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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백의 투사(1)

밤공기가 찼다.

산맥의 계곡과 능선을 따라 흐르는 한풍이 옷깃 사이를 자비 없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 내리 퍼붓던 눈발이 잠잠해져서 다행이었다. 대족장의 장례 행렬은 청명한 밤하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선두에서 걷던 댈런은 무심코 턱을 쓰다듬으려다, 손을 내려 뒤따르던 루시아의 손을 잡아봤다.

"으아? 대, 댈런?"

"차갑군."

"아, 아무래도 날씨가 추우니까 그렇겠죠? 댈런은 이, 이상하게 따뜻하네요?!"

"갈 길이 꽤 멀다고 알고 있소. 손발의 체온을 유지해두는 게 좋을 거요."

댈런은 엄지로 루시아의 손바닥을 피게 하고, 그 위에 마력으로 빚은 화염을 올려주었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화염 덩어리는 뜨겁지 않았다. 뭉근하게 자작거리며 은은한 온기로 손을 덥혀주었을 뿐.

손난로를 만들어주고 다시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자, 아공간의 아르보르가 괜스레 뿔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시도때도 없는 애정행각은 정말···어디 그것도 고향의 문화라고 해보시죠. 원주민인 하이 오크들은 그렇다쳐도, 나머지 사람들은 손도 아니라 이겁니까?]

이 새끼는 왜 또 시비지. 요즘 덜 맞았더니 기어오르는 건가?

댈런은 아공간 입구를 열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아무리 그래도 대족장의 장례 행렬이니, 누굴 패기에 적당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왜 이렇게 뿔이 났는지 알 것 같기도 했고···.

'즈탄크의 정수를 먹였다고 삐지기라도 한 거냐?'

[······.]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소화 못하고 토한 건 안타깝지만, 어차피 토사물 정도야 아공간의 조작 권한을 가진 너라면 금방 치울 수 있지 않냐.'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상한 정수를 억지로 먹이는 건 자제해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무기처럼 휘두르거나 하실 때랑은 비교할 수 없게 힘들단 말입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댈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물로 노예처럼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르보르도 결국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할 동료다.

최근 들어 이전보다 활약도 꾸준하게 늘고 있고.

뭔가를 억지로 먹이는 데 무슨 PTSD 같은 거라도 있는 듯하니, 이 부분만 조심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박. 사박.

며칠 동안 쌓인 눈밭에 발밑이 푹푹 빠진다. 장례 행렬은 마을의 경계를 벗어나 무덤 계곡으로 향했다.

고작 며칠 전에 피튀기는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을 넘어서, 절벽으로 둘러싸인 성소 분지로 접어든다.

거대한 돌무더기가 된 성소를 지나치고.

그 뒤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용암 호수를 크게 돌아간다.

새하얀 눈밭 위, 행렬이 남기는 자취는 성소 분지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모양새였다.

무덤 계곡에서 이어지는 입구로부터 반대쪽에 위치한 좁은 샛길.

까마득한 절벽 사이로 난 비좁은 길에 발을 들일 즈음, 대족장 타룸이 입을 열었다.

"잉간들은 가족이나 친구를 떠나보낼 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부른다고 들었다."

"그렇지."

"하이 오크는 다르다. 오로지 가족만이 하이 오크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지. 대족장이 죽으면 족장들과 특별한 손님들이 모여서 떠나보낸다. 대족장은 모든 부족의 가족이니까."

어둠 속. 타룸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큼직한 눈에 살짝 맺혀 고인 물기. 댈런이 말했다.

"울지 말고."

"우, 울지 않았다! 전사는 안 운다! 눈알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다!"

타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그의 등허리를 두드려줬다. 어깨를 두드리기에는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그래도···이렇게 숫자가 적은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눈가를 문지르던 타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작게 한숨을 쉬고 뒤를 슬쩍 돌아봤다.

선두에는 그와 대족장 타룸이, 그 뒤로는 댈런의 일행과 석관을 짊어진 족장들이 따르는 장례 행렬.

전부 다 합쳐도 스물이 채 안 되는 머릿수였다.

세계의 이빨 산맥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장례라기에는, 지나치게 조촐한 숫자.

이번 싸움으로 족장들이 절반 넘게 죽지 않았더라면, 행렬을 뒤따르는 이들의 수는 지금의 배는 되었겠지.

"그래도 너희들이 있어서 쓰툼파도 쓸쓸하지는 않을 거다."

씁쓸한 기운을 털어버리고 타룸이 말했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샛길 안쪽으로 행렬을 이끌었다.

휘이이이···!!

샛길로 깊이 들어갈수록 거센 돌풍이 그들을 반겼다. 동시에 기온은 시시각각 급격하게 떨어져갔다.

펠버가 주문을 펼쳐내 냉기를 감쇄시키고, 루시아가 전투 기도로 활력을 복돋아야 할 지경.

댈런마저 용혈의 힘을 조금이라도 끌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느닷없이 돌풍이 잦아들고 시야가 탁 트였다.

후우웅······.

눈앞에 펼쳐진 건 북부의 끝없는 동토였다.

차르국의 동쪽 변방에서 시작되어, 동북쪽으로 한없이 뻗어나가는 세계의 이빨 산맥이 끝나는 지점.

신이 무딘 칼날로 잘라낸 듯,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툭 튀어나온 샛길의 끝자락이 일행이 딛고 선 땅이었다.

발밑에서 구름이 넘실거리고, 저 너머에는 별빛 가득한 밤하늘이 북부의 새하얀 동토와 맞닿는다.

마치 우주가 대지를 맞이하러 내려오는 듯한 광경에, 일행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백의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도 다르지 않았다.

시야 한켠에 떠오르는 알림창을 잠시 치워두고, 모니터의 조잡한 픽셀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던 절경을 감상한다.

구름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이는 저 끝없는 동토 어딘가에는, 이 대륙을 침공하러 현현했다는 쑴의 악마들이 있겠지.

당장 눈에 보일 리는 없지만, 머지않은 시점에 그와 만나게 될 테였다.

"모두들 첫 성소에 온 걸 환영한다."

두건을 걷어내린 타룸이 말했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북쪽 땅을 내려다보듯 만들어진 작은 돌무덤 앞에 멈춰섰다.

"첫 성소는 예로부터 대족장과 그 후계자만이 올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의 칭구 쓰툼파가 묻힐 곳은 이제 무너지고 없으니···그의 시신은 이곳에서 흙과 바람으로 돌아갈 거다."

타룸이 손짓했다. 그러자 석관을 짊어진 족장들이 앞으로 나와, 돌무덤 앞에 석관을 내려놓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석관 위에 올린 타룸은, 하얀 입김을 흘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옛날, 악마들이 이 땅을 짓밟고 다니던 시절. 대선조는 홀연히 내려와 하이 오크와 다른 종족들을 이끌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비어버린 왼쪽 소매가 펄럭인다.

펠버가 시간을 되돌려 다시 만들어주겠다 했음에도, 이번 일을 잊지 않겠다며 극구 거절해 남은 흉터였다.

"수백의 악마를 찢어버린 후에, 그의 검은 부러지고 도끼는 깨졌다. 대선조는 선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여기고 하늘로 돌아갈지, 이 땅에 남아 악마들을 끝까지 몰아낼지를."

화륵.

타룸의 손에서 자색 불꽃이 피어났다.

"대선조는 땅에 남기로 했다. 악신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대가로 목숨을 바쳤지. 대족장 쓰툼파는 대선조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의 몸은 흙과 바람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대선조의 하늘 성소에서 실컷 먹고 싸울 수 있기를."

타룸이 입을 다물었다.

석관 입구를 얇은 막처럼 뒤덮은 자색 화염은, 아래쪽에서부터 관을 천천히 갉아 없애기 시작했다.

불꽃에 바스라진 먼지가 바람에 실려 구름 사이로 사라져간다.

석관의 크기는 쓰툼파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했고, 때문에 완전히 먼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릴 듯했다.

댈런은 콧잔등을 조심스레 긁적이고는, 숙연한 분위기를 깨지 않게 조심하며 시선을 돌렸다.

대선조의 돌무덤 곁에는 잿빛 시체가 있었다.

지금까지 회수한 다른 시체들과는 달리, 정권을 뻗어내는 자세로 눈을 부릅뜬 무투가의 형상.

[회백의 투사의 시체]

- 멸망에 저항했던 무투가의 시체다. 하이 오크 대족장 쓰툼파와 깊은 친분을 다졌으며, 세계의 이빨 산맥에서 오랜 시간 은둔한 채 수련을 이어갔다. 북방을 침공한 쑴의 군대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으나, 성소의 싸움에서 패퇴하고 밀려난 끝에 악마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고 죽었다.

백 회차가 갓 넘어간 시점이었나.

눈앞의 시체는 백 번에 달하는 시도에도 도저히 클리어의 기미가 안 보이자, 아예 컨트롤 연습만 지칠 때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산에 틀어박혔던 회차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하이 오크들과 함께 대련이나 사냥에만 몰두하다가, 최후의 침공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이 게임의 정신 나간 난이도를 제대로 체감하게 되었던 회차.

호전적이지만 먹을 것과 싸움에는 사족을 못 쓰는 하이 오크들과 친해진 것 역시 이때가 처음이었다.

'시체 흡수.'

티나지 않게 조금씩 움직여 손을 뻗고, 의지를 집중하자 시체가 스르르 흩어진다.

시체가 빛무리로 변해 손끝으로 빨려들어오는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함이 내면에 휘몰아쳤다.

[회백의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

뭐야. 왜 알림이 나오다 말아?

게임도 아니게 된 세상에 버그가 남아있나?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며, 댈런은 혹여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끔뻑거쳤다.

끔뻑.

끔뻑.

그리고 또다시 눈을 깜빡이자.

"···시발?"

방금까지 함께하던 장례 행렬은 죄다 사라지고,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어 있었다.

***

설산이었다.

세계의 이빨 산맥이 아닌, 캐릭터를 처음 만들면 시작하게 되는 그 설산.

발목까지 쌓인 눈밭 위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외딴 오두막 한 채밖에 없었다.

원래는 그래야 했을 것이다.

"아···이것 참 오랜만이군."

하얀 입김을 흩날리며 설산의 정경을 돌아보고 있는, 이 거구의 남자가 아니었다면.

댈런보다도 머리 하나쯤이 더 큰 듯한 남자는, 뒷마당에 널브러진 장작 패는 도끼며 가죽을 널어두는 건조대를 하나씩 지긋하게 뜯어보았다.

그리움 같은 감정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한, 이유 모를 의무감만이 묻어나는 시선과 동작.

댈런은 허리춤에 은근슬쩍 손을 가져갔다. 도끼는 다행히 멀쩡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거구의 남자가 그 호흡을 끊듯이 말을 시작했다.

"잊지 못할 정경이었다. 한때는 잊고자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 허나 십 년 동안 용병들과 함께 전장에서 구르고, 그보다 몇 배나 긴 시간을 산속에 틀어박혀 지냈음에도 잊었다 싶으면 꿈에 나타나곤 했었다."

"······."

"향수는 아니었다. 이곳에 내가 그리워할 거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이 오크들과 보냈으니, 친근감 또한 아니지. 대영역을 이루고서야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내 모든 것의 근원지가, 이 눈 덮인 산이기 때문이었음을."

남자는 턱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댈런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턱을 긁적이려던 댈런은, 그 눈빛에 잠깐 손을 멈칫거렸다.

물론 잠깐이었다. 간지러운 걸 긁지 않고 둘 정도로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 행동을 본 남자가 낮게 웃었다. 왠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댈런은 상대방도 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따라 웃어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말했다.

"댈버."

"···역시, 내 이름을 아는구나."

알 수밖에 없지. 내가 만든 캐릭터 이름인데.

2미터 50센티쯤 되어보이는 키. 바윗덩이 같은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친 가죽옷.

구릿빛으로 탄 피부와 길게 길러 묶은 회백색의 머리칼은, 나름 신경써서 커스터마이징한 외견이었다.

물론 그 피부 위에 수없이 뒤덮인 흉터들과, 전신에 새겨진 또렷한 백색 문신은 플레이를 하며 생긴 후천적 요소들이었고.

"오래도록 기다렸다. 시간의 개념마저 상실하게 되는 역천의 우물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의 은총을 누리지도 못한 채로, 다시 한 번 이 설산에 발을 들이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구릿빛 주먹을 움켜쥔다.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떨렸다.

남자가 선 곳에서 반경 수 미터의 눈이 녹아내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얕게 우르르 진동했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사선 뒤로. 가볍게 쥔 주먹을 들어올려 댈런을 겨눈 남자가, 낮게 끓어오르는 듯한 음색으로 말했다.

"오라, 마침내 시간선을 넘어 도착한,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자여. 네가 정녕 이 모든 것의 끝을 볼 자격이 있는지···내 손으로 재단해보겠다."

댈런은 자연스럽게 도끼머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뺐다.

검지로 도끼머리를 톡톡 건드리던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엿 됐군."

옛날 캐릭터랑 미러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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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백의 투사(2)

이전 캐릭터와의 결투.

DLC 안내문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죽은 캐릭터의 힘을 회수할 수 있다고만 했지, 그 캐릭터랑 치고받아야 한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게임이었다면 컨텐츠 넘친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건 게임이 아닌 칼에 찔리면 죽는 현실이었다.

1초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주먹 쥔 사내를 눈앞에 두고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야, 댈버."

"말하라. 별들의 시선이 주목하는 자여. 허나 질문을 받지는 않겠다. 네가 답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는 게 먼저니까."

"···그러냐."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칼 같기는.

의문과 추측들이야 많고 많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 대답들의 일부나마 손에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하지만 그 당사자가 역천의 우물이니 시간선을 넘었니 하는 소리만 늘어놓을 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줄 의향은 하나도 없어보인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겠지.

스륵―

착 감기는 손잡이.

설산의 반사광에 번짝이는 도끼날.

번개같이 뽑아든 손도끼는, 많고 많은 의문들을 대신해서 눈앞의 사내에게 돌려줄 첫 번째 대답이었다.

댈런이 말했다.

"일단 좀 맞자."

맞고 나면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줄 마음이 생기겠지.

휘리―!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는 동시에, 도끼 쥔 오른팔이 흐릿해지고.

쐐애―!

공간을 빗겨내며 자취를 감춘 손도끼가, 남자의 얼굴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터어엉!

무언가를 쪼갰다기에는 좀 이질적인 피격음. 남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도끼를 잡은 것이었다.

심지어 손잡이를 잡은 것도 아니고, 날 부분을 손아귀 힘으로 움켜쥔 것.

"과연, 기대한 대로 좋은 대답···!"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황금빛 폭발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폭발의 여파에 바닥에 쌓인 눈이 확 밀려나며 눈보라처럼 휘몰아친다. 댈런은 눈보라를 정면에서 뚫고 달려들었다.

널널한 가죽옷이 역풍에 펄럭거린다. 하이 오크들이 입던 걸 적당히 수선해서 만든 임시 복장이었다.

르베론의 대장간에서 받았던 갑옷은 대족장과 싸우며 망가져 못 쓰게 되었던 탓.

'여분 갑옷을 아공간에 넣어 다니던가 해야지.'

집이 좁아진다며 투덜거릴 악마의 목소리를 예상해보면서, 설산에 몰아치는 마력의 바람을 팔다리에 휘감는다.

「술식갑주(術式甲冑)」

「화염갑(火焰甲)」

"크하하하! 따끔하구···으읍!"

유물 무기의 폭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버린 사내의 안면을, 화염을 둘러 두 배쯤 커진 손아귀로 움켜쥐고.

「답보(踏步)」

발 디딜 곳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밀어차며, 폭발하는 마력을 완력으로 치환해 남자를 내던진다.

꽈앙―!

포탄처럼 쏘아진 두 신형이 오두막을 부수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급변하는 시야 아래쪽, 산 아래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득하게 스쳐지나갔다.

연달아 허공을 걷어차며 내던져진 남자의 몸뚱이를 따라잡고, 답보로 그 위를 점한 뒤 튕기듯이 다리를 내려찍는다.

「화염갑 : 홍류섭(紅流燮)」

뻐어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끝에서 터져나오는 새빨간 불꽃.

남자의 몸뚱이가 붉은 화염의 폭포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구구구···!

눈 쌓인 침엽수들이 이쑤시개처럼 꺾여나가고, 산비탈에 흘러내린 불꽃이 확 퍼지며 동면하던 일대의 초목을 불태워버린다.

댈런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발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얀 눈밭을 씻어내고 불타오르는 수 미터 반경의 화염구덩이. 그 한가운데 깊이 처박힌 남자의 갈색 눈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흐으···꽤 하는군."

남자는 멀쩡했다. 피부가 약간 붉게 달아올랐으나 그뿐이었다.

성소 수호자의 단단한 육체마저도 무너뜨렸던 일격에, 남자는 오히려 흥이 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이 정도도 안 됐다면 실망할 뻔했어."

씰룩이는 입꼬리에 묻어나는 옅은 광기.

싸움에 미친 종족과 수십 년을 같이 살더니, 본인까지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한때 키웠던 캐릭터의 정신상태를 의심해보려던 찰나, 남자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투확―

남자가 서있던 자리, 한 발 늦게 솟구치는 잿더미.

스아아아―!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살기가 몰아치는 것과 함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좀 더 놀아보자고."

「회명(回冥)」

황급히 뒤돈 순간 시야에 담긴 건, 청명한 하늘 아래 번뜩이는 잿빛 그림자였다.

허공에 난데없이 드리워진 음영의 자투리는, 분명 저 무투가 캐릭터가 익혔던 고유 스킬들의 이팩트 중 하나.

한계를 초월한 근력과 기량을 동원해, 몸뚱이 자체로 공간의 틈을 비집고 넘나드는 이동기이자.

남자에게 회백의 투사라는 이명이 붙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쉬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주먹을 내질렀다. 섬전같은 권격이 댈런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쩌어어어엉―!

"이런 씹···!"

양팔을 교차해 막았음에도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

콰지지직― 쿠궁! 쿵!

경로의 나무를 등판으로 죄다 꺾어버리고도 모자라, 댈런의 신형이 물수제비를 하듯 지면 위를 퉁퉁 튀어올랐다.

"크흐흐······."

남자는 허공을 딛고 선 채 낮게 웃으며, 산에 길쭉한 자취를 남기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화르륵!

"···응?"

주변에서 느닷없이 수십 개의 하얀 불씨들이 피어오르며, 남자의 웃음을 끊어놓기 전까지.

「발화(發火)」

「성류옥(聖蘲獄)」

촤자자자작!

씨앗에서 덩굴이 자라는 장면을 수천 배 가속하듯, 순식간에 뻗어나온 백색 화염의 줄기가 서로 얽혀들기 시작한다.

얽히고 교차하며 큼직한 구를 만들어내, 마치 덩굴로 만든 감옥처럼 남자가 선 공간을 닫아버린 화염의 줄기.

난데없이 자신을 가둔 감옥에서 이글거리는 신성력을 눈치챈 남자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단의 신성력···설마 신성 문신을 받고 기적을 익혔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아무 전조도 없이···."

빠르게 좁혀오는 화염의 창살을 거친 손아귀로 붙잡아 멈춰세우는 것과 함께, 한껏 달아오른 남자의 두뇌가 오랜 전투 경험으로 이 상황을 역산했다.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남자가 딛고 선 허공은, 바로 조금 전까지 댈런이 서있던 공간이었으니까.

"···내가 뒤에서 기습할 걸 예측한 건가!"

화염의 폭포와 함께 남자를 지면에 처박은 직후.

후속타를 넣는 대신, 허공을 딛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선공에 뒤따른 방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이 감옥을 몰래 깔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라면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고유의 비기 중 하나를 드러내면서까지 배후로 돌아 역습을 가한 일이, 오히려 상대방이 준비한 함정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다음 수를 읽어내고 예상했다는 듯한 전투 방식.

사실상 농락당했다는 걸 알아챈 남자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놈이···!"

그그그그극···!

새하얀 화염의 창살이 초월적인 완력만에 구부러지기 시작한다.

남자의 갈색 눈이 숲을 부수며 날아간 댈런의 자취를 쫓았다.

주먹질 한 방에 수십 미터를 튕겨나간 댈런은, 거적떼기가 된 가죽 상의를 찢어버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혔군.'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키워낸 캐릭터다.

고유 스킬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다지만, 대충 어떤 식으로 전투를 이어가는지는 수백 번도 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상대방의 다음 수가 눈에 들어온 이상, 필요한 건 그 의중을 역으로 찌를 수 있는 강력한 한 방.

성화의 불씨에서 비롯된 고유 스킬 '발화'.

그리고 샤니아 필로폰에게서 받은 식목계 마법 개론에서 익힌 '살아 움직이는 뿌리'.

그 두 가지의 조합은 그 한 방을 만들어내기 위한 첫 번째 안배였다.

그그극― 콰직!

버티다 못한 창살이 하나둘씩 끊어지기 시작한다. 댈런은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저 건너편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적과 주문을 융합해낸 결과물을 맨손으로 우그러뜨리는 남자의 완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초조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가 스스로 밟은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댈런이 예정해둔 두 번째 안배가 도착하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까.

"말했지."

끓는 피를 뱉고서, 보란듯이 씩 웃는다.

"일단 좀 맞자고."

쿠르르릉···.

어느새 먹구름이 모여든 하늘.

드리워진 그림자를 가르고, 저 머나먼 설산의 봉우리에서부터 한 줄기 빛살이 내달린다.

날아드는 빛살의 속도는 소리보다도 아득하게 빨랐지만, 남자의 동체시력은 그 정체를 간파하기에 충분히 뛰어났다.

"성검···토르타니스!"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먹구름을 환하게 밝히는 섬광.

하늘로부터 몇 번씩 꺾이며 내리꽂는 빛의 기둥이, 날아오는 성검의 궤적과 아슬아슬하게 겹쳐들었다.

"이런 썩을···!"

이를 악문 남자가 거세게 팔을 휘저었다.

콰지지지직!

그 힘만으로 불꽃의 덩굴들이 사정없이 끊어졌지만, 남은 덩굴들이 더욱 바짝 조여들며 남자의 움직임을 제약한다.

저항은 잠깐 뿐.

뛰어난 전사라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뇌격(雷擊)」

번쩍―!

성검과 하나가 된 푸른 번개가, 남자의 신형을 휩쓴 것과 동시에 숲을 강타하고.

꽈르르르르릉!!

뒤따른 뇌성이 지면에 닿을 무렵, 밝은 빛이 세상을 뒤집었다.

***

쿠르르르······.

충격을 이기지 못한 설산의 비탈이 무너진다.

저 멀리서 쏟아지는 산사태를 관망하던 댈런은, 시선을 돌려서 깊은 구덩이 한가운데를 바라봤다.

검게 물든 대지.

불타 바스라진 나무.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 한가운데에는, 거구의 전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검게 탄 피부는 쩍쩍 갈라졌고, 어깨부터 반대쪽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가 피를 왈칵 쏟아냈다.

분명 치명상이라 여길 수 있었지만, 그걸 본 댈런은 도리어 혀를 얕게 찼다.

"그걸 피하냐."

댈런은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남자에게서 몇 걸음쯤 떨어져 꽂혀있던 성검이 자연스레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남자의 몸을 꿰뚫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을 일격이었다.

물론 댈런도 이 한 방으로 승패가 결정되리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예상했던 것에서 한참 못 미치는 결과였다.

제대로 맞으면 악마도 날려버리는 공격을 저 정도까지 흘려낸 건, 남자의 체술이 상식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섰다는 의미.

성류옥에 속박되어 움직임이 제약된 상태에서 대체 어떻게 몸을 뒤튼 것인지, 능력치가 뻥튀기된 몸뚱이를 입고서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으으···잘 알겠다. 적어도 네가 예언이 가리키는 인물이라는 건, 이걸로 인정할 수 있겠군."

저벅.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얼핏 무방비해 보이는 몸짓.

그러나 댈런은 섣불리 다가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수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댈런은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지금 내비치는 빈틈 하나하나가, 모두 수십 년간 쌓아온 무투가의 경험 아래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라는 것을.

"···허나 역천의 우물에서 보낸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수긍할 수 없었다. 무의 끝을 보았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겨내지 못한 종말을, 다른 누군가가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

작은 손짓. 발끝의 방향. 머리를 젓는 동작. 무릎을 터는 행동까지.

하나하나의 동작 속에 무리(武理)가 녹아들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최상의 효율을 만들어낸다.

조금 전까지의 싸움과는 완벽하게 달라진 공기. 그게 이야기하는 바는 명백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초장부터 지금까지 다소 가벼운 태도로 싸움에 임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런 자세로 임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 증명해보도록 해라. 정말로 예언이 말한 대로, 네가 모든 시간선의 가능성을 모아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자인지. 그리고···"

주먹을 쥔다.

검게 탄 피부가 찢어지고.

그 아래에서 백색 문신이 빛을 토해내며.

온몸이 회백색으로 물든 것과 동시에, 남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걸 위해 내 모든 걸 받아갈 자격이 있는지."

머리칼과 같은 회백색의 일렁임이, 댈런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세상이 잿빛으로 뒤덮였다.

167

회백의 투사(3)

영역의 힘.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건 그저 모호한 게임 설정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수백 번씩 되풀이되는 회차들 속에서, 대영역을 이룬 캐릭터들은 몇 명이나 존재해왔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방식의 한계였던 걸까.

각종 부가 효과나 등으로 명확하게 나타났던 고유 스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영역 개방은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몇 번의 이펙트가 끝이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볼 수 있던 건 과정이 생략된 결과뿐이었지.'

번쩍거리는 수차례의 이펙트가 사라진 뒤.

화면에는 서로가 어떤 버프와 디버프를 주고받았고, 얼마만큼의 피해를 교환했는지만이 나타날 뿐.

때문에 영역 개방이 대충 필살기 비스무리한 능력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파헤치기는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잿빛으로 뒤덮인 하늘과 땅을 보는 건 댈런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 회백색 대지 위를 내달리며, 공간의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투사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고.

「회명(回冥)」

잿빛 그림자가 일렁이고, 남자의 거체가 흐릿해진다.

단순한 눈속임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신비를 꿰뚫는 파영의 마안도, 암월단의 유물 중 하나인 환상 살해자도 소용없었다.

찌지지지직―!

마치 질긴 천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남자의 신형이 증발하듯이 모습을 감추고.

다음 순간 댈런 주변의 여덟 방위를 점한 채 모습을 드러내며, 동시에 여덟 갈래의 공격을 동시에 뻗어낸다.

「팔연답산(八聯踏散)」

두두두두두두―!

팔다리를 휘두르는 단순한 공격들.

허나 그 한 방 한 방에 담긴 파괴력은 집채만 한 바위도 너끈히 부술 정도다.

공기를 뒤흔드는 파공음의 한가운데, 댈런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술식갑주 : 백풍갑(伯風甲)」

「열풍(裂風)」

찰나 동안 느려진 시간.

일순간에 팔과 다리를 휘감는 회오리바람.

델로스 마탑의 주문인 필즈의 바람 결계를 응용해, 술식 그 자체를 갑주로 삼아내며 팔방위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맞선다.

휘이이이···!

팔다리를 중심축 삼아 수십 갈래로 찢어진 바람이, 공세의 타점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들고.

존재하지 않는 틈을 억지로 비틀어 열어내면서, 동시에 짓쳐오는 공격 사이에 시간차를 만들어 대응해낸다.

치이이익!

검면을 정권에 가져다대어 흘린다.

후우웅―!

고개를 슬쩍 틀어 머리를 노리는 발차기를 피한다.

정면에서 찍어올리는 무릎. 한 발 나아간다. 내디딘 다리로 허벅지를 밀어내 방향을 비틀어버리고, 옆구리를 찔러오는 수도를 팔꿈치를 내리찍어 쳐낸다.

사각을 노리는 손끝과 발끝.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걷어내며 피해를 최소화한다.

이 모든 공방을 주고받은 시간은, 일반인이라면 인지하지도 못할 찰나의 간극.

들이쉰 호흡이 다하는 순간, 느려졌던 세상이 속도를 회복하며 십수 번의 파공음이 동시에 몰아쳤다.

쩌저저저저──!!

"후우―"

거칠어진 호흡. 가다듬을 여유는 없다.

땅을 밀어차 몸을 뒤로 뺌과 동시에,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흐릿한 신형이 내려찍혔다.

콰아아아앙!

내리찍은 발밑에서 쩍 하고 갈라지는 지면.

그 위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남자의 손발에 일렁이는 잿빛 기운이 휘둘러졌다.

「회백투영(灰白鬪影)」

「이팔지순(二八至瞬)」

회백의 기운이 실존하는 팔다리의 형태를 띠고 쇄도해온다.

거머쥔 주먹. 쫙 펼친 손바닥. 손날과 발끝, 팔꿈치와 무릎, 머리 위에서 내리찍는 발뒤축까지.

평범한 인간이 맨몸으로 한 번에 내지를 수 있는 공격은 오직 하나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손발은 네 개뿐이라는 상식을 정면에서 깨부수는 스물여덟 갈래 공세.

대족장이라도 막아내지 못했을 잿빛 파도의 면전에서, 댈런은 성검을 놓고 재빠르게 수인을 맺어냈다.

「염사(炎巳)」

땅이 화염을 토해낸다.

지면을 뚫고 솟구친 염열의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쏟아지는 잿빛 공세를 역으로 덮쳐들었다.

으지지지직···!

화염의 뱀마저도 남자의 공세를 막아내진 못했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전소시킬 수 있는 불길이, 권각에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는 건 말 그대로 한순간.

하지만 상관없었다.

댈런에게 필요했던 건, 바로 그 한순간의 여유였으니까.

우르릉···.

염사가 벌어다준 일말의 지체를 틈타, 저 너머의 하늘이 나직한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검붉은 먹구름이 잿빛 천구를 짓뭉개며 강림해, 수십 줄기의 불기둥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대하주염(垈煆柱炎)」

이글거리는 화염 기둥이 잿빛 대지를 덮쳐든다.

마치 도화지 위에 유화의 물감을 덧칠해가듯, 회백색 세상 위에 덧씌워지는 붉음.

먹구름이 휘두르는 수십 줄기 붓끝은 스물여덟 갈래의 공세를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남자의 신형을 뒤쫓으며 그 존재마저도 덮어씌우려 했다.

"뛰어나다! 가히 역천의 우물이 선택했다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염열의 향연에, 공간을 건너뛰며 불기둥을 피해 다니던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허나 아직도 부족하다! 산봉우리를 날려버린 내 마지막 일격마저도, 쑴의 갑옷에 고작 흠집을 내는 데 그쳤거늘! 하물며 나 하나도 손쉽게 쓰러뜨리지 못하는 네가 다섯 악신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 마디 한 마디에 숨길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난다.

세상을 집어삼킨 종말을 향한 분노.

끝내 이겨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

회한과 두려움, 질투, 아집. 녹진한 울컥임이 남자가 내뱉은 문장마다 뚝뚝 떨어졌다.

그즈음 남자의 전신을 뒤덮은 백색 문신이 눈부실 정도로 빛을 내뿜고, 갈색 눈동자마저 돌변해 회백색 광채를 흘리기 시작했다.

'백색 주술문신···하이 오크들이 동족으로 인정했다는 상징이지.'

댈런은 저 문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얼핏 하이 오크들에게 새겨진 것과 유사한 문신은, 족장들 중에서도 뛰어난 주술사들이 힘을 모아 새겨 넣어준 종족 차원의 선물.

종족이 다름에도 수십 년간 가족처럼 함께하며, 숱한 난관을 함께해온 그를 동족의 일원으로 인정한 증거였다.

"어서 나를 납득시켜 보란 말이다! 날 이겨! 그리고 내 힘을 취해보라고!"

당연하겠지만 문신의 능력 역시 하이 오크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과 지성을 투지의 연료로 삼아, 평소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방식의 주술.

하이 오크 족속만큼이나 단순해져가는 말투 역시, 지성과 감정을 불태워가며 본인의 무력을 높여낸 결과의 부작용이겠지.

그리고 많은 것을 희생한 만큼, 나타나는 효과 또한 극명했다.

쩌어어엉!

쏟아지는 불기둥을 향해 주먹을 꽂아넣는다.

굉음과 함께 공간이 이지러지며, 직경 수 미터의 불기둥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하고 꺼졌다.

먹구름이 쏟아내는 수십 갈래의 불기둥을, 단신의 권격만으로 모두 상쇄해내는 기예.

'아니, 이 정도면 기예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지.'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다.

들려오는 파공음은 단순히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아닌, 공간 그 자체가 으깨지는 파괴의 소음.

남자의 성명절기인 고유 스킬 '회망'이 무투가로서 공간과 간격이 의미하는 바를 깊게 연구한 끝에, 그림자 주술을 매개로 삼아 공간의 틈을 파고든 기예였다면.

지금의 권격은 그걸 넘어서서, 아예 공간을 짓씹고 으스러뜨리는 이적이나 다름없었다.

쩌정─ 쩡─

단순한 권격에 공간이 터지고 으깨진다.

그 파괴력은 영락했던 전대 청린용의 숨결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머지않아 마지막 불기둥을 날려버린 남자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댈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흐···으······."

투지로 이글거리는 눈빛.

일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한 살기.

처음 설산의 정경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감탄하던, 무를 갈고닦은 전사의 평정심이라고는 온데간데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평온은 모두 날아가고,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상처 입은 맹수만이 남아있을 뿐.

쿠드드드드득···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뒤로.

주먹을 천천히 뒤로 당기자, 공간이 뒤따라 비틀리며 남자 주변의 풍경이 휘어졌다.

"······."

댈런은 살기등등한 남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했다.

움켜쥔 주먹과 부릅뜬 눈은, 대족장의 장례식에서 봤던 잿빛 시체와 닮아 있었다.

악마의 군세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린 뒤, 선 채로 생을 마감한 투사의 모습.

어쩌면 지금 남자의 눈에 비치는 건 댈런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계곡을 가득 채우고 달려들던 악신의 군세일지도 모르지.

쿠르르르르······.

그렇다면.

증명해주면 될 뿐이다.

최후의 그날에 설산의 봉우리를 날려버렸던 일격을, 악신 쑴이 정면에서 받아냈던 것과 같이.

댈런 역시 그 필사의 일격을 홑몸으로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면 되는 일.

그로써 회백의 투사를 무릎 꿇렸던 그 절망과 비교해, 댈런이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만 한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던 투사의 심중에도,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날 수 있겠지.

후우.

숨을 그러모은다.

그것만으로도 사지육신에 새로운 기운이 가득 채워졌다.

검술과 주문, 용혈, 기적, 등등.

지금에 이르러 수십 개의 가능성으로 뻗어나왔지만, 시작이 되었던 가능성은 그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후우.

낙뢰를 부르는 성검도, 먹구름을 만드는 주문도 없이 뇌성을 불러낸 최초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미궁도시의 광산 깊은 곳.

사교도들의 심처에서 빚어냈던 일격.

악마의 힘을 덧입은 대사도를 쓰러뜨렸던 그 권격을 되새기며, 댈런은 눈앞의 전사와 비슷한 자세로 주먹을 당겨냈다.

서로를 향해 주먹을 겨눈 채, 수십 미터나 떨어진 두 전사의 사이.

쉭―

팽팽한 공기가 깨진 건, 단 일순이었다.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회력파주(灰力破柱)」

한 권격에 공간이 으스러졌고.

「닫힌 설산의 하늘」

「권(拳)」

한 권격에 뇌성이 울려퍼졌다.

━━━━━━!

그리고 세계가 찢어지면서.

두 인영의 뒤쪽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 설산의 봉우리 두 개가 불현듯이 사라졌다.

***

'···런······'

희미한 속삭임들.

'댈······일어···!'

목구멍을 두드리는 비릿한 혈향.

"···런! 댈런!"

이내 코와 입으로 역류하는 열기가 정신을 바짝 일깨운다.

댈런은 눈을 번쩍 떴다.

"쿨럭! 커헉!"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욱신거리는 격통.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용혈을 온몸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툭. 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심장 어림을 몇 번 두드린다. 그러자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심장이 저 스스로 박동을 늦춰갔다.

"댈런! 댈런! 정신이 좀 드십니까!"

가까스로 시선을 돌리자 루시아가 보였다. 그리고 걱정 어린 눈길로 지켜보는 다른 일행들과, 그 너머의 푸르른 하늘도.

'···하늘?'

루시아가 있는 걸 보니 여긴 현실인데. 내가 언제 누워있었지?

그런 의문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다시 한 번 전신을 내달렸다.

"크으윽······."

"일어나지 마십시오, 댈런! 지금 몸 상태가 어떤지 모르십니까?"

"어, 어떤···."

"한 시간쯤 전에 갑자기 온몸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습니다. 근육과 뼈마디가 죄다 으스러지고, 장기도 갈기갈기 찢겨나갔다고요!"

시발. 그게 대체 무슨 소린데.

168

회백의 투사(4)

입을 열기도 힘들어 가만히 눈빛으로 의문을 표하자,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펠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 자네가 갑자기 쓰러졌네. 온몸이 으스러져서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었어. 시간도 되돌려지지 않고, 루시아의 신성력도 거의 통하지 않더군. 그나마 용의 재생력 때문에 버텨낸 것 같은데······."

"···쿨럭, 그래서?"

"짧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인간의 기준에서 자네는 쉰 번쯤은 죽었다가 살아났네."

"칭구. 죽었다. 온몸이 으스러졌다. 그런데 살아났다. 그리고 또 죽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죽고 살았다."

대족장 타룸이 펠버의 말을 거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멍청한 말투인 걸로 봐서, 저쪽도 적잖이 놀라기는 한 모양이었다.

[영역에 난입한 불청객이라, 기이한 일 투성이로구나. 역천의 우물을 언급하는 걸 보아하니 이 시간선의 존재조차 아니던 모양이던데···아무튼 잠시 심장을 빌렸느니라. 이대로면 싸움에서 이기고서도 죽을 게 뻔히 보였거든.]

'내가 이겼단 말이오?'

[그럼. 이겼지. 네 몸이 상한 것도 팔 할은 네 스스로 한 짓이니라.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구나. 놈의 마지막 일격이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서야 받아내기 힘든 위력이라는 건 알겠지만, 정말 스스로의 목숨까지 태워버릴 작정이었느냐?]

'······.'

[뭐···굳이 말하자면 감명 깊은 짓거리이긴 했느니라. 상대방은 뼛가루조차 남기지 못했으니까.]

심상 너머 적창이 약간의 핀잔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제야 머릿속에 상황이 좀 그려지는 듯했다.

영역에서의 싸움은 그의 승리였다.

정확히 어떻게 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최후의 격돌에서 살아남은 게 이쪽이었으니 승패는 명백했다.

다만 문제라면 그 격돌의 여파에 더해, 마지막 일격을 날린 반작용이 후폭풍으로 현실의 육신까지 강타했다는 것.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날린 일격의 기반이 되는 심상은 오래 전, 처음으로 영역의 힘을 끌어냈던 권격의 기억.

어떤 스킬의 도움도 없이 대사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그 권격은, 당시에도 스스로의 몸을 으스러뜨리곤 했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그대로 뒈질 뻔할 줄은 몰랐는데.'

당시에는 팔 한 쪽을 박살내고 오장육부를 적당히 손상시키는 선에서 끝났던 반작용이다.

물론 일반인의 시선에서야 죽기 직전까지 간 거나 진배없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 수준의 폐혜는 아니었던 것.

'···하긴. 마지막 순간에 산봉우리가 날아가는 게 보이긴 했으니까.'

그 정도 파괴력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육체라도 버텨낸 것 자체가 기적이긴 했다.

용심장을 바탕으로 하는 온전한 용혈의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원주인인 적창의 개입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세상에 가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어쨌든 적창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승리는 맞았으니, 이제 힘을 회수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물을 차례···.

"···가만. 시체···시체는?"

"시체요? 장례를 말하는 거면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데···."

불현듯이 스치는 생각에, 댈런은 잿빛의 시체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선조의 돌무덤 곁, 회백의 투사가 최후의 일격을 내뻗었던 자리에 시선이 닿은 순간이었다.

[회백의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4, 기량 +3, 체력 +2, 감각 +3, 지능 +1, 마력 +2, 회명(고유), 회백투영(고유)]

본 적 없는 길이로 주르르 나열되는 알림창과 함께, 온몸을 덮칠 듯이 쏟아져오는 빛가루의 파도.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빛무리가 전신에 스며듦과 동시에,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막대한 힘이 차올랐다.

***

꾸드드드득···!

온몸의 근육이 섬유 단위에서 재배열된다.

모든 감각이 왈칵 뒤집어졌다가 바로잡힌다.

용혈이 흐르는 혈관에 끓어넘치는 마력과, 손끝에서부터 저릿하게 올라오는 기묘한 전능감.

탈력감을 모두 메꾸고도 흘러넘쳐 전신을 내달리는 미지의 힘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자극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시 상태가 악화되나 싶어 놀란 루시아가,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신성 문신에서 빛을 내뿜는 순간이었다.

"댈런, 괜찮···!"

"가만. 그대로 내버려두게."

가장 빨리 이변을 눈치챈 건 다름 아닌 펠버였다.

루시아를 제지한 노인은 낮게 끌끌 웃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댈런을 바라봤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네만···아무래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니까."

새로운 깨달음.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폭증한 능력치로 신체가 변화하는 사이, 절정에 다다른 무투가가 이뤄낸 고유 스킬의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육체가 회복되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

하지만 되살아난 몸 상태에 적응하기도 전에, 어떤 굳센 의지가 그의 의식을 잡아끌고 강제로 내면을 향해 시선을 돌려냈다.

쿠르르릉···.

하늘을 가득 채운 검붉은 먹구름과, 그 먹구름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수십 개의 봉우리가 늘어선 영역의 정경.

개중 두 봉우리만이 망치로 날려버린 듯 윗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댈런과 회백의 투사가 치고받았던 싸움터가, 바로 그 두 봉우리 사이에 넓게 펼쳐진 대지.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선명한 땅 위에 시선을 집중하자마자, 회백의 투사가 가진 심상의 정수가 보란 듯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치지지지직······!

물들어간다.

통에 담긴 물감을 왈칵 쏟은 것처럼, 대지와 천구 위에 빠르게 잿빛이 퍼져나갔다.

광대한 면적이 회백색의 음영으로 물들어가는 동안, 댈런의 머릿속에서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흐릿한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처음 눈을 뜬 설산의 오두막.

십여 년간의 용병 생활.

산속에 파묻혀 수십 년간 수련에 몰두하며, 하이 오크들과 동고동락한 끝에 동족으로 인정받았던 시간들.

대영역을 이루고 무의 끝을 향해 달려가며, 한때 갈망했던 재물과 명성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 행복하다 느꼈다.

어느날 산맥을 침공한 거대한 악신의 군대가, 그 모든 일상을 깨부수기 전까지는.

'크아아아악!'

'댈버 칭구! 내 부락을 부탁하···커어억!'

가족이나 다름없던 전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고.

'···댈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스승이자 둘도 없는 친우였던 대족장 쓰툼파마저 무릎을 꿇었다.

성소 뒤쪽에 비밀스레 숨겨진 대선조의 돌무덤. 그곳에서 대족장의 심장이 멈추는 걸 지켜보며, 댈버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상실감에 휩쓸렸다.

무력했다.

그리고 분개했다.

그 모든 감정을 제물로 태워내어, 골짜기로 짓쳐오는 악마의 군세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생명을 불살라가면서까지 날린 권격에 수백의 마물과 열에 달하는 악마가 찢겨나갔다.

공간이 으스러지며 골짜기가 무너지고, 드높이 솟은 산봉우리마저도 증발했다.

그럼에도 악신에게는 닿지 못했다.

쑴의 검격 한 번에 지워진 공격은, 놈의 갑옷을 조금 구기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

'이제 나를 이해할 수 있겠나.'

투사의 주마등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잿빛 천구 아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회백의 투사가 남긴 잔류 사념이었다.

폭발하던 감정은 죽음 앞에 모두 흩어지고, 무미건조해진 투사의 음색.

댈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이해하지 않을 거요."

'···뭐라?'

목소리에 의문이 어린다.

실체도, 형태도 없는 잔류 사념일 뿐이지만 댈런은 진심을 담아 대답해주었다.

"나는 쑴의 목을 칠 거니까."

'······푸흐, 과연 그렇군.'

한참이나 뒤늦은 대답. 건조한 음색 위에 얕게 감정이 쌓인다.

곧이어 잿빛으로 물든 대지와 천구가, 서서히 설산의 풍경에 융화되기 시작했다.

"······."

스며든다.

산속에서 수십 년간 쌓아올린 무의 극치가.

마지막 순간 악마의 군세를 짓이긴 일격에 담긴 감정이.

설산의 일각에 자리잡은 회백색의 영역은, 그렇게 댈런의 의지 아래 기존의 영역과 하나가 되었다.

무의 핵심 중 하나인 간격을 비틀고 넘나든 끝에, 최후에는 공간 자체를 으스러뜨린 무투가의 유산이었다.

'너에게···맡겨 보겠다.'

힘을 다한 듯한 목소리가 회백색 천구와 대지를 아스라이 울렸다.

윗부분이 날아간 두 산봉우리 사이를 공허하게 메아리치다가, 스르르 자취를 감춘 속삭임.

목소리가 사라진 잿빛 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절벽 위에 웅크리고 앉은 용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각별한 존재였느냐?]

댈런은 고개를 기울였다.

각별하다라. 그런가.

애정이 담긴 분신 같은 존재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가상의 캐릭터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요동이 느껴지는 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던 투사의 기억 때문일까.

32인치 화면에 떠오르던 수십 시간의 플레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한 인생이 시작되고 저물어간 수십 년의 기억.

[그 투사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느껴졌다만.]

'···있었지.'

이 세계는 무엇인지. 나는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어째서 그간 수많은 캐릭터들의 힘을 회수할 수 있었던 건지. 그들은 원래 어디에서 온 존재들인지.

수많은 의문들과 확정되지 않은 추측들은, 지금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지금껏 수십 구의 시체를 회수했지만, 댈런은 그중 단 하나도 뇌리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잿빛으로 물든 죽음의 순간들은, 색이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감정을 절절하게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게임 캐릭터의 가짜 죽음이 아니다.

실존하는 세계에서 살아 숨 쉬던 한 사람의 마지막 장면.

심심풀이로 플레이하던 게임이 누군가의 인생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마음 구석진 곳에 스며들었던 의문은 단 한 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 없소. 적어도 지금은.'

댈런은 피식 웃으며 잡념을 털어버렸다.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획득했고, 그에 못지않은 경험 역시 얻어냈다.

잿빛 천구 아래 메아리치던 힘없는 속삭임에, 평안함이 깃든 걸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머지않아 회백의 투사와 같은 초월자들의 시체를 회수할 기회는 또 생길 터.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들은 그때 풀어내도 되는 일이다.

'대영역을 이룬 캐릭터들···그 시체들을 찾아나서야겠군.'

생각을 갈무리하고 내면의 시선을 거둔다.

영역에서 눈을 돌려 현실로 돌아오자, 열 쌍이 넘는 걱정 어린 시선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족장 타룸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말했다.

"괜찮나, 칭구?"

"보다시피 완전히."

"천 년에 한 번 정도, 대선조의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는 하이 오크가 있다고 알고 있다."

대선조라. 그 양반은 어차피 하이 오크 아닌가?

타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며 댈런은 피식 웃었다. 타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댈런, 혹시 너는 변장한 하이 오크인가?"

"아니다. 걱정 마라. 그리고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너희 대선조와는 무관한 일이다."

"다행이군."

나직하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하이 오크다웠다.

하이 오크의 대족장은 대대로 종족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가 거머쥐는 자리.

이번 내전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댈런이 사실은 대선조의 선택까지 받은 하이 오크라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하이 오크의 대족장은 너다. 넌 잘 할 거다."

"고, 고맙다."

댈런은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기 대족장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다는 게 기꺼웠을 따름이었다.

먹을 것과 싸움에 취해 다른 건 생각도 하지 못하는 하이 오크가 태반이다.

강맹한 전사인 동시에 돌대가리인 이들 종족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권력욕이 뭔지 알 정도의 시야는 가져야 할 터.

하이 오크의 존망은 그저 이들 종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시작될 대전쟁에서 이들 종족 역시 큰 힘이 되어줄 테였으니까.

"대선조는 위대한 하이 오크다! 그의 도끼와 검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댈런의 격려에 한껏 자신감이 부풀어오른 걸까.

족장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타룸을 보며, 댈런은 낮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대선조의 돌무덤 곁, 흐릿하게 보이는 한 인영을.

"······."

종족은 인간. 키는 댈런과 비슷했다.

2미터 남짓에, 덩치 역시 그와 엇비슷한 수준.

남자는 한 손에는 큼직한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실체도 아니고, 영체도 아니었다.

신비나 환상일 리도 없었다. 남자의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뚜렷했으니까.

"노인장. 저건 뭐···."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며 펠버에게 묻는 순간, 검은 눈동자가 댈런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응? 뭐 말하나?"

"···아니오."

댈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대족장 타룸의 일장연설이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로써 장례는 끝난 것이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북부 전선(1)

휘이이···!

창문 안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창밖으로 펼쳐진 북쪽의 동토, 그 너머 서리고원에서부터 불어오는 한풍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수염을 움찔거리며, 특무대 집행관 크레이그 비드로프는 썩은 동태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이거 악마가 아니라 추위에 뒈져버리겠군."

"푸흐흐, 따뜻한 남쪽에서 반평생 계시다가 올라오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나저나 남쪽 여자들 중에 미인이 많다던데, 피난민 중에 어여쁜 처자는 없었습니···끄아악!"

"야 이 미친 새끼야. 악마 새끼들 침공이 코앞인데 지금 그딴 소리가 나오냐?"

군홧발에 걷어차인 부관이 엉덩이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소변을 보고 오겠다고 했지만, 보나 마나 경계 중인 병사들과 시시덕대러 가는 것일 테였다.

"쯧, 군기 빠진 새끼. 병사들 관리만 못했으면 진작에 잘라버렸을 것을. 능력은 또 좋아요."

크레이그는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중얼거렸다.

성벽 위 망루에 마련된 개인실은 비좁았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가 이 성의 임시 경비대장이며, 차르국 왕실 특무대의 집행관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할 혜택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곳 북부 전선의 추위가 조금이라도 가시는 건 아니었다.

부관의 말이 맞았다. 동남부에서 오래도록 첩보 작전을 이어왔던 그는 따뜻한 공기가 익숙했다.

그래서 반란 진압의 공로로 전선 동쪽 성채의 경비대장 자리를 받았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쑴의 악마 군세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특무대 요원에게 보직 거부는 곧 명령 불복종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남부 마을은 여관 음식도 나름 먹을 만했는데······. 제대로 된 사슴 스튜 먹어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군."

크레이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차르국 동남부에서 반란군들이 봉기를 일으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다.

정당한 왕홀의 주인이니 뭐니 하던 반란군 집단은, 결국 차르국 백성들까지 악마의 제물로 바쳐대다가 파멸하고 말았다.

원혼의 밤 사태 이후 몰락했던 놈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선택했던 방법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 주민들을 꾀어서 악마의 힘을 끌어오는 것.

동남부에서 몇 개의 마을이 불타올랐고, 천 단위의 주민들이 악마의 힘에 오염되어 괴물이 되어버렸다.

차리나의 시의적절한 지원 요청과, 그 요청에 즉시 병력을 북진시킨 성기사단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남부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을 터.

그건 자칫 차르국이 안에서부터 무너질 수도 있었던 위기였고, 크레이그는 그 위기 속에 있던 증인이었다.

성기사단이 변이된 마을 주민들의 무리를 쓸어버리고, 특무대와 함께 반란군의 뿌리까지 제거해내던 바로 그 자리에.

"······."

그 공로로 집행관의 자리에 앉았고, 비교적 안전한 전선 동쪽의 성채 경비대장이 되긴 했지만.

어째서일까. 크레이그는 하루하루가 좀처럼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추위나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몇 주째 스스로에게 그 핑계를 대보긴 했지만, 삶의 의욕이 사그라든 게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낭만이지.'

스스로도 미친 건가 싶지만 사실이었다.

적진 한가운데에 잠입해 정보를 캐내고, 피 튀기는 전장에서 적에게 총구를 겨눴을 때 느껴지는 낭만.

젊을 시절 특무대에 몸을 담기로 결단했던 결정적인 이유. 지금의 무기력증은 그 낭만이 없어서 생긴 현상이었다.

차르국 동남부에 정보원으로 잠입해 있을 적에는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동남부는 현 차리나가 즉위했을 때부터, 반란군 세력이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이곳은 어떻던가. 북부 전선 중에서도 동쪽 끄트머리.

전략적인 목표도 뭣도 없는 변방일 뿐이었다. 자신이 악신이었어도 이쪽으로 군대를 진격시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윗선의 의중은 이해했다. 부상을 입어가면서까지 왕실에 공헌했으니, 모든 전력을 최전방으로 돌리는 와중에도 그나마 안전한 곳으로 빼준 것이겠지.

크레이그는 책상 위에 올린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전선 중앙으로 보내달라고 요청을 넣어야 할까?

그쪽은 보름 전부터 긴장의 연속이라던데. 그동안 잘 요양한 덕에 부상의 후유증도 다 나았으니 조심스럽게 한 번······.

쿠당탕탕!

"경비대장님! 대장니임!"

문밖의 소란에 상념이 끊겼다. 크레이그는 이마에 힘줄을 빡 돋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쾅! 문짝이 부서질 듯 열리며 부관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평소의 장난기가 싹 지워진 다급한 표정. 얼굴에 줄줄 흐르는 식은땀.

한 소리 하려던 크레이그는 그럴 상황이 아님을 바로 깨달았다. 그는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허억, 헉···정찰대의 급보입니다! 마물의 군대가 밀고 내려옵니다! 창밖을 보십시오!"

이런 젠장. 욕설을 짓씹는 입술과는 달리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모순적인 반응에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크레이그는 곧장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스아아아···!

눈에 마력을 불어넣자 순식간에 시야가 급변한다. 아득한 지평선의 눈 덮인 바위까지도 보일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

쓸데없는 자극들을 능숙하게 걸러내자, 지평선 어림에서 뭔가 이상한 게 눈에 잡혔다.

새하얀 대지와 푸른 하늘 사이, 그 틈을 비집고 나오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검붉은 그림자들.

악신의 마력에 오염된 수백의 야만인 전사들과, 그 동수에 달하는 마물들의 무리였다.

'잠깐. 저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지평선의 일부분을 점거한 그림자들 뒤로, 어떤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갑주를 걸친 건물 크기의 지옥마와, 그 위에 앉아 신전의 기둥 같은 창을 움켜쥔 말머리 거인.

그리고 그 둘을 합친 것과 엇비슷한 크기를 자랑하는, 다섯 개의 머리에서 화염을 날름거리는 거대한 도마뱀.

놈들이 지옥의 악마, 그것도 쑴 직속의 악마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 머나먼 지평선에서부터 압도적인 크기의 존재감이 이곳까지 전해져왔으니까.

'···젠장. 나는 낭만을 원했지 이런 개죽음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품었던 5분 전의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크레이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명령했다.

"부관. 종을 울려라. 그리고 성주님께 사람을 보내도록."

"···예."

"보고 내용은 악마 둘과 천에 달하는 마물 및 타락한 야만인들이 침공을 개시했다는 것. 그리고···."

번쩍.

난데없는 낙뢰가 그의 말을 잘랐다. 지평선 근처에 있던 말의 머리도 같이 잘려나갔다.

말머리 갑주 거인이 말에서 떨어졌다. 크레이그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지평선 동쪽 끝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길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설원늑대를 탄 여섯 명의 인영.

선두의 거한이 뽑아든 검이 햇살에 반짝였다. 벼락을 부르는 성검. 크레이그는 단번에 그 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곁에 있던 부관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비대장님?"

"아, 그래. 아무튼 그렇게 보고드리고, 덧붙여서 낭만이 왔다고 전해드려라."

"예?"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드리지. 지휘를 맡기겠다. 아마 딱히 할 일은 없을 거야."

크레이그는 곧바로 군화를 고쳐 신고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부관의 당황한 외침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병사들 지휘는 특무대 출신인 그보다 군에 오래 복무한 부관이 더 뛰어났다. 평소에 농땡이 부렸으니 지금이라도 일해야지.

그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었다.

먼 길을 행차해오신 낭만의 마중을 나가는 임무가.

*** 꽈르르릉―!

푸른 번개가 내리꽂는다.

이미 한 차례 번개에 직격당하고 낙마한 악마, 오로바스가 등 뒤에서 방패를 꺼내 치켜들었다.

새빨간 불길로 이글거리는 거대한 방패는, 어지간한 수준의 주문이라면 닿기도 전에 살라버리는 지옥의 기물.

내리꽂는 푸름과 이글거리는 붉음이 충돌했다. 승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정해졌다.

방패를 치켜든 악마의 팔이 검게 탄 고깃덩이가 된 것이었다.

"으하하! 화끈하구만! 벼락 한 방에 팔이 너덜거리는 악마라니!"

비요른이 몰려드는 마물 군세를 향해 수류탄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꽈과광! 콰르르릉―!

공중에서 폭발하며 산탄의 비를 쏟아내는 유탄들.

마구잡이로 던진 듯 보였지만, 탄막의 폭풍은 정확하게 마물들만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설원늑대 위에서 저런 기예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평범한 장인의 수준은 아득히 넘어서는 실력자라는 증거.

댈런을 따라다니며 온갖 싸움판에 휘말려서일까.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비요른의 능력 역시, 그 어느 회차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화약을 제조하고 배합하는 기술이나, 폭약을 활용한 기상천외한 병기들을 만들어내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낸 병기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응용력과, 화약이라는 민감한 물건의 화력을 정확히 적을 향해서만 투사해내는 기예 역시 수준급.

스스로의 무위보다는 수제작한 화약에 대해서만 떠들기 좋아하는 그였으나, 일신의 무력 역시 어림잡아 4위계에 근접한 게 분명했다.

수제 도폭선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지금의 모습만 봐도, 악마의 아가리에 폭탄을 던져넣는 전성기의 그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으니까.

"전쟁의 신이시여―!"

외눈의 명공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만들어놓은 마물 군세의 공백.

그 틈을 비집고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든 늑대 한 마리가 질주해 들어간다.

늑대 위에 탄 루시아의 신성문신이 빛을 내뿜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가른 그녀의 검끝에서 백색의 화염이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백하현월(白煆弦月)」

쉬익―!

눈 깜짝할 사이 백 미터 넘게 날아간 백염의 초승달.

신성력으로 빚어진 예기에 도마뱀의 머리 중 둘이 잘려나간다.

촤아아악!

동시에 늑대의 등판을 박차고 뛰어오른 루시아의 등 뒤에서 백색 날개가 솟아올랐다.

성기사단의 고위 기적인 '투천사의 날개'. 하이 오크의 내전에서 성소 수호자들과 싸우던 중 하사받은 기적이었다.

캬아아아아―!!

루시아가 하늘을 날며 머리 셋 남은 도마뱀 악마와 싸우는 사이, 댈런은 설원늑대에서 내려 마물들의 군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적당히 두들겨 패서 길들인 설원늑대는 좋은 이동수단이었지만, 악마의 군세와 본격적으로 치고받을 때 쓰기에는 성능이 애매했다.

무엇보다 댈런 본인이 기마전을 그리 선호하지 않기도 했고. 어차피 단거리의 기동력은 답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 상관없었다.

꽈아아앙!

눈 덮인 땅이 굉음과 함께 터져나가고, 댈런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꽈과과광―

허공을 짓밟고 도약하며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좁혀낸다.

그 경로의 끝.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말머리 악마가 소리쳤다.

[성검 든 전사···! 네놈이 시체늪의 대공을 쓰러뜨린 자로구나!]

대답은 없었다. 놈도 그걸 바란 건 아니었는지, 망설이지 않고 창을 내뻗었다.

후우우웅―!

5미터에 달하는 거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일격.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창끝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다.

[어디 받아내보아라! 네놈을 죽이면 신께서 내게 대공의 자리를 하사하시겠···!]

악마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회명(回冥)」

허공에서 훅 꺼지듯 사라진 댈런의 형체가, 놈의 뒤에서 튀어나와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

[어떻···게···!]

댈런은 이번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곤 악마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잘려나간 말머리가 지면으로 떨어지고.

「홍염주(紅炎柱)」

말머리가 땅에 쿵 하고 부딪히자마자, 등 뒤에서 치솟은 불기둥이 머리 잃은 악마의 몸을 집어삼켰다.

"쯧. 이젠 악마를 잡아도 경험치를 얼마 안 주는군."

쿠르르르···. 콰지직! 우직!

눈 덮인 대지가 입을 쩍 벌린 채, 돌로 된 혓바닥으로 남은 마물들을 싹 쓸어 담는 걸 보며 댈런이 중얼거렸다.

방금 잡은 악마 덕에 가까스로 레벨이 하나 올랐다.

문제는 하이 오크들의 성소를 떠나, 이곳까지 내려오는 수 주간 경험치를 아득바득 모은 결과가 그 정도라는 사실.

설령 혼자서 이 군세를 죄다 쓸어버렸어도 경험치 막대를 절반도 채우지 못했겠지.

시체 회수로 얻는 능력치가 쏠쏠하긴 했지만, 레벨업이 더뎌지는 걸 보고 아쉬워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다.

'···좋게 생각해야지. 그만큼 일행이 강해진 건 맞으니까.'

[저급한 악마 나부랭이! 어머니의 털끝도 건드릴 생각 말아라!]

상념을 이어가는 사이 루시아에게 머리 다섯을 전부 잃은 도마뱀 악마가, 군마 크기로 성장한 청린용의 숨결에 휩쓸려 바스라진다.

나머지 군세 역시 비요른의 폭탄 세례와 발렌티노 사제의 광범위한 대지술식에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일행에게 딱히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걸 확인한 댈런은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능력치를 배분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음?'

북부의 덩치 큰 사냥견들이 끄는 전투용 눈썰매. 대략 열 대쯤이 대열을 이뤄 다가오고 있었다.

차르국 성채에서 출발한 정찰대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턱을 긁적이는데, 선두 눈썰매에 탄 지휘관 복장 남자의 얼굴이 왠지 익숙했다.

어디서 봤는지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남자는 산맥에 오르기 직전, 차르국 동남부의 한 마을에서 만났던 특무대 요원이었으니까.

'그런데 인상이···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쏙 들어간 배와 단단하게 드러난 팔 근육. 살이 빠지면서 날렵해진 턱선.

그게 끝이었으면 별 생각 없었겠지만, 어째서인지 눈빛이 미묘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게 꺼림칙하다.

크레이그 비드로프였나. 댈런은 사내의 이름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며 생각했다.

대체 두 달 사이에 뭔 일이 있으면 저렇게 되지?

170

북부 전선(2)

달칵.

적막한 응접실 안.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댈런은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원탁의 상석을 바라봤다.

원탁에서 가장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자리.

귀금속 장식이 반짝이는 의자에 앉은 노년의 남자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반쯤 빈 찻잔을 감싼 채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구려. 환영하오, 성채를 구한 영웅들이여."

왕실 특무대의 집행관이자 이곳 성채의 경비대장이 되었다는 크레이그의 손에 이끌려, 응접실로 들어온 지 무려 10분만에 듣는 인사말이었다.

"괜찮소이다, 성주. 그 누구라도 전선의 동쪽 끝에서 악마의 침공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는 못했을 거요."

"고맙소, 엘가이아 탑주. 나도 젊을 적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작은 이변에도 심신이 쇠약해지는구려."

"악마의 침공은 작은 이변이라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않소이까. 충분히 잘 해주고 계시오."

펠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인을 위로했다. 성주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세월의 풍파를 맞고 갈라진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자글자글한 주름 위로 백발이 희끗한 노인의 모습은, 전장의 일선에 나서기는커녕 방어선을 지휘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 노년의 귀족이 북부 전선의 성주로 임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차르국의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할 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심상 너머 진룡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댈런에게 물었다.

[내 근간의 기억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차르국은 나름 제국의 반열에 든다 하지 않았느냐?]

'맞소. 영토로만 치면 남부 제국보다도 더 넓지.'

[허면 어찌 그런 제국의 최전선에 이런 지휘관이 앉아있을 수 있느냐? 현 차리나 또한 문무를 겸비한 강력한 군주라고 하던데.]

'그 강력한 군주가 수백 년 동안 지금의 차리나뿐이었으니까.'

[···그렇군.]

적창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의 차리나가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탁월한 군주인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즉위한 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사백 년 전 차르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차르 비즐로프에 견주는 목소리들까지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처럼 강력한 군주라도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부딪히는 부분이 있는 법.

차르국의 경우에는, 바로 인적 자원이 그러했다.

'말단 병사야 모집하고 훈련하면 수 주만에 한 사람 몫을 하게 만들 수 있다지만···지휘관의 자리는 그렇지 않지.'

타고난 자질과 오성이 어지간히 탁월하지 않고서야, 숙련된 지휘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 년에서 십 년의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온 전대 차르들의 끝없는 향락으로 인해, 차르국의 귀족들 역시 대부분 술과 여색에 절여진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수백 년의 혼란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제 본분을 다해오던 몇몇 충성심 강한 가문이 존재했다는 것.

그 가문들을 중심으로 현 차리나는 빠르게 국력을 회복시켰고, 실력 있는 지휘관을 양성하는 중이었다.

다만 지난 십여 년간 실력 있는 지휘관을 아무리 많이 양성했다 하더라도, 지금의 숫자로는 왕도 에클라힘과 북부 전선 중앙부를 지키기에도 빠듯하다는 게 문제였지.

'결국 이 양반도 전대 차르가 통치하던 시절까지 백성들 등골이나 뽑아먹던 인물이라는 거지. 원체 북부 전선에 사람이 부족하니 외곽 지역 끄트머리에라도 일단 앉혀놓은 거고. 노쇠한 만큼 적어도 허튼 생각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한 마디로 답도 없이 무능력한 지휘관이지만, 배신할 여력조차도 없기에 임시로라도 인력 구멍을 막아놓는 데 써먹었다는 이야기.

본인의 취급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구려. 왜 쑴이 이곳으로 악마를 둘씩이나 돌린 건지. 서리고원 너머에 소환된 악마가 스물에 달한다는 건 들었으나, 그럼에도 이런 변방의 방어선에 전력의 1할 이상을 투사할 가치가 있는 건지······."

푹 내쉬는 한숨에 수염이 흩날린다.

성채의 주인으로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맞는 이야기였다.

원래라면 이런 변방에 악마가 무려 둘씩이나 쳐들어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성채는 기나긴 북부 방어선의 가장 끄트머리.

거기다 배후 지형이 워낙 험지인 터라, 대규모 군대로 여길 함락시켜봐야 방어선을 우회하기도 전에 새로운 방어선이 구축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계륵 같은 이 요새에 악마가 둘씩이나 쳐들어온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에 대한 대책 역시도.

그러나 댈런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품속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아르보르가 쪽쪽 빨아먹고 있는 정수 파편을 빼앗아 들었다.

'뱉어.'

[예?]

'다시 줄 테니 뱉으라고.'

[으븝! 악!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먹던 걸 가져가시면···아악!!]

항변하는 악마의 입을 꿀밤 한 방으로 닫아버린 뒤, 슥슥 닦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정수 파편.

스아아아···.

파편뿐이라도 지옥 마력의 집약체인 만큼, 사특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테이블 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힘없이 반쯤 감겨있던 성주의 눈이 거의 반 배쯤 커지고, 원탁의 나머지 신하들 역시 희미하게 얼굴을 꿈틀거렸다.

사악한 마력에 홀렸다기보다는, 그저 두려움에 가까운 반응들이었다.

저 정수의 주인인 악마에게 죽을 뻔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악마를 단칼에 썰어버린 존재에 대한 두려움.

펠버와 달리 댈런은 성주에게 위로 따위 건네지 않았다.

때로는 적당한 두려움이 곁들여져야 효과적인 대화가 오가는 법이니까.

적당한 순간에 필즈의 바람 결계를 응용한 술식으로 지옥 마력을 억누른 그가 입을 열었다.

"오로바스의 정수 파편이오. 대공도 아닌 하급 악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름 없는 악마는 아니지."

***

순간이지만 원탁을 휩쓴 지옥 마력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침묵을 지키는 성주와 신하들.

댈런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심문관 카스타챌드가 처치한 머리 다섯 개짜리 도마뱀 악마의 이름은 리플롭스. 역시 이름을 얻어낸 하급 악마지. 이런 악마를 둘이나 보냈소."

"알고는 있소. 하지만···대체 어째서요?"

"간단하오. 그만큼 전력이 많다는 소리요."

방어가 탄탄한 중앙부 대신 머나먼 방어선의 끄트머리를 손에 넣은 뒤, 그렇게 얻어낸 계륵 같은 이득으로 어떻게든 유리한 돌파구를 찾아내는 건 에낙사구스의 행동 방식에 가까웠다.

쑴은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악신이 아니었다. 놈은 전장의 큰 판을 짜는 전략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싸움에 미친 그 악신이라면 차리나가 전력을 집중시킨 전선 중앙부를 보고, 신나서 자신도 대부분의 병력을 투사할 터.

그런 와중에 이런 변방까지 악마가 둘씩이나 흘러나왔다는 건, 그만큼 전체적인 전력 자체가 기존의 관측을 아득히 상회한다는 의미였다.

"쑴이 소환한 악마는 스물 언저리가 아니오. 못해도 두 배. 아마 그 이상이겠지. 머지않아 전선의 중앙부에서 큰 싸움이 있을 거요."

거의 예언가처럼 내뱉는 말. 허나 근거 없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내분으로 멸망한 경우를 제외하고, 쑴의 군세에 의해 차르국이 멸망했을 회차는 언제나 같은 양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쑴의 공세는 언제나 가장 두꺼운 방어선 한 곳으로 집약되었다.

아무리 차르국이 강성한 제국이라 한들, 수십의 악마가 동원된 대공세를 막는 건 쉽지 않은 일.

방어선이 무너진 뒤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버텨내곤 했지만, 시간만 벌었을 뿐 열에 아홉 회차는 결국 멸망하곤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변방 성채의 안위가 아니오. 성채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당장 전선 중앙부로 지원을 가야 하오."

"잠깐. 지금 당신의 말 한마디로 방어선을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무리 그대의 명성이 높다 한들, 어디까지나 용병일 뿐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하오만."

성채에서 병력을 빼내야 한다는 말 때문일까.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던 신하 중 하나가 발끈했다.

"거기다 오십이 넘는 악마가 소환됐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우리 차르국은 수백 년간 북부의 악마와 싸워왔소! 그래서 흑마법사가 아님에도 최소한의 상식 정도는 알고 있지. 악마를 소환하려면 그만한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거 말이오."

"쯧쯧. 어리석은 소리 말게나. 대륙의 음지에 숨어든 악은 자네의 생각보다 많다네."

신하에게 대답한 건 댈런이 아닌 펠버였다. 노인은 황금빛으로 눈을 반짝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최소한의 상식이라···얼마나 악마들에 대해 잘 아는지 확인해볼까. 보아하니 자네의 기억 속에 악마와 싸운 경험이라고는, 외조모가 남긴 흑마법의 술식서를 갈등 끝에 몰래 폐기한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만."

"그, 그게 무슨···!"

"물론 악마의 유혹에 저항한 것은 대단한 일이나, 좁은 우물에서는 경험할 수 있는 일들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네."

갈색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흘리는 웃음. 가문의 비사를 들킨 신하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신하에게서 시선을 뗀 펠버가 눈을 돌려 원탁을 훑었다. 하나둘씩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신하들.

노인의 황금빛 안광을 마주하려는 이는 없었다. 펠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주에게 말했다.

"성주, 예로부터 악신들이 서로 반목하는 존재였다는 것 정도는 알 거요. 허나 까마득한 과거, 역사에서 지워진 고대의 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소이다."

"······."

"남부의 성기사단이 라필렘의 공격을 받았고, 에낙사구스는 미궁도시를 포함한 대륙 전역을 노리고 있소이다. 테모므론이 오래 전부터 제국 동쪽에서 인간의 영토에 눈독을 들이고 있음은 잘 알 것이오."

한층 더 깊은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여전히 성주에게만은 부드러운 목소리.

허나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움의 이면에는, 눈치채기 어려운 어떤 기묘한 울림이 담겨있었다.

원탁 위의 공기를 장악해가는 황금빛 울림.

사람의 심신을 뒤흔드는 초월자의 마력.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타인의 시간선을 들여다보고 조작할 수 있는 권능이 은밀하게 개방되며, 각 사람의 인생에서 심적으로 가장 약해지던 순간을 파고들어 이 순간에 고정시킨다.

어느 정도 감각이 뛰어난 초인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날 때부터 손에 쥔 권력만 있을 뿐 일반인에 가까운 이들은 저항은커녕 눈치챌 수조차 없는 이능.

사실상 설득이라기보다는 집단 세뇌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 댈런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몸을 슬쩍 뒤로 젖혔다.

"얼마 전 미궁도시에서는 에낙사구스와 라필렘이 협력을 했다더군.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소이다. 쑴이 북부에 이 정도의 전력을 투사한 건, 악신들의 연합이 구성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오."

"그러면···어떻게 해야···하오?"

"전선 중앙에서 지원 요청이 왔을 때는 이미 늦소이다. 당장 지원군을 파병해야 하오."

"알···겠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성주.

원탁에 앉은 신하들도 다르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것마냥,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동의의 말만을 반복할 뿐.

당장에는 저렇게 멍청해 보여도, 권능에서 벗어나고 나면 전혀 어색함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물론 지금 '설득당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을 테고 말이다.

"······."

살짝 힘에 부친지 옷깃으로 식은땀을 닦아내는 펠버를 보며, 댈런은 묘한 감상에 잠겼다.

군주의 명령 없이 군대를 움직이는 것에 대한 책임이나, 심지를 뒤흔든 뒤 세뇌에 가까운 방식으로 지휘관들의 결정을 유도한 것에 대한 가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단촐하고, 짧은 단상.

'내 주문쟁이 캐릭터들은 왜 저런 거 못 했냐.'

그건 이전 회차에서 비슷한 시도를 할 때마다, 성주들의 경비대와 본의 아닌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과거에 대한 한탄이었다.

썩을.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라고.

***

출정 준비는 빨랐다. 병사들은 한나절 만에 든 짐을 챙기고 성문을 나섰다.

지휘관이 무능하다고 병사들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차리나가 개편한 철혈군대의 방식대로 모집되고 훈련된 병사들은, 그 능력과 규율에 있어서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들보다도 뛰어났다.

성채를 운영하고 경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 천에 달하는 병력이 좁다란 계곡길을 따라 오와 열을 맞추고 진군했다.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진형의 한가운데, 훈련된 사냥개들이 끄는 썰매 위.

댈런의 옆자리에 앉은 루시아가 문득 말했다.

171

북부 전선(3)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리던 전대 차르들의 치세 하에서도, 일부 충성스런 귀족 가문들에 의해 북부 전선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왔다.

개중 대표적인 부분이 전선 사이를 빠르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둔 다리와 동굴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눈밭과 가파른 산비탈은 천혜의 방어벽인 동시에 아군의 이동 역시 방해하는 요소였고, 차르국은 수십 년에 걸친 공사로 이를 극복해냈다.

루시아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런 다리와 동굴들을 이용해도 전선 중앙부까지 가는 데 열흘 이상이 걸린다는 사실.

전선의 동쪽 끄트머리에도 악마가 둘씩이나 쳐들어왔다.

중앙부를 노리는 숫자는 그 열 배 이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중앙 전선은 괜찮을 걸세."

루시아의 걱정에 대답한 건 펠버였다.

썰매 위에서도 가장 널찍한 뒷자리. 노인은 명상을 위해 반쯤 감았던 눈을 뜨며 이야기했다.

"북부 전선의 중심은 대륙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그 자체로 거대한 요새인 왕도 에클라힘이지. 그곳이 수백 년간 몰락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네."

"무슨 이유입니까?"

"에클라힘 궁전의 서릿발 왕좌는 이 나라의 역사보다 오래된 유물이지. 곧 보게 될 걸세."

끌끌 웃으며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는 펠버.

그 표정은 마치 선물을 포장지로 덮어둔 채, 아이에게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이런 종류의 문답을 좋아하지 않는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관심을 끊었다.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댈런은 그녀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펠버가 다분히 짓궂게 굴기는 했지만, 그 말대로 왕도 에클라힘은 한동안 건재할 것이다.

현 차리나는 미궁도시의 초월자들에게도 전혀 꿇리지 않는 강자였고, 서릿발 왕좌라는 기상천외한 보구까지 더해지면 그 능력은 배 이상이 될 터.

설령 악신 쑴이 직접 강림한다 해도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전력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버티기만' 한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그래서 지원군이 필요한 거지.'

전략은 이랬다.

전선의 동부 끝에서부터 중앙으로 이동하며, 주요 요새나 거점들을 하나씩 방문해 병력을 불려나간다.

그렇게 방어선 동쪽의 가용 인원을 전부 그러모아, 전선의 중심인 에클라힘에 배치하는 게 계획의 첫 단계였다.

사실상 방어선의 일면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한 요새에 전력을 쑤셔박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생각.

하지만 바보에게는 바보처럼 맞대응하라는 말도 있듯이, 싸움에 미친 광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전략의 개념을 탈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수백 회차 중 북부의 대공세를 최후까지 막아낸 단 몇 번이, 전부 이런 방식으로 왕도 에클라힘을 지켜냈던 회차이기도 했고.

[흐음···상식적인 전략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나, 내 생각에도 쑴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가장 적합할 듯하구나. 놈이라면 북부의 전력이 한군데 모여있는 걸 보고 발정난 개처럼 달려들 테니 말이다.]

심상 너머의 고룡 역시 계획에 동의하는 어조였다.

어째 말에 뼈가 좀 많긴 하지만, 설정상 용족과 쑴은 거의 원수에 가까운 관계이니 그런 것이겠지.

"그럼 문제는 귀족들을 어떻게 설득하냐군요."

특무대의 집행관, 크레이그 비드로프가 말했다.

"제가 있던 성채의 성주와 신하들이 꽉 막힌 노인네들이긴 했지만, 능력이나 심성적인 면에서는 유약하기 그지없었죠. 하지만 전선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실력 있는 귀족들이 성주의 자리에 앉아있을 겁니다. 그들이 방어선의 병력을 빼는 일에 동의할 리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크레이그는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댈런은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비교적 안전한 변방 성채에 있다가, 지원 병력으로 차출되어 원정길에 오른 상황.

당연히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크레이그에게 그런 감정은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흐흐.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낭만이 있지. 낭만이······."

오히려 종종 지금처럼 입꼬리를 씰룩이는 걸 보아하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후덕한 동네 아저씨는 어디 가고, 단단한 육신에 이유 모를 광기가 번뜩이는 요원이 남아있는 모습.

어찌 됐건 비탄에 잠겨있는 것보다 이런 모습이 낫긴 하리라.

그리고 크레이그의 걱정과는 달리, 댈런은 설득에 대한 부분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번 계획에서 중요한 건 설득이 아니었으니까.

"아, 아슬파르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앞서갔던 척후병이 썰매 곁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척후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던 탓일까.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어떻게 엿들었는지, 병사들 사이에 순식간에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지원군을 이끌고 조금 더 나아가자, 산비탈 저 아래로 반파된 요새에서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

댈런은 썰매에서 내리며 말했다.

"노인장. 근처에 진을 치고 계시오. 한 번 둘러보고 오겠소."

무너진 요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한 줌뿐인 지원군이라도 구하러 갈 시간이었다.

***

폐허가 된 아슬파르 요새.

전선의 동쪽 변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댈런이 출발했던 성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한 요새다.

이중으로 된 성벽과 수십 대의 수성병기는 균열을 틀어막고 있던 성기사단의 요새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

타락한 북부인들과 마물의 군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최소한 이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콰직.

불타버린 투석기의 잔해를 짓밟고 요새 안으로 접어든다.

무너져내린 성벽은 강대한 악마는커녕 사람 하나의 침입도 막지 못하는 실정이다.

"인적이···없군요."

루시아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요새 안쪽은 조용했다. 악마는커녕 마물 한 마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의 파괴 속에서 생존자는커녕 시신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결코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루시아와 함께 요새의 중심부로 향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 그 이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락.

무너진 잔해의 음영 속에서 꿈틀거린 그림자.

"크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응달에서 뛰쳐나온 병사가, 부러진 검을 쥐고 댈런의 목덜미를 노린다.

댈런은 가만히 손을 뻗어 놈의 목을 잡았다.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목줄이 잡힌 병사가, 그륵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댈런을 노려봤다.

붉게 변한 눈.

길게 자란 손발톱.

사슬 갑옷을 군데군데 뚫고 자라난 뿔과 가시들은, 이미 완전하게 변이되어 손 쓸 수 없다는 증거였다.

칵! 칵!

부러진 검으로 댈런을 연신 찔러보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과 질긴 피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댈런은 손아귀에 힘을 조금 줬다. 우득 소리가 나면서 병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캬아아악! 카아악!"

꺼무룩 죽어버린 건 거짓말이라는 듯, 번뜩 눈을 치켜뜬 병사가 댈런을 향해 이빨을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휘적이는 몸통과 이빨을 부딪히는 머리가 아예 분리 된 채, 그대로 두 마리의 마물이 되어버린 것.

성벽이 무너지고 건물들이 박살나는 와중에, 길거리에 시체가 거의 없던 이유였다.

지옥 마력의 영향으로 전부 되살아난 채, 먹잇감을 기다리며 가만히 숨어있었던 것.

요새의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마력은 성벽 안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밀도 높은 마력의 흐름 탓에, 이런 자잘한 마물들의 존재감은 어지간히 거리가 가까워지기 전에는 알아채기 어려웠다.

"심상치 않군요. 이런 현상이라면···아마 멀지 않은 곳에 지옥문이 있을 겁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물이 된 병사를 던져버렸다.

"크에에엑! 카학!"

콰광! 콰르르르!

마지막까지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놈은 돌벽에 부딪혀 박살난 뒤, 돌무더기에 파묻히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

끈적이는 마력은 요새의 심부로 걸어 들어갈수록 농도가 짙어졌다.

동시에 처음 죽였던 병사 마물과 비슷한 놈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깨진 채 창칼을 꼬나쥔 말단 병사.

내장을 파먹히고 텅 비어버린 뱃가죽을 열어놓은 채로 덤벼드는 나팔수.

좀 더 들어가자 여러 육체가 붙어서 만들어진 기괴한 괴물이나, 내장과 뼛조각들이 뭉쳐진 거대 벌레 따위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예 죽지 않았음에도 지옥 마력에 오염된 채,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병사들도 존재했다.

"이 정도로 오염되어서는···사실상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지옥의 기운에 물들었어요. 생존자가 아닌 마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염된 병사를 되돌릴 방도가 있냐는 질문에, 루시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변이체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단신으로 악마도 썰어버릴 수 있는 두 사람에게, 겉보기에만 흉악한 이런 마물들은 문자 그대로 한주먹거리도 안 되었으니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전진한 끝에, 두 사람이 발견한 건 요새의 중앙광장 한가운데 이글거리는 지옥문이었다.

"···신이시여."

"악마가 직접 연 지옥문이군. 맞소?"

"맞습니다. 흑마법사 놈들의 지옥문이 다량의 제물과 계약을 통해, 일정 수준의 마물이나 악마를 쏟아낸 뒤 닫히는 문이라면···그 지옥의 거주자인 악마는 통로 자체를 뚫어버리죠."

두 사람 모두 지옥문 자체는 질리도록 봐왔으나, 이런 종류를 맞닥뜨리는 건 처음이었다.

검붉은 고리의 형상으로 이글거리는 지옥문.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사특한 마력으로 인해, 광장은 이미 지옥 그 자체나 다름없는 색채로 물들어있었다.

흑마법의 결과물과 다르게, 악마의 지옥문은 홀로 닫히는 법이 없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처럼, 주변의 원혼과 생기를 죄다 빨아들여 동력으로 삼아내고.

그렇게 얻어낸 힘으로 다시금 주변을 오염시키는 게 가장 핵심적인 특징.

흑마법사들이 단순히 힘과 군세를 얻고자 지옥문을 열어낸다면, 악마가 연 지옥문은 그 목적부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악마와 마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것.

지옥 아닌 곳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악마 놈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니까.

"이끌고 온 병력을 물리길 잘했군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요새의 성벽 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마물이 되어버릴 겁니다."

생존자가 있기는 힘들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루시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댈런은 허리춤에서 성검을 뽑아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콰득!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자락이 잘려나가고, 독특한 색채의 비늘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빛을 머금어 반짝거린다.

댈런은 손을 들어 은신 도구 뒤에서 찔러오던 창을 붙잡았다.

묵직한 감촉. 무기술을 극한까지 연마한 이의 창격이었다.

기습이 실패한 남자는 곧바로 물러나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찢어 죽일 악마의 하수인들! 특무대 집행관의 이름을 걸고, 너희를 반드시······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외침.

핏발 선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아,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었···? 옆에 성기사님이···어라? 어어?"

당황한 채 말을 더듬거리는 남자. 기습의 저의를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물들을 처리하면서 오느라 피와 살점 범벅이 된 댈런을, 악마의 하수인쯤으로 오해하고 죽이려 한 것이겠지.

애당초 저 남자 자체가 구면이었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몇 주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로서의 구면.

"오랜만이군. 검열관 로만 바르코프. 맞소?"

"마, 맞습니다. 댈런···님······."

핏발 선 눈동자에, 피와 땀으로 떡진 머리칼이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미궁에서 부하들을 지키다 최후를 맞은, 집행관 사샤 타란의 직속 부관.

남자는 악마 칼카스를 소환하려는 반란군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미궁 안으로 떠난 원정에 함께했던 동료였다.

"그, 정말 죄송합니다! 절대 고의가 아니라 정말 마물처럼 생기셔···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댈런은 왠지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성검을 내리그었다.

푸른 섬광으로 지옥문을 으스러뜨린 그는 광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요새에 당신 말고 생존자가 더 있소?"

172

북부 전선(4)

생존자는 많지 않았다.

왕실 특무대 출신으로 전선 방어 임무에 투입된 요원들이 여덟.

기존의 요새 방어병력 중 소대 규모 이상의 지휘관급 인사가 스물 남짓.

기껏해야 서른 남짓 되는 이 생존자들만이, 천 단위의 병력이 머물던 요새가 남긴 흔적이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자, 이리 와서 이것 좀 들게나. 그동안 고생 많았네."

먼저 야영지를 구축하고 기다리던 펠버가 돌아온 댈런과 생존자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는 미리 예비해둔 모닥불 몇 개를 생존자들에게 내어줬다.

생존자들은 반쯤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채 비척거리며 모닥불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붉게 충혈된 눈. 피와 먼지에 절어버린 몰골.

그들이 지난 며칠간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는,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생존자들이 스튜와 빵, 따뜻하게 덥힌 술로 몸을 녹이는 사이 댈런은 그들에게 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베테랑답게, 휴식하는 와중에도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시군요. 저희도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만, 직접 겪어보고 나니 알 수 있었습니다. 상식적인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놈들이에요."

"놈들은 성채를 함락한 뒤 지옥문까지 열어놓고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습니다. 후방 교란이나 전선 침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요."

"그저 본대의 힘을 불려 에클라힘에 결집한 중앙 방어군과 크게 한 판 붙으려는 생각만 있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싸움에 미친 야만인 새끼들···아니, 댈런 님의 출신을 비하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썩을, 서리고원 너머에는 가본 적도 없다니까 그러네.

여기서 '나 야만인 아니오' 하고 말해봐야 별 소용 없겠지. 그리고 신분을 오해한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차르국 내에도 서리고원 너머의 북부인 출신 이민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니까.

악신과 전선을 맞대고 있는 만큼 악마의 유혹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차르국의 주민들이다. 그렇기에 타락하지 않은 북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댈런쯤 되는 명성과 지위를 가졌으면, 사실상 인종에서 비롯된 불이익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댈런은 굳이 해명을 늘어놓는 대신, 다른 생존자들처럼 스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차리나께서 고용하셨다던 용병이 댈런 님이셨군요. 성기사단 이외에도 몇 군데 지원을 요청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댈런 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스튜를 우물거리던 로만 바르코프가 말했다.

미궁에서의 임무가 끝나고 집행관으로 승진한 그는, 요새의 생존자들 사이에서 나름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직속 상관을 잃은 뒤 나름대로 피나는 수련을 거듭해온 것일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역시 미궁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도 소영역을 막 이룬 3위계 초입이거나, 영역을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그에 근접한 수준의 경지에 닿아있겠지.

돌아보면 다른 생존자들 역시 영역을 이룬 초인들까진 아니라도, 일반인의 수준은 한참을 뛰어넘은 강자들이다.

악마가 요새 한가운데 열어버린 지옥문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사특한 마력에 오염되지 않으려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했으니까.

"이 사람아, 댈런 님은 그냥 용병이 아니야. 동남부에서 일어난 반란도 댈런 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피해가 훨씬 막심했을 걸세."

생존자들을 관리하던 집행관 크레이그가 끼어들었다. 로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아니, 동남부 반란은 성기사단이 해결한 문제 아니었나?"

"성기사단이 주로 개입하긴 했네만, 맨 처음 습격을 저지한 건 댈런 님의 공이 컸네. 내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았나?"

크레이그는 신난 얼굴로 로만에게 남부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두 사람이 특무대 요원 양성소의 동기 출신이라던가. 털털한 인상의 크레이그와 달리 다소 올곧은 느낌이 있는 로만이었지만,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지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 대화를 반쯤 흘려들으며 딱딱한 빵으로 남은 스튜를 싹싹 긁어먹고 있자, 루시아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댈런. 잠시 이야기 괜찮겠습니까?"

***

"예상대로 쑴은 거대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휘부 막사 안.

주변의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봤습니다. 악마 두 마리가 이끄는 마물 군세는 성을 한 시간 만에 함락하고 지옥문까지 열어놓은 뒤,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방해꾼을 제거하고 본대에 전력을 보탠 거요. 마지막 싸움을 위해서겠지."

"···그렇게 보입니다."

게임에서도 항상 보여왔던 패턴 그대로다.

지옥문을 열어 전선의 요새들을 재건조차 불가하도록 초토화시키고, 그렇게 방해 요소들을 제거해나가며 마지막 단 한 번의 싸움을 강요하는 전략.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제대로 된 한 번의 싸움에 목을 매는 악신다운 발상이었다.

"아마 앞으로 거쳐갈 요새들도 함락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제대로 된 지원 병력을 얻기는 힘들지도 모르고요."

"······."

"엘가이아 마탑주님께 차리나와 서릿발 왕좌의 능력을 듣기는 했습니다만···솔직히 소문일 뿐 아닙니까. 진짜로 악마의 대군세를 막을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는 겁니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는 모습.

병사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불안감이었다.

"방어선의 요새들을 무시하고 진군한다면 며칠이라도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차리나와 에클라힘 궁전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상, 하루라도 빨리···."

"루시아."

"······."

"불안하시오?"

잠깐의 침묵.

그 끝에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불안합니다. 이건 저 하나만의 목숨이 달려있는 일이···아니니까요."

참아왔던 감정이 울컥 쏟아진다.

작게 떨리는 손끝. 신성 문신이 반짝거리며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후르르 진동한다.

신의 부름을 받고 전장의 선두에서 달려나가는 성기사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루시아처럼 영역을 이뤄낸 초인들이나, 더 나아가 종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라 해도 다르지 않다.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서도, 미래는 불분명한 암흑일 뿐.

오히려 위로 올라가며 그 암흑의 편린을 엿볼수록 고뇌는 더욱더 깊어질 따름이었다.

원래부터 공포는 완전한 무지가 아닌, 어둠 속에 움직이는 흐릿한 실루엣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었으니까.

"대륙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저희의 싸움이 실패하면 차르국은 쑥대밭이 되겠죠. 그 다음은 도시연합과 팔시온, 그리고 성기사단이고요."

가늘게 떨리는 손길로 허리춤의 물주머니를 열고 목을 축인다.

한 번 둑이 터진 감정은 쉽게 진정될 줄을 몰랐다.

병사들 앞에서 이토록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던 건가.

함락된 요새를 눈앞에서 목격한 뒤에도 이탈자가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대마법사인 마탑주와 성기사단의 심문관, 그리고 용살자 용병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와해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군대다.

스스로의 위치를 아는 만큼, 병사들 앞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자 노력해왔겠지.

"······."

목을 축이고 푹 떨구는 고개. 쏟아지는 금빛 폭포 사이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툭. 툭. 테이블 위에 무늬지는 작은 동그라미들. 금발 너머로 들썩이는 어깨를 눈앞에 두고, 댈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두렵소."

***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었다는 반응.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과 같은 이유는 아닐 거요. 인류를 수호한다거나 문명을 지킨다거나 하는 거창한 핑계를 대기에는, 나는 그리 선한 사람이 아니니까."

끼익.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막사 천장으로 시선을 들어올린다.

짐승 가죽으로 보온성을 더한 막사 천장은, 건조대에 비쩍 마른 사슴 가죽이 매달려 있던 설산의 오두막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사방이 하얗던 세상에서 눈을 뜬 뒤, 얼마나 극심한 공포에 몸을 떨었던가.

산길에서 도끼 한 자루로 늑대 무리를 조각내고, 용병 일에 몸을 담고서 도적들에게 같은 일을 행하면서도.

그의 정신을 지배하던 건 강력한 육체에서 오는 어떠한 고양감도 아닌, 게임이 취미이던 회사원 아저씨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소. 잊혀지는 게 두렵고.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는 게 두렵소."

"······."

"처음부터 칼과 도끼로 사람이며 마물을 죽이고 다녔던 게 아니오. 주문이나 칼질은커녕, 주먹 한 번 시원하게 내질러보지 못하던 게 나였소. 얻어맞으면 얻어맞았지, 때리지는 못했던 인간."

"···댈런이 맞고 살았다니. 아무리 어릴 때라지만 상상이 안 가는걸요."

"그렇겠지. 나도 지금은 왜 그랬나 싶으니까. 맞을 땐 맞더라도 그 새끼들 아구창이나 한 대 후려줄걸."

댈런이 장난스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항상 쉬운 선택을 해왔소. 그런데 결국 그게 가장 어려운 길이더군. 언제나 후회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다시금 쉬운 길을 택했지. 그리고 또 반복하고, 그렇게···."

"······."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요. 두려움에 먹혀서 쉬운 길을 택했을 때와, 미친 것처럼 보여도 눈 딱 감고 들이받았을 때의 차이를 이제는 알고 있으니 말이오. 그리고···."

눈을 감고 이어내는 말.

"실패하는 것보다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게 더 싫으니까."

모니터 너머에서 수백 번의 실패를 지나왔지만.

"그렇게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건 이전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번 잃었기에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댈런은 그 소중함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함을 깨달아갔다.

매일 매일이 지겹고 지치던 지구에서의 삶도, 잃고 나서는 꿈에 그리는 고향의 추억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삶이라고 다를까. 댈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궁 밑바닥의 소원의 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일상의 그리움을 뼈저리게 느껴온 만큼, 이 세상의 소중함 또한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기에.

마지막 순간에 내릴 선택이 무엇일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만, 어찌 됐건 지키고 되찾아야 할 동기는 이전보다 더 커진 셈이었다.

끼익.

의자가 작게 울었다. 루시아의 의자였다.

"···함락된 요새마다 생성됐을 지옥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마지막 전투를 이긴 뒤에도 북부 전선 일대가 오염 지대가 되어버리겠죠. 그 요새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야말로 악마의 군세를 상대할 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베테랑들이겠고요."

약간의 물기가 묻어나는, 하지만 논리정연하게 진정된 목소리.

"요새를 지나치지 않고 하나하나 수습할 때마다 병사들의 사기 역시 진작되겠죠. 마지막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차리나와 서릿발 왕좌의 능력을 신뢰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선의 요새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녀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 결정을 가로막고 있던 건 두려움.

댈런은 그게 잘못되었다 여기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함께 싸우곘다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지키겠다 따위의 소리를 하지 않은 이유였다.

댈런은 눈을 감은 채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어쨌든 걱정 마시오. 내 생각이긴 한데···쑴 그놈은 지금쯤 나와 한 판 붙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테니까."

하이 오크 대선조의 무덤에서 마주했던 투사의 기억.

하늘과 땅을 회백으로 물들였던 전사의 마지막 기억에는, 쑴의 표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절절한 살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희열, 호승심과 즐거움, 쾌락의 감정들.

댈런의 감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또렷하게 느껴지던 그 감정들이, 이번 회차에서는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회백의 투사 역시 시체늪의 대공을 죽였었지.'

측근들 중 가장 영민한 책사를 잃은 싸움꾼 악신이, 그 살해자에게 보일 반응은 한 가지뿐.

어쩌면 이렇게 요새를 불태우고 함락시키는 모든 행동들은, 그를 전장으로 부르는 초대장일지도······.

쪽.

상념을 뚫고 들리는 소리.

부드러운 감촉은 이상하게도 한 발 늦게 느껴졌다.

"이건 작별 인사가 아니에요."

눈을 뜨자 가까워진 루시아가 보였다.

입술 끝에 남은 온기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촉촉한 눈가. 약간 발그레해진 뺨. 그 아래의 부드러운 미소.

그 미소가 열렸다.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다고 했죠?"

그리고 다시 한 번 다가와 부딪혔다.

"저도 두 번 잃지는 않을 거예요."

천막 안에는 한동안 온기가 감돌았다.

***

지원군은 중앙 전선으로 계속 진군했다.

함락된 요새들에서 지옥문을 부수고, 생존자들을 구출해내는 작전은 하루이틀에 한 번 꼴로 계속됐다.

댈런과 루시아를 중심으로 하던 작전은, 이내 별도의 구조대가 함께 들어가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전선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요새의 규모가 커지기도 했고, 이전에 구해졌던 전사들이 자신과 같은 생존자들을 찾아내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따금씩 함락되지 않은 요새도 있었다.

방어 병력의 저항이 거셌거나, 마물들의 군세에 악마가 하나 정도만 포함되거나 한 경우였다.

그런 요새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수비적으로 나오다가도, 구출된 생존자들에게 전황을 전해 듣고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기고 전부 차출해주었다.

그렇게 지원군의 규모를 불려가며 행군한 지 삼 주.

댈런과 오천 명의 지원군은 마침내 왕도 에클라힘을 앞두게 되었다.

173

왕도 에클라힘(1)

휘이이이······.

차디찬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댈런은 뺨을 긁적이며 능선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주변에서는 오천에 달하는 병력이 추위에 맞서 행군하고 있었다.

모두 함락된 요새에서 구출해낸 생존자들이거나, 악마의 공세를 버텨낸 성채에서 지원받은 병사들이었다.

'방어선 동쪽에서 3주 만에 오천 명···그 어느 회차보다도 많이 모였군. 이번 회차의 차르국 방어선이 생각보다 더 견고하게 버텨줬어.'

지난 몇 달간 이어져 온 후방에서의 반란이 성공적으로 제압됐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댈런과 성기사단의 개입으로 철혈군대의 인력 투입 역시 최소화되었으니, 최전선의 병력은 분산될 일 없이 방어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모아낸 병력은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 모두 부족함이 없었다.

그중에도 함락된 요새에서 구출해낸 생존자들의 역량은 상상 이상.

악마가 열어낸 지옥문의 오염을 이겨내고, 구출될 때까지 마물을 죽이며 살아남았다는 건 그 자체로 능력과 의지의 증거.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 할 만한 그들은, 악마를 향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사기 진작의 주축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의 지옥도에서도 버티던 이들이기에, 전선 동부의 요새들이 절반 이상 무너졌다는 사실 정도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물론 용살자 용병과 악마 살해자 성기사, 한 마탑의 수장 대마법사가 지원군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수확도 나쁘지 않았다.'

댈런이 북부 전선의 절반을 순회하며 얻은 건 병력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죽은 시체들 역시 그에게는 또 하나의 보상이었다.

'눈밭의 반사광에 시력을 잃은 궁사의 시체'

'거인이 던진 바위에 묵사발이 난 주술사의 시체'

'북부인 전사를 힘싸움으로 이긴 용병의 시체'를 위시로 한 여섯 구의 시체들.

악신이 직접 대륙을 침공하는 최후의 대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도, 차르국과 북부인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해왔다.

주로 용병 신분으로 캐릭터를 키운 댈런이었기에, 북부 전선에는 자연스럽게 끼어들 구석이 많았다.

회백의 권사라는 캐릭터로 악신의 침공을 본 이후에는, 침공을 방어할 전략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 들린 적도 종종 있었고.

그밖에도 세계의 이빨 산맥을 내려오며 얻었던 '졸다가 눈사태에 파묻힌 순찰대원의 시체'와 '설원늑대에게 먹힌 조련사의 시체'까지 포함하면, 회백의 투사 이후에 회수한 시체는 총 여덟 구.

팔시온의 남부 지구에서 얻은 시체와 엇비슷한 개수였다.

'고작 한 달 남짓 고생한 것치고는 분에 넘치는 보람이지.'

병력이 휴식할 때마다 시체를 찾아 움직이는 통에, 제대로 쉰 적이 거의 없긴 했지만.

고생 끝에 얻은 열매이기에 때론 더욱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법.

댈런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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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34

[근력 : 49] [기량 : 42] [체력 : 38]

[감각 : 38] [지능 : 37] [마력 : 41]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고유 스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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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30 후반에서 40 초반. 근력은 무려 50이 코앞이었다.

영역의 힘을 사용하며 단순히 능력치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이적들을 실현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능력치의 중요성이 바래는 건 아니었다.

영역의 힘이든 뭐든 강력한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재능과 오성이 필요한 게 현실.

그 재능을 나타내는 지표가 능력치였으니, 여유가 될 때마다 시체와 경험치를 아득바득 긁어모아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식목계 마법 개론에서 쓸만한 주문은 지금 익힌 두 가지가 끝인 것 같고···주술사 시체에서 얻은 룰리아의 샘물은 빙정과 시너지가 괜찮겠어.'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얻을수록, 뻗어나갈 수 있는 선택지는 십수 가지가 늘어난다.

서로의 심상을 그리고 지워나가는 초인들 간의 싸움에서, 그런 선택지들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았다.

승리를 결정하는 데는 힘의 크기만큼이나 전투를 설계하는 능력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

주문과 술식을 포함한 다양한 능력들은, 그 설계 자체를 다변화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댈런. 왕도가 보입니다."

상념을 뚫고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댈런은 상태창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 너머, 능선 저 아래쪽으로 거대한 도시가 흐릿하게 내려다보였다.

***

머지않아 눈보라가 완전히 걷혔다.

새하얀 백색 성벽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면적의 도시.

그 한가운데 높이 솟은 청백색의 궁전.

도시의 전경을 본 펠버가 나직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말했다.

"대륙 북부의 지배자 차르의 도시이자, 서릿발 왕좌의 에클라힘 궁전이 솟아오른 곳. 왕도 에클라힘. 젊을 적에는 이곳에서 얼어붙은 땅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었지. 오랜만이구만."

"크하하하! 얼음과 화약의 성지라니! 나 역시 정말 오랜만이군! 한때는 나도 이곳의 궁전을 집처럼 드나들었···어억!"

"화약에 미친 친구여, 듣는 귀가 많다네."

"끄어어, 내 두개골!"

허공에서 소환되어 뚝 떨어진 돌덩이에 얻어맞은 비요른이, 부어오른 정수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혀를 쯧쯧 차는 펠버와 난쟁이의 머리에 얼음 찜질을 해주는 아카샤.

난장판이 된 썰매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루시아가 문득 말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북부 전선의 수많은 요새들이 함락당했는데, 왕도는 함락은커녕 공격조차 받지 않고 있다니······."

그녀의 말대로였다. 왕도 에클라힘은 유일하게 성채이자 도시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삼중으로 지어진 성벽은 실금 하나 없이 단단하게 솟아있고, 그 위의 병사들 역시 만전의 태세로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한편 남쪽 성문 앞으로 까마득하게 줄 선 인파에는, 상인과 농민, 용병, 수레와 짐마차들이 검문 순서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고.

전운의 긴장감은 감돌고 있으나, 직접적인 타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몇 주간 수많은 참상들을 지나쳐왔기에, 오히려 더욱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일상의 정경.

이런 정경은 결코 우연히 펼쳐지지 않는다.

댈런의 예상이 맞다면, 분명 차리나는 이미 서릿발 왕좌에 앉아 홀로 악마의 군세를 저지하는 중이겠지.

그리고 댈런과 일행은 그 사실을 머지않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댈런 님. 차르국의 왕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차리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서릿발 왕좌의 주인이, 그들을 직접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

오천에 달하는 병력은 큰 탈 없이 성벽 안으로 들어왔다.

왕도의 경비병들이 무능한 건 아니고, 그저 미리 예정된 수순이었다.

전선 동부의 성채들을 수습하면서, 댈런은 이미 왕도로 몇 번이나 사절을 보내 지금 지원군을 이끌고 가는 중이라 전달했었다.

왕도에서도 환영의 뜻을 알리며, 가능하다면 조속히 지원군을 끌고 와달라는 차리나의 말로 화답했었고.

덕분에 난데없는 대규모 병력의 등장에 성에서 설랑(雪狼) 기마대가 튀어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성문 앞에 줄선 사람들을 잠시 물리고, 간단한 검문절차를 거치며 병력을 들여보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

그리고 병사들이 한창 검문을 받는 동안, 댈런과 일행은 에클라힘 궁전으로 초대되었다.

그것도 귀족들 중에도 특별한 몇몇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서릿발 왕좌가 놓여진 전당 안쪽으로.

쩌적. 쩍.

바닥은 물론, 벽면과 천장까지 꽝꽝 얼어버린 기나긴 복도.

에클라힘 궁전에서도 가장 심부에 있는 복도의 끝에는, 어지간한 성문보다도 두꺼운 문이 온갖 마법진으로 도배된 채 자리하고 있었다.

기긱, 그그그극―

"흐읍···!"

문틈이 벌어지는 순간 불어닥치는 냉기.

스승의 뒤를 따르던 토미가 고통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스승의 주문을 계승하며 평범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진 소년으로서도, 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한기를 감당하는 건 버거웠기 때문.

"견딜 수 없다면 돌아가시오. 차리나께서 계시는 전당에서 시체를 치우는 일은 원치 않으니."

문 앞을 지키는 왕실 수호대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화르르르···.

등 뒤에서 뻗어나온 흑염의 날개가 불어닥치는 냉기를 상쇄해낸다.

단순히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걸 넘어서서, 주변 수 미터 반경의 냉기를 완전히 몰아내는 열원이었다.

"······."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된 왕실 수호대. 댈런과 일행은 그들을 지나쳐 전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오."

"신이시여······."

전당 안은 광활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얼어붙은 대지는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졌고, 하늘에서는 얇은 눈이 끊임없이 내리며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간을 왜곡시켜 넓혀내기라도 한 걸까.

혹은 미궁도시의 약재상 필로폰의 거처와 같이, 차르국 왕조에 대대로 내려오는 심상 그 자체를 구현해낸 장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댈런은 조금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느릿하게 내리는 눈발 너머로 높게 쌓아올려진 단상과 옥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얼음으로 빚어놓은 듯한, 인간 여성의 형체를 띈 동상도.

그 동상의 입술이 달싹였다.

[환영합니다.]

[방랑하는 칼라드라쿰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자, 제국과 차르국의 기술을 훔친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

[에드거 라인하르트의 기대를 받는 악마 살해자,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 루시아 카스타챌드.]

[용신의 좌완 갑주의 시간선에 손을 댄 대지술사, 엘가이아 마탑주와 그 주문을 이어받은 제자. 펠버 발렌티노와 토미 발렌티노.]

[숨겨진 종말의 안배였으나 이제 부친으로 택한 자와 함께 종말에 대항하는 용. 아카샤 리울라크.]

[그리고···.]

쩌저적.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상의 입술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쨍―!

이내 맑은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얇은 얼음 파편들.

왕좌 위에 동상처럼 얼어붙은 여인, 차리나 비잘리나 요스코브는 얼음에서 벗어난 얼굴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악마 학살자. 용살자. 두 마녀를 죽인 자. 역천에 드리운 어두운 별나무를 길들인 자. 군주에게 버려진 용의 피를 품은 자. 성도 가문도 알 수 없으나, 신들의 주목을 받으며 결정된 모든 걸 뒤흔드는 자. 댈런."

"······."

"역천의 우물은 정말로 당신을 예언한 것일까요. 나는 맞다는 데에 내 운명의 표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렸지요. 쑴의 백여덟 악마, 그 절반을 홀로 막아내면서."

청백색의 눈동자가 댈런을 응시했다. 빨려들어갈 것 같은 마력을 품은 눈이었다.

영역의 일면이 아닌 전체를 투영해낼 수 있는 경지.

신비를 자신만의 소유로 비틀 수 있는 존재.

6위계에 오른 마법사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댈런은 가만히 손을 들어 턱을 긁적였다.

그는 생각했다.

시발, 또 주문쟁이 특유의 어려운 말 시작이네.

174

왕도 에클라힘(2)

"먼 길을 걸어오느라 고생했어요, 용사들이여."

후우. 차리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찬찬히 훑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김을 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걸어오다니. 썰매 타고 왔는데.

물론 아무리 그라도 6위계 마법사와 실없는 말장난이나 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존재가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마침내 기다리던 전력들이 모두 모여들었군요. 바르샤바크는 며칠 내로 도달한다고 했으니,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어요."

"결단이라 하시면···악마의 군세를 영토 안으로 들이시겠다는 의미입니까?"

"맞아요, 탑주. 서릿발 왕좌의 힘으로 보름째 악마들을 저지하고 있지만, 저라고 언제까지나 막아낼 수는 없어요."

차리나의 목소리는 넓은 설원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지만, 반면 그녀의 입술은 혼잣말하듯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멈출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중간중간 고통스럽게 움찔거리는 뺨과 이마.

대악마와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6위계의 마법사에게도, 서릿발 왕좌의 힘을 사용하는 건 상당한 수준의 부담이라는 증거였다.

아마 역량이 부족했던 전대 차르들이라면 왕좌에 앉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죽었겠지.

"싸움에 대한 쑴의 집착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우리 차르국 역시 놈의 손아귀에 놀아나다가 무릎 꿇을 생각은 없어요. 필멸자라고 얕보는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줘야죠. 안 그런가요?"

자꾸만 얼음이 얼어가는 뺨을 움직여, 차리나가 힘겹게 싱긋 웃었다.

펠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신중한 전략가인 그답게 이 전쟁의 당사자인 그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본 듯했다.

그때 일행의 가장 뒤에 서있던 비요른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말했다.

"그, 허, 거참···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 몸은 좀 괜찮나?"

평소의 호탕한 목소리는 어디가고, 난쟁이답지 않게 쭈뼛거리는 말투.

일행이 쟤 왜 저래 하는 표정을 짓는 사이, 차리나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기울였다.

그녀는 이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증조부. 그래도 아는 척은 해주시는군요. 백 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시기에, 저희는 그저 하룻밤 불장난의 결과물로만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다. 절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진심이었다! 어떻게···."

"푸훗, 농담이에요. 물려주신 피 덕분에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룬 마법 적성이 없었다면 고대 드워프들의 유산인 서릿발 왕좌를 이만큼이나 잘 사용할 수 없었을 거예요."

차리나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댈런은 습관처럼 턱을 쓰다듬었다. 뭐야. 저 난쟁이가 차리나 요스코브의 조상이라고?

당대 차리나의 혈통에 드워프의 피가 섞여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추문 정도야, 댈런도 수많은 회차에 걸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어떤 회차에서는 직접 룬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도 봤으니, 완전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게 외눈의 명공일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상식적으로 악마의 아가리에 폭탄을 던져넣는 미친 난쟁이가, 고귀한 혈통과 연관이 있을 거라 누가 짐작할 수 있겠나.

'제국과 차르국에서 극비리에 개발하던 화약 기술을 어떻게 빼내온 건가 했는데···그런 뒷배경이 있었던 거였나 보군.'

그러고보니 차리나가 비요른을 언급할 때 칼라드라쿰 왕조라는 이야기도 했었지.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는 온갖 베일에 감춰져 있던 외눈의 명공에 대한 설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다.

슬쩍 일행의 표정을 둘러보니, 역시나 펠버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차리나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부터 서릿발 왕좌의 힘을 천천히 약화시킬 거예요. 대략 일주일 뒤에 악마의 군세가 이곳에 도달할 겁니다. 각자 휴식을 취하시고, 마지막 준비를 하시길."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살얼음이 덮여가기 시작하는 얼굴. 불현듯 굵어지기 시작한 눈발 너머로 왕좌의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져갔다.

댈런은 일행과 함께 전당을 떠났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기 전, 머릿속에서 차리나의 전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댈런, 조심하세요. 당신을 노리는 그림자가 이 도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

그날 밤.

수행원들의 안내에 따라 일행과 함께 궁전의 빈방에 짐을 푼 댈런은, 밤늦게 홀로 궁전을 빠져나왔다.

인적 없는 거리만을 골라 가로지르며 향한 곳은 도시의 북쪽 외곽.

정확히는 그 외곽을 넘어선, 성벽이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좁은 뒷골목이었다.

탁―

가볍게 밀어찬 발걸음.

건물의 벽과 지붕을 디디고 허공을 두어 번 걷어차자, 눈높이가 성벽 위의 총안에 맞닿는다.

여기서 더 날아다니다간 예민한 몇몇 경비들의 눈에 띌 수도 있겠지. 그렇게 판단한 댈런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회명(回冥)」

어둠 속에 흩날리는 흐릿한 잿빛.

소리는 물론 마력의 움직임마저도 극도로 희미하다.

공간의 틈을 뛰어넘어 단숨에 첨탑 위에 도달한 댈런은, 가파른 지붕 위에서 어렵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도시 밖을 내다봤다.

스으으으···.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마력광.

오감에 한계까지 불어넣어진 마력.

한밤의 어둠은 그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으나, 그가 원하는 건 단순히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이상이었다.

'아커만의 작도법.'

실측 가능한 거리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궁 4층의 전역을 지도로 만들어버린 힘.

심상 너머 영역의 전역을 굽어보는 시야에, 작도법의 힘을 접목시켜 새로운 고유 스킬로 빚어낸다.

「몽환추적(夢桓追跡)」

몽왕의 궁전마저도 간파했다는 이능을 기반으로 구현한 능력은, 꿈과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대상을 추적해내는 것.

어떤 면에서는 탐색자의 좌완 파편과 비슷한 기능이다. 물론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탐색 면적은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육체의 기억에 없는 대상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탐색자의 좌완 파편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인 바.

회백의 투사에게서 물려받은 기억.

그 기억 속 한 대상을 특정해 발동 조건으로 삼고, 새로이 얻은 고유 스킬을 시전한다.

화아아아아―!

마력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며 시계가 확장된다.

물리적으로 넘어낼 수 없는, 지평선 너머라는 한계가 가볍게 부서졌다.

순식간에 지평선 너머 북쪽의 북쪽으로 확대되어가는 시계의 범위.

그 끝에 잡힌 건 거대한 서리폭풍이었다.

휘─────

서릿발 왕좌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광범위한 일대를 공간째로 동결해버리는 강력한 주문은, 모니터 너머에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선사했다.

악마의 대군이라도 막아설 수 있는 서릿발 왕좌의 마법.

「파영의 마안」

환상과 신비를 관통하는 시야로, 그 안쪽을 비집고 들어가 내용물을 열어본다.

꾸드득. 꾸득···.

눈앞을 가득 메운 건 꽝꽝 얼어붙은 수만 마리의 마물과, 그 배 이상은 되는 타락한 야만인들의 군세였다.

서릿발 왕좌의 힘을 조금씩 느슨하게 하고 있어서일까.

공간 자체가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그나마 힘이 강한 마물들은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려 시도하는 중이었다.

으지지직···.

그 다음으로 보인 건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건 수십 마리의 악마들.

기본적으로 악마가 가진 힘은 마물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기에, 놈들은 수 분에 한 걸음씩이나마 명확하게 내딛고 있었다.

[뭘 보려 하는 것이냐?]

오밤중에 벌이는 기행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걸까.

심상 너머의 절벽 위, 적창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백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곳을 내다보는 데는 상당한 집중력과 힘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

끝없는 악마와 마물의 무리를 넘어, 군세의 배후를 향해 조금 더 파고든다.

적창의 질문은 나름 합당하고, 또 어떤 맥락에서 의표를 찌르는 부분이 있었다.

마력을 쏟아부어가며 지평선 너머를 엿보는 이유가, 단순히 악마 군세를 막아서는 서릿발 왕좌의 폭풍을 보기 위함일 리 없다.

악마 수십 마리가 밀고 내려온다는 것과, 서릿발 왕좌의 힘이 이를 막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뭘 하나 했는데, 지금 설마···]

그제서야 댈런의 의도를 눈치챈 적창이, 놀란 표정으로 심상 너머에서 고개를 들고.

스으으.

마침내 시야의 끝에서 포착된 한 인영이, 댈런의 시선을 의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

놈이 웃었다.

그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몸뚱이는 어린아이가 물감으로 대충 덧칠한 듯 어렴풋하게 검붉고.

일그러진 형상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눈동자만이 핏방울의 색채로 일렁인다.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일그러짐이었으나, 누군지 알아보기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

회백의 투사가 남긴 기억.

댈런이 고유 스킬 몽환추적으로 탐색한 대상은, 그 기억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존재.

악신 쑴이었으니까.

[칼카스에 즈탄크까지 죽였다길래 어떤 놈인가 했는데, 이거 생각보다도 더 재주가 좋은 녀석이었잖아?]

놈이 말했다. 선명한 웃음기를 띈 목소리였다.

동결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수십 악마의 군세의 안위나, 그들이 주군의 의지에 따라 벌이는 침공 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저 마치 자신을 즐겁게 해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나른함 위에 꿈틀거리는 희미한 흥분이 놈에게서 느껴지는 전부였다.

[역천의 우물이 널 예언했다는 소리도 있지···네가 내 시험을 통과했으면 좋겠군. 만약 싸움이 끝나고도 살아있으면, 북쪽으로 와.]

두 눈이 천천히 휘어진다.

지평선 너머에서 뻗어나간 댈런의 시선을 정확하게 응시하는 붉은 일렁임.

놈이 말했다.

[그때 보자고.]

화아아악―!

시야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마치 고무줄을 한계까지 당겼다가 놓은 듯, 빠르게 줄어드는 시계의 범위와 거리.

그 급격한 변화에 머릿속이 아득해진 댈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멀미를 할 것처럼 속이 울렁인다. 인간의 육체를 뛰어넘은 뒤로, 어떤 외상도 없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건 의외로군. 쑴이 직접 대륙에 강림했다니.]

그리고 댈런이 감각을 진정시키는 사이, 적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심지어 무리하게 강림하기 위해 기존의 권능과 힘 태반을 내던진 모습이었다. 다섯 악신들은 언제고 서로를 잡아먹고자 으르렁대는 사이일진대.]

"······."

[아무리 싸움에 미친 자라지만···모든 걸 잃을 각오가 아니고서야, 저런 결단이 가능한 건가.]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거요."

댈런이 피식 웃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직까지 시야가 조금 어지러웠다. 눈 위를 살살 문지르자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강림했으면 강림한 거고, 본인이 불리한 조건이라도 싸우고 싶다면 그런 거지. 안 그렇소?"

[······.]

"나이를 오래 먹은 양반이라 그런가, 이상한 구석에서 걱정이 많은 것 같군."

적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절벽 위에 흐르는 미묘한 정적. 댈런은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털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태생부터 악마와 견줄 정도로 강력한 존재인 진룡. 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력을 지닌 적창이라지만, 결코 다섯 대지옥의 주인인 악신들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격차를 더 생생하게 알고 있을 테지. 당장 용신도 악신 중 하나이고, 쑴과 오랫동안 치고받아왔으니까.'

그럼에도 댈런이 가볍게 받아칠 수 있는 건, 그런 적창마저도 도달해본 적 없는 미래에 닿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겠지.

종말에 맞선 수백 회차.

모니터 너머의 축약된 시간으로만 수천 시간을 넘어서는 대장정.

수없이 반복된 플레이 속에서, 댈런이 악신의 목을 딴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기회다.'

비록 힘이 제약된 화신체겠으나, 어찌됐건 악신 중 하나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이로써 놈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면, 북방 전선도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길 것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사방에서 짓쳐드는 종말. 전선들 중 하나라도 여력이 남아돈다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변수가 되겠지.

불안정한 미래는 끊임없이 뒤틀리고 변화한다.

허나 그렇기에 더 먼 곳을 바라보며 설계해나가지 않을 수 없는 법.

물론 그걸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싸움부터 대비하는 실행력 역시 중요하겠지.

어지러움을 완전히 가라앉힌 댈런은, 첨탑의 지붕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나이에 대한 직언은 종족을 불문하고 어느 여성체에게나 실례인 걸 아느냐?]

"······어?"

그리고 답보을 익힌 뒤 처음으로, 허공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했다.

[그 반응은 뭐냐. 무감각하고 우둔한 야만인처럼 보여도, 누구보다 현란한 혀놀림을 가진 네가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몰랐다는 핑계를 댈 셈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허, 참. 허면 설마 내가 여성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그런 뜻이더냐?]

사실 그것도 있기는 한데.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느낌이고.

"······."

그보다 여기껏 침묵하던 게 그냥 저 말 때문에 꿍해있던 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라고.

175

왕도 에클라힘(3)

찰박. 찰박.

살얼음 앉은 진창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먹잇감을 찾아나온 쥐들이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퀴퀴한 냄새가 풍겨오는 도시 지하의 하수도. 댈런은 반쯤 생각에 잠긴 채 그 안쪽을 걷고 있었다.

"······."

사흘.

차리나가 이야기한 일주일의 유예기간 중 사흘이 흘렀다.

전선 동부에서부터 지원군을 끌고 도착한 일행은, 지난 사흘간 눈코뜰 새 없이 바빠졌다.

'먼저 루시아 카스타챌드···대대장.'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는 어감의 조합이다. 물론 성기사단의 한 개 대대가 우스울 규모는 결코 아니었다.

차리나가 성기사단에게 얻어낸 지원군의 전력은 상당했다.

성기사와 성전사들로 구성된 3개 대대. 총 삼천 명 가량의 병력이 왕도에 집결한 상태.

루시아는 그중 대대 하나를 맡아 지난 사흘간 손발을 맞춰보는 중이었다.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이자 악마 살해자라 불리는 심문관은, 기사단 내에서도 그만한 능력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비요른은 철혈군대의 화약 병기를 개량해주고 있지. 차르국과 미리 거래를 터놓길 잘했어.'

댈런은 일전에 미궁의 길잡이 의뢰를 맡아준 대가로, 특무대를 통해 차르국과 거래를 주고받은 이력이 있었다.

차르국은 비요른에게 합법적인 화약 재료와 기술을 공급해주고, 대신 비요른은 외눈의 명공으로서 왕실과의 협약 연구에 참여하는 게 거래의 내용.

그리고 전쟁을 앞둔 철혈군대의 노력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비요른은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철혈군대 전체의 화약 병기들을 대대적으로 계량하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 펠버는 아예 지휘권 자체를 위임받았으니까.'

엘가이아 마탑주이자 대마법사, 동시에 댈런의 권속인 펠버 발렌티노.

그는 마법 전력의 한 축인 용병 마법사들의 지휘권을 통째로 위임받았다.

'외부인에게 아예 지휘권 자체를 일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하긴 쑴의 침공 때 이 정도로 용병이 많이 모인 회차도 없긴 했지.'

차리나의 대대적인 지원 요청으로 인해, 대륙의 수많은 마탑에서 보내온 용병 마법사의 숫자는 무려 사백에 달했다.

평소 같았으면 왕실 마법사단의 일각으로 배치되어 활약하게 되었겠지만, 숫자가 숫자인만큼 그러기가 쉽지 않은 상황.

거기다 차르국의 마법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지만, 환경적인 여건으로 인해 주로 빙결 계열이나 풍운 계열 술식에 치중된 경향이 강했다.

적군을 향해 강력한 화력을 투사하는 데는 능숙해도, 용병으로 고용된 각양각색의 마법사들을 다루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반면 노인장은 미궁도시 출신에다 대마법사, 거기다 탑주인만큼 여러 모로 적합한 인물이니까.'

각종 마탑들의 지부가 모여들어, 마탑 연합까지 만들어가며 이권다툼을 벌이는 거대도시 팔시온.

펠버는 그런 곳에서 거의 1년 가까이 자리를 비워놓고서도, 보란듯이 탑주의 자리를 꿰찬 인물이었다.

그건 대마법사라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을 다루는 일에 애초부터 능숙하지 않고서야 해내기 힘든 위업이었다.

그런 이유로 펠버는 용병 마법단장 자리를 맡게 됐다.

지난 며칠간 그는 왕실의 마법사들과 소통하는 한편, 용병 마법사들을 소속과 능력에 따라 분류해 전장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에 파묻혀 있었다.

'바르샤바크가 하루이틀 안으로 도착한다고 했으니···그 전에 일차적으로 교통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긴 하지.'

차르국이 받아낸 지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대륙에 여섯 개뿐인 대마탑 중 하나이자 전격술사들의 성지인 바르샤바크.

차리나가 지원 요청을 보내며 대가로 뭘 약속한 건지, 좀처럼 땅에 내려오지 않는 주문쟁이들마저 구름 위에서 움직이는 천공요새 자체를 이끌고 온다고 했다던가.

'전부 합치면 대충 십만 대군쯤은 되겠군. 이게 무슨 삼국지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왕도 에클라힘에는 역사적으로 유래 없는 대군이 모이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댈런이 전선 동부에서 모아온 지원군을 포함해, 사만 명에 가까운 철혈군대의 정예 병력이 방어군의 주력.

대륙 전역에서 모인 용병과 소집된 민병대까지 합하면 머릿수는 두 배로 불어났다. 거기에 삼천에 달하는 성기사단의 지원군은 덤이었고.

십만에 가까운 대군의 뒤를 지원하는 건 원래 차르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왕실 마법사단과, 펠버를 주축으로 하는 용병 마법사 사백 명의 화력 투사.

거기다 전쟁이 시작되면 하늘에서는 천공요새 바르샤바크가 무자비한 뇌우의 폭격을 내릴 것이고, 땅에서는 외눈의 명공이 개조한 화약 병기들이 불을 뿜을 테였다.

'수백 회차 동안 북부 전선에 이 정도 병력이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마도···종말이 너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겠지.'

현재 종말의 공세는 그 어느 회차보다도 빠르다.

허나 그만큼 너무 이른 침공이었던 탓에, 아직 대륙의 정세는 장기간에 걸친 대혼란에 빠지기 이전이었다.

원래라면 악마 군세가 도래하는 시점은, 제국과 왕국들의 전쟁으로 분열되고 물류와 교통이 죄다 마비될 무렵.

그때라면 마탑이건 길드건 각자의 코앞으로 들이닥친 위기에 대처하기 급급해, 지원군 따위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허나 지금의 대륙은 건재했다.

국지적인 혼란과 소요가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전운 역시 감도는 중이라지만 그뿐이었다.

시한폭탄의 도화선이 시시각각 타들어가고 있으나, 아직까지 쾅 하고 폭탄이 터지지는 않은 상황.

때문에 전황은 단순히 희망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명백히 유리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으나, 반대로 불리하다고도 결코 볼 수 없을 정도.

'나를 포함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몇몇 변수를 제외한다고 쳐도···이 정도 전력이라면 승산은 삼 할 이상.'

그 정도면 충분한 확률이다.

일 할조차 안되던 수세를 뒤집은 경험도 숱한 바.

삼 할의 승산 정도라면 충분히 이겨내고도 남았다.

거기다 아군의 손에 쥐어진 변수들은 정량화하기 어려울 뿐, 하나같이 불리한 전황을 몇 번이고 뒤집어낼 수 있는 강력한 조커 카드였다.

"정지."

찰박.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의 끝.

난데없이 두툼한 손바닥이 눈앞을 막아선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손의 주인은 키가 이 미터 남짓 되는 거한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철혈군대 소속의 경비대인 모양.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뭐냐."

"거동수상자를 대상으로 불시 검문이 있겠다. 이름과 소속을 대라."

***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름, 소속. 어려운 질문은 아니지."

남자가 다시 물었다.

북부인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키는 댈런보다도 조금 더 커 보였다.

철혈군대의 문양이 새겨진 사슬 갑옷을 갖춰입고, 어깨에 경비조장의 계급표를 부착한 복장.

댈런은 남자의 투구 틈 사이를 응시하며 턱을 긁적였다. 그가 말했다.

"댈런."

"그래, 댈런. 솔직하게 대답해서 다행이군. 거짓을 고했으면 뱃가죽에 칼침을 맞았을 거야."

"이 씹새가 알면서 물은 거냐?"

"···뭐?"

투구 틈 사이로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댈런은 자연스럽게 허리띠에 손을 얹었다.

찰박.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서는 남자. 그는 당황한 눈빛을 애써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사흘간 차르국의 뒷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더군. 동료들은 악마의 군세를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홀로 딴짓거리에 열중이라지."

"그래서?"

"철혈군대가 보기에 자네의 행동은···에클라힘을 염탐하러 온 첩자로 의심이 돼."

첩자는 개뿔. 댈런은 픽 웃었다.

지난 사흘간 그가 왕도의 뒷골목을 들쑤시고 다닌 건 사실이었다.

미궁도시 팔시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왕도 에클라힘 정도면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

이곳에서 죽은 시체도 도합 네 구나 되었다. 댈런이 며칠간 찾아다닌 건 그 시체들이었다.

'카지노에서 칼빵 맞은 가짜 딜러의 시체'와 '마녀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고행자의 시체', '왕도의 최후를 함께한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하고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당연하겠지만 조금 다른 이유를 댔을 뿐, 왕실에 허락도 이미 받아두었다.

안 그래도 용병이며 온갖 인간군상이 모여든 탓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뿐 뒷골목은 혼란의 도가니가 된 실정이다.

차르국의 협력자로서 '개인 수련'의 목적으로 자유롭게 다니며, 건달 패거리들까지 두들겨 주겠다는 걸 왕실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전시라는 상황이기에 더욱 엄정한 처벌이 내려져야 마땅하겠으나, 백금패 용병이라는 차르국에 공헌한 바를 생각해 순순히 연행에 협조한다면···."

"야."

"······."

"쓸데없는 연기는 관둬라.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찰박.

남자가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억!"

대답보다는 도끼가 빨랐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돋아난 도끼자루.

두 쪽으로 갈라진 강철 투구가 첨벙 소리를 내며 하수도 진창에 처박혔다.

"사전조사 하나는 잘했군. 그건 칭찬하지. 마법이나 주술을 사용한 변장은 손쉽게 간파당한다는 걸 알고, 선천적인 육체 변이 능력자를 데려오다니."

남자의 얼굴은 조금 기형적이었다.

보통보다 뾰족한 이목구비 정도까지야 봐줄 만했지만, 뺨에서 한 뼘 길이로 길게 자라난 수염 가닥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얼굴을 죄다 가리는 투구를 쓴 이상, 털 몇 가닥 정도야 큰 의미는 없었다.

정교한 투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초인라도 간파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다. 뭔지 아나?"

[···뭐지?]

하수도 어딘가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약간 찍찍거리는 목소리. 댈런은 씩 웃었다.

"기껏 변장해서 유인할 생각이었으면 좀 덜떨어진 놈을 데려왔어야지. 내가 허리띠에 손만 얹었는데 반응할 정도로 감 좋은 놈이 고작 경비조장 수준에 머물러 있겠냐?"

[······.]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아커만의 작도법을 손에 넣은 이상, 방금 전의 한 마디만으로도 상대를 추적하는 일은 가능했으니까.

후우.

짧게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하수도의 전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걸어왔던 길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내디뎌보지 못한 통로들, 벽과 벽 사이의 숨겨진 공간들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심상 너머 영역의 일대를 굽어보는 시야와, 아커만의 작도법이 만나 이적이 발아하고.

회백의 투사가 남긴 힘, 세상을 자신의 색채로 물들이는 권능을 덧씌워 그 이적을 완성해낸다.

「몽환추적(夢桓追跡) : 회백전도(灰白全圖)」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정경.

음영의 짙음으로 표현된 근방 일대의 지도는, 일견 게임의 미니맵과도 닮아 있었다.

미니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단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인식하는 풍경이라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건 단점이라기보다 장점이었다.

"차리나가 말한 그림자가 암월단을 의미할 줄이야. 이쪽에서 굳이 먼저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먼저 손을 쓴 이상 각오는 되어있겠지."

나직한 중얼거림이 텅 빈 하수도의 통로를 따라 메아리치고, 몸을 돌려 벽을 향한 그가 가만히 손을 들어올렸다.

머릿속에 그려진 일대의 지도에 따르면, 목소리의 주인인 암월단의 암살자는 십수 개의 벽 너머에 숨어있었다.

아무리 댈런이 빠르다고 해도 놈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단의 간부급.

통로를 따라 놈을 쫓는다면 분명 모종의 수로 달아나버리겠지.

기회를 줄 생각은 없다.

눈앞으로 다가운 싸움에서 방해가 될 만한 변수는 뿌리째 뽑아버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암월단 역시 언젠가는 결착을 지어야 할 상대였으니, 다소 이른 감이 있더라도 상관은 없겠지.

휘리―

어깨 위로 들어올린 손이 한순간 흐릿해지고.

쉬이익―

벽을 코앞에 둔 도끼의 번쩍임이 불현듯 허공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몇 초 뒤.

콰광― 쿠르르르···.

하수도 저 어딘가에서 무언가 붕괴하는 소리가, 통로를 따라 아득하게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 사이에는 찍찍거리는 희미한 비명도 섞여있었다.

176

왕도 에클라힘(4)

암월단의 중급 간부, 투크탈라 스카이마스는 예지 능력자였다.

예언자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그가 예지할 수 있는 미래는 기껏해야 1초 정도였으니까.

거기다 예측 가능한 대상 역시 본인에게 제한되기에, 점쟁이의 재능으로는 전통적인 수정구 점이나 별점보다도 하잘것없었다.

다만 시간이 가지는 가치라는 건, 사람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법.

대륙의 미래는커녕 한 개인의 앞날조차 내다보기 어려운 예지력이라도, 일 초에 공방이 수 차례씩 오가는 초인들의 싸움에서는 수십 번이고 생명을 구할 절기였다.

비교적 뒤떨어지는 신체 능력을 가지고서도, 투크탈라가 암월단의 중급 간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이런 미친···!"

콰과과광!

머리 위를 희끗하고 지나간 손도끼에 목숨을 잃지 않은 것 역시, 예지 능력의 극적인 발현 덕분이었고.

"차르국 대포도 아니고 무슨 도끼가 저딴 파괴력을···!"

1초 뒤를 예지하고도 가까스로 피해낸 도끼가, 하수도의 통로 저편에 처박히며 벽이며 천장을 죄다 우르르 무너뜨린다.

조금 더 강했으면 아예 근방의 하수도가 죄다 붕괴할 뻔했다. 도끼 투척 한 방의 결과물이라고는 믿기 힘든 위력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굴리고도 도끼가 남아나나? 저 도끼는 무슨 금강궁의 보고에서 나온 물건이라도 된단 말인가?

더 큰 문제는 저런 도끼가 하수도의 벽을 죄다 건너뛰고 날아왔다는 이야기.

그래놓고서도 어떤 마법이나 주술의 전조조차 없다니, 절로 찍 소리가 나올 상황이었다.

"임무 중지! 임무 중지! 현 시간부로 임무에 투입된 암월단원은 전부 퇴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투크탈라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며 통신용 마석에 대고 소리쳤다. 그의 주변으로 인간 어린아이 크기만 한 쥐떼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공간을 아에 뛰어넘고 무기를 투척한 기예는 놀랍지만, 그 역시 날고 기는 초인들을 상대한다는 암살단의 중급 간부.

암월단은 다른 건 몰라도 치고 빠지는 전략만큼은 도가 튼 집단이다. 아직 도망칠 기회는 남아있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암살 목표가 공간 전이 주문을 익혔다는 내용은 없었으니···.

[선빵 갈겨놓고 어딜 도망치냐.]

관자놀이를 찌릿 울리는 통증.

귓가보다 먼저 머릿속에 메아리친 문장.

의미 모를 단어가 섞여든 굵직한 목소리는, 다름아닌 예지 능력의 결과물이었다.

"임무 중―찌이이익!"

평소처럼 명령을 내릴 틈조차 없다.

비명에 가까운 절박한 외침. 그 의지의 발현에 거대 쥐떼가 우르르 방벽을 만든다.

거무튀튀한 털가죽들 너머로 잿빛 그림자가 흩날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근육질의 전사.

그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뭐야, 투크탈라였냐?"

"찌, 찍?! 어떻게 내 이름을···!"

"하다하다 도저히 안 되니까, 신을 암살할 수는 없을까 싶어서 암월단에도 들어가봤잖냐."

그것도 열 번 넘게.

씩 웃으며 덧붙이는 말. 투크탈라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덩치가 암월단에 들어왔었다고? 용살자에 마녀 살해자라 불리는 저 용병이?

아니, 애초에 암월단은 근 수십 년간 암면에 들어있었는데? 그럼 인간 주제에 백 살이 넘었다는 이야긴가?

찌릿.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 사이.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어떤 장면이 파고들었다.

남자가 성검을 휘두르는 장면. 벼락같은 그 궤적에 끊어지는 자신의 허리.

투크탈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려냈다.

콰지지지직!

큼직한 쥐들이 수수깡처럼 우수수 잘려나가고, 가까스로 검을 피해낸 투크탈라는 곧장 도망쳤다.

"계획 변경! 암살을 속행한다!"

후퇴 중이던 근방의 부하 암살자들을 불러모으는 한편, 품속의 연막탄을 죄다 터뜨리며 도주를 이어간다.

찍찍찍―!

그의 부름에 하수도의 어둠에서 단검이며 꼬챙이를 꼬나쥔 쥐인간들이 튀어나왔다. 암월단원들은 그렇게 등장한 지 수 초도 지나지 않아 무기 째로 절단되어 진창에 처박혔다.

그렇게 몇 명의 암월단원이 갈려나가는동안, 투크탈라와 남자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져갔다.

사실상 다른 암살자들을 고기 방패로 써먹겠다는 심산.

허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게 아니었기에, 투크탈라의 양심에는 한 점의 가책도 없었다.

암월단이 암면에서 깨어난 건 고작 몇 달 전이다. 원래라면 조직을 정비하고 세력을 규합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시점.

허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암월단의 수장인 여섯 손가락의 다른 판단을 내렸다.

'끝이 머지않았다. 바로 활동을 개시한다.'

문제는 수십 년만에 깨어난 터라, 이 시대는 물론 암살 대상들에 대한 최신 정보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

그중에도 암살 대상 중 중요도에서 여섯 손가락에 꼽는 목표물, 댈런이라는 전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더욱 드물었다.

놈은 난데없이 등장한 용병 출신. 아무리 조사해도 출신 신분이나 태생은커녕, 어릴 적의 행적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허나 그런 불투명한 과거가 무색하게, 그는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속도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전사이자 마법사였다.

이런 종류의 암살 대상은 한 번에 처리하는 게 불가능한 법이다.

중요한 건 수십 자루의 단검을 던져서, 그중 한 자루라도 제대로 들어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암살 시도를 통해 정보를 쌓아가야 했고, 공간을 뛰어넘어 도끼를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은 가지고 돌아갈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거기다 몸뚱이 자체로 공간을 넘나들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주문이 아니었어···!'

지끈.

다시 한 번 두통이 엄습한다. 예지력으로 빚어진 장면이 보일 때의 전조였다.

다만 이번에는 투크탈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야를 한가득 뒤덮은 시뻘건 색조.

눈앞으로 다가오는 곰발바닥 같은 손아귀.

"이게 뭐···."

의문을 품는 순간, 그 해답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휘릭―

눈앞에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허공에서 등장한 남자는 약간 짜증난 어조로 말했다.

"어딜 도망가냐니까. 사람 무시하냐?"

콰아앙―!

전사의 신형이 흐릿해진 자리. 얼어붙은 하수도의 구정물이 돌바닥 째로 깨져나가고.

뻐어어어엉!

재빠르게 전사를 막아선 거대 쥐떼의 선두에서, 가죽으로 된 북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단말마의 비명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어깨에 부딪힌 뱃가죽이 터져나가고, 조각난 척추며 으스러진 내장 파편이 사방팔방 튀어나간다.

그리고 그건 시작이었다.

뿌드드드드드―!

터지고 또 터진다.

전사의 무자비한 돌격에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어떤 성명절기나 주문도 아니었다. 그저 단단한 육체와 압도적인 힘을 앞세운 무식한 육탄돌격일 뿐.

그건 마치 공기를 가득 불어넣은 포도주 부대를 줄지어 늘어놓고, 차르국 특제 포탄을 정면에서 쏴재낀 것 같은 광경이었다.

투크탈라는 그제야 예지력으로 내다본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붉음. 그리고 그 붉음을 뚫고 다가오는 손아귀···.

턱!

"능력치의 증가에는 어느정도 무감각해졌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근력 수치가 50을 넘어가니 감회가 새롭군."

"무, 무슨 소리···찌이익!"

"알 것 없다. 그보다 아까 말한 건 들었겠지?"

머리통을 잡은 큼직한 손아귀 너머, 손가락 사이로 남자의 검은 눈이 보였다.

색채를 잃은 듯 거무튀튀한 눈동자. 거기에 어떤 정교한 살심이나 타오르는 분노는 없었다.

거대 쥐 수십 마리를 육편으로 만들고서도, 별 일 아니라는 듯 그저 착 가라앉은 눈.

남자가 말했다.

"먼저 손을 쓴 이상 각오는 되어있길 바란다. 너나 암월단이나."

꾸드득···.

우악스런 손아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투크탈라는 숨이 턱 막혔다.

붉게 물드는 시야. 턱 관절에서 뼈마디가 어긋맞는 소리.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는 사무적인 태도로 손아귀에 힘을 조금씩 더해갈 뿐이었다.

뇌가 마비된 듯 예지 능력조차 발현되지 않는 상황. 그때였다.

"그쯤 해라, 인간."

먹먹해져가는 귓가 사이로, 하수도 저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 하수도의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쥐인간이었다.

지금 그의 손아귀에서 두개골이 박살나기 직전인, 암월단의 중급 간부와 같은 종족.

놈의 키는 보통보다 좀 더 작았다. 어림잡아 난쟁이인 비요른 정도 될 법했다.

허나 사슬갑옷 너머로 느껴지는 입체적인 근육의 굴곡은, 결코 그 체격을 왜소하다고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찰박.

"다시 한 번 말하지. 그쯤 해라, 인간."

놈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다른 쥐들보다 더 풍성하게 자라난 하얀 수염. 그리고 놈의 뒤를 줄지어서 따르는 수십 마리의 쥐인간들.

정체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은 모니터 너머에서도 숱하게 마주쳐왔던 존재.

횟수로만 따지면 지금 머리통이 잡혀 죽어가는 투크탈라보다도, 배는 더 많이 조우한 암월단의 상급 간부였으니까.

"암월단의 여섯째 손가락. 픽카케 스카이마스."

"···나를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생긴 것과 달리 그렇게 무식한 놈은 아니라더니, 입수한 정보가 정확했어."

시발, 생긴 게 뭐 어쩌고 어째?

댈런은 그렇게 발끈하는 대신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있던 성검이 날아와 손에 안착했다.

오른손에는 쥐인간의 머리, 왼손에는 번뜩이는 성검.

거기에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댈런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사냥꾼 같았다.

암월단의 여섯째 손가락, 픽카케는 그걸 보고 수염을 살짝 떨었다. 놈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나는 암월단의 여섯 손가락 중 하나다. 암월단의 손가락이라는 직위가 누구에게 주어지는 자리인지는 들어봤겠지."

"들어봤지. 초월자를 암살한 자에게만 준다던가. 그래서?"

"그래서라니? 말 그대로다. 나는 초월자는 아니지만, 5위계의 초월자를 암살한 적이 있다. 네가 대영역을 이뤘다고 해서 나에게 죽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협박이라는 거군. 거기다 시간 끌기인가.

머릿속에 그려진 회색 지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덕분에 근방 하수도 일대를 수십 마리의 쥐인간들이 둘러싸는 걸, 댈런은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눈앞의 쥐인간, 암월단의 여섯째 손가락이 말을 길게 늘이는 것도 보다 완벽한 암살 기도를 위한 블러핑이겠지.

그런 수싸움이 좋다면 같은 방식으로 응수해줄 뿐이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검자루를 슬슬 매만졌다.

스으으으···.

순간 뻗어나가는 위협적인 살기. 기이하게 뒤틀리는 마력의 흐름.

초월자의 의지는 단순한 발현만으로도 일대를 짓누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픽카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몇 걸음쯤을 더 물러섰다.

댈런은 그에 맞춰 앞으로 걸음을 천천히 내디뎠다. 다시 물러서는 픽카케와 암살자들.

찰박. 찰박...

미묘한 균형이 이어졌다. 댈런이 나서면 암살자들이 물러선다. 가까스로 유지되는 거리는 끊어지기 직전의 밧줄처럼 위태로웠다.

물러서다보니 어느새 막다른 곳까지 다다랐다. 먼젓번의 도끼질로 무너진 하수도 통로였다.

아직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판단이었을까. 구석까지 몰린 상황임에도 픽카케는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요구하는 건 하나다. 네 손에 들린 그놈은 내 아들이지. 아들만 백이 넘긴 하지만, 내 능력을 가장 잘 물려받은 건 그놈 하나야. 놓고 물러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럼 나도 하나 묻자."

"뭐지?"

"아들이 백이 넘는다고 했지. 이름은 다 외우고 있나?"

쥐인간의 눈이 찡그려졌다. 놈이 물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왜 묻기는."

으직!

댈런은 손아귀에 힘을 조금 주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손 안에서 부서지는 감각. 바들거리던 머리통이 희고 붉은 조각이 되어 후두둑 떨어진다.

쥐인간의 눈이 큼직해지고, 놈의 기세가 일순 흔들린 걸 본 댈런이 씩 웃었다.

"당연히 블러핑이지, 새꺄."

도끼 투척으로 무너진 통로의 잔해 안쪽. 돌더미들 사이로 황금빛 광채가 터져나온 건 그 순간.

"이런 고양이 같은 새···!"

콰아아앙―!

뒤늦게 함정이었음을 눈치챈 쥐인간의 괴성은, 황금빛 폭발에 묻혀 휩쓸려갔다.

177

왕도 에클라힘(5)

뿌옇게 시야를 가린 흙먼지. 황금빛 폭발에 벽과 천장이 무너져내리며, 수백 년간 쌓여온 퀴퀴한 악취가 훅 올라온다.

댈런은 회수한 도끼를 들고 그 먼지구름 안에 가만히 서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공간에서 연막은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암살자가 역습을 노린다면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쉬이익―

그 예상에 호응하듯, 왼쪽 뒤 사각에서 뻗어져 목줄을 노리는 단검.

슉!

허리를 틀어 피해내자마자 마치 예측했다는 듯, 동선을 따라 길쭉한 꼬챙이가 찔러들어온다.

카각!

꼬챙이에 도끼를 걸어 저지한다. 그 순간 연막을 뚫고 암기 몇 개가 날아들었다.

피피핑―!

다리와 팔, 어깨를 노리는 얇은 암기들.

역시나 그가 움직일 걸 미리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대처하기 어려운 부위와 방향만을 골라서 노리고 있었다.

'···예지력인가.'

콰앙!

발로 지면을 내리찍자 돌무더기가 확 튀어오르며 암기를 쓸어버린다. 연막 너머로 흠칫 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잠시뿐이었다.

수싸움의 개념을 넘어 찰나 뒤의 미래를 예측하고 쏟아지는 공격들.

공격을 막으면 막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다음 행보를 읽어낸 뒤 암기나 단검 따위가 날아든다.

"이건 좀 의외로군. 아예 계파 전체를 통째로 끌고 올 줄은 몰랐는데."

어지간한 초인이라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버릴 공세의 한복판.

흙먼지가 뿌옇게 휘저어지는 가운데, 댈런은 모든 공격을 흘리고 걷어내며 중얼거렸다.

"아들을 지극히 아끼는 것처럼 블러핑하더니, 아예 자식들을 모조리 갈아 넣을 심산이었나?"

"······!"

그 여유로운 발언에 연막 너머에서 초조한 기색이 느껴진다.

댈런은 독 단검 쥔 손목을 비틀어 꺾으며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암월단의 상급 간부, 픽카케 스카이마스.

여섯 계파 중 하나를 다스리는 그에 대해 댈런은 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놈이 그 자리에 올라간 건 수준급의 체술과 피에 흐르는 예지력 덕분이었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 역시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도.

물론 그 예지력이라는 게 백안의 선각자처럼 예언 수준의 능력인 건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픽카케 본인조차 기껏해야 1초를 조금 넘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허나 수백 분의 일 초에 승패가 결정되는 초인들의 싸움에서, 예지력이라는 변수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바.

어쨌거나 그 혈인능력 하나만으로 계파 중 하나를 이뤄낸 놈이다. 그런 놈이 자신의 전력을 죄다 이끌고 찾아올 줄이야.

"걱정 마라. 자식들만 보내지는 않을 테니. 대도시의 하수도만큼이나 쥐새끼들에게 어울리는 무덤은 없긴 하지. 오늘은 암월단의 한 계파가 사라지는 날이 되겠군."

[···멍청한 놈들! 저놈이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게 내버려 둘 거냐! 겁먹지 마라. 이곳은 수십만이 사는 도시의 지하, 놈은 영역을 사용하지 못해!]

끊이지 않는 도발에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걸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픽카케의 전성이 하수도의 통로를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빙고.'

그리고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유물 무기의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암월단의 상급 간부나 되는 놈이 고작 폭발 하나에 당해줄 리는 없다.

따라서 폭발 이후 기척이 소실된 건 놈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폭발의 충격과 여파를 틈타 숨어든 뒤, 댈런의 감각과 고유 스킬로도 쉽게 간파할 수 없도록 철저한 은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일 뿐.

그러나 한 번 전성을 뱉은 이상 회백전도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다.

"거기 있었냐."

머릿속 흑백의 지도 위, 픽카케의 위치가 스르르 떠오르고.

[저 새끼를 죽여―!]

직감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음을 알아차린 놈이, 발악에 가깝게 울부짖었다.

댈런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연막을 헤집고 수십 자루의 칼날이 짓쳐들어오는 건 동시였다.

쐐애애애―!

맹독 다트. 톱날 단검. 얇은 바늘 같은 암기. 소리 없이 쏘아진 뾰족한 납탄.

연막으로 눈을 가린 뒤 몰아치는 암살자들의 합공은, 공격 하나하나가 영역을 이룬 초인에게도 위협적일 정도였다.

하나하나의 위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궤적과 사선이 철저하게 동선을 예측하고 움직이는 것에서 비롯된 위협.

허나 바꿔 말하자면 이건 정교하게 짜 맞춰진 수싸움이 아닌, 예지력에 의존해 즉흥적으로 드러난 틈을 파고드는 방식의 공격이라는 소리다.

초월자들과의 싸움으로 예지에 가까운 육감과 수백 갈래 수싸움에 이골이 난 댈런의 입장에서는, 당해줄 이유가 전혀 없는 공세였다.

스으―

숨을 들이쉰 찰나의 순간.

극한으로 가속된 의식 속에서, 몇 번의 공방만으로 상대방의 공세를 분석해낸다.

각 공격의 위력과 방향, 속도, 목표점에 따라 대처할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슈르르륵!

모든 궤적을 머릿속에 담아낸 순간, 회오리바람이 팔과 다리를 휘어감는다.

「술식갑주 : 백풍갑(伯風甲)」

「열풍(裂風)」

콰자자자자작─!

그건 마치 정교한 춤사위와도 같았다.

수십 가닥의 회오리바람이 공격과 공격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막아내는 걸 넘어서서 가로채 자기 것처럼 이용하는 광경.

푸욱!

찌이이익!

깊게 내지른 단창은 물 흐르듯 동료의 가슴팍을 꿰뚫고.

퍼버버벅!

찍! 캬아악!

사방에서 날아든 비수와 암기들은 목표물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가 쥐인간들의 가죽 위에 빼곡하게 꽂힌다.

단검의 검면을 손등으로 쳐낸다. 독니를 드러낸 아가리에 가볍게 발끝을 꽂아 넣는다.

고개를 슬쩍 틀어 관자놀이로 쏘아진 납탄을 피해냄과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이자 납탄의 방향이 휘어지며 다른 쥐인간의 면전에 꽂혀들었다.

가벼운 손동작 하나에 바람 줄기가 몇 갈래씩 움직이고, 짓쳐드는 공격을 모조리 낚아채며 반대로 되돌려주는 기예.

다른 이가 보기에는 그 자체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회백의 대지에서 여덟 개의 분신으로 공격해오던 초월자를 상대해본 댈런의 입장에서는 하품 나오는 공세일 뿐이었다.

"캬아아아악!"

"찌이익! 켁!"

"물러나! 물러나!"

한순간에 수십이나 되던 암살자들의 삼분의 일이 쓰러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놈들이 혼비백산하며 거리를 벌렸다.

뿌옇게 피어올랐던 먼지 구름은 죄다 흩어지고, 대신 쓰러진 쥐인간들에게서 올라오는 비릿한 혈향으로 가득해진 하수도.

댈런은 어깨를 슬쩍 풀고는 말했다.

"이제 내 차롄가?"

그리고 다음 순간.

「뇌조(雷條)」

파지지직!

푸른 전격의 줄기가 하수도의 통로를 한가득 뒤덮었다.

***

낡은 하수도에 쥐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대도시의 하수도가 시궁쥐의 온상인 건 하루이틀이 아니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그 쥐들의 울음소리가 조금은 사람의 목소리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벽이며 천장이 부서지는 굉음이 뒤섞여 들린다는 것이었다.

콰광! 꽈르릉―

하수도 천장이 우르르 무너져내리고, 그 사이로 한 줄기 푸른 섬광이 뻗어나온다.

뇌성과 함께 통로를 번쩍하고 밝힌 섬광은, 쥐인간 셋을 찢어발기고 네 번째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풍덩! 풍덩!

콸콸 흘러가는 오수의 강에 잠겨드는 시체들.

하수도 중에서도 깊은 곳인 터라, 그만큼 많은 오수가 모여들어 수심도 깊었다.

타다다다―

댈런은 수면 위를 땅처럼 디디며 내달렸다.

뇌조로 암월단원들을 궤멸에 가깝게 몰아넣은 뒤, 그는 도주하는 픽카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머릿속 지도에 선명히 그려진 픽카케의 도주로를 보아하니, 통로를 두어 번만 꺾으면 놈의 목덜미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막아! 막으라고!]

모퉁이 하나를 돌아선 순간, 픽카케의 전성이 통로를 메아리쳤다.

방금까지 달아나던 쥐인간들이 그 한 마디에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찌이이이!

찍찍! 찌익!

뇌리를 지배하던 공포가 날아가고, 새까만 눈동자를 광기와 살의로 번들거리며 달려드는 쥐인간들.

암월단원의 양성 과정에서 자행되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과 훈련의 효과였다.

"쯧."

그래봤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지만, 사냥꾼의 입장에서는 살짝 짜증이 올라오는 부분이다.

어쨌든 그는 한시라도 빨리 시체 회수를 마치고 악마들의 침공을 대비해야 하는 입장. 괜히 암살자 하나 잡겠다고 자꾸 시간이 끌려봐야 좋을 건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의 도주 방향이 댈런이 마지막 시체를 회수하러 가던 장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수도 저 깊은 곳. 암월단이 에클라힘에 만들어놓은 지부이자 은신처.

아무래도 놈은 그곳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어올 생각인 듯했다.

찌이이익!

천장에 매달려있던 쥐인간 하나가 머리 위를 덮쳐든다. 평균을 아득히 웃도는 체격은 하이 오크에 비견될 정도였다.

댈런은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저 뒤쪽 통로에서 손도끼가 날아와 쥐인간의 미간에 처박혔다.

첨벙!

캬아아악!

머리에 도끼를 꽂은 채 물에 빠지고서도, 근육질의 팔다리를 놀려가며 댈런의 등을 덮치려 하는 쥐인간.

손을 한 번 더 까딱이자, 놈의 미간에서부터 터져나온 황금빛 폭발이 육중한 거체를 산산조각내버렸다.

콰아아아앙―!

매 투척 때마다 축적되는 거리를 계산하고, 적재적소에서 유물의 능력을 활용하는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시체를 회수하며 가진 바 능력이 다변화될수록, 매 전투의 양상은 판을 설계하고 수싸움을 이어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왔으니까.

초월자들은 영역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현실에 강요할 수 있는 레벨의 강자들이다.

단순한 힘자랑만으로 이길 수 없는 이들.

아니, 그런 힘자랑마저도 심리전과 수싸움의 일환으로 써먹어야 승리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찌이이이―!

콰직!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쥐인간들을 하나씩 처리해가며, 픽카케의 뒤를 쫓아 하수도의 더 깊은 곳으로 끊임없이 내려간다.

추적은 오수가 넘치는 구간을 지나치고, 이제는 관리는커녕 이용조차 하지 않는 하수도의 폐쇄 구간까지 이어졌다.

수백 년도 더 전에 지어진 채 방치되어, 오수마저도 말라붙은 버려진 통로들.

그 끝에 댈런의 눈앞을 가로막은 건 거대한 철문이었다.

콰아앙!

도끼질 한 번으로 철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눈앞에 펼쳐진 건 거대한 전당이었다.

은은한 빛을 뿜는 마력석들 사이, 난해한 형상의 그림들이 양각된 천장. 그 천장을 떠받치는 굵은 석재 기둥들.

낡았으나 빛이 바래지 않은 금속 조각상들이 기둥마다 곁에 도열해 있고, 그 끝에서 이어지는 계단 위에는 넓은 육각형의 탁자가 놓여있었다.

"흐흐···잘 따라와줬다, 전사. 이곳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암월단의 비처···너 같은 전사에게 어울리는 무덤이지."

픽카케 스카이마스는 그 육각탁자 위에 있었다.

지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음에도, 얼굴에는 오히려 승리의 미소가 만연한 모습.

놈은 의미심장한 찍찍거림을 흘리며, 쥐발바닥으로 탁자 가운데의 보석을 지그시 밟았다.

그리고 잠시 뒤, 전당의 천장에서 빛나던 마력석이 한순간 전부 빛을 잃었다.

팟―

한순간에 암흑천지가 되어버린 지하의 전당.

기기기긱··· 쿠웅―!

천장에서 무언가 기관장치가 작동하더니, 이내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전당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물체가 살아있음은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깊은 숨소리. 오래된 털가죽의 악취.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그르렁거림과, 차디찬 공기를 밀어내는 짐승의 온기가 피부에 닿았으니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암월단의 수호자들 중 하나지. 암월단의 초대 첫 번째 손가락이 키우던 애완 짐승이자, 그 시대의 초월자를 잡아먹은 괴물. 흐흐···너 정도면 수백 년의 굶주림을 달래주기에 충분할 거다."

전당의 저편, 짐승의 배후에서 픽카케가 비열하게 웃었다.

동시에 호박만 한 열 쌍의 붉은 눈이 번뜩이며, 어둠을 뛰어넘어 자신의 앞에 놓인 먹잇감을 노려봤다.

댈런은 그 시선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위, 어둠 속에서 떠오른 글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신당한 악신의 기수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고작 몇 글자의 알림창에 불현듯 모니터 너머의 기억들이 밀려온다. 악신 에낙사구스의 깃발을 앞세워 온 세상을 불태우던 장면들.

하지만 지금은 사색할 때가 아니다. 상념에 잠기는 걸 조금 뒤로 미루며, 댈런은 도끼를 허리띠에 꽂아 넣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리려다, 잠시 멈칫하곤 말했다.

"아, 인사를 깜빡할 뻔했군. 고맙다."

"···뭐?"

어둠 속, 픽카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댈런은 픽 웃었다.

"안 그래도 저거 어떻게 회수해야 하나 며칠 동안 고민했거든. 봉인을 내가 풀 수 없으니 천장을 통째로 부숴야 하나 싶었는데,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인사는 해야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