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죽음이 찾아왔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왜.'
꿈자리가 사납긴 했다.
트럭에 치이려는 소년을 몸을 날려 구해 줬더니 괴수로 돌변해 날 씹어 삼키는 꿈.
그 소년이 지금.
눈앞에 있다.
"김도현 씨."
새빨간 눈동자로 날 내려 보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못 하겠죠?"
지금껏 살아오며 남에게 원망 살 일은 하지 않았다.
그게 너 같은 꼬마 자식이라면 더더욱.
"...왜. 나를."
대답은 짤막하고 위태롭다.
고함이라도 질렀다간 중심을 잃고 추락할 것만 같다.
난 지금.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려 있다.
"아아. 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당신의 머릿속은 실시간으로 읽어 내고 있으니까."
소년이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린다.
뒤늦은 후회가 엄습한다.
녀석을 현실에서 조우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꿈속과 똑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구하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라 생각해요?"
재미있다는 듯 소년이 웃는다.
녀석의 입가가 인간의 가용 범위를 벗어나 귀 끝까지 찢어진다.
"나한테... 왜...."
"당신이 만든 세계에 흥미가 있으니까."
"...뭐라고?"
"당신이 창조한 소설 속 세상 말이에요."
난 작가다.
그것도 무료 연재 400회 만에 기적적으로 초 대박을 터뜨린.
웹소설계 최고의 스타 작가.
'이제야 내 인생에도 꽃이 피는가 싶었더니.'
오늘 아침, 중대한 계약을 앞두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저 빌어먹을 꼬마가 싸인 용지를 내밀며 해맑게 웃음 지을 때까지만 해도.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김도현 씨. 하지만 저도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낼 순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소년의 웃음색이 변한다.
"그런 건 재미없으니까."
낯선 이형(異形)의 웃음에서 천진한 꼬마의 웃음으로 변한 입매가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그거 알아요? 당신들이 '우리 은하'라고 부르는 곳엔, 지구 말고도 수천억 개의 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신이 난 꼬마의 입술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다.
"그뿐인 줄 아세요? 우주엔 '우리 은하'와 유사한 다른 은하가 수천억 개나 존재한다고요. 엄청나지 않아요? 수천억 곱하기 수천억 개의 별이라니! 그렇게나 다종다양한 세계라니!"
소년의 얼굴이 환희로 물든다.
"그렇다면 말예요."
돌연 차분해진 목소리로 속삭인다.
"김도현 씨의 상상으로 창조된 세계도 어쩌면, 그 헤아릴 수 없는 세계 속에 실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라고?
"아니 어쩌면."
소년의 얼굴빛이 무생물처럼 차가워졌다.
"김도현 씨가 상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우주 저편 어딘가에 창조되었는지도 모르죠."
소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진다.
새빨간 눈동자가 극적으로 굴러 사방을 훑는다.
"김도현 씨도 눈치챘죠? 저 지진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른 지진.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없다.
다시금 입을 찢어 웃는 붉은 눈의 꼬마 말고는.
"설마 네가...."
"걱정 말아요. 당신은 죽는 것이 아니니까."
"죽는 게... 아니라고?"
"당신은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당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서."
"그게 무슨...."
"패왕영웅전기(霸王英雄戰期)의 창조주인 당신이, 그곳의 등장인물이 된다는 이야기."
소년의 발이 내 손을 지르밟는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힘을 지닌 채로."
짓누르는 압력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포박된 몸은 미동조차 할 수 없다.
"너무 억울해하진 말아요."
소년의 발에 더욱 체중이 실린다.
"이건 김도현 씨가 자초한 일이니까."
"뭐... 라고...?"
"이제 와 모르는 척이에요? 조금 전 계약서에 사인까지 해 놓고서."
두 눈이 부릅떠졌다.
패영전의 게임화 계약.
그걸 아는 건 게임 제작사와 나뿐이다.
그렇다면 설마...!
"뭘 놀라고 그래요. 이제 다 알았으면서."
소년의 얼굴 반쪽이 꿈틀대며 낯익은 얼굴이 드러난다.
계약서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던 순진한 미소의 사내가.
"이런 개새끼가...!"
부드득!
팔을 뻗어 소년의 발목을 잡았다.
굳어진 몸을 억지로 깨뜨리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든다.
"너...! 정체가 뭐야...!"
"호오. 나의 속박을 맨몸으로 풀어내다니, 이거 정말 믿어지지가 않네요. 설마 '그 힘'이 벌써 발현되기라도 한 건가요?"
소년의 눈에 강한 흥미가 깃든다.
"광폭(狂暴)의 권능이라.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에요. 김도현 씨."
"묻는 말에 대답...!"
그 순간 몸의 무게가 사라졌다.
소년의 얼굴이 멀어진다.
나는.
추락하고 있다.
"빌어... 먹을...!"
굳어졌던 혓바닥도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
"네 정체가 뭐냐고 이 새끼야아아아!"
심연의 어둠이 나를 삼킨다.
추락하는 몸이 가속한다.
깔깔대는 소년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사방을 울린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아무쪼록 그때까지."
그렇게 난.
"즐겜요. 김도현 씨."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
* * *
001. 내가 만든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빗소리가 눈을 깨웠다.
주변은.
여전히 어둡다.
'여긴....'
납덩이처럼 몸이 무겁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투틋. 틋. 투트틋.
불규칙적인 빗소리가 귀를 울린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압력.
몸이 무거워지고 있다.
'아니.'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묵직한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고 있다.
점점 더.
불규칙한 빗소리가 들릴 때마다 점점 더.
'...!'
'.... .... ...?'
'.... ...!'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청각에 정신을 집중하자 오히려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있다.
'나는.'
산 채로 땅속에 매장되어 있다.
'우읍...!'
현실을 깨닫는 동시에 구역질이 밀려온다.
빗소리라 여겼던 것은 몸 위로 뿌려지는 흙 소리다.
사지를 발버둥 치지만 착각이다.
몸은 여전히 움직여지지 않고, 불규칙적인 소음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읍...! 우으읍...!'
언젠가부터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심장을 옥죄는 소음도 그쳤다.
그 대신 붉게 점멸하는 글자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 시스템 경고 ]
[ 산소가 부족합니다. ]
글자 사이로 길고 시커먼 것이 형태를 갖춘다.
수십 개의 촉수를 가진 기다란 벌레.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발목을 지나, 가슴을 지나, 턱 밑까지 다가온다.
입안으로 들어온다.
'크흑! 컥...!'
뱉어내고 싶지만 불가하다.
느릿느릿 식도를 통과한 녀석이 몸 안을 탐색한다.
그리고.
[ 원작자 권능이 개방됩니다. ]
어딘가 안착한다.
[ 첫 번째 권능 ]
[ 용력(勇力) ]
* * *
"으아아아악!"
지면을 뚫고 솟아난 검은 형체가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허어어어억!"
공기를 흡수한 몸이 급속도로 활기를 되찾는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컥! 크헉...! 비, 빌어먹을...!"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 패왕영웅전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뭐, 뭐라고?"
[ 이름: 아틸라(남/16세) ]
[ 검은늑대 부족의 야만전사 ]
이어 등장한 캐릭터 창.
그 아래 나열된 근력, 민첩, 체력 등의 스테이터스들.
이건 마치.
"뭐, 뭐야 이거! 설마 게임인 거야?"
그럴 리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꿈이다. 이건 꿈일 거야."
서늘한 바람이 불어 머리칼을 흩트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언제나 짧게 정돈했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는 것을.
"...잠깐."
머리를 만지는 손 모양이 낯설다.
입고 있는 옷 또한 마찬가지.
심지어 상의는 걸치지도 않았다.
허리춤에 매달린 손도끼를 들어 얼굴을 비춰 본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누구야 이건.'
자신의 얼굴이 아니다.
다시금 구역질이 이는 것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본다.
뭐지.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진 거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못 하겠죠?'
두근, 심장이 뛰었다.
머리를 울리는 낯익은 목소리.
'당신이 만든 세계에 흥미가 있으니까.'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났다.
그 꼬마.
그 빌어먹을 꼬마가 날 여기로 보낸 거다.
'당신은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당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서.'
소설인지 게임인지, 아니면 우주 그 어느 구석인지 모를 이 세상으로.
"미친! 그게 사실이었다고?"
그 깨달음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 등장인물, 아틸라의 기억을 로딩합니다. ]
아틸라의 기억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그러니까 오늘이 내 16세 생일이고, 성년식 행사로 곰 사냥을 나섰다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토끼를 보고 놀라 도망치다 마주친 곰 앞발 한 방에 끔살당했다고?"
...뭐 이런 등신이.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필 빙의를 해도 이런 병신 같은 놈한테...."
머리 위엔 지금껏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만든 세계 속으로 들어오다니.'
그야말로 웹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소설 속에선 이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주인공들도 많았지. 영웅이 되고, 동료를 얻고, 세상을 구하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반드시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제야 겨우 돈 좀 만지기 시작했단 말이다! 내가 그동안 투잡 뛰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설마 지진이 병원까지 덮친 건 아니겠지.'
수년간 입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어머니와.
'고양이 밥도 줘야 하고.'
유일한 동거 생물인 고양이.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털어 냈다.
덧씌워진 아틸라의 기억 덕분인지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려면 상황 파악이 먼저다.'
그는 할 일을 정했다.
'부락으로 간다.'
* * *
부락에 도착한 아틸라는 족장의 천막으로 걸어갔다.
슬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크흑...! 아틸라. 이 불효막심한 놈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족장 문주크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우십니까?"
"흐엑! 귀, 귀신이다!"
기겁을 하며 넘어간 문주크를 멀뚱히 내려 보던 아틸라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의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어 탕! 하는 소리가 탁자를 울렸다.
"캬아아악! 야만족의 술이 쎄긴 쎄구나!"
멍하니 그 모습을 올려 보던 문주크가 주섬주섬 아틸라 앞에 마주 앉았다.
"저, 정말 아틸라. 너인 게냐?"
"소주는 없습니까? 아버지."
"응? 뭐라? 소주?"
소주가 뭔지는 몰랐지만 술을 찾는 것이라 여긴 문주크는 허겁지겁 술병을 집어왔다.
'아틸라가 술을 마시다니. 생전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던 녀석인데.'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두려워해 아버지란 말 대신 족장님이라 부르며 눈 한 번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었다.
문주크의 눈이 커다래졌다.
- 이 아이는 장차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될걸세.
'저, 점쟁이 노파의 말이 맞았어!'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아틸라의 몸은 전과 달리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고.
'저것은!'
가슴 위로 길게 그어진 세 갈래 흉터는 문주크의 예감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 환생한 영웅은 가슴 위로 위대한 징표를 드러내리라.
한편 아버지에게 건네받은 술병을 재차 원샷한 아틸라는 가슴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해가 뜨면 이 빌어먹을 흉터를 새긴 곰을 찾아 복수해 줘야겠다고.
'아울러.'
곰을 이용해 날 죽인 숙부의 뒤처리까지 해 둬야겠지.
* * *
이튿날, 녹음이 우거진 깊은 숲.
사냥조의 척후를 맡은 아이바르는 터질 듯한 심장 박동을 억누르기 여념이 없었다.
'대,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야!'
아틸라는 죽었다.
함께 사냥을 나섰던 형제 모두가 확인한 일이었다.
'어쩌지. 녀석이 만약 내가 벌인 일이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사실 이전 같으면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아틸라는 자신이 눈만 한 번 부라려도 오줌을 지릴 정도의 겁쟁이였으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것 같아.'
아니 무엇보다 그 너덜너덜했던 상처가 완벽히 아문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누님은 아틸라가 이상하지 않은 건가? 형님들도? 이상해! 존나 이상한 거라고 저건!'
숙부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쳤다.
'재미있군. 하지만 허둥댈 것 없다. 한 번 죽여서 되살아난다면 두 번 죽이면 될 뿐.'
'그, 그러다 만약 또 살아나면요?'
'죽을 때까지 죽인다.'
부르르 몸을 떨던 아이바르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휘파람 소리가 뒤통수를 울렸기 때문이다.
'조, 좋아. 숙부님이 오셨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아이바르는 슬그머니 선두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바람처럼 날아든 손아귀가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어디 가십니까 형님."
팔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아이바르는 경악했다.
'무, 무슨 힘이...!'
부릅뜬 아이바르의 눈동자가 아틸라를 향했다.
확실했다.
녀석은 어제까지의 아틸라가 아니다.
'손목이... 뽑힐 것 같아...!'
말문이 막히는 괴력.
그제야 짐승처럼 탄탄한 아틸라의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부족 최고의 전사인 아버지보다도 강인해 보이는 육체.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무슨 유령도 아니고...!'
"아틸라!"
뒤늦게 형제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뒤에서 심상찮은 기척이 느껴집니다. 아이바르 형님께서 처지는 것 같아 위험하다 판단했습니다."
흠칫 놀란 아이바르의 귀에 아틸라가 덧붙였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형님. 흡사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숙부 얼굴이라도 본 것처럼."
아이바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수, 수, 숙부라니 그게 무슨...."
그때였다.
"누, 누님!"
무언갈 발견한 형제들이 고함을 질렀다.
뒤를 돌아본 아이바르의 머리털이 가시처럼 곤두섰다.
'고, 곰이잖아! 게다가 세 마리라고?'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아직 몸을 빼지도 않았는데 곰을 풀었어. 그렇다는 것은...!'
이 자리의 모든 형제들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제거하겠다는 것.
'숙부 이 개새끼가...!'
이때 만약 아이바르의 머리가 조금이라도 굴러갔다면 형제들과 힘을 합쳐 곰을 상대했을 것이다.
아틸라가 이전의 겁쟁이가 아닌 강력한 전사로 변모했을 가능성 역시 간과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공포에 눈이 먼 아이바르는 그러지 못했다.
'도, 도망쳐야 돼!'
비열하게도 저 혼자만 살아남으려는 선택지를 택한 것.
그러나 자리를 이탈하려던 아이바르는 자신의 손목이 여전히 아틸라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이런 빌어먹을...!'
이 참담한 위급 상황은 어제 봤던 아틸라의 시신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들었다.
아이바르는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짐승 같은 괴성과 함께 그의 도끼가 아틸라를 습격했다.
"으아아아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곰 세 마리가 나타난 일촉즉발의 상황에 아이바르가 아틸라를 공격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형제들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아이바르!"
하지만 아틸라는 아니었다.
그의 손이 쇄도하는 도끼날을 붙잡고, 뼈와 근육이 부서지는 소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죽이진 않으려 했더니만."
파앙!
아이바르의 목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002. 무기가 없으면 맨손으로 찢는다
곰 사냥을 재개하기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던 건 이 몸의 주인인 아틸라에 대한 것이었다.
'아...!'
녀석의 정체는 금세 유추할 수 있었다.
문주크의 동생이자 자신에게는 숙부가 되는 '블레다'의 계략에 죽임당한 비운의 캐릭터.
'그 녀석이구나.'
블레다의 입을 통해 딱 한 번 언급되었을 뿐이라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엑스트라.
그게 바로 아틸라였다.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가 있었어.'
블레다가 아틸라를 제거한 이유는 문주크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식이 아틸라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블레다는 문주크의 평정심을 흩트릴 필요가 있었고,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다.
'드디어 죽어주었구려 형님! 크하하하하!'
고대하던 문주크 암살에 성공하고 마침내 족장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그런 블레다를 도운 사람이 아이바르였다.
'그래서 죽이진 않으려 했는데.'
아틸라의 부활로 검은늑대 부족의 역사는 바뀌었다.
블레다가 원작과 같은 방법으로 문주크를 암살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아이바르를 통해 블레다의 차후 계획을 알아볼까 했지만.'
아이바르는 죽었다.
다름 아닌 아틸라의 손에.
'상관없다.'
갑자기 등장한 곰.
그 모습에 까무러치게 놀란 아이바르.
그것이 의미하는 건 자명했으니까.
'빠르게도 손절 당했구나. 아이바르야.'
털썩, 머리 없는 아이바르의 몸뚱이가 허물어졌다.
피에 젖은 손도끼를 아틸라는 무심히 바라봤다.
'야만족의 기억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이 내가 창조한 패영전(패왕영웅전기)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난생처음 경험한 살인.
그럼에도 아틸라의 심장박동은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재미있군.'
아틸라의 입가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아틸라! 이게 무슨 짓이냐!"
경악한 얼굴로 달려드는 두 형제.
그들을 누이가 가로막았다.
"너희들은 눈 뜬 장님이더냐. 아이바르가 먼저 공격했다."
"하지만 누님!"
"부족의 규율을 잊었느냐!"
누이의 일갈에 두 형제는 입술을 짓씹으며 물러났다.
아틸라를 향해 뽑힐 뻔했던 두 자루 도끼는 방향을 바꿔 곰에게 겨눠졌다.
누이도 양손에 도끼를 꺼내들었다.
"싸울 수 있겠니. 아틸라."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아틸라의 날랜 몸이 곰에게 돌진했다.
* * *
수풀 속에 은닉해 때를 기다리던 블레다는 아이바르의 죽음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뭐, 어차피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차라리 잘 됐다.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 상대는 전력을 잃었고, 은띠 전사 하나와 동띠 전사 둘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세 마리 곰을 제압할 수 없다.
'하긴 아이바르 녀석이 살아 있어 봐야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변수는 아틸라였다.
블레다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능성 따위가 아냐. 녀석은 틀림없는 대무신왕의 환생이다.'
아니라면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하루 만에 상처를 수복하고 부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 봐야 이제 성년식을 치른 애송이일 뿐. 미쳐 날뛰는 어미곰 세 마리를 당할 순 없다.'
블레다의 입가에 확신에 찬 비소가 그려졌다.
그가 아틸라를 살해한 방법은 이랬다.
'녀석을 어떻게 죽였냐고? 굴속에서 자고 있던 새끼곰들을 어미 없는 틈에 몰살한 뒤 녀석의 체취가 묻은 옷가지를 흩뿌려 놨지.'
'그다음은 간단해. 아이바르가 토끼를 몰아 녀석의 도주로를 제한했거든. 녀석은 스스로 어미곰의 입안으로 뛰어든 셈이지. 크하하하하!'
오늘 역시 큰 줄기는 같았다.
달라진 점은 새끼를 잃은 어미곰이 세 마리로 늘어났다는 것과, 놈들이 맡은 인간의 체취가 아틸라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주마.'
곰과 인간의 무리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최초의 격돌은 선두의 곰이 내지른 앞발과 그것을 향해 휘두른 아틸라의 도끼였다.
우지끈, 하는 소음과 함께 도낏자루가 부러졌고 방해꾼이 사라진 곰의 앞발이 아틸라의 안면을 직격했다.
* * *
'아. 뭐야.'
나무 기둥에 처박힌 아틸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정통으로 맞았다.
마치 중장비에라도 가격 당한 듯 눈앞이 암전 되고 뇌가 흔들렸다.
'빌어먹을.'
아틸라는 오른 주먹을 펴고 그 안의 파편들을 내려 봤다.
도낏자루가 부러진 건 곰 때문이 아니었다.
[ 권능: 용력 ]
'미친. 손아귀 힘만으로 아작을 내버렸잖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 힘을 줬다고 도낏자루를 박살 내? 이래갖고 어디 무기 들고 싸울 수나 있겠나.'
그러나 투덜거릴 틈은 없었다.
딱 봐도 그의 형제들은 곰 세 마리를 상대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전하고 있었으니까.
'저러다 진짜 죽겠군.'
몸을 일으킨 아틸라는 무기로 쓸 만한 게 없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 * *
일레크는 점점 초조해졌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아틸라도 죽었고, 동생들은 결코 저 곰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그녀는 아틸라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곰의 앞발이 아틸라의 면전에 꽂힌 순간 우레가 치는 듯한 폭음이 울렸고, 그런 엄청난 공격을 맞고 살아 있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또 지켜주지 못했어.'
주먹을 부르쥐던 그녀의 시선이 동생들을 향했다.
예상대로 둘은 곰 한 마리를 상대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우어어어어!
그 순간 광분한 곰의 앞발이 일레크에게 쏘아졌다.
조금 전 아틸라의 머리통을 깨부쉈던 가공할 공격.
일레크는 비스듬히 도끼를 뻗어 그것을 흘려 넘기고 추가 공격도 회피했다.
'기회다!'
그녀의 허벅지 근육이 꿈틀대며 놀라운 힘이 발산됐다.
순식간에 곰의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간 일레크가 무방비한 상대의 목젖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는 잊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하던 곰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을.
"누, 누님!"
등 뒤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곰의 이빨이 일레크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도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대로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듯 곰은 마구잡이로 고개를 휘둘렀다.
"크흐으으윽...!"
그녀의 세상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목표물이었던 곰이 뒤돌아 앞발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끝인가....'
그런데 곰의 앞발은 자신을 가격하지 못했다.
녀석의 팔이 붉은 실처럼 길게 늘어나며 허공으로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하늘 위의 어떤 불가해한 존재가 힘껏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저건...!'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붉은 실처럼 보인 것은 절단된 곰의 어깨에서 분출된 핏물이었고, 가공할 힘의 작용에 뜯긴 녀석의 팔은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쏘아졌다.
일레크의 눈이 커졌다.
"아틸라!"
곰의 반대쪽 팔이 같은 형상을 그리며 몸에서 분리됐다.
이어 양팔을 잃은 놈의 머리를 비틀어 던져 버린 아틸라가 자신을 향해 팔을 뻗었고,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일레크는 태어나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그러나 아틸라의 목표는 일레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이 곰의 아래턱을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폭포수처럼 피를 쏟는 곰의 어깨 위에 오른 아틸라는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포탄처럼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엉!
그렇게 그녀의 몸이 자유를 되찾았다.
널브러진 곰의 어깨 위는 뇌수와, 뼛조각과, 기타 찢어진 잔해만을 남긴 채 증발해 있었다.
일레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런 목소리도 낼 줄 아셨소?"
평소 같은 높임말이 아니었지만 일레크는 의식조차 못했다.
대답할 새도 없이 아틸라는 나머지 곰에게 달려갔고, 녀석은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한 채 앞선 두 마리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저, 전사신 티르시여...!"
일레크와 두 형제는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아틸라를 바라보았다.
* * *
"어, 어떡할까요 대장. 공격합니까?"
"아틸라가 저렇게 강해졌을 줄이야...!"
"매, 맨손으로 곰을 찢어 죽이다니,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형편없는 놈들.'
블레다는 혀를 찼다.
이리도 겁먹은 놈들을 데리고 지금의 아틸라를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이제 다음 수를 꺼낼 차례다.
"철수한다."
* * *
아이바르의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다른 부족과의 전투나 사냥 중에 발생한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음.... 그랬단 말이지. 아이바르가."
누이와 형제들의 일관된 진술 덕에 아틸라는 문책 받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한 곰에게서 발생된 풍족한 고기로 그의 성년식 통과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아틸라가 곰 고기를 잔뜩 가져왔다!"
"크하하하! 배 터지게 먹고 마셔 보자고!"
부락으로 돌아오기 전 아틸라는 새끼곰들이 살해된 동굴에 들렀다.
그곳에선 자신과 누이를 비롯한 형제들의 옷가지가 발견되었다.
전말을 알게 된 문주크는 크게 노했다.
"이, 이놈을 당장...!"
하지만 블레다와 그의 측근들은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리고 아틸라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다.
'핏물도끼 부족.'
아틸라는 웃었다.
'그 블레다가 이 정도로 포기할 리 없지. 슬슬 다음 일을 대비해야겠군.'
이튿날 저녁 아틸라는 문주크의 부름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문주크는 아틸라를 연무장으로 데려갔다.
아틸라의 손에 날이 번쩍이는 손도끼를 쥐여 준 문주크는 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네게 한 수 가르쳐 주고자 한다."
"근데 왜 그런 허접한 빠따 나부랭이를 들고 계신 겁니까."
"빠따?"
"아. 몽둥이 말입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문주크는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하! 일레크의 말대로구나! 아주 하루아침에 전사가 다 됐어!"
"검은늑대 부족원은 태어날 때부터 전사가 아닙니까."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크하하하하!"
문주크의 웃음이 멈췄다.
"네 용맹에 관한 내용은 일레크에게 들었다. 곰 세 마리를 혼자서 격파했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넌 알고 있느냐."
그럼. 알다마다.
"아직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구나. 설명해 주마. 우리 위대한 검은늑대 부족의 금띠 전사가 한 번에 사냥할 수 있는 곰의 숫자가 몇일 것 같으냐."
세 마리다.
"그래. 이제 성년식을 마쳤을 뿐인 네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답은 세 마리다. 즉 한 번에 세 마리의 곰을 사냥할 수 없는 전사는 결코 금띠 전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야."
문주크는 은근한 눈빛으로 아틸라를 바라봤다.
품 안에 숨겨온 금띠를 연신 조물락거리며.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 말인즉슨, 네가 바로 금띠 전사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아들아!'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아틸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도끼를 내버린 뒤 빠따 하나를 집어 들 뿐이었다.
"아들아. 뭐 하는 거냐?"
"실수로라도 아버질 죽일 순 없잖습니까."
003. 전설의 무기 (1)
문주크가 왜 자신을 시험하려 하는지 아틸라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대무신왕의 전설 때문이겠지.'
검은늑대 부족에 전해지는 오랜 전설.
그것은 바로 동방의 위대했던 군주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먼 훗날 죽은 이의 몸을 통해 환생해 온 대륙에 동방의 깃발을 나부끼게 한다는 이야기였다.
'수습이 어려워 걍 부족 멸망시키고 흐지부지된 설정이었는데.'
사실 검은늑대 부족은 이곳 태생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조는 머나먼 동방의 전사들.
'대무신왕의 후예들이지.'
강력한 힘으로 원주민들을 굴복시킨 동방의 민족은 이곳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며 그들의 혈통은 흐려지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순혈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아틸라를 원로들은 애지중지하며 보살폈다.
'그래서 이런 유약한 성격을 갖게 된 거고.'
문주크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틸라의 성년식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보란 듯이 아틸라가 곰 사냥에 성공하길 바랐다.
하지만 돌아온 사체는 곰이 아닌 아틸라였다.
'그러고는 되살아나 곰 세 마릴 쳐죽이고 왔으니 대무신왕의 환생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크하하! 크하하하하하!"
문주크의 웃음소리가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좋다. 몽둥이를 선택한 것 또한 너의 의지. 한 번 호되게 당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아틸라의 표정이 변했다.
자세를 잡은 문주크에게서 가공할 투기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과연 영웅급 등장인물이다 이건가.'
아틸라도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하나였지만 어제 마주했던 세 마리 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박감.
'이거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장담할 수 없겠는데.'
"안 오면 내가 간다! 아틸라!"
웃기는 소리.
아틸라는 먼저 달렸다.
"이거 맞고 푹 쉬십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틸라가 벼락처럼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러나 문주크는 침착하게 몽둥이를 들어 막아 냈고, 아틸라의 첫 번째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저릿한 팔의 감각에 문주크는 혀를 내둘렀다.
'엄청난 괴력이군. 방심했다간 오히려 당할 수도 있겠어.'
문주크는 방어한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질풍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아틸라 역시 몽둥이로 막고 회피하며 그의 공격을 버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빠따 뽀사질까 봐 힘을 못 주겠네.'
놀랍게도 문주크가 느낀 엄청난 괴력은 아틸라의 풀 파워가 아니었던 것.
'안 되겠다. 빠르게 이긴 다음 내게 맞는 무기부터 찾아야겠어.'
그러나 문주크는 패영전 세계관에 몇 존재하지 않는 영웅급 등장인물.
아틸라가 최대 파워를 드러내지 않고 이길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아들아! 고작 이 정도 실력이었단 말이더냐!"
문주크는 껄껄 웃으며 아틸라의 공격을 방어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아틸라의 무위에 감탄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공격 하나하나마다 소름이 돋는군. 이 정도 실력이면 부족에서 아틸라를 당할 자는 족장인 나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없을 터."
순간 그의 머릿속에 동생인 블레다의 얼굴이 스쳐갔지만 억지로 치워 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아들아. 넌 앞으로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단련해야 한다. 그래야 이 드넓은 세상의 풍파를 오롯이 견뎌 낼 수 있지 않겠느냐.'
문주크는 아틸라가 머지않아 부족을 떠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오늘의 승부. 이 아비가 가져가겠다.'
문주크의 눈에 강한 투기가 일었다.
아틸라는 결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소름이 돋았다.
'뭐, 뭐지?'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저건 위험하다.
자신의 육감이 미친 듯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전사의 일격!'
"이것으로 끝이구나! 아틸라!"
문주크의 몽둥이가 빛살처럼 쇄도했다.
말 그대로 빛이 쏘아진 것 같은 예리한 공격에 아틸라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마주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젠장할 또...!'
문주크의 투기에 놀라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안의 몽둥이가 쪼개진 것이다.
"이런 씨발...."
욕설을 내뱉는 그의 머리 위로 끔찍한 충격이 강타했고,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기적을 영접하며 아틸라는 정신을 잃었다.
* * *
"...완전 괴물이로군."
널브러진 아틸라를 내려 보며 문주크는 자신의 덜미를 매만졌다.
오소소 돋아난 소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의 상황을 그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악력만으로 저 단단한 쇠나무를 깨부술 정도라니."
어느 만큼의 괴력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만약 아틸라가 힘 조절에 성공해 몽둥이를 막아 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지. 그게 아니군."
아틸라를 둘러업고 연무장을 나서며 문주크는 생각했다.
애초부터 가정이 잘못됐다.
'힘 조절에 성공했다면이 아니라.'
그 무지막지한 악력을 견딜 수 있는 무기가 아틸라의 손에 들려 있었다면, 이라고 정정해야 했다.
붉게 변한 석양이 흐뭇하게 미소하는 문주크의 얼굴을 비쳤다.
그는 그런 무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 * *
검은늑대 부족의 영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쪽엔 핏물도끼 부족이라 불리는 야만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족장 군디카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야망 또한 남달라 언제고 주변의 야만 부족들을 점령해 통일된 왕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뭐? 블레다가 찾아왔다고?"
군디카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를 마친 부하는 자신의 머리 위로 술병이 날아오지 않은 것을 전사신 티르께 감사드리며 서둘러 천막을 벗어났다.
잠시 후 블레다가 들어왔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소."
군디카의 표정이 변했다.
눈짓으로 자리의 수하들을 모두 내보낸 군디카가 말했다.
"계속하시오."
"문주크의 막내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했소."
이 멍청한 새끼가 갑자기 왜 나타났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고 있었다.
군디카는 눈앞의 사내를 그냥 죽여 버릴까 하는 욕구를 어렵사리 억눌렀다.
'그럴 순 없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블레다는 장기짝 역할을 해 줘야 했고, 녀석의 남다른 무위 또한 순간의 욕구 충족과 맞바꾸긴 제법 아까웠으니까.
"말해보시오."
블레다는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역시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지만 그중 군디카의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대무신왕이라 하셨소?"
"검은늑대 부족의 수뇌부에게만 전해지는 오랜 전설이오. 아틸라 녀석이 맨손으로 그 사나운 곰들을 찢어발기는 걸 군디카 족장께서도 봤어야 하오."
군디카는 그 말이 별달리 와닿지 않았다.
실패한 자가 으레 그렇듯 녀석은 자신의 실책을 무마하기 위해 이제 고작 성년식을 마쳤을 뿐인 애송이를 추켜세우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블레다 공께서는 아틸라라는 꼬맹이가 문주크와 버금가는 전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요?"
"그 이상일 수도 있소."
"크하하하하하!"
군디카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가 자신의 원대한 야망을 아직까지 머릿속 계획으로만 남겨 둘 수밖에 없는 이유.
'미친놈. 그 문주크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그건 바로 검은늑대 부족에 문주크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주크와 겨뤄 본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사람 새끼가 아니야.'
괴물.
아니 괴물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의 존재.
그게 바로 군디카가 생각하는 문주크라는 사내였다.
'문주크를 암살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땐 언제고. 그럼 그렇지. 어찌 늑대 새끼가 호랑이를 상대하겠는가.'
그러나 군디카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속마음과는 달랐다.
"웃어서 미안하오. 상대할 맛이 나는 적수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즐거워서 그랬소."
블레다가 문주크를 처리하기 전까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블레다 공께서는 이제 어쩌실 작정이오?"
"생각해 둔 게 있소. 활 잘 쏘는 날랜 부하 몇만 빌려 준다면 내 사흘 안으로 문주크의 목을 가져다드리리다."
"그런 부하라면 지금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소?"
"그들만으론 부족하오."
"호오? 무슨 묘안인지 몹시 궁금하구려."
블레다의 측근들은 검은늑대 부족의 금띠 전사 중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자들이다.
그런 그들만으로 부족하다니, 또 무슨 재밌는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저 사내는.
흥미에 찬 군디카의 얼굴을 향해 블레다가 비스듬히 입가를 찢었다.
"숲의 재앙을 이용하겠소."
* * *
"뭐? 아틸라가 금띠 전사가 되었다고?"
"대단하군. 성년식을 완수하자마자 금띠라니."
"하긴 곰 세 마리를 혼자 잡았고 세 명의 전사가 그걸 증언했으니 자격은 충분히 갖춰진 셈이지."
부락은 아틸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무위와 용맹을 숭상하는 검은늑대 부족의 전사들답게 대부분 감탄하고 축하하는 분위기였지만.
어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기만 하겠는가.
"친형을 살해한 패륜아가 하루아침에 금띠 전사라고?"
"허! 분명 아틸라를 편애하는 일레크가 제 동생들을 구워삶아 입을 맞춘 게 틀림없어!"
그들은 아이바르의 친우들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억울하게 당한 아이바르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녀석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어떻게? 아틸라는 금띠를 받았다고. 동띠인 우리들로선 역부족이지 않을까."
하루 만에 짐승 같은 근육질로 환골탈태한 아틸라의 육체.
모두들 망설이는 와중 누군가 말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 * *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에 잠에서 깬 옥타르는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세 얼간이를 보며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네놈들은 고작 아틸라 따위를 혼 내달라 부탁하기 위해 나의 단잠을 깨웠다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아틸라가 누구인가.
전사라 부르기도 아까운 이 얼간이들의 장난감이자 부락 최고의 찌질이가 아니던가.
"이, 임무차 부락을 떠나계셨던 탓에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게... 아틸라는 오늘 정식으로 금띠를 수여받았습니다."
"뭐? 금띠를? 동띠도 아까운 그 애송이가?"
옥타르의 격한 반응에 아이바르의 친구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함께 사냥을 나선 일레크가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습니다. 오, 옥타르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일레크가 유독 아틸라 녀석을 챙겨왔다는 것을."
"흠...."
"지금 부락은 온통 녀석에 대한 얘기뿐입니다. 심지어 일레크는 문주크 족장의 뒤를 이을 전사왕이 탄생했다며 떠들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평가받는 전사이자 일레크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옥타르의 자존감과 질투심을 건드리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이제 쐐기를 박을 시간이었다.
"또 아틸라가 그러더군요. 옥타르처럼 과대평가된 전사 따윈 한 손으로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뭐, 뭐라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선 옥타르의 몸 근육이 터질 듯이 꿈틀거렸다.
"당장 놈에게 안내해!"
004. 전설의 무기 (2)
"무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문주크의 물음에 아틸라는 허리춤의 손도끼를 내보였다.
"이미 가지고 있는데요."
"아비를 속일 생각은 말거라. 그것으론 네 용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지 않느냐."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면 거리낄 것 없지.
"얼른 주십시오."
"하하하. 성격 한 번 급하구나. 서둘지 말거라. 마침 네게 딱 맞는 무기가 있으니."
딱 맞는 무기라.
아틸라는 문주크가 소유한 여러 무기를 떠올렸다.
당기는 게 있기는 했다.
"제가 고르면 안 됩니까?"
"호오. 따로 갖고 싶은 게 있었느냐."
기다렸다는 듯 아틸라가 말했다.
"용아귀를 원합니다."
"아들아. 그건 내 주무기...."
"쩨쩨하게 왜 그러십니까. 범아귀도 갖고 계시면서."
"그것 또한 내 보조무기이니라."
"둘 다 양손도끼이지 않습니까. 쌍수로 들 기력도 없으시면서 뭐 그리 장비 욕심을 부리십니까."
남들이 들었으면 까무러치게 놀랄 말이었지만 문주크는 그저 웃었다.
그는 아틸라와 이렇게 허물없이 대화할 수 있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물쩍 넘어가려 하시지 말고 걍 화끈하게 내주십시오. 제가 뭐 두 자루 다 달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 너라면 용아귀와 범아귀를 쌍수로 들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당연한 말씀을."
"그 말, 책임질 수 있으렷다."
용아귀와 범아귀가 어떤 무기던가.
웬만한 금띠 전사들도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크기와 중량을 지닌 도끼다.
문주크 정도 되기에 그것을 양손으로나마 수족처럼 휘두를 수 있는 것.
"책임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싸움은 하셔야 하니 구태여 하나만 주십사 했던 건데 둘 다 주시면 저야 개꿀이죠."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던 날, 아틸라는 밤을 새워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은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곳에 떨어졌다.
아울러 들어오는 길이 있다면 나가는 길 또한 있을 터.
자신이 만든 광대한 세계관 속을 탐색하던 그는 이윽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요정.'
패영전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종족.
'요정왕국을 찾아간다.'
그곳이라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정왕국에 가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수많은 전투야 당연한 수순이고, 그렇다면 든든한 무기 확보는 필수 중의 필수!
"좋다. 용아귀를 네게 주마. 단 방금 말했던 대로 네가 두 무기를 쌍수로 사용할 수 있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근데 증명은 쌍수로 하고 왜 도끼는 용아귀 하나만 주십니까?"
"아비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느냐."
"흠."
아쉬워하는 아틸라를 보며 문주크가 빙긋 웃었다.
"대신 더 좋은 걸 주마."
"더 좋은 거요?"
순간 아틸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먼 옛날 이 땅을 찾아 정착한 동방의 이민족들.
그들의 왕이 가지고 있던 성물이자 무기가 있었다.
'이것도 그냥 날려 버린 설정이었는데.'
이민족들은 성물을 북쪽 숲의 수호자에게 맡겼고, 수호자는 대를 이어 가며 그것을 지켰다.
먼 훗날 대무신왕의 환생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또한 수호자에겐 그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으니.
'숲의 재앙 그리즐리(회색곰).'
* * *
"저기 옥타르잖아."
"오늘 새벽 귀환했다던데."
"근데 쉬지도 않고? 과연 차기 족장의 유력한 후보답군."
"지금은 좀 다르지 않을까?"
"아하. 아틸라 말이로군."
"맞아. 성년이 되자마자 금띠를 획득한 건 유례없는 일이니까."
부족원들의 수군거림에 옥타르는 다시 한번 얼굴을 구겼다.
자신이 아틸라 같은 애송이와 동급 취급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저들에게도 옥타르 님의 용맹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관전하는 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옥타르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는 명예를 중시하는 전사.
실력을 뽐내기 위한 보여 주기식 결투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라? 옥타르. 돌아온 거야?"
일레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이이이, 일레크!"
"허둥대는 건 여전하네. 돌아오자마자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 거야."
"옥타르 님께서는 아틸라에게 결투를 신청하려 하십니다."
"결투? 아틸라와? 왜?"
"전사 간의 신성한 결투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근데 너희들은 누구지?"
일레크의 물음에 세 얼간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의도치 않게 그들을 구원한 건 옥타르였다.
"아, 아틸라가 많이 강해졌다길래, 흐, 흥미가 생겨서."
그제야 알겠다는 듯 일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겠네. 나도 구경이나 해 볼까."
"그럼 저흰 다른 구경꾼들을 몰아오겠습니다."
대답도 듣기 전에 세 얼간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옥타르는 다리를 절룩이는 일레크와 보조를 맞추며 걸었고 둘은 곧 연무장에 도달했다.
"마침 아버지와 훈련 중이었네."
옥타르의 눈이 커졌다.
'문주크 족장과 일대일 대련이라고?'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저게 아틸라? 언제 저렇게 근육이 발달한 거지? 마치 다른 사람 같은데.'
그때 아틸라가 욕설을 뱉으며 무기를 내던지더니 연무장 구석으로 달려 두 자루 도끼를 양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악마처럼 킬킬대며 족장에게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아, 아들아! 이건 반칙...!"
"반칙이 아니라 템빨!"
"이놈아!"
아틸라의 무기를 알아본 옥타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요, 용아귀와 범아귀잖아!'
폭풍처럼 쏟아지는 맹공을 허둥지둥 막아 내던 문주크는 일레크를 발견하자마자 살았다는 얼굴로 휴식을 선언했다.
툴툴대며 도끼를 내린 아틸라가 자신의 용력을 감당해 낸 두 무기를 탐욕스러운 얼굴로 내려 보았고.
그런 아틸라를 귀신 보듯 쳐다보는 옥타르에게 문주크가 물었다.
"자넨 무슨 일인가."
"그, 그냥 지나는 길에 잠시...."
"잠시?"
"이, 이제 쉬러 가려던 참입니다."
"그런가? 그럼 푹 쉬게."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옥타르의 발이 멈췄다.
일레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할까. 하지만 그건 전사답지 않은 행동인데. 그렇다고 녀석과 싸우기엔....'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수많은 인파를 거느린 세 얼간이가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옥타르 님! 잔뜩 모셔왔습니다!"
옥타르는 난생처음 같은 부족원에게 살의를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