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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2차 수면기 (4)

떠오른 문자는 간단했다.

[미션 클리어!]

'미션 클리어'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이를 본 브레드가 이를 악물었다.

으득-.

통로의 함정도 함정이었지만, 그보다 브레드를 더 열 받게 만드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저 글자판이었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죽여 주마!'

그가 그렇게 살심을 키우는 사이 다시금 글자판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3단계를 통과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걸 어쩌지?]

[지금까지는 그냥 튜토리얼이었는데?]

[이제부터가 진짜다.]

알림이 끝나자마자 바로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4단계 START!]

[미션: 십이지병.]

쿵-.

짧은 설명과 함께 공터의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다수의 존재가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는 듯한 발소리.

곧이어 묵직한 발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체고가 5m에 달하는 거인들이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각기 다른 동물 머리를 한 11명의 거인들의 손에는 각종 병장기가 들려 있었다.

그들을 본 브레드의 눈이 커졌다.

'저건...?!'

브레드는 저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저것을 모를까.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초월기!"

250여 년 전 처음 등장하여, 이제는 각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전략 병기.

비록 그가 알고 있는 초월기보다는 한참 작았지만, 저런 형태를 띠는 것은 초월기뿐이었다.

'어떻게 이곳에 초월기가?!'

금지의 존재는 못해도 천 년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 금지에 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초월기가 나타나다니.

사정을 알지 못하는 브레드로서는 이해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길게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키잉-.

11마리 동물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며 브레드를 향해 쇄도해 든 것이다.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어마무시한 속도.

마치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한 공세에 브레드도 바짝 긴장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온다!'

브레드의 눈이 형형히 빛나고.

곧 한 명의 인간과 11기의 초월기가 격돌했다.

쾅- 쾅-.

공터를 오가며 초월기와 맞붙는 브레드의 모습은 뭇 검을 잡은 무사들의 경외를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이놈들… 방진을 사용하고 있다!'

11기의 초월기는 방진을 구축해 브레드를 몰아쳤다.

이를 악문 브레드가 전력으로 영성검을 펼쳤다.

모든 것을 베어 내는 궁극기 대(對)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어 자율적인 기동을 보이는 초월기.

시간이 흐를수록 격돌은 거세져 갔다.

쿵-.

콰득-.

치열했던 2시간의 접전, 마침내 전투의 결과가 나왔다.

쿵-.

브레드의 영성검에 마지막 초월기가 허리를 베이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 앞에는 창백한 안색의 브레드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큭!"

검을 땅에 박아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한 브레드.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의 몸은 처참했다.

무리한 속성력 운용으로 여러 차례 피를 토해 내 입가는 피가 범벅이었고, 왼팔이 부러진 듯 덜렁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의 다리였다.

"제, 젠장!"

그의 오른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격한 전투 끝에 그는 자신의 장기라 할 수 있는 기동성을 잃고 만 것이다.

"허...."

결국, 중심을 잃고 쓰러진 그는 천장을 보며 신음했다.

그러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초월기가 등장하기 전, 글자판에 적혀 있던 숫자.

'십이지병이라 하였는데...?'

한데, 자신이 상대한 초월기는 모두 11기였다.

브레드는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안감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쿵-.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

곧이어 보이는 거대한 동체에 브레드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번에 나타난 것도 역시나 초월기였다.

하지만 그 크기는 지금까지 상대한 초월기의 두 배 정도.

드래곤의 머리를 한 10m 크기의 초월기를 보며 브레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허망함이 담긴 웃음소리였다.

그의 두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오는 게 아니었다....'

브레드는 후회했다.

한순간의 욕심에 눈이 멀어 금지의 경고를 무시한 자신을....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쿵-.

드래곤 머리 초월기가 빠르게 브레드를 향해 돌진했고.

콰즉-.

원작 속 로이스의 죽음과 광룡 탄생의 원흉이 배제됐다.

* * *

콰즉-.

드래곤 머리를 한 초월기의 손에 한 생명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떠오른 문자.

[YOU DIE!]

[미션 실패!]

[극락왕생하소서....]

허공에서 글자가 반짝이다 사라지니 두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났네."

"그러게."

제네로커와 발렌티나는 죽은 인간의 앞에 도착했다.

시신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시선은 무심했다.

브레드의 죽음은 처절하고 처참했지만, 그래 봤자 아들의 수면방에 무단으로 침입한 존재일 뿐.

만약 그가 이번 함정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결국 제네로커 내지는 발렌티나에게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죽은 브레드를 내려다보던 제네로커가 손을 뻗었다.

슥-.

그러자 검은 어둠이 몰려들어 주변의 흔적을 지워 나갔다.

시신은 물론 핏자국까지.

공터에 남은 전투의 흔적만 아니라면 조금 전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청소였다.

"다 됐네."

더 치울 게 없나 주변을 둘러본 제네로커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때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야...."

"응?"

"만약 그놈이 살아남았으면 다음 단계는 뭐였을까?"

지금까지 쭉 지켜본 바로는 로이스가 설치한 함정들은 단계가 존재했다.

발렌티나의 이야기에 제네로커도 살짝 궁금해지기는 했다.

'아까 그게 4단계였지?'

과연 아들은 몇 단계까지 함정을 설치해 두었을까?

발렌티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번 알아볼까?"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발렌티나가 배시시 웃으며 뛰어갔다.

제네로커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곧 그녀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

그곳은 로이스가 잠든 큐브의 근처였다.

제네로커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여긴 왜?"

"저번에 들었거든, 여기에 그게 있대."

"그거?"

"원격 수동 모듈 프로그램!"

"그게 뭔데?"

"나도 잘은 몰라. 아마 침입자 퇴치용 함정을 수동으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오호?"

제네로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곧 두 부부의 시선이 한 장치에 꽂혔다.

널찍한 화면과 6개의 둥근 버튼이 달린, 언뜻 보면 현대의 오락기처럼 보이는 장치.

일렬로 쭉 늘어진 6개의 버튼 중 4개는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나머지 2개는 녹색이었다.

"아무래도 저거 같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눌러 볼까?"

"그럴까?"

발렌티나와 제네로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로이스가 깨어 있었으면 제발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을 법한 미소였다.

곧 발렌티나의 손이 5단계로 추정되는 녹색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정면의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어쭈? 이것도 버텨?]

[어디 한번 이것도 막아 보시지!]

[5단계 START!]

[미션: 그레이트 토토를 이겨라!]

문자가 사라지자 수면방 한쪽의 벽이 열렸다.

드르륵-.

벽 사이에서 나온 거대한 동체.

그것은 다름 아닌 15m에 달하는 거대한 초월기였다.

다만 특이한 점은....

"토끼...?"

"토토?"

초월기가 이족 보행을 하는 토실토실한 토끼 인형을 쏙 빼닮았다는 점이었다.

쿵- 쿵-.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나는 그레이트 토토가 수면방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아까 그 공터로 가는 것이리라.

이를 본 제네로커가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녀석… 아빠가 만들어 준 인형이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후후. 로이스 방에 아직도 토토 인형 있는 거 알아?"

"정말? 음… 그러면 500살 성룡식 선물로 조금 더 큰 인형으로 만들어 줄까?"

"글쎄… 그건 딱히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

만약 발렌티나가 말리지 않았다면, 로이스는 성룡이 된 첫 선물로 대형 토토 인형을 받았으리라.

키득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도중 둘의 시선이 마지막 녹색 버튼에 닿았다.

방금 나간 그레이트 토토라는 초월기가 생김새는 그래도, 무시 못 할 녀석이었다.

안 그랬으면 로이스가 녀석을 5단계에 넣어 뒀겠는가.

그렇다면 마지막 6단계는 과연 무엇이 튀어나올까?

궁금증이 두 드래곤을 괴롭혔다.

그리고 둘은 생각보다 훨씬 호기심에 약했다.

"누른다?"

"응."

이번에는 제네로커가 6번째 버튼을 눌렀다.

띠-.

녹색의 버튼이 붉게 물들고,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훌륭하군. 그레이트 토토마저 물리치다니.]

[자, 이제 마지막이다.]

[하지만 넌 절대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할 거야.]

[미리 명복을 빌어 주마.]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글자.

드디어 마지막 문구가 떠올랐다.

[최종 단계 START!]

[미션: 엄빠 소환!]

그와 함께 수면방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용 삐용-.

소리의 출처는 다름 아닌 발렌티나와 제네로커의 주머니였다.

놀란 부부가 주머니에서 소리를 내는 물건을 꺼냈다.

"어...?"

"이거?"

그것은 다름 아닌 로이스가 전해준 통신석이었다.

새하얗던 구슬은 붉은빛을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곧 통신석의 붉은빛이 사라지면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 살려 줘요!]

그것을 끝으로 통신석은 다시 흰색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찾아온 정적.

"...."

"...."

발렌티나와 제네로커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핫!"

"하하하! 로이스 이 녀석이...."

아들 녀석의 깜찍한 짓에 엄마와 아빠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물론 그저 깜찍한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급한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물불 안 가리고 곧장 달려왔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 단계에 최종 보스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을 둘이나 심어 둔 로이스였다.

로이스가 선정한 최종 보스 둘은 잠든 아들이 만들어 준 즐거움에 한동안 웃을 수 있었다.

제네로커와 발렌티나는 미소를 머금고 잠든 아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1년인가...."

로이스가 성룡으로 거듭나기까지 앞으로 1년.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밝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이 더욱더 빨리 보고 싶은 두 부부였다.

외부 침입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던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한 달, 두 달, 석 달, 반년.

부모님의 아들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두 드래곤은 조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아들을 지켰다.

그렇게 로이스가 잠든 지 딱 11년이 되던 날.

쩍-.

로이스가 잠든 순간부터 주인을 보호해 온 큐브.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에 대비해 로이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보호 장치에 금이 갔다.

쩍-.

길게 이어진 실금은 그대로 큐브를 이등분했다.

푸쉬쉭-.

둘로 나뉜 큐브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이내 큐브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푸쉬쉭-.

그러자 더욱더 많은 수증기가 발생해 사방을 잠식했고 뿌연 수증기 너머로 언뜻언뜻 그림자가 보였다.

20m가 넘어가는 듯한 거대한 그림자.

수증기가 조금씩 걷히며 그림자가 완전히 드러나려는 찰나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

사방을 잠식한 밝은 빛이 사라지고 수증기조차 완전히 흩어졌다.

그러자 큐브 사이에서 잠들기 전과 달라진 모습의 로이스가 드러냈다.

키는 170㎝쯤.

나이는 소년과 청년의 사이, 대략 열여덟쯤 되어 보였다.

어릴 적 귀여움이 가득했던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귀엽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움찔-.

여전히 잠든 듯, 감겨 있던 로이스의 두 눈이 미동했다.

곧이어 살짝 눈꺼풀이 올라가며 자줏빛의 영롱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

아직은 잠이 덜 깬 듯 조금은 멍해 보이는 얼굴.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그는 손을 들어 보았다.

"커졌… 네?"

작디작았던 손이 확실히 달라졌다.

뽀얗고 찹쌀떡처럼 포동포동한 손이 아닌 길쭉길쭉 새하얀 손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야도....'

그는 잠들기 전과 사물을 바라보는 높이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이에 로이스는 미소 지었다.

'살아남았다.'

2차 수면기.

원작의 로이스가 죽는 그 시기를 무사히 버텨 내며 살아남은 것이다.

생존의 기쁨에 로이스가 멍하니 있던 순간.

"로이스 니이이임!"

우렁찬 외침과 함께 작은 인영이 쪼르르 로이스의 품을 향해 날아들었다.

금발이 찰랑거리는 작은 요정.

로이스가 오랜만에 본 녀석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핀?"

"보고 싶었어요!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핀은 로이스의 품에서 환히 웃었다.

어찌나 기뻐하던지 핀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격한 반응에 로이스도 웃으며 답했다.

"오냐. 나도 반갑다."

"헤헤."

그렇게 로이스와 핀이 즐거운 해후를 나누고 있을 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로이...."

로이스의 정면에 나타난 제네로커와 발렌티나.

그들은 훌륭히 성장한 아들을 보며 감격스러워했다.

빠르게 걸어간 제네로커와 발렌티나는 다 같이 로이스를 끌어안았다.

"아들, 무사히 성룡이 된 걸 축하한다."

"우리 아들, 다 컸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불러 줄 거지?"

포근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에 로이스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원작에서 광룡이 나타났어야 할 그날.

로이스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며 변화가 시작됐다.

157화. 새로운 목표 (1)

로이스가 오랜 수면에서 눈을 뜬 그 순간.

드르륵-.

또 다른 시간 축을 지닌 세상.

화르륵-.

멸망으로 나아가는 세상 속, 어둠이 뿌리내리고 화마가 대지를 잠식했다.

검게 황폐해진 대지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내, 사람들은 그를 엘비스 에스테반이라 불렀다.

"하...."

작게 탄식한 엘비스는 검은 하늘을 공허하게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까지인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갑작스러운 광룡의 공격에 휘말려 가문과 가족을 잃었다.

피난을 위해 떠난 겨울 대륙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을 만났다.

광룡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

엘비스는 그들과 함께 목표를 세웠고 투쟁했다.

광룡을 죽이고 모든 것을 바로잡자는 뜻으로 함께했던 동료들.

검성이라 불리며 한 자루의 검으로 세상을 질주하던 켄드릭.

짐승들의 왕 라비나.

뛰어난 치료술로 성모라 불린 아벨.

궁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천궁 제롬.

거기에 현자라고 불리던 자신까지.

한 명 한 명이 희대의 천재이자 영웅이라 불리기 마땅한 이들이었지만, 그런 이들이 모이고도 미쳐 버린 드래곤 하나를 감당해 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오랜 싸움의 끝에서 모두가 죽고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큭!"

바닥을 나뒹굴던 엘비스는 마지막 기력을 짜내 몸을 일으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엘비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붉은 모래알이 담긴 손바닥만 한 모래시계였다.

격한 전투 속에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기묘한 물건.

'고대 신의 유물이라....'

이는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신의 편린이자 시간을 역행하게 해 주는 역천의 기물이었다.

또한, 동료들이 희생해 가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살린 이유이기도 했다.

'엘비스… 너라면… 반드시 미래를 바꿔 줄 거라 믿는다.'

'너만이 할 수 있어.'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를 잘 이끌어 달라고!'

'당신을 믿어요.'

동료들은 자신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산화했다.

때문에 이렇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 가자....'

자신을 믿고 의지해 준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쉼 없이 움직여야 했다.

달칵-.

엘비스가 모래시계를 비튼 순간 붉은 모래알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모래를 완전히 비워 낸 그는 천천히, 화마로 물든 세상을 등지고 걸어갔다.

그러자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츠- 츠- 츠-.

그의 걸음걸이마다 그의 육신이 붉은 모래로 화해 흩날리기 시작했다.

육신이 사라지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엘비스는 웃었다.

그는 불타오르는 대지를 보며 다짐했다.

"비록 지금은 실패하였지만… 두 번의 실패는 없다."

짤막한 다짐과 함께 엘비스의 육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철컥-.

엘비스가 속해 있던 세상의 시간 축이 되감기기 시작했다.

모래시계의 사용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훗날.

과거이자 미래, 미래이자 과거에.

엘비스는 자신의 다짐처럼 모든 것을 이룩해 냈을 것이다.

가문의 재건과 복수.

대륙의 평화까지.

그와 동료들은 광룡의 목을 쳐 내고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릴 운명이었다.

하지만....

원작이 시작되기 전, '미래'란 엘비스의 시간 축.

원작이 시작되기 전, '과거'란 로이스의 시간 축.

엘비스가 모래시계를 비튼 순간, 서로 평행하게 놓여 흘러가던 두 개의 시간 축이 '원작의 시작'이자 '현재'라는 시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빠르게 가까워진 두 개의 시간 축이 겹쳤다.

달칵-.

어긋났던 서로 다른 시간 선이 맞물렸고.

드르륵-.

두 존재의 시간 선이 원래 하나였던 듯 자연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엘비스가 겪은 과거의 경험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상황 변해 갔다.

바로 로이스가 수년간 대륙을 떠돌며 뿌린 씨앗들로 인해 말이다.

한편,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엘비스는....

"…돌아왔다."

'새로운 현재'라는 시점에서 눈을 떴다.

* * *

무사히 2차 수면기를 마치고 성장한 로이스.

그는 한동안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뭐, 그래 봤자 몇몇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축하에는 응당 선물이 따르는 법.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로이스님!"

"고맙다!"

핀이 수줍게 웃으며 꽃을 엮어 만든 실팔찌를 로이스의 손목에 매어 주었다.

로이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이건?"

"200년에 한 번 열리는 아로니치아 꽃에 요정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팔찌예요! 어지간해서는 끊기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 은은한 향이 영구적으로 지속됩니다!"

로이스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금빛 꽃팔찌와 핀을 번갈아 보았다.

'이 녀석....'

길게 찰랑거리던 핀의 예쁜 금발이 짧은 단발이 되어 있었다.

팔찌의 재료가 무엇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이스가 웃으며 핀의 정수리를 슥슥- 문질러 주었다.

"고마워, 늘 차고 있을게!"

"넵! 헤헤!"

핀이 홍조를 띠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안달 난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자, 이제 우리 거 뜯어 보렴! 성룡이 된 기념 선물이다!"

"어서어서!"

발렌티나와 제네로커는 매우 흥분된 얼굴이었다.

어찌 된 게 선물을 받는 사람보다 주는 쪽이 더 기뻐 보이는 건 착각일까?

로이스는 볼을 긁적이며 부모님이 준비해 주신 선물 꾸러미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걸 선물 꾸러미라고 할 수 있나?'

가로, 세로, 높이가 10m는 가뿐히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선물 상자.

거기에 매 놓은 리본도 거의 시상식 카펫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 발짝 상자 앞으로 다가간 로이스가 피식 웃었다.

'뭐, 선물은 크면 클수록 좋은 거니까.'

드래곤으로 살아온 지 어언 500년.

비록 그중 111년을 잠만 잤다고 해도 근 4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드래곤으로 살아왔다.

그렇다 보니 로이스의 배포도 이제는 어엿한 드래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치렁치렁 늘어진 거대 리본을 잡아당겼다.

스륵-.

미끄럽게 풀린 리본이 바닥에 떨어지고, 정육면체의 상자가 개봉됐다.

그 안에서 드러난 선물을 본 로이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끔뻑끔뻑-.

자신이 뭘 보고 있는지 믿을 수 없는지 로이스는 연신 눈을 끔뻑였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부모님의 선물은 다름 아닌 조각상이었다.

그것도 무려 10m에 달하는 크기의 금속 조각상이 말이다.

한데, 그 조각상의 모양새는 로이스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토토?"

로이스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옆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마음에 드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네로커였다.

그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아들이 아빠가 만들어 준 토토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준비해 봤지!"

"...."

"원래는 큰 인형을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네 엄마가 어찌나 말리던지...."

제네로커의 자신만만한 어투에 할 말이 없어진 로이스.

멍하니 거대 토토 상을 바라보던 로이스가 홀린 듯 걸어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토토 상을 매만졌다.

은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광택.

'어… 설마?'

토토 상의 재질은 철도, 은도 아니었다.

단번에 그것을 알아차린 로이스가 뒤를 돌며 물었다.

"이거… 백금이에요?"

"역시 우리 아들은 물건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그것도 통짜?"

"물론! 우리 아들 일생에 한 번 있는 성룡 기념 선물인데 쩨쩨하게 도금을 했을까!"

자신만만해하는 제네로커의 이야기에 로이스의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

'이게 전부 백금이라고?! 10m짜리가?'

이 세계에서 백금은 황금보다 희귀하고 비싼 금속이었다.

시세에 따라 적으면 일반 금의 5배, 많으면 10배도 받는다.

그런 백금으로 통짜 토토 상을 만들다니!

거기에 토토 상에 박힌 시뻘건 눈알도 심상치 않았다.

'저건 로열 루비!'

일반적인 루비가 아니다.

수백 년에 하나씩 발견된다는 루비 중의 루비, 로열 루비였다.

그것도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저 정도 크기의 로열 루비 하나면 어지간한 성 하나는 사고도 남겠는데?'

그렇게 귀하디귀한 보석이 퉁실퉁실 토끼 조각상에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다.

'저게 다 얼마야?!'

수 톤에 달하는 10m짜리 백금 덩어리에 로열 루비까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성룡 기념 선물에 로이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토토 백금상은 '토끼 인형을 주고 싶은 제네로커의 욕심'과 '토끼 인형 따위는 받고 싶어 하지 않을 로이스의 취향'을 적절하게 절충한 선물이었다.

로이스는 그런 선물을 선택한 이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면서 가슴 가득 차오른 기쁨을 담아 외쳤다.

"엄마, 사랑해요!"

"후후."

자신에게 포옥 안기는 아들을 흐뭇하게 토닥여 주는 발렌티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네로커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아, 아들? 저거 준비한 건 아빠인데?"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니… 난 왜 아버지야?"

로이스는 조금 전 제네로커가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내 생에 단 한 번 있을 기념비적인 선물이 고. 작. 토끼 인형이었다는 거지?'

그렇기에 자신의 취향을 듬뿍 반영해 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너무도 기뻐하는 로이스와 그런 아들을 안고 '이게 당신과 나의 차이!'라는 눈빛으로 남편을 보는 발렌티나.

그 옆에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제네로커까지.

로이스의 2차 수면기 이후 풍경은 매우 화목했다.

그때 발렌티나가 아들을 떼어 내며 아공간에서 상자를 꺼냈다.

로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건...?"

"옆집 하이린 아줌마가 전해 주라더라."

로이스의 옆집이라고 해봤자 쌍둥이네뿐이었다.

발렌티나가 하이린이라고 부르는 이는 바로 그 쌍둥이네 어머니였다.

로이스가 하이린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줌마가요?"

"응. 우리 아들이 쌍둥이들 어릴 때 많이 도와줬잖아? 고생도 많이 했고."

"그렇죠!"

"그것도 고맙고 성룡식도 축하한다고 주는 거래."

"아하!"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하이린 아줌마!'

발렌티나보다 몇 해 먼저 산후 수면기에서 깨어났던 하이린을 만난 적 있는 로이스.

그가 본 하이린이란 드래곤은 매우 예의 있는… 천방지축 쌍둥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이린을 보며 로이스가 얼마나 개탄했던가.

'쌍둥이는 아저씨를 닮지 않고 아줌마를 닮았어야 했다!'

그런 생각은 여전히 유효했다.

'뭐, 그건 그거고.'

로이스는 밝게 웃으며 하이린의 선물을 뜯어 보았다.

50㎝ 정도 크기의 상자에는 수십 종의 풀뿌리, 열매, 동그란 환 등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곳에서 싱그러운 속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로이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약이네요?"

"응. 쌍둥이가 우리 아들 영약 많이 얻어먹었잖아? 그래서 하이린 아줌마가 늦게라도 그거 보답한다고 열심히 구하고 다녔나 봐."

"와...."

로이스는 감탄했다.

'역시 참된 용성의 소유자!'

이런 경우 바른 드래곤을 봤나!

로이스는 상자 가득 담긴 영약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후후, 전부 구하기 어려운 영약뿐이네!'

비록 이제는 영약 섭취가 딱히 필요는 없는 몸이지만, 그럼에도 로이스는 여전히 영약을 모았다.

영약이 많이 필요했던 어린 시절, 안 그래도 모자란 영약을 쌍둥이와 나눠 먹고 난데없이 소년 가장이 되어 어린 쌍둥이 먹을 몫까지 영약을 찾으러 다녀야 했다.

이후 집에 도착해서도 잘 자라지 않는 육신 때문에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먹었더랬다.

그런 로이스의 습관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영약 집착증'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로이스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한테 감사하다고… 아니, 제가 감사하다고 전할게요."

"그러렴."

로이스의 말에 발렌티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선물 증여식이 마무리되려는 찰나, 가족들의 귀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허허허! 로이스 있느냐!"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장대한 기골의 노인이 제네로커의 레어를 찾았다.

그를 본 로이스와 가족들이 놀라 소리쳤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버님?"

"크헐헐! 우리 손자,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발렌티나도 오랜만이다."

용족의 13원로이자 로이스의 친할아버지.

수백 년 만에 만난, 방금 여행에서 돌아온 듯 여전히 여행복 차림의 파무스를 보며 로이스가 물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신 거예요?"

"이 할애비 보고 싶었느냐?

"연락도 안 되고!"

"마해(魔海) 좀 다녀왔단다. 거긴 종종 한 번씩 들쑤시고 다녀 줘야 조용해지거든!"

로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래곤조차 금지로 여기는 곳을 마치 옆집 왔다 갔다 하는 듯 말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로이스는 또 한 번 남다른 드래곤의 스케일에 놀라고 말았다.

'역시 할아버지네....'

로이스가 겪은 파무스는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자유롭지만 단단한 영혼.

쌍둥이가 철없고 가벼운 영혼이라면 파무스는 그런 쌍둥이의 올바른 진화 형태랄까?

자신을 바라보는 한 쌍의 시선에 파무스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로이스의 손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 손자 성룡 선물은 챙겨 줘야지!"

로이스는 자신의 손에 올라온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예요?"

로이스의 손에 올라온 것은 검붉은 뿔이었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별거 아니다. 마해에 사는 놈 중에 왈도라는 놈이 있는데, 그놈 뿔이다."

"구하기 힘든 거예요?"

"크허허! 다른 놈들은 힘들지 몰라도 이 할애비에게는 별거 아니지! 미친 황소처럼 달려들던 놈을 단번에 고꾸라뜨리고 잘라 왔단다!"

"아항!"

파무스는 별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다.

'왈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제네로커와 발렌티나의 얼굴이 굳어진 걸 로이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딱히 위험한 거는 아닌가 보네.'

만약 그랬다면 극성인 두 부모님이 할아버지가 '왈도의 뿔'을 주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거 어디에 써요?"

"음… 그거 제법 단단하니 나중에 녹여서 장난감이나 만들거라."

"넵."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의 선물마저 조심히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 할애비는 가마!"

그렇게 막 파무스가 떠나려는 찰나.

"잠시만요!"

로이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느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무니랑 아부지한테도요."

그 말에 파무스가 걸음을 멈췄고, 발렌티나와 제네로커가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로이스가 볼을 긁적였다.

'원래는 오늘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지만.'

2차 수면기가 막 끝난 상황.

때문에 지금이 아닌 나중에 알리려 했지만, 아무래도 온 가족이 다 모였을 때 말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그러느냐?"

로이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저, 독립하겠습니다."

"...?!"

158화. 새로운 목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