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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먼저 먹는 게 임자 (2)

가을 대륙을 떠난 비공선은 무난하게 비행을 이어 나갔다.

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쌍둥이는 여전히 창문에 붙어 밖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저렇게 신기한가?'

전생에서 비록 해외여행은 해 보지 못했지만, 제주도를 가는 비행기는 타 봤었다.

때문에 로이스는 하늘을 나는 비행체는 크게 신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쌍둥이에게는 이것이 색다른 경험이었나 보다.

"높아!"

"엄청 높이 날고 있어!"

드래곤에게 있어 가장 취약한 부위가 바로 날개였다.

그중에서도 피막.

때문에 헤츨링 시절에는 날개 근육이 자리 잡지 않았다는 이유로 높은 비행을 금기시했다.

혹여라도 돌발 상황에 피막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은화성을 갈 때 각자의 아빠에게 업혀 대기권을 돌파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정도 높이까지 올라와 본 게 처음이리라.

충분히 신기해할 만했다.

하지만 로이스는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널찍한 침대.

그곳에 몇 가지 물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실상 로이스가 페이지와 다른 방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가진 물건들을 그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은 참룡검.

학술제를 마치고 떠나오며 얻어낸 정신파 변환 물질의 샘플.

그리고 겨울 대륙에서 죽을 위기를 겪으며 얻은 영웅왕의 무법까지.

그중 참룡검과 영웅왕의 무법을 바라보는 로이스의 눈은 매우 깊었다.

'검성 켄드릭을 있게 만든 최강의 패가 전부 내 손에 들어왔다.'

참룡검과 영웅왕의 무법.

이것이 우연인지, 혹은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검성을 만들어 낸 모든 도구를 손에 쥐게 되었다.

자신이 이를 봉인한다면 검성이란 존재는 나타나지 않게 되리라.

하지만 로이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좋은 걸 왜 안 써?'

아직 참룡검이야 봉인을 풀 히든피스가 나타날 시기가 되지 않았다지만, 영웅왕의 무법은 다르다.

'슬슬 이것도 익혀 봐야겠지.'

그간 이러저러한 일에 치여 수련을 할 시간이 부족했었다.

이동 계획을 세우랴.

극성맞은 쌍둥이를 챙기랴.

종종 벌어지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랴.

지난 2년간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온 것이 로이스였다.

그런 노력으로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고, 그렇게 생긴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할 생각이었다.

'이제 가을 대륙을 넘었으니 절반… 남은 시간이면 충분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부터는 조금 여유 있게 움직여도 되겠지.'

물론 그 여유는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이 되리라.

'우선은 틈틈이 영웅왕의 무법을 익히고. 남은 시간은....'

로이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신파 변환 물질에 닿았다.

어찌 보면 영웅왕의 무법보다, 그리고 참룡검보다 정신파 변환 물질이 로이스에게 더 값어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이 만들어 낸 기적의 산물이라…."

정신파 변환 물질을 처음 고안해낸 광휘의 탑 와트와 법사들.

하지만 그들도 정작 어떤 원리로 이것이 만들어졌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들은 여러 가지 물질을 섞어 가며 정신파 변환 물질을 만들어내는 배합법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로이스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라 여겼다.

'이건 혁명이다!'

그것도 성법의 체계를 완전히 뒤바꿀 혁명 말이다.

'속성과 속성이 치환되고 연동되는 과정… 그것만 풀어낸다면.'

자신의 성법은 한 차원,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리라.

이를 생각하니 로이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귀하디귀한 세 가지 물건을 다시 품에 갈무리한 로이스.

때마침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요."

로이스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브로와 페이지가 나타났다.

방 중앙에 모인 이들.

페이지를 향해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계획은?"

"우선은 장물을 숨겨 둔 곳을 알아내야 해요."

"의심 가는 곳은 없어?"

"비공선 내에 비밀 공간이 있을 거는 확실한데… 아직 어딘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 물건의 정확한 위치를 꼭 찾아야 해요. 도둑질 성공 여부의 80%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 찾는 데서 결정되거든요. 저와 파브로 씨가 같이 다니며 찾아볼게요."

장물을 중간에 가로채는 계획일은 비행의 마지막 날.

중간에 장물이 사라진 걸 저들이 알면 안 되기에.

모든 여정이 끝나고 장물과 함께 사라질 계획이었다.

비행에 걸리는 시간은 총 2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기상 악화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2주 뒤 여름 대륙에 닿을 것이다.

그 안에 장물이 숨겨진 곳을 찾아야 했다.

이에 로이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라고. 내가 그럴 줄 알고 최고의 수색팀를 보내 뒀으니까."

"수색팀요?"

페이지는 그제야 방 안에 카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카이?"

비공선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의 방.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비공선을 수색하기에 카이와 만큼 훌륭한 존재는 없었다.

실제로 지난 세월 카이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도움을 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수색'팀'이라고."

"...?"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로이스.

이에 페이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한편 그 시각.

-뀨뀨.

"가자, 흰둥아!"

-뀻!

비공선의 천장 배관을 타고 움직이는 카이와 핀.

로이스에게 특별 지령을 받은 이들이 비공선을 샅샅이 뒤져 나가기 시작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핀과 카이, 둘의 조합은 로이스가 선택한 최고의 수색팀답게 놀라운 효율을 보였다.

로이스가 믿는 수색팀이 첫 성과를 가져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가량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로이스 님! 찾았어요!"

창밖,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던 로이스는 핀의 목소리에 화색을 지었다.

"오! 어디? 어디야?"

* * *

비공선은 그 뒤로도 순항을 이어 나갔다.

약 일주일간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비공선이 어느 섬에 정착했다.

"빨리빨리 움직여!"

"곧 떠나야 한다!"

비공선이 착륙한 곳은 항해 중간 떨어지는 부식과 각종 소모품을 재충전하는 섬이었다.

사전에 해로를 통해 많은 양의 물자를 옮겨 놓고, 비행 중간 채워 놓는 방식이었다.

잠시 정착한 비공선으로 승객과 선원, 약 150명이 이용할 물건들이 빠르게 실리기 시작했다.

약 세 시간에 걸친 적재 작업.

넓은 창고에 수많은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출항!"

모든 작업이 끝나자 비공선이 다시금 하늘로 떠올랐다.

그렇게 다시금 비행을 이어 나가는 비공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륵-.

창고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의 정체는 창고지기.

불조차 켜지 않은 사내가 어둠 속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고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부스럭-.

꽉꽉 들어차 있던 커다란 상자가 들썩이고.

파직-.

그 안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치솟았다.

그와 같은 현상은 부식 창고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수가 모두 수십.

어둠 속, 새하얀 눈동자 하나가 빛을 발하며 창고지기를 응시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준비해 온 약이 못 쓰게 됐습니다. 어떤 꼬맹이와 부딪혀 깨졌는데… 이륙 시각이 촉박하여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계획에 차질이...."

"상관없다. 어차피 약을 먹고 죽나 검에 베여 죽나, 저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건 똑같다. 계획은 원래대로 진행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가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창고 출입은 제가 맡고 있으니 편히 쉬시지요."

"그러지."

끄덕-.

짧게 깜빡인 눈동자가 그대로 어둠 속에 모습을 숨겼다.

* * *

"좀… 편하게 계시죠?"

어쩌다 보니 파브로와 한방을 쓰게 된 페이지.

20년간 음지에서 지내며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이다 보니, 남녀가 한방을 쓴다는 것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다른 듯싶었다.

"저, 저, 저는 이게 편합니다!"

"하나도 안 편해 보이시는데요?"

"아, 아닙니다! 전 지금 매우 편합니다!"

침대에 각을 잡고 앉은 파브로.

지난 일주일 내내 저 자세였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보는 사람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페이지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파브로를 바라보았다.

'생긴 거는 무슨 온갖 못된 짓을 일삼을 것처럼 생겨서는....'

하는 짓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잠든 틈을 타 혹여 못된 짓을 해 올까 싶어 경계해 보았지만, 그는 자신이 잘 때도 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거기에 부부 행세를 하며 팔짱을 끼고 다닐 때는 살짝살짝 가슴이 닿으면 저 우락부락한 얼굴이 귀까지 빨개질 정도.

'흐음… 그렇단 말이지?'

살짝 새초롬하게 파브로를 바라보던 페이지.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파브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각을 잡고 앉은 그의 옆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파브로.

"여, 여기는 제 침대입니다만?"

"뭐 어때요? 어차피 한방을 쓰는 처지인데? 이 침대나 저 침대나 그게 그거죠."

그리 말하면서 은근슬쩍 조금 더 파브로에게 바짝 밀착하는 페이지.

그녀가 비록 지금은 서른아홉의 노처녀라고 카이에게 놀림 받기는 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수많은 남정네의 눈물을 뽑아냈다고 자신했다.

이런 순진한 남자를 찜 쪄 먹는 거는 일도 아니었다.

요사스러운 미소를 보내며 페이지가 물었다.

"그런데요...."

"왜, 왜 그러시죠?"

파브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다.

물 주전자를 올려놓으면 김이 끓어오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런 반응을 즐기며 페이지는 그간 품고 있던 궁금증을 던졌다.

"대체… 그 애늙은이 꼬맹이랑은 무슨 사이세요?"

"…네?"

"그 괴물 같은 꼬맹이… 대체 정체가 뭐냐고요?"

페이지의 그 물음에 붉었던 파브로의 얼굴이 사르르 제 색을 되찾았다.

그는 살짝 굳은 얼굴로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주저리주저리 떠벌릴 줄 알았던 파브로.

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네? 아, 아니, 그게… 아무리 봐도 보통 꼬맹이가 아닌 거 같아서요."

세상을 떠돌며 많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꼬맹이처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애는 없었다.

'요망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자신을 단번에 제압할 무력에 성법까지 구사하는 괴물 같은 꼬맹이.

어떻게든 정체를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꼬맹이가 부리는 이 순진한 사내를 잘 꼬드겨 정체를 알아내고자 했지만.

"말할 수 없습니다."

파브로는 단호했다.

어찌나 단호하던지 이 사내가 조금 전까지 얼굴을 붉히던 이랑 동일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

페이지가 놀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브로는 덤덤하고 잔잔한 눈빛으로 페이지를 보며 경고했다.

"깊게 알려고 하지 마십쇼. 그걸 아는 순간… 그대가 더 수렁으로 빠져들 테니까."

"...."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파브로의 말에 페이지는 오스스 소름이 돋아 올랐다.

파브로의 눈에 담긴 절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그 꼬맹이 정체가 뭐야?!'

그것을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는 사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쾅쾅-.

거칠게 두들겨지는 문.

어색한 분위기에 눌려 있던 페이지와 파브로가 동시에 문으로 달려 나갔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둘의 손이 살짝 스치고.

"큼."

"...."

흠칫하며 손을 회수하는 두 사람.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쾅쾅-.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울리는 거친 노크 소리.

그제야 침묵이 깨지고 파브로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로이스가 심통 난 얼굴로 서 있었다.

"뭐 하느라 이제야 문을 열어?"

게슴츠레한 그 시선에 당황한 파브로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귀가 빨개진 파브로를 보며 로이스의 의심이 더욱 증폭됐다.

[너 뭐 했냐?]

"...."

[하라는 감시는 안 하고 헛짓거리하고 있는 거는 아니지?]

"...."

[헛짓거리 하는 거 걸리기만 해. 그때는 아주 그냥....]

로이스의 살벌한 경고에 파브로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백의 표현이었다.

그 순간 당황한 파브로를 구해 주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무슨 일이세요?"

페이지의 물음에 로이스는 그제야 자신의 목적을 상기했다.

그가 신난 얼굴로 답했다.

"찾았어!"

페이지는 로이스의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지난 일주일간 자신이 파브로와 부부 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이유가 무엇이던가.

"어디죠?"

굳은 눈을 한 페이지의 물음에 로이스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함교."

101화. 먼저 먹는 게 임자 (3)

로이스에게 소식을 듣고 방에 모인 일동.

페이지가 살짝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함교라...."

지난 며칠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는 했지만, 설마 장물을 숨겨 둔 곳이 함교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긴… 선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면 당연히 함교겠지.'

잠시 고민하던 페이지가 로이스를 보며 물었다.

"정확히 함교 어디라고 하나요?"

"함교에 달린 함장의 침실. 그쪽에 어딘가로 이어지는 비밀 공간이 있다고 했어. 비밀 공간에 뭐가 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정도면 충분하죠."

"그렇긴 하지."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함교라는 장소의 특수성과 비공선 내에서 가장 지위 높은 이의 침실.

그런 공간에 추가로 비밀 공간을 만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함장이었단 말이지?'

사실상 함장은 비공선을 운항하는 책임자이자 장물 운송과 판매의 총책임자일 가능성이 컸다.

생각을 정리한 로이스가 미소 지으며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실력 발휘 좀 해 봐."

"예?"

눈을 동그랗게 뜬 페이지.

로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그랬잖아. 도둑질의 성공 여부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데서 80%가 갈린다고."

"…그랬죠."

"이쪽에서 80%를 채웠으니 이제 네가 나머지 20%를 채워야 하지 않겠어?"

"...?"

"가서 장물을 어떻게 들키지 않고 훔칠지 계획을 좀 세워 와 봐."

페이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저게 무슨 말이겠는가.

명백하게 자신을 부려 먹겠다는 뜻이었다.

페이지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그러는 공자님은 뭐 하시게요?"

"에이, 나 같은 꼬맹이가 왔다 갔다 하면 그것만큼 더 이목을 잡아끄는 것도 없잖아? 안 그래?"

"...."

"이런 건 전문가가 알아서 해야지."

꼭 이럴 때만 나이 어린 걸 유리하게 써먹어.

작게 구시렁거린 페이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그녀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둑질의 '도' 자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가 옆에서 끼어들어 훈수질 하는 것보다는 자신 혼자서 계획을 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계획을 잡을 수도 있고. 후후.'

속으로 웃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봐야겠네요."

자신감을 보이는 페이지를 향해 로이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음껏 실력 발휘해 보라고!"

자, 얼른 가서 일해라, 노예야!

로이스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페이지는 자발적 노예로서 착실히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그렇게 예정된 비행의 모든 일정이 끝나기 하루 전.

다시금 로이스의 방에 모인 이들.

그들의 중심에서 페이지가 그간의 성과를 보고했다.

"대략 제가 확인한 함교의 구조는 이러해요."

페이지가 정밀하게 그려진 도면을 내보였다.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함교의 승무원은 모두 14명. 그중 함장과 부함장을 제외한 남자가 8명, 여자가 4명."

"...."

"비공선 운항은 함장과 부함장, 둘을 기준으로 2교대가 이뤄지며 함장은 야간 비행의 지휘를 맡고 있어요. 비공선이 여름 대륙에 도착해 착륙하는 시간은 대략 오후 10시쯤이고요."

"비공선이 착륙하기 직전 물건을 터는 게 원래 계획이지? 털고 튄다?"

"네. 그래서 저희가 잠입할 시기는 함장이 근무하는 시간대일 거예요. 저희에게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죠."

"차라리 함장이 잠들어 있을 때를 노리는 게 쉽지 않나? 오늘 밤 당장은 어때?"

"아뇨. 방주인이 있는 거보다는 차라리 비어 있는 시간을 노리는 게 좋아요. 그리고 함장은 선내 모든 생활을 자신의 침실에서 하고 있어요. 숙면, 식사, 용변까지.... 한시도 침실을 떠나지 않고 있죠."

"그 말은 설마… 함장이 장물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고 있다는 건가?"

"추측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런 거 같아요."

"음…."

"그래서 저희 계획을 실행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비공선 야간 근무 교대가 이뤄지는, 함장이 침실을 비웠을 때뿐이죠."

"…방법은?"

"다른 비공선 승무원으로 위장해서 함교에 잠입할 거예요."

막힘없이 계획을 읊는 페이지를 보며 로이스는 놀랍다는 눈빛을 보냈다.

'확실히… 전문가는 전문가네.'

지난 며칠간 로이스는 페이지가 어떻게 정보를 모아 오는지 관찰했다.

동시에 그녀가 어떻게 가을 대륙에서 이름 높은 도둑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이 말을 여기에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페이지의 변장술을 칭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달라지냐?'

현대에는 특수분장이라는 게 있었다.

로이스가 보기에 페이지의 변장술은 그보다 더 대단하면 대단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기품 있는 귀부인.

하루는 생기 넘치는 소녀.

어떨 때는 죽음을 목전에 둔 노파.

풍기는 분위기도 휙휙 바뀌었다.

도도하거나.

처량하거나.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거나.

모든 요소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페이지는 진정한 변장의 귀재였다.

바로 옆에서 보고 있음에도 일순간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에 이 사람이 페이지가 맞는지 몇 번이나 뒤돌아볼 정도였으니, 생판 모르는 이가 봤다면 분명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페이지는 놀라운 변장술로 비공선 내부를 오가며 이리저리 정보를 모아 오더니 계획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왔다.

도둑질에 관해서 잘은 모르지만, 분명 예사의 솜씨가 아니었다.

로이스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페이지가 파브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계획에서 파브로 씨의 역할이 중요해요."

"거, 걱정하지 마십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파브로의 역할은 함교 앞에서 난동을 피워 함장과 승무원의 시선을 돌리는 것.

그사이 페이지와 로이스가 함교로 침투한다는 것이었다.

페이지의 작전에 로이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거… 영화 같잖아?!'

불법적으로 거래되는 물건을 훔치기 위해 비공선에서 벌어지는 침투 활극.

스릴 넘치는 침투 임무에 흥분한 로이스가 홍조를 띠었다.

그때 쌍둥이가 로이스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로이 우리는 뭐 해?"

"우리는?"

쌍둥이의 재촉에 흠칫한 로이스.

'아, 이것들을 까먹었네.'

뭔가 재밌어 보이는 일에 이 녀석들이 끼어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번 계획에 천방지축 쌍둥이가 끼어들면 일을 그르칠 확률이 높다는 거였다.

잠시 고민하던 로이스가 쌍둥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는 유인조야."

"유인조?"

"웅?"

"파브로랑 같이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는 막, 중, 한, 임무지."

"그, 그런거야?"

"그, 그거 우리가 해도 돼?"

"너희니까 믿고 맡기는 거야. 침투조인 나와 페이지의 목숨은 너희에게 달렸어. 잘할 수 있나, 쌍둥이?"

"응응!"

"응! 할 수 있어!"

가볍게 쌍둥이를 파브로에게 맡겨 버린 로이스.

순식간 혹덩이 2개가 붙어 버린 파브로의 안색이 거무튀튀해졌다.

파브로가 살려 달라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로이스는 이를 사뿐히 무시했다.

'저 녀석들의 연기력만큼은 믿을 수 있으니까 유인조로 잘 해내겠지.'

최종적으로 계획이 세워지고.

이후 늦은 시각까지 계획 검토가 이뤄졌다.

"그럼 시행은… 내일 밤. 그때까지 푹 쉬어 두세요."

"응, 너도."

로이스와 페이지가 서로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페이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자 파브로가 쭈뼛쭈뼛 그 뒤를 쫓았다.

그런 파브로의 뒤통수에 대고 로이스가 메시지를 날렸다.

[마지막까지 긴장 놓지 말고 잘 감시해!]

움찔한 파브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그렇게 비행의 마지막 날.

어둠이 내리고 결행의 시간을 향해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다.

* * *

다음 날 오후.

쾅- 쾅-.

함교의 문이 거칠게 울렸다.

평소에는 이런 소란이 없었던 만큼 함교 승무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야?"

"어떤 미친놈이 함교 문을 저렇게 두들겨?"

"교대 근무할 놈이 장난치는 거 아냐?"

쾅- 쾅- 쾅-.

함교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는 사이 다시금 울리는 함교의 문.

"막내야, 나가 봐라."

"네."

승무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함교 문 앞에는 험상궂은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막내 승무원이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시죠? 아니, 그것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네가 함장이냐?"

"함장님을 찾아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면 넌 빠져라! 내가 함장한테 직접 전할 테니! 여기 아주 고객 응대가 개판이야!"

"함교는 승객들의 안전과 직결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못 만날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함장 좀 만나자고 하는데 그게 어렵나!"

"그게 아니라...."

"여기 함장 나오라고 해! 당장!"

너무도 막무가내의 행태에 막내 승무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사이 함교 한쪽 공간에서 안대를 한 사내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어깨에 견장을 찬, 다른 승무원들과는 다른 복식을 한 중년 사내.

그는 함교 입구에서 벌어진 소란에 눈살을 찌푸렸다.

함장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놈들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함교 문을 열라고 했어!"

"그, 그게...."

함장의 불호령에 그제야 비행 시 불문율을 기억해 낸 이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나밖에 없는 눈이 함교 내 승무원들을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내일 착륙한다고 다들 정신머리가 빠졌지? 이번 비행이 끝나면 너희들 전부 감봉이다!"

"죄, 죄송합니다!"

승무원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사이 성난 얼굴의 함장이 함교 입구로 다가갔다.

"비켜라!"

함장의 매서운 손길에 막내 승무원이 뒤로 물러났다.

함장이 함교 앞에서 난리를 핀 거구의 사내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인가! 당장 돌아가시오!"

"네가 함장이냐?"

조금 전의 막무가내식 행태는 온데간데없고 거구 사내의 얼굴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일순간 돌변한 분위기에 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킁킁-.

함장의 코가 살짝 씰룩였다.

지금에야 비공선의 함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그도 이름 날리던 해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겹도록 맡아 왔던 냄새.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종종 맡는 비릿한 향.

'피 냄새?'

사내에게서는 바로 피 냄새가 옅게 나고 있었다.

함장이 눈앞의 사내를 훑었다.

거구 사내의 바짓자락이 피로 얼룩진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이놈 뭐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놀란 황급히 몸을 빼려 한 함장.

하지만 그보다 불청객의 행동이 더 빨랐다.

푹-.

"큽!"

기묘한 파열음과 함께 함장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함장의 등판을 뚫고 튀어나온 은빛 칼날.

"컥?!"

짧은 단말마를 내뱉고 함장은 그대로 쓰러졌다.

"하, 함장님?!"

"뭐, 뭐야?!"

놀란 승무원들이 자리에서 분분하게 일어났다.

그사이 함교 복도의 천장에서 일단의 사내들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함장의 시체를 넘어, 우르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습격자들이 사방으로 날뛰며 칼날을 휘둘렀다.

"크악!"

"컥!"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가는 승무원들.

함교 내 승무원들이 모조리 정리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히익?!"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승무원은 주검으로 변한 선배들과 그들이 흘린 피를 보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한쪽에서 복면을 내린 이가 걸어왔다.

좌측 눈 밑에서 오른쪽 뺨까지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는 사내.

스르릉-.

칼을 뽑아 든 이가 천천히 걸어가며 칼을 휘둘렀다.

푸확-.

툭-.

막내 승무원의 목이 그대로 땅에 떨어지며 피 분수가 솟구쳤다.

함교의 유리창까지 튀긴 핏물.

어둠 속 달빛에 핏물이 번들번들 일렁였고.

이를 눈에 담은 칼자국 사내의 눈빛도 덩달아 일렁였다.

"푸흐."

작게 미소 짓는 사내의 입꼬리가 들썩이며 흉터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두 눈 가득 번들거리는 살기를 담은 남자가 명령했다.

"모조리 죽여라."

그 명령에 부하들이 빠르게 함교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비행의 마지막 날.

로이스 일행이 계획을 실행하기 30분 전.

음산한 달빛을 배경 삼아 살육이 벌어졌다.

102화. 영웅 (1)

장물 탈취 계획 25분 전.

로이스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의 귀가 쫑긋거렸다.

'비명?'

그와 함께 코끝에 드리운 이상한 냄새.

드래곤의 예민한 후각이 이를 잡아냈다.

"혈향?"

로이스는 자신이 맡은 게 맞는지 쌍둥이를 바라보았다.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 피 냄새나."

쌍둥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본능적으로 살기를 감지한 것이다.

어린 헤츨링 두 마리가 기세를 일으켰다.

"진정해."

로이스가 쌍둥이를 진정시키며 토닥여 주던 순간이었다.

쾅-.

로이스와 쌍둥이의 방문이 거칠게 부서져 나갔다.

박살 난 문 너머에는 칼을 뽑아 든 사내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방 안에 어린아이 셋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애들뿐이군. 여기는 내가 처리하고 갈 테니 넌 옆방으로 가. 절대 무리하지 마라."

"그러지."

동료의 말에 뒤쪽에 있던 사내가 로이스의 방을 스쳐 지나갔다.

그사이 홀로 남은 사내가 칼을 늘어트리고 로이스를 향해 다가왔다.

로이스의 시선이 그의 칼날에 닿았다.

톡-톡-.

은빛 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붉은 액체.

바닥에 작은 얼룩을 만들며 그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의문의 침입자는 로이스와 쌍둥이를 무감정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이 비공선에 탄 것이 너희의 운명이라고 생각해라."

그리 말하며 사내가 칼을 휘둘렀다.

놈의 칼끝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로이스의 목.

비정한 칼날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로이스를 베기 위해 날아들었다.

사내는 또다시 자신의 칼날이 피를 머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응?'

그 순간 사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이 아이들 왜....'

보호자도 없는 공간에 난데없이 괴한이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데.

어째서....

'무서워하지 않는 거지?'

그가 거쳐 온 다른 방에서는 어른이라 할지라도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칼날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 방에서만큼은, 이 아이들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캉-.

아이의 여린 목을 노리고 날아들던 칼이 기괴한 쇳소리를 내며 멈췄다.

"뭐?!"

비록 큰 힘을 싣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맥없이 멈출 건 아니었다.

더욱이 칼끝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마치 검은 벽돌처럼 생긴 것이 아이의 손바닥에 나타나 칼날을 막은 것.

이를 본 습격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법사?!'

마나 스틱이 없지만, 아이가 펼친 것은 분명 성법이었다.

사내는 어린아이가 법사라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속성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사내보다 로이스가 빨랐다.

가볍게 손을 내저은 로이스.

사내의 머리 부근에 펼쳐진 공간이 결정화되었고.

"…이, 이건?!"

우득-.

놈의 머리통을 집어삼킨 공간 결정이 그대로 180도 회전했다.

탱그랑-.

사내가 쥐고 있던 피 묻은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얼굴이 등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가며 그대로 즉사해 버린 사내.

털썩-.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내려다보는 로이스의 눈은 담담했다.

'이놈… 뭐지?'

난데없이 난입하여 다짜고짜 칼을 휘둘렀다.

놈의 목적은 분명 자신의 죽음이었다.

아니, 방 안에 있는 쌍둥이도 놈의 표적이었다.

'묻지 마 살인이라.'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 자에게 로이스는 응당 죽음으로 갚아 줬다.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첫 살인인가?'

조금 전 이 작은 손이 한 인간의 목숨을 거뒀다.

그간 여행을 하며 수많은 몬스터를 죽이기는 했지만, 인간을 죽인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네?'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인간을 죽인 것은 처음이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마치 수많은 몬스터를 죽인 것 같은.

그저 그런 정도의 느낌.

'영화나 만화를 보면 첫 살인을 하고 패닉에 빠지고 그러던데....'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이런 자신이 비정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로이, 이제 어떻게 해?'

"우리 뭐 해?"

눈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장면을 보고도 순진무구한 쌍둥이를 보니 드래곤인 자신에게는 이게 정상이겠거니 싶었다.

"이제 뭐 해?"

"어떡할까?

재촉하는 쌍둥이의 물음에 로이스는 상념을 털어 냈다.

그가 쌍둥이를 챙기며 핀을 찾았다.

"핀."

"넵!"

한쪽에서 핀과 카이가 나타났다.

카이는 쌍둥이가 내뿜었던 드래곤의 기운에 벌벌 떨었다.

로이스가 핀을 향해 명령했다.

"카이랑 같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고 와."

"네!"

핀이 당차게 답하며 카이의 등에 올라탔다.

"최대한 빨리 돌아와."

-뀻!

로이스의 명령에 카이가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빠져나간 방 안.

한 구의 시체를 뒤로하고 로이스는 부서진 방문 너머를 응시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 * *

로이스 방을 지나친 또 다른 습격자.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옆방인 파브로와 페이지의 방이었다.

쾅-.

거친 소리와 함께 파브로와 페이지의 방문이 나가떨어지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구 근처에 있던 페이지가 부서진 문에 맞고 튕겨 나갔다.

"아악!"

문짝과 함께 그대로 바닥을 뒹군 페이지.

그와 함께 난입한 사내가 페이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다, 다리가...?!'

넘어지면서 접질린 것인지 발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보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못 피해.'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더욱이 몸 상태는 최악.

페이지는 죽음을 직감했다.

'아....'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악착같이 살아온 세월.

그 긴 고생의 끝이 이토록 허망할 것이라고는 그녀는 미처 몰랐다.

페이지가 절망으로 망연자실한 순간, 그녀의 정면에 검은 그림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퍼슥-.

습격자의 칼날이 페이지를 막아선 파브로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지켜보는 이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상처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파브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되레 기합을 내지르며 주먹을 뻗었다.

"흐합!"

우웅-.

토속성.

그중에서도 파브로가 익힌 무법은 굳건히 지상을 디뎠을 때 그 힘이 강하게 발휘된다.

쿵-.

거칠게 지면을 밟으며, 속성력을 잔뜩 끌어 모은 그의 육체가 짙은 갈색빛으로 물들었다.

3티어 상급에 다다른 파브로.

비록 로이스 일행에게는 매일 갈굼 받는 위치에 불과했지만, 그의 경지는 결코 얕볼 만한 게 아니었다.

어지간한 중소 귀족가의 호위 무단 단장을 일임할 수 있을 정도.

나아가 영약을 먹고 커진 드워프의 육체는 속성력 없이도 황소를 때려잡을 수 있었다.

콰즉-.

"뭐, 뭐야?!"

페이지를 기습한 이도 난데없는 파브로의 개입에 놀라 급히 검을 회수하려 했다.

그보다 파브로의 주먹이 먼저 놈의 안면에 닿았다.

쾅-.

속성력을 머금어 돌덩이보다 더욱더 단단해진 주먹.

지면을 내디디며 전신의 힘이 응축한 공격이 습격자의 광대를 으스러트렸다.

쾅-.

거대한 소리가 울리며 문을 부수고 들어왔던 습격자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조약돌처럼 날아간 습격자가 벽에 강하게 부딪히고는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기복이 없는 가슴을 보니, 주먹질 한방에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였다.

상체를 일으킨 페이지는 듬직한 파브로의 등을 보며 입술을 벌렸다.

"아...."

지난 2주간 백발 애늙은이 꼬마에게 파브로가 갈궈지며 주눅 든 모습을 지겹도록 보아왔다.

또한, 한방을 쓰면서 순진하고 얼빠진 그의 모습에 내심 무시하고 얕봤던 것도 사실이다.

단지 덩치만 큰 멍청한 사내라고.

하지만.

'강해....'

습격자 역시 무법을 익힌 듯,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못해도 4티어급.

그런 사내를 단숨에, 그것도 무기조차 사용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처리한 파브로의 무위는 그간 페이지가 가지고 있던 파브로에 대한 인상을 단번에 뒤바꿨다.

페이지가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을 때.

천천히 몸을 돌리는 파브로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크고 두툼한 손을 홀린 듯이 잡은 페이지.

파브로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페이지는 볼 수 있었다.

파브로의 옆구리에 번지는 핏물을 말이다.

"사, 상처가...."

그녀의 말에 파브로가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보며 순박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긁힌 거뿐입니다."

단순히 긁혔다고 저 많은 피가 나오겠는가.

페이지가 파브로의 상의 자락을 재빨리 들쳐 올렸다.

"억?!"

그녀의 돌발 행동에 놀라 파브로.

반면 페이지의 시선은 파브로의 옆구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게 무슨 긁힌 거예요!"

크게 난 상처에 페이지가 놀라 소리쳤다.

그녀가 재빨리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파브로의 상처를 지혈했다.

"커, 커흠… 괘,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요! 호, 혹시 포션 같은 거 없어요?"

"무슨 이런 상처에 포션씩이나!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습니다!"

"침은 무슨! 못해도 10바늘 이상 꿰매야 할 거 같은데!"

"커흠. 커흠!"

페이지의 잔소리를 들으며 파브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상처의 아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브로의 뇌를 강타한 것은 자신의 맨살에 닿고 있는 페이지의 손수건과 얼핏얼핏 느껴지는 가는 손가락의 촉감이었다.

거기다 상처를 지혈하며 바짝 붙은 페이지의 향이 코로 파고들었다.

'으어어!'

얼핏 보이는 페이지의 구릿빛 목덜미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그의 인중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액체.

파브로가 다급히 인중을 닦아 내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코… 코피?'

그 순간 페이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긴 또 왜 그래요? 거기도 맞았어요?"

"그… 아, 아까 살짝 스친 거 같습니다."

차마 다른 이유로 코피가 흘렀다고 말하지 못하는 파브로였다.

그렇게 둘이 찰싹 붙어 있는 그때.

"니들 뭐 하냐?"

갑자기 들려온 뚱한 목소리에 파브로와 페이지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들이 시선이 닿은 곳에는 로이스가 팔짱을 끼고 게슴츠레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로이스의 뒤로는 빼꼼히 고개를 내민 쌍둥이.

녀석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헤헤, 파브로 얼굴 빨개."

"뭐야, 뭐야? 둘이 뭐야?"

아이들의 시선에 파브로와 페이지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벼, 별일 아니에요."

그들을 보며 로이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로이스의 눈이 파브로의 상처에 닿았다.

"칼 맞았어?"

"스, 스쳤습니다."

이에 로이스가 포션을 꺼내 던졌다.

"마셔."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대로 포션 한 병을 들이켠 파브로.

치익-.

그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이를 본 페이지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최상급 포션?!'

단시간에 이토록 빠른 회복력을 보이는 포션은 최상급 포션뿐이었다.

용병과 무사, 위험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여벌의 목숨과 같은 약이었기에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던져 주다니?!'

페이지가 놀라거나 말거나, 그들은 지나친 로이스는 죽은 의문의 습격자에게 다가가 겉옷을 벗겨 냈다.

그러자 어깨에 부근에 드러난 문신.

그는 5개의 검이 교차하고 있는 문신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여기도 있네."

옆방으로 넘어오기 전에 자신을 습격한 이를 조사한 로이스.

습격자에게서 신분을 나타내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 시신의 어깨에서도 지금 보는 것과 똑같은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같은 소속이라는 소리겠지."

한쪽에서 로이스가 하는 짓을 유심히 바라보던 페이지의 시선이 문신에 닿았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흡!"

무언가를 알아본 듯, 페이지가 헛숨을 들이켰다.

로이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들었다.

103화. 영웅 (2)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페이지의 반응.

그녀가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로이스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린 상황이었다.

로이스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페이지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페, 페이지 씨!"

놀란 파브로가 다급하게 외쳐 봤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로이스는 달려 나가는 페이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그가 페이지를 잡을 수 있음에도 잡지 않았던 것은 상황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쫓아."

로이스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파브로와 쌍둥이가 달려 나갔다.

로이스도 뒤지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페이지는 멀리 가지 않았다.

바로 옆방.

그곳에서 그녀는 로이스가 해치운 의문의 습격자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로이스가 살피느라 헤쳐 놓은 문신을 뚫어지게 보는 중이었다.

페이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이럴 리… 이럴 리가 없어."

경악, 당황, 혼란, 공황.

부정적인 감정이 혼재된 목소리.

"아...."

기운이 빠진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페이지를 보며 로이스가 물었다.

"똑같지? 아까 그놈의 문신이랑?"

"...."

"이제 털어놔 봐. 넌 알고 있는 거지? 저 문신이 뭘 뜻하지?"

로이스의 물음에 페이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건...."

막 페이지가 입을 열려는 찰나.

쿠궁-.

비행선이 크게 요동쳤다.

순식간에 뒤로 쏠리는 육신.

파브로가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갑자기 속력이 왜?"

비행선이 흔들린 것은 급가속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 급가속을 한다고?'

이제 조금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무언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낀 로이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 순간 페이지가 결심한 얼굴로 답했다.

"이 문신은… 레온 혁명군의 문장이에요."

"레온 혁명군?"

"그들은...."

처음 들어 보는 명칭이었다.

로이스의 되물음에 페이지가 답하려는 순간.

쿠그그긍-.

비공선이 또 한 번 급가속했다.

"윽!"

"으에에! 로이 로이 몸이 뒤로 쏠려!"

"꺄하하! 이거 재밌다!"

파브로가 바로 균형을 잡았고, 쌍둥이는 뒹구르르 굴러가 벽을 찍고 돌아왔다.

도무지 페이지가 말을 이어 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은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는 게 먼저라고 여긴 로이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쌍둥이, 그리고 파브로."

"웅!"

"응응!"

"옙."

"수상한 녀석들을 보면 모조리 잡아 족쳐. 아니...."

말을 바꾼 로이스.

그의 눈에 살기가 담겼다.

"전부 죽여."

다짜고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놈들이며, 지금도 그들의 동료가 비공선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망할 놈들이 감히 내 목숨을 노렸다 이 말이지?'

여태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망 플래그에 시달려 온 로이스이다 보니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분노한 로이스는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알겠습니다."

로이스가 진심으로 분노한 것을 본 파브로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로이스가 아공간에서 그들의 무기를 꺼내 건넸다.

이를 본 페이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자!"

"싸움이다!"

오랜만에 검을 휘두를 생각에 신이 난 쌍둥이.

그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아, 안 돼요!"

페이지가 다급하게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로이스의 눈빛이 대번 싸늘해졌다.

"뭐 하는 짓이냐?"

"주, 죽이면 안 돼요."

"헛소리 말고 비켜."

로이스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솟구쳤다.

이를 정면에서 맞은 페이지.

"아으으...."

그녀는 아찔해진 정신을 혀를 깨물어가며 버텨 냈다.

파브로는 그녀를 안쓰럽게 볼 뿐 나서지는 않았다.

이번만큼은 로이스의 말이 백번 옳다고 여겼으니 말이다.

'위, 위험해!'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눈앞의 작은 꼬맹이.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저건 꼬맹이가 아니었다.

통제 불가의 괴물이었다.

'이대로는 모두… 모두 죽을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큰 결단을 내린 페이지가 자신의 상의를 벗었다.

동시에 로이스를 향해 살짝 자신의 어깨를 내보였다.

페이지의 어깨를 본 로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페이지의 어깨에는 의문의 습격자들과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놈들과 한패였냐?"

로이스의 살기가 더욱더 짙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페이지는 죽기 살기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이건… 이건 달라요!"

"뭐가 다르지?"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로이스의 싸늘한 눈빛을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이지는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괴물을 설득해야만 했다.

"제가 아는, 아니, 제가 몸담은 레온 혁명군은 절대 이런 일을 벌일 이들이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제발요, 공자님… 부탁드려요. 그들을 죽이지 말아 주세요."

"왜 죽이지 말라는 거냐? 혹여 진짜 이들이 네 동료일까 봐?"

"제가 걱정하는 건 이들이 레온 혁명군이 아닐 경우에요. 만일 그렇다면...."

"누군가 레온 혁명군을 사칭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페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이들의 배후를 캐야 해요. 하지만 만약 이들이 진짜 레온 혁명군이라면 제가 책임지고 죗값을 치르게 하겠어요."

"...."

간절한 페이지의 눈빛.

이에 로이스의 살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레온 혁명군에서 너의 지위는 높은 편인가? 지금 네 말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낮은 편은 아니에요."

그녀에게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깨달은 로이스가 덤덤하게 답했다.

"일단… 살려는 줄게."

긍정적인 답에 페이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단, 이들의 생사 여부는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결정할 거다. 저들이 진짜 너의 동료이든 아니든 간에."

여전히 싸늘함이 남아 있는 로이스의 말에 페이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로이스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

"장물은 이쪽에서 모조리 가져간다. 네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네?"

이런 상황에서 로이스가 장물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던 페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싫어?"

"아, 아뇨! 마, 마음대로 하세요!"

페이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여전히 장물을 포기하지 못한 로이스.

그가 씨익 미소 지었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지!'

안 그래도 함교에 숨어들기 위해 혼란이 필요했던 상황.

지금만큼 완벽한 혼란은 없었다.

"좋아 가자!"

로이스의 명령에 먼저 파브로가 나섰고 이어 쌍둥이가 신난 얼굴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로이스와 페이지가 뒤쫓았다.

* * *

캉- 캉-.

좁은 격실에서 한 사내가 칼날을 피하고 있었다.

노부부를 뒤에 두고 의문의 습격자를 막아서고 있는 사내가 소리쳤다.

"당장 피하십쇼!"

"어,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큭! 아, 거 아무 데나 가란 말이오!"

문 앞에서 벌어지는 공방에 노부부는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 모습에 노부부가 고용한 호위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검만 있었어도!'

비공선을 이용하는 이들이 돈 많은 부호인 만큼 호위를 고용한 이들도 더러 있었다.

사내 역시 그렇게 고용된 무사였다.

3티어 하급의 실력 있는 무사였지만, 무기를 반납한 탓에 습격자들의 맹공에 속수무책으로 제 몸을 사리기 바빴다.

더군다나 습격자들은 2인 1조로 움직였다.

"경, 경비! 경비들은 뭘 하고 있소! 여기 좀 도와주시오!"

노인이 큰 목소리로 비공선에 상주하는 경비를 불렀으나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호위 무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작정하고 비공선에 숨어든 놈들이 경비가 있는 거를 몰랐을까!'

정해진 정원 때문에 비공선에 상주사는 경비의 수는 열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마저도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탓에 모조리 전멸해 버린 상태였다.

'이 미친놈들이?!'

더욱이 호위 무사를 더욱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습격자들의 태도였다.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거냐?!'

마치 자신의 목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습격자들.

호위 무사가 매서운 눈으로 놈들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들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건데....'

습격자 두 명 모두 4티어급으로 보였다.

'기회를 봐서 단번에 처리해야 한다!'

사방에서 흩날리는 칼날을 피하며 호위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지금!'

두 습격자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겹치는 순간, 호위가 크게 발을 굴렀다.

쾅-.

나무 바닥을 찍고 그의 신형이 홀연 듯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 하늘빛 잔상만 남은 상태.

뒤쪽에 있던 습격자는 호위의 움직임을 놓쳤고, 호위 무사가 오랜 시간 갈고닦은 무법이 자연스레 발동했다.

'잔바람 밟기!'

풍속성력을 한껏 끌어올린 그가 쾌속으로 뒤쪽의 습격자에게 달라붙었다.

"헛!"

놀란 습격자가 몸을 빼려 했지만, 그의 팔목을 어느새 호위의 손에 잡혀 있었다.

우득-.

팔목이 부러지며 검을 놓친 습격자.

떨어지는 검을 빠르게 받아 든 호위가 그대로 손잡이를 역수로 잡아 습격자의 심장을 찔렀다.

호위의 동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걱-.

"...?!"

동료 죽음에 놀라 몸을 돌리던 다른 습격자의 목줄기가 베어진 것.

털썩-.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둘을 해치운 호위.

그제야 살았다는 듯 노부부의 얼굴에 안도가 서렸다.

"여, 역시!"

가을 대륙 용병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이라기에 특별히 비싼 값에 이번 여행에 호위로 고용했다.

그의 실력은 이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었다.

촥-.

호위 무사가 피를 묻은 검을 털어 낼 때였다.

푹-.

"...?!"

호위 무사의 가슴께를 뚫고 나온 은빛 검날.

그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너, 너는...?!"

은빛 검날에 맺혀 있는 하늘색의 기운.

그것은 자신이 다루는 속성력과 같은 풍 속성었다.

풍 속성을 다루는 의문의 습격자.

'이자… 강하다.'

3티어급의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

'바, 방심했다.'

동급의 실력자를 상대로 방심을 한 결과는 처참했다.

상대와 검을 맞대 보기도 전에 심장이 꿰뚫린 것.

그의 귀속으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호위 중에서는 그나마 네가 가장 실력이 있는 놈이었군."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귓가에 아른거리는 목소리에 호위 무사는 겁에 질린 노부부를 눈에 담았다.

'제, 젠장…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것이 가을 대륙에서 제법 이름 날리던 호위 무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시체.

이를 보며 그의 고용주였던 노인이 외쳤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게요!"

아내와 같이 여름 대륙으로 휴양을 즐기기 위해 나섰던 한 부호.

그는 두려움에 질린 아내 앞에서 습격자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하지만 습격자는 그런 이를 무시하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태도.

노인이 소리쳤다.

"도, 도와주시오! 거기 아무도 없소!"

그러나 부호의 도움 요청을 듣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

오로지 절망과 죽음만이 그들 부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

파즉-.

어디선가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