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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

어, 저거 좀 이상하지 않나.

원래 저랬나?

위기라고 생각하고 달려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갈 수 없어 옆으로 빙 돌아가는 중이었다.

토레스는 엔크리드가 검을 휘둘러 로저를 베는 것도 애꾸 라이칸 새끼의 목을 썰어 버린 것도 봤다.

그러며 드는 생각이다.

변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대련만 십수 번이다.

그때의 엔크리드와 지금의 엔크리드는 달랐다.

'뭐가 달라졌지?'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칼질이 조금 더 싸늘한 것 같은데?'

여유도 더 있어 보이고.

"원래 저렇게, 음, 잘 싸우는 거지?"

옆에서 핀이 물었다.

드문 실력이다. 보는 순간 누구나 다 그리 생각할 것 같았다.

"죽여주게 잘 싸우네."

감탄하던 핀이 눈을 매섭게 빛내더니, 갑자기 왼발을 길게 뻗어 땅을 밟더니 반대편 발로 돌멩이 하나를 탁하고 차올렸다.

발등에 맞아 위로 솟은 돌멩이를 쥔 핀이 달리면서 옆으로 휙 던지자.

팩하고 날아간 돌이 적병의 뒤통수에 맞았다.

딱 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맞은 놈이 고개를 숙인 순간, 늑대인간이 손톱으로 놈의 등을 후볐다.

퍽!

한 방에 등에 구멍이 나진 않았다. 갑옷이 여간 튼튼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빈틈을 허용한 대가로 등을 맞은 적병은 옆으로 굴러서 피해야 했고, 그 덕에 진형이 흐트러졌다.

진형을 갖춰 싸우던 이들 사이로 라이칸 두 마리가 파고들었다.

진형이 무너지면 라이칸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토레스는 그쪽으로 시선을 한 번 줬다가 돌렸다.

이 와중에 돌을 던지는 핀도 이상한 여자지만.

토레스는 지금 엔크리드가 너무 이상했다. 어색했다. 묘한 느낌이 가슴을 쿡 찔렀다.

말로 표현하자니, 뭐라 할 말은 없고.

그냥 이상했다.

엄청, 매우, 몹시.

'왜?'

곱씹어 보면 다 이상한데, 몇 개만 꼬집자면.

'일단, 실력.'

토레스는 지금 눈앞에서 달빛에 취한 라이칸 새끼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는 싫다. 이길 수야 있긴 하겠지만, 죽을 수도 있다.

단검으로 목을 쑤시려고 하다가 손톱에 어디 하나라도 잘못 걸리면?

'아우.'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괜한 상상이었다.

그럼, 엔크리드는?

'심장이 돌덩이냐?'

담대한 수준을 넘어선 과감함 아닌가.

적군, 그것도 잔뜩 약을 올려 둔 적병 무리와 늑대인간 사이에서 회피 묘기를 보이질 않나.

적 지휘관을 단칼에 죽여 버리질 않나.

'저 애꾸 라이칸도 슥삭 했고.'

검으로 손톱 몇 번 때리더니, 그대로 목을 벴는데.

그 솜씨가 사르르르 하고 아랫배가 살짝 아플 수준이었다.

회전하며 뻗어 나간 검이 무슨 채찍처럼 휘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아.'

토레스는 그제야 자신과 대련하던 엔크리드와 지금의 엔크리드의 차이를 인지했다.

'숙련도가 다르잖아. 숙련도가.'

분명 어색하고 어설픈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자기가 빈틈을 후벼 파며 많이 싸우면 싸울수록 빈틈을 메우기 좋다고 조언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새 완숙의 경지로 보인다.

적어도 지금의 회전 베기는 그래 보였다.

'며칠 만에?'

천재였나?

아닌데, 같이 어울려 봤기에 안다.

엔크리드의 몸 쓰는 재능은 그저 그런 정도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와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으로 둔한 편인데.

'이야. 이건 뭐.'

그냥 검을 휘두르면 한 마리나 한 명이 죽는 수준이다.

지휘관과 애꾸를 죽인 뒤에도 간간이 엔크리드를 노리며 늑대인간이나 적병이 달려들었는데.

스텝 밟고 우직하게 내리긋는 검에 머리통이 깨지고.

작정한 수평 베기는 갑옷을 베는 대신 묵직하게 후려치듯 때려 갈비뼈와 내장을 작살냈다.

칼날이 직접 파고들지 않는다고 해서 충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

중검식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주는 수평 베기라 하겠다.

'쟤들은 겁나지도 않나.'

엔크리드가 적이라고 하면 싸우기 무서울 것 같은데.

물론 토레스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지휘관과 리더.

그 외에 죽은 놈들이 서넛이 더 늘고.

그러자 엔크리드에게 덤비는 놈이 없었다.

보름달에 취해 이성을 잃은 라이칸 놈들도 아예 엔크리드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보고도 지나치고.

빙 둘러서 가고.

'나 같아도 그런다니까.'

그렇게 되니, 적병과 라이칸의 싸움만 남았는데.

그 전투도 거의 끝자락이었다.

홀로 고고히 달빛만 받으며 엔크리드만 남았다.

그게 퍽 어색해 보이지도 않는다. 익숙한 태도, 달빛 아래 엔크리드는 숨을 고르고 담담하게 나머지 싸움을 지켜봤다.

그걸 보는 순간 토레스의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늑대인간과 적병이 고작 인간 하나를 피하는 모습도 놀랍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긴 덕택이기도 했다.

위화감 따위가 토레스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실력은 그렇다 치자고.'

그럼, 이 상황은?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잖아.

라이칸 새끼들하고 회색 개 부대가 만난 것부터.

개구멍에서 계속 뒤에 뭐 있는 거 아니냐고도 했고.

'지휘관 이름은 어떻게 아는데?'

그건 진짜 말이 안 되지 않나.

우연이라 치부할 수가 없잖아.

의문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었다.

지금 토레스가 그랬다.

그렇게 우회해서 달리는 동안 이상하다는 말만 되뇌자.

"뭐가 자꾸?"

옆에서 핀이 물었다. 달리면서 핀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전장의 향방을 읽는 중이다.

둘 중 누가 남든 다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나.

처음에는 인간 쪽이 유리했는데.

지금 보면 라이칸 놈들이 이길 것도 같고.

라이칸은 진즉부터 엔크리드란 흉몽을 피했는데.

인간 쪽은 아니었다.

몇 번 더 엔크리드를 노렸다. 그 덕에 머릿수가 더 줄었다.

이렇게 된 거? 전부 한 명이 만든 상황이다. 엔크리드, 무슨 독립 소대의 소대장, 몸이 예쁘고 얼굴도 예쁜 남자.

뭐, 무슨 전술의 천재 같은 건가?

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죄다 이상해."

옆에서 같이 뛰는 토레스가 계속 신소리를 뱉었다.

둘이 꽤 친해 보였는데, 뭔가 아무것도 모르겠고, 이것도 모르겠고, 저것도 모르겠고.

뭐, 이런 눈빛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남은 놈들 처리해야 하니까."

그리 말하며, 핀은 작정했는지 허리춤의 도끼를 던졌다.

막 적병과 눈이 마주친 뒤다.

붕!

손을 떠난 손도끼가 회전하며 적병의 가슴팍에 퍽 하고 꽂혔다.

도끼에 맞은 적병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아프지, 새캬."

핀이 말하며 달렸다.

옆에서 달리는 토레스는 계속 이상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렇게 엔크리드에게 합류한 둘이다.

우회해서 오는 바람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쨌든 가시거리 범위 안에 있다가 합류하란 말을 지킨 셈이었다.

"뭐 좀 묻자."

그리고 토레스는 물어야 했다. 이 상황이 뭔지, 어떻게 된 건지.

실력이 묘하게 변한 건 제쳐 두고.

가장 급한 것부터.

"지휘관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냐?"

이건 그럴듯한 변명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엔크리드는 무던했다. 그게 뭐 중요하냐, 이거다.

"우연히."

"우연?"

우연으로 적군의 지휘관 이름을 알 확률은?

"크라이스가 적군 중에 이상한 놈이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어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나? 없다. 그리고 그럴듯했다.

"아."

"머리 감추고 다니는 게 유명하다고 비웃었지."

도시급 강자는 아니지만, 적군이니까. 거기에 하는 짓이 특이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경로로 소문을 들을 수도 있긴 했다.

아즈펜에서도 몇몇 놈은 변방수비대 대장의 이름을 알기도 할 테니.

그렇다면 가능하지. 가능은 하지.

"그럼 이 상황은 의도한 거지?"

"당연히 우연이지. 늑대인간 무리가 여기에 오는 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당연한 걸 뭘 묻는 거냐는 눈빛이다.

그게 토레스는 무척 거슬렸지만.

"그게 중요해? 나 갑자기 계획이 하나 떠올랐는데."

핀은 엔크리드가 무슨 타고난 전술 천재인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고.

토레스는 엔크리드의 어투에 또 묘한 여유를 느껴 어색했지만.

둘 다 귀는 열었다.

일단 들어는 봐야 할 거 아닌가.

"성벽 넘자. 지금이라면 아무도 성벽을 넘을 놈이 있다곤 생각 못 할걸?"

개구멍은 누가 봐도 적군이 파 둔 함정이었고.

거기서 가까스로 도주한 거다.

적병이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몰래 성벽을 넘는다면?

"기가 막힌데?"

핀이 먼저 동조했다. 그럴듯했다. 당연했다.

계획은 반복된 오늘을 통해 세웠다.

이게 어설프면 이상했다.

"씁."

토레스가 혀를 차긴 했으나, 그도 동조해야 했다.

어쨌든 작전은 그대로 진행 중이니.

지금 엔크리드가 말한 게 더없이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 같긴 했다.

그것도 적이 찔리는지도 모르게 쑤실 비수.

"가자고."

그렇게 아직 늑대인간과 적병의 싸움이 끝나기도 전.

셋은 움직였다.

"씨, 튄다!"

라이칸 대가리에 창을 찔러 넣던 병사가 외쳤다.

그렇다고 쫓아갈 순 없었다.

남은 병사의 숫자는 고작 열둘.

진형을 갖춰 싸울 순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로저 대장을 갈라 버린 저 작자와 싸우고 싶진 않았다.

"젠장."

그러니 괜히 욕만 나올 뿐이었다.

108. 승부수였다.

'잘 먹힐 것 같은데.'

성벽을 맞이한 핀은 확실히 전보다 경계의 시선이 흐릿하다고 느꼈다.

육감의 문 수준은 아니지만, 그녀도 레인져이자, 패스파인더로서의 감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토레스는 이게 과연 맞는 길인가 의심했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고민할 때가 아니잖아.'

하기로 했으면 한다.

그도 변방수비대의 일원, 나우릴리아 병사 등급제에 특급을 받은 병사다.

일당백은 아니어도 홀로 두셋 몫은 해내는 유용한 인력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먼저 간다."

굳이 핀을 앞세우지 않았다. 성큼성큼 손을 벽 틈에 넣고 오르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갬비슨도 벗었고, 투척 무기를 몇 개 썼다고 해도 허리에 절그럭거리는 롱소드는 그대로였다.

"...쟤는 대체 뭐 하는 애야?"

레인져인 자신보다 벽을 잘 탄다. 핀으로서는 할 법한 말이었다.

"나도 몰라. 가는 중이다."

"뭐?"

토레스는 자기가 한 말을 곱씹고 괴상한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다.

"전에는 조금 알았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하여간 뭐, 잘 따라와."

엔크리드의 성벽 타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예술이었다. 원숭이 뺨을 후렸다.

고민도 없이 성큼성큼 손과 발을 움직였다.

그 뒤를 핀이 따라갔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말뚝이 두 개뿐인지라 성벽에 걸 줄도 두 개가 전부였다.

핀이 밑을 보니 토레스가 가까스로 쫓아오는 게 보였다.

낑낑대지만, 애초에 운동 능력이 뛰어난 놈이다.

'그럼, 쟤는?'

다시 고개를 위로 돌려 본 핀이다.

이미 성벽 끝에 거의 다다른 엔크리드가 흉벽 밑에서 웅크린 자세로 멈췄다.

흉벽은 성벽 위로 두껍고 높게 만들어 수비를 위한 구조물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재주가 없다면 흉벽을 맨손으로 넘어서 성벽 안쪽에 떨어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저긴 못 올라가나?'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핀 자신이야, 손끝으로 매달려 상체부터 당긴 뒤에 허리 탄력으로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혹시 몰라 들고 다니는 작은 갈고리를 걸면? 더 쉽다. 갈고리 걸고 줄을 감으면 폴짝 넘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넘어간 뒤에 뒤따라오는 동료에게 손을 잡아서 당겨 주면 될 일이다.

어쨌든 엔크리드가 못 넘어가서 멈춘 것 같진 않았다.

흉벽을 넘기 전, 매달린 엔크리드는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밑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간단한 수신호지만, 알아듣긴 어렵지 않았다.

[경비병.]

성벽 안쪽에 인기척이 있다는 건가.

정작 핀은 어떤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인져인 나보다 더 예민하다는 건가.'

사실 엔크리드도 느껴지는 건 없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일 뿐.

흉벽 밑에 매달린 엔크리드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수작을 부렸을까.'

육감 차단.

이것만은 오늘을 반복하면서도 통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주문으로 수작을 부린 건 확실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평온할 순 없을 테니까.

개구멍에서야 이미 굴 안에 들어와 있어 불길함을 느낀 순간 끝장났다고 치고.

라이칸스로프 무리도 이 땅이, 그러니까 크로스 가드의 앞이 항시 마물이 오가는 땅이니 놓쳤다고 쳐도.

성벽 위에 숨어 있는 병력의 기척 또한 눈치채지 못했다?

분명 무슨 수작을 부린 거였다.

예순 번째 오늘까지는 그 수작이 뭔지 알아내려고 용을 썼으나.

'놔두자.'

중요성의 차이다. 마법사가 부린 수작보다 더 중요한 게 널렸고, 궁극적인 목적이 분명하니까.

오늘을 넘는 것.

그 시간 동안 단련하는 것.

그리하여 검을 길잡이 삼아 나아가는 것.

알아내는 걸 포기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나?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다.

이미 반복한 오늘을 통해 아는바.

'이쯤이려나.'

엔크리드는 흉벽에 매달린 채 왼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매달리려면 성벽에 틈 따위가 있어야 하는데.

크로스 가드의 이쪽 성벽은 일반 마물을 비롯해 가끔은 콜로니를 이룬 마물도 상대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 덕에 여기저기 흠집이 많았고.

보수가 되긴 했으나, 틈도 많았다.

틈에 손가락을 걸고 발끝을 집어넣고 있자니 움직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성벽 위에 매달려 자리를 바꾸며 머릿속으로 성벽 너머를 그렸다.

처음 이곳에 도달했을 때는 예측하고 추측하기만 했으나.

지금은 렛샤라는 마법사의 위치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이다.

이 오만한 마법사는 반복된 어떤 오늘에서도 제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자리를 잡은 엔크리드가 다시 수신호를 보냈다.

[너희 먼저 가.]

핀과 토레스가 수신호를 보곤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핀, 그다음은 토레스.

흉벽에 매달린 핀이 손을 뻗어 토레스를 돕고.

그대로 둘이 넘어선 순간.

화르르륵.

머리 위로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횃불 일고여덟 개가 동시에 불이 붙은 것일 터였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니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분명 내 아이들이 움직였는데?"

렛샤의 목소리.

예상한 대로 바로 성벽 너머.

그녀는 자신을 모르지만, 자신은 그녀의 위치를 안다.

그것만으로 유리한 고지였다.

거기에 그녀의 이름도 알고, 어떤 주문을 부리는지도 알았다.

"이런 씨."

토레스가 욕설을 뱉고.

"진짜네."

핀의 중얼거림을 들은 엔크리드가 손을 뻗었다.

흉벽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한쪽 팔로만 몸을 끌어 올렸다.

렘을 비롯한 분대원들이 거듭 감탄했던 근력이다. 거기에 거듭된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한 덕에 몸이 더 가볍다고 느꼈다.

쑥 하고 몸을 올리며 흉벽 위로 고개가 솟자마자 앞구르기 하듯 허공에서 몸을 휘돌렸다.

예전이라면 어림도 못 낼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으나.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하고 그동안 수없이 구른 덕에.

엔크리드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흉벽 밑으로 떨어졌다.

앞으로 말렸던 몸을 펴며 무릎을 굽힌 채로 바닥을 발로 찍었다.

훙, 쿵.

따로 낙법을 하지 못해 바닥이 찌르르 울었다.

엔크리드의 바로 앞, 마법사 렛샤가 보였다.

더없이 놀라 눈을 부릅뜬 얼굴로.

"너-언."

입이 열리고 뭐라 말하기도 전, 엔크리드의 손이 움직였다.

삐이익!

휘슬 대거다.

렛샤는 놀랐으나, 당황하진 않았다.

이건 어디서 튀어나왔지? 이런 생각만 했을 뿐.

당연히도 믿는 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주문으로 구현한 무형의 장벽이 존재했으니까.

코앞에서 쏘는 쿼렐도 막는 방어막이다.

그렇게 제 방어막을 두드릴 걸 기다리는데.

엔크리드의 휘슬 대거는 그녀를 노리지 않았다.

그녀의 너머, 쇠뇌를 든 병사 넷의 목을 노렸다.

퍼버벅.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한 엔크리드의 휘슬 대거는 목표를 정확히 맞췄다.

그동안 단련한 보람이 있었다.

적병 넷이 고꾸라진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지기 직전.

렛샤가 반응했다.

"캿!"

그녀의 입에서 기묘한 외침이 터져 나왔고.

곧 바닥에서부터 훙 하고 가시넝쿨이 날아왔다. 낭창하게 휘어지며 허리를 후려쳐 왔다.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병사부터!"

엔크리드는 검을 뽑으며 외쳤다.

치링!

뽑은 검을 휘두른다. 너무 집중한 탓인지.

머리통이 뜨거웠다.

'얇은 건 베고. 두꺼운 건 쳐 내고.'

엔크리드는 중검식이 아닌 유검식을 기초로 삼고 움직였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검술의 기본 원리 정도는 알아 두면 좋습니다. 중검식을 쓴다고 중검식만 배우면 멍청한 짓이죠. 상대의 검술을 알아야 대응도 하고 싸울 거 아닙니까?"

평소에는 게을러 빠졌고, 자신을 가르칠 때가 되어야 그나마 없는 열의라도 보이는 라그니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열정을 불태우곤 했는데.

그런 날에 했던 말이었다.

이후 각 검술의 기본 원리 정도는 배웠다.

그동안 넝쿨을 상대로 칠십 번을 넘게 연습했고.

엔크리드의 일흔 번이 넘는 오늘이 빛을 보였다.

얇은 건 잘랐고.

두꺼운 건 쳐 냄으로.

퍼버벅, 투두둑. 텅.

어떤 가시넝쿨은 두께가 팔뚝만 했다.

숫제 몽둥이 수준의 충격이었으나, 검면으로 막고 자세를 낮추며 위로 흘렸다.

유검식이었다.

"이놈이!"

렛샤는 극도로 분노했다. 감히 내 넝쿨을 피해? 칼잡이 따위가?

그녀의 손이 움직이고, 곧 넝쿨 창 서너 개와 넝쿨 채찍이 날아들었다.

엔크리드는 어설프게 감에 의지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부릅떴다.

한 점의 집중을 모두 눈에 모은 그런 기분.

눈깔이 타는 듯한 그런 체감.

이렇게 하면 모든 게 보였다.

하나하나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다시금 같은 짓을 반복한다.

검으로 쳐 내고 휘둘러 때리고 흘리고 벤다.

느낌? 그딴 건 버렸다.

육감? 지금은 필요 없다.

굳이 감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다 보고 때리고 피하고 후리면 된다.

그리 두 번의 넝쿨 공격을 흘리고 피하는 사이.

주변에서 악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의 단말마였다. 토레스와 핀의 실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님에야.

특히나 다른 곳에서 시선을 끌어 주면 토레스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단검을 다루는 재주, 직접 보지 않았나.

"그래,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해 주마."

렛샤는 분노를 안으로 머금고 눈을 빛냈다.

뱀의 눈을 닮은 마법사의 눈이 엔크리드를 직시했고.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이미 몇 번이고 봐 온 것 아닌가.

야수의 심장이 쿵쿵 뛰며 말하는 듯했다.

아니, 렘이다. 렘이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저딴 거에 당할 거면 그 심장 떼내슈."

걱정하지 마라, 미친 렘 새끼야, 저런 거에는 안 당하니까.

사안에도 꿈쩍하지 않자 마법사의 넝쿨이 더 매서워졌다.

휘리릭.

얇아지고 빨라진다.

피비비비빙.

이제까지 렛샤가 부리는 넝쿨은 창과 채찍 형태가 가장 많았지만.

현 상황까지 몰아세우면 화살 형태가 나왔다.

실제 화살은 아니지만, 두께와 더불어 매섭게 쏘아지는 건 화살의 그것과 같았다.

인간은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 낼 수 있는가.

'없다.'

기사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그렇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면.

화살 비를 쳐 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긴.'

죽었다고 복창하고 해야지.

군인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병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냥 엔크리드란 인간이 그런 것이다.

포기는 없다. 후회도 없다.

나아가는 길에 제 인생의 모든 걸 걸었다.

양손에 검을 꽉 쥔 엔크리드는 화끈한 안구의 통증을 느끼며 집중했다.

'점과 점을 잇고.'

잇는 선을 기반으로 전부 쳐 낸다.

얇게 꼬아진 넝쿨이 밑에서 위로 솟아,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 개수가 열 개를 넘어서는 걸 확인한 순간, 숫자를 세는 걸 포기.

엔크리드는 제 몸을 중심으로 집중력을 흩뿌렸다.

라이칸스로프 무리와 그레이 독 부대 사이에서 깨달은 것, 집중력 흩뿌리기.

그거로 인해 영역 내에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는 것.

그 이전, 개구멍 안의 싸움에서 배운 것도 있다.

순간적인 판단력.

모든 상황, 찰나의 순간 주저 없이 행동하는 것.

엔크리드는 두 개를 섞고 그대로 행했다.

퍼버버벅.

곧, 그의 앞 허공에서 넝쿨이 사방으로 찢기며 녹색 체액을 터트렸다.

렛샤의 이마에 핏대가 서고, 눈알에도 핏발이 섰다.

넝쿨은 멈추지 않았다.

엔크리드의 칼도.

그리고 병사들과 싸우던 핀과 토레스도 힐끗 그 광경을 봤다.

이제는 그냥 잘 싸운다는 말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토레스는 생각하며 병사 하나의 등 뒤에 선 채로 멱을 땄다.

퉁!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쿼렐이 날아왔다.

팍하고 볼트가 토레스가 죽인 병사의 뱃가죽에 꽂혔다.

"잘 보고 쏘지 그러냐?"

우드득. 끄으으악!

그 타이밍에, 한쪽에서 들리는 비명이다.

뱀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을 스르륵 움직이는 핀의 작품이었다.

다리가 꺾여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꺾여 비틀린 병사가 거품을 물었다.

핀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쿼렐에 꽂힐 판이니.

그사이에도 엔크리드와 마법사의 싸움은 계속됐고.

누구도 둘 주변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날카로운 가시넝쿨이 바늘처럼 날아들었는데.

가끔 몇 개가 튕겨 나와 주변 성벽 따위를 쑤셨다.

아군 마법사 손에 죽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두 물러났다.

그 덕에 토레스와 핀이 한숨 돌린 것도 있었고.

푹푹 성벽에 구멍을 내는 뾰족한 가시넝쿨 촉(鏃)을 보면 토레스도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다.

'이거 병사를 죽인다고 해결될 일인가.'

그러며 토레스는 깨달았다.

결국, 여기 싸움의 향방은 저 둘에게 달렸다고.

마법사가 이기면?

토레스와 핀도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런데 엔크리드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토레스가 보기에도, 핀이 보기에도 엔크리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아까까지는 피하던 넝쿨 일부가 그의 몸을 스치기 시작했으니.

그에 맞춰.

"몸에 두른 가죽 쪼가리를 믿고 덤볐느냐?"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흥분하지 않은, 승기를 붙잡은 걸 확신하는 나지막한 읊조림.

'안 좋은데.'

토레스는 생각했고.

그게 맞았다.

엔크리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계에 금세 봉착했다.

다만, 그건 엔크리드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렛샤가 승기를 확신하고.

토레스와 핀, 적병이 이 싸움을 주시하는 이 타이밍.

양손으로 쥐고 휘두르던 검을 왼손으로만 쥔 엔크리드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승부수였다.

109. 불 지르는 것도 버릇

마법사의 시선, 엔크리드는 렛샤라는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마법사도 눈이 있잖아.'

코도 있고 입도 있다.

인간이란 소리다.

"인간은 누구나 반사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작센의 가르침이 새삼 떠올랐다.

그에 맞춰 준비한 것.

엔크리드는 사납게 몰아치는 가시넝쿨을 잠깐만 멈추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기 위한 수단.

숨겨 둔 한 수.

이제까지의 오늘에서도 몇 번 시도했던 것.

연습은 충분했단 거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왼손만으로 검을 들고 쳐 내고 피하다가 가시넝쿨 하나가 퍽 하고 왼쪽 손목 위를 때렸다.

하수도의 시체 애호가에게 얻은 가죽 건틀렛 겉면이 갈기갈기 찢겼다.

엔크리드는 그 순간 오른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그 손짓에 렛샤의 눈썹이 꿈틀댔다.

투척 무기 던지는 것만 몇 번이나 보여 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렛샤는 상대가 뭘 던져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지간한 물리력은 막아 내는 주문 방벽을 두른 상태 아닌가.

그리 방심한 그녀의 눈앞으로 단검 대신 돌이 날아왔다. 수정을 닮은 얇은 구슬이었다.

번쩍!

갑자기 터진 불빛이었다. 횃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광원.

반사적으로 엔크리드가 던진 물건에 시선을 던진 렛샤를 포함한 모두의 눈이 멀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들은 시야를 잃었고.

"습."

호흡을 삼킨 엔크리드의 몸이 움직였다.

바닥만 보며 이 순간을 기다린 엔크리드의 수작이니.

소매에 숨겨 둔 건 하수도에서 얻은 빛나는 돌.

켜는 법을 알아내느라 고생 좀 했다.

그걸 이렇게 쓸 줄은 몰랐지만.

숨겨서 던지는 건 하이드 나이프란 기술을 이용했고.

빈손을 보여 줌으로써 상대의 방심을 끌어낼 의도였고, 그게 제대로 먹힌 셈이다.

이 모든 상황이 겹쳐 종잇장 같은 틈을 만들었다.

엔크리드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툭.

그 어느 날 견습 기사, 스콰이어를 보며 배웠던 돌격기.

바짝 자세를 낮춘 채로 앞으로 내달린다. 양손으로 그립을 쥐고 검을 치켜들었다.

상체를 크게 들며 왼발을 앞으로 뒤에서 앞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며, 수직 내려베기.

때마침 시야를 회복한 렛샤가 그걸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그게 그녀의 단말마이자, 유언이었다.

슉, 쩡-.

렛샤의 방어막이 부서진다. 중검식 내려베기, 그것도 힘을 몰아넣기로 작정한 일격이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일격에.

렛샤의 머리가 걸렸다.

퉁. 드드득.

방어막을 깨며 방향이 틀어진 칼날이 그녀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귀를 자르고 빗장뼈를 갈라, 밑으로 빠져나왔다.

푸브그륵.

결국, 내장 일부와 상반신의 삼 할을 베어 낸 칼날이 허리쯤에서 빠져나오고.

칼날에 잘린 팔 하나를 포함한 살덩이가 퍽 하고 떨어졌으며.

멀뚱히 선 채로 내장과 피를 바닥에 콸콸 흘리는 반송장이 된 마법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베인 자가 무슨 말을 할까.

눈에 어린 빛이 단숨에 흐려진다.

마지막 순간에 무슨 짓을 하고 싶었는지는 여실했다.

엔크리드의 뒤에서 넝쿨 몇 개가 꿈틀거리다가 힘을 잃고 쓰러졌으니.

"후."

엔크리드가 그제야 들이켠 숨을 뱉었다. 엔크리드는 렛샤의 보호막이 일정 이상 충격을 받으면 깨진다는 걸 알았다.

가령 무게를 실은 일격이라면 쉽게 깰 수 있다는 거다.

단검은 그냥 무시하면서 핀의 도끼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던가.

기실 오늘을 반복하며 배운 모든 걸 활용한 한 판이기도 했다.

하이드 나이프의 수법으로 빛나는 돌을 숨기기도 했으니.

"나머지 정리 안 해?"

엔크리드가 허공에 뜬 빛나는 돌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 빛 때문에 도시 안쪽에서도 성벽에 소란이 인 걸 금세 알 거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소리였다.

휙.

핀이 먼저 움직이고 토레스가 그 뒤를 따랐다.

남은 병사가 많진 않았다.

끄악!

성벽 위로 병사의 단말마가 이어졌다.

달빛이 아직도 엔크리드를 비추고.

토레스 핀을 포함한 적병까지도 그의 등에서부터 달빛이 후광처럼 빛나는 걸 봤다.

뭔가 다른, 일반적인 인간은 아닌, 그런 냄새를 물씬 풍겼다.

피 냄새와 장미의 향기가 성벽 위에서 섞였다.

그건 참 묘한 냄새를 풍겼다. 새로 나온 향수라고 해도 믿을 만큼 독특한 향이었다.

* * *

성벽을 넘고 내려선 뒤는 핀의 세상이었다.

그녀는 이미 준비했다는 듯, 벽 안쪽에 붙더니 땅 일부를 파내고 보따리 하나를 끄집어냈다.

"비상시를 대비한 준비물."

아마도 안쪽, 고양이라 불리는 첩자가 준비해 둔 것이리라.

보따리 안쪽 더러운 거적이 나왔다.

그녀는 곧바로 그걸 엔크리드와 토레스에게 던졌다.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성벽에 붙은 빈민촌 끄트머리에서 거적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는 동안.

핀은 뭔가 싶어 근처에 머리를 들이민 거지 둘의 목을 꺾었다.

우득 소리도 없이 상대를 잠재우는 솜씨를 보자니, 역시 핀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수없이 오늘을 반복하며 보질 않았나.

핀의 에일 카라즈 식 무투는 무르익은 열매요, 숙련자의 그것과 같았다.

빈민촌의 다수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더는 목격자가 없단 소리다.

그렇게 어둠과 더러운 거적 속으로 셋은 숨어들었다.

엔크리드는 그 뒤를 따르며 제 세상에 빠져들었다.

거듭된 생각이다. 매번 하던 대로 복기였다.

오늘을 반복할 때, 엔크리드 앞에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그럼, 그 길 중 하나를 택해 뚫으면 그만일까?

'굳이 하나를 택할 필요가 있을까?'

어깨의 힘을 빼고 나니 보이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할 게 아니라, 세 개의 벽을 다 이용하는 거다.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레이 독이 기다리는 개구멍에서는 정예 부대에 포위당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마물 라이칸스로프 무리와 싸울 때는 난전에서 싸우고 피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거기에 장미 넝쿨의 렛샤는 얼마나 좋은 교보재인가.

엔크리드는 그레이 독, 라이칸스로프, 렛샤.

셋 전부를 훈련 도구로 봤다. 좋은 교보재였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오늘'을 만들었다.

'나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왼손 건틀렛 위에 맞은 일격에 손목이 조금 아프고.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은 몸에 두른 가죽 갑옷을 믿고 맞기도 했다.

하지만 치명상은 없다.

"쉿, 고개 숙여. 순찰이다."

핀의 말에 엔크리드가 고개를 숙인 채 잠든 척을 했다.

장비 일부를 숨기고 더러운 거적 하나를 뒤집어쓴 것으로 위장은 끝났다.

"냄새 미치겠네."

"참아라. 성벽 위에서 난리 난 거 몰라? 여기로 숨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 여길 쓸어버리든가."

"쉿, 여기서 쟤들이 다 덤비면 어쩌려고?"

순찰병 둘이 떠드는 걸 들으며 엔크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됐다. 움직이자."

그녀는 익숙한 길을 가듯 거침없이 엔크리드와 토레스를 이끌었다.

걸으며 고개를 드니, 엔크리드의 눈에 도시 일부가 들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종탑, 흙길, 안쪽에서 은은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으나 대부분 어두운 골목길이다.

엔크리드가 핀의 뒤를 따르며 걷는 사이, 핀은 바로 뒤에 따라오던 토레스의 곁에 붙었다.

토레스가 할 일이나 하지 뭐 하냐는 눈빛을 보내자.

"변방수비대는 다 저런 거야?"

"응?"

"다 저 정도 하냐고."

핀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뒤, 엔크리드다.

토레스는 핀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정도 칼잡이? 그러니까 마법사의 기괴한 가시넝쿨을 방패도 아니고 칼로 튕겨 내서 막고, 빈틈을 만들어서 베어 버리는 재주를 가진 그런 칼잡이?

몇 번 가르쳐 줬더니 자기 장기인 하이드 나이프를 묘한 형태로 활용하는 그런 칼잡이?

라이칸스로프와 적의 정예병을 사이에 두고 목숨 반 개쯤 걸고 회피하며 버티는 그런 칼잡이?

결국, 덤비는 상대를 쫙쫙 베어서 혼자서 라이칸스로프 군체도 슥삭 하고 정예병도 해치운 그런 칼잡이?

토레스는 변방수비대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을 되새겨 봤다.

자, 어디 보자.

아이젠? 바니? 효운?

되겠냐!

순수하게 실력만 봐도 이제는 어떤 선을 넘어 버린 느낌인데.

"있겠냐?"

"응?"

"있겠냐고, 저런 괴물이 막 널렸겠어?"

진짜 묘한 기분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밑이었고.

이곳에 오며 대련할 때는 어울릴 만했다.

그런데 어느새 달라졌다. 숙련도가 달라지고, 검을 휘두르는 게 달라졌다.

"하."

토레스의 반응에 핀이 한숨 섞인 감탄을 뱉었다.

엔크리드란 병사가 한 걸 봐라.

'이게 소대장? 겨우 소대장?'

돌아가서 이걸 보고하면 어떻게 되려나.

그녀는 고양이가 남긴 암어를 찾기 위해 주변을 훑으면서도 엔크리드가 한 일을 믿기는 할까 걱정했다.

달빛에 의지하고 어둠을 이용해 순찰을 피하는 사이.

그들이 난리 친 성벽 위가 소란스러웠다가 금세 조용해졌다.

엔크리드는 조용해지는 게 더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를 해치우고 나니 직감이 제대로 발동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걸 너무 믿으면 또 골로 가겠지.

기껏 세 가지 벽을 다 이용해서 성벽을 넘었는데.

이대로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방심하지 않았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반응하려고.

그렇게 핀은 아침까지 헤맸고.

셋은 피로를 느끼긴 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성벽 위에서 시작된 소란은 도시를 강타하지 않았다.

오히려 쉬쉬하는 느낌이 있었다.

막 골목길을 끼고 숨어 있는데 대로를 지나가는 순찰병 둘이 떠드는 걸 들어 보니 확실히 그랬다.

"밤에 무슨 일 있었냐? 누가 성벽을 넘었다던데?"

"쉿, 그거 말하면 안 된다고 명령 떨어졌다. 괜히 입 함부로 놀리다가 감봉당하지 말고."

둘이 멀어지고.

핀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안 좋은데?"

"왜?"

"끊겼어. 고양이는 죽었어."

"헛걸음한 거란 거냐?"

토레스가 거듭 물었고 핀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지를 남기긴 했는데. 그게 좀 그렇네."

"뭐가?"

골목길 구석, 핀이 끙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성문 앞에 약속한 장소가 있어, 거기에 파묻어 뒀단 거야."

"왜 하필 성문 앞이냐?"

"그만큼 급했다는 거겠지. 혹시 탈출하다가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들를 만한 곳이니."

골치 아프게 됐다.

토레스가 엔크리드를 툭 치며 물었다.

"뭐, 좋은 생각 없냐?"

"성문 앞에서 물건을 회수하고 돌아간다. 그럼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이게 고민이 된다고?'

엔크리드가 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머리가 굳었다.'

그럴 법도 했다. 오밤중에 겪은 일이 한둘인가.

거기에 엔크리드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 준 모습 때문에 둘 다 놀라기도 했다.

검술과 모든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감한 행동력.

그게 엔크리드가 보여 준 어제다.

"불 지르자."

"...응?"

"밤을 틈타 불을 지르고 빠져나가자고. 가는 길에 물건 챙기고. 어제 있었던 성벽에서의 일을 함부로 떠들지 못하게 한다는 건 숨어 들어온 이들이 사고를 치는 걸 기다리는 거로 들리는데, 그렇게 해 주자고."

핀의 눈이 반짝였다. 기가 막힌 비책이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다.'

그녀는 자기 머리가 굳었음을 인지했다. 그럼 된 거다.

핀은 훌륭한 레인져였고.

훌륭한 레인져는 심각한 말썽꾸러기가 되기도 했다.

적국의 눈으로 보자면 그렇단 거다.

셋은 밤까지 잘 숨어 있다가 건초가 쌓인 여관 앞에 불을 놨다.

화르륵.

총 여섯 군데, 흩어져서 동시에 불을 질렀다.

핀이 가장 신난 상태였다. 그녀의 발은 빨랐고 손은 날랬으며, 그러면서 불이 났다고 가장 먼저 외침으로 입도 신나게 털었다.

그게 사람들의 혼란을 조장했다.

타오르는 불을 등지고 어둠을 틈타 움직이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어째 툭하면 불을 질러 대는 것 같은데.'

이러다 기사가 아니라 방화범이 될 것 같았다.

불 지르는 것도 버릇이 드는 것 같으니.

물론, 지금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횃대 하나를 쥐고 들고 뛰다시피 걷고서 건초 위에 던진다. 그 위에 여관에서 슬쩍한 기름병도 추가.

화르르륵.

잘도 탔다.

방화범 수준이 아니라 방화범 전문가가 되어 가는 것 같지만, 효과는 출중했다.

"불이야! 불이다아!"

낮부터 하늘이 어둑한 걸 보니 곧 봄비가 내릴 것 같았는데.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건초와 짚 더미는 잘 탔다.

곁에 있던 나무 건물도 잘 탔고.

횃대 몇 개를 쓰러뜨렸더니, 세차게 불길이 치솟았다.

시선이 전부 불길에 몰린 사이, 핀과 토레스 엔크리드는 유유히 빠져나왔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연히 핀은 땅을 파서 밀지를 챙겼고.

"이제 돌아가면 되는 것 같은데?"

토레스가 말했다.

핀과 엔크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할 시간이었다.

"마법사 이름은 어떻게 알았냐?"

성문을 나와 복귀하는 길, 토레스가 물었다.

왜 안 물어보나 싶었다.

엔크리드는 준비한 변명을 뱉었다.

"운이었다. 용병 시절 내 동료를 수없이 죽인 여자 마법사 이름이었는데, 그냥 그걸 뱉었다."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말이 되지 않기에 오히려 말이 되는 것처럼 들렸다.

토레스는 머리가 복잡해졌고, 곧 신경을 거뒀다.

'알 게 뭐람.'

다 잘 끝났으면 된 거였다. 훌륭한 군인의 자세였다.

* * *

아브나이어는 실소가 나왔다.

크로스 가드 내부에 있는 제 집무실에 앉아 연신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다 뚫렸다고? 하룻밤 만에?'

적의 첩자를 잡았고 정보를 뽑아냈다.

그걸 토대로 함정을 팠다.

첩자인 척 정보도 흘렸고.

혹 들어오게 되면 누구라도 죽여주리라고 생각했다.

이러면서도 크로스 가드로 누가 잠입을 할 거로 생각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개구멍에 있던 정예병이 거의 전멸에.'

렛샤가 죽었다.

그녀는 여기서 죽을 몸이 아니었다.

가시넝쿨의 렛샤는 이름 있는 마법사였다.

"기사가 나타난 거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일단 소란을 잠재우고 들어온 놈들이 뭘 하나 잡아 보려고도 했다.

제 직속 부대를 써서라도 그러려고 했는데.

그렇게 기다리는 사이 일어난 화재.

암살 시도를 비롯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뒀는데.

불만 났다.

그 뒤 잠입한 이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불만 지르고 나가?'

아브나이어는 계속 웃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입은 웃었고, 눈은 웃지 않는 묘한 표정이었다.

아즈펜의 천재 전략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완벽하게 당했다.

어떻게 웃음이 나오지 않겠나.

* * *

에취!

복대로 복귀하는 길, 또 대련이나 하자는 말에 핀은 엔크리드가 확실히 미친 새끼라고 생각했고.

토레스는 완곡한 어조로 거절했다.

"안 힘드냐? 난 힘들다."

그렇게 도착한 보더 가드.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서 묘한 장면을 봤다.

후줄근한, 거지라고 봐도 믿을 만한 차림의 대머리가 병사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엔크리드의 고개를 옆으로 절로 꺾게 만드는 일이었다.

110. 행운과 불행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온다.

핀과 토레스는 보고 때문에 먼저 들어갔다.

전반적인 보고는 토레스가 할 테고, 나머지는 핀이 보조하는 거니.

엔크리드는 복귀 신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숙소 앞.

예상치 못한 인물이 보인다.

길핀이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고 얼굴에는 푸른 멍이 들었다.

한쪽 눈은 반쯤 부었는데, 이제 나아가는 중인 것 같았고 걸음을 절뚝거렸다.

보니까 다리가 부러진 건 아닌 듯하고.

"좀 보자."

슬쩍 살피니, 발목을 삔 듯했다.

"전 괜찮습니다."

길핀의 어조에서 은은하게 조바심이 느껴졌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데?"

이쪽은 크라이스가 관리하는 사람.

당연히 길핀 길드에 일이 터졌으니 이 모양 이 꼴일 것이다.

"왔습니다."

"뭐가?"

"전대 길드장과 붙어먹던 개구리 새끼요."

아, 프록.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었다.

그래, 봄이 오면 프록이 온다고 했었다.

그게 지금 왔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조금 이른 거 아닌가.

"설명부터."

일단 얘기부터 들어 보고자 했다.

크라이스가 죽거나 정말 급한 일이라면 길핀과 이런 얘기를 나눌 것도 없이 당장 같이 가잔 말부터 했을 터였다.

* * *

크라이스는 벌써 엿새째 도시에서 먹고 잤다.

부대 밖에서 일주일쯤 지내는 거야, 크라이스의 일상이었다.

하물며.

'곧 출전이라며.'

그럼 준비할 게 얼마나 많나.

연초부터 시작해서 먹거리, 이런저런 심부름까지.

크라이스를 찾는 사람은 많았다. 굳이 병사뿐 아니라 장교까지.

덕분에 이런 편의를 봐주는 사람도 많았고.

그렇게 엿새째였다.

되도록 출전 전에 처리할 일은 다 정리해 두고 싶었다.

무엇보다 길핀 길드를 먹은 뒤부터는 크로나 세는 재미도 늘었고.

이러니 부대에 돌아가고 싶나.

'보자. 오늘은 얼마나 벌려나.'

나중에 샬롱을 차리려면 크로나가 많이 들 것이다.

그러니 벌 때 바짝 버는 게 최고였다.

최근에 분대장이 가져다가 판 물건 수수료도 꽤 받았고.

'어디서 그런 거 또 안 주워 오나.'

하긴, 하수도에 마법사가 숨어 살고 있었다는데.

그런 일이 빈번할까.

"점심 먹을 시간이잖아. 끼니 때우자."

그렇게 정오쯤이 되어서 길핀을 불러 점심을 해결하는 참이었다. 점심으로 나온 건 통밀을 빻아서 만든, 면 요리였다.

무슨 재주인지 얇게 면을 뽑아서 그 위에 올리브오일과 토마토소스를 얹은 볶음면 요리였다.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래서 그 구둣방 지하는 다 막았고?"

크라이스가 포크를 덜그럭거리며 물었고.

"진즉에 다 막았습니다."

길핀은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면을 삼키며 답했다.

밤의 수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밤의 경비병 정도는 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런 연유로 상비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길핀 길드가 힘을 썼다.

구둣방 지하 매몰 작업도 그중 하나였다.

상비군이 그런 일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털어 갈 건 다 털어 갔으면서 굴은 놔뒀다.

물론 그 전에 분대장이 먼저 털어 갔지만.

어쨌든 밤의 경비대란 무엇이냐.

도시에 들어오는 뜨내기를 적당히 요리해 주머니 터는 걸 제외하면, 도시에 사는 도시민에게 지키는 쪽이라는 인상을 주는 거다.

효과?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상납금을 받을 때도.

보호세를 정리할 때도.

특히나 정보를 취합할 때, 도시 주민 전부가 크라이스의 귀가 된 셈이니.

'작정하면 아즈펜 쪽 첩자를 다 솎아 낼 수도 있지 않으려나.'

길핀 길드가 주변 길드를 다 흡수하면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아직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일 같았다.

크라이스는 먹다 말고 멍한 눈으로 머릿속 계획을 곱씹었다.

'무력은 분대장을 엮고.'

분대장이 움직이면 휘하 분대원이 움직일 계기가 되니까.

각 분대원이 원하는 게 명확하다 보니, 꼬드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고.

'관리하는 사람 숫자는?'

보더 가드에도 빈민촌이 있었다. 그 안에는 삶을 포기하고 널브러진 놈들도 있지만.

아득바득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빈민촌에서 일부 데려오고.'

다른 길드 부수며 자잘한 애들 흡수하고.

크라이스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자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신나게 구르며 자란 덕일지도 모른다.

구걸하던 시절 누구에게 구걸하면 뭐가 떨어질지 한눈에 알아보곤 했으니까.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매타작만 수백 대를 맞았다.

잘못 말 걸면 맞아 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절로 본능의 감이 꽃을 피운 셈이었다.

'얼추 될 것도 같은데.'

뒷골목 길드 통합 작전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1년, 아니 기반만 마련되면 반년도 안 돼서 뒷골목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획대로 된다면.

다만, 계획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 변수였다.

쾅!

행운과 불행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온다고 했던가.

크라이스에게도 그랬다.

저택의 응접실 문을 부수고 누군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를 뒤집어쓴 작자였다.

크라이스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저택을 지키던 길드원이 십여 명.

그중 문 앞을 지키던 둘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다.

'피는?'

바닥에 흥건한 피 따윈 없다. 죽진 않았을까? 그래 보였다.

크라이스는 짧은 시간 돌아가는 상황과 갑자기 찾아온 불행을 받아들였고 인지했다.

비상한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갔고 눈은 사방을 살폈다.

"네, 이쪽으로 오시죠."

판단을 끝내고 나온 첫마디였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반응이 신선하네."

망토 안의 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움직임에 망토가 흔들렸다.

목소리는 거칠고 깔깔했다. 성대라도 다친 건가 싶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서."

"감이 좋군."

말하며 놈이 망토를 벗었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망토 안.

심장 어림에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은 상대가 보였다.

호심갑, 하트 아머다.

"...아."

인간이 프록의 생김새를 알아보는 건 어렵다.

그런데도 길핀은 상대를 알아봤다.

목에 하얀 흉터가 남은 프록.

때마다 찾아오던 사신, 길핀이 말하던 놈이었다.

'너무 이른 거 아니냐.'

봄이 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전에 있던 놈은 어디 가고?"

"이곳이 지겨워서 위로 먼저 가셨죠."

크라이스는 태연하게 프록의 말을 받았다.

길핀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곧바로 자신도 위로 가게 생겼으니까.

죽음의 공포가 드리운다. 압도적 무력 차이가 주는 위협이다.

이런 상황에서.

"식사는?"

크라이스가 태연하게 물었고.

프록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재밌는 새끼네."

말과 함께 프록이 움직였고, 길핀은 반항했고 두들겨 맞았다.

세 대로 끝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봐주지 않고 무기를 뽑았으면 일 합에 끝났으리라.

크라이스는 반항도 하지 않았으나, 맞았다.

"인간은 일단 맞아야 말을 잘 듣지. 내 지론이다. 전대 길드장을 죽인 놈 이름은?"

그렇게 두들겨 팬 뒤, 한 손으로 멱살째 잡아 크라이스를 들어 올린 프록이 물었다.

크라이스는 머리를 굴렸다.

분대원 중 누가 이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지?

렘, 라그나, 아우딘, 작센.

그중 누구의 이름을 대야 할까.

누구를 찾게 해야 할까.

프록을 보는 순간, 동시에 했던 고민이기에 주저는 없었다.

"쿨럭, 그냥 물어봐도 대답해 줬을 건데요."

"내가 싫어. 일단 두들겨 패고 듣고 싶어."

미친 프록 새끼.

속으로 한 생각과 달리, 크라이스는 "그렇군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보더 가드 상비군이 죽였습니다. 이름은 라그나."

"네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는?"

"대행이죠. 길드장 대행."

"재밌네, 재밌어. 야, 대머리."

순식간에 쓰러진 길핀은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두덩이가 너무 아팠고, 허벅지가 저려 일어날 수 없었다.

"으, 네, 네."

"라그나를 데려와라. 그럼 이놈은 놔준다."

그 말에 길핀이 크라이스를 바라봤고.

"가요. 데려오세요. 우리 진짜 길드장님을."

길핀도 눈치는 빨랐다.

프록 새끼를 죽일 만한 위인을 데려오란 거였다.

프록도 바보는 아니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순 없어도, 이 작고 예쁘장한 인간 남자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단 건 알았다.

프록은 결심했다.

'그 자식을 죽이고.'

이놈에게 족쇄를 채우기로.

원래 이곳을 관리하던 놈이 죽었으니, 새로운 관리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본국에 연락해서 뭘 하려면 손이 많이 가니, 현지 조달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수틀리면? 몸 하나 빼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 * *

"크라이스가 잡힌 지 며칠 됐지?"

엔크리드가 코를 한 번 긁고는 물었다.

"사흘입니다."

"내 분대원은?"

"때마침 전부 전장으로 향했다고."

"렘도?"

"그건 모릅니다. 없다는 얘기만 들어서."

"왕눈이가 살아 있는 건 확인했고?"

"조금 전에도 보고 왔습니다."

"팔다리를 전부 부러뜨렸나?"

"...네?"

"아니다. 팔다리도 멀쩡하게 놔뒀다면야."

엔크리드는 홀로 중얼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엔크리드와 길핀은 부대 앞에서 물러나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일어난 엔크리드를 길핀이 고개를 위로 꺾으며 봤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당장 크라이스를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엔크리드가 마저 입을 열었다.

"일단 복귀 신고부터 하고 오지."

"기다릴까요?"

"아니, 프록은 저택에 있지?"

"지금 바로 가는 거 아닙니까?"

지금 바로?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프록이 크라이스를 죽이려고 했으면 진즉에 죽였을 거다.

근데 사흘 동안 팔다리도 안 분질렀다는 건.

'잘 버티고 있단 거잖아.'

크라이스가 노린 바도 명확히 보였다.

분대원 중 누구라도 불러 달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라그나란 이름을 꺼냈겠지.

렘, 아우딘, 작센은 어떻게든 불러올 수 있지만.

제일 부르기 어려운 길치에 게으름뱅이인 라그나를 콕 집은 이유는 뭐겠나.

누구든 와 달란 거지.

'문제라면 남은 게 나뿐이란 거고.'

자신 없이 분대원이 전부 전장으로 향한 건 엔크리드에게도 의외였다.

그러니 크라이스도 예측하지 못했을 테고.

사고뭉치 분대원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말을 듣고 전장에 나갔단다.

데려간 사람도 대단하다 싶었다.

렘을 비롯한 그 친구들을 통제하다가 혈압이 올라 머리가 터져 죽지 않으면 다행일 테니.

"돌아가서 하루만 더 기다리라고 해."

그 말에 길핀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길드장이 죽습니다."

길핀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밤의 수호자가 아니라 경비병 수준이 그에게는 딱 맞았으니.

골치 아픈 일도 적었고 이게 마음도 편했다. 그래,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크라이스는 크로나를 밝히긴 했지만, 공평했다.

그래서다. 길핀은 이 평화를 지키길 원했다.

본래 프록이 오기 전에 길드가 산산이 찢기면 다 포기하고 튀려고 했던 길핀은 이제 없다.

그에게도 지켜야 할 게 생긴 셈이었다.

"가야 합니다."

그가 재차 말했으나.

엔크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서 전해, 하루만 더 기다리라고. 그럼, 라그나가 찾아갈 거라고."

말하고 엔크리드가 돌아섰다.

길핀은 여전히 선택지가 없었다. 그도 돌아서야 했다.

돌아가 말을 전해야 했다.

상황을 전하지 않으면 길드장을 찢어 죽일 것이다. 프록은 그렇게 하고도 남아 보였다.

길핀은 부서진 평화를 이어 붙이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신이시여.'

믿지 않는 신을 찾는 그였다.

엔크리드는 부대 안쪽으로 향했다.

"벌써 며칠째인지, 무슨 일인데요? 물어도 아무 말도 안 하던데."

부대 앞을 지키던 병사가 들어가는 길에 물었다.

'의리가 있어.'

엔크리드는 길핀을 떠올리며 그리 생각했다. 상비군이 뒷골목 길드를 장악했다?

운 조금 나쁘면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키고 싶었을 것이고.

그 마음은 잘 전해졌다.

"개 같은 일."

엔크리드는 대강 답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가 더 지난다고 크라이스가 죽진 않을 것이다. 상대의 태도에서 그게 보였다.

'멍청한 놈은 아닌 것 같고.'

프록은 단순 무식하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사람도 각자가 다른 것처럼 프록 또한 그렇다.

머리 좋은 프록, 무식한 프록, 섬세한 프록이 있는 거다.

그건 요정, 용인, 거인도 마찬가지지.

물론 각 종족 특징을 별개로 두고 말이다.

'시간이 있다면.'

당장 갈 필요가 없다면.

엔크리드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걸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번 '오늘'을 통해 알게 된 것.

'나아졌다.'

그게 아니라면 라이칸스로프나 적의 지휘관에게 진즉에 죽었을 테니.

그런데 마법사까지 벴다.

실력이 늘었다는 방증 아닌가.

그럼, 프록은 상대할 수 있나?

찌르기 변태를 상대할 때는 발차기 한 방에 옆구리가 다 작살나서 날아가 기절했는데?

그럼, 지금은?

'될 것 같은데.'

이유 없는 자신감은 아닐 것이다. 크라이스가 찾은 건 자신이 아니라 분대원이겠지만.

'프록, 프록, 프록.'

더 없이 어울려 보고 싶은 상대 아닌가.

그러기 위한 준비다.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피로는 쌓였다. 이틀을 밤을 새우다시피 하지 않았나.

돌아오는 길에 쪽잠도 잤고 그냥저냥 쉬면서 왔지만,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니.

'복귀 신고하고 휴식부터.'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크라이스를 죽게 두는 선택지가 없다면.

프록을 상대해야 했다.

골치 아픈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엔크리드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묘하다. 묘해.'

본래라면 겁을 먹었을까? 아니, 겁을 먹기보다는 질 것을 알고도 덤볐을 것이다. 제 사람이 죽는 걸 보고 넘어갈 순 없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살아왔다.

다만, 이전이라면 패배를 직감하고 걸음을 뗐다면.

지금은 이길지 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대장이?"

부대 내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많이 빠져 있었다.

선발대로 요정 중대장이 사고뭉치 분대를 이끌고 나갔단 소식도 있었다.

누가 데려갔나 했더니.

그 덕에 엔크리드는 타 중대 소대장에게 복귀 신고를 해야 했다.

"독립 소대 중 혼자 남은 거로 하고, 곧바로 합류하는 건가?"

안면이 있는 상대였다.

"피로가 쌓여서, 이틀 뒤에 합류하는 거로."

"그래, 어지간하면 빨리 가. 전장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으니까. 2차 출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소대장이 전서를 흔들며 주저리주저리 말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엔크리드가 돌아섰다.

휑한 숙소에 짐을 풀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뒤, 포근한 모포를 덮고 잠이 들었다.

혹 프록에게 죽어 오늘을 반복하게 된다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잠이었다.

엔크리드는 금세 잠들었다.

아주 푹, 깊은, 꿈도 꾸지 않는 말끔한 수면이었다.

깨어난 엔크리드는 눈곱을 떼고 얼굴을 씻고 아침으로 고기를 씹었다.

"아침부터 잘도 드시네."

식사 당번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걱우걱 고기를 씹어 삼킨 뒤에는 고립의 기법이다.

소화도 되고 몸에 열도 내기 좋은 훈련이었다.

그 뒤에 롱소드의 칼날을 갈아서 챙기고 남은 휘슬 대거 숫자를 셌다. 두 자루가 전부였다.

던진 걸 다 회수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작자가 만들어 줄 순 있으려나?'

속으로 도시 대장장이를 떠올리며 칼날을 눈앞에 비스듬히 들어 확인했다.

괜찮았다.

금 간 곳도 없고.

이가 나간 건 몇 군데 있지만, 이 정도야.

대장장이가 마법사를 베면 칼날이 망가진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했다.

마법사마다 다른 건가.

그렇게 준비를 다 하고 나서야.

냐아!

"어디 갔었냐?"

에스터가 나타났다.

안 보이길래 떠난 줄 알았다.

"좀 있어. 잠깐 다녀올게."

그렇게 엔크리드는 다시 밖으로 나섰다.

"캬."

뒤에서 에스터가 화를 냈다. 자기를 두고 어딜 가냐고 하는 것 같았다.

"같이 갈래? 대신 구경만 해라."

엔크리드의 말에 폴짝 뛴 에스터가 품에 쏙 들어왔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엔크리드는 걸음을 뗐다.

목적지는 크라이스가 붙들린 저택이었다.

111. 부푼 볼

'버려둘 순 없으니.'

요정 중대장이 사고뭉치 분대원, 이제는 소대원이 된 이들을 전부 데려간 건 의외였다.

엔크리드도 빈 숙소를 보지 않았다면 못 믿었을 테니, 벌써 며칠이나 막사를 비운 크라이스는 당연히 몰랐을 거다.

그러니까 라그나를 불러 달라는 말을 한 것일 테고.

'용케 출정 때 안 끌려갔네.'

엔크리드 자신이 남았으니, 같이 합류하겠다는 핑계를 댔을까?

아니면 요정 중대장의 배려로 크라이스를 두고 간 건가.

어찌 됐든 크라이스는 남았고, 분대원은 없다.

엔크리드 혼자 구해야 한다는 거다.

당장 전장에 나간 분대원을 불러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핀 길드 내부의 일에 상비군을 동원해?

'어림도 없는 소리.'

잘도 도와주겠다. 그래, 기대 볼 사람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다.

요정 중대장 말이다. 그녀가 남아 있다고 해도 도박에 가까운 일인데.

토레스라면 어떨까. 변방수비대 소대장으로서는 어려워도, 개인으로는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변방 수비대도 일부만 빼곤 바로 출정이라고 했으니.'

복귀 신고 후에 하릴없이 하루 쉬게 해 준 것만으로도 부대는 엔크리드를 챙긴 거였다.

그만큼 이번 임무를 통해 얻은 게 크단 소리일까?

엔크리드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털었다.

자꾸 잡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할 것만 하면 된다.

여기서 할 일은.

"우리 크라이스 구하러 가는 거다. 그래, 그 왕눈이."

가슴팍에 쏙 들어온 에스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스터가 자꾸 힐끔거리며 의아한 눈빛을 보인다고 생각해, 눈이 큰 친구라고 재차 말해 줬다.

괜히 입 밖으로 내보인 목표다.

그걸 들은 에스터가 파란 호수 같은 눈으로 빤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엔크리드도 비슷한 색의 눈으로 에스터를 봤다.

"왜?"

에스터가 답을 할 리는 없었다.

표범이 무슨 답을.

다만, 그 눈빛이 뭔가 말을 하는 것 같긴 했다.

마치 구하러 가는 게 맞냐고, 오롯이 이유가 그것뿐이냐고 그리 묻는 것 같았다.

"겸사겸사."

엔크리드가 속내 일부를 보였다.

늑대인간, 아즈펜의 그레이독 부대, 그리고 마법사까지.

오는 길에서 토레스와 핀을 통해 제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 욕구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지금 내 위치는? 내 상태는? 내 검은 어디까지 닿았나?

'얼마나 늘었지?'

모르겠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본래 그런 거였다.

알아야 보이는 법인데, 엔크리드의 하루는 매번 새로웠다.

그는 매일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탐험가였고.

항상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패스파인더였으며.

산을 처음 타는 등산가이자, 생전 처음 보는 사냥터의 사냥꾼이었다.

이정표를 보며 나아가지만, 정작 제가 선 위치는 몰랐다.

그래서였다.

프록이 나타났다는 말에 냉정하게 제 몸 상태를 확인한 뒤, 하루를 푹 쉬고 나선 건.

이정표의 위치를 확인해 줄 상대라는 생각이 들어 버렸으니.

'내 검이 통할까?'

일전에 프록을 마주쳤을 땐 한 대 얻어맞는 거로 갈비뼈가 제 허약함을 호소했는데.

이번에는 어떨까?

프록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비교할 상대로 이보다 더 훌륭할 순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프록이 '오늘'을 가로막는 벽이 되겠지만, 괜찮다. 괜찮았다.

분대원 중 누구라도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러하기에 엔크리드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일.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불운이 따른다고 해야 할까.

불운이야 뭐, 언제나 뒤를 따르는 친구와 같았다.

그걸 헤쳐나가는 건 불운의 강물을 헤엄치는 자의 몫이겠지.

렘을 비롯한 분대원에게 생각이 미치자 엔크리드는 자신이 보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새삼 그걸 깨달았다.

'우습다.'

한때 제 분대원을 중급 이상의 병사로 생각했었다.

중급? 우습다. 우스운 말이었다.

분대원 중 누구도 병사 등급제 안에 머물 이는 없다.

지금은 그걸 안다.

실상 분대원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고작 프록을 겁낼 이유 따윈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크라이스를 버릴 수도 없고.

물러서고 싶지도 않음에.

왼발을 떼며 렘을 상대하던 나날을 떠올렸고.

오른발로 바닥을 디디며 작센을 통해 배운 것을 되새겼다.

다시 왼발에 아우딘을.

오른발에 라그나를 담는다.

걷는 걸음마다 그동안 배운 것을 되새겼다.

수없이 만난 교관, 반복한 오늘.

프록이 상대라는 데 무섭지 않다. 이건 야수의 심장이 부린 조화일까.

평정심, 담대함, 대담함을 넘어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엔크리드의 동공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탁.

에스터가 앞발로 가슴을 쳤다. 그게 마치 아직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알아."

엔크리드는 답하고 걸었고, 곧 저택에 다다랐다.

대머리 길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응접실입니다."

응접실이 어디더라?

길핀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선 엔크리드는 응접실 문을 앞에 두고 멈췄다.

'나는 지금 죽음을 작정하고 덤비는 걸까?'

아니면 그저 호승심에 미쳐버린 걸까.

모른다. 답은 문 너머에 있었다.

에스터가 가슴에서 떨어져 나와 옆으로 통통 튕기듯 움직였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말이 통할 상대일까?'

크라이스를 살려서 데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럴 것 같긴 했다.

말이 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단 제압하고 볼 일이기도 했다.

싸우러 왔으면 싸우는 거지.

상대와 말을 나눠 뭐 한다고.

엔크리드는 짧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대화를 뛰어넘고 행동으로 말하기로 했다.

뻥.

문을 박차고 앞으로 구르며, 오른손을 앞으로 던지듯 뿌린 거다.

휘슬 대거가 무서운 속도로 공간을 접고서 날아갔다.

삐이이이익!

소리가 뒤따랐고.

기다렸다는 듯 프록의 팔은 섬광이 되어 움직였다.

* * *

이거 미친 새끼인가?

기척, 그다음은 투기.

살을 찌르는 투기 뒤에는 공격이다. 주저가 없었다.

문 앞에 서기 전부터 계획한 것 같은 그런 움직임이었다.

뻥 하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놈의 팔이 움직이는 게 프록의 눈에 보였고.

날아오는 칼날을 보자마자 프록은 제 무기를 뽑아서 쳐 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이.

프록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훙, 슉. 땅!

칼날 면으로 날아오는 단검을 쳐 냈다.

날아간 휘슬 대거가 푹 하고 벽에 걸린 조악한 가죽 장식에 박혔다.

단검을 던진 놈이 그대로 달려들며 검을 뽑는다.

치링!

뽑힌 검이 위에서 밑으로 호쾌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다.

프록은 손가락을 굽혀 검 손잡이 옆에 달아 둔 고리에 걸었다.

프록의 미끌미끌한 피부는 악력을 무기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한다.

그 덕에 프록은 루프라는 이름을 붙여 무기를 제작했다.

그게 검이 되면 루프 소드가 되는 거니.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굽히면 프록 특유의 둥근 세 개의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맞닿는다.

그 뒤는 휘두르면 되는 것.

훙, 쩡!

쇠와 쇠가 만나 시작을 알리고.

곧 검과 칼이 춤을 추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따다다다다당!

허공에서 튀는 불꽃, 무지막지한 속도로 이어지는 연격.

프록은 서른 번을 넘게 제 공격을 막아 내고 간간이 반격까지 하는 상대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 새끼, 재밌네?'

크라이스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손발이 묶이지도 않았고 어디가 부러지지도 않았지만, 도망갈 순 없었다.

겨우 이틀이지만, 프록은 무식한 체력을 자랑했다.

겨우 눈 잠깐 붙이고 항상 자리를 지켰으니까.

크라이스는 볼일을 봐도 되고 식사도 문제없었다. 아예 저 프록 새끼랑 겸상도 했다.

하지만 도망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내가 튀면 어떻게 되는데?'

다 죽겠지. 남은 길드원 전부가.

잡히면 자신도 죽은 길드원 옆에 같이 고깃덩이가 돼서 남을 거라는 건 당연했다.

저 프록 새끼는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봄이 되고 한참 뒤에 온다면서 일찍도 왔다.

크라이스도 나름 믿는 바가 있긴 했다.

분대원 중 하나나 둘이라도 오면 어떻게든 될 터였다.

그러니까 렘이나 아우딘, 작센이나 라그나.

'분대장 말고!'

문이 열릴 때, 크라이스는 기대했고.

박차고 들어온 사람을 한눈에 알아봤을 때는 실망했으며.

지금은 놀라 입을 벌린 채 다물 생각도 못 했다.

'뭔데 이건?'

따다다다다다다당!

응접실을 부술 듯이 나는 소음의 연속.

눈앞에 보이는 건 궤적과 궤적.

칼날이 만들어 내는 무언가.

그 사이로 튀는 불똥뿐이다.

이게 뭐지?

분명 들어온 건 분대장인데, 그 분대장이.

'프록과 맞서 싸워?'

그리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적어도 크라이스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엔크리드는 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상대의 무기를 주시하며 제 검을 옆으로 세웠다.

땅!

충격이 팔뚝을 지나 전신에 퍼진다.

그대로 힘으로 버티는 건 하수였다. 힘을 흘린다. 유검식을 섞는다. 이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 묘기가 지금은 가능했다.

까각!

칼날을 옆으로 튕겨 내듯 흘려 내곤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훙 하고 허공을 가르는 칼날이다.

프록은 그대로 다시 검을 내리쳤다.

따당!

막는다. 또 막고 흘리고 피한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가.

마법사의 가시넝쿨과 싸운 경험 덕분이었다.

수없이 쌓은 경험이 지금의 엔크리드가 검을 휘두르게 했다. 피하게 했다. 막게 했다.

기본은 수비.

막고 또 막는다.

상대의 무기는 넓적한 칼날을 가진 사냥칼 같은 거였다. 보통의 프록이 즐겨 쓰는 무기였다.

루프 소드라 하면 보통 이런 형태가 많이 보였다.

묵직함이 남달랐고, 상대는 프록 특유의 탁월한 근력으로 그걸 무슨 세검 다루듯 다뤘다.

엔크리드는 모든 걸 잊고 검에 빠져들었다.

상대의 검과 자신의 검.

점과 점을 잇는 선, 이어지는 선이 휘어지며 내려 떨어지는 벼락이 된다.

프록의 무기가 그랬다.

엔크리드는 떨어지는 벼락을 제 검으로 받아 냈다.

흘릴 수 없어 무릎이 반쯤 꺾인다. 꺾인 채로 그대로 검을 앞으로 부드럽게 내리치자.

프록이 반걸음 물러나며 제 칼을 찔렀다.

넓적한 칼날로 찌르기라니.

변칙이다.

그런데도 엔크리드는 그 찌르기를 날카로운 송곳처럼 느꼈다.

감각이 칼날 위에서 춤을 췄다.

본래도 어느 정도 예민했던 감각은 작센의 훈련 덕에 전에 없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검과 자신과 상대만이 남은 세계.

시간의 흐름을 잊고 어울렸다.

막고 또 막고.

틈이 보이면 찌르고 내려치고 벤다.

발렌 식 용병검의 기술을 섞어도 봤다.

베는 척하다가 멈춰 찌르기.

이제는 완연하게 몸에 묻어나는 검술이다. 중검식에 이어지는 기검이라고 해야 할까.

프록은 어지간한 건 힘으로 뿌리쳤다.

인간보다 월등한 근력 덕이었다. 그에 수반하는 운동 능력과 운동 신경도 한몫했다.

따-당! 픽! 퍽!

어떤 건 피하고 어떤 건 뿌리쳐 내고.

칼날이 볼을 스치기도 했고 갑옷 위를 프록이 주먹으로 후려치기도 했다.

주먹을 받아 내며 검을 찔러 심장을 노리니, 프록이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피했다.

"그륵!"

흥분한 프록의 목구멍에서 거품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엔크리드는 어떤 기합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집중.

오롯이 하나에 집중했다.

'흩뿌리지 말고.'

끌어모아 집중하는 것.

검을 보고 피하는 게 아니라 칼날의 감각에 의지해서 감으로 피한다.

그런 순간이 이어지며.

엔크리드는 순간 새로운 세상에 들어섰다.

고리에 걸린 프록의 손가락.

넓적한 발바닥의 흔들림.

미끌미끌한 피부 안에 감춰진 폭력적인 근육의 움직임.

그에 맞춰 자신의 손도 움직이고 팔도 내민다. 발도 떼고 몸통을 뒤틀기도 했다.

집중에 집중을 더한 순간.

점과 점도 잊고, 점이 만든 선도 잊은 순간.

엔크리드는 이어지는 전투의 향방에서 한 치 앞을 미리 봤다.

그저 지나가는 심상일 수도 있는 그런 순간.

봤기에, 보았고.

느껴지기에, 승산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았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행했다.

이제껏 틈만 나면 프록의 심장을 노렸다. 아니, 심장만을 노렸다.

지금의 찌르기도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꿰뚫겠다는 의지를 담은 찌르기가 빛처럼 공간을 뚫었다.

프록이 오른발을 뒤로 빼며 스텝으로 피했다.

핑. 드득.

호심갑 위로 칼날이 스친다. 그걸 본 프록의 볼이 부풀었다.

부룩!

심장을 건드려?

참지 못한 프록의 칼날이 전보다 더 빠르게 엔크리드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벼락같은 칼질이었다.

찰나라 할 수 있는 틈.

엔크리드는 찔렀던 검을 당겼다.

따-앙!

연격으로 이어지던 검 두 자루가 만나 허공에서 멈췄다.

"나랑 힘으로 싸우자는 거냐? 멍청한 인간아."

프록이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엔크리드는 대답 대신 자신이 봤던 장면을 재현했다.

'이렇게 하면.'

티딩.

멈춰 선 상태에서 무릎을 반쯤 굽혀 부드러움을 만들고.

상대의 힘을 받아내며 유검과 정검을 섞는다.

제힘을 믿는 프록의 칼날이 그대로 내려와 엔크리드를 이마부터 쪼갤 것 같았다.

"이런 씹, 대장!"

크라이스의 외침이 들렸으나, 둘 다 무시했고.

엔크리드는 한순간 힘을 줘, 프록의 칼면을 따라 검을 힘있게 앞으로 그었다.

일순간이지만, 프록의 힘을 밀어낸다.

티디디딩!

칼날을 타고 엔크리드의 검이 질주하고.

힘만 믿고 내리누르던 프록의 자세가 한순간 흐트러졌다.

프록이 반사적으로, 칼을 쥔 오른 팔뚝으로 심장 어림을 막았다.

심장을 노리면 또 의미 없는 일격이 되리라, 그러니.

엔크리드의 검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서걱.

노린 건 프록의 왼팔.

프록은 그 또한 피했다. 푸왁 하고 피가 솟긴 했으나, 팔이 완전히 잘리진 않았으니.

미끌미끌한 피부를 가르고 들어온 칼날이다.

볼을 부풀릴 대로 부풀린 프록의 칼날도 움직였다.

그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튕겨 나간 넓적한 칼날을 다시 내리꽂았다.

엔크리드는 그걸 오른손을 들어서 막았다.

시체애호가 마법사에게서 빼앗은 건틀렛 위로 칼날이 떨어졌다.

뻑! 뿌득.

듣기 고약한 소리와 함께 옆으로 칼날을 튕겨 냈다. 건틀렛 겉이 잘리고 베였으나, 손목이 잘리진 않았다.

아우딘에게 배운 타격 흘리기와 질기디질긴 건틀렛이 만든 조화였다.

"너 미친 새끼구나."

프록이 말했다.

덜렁거리는 왼팔, 재생력이 있다고 해도 이런 게 즐거울 리 없었다.

프록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무서운 눈빛을 쏘아 냈다.

'아.'

엔크리드는 '오늘'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오른 손목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검도 놓친 판이었다.

왼손으로 받아 내긴 했으나.

몇 수나 버틸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일격만큼은 나름 흡족했다.

심장을 노림으로 틈을 만들어 낸 일격.

정말 괜찮았다.

프록은 재능 판독자이기도 한 종족.

그는 엔크리드를 보며 불쾌함을 느꼈다.

왜? 재능이 출중해서?

아니다. 처음 보는 타입이라서다. 이건 죽여야 했다.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분명 한계에 다다른 인간으로 보였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

자신의 내려베기를 이용하고 심장을 노리는 것처럼 반복하다가.

'그렇게 왼팔을 가져가?'

그 짧은 순간, 인간은 굽혀진 무릎으로 무게를 받아 내곤 발바닥으로 땅을 긁듯이 움직여 앞으로 발을 밀어 넣기도 했다.

한 수에 승부를 걸었고, 당한 건 자신이다.

만약 지금 상대의 오른 손목이 멀쩡했다면?

'내가 지는 싸움이었다고?'

프록의 볼이 더 부풀었다.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의 칼이 위로 솟았다. 내려치면 끝날 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프록은 그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112. 당장 출진을

단 한 순간이지만.

'보였다.'

프록을 잡는 방법, 죽이는 법, 이기는 길.

이정표에 글자가 새겨지고 눈앞에 길이 나타나니.

이건 또 흡족한 오늘이 되진 않을까?

반복할 오늘을 대비해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루를 푹 쉬고 왔다.

이제 죽고 다시 오늘을 시작하면 그만인데.

프록의 칼이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살기와 투기는 그대로인데.

칼날이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붙든 것처럼 허공에서 덜컥 멈췄다.

부르륵.

프록이 볼만 부풀리고 가라앉히는 걸 반복했다.

'왜?'

엔크리드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프록의 시선, 제 팔을 자른 인간의 뒤.

새파란 호수를 담은 것 같은 눈의 표범이 있었다.

레이크 팬서.

어떤 지역에서는 영물로 취급받고 때로는 수호신처럼 추앙받기도 하나.

프록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종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짐승은 짐승일 뿐이다.

즉, 고작 레이크 팬서가 노려봐서 멈춘 건 아니었다.

'개 같네.'

프록은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그의 맨들맨들한 피부는 땀을 흘리는 대신 그와 비슷한 점액질을 뿜어냈다.

긴장함으로 나타나는 프록의 신체 변화다.

목에 흰 흉터를 가진 프록은 경험이 많았고, 그 경험 중에는 마법사를 상대한 적도 꽤 있었다.

마법사, 주문 세계를 현실에 현현하게 하는 괴이한 존재들.

상대할 때, 까다롭기만 한 것들.

레이크 팬서의 까만 피부와 눈 바깥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수없는 경험, 재능 판독자의 시선으로 보기에 보이는 마나의 흔적들.

저 표범 자체가 주문 세계를 쓰든지, 최소한 그와 연관된 무언가란 거다.

프록은 직감했다.

지금 검을 내리치면 이 남자를 죽일 수 있지만.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거지.'

주문 쓰는 표범만 문제도 아니다.

지금 눈앞에 앉은 인간도 만만치 않았다.

끊임없이 심장을 노리더니, 팔을 향해 검을 휘둘러?

마지막에 보인 한 수.

자신의 넓은 칼날을 따라 달리던 검, 칼날, 의지, 투기.

단순한 동작이 아니었다. 발을 움직여 무게를 싣고 순간적이나마 자신의 근력과 비슷한 수준의 힘을 보여 줬다.

자신과 비교하자면 작은 체구다. 그럼 결론은 하나, 근육의 질이 남다르다는 것.

거기에.

'눈깔하고는.'

눈빛이 죽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을 향한 눈에 투기가 그대로였다.

승산이 조금도 없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의지, 그 두 글자로 빚어 내서 만든 인간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 그런 무언가를 보는 기분이다.

뒤에 선 마법을 부리는 표범 따위를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오롯이 투기만 불태운다.

'미친 새끼가.'

뿌르륵.

프록의 볼이 더 없이 부풀어 올랐다.

이 상황이 통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저울을 꺼내 무게를 쟀다. 여기서 목숨을 걸고 죽여야 할 놈인가?

아니면 후일을 기약해야 하는가.

어지간하면 죽이고 싶다. 죽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반대쪽 저울에 자신의 목숨이 걸린다면?

생각을 달리 해 봐야 했다.

재능 판독자의 시선이 엔크리드를 살폈다.

꼼꼼하게 계산했다. 싸우고 싶어서 싸우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는 게 프록의 장기라지만.

제 목숨도 걸렸고, 또 이미 한 곳에 묶인 몸으로 의무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의무도 무시하면서까지 죽여야 하나?

저울의 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 도시, 보더 가드라는 변방의 요새 도시의 중요성이 그리 높지 않으므로.

곧 프록의 볼이 사그라들었다.

금방이라도 내려치려던 칼날도 도로 내렸다.

투기가 희미해진다.

'한계.'

프록은 그렇게 판단했다. 눈앞의 인간이 지금보다 나은 실력을 갖추긴 어려울 거라고.

근육의 질이 좋고, 순간적이나마 프록에 버금가는 근력도 좋다.

검술과 개인 전술까지도 훌륭하고 꺾이지 않는 마음은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반은 운이었다.'

마지막 한 수에 팔이 베였지만, 자신도 상대의 오른 손목을 아작 냈다.

상대가 부린 수작이 운에 기댄 거란 소리니.

다음에 만나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만나기만 한다면 그럴 수 있다.

"잊지 마라. 인간, 내 이름은 메엘룬이다."

그게 끝이었다.

씻은 듯이 투기가 사라지고 프록이 뒤로 물러났다.

메엘룬은 엔크리드의 뒤, 에스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냥 갈 테니, 너도 물러나라.'

그런 의미의 눈빛을 쏘아 냈다. 에스터는 반응하지 않았다. 묵묵히 호수 같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메엘룬은 바닥에 널브러진 제 망토를 챙겨 뒤로 물러났다.

프록이 유유히 저택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그를 붙들지 않았다.

몇몇 길드원이 눈치를 보긴 했으나.

"눈치 보지 말고 다 비켜. 손님 가신다."

크라이스가 제지했다. 팔 한쪽을 못 써도 프록은 프록이었다.

그렇게 프록이 떠났다.

* * *

에스터는 엔크리드가 가져온 마도서 덕분에, 몸에 걸린 족쇄를 푸는 꼼수를 찾았다.

당장 인간으로 돌아올 순 없지만, 표범의 몸뚱이로도 주문 세계 일부를 현현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번 할 때마다 고생 좀 하겠지만.'

모아 둔 마나도 써야 하고.

주문 세계 일부가 오염될 수도 있었다.

시체를 사용해 제 주문 세계를 구축하는 미친 새끼의 마도서에 있던 방법이다.

편법 중의 편법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쓸 테니.'

알아 두면 쓸모 있을 것이다. 그리 몸에 익혀 둔 것이었고.

그게 지금이 될 수도 있었다.

에스터는 고요함을 가장한 뒤, 존재감을 보였다. 제가 마법사라는 걸 프록이 의식하게 했다.

눈앞에서 그 칼날을 내리치면 나 또한 네 심장에 무언가를 꽂으리라.

의지란 무엇인가. 의지란 마나가 되기도 하는 법.

한순간 에스터는 자신을 표범이 아니라 마법사 에스터로 보이게 했다.

그 결과다.

메엘룬인지 메롱인지 하는 놈이 물러났다.

에스터 자기 몸이 멀쩡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는 엔크리드와 둘이 작정하고 덤벼도 승산이 반반이었다.

앞뒤 다 따져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지금 상대가 물러간 이유.

'운이야.'

그렇게밖에 판단이 안 된다.

엔크리드의 실력이 몰라보게 달라진 것? 놀랐다. 에스터도 매우 놀랐으나.

하지만 프록이 물러날 이유로는 부족했다.

물론 운이라 말하기 전, 상황이 뒤틀리긴 했다.

그걸 만든 건 자신의 필요로 인해 곁에 있게 된 남자가 만든 상황이었다.

'왼팔.'

심장이 아니라 팔.

계속 심장을 노리다가 물러났다면 저 새끼도 계속 버텼겠지만.

왼팔을 반쯤 잘라 버렸다.

저 정도면 도로 붙이는 것보다 잘라서 새로 자라게 하는 게 빠를지도 몰랐다.

팔 하나가 사라진 검사다.

상대해 볼 만해진 거다.

'빌어먹을.'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에스터는 한숨을 내쉬며, 그동안 쌓은 마나를 한순간 전부 날려 먹게 할 뻔한 놈의 등을 툭 쳤다.

이 자식은 왜 안 일어나는데.

"에스, 우웩!"

엔크리드도 가까스로 버티던 판이었는지.

구역질을 해 댔다.

에스터가 뒤로 폴짝 물러나고.

크라이스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니, 그런데 그, 뭐야, 라그나 찾은 거요. 그, 제 말은 알아들은 거죠?"

"후."

한 번 토악질을 해 대니 속이 좀 편해졌는지, 엔크리드가 상체를 들며 말했다.

"출전도 안 하고 엿새나 여기 처박혀 있으면서 분대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거냐? 정보를 다루는 새끼가 맞냐? 네가?"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덤덤한 어조였지.

"에?"

크라이스는 그제야 제가 놓친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분대원이야 돌아가면 언제나 보는 얼굴이고.

출전 소식을 듣긴 했지만, 엔크리드 없이 분대원을 누가 데려간단 말인가.

어디 뒤통수에 구멍이 나고 싶은 지휘관이 아니라면야.

상관 살해자에 길치 게으름뱅이, 대답 없이 툭하면 사라지는 병사, 신의 허락 없이는 싸우지 못한다는 종교쟁이까지.

아니, 누가 저런 별종 무리를 데려가겠냐고.

당연히 부대에 남아 분대장을 기다릴 줄 알았지.

오산이었다.

"없다. 전부 출정했어."

"그건 예상 밖인데, 그럼, 에스터랑 분대장뿐인 겁니까?"

"그래."

크라이스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엔크리드를 부축해 일으켰다.

"많이 다쳤습니까?"

"오른손만 빼면 뭐, 적당한 수준이라고 본다."

대답하며 엔크리드는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후 떠오르는 건 의문이다.

'왜 그냥 갔지?'

분명 칼질 한 번이면 죽을 목숨이었다. 자신도 크라이스도.

'왜?'

엔크리드의 시선이 표범, 에스터에게 닿았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정말로? 상대가 프록인데?'

프록이란 두 글자가 주는 무게를 여실히 느끼는 중이다. 저 작고 어린 표범이 뭘 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통 모를 일이었다.

"냐아."

시선을 느낀 에스터가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로 쓰러져서 되겠냐고 하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모르겠다.'

모르는 걸 붙잡는다고 답이 나오나.

그럴 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모르는 건 모르는 것. 엔크리드는 대신 내일을 위한 경험, 걷기 위한 원동력을 얻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먹혔어.'

뭐라고 해야 하나.

한순간이지만, 프록을 압도하는 기분, 그런 걸 느꼈다.

자신이 짠 판에 프록을 들이고 벴다.

팔을 벴다. 심장이 아니라 팔, 재생하겠지. 재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자신과 싸우는 중에는 아니겠지.

만약 마지막에 오른 손목을 노린 것만 피했다면.

'그랬다면.'

싸움의 향방은 달라졌을 터였다. 이번 복기는 배울 게 많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크라이스가 부축하고 에스터는 품에 뛰어드는 대신 뒤를 힐끔 보고는 옆에 붙어서 따라왔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 들어가서 쉬려는 참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건가!"

2중대장이었다. 벤젠스 소대장의 상사.

엔크리드를 찾았는지 이마에서 땀이 흥건했다. 무슨 중대장이 전령도 아니고 직접 뛰어다니나.

엔크리드가 그런 생각을 하며 군례를 보이려 할 때.

"당장! 출진을."

중대장이 먼저 말했다.

"제가 조금 다쳐서."

여유만 있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쉬었다 가고 싶었다. 전장 자체에 자신 하나가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아닐 테고.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소대장급 병사 하나다.

어떻게 보면 편의를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뭐? 어쩌다가?"

작전 중에 멀쩡하게 돌아온 걸 이미 알 테고.

"왈패랑 시비가 붙어서."

"이런 시기에 무슨 짓인가?"

중대장은 나무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소대장의 칼솜씨가 필요한 게 아니니, 움직일 수 있다면 당장 가 주길 요청하겠네."

중대장은 강요하지 않았다. 이건 숫제 부탁 조에 가까웠다.

그게 엔크리드의 귀에는 전방에서 일이 터졌다는 소리로 들렸다.

'왜?'

엔크리드는 아직 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듣지 못했다.

돌아오자마자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했고.

다음 날인 오늘은 프록이랑 칼싸움 한바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레인져 핀이 동행하기로 했는데, 당장 출발할 수 있겠나?"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합니까?"

가만히 듣던 크라이스가 의문을 표했다. 안면이 있는 사이다. 중대장이 쉽게도 입을 열었다.

"그, 제 소대장을 안 데려오면 더 싸우지 않겠다고...."

중대장이 말끝을 흐렸으나, 엔크리드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제 소대원들 말입니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출진이라고 봐도 좋다. 후방에서 쉬어도 되니, 전장에만 머물러 주면 된다고 요청이 들어왔다. 네 직속 중대장의 요청이고."

가긴 가야 할 것 같았다. 손목 좀 삐걱댄다고 쉴 시간은 없어 보였다.

아예 검을 못 쥐는 것도 아니니.

'렘.'

엔크리드도 얘기를 듣자마자 걱정이 되는 판이었다.

전장 상황 같은 건 가면서 들으면 될 것 같고.

생채기 몇 개에 약만 좀 바르고 가면 되니.

"네."

엔크리드가 군례를 보였다. 곧바로 출발하겠단 의미였다.

113. 그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