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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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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

거센 바람과 눈보라.

깎아지른 절벽 너머 만년설 덮인 산봉우리들.

대자연의 경이에 압도될 만한 정경이었으나, 방금까지 초월자들의 전장에서 구르다 온 댈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설산의 낡디 낡은 오두막은 여전했다. 그 뒷마당과 사냥꾼의 이런저런 도구들까지도.

지난번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와 다른 점은 딱 하나뿐.

"···때가 되었나."

바로 오두막의 뒷마당에 선 존재가, 거구의 남자가 아닌 로브를 두른 마법사라는 사실이었다.

"이곳도 참 오랜만이야. 정겨운 장소. 내 기억의 시작점."

회백의 투사가 그랬듯, 로브 차림의 남자 역시 뒷마당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뜯어봤다.

그러면서 턱을 긁적이는 습관 역시 동일했다. 물론 비슷한 건 그것뿐이었다.

2미터가 훌쩍 넘었던 회백의 투사와 달리, 로브를 두른 남자의 키는 기껏해야 댈런의 어깨쯤 올까 한 정도.

얇은 선의 얼굴과 푸른 눈동자는 마법사 하면 흔하게 연상되는 이미지였다. 오두막을 찬찬히 뜯어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자가 너라는 이야기군."

살짝 찢어진 듯한 목소리. 댈런은 말없이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도끼는 제자리에 잘 달려있었다. 이번에는 성검도 곁에 꽂혀있었다.

"5위계. 하지만 단순히 위계로 단정 짓기에는 한없이 방대한 심상을 가지고 있군. 이미 벽을 뚫은 누군가를 만나본 모양인데."

"······."

"그렇다면 조건은 알고 있겠지. 나를 쓰러뜨려라. 나를 무릎 꿇렸던 절망보다 더 큰 힘을 눈앞에 보이고, 그로써 내 모든 걸 가져가거라."

남자는 마치 극의 등장인물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야기했다. 설산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바람에 로브 자락이 펄럭거렸다. 길게 기른 머리칼도 흐트러졌다.

그 일장연설을 보며 댈런은 도끼자루를 슬슬 매만졌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의 진짜 육신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이곳은 심상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

이곳에서의 육신은 현실과 같지 않다. 댈런이 완전히 회복된 컨디션에 적응하는 사이,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도와달라는 게 이런 의미였느냐."

자박.

가벼운 발소리의 주인은 눈앞의 마법사와 비슷한 키와 덩치였다. 짧게 쳐올린 검붉은 머리칼이 시야 언저리에 멈춰 섰다.

"6위계. 그것도 뇌룡을 능히 압도할 만한 역량이구나.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얻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캐릭터 하나 잘 키우긴 했지. 나름 고인물이었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솔직히 말하마. 차라리 돌아가서 차리나와 함께 쑴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댈런은 픽 웃었다. 이 양반 진룡씩이나 되면서 쫄릴 때마다 말 바꾸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댈런의 컨디션이 완전하기만 했다면, 차리나를 돕는 게 더 승산이 높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대악마와 사투를 벌인 이후, 바닥난 체력과 무너지기 직전의 몸뚱이로는 그나마 이쪽이 유일한 가능성.

적창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농담으로 입에 담았을 뿐

"잡소리는 끝났나."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마법사가 말했다. 연설하듯 벌린 두 팔 그대로, 놈의 분위기가 반전했다.

"나는 간 보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니 선택지는 두 개다."

쿠르르릉······.

하늘 위에서 울려퍼지는 뇌성. 댈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썩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산의 하늘이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난 적 없는 먹구름이 뭉개지듯 밀려나고, 그 너머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전격의 바다.

「영역 완전개방 :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두 팔을 펼친 마법사의 눈은 어느새 오색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증명하거나, 죽어라."

"댈런, 조심···!"

적창의 말이 귀에 닿기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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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가르고 붉게 뿌리내린 뇌전에, 세계가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