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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 데까지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던전 안으로 강제 소환됐다.

한 던전당 100명씩.

"이곳은 제48006842호 튜토리얼 던전입니다. 현재 입장 인원 100명, 전송 중 실종자 0명. 환영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현재까지 사망자, 30명.

죽인 몬스터, 대충 50여 마리.

그리고 몰려오는 몬스터, 어림잡아... 40여 마리.

형석은 양손으로 검을 그러쥐었다.

평생 잡아 본 검이라곤 주방 식칼이 전부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게 이곳의 유일한 진리였다.

형석은 살짝 눈을 돌려 옆에 떠 있는 반투명한 푸른빛 사각형 상태창을 보았다.

상태창에는 이런 문구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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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데미지 투사

Lv.1 이상의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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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진 스킬은 이게 전부였다.

패시브 스킬 하나, 손에 쥔 녹슨 양손 검 한 자루, 그리고 옆에 무기를 들고 함께 서 있는 사람들.

뒤는 없다.

죽기도 싫다.

그러니까

"조져!!"

형석이 외쳤다.

무기를 쥔 자들은 뛰쳐나갔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일반인들이, 검과 창과 방패를 쥐고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레이드는 시작됐다.

1화 튜토리얼 (1)

이름, 도형석.

성별, 남성.

나이, 스물여섯.

직업, 회사 창고에서 놀고먹기.

"흐아아아암-."

형석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같은 공간에서 계속 혼자 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휴대폰.

다음에는 게임기.

그 다음에는 소설책.

그리고 다시 휴대폰.

"그래도 일 안 하고 월급 받을 수 있는 게 어디야.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형석도 정상적인 채용 과정을 거쳐 고용된 이 회사의 프로그래머였다.

단지 두 달 전, 출근했더니 책상이 통째로 창고로 옮겨져 있었고, 팀장이 일을 주지 않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주 음험하고 노골적인 퇴사 권고였다.

하지만 당시 형석이 팀장에게 물어본 건 단 하나였다.

"퇴근은 여섯 시에 하면 되죠?"

그렇게 일 안 하고 회사 월급 털어먹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저 또라이 새끼 누가 어떻게 좀 해 봐! 일도 안 하고 월급 떼먹은 게 두 달이야 두 달! 니들은 분통도 안 터지냐!"

강나식 팀장이 책상을 쾅쾅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사원들은 애써 눈길을 피하며 업무에 집중했다.

도형석이라는 인간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팀장만 모르고 있었다.

"야 너! 도형석한테 말했어 안 했어?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전하라고 했지 내가?"

강 팀장의 말에 한 사원이 답했다.

"말했죠."

"뭐라고?"

"이건 사직서 쓰고 조용히 나가 달라는 회사 측의 은유적인 배려다, 라고요."

"그런데?"

"노동법을 통째로 외우고 다니는 인간한테 뭘 더 어떻게 말합니까?"

강나식 팀장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장의 눈 밖에 날 것이 자명했다.

결판을 내야 했다.

강 팀장은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형석은 책상 위에 누워서 한창 폰을 두들기는 중이었다.

형석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 팀장님?"

"나가."

"외근이에요?"

"회사 나가라고, 제발 꺼져 달라고 이 새끼야."

"저 정규직인데 이렇게 막 잘라도 돼요?"

"이 업계에서 아예 매장되기 싫으면 얌전히 사직서 쓰고 네 발로 나가라고!"

강 팀장이 형석을 향해 이렇게나 비상식적인 적의를 표출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냥 꾸준히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사리에 안 맞으면 따박따박 직언하고, 또 그 와중에 틀린 말은 안 하고.

그게 형석의 천성이었다.

갈굼으로 아랫사람 휘어잡는 게 특기인 강 팀장과는 상극인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형석을 자르라는 게 무려 사장님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사장님께서 엉덩이를 닦아 달라 하시면 기꺼이 자신의 세 치 혀를 날름거리며 군침을 삼킬 사람이 강나식 팀장이었다.

그런데 도형석 이놈은 잘려나가질 않는다.

이 건방진 녀석 때문에 자신의 (사내)정치적 커리어에 흠집이 나는 걸 강 팀장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팀장님."

"뭐."

"혹시 우강호가 저 잘라 달래요?"

우강호라면 두 달 전에 강 팀장의 팀으로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었다.

그가 사장 친구의 아들이었고, 채용 과정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직장인의 윤리였다.

"그 친구가 잘라 달라고 했다면 어쩌려고? 뭐 할 수 있는 게 있어?"

"진짜인가 보네. 팀장님, 그러면 그놈이랑 저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도 아시죠?"

"알면 어쩌게?"

형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싸늘한 기운이 잠깐 형석의 눈가에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건 곧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거란 뜻이었다.

"아니 팀장님, 두 달 전에 들어온 신입사원이 기존 사원 잘라 달라 했다고 냅다 자르는 게 합리적이라고 보십니까?"

"합리? 말 잘했다. 합리가 뭔데? 사장님이 합리야. 사장님이 너 자르라고 하셨고 그게 가장 합리적인 거라고!"

후우.

형석이 얕게 한숨을 뱉었다.

"아 씨, 폰으로 녹음 떠 둘걸. 오토 돌리느라 못 했네."

"뭐?"

"나갈게요. 오늘 안에 퇴사 절차 밟을 테니까 소리 그만 지르라고요."

형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를 나온 형석은 사무실로 쏙 들어갔다.

"야, 어디 가!"

"거 나가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마십시다."

형석은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원들이 움찔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강호의 반응이 볼만했다.

형석을 빼꼼 하고 보더니 잽싸게 파티션 뒤로 몸을 숨겼다.

어린 시절 형석이 강호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건 아니었지만 모양새가 웃기긴 했다.

형석은 스틱 커피 세 개를 한꺼번에 뜯어 종이컵에 부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한가득 채워 휘휘 젓고는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화장실 좀 쓰겠습니다!"

사무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 * *

"끙."

남자화장실 변기 칸.

형석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았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우강호 이 자식은 볼 때마다 한결같이 내 발목을 잡는단 말이지."

우강호와 도형석은 중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이었다.

우강호는 제법 사는 집 아이였고, 도형석은 학교에서도 손꼽히게 가난한 집 아이였다.

그런 중학생 시절 6월 어느 날, 강호가 형석에게 말했다.

"야 너 안 씻냐?"

중학생 형석은 비듬 낀 머리칼을 긁으며 말했다.

"응."

"너 X나 냄새나."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망가진 보일러를 고칠 돈이 없어 샤워를 못 한 지 일주일이 다 됐기 때문이다.

"미안."

"미안하면 다냐?"

"너 나랑 자리 멀어서 냄새도 안 날 거 아냐."

그 말만 하고 형석은 엎어져 다시 자기 시작했다.

강호는 형석의 책상을 걷어차려 했지만 패거리가 말리는 바람에 행하진 못했다.

대신 다음 날부터 강호 패거리의 음험하고 집요한 괴롭힘이 시작됐다.

의자에 물 부어 두기, 교과서 쓰레기통에 버리기, 체육복 숨겨 놓기, 책상 속에 쓰레기 넣어 놓기 등 자잘하고 끈질긴 괴롭힘이 이어졌다.

형석은 담임 선생을 찾아가 이 고충을 토로했다.

담임은 형석에게 '너에게도 잘못이 있진 않았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이상한 조언만 남겼다.

그리곤 종례 때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을 평소보다 3분 정도 더 길게 말했다.

담임이 한 일은 그걸로 끝이었다.

정말 세상 쓸모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괴롭게 한 달이 흘렀다.

하지만 강호의 속도 계속 터져나갔다.

아무리 괴롭혀도 형석 쪽에서 제대로 된 리액션이 돌아오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형석은 늘 그냥 뚱한 표정으로 모든 괴롭힘을 참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괴롭히는 입장에서 이것만큼 천불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자 강호 쪽도 왕따의 전략을 바꿨다.

"야, 빵 좀 사다 주라."

가학적 쾌락주의에서 실용주의로 노선이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무슨 빵?"형석은 선선히 메뉴를 물었다.

"불고기빵, 한 개."

형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 원 지폐를 받아들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강호 패거리는 좋아서 낄낄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드디어 저 냄새나고 짜증나는 가난뱅이가 굴복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곧 형석이 매점에서 되돌아 왔다.

그런데 형석의 손에는 불고기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형석은 그 중 하나를 강호에게 건넸다.

"왜 두 개를... 아니, 야 인마. 거스름돈은?"

강호가 준 돈은 천 원, 불고기빵은 오백 원.

거스름돈 오백 원과 빵 하나가 돌아와야 옳은 계산이었다.

"남은 돈으로는 내 거 샀는데?"

찌익.

형석은 자기 몫의 불고기빵의 포장을 뜯었다.

"...남은 돈으로 니 빵을 샀다고?"

어이가 가출한 듯한 강호의 되물음.

"심부름 값. 당연한 거 아냐?"

강호는 어이가 털린 눈빛으로 형석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이런 빵셔틀은 겪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강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불고기빵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퍽!

형석의 명치에 주먹이 꽂혔다.

곧 강호의 패거리가 몰려들어 형석을 짓밟기 시작했다.

머릿수를 이길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평소 먹을 것도 잘 못 먹어 야윈 형석의 몸뚱어리로는 저항도 힘들었다.

일방적인 구타.

폭력은 담임이 들어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형석과 강호 패거리는 함께 교무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담임의 중재 하에 서로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나눠야 했다.

하지만 형석은 끝까지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잘못한 점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담임은 형석에게 사과하기 싫다면 교무실 앞 중앙 계단을 청소하라고 명령했다.

형석은 그것도 거부했다.

담임은 단소로 형석의 손바닥을 여러 대 내리쳤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집으로 가는 길.

멍들이 피어난 몸뚱어리와 얻어맞은 손바닥이 욱신거려 왔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아픔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쪽 어딘가부터 무언가 꽉 누르는 듯한 느낌이 훨씬 더 불편하고 아팠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왜 괴롭힌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괴롭힘 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집은 왜 이리도 가난한지.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곧 형석은 달동네의 초입에 들어섰다.

반쯤 허물어진 회색 담벼락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담벼락에서 이탈한 벽돌들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그 순간, 형석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번개같이 지나갔다.

형석은 눈물을 닦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형석은 벽돌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다음 날.

"야, 어제 불고기빵은 맛있었냐?"

강호 패거리가 건들거리면서 형석에게 다가왔다.

어제 일로 담임이 자기들 편이라는 것까지 알게 됐으니 이제 진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따 점심 같이 먹자. 너 제육볶음 싫어하지? 내가 먹어 준다."

강호의 패거리들이 뒤에서 키득거렸다.

형석은 그쪽으로 눈길도 대답도 주지 않았다.

"야."

강호가 형석의 의자를 발로 툭 밀었다.

"사람이 말하는데 무시하냐?"

덜컹.

형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실내화 주머니가 들려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형석은 교실 뒤편을 향해 걸어갔다.

"어? 야! 무시하냐? 뒈질래? 야!"

강호는 형석을 뒤따라갔다.

형석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계획한 일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뿐.

교실 가장 뒤편.

책상들의 군락과 사물함의 사이.

교실 안의 가장 큰 공터.

책상도 의자도 교탁도 칠판도 없는, 교실에서 가장 자유로운 공간.

형석은 몸을 180도 휙 틀었다.

형석의 손에 쥐어진 실내화 주머니가 막힘없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쩍-!

강호의 관자놀이를 찍어 버렸다.

"끄하아아악...!!"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고통.

강호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비명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아이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감을 잡지 못했다.

고작해야 실내화 주머니였다.

그런데 반에서 가장 덩치 크고 포악한 녀석이 그걸 머리에 맞고는 나뒹굴어버린 것이다.

강호의 관자놀이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형석은 나뒹굴어져 있는 강호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곤 실내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형석이 꺼내든 것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은 회색 벽돌이었다.

형석은 벽돌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모두가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통쾌함마저 느끼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미안해! 미안해! 살려 줘, 제발! 다신 안 그럴게! 제발!"

"미안할 짓이면 하질 말았어야지."

따악!

형석은 있는 힘껏 벽돌로 내리쳤다.

하지만 벽돌이 찍은 곳은 강호의 머리가 아니었다.

벽돌은 강호의 머리 바로 옆, 교실의 바닥을 찍었다.

형석은 일어났다.

강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 사지를 벌벌 떨고 있었다.

곧 강호의 사타구니에서 오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또 나 건드리면 그땐 진짜 대가리에 벽돌 꽂는다."

...여기까지가 도형석과 우강호 사이에 있었던 '무슨 일'의 전말이었다.

* * *

"읏차."

형석은 밑을 닦고 변기에서 일어났다.

우강호 이 자식.

내가 당한 거 이상으로 돌려주긴 했다만, 이런 식으로 또 내 앞길을 막아?

형석은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지금 잘리면 당장의 월세, 아버지의 약값, 그리고 동생의 학원비 등등이 한 번에 막막해진다.

이게 정말 맞는 일인가?

괴롭히던 놈이, 괴롭힘 당하던 녀석을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잘라버리는 게?

불합리하다.

이건 명백하게 불합리한 폭력이다.

담임에게 단소로 손바닥을 맞을 때, 강호 패거리에게 짓밟힐 때 느꼈던 그 불쾌함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형석은 생각했다.

불합리한 폭력은, 그 이상으로 불합리한 무언가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형석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변기 안에는 아직 내려가지 않은 그의 갈색 피조물이 다소곳이 담겨 있었다.

형석은 손에는 마침 빈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2화 튜토리얼 (2)

"그놈 진짜 나가는 거 맞죠?"

우강호와 강 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오늘 내일 내로 사직서 내고 나갈 거야."

"고맙습니다, 강 팀장님. 제가 진짜 도형석 그놈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문제 많은 놈이라 내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날이 딱 맞은 거지. 편하게 있...."

쾅!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형석이었다.

"어이 우강호! 잘 지냈냐!"

형석이 강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 손에는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뭐야 너!"

강 팀장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왜요? 동창들이 인사하는 것도 막아요, 이 회사는?"

"나가기로 했으면 얌전히...!"

"괜찮아요, 강 팀장님."

우강호가 강 팀장을 제치고 형석 앞으로 나왔다.

중학생 시절에도 큰 덩치였지만, 지금은 더욱 거대해져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180이 넘는 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파티션 뒤로 잽싸게 숨던 아까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형석이 회사를 나가기로 한 이상, 강호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석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랜만이다 강호야. 관자놀이는 괜찮냐?"

"좋은 데서 잘 꿰맸지. 느이 아부지도 이런 데서 치료 받으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픈 데를 찔렀더니 냅다 패드립이 날아들었다.

"그러게. 가난한 게 여러모로 서럽더라, 진짜."

"그러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여기 나가서는 여기보다 더 노력하고, 응?"

툭툭.

강호가 형석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콱!

형석이 강호의 손목을 낚아챘다.

"X발... 이만치 했으면 내 인생에서 이제 좀 꺼져 줄 때 되지 않았니, 강호야?"

강호는 손목이 잡히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밟혀 죽기 싫으면 개미가 피해 가야지 사람이 배려해야 하냐?"

도형석, 그리고 우강호.

개미, 그리고 사람.

그게 우강호의 세계관이었다.

자기보다 약한 자는 모두가 개미.

그렇기에 밟을 수만 있다면 짓밟아도 아무런 가책도 느낄 필요가 없고,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이 자식은 벽돌로 머리를 맞고도 배운 게 없었다.

"야 형석아 근데 너 아직도 안 씻고 다니냐? 무슨 냄새가...."

강호가 표정을 찡그렸다.

문득, 형석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 오늘 아침에 샤워했는데."

"근데 이게 무슨 냄새...."

"어디서 나는 걸까? 응?"

강호의 눈알이 바삐 굴렀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박혔다.

형석이 들고 있는 종이컵.

휴지로 입구가 덮여 있어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수상한 종이컵.

냄새는 그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벽돌로 머리를 쳐맞을 뻔하고도 깨달음이 없으면 대체 뭘로 갈겨야 하나 내가 고민이 많았다, 강호야."

"야, 잠깐...!"

철퍽!

형석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종이컵은 강호의 얼굴 한가운데에 직격했다.

종이컵에 담겨 있던 갈색 내용물이 터져 나오며 강호의 얼굴 전체를 덮쳤다.

갈색의, 끈적이는, 물컹한, 지독한 냄새의, 입에 담기 싫은, 파편들.

쉽게 말해, 똥.

"흐아아아악! 아악! 으아아아악!!"

강호는 칼이라도 맞은 것 마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다.

칼은 게임 속에서라도 맞아 보지만 똥은 아니었으니까.

원래 애매하게 현실적인 사건이 더 끔찍한 법이었다.

그 와중에 눈에 똥물이라도 들어갔는지 강호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시야 상실로 인한 패닉 때문에 강호는 사방을 다 어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의자들은 쓰러지고, 책상 위의 문방구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직원들은 피하기 바빴다.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강호가 더러워서였다.

"팀장님!"

강호가 팀장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 묻어있던 것이 팀장의 어깨로 옮겨갔다.

"으아악! 저리 가!"

팀장조차도 강호를 감싸 주지 못했다.

"푸하하하하하!"

형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낳은 것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뿌듯했다.

한 직원이 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를 들고 사무실로 뛰쳐 들어왔다.

직원은 강호의 머리에 물을 퍼부었다.

희석된 똥물이 바닥을 뒤덮었고, 사무실은 한층 더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파국을 뒤로한 채, 형석은 뒷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저 먼저 퇴근합니다!"

쾅.

문이 닫혔다.

* * *

"저기요,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번쩍

형석은 벤치에서 눈을 떴다.

중년의 경비원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되나요?"

"안 됩니다. 그리고 공원에서 술 먹는 것도 안 됩니다."

형석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발치에 뒹구는 맥주 캔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나온 직후, 맥주 여덟 캔을 사서 공원으로 온 뒤 줄창 마시다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다.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무튼 먹은 캔들은 다 가져다 버리고...."

"제가 오늘 회사에서 잘렸어요, 아저씨."

순간 경비원이 측은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아유, 거 뭐 어쩌다...."

"회사의 얼굴에 똥칠을 했거든요."

"아이고, 쯧쯧...."

똥칠을 했다는 걸 비유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거 비유가 아니라 진짠데.

"아무튼, 여기 저녁에도 애기 엄마들 산책 많이 나오니까 그래도 술은 다른 데서...."

"아 넵, 죄송합니다."

이제 어디서 누구랑 술을 먹지.

아 맞다, 유언수 그 녀석이 있었지.

형석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형석은 곧 어느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정말 애매한 위치에 자리한 편의점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다만 어느 이름 모를 할아버지 한 명이 편의점 앞 화단에 걸터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노숙자일까, 형석은 잠깐 동안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듯한 묘한 눈빛에서 어떤 기이함이 느껴졌다.

어쩐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연민? 슬픔?

근원 모를 감정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형석은 감정들을 뒤로하고 편의점 문을 열었다.

딸랑.

문에 달아 둔 벨이 울렸다.

"어서 오세... 어?"

입구를 쳐다보던 남자 알바생이 놀라는 투로 말했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도형석 씨."

알바생이 농치듯이 말을 건넸다.

"잘 지냈냐, 언수야. 술 마시러 왔다."

형석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와 카운터에 올렸다.

"뭐야? 너 소주 안 좋아하지 않냐?"

"빠르고 싸게 취하는 데 이만한 게 있냐."

알바생, 유언수는 형석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다 물었다.

"너 회사 잘렸지."

"그게 보이냐?"

"단서의 조합이지. 애매한 방문 시간, 안 먹던 술의 선택, 박살난 표정, 나의 명석한 두뇌에서 기인한 뛰어난 직감 등등."

"넌 가끔 너무 인간미가 없다 언수야."

"나 말고 나머지가 인간이 덜 된 거지."

"넌 어떻게 중학교 때부터 이렇게 일관적으로 재수가 없냐. 계산이나 해 줘."

"그런데 더 싸고 빠르게 취할 수 있는 거면 더 괜찮은 게 있는데."

"소주 말고? 여기 소독용 알코올도 파냐?"

언수는 카운터 뒤쪽 선반에서 갈색 병 하나를 내려다 카운터에 올렸다.

임페리얼 12년산, 위스키.

형석의 입이 딱 벌어졌다.

"미친놈아."

"가격 들으면 더 놀랄걸?"

"당연히 놀라겠...."

"1000원."

"...장난하냐?"

"세일 마감까지 30초 남았습니다."

언수가 씨익 웃었다.

형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친구의 이름은 유언수.

형석의 중학교 친구인 동시에 유일한, 가장 친한 친구였다.

형석은 1000원을 내밀고 위스키 병을 받아 들었다.

얼굴에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며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고맙다, 언수야."

"날이 거지같으면 술이라도 좋아야지. 어서 가 봐."

"너 일 끝나면 같이 먹자."

"나 오늘 새벽까지 연장 근무야. 가."

"언수야...."

"가라니까."

"종이컵 두 개만 주라."

"야 이 개ㅅ...."

* * *

형석은 위스키 한 병과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아까의 그 노인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형석은 터벅터벅 걸어가 노인 옆에 턱 걸터앉았다.

노인이 움찔하며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술 혼자 먹으면 맛없어요."

형석은 노인의 손에 종이컵을 쥐여 주었다.

곧 위스키가 잔에 부어졌다.

"아니... 이런 걸 왜...."

"아무 이유 없이 드리는 거니까 아무 생각 없이 드세요."

형석은 제 몫의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식도가 알싸하게 지져지는 듯한 느낌이 제법 좋았다.

반면 노인은 마치 제사라도 지내듯, 술잔을 허공에 세 바퀴 돌렸다.

그리곤 위스키를 바닥에 뿌렸다.

"저기요...?"

"한 잔 더 따라 봐."

노인의 목소리에는 거부하기 힘든 기운이 서려 있었다.

형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술을 따라 주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뿌리지 않고 자기가 마셨다.

"크으, 술맛 좋네. 젊은이, 이름이 뭔가."

"도... 도형석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고맙네. 덕분에 내 전우들도 맛대가리 없는 소주 대신 좋은 술로 목을 축였을 거야. 다시 한 번 정말 고맙네."

그제야 형석은 뿌려진 술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죽은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한 제사 행위였던 것이다.

"저기 어르신, 무슨 일이...."

"전쟁이었네.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는 전쟁."

"베트남 전쟁 말씀이신가요?"

"아니야. 말해도 아무도 믿지 못할 게야."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석 군이라고 했나? 진심으로 한 마디 해 주겠네. 그 무엇도 믿지 말게."

"네?"

"함부로 믿지 말고, 주위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자신이 내린 판단만 믿게."

"갑자기 왜 그런...."

"지금까지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웠다 해도,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몰아닥칠 게야. 내 장담하지. 곧 세계가 뒤집힐 게야."

"뭐라고요?"

"그러니 명심하게. 절대, 그 무엇도 함부로 믿지 말게. 술 고마웠네."

노인은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더니, 건물 사이의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형석은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도 깰 겸 집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편의점이 있던 골목을 빠져나와 얼마쯤 걸으니 번화가가 나왔다.

사람이 많았다.

행복한, 혹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방금 지나간 한 커플은, 온 세상 행복을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행복하냐.

행복한 건 어떤 기분이냐.

형석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직장에서 잘렸다.

당장 다음 월세가, 아버지 병원비가, 고3 동생의 학원비가 빠듯하다.

이미 줄이고 줄인 생활비에서 어딜 더 까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우강호 같은 놈은, 그토록 막 살아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

나는 왜 미친 듯 치열히 살아도 이 모양일까.

내 잘못일까?

세상 탓일까?

아니면 잘잘못 같은 건 애초에 아무 의미 없는 걸까?

이럴 거면, 그냥 전부 다...

키잉-.

"...?"

형석은 이상함을 느꼈다.

눈앞의 풍경이 잠깐 출렁이듯 일그러졌다 되돌아왔다.

"...나 많이 취했나?"

키이이이잉-.

좀 전에 들리던 날카롭고 기분 나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형석만 들은 게 아니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 모두가 발을 멈췄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이게 무슨 소리야...?"

"몰라, 이건 무슨...."

키이이기긱기기기긱-.

신경을 찌르는 듯한 높은 음의 괴성이 사람들의 귀에 꽂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 순간, 형석은 똑똑히 보았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주위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빌딩도, 보도블록도, 자동차도 일순간 모조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오직 사람들만이,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되었다.

믿을 수 없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혼란한 심경을 무분별하게 뱉었다.

"여기가 어디야?"

"동굴...?"

"여긴 대체 뭔데...?"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동굴 안.

다만, 일반적인 동굴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횃불들이 밝혀져 있었고, 거친 벽면과 달리 바닥은 매끈한 타일 바닥이었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오싹하고 차가운,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집중됐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천사 모양의 석상 하나가 서 있었다.

석상이 말했다.

"이곳은 제48006842호 튜토리얼 던전입니다. 현재 입장 인원 100명, 전송 중 실종자 0명. 환영합니다, 여러분."

아무도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비상식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 다들 너무나 상식적이었기에.

형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략 1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여기... 여긴 대체 어딥니까? 저흰 왜 여기에 온 거고요?"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천사 석상이 답했다.

크르르륵.

천사 석상이 서있는 곳 정반대편 구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래가 끓는 듯한 불쾌하고 오싹한 소리.

어둠 속에서 소리의 근원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석상이 말했다.

"100마리의 몬스터를 모두 사살하면 보상이 지급됩니다. 튜토리얼 레이드, 시작합니다."

3화 튜토리얼 (3)

"몬스터라고...?"

"던전은 또 뭐야?"

좌중이 술렁거렸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릅... 크익...."

어둠 속에서 몬스터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성인 남성보다 조금 작은 키, 시뻘겋게 충혈된 눈, 비쩍 마른 체구, 썩어 들어가는 피부, 그리고 지독한 악취.

"괴물...?"

누군가 이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 모두가 말없이 수긍했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 같은 그 공포스런 생김새에 사람들은 뒷걸음을 쳤다.

겪어 본 적 없는 사건, 어둡고 침침한 공간, 끔찍한 모양새의 적들.

인간의 용기를 바닥까지 긁어내 버리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들은 느직한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살려줘...!"

"으아아아아!"

"이게 뭐야! 내보내 줘!"

"엄마! 엄마아아!"

패닉.

이성은 증발하고, 본능이 몸을 옥죄는 순간.

던전 밖에선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었던 이들이 이곳에선 가장 빨리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X발, 다 앉아서 뒈질 생각이야?"

예외가 있었다.

"돌이 보이면 주워 들고! 돌 없으면 주먹 쥐고! 질질 짜다간 다 죽는다고, 이 빡대가리 새끼들아!"

바로 위스키에 머리 꼭대기까지 취한 도형석이었다.

"내가 뒈지면 당신들 탓이고 당신들 뒈지면 내 탓이다! 빨리 안 움직여!"

평소 같았으면 뱉지도 않았을 말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덕분이었다.

알코올 냄새 풀풀 나는 일갈에 몇몇 사람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돌멩이를 주워 든 자, 주먹을 쥔 자, 이를 악문 자.

각오를 다진 이들은 군중에서 빠져나와 한 걸음 앞에 섰다.

물론 뒤에 서서 벌벌 떨기만 하는 무리도 전체의 절반이었다.

싸울 용기가 없다는 이유로 무임승차를 택한 이들.

거기다 이를 종용하는 이상한 사내까지 있었다.

"여성분들은 제 뒤로 오십쇼! 어떻게든 지켜 드릴 테니까!"

한 명이라도 더 나서야 하는 판에 참전자를 줄이는 어처구니없는 발언.

형석은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보았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오랜 기간 운동을 해 왔는지 울뚝불뚝한 근육이 돋보였다.

몇몇 여자들은 그 사내의 뒤로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제각기 감사 인사와 응원을 건넸고, 이 사내도 속이 빤히 보이는 웃음으로 그에 답했다.

형석은 어이가 없었다.

저 미친 마초맨 새끼가 여기에서까지 끼를 부린다고?

"온다!"

몬스터들이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몬스터와 인간, 두 진형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그리고 그 충돌의 가장 앞에 선 사람은 셋.

도형석, 마초맨, 그리고 후드티를 뒤집어쓴 이름 모를 젊은 여자였다.

"으아아아아!"

"크르르라락!"

휙-.

쨍그랑!

날아든 유리병이 한 몬스터의 머리를 강타했다.

형석이 던진 위스키 술병이었다.

병에 얻어맞은 몬스터가 비틀거렸다.

형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형석의 한 손은 몬스터의 목을 움켜쥐고, 나머지 한 손은 돌멩이를 휘둘렀다.

쩍!

찍었다. 돌로.

우강호의 머리를 날려 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몬스터는 쓰러졌고, 형석은 올라탔다.

퍽, 퍽, 퍽, 퍽.

미간, 눈두덩이, 이마, 다시 미간.

형석은 홀린 듯이 몬스터의 면상을 내리찍었다.

움찔거리던 놈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으깨진 머리통에서 피와 뭉개진 뇌가 흘러나왔다.

피가 형석의 무릎을 적셨다.

순간, 형석은 머리가 하얘지며 술기운에서 깨어났다.

첫 살해.

비록 인간도 아니었고,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형석은 알 수 있었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기묘한 위화감.

동시에, 정신이 멍해지고,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

퍽!

누군가의 발차기에 좀비 한 마리가 나뒹굴었다.

"지금 멍 때리면 죽어, 이 병X아!"

아까 본 그 검은 후드의 여성이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 여자가 아니었으면, 정신 놓은 형석은 그대로 저 몬스터에게 공격당했을 게 뻔했다.

형석은 그대로 튀어나가 몬스터의 얼굴에 킥을 날렸다.

그리고 이어 몇 번이고 머리를 짓밟았다.

놈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느낌이 발에 스며들었다.

"고마워요."

형석이 말했다.

"싸움이나 잘 마무리하고 말해."

검은 후드의 여자는 침착하게 몬스터들을 주먹으로 팼다.

주먹을 휘두르는 폼이 굉장히 능숙했다.

권투나 다른 격투기를 오래 수련한 것일까.

"끄악!"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 이빨로 물어요! 조심하세요!"

어깨를 물린 남자는 곧 자신을 문 몬스터를 무자비하게 패기 시작했다.

던전의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몬스터에 맞섰다.

무작정 두들겨 패든가, 멀찍이서 발로 차 넘어뜨린 뒤 몰려들어 밟든가 하는 식으로.

그중에서 후드녀와 마초맨이 눈에 띄게 잘 싸웠다.

재밌는 건, 이 몬스터들이 상당히 허약했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어린아이 수준의 근력에 자기들끼리 협동하지도 않아 각개격파하기도 편했다.

간혹 기습적으로 입질을 하는 것만 조심하면 되었다.

공포스러운 외형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맨손 맨발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몬스터였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기저기 몬스터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퍼헉!

마지막으로 꿈틀대던 몬스터의 머리에 누군가가 돌덩이를 꽂았다.

"끝인가...?"

"우리가 이긴 거야?"

말없이 싸우던 사람들도 웅성이기 시작했다.

"아빠!"

맨 뒤에서 싸우지 않고 있던 한 소녀가 뛰어나왔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나이대.

그녀는 손수건으로 아버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아빠, 어깨에서 피가...."

"괜찮아, 좀 물린 것 가지고 뭘."

사망자, 0명. (일단은) 승리.

잠깐의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싸우던 사람들도 후방에 있던 사람들에게로 돌아와 서로의 안전을 확인했다.

보아하니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이곳에 휘말려 들어온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몇몇 여자들은 아까의 그 마초맨을 둘러싸고 꺄악거리고 있었다.

손꼽히게 잘 싸웠던지라 딱히 뭐라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츠즈즈즈.

"어? 저게 뭐야?"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 옆에 어떤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

"칼만 있는 게 아닌데?"

칼, 방패, 창 등의 병장기들이 몬스터들의 시체 옆에 나타났다.

마치 게임 속에서 몬스터를 잡으면 드랍되는 아이템처럼 말이다.

"무기들이잖아?"

"뭐야, 우리가 가져도 되는 건가?"

후드녀가 몬스터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뭔가요, 그건?"

한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보면 몰라? 칼이지."

어이없다는 듯이 받아치는 후드녀였다.

형석도 드랍된 칼을 뽑아 들었다.

묵직한 양날 검이었다.

그 순간

팅.

무언가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것은 푸른빛이 감도는 반투명한 사각형 창이었다.

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떠 있었다.

---------------

[알림] '녹슨 양날검'을 획득하셨습니다.

---------------

"이게... 뭐야?"

형석은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들 앞에도 똑같은 푸른 창이 떠 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문자가 쓰여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태창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천사 석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이번 전투에 참여하신 분들에 한하여 상태창과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상태창을 통해 본인의 능력치, 스킬, 몬스터 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석은 상태창이 활성화된 사람들을 다시 보았다.

과연 방금 전 몬스터와 전투를 벌였던 사람들 앞에만 상태창이 떠 있었다.

형석은 다시 상태창으로 눈을 돌렸다.

스탯, 스킬, 장비라는 탭이 활성화 되어있었다.

"어떡하지. 그냥 누르면 되나?"

정답.

터치 스크린 누르듯이 탭 위에 손가락을 얹으니 관련 정보가 상태창에 떴다.

형석은 먼저 스탯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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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5

지능: 5

민첩: 5

HP: 100

M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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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지능의 수치가 똑같은 것이 어쩐지 찝찝했다.

'무슨 의미지. 문무 겸비라는 건가 아니면 머리 나쁜 비실이란 건가.'

"이것 좀 봐요. 이러면 몬스터 정보를 볼 수 있어요."

어떤 남자가 말했다.

"네? 어떻게요?"

"상태창을 통해서 그 너머의 몬스터를 봐 보세요. 상태창을 안경이라 생각하고."

형석은 상태창을 쓰러진 몬스터들 쪽으로 돌렸다.

상태창을 통해서 죽은 몬스터를 보자 몬스터의 정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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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0 좀비]

HP: 0/10

MP: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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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라... 무슨 드래곤볼의 스카우터 같은 느낌이네."

형석은 상태창의 다른 탭을 눌러보았다.

"스킬?"

형석은 스킬 탭을 눌러보았다.

---------------

[패시브] 데미지 투사

Lv.1 이상의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

"고작 데미지를 넣을 수 있다는 게... 스킬이라고?"

무슨 불이나 얼음을 쏘거나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스킬이 떠 있는 건가?

형석은 옆 사람의 상태창을 흘깃 보았다.

하지만 푸른 창만 보일 뿐, 그 위에 무엇이 떠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타인의 정보는 열람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형석은.

"저기요, 아저씨."

"네?!"

그냥 냅다 물어봤다.

"아저씨 스킬 탭에도 '데미지 투사'라는 스킬 하나만 덜렁 있어요?"

"스킬이요? 아 네, 저한테도 데미지 투사만...."

"꺄아아아악!"

잠시잠깐의 평화를 날카롭게 찢어발기는 비명.

좌중의 시선이 한 곳으로 꽂혔다.

"도와주세요! 아빠, 아빠가...!"

아까 아버지의 피를 닦아 주던 그 소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저렇게...."

"저기요, 괜찮으세요?"

한 청년이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가 상태를 살폈다.

"그륵...."

"뭐라고요?"

"크르르륵...."

"네?"

콰득

마치 짐승이 무는 것처럼, 그녀의 아버지가 청년의 목을 물어뜯었다.

"끄아악!"

"뭐 하시는 거예요!"

"끌어내!"

사람들이 몰려들어 청년을 떼어냈다.

청년의 앞섶은 어느새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갑자기 사... 사람을...!"

청년은 욕지거리와 함께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은 어느새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녀의 아버지로부터 한두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순간, 형석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빠, 어깨에서 피가....

-괜찮아. 좀 물린 것 가지고.

조금 전 소녀와 그 아버지가 나눈 대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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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0 좀비]

---------------

몬스터명, 좀비.

좀비에 물린 자는 좀비가 된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는, 하지만 모두가 아는 상식.

그녀의 아버지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 썩어 들어가는 환부, 그리고 지독한 악취.

형석은 상태창을 통해 그를 보았다.

상태창에 정보가 떴다.

---------------

[Lv.0 감염체]

HP: 100/100

MP: 5/5

---------------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영락없는 한 마리 좀비였다.

형석은 공포가 엄습함을 느꼈다.

좀비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자신이 좀비가 되는 게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싸웠던 사람을 내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된 것.

진짜 공포는 거기에 있었다.

4화 튜토리얼 (4)

"아... 안 돼요!"

아버지가 감염된 그 소녀의 목소리였다.

"비켜. 저건 더 이상 네 아버지가 아니야."

검은 후드티의 여자였다.

한 손에는 환도 비슷한 외날검을 쥐고 있었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이렇게 무턱대고...."

"방법? 있지. 변이가 끝나고 날뛰기 전에 죽이는 거. 비켜."

"안 돼요!"

"안 비키면 네 년 목부터 친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조금도 비켜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경고했다."

후드녀가 칼을 치켜들었다.

챙!

형석의 칼이 그녀의 칼을 막아섰다.

"미쳤어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게 누구야. 아까 나 아니었으면 뒈졌을 오빠 아냐?"

"일반인한테 칼을 휘두르면 어떡합니까?"

"일반인? 말 잘했네. 여기 일반인 아닌 사람 있나?"

스릉.

그녀가 칼을 거둬들였다.

형석도 맞춰 칼을 내렸다.

"그래서, 내 앞길 막았으면 뭐 방법이라도 있어야지. 죽이는 거 말고 방법 있어?"

"치료제가 드랍될 수도 있습니다. 칼이나 방패가 드랍된 것처럼요."

"그런 논리면 난 내일 복권에 당첨될 수도 있지."

"그렇죠. 확률 얘깁니다. 그러니까 죽이진 말고 못 움직이게 일단 다리 근육만 끊어 놓으면...."

"키에에에엑!"

찢어지는 괴성.

완전히 좀비로 변이된 소녀의 아버지가 형석에게 달려들었다.

생각할 틈 따윈 없었다.

형석은 칼을 휘둘렀다.

푸확!

물컹한 감각이 칼을 타고 올라왔다.

칼끝이 복부를 갈랐다.

복막이 열리고, 내장과 피가 왈칵 쏟아져 바닥을 뒤덮었다.

좀비가, 소녀의 아버지가 쓰러졌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조금 전까지 인간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시신이 되고 말았다.

"아빠! 안 돼, 아빠!"

소녀가 울부짖으며 아버지의 시신으로 달려갔다.

손에 피와 고름이 묻는 줄도 모르고 소녀는 아버지의 몸뚱어리를 잡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울음이 시신을 살려낼 순 없었다.

"다리 근육을 뭐 어쩌자고?"

후드녀가 형석을 향해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형석이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준비나 해."

"뭘 준비해?"

되받아치는 형석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물린 게 한두 명이 아닌 건 알잖아?"

크르르륵-.

크릅, 크륵-.

좀비 특유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물린 이들의 변이가 시작된 것이다.

아까 소녀의 아버지에게 물린 청년도 어느새 좀비가 되어 있었다.

좀비가 된 이들 중엔 아까의 그 마초맨도 있었다.

"크르라라락!"

마초맨은 손에 쥔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아까 드랍됐던 창을 집어든 채로 좀비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벌써 창을 정타로 맞고 즉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패를 든 몇몇이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근육질의 거구가 온힘을 다해 휘두르는 창의 파괴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좀비화된 사람들도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 싸웠던 좀비와 달랐다.

인간일 때의 힘과 HP를 그대로 가진 채, 무기까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도 심리적 압박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그들은 단순한 좀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함께 싸웠던 전우였고, 누군가에겐 가족 혹은 연인이었으니 말이다.

"형...."

"안 돼, 오빠...."

"X발, 경석아, 대체 네가 왜...!"

소녀의 아버지, 형석이 죽인 그를 포함해 감염된 자는 7명.

그리고 그에 맞서는 사람은 40여 명.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진흙탕 같은 교착 상태.

깨기 위해선, 누군가가 파문을 일으켜야 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이 진창의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후드티를 입은 여자였다.

촤학!

순식간이었다.

좀비화된 청년 한 명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녀의 칼이 목을 가른 것이다.

"형!"

"경석아!"

가족들의 절규.

하지만 후드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좀비화된 인간들이 다른 인간을 물기 시작했다.

물린 사람들은 순식간에 감염되어 좀비로 변해 버렸다.

그제야 현실적인 위기감이 사람들을 엄습했다.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좀비가 된다.

하나둘씩, 점차 공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칼날은 좀비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누군가의 창은 좀비의 배를 뚫었다.

하나둘 좀비가 쓰러질 때마다, 그들을 사랑했던 이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남은 좀비는 이제 하나.

마초맨이었다.

"크하아악!"

그 누구도 그에게만은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휘두르는 창 때문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시, 후드녀가 나섰다.

사람들이 물러나고, 그녀는 마초맨과 독대했다.

마초맨은 한층 더 광폭하게 창을 휘둘렀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창은 굉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섣불리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창의 범위의 아슬아슬한 바깥에서 기회를 노릴 뿐.

"파워는 좋은데 잔동작이 많아. 기술 없이 힘만 믿으면 이런 궤적이 나오지."

어느 순간, 창의 궤적이 횡에서 종으로 바뀌었다.

마초맨이 창을 높이 들었다가 후드녀를 향해 내리찍은 것이다.

창끝이 바닥에 박히고 처음으로 창의 움직임이 잠깐이나마 멈춘 그 순간.

탓!

그녀는 창을 밟고 튀어 오른 뒤

푹!

마초맨의 쇄골 부근에 칼을 꽂았다.

그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고, 유려했으며, 동시에 섬뜩했다.

어깻죽지부터 심장까지 단숨에 관통당한 마초맨은 곧 숨을 거뒀다.

그 광경을 보며 형석은 느꼈다.

무술을 연마했구나, 운동신경이 좋구나, 하는 감상 이전에.

'저 여자는 사람을 죽여 본 적 있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칼은 섬뜩했다.

"뭘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어?"

후드녀의 말에 형석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맙다."

"웬 감사 인사? 난 그냥 나 살자고 휘두른 거야. 그쪽이 그랬던 것처럼."

후드녀는 형석을 지나쳐 걸어갔다.

사망자, 27명.

살아남은 전투 인원 43명.

살아남은 비전투 인원 30명.

무기를 들고 싸웠던 이들보다 후방에서 지켜지던 비전투 인원들의 피해가 더 컸다.

무기도 없었고, 무엇보다 좀비화된 가족이나 친구를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가 물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후드녀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까 전에 형석이 죽인 그 남자, 소녀의 아버지에게로.

후드녀는 그 아버지가 들고 있었던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싸우지 않고 한쪽에 모여 있던 비전투 인원들을 향해 말했다.

"어이, 무임승차자들."

그들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그래, 니들. 남들 죽자고 앞에서 싸우는데 뒤에서 시시덕대고 있던 당신들."

"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우리가 싸우기 싫어서 안 싸웠소?"

한 노인 남성의 반박이었다.

"아가리 놀리는 거 보니 싸울 힘은 있는 거 같은데. 왜 안 싸우셨습니까, 어르신?"

"젊은 놈이 말버릇이...!"

"왜? 내 말이 심해? 우린 목숨 걸고 싸우다가 좀 전엔 같이 싸우던 동료까지 우리 손으로 죽였어. 그래도 내 말이 심해?"

노인 남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 저 근육맨은 당신들 지킨답시고 싸우다가 좀비 돼서 죽었어. 뭐 느끼는 거 없어?"

아까 그 마초맨에게 지켜졌던 여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이 뭐라 반론을 말하려 했지만 나머지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뒤에서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싸우란 말이야. 나한테 진짜로 병신 취급 받기 싫으면."

"저기요."

한 청년이 후드녀에게 말을 걸었다.

"뭐?"

"제 어머니께서도 저기 계십니다. 제가 계시라 했습니다. 대신 제가 싸우겠다고요."

"그래서? 당신 어머니지 내 엄마는 아니잖아."

"뭐?!"

스릉-.

그녀의 칼이 어느새 청년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었다.

"같이 나서서 싸워 준 건 고마운데, 저것들 편 들면 당신도 똑같은 놈으로 취급할 거야."

그녀가 칼을 거뒀다.

그리곤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무임승차자들을 향해 던졌다.

땡그렁!

칼은 소녀 앞에 떨어졌다.

조금 전에 아버지를 잃은 그 소녀 앞에 말이다.

"칼 들어. 살고 싶다면 직접 싸워."

소녀의 눈은 후드녀를 시퍼렇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으로 하는 저항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이 집단의 중심은 후드녀가 완벽하게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이분 말이 맞아. 당장 무기 들어!"

누군가 후드녀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맞아!"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 줬으면 값은 해야지!"

"빨리 안 일어나!"

후드녀가 해야 할 말을, 이젠 다른 이들이 대신해서 하고 있었다.

후드녀를 중심으로 패거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걸었다는 억울함.

기껏 함께 싸웠던 동료를 자기들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

후방의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혐오감.

하지만 모든 사람이 후드녀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후방에 가족이나 연인을 두고 전투하러 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후드녀 패거리의 발언을 막진 못했다.

감정적으로건 논리적으로건 그들에게 제시할 만한 반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방에서 지켜지던 비전투 인원들이 이번에는 맨 앞에 내몰아졌다.

그 중 방패든 칼이든 든 자는 10명에 불과했다.

아까 좀비화된 사람들이 들었던 무기를 주워 든 것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전투에 익숙해진, 무장을 갖춘 사람들은 뒤에 서 있고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최전방에 선 것이다.

"꼭 이렇게 해야겠어?"

형석이 말했다.

후드녀 패거리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꽂혔다.

"왜? 무슨 문제라도?"

후드녀가 말했다.

"가장 잘 싸우는 사람들이 가장 앞에 서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사람들을 방패로 쓸 셈이잖아? 이건 그냥 희생만 늘릴 뿐이야."

"전술적인 발언이네. 그런데 그건 너무 비윤리적이잖아?"

"뭐?"

"자기 몫은 자기가 지킨다. 자기 목숨도 자기가 지킨다. 이게 가장 깔끔하고 윤리적인 거잖아?"

"무슨...!"

쿵.

동굴의 저 깊은 곳에서 소리가 울려왔다.

쿵. 쿵.

무언가가 이곳을 향해 육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온다."

몬스터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

그것들은 중세 유럽 기사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온몸을 덮고 있는 판금 갑옷, 그리고 한 손에 쥔 검.

그런 놈들이, 어림잡아 족히 40마리는 몰려오고 있었다.

형석은 상태창을 통해 몬스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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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 녹슨 판금 기사]

HP: 40/40

MP: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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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좀비보다 체력이 네 배는 높아. 괜히 무기를 준 게 아니군.'

기사들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양측의 전선이 맞붙기 직전, 후드녀가 비전투 인원들 중 한 명의 등을 칼끝으로 툭 밀었다.

"목숨값 하셔야지?"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아까 그녀에게 말싸움을 걸었던 노인 남성이었다.

그는 후드녀를 잠깐 노려보다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칼끝에 묻어 있는 피를 봤기 때문이다.

'앞장서 싸우지 않는다면 이 여자한테 죽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일순간 그런 공포에 휩싸였다.

그랬기에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으아아아아!"

노인은 칼을 들고 뛰쳐나갔다.

그는 무리에서 빠져나온 한 기사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해? 다른 놈들도 당장 튀어 나가!"

후드녀 패거리 중 한 명이 소리 질렀다.

겁에 질린 몇 명의 비전투 인원들도 결국 노인을 쫓아 달려 나갔다.

'잠깐만.'

순간, 형석의 머릿속에 세 가지 정보가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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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0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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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데미지 투사

Lv.1 이상의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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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몬스터들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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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 녹슨 판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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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 그 천사 석상이 이렇게 말했었다.

"...전투에 참여하신 분들에 한하여 상태창과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아까 좀비와 싸우지 않은 비전투 인원들은 '데미지 투사' 스킬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안 돼! 다들 돌아와!"

형석이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닿지 못했다.

뛰쳐나간 비전투 인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온힘을 다해 몬스터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팅-.

공격은 튕겨져 나왔다.

"아니...?"

"무슨?"

푸확!

몬스터의 칼이 노인의 배를 꿰뚫었다.

쉭!

투확! 촥!

그리고 순식간에 두 명의 목이 더 떨어졌다.

한 순간에 세 명이 죽었다.

스킬 '데미지 투사'의 기능은 Lv.1 이상의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것.

바꿔 말해, '데미지 투사' 스킬이 없는 자들의 공격은 저 Lv.1의 몬스터들에게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아까 좀비랑 싸우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 뒤로 빠져!"

형석이 외쳤다.

"병력을 왜 뒤로 빼? 당신 미쳤어?"

패거리 중 한 명이 형석에게 창을 들이밀며 말했다.

형석은 창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미치긴 니들이 미쳤지. 스킬 없으면 공격도 안 먹힌다고 저것들!"

"이분 말이 맞아요!"

스킬의 기능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이 형석을 두둔하고 나섰다.

"스킬 없으면 개죽음밖에 안 된다고요!"

"그건 저놈들 사정이지!"

"그게 할 소립니까? 사람을 방패로 쓰려고요?!"

생존자들은 순식간에 두 파로 나뉘었다.

형석을 편드는 쪽과 후드녀를 옹호하는 쪽.

코앞에 적이 당도한 순간에 자기들끼리 물고 뜯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형석은 후드녀를 보았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 내분의 시작을 연 자.

그 순간, 형석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마치 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5화 튜토리얼 (5)

위스키를 나눠 마셨던 그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끔찍한 일이 몰아닥칠 게야. 내 장담하지. 곧 세계가 뒤집힐 게야."

세계가 뒤집힌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대체 그 노인은 무엇을 알고 있던 걸까.

하지만 세계가 뒤집히고, 괴물이 몰려오는 것 자체보다 지금 당장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후드를 입은 저 여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거기다 싸우지 않은 자들과 싸운 자들을 갈라 치고,

자연스럽게 스킬 미보유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자연스럽게 파벌이 나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분열과 다툼의 중심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이 '튜토리얼 레이드'가 끝난 뒤에도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저런 뒤틀린 자들이 마음 놓고 활개 치는 세상이 오겠지.

그럼에도,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딜 후퇴해? 당장 앞으로 나가!"

"뒷걸음치면 우리가 죽일 거다!"

"사람을 고기방패로 쓰지 마!"

"입 닥쳐!"

자기들끼리 뒤엉켜 싸우는 인간들.

몰려오는 몬스터들.

이 순간, 옆에 서 있는 게 연쇄살인마건 학살범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살아야 한다.

"야!!"

형석이 고함을 쳤다.

일시에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니들 지금 누구랑 싸우는 거냐."

쿵. 쿵. 쿵

철그럭. 철걱. 철그럭.

몬스터들은 어느새 열 걸음 안짝으로 다가와 있었다.

핏대를 세워 가며 싸우던 사람들도 싸움을 멈췄다.

진짜 공포, 진짜 죽음이 걸어오는 상황에서, 잘잘못 따윈 아무 문제도 아니었으니.

형석은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좀비와 싸우지 않았던 사람들은 방패 들어! 데미지만 못 넣는 거지 막을 순 있을 테니까!"

캉!

선봉에 선 몬스터가 칼을 휘둘렀다.

형석은 몬스터의 칼을 막아섰다.

"좀비와 싸웠던 사람들은 최대한 창이랑 칼을 들고. 빨리!"

후웅-.

캉!

몬스터가 다시 칼을 휘둘러 형석의 칼을 후려쳤다.

"크읏!"

전보다 더 큰 충격량.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나며 형석의 가드가 열렸다.

그리고 몬스터는 그 틈을 놓치지 않-.

탱!

누군가 몬스터의 칼질을 막아섰다.

방패였다.

좀비와의 전투 당시 후방에서 싸우지 않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아까 함께 싸우지 못해 미안해요."

"흐아아아!"

몬스터가 방패에 정신이 팔린 사이, 창을 든 사람이 몬스터의 옆구리를 힘껏 쑤셨다.

창날은 갑옷의 이음매로 파고들며 몬스터의 몸을 꿰뚫었다.

몬스터는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살아 나갑시다."

방패를 든 이가 형석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며 형석은 주위를 보았다.

후방에 있던 이들은 이제 방패를 쥐고 앞서 도열해 있었다.

창칼을 쥔 이들은 바로 뒤에서 공격을 예비하고 있었다.

무기가 없는 자들은 돌조각이라도 쥐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무임승차자는 없었다.

단지 살기 위해 발악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현재까지 사망자, 30명.

죽인 몬스터, 대충 50여 마리.

그리고 몰려오는 몬스터, 어림잡아... 40여 마리.

형석은 양손으로 검을 그러쥐었다.

평생 잡아 본 검이라곤 주방 식칼이 전부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게 이곳의 유일한 진리였다.

패시브 스킬 하나, 손에 쥔 녹슨 양손 검 한 자루, 그리고 함께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

뒤는 없다.

죽기도 싫다.

그러니까

"조져!!"

형석이 외쳤다.

레이드가 시작됐다.

방패를 든 자들은 공격을 받아내고, 창칼을 든 자들은 그 틈에 몬스터를 공격한다.

탱킹과 딜링.

가장 정석적인 몬스터 공략법.

방금 몬스터를 잡아내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익혀낸 것이다.

곧 던전 여기저기서 격돌이 일어났다.

기사 몬스터는 좀비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했다.

한 마리당 두세 명은 붙어야 공략이 가능했다.

게다가 공략법을 알아냈다 뿐이지,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기에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하나, 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무리하게 공격을 시도하다 머리에 칼을 맞은 자.

방패로 공격을 잘못 흘렸다가 발등이 조각난 자.

하지만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탱커가 죽으면 다른 이가 방패를 주워 막아섰다.

딜러가 쓰러지면 다른 이가 창칼을 주워 날을 세웠다.

몬스터는 파괴되면 끝이었지만

인간은 죽어도 의지는 계승되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서른 마리.

그리고.

콰직!

마지막 몬스터가 파괴되었다.

"이겼나...?"

"이긴 거 맞지?"

"끝이지?"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인간의 승리였다.

하지만 기뻐하는 이는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다.

살아남은 이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죽은 이들을 수습했다.

사망자, 도합 40명.

생존자, 도합 60명.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잠깐, 여기 아직 산 사람이 있어!"

몇몇 사람이 그곳으로 갔다.

형석도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 한 소녀가 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까 아버지가 좀비가 되어 살해되는 것을 생생히 지켜 본 그 소녀였다.

"아저...씨...."

소녀는 형석을 향해 말했다.

"우리 아빠... 죽인... 그 아저씨 맞죠...?"

좀비가 되어서였다지만, 그리고 기습을 당한 거였다지만, 형석이 소녀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네. 접니다."

형석은 소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용서는 못... 하겠어요."

소녀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가셨다.

왼팔이 통째로 잘려나가 출혈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사과와 함께, 형석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면 아저씨... 나랑 내 아빠... 수습 좀 해 줘요...."

"꼭 그렇게 할 게요."

"내 이름은... 연민아...."

이름과 함께, 소녀의 숨이 멎었다.

소녀는 끝내 형석을 용서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그런 거였다.

치지지직-.

천사 석상 옆에서 맹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곳에 타원형의 빛나는 무언가가 형성되었다.

"저게 뭐야?"

"설마... 포털?"

"포털이 뭔데?"

"문! 밖으로 나가는 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해졌다.

나갈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천사 석상은 그 희망을 증명해 주었다.

"출구 생성 완료. 튜토리얼 던전 출입 제한을 해제합니다."

"나갈 수 있어!"

"가자!"

"빨리 와! 빨리!"

사람들이 포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죽은 친구와 가족을 들쳐 업고, 누군가는 무기를 들고 포털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포털 너머로 사라져갔다.

그사이, 형석은 어떻게 하면 소녀와 아버지를 동시에 옮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읏차."

누군가가 소녀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후드녀였다.

"이 정돈 도와드릴게."

뜬금없는 호의.

형석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며 웃음 짓던 사람이다.

"뭘 그렇게 불안한 눈초리로 봐. 싸움 끝났어."

"아까 왜 웃은 거지?"

피식.

그녀가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음식 있어?"

"뭐?"

"나는 육회랑 광어회가 좋아. 보면 절로 웃음이 날 정도로. 그거랑 비슷한 거야."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게?"

"이해할 수 없어도 납득해야 하는 게 있는 법이야."

그녀는 소녀를 안은 채 포털을 향해 걸어갔다.

"아."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우리 밖에서 마주치면 꽤 재밌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불길한 여자였다.

하지만 이 던전의 사람들 중 규격 외 수준의 전투력을 보여 줬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둘 셋씩 조를 짜 몬스터를 공략할 때 저 여자는 단신으로 몬스터를 썰고 다녔으니까.

"이름이 뭐야?"

그녀가 이름을 물었다.

"도형석."

마지못해, 답을 했다.

"나는 서세희. 기억해 두라고."

츠즈즈즈-.

그녀는 포털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던전에 남은 것은 형석뿐이었다.

"나도 나가 볼까."

형석은 소녀의 아버지를 들쳐 메고 포털로 다가갔다.

포털은 천사 석상 옆에 만들어져 있었다.

포털에 발을 들이기 직전.

순간, 왜 그랬는지는 모르나, 위스키 노인의 조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주위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자신이 내린 판단만 믿게."

형석은 천천히, 이 사태의 처음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튜토리얼이 시작됐을 때, 천사 석상이 뭐라고 말했던가.

"...100마리의 몬스터를 모두 사살하면 보상이 지급됩니다...."

튜토리얼 시작 직전, 천사가 했던 말.

100마리의 몬스터.

그리고 보상.

보상이란 게 고작 출구용 포털이란 말인가?

이상했다.

심지어 천사 석상은 이 포털을 보상이라 언급하지도 않았다.

형석은 포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즐비한 좀비와 기사의 사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태창."

팅.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상태창을 통과해 몬스터들의 사체들을 바라보자,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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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0 좀비: 50구]

[Lv.0 감염체: 7구]

[Lv.1 녹슨 판금 기사: 42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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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합 99구.

100마리의 몬스터를 잡으면 보상이 지급된다고 했다.

하지만 죽은 몬스터의 수는 99마리.

"어이."

형석은 천사 석상을 향해 말했다.

"100번째 몬스터는 어디 있지?"

팟.

포털이 사라졌다.

끼기긱, 끼긱, 끼기기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천사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였냐? 마지막 한 마리가?"

스릉-.

천사 석상이 가느다란 검을 뽑았다.

"망할."

쉬익!

석상의 칼이 찔러 들어왔다.

"크윽!"

형석은 간발의 차로 피한 뒤 그대로 나뒹굴었다.

업고 있던 소녀 아버지의 시신도 등에서 떨어졌다.

형석은 상태창을 통해 천사 석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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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5 이단의 천사상]

HP: 5/5

MP: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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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석상이 몬스터였군. 아니 잠깐, 레벨 5?!"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죽일 수 있던 기사 몬스터의 레벨이 1이었다.

그런데 레벨 5을 단신으로 잡아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천사 석상이 먼저 공격하는 몬스터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면 다리 부분이 석상의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어 위치를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저 천사 석상을 무찌르기 위해선 선공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형석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방패와 칼을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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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녹슨 원형 방패'를 획득하였습니다.

[알림] '녹슨 환도'를 획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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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석상이 장비한 무기는 칼 한 자루.

형석이 장비한 건 방패 하나에 칼 한 자루.

'저놈과 달리 나는 공격과 방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형석은 방패를 앞세운 자세를 취했다.

공략은 간단했다.

석상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칼로 공격하는 것.

타박.

타박.

타박.

탁!

뛰었다.

막고, 찌른다.

어려운 게 아니다.

막고....

캉!!

석상의 찌르기가 방패에 꽂혔다.

무시무시한 충격이 방패 너머로 전해져 왔다.

콰가가각!

형석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방금 그 찌르기 한 번에, 족히 열댓 발자국이 넘는 거리를 튕겨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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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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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저 찌르기 한 방에 형석의 HP 4분의 1이 깎였다.

기사 몬스터와 싸울 때도 깎이지 않았던 HP가.

'방패로 막았는데도 데미지가 들어왔어.'

마치 트럭에 치인 것 같은 충격.

온몸의 뼈마디가 울렸다.

석상은 자신의 가느다란 검을 다시 거둬들였다.

'어떻게 저 가느다란 칼에서 이 정도 파괴력이 나오지?'

한 방에 깎인 HP가 25.

남은 HP는 75.

저 석상의 공격을 전부 방패로 막아낸다 해도 3방만 더 맞으면 죽는다.

'그래, 이 방법뿐이다.'

형석은 방패를 다시 고쳐 쥐었다.

이번 목표는 막아내는 게 아니었다.

막아내 봤자 튕겨 나올 것이고, 그럼 공격은 넣을 수도 없다.

이번엔, 흘린다.

방패의 둥근 표면을 이용해 찌르기를 흘려 버리고, 그 틈에 칼을 꽂아 넣는다.

"후읍...."

탁!

뛰었다.

흘린다.

흘려낸다.

흘려보낸다.

석상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여지없이 찌르기가 날아왔다.

정확히, 방패의 이음새로 말이다.

콰직!

방패가 박살났다.

방패의 이음새에 딱 맞게 꽂힌 칼끝은 흘러나가지 않았고, 데미지는 고스란히 형석의 몸에 꽂혔다.

콰가각각!

또다시 실패.

형석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깨진 방패 파편이 그의 주위에 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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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51/100

---------------

방패가 깨지면서 데미지를 약간 줄여 주긴 했지만, 그뿐.

단 한 번의 공격도 넣질 못했다.

하지만 도망가긴 늦었다.

이미 포털은 닫혔으니까.

아까와 같은 상황이다.

뒤는 없다.

그저 내달리는 것이 유일한 답인 것일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에이, X발."

떨그럭-.

형석은 쥐고 있던 방패의 손잡이마저 버렸다.

형석은 오른손에 환도 한 자루만 쥔 채 석상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도 찌르기가 날아오겠지.'

거기에 모든 걸 건다.

안 되면 뭐, 음.

"죽지 뭐 X발."

타악!

형석이 다시 덤벼들었다.

쉭!

또다시 날아든, 날카롭고 폭발적인 속도의 찌르기.

푸확!

정확했다.

석상의 가느다란 칼이 형석의 배를 꿰뚫었다.

복막은 관통되고, 내장은 찢겼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직접 겪어 본 이 고통은, 상상 가능한 고통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의 결정적인 차이점.

이번엔 튕겨나가지 않았다.

턱!

형석이 석상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내 차례다."

콰직!

형석의 칼이 석상의 배를 꿰뚫었다.

이 석상 몬스터의 HP는 5.

형석보다 레벨도 공격력도 한참 높았지만, 단 한 번만 공격당해도 파괴당한다는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

[Lv.5 이단의 천사상]

HP: 0/5

MP: 25/100

---------------

쿠르르륵-.

형석이 칼을 뽑자, 흙더미가 무너지듯 석상은 허물어져 먼지가 되었다.

몬스터가 파괴되었다.

"허억... 헉... 사...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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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5

지능: 5

민첩: 5

HP: 1/100

M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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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씨, HP가 딱 1 남았다니...."

눈앞이 점차 흐려졌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아버지랑 동생이랑 언수도 나처럼 던전에 빨려들어 갔을까?

무사할까?

무사해야 하는데....

"도형석 님."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퀘스트 '신성 모독'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아, 그래.

보상이 있었지.

대체 뭔데.

당장 내놔.

금괴? 집문서? 보석? 요트?

"스킬 '이단자의 마안(魔眼)'을 획득하셨습니다."

...뭐라고?

"스킬의 상세 내용은 상태창을 확인하십시오."

아니 아니, 목숨 내놓고 싸운 보상이 뭔지도 모를 스킬 하나라고?

장난하냐?

야?

사장 나오라 그래.

야!

"튜토리얼, 종료합니다."

팟.

사방이 어두워졌다.

형석은 정신을 잃었다.

6화 헌터의 시대 (1)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다.

진짜 미친 듯이 익숙한 천장이다.

"...집이네?"

쓰러진 곳은 던전인데, 눈뜬 곳은 집 거실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좀 전에 석상에게 꿰뚫렸던 배를 만져 보았다.

배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이게 다 꿈...."

철그럭.

금속성 물체가 손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칼이었다.

녹슨 양손 검이 마룻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창들.

그리고 방패들.

튜토리얼 던전에서 사람들이 흘리고 간 병장기들이 거실 여기저기에 싸그리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야.

대형 폐기물 스티커 어디서 받더라.

"나쁜 일은 꼭 꿈이 아니지. 그치. 빌어먹을."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폰이 울렸다.

잽싸게 낚아채듯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형! 혀어어엉!"

귀청 날아가는 줄 알았다.

동생, 도형규였다.

"무사 했구나 형!"

무사 했구나, 라니.

그 말은 이 사태를 겪은 게 형석만이 아니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귀 떨어지겠다. 너야말로 던전에서 다치진 않았냐."

"좀 다치긴 했는데 괜찮아. 형은?"

"죽기 직전까지 가긴 했는데 이제 살 만해. 잠깐, 아버지는?!"

"다행이다, 진짜... 아버진 괜찮아. 무사하셔. 나 아빠 보러 병실 찾아갔다가 같이 던전에 빨려들어 갔었거든."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병원에 계속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 아버지 모시고 집으로 갈 거야. 형은?"

"나? 난 집이긴 한데, 그런데 병원이 무슨 상황인데?"

"지금 여기 시체 투성이야. 던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던전 닫히면서 전부 튀어나왔나봐. 지금 길거리 여기저기에 시체들 널려 있어. 일단 최대한 빨리 돌아갈게. 끊어."

딸깍.

형규가 전화를 끊자, 형석은 곧바로 다른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살아 있다."

단 일 초도 걸리지 않은 착신.

전화 받은 이는 형석의 유일한 친구, 유언수였다.

어쨌거나 살아 있다니 안심은 되었다.

"그렇지. 언수 네놈을 걱정하느니 미국 대통령 안부를 걱정하지."

"죽었대."

"뭐?"

"농담이야. 그런데 이게 세계적인 사태면 죽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않아?"

"이 미친놈이 진짜...."

형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이라니.

제정신이 아닌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너도 던전에 빨려 들어갔었냐?"

"내가 있던 곳은 제48006839호 던전이었지. 넌?"

"누가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해, 미친놈아."

"자신의 지적 능력 부족을 함부로 일반화하는 건 건강하지 않은 태도야, 형석아."

"좀 닥쳐 봐. 아무튼 그걸 아는 거 보니 너네도 안내 멘트 치던 석상 같은 게 있었나 보네."

"석상? 무슨 소리냐?"

엥.

"그러니까, 몬스터를 죽이라든가 상태창 확인하라든가 그런 말 없었어?"

"있었지. 그런데 그냥 들리던데? 스피커 켜 놓은 것처럼."

"너네도 동굴 아니었냐?"

"동굴이었지. 타일 깔린 동굴. 여기저기 횃불 켜져 있고."

던전 모양은 똑같다.

그런데 석상만 없다?

"뭐 세부적인 인테리어가 조금 달랐나 보지. 암튼 살아 있으니 됐다. 나중에 연락할게."

"어, 그, 그래. 나중에 연락하고 언수야."

딸깍.

석상이 없었다고?

형석이 클리어한 퀘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00마리의 몬스터를 죽일 것.'

이를 클리어할 수 있었던 요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죽은 몬스터의 수를 정확히 파악할 것.

둘째, 100번째 몬스터인 천사 석상을 파괴할 것.

언수 성격상 몬스터의 수를 파악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대부분 듣고 넘겼을 던전 번호까지 굳이 기억하는 미친놈이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천사 석상이 내가 있던 던전에만 있던 거라면?'

'그래서 그 퀘스트를 해결한 사람도 내가 유일하다면?'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희소성이 곧 가치였으니까.

'만약, 이 정체 모를 스킬을 가진 게 전 세계에서 나뿐이라면, 어쩌면, 어쩌면....'

허구한 날 물이 새는 아파트.

감당키 힘든 아버지 병원비.

고등학생 동생 놈 학원비.

이 모든 걸 단 한 번에 바꿔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지긋지긋한 흙수저 인생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석은 나지막하게, 아까부터 가장 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뱉었다.

"...상태창."

팅.

반투명한 푸른빛 사각형이 눈앞에 떠올랐다.

형석은 '스킬' 탭을 눌러 보상으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

[액티브] 이단자의 마안

타인의 스킬을 베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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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이단자의 마안'

기능, 스킬 카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아니 일단 베낄 스킬이 있어야지."

털썩.

형석은 다시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튜토리얼이란 명목으로 던전 안에 빨려 들어갔었다.

이 사태는 전 세계적인 사건일까, 한국만의 사건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눈앞에는 여전히 상태창이 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현실에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

상태창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앞으로의 세계는, 어제까지의 세계와 완전히 다를 것이란 것.

"일단 이것들이나 치우자."

집안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던 병장기들을 그러모아 베란다 구석에 처박았다.

다 합쳐서 42개였다.

이 쓸모없는 것들 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지만 기회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 * *

일주일 뒤.

형석은 방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투약을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TV를 켰다.

나오는 채널은 국가 주관 재난 방송 채널 하나뿐이었다.

방송 설비가 망가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람이 대거 죽은 게 문제였다.

현재 '튜토리얼 사태'로 사망한 국내 사망자는 대략 1000만 명.

그리고 추정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15억 명 가까이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설비나 시설이 남아 있다고 해도 인력이 없으니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서 정부는 예거 코퍼레이션과 특수 협력 관계를 체결하고...."

"예거 코퍼레이션이라. 요새 자주 보이네, 저 회사."

예거 코퍼레이션.

줄여서 예거 코프.

튜토리얼 사태 이후 급부상한 다국적 기업이다.

던전과 몬스터에 대한 막대한 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각국과 연구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데....

형석도 그 이상은 잘 몰랐다.

애초에 튜토리얼 사태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긴 튜토리얼 사태 이전부터 던전과 몬스터에 대한 연구를 해 올 수 있던 걸까.

솔직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닌....

"...오늘부터 예거 코퍼레이션 측은 던전 내에서 가지고 나온 병장기들을 일괄 매입할 예정입니다."

"뭐라고?"

볼륨을 높였다.

"...예거 코퍼레이션 측은 도검류, 창류, 방패 등 품목을 가리지 않고 개당 100만 원을 지급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매입은 각 구청 및 시청에서 이뤄질 예정이며...."

개당 100만 원.

개당?

형석은 베란다를 보았다.

한쪽에 얌전히 뒤죽박죽 쌓여 있는 병장기들이 보였다.

총 42개.

매입가 도합 4200만 원.

세상에.

"그래 이런 게 보상이지."

형석은 폰을 켰다.

* * *

구청 앞.

"줄이 기네."

사람들의 줄이 구청 입구를 넘어 앞뜰까지 뻗어 있었다.

전부 무기를 팔러 온 사람들이었다.

형석은 녹슨 방패를 든 채 그 줄에 섞여 있었다.

"누가 보면 농민 봉기라도 일어난 줄 알겠네."

그도 그럴 게, 모두 손에 칼이든 창이든 한 자루씩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십 분쯤 기다렸을까, 형석은 드디어 구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책임자 나오라 그래!"

형석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선 비쩍 마른 남자가 마체테, 소위 정글칼이라 불리는 칼 한 자루를 들고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왜 내 무기는 안 사는 거냐고!"

"손님 무기는 던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희가 매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가 칼을 들고 있음에도, 직원들은 의외로 침착하게 응대를 하고 있었다.

'적당한 칼 아무거나 들고 와서 100만 원 내놓으라고 진상 부리는 거군.'

실제로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그의 마체테는 너무 깨끗했다.

마치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처럼.

던전에서 드랍된 병장기들은 녹이 슬어 있거나 이가 빠진 게 태반이라 외양으로 바로 구별이 됐다.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던전에서 나온 병장기들은 마력향이라는 특수한 파장을 띠고 있다고요. 그래서 저희가 일일이 병장기들을 스캔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력향? 스캔? 니들이 뭔데 그런 걸 판단해? 니들이 뭔데 사람을, 어? 거짓말쟁이로 만드느냐고 어!"

"저기요...."

"그리고 저 스캔 기계는, 어, 그, 어, 인증은 받은 거야? 난 못 믿겠어. 책임자 나오라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은 또 뭐야!"

"책임잡니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상복마냥 새카맣게 차려입은 정장이 인상적인 남자가 서 있었다.

"책임자라고?"

"책임자 나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거 코퍼레이션 서울 지부 비서실장 진재호입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 당신이구만. 이봐, 당신 부하직원들이 날 어떻게 무시했는지 알아?"

"무기 스캔 통과 못 하신 거죠?"

"스캔? 말 잘했네. 저 기계, 인증은 받은 거야?"

"대한민국 정부에서 정식으로 인증받고 예거 코퍼레이션에서 공급 중인 설비입니다. 인증서라도 보여 드릴까요?"

"너... 너 이 새끼...."

할 말이 없으니 욕부터 박다니.

실로 모범적인 진상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나온 무기의 특징은 마력향 말고도 또 있죠."

이것 좀 빌리지, 하고 진재호는 스캔을 통과한 던전산 칼 한 자루를 들었다.

"던전에서 나온 무기는 특수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강도, 내열성, 내식성 모두 현존하는 어떤 금속도 따라갈 수 없죠. 티타늄 합금이 그나마 조금 쫓아올 수나 있을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캉-.

진재호가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이 진상 사내의 마체테를 후리고 지나갔다.

마체테는 어이없을 정도로 힘없이 반 토막이 나 버렸다.

반면 재호가 든 칼은 이 빠진 데 없이 멀쩡했다.

"보이나?"

"지금 뭐 하는...!"

"칼은 당신만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란 거다."

그의 목소리에는 모래와 같은 삭막함이 배어 있었다.

땡그렁.

진상 사내는 쥐고 있던 칼자루마저 떨어트렸다.

"시... 신고할 거야! 어딜 시민한테 칼을...."

진상 사내는 엉거주춤하게 뒷걸음을 치다, 잽싸게 돌아서서 입구를 향해 달음박질 쳤다.

툭.

"비켜 인마!"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친 진상 사내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야."

그런데 부딪친 상대가 영 안 좋았다.

"그래 너, 쭉정이. 사람 치고 어딜 가?"

하필 도형석이었다.

"뭐?"

"저 칼로 좀비 몇 마리나 베었지?"

"뭐? 좀비? 하, 진짜."

진상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십 마리는 벴지. 나랑 같이 던전 있던 놈들은 고마워해야 해. 다 내 덕에 살아나가지곤...."

"거짓말."

형석의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렸다.

"좀비랑 싸울 때는 맨손으로 싸워야 했어. 좀비를 다 죽이고 나서야 무기가 드랍됐지. 대체 뭘로 좀비를 벴다는 거야?"

진상 사내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스쳤다.

"무... 무기는... 난 내가 들고 간 이 칼로 잡았다고!"

"그럼 당신이 여기 들고 온 마체테는 던전에서 드랍된 게 아니란 거네?"

풋.

키득키득.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내는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난, 난, 던전 한쪽에 숨겨져 있던 무기를 찾아내서...."

"거기선 이렇게 반박했어야지. '좀비한테서 드랍된 이 마체테로, 좀비화된 사람들을 벤 거다.'라고."

"맞아! 바로 그거야! 내 칼도...."

"아, 구라 좀 그만 쳐. 난 당신이 던전에서 싸웠든 안 싸웠든 그게 관심사가 아니야."

형석은 한 차례 숨을 골랐다.

"여기서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태반은 몬스터에 맞섰던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 앞에서, 싸우지도 않은 놈이 마치 싸운 것처럼 꾸며 말하는 게 얼마나 역겨운 줄 알아!"

"아니... 아니야!"

"좀비 두개골이 부서질 때 어떤 느낌인지 알아? 기사 놈들 갑옷 사이를 찌를 때 칼끝의 물컹한 느낌은? 모르겠지. 알고 싶지도 않겠지! 당신 같은 사기꾼들은!"

"히익!"

"겁쟁이는 그냥 귀찮지. 그런데 네놈 같은 사기꾼은 역겨워. 토할 것 같다고!"

"흐으아악!"

쾅!

사내는 구청 문을 열고 그대로 도망을 쳤다.

'...흥분했네. 젠장.'

형석은 다시 줄 앞쪽으로 몸을 돌렸다.

줄 서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형석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형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목례로 답했다.

"저희가 할 말을 대신 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진재호였다.

"아뇨 뭘요, 너무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던전에서 싸웠던 쪽이었거든요."

"아, 고생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이 다 그렇죠. 그런데 방패를 팔러 오신 건가요?"

"아, 네."

형석은 들고 온 방패를 흔들어 보였다.

"지금 방패, 칼, 창을 각기 다른 데스크에서 매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줄에 방패 드신 분이 고객님뿐이군요. 오시죠. 방패 매입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우, 고맙습니다."

그냥 아무거나 집으려다가 방패를 든 게 이런 행운일 줄이야.

스캐너는 조금 큼직한 금속 탐지봉처럼 생겼다.

형석의 방패는 가볍게 스캔의 시험을 통과했다.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자 형석의 곧 통장에 100만 원이 꽂혔다.

100만 원.

마음과 통장이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저기, 한 가지 더 문의 좀 드려도 될까요?"

"무엇이죠?"

진재호가 답했다.

"집에 무기들이 몇 개 더 있는데 그것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과 동일하게 구청으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앞으로 일주일은 예거에서 더 매입할 겁니다."

"그게, 좀 많아서...."

"네? 던전에서 몇 개나 들고 나오셨길래...."

"41개...."

"41개."

재호의 표정이 벙쪘다.

형석은 침착하게 폰 갤러리를 열어 찍어 둔 인증샷을 보여 줬다.

사진 속엔 41개의 병장기들이 오와 열을 맞춰 마룻바닥에 도열해 있었다.

7화 헌터의 시대 (2)

다음 날.

예거 코프의 승합차들이 줄줄이 형석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진재호와 부하직원들이 형석의 집으로 들어왔다.

"전부 던전에서 나온 무기들이 맞습니다."

형석의 무기 41개를 모두 스캔한 결과였다.

재호는 당혹감과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고, 형석은 기어 올라오는 입꼬리를 감추느라 힘들었다.

형석은 생각했다.

정말 몇 번이고 생각했다.

'4100만 원.'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지만 전에 없던 변화를 초래하기엔 넘치게 충분한 돈이었다.

"저기, 형석 씨?"

"네?"

"이 무기들을 어떻게 다 가지고 나오셨죠?"

그러게 말입니다.

"글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진짜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제가 던전의 숨겨진 퀘스트를 클리어했거든요? 그래서 특수한 스킬을 획득했더니 알 수 없는 부가 효과로 저렇게 무기들과 함께 전송됐어요!

라고 고대로 읊을 정도로 형석은 멍청하진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가.

형석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 진재호라는 사람은 누굴까.

비서실장이라는 걸 보면 예거 코프 내에서도 직책이 낮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저런 사람이 지금 저 무기 더미를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 사람들도 이런 건 처음 보는 거다.'

만약 형석 말고 또 다른 퀘스트 완수자 케이스가 있었다면?

그 사람들도 형석처럼 다량의 무기와 함께 던전에서 방출됐을 것이다.

그러면 저 다국적 기업인 예거 코프 측에서 모를 리가 없다.

그 기이한 퀘스트와 마주한 사람이 자신뿐이란 확신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답은 간단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시겠다고요?"

"네. 그냥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까 주변에 무기들이...."

거짓말은 안 했다.

단지 한 가지 사실을 숨겼을 뿐.

단순히 희소한 재능이라면, 그것은 드러내도 된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재능이라면, 그것은 함부로 드러내선 안 된다.

특별한 소수에 대한 대다수의 반응은 두 가지다.

시기, 혹은 경외.

힘이 없다면 시기를 받고 힘이 있다면 경외를 받는다.

어설픈 초능력자는 끌려가서 해부당하지만 초사이어인 손오공은 아무도 못 건드리는, 그런 원리다.

그러니 충분히 힘을 축적하기 전까진 스킬 '이단자의 마안'을 숨겨야 했다.

"흐음...."

진재호 실장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실장님, 그럼 제가 저걸 다 주워 들고 나왔겠습니까. 3대 400도 못 치는 몸뚱어리인데...."

"아뇨 아뇨, 형석 씨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워낙 전례가 없는 일이다 보니...."

"던전 열리고 상태창 뜨는 것도 별로 전례가 없죠."

"그건 그렇죠. 어쨌든 윗선에선 매입 허가 내려왔으니 이 무기들은 예거 코프에서 전량 매입하겠습니다."

"아유, 감사합니다."

"요전 계좌로 매입 비용 송금해 드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석은 은행 앱을 켰다.

세상에, 이게 대체 몇 자리 수야.

근데 잠깐, 왜 입금액이 4100만 원이 아니라 4095만원이지.

"저기, 5만 원 덜 보내신 거 같은데요."

"아, 출장비가 5만 원이라...."

"출장비."

출장비라면 어쩔 수 없었다.

곧 직원들이 무기들을 들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저게 다 뭐야?"

"저거 하나에 100만 원씩 하는 거 아니여?"

"뭔데 저렇게 많이 갖고 있대?"

그 광경을 본 아파트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102동 401호 청년네 집에서 다량의 무기가 매매됐다는 소문이 단지 내에 좍 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거 코프의 차들이 단지를 빠져나갔다.

형석은 몇 번이고 은행 앱을 새로고침해 보았다.

직접 구청 가서 판 방패 값까지 합쳐서 4195만 원.

평생 만져 본 적 없는 숫자가 통장에 찍혀 있었다.

어떡하면 좋지.

어디에 써야 하지.

일단 월세랑 아버지 약값이랑 동생 학원비 떼 놓는 게 먼저였다.

그래도 한참 남는다.

차를 사거나 시계를 산다?

그런 사치는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다.

이 돈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가장 올바른 곳에 쓰여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올바른 소비처.

"치킨."

답은 치킨이었다.

늘 보면서 군침만 삼켰던 그 메뉴.

블랙페퍼 갈릭 명란 까르보나라 트러플 앱솔루트 치킨.

오늘이 그날이었다.

형석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 * *

진재호의 차안.

띵, 띠딩, 띵, 띵-.

"네, 지부장님. 진재호입니다."

전화를 걸어온 건 예거 코프 서울 지부장이었다.

"네, 방금 매입 끝냈습니다. 아 5만 원은 출장비요. 네, 네. 수상한 점이요?"

재호는 잠깐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던전 무기를 42개나 갖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수상하죠. 그리고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보였습니다. 당분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깐 동안 지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네, 지부장님, 춘천이요? 네. 알겠습니다. 네. 끊겠습니다."

딸깍.

"다른 차들은 본사로 보내고, 우리는 춘천으로 간다."

"넵 알겠습니다. 그런데 춘천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드디어 던전 게이트가 열렸다."

"게이트...!"

"대한민국 최초의 게이트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해."

"그럼 휴게소에는 못 들리겠네요."

부하직원의 말에 재호는 잠깐 망설였다.

"...우동 정도는 괜찮겠지."

"전 김치 우동이 좋습니다."

"난 튀김 우동. 밟자!"

차는 춘천을 향해 가속했다.

* * *

길은 한산했다.

다니는 차의 수도 줄고,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치킨, 치킨."

형석은 콧노래가 나왔다.

4195만 원.

이 돈을 어떻게 쓸까.

돈, 돈, 돈.

없이 살았던 삶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코너를 돌면 치킨집이 나온다.

맛있긴 한데 비싸서 매일 지나치던 집.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다.

"영업 안 하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의점, 고깃집 등 주변 가게들은 영업 중이었다.

"평일인데... 닭 수급이 안 되나?"

형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게 문으로 다가갔다.

파삭.

"응?"

무언가 발에 밟혔다.

꽃 한 송이가 발밑에 깔려 있었다.

"뭐지?"

형석은 발을 들었다.

그곳엔 처참하게 밟힌 하얀 국화꽃이 있었다.

문 닫은 치킨집.

그 문 앞에 놓인 하얀 국화꽃.

형석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형석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왔다.

그제야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마다 매인 노란 리본들.

추모 의미를 담은 현수막.

공원 한켠에 마련된 간이 제단.

형석은 인도 변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냐.

그 4000만 원 돈 때문에?

100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죽은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물론 이 재해에 형석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들의 죽음이 형석 탓도 아니었다.

오히려 형석은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형석이 죄책감에 휩싸여 주저앉은 이유는 하나였다.

-미안하면 아저씨... 나랑 내 아빠... 수습 좀 해 줘요....

형석이 죽인 남자의 딸, 그녀의 유언.

그 앞에서 형석은 이렇게 답했었다.

'꼭 그렇게 할 게요'라고.

뭐가 꼭 그렇게 한다는 거냐.

뜬금없는 행운에 정신 팔려서, 내가 직접 한 말까지 까먹고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말이다.

소녀의 아버지를 베던 순간의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쏟아지던 내장이 철퍽이던 소리도 생생했다.

좀비가 되어서 죽였다.

동시에 자식 앞에서 부모를 죽였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은 용서 받을 만한 짓이 아니었다.

4195만 원.

이 돈이 가장 먼저 쓰여야 할 곳은 너무나 명확했다.

세 군데의 구립 시신 공시소에 전화를 돌린 끝에 소녀와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연민아.

아버지의 이름은 연준형.

공시소에서 말한 시간에 찾아가니 화장이 완료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소녀와 아무 연고도 없는 형석이 유골을 수령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수의 시신을 관리하는 데 지친 공무원의 피로 덕에 유골을 받아올 수 있었다.

형석은 납골당에 전화를 걸었다.

"2000만 원이요? 가장 싼 봉안단 분양가가 2000만 원이라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가장 싼 봉안단 가격은 200-300만 원 정도인 게 정상이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가격이 열 배 가까이 뛰어버린 것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 사이에 1000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납골당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것이고, 가격도 그에 맞춰 뛰는 게 당연했다.

이해는 됐다. 이해는.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겐 이득이 되는 상황에서 깊은 회의감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이런 곳이었지.

"거기로 예약하겠습니다. 내일 직접 찾아갈게요."

예약을 잡고, 예약금을 송금했다.

머리 위에는 파란 하늘이 가득했다.

굴 속에서 죽어 간 사람들이 끝내 보지 못했던 하늘이.

* * *

춘천, 한 공사 현장.

현장 입구에는 공사 인부들 대신 경호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진재호가 신분증을 제시하자 그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저 왔습니다, 지부장님."

"오느라 수고했네."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그를 맞이했다.

눈가의 주름에는 어떤 완고함과 서늘함이, 목소리에는 근엄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예거 코퍼레이션 서울 지부장 최명하였다.

"대통령도 와 계신 겁니까?"

먼발치에 참모진들과 논의 중인 대통령이 보였다.

"국가적인 사태니까. 지금은 바쁘실 테니 일단 자네는 무장이나 갖추고 오게."

"게이트는 어디 있습니까?"

"이런, 그게 먼저였군. 따라오게."

둘은 공사장 더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짓다 만 철골 구조물 사이에 타원형의 게이트가 빛을 뿜고 있었다.

"고등학생 놈들이 담배 피우러 숨어 들어왔다가 발견하고 신고했다네."

"그런 놈들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군요."

"어떤가? 게이트를 직접 본 감상이."

재호는 스파크를 튀기며 명멸하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예거 코퍼레이션은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에 대해 경고를 해 왔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지. 하지만 이 게이트를 보게. 우리가 옳았어. 진 실장?"

"예, 지부장님."

"액티브 스킬은 확실히 발현된 게 맞지?"

"예. 어제도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좋아. 스킬을 가졌다는 건, 자네가 이제부터 헌터라는 의미일세. 던전 안의 몬스터들에겐 어떤 현대 병기도 통하지 않지.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건 던전에서 발굴된 무기, 그리헌터의 스킬뿐.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저 던전은 마력 측정 결과 E등급에 불과한 최하급 던전일세. 하지만 방심은 하지 말자고. 던전 안에선 뭐가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이 던전은 시작에 불과해. 곧 전 세계 곳곳에 게이트가 열리겠지. 이것을 기점으로 인류의 역사가 어디로 흐를지 솔직히 나로서도 감이 안 잡히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

"무엇을 말입니까?"

"1900년대 초중반이 전쟁의 시대였고, 80년대가 냉전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헌터의 시대가 도래할 게야."

진재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등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 이제 던전 들어갈 준비나 하게. 더 이상 내버려 뒀다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게야."

"알겠습니다!"

"무운을 빌겠네."

8화 첫 번째 카피 - 열왕 토벌전 (1)

첫 게이트가 열리고 2년 뒤.

강남역 사거리 한복판에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그냥 게이트도 아니고, 상당히 높은 등급인 B1급 던전의 게이트였다.

게이트 주변에는 기자와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간 S급 헌터 한 명 얼굴 한 번 보려고 말이다.

"저희는 지금 강남역의 B1급 게이트 앞에 나와 있습니다. 플레임파이터즈 길드의 마스터인 박석주 씨가 오랜만에 직접 레이드에 나섰는데요. 게이트에 진입한 지 현재 1시간... 말씀드린 순간! 박석주 마스터를 비롯한 길드원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헌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헌터, 게이트 너머의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한 자들.

직업의 특수성과 희소성 덕분에 조금만 업계에 이름이 알려져도 수억 원은 우습게 버는 상위권 직종이기도 했다.

이번 레이드의 참여 헌터는 9명.

그들은 현재 대한민국 최상위 길드인 '플레임파이터즈' 소속의 정예 멤버들이었다.

그리고 이번 레이드의 주역이자, 플레임파이터즈 길드의 마스터인 박석주가 가장 마지막으로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들어가서 가장 늦게 나온다.

소방관이었던 시절의 그의 버릇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몰려든 기자들과 인파를 본 순간, 박석주의 표정이 싹 굳었다.

"당신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박석주 씨! 이번 레이드는 어떠셨습니까?"

"아니 당신들 다 미쳤습니까? 언제부터 게이트 주변에 일반인 접근이 허용됐어요?"

"이번 보스몹은 어떤 유형의...."

"이봐 당신들, 만에 하나 우리 파티가 레이드에서 전멸당해서 던전 브레이크 터졌으면 당신들 전부 몰살이야!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자 자, 박석주 씨 잠깐 가라앉히시고...."

"기자란 인간들이 기본적인 안전 수칙도 몰라? 이러니까 툭하면 기레기 소리나 듣...."

갑자기 앵커룸으로 화면이 전환됐다.

"자! 지금까지 생방송으로 B1급 게이트 주변 상황 전해 드렸습니다. 이어서 마광석 전문가를 모시고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 러시아 쪽에서 새로운 유형의 마광석이 발굴됐다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