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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

#200화

검을 치우지 않은 채, 이안이 덧붙였다.

"설명은?"

"해 드리겠습니다. …전부."

"좋아."

루스를 툭 밀어내며 멱살을 놓은 이안이, 입을 벌린 필립을 돌아보았다.

"이자는 지금부터 네가 맡아라. 만약 네 목숨까지 위험하게 하면 내 손으로 죽일 거니까, 그렇게 알고."

"…들으셨죠, 사제님? 제 뒤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십시오."

애써 태연하게 내뱉은 필립이 루스를 돌아보았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루스가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이안을 두려운 듯 일별한 그가 덧붙였다.

"저, 정말 예배당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겨우 두 분이서는-"

쿵, 문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펄쩍 뛴 루스가 숨을 멈췄다. 이안이 곧바로 몸을 돌리는 가운데, 필립이 루스의 팔뚝을 움켜쥐며 미소 지었다.

"염려 마십시오. 사제님은 그저 보고 들은 것들을 전부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루스를 이끌고 걸음을 옮기며, 필립이 미소 지었다.

"가면서요."

"아니, 자, 잠깐…."

루스가 더듬대는 사이, 이안이 문을 벌컥 밀었다. 문에 얻어맞고 비틀대는 망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스가 그 끔찍한 모습에 놀랄 틈도 없이, 이안의 칼이 무자비하게 놈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쓰러진 망자를, 이안이 손아귀에서 불덩이를 뿜어 태워 버린 것이다.

눈을 치켜뜨고 있던 루스가 멍하니 뇌까렸다.

"마, 마법…?"

"-무구라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시죠."

재빨리 덧붙인 필립이 복도로 나섰다. 그는 이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사제가 우물대거나 뒤처지거나, 헛소리나 해 댄다면 가차 없이 버리고 갈 터였다.

정말 직접 죽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교단의 성자인 백금룡의 대행자가 아닌가. 적당한 명분만 있다면, 주교의 목도 직접 날려 버릴 수 있으리라.

다행히 루스는 제 발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 홀로 남겨지면 결국 죽으리란 걸 어느 정도는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작하십시오, 사제님."

걸음을 옮기며 필립이 내뱉었다. 어둠 너머를 두리번대며 마른 침을 삼키던 루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일상적이었죠. 스테판 주교님의 지도 아래, 저는 엘로이 사제님을 도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제님과 수도사들이 동참하고 있었죠. 저녁에 대공자께서 연회를 여실 계획이셨으니까요.

그리고 갑자기 밖이 어두워지더군요.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곧 몇몇 사제님들과 주교님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돌아 보셨, 히익-!"

루스가 숨을 들이켰다. 옆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온몸이 버섯으로 뒤덮인 망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앞서 걷던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려 망자의 머리를 칼로 내리쳤다. 이어진 소란을 한 귀로 흘리며, 필립이 속삭였다.

"멈추지 마십시오, 사제님. 이제부턴 말씀을 멈추실 때마다 한 대씩 때릴 겁니다."

"...?!"

"저분에게 죽는 것보단, 그게 나을 테니까요."

루스의 시선에 덧붙인 그가, 슬며시 쇠장갑을 낀 주먹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루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도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제님들과 수도사들도 복도를 달리고 있었죠. 저처럼 무슨 일이냐고 묻는 자들도 여럿이었지만, 몇몇은 아주 다급하고… 놀란 표정이었… 습니다…."

루스가 울먹댔다. 이안이 앞서 걸어가는 가운데. 옆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망자를, 필립이 그의 눈앞에서 칼로 후려쳤기 때문이다.

신성이 아른거리는 검을 손에 쥔 채, 얼굴에 검은 피가 튄 필립이 루스를 돌아보았다.

"계속. 계속 하십시오, 사제님."

"그, 그래서…."

루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

말이라도 할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저들의 뒤를 따랐다면, 진작 기절해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

"끄… 으으…."

콰직-!

토막난 채 낮은 신음을 흘리던 망자의 안면에 검날이 깊숙이 틀어박혔다.

거무스름한 날에서 흐릿하게 번진 보랏빛이, 망자의 얼굴을 뒤덮은 버섯들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촉수처럼 꿈틀대던 버섯들의 움직임이 이내 멎었다.

"후…."

이안은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주위에는 토막나고 짓이겨진 망자들의 시체가 여럿 널브러져 있었다. 숨을 멈춘 동안 처치한 놈들이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이안은 흑검에 조금씩 밀어 넣던 혼돈력을 회수했다.

파스슷….

검날에 일렁이던 보랏빛이 사그라들었다.

검날에 일렁이던 보랏빛은 흑검의 고유 스킬인 역천의 송곳니가 아니었다.

이것들을 상대로 사용하기에는 소모값이 너무 높은 스킬이었다.

제대로 활성화한다면, 금방 그의 혼돈력을 전부 먹어치워 버릴 터였다. 다행히 임의로 혼돈력을 밀어 넣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망자들을 죽일 수는 있었으니까.

손아귀의 흑검이 아쉽다는 듯 옅은 울림을 토해냈다.

하여간, 욕심은.

내심 코웃음 치며, 이안은 복도의 어둠을 훑었다.

그가 길을 찾는 방식은, 사실 전혀 대단할 게 없었다.

공허의 마력이 더 짙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전부였다.

"…그, 그리고 다음 순간. 대문이 닫혔습니다. 저는 곧바로 문으로 달려갔습니다만, 전혀 열리지 않더군요. 그리고 뒤이어, 장내에 비명이 메아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는 유약한 사제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필립과 달리, 이안은 뒤를 돌아보지조차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 물론이고, 딱히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예 듣지 않은 건 아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안은 델라 루의 신상이 오염되었으며, 의식이 타락자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멋대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루스는 주교를 비롯한 타락자로 추정되는 사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무릎 꿇고 불경한 기도문을 읊어댔다고 증언했으니까.

물론, 이안이 알게 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상에 가까운 이들부터 줄지어 쓰러지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그제야 신상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검은 덩어리를 눈에 담았습니다. 주위로 이끼와 버섯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암흑이 찾아왔습니다. 모든 불이 꺼지고, 비명소리만이 사방에 메아리쳤죠."

자신이 베어 넘기던 망자들이, 도시의 소란을 피해 도망 온 주민들과 사제들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알게 됐으니까.

"저는 다시 불을 켜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배당의 벽면이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더군요. 간신히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비명이 모두 사라진 뒤였습니다. 저는 횃불을 찾아, 가지고 다니던 부싯돌로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눈앞에 지옥이 펼쳐지더군요."

루스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높낮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자신의 기억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전부 죽어 있었습니다. 아니,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무릎 꿇은 이들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할 기도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대고 있었으니까요."

"기억나는 구절은 없으십니까?"

"위대한 순환… 초월… 탈피…. 더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사실, 아주 단편적인 것들만 기억납니다. 저는 그때 단상 위의 어둠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으니까요. 보고 있기만 해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심연이었습니다."

마른침을 삼킨 루스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목걸이에 달린 주머니를 쥔 것이리라.

"절 일깨운 건 신성이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제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여신의 은총 덕분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도요. 그리고 다음 순간, 시체들이 꿈틀대기 시작하더군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루스가 이안이 죽인 망자를 수척한 눈길로 보았다. 이 금발 수도사의 얼굴은,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빠른 속도로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저는 도망쳤습니다. 언제 횃불을 던진 건지, 언제 계단을 오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두운 복도를 달리고 또 달렸죠. 사방에 울려 퍼지는 헐떡대는 숨소리와 발소리를 들으면서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벽장 안이더군요. 그리고 계속 숨어 있었습니다. …두 분이 저를 구해 주시기 전까지요."

그리고 지금은 그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고.

속으로만 뇌까리며, 이안은 코너를 돌았다.

어느새 사방이 이끼와 버섯으로 뒤덮여 있었다. 앞을 막아서는 망자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어서, 이안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걸음을 옮기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단상에서 본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필립이 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루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꿈틀대는 검은…. 알. 그래, 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발소리만 울려 퍼지는 적막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혹시, 두 분은 알고 계십니까?"

이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듯, 루스가 읊조렸다.

필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타락한 자들이 이 땅을 오염시킬 저주의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사제들이 있었고, 대공자도 그들과 한패였죠."

"대, 대공자께서요…?"

눈을 치켜뜬 루스가 더듬댔다.

"하지만 대공자는 더없이 신실한…."

"주교는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제들은요?"

"...."

"우리가 백작의 앞에서 대공자의 정체를 밝혀냈습니다. 그러자 곧 타락한 본모습을 드러냈죠. 그러면서 도시가 어둠에 잠긴 겁니다."

"루 솔라여…. 그럼, 두 분이 바로 그, 원로 요정의 기사들이신 거군요. 바실리스크를 참살한."

"그건 제가 아니라 저분이십니다. 이반… 경이요."

"...."

루스가 멍하니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가오는 망자의 머리를 날려버리고는 화염구를 내던졌다.

불길에 휩싸인 머리가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루스가 두려운 듯 침을 삼키는 사이, 필립이 덧붙였다.

"아마 의식이 시작된 건 그때일 겁니다. 사제님은 그걸 바로 옆에서 목격하신 거고요."

"…영주님은, 도시의 시민들은 무사합니까?"

"어느 정도는요. 하지만 우리가 어둠의 근원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희생은 더 커질 겁니다."

"...."

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서부의 평화에 익숙한 젊은 수도사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일 터였다.

그의 초점 없는 눈을 바라보며, 필립이 덧붙였다.

"어둠을 처단하는 건 우리가 하겠습니다. 사제님은 끝까지 살아서, 교단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보고하십시오. 어쩌면 사제님이 모든 비극을 시작부터 끝까지 본 유일한 목격자일지도 모릅니다."

"…제 증언을 믿어 줄까요? 저 역시 제가 본 것들이 믿기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받아들일 겁니다."

단언한 필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만약 사제님이 끝까지 살아남으신다면,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알려 드리도록 하죠."

"그게 무슨…."

"이제 둘 다 입 닫아."

이안이 말을 자른 건 그때였다.

필립과 루스의 시선을 받은 그가, 고개를 까딱여 앞을 가리키고는 덧붙였다.

"계단에 다 왔으니까."

"...!"

필립과 루스의 고개가 동시에 앞으로 돌아갔다. 그의 말대로였다.

저 앞의 어둠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 1층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깊은 심연이 펼쳐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이 루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려가면 바로 예배당인가?"

"…예, 아마도요.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쯤-"

"당신은 내려오지 마시오."

말을 자른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계단 위에 있어라.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내려오지 말고, 사제를 지키면서 자리를 사수해라."

"…예.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그때 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잠시 입을 뻐끔대던 루스가 간신히 내뱉었다.

"혼자, 혼자 가신다고요?"

"그게 더 편하니까."

검을 늘어뜨린 이안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시오. 여기서 겪은 일들을, 바깥세상에 알릴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

멍하니 입을 벌리는 루스를 등진 채, 이안은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어두운 와중에도 발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계단에 가득 번진 이끼 때문일 터였다.

'마력은 충분하고… 혼돈력도 이만하면 부족하진 않고….'

이안은 차분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곧 계단의 끝이 보이면서 주위가 어슴푸레하게 밝아졌다. 예배당의 전경이 뒤이어 펼쳐졌다.

가득하다던 시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온갖 색의 이끼와 버섯들이 장내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 무릎 꿇은 채 몸을 숙인 사제들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하나 같이 등이 불룩 튀어나온 채, 맞잡은 앙상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지만, 공허의 마력만큼은 선명했다.

"...."

하지만 이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사제들이 경배하고 있는, 단상 위의 거대한 덩어리였다.

실제로 보니 알보다는 번데기에 가까워 보였다. 우화를 준비하듯, 내부에서 혼돈력이 꿈틀댔다.

중요한 건, 아직 그 과정이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

이안은 생각과 동시에 내달렸다.

단상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흑검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푸스스-

십자 막이를 타고 번진 아지랑이가, 뒤이어 검날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201화

검 자루가 손아귀에 뿌리를 내린 것 같은 묘한 감각. 흑검이 혼돈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십자 막이에서 넓게 시작돼 검날 끝으로 모여들며 일렁이는 보랏빛 아지랑이는, 이름대로 송곳니처럼 보이기도 했다.

흑기사가 사용할 때와 달리 보라색인 건, 동력원이 용의 마력이 아니라 혼돈력이기 때문일 터였다.

푸스스스슷-

장내에 가득한 이끼와 버섯들이 떨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삽시에 암녹색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들이마시면 안 될 것 같은 색. 본능적으로 숨을 멈춘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생각나네, 시발.

그때의 서부 곳곳에서 피어오르던 독 안개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부패의 안개. 부식의 연무. 병균 덩어리 등, 저마다 다른 이름과 효과를 가지고 있던 것들.

치이이이-

이건 부패의 안개인 모양이었다. 강철 장화를 신은 발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독, 병균, 포자. 정확히 무엇이 원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몸을 발끝에서부터 녹이고 있었다. 재빨리 멈춰 선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아직 단상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루스의 말대로 예배당은 작은 운동장만 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만하면 흡혈 여제의 알현실과도 필적할 만한 넓이였다.

저 검은 덩어리에 닿을 때쯤엔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으리라.

물론 시간만 충분하다면 회복하지 못할 부상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멈춰 서서 피할 공간을 찾는 건, 눈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분명 눈이 멀어버리리라.

일격에 덩어리를 끝장내지 못한다면 남은 싸움을 장님이 된 채로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해도 결과적으론 달라질 게 없었다.

시각 없이 싸우는 게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샬롯처럼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직 정체도 알 수 없는 보스와의 전투에서는 더더욱.

'왜 보스전 인트로는 다 이따위지.'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몸을 돌려 물러났다. 가장자리에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지 않는 공간들이 있었다. 적어도 당장은 안전한 공간이었다.

쩍, 쩌저적-

돌에 균열이 가는 듯한 소리가 번진 건, 이안이 예배당의 텅 빈 가장자리에 도착한 직후였다. 미끄러지듯 멈춰선 그는, 역천의 송곳니를 비활성화하며 소리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역시. 저것들도 단순한 배경은 아니었고.'

부자연스럽게 불룩 튀어나와 있던 사제들의 등이 순식간에 더 크게 부풀고 있었다. 안개에 부식되어 녹아내리는 사제복 사이로,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탈피하는 거군.'

필사적으로 의식을 치른 보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게 저들이 원하던 방식의 보상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너희들도 타긴 하겠지.'

자욱한 암녹색 안개와 탈피 중인 사제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불그스름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홍채 한복판에 아른거리는 보랏빛이 번쩍였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딴 이벤트 컷씬 따위가 끝나기를 멀뚱히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 부패의 안개가 금방 사그라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다 해도 언제든 다시 피어올라 발목을 붙잡으리라.

게임에서라면 안전지대를 찾거나 방어 스킬을 활용하는 식으로 공략해야 했겠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훨씬 쉬운 방법도 선택할 수 있었다.

혼돈력과 뒤섞인 마력이 흑검으로 밀려 들어가며 끌어 올랐다.

흑검이 짜증스럽게 울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끝이 붉게 물드는 검날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샛노란 불길이, 거칠게 넘실대며 번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암녹색 안개가 화염 해일에 휩쓸려 타들어 갔다. 그 아래의 이끼와 버섯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불길을 넓게 퍼뜨렸다. 넘실대는 붉은 물결에 휩쓸린 이끼와 버섯들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요란하게 타들어 갔다.

쩌저적-

화염 해일에 휩쓸리는 것보다, 사제들의 탈피가 조금 더 빨리 끝났다. 눅진한 점액에 뒤덮인 괴물들이, 잠자리의 그것과 비슷한 여러 겹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탈피하고 남은 껍데기들이 힘없이 널브러지고, 곧 불길의 파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여전히 검을 앞으로 내뻗은 채, 이안의 붉게 물든 눈동자가 날아오르는 것들을 훑었다.

거대한 벌레에 가까운 형태였다.

세 쌍의 기다란 잠자리 날개.

여러 겹의 홑눈이 달린 머리는 꼽등이에 날카로운 턱을 더한 것처럼 생겼고, 점액에 뒤덮인 몸은 키틴질의 갑피를 두른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가슴부터 몸통까지 이어진 여덟 쌍의 긴 다리 끝, 가위처럼 날카로운 집게가 독액을 뚝뚝 떨어뜨렸다. 앞쪽으로 두툼하고 길게 휘어진 몸통 끝에는 송곳니 같은 가시가 삐죽삐죽 돋은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있었다.

'거참 징그럽네.'

몸에 뒤덮인 점액이 마르기를 기다리듯 날갯짓하던 놈들이, 곧이어 일제히 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쩌저적-

가시 돋은 구멍이 벌어졌다. 그 너머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얼굴들이 드러났다. 진흙으로 빚은 안면상 같았다. 놈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다. 흰자위 하나 없이 새카만 눈동자.

"애석한 일이로구나…."

날벌레들이 윙윙대는 듯한,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어째서 이토록 명료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이냐?"

"…스테판 주교?"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입을 우물대던 놈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입술 아래로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 불리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 거대하며 영원한 순환의 일부가 되었으니…. 이제 나, 아니 우리는 부패와 질병을 흩뿌려 순환의 진리를 설파하는 전도자이자, 위대한 아버지의 참된 자손이며-"

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양됐다. 순환의 전도자로 거듭난 타락자들이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집게발을 멋대로 딱딱댔다.

공허의 존재로 거듭난 쾌감이 엄청난 모양이었다.

물론, 놈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여전히 저 타락자란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로불사나 힘, 금단의 지식에 대한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 대가로 저딴 몰골이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본인들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됐다고 여기겠지만. 이안이 보기엔 많고 많은 공허의 괴물들 중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저들 대부분은 이미, 머잖아 이 세계가 멸망하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이후를 준비하는 걸지도.

"그래… 확실히, 평범한 아버지는 아니군."

비로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뒤이어 꾹 주먹을 천천히 움켜쥐며 덧붙였다.

"자식들 얼굴을 엉덩이에 박아놓을 생각을 하다니."

"한번 시작된 순환은 이제 그 누구도…. 뭐라고 했지?"

자아도취에 빠진 것처럼 떠들어대던 스테판이 뒤늦게 되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 이안이, 그를 턱짓했다.

"너희는 이제 어디로 먹고 어디로 싸지?"

"그게 무슨 조잡한- …?!"

뭔가 내뱉으려던 스테판이 멈칫했다. 곧 그가 날개를 흔들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콰르르르르-

예배당을 불태우며 멀어지던 화염 해일이, 어느새 더 거칠게 넘실대며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길은 냇물이 합쳐지듯 이안을 향해 모여들면서, 점점 더 격렬하고 빠르게 출렁였다.

콰아아-

"갸- 아아악-?!"

계곡을 흐르는 격류처럼 밀려든 불길이 후미의 전도자 몇을 휩쓸었다. 아직 채 점액을 다 떨쳐내지 못했던 그들이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그 바로 뒤의 몇이 다급하게 위로 솟아올랐다.

마찬가지로 더 높이 날아오르던 스테판이 몸통 아래의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네 이놈, 참으로 마법사다운 잔머리를-"

하지만 그의 말은 이번에도 끝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이안이 돌풍에 휩싸인 채 그의 앞까지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아네."

내뱉음과 동시에, 이안은 다시 역천의 송곳니를 활성화한 흑검을 내리쳤다.

뾰족하게 일렁이는 보랏빛 아지랑이가 스테판의 윗머리에 틀어박혔다.

카드드드득-

머리와 가슴이 반으로 갈라짐과 동시에, 몸을 웅크린 이안이 스테판의 몸통 위에 발을 얹었다.

놈이 돌진력에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이안은 끝까지 멈추지 않고 가랑이 사이로 검을 내리찍었다.

콰직-!

보랏빛 칼날이 스테판의 아래 얼굴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짙은 녹색의 체액을 뿜으며 반으로 갈라지는 몸통을, 이안이 힘껏 박찼다.

"갸- 아아아-"

반으로 갈라지며 비명을 토해내던 스태판이 밀려드는 불의 격류 속으로 떨어져 타들어 갔다.

놈을 박차고 솟구친 이안은 정작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또 다른 순환의 전도자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웨에엑-!"

이안을 노려보던 놈의 아래 얼굴이 쩍 아가리를 벌렸다. 새카만 토사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진짜 얼굴로 싸네.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허공을 박찼다. 몰아친 돌풍이 그의 궤적을 나선으로 비틀었다. 이안이 토사물을 지나치며 밀려들었다.

여덟 개의 다리가 발작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안이 그 사이를 뚫고 놈의 품에 안기듯 파고든 게 조금 더 빨랐다.

콰득-!

역수로 쥔 보랏빛 칼날이 놈의 몸통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양발을 놈의 몸통에 디딘 이안이, 자루를 똑바로 고쳐 쥐며 힘차게 박찼다.

콰지직-!

칼날이 몸통 옆면을 썰며 빠져나오고, 뒤따라 이어진 아지랑이의 궤적이 전도자의 한쪽 날개를 두 개나 찢어발겼다.

"키- 아아아악-!"

전도자가 아래 얼굴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빙글빙글 추락했다. 짝이 맞지 않는 날개로는 균형을 잡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안은 이미 왔던 방향을 되돌아 포물선을 그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황급히 흩어지는 순환의 전도자들을 훑었다.

놈들은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여유와 환희로 가득하던 얼굴에는 당혹과 충격이 뒤엉켰고, 몇몇은 구멍을 오므려 아예 얼굴을 감춘 채였다.

이안의 입꼬리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나도 해 봐서 아는데. 새 육체와 힘이라는 게, 그렇게 바로바로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공허의 존재로 거듭났을 뿐, 놈들의 본질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제대로 싸워 본 적 없는 사제들.

제아무리 강대한 힘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의 과정을 거쳐 온 이안처럼.

"...."

잿빛 가운데 보라색을 머금은 이안의 눈이, 이윽고 정면에서 밀려드는 불길의 격류를 마주 보았다.

그는 피하려 하는 대신, 허공에서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콰르르르-

역류하는 화염 해일과 이안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다음 순간.

푸화악-!

혼돈력으로 증폭된 휘몰아치는 방벽이 불길을 빨아들이듯 휘어 감으며 터져 나왔다.

일순간 속도가 줄어든 전도자들이 휘청댔다.

불길을 머금은 돌개바람이 천장까지 치솟았다가, 곧이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흩어졌다.

콰아아아아-

"키아아악-?!"

전도자들이 불길을 머금은 돌풍에 휩쓸렸다.

그사이 천장까지 튕겨 오른 이안은, 몸을 돌려 천장에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구구국, 천장에 거꾸로 선 그의 전신이 압력에 짓눌렸다. 그의 양발을 중심으로 균열이 번졌다.

'사실상 이 정도면 화염 폭풍이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닌가.'

아직 익히지 못한 고위 마법 중 하나를 떠올리면서도, 이안은 곧장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향한 건 불길에 뒤엉켜 추락 중인 전도자들 쪽이 아니었다.

불길이 휩쓸고 간 단상. 그 위의 거대하고 새카만 덩어리.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가 단숨에 인식됐다.

몇 번의 원치 않는 능력치 배분 이후로, 그의 인지능력과 반사 신경은 초인적인 수준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집중력과 육감 특성이 한계치까지 활성화된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불길에 휩쓸려 끈적하게 타들어 가는 표면. 그 너머로 아른거리는 선명한 자줏빛과 그 사이로 득시글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들.

그리고 쩌적, 꼭대기에서부터 시작돼 순식간에 번지고 있는 균열까지 인식한 순간, 이안은 굽히고 있던 다리를 힘껏 박찼다.

억눌려 있던 그의 전신이, 압력을 떨쳐냄과 동시에 포탄처럼 뿜어져 나갔다.

쒸아아악-!

화염 돌풍의 잔재를 뚫고 지나가면서, 이안은 흑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보랏빛 아지랑이가 만들어낸 궤적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떨어져 내렸다.

#202화

콰지지직-

검날은 이미 균열이 시작된 거대한 덩어리의 표면을 아주 손쉽게 찢어발겼다. 쇄도하던 충격으로 덩어리 표면에 처박히면서도, 이안은 검을 쥔 팔까지 덩어리의 안으로 깊숙이 밀어넣었다.

새빨갛게 일렁이던 그의 눈동자가 보랏빛과 뒤섞여, 한순간 과열된 것처럼 타올랐다.

쩌저저적-

덩어리 윗부분이 완전히 갈라져 벌어진 것과, 내부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콰-아아아-!

터져나온 거대한 불기둥이 덩어리 표면은 물론, 그 안에 담긴 것들까지 집어삼키며 솟구쳤다.

콰르르르-

장내를 새하얗게 물들인 폭발이 천장까지 치솟았다. 그 사이로 무수히 많은 조각들이 밤하늘을 물들이는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폭발에 휩쓸려 튕겨 나가면서,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각이 완전히 마비된 탓이었다. 피어오른 푸른 역장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반 박자 늦은 발동이었지만,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

콰장-창-

역장에 휩싸인 이안이 물수제비처럼 바닥에 튕기고는 처박혔다.

우지직, 등에 닿는 감촉이 벽과는 조금 달랐다. 기분 나쁘게 으깨지는 딱딱함. 반사적으로 흑검을 역수로 고쳐 쥔 이안이, 옆구리 뒤로 힘껏 찔러 넣었다.

콰지지직-

"키-이잇-"

섬뜩한 감촉과 함께 벌레 울음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은 몸을 돌려 검날이 한 바퀴 선회할 때까지 휘두르고는, 더 이상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자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사선으로 잘려 나간 전도자가 끈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쿠르르르…

이안은 천장을 뒤덮은 열기가 흩어지는 걸 느꼈다. 본래라면 건물을 무너뜨리고도 남았을 폭발이었다. 하지만 매캐한 연기와 열기, 진동만이 느껴질 뿐 천장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파사사사삿- 파사삿-

대신 온 사방에 날갯짓 소리가 가득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안은 수백 수천의 불덩이들이 사방을 수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하나하나에 담긴 공허의 마력도.

"참으로 대단한 주문이로구나…."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이안의 귀를 파고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뭐야, 뒈진 거 아니었어?

이안이 감각을 끌어올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연기를 잔뜩 삼킨 듯한 스테판의 칼칼한 목소리가 다시금 번져나갔다.

"하지만 결국 필멸자의 하찮은 발버둥일 뿐이다…. 부패와 질병은 거대한 순환의 일부이며, 죽음 또한 마찬가지이니…. 순환과 하나 됨은 곧 불멸이라…! 보아라…! 저 위대한 군집을! 죽음 속에서도 다시 태어나는 무한한 균사체의 물결을…!"

갈라지고 뒤집힌 목소리 사이로, 역장에 부딪혀 바스러지는 것들의 소리가 우박처럼 이어졌다. 이안은 다시 한번 왼팔을 까딱여 마력 역장을 생성하면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오로지 순환만을 원하는 탐욕스러운 자손들이 이 땅에 강림하였으니… 이는 필멸자들에게는 대재앙의 징조이자 시작이요, 순환의 자손들에겐 불사의 축복이라…. 너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마법사야. 이미 순환의 고리는 이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그 시작이자 일부에 불과하니-"

하여간 졸라게도 말 많네, 새끼.

생각하는 와중에도, 연기에 뒤덮인 날갯짓 소리가 어지럽게 몰아쳤다.

까득까득, 까드득-

고막을 긁는 듯한 소리가 쉴새 없이 이어지고, 크고 작은 괴상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순환의 전도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토해내면서도, 스테판이 목소리를 높였다.

"두려워 말라, 아들들이여! 이 또한 순환의 과정일지니…! 끄, 끝내 위대한 아버지께서 이 땅에 눈뜨시어, 만물을 품으시리라…! 나,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목소리가 비명과 뒤섞였다. 가볍게 고개를 털던 이안의 눈동자가 비로소 한곳에 멈췄다. 되돌아오는 시야 한복판, 퀘스트 창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한한 탐욕의 균사체.

'균사체…?'

미간을 찌푸리며 창을 닫은 이안이, 곧이어 스테판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물어지는 푸른 역장 너머.

수없이 날아다니는 불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메뚜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하나하나가 팔뚝만 하고 훨씬 더 끔찍하게 생긴 벌레들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땅에는 이미 숯덩이가 된 것들이 널브러져 굴러다녔다.

그 사이로 훨씬 더 작은놈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그 잔재들을 먹어 치우며 다시 자라났다.

순환의 전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의 몸 곳곳에는 균사체들이 뒤덮여 있었다. 이안이 들은 고막을 긁는 소리는, 그것들이 좌우와 위아래로 동시에 벌어지는 날카로운 턱으로 전도자들을 갉아 먹으면서 낸 소리였다.

뭐, 무한 증식이라도 하는 건가?

생각하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균사체들에게 갉아 먹히고 있는 스테판에게서 멈췄다.

이안에게 잘린 반쪽은 다 타 버렸는지, 놈은 세로로 갈린 반절만 겨우 남아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가슴 아랫부분과 몸통 일부, 그리고 탄 흔적이 역력한 아래 얼굴 절반만이 간신히 남아 꿈틀댔다.

그리고 놈 역시 균사체들에게 갉아 먹히는 중이었다.

검을 움켜쥔 이안이 몸을 날렸다.

콰직, 다시 보랏빛 아지랑이를 토해내기 시작한 흑검이 그대로 균사체 하나의 몸을 갈랐다.

아주 단단한 갑피를 가르는 듯한 감촉과 함께 균사체의 몸이 반으로 갈려 나갔다. 놈의 몸속에는 내장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다. 겉과 똑같은 누르스름하고 매끈한 단면만이 널브러졌을 뿐이었다.

'이건 이것대로 또 토 나오네.'

인상을 찌푸린 이안의 눈매가 붉게 물들었다. 그대로 또 다른 균사체를 베어낸 그의 주위로 춤추는 불꽃들이 연달아 피어올랐다. 불꽃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부글대며 기어 나오던 새 균사체들이 불길에 휩쓸려 타들어 갔다.

퍼버버버벙-

달리는 이안의 등 뒤로 폭발이 줄지어 이어지는 가운데.

고통스러운 건지 환희에 찬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스테판이 소리쳤다.

"나, 나는 순환의 일부로 돌아가, 다시… 다시 태어나리라…! 아버지의 곁에서…!"

콰직-! 콰득!

그 앞까지 도달한 이안이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스테판의 육체를 거의 다 뜯어 먹어가던 균사체 세 마리가 연달아 썰려 나뒹굴었다. 아지랑이에 닿은 부분들이 새카맣게 녹아내리는 사이, 이안이 왼손을 내뻗었다.

화르르르-

손아귀에서 뻗어나간 화염 방사가 균사체들의 단면을 불태웠다.

사방에 날아다니는 불붙은 균사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반만 남은 스테판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돌아가?"

"...?!"

"거기서 뒈져 가면서 보고 있어라. 내가 이 메뚜기들을 전부 다 구이로 만들어 줄 테니까."

거친 숨결과 함께 내뱉은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하나 남은 눈을 부릅뜨며 올려다본 것도 잠시. 이안의 눈에 가득 선 핏발과 코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발견한 놈이, 놀란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구나…! 너도 공허에 속한 자였어! 누구의 뜻을 대행하느냐…? 심연의 혼돈…? 꿈꾸는 종말? 그도 아니라면, 혹 음탕한-"

콰직!

스테판의 커다란 아래턱을 짓밟아 부숴 버린 이안이, 놈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좀 닥쳐. 머리 울리니까."

그딴 별칭 같은 건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속으로만 덧붙인 그가 몸을 돌렸다. 어떻게 균사체가 이렇게 벌레처럼 움직이고 날아다니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무한하다는 게 탐욕만을 뜻하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타죽은 것만 해도 수백에, 폭발에 휩쓸려 재가 된 것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게 분명하건만.

파사사사사삿- 파사사-

잿더미 사이로 요란하게 날아오르는 놈들은, 이미 수백은 족히 되고도 남아 보였으니까.

'팔뚝만 한 벌레가 무한이라. 아주 토 나오고 좋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상 위에서도 거대한 덩어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균사체들이 뒤엉켜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그 사이를 뚫고 날아오르는 놈들도 끝이 없었다.

가만히 두면 이대로 끝도 없이 증식하고, 예배당은 물론이고 교회 전체를 가득 채울 게 분명했다. 아마 그 뒤엔 결계를 갉아먹고 밖으로 날아가겠지.

그럼 서부의 종말이나 다름없는 재앙이 시작되리라.

'하지만 게임에선 왜 이것들을 본 기억이….'

해답은 의문과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직전에 받은 퀘스트의 이름이 곧 답이었으니까.

실패의 결과. 의식이 실패한 결과물이 이놈들인 것이다.

의식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존재가 현신했으리라. 아마도 더 끔찍한.

물론 이제 와서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것들의 증식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방금 받은 퀘스트의 내용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행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파사사사사-

심상치 않은 마력의 응집을 느낀 듯, 무리 지어 솟구치던 균사체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삽시에 이안의 시야를 누런 벌레들이 가득 채웠다. 작물을 휩쓰는 메뚜기 떼를 왜 천재지변이라 여겼는지 알 것 같은 광경이었다.

'…지금이 지옥불을 써야 할 순간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샛노랗게 달아오른 흑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르르르르-

검에서 쏟아져 나온 건 화염 해일이었다. 처음으로 익힌 적색 고위 마법인 지옥불을 사용하기엔, 애석하게도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고위 마법은 그 이름만큼이나 엄청난 소모값을 자랑했다.

콰아아아아-

하지만 그저 화염 해일만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새로 익힌 또 다른 상위 마법이 있었다.

여전히 붉게 휘몰아치던 이안의 눈빛이, 불의 물결을 전부 토해내고 난 직후 다시 번뜩였다.

내뻗은 검날이 한차례 크게 출렁였다.

쾅-! 콰과광-!

균사체들을 불태우며 번지는 불의 물결 위로, 불규칙 적인 크고 작은 폭발이 치솟기 시작했다.

연쇄 폭발. 본래는 넓은 범위에 무작위 일점 폭발을 만들어 냈을 상위 적색 마법은, 화염 해일과 더해지자 곳곳에서 용암이 분출되는 듯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또다시 단숨에 막대한 마력을 소모한 이안이 잠시 비틀대는 사이.

쾅-! 콰르르르-

곳곳에서 폭발과 함께 치솟은 불의 격류에 휩쓸린 균사체들이, 속절없이 녹아내리며 바스러졌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던 이안이 자세를 다잡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번지는 화염 해일과 통제를 벗어나 마구잡이로 폭발을 이어가는 불기둥. 그리고 끝내 살아남아 달려드는 균사체들을 차례로 응시한 그의 눈동자가, 곧 보랏빛을 품은 잿빛으로 일렁였다.

바람이 전신을 감싸며 휘몰아치고, 이안이 다시 내달렸다.

쒸아악-

갓 쏘아 보낸 화살 같은 속도. 날아드는 균사체들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극한까지 치솟은 긴장감이 신경을 녹일 것처럼 과열시켰다.

혼돈력을 게걸스럽게 삼키던 흑검이 뿜어져 나갔다.

콰지지지지직-

검날이 만들어 내는 궤적이 무한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그 앞에 걸친 균사체들이 몇 토막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썰려 나갔다.

뱀파이어의 하수인들을 분쇄하던 무아지경의 검격이 다시 한번 재현되고 있었다.

그때만큼 힘이 강하고 빠른 건 아니었지만, 다행히 흑검은 군단장의 대검보다 훨씬 가벼웠다. 게다가 전신을 뒤덮은 바람도 움직임을 더 빠르게 보조했다.

콰과과과과과-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하고 나아가면서, 이안은 흑검이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살육에 미친 마검은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살육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끝내 자신의 검신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더라도. 자신을 휘두르는 주인의 육체가 무너져 내리더라도 끝까지.

이안은 그런 녀석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의지에 함께 몸을 맡겼다. 지금은 사방에 죽여야 할 것들만 가득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흑검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능력치 보정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쾅-! 콰르르르르-

어느새 번져나가던 불의 물결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바로 옆에서 치솟아 오르는 폭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안은 기꺼이 화염 해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신에 휘몰아치던 바람 칼날이 불길을 빨아들였다.

이안은 다시 한번 혼돈력을 불어넣은 바람 칼날을 시전하면서,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숨을 쉴 때마다 몸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파사사사사-

어느새 단상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위로 뭉쳐 있는 거대한 덩어리가 일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놈들은 저 안 어딘가에서 끝없이 태어나면서, 그와 동시에 동족들과 뒤엉켜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증식의 근원은 저 한복판에 있겠지.'

혼돈의 파편이 그의 추론을 증명하듯 울었다.

콰르르르-

앞서나간 화염 해일이 균사체 덩어리의 표면에 넘실대며 부딪혔다. 휩쓸린 것들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찰나.

콰앙-!

샛노란 폭발이 덩어리의 일부를 사방으로 튕겨내며 치솟았다.

불타고 조각난 균사체들이 쏟아져 내리는 한복판으로, 전신에 불길을 머금은 이안이 뛰어들었다.

#203화

"...!"

먼 뒤에서 지켜보던 스테판의 하나 남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균사체들에게 뜯어 먹힌 몸이 검게 썩어들어가고 있었지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이안이 용암처럼 폭발하는 불의 물결을 만들어 낼 때부터, 단 한 순간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이 마력의 황혼기임을 잊게 만드는 엄청난 주문은 물론이고, 그가 선보이고 있는 검술 역시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용맹한 야만 전사나 백전을 경험한 기사라도 저런 광경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제국에도 몇 되지 않는다는 검의 명인들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마법사가 선보일만한 기예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공허의 힘까지 느껴졌다.

'공허의 힘이 담긴 마검인 것인가…?'

착각이 아니었다. 새로운 감각 기관을 손에 넣은 덕분에, 스테판은 궤적마다 휘몰아치는 혼돈력을 눈으로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공허의 존재가 아닌 이상 저렇게 다룰 수는 없을 텐데. 그럼, 주문은 대마법사에 필적하고 검술은 명인에 필적하는 자가 공허의 힘까지 다룬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저 앞에서 버젓이 현실이 되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서, 설마. 인간의 탈을 쓴 혼돈의…?'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비로소 스테판은 하나 남은 눈을 더 커질 수 없을 때까지 부릅떴다.

'그럼, 의식이 갑자기 시작되 버린 것도, 전부 저 자 때문에?'

당장 달려가 확인받고 싶었다. 아귀가 딱 맞는 자신의 추론이 사실인지.

물론,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그는 이 순간에도 옴짝달싹할 수 없이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해답을 줄 당사자는 득시글대는 균사체의 한복판에 있었으니까.

콰과과과과-

불길과 보랏빛 아지랑이로 뒤덮인 궤적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면서.

이안은 반쯤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며 균사체의 군집 속을 멈추지 않고 파고들었다. 전신의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신경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이제 와선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춘 순간 저 균사체들이 그를 뒤덮을 테고. 눈 깜짝할 사이에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뜯어먹어 버릴 테니까. 그리고 나선 아마도 저것들로 되살아나 거대한 순환의 일부가 되리라.

매번 하던 것과 비슷한 생각이 뒤이어 뇌리를 스쳤다. 정말 게임에서도 이런 식으로 공략하는 보스전이었던 게 맞을까 하는.

하긴. 이 균사체들은 하나하나는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게임에서는 일반 몬스터와 싸울 때와 같은, 소위 핵 앤 슬래시라 부르는 형태의 보스전이 되었으리라.

밀려드는 것들을 끝없이 썰어 죽이며 꽤나 손맛을 느꼈을 지도.

게다가 그때는 지금처럼 신체의 결손이나 후유증 따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부식의 연무는 장비의 내구도 감소를, 부패의 안개는 도트 데미지를. 병균 덩어리는 각종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식으로만 단순하게 작동했었으니까.

그저 캐릭터가 죽지 않게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리해 줬으면 충분했을 터였다.

물론,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부분이었다.

콰지지직-

어쨌건 그는 이 끝없는 증식의 원흉에 거의 다가선 상태였으니까.

파편의 울림을 느끼며, 이안은 균사체들의 사이로 설핏 드러나는 형체를 눈에 담았다.

'역시, 신상이네.'

2미터를 훌쩍 넘는, 새카맣게 물들어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델라 루의 신상.

번영을 상징하는 풍요와 나태의 여신이, 지금은 순환을 상징하는 부패와 질병의 매개체가 되어 끝없는 탐욕을 잉태하고 있었다.

콰지직-

신상의 표면에서 버섯처럼 돋아나던 균사체들이 짖이겨졌다.

쩌엉, 검날이 신상에 틀어박혔다.

이안은 신상 내부에서 신성력과 혼돈력이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눈앞으로 섬광 같은 환영이 스쳤다. 자주색으로 물들고 있는 신성의 근원. 그 한복판에 불길한 공허의 표식이 상형 문자처럼 일렁였다. 아마도 타락자들이 치르던 의식의 징표일 터였다.

'신성의 근원을 오염시켜서 의식의 동력원으로 삼으려 한 건가.'

시간만 충분했다면 완벽하게 성공했을 터였다.

지금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동력원으로 삼고 있긴 했지만, 근원이 전부 오염된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균사체의 증식을 막는 방법은 간단해 보였다.

신상을 표식과 함께 파괴해 버리면 그만이리라. 그의 마법은 물론 일격까지 견뎌낸 걸 보면 내구도가 상당해 보이긴 했지만. 공격을 몇 번 더 반복하면 끝내 부서질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신성의 근원까지 사라지겠지.'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본래라면 타락해야만 가능했을.

충혈되어 있던 이안의 눈동자가 한순간 타올랐다.

콰- 앙-!

검날 아래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주위를 뒤덮은 균사체들을 불태우고 이안의 반신까지 집어삼켰다.

열기 속에서도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이안은 폭발 한복판의 신상을 눈에 담았다.

'감사 인사는 축복이나 돈으로 해라.'

스킬 포인트면 더 좋고.

속으로 덧붙인 이안이, 왼팔을 뻗어 새카맣게 물든 신상의 손을 움켜잡았다.

혼돈의 파편이 기다렸다는 듯 울림을 토해냈다.

***

"루 솔라여…."

복도 끝. 계단으로 접어드는 구석에 쪼그려 앉은 금발의 사제, 루스가 탄식했다.

그의 시선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계단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발의 기사가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고 작은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계단 위까지 밝히는 번쩍이는 불빛과 희미한 열기. 복도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은 덤이었다.

여기선 저 아래에 도사린 것은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란 루스가 화들짝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필립을 바라보았다.

하긴. 두려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망자들이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그 가엽고도 끔찍한 것들을 상대한 건, 물론 이 갈색 머리의 성기사였다.

그는 루스를 이곳에 놓아둔 채로, 휙 하니 복도의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필립의 검은 이제 꽤 빛이 바랜 상태였다. 그의 얼굴에 방울져 흘러내리는 검은 핏물을 멍하니 응시하던 루스가, 강철 장갑을 떠올리고는 화들짝 입을 열었다.

"저, 전 괜찮습니다. 경은 어떠십니까…?"

"저야 뭐, 일상이라서요. 이제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더는 남은 망자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다행입니다만…."

루스의 시선이 계단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안심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아. 저쪽이 더 신경 쓰이시는 거군요."

필립도 계단 저 멀리 아른거리는 불빛을 눈에 담았다. 쾅, 또 한 번의 굉음이 이어졌다.

"염려 마십시오. 저분에게도 저게 일상입니다. 이반 경은, 지지 않아요."

"확신하시는군요."

"저 분이 진다면, 이 세상이 끝장나 버릴지도 모르거든요."

"...?"

루스의 어리둥절한 시선에, 필립이 재빨리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만큼 강한 분이라는 얘깁니다. 믿어 보십시오. 우리가 싸워 없앤 공허의 괴물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체."

당신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루스는 턱 끝까지 나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무례하게 들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계단 아래에서 번진 빛이 필립의 얼굴을 은은하게 밝혔다.

루스는 비로소 이 성기사의 나이가 자신과 그리 차이 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정말 또래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의 눈에도 은은한 두려움이 맺혀 있었다. 다만 그걸 이겨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깨달은 루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필립 경."

"예?"

"경은 어쩌다 성기사가 되신 겁니까?"

"그게…. 이런.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군요. 저는 성기사가 아닙니다. 아직 기사 서임조차 받지 못했죠."

"...!"

머리를 긁적인 필립이 내뱉은 말에, 루스의 눈이 커졌다. 필립이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종자입니다. 성기사를 섬기는. 그저 운 좋게 성물을 손에 넣은 애송이일 뿐이죠."

"...."

"속여서 죄송합니다, 사제님."

필립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루스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해도 제 목숨을 구해주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더 놀랍군요. 성기사를 섬기는 건, 정말이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는데요."

피식한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행히 우리 나리들은 까다로운 분들이 아니십니다. 이반 경도 저래 보이지만, 사실 따듯한 분이시고요. 물론 위험한 건 맞긴 합니다. 아주 위험하죠. 대부분."

"…그럼, 왜 그만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토록 위험한 사명을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이유라니요…?"

오히려 고개를 갸웃한 필립이 이내 덧붙였다.

"어둠의 족속들과 목숨 걸고 싸우는 분들을 돕는 건데, 다른 이유가 왜 필요합니까?"

"...."

말문이 막힌 루스가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계단 저 아래에서 굉음과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루스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를 바라보는 종자의 머리 뒤로, 옅은 광채가 아른거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불빛이 잦아들면서 필립의 얼굴 역시 함께 어두워졌다.

빛의 산란이 만들어낸 착시에 불과했겠지만.

"어쩌면… 당신은…."

쿠구구구구-

루스가 중얼대는 그때, 복도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묘한 압력이 루스의 전신을 짓눌렀다.

눈을 치켜뜬 필립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엎드리십시오, 사제님."

"예, 예…!"

납죽 엎드리는 루스의 옆으로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원형 방패를 루스의 몸 위를 덮듯이 치켜든 채였다. 혹시 천장이 무너질 것을 대비하는 게 분명했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루스가 고개도 들지 못한채 소리쳤다. 필립의 차분한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교회를 감싼 결계가 사라지고 있는 걸 겁니다. 마경이 닫히고 있는 것이거나요."

"...!"

놀란 루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필립을 올려다 본 그가 멍하니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은, 설마."

"예. 이반 경이 이긴 겁니다."

"화, 확실한 겁니까…?"

필립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아마도요.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거든요."

흡혈 여제가 죽었을 때. 미로 저택의 결계가 사라지며 느껴지던 감각과 아주 흡사했던 것이다.

물론 필립은 그런 부연 설명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진동과 압력, 기묘한 감각의 엇갈림에 몸을 맡긴 채 차분히 기다릴 뿐이었다.

곧 진동이 잦아들었다.

루스의 머리를 가린 방패를 거두며, 필립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훨씬 짧아진 복도에는, 짓이겨지고 토막 나고 불에 탄 시체들이 가득했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필립이, 마찬가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계단을 돌아보았다.

"끝… 난 겁니까?"

루스가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운 필립이 미소 지었다.

"예. 내려가시죠."

"이, 이렇게 바로요?"

"소리 들으셨잖습니까. 나리를 챙겨야죠. 그게 제 역할입니다."

"...."

몸을 돌린 필립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입술을 몇 차례 달싹이던 루스도, 복도에 가득한 시체들을 돌아보고는 군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곧 예배당의 전경이 펼쳐졌다.

예배당은 온통 불에 탄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탄내가 진동하고, 바닥에는 잿더미가 수북하게 뒤덮여 있었다. 완전히 가루가 되어서, 본래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물론 필립과 루스는 잿더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둘은 장내에 들어선 순간부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델라 루여…."

만신창이가 된 단상 위, 델라 루의 신상이 온전한 모습으로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흠집이 생겨나긴 했지만. 어쨌건 본래의 형태를 거의 잃지 않은 데다 은은한 빛까지 머금고 있었다. 신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에 감격한 눈빛이 된 건 루스 뿐이었다.

필립은 신상의 무릎 아래를 눈에 담은 순간, 곧바로 잿더미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잿더미 속에서 뒹군 것 같은 몰골이 된 이안이, 신상의 발치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전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한 이안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푸스스, 그의 전신에서 잿가루가 흩날렸다. 비로소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은 루스가 입을 쩍 벌렸다.

엉망진창이 된 이안의 전신에도, 신상에 맺힌 것과 같은 흐릿한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반 경…."

이윽고 루스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델라 루께 선택받으셨습니까…?"

신상에 불경하게 몸을 기댄 이안이, 머리카락을 털며 내뱉었다.

"받긴 했는데, 거절했소."

"...?!"

루스의 눈이 더 커졌다. 다가오는 필립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이안이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나랑은 안 맞는 분이거든."

#204화

"그게 대체…?"

루스가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사이. 단상으로 올라선 필립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어떤 놈들이었습니까?"

"역겨운 놈들이었지. 늘 그렇듯이."

손수건을 받아든 이안이 얼굴의 재를 닦기 시작했다. 재와 섞인 코피가 찐득하게 묻어나왔다.

'갈 거면 곱게 좀 갈 것이지.'

혀를 차는 이안의 뇌리로, 방금 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혼돈의 파편은 신상을 물들인 혼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허의 표식을 곧바로 없애버리지는 못했다.

혼돈에 억눌려 있던 신성의 근원이 멋대로 신성력을 토해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공허의 표식을 태워버리기 시작하면서, 이안의 몸속까지 밀려들었다.

사도 퀘스트가 떠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물론 이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절했지만. 델라 루의 신성은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의 몸속을 맴돌고는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신성의 일부가 이안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뒤이어 체력 수치 하나가 영구적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델라 루가 축복을 내린 것이었으리라.

'지능이나 정신력을 올려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바스러지던 공허의 표식이 단말마 같은 혼돈력을 토해낸 건 그때였다. 혼돈의 파편은 신성력이 그 혼돈력을 태워버리기 전에 냉큼 자신의 일부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환영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지금까지와 비슷한 건 아니었다.

"계속 그렇게 기대 있으실 겁니까…? 상당히 불경해 보이는 건, 알고 계시죠?"

필립이 넌지시 물은 건 그때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저 뒤에 선 루스를 의식한듯한 말투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피식댔다.

"어쩌라고. 내가 구한 신상인데, 도와준 덕은 좀 봐야지."

"아. 신성으로 회복하려고 기대고 계셨던 거군요. 혹시, 어디 다치셨습니까?"

"마음이."

"...?"

아무 말이나 내뱉은 이안이, 필립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신상에 머리를 기댔다.

거의 모든 종류의 신성력이 그렇지만, 델라 루의 신성력에는 특히 회복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신성력이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몸에 조금씩 활력을 불어넣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몸속에 남은 불길한 기운들까지 녹여내고 있었다. 균사체들이 병균이나 포자라도 뿌려댔던 모양이었다.

'고작 한 번만 덕 보고 말기엔 아까운데….'

이안이 나른하게 생각하던 그때.

"주교님과 사제님들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루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소를 흘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것들을 아직도 그렇게 부르시는군."

"…죄송합니다. 입에 익어서요."

"당신이 밟고 있는 것들 어딘가에 섞여 있을 거요."

"...!"

그제야 루스가 바닥을 뒤덮은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찬란한 여신의 이름을 중얼대는 사이,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정말 죽은 건지, 그 놈의 순환으로 돌아간 건진 모르겠지만."

"순환… 이라니요?"

그래, 물어볼 줄 알았다.

이어진 필립의 대답에, 이안이 눈도 뜨지 않은 채 앞쪽을 턱짓했다.

"그런 게 있어. 가서 문이나 열어. 곧 나갈 거니까."

"조금 더 쉬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곧 일행 분들이 이쪽으로 오실 텐데요."

"글쎄. 그건 봐야 알 것 같은데."

"...?"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묘한 불길함을 느낀 듯, 필립이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다시 한번 중얼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감사 인사가 고작 이게 끝이오?"

물론 필립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슬쩍 한쪽 눈을 떠 신상을 돌아보면서, 그가 덧붙였다.

"내가 본 걸, 당신도 이미 알 텐데. 서부를 구하고 싶다면, 구경만 하지 말고 당신도 나와 내 동료들을 좀 도와 보시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신에게 말을 건 게 효과가 있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해 본 것뿐.

"...!"

정말 효과가 있었다. 신상에 맺힌 신성력이 은은하게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든 이안이 신상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그때.

"그, 이안 경…."

어느새 단상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루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썹을 치켜든 채로,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씀하시오."

"…감사합니다. 신상을 정화해 주신 것도,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신상을 정화한 은혜는 그쪽이 갚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끙, 하고 신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이안이, 손바닥으로 신상을 툭툭 치며 덧붙였다.

"찬란한 여신의 장녀께서, 직접 보답을 주시려는 것 같으니까."

"...? 그건 또 무슨."

쩌적,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거의 동시였다. 눈을 치켜뜬 루스가 소리가 난 신상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아래로 늘어뜨린 오른손에 은은한 빛이 뭉치고 있었다.

투두둑-

다음 순간 깔끔하게 잘려나간 신상의 손가락이 단상에 떨어졌다.

다섯 손가락은 신상에서 분리되고 나서도 저마다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델라 루여…."

루스의 입이 벌어지는 가운데.

몸을 숙인 이안이 돌로 만들어진 손가락들을 하나씩 주워들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보다 통이 크시군."

머릿수에 딱 맞게 줄 줄이야.

내부에 신성의 근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신상의 남은 근원을 조금 쪼개서 담아준 모양이었다.

심지어 정보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델라 루의 은총. 유물 등급의 장신구였다.

체력 수치 하나는 물론이고 체력 회복력까지 조금 올려 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상태 이상 저항력이었다. 중독을 비롯한 다섯 가지 종류의 저항력을 제법 많이 올려주는 것이다.

비단 이곳이 아니라도 두고두고 쓸만한 장신구였다.

'내구도가 낮은 게 흠이지만….'

심지어 다섯 개가 전부 같은 능력치였다. 물론, 전부 가지고 있다 해서 능력치가 중복되어 오르지는 않았다.

"이걸 담을 주머니를 만들어 주시오. 목에 걸 수 있게. 다섯 개 전부."

"…예. 그러겠습니다."

이안이 손가락들을 품에 넣으며 내뱉었다. 루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비로소 단상에서 내려온 이안이 어깨를 털었다.

잠깐 쉰 보람이 있었다. 두통과 현기증은 여전했지만, 이건 신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력 소모의 여파였으니까.

끼이이-

필립이 닫혀 있던 교회의 문을 힘껏 당겨 연 건 그때였다. 그러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어둡던 장내가 조금 밝아진 게 전부였다.

문 너머를 응시하던 필립이, 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저것들이 아직도 움직입니까? 하늘은 왜 여전히 어둡고요…?"

"역시 그렇군…."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태연한 표정에 필립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역시라니… 알고 계셨던 겁니까?"

"예상은 했지."

이윽고 문 앞에 잠시 멈춰선 이안이 거리를 눈에 담았다. 필립의 말대로였다. 아직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넘실대고, 땅에는 널브러진 망자들이 꿈틀대며 기어 다녔다.

"그래도 싸울 필요는 없겠네. 저것들, 죽어가고 있어."

태연하게 덧붙인 그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도시의 망자들은 신상을 오염시키던 공허의 표식에서 힘을 공급받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대기 중에 섞인 오염된 마력에 반응해 아직 움직이는 것뿐, 곧 완전히 시체로 되돌아갈 터였다.

'균사체들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뒈진 거고. 허술한 척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이 확실하다니까….'

루스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보내던 필립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왜 말씀을 하다 마십니까…? 어떻게 예상하신 건데요?"

"잘."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며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의 뇌리에는 마지막 순간에 본 환영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본 공허의 환영처럼 보랏빛이나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어둠 한복판이었다. 그리고 혼돈을 품은 존재감은 그 너머에서 느껴졌다.

교회의 문고리를 쥐었을 때 본 환영에서와는 다른 놈이었다. 어둠 너머의 기척은, 그놈처럼 이안을 단숨에 압도해 버리지는 못했다.

그 촉수 여럿 달린 놈은 공허의 절대자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이 기쁘지는 않았다. 우르릉, 하는 천둥 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보고 있는 환영이 공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대륙이었다. 아마도 서부 어딘가. 그리고 환영이 끝남과 동시에 떠오른 퀘스트 창이, 그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줬다.

"그… 으으…."

신음하며 꿈틀대는 망자를 지나쳐, 이안은 대로로 접어들었다. 루스의 팔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면서, 필립이 덧붙였다.

"또 뭔가 보신 거군요. 뭐였습니까?"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여러가지를 종합해 봤을때…."

덤덤하게 말하던 이안이,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져 있던 피 묻은 장검을 주워들었다. 흑검은 진작 아공간에 넣어 둔 상태였다. 그걸 들고 살아남은 주민들과 병사들 앞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식이 여기서만 이루어진 건 아닌 것 같더군."

"...?!"

이어진 말에 필립은 물론 루스도 눈을 치켜떴다. 손목만 움직여 검을 한차례 휘휘 돌린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으로 따라 붙으면서, 필립이 말을 이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말고도 이런 끔찍한 의식을 준비하던 곳이 또 있단 겁니까? 거기서도 의식이 시작된 거고요?"

"아마도. 알아들었으면서, 뭐하러 또 묻냐?"

"…제가 잘못 이해한 거길 바랐거든요."

그러시겠지.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맥없이 손을 뻗는 망자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거리 곳곳에 죽음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망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필립이 중얼댔다.

"만약 다른 곳에서도 의식이 시작된 거라면… 이곳과 같은 종류의 의식을 준비했다는 뜻일 겁니다. 한날한시에 의식을 치를 생각이었던 거겠군요.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충격받은 표정이 된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서부의 타락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겁니다. 적어도 의식을 주도한 자들은요."

당연한 얘길 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하네.

하긴. 필립은 그가 던져주는 작은 조각들만으로 퍼즐을 맞춰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안에겐 당연한 것도, 그에겐 큰 깨달음일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으리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 그 꼭대기엔 아마도, 내가 찾는 놈이 있겠지. 경이 찾는 그놈도, 아마 연관되어 있을 테고."

"루 솔라여… 드디어…."

"내가 지금 하는 말들을 까먹지 마라. 같은 말 여러 번 하고 싶진 않으니까. 네가 알아서 잘 전달해."

"물론이죠.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해 보겠습니다. 맙소사… 그저 암약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니…. 아니, 어쩌면 변방에서 그런 짓들을 벌인 건, 이런 순간들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저마다 준비하던 의식을 치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대륙이 어둠에 잠기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든 필립이 혼잣말 하듯 중얼대기 시작했다.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는 사이.

"이게, 이게 다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루스의 더듬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타락한 사제들이 이 드네로브에만 있었던 게 아니란 겁니까? 이런 저주받을 의식이 또 준비되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이미 시작됐다고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이젠 이 놈도 난리네.

이안은 헛웃음을 삼키며 루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 금발의 수도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이아기였던 모양이었다. 혼란에 빠지다 못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하긴. 어쩌면 이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이 세계의 인간 대부분은 타락자를 볼 일도 없거니와, 본다 해도 알아보지도 못할 테니까.

당연히 놈들이 얼마나 미친 짓을 벌이는지,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게 될 때쯤엔, 이승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 될 테고.

아주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았음에도, 루스는 여전히 보편적인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그의 심정을 배려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성문으로 이어진 대로로 접어들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그렇소. 그리고 거긴, 의식이 제대로 성공한 것 같더군. 이곳과 달리."

"...!?"

#205화

눈을 부릅떴던 루스가, 이윽고 더듬대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의 의식은, 실패한 거였단 말씀이십니까…? 그게요…?"

그 부분에 더 놀랐던 건가.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잘 쳐 줘 봐야 절반의 성공이겠지."

신성의 근원까지 오염시키며 준비한 의식이, 고작 메뚜기 떼나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테니까.

드네로브의 타락자들이 진짜 원했던 건, 아마 고대신의 화신체나 그에 준하는 존재를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것이었으리라.

환영 속, 어둠 너머의 그놈 같은.

신성의 근원을 완전히 오염시킬 수 있었다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스테판을 비롯한 사제들도, 그 벌레 같은 모습보다는 더 그럴듯한 무언가로 거듭났으리라.

물론 그런 사실까지 전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드네로브의 의식은 실패로 끝났으니까.

폐허가 된 거리를 돌아보며, 루스가 탄식했다.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게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면, 의식이 제대로 성공한 곳은 그럼…."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지."

"맙소사… 루 솔라여…."

루스가 망연자실하게 탄식을 흘렸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곧 중얼댔다.

"주, 중앙에 이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서부는 식량을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해와 검은 군도, 그리고 내해를 이어 주는 아, 아주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교단에서도 곧바로 대응에 나설 겁니다. 어쩌면, 황실에서도요. 아니, 분명히-"

"그건 댁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안이, 저 앞에 보이기 시작한 성문 인근으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우린 우리 갈 길을 갈거니까."

"갈 길이라니요…? 드, 드네로브를 떠나실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게 왜 그렇게 놀랄 일이오?"

"그, 그야…."

루스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지나쳐 온 모든 풍경이 그랬지만, 이 인근은 특히 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이 변한 건물들. 곳곳에 널브러져 꿈틀대는 망자들.

굳게 닫힌 성문은, 포개져 널브러진 망자들로 반 가까이가 가려져 있었다. 문 앞으로 잔뜩 몰려들어 뒤엉켜 있었던 게 분명했다.

드네로브가 오늘의 비극을 극복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어쩌면, 다시는 예전 같은 모습을 되찾지 못할지도 몰랐다.

루스가 간신히 내뱉었다.

"…여러분들이 남아 도시의 재건을 도와 주신다면,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의식이 성공한 곳들은 마경으로 자리 잡겠지. 마경은 점점 넓어질 거고, 끝내는 서부를 뒤덮을 것이오. 드네로브도 예외는 아니겠지."

"...!"

이어진 이안의 심드렁한 대답에, 비로소 루스가 눈을 치켜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들이 서부를 떠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막으러 가시겠다는 겁니까? 이곳을 구원하신 것처럼…?"

"구원은 무슨…."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목적지가 겹쳤을 뿐이오."

퀘스트와 보상이 기다리니까.

물론, 루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놀람과 경외가 뒤섞인 눈으로 이안을 바라본 것도 잠시. 화들짝 눈을 깜빡인 그가 말을 이었다.

"물론 여러분이 대단한 용사들이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교단의 성전사들을 기다려, 그들과 함께 토벌하시는 편이…."

"자꾸 꿈 같은 소릴 하시는군. 헛소리 그만하시오."

이안이 혀를 차며 내뱉은 핀잔에, 루스가 입술만 달싹였다. 욕을 먹을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음 지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사제님 말씀대로, 교단도 황실도 아마 즉각적으로 대응에 나설 겁니다. 타락자들이 제국의 영토에서 본색을 드러낸 것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중앙에서 보낸 지원군이 도착할 때쯤엔 모든 게 늦어 있을 겁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타락자들이 과연, 자신들이 일을 벌이면 토벌의 대상이 되리란 걸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확신했던 거예요. 중앙의 지원이 도착할 때쯤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한 뒤일 거라는 걸."

비로소 이 순진한 사제의 얼굴이 창백한 걸 넘어 납빛이 되었다. 숨조차 쉬지 못하던 그가 이윽고 간신히 내뱉었다.

"그, 그자들의 목적은 대체 뭐랍니까? 이런 죽음과 혼란만을 낳는 게 그들의 목적입니까?"

"예. 아마도 서부 전체를 부패와 질병이 뒤덮인 죽음의 땅으로 만들려는 거겠죠. 타락자들은 그 대가로 영생을 얻고, 이 땅에서는 강대한 힘을 휘두르며 살게 될 겁니다."

"루 솔라여…."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의식은 이제 막 시작됐고, 아직 서부 전체가 더럽혀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막을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나리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걸 테고요. 그렇지요, 나리…?"

필립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낮게 실소했다. 제발 그렇다고 해 달라는 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더니, 막판에 가선 본인도 확신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결계는 깰 수 있고 마경은 닫을 수 있지. 공허의 존재들은 무적이 아니야. 설사 죽일 수 없더라도,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 그러니까…."

성문 앞에 쌓여 있는 망자 더미로 성큼성큼 다가서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기억을 잘 떠올리는 게 좋을 것이오. 사제. 살린 값은 하셔야지."

"...?"

고개를 기울이는 루스를 외면한 채, 이안이 쌓인 시체들을 치워내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망자들은 가늘게 경련할 뿐, 이제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재빨리 그의 옆으로 따라붙으면서, 필립이 덧붙였다.

"이곳의 타락자들은 대부분 사제였지 않습니까."

"...!"

"그들의 과거,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다른 도시의 사제들. 그리고 의식을 치를 만한 서부의 도시가 몇이나 되는지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분명 서부를 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내뱉은 그가 이안과 함께 시체를 치우는 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망자들을 휙휙 옆에다 던져 놓는 이안과 달리,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망자들을 옮겨 놓고 있었다.

그런 둘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스가, 이윽고 내뱉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두 분께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게 제가 여러분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어쩌면 제가 살아남은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교회로 돌아가 곳곳을 뒤져 보겠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사명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툭, 시체를 옆으로 던진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알았으니까, 와서 이거나 도우시오."

"…아, 예."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 루스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말은 거창하게 한 주제에, 이 꿈틀대는 망자들에게 손을 댈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사제들이란.

낮게 실소한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때는 너도 가서 도와줘라. 물건 뒤지는 건, 네 특기잖아?"

"나리께 잘 배운 덕분이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쿠르르르-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움직임을 멈춘 이안과 필립이 좌우로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병사들 몇이 좌우에서 문을 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낯익은 실루엣이 드러났다.

"...?!"

문을 열자마자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듯, 메브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를 마주 본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몰골이 아주 볼만하시군."

메브의 상태 역시 그 못지않게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붉은 머리칼은 그렇다 쳐도, 얼굴과 정복도 온통 검붉은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메브는 이안의 농담에 웃음 짓는 대신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문을 연 병사들이 냉큼 움직여 문 앞을 가로막은 망자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군.

이안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하긴. 그녀가 싸우는 걸 눈앞에서 봤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곧바로 걸음을 옮겨 다가오면서, 메브가 입을 열었다.

"교회로 가지 못해 미안하다. 어떻게든 상황을 끝내고 합류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설명하실 필요 없소. 이미 대충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주군과 샤론은?"

말을 자른 이안이 물었다. 멈칫한 메브가 낯을 굳혔다.

"그게 내가 늦은 이유 중 하나다. 샬, 아니, 샤론이 부상을 당했어."

"예…?!"

이안의 미소가 굳어지는 가운데,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던 필립이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샤론이 당할 만한 상대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그랬지. 갑자기 불길한 마력이 짙어지더니, 온몸에 촉수가 달린 놈들이 주위의 망자들을 끌어당겨 이어 붙으며 거대해졌다. 그리고는 독기가 섞인 숨결을 토해내더군. 병사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과 샤론이 전부 상대하신 거군."

이안이 말을 맺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메브를 보며,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언제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타락자들이 공허의 존재로 거듭나고, 균사체들이 밀려 나오던 그때. 아마 도시의 망자들도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었으리라.

어쩌면 문 앞에 쌓여 있는 이것들도 서로 이어 붙었다가 떨어진 것들일지도 몰랐다.

"지금, 어디에 있소?"

"안전한 곳에. 주군과 함께 있다."

"안내하시오."

아직 남은 시신들 위로 올라선 이안이, 엉거주춤하게 뒤에 선 루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시오. 백작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건, 그쪽이 해주셔야겠으니까. …너도다, 필립."

뒤따르는 필립에게 덧붙인 그가 걸음을 재촉했다.

***

메브는 이안을 성벽 밖으로 이어진 판자촌의 끝으로 안내했다.

살아남은 병사들과 주민들은 곳곳에 널브러진 망자들을 추스르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메브를 마주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오셨군요, 이반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 시종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새로 임명된 시종장인 모양이었다. 그는 이안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이었다.

"백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함께-"

"보고는 이 둘에게 들으라 하시오."

눈길도 주지 않고 내뱉은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루스를 이끌고 시종을 따라갔다. 그들이 향한 건 병사들 몇이 호위 중인 판잣집이었다.

메브는 그 옆의 또 다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앞에 병사 몇과 시종 하나가 서 있었다.

"부르기 전까진 아무도 들이지 마라."

메브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고개를 숙인 시종이 옆으로 물러났다. 메브가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이안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장내로 들어섰다.

"...! 이…!"

낡아빠진 침상 옆에 앉아있던 테사이아가 이안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말을 끝맺지 못한 건 이안이 검지를 입술 앞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메브와 마찬가지로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테사이아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다.

"상태는 어떻지?"

이안이 침대로 다가서며 말했다. 숨을 멈추고 있던 테사이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안 좋아. 독인지 저주인지 모르겠어. 마력을 밀어 넣어 봤는데, 씨알도 안 먹혀. 어떻게 해야 돼, 이안? 이러다 우리 야옹이가-"

"요란 떨지 마라, 귀쟁아…."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사이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가온 이안을 올려다보며, 샬롯이 마른 혀를 날름댔다.

"면목이 없군. 또 당했다…."

"그건 딱 봐도 알아."

내뱉으며, 이안은 샬롯의 상태를 살폈다. 목덜미와 팔, 옆구리 따위에 할퀴고 물린 상처가 여럿이었다. 가장 깊은 건 옆구리의 상처였다. 커다란 촉수에 쓸린 것 같은 흔적. 저주의 마력이 느껴졌다. 갑옷을 걸쳤더라면 입지 않았을 상처들이었다.

다행인 건, 그 와중에도 그녀의 반대쪽 옆구리에는 부러진 단죄의 검이 기대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티르 엔의 신성력으로 중화할 수 있는 한계는 넘었겠지만, 어쨌건 저주가 번지는 건 늦춰주고 있었으니까.

"아주, 온 몸을 던졌군."

오른손의 장갑을 분리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덕분에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샬롯이 아니었다면 아마 반 정도는 더 죽었을 거야."

"이 멍청한 야옹이가, 나는 못 오게 했어. 내가 빠지면 방어선이 무너지니까, 혼자 막으려고 했다고."

테사이아가 덧붙인 말에, 샬롯이 짧게 코웃음 쳤다.

"네 실력으로는 짐만 되니까 오지 말라고 한 거다. 멍청아."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죽진 않겠군."

내뱉으며, 이안이 맨손이 된 오른손을 샬롯의 옆구리 앞에 펼쳤다. 손가락에 감겨 있던 늪지의 원한이 뱀의 형태로 돌아가 그 위에 떨어졌다. 입을 쩍 벌린 녀석이 샬롯의 옆구리를 깨물어 저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혹시나 했는데. 되는군."

"효과가 있는 거야…? 살 수 있는 거지?"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자꾸 멋대로 죽이지 말라는 샬롯의 중얼거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였다.

"아마도. 운이 좋군."

아공간에 손을 넣은 이안이, 아까 품에 넣는 척 밀어 넣었던 델라 루의 은총을 다섯 개 전부 꺼내 들었다.

"델라 루에게 감사 인사라도 한 번 더 해야겠어."

#206화

"델라 루…?"

고개를 갸웃한 테사이아가, 이안의 손아귀에서 번지는 은은한 빛을 눈에 담았다.

"이게, 델라 루의 신성이야?"

"…성물이군. 아니, 성물의 파편인가."

벽에 기대선 메브가 말을 받았다. 이안의 손바닥에 놓인 돌 손가락들을 응시하며, 그녀가 덧붙였다.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이냐? 신성의 근원은 자른다고 쪼개지는 것이 아니며, 본래라면 그저 평범한 돌 조각이 되었을 것인데."

"여신께 달라고 했소."

"...?"

메브가 귀를 의심하듯 눈을 깜빡였다. 샬롯의 목덜미와 팔뚝을 비롯한 상처 부위에 델라 루의 은총을 하나씩 얹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타락자들은 신상을 더럽혀 의식의 주체로 삼았소. 그걸 내가 정화했으니, 그 보답을 달라 청했을 뿐이오."

"그랬더니… 보답을 주셨다고?"

"보다시피."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니, 아니다. 의미 없는 의문이군. 이미 그 결과물이 버젓이 있으니."

멍하니 내뱉던 메브가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말을 맺었다.

하긴 뭐, 나도 정말 될 줄은 몰랐으니까.

속으로 중얼댄 이안이, 마지막 남은 엄지 조각을 쥐며 덧붙였다.

"이 녀석이 회복되고 나면, 각자 하나씩 나눠 가질 것이오. 겪어 보셨다시피, 독과 병을 뿌리는 것들을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르니까. 이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요."

"그래. 그렇겠지. 감사합니다, 풍요로운 여신이시여…."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은 메브가, 그대로 입술만 달싹이며 델라 루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샤아-

환부에서 입을 뗀 늪지의 원한이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은 오른손을 내뻗었다. 냉큼 튀어 오른 검은 실뱀이 그의 중지에 감기기 시작했다.

…이 놈, 조금 길어진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었다. 녀석이 손가락에 반 바퀴 이상 더 감긴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엔 이 녀석을 끼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까.

전에도 그러더니, 저주가 이 녀석에게는 양분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 정말 성장형 아이템인 건가.

'아직 능력치는 그대로인데….'

생각하며, 이안은 마지막 남은 엄지를 샬롯의 옆구리 위에 얹었다.

이런다고 능력치가 중첩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성력이 닿는 면적이 넓어지면 회복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모든 정보가 반드시 수치상으로만 표시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흐릿한 주황색 눈을 마주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자라. 버티지 말고. 다 끝났으니까."

"그래…. 정말이지… 면목이…."

중얼대던 샬롯이 눈을 감았다.

왜 자꾸 면목 타령이야.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하긴. 샬롯은 유독 부상이 잦은 편이긴 했다. 전투 방식이 워낙 과격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본인은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터였다.

어쨌든, 샬롯의 표정과 숨결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삼킨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그녀가 누운 침대를 훑었다. 빈말로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선 없던 병도 생기겠는데."

"여봐라!"

테사이아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를 바라보는 테사이아의 눈가에 핏줄이 돋아나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로 요정의 늪색 눈동자가 마력을 머금고 일렁였다. 평범한 사람은 제대로 마주 볼 수조차 없는 안광.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작께, 별관의 수습과 정리를 최우선으로 하시라 전하거라. 부상자를 옮겨야 하니."

"예, 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공…!"

고개를 조아린 시종이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사람 부리는 게 너무 빨리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잊고 있던 두통과 현기증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테사이아가 미간을 좁히며 읊조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역겨운 마력이 느껴지지? 신상을 정화했다며. 분명히 망자들도 흐물흐물하게 다 나자빠졌었는데."

"그야. 다 끝난 게 아니니까 그렇지."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한 이안이, 테사이아와 메브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 녀석만 푹 쉬어야 하는 게 아니야. 우리도 오늘의 피로를 풀고, 떠날 준비를 바로 시작해야 돼.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실해지면, 바로 떠날 수 있게."

"의식은 막았다며? …설마, 여기가 끝이 아닌 거야?"

"자세한 얘기는 이따 필립에게 들어라."

"조금만 해 줘. 궁금하단 말야."

귀찮아 죽겠네, 진짜.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별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의식이 시작된 건 여기만이 아니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래. 신상에 새겨진 표식을 없앨 때, 잠시 그쪽이 보이더군. 마법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거야."

"같은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서부의 타락자들은… 전부 한통속이었던 건가."

어느새 싸늘해진 표정으로 메브가 읊조렸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확실한 건, 또 다른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뿐이오. 여기서 넘어온 것들보다 훨씬 강한 무언가가 실체를 갖췄더군. 그곳의 타락자들도 더 큰 보답을 받았겠지. 어쩌면…."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이 말을 맺었다.

"그 사이엔, 경이 쫓는 놈도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지도…."

가라앉은 눈으로 읊조린 메브가, 이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외면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이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막아야 해."

"기대되네."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과 메브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또 어떤 괴상한 놈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실전이 최고의 연습이란 말이 맞았어. 오늘만 해도, 실력이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니까. 분명 그것들을 다 족칠 때쯤엔 나도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은 알겠다만. 기대된다는 말은 옳지 않다. 테사."

잠시 그녀를 마주 본 메브가,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이니까."

"나도 알아, 빨강 머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막으려고 노력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일어났잖아? 이안도 그랬다구,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안 그래, 이안?"

"…틀린 말은 아니다만. 타락자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군."

이안의 싸늘한 핀잔에, 테사이아가 흠칫한 얼굴로 메브를 돌아보았다.

"아, 그, 그랬지.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내가 귀쟁이라 그래. 생각 짧고 이기적이라서."

자학까지 곁들인 사과에, 메브가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나는 괜찮다. 그래도 사과해 주어 고맙구나, 테사."

"…사과의 의미로 앞으론 군말 없이 도울게. 그게 아니라도 도울 거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머쓱하게 샬롯의 정수리 갈기를 쓰다듬던 테사가, 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교회에 넘어온 괴물은 정확히 어떤 놈이었는데? 여기 있던 놈들만큼 역겨웠어?"

"필립에게 들어라. 그 녀석이라면 네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신나게 떠들어 줄 테니까."

맥없이 내뱉은 이안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 침대 맡에 뒤통수를 기댄 채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비죽인 테사이아가 샬롯의 갈기로 시선을 돌리고, 메브도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

울려 퍼진 노크 소리에 테사이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장내로 들어선 건, 물론 필립이었다.

"네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주근깨."

테사이아의 말에 눈을 끔뻑인 필립이, 문을 닫고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테사가 저러는 걸 보니, 샬롯은 괜찮은 모양이군요."

"고비는 넘겼다."

이안이 입술만 움직여 대답했다. 메브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필립."

"예. 저도 꽤 길어질 줄 알았습니다만. 백작의 반응이 의외로 담백하더군요. 본인이 처한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미 다 받아들인 모양이었습니다. 게다가 테사가 사람을 보냈던데요."

"응. 맞아. 백작이 뭐래?"

"그러겠다고 전하라더군요. 그리고 나선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지금은 보고 보다 수습과 정리가 우선이라면서요."

말하면서 검과 방패, 장갑을 차례로 벗어 내려놓은 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면 마차를 보낼 테니, 우리는 잠시 쉬고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알았다 답하고 돌아온 길입니다. 루스 사제님이 함께 가셨으니, 못다 한 이야기는 그분께 따로 들으시겠죠."

"그래… 잘 됐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안이 고개만 까딱대는 사이, 테사이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우리한테도 네가 설명해 주기로 했다면서?"

"아, 예. 그렇습니다. 전부 설명해 드려야죠. 백작께 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음?"

휙 날아온 물건을 받아든 필립의 눈에, 곧이어 화색이 돌았다. 술병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아공간에 쟁여 뒀던 술을 꺼내 던진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리…! 맙소사, 이 한 병이 여신의 은총처럼 느껴지는군요."

필립이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내뱉는 가운데, 술병에 시선을 고정한 테사이아와 메브가 잽싸게 그의 앞에 착석했다.

…이제야 좀 편히 쉬겠군.

술병 마개가 열리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이안이 눈을 감았다.

"마차가 오면 깨워라."

이어진 필립의 목소리는, 훌륭한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

드네로브의 주민들은 평화에 익숙할지언정 나약하지는 않았다.

생존자들의 일부는 도시 밖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나머지는 도시 곳곳에 남은 시체들을 그 안으로 옮겼다. 시체가 담긴 커다란 구덩이가 성벽 주위로 여럿 생겨나고, 곧 차례로 불에 타들어 갔다.

매캐한 연기가 밤새 성벽 밖을 뒤덮고, 주민들은 돌아가며 그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영혼은 루 솔라에게, 육신은 델라 루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서부식 추모 의례였다.

일행은 도시의 일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고, 별관에서 조용히 휴식에 전념했다.

"백작께서 보내신 전갈입니다."

노크와 함께 방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이어진 건, 다음날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들어오시게."

샬롯의 배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테사이아가 냉큼 바로 앉으며 내뱉었다.

새로 임명된 시종장이 공손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백작 각하께서 접견을 청하셨습니다, 공."

"그래? 언제…?"

"공께서 원하시는 때라면 언제든 상관 없으시다 전하라셨습니다."

"그럼, 준비를 끝내는 대로 바로 가겠다 전하거라."

"예. 그리고… 이반 경도 동행해 주십사 청하셨습니다만."

테사이아가 건너편의 소파에 누워 있는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곧바로 내뱉었다.

"알았다. 그리하지."

깍듯하게 인사한 시종장이 몸을 돌렸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테사이아가 입술을 씩 말아 올렸다.

"잘됐네.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면 좋겠다 싶었는데."

"왜?"

"우리 말이 또 죽었잖아. 보니까 백작의 말은 꽤 여럿 살아 남았더라구. 내놓으라고 하려고."

"…너도 참 대단한 녀석이야."

"역시 똑똑하지?"

이안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건지, 우는 놈 뺨치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었다.

물론 하지 못할 요구는 아니었다. 사실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으리라.

그들이 아니었다면 드네로브는 지금쯤, 공허의 거대 메뚜기들에게 남김없이 뜯어먹힌 후였을 테니까.

"이안 나리까지 뵙자는 걸 보면, 남아 달라는 부탁을 하시려는 게 아닐까요? 적어도 영지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는요."

느릿느릿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필립이 덧붙였다. 그는 교회로 가서 루스를 만날 예정이었다.

"글쎄.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외출복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섰다.

그가 옷을 갈아 입는 사이, 메브의 도움을 받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모아 묶은 테사이아도 나갈 채비를 끝냈다.

"야옹이 잘 지키고 있어, 빨강 머리."

"나도 도시로 나갈 거다. 떠날 채비를 해야 하니. 그 후엔, 교회로 갈 거고."

이어진 메브의 말에, 테사이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야옹이 간호는 누가 해?"

"…내 스스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샬롯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 곳곳에 얹어져 있던 델라 루의 은총이 투투둑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안이 옷깃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냐?"

"덕분에. 아직 기운은 없다만. 반나절이면 충분히 쌩쌩해질 거다."

"센 척하긴. 헛소리 말고 누워 있어. 약골아."

테사이아의 핀잔에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신 샬롯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며 덧붙였다.

"씻고 누울 거다. 다들 말끔한데, 나만 너무 지저분하군."

"목욕물에도 미리 그 성물들을 넣어 둬라. 혹시 모르니, 물을 충분히 정화하고 씻도록 해. 미리 물을 팔팔 끓이라 전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았다. 그러지."

이안의 첨언에, 샬롯이 냉큼 침상에 흩어진 돌 조각들을 챙겼다.

일행들은 어느 순간부터 기회만 생기면 자발적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안의 영향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 암흑시대에서 가장 청결한 방랑자들일지도 몰랐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샬롯에게 손가락을 까딱인 테사이아가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따라붙으면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교회에서 봅시다. 일이 끝나면 나도 그리로 갈 테니."

#207화

하늘의 먹구름은 더는 본색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자욱했다.

하지만 장원은 벌써 이곳에서 일어났던 비극의 흔적을 거의 다 지워 낸 상태였다. 새로 임명된 듯한 시종과 하인들이 바쁘게 곳곳을 오갔다.

이런 게 제국의 저력 중 하나일 터였다. 수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음에도, 체제 자체가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 것이다.

"텐시아 아이나스 공과 이반 경이 드셨습니다, 백작 각하."

물론, 거기에는 이 늙고 깐깐한 백작이 건재한 덕분도 있을 터였다. 자식 농사에는 실패했어도, 영주로서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안은 연회장으로 들어서며 백작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는 오벨리가 부패의 뿌리로 거듭났던 연회장을 여전히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바닥에 미처 다 지우지 못한 거뭇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상석의 의자에 앉은 백작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눈은 지금이 더 형형하게 빛났다.

어쩌면 자신이 약해지거나 꺾이지 않았음을 모두에게 보이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젊은 기사가 서 있었다. 새로 임명한 경호 대장인 모양이었다. 어제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사인지, 테사이아와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에 긴장이 묻어났다.

"물러나 있거라."

백작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음에도, 기사와 시종장이 함께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백작이 무표정하게 테사이아를 내려다보았다.

"간밤은 편히 보내셨소? 귀공은 안색이 늘 창백해서, 얼굴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군."

이 늙은이 보게.

이안의 미간이 설핏 꿈틀댔다. 그 난리를 겪고도 무례함을 무기로 쓰는 방식을 고수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테사이아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덕분에요. 각하는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지셨군요. 조심하세요. 촛불이 갑자기 밝게 타면, 곧 꺼진다 들었습니다."

"...."

백작의 눈매가 꿈틀댔다. 이안도 슬쩍 테사이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백작의 주름진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웃음을 흘린 그가, 한결 느슨해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게 말이오. 하지만 별 수 없지. 지금은 늙은이가 무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니."

"그래도 신경 쓰셔야지요. 어렵게 살린 목숨인데, 허망하게 잃고 싶진 않답니다."

테사이아의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백작이 옳은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입가에도 비로소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백작의 첫마디가 나름의 재미없는 농담이었음을, 그리고 테사이아도 그걸 같은 방식으로 받아친 것임을 깨달아서였다.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고군분투하는 사이, 둘의 관계에도 이안이 알지 못하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위기와 고난은 사람을 빠르게 가까워지게 만드는 법이니까.

곧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온 백작이 물었다.

"샤론 경의 상태는 어떠시오?"

"델라 루의 보살핌 덕분에,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본래도 강건한 전사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서, 무슨 용무로 접견을 청하셨나요?"

"이유야 여럿 있소만…. 우선은."

백작이 묘하게 머쓱한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섰다. 테사이아를 가만히 바라본 것도 잠시.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겠소. 귀공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내 목숨은 물론이고 이토록 많은 이들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오."

백작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번에는 테사이아도 조금 놀란 게 분명했다. 잠시 멈칫했던 그녀가, 이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만 하세요, 각하. 이젠 정말 불안해진답니다. 사람이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거든요."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니, 귀담아듣지 마시오."

짧게 헛기침한 백작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테사이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어머. 쑥스러워하시기까지. 인사는 잘 받았습니다, 각하. 물론, 말씀으로만 끝내지 않으시면 더 좋겠지만요. 제 측근이 종종 말하길…."

슬쩍 이안을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은 테사이아가, 다시 백작을 마주 보며 말을 맺었다.

"감사는 말이 아니라 돈이나 선물로 표해야 하는 법이라더군요."

"거참 요정다운 격언이로군. 하지만 응당 이루어져야 할 순서이지. 보석이나 귀중품은 가진 게 그리 많지 않소. 물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소만, 그보다 서부의 방식대로 실용적인 보답을 드릴까 하는데. 어떠시오?"

"우선,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죠."

"귀공이 곧 떠나시리란 말을 전해 들었소. 그러니…."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댄 백작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내뱉었다.

"창고와 병기고를 열어 귀공의 여정에 도움이 될 물건들을 지원할까 하는데. 어떠시오? 공께서 직접 고른 물건들은 전부 내어 드리리다. 물론, 가진 걸 전부 드릴수는 없소만."

"…오늘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시는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말도 세 마리쯤 내어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렇게 하시오. 귀공께서 당당히 요구하시니, 오히려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군."

쿵짝이 아주 잘 맞네.

이안은 심드렁하게 둘의 대화를 귀에 담았다. 어쨌건, 고작 이런 얘기나 하려고 그들을 불러들인 건 아닐 터였다. 귀족이란 것들은 언제나, 본론을 가장 나중에 꺼내는 걸 미덕으로 여겼으니까.

몇 마디 쓸데없는 대화를 더 주고받은 후, 비로소 백작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이반 경."

이안은 대답 대신 백작을 바라보았다. 언제 테사이아와 떠들었냐는 듯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백작이, 이윽고 내뱉었다.

"경께도 감사를 표하겠소. 귀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단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소. 드네로브와 웨스트우드 가문은, 경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감사는 기꺼이 받겠소."

이안의 심드렁한 대답에도, 백작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안은 그가 묘하게 조심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테사이아보다 오히려 그가 더 어려운 눈치였다.

곧 백작이 느릿느릿 운을 뗐다.

"해서, 본론에 앞서 경께 직접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소만."

"말씀하시오."

"듣자 하니, 의식이 이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던데. 사실이오?"

"그렇소. 아마도."

"드네로브의 타락자들은 거대한 음모의 일부일 뿐이며, 이 모든 일을 꾸민 자가 따로 있으리라던데. 이 또한 사실이오?"

"그럴 것이오. 아마도."

"그들을 징벌하고자 떠나시리란 것도, 사실이고?"

슬며시 미간을 좁힌 이안이 내뱉었다.

"…본론을 꺼내시오. 백작."

자꾸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으로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잠시 그를 마주 본 백작이,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복수해 주시오."

"...?"

"이 음모와 관련된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죽여 주시오. 그래서 놈들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 주시오. 본래 하려던 일이니 그리 어렵지 않겠지. 그래 주신다면, 내 무엇으로라도 보답하겠소."

이게 본론이군.

백작의 냉막한 눈을 마주 보면서,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이 늙은 백작은 어제의 일을 극복한 게 아니었다. 그저 그런 척하고 있을 뿐.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연달아 떠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복수와 속죄. 퀘스트의 내용을 훑는 이안의 한쪽 눈매가 꿈틀댔다. 분기점이 되는 퀘스트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백작의 복수를 돕거나. 그가 속죄하도록 돕거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의식을 주도한 타락자들은, 죽게 될 것이오."

퀘스트 창을 닫으며 내뱉은 그가, 다시 백작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복수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오. 나는 타락자의 목을 수집하는 취미 따윈 없소. 그럴 생각도 없고."

"...!"

백작의 눈이 순간 커졌다. 격류가 몰아치는 듯한 그의 눈빛을 담담하게 마주한 채, 이안이 말을 맺었다.

"당신의 죄책감을 내게 떠넘기지 마시오. 백작."

"...."

백작의 주름진 미간이 좁아졌다. 이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침묵이 이어진 것도 잠시.

"…그럼 내가."

얼굴을 쓸어내린 백작이,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이 늙고 병든 몸으로는 스스로 복수조차 할 수 없소. 이 땅을 계속 다스릴 수도 없겠지.

이번 일을 중앙에 비밀로 할 수는 없소. 중앙에 알려야 그나마 하나 남은 자식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백성들이 목숨을 잃는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와 가문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될 것이오. 타락자와 한통속으로 몰려 죽게 되거나, 불명예를 안은 채 작위를 박탈당하겠지."

잠시 목이 멘 듯 말을 멈춘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이렇게 복수라도 청하지 않는다면, 내가 죽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글쎄…."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이안은 내심 한숨 쉬면서도 내뱉었다.

"적어도 당신의 아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그리고 당신이 아들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속죄는 직접 하실 수 있겠지."

"...!"

눈을 치켜뜬 백작이, 이윽고 낮게 침음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겠군."

"…고작 그것만으로 충분하진 않을 것 같소만."

"그건 귀하의 마음에 달린 문제일 거요."

"하…. 속죄… 속죄라…."

탄식을 흘린 백작이 주름지고 깡마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읊조렸다.

"땅을 일구는 것이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라도 할 수 있소. 하지만 그걸 속죄라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오히려 도피에 가깝겠지. 그보단 차라리, 엉망이 된 주민들의 삶을 되돌리는 것에 목숨을 바치는 편이…."

잠깐 말을 멈춘 백작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아쉬울 따름이군. 내 목숨이 다하는 것보다, 그리할 수 없게 되는 날이 더 빨리 오고야 말 테니."

"...."

묘한 눈빛이 된 테사이아가 슬쩍 이안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눈동자만 굴려 그녀의 늪색 눈을 마주본 것도 잠시.

"그럼 그때는…."

짧게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연 이안이, 다시 백작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내 이름을 파시오.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

백작이 그를 마주보았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지 않소? 그래서 내게 이딴 걸 물으시는 게 아닌가?"

"...."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인 백작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그래…. 귀하가 아이나스 공을 섬기는 일개 기사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소. 메버릭 경도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원로라 하나, 성기사들이 요정을 섬길 리는 없지. 알면서도 묻지 않은 건… 숨길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해서였소만. …귀하의 진짜 정체를, 알려 주시려는 것이오?"

입꼬리를 옅게 말아 올리고 있던 테사이아가, 이안의 얼굴 쪽으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며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퀘스트만 아니었어도.

코로 한숨 쉰 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어서 예를 갖추도록 하세요. 백작."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비켜서면서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녀의 엄중한 눈빛을 받은 백작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턱 끝을 살짝 치켜든 채 기다리고 있던 테사이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이분은,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 북부의 대전사. 북부의 용살자이며, 또한 저 위대한 백금룡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 공인된 북부의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십니다."

"...."

테사이아를 바라보는 백작의 얇은 입술이 설핏 벌어졌다.

이안의 정체가 그의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은 게 분명했다. 이안을 돌아본 그의 얼굴에 비로소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루 솔라 맙소사…. 그 유명한 분이셨다니."

소개말의 진위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안이 보여준 전공만으로도 설득력은 충분했다. 하물며 원로 요정의 소개가 아닌가. 게다가 백작도 이미 북부의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테사이아가 짧게 내뱉었다.

"백작?"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인 백작이, 곧바로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를 뵙습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극진한 예를 갖춘 말투와 태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백작이기 이전에 루 솔라를 섬기는 신도였으니까.

백금룡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교단의 성자이니, 그의 대행자인 이안 역시 마땅히 성자로 대우해야 했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이안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일어서시오, 백작. 그렇게 부르지도 마시고."

"…그리하겠습니다, 이안… 경."

백작이 순순히 일어섰다. 그런 와중에도 고개는 여전히 숙인 채였다.

테사이아의 뿌듯함이 담긴 시선을 흘려넘기며, 이안이 말했다.

"아이나스 공과 메버릭 경은 나를 조력하고 있소.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겠소."

"…물론입니다. 저 역시 비밀을 지킬 것을 찬란한 여신께 맹세하겠습니다."

뭘 또 맹세 씩이나.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이나 황실의 조사관이 파견을 나온다면, 내 말을 전하시오. 백작은 이번 일로부터 무관한 피해자이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리고 아들이 저지른 죄업은, 드네로브를 수복하는 것으로 속죄하라 했다고."

"…그리하겠습니다."

백작이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진심에서 묻어나온 대답이 분명했다. 퀘스트 완료 창이 눈앞에 떠올랐으니까.

별짓을 다 시키네, 정말.

'게임에선 클릭 한 번으로 끝났을 퀘스트 같은데….'

이게 정말 더 좋은 결말로 가는 선택지인 건 맞나?

아니라 해도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확인 창을 닫은 이안이 백작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남으셨소?"

"…있었으나,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편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경."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테사이아게 눈빛을 보내며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내딛기 전에, 뒤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더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멈춰 선 이안이 백작을 돌아보았다. 작고 마른, 검게 탄 노인.

"후회할 일을 반복하지 마시오."

"...."

순간 굳어졌던 백작이, 이윽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오늘 주제넘은 소리를 많이 하네.

소리 없이 입맛을 다신 이안은,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나섰다.

***

"이런 기분이었네. 야옹이가 자꾸 하고싶어 한 이유를 알겠어."

저택을 나선 테사이아가 슬쩍 주위를 살피고는 속삭였다.

대꾸도 하지 않는 이안을 싱글대며 바라본 그녀가 이내 덧붙였다.

"꽁꽁 숨겼던 비밀을, 내 입으로 밝히는 기분이랄까? 뭔가 속이 다 시원해."

퍽이나 그러시겠지.

콧방귀를 뀌며 걸음을 재촉한 이안이, 이윽고 바깥 장원으로 들어서며 내뱉었다.

"샬롯에게 보급 소식을 전해. 이곳의 병기고에 엄청난 게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제국제 물건들이니 쓸 만은 할 거야. 분명 직접 보겠다고 할 테니 무리하지 않게 신경 쓰고. 떠나기 전에 상처가 다 아물면 좋겠으니까."

"가만 보면 은근히 야옹이만 챙긴다니까. 알았어. 걱정마. 그 손가락들을 온몸에 둘둘 두르게 할 테니까. 이안은, 바로 교회로 가?"

"그래야지…."

이안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마음 같아선 며칠은 쉬고 싶건만.

이 빌어먹을 세상은 그런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 잘 처리하고 오거라. 이반 경."

고고한 표정으로 말한 테사이아가 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근처를 지나는 시종에게 손짓해, 저택의 창고와 병기고를 방문할 테니 준비해 두라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저 녀석, 진짜 원로가 되면 아래 귀쟁이들을 엄청나게 부려 먹겠군.

낮게 웃음 지으며, 이안은 도시로 발을 들였다.

#208화

빵 냄새 대신 흐릿한 탄내와 눅눅함이 이안의 코를 파고들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망자들의 흔적을 지우고 부서진 건물과 길을 재건하는 병사들과 주민들의 얼굴에선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그저 묵묵히 저마다의 맡은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 와중에 이안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길가로 물러나거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안이 타락자들을 처단하고 의식을 중단시켰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하다못해 신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소문은 어찌나 빠른지.'

고개만 끄덕이며 걸음을 옮긴 이안은, 곧 도시 한복판의 교회에 발을 도착했다.

교회는 대문을 활짝 연 채였다.

촛불과 등잔을 밝혀둔 예배당의 내부는, 그가 마지막에 본 것보다는 봐줄 만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벽면과 천장 곳곳에 이안이 만들어 낸 그을린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어쨌건 바닥을 뒤덮은 잿더미는 전부 사라진 데다, 곳곳에 동물 가죽이나 침구 따위도 잔뜩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올리거나 잠을 청하는 주민들이 여럿이었다. 일부러 주민들을 이곳에서 재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모를 저주의 잔재를 신성력으로 정화하려는 것이리라.

"선물이 아주 유용하더군. 잘 쓰겠소."

잠시 멈춰 선 이안이 신상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목소리가 델라 루에게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단상 위, 한쪽 손의 손가락이 모두 사라진 신상은 그저 은은하지만 포근한 빛을 머금고 장내를 굽어살필 뿐이었다. 그 뒤로, 교회 벽면의 구멍을 타고 흘러든 흐릿한 빛이 커다란 원의 형상을 그리며 아른거렸다.

종교적 엄숙함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광경이었지만.

'이 흐린 날씨에 어떻게 저게 보이는 거지.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이안은 그런 감흥과는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저 신상이 영지에 남은 오염의 잔재를 조금씩 정화해 주리란 사실 뿐이었다.

"이반 경… 이십니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따라붙은 건 그때였다. 자유민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루스 사제님을 도와, 교회의 일을 돕고 있는 안나라고 합니다. 나리."

"사제님이 보내셨소?"

"예. 기사님께서 도착하시면 모시고 와달라 부탁하셨습니다. 다른 두 분도 이미 와 계십니다. 그럼, 이쪽으로…."

공손히 팔을 들어 방향을 안내한 안나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예배당 뒤편의 계단으로 이안을 안내했다.

첨탑에서 이어졌던 숙소가 아니라, 그 반대편의 또 다른 복도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이곳에는 사제들의 집무실과 서고, 기도실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복도를 쓸고 닦는 이들. 텅 빈 채 문이 열린 집무실. 집무실에서 옮겨온 듯한 책들을 서고에 정리하는 건, 또 다른 자유민 여자였다.

"다들, 이번 일로 가족을 잃은 이들입니다. 나리. 자원해서 교회의 복구를 돕고 있지요."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안나가 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 아들은 저를 구하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모습으로 되살아나 다른 이들을 해쳤죠. 그런데도… 제 아들의 영혼이 천상에 닿을 수 있었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시오?"

이안의 시선에, 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주제넘은 질문이었습니다. 성기사님이라면 답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여…. 죄송합니다. 나리."

"...."

이안은 자신이 성기사가 아니라고 정정하는 대신, 그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의 굳어진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찬란한 여신께선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시지. 지상을 향한 끝없는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희생이오. 교단이 희생과 사랑을 가장 고결한 덕목이라 여기는 건 그래서라더군."

"...!"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아들은 가장 고결한 선택을 했소. 그리고 저주받은 모습으로 되살아난 건, 당신의 아들이 아니오. 그저 그의 껍데기였을 뿐이지."

"저, 정말 그럴까요…?"

"글쎄."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사실 정말 그럴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그가 떠든 말들은, 그저 게임을 하며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정보와 때때로 필립이 주절대던 말을 적당히 뒤섞어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도 알아본 걸 찬란한 여신께서 모르실 것 같진 않군."

그런 속내와 달리, 이안은 덤덤하게 말을 맺었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위안일 테니까.

안나의 얼굴에 우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길이나 어서 안내하시오. 걸음 자꾸 늦추지 말고."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오히려 미소 지은 안나가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그래 봐야 잠깐이었다. 그녀는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굳게 닫힌 문 옆에서 멈춰 섰다.

안에서 인기척과 속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에게도 겨우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다. 왜 교회는 방음이 잘 될까.

새삼스러운 의문을 떠올리며, 이안이 문고리를 쥘 찰나였다.

"신상을 정화해 도시를 구하셨다 들었습니다."

안나가 문득 내뱉었다. 이안이 돌아보자,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내색조차 하지 않으시니, 나리야말로 제가 본 그 누구보다도 고결한 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리. 찬란한 여신께서 나리의 앞날을 가호하시길 빌겠습니다."

"...."

깊이 허리를 숙였던 안나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이안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려 문을 열었다.

정말 멋대로들 생각한다 싶었지만, 이제는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등잔 불빛이 일렁이는 어둑한 장내가 드러났다.

집무실이었다. 책상 위에 일지로 보이는 책들과 온갖 서신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그 앞에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던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누가 보면 음모라도 꾸미는 줄 알겠네.

"뭔가 찾으셨나 보군."

문을 닫은 이안이 내뱉었다. 필립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입니다, 나리."

"이곳의 사제들을 타락시킨 배후를 알아냈다. 이반."

곧바로 말을 받은 메브가, 가라앉은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주르도였어."

"우리가 쫓던 그놈?"

"예. 지금은 사제가 아니라 주교더군요. 그것도 한때 라클리프의 대주교까지 역임했고요. 어쩌면 예전부터 주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신을 잔뜩 주고받았더군. 덕분에 많은 것이 확실해졌다."

번갈아 이어지는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책상 앞까지 다가선 이안이,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요점만 말해 주시오. 차근차근."

그의 시선을 받은 루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세한 내막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건 이 안에서 밝혀진 사실들에 대해선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메브와 눈빛을 교환한 필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리의 예상대로, 서부의 타락자들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였습니다. 테센의 수도원과 라클리프의 교회에 오간 서신이 잔뜩이더군요. 물론 나름대로 위장해 두었습니다만. 저와 나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전에 본 적 있는 방식이거든요. 어떤 식으로 본론을 숨겨 두었냐 하면-"

"요점만. 필립. 요점만."

"…주르도는 지금 테센에 있습니다. 그것도 수도원의 원장을 겸하면서요. 그전에는 라클리프에서 서부의 교단을 총괄하는 대주교로 있었습니다만, 자리를 내려놓고 테센으로 돌아갔더군요. 라클리프에서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더군요."

"크랄렌 공작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공작에 대한 서운함을 서면으로도 드러낼 정도였어."

이어진 메브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주르도와, 공작이?"

"그래. 그런데도 공작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못한 것 같더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서부의 대귀족이니. 무튼, 그 후로 그쪽과의 연락은 여길 통해 간접적으로 주고받았다. 공작의 시선을 의식한 거겠지. 덕분에 우리 손에 들어온 서신의 양도 늘어난 거고."

"흐음…."

"…뭔가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느냐?"

"아니오. 아무것도."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게임 속 죽음의 도시가 된 라클리프의 보스가 바로 크랄렌 공작이며, 그가 거느린 마법사와 그의 호위 기사가 중간 보스였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대사도 그런 식으로 쳤고. 당연히 한통속인 줄 알았는데.'

놈들과 오히려 마찰을 빚었다니.

하긴. 그게 한통속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타락자는 의견이 맞지 않으면 저들끼리도 죽고 죽이는 것들이니까.

또 뭔가 뒷사정이 있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놈에게도 배후가 있는지는, 알아내셨소?"

"글쎄. 누군가의 뜻을 따르는 것 같은 뉘앙스가 아예 없진 않았다만. 그보단 그가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더군. 어쩌면 그놈이… 모든 비극의 원흉일지도 몰라."

"흠…."

모든 비극이 비단 이곳에서의 알만을 뜻하는 건 아니리라.

이안은 잠시 턱만 긁적였다.

주르도가 꽤 거물이라는 것부터가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독자적으로 서부의 타락자들을 조종한 진짜 흑막이란 생각까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가보면 확실해지겠지.'

그는 이내 어깨를 까딱였다.

그저 잘 감춰져 있을 뿐,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 있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르도. 그리고 크랄렌 백작. 이렇게 끝에서부터 잘라내며 나아가다 보면, 결국은 몸통에 닿을 수 있으리라.

아마도 원탁 의회의 의원이라는, 숨겨진 이름을 가진 몸통에.

"어쨌든 결국, 내가 본 환영이 어디인지까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단 거군."

"그래. 애석하게도."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죠. 라클리프의 타락자들은 비교적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 같긴 했습니다만. 그런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놈들은 아니니까요."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루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테센과 라클리프 중에, 여기서 어디가 더 가깝지?"

루스가 더듬대며 대답했다.

"거리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테센 지역이 드네로브의 남쪽으로 펼쳐져 있긴 합니다만. 도시와 수도원은 남서쪽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거든요. 반면에 라클리프는 조금 서쪽으로 꺾어야 하긴 하지만,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가기만 해도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데. 어쩌시겠소?"

이안의 시선을 받은 메브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내뱉었다.

"테센부터 들르는 게 나을 것 같다. 비단 그곳에 주르도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라클리프에는 공작이 있으니까. 타락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해도 방어할 힘이 있으며, 검은 군도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테센은, 이곳보다도 더 무방비 상태에 가까울 거야."

"그럼, 그렇게 합시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벌떡 일어섰다. 그를 바라보던 필립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설마, 더는 들을 게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뭐, 놈들을 죽이는 데 필요한 정보라도 찾아냈냐?"

"그… 건 아닙니다만. 이 자들이 언제부터 서부에 뿌리를 내린 건지. 얼마 전까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같은 중요한-"

"나한텐 하나도 안 중요해."

"…예. 알겠습니다. 돌아가면 주군께나 말씀 드려야 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즐겁게 들어주시겠죠."

오늘은 방을 따로 써야 겠군.

이안이 콧방귀를 뀔 찰나, 루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씀을 다 나누신 것 같아 드리는 말입니다만…."

"...?"

"정말이지 충격적이군요. 주르도 주교님은 저도 몇 번이나 뵌 적이 있습니다. 존경할 만한 분이셨지요. 그런데 그분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니…."

그의 표정과 말투는 씁쓸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정면으로 부정당한 사람처럼 풀 죽어 보이기도 했다.

사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정말이지, 저는 이제 교단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런, 눈을 떠 버리셨군."

피식한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마법사만 검은 벽의 광기에 빠져드는 건 아니오. 사제."

"가장 가까이에서 신을 섬기는 이들은, 그렇기에 때때로 귀 기울여선 안 될 속삭임까지 듣게 되죠. 저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습니다만. 그게 사실입니다."

루스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필립이 말을 받았다.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 것이리라.

"타락자들은 늘 가까이에 있는 무고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어둠의 유혹은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듭니다. 그러니, 차라리 교단을 떠나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사제님. 신과 멀어지면, 그만큼 어둠과도 멀어질 수 있어요."

성기사의 종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필립의 눈빛과 말투는 진솔했다. 어쩌면, 그도 과거에 겪었던 갈등일 터였다.

하지만 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남을 겁니다. 어둠이 두려워 도망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전 찬란한 여신과 풍요로운 여신을 섬기는 것이지, 교단을 섬기는 건 아니니까요."

"…이젠 제법 사제다운 말씀을 다 하시는군."

이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건가. 이안이 놀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를 바라본 루스가 창백하게 미소 지었다.

"두 분께 배운 겁니다. 물론 여러분처럼 어둠과 정면으로 맞설 배포는 없습니다만. 신을 섬기며 사람들을 돕는 건 저도 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외롭긴 하겠습니다만. 아, 물론."

일행을 한 차례 돌아본 루스가 덧붙였다.

"여러분은 예외입니다. 제가 유일하게 믿는 분들이에요."

"그런 식으로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이오."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우리도 댁을 속인 건 마찬가지거든."

"...?!"

루스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이안이 밖으로 나갔다.

"부디 지금의 그 마음을 잊지 않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사제님.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나지막이 내뱉은 메브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는 둘을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루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오늘 우리가 밝혀낸 부분은, 당분간 대교회에도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적어도 당분간은요. 사실 저는, 본 교단도 전부 믿을 수는 없다고 보는 쪽이거든요."

"...!"

루스의 눈이 커졌다. 씩, 이를 드러내며 웃은 필립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주교님이 되어 계시면 좋겠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멍하니 서 있던 루스가 비로소 눈을 깜빡였다. 셋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은 것도 잠시.

"대교회도… 믿을 수 없다라."

책상에 쌓여 있는 일지와 서신들을 돌아본 그가, 이윽고 상자를 찾아 몸을 돌렸다.

서부에 깃든 어둠 물러나는 그 날까지, 증거물들을 아무도 모를 곳에 숨겨 두기 위해서였다.

교단의 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었지만, 상자를 꺼내는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9화

일행은 돌아오는 동안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는 아니었다. 이안은 물론이고 메브도 굳게 입을 다문 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장원으로 들어선 순간 필립의 표정이 밝아진 건 그래서였다.

"저게 뭐죠? 저 사람들은 저런 걸 왜 들고 다닌 답니까?"

분위기를 환기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그의 시선은 여러 자루의 검을 낑낑대며 들고 가는 하인을 좇고 있었다. 그 뒤로는 또 다른 하녀가 강철 투구를. 그 옆에는 사슬 갑옷과 강철 장갑을 품에 안은 하인이 걷고 있었다.

곧 그들이 별관으로 들어가자, 필립이 이제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 되어 덧붙였다.

"왜 우리 숙소로 들어가는 거고요?"

그 와중에도, 방금 들어간 이들과 달리 빈손인 하인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메브도 설명해 달라는 듯 이안을 돌아보았다.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말했다.

"백작이 창고와 병기고를 열어 줬소. 보답으로."

필립이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 그래서 두 분을 부른 거였군요."

"뭐, 겸사겸사."

"뭐가 더 있었습니까? 그러고 보니, 백작과는 무슨 얘길 나누신 건데요?"

거참 빨리도 물어본다.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저택 입구로 들어서며 내뱉었다.

"알 필요 없어.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빈손이 된 하인들이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을 발견한 그들이 옆으로 물러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 미소 지어 보인 필립이 덧붙였다.

"이따 따로 주군께 여쭤보겠습니다. 주군께선 분명 자세히 알려 주실 테니까요."

알면서 왜 굳이 자꾸 나한테 먼저 묻는 거냐고.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닫힌 문을 열었다.

"왔느냐? 기다렸다."

한쪽 다리를 꼰 채 침대맡에 앉아 있던 테사이아가 텐시아 아이나스의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맞이했다.

그건 동시에 일종의 신호였다. 곧 하인들이 다시 올 테니, 각자의 역할극을 유지하라는.

방 한복판,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른 샬롯도 장내로 들어서는 이안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과 달리 잠시 문 앞에 멈칫하고 섰던 메브가, 이내 내뱉었다.

"…보답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것 같은데."

내 말이.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내부를 돌아보았다. 방 전체에 온갖 병장기들이 진열된 것처럼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는 전부 도검류이긴 했지만, 날의 생김새나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병기고를 아예 통째로 털어 오셨나 보군."

"내가 이리 명한 게 아니다. 샤론의 작품이지."

이안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곧이어 이안을 마주 본 샬롯이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셨다.

"의외로 쓸 만해 보이는 게 많더군. 뭘 원할지 몰라서, 괜찮아 보이는 건 전부 추렸다. 너희가 고르고 나면 나머지는 도로 돌려보낼 거야."

"전에 그 제국 상인을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물론 그때만큼 품목이 화려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좋은데요."

용병의 눈빛이 되어 내뱉은 필립이, 품에서 목걸이 뭉치를 꺼냈다.

끝에 오밀조밀 단단하게 만든 작은 가죽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

델라 루의 은총을 보관하는 용도가 분명했다. 루스가 잊지 않고 준비해준 것이리라.

필립이 목걸이들을 침대 위에 놓는 사이, 제가 한 일인 양 거만한 미소를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천천히들 둘러보거라. 시간은 많으니까."

몸을 돌린 필립은 이미 벽에 기대 놓은 장검 하나를 집어 드는 중이었다. 중간 길이에 날이 넓적한, 제국 병사들이 보조 무기로 자주 들고 다니는 장검이었다.

메브가 문 옆의 벽에 기대서고 이안이 식탁으로 다가서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세 명의 하인이 몇 가지 물건들을 더 들고 장내로 들어섰다.

일행에게 엉거주춤 인사한 그들이 저마다 흩어져 가져온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셋이 장내로 들어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말씀하신 물품은 이게 전부입니다. 나리."

들고 온 검을 식탁 맨 가장자리에 놓은 하인 하나가 공손하게 말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건물 앞에서 기다리거라. 선별이 끝나는 대로 부를 것이니."

악덕 귀족이 따로 없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품에 손을 넣으며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하인들을 불러 대기하라 하시오. 그쪽들은 물러나서 쉬고."

그가 은화를 쥔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맥주라도 한 잔씩 마시면서."

"...! 감사, 감사합니다, 나리."

눈을 치켜뜨며 받아든 하인이 납죽 허리를 숙였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다른 하인들을 돌아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는 김에, 간단한 부탁을 더 하고 싶은데."

"예. 말씀하십시오."

"백작께서 말을 내어 주시기로 하셨소. 마구간지기에게 말해 두고, 우리 마차와 함께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준비해 두라 이르시오. 시종에게도 우리 식량과 술을 준비해 실어 달라 전하시오. 가능하면, 오늘 밤 안에.

"빠짐없이 전달하겠습니다, 나리."

공손하게 대답한 하인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몸을 돌렸다. 노동의 피로가 싹 가신 얼굴들이었다.

문이 닫히자,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당근을 주는 척하면서 일을 더 시키다니. 역시 이안이네."

"뭘 또 역시야."

그런 거 아니거든?

"주근깨가 그랬거든. 너한테 배우는 게 많다고. 나도 그러는 중이야. 확실히, 도움이 되네."

"...."

이안의 시선에 재빨리 헛기침한 필립이, 손에 든 검으로 시선을 옮기며 내뱉었다.

"그, 그런데 괜찮을까요? 만약 정말 테센에 마경이 열린 거라면, 중간에 분명 말이 또 죽게 될 텐데요. 식량이 다 썩어 버릴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도보로 이동할 생각도 해야지."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 테사이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무시한 채 식탁에 놓인 소검을 집어 든 이안이, 그걸 아공간에 휙 던져 넣으며 덧붙였다.

"식량이나 보급품 일부는, 이렇게 보관하면 그만이고."

"아. 나리의 마법이 있었죠. 하지만 용량에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욕심내라. 그런 눈빛 하지 말고."

"…예."

앞서서도 그랬듯. 부피가 크지 않은 것들 위주라면, 일행 모두의 여벌 장비를 보관할 수도 있을 터였다.

식량은 봉인함에 넣어 둘 생각이었다. 아공간에 빵 부스러기가 잡히게 두고 싶진 않았으니까.

일행들은 한층 더 진중해진 얼굴로 병장기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외는 벽에 기대 선 메브와 이안 뿐이었다.

이안은 늘 그렇듯,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보기만 했다. 그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어쨌건, 병장기를 보는 안목은 샬롯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절반 이상이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특출난 건 없지만…. 역시, 제국제 물건은 기본적으로 능력치가 높네.'

낮은 등급의 장비조차 쓸 만해졌다는 부분에서, 이안은 환경의 변화를 또 한 번 실감했다.

게임이라면 2챕터 후반과 3챕터 초반 사이의 어디쯤일 터였다.

게임에서는 제국에 발을 들이자마자 냅다 제도로 갔었지만, 지금의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알았을 뿐, 사실 제도로 가는 걸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위를 돌며 천천히 진행하는 게 더 좋았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다를 수도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이상,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전에는 몰라서 건너뛰었거나 수많은 시도 끝에 간신히 통과했던 난관들을 무사히 통과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목숨 원 코인으로…. 시발.'

당장 테센에 기다릴 것들도, 그런 미지의 난관 중 하나였다.

"넌 왜 그러고 있어, 빨강 머리? 안 골라?"

테사이아가 문득 말한 건 그때였다. 벽에 기대선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메브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지금 내 장비로도 충분해."

"아닐걸? 넌 신성력을 휘둘러 대서 모르겠지만, 무기가 순식간에 녹이 슬어서 부서지고 그랬다고. 나랑 야옹이 봐. 장비를 반은 다시 맞춰야 하잖아."

"일리는 있는 말이오."

강철 장화를 집어 들면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놈들에겐 신성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으신 건 알지만. 최소한의 방비는 해서 나쁠 건 없잖소. 어쨌든, 상대는 공허의 존재니까."

게다가 부식의 저주는 꼭 전투 중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행은 아직 모르지만.

"그렇긴 하겠다만…."

"이건 경의 복수이기도 하잖소. 배려하지 말고 고르시오."

"아. 우리 물건만으로도 공간이 부족할까 봐 그런 거였어? 역시, 착하네. 빨강 머리."

테사이아가 놀리듯 미소 지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머쓱하게 헛기침한 메브가, 앞으로 나서 무기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선택을 끝낸 이안은,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메브가 물러나 있던 건, 물론 자신감의 표출이나 일행을 배려해서만은 아닐 터였다.

아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겠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물론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의 고민은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이안. 지금 내 걱정은 시기상조라는 걸."

메브가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무슨… 걱정을 하고 계셨던 건데요?"

하던 일을 멈춘 필립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메브가 검날에 얼굴을 비춰 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 때 이른 고민이다. 필립. 현실이 되고 나서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은."

"…아. 알겠습니다. 또 단서가 끊어질 걸 염려하신 거군요."

그제야 알겠다는 듯 필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브가 얇고 긴 양손검 한 자루를 방 중앙에 놓으며 내뱉었다.

"내 복수의 근원에 아주 가까이 까지 다가왔다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조바심이 나는 거겠지. 목표를 코앞에 두고, 다시 길을 잃게 될까 봐."

"그러더라도 혼자 헤매지는 않으실 거요."

침대 맡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든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나도 찾는 놈들이 있잖소. 경도 아시겠지만, 같은 놈들일 확률이 높고."

메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필립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막다른 길이면 어떻습니까? 이안 나리가 계신데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생각지도 못한 길을 찾아내실 겁니다."

"물론, 그건 이번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지."

그 근거 없는 믿음은 둘째 치더라도.

코웃음 치며 대답한 이안이, 일행들을 차근히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들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해. 잡생각이나 소풍가는 기분으로 상대할 만큼 호락호락한 것들은 아닐 것 같으니까."

샬롯은 물론, 테사이아까지 진지한 눈빛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은 시간 동안, 다들 휴식도 충분히 취하도록 하고."

"옳은 말이다, 이반."

슬쩍 앞으로 나선 테사이아가,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깐 채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반 경이 말했듯, 휴식도 여정의 일부이니. 필립? 나가서 하인들을 들라 이르고, 식사를 준비하라 하거라. 성대하게."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평소보다 더 과장된 태도였다. 풀썩 웃음 지은 필립이, 마찬가지로 과장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주군."

꼬박 하루를 더 휴식으로 보낸 일행은, 그 다음 날 오전이 되어서야 드네로브를 떠났다.

마중 나온 주민들과 루스의 인사를 받으며, 시들어 쓰러진 밀밭들을 등진 채로.

***

루스는 예배당에 놓인 의자의 간격을 다듬고 있었다. 백작을 비롯한 모든 주민들이 정화 기도와 의식을 치렀으니, 예배당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린 것이다.

당분간은 도시의 유일한 사제인데다 그마저도 임시 승격된 처지에 불과했지만. 루스는 모든 고된 업무를 담담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물론 주민들의 도움과 백작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백작은 그날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그를 아주 신뢰하고 있었다.

"사제님, 사제님…!"

문이 벌컥 열리며 예배당으로 청년 하나가 달려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교회의 일을 도우며, 루스의 수족 역할을 자처하는 이였다. 하던 일을 멈춘 루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 중앙, 중앙의 대교회에서 나온 분들이 오셨습니다…!"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한 말에, 루스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중앙에서 온 분들이 확실합니까?"

"예, 본교단의 분들만 입으신다는 망토를 걸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교회로 오고 계시고요?"

"직접 본 건 아닙니다만, 아마도요. 경비 대장에게 인근의 밀밭이 말라 죽은 이유라던가, 도시의 사건 같은 것들을 물었다고 합니다."

"…바로 가서 백작께 상황을 전해주세요. 제가 보냈다고 말씀하시면 들여보내 줄 겁니다."

"예…!"

숨을 고른 청년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루스의 눈빛에, 비로소 감추고 있던 긴장과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대 교회의 사제님들이… 무슨 용무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물론, 백작도 아직 중앙에 이곳에서 일어난 비극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겨우 도시에서 그날의 흔적을 전부 지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 도시에 들어선 이들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란 뜻이었다.

애초에 중앙이 알게 되었다 해도, 조사단이 파견을 나오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원로 요정 일행이 도시를 떠난 지도, 아직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해도… 이 일을 문제 삼는다면….'

어쩌면 다음에 드네로브를 찾는 것은 조사단이 아니라 정화자들일지도 몰랐다. 온갖 흉흉한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신의 엄벌.

그들을 실제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끼이-

그때, 예배당의 대문이 다시 열렸다. 그 너머로 드러난 두 실루엣을 눈에 담은 루스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서, 설마…?'

#2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