제178화
라온은 당황하여 전신을 부르르 떠는 이닐드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익스퍼트 상급 수준인가.'
이닐드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내부에서 퍼져나오는 기운은 익스퍼트 상급에 필적한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괜히 모렐이 결투를 허가한 게 아니었다.
다만 이닐드는 물론이고, 모렐도 자신의 무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이 드러낸 기세 그대로 익스퍼트 중급 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력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무언가 어설퍼.'
이닐드의 기세에 비해 그가 가진 격 자체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많은 실전을 겪지 않은 것 같았다.
"이익!"
이닐드는 라온이 든 거대한 몽둥이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날 무시하는 거냐! 당장 검을 뽑아라!"
그는 라온의 허리춤에 매달린 제천검을 가리켰다.
"내 검은 아직 개시 안 했거든. 너랑 싸우는 데 쓰기엔 아까워."
"너 이 새끼! 정말 죽여 버…."
그는 욕을 하려다가 뒤에 있는 왕녀를 힐끔 보고 억눌렀다. 이 상황에서도 왕녀를 신경 쓰다니, 안 좋은 쪽으로 보통 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사람이 이리 몰려 있어?"
"결투를 한다는데? 그것도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육황의 둘이? 미쳤는데!"
"우와아아아!"
가득이나 왕래 많은 시청 앞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변을 둘러쌌다.
"누가 이길까?"
"아쉽게도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어."
"무조건 발카르지."
"왜? 지그하르트도 같은 육황이잖아."
"저쪽 긴 금발이 이닐드잖아. 모렐의 제자이자, 5서클의 끝에 이른 마법사. 두 가지 속성이 담긴 주먹을 기가 막히게 다룬데. 반면 저쪽 잘생긴 친구는 나이도 어리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자자, 떠들지만 말고! 여기 와서 돈부터 걸어! 이런 끝장나는 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잖아!"
사람들이 몰라다 보니, 자연스레 도박판도 열렸다. 다만 대부분이 이닐드의 명성을 듣고, 그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후우, 좋다. 검을 꺼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닐드는 구경꾼들이 본인을 칭찬하는 걸 듣고서 빙긋 웃었다. 칭찬 조금 들었다고,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는 걸 보면 참으로 일관성 있는 놈이었다.
"패배한 뒤에 왕녀님께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준비나 해라!"
이닐드가 전투용 장갑을 끼고서 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주문을 외우자 마나의 흐름이 가속되며 그의 전신에 빛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시작한 거지?"
라온이 차게 웃으며 땅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닐드의 앞에 이르러 성인의 몸통만 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뭐, 뭐야! 실드!"
버프 마법을 외우다가 당황한 이닐드가 다급하게 실드 마법을 운용했다. 푸른 막이 그의 앞을 덮었지만 아무 의미 없었다. 몽둥이 앞에서는 모든 게 평등하니까.
꺄아아아앙!
한 겹의 실드가 유리장처럼 깨져나가고, 둔탁한 몽둥이가 이닐드의 허리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바위가 깨지는 듯한 살벌한 소리와 함께 이닐드가 공처럼 튕겨 나가며 머리를 땅에 꼬라박았다.
후우욱….
주변을 둘러싼 수십 명의 사람들은 라온의 몽둥이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방금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어!"
"어떻게 저 큰 걸 들고…."
구경꾼들만이 아니라,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들도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닐드!"
모렐이 마나가 깃든 소리를 지르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닐드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몽둥이에 맞은 것치고는 꽤 멀쩡한 모습이었다.
"역시."
라온은 이닐드가 오른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티팩트인가."
몽둥이로 이닐드를 쳤을 때 콩으로 꽉 찬 보자기를 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티팩트로 유명한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답게 물리 방어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이 새끼! 이게 무슨 짓이냐!"
이닐드는 눈을 붉게 물들이며 악을 질렀다.
"뭐가?"
"준비하고 있는데 공격하다니! 이 비겁한 놈!"
"준비? 무슨 준비?"
"버프 마법을 걸고 있었잖느냐! 그 틈에 공격하다니, 네놈에게는 명예도 없는 것이냐!"
그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며 비겁하다고 떠들어댔다.
"비겁?"
라온이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고 고개를 모로 틀었다.
"전장에 나가서도 그딴 소리를 할 건가?"
"뭐?"
"네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준비가 안 되었으니, 멈춰달라고 할 거냐고."
"그, 그것과는 다르지 않냐! 이건 결투잖아!
"마법사가 결투에서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그게 시작 신호 아닌가? 오히려 내가 선수를 당한 건데?"
"그, 그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떠는 이닐드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운용한다는 건 검사가 검을 뽑은 것과도 같다. 소꿉놀이처럼 기다려주는 대결을 하려면 집에 가서 해."
"바, 발카르를 모욕하지 마라!"
"발카르가 아니라, 널 모욕했다니까."
"네가 한 말은 내가 아니라…."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라온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강대한 풍압이 이닐드의 목소리를 짓눌렀다.
"할 거야. 말 거야."
"끄으윽, 이젠 방심하지 않는다!"
이닐드가 뒤로 훌쩍 물러서서 빠르게 버프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스트렝스, 아이언 스킨에 각종 버프가 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
라온은 이번엔 그가 버프를 전부 걸 때까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멍청한 놈! 이제 와서 명예를 지켜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명예 때문이 아니라, 또 주절대면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입만 살아서!"
이닐드가 오른손에 불꽃, 왼손에 바람을 뭉친 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기척이 나타난 건 자신의 뒤쪽. 빠른 움직임이 아니라, 아예 기척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근접 거리 이동 마법 블링크였다.
"죽어!"
정립된 투로로 뻗어진 이닐드의 주먹에 바람과 불꽃이 휘몰아쳤다. 강대한 공격이 향하는 곳은 라온의 허리. 당했던 대로 갚아주겠다는 듯한 유치한 공격이었다.
"너무 뻔하게 보이잖아."
라온은 조금의 당황도 없이 진각을 밟으며 몸을 돌렸다.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괴력에 허리의 회전력을 담아 몽둥이를 휘둘렀다.
후우우웅!
강대한 힘이 깃든 몽둥이가 바람과 불꽃으로 어우러진 이닐드의 마권과 맞부딪쳤다.
"멍청한 놈!"
이닐드는 뻗어오는 라온의 몽둥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검사답게 반응은 빨랐지만, 5서클 마법 바람의 폭류와 화령의 비수를 결합시킨 조합 마법을 저딴 몽둥이 하나로 뚫으려 하다니 머리가 텅텅 빈 검사다웠다.
'이대로 태워주마!'
저 잘난 얼굴을 지져버리기 위해 더욱 마력을 집중시키려고 할 때였다.
'어?'
한참 전에 다 타버려야 했을 몽둥이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몽둥이가 크긴 했지만, 그 재료는 나무에 불과하다. 이 뜨거운 화력에서 타지 않고 오히려 마법을 짓이기며 들어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저기에 오러를 담았다고?'
무기가 크면 클수록, 모양이 둔탁하면 둔탁할수록 오러를 담기는 쉽지 않다. 소드 마스터는 많아도, 해머나, 모닝스타 마스터는 극소수인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저 미친놈은 저 몽둥이에 마나를 담아낸 것 같았다. 입심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름 실력도 있는 것 같았다.
"크아아아!"
이닐드가 비명을 지르며 마력을 집중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몽둥이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5서클 조합 마법을 뚫고 들어왔다.
"브, 블링크!"
이닐드는 결국 경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일단 후퇴한 뒤에 다른 마법을 사용해서 빈틈을 노려야 했다.
'자, 잘 빠져나왔어. 저기 있었다가 또 얻어 맞… 어?'
녹아내리는 자신의 마법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태양을 가리며 거대한 몽둥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
머리가 하얘진다. 블링크나, 실드를 쓴다는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입만 떡 벌렸다.
"블링크는 이제 안 통해."
라온은 옅은 미소를 흘리며 몽둥이를 찍어 내렸다.
콰아아앙!
바닥이 파여나갈 정도의 충격파가 터지고, 이닐드가 땅에 꼬꾸라졌다. 아직도 아티팩트가 운용되는지 상당한 양의 충격이 흡수되었다.
"좋네. 때릴 맛이 나."
라온이 살벌한 눈빛을 발하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잠깐만! 내가 졌… 크아아악!"
이닐드의 입에서 포기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다시 몽둥이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바닥에 깔린 모래들이 용오름이 될 정도의 광풍과 함께 이닐드가 하늘로 치솟았다.
"힘껏 때려도 죽지 않는다니, 얼마나 좋아."
라온은 몽둥이를 양손으로 잡고, 떨어져 내리는 이닐드를 날려버렸다.
콰아아앙!
공기가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이닐드가 대지에 대자로 처박혔다. 그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두 개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끄으으윽…."
반지를 끝으로 충격 흡수 아티팩트가 더는 없던 것인지 이닐드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만 줄줄 흘렸다.
"사, 살려…."
"안 죽여."
라온은 몽둥이를 어깨에 걸친 채 이닐드를 내려보았다.
"근데 넌 쓸데없는 말이 좀 많더라고. 한동안 묵언수행 좀 하자."
그 말을 하며 입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닐드의 입에서 옥수수가 다발로 쏟아졌다.
"끄르르륵…."
이닐드는 목을 뒤로 넘긴 채 눈을 까뒤집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라온은 몽둥이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시원하네.'
이성을 좋아하든, 관심을 끌든 알 바 아니지만, 이닐드는 왕녀의 시선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했다. 말도 더럽게 많고, 하는 짓도 유치해서 마음껏 패주었더니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해졌다.
-지독하군….
라스는 걸레짝이 되어버린 이닐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왕은 저리 고통을 주지 않고, 일격에 끝을 냈을 것이다.
'이래 봬도 힘 조절한 거야.'
정말 온 힘을 다했으면 첫 일격에 이닐드는 죽었을 것이다. 이것도 상당히 봐준 것이다.
-하여튼 인간은 약한 주제에 잔인하기만 하노라.
'잔인은 무슨. 죽이는 게 더….'
라온이 고개를 저을 때였다.
[<분노>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오.'
시스템이 능력치를 올려주고 돌아갔다.
-무, 무슨 소리냐! 본왕이 언제 감탄을 해!
'감탄했잖아. 잔인하다고.'
-아, 아니. 그건 그냥 한 소리지 않느냐!
'너 왕이지? 그것도 위대한 마계의 왕.'
-그, 그렇다.
'그런 위대한 왕이 그냥 하는 소리가 있어? 다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어쨌든 좋네. 이런 놈을 잡고 능력치가 오르다니.'
라스는 능력치를 확인하는 라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제, 젠장. 정말 입 하나는 더럽게 잘 놀리는구나.
이닐드라는 느끼한 놈은 단순히 말이 많은 거고, 라온 놈은 말을 잘 굴린다. 매번 느끼지만, 말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상대해서는 안 될 놈이로다….
* * *
찌직.
구경꾼들은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닐드가 박힌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지,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가 이겼는데? 그것도 압도적으로…."
"허억!"
"이거 꿈 아니지?"
"내 평생 몽둥이에 오러를 씌우는 건 처음 본다…."
"요즘 지그하르트는 몽둥이 쓰는 법도 가르치나?"
"미쳤군. 미쳤어. 아직 20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들은 여유롭게 이닐드를 꺾은 라온을 쭉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닐드 님이 졌다고?"
"그것도 검이 아니라, 몽둥이에…."
"바, 방심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블링크까지 썼잖아! 피하질 못한 거라고!"
"어떻게 이런…."
발카르의 마법사들 역시 쓰러진 이닐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떨었다.
"자자, 대결이 끝났으니, 판돈을 나눠야지. 지그하르트 쪽에 건 사람들은 이쪽으로 오슈! 배율은 자그마치 4.2배요!"
처음 도박판을 벌였던 사람이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대박 터졌다!"
"앞으로 지그하르트 쪽에 매일 절해야겠어!"
"지그하르트의 잘생긴 검사님! 제가 오늘 술 한잔 사겠습니다!"
"나, 나요! 나야!"
돈을 따고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광풍단이 잘 아는 경쾌한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으하하하! 대박!"
어느새 도박에 참여한 붉은 머리 엘프 하나가 낄낄거리며 손에 든 금화 20개를 보고 있었다.
"역시 돈을 빌려오길 잘했어. 라온에게만 걸면 잃지를 않는다니까! 판돈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완벽했…."
"리메르."
리메르가 히죽이며 금화를 챙길 때 모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저 녀석은 뭐냐."
모렐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담고 있었다.
"지그하르트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괴물인가?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의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런 표정은 처음 보네."
리메르가 금화를 품에 넣으며 헤죽 웃었다. 모렐은 화염 마법사인 주제에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간인데, 저렇게 당황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혹시 하분 성의 검귀라고 들어봤어?"
"웨이브 때 무너진 성벽을 아래에서 지켰다는 그 미친놈 말인가?"
"그래. 그 미친놈이 저 녀석이야."
"그랬군. 하분 성의 검귀는 예상대로 지그하르트의 검사였어. 다만 저리 어릴 줄은 몰랐다."
모렐은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대결에서 패한 제자도, 내기도, 다 잊고 그저 라온에 대한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녀석이지. 잘 봐둬 조금만 지나도 훨씬 유명해질 테니까."
"잘난척하지 마라.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발카르에도 비슷한…."
"난 인정 못 해!"
갑작스럽게 울린 뾰족한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이런 대결 인정 못 한다고!"
제이나 왕녀가 붉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라온의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 * *
라온은 앞을 가로막은 제이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인정 못 한다는 거지?"
"이 승부!"
제이나는 발밑에 깔린 이닐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인정하지 않았어!"
"너희 일행의 대표가 인정한 대결인데."
라온은 놀라움이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보는 모렐을 가리켰다.
"대표는 그가 아니라, 나야!"
제이나는 당당하게 본인을 가리켰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명가에서는 후계자들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이름만큼은 대표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다.
"그건 말이 안 돼."
"뭐?"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승부를 내기 전에 했어야지.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못 받아들이겠다? 스스로 그릇의 크기가 작음을 증명하는 짓이다."
"아, 아까는 말을 꺼내기…."
"거기다 이자는 발카르의 이름과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담았다."
라온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이닐드를 턱짓했다.
"서로의 소속을 입에 담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암묵적으로 허가를 했다는 의미지. 발카르의 이름으로 승부를 내고서도 우기겠다는 건가? 그쪽 왕국의 이름은 그리 가벼운 모양이지?"
"맞지. 멈추려면 진즉에 멈췄어야 했어."
"그러니까. 다 끝났는데, 왜 저러는 거야."
"다 끝나고 우기는 건 너무 추잡하잖아."
구경꾼들은 제이나에게 살짝 들릴만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으윽…."
제이나는 구경꾼들의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다 닥쳐! 이건 잘못된 승부였으니까!"
"좋아. 그렇다면 기회를 주지."
그녀가 구경꾼들에게 소리를 지를 때 라온이 바닥에 내려놓은 몽둥이를 다시 들어 올렸다.
"네가 나와 싸워서 이긴다면 이전의 승부는 무효로 해주겠다."
"스, 승부? 너랑 내가?"
"뭘 그리 당황하는 거지? 설마 그냥 봐줄 거라 생각했나?"
"나는…."
제이나의 시선이 피 묻은 몽둥이로 향했다. 조금 전 이닐드를 개패듯 두드린 몽둥이를 보자 싸우자는 말이 나오질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았다. 모렐을 보았지만, 그는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이대로 패배를 받아들이라는 뜻 같았다.
"안 돼!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게 질 순 없다고!"
"그걸 인정하기 싫으면 덤비면 된다. 거기서 입으로만 떽떽 거리지 말고. 와라."
차게 웃으며 몽둥이를 들었다. 제이나를 향해 겨눈 몽둥이에서 이닐드를 후려 팰 때보다 강대한 기류가 치솟았다
"으윽…."
제이나는 그 막대한 기세에 짓눌려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손만 떨었다.
"저쪽은 주둥이만 놀리는 게 특긴가? 다 입으로만 떠드네."
"그거 제가 해도 될까요?"
마르타가 차게 웃을 때 발카르 왕국 기사들 사이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가 또 있는 건가.'
또 어떤 멍청이가 본능에 이끌렸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
키가 그리 크지 않지만, 체격이 단단한 20대 중후반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이닐드와는 다른 맑고 곧은 눈. 왕녀보다 오히려 자신의 무력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발카르 왕국 영수 기사단의 자티스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라온님의 검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검례를 취했다.
"자신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자티스는 당당하게 자신 없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이라고 했다. 즉, 언젠가는 막겠다는 뜻이었다. 익스퍼트 중급도 되지 않는 무력이지만 그 이상의 굳건함이 느껴졌다.
'발카르의 기사라….'
발카르는 마법 왕국답게 기사보다 마법사가 주가 되는 세력이다. 기사들은 마법사의 방패막이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힘과 열의가 없다는데 저 자에게선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몽둥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자티스는 자세를 낮추고, 두꺼운 검을 사선으로 세웠다. 피하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말했던 대로 받겠다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네.'
다만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닐드 때보다 더 강한 힘과 오러를 실어 몽둥이를 내리쳤다,
콰아아아!
무시무시한 풍압과 함께 몽둥이가 떨어져 내릴 때 자티스의 자세가 살짝 변했다. 반은 견디고, 반은 흘리려는 것 같았다.
'어딜.'
라온이 찰나의 순간에 몽둥이를 살짝 틀었다. 절대 흘릴 수 없는 궤도였다.
"흐읍!"
자티스의 집중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몽둥이가 틀어지는 걸 보자마자 흘리기를 포기하고 방어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콰아아아앙!
장대한 기운이 깃든 몽둥이와 단단한 오러가 어린 검이 맞부딪치며 압축된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후우우욱.
가라앉는 회색 기류 속에서 조각난 검을 들고 있는 자티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이 깨지고, 무릎은 꿇었을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고통이 심할 텐데도, 부러진 검을 붙잡은 채 이를 꽉 물고 버텨냈다.
"제, 제가 졌습니다."
자티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다만 눈빛은 처음보다 더 반짝인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전부 머저리는 아니로군.'
승부를 겨루고, 정당하게 패배를 인정한다. 이름 난 왕국답게 전부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다. 이 자티스라는 남자는 더 높이 올라갈 무인이었다.
"이익! 또 졌어! 이 멍청이들은 왜 다 나서서 일을 망치는 거야!"
다만 제이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는 자티스를 노려보며 안정되어가는 분위기에 재를 뿌렸다.
"이것도 저 놈이 홀로 나서서 그런 거니 난 인정 못해!"
그녀의 애새끼 같은 반응에 짜증이 확 돋아났다.
"제이나 왕녀."
라온이 몽둥이를 내려놓고 제이나의 앞에 섰다.
"지그하르트 광풍단의 부단주로서 말하겠소. 한 번 더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 순간 지그하르트에 싸움을 건다고 생각하고 검을 뽑겠소."
검집을 툭 친 순간 지금까지 숨겨둔 기파가 해일처럼 치솟았다.
콰아아아!
제이나의 기세만이 아니라 감정마저 찌그러뜨리는 압도적인 기운. 지금 이 공간을 지배하는 건 라온이었다.
"아으윽…."
제이나가 입술을 깨물다가 그래도 주저앉았다. 라온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대답하시오."
"허어억…."
라온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제이나가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할 때 뒤에 있는 모렐이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후우우욱!
그의 손짓에서 피어난 열기가 깃든 바람이 라온의 기세를 밀어내고, 제이나를 움켜쥐고 있던 오러의 밧줄을 끊어냈다.
"거기까지만 하게."
모렐이 바들바들 떠는 제이나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기절한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흐으윽…."
이쪽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보니 공포가 뇌리에 깊게 박힌 것 같았다.
"왕국의 금지옥엽으로 자라시다보니, 아직 철이 없으시네."
"그걸 저희가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야.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그의 눈동자에는 미안함보다는 놀라움과 당황의 빛이 어려 있었다. 첫눈에 자신의 무력을 파악하지 못한 것에 어지간히 놀란 것 같았다.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약속대로 이번 일에서 물러나도록 하지."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라온이 물러나려던 모렐의 앞을 막았다.
"음?"
"전 아직 승부에서 이긴 뒤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 쪽이 물러나는 거 아니었나?"
"이번 대결의 조건은 모렐 님이 직접 진 쪽이 이긴 쪽 말을 따르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끄응.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 거지?"
"제자분이 아주 좋은 걸 알려주셨잖습니까."
발카르 왕국의 기사들이 업고 있는 이닐드를 가리켰다.
"저희 광풍단은 이번 의뢰가 끝날 때까지 발카르 왕국의 마법단 살라만을 하인으로 쓰겠습니다."
라온이 씩 웃으며 도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반 계약서."
제179화
"부단주님. 저라고 아무거나 다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계약서 있어? 없어?"
라온이 있으면 빨리 달라며 손을 까딱였다.
"아, 있긴 하죠."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자 빳빳한 계약서 한 장이 튀어나왔다.
"펜이랑, 책받침도 필요해."
"그것도 있긴 한데…."
녀석이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펜과 책받침 하나를 꺼냈다.
"고맙다."
라온은 펜과 책받침을 받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시죠? 저라고 항상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알아."
"안 믿는 눈치네요."
도리안은 입맛을 쩝 다시고, 옆에 놓아둔 몽둥이의 피를 쓱쓱 닦은 뒤에 배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 거대한 몽둥이가 작은 배 주머니에 들어가는 모습에 구경꾼들이 한 번 더 감탄을 터트렸다.
"우와아…."
"지그하르트가 여간내기가 아니네."
"그러게 말이야. 이닐드를 꺾는 어린 검사에, 저리 특이한 검사까지…."
"북방의 거인이 잠에서 깨어난 건가?"
"하긴 지그하르트가 움직이면 아무도 못 막지."
방금 보여준 모습들이 놀라웠기 때문인지 구경꾼들은 모두 발카르는 잊고, 지그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라온은 구경꾼들의 호들갑을 들으며, 빠르게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내용은 간단했다.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살라만은 광풍단의 지시에 복종을 해야 하며 폭력이나 욕설은 물론이고, 반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물론 광풍단 쪽에서도 목숨을 걸 정도로, 과한 요구는 할 수 없다는 부분도 작성했다.
"보시죠."
"꼭 계약서까지 작성해야 했나?"
모렐은 계약서를 받아들고 인상을 구겼다.
"일은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우리 부단주는 나처럼 설렁설렁하지 않아. 조심해야 할걸?"
리메르는 계약서를 힐끔 살피고선 헤죽 웃었다.
"자랑인가?"
"자랑이지. 네 제자는 이빨 뽑힌 채로 엎어졌는데, 내 제자는 저리 당당히 서 있잖아."
그는 이닐드와 라온을 차례로 가리키며 씩 웃었다.
"끄으윽…."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던 모렐이 참지 못하고 이를 바득 갈았다. 제자가 비교당하는 건 그에게도 큰 충격이 되는 모양이다.
"계약서엔 별문제 없네. 빨리 서명이나 하셔."
"시끄럽다."
모렐은 어깨를 쳐서 리메르를 밀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젠 백이 넘는 구경꾼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다니….'
지그하르트의 콧대를 납작하게 누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결투를 제안한 건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왕녀와 이닐드가 나대고, 자신이 한 말이 있었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후우…."
모렐은 다시 계약서를 살핀 뒤에 계약서에 서명했다.
"거봐. 어차피 할 거면서."
"입 좀 다물어!"
"예이!"
리메르가 모렐을 조롱할 때 라온은 제이나 왕녀와 이닐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닐드는 육체적 충격에, 왕녀는 정신적 충격 때문에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치료소로 보낼 겁니까?"
"예. 다행히 대로 중간에 유명한 치료소가 있습니다."
자티스가 이닐드를 업으며 도로 중간쯤에 있는 4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는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했는지 얼굴에 구김이 없었다. 오히려 말을 걸어줘서 고맙다는 듯 웃었다.
"그렇군요. 다녀오세요."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붉은색 핀 두 개를 꺼냈다. 재빠르게 손을 놀려 이닐드와 제이나 왕녀의 옷에 핀을 끼워 넣었다.
"흐음…."
"라온!"
업혀서 내려가는 이닐드와 제이나 왕녀를 보고 있을 때 종이가 팔랑이며 날아왔다.
"서명 다 됐다!"
"쯧."
뒤를 돌아보니 리메르는 히죽 웃고 있었고, 모렐은 똥 씹은 표정으로 바닥의 돌을 걷어차고 있었다.
"오늘의 굴욕은 잊지 않을 거다."
"예. 잊으시면 안 되죠. 그 굴욕을 만든 당사자시지 않습니까."
"끄윽, 너…."
"단주님."
라온은 손을 떠는 모렐을 뒤로 하고 리메르에게 다시 계약서를 건넸다.
"계약서는 단주님이 챙기셔야죠."
"아, 귀찮아. 네가 챙겨."
리메르는 계약서를 받지 않고,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감쌌다.
"단주님! 라온이 다 해놓은 밥상에조차 앉지 않겠다는 건 심하지 않습니까!"
"하는 일 더럽게 없네. 교관 때보다 더해."
"으윽…."
버렌과 마르타의 차가운 눈빛에 리메르가 찔끔 어깨를 떨고서 계약서를 챙기려고 했다.
"아닙니다. 제가 가지는 게 낫겠네요."
라온이 고개를 젓고 계약서를 품에 넣었다.
"단주님이 가지시면 저쪽에 팔 거 같아서 안 되겠어요."
지금까지의 리메르를 본다면 금화 몇 개만 준다고 하면 계약서가 아니라, 계약서 할아버지도 팔 사람이었다.
"가자. 이 난리가 났으니, 시장도 준비를 끝냈을 테지."
라온은 시청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광풍단과 이젠 하인이 된 살라만도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아…."
시청 앞에 홀로 남은 리메르는 빈손을 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젠장! 계약서를 파는 방법도 있었구나!"
* * *
끈적하고 붉은 물기가 바닥에 가득 깔린 지하. 복도 양옆으로 줄지어 세워진 철장에서 사람들의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14살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적발 소녀가 그 비린내 나는 복도를 지나간다. 철장에서 흐느끼는 신음을 즐기듯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의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지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산뜻한 분위기의 방 안에는 회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늘어뜨린 인자한 외모의 노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예정대로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도착했어."
소녀는 친구라도 되는 듯 노인에게 말을 놓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정확한 날이로군. 준비는 어떻게 됐지?"
노인은 소녀를 보지 않고, 책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뭘 물어. 절반은 마셨고, 절반은 그대로 놔뒀지."
"곧 사도께서 오실 거다. 이동에 차질이 없도록 확실히 계산하도록."
"알겠어. 그런데 재밌는 일이 있었어."
적발의 소녀는 작은 손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오자마자 결투를 벌이더라고."
"결투?"
"싸운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와 이닐드가 붙었어."
"이닐드가 이겼겠군."
"아니."
아니라는 말에 처음으로 노인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가 그야말로 압도했어. 검도 아니고, 몽둥이로 다 때려 부쉈지."
"음? 몽둥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거기에서 그 금발의 꼬마가…."
소녀는 라온과 이닐드의 전투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내기까지 모든 내용을 말해주었다.
"셀린느."
노인이 눈매를 좁히며 소녀를 불렀다.
"그 어린 검사에 대해 조사해 봐."
"왜? 어차피 곧 떠날 거잖아."
"우리와 지그하르트는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다. 미래의 강대한 적이 될 놈이라면 미리 알아봐야겠지. 그리고 혹 기회가 된다면…."
"죽이라는 거지?"
셀린느라 불린 소녀가 두 손가락을 모아 목을 그었다.
"리메르나 모렐이 있다면 접근하지 말고, 정보만 모아. 그놈이 혼자 있을 때만 움직이도록. 마스터가 아니라면 네 주술을 눈치챌 수 없으니까. 어렵지 않을 거다."
"그거야 쉽지."
그녀는 아름다움과 귀여움이 어우러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빙긋 웃었다.
"지그하르트의 피 맛은 어떨지 궁금하네."
"많이 먹어보지 않았느냐."
"그 꼬마는 달라. 재능도 재능이지만 얼굴도 기깔나게 잘 생겼거든."
"흥, 쓸데 없기는."
노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왕녀와 이닐드가 쓰러졌다고 했었나?"
"그래. 기절해서 치유실로 데리고 갔지."
"흐음…."
노인은 턱을 긁적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일석이조가 될 수도 있겠군."
* * *
포르반의 시장 오위스트는 풍채가 좋아 신뢰감을 주었다. 다만 얼굴에서 땀이 계속 흘러내려 불안한 인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자, 잘 오셨습니다."
오위스트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축이며 고개를 꾸벅였다.
"포르반의 시장 오위스트라고 합니다."
"지그하르트 광풍단의 리메르라 합니다."
리메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앉으시죠."
시장의 손짓을 따라 리메르가 중앙에 앉고, 남은 사람들은 뒤에 섰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을 뵈어 정말 영광…."
"제가 잘나기는 했지만, 임무가 급하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리메르는 임무 이야기부터 하자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아, 알겠습니다. 저희 포르반은 본래 교역과 관광으로 먹고사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종 사건이 조금 많은 편입니다. 다만 세 달 전부터 그 수치가 차츰 늘어났고 최근 2주 동안 실종신고만 100명이 넘게 들어왔습니다."
포르반이 작지 않은 도시라고 해도 2주 만에 100명이 넘는 실종 신고가 들어온 건 이례적인 일이다. 시청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 실제 실종은 그보다 많을 가능성도 있었다.
"조사를 위해서 위장한 도시의 경비대와 용병에 기사까지 투입했지만, 저희를 비웃듯이 실종은 계속되었고, 투입한 용병이나 기사마저 사라졌습니다."
오위스트는 뺨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제발 해결해달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실종이 많은 것 치고는 도시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던데요?"
리메르가 시장실 밖으로 보이는 도시를 살피며 입을 뗐다. 그의 말대로 오늘 본 포르반에 그림자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실종에 대해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용히 있던 버렌이 눈매를 좁히며 앞으로 나왔다.
"마,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교역과 관광으로 살아가는 도시입니다. 실종이 급속도로 늘었다고 소문이 나면 관광객이나 상인이 찾아오지 않으니, 아, 알리지 않았습니다."
오위스트도 그게 문제라는 걸 아는지 땀을 두 배로 흘렸다. 거의 비를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빠르게 알려서 피해를 줄여야 하지 않습니까!"
"시, 실종에 대해 알려진다면 피해는 소수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받게 되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이랄! 무얼 어쩔 수가 없다는 거야!"
"버렌, 마르타."
버렌만이 아니라, 마르타도 따지려고 할 때 라온이 손을 올려 두 사람의 시야를 막았다.
"단주님께서 이야기 중이다."
"이걸 보고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포르반이라고 하면 관광이 떠오를 정도로 도시의 이미지라는 건 각인이 쉽다. 만약 대량 실종에 대한 이야기가 떠돈다면 관광객들은 다른 관광지를 찾아갈 것이고, 그에 따라 교역량도 줄어들게 될 거야."
라온은 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되면 시장의 말대로 피해가 도시 전체로 번질 거다. 실종이 아니라, 일자리를 잃고 굶어 죽는 사람이 대량으로 쏟아질지도 모르지. 거기다 그걸 알린다고 실종이 사라진다는 보장도 없어. 2주간 100명을 데리고 갈 정도로 미친놈들이라면 문을 부수고라도 납치를 해갈 거다."
2주 동안 100이 넘는 사람들을 납치할 정도라면 이미 인간의 거죽을 벗어던진 괴물들이다. 실종 사실을 알려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집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
"도시의 시민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게 제일이다."
"저, 정확합니다!"
라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위스트가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이 사건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간다면 실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연쇄적으로 번지게 될 겁니다! 저, 저희 도시의 대체재는 정말 많으니까요!"
그는 감탄이 실린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분은 누구십니까? 토,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크흠, 우리 광풍단의 부단주이자 제 제자입니다. 보통이죠."
리메르가 헛기침을 하며 본인을 가리켰다.
"광검님의 제자셨군요. 어쩐지 총명함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위스트가 라온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단하군.'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이 짧은 순간에 그 깊이까지 닿다니, 라온이라는 남자의 무력은 몰라도 통찰력은 범인을 한참 뛰어넘었다.
"놈들에 대해 알게 된 건 없습니까."
"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고 없고도 가리지 않구요. 도둑이 물건을 훔치듯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납치해갑니다. 흡사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실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조사를 나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용병과 기사들의 무력 수위는 어떻게 되죠?"
"용병은 익스퍼트 하급 정도였고, 기, 기사는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이었습니다."
오위스트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익스퍼트 상급이 실종 되었다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까? 놈들의 무학을 봤다든지, 외모나, 복장을 봤다든지."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신매매단은 아니겠어."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실제로 인신매매하는 놈들도 이 사이에 더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골머리가 아픕니다."
오위스트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오마일 가능성도 있겠어."
"오, 오마요?"
리메르가 오마라는 단어를 꺼내자 시장의 볼이 파들파들 떨렸다.
"제, 제발 해결해주십시오! 이거 해결만 된다면 의뢰비는 물론이고, 포상으로 원하시는 건 다 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오위스트가 고개를 확 숙였다. 그는 계속 본인의 안위보다는 도시 전체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과 다르게 도시만을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원하는 거 다 해준다는 말 잘 기억하고 계세요."
리메르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가자!"
그는 시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그런데 살라만 분들은 왜 다시 오셨습니까?"
시장은 라온의 뒤편에 서 있는 모렐과 마법사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라온이 살라만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희 하인이니까."
"허억! 그, 그게 무슨!"
오위스트가 기겁하며 일어섰다. 모렐이 난동을 부릴 줄 알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턱만 떨었다.
"꼬, 꼭 하인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않느냐."
"않느냐?"
라온이 모렐의 뒷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않느…."
모렐이 허공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쉰 뒤에 말을 이었다.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말했듯이 전 확실한 게 좋거든요."
라온이 빙긋 웃으며 열린 문을 가리켰다.
"나가죠. 아래에서 단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는 모렐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 시장실을 나갔다.
"후우욱…."
모렐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는 이글거리는 열기를 뱉어내며 오위스트를 노려보았다.
"허억!"
오위스트는 그 눈빛을 받고 마른침을 삼켰다.
'마, 말하면 죽인다는 뜻이야.'
모렐은 오늘 일을 어디에다가 말했다간 전신을 홀라당 태우겠다는 눈빛을 보내고서 시장실을 나갔다.
"끄윽!"
"윽!"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다른 마법사들도 이를 바득 갈거나, 입술을 깨물며 모렐의 뒤를 따라갔다.
"허억! 허억!"
홀로 남은 시장실에서 오위스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대체 뭐가 뭔지…."
* * *
시장실 밖으로 나온 광풍단과 살라만은 리메르의 앞에 모였다.
"들었듯이 실종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충 예상가는 놈들은 있지만, 섣불리 말할 수는 없어."
리메르는 뒷짐을 진 채로 말을 이었다.
"익스퍼트 상급의 검사도 실종되었을 정도이니, 개인행동은 절대 금지다. 사람 수대로 광풍단 2인 그리고 살라만 1인을 넣은 3인 1조로 움직인다."
"예!"
"모렐 불만 없지?"
"...."
모렐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하셔야죠."
라온이 모렐에게 턱짓했다.
"끄응, 아, 알겠다."
"알겠다?"
"알겠… 알겠습니다."
"좋네요."
라온은 계속하라는 듯 리메르에게 손을 올렸다.
"푸하하하하! 모렐! 어우 배 아파!"
리메르는 모렐을 보며 배를 잡고 웃더니, 힘이 빠졌다면서 라온에게 조를 짜라고 지시했다. 귀찮아서 넘긴 게 분명했다.
"하아, 정말이지…."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각기 실력의 균형이 맞도록 적절하게 조를 짜주었다.
"이 조대로 조사를 시작한다. 나와 모렐은 이 근처에서 대기할 테니까. 3시간마다 이곳으로 돌아와서 진행 상황을 보고 하도록.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보고부터 해라."
리메르는 그 말과 함께 수련생 때 주었던 무음 피리를 하나씩 넘겨주었다.
"나도 줄 게 있다."
라온은 주머니에서 빨간 핀을 하나씩을 꺼내서 광풍단원의 옷에 끼워 넣었다.
"이건 뭡니까?"
버렌이 옷에 끼워진 붉은색 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화인석으로 만든 옷핀이다."
라온이 눈을 깜빡이는 루난에게 옷핀을 달아주며 말을 이었다.
"내 오러가 깃들어 있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지. 절대 빼지마."
이 옷핀은 발칸에게 부탁해서 만들어낸 장비로 만화공의 오러가 깃들어 있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물이다. 아직 완벽하게 정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미완성품이라도 일단 써야 할 것 같았다.
"쯧, 뭐, 이런 걸…."
마르타가 혀를 찼지만, 완전히 싫지는 않은지 옷핀을 다는 걸 막지 않았다.
"우리 부단주가 준비성 하나는 철저…."
"광풍단 공금에서 뺄 거니까 준비해 두시죠."
"크흠…."
리메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출발해라. 실종 장면을 목격하던가,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광풍단과 살라만으로 이루어진 임시 조는 우렁차게 대답하고서 각자 정해진 구역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모렐이 리메르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렵겠지."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왔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머리가 텅텅 빈 놈들이 아닌 이상 몸을 사릴 거야. 다만…."
"다만?"
"우리 예상대로 오마 중 하나라면 큰불 하나 지르고 도망갈지도 모르지."
"으음…."
모렐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 영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 내가 지원을 나가자마자 귀신처럼 실종 사건이 사라졌지만."
"그래서 여기로 온 거였나?"
"그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네놈들 때문에 다 망했다."
모렐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네 제자라는 라온은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무력은 그렇다 치고, 머리까지 굴릴 줄 알다니…."
시장실에서 라온이 오위스트 생각을 읽었을 때는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었다.
라온이라는 놈은 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 녀석이 방계라는 걸 믿을 수가…."
"아, 갈 곳 생각났다."
리메르는 모렐의 말을 막고서 손을 흔들었다.
"무음적 들을 줄 알지? 너는 여기서 애들 문제 있나 좀 살펴줘."
"리메르!"
모렐이 소리를 질렀지만, 리메르는 어느새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이런 망할!"
모렐이 리메르가 사라진 곳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스승이나, 제자나 사람 열받게 하는데 도가 텄어!"
* * *
라온은 도리안, 자티스를 데리고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쉬셔도 되는데요."
내상과 외상을 입은 자티스에게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 했지만, 그는 숫자를 맞춰야 한다며 끝까지 따라왔다.
"괜찮습니다. 라온 님과 함께 가다니 영광일 뿐입니다."
고작 한 번의 대련을 했을 뿐인데, 자티스는 무슨 은사를 만난 듯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보다 어린 분의 검술을 보고 감탄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극한의 노력과 재능이 어우러진 검술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자티스 님도 빠른 순간에 자세를 전환한 걸 보면 더 위로 올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에이, 일검도 받지 못한 제 얼굴에 금칠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자티스의 성격과 검술의 속성을 볼 때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빨리 성장할 체질이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자티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검술 실력과 달리 어리숙한 느낌이었다.
"저기 두 분? 저도 있는뎁쇼?"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옆으로 왔지만 라온과 자티스는 검술에 관한 이야기로만 이야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은 저희가 수색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티스가 점차 어두워지는 골목 사이를 둘러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우리에겐 정보가 많지 않으니까요."
라온은 일을 해결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고 말하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본래 이런 정보는 위가 아니라, 아래를 봐야 하는 법입니다."
그는 한 번 와본 듯 더럽고, 어둑한 골목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으음, 괜찮으려나…."
자티스가 바닥의 피 묻은 유리 조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따라가면 돼요."
도리안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과자를 입에 넣고 옆으로 다가왔다.
"저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일이 알아서 해결되더라구요. 좀 무섭긴 하지만…."
그는 오싹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떨고서 라온의 뒤를 따라갔다.
"음…."
자티스가 라온의 등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왕국의 수많은 기사들과 검을 부딪쳐 보았지만, 감동을 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온의 검에는 힘과 기술을 넘어선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 검을 다시 보고 싶어.'
그는 망설임을 부추기던 유리 조각을 짓밟으며 라온의 뒤를 쫓았다.
제180화
리메르는 도시 중앙에 있는 첨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포르반 전체를 내려보았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나."
시장의 말을 들어보면 실종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단원들에게 일 시켜놓고 도박장에서 놀 때가 아니었다.
'오마는 확실해. 백혈교냐, 아니냐의 문제지.'
하는 짓거리를 보면 오마 중 백혈교와 비슷했다. 다만 세상에는 워낙 미친놈들이 많아서 한쪽으로 확정 짓는 건 위험했다.
'누가 되었든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해.'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온 걸 확인했으니, 놈들도 지금까지처럼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도망칠 가능성이 높으니, 그 전에 찾아야 했다.
"후우…."
리메르가 눈을 감았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푸른 바람이 실타래처럼 풀리며 포르반 전체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술과 오러가 어우러진 기예였다.
주변에 한정되던 감각이 시곗바늘처럼 길게 솟구쳐 도시의 방위 하나를 끝까지 뒤덮었다.
상세한 것을 느끼기 힘들고, 오러와 정신력 소모가 심하지만, 소란이 일어난 곳의 위치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버렌은 정해진 곳만 딱딱 돌아다니네. 마르타는 지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루난은 지금 자는 거야? 아니지?'
광풍단원이 무엇을 하는지 하나하나 살피고 있던 그가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라온?"
가장 믿고 있던 라온이 상상도 못 한 곳에 있었다.
"네가 왜 거기 있어!"
나도 일하는데!
* * *
포르반은 관광 도시답게 다양한 도박장이 있었다.
가장 좋은 도박장을 말하라고 하면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겠지만, 가장 많은 돈을 따고 싶다고 한다면 모두가 한 입으로 '오크의 욕망'으로 가라고 외쳤다.
오크의 욕망은 두 가지로 특별한데 포르반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높은 배율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곳에 가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오던가, 벼락부자가 되어 나오던가 둘 중 하나였다.
물론 대부분이 쪽박을 쳤고, 대박을 치는 건 극소수였지만, 오늘은 그 극소수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또 땄어! 또 3배로 땄다고!"
"어떻게 한 번을 안 잃지?"
"계속 이긴 건 아니야. 상대 패가 높을 때마다 귀신같이 피할 뿐이지!"
"미쳤구만. 운빨이 장난이 아니야."
"한두 번 해야 운이지. 저건 실력이야. 실력! 진짜 도박꾼이라고!"
본인의 판에만 관심을 가지는 진성 도박꾼들이 구석 테이블에 몰려들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진짜 부럽다. 저 정도면 한 달에 한 번 터지는 대박 수준인데…."
"캬아, 이대로 빠져도 집 하나는 사겠네."
"돈도 돈인데, 딴 걸 그대로 지르니까. 판이 장난 아니게 커지고 있어. 무슨 어린 친구가 저리 배포가 크지?"
그들이 주목하는 포커 테이블의 중심에는 제복을 벗고, 여행객 복장을 한 라온이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칩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저, 저분이 저렇게 도박을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티스는 라온의 앞에 쌓인 칩을 세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별거 아니에요. 전에는 카멜룬 지하 카지노에 가서도 다 털었다니까요."
"정말요?"
"네. 그쪽의 싸가지 왕녀. 아니! 제이나 왕녀님도 거기서 털려서 지금까지 성질내는 거잖아요."
도리안은 싸가지라고 하자마자 황급하게 본인의 입을 때렸다.
"말했듯이 저희 부단주님은 못 하는 게 없어요. 귀신같다니까요."
"와아…."
자티스는 도리안이 제이나를 싸가지로 불렀다는 것도 듣지 못하고,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았다. 무력과 지혜에 이어 저런 재주까지 가지고 있다니,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다.
다만 도리안이나 도박꾼들의 생각과 달리 라온은 포커에 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가 돈을 계속 따는 이유는 딱 하나. 음식에 미친 분노의 마왕 덕분이었다.
-저 노인네 풀하우스다. 이번 판은 죽어라.
라온에게만 보이는 라스가 허공을 노니며 도박판에 앉은 상대의 패를 모조리 읽어주고 있었으니,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한 끗 차이네.'
라온은 짧게 혀를 차고서 패를 버렸다.
"죽어."
"윽!"
"끄응…."
죽는다고 하자마자 우측에 앉은 노인과 좌측에 앉은 청발의 미녀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지의 반응을 보면 이 둘과 앞의 딜러까지 전부 도박장에서 붙인 전문가들이었는데, 셋이 합심을 해도 이기질 못해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상태였다.
-확실하게 기억해라. 구슬 아이스크림 5개 세트에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세 가지다.
'물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의 마왕을 부리는 대가로 너무 싸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난 약속은 지키잖아.'
-지이이이이랄! 네놈이 무엇을 해준다고 해놓고 제대로 된 적이 없느니라! 그 검을 만들 때도 돼지 통구이를 못 먹지 않았더냐!
'그건 천재지변이….'
-네놈이 막을 수 있는 천재지변이었느니라!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면 다시는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니라.
'알겠어. 확실히 지킬게.'
라스를 달래듯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리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사라지면 곤란했다.
"그, 그럼 다음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딜러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전 판부터 도박장 하루 매출이 왔다 갔다 하니, 그도 죽을 맛인 것 같았다.
-다녀오겠노라.
딜러가 카드를 뿌리고, 교환을 끝내자마자 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계집은 풀하우스, 노인네는 플러시이니라.
'이번에는 질러야 할 때네.'
라온이 덤덤한 표정으로 카드를 확인했다. 숫자가 같은 네 장의 카드. 포카드였다.
"올인."
테이블 위에 있는 언덕 수준의 칩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또 전부 넣었어!"
"대박…."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로티플이라도 나온 건가?"
도박에 미친 구경꾼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판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기대했다.
"도, 도련님. 여기서 멈추는 것도…."
"아직이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우린 도박하러 온 게 아니잖아."
"아! 맞다!"
도리안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까지 포커에 너무 몰입해서 도박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후우, 잠시 숨 좀 고르겠습니다."
"대체 뭘 먹었길래 그렇게 배포가 커요? 심장이 떨려서 못 참겠네."
딜러가 감탄사를 흘리고, 옆에 앉은 여성이 다리를 꼬며 농염한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끄는 행위. 즉, 작업을 친다는 뜻이었다.
"북쪽에서."
라온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는 척하며 감각으로는 우측에 있는 노인을 살폈다. 그의 손이 카드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는 순간 팔을 뻗었다.
"동작 그만. 바꿔치기냐?"
노인의 손목을 움켜쥐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 뭐야! 놔!"
"언제까지 그런 허접한 수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즈, 증거 있… 끄아아악!"
라온이 손목을 비틀자, 노인의 소매에서 판에 있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카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증거 여기 있네."
바닥의 카드 중 조금 전 바꿔치기한 다섯 장을 위로 올렸다. 뒤집으니, 라스의 말대로 플러시가 나왔다.
"플러시는 좋은 패지. 근데 이건 어떨까."
노인이 바꿔치기 한 패를 뒤집었다. 무늬가 똑같으며 숫자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카드 다섯 장. 스트레이트 플러시였다.
"너도 알고 있었지?"
"그, 그게…."
"모를 수가 없잖아. 이렇게 패를 짠 게 넌데."
딜러에게 살벌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플러시를 스트레이트로 바꾼 거네!"
"저 새끼 타짜였어? 나 매번 저놈한테 다 빨렸는데!"
"딜러랑 타짜랑 한패라고? 시발! 오크의 욕망이 타짜를 쓰다니!"
"다 사기였잖아!"
도박꾼들이 악을 지르자, 도박장의 모든 게임이 멈추고, 테이블이 뒤집히며 난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괴, 난동, 분노! 좋구나!
라스는 오랜만에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았다며 히죽거렸다.
-이게 네놈이 바라던 모습이냐?
'아니.'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이 소동을 즐기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크의 욕망을 운용하는 지배인 켄트라고 합니다. 게임에 문제가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전부 이쪽이 잘못했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 시켜놓고 모른 척이야?"
라온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됐으니까. 돈이나 가져와. 저 칩의 세 배를 줘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액수가 액수이니, 위에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허튼짓하진 않겠지?"
"이렇게 많은 눈이 있는데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좋아."
고개를 끄덕이고 지배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도리안과 자티스는 멍하니 그 뒤를 따라갔다.
"소란을 일으키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여기 있는 손님 모두에게 은화 50개짜리 칩을 드리겠습니다!"
지배인과 함께 온 도박장 직원이 칩을 뿌린다며 테이블 위에 은색 칩을 올려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동을 부리던 도박꾼들이 걸신들린 듯 달려와 칩을 챙겼다.
라온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지배인실로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이지만 가구는 그리 많지 않았고, 덩치가 큰 장정들이 석상처럼 벽에 붙어 있었다.
철컥!
도리안과 자티스까지 사무실에 들어오자 뒤에 서 있던 덩치 하나가 문을 잠갔다.
"후우…."
지배인이 등을 돌렸다. 조금 전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악귀가 어린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어디서 보냈어. 엘프의 계곡이야? 거인의 발자국이야! 아니면 새로 연 고양이의 젤리냐?"
"도박장 이름들이 참 유치하네. 고양이 젤리라니."
라온은 지배인이 말했던 도박장의 이름들을 읊으며 피식 웃었다.
"너 여기가 도둑 길드가 보호하는 곳이라는 걸 알고 깝친 거냐?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고 싶어? 앙?"
지배인이 손짓하자, 병풍처럼 서 있던 덩치들이 움직였다. 위협하듯 주먹을 풀고, 어깨를 돌렸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 안 쓰나?"
"그 개돼지들에게는 사료를 뿌려놨거든. 도박에 미친 놈들이라 너희가 시체가 되어 나가건, 살아나가건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참 다행이야. 마음껏 패도 문제없는 쓰레기들이라."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
"어쨌든 여기가 도둑 길드 소속이라는 거지? 그럼 제대로 찾아왔네."
"제대로 찾아온 건 네 제삿날이고! 뭣들 하냐! 저 새끼들 죽여!"
지배인이 손가락을 겨누자, 덩치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말이 필요 없으면 나야 편하지."
라온이 도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몽둥이. 좀 작은 거."
* * *
"그러니까 너희들 중에서도 실종자가 많다는 거지?"
"예에! 그렇습니다! 사, 상당히 많았습니다."
지배인은 흘러내리는 쌍코피를 닦지도 못한 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으로는 피투성이가 된 덩치들이 낙엽처럼 널려 있었다.
"실종 때의 상황은?"
라온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몽둥이로 땅을 찍으며 물었다.
"끄윽, 그게…."
가볍게 내리찍은 몽둥이가 돌로 만든 바닥을 파고드는 걸 본 지배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 솔직히 잘 모릅니다. 함께 길을 걷고 있다가도 정말 갑자기 사라지니까요. 누가, 언제, 어떻게 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주변에서 사람이 사라지면 그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는 증언이 좀 있었습니다."
"소름이 끼친다라…."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인에게 영향이 닿지도 않았는데, 소름이 끼친다면 마기나 요기 혹은 혈기처럼 좋지 않은 기운이 분명했다.
"단순하게 관광객이나, 행인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밤사이에 한 가족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자연스럽다고?"
"예. 문이나, 창문을 뜯어낸 흔적도 없고, 반항한 흔적도 전혀 없이 사람만 사라진 경우도 몇 번 있었습니다."
지배인은 맞아서 그런 건지, 실종이 무서워서 그런 건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시청에서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는데."
"그 돈만 밝히는 놈들이 실종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몇 번 이야기해도 들어 먹질 않았습니다."
그는 보고를 올려도 시장에게 닿기 전에 끊긴다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시청에도 인신매매와 관련 있는 자가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실종이 이 정도 규모로 퍼질 리가 없지."
이런 실종 사건이 일어난 지 3달이 지나고 나서야 지그하르트에 지원을 요청했으니, 반응이 상당히 느린 편이다. 시청에 있는 누군가가 중간에 계속 방해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은폐하기에는 시청만 한 곳이 없었으니까.
"도둑 길드는 어디에 있지?"
"도, 도시 서쪽에 녹음서리라는 다루가 있습니다."
"다루?"
다루는 전통 과자와 차를 파는 찻집이다. 도둑 길드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암호는?"
"그…."
지배인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푸른 차와 붉은 차 중에 붉은 차를 달라고 하면 됩니다."
"그거 피를 보자는 뜻이잖아. 아직 덜 맞았네."
"히익! 정말입니다! 그게 암호에요."
라온이 몽둥이를 쥐고 일어서려 하자 지배인이 손을 마구 저으며 머리를 박았다.
"저,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암호도 필요 없을 겁니다. 가자마자 알아볼 테니까요."
"흐음…."
그 말이 맞다. 정보력이 뛰어난 도둑 길드의 특성상 자신이 도박장을 여러 의미로 거덜 냈다는 걸 알고 먼저 공격하든, 머리를 숙이든 할 것이다.
"알겠다."
라온은 몽둥이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도리안에게 돌려주었다.
"아 또 피!"
도리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남은 피를 슥슥 닦고서 배 주머니에 넣었다.
"와아…."
자티스는 아직도 적응 안 되는지 헛바람을 흘렸다.
"가, 가시는 겁니까."
"가야지. 그 전에 받을 건 받고."
라온이 모은 네 손가락을 까딱였다.
"금화부터 내놔. 칩의 세 배로."
"아어…."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지배인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 * *
라온은 도리안과 자티스를 데리고 도박장에 나와 도둑 길드가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도, 도둑 길드를 찾으려고 하신 거였군요."
자티스가 볼을 긁적이며 다가왔다.
"이런 일은 윗대가리보다는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 사건 같은 건 따로 호위를 두는 편인 귀족들보다 서민, 그것도 이런 뒷골목에서 사는 하층민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도둑 길드라면 시청에서 모르는 정보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둑 길드가 의뢰를 받을까요?"
도리안이 오크의 욕망을 가리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금화도 거덜 내고, 지배인이랑 가드를 곤죽으로 만들었는데, 칼부터 날아오는 거 아닐지…."
"도둑 길드도 저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의뢰를 받아야지. 내가 사기 친 것도 없잖아."
이번 일에서 자신이 잘못한 건 없다. 도박에서도 술수를 쓴 것도, 먼저 공격한 것도 저쪽이니까.
-양심도 없는 놈! 본왕이 움직였지 않느냐!
'너야 나한테만 보이잖아. 그건 사기가 아니라, 내 능력이지.'
-끄응.
'화내지 말고 참아. 아이스크림이 기다리고 있다고.'
-윽! 너어어란 놈은 정말….
라온이 인상을 찌푸린 라스를 밀어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는 엄청 시원시원하게 움직이시네요."
"급하니까."
예상대로라면 이번 일의 원흉은 오마 중 하나 백혈교다. 그 미친놈들을 막으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들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서라도 빨리 처리해야 했다.
"실종자를 줄이려는 그 노력! 감동했습니다!"
자티스가 갑자기 두 손을 모은 채 눈동자를 빛냈다.
"라온 님은 욕을 먹더라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시는 거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도망치기 전에 잡고 싶을 뿐…."
"겸손까지! 정말이지 기사의 귀감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는 감탄했다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어, 뭐…."
라온이 뭐라 대꾸를 할지 고민할 때였다.
꺄아아아악!
바로 옆 골목에서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기감으로 위치를 파악한 뒤 벽을 넘어 소리가 들린 장소로 향했다.
"끄흐흡!"
로브를 입은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입에 재갈을 물린 여자아이를 보자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이는 살려달라는 듯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이런 젠장!"
"빨리 처리해!"
세 남자 중 가장 가까이 있던 장발의 장한이 단검을 꼬나쥐고 달려왔다.
뻐억!
라온은 찔러오는 단검을 가볍게 피한 뒤 장발 남자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살짝 쳤음에도 남자는 기절하여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놈들은 아니야.'
오러는커녕 육체만 조금 단련한 동네 건달 수준이다. 이런 놈들이 이번 실종 사건의 배후일 리 없었다.
"저 자식들!"
"이런 대낮에 납치를 하다니!"
뒤늦게 따라온 도리안과 자티스가 달려가 당황한 두 놈을 때려눕혔다.
"괜찮니?"
도리안이 보자기에서 여자아이를 꺼내주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찬란한 적발과 서리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녀였다.
"고, 고맙습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목소리에도 매력이 넘쳤다. 새벽이슬이 나뭇잎을 촉촉이 적시듯 가슴을 울리는 음성이었다.
"아, 아냐."
"아, 아닙니다…."
도리안과 자티스는 무언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절 구해주셨죠."
소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가 시선을 쭉 빨아들였다.
"저, 정말 고마워요."
소녀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얼굴이 확대된 것처럼 크게 보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당장 아이를 껴안고 위로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았다.
'이게 내 생각이라고?'
절대 아니야.
암살자로 살아온 자신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위로부터 한다는 생각을 가질 리 없었다.
우웅.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등 뒤에서 미약한 진동이 일었다. 진혼검. 적을 느꼈을 때만 반응하는 요검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백혈교!'
라온이 본능적으로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고오오오.
여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이제야 여자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아름다운 건 여전하지만 끼워 맞춘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드는 기이한 얼굴이었다.
'후우….'
정신을 차렸다는 티를 내지 않고, 도리안과 자티스를 따라 눈동자를 탁하게 풀었다.
속을 드러내지 않고, 표정을 관리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의 눈빛이 한층 더 반짝인다. 지금까지 맡지 못했던 오묘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치이잉!
다시 한번 머리가 멍해지려 했지만 회전하는 불의 고리가 그 탁기를 지워버렸다.
"아, 아니다."
라온은 소녀의 매혹에 완벽하게 빠진 것처럼 어눌하게 발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소녀가 한 발 더 다가왔다. 팔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안아달라는 듯 손을 내뻗었다.
"아…."
그녀의 의도대로 팔을 벌렸다. 진혼검의 진동이 더 거세졌다. 모른 척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고마워요."
안아주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 소녀의 눈동자가 오싹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날 위해 죽어줘서."
그녀가 새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심장을 찔러왔다.
후우웅!
대비하지 않았다면 피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와 강맹한 기운이었지만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왼쪽 가슴에 그녀의 수도가 닿기 직전 진혼검을 뽑았다.
치이이잉!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뽑혀 나온 붉은 칼날에서 샛노란 요기가 불을 뿜었다.
촤아아아악!
백색과 황색의 기운이 나선으로 꼬인 순간 하얀 피를 뿌리는 팔뚝 하나가 치솟았다.
"꺄아아아악!"
소녀는 잘려나간 팔을 부여잡고, 괴수와도 같은 비명을 터트렸다. 팔뚝에서 하얀 물감을 탄 듯한 탁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역시 백혈교였군."
"부, 분명 주술에 빠졌는데 어떻게…."
라온은 진혼검에 묻은 더러운 피를 털어내며 차게 웃었다.
"잘."
제181화
백혈교의 대주교 셀린느는 바닥에 떨어진 본인의 팔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뭐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라온이라는 아이를 보자마자 참고 있던 흡혈 욕구가 미친 듯이 샘솟았다. 특별한 힘이 그의 피에 깃들어 있다는 뜻. 그 피를 마시고, 더 강해지고 싶었다.
다리곤도 기회가 된다면 죽이라고 했으니, 바로 매혹의 주술을 읊조리며 라온에게 다가갔다.
거기까지는 완벽했다. 그는 품을 열어주었고, 눈동자는 풀렸으니까.
하지만 심장에 혈수를 박아넣으려는 순간 라온의 눈동자에 시퍼런 빛이 돋아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단검을 내질러왔다.
다급하게 혈기를 응축시켰지만, 단검은 혈기를 가볍게 찢고, 자신의 팔을 갈라버렸다.
뚝뚝.
깔끔하게 베어진 팔뚝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지만,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크으…."
셀린느가 새파래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럽게 아파.'
백혈교의 연공법인 백혼의 오러에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공능이 있건만, 그 통증 감소 능력이 사라진 듯 지독한 아픔이 머리를 울렸다.
"어, 어떻게 내 주술을 벗어난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무슨 짓은 네가 했지."
'저 단검인가?'
지금 보니 라온이 쥔 단검에서 흉폭할 정도의 요기가 휘몰아쳤다. 단검에 어린 기운이 회복을 방해하고, 계속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단검이 주술을 풀어주었군."
셀린느가 단검을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글쎄?"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단검을 휘돌렸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지 표정이 평온했다.
자신이 뿜어낸 혈기 앞에서 저리 여유롭다니, 뒤에 있는 바보 둘과는 차원이 달랐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셀린느가 호흡을 고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뻗었다. 백혼의 오러가 열화처럼 퍼져나가며 잘려 나간 손이 스스로 날아와 팔에 달라붙었다.
치이이익!
하얀 김이 흐르며 단검에 베인 팔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백혼의 오러가 가진 재생의 공능이었다.
"그리 여유를 부렸다간…."
셀린느가 도로 붙은 팔로 주먹을 쥐며 금빛 눈동자를 번쩍였다.
"그 모가지에 구멍이 뚫릴 거야!"
* * *
라온은 다시 붙은 셀린느의 팔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재생의 공능이로군.'
백혈교의 연공법, 백혼의 오러는 트롤 이상의 재생력을 부여해준다고 한다.
팔을 붙이는 모양새를 보니, 저 여자의 계급은 대주교 이상인 것 같았다.
다만 얼굴빛을 보면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다. 진혼검의 요기가 계속해서 지독한 고통을 주고 있을 것이다.
-추한 힘이로구나.
라스는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남의 피를 갈취하여 강해지는 힘이라, 더럽고 조잡해. 본왕이라면 당장 얼려서 저 추잡한 것의 핏물을 모조리 빼버렸을 것이야.
녀석은 보기 싫으니 빨리 제거하라며 손목을 툭툭 쳤다.
"으헉!"
"허어…."
이제야 정신을 차린 도리안과 자티스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배, 백혈교!"
두 사람 역시 앞의 여자가 백혈교의 간부라는 걸 알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부, 부단주님!"
"괜찮으니, 물러서 있어."
라온은 두 사람에게 손을 저어주고, 백혈교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팔을 붙이는 걸 보니, 대주교쯤 되나?"
"그걸 알고도 여유를 부려? 내게 시간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글쎄?"
지금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임무가 저 여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실종을 해결하는 것이었으니까. 최대한 정보를 빼내야 한다.
"죽여주지!"
대주교가 양손을 모은 채 알 수 없는 언어로 주술을 외운다.
고오오오!
그녀의 전신이 하얗게 물들고, 짙은 꽃향기가 골목 전체를 휘감았다. 향을 맡자마자 머리가 멍해진다. 조금 전의 매혹보다 훨씬 강력한 주술이었다.
'어차피 소용없지만.'
불의 고리가 공명하는 순간 향기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자신에게 저 정도 매혹술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맑은 눈빛으로 대주교를 굽어보았다.
"대, 대체 어떻게…."
대주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고작 매혹술이 다라면 시간을 준 의미가 없네."
라온이 차게 웃으며 진혼검을 역수로 쥐었다.
"끝내자."
땅을 박차고, 혈기로 가득한 공간에 뛰어들었다.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지만, 불의 고리와 진혼검이 혈기를 모조리 밀어냈다.
"이놈!"
대주교가 눈을 부라리며 수도를 내뻗었다. 당황한 상태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투로. 대주교라는 계급에 설 만한 혈수공이었다.
다만 주술에 비하면 조금 처진다. 앞의 대주교는 무학보다 주술을 파고든 것 같았다.
고오오오!
라온은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휘돌리며 대주교의 연달아 펼치는 혈수공에 집중했다. 혈수공은 백혈교 간부의 기본 무학이니, 제대로 보아둔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죽어!"
흥분한 대주교는 라온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계속해서 수도를 뻗어냈다.
골목 전체가 그녀의 손날에서 피어난 기운에 터져나갔지만, 라온은 자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빠르고 강맹하면서 요사스럽군.'
단순하지만 그래서 강한 무학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그럼 그만두지."
라온이 뒤로 빼려던 왼발에 다시 힘을 주고 앞으로 나아갔다.
"헉!"
당황하여 물러나던 대주교를 쫓아 오른손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이익!"
대주교가 눈을 부라리며 혈기를 가득 모은 수도를 뻗어왔다.
챠아앙!
검과 손날이 격돌했건만 쇳덩이끼리 부딪친 듯한 소리가 울렸다.
찌지직!
하지만 호각은 아니다. 원망으로 타오르는 진혼검의 맹렬한 요기가 대주교의 혈기를 찢으며 들어갔다.
"이익!"
대주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라온은 오른손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왼손을 재빠르게 놀려 붉은색 핀을 대주교의 상의 끝단에 꽂아 넣었다.
뻐어어억!
핀이 제대로 꽂힌 걸 확인하자마자, 몸을 틀어 그녀의 허리를 걷어찼다.
"크윽!"
대주교가 신음을 흘리며 벽에 부딪쳤다.
푸카아악!
라온은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돌진해 진혼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징그러운 빛의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끄아아악!"
대주교는 도망치기 위해서 진혼검이 박힌 어깨의 살을 뜯어내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죽어버리겠어!"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 앞으로 내뻗자, 손톱의 끝에서 치솟은 하얀빛이 섬광처럼 쏘아졌다. 검기와도 같은 기운을 손가락에서 뿜어내는 혈지공이었다.
고오오오!
라온은 이번에도 그 기술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혈지공의 흐름을 읽은 뒤 진혼검을 그었다.
치이이잉!
반원을 그리며 뻗어나간 요기의 칼날이 혈지공의 기운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아직 안 끝났어!"
대주교가 끝장을 보겠다는 듯 계속해서 혈기의 선을 쏘아냈지만 진혼검이 뿌리는 요기의 벽을 뚫어내지 못하고 모조리 녹아내렸다.
"대, 대체…."
대주교는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라온은 그녀를 압박하듯 그만큼 앞으로 나아갔다.
"오지 마!"
"여유 부리지 말라더니, 결국 그 수준인가?"
라온이 차게 웃으며 턱을 모로 틀었다.
"예상대로 백혈교가 포르반 실종 사건의 주역이었군."
"예, 예상대로?"
"이런 추잡한 일을 벌이는 건 너희뿐이니까."
"닥쳐!"
"난 왜 공격했지? 쉽게 피를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나?"
"닥치라고!"
대주교가 혈지공을 쏘아낼 때 앞으로 뛰어들었다. 손을 미처 빼지 못한 그녀를 향해 진혼검을 사선으로 베었다.
푸카악!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검흔이 돋아나며 탁한 핏물이 허공을 뒤덮었다.
"끄아아악!"
대주교는 비명을 지르며 상처를 감싸 안았다.
"너희 지부는 어디에 있지? 납치한 사람들은 살아 있나?"
"끄으윽…."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멈춰 섰다.
"조, 좋다…. 여기서 끝을 보자. 너만큼은 죽여주지."
대주교가 광기에 차오른 눈빛을 발하며 양손을 모아 삼각형을 그렸다.
우우우웅!
중얼거리며 외우는 주문이 허공을 퍼져나가자, 삼각형에서 시뻘건 빛이 뿜어지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큭! 뭐야!"
그 기운이 터지기 직전 그녀가 등을 대고 있던 벽에 허연 구멍이 돋아나며 나선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젠장! 다리곤! 뭐 하는 짓이야!"
그 소용돌이는 주문을 외우던 대주교를 빨아들이고,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내 이름은 셀린느다. 너는 내가 죽인다! 라온 지그하르트!"
셀린느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며 악을 지르고 나서 구멍이 완벽하게 닫혔다.
"뭐야. 도망쳤어?"
뒤에서 경쾌한 바람과 함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메르였다.
"아쉽게도 단주님을 보고 도망친 모양입니다."
상황으로 보니 대주교가 아니라, 그녀의 동료가 리메르를 보고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음? 아쉬운 표정이 아닌데?"
리메르는 라온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대로다. 딱히 아쉬움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큰 걸 위해서 일부러 놓아줬으니까.
"부, 부단주님!"
"괜찮으십니까?"
벽에 딱 달라붙어 있던 도리안과 자티스가 뛰어왔다.
"괜찮아."
손을 젓고서 바닥의 혈흔을 살피는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 실종 사건의 뒤에는 백혈교가 있었습니다."
"뭐, 그렇겠지."
리메르가 알고 있었다는 듯 주홍색 핏물을 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대주교에서도 중급 이상인데, 압도하다니, 너 또 강해졌냐?"
"주술 위주로 힘을 쌓았는지 그리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셀린느라는 여자의 주술은 강력했지만, 무력은 별 느낌 없었다.
"허…."
"그게 강하지 않았다고?"
도리안과 자티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백혈교의 대주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뿐일 거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도 아쉽게 됐군. 잡았다면 본부의 위치를 알 수 있었을 텐데."
"힘들 겁니다. 놈들에게는 고문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백혈교도들은 광신도답게 고문이 먹히지 않는 독종들이다. 전생에서 백혈교도를 며칠 동안 고문을 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긴 걔네는 지독하지. 그러니 아직 백혈교 총단이 밝혀지지 않았고."
"예. 총단은 모르죠. 다만…."
라온이 옷깃에 꽂아둔 붉은 핀을 만지며 옅게 웃었다.
"포르반의 백혈교 지부가 어디에 있는지는 곧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 * *
콰아아앙!
셀린느가 하얗게 물든 손을 휘두르자, 이중으로 설치한 벽이 가루가 되어 무너졌다. 라온이 진혼검으로 가볍게 막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씨이이이이발!"
그녀는 라온에게 당했던 상처를 손톱으로 쥐어뜯으며 악을 질렀다.
"아파! 아프다고! 통증이 사라지질 않아!"
백혼의 기운을 계속 운용하고 있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다리곤! 어떻게 좀 해봐!"
"좀 진정해라."
다리곤이라 불린 노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날 왜 소환한 거야! 놈을 죽였으면 이 고통도 없었을 텐데!"
"리메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잡혔을 거야."
"크윽…."
셀린느가 이를 바득 갈며 손톱으로 벽을 긁자, 벽이 푸딩처럼 갈라져 뭉개졌다.
"부수지 좀 마. 이 방은 계속 써야 한다고."
다리곤은 혀를 차고서 셀린느의 상처를 살폈다.
"지독하군."
대주교급인 셀린느의 오러라면 이미 모든 상처를 아물게 만들어야 하건만 검흔에 깃든 기이한 힘이 재생을 방해하고 그녀에게 화상 같은 통증을 안겨주고 있었다.
"요기. 그것도 꽤 지독한 요기가 스며들어있다. 지우려면 한참 걸리겠어."
"그러니까 그놈을 죽여야 해. 무조건!"
셀린느의 눈동자에서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의 살기가 치솟았다.
"내가 죽일 거야! 살을 뜯고, 뼈와 피를 갈아 마실 거라고…."
"라온이라는 놈을 죽인다고 사라질 상처가 아니다. 오히려 원한이 깃들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지. 거기다…."
그는 셀린느의 상처에 혈기를 주입해주고서 몸을 돌렸다.
"곧 그분들이 오신다.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치도록."
"크으, 젠장! 젠장!"
셀린느가 악을 지르며 땅을 내리쳤다. 다리곤의 사무실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그러게 내가 정보부터 모으라고 하지 않았나. 괜히 식욕만 앞서서…."
"닥쳐! 그놈을 보면 네놈도 피를 빨 생각부터 했을 테니까!"
"그 정도인가."
"후욱, 그놈은 내 꺼야. 이렇게 당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 어떻게 해서든…."
"당하기만 한 건 아니다."
"뭐?"
"네가 그 어린놈에게 찢기는 동안 이쪽도 계획에 성공했으니까."
다리곤이 손가락을 튕기자,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새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들어와 기절한 두 남녀를 내려놓았다.
라온에게 당한 후 치료소에 입원해 있던 이닐드와 제이나 왕녀였다.
"치료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직접 가서 잡아 왔지. 이 둘을 데리고 간다면 이득도 보통 이득이 아니다. 발카르 국왕이 미쳐 날뛸 거야. 지그하르트에 전쟁을 걸지도 모르지."
"모렐이 마법 아티팩트를 설치해 두었을 텐데?"
"당연히 제거한 후 데리고 왔다. 내가 너처럼 아마추어인 줄 아나?"
비웃음을 흘리듯 다리곤의 주름진 입매가 가늘게 올라갔다.
"그분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닐드를 줄 테니, 마시고 그 상처를 회복해라."
"능구렁이 같은 영감."
셀린느는 못 당하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노도 가라앉은 듯 눈동자의 금빛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만 그 둘 모두 이닐드와 제이나의 옷에 끼워진 핀이 붉게 번들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 * *
라온은 본래 도둑 길드에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리메르와 함께 시청으로 향했다.
남아 있던 모렐과 복귀한 검사, 마법사들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일단 적의 정체는 밝혀졌다."
라온은 회의실의 소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기막을 친 뒤에 회의실 단상 위로 올라갔다.
"어?"
"정말입니까?"
"이렇게 빨리요?"
"오오!"
광풍단만이 아니라, 모렐과 살라만의 마법사들도 깜짝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시청이 몇 달을 뒤져도 찾지 못한 걸 몇 시간 만에 밝혀냈으니, 그들이 경악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예상한 사람이 꽤 있을 텐데, 납치의 주범은 백혈교다."
백혈교라는 말을 하며 셀린느의 피가 묻은 천을 앞으로 꺼냈다. 생물의 핏물 같지 않은 탁한 빛에 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기분 나쁜 색깔…."
"백혈교!"
"역시 그놈들이었군."
"크윽…."
"지독한 놈들!"
광풍단과 살라만은 육황의 무력단체답게 오마 중 하나인 백혈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다만 그 이상으로 지독한 살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고오오오!
마르타. 지옥의 불꽃 같은 검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오싹할 정도의 살기를 일으켰다. 이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돌아볼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다.
-소고기 소녀가 왜 저러는 것이냐.
'백혈교였나.'
라온이 마르타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귀화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지금까지 너무 악바리처럼 굴어서 단순히 성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그하르트에 들어오기 전 백혈교에게 당했던 것 같다.
"그 피는 어떻게 구했고, 백혈교와는 어디서 부딪쳤지?"
모렐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셀린느의 피가 묻은 천을 가리켰다.
"부딪쳤지?"
"부, 부딪쳤습니까. 크윽."
라온이 뒷말을 따라 하자, 모렐이 이를 악물고 존댓말을 흘렸다.
"도둑 길드를 찾으러 가는 길에…."
라온은 셀린느와 싸우고 그녀가 도망친 것까지 모두 말해주었다.
"대, 대주교를 베고, 도망치게 만들었다고?"
"이제 막 검사가 된 사람이…."
"허어…."
모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고, 살라만의 마법사들 역시 마른침을 삼켰다.
"너라는 놈은 대체…."
버렌 역시 당황했는지 평소처럼 반말을 내뱉었다.
"...."
"백혈교…."
루난과 마르타는 피에 젖은 천을 지그시 바라만 보았는데, 그 감정은 너무도 달랐다. 별 느낌 없이 보는 루난과 달리, 마르타는 당장에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아쉽군."
모렐이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놈들은 나타나지 않을 거다. 아무리 백혈교가 미쳤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와 발카르에 정체를 들키고도 움직일 놈들은 아니야."
그의 말이 맞다. 놈들은 납치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하니, 이제 빠질 준비를 할 것이다.
다만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이번에는…."
콰앙!
라온이 말을 하려고 할 때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치료소에 다녀온다던 자티스가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가 손을 바르르 떨며 바로 말을 이었다.
"치료소에 있던 제이나 왕녀님과 이닐드 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뭐?"
"어?"
왕녀와 이닐드가 사라졌다는 말에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치료소에 있던 치료사들만이 아니라, 기사와 마법사들이 기절한 것처럼 잠에 빠졌고, 왕녀님과 이닐드 님만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
"말도 안 돼! 아티팩트에선 아무런 반응도…."
"아티팩트는 두 분이 계시던 침상 위에 있었습니다!"
자티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아귀에는 두 개의 목걸이와 반지가 있었다.
"젠장! 당했어!"
"이, 이런!"
모렐과 마법사들은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말아쥐었고, 광풍단 검사들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짝!
모두가 당황하여 혼이 반쯤 빠져 있을 때 정신을 일깨우는 손뼉이 울렸다.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됐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떻게 해서든 왕녀님을 찾지 않으면 이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될 거야! 지그하르트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괜찮습니다."
라온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눈빛으로 모두의 시선을 받았다.
"왕녀와 이닐드가 어디로 납치되었는지."
옷깃에 끼워둔 붉은 핀을 빼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만화공의 기운을 일으키자, 핀이 스스로 떠올라 방향을 가리켰다.
"도망친 대주교가 어디에 있는지."
라온은 입을 떡 벌린 사람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제182화
"그건 아까 우리한테 준 핀이잖아."
버렌이 라온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붉은 핀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위치를 찾을 수 있으니까. 가지고 있으라고 한 거 맞지?"
그가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다른 검사들도 핀을 꺼내놓았다.
"맞아. 내 오러가 들어가 있어서 너희들의 위치를 알 수 있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어떻게 왕녀와 이닐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건데? 그 둘에게는 핀이 없잖아."
"있어."
"어?"
"이, 있다고?"
"정말입니까?"
"그게 왜 왕녀님에게!"
있다고 하자 검사들만이 아니라, 마법사들도 눈을 부릅떴다.
"둘이 기절했을 때 옷에 끼워뒀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꺼낸 핀을 다시 옷깃에 꽂아 두었다.
"대, 대체 왜?"
"어떻게 알고서?"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만약 내가 오마 중 하나고, 왕녀와 이닐드가 쓰러졌다는 걸 알면 분명 두 사람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그걸 예측했다고?
"예측이라기보다는 아니면 좋고, 만약 납치가 일어난다면 놈들의 위치를 잡을 수 있으니까."
"허어…."
"정말이지…."
라온의 덤덤한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메르만 홀로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잠깐."
조용히 듣고 있던 모렐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핀을 꽂을 때 사용한 수는 신입 검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뛰어났다?"
이닐드를 압도하며 때려눕힐 때도 나름 놀랐지만, 지금은 그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경악스럽다. 저게 17살짜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녀석보다 더해….'
발카르에도 숨겨둔 어린 괴물이 하나 있지만, 무력은 따라가도 라온의 심계와 행동력은 절대 쫓지 못할 것 같았다.
"북멸왕께서 직접 키우시기라도 하는 건가? 저런 괴물이 어떻게 나타난 거지?"
"그럴 리가."
리메르가 피식 웃었다.
"조금 도움을 주긴 했지만, 저 녀석은 혼자 힘으로 컸어. 내 손도, 가주님의 손도 벗어나서 스스로 성장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잘 봐두는 게 좋을 거야. 지그하르트가, 아니 대륙의 역사가 라온에 의해서 새로 써질 테니까."
그는 손을 빙글 흔들고서 회의장을 나갔다.
"역사라…."
모렐은 리메르가 나간 문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비웃어주었겠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후우, 가자. 우리도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그는 조금 지친 얼굴로 살라만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갔다.
* * *
라온은 리메르와 광풍단원들을 데리고, 백혈교의 지부로 의심되는 곳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섰다.
"저깁니다."
손가락으로 언덕 아래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을 가리켰다. 포르반 시 북쪽에 있는 상인 가문으로 평소 선행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라고 했다.
상인 가문은 마차를 이용하기 좋으니, 사람들을 납치하기도 편했을 거다.
"저기가 백혈교의…."
마르타는 당장 달려갈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검은 눈동자에 어린 건 살기라는 단어로도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였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본인이 죽더라도 칼을 날릴 기세. 아무래도 오늘 전투에서 마르타를 자세히 봐두어야겠다.
"저거란 말이지."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저길 그냥 칠 수는 없잖냐. 전부 백혈교는 아닐 거 아니야."
"그냥 쳐도 됩니다."
라온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울부짖는 진혼검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지하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혈교도니까요."
"어? 진짜?"
"예."
울부짖는 진혼검이 말해준다. 저택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혼의 오러를 익히고 있는 백혈교였다.
"1조는 전방, 3조는 후방을 친다. 2조는 우측으로 침투해서 지하에 있는 인질들을 구해. 항상 광풍진은 유지하면서 움직이도록."
"그럼 좌측은?"
"나와 단주님이 간다. 2조처럼 바로 아래로 내려가서 간부를 상대할 거다. 제가 셀린느를 맡을 테니, 단주님은 이동 주술을 사용한 간부를 맡아주세요. 그놈을 빠르게 제압해야 놈들의 도주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리메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네가 단주 같지 않냐? 나 존재감이 너무 없는데?"
"원래 없으셨습니다."
버렌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루난이 차분히 일어서고, 마르타는 닭살이 돋아오를 정도의 살기를 피워냈다.
"선공은 제가 날리죠."
라온이 진혼검을 역수로 잡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극성으로 일으킨 만화공의 기운을 진혼검이 가진 요기의 흐름에 끼워 넣었다.
화아아아아아!
요기를 담은 만화공 화령이 허공을 가득 수놓으며 저택의 중심에 적화의 폭격을 일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