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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요정인가

사사사악.

조심스럽게 올라가던 나무에서 내려왔다.

첫인상이 나무에 달라붙어 올라가는 모습이라니.

"…."

조용히 돌아온 시무를 반기며 날 바라보고 있는 존재들.

모두가 시무와 같은 생김새였다.

다른 게 있다면 크기가 훨씬 크다는 것.

시무가 아기 냥이었다면 눈앞에 나타난 이들은 킹냥이었다.

뭐라고 해야 되지.

시무를 만났을 땐 야옹 소리를 내봤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왠지 모르게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박.

!!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킹냥이 A.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걸 보니 무리를 이끄는 대장 같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당."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당황했을 뿐 긴장하고 있진 않았는데.

긴장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순간 몸이 빳빳해질 정도로 긴장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 말했다.

킹냥이가 말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내가 야옹거리며 말을 안 건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옹야옹하며 말을 걸었었다면 긴장과 별개로 수치사 각이었다.

"인간의 말을 하는 게 신기하냥?"

"으… 응."

말투만 보면 킹냥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갔다.

"우린 인간의 언어가 생겼을 때 부터 알고 있었으니 신기해할 필요 없당."

다가온 킹냥A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와우.

계속해서 스미레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맑고 푸르며 밤하늘을 담아 놓은 듯한 눈동자.

그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좀 성장해야 가질 수 있나 보네.

대충 보니 시무 같은 작은 덩치의 냥이들은 검은색 눈동자였다.

"우리는 페샨. 이곳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당."

데몬… 이 아니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데몬이란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 붙인 이름이니까.

"내 이름은 리카르도, 편하게 불러도 된당."

생긴 건 킹냥인데 이름은 무슨 콜롬비아 카르텔 이름이네.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으며 입을 열었다.

"전 백운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존댓말로 이름을 말하자 리카르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반말이 거슬렸던 게 분명해.

"오랜만에 만나는 인간이구낭."

"오랜만이라면…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건가요?"

"만난 것 뿐만이 아니당. 오래전엔 우리도 인간과 함께 살았었당."

함께 살았었다니.

내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무 우물 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세계엔 내가 알지 못하는 게 얼마나 많이 있는 걸까.

"사람들은 당신들을 뭐라고 불렀나요?"

페샨이란 건 알았지만 이들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뭐라고 불렀는지가 궁금했다.

보통 그렇게 불린 명칭이 기록에 남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름으로 불렸당. 어느 시대엔 신령, 어느 시대엔 요정, 어느 시대엔 요괴, 지금은…."

"데몬."

내 대답에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해지면 똑똑해질수록 인간은 자신 외의 존재들을 부정했당. 그래서 우리도 더불어 사는 것을 멈추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거당."

"존재들이라 하면, 페샨 같은 존재들이 또 있다는 건가요?"

리카르도가 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신이라던가 요정 같은 존재가 아니당. 그저 수많은 종족 중 하나일 뿐이당. 다들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인간이 인지하지 못할 뿐이당."

인간 외의 존재들이 많고 각자의 세계가 있다니.

리카르도의 설명을 듣자 묘한 간질거림이 올라왔다.

지구가 전부가 아니구나.

세계 여행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아오던 환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 그곳만의 문화와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세계가 있다니.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끄앙!"

잠시 멍해 있는 사이 아장아장 걸어온 시무가 머리를 비볐다.

시무의 등 뒤로 미니 붕대가 보였다.

호다닥.

고개를 돌려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제가 한 거 아닙니다."

"방금 들었당. 네가 아이를 구해준 건 알고 있당."

휴.

괜한 오해를 살 일은 없을 듯하다.

"한눈을 판 사이 아이가 사라져 버렸당."

사라져도 어차피 공간 안에 있을 거라 안심했다는 리카르도.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시무는 없었고 잠시 후 한쪽에 벌어진 균열을 발견했다고 한다.

"원래 인간 세계로 향하는 문이 있던 위치였당. 열쇠로 잠궈놨는데 아이가 열고 나가버렸당."

"끄앙!"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끄앙거리며 여기저기를 활보하는 시무.

안 귀여웠으면 이미 궁댕이 날아갔지.

"사람들은 우리를 데몬이라 부르며 죽여야 하는 존재로 알고 있당. 그래서 찾으러 나가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정말 고맙당."

리카르도의 감사 인사에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드드드득!

아 저거 있었지.

여전히 문이 닫히지 않도록 비집고 있는 우덴킹의 줄기.

더 깊숙이 침투하진 못했지만, 우덴킹의 줄기는 조금씩이나마 문의 크기를 넓히고 있었다.

"아이가 문을 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당.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근처에 있던 녀석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당. 그래서 문을 닫지 못한당."

곤란한 듯 문을 바라보고 있는 리카르도.

"우덴킹… 저 나무 새끼 이름인데요. 저건 왜 여기로 들어오려는 거예요?"

내 물음에 리카르도가 주변의 루비 산을 둘러봤다.

"우리의 세계를, 페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당. 커다란 힘이라 다른 존재들이 탐낸당."

못 가져가겠네.

아주 그냥 한 보따리 오지게 싸들고 갈 생각이었는데 존재를 지탱해주는 힘이라니.

마음을 몹시 약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럼 저 힘으로 줄기 따위 쳐내버리고 문 닫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단순무식한 방법이었을까.

리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도 축복과도 같은 힘이당. 마음대로 사용하고 안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당. 그리고 우린 싸움을 하지 못한당."

싸움을 못 한다며 파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리카르도.

안 어울리긴 해.

이렇게 귀엽게 생긴 킹냥이들이 피 튀기는 전투를 한다라.

외관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안 어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강아지풀 살랑이는 곳에서 뛰어노는 게 제일 잘 어울리는 느낌이야.

"아까 나무를 오르고 있던데 왜 그런거냥."

뜨끔.

땡그랗게 눈을 뜨고 순진하게 묻는 리카르도.

리카르도는 인간의 보석에 대한 탐욕이나 물욕 같은 걸 잘 모르는 표정이었다.

"주… 주변 좀 둘러보느라… 하하."

멋쩍게 웃은 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쩝, 루비 들고 가기는 그른 것 같고.

"끄아앙!"

아기냥이 복귀시켜준 거에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가끔은 착한 일도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약간은 쓰린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꾸두둑!

여전히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우덴킹.

착한 일한 김에 한 번 더 하지 뭐.

"저거 제가 치워드리면 문 닫을 수 있는 거죠?"

"그렇당. 저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약하지 않당."

"괜찮아요."

의미를 알진 모르겠지만 엄지를 한 번 치켜세워줬다.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리카르도.

"…."

날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탐욕스럽게 생겨서 의심하는 건가.

학창 시절부터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셨었다.

운이는 눈에 욕심이 가득한 게 탐욕상이라고.

"보답을 하고 싶당."

에이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요.

라고 말해야 아름다운 장면이겠지만.

오는 건 막지 않는다가 내 신조였다.

끄덕.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박.

뒤에서 다가온 또 다른 페샨이 꽁꽁 싸맨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아무리 봐도 인간이 만든 상자였다.

킹냥이들이 머무르는 세계에는 몹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너 말고도 옛날에 우릴 도와줬던 사람이 있었당. 그 사람이 떠나며 주고 간거당."

선물 돌려막기…?

설날에 들어온 선물을 다른 이에게 다시 설날 선물로 건넨다.

안될 건 없지만 도리에는 살짝 어긋나는 그런 수법.

"힘을 원하면 열어보라고 했당. 그런데 우린 싸우고 싶지 않당. 그래서 안 열어보고 있었당."

일단 받고 보자.

내밀어진 작은 상자를 받아 품으로 챙겨 넣었다.

"그리고 이건 페샨을 도와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이당."

스윽.

리카르도가 앞발을 들어 내 머리로 가져다 댔다.

꾸욱.

말캉한 젤리에 감싸지는 느낌이 이마로 전해졌다.

"우리 페샨의 눈은 항상 진실만을 본당. 진실 외의 것은 보이지 않는당."

우우웅.

리카르도의 앞발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사아아.

앞발을 통해 나에게 흡수되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맑고 깨끗한 기운이 내 눈에 담기는 느낌이었다.

슥.

끝난 건지 발을 떼는 리카르도.

여전히 귀여운 얼굴로 리카르도가 눈을 반짝였다.

"친구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당."

"…!"

친구라… 좋은 단어다.

킹냥이 친구라니.

꾸드드드득!!

점점 커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비집고 들어오려는 집념 만큼은 상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친구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확실히 없애줘야겠네.

"문 닫을 준비해랑."

페샨의 친구가 된 기념으로 말투를 따라했다.

슥슥.

마지막으로 가기 전.

끄앙거리는 시무를 폭풍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는 원할 때 언제든 이곳으로 올 수 있당."

!?

너무 마지막처럼 쓰다듬어서인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무는 시무.

또 쓰다듬을 수 있다면 킵해두기로 한다.

"나중에 또 보장."

시무에게 인사를 건넨 후 몸을 일으켰다.

"…."

초롱초롱한, 스미코 할머니의 말대로 밤하늘이 담긴 듯한 아름다운 눈.

많은 페샨들의 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해야겠구먼.

"간당."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벌어져 있는 틈으로 걸어갔다.

이놈의 나무쉨.

감히 킹냥이의 공간을 탐내?

우두둑.

손을 풀며 틈 밖으로 발을 뻗었다.

* * * 

아름다운 안쪽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광경이었다.

도망친건지 우덴킹에게 빨려 들어간 건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히리와 일행들.

우글우글.

나온 공간엔 타겟을 잃어버린 우덴들만이 우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동족이 틈을 열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우덴킹과 함께 말이다.

사방이 나무쉨 투성이구만.

어림잡아 봐도 수백 마리였다.

드득.

잠시 후 내 존재를 눈치챈 우덴들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고개를 돌려 날 응시하는 장면이라니.

그저 나무일 뿐이지만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뭐, 여유롭네.

원래라면 수리검을 들고 호다닥 째는 게 정상인 상황이었다.

마운티거 때와 달리 휘발유나 가스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우루루루!!

나에게 무섭게 밀려오는 우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휘발유? 가스통?

필요 없다.

[앤 보니&메리 리드]

두 손으로 쥐어지는 리볼버의 감촉을 느끼며 다음 단어를 떠올렸다.

72화. 나무는 활활

문으로 뛰어들기 전.

정확히는 히리에게 열쇠를 뺏은 순간이었다.

파악!!

아직 문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악.

더 이상 내가 있는 곳은 어두컴컴한 공간이 아니었다.

근무 전날 깨우던 후임의 눈뽕처럼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우우웅.

동굴엔 불어올 리 없는 상쾌한 바람과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의 따스함까지.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

시각과 촉각 다음은 청각이었다.

킁킁.

남은 건 후각.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상쾌한 바람과 눈부신 햇살, 갈매기 소리와 바다 내음이라니.

바다요…?

부스스.

눈뽕 당했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이런 게 느껴지는 건 바다 뿐인데 왜 갑자기?

!!

"와우."

와우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은 단어였다.

속이 뻥 뚫리는 넓고 푸르른 바다.

눈부시게 햇살을 반사하고 있는 바다에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그러졌다.

평화롭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갈매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아닌가? 비둘기였나? 아무튼,

지금 눈앞의 잔잔한 바다와 함께 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응?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배 위네.

요즘 티비에서 보던 최신식 배는 아니었다.

좋은 목재로 만든 고급 배.

항해 관련된 게임을 하면 나오는 그런 배였다.

나 배 멀미 하는데.

고등학교 2학년 제주도 여행.

우도를 가던 배에서 참지 못한 토를 사방으로 뿌려댔었다.

다 추억이지.

그때 토를 맞았던 친구들에게는 추억이 아니겠지만.

기억이란 건 원래 상대적인 것이다.

"오랜만이네."

"!!"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

첫 만남에서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모습의 앤 보니였다.

이제야 해적답네.

감옥에서 만났을 때는 거의 다 죽어가던 모습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해적들이 입는 가죽 바지와 편해 보이는 셔츠를 걸치고 있는 보니.

감옥에서 잠깐 본 게 다인데.

씨익.

반갑네.

"좋아 보이네요."

"덕분에."

두리번두리번.

한 명 더 있어야 하는데.

"여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또 뒤에 나타나 있던 거지.

완전 다른 사람이네.

메리도 보니와 마찬가지였다.

파란 곱슬머리를 깔끔하게 내린 채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저벅.

내가 있는 갑판까지 걸어온 보니가 날 바라봤다.

"그런데 유리병은 왜 아직도 들고 다녀?"

"아."

보니의 말에 품으로 손을 넣어 개미굴에서 주웠던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황금빛을 뿜어내며 내게 리볼버를 손에 넣게 해줬던 유리병.

"이거요."

괜히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무기를 얻게 해주고 빛을 잃은 유리병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개미굴에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열어보지도 않았네. 인간은 호기심을 못 참는 동물 아니었나?"

겁나 열어 보고 싶긴 했다.

안에 무슨 쪽지가 들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직접 봐봐.

"보라고 해도 안 보는 애는 처음이네."

안 읽은 이유는 단순했다.

누가 들으면 손발 접히게 오그라든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좀… 이대로 바다에 되돌려 놓고 싶었거든요."

마지막 생을 감옥에 갇혀 죽어 간 보니와 리드.

이 유려병이라도 과거에 종횡무진 누볐던 바다로 보내주고 싶었다.

"너 보기보다 감성적인 애구나."

"하하… 그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들고 다녔어요."

감성과는 거리가 먼 생을 살아왔지만.

애먼 데서 고집, 감성이 터지는 경향이 있었다.

아직은 마음에 드는 바다를 발견하지 못해 계속 들고 다니던 중이었다.

슥.

손을 뻗는 보니와 리드에게 유리병을 건네줬다.

"어!"

휙.

받기 무섭게 넓은 바다로 유리병을 던지는 두 사람.

잠시 멍하니 둥둥 떠가는 유리병을 보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

이거면 될 것 같았다.

이런 바다라면 합격!

"기특하네."

밝게 웃는 보니와 리드에 손을 내저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입꼬리가 미친 듯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기특하니까 보여 줄게."

"…?"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거."

이 사람들도 참 감성적이네.

"이미 보고 있는데요."

진한 바다 내음을 들이마시며 갑판을 두 손으로 짚었다.

"정말 예쁜 바다에요! 두 분이 가장 사랑할 만해요!"

….

잠시 이어지는 정적.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

"?"

애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서 있는 보니와 리드.

바다 아닌갑네.

당연히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약간 감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어, 저기 오네."

보니의 눈을 따라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배였다.

아! 배였구만.

내가 봐도 이쁜 배였다.

동시에 짐을 잔뜩 싣고 있는 걸 보니 실용적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끄덕.

저건 인정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가 아니라 배를 좋아하셨군요."

"이제야 알았어?"

"제가 봐도 예쁜…."

철컥. 철컥.

응…? 철컥…?

내 얼굴 좌우로 내밀어져 있는 리볼버 두 자루.

마치 내 어깨를 리볼버의 받침대로 쓰고 있는 모양새였다.

"저… 저기요?"

"저렇게 무언가를 가득 실은 배. 리드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거든."

뭔가 잘못됐다.

내가 생각하던 거랑 결이 다르다.

"저런 나무 배는 말이야."

보니와 리드가 각각의 리볼버에 반대편 손을 올렸다.

싸악.

!

손으로 한 번 쓸기 무섭게 하얗던 총신의 가운데가 붉게 변했다.

"불태워서 가라앉힌 다음에 빼앗아야 제맛이거든."

잠시 잊고 있었다.

보니와 리드는 이름을 떨친 악명 높은 해적이라는 걸.

감옥에서 다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지라 둘을 그저 짠한 자매라고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겠어?"

묘하게 현타가 오는 깨달음에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질.

해적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뭐겠는가.

남에 꺼 빼앗는 거지.

싱긋.

해맑게 웃어 보인 보니와 리드가 작고 아기자기한 배를 응시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동시에 겹쳐 들려오는 보니와 리드의 목소리.

"남에 꺼 빼앗기."

두두두두두두두두!!

* * *

아까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히리의 열쇠를 빼앗은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조건의 완성인 듯했다.

뭐, 어쨌든.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손에 쥐어져 있는 리볼버 총신으로 아까 봤던 붉은 선이 생겨났다.

철컥.

리볼버를 몰려오고 있는 우덴에게 조준했다.

- 콰아아아!!

보니와 리드의 탄에 맞고 불타올랐던 아기자기한 배를 떠올렸다.

명복을 빕니다.

아기자기한 배님.

길동무는 만들어드릴게요.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총구가 불을 뿜으며 탄을 쏟아냈다.

이전과 같은 붉은색과 파란색의 탄환이었지만. 

다른 게 있다면,

콰아아아아!

착탄점에서 폭발하며 불꽃을 일으킨다는 것.

화르르륵!!

탄을 쏟아내기 무섭게 동굴이 불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어--!

위기를 감지한 건지 페샨의 입구를 비집고 있던 우덴킹도 움직이고 있었다.

쐐에에엑--!

정면에서 또 다른 우덴킹의 줄기가 날아들었다.

작열탄이 없었으면 곤란했을 놈이지만.

삭.

이젠 아니었다.

우글거리던 우덴은 서로에게 불을 옮겨 붙이며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동굴 벽면을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불이 붙자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우덴킹의 줄기들.

내게 다가오던 줄기도 마찬가지였다.

작열탄에 닿자마자 불타기 시작했고, 그 불은 줄기를 타고 본체로 올라가고 있었다.

쿠우우!

탄의 위력에 못 견딘 동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루루.

탄에 직격당해서인지 먼저 무너져내린 벽면.

타닷.

리볼버를 든 채로 벽면을 향해 달려갔다.

우덴킹의 줄기로 인해 잘 지탱되고 있었을 뿐 동굴의 벽면 자체는 두껍지 않았다.

탁!

무너진 벽면을 통해 나온 동굴 밖.

그어어어어--!

여기에 있었구만.

동굴 밖엔 거대한 덩치의 우덴킹 두 마리가 불을 끄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내가 올라온 양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우덴킹 두 마리.

철컥.

양팔을 벌려 녀석들 향해 리볼버를 겨눴다.

직화구이다, 나무쉨아.

두두두두두두두!!

* * *

"휴우."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사우나구만, 사우나여.

그것도 찾아보기 힘든 천연 목재 사우나였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큰 크기의 우덴킹 두 마리와 함께 동굴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우덴 수백 마리까지.

불가마도 이런 불가마가 없었다.

스윽.

리볼버를 든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오랜만에 땀을 빼니 몹시 개운했다.

이대로 료칸으로 돌아가서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면 딱일 것 같았다.

….

팔을 내려 여전히 달궈져 연기가 나고 있는 리볼버를 바라봤다.

무서운 친구들이었어.

보니와 리드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본 느낌이었다.

사아아…!

잠시 후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기 시작한 리볼버.

쿨타임은 크게 줄지 않았지만 유지 시간은 처음보다 확연히 늘어났다.

쿨타임이 없어지면.

행복한 상상을 떠올렸다.

수리검으로 순간이동하며 쏘아대는 작열탄이라.

상상만 해도 강려크하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맑게 갠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색이라 그런지 두 사람과 함께 보고 있던 바다가 떠올랐다.

어쨌든.

씨익.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 * *

낮열밤열.

조금 전 내가 만든 사자성어다.

낮에도 뜨겁고 밤에도 뜨겁다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

"어흐으…!"

아침에 땀을 쏙 뺀지라 오늘은 별로 안 땡길 줄 알았는데.

건방진 착각이었다.

온천은 항상 옳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꼬로록.

새롭게 깨달은 사실 하나.

조식을 먹은 이후로 밤이 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것.

시간 됐는데.

이제 곧 저녁을 줄 시간이야.

파블로프의 개처럼 밥 때가 되었음을 깨닫곤 호다닥 밖으러 달려나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정좌했다.

셋 세면 온다.

하나.

똑똑.

셋.

"네!"

우렁차게 대답하자 스미레가 진수성찬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비주얼 100점 만점에 200점.

역시나 오늘도 흡족스러운 비주얼의 식사였다.

기다리자.

아직 손을 뻗지 않은 채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스미레가 나간 뒤에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심산이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세팅을 끝낸 후 문으로 몸을 돌리는 스미레.

아.

"스미레 님!"

"네,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돌린 스미레.

스미레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스미레 할머님이 말씀하신 요정요."

"…?"

"진짜 있었어요."

뜬금포 터지는 말 때문이었을까.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스미레가 입가 가득 미소를 그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73화. 불꽃놀이엔 맥주지

짹짹.

기분 좋은 햇살과 함께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우리집 같이 익숙해 져버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날이구먼.

충분히 쉬었는데도 막상 떠나려니 아쉬웠다.

언제 또 이렇게 편한 잠자리에 맛있는 삼시 세끼를 챙겨 먹을 수 있을까.

얼른 한국 가서 계좌도 열어봐야 하는데.

- 일본에서는 조회가 불가능해요.

어제 지문으로 계좌를 조회해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일본 계좌로 돈을 환전해 놓은 게 아니라면 조회할 수 없다는 것.

개부자 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일본으로 오기 전 보내버렸던 마운티거.

화려한 화형식을 치룬 만큼 조회수가 엄청날 터였다.

후원금 10억 들어왔으면 뭐하지.

헤벌쭉.

이불을 돌돌 말고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로또 당첨되면 뭐 하지란 상상과 비슷한 망상이었다.

아.

엉금엉금.

옷가지가 있는 곳으로 기어가 액션 캠을 집어 들었다.

딸깍 딸깍.

샤발 안되네.

동굴 밖에서 오래 쬐고 있었던 장작불이 문제였다.

땀도 쏙쏙 흐르는 게 시원해서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액션 캠이 맛이 가버렸다.

아니 이런 싸구려를 팔아?

캠을 팔았던 헌터 등록소 창구를 떠올렸다.

이상한 비닐 봉다리에 담아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뽑기 운 최악이야.

쉬지 않고 남탓을 시전하고 액션 캠의 메모리 카드를 뽑았다.

우덴킹이랑 우덴을 불태운 동영상이라고 건질 생각이었다.

흐느적.

동영상만 건지겠다는 것도 사치였나 보다.

메모리 카드가 캠에서 빼자마자 흐물흐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카메라 똑바로 만든 거 맞냐구!

다시 한번 무한 남탓을 시전하고 캠과 메모리 카드를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켰다.

어쩌겠는가.

제 명을 다 하고 떠나버렸는데.

진짜 개튼튼한 걸로 하나 사야지.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도끼가 찍어도 안 부서지는 걸로 하나 장만해야겠다.

미리미리 살 걸.

광고를 보면 최신식 캠이 정말 많았다.

등록소에서 파는 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니미니한 초소형 캠.

크기는 작지만 화질과 배터리는 압도적으로 훌륭한 제품이었다.

그걸로 하나 사야겠어.

한 번 사려다 너무 비싸서 말았었는데 덕분에 동영상까지 하나 날려 먹었다.

구두쇠의 최후인가.

스스로에게 고개를 흔들어 준 후 널브러져 있는 짐을 꾸렸다.

아직 체크아웃 시간까지는 좀 남았지만 미리 나가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다.

저번엔 시무 만나면서 산책 실패했으니까.

짐을 챙기다 어제 입었던 옷을 쳐다봤다.

안주머니에 보니와 리드의 유리병이 들어있었던 옷.

진짜 없어졌네.

보니와 리드가 넓은 바다로 던져버렸던 유리병.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없어져 버렸다.

내 능력이지만 참 신기하단 말이야.

꿈 같지만 현실인 공간.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에 간섭하는 공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머리로 완벽히 이해되지 않아서인지 가끔 묘한 신비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슥.

마지막으로 가방 안에 소중히 모셔져 있는 보따리를 바라봤다.

누가 열어볼세라 아주 그냥 죽어라 꽁꽁 싸맨 보따리였다.

- 힘을 원하면 열어보라고 했당.

안의 내용물이 궁금하지만 보따리를 풀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고생길 제대로 시작일 것 같단 말이지.

본능적인 감각에 의한 판단이었다.

보따리를 풀고 상자를 여는 순간 꽤 오랜 시간 고생을 할 듯한 강력한 느낌.

오늘까지만 쉬고 열자.

커다란 일보 전진을 위한 잠시의 휴식 시간이었다.

이대로 유후인 구경도 제대로 못 하고 갈 순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보따리를 가방으로 챙겼다.

짐은 다 챙겼고.

간소한 짐이 든 가방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3일 동안 잘 쉬다가는 호화 료칸.

열심히 돈 벌어서 또 와야지란 생각을 하며 문을 나섰다.

* * *

"500엔입니다."

짤랑.

동전 하나를 건넨 후 꼬치 다섯 개를 받아 들었다.

료칸을 나오자마자 만난 꼬치 가게.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어.

목적은 산책이었지만 어디선가 달달한 냄새가 풍겨왔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따라 도착한 장소가 바로 이곳.

보기만 해도 달콤한 꿀을 잔뜩 바른 당고 가게였다.

쏘옥.

우물우물.

와씨.

달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혀가 얼얼해지는 극강의 달콤함.

조금이나마 안 깼던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쏙.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다 먹으면 당뇨가 걸릴 듯하지만 멈출 수 없는 맛이었다.

"어머니! 저도 당고 사주세요!"

내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일까.

마주 오던 꼬마가 엄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헌터 말고 먹방을 했어야 하나.

스스로의 먹방 재능에 만족해하며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로 걸음을 옮겼다.

유후인 마을을 둘로 나누는 강줄기.

커다랗진 않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강이었다.

좋다.

입에선 달달한 당고가 녹고 있었고 눈앞엔 시원한 강줄기가, 주변은 발전 전의 정감 넘치는 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냥 걷고만 있을 뿐인데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평화로워지는 기분이다.

"빨리 밤 됐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올해도 엄청 예쁘겠지?"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나쁜 일이다.

나쁜 일이지만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 밤에 뭐하나?

조금 더 걷자 있는 녹차 가게로 들어갔다.

"녹차 아이스크림 하나랑 녹차 주세요."

"예이. 400엔입니다."

돈을 건네며 주인아저씨를 바라봤다.

"오늘 밤에 여기서 뭐 하나요?"

"아이고 유후인 처음 오시는 분인가 보네."

"3일 전에 처음 왔어요."

아저씨가 손을 들어 벽 한쪽을 가리켰다.

# 유후인 불꽃 축제

오.

불꽃 축제란 말에 머릿속에 여러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물론 현실에선 불꽃 축제란 곳에 가본 적이 없기에 모두 2D 영상이었다.

단골 소재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이었다.

일본 전통 의상인 유카타를 입고 연인(진)인 친구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

흔히 축제엔 꼬치나 맥주를 파는 포차도 열기에 볼 때마다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이 풀리려고 하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진짜 장날이었다.

여기서 버킷리스트 하나 달성 하겠구만.

조금 전 작성된 버킷리스트를 벌써 하나 채울 수 있다니.

정말 난 행운을 타고 났다.

좋아.

오늘 밤 일정이 정해졌다.

불꽃놀이 구경 확정!

* * *

벌컥! 벌컥!

"크하아!"

시원한 맥주를 원샷한 후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진짜 좋네.

유후인 자체가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포차와 포차에서 흘러나오는 따듯한 주황색 불이 너무 예쁘고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바라던 거야.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것처럼 사랑을 속삭일 연인은 없었지만.

시원한 맥주와 짭짤한 꼬치,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불빛들까지.

이거면 충분했다.

음… 한 번 입어볼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턱을 문질렀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유카타와 나막신이 내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디 보자.

"유카타 대여해 드립니다! 싸요! 싸!"

좋았어.

호다닥 소리 지르고 있는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 * *

따각. 따각. 따각.

흡족스러운 소리구만.

나막신을 튕기며 나풀거리는 소매를 내려다봤다.

입어보기 전에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개편하다!

편해도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품이 커 너풀너풀한 상의와 치마처럼 밑에가 뻥 뚫려 있는 하의까지.

이래서 치마를 입는 건가.

일평생 바지만 입다 입어서인지 엄청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가능하다면 대여가 아니라 하나 업어가고 싶었다.

짤랑.

손바닥에 놓인 동전을 바라봤다.

유카타 대여를 마지막으로 지폐는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좀 더 달라 그럴 걸.

양심 터진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마저도 쿄스케가 챙겨준 돈이었는데.

가는 길에 꼬치 두어 개 더 먹으면 끝나겠구만.

공항까지 타고 갈 차비만 남겨두면 되니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바글바글.

사람 너무 많네.

불꽃놀이는 하늘에다 쏘니 안 보일 일은 없겠지만.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불꽃놀이를 이렇게 사람들에게 낑겨 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탁 트인 장소에서 보고 싶었다.

"1분 후 불꽃놀이를 시작하겠습니다!"

행사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가 좋겠어.

인파에서 빠져나와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비전 수리검]

수리검을 행사 장소 옆쪽의 산등성이로 최대한 살살 집어던졌다.

"10! 9! 8!"

[비전]

진행자의 카운트에 빠르게 비전을 했다.

순식간에 바뀐 눈앞의 풍경.

여기다.

유후인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

불꽃놀이가 준비된 행사장과도 정면이었다.

"3! 2! 1!"

피유우웅!

카운트가 끝나기 무섭게 폭죽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와…."

펑! 펑! 펑!

하늘에 도달하자마자 화려한 불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불꽃놀이란 게 원래 이렇게 멋있었나.

능력의 개방으로 불꽃 제작 장인이 된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었다.

그 때문인지 입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문양이 쉴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으차.

한쪽 풀밭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치이익!

캔맥주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거품을 쏟아냈다.

꿀꺽.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하늘을 수놓고 있는 불꽃을 바라봤다.

안주 같은 건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싱긋.

입가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오오타!

* * * 

일본의 비상 대책 본부.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자가 본부로 들어왔다.

깔끔한 블랙톤 정장과 단정한 검은색 단발 머리를 넘기고 있는 여자.

벌떡.

여자를 발견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군인들과 관리들.

"오셨습니까, 장관님."

장관이라 불린 여자, 니시다 료코가 일어나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상황은 어때요?"

"…."

질문에 고개를 숙이는 군인들에 료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지원군이 도착했을 땐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 아군 피해는요?"

침통한 표정을 지은 장성이 브리핑 화면을 틀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개의 이름들.

이름들은 모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

그 화면의 의미를 아는 료코가 두 눈을 꾹 감았다.

'다 죽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선 계속 이 상태로 눈을 감은 채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처음 산정한 놈의 등급은 A급이라고 들었습니다… 만. 화면을 보니 아닌 거 같네요."

기존 데몬 등급 산정을 맡았던 군인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상황에 사과는 무의미합니다. 등급은 다시 산정 했겠죠?"

"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데몬의 사진이 찍힌 화면을 공유했다.

5미터는 되어보이는 크기에 맨들거리는 적색 갑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데몬.

"데몬 번호 A-82번, 새로 산정한 등급은… S입니다."

"!!"

S란 말에 본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데몬의 등급은 만국 공통.

여기서 S급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노네임드.

그리고, 해당 데몬이 노네임드라는 사실이 인정되면 고유의 이름이 붙는다.

"국가 소속 헌터 7급 37명, 5급 19명, 3급 6명. 총 62명 사상자를 낸 노네임드 데몬, 사로카."

꿀꺽.

"현재 후지산에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74화. 후지산

부스스.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인생 한순간이야.

졸린 눈을 간신히 떠 주변을 둘러봤다.

어젯밤 불꽃놀이를 보던 산등성이의 꼭대기.

아침 8시 정도 됐으려나.

정확한 현재 시간을 알 순 없었다.

단지 마을 사람들이 마당을 쓸고 있는 걸 보며 추측해볼 뿐이었다.

어제까지는 호화 료칸의 천장 아래서 눈을 떴는데.

하루 만에 산 노숙으로 변하다니.

고개가 절로 내저어지는 상황이었다.

어젯밤 불꽃놀이가 끝난 후.

시원한 맥주와 예쁜 불꽃놀이를 봐서인지 기분이 몹시 좋았고.

이대로 내려가기가 좀 아쉬웠었다.

- 아쉬운데 별이나 좀 보다 갈까.

그렇게 발라당 누워 하늘을 메우고 있는 별구경을 시작했다.

- 음냐.

별구경을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졸음이 스르륵 밀려오기 시작했다.

- 눈만 좀 붙일까.

너무 달콤했기에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것이 마지막 기억.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주 그냥 꿀잠을 자버렸어.

푹신한 침대는커녕 여기저기 튀어나온 풀바닥이었지만.

몸은 침대에서 잔 것 못지 않게 개운했다.

"끄어어어!!"

팔이 빠져라 기지개를 켠 후.

[비전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나막신을 신고 산을 걸어 내려갈 순 없는 노릇이다.

"자 가볼…!?"

나막신?

수리검을 던지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자유로운 하체에 고개를 내렸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나 유카타 빌렸었지.

노점상의 모습을 봤을 때 축제에만 오는 분인 거 같은데 큰일이다.

안 되는데.

물론, 큰일 난 건 그 유카타 주인 분이 아니었다.

반대였다.

- 보증금 주세요. 유카타 반납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흉흉한 세상이라 그런 것 같았다.

워낙 별난 놈들이 많다 보니 유카타를 빌려주며 보증금을 받았던 주인 아저씨.

- 유카타 개비싸구나.

생각보다 몹시 센 보증금에 유카타는 비싼 옷이구나 하며 돈을 건넸었다.

어차피 불꽃놀이만 끝나고 반납할 테니 별 생각 없이 보증금을 맡긴 건데.

산 위에서 기분 좋다고 잠이 들어버릴 줄은.

안돼!

급한 마음에 수리검을 산등성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내 차비야!

호다닥.

* * *

"…."

하나 업어갈까 생각했던 게 씨앗이 된 걸까.

뜻밖의 유카타가 생겨버렸다.

물론 그리 기쁜 상황은 아니었다.

공항까지 갈 차비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휑하네.

내년이 되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굳은 의지인지 노점상이 있던 자리는 깔끔했다.

그것도 몹시 깔끔.

-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혹시나 주민분이실까 희망을 걸어봤지만.

노점상 옆에 위치하고 있던 가게 아주머니 말씀을 들으며 체념하게 되었다.

으… 음.

긍정적인 생각을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을 항상 계획대로 살아갈 순 없는 것.

그리고 이런 돌발상황이야말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짝!

헛소리였다.

아무리 돌발상황이라 해도 집에 못 돌아가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우물우물.

막막한 마음에 조금 전에 산 경단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차비로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달달한 걸 먹으며 뇌를 회전시켜야 했다.

수리검을 던지면서 간다…?

경단의 효과는 미미했다.

수리검을 던지면서 공항까지 갔다간 팔이 먼저 빠져버리고 말 터였다.

역시 현실적인 건.

부스럭.

품에 있던 명함을 꺼냈다.

# 모리타 쿄스케

쿄스케가 핸드폰을 사면 등록하라고 줬던 연락처였다.

안돼.

이건 최후의 보루였다.

그렇게 멋있는 이별의 말은 다 건네놓고 맥주랑 꼬치 처먹고 잠들어서 돈 달라고 다시 전화를 한다?

안되지 안돼.

인간 백운의 가오가 허락하지 않는다.

톡.

들고 있던 경단까지 다 먹어버렸다.

슥.

더 먹을 거 없나 가방을 뒤지던 중 눈에 띄는 보따리.

이거나 열어볼까.

애초에도 어제까지만 쉬고 열어볼 생각이었으니.

마땅한 이동 수단이 떠오를 때까지 상자의 내용물이나 살펴봐야겠다.

음.

[잭 더 리퍼]

서걱.

너무 옴팡지게 묶여있는 보따리. 

망설임 없이 면도칼로 매듭을 잘라냈다.

보따리가 펼쳐지며 시무 만큼이나 앙증맞은 크기의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사기 아니야?

착하고 귀여운 페샨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게 아닌가 의심되는 비주얼이었다.

혹시… 보라돌이?

상자에 손을 가져가며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페샨이 위기 때 사용할 수 있는 비밀 무기를 숨겨놓은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금돌이까진 안 바란다, 보라돌이라도!

달칵.

….

응, 아니야.

금빛이나 보랏빛은커녕 빛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게 나와버렸다.

아주 옛날에 쓰였을 법한 양피지로 된 쪽지.

반듯하게 접혀있는 작은 쪽지가 상자 내용물의 전부였다.

에이.

첫 번째 어긋난 기대감은 뒤로하고 쪽지를 펼쳤다.

아직 완전히 기대를 버리기엔 일렀다.

혹시 아는가.

해적왕 같은 존재가 어마어마한 재산을 숨겨놓은 보물지도 일지도 모른다.

뭐야.

텅.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 사기였네.

신기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펼쳐본 쪽지엔 보물 지도는 고사하고 작은 활자 하나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리 냥냥이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다지만 너무 성의 없고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였으면 최소한의 성의로 한글이라도 몇 줄 적어놨을 텐데.

참 못된 인간들 많아.

빈 쪽지를 선물이라고 받으며 기뻐했을 페샨들이 떠올랐다.

불쌍한 냥냥이들.

나중에 만나게 되면 사기당하지 않는 법에 대해 강의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차비도 없는데 힘만 빠졌네.

아무것도 안 적힌 상자와 쪽지를 내다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스르르…!

그 순간.

쪽지에서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힘을 얻고 싶다면.

쪽지 위로 한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스륵.

오씨.

계속 글씨가 써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쪽지엔 거대한 눈 모양의 그림이 그려졌다.

마치 날 구석구석 살피며 눈알을 굴리고 있는 듯한 그림이었다.

사락.

잠시 후 눈이 없어진 후.

쪽지로 간략한 문장 하나가 적혀졌다.

# 후지산으로 가라.

파삭!

잠시 동안 문장을 보여준 뒤 쪽지가 바스러졌다.

역할을 다하자 참아왔던 세월을 한 번에 받으며 사라져버린 듯했다.

후지산…?

내가 아는 그 후지산을 말하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유후인의 숲과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곤 하나 페샨 족이 머무는 곳은 다른 세계였다.

다른 세계에서 건네진 쪽지가 후지산을 가리키고 있다니.

음.

원래는 어떻게든 공항으로 가 한국행 비행기를 탈 생각이었다.

쿄스케도 구했고 스이카도 찾았으니 일본에 볼일은 끝났기 때문이다.

어쩌지.

그러던 중 나타난 쪽지의 문장.

무기왕의 능력에 의한 거였다면 의심없이 갔겠지만.

생전 처음보는 의심스러운 쪽지가 후지산으로 가라고 하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찜찜한데.

그렇다고 안 가기에도 찜찜했다.

페샨에게 상자를 건넨 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정말 페샨에게 힘을 줄 생각이었고 이 쪽지가 가리키는 곳에 그 방법이 있는 거라면?

한국에 들렀다 가기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후지산에 무언가 묻혀있고 그걸 파내는 일이라면 언제 가든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마는, 시간제한이 있는 기회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스륵.

누구의 눈인진 몰라도 조용히 그려져 나를 살폈던 눈동자.

눈동자는 마치 현재의 나를 샅샅이 훑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백운에게 있어 최적화된,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루트를 찾아 추천한 느낌.

고민하지 말자.

난 나를 잘 알았다.

고민해봐야 어차피 가겠지.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 찾아야 하는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쪽지가 사기일지라도 직접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저벅.

간다! 후지산으로!

몸을 돌려 대로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땡전 한 푼 없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는 막막했다.

하지만, 일단 가본다.

부우우웅.

일단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길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내 옆으로 경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섰다.

너무 신기한 꼬라지라 사진 찍으려고 하나.

유카타를 입고 나막신을 신은 채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

신기하다면 신기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위이이잉.

차의 창문이 내려가고.

"배… 백운 님?"

내 이름이 불리어졌다.

* * *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느끼며 앞을 바라봤다.

"와 진짜 백운 님이라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더니.

타국의 마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토벌전 이후로 영상도 안 올라오고 해서 정말 걱정했어요."

"대산한테 무슨 일이라도 당하신 줄 알았거든요."

"하하…. 아니에요."

광산 토벌전에서 만났던 유연경과 배이슬.

당시 게스트 헌터로 참가했던 두 사람은 아직도 유후인에서 날 만났단 사실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운티거 영상도 봤어요! 백운 님 그 동영상 댓글 보셨어요? 완전 난리라니까요."

!?

당장 어떻게 난리가 났는지 말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조수석에 있던 배이슬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딘가로 접속하더니 나에게 폰을 건네는 배이슬.

# 돌아온 무기왕, 산을 불태우다.

제목 누가 지었어 이거.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이었다.

옆에 있다면 어깨를 격하게 두드려 주고 싶었다.

@ 갈아입으신 분 좋아요 요망.

동영상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베스트 댓글이었다.

쿡.

내 폰은 아니었지만 조심스럽게 좋아요 버튼을 클릭했다.

# 콰아아아!

마운티거가 활활 불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동영상이 끝나려는 시점.

한튜브에서 편집한 건지 장면이 바뀌며 CBC의 송유빈이 나타났다.

# 쾅!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카메라를 응시하는 송유빈.

무언가를 잔뜩 참고 있던 건지 송유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아!!!

흐뭇.

몹시 흐뭇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CBC의 송유빈이다.

각 방송사 리포터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진심을 다해 외쳐주다니.

코쓱.

이 정도 반응이면 후원금은 얼마나 들어와 있을지가 점점 궁금해졌다.

핸드폰을 돌려주기 위해 고개를 들자 배이슬과 유연경이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배이슬이 입을 열었다.

"신기해서요. 보통은 자기 동영상이 올라가면 주구장창 지켜보고 있거든요. 조회수는 올랐는지, 댓글은 달렸는지, 댓글엔 무슨 내용이 달렸는지 반응이 궁금해서요."

"… 이번에 한국 가면 진짜 사려고요. 스마트폰."

"꼭 좀… 사세요. 꼭!"

내가 생각해도 유인원 수준이었다.

동영상에 관심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스마트폰이 없다니.

굳이 핑계를 대자면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일이 생겼었다.

아니지, 내가 일을 만든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 사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운전 중이던 유연경이 백미러를 통해 날 바라봤다.

"백운 님, 광산에서는 정말 감사했어요."

"맞아요, 한동안 연경 님이랑 백운 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머쓱해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사뭇 진지하게 재차 감사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

감사 인사와 함께 소소한 덕담을 주고받은 후 창가에서 쌩쌩 지나가는 배경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후지산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후지산으로 간다는 말에 태워주겠다 말한 유연경과 배이슬.

마침 막막하던 차라 일단 엉덩이를 밀어 넣고 봤다.

"아니에요, 저희 원래 경로에도 후지산이 있었거든요."

"맞아요! 조금 일찍 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끄덕.

원래도 편했지만 한층 더 편해진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여행이라 하면 동행이 있어야지, 암!

태어나 처음으로 동행과 함께 하는 후지산 행.

출발.

75화. 긴급 대피령

후지산 근처의 식당.

이… 이게 오마카세란 건가.

비싼 가격대에 인터넷으로만 봤던 식당이었다.

요리사가 마음대로 음식을 내는 고급진 곳.

- 사실 제가 엔화가 없어요.

차를 타고 오며 땡전 한 푼 없음을 고백했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고백이 끝나기 무섭게 걱정말라며 엄지를 치켜세운 유연경과 배이슬.

이제부터 나의 숙식을 모두 책임져주겠다는 고마운 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숙식 쩔 받기.

그 첫 번째 장소가 이곳 오마카세였다.

"처음부터 너무 잘 얻어먹네요."

"마음껏 드세요! 부족하면 다른 것도 더 사드릴게요."

의욕 넘치는 두 사람에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먹으라곤 하지만, 평소처럼 너무 개돼지처럼 먹진 않을 생각이었다.

"연경 님이랑 이슬 님은 유명하신가 봐요. 협찬까지 받으시고."

유연경과 배이슬이 일본에 온 이유는 관광이 아니었다.

일본 관광청에서 홍보를 위해 두 사람을 초대한 것이었다.

유명 관광지를 찍어 한국에서 홍보해달라는 내용.

"에이 아니에요. 적당한 가격의 게스트를 부른 거죠."

"저랑 이슬 님이 엄청 적당한 가격의 게스트거든요."

"그런 게 어딨어요. 두 분이 올리시는 영상이 재밌으니까 협찬도 오는 거죠."

말하기 무섭게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두 사람.

"백운 님, 저랑 이슬 님 영상 본 적 없죠?"

뜨끔.

내 거도 안 보는데 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라도 하지 말걸.

화제 전환을 위해 호다닥 음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너무 맛있네요."

그렇게 초밥을 우물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띠링.

유연경과 배이슬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어!"

"어? 취소오!?"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 메세지를 보더니 눈이 커다랗게 변하는 두 사람.

미간을 찌푸린 채 상세 내용을 읽은 유연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했던 돈은 모두 주되 일정이 취소되었으니 돌아가라니…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말했던 일본 관광청의 일정이 취소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돈은 주겠다니.

어떻게 보면 꽁돈이라 좋은 거지만 유연경과 배이슬은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시판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에요. 후지산이나 후지산 근처에 잡혔던 일정들이 전부 취소됐대요."

"근처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생긴 걸까요?"

후지산이라 하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 치곤 너무 조용한데.

앞에 있는 요리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를 으쓱 올리며 딱히 별일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딱히 기억나는 것도 없는데.

정말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사건이 아니라면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애초에 무능력자의 몸으로 한국을 나갈 생각조차 못 했던 시기라 다른 나라의 기사까지 챙겨보진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연락은 해봤는데 다른 분들도 모르겠다고 하시네요. 다들 일방적으로 문자를 받은 모양이에요."

"뭐 약속했던 돈은 정상적으로 지급해줬으니 다행이지만. 이상하네요."

꽁돈 벌었다 생각하자는 두 사람.

"여기까지 왔으니까 관광이라고 하고 가요. 백운 님은 돌아가는 비행기 예약하셨어요?"

"아뇨, 일이 다 끝나면 하려고요."

"그럼 다 돌아본 후에 같이 돌아가요!"

밝게 말하는 두 사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돌아다닐 때의 자유로움은 없었지만 동행이 있는 건 이거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었다.

냠.

알아보는 걸 멈추고 음식으로 손을 뻗는 배이슬.

배이슬이 우물거리던 초밥을 넘기고 나를 바라봤다.

"백운 님은 후지산에서 뭘 찾는다고 하셨죠?"

"네, 그게 뭔지는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지만요."

후지산으로 왜 가냐는 질문에 양피지에서 봤던 문장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 우와… 저희가 물어보긴 했지만, 그런 거 막 알려주셔도 돼요?

사실 보물지도였으면 안 알려줬다.

단지 날 훑고 문장을 띄웠던 양피지를 봤을 때 나를 위한 전용 어드바이스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순순히 알려준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올라가 보려고요."

딱히 다른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 방법이 없었다.

쪽지의 내용대로 후지산을 아래서부터 올라가 보고.

과연 사기 쪽지였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생각이었다.

"잘됐네요. 저희도 후지산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

그냥 오르면 되는 거 아니었나.

내 놀라는 모습을 봐서인지 유연경이 손을 내저었다.

"산 자체를 오르는데 비용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산에서는 언제든 데몬이 나타날 수 있다 보니 보호해줄 헌터를 고용하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다행이다.

나랑은 상관없는 비용이다.

"이거 또 의도치 않게 백운 님 덕을 보겠는데요?"

"제가 정상까지 잘 지켜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나도 올라가야 하는 길.

겸사겸사 데몬도 때려잡으며 가면 될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얼른 더 드세요! 백운 님!"

* * *

후지산 근처의 대책 본부.

"후지산 통제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진행 중입니다. 근처의 대외 일정은 모두 취소했고 가게들에도 조기 영업종료를 요청 중입니다."

료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판을 바라봤다.

S급 데몬 사로카는 후지산 안에 있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사로카가 어째서 가만히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가능한 한 근처의 인원들을 멀리 떨어지게 해야 했다.

"절대 사로카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선 안 됩니다. 패닉에 빠질 거예요."

은밀하게 후지산 주변의 일정을 취소하고 가게를 닫게 하는 이유였다.

S급 데몬, 또 다른 이름으로는 노네임드라 불리는 존재.

노네임드에 대한 공포는 정부나 헌터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과거 노네임드가 등장했던 곳마다 벌어졌던 처참한 학살극.

시민들 역시 그 학살극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로카가 후지산에 있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후지산을 벗어나기 위해 소란이 일어날 터였다. 

정부조차 통제하기 힘든 혼돈이 일어나는 것.

"일단은 외부 인원부터입니다."

근처의 주민을 대피시키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유입을 막는 것이었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주민보다 관광객의 수가 더 많은 지역.

관광으로 즐길 수 있는 걸 모두 닫아 관광객들이 찾지 않게 할 계획이었다.

'외부 인원들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진다.'

패닉을 걱정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정부가 사로카의 존재를 알고서도 곧바로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명 논란이 생길 터였다.

그 과정에서 후지산을 방문했던 관광객에 문제가 생긴다면?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

"1급, 2급 헌터들은 오고 있나요?"

"예… 오고는 있는데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오는 인원이 대부분이라서요."

료코는 사로카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마저 놓칠 순 없는 일.

끝을 내기 위해 최고위층의 까다로운 결재까지 받으며 1급 헌터를 불러들였다.

"최대한 조용히 주민들도 대피시키세요. 후지산에서 가까운 사람들부터입니다. 이유는 후지산의 화산 움직임 때문이라고 발표하시고요."

"알겠습니다."

료코의 명령을 받은 직원이 연락을 돌리려는 순간.

# 콰아아아아아!!

"!?"

후지산을 모니터링하던 화면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후지산의 정상 부분.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드론 가까이 붙여보세요!"

주변을 감시 중이던 드론이 정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먼지구름의 이유를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드론.

꿀꺽.

본부 내부의 모든 시선이 모니터로 향하고 있었다.

드론을 조종하고 있는 직원도 미세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 위이이잉.

먼지 속에서 카메라를 확대하는 드론.

아직까지 보이는 건 아무것도….

# 콰직!!

"!!"

순식간이었다.

먼지 속에서 적색 갑주를 둘러싼 주먹이 튀어나온 것은.

그대로 드론을 부순 건지 전송되던 화면이 끊어졌다.

"…."

무거운 정적이 깔린 본부.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책임자인 료코에게로 이동해갔다.

다른 헌터들이 올 때까지는 사로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사로카가 움직이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 내리세요."

"예?"

"후지산 인근에 긴급 대피령 내리세요."

* * *

"꺄악!"

고개를 들어 후지산의 정상을 바라봤다.

정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난 양의 먼지구름.

뭐야?

식사를 마친 뒤 산책이나 할 겸 후지산 주변을 걷고 있던 중.

서 있는 땅까지 흔들리는 걸로 보아 저 먼지구름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었다.

"무… 무슨 일이죠?"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거닐던 주민들도, 점점 닫아가는 가게에 실망하며 떠나려던 관광객들도.

모두가 같은 표정으로 후지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에에에에에엥----!!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가 재난에나 울린다고 하는 사이렌인데 그게 왜 지금 울리는 걸까.

부우우우웅!

잠시 후 새까맣게 칠해진 차량들이 속속 도착했다.

뭐지? 이 속도는.

대처가 빠르다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등장하고 있는 차량과 인원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띠링! 띠링!

동시에 사람들의 핸드폰도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후지산 인근 전체에 내려진 긴급 대피령 문자였다.

싸한데.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다는 것 자체가 위급한 상황이지만.

문자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는 게 싸한 느낌을 불러오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밝히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라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

콰아아앙 ---!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에 배이슬과 유연경이 날 바라봤다.

"백운 님, 일단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심상치가 않아요."

심상치 않은 수준이 아니라 불길했다.

먼지 때문에 보이진 않아도 분명 무언가 산을 두들기고 있는 소리였다.

한방 한방에 저런 먼지구름이 생길 정도라니.

단순 산사태면 차라리 괜찮았겠는데.

산사태가 저런 소리를 내며 먼지를 일으킬 리는 없었다.

다급하게 달려온 인원들도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저 차로 가요!"

대피를 돕고 있는 차량.

유연경과 배이슬을 차량 쪽으로 앞장세웠다.

[비전 수리검]

후우웅…!

소란스러운 틈을 타 두 사람 모르게 수리검을 후지산으로 던졌다.

"세 분이신가요!? 어서 타십시오."

일본 측 헌터로 보이는 인원이 배이슬과 유연경을 태운 뒤 나를 바라봤다.

"…?"

두 사람을 따라 타지 않는 날 의아하게 바라보는 헌터.

"배… 백운 님, 설마?"

유연경과 배이슬이 불안한 눈동자로 날 응시했다.

광산에서 한 번 봐서인지 내가 뭘 할지 본능으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씨익.

"연경 님, 이슬 님. 나중에 봬요."

"아…!"

무언가 말하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끝으로.

후지산 쪽, 시야가 닿는 곳에 꽂아놓은 수리검으로 눈을 돌렸다.

[비전]

76화. 참극

우르릉.

산을 두들기고 있는 녀석 때문일까.

발아래가 쉴새 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 백… 백운 님?

미친놈 바라보는 얼굴이었지.

배이슬과 유연경은 예상은 했지만 볼 때마다 엄청난 짓을 하시네요. 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었다.

인정이지.

산을 울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 덕에 당장에라도 산사태가 일어날 것 같은 후지산까지.

올바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냅다 후지산에서 도망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누가 안 도망가고 싶겠는가.

나도 가능하다면 확정된 위험에서 멀리멀리 떨어져 강 건너 불구경 하고 싶었다.

하지만,

- 후지산으로 가라.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쪽지의 문장.

누가 남긴 건지, 무슨 원리로 쪽지에 글씨가 쓰인 건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까지 사기 아닌가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잖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쪽지를 따라 후지산으로 왔는데 마침 이런 일이 생긴다?

정말 낮은 확률에 의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인연은 언제나 우연을 가장해 찾아온다.

내 본능은 우연의 일치보단 이쪽에 더 높은 베팅을 하고 있었다.

- 힘을 원한다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미친 듯이 무기를 모으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힘을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위험해 보인다고 포기한다?

말도 안 되지.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개미굴에서 유리병도 내팽개치고 위를 향해 달렸을 것이다.

우르르응!

조금만 더 있으면 쏟아지겠구만.

두들겨지고 있는 건 내가 달리고 있는 반대편.

지금 당장 내 쪽으로 눈이나 모래가 쏟아지진 않았지만.

발아래의 진동이 점점 강해지는 걸로 보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빙글.

정상에….

수리검을 최대한 하늘로 던지며 몸을 이동시켰다.

뭐가 있는 거냐!

* * *

장관 료코와 헌터들이 특수 차량에 올라 후지산을 달렸다.

슥.

앞좌석에 타고 있는 켄지가 백미러로 뒷좌석의 료코를 바라봤다.

'괜찮을까.'

- 제가 가겠습니다.

1급 헌터들의 도착 때까지만 기다리자는 말에 료코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사로카가 후지산을 두들기고 있는 상황.

후지산 아래에 사는 주민이 많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산사태가 일어나 대피 중인 사람들을 집어삼킬 터였다.

'장관님이 강한 건 모두가 알지만.'

료코 장관이 사로카를 담당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장관들 중에서도 강한 능력을 개방한 료코.

장관이 된 료코가 직접 현장으로 가 싸울 일은 적었지만, 그 전까지의 현장 경력이 워낙 화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의 마녀.'

료코는 눈을 다룰 수 있었다.

물론 눈이 없는 곳에서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만.

눈만 존재한다면 료코는 위협적인 위력을 뿜어내는 게 가능해졌다.

'현재 정상으로 향하고 있는 건 대다수가 3, 4급 헌터들.'

원래라면 듬직했을 전력이었다.

3급과 4급 헌터 개개인은 세계 어디에서도 제 몫을 할 수 있는 전력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켄지가 불안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로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후지산 전에 등장했던 곳에서 3급과 4급 헌터들을 장난감처럼 짓뭉개버렸던 데몬.

뭉개졌던 동료들의 시체를 본 이들이 지금 후지산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만큼 사로카를 만나기 전부터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죠?"

"잠시 후면 도착합니다. 얼마나 붙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료코가 입을 열었다.

"저희의 목적은 아래 주민들의 대피 시간을 버는 겁니다. 산사태는 제가 눈을 이용해 막을 수 있을 테니 너무 가까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하지만 료코를 끝까지 말릴 수 없었던 이유였다.

료코를 제외하고는 지금 쏟아지는 산사태를 막을 수 있는 인원이 없었다.

'그렇다고 장관이 직접 나서다니.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대참사였다.

이유는 어쨌든 장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데몬에게 당하는 순간 엄청난 동요가 일어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1급 헌터 도착은 얼마나 남았죠?"

"가장 가까이 있는 인원이 한 시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료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료코가 가장 걱정하는 건 산사태가 아니었다.

'폭발할 수도 있어.'

활동하고 있는 화산 중 하나인 후지산은 타이머가 멈춰있는 시한폭탄이었다.

일단 폭발했다 하면 대참사였기에 일본에서도 후지산에게 자극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던 상태.

그런 후지산을 저렇게 때려대고 있으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걸 노리는 건 아니겠지.'

사로카의 강함이 다른 차원 급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살인이라는 본능에 의해 움직일 뿐. 

생각에 의해 판단을 내리고 움직인다고 여기진 않았다.

'….'

그렇지 않길 바라야 했다.

그랬다가는 더 절망적일 듯하니 말이다.

우루루루!

"장관님,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료코가 차에서 내렸다.

차로 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여기서 산사태를 막도록 하죠. 나머지 인원은 경계 진영을 펼쳐 주세요."

"알겠습니다."

료코가 산사태가 내려오는 중앙으로 자리를 잡고.

나머지 인원들이 에너지 쉴드를 포함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료코는 1급 헌터들이 올 때까지 산사태를 막고, 나머지 인원은 그런 료코를 만약에 있을 위험으로부터 지키면 됐다.

척.

바닥에 손을 짚은 료코가 눈을 감았다.

사아아…!

료코 주변으로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한 시간만 버티면 된다.'

료코에게서 시작된 눈보라가 밀려오고 있는 산사태 쪽으로 날아들었다.

쿠드드득!

드드드…!

단단한 눈의 장벽에 막히자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 눈더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헌터들의 얼굴로 역시라는 표정이 지어졌다.

저런 거대한 산사태를 단신으로 막다니.

"반대편 쪽에 남은 사람은 없겠죠?"

능력을 유지하며 료코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능력을 펼쳐도 거대한 후지산 전체를 감당하는 건 불가능.

막을 수 있는 건 현재 방향 한쪽이 최대였다.

"예!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차량으로 이동 중입니다. 저희가 올라온 쪽이 메인 길이 있는 곳이라 아마 다 이쪽으로 이동해 있을 겁니다."

"대피 인원이 몰려 길에 병목이 생기긴 했지만 대피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료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만 지키면 대피에 문제는 없었다.

'한 시간은 버틸 수 있다.'

능력을 사용해 산사태를 막는데 아무런 리소스가 들어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처럼 아무 방해도 없다면 이 정도는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소모량이었다.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들려오던 굉음도 멈추었다.

더 이상 후지산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화산이 터질 일도 없으니 불행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전 인원 지금 포지션 그대로 유지합니다! 혹시 모르니 긴장 풀지 말…."

퍼엉!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료코의 능력으로 막아뒀던 산사태의 한쪽 면이 부서져 내렸다.

"쏟아진다! 대비해라!"

내려오는 눈의 양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문제는 눈이 진영으로 쏟아지며 시야가 가려졌다는 것.

'이런… 내 눈의 통제 범위 밖이야.'

눈 자체를 다루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주변의 모든 눈을 다루는 게 아닌, 처음 일으켰던 눈보라의 근처의 눈만 조종할 수 있었다.

"다들 괜찮나!"

"예! 문제없습니다!"

"방금 뭐였을까요!?"

료코가 눈을 찌푸리며 위를 바라봤다.

정상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돌덩이가 눈의 장막을 때린 걸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꿀꺽.

'침착하자.'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든 무의미했다.

사방이 눈으로 인해 온통 백색이 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쿠득!

"!?"

쾅!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쾅! 쾅! 쾅!

"각 분대 인원수 파… 꺽!"

'!?'

어째서 불길한 예상은 항상 들어 맞아버리는 걸까.

탕! 탕! 탕!

"이런 멍청한! 아무데나 쏘면 어떡… 끄악!"

푸욱!

"으아아!!"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부하들이 당하고 있었다.

꿀꺽.

사방은 시야가 막혀있었다.

'어디냐…!'

료코가 손을 짚은 채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손을 떼는 순간 산사태가 쏟아져 내릴 터.

지금 자리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쾅! 퍽!! 쩌억!

….

그렇게 얼마나 많은 타격음이 들려왔을까.

차단된 시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건지, 몇 명이나 당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잠시지만 고요함이 찾아왔다.

'어디냐… 사로카…!'

고요함을 틈타 주변을 살폈다.

최소한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야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잠시 후 료코가 입을 열려는 찰나.

푸확!!

후두둑.

"…!!"

료코의 얼굴로 아직 채 식지 않은 붉은 액체가 흩뿌려졌다.

끈적한 점도를 가지고 이마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누군가의 피.

쿵…. 쿵….

짚고 있는 손으로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피가 날아온 건 전방.

그리고 진동이 전해지는 방향도 앞이었다.

'… 있다.'

쿵. 쿵. 쿵.

점점 커져가는 울림에 료코의 심장이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었다.

수십 명의 헌터를 단신으로 도륙해버린 S급 데몬.

쿵…!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이 잦아들고.

료코의 앞으로 붉은 갑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덩치와 공허한 눈이 아니라면 사람에 가까운 체형을 가지고 있는 S급 데몬.

사로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절망이 료코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사로카의 등장 때문이 아니었다.

"쿨럭…!"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부하들 때문이었다.

참극.

이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건 기본이고 사지가 멀쩡히 붙어있는 인원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크르으…!

사로카는 나지막한 울음만을 흘릴 뿐 더 이상 다가오진 않고 있었다.

마치 곧 다가올 죽음을 천천히 음미하라는 배려 같았다.

'한 시간은커녕.'

료코의 눈가로 씁쓸함이 번졌다.

'이십 분도 못 버텼구나.'

이쯤 되니 널브러져 있는 부하들에게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의 희생을 치르며 얻어낸 이십 분은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걸까?

'뒤에 있는 대피 행렬에겐 의미 있는 시간이었길.'

스으으.

료코에게 주어졌던 배려의 시간이 끝난 것 같았다.

료코를 향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리는 사로카.

단순하게 팔을 휘두르려는 동작이지만, 저 단순한 동작에 헌터들의 팔다리가 터져나갔다.

스륵.

눈을 감은 료코가 죽음을 기다렸다.

일 초라도 더 늦추기 위해 능력은 해제하지 않은 채였다.

후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앙!!

엄청난 마찰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소리.

'…?'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료코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

뭐에 맞은 건지 뒤까지 밀려나 있는 사로카.

그런 사로카를 대적하고 있는 건 거대한 수리검을 든 남자였다.

77화. 붉은 갑주의 사로카

얘가 왜 여기에 있지.

급박한 상황에 일단 수리검을 내던진 후 비전을 통해 이동해왔다.

그런 내 앞에 등장한 적색 갑주의 데몬.

"크르르."

내가 놀란 건 녀석이 무서운 소리를 내서는 아니었다.

나보다 두 배는 큰 크기에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붉은 갑주를 입고 있어서도 아니… 이건 좀 상관이 있는 거 같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여기서 또 아는 얼굴을 만나네.

내가 놀란 이유였다.

아는 얼굴이어서.

붉은 바리.

눈앞에 있는 붉은 갑주 놈은 회귀 전에 직접은 아니지만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아마 시기상으로는 몇 년 뒤였던 것 같다.

뉴스에 붉은 갑주의 데몬으로 대서특필 되며 새로운 노네임드의 등장이라고 보도되었던 데몬.

분명 몇 년 전인데도 이놈이 여기에 있다는 건.

고개를 돌려 학살당해 널브러져 있는 일본 측 헌터들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후지산 아래에서의 반응도 그렇고 분명 이들은 붉은 바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것이었다.

"앞에 있는 놈, 뭔가요?"

내 물음에 멍 때리고 있던 여자가 정신을 차렸다.

붉은 바리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여자가 최대한의 목소리를 냈다.

"도… 도망치세요. 앞에 있는 건, 사로카. S급 데몬입니다!"

사로카…?

역시 알고 있네.

S급 데몬에 회귀 전 한국에서 불렸던 이름이 아닌 사로카라는 이름이 이미 붙어있는 걸 보니 확실해졌다.

일본은 이미 사로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잠자코 있었던 건가.

내 사는 게 바빴다 보니 딱히 다른 나라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런 걸 보면 조금씩 정이 떨어지려고 한다.

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던 사로카.

한국에서는 어디선가 이동해온 흔적이 있던 사로카를 오랜 시간 추적했었다. 

결국엔 실패했지만 말이다.

쯧…. 뭐, 조용히 있는 게 현명하긴 하지.

잘못한 게 없는데도 침묵했다는 거 자체에 불똥이 튈 테니까.

"일단 일어나시죠. 자리부터 피하게."

눈은 사로카에 고정시킨 채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일본이 괘씸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을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저는 일본의 데몬 대응 본부 장관, 니시다 료코입니다. 지금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

료코가 짚고 있는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선을 따라가자 눈에 의해 멈춰있는 산사태가 보였다.

"그럼…!?"

"크르!"

쾅!

와씨.

더 이상 못 기다려주겠는지 주먹을 한 방 날린 사로카.

수리검을 휘둘러 막아냈는데도 몸이 료코가 있는 뒤까지 쭉 밀렸다.

"이 아래는 대피 행렬이 있는 도로가 있습니다. 산사태가 이대로 내려가면 대참사에요."

"!"

반대편 아래에서 차에 탑승했던 유연경과 배이슬.

이미 난리가 난 이후였기에 그 둘 역시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이 아래에 갇혀 있을 터.

"지원은 있나요?"

"1급 헌터가 오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30분 정도고요."

30분이라.

호흡을 가다듬으며 앞에 있는 사로카를 응시했다.

그리 막막한 싸움은 아니었다.

30분만 버티면 일본의 1급이 오니 최악의 상황에도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싸움이다.

"일단 제가 시간을 좀 끌어보겠습니다."

"!!"

무리라고 생각해서일까.

료코의 얼굴로 갈등 어린 표정이 나타났다.

S급 데몬을 상대로 싸우면서 시간을 끌겠다는 무모한 선택.

도망치라고 하는 게 옳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죽으며 산사태를 막을 수 없게 된다.

닥친 현실 때문에 또 다른 현실을 무시해야 하는 상황.

끄덕.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료코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버텨 주세요. 산사태를 다른 곳으로 처리하고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산사태를 처리하다니. 

아까부터 느꼈지만 료코는 강한 자연계의 능력자였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리 범위에 특화된 능력이라 해도 단신으로 자연재해를 막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사로카를 봤다.

되려나.

탓!

사로카가 움직이기 전, 먼저 발을 뻗어 달리기 시작했다.

굳이 료코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꿀꺽.

조금씩 가까워지는 사로카를 보니 마른침이 삼켜졌다.

처음 만나는 공식 S급 데몬.

국가직 1급이나 2급, 혹은 기업의 정상급 헌터가 아니라면 대적조차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존재였다.

빙글.

달려나감과 동시에 몸에 한 바퀴 회전을 주었다.

피렌조처럼 빠르진 않다.

관절을 꺾어대며 불가능한 방향으로 칼을 찔러 넣었던 피렌조.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속도 하나 만큼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사로카는 오히려 파워형.

수리검으로 제대로 막았음에도 뒤까지 밀려났었다.

면도칼도 안 통하겠지만.

저 붉은 갑주 때문에 상성 자체는 안 좋지만.

어떻게든.

후우웅…!

되게 해본다.

쾅!!

* * *

도쿄의 한 대학병원.

온몸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간신히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말 끔찍하게 당했어. 온몸에 성한 뼈가 하나도 없다니."

누워있는 건 일본의 국가직 3급 헌터, 요시다.

S급 데몬 사로카와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헌터였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에요."

"그렇지."

'얼마 버티진 못하겠지만.'

의사 모타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상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모든 조치를 취했지만 아마 오늘을 넘기진 못할 터.

'대체 뭐랑 싸운 걸까.'

간호사의 질문에 모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친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던 국가 요원들.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모타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국가와 관련된 기밀사항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았기 때문이다.

'여러 대를 맞은 것도 아니었어. 단 한 방이다.'

모타가 가장 놀랐던 부분이다.

요시다의 골반으로 가해진 단 한 번의 충격.

그 충격 한 번 때문에 요시다의 몸 전체가 아작이 나버렸다.

'트럭 같은 거에 받혔다고 보기엔 타격 지점이 너무 좁아.'

데미지는 트럭 수준이었지만 그랬다면 타격 범위가 달랐을 것이다.

'만약 요시다를 저렇게 만든 게 데몬이라면.'

어떤 급을 매겨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치유에 관련된 능력을 개방해 한 번도 데몬과 싸워보진 못한 모타였지만.

그래도 오랜 의사 경력으로 데몬의 강함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S급… 인가.'

삐---! 삐---!

"!!"

간신히 숨은 붙어있지만 의식이 없었던 요시다.

정신을 차린 건지 요시다의 심장 박동수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진정제 가져와!"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린 모타가 요시다에게 다가갔다.

움직이면 끔찍하게 고통스러울 텐데도 고개를 계속해서 움직여대는 요시다.

"…!?"

요시다의 눈이 모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산소호흡기 너머로 약간씩 움직이고 있는 요시다의 입.

스윽.

그래선 안 되지만.

너무나도 필사적인 요시다의 모습에 모타가 산소호흡기를 잠시 떼어냈다.

"말…."

'말?'

"잘 안 들립니다!"

모타의 되물음에 요시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뱉어냈다.

"말을… 했… 다."

삐--------------!

숨이 끊어진 요시다를 내려다보는 모타.

마른침을 삼킨 모타가 요시다가 했던 말을 다시 되뇌어보았다.

"말을 했다고…?"

* * *

쾅! 쾅! 쾅!

몸의 회전력을 잃지 않도록 계속해서 수리검을 휘둘러나갔다.

갑주가 있어도 그냥 몸으로 받아내기엔 무리라고 생각한 건지 사로카도 가드를 세운 채 방어를 하고 있었다.

거 더럽게 단단하네!

때리고 있으면서도 혀가 내둘러지는 단단함이었다.

몇 키론지 재본 적은 없지만, 맨바닥에 던지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수리검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런 수리검을 몇 방이나 맞았는데도 박살나기는커녕 구겨지지조차 않는 갑주.

후웅.

!!

얼굴 옆으로 사로카의 주먹이 뻗어졌다.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온몸으로 주먹의 기압이 느껴졌다.

계속 가드를 올린 채 방어만 하고 있다고 방심할 수 없는 이유였다.

제대로 맞으면 바로 골로 간다.

삭.

자세를 바짝 낮추며 다시 한번 몸에 회전을 줬다.

사로카는 주먹을 뻗으며 가드가 풀려있었다.

금이라도 좀 가라.

그대로 회전시킨 수리검을 사로카의 복부로 꽂아 넣었다.

쿠우웅!!

이번에도 갑주는 부서지지 않았지만,

"크르으…!!"

데미지는 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몸을 굽히며 신음을 뱉어내는 사로카.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건가.

사로카의 뒤로 후지산의 분화구가 보였다.

최대한 료코와 떨어뜨려 놓기 위해 수리검으로 이동하며 싸운 탓이었다.

그나저나… 개무섭네.

관심을 받는 건 참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수리검으로 비전할 때마다 바짝 붙어 쫓아오던 사로카는 밤에 봤으면 그대로 지려버렸을 정도로 무서웠다.

저 미친 방어력도 그렇고.

갑주로 인한 방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면도칼과 스이카로는 뚫는 게 불가능한 단단함.

수리검과 비늘, 리볼버 정도만이 갑주를 상대로 유효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한 방만 제대로 맞아도 골로 갈 거 같은 묵직함까지.

스펙만 보면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싸울만하다.

공격은 묵직하지만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속도였다.

그렇다보니 피렌조 때처럼 전투 자체가 긴박하지도 않은 상태.

나도 속도는 줄었지만.

5미터 거구의 사로카나 무거운 수리검을 들고 있는 나나 둘 다 속도가 느리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건 나였다.

한 박자나마 사로카보다 먼저 반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후우.

다 쫓아왔다 생각한 건지 멈춰있는 사로카를 응시했다.

수리검으로 상대하면서 틈을 노리고 유탈라스의 비늘로 끝을 낸다.

산도 부쉈던 비늘이다.

사로카의 갑주라고 무적은 아닐 터.

분명 부서질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파고들기 위해 몸을 낮췄다.

사아아…!

!?

그 순간,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오한이 밀려왔다.

잠시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오한이었다.

뭔가 달라졌다.

앞에 있는 건 조금 전과 동일한 사로카인데 어째서일까.

한순간에 다른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드드득.

괴기한 소리와 함께 사로카의 갑주에 변화가 일어났다.

맨들맨들 했던 표면이 돌기처럼 일어나기 시작한 것.

"크르… 크…!"

!?

오한이 귀까지 이상하게 만든 걸까.

조금 전 사로카가 낸 소리가 비웃음으로 들려왔다.

정신 차리자.

사로카가 뭘 하든 다 할 때까지 기다려줄 필요는 없었다.

어떤 게 변한지는 몰라도 내가 해야 할 행동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휘이…!

몸에 회전을 주며 수리검에 무게를 실었다.

아직 사로카와의 거리는 충분한 상태.

한 바퀴 더 회전을 먹인 뒤에 던진….

화악!

!!!!

분명 충분한 거리가 있었다.

어떻게…?

있었을 터인데.

사로카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78화. DOWN

쐐엑!

귓불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로카의 주먹.

뭐… 뭐냐.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한 번의 공격 후 다시 멈춰 서 있는 사로카.

끈적.

귓가로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오른손에 들려있는 면도칼을 내려다봤다.

사로카와 얼굴을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면도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사로카의 주먹에 얼굴이 날아갈 뻔했다.

숨기고 있던 건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로카를 살폈다.

갑주의 생김새만 변한 게 아니었다.

이동을 포함한 모든 움직임의 속도가 월등히 올라갔다.

피렌조 만큼은 아니지만… 위험하다.

지금은 피가 없어 잭 더 리퍼와의 동기화도 불가능한 상황.

사로카의 파워에 더해 빨라진 속도는 피렌조 때보다 훨씬 더 큰 위험으로 느껴졌다.

저벅.

한껏 여유를 부리던 사로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몹시나 여유로운 걸음걸이.

이 정도 속도로 가도 충분히 널 죽일 수 있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크르… 으!!"

쿠웅!

여유롭게 걷던 사로카가 순식간에 앞까지 쇄도해왔다.

!!

이번에는 죽이겠다는 생각일까.

쐑! 쐑! 팡!

쉴새 없이 사로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한 방 한 방이 엄청난 바람 소리를 내며 휘둘러지는 치명타였다.

혹시 모르니까…!

스륵… 카앙!

아니나 다를까.

틈을 이용해 휘두른 면도칼이 갑주에 튕겨 나왔다.

돌기 형태로 바뀌며 방어력은 내려가길 바랐는데.

지금 손으로 전해진 느낌으로 봐선 면도칼로 사로카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팡! 팡! 팡! 팡!

사로카의 주먹이 도착하는 곳에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파워가 세면 공기와 마주치며 저런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까.

집중하자.

계속해서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사로카의 동작을 살폈다.

사로카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건 유탈라스의 비늘 뿐이었디.

리스크가 있다면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그 뒤로는 쿨타임에 걸려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무조건 맞춰야 한다.

속도와 파워는 강력하지만 사로카의 공격은 단순했다.

특수한 기술이나 변칙적인 공격 없이 피지컬에 의존한 공격.

지금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지만.

팡!

방심은 금물이다.

더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 때려야 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휘두르기엔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스윽.

곁눈질로 오른쪽에 있는 분화구를 바라봤다.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지만 떨어지면 어느 정도의 체공 시간은 보장될 것 같았다.

사로카는 날지 못한다.

몸이 뜨는 순간 날지 못하는 사로카는 피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조금 더 명확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좋을 텐데.

공격을 피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더 마지막 공격의 성공 확률을 높이고 싶었다.

부릉!

…!

그때 도착한 차량 한 대.

차에서 내린 건 밑에 있던 료코였다.

"산사태는 처리했습니다!"

말과 동시에 바닥으로 손을 짚는 료코.

료코의 손을 시작으로 눈보라가 일어나 사로카와 내 사이로 날아들었다.

드득…!

"크르…!!"

팔꿈치부터 엉겨 붙기 시작한 눈 때문일까.

사로카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지금이다.

일단은….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도발.

사로카가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이.

두두두두두두---!!

리볼버를 쏟아부었다.

뚫리면 베스트.

뚫리지 않더라도 도발의 효과는 있을 테니 상관없다.

콰가가아아아!!

단거리에서 쏟아져서일까.

부딪힌 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로카도 그냥 견디는 건 불가능한지 몸을 웅크리고 탄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료코 님! 눈으로 저놈 얼리는 게 가능한가요!?"

"완벽히 얼릴 수 있을진 모르지만… 시간만 주어진다면 가능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은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상황.

최소한 리볼버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여유가 생겼다.

생각하자.

날지 못하는 사로카와 적을 얼릴 수 있는 료코의 눈.

그리고 맞출 수만 있다면 한 번에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내 비늘까지.

"제가 신호하면 저놈을 얼려주세요!"

"방법이… 있는 건가요?"

방아쇠를 당기며 입을 열었다.

"저놈은 날지 못합니다! 공중으로 끌어내서 싸움을 끝낼 거예요!"

"!!"

"끝낼 수 있는 공격이 있으니까 걱정말고 못 움직이게만 얼려주세요!"

"알겠습니다!"

행운이다.

매일 재수 없는 상황만 터지더니 오늘은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줄 원군이 생겼다.

그것도 싸움에 큰 도움이 되는 원군이 말이다.

콰가아!

리볼버가 시간을 다 하고 사라졌다.

[비전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들고 앞을 살폈다.

사로카와 작열탄의 충돌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상태.

"크… 르…!!!"

사로카의 분노한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작열탄으론 못 뚫은 건가.

연기가 걷히자 드러나는 사로카의 모습.

뚫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타격은 받은 것 같았다.

새빨갛게 달아올라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갑주.

집중적으로 탄을 맞아서인지 갑주의 한쪽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저기로 꽂아야겠네.

"준비 됐습니다!"

료코의 외침이 들려왔다.

"크라아!"

동시에 사로카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날 죽이고 싶어 완전히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후웅!

분화구 쪽으로 수리검을 던진 뒤.

따라와라.

사로카가 내게 도달하기 직전,

[비전]

분화구의 허공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따라와.

혹시나 료코 쪽으로 간다면 작전은 실패다.

늦지 않게 수리검으로 료코에게 가 일단 피하고 봐야 했다.

파앙!

하지만, 눈이 돌아간 게 확실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뛰어드는 사로카.

이로써 사로카도 허공에 떠오르게 되었다.

갑주가 달궈져서인지 아직 좀 거리가 있는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닿기만 해도 최소 화상이겠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로코와 내가 분화구의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

"크라아!!"

위에서 나를 향해 추락하는 놈을 보고 있으니 오금이 저려왔다.

슥.

수리검을 뒤로 젖힌 후 사로카의 위쪽으로 내던졌다.

쐐엑!

사로카의 옆을 지나 위까지 나아간 수리검.

날 향해 날아들고 있는 사로카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공수교대다, 이 새끼야."

[비전]

* * *

"크르…!?"

위아래가 뒤바뀌자 사로카가 하늘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학습 능력이 없구만.

수리검 비전으로 그렇게 이동하는 걸 봤으면서도.

눈이 돌아가 달려드는데 급급한 모양새였다.

"지금이에요!"

료코를 향해 소리지르자 엄청난 양의 눈이 분화구로 날아들었다.

스치고 지나가는 것뿐인데도 몸이 떨려올 정도의 한기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일반적인 눈이 아니구만.

쏴아아아---!

달궈져 있던 사로카를 뒤덮어가는 료코의 눈.

높은 온도에 눈이 기화하며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생겨났다.

"크… 크르…!"

달궈진 온도 덕에 잠시동안은 사로카가 눈을 이겨내는 듯했지만.

그것만으로 떨쳐내기엔 눈의 양이 엄청났다.

드드…드… 득!

조금씩이지만 사로카의 몸을 완전히 제압해나가는 료코의 눈.

드득.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사로카의 움직임이 완벽히 멈춰졌다.

"됐습니다! 완전히 얼었어요!"

조종하는 눈을 통해 적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지 료코가 됐다며 소리를 질렀다.

100%.

확신이 들었다.

완벽히 얼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추락하고 있는 사로카.

[유탈라스 - 2단계 의태]

사아아아---!

눈부신 푸른 비늘이 오른손으로 모여갔다.

오른팔로 집중되는 엄청난 힘.

이거면 된다.

몸을 감싼 채 일렁이는 비늘과 함께 사로카에게 나아갔다.

눈으로 꽁꽁 덮여있는 사로카.

녀석을 향해 젖혔던 주먹을 최대한의 힘으로 내질렀다.

끝이다.

콰아아아아아---!

비늘로 덮인 주먹이 사로카를 향해 날아갔다.

드득.

사로카는 이대로 비늘에 맞고 산산조각날 거라 확신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

파아아앙!!!

주먹이 도달하기 직전.

사로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부수고 나왔다.

"크르… 단순… 하구… 나"

!!!

완벽히 잡았다고 생각한 채 모든 걸 담아 내지른 공격이었다.

사로카는 얼어있기에 피할 거라는 가능성은 염두해두지 않은, 피해선 안 됐기에 그럴 가능성이 존재했으면 안 되는 공격.

그런 공격을 사로카가 공중에서 몸을 틀며 찰나의 차이로 비껴냈다.

파아아아앙!!

유탈라스의 주먹과 공기가 만나며 찢어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 런.

완전히 피해낸 건 아니었다.

스친 것만으로도 갑주로 쌓여있던 왼팔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끌어들인 줄 알았는데.

주먹을 휘두르느라 몸의 균형은 밑으로 쏠려있었고.

수리검을 다시 꺼내 던져낼 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땅을 딛고 있지도 않기에 면도칼을 꺼내 회피할 수도 없었다.

휘릭.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회전시키는 사로카가 눈에 들어왔다.

끌려 들어온 거였나.

쐐에에에에엑---!!

회전력까지 먹어 엄청난 힘을 싣고 옆구리로 날아드는 사로카의 발차기.

조졌… 네.

콰아아아아앙----!!!

"크학…!"

쿵!!!

그대로 분화구의 아래 벽면으로 처박혀버렸다.

온몸으로 끔찍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유탈라스가 해제되던 타이밍이라 비늘이 완벽히 방어해주지 못한 것 같았다.

"쿨럭!"

목을 타고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쿠웅!

분화구의 바닥으로 착지한 사로카.

쿵.

사로카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움직여라.

삐걱거리는 몸에 명령을 전달했다.

움직일 때마다 마디마디가 뒤틀리는 느낌이었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잭 더 리퍼]

호흡조차 멀쩡하지 않은 상황.

면도칼을 꺼내 움직일 준비를 했다.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쐐에엑!! 쾅!!

!!

하늘에서 거대한 비석이 떨어져 내렸다.

"크르…!?"

갑작스러운 비석의 등장에 걸음을 멈춘 채 하늘로 눈을 돌린 사로카.

1급 헌터인가.

온다고 했던 일본 측의 헌터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스윽.

하늘을 바라봤던 사로카가 다시 내게로 눈을 돌렸다.

더 이상 다가오진 않았지만, 하등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나약… 하구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콰앙! 콰앙! 콰앙!

계속해서 내리꽂히는 비석을 뒤로 한 채 사로카가 땅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

"----!"

나를 향해 무언가 소리 지르고 있는 몇 명의 사람들.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왔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살아서 다행이다?

분명 늦지 않게 도착한 헌터들 덕에 목숨을 구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행이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현재의 상황에 무력감이 밀려왔다.

핑.

누적된 데미지 때문일까.

사로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시야가 조금씩 땅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이에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패배.

79화. 특이 케이스

CBC의 방송 데스크.

송유빈이 밝은 얼굴로 게스트를 소개했다.

"오늘은 국가직 2급 헌터이면서 동시에 신입 헌터들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이명훈 헌터 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명훈입니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우람한 체격을 가진 이명훈이 고개를 숙였다.

주에 한 번씩 송유빈이 진행하는 헌터 관련 프로그램.

오늘은 격투와 헌터들의 양성에 조예가 깊은 이명훈이 초대되었다.

"안녕하세요, 명훈 님. 지금까지 수많은 신입 헌터들을 키워내셨는데요. 제자였던 헌터들이 싸움에 훌륭히 임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그야 정말 자랑스럽죠.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햇병아리처럼 삐약거리던 녀석들이. 지금은 여러 현장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고 있으니까요."

"국가직 사관학교 출신의 헌터분들은 가장 무서웠던 교관으로 명훈 님을 뽑는데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턱을 문지르는 이명훈.

잠시 후 이명훈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마 제일 많이 때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때… 때린다고요?"

놀라는 송유빈에 이명훈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물론 훈련에서입니다. 제가 격투 담당이니까요."

그제야 아아 하는 얼굴로 송유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이 때리게 되겠군요! 훈련을 실전처럼 한다고 들었었는데 그래서 더 혹독하게 하시는 걸까요?"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명훈이 말을 이어나갔다.

"실전처럼 훈련하지 않으면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몸이 굳기 마련이니까요. 공포가 몸을 잡아먹더라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몸에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 깊은 이유가 있었군요! 훈련을 실전처럼!"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조금 전보다 사뭇 진지해진 이명훈의 모습.

송유빈이 긴장한 얼굴로 이명훈의 입을 응시했다.

"패배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패배… 를요?"

첫 번째 이유와 달리 두 번째 이유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승리만을 각인 시켜줘도 모자랄 판에 패배라니.

"내가 질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마주했을 때 함께 밀려오는 공포와 무력감. 이것들을 이겨내는 게 헌터들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명훈이 몇 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승승장구하던 헌터들도 단 한 번의 패배에 멘탈이 나가 다시는 싸울 수 없게 되는 케이스가 많다는 설명이었다.

"몇 번의 승리는 정말 달콤합니다. 누구와 싸우든 절대 지지 않을 거란 착각을 불러오거든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오는 패배가 위험합니다. 운이 좋게 살아남았는데도 정신이 죽어 다시는 못 싸우게 되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던 송유빈이 몇 가지 통계 자료를 본 뒤 질문을 건넸다.

"각종 영상 사이트를 보면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사라진 프리랜서 헌터들이 많은데요. 이것도 말씀하신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어디선가 죽임 당한 게 아니라면, 대부분이 동일한 이유일 거라 생각합니다. 처음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자신에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겪어온 승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충격은 더 크게 다가오니까요."

꿀꺽.

머릿속으로 어느덧 팬이 되어버린 무기왕을 떠올려서일까.

'마운티거 이후로 무기왕이 잠잠한데.'

설마…? 라는 생각 때문인지 괜히 긴장되는 마음.

송유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멘탈이 나간다는 건, 다시 못 싸우게 된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명훈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완전히 무너지는 겁니다. 다시는 데몬을 마주할 수도,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조차 완전히 사라진 채로요."

* * *

입을 안 연지 얼마나 됐을까.

입안으로 지독한 단내가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건 이송 되어온 병원의 흰색 천장뿐이었다.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끼익.

문이 열리며 들어온 몇 명의 사람들.

"아직도… 인가요?"

료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후 가장 많이 찾아온 사람이었다.

좀 미안하네.

료코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웠다.

사로카와 싸울 때 근처에서 날 도와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예, 몸에 큰 이상은 없는데…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 혹시 몸이 아니라 다른 곳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나요?"

"예…. 그 사로카와 맞서 싸우다 죽기 직전까지 갔었으니까요. 충격이 컸다면… 못 깨어나거나, 깨어나더라도 폐인인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니에요, 선생님.

전 멀쩡합니다.

너무 멀리 가는 건가 싶어 눈을 떠볼까도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끼익.

그렇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 나누다 방을 나가는 료코와 담당의.

죽기 직전까지라.

분화구 안에서의 싸움을 떠올렸다.

비늘이 사라지고 몸은 충격 때문에 삐걱거렸었다.

제때 헌터들이 안 왔으면 죽었겠지.

료코가 말했던 1급 헌터들이 도착했고.

그들이 분화구에 있는 사로카를 공격해 물러나게 만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사로카로부터 살아남았을 확률은 희박했다.

아무리 동기화를 가능했다 한들 안 썰리던 갑주를 벨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몸 상태 역시 최악이었었다.

전해진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을 리 만무했다.

산 게… 다행이구만.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심하네.

함정으로 빠트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빠진 거였다니.

생각도 못 했다.

사로카가 말을 할 줄은.

그것도 모르고 바로 앞에서 료코한테 계획을 떠들어댔으니.

사로카에게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알려준 셈이었다.

그리고, 직전에 페샨을 만났었음에도 사로카가 말을 할 거라 단정 지어버린 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 그저 수많은 종족 중 하나일 뿐이당.

수많은 종족 중 하나.

사로카도 페샨과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살의만을 가지고 살육을 저지르는 괴물… 이라고 생각해서인가.

페샨을 본 이후 어떤 데몬이든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사로카를 포함해 지금까지 본 데몬들은 예외일 거라 생각했다.

정확히는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괴물 같은 놈들이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걸 왠지 모르게 인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스윽.

천장으로 든 손을 바라봤다.

패배.

무척이나 낯설 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든 내게 닥칠 수 있는 거였는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지금까지 다 이겨서 그런가.

하운드를 시작으로 크럭커와 괴물 거북이, 마운티거, 거기에 피렌조까지.

간사이 지방에서 유명하다던 나카지까지 발도 두 방에 보내버렸다.

- S급 데몬, 사로카입니다.

그래서인지 후지산에서 료코의 말을 들었을 때도 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일단 부딪히면 어떻게 해서든 내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기고만장했네.

회귀 전에 S급 데몬의 뉴스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었었다.

눈앞에 저런 게 나타난다면 무조건 죽음 확정이니까 말이다.

그랬었는데 고작 10번도 안 되는 싸움 이겼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승리했을 때도 억지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당장 피렌조만 봐도 그렇다.

만약 그 순간에 잭 더 리퍼의 동기화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미 목을 베였던 내가 피렌조와 다시 싸울 수나 있었을까?

싸우긴 뭘 싸워 그냥 죽었겠지.

피렌조 때는 진짜 운빨이었다.

침통한 깨달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새삼스럽게 무기들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 패배는 무기의 성능 차이가 아니었다.

무기를 사용하는 주인이 문제라 진 것이었다.

무기는 사용하는 건데.

사용하는 인간이 이 모양이니.

- 얼른 일어나세요, 백운 님!

- 같이 돌아가요!

몇 시간 전 찾아왔던 유연경과 배이슬.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지긴 했어도 내가 싸운 게 조금이라도 대피에 도움이 됐을 테니까 말이다.

"풉."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사로카와 싸우며 얼마나 뒤에 있는 대피 행렬을 걱정했다고.

개박살 난 뒤에야 그거나마 도움이 됐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걸까.

"추하구만, 백운."

지금 상태로 사로카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조금 더 신중히 유탈라스의 비늘을 맞췄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

아니다.

잘못된 건 조금 덜 신중하고 말고의 차이가 아니다.

내가 한 건 도박이야.

애초에 사로카와 했던 건 싸움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파워와 방어력이 나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던 사로카.

사로카보다 내가 뛰어났던 건 약간의 속도와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비늘이 있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모든 전력이 내가 열세 했는데도 이 비늘 한 방에 의지하는 건 싸움보단 도박에 가까웠다.

물론 도박이 필요한 싸움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의 싸움이 성사되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시작부터 도박에만 목매달고 싸움을 시작한 건 잘못된 것이었고.

도박밖에 없는 주제 질 거라는 생각도 없이 오만했던 건 더더욱 잘못되었다.

….

싸우는 법도 모르고… 싸운 건가.

가장 뛰어나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잭 더 리퍼의 면도칼.

면도칼을 들고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면도칼로 인해 향상된 감각과 본능, 스피드에만 의지했을 뿐.

정작 나는 전투의 경험은 고사하고 싸우는 방법조차 제대로 몰랐다.

대충 휘두르고 쏘기만 했었네.

그렇게만 해도 다 이겼었으니 다행이지만.

사로카나 피렌조 같은 상대를 한 번 더 만난다면.

그때는 살아남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

짜아악!!

볼따구가 얼얼할 정도로 양 뺨을 두들겼다.

그만 찌질대자.

찌질댄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스륵.

감았던 눈을 떴다.

잘못된 건.

휙휙.

잠시 몸 여기저기를 살펴본 후.

바로 잡으면 되는 법.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다시 CBC의 데스크.

완전히 무너진다는 이명훈의 말에 송유빈과 방청석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절망적인 말이었다.

단 한 번의 패배만으로 지금까지 승리를 이어왔던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버린다니.

"혹시."

데스크에 분위기 전환이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송유빈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무너진 후 다시 일어선 케이스는 없나요?"

무기왕이 무너졌을 거라 생각해서는 아니었지만.

만약에, 만약에 무기왕이 무너졌을 때 정말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란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런 케이스는 없습니다."

"아…."

자기가 왜 이러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송유빈이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송유빈을 잠시 쳐다보더니 입을 여는 이명훈.

"특이 케이스가 있습니다."

"특이 케이스요?"

누군가를 떠올린 건지 이명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무너지는 걸 모르는 인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송유빈의 얼굴에 이명훈이 말을 이어갔다.

"인간이라고 좀 강하게 표현한 이유는, 징글징글하거든요. 아무리 넘어뜨리고 떨어뜨려도 좌절하긴커녕 다시 기어 올라오니까요. 그런 인간들은 죽음의 위기를 겪든, 누군가에게 처참히 개박살이 나든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를 막아 세운 벽을 어떻게 하면 넘을 수 있을지 고뇌하며 계속 부딪힐 뿐이죠."

"!"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라면 어떤…?"

꼴깍.

송유빈이 이유 모를 긴장감에 침을 넘기고.

틀림없는 진리를 말하는 듯 이명훈이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제냐의 문제일 뿐… 무조건 괴물이 된다는 겁니다."

80화. 빨리 한국으로

달달달달달.

"배… 백운 님, 어디 안 좋으세요?"

일본 도쿄에 있는 한 병실.

유연경과 배이슬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정확히는 쉴새 없이 떨리고 있는 내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손으로 다리를 꾹 눌렀다.

잠깐 한눈을 판다 싶으면 달달달 떨리는 다리.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급증에 걸린 것 같았다.

빨리 한국으로 가야 되는데.

아직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조금만 움직여도 끔찍한 고통이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퇴원을 요구한 이유는 단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빨리 쎄져야 하는데!

리카르도에게 받은 쪽지는 후지산을 가리키고 있는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느냐?

간단했다.

사로카에 줘터진 후 쪽지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 후지산으로 가라.

쪽지는 힘을 얻고 싶다면 후지산으로 가라고 했었다.

처음엔 내용을 보고 후지산에 무기나 그에 대한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후지산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사로카였다.

그리고,

사로카를 만난지 한 시간도 안 되어 개박살 나버리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였다.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패배.

갑작스럽게 만났다곤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전력 차이에서 온 완벽한 패배였다.

쪽지가 말하는 건 후지산에 무언가를 숨겨놨다는 게 아니야.

억측일 수도 있었다.

쪽지는 그냥 아무 말이나 써놓은 것 뿐이고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걸 수도 있지만.

만약 쪽지가 거짓이 아니라면.

쪽지가 원했던 건 내가 후지산으로 가 사로카에게 박살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계속해서 이겨오며 대충 무기만 열심히 모으면 지는 일 따위는 없겠지란 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사로카를 만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지속됐을지 모르는 이런 오만을 쪽지가 부숴주었다. 

지면서 바로 죽을 수도 있던 걸 쪽지가 미리 지게 해서 구해준거야.

라고 슈퍼 긍정회로 가동 중이었다.

이번 패배를 초석으로 삼아 강해진 다음, 사로카 새끼를 박살내는 것.

이것이 나의 플랜이자 쪽지가 원하는 바라고 결정했다.

내 판단이 옳은지, 쪽지가 원하던 길이 이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했을 땐 맞았다.

맞는 걸 떠나 최상의 루트였다.

물론 아직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몰랐기에 빨리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백운 님, 너무 빨리 퇴원하는 거 같아서 걱정돼요. 아까 의사 선생님도 깜짝 놀라셨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배이슬의 말에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괜찮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긴 했다.

S급 데몬에게 처맞아서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는 환자가 당장 퇴원하고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지금 몸이 아픈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는 게 중요한데.

누워 있어봤자 잠도 안 올 거야.

솔직히 말하면 불안했다.

이렇게 누워 있는 동안 사로카 새끼가 병원으로 쳐들어오면?

지키고 있는 헌터는 있지만 만약 나와 단둘이 남게 된다면?

사로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급의 다른 강한 데몬을 만나게 된다면?

누군가 들으면 망상증이라고 할만한 경우의 수들이지만.

지금 내 힘으론 이 경우의 수들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몹시도 불안했다.

그냥 뭘 만나든 때려잡을 수 있게 강해지면 되는 일이야.

그렇게 스스로의 판단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이.

끼익.

왔다.

문이 열리며 장관 료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듯한 느낌이었다.

당장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있던 이유.

내가 깨어나면 료코가 꼭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장관님 말씀이니까 잘 들어야지.

"퇴원하신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료코는 아직도 내가 퇴원한다고 말한 사실을 믿지 않는 듯했다.

의사에게 잘못 전달받은 게 아닐까라 생각하는 얼굴.

"제가 한국에 아주 급하게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바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온몸에 칭칭 붕대를 감고 있는 내 몸을 훑는 료코.

료코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았기에 선수를 쳤다.

"몸은 좀 삐걱거리긴 하지만 움직이는데는 아무 지장도 없습니다. 제 몸이 좀 튼튼하거든요."

아까 했던 것처럼 엄지를 치켜세우자 료코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말하든 내가 떠날 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슥.

유연경과 배이슬, 옆에 있던 의사를 쳐다본 료코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가능하다면 백운 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 *

탁.

문이 닫히며 병실엔 료코와 나 둘만이 남게 됐다.

모두가 나가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료코.

"백운 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사로카를 상대해준 덕에 뒤에 있던 대피 인원들까지 무사했다며 료코는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일본 측 헌터분들이 안 도와주셨으면 전 죽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기를 잠시.

옆에 있는 의자로 몸을 앉힌 료코가 입을 열었다.

"분화구부터 이어진 땅굴을 따라갔지만. 사로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합니다."

다음에 만나려면 한국인가.

회귀 전에 사로카가 한국에 나타났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일본에서 끝까지 잡히지 않았다는 것.

무언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사로카는 2년 뒤 한국에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후지산에서 날 만나서 팔 하나가 날라갔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회귀 전과 다른 한 가지였다.

과연 그게 사로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에전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사로카가 나타나주는 것이었다.

그래야 만날 수 있어.

처음으로 날 막아선 벽.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부순 뒤 나아가고 싶었다.

"저…. 백운 님."

"네?"

료코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스스로도 이걸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아는 거라면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힘을 얻어서일까.

한숨을 쉰 료코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사로카에게 뭔가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특이한 점이라면…?"

"가령, 말을 했다거나요."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아는진 모르겠지만.

료코 역시 무언가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워낙 믿기 어려운 일이니 사로카와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싸웠던 내게 물으러 온 것.

"예."

"!!"

내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료코의 눈이 커졌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짤막한 두 마디 정도였죠. 단순하구나, 나약하구나."

나약하다니.

쌍놈의 새끼.

지보다 약한 건 맞으니 더 할 말은 없다.

"이럴 수가."

료코는 자신이 들은 게 진실이 아니길 바랐던 것 같았다.

뒤로 몸을 젖히며 이마를 짚는 료코.

"잘못 듣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들었거든요."

다시 한번 말하자 료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로카와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인원이 있습니다. 지금은 죽었지만요."

- 말을… 했… 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의사에게 남긴 말이라고 했다.

스윽.

얼굴을 감싸쥔 료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몬이 말을 하다니…. 백운 님까지 들으셨으니 부정하기가 힘들군요."

페샨과 리카르도 덕에 충격이 덜하긴 했지만.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싸우는 중만 아니었으면 소리 질렀지.

5미터짜리 미친 살인병기가 말을 하는데 누가 안 놀라겠는가.

"백운 님."

"네."

고개를 든 료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로카가 말을 했다는 사실.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웬만하면 바로 오케이 했겠지만.

조금 전 료코가 말한 건 망설여졌다.

이 사실을 숨김으로써 사로카에게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가직 헌터를 포함해 각 주요 기업들에겐 알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국민들에게도 알릴 생각이고요. 단지, 한 번에 퍼져 가해질 충격을 줄이고 싶습니다."

난리가 나긴 하겠지.

료코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데몬을 그저 살육을 즐기는 외계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덜컥 데몬도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에까지는 숨기진 못할 거 같네요."

"예, 그런 순간까지 비밀로 해주시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 전에 최대한 충격이 덜한 방법으로 알릴 생각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부탁을 들어줘 감사하다고 말한 료코가 날 빤히 쳐다봤다.

잠시 정적이 찾아와서인지 급 어색해진 분위기.

"왜… 그러시죠?"

"이것도 좀 실례가 되는 질문일 거 같은데. 정말 국가직 10급 헌터이신가요?"

왜 안 물어보나 했다.

한 나라의 장관인 료코.

분명 한국에 연락해 내 신분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도 못 믿겠지.

1급이나 2급 헌터가 와야 대적할 수 있는 사로카를 10급이 30분 가까이 잡고 있었으니.

안 믿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하하…. 맞습니다."

"… 그런가요."

한동안 더 날 바라보던 료코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묻고 싶은 게 더 많아 보였지만 참는 모습이었다.

"제가 궁금했던 건 다 여쭤봤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료코.

료코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백운 님과 일행분들이 돌아가실 비행기는 준비해놨습니다. 공항에서 이걸 보여주면 바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옅게 웃어 보인 료코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보답하겠다는 료코에 나도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또 만날 일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또 만나게 되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밀어진 료코의 손을 맞잡았다.

* * *

도쿄의 하네다 공항.

"우…. 우와."

"와…. 이거 진짜 타도 되는 건가요?"

유연경과 배이슬이 입을 벌리고 눈앞에 있는 걸 바라봤다.

영화에서나 보던, 사우디아라비아 재벌들이나 타고 다닌다는 전용기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 이쪽으로 오십시오.

료코가 건네준 서류를 보여주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공항 직원들.

직원들은 곧바로 우리 세 사람을 안내해 이곳으로 데려다줬다.

역시 장관이야.

앞에 있는 전용기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올 땐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왔는데 갈 때는 전용기라니.

앞으로 이런 호화로운 왕복 비행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백운 님 덕분에 전용기를 다 타보네요."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내 두 손을 꼭 잡는 배이슬과 유연경.

두 사람은 전용기를 타본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격한 모습이었다.

"크흠!"

전용기를 대준 건 료코였지만 내 어깨가 올라가는 건 어째서일까.

두 사람을 향해 자연스레 헛기침을 한차례 해준 뒤. 

저벅.

전용기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가자.

강해지러.

81화. 산삼의 효능

일본 하네다 공항 밖.

열린 창문을 통해 료코가 날아오르는 전용기를 응시했다.

'백운… 이라.'

전용기에 타고 있을 백운을 떠올렸다.

백운은 10급 헌터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실제로 신분을 확인했을 때도 10급이 맞았다.

'10급이 S급을 막았다.'

어디다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신나게 까일 일이었다.

료코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일.

# S급 데몬 사로카는 어디로 향했을까요!

# 정부는 어째서 찾지 못하는 겁니까!?

차 안의 라디오에서 격앙된 진행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상대로네.'

일본 정부는 후지산에서의 일을 공개하기로 입장을 정했다.

근처에 있던 너무 많은 사람이 의혹을 제기했고, 더 이상 숨겼다간 오히려 국민을 기만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사로카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제외하고 말이다.

'….'

당연히 후지산에서 사람들이 대피하는데 가장 큰 공로를 한 백운에 대해서도 보도할 생각이었다.

- 전 빼주세요.

그에 대한 동의를 얻고자 갔던 병실에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던 백운.

어째서냐고 이유를 물었지만 그저 외부로 노출되고 싶지 않다는 말만을 했었다.

- 이겼으면 또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한 말인지, 농담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운은 이겼었다면 방송을 타도 나쁘지 않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바로 전날 죽을 뻔했던 사람이라니.'

티를 내진 않았지만, 료코는 백운과 대화를 나누며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료코가 봤던, 강한 데몬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뒤 살아남은 이들에게 생긴 공통점.

'다들 무너졌다.'

앞으로 싸움은커녕 제대로 된 일상생활은 가능할지 우려가 될 정도로 무너졌던 사람들.

하지만, 백운은 달랐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그냥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 있는 걸까.'

장관이란 위치가 주는 책임감과 부담감.

이런 것들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료코 역시 몹시 힘든 상태였다.

- 끄아악!

자신의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로카에게 죽어나간 헌터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앞에서 웃으며 말을 하던 이들의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엔 동료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다.

'….'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이 떠올랐다.

여유를 즐기며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던 사로카의 모습이 말이다.

꽈아악.

료코가 덜덜 떨려오는 손을 꾹 누르며 마지막 병실에서의 백운을 떠올렸다.

- 한국으로 가야 돼요.

죽을 뻔하며 공포에 질린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무서워서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가려는 게 아니었다.

백운의 눈은 공포에 질리긴커녕 오히려 빛나고 있었다.

지나간 어제를 떠올리기보단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

위잉.

시야에서 사라진 전용기에 료코가 창문을 올렸다.

'10급 헌터 백운.'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확신이 들었다.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생긴다면 그땐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해져 있을 거란 확신이 말이다.

* * *

삐걱.

"끄어어!"

진통제의 효과가 사라져서일까.

조금만 움직여도 자동반사적으로 비명이 터졌다.

- 괘… 괜찮으세요!?

처음엔 기겁을 하며 달려왔던 두 사람이지만.

전용기에 탄 이후 몇 번을 그랬더니 이제는 적응한 모양이었다.

사삭.

배이슬과 유연경이 날 진정시킬 수 있는 달달한 음식과 술을 가져다줬다.

"쭉 들이키세요! 쭉!"

벌컥벌컥!

"크으!"

몸의 고통과는 별개로 입에 쫙쫙 달라붙는 고급 술.

괜히 고급 술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어디 천년삼이라도 있으면 한 방에 나을 텐데, 아쉽네요."

천년삼…?

갑자기 산삼 이야기를 꺼내는 유연경을 바라봤다.

"아."

그러자 핸드폰에서 무언가 사진을 띄워 보여주는 유연경.

산삼 사진이었다.

"실제로 산에서 발견된 산삼 중에 가장 오래된 건 백년삼이라고 해요. 말이야 천년삼이니 만년삼이니 하지만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거죠."

"일반 산에서는 말이죠."

옆에서 끼어든 배이슬이 묘한 말을 했다.

일반 산에서는.

그럼 발견된 적이 있단 말인가?

"백운 님이 잡으셨던 마운티거. 그 마운티거한테서는 아주 희박한 확률로 천년삼이나 만년삼이 나온다고 해요."

회귀 전에 종종 봤었다.

마운티거를 잡고 산삼을 얻은 이들의 기사.

그때 봤을 땐 끽해야 몇백 년 된 산삼이 다였었다.

그리고 나도 주웠으니까.

몇 년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시간이 천년만년 된 건 아니지만, 마운티거가 사람의 생기를 먹고 사니까요. 마운티거에게서 자란 산삼은 그 생기가 전부 몰빵 되는 거죠."

"으….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은 산삼이라니. 누가 줘도 못 먹을 거 같아요."

몸서리 치는 배이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주워놓고는 제일 비싼 프라이빗 헌터 은행에 보관해뒀을 뿐, 차마 먹을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고 자랐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몸에 좋대요?"

먼저 이야기를 꺼낸 유연경에게 질문을 건넸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회귀 전에 들었을 때도 마운티거에게 나온 산삼이 딱히 어디에 좋다라는 명확한 효능이 밝혀지진 않았었다.

그냥 산삼이니까 몸에 좋겠지란 인식이었다.

마치 영양제는 챙겨먹고 있지만 이게 실제로 내 몸을 건강하게 해주고 있는 건지 의심되는 고런 것이지.

내 안에서의 산삼은 그저 개비싼 영양제 중 하나였다.

슥슥.

유연경이 여기저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저희 셋밖에 없어요."

"아."

얼마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신중을 기하는 유연경.

세 명이라 했는데도 유연경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에 게스트 헌터로 초청된 곳에서 만난 분이 있거든요. 데몬들에게서 나오는 전리품들 중 고가의 것만 경매 형식으로 진행하는 거래소에서 일하는 분이었어요."

끄덕끄덕.

비밀스럽게 말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거래소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게 바로 산삼. 물론 일반 산삼이 아니라 마운티거에게 나온 산삼이라고 해요."

"명확한 효능은 없는데 그냥 돈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유연경이 고개를 좌우로 강하게 내저었다.

조금만 더 세게 돌리면 반대로 돌아가겠다 싶은 강도였다.

"사실은 관련 능력자들에 의해 밝혀진 효능이 있다고 해요. 먹은 사람의 신체 능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가지고 있던 질병과 상처를 바로 낫게 해주는 건 물론이고, 그 후로도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신체 능력의 전체적인 향상은 덤이고요."

"에이!"

뜬구름 잡는 말에 손을 내저으며 기울였던 몸을 원위치시켰다.

산삼이 무슨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 약도 아니고 저런 효과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분 산삼 산 거 아니야?

유연경이 홀라당 속아 산삼을 산 게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애초에 그런 효능이 있었으면 뉴스에 대서특필 되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다른 이보다 더 빨리 지식을 탐구하고 그 지식을 알리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이치.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모르시는 말씀! 산삼의 효능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자가 아주 소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그 소수는 돈 많은 이들에게 고용된 상태고요."

"그럼 그 정보를 숨기는 이유는요?"

"구하기 힘들어지니까요.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공유하고 있지만, 공급하는 사람까지 그 정보를 알게 되면 자기가 먹거나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요구할 게 뻔하잖아요."

이건 또 나름 일리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저런 거래소에서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은 평범한 부호 이상인 사람들.

이들은 거래소에 물품을 공급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저 수요하는 입장일 뿐.

거래소에 물품을 납품하는 건 나 같은 평범인들 뿐일 테고.

자기들끼리만 경쟁하면 되는 걸 공급자들한테까지 알려줘 괜히 가격을 더 높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정보를 숨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다.

스윽.

다시 몸을 기울여 질문을 건넸다.

가장 중요한 질문.

산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끼리는 그에 합당한 가격을 내고서라도 가져가려 할 터였다.

즉, 가격에 비례해 마운티거 산삼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

"마운티거 산삼, 얼마에 거래가 된대요?" 

바짝.

거의 이마를 모으는 수준까지 근접한 유연경.

그런 거리가 아니면 안 들릴 목소리로 유연경이 말을 시작했다.

"마운티거의 산삼은 얼마나 많은 생기를 빨아들였냐에 따라 년수가 정해진데요. 그만큼 효능이 엄청나니까."

꿀꺽.

"사… 산삼의 년수를 측정하는 방법 같은 게 있나요?"

"정확하게는 전문가가 봐야겠지만. 마운티거의 산삼에 새겨진 줄 수를 보면 가라지만 대충 시기를 가늠할 수는 있대요. 아주 찐하고 굵은 한 줄이 천년, 옅고 가는 게 백년이랬나. 여하튼, 경매소에 나왔던 가장 오래됐던 게 800년짜리였는데."

말로는 차마 할 수 없었는지 유연경이 한 손을 쫙 펴보였다.

"오… 오억!?"

"공 하나 더요."

시발..?

오십 억요?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엄청난 액수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산삼 하나에 오십 억을 주고 산다고?

"이 가격이 증거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런 효능이 없다면 미쳤다고 오십 억에 사겠어요."

나도 나름 불신의 아이콘이었지만.

유일하게 믿는 게 숫자였다.

산삼 하나에 오십 억을 지불하는 돈 많은 부호들.

돈이 많다고 허투루 쓸 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본 찐부호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숫자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며 합리적인 계산을 했던 것.

슥.

할 말을 다 해서인지 유연경이 잔뜩 기울였던 몸을 원위치시켰다.

"그래서 한번 말해봤어요. 그게 있으면 백운 님 몸도 한 방에 낫겠다 싶어서."

시발… 있는데.

물론 몇 년짜린지는 모른다.

산삼 줄이 몇 줄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뇌 용량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리가 있어.

아까는 불신 가득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반 산삼과 마운티거의 산삼은 이름만 같을 뿐 아예 성장 수단 자체가 달랐다.

마운티거에게 산삼이 나오는 건 매우 드문 확률.

사람의 생명력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산삼도 없었다.

완쾌는 물론이고 향후의 치유력과 신체 능력까지 향상 시킨다라.

"물론 주의할 점도 얘기해주더라고요. 아무나 마운티거의 산삼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주의사항을 말해주는 유연경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동시에 머릿속에선 금고에 잠자고 있을 내 산삼을 떠올렸다.

뭔가 오래된 외관상으로는 만년삼이었던 녀석.

사람의 생명을 먹는 느낌이라 제대로 된 감정을 받은 후 내다 팔 생각이었었다.

하지만 저런 효능이 진짜라면.

진짜가 아니더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결정을 내린 후 머릿속에서 플랜 앞부분을 수정해나갔다.

먼저 들려야 할 곳이 생겼다.

82화. 만년삼

"어서오세요, 헌터 프라이빗 은행입니다."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쩔뚝이며 달려온 곳.

밥을 사주겠다는 두 사람의 권유에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한 후 이곳으로 직행했다.

- 나중에 꼭 연락하셔야 돼요! 꼭!

못 사준 밥을 제대로 사주겠다며 연락하라던 배이슬과 유연경.

꼬로록.

나중에 꼭 연락해야지.

당장 오늘 얻어먹고 싶었지만, 마음이 급해 맛있는 걸 먹어도 그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 것 같았다.

"백운 헌터님. 여기에 지문 찍어 주시고 홍체 확인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에 따라 절차를 밟아나갔다.

비싸지만 보안 하나는 기가 막히는 프라이빗 은행.

몸값 높은 헌터들까지 보안을 위해 배치되어 있는 장소였기에 무장 강도가 들이닥쳐도 거뜬한 장소였다.

지잉.

"확인 되셨습니다. 11번입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작고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 내가 맡겼던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샤샥.

상자를 한 번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후.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부디 만년삼이어라.'

* * *

시… 시발?

나도 모르게 찐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느 한적한 산골의 깊숙한 장소.

바위 위에 올라와 상자를 열고 산삼을 살폈었다.

- 아주 찐하고 굵은 한 줄이 천년이에요.

정확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유연경이 말했던 가라 방법으로 봤을 때 내가 들고 있는 건 무려.

여… 열줄.

만년삼이었다.

개찐하고 개굵은 줄이 열 줄이나 새겨져 있는 산삼.

꿀꺽.

800년따리가 50억이면 이건 얼마란 거야.

진짜 만년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맞다면 내 손에 들려있는 건 아파트 한 채 수준이 아니었다.

아파트 한 동을 사도 부족함이 없을 물건이었다.

- 하지만! 설령 생겼다 해도 조심해야 해요.

마지막 유연경이 말해준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사람의 생명을 먹고 자란 만큼 효능이 뛰어나지만, 그만큼 가지고 있는 열이 엄청나 잘못 먹었다간 죽을 수도 있단 말이었다.

삼 종류는 열이 높으니까.

그래서 아무리 좋은 삼도 몸에 열이 많은 사람한테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이게 진짜 만년삼이면 활화산이라 봐야 할 텐데.

내가 열이 많은 체질이었나?

잘 모르겠다.

그냥 살아지는대로 살았다보니 체질이나 이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꿀꺽.

눈앞에 있는 만년삼을 보고 있자니 조금 긴장됐다.

현재 몸의 치료는 물론이요 영구적인 치유력 및 신체 능력의 향상.

내게 몹시 필요한 것이었다.

산삼 먹고 뒤지진 않겠지.

그랬다간 카이안한테 뺨을 처맞고 뒤돌려차기까지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 나약… 하구나.

사로카가 사라지기 전 내게 남겼던 마지막 한 마디.

딱정벌레쉨.

그 한 마디를 떠올리니 천불이 나는 느낌이었다.

진정해.

열 내면 안돼.

최대한 차분히 먹자.

사로카를 박살내기 위해서라도.

그걸 위해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치유력과 신체 능력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지금의 부상을 빨리 회복해야 했다.

그래야 강해지던가 말던가 하니까 말이다.

스윽.

만년삼을 든 손을 입 앞으로 가져갔다.

사람의 생명력이 깃든 산삼.

산삼에 깃들어 있을 생명들에 기도를 한 번 올린 후.

와작!

입으로 만년삼을 집어넣었다.

* * *

음… 아직은 괜찮은데.

역시 연경 님은 사기를 당한 걸까.

조금 전 만년삼을 넘겼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오만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더럽게 쓴 인삼을 넘긴 느낌이었다.

설마 아무 효능이 없다면.

호달달달달.

온몸이 떨려왔다.

내가 지금 뭘 먹은 거야!

아파트 한 동을 한 큐에 처먹은 것과 다름없었다.

호달달 떠는 와중에 느껴지는 고통을 보니 입었던 부상도 그대로였다.

눈곱 만큼도 치유되지 않은 상태.

끝에만 먼저 조금 먹을…!?

뒤늦은 후회를 하며 눈물을 흘리려는 찰나.

두근.

어째선지 심장 박동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원래 심장이 이렇게 크게 뛰나?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사아아아…!

키… 킷타!

뭔가 오기 시작했다.

위가 있는 상체의 중심부터 퍼지기 시작한 뜨거운 열기.

뜨겁다라는 표현만으론 한참 부족했다.

울컥!

입을 통해 붉은 피가 쏟아졌다.

시… 시발?

뭔가 잘못됐다.

만능 약을 먹은 게 아니라 독약을 먹은 것 같았다.

우드드득!

"끄아…!"

보통 산삼이 혈관을 타고 전달되는 거였나?

팔다리까지 퍼진 열기에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제대로 된 비명조차 안 나올 정도의 끔찍한 고통.

드득! 우득!

이건 죽는다.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이 들었다.

분화구에서 사로카가 다가올 때보다 더 강한 확신이었다.

그만큼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강한 고통이었다.

삐이이이---!

귓가로 이명이 들려오고.

뚝.

잠시지만 몸을 녹이던 고통이 잦아들었다.

잦아들다 못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었다.

…?

끄… 끝인가?

온몸으로 퍼지는가 싶더니 급속도로 사라진 열기.

만년삼 쉨, 해… 해치웠나.

그렇게 몸을 살피려고 상체를 든 순간.

온몸에 퍼져 웅크리고 있던 열기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우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악!!!"

* * *

뜨끈.

코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눈을 떴다.

떠진 눈으로 보이는 건 밤하늘의 수많은 별뿐이었다.

눈 멀쩡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산벌레의 울음소리.

귀 멀쩡하고.

슥.

손등으로 뜨끈한 느낌이 들었던 코를 훔쳐보았다.

흥건.

허.

조금 전까지 흘렀던 건지 엄청난 양의 피가 소매에 묻어나왔다.

피가 난 건 코뿐만이 아니었다.

눈과 귀에서도 많은 양의 피가 나와 있었다.

짝.

나 살아있는 건 맞나.

뺨이 얼얼한 걸 보니 죽은 건 아닌 듯하다.

- 끄아아아아아악!!!

잠잠해졌나 싶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고통과 열기가 몸을 덮쳐왔다.

눈앞은 하얗게 변했고 귀에선 이명이 끊이지 않았으며, 코에선 그저 피비린내만이 가득했었다.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다 정신을 잃고 만 것.

설마.

조심스럽게 손을 옮겨 바지를 만져봤다.

휴.

다행히 지리진 않은 모양.

…!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조금만 움직여도 뒤지게 아팠던 팔이었다.

그런데 바지를 만지면서는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휘이익.

조심스럽게 팔을 돌려봤다.

멀쩡하다.

휘이익! 휘익! 휙!!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며 팔을 돌려도 멀쩡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리와 몸을 움직이며 상태를 체크했다.

꿀꺽.

체크를 끝낸 뒤.

멍한 기분에 몸을 내려다봤다.

최소 한 달은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던 부상.

그 부상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사라지기만 한 게 아니야.

손을 올려 몸 여기저기를 만져봤다.

대충 확인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몸은 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스윽.

고개를 올려 정상 쪽을 응시했다.

탓!

달리기 시작했다.

산 정상을 향해.

아무런 무기도 꺼내지 않은 채로.

가볍다.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쿠욱…!

그리고 땅을 짚는 발에서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힘이 느껴졌다.

훨씬 더 빠르게, 훨씬 더 힘차게 발돋움 하는 게 가능했다.

두근.

그렇게 신체의 향상을 느끼며 한참을 내달렸다.

탁.

정신없이 오르다보니 도착해버린 산의 정상.

산까지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우우웁."

정상에서 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코를 통해 흘러 들어와 폐까지 전해지는 상쾌한 공기.

이전보다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달달한 공기였다.

얼떨떨하네.

정상까지 오르며 몸의 컨디션이 완벽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마운티거를 통해 주운 산삼에 이런 엄청난 효능이 있었다니.

- 먹는 사람에 따라 달라요.

똑같은 천년삼을 먹어도 복용자에 따라 효능은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내 몸이 삼을 받아들이기에 최적인지 몰라도 기대 훨씬 상회하는 효능이었다.

씨익.

몸이 완전히 나았다는 걸 깨닫자 미소가 지어졌다.

마음이 급해 다짜고짜 달려왔지만 조금 걱정했었다.

부상 때문에 강해지는 것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걱정 하나는 덜었고.

최소한 나로 인해 지체될 가능성은 없어졌으니.

다음 불확실성을 확인할 차례였다.

꾸벅.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되게 해주세요. 

* * *

목적지로 향하기 전 기록을 살폈다.

가장 빨리 구해야 했던 무기는 2년 뒤에 대산이 발견하는 무기…지만.

그 무기는 소피아가 건들지 않기로 약속했다.

소피아가 약속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굳이 시간에 쫓길 필요는 없었다.

사로카가 한국에 나타나는 건 2년하고도 조금 뒤.

나와 만난 게 변수가 되지 않았다면 사로카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내가 바꿔야 하는 것도 없어.

2년 뒤까지 내가 지켜야 하는 이들은 모두 안전했다.

2년.

내게 주어진 여유 시간이었다.

# 잔고: 93,700,000.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잔고였다.

마운티거 님, 감사합니다.

오천 이상의 후원금을 벌어들인 것도 모자라 만년삼까지 준 마운티거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 뒤.

초조한 마음으로 눈앞의 창구를 바라봤다.

- …?

조금 전 미친놈 아니야? 라는 얼굴로 날 바라봤었던 직원.

직원은 여전히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나 같아도 미친 놈이라고 하겠다.

-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무나 막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창구의 직원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다.

어쩔 수 있나.

방법이 없는데.

- 답장이 없을 확률이 99.999% 지만. 일단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 연락은 남겨놓을게요.

어휴 시발 개귀찮지만 해준다는 표정으로 메세지는 남겨 준 창구의 직원.

그거면 됐다.

언제 답장이 올지 모르지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무릎 꿇고 있어야 하나.

보통 영화나 만화에서 보면 비 오는 날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기다렸었는데.

똑같이 해야 되는 게 아닌지 고민이 됐다.

"!!!"

벌떡!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앉아있던 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뒤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누구 높은 사람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이게 누구야. 오라고 할 때는 매몰차게 거절하더니."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곳, 헌터 중앙처에 찾아온 이유.

창구의 직원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와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0.001% 적중.

말도 안 된다는 눈빛과 동시에 조금 전에 내게 무시하듯이 말한 것에 대한 낭패감 때문인 듯했다.

벌떡.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꾸우버억!

돌아보기 무섭게 90도를 넘어 날카로운 예각 수준의 인사를 박았다.

태어나 이렇게 인사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뭐야? 안 어울리게."

대한민국 국가직 1급 헌터.

다이아몬드 인간이라 불리며 동시에 모두의 영웅인 남자.

기태랑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83화. 사부님

"뭐…?"

중앙처에 위치한 기태랑의 사무실.

눈이 커진 기태랑이 컵을 내려놓으며 날 바라봤다.

이게 드디어 미쳤구나 싶을 거야.

다짜고짜 찾아온 나를 만나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 싸움 좀 알려주세요!!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기태랑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였다.

이게 최선이자 최단 루트다.

내가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 근거는 명확했다.

2년 전 한국에 나타난 사로카.

그 사로카를 잡은 게 기태랑이었기 때문이다.

- 기태랑입니다! 기태랑이 또 잡아냈습니다!

그때의 이름은 사로카가 아닌 붉은 바리였지만.

어쨌든 그 사로카를 단신으로 박살낸 게 기태랑이었다.

- 엄청난 격투전입니다!

엄청난 강도를 자랑하는 갑주와 다이아몬드의 부딪힘.

난 다이아몬드는 아니지만.

그때는 뉴스를 보며 다이아몬드가 더 단단해서 이겼구나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기태랑이 강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난 격투 능력.

멀리서 대충 보면 알 수 없지만.

기태랑의 이력은 화려했다.

개방하기 전부터 수많은 무술 마스터는 물론이요, 그 무술을 바탕으로 격투기 대회란 대회는 모조리 휩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급이고, 그래서 무적이라 불리는 거야.

어떻게 보면 기태랑은 자신과 어울리는 최적의 능력을 개방한 것이었다.

절대 부서지지 않는 몸과 인간계 최강이라 불리던 격투 실력까지.

가히 사기라 부를 수 있는 조합이었다.

내 목적은 사로카를 박살내는 것.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법.

내 판단에선 회귀 전 사로카를 잡았던 기태랑에게 싸움을 배우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싸움을 알려달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나가 이 새끼야! 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유를 묻는 기태랑에 후지산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S급 데몬한테 개발렸으며 죽을 뻔 했다는 걸.

아마 이대로라면 금방 쥐도 새도 모른 채 죽을 거라는 징징거림까지 더해서 말이다.

"그래서였군."

…?

그래서였다니?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틀 전에 일본 니시다 료코라는 장관이 신원 조회를 요청해왔거든. 이유는 국가 기밀이라 알려주지 못하겠다 하더군."

여기까지 올라온 모양이구만.

료코가 신원 확인을 위해 무언가 했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그게 1급인 기태랑한테까지 전해졌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거 참. 유별난 건 알았지만 일본까지 가서 S급 데몬이랑 싸우다니."

기태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날 바라봤다.

"S급이랑 싸웠는데도 살았다는 게 다행이고. 패배했는데도 몸이 멀쩡하다는 건 정말 천운이야."

어떻게 멀쩡한지 물으면 말하려고 했지만.

굳이 궁금해하는 것 같진 않아서 만년삼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대는 기태랑.

"나한테 싸움을 알려달라는 걸 보니 강해지고 싶은 걸 텐데. 강해져서 어떻게 하려는 거지?"

"그놈 찾으러 갈 거예요."

"푸흡…!"

망설임 없는 대답에 기태랑이 머금고 있던 차를 뿜었다.

휘둥그래진 눈엔 이거 진짜 개미친놈이구나 하는 메세지가 쓰여있었다.

"S급이란 등급이 왜 붙었는지 의미는 알고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갓난 아이도 S급이 노네임드 이상의 데몬에게 붙여지는 급이며, 노네임드라 하면 세계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치를 떠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엔 운이 좋아서 살았지만, 다음은 아닐 거야."

사뭇 심각한 얼굴로 기태랑이 말을 이어갔다.

"다음엔 죽을 거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데도 또 찾아가겠다고?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보이는데."

무언가 살짝 화나 보이는 기태랑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반대에요. 살고 싶어서 안달 났거든요.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표정의 기태랑에 말을 이어갔다.

"한 번 죽을 뻔했다고 방구석에 박혀 벌벌 떨면서 숨어 살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 보니 또 언젠가는 사로카 같이 강한 적을 만날 거고요. 그럼 전 아마 죽겠죠."

한 차례 숨을 돌린 후 기태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기에, 그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었으면 했다.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민하다 찾아왔어요. 제가 죽지 않도록."

쿵.

다시 한번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 넣었다.

"싸우는 법 좀 알려주세요."

"…."

꼴깍.

제바알!!

무겁게 찾아온 정적.

기태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절하면… 내일도 온다.

내일 거절 당하면?

내일 모레도 오고 그 다음 날도 오고 계속 올 생각이었다.

단순한 격투기로는 안돼.

그럴 거였으면 돈만 내면 알려주는 격투기 도장에 갔을 것이다.

난 실전에서 통할, 수많은 싸움을 통해 단련된 찐 싸움을 배우고 싶었다.

부스럭.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태랑.

창문 밖으로 날 던지려는건가 하는 순간.

"생각하는 시간은?"

!!

호다닥 고개를 들어 답을 했다.

"2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태랑이 쪽지에 주소 하나를 적어 내게 건넸다.

"준비해서 이틀 뒤에 이곳으로 와."

됐다!

"감사합니다!"

"오면 끝이다. 힘들다고 도망치고 그런 거 없어."

"당연함돠!"

우렁찬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태랑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이틀 뒤에 보자고."

* * *

- 싸움 좀 알려주세요!

"허."

의자에 앉은 기태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짜고짜 찾아온 것도 모자라 자리에 앉자마자 한 얘기가 싸움을 알려달라는 거라니.

'별나다는 건 알았지만… 상상 이상이네.'

기태랑을 놀라게 한 건 또 있었다.

백운과 사찰 앞에서 헤어진 지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몸… 어떻게 된 거지?'

남들은 모를 수도 있지만.

육체 단련엔 이골이 난 기태랑은 알 수 있었다.

백운의 몸이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말도 안 되게 좋아졌다는 걸 말이다.

'단순히 운동을 했다… 는 건 말이 안 되고.'

근육이 만들어지는 데까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운동을 해서 키웠다는 건 불가능한 일.

백운의 몸은 싸움에 필요한 근육만이 말도 안 되게 발달된 상태였다.

그리고,

풍기는 기운 역시 달라졌다.

단순히 육체적 발전으론 얻을 수 없는 것마저 생겨있었다.

'훨씬 날카로워졌어.'

이건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죽을 뻔한 위기.

이런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다.

무너지거나, 딛고 일어나거나.

후자의 경우엔 보통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감각과 투지를 얻게 된다.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톡. 톡. 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이틀 뒤부터 시작될 일들을 떠올렸다.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 왔다면 고민 했겠지만, 살려달라고 온 사람을 어떻게 내칠 수 있단 말인가.

"풉."

기태랑이 고개를 흔들며 조금 전 생각을 정정했다.

'솔직해지자.'

누군가를 살려야겠다는 정의감.

백운에게 싸움을 알려주기로 한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배우고자 하는 이유를 물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백운이 싸움을 알려달라고 말한 순간.

기태랑의 안에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백운을 처음 만난 건 구룡산에서였다.

10급 헌터라면서 뿜어내던 엄청난 화력.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광산에서부터였어.'

피렌조와 싸우는 백운의 모습을 보며 기태랑은 묘한 감정을 느꼈었다.

'기대감.'

광산에서 만난 백운은 구룡산 때보다 훨씬 강했다.

그리고 광산에 들어갔던 백운과, 피렌조를 마무리 짓던 백운 역시 달랐다.

그 짧은 사이에 더욱 성장해버린 것.

'오늘은 그때보다 또 성장해서 내 눈앞에 나타났군.'

두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태랑은 백운의 말도 안 되는 성장세에 견디기 힘든 기대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말이다.

'어디까지 강해질지.'

기태랑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미치도록 기대된다.'

* * *

자연인이셨나.

눈앞에 자리 잡고 있는 돌산을 바라봤다.

아닌가, 손오공인가.

손오공도 돌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던데.

만화에서 봤던 그런 산을 떠올릴 정도로 앞에 있는 산은 엄청났다.

머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등산할 엄두조차 안 날 경사.

묵직.

고개를 돌려 어깨에 멘 배낭을 바라봤다.

- 의식주는 알아서 해결해라.

그래서 이틀 동안 여기저기를 돌며 잔뜩 구매해왔다.

일용할 식량과 잠을 잘 텐트와 옷가지까지.

- 강은 있으니 씻을 순 있을 거야.

이런 곳에 강이 있는 게 더 신기하네.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며 첫발을 내디뎠다.

수리검으로 올라갈까 했지만 본격적인 수련 전 몸도 풀 겸 뛰어 올라갈 생각이었다.

과연 무슨 수련일까.

만화에서 봤던 각종 수련법들이 떠올랐다.

2년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하던 기태랑.

기태랑만의 필살 특훈법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뭐라고 부르지.

오늘부턴 기태랑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을 생각이었다.

스승님? 사부님?

이거이거… 낯간지럽구먼.

스승과 제자라니.

마음까지 따듯해지는 훈훈함을 느끼며 목적지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 응?

나름 일찍 도착한 정상엔 이미 기태랑이 와있었다.

해맑게 인사를 한 직후.

배낭을 내려놓으라 하더니 기태랑이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뭐지, 보호구 같이 생긴 것들은.

기태랑이 던진 건 팔과 다리, 몸에 차는 보호대였다.

물론 딱 봐도 일반적인 건 아니었다.

평소에 보던 쿠션감 있는 보호대가 아닌, 왠지 모르게 오묘한 빛을 내고 있는 광석으로 만들어진 보호대였다.

"오늘 이후로 절대 벗지마라. 2년 뒤까지."

!?

2년 뒤까지 벗지 말라니.

솔직히 놀랐지만 되묻진 않았다.

뭘 시키든 다 할 생각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후 떨어져 있는 각반 하나를 주웠다.

!!

개무겁다.

개무겁다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미친 듯이 무거웠다.

양다리와 양팔, 몸통까지 하면 보호대는 총 다섯 개.

이런 무게를 다섯 개 찼다간 걷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그래도 차야지.

착.

간신히 보호대를 다 찬 후 입을 열었다.

"다 착용 했…."

빠악!!

"꾸헥!"

온몸을 울리며 저릿하게 만드는 고통이었다.

분명 보호대에 맞았는데 고통이 왜 이렇게 선명한 걸까.

"마각의 보호대다."

조금 전 냅다 발차기를 꽂아 넣은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몸을 완벽히 보호해주지만, 고통 만큼은 그대로 전달되지."

스스스…!

다시 공격하기 위해 기태랑이 발을 치켜들기 시작했다.

"고통을 줄이고 싶다면."

쐐에에엑!

눈앞으로 기태랑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움직여라."

84화.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몇 달 뒤.

돌산에 오르고 몇 달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처맞고 있었다.

빡! 빡! 빠악! 퍼억!

"꾸억! 끄악!"

기태랑은 공격했고 난 두들겨 맞는 중.

얼핏 보면 첫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다른 게 있었다.

휘익!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 또한 손과 다리를 뻗고 있다는 것.

처음엔 보호대의 무게에 적응하지 못해 꼼짝도 못 하고 처맞았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호대를 찬 채 산을 오르락내리락 한 결과.

움직여진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100%는 아니지만 팔과 다리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빠악!

꾸억!

물론 여전히 더럽게 아팠다.

다이아몬드니까 당연한 건가.

이 보호대가 아니었다면 팔다리가 부서졌을 터.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도 다치지 않을 수 있단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나저나 다이아몬드란 건 정말.

빠악!

개단단하구나!

처맞으며 새삼스럽게 깨달은 진리였다.

- 태권도에서 중요한 건 축이다.

기태랑이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두들기는 건 아니었다.

두들기더라도 다양한 무술로 다채롭게 후려 패고 있었다.

진짜 괴물이네.

몸소 처맞으면서 느낀 건 기태랑의 경이로움이었다.

무술마다의 준비동작과 전개 과정, 타격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럼에도 기태랑은 이 모든 걸 몸에 익히고 있었다.

- 몸으로 기억해라.

기태랑은 내가 한 무술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다른 무술로 날 두들겼다.

그때마다 나 또한 달라진 무술을 배워나가며 반응을 하고 있었다.

뻐억!

"꾸헉!"

데굴데굴.

마지막 기태랑의 뒤차기를 맞으며 바닥으로 뒹굴었다.

엄살이 아니라 뒹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도 안 죽었구나.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오늘도 살아남았음에 감사를 느꼈다.

"내일 보자고."

기태랑이 쿨하게 손을 흔들며 산을 내려갔다.

항상 똑같은 스케줄이었다.

기태랑은 아침에 와 날 두들긴 후 산을 내려갔다.

"하아."

첫날은 뒤지겠구나 싶었는데.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몇 달이 지나니 더럽게 아프긴 해도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 반짝.

별 이쁘네.

이런 맛이 있었다.

하루종일 두들겨 맞은 후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

반짝이는 게 별인지 내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름다웠다.

내일은 비광 님 차례니 그나마 덜 맞겠네.

두 달 전.

내가 한참 두들겨 맞고 있는 정상으로 비광이 찾아왔다.

-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껴주라.

그렇게 날 두들… 아니지.

수련에 참가하게 된 비광.

다행이라면 비광마저 날 무참히 두들기진 않았다는 것이다.

- 도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

비광이 처음으로 내게 건넸던 질문이었다.

머선 소리고!

처음엔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나 의아했었다.

- 눈 감아봐.

쿡. 쿡. 쿡. 쿡. 쿡.

- 검지, 검지, 검지, 검지.

내 어깨를 찌르며 어느 손가락으로 찔렀는지를 말해준 비광.

쿡.

- 어느 손가락이게?

검지요.

라고 대답한 후 눈을 뜨자,

…! 

펼쳐져 있는 새끼 손가락이 보였다.

- 심리전. 도박이든 싸움이든 절대 빠지지 않는 게 심리전이야.

오른쪽이다 싶으면 왼쪽을.

왼쪽이겠다 싶으면 위를.

상대가 예측할 수 없게끔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

진짜 당연한 이치인데.

지난 싸움들을 떠올려보니 그냥 되는대로 공격을 퍼부었을 뿐 상대의 심리나 이런 것들까지 고려하진 않았었다.

- 하지만, 한끗 차이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싸움에서 공격마다 이런 걸 염두하며 싸우는 건 불가능하지.

톡톡.

비광은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미소를 지었다.

- 그래서 필요한 거다, 센스가.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방어와 공격에 묻어나오는 판단. 그게 전투 센스야.

그 날부터 비광은 내 전투 센스를 키워주겠다며 주기적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 삼땡.

빠악!

물론 강도만 덜 할 뿐 심리전에 패배해 처맞는 건 마찬가지였다.

"후우…!"

휴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챠."

이젠 보호대를 찬 채 돌산 전체를 한바탕 뛰어다닐 차례였다.

"가볼까."

* * *

달리기를 시작하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으어… 뒤지겠다."

처맞은 것도 모자라 달리기까지 하니 온몸이 녹초였다.

아니지, 녹초도 이렇게 히마리가 없진 않을 것이다.

엉금엉금.

낮은 포복을 이용해 목적지를 향해 기어갔다.

한 뼘만… 더!

퐁당.

손끝으로 강물의 시원함이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 담궜을 뿐인데 온몸으로 청량감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호다닥… 풍덩!

그대로 굴러 강으로 입수했다.

천국이다.

강 입장에선 땀에 절여진 내가 달갑지 않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나부터 살고 봐야지.

푸욱.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집어넣은 후 몸을 뒤집었다.

반짝.

눈을 뜨자 물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날 반겨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태랑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손꼽아 기다리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하아.

달궈진 몸을 서서히 식혀주는 시원한 물의 감촉과 세상에 나 혼자가 된듯한 고립감까지.

하루 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씻겨 흘러 가버리는 느낌이다.

강해지고 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

이 순간마다 항상 달라진 내 몸을 체크해 나갔다.

솔직히 처음엔 그냥 아프기만 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 머리와 몸은 기태랑의 싸움을 습득하고 있었다.

배워야지! 라는 머리에 의해서가 아닌, 엄청난 고통과 함께 자연스럽게 터득이 되는 중이었다.

꽈악.

그와 함께 몸 역시 말도 안 되게 성장했다.

대충 만져봐도 돌덩이 같아진 팔과 다리.

단단해졌어도 다이아몬드만큼은 아니기에 여전히 아팠지만, 확실히 단련되고 있었다.

내일이 안 왔으면 했는데.

수련을 하기 싫다거나 하는 그런 썩어빠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워낙 엄청나다 보니 좀 천천히 왔으면 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통에 의해 했던 이런 생각도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반대.

내일이 빨리 왔으면 했다.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더럽게 아프고 힘들었지만, 성장의 즐거움과 기대가 이러한 힘듦을 가볍게 즈려 밟아버린 것.

즐겁다.

고통과 별개로 미치도록 즐거웠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는 이 느낌.

이 고통 때문에 내가 죽는 게 아니라면, 난 계속 강해진다.

꾸룩.

"푸하아!"

한계에 도달한 숨에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상쾌했다.

차박.

물에서 나와 강 위에 있는 바위로 걸어갔다.

짧지 않은 하루였지만 아직 남은 게 있었다.

잠에 들기 전 빼먹지 않고 하는 마지막 루틴.

[잭 더 리퍼]

내 육체적 성장도 필요했지만.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 역시 중요했다.

면도칼을 꺼내 휘두르며 계속해서 감각을 살려 나갔다.

[앤 보니&메리 리드]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비전 수리검]

[스이카]

다른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일매일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무기를 꺼내 감각을 익히고 탐구해나갔다.

이전엔 너무 휘두르는데 급급했어.

내가 살아있으니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무기를 더 깊게 이해하며 완벽한 나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강해지자.

면도칼을 휘두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기와 함께.

* * *

돌산의 입구.

기태랑과 비광이 나란히 산을 올랐다.

"대단하네. 이 돌산을 맨날 오른다고?"

"호출이 있었던 날 제외하고는 맨날 올랐지.

비광이 기태랑의 정성에 혀를 내둘렀다.

"내가 생각하기엔 네가 더 대단한데? 그 좋아하는 도박도 멈춘 채 같이 오르고 있잖아."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는 비광.

"나야 일주일에 한 번인데 뭐."

기태랑이 그런 비광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주일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이 뭐가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비광에겐 대수였다.

'장관님의 호출이 아니면 도박장에 사는 놈인데.'

극강의 도박 중독과 귀차니즘.

이 두 가지가 합쳐져 만들어진 게 비광이란 인간이었다.

'나도 한 귀차니즘 하지만.'

비광과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런 비광이 지금은 매주 찾아와 자신과 돌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나랑 같은 이유겠지.'

기대감.

스승과 제자라던가 그런 낯간지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단지, 제자의 성장을 지켜보는 스승의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

원래도 알았지만 직접 지켜보니 혀가 내둘러졌다.

"저번 주에 보니 보호대는 적응 끝난 모양이던데."

"그런 거 같더군."

마각의 보호대.

첫날 돌산으로 보호대를 가져가면서도 너무 강행군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마각.

관련 능력자가 온갖 귀하다는 재료를 모아 만든 새로운 종류의 광석이었다.

전해져야 할 고통은 그대로 전해지지만, 직접적인 상처나 데미지는 받지 않는 특수 광물.

'그럼에도 쓰이지 않는 건… 저 미친 무게.'

만들기가 어렵고 시간까지 오래 걸려 대량 생산도 불가능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안 찾는 건 무게 때문이었다.

온갖 경량화 능력을 쏟아부어도 마각은 전부 튕겨내 버린 것.

그래서 모두가 사용을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마각 보호대 다섯 개를 한 번에 찬 것도 놀라웠는데.'

시간을 두고 하나씩 차라고 던져준 걸 처음부터 주섬주섬 다 차버린 백운.

그것도 모자라 몇 달 만에 마각의 무게를 완벽히 소화해버렸다.

"미친놈이야."

"미친놈이지."

같은 생각에 비광과 기태랑이 고개를 저었다.

"밤마다 미친놈처럼 뛰어다니는 거 같던데."

"하늘로 총까지 쏴대고, 무슨 귀신 울음소리까지 만들어내던데."

덕분에 기태랑은 동료 헌터에게 부탁해 돌산 주변을 결계로 둘러싸야 했다.

아무리 오지여도 이 정도 퍼포먼스면 빠르든 늦든 눈에 띌 것이었기 때문이다.

"뭐하는 놈이야, 대체."

"그러게."

비광의 궁금증엔 기태랑도 동감이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몸에, 무슨 능력이기에 저리 다채로운 힘을 쓸 수 있는 걸까.

"들어도 모르겠더군. 다양한 무기를 흡수하고 쓸 수 있다는데… 단순히 그게 끝이 아닌 거 같아."

기태랑이 궁금해하자 백운이 무기 별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각각의 무기를 꺼내 들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어."

"흐음."

산을 오르는 둘 사이로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둘은 알고 있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육체와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미친 성장 속도를 보여주는 괴물 같은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이 개방한 건 무기를 모으면 모을수록 강해지는 능력."

피식.

비광의 혼잣말에 기태랑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 말인 즉슨."

고개를 끄덕인 기태랑이 비광의 말을 이었다.

"강해지는데…."

돌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기태랑과 비광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한계가 없다는 것."

"한계가 없다는 것."

* * *

2년 뒤.

85화.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