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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실력 부족

세 번째 오늘.

악력 훈련, 전투 복기는 그대로 했다.

엔크리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똑같은 하루,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내가 눈치 못 챘던 거지.'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크랑은 아침을 걸렀고 점심 이후에야 돌아왔다.

의무 막사 병사도 자리를 오래 비웠다.

본래라면 항상 막사를 지키는 게 일이었던 병사다.

그 외에는 같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의무 막사에 환자가 몇 있는 것도 비슷했다.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 앉아서 주변을 오가는 병사를 관찰했다.

아무래도 이쪽은 후방인지라, 전투 병력이 전방에 비해 적긴 했다.

사람이 끄는 짐수레 중 하나의 바퀴가 부러져 수레가 옆으로 기우뚱 무너졌다.

여기저기서 병자의 신음이 들렸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덕에 불평을 토하는 병사가 있다.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대단한 경계 태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암살자 몇 놈을 놓칠 수준은 아니지.'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암살자와 맞서며 소란을 피우면 끝이다. 마음가짐을 다잡는다.

나머지는 평소와 똑같이 보냈다.

"그거 안 지겨워?"

크랑의 일상적인 질문이 있었고.

"돌아가면 두고 보자, 이 자식들."

벤젠스의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있었다.

밤이 깊었다.

엔크리드는 잠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침상에 궁둥이를 반쯤 걸치고 앉았다.

그는 앉은 채로 자신이 아는 정보를 되새겼다.

암살자가 오는 시간은.

'세 번째 불침번이 교대한 후.'

사용하는 무기는 독침과 칼날.

여자 또는 아이처럼 보이는 체형.

의심되는 용의자는 새로 부임한 중대장.

노리는 건 아마도 크랑.

아는 건 이게 전부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란만 피우면 되는 일인데.

교대하는 불침번을 보며 엔크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으, 오줌?"

경계를 서던 병사가 하품하며 물었다.

"아니, 그냥 잠이 안 와서."

"내일이면 본대 복귀라면서요?"

불침번을 서던 병사가 슬쩍 웃음을 보인다. 주근깨와 축 처진 눈, 순한 인상의 병사였다.

엔크리드는 분대장 지위니, 일반병보다 직급이 높긴 했다.

"그렇지."

"긴장돼서 잠이 안 오는 겁니까?"

"아니, 달이 밝아서."

엔크리드의 말에 주근깨 병사가 머리 위로 고개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구름이 달빛을 야무지게 가린 밤하늘이다.

저 멀리 밝게 빛나는 별이 반짝거리긴 하지만,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횃불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달이요?"

"농담이다."

엔크리드는 말하며 옆 막사 불침번을 슬쩍 봤다.

아무리 군기를 다잡아도 저런 병사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슬쩍 천막 기둥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조는 불침번이 보였다.

"하하."

주근깨 병사가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 횃불이 밝아서 못 자겠어."

"예민하시군요."

"어릴 때부터 그런 편이었지."

빈말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편이었다.

잘 듣고 잘 맡고 맛도 잘 분간했다.

오감이 예리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눈치도 못 채고 당했다 이거지.'

어지간히 은신에 재주가 있는 상대였다.

하긴 암살자가 은신과 잠입에 자신이 없다면 뭐에 자신이 있겠나.

어둡다. 밤하늘의 별과 횃대에 타오르는 불빛을 보며 엔크리드는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더 건넸다.

고향은 어디고, 어쩌다 군대에 들어왔는지에 관한 그런 이야기.

주근깨 병사는 거리낄 것도 없이 제 얘기를 줄줄이 했다.

자세히 듣지는 않았다.

엔크리드는 말하면서도 뒤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목 언저리를 자꾸 손으로 만졌다.

'목에 맞았기 때문에 독이 바로 효과를 보인 거다.'

목이 아니라 팔뚝에 맞았다면 대응할 시간이 충분했을 거다.

대비다.

깨어 있다면 소리 지를 여유 정도는 충분히....

"로라가 절 기다린다고 했...."

주근깨 병사는 한창 고향에 있는 여자 친구에 관한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 순간 푹- 하고 뭔가가 주근깨 병사의 목을 뚫고 나왔다.

'칼날!'

목 앞으로 손가락 길이만큼이나 칼날이 튀어나왔다.

피가 왈칵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저 칼을 뽑기 전에는 저게 곧 출혈을 막는 도구가 될 테니.

주근깨 병사가 옆으로 휘청하더니 어느샌가 입이 틀어막힌 채로 소리 없이 무너진다.

핑- 그리고 무언가가 엔크리드를 향해 날아왔다.

그 모든 동작이 한 호흡이었다.

엔크리드도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목을 손으로 감쌌다. 픽 하고 손등 위로 독침이 꽂혔다.

이제 고함을 지를 차례였다.

여기 암살자가 있다!

습격이다!

라든지.

하다못해.

아아아아아아!

이런 의미 없는 고함이면 충분했다.

그랬는데.

텁.

뭔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도 없고 경고도 없다.

엔크리드는 누군가 자신의 목뼈를 잡고 비트는 걸 느꼈다.

우두둑.

이후 목 뒤로 화끈한 통증과 함께 칼날이 쑥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하도 쑤심을 많이 당해 봤더니, 이제는 들어오는 칼날의 깊이와 부상의 정도까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엔크리드는 찔린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뜨끈한 피가 목덜미부터 흘러서 가슴까지 적셨다.

상대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

엔크리드에게는 그쪽 상황까지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크랑은? 벤젠스 소대장은?'

왈칵왈칵 생명력과 같은 피를 쏟아 내면서 엔크리드는 제 앞에 널브러진 둘을 확인했다.

하나는 주근깨 병사였다.

목이 뚫려 죽었다.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며 천막 바닥을 적셨다.

'저 친구 이름이 뭐였지?'

별 얘기를 다 했는데 하나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천막 입구 안쪽, 벤젠스 소대장도 보였다.

이쪽도 목이 졸렸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크랑은 보이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고개를 들어 천막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움직이자, 꽂힌 칼이 흔들리며 끔찍한 통증이 따라왔다.

"끄으허륵."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몸을 세워 바라봤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자가 보였다.

찢어진 천막 뒤쪽, 그 앞을 막은 요정족 여자가 보였다.

'역시 너였냐.'

새로 부임한 중대장이었다.

아무리 눈썰미가 없어도 이걸 못 알아볼 순 없었다.

"벌써 빼...."

거기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섞인다.

여기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다시 시작된 오늘.

'염병.'

피식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상대는 암살자.

야수의 심장이고 발렌 식 용병검이고 뭐고 간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마주하고 싸워야 뭘 해도 할 거 아닌가.

근데 일언반구 말도 없이 대뜸 목을 찌르고 독침부터 날린다.

팍 하고 모포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침부터 미쳐 버린 거냐?"

날아간 모포를 반쯤 머리에 뒤집어쓴 벤젠스 소대장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오냐, 죽어 보자. 이거 하극상이지?"

엔크리드는 절뚝이며 일어나는 벤젠스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야! 도망가냐? 이 새끼가? 너 잡히면 뒈진다!"

벤젠스의 외침 뒤로.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일어난 크랑의 목소리까지.

다시 같은 하루의 반복이다.

'한번 해 보자고, 암살자 씨.'

엔크리드는 네 번째 밤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단검 몇 자루도 챙겼다.

그와 함께 주근깨 병사를 꼬드겨 막사 안으로 들어오게도 했다.

"지킬 사람이 여기 다 있잖아?"

설득은 쉬웠다. 이 순박한 시골 청년은 엔크리드의 말에 홀라당 넘어왔다.

횃대 하나를 안쪽으로 가져와서 꽂았다.

막사 안이 확 밝아졌다.

'자, 암살자 여러분. 이렇게 밝은 데서도 작업이 가능할까?'

가능했다.

언제 숨어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가까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천막 위에서 뚝 하고 암살자가 떨어졌고.

떨어진 그림자는 주근깨와 엔크리드의 목에 독침을 꽂았다.

죽기 직전, 엔크리드는 천막이 서걱 하고 잘리는 걸 봤다.

하얀 칼날.

너머의 검은 인영.

안쪽에 가져다준 횃대 덕분에 불빛이 일며 상대의 얼굴을 비춘다.

새로 부임한 중대장이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다섯 번째 오늘이 밝았다.

"오냐."

알면서도 당했다. 네 번째였다.

오기가 생겼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시도하되, 이번에는 정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쪽 막사의 침대는 밑을 띄워 둔 형태였는데.

거기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짧은 화살을 던졌다. 던지는 종류의 화살 암기다.

화살촉에는 독이 발려 있었다.

맹독이었다.

칼에 찔려 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극통이 찾아왔다.

심장을 개미가 물어뜯어 먹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며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고로 뭘 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여섯 번째 오늘도 비슷했다.

간간이 조금씩 변화는 있었다.

죽기 직전, 암살자 무리가 뭐라 말하는 걸 들었다.

"너, 호...."

"네가...."

"이건 경...."

"공정...."

물론 그걸 들었다고 변하는 건 없다.

뭘 당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잘해야 단어 몇 마디가 전부인데.

어찌어찌 머리를 굴려 이어 보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김에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시도를 다 해 봤다.

포기를 모르는 건 장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이라는 건 고금의 진리이니까.

끝없는 도전이 반드시 답은 아니라는 거다.

다행히도 엔크리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스무 번의 실패.

'소리 지르는 것도 무리.'

암살자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거다.

한 번은 아예 상대가 뭘 시도하기도 전에 습격이라고 외쳐 보기도 했다.

주변 막사의 병사가 엔크리드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크랑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것도 봤다.

대충 세 번째 불침번이 온 이후니까. 타이밍에 맞춰 시도한 선제공격이라 할 수 있었는데.

"습격? 어디?"

결과적으로 옆 소대장한테 정강이만 까였다.

먼저 소리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오늘을 그냥 넘기게 되는 걸까?

그럼 정강이를 까인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소란이 끝나고 엔크리드가 개꿈을 꾼 거로 대강 핑계를 댄 이후.

"어떻게 알았지?"

엔크리드는 처음으로 암살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쇳소리가 섞인 남자였다.

그리고 죽었다.

목에 칼날이 꽂혀서.

이런 시도가 있었다면 다른 시도도 있었다.

"벤젠스 소대장님. 혹시 저 때문에 약 오르십니까?"

"뭐, 시발?"

"제가 아니라 크랑 때문이죠? 크랑이 자꾸 헛소리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엔크리드는 가벼운 얘기로 둘의 정신을 환기하고 경고했다.

"암살자가 올 겁니다. 오늘 밤."

"...곱게 미쳐라. 또라이 새끼야."

벤젠스는 믿지 않았다.

"출생의 비밀이 있어? 너? 암살자가 왜 와?"

크랑도 믿지 않았다.

믿음이 부족한 인간들이었다.

실패였다.

시도는 다양했으나 실패 원인은 비슷했다.

'실력 부족.'

한 가지 이유로 귀결할 수 있었으니까.

암살자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야수의 심장도, 발렌 식 용병검도.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밤중에 렘을 데려와?'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렘이라면 혹은 다른 분대원이라면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왕눈이만 아니면.'

안 당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데려와?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일개 분대장이고 그들은 일개 병사다.

실력을 떠나서 지위가 그렇다.

의무소대를 책임지는 소대장에게 말해 본다면?

'퍽이나 들어주겠다.'

핑계는 뭐라고 대고?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분대원을 데려오는 건 무리였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있었다.

같은 오늘의 반복.

엔크리드는 왕눈이를 보는 시간과 장소를 안다.

'조언을 구해 볼까.'

자신의 분대원들은 전부 재주가 살벌하게 뛰어나다.

'데려오는 건 아니더라도.'

의견은 들어 볼 수 있겠지.

오기로 버티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다.

엔크리드는 왕눈이를 만나기 위해 궁둥이를 뗐다.

"어디 가냐?"

뒤에서 벤젠스 소대장이 물었다.

크랑도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고.

엔크리드까지 나가니 물은 듯했다.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외로움 타십니까?"

"뭐, 시발?"

"아니면 말고."

"야, 너, 이, 씹."

무시하고 밖으로 나와 걷는다.

"너 내가 나으면 두고 보자!"

막사 안에서 벤젠스 소대장이 외쳤다. 엔크리드는 귀를 후볐다.

왕눈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표정이 더럽게 안 좋긴 한데.

왕눈이 표정이 뭐가 중요할까.

이쪽은 상대 얼굴도 못 보고 스무 번이나 오늘을 반복하고 있다.

"왕눈아."

어딜 가는지 바삐 걷던 왕눈이가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엔크리드를 발견했다.

"분대장님? 이제 멀쩡하시네?"

"잠깐 얘기 좀 할까?"

"아, 제가 좀 바빠서. 그, 말 상대가 필요하면 저기, 작센 있습니다."

왕눈이는 진짜 바쁜지, 엄지를 들어 뒤쪽을 가리키고는 발을 재게 놀려 걸어갔다.

붙잡을 틈도 없었다. 어차피 왕눈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분대원을 불러오라 시킬 참이었다.

엔크리드는 왕눈이가 손가락으로 알려 준 천막으로 향했다.

대형 천막이 아니라 작은 천막이었다.

보급 물품 중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정비 막사다. 고장 난 물자를 모아 둔 천막이니,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 정비 막사 사이에 있는 작은 천막이었다.

사람 둘이나 들어가면 딱 맞을 것 같은데.

"분대장님?"

거기에 작센이 있었다.

적갈색 머리칼에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눈.

무난한 미소를 보이는 분대원.

그리고 렘의 평가에 따르자면.

제일 뒤가 구린 놈.

상대와 맞상대하는 것보다 빈틈을 후비고 찌르는 걸 즐기는 변태 새끼.

라는 말도 했었다.

긁적.

엔크리드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곤란한 시간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시간 있어?"

작센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 천막 사이에서 꼬불꼬불한 노란 머리칼의 여자가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가 쏙 들어갔다.

"볼일은 다 끝나서."

작센이 단추를 다 풀어헤친 셔츠를 어깨 어림에 걸치며 일어났다.

17. 뒤에 눈을 달면

재주가 좋다면 이 안쪽에서도 창부를 만날 수도 있었다.

창부들도 도시나 시골 마을보다 부대 내에 들어오는 걸 선호한다고 들었다.

일단 평소보다 화대를 많이 받을 수 있으며.

알음알음한다곤 해도 이게 군법과 규율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

여기서 만나는 남자는, 병사든 지휘관이든 소란을 피우는 걸 극도로 피했다.

괜히 여자를 불렀다는 걸 들켜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드는 걸 즐기는 놈은 없을 것이다.

고로 여기는 돈 많이 주는 호구 천지라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재주도 좋네.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왕눈이가 주선했을 거고.'

"거, 음, 부럽다. 재주 좋네?"

"굳이 욕구 불만인 채로 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할 수 있다면 하고 사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작센은 셔츠 단추를 채우며 걸었다.

막사에 남은 여자와는 정말 화폐로 엮인 사이였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추를 여미는 셔츠 사이로 빨갛게 부어오른 키스 마크가 보였다.

아주 뜨거운 한때를 보낸 듯했다.

작센의 붉은색이 섞인 갈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 흩날렸다.

외모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잘생겼다.

그래, 이 정도면 여자가 꼬일 만도 하지.

"무슨 일입니까?"

엔크리드를 슬쩍 보며 작센이 묻는다.

평소와 같다. 수더분하고 수수한 태도.

분대원 작센.

렘이 평가하기를, 빈틈을 후비는 걸 선호하는 변태.

엔크리드는 아주 잠깐, 전장에서의 작센을 떠올렸다.

렘이 질주하는 맹수를 닮았다면 이쪽은.

'딱히.'

작센이 싸우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렘이 말해서 아는 것과.

창으로 적군의 등을 쿡 하고 찌르는 걸 한번 본 것.

그게 전부였다.

다만, 실력을 유추할 수는 있다.

그 렘조차 자잘하게 상처를 입곤 하는데.

이쪽은 그런 상처가 없다.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경미하다.

"너, 제대로 안 싸울 거냐?"

다만, 가끔 렘이 이리 말하며 으르렁거릴 때가 있었지.

그럴 때면 작센은 렘을 대놓고 비웃곤 했다.

"피를 보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피를 보는 걸 안 즐기면 그냥 뒈지시든가. 아니면 여기에 있지를 마, 음흉한 새끼야."

"그건 네 알 바가 아니고."

"오냐, 머리를 쪼개 줄까, 몸통을 쪼개 줄까?"

"그 전에 네 심장에 엄지손톱만 한 구멍을 두 개만 내주지."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팔뚝에서 피를 흘리며 도끼를 드는 렘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작센을 보며 엔크리드가 둘 사이에 섰으니까.

"서로 죽이고 싶다면 한 명이 적군 쪽으로 가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굳이 여기서?"

이후에도 둘은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긴 했지만, 싸우진 않았다.

말로만 하면 안 되지만, 둘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면 귀신같이 진정되곤 했다.

그렇게 말린 분대원이 어디 한둘인가.

렘은 작센을 음흉한 들고양이라고 불렀고.

작센은 렘을 미친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엔크리드는 작센이 어디선가 주워 온 창으로 적군의 등을 찌르는 것도 봤다.

상대는 찔리고 나서도 작센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

두리번거리다가 쭈그려 앉은 작센에게 발목이 차였다.

등에 창을 박은 채 바닥에 버둥거리던 적군의 모습이 선연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궁금했기에, 한가한 시간에 물었었다.

"상대 신경이 온통 전면에 쏠려 있었으니까 된 겁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렘이야, 제가 알고 가진 걸 쉬이 알려 주는 편이지만.

작센에게도 같은 걸 바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엔크리드가 쉬이 포기하진 않았지만.

"분대장?"

작센이 발을 멈췄다. 어느새 엔크리드가 있는 의무 막사 앞이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듣고 생각에 잠겨 버렸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엔크리드가 4중대 4소대 사고뭉치 분대의 분대장이 된 건 노려서 한 게 아니다.

그 누가 계획해서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러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필요한 게 있으면 요구한다.

엔크리드는 분대원을 그렇게 대했다.

"만약 너 같은 놈이 내 등을 찌르면 어떻게 피하지?"

작센은 엔크리드의 말을 한 번에 이해했다.

몇 번이고 등 뒤로 몰래 다가가는 수법을 얼마나 알려 달라고 졸라 대는지.

지독할 정도였다.

며칠에 한 번씩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차라리 징징거렸다면 대하기 더 편했을 것이다.

적당히 겁줘서 쫓아내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분대장은 그러지 않았다.

알고 싶다, 배우고 싶다, 그런 열망만 보인다.

그 열정에 감복하진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대로 두면 아마 이 분대에 있는 내내 저렇게 며칠에 한 번은 말할 것이다.

이 작자를 평생 알고 지내면 아마 평생 물어볼 것이다.

작센은 지독하다는 말을 쉬이 하지 않는다. 사람의 한계를 너무 잘 아니까.

정신력, 신념, 의지라는 말이 가진 허황함을 안다.

그런데도.

그에게 엔크리드는 지독한 인간이었다.

검과 무예에 관한 열정만큼은 어떤 누구보다 뜨겁다.

그 열정이 그를 이렇게 움직이는 걸까.

"왜 그렇게 배우려고 합니까?"

"그걸 알면 조금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겠지."

버는 돈을 어디 교습소에 다 갖다 바친다면서 오래 살아남아서 뭐 하려고?

작센은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알아서 뭐 하겠나.

어차피 지나갈 인연이 아닌가.

이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작센은 성심껏 설명했다.

그렇다고 분대장이 그걸 익힐 순 없었다.

당연했다.

그건 이쪽 '계열'이 쓸 만한 게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 질문은 조금 더 신선했다.

"늑골이 나간 게 눈먼 칼, 아니 눈먼 발길질에 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센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다.

이전 전투에서 프록에게 차인 게 기척을 못 느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큰 오산이니까.

"아니, 그건 상대가 무지막지한 거고."

"그럼?"

드물게 물음이 이어졌다.

"궁금해?"

그 물음에 엔크리드는 오히려 되물었다.

그는 작센이 평소에 보이는 태도를 잘 안다.

그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가까이 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작센을 아주 친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만.

444분대를 제하면 그를 딱히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적당한 거리.

그게 작센의 평소 모습이다.

그러니 이리 묻는 게 어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렇게 물으면 작센이 더 묻지 않고 답을 줄 것을 알았다.

의도해서 이런 관계가 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니 이들이 평소 보이는 반응과 스탠스는 잘 알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뒤에서 창을 찌르는 놈이 있으면 먼저 알아채면 됩니다."

역시나 설명은 최악이다.

렘이 말하길 자신이 설명은 못 한다고 하지만, 작센이 비하면 그는 명가의 검술 선생도 해먹을 수 있을 것이다.

참 다행인 건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선생을 만나 봤고 경험해 봤다는 거다.

그중에는 실력보다 더 잘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고.

실력은 괜찮지만, 가르치는 건 젬병인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선생, 모든 순간에 엔크리드는 돈값을 받아 냈다.

고로 잘 배우는 방법이야 차고도 넘쳤다.

"어떻게 먼저 알아채는데?"

엔크리드가 물었다.

"주변을 항상 둘러보면 됩니다."

"둘러봐도 당하면?"

"더 자주 둘러보십시오."

"종일 고개를 돌리고 다닐 순 없잖아?"

"분대장이라면 가능합니다."

"아니, 안 돼."

작센 자식은 가끔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렘처럼 농담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진지하다.

몇 번의 경험으로 엔크리드는 대응법을 알았다.

단호하게 못 한다고 하는 거다.

과연 그 단호함에 작센은 생각이 바뀌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더니 슬쩍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무 막사 옆에 이런저런 짐을 쌓아 둔 곳이었다.

그 위에 대강 궁둥이를 걸치고 앉은 그가 옆 천막에 슬쩍 몸을 기대며 말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오늘 하루는 길어."

적어도 자기 전까지는 시간이 팽팽 남아돈다.

"끼니는 챙겨야죠?"

"한 끼 굶는다고 죽어? 내가 앞으로 너 대신 식사 당번을 평생 해 주지. 아, 물론 같은 분대에 속해 있는 내내."

어차피 오늘 하루가 지나면 없어질 약속.

엔크리드는 약속을 남발했다.

"그 말 농담이면 재미없을 건데요?"

우스운 게, 444분대원 모두가 가장 싫어하는 게 설거지 식사 당번 따위다.

그것보다 전투가 낫다는 이들이다.

이유? 다른 분대원이 처먹는 걸 챙기는 게 싫고 이 새끼들이 먹은 걸 닦아 주는 게 싫단다.

한결같이 미친놈들이지만.

배울 건 많다.

적어도 전장과 전투에서만큼은 엔크리드에게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다.

만약 작센이 이걸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따위 걱정할 시간에 집중이나 하고.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오늘에서 렘이나 다른 분대원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전장에서 잔상처가 남지 않는 병사.

작센이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췄는지는 모른다.

직접 눈으로 본 건 없다.

다만, 결론이 그를 대단한 병사라고 말한다.

렘의 태도가 작센의 실력을 방증한다.

그럼 배울 게 있을 것이다.

그게 딱히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분명 나중에는 쓸 만할 것이다.

야수의 심장은 뭐, 배울 때부터 쓸 만했던가.

"빈말할 만큼 한가하진 않아."

"아까는 오늘 내내 시간이 있다면서?"

"그건 다른 얘기고."

"좋습니다. 약속은 지키겠죠."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예 작센 앞에 주저앉았다.

오가는 병사 몇이 둘을 봤지만, 딱히 말을 거는 이들은 없었다.

오가는 병사와 물자 수레 사이에서 둘은 마주 앉았다.

한쪽은 짐에 앉아서 눈높이가 높았지만.

그게 딱히 신경 쓰일 수준은 아니었다.

작센은 묘한 기분이었다.

엔크리드는 철퍼덕 주저앉더니 자신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자갈이나 박힌 돌 따위가 있으니, 불편할 법도 할 텐데.

무엇보다 수레가 오가며 흙먼지가 일어나는데도 그런 환경 따윈 잊은 눈이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얘기에 집중한다.

그 눈빛의 진지함에 작센이 입을 열었다.

"사람에겐 오감이란 게 있습니다."

"눈, 코, 귀 그런 거 말하는 거야?"

"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죠."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올까?

그런 의문이 들 법도 하지 않나?

엔크리드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저 경청한다.

좋은 태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올 만큼.

본래는 오감만 단련하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던 작센은 설명을 시작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소리였다.

"계속 고개를 돌릴 수 없다면 뒤에다 눈을 달면 됩니다."

마음에서 나왔다고 입에서 나온 말이 친절하란 법은 없다.

작센은 자신이 말하고도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설명이 잘못됐다.

"그렇군."

그런데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참.'

작센은 말을 골랐다.

이런 걸 가르칠 줄은 몰랐지만.

안 될 건 없으니.

수련한 것의 일부만 가르치면 될 것이다.

그동안 봐와서 안다.

분대장은 평범하다. 그의 감각 또한 그렇다.

타고난 게 없다는 거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하는 훈련은 일반인을 대상으로도 효율이 나온다. 꾸준히 서너 달쯤 하다 보면 꽤 괜찮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본래는 동굴 같은 곳에 가둬 두고 하는 수련이다.

그보다 더 좋은 수련은 뭐, 분대장을 죽이기로 작정한 암살자에게 수십 번 목숨을 위협당하면서 하면 더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니.

"눈으로는 항상 사방을 둘러볼 순 없지만, 귀로는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마물 오줌 같은 설명이었지만.

"아, 그래, 소리는 앞과 뒤를 가리지 않으니까."

경청하는 자세의 엔크리드는 금세 말을 알아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도 앞과 뒤가 있습니다. 소리를 구별하다 보면 청각이 발달하게 될 겁니다. 가령 앉은 자리에서도 할 수 있는 훈련이죠. 자, 들어 보십시오."

당연히도 이런저런 소리가 들렸다.

수레 구르는 소리, 투덜대는 병사의 말소리, 신음을 흘리는 병자의 소리, 참으라는 무감각한 의사의 목소리, 그 외에도 오늘따라 꽤 세게 부는 바람에 천막에 꽂은 깃이 파라락거리는 소리까지.

짧은 침묵 끝에 작센이 말했다.

"오늘은 서풍이고 의사는 여기서 앞쪽으로 세 번째 막사에 있군요. 그리고 저 수레는 왼쪽 바퀴 이음새가 헐거워져 있고요. 운이 좋다면 이틀 뒤에, 운이 나쁘다면 오늘 바퀴 이음새가 틀어지겠군요."

그 말대로였다.

잘 구르던 수레바퀴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무너졌다.

"에이, 진짜!"

수레를 몰던 병사가 짜증을 버럭 냈다.

"소리를 구분하고 분간하면 항상 주변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엔크리드는 놀랐다.

이런 게 되는 건가? 된다는 거야 지금 작센이 보여 줬다.

"뒤에 눈을 다는 법, 청각 단련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청각 수련은 환경이 중요하지, 수련 방법이 어렵진 않다.

그저 소리를 구분하는 게 전부니까.

물론 쉽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해서 듣고 구분하면 더 도움이 되겠네? 그게 익숙해지면 다른 방식으로 하고?"

분대장은 검술을 비롯한 무예 실력과 별개로 확실히 듣는 건 잘했다.

잘 듣는다는 건, 이해가 빠르다는 말과도 같았으니.

분대장은 금세 작센의 말을 이해했다.

"네, 맞습니다. 무음으로 움직이는 암살자의 걸음이나 기척을 읽는 법 중에는 주변에 흐르는 공기 소리로 구분하는 것도 있습니다. 잘 아는 암살자가 있다면, 몰래 목을 노리고 오라고 하면 좋을 겁니다. 그게 제일 좋은 훈련 수단이 되겠지요."

이후에 한 얘기는 반은 농담이었다.

실제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으니까.

농담이긴 했으나, 확실히 필요치 않은 말을 하긴 했다.

쓰레기 같은 설명을 척척 이해하기에 작센이 자기도 모르게 말한 거다.

분대장과는 영영 연이 없을 이야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랬는데.

"그래?"

분대장은 오히려 눈을 더 빛낸다.

참 알 수 없는 인간.

작센은 엔크리드를 그리 평가했다.

18. 살았네?

밤이 됐을 때, 암살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했다.

별 의미는 없었다.

소리나 기척 따위가 느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하자.'

고민 따윈 없다. 수련법이 정해졌다면 소가 밭을 가는 가듯 그냥 하면 된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독침이 날아오기 전, 분명 암살자는 천막에 들어온다.

그 기척을 듣는 거다.

매일 누워서 잠이 들면 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밤 쪽 수련만 반복하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면 좋다.

낮에는 작센을 찾았다.

청각 단련을 배운 바로 다음 날의 오늘.

엔크리드는 천막 앞에서 수수하게 기다려야 했다.

평소보다 너무 일찍 온 탓이었다.

안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기에 더 가까이 가진 않았다.

무슨 밀어를 속삭이는지는 몰라도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다린 뒤, 작센을 만나고.

"같이 좀 걷지."

그리 걸으며 말을 나눈다. 같은 질문, 같은 태도.

엔크리드는 매번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크랑이 했던 경청의 태도를 보였다.

잘 듣는 건, 잘 배우는 것과 연관이 깊었다.

일단 잘 듣고 이해해야 다음이 있는 법이니까.

깨닫지는 못했어도 본능적으로 듣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엔크리드의 잘 들었다.

그런 면에서 경청의 태도는 더없이 훌륭한 도구였다.

작센은 번번이 같은 말을 반복했고.

엔크리드는 가끔은 천재를 흉내 내야 했다.

"머리 뒤에 눈을 단다는 거, 듣는다는 거지? 귀로 들으면 된다는 거?"

"...딱히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군요."

"소리에도 방향은 있구나. 앞과 뒤, 좌우를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들려오는 소리와 세기를 통해서 맞지?"

"천재였나?"

"뭐라고?"

"아닙니다. 생각보다 영특하시군요."

"왜 내가 멍청이로 보였어?"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죽는다. 다시 반복된 오늘.

벤젠스 소대장의 불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 아침 안 줘? 이 새끼 빠져서 어디 간 거냐?"

"네, 배고프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죠."

"뭐?"

"우리 소대장님 그만 징징거리시게 아침 찾으러 갑니다."

"...너 미쳤냐?"

그건 아니고.

무슨 말을 해도 큰 의미가 없으니까 놀리면서 시작해 봤다.

주변에 흘러가는 이들을 눈에 담고.

흘러가는 일 중 일부를 지표로 삼아 반복되는 오늘을 조금씩 다르게 보낸다.

엔크리드는 반은 장난으로 아침을 넘긴 뒤, 하루를 반복했다.

다섯 번, 열 번.

그리 반복하다 보니 천막에서 작센을 꺼내는 것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뻘쭘하기도 했지만, 둘이 나누는 밀어를 우연히 들은 뒤로는 거침이 없었다.

오늘은 어디가 좋았고.

저번에는 어디가 좋았으며.

어떤 자세를 선호한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반복된 오늘에서 엔크리드는 천막을 거침없이 젖혔다.

"작센 시간 있지?"

"...뭡니까?"

"더 할 거면 비켜 주고."

"하고 싶어도 흥이 깨지게 하는군요."

"그럼 나와."

옆에 있던 여자가 황당한 눈으로 '이 새끼는 뭐지'라는 눈빛을 쏘아 낸다.

처음에는 난감하기도 했지만, 익숙해지니 뻔뻔해졌다.

무시했다는 거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도 작센은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다만, 엔크리드가 왜 이러나 궁금해할 뿐이었다.

그의 호기심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게 궁금해?"

"아니요. 됐습니다."

수련도 그렇다. 어느 정도 소리를 듣는 게 익숙해지니, 작센이 의문을 표했다.

"...이런 거 배운 적 있습니까?"

"어릴 때 조부께 조금."

엔크리드는 전쟁고아다.

조부는커녕 부모도 몰랐다.

"그렇군요."

이런 되지도 않은 핑계에도 작센은 그냥 넘어갔다.

엔크리드는 하루를 항상 값지게 보냈다.

찌르기를 훈련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일이었다면, 이번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일이었다.

성과는 있었다.

엔크리드는 더디지만, 착실한 걸음을 이어 나갔다.

'배운 대로 하자.'

한 걸음씩 갈 수 없다면 반걸음씩.

반걸음도 안 된다면 반의반 걸음씩.

그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면 발가락을 꿈틀거리는 것부터.

같은 오늘을 반복하는 게 스무 번쯤 지났을 무렵.

'들린다.'

바람이 깃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고.

끼리리릭.

마차 바퀴에서 나는 껄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맞물리는 톱니가 망가진 태엽 같다.

'부서지는 소리다.'

소리에도 종류가 있다.

어떤 소리는 말하듯 정보를 전해 준다.

가령 깃발을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렇다.

"서풍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쉽습니다. 지금 제가 앉은 쪽을 확인하고 북쪽을 찾은 뒤,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의 방향을 쫓으면 됩니다."

말이야 쉽지. 이걸 단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반복 또 반복.

언제가 그래 왔듯이, 하루와 하루를 쪼개며 사는 것임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

모든 것이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다.

'깃이 흔들리는 소리를 따라.'

자신이 앉은 위치에 따라.

바람의 방향을 알아낼 수 있다. 딱히 실생활이나 전장에 통용될 건 아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야 앉은 자리에서도 알 수 있는 거니까.

다만, 이걸 소리로만 알아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의사의 목소리를 구분하고.

크기를 가늠해, 거리를 잰다.

'제대로 익히면 전장에서도 쓸 만하겠어.'

그러고 보면 작센은 언제나 한발 앞서 위험한 전장은 피했다.

미리 듣고 판단하고 움직인 걸까?

그렇게도 할 수 있나?

지금 당장은 모를 일이다.

소리를 분간하는 게 이 훈련의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듣는 거로 거리를 재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이제 막 이 두 가지를 마친 셈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작디작은 소리를 구분해서 듣는 것.

제일 좋은 훈련은 암살자의 기척을 듣는 거라고 했던가.

'우습지만.'

최고의 환경이었다.

뭔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죽는 건 정말, 생각보다 너무 불쾌했다.

어떤 반항도 없이 훅 가는 그 상황 자체가 최악이다.

그래도.

'이건 기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괜히 주근깨 불침번과 엮이면 번번이 이 친구가 죽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일단은 듣는 것부터.

그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낮에는 수레 구르는 소리, 나무못이 깨져 흔들리는 소리, 반대로 멀쩡한 수레 소리 따위를 듣고.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천막,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분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고되고 괴로울 수 있었지만.

'재밌어.'

엔크리드에게는 달랐다.

그에게는 소소한 성장조차도 기쁨이었다.

야수의 심장을 배울 때처럼 몸을 굴리는 건 아니었지만.

심력 소모가 극심했다.

너무 집중하면 머리통이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서른 번쯤 반복하니, 금세 괜찮아졌다.

조금이지만,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산다.

엔크리드는 그게 몸서리칠 만큼 좋았다.

그렇게 쉰여섯 번째의 밤.

슥.

횃대에서 타오르는 횃불 소리.

밤을 지키는 병사가 졸다가 놀라 창대로 바닥을 찍는 소리.

주근깨 가득한 의무 막사 불침번이 가끔 천막 안을 들추는 소리.

그 소리 사이로 작디작은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휙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

'들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 엔크리드의 귀가 미약한 차이를 구분해 냈고.

들리는 순간, 엔크리드는 서슴없이 옆으로 굴렀다.

'피했어.'

처음 계획은 피한 뒤에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히육.

등 뒤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품에 숨겼던 단검을 꺼낼 틈도 없었다.

다시 앞으로 굴렀다.

시익, 수윽, 쉭.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작은 소음이 계속해서 들린다.

소리로 방향을 구분함으로 엔크리드는 가까스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칼날 끝이 허벅지 어림을 스치기도 했다.

'이건 운이 좋았다.'

잘못했으면 허벅지가 베였을 거다. 생채기도 위험한 상대였다.

독침을 쓰는 놈이 칼날에 아무것도 안 발랐을까.

거듭 구르고 몸을 튕기며 피한다.

야수의 심장이 빛을 발한다.

거듭 위험한 순간이 계속됨에도.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흥분할 필요가 없으니.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것뿐이라면.

'괜찮아. 할 만해.'

반격을 포기하면 피할 수 있다.

칼날이 등을 노리며 길게 세로로 그어진다.

상대의 의도는 명확했다.

스치기라도 하라는 거다.

엔크리드는 이 소란에도 꿈나라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벤젠스의 침상 쪽으로 굴렀다.

구르며 어깨로 침상을 밀쳤다.

퍽.

어깨 근육에 묵직한 충격이 돌아온다.

통증을 참아 내면서 힘껏 들이받았는데도 벤젠스 소대장은 깨지 않았다.

'독침.'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비 또는 수면에 관련한 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한 놈."

이번에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암살자가 중얼거리며 툭 하고 땅을 차는 소리까지 들렸다.

엔크리드는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라, 숨을 몰아쉬었다.

암살자는 상대의 숨이 헐떡이는 걸 느끼곤 오른손에 든 나이프를 찌르며 왼손에 든 독침을 던졌다.

필살의 한 수에 가까웠다.

엔크리드는 가뿐 호흡과는 별개로 잽싸게 대응했다.

나이프는 피하고 독침은 벤젠스 소대장의 팔을 들어서 방패로 삼아 막았다.

픽 하고 독침이 벤젠스의 팔뚝에 박혔다.

막힌 걸 보고 암살자가 주춤하는 사이, 엔크리드는 그대로 천막 입구 쪽으로 몸을 굴렸다.

숨이 가빠 보이는 건 속임수였다.

'이게 바로 발렌 식 용병검, 속임숨이다.'

싸움을 쉽게 끝낼 기회를 주고 거기에 반응하는 틈을 노리는 수작이었다.

보기 좋게 먹힌 한 수다.

구르던 엔크리드가 몸의 탄력을 이용해 반쯤 일어나 천막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처럼 굴었다.

암살자가 훅 몸을 날렸다.

그 또한 속임수였다.

엔크리드는 입구 대신 벽으로 향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며 천막 벽을 그으려 했다.

찢고 뛰쳐나가면 이기는 싸움, 그렇게 생각하는데.

부우욱.

그보다 먼저 천막 벽이 찢어졌다.

잘린 천막 벽 너머.

"좀 늦었군."

목소리와 함께 녹색으로 빛나는 눈이 보였다.

요정 중대장이었다. 암살의 주범.

반사적으로 찌르기를 시도했다.

손에 든 건 단검이지만, 수없이 반복한 기술이기에 몸에 익었다.

왼발을 축으로 몸을 틀며 단숨에 상대를 향해 찌른다.

오른팔이 투창처럼 뻗어나간다.

요정족 중대장은 눈을 빛내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오른손을 안에서 밖으로 휘둘렀다.

턱, 휙.

그 손짓에 찌르기의 궤도가 틀어진다. 동시에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발 축을 걷어찼다.

세상이 빙글 돌며 엔크리드는 곧 땅을 굴렀다.

그 뒤 요정족 중대장은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티디딕.

엔크리드는 외면하고 제 망토를 당기더니 펄럭하고 앞을 막았다.

투두둑 하고 망토 위로 뭔가 박혔다.

독침이었다.

"괜찮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보고 있자니, 천막 밖에서 엎드린 크랑이 보였다.

"호위가 있었나?"

암살자의 목소리에 동요한 기색이 역력했다.

"암살질이라니 구토가 쏠리는군."

요정족 중대장이 망토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엔크리드의 머리는 상황을 이해하기 바빴다.

'암살자가 아니라?'

지키는 쪽이었나?

그럼 죽을 때 본 건, 자신을 죽인 쪽이 아니라 그냥 늦게 도착한 거였고?

"다친 것 같진 않은데?"

"놀라서."

엔크리드는 크랑의 질문에 답하고 몸을 돌렸다.

암살자는 요정족 중대장을 보자마자 내뺄 궁리를 했는지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려 있었다.

중대장은 굳이 그걸 잡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곧 암살자는 뒤로 슬금슬금 발을 빼더니 천막 입구를 박차고 나가서 도주했다.

뛰면서도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이거 참."

크랑이 쑥스럽게 웃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중대장은 천막 앞까지 다가가더니, 기절한 거로 보이는 주근깨 병사의 어깨를 잡고 발을 질질 끌어 천막 안에 던지듯 놓고는.

벤젠스 소대장을 힐끗 본 뒤 돌아섰다.

녹색의 눈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짧은 침묵.

잠시 뒤, 고개를 갸웃한 중대장이 입을 열었다.

"살았네?"

그 질문에는 놀람이 섞여 있었다.

19. 화재

오늘을 견딘다.

단련과 훈련의 반복.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반복된 오늘에서 이 시점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죽으려나?'

중대장의 반응에 처음 든 생각이다. 엔크리드는 곧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죽이려 했으면 아까 했을 거다.'

크랑은 대체 언제 빠져나간 걸까.

그쪽 기척은 느끼지도 못했다.

'씁.'

이런 상황임에도.

'아직 부족해.'

엔크리드는 단련한 청각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건 그의 천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새로 부임한 중대장, 요정족 여자가 빤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살았네? 라고 했던가.

그럼 뭐라고 답해야 하나.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죽어야 했습니까?"

"음, 그건 아니지."

중대장은 입술만 움직여 답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엔크리드를 보고 있다가 뒤로 돌았다.

그러더니 바닥에 쓰러진 독침을 회수했고, 벤젠스와 데리고 온 불침번의 눈을 뒤집어 까는 등 상태를 확인했다.

'그 와중에 병사가 죽진 않았나 확인하는 건가.'

그러더니, 독침을 입가로 가져가 혀에 살짝 대본다.

'약초학에도 조예가 있나 본데.'

가끔 용병 중에 저런 짓을 하는 이들을 봤다.

요정은 자연 친화적인 이들도 많으니, 독과 약에 조예가 깊은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주저앉은 채로 바라만 봤다.

도저히 일어날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누군가 자신의 목을 노린다면 구르든 뒤집든 피하겠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첫 번째로 반복한 오늘만큼은 아니지만, 이것 또한 지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처음이 체력이었다면.

이번에는 정신력을 바닥까지 쓴 기분이었다.

소리만 듣고 거듭된 공격을 수차례 피했다.

그 와중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동안 당한 게 몇 번인가.

기척 없이 당한 적도 있지만, 가까스로 첫 공격을 피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반복된 패턴은 학습이 되는 법이다.

암살자의 행동에도 패턴이 있었고.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그걸 학습했다.

'이것도 한번 해 봤다고.'

두 번째에는 조금 수월한 건가.

아니었다.

절대로 수월한 게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 엔크리드가 반복한 오늘을 봤다면, 그걸 옆에서 함께 했다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립된 오늘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엔크리드는 앉은 채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정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두통이 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런 감이 왔다.

슥.

누군가 옆에서 목에 뭔가를 들이대는 기척에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틀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거기에 크랑이 손날로 엔크리드의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게 보였다.

"정말 뒤에 눈이라도 달린 건가?"

크랑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장난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철없는 친구를 보았나.

크랑이 태평한 말투로 웃으며 말한다.

"아, 미안하다."

정말 암살자가 이 새끼를 노린 게 맞나?

'그럼 얘만 죽이지, 왜 나부터?'

그냥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건가?

정말로 단순히 운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그럴 리가 있나.

일단 크랑을 노린 건 맞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벤젠스와 자신을 노리고 암살자가 오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나랑 벤젠스라면 적당히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게 편하지.'

힘없는 병사 둘을 처리하는 데 굳이 암살자씩이나?

그럴 필요는 없다.

암살자를 보내는 이유가 뭐겠나.

소리소문없이 쓱싹하고 싶단 거다.

누가 시끄럽게 할 일도 없이 해치우고 끝낸다.

죽인 뒤에 남은 시신? 천막에 불을 지르면 된다.

불에 타 죽은 시신에 남은 자상을 누가 신경 쓴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시체를 처리할 방법은 많다.

피와 흔적을 지우고 외진 곳에 던져 줘도 될 것이다.

그럼 탈영이라고 생각하지, 납치와 살인에 무게를 두고 찾진 않는다.

하물며 여긴 외곽에 있는 의무 막사다.

장교급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병급이 머무는 임시 의무 막사 따위란 거다.

누구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이다.

물론 여기도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아마 날 노린 걸 거다."

중대장이 대강 안쪽 상황을 정리하고 천막 바깥을 슬쩍 내다볼 때다.

옆에 쪼그려 앉은 크랑이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음, 왜?"

"너 별로 놀라지도 않네?"

"놀란 거다. 충분히."

"포커페이스가 좋구나. 너."

지금 그런 거에 집중할 때냐?

엔크리드는 핀잔을 뱉으려다가 말았다.

그동안 봐 와서 안다. 이쪽은 태평한 성격이다.

'물론 할 때는 하겠지만.'

이미 지나간 오늘이기에, 크랑의 기억에는 없는 일이겠지만.

주변 모든 걸 빨아들이듯 연설하던 모습이 엔크리드 뇌리에 각인된 듯 남아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 말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언제 왔는지 소리 없이 다가온 중대장이 말했다.

크랑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했다.

"그래서 하여간 미안하다고."

이것도 사과라고 하는 건가.

말한 크랑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곤 중대장과 눈을 마주쳤다.

"누군가에게 명령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부탁하지."

크랑은 벤젠스뿐 아니라 중대장에게도 말을 놨다.

고위 귀족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칼 맞고 뒈져도 할 말이 없으니까.

그가 그냥 입만 연 건 아니었다.

한 걸음.

고작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뿐인데.

그때와 같았다.

그에게 정체가 무엇인지 물었을 그때와 흡사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크랑은 조용히 시선을 받아들였다.

관객은 둘, 배우는 하나.

하지만 그 배우는 소용돌이 같다.

주변의 모든 걸 흡입해서 삼키는 욕심쟁이다.

"부탁해도 되겠지? 이건 빚으로 알고 갚지."

"하십시오."

중대장이 읍하며 답한다.

크랑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늘은 이제 아무도 안 죽었으면 좋겠다."

작지만 단단하고, 고요하지만 폭풍 같다.

목소리에 마력이 있다면 꼭 이럴 것이다.

저 말을 들어주고 싶다. 그리 생각하게 만드는 톤과 어조다.

어떻게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건지.

엔크리드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한 번 겪었던 일이었기에 그렇다.

그리 주변을 빨아들인 소용돌이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크랑이 말하고는 엔크리드에게 손을 내민 거다.

"다리가 풀린 거지?"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엔크리드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마음을 돌린 이유입니까?"

그런 둘을 보더니, 중대장이 묻는다.

"그렇다고 해 두지."

크랑이 답했고.

엔크리드는 둘이 나누는 대화가 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을 마음도 없었다.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중대장은 흠하고 작은 한숨을 뱉더니, 엔크리드를 향해 말했다.

"오늘 일, 함구할 수 있겠나?"

"네, 물론."

그렇게 안 하면 당장 목에 구멍이라도 내줄 기세로 묻는데, 다른 대답이 나올 턱이 있나.

새로 부임한 중대장의 실력은 아까 엿볼 수 있었다.

딱 한 수지만.

'그걸 그렇게 쳐 낼 수 있는 거였나?'

손등 바깥으로 밀어내는 한 수.

손짓 한 번에 엔크리드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되도록 그걸 반복해서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죽으면 그만이다.

오늘을 반복하면 된다.

여기서 함구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죽이지 않으려나?

아니다. 그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 않고도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이야 많을 것이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하물며 일부러 자살하고 싶지도 않았고.

"부탁한다."

무엇보다, 크랑이 이렇게 말한다.

엔크리드는 고작 며칠, 고작 몇 번의 대화였지만.

크랑이란 친구와 쌓인 정이 적지 않음을 느꼈다.

둘 사이는 함께한 기간과 별개로 기묘할 정도로 친밀했다.

"입 다무는 건 내 특기야."

빈말은 아니었다.

분대 내에서 그가 아는 비밀만 몇 개인가.

그중에는 중요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어디에서 말한 적은 없다.

"그럼 이 사태만 해결하면 되겠군요."

중대장이 말하더니, 찢어진 천막과 쓰러진 병사 둘을 봤다.

"더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에는 저 둘도 포함이야."

크랑이 말하고 중대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알면?

눈치를 보니, 크랑의 정체는 밝히기 곤란한 것 같고.

중대장은 고민 중이었다.

"저 불침번이 깨어나면 자기가 습격받은 걸 알까요?"

엔크리드가 궁둥이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모를 거로 추측한다. 안다고 해도 아무것도 못 봤을 거고."

중대장이 반쯤 확신을 담아 말한다. 엔크리드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 게 몇 번인데.

주근깨가 가득한 저 경계병도 아무것도 모른 채 기절했을 거다.

그럼 뭐.

"한 명만 밖으로 업고 나가 주시죠."

엔크리드의 말에 중대장이 그를 돌아본다.

"간단하고 편리한 해결책, 있습니다. 대신 제가 욕을 좀 먹을 수도 있겠군요. 그건 중대장님이 막아 주시면 될 것 같은데."

계획을 말한다. 그걸 들은 크랑은 웃고 중대장은 웃음기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화르르륵!

"음?"

꾸벅꾸벅 졸면서 근무를 서던 막사 앞 불침번은 갑자기 볼이 따끔해서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보니 어디선가 훈훈한 열기도 느껴졌다.

반쯤 잠에 취한 채로 옆을 돌아본 그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불이네?'

불이다. 천막 앞쪽에 붙은 불길이 위로 솟으며 불씨를 휘날린다.

딱.

쥐고 있던 창이 바닥에 떨어지며 난 소리에 잠이 확 깼다.

"부, 불! 불! 불!"

창을 놓친 병사가 외쳤다. 놀란 그는 혀가 꼬였다.

"불! 불! 불!"

'불이야'도 아니고 불만 거듭 외쳤다.

하지만 어찌나 그 말이 다급한지 주변에 있던 이들의 귀에 쏙쏙 박혔다.

"불이야!"

마침 가까이 있던 순찰 경계병이 크게 외쳐 상황을 명료하게 알렸다.

"의무 막사에 불이 붙었다!"

눈치 빠른 순찰병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물 가져와!"

그제야 다른 병사 무리가 하나둘 고개를 들이밀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염병, 막사 안에는?"

"사람이 있었나?"

"있잖아, 그 씹 병사!"

천막 앞에만 붙은 불은 금세 위로, 천막 전체로 옮겨붙었다.

아닌 밤중에 난리가 났다.

까만 그을음과 연기가 위로 솟는다.

어지간히 용기 있는 병사라고 해도 안으로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물 가져오라고!"

그중 보급 중대장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발을 재게 놀리던 이들이 양동이 따위에 물을 담아 왔다.

촤아악!

양동이에 담은 물을 불 위로 뿌린다. 일순간 연기가 치솟았지만.

"길게 늘어서서 받아치기로!"

보급 중대장이 외쳤다. 그가 평소에 짐 좀 날라 본 경력을 발휘했다.

받아치기는 한 줄로 쭉 늘어서서 물건을 옮기는 방법이었다.

병사 무리가 길게 늘어져 같은 방식으로 물 양동이를 건네서 앞쪽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팍!

그중 어떤 머저리가 바닥에 양동이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장난치냐? 빨리 안 주워?"

"시정하겠습니다!"

소란이 인다. 불길이 병사들 얼굴을 비췄다.

보급 중대장은 발을 동동 굴렀다.

천막에 붙은 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저게 옆으로 옮겨붙으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을 터였다.

그에게는 안에 있는 놈이 몇 죽는 것보다 불이 옮겨붙는 문제가 더 컸다.

양동이 전달로 불길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보급 중대장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불이.'

요즘이 화재가 잘 일어나는 계절이던가?

그 정도로 건조한 날씨는 아닌데?

다행히 불이 옆으로 번지진 않았다.

불길은 기다렸다는 듯, 천막 하나만 홀랑 태우고 끝났다.

"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밤눈이 밝은 병사 하나가 외쳤다.

"데려와, 살았으면 다행이지."

보급 중대장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그들이 산 것보다 불이 옮겨붙지 않은 게 백 배는 다행이었다.

* * *

엔크리드는 중대장이 밖으로 옮겨 둔 벤젠스 소대장 옆에, 주근깨 병사를 눕혔다.

"여기!"

그리고 외치니, 사람들이 몰려왔다.

"괜찮나?"

"갑자기 불이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엔크리드는 얼굴에 검댕을 묻힌 채로 콜록콜록 기침을 뱉었다.

누가 봐도 불이 난 천막에서 방금 막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저도, 쿨럭, 켁, 잘 모르겠습니다."

기침과 함께 엔크리드가 말을 잇는다.

한밤중에 화재는 결국 사고로 끝났다.

* * *

부오어엉.

저 멀리서 올빼미 따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숲 쪽일 것이다.

요정 중대장은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에 있는 지도와 현재 위치를 대입해 방향을 잡고 걸었다.

진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자갈이 널린 냇가였다.

목적지에 다다른 중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 분대장이 아니었으면 위험했습니다."

막사를 둘러본 것만으로 중대장은 암살자의 의도를 알아챘다.

'입구 쪽에 있는 걸 제거하고 곧바로 목표를 제거.'

그 입구 쪽에 있던 게 엔크리드였다.

덕분에 살았다.

그가 조금만 덜 버텼으면 죽었다.

그도 죽고 호위 대상도 죽었다.

"그런가."

크랑은 말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중대장은 그런 그를 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담백한 작별 인사다.

요정족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은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보직은 사이프러스 사단 4대대 4중대장이다.

진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어둠 너머로 들어간 요정의 모습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걸 보며 크랑은 엔크리드의 꿈을 떠올렸다.

'기사라.'

"널 보니까 나도 어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는 것 같다."

크랑은 엔크리드의 꿈을 듣고 그렇게 답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크랑은 상대를 속일지언정, 진심으로 다가온 상대에게 빈말을 한 적은 없었다.

크랑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출생도, 비밀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피해 온 일이었으나.

'나도 마주쳐 보겠다.'

엔크리드의 실력이야 한눈에 알아봤다.

그런 그가 기사를 꿈꾼다.

지나가는 사람 열 중에 다섯은 그 꿈은 가당찮은 것이라 할 것이다.

나머지 다섯은 비웃기 바쁠 것이고.

그래도 그는 꿈을 꾼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고작 며칠이지만, 묵묵히 주먹을 쥐고 펴는 걸 반복하는 모습에서 그가 변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참 재밌는 친구였지."

묘한 친밀감이 남는다. 크랑의 머리 위로 구름이 걷힌다. 달빛이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는 걸었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삶이 그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20. 분대장 엔크리드

천막 사이에는 횃대가 있다.

그리고 보급 막사에는 기름이 있고.

며칠을 오늘을 반복하며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해 왔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 위치가 어디인지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잠시 다녀오죠."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소리로 순찰병의 위치를 파악하고 몰래 보급 막사에서 기름을 가져오는 건.

가져온 기름을 천막에 대강 뿌린다.

이후는 더 쉽다.

횃대를 툭 차고 넘어뜨리면 그만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어야 했으니 그림자를 벗 삼아 포복으로 기어서 횃대를 당겨 안쪽으로 넘어뜨렸다.

횃대 끝에 있던 불씨가 기름을 만나 화르륵- 하고 반갑다며 크게 인사했다.

"재주가 좋네."

중대장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거 칭찬인가?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천막에 불을 질렀다.

당연하게도 기름을 부은 곳에 먼저 불이 붙었고.

엔크리드는 불길을 적당히 피해 검댕을 얼굴에 묻히고 연기도 조금 마셨다.

어설픈 연기보다는 실제로 반응하는 게 훨씬 쉽다.

"콜록!"

기침을 토한 엔크리드는 쓰러진 주근깨 병사를 업고 중대장이 들어왔던 천막의 찢어진 부근으로 나가서 막사를 빙 돌아 의무 막사 앞에서 쓰러졌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불이야!"

불을 낸 것도 일부러 순찰병이 오는 타이밍에 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옆 막사 불침번 자식은 서서 자기의 달인이었다.

통 안 깼다.

엔크리드는 암살자가 저 친구한테도 독침을 쏘고 간 줄 알았다.

여기까지 대단한 준비도 필요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보급 막사에서 기름 훔치고.

횃대만 넘어뜨리면 끝인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크랑과 중대장은 퍽 인상 깊은 듯했다.

"정말 어디 도적단에 갔으면 우두머리쯤은 뚝딱해 먹었을 것 같은데."

떠나기 직전, 크랑이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걸 칭찬이라고 하는 건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자, 꼬부라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렸다.

'머리카락도 좀 잘라야겠네.'

그는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바닥에 누웠다.

큰불은 아니다. 그리 큰 사고도 아닐 것이다.

죽은 사람도 없으니까.

불침번에 관한 핑계도 대충 생각해 뒀다.

'내일 물어봐라. 내일.'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정말 이대로 누워서 자 버리고 싶었다.

긴 밤이었다.

정말 긴 오늘이었고.

두통을 넘어서 머리통이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생존자는?"

"저쪽입니다. 근데, 음. 이제 기절했나 봅니다."

엔크리드 자신을 향한 말인 건 알았지만,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엄습했다.

* * *

불침번이었던 주근깨 병사는 아니겠지만, 엔크리드는 그에게 일방적인 친밀감을 느꼈다.

'넌 모르겠지만.'

엔크리드는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의 고향을 알고.

고향에 두고 온 여자 친구의 존재도 알며.

왜 군대에 왔는지도 들었다.

그에게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있는 오늘이었다.

덕분에 생긴 친밀감이다.

거기에 화재도, 습격도 그의 잘못은 아니니까.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대줬다.

불이 나자마자 그가 소리쳤고, 안에 있는 이들을 구하려고 했다고.

그러다 연기를 들이켜서 기절했다고.

이제 막 훈련을 끝낸 신병이다.

그 훈련 중에 막사 화재에 관한 훈련은 없을 테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한 이유였다.

"제가 그랬다고요?"

다만 제 기억에 없는 일이니, 황당해 되묻기는 했지만.

"기억이 날아갔나 보군."

보급 중대장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엔크리드는 누가 자신을 의심하진 않을까 했지만, 그런 일도 없었다.

그게, 너무 딱딱 맞게 변명을 잘 대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보급 중대장은 그저 보급 막사에 불이 안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걸 노린 것도 있었으니, 상황 자체는 마음먹은 대로 됐다고 할 수도 있었다.

새로이 밝은 아침.

오늘은 반복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난 엔크리드는 여전히 두통을 느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오늘'을 다시 넘겼으니까.

"날 구했다고?"

얼굴과 몸을 씻고 탄내가 나는 옷을 갈아입은 채 단검을 들어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한 뒤 나선 길이다.

벤젠스가 보급품이 든 박스에 궁둥이를 걸친 채 물었다.

"눈앞에서 불에 타 죽게 둘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엔크리드의 말에 벤젠스가 입을 오물거렸다.

뭐라고 웅얼거리던 그가 물었다.

"...왜?"

엔크리드는 이게 이유가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딱히 길게 말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전우니까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걸 들은 벤젠스의 표정이 굳었다.

"쓰읍."

표정이 굳어진 그를 보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전장의 꽃은."

"...보병이다."

보병 중대의 인사다.

그 말과 함께 엔크리드가 몸을 돌렸다.

조금 전 복귀 명령을 받은 참이었다.

"못되게만 굴었는데."

뒤에서 벤젠스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본래라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가 들린다.

'청각 단련.'

엔크리드는 자신이 얻은 능력을 곱씹었다.

그리고 어젯밤 요정 중대장이 칼을 옆으로 쳐 내는 것도 떠올렸으며.

찌르기와 암살자의 공격을 피한 것도 되새겼다.

저절로 드는 의문.

'난 여전히 제자리인가?'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과연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갑자기 렘과 한판 붙어 보고 싶었다.

'일단은.'

본 막사로 돌아가서 푹 쉬는 게 먼저다. 머리가 아직도 지끈거렸다.

"날씨는 참 좋네."

몇 걸음 걷지 않고 엔크리드는 자신의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봤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맑게 갠 새파란 캔버스가 보였다.

그 위로 뭉게구름이 조각조각 펼쳐져 있었고,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오늘은 무척 맑은 날이었다.

걷기만 해도 두통이 가실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 *

크라이스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엔크리드가 자리를 비운 게 딱 일주일이었다.

'그때는 대체 어떻게 지냈지?'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크라이스의 정신은 현실에서 도피했다.

크라이스는 엔크리드가 없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분대장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막사 앞으로 모이라는 거고."

'그러니까'를 연신 반복하던 분대장.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그리고 첫 전장에서 비명횡사했다.

"내 뒤를 따라라!"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온 듯했다.

사고뭉치 분대는 숫자는 몇 안 되지만, 실력만큼은 일품이라고.

그런 이들이 얌전히 제 뒤를 따라 주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혼자 돌진하다가 창에 머리가 꿰였다.

그가 썼던 투구가 도로 날아오자 렘이 그걸 뒤돌려차기로 날려 버렸었다.

'그다음 분대장이.'

"싸움 좀 한다고 들었는데, 실력 테스트 한번 해 볼까? 나랑 붙어 볼 사람 없나?"

귀족의 자제라고 들었다. 무슨 죄를 지어서 종군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고 몇 달만 여기에서 구르다가 도로 돌아간다고 했었다.

그 귀족은 자신감이 넘쳤고 경험은 없었다.

"감히 분대장님과 대련을 해도 됩니까?"

렘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고.

"음, 너 말고, 그래, 너 나와 봐라. 적갈색 머리통 너."

그는 작센을 상대로 골랐다.

렘이야 겉만 봐서는 불한당 그 자체니, 누가 봐도 싸움 좀 하게 생겼다.

그렇다고 크라이스를 부르자니, 그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고.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게 작센이었나 보다.

당연하게도 큰 실수였다.

"저 말입니까?"

"그래. 나와라. 겨뤄 보자. 하하, 난 이제까지 져 본 적이 없다."

"대련하다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사내가 그런 걸 두려워한단 말인가? 불문에 부치는 거지!"

오만하고 건방진 귀족 분대장은.

"아아악!"

팔뚝이 부러졌다.

"당연히 피할 줄 알았는데."

평소의 작센은 서글서글하게 굴지만, 가끔은 상당한 미친놈이 된다.

대충 상대하던 작센을 구경하며 도발한 렘과 다른 분대원 탓이었다.

"저기서는 왼발을 앞으로 내뻗었어야지."

"웃기시네, 그냥 발을 냅다 걸어서 자빠뜨리면 될 것을."

"검을 쓰는 손에 힘이 좀 빠진다. 더 세게 쥐어라. 상대를 얕보다간 네가 다친다."

"쯧, 어디서 여자 하나 자빠뜨리는 것도 못 할 빈약한 놈이로다. 나였으면 진작에 끝냈다. 아, 지루해."

그 말에 작센이 사납게 변했고.

귀족 분대장의 팔을 부러뜨린 대가로 중대장이 버럭 화를 냈었다.

"상관 폭행을 해?"

"불문에 부친다고 반드시 싸우자고 그랬습니다."

"맞아. 맞아. 남자가 한 입 갖고 두말하면 거시기가 떨어지는 법인데."

"입은 하나인데, 말은 계속 변하니, 아, 죄인은 속죄하나이다."

분대원이 한마디씩 뱉으니 중대장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붙은 거였다.

당연히 귀족 분대장은 그대로 꼬리를 감췄다.

제 가문에서야 자신한테 져 줄 돈에 팔린 칼잡이가 넘쳐났겠지만, 여긴 전장이다.

애초에 중대장도 귀족 분대장을 전장에 끌고 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대충 분대장 지위만 붙여 준 거지.

'그다음 분대장도 뭐.'

다 오십보백보였다.

버럭 화를 잘 내던 분대장은 렘과 밖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더니 더는 까불지 않고 조용히 전출을 신청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연유로 다 뛰쳐나갔다.

그나마 버틴 사람들도 소 닭 보듯 지낸 게 전부였는데.

"후."

크라이스는 뒤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고개를 돌린 크라이스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감과 함께 중얼거렸다.

"뭐냐, 이 꼴은."

엔크리드였다. 그가 관자놀이를 오른 검지로 꾹꾹 누르며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4분대 막사 앞에서 대치한 둘을 바라봤다.

크라이스가 도피했던 현실이다.

"분대장이 없으니까 내가 부분대장이나 다름없다고 했지? 그러니까 까라면 까야지. 라그나 분대원?"

"이름을 부르지 말고 성에 님을 붙여서 말해라. 야만인."

"허, 이 편식쟁이가 귀족 껍데기를 뒤집어쓰셨나."

"인간이 덜된 짐승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불쾌할 뿐이다."

"오, 그래? 짐승한테 마구잡이로 뜯겨 봐야 정신 차리겠네?"

으르릉거리는 렘의 손에 핏줄이 돋았다.

금방이라고 도끼를 날려 상대의 머리를 쪼갤 기세였다.

라그나라 불린 분대원은 대수롭지 않게 그를 마주했다.

손을 늘어뜨리고 아무렇지 않게 섰다.

저게 라그나의 준비 자세였다.

작센은 상관없다는 듯 구경하고.

남은 분대원 하나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둘을 말렸다.

"형제님, 투쟁과 폭력은 나쁜 겁니다."

"빠져라, 종교쟁이."

"뒤로 물러나라. 검에는 눈이 없으니."

렘과 라그나가 동시에 답한다.

'분대 꼴 잘 돌아간다.'

고작 일주일에 이 모양 이 꼴이라니.

걸으며 날아갔던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크라이스, 남는 약 없나?"

작센은 싸우든 말든 제 할 말만 했다. 그가 엔크리드를 보고 눈인사를 하며 크라이스에게 물었다.

"지금은 없어요. 분대장님, 오셨네요. 안 그래도 찾아뵐까 했는데. 일이 좀 있었거든요."

크라이스가 작센에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엔크리드를 향해 말했다.

"잠시만."

일단 저 둘을 말리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대로 놔두면 정말 피를 볼 기세였다.

자신이 온 날도 이랬었다.

그때 상대는 라그나가 아니라, 기도하던 분대원이었지만.

"투쟁과 폭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저리 말하는 저 작자도 정상은 아니지.

"이봐!"

엔크리드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하고 둘 사이를 막았다.

이들의 싸움을 말리는 법은 단순하다.

말로는 어림도 없다.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엔크리드가 둘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진짜, 뭘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왔수?"

렘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등 혈관이 꿈틀거리다 멈췄다.

"이거야 뭐 같이 벨 수도 없고. 분대장은 음, 아니다."

노려보던 렘과 라그나가 뒤로 물러난다. 물러나면서도 서로 덕담을 건네는 건 잊지 않았다.

"넌 전장에서 죽지 마라, 내가 죽여야 하니까."

라그나가 말하고.

"응? 뭐라고? 내일 뒈지고 싶다고? 렘 님의 도끼 맛을 너무 보고 싶다고?"

렘이 받아친다.

"그만."

그 사이에서 엔크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들은 사이가 이렇게 나쁜 거지.

모른다. 처음부터 이랬으니까.

둘이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다.

거참, 돌아오자마자 본 게 싸움질이라니.

"하여간 분대장 없는 동안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고요."

뒤에서 크라이스가 다시금 입을 연다.

"그러냐?"

딱 봐도 알겠다.

의무 막사에 있을 때, 라그나가 막사가 개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괜찮다.

하도 험한 일을 겪고 왔더니, 이들이 친 사고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식사 당번을 안 챙겨서 각자 식사를 챙긴 것.

옆 막사 분대원과 시비가 붙어 그놈 턱을 갈긴 것.

소대장 호출을 무시한 것.

'나 하나 없다고 너무 개판인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부쩍 들긴 했지만, 정말 괜찮았다.

크라이스는 종알종알 말을 계속했고.

엔크리드는 난리의 종류가 사고뭉치 분대에만 있진 않다는 걸 알았다.

"저주?"

엔크리드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잊고 되물었다.

"네, 진지 전체에 저주가 걸렸다고 하던데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두통을 잊을 만한 헛소리였다.

21. 대련과 복기

꽈릉.

갑자기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더니, 투둑투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이, 기분 잡쳤네."

"흠."

열이 올랐던 렘과 라그나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다.

이거로 싸움은 끝이다.

둘이 비를 피하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맑았는데 갑자기 비라니.

날씨가 미쳐 돌아가는 중이었다.

가을 끝자락이니, 소나기가 내릴 계절도 아니었다.

이 날씨의 하늘은 비에 박하다. 특히나 먹구름 하나 없는 소나기는 정말 드물었다.

"갑자기 비라니."

크라이스가 마른하늘에 친 벼락과 빗줄기를 보며 말했다.

엔크리드도 함께 하늘을 보며 자신이 없을 때 일어난 일을 되새겨봤다.

저주는 역시나 그렇듯 개소리였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 것도 저주라고 하겠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여간 사흘 동안 보는 넘어져서 코가 깨지고 잭은 팔이 부러졌다고요. 거기에 로튼은 뱀에 물렸고."

셋 다 정찰대다.

보는 공중제비를 돌 정도로 날쌘 병사지만, 갑옷을 입고 그런 짓을 하니 코만 깨진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고.

잭은 평소 창을 다루는 실력을 과신하는 입이 더러운 병사다.

대련하다가 팔이 부러졌다는데, 상대가 작정하고 부러뜨렸을 거라는 데 돈을 걸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로튼은 정찰대치고는 조심성이 없는 편이다.

지금은 뱀이 많이 나오는 계절은 아니지만, 이 초원에는 특히나 뱀이 많은 구역이 있다.

그러므로 셋 다 그럴 만했다.

"그 셋 말고도 냄비에 손을 댄 사람도 있고요."

왕눈이는 신이 난다는 듯 말했다.

이게 정말 저주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할 리가 있나.

그저 얘깃거리다.

"거기에 의무 막사가 불탔다는 소식도 있었거든요. 아, 분대장은 거기 있었잖아요. 뭐 들은 거 없어요?"

막사가 탄 것도 그것도 저주라고 하는 거냐?

"응. 그랬지. 잘 타더라."

크라이스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직접 봤어요? 정말 갑자기 불이 화르륵 솟은 거예요? 첩자가 들어왔다는 말도 있던데?"

응. 아니다.

'내가 했다.'

불을 지른 건 엔크리드다.

그리고 첩자라, 암습은 있었지만, 그게 과연 적병일지는 의문이다.

크랑의 정체는 아직 모르겠지만, 최소 귀족의 서자쯤 되는 것 같으니.

그 암습자는 아군 쪽 아닐까?

저주야, 말해 뭐하겠나.

곧 지휘부 쪽에서 단속에 나설 것이다.

이런 말이 부대 내에 도는 걸 반기는 지휘관은 없을 테니.

"네? 뭐 본 거 없냐구요."

왕눈이가 재촉한다.

엔크리드는 잠시 그 큰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이 모든 걸 말하기에는 크라이스의 입이 너무 가볍다.

가볍지 않다고 한들 말할 이유도 없고.

함구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하는 거다.

"내가 있던 막사가 불탔다."

"에?"

"몰랐나 보네?"

"전혀요. 그럼 적병이 쳐들어온 게 아니고? 갑자기 불이 붙은 게 맞아요?"

"불침번이 졸았고, 바람에 횃대가 넘어졌다. 마침 횃대에 보충하려 놔둔 기름통이 옆에 있었고. 쓰러진 횃대에서 천막에 불이 붙고 파악."

엔크리드가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손으로 불꽃이 퍼지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별거 아니었네요."

"내가 죽을 뻔했다는 생각은 안 들고?"

"여기 멀쩡히 살아 있네요."

이건 뭐, 걱정을 해 주는 건지 뭔지.

"멀쩡히 잘 살아 있는 게 아니면 분대장은 유령인 거요?"

렘이 뒤에서 끼어들고는 낄낄 웃는다.

이 새끼는 이걸 농담이라고 하는 걸까.

"주께서 이르시되, 망령은 고이 잠들라 하셨으니."

그리고 종교에 심취한 분대원이 말로 엑소시즘을 행한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진짜 유령이라면 듣기 참 껄끄러운 말이라 생각했다.

"머리카락만 좀 탔다."

앞머리 끝이 좀 그을려서 잘랐다. 칼로 대충 잘라 둔 머리카락은 손질이 제대로 안 된 티가 났다.

"원래 검은 머리라 타도 티가 안 나는 거요."

렘이 연신 낄낄대며 말했다.

"네 머리는 그럼 잿더미냐?"

렘의 머리카락은 회색이다.

"앗, 어떻게 알았수? 내 머리는 잿더미유."

이 새끼는 이게 진짜 재밌는 걸까.

막사 안에서 웃는 게 자기뿐인데도 연신 이런다.

정말 소나기였는지, 내리던 비가 금세 그쳤다.

잡담은 잠깐이었다.

크라이스는 비가 그치자 볼 일이 있다며 나갔다.

엔크리드는 제 자리에 누워 천막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배경 삼아 잠들었다.

다디단 낮잠이었다.

어느 정도 자고 일어나니, 아픈 머리가 말끔해졌다.

피로감도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로 허리를 틀었다.

옆구리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좋다. 개운했다.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를 기울이니, 막사 앞에서 사람 오가는 소리와 바로 옆 막사 병사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뭔 비가 내리다 말다 지랄을 하네."

엔크리드는 막사 입구를 손으로 밀어 밖으로 나왔다.

분대원은 막사 앞에 여기저기 떨어진 채 개인 정비 시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작센과 크라이스야 안 보이는 게 당연할 거고.

나머지는 자리에 있었다.

그중에서 젖은 바닥에 뭘 끄적거리던 렘에게 다가갔다.

"할 일 없어 보이는데."

"그래 보이슈? 맞수다. 심심해서 막 어느 놈 머리통을 깨 볼까 고민하던 참이었지."

고약한 말재주로 주변 분대원에게 시비를 거는 건 렘의 특기 중 하나다.

시비 건 상대가 덤비면 몇 대 두들겨 패는 게 취미 중 하나고.

엔크리드가 온 이후로 뜸해지긴 했지만, 그 취미를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그럼 나랑 대련 한판 하자."

"대련?"

"그래. 대련."

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엔크리드의 대련 요청은 일상이었다.

"좋수다."

둘은 막사 뒤쪽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지랄 맞은 날씨 덕에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있어도 신경도 안 쓸 터였다.

엔크리드는 렘과 열 걸음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섰다.

렘이 히죽히죽 웃으며 손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틈만 나면 갈아 둔 도끼날이 마른 햇살을 반사했다.

비가 오다가 말다가 했다던데, 지금은 맑디맑았다.

마른 공기가 아닌 습한 공기가 느껴지고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다고 질퍽질퍽한 바닥도 아니었다. 축축하지만, 발이 푹푹 빠지지도 않는 부드러운 흙바닥이다.

적당한 구름이 햇살을 가려, 눈이 부시지도 않았다.

"싸우기 좋은 날이네."

"그래?"

엔크리드는 답하고 야수의 심장을 일깨웠다.

반복된 하루를 거듭하며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중에는 몸을 굴리고 청각을 단련하는 것도 있지만.

머리를 쓰는 것도 포함이었다.

'발렌 식 용병검은 안 통한다.'

찌르기를 배우며 렘과 수없이 싸워 봤기에 안다.

렘에게 발렌 식 용병검은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이 가진 무기와 상대가 주는 위압감, 그동안의 경험.

모든 걸 염두에 두고 싸운다면 어떤 공격이 유효타가 될 것인가.

어떻게 유효타를 만들 것인가.

거듭된 고민, 그 해답을 확인할 때다.

슥.

렘이 발을 앞으로 내민다. 턱 하고 땅을 밟는 걸음에 주저는 없다. 자신감이 돋보였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먼저 가야 하는 거요?"

엔크리드는 답하는 대신 상대의 호흡을 훔쳤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렘의 호흡은 길고 느리다.

그 긴 호흡이 내뱉어지는 중간, 엔크리드는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뒷발을 밀며 나아간다.

공간을 좁힘과 동시다.

붕!

손에 쥔 검을 휘둘러, 횡으로 그었다.

렘은 허리를 뒤로 젖혀 눕듯이 피했다.

정확히 베는 범위를 예측했기에 할 수 있는 묘기다.

반쯤 뒤로 누운 자세에서도 렘의 눈은 엔크리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확인한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검을 당겨 제 앞을 막았다.

붕.

땅!

어느새 도끼가 날아와 검날을 후렸다.

충격이 크진 않았다.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누운 자세에서 휘두른 도끼 아닌가.

그 자세 그대로.

붕, 붕!

도끼가 거듭 날아왔다.

땅! 땅! 까-앙!

양손으로 검을 꽉 쥐고 막고 또 막는다.

한 번이라도 멈추며 자세를 추스르고 공격하려 했는데, 렘은 멈추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연속해서 떨어지는 단두대에 선 기분이 들었다.

소나기 같은 도끼 공격은 렘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며 끝났다.

짧은 틈이 생겼으나, 엔크리드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 하지도 않았다.

허리를 세운 렘이 뒤로 제 팔을 당겼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뒤로 물러나고 호흡을 가다듬는 대신.

팍!

한 발을 앞으로, 수없이 반복한 찌르기를 내질렀다.

막던 자세 그대로 뻗어 내는 칼날.

반드시 찌르겠다는 각오를 품는다.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찌르기를 내질렀고 렘의 허리쯤을 찌르는 순간, 엔크리드의 눈에 푸른 하늘과 렘의 얼굴이 엇갈려 보였다.

'어?'

엔크리드의 눈에 렘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붕.

찌르는 순간, 렘은 엔크리드의 발목을 걷어찼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덕분에 검 끝이 허공을 갈랐고.

렘은 도끼를 휘두르는 대신 놓아 버리고, 엔크리드의 멱살을 잡고 옆으로 던졌다.

"윽!"

옆으로 구른 엔크리드는 금세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았다.

속임수였다.

도끼를 뒤로 빼는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그걸 역으로 이용한 거다.

"후우."

널브러진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엔크리드도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쉬이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한 손으로 사람을 날려 버릴 정도라니.

아무리 몸에 장비를 안 걸치고 있어 상대적으로 가볍다지만, 괴력이라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앉은 채로 고개를 드니, 렘의 얼굴이 보였다.

묘한 표정이었다.

평소 그는 대련 중에 계속 웃는다.

지금은 아니다.

입가가 바르다. 단정하다. 그는 웃지 않았다.

"씁, 어디서 나 몰래 좋은 거라도 드슈?"

렘이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이 당연했다.

찌르기 훈련을 도와준 건 기억에 없을 테니.

결국, 그 첫 번째 '오늘'을 벗어날 때는 식사 당번만 시켰으니까.

"전에도 생각한 건데, 어째 실력이 훌쩍 는 것 같단 말이지. 특히나 그 찌르기, 좋았수다. 나쁘지 않았수."

"그래?"

"그렇수. 내가 또 빈말은 안 하우."

"퍽이나."

농담이라 치부하며 헛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놈이.

"진짜라니까."

"알겠다. 그럼 복기해 보지."

"...분대장은 참 한결같은 인간이우. 어째 사람이 안 변하는 거요?"

대련 후의 복기.

이 또한 일상이었다. 아무리 건질 게 없어도 엔크리드는 대련 상대를 물고 늘어졌다.

사소한 거 하나라도 배우고 익혀 단련하기 위해서다.

정작 상대한 쪽에서는 할 말이 없을 때도 많은 법이다.

실력이 조금이라도 늘어야 무슨 말이라도 해 줄 것 아닌가.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렘도 대련이 끝난 후에 '거, 강단을 좀 길러 보슈' 따위의 말을 하곤 했었다.

의미도, 가치도 없는 말이다?

아니다. 렘은 안다. 재능이 없는 자의 끝을.

그러기에 죽지 않으려면 갖춰야 할 걸 알려 준 거다.

같은 이유로 야수의 심장도 전수해 준 거고.

그런데 지금은?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당장 이번 대련으로 할 말이 많아진 게 그 방증이었다.

"일단, 내 도끼질을 기다린 게 너무 티나우. 아무리 내가 잘 안 속아도 속이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우?"

렘이 입을 연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러하듯, 제대로 된 경청의 자세로.

렘은 그걸 보며 픽 웃었다.

선뜻 핵심부터 짚어 내고 자잘한 이야기는 나중이다. 렘의 방식이었다.

엔크리드는 하나하나 모든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 * *

사흘 동안 전투가 없었고, 그동안 엔크리드는 렘과 세 번의 대련을 더 했다.

"하체를 단련하는 게 좋겠수. 묘하게 균형이 안 맞아."

평소에는 시답잖은 말만 연신 해 대도 렘은 핵심을 꿰뚫어 보는 편이었다.

엔크리드는 그 말을 되새기고 곱씹었다.

이후 그는 다시 단련에 힘썼다.

다들 쉬는 시간에도 그리했다.

개인 정비 시간에는 다들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편지를 쓰는 이들도 있고.

휴식에 몰두하는 병사도 있다.

엔크리드는 먹고 자는 걸 제외하면 수련과 훈련에 모든 걸 쏟아 냈다.

누가 보면 지독하다고 할 법도 하지만.

정작 하는 사람은 평온 그 자체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실력에 무엇보다 큰 충족감을 느낀다.

그 덕분에 고통이 가중되는 신체 단련에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지독한 인간일세, 의무 막사에서 복귀하자마자 또 저러네."

"근래 좀 잠잠하더니만. 다시 불이 붙었네, 저 양반."

"내가 저렇게 훈련했으면 진즉에 기사 끝자락이라도 갔을 텐데."

"응? 너 왜 입으로 똥을 싸냐?"

몸을 굴리며 청각에 집중한다. 근육이 비명을 내지를 때, 청각에 집중하면 고통이 가시곤 했다.

엔크리드의 귀에 다른 막사에 있는 병사 둘의 시답잖은 말이 들렸다.

같은 소대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3분대다.

이후 더 먼 곳까지 청각을 북돋아도 보고.

뒤쪽에서 들리는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듣고 어떤 행동인지 짐작도 해 봤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누군지 알아맞히는 것도 시도해 봤다.

열에 다섯은 틀렸지만, 그래도 익숙한 발걸음은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가볍고 빠르지만,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왕눈이.'

맞았다.

"또 훈련이에요? 징그럽다. 징그러워."

크라이스가 다가와 말했다.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반쯤 앉았다가 일어나는 걸 반복하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두피 사이로 땀이 흘러 눈썹 끝에 맺혔다.

오락가락하던 하늘도 멀쩡해져, 건조하고 마른 바람이 부는 본래의 날씨다.

이런 날에 전신을 적실 정도로 땀을 흘리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곳이 전장이고.

언제 싸울지 모르는 곳에서 훈련이라니.

그럼에도 다들 그러려니 한다.

엔크리드가 언제 하루 이틀 이랬나.

이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거 안 힘들어요? 용케 그걸 매일 하네."

크라이스가 말하며 한쪽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납작한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뚝 하고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코끝을 스쳐 바닥에 떨어졌다.

허벅지로부터 묵직한 통증이 올라왔다. 부들부들 근육이 떨리고 구역질이 솟았다.

한계에 다다랐다.

엔크리드는 땀을 흠뻑 흘린 채로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눈을 감자, 바람이 시원하게 축축한 이마와 귀를 훑었다.

오늘 훈련 완료.

그리 생각하며 바람을 즐기는데.

저벅저벅 하고 힘 있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는 엔크리드의 뒤에서 멈췄다.

"여전히 열심이군."

고개를 뒤로 꺾어 상대를 바라봤다. 햇빛을 가리며 긴 그림자가 엔크리드 얼굴을 덮는다. 역광으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으나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인 건 알겠다.

"얘기 좀 할까?"

4소대장이었다.

22. 임의 보직 변경

4소대장은 시답잖은 말을 던졌고.

엔크리드는 대충 답하고 흘려들으며 이 작자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할 말 있으시면 편하게 하시죠."

땀에 푹 절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는 중이다.

지금이 딱 좋았다. 적당한 탈력감과 함께 바람을 즐기는 순간이니.

그러니 어서 할 말 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찰대로 편입해서 임무를 수행해 줬으면 하는데."

4소대장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 모습에서 지휘관의 단호함이 아닌 방어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정찰대라.

흔한 차출은 아니다. 하물며 자신의 위치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걸 엔크리드 자신도 안다.

분대장급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444분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을 정찰대로 뺀다고?

"괜찮겠수? 우리 분대장 데려가도?"

뒤에서 불쑥 렘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렘이 엔크리드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신장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그럭저럭 편하게 기대는 자세가 나왔다.

"그거 진심이우?"

반쯤 웃으며 묻는 건데, 데려가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 같다.

"명령이다. 렘."

4소대장이 눈을 부라렸다. 허세다. 엔크리드는 한눈에 알아봤다.

렘은 사고뭉치다. 수틀리면 도끼를 휘두르는 망나니다.

그런 망나니를 상대로 지휘관의 권위를 들먹여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그건 4소대장도 알고 엔크리드도 알고 렘도 안다.

"렘."

엔크리드는 이 도끼질 좋아하는 분대원이 뭐라고 더 입을 열기 전에 제지하는 의미로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털어 렘을 뒤로 밀어냈다.

"아니, 뭐, 마음대로 하시든가."

렘이 툴툴대며 뒤로 빠졌다.

"내가 대신 가도 됩니다."

라그나가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미아가 장래 희망이었냐?"

그걸 들은 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라그나는 발끈하려다 꾹 화를 눌러 참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라그나는 길을 찾는 일에 재주가 없다.

아니, 지도를 손에 쥐여 주고 설명해 줘도 다른 곳에 도착하는 놈이다.

그렇다고 옆 사람과 손발을 잘 맞추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분대에서도 명령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싸워서 결국 여기에 온 거 아닌가.

정찰병으로 뽑기에는 걸리는 게 많았다.

"다 되도 넌 안 되지."

4소대장도 라그나한테는 고개를 가로저을 도리밖에 없다.

엔크리드는 이 상황 자체가 안 좋은 신호로 들리긴 했으나.

'이것저것 따져 보면 내가 적격이긴 한데.'

자신의 애매한 위치는 444분대원 사이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딱 일주일 자리를 비운 거로 소란도 꽤 일었고.

그런데도 자신을 콕 집어 부른다?

그만큼 부를 사람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저주라고 떠들던 말은 금세 쏙 들어갔으나.

그게 준 여파는 남았다.

보, 잭, 로튼 셋 다 전부 정찰대 소속이었으니까.

머릿수가 부족한 거다.

"휴, 나도 골치 아프다. 소대장 하나가 배탈이 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

정말 저주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하필 정찰소대에만 그런 일이 생겼으니.

소대장은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굳이 엔크리드를 부르고 싶은 기색도 아니었다.

'묘하게 위화감이 드네.'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쳐다보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다 말할 테니까."

"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뭘?'

그냥 쳐다봤는데 4소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과잉 반응하는 거다.

"거, 눈으로 그런 욕을 하면 어쩌자는 거유? 가끔이지만, 당하는 사람 기분도 생각해야지. 그것도 상관한테."

렘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저 농담에 반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에 다시 소대장을 보니.

"임의로 정찰대 인원을 늘리기 위해 분대장 하나를 소대장으로 임의 진급시켰는데, 아무래도 숫자가 부족하지 않나. 그래서 급한 김에 각 부대에서 정찰 임무 수행이 가능한 인물을 차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너를 포함하는 게 어떻겠냐고 윗선에서 말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고."

"윗선입니까?"

"새로 온 중대장. 뭐 찍힌 건 아니지?"

비밀을 알고 있으니, 정찰대로 보내 소리소문없이 죽여서 입을 막겠다?

아니, 그럴 거면 굳이 이럴 이유가 있나?

없다. 몰래 죽여도 될 만한 재주도 있어 보였고.

그게 아니라도 방법은 많으니까.

그렇다고 쉽게 죽어 줄 건 아니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말한 것 같은데.'

엔크리드는 그렇게 판단했다.

"윗선의 명령이다. 그러니까 좀 가자."

옆에서는 렘이 눈을 부라리고.

그 뒤에서는 라그나가 자신이 가겠다고 한다.

막사 바로 앞에서는 일반 병사보다 훌쩍 머리 하나는 큰, 곰도 맨손으로 두들겨 팰 것 같은 분대원이 하늘을 보며 신에게 기도하는 중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여, 저의 작고 소중한 분대장을 빼앗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 작고 가냘픈 종에게 시험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그걸 들은 4소대장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누가 뺏어간다는 거냐고.

그리고 누가 작고 가냘픈 거냐.

기도하는 병사의 팔뚝 근육이 불끈불끈 움직였다.

과장 조금 보태서 팔뚝이 어지간한 병사의 허벅지만 했다.

키도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저 병사의 팔뚝은 그 자체로 무기다.

그러므로 저 독실한 병사가 가냘픈 거라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참 드물 것이다.

"이번 한 번이면 될 거야. 곧 겨울이 될 거고 그럼 이번 출정도 끝날 테니까."

차기 출정 때는 어차피 정찰대 편성을 다시 할 것이다.

그때 444분대장을 정찰대에 두진 않을 테니까.

엔크리드는 소대장의 말을 이해했다.

겨울에 전쟁을 이어가는 바보는 별로 없다.

고로 이번 전쟁도 가을이 지나면 멈출 가능성이 컸다.

굳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자주 있는 종류의 일이다.

이런저런 일에 땜빵으로 불려 가는 건.

싸우는 재능이야 부족하지만, 다른 일은 또 중간 이상은 한다.

정찰 임무도 마찬가지고.

다만, 이번에 부상으로 막사를 비운 것 때문인지, 제 분대원이 하나같이 자신을 떠나는 걸 반기지 않았다.

'내가 딱 적임이긴 한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죽는다면 하루를 반복할 수 있다.

이번 임무는 그 어떤 누구보다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다.

위험을 인지하고 피하는 건 그의 장기이기도 했고.

"명령이다. 사 분대장."

소대장이 명령이라고 하는데 어째 구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엔크리드는 뒤를 돌아봤다.

렘이 도끼를 갈기 시작했고.

라그나는 자기가 가도 된다는 의견을 다시 피력했다.

마지막 분대원은 결국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까? 라고 거듭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참.'

어디서 한 대 맞고 오면 이들이 다 같이 들고일어날 것 같았다.

원래 이랬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처음에 분대에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 서로 관여하던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없을 때 많이 힘들었던 거냐?'

왕눈이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렇다고 해서 상부 명령을 어쩌겠나.

제 분대원들이야 막 나가는 놈들이라고 해도 엔크리드는 아니었다.

"갔다 와야겠는데."

후 하고 숨을 한번 내쉬고 한 말이다.

윗선에서 내린 결정이다. 애초에 항명은 불가다.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야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엔크리드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정리된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감투뿐이라도 그가 이 여섯뿐인 분대의 대장이다.

"맘대로 하슈."

렘이 흥하고 콧바람을 불더니, 답했다.

"거, 내가 가도 된다니까."

라그나는 끝까지 우겼지만, 그게 먹힐 일은 없었다.

진지 안에서도 길을 잃는 놈이 정찰병이라니 그게 되겠냐?

엔크리드는 라그나가 어떻게 방랑 생활을 했는지 그게 더 신기했다.

동쪽 끝 바다까지 다녀왔다고 했던가?

길을 잃어서 거기까지 간 건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걸 물을 일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항상 그랬듯, 이들과 적당히 거리를 뒀다.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게 분대장 엔크리드다.

"그래, 좋다."

4소대장이 말하고 돌아섰다.

올 때보다 배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어깨에 있던 짐이 내려간 듯했다.

소대장이 떠나고 씻고 쉬는 사이, 막사 내에서 사소한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배운 건 계속 연습하고 있습니까?"

침상에 반쯤 기대 누운 작센이 말을 던진 게 시작이었다.

작센의 침상은 가장 안쪽.

엔크리드는 가장 앞쪽이다.

막사 내에 모두가 작센의 목소리를 들었다.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에게 청각을 단련하는 걸 배운 채로 반복된 하루를 넘겼으니, 물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들은 렘이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뭘 배워?"

그동안 엔크리드는 분대원 여럿의 손을 탔다.

렘에게도, 라그나에게도, 독실한 신도 분대원에게도 이런저런 걸 조금씩 배웠다.

하나같이 당장 전장에서 살아남는 방편 같은 거였고.

엔크리드는 열심히 배웠으나, 다 체득하진 못하고 대강대강 써먹은 편이었다.

완벽하게 배우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그나마 이제 야수의 심장은 몸에 제대로 붙었달까.

하지만 그동안 작센에게 뭘 배운 적은 없었다.

"네가 뭘 가르쳤다고?"

누워 있다가 상체를 일으킨 렘이 물었다.

"꾸준히 하십시오. 도움 됩니다."

완벽하게 무시당한 렘의 눈에서 불길 비슷하게 타올랐다.

"이 새끼가?"

"하지 마라."

엔크리드가 확 불이 붙은 렘의 어깨를 붙들었다.

"저 음흉한 놈한테 뭘 배운 거요? 거, 아무거나 배우면 안 좋은 버릇 든다니까."

"훗."

엔크리드와 렘의 대화를 듣던 작센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 그래, 음, 네가 죽을 때가 됐지. 오늘이구나. 저 평야에서 떠돌아다니는 마물의 양분이 되고 싶은 거지? 맞지?"

작센은 무시로 일관했다.

엔크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렘의 팔을 잡아끌었다.

"적당히 해라. 다 죽고 죽이며 싸울 것도 아니고."

"걱정 마슈. 내가 살아남을 테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누가 살아남아?"

"아, 신이시여, 믿음이 없는 어리석은 영혼을 위로 올려보내도 되나이까? 허락하신다면 그리하겠나이다."

렘의 말에 라그나와 독실한 분대원이 반응했다.

"그만, 그만, 그만. 몇 번을 싸워도 말릴 거다. 괜한 짓 하지 말고 힘도 빼지 말자."

엔크리드는 과연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게 맞는지 후회가 들었다.

이것들을 놔두고 가는 게 맞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래도 끝장은 잘 안 봐요. 무기 몇 번 부딪치다가 말더라고요."

크라이스가 주머니에서 은화 개수를 세며 말했다.

그게 문제인 거다. 그 무기 몇 번이.

남들이 보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 보인다는 거지.

이런 사고뭉치들임에도 지휘관은 이들을 내치진 않는다.

이유? 당연하게도 출중한 능력 덕이다.

전장에서 이들은 확실히 일당 십 이상의 우월한 전투력을 지닌 병사니까.

그러니까 정찰대로 자신이 빠지는 것도 맞다.

'나는 전력 누수도 아닐 테니.'

하지만 이들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엔크리드는 자신의 부족함을 다시 깨닫는다.

'난 재능이 없다.'

열두 살의 꼬마에게도 졌다.

아무리 그 아이가 천재라고 해도.

다 큰 어른이 검의 무게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이며 검을 든 아이에게 졌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다.

좌절할 일도 아니다.

그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 일일 뿐.

그렇다고 포기했던가.

아니다.

그 상황을 곱씹고 또 씹어 자신을 정확히 인지한 게 전부다.

그렇다면 이게 끝인가.

그 또한 아니다.

재능이 없다면.

'언젠가는.'

한 걸음이 안 되면 반걸음씩.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아직 걸음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어쩐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엔크리드는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검을 좀 휘두르고 땀을 좀 흘려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그걸 본 라그나가 일어나 따라왔다.

"오랜만에 자세나 좀 보죠."

"내가 있는데?"

렘이 뒤늦게 따라 일어나며 말한다.

둘의 눈이 마주치며 살벌한 기세가 오갔다.

눈이 마주친 중간 지점에서 소용돌이가 생길 것 같았다.

"꾸준히 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어쭙잖은 칼질보다."

잠자리에 누운 작센이 말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보던 둘의 눈이 휙 하고 작센에게 향한다.

"어쭙잖은?"

렘이 말하고.

"칼질?"

라그나가 이어 말한다.

"둘 다, 내 자세를 봐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엔크리드가 셋 사이로 끼어들었다.

끝내 둘을 다독인 엔크리드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둘의 조언 반 잔소리 반을 토대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땀을 흠뻑 흘린 하루가 지난다.

아침 해가 밝으면 정찰소대로 잠시 소속을 변경한 채로 나가야 했다.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리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땀을 흠뻑 흘리고 나니, 다들 불쾌함이 가신 듯했고.

땀을 흘리고 개울가를 찾아 씻은 엔크리드도 개운하게 잠들었다.

* * *

"중대장님, 그 친구는 왜 굳이 정찰대에?"

요정 중대장은 1소대장이 횃대 근처에 서 있는 걸 보고 말했다.

"횃대 근처에서 물러나라. 넘어지면 불이 날 수 있으니."

"네?"

"옆으로."

"네."

1소대장이 옆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중대장의 천막은 일반 천막보다 높고 넓었다. 가운데 위쪽으로 횃대 하나를 놓고 불을 밝혀 두기도 했다.

조악하지만, 회의를 위한 테이블도 있다.

회의를 통해 중대 정찰 루트를 정하는 자리였다.

그 와중에 1소대장이 물은 거였고.

물을 만도 했다.

1소대장은 중대장의 참모를 겸한다. 사이프러스 사단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눈치 빠르고 제 살길 잘 찾는 병사라면 잘 어울릴 듯해서."

"네, 그렇군요."

크게 무게를 둔 판단이 아니다.

직감에 의한 편성이다.

따로 이유는 없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답해야 할 일.

물론 중대장의 판단은 옳았다.

요정의 직감은 때로 예언가의 말보다 날카로운 법이었다.

23. 누의 발자국

"평소보다 부자연스러운 소리, 그걸 듣는 겁니다."

정찰대 출발은 동이 트기도 전인 푸른 새벽이었다.

혼자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자니,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작센이 말을 툭 내뱉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엔크리드가 되묻자.

"전장에서 칼 안 맞는 법, 물어봤잖습니까."

엔크리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의무 막사, 암살자의 습격, 요정 중대장, 크랑, 불.

그 모든 소란을 끝내고 왔더니 사고뭉치 분대는 싸움박질 중이었다.

정신이 산만할 법도 했다.

덕분에 듣고 나서야 떠올랐다.

그 모든 일이 있기 전, 암살자와 마지막 춤을 추기 전의 마지막 하루에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었다.

"잘 듣는 법은 알겠는데, 전장에서 칼 안 맞으려고 계속 집중해서 들을 순 없잖아? 뒤도 안 보고 피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

청각 단련, 그래 좋다.

하지만 이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다.

전장 한복판에서 이런 식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 있을까?

'어려워.'

해 봤기에 안다. 익숙해지면 여럿을 상대로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잘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작센은 성실했다.

지나가는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충실히 답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더 성실했다.

그는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질감을 느끼라는 거지?"

"평소와 다른 감각을 깨우면 좋겠지만, 그건 쉽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풀밭이라면 풀잎 스치는 소리를 유심히 듣다가 종류가 다른 소리를 찾는 겁니다."

정찰 지역이 풀밭이다. 짧으면 종아리, 길면 눈높이까지 자란 풀이 가득한 곳.

그걸 알고 해 주는 말 같았다.

친절한 답변을 들으며 엔크리드는 문득 궁금해 물었다.

"꽤 자세히 말해 주네?"

작센은 그 말에 엔크리드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그 눈이 다 알면서 뭘 묻냐는 그런 말을 포함한 것 같았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제야 작센이 마저 말했다.

"분대장은 지독하니까요."

"...뭐?"

어디부터 대화의 방향이 틀어진 거냐?

갑자기 지독하다는 말이 왜 나와?

작센은 분대장의 집요함을 안다. 검에 대한 열정을 안다. 그러하기에 한 말이지만.

엔크리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 물으려다가 엔크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중요한가?

사고뭉치 분대원의 변덕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럼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배울 사람이 있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으며.

내용이 가치가 있다면 그뿐.

당장 정찰대 소집에 끌려가는 중이니, 이걸 곱씹고 가면서 단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고로 따지지도 않고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은 무시했다.

"종류가 다른 소리를 어떻게 구분할까?"

엔크리드는 당황한 기색을 순식간에 지우고 본론으로 돌아섰다.

그걸 보는 작센의 눈빛이 묘했다.

머리가 셋 달린 용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왜?"

"아닙니다."

설명이 이어졌다. 이질적인 소리란 무엇인가.

청각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훌륭했다. 배우는 즐거움이다. 엔크리드는 더없이 흡족한 기분으로 길을 나섰다.

"그래, 그런 식이었구나."

작센은 여전히 묘한 눈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엔크리드는 그걸 느끼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럼 갔다 오겠다."

그가 정찰 임무를 위해 막사 외곽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걸 보며 작센은 생각했다.

'말이 안 되는군.'

최근 분대장이 귀를 기울이며 발소리를 듣는 걸 본 적이 있다.

꽤 먼 거리에서부터 반응했었다.

청력, 듣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다만, 조금 이상할 뿐.

그가 아는 모든 훈련 방식과 같은 훈련을 받은 인간 전부를 대입해 본다.

소리를 듣고 귀를 단련한다는 건, 계속해서 다른 소리를 듣고 구분한다는 거다.

그러다 보면 소리의 종류를 파악하는 거고.

그런데 지금 분대장은 어떤가.

'듣는 귀는 수준급인데, 구분하는 건 초보자다.'

마치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듣는 행위만 단련한 사람 같다.

하지만 그게 단련한다고 되는 건가.

여벌 목숨이 수십 개라면 저런 식으로 단련도 되겠지만.

'묘해.'

분대장은 참 묘한 사람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자신이 아는 걸 하나라도 더 말해 준 거다.

그리고 분대장은 조금 전 배운 걸 금세 흡수할 것이다.

듣는 귀를 단련하는 게 힘든 거지.

소리를 구분하고 분류하는 건 부가적인 거니까.

그리 불침번을 끝내고 막사에 들어서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렘이 있었다.

손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는데, 그게 심히 불쾌했다.

"눈깔이 재수가 없는데?"

작센이 아침 인사를 건넸다.

렘은 부드럽게 웃다가 답했다.

"너도 이제 분대장의 매력에 빠진 거냐? 보고 있으면 막 가르쳐 주고 싶고 그러지?"

"정당한 교환이다. 신세를 졌으니 나중에 상응하는 가치를 받을 거다."

등가교환의 작센.

부대 내의 별명이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작센은 알았다.

분대장을 향한 가르침은 뭘 요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충동적인 판단이었다.

최근 전장에서 눈에 띈 활약을 했던 게 인상에 남은 탓일까?

작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여기서 끝내면 될 뿐.

"조까, 새캬. 사내새끼가 수줍어하기는."

렘은 낄낄대다가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모포를 당겨 턱 밑까지 덮더니 포근함에 취한 듯 곧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가끔 작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미친 야만인은 뭘 믿고 저리 나대는 걸까.

"가서 누워라. 나 잠들었다고 덤비면 머리 쪼개진다."

잠든 척하던 렘이 말했다.

작센은 렘의 말을 무시한 채, 제자리를 찾았다.

괜히 대거리하면 말만 많아지는 상대다.

"하여간 새끼, 툭하면 대답을 안 해."

아니나 다를까, 렘은 제가 말해 놓고 제가 투덜거렸다.

* * *

새벽 나절부터 출발한 정찰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아즈펜 새끼들 만나면 머리통을 쪼개 버린다. 알았나?"

소수 지휘를 맡은 정찰 분대장의 말이다.

순간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넌 정찰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물을 뻔했으나 그보다 분대장의 말이 더 빨랐다.

"사고뭉치 분대장, 당신도 지금은 그냥 병사인 거야. 명령에 불복할 거면 지금 말해, 실력으로 얘기하자고. 뭐, 난 누구와 달리 똥구멍으로 분대장이 된 게 아니라서 자신 있거든."

말투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화나지 않았다. 그리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평소에 이런 찬사를 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자신을 모르는 이들이 내뱉는 단순한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괜한 분란을 만드느니, 얌전히 순찰이나 돌며 배운 걸 곱씹고 돌아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아니꼬워도 참아요. 좀 나대는 성격인 것 같더라고요."

바짝 붙은 다른 병사가 말했다. 목소리가 걸걸하고 나이도 찬 병사였다.

"신경 안 써."

"그럼 다행이고."

옆에 붙은 병사가 분대장의 눈을 피해 수수하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다.

"그럼 출발!"

총원 열, 정찰대이자 순찰대의 출발이다.

정찰대라고 해서 모두 적지를 염탐하는 건 아니었다.

이쪽 평야는 대륙에서 그린 펄이라 불리는 넓은 초원이다.

동쪽으로 가면 얕은 구릉을 따라 몇 개의 완만한 산등성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넓고 시야를 가리는 게 없다.

서쪽으로 가면 나우릴리아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펜-하닐 강이 흐르고, 그 강은 지금 적군인 아즈펜 공국도 공유하는 넓은 강줄기였다.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이쪽 평야 전투에서 기습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찰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적지 탐사와 주변 순찰이다.

혹시나 낮이나 밤을 틈타 이동하는 무리는 없는지.

적의 기병이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는지.

혹은 다른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게 일이다.

그 와중에 주요 지역을 확인하는 것도 포함이고.

물론 정찰대는 위험하다.

언제 적군과 조우할지 모른다.

정찰대끼리의 교전이 곧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자주 일어나서도 안 되고.

"가자, 나우릴리아 보병의 위대함을 보여 주러."

엔크리드가 볼 때, 저 앳된 분대장은 제 실력에 취한 머저리였다.

어디 귀족의 사생아라도 되는 건가.

그게 아니면 부대 지휘부 쪽에 믿는 구석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막 열아홉이나 스물이나 됐을까.

나우릴리아 정규군 분대장으로서는 꽤 빠른 진급이다.

그래 봤자 진짜 천재에 비하자면 저런 병사는 널리고 널렸지만.

정찰대의 역할 따위는 이미 정찰 분대장이란 놈의 머리통 속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중 병사 일부는 그 말에 동조하기도 했다.

"당연하죠. 대장님 실력이면 몇 놈쯤은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용병 다섯 놈을 때려눕힌 용력을 보여 주십쇼!"

'분대장 꼬마 똥구멍 헐겠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됐는지는 너무도 뻔한 얘기였다.

하필 정찰대에 속한 병사의 부상이 잦아서 머릿수가 부족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자신도, 그리고 저 머저리들도 이곳에 오게 된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들은 수준 이하 아닌가.

그래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 정찰대의 루트는 정해져 있다.

'아군 진지를 기준으로 원을 그리며 순찰.'

세부적인 루트는 분대장의 몫이지만.

엔크리드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정찰 분대장이 심각하게 머저리 짓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누 발자국이군."

분대장이 지나가다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누는 소를 닮은 초원을 무리 지어 달리는 동물 중 하나다.

많으면 쉰, 적으면 스무 마리씩도 이동하는 동물이다.

"이걸 쫓으면 오늘 포식하겠군. 다들 바비큐나 해 먹자고."

...누 스무 마리를 쫓자고?

그보다 더 황당한 건, 저 발자국이 누가 아니라는 거다.

발자국은 누가 아니라 가젤의 것이었다.

"잘도."

뒤에 붙어 있던 인상 좋은 병사가 중얼거렸다.

그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으며 분대장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첫째 날, 정찰대는 전진하며 있지도 않은 누를 찾아 헤맸다.

당연하게도 대놓고 흉흉하게 눈을 부라리는 무리에게 잡혀 주는 짐승은 없었다.

"에이씨."

분대장은 괜히 성질을 부렸다.

만약 누를 잡았으면 저 새끼는 정말 불이라도 피우려고 했을까?

그랬다면 참 볼 만했을 것이다.

몰래 움직이는 것도 부족해서 모닥불까지 피우는 정찰대라니.

'나는 정말 완벽한 병신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나마 아무 짐승도 못 잡아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해가 떨어지기 전, 구릉과 훌쩍 큰 나무 네 그루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야영할 준비를 끝낸 참이었다.

"사고뭉치 분대장님은 어디 출신입니까?"

첫인상이 좋았던, 무엇보다도 정찰 분대를 이끄는 머저리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 병사였다.

"보더 가드."

"직업 군인?"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더 가드는 변방을 지키는 요새 도시다.

그곳에도 농지가 있고 상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군사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훈련 시설과 직업 군인이 잔뜩 머무는 도시란 거다.

"전 산골 마을에서 왔고 사냥이라면 자신 있는 편인데, 아까 그 발자국을 보고 누라고 하는 데서 기겁했습니다. 가젤의 흔적이었는데."

기겁한 건 엔크리드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공감대가 생겼다.

사냥꾼 출신 병사의 이름은 엔리.

수더분한 성격이지만, 현재 분대장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일은 재밌는 걸 알려 드리죠. 초원에는 딱히 길이 없는 것 같아도 짐승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거든요."

몇 마디 더 떠들던 엔리는 금세 눈을 붙였다.

그날 세 번째 순서로 불침번을 서며 엔크리드는 작센이 가르쳐 준 걸 곱씹었다.

실제로 검을 쥐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배운 걸 되새겼다.

정찰 파견을 나가기 전, 라그나와 렘과 한 대련이 꽤 도움이 됐다.

'어떤 자세에서도 찌르기를 넣으라고 했었지.'

렘이 한 말이다. 자신도 그걸 위해 단련 중이었다. 렘은 방법도 알려 줬다.

하체를 단련하라고 했다.

정찰대는 많이 걷는다. 기병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걷는 것도 좋아.'

다릿심을 기르기 나쁘지 않다.

육포로만 배를 채웠더니 속이 허할 법도 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그런 걸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 할 훈련과 앞으로 해야 할 훈련과 검술, 작센에게 배운 청각, 엔리가 가르쳐 준다던 사냥꾼의 잡기 따위가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그는 순수하게 배우고 익히는 걸 즐겼다.

물론 익힌 만큼 쓰는 것도 즐겼고.

'돌아가면 다시 대련해 보자.'

엔크리드는 불침번 내내 이질감을 느끼는 청각 단련과 함께 생각을 이어 갔고.

곧 다음 불침번을 깨우고 잠이 들었다.

이틀째 동이 트기 시작한 이후부터 정찰대는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에 엔리에게 짐승 길을 보는 법을 대강 배우고.

종아리까지 오는 풀을 스치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배울 게 많아.'

엔크리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엔리가 알려 주는 사냥꾼의 상식도 꽤 재밌었다.

그동안은 이런 쪽 지식을 쌓을 여유가 없었다.

"이쪽으로."

정찰 분대장이 앞장서서 길을 나선다. 향하는 곳은 키다리 잡초가 가득 자란 잡초밭이다.

'무난하네.'

적군을 만나서 머리를 쪼갤 거라던 것치고는 문제없는 루트였다.

배정받아 확인해야 할 지점이기도 했다.

물론 정찰 분대장은 엔크리드의 상식을 간단히 깨부쉈다.

"이대로 풀밭을 뚫고 나가서 정찰대 흔적을 쫓는 거다. 어때?"

이 새끼는 진짜 미친 새끼인가?

절로 그런 말이 입 밖에 나올 뻔한 걸 꾹 눌러 넣었다.

키다리 잡초밭에서 뭘 보고 방향을 잡을 것이며.

이렇게 간다고 적의 정찰대를 만난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대강 안쪽에 혹 적의 매복은 있는지, 이상 상황이 발생했는지만 확인하면 될 일을.

"끼어들지 마쇼. 거, 분대장이라고 다 같은 분대장이 아니야."

돌려 말하는 거로 다독이려 했더니, 휘하 병사가 나서서 이리 말한다.

허허.

엔크리드는 여전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이걸 이대로 놔둬도 되나 생각했을 뿐.

고민은 짧았다.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만약 수틀려서 죽게 된다면.

다음 날 다시 생각해 보기로.

그게 아니라면.

'헛다리 짚고 돌아가는 거지.'

뭐가 됐든 자신한테 손해는 아니었다.

24. 셋

"바람이 지금 이쪽으로 불죠? 근데 이쪽 짧은 풀들은 역방향으로 누웠고 동그란 모양인 게 보이죠?"

엔리가 긴 풀의 밑부분을 발로 밟는다. 그렇게 긴 풀을 옆으로 치워 그보다 짧은 풀이 가득한 땅을 보여 줬다.

그 풀밭에 난 흔적을 보고는 엔리가 술술 입을 열었다.

"그러네."

엔크리드는 답하며 유심히 바닥을 살폈다.

말하니 알겠다만은, 혼자서 찾으라고 하면 글쎄,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키다리 풀밭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녹색의 향연이다.

대륙을 여행하던 음유시인 하나가 한여름에 이 부근 평원을 보며 여기에 그린 펄이란 이름을 붙였다.

녹색의 진주라는 의미였다.

그중 긴 풀밭은 마치 수위가 깊은 심해와 같이 더 진하게 보였다고 하다.

그럴 만도 하지.

이 빌어먹을 풀밭은 인간이 들어와 헤집고 다니기에는 그리 기분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방심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 볼이고 눈이고 가리지 않으며 탁탁 부딪히고.

사방에서 풀벌레가 몸에 붙는다.

귀뚜라미나 여치 따위가 툭툭 튀어나와 뛰어다니고, 간간이 물이 고인 곳에선 개구리도 보였다.

개구리를 보고 있자니, 자신을 걷어찬 프록이 떠올랐다.

물론 프록은 자신들이 개구리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라 말한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그들 앞에서 개구리를 죽여도 그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심장을 터트려 버리겠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옆구리 한 방.'

반사적으로 막았지만, 딱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프록의 강함과 견주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그 프록과도 싸울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어쩔 수 없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기에.

하지만 또한 의심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럴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 말지.

엔크리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 즉시 털어 냈다.

그따위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므로.

그리 생각하며 엔리의 설명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초원 사냥꾼 출신이라는 이 병사는 다분히 긍정적이었다.

분대장이 어떤 병신 같은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엔크리드를 향해서 되레 참으라고 한다.

물론 엔크리드는 애초에 참을 필요도 없었다.

그도 그러려니 하는 건 익숙하니까.

엔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냥꾼의 장기를 발휘해 이런저런 걸 계속 살폈다.

듣는 재미가 있는 얘기였다.

"짐승의 배설물이 별로 없군요. 왜지?"

엔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문제가 돼?"

엔크리드는 자신의 머리 위로 자꾸 수그러지는 길고 두꺼운 풀잎을 손으로 밀어내며 물었다.

"이 풀밭은 사람이 보기에는 쓸모없는 잡초밭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쪽 풀을 주식으로 삼는 놈들에게는 천혜의 보고 같은 곳이니 보통 짐승의 흔적이 많은 남는 편인데, 지금은 드물군요."

짐승이 적다. 왜? 흘려듣던 엔크리드는 볼에 붙은 풀벌레를 손가락으로 잡아뗐다.

거머리도 아닌 게 피를 빨아 먹으려고 주둥이에서 삐죽한 뭔가를 내미는 게 보였다.

벌레와 주변의 시야를 가린 풀을 보자니, 날을 바짝 세운 낫을 들고 와서 싹둑싹둑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왈칵 일어났다.

"쉿, 말이 너무 많다. 너."

정찰 분대장이 뒤를 보며 말했다.

그는 눈앞을 스쳐 가는 귀뚜라미 따위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불평은 없다.

'이건 또 의외네.'

자기가 오자고 해 놓고 이게 뭐냐며 잔뜩 짜증이나 낼 줄 알았더니.

녹색의 향연이라 하지만, 잘 살펴보면 곳곳에 옅은 갈색으로 색이 바랜 풀도 많았다.

곧 가을이 다가온다는 징조다.

겨울이 되면 이 풍성한 풀밭도 잠들 듯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다.

그리고 다시 날이 따뜻해지면 죽은 풀을 양분 삼아 다시 키다리 풀이 자라고.

매해, 매년 반복되는 일이다.

'죽고, 다시 자라고.'

자연의 섭리일까.

그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뭘까.

오늘의 반복.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머릿속을 떠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가 반복되는 걸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순 없으니.

다만, 엔크리드는 노선을 확실히 정했을 뿐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한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마찬가지.

축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주라고 해도 변하는 게 없을 뿐.

꽤 오래 풀밭을 헤치고 걷는 중에 누가 엔크리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엔리가 아니었다.

분대장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병사다.

"우리 분대장이 너무 철없어 보이겠지만, 이해 좀 해 줘. 사정이 있어서 그래. 공을 세워야 하는데 정찰대 같은 곳에만 보내고 이러니까, 욕구 불만이라고."

갑자기 이건 또 뭔가.

"그쪽도 분대장이잖아. 그 똥구멍 얘기는 잊어 주면 고맙고."

생뚱맞은 타이밍이군.

그리 생각하면서도 엔크리드는 사과를 대강 받아들였다.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얼굴을 붉혀서 좋을 건 뭔가.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엔크리드는 여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쪽에 심력을 소모하느니, 훈련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겠다고 말겠다는 거다.

"그러지."

"아량이 넓어. 분대장."

그렇게 말한 병사가 미소를 보였다. 색이 바랜 금발에 싸움 잘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왕눈이랑은 반대되는 타입이란 거고.

더 쉽게 말하면 못생겼다는 거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몸을 돌리고.

버릇처럼 청각에 집중한다.

딱 그 타이밍에 이질적인 소리가 귀에 꽂혔다.

부스스. 하악! 바사삭.

작센에게 배운 뒤 꾸준히 훈련한 것이 빛을 발했다.

'소리가 다른데?'

정찰대 열 명은 어깨가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서로의 등이 보일 정도로는 붙어 걸었다.

이들이 키다리 풀을 헤치는 소리는 이제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 들린 소리는 달랐다.

더 멀리서 들린 소리다.

분명히 사람이 풀을 헤집는 소리였고.

그 사이에 하악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풀을 밟는 소리가 섞였다.

사람이다.

그게 아군일 리는 없었다.

키다리 풀밭 자체는 큰 효용 가치가 없는 땅이다.

이 빌어먹을 풀밭 너머에 적지가 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다만, 키다리 풀밭을 나오면 곧바로 평원인지라, 몸을 숨길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걸 통과해 움직이는 건 그리 영리한 행동이 아니다.

그럼 상대 쪽에서도 이쪽만큼이나 멍청한 분대장이 있어서 정찰대를 보냈다는 건가?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

엔크리드가 말했다. 그러자 앞에 선 싸움 잘하게 생긴 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뭐?"

당최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우측에서 엔리가 거들었다.

"뭐라고?"

엔크리드가 아예 발을 멈추자, 앞에 섰던 정찰 분대장이 뒤로 물러서며 다가와 물었다.

"적이다."

듣자마자 말했지만, 이걸 인지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핑! 퍽!

적이라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적의 공격이 먼저 닿았다.

"으악!"

분대장이 물러서며 선두가 된 병사의 머리통에 짧은 화살이 꽂혔다.

소리로 쏘아진 방향을 잡고.

눈은 화살의 형태를 훑었다.

'볼트.'

짧은 화살, 근거리에 쓰기 좋은 놈이다. 장궁에 걸어 쏘는 용도가 아니니.

'쇠뇌.'

결론은 금방이다. 엔크리드는 선두에 선 병사의 머리통에 구멍이 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엎드려!"

동시에 분대장의 멱살을 잡아 밑으로 당겼다.

"억!"

분대장이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그대로 바닥에 바짝 엎드리자, 곧 억, 컥 하는 단말마 따위가 들렸다.

'전면과 우측, 좌측.'

자세를 낮춰 1차 사격을 피해 봤자, 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럼 해야 할 건 무엇인가.

뛰쳐나가야 한다. 방향을 잡고 뚫어야 한다. 그럼 멈춰선 안 된다.

엔크리드는 바닥에 배가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춘 채로 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사사삭!

수풀이 옆으로 비켜나며 그의 움직임을 적에게 알린다.

당연하게도 쇠뇌용 화살이 무수히 날아들었다.

"바보 같은!"

엔리가 놀라 외쳤다. 자살 행위로 보였다.

파바박.

반쯤은 운이겠지만, 엔크리드는 볼트를 대부분 피했다.

한 발이 왼쪽 어깨에 꽂혔지만, 그래도 적이 시야에 잡혔다.

적은 키다리 풀을 적당히 잘라 움직일 공간을 확보했다.

수풀 사이에 녹색의 옷을 입고 손에는 쇠뇌를 든 놈이 보였다.

보자마자 검을 뽑는다.

'언제, 어느 자세에서든.'

최선의 공격을 펼치는 것.

배운 바대로 행동했다.

땅을 박차고 거리를 좁힌다. 적이 쇠뇌를 재장전하려 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검이 닿는 거리를 확보하자마자, 엔크리드는 왼발로 땅을 찍으며 한 손 찌르기를 날렸다.

그의 손에 들린 아밍 소드의 끝이 허공을 뚫고 날아가, 적의 목덜미를 훑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얇은 목덜미 가죽을 갈랐다.

칼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팍 하고 뿜어지더니, 곧 진한 선혈을 꿀렁꿀렁 쏟아 내기 시작했다.

목이 베인 병사가 제 목을 그러쥐고 기우뚱 넘어졌다.

엔크리드는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왼쪽으로 튀어 나가듯 움직였다.

볼트를 쏠 거리가 아니다. 창날이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왔다.

엔크리드는 달려드는 척하다가 제자리에 멈춰, 적의 창이 허공을 찌르게 놔뒀다.

보병용 단창과 그걸 들은 병사의 눈이 보였다.

기묘한 흥분과 놀람이 섞인 눈.

전장에 선 병사의 눈이다.

쇠뇌, 단창, 녹색으로 물들인 옷.

매복을 작정하기 위한 무장이었다.

눈에 들어온 정보를 한순간 머릿속에 쑤셔 박고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 횡으로 휘둘렀다.

단창을 든 적병이 뒤로 물러나, 검이 그린 궤적을 피하고 회수한 단창을 다시 쭉 내질렀다.

엔크리드는 쭉 찔러오는 단창을 보며 피하는 대신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했다.

제자리에서 반 바퀴 돌며 다시 검을 찌른다.

피하고 찌르는 행위, 공수를 하나로 합친 일격이었다.

검이 적의 몸통을 찔렀다. 푹 하고 손아귀에서 묵직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상대의 갑옷은 전부 두툼한 천 갑옷이었다.

적당한 힘과 재주, 날카로운 칼날이 있다면 뚫기 어렵지 않았다.

"끄으르르."

복부에 검이 꽂힌 적병이 단창을 떨어뜨리며 엔크리드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놈의 손아귀가 베이며 피가 흘렀다.

'바로 못 빼.'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철칙이다.

상대에게 잡힌 검을 놓고 바닥에 떨어진 단창을 줍는다.

쌩.

그사이 다른 적병이 쇠뇌를 몽둥이 삼아 휘둘렀다.

수그린 자세 덕에 엔크리드의 머리 위로 쇠뇌가 스쳤다.

투구 대신 쓰고 온 아밍 캡이 쇠뇌 끄트머리에 걸려 훌렁 벗겨졌다.

차가운 공기가 닿자, 두피가 시원해졌다.

엔크리드는 주운 단창을 보이는 발등에 꽂았다. 쇠뇌를 휘두른 적군의 발등에 멋진 장식을 만들어 주는 행위였다.

퍽!

"끄아아아!"

통증은 비명을 부른다. 비명은 주목을 부르고.

그러므로 상대 적병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하는 방편으로의 비명은 적절했다.

그대로 달려들어 단창이 박히지 않은 반대쪽 무릎을 잡아 역방향으로 꺾었다.

우드득!

"끄어어어!"

종교쟁이 분대원에게 배운 기술이다.

엄청나게 어설펐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넘어진 놈의 허리춤에 있던 숏소드를 뽑았다.

그러곤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잡으며 발등에 단창이 꽂힌 놈의 목에 숏소드를 바짝 들이댔다.

"끄그!"

놈이 반항하기도 전에 칼날을 부드럽게 밀어 넣고 옆으로 당겼다.

스커억.

손아귀에 저항력이 느껴지며 살가죽을 썩둑 벤다.

끄르륵하는 피거품이 끓는 소리가 났다.

목이 베인 병사가 손으로 목을 움켜잡더니 풀썩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엔크리드는 무릎을 꿇고 죽어가는 병사의 뒤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수그려 적병을 방패로 삼은 뒤 숨을 골랐다.

'일단 한쪽.'

삼면 포위 상태였다.

그중에 한쪽은 열어 둔 셈이다.

이제 수틀리면 도망갈 틈이 생겼다.

"...최하급 병사라면서요?"

그러자 어느새 뒤에 붙은 엔리가 말했다.

"맞는데."

숨을 고르며 답하자, 엔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솜씨가 최하급 병사라고요?"

"젠장, 내가 똥구멍이잖아."

그 와중에 정찰 분대장이 머저리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건 진짜 무슨 생각인지.

"뒤로, 나서지 말고."

싸움 잘하게 생긴 병사가 그런 분대장 앞을 막았다.

살아남은 건 이렇게 넷이었다.

남은 정찰대는 다 죽었다.

당장 눈앞에 눈을 부라리는 적병이 대략 스물이 넘는 듯싶었다.

"...뭔, 씹."

아즈펜의 적병이 입을 연다. 그가 놀란 눈으로 엔크리드를 한 번 보곤 죽은 병사 무리를 한 번 본다.

죽은 병사가 셋이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놀라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찾고 그대로 행할 뿐.

쇠뇌는 여전히 위협적이며.

적군의 수는 많고.

자신은 검을 잃었다.

"튀어!"

발렌 식 용병검, 줄행랑을 쓸 때였다.

엔크리드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뛰었다.

25. 키다리 풀밭

"이대로 풀밭을 뚫고 나가서 정찰대 흔적을 쫓는 거다. 어때?"

다시 보니, 이 말을 할 때의 정찰 분대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대감과 자신감, 적당한 긴장이 뒤섞인 모습이다.

새로운 오늘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줄행랑은 실패였다.

엔크리드는 눈을 뜬 뒤, 하루를 곱씹는 것으로 새로운 오늘을 맞이했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동쪽으로 간 게 실수였을지도.

'아니, 거기까진 괜찮았던 것 같은데.'

복기는 엔크리드의 버릇이다.

동쪽으로 튀다가 쇠뇌 부대를 다시 만나서 몸에 볼트를 다발로 꽂고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꿈틀거리다 머리통에 볼트가 꽂혀 죽었다.

그때의 고통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하지만 이걸 되뇌지 않으면 계속 죽어야 한다. 그건 더 싫다.

복기, 계속 되짚어 문제를 찾는다. 엔크리드는 생각을 반복했다.

'들을 수 있어서 먼저 기회를 잡았어.'

이질적인 소리를 잡아챘다.

작센에게 배운 게 도움이 됐다.

이후 야수의 심장이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게 했다.

한쪽을 택해서 뚫어야 했다.

실패했지만.

'다시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추격하는 부대에게 잡힌 게 아니라 운이 나쁘게 대기하던 부대와 만난 거니까.

'길을 다시 잡으면 될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있으니, 옆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엔리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너무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슬쩍 둘러만 보고 가면 그만이니까, 참아요."

뭘 자꾸 참으라는 건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말하며 엔리가 눈으로 슬쩍 앞을 가리켰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분대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인상 험한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부라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비를 걸기 위해 보는 건 아닐 것이다.

'분대장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사리 분별이 있는 쪽이지.'

아마도 지금쯤 기회를 봐서 자신을 잘 타일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말을 걸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인상 험한 병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엔크리드는 알았다며 엔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었다.

풀을 손으로 치우며 안으로 들어섰다.

곧 익숙한 광경이 눈 앞을 가린다. 녹색의 키다리 풀이 시야를 극단적으로 제한했다.

확실히 이 안쪽에서 매복한 상대를 맞이하는 건 안 좋다. 목숨 걸고 굳이 이 안에 들어가는 건 보통이라면 할 짓이 아니다.

'애초에 여길 안 들어가면?'

그건 안 된다.

키다리 풀밭을 정찰하는 게 이 부대가 이곳에 온 이유요, 목적이다.

그걸 무시하고 돌아가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들어가기도 전에 적의 매복을 눈치챘다고?

어떻게 정찰 방향을 돌린다고 쳐도.

여기에 있는 열 명이 잘도 그 말에 입을 맞춰 주겠다.

피할 수 없다. 보통 새로 맞이한 '오늘'은 언제나 이렇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곤란하다고 묻는다면야.

'나쁘지 않아.'

제대로 싸운 건 딱 한 번이었지만.

엔리가 자신을 보며 그게 무슨 최하급 병사냐고 물었고.

분대장은 자기 자신을 비하했다.

'실전.'

단 한 번의 전투였지만, 그 한 번의 경험이 값졌다.

야수의 심장이 당황할 겨를도 없게 해줬다.

틈을 쪼개며 검을 휘둘렀고 찔렀다.

상대의 행동 패턴을 예측해 움직였다.

그 사이사이 배운 걸 써먹었다.

두근.

심장이 뛴다. 짜릿한 무언가가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좋은 기회다.'

정찰 임무를 떠나기 전, 렘과 라그나가 번갈아 가며 자신의 검술을 봐 줬다.

그들에게 배운 것.

홀로 깨달은 것.

전부 소화하기 딱 좋다.

"여기 보이십니까? 풀이 누운 곳?"

"짐승 발자국이네."

엔크리드는 배운 걸 써먹을 줄 아는 남자다.

그는 아는 척을 했다.

엔리가 엔크리드를 보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물었다.

"사냥 경험이 있으시군요?"

없다. 엔리에게 배운 거였다.

"그냥 오가며 들은 게 있어서."

엔리에게 들은 거였다.

정직히 답한 뒤, 시답잖은 얘기를 이어 갔다.

그러며 걸음을 조금 재게 놀려 앞으로 붙었다.

분대장의 바로 뒤다.

엔크리드는 지금 정찰대의 진형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분대장이 앞, 우측으로 둘, 좌측으로 둘.

분대장의 바로 뒤는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맡는다.

나머지 인원은 후위처럼 뒤따랐다.

'그냥 머저리는 아니란 말이지.'

진형이 그럴듯했다.

만약 적이 나온다면 대응하기 좋은 형태.

쇠뇌를 무장한 부대를 만나면 진형 따위는 별 소용 없겠지만.

죽었던 오늘에서 정찰 분대장은 더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엔크리드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거기에 칼솜씨도 꽤 괜찮았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아주 능숙한 병사였고.

'최소 중급 이상.'

나우릴리아 병사 수준으로 보자면 그렇다.

분대장도 인상 험악한 병사도.

둘 다 실력이 괜찮다.

엔리도 나쁘지 않았다. 숏보우 하나를 왼손에 든 채로 걷는 그는 속사로 화살을 쏠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볼트 수십 발을 피하며 살아남을 수준은 아니지만.

'쇠뇌 부대는 무조건 피한다.'

엔크리드는 일부러 분대장 뒤로 바짝 붙어 걸었다.

분대장 눈치를 보는지 인상 험한 병사는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부스스. 하악! 바사삭.

그리고 다시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숙여."

일단 분대장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처음에는 넷만 살아서 도망갔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살릴 것이다.

"으억!"

분대장이 뒤로 넘어지며 비명 비슷한 걸 내질렀다.

"적이다!"

적군이 외쳤다. 곧 볼트가 날아들었다.

그사이 엔크리드는 아군 병사 둘의 오금을 순서대로 걷어찼다.

쓰러진 병사의 머리 위로 볼트가 휙휙 하고 날아갔다.

엔크리드도 발을 앞뒤로 벌리며 몸을 바짝 낮췄다.

눈앞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놀랐는지 잽싸게 뛰어서 달아났다.

엔크리드는 앞뒤로 다리를 찢었다가 허벅지 근육과 척주기립근의 탄력으로 일어나며 쓰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팽- 하고 나이프가 공기를 찢었다.

나이프는 허공을 갈랐다.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지만, 적군이 잠깐 몸을 움츠리게는 했다.

짧은 틈, 그거면 충분했다.

빡.

팔꿈치를 뒤로 뻗으며 살짝 분대장의 이마를 때리고.

"정신 차리고."

말하며 앞으로 튀어 나간다.

파바박.

흙과 풀을 짓밟으며 검을 뽑는다. 뽑으며 자세를 잡고 한 손 찌르기다.

'전심전력.'

반드시 꿰뚫겠다는 마음은 담되, 찌르고 나서 근육에 힘이 빠지면 안 된다. 전력으로 찌르면서 힘은 어떻게 남기는데?

"그건 감이 있어야 해. 감은 어떻게 얻냐고? 계속해. 하다 보면 돼."

대련 중 렘이 해 준 말이다.

엔크리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소화하는 중이었다.

퍽!

검 끝이 상대의 가슴 어림을 뚫었다.

비틀어 뽑는다.

근육과 신경, 심장을 쪼갠 칼날이 뽑혔다.

그대로 횡으로 휘두르는 척하다가 거리를 좁히고 발을 휘둘러 다른 적병의 정강이를 끊어 찼다.

막 쇠뇌를 들고 조준하려던 적병이다.

"꺽!"

맞은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리고, 엔크리드는 폼멜로 수그린 병사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콰직!

그 동작은 어설픈 가죽 투구 위를 둔기로 때린 것과 같았다.

단단히 생나무를 쪼갠 감각이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그대로 두 놈째를 쓰러뜨린 후다. 몸에 일반적인 것보다 배는 두꺼운 천 갑옷을 두르고 큼직한 원형 방패를 든 놈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핑핑핑!

엔리가 속사로 화살 세 발을 쐈다.

하지만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꽂힌 자리에 피가 배어 나오지 않는다. 어설프게 꽂힌 화살 한 발은 아래위로 흔들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너무 급히 쏘는 바람에 활의 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거다.

엔크리드가 급히 왼손으로 검을 바꿔 쥐고는 그대로 휘둘렀다.

까-앙!

칼날과 방패의 모서리가 만나며 불똥이 튀었다.

방패 틀을 찌그러뜨리긴 했지만, 엔크리드도 손이 저렸다.

"크아아!"

적군이 고함을 내지르며 엔크리드의 머리 위를 덮쳤다.

두근.

잠깐의 방심이 곧 죽음이 되는 곳.

당황하면 죽는다.

그게 바로 전장이다.

야수의 심장이 빛을 발하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담담하게 만들어 주는 대담함.

두꺼운 근육으로 이뤄진 심장이 제 역할을 해내기에.

엔크리드는 방패를 내리찍는 궤적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잘 보고, 잘 피해."

렘의 가르침이다.

보고 피한다.

"검에 쓸데없는 부분은 없습니다. 손잡이부터 검 끝까지, 다 쓰는 겁니다."

이건 라그나의 가르침.

엔크리드는 잘 보고 있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뒤로 물러났다.

붕 하고 방패가 코앞을 스치며 풍압으로 머리칼이 휘날렸다.

"후욱, 후욱!"

방패를 내리찍은 놈이 근육에 힘을 줘 방패를 다시 치켜들었다.

거친 숨결이 방패 너머에서 들렸다.

숨소리와 어깨의 움직임을 통해 상대가 바짝 긴장한 게 보였다.

방패 위로 빼꼼히 내놓은 눈알을 굴리며 엔크리드를 주시한다.

방패를 때려서는 싸움이 길어질 것이다.

엔크리드는 검을 던져 손잡이가 위로 검날이 손으로 오게 바꿔 쥐었다.

바꿔 쥔 채, 허리와 무릎의 회전을 통해 전력으로 휘둘렀다.

방패를 든 적이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이뤄진 동작이었다.

훙, 퍽!

곧 삐죽한 검의 날 밑, 콧등이 끄트머리가 상대의 눈에 박혔다.

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피와 함께 맑은 물이 줄줄 흘렀다.

"끄아아악!"

애꾸가 된 병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엔크리드는 검날을 쥔 덕에 피가 흐르는 손으로 숏소드를 뽑았다.

그대로 애꾸가 되어 발광하는 상대의 목에 칼날을 꽂았다가 뽑는다.

팍!

동작에 맞춰 피가 솟았다. 꾸르륵, 목에서 피거품이 일며 방패병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여기로!"

무지막지한 장면의 연속이었기에.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몇 명을 해치운 거지?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찌른 검을 회수했다.

검 손잡이까지 피가 질척하게 묻었다.

그걸 대강 닦아 내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그를 따라온 숫자는 여섯이었다.

둘을 더 살린 거다.

"...너 뭐야."

달리는 와중에 옆에 찰싹 달라붙은 정찰 분대장이 물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이런 말 할 시간에 달리는 게 나을 텐데.

엔크리드는 다시 동쪽으로 뛰었다.

이후에도 보이는 족족 적군을 때려눕혔고 죽였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깊게 들어왔으나.

'방향을 잘못 잡았어.'

동쪽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는 창병 오십을 만났다.

단련된 창병 오십이면 소대 규모다.

고작 셋이서 상대할 수 없었다.

오면서 나머지를 잃고 정찰 분대장과 인상 험한 병사만 남았다.

"재수가 없었네."

험악한 외모의 병사가 말하고.

"젠장."

정찰 분대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울상을 지었다.

엔크리드는.

"다섯은 데려간다."

각오를 다지고 덤볐다.

상대 쪽에서 보자면 가히 미친놈이었으리라.

오십의 창병을 보고 덤벼?

창병 무리가 보기에 이건 완벽하게 미친놈이었다.

기사 또는 기사단에 속한 이라면 모를까.

이건 무슨 짓인가.

검을 쓰는 걸 보면 싸울 줄 아는 건 알겠지만,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잘해야 숙련된 병사 소리나 들을까.

제 목숨을 안 돌보고 덤비는 모습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렇게 달려든 엔크리드는 창병 셋을 죽였다.

그리고 배에 창에 꿰어 죽었다.

물론 끔찍하게 아팠다.

창병 무리 뒤로 기다란 깃발이 누워 있는 게 보였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이쪽으로 가자. 풀밭 너머 적군을 죽이면 공적이잖아? 아니, 생포하는 게 나으려나?"

분대장의 말을 들으며 엔크리드는 다시금 하루를 곱씹었다.

복기다.

'동쪽에서는 활로가 안 보여.'

그럼 이번에는 북쪽이다.

실전은 좋은 자양분이었다.

이건 그토록 사이 안 좋은 렘과 라그나도 같은 의견이다.

하물며 그 작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오감을 단련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목숨 걸고 싸우는 거라고.

죽는 그 순간에 인간의 집중력은 한계를 깨 버린다고 했다.

그 말을 엔크리드는 몸소 증명하는 중이었다.

'늘었다.'

오만이 아니고 자만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실력이 꽤 늘었다.

그리고 지금도 느는 중이었다.

반복된 오늘에서 엔크리드는 북쪽에서 아홉 번 더 죽었고.

동쪽에서 여섯 번 더 죽었으며.

서쪽에서는 열두 번 더 죽었다.

전투가 이어진다.

단숨에 실력이 늘진 않는다. 그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차분하게 한 걸음씩 나갈 순 있으니.

엔크리드는 다시금 환희를 느꼈다.

지금도 성장하고 있으니까.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이 있으니까.

"으아아아!"

퍽!

반복된 하루 중 꽤 용맹한 병사의 창날이 볼을 스친다.

이전의 엔크리드라면 피하지 못했을 일격이었다.

가히 찌르기 병사의 그것과 닮은 일격이었으나, 피했다.

피한 것에 그치지도 않았다.

수 없는 실전이 엔크리드에게 좋은 버릇을 심어 줬으니.

그는 피하며, 검을 위에서 밑으로 내려쳤다.

수직으로 내리치는 검이다.

투-웅.

그리고 그 순간, 엔크리드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검을 내리쳤는데, 손에 남은 감각이 없다.

아니, 너무 미약하다.

분명 상대의 팔을 베고 내려갔는데, 마치 썩은 나뭇가지를 벤 것 같았다.

그만큼 손쉬웠다.

반면에 상대의 팔은 깨끗하게 잘려 허공에 날았다.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더없이 깨끗한 일격.

흔히 말하는 손에 느낌이 나지 않는 검격.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수없이 해내는 그 일격.

"아."

한순간 집중이 깨질 정도로 엔크리드는 놀랐다.

전투 중에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손에 쥔 검의 무게가 충실히 느껴진다.

손에 남은 짜릿한 감각이 희열을 느끼게 했다.

"하, 진짜."

너무 신난다.

피를 뒤집어쓴 채로 웃는다. 더 없이 차오른 만족감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친 새끼!"

적군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그야말로 미친 새끼일 따름이었지만.

어쨌든 엔크리드는 수없이 또 죽었다.

그리고 수없이 또 오늘을 반복했다.

그 반복된 오늘에서 대련으로 배운 게 몸에 스며들었다.

26. 활로

'거기서 피했어야 했어.'

엔크리드는 그에게만 존재하는 어제의 오늘을 다시 곱씹었다.

'아니,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니지. 일격에 너무 연연했다.'

피할 건 피하고 칠 건 치고.

순간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거듭 듣지 않았던가.

수없이 많은 검술 선생에게도, 렘에게서도.

"야수의 심장 덕으로 잘 보면 뭐 하겠수?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그냥 골로 가는 거요."

마치 옆에서 렘이 낄낄 비웃으며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렘 새끼가 알면 저리 말했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순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오늘은 조금 다른 루트로.'

매일 길을 바꾼다. 반복하는 오늘을 가진 자의 특권이었다.

"이쪽 풀밭 너머에 있는 적의 정찰대를 잡아가는 거다. 어때?"

오늘도 어김없이 정찰 분대장이 모두를 나락으로 이끄는 중이었다.

말릴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아니, 엔크리드는 정찰 경로를 바꿔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어떤 다른 루트를 택해도 같다.

'이미 이 일대에 매복한 병력이 가득하다는 거지.'

키다리 풀밭을 중심으로 적군이 잔뜩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눈 뜨자마자 본대로 복귀하는 게 답이지만.

'그게 가능할 리는 없고.'

그렇게 하면 명령 불복종이다.

명령 불복종은 심하면 즉결 처형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이 아홉을 버리고 혼자 탈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건가?

'그러려고 검을 배웠던가?'

기사, 장군, 영웅.

지금도 그딴 걸 꿈꾸며 검을 휘두른다.

그런데 이들이 몰살당할 걸 알면서 그냥 버리고 가는 게 답인가.

과연 그게 최선인가?

'아니지.'

사람에겐 누구나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호인도, 그렇다고 성자도 아님을 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누군가는 이걸 신념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걸 고집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남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정한 일이다.'

남의 정한 기준에 맞춰서 살았다면 진즉에 모든 걸 포기하고 어디 한적한 마을에 있는 자경단의 한량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

도주라는 선택지는 버린다.

그 외에 오늘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목표였다.

다시 싸운다. 피를 흘리고 적군을 죽인다. 이번에는 검을 방패 삼아 막다가 부러졌고.

창대에 머리통을 맞았다.

빙글 하고 세상이 돌았다.

당연하게도 죽음이 뒤따랐다.

창날이 가슴을 후빈 게 원인인지, 아니면 창대에 머리통에 깨진 게 원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시 반복이다.

또 죽고 또 죽는다.

목숨을 건 실전을 거듭 경험함으로 대련으로 배운 걸 소화하고.

알고 있던 것들을 되새긴다.

그 모든 시간 내내 엔크리드는 딱 두 가지만 머릿속에 담았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더 싸울 수 있을까.

둘은 이 오늘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내일을 향해 가는 것.

엔크리드는 그 순간을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을 안다.

두 번의 오늘을 그렇게 넘겼으므로.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길이 안 보여.'

어딜 가도 적군만 가득하다.

메뚜기와 여치, 풀벌레와 눈을 가리는 키다리 풀, 습기 가득한 질퍽질퍽한 땅에 뭐 좋은 게 있다고 저만한 병력을 매복시키는지 모를 일이다.

'지독한 새끼들이네.'

하물며 하나같이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다.

어중이떠중이 급의 돈 받고 싸우는 용병도 아니고.

마지못해 끌려 나온 징집병도 아니다.

전부 봉급 병사다.

그리고 이런 병사 무리를 일부에서는 정예병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대규모 전장에서야 정예병이 다른 의미로 쓰이겠지만.

이 정도 전장에서는 직업 군인 정도면 정예병이 맞다.

배 채우고 창 휘두르며 싸우는 연습만 하는 게 정예병이 아니라면 어떤 병사가 정예라 할 수 있겠나.

'골치 아픈데.'

기습으로 덤비면 셋이나 넷까지는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특히나 쇠뇌로 무장한 병사 무리를 뒤에 두고 도주하면서 싸우는 건 더더욱 무리고.

'전부 다 죽일만한 무력.'

이 오늘을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가능할까?

그만한 무력을 갖는 게?

아니, 아니다.

해 봤으니 안다.

처음 반복했던 오늘, 그 찌르기 병사를 넘어 내일로 나아가려 했던 건 무엇 때문이었나.

'정체된 시간 안에서 배우는 건 한계가 있어.'

엔크리드는 자신을 잘 안다. 실력을 늘리고 성장의 희열을 느끼려면 자신에게는 좋은 스승과 계기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반복된 오늘을 허투루 보낸다는 건 아니었다.

청각 단련, 검술, 전투 복기.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미약하지만 성장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활쏘기는 자신 있지만, 간이 작아서 난전이 되면 손이 떨립니다."

엔리가 옆에서 말했다. 몇 번 들었던 내용이다.

본인은 간이 작지만, 그래도 활을 쏠 때는 꽤 괜찮은 실력이라는 둥.

"백 보 밖의 머리 위에 얹은 사과를 맞출 정도는 돼?"

머리나 식힐 겸 농담을 던지니.

"백 보 밖은 무리고, 서른 보 이내는 해 볼 만하죠. 저기 정찰 분대장의 머리 위에 사과를 놓고 오시면 제가 한번 맞춰 보겠습니다."

"아쉽네, 사과가 없어."

"그러게요, 아쉽군요."

엔리는 농담을 즐길 줄 알았다.

"근데 정말 서른 보 이내면 꽤 자신 있습니다. 머리 위 사과는 모르겠고 머리통을 맞추는 건요."

엔리가 덧붙였다.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화살로 머리통을 하나씩 맞추면 얼추 적군 열은 따겠어."

엔크리드가 엔리의 화살집을 힐끔 보며 말했다.

허리춤에 맨 납작한 가죽 화살집에는 대략 열 발의 화살이 들어 있었다.

안 흔들리게 가죽끈으로 허벅지와 허리를 감아 연결하고 그 끈을 다시 화살 열 대를 모아 감아서 묶어 놨다.

나중에 끈만 느슨하게 풀면 뽑아서 쓰기 좋을 것이다.

평원 사냥꾼 출신답게, 엔리는 활을 다루는 것도 화살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도 능숙해 보였다.

"이봐. 뭘 낄낄대는 거야? 정찰 임무 중이다. 하여간, 쯧."

앞에서 정찰 분대장이 눈을 부라렸다. 혀도 찼다.

물론 엔크리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반복된 오늘에서 저 애새끼가 한마디씩 끼어드는 것도 몇 번은 있었던 일이다.

'화살로 두엇 잡고 시작하면 좋겠는데.'

분대장 뒤에서 따라 걷던 인상 험악한 병사가 엔크리드에게 눈짓했다.

대답하지 말고 그냥 있어 달란 뜻으로 보였다.

이전과 같다.

얼굴 붉힐 필요는 없으니, 굳이 따질 건 없었다.

'그럼 이쪽에서 기습하기 한결 쉬울 거고.'

엔크리드의 머릿속에서 가상의 전투가 이어진다. 반복된 오늘을 통해 수집된 정보는 가상의 전투를 꽤 그럴듯하게 머릿속으로 구현해 냈다.

결국, 죽는다. 어지간하면 죽을 것이다.

상대와 실력 차이가 확연하게 난다고 해도 머릿수 차이가 너무 난다.

무장이라도 이쪽이 유리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양손에 도끼 두 자루 들고 들어가 세차게 휘둘렀을 것이다.

렘의 실력이라면 백 명을 다 죽일 순 없어도.

죽일 만큼 죽이고 빠져나오는 건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날래고 파격적인 실력을 갖췄다.

'그런 놈이 고작 병사라는 게 우습지.'

정작 렘은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어찌 보면 사고뭉치 분대에서 유일하게 자신만 욕심이 있는 듯싶었다.

분대장 그 이상이 되고 싶은 건 자신뿐인 듯하니.

여기에 없는 분대원을 떠올리면 뭐 하나.

엔크리드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짧게 자란 풀 사이로 실뱀 한 마리가 휙 하고 지나갔다.

점점 발에 밟히는 풀의 높이가 높아지는 중이었다.

키다리 풀밭에 다가간다는 방증이었다.

'난 렘이 아니다.'

다시 가상의 전투를 머릿속에 그린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분대장의 실력은 어느 정도지?'

이제까지는 너무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저 나쁘지 않다 정도로만 인식했다.

정찰 분대장과 인상 험악한 병사, 그리고 엔리.

나머지 정찰 분대원까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답을 내놨다.

"내가 지킬 필요는 없지."

"...네?"

자기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엔리가 옆에서 되물었다.

"아니야."

멍청했다. 이제까지 엔크리드는 홀로 이걸 뚫고 나가려 했다.

혼자 전부를 지키는 개념으로 싸웠으며, 적군과 조우하는 순간을 수동적으로 대처했다.

고로 이제까지 모든 수단을 다 써 봤다고 생각했지만, 하나가 남았다.

아예 판을 바꿔 버릴 만한 수단이.

우득우득.

엔크리드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아직 풀밭에 다다르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엔크리드는 인상 험악한 병사의 어깨를 잡고 당겼다.

"음?"

그가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줬다.

"뭔데?"

"너 아까 나 노려봤지?"

안다. 노려본 게 아니라 양해를 구한 눈빛이라는 거.

하지만 얼굴이 무기인 친구는 그저 바라만 봐도 노려보는 것과 같아지는 법이다.

"아니, 이봐, 그게 아니라."

"혓바닥이 뭐가 이렇게 길어."

붕!

엔크리드가 주먹을 휘둘렀다. 인상 험악한 병사가 고개를 뒤로 젖혀 피했다.

"...너, 뭐야? 돌았어?"

앞에서 정찰 분대장이 황당함을 담아 물었다.

"덤벼."

엔크리드는 무시하고 상대의 발목을 걷어찼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끝내 그것도 피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치 좀 있는 놈 같더니."

"눈치가 있으니까. 네 아니꼬운 눈빛을 읽은 거겠지?"

렘이 인정했다.

말로 사람 속을 긁는 건 엔크리드가 대륙 제일일지도 모른다고.

"덤비라고, 지나간 암소도 안 돌아보게 생긴 자식아."

과연 그랬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노련함을 전신에 풍기는 병사의 얼굴이 벌게졌으므로.

"오냐, 몇 대 맞자. 너."

엔크리드는 그와 싸웠다.

칼을 뽑는 대신 주먹을 칼 삼아, 발을 둔기 삼아.

맞고 때리는 게 얼추 비슷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밀렸다.

'잘 싸운다.'

왕국이 정한 기준으로 보자면 최소 중급에서 상급으로 넘어가는 수준은 됐다.

"최하급 병사라며?"

짝짓기에 거듭 실패할 것 같은 외모의 병사가 터진 입술에서 피를 퉤 뱉고는 물었다.

"맞아. 최하급."

"진급하면 뭐 돈도 주고 한다던데, 뭐 한다고 그러고 있는 거냐?"

엔크리드도 안다. 자신이 최하급 병사 수준은 아니라는 걸.

군에 발을 들일 때부터 최하급은 아니었다.

그저 굳이 급수를 올릴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다.

자신의 실력과 한계를 명확히 아니까.

굳이 하급 병사라는 꼬리표를 붙일 필요는 없었다.

물론 지금은 좀 다르다.

기회가 되면 진급도 할 것이다.

다만, 그게 최우선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지.

삼류와 이류, 일류 용병을 가르는 기준이나.

이쪽 병사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나.

그게 뭐가 중요할까.

"잘 싸우는구나. 너."

엔크리드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자신의 예상보다 실력이 더 괜찮다.

실전에 들어가면 더 잘 싸우는 타입일 것이다.

제대로 싸울 기회만 된다면 말이다.

"뭐 하는 짓이야?"

둘이 싸우는 걸 보며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정찰 분대장이다. 그가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연다. 당장이라도 엔크리드에게 덤빌 것 같았다.

그에 앞서 엔크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련입니다. 몸풀기 딱 좋았네요."

뻔뻔함을 넘어서 당당함이 묻어나는 답에, 정찰 분대장이 뭐라 말을 뱉으려다가 멈췄다.

말문이 막힐 법도 했다.

"그냥 놔두시죠.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인상 험악한 병사가 분대장을 말렸다.

엔크리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입은 좀 조심해라. 사고뭉치 분대장. 나중에 혀 때문에 일 한번 치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엔크리드는 답하고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옆에서 엔리가 바짝 붙더니 부은 광대뼈 부근을 보며 말했다.

"최하급 병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는데."

다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주변 정찰 분대원 몇 명도 다들 엔크리드를 힐끔거렸다.

"너무 잘 싸우시던데."

"열심히 단련했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복된 오늘을 통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았나.

이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정찰 분대장은 기어코 키다리 풀밭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저 안에 꿀단지라도 숨겨 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애인을 숨겨 뒀던가.

하악! 바삭.

같은 소리를 듣고 다시 적군이 다가오는 걸 알아챈다. 새로운 오늘을 맞이한다. 이게 시작이었다.

"적군."

터진 입술로 엔크리드가 말하고 엔리를 툭 쳤다.

"저쪽, 쏴."

활 솜씨를 보고 싶었다. 엔리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네?"

아무래도 적군이란 말에 바짝 얼어붙은 듯싶었다.

이후로도 제대로 활을 쏘는 건 못 봤다. 그의 말대로 간덩이가 작은 건지, 전투가 벌어지자 허겁지겁 움직이기 바빴다.

그래도 속사로 몇 발 쏘는 걸 보니, 자세는 잡혀 있는 것 같았고.

'내가 분대원인 채로는 안 되겠는데.'

같이 움직이는 이들이 명령에 반응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어 두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이것도 뒤로 넘겨 두고.'

결국,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발악하고 죽는 그런 일.

엔크리드는 몇 번의 오늘을 더 반복했다.

그 와중에 분대장의 실력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어디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 태가 났다.

"도전은 언제든 받아 주마."

반복된 하루 중 몇 번 정도 시비를 걸고 적당히 놀아 주며 져 주니까 애가 좀 신나 했다.

엔크리드는 분대장을 몇 번 상대해 보며 버릇과 패턴을 눈에 익혔다.

'실전 경험이 적어.'

그게 인상 험악한 병사가 보모처럼 딱 붙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 둘의 관계는 뭘까.

슬쩍 물어보니.

"옛날에 존경하던 사람 아들."

인상 험악한 병사가 툭 말을 뱉었다.

이 작자, 의리가 넘쳐흐르는 인간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게 전부 이 애새끼를 위한 거였다.

그는 진짜 보모였다.

"귀족?"

"몰락 귀족은 귀족 취급 안 해 주는 거 모르나?"

정찰 분대장은 몰락 귀족이었다.

"그렇군."

이후 나눈 말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엔크리드는 머리 위에 뜬 해를 봤다.

정오의 해다.

바람은 적당히 선선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다.

정찰병은 전부 경갑 차림이다.

날래게 움직이려면 당연했다.

간소한 무장과 경갑.

그게 기본이다. 아군의 무장과 실력, 가진 것들을 정리한다.

그 외의 것들도 전부 인지해야 한다. 엔크리드는 현 상황에서 아는 모든 걸 머릿속에 넣었다.

날씨, 바람, 장소, 상황, 아군 그리고 적군.

이 모든 걸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면 활로, 보일 것 같았다.

27. 이게 왜 최하급 병사야?

정찰 분대장의 이름은 앤드류였다.

풀 네임은 앤드류 가드너.

한때 남작의 위를 지녔으나, 지금은 몰락한 가문의 유일한 승계자다.

그의 바람은 하나였다. 자신의 대에서 가드너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앤드류, 네가 희망이다."

병으로 죽어 가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남아 여전히 생생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과 남의 집 하녀 노릇을 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그 돈은 전부 앤드류를 위해서 썼다.

검술 교습소부터 시작해서 입고 먹는 것까지.

풍족한 성장기를 보냈다고 할 순 없으나, 그렇다고 부족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일에 치이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어머니의 바람 또한 한 가지였다.

"가문을 이어,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렴."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앤드류가 제 가문을 부흥시키는 수단으로 택할 만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가 아닌가.

싸우고 또 싸워, 제 능력을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훈련과 인맥이 필요한 시점에 적절한 도움이 있었다.

어머니는 죽기 전, 한때 남편의 의형제와 다름없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재능은 있군요."

아버지의 의형제라던 남자의 말이었다.

이후 앤드류는 고된 훈련을 받았고 종군했다.

직업 군인으로 시작했고, 어린 나이에 분대장의 지위를 받았다.

'공적이 필요해.'

앤드류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만 가득했다.

실력에 자신이 있기도 했다.

전장에 나서서 어지간한 병사 서넛을 죽인 뒤 생긴 자신감이다.

"매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조언자이자, 조력자가 툭하면 잔소리했다.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앤드류가 그 말을 허투루 듣진 않았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

일단 자신이 살아야 가문의 부흥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도전적인 삶을 포기할 수도 없다.

도전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가문의 위세를 잃은 아버지가 좋은 본보기였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없던 아버지는 매일 검을 휘둘렀으나, 그 재능이 보잘것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가문의 부흥 따윈 꿈꾸지 못했다. 금세 포기했으니까.

남은 자산을 탕진하는 게 그가 가진 삶의 전부였다.

그러다 시비가 붙은 도박꾼의 칼에 찔려 죽었다.

'미래가 없는 삶은 암울한 법.'

그렇기에 그는 가문의 부흥을 꿈꾸면서도 제 목숨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아니꼬운 일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 사고뭉치 분대장이 앤드류의 눈에 걸렸다.

자신은 실력으로 이 자리에 있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위대한 위업을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그런데 저 작자는 뭔가.

실력은 최하급 병사에.

운 좋게 분대장의 위치에 선 봉급 도둑이 아닌가?

직업 군인으로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그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했다.

'어찌어찌 봉급이나 타며 오늘에 안주하다가 죽겠지.'

훈련한답시고 검을 휘두르는 척이나 하고 살 것이다.

일개 병사가 검을 단련한다며 검대와 검을 차고 온 것도 우스웠다.

엔크리드를 안다면 할 수 없는 생각이지만, 앤드류는 그를 몰랐다.

그리고 지금, 아침부터 사고뭉치 분대장이란 놈이 빤히 자신을 쳐다봤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불쾌한 감각이 서로의 눈을 타고 흐른다. 그 감각의 끝, 앤드류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알이 거슬려.'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사고뭉치 분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깔이 불쾌한데?"

음? 지금 누구보고 하는 말이지?

앤드류가 미간의 확 좁혀졌다. 찌푸려진 그의 인상이 심경을 대변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병사 중 하나가 먼저 나선다.

"지금 뭐라고 한 거요?"

이마에 칼자국이 난 병사다. 본래 싸움판을 떠돌던 친구라고 했던가.

앤드류는 그를 향해 말했었다.

"나를 따라와라. 깡패보다 나은 삶을 주겠다."

그는 이후 앤드류의 심복이 됐다.

아직 실력은 형편없고 깡패일 때 버릇을 다 버리지도 못했지만, 싸움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데려온 친구다.

그런 병사가 셋이었다.

그 셋이 슬며시 일어나서 사고뭉치 분대장을 감쌌다.

* * *

엔크리드는 몇 번의 오늘을 반복하며 결론을 내렸다.

'역시 분대원의 위치로는 안 돼.'

이들이 자신의 말을 충실히 따르고 명령에 움직여 줘야 한다. 그게 최소 조건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기사는 어떻게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가.

그들은 어찌하여 전장에 나서자마자 사람들을 열광케 하는가.

간단한 이유다.

실력이다.

능력을 보여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지금 자신을 포함한 열 명을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인가.

신뢰를 얻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하루 만에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며 친분을 쌓을 순 없으므로.

남은 건 강압을 기반으로 한 폭력뿐이었다.

"그 입이 문제 같은데? 예쁘장한 문신이라도 하나 새겨 드릴까?"

이마에 흉터가 있는 병사가 말했다. 눈빛이 번들거렸다. 사람 몇은 담가 본 낯짝이었다.

어째 이 새끼는 대사가 한결같네.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셋이 선 위치를 봤다.

그들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지만, 이미 수차례 반복한 오늘이다.

반복한 이유? 하나뿐이었다.

폭력과 강압은 압도적일수록 좋으니까.

그러려면 경험이 필요했다.

실력과 별개로 이들의 반응과 패턴을 알아야 했다.

그런 이유로 발렌 식 용병검은 배제.

순수한 실력으로 제압해야 했다.

반복된 오늘을 넘기기 위한 첫 번째 관문, 깡패 병사 셋을 제압하는 거였다.

"말문이 막히셨나?"

깡패 출신 병사가 건들거렸다.

엔크리드는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말없이 한 걸음.

상대가 반응한다. 움찔하며 주먹을 들으려고 한다. 싸울 자세를 취한다.

셋 중 하나는 아예 숏소드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엔크리드는 왼발을 먼저 바닥에서 뗐고, 그 한 걸음은 무척 느렸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게 뭔가 싶어 바라보다가도 뭐라 따지기에는 모호한 그런 타이밍.

엔크리드의 오른발이 빠르게 땅을 찼다.

느린 동작에 빠른 동작을 섞으며 배는 빨라 보이기 마련이었다.

간단한 속임수이자, 선공을 위한 수작이었다.

그리고 그건 꽤, 아니 엄청나게 유용했다.

"씁!"

이마에 흉터를 가진 병사가 호흡을 삼키며 주먹을 뻗으려 했다.

물론 그보다 빨리 엔크리드는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떡!

정강이를 옆으로 밀듯이 차자 상대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곧바로 손등 보호대를 앞세워 옆으로 기울어진 상대의 관자놀이 부근을 때렸다.

호쾌한 스윙의 타격이었다.

뻑!

"끅!"

상대가 짧은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엔크리드의 이후 움직임도 물 흐르듯 유려했다.

옆으로 몸을 돌리자, 빈틈을 노리고 날아오는 숏소드가 허공을 긋는다. 약속된 동작이라도 되는 듯 숏소드를 쥔 병사의 손목을 잡아 꺾는다.

다치지 않게 적당히 힘을 주는 게 핵심이었다.

우득. 딱.

그렇게 손목을 비틀고 턱 부근을 비스듬한 각도로 때리자, 두 번째 병사도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쓰러지는 병사의 가슴을 마주 안아서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고.

일어나며 떨어진 숏소드를 주워든다. 엔크리드는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더 할 건가?"

나섰던 병사 중 홀로 남은 친구가 식은땀을 흘렸다.

먼저 칼을 뽑은 건 상대 쪽이었다.

이대로 찔러도 할 말이 없으리라.

"뭐 하자는 거지?"

거기까지 지켜보던 정찰 분대장이 나섰다.

"첫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걸음마나 간신히 뗀 애송이 친구."

엔크리드가 겁을 집어먹은 놈 대신 정찰 분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면 어지간한 건 다 참고 넘어가도 된다. 딱히 상대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다면?

할 말을 다 하면 되는 거다.

"너 같은 놈 지휘를 받으면 시답잖은 정찰 임무에도 몰살당할 것 같아서, 실력으로 가르자고."

항명은 큰 죄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묘했다.

엔크리드는 본래 분대장의 지위다.

상대가 그걸 존중했다면 모를까.

철저하게 무시하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참지 못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윗선에서도 둘 중 누가 정찰 분대를 이끌어도 상관없다고 할 터였다.

정찰 소대장이 떠날 때 고생하라며 어린 분대장의 뒤를 잘 봐주란 말도 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그때였다.

뒤를 봐주다 못해 앞에 나서야 할 때.

"...싸워서 이기는 쪽이 분대 지휘권을 갖자고?"

정찰 분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되겠군. 나보다 약한 놈 밑에서 구를 마음은 없어서."

정작 사고뭉치 분대에서는 크라이스를 제외하면 엔크리드보다 잘 싸우는 괴물들밖에 없지만.

핑계는 핑계일 뿐이다.

되도록 상대가 발끈해서 덤비는 게 좋았다.

"덤벼라.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 여자랑 잠은 자 봤나? 아, 아직 고추가 덜 자랐나?"

앤드류의 안색이 굳었다.

그는 아직 첫 경험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을 아껴 몸을 단련했다.

그 시간을, 자신의 노력을, 여기까지 오기 위해 했던 모든 것을 상대가 모욕하는 것처럼 느꼈다.

퉁.

분대장이 숏소드를 뽑았다.

"넌 검을 뽑아도 좋다. 칼날 길이가 실력을 대변하진 않을 테니까."

"거, 음."

앤드류의 말에 옆에 있던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말리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숨을 쉬며 물러섰다.

그는 용병으로 꽤 오래 일했다. 이런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봤다.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있었다. 차라리 지금 풀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감정이 골이 깊어지는 게 더 골치 아픈 일이다.

사내자식들이란 한바탕 싸우고 나면 오히려 감정을 털곤 했으니까.

더욱이 그는 앤드류를 잘 알았다. 자신이 검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천둥벌거숭이 애송이 같지만.

칼도 다룰 줄 알고 소탈한 면도 있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가를 줄도 안다.

'쉽진 않겠지만.'

수틀리면 자신이 끼어들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고뭉치 분대장의 자세, 발의 위치 따위를 보니 보통내기로 보이진 않았다.

손바닥에 인이 박이다 못해 굳어 버린 두툼하고 딱딱한 굳은살이 보였다.

하루 이틀로 만들어진 훈장이 아니었다.

"됐다. 난 맨손으로 하지."

"이 새끼가?"

앤드류가 흥분했다. 저건 단점이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

나중에 지적할 게 생겼다.

남자는 그리 생각하며 마음 편히 감상하기로 했다.

빨리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둘 다 실력이 특출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엉망진창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므로.

그러면서도 내심 앤드류가 이기지 않을까 했다.

흥분했다고 해서 기본기가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

그는 재능이 있었다.

사고뭉치 분대장이 손짓했다. 덤비라는 손짓에 앤드류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뻑!

"...한 방에?"

아니, 이건 뭔데.

인상 험악한 병사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앤드류가 달려든 순간, 사고뭉치 분대장이 왼손을 뻗는 시늉을 했다.

그걸 감지한 앤드류는 숏소드를 그었다.

그러곤 검의 궤적을 완벽하게 읽은 상대가 왼손등에 있는 가죽 건틀렛으로 날아오는 숏소드의 검면을 때렸다.

그 결과 한순간 앤드류의 가슴이 열렸다.

활짝 열린 앤드류의 품 안으로 사고뭉치 분대장이 파고든다. 이후 좁은 공간에서 그의 몸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딱!

바닥을 차며 안에서 몸을 뒤틀며 팔꿈치를 뻗어, 정확히 앤드류의 명치를 찍었다.

그 한 방으로 끝이었다.

"끄으으읍."

앤드류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순간 호흡이 턱 막히고 사지에 힘이 쭉 빠질 것이다.

급소란 그런 곳이니까.

앤드류가 꺼걱 하는 신음을 마저 토해내며 등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실전이었다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무슨, 힘이.'

두꺼운 천 갑옷을 뚫고 충격을 전해 주나.

실력이 어지간한 용병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연이어 절로 드는 의문이 있었다.

이게 왜 최하급 병사야?

28. 기습과 푸른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