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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마녀······?"

한 박자 늦은 반응. 댈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번에 당황한 얼굴이 되어, 곧장 경계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점심때가 넘어가는 여관 주점은 시끄러웠다. 그들에게 신경 쓰는 시선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밖에 없었다.

"양갈비 약초 찜과 르비바흐 특산품인 약주 나왔습니다. 약주는 도수가 높으니 물에 조금씩 타서 드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달칵.

접시와 술병, 나무잔 두 개를 내려놓은 종업원이 빈 그릇들을 모아서 가져갔다.

그가 사라지자 그 시선 하나마저도 사라졌다. 루시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씀하신 게···제가 아는 그 마녀 맞습니까?"

"맞소."

퐁.

마개를 따자 씁쓸하고 독한 향취가 코를 찌른다. 댈런은 씩 웃었다. 이거 맛있겠네.

"만드레이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식물이지."

쪼르륵.

댈런은 잔에 술을 따르며 운을 띄웠다.

"특유의 붉은 꽃이 피어나기 전에는, 경험 많은 약초꾼들이라도 잡초와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오. 사실 큰 상관은 없는 일이지. 꽃이 피지 않은 만드레이크는 아직 덜 자란 상태고, 약초로서의 효능이 아예 없다시피 하거든."

"만드레이크 한 뿌리가 나온 곳에서는 못해도 주변에 서너 뿌리가 더 자라게 된다······. 그게 그런 뜻이었군요."

"···의외인데. 요즘 성기사단에서는 그런 것도 배우시오?"

루시아는 살짝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본단의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독서광 기질이 좀 있었거든요."

"그렇군."

댈런은 짧게 대답하곤 잔을 기울였다.

르비바흐의 약주는 독한 술이었다.

술기운이 식도와 위장을 따라 내려가며 뜨겁게 덥히고, 약초 특유의 씁쓸하고 살짝 역한 잔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르비바흐는 원래 약초로 먹고 사는 도시요. 그런 이곳에서 만드레이크가 한 해에 몇 뿌리 정도 나는지 아시오?"

"두세 뿌리쯤 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약초의 도시라도, 원체 귀한 약초 아닙니까?"

"맞소. 대충 그쯤 되지. 그런데 근 한 달간 르비바흐에서 발견된 만드레이크가 얼마나 되는지 들었소?"

"성문 앞에서 오십 뿌리가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습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퍼진 소문만 그 정도요. 대륙 각지에서 상인들이 이토록 많이 몰려왔다는 건, 사실은 그 이상이라는 소리고."

"그렇다는 건······."

"숲에 피어난 만드레이크는 못해도 수백 뿌리. 풍년이 아니라 재앙이라 불려야 될 숫자일 거요."

루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드레이크는 전설적인 효능으로 유명한 약초였지만, 동시에 뽑혀나 죽음을 맞이할 때 비명을 지르는 괴이한 식물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 비명에 실린 마력은, 듣는 이의 심장을 파괴하는 주문 그 자체.

수백 뿌리가 동시에 비명을 내지른다면, 숲 근방의 모든 이들이 몰살당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수백 뿌리가 단번에 뽑히는 일은 없겠으나, 그럼에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상황.

댈런은 술을 다시 따랐다. 그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이 근방에는 마녀가 한 명 살고 있소. 그것도 다른 마녀들에 비해 유독 인간에게 독기를 가득 품은 마녀지. 때 아닌 만드레이크 풍년은 아마 그녀가 벌인 짓일 테요."

"그러면 당장 잡으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가 반문했다.

"그 마녀가 어딨는 줄 알고?"

"그야 만드레이크가 발견된다는 숲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짜고짜 그 숲으로 쳐들어가자?"

댈런이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에 당장 그러자고 하려던 루시아가 말을 멈췄다.

그녀가 아는 마녀는 날 때부터 술사로서 완성된 존재였다.

재능과 노력으로 빚어진 초인들을, 혈통의 힘 하나만으로 압도하는 괴물들.

그리고 술사들이 무언가 일을 꾸밀 때, 자신의 영역을 수많은 주문과 함정으로 철저하게 방어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일이다.

즉 이대로 숲에 쳐들어가봤자, 마녀가 준비해둔 주문들에 휘말려 목숨이 위험해질 뿐이라는 소리.

설령 운이 좋아 그 주문을 죄다 뚫고 마녀의 심처에 도달한다 해도, 정작 마녀는 여유롭게 자신만의 탈출구를 통해 빠져나간 뒤일 테였다.

"···어렵겠군요."

루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로서는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댈런은 다시 한 번 잔을 채우며 말했다.

"마녀에게 접근하는 법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루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여관 창문을 고갯짓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려, 햇살이 창살 사이로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면, 마녀나 흑마법사들이 활동하기 딱 좋은 시간이 오니까."

***

날이 저물었다. 댈런과 루시아는 도시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르비바흐는 작은 도시. 뒷골목의 규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요 근래 도시를 찾은 외지인들이 부쩍 늘어난 탓에, 뒷골목 상권 또한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자, 돈 놓고 돈 먹습니다! 주사위 눈금만 맞추면 은화가 금화로 바뀌는 마법!"

"거기 오빠들, 우리 가게에서 잠시 쉬다 가!"

창관과 불법 도박장, 마약상이 뒤섞인 홍등가를 지나,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한 허름한 건물 앞이었다.

"여기입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그녀는 품이 넓고 어두운 로브로 온몸을 가린 상태였다.

더불어 흑마법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신성력을 감추기까지 했다.

'그림자에 스며드는 빛. C등급 스킬이지. 기사단에서도 심문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고.'

심문관들의 주 임무는 기사단 내부의 악을 추적해서 척결하는 것.

그 특성상 스스로가 성기사임을 노출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도 오기 마련이다.

신성력을 감추는 이 기술은, 게임에서도 루시아와 함께 잠입 임무를 하면 이따금씩 볼 수 있는 스킬이었다.

'역시 스킬 C등급인가.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하군.'

로브로 온몸을 가린 루시아를 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감각이 에민한 그마저도, 루시아에게서 평소 은은하게 느껴지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라면 어떤 기운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루시아의 자세와 호흡으로 그녀가 실력있는 검사임을 눈치챌 수 있을 테였지만.

'흑마법사 나부랭이들이 그런 눈썰미를 가졌을 리는 없지.'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고 세 번 두드렸다.

쾅쾅쾅.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문 위쪽에 달린 작은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창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게슴츠레 눈을 뜬 뻐드렁니 남자였다.

그는 댈런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흐아암, 누굴 찾나? 미리 말하지만 여기는 여자나 마약을 파는 곳이 아니야."

하품까지 섞어가며 귀찮음을 다분히 묻어내는 말투.

눌러붙은 눈곱을 비벼 떼는 남자의 외견은, 별 특별할 것 없는 뒷골목의 거주민처럼 보였다.

그러나 초인의 경지에 접어든 마력 수치와, 옛적부터 그 경지를 넘어선 감각 수치는 분명히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불길한 마력이 남자의 주위를 멤돌고, 흐릿한 혈향과 시약의 냄새가 예민한 후각을 자극한다.

남자가 누구인지는 단박에 답이 나왔다.

'흑마법사.'

당연한 일이다.

댈런이 방문한 이곳은, 이 도시에서 흑마법사들이 모여 자신들의 재주를 파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

동시에 재의 마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까지,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고 거처로 삼은 곳들 중 하나였으니까.

댈런은 괜히 코를 긁적거렸다. 그리고는 약간 어눌한 말투로 남자에게 물었다.

"그, 여기에 점을 잘 치는 노파가 있다 들었는데. 내가 잘못 온 건가?"

뻐드렁니 흑마법사는 미간을 슬쩍 올리더니,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쪽 손님이셨군."

드르륵.

창문이 닫힌다. 곧이어 안쪽에서 자물쇠며 걸쇠를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어서 들어와. 안에서 이야기하지."

뻐드렁니의 흑마법사는 슬슬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댈런은 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문 안쪽은 어두웠다. 횃불 하나 없이, 복도인지 넓은 방인지도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댈런은 그 어둠이 두려운 듯 주춤거렸다.

그건 마치 흑마법에 대한 공포가 만연한 북부 출신의 어느 야만인과 같은 태도였다.

"······."

그리고 루시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왔다.

여관을 떠나며 미리 정해둔 각본.

야만전사와 그를 따르는 낡을 로브를 걸친 하인으로서의 연기였다.

"흐흐흐. 그쪽 하인은 주인님한테 충실하게 붙어있는 강아지 같군."

흑마법사가 루시아의 몸을 훑으며 말했다. 댈런은 로브 소매에 가려진 그녀의 손에 힘을 꽉 들어가는 걸 느꼈다.

"킁킁. 젊은 여자 냄새가 나는데. 그냥 하인으로 두기에는 아깝지 않아?"

"부족을 떠날 때 아버지가 물려주었소. 탐낼 생각은 마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옷자락 잡은 손을 두어 번 토닥였다.

소리 없는 작은 한숨. 그리고 손에서 살짝 풀어지는 힘.

방금 목숨의 위기를 넘긴 줄도 모르는 흑마법사는, 두 사람이 실내로 완전히 들어서자 문을 쿵 닫았다.

그리고 다시 걸쇠와 자물쇠를 채우며 말했다.

"노파는 한동안 자리를 비웠어. 하지만 점 치는 일이라면 나도 좀 할 수 있으니까, 괜히 돈 안 내고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북쪽에서 온 손님이라면 흑마법사의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겠지?"

히죽거리는 어조로 하는 말은, 회유인 동시에 분명한 협박.

그리고 문이 완전히 잠기자마자, 칠흑같던 어둠이 물러가고 넓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앗―

타오르는 모닥불과 천장에 군데군데 박힌 마력석.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을 둘러친 벽돌 벽에 폐쇄감이 느껴짐에도, 답답함이 없을 정도로 널따란 방의 면적.

외부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이 방은, 건물의 지하에 지어진 공간이었다.

본래라면 서로 이어져있지 않은 지상과 지하의 두 공간.

흑마법사들의 비밀스러운 거처답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걸 트리거 삼아 작동하는 결계진만이 두 공간 사이를 오갈 수 있는 통로였다.

"뭐야, 뻐드렁니? 개장하자마자 손님이냐?"

"덩치 큰 손님이네. 어서 와. 운명의 솥 앞에서 새끼 손가락을 걸고 미래를 맞춰보는 건 어때? 킥킥킥."

넓은 방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약방처럼 약병과 서적들을 뒤에 쌓아둔 채, 카운터에 기대선 노인.

돗자리를 깔고 금이 간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는 대머리.

가마솥을 저으며 뭔가 이상한 색감의 스튜 비스무리한 걸 만들어내고 있는 산발머리 여자 등등.

그 앞에서, 댈런은 슬며시 웃으며 감각을 확장해나갔다.

마녀가 설치해둔 결계로 인해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와 문이 잠긴 순간, 결계 내부에 들어선 그의 감각은 제약에서 자유로워졌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공간 전체를 훑고, 그 안에서 흐르는 마력의 바람을 느껴낸다.

뻐드렁니의 말이 맞았다.

재의 마녀는 여기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곤 작은 도시에 빌붙어 사는 어중이떠중이 흑마법사들뿐.

더불어 흑마법사들이 막 활동을 시작할 시간대여서 그런지, 어중간하게 피해를 볼 손님들 역시 한 사람도 없었다.

"자 그럼, 우리 야만인께 필요한 행운이 뭘까···응?"

문을 완전히 잠그고 돌아선 뻐드렁니 흑마법사는, 댈런의 입꼬리에 맺힌 사나운 미소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함을 느낀 그는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댈런의 손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커허억···!"

두툼한 손아귀가 뺨을 한 차례 훑어내자, 흑마법사가 털썩 엎어지며 부러진 이빨과 핏덩이를 우수수 쏟아낸다.

순간 얼어붙은 방 안의 공기.

댈런은 반쯤 실신한 뻐드렁니의 머리를 지그시 밟으며 말했다.

"인내하느라 고생했소. 이제 성기사의 본분을 다해도 좋소."

루시아는 말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의 로브 틈 사이로 새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재의 마녀(2)

"성기사다! 죽여!"

누군가 소리쳤다. 그 말에 흑마법사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젊은 여자의 눈에 붉은 기운이 요사스레 감돌고, 약방 노인은 몸에 숭숭 털이 돋아나더니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돌진한다.

"르카렘― 오브!"

"오투독사― 바사크!"

동시에 무형의 힘이 지하실의 흙바닥 위를 내달리고, 녹색의 벼락이 더벅머리 흑마법사의 손바닥에서 쏘아진다.

그 공세의 종점에서, 루시아는 로브를 풀어 집어던졌다.

성기사단의 문양이 수놓아진 갑옷 아래, 그녀의 드러난 피부에서 신성문신의 빛이 내뿜어지고.

스아아아―

새하얀 검신이 십자막이부터 검끝까지 신성력의 빛으로 뒤덮인 순간.

팟―

그녀의 신형이 쏘아졌다.

스가가가각!

짧은 순간 그려지는 수십 번의 호선.

짐승인간이 된 노인이 온몸을 난자당한 채 바닥을 뒹군다.

낭창거리는 채찍을 든 붉은 눈의 여자는 목과 심장에 뚫린 구멍에서 새빨간 피분수를 뿜어댔다.

방패를 들어 무형의 힘을 걷어내고, 신성력 머금은 검끝으로 녹색 벼락을 엮어 뿌리치는 루시아.

곧장 쇄도하는 그녀의 앞에서, 두 흑마법사는 다음 주문을 외워내지 못했다.

"괴, 괴물!"

"살려줘! 도망쳐!"

넓은 방 안의 흑마법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간다.

말 그대로 학살당하는 놈들을 보면서도, 댈런은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호칭과 주문을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세간에서는 얼핏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당초 이 세계의 마법사와 흑마법사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흑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니라 사교도 쪽에 더 가깝지.'

마탑에 소속되어 대대로 전승되는 주문을 익히는 마법사와는 달리, 흑마법사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거래를 해 힘을 얻는 이들.

악마가 인신공양 없이는 거래에 응하지 않는 족속이라는 걸 생각하면, 놈들이 얻은 힘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결국 흑마법사란 작자들이 불법 마약상 내지 인신매매범의 직업으로 음지에 숨어드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저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구성한 눈앞의 흑마법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놈들이 악마의 이름을 외며 시전하는 주문이나, 뒤틀린 육신으로 얻게 되는 초인적인 신체능력 역시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얻어낸 보상이었을 테니까.

그런 쓰레기들을 학살하는 데는 일말의 죄책감도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끄아아악!"

루시아의 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흑마법사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넓은 방 안은 흑마법사의 시체로 가득했다.

남은 건 돗자리를 깐 대머리와 솥을 저어대던 산발머리 여자 두 명.

검에서 피를 털어낸 루시아가, 놈들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커어억···!"

산발머리 여자가 치켜든 단검이, 대머리 동업자의 가슴팍을 등 뒤에서부터 꿰뚫는다.

"이, 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돌려,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여자에게 뭐라 말하려 하는 대머리 흑마법사.

산발머리 여자는 그 중얼거림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단검을 크게 비틀며 뽑아냈다.

"커헉!"

피를 쏟으며 털썩 쓰러지는 흑마법사의 시체.

쯔아아악―

그 꿰뚫린 가슴팍에서부터 음침한 마력이 꿈틀거리며 빚어지고.

뚜렷한 어둠의 형상을 갖춘 마력이 순식간에 대머리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흐흐흐. 나를 이런 허접한 새끼들이랑 동급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지."

산발머리 여자는 음산하게 웃으며 단검을 세우고, 마치 기도하듯 두 손으로 모아쥐었다.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사람을 희생물로 바쳐버린 그녀는, 단검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칼카스― 쎄 글램!"

콰자작!

허공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이지러진다.

불길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그 일그러짐 사이로 새어나온다.

산발머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흑마법의 길은 손쉽게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만큼, 어중이떠중이들이 수없이 많은 것 또한 사실.

그런 어중이떠중이와 진짜 흑마법사의 차이는, 지옥문의 편린만이라도 열어젖힐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지옥문의 아주 작은 편린이었으나, 그걸 열어내는 데 소요된 제물은 고작 한 명의 목숨.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모인 흑마법사들 중, 그녀를 따라갈 실력자가 없다는 말은 사실이리라.

스으으······.

박리된 공간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건 푸른빛의 사슬이었다.

음침한 냉기로 둘러진 사슬 가닥들은, 살아있는 뱀처럼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칼카스의 사슬이시여! 저 성기사를 휘감으소서!"

산발머리 여자가 소리쳤다.

댈런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가까스로 도끼를 뽑지는 않았다.

저 주문쟁이의 머리에 당장 도끼가 자라나게 할 수 있음에도, 그가 멈춘 건 루시아 때문이었다.

'지금 루시아 카스타챌드에게 가장 부족한 건 실전 경험이다.'

루시아 카스타챌드.

미래에 악마 살해자라 불릴 영웅.

떡잎부터 남다른 그녀는, 수습기사임에도 심문관의 자리에 임명될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인재였다.

그리고 미궁에서부터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그녀의 검술과 능력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는 바.

지금 그가 끼어드는 건, 먼 미래를 내다볼 때 오히려 패착이다.

루시아 카스타챌드가 악마 살해자로 빚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난관을 돌파하는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할 테니까.

"그냥 어쩌다 흑마법에 빠진 애송이들인 줄 알았는데, 악마까지 불러내는 흑마법사였어?"

그리고 수습기사는 댈런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 씨발년이었잖아?"

화르륵!

루시아의 검에 맺힌 신성력이 불꽃의 형태로 타오른다.

신성문신에서 거세게 뿜어지던 빛이 은은하게 잦아들고, 백염으로 타오르는 검은 각진 방패 위에 비스듬히 뉘어졌다.

"곱게 죽을 생각은 마."

두 눈을 둘러싼 신성문신이 빛을 발한다.

발 아래 돌바닥에 쩌적 하고 금이 갔다.

쐐애애액―!

푸르른 사슬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다른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 흐릿한 잔영만이 남았고.

쩌어엉!

지옥의 냉기를 흘려대던 사슬 가닥들이, 굉음과 함께 잘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 어떻게 칼카스의 사슬옥좌에서 나온 사슬을···캬아악!"

산발머리 여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쩍 갈라진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어느새 화살처럼 쏘아진 루시아가, 산발머리를 지나치며 백염을 품은 검으로 그 가슴팍을 길게 그어버린 것.

갈비뼈가 잘리고 그 안의 폐와 장기가 다 드러나는 상처.

상흔을 따라 타오르는 백염이, 그 안으로 파고들며 희생자의 몸뚱이를 안에서부터 태워갔다.

"꺄아아아아아!"

넓은 지하실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하얀 불은 곧 흑마법사의 전신으로 번져갔다.

간악한 사교도나 흑마법사, 혹은 기사단의 배신자를 처벌할 때나 쓰이는 단마의 백염.

죽는 그 순간까지 작열의 고통을 약속하는 불꽃은, 흑마법사들이 성기사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파스스······.

산발머리 흑마법사는 검은 재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술사가 죽자 이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사라진 지옥문 역시 스르르 사라졌다. 푸른빛의 사슬도 한 줌의 먼지로 화해 증발했다.

"후우."

루시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댈런에게 고개를 돌렸다.

댈런은 그제서야 도끼머리에 얹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가 말했다.

"검이 늘었군."

루시아는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

르비바흐의 흑마법사, 한스 징글러는 머리가 아팠다.

마치 전날 독주를 병째 위장에다 들이붓고, 아침까지 찬바람을 맞으며 홍등가에서 곯아떨어진 느낌이었다.

"신성력으로도 치유가···몸속에 스며든 악마의 마력이······."

"···필요 없소. 어차피······."

그런 그의 귓가로 어떤 목소리들이 들렸다.

심금을 울리는 여자의 미성과,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스는 흐릿한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왠지 입안 전체가 욱신거리면서 묘하게 허전했다.

"으음, 무, 무르 조므······."

"마침 일어났군. 아가리 벌려라, 새끼야."

"우읍···!"

입에 병 주둥이가 거칠게 틀어박힌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입안으로 어떤 액체가 왈칵이며 쏟아졌다.

한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입이 왜 허전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호구 손님이라 생각했던 거한의 손찌검에, 그의 입안이 터지고 이빨이 죄다 빠져버렸던 것.

그리고 방금 입안에 쏟아진 액체의 냄새는, 옆집 약방에서 노인이 허구한 날 만들어대던 싸구려 재생 포션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흑마법사는 지하실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질러댔다. 댈런은 그걸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시오. 효과 직방이지 않소."

"······그게 재생 포션이 아니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러면 뒈졌겠지. 뭐 어떻소. 흑마법사 하나 편하게 처리한 셈 치면 되는 거지."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물론 마지막 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노인의 약방에서 재생 포션이 몇 번째 칸에 있는지, 그 약병이 어떤 모양인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다 이야기하는 건 오히려 설명할 거리를 더 늘릴 뿐이다. 이럴 땐 대충 넘어가는 게 편했다.

"끄으으······."

그 사이 찢어진 입안을 다 회복한 흑마법사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턱을 죄다 부수고 치유했음에도, 놈의 치열은 여전히 뻐드렁니였다. 이거 포션 가지고는 교정이 안 되나 보군.

"혹시 서, 성기사단에서 보내셨소?"

뻐드렁니는 시체가 된 동업자들과 루시아의 갑옷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처음보다 훨씬 공손해진 말투였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로···."

"마녀를 만나러 왔다."

뻐드렁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분은 여기 안 계시오."

"어디 있는데?"

"르비바흐 숲에 계시오. 그, 약초 많기로 유명한 그 숲 말이오."

"숲이라. 거기에 아예 자리 잡았다는 거군."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숲에 있는 것 정도는 반쯤 예상하고 있었다.

만드레이크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상인들이 몰려드는 시점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악신과의 거래를 진척시키고 있을 무렵.

지금쯤 그녀는 숲 한가운데 있는 악신의 제단 곁에 머물며, 주기적인 인신제사와 함께 악신과의 협상을 이어가고 있을 터였다.

댈런은 뻐드렁니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가 말했다.

"마녀가 숲에서 안 나온 지 얼마나 됐지?"

"보름쯤 되셨소."

"그럼 그동안의 제물은 너희들이 공급하고 있었겠군."

뻐드렁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가 순수한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한때 동업자였던 그마저도 그 노파가 마녀라는 걸 알게 된 건 한 달이 채 안 되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온 것인지. 눈앞의 야만인과 성기사는 뭘 하는 사람들인지.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오갔다. 죽어버린 동업자들의 시체와 아직 욱신거리는 입안 때문에 그 혼란은 배가 되었다.

"제물. 어떻게 공급하지?"

그러나 야만인의 낮은 목소리와 무감정한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 질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고자 하는 갈망.

그 갈망이 뻐드렁니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들었다.

"···우리뿐 아니라 몇몇 공동체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매일 산 제물을 데려가고 있소. 약으로 절이거나 돈으로 꿰어서. 용병이면 호위 의뢰라고 포장해서 숲 깊은 곳으로 이끌고 들어가오."

"마녀의 결계가 있을 텐데."

"마녀가 우리에게 준 징표가 있소. 일종의 토템인데, 그걸 가지고 정해진 길을 따라 들어가면 숲에 걸린 주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소. 만약 길을 잘못 들거나, 징표를 몸에서 떼어놓는 순간 그 사람은 주문에 공격받아 갈가리 찢겨나가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그렇군."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춤에 걸린 도끼에 손을 턱 얹고는 말했다.

"살아나갈 기회를 주지. 우리를 제물로 위장해서 그 숲으로 안내해라."

***

뻐드렁니 흑마법사의 제물 상납일은 마침 다음날이었다.

댈런과 루시아는 하루 동안 놈을 잡아두고, 다음날 밤 함께 르비바흐 숲으로 떠났다.

슬슬 늦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남쪽 지방은 벌써부터 밤공기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전날 밤에 내린 눈은 쌓이기는커녕 순식간에 녹아들어, 숲의 초입을 약간 질척이는 늪지 비슷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흙과 썩은 낙엽이 습기를 머금고 발 아래서 부스러진다. 가죽 부츠는 순식간에 발목즈음까지 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뻐드렁니는 숲 안쪽으로 한 시간쯤 걸어들어간 끝에 멈춰섰다. 놈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마녀의 주문 안으로 들어갈 거요. 미리 준 토템···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시오."

뻐드렁니는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이제 자기가 뭘 하는지도 헷갈릴 지경일 테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작은 도시에서 평범하게 사람들 등쳐먹고 사는 애송이 흑마법사였던 그다.

느닷없이 마녀의 하수인이 되어, 자기가 평생 죽여본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를 제물로 끌어다 바친 게 한 달 사이 일이었고.

그런데 이제는 그 마녀를 죽이겠다는 야만인과 성기사를, 마녀의 심처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눈을 왜 굴리지?"

"아, 그, 그게."

물론 댈런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흑마법사의 사정 따위 고려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멍하게 선 뻐드렁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앞장서라."

"아, 알겠소."

뻐드렁니는 한숨을 푹 내쉬고 걸어나갔다. 댈런과 루시아는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원래 르비바흐 숲은 그렇게까지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 아니었다.

때문에 오늘처럼 달이 밝은 날이면, 숲 안쪽으로 들어가도 그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밤하늘에서 달과 별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 대신 하늘을 가득 메운 건, 탁한 잿빛의 어떤 음습한 기운.

미세먼지 가득하던 서울의 하늘을 떠올리던 댈런은, 문득 느껴지는 진동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댈런은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그의 등에는 천에 감싼 채 사슬로 매어둔 성검이 있었다.

악마에게 신성력을 상실한 성검.

그 성검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성검이 떨리는군."

재의 마녀(3)

"성검 말입니까?"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이 천에 싸인 성검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사라졌다.

"잘못 느끼신 것 아닙니까?"

루시아가 말했다. 댈런은 코를 긁적거렸다.

뭐야 이거. 분명 느껴졌는데?

"···귀신같군."

루시아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앞서가는 흑마법사가 듣기 힘든 크기로 작게 속삭였다.

"알버스 삼촌께 들어서 아시겠지만, 댈런이 운반하고 계신 성검은 신성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통통.

그녀의 손이 천에 싸인 성검을 두드렸다. 아까 전의 기이한 진동과는 다른 투박한 울림이었다.

"보십시오. 저나 댈런처럼 주인 아닌 자가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잖습니까? 가까스로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악마의 마기 때문에 신성력도 완전히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더이상 제대로 된 성검이라 부르기도 애매합니다만."

댈런도 알고 있었다.

힘을 잃은 성검, 혹은 타락을 씻어낸 성검은 단단한 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막대한 신성력을 담아내던 그릇인만큼 어지간해서는 부서지지 않지만, 내재된 능력은 모두 날아가버린 뒤다.

게임 아이템으로 치면 내구도는 무한인데 특별한 옵션은 없는 무기인 셈.

물론 오랜 시간 성기사단의 비처에서 신성력을 공급받으면, 그 능력을 회복할 수 있기는 했다.

아니면 아주 간혹 있는 특별한 이벤트를 거치며, 신이 다시금 성검에 힘을 불어넣어주기도 했고.

그러나 전자는 백 년쯤 걸리는 일이고, 후자는 전설적인 성기사가 그 성검을 소지하고 있는 게 전제되어야 하는 이벤트.

둘 다 지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미심쩍긴 하지만, 재의 마녀를 코앞에 둔 이 순간에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일행은 계속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풍경은 갈수록 이질적으로 변해갔다.

이상하게 뒤틀린 나무들과, 누렇게 죽은 풀들. 마치 숲 전체가 생기를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생기를 머금은 건, 그 사이사이 가끔씩 보이는 붉은 꽃뿐이었다.

죽은 잎사귀 사이에서 홀로 영롱한 꽃을 보며, 루시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만드레이크······."

"마녀는 사람을 바쳐서 만드레이크를 키워내고 있소. 악신과 모종의 계약을 맺고, 인신제사의 대가로 만드레이크를 인위적으로 증식시키고 있지. 저 숲은 그 때문에 죽어가는 거요."

뻐드렁니 흑마법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소. 이제 와서 양심이라도 찔리나. 그냥 혼란스러운 것 같소."

댈런은 뒤에서 뻐드렁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개소리 말고 잘 가기나 하라는 뜻이었다.

뻐드렁니는 말없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댈런은 그 뒤를 넓은 보폭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수백 뿌리나 되는 만드레이크가 몇 주만에 자라났소.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혈통의 능력이 식물을 키우는 게 아닌 이상 이런 짓은 혼자 힘으로 못하지. 그러니 악신의 도움을 받은 걸 거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이 많은 만드레이크를 키워서 대체 뭘 하겠다고?"

"여관 주점에서 이야기했었지 않소? 이 도시에 살던 마녀는 인간에게 유독 독기를 가득 품은 마녀라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바쁘게 발을 놀리는 흑마법사의 뒤를 느긋하게 밟으며 이야기했다.

"이대로 몇 달이 더 지나서, 대략 천 뿌리가 넘는 만드레이크가 자라난다고 가정해 보시오. 그리고 만약 그 만드레이크가 동시에 뽑혀나와 비명을 지른다면?"

"···그 비명의 합창은 르비바흐에 닿고도 남겠군요."

루시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비바흐는 그 날로 죽음의 도시가 되는 거요."

"마녀라 해도 그 뿌리는 같은 인간이라 배웠는데, 인간을 향한 복수심이 그 정도인 겁니까? 대체 왜···?"

루시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진 모른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둘러대는 게 아니었다.

재의 마녀가 언제부터 사람을 향해 칼을 갈았는지는 게임에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설령 누가 알려준대도 굳이 들을 생각은 없었고.

애당초 마녀라고 다 사악한 게 아니다.

모진 일을 당했음에도 인간에게 우호적인 마녀 역시 존재했다. 깃털의 마녀가 그 대표적인 예시.

결국 복수의 범위를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인류 전체로 확장시킨 건, 재의 마녀 본인이 선택한 길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인류의 멸망을 소원으로 택한 이상, 댈런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마녀가 꾸미는 계획을 저지하고.

나아가 더이상 사특한 술수를 부리지 못하도록 처단하는 것.

'그 계획의 첫 단추가 만드레이크를 비정상적으로 증식시키는 거지.'

수십 명을 인신공양해 얻은 힘으로 천이 넘는 만드레이크를 꽃피우는 것.

그건 마녀와 악마 사이의 계약에서 다음 단계를 위한 교두보였다.

그 만드레이크가 내지르는 비명의 합창을 이용해, 르비바흐를 포함한 근방 일대의 모든 인간을 제물로 바쳐버리는 게 이 계약의 진짜 핵심.

악신에게 수천 명에 달하는 제물을 바친 재의 마녀는, 계약에 따라 홀로 군대도 너끈히 상대할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탄생하는 게, 게임 중반부 최악의 보스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타락한 재의 마녀'.

인간을 향한 증오가 흘러넘치는 마녀가, 혈통의 능력에 더해 악신의 힘까지 얻게 된 결과였다.

'그말인즉, 적어도 아직까지 최악의 보스몹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건 기회였다.

최악의 보스몹 중 하나를 사전에 처리할 기회.

지금의 마녀는 혈통의 능력만을 깨우쳤을 뿐, 아직 악신에게 힘을 하사받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마저도 악마에 버금가게 위험한 적이긴 했으나, 아예 상대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완전한 힘을 얻은 재의 마녀는 성검의 악마나 대사도를 뛰어넘는 종말의 주역이 된다. 더 성장하기 전에 여기서 끝을 봐야 해.'

변한 건 없었다.

청동 구역의 낮은 거리에서, 거대 괴인이 될 존재를 미리 처리했을 때부터.

대계가 온전히 준비되기 전에 대사도를 처치하고, 아직 채 성검을 타락시키지 못한 악마를 쓰러뜨린 것까지.

그 중간중간 역행의 사도들과 놀 전사장, 프로그맨 부족을 처리한 것까지도 모두 같은 맥락이었다.

다가올 종말을 미리 저지한다.

그리고 그 종말에 삼켜졌던 시체들을 회수한다.

비록 그라는 변수에 대응해, 종말 역시 빠르게 패를 내보이기 시작했지만.

'종말의 손아귀들이 빠르게 다가온다면, 그보다 한 발 앞서서 그 손목 째로 잘라버리면 될 일.'

허리춤의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댈런은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빠르게 했다.

***

뒤틀린 나무들과 죽은 풀의 숲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댈런은 문득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혈향과 정체 모를 역겨운 향취. 얼핏 보글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사악한 마력이 가까이 있습니다."

뒤에서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뒤를 돌아봤다.

검을 쥔 성기사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감각을 한 번 흩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 말대로였다.

우거진 나무들은 얼마 걷지 않아 사라졌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숲 한가운데 있는 넓은 공터였다.

가운데의 제단을 중심으로, 나무 한 그루 없이 탁 트이게 다져진 공간.

악신을 위해 만들어진 널찍한 돌제단 곁에는 커다란 철제 우리가 산 제물들을 가둬두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큼직한 가마솥 안에서 무언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파른?"

루시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는 곧장 우리를 향해 달려갔다.

철제 우리 안에는 스물에 달하는 사람들이 갇혀 신음하고 있었다.

사지 중 한두 개를 잃은 채 어떤 약에 취한 듯, 반쯤 이성을 잃고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

댈런은 루시아의 외침을 듣고서야, 뒤늦게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른! 파른! 괜찮니? 정신 차려봐!"

쇠창살을 흔드는 성기사의 손길에 가까스로 눈을 뜨는 소년.

갈리오스 상단을 호위하던 소년 용병 파른은, 한쪽 눈이 파이고 왼팔이 잘려나간 몰골로 다른 제물들과 함께 우리 안에 처박혀 있었다.

"으···으에······. 기사···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잠시만 있어봐. 금방 구해줄게!"

끼기기긱!

우악스레 쇠창살을 벌린 루시아가, 용병 소년을 필두로 갇혀있던 제물들을 한 명씩 꺼내어 풀밭에 눕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뻐드렁니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녀께선 안 계신 건가?"

당황한 목소리. 하지만 동시에 안도한 기색도 엿보인다.

댈런은 무시하고 가마솥 안을 들여다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쭉한 내용물.

둥둥 떠다니는 기름기와 거품 안쪽으로 푹 익은 뼈와 살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뭘 넣고 끓인 스튜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뼛조각들의 크기와 모양부터가 명백한 증거였으니까.

"시발 식인종 새끼."

댈런은 솥을 쾅 걷어찼다. 내용물이 왈칵 쏟아지며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도 함께 바닥을 굴렀다.

덜 녹은 사람의 팔다리와 머리통, 토막난 몸뚱이의 조각들이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쯧쯧쯧. 우리 성기사와 야만인에게는 밥상머리 예절부터 다시 가르쳐야겠구나."

스르르르.

뿌연 하늘에서 무언가 흘러내린다.

마치 밤새 숱을 태운 통을 기울여, 그 안의 재를 쏟아내는 듯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잿더미는 공터 외곽에서 꾸물거리더니, 이내 인간의 형상으로 서서히 일어섰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을 엎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도 가르쳐주지 않으시던?"

***

음습한 바람이 재를 흩날린다.

그 잿바람 가운데 선 존재는 두건을 쓰고 등이 굽은 노파였다.

두건 아래로 빛나는 노란 눈.

그 눈을 마주한 뻐드렁니 흑마법사가, 단박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마, 마녀님!"

"이런, 쯧쯧. 한스. 오늘 제물을 상납하는 게 자네 차례였지?"

마녀는 뻐드렁니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흑마법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스야, 한스야. 이 노친네가 뭐라 말하던?"

"마녀님.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마녀님 앞으로 이끌라고 해서···!"

"고르고 골라서, 적당한 제물을 가져오라지 않던?"

마녀가 히죽거렸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입꼬리와 함께 말려올라간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 웃음을 악마의 미소 정도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 노친네는 마귀할멈이라, 말 안 듣는 아이는 잡아먹어야 성에 차거든."

"아, 아아······!"

마녀가 손가락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뻐드렁니의 머리가 펑 하고 뽑혀나갔다.

코르크 마개를 따듯이, 숲 저편으로 날아가버린 뻐드렁니의 머리통.

쓰러진 시체의 목에서는 피 대신 잿가루가 슬슬 흘러나온다.

"끌끌. 그러게 노친네가 말을 하면 들어먹어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니."

흑마법사의 시체를 발로 꾹꾹 밟아대며 클클거리는 마녀.

"···재의 마녀."

그때 제물로 붙잡혔던 포로를 전부 구출해낸 루시아가, 포로들의 앞을 막아선 채 검을 뽑아들었다.

"아직 살아있는 마녀의 네 혈통 중에서도, 재의 혈통만큼은 기사단의 서고에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녀의 신성문신이 빛을 뿜었다.

동시에 검을 뒤덮은 채 타오르는 단마의 백염.

"개과천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악인으로, 악마와 동일하게 취급하라고."

"···호오. 심문관이셨나."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마녀를 향해, 루시아는 방패와 검을 앞세우고 선언했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지금 이 시간부로 재의 마녀를 처단하겠―."

패래래랙―!

선언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날아든 빛의 원반이, 여유롭게 웃고 있던 마녀의 미간에 정확하게 틀어박힌 것.

어벙해진 얼굴로 댈런을 쳐다보는 루시아를 향해, 댈런은 머리에 도끼 꽂은 마녀를 고갯짓했다.

"쓸데없이 힘 뺄 거 없소. 저건 가짜요."

루시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쓰러진 마녀를 다시 돌아봤다.

그러자 넘어갔던 시체가,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스르르 일어섰다.

"···어머, 야만인치고는 눈치가 빠르신걸?"

머리에 도끼를 꽂은 채로, 마녀가 히죽 웃었다.

재의 마녀(4)

"마침 잘 됐어."

마녀가 말했다. 그녀는 머리에서 도끼를 뽑아들어,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는 모양새로 댈런의 발치에 휙 던졌다.

쩍 갈라졌던 머리는 금세 스르르 붙었다. 마녀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렸다.

주름지고 뒤틀린 손가락이 각각 끝과 끝을 맞대며 기묘한 문양을 그려냈다.

"안 그래도 혼자 있기 적적해서 손님을 하나 초대할 생각이었거든. 기사님을 아주 좋아할 손님이야."

낮고 빠른 주문이 마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어냈다.

공터가 어둠에 덮이는 듯하고, 어떤 음산한 바람이 제단을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루시아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제단 위에 놓여있던 제물이 허공으로 스르르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특한···!"

그건 사람의 팔을 잘라, 나뭇가지로 왕관을 만들듯이 둥글게 엮어놓은 상징물.

백수십 개의 손가락들이 서로 엮이며, 각기 신을 모독하는 글자를 그려내고 있는 기괴한 토템이었다.

화륵!

그 상징물에 녹색 불꽃이 피어나고.

동시에 제단 위의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쩌저적―!

검붉은 빛으로 일렁이는 공간의 틈.

유리처럼 깨져나가는 공간은 이내 뚜렷한 형태를 갖추고, 검붉은 타원형의 포탈을 형성한다.

크르르르···.

지옥문 너머에서 푸른 사슬을 온몸에 두른 집채만한 개 두 마리가 걸어나왔다.

두 눈이 귀화로 타오르는 지옥견들은, 루시아를 바라보자마자 침을 뚝뚝 흘리며 몸을 낮췄다.

"사슬옥좌의 주인, 칼카스가 애지중지 키우는 사냥개들이야. 너처럼 어여쁜 성기사의 살점과 피를 가장 좋아하단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악마는 아니어도 상급 마물쯤 되는 놈들이었다.

성전사 열둘과 수습기사 둘, 정식 기사로 이루어진 성기사단의 정규 전투단이 나서도 상대하기 힘겨울 법한 존재들.

물론 수습기사인 루시아 카스타챌드 역시, 평범한 성기사의 무력을 이미 한참 전에 뛰어넘은 인물이었다.

댈런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상대할 수 있겠소?"

"···금방 끝내겠습니다."

루시아가 신성문신에서 빛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서 가감 없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럼 이번에도 등을 맡기겠소."

댈런은 낮게 웃으며 발치의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는 마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늙은 마녀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히죽거렸다.

"끌끌, 나도 여자보다는 자네 같은 근육질 남정네랑 뒹구는 게 좋아. 북부 어느 지방 출신이야?"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가짜 마녀와 드잡이질을 해봐야, 진짜는 아무 타격이 없고 피로만 쌓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눈을 반개한 채, 이제는 익숙해진 심상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깎아지는 벼랑과 가파른 비탈길. 눈보라가 가라앉은 설산의 정경.

휘이이― 화륵!

오두막 주위에는 화염과 냉기가 휘몰아치며 서로의 꼬리를 잡으려 들었고.

파지직!

그 사이에서 이따금씩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작은 존재감이나마 과시하고 있었다.

두근.

심박처럼 맥동하는 지면과, 설산 곳곳에 뿌리박은 갑주처럼 매끈한 돌덩이들.

하늘 저 끝은 타오르는 듯 붉었고, 반면에 이쪽 하늘 대부분은 휘몰아치는 강풍으로 가득하다.

상단을 호위하며 그는 매일같이 이 세계를 들여다보고, 또 연구했다.

그 끝에,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영역이라는 개념은, 존재의 힘을 담아두는 그릇.

필멸자의 육신에 차마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 존재의 의지를 통해 빚어진 세계 이면의 그릇에 담기는 기적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댈런의 영역에서 가장 큰 힘은 붉은 하늘에서 내리는 불의 비도, 모든 걸 분쇄할 기세로 몰아치는 강풍도 아니었다.

쿠르릉.

바로 하늘을 가르는 우렛소리.

그 우렛소리가 심장을 저릿하게 울리고, 마치 당장 던져달라는 듯이 손안의 도끼가 부르르 떨린다.

"노인의 질문에 입을 꾹 닫고 있다니. 밥상머리 예절부터도 그랬지만, 예의가 단단히 부족한 놈팽이구나."

"예의는 개뿔. 초면에 패드립부터 박은 새끼가."

"패···뭐?"

댈런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반개한 눈을 완전히 떠, 잿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숲 위의 하늘을 뒤덮은 희뿌연 회색빛의 향연.

약에 절여진 산 제물들은 하나같이 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마녀의 분신체 역시 저곳에서 빚어져 떨어졌다.

달과 별을 가린 저 하늘의 그림자는, 단순히 밤하늘에 칙칙하게 낀 구름 같은 게 아니었다.

저건 혈통의 힘과 주문의 집약체이자, 물질계에 실체화된 마녀의 영역.

동시에 마녀가 스스로의 몸을 숨긴 은신처였으니까.

우우웅―

댈런의 검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의 눈처럼 번쩍인다.

마침내 처음으로 숙련도 백 퍼센트를 찍은 야간 시야가, 영역의 힘을 빌려 그 눈동자에 짧은 순간 깃든 것.

단순한 능력치나 스킬을 초월한 시선이, 잿빛 하늘 사이로 꾸물거리는 음영을 포착해낸다.

[마녀를 스토킹한 성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힘 없는 약초꾼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정의롭고 용감한 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소리 없는 암살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형태를 명확하게 인식한 순간, 하늘 저편에서 주르르 나열되는 알림창들.

댈런은 꿈틀대는 음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심상 속 우렛소리에 맞춰 손 안의 도끼를 떠나보냈다.

"아, 안 돼!"

가짜 마녀가 외쳤다. 때늦은 외침이었다.

번쩍―!

댈런의 주변에서 뒤틀린 마력이, 손을 떠난 도끼에 휘감기며 거대한 빛줄기로 화하고.

우르르릉!

한 발 늦게 따라온 뇌성이, 공터 주변의 나무들을 뒤흔들었다.

***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화는 땅에서 하늘로 쏘아올려진 빛줄기와 우렛소리의 여파가 가라앉을 즈음 나타났다.

잿빛 하늘이 꿈틀거리더니, 그 품에서 작은 덩어리를 스르륵 흘려낸 것이다.

철퍽!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곤두박질친 잿덩어리.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하늘거리는 잿빛의 천으로 온몸을 몇 겹씩 두른 젊은 여성이었다.

"쿨럭! 컥!"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는 여성. 어깨부터 골반까지 길게 그어진 상흔에서 왈칵이며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머리 위에 고정된 알림창들을 보며 댈런은 어깨를 휘휘 풀었다. 이거 보스몹 본체 한 번 보기 힘드네.

"흐으, 방심했구나. 설마 영역을 일궈낸 전사일 줄이야."

재의 마녀는 작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분신체였던 노파가 한 줌 먼지가 되어 가느다란 손끝으로 빨려들어갔다.

곧이어 잿가루가 스르르 상처를 뒤덮어 일시적으로 봉합했다.

작은 우렛소리와 스파크가 끊임없이 튀어올랐기에, 단순한 봉합일 뿐 완전한 재생은 아니었으나.

"후우."

힘겹게나마 탄성을 내뱉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마녀의 모습을 보니 임시방편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에낙사구스여. 약속대로 힘을."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악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마녀.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부릅뜬 노란 눈에서, 녹색의 불꽃이 번들거린다.

저건 마녀가 이미 악신의 힘을 일부 하사받았음을 내보이는 증거였다.

거기에 하늘의 일그러진 마력과 그녀의 주변으로 기이하게 뒤틀리는 공간은, 마녀 역시 스스로의 힘을 갈고닦아 영역을 이뤄낸 존재이기에 나타난 현상.

패래래랙―콱!

뒤늦게 공터 한 귀퉁이에 떨어진 도끼가 서서히 재로 변하는 걸 확인한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다.

힘을 온전히 깨우치지 못했어도, 재의 마녀는 최하급 악마 정도는 뛰어넘는 강적.

일격에 처치할 수 있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다행히 폭증한 체력 능력치 덕에, 영역을 사용했음에도 그 여파는 팔다리가 살짝 뻐근한 정도였다.

스릉.

댈런은 검을 뽑아들었다. 짧게 호흡을 들이쉬고, 양팔에 분쇄검의 기운을 둘러낸다.

그 사이 마녀도 재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낮고 빠른 단어들로 주문을 외며, 몸을 공중에 붕 띄워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낸다.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사도와의 결전 이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이었다.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담아, 통나무 같은 다리가 지면에 발을 쿵 구른 순간.

콰아아앙!

있던 자리의 땅을 폭발시키며, 전사의 신형이 사라졌다.

***

와지끈!

장정 두 명의 품을 넘어서는 아름드리나무가 팽그르르 넘어간다.

꽈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몰아친 광풍에, 이끼 덮인 커다란 바위가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

우르르 튀어오르는 돌조각과 먼지. 댈런은 검을 고쳐쥐었다.

제단이 있던 공터는 영역을 이룬 두 초인이 싸우기에 좁은 전장이었다. 싸움이 숲 속까지 이어진 건 필연적.

그리고 사방에 뿌리내린 덩굴과 나무들은, 마녀가 스스로의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애물이 되어주었다.

'어디 있나.'

심상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영역의 힘을 끌어와, 번뜩이는 두 눈으로 사방을 훑어낸다.

전방위로 뻗어가는 그의 감각이,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마녀의 기척을 쫓았다.

스륵!

나뭇가지에 천자락이 스치는 소리.

댈런은 곧장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

광풍과 함께 땅의 흙이 우르르 솟아오르고, 경로에 있던 나무들이 와지끈 부서졌다.

"이런 무식한!"

그 끝에 있던 사람의 신형. 하늘거리는 잿빛 천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은 빠르게 수인을 맺고 몸을 던졌다.

슈르르륵―

그녀가 손을 뻗자 하늘에서 잿가루가 쏟아진다.

분쇄검의 여파로 밀려오는 돌과 나무의 파편이, 그 잿가루의 파도와 충돌하며 원래의 방향에서 빗겨나갔다.

땅바닥을 구르며 그 남은 여파마저 피해낸 마녀는, 다시 공중에 몸을 띄우며 댈런을 돌아봤다.

"···어디?"

북방인 전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시야에 담긴 건, 분쇄검의 여파로 쓰러진 나무들과 땅에 파인 고랑뿐.

콰득!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전사가 보였다.

몸을 거꾸로 뒤집어, 높게 솟은 나무에 발을 디딘 채.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쏘아질 것 같은 기세로.

"이런 씨발!"

콰지직!

마녀가 몸을 날렸다. 나무를 박살내고 쏘아진 댈런의 신형이, 곧바로 그녀가 있던 땅에 처박혔다.

꽈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섬광.

영역의 힘이 방출되며 마녀가 있던 자리에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파이고, 뿌연 돌가루와 먼지가 연막처럼 구덩이를 덮었다.

"크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낸 마녀가 손끝을 까딱인다.

이곳은 공터 주변의 숲속. 그녀가 안배해둔 온갖 함정과 주문으로 가득한 공간.

쉬쉬쉭!

별다른 영창도 필요없이, 그녀의 의지와 작은 손동작만으로 가시 돋친 넝쿨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바윗덩이가 제 몸을 일으킨다.

쐐애액―

쿠르르르!

뿌연 먼지 속에서도 뚜렷한 전사의 존재감을 향해, 수십 가닥의 넝쿨과 집채만한 바위덩이가 제 몸을 굴려내고.

꺄아아아아아―

미리 마력을 심어두었던 만드레이크가, 땅에 박혀있던 고개를 스스로 내밀고 전사를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크읏!"

악신에게서 만드레이크의 비명에 대한 내성을 얻었음에도, 잠깐이지만 눈앞이 어지럽다.

마녀는 눈을 녹색으로 번뜩이며 중심을 잡았다.

함정들이 벌어놓은 여유가 그녀의 마지막 기회였다. 얇고 길다란 손가락들이 가까스로 수인을 맺어냈다.

"에낙사구스여―!"

잿빛 하늘을 향해 마녀가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따라 하늘에서부터 녹색의 잿바람이 휘몰아치고.

나뭇가지 사이를 타고 내려온 잿바람이 지면 위를 낮게 내달린다.

파스스스―

그 지나간 자취에 있던 나뭇가지와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전부 재로 변해 흩날렸다.

'이겼다.'

마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진짜 힘은 주문보다는 이능에 가까운 혈통의 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재의 저주야말로, 그녀가 타고난 힘의 진가라 할 수 있었다.

후르르르!

잿바람이 연막 안으로 파고든다. 전사는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가시덩굴과 바윗덩이가 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내, 짧은 순간이나마 전사의 발을 붙들어놓은 것.

"···좋은 싸움이었다. 전사야."

잿바람이 구덩이를 뒤덮는 것을 확인한 마녀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나무에 기댔다.

아무리 영역을 일궈냈다 해도, 성기사나 사제의 신성력이 아닌 이상 저주를 이겨낼 수는 없다.

그리고 원래라면 재의 저주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직접 목표의 몸에 징표를 새겨야 했으나, 악신의 힘으로 그 한계를 부순 결과물이 바로 저 녹색 잿바람이었다.

말하자면 이 힘을 사용할 여유가 생긴 순간부터, 이 싸움의 승패는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흐흐흐. 만드레이크의 비명마저도, 시련을 극복한 순간에는 마치 축가처럼 들리는구―"

그 순간.

휘이이이― 콰직!

구덩이에서 날아온 큼직한 방패가, 비명을 지르던 만드레이크를 두 동강내고 땅에 박혔다.

마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가라앉아가는 먼지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구름 너머, 전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존나 시끄럽네. 밥상머리 예절 운운하더니 먹는 산삼으로 장난치는 건 뭐 하자는 거냐?"

"···어떻게?"

후웅―

난데없는 바람이 뿌연 먼지를 쓸어간다.

드러난 구덩이 안쪽, 덩굴의 잔해와 바위 조각은 지금 순간에도 서서히 재로 변해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뚝 선 전사는 저주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보였다.

아니, 재의 저주는 분명 전사에게도 먹히고 있었다.

녹색 잿가루들은 그의 갑옷을 부식시키고, 그 안의 피부에까지 들러붙어 갉아먹는 중이었으니까.

치이이······.

전사는 저주를 피해간 게 아니었다.

반대로 그의 피부와 근육, 점막 조직들 모두 파괴되는 즉시 재생되고 있었을 뿐.

마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필멸의 인간이···불멸하는 용의 피를 품은 거지?"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뻐근한 목을 휘휘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푸후."

"아, 아니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버틸 수는 없다. 한낱 필멸자에게···용의 피는 허용되지 않는 힘. 그 피는 네 기력을 급격히 소진시키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 것이야."

마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댈런은 픽 웃었다.

어벙한 어조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라면 그랬겠지.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재의 마녀는 강력했다.

그리고 그런 마녀의 능력 중에도 가장 까다로운 게 바로 재의 저주.

인간을 향한 마녀의 원한이 담긴 이 저주는, 마녀가 징표를 새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최악의 능력 중 하나였다.

'심지어 마녀를 죽이거나 신성력으로 저주를 몰아내는 게 아니라면, 해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그리고 그 저주는 마녀가 악신 에낙사구스의 힘을 얻은 뒤, 한층 강화된 형태로 재탄생한다.

인장을 새길 필요도 없이, 닿기만 해도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녹색 잿바람의 형태로.

재의 마녀가 중반부 최악의 보스 중 하나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이 정신 나간 능력의 영향도 막대한 바.

사실 댈런의 원래 계획은, 그녀가 이 능력을 손에 넣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었다.

'설마 벌써 악신에게 이 정도까지 힘을 얻어낼 줄은 몰랐지. 아니, 사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다.'

지옥의 존재들은 대가 없이 힘을 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녀가 지금까지 바친 제물들은, 채 수백도 되지 않는 숫자.

원래 마녀가 악신의 힘을 얻고 재의 저주를 강화시키는 건, 만드레이크의 비명을 이용해 수천의 제물을 바친 뒤였다.

때문에 지금 마녀가 가진 힘은 정황상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서도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댈런은 손을 들었다. 손잡이만 남은 검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잿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갑옷의 팔 부분이 스러지고, 파괴와 재생을 거듭하는 살갗이 공기에 노출되었다.

우웅―

그렇게 들어올려진 손이 움켜쥔 것은, 등 뒤에 메인 채 작게 울리는 검의 손잡이.

마녀의 녹색 잿바람이 그를 덮친 순간, 잠잠하던 성검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사삭―

성검을 감쌌던 천이 바스라지고.

검집 대신 검신을 두르고, 댈런의 등허리에 메어졌던 사슬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두터운 손이 성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자마자, 청명한 기운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저주의 마력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서, 성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마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우르르릉.

녹색 재를 완전히 떨쳐낸 댈런이, 심상 너머의 우렛소리를 들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우르르르―

댈런은 문득 눈을 들었다.

우렛소리는 심상 저편에만 있지 않았다.

잿빛으로 꾸물대던 하늘 한가운데.

잿빛 기운이 꿈틀대며 물러나고, 구름 덮인 밤하늘이 그 구멍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르릉.

내면의 우뢰가 진동한다.

우르르르!

그에 화답하듯, 밤하늘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려퍼졌다.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의 사지 말단부까지 청명한 기운이 내달리며 생기를 채워낸다.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쥔 그는, 머리 위로 성검을 가만히 치켜들었다.

쉬익―!

그가 내면의 우렛소리와 함께 마녀를 향해 검을 내려친 순간.

꽈르르르르!

밤하늘의 먹구름도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이 숲으로 쏟아내고.

번쩍―!

동시에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에 뚫린 구멍을 비집고 마녀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작가의 말

"댈런. 이제 와서 말하기 좀스럽게 느껴지지만,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모닥불을 앞에 두고 루시아가 말했다. 막 노릇노릇 구워진 노루 다리를 베어물려던 댈런은, 군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뭐요?"

"성검을 향해 귀신같다고 했던 말, 성기사 앞에서 굉장히 무례한 발언입니다."

···내가 그랬나?

머리를 긁적여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재의 마녀를 처리하러 가던 르비바흐 숲속에서. 진동하던 성검이 루시아가 손을 대는 순간 멈춘 걸 보고 그렇게 말했더랬다.

빌어먹을 지능 수치. 그런 건 또 왜 기억하고 있는 건데.

"엄연한 신성모독입니다, 그거."

루시아는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댈런은 괜히 코를 문질렀다. 그는 노루 다리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진심을 담은 사과를 원합니다."

댈런은 코를 긁적였다. 그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러나 눈앞에서 기름기를 뚝뚝 흘리는 노루 다리와, 지금껏 먹어온 루시아의 요리, 그리고 앞으로 남은 여정동안 그녀의 손을 거쳐 탄생할 수많은 진수성찬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내가 잘못했소."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루시아는 표정을 풀고는 후추통을 들었다.

그녀는 기름과 버터를 두른 노루 가슴살에 후추와 향신료로 범벅을 하더니, 불 위에 얹어진 노루 다리를 슬쩍 밀어내고 한가운데에 가슴살을 얹었다.

치이이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익기 시작하는 노루 고기. 루시아는 그걸 불 위에서 천천히 돌리다가, 문득 댈런을 보고 물었다.

"···혹시 눈앞에 먹을 게 있어서 사과한 건 아니겠지요?"

댈런은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하고는, 입에 있는 고기를 마저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럴 리가. 이래 봬도 성검의 인정을 받은 전사 아니오. 믿어주시오. 우린 같은 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발, 맛있는 밥 한 번 먹기 힘드네.

"방금 속으로 욕하셨습니까?"

"···무슨 소리요. 고기가 참 맛있다고 생각했소."

"다행이네요. 많이 드세요."

***

어제 올리려던 외전인데, 오늘자에 대한 스포가 다소 포함되어 있어서 하루 늦게 올립니다.

재의 마녀(5)

쩌저적―!

지면이 얼어붙는다. 그 위에 자라던 풀과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품은 사슬.

칼카스의 사냥개를 휘감은 사슬들은,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생기를 지워내고 차가운 죽음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 씨발 개새끼들아 좀 뒈져!"

쌍욕을 뱉어대는 성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검을 내리그었다.

쨍강―!

신성력 머금은 검이 칼카스의 사슬과 부딪친다.

짧은 순간, 냉기와 새하얀 빛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 끝에 승리한 건 신성력 쪽이었다.

차르르르!

사람 팔뚝보다 두꺼운 굵기의 사슬이 토막 난 채 멀리 날아간다.

그러나 루시아는 찌푸린 미간을 펴내지 못했다.

이렇게 잘라낸 사슬이 벌써 몇 토막이나 되었는지.

그러나 사냥개를 뒤덮은 사슬의 갑주는, 아직까지 반의 반도 채 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으르릉!

침을 뚝뚝 흘리며 달려드는 지옥견.

쩍 벌린 아가리 안으로, 시퍼렇게 번뜩이는 이빨들이 날카로운 첨단을 들이댄다.

다리의 신성문신이 순간 강렬한 빛을 내뿜고, 루시아는 미끄러지듯 걸음을 밟아내며 그 무식한 육탄돌격을 피해냈다.

쿵!

제 속도를 못 이기고,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 고개를 처박은 사냥개.

스가가각!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번뜩이는 성기사의 검.

유려하게 휘어진 십수 갈래의 검로가, 사슬 몇 가닥을 끊고 사냥개의 눈을 찌른다.

크아아아!

검붉은 피를 줄줄 흘리며 사냥개가 물러섰다. 루시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신성문신의 기세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만만치 않아.'

칼카스의 사냥개.

냉기 머금은 사슬을 두른 이 집채만 한 지옥견에 대해서는, 그녀도 기사단에서의 공부를 통해 알고 있었다.

놈은 '사슬 옥좌의 칼카스'라 불리는 악마가 키우는 하수인.

그리고 칼카스는 악신 에낙사구스 휘하에 있는 아홉 옥좌 중 하나의 주인으로, 그 옥좌의 서열은 아홉 번째였다.

물론 가장 낮은 아홉 번째라고는 해도, 그 순위는 악신의 직속 악마 중에서만 따진 것.

악신을 직접 보좌하는 그 힘은 결코 얕볼 게 아니었다.

'놈의 옥좌 주변에는 저런 사냥개가 수천 수만이나 있다지.'

사냥개의 비틀거림에 따라 흔들리는 사슬을 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

저 사슬 하나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닿는 순간 동상으로 피부를 잘라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놈들이 수천, 아니 수만이라니.

꽈악.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순간 흔들리려던 마음을 다시 부여잡는다.

신성 문신의 빛이 은은하게 잦아들고, 검에 맺힌 신성력이 하얀 불꽃의 형태로 타오른다.

그녀는 피륙을 입은 인간.

신성 문신의 힘으로 저항하고 있지만, 저 지옥의 한기 앞에서 오래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공격이었다.

푸른 냉기를 머금은 사슬을 죄다 끊어내고, 사냥개의 목줄기를 끊어놓을 단 한 차례의 일격.

으르르르.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사냥개 한 마리가 부상당한 동족의 곁을 맴돌며, 그녀가 덤벼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사냥개의 푸른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놈은 동족을 지킬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저 루시아가 동족의 목을 잘라내는 순간만을 기다렸다가, 그 뒤를 쳐서 성기사의 살점과 피를 씹어삼키려 할 뿐.

그건 사슬의 한기만큼이나 냉혹한 마물의 성정이었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루시아의 발목을 붙잡는 원인이었다.

당장 한 놈의 목을 따면, 다른 놈에게 팔 하나는 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지구전으로 들어가자니, 사슬의 끔찍한 냉기 때문에 패배할 게 눈에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정신 차려, 이 썅년아. 댈런은 악신과 손잡은 마녀에게 홀로 맞서고 있어.'

루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팔 한 쪽 정도야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성기사의 인생은 투쟁의 연속.

그 끝없는 굴레의 끝은, 언젠가 마물의 이빨과 발톱으로 맺어지지 않던가.

그리고 기왕 끝맺는 거, 대륙의 위협인 재의 마녀를 처치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런 피날레가 어디 있겠어.'

콰지직!

그녀의 발 아래.

꽝꽝 얼어붙은 대지가 쩌적 갈라진다.

부상당한 사냥개가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놈의 동료 사냥개는 탐욕스럽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끼잉?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냥개의 고개가 숲 저편으로 동시에 돌아갔다.

'뭐지···?'

마음 한 켠에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주의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결단의 순간, 두 눈을 둘러싼 문신은 이미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아무리 그녀라 해도, 두 눈의 문신을 발현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십수 초가 고작이었다.

문신의 힘이 일깨워지며, 머리 전체에 청명한 기운이 스며든다.

후우.

반복적으로, 작게 호흡을 내쉰다.

다른 문신들로 몇 배나 확장된 힘과 감각의 크기가, 이 순간만큼은 명확하게 머릿속에 인식된다.

두 눈을 둘러싸고 새겨진 이 문신은, 백여 종에 달하는 성기사단의 신성 문신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새겨지는 종류.

이건 신성력으로 뇌를 강화시켜, 세상을 인지하는 정교하고도 복잡한 능력을 직접 끌어올려주는 기사단의 비기였다.

후우.

사실 성기사단의 신성 문신도 한계점이 있었다.

힘과 감각을 아무리 강화시키더라도, 결국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범인을 초월한 지성과 의지가 필요했기에.

두 눈을 둘러싼 이 신성 문신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성기사단의 해답이었다.

뇌에 직접 신성력을 때려 박는 특성상, 신성 문신과 어지간히 적성이 맞지 않고서야 새길 엄두조차 낼 수 없었지만.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그 특별한 문신을 열다섯 살에 새길 정도로 독보적인 재능의 보유자였다.

차르르르―

위협적으로 흔들리는 수백 가닥의 사슬. 거기에서 뿜어지는 냉기의 흐름.

얼어붙은 지면의 미끄러운 정도와, 사냥개가 가진 두 심장의 펄떡임.

증폭된 감각이 수용해내는 정보는 마치 바다와도 같았고.

머릿속을 각성시킨 신성력의 힘 아래, 그 모든 정보는 하나의 반죽이 되어 뚜렷한 검로와 발걸음을 제시한다.

쩡―!

그녀의 발이 지면을 박찼다.

화르르륵!

검신에서 흰 불꽃이 타오른다.

화살처럼 쏘아진 성기사의 잔영이, 지옥견의 모든 사슬을 끊어버리고 두 개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를 훑어낸다.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건, 단마의 백염이 그려내는 길고 곧은 직선.

쩌저저정―!

지옥의 마기로 빚어진 냉기는, 신성력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이겨내지 못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사슬.

백염에 휘말려 터져버리는 두 개의 심장.

깨애액―!

단말마의 비명조차 길지 못하다.

집채만 한 사냥개를 동강내버린 루시아는, 곧장 아름드리나무를 박차고 방향을 틀었다.

크르르!

뒤늦게 동족의 죽음을 알아차린 사냥개가, 고개를 돌려 성기사를 물어뜯으려 하지만.

스각―!

성기사의 검은, 이미 놈의 몸뚱이를 반으로 가른 뒤였다.

쿵―!

동시에 쓰러지는 두 지옥견의 사체.

"후우! 하아."

뻐근한 뒤통수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루시아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황급히 사냥개들이 바라보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옥의 마물들이 반응했다는 건, 소환사에게 어떤 이변이 생겼다는 의미.

곧 마녀와 댈런의 싸움에서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어?"

그녀는 순간이지만 눈을 의심했다.

마녀의 마력으로 뒤덮인 잿빛 하늘에서, 단 한 군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르르르릉!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부터 뇌성이 울려퍼진다.

그 공기의 떨림은, 멀리 떨어진 루시아의 몸마저도 울릴 정도로 강렬했다.

"저, 저게 대체······."

루시아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천기는 그녀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길 기다려주지 않았다.

숲 전체에 요동치는 공기.

하늘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신성력.

그 절정을 장식한 건, 푸른 눈동자에 비친 하늘을 쪼개는 한 줄기 벼락이었다.

***

"시발."

댈런은 욕했다. 그리고 움찔했다.

이거 신이라는 작자가 지켜보고 있을 텐데. 욕 해도 되나?

하지만 생각해보니 성검에 힘을 돌려준 걸 보면, 지금까지 그가 했던 행동들 역시 다 지켜보고 있었단 이야기였다.

댈런은 그래서 그냥 한 번 더 욕했다.

"쿨럭! 시발! 컥!"

뿌옇게 피어오른 재가 입과 코, 폐부를 파고든다.

기침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상을 강타한 벼락, 아니 벼락이라 부르기에도 뭣한 빛의 기둥은 반경 십여 미터가 훌쩍 넘는 구덩이를 만들어버렸다.

거의 뭐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광경 안에서, 성검을 든 댈런을 제외하고 모든 게 다 검은색이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는 뜻.

조금만 움직여도 휘날리는 새까만 재의 향연에, 댈런은 손사래를 치며 구덩이 밖으로 나갔다.

"쿨럭! 두 번 썼다가는 폐렴 걸려 뒈지겠네."

마녀의 저주 때문에 옷가지가 죄다 사라져서 천 쪼가리 하나 남지 않았다.

결국 구덩이 밖에서 이끼를 널찍하게 긁어내, 코와 입을 두르고서야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이가···없구나."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구덩이 한가운데, 근육이며 뼈까지 죄다 으깨진 채 검게 변해버린 마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심장은 멈췄고, 폐도 제 기능을 잃은 상태.

그럼에도 마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마녀의 생명력이 질기기는 했다.

"뭐가 어이가 없냐."

"너 같은···이가, 골라캅을 죽였다는 것도. 그리고 전쟁의 신이 이토록 첨예한 운명의 갈림길에서, 흐윽, 너 같은 무신앙자를 선택했다는 것 역시도······."

"남의 신앙 폄하하지 마라. 이렇게 생겨먹었어도 전생에는 어릴 때 나름 교회 오빠 소리 들었다."

"······뭐?"

뜬금없는 외계어에 마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그래도 찢기고 부서진 피부가, 그 표정의 변화에 후두둑 떨어지며 검게 탄 뼈와 속살을 드러냈다.

댈런은 성검을 휘적대며 구덩이를 내려갔다. 그는 마녀의 목에 성검을 겨눴다.

"하긴, 다 뒈져가는 놈 앞에서 할 소리는 이게 아니지."

"나, 나를 죽이면 후회할 것이다. 신의 전사야. 왜 그런지 아느냐?"

댈런은 픽 웃었다. 웃기는 년이네. 무신앙자랬다가 신의 전사랬다가 지멋대로야?

마녀는 댈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 숲에는 이천에 달하는 만드레이크 씨앗이 뿌려져 있다. 그리고 그중 오백은 이미 다 자랐고, 천은 싹을 틔워 꽃을 피워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날 죽여봤자 그것들이 자라는 건 멈추지 않아."

흐읍.

이야기를 멈추고 고통스럽게 숨을 들이쉰다. 다 뭉개진 입술이 파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날과 시가 되면, 내 안배에 따라 그 모든 만드레이크들이 스스로 지상에 뽑혀 나와 비명을 지를 거다. 그러면 르비바흐는 죽음의 도시가 되겠지. 날 살려둬야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말을 마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마치 이래도 네가 날 죽일 수 있을까? 라는 듯한 얼굴. 댈런은 그 앞에서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만드레이크는 공기에 민감하지."

"······."

"르비바흐 숲은 물과 공기가 좋아, 약초들이 자라기 최적의 환경이고."

마녀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숲의 지하수에 독이라도 타겠다는 건가? 아니면 이 숲에 불이라도 놓으려고? 아무리 네가 빠르고 은밀하다 해도, 약초꾼들의 눈을 피해 숲 전체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성검을 바닥에 꽂아놓고, 두 손을 하늘 위로 활짝 펼쳤다.

마녀가 쓰러지며 숲속의 주문은 죄다 깨어졌고, 하늘을 뒤덮던 잿빛 기운 역시 전부 걷혀나갔다.

먹구름 드문드문한 밤하늘 아래.

댈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숲속에 흘러가는 마력의 바람을 느껴내며, 높아진 마력 수치가 작동해 그 바람을 붙들어 세운다.

머릿속에 그려내는 건, 온 하늘을 뒤덮는 붉은 열기.

심상 너머의 영역에서 보았던 붉은 하늘을 눈앞에 그리며, 그의 입이 짧은 영창을 외워냈다.

"이그넬― 셀티데오 라그레타."

쿠르릉.

하늘이 변화한다.

검은 먹구름이 서서히 붉은 기운을 머금고.

간헐적으로 들리던 우렛소리가 기이한 음색으로 변화한다.

쿠르르르릉.

그 소리는,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이 내는 것과 같은 울부짖음.

댈런이 두 손을 서서히 내릴 즈음, 하늘을 가득 메운 붉은 구름은 숲 전체에 불꽃의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전대 이그넬라 마탑주의 주문을 네가······."

마녀가 턱을 덜덜 떨었다. 댈런은 별다른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꽂혀있던 성검을 높이 치켜들고, 부드러운 호선을 내리그었을 뿐.

부들거리던 마녀의 머리가 두 쪽으로 갈리며, 간신히 이어지던 생명력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푸후."

댈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풀었다.

마녀와 싸우며 영역을 몇 번이나 사용한 건지. 못해도 스무 번은 훌쩍 넘은 게 분명했다.

거기다 만드레이크의 비명과 온갖 주문을 받아내며, 이번 싸움에서도 용혈의 덕을 꽤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남은 건 뻑적지근한 몸과, 눈에 띄게 무뎌진 감각.

어쨌건 그 대가로 잿빛 시체를 네 구나 얻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댈런은 자연스레 시체를 회수하려 손을 뻗었다.

부스럭.

그때 뒤에서 어떤 기척이 들렸다.

댈런은 무뎌진 감각을 한껏 세워내며, 성검을 앞세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이, 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검을 꽉 붙잡고 있는 성기사를.

그녀는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방패를 들어, 파란 눈을 반쯤 가렸다.

댈런은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갑옷이며 옷가지까지 죄다 타버려 훤히 노출된 그의 몸뚱이가 보였다.

"음. 싸움이 좀 격렬했지."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부들거리던 루시아의 입술이 열리며, 마침내 걸쭉한 욕설을 뱉어냈다.

"이런 씨발 격렬하고 자시고! 그 덩치에 밖에서 홀딱 벗고 뭐 하는 짓거립니까! 천 쪼가리라도 갖다드릴 테니 당장 걸쳐주시길 요청합니다!"

소문(1)

불의 비는 머지않아 잦아들었다. 애당초 그렇게까지 피해가 클 법한 위력도 아니었다.

아직 댈런의 스킬 숙련도가 높지 못한 것도 이유였고, 범위를 과하게 넓히다 보니 위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영향도 있었다.

때문에 댈런이 시전한 주문,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는 숲을 완전히 태워먹기는커녕 곳곳에 금방 꺼질 불꽃들을 피워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화르륵.

물론 공기의 변화에 민감한 만드레이크들은, 그 작은 화재로 발생한 연기만으로도 9할 이상이 하루이틀 안에 고사(枯死)할 테였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상인들은 손해를 좀 보겠지만, 뭐 어쩌랴. 사람 목숨이 먼저인 것을.

루시아가 가져다준 널찍한 천으로 몸을 두른 댈런은, 불의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구덩이 안으로 내려갔다.

구덩이 안에는 잿빛 시체 네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댈런은 손을 뻗어 시체를 회수했다.

[힘 없는 약초꾼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1]

[정의롭고 용감한 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약초꾼과 전사의 시체는 능력치 하나 정도만 주었다.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전사는 보스몹인 재의 마녀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시체였다.

게임 초반부의 성장과정은 나름 밟아냈지만, 종말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중반부에는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했을 적의 결말.

그리고 약초꾼은 말 그대로 컨셉 플레이를 하던 중, 숲 깊은 곳에서 난데없는 함정 주문에 걸려 비명횡사한 시체였다.

'심지어 그때는 르비바흐 숲도 아니었지.'

댈런이 마녀를 최대한 빨리 처치하고자 한 이유였다.

르비바흐의 주민들을 몰살시킨 이후에도, 마녀는 비슷한 방법으로 몇 차례에 걸쳐 수백 수천의 제물을 악신에게 바치며 힘을 얻어갔기에.

댈런은 다음 시체로 손을 뻗었다.

[마녀를 스토킹한 성전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저주막이의 인장(D)]

"······."

뭔가 이상한 시체 이름에 자꾸 눈이 간다. 댈런은 애써 외면하며 보상 항목만을 살폈다.

저주막이의 인장은 신성 문신과 비슷하게 피부에 새겨서 얻는 힘.

어깨가 간질간질한 느낌에 몸을 두른 천 자락을 살짝 걷어보니, 엄지손톱만 한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네 흑마법사의 자질구레한 저주는 기본으로 막아주고, 숙련도가 상승할수록 그보다 강한 저주의 위력도 반감시켜주지.'

스킬을 얻은 경로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치민다.

성기사 캐릭터로 재의 마녀와 싸우다 그 본체를 처음으로 본 후.

모니터 너머의 댈런은 예상치 못한 미형의 외모에 반해, 재의 마녀를 한 회차를 내내 쫓아다녔다.

마녀에게 얻어걸린 저주를 신성력만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워, 어렵사리 연이 닿은 엘프 마법사에게 룬 징표까지 받아 새길 정도로 진심이었던 과거의 그.

'잠시 미쳤었지. 게임 캐릭터가 뭐 그렇게 좋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댈런은 마지막 시체에 손을 가져갔다.

[소리 없는 암살자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3, 마력 +1, 암월의 주문살해자]

"음?"

시체를 회수하자 단검 하나가 손 안에 툭 떨어진다.

상승한 능력치의 고양감을 만끽하던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고 단검을 바라봤다.

얇은 검신이 두 줄기로 갈라져, 파도치듯 좌우로 휘어지며 교차하는 단검이었다.

'주문살해자.'

수준 이하의 주문은 닿기만 해도 그냥 소멸시켜버리며, 강력한 주문이라도 물리적인 검격으로 대응할 수 있게 만드는 보검.

더불어 살짝 베어내는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마력 감응력에 일시적인 혼란을 일으키는 저주가 담긴 검이기도 했다.

'여기서 아이템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이템도 계승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은 건 이번이 처음.

거기다 지금까지 회수한 시체가 두 자릿수에 달하는 걸 생각하면, 아이템에 대한 기대감은 아예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온다고 해도, 그 아이템이 과연 쓸모가 있을지도 문제였고.

'암월단의 보물이라면 못해도 어지간한 C등급 스킬 값은 하지.'

댈런은 천 자락을 조금 찢어 단검을 잘 감쌌다.

그는 잿구덩이 밖으로 나오면서, 상태창을 열어 레벨업한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했다.

"음?"

그리고는 문득 고개를 돌려, 방금 지나온 발 아래를 내려다봤다.

벼락이 내려친 경계의 조금 바깥.

서로 얽히듯이 자라난 두 송이의 붉은 꽃이, 통째로 재가 될 위기를 모면한 채 피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공터로 돌아가니 루시아가 소년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마에 얹은 손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죽어가던 소년의 육신을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댈런은 허리띠에 손을 찔러넣었다. 아니, 찔러넣으려 했다.

잠깐 손을 허우적대던 그는, 지금 입고 있는 게 큼직한 천 한 폭뿐인 걸 깨닫고는 팔을 그냥 편하게 내렸다. 그가 물었다.

"애는 괜찮소?"

"일단은요. 당장 죽지는 않도록 해뒀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치료하려면 신전의 사제를 찾아가야 합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물로 잡혔던 다른 포로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들은 어떻게 된 거요?"

"···죽었습니다. 손 쓸 틈도 없이."

"하긴, 살아있는 게 대단한 일이긴 하지."

댈런의 말에, 루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공터에 남은 흔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녀의 인신제사는 보통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팔만 떼어내 토템을 만들거나, 눈알을 적출해 짐승에게 먹인 뒤 그 짐승의 배를 갈라 태우는 건 예사였다.

장기를 끄집어냈다 다시 집어넣고,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으로 끔찍한 고통을 주면서도 끝끝내 희생자를 살려놓는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맛본 사람들의 원성과 비명이 제물로 바쳐지고, 만신창이가 된 몸이 그 고통에마저 둔감해질 즈음 그녀는 제물의 목을 그었다.

마치 대사도와 유사한 형태의 인신제사 집행.

그러나 그보다 배는 잔악하고 사특한 방식이었다.

그토록 처참하게 유린당한 희생자들이 정상적으로 살아있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철제 우리에 갇혀있던 건 대부분 사실상 산 송장들. 마녀의 주문에 의해 강제로 목숨이 붙어있던 이들이었다.

소년 용병 파른이 목숨을 건진 건, 그나마 가장 최근에 제물로 끌려왔기에 가능한 일일 테였다.

"시발 에낙사구스."

댈런은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이런 극악무도한 인신제사의 현장은 다 그놈과 엮여있었다.

모니터 너머로는 익숙해졌던 악신의 만행.

진짜가 아니었기에 대충 넘겼던 참극의 현장들.

그러나 그가 디딘 땅과 숨 쉬는 공기는 이제 실재하는 현실이었고, 한때 넘겼던 비극들은 몇 곱절이나 되는 씁쓸함으로 그의 심중을 후벼팠다.

내가 이 땅에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저걸 막기 위해서일까.

애당초 내가 이 게임을 하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현실이 되기나 했을까. 비극의 근원은 어쩌면 내가 아닌가.

오래전에 잠재웠던 목소리들이 다시금 내면을 흔들어댄다.

이제는 그의 일부가 된 우악스런 야만전사는 그 목소리들에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깊은 가슴 속 남아있는 마우스를 딸깍이던 남자는 그렇게 강인하지 못했다.

무감정한 얼굴 뒤에서, 기나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혼란이 지나간다.

댈런은 입을 열었다.

"···갑시다. 날이 밝겠소."

"예. 파른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할 테니."

루시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댈런은 조심스레 소년 용병을 등에 업었다.

얇은 천 자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소년의 체온은 따뜻했다.

작은 위안이었다.

***

르비바흐로 돌아간 일행은 하루를 푹 쉬었다.

정확히는 댈런만 쉬었다. 루시아는 파른을 간호하느라 하루를 꼬박 깨어있었다.

사실 돌아온 날 새벽부터 사제를 찾아가 치유의 기적을 받은 이상, 그녀가 할 만한 일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수습기사는 따뜻한 물수건을 갈아주고, 입에 묽은 죽을 흘려 넣어주며 어린 소년을 간호했다.

마치 자신이 잠든 사이 아픈 동생에게 어떤 이변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하는 누나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정성 어린 간호가 진짜 효과가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소년 용병 파른은 이튿날 새벽 정신을 차렸다.

"···한 시간 내내 비명을 지르다가 다시 의식을 잃기는 했지만요."

소년을 보러 방에 찾아온 댈런을 향해, 루시아가 말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눈. 피로가 한계에 다다른 얼굴이었다.

"어린 나이로 감당하긴 힘든 기억일 테지. 곁에 있어 주느라 고생했소."

"고생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신전의 사제가 말한 대로, 영혼의 밀도가 강한 아이인 만큼 스스로 잘 버텨낸 거죠."

"어린 나무는 아무리 심지가 곧다 해도 버팀목을 대어줘야 잘 자라는 법이오. 그쪽은 버팀목의 역할을 잘 해준 거지."

루시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눈을 슥슥 비비더니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느 정도."

댈런은 어깨를 휘휘 풀며 대답했다.

사실 그라고 처음부터 루시아 혼자 소년을 간호하게 둘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여관에 돌아와 긴장을 풀자마자, 어마어마한 피로가 온몸을 덮쳤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마녀의 저주에 노출되었고, 그걸 용혈의 재생인자 하나만으로 버텼던 게 원인.

결국 댈런은 하루종일 잠만 잤다.

물론 루시아는 그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며 그 능력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이를 충분히 이해했다.

"좀 쉬시오. 내가 대신 지켜보고 있겠소."

댈런이 그렇게 말하고 등을 두드리자,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하품을 했다.

"무슨 일 있으면 깨워주십시오."

"알았으니 주무시오."

그녀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일 테다. 칼카스의 사냥개 두 마리를 홀로 상대한 데다, 쉬지도 못하고 소년을 치료하고 간호했으니까.

성기사가 침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댈런은 소년이 누워있는 간이침대 앞에 앉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소년의 몰골은 처참했다.

어깨 조금 아래에서 잘려나간 왼팔과, 새의 부리에 쪼아 먹힌 듯 거칠게 뽑혀나간 왼쪽 눈.

루시아의 신성력과 사제의 기적으로 썩어가던 상처의 말단부는 완치되었지만, 잃어버린 부위들이 새로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른 제물들처럼 장기가 뜯기고 피부가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사제의 기적으로도 살리기 힘들었을 테니까.

똑똑.

그렇게 두어 시간쯤 지켜보고 있었을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어, 댈런인가? 나일세! 볼크마!"

한창 바쁠 상인 양반이 여긴 왜 왔어? 댈런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섰다.

문을 열어보니 볼크마 갈리오스는 커다란 쟁반을 들고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쟁반 위에 얹어진 스튜와 양갈비, 빵과 맥주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그가 말했다.

"조, 좀 들어가도 되겠나?"

"일단 내려놓으시오. 그러다 전부 쏟겠군."

댈런은 쟁반을 받아 방 안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볼크마는 그제야 휴 한숨을 내쉬고선 방으로 들어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콧수염을 매만지던 그는 간이침대 위에 눕혀진 소년을 보고 잠시 얼어붙었다.

"저 소년, 이번 상행을 호위한 용병이잖나. 동패로 승급한 뒤에 곧장 다음 의뢰를 맡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었네만······."

"맞소. 그 의뢰에서 다친 걸 우연히 발견해, 데려와서 치료했지."

"···시셀라시여. 어린 나이에 저런 모진 꼴을 당하다니."

볼크마는 주섬주섬 품을 뒤지더니 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금화 반쪽을 꺼내, 침대 곁 탁자에 살포시 놓아두었다. 그가 말했다.

"아이가 깨어나면 내가 주는 위로금이라 말해주게."

"의뢰가 끝난 동패 용병에게 주는 것 치곤 좀 큰 돈인 것 같은데."

"어찌 큰 돈이겠나. 이 소년의 창창할 미래에 비하면 금화 반쪽은 한없이 작은 금액이지. 나는 그저 한때나마 연이 닿았던 상인으로서, 그 미래에 약간의 투자를 하고자 할 뿐이네."

댈런은 말없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이 양반이 또 헛소리 시작했네. 그게 끝이 아닐 텐데?

"물론 그런 선심을 보임으로써, 오크 삼백을 단숨에 때려죽인 그의 보호자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도 있네."

댈런의 눈길에 볼크마는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예전보다 철면피가 더 두꺼워졌군."

"그거야말로 상인의 덕목 아니겠나? 으하하!"

댈런은 마주 낮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단숨에 반쯤을 들이킨 그가 물었다.

"그래서 한창 바쁘실 상인께서 여긴 무슨 일이오? 이렇게 쟁반까지 들고."

"자네랑 성기사가 하루종일 내려오지 않기에, 먹을거리라도 좀 가져다줘야 할 것 같았네. 아, 바빴던 일은 전부 사라졌다네. 예정되었던 경매며 거래가 죄다 취소되거나 미뤄졌거든."

댈런은 피식 웃었다.

"난 또. 상단이 망해서 여관 직원으로 재취업한 줄 알았잖소."

"···그런 끔찍한 소리 말게나."

상단주가 부르르 떨었다. 댈런은 한 번 더 웃고는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안 그래도 하루종일 잠만 자다가, 깨어나자마자 파른을 간호하느라 배가 고프던 차였다.

큼직한 잔의 나머지 절반을 단숨에 들이키고, 양갈비를 하나를 한 입에 훑어낸 그가 말을 이었다.

"경매랑 거래가 취소되었다는 건 무슨 말이오?"

"그저께 밤에 르비바흐 숲에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더군. 하늘이 잿빛 기운으로 뒤덮이더니 그걸 뚫고 번개가 내리치고, 곧이어 화염이 비처럼 내렸다지 뭔가."

양갈비를 뜯던 댈런의 손길이 잠깐 멈칫했다.

물론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댈런의 입은 갈빗대에 붙은 고기를 자연스레 마저 흡입했다.

"약초꾼들이 하나같이 당분간 숲에 못 들어가겠다고 학을 떼더군. 악마가 지옥문을 열고 나오다 천벌을 받았다는 둥, 어느 마탑의 대마법사가 마녀와 결투를 벌였다는 둥,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고 있네."

댈런은 빵을 스튜에 푹 찍어 씹어 삼키면서 생각했다.

사람들 추리력이 생각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물론 그 소문이 거짓말이라 생각하는 상단주는, 약초꾼들이 죄다 미신에 절어 있다느니 하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댈런은 그 푸념을 한 귀로 흘리며 쟁반에 가져온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렇게 양갈비와 스튜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볼크마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주제를 바꿨다.

"아, 그런데 그 소문 들었나? 여기서 일주일쯤 떨어진 제국의 북쪽 변방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있다던데."

그 말에 끊임없이 음식을 집어 들던 손이 우뚝 멈췄다.

소문(2)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고 했소?"

댈런은 손에 묻은 양념을 대충 닦아내며 물었다.

"맞네. 뼈만 남은 시체가 무덤을 헤집고 일어나고, 전날 침상에서 임종을 맞은 노인이 밤중에 집밖으로 걸어나간다더군."

"흠."

톡톡.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댈런은 생각했다.

'언데드가 나타났다라.'

언데드의 등장은 이 게임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조였다.

칠십 년 전에 성기사단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진 이후, 사령술사는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

살아남은 소수의 사령술사들은 성기사단의 손길이 닿기 힘든 오지에 숨어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저 북방 서리고원이나 제국 서부의 뱀파이어 백작령, 혹은 대륙 서쪽의 작열사막 정도.

그런 오지가 아니면 사령술사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언데드가 발견되었다는 건, 어떤 이변이 생긴다는 분명한 전조였다.

'그 이변 중 최악은 뱀파이어 백작이 제국을 침공하는 거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사백 년 만에 인간의 땅을 넘보는 뱀파이어 백작.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제 2차 혈귀전쟁은, 게임 후반부의 대미를 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활동하기에는 아직 시기가 너무 이르다. 제국의 힘도 충분히 약화되지 않았고.'

역행의 사도들이나 재의 마녀와는 다르게, 혈귀전쟁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 하나의 의지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제국의 무리한 확장정책과 그에 따른 국가 간의 알력다툼이 복잡하게 얽히는 게임 중반.

그 여파가 끝끝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버린 것이 바로 혈귀전쟁이었으니까.

아무리 악신이 개입한다 하더라도, 복잡하게 얽힌 대륙의 정세를 이 정도로 급박하게 움직이기는 힘들 테였다.

댈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망자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없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만······. 군대가 움직였다는 소문은 없는 걸 보니, 변방의 마을에서 난 소문 정도인 것 같네."

"그렇군. 고맙소."

댈런은 다시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큼직한 빵 덩이를 찢는 그를 보며 볼크마가 물었다.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는 건가? 난 그냥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네만."

"아니오. 그저 헛소문이겠지."

고개를 갸웃하는 볼크마를 앞에 두고, 댈런은 빵조각을 씹으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제국 북쪽에 국한된 소문이라면 긴장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뱀파이어 백작의 침공 전에는 제국의 모든 땅과 그 주변의 소왕국들, 심지어 도시연합에까지 죽은 자들이 돌아다닐 정도니까.

'그러면 언데드가 출현하는 소규모 이벤트들이 중 하나라는 건데. 지옥의 뱃사공? 아니면 유령마의 전설? 또 뭐가 있더라.'

남은 스튜를 빵조각으로 싹싹 닦아먹으며, 댈런은 가만히 기억 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볼크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제국의 정세가 어쩌고, 그에 따른 물가가 어쩌고 하는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

그날 소년은 다시 한 번 의식을 차렸다. 볼크마가 떠난 지 몇 시간 안 되어서였다.

"······."

소년은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멀뚱히 천장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댈런을 바라보더니, 작은 눈망울에서 눈물 몇 방울을 또륵 흘렸을 뿐이었다.

"배 안 고프냐."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빵과 스튜를 내밀었다. 소년은 그걸 싹싹 긁어먹은 다음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던 소년은, 나흘째가 되면서부터 일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루는 루시아의 손에 이끌려 신전의 사제를 한 번 더 방문했다.

다음날에는 새 갑옷과 검을 주문하는 댈런을 따라 대장간에도 갔다.

어느 날 시장에서 두 사람이 건량을 사들이는 걸 보고, 소년은 이들이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날 저녁 먹는 자리에서, 소년이 말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루시아는 스튜를 퍼올리던 숟가락을 멈칫했다.

마녀에게서 구출해낸 이레로, 소년이 처음 입을 연 것이었다.

"어···얘야, 우선 우리가 가는 곳은 그냥 옆 도시가 아니란다."

"어딘데요?"

"그게 말이지······."

루시아는 입가를 일자로 길게 늘이며 얼버무렸다.

배신자가 성검을 노리고 있고, 그 위협을 뚫고 성기사단의 본단으로 가는 길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소년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어린 나이에 마녀에게 고문당하며 받은 충격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수준.

그 끔찍한 기억을 눈앞의 두 사람을 의지해 극복해낸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소년의 입장에서는 안정감의 근원이 되는 두 사람과 떨어지는 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다고 막상 데려가자니, 말 그대로 어떤 위험이 존재할 지 모르는 여정이었다.

"음······."

"···역시 안 되겠죠?"

소년의 얼굴에 절제된, 그러나 못다 감춘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그때 소시지를 질겅이던 댈런이 입을 열었다.

"본인 몫의 배낭을 챙길 줄 아나?"

"···예."

"야영지는 꾸릴 줄 알고?"

"다른 동패 용병들에 비해 조금 느리지만, 할 줄 압니다."

"말은 타봤나?"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조랑말 정도라면 몇 번 경험은 있습니다. 가르쳐주시면 빠르게 배우겠습니다."

"그럼 됐군. 내가 짐꾼 겸 용병으로 너를 고용하겠다. 용병 길드에 정식으로 지명 의뢰를 넣도록 하지."

댈런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시지를 큼직하게 잘라 입에 넣었다. 소년도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대화에, 루시아가 약간 당황한 눈치로 뒤늦게 덧붙였다.

"어···검술은 내가 가르쳐줄게! 댈런도 좋은 스승이긴 할 텐데, 사용하는 검술이 너랑은 잘 안 맞을 거야."

"감사합니다."

소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동패 용병 파른의 동행이 결정되고, 일행은 며칠 뒤 도시를 떠났다.

갈리오스 상단을 따라 르비바흐에 도착한 지 정확히 열흘만이었다.

***

타다닥. 타닥.

모닥불이 불티를 휘날렸다. 댈런은 굵은 나뭇가지를 들어 불을 몇 번 쑤셔줬다.

그리고 거세진 불길 위에 장작을 추가로 얹은 뒤,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읊었다.

"이그넬 로트."

마력으로 피워낸 불꽃이 장작에 옮겨붙었다. 장작을 조금씩 갉아먹던 불꽃은 이내 모닥불과 하나가 되어 거세게 타올랐다.

댈런은 불 곁에서 덥히던 그릇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루시아와 파른은 모포 속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불침번 초번이었다.

"음. 맛있군."

저녁 먹고 남은 걸 다시 덥혀놓으니, 야식 삼아 먹기 괜찮았다.

저녁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루시아의 작품이었다.

도시에서 사온 채소와 계란을 고기와 함께 구운 것과, 약간 물렁해지거나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재료들을 볶은 곡식과 함께 때려넣고 푹 끓인 스튜.

댈런은 조금 질긴 고기를 질겅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구보다 조금 작은 달. 밤하늘에 빼곡한 별들.

별들의 위치는 고향의 밤하늘과 판이하게 달랐지만, 사람들이 이름 붙인 별자리의 형태와 모양은 꽤나 비슷비슷했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세상.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그런 것이었다.

"으으으."

그때 곤히 자던 파른이 신음을 흘리며 뒤척거렸다.

댈런은 소년의 머리에 조심스레 손등을 대어보았다. 조금 뜨거웠다. 심하진 않았다.

"잘해주고 있다, 동패 용병 파른."

댈런은 잠꼬대에 내려간 소년의 모포를 끌어올려주며 작게 말했다.

일행이 르비바흐를 떠난 지 오늘로 나흘째였다.

상인들이 이용하는 길을 따라, 제국 국경을 향해 말을 타고 남하하는 여정이었다.

상단을 호위할 떄와는 달리, 셋만 움직이게 되면서 할 일은 더 늘어났다.

항상 주변을 경게하는 건 물론이고, 해가 저물 즈음에는 괜찮은 장소를 찾아 야영지를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밤이 되면 불침번도 서야 했고.

그리고 성기사와 베테랑 용병 사이에서, 이 어린 소년은 꿋꿋이 제몫을 해냈다.

댈런이 짐승을 사냥하고 루시아가 야영지를 준비하는 동안, 파른은 숲에 들어가 땔감을 만들어왔다.

루시아의 만류에도 굳이 불침번을 섰고, 그러면서도 낮에 힘든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덕분에 댈런의 예상보다 일행의 속도는 크게 뒤쳐지지 않았다.

'도시연합과 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넘는 데 사흘. 다시 에스트라 강을 건너 제국 영토를 벗어나는 데 이틀. 그리고 나서 열흘 안팎이면 성기사단에 도착하겠군.'

물론 말을 타고 정상적으로 갈 때의 이야기고, 뜻밖의 사고가 터지거나 하면 시간은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고기를 우물거리던 댈런은, 반쯤 비운 그릇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조금 떨어진 모포를 쳐다봤다.

"잠이 안 오시오?"

모포 속. 루시아가 눈을 떴다. 그녀는 스르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그렇군요."

그녀가 일어나 앉자 긴 금발이 찰랑거리며 얇은 어깨를 덮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금빛 폭포같았다.

루시아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직까지도 간간이 신음을 흘리고 있는 파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힘들어할까요?"

도시를 떠난 이후, 소년은 매일 밤 저렇게 앓았다.

마녀에게 입은 상처는 완치되었으나, 정신에 입은 상처마저 다 씻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요. 우리의 역할은 그저 기다려주는 거지."

"···그렇죠.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루시아는 왠지 약간 젖은 눈으로 고개를 내리깔았다.

촉촉한 푸른 눈동자 위에, 모닥불의 붉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들은 죽였소?"

"네?"

"미궁도적 놈의 동료들. 바렛을 죽이는 데 동참했을 거라 짐작되는 용의자들 말이오."

"······아."

잠시 고개를 들었던 성기사는 다시 시선을 떨궜다.

그녀는 한동안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깨물어 살짝 창백해진 입술이 열렸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루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마치 왜 그랬는지 물어달라는 듯한 공백이었다.

댈런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러나 성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린 것도 아니었다.

길지 않은 여백을 건너, 질문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루시아는 짧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시에나에게 얻은 정보로 어떻게 미궁도적 '스킨헤드'의 동료들을 쫓았는지.

그리고 처음 붙잡은 놈의 동료가, 그녀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도.

'너희 같은 성기사단 놈들이 뭘 알아! 배가 불러서 인류의 방패며 균열의 수호자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주제에! 우린 너희 같은 배부른 년놈들과는 달라. 하루 벌어먹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마물들과 싸운다고. 인류를 위한 악마 토벌? 하! 내 눈에는 신념에 취한 새파란 애송이가, 수백 플로린짜리 밥그릇을 빼앗으러 온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는 그렇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시인했다고 한다.

자신이 성기사 바렛의 등을 찔렀음을.

악마에게 걸린 포상금과 성검을 모두 챙기려 했다는 것을.

"듣고 나니 황당하더군요. 저희는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입니다. 균열을 수호한다는 건, 곧 이 대륙의 주민들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죠. 대가도 없고, 요구도 없이."

루시아는 입술을 다시 잘근거렸다.

"그놈과 대화하며, 저희의 헌신에 돌아올 대접은 어쩌면 등에 꽂히는 칼뿐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꼈죠. 선배들 중 의무를 저버리고 산골에 틀어박히는 이들을···마침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왔다. 모닥불이 흔들렸다.

성기사의 푸른 눈 위에 비친 붉은 일렁임도, 그에 맞춰 함께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댈런은 묵묵히 그걸 지켜봤다. 한동안은 그 바람 소리와 소년의 끙끙거림만이 들렸다.

"그런데 놈을 죽이려는 순간, 바렛의 말이 귀에 맴돌더군요."

"어떤 말이었소?"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말라고. 사람은 애초에 믿을 존재가 아니라고."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옅은 한숨과 함께 다음 문장을 뱉었다.

"···사람은 그저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고."

"음."

댈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숟가락을 들어 다시 고기와 스튜를 우물거렸다.

"그 말이 맞는지 아직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믿을 존재가 아니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성기사단은 그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죠."

루시아는 살짝 웃었다. 힘겨운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그저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어느새 바람이 잦아들었다. 모닥불은 다시금 꼿꼿하게 타올랐다.

성기사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거리던 불꽃도, 어느새 중심을 되찾고 곧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외풍에 꺾여가던 신념의 불꽃이, 어떤 계기로 한층 더 단단해진 것처럼.

"그랬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었다.

반박할 말은 당장에도 그의 머릿속을 굴러다녔으니까.

당장 루시아가 살려보낸 놈만 해도,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의 뒤통수를 치며 희생자를 만들 테였다.

자신이었다면 단칼에 놈을 썰어버렸을 것이다.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동시에, 댈런은 알았다.

그토록 손쉽게 죽인 누군가가, 먼 미래에 선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 역시 없다는 것을.

지금껏 그의 손에 죽어간 사람만 세 자릿수는 되었다.

그 중에는 어느 집안의 가장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자녀는,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에서 작은 영웅이 될 예정이었을지도 몰랐다.

굵직굵직한 미래를 알고 있는 그라도,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세계은 더 이상 0과 1로 작동하는 게임이 아니라.

살아 숨쉬며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가는, 말 그대로 실재하는 세상이었으니까.

"세상은 복잡하지."

댈런은 빈 그릇을 내려놓고 말했다.

"허나 그런 복잡함 속이기에 정의는 때로 단순한 형태일지도 모르는 법이오. 물론 반대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는 각자의 정의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누군가에게는 복잡한 자신만의 정의.

그리고 루시아의 정의는 위태롭게나마 완성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기질과 신앙, 경험을 통해서.

아마도 이건 악마 살해자가 빚어져가는 과정일 테였다. 그리고 댈런은 굳이 그걸 무너뜨릴 생각이 없었다.

미래를 알고 있기에, 미래의 영웅을 대하는 태도가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짧은 격려뿐이었다.

"어쨌든 사람에게 완전한 정의는 없소. 만약 있다면, 그건 신의 영역이며 권한이겠지."

부디 그쪽이 세워가는 정의가 정말로 신의 뜻이기를 바라오. 그는 나지막히 덧붙였다.

루시아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식사를 마친 그릇을 대충 닦아내 챙겼다. 그러면서 주제를 돌렸다.

"지도를 보니 상행로 길목에 여관이 하나 있더군. 내일이면 도착할 것 같소. 거기서 물자를 조금 보충하고, 하루쯤 여독을 푼 다음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

"신선한 채소가 다 떨어졌습니다. 여관의 사정이 넉넉하다면 좀 사도 괜찮겠군요. 비싼 값이겠지만."

"내 짐의 반 이상이 금화요."

씩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루시아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댈런도 마주 낮게 웃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오는군."

그가 말했다. 루시아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신성 문신으로 한껏 안력을 끌어올린 그녀는, 이내 자연스레 검에 손을 가져갔다.

화살 닿을 거리보다 조금 먼 곳.

두 그림자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소문(3)

"어, 어떻게 아신 거요?"

두 피난민 중 남자 쪽이 입을 열었다. 수염이 조금 지저분하게 자란, 서른쯤 되어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댈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보통 소문이 사람보다 빠르지."

꼬르륵.

그때 수염 남자의 배가 우렁차게 꼬르륵거렸다.

뭐라 더 말하려던 남자는 배에서 난 소리가 민망한 듯 입을 닫았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모포 곁에 놓인 배낭에서 육포와 마른 빵을 꺼냈다.

"먼 길 오느라 배고프시겠군. 좀 드시오."

두 피난민은 잠깐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육포와 빵을 받아든 그들은, 이내 걸신들린 듯 음식을 입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사실 마른 빵과 질긴 육포가 급하게 먹기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마치 며칠을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먹어댔다.

댈런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배낭에서 가죽 수통을 끌러 건네며 말했다.

"이 길로 나흘쯤 가면 르비바흐라는 도시가 나올 거요. 일거리가 필요하면 거기서 찾으시오. 근래 돈 많은 상인들이 죄다 몰려왔으니, 당장 먹고 살기 어렵지는 않을 것 같군."

"고맙소. 정말, 쿨럭! 고맙소이다."

수염 남자가 두 볼에 빵조각을 잔뜩 쑤셔넣은 채 말했다. 그는 완전히 감격에 젖은 눈이었다.

그때 수통으로 목을 축인 피난민 여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어떻게 사례하면 될까요? 저희가 당장 대가로 드릴 만한 게 별로 없어서······."

"대가를 바란 게 아니니, 부담 갖지 마시오."

댈런은 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헤집으며 덧붙였다.

"정 뭣하면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는 그 소문이나 더 말해주시오. 타지에서 온 여행객에게 듣는 이야기만큼 밤을 지새우기 좋은 것도 없거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육포 조각을 뜯어 입에서 천천히 굴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동네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오래된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나, 제국 북부에 강림한다는 소문이었죠."

"악마 말이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사교도들이었어요. 어디선가 나타난 사교도들이 마을 광장에서 외치기 시작했죠. 종말이 다가온다느니, 악마께서 강림하실 제단을 준비하라느니······. 마을 청년들이 아무리 쫓아내도, 다음 날만 되면 다시 나타나더군요."

"진짜로 극성인 놈들이었소. 으으!"

배를 좀 채웠는지, 빵과 육포를 내려놓은 수염 남자가 치를 떨었다. 여자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사실 사교도라 해서 다들 역행의 사도들처럼 거대한 조직을 이루는 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사교도라 부르는 작자들은, 본인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마을 광장이나 성문 앞에서 난동을 부려대는 걸인들을 의미했으니까.

그들은 대부분은 남루한 옷차림에 떡진 머리를 한 미치광이들이었고, 간혹 사기꾼들 한둘 끼어있었다.

몇 대 두들겨 쫓아내도 어느새 다시 돌아와 이름 모를 신의 계시를 소리쳐대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바퀴벌레 같은 존재인 셈.

'그나저나 악마에 대한 소문이라. 조금 이른 감이 없지는 않군. 게임 중반부쯤 되면 흔한 이벤트이긴 한데.'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중반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마물들은 더욱 활개를 치고 대륙 곳곳에는 전운이 감돌게 된다.

지난 세월 댈런의 활약이 없었다면, 당장 미궁도시만 해도 몇 년 뒤쯤 개판이 되는 걸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행의 사도들이 청동 구역을 뒤엎고, 성검 든 악마와 거대한 놀 무리는 미궁 1층을 휘젓고 다녔겠지.

그 정도 상황이면 악마에 대한 소문 정도야 그닥 중요한 이벤트도 아니게 된다.

기껏해야 변방 도시나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이드 퀘스트 정도일까.

'물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아무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이변이 일어난다지만, 대륙의 정세는 아직 중반부에 접어들기까지 한참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악마에 대한 소문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소문에서 그치면 모를까.

사령술사에 언데드까지 나타나는 상황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다들 헛소문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졌죠. 밤만 되면 무덤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까요."

여자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곁에 있던 수염 남자가 그녀를 토닥이며 대신 말을 이었다.

"떠나기 전에는 이런 소문까지 들었소. 산 속의 어느 동굴에 악마가 봉인되어 있고, 사령술사들이 그 봉인을 푸는 의식을 벌이는 중이라더군. 악마라니.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내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소."

"고생이 많으셨군."

수염 남자는 작게 웃었다. 약간 허탈한 웃음이었다.

댈런은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더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 봉인되었다는 악마. 그게 무슨 악마인지는 모르시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불사의 악마라 했던 것 같소."

***

'불사의 악마라.'

다음날.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며, 댈런은 머릿속으로 어제 나눴던 대화를 끊임없이 복기했다.

'불사의 악마. 그렇지. 제국 북부의 렝클턴 마을. 사교도들과 언데드의 등장. 모두 불사의 악마를 가리키는 증거였어.'

어째서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사실 기억 속 수천 개에 달하는 이벤트와 퀘스트들 사이에서 정답만을 골라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어느 순간 제일 낮은 능력치가 되어버린 지능 수치를 좀 더 올려야겠다고 다짐하며, 댈런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이 게임에서 가장 짜증나는 놈이랑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건데.'

불사의 악마.

놈은 말 그대로 죽지 않는 악마였다.

물론 악마라 하면 다들 필멸자의 궤를 벗어난 놈들이긴 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병들거나 늙어서 죽는다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다만 불사의 악마 같은 경우는 그 개념이 조금 달랐다.

놈의 '불사'는 문자 그대로 절대 죽지 않다는 의미였다.

'검신이 오의 중 하나를 써서 걸레짝을 만들고, 거기에 마녀의 주문과 기사단장의 신성력을 함께 쏟아부어도 안 뒈졌지.'

어느 회차에 벌였던 기행을 떠올려보며, 댈런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불사의 악마가 가진 무력 자체는 그리 막강하지 않았다.

악마의 기준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마물의 기준으로도.

불사의 능력을 제외하고 따져보면, 일전에 죽였던 놀 전사장 바르구프 정도 될까.

그럼에도 죽지 않는다는 그 능력 하나 때문에, 놈에게 잘못 걸리면 그 회차는 망했다고 봐야 했다.

대륙 끝까지 쫓아다니며 온갖 저주를 걸어대는 악마를 곁에 두고, 제대로 된 싸움이라는 게 가능할 리 없었으니까.

'놈이 활동하는 영역을 피해가려면, 정말 한참을 돌아가야 할 텐데······. 잠깐. 어쩌면···?'

그때 문득 어떤 아이디어 하나가 댈런의 뇌리를 스쳤다.

댈런은 곧장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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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13

[근력 : 32] [기량 : 21] [체력 : 28]

[감각 : 20] [지능 : 19] [마력 : 20]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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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글자들이 주르르 떠오른다.

처음 미궁도시에 발을 들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해진 상태창.

뒷골목의 허름한 여관에서 첫 스킬을 얻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 개나 되는 스킬들이 그의 상태창에 들어차 있었다.

능력치 역시 도합 50이 넘게 상승했다.

거기다 지능 수치를 제외하면 이제 모두 20대였다.

숲에서 캐낸 만드레이크 두 뿌리 중 하나를 먹어, 체력과 마력이 추가적으로 하나씩 오른 결과.

안타깝게도 이런 종류의 영약들은, 종류별로 한 번밖에 능력치를 올려주지 않는다는 제한이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댈런은 마녀를 쓰러뜨린 날, 용혈의 여파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르비바흐 숲을 이 잡듯이 뒤졌으리라.

'어쨌건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 있겠군. 마녀를 죽이고 얻은 것들이 마침 부족한 부분을 메꿔줬어.'

문득 떠오른 발상이 계획으로 구체화되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댈런은 상태창을 바라보며 가만히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그런 그에게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피난민들이 남긴 말에 대해 생각하십니까?"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는 말. 댈런은 말없이 코를 긁적였다.

루시아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관을 조심하라 했던가요. 돌아가는 게 나으렵니까?"

아, 그 말을 얘기한 거였나.

아침에 헤어지며 피난민 부부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길목에 있는 여관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다만 이상하게도 그 이상의 언급은 피하는 눈치였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관이 있는 곳은 작은 숲을 가로지르는 길목이오. 돌아가면 시간이 배는 더 걸릴 테지. 반대로 그만큼 피난민들이 많이 거쳐갔을 테니, 언데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좋을 거요. 더불어···."

파른이 꽤나 지쳐 보이기도 하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루시아는 살짝 시선을 돌려 뒤를 보았다. 파른은 말 안장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닷새째 이어지는 노숙과, 익숙하지 않은 승마의 피로가 소년의 체력을 착실하게 깎아먹고 있었던 것.

결단코 내색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이런 종류의 피로는 방치하면 더 큰 사고를 부르는 법이다.

"하루는 푹 쉬었다 가야겠군요."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고선 말의 속도를 살짝 늦췄다. 그녀의 말이 소년의 말 근처로 붙어갔다.

"···으음!"

뭔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번쩍 눈을 뜨는 소년.

파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빠르게 사방을 돌아보며 주위를 경계했다.

루시아가 지난 며칠 승마와 검술 등을 교육하며 조언한 것들을, 착실하게 따르는 모습이었다.

'뭘 해도 될 녀석이군.'

댈런은 낮게 웃었다.

***

일행은 그날 저녁 늦게 여관에 도착했다.

상행로는 이름 모를 작은 숲 한가운데를 관통했고, 여관은 그 숲길 오른편에 붙어있었다.

"우와. 진짜 크다······."

파른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외딴 숲 한가운데 있는 저택 같은 외형이, 소년의 마음을 동하게 한 듯했다.

"국경선 근처라 오가는 상인들이 많아서 그래. 국경만 넘으면 바로 마을이니까, 재료 수급도 원활할 거고."

루시아가 소년의 곁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여관은 4층 규모였다. 1층은 주점 겸 여행물품을 파는 잡화점을 겸했고, 그 위로는 전부 객실이었다.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걸 생각했는지, 건물 옆에는 큼직한 마굿간도 하나 있었다. 마굿간에는 이미 짐수레와 말들이 여럿 묶여있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안내하는 직원은 따로 없어보였다.

곧장 마굿간으로 말을 몰아가는데, 루시아가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였다.

"댈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왜 그러시오?"

"미약하게나마 사악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느꼈소."

어째서인지 스산한 공기. 그 속에 옅게 스며든 향취는 전사의 코가 쉽게 놓칠 수 없는 종류였다.

"피 냄새가 나는군."

소문(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