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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영웅 (6)

짙은 절망감이 엄습했다.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공선이 향하는 곳.

"아...."

어찌 저곳을 모를까.

"아아아...!"

버니엄 궁.

국왕이 기거하는 장소이자 프렌체 왕국의 심장.

어릴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던 곳이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비공선이 버니엄 궁을 깔아뭉갤 게 뻔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왕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어, 어떻게든 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공선이 버니엄 궁과 충돌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상태.

시시각각 다가오는 궁전의 모습에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신이시여....'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뿐이었다.

제발 국왕이 궁전에 없기를.

다른 곳에 있기를 말이다.

하지만 야심한 시각, 그녀가 알고 있는 프렌체 국왕이라면 분명 잠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일을 꾸민 이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 시간을 노렸을 터.

'이대로… 끝인가.'

국왕의 목숨과 프렌체 왕국의 명운도.

또한, 자신이 살아온 20년의 세월도.

이번 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지리라.

그런 상황임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페이지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 순간.

우웅-.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우웅 우웅-.

기묘한 공명음에 페이지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찬란한 빛에 감싸인 존재를.

"아...."

긴박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넋을 놓고 말았다.

"로이스… 공자님?"

빛을 일으킨 존재는 페이지가 애늙은이 백발 꼬맹이라 부르는 이였다.

그의 몸이 비공선의 낙하와 상관없이 두둥실 떠올랐다.

페이지의 시선이 계속해서 로이스의 행적을 좇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이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뿜어내던 하얀 빛이 서서히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인력과 척력을 다루는 힘의 속성.

로이스가 뽑아낸 2티어급의 힘 속성이 함교를 중심으로 비공선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

페이지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너무도 압도적인 기운.

또한, 절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힘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야?'

단순한 속성력이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아니었다.

속성력이 품고 있는 기질.

그것이 그녀의 심장을 압박했다.

애초에 괴물 같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마주한 로이스의 진짜 힘에 페이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런?'

로이스란 아이가 자신에게 보여 준 것은 그저 극히 일부일 뿐.

아주 작은, 빙산의 일각.

페이지는 지금 자신이 받는 느낌을 표현할 특별한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뿐.

그러는 사이 로이스는 자신의 할 일을 이어 나갔다.

'보자… 저쪽이 좋겠네.'

전방을 주시한 로이스가 버니엄 궁의 널찍한 정원을 발견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곧 그의 하얀 손이 허공을 유영했고, 그럴 때마다 푸른 속성력이 오로라처럼 일렁이며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에 페이지는 다시 한번 넋을 놓고 말았다.

마치 로이스에게 지휘를 받아 춤을 추는 듯한 푸른 빛의 향연.

청광(淸光)의 춤사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쿠그그그-.

푸르름에 휩싸인 비공선의 선체가 잘게 진동했다.

45도의 각도로 기울어져 빠른 속도로 낙하하던 비공선이 서서히 수평을 되찾아 갔으며, 나아가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 움직인다!"

파브로의 외침대로 비공선의 선두가 방향을 틀었다.

이에 페이지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이 방향은 정원쪽이다!'

이대로만 비공선이 내려간다면 정원이 망가지겠지만, 궁전을 그대로 들이박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결과였다.

드드드-.

비공선이 급격하게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면과 비공선이 불과 3m 정도가 남았을 때.

선체를 감싼 푸른 빛이 옅어지며 비공선이 급격하게 떨어져 정원의 분수를 깔아뭉갰다.

"으아악!"

"꺄아악!"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라 승객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일순간의 충격이 있고 난 뒤.

쿵-.

비공선은 완전히 착륙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몇 분 사이 일어난 일.

자신이 만들어 낸 최상의 결과에 로이스가 활짝 웃었다.

"비상착륙 완료!"

힘 속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뤄 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수많은 사람을 구해 낸 로이스.

너무도 해맑은 그 모습에 페이지가 홀린 듯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로이스는 그저 미소를 보내 올 뿐이었다.

* * *

늦은 밤 벌어진 비공선의 추락에 그 누구보다 놀란 이들은 역시나 프렌체 왕궁의 사람들이었다.

"응? 저, 저게 뭐야?!"

왕궁을 향해 떨어지는 비공선을 본 경비병이 타종으로 비상 상황을 알렸다.

땅- 땅- 땅-.

"비, 비상! 비상!"

"당장 국왕 전하를 모셔라!"

비공선이 떨어지고 있는 궤도.

눈이 있다면 보고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왕의 궁전이 비공선으로 인해 무너지리란 걸 말이다.

하지만 하늘에서 비공선이 떨어지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또한, 어둠 때문에 이를 발견하는 게 늦었기에 국왕에게 소식의 전달이 늦어졌다.

때문에 모두가 궁전과 비공선의 충돌을 예상했다.

그런데.

"어?"

갑자기 푸른 빛에 휩싸여 방향을 튼 비공선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궁의 정원에 내려섰다.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어두운 밤 왕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뭣들 하느냐! 빨리빨리 움직여라!"

궁내에 상주하고 있던 관리들이 바삐 움직였다.

궁 안에 비공선이 떨어진 초유의 사태.

버니엄 궁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사들은 무얼 하는가! 전하를 모셔라!"

하지만 궁이 이토록 시끄러운데 국왕인들 가만히 있었겠는가.

척- 척- 척-.

중갑을 걸친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60대 중반의 노인.

"저, 전하! 위험합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프렌체 국왕은 기어코 정원으로 들어섰다.

"괜찮다. 그것보다 어찌 된 상황이더냐?"

"그것이...."

국왕의 물음에 상황을 보고받은 관리가 모든 것을 고했다.

그사이 왕궁의 병력이 삽시간에 정원으로 몰려들었고, 비공선을 에워쌌다.

모든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국왕을 비공선을 바라보았다.

"허…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라.... 어디 소속의 비공선이더냐?"

"새겨진 문장을 보아서는 가을 대륙 사무엘 령 소유의 비공선으로 보입니다."

"사무엘?"

국왕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원래 비공선을 운용하는 국가도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있더라도 왕가 전용기 혹은 한 국가의 전략 병기로 취급받는다.

그런 비공선을 민간용으로 운영하는 곳은 여름, 가을 대륙을 통틀어 사무엘 영주뿐이었다.

"사무엘 영주의 비공선이 왜?"

사무엘 영주의 비공선은 여름 대륙과 가을 대륙을 오가는 비공선이라고는 하나 명백히 가을 대륙 영지의 것이었다.

만약 잘못된다면 프렌체 왕국과 사무엘령이 속한 국가 간의 분쟁으로도 번질 수 있는 일.

이에 프렌체 국왕이 명령했다.

"속히 비공선에 사람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신하가 프렌체 국왕의 명령을 이행하기 전, 비공선 쪽에서 먼저 반응이 발생했다.

드륵-.

착륙한 비공선의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 살았다!"

"살았다고!"

"만세!"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한 이들은 우르르 비공선 밖으로 나와 지면을 밟기 무섭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는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이, 이게 무슨?"

"허...."

잔뜩 긴장하며 비공선을 둘러싸고 있던 프렌체 왕국의 무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 비공선에서 벌어진 습격에서 살아남아 밖으로 나온 숫자는 어느덧 80여 명에 달했다.

그들 모두가 승객이었고, 단 한 명의 승무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습격에서 가장 먼저 승무원들이 죽어 나간 상황에서 로이스의 일행이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승객들만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전부 빠져나왔을 때, 느지막하게 로이스 일행이 나타났다.

그 선두에 선 이는 역시나 파브로였다.

"사, 살았다아아!"

지금껏 밖으로 빠져나온 그 누구보다 격하게 기뻐하는 파브로.

그는 일전, 가을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지면에 입을 맞췄다.

마치 땅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그 뒤로 로이스와 쌍둥이가 걸어 나왔다.

"이거 또 궁상떨고 있네."

"파브로 그거 지지."

"지지야, 파브로. 퉤퉤 해! 퉤퉷!"

로이스가 땅에 엎드린 파브로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쌍둥이가 파브로의 등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그러는 사이 프렌체 왕국의 무사들이 바짝 비공선으로 다가섰다.

비공선을 둥그렇게 둘러싼 무사들을 보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승객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 여기가 어디지?"

"이 사람들은 또 뭐고?"

일단 살아남기는 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그들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프렌체 국왕의 옆에 있던 중년의 무장이 앞으로 나서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은 프렌체 왕국의 버니엄 궁전이다! 왕국의 심장을 무단으로 침범한 그대들은 누구인가!"

"프, 프렌체 왕국?"

프렌체 왕국은 원래 예정된 도착지에서 서북쪽으로 마차를 타고 사흘 거리에 있는 국가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생존자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무장의 근엄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대들은 현재 국가 경계를 무단으로 넘은 것은 물론이요, 국가 간의 분쟁을 일으킬 만한 중범죄를 저질렀다! 당장 이일의 책임자는 앞으로 나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라! 그렇지 않다면 프렌체 왕국의 지엄한 법도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그 외침에 승객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 함장! 함장이 나와서 설명하시오!"

"승무원? 여기 승무원 없소?!"

하지만 이미 죽은 함장과 승무원들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게 상황은 진정되지 않고 혼란만 가중되는 찰나.

"제가 설명드릴게요."

비공선의 그늘진 입구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늘었지만, 제법 큰 목소리였기에 모두의 이목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좌중의 시선을 받으며 비공선 밖으로 빠져나온 이는 다름 아닌 페이지였다.

그녀는 침착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야?"

"누구지?"

그녀를 보고 승객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페이지가 알아서 나서 준 상황에 오히려 고마워하며 그녀가 나아갈 수 있게 길을 텄다.

한데, 그런 페이지를 보고 프렌체 왕국의 사람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응?"

"어?!"

페이지를 보고 경악한 프렌체 왕국의 사람들.

그 대다수가 제법 나이가 있는 이들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오래된 관리들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몰라 두 눈을 끔뻑였다.

"어, 어찌?!"

"저, 저분이 왜?!

기어코 프렌체 왕국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져 나왔다.

갑작스럽게 변한 분위기에 모두가 어리둥절해할 때.

저벅 저벅-.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간 페이지.

그녀가 굳은 얼굴의 국왕 앞에 가만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든 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를 들은 프렌체 국왕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리고.

"전하… 아니, 아바마마."

뒤이어진 호칭에 좌중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108화. 영웅 (7)

술렁거림이 번져 나갔다.

프렌체 왕국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같이 비공선을 타고 왔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페이지만을 바라보았다.

특히나 파브로의 입은 떡 벌어져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로이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핀...."

"네?"

"그 아바마마라는 게 말야, 그거 왕녀가… 그러니까 공주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말 아니던가?"

"그, 그렇죠…?"

"근데 페이지가 왜 저 국왕을 보고 아바마마라고 하는 건데?"

"그거야… 페이지가 공주니까?"

"누가? 저 좀도둑이?"

"아, 아마도요?"

로이스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대충 듣기로는 페이지가 가을 대륙에서 도둑질하며 살아온 세월이 20년이라고 했다.

그것도 나름 이름 날리는 도둑으로 말이다.

그런 그녀가 여름 대륙의, 그것도 한 왕국의 공주일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니… 이게 말이 되나?'

하필!

자신이 묶고 있는 숙소 천장에서 떨어진 도둑이.

하필!

하이재킹 테러를 할 뻔했던 왕국의 공주라는 게?

'이 정도면 진짜 운명이란 건데....'

지금 같은 상황이 로이스로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페이지와 국왕.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부녀 중 국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20년 만에 만난 딸에게 건네는 인사말치고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반면, 페이지는 이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렇구나."

"상황을 설명을 드리기 전에...."

페이지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척- 척- 척-.

어디에서인가 육중한 갑옷이 걸을 때마다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일단의 무리가 정원으로 들이닥쳤다.

스물이 넘는 인원의 선두에는 40대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전하!"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국왕을 향해 뛰어온 백금발의 사내.

그를 본 페이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국왕이 백금발의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레반스."

"이 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입니까!"

"별일 아니다."

"별일이 아니라뇨! 한 나라의 심장부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데!"

"되었다.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가?"

"안 그래도 인근을 지나가던 길에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전하가 걱정되어."

"그렇군."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께서 이리 무사하시다니.... 하늘이 도왔습니다."

레반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국왕을 걱정하는 충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페이지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한참이나 그렇게 국왕을 향해 걱정스러움을 보이던 레반스가 마침내 페이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여인은...."

페이지를 향한 레반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설마… 페이지 공주님?"

"…오랜만이군요, 재상."

"허...."

레반스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십 년… 만이군요."

레반스의 얼굴에 복잡스러운 감정이 나타났다.

이십 년 전 궁을 떠나 사라졌던 공주가 난데없이 나타날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레반스의 놀람은 이내 사그라졌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가 페이지를 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물음에 페이지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답했다.

"습격이 있었어요."

"습격?"

"불손한 무리가 비공선을 장악해 버니엄 궁에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 무슨?!"

페이지의 말에 국왕은 물론 레반스와 주위의 모든 이들이 놀람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히 어느 분의 도움으로…."

페이지의 시선이 잠시 로이스에게 향했다.

그녀의 뇌리로 조금 전, 엄청난 이적을 보이며 모두를 구해 낸 로이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어요. 습격자들은 모두 제압하여 한곳에 모아 두었습니다."

페이지의 증언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구나."

"아니에요. 제가 한 일은… 딱히 없는걸요. 모두 그분 덕분입니다."

페이지의 말에 국왕이 시선을 돌려 물었다.

"누구인가. 이 많은 생명을 구해낸 의인이."

국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정원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페이지가 다급히 나섰다.

"아, 그분은...."

페이지는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믿어 주실까?'

겉보기에 어려 보이는 이의 몸에 그토록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 있음을.

자신도 직접 보고, 경험해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한 사실을 아버지가 믿어 줄지가 의문이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생존자들 사이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파브로 님!"

목소리를 낸 이는 승객 중 가장 마지막에 구함을 받은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파브로가 있는 곳을 향해 감격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노부인을 따라 그녀의 남편도 같이 파브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이 파브로를 지목하자 여기저기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아! 저 사람이었어! 저 사람이 우리를 구해 줬다고!"

"아아, 저분의 이름이 파브로였군요."

"파브로 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로이스 일행에 의해 구함을 받은 승객들.

그들이 본 것이라고는 쌍둥이가 만들어낸 뇌전의 번쩍거림과 이후 나타난 파브로가 기절한 습격자들을 질질- 끌고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파브로가 자신들을 구했다고 여길 만도 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소이다!"

"고맙소!"

여기저기서 터지는 감사 인사에 정작 당사자인 파브로는 당황하여 눈알을 굴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로이스의 눈치를 봤다.

물론 자신도 저들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많은 일을 한 것은 로이스와 쌍둥이지 않은가.

'이,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정작 칭찬받을 이는 따로 있건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에 파브로는 기쁘기보다는 너무도 두려웠다.

'이걸로 괜히 꼬투리 잡혔다가는....'

아마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하겠지.

그때 프렌체 국왕이 파브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파브로라고 하였는가?"

자신을 향한 물음에 파브로가 경직됐다.

그가 언제 이런 자리에서, 그것도 한 나라의 국왕에게 이름이 불려 보았겠는가.

파브로가 쭈뼛거릴 때, 로이스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우리 영웅 님 뭐 해?]

살짝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쌍둥이를 끌고 슬쩍 물러나는 로이스를 보며 파브로는 눈을 끔뻑거렸다.

[왕이 물어보는데 그냥 그러고 있을 거야?]

그제야 파브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저, 전하...."

"고맙네. 수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줘서. 그리고...."

프렌체 왕의 시선이 페이지에게 향했다.

"내 하나뿐인 딸아이를 살려 줘서."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모든 공로를 자신이 가져가는 것에 언제 거부감이 있었냐는 듯 파브로는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에 로이스가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오? 제법이네?'

연기 하나 못해 쩔쩔매던 파브로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자신들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렇다 하여도 그대가 큰일을 해낸 것은 사실이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목숨을 잃었겠지."

"...."

"일단 오늘은 편히 쉬거라. 그사이 나는 그대의 공을 어찌 치하할지 고민해 보겠다."

"가, 감사합니다."

파브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또한, 국왕이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향해 말했다.

"모진 일에 휘말린 그대들도 고생이 많았다. 오늘 하루는 궁에서 편히 머물다 가거라."

국왕의 배려에 생존자들은 화색을 지었다.

"바론."

국왕의 부름에 그를 따라왔던 나이 든 호위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비공선의 습격자들을 수습하라. 또한, 사무엘 영지에 연락해 사고의 경위를 조사한 뒤 내게 보고 하고."

"명에 따르겠습니다."

"공주는...."

페이지를 향하는 국왕의 시선.

잠시 머뭇거린 국왕이 말했다.

"최대한 바론에게 협조하여 이 일의 모든 것을 낱낱이 고하라."

"…예. 알겠습니다."

낯빛이 굳은 페이지가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끝으로 국왕은 몸을 돌렸다.

20년 만에 만난 딸과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낼 법도 하건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이었다.

로이스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부녀의 모습은 아닌 듯싶은데....'

하긴 일반적인 관계였다면, 페이지가 이런 집을 놔두고 머나먼 타지에서 도둑질하며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온 혁명군의 일부터 시작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야 했던 페이지의 과거사.

이에 로이스의 호기심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은 이내 사그라졌다.

'뭐, 그건 그거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어차피 자신은 여름 대륙 입성이라는 목표와 장물 탈취라는 중간 목표까지 완벽하게 달성했다.

아니, 이 정도면 120%를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잽싸게 떠나야지.'

장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 사무엘 영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지금은 잽싸게 튀는 게 최고였다.

로이스가 향후 계획을 세우는 사이 왕국의 무사들이 비공선으로 들어가 기절한 습격자들을 끄집어냈다.

이미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은 로이스는 무사들이 습격자를 끌고 가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이후, 왕궁의 관리인들이 비공선의 생존자들을 안내했고, 특히 영웅 파브로의 일행인 로이스와 쌍둥이는 더욱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좋아 좋아!'

여름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날.

로이스는 출발이 매우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 * *

호화로운 침실 위를 뒹굴어 다니던 로이스는 침대에 누워 헤벌쭉 웃어 보였다.

"이야… 돈 굳었다."

비록 하룻밤만 묵고 떠나갈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 고급스러운 곳에서 1박을 하면 그 돈도 만만치 않았다.

안 그래도 장거리 비행, 나아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느라 고단했던 찰나.

고급스러운 침대와 보들보들한 이불의 조합은 로이스에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한참을 뒹굴뒹굴하던 로이스가 살짝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 자식들 왜 이렇게 안 와?"

출출하던 찰나, 파브로에게 영웅 이름값을 팔아 야식 좀 얻어 오라고 시킨 로이스.

남들에게 영웅 소리를 듣지만, 로이스에게는 그냥 잔심부름꾼에 불과했다.

그런데 심부름을 보낸 파브로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핀에게 파브로를 찾아오라 시켰더니 이제는 녀석도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들이 어찌나 안 돌아오던지 야식을 기다리던 쌍둥이가 지쳐 잠이 들었겠는가.

까까에 환장하는 그 쌍둥이들이 말이다.

여전히 오지 않는 파브로와 핀을 기다리던 로이스가 불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것들 설마… 자기들끼리 맛있는 거 먹고 있는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찰나.

"로, 로, 로이스 니이이임!"

큰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살짝 열리며 핀이 쪼르르 날아왔다.

홀로 등장한 녀석을 보며 로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혼자 와? 파브로는? 야식은?"

"크, 큰일 났어요!"

"큰일?"

허겁지겁 로이스의 앞으로 날아온 핀의 얼굴은 크게 질려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핀이 이토록 놀랐단 말인가.

덩달아 로이스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어진 핀의 이야기는 로이스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파, 파브로가!"

"파브로? 걔가 왜?"

"페, 페이지랑 야반도주했어요!"

"...?!"

엄청난 소식에 로이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109화. 시간은 금(金)이다 (1)

로이스의 얼굴은 멍했다.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가 제대로 된 게 맞는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뭔… 도주?"

"야반! 야반도주요!"

날개를 파닥이며 팔을 휘휘 내젓는 핀.

이에 로이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진짜예요! 진짜라고요! 제가 봤어요!"

핀이 일으킨 소란에 눈을 뜨는 쌍둥이가 슬금슬금 로이스에게 기어 왔다.

"피이이인… 시끄러워어어."

"파브로는? 까까는?"

로이스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눕는 녀석들을 무시한 채 핀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진짜 본 거 맞아?"

"네! 파브로가 페이지와 같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똑똑히 봤어요!"

"으음...."

로이스가 팔짱을 끼고 고심했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쌍둥이가 로이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에?"

"파브로 도망갔어?"

로이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가?'

파브로는 겨울 대륙에서 약속했었다.

자신들과 함께 봄 대륙으로 향하기로.

드래곤에게 절대복종하는 드워프의 피를 타고난 파브로가 약속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고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제 몸을 끔찍이 여기는 파브로의 성향을 미뤄 보아 그가 야반도주했다는 사실은 쉬이 믿기 어려웠다.

그것도 본 지 며칠 안 된 페이지와 말이다.

때문에 로이스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한 것이다.

"페이지랑 파브로한테 묻은 추적 약 효과 아직 유효하지?"

"네! 제가 종종 새로운 거로 묻혀 두고 있어요!"

"잘했어."

쌍둥이를 관리하느라 만든 추적 약을 페이지와 파브로에게 묻혀 두었던 로이스.

파브로에게는 자신이 없는 사이 쌍둥이를 책임지는 그를 찾기 쉽게 묻혀 두었고.

페이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 뒤통수를 치고 도망칠지 몰라 뿌려 두었던 걸 이렇게 써먹네.'

덕분에 이런 상황에서도 로이스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럼 기다려 보자고, 잠깐 어디 갔다가 오는 걸 수도 있으니까."

로이스는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쌍둥이는 로이스의 허벅지를 베고 편히 잠들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흠...."

로이스가 열리지 않은 방문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어둠이 물러가며 새벽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파브로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결국, 로이스가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가 봐야겠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파브로가 오지 않는다면 무슨 일 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혹은....

'핀의 말처럼 야반도주했거나.'

로이스는 쌍둥이를 깨워 준비했다.

"우웅… 로이, 우리 어디 가?"

"파브로 잡으러."

"웅?"

파브로를 잡으러 간다는 소리에 쌍둥이가 벌떡 일어섰다.

눈을 비비는 쌍둥이를 이끌고 밖으로 빠져나온 로이스.

"핀 앞장서."

"넵!"

어둠을 틈타, 세 마리의 헤츨링과 요정 한 마리가 프렌체 왕궁의 담벼락을 넘었다.

그로부터 30여 분 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세상.

본격적인 야외 활동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보니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고, 덕분에 로이스 일행은 수월하게 파브로의 행적을 쫓을 수 있었다.

"여기예요."

작은 나침반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의 뾰족한 끝이 허름한 술집을 가리켰다.

'영업 종료'라는 팻말이 걸린 문을 보며 로이스가 눈을 빛냈다.

"여기란 말이지?"

현재 로이스 일행이 있는 곳은 왕궁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진 도시의 외곽.

로이스가 허름한 가게를 보며 가볍게 좌우로 목을 꺾었다.

"파브로… 넌 잡히기만 해 봐라."

감히 우리를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야밤에 이 개고생을 하게 만들어?

야식을 기다리다가 밤을 꼴딱 새우게 생긴 로이스.

그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걸렸다.

우직-.

로이스가 잠긴 문고리를 그대로 잡아 뽑아 버렸다.

끼이익-.

살짝 열리는 낡은 문 안으로 로이스와 쌍둥이가 발을 들여놓았고.

딸랑-.

문에 걸린, 평소였다면 손님의 입장을 알렸을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렸다.

빈 테이블만 즐비한 내부를 훑은 로이스가 핀을 바라보았다.

"여기 맞아? 아무것도 없는데?"

"음...."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핀이 쪼르르 날아갔다.

핀이 재가 쌓인 벽난로 앞을 알짱거렸다.

"이쪽이라고 하는데요?"

"그래?"

핀의 중얼거림에 로이스가 씨익 웃으며 벽난로의 한쪽을 밀었다.

그러자.

구그긍-.

돌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밀려나는 벽난로.

동시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났다.

"우와! 우와!"

"비밀 던전! 던전 입구!"

"모험이다!"

흥미로운 상황에 쌍둥이의 두 눈이 과하게 초롱초롱 빛났다.

"자, 가자!"

선두에서 로이스가 쌍둥이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레온 혁명군 수도 지하 비밀 거처 입구.

"흐아암!"

"입 찢어지겠다."

"아, 어제 너무 마셨다. 피로가 안 가시네."

"쯧, 어쩐지 무식하게 퍼마시더라니."

외부의 침입에 맞서 번을 서고 있던 두 명의 사내.

그간 단 한 번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은 비밀 거처였기에 그들은 습관적으로 설렁설렁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 좀 잔다. 교대 시간 되면 깨워 줘."

"야, 경계 임무 중에 누가 쳐 자래?"

"아 좀 봐줘라, 어제 네가 내 돈 많이 따 갔잖아?"

"이 새끼가.... 오늘만이다."

"큭큭, 고맙다."

동료의 허락에 대머리 사내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응?"

홀로 번을 서고 있던 이가 돌연 정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가 황급히 대머리 사내를 깨웠다.

"야, 야!"

"어?! 왜, 왜? 무슨 일이야?"

"…저기 좀 봐 봐."

살짝 선잠이 든 찰나 갑작스럽게 깨어난 대머리 사내는 동료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이해 못 할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애들?"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오는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대체 애들이 여길 어떻게?"

두 눈을 끔뻑이던 둘은 잔뜩 긴장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곧 그들의 앞에 로이스 일행이 당도하고.

"누구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그들의 물음에 일행을 대표해 로이스가 답했다.

"알아서 잘 들어왔지."

"...."

"그것보다 아저씨들, 우리가 집 나간 드워프를 찾으러 왔는데… 혹시 못 봤어?"

영문 모를 물음에 대머리 사내가 머릿속에 든 의문을 여과 없이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뭔 개소리야?"

이를 들은 로이스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말려 올라갔다.

* * *

침대 위, 감겼던 파브로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으음...."

잠시 뒤척이던 그의 귓속으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깼어요?"

갸날픈 목소리에 파브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헉?!"

상체를 일으킨 파브로.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페이지를 확인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 여긴?"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기억을 되돌려 보는 파브로.

'그러니까....'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는 그의 귀로 살짝 질책하는 페이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게… 왜 함부로 덤벼서는."

페이지의 질책이 파브로의 기억을 되살려 줬다.

"아...."

* * *

로이스와 쌍둥이의 야식 심부름을 하러 방을 나섰던 파브로.

왕을 구한 영웅이라는 이름을 팔아 야식을 구걸하러 다닐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그는 연신 투덜거리며 궁을 배회했다.

우여곡절 끝에 어찌어찌 궁인의 도움으로 야식을 구해 방으로 돌아가던 중, 파브로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우연히도 말이다.

"응?"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시녀로 보이는 여인.

살금살금, 교묘하게 이동하는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덕분에 파브로는 단번에 시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페이지 공주님?"

누가 봐도 시녀로 보일 듯한 완벽에 가까운 변장술.

어둠에 특화된 듯 소리 하나 없이 완벽한 몸놀림.

특히, 파브로의 감이 강력하게 알리고 있었다.

저건 페이지라고 말이다.

'또 뭘 훔치려고 저러시나?'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파브로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페이지를 쫓는 검은 그림자의 등장이었다.

"이런?!"

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곧장 페이지를 향해 달려갔다.

"공주님!"

"엄마야! 뭐, 뭐예요?!"

놀라 허둥거리는 페이지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고 그대로 담장을 넘은 파브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도중 검은 로브를 쓴 이가 그들을 막아섰다.

"누구냐?!"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일세. 페이지를 내놓게!"

"어림없는 소리!"

"자, 잠깐만요! 두 분 모두...."

페이지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로브를 뒤집어쓴 의문의 존재와 파브로의 공방이 시작됐다.

곧 파브로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자… 강하다!'

짧게 공방을 주고받던 파브로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채 몇 번의 공방이 지나기도 전에 파브로는 결국 상대에게 완전히 제압당하고 말았다.

퍽-.

"커흑!"

상대의 일격에 뒤통수를 두들겨 맞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갈 무렵.

"멈춰요! 그분은 적이 아니에요!"

점점 흐릿해지는 파브로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허겁지겁 달려오는 페이지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완벽한 암전이 찾아들었다.

* * *

그제야 모든 것이 기억난 파브로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

파브로가 페이지를 보며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자신을 걱정하는 파브로의 모습에 페이지가 옅게 미소 지었다.

이에 파브로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수상한 자가 페이지 씨를 쫓고 있기에...."

"그래서 절 쫓아오신 거예요?"

"그, 그렇습니다."

"하아...."

페이지의 한숨이 짙어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중후한 인상의 6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들어섰다.

회색의 머리칼.

구릿빛의 피부.

노인답지 않게 탄탄한 육체.

노인은 상체를 일으킨 파브로를 보고 살짝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깨어났군."

"어...?"

노인의 목소리에 파브로는 놀랐다.

'저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는 자신을 때려눕힌 이와 똑같지 않은가.

파브로는 놀라 페이지와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해명을 바란다는 듯한 그의 시선에 페이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분은 저와 따로 만나기로 약속했던 분이에요."

"...?!"

"그리고 저분이 절 뒤따라오신 거는 파브로 씨처럼 절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고요."

"아...."

이렇게 되면 페이지를 미행한 수상한 자는 자신이 되는 셈이었다.

파브로는 자신의 오해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 파브로를 노인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징그럽게도 튼튼한 몸이군. 나는 거의 죽일 작정으로 두드려 팼는데."

"…아프긴 하더이다."

"허… 그게 고작 아프다고 할 정도로 끝날 게 아닐 텐데?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짜 죽었어."

노인은 정말로 파브로를 죽일 작정으로 공격을 했었다.

이를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파브로는 죽지 않고 기절만 했을 뿐이다.

실로 놀라운 육체 내구성이라 할 만했다.

그래도 아직 통증이 남았는지 파브로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저도 기절을 해 본 게 얼마 만인지… 어? 어라?!"

말을 하던 파브로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나.

"왜 그러세요?"

"지, 지금 몇 십니까?"

"예?"

"아, 아니…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사색이 된 파브로가 페이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당황한 페이지가 떠듬떠듬 말했다.

"대, 대충 4시간 정도 기절해 계셨어요."

"네, 네 시간?!"

페이지의 대답을 듣는 순간 파브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급격하게 빠져나갔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이처럼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난데없는 파브로의 반응에 놀란 페이지가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망했습니다."

"네?"

"완전… 망했습니다."

"...?"

"그분의 분노를 어찌 감당할지.... 난 죽었다."

반쯤 영혼이 나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파브로를 보고 페이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야식 심부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

"이런 데서 자빠져 자느라 무려 4시간이나 그분들을 기다리게 했습죠...."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던 파브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결심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칼질 좀 하십니까?"

"…제법 쓴다고 자부하네만?"

"잘됐습니다."

파브로가 노인을 향해 목을 쭉 내밀었다.

"단칼에 쳐 주십쇼."

"…자네 뭐 하나?"

"이대로 끌려가서 고통받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편이 낫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상황에 노인은 그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이는 페이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쿠그그긍-.

그들이 머무는 방이 거세게 떨려 왔다.

이를 듣자마자 파브로가 경기를 일으켰다.

"와, 왔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 파브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쩌면 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자신의 앞날이리라.

혹은 피투성이의 가시밭길이거나.

그사이 노인과 페이지가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가 상황을 살폈다.

쿠그긍-.

잘게 진동하는 복도의 벽면.

동시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으아악!"

"아아악! 이 미친 꼬맹… 꾸엑!"

파죽지세로 쓸려 나가는 레온 혁명군의 단원과.

"머리!"

"명치!"

그 속에서 쉼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은발의 꼬마들.

그리고.

"여기 가출한 드워프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만? 혹시 보신 분?"

쭈그리고 앉아 기절한 대머리 단원의 머리를 찰싹찰싹 두들기며 심문하는 로이스까지.

"헉?!"

"저, 저 아이들은?!"

노인과 페이지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110화. 시간은 금(金)이다 (2)

노인과 페이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로이스와 쌍둥이를 보고 기겁했다.

물론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서로 달랐다.

'맙소사! 여길 어떻게?!'

페이지가 놀란 이유는 그 누구에게도 발각된 적 없는 레온 혁명군의 비밀 거점이 너무도 손쉽게 아이들에게 발각됐다는 점이었고.

노인은....

"너희는… 쌍둥이가 아니더냐!"

실로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에 놀라고 있었다.

반가움이 가득한 우렁찬 목소리에 로이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화색을 짓고 있는 노인을 보며 로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라...? 저 노인네는?"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저 징글징글한 얼굴을.

로이스가 손가락으로 노인을 가리켰다.

"쌍둥이 유괴범!"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노인, 검은 물소 용병단의 단장인 그렉이 버럭 소리쳤다.

이에 로이스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노인네가 여긴 왜 있어?"

"노인네라니! 그러는 너희야말로 어찌 여기 있는 거더냐?"

"질문은 제가 먼저 드렸습니다만?"

겨울 대륙에서 가을 대륙으로 오는 배편에서 만났던 노인 그렉.

그를 이런 장소에서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이스와 쌍둥이, 그리고 그렉이 서로 안면이 있는 듯싶자, 주변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페이지가 로이스와 그렉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서로 알고 있는 사이셨나요?"

"알다마다!"

가장 먼저 답한 것은 그렉이었다.

그가 쌍둥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내가 점찍은 제자들이다. 그리고...."

연이어 로이스에게 향하는 시선.

영 탐탁지 않은 눈빛이었다.

"우리 제자들의 보호자라고나 할까?"

"누가 누구 마음대로 제자래!"

로이스가 어림도 없다는 듯 쌍둥이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가 헤벌쭉 웃고 있는 그렉을 노려보았다.

'진짜 이 노인네들과는 전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는 건지!'

겨우겨우 로건과 에이든을 떼어놓고 왔다 싶었더니, 이제는 한 대륙을 건너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금 쌍둥이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작했다.

"쌍둥이,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까까 준다고 하면?"

"저희는 입이 고급이라 그런 싸구려 까까는 안 먹어요!"

"1,000만 골드짜리 까까로 가져오세요!"

"쌍둥이, 낯선 사람이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저희보다 약한 사람은 취급 안 해요!"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세요!"

"옳지, 잘했어."

로이스가 믿음직하다는 얼굴로 쌍둥이를 칭찬했다.

무언가… 한 단계 더 철벽으로 변한 로이스의 방어 태세에 그렉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교육을 끝낸 로이스가 페이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둘러 볼일을 보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기에 그는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여기 가출한 드워프 있지?"

"드워프요...?"

페이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로이스가 말을 정정했다.

"너랑 야반도주한 그놈."

"네?"

"파브로 말야!"

"아! 그분이라면 계셔요. 그런데 야반도주는 무슨 소리이신지...?"

그때 한쪽 방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스가 그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오지?"

"...."

"곱게 두 발로 걸어 나올래? 아니면 실려 나올래?"

"가, 갑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로이스의 협박이 끝나기 무섭게 파브로가 방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후다닥 달려오는 파브로를 노려보던 로이스.

그는 파브로가 앞에 서기 무섭게 정강이를 걷어찼다.

"끄악!"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구는 파브로.

난데없는 상황에 이를 지켜보던 이들이 넋을 놓고 말았다.

다만 로이스만이 매서운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거렸으니.

"원위치."

"우, 원위치!"

"상황 설명. 간단하게. 세 줄로 요약."

"페이지 씨를 미행하는 수상한 자 발견! 제가 쫓았습니다! 수상한 자, 그러니까… 저 노인네한테 얻어맞고 기절했습니다!"

"확실해?"

"조,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짧지만 완벽에 가까운 상황 설명이었다.

이에 로이스가 핀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야? 야반도주라며?"

"어… 그… 분명 같이 나가는 것을 봤는데. 분명히 파브로가 페이지를 안고 담을 넘었어요!"

"하아...."

로이스의 한숨이 깊어졌다.

아마도 핀은 파브로가 페이지를 안고 담을 넘는 장면을 보고 오해를 한 듯싶었다.

그 작은 오해 하나 때문에 이 밤중에 이 사달이 났으니….

'뭐 엎질러진 걸 어쩌겠어.'

로이스가 파브로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혹여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닌가, 슬슬 눈치를 보고 로이스에게 다가가는 파브로.

그리고.

퍽-

"끄아아악!"

그가 다시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로이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 때문에 오밤중에 이 난리 쳤잖아!"

"죄, 죄송합니다!"

"넌 일단 나가서 보자."

"흑...."

여기서 나가면 또 얼마나 까일지....

파브로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뭐 해? 얼른 안 따라와?"

"가, 갑니다!"

"다들 실례했습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가볍게 손을 들어 대충 사과를 한 로이스.

한밤중에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유유히 빠져나가려는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볼 레온 혁명군이 아니었다.

"이 정신 나간 꼬맹이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너희들 마음대로 들락날락이냐!"

"우리가 보내 줄 거 같아?"

상황을 듣고 모여든 레온 혁명군의 숫자는 어느덧 서른을 넘어갔다.

쌍둥이에게 얻어맞고 파들거리는 이까지 포함하면 마흔 명에 달했다.

제법 널찍한 복도였지만, 그들로 인해 북적거릴 지경.

흉흉한 분위기에 로이스가 대충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앗! 여기가 아니었네? 이런 잘못 찾아왔구나. 그럼 진짜로 다들 수고하세요!"

"인제 와서?!"

"어림없는 소리!"

로이스의 어색한 연기.

도무지 겁이 없는 그 모습에 혁명군 단원들의 기세가 더욱더 사나워졌다.

그때 그렉이 나섰다.

"물러나거라."

"단장님!"

"물러나라."

그렉의 명령에 단원들이 소리치기는 했지만, 그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는지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단원들 앞으로 나온 그렉이 로이스와 쌍둥이를 보며 말했다.

"너희가 여기를 어떻게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내 줄 수는 없겠구나."

"에이, 그냥 보내 줘요. 저희는 파브로만 찾으러 온 건데. 어디 가서 여기에 뭐가 있는지 말 안 하고 다닐게요."

"허허, 이쪽도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어쩔 수 없단다. 얌전히 이곳에 있어 주거라."

"그러지 못하겠다면요?"

"내 너희들의 재능을 어여삐 여기기는 하나…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뛴다면 훈육을 하는 수밖에."

그 말에 로이스는 고민했다.

물론 그가 고민하는 거는 이곳에 남을지 말지가 아니었다.

'어쩔까.'

눈앞의 그렉, 그는 생각보다 실력 있는 자였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일반 단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실력자.

그런 존재를 손쉽게 처리해 버린다면?

그것도 어린아이들이 말이다.

로이스가 페이지를 흘끗거리고는 피식했다.

'하긴, 이미 보여 줄 거 다 보여 줬는데, 이제 와서 뭘 고민하냐.'

차라리 이참에 제대로 보여 주고, 다시는 제자니 뭐니 하며 들러붙지 못하게 하는 편이 나으리라.

더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 말이다.

로이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굴 훈육한다고요? 쌍둥아, 가서 저 할아버지 맴매 좀 해 드려."

"응!"

"웅웅!"

밝게 웃는 쌍둥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와 같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그렉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렇지. 이 그렉이 점찍은 아이들인데 고작 이런 일에 겁을 먹어서야 쓰나."

매우 흡족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그에게 한 단원이 속삭였다.

"조심하시지요. 보통 꼬맹이들이 아닙니다."

"쯧, 내 그러게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지 않았더냐."

"그… 진짜 보통 꼬맹이들이 아닙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대단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지. 못 본 사이에 어디서 몇 수 재간을 배워 온 모양이구나."

쌍둥이의 무서움은 당해 본 자만이 알았다.

그저 단편적으로 쌍둥이의 재능만 보아 온 그렉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까딱였다.

"자, 오너라. 어디, 너희가 뭘 익혔는지 보고 내 한 수 가르쳐 주마."

그렉의 여유 넘치는 모습에 로이스는 실소했다.

한편, 걱정하던 단원도 적당히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단장님이시니.'

그렉.

한때는 프렌체 왕가 호위무단의 단장까지 역임한 이였다.

순수한 실력으로만 따져도 여름 대륙 내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이였다.

자신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렉이 저런 꼬마들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곧 그렉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로이스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암 속성 2티어라….'

분명 인간들 사이에서는 제법 방귀 좀 뀌고 다닐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칸, 카니, 얼른 끝내고 가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쌍둥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파즉-.

녀석들이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한줄기의 뇌전뿐.

그리고.

"빠샤!"

"아자!"

순식간에 그렉의 곁에 나타난 녀석들이 정면과 후면에서 주먹을 내질렀다.

"...?!"

일순간 쌍둥이의 움직임을 놓친 그렉은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그사이 뇌전에 휩싸인 쌍둥이의 주먹이 그렉의 몸에 닿았다.

"명치!"

칸의 외침과 함께 명치를 얻어맞고 뒤로 튕겨 나가는 그렉.

"뒤통수!"

카니의 주먹이 닿으며 그의 신형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쾅-.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크나큰 소리.

파즈즉-.

뇌전에 휩싸인 그렉은 팔다리를 파들파들 떨다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

잠시 정적이 감돌더니 이내 폭풍 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다, 다, 단장님?!"

"마, 말도 안 돼!"

믿고 있던 그렉이 단 두 방에 침몰해 버린 이 상황을 단원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들을 무시한 쌍둥이가 로이스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로이 배고파...."

"나도...."

"가서 맘마 먹자."

로이스가 쌍둥이의 손을 잡고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길목에 자리한 단원들은 감히 그들을 막을 생각을 못 하고 좌우로 길을 텄다.

개선장군처럼 나아가는 로이스와 쌍둥이 뒤를 파브로가 죄인처럼 따라붙었다.

터무니가 없어도 너무도 없는 상황.

그곳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다름 아닌 페이지였고, 그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다급하게 뛰어가 로이스 일행의 붙잡은 페이지.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공자님들!"

"왜? 너도 우리 못 가게 막을 거야?"

상대가 공주임을 알았음에도 로이스는 여전히 반말이었다.

페이지도 딱히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뇨, 보내 드릴게요. 다만 이야기를 좀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저희 사이에 청산할 빚이 있지 않아요?"

"빚?"

"비공선 습격자들의 처분요! 저번에 설명드린다고 했는데 못 드린 거! 지금 해 드릴게요!"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이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필요 없어."

"네?"

"알 게 뭐야.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인데."

그 당시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기에 자신이 처리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거 괜히 쑤셨다가 귀찮은 일이 줄줄이 따라올 거 같단 말이지.'

또 로이스가 이런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지 않던가.

어차피 다시는 볼일도 없고 자신들이야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로이스를 페이지는 끝까지 붙잡았다.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부탁드릴 게 있어요."

"거절."

단호해도 너무 단호했다.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걸어 나가는 로이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페이지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2분에 1골드!"

로이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쫑긋거리는 그의 귀를 본 것일까?

페이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이어 외쳤다.

"이야기를 들어 주시면 2분당 1골드씩 드릴게요! 제 부탁은 그 이후에 들어주실지 말지 결정하셔도 돼요!"

그 말은 로이스를 붙잡기 충분했다.

그가 살짝 고개만 틀어 물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만 들어 주면 2분에 1골드란 거지?"

"네!"

"에이."

실망했다는 듯 얼굴로 다시 고개를 튼 로이스는 발길을 돌렸다.

다급해진 페이지가 액수를 높였다.

"1분에 1골드!"

잠시 멈칫한 로이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몸은 출구를 향해 있었다.

이를 악문 페이지가 승부수를 띄웠다.

"1분에… 2골드!"

페이지의 승부수가 먹힌 것일까.

로이스가 완전히 돌아서며 환한 미소를 보내왔다.

"헤헤, 어디로 가면 돼?"

"...."

말이 없는 페이지를 힐끗거린 로이스가 품에서 시계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

로이스의 시계가 째깍째깍 흘러갔다.

시간은 금이라는 명언을 몸소 실천하는 로이스였다.

111화. 확실한 한 방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