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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의 황제.

그의 시선이 대전에 무릎 꿇은 무사에게 향했다.

오늘 아침, 동부 전선에서 왔다는 백곰무단 소속 무사의 몰골은 처참했다.

흙먼지로 가득한 얼굴에 언제 갈았는지도 몰라 누렇게 변색된 붕대.

원래대로라면 절대 황제의 대전에 들어올 수 없는 이였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황제가 직접 그를 불러들였다.

중간 다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이다.

대략적인 상황을 들어 알고 있던 황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가 보고 겪은 것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라."

"예, 옙!"

좌우로 늘어선 권세 높은 귀족들과 제국의 절대자가 눈앞에 있었다.

생전 처음 황제를 대면한 무사는 애써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침착하게 그날의 일을 풀어 냈다.

"하여...."

수많은 이들이 모였지만,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적막 속에 무사의 생생한 이야기가 대전 속에 내리깔렸다.

그렇게 얼마 뒤, 무사의 이야기가 끝나고.

황제가 등을 세우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래서… 피해 규모는?"

"현재 동부 사령부 소속 초월기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으로 전기(全機) 사용 불가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투 규모에 비해 사망자가 극단적으로 적다는 점이온데...."

"어찌 말을 하다 멈추느냐?!"

"그, 그것이 부상자가 너무 많아 즉시 전력으로 포함될 인원이… 채 천 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허...."

결국, 참아 왔던 깊은 숨을 토해 낸 황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앞이 아찔했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무사는 사실상 5만 병력이 전멸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려 5만의 병력이....'

어질어질한 현기증에 황제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 빛이란 게… 대체 무엇이더냐."

"그, 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빛이 터지고 난 뒤 초월기들이 맥없이 쓰러졌다는 겁니다."

"…알았다. 물러가라."

황제가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젓자 무사가 대전을 떠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황제가 궁정 법사장을 보며 물었다.

"저 무사가 말한 빛이 무엇이라 보는가."

"송구하오나,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사옵니다."

"그럼 묻겠다. 그대는 성법으로 1천의 초월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가?"

"불가능하옵니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불가능할 일이옵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하다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도대체 그 빛이 뭐란 말이냐!"

"...."

말없이 고개를 숙인 궁정 법사장을 보며 황제의 얼굴을 일그러졌다.

'도무지… 제대로 되는 게 없구나!'

승리를 약속했던 호안 후작은 지금 생사조차 알 수 없고, 동부의 전력은 궤멸했다.

그 많던 초월기는 그저 한낱 고철 더미가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사무엘 후작."

"예, 폐하."

"놈들의 위치는?"

"현재 몬스터 군단은 동부 지역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습니다. 한데 이상한 것은 놈들이 이동 중에 약탈 등을 벌이지 않고 빠르게 직선 경로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탈을 벌이지 않는다? 몬스터가?"

"그렇습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성과 절제 따위가 없는 몬스터가 약탈을 벌이지 않고 전진만 하고 있다?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사무엘 후작을 재촉했다.

"경로… 놈들의 목적지가 어디로 예상되느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사무엘 후작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계산이 틀렸다면 지금 내뱉을 말로 인해 제국은 또 한 번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말할 때였다.

후작이 숨을 크게 참으며 입을 열었다.

"제 예상이 정확하다면 몬스터 군단의 목적지는.... 아니, 스노우 킹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 제도입니다."

"...?!"

사무엘 후작의 발언에 황제는 물론 귀족들이 눈을 크게 치떴다.

제도(帝都).

황제를 비롯한 황가, 수많은 귀족과 주요 기관이 자리한 곳.

이곳이 타격을 받으면 제국이 휘청거린다.

심할 경우 겨울 대륙에서 도미넌트 제국이 사라질 것이다.

황제가 굳은 낯빛으로 물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아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황제의 물음에 사무엘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후...."

사무엘 후작의 확언에 황제가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제를린 장군."

"예, 폐하."

"그대에게 2만의 중앙 수비군 통수권을 주겠다. 또한, 징집의 권한 역시 부여하는바, 사활을 걸고 제도를 수호하라."

"충!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궁정 법사장."

"하명하소서."

"궁정 성탑의 모든 전투 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기꺼이 폐하의 부름에 응하겠나이다."

궁정 법사장이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귀족들을 보며 외쳤다.

"현 시각으로부터 제국 전역에 국가 비상령을 선포한다. 제국에 속한 귀족으로서 이번 징집을 거부하는 자는 지엄한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고, 황제의 대전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리고 동부 사령부가 몬스터 군단에 대파(大破)당한 일로부터 일주일 뒤.

제도와 동부 국경의 중간 지점에 스노우 킹 군단을 막을 제국의 2차 저지선이 형성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2차 저지군과 몬스터 군단이 충돌했으며.

바로 그다음 날....

2차 저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황궁으로 날아들었다.

187화. 뚠뚠이 (1)

황제의 대전 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연전연패.

그것도 제국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병력이 동원되고도 대패했다.

심지어 두 번째 참패의 양상마저 첫 번째 패배와 똑같았다.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날아들어 초월기가 무력화됐고, 몬스터들이 인간군을 휩쓸었다.

그나마 궁정 법사장과 궁정 성탑의 참전으로 몬스터 군단에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는 있었지만, 궁정 성탑도 계속 밀려드는 몬스터 군단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첫 번째 전투의 패배가 우연이 아니었음이 밝혀지자 황제는 위기감을 느꼈다.

"궁정 법사장."

두 번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궁정 법사장.

쉬지도 못하고 불려 온 그의 얼굴에 피로함이 가득했지만, 황제의 부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폐하."

"대체 그 빛이 무엇인가?"

이번에도 초월기를 무력화시킨 괴상한 빛.

궁정 법사장은 물론 다른 법사들까지 전부 달려들어 그것에 대해 논의해 봤지만, 끝끝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아낸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 빛을 쐬면 초월기의 동력구에 이상 반응이 일어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것 역시 스노우 킹의 능력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사료됩니다."

"막을 방법은?"

"송구하옵니다…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으득-.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찾지 못했다고 하면 끝인가? 방법을 마련해야 하지 않은가!"

"...."

"그 빌어먹을 빛을 막지 못하면 수천 기의 초월기를 가졌다고 한들 무용지물이다! 우리가 가진 병력만으로 어찌 저놈들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이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궁정 법사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황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찌…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제국은 두 번의 패배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더 큰 위기는 이제부터였다.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황제가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다니어스 공작."

"예, 폐하."

"속국의 병력은 어찌 되었는가?"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제국의 전력은 크게 꺾였고, 이에 황제는 자신들에게 굴복한 왕국에 병력을 요청했다.

그 일을 행한 자가 바로 재상인 다니어스 공작.

그는 자신이 맡아 진행한 일을 보고했다.

"이미 6만의 추가 병력이 3차 저지선에 집결해 있습니다. 이제 모이고 있는 서부 사령부의 병사들까지 더하면 대략 9만의 병력이 집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9만이라...."

황제가 인상을 썼다.

9만이라는 숫자는 분명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막대한 군자금이 들어갔다.

여기서 9만의 대군이 움직이며 또 얼마의 예산이 들어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쟁이 금방 끝나 추가적인 지출이 없었다는 것뿐.

이를 떠올린 황제는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니.'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참패를 겪었는데 고작 군자금 좀 아꼈다고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신이 어이없던 것이다.

안색을 정돈한 황제가 다시금 공작을 보며 물었다.

"9만의 병력이면… 놈들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건가?"

"이미 두 차례의 전투가 있으면서 몬스터 군단의 숫자도 6만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이쪽은 8만을 잃었는데 한낱 몬스터 따위가 2만이라.... 그래서?"

"3차 저지선을 담당하고 있는 카덴 공작 각하라면 능히 몬스터 군단을 막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카덴 도윌슨 공작.

제국 제일검이라 불리는 1티어의 검공이라면 충분히 믿음직한 존재였다.

다만, 그럼에도 황제의 인상을 펴질 줄 몰랐다.

"막는다? 나는 그대에게 이 전쟁의 승패를 물었다."

"아시다시피 초월기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정체불명의 빛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는 한 초월기는 그저 값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3차 저지선에 초월기는 배치되지 않았다.

"검공의 전술과 무위라면 충분히 몬스터 대군과 맞설 수 있으나… 문제는 스노우 킹입니다."

"…그렇군."

단순히 몬스터 군단을 부리는 능력뿐 아니라 본신의 무위도 탑티어에 비견된다는 괴물 중의 괴물.

아무리 검공이라고 할지라도 1티어인 그가 스노우 킹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스노우 킹을 처리하지 못하는 한… 완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황제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검공과 3차 저지선마저 뚫리면 바로 제국의 심장이라는 제도가 몬스터 군단의 앞에 놓인다.

어떻게 해서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황제가 정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제국의 운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마땅한 대응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수많은 귀족도 그저 눈치를 보며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적막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벅-.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사무엘 후작?"

모두가 침묵할 때 나선 이는 다름 아닌 사무엘 후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찾았다. 내 살길을.'

이번 전쟁을 이기든 지든, 그에게 뒤는 없었다.

전쟁에서 이겨도 사건 발단의 책임을 물어 면책을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사형이었다.

전쟁에서 지면 제국 자체가 사라지니 그 또한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바로 이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

최악의 상황에서 공을 세운다면 최소 죄를 덮을 수는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한 가지 방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스노우 킹을 상대할 방법이 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렸다?!"

황제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런 반응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후작은 빠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다만 방법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허락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허락? 무엇이냐?"

"제국 예산 중 100만 골드를 융통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합니다."

"...?!"

100만 골드.

도미넌트 제국의 1년 예산이 1,000만 골드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일반 서민 한 가구가 1골드면 1년을 살 수 있고, 나름 부유한 귀족 가문이라고 해 봤자 지닌 재산이 1만 골드 정도.

수십만 골드를 가지려면 제국의 공작 가문 정도는 되어야 한다.

때문에 100만 골드가 언급됐을 때 귀족들이 술렁였다.

이에 황제가 사무엘 후작을 노려보며 물었다.

"100만 골드라… 그것으로 무엇을 할 셈이지?"

"괴물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괴물...?"

황제의 물음에 후작이 웃으며 답했다.

"스노우 킹이 괴물이라면… 또 다른 괴물로 놈을 상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스노우 킹을 상대할 괴물이 있다는 소리더냐?"

"있습니다."

사무엘 후작의 확신에 황제는 살짝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자세히 말해 보라."

일단 황제가 이야기를 들어줄 듯싶어지자 사무엘 후작은 자신이 준비해 온 수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뒤.

"호오."

황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짐 또한 들어 본 적이 있다. 한데, 그 '괴물'이 실제로 존재하였단 말인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제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까지 끝마쳤습니다."

"후작이 보기에 그 괴물이 스노우 킹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그렇습니다. 오히려 소문이 모자란 듯 보였습니다."

"흠...."

사무엘 후작의 확언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100만 골드 정도는 충분히 쓸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대에게 이번 일에 관한 전권을 일임한다. 제국의 사활이 걸린 일이니 반드시 성사시키거라. 만약 너의 방법이 이 나라를 구한다면… 네 죄를 사하여 주겠노라."

드디어 원하는 바를 얻어 낸 사무엘 후작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 * *

3차 저지선이 형성된 지 이틀 뒤.

사무엘 후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금발에 적안.

150㎝의 단신.

이제 고작 15살쯤으로 보이는 외모의 소녀였다.

그녀는 마치 사무엘 후작의 집무실이 제 안방이라도 된 듯, 여유로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소녀가 후작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밝고 가벼운 목소리였다.

도미넌트 제국의 거물이라는 사무엘 후작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말투.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사무엘 후작의 태도였다.

"말씀하신 금액을 준비했습니다."

자신의 딸뻘로 보이는 소녀에게 사무엘 후작은 공손하게 대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어리디어려 보이는 소녀에게 자신의 목숨 줄이 달려 있으니 말이다.

사무엘 후작의 이야기에 소녀는 환히 웃었다.

"와? 빠르네요? 난 며칠 걸릴 줄 알았더니. 대충 듣기는 했는데… 급하긴 급한가 봐요?"

백색의 모피 코트 사이로 드러난 맨다리가 앞뒤로 까딱거렸다.

그 모습에서 그녀의 기분이 지금 아주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후작의 기분은 착- 가라앉았다.

그에게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급하지요. 그러나 허투루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골드는 스노우 킹의 목을 가져오시면… 그때 드리겠습니다."

"에? 계약금도 없어요? 너무하시네?!"

"걱정하지 마시오. 일만 제대로 처리해 준다면… 그대가 원하는 금액은 반드시 지급될 터이니."

후작의 단호한 목소리에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아요. 그쪽 사정 뻔히 아니까 이번만큼은 제가 맞춰 드리죠. 다만, 추후 지급될 골드는 전량 현물이어야 한다는 거 아시죠?"

"알고 있소이다."

소녀가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바로 일 들어가죠."

"전선으로 가시오. 그쪽 사령부에는 내가 이미 말을 해 두었으니."

"네에 네에! 그럼 다음에 다시 돈 받으러 오면 그때 봐요."

"반드시… 반드시 놈의 머리를 가져와야 할 거요."

"알았대두요."

잔소리가 지겹다는 듯 살짝 코를 찡그린 소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휙- 하니 등을 돌려 후작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조차 닫지 않고 말이다.

후작은 소녀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기원했다.

제발 저 소녀가 스노우 킹의 목을 들고 오기를.

* * *

후작의 저택을 빠져나온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인근 숲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눈길을 걸어 막힘없이 숲에 들어선 소녀가 경쾌하게 소리쳤다.

"뚠뚠아, 나 왔어!"

그녀의 외침이 숲에 메아리치고.

푸드덕-.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며 나무에 쌓인 눈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쿵- 쿵-.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겹겹이 자라난 나무 틈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릉-.

심기 불편한 울음소리가 깔리고 나무 그늘 사이로 비친 황금빛 안광.

이를 마주한 소녀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왜? 뚠뚠이가 뭐 어때서!"

크르륵-.

"뚠뚠이라는 말… 어감이 귀엽지 않아?"

크륵!

"아, 알았어. 그렇게 안 부를게, 화내지 마!"

크릉.

자신의 사과에 그제야 가라앉은 안광을 보고 소녀가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일 받아 왔어!"

크릉?

"네 사룟값 벌러 가자고!"

소녀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황금빛 거대한 눈동자가 기쁨으로 일렁였다.

그로부터 잠시 뒤.

쿠드드득-.

눈 쌓인 나무들이 우후죽순 부러져 나갔고.

크허헝-.

우렁찬 포효가 있고 난 뒤, 새하얗고 거대한 동체가 숲을 빠져나와 놀라운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사활이 걸린, 3차 저지선이 있는 방향으로.

188화. 뚠뚠이 (2)

카덴 도윌슨.

어린 시절 그는 자식이 없던 도윌슨 공작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자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잡음 없이 가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지닌 탁월한 무의 재능 덕분이었다.

도윌슨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1티어에 도달한 그는 명실상부 제국 최강의 무사로 거듭났고, 도윌슨 공작가를 제국 내 우뚝 서게 했다.

검공이란 이명을 얻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헤쳐 온 카덴 공작이었지만, 이번에 마주한 난관만은 그에게도 꽤 버거웠다.

"흠...."

카덴 공작은 넓게 펴진 지도를 보며 고심했다.

'지금까지 놈들이 최단 거리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이 길목을 지난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찰대의 정보로 추측하건대 현재 진영을 펼친 곳이 스노우 킹 군단과 부딪힐 최후의 접전지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앞으로 반나절 후에 말이다.

'지리적인 이점은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카덴 공작의 인상을 펴질 줄 몰랐다.

"9만 대 6만...."

현재 3차 저지선에 모인 병력은 9만이 넘는 대군.

지리적인 이점도, 수적인 이점도 도미넌트 제국군이 우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대형 몬스터가 2천이라...."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1, 2차 저지군이 무너진 건 초월기를 쓰지 못한 것도 있지만, 몬스터들 사이에 섞여 있는 대형 몬스터들 때문이기도 했다.

"쉽지 않구나."

이번 전쟁의 승패는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되리라.

첫째,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형 몬스터를 처리하는지.

'대형 몬스터 문제는 어느 정도 처리됐다.'

며칠간 밤을 새워 가며 전술을 짠 결과 대형 몬스터에 최적화된 병진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그리고 이번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두 번째 요소.

아니,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스노우 킹을 얼마나 묶어 둘 수 있는지였다.

'죽이는 것은 현재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대한 놈을 묶어 둬야 하는데....'

스노우 킹을 떠올린 카덴 공작의 낯빛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내가… 놈을 묶어 둘 수 있을지.'

현 제국 내에서 그나마 스노우 킹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었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제국은 끝이군.'

무거운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렇게 신중한 얼굴로 지도만을 노려보고 있을 때.

흠칫!

카덴 공작이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건?!"

그의 시선이 막사 밖을 향했다.

'뭐냐! 대체 뭐가 오고 있는 거냐?!'

실로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1티어인 자신이 기운을 느낀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

카덴 공작은 빠르게 검을 집어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 정도의 기운이라면.'

1티어인 자신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할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스노우 킹!'

검을 챙겨 든 카덴 공작이 빠르게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웅성거림.

진영 전체가 술렁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거기서 카덴 공작은 이상함을 느꼈다.

'…비명이 없다?'

만약 스노우 킹이 쳐들어온 것이라면, 비명과 고함이 난무해야 했다.

하지만 술렁거림이 있을지언정 공포에 젖은 비명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머릿속에 생겨난 의아함을 뒤로하고 카덴 공작은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둥그렇게 모여 있는 병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게 뭐냐?"

"샤벨 타이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큰데?"

"허… 어마어마하군."

수군거리는 병사들 너머에서 느껴지는 무언가.

카덴 공작이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어? 사, 사령관 각하!"

"사령관 각하시다! 비켜라!"

카덴 공작을 알아본 이들이 비켜섰다.

곧 그는 병사들에 둘러싸인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윤이 나는 흰 털과 거대한 앞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음에도 그 높이가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신장.

크릉-.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괴물이 카덴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쭈뼛-.

황금빛 호안(虎眼)을 마주한 순간 카덴 공작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검 자루 위로 올라갔다.

단지 눈빛만으로도 카덴 공작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꿀꺽-.

카덴 공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는 그 순간.

"진정해."

괴물의 북슬북슬한 목덜미에서 하얀 손이 삐죽 튀어나와 털을 쓸었다.

곧 털 사이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존재.

"괜찮아. 적이 아니야."

몸을 일으킨 이는 금발·적안의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진정시키고는 카덴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카덴 도윌슨 공작님이신가요?"

"…그렇다. 그대는...?"

"사무엘 후작이 이리로 가면 된다던데? 혹시 얘기 못 들으셨어요?"

"설마?!"

소녀의 말에 카덴 공작의 뇌리로 며칠 전 사무엘 후작에게서 온 전언이 떠올랐다.

[스노우 킹을 처리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공작 각하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저 헛소리라 치부하고 지나쳤다.

제국 최고의 실력자인 자신도 스노우 킹의 상대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판국에 스노우 킹을 처리할 사람이 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이후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사실이었구나!'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스노우 킹을 처리할 존재가.

정확히는 사람이 아닌 짐승의 형상을 한 괴물이었지만.

'됐다!'

카덴 공작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저 괴물이 스노우 킹 못지않은 존재라는 걸.

저 괴물이라면 충분히 스노우 킹을 몰아세울 수 있을 거라고.

'이길 수 있다!'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떤 공작이 미소를 머금고 시선을 위로 돌렸다.

괴물의 목덜미 위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미소녀.

공작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들었다. 그대들이었군. 사무엘 후작이 보낸다는 최고의 패가."

"맞아요!"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공작의 물음에 소녀가 웃으며 답했다.

"아, 자기 소개를 까먹었네요."

소녀가 괴물의 등 뒤에서 몸을 날렸다.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그녀는 살짝 코트를 잡고 허리를 숙였다.

완벽하게 몸에 밴 귀족 가문 영애의 인사법이었다.

"인사드립니다. 트루건 가문의 차기 가주 라비나라고 합니다. 아! 제가 좀 동안이기는 하지만, 올해로 스물셋입니다!"

자주 나이를 가지고 해명해야 했던 듯, 라비나는 재빨리 자신의 나이를 덧붙였다.

"허...."

어려 보이는 소녀가 차기 가주란 소리에 한 번 놀라고, 나이가 스물셋이란 소리에 또 한 번 놀란 카덴 공작.

그런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어 준 라비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 친구의 이름은...."

손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털의 촉감을 즐기며 라비나가 말했다.

"나비예요."

-크릉!

라비나의 소개에 성체가 된 나비가 길게 콧김을 뿜었다.

* * *

그로부터 반나절 뒤.

겨울 대륙 동부, 전신의 교단.

"흐흥."

로이스는 긴 탁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온 타니아가 헤실헤실 웃으며 물었다.

마치 지금이 기회라는 듯 눈을 빛내며.

"로이스 오빠,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있지."

"뭔데요?"

"일이 잘 풀리는 게 좋은 일이지."

모든 게 척척 알아서 진행되고 있었다.

몹 몰이에 신난 쌍둥이가 열심히 스노우 킹을 제국으로 몰고 있었고, 제국은 우왕좌왕이었다.

아마 이번 일만 잘 풀리면 곧 스노우 킹 군단이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리라.

그렇게 되면....

'마무리에 들어가야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로이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니 타니아가 또 헤실헤실 웃으며 로이스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헤헤, 오빠가 기분 좋으니 저도 기분 좋아요."

그러면서 로이스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얹는 타니아.

하지만 그녀의 머리가 어깨에 닿기 전 로이스의 손가락이 그녀의 옆통수를 밀어냈다.

"까분다. 그리고 너… 호칭 똑바로 못해?"

"…칫."

로이스의 철벽 수비에 타니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를 본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 이게 틈만 나면 오빠 오빠 거리네.'

평소에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자신이 기분 좋아 보인다 싶으면 은근슬쩍 호칭을 변경하는 타니아였다.

'여우네 여우.'

자신을 흘겨보는 로이스의 시선에 타니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천 년 묵은 구미호처럼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으니.

'로이스 오빠, 처음이 어렵지 자주 듣다 보면 익숙해지는 거랍니다!'

지금도 봐라.

처음에는 오빠 소리가 나오면 칼같이 지적하던 로이스의 반응이 이제는 조금 늦어지지 않았던가.

거기서 타니아는 희망을 엿보았다.

'앞으로도 선생님 기분 좋을 때 열심히 공략해 봐야지!'

그녀는 속으로 굳은 의지를 다졌다.

그런 동생의 집념이자 집착을 지켜보고 있던 켄드릭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사이 로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타니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슬슬 놈들이 붙었을 거니까, 가서 좀 보고 오려고."

"저도 같이 가요!"

"선생님, 저도 데려가 주십쇼!"

"됐어. 금방 끝날 거니까 너희는 여기 있어."

"우우… 너무해요."

"알겠습니다...."

"핀, 너는 여기서 얘들 어디 가서 딴짓하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 파브로 오면 나 나갔다고 말해."

"네, 로이스 님!"

"저희가 무슨 앤가요!"

"맞습니다! 저희도 다 컸습니다!"

"자면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울지나 말고 그런 소리 해, 오빠."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어제 잠꼬대로 그런 소리를 하기는 했지."

"…진짜? 내가?"

"응."

"거짓말!"

"응, 거짓말이야."

"…죽인다!"

로이스가 떼 놓고 간다고 투덜거리던 불꽃 남매는 이내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했다.

"나 갔다 온다!"

"다녀오세요!"

핀의 배웅을 받으며 로이스는 곧장 공간 이동을 펼쳤다.

그와 함께 로이스의 신형이 공간을 넘어, 도미넌트 제국의 3차 저지선 상공에 나타났다.

그는 발밑의 상황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오? 제시간에 맞춰 왔네."

발아래에서는 스노우 킹 군단과 제국군이 충돌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이스는 제국의 진영을 보며 감탄했다.

"이야, 준비 많이 했네."

단순히 진영을 한 번 살피는 것만으로도 로이스는 알 수 있었다.

제국의 진영이 9만의 병력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켜 충돌의 여파를 줄이는 구성이란 걸.

거기에....

"일부 병력을 빼서 특공대식으로 만든 건가?"

아마도 특공대의 목적은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거겠지.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머리 많이 썼네."

제국 측에 나름 유능한 전술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서 밀리면 뒤는 벼랑 끝이니 사활을 걸만 하지.'

제국 측의 준비와 전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로이스는 여유로웠다.

그는 믿고 있었다.

"못생긴 왕돼지를 처리하지 못하면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자신으로 인해 초월기까지 발이 묶인 상황에서 단순히 저 병력만으로 스노우 킹을 상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 저지선만 넘기면 바로 제도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몹 몰이의 끝이 보이니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졌다.

로이스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제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누가 내 물건에 손을 대래?'

그는 다짐했다.

이번 기회에 제국의 골수까지 탈탈 털어 버리겠다고.

그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오오! 시작한다!"

제국의 운명을 건 마지막 승부.

그것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와아아아!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거센 함성을 내지르는 병사들.

그리고 이에 마주해 달려가는 몬스터 군단.

이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로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막 몬스터 대군이 그대로 제국군을 덮치려는 찰나 제국 진영에서 새하얀 점이 움직였다.

로이스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뭐야… 저 털 뭉치는?"

높은 상공에서 내려다봐서 털 뭉치지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보다 큰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리고 털 뭉치를 인지한 순간 로이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웅- 웅-.

'이건...?'

오래전에 묶어 둔 계약이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어서 빨리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여기에 있다고.

영혼이 보내오는 감각.

이를 느낀 로이스의 입에서 털 뭉치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설마 나비?"

로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녀석이 여기 왜 있어?!'

과거 트루건 가문에 위탁했던 나비.

안 그래도 겨울 대륙에 와서 나중에 트루건 가문을 찾아가려 했건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비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비를 바라보던 로이스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이거 설마....'

족히 탑티어 상급은 될 것 같은 기세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광뇌호! 진화에 성공했구나!"

하지만 감탄만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몬스터 군단을 지나 빠르게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나비의 목표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노우 킹을 노리고 있다!'

아무리 스노우 킹이라고 해도 광뇌호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저 녀석이 여기 있다면… 라비나도 분명히 같이 있을 거다!'

수왕 라비나.

그녀의 서포트를 받는 광뇌호는 단시간이나마 광룡과 '맞짱'을 뜰 만한 존재였다.

스노우 킹의 목덜미가 뜯겨 나가는 것도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스노우 킹 군단의 진격은 여기서 막히게 되는 거였다.

로이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다급해진 로이스.

그가 오래전 뇌호와 묶었던 '링크'를 활성화하며 의념을 보냈다.

[나비, 멈춰!]

189화. 뚠뚠이 (3)

겨울 대륙에는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 온 명문 귀족 가문이 몇몇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덤 왕국에 자리한 트루건 후작 가문은 겨울 대륙 사람들에게 꽤 유명했다.

가문 대대로 경지 높은 드루이드 법사들을 배출한 명문가.

영수와 계약을 맺고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는 트루건 가문은 드루이드를 꿈꾸는 이들에게 성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트루건 가문에 신동이라 불리는 이가 태어났으니.

그게 바로 트루건 가문의 무남독녀, 라비나 트루건이었다.

대대로 정신 속성을 타고나는 트루건 가문에 목 속성까지 지니고 태어난 라비나.

그녀는 2중 속성을 타고난 걸로도 모자라 경악스러운 친화력으로 갓난아이 시절부터 뭇 영수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일찌감치 드루이드로서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며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라비나.

그녀가 무럭무럭 자라나 13세가 되던 해.

가주는 딸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며 말했다.

"이제 너도 인사를 드릴 때가 됐구나."

"인사요? 근데… 아빠, 여긴… 금지잖아요?"

아버지의 손을 잡은 라비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말이 금지이지 이곳에 관한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트루건 가문의 금지.

그곳에 짐승의 왕이 기거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듣고 자란 소문.

그리고 그날… 라비나는 소문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크르륵-.

가문의 금지에 기거하고 있다는 짐승의 왕은 거대한 호랑이였다.

일반적인 호랑이의 몇 배에 달하는 체구.

하지만 그런 몸집보다 라비나를 사로잡은 것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격이었다.

덜덜덜-.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빛 동공에 어린 라비나의 육신은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아아아....'

어린 시절부터 영수들과 지내며 수많은 존재감을 몸소 느껴 본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달라… 이건...!'

눈앞의 거대한 호랑이가 고작 영수 따위가 아니란 것을.

그녀는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화, 환수! 아빠, 저거 환수죠!"

크릉-.

'저거'라는 소리에 호랑이가 불편한 소리를 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비나는 흥분해 떠들었다.

"책에서 본 적 있어요! 뇌호가 진화한 환수… 광뇌호! 그쵸? 광뇌호 맞죠?!"

가문이 오랫동안 집필한 영수·환수 서열 도감의 가장 상단.

그곳에 당당히 기재된 최강의 환수 광뇌호가 가문의 금지에 있었다는 사실에 라비나는 극도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볼을 발갛게 물들인 딸을 보며 가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광뇌호란다."

"와! 어떻게… 어떻게 광뇌호가!"

"그리고 라비나, 말을 조심하거라."

"네?"

"나비 님께서 지켜보고 계시지 않으냐."

아버지의 말에 라비나는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금빛 눈동자에 라비나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두려움과 반대로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나비요...? 아니, 누가 그런 이름을! 지상 최강의 환수 광뇌호한테 나비가 뭐예요?! 좀 더 멋지고 웅장한 이름을 지어 줬어야지!"

광분해 날뛰는 딸을 보며 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라비나를 향해 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퍽-.

"악!"

라비나가 얼얼한 느낌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녀의 머리를 때린 것은 다름 아닌 광뇌호의 꼬리.

딸이 맞았음에도 가주는 위로해 주기는커녕 대차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 그러게 말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우...."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라비나는 살랑거리는 흰 꼬리를 노려보았다.

가주가 미소를 머금고 딸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나비라는 이름도 저분에게는 소중한 이름이란다. 나비 님의 주인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지."

아버지의 이야기에 라비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요...? 저 광뇌호… 아니, 나비 님은 우리 트루건 가문의 환수가 아닌 건가요?"

"그렇단다. 250년 전, 너의 먼 선조이신 제이콥 님께서 오래전 어린 나비 님과 가문으로 돌아오셨지. 제이콥 님께서 유지를 남기시길, 훗날 나비 님의 주인께서 찾아올 터이니 정성을 다해 모시라고 했단다."

"왜요?"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단다."

"와… 그래서 은혜 갚자고 250년 동안 나비 님을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거네요? 그 정도면 충분히 은혜 갚은 거 아닌가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다."

"네?"

"지난 250년간 가문의 영지 내에서 다른 영수들이 폭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다. 그게 다 나비 님 덕분이지. 우리가 나비 님을 모시는 만큼 나비 님도 우리 트루건 가문에 도움을 주고 계시는 거란다."

"아!"

라비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럴 만했다.

뭇짐승의 제왕이라 칭해지는 광뇌호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느 영수가 이 땅에서 기를 펴고 날뛰겠는가.

영수가 폭주하면 그 계약자에게까지 큰 영향이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나비가 터를 잡은 트루건 영지만큼 드루이드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었다.

"와아...."

라비나는 시큰둥하게 엎드려 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환수… 광뇌호.'

최고의 드루이드라고 하던 트루건 가문의 시조조차 넘보지 못한 최강의 환수.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넘길 드루이드가 어디 있겠는가.

라비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주인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했다.

250년간 찾지 않은 주인보다는 옆에서 보살펴 주는 자신이 낫지 않을까?

만약 광뇌호의 마음을 얻게 된다면....

'내가 바로 광뇌호의 주인이 되는 거야!'

어린 라비나의 마음속에 열망이 타올랐다.

눈을 초롱초롱 빛낸 라비나가 나비를 향해 다가가 가볍게 미소를 보냈다.

"저기요, 나비 님?"

크릉-.

라비나의 부름에 나비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지만, 라비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친구 할래요? 제가 잘해 드릴게요."

퍽-.

라비나의 첫 접선 시도는 다시금 날아온 흰 꼬리가 손을 쳐 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라비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뒤로 뻔질나게 금지를 드나들기 시작한 라비나.

높은 친화력과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바탕으로 그녀는 나비를 공략해 갔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겨울 대륙의 전장.

"나비, 가자!"

처음 나비는 몸을 만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나비한테 반말을 한다?

처음 말을 놓았다가 꼬리 몽둥이에 두들겨 맞았다지?

나비의 등 뒤에 타는 일?

미치지 않고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친근하게 광뇌호의 이름을 불렀고 녀석의 등에 몸을 실었다.

지난 10년간 쌓아 올린 나비와 라비나의 유대감이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타탁-.

라비나를 등에 태운 나비가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리는 엄청난 속도였지만, 라비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속도는 나비가 자신을 배려해 일부러 조절한 것임을.

만약 나비가 마음먹고 달린다면 자신은 진작에 등에서 떨어졌으리라.

라비나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수만의 몬스터 대군이 밀려들고 있는 상황.

그 너머에 스노우 킹이란 괴물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위험천만한 곳으로 홀로 뛰어 들어감에도 라비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되레 희열했다.

'이게 환수 광뇌호!'

나비와 함께 달리는 라비나는 마치 자신이 세상의 제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비와 함께라면… 세상에서 우리를 막을 존재는 없어!'

탑티어의 괴물이라 불리는 오크 로드조차 일격이면 충분하리라.

라비나가 고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비! 얼른 끝내고 돈 받아서 집에 가자!"

-크릉?

"당연히 네 간식도 사서 가야지!"

-크앙!

"가즈아아!"

간식이라는 소리에 나비의 눈이 빛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흥분된 마음으로 몬스터 대군에 뛰어들려는 찰나.

[나비, 멈춰!]

-...?!

즈즈그그극-.

나비는 자신에게만 들려온 목소리에 급히 멈춰 섰다.

그 탓에 나비가 미끄러져 온 곳으로 긴 흔적이 남았다.

"우, 우왁!"

갑작스러운 제동으로 떨어질 뻔한 라비나는 겨우 털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런 라비나의 시야에 쉼 없이 흔들리고 있는 나비의 동공이 들어왔다.

'나비?'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비의 굳은 얼굴.

그리고.

[나비, 이리 와.]

나비는 자신이 들은 것이 단순히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뇌리에 울리는 영혼의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우와아악!"

라비나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그대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 나비!"

대롱대롱 매달린 라비나는 어떻게든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악착같이 매달려야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전장을 이탈한 나비와 라비나.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카덴 공작.

"저, 저, 저?!"

준비했던 비장의 한 수가 바로 눈앞에서 훨훨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새카맣게 몰려드는 몬스터 군단이 카덴 공작의 시야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젠장! 전군 충격에 대비하라!"

이를 악물고 고함을 내지르는 카덴 공작의 얼굴에 참담함이 서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