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남매가 넋이 나간 사이, 아론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정신 나간 놈의 말이 사실이었다니.... 정말로… 드래곤이 나타났어."
엘비스가 떠나며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로 드래곤이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아론은 깨달았다.
'가만…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건...?'
엘비스는 드래곤의 등장만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말했었다.
[당장 이 마을에서… 아니, 이 지역에서 도망치세요. 광룡 제네로커가 머문 자리에 남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일 테니까....]
만약 정말로 저 드래곤이 엘비스가 말한 그 드래곤이라면....
'아, 안 돼!'
아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모, 모두 도망쳐어어어!"
아론의 비명 같은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엘비스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드래곤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딱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분위기.
쿠르르르릉-.
블랙 드래곤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검은 기운에 따라 주변 대기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먹구름처럼 하늘을 뒤엎은 모양새.
이를 본 로이스와 쌍둥이는 경악했다.
"미친!"
"저, 저!"
그들이 어찌 저것을 몰라보랴.
순수한 속성력을 기반으로 한 드래곤 최고의 공격기.
브레스가 사용되기 전의 전조 현상임을 말이다.
"저 미친 새끼가 여기다가 브레스 날리려고 하는 거야?!"
칸이 경악해 소리친 사이 로이스의 사고가 빠르게 돌아갔다.
'젠장!'
블랙 드래곤이 나타난 순간까지는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확실해졌다.
놈의 적의와 살기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저 새끼… 날 노리고 온 거야!'
또한, 저 브레스도 자신을 죽이기 위한 것이리라.
하지만 피하고자 하면 못 피할 것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마을이 날아간다.'
브레스에 당한 마을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그 안에 자리한 마을 주민들 또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겠지.
'마을 전체를 공간 이동으로 대피시킨다면?'
한 지역 전체를 공간 이동으로 옮기는 작업.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로이스도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머리 위로 브레스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에 한가하게 그런 작업을 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지....'
찰나의 순간 로이스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과 고민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과 지인들만 이곳을 빠져나갈까?
그럼 마을 사람들은 어쩌지?
그들이 죽든 말든 나와 상관이 있나?
마을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둔다면 과연 리아와 아론, 켄드릭과 타니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만약 이대로 마을이 브레스에 파괴된다면....
'지금 상황이 원작과 다를 게 뭐가 있지?'
그리 생각한 순간 로이스의 마음이 움직였다.
'…막아야 해.'
로이스의 가슴이 시키고 있었다.
저 드래곤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내라고.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원작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왔던, 가슴속 깊이 깃든 본능의 충동이었을지 몰랐다.
그 덕분에 로이스는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아리아나, 금방 갈게… 집에 얌전히 있어."
"오빠?"
"핀, 아리아나를 부탁한다."
"…로이스 님?"
그 말을 한 로이스는 아리아나의 품에 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츠팟!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모든 사항에서 최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동생을 피신시킨 로이스.
그가 조용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로이스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벅-.
한 걸음.
저벅-.
또다시 한 걸음.
그렇게 로이스가 딱 세 걸음을 떼니 그의 육신 전체가 새하얀 빛에 잠겨 보이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그리고.
츠츠츠-.
로이스를 감싼 빛이 터지듯 주변으로 크게 확장되고 하늘로 치솟았다.
"아...."
하늘로 치솟은 빛의 기둥을 보며 좌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공을 장악한 검은 기운 사이로 치솟은 빛의 기둥은 마치 먹구름을 뚫고 내리쬐는 햇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를 더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츠츠츠-.
기둥의 새하얀 빛이 뭉치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
한 쌍의 거대한 날개.
긴 목과 묵직한 몸통.
굵직한 꼬리까지.
로이스가 사라지고 빛의 기둥 속에서 나타난 것은 순백의 드래곤이었다.
"...?!"
"어, 어떻게 된 거야?!"
로이스와 오랜 시간 알고 있던 이들은 낮게 떠 있는 백색의 드래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로이스가 있던 자리에서 치솟은 빛 기둥과 그 속에서 나타난 새하얀 드래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선생님이… 드래곤?!'
하지만 그런 놀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쿠그그그-.
하늘에 떠 있던 블랙 드래곤의 주변에 일렁이던 기운이 놈의 주둥이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놈의 주둥이 앞에서 소용돌이치며 굉음을 냈다.
그렇게 약 3초 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가 직선으로 쏘아졌다.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전설의 재현.
이를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차마 기뻐할 수 없었다.
검은 광선이 노리고 날아드는 목적지가 바로 자신들의 마을이었으니 말이다.
'주, 죽는다!'
'죽을 거다!'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가 막 발사된 순간.
찰나에 불과했음에도 브레스를 마주한 이들 모두가 죽음을 예감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
로이스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브레스를 막을 수 있는 건 브레스뿐.'
순수한 마나이자 속성력의 집결체인 브레스는 법칙을 무시하며 파괴를 일삼는다.
그 앞에서는 그 어떤 무법도, 그 어떤 성법도 미약한 힘일 뿐.
시간과 공간, 중력마저 무시해 버리는 브레스를 막기 위해서는 최소 제로의 경지에 들었거나 혹은 비슷한 위력의 브레스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로이스가 다급하게 드래곤 하트를 가동했다.
스하아아--!
로이스가 타고난 속성을 띤 '최초의 숨결'이 입 밖으로 토해졌다.
그렇게 토해진 최초의 숨결 주변으로 대기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쿠그그그-.
브레스의 원리는 속성력을 띤 최초의 숨결이 대기의 마나를 끌어모아 응집하는 것.
때문에 브레스의 색은 드래곤이 타고난 속성으로 정해졌다.
제네로커의 브레스가 검은색인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그리고 4속성을 타고난 로이스의 브레스는 그 어떤 브레스보다도 완벽한 백색을 띠고 있었다.
휘오옹-.
로이스가 토해 낸 최초의 숨결이 대기를 응집하고 이내 하늘을 향해 모아놓은 힘을 터뜨렸다.
-------!!
형용할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직선으로 쏘아진 로이스의 브레스.
흑과 백의 서로 다른 브레스가 허공의 한 지점에서 맞닿았다.
그리고.
콰가가가-.
순수한 마나의 격돌로 인해 발생한 폭풍이 몰아쳤다.
"으아아악!"
"자, 잡아!"
"나, 날아간다!"
두 브레스의 격돌로 대기가 터져 나가며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건물의 지붕이 날아갔다.
그사이에도 흑백, 두 브레스의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멸하고자 하는 힘과 지키고자 하는 힘의 대결.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보다 조금 늦게 발사되었지만, 로이스의 브레스는 그래도 잘 버텨 내는 듯싶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로이스도 알고 있었다.
'밀린다!'
블랙 드래곤에 비해 준비하는 시간도.
그리고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출력도.
모든 게 자신의 열세였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로이스의 브레스가 서서히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새끼… 강해!'
처음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됐을 때, 로이스는 자신의 브레스가 다른 드래곤에 비해 위력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4속성을 타고난 영향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브레스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을은 물론 자신까지 위험해질 상황.
'방법을 찾아야 해...!'
로이스가 대책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츠쾅-.
로이스의 양옆에서 은빛 섬광 두 줄기가 스치고 지나쳤다.
그리고 검은 브레스와 그대로 맞닿았다.
쿠그그그-.
또다시 주변으로 폭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이에 로이스가 반색했다.
'쌍둥이!'
블랙 드래곤의 존재에 깊게 몰입해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자신 말고도 두 마리의 드래곤이 더 있다는 것을.
콰가가가-.
현신한 쌍둥이의 브레스가 로이스를 도와 검은 브레스를 상대했다.
무려 세 마리의 드래곤이 온 힘을 다해 쏘아 낸 브레스가 마침내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됐다!'
그 순간이었다.
츠츠츠-.
4개의 브레스가 합류되는 지점의 공간이 무섭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로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브레스와 브레스가 충돌하며 서로를 상쇄했다고는 하지만, 무려 4개의 브레스가 충돌하며 마나가 밀집했다.
주변보다 농도가 높아진 고밀도의 마나.
만약 이대로 계속해서 충격이 가해지게 둔다면....
'폭발한다!'
4마리의 드래곤이 쏟아내어 만들어 낸 고밀도 마나 폭발이었다.
그 범위가 절대 작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로이스의 예상한 마나 폭발은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지이잉-.
대기가 가볍게 떨리고.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빛의 폭발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 * *
세상이 빛에 삼켜지고 나서 1분여 후.
"어?"
강렬한 빛에 감았던 눈을 뜨는 마을 사람들.
"사, 살았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모두가 엄청난 폭발과 함께 죽음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헉?!"
"마, 맙소사!"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 주변을 둘러보고 경악성을 토해냈다.
멀쩡한 마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마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져진 상태였다.
가꿔 놓은 농지.
몬스터와 짐승들을 막기 위해 마을 외곽에 세워 둔 목책.
드넓은 숲까지.
반경 1㎞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로지 마을만이 섬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어떤 존재가 폭발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준 것이리라.
그리고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향해 쏘아지던 검은 브레스를 막아 준 순백의 드래곤.
그가 이번에도 자신의 마을을 지켜 주었으리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예상대로 대폭발로부터 마을을 지킨 건 로이스였다.
'큰일 날 뻔했네.'
대폭발의 징조를 알아차리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그가 결계를 치는 게 1초만 늦었어도 마을 전체가 날아갔으리라.
살짝 안도한 로이스는 블랙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저 새끼...!'
대폭발로 인해 브레스는 멈춘 상태.
한 차례 위기를 넘기니 분노가 치솟았다.
저놈 때문에 꽁꽁 숨겨 왔던 정체가 드러남은 물론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억울해서 밤잠을 설치리라.
이를 까득 깨문 로이스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훙- 훙-.
두어 번의 날갯짓에 힘입어 로이스의 동체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를 따라 쌍둥이들도 날아올랐다.
그렇게 블랙 드래곤과 마주한 순간.
[내 아이… 내 아이를 죽였어… 용서… 못 해… 모조리… 모조리 죽일 거다… 전부 멸하리라...!]
귓가에 들려오는 블랙 드래곤의 중얼거림에 로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260화. 제로 (2)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이를 들은 로이스는 굳어 버렸고.
그사이 쌍둥이가 블랙 드래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야, 너 누구야! 누군데 함부로 와서 침 뱉고 난리야!"
"여긴 우리 구역이다! 딴 데로 꺼져."
쌍둥이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블랙 드래곤.
[모조리… 모조리 죽일 거다. 전부 지워 버리마....]
이를 보며 쌍둥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저거, 왜 저러냐?"
"그러게?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이제 보니 눈깔도 정상이 아닌데?"
칸의 말처럼 블랙 드래곤의 눈은 마치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초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쌍둥이가 그리 대화를 나누는 사이 로이스는 혼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갑자기 나타나 명백히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드래곤.
놈과 자신의 접점은 없었다.
하지만.
'저 녀석....'
조금 전 놈이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이가 죽었다고 했어.'
아이를 잃고 미쳐 버린 드래곤.
이를 떠올리자마자 어떤 한 존재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일까?
'설마....'
자꾸만 불쑥불쑥 고개를 치미는 불길한 생각을 겨우 억누른 로이스가 놈을 향해 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로이스의 목소리에는 옅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이게 다… 인간들… 때문이다....]
"...."
[버러지… 같은 인간들....]
"너...."
느릿느릿 이어지는 블랙 드래곤의 한마디 한마디.
[전부… 전부 쓸어버릴 거다....]
"...!"
[이 모든 게… 너희가… 자초한… 일이다....]
로이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계속해서 느릿느릿 끊기는 말소리였지만, 로이스에게는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저 대사를 알고 있었다.
바로 환생 전 원작 속, 미쳐 있던 제네로커가 내뱉은 말들.
그것을 놈이 똑같이 읊고 있었다.
그와 함께 로이스의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갔다.
"너, 누구야."
[너희가… 내 아이를… 죽였다.]
"…네놈, 누구냔 말야!"
[....]
로이스의 쩌렁쩌렁한 외침.
이후 블랙 드래곤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흐르고.
초점이 없던 블랙 드래곤의 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서서히 초점이 잡혀 가는 눈.
그리고 처음으로 놈에게서 더듬거리는 말이 아닌 정상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는 너야말로 누구지?]
이전까지의 목소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정도로 중성적이었다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변해 있었다.
이에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도 궁금해서 말이지. 대체 넌 누구냐?]
"...."
[어디서… 너 같은 놈이 나타났냐고!]
이지를 되찾은 광룡의 눈에 다시금 분노가 서렸다.
이를 마주한 로이스가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아 가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잘 알 텐데?]
"너, 설마… 억지력이냐?"
놈이 로이스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날 그렇게 부르나 보군.]
"...."
[억지력이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야말로 이 세상의 순리이며 내 의지가 진리란 말이다! 내가 누구냐고?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이 세상을 기획하고 세상 만물을 창조해 낸 창조주! 다시 말해....]
"...."
[마땅히 신이라 불리기 합당한 존재라는 거지!]
놈의 이야기에 쌍둥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카니, 쟤가 신이래."
"나도 귀 있어."
쌍둥이가 두 눈을 끔뻑이는 사이 놈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사소한 하나하나가 모두 나의 안배 속에 탄생했다. 한데....]
"...."
[대체 네놈은 뭐란 말이야! 죽었어야 할 놈이 아득바득 살아남지를 않나, 제멋대로 흐름을 바꾸지를 않나! 네놈으로 인해 뒤틀린 스토리가 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하냐!]
분노가 가득한, 혹은 어린아이의 그것 같은 투정을 가만히 듣고 있던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로이스는 이를 자연스럽게 숨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죽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냐?"
[당연한 소리. 그게 네 운명이었다. 넌 죽었어야 해.]
"…그간 날 죽이려 한 것도 너였고?"
[나의 의지가 이 세상의 순리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로이스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순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네가 뭔데 죽음이 내 운명이니 뭐니,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말했을 텐데?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주인이다! 이 세상을 만든 게 나란 말...!]
그때 로이스가 놈의 외침을 뚝 끊어 냈다.
"창조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림도 거지같이 그린 게. 내가 그림판에 그려도 너보다는 잘 그리겠다. 이게 어딜 봐서 네가 그린 세상이냐?"
[거, 거지같이 그리다니?! 그리고 애초에 이것도 그림판으로 그린 거거든! 이것보다 어떻게 더 잘 그릴… 어...? 어라?]
반사적으로 로이스에게 소리치던 놈이 우뚝 멈춰 섰다.
동시에 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놈의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이에 로이스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구나? 철수88."
[...?!]
철수 88.
그건 원작을 연재하던 블로그 주인의 닉네임이었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놈을 보고 로이스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원작자였어.'
그의 의문은 예전부터 존재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 하던 억지력.
그게 단순히 운명의 흐름이었을까? 하는 의문.
혹여 이게 단순히 운명의 흐름이 아닌 누군가가 개입한 건 아닐까 싶었다.
이를 가정하기 무섭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원작의 작가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억지력이 발동한 시간은 못해도 수백 년.
만약 작가라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토록 긴 시간을 살아갈 리 없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억지력이 작가라는 가정을 배제하고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 상황이 달라졌다.
조금 전 놈이 한 말 중 한 가지.
'스토리.'
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토리'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로 인해 억지력은 작가의 개입일지 모른다는 가정이 다시금 대두됐다.
이를 확인해 보고자 가볍게 놈을 떠본 건데.
'…한 번에 걸려드네?'
아무래도 작가란 놈은 생각보다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닌 듯싶었다.
또한, 감정을 쉽게 내비치는 성격.
[너,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글쎄? 뭘까?"
로이스의 비아냥에 놈이 이를 악물었다.
[됐다. 네놈이 뭐가 됐든 상관없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블랙 드래곤, 아니, 이제 새로운 광룡이라 부를 존재의 눈에서 이성이 사라졌다.
그리고 철수88의 것이 아닌 본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라… 져라!]
광기로 가득한 외침과 함께 광룡의 육체에서 검은 어둠이 길쭉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수백 가닥의 어둠은 로이스와 쌍둥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촤자자자작-.
촉수처럼 보이나, 칼날보다 날카로운 어둠은 무한대로 늘어나며 셋의 취약점을 노려 왔다.
얼굴과 눈.
그리고 날개와 심장.
공격에 적중당하는 순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리라.
'이건...?!'
로이스는 이와 같은 공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네로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공격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아버지의 설정을 그대로 따온 거다!'
새롭게 태어난 광룡의 기초 설정이 바로 광룡이 된 제네로커이리라.
'그렇다면...!'
그동안 제네로커의 기술을 수없이 보아 온 로이스.
그러니 대책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로이스의 등 뒤로 십수 개의 법진이 생겨나며 동시다발적으로 성법이 발동했다.
동시에 주변으로 로이스의 공간 성법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두드득-.
로이스와 쌍둥이를 노리고 날아들던 어둠의 촉수들이 갑작스럽게 방향이 꺾였다.
그러고 같은 촉수끼리 부딪치고 얽히기 시작했다.
즉즉-.
아주 가볍게 놈의 공격을 막아 낸 로이스.
그가 만들어 준 기회를 쌍둥이는 놓치지 않았다.
츠즉-.
거대한 은빛 드래곤 두 마리가 순식간에 뇌전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들이 나타난 곳은 광룡의 지척.
훙-.
거친 파공음을 내며 쌍둥이의 꼬리가 휘둘러졌다.
좌우, 각각의 방향에서 각기 광룡의 상단과 하단을 노리고 날아드는 꼬리.
그것도 뇌전을 잔뜩 머금은 쌍둥이의 꼬리 치기는 일반적인 존재에게는 재앙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를 대하는 광룡의 반응은 간단했다.
콰득-.
놈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회전하며 쌍둥이의 꼬리를 쳐 낸 것.
2 대 1의 상황이었지만, 광룡의 꼬리는 쌍둥이의 꼬리를 완전히 쳐 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했던 쌍둥이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악!"
"켁!"
가해진 충격 때문에 허공에서 추락할 뻔한 쌍둥이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이를 본 로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육체적 능력은 놈이 몇 수 위다.'
평소에도 육탄전을 즐겨 하는 쌍둥이가 단 한 수에 밀렸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놈의 육체 능력이 어지간한 성룡을 가뿐하게 상회한다는 소리였다.
'그럼 내 성법에도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크르르-.
로이스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로이스의 육신 위로 검고 반투명한 공간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로이스가 만들어 낸 현신화 전용 성법이었다.
육체의 물리적 능력을 증가시키고 각종 버프 효과를 부여해 주는 성법.
이 성법을 펼친다면 어지간한 고룡의 육체 능력과 엇비슷해지리라 자신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러 흑빛 갑주를 걸친 순백의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렇게 성법이 완성되기 무섭게 로이스는 광룡을 향해 돌진해 들었다.
크워어어-.
우렁한 포효와 함께 날아가는 로이스의 입에서 한 줄기 브레스가 뿜어져 광룡에게 날아갔다.
이에 맞서 광룡도 브레스를 뿜어냈다.
쾅-.
공중에서 부딪히며 짧게 폭발을 일으킨 브레스들.
그리고 이는 그저 가벼운 인사에 불과했다.
훙-.
로이스가 가볍게 한 번, 날갯짓하자 그의 육신이 곧바로 음속을 돌파했다.
쾅-.
그대로 광룡을 들이받은 로이스.
그 충격에 의해 광룡과 로이스는 한데 엉켜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아가는 와중에도 로이스와 광룡은 서로를 노리고 공격했다.
크라라!
콰득-.
비록 광룡에 비해 무려 10m 정도나 작은 로이스였지만, 그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작은 만큼 더 빠르게, 그리고 성법으로 강화된 육신으로 광룡을 몰아쳤다.
쾅- 쾅-.
수십 합의 공방이 둘 사이에 오갔다.
육체의 격돌.
각종 성법의 발현.
때로는 브레스까지.
초근접 거리에서 위험천만한 공격이 오가니 쉼 없이 폭음이 들려왔다.
이를 본 쌍둥이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어쩌지?"
"어쩌긴 지켜봐야지. 솔직히 저기 끼어들 수도 없잖아? 로이가 잘하고 있기도 하고."
그리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쌍둥이는 로이스와 광룡을 쫒아갔다.
한편, 그렇게 산맥을 넘어 멀어지는 네 마리의 드래곤들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안도했다.
"사, 살았다."
"흐억...."
검은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다 죽은 목숨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순백의 드래곤과 연이어 은색의 드래곤 두 마리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줬다.
그 사실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감격스러워했다.
하지만 단 한 명.
붉은 머리의 여인, 타니아의 심정은 너무도 초조했다.
그녀는 로이스가 사라진 하늘을 보며 양손을 모았다.
"부디…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선생님."
261화. 제로 (3)
로이스와 광룡은 끊임없이 격돌을 이어 가며 날아갔다.
마을을 벗어나 산맥을 넘었고, 거기서 더 서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로이스와 광룡의 공방은 더욱더 거세졌다.
쌍둥이가 둘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지만, 섣불리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날아갔을까.
봄 대륙의 서편, 망망대해 위에 도착하고 나서야 둘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로이!"
"괜찮아?"
쌍둥이가 로이스의 곁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괜찮아."
작게 고개를 끄덕거린 로이스가 정면을 응시했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확실하게 깨달았다.
놈의 육체적 능력은 어지간한 고룡급에 맞먹는다는 것을.
[나를… 방해하지… 마라.]
광기로 얼룩진 광룡의 입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수를… 나는… 복수를… 하려는 것… 뿐이다.... 내… 아이의… 복수....]
이에 로이스는 냉소를 머금고 답했다.
"네 아이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어."
[나는....]
"네 존재 또한 거짓에 불과하고."
[모조리… 모조리 죽일 거다.]
"그러니 적당히 하고 좀 꺼져라. 제발 나도 좀 편하게 살자."
로이스의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놈이 반응했다.
[죽여야 해… 너를… 죽여야 해… 네가 사라져야… 해....]
놈의 적의가 더욱더 선명해졌다.
그와 함께 놈의 육신에서 검은 일렁임이 퍼져 나갔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아직 석양빛이 남아 있는 시각.
한데, 놈을 중심으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로이스와 쌍둥이는 저런 현상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이에 로이스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
처음에는 광룡의 경지가 훤히 내보였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 어쩌면 혼자서 놈을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놈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게 변해 갔다.
슥-.
사방에 퍼뜨렸던 검은 기운이 점점 더 짙어지면서 결국 로이스가 가늠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고 말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로이스가 이룩한 경지보다 놈의 경지가 더 높다는 소리였다.
이에 쌍둥이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로이, 저거 설마...?"
"우리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듯한 눈빛.
로이스도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맞는 거 같다."
"미친… 제로의 경지라고?! 그리고 저거 아저씨 기술이잖아?!"
"야… 우리 쟤랑 싸워야 하냐? 그냥 대화로 조용히 풀면 안 될까?"
"멍청아! 아까 못 들었냐? 쟤랑 로이랑 뭔가 있는가 보잖아. 그리고 저 새끼가 우리 로이 죽인다고 협박했고!"
"아니, 그래도 저런 거랑 어떻게 붙어?! 난 원로님들 외에 또 다른 제로급 드래곤이 있단 얘기 못 들었단 말야!"
쌍둥이의 대화에 로이스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렇게 떠들 시간에 도망칠 준비나 해!"
만약 놈이 정말 제로의 경지에 도달한 괴물이라면, 이대로는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었다.
로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니까 그놈이 그리 자신만만했겠지.'
철수88.
놈은 오늘 로이스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듯.
로이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위험하다.
'젠장!'
몸을 날린 로이스가 곧장 쌍둥이를 감쌌다.
어차피 날아가 봤자 금세 따라잡힐 것은 당연한 일.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공간 이동으로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테니 말이다.
'놈을 상대할 대책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고!'
대책이란 것도 살아남아야지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로이스가 막 쌍둥이를 낚아챘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3초 남짓.
하지만 그보다 광룡의 행동이 빨랐다.
그와 함께 로이스와 쌍둥이의 신형이 어둠에 잡아먹혔다.
세 드래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광경을 지켜보며 광룡이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죽어 가라....]
* * *
어둠에 집어삼켜진 로이스.
그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칸! 카니!"
애타게 친구들을 불러 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쌍둥이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로 직전까지 자신의 곁에 그들이 있었음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로이스는 재빨리 성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그 어떤 성법도 정상적으로 발동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성법이 발동한 건지 아닌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 뒤로도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본 로이스는 모든 게 무용지물이란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정말이지 완벽한 어둠이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었다.
또한, 어둠에 파묻힌 육체는 인지조차 되지 않았다.
'이게 내 손인가? 아니면 다리? 날개?'
광룡이 만들어 낸, 제로급 경지에 다다른 이가 펼친 어둠.
그건 그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아직도 로이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섬에 갇혀 있을 당시, 제네로커가 자신을 구하러 왔을 때.
아버지는 이와 같은 어둠으로 몬스터 무리를 집어삼켰다.
이후 어둠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지금 자신이 겪어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째서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인지.
'어둠에 잠식당해 자아를 잊는 순간…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정확히는 어둠과 하나가 되는 걸 테지.
세상의 법칙 따위는 무시하는 상식 밖의 힘.
'이게 제로의 경지....'
이 어둠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자신, 혹은 쌍둥이가 제로의 경지에 도달하면 되는 거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자신과 쌍둥이가 고룡급이라면 모를까 이제 막 성룡식을 치른 드래곤들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어린 나이에 제로급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다가는… 죽는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휘말린 쌍둥이들까지.
드래곤 세 마리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지워지리라.
이에 로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지려고 그동안 악착같이 살아남은 게 아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그러할 듯이.
자신은 살아남을 것이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제로의 경지에 도전해야만 해.'
어차피 자신은 탑티어에 도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공간 속성은 탑티어를 마스터했다고 여겨 왔었다.
제로의 경지에 도전할 자격은 충분했다.
다만 이후 제로의 경지까지가 너무 멀게 느껴져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시간이 없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로이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자신을 관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로이스는 어둠을 부유했다.
어둠이 주는 미지의 공포.
무저갱의 입구가 자신의 앞에 놓였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자아가 흔들렸지만, 로이스는 악착같이 버텨냈다.
'대체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시간의 흐름을 잊은 지는 한참이었다.
별로 시간이 안 흐른 거 같기도 하고.
혹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거 같기도 하고.
생체의 시간 감각이 엉망으로 돌아 가고 있었다.
'하긴, 지금 내 팔다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헷갈리는 마당에… 시간 감각이 있을까.'
이 짙은 어둠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둠은 끊임없이 로이스의 정신을 괴롭혔다.
놓아 버려.
힘들지 않아?
왜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는 거야?
이제 편해지자.
나와 하나가 되는 거야.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드래곤임에도 치밀어 오르는 유혹이 너무도 강력했다.
자아가 약한 몬스터나 인간이었다면 이미 진즉에 어둠과 하나가 되어 사라졌을지 몰랐다.
이쯤 되니 로이스의 마음에 걱정이 깃들었다.
'쌍둥이들은 무사할까?'
늘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단순무식한 쌍둥이들.
과연 녀석들이 끊임없이 정신을 괴롭히는 이 어둠에서 생존해 있을까?
이미 진즉에 어둠에 동화되어 무로 되돌아간 게 아닐까?
로이스는 치밀어 오른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믿어 보자… 녀석들이라면 괜찮을 거다.'
지금은 불안에 떨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해 내야 할 때.
현재로서는 자신이 제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로이스는 또다시 어둠 속을 부유했다.
* * *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아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제로의 경지가 뭘까?'
언젠가 그는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제로의 경지가 무엇이냐고.
어떻게 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거냐고.
그때 제네로커는 이리 답했었다.
[제로의 경지? 그거 대충 나이 먹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고룡이라고 전부 다 제로의 경지인 거는 아니잖아요?]
[그거야 노인네들이 게을러서 그런 거고. 또, 제로의 경지에 도달하면 원로직을 맡아야 하는데… 게으른 노인네들이 그 귀찮은 걸 맡으려고 할까?]
[아....]
[고룡급은 언제든지 제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노인네들이 일부러 미루는 거다. 어떤 노친네는 제로에 도달할 뻔한 걸 억지로 막는다고 하트 망가져서 골골거렸지.]
[와, 그런 무식한....]
[그 무식한 드래곤이 네 할아버지다.]
[....]
[그러다가 한 500년 뒤에 다시 제로에 도달해서 원로가 됐지만.]
[....]
[쯧, 이러니까 원로들이 제발 후임 좀 나타나라고 징징거리지. 하트 망가져서 골골거릴 때는 네 할아버지가 멍청한 줄 알았더니 오히려 그게 현명한 거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벌써 제로의 경지에 도달해서는....]
[음… 드래곤은 자연스럽게 나이 먹으면 제로의 경지에 도달하는 거네요?]
[어지간해서는 그렇지.]
[그럼 나이 먹어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 말고 제로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니! 그걸 왜?! 로이스 너도 제로의 경지에 최대한 늦게 들어! 안 그래도 비자연속성 드래곤은 귀해서 지금 비자연속성 원로 맡은 고룡들이 제발 후임 좀 나타나라고 매일매일 난리인데!]
[....]
[비자연속성 원로가 되는 순간 그냥 수천 년은 일만 해야 할 걸?]
[그래도 궁금해요. 아부지도 고룡급이 아닌데 제로의 경지를 이뤘잖아요? 전 그게 정말 멋있던데.]
[흠흠, 그, 그래? 이 아빠가 좀 멋있기는 하지. 다른 게으른 드래곤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비결이 있을까요? 어떻게 제로의 경지에 도달하신 거예요?]
[흠… 비결이라… 비결이라고 보다는 그저 알게 됐다고나 할까?]
[뭘요?]
[제로의 경지라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는 걸?]
[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제로의 경지는 그저 옆에 있는 열쇠 하나를 손에 쥐는 일이란 걸. 다만 그 열쇠는 네가 찾는 게 아니다. 그들이 쥐여 주는 거지.]
[그 말 자체가… 굉장히 거창하게 들리는 건 제 착각이겠죠? 그리고 그들?]
[그렇게만 알고 있어. 괜히 처음부터 완전한 답을 듣는다면 경지를 개척하는 데 걸림돌이 될 테니까.]
흔히들 말한다.
제로의 경지는 반신의 경지라는 것을.
하지만 제네로커는 말했다.
제로의 경지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고.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달하는 것으로 반신급 존재가 된다는 제로의 경지를 그토록 가볍게 취급할 수 있을까?
'아버지도 그저 의미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거는 아닐 거야.'
그럼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열쇠?'
대체 무슨 열쇠를 '그들'이 쥐여 준다는 걸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일까?
로이스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의 사고는 깊고 깊은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모순되게도 그의 자아를 분열시키려던 어둠으로 인해 로이스는 오히려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로이스는 '열쇠'와 '그들'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끊임없이 관조를 이어 나가는 로이스.
그는 알지 못했다.
짙고 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육신이 옅은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그는 깨닫지 못했다.
262화. 제로 (4)
로이스와 쌍둥이가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5분여.
광룡의 눈에 이지가 깃들었다.
다시금 나타난 철수88.
존재 자체를 지워 내는 어둠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안에 갇힌 이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조금 전부터 어둠을 뚫고 미약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절대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현상.
철수88이 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저러한 현상이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암흑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가 생겼기에 일어나는 변화.
그게 자신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임은 자명했다.
어둠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이 간 철수88은 이를 악물었다.
[…지독한 놈.]
로이스라는 놈으로 인해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는 자신의 창조물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죽이고자 노력했건만, 로이스란 놈은 죽음의 위기에서 악착같이 살아났다.
또한, 위기를 겪을 때마다 놈은 더욱 강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끼고 아껴 모은 '힘'으로 광룡을 창조해 내고 이번에야말로 무조건 놈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건만, 이번에도 놈은 또 살아남으리라.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강해지겠지.'
죽일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오히려 놈이 진보할 계기를 마련해 준 꼴이 됐다.
아마 놈이 저 어둠을 뚫고 나온다면 그때는 제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봐야 했다.
'놈이 완전히 제로의 경지에 들기 전에 여기서 처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 늦은 건가.'
하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그간 모은 '힘'을 전부 쏟아부어 만들어 낸 가짜 광룡이었지만, 진짜 광룡에 비하면 너무나 조잡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로이스의 힘이 강했다.
지금 가짜 광룡이 사용한 기술도 상당한 무리가 동반된 기술이었다.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는 억지로 잡아 놓은 형태가 무너질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사용한 '암흑 공간'이 철수88이 준비한 비장의 수였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이제 로이스를 죽이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힘이 필요했다.
자신은 그 준비를 해야 할 터.
광룡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고.
[…다음이 마지막일 거다.]
광룡이 몸을 돌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륙이 있는 동쪽을 향해서.
* * *
시간이 흐를수록 로이스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더욱 밝아졌다.
동시에 그의 사고는 더욱더 깊어졌다.
'제로의 경지. 그리고 열쇠....'
자신이 알고 있는 제로의 경지란 세상의 법칙에 간섭하는 규격 외의 힘이었다.
'그럼 아버지가 말한 열쇠란 법칙과 나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아닐까?'
여기서 열쇠는 물질적인 것일까?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
둘 중 하나라 쳐도 그럼 '그들'은 누구지?
'그들… 그들이 누구지?'
세상의 법칙과 나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존재.
대체 그들이 누굴까?
그렇게 고민을 이어 가던 로이스.
그는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
아니, 그건 소리라기보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자신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이게 뭐지?'
굉장히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친숙함 느낌,
로이스는 기묘한 감각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부르는 거냐?'
감각이 보내 오는 신호는 그러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 달라는 듯, 칭얼거리는 듯한 느낌.
'너, 누구야?'
그 물음에 신호가 변했다.
녀석은 말하고 있었다.
그 답은 네가 구해야 한다고.
이에 로이스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신호에 정신을 집중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제네로커가 말한 '그들'의 존재가 이것임을.
'뭐지… 왜 이렇게 친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이 녀석의 정체가 뭐지?
난 이걸 어디서 느껴본 거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신이 품고 있는 마나였다.
정확히는 속성력.
하지만 전해지는 느낌이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그보다 훨씬 진화한… 다른 격의 느낌이야. 그런데 난 언제… 이걸....'
그렇게 고민을 이어 가던 로이스의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쳤다.
드디어 떠오른 것이다.
어디서 이런 감각을 느껴 본 것인지.
자신의 생에 있어 단 한 번.
아버지의 손에 들려 은화성에 들어갔을 때.
제로의 경지에 오른 13원로에게 둘러싸여 속성력을 판별받던 순간, 자신에게 날아왔던 보석과도 같았던 속성력의 집결체.
바로 그것에게서 나던 느낌이 이러했다.
과거에는 그저 그 또한 속성력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13원로의 속성력은 일반적인 속성력과 달랐다.
일반적인 속성력이 마나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이건....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느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이리 칭했다.
"근원."
로이스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 그의 내면에서 진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답이야, 로이스.]
그리고.
철컥-.
열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로이스의 전신에서 눈부신 무지갯빛 광채가 치솟았다.
동시에 로이스는 자신의 영혼이 무언가와 연결된 기분을 느꼈다.
미칠 듯한 충만함이 몰려드니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이 치솟았다.
로이스는 그 자신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자.
츠츠츠-.
어둠이 갈갈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 * *
촤아아-.
순풍을 타고 물살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바로 봄 대륙에서 여름 대륙으로 향하는 배편.
승객 300명을 태운 대형 여객선이 바다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여객선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총책임자.
항로를 탐색하고 진로를 정하는 항해사 등등.
특히 승조원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이 바로 갑판 선원들이었다.
그들이 많은 이유?
별다른 게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뭐, 말이 필요로 한다는 거지 사실상 함선 내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은 갑판 선원들이 처리했다.
가장 더럽고.
가장 힘든 일을 하는 갑판 선원들.
때문에 몇 번의 항해를 하고 도저히 못 하겠다고 때려치우는 이들이 넘쳐났다.
더군다나 갑판 선원의 악명이 돌다 보니 해당 업무는 늘 인력난에 시달렸다.
그런 이유로 함선에서는 임시 단기직으로 갑판 선원들을 뽑기도 했다.
현대로 치자면 단기 알바와 같은 형태였다.
그리고 이번 여름, 대륙행 함선의 임시 선원이 된 이들 중에는 엘비스도 섞여 있었다.
"어이, 엘비스. 가서 이거 바다에 버리고 와!"
"예, 알겠습니다!"
함내 조리 대원의 명령에 엘비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거한 잔반통을 들고 낑낑거리며 가파른 함 내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가 바지와 신발에 잔반의 오물이 튀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한 상황인 듯 엘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반통을 옮겼다.
그렇게 함미에 도달한 엘비스는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부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토해 낸 엘비스는 벽에 기대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짓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네."
시간을 되돌리기 전.
광룡을 피해 피난 가던 시절에도.
광룡과의 오랜 싸움을 이어 나가던 시절에도.
이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현자라 불리던 내가 여기서는 음식물 찌꺼기나 버리는 신세라니....'
엘비스가 이런 신세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없기 때문.
"하아...."
달라진 현실에 적응을 못 하고 허송세월을 보낸 엘비스.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봄 대륙으로 향하고자 했지만, 가족들에 의해 그의 시도는 번번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다 겨우겨우 성공하여 야반도주하듯 집을 빠져나왔다.
이후 그는 여름 대륙의 동쪽에서 봄 대륙으로 향하는 배편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여름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장정.
처음 그는 어렵지 않게 여름 대륙의 서쪽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엘비스의 착각이었다.
그가 간과했던 사실.
아니, 알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실.
그것은 그의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는 거였다.
가문의 재력.
그가 가진 재산.
나아가 일신의 경지까지.
나름 현재 상황에 적응했다고 여겼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금의 속성력도 쌓지 못한 평범한 몸으로 그 험난한 여정을 버텨 내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탓에 그는 무일푼.
태어나 단 한 번도 돈이 없었던 적이 없는 그였기에 가난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다.
과거 엘비스에게 돈은 벌면 되는 것이고, 쉽게 벌 수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야 능력이 차고 넘치니 돈 따위는 얼마든지 쉽게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무능력한 일반인이 되고 나니 돈을 버는 게, 하루를 벌어 한 끼를 먹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여름 대륙을 횡단하며 하루 이틀쯤 굶는 일은 허다했고, 제대로 된 잠자리를 가져 본 적도 손에 꼽았다.
그가 가진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마침내 여름 대륙의 서쪽, 봄 대륙으로 가는 배편이 있는 에이바우트항에 도착한 엘비스.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 여겼지만, 오히려 그게 시작이었다.
당장 봄 대륙으로 갈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구해야 했던 것.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이 모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봄 대륙행 배편의 임시 승무원으로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봄 대륙에 도착.
거기서 또 과거 켄드릭에게 들었던 그의 고향까지 가는 여정.
하필 켄드릭의 고향이 봄 대륙의 서쪽 끝이었다.
만약 그가 봄 대륙에 존재하는 고대의 공간 이동 법진을 알지 못했다면.
여름 대륙을 횡단하는 내내 과거의 경지를 되찾고자 조금이라도 속성력을 쌓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공간 이동 법진을 작동시키지 못했다면.
또다시 봄 대륙을 횡단하는 데 몇 년을 허비했을지 몰랐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알고 있는 켄드릭의 고향에 도착했지만....
'마을이… 없어....'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마을을 떠나서 사람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허망함이 엘비스를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여기가 아닐지도 몰라.'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찾아 그는 미친 듯이 녹치 산맥을 뒤지고 다녔다.
그는 거의 열흘 넘게 산맥을 뒤지고 다녔다.
무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행군.
그리고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산맥을 뒤지고 다닌 결과, 그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만약 우연히 사냥꾼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몬스터나 산짐승의 배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후 마음씨 좋은 사냥꾼의 집에서 머물던 그는 마을을 떠나가며 답례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줬다.
광룡이 나타날 거라고.
그러니 살고 싶으면 도망치라고.
사실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자 아집이나 다름없었다.
광룡은 나타날 거다.
반드시 나타날 거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라.
그렇게 마을을 떠나서도 며칠간 녹치 산맥을 뒤지고 다닌 엘비스.
그쯤에서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룡은… 없는 거구나.'
죽은 동료들을 위해.
멸망을 막고자 과거로 돌아왔건만, 세상은 달라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평화.
자신과 동료들의 그토록 원하던 '평화'.
세상을 평화롭게 되돌리기 위해 그렇게 싸워 왔건만, 정작 평화로워진 세상으로 인해 엘비스는 목적을 잃고 말았다.
이후 그는 녹치 산맥을 떠나 다시 에이바우트항으로 돌아왔고, 여름 대륙행 배편의 임시 승무원이 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촤아아아-.
물살이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엘비스는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목적성을 잃은 엘비스의 마음은 방황하고 있었다.
263화. 제로 (5)
평생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건만, 그의 삶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광룡을 죽이겠다는 목적.
이를 떠올린 엘비스가 피식거렸다.
"하긴… 지금 상태로 광룡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
현재 그의 경지는 3티어 초입.
아무것도 없는 백지 같은 상태에서 불과 4년여 만에 3티어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면 많은 사람이 놀라리라.
하지만 엘비스가 누구던가.
빛의 현자라 불리며 제로의 경지를 넘보던 강자였다.
과거 그의 관점에서 3티어의 경지는 풋내기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 풋내기구나.'
아무리 깨달음이 높은들 뭐에 쓰랴.
당장 속성력이 부족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데.
속성력을 쌓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만약 영약을 구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영약은 무슨.'
그 외에도 아주 소수의 특출난 천재라면 보유한 속성력 이상의 경지를 넘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엘비스는 그 정도의 천재가 아니었다.
"…켄드릭이라면 다르겠지만."
그가 본 수많은 사람 중 켄드릭 이상의 재능을 지닌 이는 없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그는 매우 단기간에 제로의 경지에 도달해 광룡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런 켄드릭이 있음에도 엘비스가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동료들을 모은 구심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녀석들을 찾아볼까?'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또한, 무슨 이유로 그들을 설득할까?
있지도 않은 광룡을 들먹이며?
곧 세상이 망할 거라는 말을 하며?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아… 일단은 돌아가자. 집으로...."
비록 이제는 농사나 짓는 가문이 되었음에도 단 한 가지, 죽은 줄 알았던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좋았다.
"…정 안 되면 나도 농사나 지어야겠지."
물론 그 전에 집에서 가출한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이제 며칠 있으면 도착하는 여름 대륙.
엘비스는 벌써부터 이번 가출에 대해 가족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엘비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이었다.
훙-.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여객선의 돛이 크게 펄럭이며 부풀어 올랐다.
그에 따라 배 역시 크게 출렁거리는 것은 당연지사.
"으악!"
"뭐, 뭐야!"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복이 될 정도로 휘청거린 여객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승객들이 놀라 소리쳤다.
이는 엘비스도 마찬가지였다.
"윽!"
순간 중심을 잃고 바다에 빠질 뻔했던 엘비스는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어...?"
그는 볼 수 있었다.
"어어?"
여객선의 위.
어슴푸레 깔린 어둠과 은은하게 세상을 밝히는 달빛.
그리고 하늘을 가린 하얀 구름 속, 그 안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자.
어찌나 크던지 한 눈에 완전히 담기지 않는 거대한 형체였다.
곧 구름 속에서 검은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게 뭐야?!"
"새? 새인가?"
"저런 새가 어딨을까!"
"모, 몬스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등장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다만 한 사람.
"...?!"
엘비스의 눈에는 당황이 서렸다.
"저, 저게… 어째서...?"
어찌 그가 몰라볼까.
저건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감히 몬스터 따위를 저 존재에 어찌 비할까.
저 존재로 말하자면 지상의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최상위 생명체였다.
전설 속 이야기를 통해서나 전해지는 존재.
"…드래곤?"
또한, 엘비스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단순한 드래곤이 아니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살기.
지난 수십 년간 겪어 봤던 기운.
이에 엘비스는 확신했다.
"제네… 로커?"
광룡 제네로커.
무언가 좀 달라진 느낌이었지만, 분명 느껴지는 흉포한 기운은 광룡이었다.
그가 그렇게 멍하니 있는 사이.
크와아아-.
괴성을 내지른 광룡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여객선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망망대해, 그것도 여객선이란 한정된 공간에 있는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게 승객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광룡이 여객선의 지척에 다가왔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완벽한 파괴였다.
콰드득-.
별다른 기교도, 브레스도 필요 없었다.
그저 단순한 육체적 능력만으로 거대한 여객선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내는 광룡.
"꺄아아악!"
"살려 줘!"
광룡의 파괴 행위에 걸려든 사람들이 우후죽순 쓰러져 나갔다.
그렇게 약 10여 초 후.
여객선이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잔해뿐.
-크아아아!
다시금 포효를 내지른 광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푸하!"
물에 빠져 있던 엘비스가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엘비스의 눈과 광룡의 눈동자가 마주친 게.
"...?!"
그 순간 엘비스는 광룡의 눈에 약간의 흥미가 깃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펄럭-.
엘비스에게서 시선을 뗀 광룡이 거칠게 날갯짓을 하며 사라졌다.
그렇게 바다에 둥둥 떠서 사라지는 광룡을 멍하니 바라보는 엘비스.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떨어진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엘비스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바다에 빠진 사람들이 내지르는 아비규환의 비명 속에 엘비스의 대소가 섞여 들었다.
"흐하하하!"
엘비스는 너무도 후련하게 웃었다.
그간의 고민과 좌절이 완전히 사라진 말끔한 웃음소리.
"있었어… 역시 있었어! 광룡은 존재하고 있었다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는 엘비스의 눈에 한 가지가 샘솟았다.
바로 '의욕'이라 일컫는 감정.
"크하하하!"
그렇게 그 뒤로도 엘비스는 한참이나 광룡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그간의 고민과 걱정을 털어 냈다.
* * *
제네로커의 기술, 절대적인 암흑.
존재 자체를 집어삼키는 어둠은 분명 놀라운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공간'이라는 범위 안에서 펼쳐지는 기술.
공간의 근원을 깨닫고 공간의 법칙에 간섭할 수 있게 된 로이스는 가짜 광룡의 기술을 너무도 손쉽게 파훼할 수 있었다.
바로 암흑 공간 그 자체를 공간째 재구성해 버린 것,
차즈즈즉-.
기괴한 소리와 함께 어둠이 찢겨 나가며 세 마리의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중 은빛 드래곤들은 허공에서 크게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칸, 카니!"
놀란 로이스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 순간, 쌍둥이의 육신이 두둥실 떠올랐다.
로이스가 서둘러 둘에게 다가갔다.
"으어어...."
"주, 주, 주, 죽는 줄 알았어."
"엄마, 아빠… 미안해요...."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살짝 동공이 풀려 중얼거리는 둘의 모습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다행이네.'
혹여 자신이 늦은 게 아닐까.
쌍둥이의 존재가 이미 지워진 게 아닐까 싶었지만, 녀석들은 생각보다 더욱 잘 버텨 낸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어둠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단순 무식한 것들이어서 그런가?'
그렇게 살짝 안도하고 나니 로이스의 사고가 자신의 상태에 미쳤다.
그와 함께 로이스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하하, 하하하."
그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드래곤의 전통이라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은화성에서 받은 속성 판별.
하지만 그건 단순한 전통이 아니었다.
그건 영재교육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막 속성력을 품을 드래곤에게 근원의 씨앗을 나눠 주다니… 하여간 이 드래곤들의 사고방식은 미쳐 돌아가는구나.'
세상의 법칙과 직결되는 속성의 근원.
아주 작은 티끌만 한 씨앗에 불과하지만 오랜 시간 그 근원을 품고 있는 드래곤들은 나이를 먹어 가며 자연스럽게 근원을 키워 나가게 된다.
그렇게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근원이 발아하고 이를 통해 고룡급에 이르러 제로의 경지에 손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누대에 걸쳐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해 온 용족,
오로지 속성별로 제로급 경지를 보유한 드래곤이기에.
그리고 근원을 품을 수 있는 최강의 영구 기관인 드래곤 하트를 가진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이러니 그 어떤 종족이 날고 기어도 드래곤을 이길 수 없는 거겠지.'
로이스는 드래곤의 단순 무식한 영재교육에, 그리고 그 영재교육의 무시무시한 효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하, 드래곤으로 태어난 게 너무 행복해 미치겠네. 하하하!"
그렇게 로이스는 너무도 후련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쌍둥이가 로이스를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로이도 많이 힘들었나 봐..."
"정신 차려, 로이...."
쌍둥이의 안타까운 시선을 받으며 로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없는 건가?'
암흑 속에서 나온 순간 곧장 광룡의 존재를 탐색해 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로의 경지에 오르며 확장된 감각에도 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튀었네."
어둠이 놈의 권역이다 보니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에게 벌어진 변화를 말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추가 공격을 하지 않은 거지?'
자신이 제로의 경지에 들기 전, 놈이 자신과 쌍둥이를 끝장내고자 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걸 그냥 두고만 보다가 결국 도망을 쳤다고?'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놈도 정상은 아니었던 거다.'
아무리 신적인 존재,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작가라 하여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네.'
비록 지금 자신이 제로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많은 게 미흡했다.
근원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주 살짝 맛만 본 것과 같은 상태.
근원이란 재료를 어떻게 요리해서 어떤 식으로 맛을 낼지는 차근차근 궁리를 해 봐야 할 문제였다.
'결국은 시간인가....'
근원에 대한 이해도를 쌓아 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다만 문제는 놈도 자신이 제로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놈은 자신을 죽일 더욱더 확실한 방책을 마련해 되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그동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놈과 나는 양립할 수 없어.'
철수 88, 놈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수88을 없애거나 놈이 이 세상에 간섭할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죽거나 놈이 죽거나.
앞에 놓인 건 그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고 로이스는 절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 일은 없을 거다.'
생존을 위해서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전력을 키워야 해.'
자신과 쌍둥이만으로는 더 강해져서 찾아올 광룡을 대적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함께 싸워 줄 동료들이 필요했다.
'쌍둥이 말고 고룡급 드래곤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원작에서 광룡이 미쳐 날뛸 때도.
지상이 파괴되어 감에도 원작에서 다른 드래곤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한데....'
다른 드래곤들이 인간계에 개입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로이스는 다른 동료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예전부터 침을 발라 둔, 제법 공을 들여 키워 낸 전(前)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의 주인공들이 있지 않은가.
다만 문제는....
"…애들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전(前)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의 주인공들을 광룡 잡이에 끌어들이기 전에 대놓고 까발려진 정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음...."
난감한 상황에 로이스가 볼을 긁적였다.
264화. 여름 (1)
실내에 적막이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랐다가 다시 만난 로이스를 보고 펑펑 울었던 아리아나.
새근- 새근-.
로이스의 품에 안겨 깊게 잠이 든 아리아나의 숨소리만이 정적 속에 작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탁자 하나를 앞에 두고 빙 둘러앉은 사람들.
탁자를 중앙에 두고 로이스와 쌍둥이, 그리고 그 반대쪽에 다른 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적막 속에 처음 입을 연 것은 리아였다.
"솔직히…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는 생각했어요."
리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깔렸다.
그녀의 시선은 로이스를 향해 있었다.
"늙지 않는 외모, 평범하지 않은 능력… 그래도 속성력을 수련하는 사람 중에 오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겼죠."
"...."
"그런데 사람이 아니실 거라고는…."
리아가 꺼낸 말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리아와 그녀의 남편인 아론.
켄드릭과 타니아.
그리고 라비나까지.
로이스와 쌍둥이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 그들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두가 말없이 자신만을 바라보자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그래서? 이제 내가 무서워?"
그의 물음에 리아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
"숲속에서 오크에게 죽어 갈 뻔한 절 구해 준 분도 로이스 오빠고, 이날 이때까지 보살펴 준 것도 오빠예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절 거둬 준 분을… 제가 어찌 무서워하겠어요. 로이스 오빠는 오빠일 뿐이니까요. 다만...."
"다만?"
"다만… 미리 말해 주셨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요. 조금 섭섭하네요."
"말해 주긴 무슨. '내가 드래곤이다, 내 친구들도 드래곤이다'라고 말하면 너희가 잘도 믿었겠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리아가 살포시 웃을 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론도 끼어들었다.
"로이스 님이 어떤 분이시든 저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리아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로이스 님 덕분이니 말입니다."
그리 말하며 리아의 손을 살그머니 잡는 아론.
그런 둘의 행동이 분위기를 온화하게 바꾸었다.
그때 켄드릭이 살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요, 선생님...."
"왜."
"그… 정말 드래곤이신 거예요?"
"그럼 가짜 드래곤이리?"
켄드릭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서 어릴 때 저희보고 드래곤 모시길 아버지와 스승님같이 모시라고 하셨구나!"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진실이 드디어 밝혀지자 켄드릭의 눈이 반짝였다.
"와… 그럼 저희는 정말… 드래곤의 제자인 거네요?!"
"...."
"드래곤의 제자라니! 우와!"
"…1절만 해라."
"넵!"
대답은 잘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켄드릭의 눈은 별이라도 내려앉은 듯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이었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드래곤!
그가 읽은 이야기책 속에서 드래곤은 부활한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용사에게 도움을 주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혹은 악을 물리치는 존재이거나.
물론 타니아와 켄드릭이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 역시 로이스가 세뇌를 위해 준비한 거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런 조기 교육 덕분에 켄드릭과 타니아가 가진 드래곤에 관한 인식은 매우 좋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켄드릭의 망상이 시작됐다.
'이건 마치… 내가 용사가 된 거 같잖아?!'
드래곤이 키워 낸 용사.
아직 소년의 마음을 간직한 켄드릭에게 그와 같은 칭호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혹시 내가 선택받은 존재여서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받아 주신 게 아닐까?'
어쩌다 보니 진실과 대충 엇비슷한 상상을 하는 켄드릭.
그가 그렇게 꿈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켄드릭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이가 있었으니.
그녀를 보며 로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는다."
"…네?"
난데없이 살해 협박을 받은 라비나가 움찔했다.
"왜, 왜요?!"
"드래곤을 길들여 보겠다느니 그런 생각 했지?"
"...?!"
라비나의 어깨가 조금 전의 두 배로 움찔거렸다.
그녀가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드, 드래곤은 독심술도 할 수 있는 건가요?"
어쩜 제 조상과 똑같은 건지.
머나먼 과거, 제이콥이 하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걸 보니 라비나가 그놈의 핏줄은 핏줄인가 보다.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 드래곤을 길들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봐. 다만 그 전에 네 머리가 떨어지는 게 빠를 테지만."
딸꾹-.
놀란 라비나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기요, 선생님...."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타니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시무룩하고 우울함이 가득한 얼굴로 축 처져 있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로이스를 불렀다.
"왜."
"그… 있잖아요."
"뭐가."
"드래곤은 수명이 어떻게 돼요?"
"...?"
난데없는 질문에 로이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카니가 그를 대신해 답해 줬다.
"우리? 대충 1만 년은 족히 살아가지."
"그, 그럼 드래곤들은 안 늙어요?"
"늙기야 늙어."
"배, 백 년 뒤에는요?"
"그때야 당연히 지금이야 똑같지. 천 년… 아니, 2~3천 년 뒤에도 별 차이 없을걸?"
카니의 답변에 타니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절규를 내질렀다.
"안 돼요!"
갑작스러운 타니아의 반응에 모두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에 타니아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그럼… 저는 늙는데 선생님은… 선생님은 안 늙는다는 거잖아요!"
켄드릭이 어이없다는 듯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게 문제였냐?"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데! 선생님과 결혼했는데 나만 쭈그렁 할머니가 되어 가는 거란 말이야!"
"선생님이 너랑 결혼을 해 주기는 하신대? 망상도 그 정도면 병… 칵!"
동생에게 사실에 기반한 정신 공격을 하던 켄드릭이 날아온 타니아의 주먹에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그사이 타니아가 로이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로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무, 무슨 방법 없을까요?"
"...."
"저만 늙기 싫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제가 로이스 오빠의… 신부니까요? 미래의?"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고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타니아.
이제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익숙해진 로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방법이 아예 없는 거는 아니지."
"이, 있어요? 방법이?"
"방법이 있다고요?!"
로이스의 이야기에 타니아는 물론 엎어져 있던 켄드릭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에 더욱더 진한 미소를 띤 로이스가 말했다.
"엘릭서 한 병이면 수명도 조금은 늘고 노화 진행도 느려질 거다."
"...?!"
이를 들은 켄드릭과 타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어진 말.
"원한다면 주마."
그 말에 타니아와 켄드릭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오랜 시간 로이스와 알고 지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이스가 그러한 물건을 그냥 내어줄 리 없다는 것을.
때문에 그들이 먼저 물었다.
"조건이 뭔가요?"
"보상인 거죠?"
제자들의 긴장된 눈빛 속에 로이스가 웃으며 답했다.
"탑티어."
"…네?"
"예?"
"탑티어에 가장 먼저 도달하는 사람에게 주마. 기한은 반년."
"...?!"
켄드릭과 타니아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겨울 대륙을 떠나 가을 대륙에서 보낸 3년 여.
그 시간 동안 그들이 허송세월한 건 아니었다.
켄드릭은 1티어 하급.
타니아는 1티어 중급에 겨우 발을 걸친 상태.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로이스는 그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안 될 거 있나?"
"...."
"1티어에 오르면서 겪어 봤겠지만, 탑티어가 되면 신체의 재구성을 한 번 더 겪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체 능력이 1티어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상승하지. 나아가 수명이 늘어날 거고 거기에 엘릭서까지 더해지면 수백 년은 족히 살 수 있을 거다."
켄드릭이 입을 꾹 다물었지만, 타니아의 두 눈을 활활 불타올랐다.
"정말이시죠? 정말로 반년 안에 탑티어에 오르면 엘릭서를 주신다는 거?"
"약속하지."
"할게요. 반드시!"
타니아가 양손을 불끈 말아 쥐고 의지를 다졌다.
거기에 친동생이지만, 타니아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는 켄드릭이 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도 합니다!"
그렇게 불이 붙은 둘을 보며 로이스는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가 미소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여행은 여기서 종료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
"네?"
"예? 그게 무슨!"
제자들의 반발에 로이스가 침착하게 답했다.
"봐서 알 거다. 그 드래곤… 난 그 녀석과 싸워야 한다."
"...?!"
"그 싸움은 너무도 위험하고 나조차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거기에 너희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
로이스가 스스로의 안전조차 장담하지 못한다 말했다.
그만큼이나 위험한 싸움이 될 거라는 뜻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그래도 전 갈래요."
타니아가 곧은 눈으로 로이스를 응시했다.
이에 로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야. 죽을 수도 있어."
"죽더라도… 선생님 옆에서 죽는 거잖아요?"
"...."
"전 그거면 만족해요."
타니아가 하얀 꽃과 같은 미소를 보내 왔다.
그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켄드릭이 말했다.
"선생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켄드릭답지 않게 신중한 목소리에 로이스가 시선을 돌렸다.
"뭘?"
"선생님은 왜 그 드래곤과 싸우려고 하시는 건가요?"
"...."
"그 드래곤은 왜 선생님을 죽이려고 하는 거고요?"
잠시 뜸을 들인 로이스.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
"세계 평화를 위해서랄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철수88이 로이스를 죽이려는 이유도 궁극적으로 세상이 파멸되는 스토리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광룡을 막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인 것은 확실했다.
그런 로이스의 답변을 들은 켄드릭의 눈에 빛이 담겼다.
그가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뭐?"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무법이… 제가 무법을 익히며 해 온 노력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될 수 있는 기회지 않습니까! 무릇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로 거창한 목표를 위해 검 한번 휘둘러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켄드릭과 타니아의 의지에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 내가 말했지. 그렇게 쉽게 결정할 게 아니라고."
그리 말한 로이스의 시선이 리아와 아론에게 닿았다.
그제야 부모님에게 생각이 미친 켄드릭과 타니아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흔쾌히 승낙하겠는가.
켄드릭과 타니아의 낯빛에 리아와 아론의 눈빛이 흔들렸다.
특히 리아의 동공 속에는 깊은 갈등이 번져 갔다.
자신이 아무리 로이스를 믿고 의지한다고 해도 자식들이 사지로 간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선뜻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가거라."
"…여보?"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론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갈등이 사라지고 확신이 서려 있었다.
"너희도 이제 애들이 아니고 다 큰 성인이다. 너희 운명은 너희가 선택하는 거다."
"당신...."
"보내 줍시다, 리아."
"하지만...."
"당신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살았듯… 우리 아이들도 원하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리고 나쁜 짓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데… 부모 된 이로서 믿고 지지해 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남편의 이야기에,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에 리아와 켄드릭, 타니아가 침묵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리아가 자식들을 매서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럴게요."
"약속할게요."
자식들의 대답에 리아가 매서운 눈빛을 풀고 아이들을 살며시 안아 주었다.
"꼭… 살아서 돌아오렴."
"엄마...."
"엄마...."
그렇게 타니아가 살짝 눈물을 글썽일 때.
"로이스 님."
라비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도 갈게요."
"…뭐?"
"어차피 저한테도 물어보실 거였잖아요? 넌 어떻게 할 거냐고. 원한다면 겨울 대륙으로 보내 줄 거라고."
"뭐, 그렇지."
"그러니 먼저 말씀드릴게요. 저도 로이스 님 따라갈 거예요."
"어째서? 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을 텐데?"
"저는 돌려보내도 나비는 데려가실 거잖아요?"
"...."
"거봐! 어차피 제가 있는 게 나비가 전투를 벌이는 데 더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일을 겪고 저만 쏙 빠져 버리기도 뭐하고요."
"뭐, 그러든가."
"헤헤."
라비나가 배시시 웃었다.
이를 본 로이스도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됐네.'
애초부터 저들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로이스.
하지만 그는 강압적인 합류가 아닌 자발적인 합류를 원했다.
원하는 결과를 이뤄 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
로이스가 품에서 얇은 책자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받아."
책자를 받아 든 켄드릭과 타니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치 이게 뭐냐는 듯한 시선에 로이스가 웃으며 답했다.
"너희가 익힌 무법의 후반부."
"...?!"
"탑티어에 오르는 데 꽤 도움이 될 거다."
"아...!"
놀란 불꽃 남매를 보는 로이스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그렇게 그날.
검성 켄드릭을 만든 영웅왕 무법의 진체(眞體)가 원주인에게 돌아갔다.
265화. 여름 (2)
켄드릭과 타니아가 아직 어렸던 시절.
로이스는 그들에게 영웅왕 무법의 전반부만 전했었다.
언제,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몰라 의도적으로 그들의 성장을 제한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반부만 가지고도 녀석들은 1티어에 올랐지.'
이는 원작 속 켄드릭이 경지를 이룬 시기보다 빨랐다.
가르침을 받은 건 비록 무법의 전반부뿐이었지만 로이스라는 좋은 스승, 그리고 서로에게 자극이 될 수 있는 경쟁자의 존재.
두 가지의 조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나온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서 둘에게 영웅왕 무법의 후반부가 전해진다?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다는 격이지.'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불꽃 남매는 영웅왕 무법의 후반부를 익히기 무섭게 진보하기 시작했다.
영웅왕 무법의 후반부를 익히기 시작한 지 일주일.
켄드릭과 타니아는 기존의 경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켄드릭은 1티어 중급, 타니아 역시 1티어 상급에 도달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성장 속도.
지난 일주일간 이어진 로이스의 맞춤식 교육과 그가 준 하급 화속성의 영약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완숙에 다다른 영성검을 펼쳐 보이면서 켄드릭이 다소 허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 이렇게 빨리 강해져도 되는 건가?"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이란 것을 말이다.
그런 켄드릭의 중얼거림에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거만 떨지 말아. 광룡 앞에서 오줌 지리고 싶지 않거든 입 놀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수련해."
"네...."
평소였다면 투덜거렸을 켄드릭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그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광룡의 무시무시함을.
당시에 그는 그저 광룡의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때문에 광룡을 만나면 오줌 지릴 거라는 로이스의 농담이 농담같이 들리지 않았다.
'뭐라도 하겠다고 큰소리 떵떵 쳐놨는데 오줌이나 지리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냐… 이왕 하겠다고 한 거, 미친 드래곤한테 칼침 한 방이라도 먹여야지!'
죽을 땐 죽더라도 생채기 하나는 남겨야 자존심이 살 거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수였다.
그리고 그의 수련 의지에 기름을 끼얹는 것은....
"…독한 년."
마당 한쪽에서 신중한 얼굴로 주먹을 휘두르는 타니아였다.
엘릭서를 얻어 로이스의 옆에 오래오래 남겠다는 목표를 세운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수련에 열중이었다.
잠조차 줄여 가며, 매일매일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 타니아.
그로 인해 켄드릭은 타니아와 자신의 경지에 점차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실이 켄드릭을 자극했다.
'오빠의 자존심이 있지! 언제까지 쥐어 터지고 살 수는 없잖아?!'
만약 여기서 타니아와 경지가 더 벌어진다?
안 그래도 얻어터지는 신세인데 더 강해진 타니아를 마주하라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
고개를 세차게 흔든 켄드릭은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로이스는 수련에 열중인 제자들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성장이 빨라.'
아무리 영웅왕 무법의 후반부가 전해졌다고 해도 불꽃 남매의 성장 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자라.'
그래 봤자 이제 겨우 1티어였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분명 대단한 것이 맞았지만, 그들이 상대할 것은 제로의 경지에 도달한 드래곤이다.
1티어로는 어림도 없었다.
'최소 탑티어는 되어야지 비벼 볼 만하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다.
제자들이 탑티어에 도달하고 거기에 로이스가 준비한 몇 가지가 추가된다면 광룡을 상대하는 데 좋은 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고… 슬슬 여름 대륙으로 떠나야겠네.'
광룡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더욱이 그것이 해황의 유산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해신궁(海神弓) 아테로이제.
천궁 제롬의 무기이자 광룡 제네로커의 날개를 꺾은 신기(神機).
이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세이렌의 눈물이 지닌 비밀을 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여름 대륙 어딘가에 존재할 성모를 찾는 것이 필수였다.
또한, 해신궁을 누구보다 잘 다룰 존재가 성모의 곁에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로이스의 다음 행보가 여름 대륙으로 잠정 결정됐다.
이쯤 되니 로이스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슬슬 그놈을 불러야겠네."
그 '누군가'가 누리고 있을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이 임박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