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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푸르릉.

번쩍이는 판금 갑주를 걸친 군마가 거칠게 투레질했다. 하루 동안 준비를 마친 일행은 동틀녘에 제2 방어선을 떠났다.

일행이 디딘 길은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었다.

그 말인즉, 어제 회의에서 임무를 속행하기로 결론이 났다는 뜻이었다.

덜커덩. 덜커덩.

일행의 짐은 지금까지에 비해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말에 각자의 짐을 실었을 뿐 아니라, 수레까지 두 대나 동원될 정도.

그만큼 속도는 더뎌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스트라 요새의 함락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방금 떠난 요새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렇게 몇 시간이나 균열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육포를 씹는 댈런에게 마우그가 느리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댈런 경."

중년의 성기사가 조용히 말했다. 댈런은 수통의 물로 입안에 남은 육포를 삼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경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임무는 계속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갔겠지. 말했잖소."

마우그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그 발언이 진심이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태양은 균열의 절벽 너머로 고개를 빼꼼 드러내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아렸다. 댈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어제 있었던 회의를 떠올려봤다.

회의실에서 임무의 향방을 놓고 투표를 한 것도 딱 이맘때쯤이었지.

불편한 침묵이 감돌던 회의실 공기 속에서, 댈런은 가장 먼저 손을 들었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리 말해두겠소. 다들 안 가더라도 나는 갈 것이오.'

무심한 얼굴로 툭 뱉었던 말.

홀로 균열에 들어가겠다는 선언 치고 너무나 가벼운 어조여서,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째서 그러시려는 거죠?'

그리고 그 조금 이후, 끊임없이 임무 중지를 주장했던 피드나가 그를 쏘아붙였다.

'어차피 나는 의뢰를 받은 용병일 뿐이니, 의뢰가 무산되고 나면 어딜 가든 내 자유지.'

'지금 균열 안으로 들어가면 마물 군대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개죽음을 원하신다면, 기사단의 보물인 성검은 반납하고 가시죠.'

피드나의 힐난에 회의실 분위기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기사단의 정예인 심문관이라지만, 성검의 주인인 댈런을 상대로 선을 넘은 소지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댈런은 그런 말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뚱한 눈으로 피드나를 마주 봤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 돌아가면 피할 수 있나?'

'적어도 충분한 준비 끝에 싸울 수 있겠죠.'

'그리고 균열의 마물들에게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겠지. 언제부터 성기사단이 악마와 마물들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겁쟁이들을 기사로 들여왔는지 모르겠군.'

낮은 비웃음. 그리고 발작하듯 일어난 심문관.

고위 기사 마우그는 순식간에 험악해진 회의실의 분위기를 중재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그리고 이어진 투표에서,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임무 속행에 손을 들었다.

그게 성검이 택한 전사의 의견을 존중해서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전략적인 판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정말로 신의 뜻을 헤아렸거나, 아니면 웬 이방인 전사의 도발에 그냥 욱하는 마음에서였을지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되었으니 상관없지.'

두 마법사를 포함해 나머지 성기사들까지 전부 찬성표를 던지니, 심문관 피드나도 끝에는 마지못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매한 만장일치로 임무 속행이 결정된 결과, 일행은 지금처럼 균열 안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피드나 심문관은 빠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함께 가는군.'

사실 출발하기 직전, 마우그는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고 한 번 더 선언했었다.

일행의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기사단의 고급 전력이었고,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임무가 반쯤 자살행위인 것 역시 맞았으니까.

그럼에도 끝끝내 혼자서는 돌아가지 않는 걸 보면, 성기사들에게 명예가 중요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안정화에 시간이 좀 걸리시는군요."

그때 마우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댈런의 왼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곳곳에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한 손등. 그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신성 문신.

완전히 안정화가 된 이후의 신성 문신은, 피부와 동화되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허나 어깨에 새긴 다른 두 개와 달리, 손등의 신성 문신은 그 안정화에 시간이 꽤 걸리고 있었다.

"하긴, 성기사들 중에도 흔히 새기는 문신은 아니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만큼 조건이 까다롭고, 사용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문신이니까요."

"그렇게 보기만 해도 뭔지 아시오?"

"물론입니다. 신성 문신을 새길 권능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지만, 새 문신을 연구하고 옛 문신을 계량하는 작업에는 저 같은 고위 성기사들도 많이들 참여하는 편입니다."

마우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댈런 경께서 손등에 새기신 문신은 기적을 사용하기 위한 촉매 아닙니까?"

타락기사(2)

"생각할수록 대단하군요.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셨을 뿐 아니라, 신께 기적까지 하사받으셨다니.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기적을 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직이오."

"역시. 경이라면 그런 상위급의 기적을···예?"

마우그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거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네.

"아직 기적을 받지는 못했소."

"···기적을 받지도 않으셨으면서, 기적을 사용하기 위한 문신을 새기신 겁니까?"

"뭐 문제라도 있소?"

여상스런 대답에 마우그의 눈에 혼란이 어렸다.

사실 보통이라면 문제가 있긴 했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나 전투 중에 기적을 하사받는 게 먼저고, 그 기적을 사용하기 위해 문신을 차후에 새기는 게 맞았으니까.

애당초 신이 기적을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전체 성기사 중 기적을 내려받은 성기사의 비율은 많이 쳐줘야 5퍼센트 정도.

언제나 기도와 수행으로 심신을 갈고닦는 성기사들도 그럴진대, 신성력 한 줌 없는 댈런이 문신을 미리 받는 행동은 상식보다는 비상식에 가까우리라.

물론 댈런의 상황은 좀 달랐다.

계승자 옵션으로 인해, 그는 기적마저도 스킬의 형태로 회수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균열 깊은 곳에는 성기사로 활동했던 시체가 몇 구 있는 만큼, 문신을 미리 받은 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아, 아닙니다. 문제라니요. 역시 성검의 주인이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였는데, 제 믿음 없음이 이렇게 또 드러나는군요."

당혹감에 빠져있던 마우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회개 모드로 돌아선 중년의 고위 기사를 두고, 댈런은 느긋하게 말을 몰며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재밌게도 그의 주변에는 뭔가 계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말이 참 많은 것 같았다.

신성 문신을 연구한다는 마우그나, 갈리오스 상단주인 상인 볼크마나.

'그러고 보면 저 노인장도 원래는 수다쟁이였지.'

앞서가는 펠버의 좁은 등을 보며, 댈런은 문득 생각했다.

진중한 인상이냐 좀 더 자유분방해진 느낌이냐의 차이지, 펠버 역시 말이 많은 건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성소에서 있었던 싸움 이후로, 이 원로 마법사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그마저도 단답이거나 그냥 웃어넘기는 경우가 잦았다.

'뭔가 변할 만한 사건이 있었군.'

댈런도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기는 했다.

성소에서 부단장에게 치명상을 입고 회복한 뒤, 펠버의 경지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는 것을.

아마 그 사건을 계기로 오랜 시간 막혀있던 자신만의 벽을 뚫어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말수가 준 건 그런 급격한 경지 상승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하긴, 당장 나만 봐도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니까.'

댈런은 뻐근한 어깨를 휘휘 풀며 생각했다.

요 근래 들어 어쩐지 몸이 미묘하게 삐걱대는 느낌이었다.

싸움을 할 때는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면 유독 부각되는 불편함.

'흠.'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용혈의 부작용 때문은 아니었다.

용혈의 재생 인자로 소진시키기에, 그의 체력 수치는 이미 너무 높았으니까.

아마 모래바람 왕조의 지하 유적 때처럼, 거대한 미로를 홀로 부수는 정도는 되어야 조금이라도 부담이 오리라.

'능력치의 균형 문제도 아니다. 근력과 체력이 다른 능력치보다 좀 많이 높기는 하지만, 그래도 두 능력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니까.'

댈런이 생각하기에, 이건 영역의 문제였다.

정확히는 영역 안에 담긴 힘이 너무 비대해서 생긴 문제.

지금까지 그가 습득한 스킬은 열이 훌쩍 넘어갔다.

개중에는 평범한 재능으로는 닿을 엄두도 낼 수 없는 C등급 이상도 여럿이었고.

심지어 그 스킬들이 하나씩 숙련도의 최고치를 찍어가며, 원래보다 더 큰 가능성의 힘에 닿는 중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여러가지 힘이 한 영역 안에 거하게 된 이상, 그릇에 담긴 힘의 총량이 막대하게 늘어나는 건 필연적.

'그 막대한 힘의 규모가, 내 몸에 부담을 주는 게 분명하다.'

영역이 그릇이라면, 육신은 그 그릇에 연결된 통로였다.

물론 영역의 힘을 사용한다 해서, 환상세계에 한계 없이 풀어진 가능성의 전부를 불러오는 게 아니긴 했다.

다만 원체 그 힘이 강력하다 보니, 얼마 전부터는 이 현실 세계로 표출되는 일부마저도 그의 몸에 무리를 가하게 된 상황.

'근력과 체력 수치가 일단 버텨주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담아낼 수 없는 힘이야.'

사실 이건 보통의 경우라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육신의 능력치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는 건, 현실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으니까.

원래라면 게임 캐릭터라도 적합한 능력치를 달성한 뒤, 제대로 된 스승이나 비급을 통해 이론을 익혀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게 스킬이다.

그마저도 낮은 등급에 해당하는 말이었고, 상위 등급 스킬들은 이론과 더불어 오랜 수련과 실전을 거쳐 가며 얻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지금은 어떠한가.

시체 한두 개 정도 회수하면 스킬 하나쯤은 얻어내는 게 일상이었다.

원래라면 함께 습득하기 극도로 어려워야 할, 서로 다른 학파의 주문들까지도 한 영역에 손쉽게 담아내고 있었고.

'온갖 힘이 잡탕으로 뒤섞이고, 거기에 원래보다 더 강해지기까지 하는데 부작용이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댈런은 그렇게 상념을 갈무리하며,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하다.

다만 어떤 대책을 세우냐에 따라 이 여정이 끝나고 취할 행보가 달라지는 만큼, 미리 생각을 정리해두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쫄깃한 식감 사이로 흘러나오는 육즙의 풍미를 즐기며,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경험했던 지식을 조용히 반추하기 시작했다.

***

제2 방어선에서 에스트라 요새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다만 보급품을 가득 실은 수레로 인해, 일행의 발걸음은 꽤 많이 느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사흘째 정오가 넘어갈 즈음, 그들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로군요."

몇 줄기로 피어오르는 회색빛 연기를 본 마우그가 중얼거렸다.

일행은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에스트라 요새를 온전히 눈에 담게 된 건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나서였다.

"신이시여······."

그리고 현장을 마주한 노년의 성기사, 차석 심문관 도메르는 깊이 탄식했다.

에스트라 요새는 완전히 함락된 상태였다.

곳곳이 무너진 성벽. 그 위의 부서진 대(對)마물용 수성병기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거멓게 죽은 피가 굳어있었고, 그 너머로는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뒤로 한 채, 성곽 바깥까지 점점이 흩어진 마물과 인간의 시체들 사이에서.

광택 없는 갑주를 차려입은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큼직한 바위 위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나 했지."

그가 말했다.

갑옷에 새겨졌던 성기사단의 문양은, 기이하게 비틀려 신을 모독하는 형상을 그려냈다.

강력한 치유 능력을 자랑하던 성검은 어디 두고, 바위에는 사람 키만 한 거대한 대검을 기대어둔 상태.

한때 성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에버로크 글라스덴은, 이질적인 빛이 꿈틀거리는 눈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일행의 비교적 뒤에 자리한, 남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전사를.

"내일까지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려 했다. 북방의 야만인."

놈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사악함이 뚝뚝 묻어나는 그 웃음을, 댈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신을 배반했군."

"흐. 배반?"

에버로크가 웃었다.

"난 지금도 신의 신실한 종복이다. 이전의 고리타분한 신이 아니라, 내게 끝없는 힘을 약속해주는 참된 신이 내 주인일 뿐이지."

츄릅. 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보통의 혀보다 몇 배는 길게 늘어나, 턱 밑까지 유연하게 내려오는 새빨간 혓바닥.

번뜩이는 눈에서 사특한 안광이 줄줄 흘러내리고, 당긴 입꼬리는 안면 근육을 기괴하게 뒤틀어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악귀의 얼굴처럼 보였다.

'기본적인 신체 구조마저 변이될 정도인가.'

이성을 유지한 채 저 정도로 신체가 뒤틀렸다면, 대체 악신의 힘을 얼만큼이나 몸에 받아낸 것인가.

사실상 하사받은 힘의 총량만을 따지면, 놈은 악마화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기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성기사들의 표정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쾅!

지면을 내려찍는 커다란 양날 도끼.

수백 킬로그램 무게의 추로 내려찍기라도 한 듯, 단단한 지면이 대번에 한 뼘 깊이 이상으로 움푹 파였다.

"타락한 배교자 같으니라고! 그래도 한때나마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자가, 어찌 더러운 악마의 피를 핏줄에 품을 수 있는가!"

양손도끼에 신성력을 한가득 둘러내며 도메르가 소리쳤다.

온몸에서 빛나는 신성 문신에, 노기사의 주변을 두르던 공기마저 함께 무거워지는 듯했다.

"요새가 함락됐는데도 불구하고, 왜 전령이나 하다못해 생존자라도 오지 않았나 했더니. 그게 당신 때문이었군요."

그 곁에서 고위 기사 마우그도 살짝 붉어진 얼굴로 검을 뽑아들었다.

"요새를 우회하는 비밀 통로는 극히 일부의 고위 성기사들에게만 알려져 있죠. 그걸 이용해 패퇴한 기사단의 퇴로를 가로막을 줄이야. 그래도 부단장의 자리에 있었던 당신인데, 이토록 빠르고 잔혹하게 등을 돌릴 줄은 몰랐습니다. 에버로크."

구우웅···.

수석 심문관에 고위 성기사의 기세가 더해진다.

보이지 않는 기운의 압박만으로도 지면의 작은 돌들이 파르르 떨렸다.

에버로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댈런을 계속 응시할 뿐.

"쯧.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군."

도메르는 짧게 혀를 찼다. 그는 왼손을 주먹쥐어 들어올리며, 등 뒤의 일행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선언했다.

"기사단 내부의 악을 척결하는 심문관 도메르 라이커스 외 4인은, 지금 이 시간부로 배교자 에버로크 글라스덴을 처단하겠소."

스르릉, 카강!

수석 심문관의 처형 선고에, 나머지 심문관들도 각자의 무기를 뽑아든다.

화르륵.

검신과 도끼날, 창끝에 일렁이는 백색 불꽃들.

악을 불태우는 단마의 백염을 마주한 에버로크는, 그제서야 시선을 노년의 기사에게 돌렸다.

"흐흐. 미안하지만 기사단장의 노리개 따위를 상대해줄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기이이이―

그 말과 동시에 공간이 왜곡됐다. 댈런은 잠시 눈을 의심했다.

저 멀리 있던 요새가 느닷없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에버로크가 서 있던 공간은 고무줄처럼 죽 늘어나며 요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

환각이나 착시가 아니다.

주문과 신비를 꿰뚫어보는 댈런의 시야는 눈앞의 비틀림이 마력의 결과물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공간을 뒤틀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무너진 요새의 폐허를 기점으로 작동해 에버로크의 몸을 그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

그리고 단순한 공간 전이가 아닌, 저 정도의 현실 왜곡이 필요한 것이라면.

'요새는 이미 악마의 힘에 물들었군.'

고도의 지능 수치가 순식간에 결론을 도출한다.

모니터 너머에서의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수천 가지 경우의 수를 눈앞의 현상에 빗대어보며 분석한 결과.

성기사단의 부단장 에버로크가 타락기사로 변모할 때면, 필연적으로 악신 라필렘의 힘을 하사받게 된다.

그리고 타락기사가 된 끝에 에스트라 요새를 점령한 경우에, 놈이 취하는 행보는 세 가지.

용이 이끄는 마물 군세의 거점으로 삼거나.

거대한 지옥문을 열어젖히거나.

'아니면 요새 자체를 라필렘의 환영궁전에 바치던가.'

꽈아앙!

판단을 마치자마자 지면이 폭발한다. 돌과 흙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폭심의 가운데서 흐릿한 그림자가 되어, 요새 쪽으로 쏘아진 전사의 신형.

꽈과과과광―!

짧은 순간 허공을 십수 번이나 디디며, 순식간에 음속에 가까워진 그의 몸이 타락기사와 그 사이의 간격을 순식간에 좁혀낸다.

'지금 저 현상은, 라필렘의 궁전이 강림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의 작용.'

그리고 라필렘의 이명 중 하나는 끝없는 변화와 뒤틀림의 악신인 만큼.

눈앞의 폐허가 그 환영궁전의 그림자라도 덮어썼다면, 이 인원으로 외부에서부터 그걸 파훼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나 안에서부터라면 가능하다.'

댈런은 확신했다. 아니, 그냥 알고 있었다.

일단 파고들기만 한다면.

저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따라들어가, 환영궁전의 그림자가 드리운 폐허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이후에 그가 취할 행보는, 이미 완벽한 공략법으로서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썩을···!'

허나 조금 늦었다.

블랙홀처럼 요새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공간의 뒤틀림은, 물리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바.

어느새 타락기사의 일그러진 신형은, 아음속에 다다른 댈런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그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꽈과과과―

찰나의 시간 속. 발끝으로 끊임없이 공간을 격한다.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전신의 근육과, 음속의 벽에 가까워지며 온몸에 부딪히는 공기의 저항.

그러나 극한으로 힘을 끌어올렸음에도, 저 휘어지는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펠버가 지팡이를 들어올린 건, 바로 그때였다.

타락기사(3)

쿨럭. 주문 직후에 어렴풋이 들리는 기침소리.

평범한 기침이 아닌 피를 토하는 듯한 소리였지만, 댈런은 무시하고 앞만 바라봤다.

오랜 한계를 돌파한 노년의 원로 마법사가,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걸 불사하고 힘을 썼다는 건.

땅의 기억을 읽어낸다는 영역의 능력을 통해, 그 역시 무언가 예견한 끝에 결단했다는 이야기니까.

우웅―

공간이 물결친다. 거대한 힘이 등 뒤에서부터 일대를 휩쓸었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감각 속, 눈앞에서 믿기 힘든 현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츠즈즈즈···.

블랙홀처럼 휘어진 채 빨려들어가며, 폐허가 된 요새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공간의 비틀림.

그 비틀림의 방향성이 순간적으로 뚝 멈추더니, 도리어 댈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

에버로크의 눈이 당혹감으로 커졌다.

펠버의 주문은 비틀린 공간에 이중으로 개입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빨려들어가던 공간은, 방금 전까지 밟아가던 궤적을 정확히 되짚어가며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광경.

댈런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파직!

찰나의 시간 끝. 주문이 힘을 잃었다.

역행하던 시간이 원래의 방향을 되찾고, 타락기사의 신형 역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펠버가 돌려낸 시간은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허나 댈런에게 필요했던 것 역시, 그 찰나가 전부.

그의 손이 흐릿해졌다.

꽈광!

단검이 연이은 소닉붐을 터뜨리며 날아간다.

타락기사의 신형을 집어삼키고 닫혀가는 공간의 왜곡에, 암월의 주문살해자가 충돌하며 마력을 한껏 뒤틀어낸다.

쩌적!

거의 닫혀버린 공간의 균열.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 한가운데 실낱같은 틈이 벌어졌다.

스릉―

반 박자 늦게 공간의 왜곡을 따라잡은 댈런은, 단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허리춤의 성검을 뽑아들었다.

펠버가 만들어준 잠깐의 시간.

주문살해자가 뚫어낸 손바닥만 한 틈.

번쩍이는 푸른 검신과, 그 검신에 휘감기는 회오리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말하는 듯했다.

꽈르르릉!

힘줄이 바짝 솟은 손아귀로 내려치는 검끝에서, 온몸의 근섬유 가닥가닥으로부터 힘이 모여든다.

필멸자의 육신에는 다 담아낼 수 없어, 영역이라는 소우주에 한 발을 걸친 초인적인 근력.

인간의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 힘이,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하며 그 틈을 찢어발긴다.

콰지지지직―!

마력과 마력이 충돌한다.

악신의 힘과 성검의 신성력이 맞부딪혔다.

두 힘이 격돌하며 발생한 거대한 폭풍은, 닫혀가던 공간을 다시 열어내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틈을 만들어냈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순간적으로 시야가 반전되며, 모든 감각이 뒤섞였다.

***

···

···

···

사위가 고요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발밑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지면이었다.

발을 들어 바닥을 꾹꾹 다져보던 댈런은 문득 눈치챘다.

방금까지 귓가를 울리던 소음들이, 한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을.

···

검끝에서 터져나오던 우렛소리도.

강철 같은 피부를 따갑게 스치던 바람의 저항도 없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공간에서, 댈런은 눈을 떴다.

···

그의 눈앞에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갖아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정글, 혹은 숲.

그러나 괴이하게 뒤틀린 식물의 줄기와 뿌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뿌리내리고 얽혀가며 사방을 빽뺵하게 채운 광경을.

결코 일반적인 숲이나 정글이라 말할 순 없을 테였다.

'들어왔군.'

그 환각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거미줄처럼 얽힌 줄기 사이사이로 붉은색의 덩굴, 진녹색 꽃, 푸른 열매들과 자줏빛 이끼가 뒤섞인 거대한 정글.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라필렘의 환영궁전. 그중에서도 가장 외곽 지대인 우묵함의 정원.'

정확히는 그 정원의 그림자가, 무너진 기사단의 요새 위에 덧씌워져 만들어진 일종의 던전이 바로 이곳이었다.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사람의 혼을 빼놓을 듯한 이질적인 풍경 안에서, 댈런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악신의 영역인 라필렘의 환영궁전은, 흔히들 지옥이라 부르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환상세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다섯 악신의 심상과 권능이 고스란히 녹아든 다섯 개의 소우주.

개중 하나인 환영궁전의 초입부가 바로 우묵함의 정원이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댈런의 주변을 둘러싼 정경은, 결코 그 지옥의 본체가 아니었다.

'그랬으면 뼈도 못 추렸겠지.'

실제 지옥의 악독함은 이곳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악마를 두들기고 용을 때려잡은 댈런마저도, 그곳에서는 몇 분도 못 가 영혼과 육신이 걸레짝이 될 테니까.

수많은 인간을 씹어삼키는 악마들이, 제 갈 길 잘 가다가도 문득 객사하곤 하는 장소가 바로 지옥.

수백이나 되는 댈런의 캐릭터들 중에서도, 진짜 지옥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본 건 열이 채 안 될 정도였다.

'지옥의 그림자를 현실에 강림시키는 사술은, 그 진짜 지옥의 겉모습과 일부 속성만 베껴서 현실 위에 결계처럼 덧씌우는 것.'

대충 지옥의 열화판 복사 버전을, 현실이라는 바탕화면 위에 붙여넣기 한다고 보면 되려나.

스스로도 실없는 비유라 생각하며 댈런은 천천히 성검의 힘을 끌어올렸다.

쿠르르릉.

벼락의 성검이라 불리는 토르타니스와, 심상 너머 영역에서 들려오는 우렛소리가 공명하기 시작한다.

더이상 손속을 봐줄 필요는 없다.

먼젓번의 싸움에서는 부단장이 회심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기에, 일격에 죽이지 않았던 것일 뿐.

하지만 수백 회차에 달하는 그의 경험에 따르면, 이 정도까지 타락한 부단장은 결코 기사단의 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러기엔 너무 멀리 걸어왔기 때문이겠지.

열 명의 흑마법사들 중 한 명만이 악마의 힘을 불러낼 수 있다면.

지옥의 그림자를 강림시키는 금술의 사용자는, 악마의 힘을 불러내는 백 명의 흑마법사 중에 많아야 한 명.

그만한 특권과 힘을 이 짧은 시간에 악신에게 내려받았다는 건, 그의 존재와 영혼 대부분을 그 대가로 저당잡혔다는 소리니까.

뿌드드드······.

성검에 깃든 힘을 끌어올리자, 거대한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미로가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꺼운 덩굴이 뱀처럼 스르르 움직이고, 사람만 한 꽃잎이 암술과 수술 사이에서 길쭉한 혀를 낼름거렸다.

이내 발밑의 바닥 역시 부르르 떨리더니, 수박만 한 눈을 차례차례 뜨기 시작했다.

끔뻑. 뒤룩.

주위를 살피더니 금세 댈런을 찾아낸 가지각색의 눈동자들.

성검의 존재를 눈치챈 지옥의 식물들이, 그 주인인 댈런을 향해 서서히 공격성을 띄기 시작한다.

꾸드드득.

성인 장정을 덮고도 남을 크기의 잎사귀가, 제 잎맥 위를 뾰족뾰족한 가시들로 뒤덮기 시작했고.

크흐으···.

수레만 한 열매는 길게 갈라진 틈을 뻐끔거리며, 그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푸쉬이이이―

성검의 기운에 자극 받은 이끼와 버섯들은 사방으로 독기를 뿜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독기가 아닌, 살이 썩고 내장이 뒤틀리게 만드는 역병의 기운.

사방에서 조여오는 살기와, 피부를 파고드는 역병을 느끼며 댈런은 낮게 웃었다.

치이이······.

살짝 벌린 입에서 뿜어지는 증기.

코와 귀, 눈과 피부 곳곳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공기를 농밀하게 뒤덮어가는 역병의 기운에, 용혈의 재생 인자가 반발하며 죽어가는 세포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

댈런은 가만히 성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발밑에서 끔뻑거리는 큼직한 눈 하나를, 그대로 검끝으로 내리찍었다.

***

――!

―――!!

하늘과 땅이 비명을 질렀다.

라필렘의 환영궁전.

그곳에서도 우묵함의 정원은 하늘과 땅마저 악신의 애완용 식물로 구성된 기괴한 장소.

이곳에 자생하는 모든 식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었기에, 개중 하나를 공격하는 건 그 모든 식물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공격했다는 이야기.

슈르르륵!

캬햐―!

가시 돋친 덩굴이 사방에서 댈런을 잡아채려 쏘아지고.

거대한 열매가 주둥이를 쩍 벌린 채, 먹잇감이자 침입자인 전사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 달려든다.

독액이 뭉글뭉글 솟아나는 가시와, 삼중으로 돋힌 이빨을 보고도 댈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며, 한껏 사나운 웃음을 지어보일 뿐.

그가 어째서 이곳을 알고 있는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공들여 육성했던 성기사 캐릭터를 잃은 뒤, 처음 접해보는 지옥의 파편을 공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던가.

그리고 그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던전 밑바닥에 잠들어있을 성기사의 시체는, 이 지옥을 깨부술 수 있다는 희망이자 목표가 되어주었고.

지옥의 기괴함에 대한 수십 시간의 공부는,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전략으로 그에게 힘을 더해주었으니까.

스가가각!

휘둘러낸 검끝. 파쇄검의 검풍이 몰아치며 수백 가닥의 덩굴을 단숨에 조각낸다.

꽈광! 꽝!

큼직한 나무의 줄기에 내딛는 발걸음은, 그 자체로 진각이 되어 나무에 돋아난 눈을 으깨며 육신을 강하게 띄워올렸다.

파지지지직!

허리춤에서 뽑혀나온 손도끼가 저 혼자 춤을 추며, 주인의 주변을 수호하듯이 다가오는 나뭇가지들을 번개로 지져버린다.

비산하는 검붉은 수액.

토막난 줄기와 으깨진 열매들.

검끝만이 아니라 손발이 닿는 모든 곳이, 무언가 으깨지거나 끊어지는 파괴의 현장이 되어간다.

그건 일견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광경이었으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열매의 색깔을 보고 품은 독액의 종류를 파악해, 독성이 강한 것은 멀리서 으깨고 그나마 약한 건 다가왔을 때 처리한다.

덩굴의 움직임을 계산해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패턴에 대입시키며, 적재적소에 날리는 뇌격으로 놈들이 큼직하게 구축하던 포위망을 뚫어낸다.

아무리 그림자라도 그 근원이 지옥 그 자체인 이상, 파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뿐만이 아니라 경험과 지혜 역시 필요했다.

그리고 끝없어 보이는 공세를 극복하며, 댈런은 느끼고 있었다.

그가 군대라도 집어삼킬 공세의 파도를 뚫어낼 때마다, 이전보다 더한 악의와 마력이 농밀하게 공기를 잠식하는 것을.

콰직!

덩굴이 끊어진다. 느껴지는 손맛이 질겼다.

뻐어어엉!

화염을 두른 발끝에 터져나가는 열매에, 이제는 이빨만이 아니라 뒤틀린 손발까지 돋아나 있었다.

죽이면 죽일수록 덤벼드는 식물들은 더 기괴하고 강력해진다.

마치 개미가 발버둥칠수록 개미지옥의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가듯, 그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지옥의 악의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현상.

사실 댈런은 알고 있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우묵함의 정원에서는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갈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깊은 밑바닥의 악의는, 종말이 닥친 세상에서 고위 기사의 자리를 꿰찬 성기사라도 버틸 수 없다는 것 역시도.

그렇기에.

"푸흐."

오히려 한껏 부풀어버린 기대감이 몸을 움직인다.

고위 기사의 시체가 있을 이 지옥의 끝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기대감.

그리고 그렇게 힘을 쌓아가는 여정에서, 어쩌면 이번 회차의 끝에는 종말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까지도.

사실 그림자라 해도 지옥의 편린을 부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종말 그 자체를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증명하는 게 아니겠는가.

성화의 불꽃을 품고도 가장 깊은 함정 속으로 빨려들어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 그의 성기사 캐릭터는 그 증명의 마지막 조각이 될 테였다.

스륵! 쉬이이익!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할 공간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덩굴과 가시의 파도 앞에서 검을 들어올렸다.

성검의 푸른 검신은 역병의 기운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빛났다.

식탐에 더해진 증오와 분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가운데.

쿠르르릉···.

내디딘 발걸음에서 울려퍼진 천둥이, 그대로 다리와 배를 타고 올라와 손끝에까지 다다르고.

번쩍―!

산맥 거인의 주먹과도 같이 덮쳐오는 이끼와 덩굴의 파도가, 한 줄기의 섬광 앞에 두 갈래로 쩍 갈라졌다.

콰과과과과―

섬광과 함께 몰아치는 힘의 폭풍.

전력을 다해 내지른 검격의 여파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빽빽하게 들어찬 식물들과 그 너머의 공간 자체를 일부분 일그러뜨렸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스며든다.

성검의 힘으로 부름받은 벼락이, 폐허 위에서부터 떨어져 거대한 결계의 천장에 구멍을 뚫어버렸기에 벌어진 일.

지금이라면 도약 스킬로 허공을 디뎌가며 이 지옥의 그림자를 탈출할 수 있었으나, 댈런은 그러지 않았다.

굳이 성검의 힘을 끌어올려가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지옥을 자극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저벅.

서서히 수복해가는 지옥의 식물들이, 곧장 덤벼들지 못하고 망설이며 만들어진 정적 한가운데.

거듭 강해지는 지옥의 압박을 정면으로 깨부수며 도달한, 우묵함의 정원 밑바닥에서.

[지옥 그림자의 밑바닥에서 성화를 밝혀낸 성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은 웅크려 엎드린 잿빛 시체의 형상 위로, 익숙한 알림창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지옥 그림자의 밑바닥에서 성화를 밝혀낸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감각 +1, 지능 +1, 마력 +1, 성화의 불씨(C)]

지옥의 그림자를 무너뜨릴 시간이었다.

타락기사(4)

에버로크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서 지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불 붙은 덩굴들이 몸을 뒤틀고, 매캐한 탄내에 꽃잎이 진액을 토해낸다.

뿌리와 나무 줄기 곳곳에 난 수십 개의 눈이, 자욱한 연기를 참지 못하고 끔뻑이며 피눈물을 흘려댔다.

화륵!

또 하나의 불덩이가 떨어진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불꽃 위에, 아지렁이처럼 덮여있는 기운은 분명한 신성력.

그것도 극소수의 고위 기사만이 하사받는다는 기적, 성화의 불씨에서 비롯된 신성력이었다.

캬아아아아!

불 붙은 열매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우묵함의 정원은 악신의 괴기한 식물들이 가득한 밀림과도 같은 곳.

그 근본이 식물이기에, 이곳에 서식하는 식물형 마물들이 불에 다소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물며 그 불에 성화의 신성력이 더해지고, 그런 불덩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면.

아무리 지옥의 그림자라 해도, 그 그림자를 지상에 붙들어맨 사악한 마력째로 타들어갈 수밖에.

"씨발! 라필렘이시여!"

배교한 성기사가 신을 찾는다.

그건 이전에 섬기던 신이 아닌, 새로이 받아들이게 된 악신의 이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불탄 끝에 역소환되는 지옥의 그림자 사이에서, 에버로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청린과의 거래에 따라 악신 라필렘에게 받아낸 힘은, 사라져가던 신성력을 대체하고 남을 정도로 강력했다.

팔다리의 근력은 거인에 버금갔고, 수명을 초월한 활력이 몸 깊은 곳에서 끝없이 샘솟는다.

아룡에 버금가는 재생력은 어지간한 중상도 순식간에 수복할 수 있었으며, 역병의 주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권능 역시 얻었다.

전쟁의 신을 열성적으로 섬기던, 젊을 적의 부단장 에버로크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려진 역량.

'고작 보름 만에 그런 힘을 얻게 되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란 말인가!'

기세를 몰아 청린의 군세를 이끌고 에스트라 요새를 점령한 것까지도 좋았다.

성기사단의 최전방 요새라는 상징성을 제단 삼고, 이곳에서 죽어간 성기사들을 제물 삼아 지옥의 그림자를 강림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림시킨 우묵함의 정원은, 에버로크 자신만의 강력한 요새였다.

단순히 침입자를 집어삼키는 함정일뿐 아니라, 그 자신의 힘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들어준 요새.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 생각했다.

그 요새가 한낱 야만인 전사의 손에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하찮은 야만인 새끼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다.

눈앞의 세상이 붉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지옥의 마력에 절여진 두뇌가,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콰작!

땅에 박혀있던 거대한 검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손으로 빨려들어가고.

"크아아아아!"

타락기사는 증오와 분노를 담아 소리지르며, 지옥의 그림자가 흩어져가는 공터 한가운데서 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저벅.

그러던 중 들려온 발소리에, 에버로크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너···!"

붉게 충혈된 눈에 비친 건, 역병의 기운에 걸레짝이 된 갑옷을 걸친 야만인 전사였다.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돌덩이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큰 키의 전사.

놈의 손에 들린 성검과, 무심하게 턱을 긁적이는 왼손에서 빛나는 신성 문신을 본 순간.

"크아아아아!"

에버로크는 더이상 판단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야수처럼 날뛰는 지옥 마력에 몸을 맡긴 채 달려든다.

까가가가강―!

찰나의 순간 수십 번의 격검이 이루어지며 튀어오르는 불티들 사이에서, 야만인 전사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뭔데 혼자 2페이즈로 넘어갔어?"

그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에, 분노가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에버로크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한다.

한 쪽은 푸른빛을 흘리는 성검이었고, 다른 한 쪽은 들것으로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길고 널찍한 양손검이었다.

찌르기와 베기, 폼멜로 찍고 가드로 걸어넘기는 검술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야성에 몸을 맡겨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십 년간 쌓아온 검술의 묘리가 녹아난 타락기사의 검.

댈런은 어렵지 않게 그 검격 하나하나를 받아내며 생각했다.

'뭔데 벌써 2페이즈냐.'

타락기사 에버로크 글라스덴은, 여타 보스몹들과 비슷하게 두 개의 페이즈로 구성되어 있었다.

악신의 힘을 얻어 강화된 신체를 기반으로, 성기사 시절 한평생을 쌓아온 검술을 마음껏 펼쳐보이는 게 첫 번째 페이즈.

그리고 아룡급 재생력을 자랑하는 육신에 상당량의 피해가 누적된 이후, 더이상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힘의 본성에 이끌려 짐승처럼 변하는 게 두 번째 페이즈였다.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는 좀 엉성한 광역기이니, 거기에 그만 한 타격을 입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짐작되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크아아악! 죽···어라! 야만인!"

"···너 이 정도로 유리멘탈이었냐?"

에버로크가 정신적인 데미지가, 페이즈를 그대로 넘길 정도로 강하게 누적되었다는 것.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놈이 악마 골라캅을 이용해 성검을 타락시키려던 계획부터, 내전으로 기사단을 혼란시키려는 시도까지 모두 자신에게 막혔다.

거기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강림시켰을 지옥의 그림자마저, 방금 전 동일한 사람에게 무너진 상황.

일생을 걸고 진행 중이던 작전들을 족족 방해하고서도, 정작 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털레털레 걸어나오는 걸 눈앞에서 본 기분은 어떨까.

'그 정도면 멘탈이 털려도 이상하지 않긴 해.'

댈런은 상념을 털어내며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이해가 간다 해서 손속을 가벼이 할 생각은 없다.

놈은 이미 수백의 희생자를 낸 악인.

그러고도 모자라, 아예 악신에게 제 영혼을 팔아버린 존재였기에.

까가가가―콱!

성검의 검의 가드 부분이 거검의 검신에 절묘하게 걸린다.

호흡과 호흡 사이의 틈을 파고든 기예에, 몰아치던 공세가 덜컥 멈춘다.

"크윽!"

댈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찰나에 뻗어낸 왼손으로, 타락기사의 갑옷 목덜미 부분을 잡아챈다.

"이그넬 로트."

화륵!

영창과 함께 갑옷을 잡아챈 손끝에서 치솟는 불길.

동시에 손등에 새겨진 신성 문신이 빛나고, 하늘 저편과 연결되는 기이한 느낌과 함께 그 불꽃에 강력한 신성력이 깃든다.

'성화의 불씨.'

성기사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C등급 스킬이자, 신성 문신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는 전쟁신의 기적.

악신의 마력과 상극인 그 불꽃에, 타락기사가 움찔하며 행동을 멈춘 사이.

떠어어엉―!

신성한 화염을 갑주처럼 둘러낸 무릎이 놈의 명치께를 찍어버리며, 그 몸뚱이를 공터 귀퉁이의 폐허 안쪽으로 처박아버린다.

콰르릉! 쿠르르르르!

포탄에 맞은 것처럼 에버로크 위에 와르르 무너지는 건물.

타락기사의 악마적인 육신이라도, 오 층짜리 요새 건물이 머리 위에서 무너지는데 멀쩡할 리는 없겠지.

다리를 감싼 화염 갑주를 해제하며, 댈런은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쳐다봤다.

끼에에에―!

흐에에엑! 캬하학!

기분 나쁜 비명을 지르는 덩굴과 꽃들. 그 끝에 연기처럼 흩어지며 역소환되는 지옥의 그림자.

마치 한겨울 창문에 서린 김이 닦여나가는 듯한 광경 너머로,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불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쿠르릉. 콰르르르···.

'상상 이상이군.'

스스로가 만들어낸 장면임에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성화의 비는 충분히 전율적인 광경이었다.

사실 성화의 불씨는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 강력한 스킬이 아니었다.

통제 하에 놓인 어떤 불이든, 성화로 바꿔낼 수 있다는 게 그 능력의 골자.

일반적으로는 기껏해야 성화가 붙은 횃불로 마물에게 겁을 주거나, 불화살에 성화를 담아 쏘아내는 게 전부인 기적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함께 배울 수 없는 스킬들을, 계승자 옵션을 통해 한 영역 안에 담아낸 댈런에게는 달랐다.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에 성화의 불씨를 깃들이면, 광범위한 지역에 성화의 폭우를 쏟아붓는 정신 나간 스킬이 되어버렸다.

데하만의 갑주격투로 빚어낸 화염 갑주 역시, 마물에게 치명적인 신성력을 한가득 머금은 공방일체의 갑옷이 되었고.

물론 한계는 있었다.

정확히는 스킬과 영역의 한계라기보다, 그걸 감당해내는 육신의 한계였지만.

"쿨럭."

목구멍에서부터 터져나오는 비릿한 혈향.

댈런은 입안 한가득 모인 죽은 피를 퉤 뱉으며 생각했다.

'대책이 필요하겠군.'

얼마 전부터 느낀 문제였다.

원래라면 일평생 노력해도 닿기 힘든 경지의 힘이, 한 사람의 영역 안에 뒤섞인 부작용이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은.

여러 힘이 서로 시너지를 내면서, 원래보다 더 강력한 결과물을 빚어내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강력한 힘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아직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육신에 막대한 부하를 가하는 현상마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영웅들 중에는 혈통의 힘을 다루는 동시에 검술의 달인이고, 성기사이면서 주문을 연구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뼈를 깎는 노력과 기나긴 수련으로 쌓아올려진, 인간의 것을 한 발짝 벗어난 육신과 심상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했던 일.

더불어 오랜 수행은 그들의 육신과 힘의 결을 동일하게 변화시켜냈기에, 아무리 강대한 힘이라도 큰 무리 없이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백 년씩 수행을 쌓아올릴 시간은 없다.'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근 몇 달간, 그는 대륙의 역사 이래로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시체를 회수하며, 거기서부터 수많은 힘을 한 영역에 우겨넣어 부작용이 생길 정도였으니.

그렇다고 이 길을 되돌리거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다가오는 종말은 세계 곳곳에 은둔한 초월자들도 막아내지 못한 재앙.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과 비슷한 속도, 혹은 그 이상의 속도로 강해져야지만 그 초월자들을 뛰어넘어 종말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쿠르르르.

소매로 입가의 피를 훔치는 사이, 무너진 건물 폐허에서 기괴하게 뒤틀린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에버로크였다.

"···아직도 안 뒈졌냐."

"크륵. 크르르."

반인반마가 신음을 흘렸다.

세 개의 팔. 네 개의 다리.

이마 한쪽에 길게 돋아난 뿔과, 그 뿔에 점점이 박힌 눈알들은 혐오감의 극치였다.

온몸에 수포가 부글거리는 가운데, 놈은 끈적한 진액으로 이어진 손가락을 들어 댈런을 가리켰다.

"이, 이교도 야만인. 죽···어···."

"지랄. 누가 누구한테 이교도냐."

댈런은 상념을 털어내고 검을 들었다.

튼튼한 육신을 만드는 건, 이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늦지 않는다.

"크아아아!"

입가에 노란 거품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반쯤 악마에 가까워진 타락기사를 향해.

꽈아앙―!

공터 바닥을 터뜨리며 날아간 댈런이, 번뜩이는 성검을 내리그었다.

***

본래 뛰어났던 검술을 악마 같은 힘으로 보완해낸 게 1 페이즈.

그리고 그 검술을 반쯤 잊은 채, 야성에 몸을 맡기고 달려드는 게 2 페이즈.

그렇다면 이제 사람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반인반마의 몰골이 된 에버로크의 상태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3 페이즈냐?'

모니터 너머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락기사의 모습을 관찰하며, 댈런은 휘둘러오는 길쭉한 팔에 성검을 가져다댔다.

"캬아아아아!"

반쯤 잘린 팔뚝에서 고름과 피가 흩뿌려진다.

잘려나간 상처는 순식간에 살이 차오르고, 단단한 딱지 같은 조직이 그 위를 덮어씌운다.

이제는 아룡마저 넘어선 재생력과 변이능력.

그러나 그 대가로 달인의 검술과 기민한 판단력은 이미 상실했고, 묵직하게 휘두르는 팔다리는 빠르기만 하지 정교함은 하나도 없다.

지금의 에버로크는 고강한 무예를 보존한 성기사가 아니라.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짐승 같은 마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캬하아아악!"

콰과과과과―

숨 한 번 들이쉴 시간 동안, 수십 번 내질러진 검격이 건물 하나를 버터처럼 잘라버린다.

댈런은 굳이 맞부딪혀주지 않았다.

그 대신 가볍게 허공을 밟으며 놈의 주변을 반 바퀴 돌아낸 그는, 연격이 끝나는 순간 반인반마가 된 타락기사에게 몸을 날렸다.

스각―

깔끔하게 양단되는 허리.

촤자자작!

곧장 터지는 끈적한 고름으로 다시금 붙어버리는 상흔.

쿠구구궁―

그러나 검로를 따라 터지는 분쇄의 폭풍이, 한 차례 회복된 타락기사의 몸을 안에서부터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끄아아아아!"

마치 내장에서 폭탄이 터진 듯, 반인반마의 피부가 안에서부터 꿀렁거린다.

떠나갈 듯한 비명과 함께, 타락기사가 검을 쥐지 않은 두 팔로 배와 가슴팍을 감싸고 몸부림쳤다.

놈의 몸뚱이 곳곳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안에서 밖으로 터져버리며 살점과 내장을 왈칵 쏟아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뿌드드득!

그 상흔 하나하나로부터, 곧장 새로운 팔다리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캬학! 캬아아아!"

한 다스가 넘는 팔과 다리가 몸 곳곳에 주렁주렁 달린 모양새.

그로테스크함에 눈살을 찌푸릴 새도 없이, 그 팔다리들이 제각각 수인을 맺어낸다.

콰자작!

빈 허공이 유리처럼 깨져나가고, 수인만으로 열린 지옥문의 파편에서 독을 품은 가시들이 쏟아져 나온다.

댈런은 곧장 성화의 갑주로 몸을 감쌌다.

지옥의 가시는 고열의 신성력으로 일렁이는 화염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그 갑주마저 뚫고 침투한 역병의 기운 역시, 댈런의 피부 위를 덮는 어떤 얇은 막에 가로막혀 소멸한다.

누더기가 된 갑옷의 어깨받이 너머로, 타는 듯 빛을 머금은 신성 문신이 드러났다.

단장에게 받은 신성 문신 중 하나.

역병 저항의 문신이었다.

"크아아아! 어떻게! 어떻게 신성력을 숨기고 있었지!"

가까스로 일말의 이성을 되찾은 걸까.

짐승과도 같은 소리로 울부짖는 에버로크를 향해, 댈런은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숨긴 게 아니라, 방금 얻은 거다."

"말도···안 되는, 크륵, 소리!"

믿기 싫으면 말던가. 댈런은 무덤덤한 눈으로 팔다리가 스무 개 가까이 달린 반인반마를 쳐다봤다.

"크륵. 크르르륵."

타락기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놈도 한계였다.

재생이 거듭될수록 육신에 대한 통제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악신에게 받은 힘이라 해도 무한한 건 아니었으니.

더군다나 놈의 힘을 증폭시켜주던 지옥의 그림자마저도, 성화의 비로 인해 거의 다 역소환된 상태였다.

"크아아아아아!"

타락기사가 달려들었다.

십수 개의 팔다리를 휘저으면서도,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댈런을 향해 이빨과 손톱을 들이댄다.

마지막 기회라는 걸 직감했는지, 온 힘을 쥐어짜 가하는 일격.

"후우."

댈런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깨 위로 들어올린 검을 가로로 눕혀 겨눴다.

"이그넬 로트."

화륵!

비검의 힘으로 성검 위에 불을 붙인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성화가 순식간에 검신을 집어삼켰다.

고강한 검술이나 기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피부를 찢어내는 타락기사의 손발톱을 무시한 채, 놈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찔러낼 뿐.

푸욱!

성검이 가슴팍을 꿰뚫는다.

두터운 검신에 타락기사의 심장이 반으로 쪼개진 순간이었다.

"끄힉! 꺽! 끄아아악······!"

뻐어어엉!

이미 한계에 다다랐던 악마의 피가, 성화의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반발하며 폭발했다.

후두두둑.

붉은 고깃덩이의 비가 쏟아진다.

허리 위가 사라진 타락기사의 하반신이 스르르 넘어갔다.

치이이이···.

놈의 손톱에 찢긴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가운데, 댈런은 지옥의 그림자가 말끔하게 걷혀나간 폐허의 참상을 둘러봤다.

흔한 배신자들의 최후가 그렇듯, 격렬한 싸움에 비해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서 있었을까.

"댈런! 댈런! 살아있는가!"

지옥의 그림자가 걷혀나간 폐허 안쪽으로, 엘가기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제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그를 찾아 들어왔다.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댈런을 발견한 펠버는, 근심 가득했던 얼굴을 활짝 펴며 그에게 다가왔다.

"댈런! 살아있었···쿨럭! 살아있었구만! 쿨럭! 컥!"

···노인장, 지금 날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용의 권속(1)

"노인장이야말로 괜찮소?"

"쿨럭! 괜찮네! 크흐흐, 나이가 드니 잔기침이 많아지는구먼. 쿨럭! 크흠!"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펠버.

댈런의 멀뚱한 시선을 뒤로 하고, 원로 마법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타락기사의 절반만 남은 몸뚱이를 향해 다가갔다.

"크흠, 쿨럭! 큼! 이게 에버로크의 시신인가?"

품이 넉넉한 로브 소매로 입을 가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제자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모습.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은데.'

피보라가 덮쳐온 뒤 둔감해진 후각.

그 사이로 새로운 혈향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피 묻은 소맷자락을 안 보이게 숨기고, 그마저도 간단한 주문으로 빠르게 세탁해냈지만 댈런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알아온 만큼, 펠버 역시 댈런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잘 알고 있을 테였다.

그럼에도 굳이 저렇게 딴청을 부리는 이유는 둘 중 하나일 터.

다른 이에게 약한 모습을 내보이기 싫은, 마탑의 한 축을 맡았다 할 수 있는 원로 마법사로서의 자존감이든가.

아니면 진심으로 댈런이 자신을 걱정하길 원하지 않는 것이겠지.

"재생이 한계에 달했구만. 신성력과 영역의 힘이 재생을 방해하기도 했고 말이야. 잔여 마력의 성질을 보아하니 이미 악마나 다름없어졌어."

지팡이 끝으로 시체를 쿡쿡 찔러보며 펠버가 말했다.

댈런은 얼굴의 핏자국을 대충 닦아내고 고개를 돌렸다.

성기사들이 한발 늦게 공터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댈런 경! 괜찮으십니까?"

"저건···설마 에버로크?"

"말도 안 되네. 한때 성기사였던 이가 저렇게까지 타락하다니!"

공터에 들어서자마자 머릿수만큼이나 가지각색인 반응들이 튀어나온다.

댈런은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나, 성기사들이 에버로크의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문관들은 곧바로 타락기사의 사체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뭔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연신 뱉어내는 답답한 신음과 탄성들.

성기사가 악신의 힘을 뒤집어쓰다 못해, 사실상 악마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타락도 아니고, 아예 악마화되는 건 찾아보기 힘든 일이긴 하지. 종말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드문 일도 아니지만.'

종말의 최후반부.

악신의 대대적인 침공이 슬그머니 전조를 드러낼 즈음에는, 고위 악마가 직접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잦았다.

그리고 고위 악마들 중에는 단순히 마물의 군세를 앞세워 인간 세력을 짓밟는 게 재미없다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온갖 은밀한 유혹을 통해, 인류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걸 즐겼다.

'에낙사구스나 라필렘 휘하의 악마들이 그런 놈들이 많지.'

고위 악마들, 혹은 대악마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필멸자는 많지 않다.

성기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철저한 훈련과 수행으로 단련되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신앙심이 상당히 깊지 않고서야 고위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었으니까.

"댈런 경,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마우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왔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상념을 털어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루쯤 쉬면 될 거요."

"다행입니다. 요새의 안전을 확보하고 임시 거점을 설치하는 동안, 못해도 하루 이상은 머무를 예정입니다.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죠."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우그는 문득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기적을 받으셨군요. 제 믿음이 부족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뭐야, 또 혼자 회개 모드야?

받았다기에는 뭔가 어폐가 좀 있긴 했지만, 댈런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런 신실한 성기사에게 괜히 혼란을 줘봐야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그는 그냥 피식 웃으며 왼손을 들어봤다.

손등 위의 신성 문신은 아직까지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삼각형 형태로 배치된 원 세 개, 그 사이를 꿰는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들.

세 개의 원을 중심으로 한 문양은, 얼핏 보면 대칭을 이루는 듯하면서도 자세히 살피면 조금씩 달랐다.

"전쟁의 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은 신성 문신을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죠. 기적의 사용을 성법구나 성유물에 의존하는 제국의 만신전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그쪽 사제들이 들으면 조금 기분 나쁠 말이겠군."

마우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쪽에서도 우리의 기적을 야만신을 섬기는 서리고원 너머 이교도들의 신앙 주술에 비교하곤 합니다. 둘 다 문신을 통해서 사용한다면서요."

"그렇소?"

댈런은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송곳니를 슬쩍 드러내며 웃었다.

그 사나운 미소를 마주한 고위 기사가, 뒤늦게 댈런의 덩치와 외견을 의식하고는 더듬거리며 두 손을 펼쳐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댈런 경의 고향을 비하할 의도는 결코 없었습니다."

"장난이오. 장난."

댈런은 낮게 웃었다. 가본 적도 없는 북방 서리고원.

그쪽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진짜 그곳 사람인 것 마냥 느껴질 지경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가게 되겠지.'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서리고원의 풍광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일 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 험지 너머에는, 놓치기 아까운 시체가 몇 구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궁에서 봤던 그 용병이 서리고원 남쪽의 차르국 출신이었지.'

루시아와 성검을 찾으러 가던 시절, 미궁도적 중 화약 병기를 쓰는 놈.

이름이 보리스였던가. 꽤나 완숙한 금패 용병이었던 놈의 용병패는, 아직까지도 그의 가방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 가방이 담긴 아공간 안에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좀 조용하다?'

[···성기사들 앞에서 절 부싯돌로 쓰실 생각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간만에 악마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때 반쪽짜리 시체를 만지작거리던 심문관들이 돌아왔다.

"댈런 경께서 처치하신 반인반마가 에버로크 글라스덴임이 확인되었소. 성검의 주인으로서 타락한 성기사를 단죄해주신 것에, 심문관들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오."

물론 임무가 끝난 뒤 합당한 보수를 약속드리겠소.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년의 성기사, 차석 심문관 도메르가 말했다.

"하지만 놈이 가지고 도망쳤던 성검 누미스라크와 균열 방벽의 열쇠는 찾을 수 없더군요."

심문관 피드나였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폐허가 된 요새를 둘러봤다.

"여기 어딘가에 숨겨놨을 수도 있으니, 생존자를 수색하면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죠."

***

일행은 에스트라 요새의 폐허에 야영지 겸 임시 거점을 꾸렸다.

성기사단의 최전방 방어선인 만큼, 에스트라 요새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상주병력만 이천이 넘어가고, 최대한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면 오천 명 이상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는 규모.

에스트라 강을 마주 보고 수 킬로미터 길이의 성벽이 이중으로 쌓여있는 이 웅장한 요새를, 소수의 인원으로 하루만에 수색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타닥. 타다닥.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목재를 모아 지핀 모닥불 앞.

큼직한 솥에는 고기와 곡물, 그리고 신선한 채소를 썰어넣은 스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오늘의 저녁 식사는 차석 심문관 도메르의 작품이었다.

루시아가 만든 것보다야 못했지만, 그래도 양과 질 모두 나쁘지 않았다.

균열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성기사들은 평균적으로 요리 실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타다닥. 탁.

댈런은 스튜가 담긴 나무 그릇을 입에 대고 조금씩 홀짝였다. 모닥불 앞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

성기사들은 빠르게 식사를 끝마친 뒤 생존자와 성검, 방벽 열쇠를 찾아 수색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펠버는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제자와 함께 그나마 멀쩡한 어느 건물 안에서 명상에 들어갔고.

때문에 한때 사람으로 북적거렸을 요새의 연병장에는, 이제 쓸쓸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폐허라면 으레 들려야 할 풀벌레 우는 소리나, 생쥐가 기어다니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지옥의 그림자가 덧씌워졌던 곳에, 섣불리 발을 들일 만큼 간 큰 생명은 없었기 때문.

지구에서나 이 대륙에서나 짐승은 인간보다 예민했다.

뭔가 불길함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라도 따로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 잡생각을 굴리던 댈런은 문득 중얼거렸다.

"야."

답은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불렀다.

"야. 악마 새끼."

[···네?]

"주인님 세 글자는 팔아먹었냐?"

[아, 아닙니다, 주인님!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심심해서."

영혼의 연결을 통해 악마가 약간 벙찐 표정이 되는 게 느껴졌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는 두 손을 등 뒤에 짚고 고개를 젖혔다.

두 절벽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 너머, 별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교차하는 두 줄기 은하수와, 지구의 한적한 시골에서 보던 것보다도 몇 배나 많은 별들의 반짝임.

"······."

몽글몽글 솟던 잡생각이, 별들의 반짝임과 모닥불의 춤사위 앞에서 차분하게 흩어져간다.

붉은 온기마저도 외롭게 느껴지는 침묵. 나쁘지 않았다.

초인의 감각과 지능 수치를 얻은 이래, 언제나 내외적으로 소음에 둘러싸인 신세였기에 고요함은 언제나 달가웠다.

댈런은 부지깽이로 불을 좀 쑤신 후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

이름 : 댈런

레벨 : 17

[근력 : 34] [기량 : 26] [체력 : 30]

[감각 : 22] [지능 : 24] [마력 : 23]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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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레벨.

기사단의 방어선을 습격하던 놀 군세를 박살내며 하나, 지옥의 그림자를 초토화시키고 타락기사 에버로크를 처치하며 또 하나가 올랐다.

추가 능력치는 지능과 마력에 하나씩 투자했다.

능력치의 불균형이 당장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좀 더 균형잡혀 있다면 영역의 힘을 보다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을 테였다.

스킬을 하나씩 확인해보며 숙련도의 변화까지 살펴본 댈런은, 상태창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켠 그가 말했다.

"야."

[넵, 주인님!]

"너 말고."

댈런은 픽 웃었다.

"거기 기둥 뒤에 숨어있는 놈."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반쯤 무너진 기둥 뒤에서, 그림자가 스르르 흘러내려 사람의 형체를 이뤘다.

"감이 좋네? 야만인."

응달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엘프였다.

뾰족한 귀. 갸름한 얼굴선. 또렷한 이목구비와 가늘고 길쭉길쭉한 팔다리.

동쪽 바다 너머에서 몇 년에 한 번 모습을 드러낸다는 엘프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댈런은 그녀의 잿빛 눈동자와 보라색 입술이, 바다 너머의 비교적 우호적인 엘프들과 명백히 다른 종족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댈런은 평소의 무감정한 얼굴로 엘프를 바라봤다. 그가 말했다.

"그림자 엘프군."

"역사에도 관심이 많나 봐? 야만인답지 않게."

엘프 여자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자신을 알아본 게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유려하게 휘어진 곡도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하시키루크의 딸, 탈라리나의 손녀, 그림자 엘프의 시조 멜브리데의 십칠대손, 타티아델라!"

마력이 서린 목소리가 폐허의 공터에 메아리쳤다.

어떤 주문이 담긴 목소리인지, 희미한 청회색 기운이 검신을 은은하게 덧씌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엘프의 눈이 신비한 빛으로 번뜩였다. 댈런은 말없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용신의 좌완 갑주 청린의 권속이며, 수정과 냉기의 힘을 받은 자, 응달의 감시자···!"

큰 소리로 외치던 엘프의 동공이 좁아졌다. 그녀에게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건 어떤 빛의 원반이었다.

밤하늘 아래, 모닥불의 불그스름한 일렁임을 부숨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뿌리며 날아오는 빛의 원반.

너무 빠르게, 또 너무 갑작스럽게 날아왔기에, 엘프의 감각으로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녀의 재주로는 저걸 피할 수 없었고.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온 빛의 원반은, 자신을 확실히 죽일 것이라는 사실.

쐐애―

그 순간.

까아앙!

어디선가 쏘아진 검은 선이, 그 원반에 적중하며 궤도를 비틀었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원반이 지나가는 걸 눈이 쫓지 못했다.

느껴진 건 목 오른쪽에서 화끈하게 퍼지는 통증과, 골반까지 덮던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머리가 약간 가벼워진 감각.

콰광! 쿠르르르···.

그리고 등 뒤에서 무언가 포탄에 맞은 듯,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뿐이었다.

야만인 전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한 놈이 더 있었군."

청린의 권속, 엘프 타티아델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미소였다.

용의 권속(2)

"그래. 여기 한 놈이 더 있지."

반쯤 폐허가 된 건물 창 안쪽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땅딸막한 난쟁이 하나가 창문을 넘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타닥.

착지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난쟁이가 뛰어내린 높이가 삼 층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난 저 쓸데없이 자기소개가 긴 귀쟁이 년처럼 그림자에 숨는 짓은 못해."

수염이 너저분한 난쟁이가 말했다.

"장인이자 전사인 내 자존심이 그런 짓을 용납하지도 않고."

그는 슬며시 웃으며 덧붙였다.

난쟁이의 키는 작았다. 댈런의 허리쯤도 못 되는 신장이었다.

소년 용병 파른과 비교해도 조금 작은 정도였지만, 동시에 놈의 굵직한 팔다리는 파른의 허리와 굵기가 맞먹었다.

촤르륵.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마찰하는 촘촘한 미늘 갑옷 위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굵직굵직한 근골의 굴곡.

아마 오크 전사와 힘을 겨루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테였다.

"끄응. 이놈이 성능은 참 기깔나는데, 들고 다니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니까."

난쟁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복잡한 모양의 쇠뇌를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쇠뇌는 거의 난쟁이의 몸만 한 크기였다. 심지어 놈의 무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등에는 얇은 사슬로 커다란 전투 망치를 매어두었고, 허리춤에는 권총 크기만 한 연발 쇠뇌가 달려있었다.

그밖에도 자잘한 무기들이 갑옷 위 여기저기 걸쳐져 있는 모습은, 전사라기보단 무기를 팔기 위해 몸소 나선 장인에 좀 더 가까워 보이는 모양새.

아마 저 장비들을 합치면 본인의 체중보다 배는 더 무겁지 않을까.

댈런이 난쟁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놈은 제 어깨 너머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방금 그건 무슨 주문인가? 생긴 건 손도끼처럼 보였는데, 위력은 무슨 제국군 대포에서 쏘아진 포탄 같군."

난쟁이의 시선은 피 흘리는 목을 감싸쥐고 주저앉은 엘프 너머, 연병장 한쪽 구석의 단층짜리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정확히는 건물이었던 잔해였다. 폭삭 내려앉은 잔해 위로, 뿌연 흙먼지가 푸스스 내려앉는다.

궤도가 비틀린 손도끼가 원래의 목표를 스쳐 지나가, 애꿎은 건물의 벽과 기둥을 부수며 완전히 무너뜨려버린 것.

난쟁이는 그 먼지투성이 잔해를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화약 병기라기에는 소리가 너무 없었고. 기관장치라기에는···글쎄, 정교함이 결여되었어. 그러고 보면 마력도 딱히 느껴지지 않았단 말이지. 주문이 아니라 혈통이나, 뭐 신성력 같은 건가?"

습관처럼 수염을 배배 꼬는 난쟁이.

댈런은 별 대답 없이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염 터럭을 두 번쯤 꼬아대던 난쟁이는, 뒤늦게 고개를 돌리고 댈런과 눈을 마주쳤다.

"······."

무덤덤한 시선. 동요 없는 침묵.

난쟁이는 수염 꼬던 손짓을 멈추고, 약간 초조하게 수염투성이 턱을 벅벅 긁었다.

"큼. 영업 비밀이라 이건가. 하긴, 나라도 누가 내 흑철복합궁(黑鐵複合弓)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하지 않을 거야. 설명해줘봤자 이해할 놈도 거의 없을 테지만."

난쟁이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쇠뇌를 도로 들어올렸다.

자기 몸만 한 크기의 쇠뇌임에도, 양손으로 들고 조준하기까지는 반 호흡조차 걸리지 않는다.

차르르르···철컥!

십수 개의 도르래와 복잡한 기관장치가 돌아가며, 저 혼자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장전했다.

틱. 투웅―!

가볍게 당긴 방아쇠에, 가볍지 않은 파괴력을 싣고 쏘아지는 화살.

쐐애애―!

예고 없는 사격이 날아온다.

나름 방심을 유도했다면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모닥불이 흔들거리는 공터의 어둠 속에서, 화살촉부터 깃까지 검은색인 화살은 하나의 검은 선처럼 보였으니까.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그 검은 선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이다.

물론 댈런은 드문 쪽에 속했다.

스으―

댈런은 손을 뻗었다. 길게 늘어진 시간감각.

그 속에서도 검은 선 수준으로 보이는 걸 보니, 놈이 가진 쇠뇌의 위력이 대단하긴 했다.

그는 검은 선의 중간쯤을 잡았다. 순간적으로 거센 저항이 느껴졌다.

무시하고 조금 더 힘을 주니, 손바닥 살갗이 조금 까지면서 광택 없는 검은 화살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음. 조금 따가운데. 댈런은 손아귀 안의 화살을 만지작거렸다.

화살촉부터 깃까지 통째로 무광 금속이었다. 심지어 화살대 중간중간에 날카로운 가시까지 돋아나 있었다.

"잡···아? 흑철 화살을?"

난쟁이가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거 어디서 본 광경이군.'

몇 달 전, 루시아와 미궁에 내려갔을 때였다. 미궁도적 중 한 놈도 이렇게 검게 칠한 화살을 날렸더랬지.

댈런은 그때 했던 것처럼 했다.

멍청한 얼굴의 난쟁이에게 화살을 되돌려준 것이다.

쐐애애―!

화살이 거꾸로 날아간다. 쇠뇌에서 쏘아진 것과 엇비슷한 속도였다.

다만 눈앞의 난쟁이는 미궁의 어벙한 탐험가들을 털어먹던 도적보다 좀 더 나았다.

화살을 잡아챈 댈런의 손이 흐릿해진 순간, 놈은 반사적으로 거대 쇠뇌를 방패 삼아 던져버린 것이다.

콰직!

커다란 석궁이 제 화살에 박살난다. 도르래와 줄들을 죄다 끊어지며, 금속과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난쟁이는 곧장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땅딸막한 몸뚱이가 이 층 높이까지 떠오른다.

제 몸의 몇 배 높이로 도약한 난쟁이는, 곧바로 등에서 전투망치를 끌러냈다.

"흐으으읍!"

기합과 함께 힘을 끌어모은다. 망치를 든 두 손에서 힘줄이 불끈 솟았다.

동시에 난쟁이의 이마에서 푸른 인장이 빛났다.

방어선을 침공한 놀 군세, 그 선두에서 발리스타 화살을 쳐내던 놀 전사와 같은 인장이었다.

댈런은 성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내면의 우렛소리가 검신을 타고 퍼져나간다.

집중된 감각 아래, 시간이 다시 한 번 느려졌다.

슬로우모션처럼 흘러가는 눈앞의 광경에, 망치머리의 뒤쪽에서 불꽃이 터져나오는 게 보였다.

댈런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시발, 제트엔진 망치냐? 그는 조금 당황한 채 성검을 가로로 그었다.

불을 뿜는 망치와 뇌성을 품은 성검이 충돌했다.

꽈릉···!

공터 한가운데서 우렛소리가 터져나왔다. 난쟁이는 댈런의 등 뒤로 수 미터쯤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그의 손에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망치가 들려있었다.

부서진 망치머리 안쪽에서 얇은 사슬과 크고작은 톱니들, 그리고 기름이 후드득 떨어졌다.

난쟁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를 잃었다면, 언제나 세 번째 수가 있는 법이었다.

"흐아아―"

기합과 함께 돌아서며 허리춤에서 소형 쇠뇌를 꺼내들자, 5연발 쇠뇌가 스스로 장전을 마치고 발사될 준비를 끝냈다.

"―칵?"

그리고 난쟁이 역시 끝이었다.

돌아선 건 상반신뿐이었다.

여전히 정면을 보는 허리 아래는, 홀로 비틀거리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위에 얹어져 있던 상반신도 저절로 굴러떨어졌다.

주르륵. 잘린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내장들.

무릎 꿇었던 허리 아래쪽 역시, 뒤늦게 힘을 잃고 철푸덕 넘어지며 창자를 쏟아낸다.

"끄으. 끄흐으으······."

피가 빠져나간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쟁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쇠뇌를 들어올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사이자 장인.

그것도 청린의 권속들 중 가장 뛰어난 장인이었다.

이 5연발 쇠뇌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명작이었고, 밀수한 화약으로 만든 폭시라면 저 괴물 같은 북방인 전사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을 테였다.

"끄흐으······."

하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당겨봐도 방아쇠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그때 그의 상반신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벅.

북방인 전사였다.

"뭐하냐."

그가 말했다. 난쟁이는 힘겹게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순간 눈을 의심했다.

"흐윽···!"

야만인 전사의 모습에 용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검붉은 탁색(濁色)의 비늘을 두른 용.

주둥이에서 검붉은 화염이 넘실거리고, 세로로 찢어진 눈은 존재를 꿰뚫어 보는 듯 번뜩인다.

"크윽, 허억···!"

예로부터 난쟁이들에게 용은 공포의 대상.

자신의 주군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위압감에, 난쟁이는 눈을 뒤집고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그건 난쟁이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뇌에서 피가 전부 빠져나갔다.

뇌가 기능을 멈추자 심장도 정지했다.

난쟁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희번뜩 뜬 채 굳어버렸다.

댈런은 멀뚱하게 그걸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뭐야?"

죽기 전에 헛것이라도 봤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난쟁이의 손에서 쇠뇌를 가져왔다.

"흠."

복잡한 장치가 내장된 5연발 쇠뇌.

크기는 비교적 작지만, 어딘가 익숙한 형태였다.

쇠뇌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댈런은 문득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건물 벽에서부터 솟아 나온 그림자가, 그 억센 손아귀에 잡혀들었다.

"컥···!"

그림자가 씻기듯이 사라진다. 댈런의 손 안에 남은 건 얇은 목이었다.

긴 머리칼이 한쪽만 단발이 되어버린 그림자 엘프 여자.

그녀의 이마에는 푸른 인장이 빛나고 있었고, 목에는 도끼가 빗맞은 흉터가 길게 남아있었다.

"커헉! 베, 베요른의 원수를···!"

엘프가 낭창거리는 검을 찔러왔다. 목이 잡힌 상태로, 죽음을 불사한 일격이었다.

댈런은 그냥 손가락만 까딱였다. 방아쇠가 당겨진 쇠뇌가 손가락만 한 화살을 두 발 뱉어냈다.

보통보다 조금 두꺼운 화살이 피부를 파고들고, 근육과 뼈 사이를 헤집어 들어갈 즈음 화살촉이 폭발했다.

뻐벅! 뻑!

둔탁한 폭음. 비산하는 뼛조각과 살덩이.

검을 쥔 손이 갑옷에 툭 부딪히고 떨어졌다. 팔꿈치 아래가 사라진 엘프는 눈이 반쯤 뒤집혔다.

"흐아아악! 꺄아악! 주, 죽어! 죽어버려라 야만이···!"

"레니아― 바사크."

빠지직!

목을 잡은 손아귀에서 푸른 전격이 튀었다.

버둥거리던 엘프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

습격을 당한 건 댈런만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습격은, 수색을 위해 흩어져 있던 성기사들을 하나씩 노렸다.

두 명이 부상당했고,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애당초 여정에 나선 이들은 모두 고위 기사와 심문관들.

둘 모두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직책은 결코 아닌 만큼, 일행은 예상치 못한 습격에도 충분히 대비되어 있었다.

"쯧. 십 년만 젊었어도 이런 놈따위는 일검에 베어버렸을 것을."

허리에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차석 심문관 도메르가 끌끌 혀를 찼다.

그의 발밑에는 보통보다 반 배쯤 덩치가 큰 놀이,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놀의 머리에는 희미하게 푸른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다른 습격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새겨진 표식이었다.

"권속의 표식입니다. 습격자들은 전부 진룡 청린의 권속들이군요."

마우그가 말했다.

댈런은 그 말을 듣고선 턱을 쓰다듬던 손을 멈칫했다. 권속이라 이거지. 아는 게 좀 있겠군.

그는 멈칫한 손을 들어 그대로 가볍게 휘둘렀다.

손끝이 그림자 엘프의 뺨을 훑었다. 감전되어 기절했던 엘프가, 얕은 손찌검에 땅바닥을 뒹굴며 퍼뜩 깨어났다.

"큽! 으으읍!"

"몇 개만 묻지."

댈런은 엘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

엘프는 깨어나자마자 눈을 빙빙 돌렸다.

꿈지럭. 등 뒤로 손을 묶은 밧줄을 확인하는 손짓. 주문을 막아둔 재갈을 어떻게 해보려는 혀놀림.

이거 안 되겠군. 댈런은 엘프의 옷깃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쪽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큽! 크흡! 우욱···."

"습격은 실패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여기서 혼자 주문으로 발악해봐야 달라질 게 있어 보이나?"

턱이 빠지고 재갈까지 벗겨져, 입에서 핏덩이와 부러진 이빨을 줄줄 흘리는 엘프에게 댈런이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엘프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어댄다. 저어대더니 또 끄덕이기 시작했다. 눈이 살짝 풀린 걸 보니 이제 말이 좀 통할 듯했다.

댈런은 가볍게 턱을 도로 끼워 맞춰주곤 다시 물었다.

"몇 개만 묻겠다. 일단 첫 번째. 옥시키루스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놈처럼 공간 전이를 한 거지?"

그림자 엘프와 난쟁이는 숨어있다 나타난 게 아니었다.

감각이 예민한 댈런조차, 그 기척을 느낀 건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그림자 안에 숨었다 해도 댈런의 감각을 피할 순 없었다.

그의 시선은 그런 주문이나 힘 정도는 꿰뚫어 보고도 남았으니까.

거기다 존재감이 표백되는 듯한 전조와, 갑자기 또렷해지는 기척은 이미 겪어서 익숙해진 바.

놈들이 사용한 건 푸른 비늘 아룡 옥시키루스의 공간 전이 권능과 유사한 주문이었다.

"옥시키루스는···우욱, 비늘 주문서를 만들어 청린께 헌납했어. 우린 그걸 사용했다."

"그렇군. 그럼 왜 우리를 습격했지?"

"네놈들이 찾는 건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니까. 미끼를 문 고기는 달아나기 전에 잡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

고기라. 기분 좀 나쁜데. 뺨을 한 번 더 만져줄까 하던 댈런은 꿇어앉은 무릎을 툭 차는 걸로 대신했다.

얼굴을 잘못 건드렸다가 이번에는 턱이 아예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말은 하게 해야지.

박살난 무릎 관절에 엘프가 지르던 비명이 멎은 뒤. 댈런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방금 네가 말한 성검과 열쇠는 어디 있지?"

용의 권속(3)

"성검과 열쇠는···청린께서 친히 가져가셨다."

신음을 꾹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엘프가 말했다.

성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말이 맞다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는 단언컨대 기사단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물들.

진룡의 마법과 권능은 악마에 비견되는 바, 만약 청린이 기사단의 보물에 직접 술수를 부린다면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때는 요새 하나 무너진 게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 엘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합니다. 청린은 오래 전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심문관 피드나가 나섰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엘프를 노려봤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알려진 놈입니다. 만약 엘프의 말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청린이 기사단의 보물에 손댈 정도로 원기를 회복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맞는 말이네. 성검도 그렇지만, 균열 방벽의 열쇠 역시 허락되지 않은 이가 만질 수 없게 되어있어. 아무리 진룡이라도 오늘내일하는 상태에서 그걸 다룰 순 없을 걸세."

차석 심문관 도메르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댈런은 턱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 귀쟁이 입을 좀 더 열어달라는 소리지?

그는 무심한 눈으로 엘프를 내려다봤다. 그림자 엘프는 다시 슬슬 눈을 굴리고 있었다.

두 볼이 퉁퉁 붓고 한쪽 무릎은 으스러졌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진 눈빛. 아무래도 성기사들의 당혹감 어린 대화를 듣고 정신이 좀 든 모양이었다.

엘프는 눈을 치켜뜬 채,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맞아. 청린께서는 이미 오랜 부상을 회복하셨지. 나를 죽이면 청린께서 친히 네놈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토끼 같은 아내와 자식들이 그분의 이빨 사이에서 잘게 으깨진 고깃덩이가 되는 걸 똑똑히 보게 하실 거다."

명백한 협박조의 선언. 댈런은 픽 웃었다.

밤은 꽤 길었고,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멀쩡한 관절은 많았다. 제 할 말만 하고 입 닫게 둘 수는 없지. 그가 엘프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일행의 뒤편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내게 방법이 있네."

원로 마법사 펠버였다. 제자와 함께 명상에 들어갔던 그는, 몇 시간만에 컨디션을 어느 정도 되찾은 상태였다.

이제는 제자의 부축 없이도, 지팡이를 짚고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 단정하게 묶은 갈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펠버는 그림자 엘프의 면전으로 다가갔다.

"내 소영역의 능력은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이지."

"대지의 기억이라 하시면···?"

"자세히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대충 다른 이의 과거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네."

펠버가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과거를 읽어낸다는 말에 몇몇 성기사들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붉어진 얼굴.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 뭐, 원래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떳떳하기는 힘든 거지.

댈런이 턱을 긁적이고 있자니, 몇몇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원로 마법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걱정 말게나. 남의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는 취미는 없으니."

펠버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림자 엘프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엘프 역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에,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는 마법사가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 이상의 저항은 할 수 없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부서진 무릎이 욱신거리며, 그녀의 곁에 선 괴물 같은 북방인 전사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었으니까.

"노인장, 괜찮겠소?"

댈런이 말했다. 펠버는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네. 시간선에 손을 대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슬쩍 엿보기만 하는 것 정도야 이전에도 해왔던 일 아니겠나."

본인이 괜찮다면야. 댈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주었다.

펠버는 엘프 앞에서 지팡이에 기대섰다.

두 눈을 반개한 채, 노인의 수염 사이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온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우웅······.

희미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 감응력만이 느낄 수 있는 울림.

마법사의 발밑에서 시작된 울림은, 평소처럼 넓게 뻗어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펠버와 엘프를 감싸는 범위 내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공명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확실히 달라졌군.'

댈런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신비를 꿰뚫어보는 그의 눈에는, 펠버를 중심으로 공명하는 마력이 마치 황금빛 파동처럼 보였다.

그는 펠버의 소영역에 대해 알고 있었다.

대지의 기억 속에서, 이 땅을 밟고 선 생명의 과거를 반추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대지의 기억 속 수많은 선례들을 바탕으로, 흐릿하게나마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

허나 판타지 버전 빅데이터처럼 보였던 그 능력은, 지금 원래의 한계마저 한 꺼풀 벗어던진 채였다.

황금빛 파동을 자세히 뜯어본 그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엘가이아 마탑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펠버의 능력은 단순히 대지의 기억만을 읽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대영역으로 확장된 펠버의 능력은, 더이상 읽어내는 기반을 발 밑의 물리적인 땅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땅이라는 기본 심상만 충족된다면, 굳이 지금 발을 디딘 장소로 그 한계를 단정지을 필요 없었으니까.

물리적인 대지와 더불어 기반 삼은 건, 그 존재의 심상과 기억 속에 비친 대지의 모습.

그 심상 속 대지의 기억이 원래 땅의 기억과 대조와 공명을 거치며, 기존에는 볼 수 없던 영역의 시간선까지 들여다본다.

전지의 편린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건, 그런 개념의 확장 덕분이었다.

"으음······."

작게 침음을 흘리는 원로 마법사.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엘프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내 펠버는 반개하고 있던 눈을 완전히 떴다. 그는 황금빛 안광을 안개처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청린이 악신과 거래했군. 그가 에낙사구스에게 무엇을 대가로 주었는지는 알 수 없네. 다만 그 거래로 받은 지식과 원기를 기반 삼아,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 건 분명하네."

"새로운 일이라면···?"

마우그가 물었다. 숨을 잠깐 고른 펠버가 말을 이었다.

"직접 기사단을 무너뜨리고, 단장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걸세."

***

다음 날, 본단을 향해 전령이 출발했다.

임무의 진척도를 보고하는 것과 더불어, 혹시 모를 침공을 대비하라는 전언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열두 명의 일행은 기존의 계획대로 임무를 속행했다.

네 명은 폐허가 된 에스트라 요새에 임시 거점을 세우고, 나머지 여덟은 강을 따라 청린의 영토로 진입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임무의 목표는 조금 달라졌다.

성검과 방벽 열쇠를 회수하는 대신,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게 이제는 주 목적이었다.

진룡이 직접 두 보물을 가져간 이상, 지금의 전력을 가지고 정면에서 충돌하는 건 위험부담이 막대했다.

그보다는 청린의 영토에 잠입해서 놈의 계획을 살핀 뒤, 전력을 온존한 채 복귀하는 게 더 나은 선택.

일행은 에스트라 요새 앞 선착장에서 배를 골라탔다. 대부분 부서졌지만 몇 대 정도는 남아있었다.

작은 범선이 강물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댈런은 갑판 위에서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여유 시간에 심상 너머의 영역을 관조하는 건 언제부턴가 습관이 되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보아왔던 익숙한 설산의 풍경.

쿠르르릉.

조금씩 변해가는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수많은 변수와 가능성들로 복잡해졌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후우웅.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균열 안쪽에서부터 사시사철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댈런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조심스레 다가오던 금발 청년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엇, 일어나셨습니까?"

원로 마법사의 제자, 토미 발렌티노.

고작 몇 달 전 하수도에서 죽다 살아난 철없던 청년은, 여러 일을 겪으며 어느새 완숙한 마법사가 되어있었다.

"네 스승님은?"

"선실에서 홀로 명상에 들어가셨습니다. 전 실내가 멀미 나고 답답해서 올라왔는데, 마침 명상중이신 것 같아 함께할까 하고······."

"명상 아니다.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댈런은 대충 대답해주고 찌뿌둥한 등과 어깨를 풀었다.

배가 조금 고팠다. 선착장에서 출발한 게 정오였는데, 하늘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아직 저녁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선창에 내려가 뭐라도 주워먹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곁에서 머뭇거리던 금발 마법사가 그냥 털썩 앉아버렸다.

댈런은 어깨 풀던 걸 멈추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야. 어쩌라고?

"저희는 용과···싸우게 되는 겁니까?"

청년이 고개를 푹 떨구며 중얼거렸다.

"글쎄."

댈런은 간식은 글렀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균열의 심부로 접어드는 경계, 에스트라 강의 하류는 기이한 지형이었다.

10킬로미터를 훌쩍 넘어서는 까마득한 절벽. 그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로부터 시작되는 강.

지상에서 제국과 노리아 왕국의 국경선인 에스트라 강은, 균열 아래로 떨어지고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균열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며, 인간과 마물의 영역을 구분지어준 것.

강의 시작점인 폭포까지는 인간의 땅이고, 흘러가는 강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골짜기들은 마물의 영토였다.

넓은 강 양쪽으로 이따금씩 드러나는 뭍은 그런 골짜기들 중 하나의 입구였다.

그 안쪽에는 놀이나 프로그맨, 고블린 따위가 부족을 이루고 있을 테였다.

'청린의 영토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하루쯤 배를 타고 내려가면 나오지.'

내려갈 때는 물길을 따라가고, 돌아올 때는 돛을 펴고 바람을 타면 되었다. 노잡이가 사실상 필요없었다.

"진룡은 죽일 수 없는 존재라 들었습니다."

상념을 뚫고 청년이 다시 중얼거렸다. 댈런은 꺾어져라 치켜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가 말했다.

"용도 죽는다."

"허면 왜 불멸자라 불리는 건가요?"

"우리처럼 늙어 뒈지진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용은 칼로 찌르고 주문으로 지지면 죽었다. 필멸자들보다 좀 더 많이, 그리고 더 강하게 찌르고 지져야 할 뿐.

하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 댈런은 청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섭나?"

"···예."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 댈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년은 고개를 슬쩍 들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제 그림자 엘프를 심문하고 죽일 때, 표정이 썩 좋지 않더군. 네 미래가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들렸던 고개가 다시 푹 떨궈졌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무서울 만하지. 어떻게 안 그렇겠는가.

원로 마법사의 제자가 될 정도면, 재능이 평범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느 마탑에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비범한 마법사.

그러던 청년이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여정 끝에, 초인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마물이 득시글하다는 균열 안으로 들어가는 상황이다.

심지어 곱게 가는 여로도 아니었다.

오천에 달하는 놀 군세와 공성전을 벌인지 며칠이나 됐다고, 한밤중에 용의 권속들에게 습격까지 당했으니.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이 모든 일의 배후인 용의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겠단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겠지. 여기 있는 다른 초인들이야 제 한 몸 빼낼 실력이 된다지만,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거기다 믿고 있던 스승마저 얼마 전부터 골골대기 시작하는 판이다. 당장에 주저앉아 집에 가겠다고 울어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지 않는다는 건, 하나뿐인 제자로서 차마 제 스승의 체면을 깎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야. 악마 새끼.'

[···넵, 주인님.]

'유적에서 얻었던 천쪼가리 좀 꺼내봐라.'

품속에 손을 넣고 아르보르를 부르자, 악마가 꿈지럭거리며 공간을 살짝 열어 손에 잘 접힌 천을 쥐어주었다.

댈런은 그걸 토미에게 건넸다. 청년은 얼떨결에 받아들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투명 망토다."

작은 노파 올가의 투명 망토.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에서 시체를 회수하고 얻은 아이템이었다.

사람 한 명을 딱 덮을 수 있을 크기의 천은, 뒤집어쓰는 순간 거의 모든 기척을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단점이라면 댈런이 사용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는 것.

기껏해야 상반신만 가려지면 다행이려나.

어떻게든 쓰자면 활용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이 금발 청년에게 더 유용한 물건일 테였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망토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청년에게, 댈런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 두려우면 언제든 뒤집어쓰고 도망치면 된다. 네 죽을 자리는 네가 선택하라는 거야."

"······."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선실 입구로 걸어갔다.

고민 많은 걸음걸이였다. 두 손은 투명 망토를 간절히 움켜쥐고 있었고.

다시 혼자가 된 댈런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머릿속에 청년의 질문이 맴돌았다.

'저희는 용과 싸우게 되는 겁니까?'

"글쎄."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더 떠올랐다. 이번에는 청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용과 싸운다면 이길 수는 있고?'

"······."

'청린과는 싸워본 경험도 없잖아.'

머릿속 목소리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맞았다. 대부분의 보스몹들과 달리, 진룡 청린은 원래라면 상대할 일 없는 배경 설정 같은 존재였다.

용신의 좌완 갑주라는 이명만큼이나, 한때 동족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강함을 지녔다는 진룡.

그런 존재와 싸우게 됐다는 건, 이번 회차가 전례 없을 정도로 꼬였다는 소리였다.

'너 잘못하면 죽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싶어?'

머릿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걱정스런 말투. 달콤한 유혹.

이길 수 있을까. 모른다. 아룡도 간신히 잡았는데. 지면 죽겠지? 그건 확실해. 지금이라도 도망쳐? 그러면 살 수는 있겠지. 그래.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는 거야.

머릿속 문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합리적이고 매혹적인 논리와 설득. 익숙한 편안함이 뇌리를 잠식한다.

댈런은 왠지 머리가 아팠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찬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두근거리는 용의 피가 혈관을 달군다.

그가 말했다.

"씹새야. 이 세계에서도 평생을 도망만 다닐 거냐?"

'······.'

"난 그렇게 살기는 싫은데."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댈런은 씩 웃었다.

모든 게임에는 분기점이 있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을 피할 건지, 아니면 들이받을 건지를 선택하는 분기점.

어쩌면 전자가 더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후자는 무식한 야만인의 호승심일지도 몰랐고.

정말로 게임이었다면, 그도 전자를 택했을 테였다.

일단 물러나서 돌아가는 꼴 좀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음 회차도 있으니까- 라는 태도.

누구보다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 자부하던, 머릿속의 삼십 대 아저씨는 그걸 원했다.

"스읍―"

그러나 폣속을 채운 찬 공기는 현실이었다.

한 번뿐인 기회. 실수하면 끝인 현실.

이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근육질의 금패 용병 댈런은 그렇게까지 합리라는 방패 뒤에 숨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합리적인 판단이 정말로 그의 목숨을 살릴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건 인정한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시에 한 걸음만 물러나도 끝없는 낭떠러지라면? 지금껏 싸워온 싸움들이 다 그렇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이 게임의 판돈에는 그의 목숨만 올려져 있는 게 아니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쌓아온 인연들.

하지만 삼십 대 아저씨가 경험했던 그 어떤 운명보다도 깊은 관계들.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저울로 무게를 달기에, 그 관계들은 이미 지나치게 무거워져 있었다.

"으챠."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다 되어있었다. 냄새로 보아하니 오늘의 메뉴는 구이 종류인 듯했다.

문득 루시아의 땅굴토끼 구이를 먹고 싶다 생각하며, 덩치 큰 용병은 흔들리는 갑판 위를 휘적휘적 걸어갔다.

진룡(1)

날이 밝았다.

일행이 탄 작은 범선은 안개 사이를 천천히 순항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흔들거리는 갑판 위. 고위 성기사 마우그가 퀭한 얼굴로 하품을 쩍 했다. 짜증 섞인 하품이었다.

"빌어먹을 바위트롤 새끼들."

"프로그맨도 마찬가집니다."

피드나가 말을 받았다.

"개구리 다리가 닭고기 맛이라던데. 죄다 뜯어서 삶아버릴까 고민했습니다."

그녀는 다크서클 짙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일행의 작은 범선은 밤새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프로그맨의 독침이 무슨 여관 다트판처럼 빼곡하게 박힌 배 옆구리. 거미인간들의 덫에 걸려 부러진 중간 돛대.

새벽녘에 바위트롤이 나타났을 때, 마우그는 순간이나마 이 여정이 여기서 끝나는 건가 생각했다.

뱃머리 선수상을 박살낸 바위트롤의 돌덩이 세례는, 선체에 조금만 제대로 맞아도 그대로 침몰할 만큼 위협적이었으니까.

때마침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명상을 마무리하고 갑판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공중에서 바윗덩이의 방향을 되돌려 날릴 정도의 강력한 대지술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정말 여정은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법사님."

마우그가 말했다.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덮쳐오는 바위를, 지팡이를 슬쩍 까딱인 것만으로 돌려보내 바위 트롤을 깔아뭉개버리던 마법사의 주문을.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는 고위 성기사 앞에서, 펠버는 갈색 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아닐세. 그나저나 다 와가는가?"

"거의 도착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될 겁니다."

"그렇군."

펠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뱃머리에 올라가 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선객 한 명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린다고 했소?"

"그렇네."

거구의 용병이 턱을 긁적였다.

그는 부서진 선수상의 받침대에 팔꿈치를 기댄 채 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개로 뒤덮인 강 위를 꿰뚫어보는 검은 눈. 약간은 멍해 보이기도 하는 눈빛이었다.

펠버는 그가 보는 방향을 눈을 끔뻑이며 쳐다봤다. 그의 시야에는 온통 안개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육신은 주문 없이는 그저 팔십 먹은 노인의 몸뚱이였으니까.

반대로 약간 흐리멍텅한 전사의 시선 앞에서라면, 이 자욱한 아침 안개도 없는 거나 다름없겠지.

펠버는 새끼손가락으로 눈곱을 떼어내며 물었다.

"무슨 생각하나?"

"용굴에 있을 금은보화."

"자네 이미 금화가 한 궤짝쯤 있지 않나?"

"돈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그게 자본주의 아니겠소."

"···그건 또 뭔가?"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펠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보다시피."

"안 괜찮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펠버가 끌끌거렸다. 그는 뱃머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안개 속을 바라보는 펠버의 눈은 평소처럼 마력광이 일렁이고 있지 않았다.

지금 순간만큼은 마법사의 눈이라기보다, 오랜 인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지긋한 노인의 눈이었다.

"나는 살 만큼 살았네.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르지."

노인이 말했다.

"몸 상태 정도야 신경 쓸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얼마나 의미 있는 끝맺음을 매듭짓냐는 거니까."

"······."

"내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한다네. 죽을 방법 역시도."

그리고 그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감사한 특권이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덧붙이는 노인의 말에, 댈런은 적절한 대답을 골라내지 못했다.

고작 서른 먹은 아저씨였던 그가, 뭐라고 죽음에 대해 논한단 말인가.

노인의 앞에서 자신은 마치 어젯밤에 찾아온 금발 청년과 그리 다를 바 없을 텐데.

댈런이 말없이 수면만 바라보고 있자, 펠버가 낮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얼굴 좀 펴게. 자네라고 평생 지금 같을 거라 생각하나?"

"노인장보다는 천천히 늙을 것 같소만."

"예끼! 버르장머리 하고는. 노망난 할아범의 지팡이에 두들겨지고 싶은 건가!"

노인이 지팡이를 무슨 검처럼 치켜들었다. 댈런은 노인 공경의 차원에서 몇 대 맞아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웃어젖혔다.

그건 낮거나 사나운 웃음이 아닌, 시원한 웃음이었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한동안 뱃머리를 소란스럽게 했다.

***

마우그의 말대로 배는 한 시간쯤 지나 뭍에 닿았다.

수많은 계곡이 거미줄처럼 얽힌 균열의 심부에서도, 유독 넓은 계곡의 입구.

일행은 모래사장 근처에서 닻을 내리고 배를 정박시켰다.

버석. 버석.

가장 먼저 내린 댈런은 발밑이 푹 빠지는 걸 느꼈다. 생각보다 깊은 모래사장이었다.

거기다 구름에 햇빛이 거의 가려졌음에도, 한낮의 햇빛을 받은 것마냥 반짝거리는 모래밭은 왠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스르륵.

댈런은 모래를 한 줌 쥐어보았다.

수분기 없는 모래가 손 안에서 쉽게 바스라진다.

자세히 보니 보통의 모래알과는 좀 달랐다. 얼음 같기도 하고, 수정 같기도 한 모래알들.

그 하나하나가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품은 결정이었다. 댈런의 두터운 피부마저도 살짝 시릴 정도였으니.

'뭔진 몰라도 주문인 건 확실하군.'

댈런은 모래를 몇 번 지근거리며 밟아보았다. 두꺼운 가죽 부츠 너머로도 발바닥에 한기가 전달되었다.

그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린 토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차갑냐?"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차가울 걸세. 청린의 영역은 마법적인 냉기로 가득하거든. 옷을 껴입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니, 정 힘들면 마력을 끌어올려서 버티게나."

도메르가 말했다.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여기 와본 적 있소?"

"한 번. 내가 막 성년이 되었을 때니, 대충 백 년쯤 전이었지."

백 살이 넘는다라. 겉보기에는 일흔쯤 되어 보이는데.

겉모습만으로는 초인들의 나이를 분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도메르는 댈런이 했듯 발밑에서 모래를 한 움큼 주워들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어. 연이은 마물들의 침공에 에스트라 요새가 함락되었고, 단장님께서는 기사단의 정예 수십 명을 대동해 용 사냥에 나서셨네. 평범한 용사냥꾼들과 달리, 아룡이 아닌 진짜 용이 사냥감이었지."

"진룡 사냥이라니. 정신 나간 단어로군."

"맞네. 단장님이 아니셨다면 누구도 엄두를 못 냈을 걸세."

도메르가 끌끌 웃었다. 추억을 회상하는 노인의 웃음이었다.

"사냥 결과는···글쎄, 반쪽짜리 성공이라 할 수 있겠군. 치명상을 입은 용은 그 날 이후로 제 용굴에 틀어박혔으니 말일세."

"아예 죽일 수는 없었던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랬지. 용과 직접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인 단장님께서 부상당하셨으니까."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노인이 청년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단장님께서 팔과 눈을 잃으신 게 그날이었다네. 쉰에 달하던 정예 기사들도, 나를 포함해 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었고 말이야."

마치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담담한 어조.

허나 그 속의 내용은 희미한 회한을 품고 있었다.

백 년이 지나도록 다 닳지 못한 슬픔. 그리고 잃어버린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겠지.

대답을 들은 토미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괜한 걸 물어봤나 싶었던 것이다.

도메르는 신경 쓰지 말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어찌됐건 그 날 이후로 놈은 용굴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네. 단장님께서는 놈이 검에 입은 상처가 너무 심각해서 그런 거라 하시더군. 설령 그게 아니라도, 애당초 용이라는 족속 자체가 제 용굴에서 나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기도 하지."

차석 심문관은 청년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다시 지어주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번 임무에서 우리가 마주칠 확률은 희박할 걸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예, 감사합니다."

겁먹었다는 사실을 들킨 게 부끄러웠던 걸까. 노인과 눈이 마주친 토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던 손을 내려 허리띠에 걸쳤다. 안개가 더 짙어지고 있었다.

물가에서 이미 한참을 멀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한기를 품은 안개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어져, 이제는 그의 눈으로도 생각보다 멀리 볼 수 없을 정도.

발밑의 모래밭 역시도 계곡의 초입부에 비해 냉기를 조금씩 더해가고 있었다.

'좋지 않군.'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강하게.

긴장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두렵지도 않았고.

알 수 없는 몸의 반응에, 댈런의 손은 어느새 허리띠에서 성검의 손잡이로 옮겨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잠깐."

제일 후미에서 걷던 펠버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누군가 있네."

그가 말했다. 동시에 댈런이 성검을 뽑아들었다.

스아아아―

어깨로부터 시작된 회오리가, 팔과 손목을 지나 검신을 뒤덮는다. 댈런은 가볍게 회오리를 흩뿌렸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범위를 극단적으로 넓히고 위력을 줄인 채였다.

후웅―!

회오리 앞에 안개가 부서져 흩어지자, 저 멀리 가녀린 인영이 보였다.

[재미있는 재주로구나.]

그리고 스산한 전성이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촤르르르···.

안개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결정화된다는 말이 더 적절했다.

빽빽하던 안개는 순식간에 발밑의 모래알과 비슷한 결정으로 압축되더니, 우수수 떨어지며 모래밭 위에 한 겹을 더했다.

결정이 옷 속을 파고들어 바스락거린다. 반 뼘 정도 더해진 결정의 높이에, 발목까지가 모래밭에 파묻혔다.

그러나 일행 중의 누구도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못했다.

순식간에 넓어진 시계 속.

모두의 시선은, 화살 한 바탕 거리쯤 떨어진 여성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오랜만의 손님이로구나. 어언 백 년 만인가.]

자박.

여성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작고 가녀린 체구.

길게 늘어뜨린 탁한 청백색 머리칼.

또렷한 이목구비와 가느다란 턱선은 분명 미형의 얼굴을 나타냈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름다움이 아닌 섬찟함이었다.

그건 인간 같지 않은 피부의 창백함 탓이었을까.

아니면 세로로 찢어져 번뜩이는 노란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건 일행 가운데에는 긴장 어린 침묵이 내려앉았고, 여성은 그걸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대접이 좀 부족하여도 이해하길 바란다. 백 년이라는 시간은 필멸자에게만 긴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청린···!"

도메르가 씹어뱉듯 말했다. 여성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를 아느냐?]

스릉―

대답은 없었다. 검을 뽑아든 도메르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의 몸에서 신성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검신에서 새하얀 불꽃이 폭발하듯 타올랐다.

"도망치시게들. 돌아보지 말고, 곧장 배를 타고 떠나. 떠나서 청린이 용굴을 벗어났다고 알리게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가 처음 보이는 면모였다.

노인은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놀 군세가 기사단의 요새에 들이닥쳤을 때도, 용의 권속들이 한밤중에 일행을 습격했을 때에도.

심지어 그 습격으로 본인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랬다.

허나 쯧쯧 혀를 차며 커다란 놀을 밟아대던 노인은 이제 없었다.

온몸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가녀린 여인 앞을 막아선 고강한 성기사만이 존재할 뿐.

쿠르르르······.

발밑의 모래가 밀려난다.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신성력이었다.

강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노쇠한 육체에, 빼곡하게 새겨진 신성 문신으로 유예를 더한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노인의 눈을 빤히 응시하던 여성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탁 쳤다.

[아, 기억나는구나.]

그녀가 말했다.

[너, 그 역겨운 신의 종자와 함께 왔던 어린 것이었지.]

그 말이 신호였다.

공기가 반전된다. 살기가 실체화되어 짓누른다. 피부를 찌르는 무형의 압(壓)에, 신성력의 불꽃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알고 있느냐?]

노란 눈이 말했다.

[내 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가 소리쳤다.

"어, 어떻게 그때의 상처를 회복···!"

후웅―

바람이 뺨을 훑었다. 차가운 미풍이었다.

모래 바닥을 훑고 지나가며 그 미풍을 일으킨 무언가의 궤적 이후에, 성기사의 가슴팍은 한 줌 핏물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게 거대한 살덩이라는 건 댈런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마치 저항 하나 없는 듯, 신비로운 기색으로 휘둘러진 용의 꼬리.

상반신을 잃은 머리가 모래밭 위에 툭 하고 떨어지고, 반쯤 남은 허리에 붙은 두 다리도 기우뚱하며 쓰러졌다.

노인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피드나가 비명을 질렀다.

"차석 심문관니···!"

후웅―

궤적이 다시 공기를 갈랐다. 댈런은 이번에는 반응했다.

꽈광―!

성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발밑의 모래밭을 폭발시킨 신형이 앞으로 쏘아진다.

내면의 천둥이 울었다. 성검이 그 우렛소리에 공명했다.

검신을 휘감은 회오리가 섬광을 엮어내고, 두 손에서부터 발아한 불꽃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그 모든 건, 단지 찰나.

그 찰나의 끝.

성검과 꼬리가 만난다.

쩌━━━━━━

부서진다.

공간이 찢어졌다.

힘과 힘이 부딪혔다기보다, 신비와 신비가 겨루었다 설명해야 할 격돌.

필멸자의 신비는 강했다. 통로로서의 피륙이 간신히 버틸 정도였으니.

허나 태생부터 신비 그 자체인 존재 앞에서는, 한 번의 꼬리질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격.

콰학―!

찢긴 공간이 아물어지는 순간, 모래밭이 뒤집어진 건 댈런 쪽이었다.

쿠과과과과······!

폭풍이 몰아쳤다. 백 년간 쌓인 모래밭이 그 폭풍 앞에서 파도가 되어 밀려났다.

거대한 골짜기가 우르릉 울면서, 오래 묵은 바위들이 절벽에서 아래로 우후죽순 떨어졌다.

쿠궁. 쿵.

민낯을 드러낸 딱딱한 지면 위에, 제 질량의 속도대로 부딪혀 부서지는 바윗덩이들.

잘게 떨리는 대지 위에 서 있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두 발을 지면에 디디고 우뚝 선 채, 온몸에서 증기를 뿜어대는 전사와.

그보다 몇 걸음 뒤에서, 황금빛 안채를 번뜩이는 노년의 마법사.

[호오.]

청린용, 테데라 리울라크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흥미로운 손님들이로구나.]

진룡(2)

푸쉬이이이···!

눈앞이 까맣다. 그러다 다시 새하얘졌다.

시야를 가득 뒤덮은 백색은 온몸에서 뿜어지는 증기였다.

안와 안쪽에서 박살났던 눈알이 재생되고 머지않아, 몸의 나머지 신경들도 하나씩 이어 붙기 시작하며 격통이 몰려왔다.

"쿨럭!"

주르륵.

온몸이 아프다. 입가에서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높은 감각 수치는 몸의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해주었다.

반쯤 곤죽이 된 내장. 얼어붙고 찢겨나가 뒤집어진 피부.

벗겨진 살갗의 틈 사이로, 계곡의 냉기가 속살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그 안의 근육은 갈기갈기 찢긴 뒤 재조립되듯 붙고 있었다.

짝. 짝.

고막이 회복되면서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잘했다, 전사야. 네 사람들을 지켜냈구나. 팔다리 하나씩은 잃은 것 같지만, 하찮은 몸뚱이를 부지한 게 어디겠느냐.]

귓가를 웅웅거리는 전성. 청린이었다.

방금 전의 거대한 격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한껏 묻어났다.

그녀는 오히려 그 일격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신비롭구나. 백 년 만에 맞은 손님에게서 오랜 친우의 향내를 맡을 줄이야.]

자박.

모래밭 위를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

흩어져가는 증기 사이로, 품이 넓은 로브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용신께서 그를 소환하신 게 벌써 천 년이 다 되어가는가. 소식이 끊겨 내 궁금하긴 했었지. 드넓은 강물에서 한 줌을 퍼담은 수준이라도, 어떻게 그의 피를 이어받게 된 것이냐?]

"···지, 랄···하네."

[호오. 그 상태가 되어서도 말을 할 수 있다니. 역시 그의 피를 받은 자인가. 그 역시 불 같은 성정과 의지의 소유자였지.]

여인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비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도끼든 뭐든 던져서 저 빌어먹을 아구창에 꽂아버렸을 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그의 몸은 사실상 박살이 난 거나 다름없었고, 용혈의 재생 인자는 무너져가는 몸뚱이를 붙잡은 채 급한 곳부터 여기저기 회복시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행하는 생명 유지와 수복의 두 역할.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당장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회복에 전념하는 게 우선이었다.

문제는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든 몸뚱이로, 대체 어떻게 시간을 끌 것인가.

초인적인 지능 수치가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뒤져가며,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순간이었다.

"끌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터벅.

누군가 그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곧게 편 허리.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는 걸음걸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잔영을 남기는 머리칼과 수염.

발걸음마다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황금빛 동심원의 파동이, 매혹적으로 눈길을 잡아끈다.

증기에 삼켜진 댈런을 열 발자국쯤 앞서간 펠버는, 잠시 멈춰서더니 뒤를 슬쩍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쉬고 있게나. 내가 일단 발을 잡아둠세."

다시 정면을 향하는 마법사의 시선.

그 눈동자에서 황금빛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호오. 너는 또 무슨 재주를 가지고 있느냐?]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진룡의 면전에서,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땅을 가볍게 찍자.

구우우우―

발밑에서 퍼져나가던 동심원이 일순 일그러지며, 황금빛 색채가 계곡을 환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입술을 달싹이며 외는 주문.

그 주문 직후, 원로 마법사의 시야가 용의 장대한 기억으로 점철되었다.

***

청린은 즐거웠다.

백 년 만에 회복된 육신. 그 육신을 시험해볼 만한 전사와 마법사. 그리고 전사에게서 나는 친우의 향취.

역겨운 전쟁신의 종자와 사투를 벌인 이래로, 오랜 세월 끝에 처음 맛보는 진정한 기쁨이었다.

'자그마치 백 년이었지.'

백 년 전의 어느 날.

청린은 아직도 그 날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당시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무리 성기사단의 노괴라 해도, 설마 필멸자가 그녀를 직접 공격하는 광오함을 보일 거라고는 말이다.

허나 추종자들과 함께 그녀의 땅을 습격한 신의 종자는, 다짜고짜 그녀의 목덜미에 검끝을 들이밀었다.

'용신의 좌완 갑주, 테데라 리울라크. 오늘은 네놈이 용굴 밖으로 나오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하. 용기가 가상하구나. 하찮은 필멸자 주제에.'

당시 청린은 코웃음 쳤다.

제 신 하나를 믿고 진룡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얼마나 오만한 모습이었던가.

하지만 놈의 검에서 흘러나온 녹진한 백색 화염은, 그녀의 비늘마저 태울 정도로 강렬했고.

일대를 뒤덮은 놈의 영역의 힘은, 당황한 그녀가 용굴로 후퇴하는 걸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끝내 성검에 꿰뚫린 심장과 뜯겨 나간 날개 또한, 어찌나 참혹한 아픔이었던가.

그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은 뒤, 청린은 천근만근 무거워져가는 육신을 억지로 붙잡은 채 살아왔다.

'그마저도 이제 끝이라 여겼지.'

앞으로 기껏해야 오 년.

잘해봐야 그 정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천 년도 전에 나무에게서 받은 저주와, 기사단의 노괴가 근래 들어 입힌 치명상은 그녀의 몸을 안에서부터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있었으니.

괜찮았다.

백 년간 설욕의 날을 기다려왔으나, 그게 꼭 자신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혹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못할 걸 대비해, 청린은 지난 수십 년간 정성을 들여 알을 품어왔다.

하지만 운명은 기이한 법.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은 순간,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청린, 내게 힘을 주십시오. 대신 기사단의 보물을 바치겠습니다.'

힘에 눈이 먼 성기사가 노괴를 배신하고 가져온 성검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다.

마냥 순탄치는 않았다.

역겨운 신의 힘을 담은 물건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대비해 준비해둔 수만의 마물을 에낙사구스에게 주어야 했고.

그 대가로 얻은 원기와 지식을 가지고, 성검을 해체하는 과정은 진룡인 그녀로서도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허나 그 끝에, 그녀는 몸을 회복했다.

천 년도 전에 입은 저주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으나, 기사단의 노괴와 싸우며 입은 부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시 붙은 날개.

수복된 심장.

온몸을 충만하게 채우는 권능의 마력은, 단 보름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보름이라."

의식의 흐름을 뚫고 들어오는 중얼거림.

청린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보름 정도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끌끌, 눈치 빠른 도마뱀이구만."

펠버는 나직하게 웃으면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 끝에서 터져나오는 황금빛 파동은, 방금까지 청린의 눈동자에 스며들었던 것과 동일한 색채였다.

"보통은 기억을 읽힌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데. 대영역을 이뤄낸 뒤 처음 보는 일이군."

과연 초월적인 존재의 저주를 받았어도 진룡은 진룡인가.

완전하게 전개한 대영역을 순식간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방심한 틈을 타 기억을 읽어내던 마법사의 마력을 무의식 차원에서 몰아내버리는 기예.

필멸자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그 마력 응용력은, 진룡이 존재 자체가 신비인 생물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아직 부서지던 몸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력과 육신의 운용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걸 감안하면 원래의 능력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늦었다네."

허나 필멸자의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난 그 능력도, 파고들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청린의 기억을 되짚어본 결과, 그녀가 지금의 역량을 회복한 건 고작 반 개월 전.

부상을 회복한 지금의 그녀는 이곳에 있는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지만.

반 개월 전의 그녀를 마주한다는 전제만 있다면, 지금 몸을 회복 중인 댈런도 충분히 승리를 점쳐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스륵···.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지팡이에서 떨어진다.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수인을 맺기 시작하는 손끝. 나직하게 읊는 기나긴 주문.

손에서 떨어졌음에도 허공에 둥둥 떠있는 지팡이를 중심으로, 황금빛 파동이 반전되더니 용을 향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펠버의 입에서 처음 맺어지는 영창과 함께, 동심원의 파동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청린이라는 존재 자체를 대지로 삼고, 그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걸 넘어 과거에 지나쳐온 순간으로 회귀시키는 대영역의 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걸 과거로 돌려버리는 권능은, 아무리 대영역을 열어낸 대마법사라 해도 손에 쥘 수 없었다.

하지만 육신에 한정해 시간선에 손을 대는 것 정도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콰아아아아―!

파도처럼 몰아친 황금빛 정광이 청린의 몸을 집어삼키고.

[크···!]

투웅―!

육신에 나타나는 변화를 눈치채자마자, 청린은 제자리에서 높이 도약해 파도를 벗어났다.

허나 영역의 힘은 이미 몸의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빛의 파도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 영향을 떨쳐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빠드득.

창백한 살결이 갈라진다.

마력이 하얀 숨결의 형태로 새어나왔다.

찢겨나가는 날개로 인해 수백 미터 상공에서 여린 몸이 휘청이고.

깨진 심장에서 신비 그 자체인 몸뚱이를 유지할 동력이 소실되어간다.

[너, 초월자도 아닌 필멸자가 어찌 시간선에 직접 손을···!]

당혹감에 물든 목소리로 전성을 토해내는 청린.

방금까지 넘쳐나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노란 눈동자가 스산한 마력으로 번뜩이고, 그녀의 존재감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르르···.

골짜기가 진동한다.

발밑의 돌들이 파르르 떨렸다.

작은 인간의 몸이 자취를 감춘 순간, 불현듯이 거대한 그림자가 계곡에 드리웠다.

쿠구구구구······.

한기를 품은 공기가 사방으로 몰아치고, 지면에 남아있던 결정 모래들이 폭풍처럼 밀려난다.

전조도 없이 나타난 용의 진체는, 수백 미터의 상공에서도 거대하게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

체고는 요새의 성벽보다도 높았고, 몸길이는 자그마치 백 미터에 가깝다.

두 쌍의 푸른 날개는 상단의 행렬을 뒤덮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북부의 빙하를 깎아놓은 듯한 이빨들은 하나하나가 성인 장정 이상의 크기였다.

존재만으로도 공기를 짓누르는 격의 압박.

그 앞에서 골짜기의 까마득한 절벽마저도, 가느다란 겨울철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가운데.

"쿨럭! 커헉···!"

완전히 전개된 대영역의 힘을 빌어 간신히 버텨내며, 펠버는 그녀의 심상을 어렴풋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이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과거의 회한과 침입자를 향한 살기가 뒤섞인 의념.

불멸자의 몸을 입고 태어나, 한 세기 동안 겪어온 필멸자의 삶은 대체 어떤 원한을 새겨놓은 것일까.

다시금 무너지기 시작하는 육신을 진체로 현현해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남은 수명마저 단축된다는 건 그녀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골 깊숙한 곳까지 새겨진 원한은, 목숨조차 도외시하는 강박에 가깝게 그녀를 몰아붙였고.

끝내 이 자리에서 모든 힘을 쏟아붓더라도, 침입자를 죽이겠다는 의지로 빚어진다.

[――――!]

전성으로 내뱉어지는 용언.

마력의 바람이 요동친다.

아룡과 달리 주둥이로 깊은 숨결이 모이고, 청백색의 기운이 목구멍 안쪽에서 일렁이는 건 단 한순간.

모든 걸 얼려버릴 극한의 냉기가, 눈앞의 마법사와 그가 선 대지를 뒤덮어버릴 기세로 뿜어지려는 찰나였다.

패래래랙―!

빛의 원반이 날아간다.

여느 때처럼 햇살을 부수고 날아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검붉은 빛을 토해내는 빛의 원반.

일렁이는 검붉음은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더니, 거대한 불덩이나 다름없게 되어 막 쏘아지는 숨결에 부딪혔다.

꽈릉━━ 꽈과과과과―!

두 신비가 부딪혔다.

먼젓번의 격돌보다도 몇 배는 강렬한 힘의 폭발.

터져나오는 격돌의 잔재가, 일종의 폭격이 되어 절벽과 지면을 우르르 강타한다.

"커헉···크으으."

검게 죽은 피를 토해내며 무릎 꿇은 펠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만들어낸 황금빛 역장으로 스스로를 감쌌다.

역장에 충돌하는 붉고 푸른 힘의 잔재들.

용이 숨결을 토해내려는 순간에 죽음을 직감했던 그에게, 눈앞의 광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펠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힘의 파편들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댈···런···?"

그의 뒤편.

수십 걸음쯤 떨어진 골짜기의 한가운데.

그곳에는 한 전사가 팔을 길게 뻗은 채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익히 아는, 아니 알아왔다고 생각한 전사.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한 개 이상 큰 키와, 갑옷 그 자체나 다름없는 돌덩이 같은 근육들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근육을 뒤덮은 검붉은 화염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그가 알던 사람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발만 잡아두겠다더니, 아예 반 죽여놔버렸군."

전사가 말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육성인 동시에, 공간을 뛰어넘어 귓가를 울리는 전성과도 같은 목소리.

그 기묘한 목소리에서 자신이 알던 전사의 말투를 느낀 펠버는, 피 흘리는 입술을 힘겹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좀 분발해봤네. 그래서 불만인가?"

"아니. 상관없소."

전사가 마주 웃어주었다.

평소의 검은 눈이 아닌, 세로로 찢어진 검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을 성검에 둘러낸 그는, 찢겨나간 날개로 힘겹게 허공에 머무는 진룡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경험치는 막타 친 사람 거니까."

사납게 드러내는 송곳니.

그건 포식자의 웃음이었다.

진룡(3)

[스킬, '검붉은 용의 피(A)'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그 알림창이 떠오르기 이전부터, 댈런의 심장은 거세게 맥동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건 평소의 두근거림과는 달랐다.

인간의 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서 산소를 실어나르는 혈액의 움직임도.

몸을 수복하기 위해 전신으로 뻗어나가는, 재생 인자를 품은 뜨거운 피의 내달림도 아니었다.

좀 더 깊고 열기로 가득한 박동.

물리적인 혈액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흘러가는 듯한 감각.

오래 전.

하수도에서 처음 용혈의 재생 인자를 얻은 직후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동안 수많은 시체를 회수하며 두 자릿수에 달하는 스킬을 얻었으나, 몸의 일부에 신비가 더해진 감각을 느낀 건 그때 한 번뿐이었다.

'바로 지금 전까지는.'

스으―

숨을 들이쉰다.

본디 산소를 흡수해 운반해야 할 피는, 산소가 아닌 공기중의 마력을 받아들여 온몸으로 실어날랐다.

세포 하나하나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인해 이질적인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고.

신체 능력의 전반이 강제로 끌어올려짐과 함께, 격의 상승이라 할 만한 감각이 느껴진다.

후···.

가볍게 내쉬는 날숨. 그 숨결에 이글거리는 열기.

심상 너머의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나, 댈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현상은 숙련도의 한계치에 다다른 용혈의 재생 인자와, 진작에 임계를 넘어선 체력 수치가 맞물려 벌어진 일임을.

동시에 그건 먼 미래의 갈림길 중 하나에서, 역행의 사도들이 모종의 경로로 입수한 용혈의 인자가.

계승자 옵션으로 뒤틀린 시간선과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환상세계의 성질을 통해, 인간의 몸속에서 진짜 용의 피로 되살아났음을 의미했다.

[크으··· 이건 불가능하다.]

냉기와 불꽃이 폭발한 여파를 정면에서 허용한 일이, 쇠약해진 육신에게는 생각보다 큰 타격이었던 것일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공중에서 휘청거리는 푸른 용을 댈런은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야의 한 켠.

낯선 존재의 시선이 느껴진다.

[······.]

그건 또 하나의 용이었다.

검고 붉은 비늘로 화려하게 몸을 두른 채, 이쪽을 응시하는 거대한 용의 형체.

실체가 아니었다. 용의 그림자는 마치 환상처럼 언뜻 비쳤다 흩어졌다.

"······."

그러나 댈런은 그 찰나의 시선으로부터, 더없이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지금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불편함.

허나 어쩔 수 없는 결과이자 과정임을 알기에 선택한 외면.

[어찌 필멸의 존재 따위에, 지고한 용의 피가 깃들 수 있다는 말이냐! 이건 단순히 향취가 묻은 것과는 다르다! 이건···이건······!]

푸른 진룡의 노기가 담긴 전성이 귓가를 울렸다. 댈런은 검붉은 용의 환상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새로 주어진 힘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일.

허나 그보다 시급한 건, 이 힘을 사용해 눈앞의 강대한 적을 떨어뜨리는 것이었기에.

[진룡이라는 종을 더럽히는 네 존재, 나 테데라 리울라크가 친히 짓씹어서 소멸시켜주겠노라.]

"지랄하네."

댈런은 발을 내디뎠다.

쿵.

존재감이 무형의 압력이 되어 주변의 공기를 밀어낸다.

발밑에 흩어진 결정 같은 모래알이, 그 압력의 열기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를 번뜩이며, 댈런은 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두 절벽을 사이에 둔 수백 미터 상공에, 상처 입고 쇠약해진 푸른 용의 진체가 보인다.

청린용, 테데라 리울라크.

꼬리치기 한 번으로 그의 초인적인 육신을 빈사 상태에 몰아넣었던 진룡.

조금 전까지 항거할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만들었던 불멸자는, 더이상 상대가 불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강대한 저주에 당해 원래의 역량을 반도 내지 못하는 용.

그마저도 기사단장 에드거에게 치명상을 입고, 아예 필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게 된 불멸자.

물론 댈런의 상황도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갓 깨어난 용의 피에 담긴 타오르는 신비가, 그의 불완전한 육신을 거칠게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허나 상관없었다.

이 불완전한 조합으로도 승리를 점쳐볼 수 있을 만큼, 저 용은 충분히 쇠약해져 있었으니까.

[그 알량한 불로 내 숨결을 막아낼 수 있겠느냐! 감히 필멸자가 불멸의 존재를 흉내낸 죄, 화염째로 얼어붙게 만들어 징벌해 주겠다!]

어렵사리 하늘에서 균형을 잡아내며, 악에 받쳐 토해내는 전성.

허나 그렇게 엄포를 놓았음에도, 섣불리 숨결을 내뿜지는 못했다.

용의 숨결은 가장 기본적인 권능 중 하나이기에, 시간이 되감긴 청린의 몸은 그만큼 몸이 상해 있다는 뜻이겠지.

댈런은 픽 웃었다.

"너 말이 좀 많아졌다?"

[······!]

"늙고 약해진 개가 더 사납게 짖는다고 하지."

[이······!]

분노에 물든 청린의 전성을 무시하고, 내디딘 발에 힘을 모아낸다.

쩌적.

발밑에서 갈라지는 대지.

쿠르르.

영역의 힘을 굳이 이끌어내지 않았음에도, 균열 사이에서 일렁이는 검붉은 불꽃.

전신을 휘도는 불꽃의 깊이를 느껴내며, 댈런은 가볍게 몸을 밀어올렸다.

투웅―

떠오르는 신형. 소음은 없다.

도약이라기보다는 비행에 가까운 궤적 끝에, 어느새 몸을 감싼 불길은 등 뒤에 자연스레 날개를 빚어내고.

콰르르르―

검신을 뒤덮고도 모자라 그 너머로 뻗어나가는 흑염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묵직한 기세를 내뿜는다.

양손으로 들어올린 성검을 뒤덮은 화염의 형상.

댈런의 몸보다도 거대해진 그 일렁임은, 마치 언뜻 검붉은 용의 발톱과도 같아 보였고.

[――――!]

이제는 그 시선이 광기로 타오를 지경인 청린 역시, 용언을 토해내며 발톱을 앞세워 급강하했다.

균열의 심부.

청린의 영역 골짜기.

수백 미터 상공에서, 두 용이 충돌했다.

***

우르르릉······.

하늘이 낮게 포효했다. 토미는 겁먹었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돌더미를 향해, 청년은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읊었다.

"엘르. 마이아린."

쿠르륵.

바위와 자갈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산더미처럼 쌓인 돌 틈 사이에,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토미는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낮춰 그 사이를 비집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무너지지 않기를.

자신이 지나갈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주기를.

다행히 마력으로 벌어진 돌 틈은 그가 지나갈 때까지 붕괴하지 않았고, 토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다시 달려갈 수 있었다.

꽈릉! 쿠르르릉!

쩌적― 쩌저적―

한편 머리 위 상공에서는 거대한 두 힘이 끝을 모르고 격돌하는 중이었다.

그 충돌의 파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이따금씩 화염이나 냉기의 덩어리 같은 형태로 토미의 근처에 떨어지기도 했다.

꽈과과광―!

집채만 한 돌덩이를 단숨에 얼리고 태워 가루로 만드는 힘의 잔재.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그 폭격 속에서, 청년이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꽈악.

그럼에도 달린다.

투명 망토를 움켜쥔 손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음에도, 청년 마법사는 내달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고막을 때리는 거대한 폭음.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는 지면과 절벽.

지나온 길 위로 몇 번이나 떨어지는 집채만 한 돌덩이들.

쉴새 없이 주문을 외워대며, 한 손으로 수인을 맺어내는 청년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정 두려우면 언제든 뒤집어쓰고 도망치면 된다.'

바로 어젯밤, 댈런이 그에게 해준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네 죽을 자리는 네가 선택하라는 거야.'

"···선택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은 중얼거림.

그 말이 맞았다. 청년은 선택했다.

전사가 건네준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기로.

그리고 설령 이곳이 죽을 자리가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기로.

언젠가 맞이할 삶의 마지막이라면, 그 마지막 숨은 누군가를 살리는 데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청년은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지옥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스승님.'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

천애고아였던 자신을 거두고, 마탑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해 준 은사.

젊은 피의 호기심과 어리석음으로 몇 번이나 실수를 거듭했지만, 스승은 그때마다 어김없이 자신을 구해주었다.

성년을 훌쩍 넘긴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때로는 원로 마법사라는 정치적 입장마저 도외시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던 스승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더불어 그 비호 아래에 온실 속 화초처럼 머물던, 그동안의 자신이 얼마나 답 없는 철부지였는지도.

'···이대로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닿지 못한 말을 되뇌인다. 토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물과 콧물의 짭짤함과, 비릿한 혈향이 섞인 목넘김이었다.

이제야 한 사람 몫을 하는 마법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 그 은혜를 조금도 값지 못했는데, 이대로 떠나버리시면 어찌한단 말인가.

상공에서 두 초월적인 존재가 맞붙는 가운데, 토미가 도망치지 않고 스승이 있던 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건 그런 이유였다.

그 절절한 의지를 신이 듣기라도 한 것일까.

"···큿!"

어디선가 튄 돌멩이가 이마를 스치고, 눈앞을 가린 핏물을 닦아낸 토미의 시야에.

우우우웅···.

뿌옇게 일어난 먼지와 이리저리 뒤집힌 지면 한가운데,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빛 반구가 보였다.

"스승님!"

토미가 외쳤다. 젖 먹던 힘을 쥐어짜 달렸다.

가까이 갈수록 거세지는 잔해의 폭격이 목숨을 노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느 거리 안쪽으로 다가오자, 황금 반구는 마치 살아있는 듯 출렁거리더니 그 범위를 넓혀냈다.

토미의 몸을 감싸 보호하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돌덩이 몇 개를 받아내는 금빛 마력.

반구의 안쪽에 들어온 토미는, 마침내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댄 펠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끌끌. 괜찮다마다. 너야말로 몰골이 그게 뭐냐?"

스승이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희뿌예진 동공. 초점 없는 눈동자.

극에 다다른 마력 감응력으로 제자의 존재를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으나, 반면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인 노쇠한 몸은 천천히 식어가는 중이었다.

"크으······."

"쯧쯧. 포션 사용에 주의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그렇게 사용했다가는 언제 팔다리 불구가 될지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제자를 앞에 두고, 스승은 힘겨운 손길로 그 머리를 토닥이며 습관처럼 핀잔을 주었다.

토미는 그 핀잔마저도 달가웠다. 스승의 걱정 어린 한 마디에 욱신거리던 통증도 녹는 듯했다.

"이리 와보거라."

펠버는 제자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잘게 떨리는 손길이 제자의 다친 환부를 더듬거린다.

"으음. 심각하구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토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석 심문관을 단숨에 죽인 용의 일격은, 댈런이 나서서 막아섰음에도 새어나온 힘의 여파마저 강렬했다.

성기사들과 함께 수백 미터 거리를 튕겨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의식을 유지한 것 자체가 기적.

청년은 끊어진 손가락을 주워 모으고, 으깨진 다리를 어거지로 끼워 맞춰 재생 포션을 들이부어가며 몸을 수복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처치는 아니었다.

재생 포션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재생만 해주는 것이기에 외과적인 처치를 동반해줘야 하는 치료수단.

지금처럼 막 갖다대고 붙였다가는, 관절이 잘못 접합되거나 신경이 눌리는 등 온갖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었다.

펠버는 혀를 차며 제자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주문을 속삭였다.

"가만 있거라.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떨리는 손끝. 황금빛 파동이 역전되어 청년의 몸에 스며든다.

억지로 끼워 맞췄던 근육과 뼈들이, 순식간에 으스러지더니 다시 원래의 정상적인 형태로 되돌아갔다.

"쿨럭! 이제 좀 낫구나."

"스승님! 제가 아니라 스승님의 시간을 되돌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이놈아.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스스로의 시간선을 다스릴 줄 안다면, 그게 신이지 인간이겠느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먹이는 제자에게, 펠버는 또 한 번 핀잔을 주며 끌끌 웃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서라, 안 간다. 내 종착지는 이곳이다. 다행히 댈런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구나."

펠버는 고개를 탁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육신과 다르게, 영역의 힘은 아직까지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전개되어 있었다.

덕분에 초첨 잃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펠버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전황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푸름과 붉음의 싸움.

냉기와 화염의 사투.

한쪽은 날 때부터 불멸의 존재이되, 저주와 부상으로 필멸의 굴레를 짊어지게 된 초월자였고.

다른 한 쪽은 오롯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끝없는 생의 반복으로 종의 한계를 몇 번이고 뛰어넘어 불멸의 끝자락을 쥐게 된 존재.

불완전한 필멸의 육신으로 신비를 받아들였으니, 분명 뒤탈이 없지는 않겠다마는.

적어도 지금만큼은 영락한 불멸자를 상대로, 댈런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전(善戰)을 이뤄내고 있었다.

쿠구구궁······.

하늘이 검붉은 기운으로 번쩍였다. 거대한 푸른 덩어리가 계곡 저편으로 낙하했다.

그 뒤를 쫓아 지면으로 내리꽂히는 검붉은 전사의 신형.

싸움이 끝나간다는 걸 느낀 펠버는, 제자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좀 더 가까이 오너라, 토미. 네게 내 마지막 깨달음을 전수하겠다."

가까이 다가온 청년의 이마에 얹어진, 주름 자글자글한 노인의 손.

"대지의 심상으로 시간선에 손을 대는 나의 영역을, 네가 후대에 계승하도록 하여라."

그 손등 위에서, 새로운 마법체계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진룡(4)

쿠르르르······.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거대한 용의 진체가 추락한 자리였다.

연막처럼 피어오른 먼지구름 앞. 댈런은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치이이이―

붉은 핏물에 공기가 이지러진다. 마치 뜨겁게 달군 쇳물을 땅에 흘렸을 때와 비슷했다.

'이건 뭐 사람 몸뚱이가 아니군.'

진작에 평범한 인간의 육신은 벗어던졌으나, 이제는 사람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기도 뭣한 상황.

기묘한 감상에 이글거리는 핏자국을 바라보는 사이, 흙먼지 연막을 가르고 무언가가 빠르게 쏘아졌다.

스가가가각!

수십 개의 푸른 결정이었다. 궤적을 따라 차디찬 냉기를 꼬리처럼 달고 날아오는 새파란 결정들.

댈런은 별 동요 없이 검을 들었다. 검붉은 화염이 휘감긴 검로가, 예정된 사선을 몇 번이고 가로지른다.

쩌저저저정―!

냉기와 열기가 만나며 폭발하고, 밀려난 공기가 연막을 확 몰아낸 순간.

화르륵!

온몸에 불꽃을 둘러쓴 댈런의 신형이, 폭발의 여파를 뚫고 용에게 부딪혔다.

꽈아아앙!

가벼운 검격. 무거운 화염.

너덜너덜해진 용의 진체가 또 한번 두들겨지고, 신비와 신비의 충돌에 비늘과 근육이 찢겨나간다.

두 쌍의 날개로 최대한 공세를 막아내며, 청린은 순간적으로 동공을 좁혔다.

[――――!]

피칠갑된 주둥이에서 용언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눈에 푸른 잿빛이 점멸했다.

시선만으로 쏘아내는 건, 진룡의 피에 새겨진 수많은 권능들 중 하나.

스아아아아―

공기가 얼어붙는다. 급격한 냉동은 어떤 증기의 폭발로 화해 허공에 하얀 궤적을 남겼다.

그건 마력으로 빚어진 냉기의 개념이 아니었다.

'저주.'

초월자의 심상과 이질적인 의념으로, 한랭지옥의 일부를 끌어오는 권능.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저주 앞에서, 댈런은 망설이지 않았다.

꽈아아앙―!

발밑에서 흑염이 터져나온다. 저주를 뒤집어쓴 육신이 소리의 벽을 넘어섰다.

순식간에 용의 거체를 스쳐 지나가며, 검붉은 화염을 물감 삼아 성검이 그려낸 거대한 호선.

쿠궁. 쿵!

그 호선의 경계에 걸쳐졌던 용의 두 날개가 동시에 땅에 떨어지고, 날개 잃은 용이 한 발 늦게 거센 비명을 토해낸다.

[끄아아아아! 어떻게 저주를 무시하지! 어떻게 지옥의 냉기에도 아무렇지 않은 거냐!]

놈의 눈이 푸르게 번쩍였다. 다시금 쏟아지는 시선의 저주가 공기를 동결시켰다.

목숨을 도외시한 마력의 운용으로, 주둥이에 모아낸 숨결이 저주와 함께 쏟아진다.

콰아아아아―!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화염의 검을 내리쳐 숨결을 갈라내고, 전신을 강타하는 저주는 무시한다.

[으읍. 끄윽. 꺼어어억···.]

지옥의 저주를 두 번이나 포식한 악마가, 아공간에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런 트림을 내뱉었다.

다치고 노쇠한 용은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네가 나무를···!]

[끄르륵. 너 나 아냐?]

[···알다마다.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서 영락했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네놈이 건 저주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거늘,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으···!]

노성을 터뜨리던 용은 순간 흠칫하며 물러났다.

본능에 가까운 동작. 뒤늦게 목덜미에 뜨끔한 감각이 올라왔다.

[커헉! 크······.]

"새끼가 어디 한눈을 파냐."

댈런이 씩 웃었다. 성검의 날을 따라 극도의 한기가 서린 청백색 혈액이 흘러내린다.

용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봐야 네 발 달린 도마뱀 수준이었다.

망가진 심장은 공간 전이는커녕, 숨결 한 번에도 욱신거리는 상태였고.

두 쌍의 날개가 각각 한 쪽씩 잘려나가고 없었기에, 날아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네놈, 후회할 것이다! 필멸의 육신으로 불멸하는 용의 피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일그러진 얼굴로 청린이 소리쳤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그는 검끝을 슬쩍 내리며 물었다.

"그건 내 사정이지. 살려주면 도와주기라도 할 건가?"

[···용의 몸은 용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푸흐흐."

목숨을 구걸하는 용이라. 이거 웃긴데.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멸의 삶을 경험하더니, 너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됐군."

[그게 무슨···!]

"됐다. 해결책은 다른 놈한테 물어보면 돼."

화륵.

타오르던 불길이 응집된다. 성검 위에 한 겹 덧씌워지는 검붉은 검신.

그 의도를 눈치챈 청린이 황급히 숨결을 그러모았지만, 댈런의 신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꽈광―!

높이 치솟는 도약의 불길.

그 애꿎은 불길을 뒤덮는 용의 숨결.

이미 사라진 자리에 숨결을 뿜어내던 청린의 시선이, 어느새 머리의 옆쪽으로 돌아온 전사를 가까스로 발견하고.

[――!]

필사의 의지로 용언을 쥐어짜려 하는 순간, 검붉은 검이 세로로 떨어졌다.

까━━━

파육음이 아니었다.

너덜거리는 푸른 비늘과 검붉은 검날이 부딪친 결과는 거대한 폭발.

범선을 대어둔 골짜기의 입구에서도 보일 법한 섬광의 번뜩임 이후,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풍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가고.

쿵.

푸른 용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

댈런은 청린의 심장을 꺼내 아공간에 보관했다.

심장만이 신비의 결정체인 아룡과 달리, 진룡의 육신은 몸 전체가 신비의 산물.

다만 아무리 욕심을 낸다 해도, 아르보르의 그리 넓지 않은 아공간에 백 미터에 달하는 몸뚱이를 넣을 공간은 없었다.

거기다 그 거대한 시체를 가공하고 처리하는 것 역시, 개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고.

'단장에게 넘기고 빚을 한 번 지우면 되겠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거대한 도마뱀 사체보다는, 성기사단의 단장 같은 존재에게 빚을 지우는 게 훨씬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용의 신비가 모여들고 순환하는 핵심 기관이 심장이기에, 어찌됐건 알짜배기는 확실하게 챙긴 셈.

[우왁! 이게 뭐야!]

제 안방에 떨어진 커다란 심장에 악마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검에서 피를 털어냈다.

사실 필멸자가 진룡의 심장을 제대로 사용할 방법은, 그의 머릿속에도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심장을 챙긴 건, 청린이 언급한 그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

초월적인 존재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걸쳤으나, 말 그대로 발끝일 뿐이기에 만들어진 불안정함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으으으. 추워라. 서리고원 너머도 이렇게 춥진 않을 텐데······.]

청린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로 인한 악마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댈런은 처음 청린과 맞붙었던 장소로 돌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이 보였다.

탁한 회갈색 수염의 늙은 마법사와, 그 곁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는 청년이었다.

터벅터벅 걸어간 댈런은 소년과 노인의 곁에서 멈춰섰다. 노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바위에 기대어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육체와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

그건 마치 방금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댈런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쭈그려 앉았다. 성검은 대충 땅바닥에 꽂아놓고, 주워온 도끼도 그 곁에 내려두었다.

그가 말했다.

"죽었소?"

"···아직이네, 쯧. 버르장머리하곤."

"죽을 때가 다 되긴 했나보군. 입이 거칠어졌어."

노인이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자의 금발에 툭 올려놓았다.

"내 영역의 능력은 이 아이에게 전해주었다네. 전승자가 한 명뿐이니 마탑이라 하긴 뭣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주문의 시조가 될 수 있다니 감격스럽군."

"······."

"이 전사를 잘 보필하거라, 토미. 대륙을 구하기 위해 영겁의 시간을 노력해오신 분이다."

소년은 말이 없었다. 끄덕이는 고갯짓은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댈런은 그걸 보며 눈썹 가장자리를 긁적였다. 나지막이 웃은 펠버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인사를 해야겠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해주겠네."

"뭐요?"

"용굴에서 어린 것이 자네를 따르게 될 걸세. 언젠가는 자네의 숙적이었을 테고, 그 원한을 잊으라 요구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부탁하겠네. 어린 것을 거두어주게나."

눈썹 긁적이던 손이 멈칫했다. 펠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든 일이라는 걸 아네. 허나 내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주게나. 그 아이는 자네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걸세."

후우.

노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 숨결의 온도가 미지근했다.

조금씩 헐떡이는 숨소리는, 한 인생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말해주었다.

펠버는 짧게 숨을 끊어 쉬며 남은 말을 이어갔다.

"흐흐. 사실···물어보고 싶은 게 많긴 하네. 어찌 그 영겁의 시간을 버텨냈는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서 부러지지 않을 수 있는지······. 내 인생의 말미에 자네를 알게 되어 영광이었네. 별들 사이에서···자네의 활약을 지켜보도록 하겠네, 댈런."

노인이 눈을 감았다. 그의 마력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은은하게 감돌던 황금빛이 자취를 감추고, 노인의 숨마저 끝내 흐릿해져간다.

그 앞에서,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소."

"···예?"

의식이 사라진 본인 대신에,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의문을 표하는 제자.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세로로 찢어진 눈이 하늘을 응시한다. 초월적인 시선은 좀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내리쬐는 햇빛. 그 햇살 너머에 빛나는 별들. 두 줄기 은하수.

이 땅의 별들이 머나먼 고향의 가스 덩어리와 동일하지 않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단순히 중력과 기타 등등 뭔지 모를 물리 법칙들에 끌려다니는 무생물이 아닌, 신들의 시선이 묻어나는 어떤 이질적인 규칙의 결정체들.

허나 그 별들을 바라보는 용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 이 우주 어딘가에 있기를 소망하는 고향의 푸른 별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건 회상이자 회한이었고, 그리움이자 지겨움이었다.

나 하나의 안락함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한 나날들. 그게 당연시되고 때로 권장되던 사회. 서로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이 곧 정의라 외치는 집단들.

수십억의 하나로 태어났을 뿐인 그가, 그 수많은 목소리들에 무릎 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타인보다 스스로를 선택했다. 희생이 요구되는 관계보다 안락한 외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 생각했다.

이 대륙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는.

'···나를 희생할 수 있는 관계라.'

한때는 외로움이라 생각했다.

낯선 타지에 떨어진 이방인의 고독에서 비롯된 감정일 뿐이라고.

어쩌면 생전 얻어본 적 없는 힘을 손에 쥐고서, 스스로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인간이라는 걸 잠시 망각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불태운 노인 앞에서, 댈런은 오랜 고민의 답을 마침내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알게 된 지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사실상의 타인.

허나 배불뚝이 아저씨의 삼십 년 인생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자기희생의 관계.

0과 1로 이루어진 게임 속 세상에서, 종말을 막아내지 못한 건 어쩌면 현질의 결여 때문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에게는 화면 속 세상을 지켜야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

피식.

댈런은 헛웃음을 지었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문답이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노인을 바라봤다. 생기를 잃어가는 몸. 굳게 닫힌 눈꺼풀.

이미 보거나 듣지 못하게 되었을 터인 노인의 앞에서, 댈런은 마지막 남은 기감에라도 들리도록 마력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그쪽이 먼저 부탁했으니 나도 하나 부탁하겠소, 노인장.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해주시오."

화륵.

손바닥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검붉은 화염. 그 중심에는 어떤 녹진한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온전한 용혈을 스킬로 얻게 된 이후, 용의 피에 담긴 수많은 힘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처음 얻은 A급 스킬이기에, 지금의 지능 수치로도 다 해석해낼 수 없는 부분들이 다수였지만.

어렵사리 깨닫게 된 몇몇 권능들 속에서, 댈런은 권속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용이 스스로의 힘을 떼어, 자신을 따르는 존재에게 하사해주는 것.'

모니터 너머에서 수십 수백 번을 싸웠을 뿐 아니라, 바로 얼마 전에도 칼을 맞댔던 청린의 권속들.

그들에게 새겨진 인장은 단순히 그들의 소속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진룡이 자신의 힘과 불멸성의 일부를 떼어주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초월자의 힘을 덧입는 만큼, 원래부터도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라야만 받을 수 있는 권속의 인장.

펠버는 그럴 능력이 충분하고도 넘쳤다. 대영역을 이뤄낸 대마법사가 안 된다면 누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바로 본인의 의지.

의식이 꺼져가고, 무의식의 깊은 본심만이 오롯이 남은 상태.

삶의 끝자락에 선 원로 마법사의 속마음은, 과연 누군가에게 속한 삶이라도 달갑게 받아들일 것인가.

개인적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찬반의 의사뿐.

심상 깊은 곳에서 지금껏 쌓아온 힘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댈런은 그 힘이 응축된 손을 노인의 머리 위에 얹었다.

후르르르······.

기다렸다는 듯이 노인에게 스며드는 불꽃.

그리고 한동안 이어지는 초조한 정적.

눈물 자국 가득한 제자의 시선이, 스승의 죽은 듯한 얼굴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화륵!

느닷없이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 노인의 이마 위에, 검붉게 타오르는 표식이 또렷하게 새겨졌다.

길들여진 재앙(1)

"크흑···차석 심문관님······."

청린의 영역 입구. 정박한 범선 근처에 임시로 마련해둔 마련한 야영지.

모닥불의 빛이 희미하게 닿는 야영지 외곽에서, 심문관 피드나는 잘려나간 차석 심문관의 머리를 앞에 둔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도 그리 좋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사라져 너덜너덜했고, 얼굴 반쪽은 동상으로 얼어붙은 상태였으니.

그나마 치유 기도와 재생 포션으로 수많은 찰과상과 타박상을 치료했기에 이 정도였다.

첫 격돌의 여파로 의식을 잃은 그녀는, 이어진 전투로 무너진 계곡의 잔해들에 깔려 상당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후우."

저 멀리 흐느끼는 심문관을 바라보던 마우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괜히 모닥불을 쿡쿡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원로 마법사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죽지는 않을 거요. 의식을 언제 차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그럼 그 제자는···?"

"노인장을 간호하다가 쓰러져 잠든 것뿐이오."

"···다행입니다."

마우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야영지 외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댈런과 두 마법사를 포함해, 에스트라 요새에서 출발한 건 총 여덟 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살아남은 건 다섯뿐.

용의 첫 일격에 죽은 차석 심문관을 포함해, 이후 이어진 전투의 여파로 두 명이 더 사망했다.

"무릇 성기사라면 언제든 죽음을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이든, 아끼는 동료의 죽음이든 간에 말이죠."

야영지 외곽에 하얀 천으로 덮어둔 시신들을 바라보며, 고위 성기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허무하게 스러진 전우의 빈자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상할 정도로 아려지곤 합니다."

댈런은 가만히 소시지를 질겅거렸다. 때론 침묵이 가장 좋은 공감 수단이었다.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균열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싸움이 끝난 지 몇 시간 안 된 것 같은데,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는 벌써부터 제 자취에 반짝이는 섬광들을 흩뿌려놓고 있었다.

"먼저 주무십시오. 제가 심문관 피드나를 지켜보며 깨어있겠습니다."

마우그가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 편할 때 주무시오."

"···진룡과 싸우시고도 괜찮으신 겁니까?"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지."

댈런은 낮게 웃으며 모닥불 곁에 소시지를 몇 개 더 꽂아두었다. 이거 다 먹기 전까지는 잘 일 없다는 뜻이었다.

마우그는 끝까지 함께 깨어있으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고 말았다.

고위 성기사인 그에게도 지난 열흘은 상당히 가혹한 여정이었다.

울다가 끝내 실신한 피드나를 모닥불 근처에 잘 눕혀둔 뒤, 댈런은 딱딱한 빵을 얇게 잘라 저민 햄과 같이 우물거렸다.

그가 문득 말했다.

"야."

[···넵, 주인님?]

"너 진짜 옛날 기억 안 나냐?"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제 또렷한 첫 기억은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 안에서 시작합니다. 요즘 들어 그 이전의 삶이 있다는 것은 조금씩 자각하고 있지만···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처럼 엉성한 장면들의 조합일 뿐입니다.]

"기억나는 장면들이 뭔데."

[밝은 빛의 옥토. 묘목을 심은 누군가. 뻗어나온 줄기와 가지. 그리고···여행입니다.]

"여행?"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하지만 전부 흐릿한 장면들입니다.]

슬픔이 조금 묻어나는 어조였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 주머니나 휴대용 버너 정도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댈런은 아르보르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기사단장부터가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모래바람 왕조나 청린과는 아예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니까.

어쩌면 저주를 먹어치우는 그 능력 역시, 악마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당장 알아보기에는 다소 막막한 일이고, 그보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들도 산처럼 쌓여있었기에 잠시 미뤄둘 뿐이었다.

'우선 이 몸뚱이에 대해서부터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판이니까.'

댈런은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

이름 : 댈런

레벨 : 19

[근력 : 34] [기량 : 28] [체력 : 31]

[감각 : 24] [지능 : 26] [마력 : 26]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

청린과의 전투를 거치며 상태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벌써 레벨 20이 코앞.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는 체력과 마력에 분배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스킬 목록의 마지막에 위치한 '검붉은 용의 피'였다.

숙련도 최대치를 찍은 용혈의 재생 인자와, 그보다 한참 전에 30에 도달한 체력 능력치가 함께 빚어진 결과물.

댈런의 영역은 두 가지 가능성의 발아를 한 줄기로 꼬아내어, 초월적인 존재의 특성 자체를 스킬의 형태로 발현시켰다.

마치 영역을 처음 이뤄냈던 순간처럼, 각성과 동시에 모든 능력치를 두 개씩 끌어올린 건 덤이었다.

'펠버를 권속으로 삼으며 근력과 체력이 다시 감소하긴 했지. 스킬도 둘이나 사라졌고.'

물론 그만 한 대마법사를 살려낼 뿐 아니라 영구적인 아군으로 삼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는 희생이었다.

'그나저나 A급 스킬···확실히 강력하긴 하군.'

혈관을 따라 흐르는 용의 피에 감각을 집중하며, 댈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용의 피를 얻기 전, 그의 몸은 시시각각 무너지는 중이었다.

방대한 영역의 힘을 필멸자의 육체가 감당하지 못해, 힘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축나는 현상.

그의 신체 능력이 범인의 수준은 이미 아득히 초월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멸자의 육신이라는 한계가 생각보다 큰 제약이었던 탓이다.

'용의 피를 얻게 된 이후로, 그 압박은 거의 씻은 듯이 사라졌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댈런은 스스로의 내면을 더 깊이 관조했다.

쿵. 쿵. 쿵. 쿵.

그리 크지 않게 맥동하는 심장.

그 울림에 따라 온몸을 휘도는 무거운 열기.

용혈을 얻은 이후, 댈런의 육신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건 단순히 능력치 증가의 개념이 아니었다.

재생 인자로 말미암은 회복력은 더이상 예전처럼 막대한 체력을 요구하지 않았고.

필멸자의 육신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던 영역의 힘을, 혈관에 흐르는 신비의 그릇은 너끈히 담아내고도 남았다.

먼 미래에 더 큰 힘을 여럿 얻게 된다면 몰라도, 당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스킬이 두 배쯤 증가하더라도 문제가 없을지도.

허나 큰 힘은 큰 대가를 요구한다던가.

진룡의 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쉽게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화륵.

손아귀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불길.

입으로 가져가던 소시지가 한 줌 잿더미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

댈런은 물주머니를 열어 손에 묻은 재를 씻어냈다.

이런 의도하지 않았던 발화 현상이 한나절 사이에만 벌써 열 번이 넘어갔다.

시시때때로 눈의 형태가 변하고, 숨결이 열기로 달아오르는 건 양반이었다.

제멋대로 화염이 터져 나와 용의 날개나 발톱의 형상을 취하려고 하는 통에, 방금처럼 입고 있는 옷이나 불길에 닿은 물건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두세 번 있었다.

균열 심부의 외딴 골짜기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여기가 사람이 바글바글한 팔시온의 청동 거리였다면 대참사가 몇 번은 났을 테였다.

'모르긴 몰라도 침묵중대장이랑 진지한 면담의 시간 정도는 가졌겠지.'

올곧으나 참 고지식하던 전사, 가웨인을 떠올리며 댈런은 피식 웃었다.

어쨌건 한나절 동안 스스로를 관조하며, 댈런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직면한 이 문제는, 단순히 외형이 좀 변하고 끝날 종류가 아니라는 걸.

'···스킬이 제 의지를 가진 건 처음이군.'

의지를 가진 힘.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 댈런이 얻은 스킬들은 일종의 도구 같은 개념이었다.

다루는 난이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스스로의 의지가 없이 주인의 손에 맡겨진 도구.

그러나 검붉은 용의 피는 그 자체로 초월자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아마도 이 피의 주인이었을, 댈런 자신도 설정상으로만 알고 있는 검붉은 용의 의지.

'용신의 적창, 이름이 지워진 용.'

종말의 최후반부까지도 등장하지 않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용들에게 붙은 이명을 생각했을 때, 용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진룡이라면 청린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강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어떤 부상이나 저주도 입지 않은, 전성기 시절의 청린 기준으로.

"쯧."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입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존재에게 말을 건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

당장에 고민해서 어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댈런은 한쪽에 쌓아둔 짐더미에서 빵과 소시지를 몇 개 더 꺼냈다.

불에 달궈진 보존식량들이 천천히 온기를 머금어갔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밤은 딱 적당하게 길었다.

***

다음날.

새벽부터 에스트라 강은 기사단의 증원 병력을 실어나르는 범선들로 가득 찼다.

일행은 물론 댈런도 살짝 놀란 부분이었다.

대규모 야영지가 준비되는 사이, 댈런은 증원 병력과 함께 온 익숙한 얼굴을 통해 자세한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방어선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본단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습니다."

먼 미래에 악마 살해자라 불릴 영웅, 성기사단의 정식 기사이자 심문관인 루시아였다.

거의 보름 만에 본 금발의 성기사는, 분위기가 살짝 달라져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느껴지는 기세부터 다를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한 모습.

아마 미궁도시에서부터 이어져온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번에 갈무리해 정리하며 한 단계 높은 성취를 이뤄낸 모양이었다.

"부단장이 일으킨 반란의 여파는 쉽게 가라앉을 성격의 일이 아니었죠. 안 그래도 어수선한 상황인데, 첫 번째 방어선인 에스트라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전언은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수백 명의 증원군이 올 수 있었던 거요?"

"단장님 덕분입니다."

혼란에 혼란이 중첩되는 본단의 상황 속.

단장 에드거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적절한 증거와 증인을 확보해, 부단장의 반란과 청린의 침공을 교묘하게 한데 묶어버렸다.

지금까지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기사단을 혼란시켜 무너뜨리려 하는 악한 용의 계략이라 선언한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합니다. 실제로 청린과 에버로크가 모종의 밀약을 맺기도 했었으니까요."

"······."

물론 순서가 좀 이상하긴 했다.

에버로크가 난데없는 북부 출신 전사에게 패배하고, 그 결과로 성검과 균열 방벽의 열쇠를 자신에게 가져다줄 거라고는 청린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어쨌건 내분과 외침이라는 연이은 악재 속에서, 에드거는 향할 곳 잃은 시선들을 외부의 적에게 자연스럽게 돌리는 데 성공했다.

정적들에게 기사단의 노괴라 불리는 그가, 성기사단의 수장으로서 백 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켜온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그렇게 에스트라 요새의 함락 사실을 전해들은 본단은, 그 즉시 대규모의 병력을 균열 안으로 밀어넣었다.

에드거는 그 병력을 직접 이끈 에드거는, 우선 병력의 칠 할 정도로 요새의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댈런과 일행을 찾기 위해, 나머지 삼 할에 달하는 병력에게 에스트라 강을 건너라 명령했다.

'아마 예지안의 능력이 개입했겠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전략에 통달했다고 해도, 청린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천에 가까운 병력을 무작정 용의 영역으로 밀어넣지 않았을 터.

어찌 됐건 한바탕 사투를 겪고 난 일행에겐 다행이었다.

청린의 영역 입구에 설치된 기사단의 임시 진영에서, 생존자들은 단순한 야전 응급처치 이상의 충분한 치료와 휴식을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

'슬슬 가야겠군.'

끼익.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거리던 루시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용굴."

댈런은 무장을 점검했다.

왼허리춤의 성검. 반대쪽의 도끼와 주문살해자.

넝마가 된 갑옷은 증원 병력에게서 하나 보급받았고, 아공간에는 루시아의 특제 용꼬리 육포를 새로 넉넉하게 쟁여두었다.

"벌써 말입니까?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으셨잖습니까."

"대충 살 만하오. 그만큼 급한 일이기도 하고."

루시아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같이 가자는 것이겠지.

"금방 돌아올 거요. 여기 계시오. 노인장을 부탁하겠소."

"······알겠습니다."

살짝 풀 죽은 목소리. 댈런은 낮게 웃고는 막사를 나섰다.

비록 게임 속에서처럼 자연사는 아니었지만, 청린은 결국 제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의 미래는 댈런이 알던 흐름과 다시금 엇비슷하게 이어질 테였다.

그리고 댈런이 아는 미래는 모두가 종말의 분기점들.

대륙의 운명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걸 막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부탁하겠네. 어린 것을 거두어주게나.'

말 위에 올라탄 그의 뇌리에, 문득 펠버의 유언이 스쳐지나갔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원로 마법사가, 시간선 너머를 내다봄으로 남긴 예언.

'힘든 일이라는 걸 아네. 허나 내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주게나.'

"···쯧."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펠버의 대영역은 그의 삶을 어디까지 들여다본 것일까.

마치 그가 겪어온 플레이들을 엿보기라도 한 것 같은 유언이, 은근하게라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고개를 슬슬 털어낸 댈런은 말을 출발시켰다.

예언가의 말재간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허나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의 유언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어느 쪽이든 결정하기 위해서는, 용굴에 가서 그 예언의 주인공과 대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대륙 남서부를 지옥으로 만드는 거대한 재앙.

'왕국을 얼린 숨결'이라는 이명이 붙게 되는 사상 최악의 진룡 중 하나를 말이다.

길들여진 재앙(2)

골짜기는 시끌시끌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진룡의 영역이었던 곳답지 않게, 미로 같이 얽힌 골짜기들 사이에는 인간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길을 닦을 거다!"

"큰 바위는 나중에 쓸 수 있도록 적당히 조각내고, 자잘한 돌덩이는 바로 수레로 실어날라라!"

"절벽에 난 틈이나 동굴을 조심해! 혹시나 마물들이 숨어있을 수 있다!"

목소리의 주인은 성전사들이었다.

두 손에는 끌과 정을, 허리띠에는 무기를, 뒷춤에는 각종 공구가 든 가방을 맨 기사단의 성전사들.

이들은 소대 단위로 흩어져서 계곡의 입구 근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전투의 여파로 곳곳에 떨어진 낙석을 치우고, 길이 닦일 곳의 땅을 한 차례 엎어놓는 작업이었다.

깡! 깡! 덜그덕. 덜그덕.

기사단이 도착한 지 고작 한나절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전격적으로 진척되는 작업 현장.

성전사들이 이렇게 길을 정리하거나 강가에 임시 진영을 세우는 사이, 성기사들은 정찰대를 편성해 일대의 남은 마물들을 처리해 일대를 안전 지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요새를 하나 더 지을 생각인가 보군.'

댈런은 말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백 회차에 달하는 플레이 중, 간혹 지금처럼 성기사단이 제 세력을 넓혀내는 때가 있었다.

보통 청린이 자연사한 틈을 노려, 에스트라 요새 너머로 병력을 진격시킨 경우가 그런 것.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균열 심부의 초입 구간은 실질적으로 청린의 통치 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바.

청린이 자연사하고 세력이 사분오열되는 타이밍을 잘만 고르면, 성공적으로 균열 심부의 일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 타이밍이 가장 문제긴 하지만.'

타이밍을 잘못 잡아 일찍 진격한다면, 아직 건재한 청린의 세력에게 역공을 맞는다.

그렇다고 너무 늦으면 균열 더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온 악마들이, 이미 청린의 영역이었던 곳을 다 흡수하고 자리를 잡은 상태일 테고.

청린이 정확히 몇 날 몇 시에 죽는지를 알 수는 없으니, 사실상의 도박수나 다름없는 행위.

거기다 설령 그렇게 땅을 빼앗아냈다 해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애당초 성기사단의 존재 목적은 균열의 입구를 지키는 거지, 균열 안으로 치고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제 영역을 지키는 데 가장 많은 힘을 쏟는 기사단이, 균열 안으로 진격하고자 결단을 내렸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백이면 백 대륙 전체가 일찌감치 혼돈에 빠져, 미궁 안의 악마들에게 어떻게든 한 방을 먹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어찌 한 방을 먹였다한들, 뒤이어 덮쳐오는 더 큰 종말의 손아귀 앞에서 기사단이 버텨내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지만.'

종말이 그 속도를 높이고 있는 건 확실하다.

허나 그 주요한 시도들이 번번히 댈런의 손에 저지되고 있는 것도 사실.

모르긴 몰라도 몇몇 악마들의 마음은 꽤 조급할 것이다.

계속해서 뒤틀리는 미래를 보다못해, 원래 정해진 순서보다 몇 년을 앞당겨서 대륙을 침공하려 했건만.

그 시도들이 한 사람의 손에서 번번히 무너지는 걸 보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 어느 회차보다도 대륙의 인간들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종말이 열심히 삽질을 하는 와중에, 이렇게 기사단이 균열 안쪽으로 세력권을 넓혀내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깡! 깡!

사람들의 외침 사이사이로 공구로 바위를 쪼개는 소음이 울려퍼진다.

노새의 투레질과 수레의 덜커덩거리는 소리 사이로, 댈런은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그리고 그때.

"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계곡 저 안쪽에서부터 그의 귓가에 닿았다.

***

그어어어어!

"바위 트롤이다, 물러나!"

"으악! 뭐야, 순찰대가 다 정리하고 간 거 아니었어?"

절벽의 갈라진 틈 안쪽.

비좁은 동굴 같은 지형에서 트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한창 작업중이던 성전사들은 하얗게 질린 채 우르르 물러났다.

절벽 틈을 반원형으로 넓게 둘러싼 성전사들이, 황급히 공구를 버리고 각종 병장기며 굵은 올가미를 꺼내들었다.

"으, 으아아아!"

그때 바위 틈 안쪽에서 성전사 한 명이 뛰어나왔다.

아직 어린, 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싶어보이는 소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년은 반쯤 패닉에 빠져 소리질렀다.

"모, 모두 도망쳐! 트롤, 트롤이야!"

"래리! 이쪽으로 와라!"

소대를 이끄는 중년의 성전사가 외쳤다. 소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섬전같이 날아온 돌덩이가 소년의 다리를 스쳤다.

"끄아아악!"

피가 촥 튀고,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소년.

허둥지둥 기어서 도망치려는 그의 등 뒤, 삼 미터에 가까운 근육질의 트롤이 절벽 틈을 비집고 나타났다.

"래리!"

중년 성전사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조차도 섣불리 다가서지는 못했다.

바위 트롤의 피부는 돌덩이처럼 쩍쩍 갈라졌으며, 그 강도는 말 그대로 바위나 다름없는 수준.

신성 문신으로 육신과 무구를 강화할 수 있는 성기사가 아니라면, 창칼 따위의 날붙이로 찔러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그륵, 그르륵. 그어어어!

"으, 으아아아!"

트롤의 코앞. 어깨를 붙잡고 주저앉은 성전사가 비명을 지른다.

바위 트롤이 손을 뻗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탐욕스런 눈빛에, 사람의 머리 정도는 단숨에 으깰 악력의 손아귀였다.

"으······."

소년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패래랙― 쾅!

머리칼이 휘날렸다. 뭔가 공기를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거대한 쐐기로 돌을 쪼개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고, 소년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그어어어어!

트롤이 외마디 비명을 토해내더니, 놈의 손목이 스르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쿵.

녹색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소년의 눈에 절벽에 박혀 반짝이는 날붙이가 보였다.

그그극···.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판단이 서기도 전에, 그 날붙이는 저 혼자 절벽에서 뽑혀나왔다.

화륵!

검붉은 화염이 날붙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건 손도끼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도끼는 검붉게 타오르는 원반이 되어 바위 트롤에게 날아갔다.

패래랙― 퍼걱!

마치 부드러운 치즈를 가르듯, 가볍게 트롤의 가슴팍을 헤집고 나오는 원반.

일순의 번뜩임 같은 그 궤적을 따라가던 소년의 시선은, 마침내 동료 성전사들의 뒤에 선 덩치 큰 용병에게 닿았다.

"용병···?"

기사단이 외부인에게 보급하는 갑옷을 입은 걸 보니, 확실히 용병이 맞았다.

그는 제 손으로 돌아온 도끼를 옷자락으로 대충 닦고는 허리춤에 척 끼워넣었다.

도끼머리를 툭툭 두드린 자연스레 그가 동료 성전사들 사이를 지나쳐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소?"

"예, 예에···으윽."

"좀 다쳤군."

두꺼운 곰 같은 손이 소년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뭐 어찌 저항하거나 할 틈도 없었다.

찢어진 바지와 그 안의 환부를 눈대중으로 살피던 그는,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부었다.

"으윽!"

재생 포션의 통증이 화끈하게 올라온다. 소년은 가까스로 비명을 참아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약병에서 털어낸 용병은, 능숙하게 붕대를 풀어 환부를 감쌌다.

"뼈는 안 상했소. 다만 새로 차오른 근육과 살점이 자리를 잡아야 하니, 하루쯤은 뛰지 말고 걸어만 다니시오. 무거운 것도 들지 말고."

"예, 예. 고맙습니···어엇."

"왜 그러시오?"

"누, 눈이······."

"···아."

용병은 손으로 눈을 덮었다. 그리고 뭔가 중얼거린 후 손을 치웠다.

방금까지 세로로 찢어져 검붉게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어느새 평범한 검은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범했으나 깊은, 묘하게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눈.

"가보겠소."

용병은 소년이 뭐라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일어섰다.

그는 이들의 소대장인 중년의 성전사에게 다가가, 소년이 하루 정도 일을 쉬게 해달라 말했다.

중년 성전사는 바짝 얼어붙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그대로 말을 타고 떠났다.

"펴, 편안한 여정 되십시오!"

떠나가는 말의 뒤로 잔뜩 기합이 들어가 외치는 소대장.

소년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소대장의 표정은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몸. 하얗게 질린 얼굴.

마치 자신이 트롤에게 잡히기 직전에 지었을 것 같은 그 표정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대장님, 저 완전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너는 쉬어야 해. 저분의 명령이다."

"···혹시 저분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신가요?"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는 소대장의 태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위 트롤이 꽤 강한 마물이긴 하지만, 강력한 마법사나 성기사라면 혼자서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단 일격에 바위 트롤의 심장을 부수는 주문은 들어본 적 없긴 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요상한 주문은 많은 법.

저 용병은 그가 모르는 주문을 알고 있는 듯했고, 그건 신기할 뿐 이렇게 덜덜 떨 일은 아니었다.

"넌 결코 모를 거다. 난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얼마 전 기사단이 내전에 휘말렸을 때, 저분께서 어떻게 아룡을 죽이고 용살자의 칭호를 얻으셨는지."

"예? 용살자요?"

소년은 순간 혀를 씹을 뻔했다. 그러나 소대장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 성소에서 까마득히 높은 창공 위.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성검으로 벼락을 뿜어내셨지.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말이다···."

꿀꺽.

떨리는 입술로, 소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룡 청린의 목을, 저분이 직접 자르셨다고 하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