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0화
데뷔 (2)
변하늘은 작은 언론사의 기자다.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다.
'···영등포에 나타난 빌런을 F급 헌터가 막았다고?'
변하늘은 금세 조사에 착수했다.
찾아보니 해당 헌터에 대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한산에서 발생한 던전 폭주.
그것을 홀로 처리하고 헌터 시험에선 뛰어난 실력으로 수석합격.
심지어.
'빌런 대응부서의 용병으로 들어가기까지···.'
심상치 않은 행적이었다.
F급이라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아직 자세한 시험내용이 공개되지 않았고, 협회에 소속된 덕분에 길드에선 직접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듯 하지만···.
들리는 소식을 살펴보면 이전석을 탐내는 길드나 사무소가 꽤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해당 헌터가 지닌 유명도에 비해 인터뷰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이 궁금해 선배에게 물었더니.
"이전석? 아, 그 헌터."
선배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갤 저었다.
"협회측에서 인터뷰도 못하게 막고 있더라."
표정을 보니 분함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협회까지 찾아갔다가 쫓겨난 모양.
물론.
'아직 아무도 인터뷰를 못 땄다는 거지?'
변하늘은 도리어 협회가 막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아직 누구도 이전석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 자신이 인터뷰를 딴다면?
'특종!'
선배한테는 칭찬을 들을 테고, 상부에서는 진급을 고려해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무언가 포상이 있겠지.
'일단 나가자.'
그 후.
변하늘은 발 빠르게 돌아다녔다.
북한산과 영등포에도 가보고.
협회에 갔다가 선배나 다른 기자들처럼 쫓겨나기도 했다.
그래도 변하늘은 포기하지 않았다.
열정, 노력, 끈기.
오직 그것만으로 언론사에 들어와 기자가 된 그가 아니던가.
변하늘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협회를 찾았고, 북한산과 영등포를 돌아다니며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끄응······.'
공원 벤치에 털석 주저앉은 변하늘.
그가 손수건으로 땀방울을 닦아냈다.
이내 품에서 수첩을 꺼내 펼친다.
수첩에는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몇몇 목격자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전석에 대한 이야기.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눈이 조금······. 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생김새나 인상착의요? 음··· 생각보다 장신이었고 머리카락이 여자처럼 덥수룩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그 머리카락을 잘 받쳐준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의외로 훈남이었어요.
북한산에 발생한 던전 폭주.
그곳에서 살아나온 생존자들의 말이다.
반면 영등포에서 그를 봤던 이들의 증언은 조금 결이 달랐다.
━싸우는 모습이 아름다웠어요. 무슨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아, 이거 기사로 나가나요? 그럼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실어주실 수 있나요?
━영웅? 영웅 맞죠! 그분이 아니었다면 거기 있던 사람들 중 태반이 죽었을 건데요!
오직 칭찬 일색.
변하늘은 마지막으로 함께 헌터시험을 봤던 이들을 찾아갔었다.
━······저랑은 다른 종류의 사람 같았어요.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되나? 질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또 무서웠죠.
그 모든 의견을 총합해 수첩에 적은 변하늘은 이전석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초신성.'
세간에 흔히 드물게 나타나는 천재.
성격은 잘 모르겠지만···.
재능과 운.
두 가지가 모두 받쳐주는 헌터.
이런 경우, 대다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A급이나 S급으로 올라오곤 했다.
그때가 되면 인터뷰를 하기는 더 어려워질 터.
하지만···.
'정작 이전석 헌터 본인은 만날 수가 없단 말이지.'
사는 곳?
모른다.
어디를 주로 돌아다니는 지도 알 수 없다.
협회는 침묵만을 고수할 뿐.
목격자들도 어디까지나 잠깐 그를 본 것에 불과하지 연락망을 가지고 있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여태까지의 증언도 충분한 기삿거리였지만.
'그런 건 이미 많이 올라왔어.'
[F급의 활약! 목격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다.]
방금도 그런 제목의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변하늘이 알아낸 것과 비슷한 내용.
이런 건 절대 특종이 될 수 없다.
때문일까.
변하늘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맞은편 아이템샵에서 웬 남자 한 명이 나왔다.
변하늘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덥수룩한 머리.
소름끼치는 눈.
그 모든 걸 커버하는 듯한 외모.
'에이, 아니겠지.'
그는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여태까지의 고생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만 것.
"혹시 이전석 헌터님이실까요?"
변하늘이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맞으면 대박.
틀리면 사람을 잘못 봤다며 사과하면 될 뿐인 일.
곧, 남자가 입을 열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려던 차.
웬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그런데요?"
이전석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
남자- 변하늘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물음을 던져왔다.
"그, 그럼 혹시 잠깐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당연히 익명성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어딘가 매우 흥분한 듯한 모습.
언행을 보니 아무래도 기자인 듯했다.
김백동은 기자의 접근을 모두 막고 있다고 했지만, 이런 우연까지 걷어낼 순 없겠지.
인터뷰.
솔직히 말하면 관심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걸 해서 뭣한단 말인가.
이전석은 변하늘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변하늘이 말을 이었다.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으셨을 텐데 영등포 사건에서 선뜻 나설 수 있으셨던 이유가 뭔가요! 무섭지는 않으셨나요?!"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미는 변하늘.
어지간히도 흥분한 듯한 모습이다.
"음······."
이전석은 잠시 고민했다.
대답해줘야 할지말지.
대답해주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기자라는 직종은 원체 제 생각대로 기사를 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까.
하물며 익명성도 보장해준다고 하니···.
그래서 이전석은 짧게나마 대답해주고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헌터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끄적, 끄적-.
신나게 인터뷰의 내용을 수첩에 적어내리는 변하늘.
이후로도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이전석은 귀찮은 듯, 그러나 자신이 특정될 만한 말만은 피한 채 짤막히 대답했디.
그리고.
"감사합니다!"
5분이 지났을 무렵에야 기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이전석.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였으나.
'참, 그러고 보니 정장도 사야 되는데.'
문득 부모님에게 한 거짓말이 떠올랐다.
협회 사무직으로 취직했다고 했으니···.
흰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하면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다.
이전석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근처 옷가게로 향했고, 검정색 코트와 잘 어우러질 만한 회색 정장을 구입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때마침 한유리가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왔니?"
"네."
"손부터 씻고 식탁에 앉으렴."
그 말대로 이전석이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그릇과 수저가 두 쌍뿐이었다.
"아버지랑 지혜는요?"
"아빠는 회식, 지혜는 친구들이랑 먹는다고 하더라."
한유리가 반찬들을 줄지어 놓으며 말했다.
이전석은 그녀가 앉기까지 기다렸다.
"먼저 먹으렴."
"어머니랑 같이 먹을게요."
"얘도 참."
호호-.
한유리가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이전석도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좋았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전에는 가지지 못했고, 또 바랄 수도 없던 행복이.
그렇기에 더욱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결심.
지겹도록 해도 모자르다.
"잘 먹겠습니다."
한유리가 뒤늦게 자리에 앉자 이전석이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 ※ ※
"······."
이전석은 책상에 앉아 멍 때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촤락-.
창을 열어 잠시 공기를 환기시켰다.
하늘을 보니 벌써 여명이 다가왔다.
'6시인가.'
가만히 앉아 멍 때리며 명상이나 하다 보니 벌써 아침이 되었다.
잠을 전혀 자지 않았으나 그리 피곤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에겐 영원의 낙인이 있었으니까.
정신은 마모되지 않고 피곤해 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굳이 잠을 잘 필요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회귀 후 첫날.
침대에 누워 애써 잠을 청하려 했지만 결국 내리 밤을 새웠다.
그때 이전석은 영원의 낙인이 잠을 앗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딱히 암담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을 못자면 뭐 어떠랴.
불면증처럼 피곤한 것도 아니고.
다만 심심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이전석은 밤이 되면 방에 들어와 명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날이 밝아가는 이른 아침.
오늘은 조금 다른 걸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관심도 없어 켜지 않았던 고물 컴퓨터의 전원을 누른다.
우우웅-.
언뜻 비행기 엔진음과도 같은 소음이 울리며 컴퓨터가 켜졌다.
이전석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러자
'···F급의 작은 영웅?'
낯간지러운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북한산, 영등포.
두 재앙에서 시민들을 구한 영웅.
더불어 뛰어난 실력으로 헌터시험을 통과한 헌터.
이모씨라며 실명은 적혀 있지 않지만···.
틀림없었다.
이전석을 가리키는 기사였다.
[F급 헌터 이모씨는 영등포에 나타난 빌런에 대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설명했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헌터가 늘어나는 요즈음 시대.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조차 아끼지 않는 이런 헌터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어제 말했던 인터뷰가 그대로 실렸다.
댓글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
└와··· F급이면 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
└ㄹㅇ 그니까.
└요즘 헌터들은 죄다 돈이나 명예밖에 안 보잖음. 돈을 조금이라도 적게 주면 아예 던전 공략도 안 하려고 하는 놈들도 있다니까?
└헌룡인 수준ㅋㅋ
└헌룡인은 무슨. 그딴 놈들한테 헌터라는 단어조차 아쉽다. 이런 사람이 진짜 헌터고 영웅이지.
━
오직 칭찬 일색.
물론 악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악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
└F급 헌터가 대체 무슨 깡으로 나섰대? 현장에 감독관도 있더만 그냥 조용히 짜져 있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잖아. 헌터라면 당연히 시민들을 지켜줘야지.
└칭찬해줘도 모자랄 판에 이걸 훈수두고 있네 ㅉㅉ
└너도 그냥 평생 집구석에 짜져 살아라.
━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기사나 댓글에서도 언급된 사실.
요즘 헌터들.
그중 대다수가 돈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구할 수 있는 사람도 구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무시한다.
돈이 안 되고 명예가 따라오지 않으니까.
마치 귀족이라도 된 것 마냥 구는 행태.
그런 상황에 이타적인 마음으로 시민을 구하는 헌터의 등장은 사람들로선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의 경우가 생겼을 때.
자신을 구해주는 건 다름 아닌 그 헌터였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많군···.'
김백동의 말 때문에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자신과 관련된 기사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TV 뉴스를 탄 것도 적잖게 있었다.
그 모두가 하나같이 이전석을 이렇게 불렀다.
괴물로부터 시민을 지켜낸 영웅, 이라고.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이다.
영웅이라니.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슬슬 시간인가.'
그렇게 한참 컴퓨터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시간이 7시를을 넘어가 있었다.
이전석은 가볍게 몸을 씻은 뒤 적당히 아침끼니를 해결하곤 출근 준비를 했다.
어제 산 정장에 은신자의 코트를 걸친다.
그리고 목걸이와 반지를 꼈다.
협회는 헌터들의 기업인만큼 아이템에 의한 복장이나 악세사리는 크게 제지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후.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뒤늦게 일어난 부모님께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왔다.
※ ※ ※
뚜벅- 뚜벅-.
조용한 협회 건물을 홀로 걷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층으로 이동.
'24층이라고 했던가?'
그곳에 부서가 있다고 들었다.
이윽고.
띵-.
이전석은 24층에 내려 어느 문 앞에 다다랐다.
[빌런 대응부서.]
그런 표찰이 달린 곳.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
웬 남자와 얼굴이 마주쳤다.
기억에 있는 인상.
이전석은 그가 누군지 금방 떠올렸다.
'김백동 팀장과 같이 있던 사람이군.'
감독관은 보통 2인 1조로 활동한다.
그리고 그건 김백동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런 김백동의 파트너이자 부사수가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당연히 미래에서는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소식은 들어봤다.
어디까지나 소식만.
박일우, 25세.
A급 헌터 감독관.
김백동의 말에 의하면, 개벽연합을 기습할 때 사망했다고 한다.
곧 죽을 사람을 코앞에서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혹시 네가 이번에 들어온 신입?"
박일우가 악수 차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나는 A급 감독관 박일우라고 한다. 잘 부탁 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전석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
"박인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팀장님!"
뒤를 돌아보며 대답하는 박일우.
사무실 안쪽에 김백동이 앉아 있었다.
그가 박일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일단은 네 후배이긴 하지만, 정직원이 아닌 용병이다. 예의를 갖춰라."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신나서 그만······."
박일우가 뒤늦게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2개월 뒤 회사에서 나갈 용병.
후배라곤 해도 임시일 뿐.
언젠가는 남이 될 사이다.
그런 마당에 다짜고짜 말을 놓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저는 괜찮습니다."
이전석은 별 거 아니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본인은 괜찮다고 하니까···."
힐끗.
박일우가 김백동의 눈치를 봤다.
"쯧. 알아서 해라."
"옙!"
김백동이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익숙한 일인 듯한 눈치.
이전석은 박일우를 쳐다봤다.
꽤나 특이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인턴이라면 무조건 선배의 말에 따르기 마련인데, 박일우에게선 어딘가 통통 튀는 듯한 독특함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멀쩡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만큼 능력이 있기 때문이리라.
"헌터님, 혹시 사전에 보내드린 매뉴얼은 읽어 보셨는지?"
이내 김백동이 이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전석.
"예. 보내 주신 건 다 읽어봤습니다."
"그럼 기본적인 것들은 숙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라며 김백동이 말을 이었다.
"만약을 위해 설명 드리자면, 빌런 대응부서는 기본적으로 2인 1조로 팀을 이루어 활동합니다. 오전, 오후, 저녁, 새벽으로 시간대를 나누고 4개의 팀이 각각 6시간 씩 교대하며 업무를 보는 방식이죠."
"나랑 팀장님이 새벽팀이야. 최근에 바뀌었거든."
옆에서 박일우가 부가설명을 붙였다.
김백동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중 헌터님은 주로 오전근무를 맡게 되실 겁니다."
알고 있다.
문자로 매뉴얼을 받으며 들었으니까.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다행히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기에 근무가 끝나면 다른 중요한 일들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근무를 맡게 될 사수는······ 아, 마침 오는군요."
김백동의 시선이 부서 입구로 향했다.
이전석은 길을 비켜서듯 뒤를 돌아봤다.
부서 사무실 문.
그 앞.
눈에 익은 여인이 서있다.
눈처럼 하얀 백발에 아름다운 외모.
김백동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바노프 과장이 사수를 맡아주실 겁니다."
이 또한 사전에 미리 들은 이야기다.
그러나 정작 아냐는 사전에 듣지 못했는지 꽤 당혹스런 눈치였다.
"팀장님? 저는······."
"이바노프 과장."
문득.
김백동이 아냐의 말을 끊었다.
"언제까지 애처럼 떼만 쓸 순 없다는 거, 잘 알잖나."
왜일까. 분위기가 사뭇 무거워졌다.
"팀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도 한계가 있어. 2년 이상 원칙을 어기는 팀원을 계속 끌어안고 갈 수는 없다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 말했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이대로라면 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하긴 당연한 일이다.
아냐 이바노프.
그녀는 늘 팀을 이루지 않은 탓에 중요한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무려 2년이나 지속됐다.
제아무리 김백동이라도 지켜줄 수 있는 한계가 있을 터.
"······알겠습니다."
결국 아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한 듯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대로 잘리는 것도 그녀로선 원하는 바가 아닐 테니까.
'과연.'
그 모습을 본 이전석은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전생에선 해고당했겠군.'
그때는 이전석이 용병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아냐도 팀을 이루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 죽은 건 아닌가?'
물론 꼭 그렇게 확신할 수만도 없었다.
김백동의 눈치를 보면, 그도 아냐를 해고하는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 부서에 잔류시켰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전생에서 아냐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저는 이만 퇴근할게요."
인수인계를 마친 박일우가 사무실을 나갔다.
김백동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 바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벽연합과 관련된 일일까?
"헌터님께선 끝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김백동이 가리킨 텅 빈 자리.
이전석은 그곳에 앉았다.
때마침 맞은편이 아냐의 자리였다.
묘한 기류가 바람처럼 흘러들어온다.
어색함에 어색함이 더해졌다.
이전석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한가하군.'
협회에 들어오긴 했다.
그런데 정작 할 일이 없었다.
용병의 특이성 때문이다.
용병은 정직원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정작 외부인인 탓에 회사 내 작업을 맡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 안 가 용병제도가 사라졌었지.'
옛날에야 인력이 원체 부족해서 용병제도도 의미가 있기는 했다.
계약금으로 주는 돈도 훨씬 많아서 용병으로 잠시나마 들어오는 헌터들도 많았고.
물론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길드 외에도 사무소 같은 여러 단체가 설립되며 인재의 폭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어색한 침묵 속.
"팀장님."
"왜?"
"출동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아냐가 입을 열었다.
"마포구에 있는 은행에서 빌런 둘이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합니다. 거액의 돈과 안전한 탈출루트를 요구하고 있다는군요."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어투.
"빌런은 각각 B급과 A급이고··· 현장에 있는 경찰과 헌터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출동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전석이 그 말을 엿들었다.
A와 B.
'B라면 또 모르겠지만, A부턴 일반적인 헌터들이 상대하기 꽤 까다롭지.'
빌런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감독관조차 최소 등급이 A인 걸 생각하면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흐음."
아냐의 말을 듣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김백동.
이내 그가 이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라면 저와 이바노프 과장이 갔겠지만··· 이전석 헌터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할 수 있겠냐는 의미였다.
하등 의미 없는 질문이다.
거절하면 기껏 용병으로 들어온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물어본 이유는 이전석의 등급이 아직 F에 불과했기 때문일까.
'빨리 등급을 올리든 해야겠군.'
처음부터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협회의 규칙이 F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A정도면···.'
아직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일까.
김백동이 아냐에게 명령했다.
"그럼 이바노프 과장."
"예, 팀장님."
"이전석 헌터님과 함께 마포구로 향하도록. 상황이 시급하니 포탈게이트를 사용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아냐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가시죠, 이전석 헌터님."
"예."
두 사람은 부서를 빠져나와 지하 4층으로 향했다.
그 사이.
'······.'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이전석이 슬쩍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제 협회장에게 보냈던 문자.
'아직 못 봤나?'
연선화에게 답이 오지 않는다.
뭐,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다.
협회장이라는 양반이 이제와 제자로 삼기 싫다며 무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곳입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하 4층에는 게이트가 여럿 존재했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갈색 게이트.
언뜻 3미터는 되어 보인다.
저게 바로 포탈 게이트였다.
텔레포트를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장치.
아냐가 그 앞에 서서 허공에 손가락을 두들겼다.
마나의 파동으로 좌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울렁거리실 겁니다."
아냐의 주의.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게이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좌표 4847.224.552로 이동합니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섬광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빛이 잦아들며 삭막한 지하 대신 도시의 풍경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서진 잔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구급차와 경찰관.
그리고 다친 몇몇의 사람들.
"제대로 도착했군요."
아냐가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사건현장으로 바로 이동한 모양이다.
"혀, 협회 감독관분들이십니까?"
경찰 한 명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현장에 나타났기 때문일까.
감독관임을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상황설명 부탁드립니다."
아냐의 말에 경찰이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현재 빌런 두 명이 은행내부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보름 전 출소한 전 조직폭력배로, 광폭화라는 B급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한 명은?"
"마찬가지로 같은 조직에 속한 조폭입니다. A급이라는 것 외엔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아서······."
경찰은 "다만"이라며 엉망진창이 된 은행내부를 바라봤다.
"꽤 성가신 능력인 것 같은지라, 저희측 인원이 다수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턴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지친 듯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경찰관.
이전석과 아냐는 은행 가까이 다가갔다.
안전줄을 넘어 빌런이 보이는 입구로 향한다.
"이전석 헌터님. 헌터님께선 아직 경험이 적으시니 밖에서 대기하고 계셔도 됩니다."
아냐가 배려하듯이 말했다.
이전석.
그는 아직 F급 헌터에 불과했으니까.
재능이 있다는 건 알지만 벌써부터 A급과의 실전에 투입되기엔 너무 일렀다.
그러나.
"오늘은 제가 해결······."
그녀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
갑자기 이전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단 모습만이 아니다.
느껴지는 기척 또한 완전히 없어졌다.
다시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땐.
서걱-.
빌런 중 하나가 목이 베여 쓰러진 뒤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1화
데뷔 (3)
"옛날에는 조폭도 범죄집단이었다지."
머리를 깨끗하게 민 대머리의 사내가 말했다.
그- 김영소는 화영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헌터들이 생겨나면서 대부분의 조폭은 바퀴벌레처럼 박멸 당했고, 지금 남아 있는 건 정부와 협회에 아양을 떨어 살아남은 떨거지들뿐이야."
후-.
김영소가 담배연기를 짙게 내뱉었다.
쿨럭!
그에 노인 한 명이 기침했다.
아무래도 기도가 취약한 모양.
김영소는 그런 노인을 걷어찼다.
"으억···!"
삐쩍 마른 노인은 힘없이 쓰러졌다.
"하, 할아버지!"
작은 아이가 노인을 붙들었다.
겁 먹은 표정.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김영소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가래 섞인 침을 퉤 뱉어낸 뒤 은행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비교적 짧은 머리에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내가 서있었다.
같은 화영파의 일원이자 최근 들어온 막내, 양민하.
김영소가 그에게 말했다.
"민하야."
"예, 형님."
"너는 조폭이 뭘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 하냐."
"그건······."
양민하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김영소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 애매하지. 요즘 조폭은 정말 애매해."
힐끗.
은행 바깥에 진을 치고 있는 경찰과 헌터들을 노려본다.
"빌런도, 헌터도 아닌 애매한 놈들의 집합소. 그게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폭의 인식이야. 실재로 하는 일도 그렇게 다르지 않고 말이지."
대부분의 조폭이 박멸당한 상황.
괜히 쓸데없는 짓거릴 했다간 언제 협회에 의해 간판이 철거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조폭들은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폭력배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자선단체 같은 짓거릴 하고 다니고, 협회나 길드가 부르면 발정난 개새끼처럼 달려가 헥헥 거리지."
김영소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버렸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꽃.
그걸 발로 짓밟아 꺼트린다.
"나는 우리 화영파를 다시 일으킬 거다. 두목님은 쉬쉬하시는 모양이지만, 여기서 적당히 돈을 털고 연합과 접촉할 생각이야."
"예? 연합이요? 연합이라면 개벽연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두목님이 연합과는 절대 연관되지 말라고······."
"등신 같으니."
김영소는 양민하를 더러 한심하다는 듯 욕설을 지껄였다.
"크게 되려면 가끔은 도박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맞는 말이다.
도전 없이는 성공도 없다.
성공의 전제조건은 도전.
그러니 그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연합한테서 지원을 받으면 우리 화영파도······."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이었다.
서걱-.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뺨에 무언가가 튀었다.
손을 훑어보자 새빨간 액체가 묻어났다.
'피···?'
의아함에 슬쩍 옆을 쳐다봤다.
직후.
"무슨······?"
김영소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눈동자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돌연 머리가 잘려나간 양민하.
분수처럼 피를 흩뿌리는 단면.
머리는 은행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생기가 사라져버린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래서 한다는 일이 겨우 은행털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영소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위험하다고.
타닥-!
재빨리 목소리와 거리를 벌리는 김영소.
양민하의 몸통이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그 사이.
마치 연기를 걷어내듯 누군가 나타났다.
덥수룩한 머리와 길쭉한 장신.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동공.
그- 이전석이 김영소를 쳐다봤다.
이전석은 새빨간 단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
틀림없다.
'이놈이 민하를 죽인거야.'
언제? 어떻게?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
A급 헌터인 자신이 말이다.
"······뭐냐, 너."
김영소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헌터."
짧고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그딴 걸 묻는 게 아니었다.
"감독관이냐?"
김영소는 따지기라도 하듯 재차 물음을 던졌지만, 이전석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섬뜩한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
터벅-.
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김영소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미친······.'
심상치 않다.
이상하다.
이런 건 S급 헌터를 마주하고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그 이상의 헌터라고?'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다.
SS급 헌터는 대한민국에도 몇 없는 귀중한 인재다.
그런 위인이 고작 은행털이범 하나 잡겠다고 나서다니?
꿀꺽-.
김영소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영소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냈다.
공격하려는 걸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오지마!"
김영소가 옆에 있던 아이를 인질로 잡은 것이다.
전혀 부드럽지 않은,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
눈물을 터트리는 아이의 목에 검이 겨눠진다.
"그 이상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이 녀석은 죽는다."
순간.
이전석이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에 김영소가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지. 네놈은 인질을 신경 쓸 수밖에 없어.'
감독관인 이상 당연한 일이다.
시민을 버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독관은 협회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돈은 어차피 충분히 챙겼어.'
김영소가 어깨에 멘 가방을 흘겨봤다.
현금이 두둑하게 든 백팩.
하나같이 오만원권 뿐이다.
'이 정도면 연합 놈들도 이야기는 들어주겠지. 그러니 지금은 애새끼를 인질로 잡고 최대한 멀어지는 거야.'
이내 김영소는 슬그머니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목에 검을 겨눈 그대로.
"애새끼 모가지 잘리는 꼴 보기 싫으면 다 비켜!"
"으아앙-!"
녀석의 협박에 아이가 크게 울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당황한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는 눈치.
그저 녀석의 의도에 따라 조금씩 물러날 뿐이다.
"영진아···!"
쓰러져 있던 노인이 아이를 애처롭게 불렀다.
"괜찮을 겁니다."
이전석이 노인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말했다.
"저 혼자 온 게 아니니까."
그 말 대로였다.
인질로 인해 물러나던 사람들.
그 한 가운데.
아냐 이바노프가 서있었다.
"비키라는 말 못 들었어?!"
독이 차오른 김영소의 외침.
그러나.
"김영소. 화영파 서열 2위. A급 각성자."
아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갈 뿐.
"지금이라도 인질을 내려놓고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드리겠습니다."
살벌한 기세로 압박하는 그녀.
범죄자가 초능을 가지며 빌런이 된 사회다.
과거와는 다르다.
자격만 있다면 빌런에 대한 사살은 대부분 허용됐다.
"망할···!"
김영소가 까득 이를 갈았다.
그는 투항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가끔 저런 놈들이 있기는 했다.
물론.
'······어차피 투항해도 끝이야. 이 소식은 금세 두목님께 전해질 테고, 그럼 나는 파문당하고 말겠지."
그뿐이랴.
평생 감옥신세를 지며 살아야할 터.
경우에 따라선 사형이 선고될지도 모른다.
현대의 법은 빌런에게 자비가 없었으니.
그러니.
'절대 여기서 잡힐 순 없어.'
결국 김영소는 결정을 내렸다.
"뒤져!"
그의 등 뒤로 화살이 형성된 것.
푸른 마나가 소용돌이치듯 모여들며 수십 개의 화살을 만들어낸다.
'마나사출'이라는 이름의 특성이다.
간단한 이름과 달리 그 위력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모든 화살이 오직 아냐만을 노린 채 날아든 것이다.
그리고 폭발.
콰앙-!
땅과 하늘.
대기가 뒤흔들리며 진동한다.
이 특성으로 여러 명의 헌터가 부상을 입었다.
유도라는 효과와 더불어 화살과 화살 간의 연쇄폭발이 원인이었다.
그것은 가죽과 근육을 뚫고 내장까지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혔으며, 사건해결을 위해 나선 수많은 헌터들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어떻게······."
아냐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서늘한 냉기만이 주변을 맴돈다.
눈처럼 휘몰아치는 새하얀 입자.
화살은커녕 폭발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뚜벅-.
아냐가 말없이 김영소에게 다가갔다.
"오지마! 못 들었어? 오지 말라고! 애새끼가 죽어도 좋은 거냐!"
김영소가 협박하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날 끝으로 피한방울이 흐르고, 아이가 혼절할 것처럼 울어댔다.
현장이 혼란으로 물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냐는 멈추지 않았다.
"이, 이 자식······!!"
당황하는 김영소.
순간.
쩡-!
큰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얼어버렸다.
다리부터 머리까지.
모든 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아이는?
멀쩡하다.
오직 김영소만이 얼음 속에 갇혀있을 뿐.
아냐의 특성 '절대영도'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냉기를 자유자재로 조율해, 오직 김영소만을 얼음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툭-.
이어 김영소의 팔을 가볍게 후려친 아냐.
녀석의 팔이 부서지며 아이가 풀려났다.
"괜찮니?"
"흐아앙!"
아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냐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영소와 대비되는 부드러운 손놀림.
차가운 외모와 무표정한 얼굴. 한없이 냉혈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아냐는 의외로 아이를 잘 다루는 편이었다.
그때.
"위험합니다, 감독관님!"
멀리서 경찰관이 소리쳤다.
동시에 앞에서 빛이 발했다.
"나 혼자··· 갈 줄 알고······!"
쩌적-.
갈라진 얼음 사이.
김영소가 메마른 목소리를 토했다.
뒤이어 빠르게 녹아내리는 얼음.
그 사이로 붉은 빛이 터져 나온다.
'···특성이 하나가 아니야?'
아냐가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엔 그녀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자폭······ 크흐, 별 쓸모없는 특성이다만······ A급이다···. 애새끼는 물론 네년도 사지 하나 잃어버릴 각오는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제는 아예 자포자기가 된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아냐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놈이 발동하는 특성을 막기 위해.
'자폭류 특성이라면, 최소 반경 100미터까지는 완전히 초토화될 거야.'
그럼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죽을 거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내 절대영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절대영도.
S급 특성.
그 효과로 폭발의 범위와 영향을 최대한 억누른다.
물론 죽이는 게 더 확실하긴 하지만, 그런다고 자폭이 취소될 거란 보장도 없다.
아냐로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수밖에 없는 셈.
사시나무처럼 딸리는 양손.
그 사이로 하얀 냉기가 구의 형태를 이루며 모여든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안 돼.'
김영소가 자폭을 발동하는 즉시.
냉기로 폭발을 뒤덮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냐 자신조차 큰 피해를 입을 거다.
마나로 몸을 지키면 된다지만, 아직 절대영도와 동시에 마나를 컨트롤하기엔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미숙했으니.
덕분일까.
아냐는 금방이라도 절대영도를 발동할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쇄액-!
어디선가 단도 한 자루가 날아왔다.
정확히 김영소의 목을 노린 일격.
"커헉···!"
단도가 그의 목을 파고들어갔다.
하지만.
과연 A급이라는 걸까?
그는 동맥을 찔렸는데도 죽지 않았다.
이를 악 문 채 정신을 붙든다.
오히려 자폭의 범위가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순간.
"곱게 가야 벌도 덜 받는다."
의미모를 말이 들려왔다.
"너······!"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김영소.
아냐도 말은 안 했지만 꽤 놀란 눈치였다.
다름 아닌 이전석 때문이다.
그가 돌연 눈앞에 나타난 것.
"특성도 살아 있어야 쓸 수 있는 법이지. 안 그래?"
"이 새끼······!"
비웃음이 뒤섞인 말.
김영소가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정곡인가보군."
이전석이 그리 말하며 박혀있던 적단도 빼냈다.
김영소의 반응.
확신은 얻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망할···!!"
욕설과 함께 자폭을 가속화 시키는 김영소.
붉은 빛이 빠른 속도로 범위를 넓힌다.
물론 하등 의미 없는 짓이다.
이전석은 그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적단도가 피를 흡수합니다.]
한껏 피를 머금은 채 예리해진 적단도.
그것을 횡으로 휘두른 것이다.
서걱-.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단면.
머리통이 허공을 회전한다.
"······!"
김영소의 얼굴에 충격 어린 감정이 엿보였다.
그러나 죽은 자가 말을 할 수 있을 린 없으니.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을 획득합니다.]
[자폭(A)을 습득합니다!]
얼음에 걸치듯 쓰러진 김영소.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통.
붉은 빛이 한순간에 잦아든다.
시전자의 죽음으로 인해 특성이 취소된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 아냐는 최대한 냉기를 모았으나, 다행히도 김영소는 숨은 멎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폭이 다시 발동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괜찮으십니까?"
이전석이 단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물었다.
아냐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헌터님······."
나지막이 무언가를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던 때였다.
"영진아!"
멀리서 노인이 다가왔다.
"할아버지!"
노인을 발견하자 바로 달려가 품에 안기는 아이.
노인은 아이에게 상처가 없나 확인한 뒤,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여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헌터님들!"
그에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아냐.
그녀는 하려던 말도 뒤로한 채 노인과 아이를 119 구급대원에게 인도했다.
뒤이어 경찰과 헌터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급히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두 빌런에 의한 은행점거 사건은 막을 내렸다.
※ ※ ※
경찰이 현장정리를 하고 있을 무렵.
이전석은 근처 벤치에 앉아 김영소를 죽이고 얻은 특성을 확인했다.
━
자폭
등급 : A
효과 : 목숨을 대가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아주 낮은 확률로 생존한다.
━
자폭.
그 효과를 본 이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가장 원하지 않던 걸 얻어버렸다.
목숨을 대가로 발동하는 특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다.
그나마 낮은 확률로 생존한다는 문구가 있긴 했다.
아마 김영소가 자폭을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겠지.
희미한 확률에 자신의 목숨을 건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에겐 전혀 메리트가 없는 효과였다.
확률적 생존.
그 확률이 얼마나 낮을 지도 모른다.
아마 높은 확률로 죽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적의 발꿈치라도 물고 늘어지는 게 나았다.
그래도···.
'이건 좀 괜찮네.'
다른 하나는 좀 나은 편이었다.
B급 빌런을 죽이며 얻은 특성.
이름이 양민하라고 했던가?
━
광폭화
등급 : B
효과 : 마나를 제외한 모든 스펙이 +30 상승한다. 다만 시전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식이 불안정해지며, 종국에는 피아식별을 가리지 않고 날뛰게 된다.
━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특성.
그러나 이전석에겐 영원의 낙인이 있다.
의식이 마모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능력.
즉, 이전석에게 광폭화는 지속적으로 스팩을 30 만큼이나 올려주는 버프 특성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또한 마나를 소모하니 쉽게 사용하진 못하겠지만···.
스윽-.
이전석이 적단도를 집어넣었다.
코트 안, 띠 같은 형태의 끈.
그곳에 검집처럼 적단도를 고정시킨다.
은신자의 코트.
편의성 만큼 효과도 나쁘지 않았다.
숨을 참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헌터인 이전석에겐 그리 큰 단점은 아니었다.
은신과 아이템의 조합.
'아냐 감독관도 가까이 접근할 때까진 알아채지 못했지.'
안 그래도 A급이던 특성이다.
모습을 완전히 지워지는 효과.
거기에 기척까지 사라지니, 은신은 S급 못지않은 효과를 발휘했다.
'내 전투스타일과도 딱 맞고.'
덕분일까.
왠지 이 조합은 앞으로도 자주 써먹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은행 테러로부터 많은 사람을 구하셨습니다.]
[선업이 '2000'만큼 증가합니다.]
뒤늦게 시스템이 떠올랐다.
2000.
빌런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한 대가다.
절대 낮은 건 아니었다.
다만 최은하를 구했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수치였다.
그 사실에 이전석이 아쉽다는 양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
띠링-.
꽤 흥미로운 문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냐 이바노프가 첫 번째 운명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자책의 운명'을 비트십시오.]
[보상 - 업상점 무료 이용권(S)]
'이건······.'
최은하를 구할 때도 나타났던 시스템이다.
마치 게임 속 퀘스트와도 같은 내용.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보상이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업상점 무료 이용권
그것도 S급.
S급 이하라면 그게 무엇이든 무료로 구매할 수 있다는 걸까?
이전석은 그 내용에 흥미가 동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지껏 선업이 아까워 이용하지 않던 업상점이 아니던가.
그걸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니 관심이 갈 수밖에.
이 또한 시스템이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이전석은 얼마든지 그 의도에 어울려줄 생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보상이 나쁜 것도 아니고···.
"이전석 헌터님."
문득.
아냐가 이전석에게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녀는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물어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2화
악수
"마지막에 왜 도망치지 않으셨죠?"
아냐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지막? ······아."
이전석은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김영소가 자폭을 사용했을 때.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야 대답하자면 간단했다.
천살성의 효과가 그랬으니까.
특성을 빼앗으려면?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상대를 죽여야만 한다.
김영소의 마나화살이 탐이 났고,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것이다.
뭐, 결과적으론 자폭을 얻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이전석이 잠시 고민했다.
천살성에 대한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다.
특성을 원해서 죽였다니.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반감밖에 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전석은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인터뷰 때와 똑같은 대답.
이전석 본인은 잘 모르는 눈치지만, 그는 대답하기 귀찮을 때 이런 식으로 대충 둘러대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그런 그에게, 아냐가 재차 물었다.
"자폭이 멈추지 않았다면 어떡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어떡하긴요. 과장님이 계시잖습니까."
"······."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쳐다본다.
굳이 따지자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실재로 아냐는 자폭이 취소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냉기를 비축해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목숨을 저울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 목숨이 자신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이전석은 뛰어난 헌터였다.
단순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사수인 자신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우선진입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할 정도로 이전석의 실력과 재능은 실로 뛰어났다.
시험에서 보여준 게 다가 아니라는 듯 빌런을 죽이던 모습.
'A급 빌런을 상대로도 망설임이 없었지.'
겁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누군가는 이를 만용이라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용은 힘없는 자들에게나 통용되는 말이다.
힘이 있다면 그것은 용기가 된다.
그리고 이전석에겐 힘이 있었다.
'······실력은 이미 A급이라 봐도 좋을 정도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실력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냐는 그의 말을 되새겼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왔다.
아냐의 부사수이던 헌터, 김수현.
그도 정확히 같은 말을 했었다.
우연일까?
우연이겠지.
그럼에도 그 말이 계속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돌아가면 약부터 먹어야겠어.'
머리가 어지럽다.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인다.
병원에선 공황장애라 했다.
특히 불안증세가 심하다고.
부사수를 잃은 뒤부터 아냐는 계속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 그녀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아냐의 마음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는 뒤늦게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 ※ ※
이전석은 무언가를 지긋이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 무간에서 생긴 버릇이었다.
흥미로운 게 생기면 곧장 그것에 대해 분석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곤 했는데, 그건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협회로 돌아가는 버스 안.
이전석은 아냐를 지긋이 관찰했다.
그리고.
'공황장애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 아냐의 상태를 파악했다.
떨리는 손,
불안한 시선처리,
손끝에 맺힌 땀방울.
이전석의 눈동자는 그것들을 전부 캐치했고, 아냐의 증상을 공황장애로 인한 것이라 결론 내렸다.
아마 부사수를 잃은 영향이겠지.
그 트라우마로 인한 극도의 불안증세가 아냐에게서 엿보였다.
"······."
이전석은 여전히 눈앞에 떠올라 있는 시스템을 응시했다.
[아냐 이바노프가 첫 번째 운명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자책의 운명'을 뒤트십시오.]
[보상 - 업상점 무료 이용권(S)]
최은하 때와 똑같은 시스템.
다만 운명의 종류가 다르다.
자책.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
'공황장애를 해결해주면 되나?'
지금으로선 그거 외엔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황장애.
결코 간단한 병이 아니다.
그게 진즉 해결 가능한 거였다면 아냐가 2년 간 홀로 활동하는 일도 없었겠지.
특히 정신적인 질병은 약을 먹고도 쉬이 낫기가 어려웠다.
애당초 이전석은 의사가 아니다.
관찰을 잘하긴 하지만 그뿐.
무언가를 치료하거나 해결해주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죽이는 거면 또 몰라도.
'자책이라는 게 뭔지가 관건이로군.'
아마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아냐의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난지 한 달도 안 된 사이.
그런 사람의 트라우마를 해결하란다.
이왕 퀘스트를 줄 거 자책에 관한 정보도 주면 좋겠건만, 시스템은 그런 것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걸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쪠쩨하다고 해야 할지······.
'난감하네.'
이전석은 내심 한숨을 쉬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퀘스트를 실패해도 딱히 패널티가 없다는 것일까.
정 안되겠다 싶으면 포기하면 될 일.
시스템의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이유도 없다.
보상이 아쉽긴 하지만, 무리한 요구를 받아가면서까지 남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그리고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끼익-.
버스가 어느새 협회 앞에 도착했다.
※ ※ ※
부서로 돌아가자 그곳엔 아직 김백동이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그가 이전석에게 물었다.
일에 관한 걸 묻는 거겠지.
"아직 첫날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처음 하는 것도 있고, 쉽지 않네요."
이전석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딱 정석적이기 그지없는 대답.
이 또한 귀찮음에서 묻어나온 말이었다.
"차차 익숙해지실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김백동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상부와 미팅이 있어서."
이내 그가 부서를 나갔다.
개벽연합.
그와 관련된 미팅일까.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다.
이윽고.
사무실에는 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아냐와의 어색한 기류만이 흐른다.
그 사이.
시간은 무색하리만치 흘러갔다.
어느새 점심이 지나고 1시가 되었다.
조금 있으면 업무가 끝날 시각.
'음······.'
이전석은 힐끗 휴대폰을 쳐다봤다.
여전히 연선화로부터 답신이 없었다.
무언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지루하군.'
이전석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하품을 하며 주변을 관찰했다.
사무실에 배치된 가구와 식물.
팀원들의 책상과 그 위의 장식.
그것들을 하나 둘 씩 뇌리에 새긴다.
아까는 출동명령 덕분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 이전석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인턴의 책상이었다.
'박일우··· 애니를 좋아하나?'
책상에 미소녀의 피규어가 가득하다.
회사 내 사무실에 미소녀 피규어라니.
그의 독특한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관찰하던 차.
'음······?'
이전석이 의문 어린 눈빛을 띠었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팀원의 책상.
그 위에 장식된 자그만 화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화분에 피어난 꽃.
'렐라나의 잎사귀?'
그것은 이전석이 보기에 너무나 익숙한 '마화(魔華)'였다.
마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평범한 꽃이 아니다.
S급 던전에서 출몰하는 아주 희귀한 독꽃.
'저게 시중에 나타나는 건 5년이나 지난 뒤일 텐데···.'
그런 게 협회에 있다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설마하니 저게 뭔지도 모르고 장식해놨을 리도 없고.
"과장님."
문득 이전석이 아냐를 불렀다.
"저긴 누구 자리입니까?"
"윤대리··· 윤진 헌터의 자리입니다."
한참 업무를 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답했다.
그러다 힐끗 이전석을 쳐다본다.
"왜 그러시죠?"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이전석은 그리 둘러대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윤진.
'윤진이라.'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짚는다.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그는 미래에서도 꽤 유명한 빌런이었으니까.
아마 동명이인은 아닐 거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덕분일까.
그의 책상에 장식된 렐라나의 잎사귀가 유독 신경쓰였다.
한참 그걸 관찰하는 사이,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2시.
오전 팀의 업무가 끝나는 시각.
"수고하셨습니다."
아냐는 바쁜 일이 있다면서 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과장님께서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군요."
그런 그녀를 대신해 인수인계를 맡은 남자가 말했다.
슬쩍 이전석을 돌아보는 남자.
"저는 윤진이라고 합니다."
윤진.
이놈이다.
렐라나의 잎사귀의 주인.
아이러니하게도, 그 얼굴은 이전석도 아는 것이었다.
"안전요원으로 헌터시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저희부서에 들어오실 줄은 몰랐네요."
그가 털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말에서 가시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이전석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전 사건에서 활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과장님과도 팀이 되셨다고······."
"아, 예."
이전석은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윤진의 눈빛.
희미하게 악의가 깃들어 있다.
질투 어린 감정이 느껴진다.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꽈악-.
그때.
맞잡은 손에 악력이 가해졌다.
'흠······.'
손이 부러질 것만 같은 고통.
이전석은 태연하게 윤진을 마주봤다.
'이놈은 과거에서도 여전하군.'
미래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다짜고짜 기 싸움을 걸어왔었지.'
그때는 순수 악력으로 손을 아작 냈다.
이런 치졸한 기싸움이 같잖아서.
그래서 손은 물론이고, 후에 팔까지 잘라버렸다.
윤진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전석은 이미 천살성에 의식의 태반이 집어삼켜져 있었을 때니까.
그만큼 잔혹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단순히 도의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힘이 한참 뒤떨어지는군.'
그렇다.
현재 이전석과 윤진은 스탯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기만 하랴?
물론,
그것도 이전석의 성격이 아니었다.
때문일까.
이전석은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특성 발화를 사용합니다.]
다름 아닌 발화를 사용한 것.
불꽃은 피우지 않았다.
그저 열만을 손바닥에 전했을 뿐.
몇 번 발화를 사용하다 보니 이런 식의 응용도 가능해졌다.
그러자.
"······?!"
윤진이 열기에 깜짝 놀라 손을 땠다.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도 놀란 눈치다.
이전석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별 거, 아닙니다."
윤진이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꼴에 자존심이랍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게 참 같잖았다.
더 보고 있을 가치도 없었다.
"그럼 저도 일이 있어서."
이전석이 아냐를 따라 사무실을 나갔다.
"······."
홀로 부서에 남겨진 윤 진.
그가 떨려오는 손을 붙잡았다.
공포일까, 고통일까.
어째서인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 ※ ※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이전석.
'아냐 감독관을 좋아했나?'
그가 윤진에 대해 생각했다.
윤진.
빌런명 인형사.
지금은 아직 감독관으로 활동하는 모양이지만, 미래에서 널리 알려진 그의 이명은 바로 인형사였다.
'연헙과의 싸움에서 빌런이 됐다고 했지.'
이 또한 김백동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윤진은 추후 협회를 배신하게 된다.
헌데.
그런 그가 아냐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착각은 아니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이전석은 확신했다.
그건 명백한 질투였다고.
하물며 그 상황에서 질투를 느낄만한 요소라면 하나밖에 없었으니···.
'치졸함의 극치로군.'
이전석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처음 만난 신입에게 질투를 느끼고, 그것도 모자라 악력싸움이나 걸어오는 꼬라지.
왜 그가 빌런이 됐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제와 회유한다고 미래가 변할 것 같지도 않고······.'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이전석.
띡-.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가 1층을 눌렀다.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죽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침 윤진이 가진 특성은 이전석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살려둬서 좋을 게 없는 놈이다.
회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
이전석은 그런 있는지도 모를 희망에 눈독을 들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죽이자고.
생각은 곧 결심으로 이어지고, 결심은 이윽고 어느 한 추론과 계획을 도출해냈다.
아냐 이바노프의 트라우마.
전 부사수 김수현의 죽음.
그리고 윤진이 가진 질척한 감정.
확신도 없고 달리 증거도 없지만.
'놈이 내가 아는 인형사가 맞다면···.'
그렇다면, 곧.
윤진은 수일 내로 이전석에게 접근해올 것이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3화
고독(蠱毒) (1)
얼마 후.
협회를 나온 이전석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수신인은 다름 아닌 연선화였다.
문자로 답이 오질 않으니 전화라도 해볼 셈.
그런데.
━비서 유한설입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는지요?
정작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남성의 목소리였다.
비서.
왜 그가 대신 전화를 받은 거지?
그에 대해 이전석이 물어보니.
━협회장님께선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부재중이라고요?"
━일본 쪽에 급한 일이 생기신지라···. 돌아오시면 헌터님께서 연락하셨다 전해드리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이전석이 전화를 끊었다.
연선화는 부재중이라고 한다.
'어쩐지 연락이 없더라니.'
휴대폰조차 놓고 갈 정도로 급한 일일까?
'그럼 일단······.'
협회를 나온 이전석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본다.
2시를 조금 넘긴 시각.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엔 이르다.
'마침 잘 됐어.'
윤진.
아마 지금 그의 등급은 A일 것이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또 모르겠지만···.
상대가 대인경험이 풍부한 감독관일 경우,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전생이라면 또 몰라도 지금 그는 평범한 감독관보다 한참 약했으니까.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레벨을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전석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10미터 남짓한 크기의 게이터가 빌딩을 대신하듯 새워진 거대한 공터였다.
※ ※ ※
"죄송하지만 F급은 B급 던전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푸른색의 거대한 게이트 앞.
문지기 헌터가 이전석을 가로막았다.
이전석은 곧장 품에서 배지를 꺼냈다.
감독관에게만 주어지는 금색 배지다.
용병이라도 감독관인 이상 이전석도 그들 못지않은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 감독관님이셨군요! 확인되셨습니다!"
배지를 확인한 문지기는 쉽게 길을 비켜주었다.
이전석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존경, 동경, 그리고 두려움.
이게 바로 감독관이 가진 지위다.
협회와 정부, 그리고 세계연맹의 비호를 받는 헌터.
임시라 해도 결코 무시할 만한 신분이 아닌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짧게 인사하며 게이트로 들어갔다.
['피로 뒤덮인 초원'에 입장합니다.]
곧 시야가 일렁이며 환경이 바뀐다.
이전석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똬약볕이 내리쬐는 초원.
곳곳에 마른 피가 흩뿌려져 있다.
뒤이어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
피로 뒤덮인 초원
등급 : B
내용 : 오크는 본래 땅에서 태어난 골렘이었다. 그러나 마기의 침식으로 육체를 가지게 된 그들은 의지 없는 괴물로서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오직 피를 탐할 뿐인 괴물로부터 도망쳐 살아남거나, 놈들을 사냥하여 정복하라.
━
오크가 등장하는 B급 던전.
절대 낮은 수준은 아니다.
B급이라면 일반적인 헌터들 사이에서도 사지(死地)로 유명한 장소였으니까.
그만큼 보상이나 경험치도 많았다.
다만.
이전석으로선 그조차 아쉽기만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전생에서 그는 SSS급조차 홀로 공략했었으니까.
그런 마당에 B급 수준의 보상이나 경험치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A급 던전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힘들어.'
A급.
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한두 마리 정도가 한계였다.
몬스터가 때로 몰려드는 던전에선 제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B급 던전을 골라 들어왔다.
그것도 오크가 등장하는 곳을.
'오랜만에 레벨업이로군.'
개체수가 유독 많은 오크는 헌터들이 레벨을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몬스터였다.
물론 오크 특유의 재생력 덕분에 되려 레벨을 올리긴커녕 죽는 경우도 허다했지만···.
적어도 이전석이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아무리 성가시고 강해도 기껏해야 오크.
전생에 수도 없이 죽여본 놈들이다.
행동패턴이나 공략법은 충분히 숙지한 상태.
서걱-.
이전석이 적단도로 손을 그었다.
날에 예리함을 불어넣고.
[은신자의 코트가 기척을 지웁니다.]
동시에 호흡을 참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쪽같이 사라진 기척.
굳이 은신까지 사용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마나소모가 너무 컸으니까.
그저 조용히.
이전석은 붉은 초원 위를 이동했다.
※ ※ ※
헌터의 성장은 무한하지 않다.
F급부터 SSS급까지.
특성의 등급에 따라 헌터가 올릴 수 있는 레벨도 한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EX+급 특성을 가진 이전석은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그건 이전석 본인조차 궁금한 정보였다.
'전생에선 500쯤까지 올렸지.'
그러고서도 레벨이 멈추지 않았다.
S급은 100.
SS급은 200.
그리고 SSS급은 300에서 성장이 멈춘다.
하지만 당시 EX급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이전석은 500을 넘기고서도 한계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물며 EX+급인 지금이라면?
어디까지 레벨이 오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강해질 수 있어.'
그 누구보다.
아니.
전생의 자신보다.
훨신 더 높은 영역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 기대감 속에서 적단도를 휘둘렀다.
오크의 뒤쪽.
기척을 지운 채 접근해···.
서걱-.
단숨에 녀석의 목을 벤다.
그러나.
"크어억!"
괴성을 내지르며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는 오크.
이전석은 잽싸게 뒤로 도약했다.
아슬아슬하게 도끼날이 앞머리를 스친다.
'역시 재생력이 빨라.'
이전석이 침착하게 오크를 관찰했다.
분명 녀석의 동맥을 베었다.
단순히 스친 수준이 아니다.
명백하게 혈관을 벴지만, 벌써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거대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
이 정도로는 치명타를 줄 수 없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선······.
'심장을 파괴해야 해.'
이전석이 참았던 호흡을 터트리며 단숨에 땅을 박찼다.
순간.
"━━━!!"
오크가 눈을 까뒤집은 채 포효했다.
흔히 피어라고도 불리는 공격.
특성은 아니다.
오크 자체의 신체능력이었다.
그들은 본디 땅의 골렘으로서, 용의 먼 후예라고도 불렸으니까.
그렇게 발생한 소리의 파동이 이전석을 휘감았다.
그러나 소용없다.
피어는 정신에 타격을 입히는 능력.
반면 이전석에겐 영원의 낙인이 있었으니.
그의 정신은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
"크어?"
오크가 움츠러들지 않는 이전석을 보고 당황했다.
그 사이.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이전석이 다리를 베었다.
가능한 깊게, 많은 피가 쏟아지도록.
촤악-!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에 적단도를 적신다.
"크어억!!"
오크가 또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이전석은 날렵하게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차례차례 치명타가 되지 못할 상처들을 입혔다.
이미 전생에서 수없이 죽여 온 괴물.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그가 버거워할 만한 상대는 아니다.
그리고.
[적단도가 피를 흡수합니다.]
[적단도의 공격력이 '100'만큼 증가합니다.]
흡수하는 피만큼 끊임없이 증가하는 적단도의 공격력.
상태창을 보니 공격력이 2천까지 올라가 있다.
다만.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이전석이 적단도를 흘겨봤다.
날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더 피를 흡수했다간 적단도가 망가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전석은 자세를 낮춘 채 다시 오크를 향해 도약했다.
탓-!
"━━━!!"
피투성이가 된 오크가 또 다시 피어를 사용한다.
과연 멍청함의 대명사라고 해야 될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면 그새 기억이라도 잊어버린 건지.
어찌됐든 이전석과는 상관없는 일.
후웅-!
사선으로 휘둘러져 오는 도끼.
가볍게 옆으로 돌며 공격을 피한다.
오크가 당황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손아귀로 이전석을 움켜쥐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이제와 무슨 의미일까.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모든 신체능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일순간.
이전석의 동공이 붉게 물들었다.
뱀처럼 길쭉하게 찢어지고-.
전신에서 붉은 연기가 치솟는다.
이전석은 이전보다 월등히 빨라진 속도로 오크의 손아귀를 벗어나며, 그대로 녀석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작단도를 찔러 넣었다.
푸욱-!
정확히 명치를 파고드는 날.
극도로 날카로워진 예리함은, 그대로 피부와 가죽을 두부처럼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었다.
"크어어······!"
그럼에도, 오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적단도를 옭아매듯 재생하는 근육.
이전석은 거기에 발화를 사용했다.
화륵-!
검붉은 불꽃이 손을 따라 적단도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쿠웅-!
폭발.
심장을 꿰뚫은 적단도.
그 끝에서 불꽃이 터지며 심장을 산산조각 냈다.
불꽃과 함께 터져 나오는 피와 육편.
이전석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쏟아지는 핏물을 피했다.
"크어어···."
가슴팍이 뻥 뚫린 오크.
녀석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아직도 죽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질긴 생명력이야.'
저게 특성으로 인한 효과가 아니라 단순 신체능력이라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것도 S급이나 A급도 아닌, B급이 말이다.
오크가 유독 헌터 사냥꾼이라 불리며 악명이 자자한 이유였다.
[광폭화를 해제합니다.]
이전석이 특성을 비활성화 했다.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건 좋다.
다만 마나소모량이 꽤 컸다.
발화까지는 괜찮지만, 은신이나 스켈과는 동시에 사용하지 못할 듯싶었다.
서걱-.
마지막으로 오크의 목을 베었다.
송곳니가 돋아난 머리가 바닥을 뒹군다.
오크는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전석은 적을 상대할 땐 주로 목을 베며 마무리하는 편이었다.
이유라고 해봤자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러는 게 더 확실하니까.
목이 잘리고 죽지 않는 괴물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러니 목만 자르면.
대부분은 죽는다는 소리.
그리고 그건 눈앞의 오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크를 사냥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드디어 레벨이 올랐다.
27.
고작 1.
미약하기 그지없는 수치.
그러나 이전석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전석.
그가 다시 자리를 옮겼다.
숨을 참자 사라지는 기척.
곧 그가 다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세 마리가 무리를 이룬 장소.
그 한 가운데.
[스켈이 거대화를 사용합니다.]
[스켈이 돌진을 사용합니다.]
거대화를 사용한 스켈이 믹서기 마냥 오크들을 갈아버리며 등장했다.
마나 소모량도 크고 지속시간도 짧지만···.
'스탯이 50씩 올라가는 만큼 위력도 괜찮아.'
거기에 돌진이 더해지니 스켈은 A급 헌터와 비슷한 위엄을 자랑했다.
그리고 스켈이 오크들을 상대하는 사이.
꿀꺽-.
이전석이 품에서 물약을 꺼내 마셨다.
푸른색의 액체가 식도를 통해 넘어간다.
그러자.
[마나가 '10'만큼 회복됩니다.]
마나가 일부 회복되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
아이템샵에서 구매한 마나 포션이다.
가격이 꽤 비쌌지만 성장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만한 지출이었다.
반면.
'오른손도 치료해야 되는데··· 포션이 어지간히 비싸야지.'
해주포션.
그것의 가격을 떠올린 이전석이 혀를 찼다.
고작해야 하급 저주일 뿐이다.
그런데 가격이 4천만이란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점원은 해주포션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어 자연스레 가격이 올랐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개소리다.
포션의 제작자가 어디 한 둘이랴.
단지 특정 기업이 독점을 위해 극단적으로 공급을 줄이고 있을 뿐이다.
직접 미래를 겪은 이전석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해당 기업을 찾아가 독점을 멈추라 할 수도 없는 노릇.
'······그 사람을 찾아가야 되나.'
이전석은 전생의 인연을 떠올렸다.
연금술의 대가로 활동하던 남자.
'이 시간대에 각성한 상태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찾아볼 만한 가치는 있으리라.
"왕이시여······."
어느새 오크들을 전부 처리한 스켈.
그가 이전석에게 다가와 무릎 꿇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뒤이어 2의 레벨이 오른다.
동시에 다시 몸집이 작아진 스켈.
거대화의 지속시간이 다한 것.
쉬운 싸움은 아니었는지 몸 곳곳이 부서지고 어긋나 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사용하지 못할 듯싶다.
이전석은 스켈을 소환해제했다.
[소환수의 큰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30분 뒤 소환할 수 있습니다.]
'데미지를 입으면 쿨타임이 생기는 건가.'
아예 사망 처리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시험해볼 여유는 없었다.
다시 기척을 감추는 이전석.
자리를 옮겨 오크를 사냥한다.
마나 포션 덕분일까.
지속적인 싸움에도 크게 지치지 않고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이윽고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이전석은 보스를 잡으며 던전 공략을 끝마쳤다.
※ ※ ※
[오크 로드를 사냥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기존 오크보다 배나 더 거대한 로드.
녀석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잘려나간 머리통이 바닥을 나뒹군다.
동시에.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힘의 권위(D)를 습득합니다!]
오크 로드가 가지고 있던 특성을 빼앗았다.
다만.
'하필이면 가장 급이 낮은 걸 얻었군.'
오크 로드는 B급 특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보다 한참 더 낮은 D급 특성을 얻었다.
물론 효과를 보면 나쁜 특성은 아니었다.
━
힘의 권위
등급 : D
효과 : 근력이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패시브 특성.
10의 레벨업과 동등한 효과다.
반면 이번에 이전석이 올린 레벨은 12.
[스탯포인트 '12'를 사용하셨습니다.]
[민첩이 '12'만큼 상승합니다.]
그 모두를 오직 민첩에만 투자했다.
마나도 중요하긴 했지만, 지금은 우선 민첩부터 올려둘 필요가 있었다.
이전석의 전투스타일에 가장 큰 토대이자 기둥이 되는 게 바로 민첩스탯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이전석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
Lv. 38
[근력 - 20] [민첩 - 42]
[체력 - 20] [마나 - 20]
스탯 포인트 - 0
선업 - 24050(600)
악업 - @#%^@#TF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C), 업상점, 은신(A), 광폭화(B), 힘의 권위(D)
━
레벨과 스탯, 그리고 특성.
모든 게 처음 회귀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스탯만 보면 B급 헌터와 엇비슷한 수준.
특성의 개수나 이전석이 가진 전투적 센스를 고려하면 A급까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스켈과 은신까지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아슬아슬하게 S급도 상대할 수 있겠어.'
이길 수 있을진 모른다.
다만 질 자신도 없었다.
이전석은 오크 로드의 시체로부터 둥근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흔히 보스급 몬스터가 지니고 있는 코어.
다르게는 마석이라고도 불리는 물건이다.
헌터들은 보통 이 마석을 감정 후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곤 했다.
'아이템은 안 떴군.'
아쉽긴 했지만 그뿐이다.
아이템은 드랍확률이 극도로 낮았으니까.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슬슬 돌아갈까.'
이전석은 마석을 집어든 채 던전을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돌아가려던 차.
"···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디론가부터 걸려온 전화.
발신인은 다름 아닌 최은하였다.
이전석이 휘말릴까봐 잽싸게 자리를 벗어났던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는 건···.
'문제가 생겼나보군.'
틀림없다.
이전석은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4화
고독(蠱毒) (2)
━혹시, 한 번 만나뵐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
어딘가 많이 불안해 보인다.
떨림이 멈추지 않고,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뒤이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최은하가 두 번째 운명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좌절의 운명'을 뒤트십시오.]
[보상 - 2만 선업]
'두 번째라 보상이 2만으로 오른건가?'
어쨌든 마냥 무시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이전석은 곧장 그녀를 불러냈다.
적당히 평 좋은 카페로 향해, 그곳에서 최은하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의 문이 열리고.
딸랑-.
한 여인이 어물적 거리며 들어왔다.
머리가 어수선했지만, 틀림없었다.
최은하였다.
"앉으시죠."
이전석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아, 네···."
최은하는 조심스레 그곳에 앉았다.
표정을 보니 꽤 어두워 보인다.
팀원들의 죽음을 깨닫고 절망한 걸까.
시스템을 보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일단 음료부터 시키고 이야기합시다."
이전석은 이번에도 망고라떼를 주문했다.
최은하는 고개를 젓길레 시키지 않았다.
"냉수 한 잔만 주세요."
대신 이전석이 물 한 잔을 요구했다.
최은하의 표정을 본 것일까.
점원은 쉽게 요구를 받아줬다.
뒤이어 나온 냉수와 망고라떼.
"그러고 보니 제 이름도 안 알려드렸네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이전석이 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저는 이전석이라고 합니다. 일단은 협회의 임시 감독관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 저는··· 최은하입니다."
자기소개 시간이라고 착각한 걸까.
제 이름을 말하는 최은하.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화산의 매니저죠. 알고 있습니다."
명함을 받았었으니까.
그보다.
"일단 무슨 일인지 물이라도 한 잔 드시고 이야기해주시죠."
"그게······."
물 잔을 잡고 멈칫하는 최은하.
손이 시리지 않은 걸까.
이내 물을 홀짝이듯 마신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번에 전석 씨랑 헤어지고···."
떨리는 어조로 천천히 말을 잇는 최은하.
이전석은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러다 대충이나마 상황을 파악했다.
최은하가 좌절한 이유.
'최승철이 원인인가.'
최은하는 말했다.
그날 이후 팀원들의 행방을 조사했으나 찾을 수 없었고, 이틀 뒤 아귀들의 낙원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누구의 짓인지는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최승철.
대놓고 이런 짓을 할 만 한 건 그밖에 없었으니.
그 사실을 알고.
━장례식장을 찾아갔어요.
최은하는 팀원들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울고 있는 유족들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도저히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화산.
같은 직계.
F급 던전에서의 단체 죽음.
그들은 의심할 것이다.
다름 아닌 최은하 본인을.
그리고.
━살려내! 내 아들 살려내라고!
우연히 밖에서 마주친 유족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냥 너무 슬프고 분하고, 그리고 죄송스러워서······.
최은하가 입술을 앙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를 좌절케 한 건 정작 다른데 있었다.
━오라버니를 찾아갔어요.
━담판을 지으려고.
━근데······.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온 여동생에게, 최승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껏 벌레 몇 마리의 목숨이다. 헌데 뭘 그리 슬퍼하지? 벌레를 동정하고 벌레와 같이 되고자 하니 네가 벌레처럼 여겨지는 거다, 동생아.
최은하는 그로부터 살의를 느꼈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나락 속 악의.
━그 말을 듣고···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최승철은 최은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건 최은하 본인도 알고 있을 터.
하지만 화산에는 그녀의 편이 없다.
최은하를 따르고 지켜주는 자가 있었다면 애당초 그녀가 D급 공략팀의 매니저를 맡는 일도 없었겠지.
"그래서."
이전석이 텅 빈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를 찾아왔다는 겁니까?"
"······."
최은하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전석을 찾은 시점에서부터, 화산에서 그녀가 얼마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도와드릴 순 있습니다."
이전석의 말.
최은하가 뒤늦게 고개를 든다.
"최승철을 죽여 복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화산으로부터 숨어 살고 싶다면 그럴 수 있게 도와드리죠."
멍하니 이전석을 쳐다보는 최은하.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럼 뭐, 제가 냉정히 은하 씨를 내쳐버리길 바라셨습니까?"
"······."
"도와달라고 하셨으니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 말에 최은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딘가 놀란 것처럼 보이는 눈치였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그녀를 도와준다는 것.
그건 다시 말해 화산을 적대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솔직히 최은하 자신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매달릴 곳이 없어서.
어딘가에라도 손을 뻗고 싶어서.
그래서 연락한 게 이전석이었을 뿐이다.
헌데 이렇게 쉽게 도와준다고 하니, 그녀로선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할 따름이었다.
그런 복잡스런 마음 덕분일까.
"······."
최은하는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눈치.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돈다.
이전석은 침착하게 최은하를 기다렸다.
재촉한들 해결될 일도 아니다.
애당초 최은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면 시스템은 좌절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표현했겠지.'
좌절과 절망은 언뜻 비슷해 보여도 명백히 의미가 다른 단어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는··· 유족분들한테 사과하고 싶어요."
최은하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한 마디.
툭-.
이전석이 텅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본인이 한 짓이 아니잖습니까."
"제가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였죠."
양주먹을 꽉 쥔 채 대꾸하는 최은하.
굳이 따지면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하등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이 세상엔 원흉이 아닌 것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옆집 아저씨의 아들조차 살인에 연류된 공범이 되어버릴 것이다.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예였지만, 최은하가 느끼는 죄책감은 마치 그와 같았다.
그렇다고 이전석은 그녀의 마음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부정하면?
그래서 뭐가 달라지랴?
"하지만······."
최은하는 무언가 결심한듯 말을 이었다.
"제가 그분들께 찾아가 고개를 숙여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가족을 잃은 슬픔.
그건 고작 사과 몇 마디로 해결될 감정이 아니다.
평생을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도 부족하다.
목숨으로 사과한대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이전석이 그러했으니까.
잃어버린 건 돌아오지 않는다.
결코.
그렇기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유족분들께, 돌아가신 헌터분들께도 위안이 될 수 있도록 한을 갚아드리고 싶어요."
최은하는 거기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의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의 한을 갚는 것.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최승철의 죽음.
그가 죽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면, 사자들의 한도 조금은 가벼워지리라.
"그분들께 제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는 화산의 이름을 걸고 정식으로, 제대로 사과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즉, 그녀는 자신이 직접 화산의 장(將)이 되어 대국민적 사과를 하려는 것이다.
결심.
결정.
각오.
결단.
최은하의 눈빛으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좌절이나 절망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잠깐의 대화가 도움이 된 걸까.
[최은하에게 주어진 '좌절의 운명'을 비트셨습니다.]
[보상으로 2만 선업이 주어집니다.]
시스템을 보니 그런 듯싶었다.
이윽고 최은하가 재차 말했다.
"도와주세요."
잘 보니 양손이 떨리고 있다.
그녀로서도 꽤나 큰 결심을 한 셈.
아니.
'이미 결정은 내린 상태였어.'
다만 그 결정을 실행할 힘이 없어 좌절했을 것이다.
"염치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에겐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화산에는 온통 적뿐이라······."
그래서 이전석에게 부탁한 거겠지.
찾아서 도움을 요청할만한 사람.
최은하에겐 그런 사람이 이전석밖에 없었으니.
비교적 최근에 만났으나.
선의로 목숨을 구해주고.
그럼에도 불필요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은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예."
나지막한 최은하의 물음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 씨가 직접 화산에 복수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제가 직접? 하지만 저는······."
비각성자.
최은하가 그 단어를 말하기 전이었다.
우웅-.
최은하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다름 아닌 이전석이 문자를 보낸 것.
그곳에는 어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건······."
"지금부터 거기로 찾아가세요."
"경기도 안양시?"
의아해하는 최은하에게 이전석이 말했다.
"회색 지붕에 오래된 초가집입니다. 그 집의 대문을 한 네 번쯤 두드리면, 도깨비 같은 외뿔을 다신 어르신 한 분이 나올 겁니다. 그럼···."
이전석이 말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문득.
가게 구석의 메모지를 발견했다.
이전석은 직원의 허락을 받고 메모지 한 장을 때왔다.
하는 김에 카페에서 펜도 빌리고.
[은(恩)을 갚을 시간이오, 노괴. 이 아이를 제자로 삼아 보호해주시오.]
거기에 그만이 알고 있는 암호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어르신한테 이 쪽지를 건네주세요."
이전석은 메모지를 고이 접어 최은하에게 건넸다.
"그분이 은하 씨한테 싸울 방법을 알려주실 겁니다."
"···싸울 방법이요?"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가보면 아실 겁니다."
"그러니"라며 말을 잇는 이전석.
"제가 찾아갈 때까지 거기서 숨어 지내시면 됩니다."
최은하가 접힌 메모지를 빤히 쳐다봤다.
이번에도 아주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이윽고.
"감사해요."
최은하가 울음을 참는 어조로 말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하지만.
"그거 아시죠? 아직 북한산에서 살려드린 것도 못 갚으신 거."
"그, 그건······."
"농담입니다."
이전석이 장난스레 웃었다.
"뭐, 정 고맙다면 나중에 화산의 보물고나 열어주시면 됩니다."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한 창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냐며 일갈했겠지만.
"그럴게요."
최은하는 굳게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눈을 뜬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전석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열심이군.'
의도적으로 은혜를 입히고 그걸 이용하려고 했던 건 맞다.
다만 이전석 본인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최은하는 이전석에게 더 큰 은혜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최은하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석은 대답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이윽고 그녀가 급히 카페를 나갔다.
혹시 모를 화산에서의 미행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거기로 찾아가세요.
이전석이 알려준 주소를 목적지로,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그분이 은하 씨한테 싸울 방법을 알려주실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믿기질 않았다.
싸울 방법이라니.
비각성자인 그녀에 반해, 최승철은 S급의 헌터였으니까.
아무리 단련한대도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최은하는 이전석을 믿었다.
그가 보여준 선의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것밖엔 없어.'
믿지 않는다고 한들 다른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산에는 온통 그녀의 목을 노리는 이들밖에 없었으니.
그래서 최은하는 이전석을 믿었고, 또한 그의 말에 따랐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
그걸 빤히 쳐다보며, 최은하는 생각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 ※ ※
홀로 카페에 남은 이전석.
그가 망고라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실제 과즙으로 만들어서 그럴까.
꽤 달달하니 맛이 좋았다.
이전석은 망고라떼를 한손에 들고 카페를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카드를 한 장 써버렸군.'
카드.
그만이 알고 있는 정보.
그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소모했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화산을 무너트리기에 최은하 만큼 중요한 수단도 달리 없었으니.
비단 무너트리는 것만이 아니다.
추후 길드장이 될 그녀를 잘 이용한다면, 화산을 꼭두각시처럼 제 뜻대로 이용할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지금은 그것보다······.'
이전석이 숨을 참았다.
희미해지는 기척.
가게를 나와 최은하가 향한 길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음······?!"
복면 쓴 남자 한 명을 붙잡았다.
담벼락을 뛰어넘으려던 놈의 다리를 그대로 왼손으로 잡은 채 바닥에 내려친다.
쿠웅-!
"커헉···!"
희미하게 금이 가며 파이는 땅바닥.
남자가 충격에 피를 토한다.
광폭화까지 써서 내쳤으니 당연한 일.
잘 보니.
"화산에서 보낸 자객인가."
가슴팍에 익숙한 배지가 달려 있다.
이전석은 그가 최은하를 미행하고 있으며, 지금도 멀어지는 최은하를 따라가려 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어, 어떻게 나를···!"
"어떻게고 뭐고, 그렇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으면 모를 리가 없지."
이전석이 오른발로 자객의 목을 짓밟았다.
"크흐윽······!"
복면으로 스며드는 새빨간 피.
자객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고통스러워한다.
반면 이전석의 태도는 너무나 태평했다.
한손에 망고라떼를 든 채 그 맛을 음미한다.
흡사 미친놈과도 같은 광경.
적어도 그에게 붙잡힌 자객이 보기엔 그랬다.
"그래서."
이내 망고라떼를 전부 마신 이전석이 텅 빈 잔을 발화로 불태워버리며 말을 이었다.
"너희 같은 귀하신 분들이, 대체 뭣 때문에 벌레들이나 들를법한 장소까지 왔는지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진득하게 말이야.
하하-.
이전석이 소름끼치는 웃음을 흘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5화
고독(蠱毒)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