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5

악마의 성검(10)

놀 거주지를 탈탈 털어버린 댈런과 루시아는, 우선 그날 하루를 푹 쉬기로 했다.

루시아의 컨디션 때문이었다.

장장 네 시간을 갑각늑대에 매달려 있었던 데다, 곧바로 놀 거주지를 휩쓸고 다니며 그녀의 체력은 말 그대로 방전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신성력마저, 거주지 안에 세워진 악신의 제단을 정화하며 완전히 고갈된 상황.

악마가 숨어든 동굴은 여기서 남쪽으로 일주일은 걸어가야 했다.

무리해서 출발했다가 중간에 다시 방전될 바에야, 차라리 지금 쉬어두는 게 더 나은 선택.

어차피 갑각늑대를 이용해 이동시간을 극도로 단축시켰기에, 하루쯤 쉰다고 해서 계획에 큰 차질은 없기도 했다.

화르르륵.

댈런은 놀들이 모아놓은 땔감으로 모닥불을 지폈다.

그 사이 루시아는 거주지 안에 흐르는 냇가에서 몸과 갑옷을 박박 씻고 왔다.

여벌로 챙겨온 가벼운 옷을 걸치고, 냇가에서 빤 갑옷과 옷을 모닥불 곁에 말려둔 그녀는 곧장 천막 안에 들어가 수마에 빠져들었다.

천막은 짐승 냄새가 좀 남아있긴 했지만, 지능 높은 종족답게 하룻밤 머물 거처로는 제격이었다.

푹신한 털가죽 침대.

바람을 막아줄 두터운 천막.

이 두 가지만 해도, 미궁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잠자리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저벅.

댈런은 고생한 성기사를 재워두고서 거주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 역시 피와 내장을 냇가에서 씻어냈기에, 지금은 가벼운 천옷 한 겹 차림이었다.

저벅. 저벅.

거주지를 둘러보며 안전을 재확인한 그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놀 전사장의 천막 쪽으로 향한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놀 시체는 차가운 밤공기 아래 식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시체.

두 팔과 목이 잘려나간 놀 전사장의 시체 앞에서, 댈런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만 보이는 잿빛 시체 두 구가 빛무리로 화하며, 그의 손 안으로 스르르 빨려들어온다.

[미궁 초행자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완숙한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기량 +1, 라판텔라의 분쇄검(C)]

별볼일 없는 허접한 캐릭터의 시체 하나와, 나름 공략을 연구하던 시절의 시체 하나.

다행히 근력은 오르지 않았다.

댈런은 굉장히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

이름 : 댈런

레벨 : 10

[근력 : 30] [기량 : 18] [체력 : 19]

[감각 : 17] [지능 : 19] [마력 : 14]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

마침내 두 자릿수가 된 레벨.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레벨 10이 되었다 해서, 이 망할 게임이 뭔가 특별한 보상을 주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추가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하자, 체력 수치 역시 드디어 20대에 접어들었다.

'이건 충분히 의미가 있지.'

몇 번 몸을 풀어보는 것만으로도, 내상 없이 다룰 수 있는 힘의 크기가 확연히 늘어났음이 느껴진다.

댈런은 어깨를 휘휘 돌리며 달라진 몸에 익숙해져갔다.

'다른 능력치들도 골고루 올리긴 해야 할 텐데.'

능력치 하나가 과도하게 높았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어쩌면 특정 능력치가 과도하게 낮거나 할 때 역시, 뭔가 부작용이 있을 지도 몰랐다.

'일단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그 다음에 밸런스를 신경 써야겠군.'

댈런은 몸을 푸는 걸 멈추고, 들고온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낮에보다 조금 더 어두워진 별빛이, 잘 닦이고 갈린 검끝에서 반짝거리며 부서진다.

통짜 금속으로 만든 검은 수백 마리의 놀을 썰어버리고도 멀쩡했다.

과연 르베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

모닥불 곁에서 말리고 있는 갑옷 역시, 사슬이 부분부분 끊어지긴 했어도 크게 찢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스읍―

댈런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지능 수치가 새로이 얻어낸 지식들을 조각조각 나누고 분석해낸다.

감각과 기량 수치는 그 분석해낸 산물을 근육과 내장에 적용해가며 몸의 움직임으로 체화시켰다.

손끝이 저릿해온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딱히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온몸에 뜨거운 피를 넘치도록 펌핑해댔고.

전신의 근육은 당장에라도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공기를 찢어발기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완숙한 투사의 시체를 회수하며 얻게 된 스킬, 라판텔라의 분쇄검.

데하만의 갑주격투 이후 처음 얻어낸 이 무투 스킬은, 그의 초인적인 육신마저도 고양시키는 위력의 무술이었다.

같은 C등급인 용혈의 재생 인자를 생각해봤을 때, 분쇄검이 보여줄 활약은 당연히 기대되는 바.

거기다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본 적 없는 용혈의 재생 인자와 달리, 라판텔라의 분쇄검은 댈런 역시 몇 번쯤 얻고 사용했던 검술이었다.

모니터 너머에서나마 그 위력을 실감한 적이 있는 만큼, 기대감이 배가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공격에 치중된 양손검술이지. 방어마저도 공격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 모든 공방에서 파괴력 하나에만 초점을 맞춘 검술.'

후우―

천천히 호흡을 내뱉는다.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천천히 어깨 너머로 들어올린다.

그의 앞에는 놀 전사장의 도끼창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바위를 쪼개고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도끼창.

습―

뱉었던 호흡을 다시금 짧게 그러모은다.

뻗어나가는 감각을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돌린다.

천천히 왼발이 바닥을 끌며 앞으로 나아가고.

양 팔의 어깨에서부터,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스으으―

어깨부터 팔뚝을 덮어가는, 기묘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

그 기운이 검을 잡은 손끝에 도달한 순간.

휘익―!

특별할 것 없는 검격이, 어깨 위에서부터 사선으로 내리그어졌다.

"······."

변화는 한 박자 늦게 나타났다.

캉!

바위도 박살낸 도끼창이 반으로 뚝 갈라지더니.

쩌저저저저정―!

그대로 자루 끝부터 도끼머리까지 산산조각나며, 수백 조각의 고철 파편으로 변해 전방으로 터져나간 것.

그건 어둑한 하늘의 별빛이, 수백의 반짝거림으로 지상에 피어났다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

다음날.

두 사람은 아침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댈런은 최대한 전투를 피하는 방향으로 경로를 계획했다.

루시아의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자잘한 전투라도 삼가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그렇게 사흘을 별 탈 없이 남하했다.

미궁에 내려온 지는 나흘째가 되는 밤이었다.

타다닥.

댈런은 모닥불 앞에 앉아, 저녁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닥불 맞은편에서 루시아가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평소보다 더 많이 잡아오셨습니까?"

그녀는 불 위에서 꼬챙이를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가죽을 벗기고 손질한 땅굴토끼 열 마리가, 그 꼬챙이에 꿰인 채 익어갔다.

땅굴토끼는 지상의 토끼보다 훨씬 위험하고 사납긴 하지만, 미궁에서는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는 짐승형 마물 중 하나였다.

고기의 맛이 토끼와 크게 다르지 않아, 사냥꾼 출신의 탐험가들이 애용하는 식량이기도 했다.

"댈런?"

지글지글.

기름 자글거리는 소리에 군침이 고인다.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는 10분 전부터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댈런은 침을 꿀떡 삼키고서야 뒤늦게 대답했다.

"배고파서. 그리고 숲 근처라 그런지, 근처에 토끼굴이 꽤 많기도 했소."

"그렇습니까. 댈런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많이 드시는 건 알지만, 되도록 열 마리를 넘기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한 번에 요리하는 게 쉽지는 않아서요."

"내가 도와주면 되지 않겠소."

"이런 씹···아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아주시죠."

루시아는 미간을 잔뜩 오므리며 댈련을 노려봤다.

눈으로 욕한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주는 눈빛이었다.

댈런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내가 누구 식중독이라도 걸리게 했나?

"댈런이 한 요리는···애당초 그걸 요리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군요. 그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난 그래도 먹을 만하던데."

"차라리 날것으로 드십시오. 그게 더 영양가 있고 맛도 좋지 않겠습니까?"

댈런은 손가락으로 코를 긁었다. 사실 지구인이었을 적에도 요리만큼은 잼병이긴 했다.

이 세계에 와서도 요리라고는 용병 생활 초기에 스튜 몇 번 끓여본 게 다였고.

그마저도 선배 용병들이 곧 자기들이 하겠다며 뜯어말려서, 그냥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었지만.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처음 사냥해온 짐승을 요리할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의 딴에는 나름 속살은 적당히 쫄깃하고, 껍질은 바삭하게 잘 익었다고 느꼈으니까.

물론 루시아가 그걸 맛보며 온갖 쌍욕을 내뱉은 다음에는, 나름 자기 객관화가 되어가고 있긴 했다.

한 입 물었다가 이가 깨질 뻔하고, 신성 문신으로 골격을 강화시켜서야 질기디 질긴 속살을 겨우 씹어삼킨 걸 눈앞에서 목격했으니까.

"다 됐습니다."

때 아닌 자기혐오에 빠져들려는 찰나, 루시아가 다 된 구이를 척 내밀었다.

기름과 꿀을 발라 반들반들하게 익힌 겉면에, 적당히 뿌려진 향신료의 향긋한 냄새.

한 입 베어물자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껍질이 입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고, 그 안쪽 살결은 부드럽게 갈라지면서 입안에 육즙을 흩뿌렸다.

이 정도면 거의 A등급 요리 스킬을 가지고 있다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악마 살해자가 요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을 줄이야.'

순식간에 두 마리째를 반쯤 먹어치우며, 댈런은 생각했다.

"평소에도 요리를 좋아하시오?"

"훈련 때 야영을 하게 되면 제가 도맡아서 하곤 했습니다. 성기사단의 교범에는 먹는 것 역시 전투의 일부라 쓰여 있어, 각종 향신료도 보급이 잘 되는 편이고요."

미궁에까지 향신료와 꿀을 챙겨올 정도면, 아마 대륙의 그 어느 군대보다 이쪽 보급이 잘 되는 걸 테였다.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언뜻 봤던 성기사단의 보급 목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소금과 후추를 포대 단위로 포함시켰었지.

'멸망을 앞둔 마지막 만찬에서, 성기사단이 빠지면 왠지 모르게 섭섭하긴 했어.'

댈런은 문득 떠오르는 잡생각에 피식 웃었다. 이제야 토끼 다리 하나를 마무리한 루시아가 물었다.

"악마의 거처까지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습니까?"

"이 속도라면 대충 나흘 정도 더 가야 하오. 그보다 하루쯤 빨라질 수도 있고."

여기서 속도를 더 높인다면 말이지. 댈런은 덧붙였다.

지난 사흘간 루시아의 체력은 충분히 회복되었다. 조금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테였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별 말은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모닥불 타닥거리는 소리와, 고기를 우물거리는 소리만이 멤돌았다.

댈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바렛은 어떤 사람이었소?"

루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댈런은 기름 묻은 손을 옷자락에 슥슥 닦으며 말했다.

"애송이니 뭐니 하는 소리 하려는 거 아니니 걱정 마시오. 그때는 그쪽 정신 차리라고 한 소리고. 사실 성검의 인정을 받을 정도면 꽤 괜찮았던 사람이란 거 아니오?"

"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루시아는 먹던 고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는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성기사였습니다. 많은 동기와 후배들이 존경했고, 심지어 선배 기사들 중에 그에게 먼저 경례하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죠."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슬픔과 불신, 추억과 회환이 뒤섞인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댈런은 그녀의 얼굴 위로 묻어나오는 복잡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응해주었다.

"안타깝군."

"그래서 이해가 안 됩니다. 대체 왜 성검을 훔친 것이며, 대체 왜···왜 악마에 그렇게 쉽게 빼앗긴 것인지. 물론 악마를 얕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전사들과 토벌대의 탐험가들도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쉽게 당했다는 건······."

루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댈런은 고기를 한 점 더 베어물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긴 했다.

성검의 인정을 받을 정도라면 보통 성기사는 아니라는 뜻.

거기다 악마를 토벌하기 위해서라면 못해도 탐험가 수십이 몰려갔을 테다.

'수습 기사들과 성전사들도 따라갔다고 하니까, 미궁 1층까지 쫓겨난 최하급 악마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법도 한데.'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미궁에 들어오기 전 엿들었던 민머리 탐험가의 증언.

'놈은 악마가 성검에 배를 찔렸다고 했지.'

성검의 신성력이면 최하급 악마의 재생력 정도는 손쉽게 압도할 수 있었다.

배에 구멍이 뚫려 내장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악마 특유의 재생력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소리.

그대로 공세를 이어나갔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테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군.'

댈런이 의심의 깊이를 점점 더 더해가는 동안, 루시아는 고개를 휘휘 털어냈다. 그녀가 말했다.

"이미 전사한 동료입니다. 비록 실수와 책망받을 거리가 있을지언정, 악마와 싸우다 죽었으니 영광스러운 죽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줄 동료가 있다니, 성기사 바렛은 영광스러운 삶을 살다 간 게 맞는 듯 하군."

"······."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려놓았던 토끼 고기를 들어, 다시 한 입씩 베어물기 시작했다.

댈런도 꼬챙이에서 고기 한 덩이를 더 빼냈다. 벌써 다섯 마리째였다.

루시아는 먹던 걸 잠시 멈추고 그걸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체 저 많은 고기가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

밤이 깊어갔다. 댈런이 먼저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루시아는 모포 속에 들어가자마자 1분도 안 되어 잠에 빠져들었다.

타다닥. 타닥.

댈런은 모닥불을 멍하게 바라봤다. 툭툭 튀는 불티가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간다.

그 모양새가 마치 별동별 같았다. 떨어지는 대신 솟구치는 별똥별.

그들은 저 밤하늘이 제 고향이라고 주장하듯, 어지러운 몸놀림으로 별들에 닿고자 하는 갈망을 표출해댔다.

종국에는 빛이 사그라들고 남는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며칠 전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자네는···대체 누군가?'

펠버의 목소리였다.

땅의 기억에서 댈런을 읽어낸 원로 마법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던 이야기.

'땅은 자네의 생애가 고작 2년하고도 한 달이라고 말하네. 이건···이건 정말 예상 밖이로군. 평범하지 않은 이라고 생각하긴 했네만.'

영역을 거둬들이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미세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해 두겠네. 자네 같은 영웅의 앞길에, 이런 늙은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댈런은 낮게 웃었다.

비밀로 해 두겠다니.

처음에는 약간 경계했지만, 보면 볼수록 믿을 만한 노인이었다.

생각해보면 원작에서도 그랬다.

악마의 군세가 미궁도시를 침공할 때마다, 펠버 발렌티노는 엘가이아 마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었다.

영입 불가능한 엑스트라 NPC 중 하나라 동료로 삼은 적은 없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

타다닥. 탁!

댈런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몇 번 들쑤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가 잠든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는, 모닥불을 떠나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반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대의보다는 사리사욕에 이끌리는 게 원래 인간의 본성인 법이니까.

댈런 자신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기에,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욕심을 추구하는 과정에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놈이 있다면.'

그럴 경우, 손속을 봐줄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

피잉―!

어둠을 뚫고 날아드는 화살.

촉부터 깃털까지 죄다 검게 칠해진 화살은, 미궁처럼 어두운 환경에서 기습을 가하기에 최적화된 암기였다.

댈런은 손을 뻗어 화살을 잡아챘다.

살짝 저릿한 피부의 감촉을 보아하니, 이걸 쏘아낸 장치도 평범한 활이나 석궁은 절대 아닌 듯했다.

잠시 화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숲 경계의 풀숲 쪽으로 화살을 휙 날렸다.

쐐―!

발사되어 날아올 때보다 반 배는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는 화살.

그 검은 궤적이 수풀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진 직후, 수박이 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털썩!

수풀 밖으로 굴러나오는, 머리가 반쯤 사라진 시체.

놈이 떨어뜨린 복잡한 형태의 기계식 쇠뇌는, 다음 화살이 장전되는 중이었다.

그때 다른 풀숲들이 푸스스 떨렸다. 댈런은 검손잡이에 손을 턱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숲을 헤치고 중무장한 사람들이 한 명씩 걸어나오기 시작한다.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터져버린 남자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씨, 씨발! 라쿠스!"

"죽여버리겠다! 이 야만인 새끼!"

너나할 것 없이 무기를 뽑아드는 탐험가들. 댈런은 그 가운데서 민머리 용병을 발견했다.

민머리 역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놈의 어깨가 흠칫했다. 댈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냐?"

"···운 좋게도."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하나 물어보자. 언제부터 우리 뒤를 밟았지?"

"······."

민머리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닫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탐험가가 소리를 질렀다.

"덮쳐라! 죽여버려!"

탐험가들이 달려든다. 창과 검이 찔러오고, 석궁에서 화살이 쏘아져 날아들었다.

번쩍이는 십수 개의 날붙이 앞. 댈런은 두 손으로 검을 모아쥐곤 사나운 미소를 만들었다.

성기사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증인에게, 솔직한 증언을 받아낼 시간이었다.

악마의 성검(11)

가장 먼저 도착한 건 화살이었다.

쐐애애―!

석궁에서 쏘아진 화살의 끝, 화살촉에 누렇게 묻어있는 맹독이 별빛 아래에서 번들거리며 빛난다.

댈런은 항상 하던 대로 대처했다.

어렵지 않게 손을 뻗어 화살을 잡아내고, 석궁을 겨눈 사수에게 화살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커헉!"

화살통에 손을 넣던 사수가 목을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놈의 목에는 화살의 깃 부분만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목 주변부터 푸르딩딩하게 부풀어가는 혈관을 보니, 어지간한 극독을 발라둔 모양이었다.

"하압!"

"죽어라!"

화살 다음에는 검끝이었다. 한 박자 늦게 검을 휘두르는 탐험가가 두 명이었다.

쌍둥이인지 얼굴에 점 하나를 빼면 똑같이 생긴 두 검사.

한 명은 댈런의 왼쪽, 다른 한 명은 그의 오른쪽을 점한다.

쉬익―

왼쪽 검사의 찌르기가 목을 노려오고, 오른쪽 검사는 허벅지를 길게 베어내며 합공했다.

척 봐도 한두 번 맞춰본 호흡이 아니었다. 댈런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휘릭―

그의 발끝이 순간 흐릿해졌다.

터엉!

"허억!"

허벅지를 노리던 검이 바깥으로 거칠게 튕겨났다. 그 강력한 반동에 검사가 어어 하며 끌려갔다.

그 사이 댈런은 다른 한 명의 검을 걷어내고 목을 날려버렸다.

툭, 하고 눈앞에 떨어지는 쌍둥이 형제의 머리.

"타렌···?"

검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앞에서 댈런의 발끝이 다시 한 번 흐릿해졌다.

다만 이번에 걷어찬 건 검이 아니었다.

와직!

관자놀이가 순간 움푹 들어가며, 망치에 얻어맞은 듯 함몰되는 검사의 머리뼈.

붉고 하얀 것들이 커다랗게 뚫린 구멍으로 후두둑 쏟아진다.

우르르 덤벼들던 탐험가들이 순간 주춤했다. 그때 뒤쪽에 있던 탐험가가 큰 소리로 주문을 외었다.

"이그넬―발라둠!"

화르르르!

허공에 불의 창이 만들어진다. 붉게 타오르며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는 세 개의 창.

주문을 본 누군가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이거야! 저 새끼도 검으로 불덩이를 막을 순 없겠지!"

맞는 말이었다. 검으로 불덩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막을 일이 없게 만들면 그만인 법.

패래래랙―!

빛의 원반이 공터를 가로질렀다. 화염창의 빛을 반사해 붉게 타오르는 원반이었다.

"이그넬―억!"

다음 주문을 외던 마법사의 이마에 도끼가 박히고, 화염창 역시 허공에서 펑 하고 터지며 불티를 흩뿌렸다.

"······."

환호하던 탐험가가 입을 다물었다.

흩날리는 불티가 스르르 내려앉는 아래, 공터의 분위기 역시 착 가라앉았다.

믿었던 마법사마저 한 방에 죽어버렸다.

스물 남짓하던 동료들 중 벌써 다섯이 시체가 된 상황.

전투의 흥분이 차갑게 식어버리자, 이성을 되찾은 탐험가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하, 항복?"

개중 한 명이 두 손을 들어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항복은 지랄."

콰아앙!

흙더미가 치솟고, 댈런의 신형이 사라진다.

콰직―

항복이라 중얼대던 탐험가의 몸이 사선으로 쪼개졌다.

죽는 순간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였다.

"우아아악!"

옆에 있던 동료 탐험가가, 흩뿌려진 피분수에 기겁하며 방패를 쳐들었다.

콰드득!

댈런은 그냥 검을 내리그었다. 탐험가는 방패와 함께 몸이 반으로 갈렸다.

"으, 으아아! 괴물!"

"다들 도망쳐라! 집결지에서 모인다!"

탐험가들은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름 잡히지 않기 위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모양새.

물론 그 정도로 그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댈런은 다리와 발끝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콰아앙!

발 아래 흙더미가 폭발하는 순간, 그의 검이 다음 사냥감을 쫓아갔다.

***

이어진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아니, 애당초 전투라기보단 사냥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등을 돌려 달아나면, 도약 스킬로 따라잡은 댈런의 검에 허리가 끊어지든 목이 날아가든 한다.

반격하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목만 날아갈 걸 무기도 함께 두 동강이 날 뿐이었다.

도약 스킬의 여파로 흙더미가 열 번쯤 치솟았을 무렵.

살아남은 탐험가는 단 둘뿐이었다.

민머리 탐험가와, 노련한 인상의 산적수염 탐험가.

찰박.

댈런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발밑에서 피웅덩이가 파문을 만들었다.

어느새 피와 내장으로 뒤덮인 숲 앞의 공터.

스물 남짓하던 탐험가들은 죄다 시체로 변해, 이 순간에도 꿀럭이며 붉은 선혈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산적수염 탐험가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대체 뭐냐."

매서운 눈매가 파르르 떨린다. 노련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겁에 질린 것이다.

산적수염의 얼굴은 기억에 있었다.

놈은 미궁에 들어오기 전, 민머리가 속닥거리며 설득하던 바로 그 탐험가였다.

찰박. 찰박.

댈런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가 말했다.

"다시 물어보지. 언제부터 우리를 쫓았나."

"···이틀 전부터다. 놀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서 거슬러 올라갔는데, 너와 성기사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더군. 바로 뒤를 쫓았지."

산적수염은 순순이 대답했다. 댈런의 초인적인 무력을 보고, 빠르게 판단을 내린 것이다.

"왜?"

댈런의 물음에, 산적수염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봐도 보물이 가득 들었을 법한 금고를 등에 지고 가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나?"

댈런은 쓰게 웃었다. 역시 금고 때문이었나.

놀 전사장의 천막 안에 있던 금고는, 의외로 굉장히 복잡한 잠금장치를 달고 있었다.

힘으로 부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안에 있던 물건들이 손상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이런 경우에는 돈이 좀 들더라도, 시에나의 인맥을 빌려 전문가를 찾아가는 게 나은 법.

결국 댈런은 미궁에서 나갈 때까지, 금고를 사슬에 묶어서 등에 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이 탐험가들은 그걸 어떻게 빼앗아보려고 그를 지금껏 쫓아온 것이었고.

"쯧."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그때 산적수염이 입을 열었다.

"거래를 제시하지."

그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품속에 손을 넣었다.

품속에서 꺼낸 건 작은 나무 조각상이었다.

"이 토템은 오백 걸음 밖으로 소리나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 주는 물건이다. 널 미행할 때도 이걸 사용했지. 내 목숨값으로 내겠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동료를 죄다 죽여버린 적에게 거래라.

그는 빈 왼손을 내밀었다. 일단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산적수염은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가, 휙 하고 댈런에게 던졌다.

휘이―

나무 토템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철컥― 콰앙!

뻗어낸 산적수염의 팔 안쪽.

옷 속에 숨겨진 기관장치에서 화약이 폭발하며, 작은 납탄이 화살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쏘아냈다.

콰지직!

날아가던 토템이 엄지손가락 반 마디만 한 납탄에 산산이 부서졌다. 납탄은 토템을 박살내고 그대로 직진해 댈런의 심장을 노렸다.

그 앞에서 댈런은 생각했다. 거래는 개뿔.

그는 언제나와 같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조금 신중했다.

화살 같은 날붙이를 잡아본 적은 많아도, 총알은 처음이었으니까.

갑주격투의 묘리가 은연중에 녹아나고, 유연하게 말린 손가락과 손바닥이 납탄을 잡아낸다.

찌직―

손아귀 안쪽이 좀 찢어졌다. 문제없었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근육은 상하지 않았으니까.

댈런은 보란듯이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서 둥그런 납탄을 슬슬 굴리며 말했다.

"제국군이나 차르국 왕실에 연줄이 있나보군. 화약무기는 아직 암시장에도 거의 풀리지 않았을 텐데."

"······괴, 괴물."

댈런은 픽 웃었다. 그는 납탄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서, 산적수염 탐험가에게 도로 던졌다.

쐐애애―퍽!

쏘아졌던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날아간 납탄. 산적수염은 반응도 못 하고 스르르 허물어졌다.

쓰러진 그의 가슴팍에는 엄지손톱 크기의 구멍이 왈칵거리며 피를 뿜고 있었다.

댈런은 다가가 놈의 품속을 뒤졌다. 작은 화약병과 납탄 여러 개, 그리고 용병패가 나왔다.

'금패 용병 출신이었군.'

용병의 옷자락으로 피를 닦아내니, 금박 위에 새겨진 이름이 드러났다.

보리스.

이름으로 추측해보건대, 대륙 북부의 차르국에서 온 모양이었다.

"······."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민머리가, 기회다 싶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댈런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휙 털었다. 그의 손끝에서 납탄 여럿이 날아갔다.

피피핑―

"끄아아악!"

납탄 세례에 종아리와 허벅지가 꿰뚫린 민머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끄아악! 으아아아!"

"어딜 내빼냐 새꺄."

댈런은 민머리에게 다가섰다. 놈은 땅을 짚고 헤엄치듯 이리저리 뒹굴며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댈런은 코를 흥 풀고는, 놈의 목 바로 옆에 검을 푹 꽂았다.

딸꾹.

비명이 뚝 멈췄다.

댈런은 검손잡이에 손을 척 걸치고 물었다.

"성기사는 누가 찔렀지?"

민머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멀쩡한 성기사가 악마 배에 칼빵을 놓고서도 성검을 뺏겼다는데,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거기다 성검의 인정까지 받은 정식 기사고, 악마는 최하급에 미궁 1층으로 쫓겨날 수준인데?"

"나, 난 모르는 일이오. 대체 그걸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시오?"

"니가 공격대에 있었다며."

민머리는 입술을 꾹 닫았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는 검을 집어넣고 마법사의 시체에서 도끼를 뽑아왔다. 그리고 민머리 앞에 쭈그려 앉았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

그가 말했다.

"하나는 그렇게 입을 꾹 닫은 채, 팔다리가 다 잘리고서 저기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는 거다. 참고로 이 근방 놀들은 아주 배가 고플 거야. 불을 피우고 할 것도 없이 산채로 뜯어먹겠지."

민머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앞의 야만전사는 그보다 더한 일도 망설임 없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댈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입을 열어서 네가 아는 걸 나한테 다 말한 뒤, 최대한 고통이 덜한 방식으로 죽는 거야. 참수형 정도면 인간적이겠지. 안 그런가?"

"···내가, 내가 찔렀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댈런은 말없이 팔짱을 꼈다. 계속해보라는 의미였다.

민머리는 턱을 덜덜 떨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젊은 성기사가 성검을 들고다닌다니, 누가 봐도 이상했소. 둘 중 하나라 생각했지. 성기사단이 미쳐서 젊은 애송이한테 성검을 맡겼거나, 아니면 그 애송이가 미쳐서 성검을 들고 튀었거나."

성기사단이 미쳤다면 성검을 암시장에다 팔아버려도 무방했다.

애송이가 미쳤다면 성검을 되돌려주고 넉넉한 포상금을 받을 생각이었고.

댈런은 민머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죽이고 뺏자 결심했다?"

"원래는 그냥 농담처럼 나온 이야기였소. 악마 토벌대에 성기사가 빠지면 손해니까. 하지만 성검이 악마의 배를 찌르고, 성기사도 큰 부상을 입고 나니 기회가 보였지. 둘 다 꿀꺽할 수 있는 기회가."

댈런은 낮게 웃었다. 평소와는 달리 듣는 이가 소름이 돋게 할 웃음이었다.

민머리는 어깨를 흠칫 떨며 몸을 추스렸다.

"농담이라."

사람 죽이고 물건 뺏자는 걸 농담처럼 이야기한다니.

영락없는 강도에 살인자의 인생이 아닌가.

미궁에 내려가는 탐험가들 중에, 이런 인간 말종들이 종종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흔히들 미궁도적이라 불리는 족속들.

그의 캐릭터 역시 이런 미궁도적에게 털린 적 있었으니, 놈들이 이 사건에 개입됐다는 게 딱히 놀랍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그와 함께하는 의뢰주의 입장은, 분명히 다르겠지.

"그래서 부상당한 성기사 등을 찔렀다?"

"나, 나만 찌른 건 아니었소. 아까 당신이 죽인 라쿠스가 먼저 화살을 쐈고, 나와 같이 다니던 몇몇이 더 함께했소."

민머리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댈런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찰박.

밤의 어둠 사이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두운 로브를 걸친 인영이었다.

두건 아래로 금발이 슬쩍 내비치고, 푸른 눈은 무슨 도깨비불처럼 타오르는 듯하다.

댈런이 굳이 놈들을 죽이지 않고 심문하기 시작한 건, 누군가 어둠 속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는 의뢰를 받았을 뿐 희생자와 별 인연이 없는 그와 달리, 친우의 흔적을 찾아 미궁까지 내려온 성기사 본인.

한편 민머리는 아직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댈런을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탐험가시면 잘 알 거 아니오. 이거 한 탕이면 더 이상 이 끔찍한 곳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누가 안 넘어갈 수 있겠소? 제발 좀 살려주시오. 악마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목숨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고 싶지는···."

"···씨발 새끼들."

어둠 속 인영,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 그, 그쪽은 설마···!"

어둠 속을 돌아본 민머리가, 그녀의 푸른 눈을 발견하고 입을 떡 벌린다.

루시아는 천천히 두건을 젖히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뱉었다.

"그래, 이 창자를 끄집어내 목을 매달아버릴 새끼야. 니가 죽인 그 애송이 성기사의 동료다."

악마의 성검(12)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찰박.

루시아의 부츠가 피웅덩이를 밟았다.

"그 병신 같은 악마새끼가, 너를 놓칠 만큼이나 충분히 무능했다는 게."

스르릉.

그녀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새하얀 검신이 별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으, 으으······."

민머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뒤로 기었다. 루시아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그를 천천히 따라갔다.

찰박. 찰박.

민머리가 기어가며 질질 끌린 흔적이 남은 땅.

피 묻은 루시아의 부츠가 그 위에 붉은 자취를 남긴다.

그건 마치 죽을 때가 다 되어 도망가는 죄인과, 그걸 잡으러 가는 사신의 발자국 같았다.

"그 덕분에 적어도 지켜주지는 못했을지언정······."

사아아아―

검신이 새하얀 빛으로 덮인다.

검 위에 유형의 기운으로 일렁이는 신성력은, 마치 타오르는 하얀 불꽃처럼 보였다.

몸을 부르르 떨며 바지를 노랗게 적시는 민머리 앞.

루시아는 검을 두 손으로 잡고, 그 끝이 땅을 향하게 거꾸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사형선고와 같은 마지막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존경하던 동료의 핏값 정도는, 직접 받아낼 수 있게 됐으니까."

푸욱.

검끝이 민머리의 발등을 꿰뚫는다.

순간 하얀 불꽃이 화륵 타오르며, 발과 발목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아아아아악!"

민머리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불꽃은 멈추지 않았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골반과 허리를 천천히 집어삼킨다. 반대쪽 다리는 이미 새하얀 화염에 뒤덮인 채였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아!"

댈런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봤다.

낼름거리며 희생자의 피부를 집어삼키는 하얀 불꽃. 진짜 불과는 다르게 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저 불꽃은 신성력으로 빚어진 바.

피부를 삼키면 근육을.

근육을 먹어치우고선 뼈를.

그렇게 다른 모든 것은 태워 없애면서도, 희생자의 신경만큼은 마지막까지 재생시켜 끝없는 고통을 주는 특수한 불꽃이었으니까.

'단마(斷魔)의 백염.'

그 잔혹함 때문에, 성기사단 내에서도 거의 금기시되는 비의.

극히 일부의 선택된 성기사들만이 전수받을 수 있으며, 그마저도 사특한 악마의 추종자를 심문할 때나 간혹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끄아악! 흐아아악!"

다리가 다 타서 뼈가 검게 녹아간다. 백색 불꽃은 복부와 가슴, 그리고 팔까지 옮겨붙었다.

피부와 근육이 녹아내리다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은, 공터에 펼쳐진 피와 내장의 향연과는 다른 의미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 모든 광경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묵묵히 지켜봤다.

"흐억! 커어어―"

이내 폐와 기도에 불이 옮겨붙었다.

눈코입에서 검은 재와 흰 불꽃이 날름거리며 새어나왔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희생자를 태우는 불길.

안팎을 가리지 않는 그 끔찍한 고통에, 허리 아래가 전소된 민머리는 검게 타버린 상반신만을 휘적여댄다.

그 온몸으로 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은.

꾸드드―퍽!

결국 열기를 견디지 못한 심장이 퍽 하고 터지고서야, 끝을 맺었다.

"······."

화르륵. 화륵.

남은 머리뼈와 그 안의 뇌수까지 남김없이 훑고 사라지는 백색의 화염.

민머리가 이 자리에 존재했다는 증거는 멀쩡하게 남은 그의 옷가지와 무기, 그리고 용병패뿐이었다.

스윽.

댈런은 옷가지 사이에서 은패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바라봤다.

루시아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빛의 검을 든 채, 길게 풀어헤친 금발을 축 떨구고 있었다.

"······."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몸.

갑옷 위로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그녀는, 금발과 푸른 눈을 제외하면 밤의 어둠과 거의 완전히 일치된 듯했다.

댈런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만히 은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말했다.

"후회하시오?"

"아니요."

성기사는 즉답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적어도 복수에 대해서만큼은."

그녀의 얼굴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하얗게 질린 얼굴. 꽉 깨문 입술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온다.

죄책감과 혼란이 짙게 녹아나는 표정 앞에서,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라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럼 자책하오?"

대답은 없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수염이 조금 까끌하게 자라있었다.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과거가 있다는 건,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빚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이야기요. 바꿔 말하면, 그때 이렇게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은 아무 의미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거지."

상상도 못 한 큰 힘을 얻고 나자 문득문득 떠올랐다.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회사를 다니면서도, 집에서는 무기력한 게임 폐인처럼 지내던 과거의 자신이.

과거에는 엄두도 못 냈을 업적들을 이뤄가며 자문하기도 했다.

과연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무능한 게임 폐인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의미 없는 질문이었지.'

과거의 선택을 꺼내어 곱씹는 건, 이미 그 시절을 밟고 지나왔기에 가능한 일.

지구에서의 삼십사 년.

그리고 대륙에서의 이 년.

지금의 댈런이라는 사람은, 그 세월을 벽돌처럼 차례로 쌓아올린 끝에 만들어진 존재였다.

반성과 후회는 다르다.

개선과 자책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댈런이 내린 결론은, 전자는 취하되 후자는 그저 흘려보내는 것.

애당초 그 시절의 게임 폐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를 멸망에서 구해가는 지금의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후회하는 시절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더 나은 내가 있는 거요. 지금의 내가 후회된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져 있겠지."

툭툭.

크고 두툼한 손이 루시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 손길에 악문 이에서 힘이 풀어지고, 푸른 눈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댈런."

그 한 마디가 벅찬지 잠시 숨을 몰아쉰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바렛의 명예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지킨 게 아니오."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의뢰를 내건 것도 당신이고, 끝까지 동료의 충성심을 피력한 것도 당신이지. 난 지나가다 의뢰를 받게 된 용병에 불과하오."

그리고 충분한 대가를 받아낼 거니, 부채감 따위는 필요 없소. 댈런은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좋습니다. 예상보다 더 잘해주셨으니, 여기서 나가면 의뢰비를 재협상해보도록 하죠."

"돈 많이 주는 의뢰주는 언제나 환영이지."

댈런이 소리내어 웃었다. 루시아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슬픈 미소. 그러나 더이상 복잡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심호흡을 한 그녀가 말했다.

"바로 출발하시죠. 밤이 깊었지만, 이대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알겠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야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댈런은 잠시 생각하다가, 품속에서 은색 용병패를 꺼내들었다.

검은 재를 툭툭 털어내니 이번에도 이름이 보였다.

'스킨헤드.'

민머리. 용병으로서 사용하는 이명일 테다.

피식 웃은 댈런은 은패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까마귀 둥지에 의뢰할 게 생겼군.'

본명은 알 수 없었지만, 이명만으로도 그간의 행적 정도를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놈의 증언에 따르면, 성기사의 등을 찌른 탐험가는 한 명이 아니었다.

복수를 하게 된다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때로 그런 냉혹한 태도도 필요했다.

아직 어린 수습기사가 거기까지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터.

그렇다면 이름을 찾아주는 수고 정도는, 충분히 대신해줄 의향이 있었다.

은패에 새겨진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새긴 댈런은, 루시아의 뒤를 따라 공터를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기로운 피냄새를 맡은 놀들이 공터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

그날 이후 일행은 속도를 높였다.

다만 경로는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

이전까지 최대한 빠르고 안전한 길을 골라서 다녔다면, 탐험가들과의 전투 이후 댈런은 보다 험난하고 위험한 곳들을 거쳤다.

'죽은 민머리 탐험가의 말이 맞다면, 생각보다 악마가 큰 부상을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교활한 족속이다.

아마도 놈은 탐험가들의 눈에 번들거리는 탐욕을 미리 읽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 큰 부상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곧 죽을 것처럼 연기를 해서, 탐험가들이 성기사를 배반하도록 유도한 것이겠지.

놈의 입장에서도 정면승부는 버거웠을 테니, 나름대로 머리를 썼을 터였다.

'그리고 악마가 부상을 완전히 회복했다면, 이쪽도 좀 더 준비를 해야겠지.'

준비라고 해서 거창할 건 없었다.

경로를 크게 비틀지 않는 선 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얻어내는 게 골자였으니까.

첫째 날, 댈런과 루시아는 커다란 늪지에 발을 들였다.

그날 밤 댈런은 야생 프로그맨 부족 하나를 쓸어버리고, 놈들의 둥지 한가운데에 있는 시체를 회수했다.

[마궁사를 꿈꾸던 활잡이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마력 +1]

둘째 날, 안개 낀 구릉지를 넘어가던 두 사람은 버려진 오두막을 발견해 하루를 묵었다.

루시아가 잠든 사이, 댈런은 오두막 안방의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내려갔다.

오두막의 지하에는 숨겨진 마약 재배지가 있었다.

주인이 모종의 사고를 당했는지,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잡초로 뒤덮인 재배지.

그곳에는 오랜 기간 미궁이 마력에 변질되어, 반쯤 영약이나 다름없게 된 약초가 하나 있었다.

'체력을 1 올려주는 대신, 지능을 1 낮춰버리지.'

과연 먹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몰려왔다.

실시간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불쾌한 감각이었다.

"우욱···시발."

다행히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두통은 싹 가셔서, 다음날 일정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셋째 날, 일행은 탐험가들 사이에서 '귀신의 숲'이라 불리는 곳을 통과했다.

나무들이 소리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길을 잃게 만들거나 막다른 절벽으로 여행자를 내모는 음침한 숲.

우지직―쿵!

댈런은 가로막는 나무들을 죄다 꺾어넘기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나무 몇 그루 움직이는 것 가지고 혼란을 빚기에, 그의 감각 수치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길을 잃은 길잡이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1]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길을 잃고 굶어죽었던 시체를 회수하며, 댈런은 어렴풋이 짐작하던 현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영역을 이룬 뒤부터, 시체 회수로 얻어내는 보상이 확실히 줄어들었군.'

투사의 시체에서 분쇄검을 얻어낸 걸로 볼 때, 모든 보상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다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흔히들 망한 캐릭터라 부르는 시체들의 보상은 능력치 하나가 끝이었다.

더이상 허접한 시체로는 예전처럼 스탯과 스킬을 한가득 받아갈 수 없다는 뜻.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앞으로의 중장기적인 전략을 조금 수정할 필요는 있었다.

'다수의 시체를 찾아다니기보단, 더 강력했던 캐릭터의 시체 위주로 찾아다녀야겠군.'

그렇게 넷째 날이 되었다.

예상보다 먼 거리를 돌아간 강행군이었음에도, 루시아는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잘 따라왔다.

그 결과, 넷째 날 해가 저물어갈 무렵.

댈런과 루시아는 악마가 숨어있다는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여기가···맞는 것 같군요."

루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댈런도 그 옆에서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악마가 숨어있는 곳이니 평범한 모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예상 밖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댈런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거처가 된 동굴 입구.

그 앞에는 백여 구에 달하는 탐험가들의 시체가, 보란 듯이 무더기로 쌓여 전시되어 있었으니까.

시체의 무더기는 갈기갈기 찢기고 조각이 난 채, 어두운 사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동굴 앞을 가로막은 모양새가, 마치 이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몰골이 될 거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그우우······.

그리고 그 시체 무더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팔다리와 몸통, 머리와 내장이 긴 혈관 다발과 창자 따위로 한데 묶인 몸뚱이.

백여 구에 달하는 시체 무더기는 그렇게 팔이 네 개인 거인의 모습을 취하더니, 온몸에 달린 입에서 음울한 신음을 흘려댔다.

우어어어―

"전쟁의 신이시여······."

루시아가 침음을 흘리며 검을 뽑았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댈런은 눈썹을 까딱이고는,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시체거인을 쳐다봤다.

대충 건물 3층 높이쯤 되는 시체거인.

척 봐도 경험치를 꽤 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궁도적 무리를 처리하고, 프로그맨 부족을 몰살하며 그의 경험치 막대가 슬슬 레벨업에 가까워진 상태.

'저거 하나면 딱 되겠군.'

"댈런. 제가 놈의 시선을 끌 테니···."

루시아가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운을 띄우는 찰나.

콰아앙!

그녀의 곁에서 흙더미가 폭발하며, 댈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악마의 성검(13)

뻐어엉!

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인의 아래턱이 터져나갔다.

후두둑 떨어지는 살점과 뼛조각.

시체거인은 휘청이면서도 길쭉한 팔 중 하나를 내뻗었다.

거대한 주먹이 공기를 매섭게 가르고, 아직까지 공중에 붕 떠 있는 댈런을 후려친다.

콰앙―!

주먹에 얻어맞은 댈런이 저 멀리 날아갔다. 거의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리.

골이 흔들리는 충격 속에서도, 댈런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중심을 되찾은 뒤 땅에 발을 디뎠다.

지지지직―

그의 발 아래 땅에 두 줄기 깊은 고랑을 새겨진다.

본의 아니게 만들어진 밭고랑의 끝, 댈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치이이······.

이마와 어깨, 팔뚝에서는 오랜만에 증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의 입가가 뒤틀리며 사나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 새끼 좀 치네?

꽈아앙―!

흙더미가 폭발했다. 댈런의 신형이 재차 사라진다. 거의 동시에 그의 손끝이 허리춤을 스쳤다.

패래래랙!

미궁의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는, 덩치 큰 전사와 빛의 원반.

먼저 도착한 건 빛의 원반이었다.

콰지직!

도약의 가속이 더해진 손도끼가, 시체거인의 어깨쯤을 가볍게 가르고 지나간다.

투척에 담긴 비인간적인 힘은 시체거인의 어깨를 연결하던 혈관과 내장을 죄다 끊어버렸다.

뚜두둑―

쿵 하고 떨어지는 시체거인의 팔.

열 구 가까운 시체가 뒤얽힌 거대한 팔은, 몸뚱이에서 분리되고서도 살아서 꿈틀거렸다.

우어어.

엄지 끝에 달린 머리가 눈을 뒤룩거리며 댈런을 발견한다.

댈런은 어느새 시체거인의 본체를 들이받고, 세 개 남은 팔을 넘나들며 놈의 온몸을 두들기고 있었다.

홀로 떨어진 팔은 손가락을 오므렸다. 이대로 뛰어올라 본체를 공격하는 전사의 뒤를 칠 생각이었다.

놈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도약하려는 순간.

"역겨운 마물 새끼!"

빛의 검이 놈의 엄지를 잘라버렸다.

그어어억!

거인의 팔이 비명을 질렀다. 잘려나간 엄지는 펄떡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루시아의 검에 서린 신성력이, 시체거인의 핵에서부터 공급되던 사이한 마력을 끊어놓은 것.

성기사의 신성력은 악마의 마력과는 완전히 상극의 속성을 지닌 힘.

이 신성력은 신성 문신과 더불어, 성기사단이 홀로 미궁의 입구 하나를 틀어막을 수 있는 또 다른 힘이었다.

"댈런!"

몇 번의 칼질로 팔 한 짝을 마무리한 루시아가 외쳤다.

댈런은 시체거인의 어깨와 팔, 허리와 정수리를 넘나들며 놈의 몸을 착실히 두들기고 있었다.

퍽! 퍽!

가벼운 주먹질에 피와 살이 터져나가고.

콰직!

발길질 한 번에 얽혀있던 팔과 내장이 우수수 비산한다.

우어어어―

제 몸을 구성하던 걸 잃어가며, 그 저항 역시 서서히 줄어드는 시체거인.

댈런은 가슴팍을 걷어차 커다란 구멍을 뚫어낸 뒤, 그 안의 핵을 불꽃 화살로 터뜨려 마무리했다.

그어어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거인의 몸이 풍선처럼 폭발한다.

후두두둑.

살점과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댈런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가 말했다.

"불렀소?"

"···아닙니다."

육편의 비를 방패로 막아내며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고층 건물 크기의 적에게 단신으로 달려들기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되어서 불렀건만.

놀 거주지를 단신으로 휩쓸어버린 남자를 걱정한 자신이, 왠지 모르게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고깃조각의 비가 그치고, 루시아는 사방에 흩뿌려진 참상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염려가 됩니다. 아직 놈의 마굴에 진입하지도 않았는데, 입구에서부터 이렇게 거센 저항이라니요."

"글쎄. 난 오히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오."

댈런은 어깨에 붙은 창자를 툭툭 떼어내며 말했다.

"탐험가들의 입장에서 미궁 1층까지 쫓겨난 악마는 버거우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지. 거기다 지금 세간에는 악마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소."

물론 그 소문은 가짜였다.

정확히는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인, 대규모 토벌대의 생존자들도 반쯤 속은 것이었지만.

악마는 생각보다 그리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저 토벌대의 배신을 유도하기 위해, 그렇게 연기한 것일 뿐.

그랬기에 그 계획이 성공하자마자 단박에 성검을 빼앗고, 토벌대의 삼분의 일을 그 자리에서 몰살한 것이다.

하지만 성검에 찔려 비틀거리던 악마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내기에는 너무 유혹적인 장면이었던 걸까.

토벌대의 생존자들 중 누구도, 그게 악마의 속임수라는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대규모 토벌이 한 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당한 악마를 사냥하려는 애송이 탐험가들이 미궁의 입구로 벌떼같이 몰려들었던 것이겠지.

"시체를 이렇게 많이 쌓아놓은 걸로 봐서, 놈은 지금까지 수백 명에 달하는 탐험가를 유인해서 처리한 것 같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악마는 사람의 영혼을 뽑아 더럽히고, 그 타락한 영혼을 제 힘으로 삼는 족속이죠. 그 찢어죽일 악마 새끼는 더 큰 힘이 필요했던 겁니다."

루시아가 말을 받았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성기사 바렛과 전투하며 분명 부상을 입기는 했을 테니, 멋모르고 달려드는 애송이 탐험가들의 영혼은 그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공급원이었겠지."

"···동시에 성검을 타락시키는 데 필요한 힘의 공급처이기도 했겠죠."

"그렇소."

성검에 입은 부상을 치유하고, 성검 자체를 타락시키기 위한 힘.

그 힘을 위해 못해도 수백 명분의 제물이 필요했을 테다.

영리한 악마는 자신을 노리는 탐험가들을 유인해, 역으로 사냥하면서 필요한 제물의 수를 보충해왔겠지.

그렇다면 시체거인이라는 거대한 마물로,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아버린 지금의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놈은 이제 제물이 충분히 확보되었다 여기는 거요. 지금쯤 성검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의식을 한창 진행하고 있겠지."

"그리고 아직 그 의식은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이 놈을 공격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거군요."

"맞소. 이해가 빠르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시체거인을 잡으며 레벨업해 얻은 추가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했다.

이로써 그의 레벨은 11. 체력 능력치는 22.

이 정도면 성검을 든 악마와도 충분히 한 판 붙어볼 만했다. 그가 말했다.

"어서 들어갑시다. 동료의 복수는 마무리해야지."

***

동굴의 초입은 흔한 자연동굴의 외관이었다.

울퉁불퉁한 바닥과, 위아래로 자라난 석순과 종유석.

종유석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니, 주변의 풍경이 하나씩 바뀌기 시작한다.

길을 가로막던 석주와 천장에서 무너진 돌더미들이 사라지고.

울퉁불퉁하던 발밑은 어느새 잘 다듬어진 석재 판석이 깔려 있었다.

동굴의 넓이 역시 크게 확장되어, 성인 장정 다섯 명이 나란히 팔을 뻗어도 될 정도가 되었다.

마치 고대의 유적 통로처럼 느껴지는 공간.

댈런의 곁에서 걷던 루시아가, 문득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미궁 안에 어떻게 이런 환경이 구축된 건지 아십니까?"

"악마의 마굴이 다 그렇지 않소. 겉멋이 잔뜩 든 함정투성이 통로와 방들."

댈런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루시아는 잠시 우물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마굴을 만드는 건 악마가 아니라 그 휘하의 고블린들이랍니다."

댈런은 루시아를 슬쩍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야간 시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

그 위로 옅게 내비치는 의기양양함에, 댈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쪽 지식을 자랑하고 싶다 이거지?

"고블린이 악마들의 작품인 건 세간에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죠. 하지만 사람들은 온 천지에 득시글한 이 땅딸막한 악귀에 짜증을 낼 뿐,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를 겁니다."

"그렇소?"

"예. 사실 고블린은 악신 에낙사구스가 인생의 역작으로 작정하고 만들어낸 족속입니다. 지옥의 가장 흔한 악귀인 임프를 기반으로, 좀 더 생산성이 좋고 강력한 악귀를 만들어내려 한 거죠."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놈의 계획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맺었답니다. 루시아는 푸른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에낙사구스의 원래 계획은 오크를 모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고블린은 오크 특유의 어마어마한 증식능력을 가지게 되었죠. 하지만 그 대가로 오크의 근력은 포기해야만 했고, 무슨 부작용이 생긴 건지 크기마저도 난쟁이만도 못한 땅딸막한 체구가 되었답니다."

"그렇군."

"재밌는 사실은, 지상에 나온 고블린들을 수백 년 전부터 그 원본이 되는 오크가 잡아다가 노예로 길들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오크 입장에서는 자기들처럼 피부가 초록색이고, 증식력도 어마어마한 데다 손재주가 좋고 덩치까지 작으니 부려먹기 딱 좋은 노예였던 셈이죠."

루시아는 혼자 깔깔거리며 웃었다. 댈런도 그녀를 따라 낮게 웃어주었다.

며칠 전까지 웃음에마저 슬픔이 깃들던 그녀가, 갑자기 수다쟁이가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큰 싸움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려는 태도.

침울함과 슬픔에 잠겨서는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으니, 답지않은 지식 자랑을 해서라도 스스로의 기분을 전환하려는 노력이었다.

"다만 이 마굴은 지금의 이름 없는 악마가 지은 건 아닙니다. 팔시온으로 떠나오기 전에 성기사단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30년 전에 여기 마굴을 지었다가 토벌된 다른 악마가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여기 머무는 놈은 고작 빈집털이범밖에 안 된다는 거군."

"아하하, 맞습니다."

파란 눈이 좀 더 눈에 띄는 호선을 그렸다.

얼굴에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으면서도, 루시아의 자세와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느 순간에 마물이 습격한다 해도 곧바로 반격할 수 있는 상태. 확실히 영웅이 될 인재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습격은 없었다.

일자로 죽 뻗은 통로를 한참을 걸어간 두 사람은, 마침내 통로를 가득 채운 두터운 석벽에 가로막혔다.

"문이 없군."

댈런이 말했다.

"열린 흔적이 있는 걸 보니, 주문으로만 열 수 있는 벽인 것 같습니다."

석벽을 찬찬히 뜯어보던 루시아가 대답했다.

댈런은 석벽을 똑똑 두드려봤다.

예민한 그의 감각과 지능 수치가, 벽을 타고 울리는 진동과 소리에서 벽의 두께와 단단함을 역산해냈다.

'두껍군. 대충 이 미터 남짓인가.'

거기다 기감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력으로 봤을 때, 특별한 마법적 조치까지 되어있는 듯했다.

이 정도면 일전에 성벽 수준의 강도를 자랑하던 텔리아 상회의 밀실보다 몇 수는 위.

아무리 그라도 용혈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부수기 쉽지 않았다.

"물러나시오."

하지만 악마의 심처가 코앞이니, 이제 와서 벽 하나에 막혔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댈런은 어깨를 슬슬 풀며 루시아를 뒤로 물렸다. 그는 등에 맨 가방과 금고를 통로 한쪽에 내려놓았다.

후욱.

숨을 들이쉰다.

깊은 호흡이 사지의 말단까지 뻗어나가며. 온몸의 근육과 신경을 일깨운다.

두근.

거세게 맥동하는 심장이, 혈관을 따라 뜨거운 피를 온몸으로 실어나르고.

강철보다 단단한 근섬유가, 주인의 의지에 반응해 스스로를 뒤틀어 한계까지 힘을 낼 준비를 한다.

'오랜만이군.'

대사도와의 결전을 벌인 이후, 전력을 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힘을 쓸 생각에, 호승심 넘치는 전사의 육신이 기대감으로 가득 차는 게 느껴진다.

과연 그동안 성장한 그의 육체는, 인간을 한참이나 넘어선 힘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더불어 새로이 깨달은 '영역'이라는 능력은, 그 힘을 다뤄내는 방식을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원로 마법사 펠버에게 영역에 대해 들은 이후, 댈런은 속으로 수없이 그 깨달음에 대해 반추했다.

'영역을 사용한다는 건, 그 가능성을 불러와 이 땅에서 불가능한 이적을 행하는 일.'

눈을 감는다.

그리고 떠올린다.

그 날 마주했던 설산의 풍경.

이 땅에서 처음 들이쉬었던 차가운 숨과, 그 냉기에도 굴복하지 않던 단단하고 뜨거운 육신을.

후우.

더 이상 오두막의 컴퓨터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그 과거를 직시하고 극복함으로, 댈런은 힘의 그릇에 대한 증명은 해내었기 때문.

대신 버려진 오두막의 모닥불은 난로를 삼킬 듯 타오르고 있었고, 방 한쪽에는 허공에 맴도는 냉기에 테이블과 의자가 차갑게 얼어붙은 채였다.

그리고 그 냉기와 열기가 공존하는 오두막의 바깥.

우르르릉―

번개의 번쩍임이 없었음에도, 오두막과 설산을 뒤흔드는 천둥의 소리.

현실의 육체를 진동시키는 그 우렛소리를 느끼며, 댈런은 눈을 떴다.

슥―

그는 도끼를 뽑아들었다.

영역을 사용하는 게 가능성의 현실화를 의미한다면, 꼭 주먹을 사용해야만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르베론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도끼는, 댈런의 거친 손속에 의해 이미 걸레짝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한 번은 버틸 수 있겠지.'

심상 저 너머 설산을 뒤흔드는 우렛소리에, 낡은 손도끼는 공명하듯 함께 진동한다.

그건 마치 얼른 자신을 날려, 이 벽을 부수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댈런은 씩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주문으로 여닫힐 벽의 이음매를 정확하게 겨누고, 어깨 너머로 들어올린 손도끼에 의지를 집중한다.

필요한 건, 악마가 쌓아올린 방벽을 돌파할 단 한 번의 일격.

그 굳건한 의지에 주변의 마력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는 순간.

구구구궁―

예상 밖으로, 거대한 석벽이 저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크흐흐. 어서 오거라. 서리고원을 넘어온 대전사와 아직 못다 피어난 어린 성기사야."

반쯤 열린 석벽의 틈으로, 악마가 검은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3층 건물 높이의 덩치에, 팔이 네 개 달린 악마의 육신.

거무튀튀한 피부와 머리에 솟은 두 뿔만 제외하면, 앞서 동굴 입구에서 마주쳤던 시체 거인과 거의 비슷한 외양이었다.

'흠.'

댈런은 잠시 갈등했다.

부수려던 벽이 사라지고 그 뒤에 있어야 할 악마가 나타난 상황.

영역은 이미 현실로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도끼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파르르 떨린다.

핏속의 재생 인자가 이미 증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벌어지는 이적을 회수하기에는, 아직까지 이 힘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목표를 약간 수정하는 것뿐.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별들의 시선을 읽어보니, 너희들의 손에 미궁의 많은 것들이 정리되었더구나. 에낙사구스의 장기말, 라필렘이 만든 살아있는 숲, 벨제붑이 수족으로 쓰려던 늪지의 프로그맨 부족과, 더불어···응?"

히죽 웃는 얼굴로 일행의 업적을 열거하던 악마의 시선이, 문득 댈런에게 향한다.

뒤틀린 마력의 흐름과, 큼직한 손에서 공명하는 도끼.

그 의미를 깨달은 악마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 순간.

"말 존나 많네."

똑같이 히죽 웃어주며, 댈런이 짧은 말로 악마를 비웃고.

번쩍―!

파공성조차 없이 세로로 길쭉하게 뻗은 빛줄기가, 벼락처럼 어둠을 가르고 악마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우르르르릉―!

그 벼락의 뒤를 이어.

거대한 천둥소리가 마굴의 통로와 공동을 뒤흔들어놓았다.

악마의 성검(2)

치이이······.

증기가 눈앞을 가득 메운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입에 모인 피를 퉤 뱉으며, 댈런은 낮게 웃었다.

"푸흐."

살짝 벌어진 입에서 증기가 뿜어진다.

팔은 이상하게 뒤틀린데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신세였지만, 댈런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쌓아온 체력수치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기 때문.

치이이―

진탕된 내장과 오른팔을 재생하느라, 용혈의 여파가 스멀스멀 몰려오기 시작하는 상황.

그럼에도 지금 겪는 피로감 정도면, 그냥 몇 시간만 자도 순식간에 회복될 수준이다.

미궁에서 나갈 때까지 버티는 걸 감안해도, 영역을 한 번쯤은 더 사용할 수 있을 정도.

지금보다 근력 수치가 낮았던 대사도와의 싸움에서 며칠씩 알아누웠던 걸 생각하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승한 근력의 영향인지 위력 역시 눈에 띄게 강해졌다.

지금 이 일격을 대사도에게 날렸다면, 놈은 마지막 말을 남기지도 못하고 증발했을 것이다.

"크으윽! 우욱······."

물론 기껏해야 악마의 일부분을 소환했던 대사도와는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아무리 하찮더라도 악마 그 자체.

격 자체가 다른 존재다보니, 한 방으로는 죽지 않았다.

치이이이······.

전신에서 뿜어지는 연기 너머.

신음을 토하며 버둥거리는 악마의 몸뚱이가 보인다.

놈은 대충 몸의 왼쪽 절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삼분의 일 정도가 뜯겨나간 상반신에서 내장이 주르륵 쏟아진다. 왼다리도 무릎 아래로는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반쯤 잘려나간 뿔을 달고서, 뭉게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는 악마.

놈은 둘 남은 팔을 놀려 뒤로 기어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재생이, 재생이 되질 않는다. 서, 설마 영역을 이룬 것인가! 이제 막 미궁에 들어온 용병 따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놈의 거대한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룬다. 뜯겨나간 상반신에서는 내장이 왈칵이며 흘러나왔다.

잃어버린 피와 내장 자체는 몸 안에서 순식간에 재생되는 듯했으나, 댈런에게 잘려나간 몸의 반쪽은 상황이 달랐다.

사라진 어깨가 다시 자라나려는 찰나.

우르릉―

미세한 천둥소리와 함께, 어깨뼈가 파삭 하고 부서진다.

절반 가까이 날아간 갈비뼈가 재생되려는 순간에도.

타닥! 타다닥!

번쩍이는 작은 섬광이 자라난 뼈와 내장을 두드리며 가루로 만들었다.

영역으로 빚어진 의념 그 자체가 악마의 재생력을 가로막는 광경.

댈런은 사나운 미소를 머금은 채, 검과 방패를 뽑아들고는 터벅터벅 공동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루시아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바렛."

뭐? 그 성기사?

댈런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루시아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공동의 한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는 동시에, 악마와 스스로에만 집중되던 감각을 순식간에 넓혀낸다.

공동 끝까지 뻗어나가는 초인적인 감각의 영역.

그 끝에 흐릿한 존재감이 포착된다.

어둠 속, 눈을 감고 석상처럼 선 갑주 입은 기사.

치열한 전투를 겪었는지 갑주는 온통 긁히고 구멍이 나 너덜거렸고, 목에 감긴 사슬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새어나온다.

그때 악마가 외쳤다.

"나의 충실한 타락기사야! 놈들을 막아라!"

그 말에 기사가 눈을 떴다.

동시에 목에 감긴 사슬이 보랏빛 광채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흐리멍텅한 눈동자에서 형형하게 안광이 흘러나오고, 정적이었던 그 몸의 뼈마디와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튀어나갈 준비를 마친다.

철컹.

갑주가 마찰하며 쇳소리를 내고.

스릉―

검을 뽑아든 기사의 신형이, 한순간 댈런의 감각에서 벗어났다.

"······!"

동시에 온몸을 울리는 육감의 경종.

댈런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철과 철이 부딪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

검격이 맞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불꽃이 비산하고, 달려들던 타락기사의 몸이 공동 저 안쪽으로 튕겨나간다.

꽈광― 쿠르르.

놈이 처박힌 벽에 금이 쩍쩍 가면서, 천장의 석재가 우르르 무너져내린다.

댈런은 발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의 발밑 돌바닥이 밭고랑처럼 길게 파여있었다.

고작 한 번의 격돌로 만들어진,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깊은 흔적.

이건 힘에서 그가 명확한 우위를 가져가긴 했으나, 저 타락기사의 육체능력 역시 평범을 한참이나 넘어섬을 보여주었다.

쿠르르르!

과연 몸의 내구성 역시 범상치 않은지, 타락기사가 돌무더기를 헤치고 일어선다.

"······."

악마와 다르게 미사여구는 없었다.

놈은 그대로 댈런에게 돌진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

쉭―

어두운 빛을 머금은 검이 찔러온다. 댈런은 방패로 걷어내고 검을 내질렀다.

터엉!

칼막이 부분으로 그 찌르기를 빗겨낸 기사는,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현란하게 댈런의 허벅지를 베어들어갔다.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베는 동작이 시작되는 어깨를 걷어차버린 것이다.

콰앙!

강력한 발길질에 어깨의 판금 부분이 박살난다. 단번에 어깨뼈가 탈구된 타락기사가 황급히 물러섰다.

댈런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따라가서 검을 내리그었다.

까앙!

그러나 그 사이에 빠진 어깨가 도로 붙으며, 타락기사는 능숙하게 댈런의 검을 흘려냈다.

그리고.

까가가강!

찰나의 순간에 십수 번에 달하는 공방이 오갔다.

과연 루시아의 말대로 모두가 존경할 만한 기사였던 걸까.

타락기사의 능란한 발놀림과 검술은, 댈런의 감각마저 현혹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공세는 댈런이 쥐고 있었다.

기술적인 측면은 타락기사의 검술이 한참 우위였으나, 기본적인 힘과 빠르기에서 댈런이 압도했기 때문.

콰지직! 으직!

파괴적인 검끝에 기사의 갑옷이 몇 번이나 찢어지고 깨져나갔다.

하지만 싸움은 좀처럼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기사의 타락한 신성문신이 음울한 빛을 뿜어내는 순간, 그 상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악마의 재생력이 부럽지 않은 수준의, 어마어마한 자가수복력.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곤란한데.'

타락한 신성문신의 힘을 덧입은 기사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노련한 검술에 초인적인 육체능력, 거기다 악마에 버금가는 재생능력까지.

물론 신성문신의 힘은 영원하지 않으니, 시간이 주어진다면 천천히 압도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지금의 전투가 시간싸움이라는 점이었다.

"크으윽, 영혼에게 버려진 육신들이여! 나의 일부가 되어라!"

공동 가운데에 그려진 마법진 안쪽.

악마는 널브러진 탐험가의 시체들로 몸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찢기고 으깨진 시체들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거대한 팔다리를 만들어낸다.

본래의 육신에는 비할 바가 아니겠으나, 어찌됐건 놈이 몸을 수복하는 순간 댈런은 악마와 타락기사를 함께 상대하게 될 터.

그렇게 되면 아무리 그라 해도 승산을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타락기사 하나 잡자고 영역을 사용하는 건 바보짓이다.'

영역은 강력한 카드이지만, 남발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그의 체력 수치는 근력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는 바.

지금의 몸 상태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 영역이라는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한 번뿐이었다.

악마 특유의 끝없는 재생력을 생각해서라도, 그 한 번은 악마 놈을 마무리하는 데 써야만 했다.

까가가가강!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와중에도,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예리한 검격은 끝도 없이 오고간다.

사방으로 불티가 튀고, 주변의 바닥이 수많은 검흔으로 난도질당한다.

까아앙!

그 검격의 파도 끝, 서로에게 날린 강력한 일격이 맞부딪히고.

타락기사가 몇 걸음을, 야만전사가 한 걸음을 물러난 순간이었다.

화악―

주변이 갑자기 밝아진다. 타락기사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신성문신에서 뿜어지는 순수하고 밝은 빛.

그 빛을 전신에 머금고 걸어온 루시아가 댈런의 곁에 자리했다. 그녀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댈런. 예상 밖의 상황에···제가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댈런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낮게 웃었다.

"이제는 좀 정신이 들었소?"

"예."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스르릉.

빛을 머금은 손이 검을 뽑아든다. 새하얀 검신의 첨단은 타락기사를 가리켰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수습기사이자, 기사단 내부의 악을 척결하는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지금 이 시간부로 마에 물들어 타락한 성기사 바렛을 처단합니다."

화륵.

그녀의 검이 신성력을 머금고 타오르기 시작한다.

평범한 신성력의 일렁임이 아닌, 불꽃처럼 넘실거리는 강렬한 백색의 광채.

기사단의 심문관만이 전수받을 수 있는 '단마의 백염'.

간악한 사교도나 악마를 상대로만 사용되는 그 불꽃이, 그녀의 검신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크으으으."

그 눈부신 광채 때문일까.

지금껏 무표정하던 타락기사의 얼굴이, 루시아를 바라보며 잔뜩 일그러진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등을 맡기겠소."

"예."

그는 두 기사를 뒤로하고 천천히 공동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악마는 어느새 잘려나간 신체를 대부분 수복해, 반쯤 시체거인에 가까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놈이 말했다.

"흐흐흐. 저런 애송이 성기사에게 등을 맡겨도 괜찮겠느냐?"

입꼬리를 히죽거리는 웃음. 놈은 댈런의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두 기사가 격돌하기 시작했는지, 연이은 굉음과 충격이 지면을 얕게 울리고 있었다.

원한다면 감각을 뻗어내어, 그 전황을 살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악마 살해자를 믿는다."

댈런은 그러지 않았다.

"악마 살해자라니? 저 애송이가 말이냐?"

의문스런 어조로 되묻는 악마. 댈런은 말없이 방패를 툭 내려놓았다.

악마는 얼굴에 어린 의문을 지워내고는, 자랑스러운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흐하하하! 네 간절한 마음은 알겠다만, 허탄한 이명에 매달리는 건 우매한 일이다. 자고로 무력은 드러나는 이름에 묶이지 않음이니, 반면 나의 타락기사는 원래라면 나마저도 이길 강자였지."

악마는 흰자위 없는 검은 눈을 번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첨예한 싸움 끝에 그의 동료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혹은 내 오랜 비보인 할만의 사슬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였어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을 터. 하지만 타락한 성물의 힘은 이제 그의 온몸을 잠식했다. 한때 신 앞에서 완전했던 성기사는, 이제 온전하게 타락한 나의 종자가 됐음이야."

댈런은 말없이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오른발은 살짝 뒤로. 왼발은 바닥에 끌듯이 약간 앞으로.

자세를 잡아가는 그를 보며, 악마는 히죽 웃었다.

"내 별의 시선을 읽어 너에 대해서도 잘 알지. 한평생 방패와 검을 사용해온 용병이며, 제국의 격투술로 에낙사구스의 하수인을 처치한 전사야. 영역을 이룬 건 예상 밖이었다만, 네 본질은 검술에 있지 아니하잖느냐?"

키이잉―

악마가 손을 들었다.

불길한 울림이 그 손바닥에서 토해지더니, 그 위에서 어둠이 넘실거리며 커다란 검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나, 찢긴 육신과 톱날검의 악마 골라캅이 네게 죽음으로 한 수를 가르쳐주도록 하마."

"야."

"흐흐, 유언이라도 있느냐?"

악마가 물었다. 댈런은 짜증 서린 얼굴로 대꾸했다.

"보스전 컷신 볼 때부터 생각한 건데, 너 쓸데없이 말 존나 많은 거 아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습―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평소의 깊은 호흡과는 달리, 짧게 그러모으는 호흡법.

동시에 양 어깨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스으으―

팔 위를 내달려 검에 닿는 기운.

그 순간, 기묘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

두 손으로 거머쥔 한 자루의 검.

평소에는 그렇게도 가볍게 휘두르던 검이, 천하의 그 무엇보다 무거워진 듯한 감각.

휘이―!

댈런은 그 무게감을 온전히 느껴내며, 검을 들어올렸다가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압도적인 중량이 그려내는 선은, 당연하게도 단순하기 그지없었고.

"응? 무슨―"

댈런의 몸이 그려내는 기이한 마력의 흐름에, 악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검을 들어올린 순간.

쩌저저저정―!

놈이 쳐들었던 어둠의 검이, 요란하게 굉음을 뿜어대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산산조각난 어둠의 검이, 마력의 폭풍이 되어 악마의 상반신을 덮쳐든다.

수백 구의 시체로 간신히 수복해낸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

몸의 절반이 걸레짝이 된 채, 악마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커헉···이, 이게 무슨."

악마가 더듬거렸다. 장황하게 늘어놓던 말이 쏙 들어간 모습이었다.

댈런은 팔 전체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두른 채,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어깨 너머로 눕혀서 들어올렸다.

그가 말했다.

"다시 붙어보자고, 수다쟁이 악마 새꺄."

꽈아앙!

그리고 바닥의 판석이 박살나며,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악마의 성검(3)

후웅―

음울한 기운을 머금은 채, 내리그어지는 타락기사의 강철검.

깡―!

새하얀 불꽃을 덧씌운 검이 이를 걷어내고, 그 기세를 몰아 방패로 밀어붙인다.

터엉!

하지만 타락기사의 손에서 뿜어내는 어두운 기운이 방패의 기세를 상쇄해냈다.

직후 방패를 옆으로 밀어내고, 역으로 검을 재차 찔러오는 타락기사.

카가각!

검과 검이 부딪히고, 검신과 가드가 서로 얽히며 잠시간 힘겨루기가 오간다.

그리고 잠시 후.

까가가강―!

힘의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얽혔던 검이 풀어지며 십수 번의 검격이 맞부딪힌다.

불길한 기운이 덧씌워진 강철검과, 신성력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백색 검의 춤사위.

그 춤이 그려내는 하나하나의 선과 면이, 서로의 목줄기와 심장 언저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치명적인 쾌검이었다.

까가강! 깡!

기이하게도 두 검이 그려내는 움직임은 묘하게 엇비슷했다.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성기사단 특유의 빠르고 유연한 검술에, 신성문신의 힘으로 현란한 움직임을 덧씌운 루시아의 검은.

원래 성기사 바렛이 수습기사 시절 창안해낸 독자 검술을, 그녀에게 맞게 본따 만든 작품이었으니까.

'배신자 새끼.'

루시아는 핏발 선 눈으로 타락기사를 노려봤다.

배신감과 분노가 그녀의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목숨을 건 첨예한 줄다리기 속에서, 평소처럼 신념과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한 일.

한때나마 동경했던 이의 처참한 몰락은, 그녀의 심중에서 복잡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너는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목에 핏발이 설 정도로 소리치면서, 그녀는 성기사단 시절의 옛 기억을 떠올렸다.

성기사 바렛은 훈련생 시절부터 남다른 인물이었다.

혹독함으로 악명 높은 체력평가 때마다, 그는 언제나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동기들이 아직 검술의 기초도 떼지 못했을 무렵, 저 혼자 검 한 자루로 수습기사 조교를 이겨먹었다.

신앙심도 뛰어나 매일 일과가 끝나면 예배당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것은 물론이요.

동기와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그를 찾는 이가 있으면 언제든 달려가 성심성의껏 도와줬다.

수습기사가 됐을 즈음, 성기사단 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가 차기 기사단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며, 혼자 설레발 치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였는데.

"그런데 왜!"

까가가강!

찰나의 시간을 관통하는, 정확히 열네 번의 검격.

검과 검, 방패가 맞부딪히며 불똥이 튀어오른다.

"왜 이런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건가!"

사실 그녀도 알았다.

토벌대에게 배신당해 악마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일에 대해, 바렛의 잘못이라곤 필사의 각오로 싸웠던 것뿐이며.

그 끝에 그의 목을 휘감은 할만의 사슬은, 설령 기사단장이라도 저항하기 힘든 강력한 성물이라는 사실을.

"차라리 도망치지 그랬나! 지원을 요청할 수는 없었나!"

그럼에도 루시아는 외칠 수밖에 없었다.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울분을 토해내는 것에 가까운 의문을.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한 것인가! 대체 왜···!"

왜 나로 하여금, 네 목에 검을 겨누게 만드는가.

화르르륵!

백색 화염이 검 전체를 집어삼킨다.

심문관의 지위를 나타내는 단마의 백염.

그 백염을 전수받은 이상, 그녀의 신분은 수습기사이기 이전에 심문관이었다.

그리고 심문관의 첫 번째 임무는 기사단 내부의 악을 척결하는 것.

설령 그 악이 자신이 존경하던 동료라 할지라도.

성기사단의 흰 불꽃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옛 동료의 수급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까아아앙!

처음으로 타락기사의 검이 튕겨나간다.

루시아의 검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향연은, 이제 매끈한 검신의 원래 모습을 완전히 가릴 정도였다.

까가강!

이어지는 강력한 공격에 활짝 열린 타락기사의 가슴팍.

루시아의 검이 번쩍이고, 단단한 판금갑이 쪼개지며 가슴팍에 긴 상흔이 새겨졌다.

화르륵!

상흔을 따라 번지는 백색의 불꽃.

백염은 순식간에 살과 피를 집어삼키며, 한 줌의 재로 만들어 허공에 흩뿌렸다.

가까스로 타락한 신성문신이 강렬하게 빛을 내뿜으며, 그 불길이 전신으로 번지는 걸 막아섰다.

크르르르.

타락기사가 낮게 신음했다. 그는 상처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아랑곳 않고 자세를 잡아갔다.

"···개 같은 새끼."

루시아는 만감이 뒤섞인 눈으로 그걸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백색 불꽃처럼 일렁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넌 그냥 여기서 뒈져라."

꾸드득.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발 아래 짓눌린 판석에 쩌적 금이 가고.

쩌어엉!

두 기사가 다시 한 번 격돌했다.

***

격렬한 공방이 오가는 두 기사의 싸움과는 달리, 악마와 전사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꽈아앙!

바닥을 부수며 도약한 댈런의 검에, 악마가 빚어낸 어둠의 칼은 속수무책으로 박살났다.

"끄아아악!"

분쇄검의 검풍과 부서진 어둠의 파편이 휘말리고, 그 폭풍에 악마가 직격당하기를 대여섯 번.

시체로 수복한 몸의 절반은, 분쇄검의 위력 앞에서 순식간에 다시 고깃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자, 잠시만. 잠시만 협상을 하자···그어억!"

다시금 내장을 줄줄 흘리게 된 악마가 대화를 요청했지만, 댈런은 말없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영역을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분쇄검 자체의 파괴력도 결코 약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숙련도가 낮아도, 스킬 등급 자체의 위력은 결코 무시 못 하지.'

라판텔라의 분쇄검은 C등급 스킬.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게 해준 용혈의 재생 인자와 동급의 능력이었다.

분쇄검을 두어 번 더 얻어맞은 악마는 공동의 중앙에 새겨진 마법진 위에 엎어졌다.

첫 일격을 맞았을 때처럼, 뜯겨나간 옆구리에서 거무튀튀한 내장이 꿀렁이며 쏟아진다.

다만 그때와의 차이점은, 이제 공동 안에 그걸 틀어막을 시체가 한 구도 남지 않았다는 점.

악마는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끄으으, 어찌 제국의 무예와 기사왕국의 검을 동시에 가질 수 있지? 애당초 어떻게 별들의 시선을 피해 그런 기술을 숨겨둘 수 있었냐는 말이다!"

댈런은 픽 웃었다. 영악한 놈이었다.

악마는 끝없이 입을 나불대면서도, 자연스럽게 마법진 한가운데로 기어가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보면 그저 고통에 겨워 도망치는 몸짓.

허나 놈이 기어가는 방향에는, 신성력을 전부 상실한 성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댈런은 느긋하게 걸어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말했다.

"스킬빨이다 새꺄."

"스, 스키? 그게 무슨―."

악마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댈런이 휘두른 검이, 악마의 목을 툭 잘라버린 것.

목이 떨어지고도 이를 다시 재생시키려는 악마의 육신 앞에서, 댈런은 너덜너덜해진 검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단단히 말아쥔 주먹. 내면의 시야로 내다보는 설산의 정경.

그 설산에서 내리치는 천둥소리와 함께, 그는 주먹을 뻗었다.

우르르릉―!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남은 건 대량의 끈덕한 핏물과 고깃조각들 뿐이었다.

"후우."

전신에서 뜨거운 증기가 뿜어진다. 이로써 이번 싸움에서 영역을 사용한 건 두 번째.

체력은 아슬아슬하게 한계 안쪽이었다.

어그러진 팔이 어느 정도 재생되자, 댈런은 그제야 두 기사를 돌아볼 수 있었다.

"흠."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쩌저정! 쩌정!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두 자루의 검. 승세는 여전히 타락기사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과 같지는 않았다.

타락기사의 몸놀림은 댈런과 처음 격돌했을 때에 비해 꽤 볼품없어진 상태였다.

반면 루시아의 검격은 처음보다 더 날카롭고 강해져 있었고.

때문에 두 기사의 공방은 미세하게 기울어있을 뿐, 거의 비등한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성장해서 타락기사의 역량을 따라잡은 건가?'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댈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루시아의 역량이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허나 댈런과 격돌했던 타락기사를 따라잡으려면, 여전히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의 싸움이 비등한 건, 타락기사가 본연의 힘을 다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아니, 정확히는 스스로 힘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쩌어엉!

검이 맞부딪힌다. 루시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타락기사의 신성문신 중 하나가 흐릿해졌다.

쩌정!

그리고 다음 격돌은, 루시아의 미세한 우위였다.

'스스로의 힘을 억제해서, 루시아를 강제로 성장시키고 있군.'

댈런의 시선이 타락기사의 목을 향했다.

놈의 목을 휘감은 사슬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할만의 사슬.'

원래는 구속한 상대를 복종시키는 강력한 성물이었으나, 타락하면서 원래의 기능에 강력한 마기가 더해진 아이템.

지금의 댈런이라도 저 타락한 성물에 저항할 역량은 안 될 터였다.

그만큼 강력한 물건이기에, 바렛이 아무리 뛰어난 성기사였다 해도 악에서 벗어날 도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남은 의지를 총동원해, 스스로의 힘을 억제하고 있는 건가.'

성물의 힘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성물에 타락한 본신의 힘은 별개의 문제.

바렛은 타락해버린 이 순간에도, 자신의 의지로 그 힘을 억눌러 루시아의 성장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차라리 동료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불사르겠다는 건가.'

실로 고결한 의지.

성기사의 정석이라 할 법한 마음가짐이었다.

댈런이 그런 생각을 품는 와중에도, 두 기사의 싸움은 점점 더 격해져갔다.

쩡―!

두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더이상 평범한 금속끼리의 마찰음이 아니었다.

콰드득!

현란하게 내딛는 그들의 발걸음마다, 밟힌 판석이 산산이 깨져나간다.

크르르르!

몸 곳곳에 불타는 상흔을 입은 타락기사가, 입가를 죽 찢으며 울부짖었다.

댈런은 마치 그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동료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리고 그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내딛는 동료가 자랑스러워서 웃는 웃음.

타닥.

매섭게 몰아붙이던 루시아가 검을 내렸다.

한 발 늦게나마, 그녀도 타락기사의 저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 씨발 새끼가······."

깨문 입술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린다.

사방으로 빛을 뿜어대던 신성문신은,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의 강도를 천천히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근처에만 가도 눈부실 정도였던 광채는 사그라들었다.

그 대신 자리 잡은 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순백의 빛.

밝기 자체는 약해졌으나, 그 희미한 빛에서 느껴지는 압은 이전보다 배는 더 강렬했다.

크르르.

이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리는 타락기사 앞에서, 루시아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각진 방패가 앞에, 검은 그 옆에 비스듬히 뉘여서.

자세를 잡은 그녀의 얼굴 위, 두 눈을 둘러싼 신성문신이 처음으로 빛을 발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녀의 몸이 쏘아졌다.

촤학!

마치 빛의 화살처럼 날아간 그녀의 신형이, 타락기사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타락기사는 저항하지 않았다.

검을 들지도, 몸을 움직여 피하지도 않았다.

철컹.

그의 목에 감겼던 사슬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천천히 깜빡이다가 사라지는 사슬의 보랏빛 기운.

"후우······."

눈에 이지를 되찾은 성기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그의 신성문신이 본래의 순수한 빛을 되찾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작게 우물거리는 성기사.

그리고.

화르르르―

어깨부터 골반까지를 가른 상흔에서, 거센 불꽃이 타오르며 그의 온몸을 집어삼켜갔다.

검은 재가 되어 휘날릴 때까지, 성기사는 한 마디 신음도 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남은 건 누더기가 된 성기사의 갑옷과 검, 그리고 거무튀튀한 사슬뿐.

타락한 기사를 단죄함으로 임무를 다한 수습기사는, 그 유품을 차마 돌아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궜다.

"바보 같은 년···왜 마지막까지 그런 말밖에 못하고······."

축 늘어진 금발 사이,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중얼거림.

"반가웠을 거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댈런은, 그 중얼거림에 덤덤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때론 사람들의 수많은 미사여구보다, 친구의 욕 한 마디가 더 큰 작별 선물이 되기도 하지."

"······."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성기사의 어깨가 작게 떨린 것이, 곧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

그 어느 때보다 처연한 정적이 내려앉은 공동.

길게 늘어뜨려진 금발 아래로.

맑은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졌다.

***

"바렛이 명을 다했군."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진 발코니 위.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사가 말했다.

"골라캅도 죽었어."

그의 곁, 두건을 뒤집어쓴 노파도 말했다.

"나는 그런 머저리 따위에겐 관심이 없다. 놈은 그저 장기말일 뿐이야."

"끌끌끌. 악마를 두고 머저리라 하다니, 과연 성기사단의 부단장다운 패기야."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다."

기사는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노려봤다. 하지만 노파는 낄낄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조심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닌가? 성기사단의 부단장이 별을 보며 점을 치고, 마녀와 내통하며, 악마를 앞세워 유망한 기사와 성검을 동시에 타락시킨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면―."

"그러니까 그 입을 조심히 놀리라는 게다."

사아아―.

기사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뻗어나간 청백색의 기운이, 노파의 목을 천천히 옥죄어갔다.

그 순간 두건 아래, 노파의 노란 눈이 빛나며 음습한 바람이 발코니 안에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청백색의 기운과 몸을 얽는 음습한 바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잠시간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먼저 백기를 든 건 노파 쪽이었다.

"끌끌, 하여간 이 노친네는 입이 방정이란 말이야. 좀 봐줘. 그쪽 일을 내가 얼마나 열심히 도왔는데."

음습한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흩어진다. 기사 역시 기운을 거두고 손을 내렸다. 그가 말했다.

"내 앞에서 그 더러운 세 치 혀를 놀릴 생각은 말아라. 다 네년의 저열한 계획을 위한 것 아닌가."

"쳇."

노파는 툴툴거리며 발코니 끝으로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발코니의 난간 위에 올라선 그녀가 말했다.

"동굴 속의 어미에게는 잘 말해뒀어. 언제 찾아가든 그녀는 널 환영할 거야. 그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와 같이 오두막으로 보내줘."

"대가는 내가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후에 보내겠다."

"그러든가."

휘릭.

노파의 몸이 발코니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기사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천기가 이토록 어지러움에도, 고작 성검 한 자루 타락시키는 일이 실패로 돌아갔는가."

그는 허리춤의 검손잡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공들여 준비한 타락기사마저 쓰러졌으니, 이제 이 몸이 향할 곳은 하나뿐이겠군."

조금 더 하늘을 바라보던 기사는,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라진 발코니 위.

난데없이 불어온 미풍이,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잿가루를 싣고 날아갔다.

정산(1)

쿠르르르―

오래된 석실 문이 거친 소음을 내며 열렸다. 먼지가 푸스스 흐릿하게 떨어진다.

댈런은 손부채질로 먼지를 몰아내며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횃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석실은, 공동에서 이어지는 악마의 비처.

곧, 악마가 자신의 보물을 모아두는 곳이었다.

"···쯧."

하지만 넓은 석실 안을 슥 둘러본 댈런은 짧게 혀를 찼다.

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원래라면 이곳에는 번쩍거리는 갑주와 무기들, 궤짝 단위의 금화, 그리고 악마가 희생물로 쓰기 위해 선별해둔 포로들로 가득해야 했다.

살아있는 포로는 구출해내고 죽은 포로의 장례를 치뤄준 뒤, 토벌대가 공헌도에 따라 보물을 나눠 가지는 게 원래의 순서.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으리으리한 보물들과 의식 잃은 포로들이 아니었다.

'이 게임 하면서 이렇게 가난한 악마는 또 처음 보는군.'

대부분의 공간에는 오랜 세월 쌓여온 먼지뿐.

비처에 있는 것이라곤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시체 더미와, 그 곁의 마석 한 무더기가 전부였다.

그나마 마석 옆에 놓여있는 몇 점의 무기며 갑옷 따위마저도 썩 값어치가 높아보이지는 않았다.

죄다 탐험가들의 시체에서 벗겨낸 물건이었고, 이 시점에 악마를 토벌하겠답시고 온 탐험가들은 대다수가 어중이떠중이였으니까.

'몇 년 뒤라면 금화며 최고급 마석, 질 좋은 갑옷과 무기 따위가 넘쳐나는 보고가 됐겠지만.'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실망감.

그러나 댈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악마가 그만큼의 재물을 쌓았다는 건, 결국 그만큼 많은 탐험가들이 놈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댈런은 먼 미래를 바라보며 이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하는 입장.

언젠가 인류의 전력이 될 수도 있는 탐험가들의 손실을 막는 게, 금화 몇 줌 얻는 것보다 더 남는 장사였다.

댈런은 약간의 아쉬움을 떨쳐내고 시체 더미로 다가섰다.

"으으···."

그때 시체 더미에서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생존자들이었다.

"주···죽여···줘······."

한 생존자가 어눌한 발음으로 부탁했다. 깨진 두개골 사이로 뇌가 삐져나온 게 보였다.

생존자들이라 해서, 정상적인 몰골로 살아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상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상을 입은 채, 악마의 마법으로 명줄만을 이어가고 있는 신세였으니까.

'죽은 거나 다름없는 육체에, 영혼을 대충 바느질해 붙여놓은 꼴이지.'

팔다리가 뜯기고 내장이 뭉게진 탐험가들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나 방치되어 있었다.

악마가 원하는 건 끔찍한 고통 끝에 죽음을 맞이한, 신선한 희생물의 영혼이었기에.

당연하겠지만 이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지금 당장 재생 포션을 때려붓는다 해도 살려낼 수 없는 지경까지 간 이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매듭지어주는 것만이, 같은 인간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스릉―

댈런은 검을 뽑았다.

생기를 잃고 끔뻑이던 몇몇 눈동자들이, 검을 뽑아든 댈런을 보고 안도의 눈빛을 지어보인다.

괜히 입안이 씁쓸함을 느끼며, 댈런은 검을 내리그었다.

콰지직!

시체 더미가 갈려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라판텔라의 분쇄검은 같은 크기의 바위도 부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댈런은, 무너진 시체더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갈려나간 살점과 내장들 사이에, 잿빛 시체 두 구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악마의 보존식이 된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악마의 보존식이 된 자객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시발."

보존식이라니. 네이밍 센스가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만.

댈런은 툴툴거리며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잿빛 시체가 빛무리로 화하고, 그의 손으로 스며들며힘을 더해주었다.

[악마의 보존식이 된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마력 +1,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D)]

[악마의 보존식이 된 자객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체력 +2]

익숙한 고양감이 온몸을 뒤덮는다. 오랜만에 근력 역시 증가했다.

다행히 예전처럼 근육이 뒤틀리는 현상은 없었다.

그저 어떤 기운이 근섬유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을 뿐.

'체력 능력치가 궤도에 올라서인가. 아니면 영역을 이뤄서?'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댈런은 상태창을 열었다. 레벨은 12가 되어있었다.

아무리 최하급이라도 악마는 악마.

미궁도적 무리에 프로그맨 부족, 시체거인까지 처치하면서 겨우 하나 올랐던 레벨이 악마 한 놈만으로 하나 더 오른 것이다.

추가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하고 나니, 이제 체력 수치는 25에 다다랐다.

이 정도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에 치이거나, 독사의 맹독을 혈관에 주입해도 타격이 없을 몸뚱이다.

"거의 사람이 아니라 괴물인데."

어깨를 휘휘 풀며 공동으로 돌아오니, 루시아가 작은 봉분을 다듬고 있었다.

부서진 판석을 묘비 삼아 세우고, 성기사 바렛의 이름을 새긴 무덤.

그 안에는 재가 되어 사라진 육신 대신, 그의 상처 입은 갑옷이 묻혀있었다.

"사람들은 바렛 스트리먼을 그리워할 겁니다."

무덤 앞에서 루시아가 말했다.

"타락했던 최후는 그의 갑옷과 함께 이곳에 묻히고, 사람들은 그를 악마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성기사로 기억할 테니까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비밀로 부쳐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아의 부탁에, 댈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돈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그 정도는 해야지.

루시아는 삼십 분 정도를 더 무덤 앞에서 보냈다.

그동안 댈런은 육편이 된 시체에서 악마의 정수를 찾아내고, 성검과 할만의 사슬을 두꺼운 천으로 감쌌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

미궁 1층의 중앙에는 거대한 비석이 있다.

하루에 한 번, 미궁도시 팔시온으로의 전이 마법이 발동되는 비석.

흔히들 귀환비라 부르는 이 비석은, 미궁 안에서 유일한 안전지대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비석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보호막이, 마물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기 때문이었다.

댈런과 루시아가 안전지대에 도착한 건, 마굴에서 출발한 지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를 안전지대에서 머문 뒤, 다음날 정오에 전이 마법을 통해 팔시온으로 돌아갔다.

우우우웅―

내려갈 때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결계탑으로 돌아오는 전이 마법은 중력이 순간 역전되는 감각을 수반했다.

"으으······."

루시아는 매스꺼운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고개를 털고서 댈런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바로 성기사단 지부로 가시겠습니까?"

중앙 광장에 도착해서 루시아가 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 계시오. 나는 내일이나 모레쯤 들리도록 하지."

보름이 넘도록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으니, 하루 정도는 푹 쉬어줄 필요가 있었다.

증가한 체력 능력치가 상당 부분 상쇄해주기는 했지만, 영역을 사용하면서 용혈로 몸을 재생한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기도 했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성검과 할만의 사슬을 가지고 먼저 지부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더불어 댈런이 이번 의뢰에 힘써주신만큼, 약속드렸던 보수 이상을 건의해보도록 하죠."

"그래주면 고맙지."

댈런은 씩 웃었다. 원래 의뢰 내용는 성검을 되찾는 게 끝이었다. 악마를 처치하는 건 필수 목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댈런은 둘 모두 완수했을 뿐 아니라, 오래 전 기사단이 잃어버린 성물까지 찾아다줬다.

넉넉하게 원래 약속했던 보수를 두 배쯤 올려받아도 될 일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혹시 보수로 받고자 생각해두신 게 있으십니까?"

"신성문신을 새길 수 있소?"

댈런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성기사단의 신성문신.

수많은 의뢰들 중 성기사단의 의뢰를 택한 건, 처음부터 그걸 보수로 생각해뒀기 때문이었다.

'게임에서 신성문신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각종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거지.'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방법이 레벨업밖에 없는 건 아니다.

각종 비약이나 주문, 의식을 통해 능력치를 인위적으로 올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다만 미궁에서 캐먹었던 약초처럼, 대부분의 방법은 극심한 부작용이나 여러 폐혜들을 달고 있었다.

성기사단의 신성문신은 그 중에서도 부작용 없고 깔끔하기로 독보적인 종류였다.

'그만큼 받는 조건 자체가 까다롭긴 하지만.'

본디 신성문신은 외부인에게 새겨주지 않는, 성기사단의 전유물이다.

애당초 전쟁의 신에게서 하사받는 신성력을, 문신을 매개 삼아 효율성을 높여 사용하는 게 그 본질이었으니까.

다만 외부인에게 신성문신을 새겨주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했다.

고위 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 성기사단을 방문해, 많은 양의 헌금을 하며 정중하게 신성문신을 부탁하는 경우가 대표적.

댈런의 말에, 루시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가능하긴 할 겁니다. 다만 댈런이 그 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지는······."

"그건 상관 없소."

그녀의 걱정도 일리가 있었다.

신성문신을 받아가는 귀족들이 몇 있긴 해도, 그 문신의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으니까.

애당초 전쟁의 신이 하사하는 신성력이 없으면, 평범한 장식용 문신이랑 크게 차이가 없는 게 신성문신이다.

거액을 헌금하고 신성문신을 새겨가는 귀족들 역시, 그저 행운의 부적 정도의 의미로 여길 뿐.

'전쟁의 신과 관련된 물건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구해주는 부적처럼 여겨지니까.'

물론 댈런의 생각은 달랐다.

악마를 때려잡아가며 얻어낸 의뢰 보수를, 고작 행운의 부적 따위에 쓸 수는 없는 법.

신성문신을 사용하는 데 신성력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얻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댈런은 어디에서 그 신성력을 얻어낼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성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계곡 안쪽, 미궁으로 향하는 통로인 균열의 깊은 곳.'

그곳에 잠들어있을 시체는, 그가 원하는 신성력을 넘치도록 품고 있을 테니까.

"신성문신을 받으려면 본단까지 가셔야 할 겁니다. 문신을 새기는 권능은 기사단장님과 부기사단장님께만 계승되는지라."

"언젠가 한 번 들리면 되겠지."

급할 필요는 없었다.

미궁에 들어가기 전과는 달리, 댈런의 체력 수치는 근력을 꽤 많이 따라잡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영역을 한 번 사용했다가 며칠씩 몸져누울 일은 없었다.

본신의 능력이 가까스로나마 균형을 맞췄으니, 이제 주목해야 할 건 다른 일들이었다.

'우선은 휴식이 먼저다.'

쉴 새 없이 달려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지쳐서 쓰러지기 마련.

몇 년 단위의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입장에서, 적절한 휴식은 단순한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이틀 안에 성기사단 지부를 방문하기로 약속한 뒤, 댈런은 순은 구역에서 숙소로 삼고 있는 엘가이아 마탑으로 향했다.

"···자네, 등 뒤에 그게 뭔가?"

"한 탕 하고 왔소. 신세 좀 지겠소."

"······잠시만 기다리게. 그대로 방에 내려놨다간 방바닥이 내려앉겠어."

그리고 거의 사람만 한 금고를 짊어지고 오는 그를 보고 고개를 내저으며, 펠버 발렌티노는 그가 묵을 방의 바닥을 손수 마법으로 강화해야만 했다.

***

다음날, 댈런은 다시 중앙 광장을 방문했다.

광장의 북쪽, 순은 구역에서도 보기 드문 10층짜리 건물에는 '미궁 관리청'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미궁 관리청은 사실상 미궁과 관련된 거의 모든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도시 기관.

댈런이 이곳을 방문한 건, 다름아닌 악마 토벌을 정식으로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미궁의 악마를 토벌한 탐험가에게, 금강궁은 상당한 포상금을 현금으로 지급하지.'

댈런이 악마의 사체에서 그 정수를 회수해온 건, 그 포상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도시의 정부 역할을 하는 금강궁에서 직접 지급하는 보상이기에, 포상금은 그 단위부터가 남달랐다.

아무리 못해도 금화 백 닢. 악마의 강함에 따라 금화 몇 궤짝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거기다 루시아가 자신은 악마에게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았다며 극구 사양했기에, 받아내는 포상금은 온전히 그의 차지였다.

"미궁 관리청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악마의 정수를 가져왔소만."

접수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그렇게 말하니, 직원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보다 더 높은 상사에게 그를 모셔갔다.

그렇게 윗사람의 윗사람, 그 윗사람까지 안내받은 긴 여정의 끝.

악마 토벌 담당자를 모셔오겠다는 말과 함께, 댈런은 어느 으리으리한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게 되었다.

'게임 화면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진짜 응접실 하나에 별 돈지랄을 다 해놨군.'

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며 댈런은 생각했다.

가구마다 금박이 안 입혀진 게 없으며, 작은 보석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찻잔과 접시들.

천장의 샹들리에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산산히 부숴 방 정체에 흩뿌렸다.

과장 조금 보태서, 마탑 연합의 청동 구역 지부가 동네 판자촌으로 보일 지경.

후릅.

지구에서나 맛보던 고급 원두의 커피를 즐기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한 젊은 남자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 곱디 고운 하얀 피부. 짧게 올려쳐서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칼.

척 봐도 나 귀족이오 하고 말하는 듯한 모습의 남자는, 자연스럽게 댈런에게 걸어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미궁 관리청 소속의 에반이라고 합니다."

깔끔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댈런에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

그 몸짓이며 자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초인들이 즐비한 순은 구역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댈런은 알고 있었다.

그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 일신의 능력은 여느 범인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이 남자가.

사실은 그에게 이미 한 번 접근한 적 있는, 금강궁의 가장 깊고 높은 곳에 기거하는 초월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했을 땐 게임에서 본 적 없어서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이렇게 정해진 순서대로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게임에서 처음으로 미궁의 악마를 퇴치하고 이를 관리청에 보고했을 때.

플레이어는 초월자와의 첫 조우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초월자가 바로 눈앞의 남자.

관리청의 고위 공무원으로 위장한 채 등장하는 남자의 정체는, 바로 금강궁의 스물여섯 초월자들 중 하나.

'천변만화의 얼굴'이라 불리는 에버론 라크탈라였으니까.

"미궁 초행길에 악마를 퇴치하시다니, 신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대전사는 역시 다르군요."

그랬기에, 장난스레 웃으며 그를 떠보는 남자의 말에.

"운이 좋았지. 그리고 그 운이 지금도 나를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오."

이번에는 댈런 역시 마주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금강궁에서도 가장 높은 스물여섯 전당의 초월자들 중 하나를, 이런 순은 구역에서 두 번이나 마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정산(2)

"···이런."

짧게 토막친 한 마디와 함께,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수백 년에 달하는 세월에서 묻어나오는 여유는, 예상치 못한 반응 하나에 깨어질 만큼 얕지 않았다.

"과연, 이 역시 신들이 주시하고 있는 전사답다고 할까요."

"대사도도 그렇고 악마 놈도 그렇고 자꾸 그놈의 신들을 언급하는데, 이 동네 신들은 무슨 관음증이라도 있소?"

남자의 표정이 다시 미세하게 굳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입가에 맺힌 웃음은 조금 전보다도 더 뚜렷해져 있었다.

'역시.'

댈런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깨어지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초월자의 평정을, 일부러 조금씩 더 흔들어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에버론 라크탈라.

흔히 '천변만화의 얼굴'이라 불리는 초월자는,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일에 흥미를 느끼는 인물이었기 때문.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선에서, 초월자조차 예단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줄수록 호의를 끌어내기 쉽지.'

그리고 초월자쯤 되는 인물이라면, 그 호의만으로도 금화 수백 닢 이상의 값어치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

댈런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관리청부터 찾은 건, 단순히 포상금으로 받을 금화 수백 닢 때문만이 아니었다.

"북부 서리고원을 넘어온 대전사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상당히 불경한 어조로 들리는데요."

에버론은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댈런은 가벼운 어조로 그 말에 대꾸했다.

"내가 신앙심이 그리 깊지는 않아서."

"글쎄요. 그보다는 신앙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에버론은 잠시 간격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애당초 당신은 서리고원을 넘어온 적도 없잖습니까?"

눈매가 완만한 호선을 그린다. 입꼬리는 조금 더 끌어올려졌다.

마치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 듯한 표정과 어조.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어디 내 예상을 한 번 빗나가 봐라.

제아무리 비범한 사람이라도, 초월자의 저런 태도 앞에서는 백이면 백 눌리는 게 당연한 법이다.

남자의 몸에서는 어떠한 힘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그 표정과 몸짓, 말투 하나하나에는 수백 년의 세월에서 녹아나는 압박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압박감 앞에서.

"푸흐."

댈런은 참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뜨렸고.

"···뭐가 그리 재밌으시죠?"

남자의 웃는 얼굴에 미세한 감정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오."

댈런은 웃음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새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줄까.'

짧은 순간, 머릿속에 수십 가지 선택지가 우르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고작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이지만, 이 문답은 곧 초월자의 호기심과 흥미에서 비롯된 시험.

그렇다면 그 기대감에 충분히 부응해줘야 할 테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끝에서.

댈런은 웃음기가 여실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서리고원을 넘어온 적 없다고, 그쪽 선각자가 그리 말했소?"

"예?"

"백안의 선각자. 그 천 년 묵은 점쟁이가 나에 대해서 말해주었냐는 이야기였소."

그 한마디에.

지금껏 유지하던 초월자의 평정심이 산산이 부서진다.

커피잔으로 향하던 손이 정지화면처럼 멈추고, 흔들림 없던 표정이 처참할 정도로 무너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요. 선각자를 아실 줄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에버론이 말했다.

스물여섯 초월자 중 하나이자, 그 초월자들 중에도 가장 베일에 싸여진 존재.

세간에서는 그 이명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존재에 대해 너무나 당연한 듯 언급하는 댈런의 말.

이백 년 이상 살아온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도, 그 말 앞에서 여유롭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존재로군요."

여전히 살짝 떨리는 동공. 그 안에는 흥미와 당혹감, 더 큰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앞에서 댈런은 여상스러운 태도로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당신에게서는 마치 당신들이 초월자라 부르는, 내 친우들을 대할 때의 느낌이 듭니다."

그 솔직한 감상에 댈런은 낮게 웃었다. 에버론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예상 밖의 상황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만남은 모니터 너머에서 숱하게 겪어온 상황.

애초에 대화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대화의 흐름과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눈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라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비밀스러운 존재라 해도, 모니터 밖의 관찰자였던 댈런에게는 이미 수없는 접점과 공략을 거쳤던 존재일 뿐이기에.

"커피가 맛있군. 한 잔 더 없소?"

동이 난 주전자를 기울이던 댈런이 말했다. 에버론은 약간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방 밖에 대기하던 직원이 들어와 빠르게 다과를 교체했다.

테이블 위에는 그렇게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멤돌았다.

달칵.

에버론이 다시 입을 연 건, 직원들이 나가고 그가 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였다.

"악마의 정수를 가져오셨다고 했죠?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혼란스럽던 감정은 어디 가고,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건네는 말.

그러나 잔잔하게 깔린 미소는, 댈런이 그의 시험을 통과하고 호의를 얻어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철컹. 철컹.

단단하게 잠긴 궤짝이 묵직한 소음을 낸다.

댈런은 손 안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장서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궤짝이 들려 있었다.

그건 악마의 정수를 넘기고 받은 포상금, 금화 백팔십 개가 담긴 궤짝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백오십 닢 정도에서 그칠 포상금을, 웃돈을 한참이나 얹어 받은 것.

초월자의 호의는 아무리 못해도 금화 수십 닢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댈런은 궤짝을 슬슬 쓰다듬었다.

'거의 금화 이백 닢이라니.'

왠지 감개가 무량해지는 순간이었다.

은화 몇 푼 더 벌기 위해 하수도의 프로그맨 독침을 주워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두 손을 넘칠 정도의 금화가 그의 손에 있었다.

이 정도면 암시장에서 마법시대의 유물이나 전설적인 장인들이 만든 무구를 한두 점 정도 살 수 있는 돈.

'어떻게 쓸 지는 차차 생각해봐야겠군.'

어쨌든 미궁을 나온 뒤 가장 중요한 업무는 이로써 마무리됐다.

댈런은 마탑에 들러 금고와 그밖의 전리품들을 챙긴 후 곧장 청동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까마귀 둥지였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홀은 한적했다. 바텐더 버번만이 바 테이블 뒤에서 홀로 잔을 닦고 있었다.

댈런은 자연스레 테이블에 앉아 주문했다.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버번은 닦던 잔을 내려두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댈런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 문득 물었다.

"시에나는 안에 있소?"

끄덕.

작은 고갯짓이 돌아온다. 그리고 댈런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철저하게 방음 처리가 된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오는 두 기척을.

두 기척.

선객이 한 명 있었다.

"···아무튼 잘 전해주시길 바라네."

"걱정 마세요. 미궁에서 나왔다는 소식이 있으니, 아마 며칠 안에 여기 들를······."

뒷문을 열고 나오던 시에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은 바 테이블의 댈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방금 받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시에나가 외쳤다.

"댈런!"

"거 귀 떨어지겠네. 나도 반갑소."

"아하하하, 미안해.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왔길래."

기분 좋은 경쾌함을 담은 웃음.

댈런은 마주 낮게 웃다가, 그녀의 뒤에서 나오는 인물을 보고 술잔을 한 번 더 들었다.

"댈런? 자네, 정말 자네인가?"

"오랜만이오, 상단주."

"맙소사 시셀라시여! 미궁에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자네 멀쩡하구먼!"

갈리오스 상단의 상단주, 볼크마 갈리오스는 거의 술집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외쳤다.

하여간 목청 한 번 좋은 사람이라니까. 댈런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사지 중 하나라도 어디 놓고 올 줄 알았소?"

"으하하! 그럴 리가 있나! 자네처럼 대단한 전사라면 미궁을 휩쓸고 다녔겠지!"

볼크마는 얼굴에 반가움을 한가득 담고서 손사레를 쳤다.그는 자연스럽게 댈런 옆에 앉았다. 버번은 익숙하게 술 한 잔을 더 내어주었다.

댈런은 그 사이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오?"

"그게 말일세···."

"내가 이야기할게."

시에나였다. 그녀는 바 테이블의 반대편, 버번의 곁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두 사람을 마주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살짝 모아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알아봐달라고 한 것들 기억해? 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비약이나 의식, 혹은 주문."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들은 지명의뢰를 선별할 때 그가 조건으로 내걸었던 보상이었다.

아직까지 체력 능력치가 심각하게 뒤떨어지던 시점.

한시라도 체력을 올려야 했기에, 그는 시에나에게 의뢰와 무관하더라도 따로 알아봐 달라는 말을 남겼었다.

"개인적으로 주문이나 의식 쪽을 알아봤지만, 큰 성과는 없었어. 대부분 얻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부작용이 너무 극심한 종류였거든."

"그렇군."

하긴 성기사단의 신성문신이 특이한 케이스일 뿐, 능력치를 올려주는 대부분의 의식이나 주문은 과도한 대가를 요구하곤 했다.

사실 신성문신의 경우도, 이번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궤짝 단위의 금화를 바쳐야 받을까 말까 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래서 약초 쪽을 주로 알아봤지. 필로폰네 과수원이나 서부 지구의 약초 재배자들, 그리고 상인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한 건을 했다, 이 말이네."

잔을 반쯤 비운 볼크마가 붉어진 얼굴로 껄껄 웃었다.

뭐야, 벌써 취했어?

"도시연합 남서부의 르비바흐라는 소도시를 아나?"

"들어본 적 있소. 근처 산지에서 질 좋은 약초가 나기로 유명한 곳 아니오?"

르비바흐.

미궁도시 팔시온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연합에서도, 남서쪽 저 끝에 붙어있는 작은 도시였다.

인구가 오천이 좀 넘는 동네이지만, 게임에서 한 번 중요한 사건으로 부각되는 곳.

댈런의 말에 볼크마는 거나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맞네! 거길세! 지리에까지 정통하다니, 역시 자네는 특별한 전사야. 아무튼, 이번에 내가 그 도시에 대한 귀한 정보를 들었다네."

"뭐요?"

댈런은 버번에게 술 한 잔을 더 받으며 물었다.

상단주는 뭔가 음흉한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이었다.

"흐흐, 놀라지 말게나. 무려 르비바흐 근처에서, 만드레이크가 수십 단위로 서식하는 군락이 발견되었다고 하네!"

죽어가는 노인도 벌떡 일으키고,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도 없어서 못 먹는다는 그 전설의 약초 말일세!

혼자 신이 나서 외쳐대는 볼크마에게, 댈런은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이오?"

"정말이고말고! 나, 볼크마 갈리오스! 돈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앞선다 자신할 수 있네!"

취기가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외치는 볼크마. 댈런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술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그걸 본 시에나가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댈런, 헛소문일 수도 있어. 아니, 헛소문일 확률이 높아."

"하지만 사실이기만 하면 일확천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겠지! 알아두게나, 모든 기회에는 위험이 공존하고, 강력한 위험이 도사릴수록 더 달콤한 보상이 따른다는 걸 말일세!"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비운 술잔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는 술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르비바흐의 만드레이크 군락이라.'

댈런은 알고 있었다.

취기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볼크마의 말대로, 이건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실 소문의 진위만 따지자면, 실상은 지금 퍼진 소문마저도 축소된 경향이 없지 않았다.

소문의 만드레이크 서식지에는, 수십 단위가 아니라 천에 가까운 만드레이크가 자라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댈런의 초점은 사건의 진위 여부에 있지 않았다.

'이건 벌써 일어날 이벤트가 아닌데.'

이 사건이 단순히 만드레이크 풍년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만드레이크는 체력과 마력을 증진시켜주는 전설의 약초.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심장을 파괴하는 비명을 지르는 마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만드레이크가 천 가까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경이, 저주받은 비명의 숲.'

대륙 한복판에 느닷없이 이 마경이 생겨나는 건, 게임이 중반부로 접어들어간다는 신호였다.

이건 천에 달하는 만드레이크의 비명이 근방 일대를 뒤덮고, 그 여파로 르비바흐라는 도시가 하루 아침에 주민들의 무덤으로 변해버리는 사건이자.

게임의 중반부 최악의 적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재의 마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전조였기 때문에.

정산(3)

대륙에는 네 명의 마녀가 있다.

불의 마녀, 재의 마녀, 뼈의 마녀, 그리고 깃털의 마녀.

겉모습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이들이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혈통으로 계승되어, 날 때부터 타고나는 특별한 이능.'

그 어떠한 수련이나 노력 없이도, 이들이 타고나는 이능의 크기는 어지간한 대마법사 수준에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재능만으로 큰 힘을 얻은 이들은, 어느 세계에서나 모난 돌로 취급되는 법.

동시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 역시, 어느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법칙이다.

때문에 자그마치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녀들은 수많은 억압과 사냥을 당해왔다.

오직 마녀라는 사실 하나만이, 그들이 핍박받는 유일한 이유.

그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처음 열네 혈통이었던 마녀는 당대에 와서 네 혈통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역사 이래 마녀들의 악행도 끊이지 않았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게 당연하다.

하물며 홀로 도시를 불태울 힘을 지닌 마녀들이, 억울한 핍박 속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수백 년 전, 핍박을 견디지 못한 마녀들은 끝내 사람을 향한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말았다.

그 강대한 힘에 불타 사라진 도시만 수십 개.

마녀를 향한 사람들의 증오는, 그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 뒤는 불 보듯 뻔했다.

사람들은 마녀를 위험한 존재라며 사냥하고, 마녀들은 더한 증오를 불태우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마녀와 인류 사이의 수백 년 역사는,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끝없는 악순환의 굴레 속.

유독 악명 높은 마녀의 혈통이 둘 있었다.

'뼈의 마녀, 그리고 재의 마녀.'

그중에도 당대의 재의 마녀는, 가장 간교한 방식을 동원해 대륙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존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만드레이크의 증식으로 새로운 마경이 탄생하는 이 사건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악신 에낙사구스와의 계약을 맺고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의미.

'원래라면 몇 년은 더 있어야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정상적인 흐름은 결코 아냐.'

댈런은 술잔을 톡톡 두드렸다.

어떤 변수가 생긴 것일까. 무엇이 그 마녀의 칩거를 이리도 일찍 깨뜨리게 만든 것일까.

볼크마의 술주정을 배경음악 삼아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지.'

어째서 몇 년이나 앞당겨 일어난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수가 무엇인지만큼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수백 회차의 플레이 동안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모니터 너머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변수.

그 변수는 다른 무엇도 아닌, 비정상적인 성장과 행보를 거듭하는 댈런 자신이었으니까.

"나도 같이 가겠소."

댈런은 빈 잔을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버번은 자연스레 한 잔을 더 따랐다.

갈색 액체가 든 술병은 벌써 반쯤 비어 찰랑이고 있었다.

"어어? 같이?"

"한몫 잡으러 르비바흐로 간다는 거 아니었소?"

"맞지, 맞아! 이 도시의 상단 지부는 이제 안정화되었으니, 새 사업을 찾아 떠날 참이었지!"

"그러니까 같이 가겠다고."

"······?"

취기에 알딸딸해진 볼크마는, 한 발 늦게 댈런의 말을 알아듣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럴 수가! 설마 자네가 내 상행에 동행해주겠다는 건가? 나야 더없는 영광이지! 맨손으로 고블린을 찢어 죽인 대전사, 청동 구역을 구해낸 영웅 댈런!"

"···내가 못 살아."

느닷없이 술집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치는 볼크마.

그 무지막지한 성량에 화들짝 놀란 시에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이 양반 취하더니 호들갑이 더 심해졌네.

그는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따라 알싸한 향을 품은 뜨거운 기운이 내려가며, 복잡해지는 머리를 번쩍 깨워낸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곳은 살아있는 세계다.

0과 1로 구성된 컴퓨터 게임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댈런이라는 거대한 변수에 의해, 그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복잡한 과정과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댈런 자신이 그 복잡함에 발을 맞춰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간단한 일이었지.'

댈런은 가만히 떠올렸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하고 난 뒤, 여관방 안에서 끄적였던 수많은 종이 더미를.

시체를 회수하고 돈을 벌어 일신의 무력을 끌어올리며, 종말의 가능성들을 앞서 차단하고자 했던 그때의 계획을.

지난 몇 주간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모두 그 여관방의 계획과 결단에서 출발한 걸음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다해낸 최선에, 이미 수많은 열매들이 맺힌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의 손에 부서져나간 종말의 초석들이, 지나온 발자취 위에 군데군데 흩뿌려져 있는 건 누가 봐도 명백했으니까.

'달라진 건 없다.'

이미 수없는 변곡점이 발생했음에도, 처음의 결심 자체에서 바꿔야 할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시체를 회수해 본신의 능력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능력을 기반으로 종말의 가능성들을 하나씩 처단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알던 미래가 끊임없이 뒤틀린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이 많은 변곡점들은 모두 그 자신이 빚어낸 것이었으니까.

변해가는 미래에 주저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놈들이 이렇게 움직여주는 게 오히려 반가운 일이지.'

댈런은 이미 종말을 향해 가는 갈림길을 몇 개나 막아낸 바.

이 상황에 종말의 주동자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놈들의 반응이 격해진다는 건, 곧 댈런이 종말에게 명백한 위협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달라진 건 없다.'

댈런은 다짐하듯 속으로 거듭 되뇌었다.

'만약 종말이 한 발 앞서 다가오려 한다면.'

그때는 그 앞서 다가온 다리째로 찍어, 똑같이 불구덩이에 던져버리면 될 일.

저도 모르게 사나운 미소를 머금으며, 댈런은 볼크마에게 재차 물었다.

"출발일은 언제요?"

"나흘. 나흘 뒤일세."

"나흘이라."

그 정도면 새 장비를 장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궁에서의 수많은 싸움을 통과하며, 르베론에게 받았던 갑옷과 무기들은 대부분 손상된 상태였다.

도끼는 마지막 일격 이후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갑옷은 군데군데 찢겨나간 채 피와 내장 범벅이 되어 잔뜩 녹이 슨 상황.

가벼운 천옷 차림인 그가 당장 들고 있는 건, 부러지기 거의 직전인 검 하나뿐이었다.

미스릴 제련소에 주문을 넣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흘 뒤에 상단 건물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

다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댈런은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술집을 나섰다.

그러더니 잠시 후, 갑자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

만취한 상인을 어떻게 쫓아낼지 궁리하던 시에나는, 그의 갑작스런 재방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울어졌던 고개는, 댈런이 등에 짊어진 커다란 물건을 보고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부탁 하나 하지."

"···뭔데?"

"전문가를 시켜서 이것 좀 열어달라고 해 주시오."

쿠웅!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손님이 없이 한적한 홀에, 거대한 금고 하나가 놓였다.

그 무식한 질량에 나무판자로 된 마룻바닥이 출렁였다. 왠지 작게 우지직 하는 소리도 들린 듯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시에나를 향해, 댈런은 슬슬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안에 나온 것들은 팔아서 나흘 뒤까지 현금으로 부탁하지."

"나흘 뒤? 진심이야?"

"그럼."

댈런은 장난기 다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신의 능력을 믿겠소. 대신 이번 일의 수수료는 충분히 받아가도록 하고."

"······."

이마를 탁 짚는 그녀를 뒤로 하고, 댈런은 빠르게 술집을 빠져나왔다.

둥지의 마녀라고 소문난 그녀의 분노를 견디게 될, 운 없는 만취한 상인에게 내심 애도를 표하면서.

***

까마귀 둥지를 나온 댈런은 곧장 미스릴 제련소에 들렀다.

아무리 이제 막 활동을 시작했다 해도, 마녀는 단신으로 족히 군대를 상대할 존재.

천옷에 다 부러져가는 칼 한 자루 들고 그런 존재와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기왕 장비를 장만할 거면, 신뢰할 수 있는 대장장이에게 맡기는 게 옳았고.

"댈런! 이게 얼마 만인가!"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나오는 르베론을 보며 댈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거 왠지 몇 주 전에 본 광경 같은데.

르베론은 잠시 쉬는 중이었는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댈런은 그에게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건넸다.

"미안하게 됐소. 영감이 만들어준 물건들, 그 사이에 전부 부숴먹었소."

"으하하! 그럴 줄 알았네!"

검을 건네던 댈런의 손이 멈칫했다. 그럴 줄 알았다고?

그의 반응에 르베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항상 올 때마다 그 전에 줬던 물건을 죄다 못 쓰게 만들어놓지 않나? 그래서 자네가 오기 전에 미리 다 만들어뒀지! 들어오게나!"

대장장이는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넣으며 댈런을 이끌었다. 그는 가게 한쪽 구석을 헤집더니 이내 저번처럼 큼직한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상자 안에는 튼튼해 보이는 갑옷과 방패, 검 한 자루, 그리고 손도끼가 들어있었다. 르베론은 갑옷을 먼저 꺼내들었다.

"갑옷은 튼튼한 천옷 위에 은철 사슬과 갑각늑대의 가죽을 덧대 만들었네. 가슴과 등, 어깨와 팔은 흑철을 얇게 펴서 보강했다네."

갑옷의 각 부위를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토해내는 설명. 댈런은 상의를 벗고 바로 입어보았다.

전보다도 더 편안한 착용감과 조금 더 묵직해진 무게감.

아무래도 그의 초인적인 근력을 고려해서 무게에 신경을 덜 쓰고 만든 듯했다.

"저번 검을 거의 걸레짝으로 만들었으니, 이번 검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 같네. 그래도 겉을 은철로 감싸고 심지를 흑철로 잡아두어, 이전보다는 훨씬 오래 버틸 걸세."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은철과 흑철은 귀하기도 귀하지만,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 금속.

게임 상에서 르베론이 저런 고급 금속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건, 못해도 튜토리얼이 끝나고 2년 이상 흐른 시점이었다.

"놀랍군. 어떻게 실력이 이리 날로 좋아지시오?"

"그야 다 자네 덕 아닌가! 이렇게 좋은 터에 완벽한 설비를 갖춘 대장간을 내어주고, 믿을 수 있는 재료 수급처까지 주선해줬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내 자존심이 안 서지."

르베론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과연 미스릴의 제련자인가.'

인생의 가장 깊은 계곡을 슬쩍 메꿔놨더니, 본디 그 계곡을 딛고 일어섰을 힘으로 산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버릴 줄이야.

전설적인 인물이 될 사람은, 역시 그 떡잎부터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텅텅!

흡족한 얼굴로 자신이 만든 무구를 두드려보는 대장장이의 모습을 보며, 댈런은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걸어온, 수많은 갈림길을 꺾어 선택한 이 길이 옳았다는 것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암울한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 뒤바뀌고, 예정되었던 미래가 흔들리는 건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댈런 자신도 인간인 이상, 격변하는 미래에 순간 당황하는 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할은, 이 변화를 더욱더 가속하는 것.

이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다가오는 종말을 유예시키고, 끝내 세계의 운명이라는 걸 뒤엎어버릴 수 있다면.

스릉―

"좋은 검이군. 도끼와 방패도 그렇고. 잘 쓰겠소."

"그러게! 아직 자네에게 빚진 금화가 반은 남았으니, 대금은 다다음 번에나 내도록 하게나!"

"고맙소. 오늘은 일이 바빠서 바로 가보도록 하지."

"그러게나. 나도 오늘은 밀린 잔업이 많아서! 으랏챠!"

얼마든지 지금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멸망의 사냥개들을 추적해, 그 숨통을 끊어놓으리라.

'그리고 그 끝에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 있겠지.'

댈런은 그리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는 대장장이를 등지고 가게를 나섰다.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

성기사단 지부에 도착한 건 밤이 다 되어서였다.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은장식이 특징인, 성기사단 건물만의 독자적인 양식.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그 화려한 양식을 응접실에서 감상하고 있자니, 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한쪽은 노년과 중년의 경계에 걸친, 주름이 자글자글한 인상의 남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지난 보름 동안 미궁을 함께 돌파한, 미래에 악마 살해자로 명성을 떨치게 될 성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댈런.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오."

루시아의 사과에 댈런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건물 양식이 멋지더군.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소."

"심미안이 깊으시군요. 은장식은 악마를 가르는 신의 빛을 뜻하고, 곡선과 직선은 그 빛의 부드러움과 뼈를 쪼개는 날카로움을 의미하지요."

남자는 주름이 부드럽게 잡히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댈런의 앞에 마주 앉았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행정관, 알버스라고 합니다."

"댈런이오."

댈런은 남자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검을 오래 잡아오신 모양이오? 성기사단의 행정관들 중에는 한때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던 이들이 있다 들었는데."

"허허, 기사직에서 은퇴한 지는 좀 되었답니다."

마물과의 전투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거든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이 넓은 바지를 슬쩍 걷어보였다.

거기에는 중년 남자의 털이 수북한 다리 대신, 매끈한 금속 재질의 의족이 달려있었다.

댈런은 그걸 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상당한 실력자군. 이 정도면 지부의 총책임자쯤 되겠어.'

저런 의족을 쓰면서도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나타냈다.

이 알버스라는 남자가, 한때나마 굉장한 실력의 기사였다는 것.

'성기사단은 실력과 경험을 무엇보다 중시하니까, 이 정도면 미궁도시의 지부를 총괄하기에 충분하지.'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알버스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작은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가 말했다.

"본디 귀하의 공로는 단장님께서 직접 치하하셔야 할 일이지만, 불가피하게도 부족하나마 이 지부를 대표하는 제가 대신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근래 성기사단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점 양해해주시기를."

긴 감사의 말과 함께 내미는 주머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알버스에게, 댈런은 마주 고개를 숙여 답했다.

성기사들은 신 앞이 아니고서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설령 제국의 황제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기에 성기사가 고개를 숙인다는 건,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행동이었다.

그것도 성기사의 길에서 은퇴한 뒤 미궁도시의 지부를 총괄하는 행정관의 목례라면, 어마어마한 의미가 담겨있을 터.

'그만큼 성기사단의 입장에서 이번 사건이 큰 의미를 가진다는 이야기겠지.'

고개를 든 댈런은 받아든 주머니를 슬쩍 열어봤다.

은실로 묶인 입구 안쪽, 반짝이는 금빛이 엿보였다.

금화였다.

"약소하게나마 금화 서른 닢입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요청하신 신성문신은, 제가 직접 추천장을 적어서 본단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 원하실 때 본단에 가시면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감사하오."

댈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신성문신의 값어치만 해도 금화로 환산하면 수백 닢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런데 잔금으로 금화를 더 얹어준다는 건, 분명 굉장한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성기사단의 정산은 끝나지 않았다.

덜컥.

테이블 위에 작은 함을 올리며, 알버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뭐요?"

"저희가 드리고자 하는 성의입니다."

성의라.

그런 말 들으면 보통 불안해지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보랏빛 사슬이 은색 천에 잘 싸인 채 들어있었다. 댈런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건 타락한 성물 아니오?"

"맞습니다. 사백 년 전 기사단이 잃어버린 할만의 사슬이죠. 악마의 마굴에서 귀하와 루시아 경이 가져오셨다 들었습니다."

알버스는 사슬이 담긴 함을 댈런 쪽으로 슬며시 밀며 말했다.

"비록 여전히 마기가 깃들어있는 상태이지만, 검증한 결과 사용자의 정신은 전혀 침범하지 않으니 상당한 수준의 보물이라 할 수 있죠."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할만의 사슬은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사슬로 묶은 대상을 강제로 굴복시키고,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따르도록 만드는 물건.

타락한 상태이건, 모종의 방법으로 그 타락을 씻어냈건 간에 그 기능 자체는 그대로였다.

유일한 차이점은 마기로 대상을 물들이느냐, 아니면 오히려 신성력으로 정화시키냐의 차이일 뿐.

"성기사단이 타락한 성물을 쓰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 오히려 귀하와 같은 영웅이시라면, 그런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도 이 보물을 세상을 구하는 데 사용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알버스가 테이블 위에 차분히 두 손을 올려둔 채 말했다. 그 곁의 루시아는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댈런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듣는 이가 소름돋게 만드는 웃음.

테이블 위에 놓인 행정관의 손이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움츠러드는 걸 보며, 그는 천천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행정관 양반."

탁.

함 뚜껑을 소리나게 덮인다. 알버스의 손이 움찔한 건 동시였다.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말로 하시오. 이런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릴 게 아니라."

천천히 미소를 머금어가며, 댈런은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빚을 지우는 일은 잘해도, 빚을 지는 일은 잘 못하거든."

상행(1)

파르르 떨리는 행정관의 손끝. 그리고 그걸 쳐다보는 댈런의 무감정한 눈.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테이블 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불편함이라기에는 과하게 팽팽하고, 긴장감이라기에는 조금 느슨한 정도의 정적.

"어휴."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행정관이나 댈런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알버스 삼촌, 제가 말했잖습니까. 댈런은 그런 식으로 구슬리는 게 통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한숨을 푹 내쉰 루시아가 알버스를 나무란다.

그녀는 손끝으로 함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댈런, 이건 그냥 제 선물로 받아주십시오. 미궁에서 제 목숨을 숱하게 구해주셨으니, 그 보답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선물?"

댈런은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답이랍시고 성물을 그냥 던져준다고? 그래도 되나?

"악마나 마물에게 빼앗긴 성물은, 그걸 탈취한 기사에게 소유권이 돌아가는 게 기사단의 법도입니다. 이건 제 손으로 타락기사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니, 제 뜻대로 댈런에게 넘기겠습니다."

함을 이쪽으로 밀어내는 루시아의 하얀 손을 보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성기사단에 그런 설정도 있긴 했지.

워낙에 잠깐 언급되고 넘어간 설정이기도 하고, 외부인에게 성물을 넘기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보니 잊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타락기사 이야기. 그거 마음대로 말해도 되는 거였소?"

"알버스 삼촌은 저를 업어 키우다시피 하신 분이니 괜찮습니다. 입도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무겁고요."

댈런은 알버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늦은 중년의 행정관은 여전히 눈가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댈런이 계속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였다.

"실례했습니다. 서리고원을 넘어온 북부인들 대할 때를 생각하다 보니, 귀하께 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뭐, 괜찮소. 그렇게 기분 상할 일도 아니고."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알버스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되물었다.

"···진짜 이런 사과 하나로 괜찮으신 겁니까?"

"그러면 내가 그쪽 귀라도 잘라서 받아가리?"

"아니, 아닙니다. 그저···루시아 경이 했던 말들이 과장이라 여겼는데, 정말인가 보군요. 영웅의 무력과 성자의 성푸―윽."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하얗고 긴 손가락.

"······."

부릅뜨고 째려보는 루시아의 푸른 눈동자에, 알버스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뭔데. 무슨 뒷담을 하고 다녔길래?

루시아는 가벼운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댈런. 기사단은 당신께 의뢰를 하나 더 맡기고자 합니다."

의뢰라. 성기사단의 의뢰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기사단이야말로 돈 많은 고객들 중 하나인 데다, 그가 원하는 물건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댈런은 테이블 위의 금화 주머니를 은실로 잘 묶어 허리띠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가볍게 되물었다.

"무슨 의뢰요?"

"댈런이 본단까지 성검을 운반해주셨으면 합니다."

성검을?

돈주머니를 허리띠에 묶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루시아는 낮게 말을 이었다.

"···기사단 내부의 누군가가 성검을 노리고 있습니다."

뭐 시발?

***

"며칠 전, 본단에서 보낸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루시아는 천천히 운을 뗐다.

"만약 성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면, 안전에 유의하며 그 성검을 본단으로 가져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특별한 내용은 아니다.

성기사단이 가진 수많은 성물들 사이에서도, 열두 자루의 성검은 단언컨대 가장 높은 지고의 보물.

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 하루 속히 제 자리를 찾길 바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심문관들만이 볼 수 있는 암호가 숨겨져 있더군요."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게, 심문관들의 역할은 기사단의 타락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라면, 보통 기사단의 내부에서 불거지는 어떤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암호는 도둑질, 습격, 배신이었습니다. 즉···."

"기사단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군."

끼이익.

댈런은 손을 머리 뒤로 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맞습니다."

루시아는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댈런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댈런."

댈런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성검을 되찾아달라는 의뢰도 모자라, 이런 부탁까지 하는 게 염치없다는 건 압니다. 허나 저 혼자서는 성검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루시아는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축 늘어뜨려진 금발이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마치 그녀의 절박함을 나타내는 듯.

어쩌면 성기사단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

끼익.

댈런은 뒤로 젖혔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시오. 성기사가 허리를 굽히는 건 부담스럽소."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두툼한 손이, 성기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일으킨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

입술을 꽉 깨문 새하얀 치아. 푸른 눈동자 아래 물기가 살짝 맺혀있었다.

여기서 눈물은 반칙이지. 댈런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자리에 다시 털썩 앉으며 알버스를 쳐다봤다. 그가 말했다.

"나는 용병이오."

톡. 톡.

의자의 팔걸이를 천천히 두들기는 손가락. 알버스는 조금 굳은 얼굴로 그 손끝을 응시했다.

"그리고 용병은 공짜로 일하지 않지."

"신성문신을 하나 더 받으실 수 있도록 추천장을 추가로 써드리겠습니다. 혹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선수금으로 금화 한 궤짝이라도 내어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까보다 좀 더 담백해진 어조. 댈런은 낮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화는 됐소. 선수금은 이미 받았거든."

그는 함 안에서 사슬을 꺼내들었다. 투박한 사슬은 그의 손이 닿자마자 불길한 보랏빛을 은은하게 뿜어댔다.

휘감은 대상을 주인의 의지에 복종시키고, 동시에 마기에 물들이는 할만의 사슬.

그 타락한 성물이, 댈런의 손길에 닿는 순간 그를 곧장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어찌 이리도 곧바로······?"

놀란 눈으로 그 현상을 쳐다보는 행정관 앞에서, 댈런은 사슬을 천으로 잘 말아 허리띠에 걸쳐두었다. 그가 말했다.

"다만 가는 경로는 내가 결정하겠소. 성기사단에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거든."

성기사단이 위치한 균열의 입구는 대륙의 남서쪽에 있다.

그리고 만드레이크 군락이 발견됐다는 르비바흐 역시, 공교롭게도 여기서 남서쪽으로 꽤 가야 나오는 도시.

성검을 운반하는 길에 재의 마녀를 처리할 수 있다면, 한 번의 여정으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일.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댈런은 사슬 걸린 허리띠를 슬쩍 추스르며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을 나서기 전,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흘 뒤에 출발할 거요. 그때까지 떠날 준비를 해두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은빛 물체.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물건을 잡았다. 용병패였다.

"이게 뭡니까?"

"바렛의 뒤통수를 친 그놈의 용병패요. 그걸 들고 까마귀 둥지로 가 내 이름을 대면, 그놈과 함께 바렛의 뒤통수를 친 이들이 누군지 찾아줄 거요."

루시아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댈런은 그걸 무덤덤하게 바라보다 문을 열고 나갔다.

끼이익.

천천히 닫혀가는 응접실의 문 사이.

"···고맙습니다."

작은 중얼거림이 닫히기 직전의 문틈으로 흘러나와, 댈런의 귓가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

나흘이 지났다.

댈런은 불필요한 짐을 죄다 처분한 뒤, 가벼운 차림으로 상행의 마차에 올랐다.

놀랍게도 그 짐의 반 가까이는 금화가 담긴 궤짝과 주머니였다.

악마의 정수를 넘기고 받은 백팔십 닢과, 성기사단에게 받은 서른 닢의 금화.

도합 이백 닢이 넘어가는 거금은, 출발 직전에 시에나가 물건 대금이라며 전달한 금화로 인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풀어버렸으니까.

이로써 평범한 장정이면 아예 드는 것조차 힘들어져버린 그의 배낭.

그 속에는 금화뿐 아니라, 그 금화의 가치에 상응하는 계약서 두 장도 곱게 접혀 들어있었다.

한 장은 성기사단과 작성한 성검의 운반 의뢰 계약서.

그리고 다른 한 장은 갈리오스 상단과 맺은 호위 의뢰 계약서였다.

'금패 용병으로 상단 호위를 맡은 건 처음이군.'

팔시온에 도착한 뒤로는 도시에서 나간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시에 들어올 때도 갈리오스 상단과 함께였었지.

어느새 그때로부터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나있었다.

원체 수많은 사건들이 정신없이 터지고 해결되다 보니, 약간은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마차의 창문덮개 틈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가, 그 지나간 시간들을 스르르 설명해주는 듯했다.

도시 남쪽으로 뻗은 이 대로를 반대로 따라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아직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완연한 한겨울인 지금처럼 춥지는 않았으니까.

"댈런은 춥지도 않으십니까?"

루시아가 입에서 김을 후후 뱉으며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마차 안에는 난방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의 벽과 지붕이 눈이나 칼바람 정도는 막아주겠지만, 이런 한겨울의 추위까지는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오히려 마차 안이 더 추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걸어가며 몸을 움직여 체온을 덥히는 바깥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가만히 앉아,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게 움직임의 전부였으니까.

물론, 애당초 추위라는 것 자체가 댈런 자신과는 상관없는 단어였지만.

"추위를 잘 안 타서."

"이 날씨에도 추위를 안 탄다니, 북부인들은 다 그렇습니까?"

"글쎄. 그건 모르겠군."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애당초 그가 추위를 안 타는 건, 북부인의 피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유였다.

'용들은 보통의 더위와 추위 정도는 아예 느끼지 못한다네. 자네가 말한 부작용을 들어보니, 그게 용의 피에서 비롯된 체질이라는 학계의 이론이 사실이었나 보군.'

미궁에서 돌아와 엘가이아 마탑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 그의 방을 방문한 펠버 발렌티노가 했던 말이었다.

'책을 몇 권 가져왔으니, 가져가서 한 번 읽어보게나. 자네 같은 전사라면 자기 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지.'

그렇게 덧붙이며, 두꺼운 전공서적 같은 장서들을 건네주기도 했고.

'그 사람도 참 재미있는 양반이야.'

금화를 제외하고, 그의 짐 무게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책들을 떠올리며 댈런은 슬슬 웃었다.

땅의 기억에서 그의 옛적 모습을 읽어내지 못해, 당황하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레 겁을 집어먹거나, 좀 영악하다면 그걸 약점으로 이용하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그러나 펠버는 그 이후로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힘썼다.

'자네 같은 영웅의 앞길에, 이런 늙은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그가 남겼던 말이 떠올라, 댈런은 무심코 피식 웃었다.

요새 종종 생각하는 일이지만, 정말로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르베론이나 시에나, 루시아처럼 그가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이들이 있었다면.

펠버 발렌티노나 토미 발렌티노, 아니면 페니처럼 의도되지 않은 비틀림 역시 존재했다.

'볼크마 갈리오스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지.'

사실 댈런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갈리오스 상단의 이름조차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아마 갈리오스 상단의 예정된 미래가, 텔리아 상회에 잡아먹히는 운명이었기 때문이겠지.

텔리아가 갈리오스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건 튜토리얼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

그리고 기본 캐릭터로 플레이했을 경우, 그 시기는 잡다한 용병 의뢰나 하며 레벨업을 하고 돈을 모을 때였으니까.

그 시점에 팔시온에서 텔리아에 맞서 상권을 경쟁하던 볼크마의 운명 역시,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괴인이 되거나, 아니면 그냥 죽었겠지.'

수백 번의 회차 속에서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운명.

그저 한 사람일 뿐인 그의 손에, 그런 운명들이 벌써 몇이나 바뀌고 있는 것인가.

괜히 어깨가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에, 댈런은 절레절레 고개를 털어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 창문덮개를 가볍게 두드렸다. 댈런은 느릿하게 창문을 열었다.

상행(2)

휘이이―

열린 창문으로 파고드는 한겨울의 찬바람.

창밖에는 소년 용병이 마차 곁을 따라 걷고 있었다.

"뭐지?"

"부,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상단주님께서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소년은 힘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댈런의 덩치와 낮고 굵은 목소리에 약간 겁을 먹은 듯했다.

아직까지 미등록 용병인 소년의 입장에서는, 한참 아득해 보이는 금패 용병의 신분 역시도 한몫했을 테고.

"없다고 전해드려라."

"···앗, 그,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 봐라."

"상단주님께서 이걸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수수한 술 장식이 달린 작은 나무 상자였다.

댈런이 상자를 받아들자, 소년 용병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상인도시 베닐, 아니 베닝헴에서 유행하는 간식거리라고 하셨습니다. 꿀 대신 사탕수수 당액을 사용한 과자인데, 무료하실 때 드시라고···."

"알겠다. 고맙군."

슥슥.

창밖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두터운 손. 얼어붙은 머리칼이 곰 앞발 같은 손아귀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이름이 뭐랬지?"

"파른입니다."

"나이는?"

"이번 생일에 열넷이 됩니다."

소년은 이제 막 변성기가 오기 시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에서도 아직 앳된 티가 다분했다.

댈런은 상행이 출발하기 전, 서로를 잠깐씩 소개한 기억을 되짚어보며 말했다.

"음, 기억났다. 미등록 용병 파른. 이번이 세 번째 의뢰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만 끝나면 동패를 달겠군. 축하한다."

소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움과 기쁨, 예상치 못한 축하에 대한 당황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댈런은 그걸 보고 낮게 웃었다.

거친 일이 일상인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대에 따라오는 순수함이 바래지 않은 모습.

이제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고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모습에, 댈런은 빈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는 상자 속 과자를 큼직하게 한 움큼 집어 주머니에 넣고는, 입구를 잘 묶어 소년에게 건넸다.

"이건 몰래 먹어라. 상단주께는 내가 잘 먹겠다 했다고 전해드리고."

"가, 감사합니다!"

"쉿. 몰래 먹어야 한다. 얼른 가 봐라."

댈런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어주었다.

열린 창문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의외입니다."

"뭐가?"

"미궁의 악마나 성기사단의 행정관 앞에서는 그토록 강력하고 사납기까지 한 댈런이, 소년 앞에서는 갈대처럼 부드럽다는 점이요."

댈런은 피식 웃었다. 루시아는 따라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워낙 대식가시기에, 누가 뭐래도 먹을 건 양보하지 않는 성격인 줄 알았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요?"

"성기사 앞에서 불경한 말은 삼가주시죠, 댈런."

첫만남에서 쌍욕부터 들려주던 사람이 뭐 어째?

댈런은 황당한 표정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창문을 열고 딴청을 피웠다.

댈런도 이내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긴 행렬이 펼쳐져 있었다.

말과 노새, 짐마차, 수레, 그리고 사람의 행렬.

갈리오스 상단의 상행 규모는 도시로 올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다.

'용병도 예순 명쯤이나 고용했지.'

육십 명이나 되는 칼잡이. 거의 작은 군대나 다름없는 숫자다.

용병들 대부분은 행렬의 외곽을 빙 둘러서 호위하고 있었다.

동패 용병, 혹은 아까 소년처럼 아직 미등록 신분으로 활동하는 용병들이었다.

동패는 외곽을 둘러싼 채 걷고, 은패는 말이나 짐마차 위에서 교대로 경계를 선다.

댈런 같은 금패 용병이 만약 끼어있다면, 아예 상단 측에서 따로 마차를 마련해 모셨다.

실력과 실적에 따라 명확하게 차등을 두는, 이쪽 업계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평화롭군요."

문득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말없이 과자를 입에 넣었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면서, 다리를 움직여 천에 싸서 놓아둔 성검을 의식적으로 확인했다.

과자는 빵집에서 파는 곰돌이 쿠키 같은 맛이었다.

***

상단은 일주일 정도 별 탈 없이 남하했다.

루시아의 말대로 나흘간은 정말 평화로웠다. 미궁도시의 순찰권 안에서는 흔한 도적마저도 드물기 때문이었다.

순찰권을 벗어나자 도적이나 고블린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행에 큰 지장은 없을 정도였다.

애당초 이 상행은 평범한 도적이 노리기에는 지나치게 큰 먹이였기 때문이다.

용병만 육십에, 상단 측 일꾼들까지 칼을 들면 백수십에 달하는 병력.

멋모르는 도적들의 습격이 두어 번 있긴 했지만, 용병들이 무기를 뽑고 달려들자 놈들은 곧장 꽁지를 말고 달아났다.

댈런이나 루시아가 나설 것도 없었다.

그렇게 팔시온을 떠난 지 여드레째가 되었다.

"흐아암."

루시아는 하품을 쩍 했다.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댈런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마차의 진동에 따라 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심심하지도 않으신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처음 상행에 합류할 때까지만 해도, 무려 마차를 제공해준다는 말에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마차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자, 그녀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비좁은 마차 안에 하루종일 있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온도도 바깥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추운 마차 안.

마차 여행이라기에 편하게 내심 편하게 누워서 가는 걸 기대했는데, 눕기는커녕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반평생 육체를 연단해온 성기사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마치 좁은 창살 안에 갇힌 새가 된 느낌.

설령 그 모든 걸 참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마차 여행이 고역인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심심해.'

바로 너무 무료하다는 것.

'걸어서 여행할 때는 그나마 여기저기 둘러보고, 작은 일이라도 직접 하는 맛이 있었는데.'

도보 여행은 말이 여행이지, 또 하나의 수행이나 다름없었다.

멈추지 않고 걸어나가야 하고,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해가 떨어지기 전에 노숙할 곳을 찾아 천막과 불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상행에 동참한 지금, 그 모든 일은 상단의 일꾼이나 용병들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좋아하던 요리까지 상단 소속의 일꾼들이 뚝딱 만들어서 가져다줘버리니,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기도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는 본단에서 늘 하던 아침과 저녁 기도만 해도 버거웠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밖에 나가서, 상행을 따라 걷기라도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히히힝―!

말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 하고 멈췄다.

순간적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

정신이 번쩍 들며,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동패는 전원 앞으로! 은패는 특기에 따라 자리를 잡아라!"

"무, 무슨 일이오!"

"수레에 실린 무기를 내려라! 일꾼들을 무장시켜! 상단주께선 어디 계신가!"

아수라장이 된 상단의 행렬.

용병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당황한 상인들은 그들 중 아무나를 붙잡고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루시아는 빠르게 신성문신을 활성화시켰다.

오감이 한껏 예민해지고, 손발에 청명한 기운과 함께 힘이 솟았다.

그리고 칼잡이들이 흔히들 육감이라고 부르는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사람과 짐마차들 너머를 응시하고.

양옆의 숲 사이로 난 대로 저 끝에, 녹색의 물결을 포착하는 순간.

"습격! 습격이다! 전방에 오크 팩!"

짐마차 위에서 경계를 서던 은패 용병이, 상행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치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

댈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심상 너머, 환상세계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있었다.

현실에서 멀어져 무방비해지는 상태이지만, 기습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초인적인 감각과 지능 수치로 무장한 몸뚱이는, 그의 의식이 먼 우주를 여행하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현실의 자극과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으니까.

"흠."

그리고 지금, 그가 눈을 뜬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였다.

"댈런! 댈런!"

루시아의 외침이 귀를 찌른다. 댈런은 순식간에 감각을 확장시켰다.

내면으로 쏠리던 감각이 날개 돋친 듯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행렬 전체를 넘어 숲과 그 사이에 난 대로까지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그의 감각권에 사로잡혔다.

화살 한 바탕 거리보다 좀 더 먼 지점.

가볍고 무거운 발구름을 위시한, 우글거리는 생명체의 기척들.

"댈런! 일어나십시오! 습격이···."

"오크들이군. 길 앞뒤로 막아섰어. 숲 사이로 난 길이라는 이점을 이용할 생각인 듯하오."

루시아가 약간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능숙하게 갑옷 끈을 조이고 무기를 허리에 차며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용병들이 앞으로 쏠리고 있소."

마지막으로 천에 싸인 성검을 가죽끈으로 등에 멘 그는, 우악스런 손아귀로 마차 지붕을 잡았다.

그리고 한 번 힘을 주는 것만으로 몸을 튕겨 지붕 위에 올라섰다.

"우아악!"

지붕 위에서 활을 들고 자리 잡은 용병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댈런은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상행은 숲 사이로 뻗은 도시연합의 대로를 가던 중이었다. 대로는 잘 정비되었지만 좌우로 넓지는 않았다.

상행의 앞길을 가로막은 오크는 대략 백 마리. 고블린은 그 두 배쯤 되었다.

놈들은 거친 몸짓으로 몰려오며 땅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상단의 용병들은 죄다 그리 몰려가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전방과는 다르게, 상행의 뒤쪽은 언뜻 잠잠해 보였다.

그러나 댈런의 예민한 감각은,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오크들의 거친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상행의 용병들과 칼 든 일꾼들이 행렬의 앞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놈들은 그제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 숫자는 대략 삼백.

고블린 하나 없이, 순수하게 오크로만 구성된 무리였다.

'머리를 잘 썼군.'

댈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영악한 지휘관을 둔 게 틀림없었다.

루시아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뒤쪽에서 나타나는 오크들을 보고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댈런은 그녀에게 말했다.

"상행의 전방 방어선에 합류해주시오. 상단의 전력으로는 백에 달하는 오크를 상대하기 버거울 거요. 그리고 앞으로 갈 길이 머니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하오."

"하지만 그러면 뒤쪽이 비지 않습니까?"

"뒤는 내가 맡겠소."

루시아는 미간을 좁힌 채 그를 쳐다봤다. 댈런은 그냥 씩 웃어주었다.

젊은 성기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검을 꽉 잡으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말했듯이 아군 피해가 최소화되어야 하오. 믿겠소."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녀는 팔다리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행렬의 앞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댈런은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상행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어있던 오크들은 이제 전부가 대로 위에 올라서 있었다.

전방에서 온갖 소란을 다 일으키며 달려오는 동족들과는 달리, 놈들은 조용하게 속보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앞으로 시선을 끌고 소리 없이 뒤를 친다는, 간단하지만 놀랍도록 효과적인 작전.

그리고 지능이 떨어지는 오크들이 이런 작전을 효과적으로 쓰고 있다는 건, 곧 놈들의 두령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증거였다.

'누가 지휘관일까.'

댈런은 도끼를 뽑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크 무리를 훑기 시작했다.

투쟁심 강한 오크 종족의 특성상, 지휘관은 반드시 부하들과 함께 돌격하는 법.

비록 놈은 삼백에 달하는 초록색 파도 속에 묻혀 있을 터이나, 그 정도로 댈런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기 있군.'

그리고 댈런은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대한 근육질의 초록색 덩치들 사이, 유독 특별한 외양이 눈에 띄는 두 개체를.

한 쪽은 뼛조각과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커다란 나무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는 오크 주술사.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거의 삼 미터에 달하는 키에 성인 장정만큼이나 커다란 대검을 든 오크 전사였다.

[어리숙한 용병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벼락을 부르는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두 오크의 머리 위에 각각 뜬 알림창을 보며,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그는 손도끼를 어깨 너머로 들어올렸다.

지휘관은 둘. 도끼는 하나.

찰나의 시간 동안, 그의 두뇌가 두 놈 중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패래래랙―!

빛의 원반이 쏜살같이 대로 위를 날아가고.

"루크샤······어억!"

뭔가 주문을 외던 오크 주술사의 고개가 뒤로 팍 꺾였다.

쿵.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오크의 거대한 몸뚱이.

놈의 이마 위에는 나무 손잡이가 그 날을 단단하게 뿌리박은 채 자라나 있었다.

상행(3)

주술사가 쓰러지자 오크들이 순간 주춤했다.

놈들은 머리에 도끼를 꽂고 죽어버린 자신의 지휘관을 멀뚱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넘들이 도끼 날린다! 오크는 덜격! 덜격한다아!"

어눌한 발음으로 거대한 오크 전사가 외치자마자.

구어어어!

그 외침에 호응하듯, 오크 무리 전체가 전의를 불태우며 고함을 질러댔다.

두두두두―

삼백의 녹색 거체들이 지면을 진동시킨다. 놈들은 칼과 도끼를 치켜들고 대로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들은, 대로를 막아선 거구의 전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살의로 번뜩이는 시선의 중심.

댈런은 적당히 마차들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스릉―

그는 검을 뽑아 양손으로 쥐었다. 르베론이 흑철과 은철을 섞어 만든 검이었다.

마치 단단한 거목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지면을 굳건하게 딛고 선 두 발.

밀려오는 녹색 파도 앞에서, 댈런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습―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어깨에서 시작된 기운이, 손끝까지 내닿는 건 한순간.

휘익―

가로로 길게 그은 검격은, 녹색의 파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쩌저저저정―!

오크들이 들이민 무기가 산산조각 나며, 금속의 폭풍이 되어 녹색 파도의 선두를 덮쳐들었다.

그워어어어!

피투성이가 된 오크들이 땅을 나뒹군다.

아무리 오크의 육신이 단단하다 해도, 쏟아지는 화살비를 견뎌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의 폭풍은 화살비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 기사왕 중 한 명이 직접 창안했다 알려진 라판텔라의 분쇄검.

최하급이라지만 악마의 육신마저 갈아버린 그 검격을, 맨몸뚱이로 받아내고도 멀쩡한 오크는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꽈광!

판석을 부수고 섬전처럼 날아간 댈런의 신형이, 흐트러진 녹색의 물결을 그대로 파고든다.

콰직―

거칠게 휘두른 검이 거대한 오크의 허리를 단번에 토막 내고.

좌자자자작―!

한 박자 늦게 폭풍이 몰아치며, 허리 잘린 놈의 뒤에 있던 오크들이 죄다 갈려나간다.

콰지지직!

검격 한 번에 오크 다섯이 쓰러진다. 다음 일격에는 일곱이었다.

놀 전사장을 쓰러뜨리고 계승한 라판텔라의 분쇄검은, 악마와의 싸움을 거치며 실전에서도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습―

들이쉬는 짧은 호흡.

팔을 내달리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안 그래도 무거운 검을 십수 배는 더 무겁게 만든다.

팔과 손목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내질러, 어떤 방어도 뚫어버리는 검격으로 화하는 것이 분쇄검의 근본.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치는 것만으로도, 그 무기를 깨뜨리고 그 뒤의 상대마저 부숴버린다.

방어마저 곧 공격의 일부라 여기는 분쇄검의 묘리는 그런 의미였다.

콰르르르르!

검풍에 빗겨 맞은 대로에서 판석이 우르르 깨져나간다.

살과 피의 폭풍은 날카로운 돌조각의 폭풍이 되어 더 많은 오크들을 휩쓸었다.

아직 검술의 숙련도가 부족해 영역의 힘을 접목시킬 순 없으나, 만약 가능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는 위력.

그 압도적인 위력의 검술 앞에, 벌써 백여 마리에 달하는 오크가 시체가 되었다.

그어어어―!

눈앞에서 동족들이 죽어감에도 오크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오크는 싸움 그 자체를 삶의 목표 중 하나로 삼는 종족.

동족들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쓰는 것 정도로, 그들의 사기를 꺾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잉가아아아안!"

그리고 부하들이 맥없이 죽어나가는 걸 더 지켜볼 수 없었던 걸까.

여태껏 한 걸음 뒤에서 싸움을 관망하던 거구의 오크 전사가, 어눌한 발음으로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잉간! 죽이고 먹는다!"

후웅―!

거대한 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어온다.

삼 미터쯤 되는 오크의 덩치에, 성인 장정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의 조합.

그 무식한 힘과 질량의 일격은, 댈런이라도 맞으면 두 쪽 날 법한 기세였다.

댈런은 그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올려 그었다.

꽈아앙!

격검의 충격으로 발 아래 판석에 금이 가고, 은철과 흑철을 섞어 만든 검이 출렁거린다.

그 결과는 명백했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오크의 팔과 대검. 훤히 드러난 놈의 근육질 가슴팍.

올려 긋는 것보다 내려치는 힘이 배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오크의 근력이 댈런에게 압도적으로 밀린 것이었다.

"이, 잉간, 거인의 힘···!"

"시끄럽다."

콰직―!

댈런은 검을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사선으로 쪼개진 오크의 상반신이 쿵 하고 지면에 떨어졌다.

구으······.

단 한 차례의 공방으로 죽어버린 지휘관. 오크들은 그제야 벌건 눈을 큼직하게 뜨고 주춤대기 시작했다.

댈런은 놈들을 보고 씩 웃었다. 그의 발이 피투성이 판석을 즈려밟았다.

그리고.

꽈아앙!

주춤거리는 녹색 물결 안으로, 전사의 신형이 다시금 파고들었다.

***

전투는 머지않아 끝났다.

댈런이 삼백에 달하는 오크를 몰살할 동안, 상행 앞쪽의 용병들 역시 방어선을 구축해 오크와 고블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막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솟고 하는 거! 그것도 성기사님이 가지신 문신의 능력인가요?"

"아니. 그건 전투기도의 힘이야. 성기사라면 누구나 전쟁의 신께서 내려준 신성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돕는 기도를 익히거든."

댈런은 오크 시체를 뒤적이다 고개를 돌렸다. 마차 사이로 돌아나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하나는 파른이라는 소년 용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루시아였다.

루시아 곁에서 신나게 떠들던 소년은, 댈런을 발견하고선 움찔하더니 입을 꼭 다물었다.

댈런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덩치 큰 용병 삼촌보다는 예쁜 성기사 누나가 더 좋다 그거냐?

실없는 생각을 하는 그에게 루시아가 다가왔다.

"이 많은 오크들을 혼자 처리하신 겁니까?"

"오랜만에 몸을 풀 기회였소. 나쁘지 않더군."

"···오크 수백 마리가 몸풀기라니. 댈런도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루시아는 어이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용병들 말로는 그쪽의 활약이 컸다고 하던데."

"방어선을 지켜내는 전투는 성기사의 특기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상단 앞쪽에서 벌어진 전투는, 사실상 루시아의 활약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성문신으로 스스로를 강화한 데 이어, 그녀의 전투기도가 용병들의 사기와 능력 전반을 끌어올린 것.

매번 댈런의 페이스에 휘말려, 고작 둘이서 강력한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만 했던 미궁에서와 달리.

방금의 싸움은 그녀의 전투기도가 빛을 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전투기도의 결정적인 장점이, 바로 대상 범위니까.'

전투기도의 기본 효과 자체는 약간의 사기 진작에 활력 회복 정도가 끝이었다.

그러나 다른 스킬들에 비해 조금 뒤떨어지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대상 범위는 성기사의 전투기도가 사기 스킬 소리를 듣게 하기 충분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에서 수천까지.

성기사의 능력에 따라 그 범위는 끝을 모르고 확대되곤 했으니까.

약간의 사기 진작 효과라도, 그 범위가 수백 이상이 되는 순간 효용성은 차원이 달라지는 법이다.

"성기사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성기사님."

때문에 용병들은 루시아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곤 했다.

루시아는 살짝 웃어보이며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그때 오크 시체를 툭툭 발로 차보던 소년이 물었다.

"왜 대로에서 이런 마물들이 날뛰는 거죠?"

"음, 일단 오크는 마물이 아니야. 이들이 키우는 고블린만 마물이지."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시아는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물들과 달리 오크의 고향은 대륙 북동쪽의 세계의 이빨 산맥이란다. 오크는 원래부터 악한 종족이 아니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잖아요! 말도 어눌하게 하고요."

"오크들은 원래 싸움을 좋아해. 그리고 이 오크들은 고향을 너무 오래 떠나있었어. 그 때문에 여러 부분이 퇴화했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습격하는 거지. 세계의 이빨 산맥에 사는 오크들은, 이들과 달리 능력뿐 아니라 지성도 더 뛰어나단다. 동부의 스타파 왕국이랑 무역을 할 정도로."

스륵. 스륵.

부드럽게 머리를 문지르는 손길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고운 목소리.

쌍욕을 입에 달고 지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댈런은 무심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들은 루시아가 푸른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댈런은 뭐 어쩌라는 듯 뚱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봤다.

그렇게 잠시 있자, 루시아는 먼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마물의 활동이 정말로 확장되고 있기는 한가 봅니다. 오크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대로를 점거했다는 건, 원래의 세력권에서 밀려났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런가 보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턱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해.'

사실 튜토리얼이 끝난 시점부터 몇 달간은, 대륙 곳곳에서 마물이 한 차례 준동하는 시기다.

흔히들 1차 침공이라 부르는 이 시기는, 제국과 왕국들이 각자 마물의 침공을 대비해 철저한 방비를 하는 기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각 나라들이 긴장감을 느슨하게 풀 즈음, 놈들의 대대적인 2차 침공이 전 대륙을 강타하지.'

마치 큰 지진 전에 작은 지진이 오는 것과 같은 모양새.

그러나 수백 회차에 이르는 댈런의 경험은, 오히려 지금의 준동이 작은 지진보다 큰 지진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1차 침공 때 이 오크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댈런은 이 오크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오크 주술사와 전사가 이끄는, 오백 정도 규모의 오크 부락.

도시연합 남서쪽의 산지에 자리 잡은 이 부락은, 본디 2차 침공 전까지는 한 번도 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그래서 플레이 초중반에 용병 길드 토벌 퀘스트 중 하나가, 종종 상인들을 털어먹는 이 부락에 쳐들어가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것일 정도.

'거기다 두 오크 대장의 능력을 봐도 절대 만만한 놈들은 아니지.'

비록 지금의 그에게 순식간에 목숨을 잃긴 했지만, 보통의 플레이에서 이 오크들은 만만찮은 강적이었다.

고인물인 댈런조차 토벌 퀘스트를 하다가 각각 한 번씩 목숨을 내어줬을 정도니까.

[어리숙한 용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1]

[벼락을 부르는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마력 +2, 쏘아지는 번개(D)]

심지어 계승 보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마법사의 경우 꽤나 잘 성장한 캐릭터였다.

이런 존재들이 제 터전을 잃고 쫓겨났다는 건, 지금 마물의 준동이 댈런이 익히 알던 1차 침공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군.'

댈런은 슬슬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일찍 활동을 시작한 건 재의 마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라는 변수의 파급력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전 대륙에 스며들고 있을지도 몰랐다.

"댈런! 다시 출발합니다!"

그때 루시아가 외쳤다. 그녀는 어느새 마차에 타는 중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슬쩍 털고는 마차로 향했다.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는 차차 알아가면 되는 일.

당장은 눈앞의 일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

상행은 계속해서 대로를 따라 남하했다.

이들이 르비바흐에 도착한 건, 오크 습격이 있고서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침부터 성문 앞은 수많은 인파들로 바글거렸다.

만드레이크에 대한 소문이 슬슬 퍼져나간 터라, 이 기회를 통해 한몫 잡고자 하는 상인들이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것이다.

덜컹덜컹! 쿵!

히히히힝―

때문에 성문 앞은 짐수레의 덜컹거림과 노새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고함이 끊이지 않고 울려퍼졌다.

그 시장통 분위기에 경비대는 검문을 반쯤 포기한 듯, 짐 검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사람들을 들여보내고 있었고.

물론 저들 독단으로 그러는 건 아닐 테였다.

아마 검문 자체보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우선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겠지.

만드레이크에 대한 소문은 상인들뿐 아니라 도시 차원에서도 한몫 크게 챙길 수 있는 기회.

모여든 상인들에게서 걷히는 세금만 계산해도, 이 작은 도시 재정은 작년의 몇 배쯤 늘어날 전망이 보였으니까.

그렇게 갈리오스 상단의 호위 의뢰가 마무리된 곳은, 도시에서 가장 좋은 여관 1층의 주점이었다.

루시아와 함께 앉아 식사를 주문한 댈런은, 큼직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주점을 둘러봤다.

여관 술집이 붐비기에는 조금 이른 점심때.

그러나 주점의 공기는 벌써 왁자지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온 상인들이 작은 술잔을 앞에 놓은 채 돈이 될 만한 정보를 교환하고.

그들의 호위로 온 용병들은 보수금으로 받은 은화를 털어서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해 떠들어댄다.

"으차, 늦어서 미안하네. 생각보다 정산이 오래 걸렸지 뭔가."

그때 볼크마가 땀을 닦으며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주머니 두 개를 풀어 댈런과 루시아 앞에 각각 내려놓았다.

"여기 보수금일세. 두 사람 모두 2플로린 50실링. 원래 계약은 2플로린이지만, 오크와의 전투에서 두 사람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조금 더 넣었네."

"고맙소."

댈런은 주둥이를 슬쩍 벌려서 주머니 안을 확인해보았다. 은화가 수북한 가운데 금화 두 개가 섞여 있었다. 그는 주둥이를 잘 묶어서 품에 넣었다. 루시아도 주머니를 챙겼다.

그 사이 볼크마는 도수 낮은 맥주 한 잔을 주문해 한 모금 마시고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자네들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재의 마녀(1)

"일단 며칠 정도 머물 예정이오."

댈런은 양갈비 하나를 집어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갈비는 이 주점에서 가장 비싼 요리였다.

고기를 한 번 얕게 훈연한 다음, 약초에 감싸서 네 시간을 쪘다고 하던가.

댈런은 음식을 내온 종업원의 설명을 되새겨보며 갈빗대를 끝에서 끝까지 한 입에 훑었다.

"음."

부드럽게 찢어지는 살결 사이로 입안 가득 육즙이 흘러나온다. 양고기 특유의 잡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약초의 은은한 풀뿌리 향을 짙게 머금은 육즙이 입안에서 감칠맛을 돋궈주었다.

"며칠이라도 쉰다니 다행이구만. 쉴 땐 확실히 쉬어줘야 하네. 특히나 이번처럼 긴 여정을 전후로는 더더욱 그렇지."

볼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갈비를 더 시켰다. 그리고 본인도 갈빗대 하나를 집고서 물었다.

"그럼 두 사람은 계속 동행하시는 겐가?"

"예. 댈런이 성기사단의 의뢰를 받고 있는 동안은 함께할 예정입니다."

대답한 건 댈런이 아니라 루시아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옆을 쳐다봤다.

댈런은 입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리며 다음 갈빗대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시선을 받은 그는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다시 말없이 고기에 집중했다. 이 집 양갈비 참 맛있게 하네.

"성기사단의 의뢰라니? 혹시 나도 들을 수 있겠나?"

볼크마가 눈을 반짝였다. 루시아는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의뢰의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예민한 사안인지라."

"하긴, 성기사단의 의뢰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미안하네. 내가 주제넘었어."

볼크마는 빠르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즈음 종업원이 양갈비 요리를 새로 내어왔다.

어느새 갈비 세 개째를 헤치운 댈런은 자연스럽게 새 접시로 손을 뻗었다. 금방 나오는 걸 보니 비싸도 인기가 많아, 미리 조리해두는 듯 보였다.

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계속했다. 테이블 위에는 양갈비와 스튜, 고기 파이, 맥주가 끊임없이 채워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볼크마는 말이 많아졌다. 도수 낮은 맥주 한 잔에 취해버린 것이다.

상인들이 쏟아지는 바람이 공급이 많아져 도시 물가가 내려갔다느니, 곧 열릴 특별 경매에 만드레이크가 무려 세 뿌리나 올라올 거라느니.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죄다 상인들이 좋아할 법한 내용뿐이었다.

까마귀 둥지에서 그 주사를 한 차례 경험해본 댈런은, 별 대답 없이 묵묵히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애매하게 중간에 끼인 루시아만 곤란해할 뿐이었다.

취한 상인의 수다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다보니, 그녀는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 꼴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얼굴이 홍당무처럼 물든 볼크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하하! 그럼 나는 먼저 올라가 보겠네. 하루쯤 여독을 풀고 내일부터 제대로 일을 시작해봐야지. 점심값은 내 앞으로 달아뒀으니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시다가 쉬러 가게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관 위층으로 올라가는 상인.

댈런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종업원을 불러 양갈비와 비싼 병술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때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일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미궁도시를 떠나기 전, 댈런은 르비바흐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걸 그녀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그게 정확이 어떤 일인지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을 뿐.

댈런은 싹싹 발라먹은 갈빗대를 그릇 위에 올려놓고 대답했다.

"마녀를 죽일 것이오."

루시아의 눈이 큼지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