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쿠드드드득-
처음의 맹렬한 기세와 달리, 대검 날에 점점 무게가 실렸다. 잘려 나가 밀려나는 넝쿨들이 기울어졌다.
이를 악문 이안은 허리와 팔에 온 힘을 집중해, 일련의 과정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대검 날이 반대편으로 길게 빠져나왔다.
"...."
이안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반발력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검이 약했거나 중간에 망설였다면 다 베어 내지 못할 뻔했다.
뭐가 이렇게 질기지. 생각하는 사이, 기울어지던 넝쿨 장벽이 단면에서 붉은 진액을 흩뿌리며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앞에 선 이안의 얼굴에도 붉은 진액이 튀었다.
그의 가슴 아래로 긴 직선을 그리며 남은 하단부에도 피처럼 붉은 진액이 솟구쳤다.
정말 피였다. 온갖 것들의 피냄새가 뒤섞인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시발…."
얼굴의 피를 닦아낸 이안이 대검 날을 땅에 박았다.
그의 짜증스러운 시선이 장벽의 두께를 가늠했다. 단면은 겉보기보다 훨씬 두껍고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비로소 그토록 잘라내기 힘들었던 게 이해가 됐다. 오히려 중간에 날이 걸리지 않은 게 용했다.
'게임에선 파괴 불가능한 벽이었겠지. 그걸 억지로 잘라내려 했으니.'
피가 튀는 장벽 건너편으로 또다시 넝쿨 장벽이 보였다.
다른 통로였다. 이런 식의 미로가 여러 겹으로 이어져 있으리라. 이안의 시선이 저 멀리, 끄트머리만 간신히 보이는 저택의 지붕으로 향한 그때였다.
꾸득, 꾸드득- 꾸득-
잘려나간 단면의 출혈이 잦아들더니, 새로운 줄기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거뭇한 줄기들은 본래보다 더 어지럽게 뒤엉키며 밀려 올라갔다.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도 더 자라나는 넝쿨 장벽을 올려다본 이안이, 비로소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래선 한도 끝도 없겠군."
마법을 사용하거나 계속 썰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마법에도 내성이 있을 터였다. 물론 이것들이 영원히 다시 자라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그의 마력과 신성력, 체력이 바닥나는 속도가 더 빠를 터였다. 같은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시발, 정말 던전이네.
"아무래도 그냥 뚫린 길로 나아가는 게 좋겠구나. 잘라낸 벽을 넘다가 중간에 저렇게 다시 자라기라도 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아."
메브가 덧붙였다. 이안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검을 들어 아공간에 넣었다.
이 미로 정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였다. 휘둘러 대다가 넝쿨 장벽에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어쩌면 회수하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일어서서 좌우의 통로를 번갈아 돌아본 필립이 읊조렸다.
"어느 쪽이 옳은 길일까요. 아니, 애초에 옳은 길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도 의문입니다."
"어쨌든 저택 가까이까진 갈 수 있겠지."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으며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손에는 아공간에서 꺼낸 가죽 수통을 든 채였다. 샬롯이 들고 있던 부러진 단죄의 검을 내밀며 덧붙였다.
"내가 볼 땐 어느 쪽으로 가건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 양쪽 모두에 우릴 기다리는 것들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 아마도… 심판자들까지."
메브에게 수통을 건넨 이안이, 단죄의 검을 받아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담긴 신성력이 느껴졌다. 검집 덕분에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뽑아 든 순간부터 마구 흩뿌려댈 게 분명했다.
그가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넣는 사이, 물을 마시고는 수통을 필립에게 건넨 메브가 말을 이었다.
"들은 대로라면, 심판자란 것들은 아까 그 흡혈귀들보다 훨씬 더 강하겠지."
"물론이다. 같은 뱀파이어들을 징벌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저 밖에서부터 내내 대비하고 있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더군."
샬롯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놈들은 처음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이안을 비롯한 일행들도 자주색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안에서 보니 소용돌이의 눈이 훨씬 더 커다랗게 보였다.
이안은 그 먹구름의 경계선을 찬찬히 훑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자주색 밤하늘과 그 한복판의 커다란 초승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확대해 놓은 것처럼 커다란 달이었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지금은 하단 절반 정도가 붉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보고 있으면 피가 식는 듯한 서늘함이 전해졌다.
샬롯이 낮게 덧붙였다.
"아마도 이 안에서 싸우는 게 가장 강할 테니까."
"초승달…!"
물을 마시던 필립이 탄성을 흘리고는 덧붙였다.
"그때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역시, 뱀파이어들이 초승달을 가장 좋아한다는 건 그냥 속설이 아니었던 겁니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떨떠름하게 혀를 날름댔다. 그녀에게 수통을 건넨 필립이 가라앉은 눈으로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진짜 달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밤하늘도요. 진짜라면 찬란한 여신께서 한 번에 이만한 신성을 내리시지는 못하셨을 것 같거든요. 아마도 실제로는 대낮일 것 같습니다만."
"마경이 처음도 아니면서, 아직도 그런 걸 신기해하냐?"
피식댄 이안이, 필립에게 아공간에서 꺼낸 새 검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필립이 감사하다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검은 어느새 이가 다 나간 상태였다.
"…망했군요. 적어도 몇 년은 쓸 생각이었는데."
방패의 상태까지 확인한 필립이 우울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의 철제 원형 방패는 표면과 가장자리 곳곳이 구겨지고, 일부는 조금씩 찢겨나가기까지 한 상태였다.
괴물 군단 사이에서 악전고투를 벌인 결과였다.
물론 방패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애지중지하던 때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비루해졌다.
필립이 입맛을 다시며 검을 교체하는 사이.
"휴식은 충분히 취한 것 같으니 출발합시다. 이제부턴 다들 긴장을 유지해.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수통을 받아 목을 축인 이안이, 좌측으로 펼쳐진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장검을 뽑아 들고, 신성력은 문신 안으로 갈무리한 채였다.
샬롯과 메브가 각각 송곳니 검과 요정의 세검을 뽑아 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왜 이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왼쪽은 불길한 방향이잖습니까."
재빨리 따라붙은 필립이 속삭였다.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네 주둥이가 더 불길해. 헛소리하지 말고 주위나 잘 살펴라."
"옙…."
일행 모두가 장미 넝쿨이 좌우로 펼쳐진 통로로 접어들었다. 뒤에서 뿌득대는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고작 몇 걸음을 더 나아갔을 때였다.
"...!"
뒤를 돌아본 필립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 입구를 가로지르며 넝쿨들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런? 아니…?"
순식간에 뒤엉키며 통로를 막는 넝쿨을 바라보며 필립이 더듬댔다.
나머지 셋은 서로를 한차례 일별하며 어깨를 까딱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인 필립이 후다닥 따라붙었다.
"입구가 사라졌는데, 다들 너무 태연하시군요."
"달라질 게 없으니까. 어차피 우린, 입구가 아니라 출구를 찾으러 들어온 거잖아?"
샬롯의 태연한 대꾸에 필립이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격 유지에 신경을 써야겠군."
메브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런 게 가능하다면, 자칫하다 일행이 나뉘게 될 수도 있겠어."
"옳은 말씀이십니다. 여기서 고립되면 결말이 좋을 것 같진 않네요."
일행은 둘씩 나란히 선 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나아갔다.
통로는 그들 넷이 충분히 나란히 걸을 만큼 넓었지만, 다들 넝쿨 장벽 가까이로는 굳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장벽에서는 뿌득대는 소리가 속삭이듯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표면에 돋은 가시들도 심상치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고, 때때로 장벽 위에 핀 붉은 장미도 요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꽃잎을 타고 때때로 핏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나마 육식 나무처럼 스스로 움직여 습격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피를 먹고 자라는 변이된 식물이 아니던가. 어떤 예상 못한 괴상한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이건…."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살폈다.
넝쿨 장벽이 사방을 감싼, 네모 반듯한 공터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일행 모두가 어느 정도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정원 속의 또 다른 정원.
"전장이군."
샬롯이 읊조린 말에, 필립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황색 눈동자를 묘하게 번뜩이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전장을 만들어 둔 거야."
"허…."
필립이 그제야 탄식하는 가운데,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저택으로 향하며 지나친 말라비틀어진 미로 정원에도, 이런 공터가 있었다. 다만 지금보다는 작았고, 구울 실험체들이 그를 반겨 주었었다. 물론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놈들은 전부 정원의 양분이 되었으니까.
이안의 시선이 이어진 통로를 훑었다. 갈림길이었다. 정면과 우측.
이안은 별다른 고민 없이 우측 길로 접어들었다.
"망설임이 없으시군요…. 길을 찾는 요령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새끼, 궁금한 것도 많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최악의 상황에선 일행이 나뉠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리만 아는 요령이 있으시다면, 다들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뜻밖에도 합리적인 이유였다. 하긴, 이놈도 이제 짬이 있는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길은 나도 몰라. 대충 세 가지 정도만 고려하면서 움직이는 거지."
"세 가지요…?"
이안이 검을 들어 슬쩍 하늘을 가리켰다.
"밤하늘의 경계선. 정원은 아마 이 밤하늘의 범위만큼 펼쳐져 있을 테니까."
"...!"
필립은 물론 일행 모두가 새삼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필립이 더듬댔다.
"새, 생각보다 훨씬 넓겠군요."
"저택은 아마 정중앙이나 그 근처에 있을 거다. 그러니까 그걸로 방향을 참고하는 거야. 그보단 우리 위치를 대충이라도 가늠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이안이 검을 옆으로 뻗어, 넝쿨 장벽을 긁으며 지나갔다.
"이렇게 한쪽 벽면을 기준 삼아 나아가는 거다. 이런 미로에서 길을 찾으려고 하는 건 의미가 없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계속 마음에 정해둔 벽면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에 도달하게 되겠군. 막다른 길이라 해도 벽은 이어져 있으니까.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어."
메브가 덧붙였다. 감탄한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애초에 그가 생각해 낸 방법도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쯤 읽은 책에서 본 내용에 불과했다.
'그걸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밤하늘. 벽면. 하고 필립이 읊조리는 사이에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직각으로 꺾인 코너를 돌고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그… 세 번째는요? 세 번째는 뭡니까?"
점점 안달이 나는 눈빛이 되던 필립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샬롯과 메브도 슬쩍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겠어. 적이지. 이건 말하지 않아도 알 줄 알았는데."
말을 멈춘 그의 시선이, 통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공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브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턱을 긁적이던 필립이 말했다.
"적이 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됩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부분에는 아둔해서요."
"적이 굳이 막다른 길을 막고 기다리지는 않을 거 아냐. 물론 무작정 우리를 따라오는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확률적으로 옳은 길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
"아하…!"
필립이 탄성을 흘리는 가운데, 이안이 새로운 공터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기던 그가, 공터 중앙쯤에서 멈춰서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군."
"...?!"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이 이내 눈을 치켜떴다. 등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번졌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며 안면 가리개를 내리는 메브의 곁에 재빨리 다가선 그가, 검과 방패를 치켜들며 몸을 돌렸다.
스스슷-
그들이 지나친 통로 옆. 높다란 장미 넝쿨 위에 그림자 하나가 솟고 있었다. 뒤이어 그 사이로 두건을 눌러쓴 중년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소 피곤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에 곱슬 거리는 흑발.
어깨에 두른 검은 망토 아래로, 지팡이를 짚은 손이 드러났다.
새카만 흑단목 지팡이를 장벽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짚고 있었다.
다소 우울해 보이는 눈으로 서로 간격을 확보하는 일행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기랄… 제발 이쪽으로 먼저 오지 않기를 빌었거늘…. 저 괴물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게 내가 될 줄이야…."
"...?"
놈을 응시하던 필립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 뱀파이어가 칭하는 괴물은 이안을 뜻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투나 표정만 보더라도, 전혀 그와 싸우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품위를 지키십시오, 네이든 경. 적을 앞에 두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셔서야 되겠습니까?"
"...!"
뒤에서 이어진 차분한 목소리에,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하나가 아니었다고?'
그의 고개가 득달같이 뒤로 돌아갔다. 장벽 위를 응시하는 이안과 샬롯의 뒷모습. 그리고 장벽 위에 우두커니 선 또다른 뱀파이어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161화
단정하게 빗어넘긴 흑발.
제국 양식의 검은 정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얼굴에 기품 있는 미소를 머금은 미남자였다.
"뒷놈은 주문 쟁이 같다, 이안."
"흡혈귀는 다 주문 쟁이야."
"그건 안다만. 주문을 주로 쓸 것 같은데."
마른침을 삼키는 필립의 귓가로, 샬롯과 이안의 대화가 파고들었다. 둘 다 덤덤한 말투였다.
이안이 일단 지켜 보자는 듯 어깨를 까딱이는 사이, 정복 뱀파이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미로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살자 이안 경, 그리고 일행 여러분. 저는 저택의 집사장인 알프윈입니다. 여제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흰 귀빈을 내려다보며 맞이하나 보지?"
일행들이 저마다 자세를 다잡는 가운데, 이안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알프윈이 대답했다.
"양해해 주십시오. 경께서 대화보다 행동을 우선하는 분이란 걸 이미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이군요."
"다른 방향으로 갔다면 다른 놈들이 환영해 줬겠군."
"물론입니다. 귀빈들께서 어디로 가실지는, 저희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애석하게도 경 덕분에, 남은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감사 인사는 사양하지."
이안의 도발에도 알프윈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염려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들께서 들어오셨으니, 곧 다들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그중엔 반가운 얼굴도 있을 테고요."
샬롯이 낮게 으르렁댔다. 곧바로 쌍둥이를 떠올린 것이리라.
"저놈은 내게 맡겨다오, 이안. 부디."
그녀가 내뱉는 가운데, 알프윈이 한 손을 가슴 앞에 올리며 덧붙였다.
"그 전에, 지루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푸스스, 가슴에 얹은 손에서 검은 안개가 번졌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알프윈의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저희만으로 경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안개 사이로 새카만 검의 형태가 드러났다. 날 한복판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튀어나온 기형 검이었다. 커다란 갈고리나 원형 낫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굴 옆으로 검날을 드리운 알프윈이 말을 맺었다.
"다른 일행 분들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자신감 넘치는 놈이군. 말도 많고."
분위기가 흉흉하게 가라앉는 가운데, 이안이 고저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 붉은 신성력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 해 봐."
내뱉음과 동시에, 이안이 예고 없이 왼손을 털었다. 빛살처럼 날아드는 투척용 단검을 단박에 쳐낸 알트윈이 미소 지었다.
"기꺼이."
슈확,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알프윈이 새카만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쇄도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건만,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샬롯이 이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각-!
초승달 검과 송곳니 검이 맞부딪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
"내려와라! 이 겁쟁아!"
필립이 아직도 넝쿨 장벽 위에 선 네이든을 검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이든이 신경질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너 같으면 가겠느냐, 애송아? 난 이 위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니, 어디 끌어내려 보거라."
그가 흑단목 지팡이를 슬쩍 까딱였다. 발치에 피어 있던 커다란 장미가 툭 떨어지더니 빙글빙글 돌며 그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회전하는 꽃잎이 순식간에 올올이 해체되더니, 그대로 새빨간 핏덩이로 화했다. 네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할 수 있다면 말이지."
파파팟-!
동시에 핏덩이에서 붉은 가시가 쏟아져 나왔다. 필립이 화들짝 오른팔을 내뻗었다.
삽시에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그는 물론 옆의 메브까지 감싸며 커다랗게 번졌다. 평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신성력.
장막에 닿은 피의 가시들이 타들어 가는 사이.
쩌엉-!
순식간에 몇 합을 교환하고, 힘으로 초승달 검을 떨쳐낸 샬롯이 알프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을 틀어쥐려는 듯, 손톱이 튀어나온 손아귀를 앞으로 내뻗은 채였다.
샬롯의 힘에 놀란 듯 눈썹을 치켜 올린 것도 잠시. 알프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쒸엑-
"...!"
놈의 그림자 아래에서 구불구불한 단검 날이 솟구쳐 올랐다.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 단검을 내뻗으며 놈의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샬롯의 눈이 커질 찰나.
퍼억-!
미간에 투척용 단검이 박힌 여인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뒤따라 달려든 이안이 그대로 검을 휘둘러 여인의 목을 날려 버렸다.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거둬들인 샬롯이,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콰지직-!
송곳니 검이, 이번에는 진짜 놀란 게 분명한 알프윈의 가슴팍을 길게 찢어발기며 지나갔다.
알프윈이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넝쿨 장벽에 부딪혔다. 장벽에 솟은 가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털썩-
반으로 잘린 여인의 머리가 뒤이어 땅에 떨어졌다. 아래턱이 없어서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미간에 단검이 박힌 채, 피눈물 맺힌 눈만 깜빡댈 뿐.
퍼석, 이안이 그 머리를 밟아 으깨버리는 사이, 뒤에서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 나리! 어쩌죠? 저놈은 정말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메브를 돌아보았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시선을 느낀 그가 옆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는 그때.
"감이 대단하시군요, 이안 경.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알프윈이 내뱉었다. 말하는 사이에 쩍 갈라져 있던 가슴팍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심지어 걸치고 있던 옷까지 되돌아왔다.
그게 더 신기한데.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잘."
물론 감으로 알아챈 건 아니었다.
이안은 처음부터 놈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달아 떠오른 퀘스트 창 덕분이었다.
피의 마술사. 그리고 집사와 시녀들.
보이는 건 집사뿐이니, 시녀들은 어딘가 숨어 있으리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짙은 그림자를 본 순간, 그녀들이 저 안에 있으리라 확신하게 되었고.
"기습은 의미가 없겠군요."
다시 땅에 내려선 알프윈이 팔을 펼쳤다. 그의 그림자가 넓어지더니, 그 아래에서 시녀복을 걸친 여인들이 우수수 솟아올랐다. 하나같이 구불구불한 단검을 움켜쥔 채였다.
그녀들은 자세를 다잡음과 동시에 이안과 샬롯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시녀들이 채웠다.
뭐 이렇게 많이 나와?
생각할 찰나, 샬롯이 이안의 앞으로 나섰다. 철컹대는 소리와 함께 메브도 달려왔다.
"여긴 우리가 처리하겠다, 이안."
그녀가 이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덧붙였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방패를 치켜든 채 언제든 신성력을 펼칠 태세인 필립의 뒷모습이 가까워졌다.
"너도 가라. 둘을 보조해."
"예. 감사합니다, 나리."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장벽 위의 네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끼아아아-"
"꺄아아아악-!"
시녀들이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싸우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네이든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아졌다.
"제기랄…. 네 일행이 저것들을 다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냐?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주문쟁이는 주문쟁이끼리 놀아야지."
이안이 불그스름한 마력이 맺힌 눈으로 내뱉었다. 주위의 소란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는 뒤의 기척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지만, 네이든이 거기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보면 기절하겠군. 마검사라니. 대체 너 같은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너 같은 괴물은, 말이 되고?"
화르륵, 동시에 이안의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들이 네이든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네이든이 망토를 휘저었다. 동시에 그의 옆에 둥둥 떠 있던 핏덩이가 방울 같은 막이 되어 그의 주위를 뒤덮었다.
퍼버버벙-
거대한 핏방울에 부딪힌 화염구가 연달아 폭발했다. 붉은 수증기가 자욱해졌다. 화염구는 단 하나도 핏방울을 뚫어 내지 못했다.
"헉-"
하지만 망토를 내리는 네이든의 얼굴에는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쒸엑-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뛰어오른 이안이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약력이 어찌나 좋은지, 거의 장벽 위에 닿을 정도였다.
"제기랄-!"
네이든이 다급하게 망토를 펄럭였다. 이안이 몸쪽으로 당겼던 팔을 힘차게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쉬학-!
네이든의 몸이 누가 끈으로 당긴 것처럼 옆으로 미끄러졌다.
콰지직, 이안이 휘두른 검이 빈 허공을 가르고 장벽 윗부분에 틀어박혔다. 검날에 찢겨나간 넝쿨 단면에서 새빨간 핏물이 솟구쳤다.
"제기랄! 벽이 낮아! 너무 낮다고! 듣고 있냐, 이 멍청한 놈아?!"
네이든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력까지 섞인 외침. 장벽에서 꾸득, 꾸드득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넝쿨 장벽이 더 높아지고 있었다.
뾰족한 가시들을 발로 차 부러뜨리고는 그 사이로 발을 내디딘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을 통제하는 놈도 있나?'
우드득, 동시에 장벽에 박혀 있던 칼날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말려 들어갔다.
미련 없이 놔 버린 이안이, 저만치의 네이든을 향해 도약했다.
휘아아악-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몸을 허공에서 한 번 더 떠밀었다. 장벽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도약하며 치켜든 손이 아공간을 훑고, 이내 새로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든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미친 괴물 놈…! 정말 카르하가 따로 없구나…!"
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파라락, 망토가 펄럭이면서,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안은 허공에서 고개만 돌려 놈의 움직임을 좇으며 혀를 찼다.
진짜 모기 같은 새끼네.
콰직!
그 와중에 장벽에 검을 내리쳐 박은 이안이, 한결 더 능숙하게 가시들을 후려치고 발로 차 공간을 확보하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검 자루에 의지한 채 매달린 형태였다. 평소라면 꽤 힘이 들었을 자세였지만, 투쟁의 축복을 활성화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신성력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능력치 상승 폭이 아까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야만 전사보다 힘이 강할 터였다.
"씁…."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네이든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난전이 펼쳐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사방에서 밀려드는 시녀들은, 더이상 인간 같은 형상이 아니었다. 온통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깨진 유리 조각처럼 돋아난 이빨.
단검을 쥔 손에도 칼날 같은 손톱이 번뜩이고 머리카락은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댔다.
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날뛰는 샬롯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느새 은검까지 뽑아 든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짐승처럼 날뛰어댔다. 칼날뿐 아니라 어깨나 팔꿈치, 무릎으로 후려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겨난 빈틈은 삽시에 피어오르는 황금빛 장막이 막아줬다. 방패를 바짝 치켜든 필립은 가장자리에서 방어에 주력하며 샬롯과 메브를 보조하고 있었다.
채채챙-!
그리고 지금 알프윈을 상대하는 건 메브였다. 그녀는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을 어지럽게 오가는 초승달 검의 변칙적인 궤도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받아 내거나 흘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요정의 세검을 가볍게 휘둘러 시녀의 머리를 찌르거나 목을 날려 버렸다.
손잡이로 후려치기도 했는데, 은장식이 되어 있어 뱀파이어들에겐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푸욱-!
한순간, 그녀의 세검이 알프윈의 한쪽 어깨를 찔렀다. 알프윈은 두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검날에 더 깊숙이 몸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놈의 그림자에서 구불구불한 단검과 그걸 쥔 가느다란 팔이 솟아올랐다.
푸스슷-
알프윈의 초승달 검에 그림자 같은 안개가 맺히고, 어느새 어깨 위까지 모습을 드러낸 시녀가 기척 없이 메브의 갑옷 틈을 노릴 찰나였다.
콰직-!
어느새 달려든 이안의 검이 시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을 치켜뜨는 알프윈에게로 달려들었다.
"주문 쟁이 같은 짓만 하는군."
내뱉음과 동시에 뻗어 나간 쇠주먹이 알프윈의 한쪽 얼굴을 그대로 후려쳤다.
빠각-
아름답던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며 튕겨 나갔다. 주먹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어깨에 박힌 칼날이 살을 찢고 나와버릴 정도였다. 바닥을 나뒹구는 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내뱉었다.
"방심하지 마시오."
메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가 다시 내달렸다. 지나치는 과정에서 마주친 시녀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콰직! 서걱-
시녀들 몇이 발악하듯 달려들었지만 이안의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검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미련 없이 던져버린 이안은 주먹으로 시녀들을 후려치며 지나쳤다.
"캬오오오-!"
샬롯이 포효하며 이안의 뒤를 막았다. 시녀들이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몰려들었다.
'더럽게 정신없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의 시선은 저만치의 장벽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는 고개를 끝까지 꺾어야 꼭대기가 보였다.
어느새 또 하나의 혈옥을 만들어낸 네이든.
"...!"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눈을 부릅뜨더니 삽시에 주문을 완성했다. 혈옥에서 피의 가시가 소나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안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쿠웅- 쒸아악-!
땅이 움푹 파이면서 그의 몸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지직-!
쏟아진 피의 가시들이 그 위를 두들겼다. 그를 지나친 게 더 많았지만, 그마저도 때마침 피어오른 신성력의 장막에 막혀 증발했다.
그런데도 네이든의 입가에는 오히려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이안이 그리는 포물선이 그에게 닿을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면서 그가 씹어 뱉었다.
"헛 힘 쓸 시간에, 가서 저것들이나-"
잠시 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몸이 앞으로 새우처럼 굽어졌다.
자루가 은으로 장식된 비수가, 어느새 그의 복부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요정의 비수.
"어, 어억…?"
네이든이 신음을 토하며 눈을 치켜떴다. 정점을 지나쳐 장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이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가득 맺혔다. 옆으로 내뻗은 손에 홀연히 나타나는, 무식하게 큰 대검도.
그제야 네이든은 이안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 위에 닿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투척한 단검이 절대 빗나가지 않을 만큼만 가까워지면 충분했던 것이다.
솨아아-
검신을 타고 불그스름한 빛이 번지기 시작한 순간, 네이든의 눈에 여유가 사라졌다. 그가 다급하게 복부에 박힌 비수를 움켜쥐었다.
치이익, 자루에 장식된 은이 그의 손아귀를 붉게 태웠다. 네이든이 이를 악물며 손아귀에 힘을 준 순간.
"내려와, 새꺄."
내뱉은 이안이, 가까워지는 장벽을 향해 온 몸을 비틀며 대검을 내리쳤다.
#162화
뿜어져 나간 바람 칼날이 이안의 속도를 순간적으로 줄였다. 뒤따라 틀어박힌 대검이 장벽을 비스듬하게 가르며 뻗어 나갔다.
이안은 신성력을 끌어올리면서 온 힘을 다해 몸을 휘돌렸다.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검날이 장벽 밖으로 빠져나왔다.
쿠웅-
이안이 등부터 장벽에 처박혔다.
장벽에 빼곡하게 돋은 가시들이 갑옷 위를 두들겼다. 일부는 허리나 팔의 사슬 고리 사이로 파고들어 박혔다.
이안은 미간만 찌푸릴 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회복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가시를 뽑을 필요 조차 없으리라. 혹여 상태 이상 같은 걸 유발하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자신도 있었다.
우르르르-
충돌의 여파로, 잘려나간 넝쿨들이 그의 앞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뒤엉킨 채 잘려나간 뱀 무더기 같았다. 네이든도 그 사이로 함께 떨어졌다.
철퍽-
피를 흩뿌리는 넝쿨 더미 사이로, 추락한 네이든이 나뒹굴었다. 넝쿨의 가시가 그의 전신에 박혔다. 그는 간신히 뽑아든 요정의 비수를 그제야 땅에 떨어뜨렸다. 단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익다 못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신음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핏물 사이.
쿠웅-
대검을 쥔 이안이 착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네이든을 내려다본 이안이, 대검을 치켜들며 내뱉었다.
"반갑군."
"제, 제기랄-!"
네이든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옆에 떨어진 흑단목 지팡이를 쥐려 했다.
쒸엑- 콰직-
하지만 자비 없이 떨어진 대검이 그대로 그의 몸을 쪼개 버렸다.
넓적한 검날을 사이에 두고 쩍 갈라진 네이든의 몸에서 한 박자 늦게 피가 치솟았다.
양손으로 자루를 움켜쥔 이안의 눈동자에 불길 같은 마력이 휘몰아칠 찰나.
푸확-!
네이든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 사이에서 분리되어 나온 진혈이 장벽 너머로 빨려들듯 멀어졌다. 나머지 피가 힘을 잃고 쏟아졌다. 가뜩이나 진액 덕분에 붉어졌던 이안의 전신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화르륵-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들이 피어올랐다.
뒷북 오지네, 시발.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닫으며, 이안은 땅을 바라보았다.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장미 넝쿨들. 토막 난 채 비쩍 말라붙은 네이든의 몸은, 끝에서부터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땅은 이 와중에도 쏟아진 핏물을 흔적도 없이 빨아들였다. 이안은 그 사이에서 요정의 비수와 흑단목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대검과 지팡이를 차례로 아공간에 쑤셔 넣은 그가, 비로소 시선을 돌렸다.
"끼아아아-!"
"캬아아!"
콰직! 쩌억-!
시녀들과 일행의 전투는 아직도 한창이었다. 일행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면서 착실히 적들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녀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몇몇 시녀들이 이안을 향해서도 구불구불한 단검을 뻗으며 달려왔다.
새 검을 꺼내든 이안이 손을 털었다. 그의 주위에 일렁이던 불꽃들이, 기다렸다는 듯 뿜어져 나갔다.
펑- 퍼버벙-
달려들던 시녀들은 물론, 이리저리 날뛰는 무리 한복판에도 폭발이 이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
메브와 접전을 벌이던 알프윈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의 빈자리는 시녀들이 채웠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내뱉었다.
"네이든 경이 벌써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차분한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에는 아까보다 여유가 없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에도 끈적한 핏물이 맺혔다.
물론 이안만큼 엉망은 아니었다.
혈인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내뱉었다.
"다음은 너다."
"보아하니 정말 그렇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알프윈이, 불현듯 몸을 돌려 내달렸다. 그가 쏜살같이 통로에 가까워졌다.
"...?!"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가운데, 아직 수십 명은 남아 있던 시녀들도 일제히 통로로 달려갔다.
일행과 뒤엉킨 몇 명만이 죽음을 각오한 듯 더 표독스럽게 덤벼들었다.
아니, 진짜 튀는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응에 당황하면서도, 이안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로에 들어선 알프윈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우글우글 도망치는 시녀들의 뒷모습만이 선명할 뿐.
이안이 소리쳤다.
"다들 따라와!"
샬롯과 눈빛을 교환한 걸 마지막으로, 이안도 통로에 접어들었다.
바람 칼날이 전신을 감싸고, 시녀 무리가 가까워지던 것도 잠시.
"키야아아!"
"죽어엇-!"
불현듯 무리 최후미의 시녀 둘이 몸을 돌리더니 이안을 향해 마주 달려왔다.
단검을 이안을 향해 내던지고는, 손톱이 돋은 양팔을 내뻗은 채였다.
단검을 쳐내며 미간을 찌푸린 이안은, 이내 속도를 줄이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궤적을 따라 뿜어져 나간 바람 칼날이 시녀 하나의 허리를 양단하고 다른 하나의 어깨까지 썰어 버렸다.
하지만 시녀들은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았다. 몸이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기어코 이안을 붙잡으려 내뻗은 손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결국 땅에 발을 찍어 멈춰 서며, 이안이 주먹을 내뻗었다.
꽈직!
신성력과 가속도가 더해진 주먹이 상반신만 남은 시녀의 머리를 말 그대로 으깨 버렸다. 한쪽 안면이 움푹 들어간 시녀가 옆의 장벽에 처박혔다.
하나 남은 팔을 내뻗던 시녀의 정수리로는 검날이 틀어박혔다.
'논개 작전인가…?'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진 않겠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좁아졌던 시녀들과의 간격이 다시 저만치까지 벌어졌다. 이안은 혀를 차면서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행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샬롯을 필두로 다들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차피 통로는 하나뿐이니, 저들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이안은 시녀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내달렸다.
'내 뒤를 따라오던 것들도 이런 기분이었나…?'
묘한 감흥이 뒤를 이었다.
쫓기는 상황은 많이 겪었지만, 이렇게 적들의 뒤를 따라가는 건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것들은 그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이든도 그를 사신 취급하지 않았던가.
물론, 저것들이 지금 도망치는 건, 그저 그가 두려워서만은 아닐 터였다.
'함정이 있거나, 다른 놈들과 합류할 생각이겠지.'
어렵지 않게 유추하면서도, 이안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저것들이 아니라도 마주치게 될 함정이고, 마주치게 될 적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그를 막지 못하면 죽게 되는 건 저것들도 마찬가지 같지 않던가.
저런 식으로 내내 도망만 다닌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진혈이 뽑혀 죽게 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문득 짧게 혀를 찼다.
진혈을 회수한다는 건, 여제가 그만큼 점점 더 강해진다는 의미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혈을 많이 품은 부작용이 없진 않겠지만, 그게 당장 그에게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부조리한 상황이었다.
그를 지치게 하는 전투가, 반대로 상대를 강하게 만들고 있다니.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한 줌이라도 더 많은 진혈을, 회수할 수 없도록 태워버려야 겠다고 생각할 뿐.
"키아아-!"
"캬아아악!"
그 와중에도 시녀들은 계속해서 둘씩 짝을 지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은 그때마다 평등한 죽음을 선사하고, 다시 조금 더 거리가 벌어진 시녀들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좌우의 넝쿨 장벽은 본래의 높이로 되돌아와 있었다. 처음 싸웠던 공터 인근의 장벽들만 급속도로 자랐던 모양이었다.
시녀들의 뒷모습은 코너를 돌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놓치지 않았다.
이안은 어쩌면 알프윈은 이미 저기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에 불과할지도.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렇게 세 번째 코너를 돈 직후였다.
저 멀리, 이미 다음 코너에 들어선 시녀들이 우르르 멀어지는 가운데.
꾸득- 뿌드득-
방금까지 장벽이던 정면에서 넝쿨이 밀려나며 새로운 통로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녀들이 지나친 길은 장벽에서 밀려 나온 넝쿨들이 다시 막아버리는 중이었다.
길이 바뀐 것보다 더 이안의 시선을 잡아 끄는 건, 새로 나타난 통로 저 끝에 우두커니 선 남자였다.
얼굴에 나무판자를 대충 엮은 가면을 쓰고, 핏물이 잔뜩 배인 앞치마를 두른 거한. 손에는 커다란 정원용 가위를 들고 있었는데, 날도 녹이 슨 것처럼 붉었다.
'공포 영화 살인마가 따로 없네.'
생각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미로 저택의 정원사.
입가에 헛웃음을 머금은 것도 잠시, 이안은 더 속도를 높였다.
어차피 길은 이미 바뀌었으니, 저놈이라도 반드시 죽여야 했다.
보아하니 정원사는 미궁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 같았으니까.
저놈을 놓쳐서 계속 길이 달라진다면, 말 그대로 영원히 미로를 배회하게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전에 다른 대책을 찾아내겠지만, 그보다 여기서 저놈을 죽여버리는 게 훨씬 손쉽고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우오오-!"
정원사가 가위를 철컥대며 포효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의 전신에서 불그스름한 마력이 번져 넝쿨 장벽으로 스며들었다.
촤악- 촤아악-!
지나친 코너 너머에서부터 회초리를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본 필립이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나리! 더 빨리 뛰십시오! 다들 더 빨리 뛰세요! 으아아!"
저 너머의 장벽 윗부분이 파도치듯 크게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넝쿨이 차례로 구부러져 땅을 후려치고 올라갔다. 이대로면 삽시에 그들이 지나치는 통로까지 밀려들 터였다.
"...!"
차례로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일행이 젖먹던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원사가 아니라 조련사 아닌가?
생각하며 다시 앞을 바라본 이안의 미간이, 이내 더 일그러졌다.
어느새 정원사가, 양손에 밑동을 자른 넝쿨을 몇 가닥씩 꼬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신으로 마력이 일렁였다. 그가 잘린 넝쿨의 단면을 맞붙였다. 하나로 이어진 넝쿨이 뱀처럼 스르륵 움직여 그의 뒤로 기어갔다. 곧 몸을 숙인 정원사가 한 손으로는 땅에 박아 둔 정원 가위를, 다른 한 손으로는 넝쿨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다시 허리를 편 그가 넝쿨을 쥔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촤아악-!
배배 꼬인 줄기가 통로 바닥에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채찍이 따로 없었다. 단면을 이어 붙인 만큼, 엄청나게 길어진 가시 채찍이었다.
"으하하하하-!"
연달아 앞뒤로 채찍을 휘둘러 대면서, 정원사가 가래가 끓는 듯한 대소를 터뜨렸다.
미친 새끼가 따로 없네, 진짜.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덩치만 봐도 보통 괴력을 가진 놈이 아닐 터였다. 축복을 받는 그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필립이라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투구조차 쓰지 않은 샬롯은 물론 전신 갑옷을 걸친 메브도 저기 휩쓸리면 무사하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순간에도 쓰러졌다 올라가는 넝쿨 장벽의 물결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나, 나리! 뒤! 뒤에!"
또 뭔데, 시발.
이안은 마력이 몰아치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벽의 물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나타나는 통로 저 너머. 어느새 알프윈과 시녀들이 서 있었다.
정원사의 도움으로 작게 한 바퀴를 돌아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화르르륵-
이를 가는 이안의 주위로 춤추는 불꽃이 연달아 피어올랐다. 혼돈력을 머금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아진 채였다. 이안은 지체하지 않고 정원사를 향해 일제히 불꽃을 내뻗었다.
퍼버버버벙-
떨어져 내리는 가시 채찍에 휘말린 불꽃이 반 가까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정원사는 물론 정원사 주위의 장벽까지 쏟아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정원사가 채찍질을 멈추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화력이었다.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사이.
"그워어어어-"
불길에 휩싸인 정원사가 울부짖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통스러운 듯한, 겁에 질린 것 같은 비명이었다. 물론 전혀 애처롭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놈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불길 대신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있던 주위의 장벽을 물결처럼 출렁이게 했다.
촤아아아아-
뒤에서 이어지는 파도의 속도가 더 빨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환장하겠네, 진짜.
이안이 다음 대책을 강구할 찰나.
"안 되겠습니다! 다들 엎드리십쇼! 절 믿으시고요!"
필립이 오른팔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그의 검에서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황금빛을 확인한 이안이, 그대로 속도를 죽이며 몸을 날렸다.
"다들 바닥에 붙으세요!"
샬롯과 메브까지 몸을 날리는 걸 확인한 필립이, 마지막으로 검을 내뻗으며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그대로 황금빛 장막이 되어 일행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얼마나 신성력을 아끼지 않았는지, 이안을 지나쳐 저 앞까지 뻗어나갈 정도였다.
촤아아악-
그리고 장벽의 물결이 그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일행은 그저, 등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눈부신 장막에 닿은 순간, 가시와 넝쿨이 재가 되어 타들어 간 덕분이었다.
가시 파도가 일행을 지나쳤다.
신성 장막이 흩어지면서 만들어진 반딧불 같은 빛무리가, 넝쿨 장벽에서 떨어져 나온 가시와 뒤엉켜 나부끼는 가운데.
"하…."
짧은 한숨을 내쉰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잦아드는 장벽의 파도 너머, 열기에 휩싸여 울부짖는 정원사에게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뒤따라 샬롯과 메브도 일어서는 가운데.
"것 보십시오!"
의기양양한 얼굴로 튕겨 오르듯 일어선 필립이 소리쳤다.
"제가 저만 믿으라고 말씀드렸- 으헉!?"
말하다 말고 화들짝 몸을 돌린 필립이 반사적으로 왼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보다 날아든 검은 궤적이 더 빨랐다.
콰직, 짧은 소리와 함께 필립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일행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멈칫하던 필립이 허물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필립-!"
#163화
달려 나간 메브가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필립의 왼쪽 어깻죽지에 튀어나온 단검 자루를 눈에 담은 이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
흐릿해지는 검은 궤적 너머. 손을 내뻗은 알프윈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시녀들이 쓰던 단검을 던진 것이리라.
이안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는 그때.
"으오오오-"
뒤에서 정원사의 겁에 질린 비명과 꾸득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멈칫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에 휩싸인 채 허우적대며 몸을 돌리는 정원사. 그리고 다시 스멀스멀 모여드는 넝쿨들.
다시 본래의 장벽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 멀지 않아서, 지금이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달려가는 대신, 짧게 입맛만 다시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가 다시 알프윈 쪽을 돌아보려는 찰나.
솨아아-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넝쿨 사이를 가로막았다. 신성력에 닿은 장미 넝쿨들이 타들어 가고,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십시오, 나리. 놓치면 안 될 놈입니다…."
미간을 좁힌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메브의 품에 안겨 옆으로 옮겨지는 그는, 안색이 창백한 와중에도 오른손을 내뻗고 있었다.
어깻죽지의 단검은 뽑지도 않은 채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무슨.
"헛소리 말고-"
"괜찮다, 이안. 가거라."
말을 자른 건 필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메브였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달려오기 시작한 시녀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전신에는 검붉은 신성력이 끈적하게 번지고 있었다.
세검을 고쳐 쥐며, 그녀가 덧붙였다.
"저것들은 내게 맡겨다오. 단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테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필립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서요, 나리. 성물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렸다.
"버티시오. 둘 다."
내뱉은 그가, 신성력에 타들어 가면서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넝쿨 사이로 몸을 날렸다.
필립에게 고개를 끄덕인 샬롯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퍼석-!
둘이 지나치기가 무섭게 장막이 흩어졌다. 재가 된 넝쿨들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벽이 메꿔졌다.
장벽 너머에서 시녀들의 비명이 메아리치고, 뒤이어 붉은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벽 하나 사이라기엔 멀게 느껴지는 소리였지만,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감각의 왜곡은 어차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허우적대며 도망치는 정원사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순간도 저놈을 시야에서 벗어나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든 미로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놈이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놓친다면, 두고 온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으리라.
"으어어어어-"
우스꽝스럽고 둔해 보이는 자세로 달리고 있음에도, 정원사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투쟁의 축복을 활성화한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워어어억-!"
점점 가까워지는 이안을 돌아보며 겁에 질린 듯 울부짖던 정원사가, 곧 널찍한 공터로 들어섰다.
놈이 손의 가위를 다급하게 철컹댔다. 통로 좌우의 넝쿨들이 스멀스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좁아지는 입구를 여유롭게 통과한 그가, 곧 공터를 가로지르고 있는 정원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혼돈력으로 증폭되고 신성력까지 실린 바람 칼날이, 놈의 두꺼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끄어어억!"
두 다리가 허벅지 아래로 잘려 나간 정원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뒤따라 몸을 날린 샬롯이 아슬아슬하게 공터로 들어서는 가운데, 이안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가 정원사의 머리를 노려보며 검을 치켜들 찰나.
쒸에엑-
"...!"
불현듯 새카만 궤적이 날아들었다. 몸을 비튼 이안이 검을 떨쳤다.
검은 궤적이 잘려나가고, 거의 동시에 증발해 사라졌다.
정원사를 지나친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하는 사이.
"이걸 자르다니? 역시 대단하군, 으히힛…!"
장벽 위에서 거슬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골격이 얇고 길쭉한, 거무튀튀한 가죽으로 만든 딱 달라붙는 옷을 걸친 남자였다. 가죽 두 장을 기워 만든, 코 위까지 가리는 가면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이안을 방해한 건,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었다. 손잡이 아래로는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카맣게 아른거렸다.
"...."
이안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고문 기술자라는 이름으로 떠오른 퀘스트 창조차 바로 닫아 버린 채, 그가 다시 정원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 으어어-"
잘린 다리를 주워든 채 주춤주춤 기어가던 정원사가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슈확-
새카만 보호막이 원을 그리며 놈을 감쌌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표면을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부러진 건 오히려 그의 검이었다.
방해가 왜 이렇게 많아, 시발.
비로소 이안이 짜증스럽게 부러진 검을 내던지는 사이.
"저 머저리를 우리 손으로 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용살자는 무섭네. 그렇지, 언니?"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번졌다.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전신의 털과 갈기가 삽시에 곤두서는 듯 했다.
아공간에서 새 검을 꺼내 들면서, 이안은 장벽 위에 나란히 선 백금발의 두 뱀파이어를 눈에 담았다.
너희가 그 쌍둥이냐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었다.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으니까.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그림자 자매.
이안은 창을 닫음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촤아악-!
그림자 채찍이 그가 서 있던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새 장벽 위를 내달린 고문 기술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듣던 대로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군…! 네 그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지는 걸 꼭 보고 싶어, 용살자!"
진짜 전형적으로 미친 것들이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보호막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당연하게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사가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모양.
그냥 부서질 때까지 부숴 봐?
"...!"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쌍둥이 중 하나가 장막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첫째였다.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 본 순간, 이안은 시야가 그 눈을 중심으로 왜곡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 눈동자 안쪽이 기묘한 파형을 그리며 일렁였다.
눈을 마주 본 순간 홀린다더니.
하지만 이안의 의식을 완전히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안은 혼돈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어긋났던 감각을 단숨에 되돌렸다.
시야가 명료해짐과 동시에, 이안이 왼팔을 털었다.
퍼억-!
미간에 단검이 박힌 자매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다음 순간 그녀가 휙, 장막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자신의 자매의 곁에 솟아올랐다.
미간에 박힌 단검을 뽑으면서, 그녀가 읊조렸다.
"역시 안 통하네. 그래도 이렇게 쉽게 떨쳐낼 줄은 몰랐는데. 너랑은 딴판이야, 안 그래 야옹아?"
동시에 고개를 돌린 자매의 얼굴에 이내 비웃음이 번졌다.
어느새 안대로 단단히 눈을 가린 샬롯이, 송곳니 검과 은검을 동시에 뽑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갈기가 고요한 살기를 머금고 일렁이는 가운데, 둘째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대책이라고 가지고 온 거야? 그 몰골로 싸울 수나 있겠어?"
샬롯이 대답 대신 몸을 날렸다.
"아, 그래. 싸울 수 있구나?"
"이번엔 또 얼마나 재롱을 부릴지 기대되네."
낭랑한 말투와 달리 가라앉은 눈빛이 된 자매가 물러나는 가운데.
"아하하! 드디어 내게도 관심을 보이는구나!"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던 고문 기술자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놈은 그러면서도 채찍을 쥔 팔을 다시 한번 크게 털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궤적을 바꾼 채찍이 기다랗게 늘어나며 이안의 측면을 노렸다.
이안의 주위로 마력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직-
채찍은 역장에 막히고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표면을 기어올라 반대편까지 넘어갔다. 가늘어진 채찍이 기어코 이안에게 도달했다.
이안이 그 궤적 앞으로 왼팔을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촤르륵-
채찍이 기다렸다는 듯 이안의 팔을 휘감았다.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마력이 이안의 전신으로 퍼졌다.
파슥, 마력 역장이 깨지는 가운데 고문 기술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잡았다…! 이제 너는 내가 만든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채찍을 끌어당기던 고문 기술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분명 그의 마력은 이안에게 극한의 고통을 전해 주고 있건만.
이안은 비명은커녕 여전히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휘두르는 대로 끌려오지도 않았다.
카가각-
뒤꿈치를 땅에 찍으며 멈춰선 이안이, 채찍이 감긴 왼손으로 한 번 더 채찍 한복판을 콱 움켜쥐고는 힘껏 끌어당겼다.
으스러질 듯 자루를 쥐고 있던 고문 기술자의 몸이 휙, 그에게로 딸려 들어갔다.
마력을 밀어 넣는 동안의 채찍은 본래처럼 마구 늘어날 수 없었다.
"너, 고통을-?"
놀란 목소리로 내뱉던 고문 기술자의 눈동자에, 붉은 신성력이 가득 맺혔다.
서걱-!
눈동자 한복판에 닿은 검날이, 놈의 머리를 가로로 가르고 지나갔다. 그대로 왼팔을 뻗은 이안이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땅에 내리찍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고, 손아귀에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콰앙!
손아귀에서 폭발한 화염구는 고문 기술자의 가슴을 말 그대로 뻥 뚫어 버렸다. 신성력을 머금은 이안의 손은 손가락 하나조차 날아가지 않았다.
이안이 비로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느껴. 참았을 뿐이지."
지독한 고통이었다. 그 때문에 불필요한 신성력을 낭비했다. 하지만 무작정 손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번엔 진혈을 완전히 태워 버렸으니까.
가슴이 터지고 머리 절반이 날아간 고문 기술자가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퍼석, 그때까지 왼팔에 감겨있던 그림자 채찍이 자루만 남긴채 사라졌다.
왼팔을 툭툭 털며 일어선 이안은, 저 반대편의 장벽 위에서 날뛰고 있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콰직-! 서걱-!
좌우로 흩어진 자매가 서로의 그림자를 번갈아 오가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따라붙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온몸에 넝쿨의 가시가 박히고, 자매들이 날리는 그림자 칼날에 살가죽이 찢어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캬오오-!"
오히려 그럴수록 더 크게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이안은 그녀를 도우러 달려가는 대신, 그저 시선을 돌렸다.
그날의 일을 수없이 곱씹으며 복수를 꿈꾸던 그녀였다.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을 기회는 줄 생각이었다. 그게 성공으로 끝나건 실패로 끝나건 간에.
'뭐, 죽게 놔두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게 당장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균열이 번지는 보호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정원사가 날뛰고 있었다.
쩍, 쩌적- 쩌엉-!
곧 보호막을 깨뜨리며, 가위를 치켜든 정원사가 솟아올랐다.
놈이 멀쩡해진 몸으로 울부짖었다.
"으오오오-"
주위의 장벽이 파도치듯 꿈틀대는 가운데.
쒸에엑-!
붉은 궤적이 놈의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가면 아래, 정원사의 눈이 커졌다.
"으워어억!"
놈이 발작적으로 가위를 내뻗었다.
***
콰지지직-
살덩이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생이 샬롯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확인하던 첫째가, 눈을 치켜뜨며 옆을 돌아보았다.
"...!"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간 정원사의 모습이었다. 이안은 놈을 지나쳐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으워어어어억-!"
정원사가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마구잡이로 뿜어낸 마력이 주위의 넝쿨들을 놈의 주위로 끌어당겼다. 이안은 촉수처럼 뻗어오는 가시넝쿨을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했다.
"조용히 있을 것이지. 모자란 녀석…."
혀를 찬 첫째가 장미 꽃잎을 입에 넣으며 마력을 끌어올린 찰나였다.
쉬학-
머리 위로 문득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든 첫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부끼는 새카만 갈기. 그리고 말려 올라간 채 번뜩이는 뾰족한 송곳니였다.
어느새?
내심 경악한 첫째는 그림자 가시를 내뻗으며, 동시에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건 샬롯이 예상한 그대로의 움직임이었다.
푸욱-!
바닥에 깔리듯 밀려들던 송곳니 검이, 그림자 속으로 떨어지던 첫째의 가슴팍을 낚아채듯 꿰뚫고 치솟았다.
"아윽…?!"
첫째의 눈이 커졌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고통.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은검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양손을 움켜쥐었다. 멈칫했던 두 가닥 그림자 가시가 곧바로 다시 뻗어 나가 샬롯의 양쪽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밀어내듯 점점 더 깊이 박혔다.
하지만 샬롯은 물러나지 않았다.
콰직-!
그녀가 그대로 첫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목덜미가 통째로 으깨질 정도의 엄청난 치악력이었다,
"언니-!"
뒤에서 자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첫째는 오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치이익-
샬롯의 은검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복부를 가르며 파고들고 있었으니까. 살을 태우며 비스듬하게 밀려든 검날이, 이윽고 터질 것처럼 뛰는 그녀의 심장에 닿았다.
"...!"
고개를 쳐든 첫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푸스스, 샬롯의 옆구리를 꿰뚫었던 그림자 가시가 사그라들었다.
첫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샬롯이, 비로소 목덜미를 물고 있던 입을 뗐다. 뱀파이어의 피와 살이 입안에 가득했다. 평생 잊지 못할 복수의 맛.
"안 돼애애애-!"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첫째를 검에 매단 채, 샬롯이 몸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감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했다.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기척과 그녀를 향해 밀려드는 수많은 그림자 가시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
샬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팔을 휘둘러, 재가 되기 시작한 첫째를 밀려드는 그림자 가시 쪽으로 내던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몸을 날렸다.
검을 고쳐 쥐는 수인의 입에서,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
콰지지직-!
나무 가면 한복판으로 떨어진 검이, 정원사의 목 아래까지를 세로로 가르며 멈춰 섰다.
"으… 어어억…."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는 정원사의 머리가 좌우로 쩍 갈라졌다.
마찬가지로 토막 난 나무 가면이 벗겨졌다. 그 아래로 묘하게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드는 기괴한 얼굴이 드러났다. 피가래 끓는 소리를 토해내는 놈의 얼굴에는 순수한 고통과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잿빛으로 일렁이던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퍼억-!
진공 폭발이 정원사의 머리와 가슴팍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작은 살점으로 변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안은 그 사이로 드러난 속살에 더 깊이 검을 내리누르며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퍼엉-!
비대한 가슴팍이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갔다. 견디지 못한 검날이 또다시 산산이 조각났다.
이안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정원사의 몸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파스슥-
정원사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동시에 사방에 출렁이며 뻗어 나오던 넝쿨들이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반도 남지 않은 검을 휙 던져버리면서, 이안은 다음 검을 꺼냈다.
어느새 아공간에 남은 장검은 세 자루밖에는 되지 않았다.
가죽 띠에 남은 단검도 요정의 비수 뿐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확인하면서, 이안은 아공간에 다시 손을 넣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두 자루 투척용 단검을 꺼내 가죽 띠에 끼워 넣는 사이.
"...!"
눈앞으로 또 다른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집사와 시녀들.
메브가 알프윈을 죽였다는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보단 퀘스트 완료창이 떴다는 사실 자체가 이안을 놀라게 했다.
'퀘스트를 받기만 하면, 꼭 내가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는 건가…?'
어쩌면 그가 메브를 동료로 인정하고 있기에 가능한 상황인지도 몰랐다.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끼아아아악-!"
저만치의 장벽 위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보인 것은 몇 개의 그림자 가시에 찔린 샬롯. 그리고 그녀의 은검에 꿰뚫려 비명을 지르는 마지막 쌍둥이였다.
비명은 곧 잦아들었다.
샬롯을 꿰뚫었던 그림자 가시들이 부스스,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이안의 눈앞으로 다시 한번 퀘스트 완료창이 떠올랐다.
샬롯이 털썩 주저앉은 건 그 직후였다.
"----!"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전신이 그야말로 만신창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야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내심 생각하던 이안은, 다음 순간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포효를 끝낸 샬롯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장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양손의 검은 놓치지 않은 채였다.
촤아악-!
그녀를 받아든 이안이 장벽에 등을 부딪치며 멈춰 섰다.
여전히 안대를 뒤집어쓴 샬롯이 붉게 물든 송곳니를 드러냈다.
후련해 보이는 미소였다.
"성공했다… 이안."
"그래. 봤다."
대충 대답하면서, 이안은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몸 곳곳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넝마가 된 부츠 아래로 드러난 맨발과 다리, 팔뚝에는 특히 더 많았다. 거기다 몸 곳곳에 긁히고 찔린 상처도 여럿이었다.
아무리 생명력이 뛰어난 수인이라도 단시간에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마경 한복판에서는 특히.
이안은 곧바로 문신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력과 혼돈력을 능수능란하게 다뤄 온 입장에선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
움찔 어깨를 떤 것도 잠시, 샬롯이 이내 내뱉었다.
"힘을 아껴라, 이안. 나는 잠깐 쉬기만 하면 돼."
"입 다물어. 널 여기 두고 갈 건데, 그냥 버려둘 수는 없거든?"
"그런 거라면…."
샬롯에게 흘러든 카르하의 신성력은 곧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뭉근하게 고였다가 이윽고 전신으로 번졌다.
어쩌면 자신만의 투쟁을 완수한 전사를 알아본 걸지도 몰랐다.
샬롯의 표정이 조금씩 편해질 찰나.
"이런… 한 발 늦어 버렸군…."
반대편 통로 쪽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번쩍 고개를 치켜드는 샬롯의 머리를 다시 꾹 내리누르면서, 이안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의 뱀파이어들과 달리, 비쩍 마르고 볼품없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머리털은 물론, 눈썹이나 수염도 없어서 한층 더 기괴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발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다.
"뭐… 상관 없겠지…."
의욕 없이 중얼댄 그가 팔을 들었다. 그림자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여러 개의 인간 몸통을 커다란 덩어리로 이어붙인 몸체에, 수많은 팔다리가 제멋대로 돋은 거대한 실험체였다.
"...!"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글자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거대한 실험체의 몸체 위, 홀로 불쑥 솟아 있는 상반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백한 은발. 비쩍 마른 어깨. 그리고 낯익은 이목구비.
이안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그때, 붉은 안광이 번졌다.
"드디어 왔구나… 계속 기다렸어."
이어진 목소리에, 누워있던 샬롯의 고개가 다시 번쩍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이안도 막지 않았다.
"그럼 이제…."
굳어진 이안과 더듬대는 손길로 안대를 쥐는 샬롯을 번갈아 바라 본 테사이아가, 우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나 좀 살려줘, 얘들아."
#164화
안대를 벗고 거대한 괴물을 눈에 담던 샬롯의 주황색 눈동자가, 이내 멍하니 풀어졌다.
괴물의 몸통에 허리 아래와 양팔이 박힌 형상인 테사이아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테사…."
샬롯이 탄식하는 가운데, 맥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제께서 보낸 선물이오, 용살자…."
이안의 눈빛이 우묵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테사이아를 지나쳐 뱀파이어에게로 향했다.
제작자. 새로 받은 퀘스트의 이름이기도 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전하라 하셨소. 그리고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오."
제작자가 여전히 내뻗고 있던 팔을 들썩였다. 길고 깡마른, 손톱이 보기 싫게 자란 창백한 손이 악기를 연주하듯 꿈틀댔다.
철퍽- 터억-
그의 그림자에서 또 다른 괴물들이 우글우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동물과 마물을 멋대로 접붙인 키메라. 그리고 밖에서 본 것보다 더 커다란 구울 실험체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쉬고 있어라."
내뱉은 이안이 일어섰다. 테사이아를 멍하니 마주 보던 샬롯이 화들짝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
이안은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키메라와 실험체들이 순식간에 통로 앞과 공터를 가득 채우며 늘어섰다. 놈들은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 이안을 노려보기만 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이안."
테사이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목 아래로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도와줘, 이안-"
"여길 지나가려면 내 작품들을 전부 죽여야 할 것이오…."
제작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작고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러니 이왕이면… 그냥 죽어 주셨으면 좋겠군…. 귀하는 아주… 값진 재료가 될 것 같거든…."
"…그렇다는군."
검을 검집에 되돌린 이안이 오른팔을 옆으로 내뻗으며 말했다. 그 옆으로 거대한 대검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테사이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덧붙였다.
"미안하게 됐다. 테사."
"왜, 왜 사과를 하는 거야, 이안?"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이안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은 타오르듯 이글대고 있었다.
테사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사이, 거뭇한 마력이 키메라와 실험체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고막을 긁는 듯한 숨소리가 번졌다.
이안이 한 발 먼저 몸을 날렸다.
대검이 거대한 붉은 궤적을 그리며 뿜어져 나갔다.
콰지지지직-!
휩쓸린 키메라와 구울 실험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검은 마력을 머금은 괴물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거대한 실험체의 일부가 된 테사이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몸통에 달린 수많은 팔다리가 난폭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충격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나, 나도 죽이겠단 거야, 이안? 아니지? 날 구해주려는 거지?"
콰드드득-!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고 대검을 휘둘렀다. 곰의 몸통에 박쥐의 날개, 계곡 거미의 머리를 가진 키메라가 독액을 뿜던 그대로 찢겨 나갔다. 그 너머, 인간 넷을 이어 붙여 만든 실험체도 반으로 토막 났다.
이안은 놈들의 토막을 어깨로 후려치고, 뒤따라 밀려드는 놈들은 주먹으로 찍어 버리면서 다시 대검을 내뻗었다.
오로지 죽음만을 만들어 내는 궤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테사이아의 눈에서, 왈칵 피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야…! 나라고, 이안!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내가 원해서 움직이는 게-"
콰직-!
이안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던 실험체 하나가 대검에 휩쓸려 터져 나갔다. 붉은 피보라가 치솟았다.
"안 돼! 이안! 잠깐만…!"
어느새 뒤따라온 샬롯이 소리쳤다. 양손에 이가 나간 송곳니 검과 반 토막이 난 은검을 든 채였다 신성력을 머금고 아물던 상처들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저건 테사다, 이안…! 저딴 몰골이 되었어도 테사야! 구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러니 제발-"
내뱉던 샬롯이 멈칫댔다. 이안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휘두르던 대검을 끝까지 내뻗으면서, 그가 내뱉었다.
"빠져 있어. 너까지 죽을 수도 있으니까."
"...!"
샬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부러질 듯 이를 악문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녀가 주위에 가득한 괴물들을 돌아보았다. 흉포한 야수의 눈은 곧, 놈들의 뒤편으로 설핏 드러나는 제작자의 위치를 찾아냈다.
"----!"
샬롯이 울부짖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속에 고여 있던 신성력이 일제히 표면으로 드러나 붉게 타올랐다.
갈기를 불길처럼 휘날리며, 샬롯이 몸을 날렸다.
꽈드득-!
그 사이에도 이안은 테사이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릴 때마다 한 줄씩의 공간이 썰려 나갔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테사이아의 눈에는 피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안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배신감보다 더 큰 감정은 공포였다.
콰직-
그리고 마침내, 대검을 내뻗은 이안이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테사이아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살려 줘, 이안…."
말과 달리 그녀의 거대한 몸체는 이안을 짓이겨 버리려는 듯 달려들고 있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돋은 거대한 몸통 한복판이 세로로 쩍 갈라지고, 트롤의 송곳니가 가득 박힌 거대한 아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물러나지 않고, 양손으로 고쳐 쥔 대검을 올려 쳤다.
콰지지직-!
붉은 궤적이 아가리를 가로로 길게 훑고 지나갔다. 십자 형태로 변한 아가리 주위에서 붉은 피와 내장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테사이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점처럼 수축된 그녀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아파…! 이안…! 아파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몸통은 이안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으로 화염구를 쏘아 올린 이안이 물러났다.
쩌엉-!
땅을 내리찍은 테사이아의 몸통 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피눈물을 철철 흘리는 그녀가, 바로 앞에 선 이안을 내려다보며 되뇌었다.
"살려 줘, 이안. 살고 싶어, 나… 나, 살고 싶어…."
"미안하다."
이안이 씹어 뱉었다. 테사이아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그가 늘어뜨린 대검을 치켜들었다.
"네 복수는 반드시 해 주마."
콰지지직-!
그의 좌우로 달려들던 두 마리의 키메라가 하나의 궤적에 토막 났다. 그대로 몸을 휘돌린 이안이, 테사이아를 향해 뛰어올랐다.
"싫어어어어-!"
테사이아가 절규했다. 동시에 마력을 머금고 회복하던 그녀의 몸체가 펄쩍대며 뛰어올랐다.
콰지지직-!
덕분에 이안의 대검은 몸통에 달린 팔과 다리 몇 개를 잘라내고, 그 옆에 선 실험체들을 대신 휩쓸고 지나갔다.
"...."
미간을 찌푸린 이안의 눈동자가, 멀어지는 테사이아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걱! 콰직! 콰직!
전신에 불길 같은 신성력을 머금은 채 돌진하는 샬롯.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선 제작자.
"빠져 있으라니까…."
혀를 차며 읊조린 이안이 대검을 고쳐 쥐었다. 곧이어 휘몰아치기 시작한 붉은 궤적이 주위를 휩쓸었다.
***
"훌륭한 재료가 또 있었군…."
제작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샬롯은 짧은 포효를 터뜨렸다.
신성력을 머금은 갈기가 타오르듯 일렁였다. 그녀의 양손이 쉴 새 없이 궤적을 만들어 냈다. 괴물들을 일방적으로 썰어 대고 있음에도, 그녀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없었다.
전신으로 번지는 신성력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힘이 다하기 전에 제작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더는 싸울 수 없게 되리라.
"물러나! 멍청아!"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눈을 치켜뜬 샬롯이 뒤로 펄쩍 물러났다.
콰앙! 테사이아의 거대한 몸통이 그 아래 서 있던 키메라를 짓이기며 떨어져 내렸다.
몸통 곳곳에 돋아난 팔과 다리가 샬롯을 낚아채려는 듯 뻗어 나왔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염려 마라 짐승아… 그 후엔 네 친구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
중얼댄 제작자가 검은 마력을 흩뿌리며 물러났다.
피가 철철 흐르던 테사이아의 몸체가 봉합되기 시작했다.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멍청한 짐승아! 그러다 죽어! 죽는다고!"
"…네 걱정이나 해라, 귀쟁아."
이를 악문 채 내뱉은 샬롯이, 양손의 검을 으스러질 듯 고쳐 쥐었다.
"지금 이대로면, 너도 죽어."
"그러니까 도망가!"
말과 달리, 테사이아의 육체는 샬롯에게로 달려들었다. 수많은 팔과 다리가 그녀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샬롯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주위의 다른 실험체들을 후려치고 썰며 달려나갔다.
그 뒤로 따라붙으면서 테사이아가 외쳤다.
"도망쳐.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다시 나를 구하러 와…! 이것들에게 죽거나 붙잡히면, 너도 나랑 똑같은 일을 겪게 될 거야!"
"닥쳐!"
포효한 샬롯이 더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늑대의 머리와 트롤의 머리가 연달아 돋은, 계곡 거미의 몸통을 가진 키메라가 눅진한 체액을 흩뿌리며 난도질당했다. 샬롯은 곧바로 다음 실험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같은 행동의 반복.
테사이아는 비로소, 그녀가 모든 실험체와 키메라를 죽이기로 마음을 바꿨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자신만을 제외하고.
아마도 나머지를 다 죽인 후에 그녀를 구해 낼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리라.
"샬롯…."
다시 한번 피눈물을 쏟은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저 앞에서 새파란 폭발이 휘몰아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쿠콰콰콰콰-
대검의 궤적에 뒤이어 휘몰아친 냉기 칼날이, 칼날의 폭풍처럼 앞의 모든 것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 잔재가 흩어지기도 전에, 붉은 궤적이 뻗어나갔다.
콰직-!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넓적한 궤적에 휩쓸린 건, 깡마르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중년 뱀파이어였다.
"잡았다, 씹새야."
상반신만 남은 놈을 넓적한 검신 위에 얹은 채, 이안이 씹어 뱉었다.
제작자의 핏기 없는 얼굴에 무기력한 미소가 번졌다.
"아쉽군… 언젠간 나 자신도 재료로 쓰고 싶었…."
콰앙-!
검신을 타고 피어오른 불길이, 제작자를 수많은 파편으로 만들며 폭발했다.
"끼아아아아악-!"
"크르르륵…!"
남은 키메라와 실험체들이 폭주하듯 날뛰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테사이아의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자가 죽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끔찍한 육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콰지직-! 콰직!
이안이 다시 붉은 궤적과 죽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테사이아의 육체도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안 돼! 이 멍청한 귀쟁아!"
실험체 하나와 뒤엉켜 있던 샬롯이 소리쳤다.
어느새 그녀의 신성력은 거의 다 사그라들고 있었다.
테사이아가 울 듯한 얼굴로 중얼댔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없다구…."
콰지직-!
거대한 붉은 반월이 그녀의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사이로, 피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이안이 솟구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사이아를 응시한 그가, 뒤이어 대검을 내리쳤다.
꽈드드득-!
그를 향해 내뻗은 팔과 함께, 테사이아의 거대한 몸통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갔다.
테사이아가 울부짖었다. 착지한 이안이 곧바로 다시 뛰어올랐다.
콰직! 콰지직-! 콰직!
일방적인 난도질이 이어졌다. 이안은 테사이아의 비명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베고 또 후려치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몸통이 잘리고 찢겨 나가며 점점 더 작아졌다.
그러던 한순간.
터억-!
쇄도한 이안이 손을 뻗어, 테사이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
테사이아는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고통과 공포, 원망으로 얼룩진 혼탁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살아 움직이는 키메라나 실험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샬롯 역시 완전히 힘이 다한 듯 실험체의 시체 옆에 주저앉아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대검을 옆으로 툭 던진 이안이, 테사이아의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그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우득, 우드드득-
"...!"
고개를 치켜든 테사이아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이 그녀의 상반신을 끌어안고는 억지로 뜯어내고 있었다.
산채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
꽈지직-!
마침내 그녀의 상반신이 완전히 뜯어져 나왔다. 피가 치솟고, 남은 몸통이 힘을 잃고 널브러졌다.
"아… 아아…."
이안의 품에 안긴 테사이아의 상태도 온전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허리 아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양팔도 팔꿈치 아래로는 그저 피만 흘리는 채로 찢겨 나갔다.
이안이 축 늘어진 몸통 위에 그녀를 뉘었다.
"이, 이안…."
테사이아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우묵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이윽고 읊조렸다.
"…그냥 이대로 죽게 두려는 건가."
그럴 순 없지. 테사이아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 그가,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
팔목 보호대까지 힘으로 뜯어내는 이안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뒤이어 그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사그라들었다. 이안이 테사이아의 앞으로 자신의 맨 팔뚝을 들이밀었다.
"마셔라. 테사."
"...!"
비로소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사실, 더는 피를 빨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요정의 비수를 뽑아 든 이안이, 그대로 자신의 팔뚝 바깥쪽을 그었다.
붉게 흘러내린 핏물이 테사이아의 입술에 떨어졌다.
"삼켜."
홍채에 옅은 보랏빛이 서린 이안이 덧붙였다.
테사이아는 이미 그러고 있었다.
이안의 피가 입술을 적신 순간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입을 뻐끔댔다.
곧 그녀의 입에 송곳니가 가득 튀어나왔다. 이안이 그 앞으로 팔뚝을 가져다 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팔뚝을 물었다.
"...."
꿀꺽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가느다란 목이 쉼 없이 꿈틀댔다.
비틀대며 일어선 샬롯이 다가오는 가운데, 테사이아의 몸이 수복되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팔과 하반신에 뼈가 돋고 핏줄이 번졌다. 곧이어 근육과 속살, 피부가 빠른 속도로 본래의 형태를 되찾아 갔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그때쯤이었다. 그가 슬며시 테사이아의 머리를 후려칠 준비를 하는 사이.
"하, 하아… 하아…."
테사이아가 먼저 입을 뗐다.
입가가 피범벅이 된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녀가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네 피는 정말 엄청나게 맛있네, 이안. 내 평생 최고의 맛이야…."
"중간에 멈춘 걸 보면, 그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먹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겨우 살았는데."
새로 돋아난 손을 쥐락펴락한 그녀가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다가오던 샬롯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나한테 안 죽어서 다행이네, 야옹아."
"…네가 다행이겠지."
샬롯의 대답에 킥킥댄 것도 잠시.
"...!"
불현듯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테사?!"
소스라치게 놀란 샬롯이 달려오는 사이.
"이, 이안…? 이상해. 몸속에서, 몸속에서 뭔가…!"
붉게 물든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이안이 덤덤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역시. 이제 시작되는군."
"그게 무슨…? 아, 아아악…!"
테사이아가 억눌린 비명을 토해냈다. 몸이 솟구치듯 들썩이고 팔과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꺾였다.
이안이 그녀의 팔다리를 하나씩 움켜쥐며 시선을 돌렸다.
"...!"
허둥지둥 살점 위로 올라서던 샬롯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녀가 테사이아의 반대쪽 팔과 다리를 꺾이지 않도록 붙잡는 그때.
"내 피, 내 피가…!"
테사이아가 간신히 내뱉었다.
온 힘을 다해 뭔가로부터 저항하는 것처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이안이 한쪽 무릎으로 그녀의 팔을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제가 네 진혈을 빼내려는 거다. 저항해도 소용없어."
요정의 비수를 다시 뽑아 든 그가 덧붙였다.
"넌 이제 죽을 거다, 테사."
#165화
"...?!"
테사이아는 물론 샬롯도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비수를 테사이아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예리한 검날이 그녀의 가슴 한복판을 얕고 길게 갈랐다.
아슬아슬 이어지던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그거면 충분했다.
푸확-!
테사이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내고, 새로 생겨난 상처 사이로 피가 치솟았다.
"꺽… 꺼어어…."
몸을 지탱하듯 머리를 치켜든 테사이아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번졌다. 분리된 진혈이 하늘 너머로 쏜살같이 멀어졌다. 촤악, 쏟아지는 핏물과 함께 테사이아의 몸이 힘없이 널브러졌다.
"테사…!"
샬롯이 탄식했다. 그러면서도 대체 왜? 하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여전히 테사이아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생기가 사라지고 있는 그녀의 눈을.
붉은 빛을 잃어가는 동공이 서서히 풀어졌다.
바로 죽지 않는 건, 아마도 혼돈력 덕분일 터였다. 이안은 그녀가 육체를 빨리 수복할 수 있도록, 피에 혼돈력을 섞어 넣었었으니까.
혼돈력은 마족 같은 타락한 존재들의 신성력이나 다름 없었다.
여제의 손길에서 잠시나마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리라.
"손 놓지 마라."
테사이아의 얼굴을 감싸 쥐려던 샬롯이 화들짝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비로소 그녀를 마주 보았다. 놀랍게도, 수인 전사의 주황색 눈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이안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돌린 샬롯이 이내 눈을 치켜떴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들려 있었다.
"생명수의 씨앗…?"
샬롯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씨앗으로 향했다.
"...."
미간을 설핏 찌푸린 것도 잠시.
그가 그대로 테사이아의 명치 아래, 쩍 벌어진 상처 사이로 씨앗을 찔러 넣었다.
"...!"
샬롯이 숨을 들이켰다. 상처에 고인 테사이아의 피가 줄어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씨앗이 그녀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쩌적-
씨앗의 표면에 균열이 일었다. 벌어진 환부 사이로 가느다란 뿌리들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돋아난 뿌리들이 거미줄처럼 테사이아의 몸속으로 번져 나갔다.
미동도 없던 테사이아의 몸이 움찔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사이아가 몸을 들썩였다. 발작이 다시 시작됐다. 비명은 없었다. 경련하며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완전히 위로 돌아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컥… 커억…."
테사이아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역류했다. 우수수 떨어진 송곳니가 그사이에 뒤섞였다.
그녀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른 샬롯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테사이아의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린 그녀가 손가락을 입안에 넣었다. 핏물과 송곳니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테사이아가 자신의 피에 익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잘했다."
내뱉은 이안이 다시 테사이아의 명치를 돌아보았다.
생명수의 씨앗에서는 싹이 돋아나지 않았다. 그럴 에너지조차 전부, 뿌리를 뻗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씨앗을 중심으로 피부 아래의 핏줄이 수많은 실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그녀의 몸속 깊은 곳까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정말 되는 건 다행인데…. 보기에 좋은 의식은 아니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마력 탐지를 활성화했다.
그는 처음부터 테사이아를 그냥 죽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손수 죽이려 한 건, 여제가 테사이아의 몸에서 진혈을 빼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생명수의 씨앗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죽이려 했고, 그런데도 여제가 진혈을 빼내지 않자 반대로 살리려 한 것이다.
물론 씨앗은 테사이아가 뱀파이어인 상태에서도 효과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몸속에서 진혈이 사라지진 않았을 테고, 그건 결국 여전히 여제가 그녀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러니 진혈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굳이 비수로 가슴에 상처를 낸 것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니, 이왕이면 부가적인 피해 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끝나버리는 편이 더 나았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이안은 테사의 전신에서 반짝이는 마력의 흐름을 눈에 담았다.
씨앗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뿌리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이었다.
가슴의 상처에 씨앗을 박아 넣은 건, 사실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안은 씨앗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그걸 테사이아의 입에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원로라는 이름의 퀘스트가 떠올랐고, 거기엔 요정의 가슴에 씨앗을 심으라고 쓰여 있었다.
이안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불친절하고 생략이 많을지언정, 어쨌건 퀘스트나 정보창이 그에게 거짓 정보를 알려 준 적은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솨아아-
이안은 뿌리들이 토해내는 마력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수없이 많은 가느다란 뿌리가 테사이아의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몸속을 투시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장 밝은 빛을 뿜는 건 자리를 잡고 성장을 멈춘 것들이었다.
이안의 눈에는 테사이아의 몸과 하나로 융합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을 감싼 뿌리들도 그랬다. 수십 가닥의 뿌리가 심장의 형태를 온전히 드러내며 일렁였다.
그러면서 규칙적인 박자로 번쩍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아래의 심장이 함께 두근거렸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심장이 멈출 각오를 해야 한다더니.'
죽음은 재탄생을 위해 필연적으로 선행되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저 쇼크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의 눈에 보이는 이 일련의 변화들은, 전혀 조심스럽지도 부드러워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테사이아가 의식을 잃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맨정신에 이 의식을 치렀다면 그야말로 죽음의 고통을 느꼈으리라.
'진혈을 빼앗기는 것도 충분히 고통스러웠겠지만.'
어쨌든, 연달아 끔찍한 고통을 받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툭, 경련하던 테사이아의 사지에 비로소 힘이 풀렸다.
까뒤집혀 바들대던 눈꺼풀이 닫히고, 창백한 입술 사이로 옅은 숨결이 번졌다.
그녀의 몸속에 반짝이는 마력들이 어느 정도의 균일도를 갖췄다.
이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마력이 오가는 뿌리들을 눈에 담았다.
마치 새로운 신경계가 만들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처럼 급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 뿌리의 끝부분들은 여전히 조금씩 꿈틀대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아마 테사이아의 전신, 모든 말단 부위까지 도달하고서야 끝이 나리라.
"잘… 된 건가?"
그런 사실들을 알 리 없는 샬롯은, 조용해진 테사이아가 불안한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테사이아의 가슴 한복판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길게 가른 상처는 이미 아물었다. 쩍 반으로 갈라진 생명수의 씨앗만이 그녀의 명치에 툭 튀어나온 채였다.
이안이 손을 뻗어 씨앗을 쳐냈다.
퍼석-
씨앗이 힘없이 바스러졌다. 벼락에 맞은 듯한, 뿌리가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만들어 낸 불그스름한 흔적이 그녀의 피부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내뱉은 이안이 테사이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턱까지 번진 뿌리들이 꿈틀대며 얼굴을 타고 오르는 게 보였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안은 이 뿌리들이 뇌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그녀가 눈을 뜨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의 테사이아는 아마도,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터였다.
적어도 더이상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지는 않게 되리라.
"깨어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다."
내뱉은 이안이, 안도한 듯 맥 풀린 얼굴이 된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네가 이 녀석을 지켜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
지금 샬롯의 몰골은 빈말로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방어구와 곳곳에 피가 엉겨 붙은 털가죽. 박혀 있던 가시가 떨어져 나간 손발은 특히나 만신창이였다. 한쪽 귀 끝에도 찢겨나간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주황색 눈동자에는 삽시에 빛이 되돌아왔다.
"물론이다. 겨우 살려냈는데, 다시 잃을 순 없어."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테사이아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비장했다.
목숨도 걸겠군.
'하긴, 이미 걸었지.'
피식한 이안이 일어섰다.
긴장이 조금 풀린 덕분인지 얕은 현기증이 일었다. 관절이 삐걱대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턴 이안은, 아공간에서 설표 가죽 망토를 꺼내 테사이아의 몸에 덮어 주었다.
"혹시 경과 필립이 온다면, 함께 지키고."
뒤이어 내뱉은 그가, 테사이아가 누운 살덩이 위에서 툭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토막난 키메라와 실험체들로 난장판인 공터를 가로질렀다.
그 사이에서 너덜너덜해진 송곳니 검과 토막 난 은검을 집어 든 그가 샬롯의 근처로 대충 던졌다.
허공을 가로지른 두 자루 검이 살덩이에 박혔다.
"그들이 오면, 네 뒤를 따르게 하겠다. 귀쟁이를 지키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해."
샬롯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아직 테사이아를 안아 들 엄두는 나지 않는지, 살점 위에 다시 걸터앉은 채였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나를 찾아낼 때쯤엔, 상황이 끝나 있을 거다. 거의 끝났거나."
군단장의 대검을 집어 들며 대답한 이안이, 대검을 아공간에 쑤셔 넣고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며 덧붙였다.
"혼자가 됐으니까. 이제부턴 최단 거리를 돌파할 거거든."
주머니에 담긴 건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마석이었다. 팔찌의 마석을 교체하며,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줏빛 밤하늘 한복판. 거대한 초승달은 어느새, 거의 끄트머리까지 붉어진 상태였다.
언젠가부터 정원이 더 붉어진 것 같다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달빛은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가장자리로 모여드는 소용돌이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었다.
솨아아-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이안을 훑고 지나갔다. 넝쿨 장벽들이 흔들렸다. 듬성듬성 피어 있던 거대한 장미에서 꽃잎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건조한 눈길로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그러니 잘 붙잡아 두고 있어라. 네가 운 건 비밀로 해 줄 테니까."
"...! 내, 내가 언제…."
발끈했던 샬롯이, 머쓱하게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혀를 날름댔다.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올리고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때때로 나타난 막다른 길은, 그냥 장벽을 타 넘어 통과했다.
혼자 움직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길을 가로막지 않았따. 이안은 미로의 하수인들이 전부 사라졌으리라 내심 확신했다.
심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장벽 곳곳에 핀 거대 장미들이 바람에 휩쓸려 흩날렸다. 수많은 꽃잎들이 허공을 붉게 물들이며 정원 너머로 날아갔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저 꽃잎들이 피로 만들어진 것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장벽을 넘을 때마다, 저택으로 모여드는 꽃잎의 물결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꽃이 다 떨어진 넝쿨 장벽들도 빠르게 생기를 잃고 있었다. 마름쇠처럼 뾰족하던 가시들은, 어느 순간 부터는 손만 대도 툭툭 부러져 떨어질 만큼 약해졌다.
미로 정원이 쓸모를 다한 게 분명했다.
날아가는 꽃잎들은 아마도, 이제 저택에 남은 것들과 여왕의 힘이 되어주리라.
'똥개도 제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지만. 지독하네, 진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은 오히려 더 속도를 높였다.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여기서 멈추거나 물러난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렇게 몇 개의 장벽을 타넘고 통로를 지나쳤을까.
"...!"
한순간 좌우를 가리던 장벽이 완전히 사라졌다. 시야가 탁 트이고, 불어온 바람이 이안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비로소 걸음을 늦추고 숨을 고르면서, 이안은 저 앞에 드러난 미로 저택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166화
3층 높이의 대저택은 담장도 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본래는 정원에 둘러싸인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제법 거리가 떨어진 녹지에 홀로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모든 창문과 대문이 활짝 열려 있기까지 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그 주위를 붉은 꽃잎들이 자욱하게 흩날리며 떠다녔다.
나풀대는 꽃잎들이 저택의 열린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들락거렸다.
수천 마리의 나비 떼에 둘러싸인 괴물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하네 정말.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게임에서의 기억이 절로 겹쳐졌다.
그때의 저택 지하에는 부지만큼의 지하 공간이 있었다.
여러 타락자나 마족이 그렇듯. 뱀파이어 들도 신의 시선이 닿지 않은 지하에 본거지를 지어 둔 것이다.
연구실과 고문실. 또 다른 지하 동굴로 통하는 비밀 통로. 그리고 여제의 알현실 같은 것들이 위치한, 일종의 간이 지하 궁전.
지금은 그때와 달리 본래의 여제가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
활짝 열린 대문 앞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제국식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었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여제의 반려.
…반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갈 찰나.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이안 경."
노인, 니그리안테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가 정중하면서도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어디까지나 귀하의 길잡이로 이곳에 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여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말을 이어 가는 동안, 이안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다 끝내는 달리는 형상이 되었다.
그가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아 들자, 비로소 백작이 미소 지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미 많은 힘을 소진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힘을 아끼시고-"
"그럼 목만 내밀고 있어라. 깔끔하게 처리해 줄 테니."
이안이 달리며 내뱉었다. 백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제 안내 없이는, 여제께서 계신 곳을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글쎄. 지하에 있는 거 아닌가?"
"...!"
바로 정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백작의 눈이 설핏 커졌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달려왔다. 이윽고 백작이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뻗었다.
"어쩔 수 없군요."
주위에 나풀대던 꽃잎들이 쏜살같이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사이에 저마다 하나씩의 핏방울로 변한 채였다. 백작이 손을 털었다. 삐죽대던 핏방울들이 산탄총처럼 뿜어져 나갔다. 다른 점이라면 총구가 아니라 넓은 면적을 점령하고 밀려든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건 거의 크레모아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푸확-!
동시에 치솟은 돌풍이 날아드는 핏방울을 흩어버렸다. 전부 튕겨 나간 건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검과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맨몸으로 견뎌냈다.
"역시, 어림도 없군요."
하지만 백작은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안의 속도를 조금 늦춘 것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전신이 거뭇한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새카만 연기 덩어리가 된 그가 쏜살같이 저택 안으로 멀어졌다.
그가 지나친 경로에 나울대던 꽃잎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몰아쳤다.
'모기 새끼들은 튀는 걸 너무 좋아한다니까.'
유전자에 새겨져 있나.
혀를 차면서도, 이안 역시 저택으로 들어섰다.
백작의 뒤를 쫓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지나친 궤적을 따라 꽃잎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텅 빈 복조를 지나친 이안은 곧바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다음 복도로 들어섰을 때, 검은 안개로 변한 백작은 이미 저 멀리의 코너를 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휘몰아치는 꽃잎 사이로 이안도 질주했다.
밀려나기 전에 그의 몸에 부딪힌 꽃잎들이 핏방울이 되어 끈적하게 터져 나갔다.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네, 진짜.
생각하던 이안의 눈빛이 이내 묘해졌다.
백작이 그저 단순히 도망만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서였다.
'길잡이라더니.'
게임에서 저택의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3층, 여제의 집무실 뒤에 위치해 있었다.
그때보다 저택이 훨씬 커진 지금도, 그런 기본적인 요소까지 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역시나. 길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백작의 흔적은 3층까지 이어졌다.
계단을 올라 또 다른 복도로 들어선 이안은, 흔적을 뒤따르며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통 붉은 녹지와 붉게 변색되고 있는 미로 정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느새 완전히 붉어진 초승달의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각인 됐다. 밤하늘의 테두리를 따라 번지는 먹구름의 소용돌이도 태풍처럼 빠르고 거셌다.
두족류의 눈알 같아 보일 정도였다. 저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철컥. 쿠구구구구-
그때, 저 멀리서 기관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휘몰아치는 꽃잎을 따라 복도 끝의 열린 방 안으로 들어선 이안은, 이내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장식과 가구로 가득한 집무실 너머.
벽면이 통째로 돌아가면서 숨겨진 원형 계단의 입구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더럽게 친절하네.'
나풀대는 꽃잎을 손으로 튕겨 터뜨리며, 이안은 계단을 내려갔다.
사방이 벽으로 가득해졌지만, 계단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꽃잎들이 은은한 붉은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원을 그리며 이어진 계단을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
한참 이어지던 계단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동시에 계단 주위를 막고 있던 벽도 사라지고, 널찍한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널찍하고 길게 이어진 통로 좌우로, 벽에 박힌 마석이 뿜어내는 빛이 은은하게 번졌다. 높다란 천장 인근에는 붉게 일렁이는 꽃잎들이 수없이 떠다녔다.
뭐, 밝아서 좋네.
이안은 넓고 길게 이어진 통로를 나아갔다. 좌우로 이어진 밀실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 앞의 커다란 대문 앞에 백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달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제 저놈이 도망쳐 봐야, 갈 곳은 여제의 알현실뿐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백작이 주름진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이곳이 귀하의 종착지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다음 순간, 그가 그대로 손을 들어 자신의 목 앞을 그었다.
푸확, 잘린 목 단면에서 피가 튀었다. 그 사이로 번진 진혈이 대문의 틈 사이로 빨려들어 사라지고, 백작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자결이라니.
이어진 퀘스트 완료 창을 닫아 버리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혹여라도 그에게 진혈을 잃기 전에 그냥 죽음을 택해버린 모양이었다. 여제에게 반드시 자신의 진혈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족 충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정말 여제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백작의 시신을 밟고 지나쳤다.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천장까지 이어진 대문을 힘차게 밀었다.
쿠구구구-
그의 기억보다 더 큰 여제의 알현실이 드러났다.
'하여간 두더지 같은 것들.'
이안은 심드렁하게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알현실의 천장에도 꽃잎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붉은빛을 흘리며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그 아래로, 의자 대신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원통이 솟아 있었다.
황금 잔이나 화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면에 루비를 중심으로 한 보석이 호화롭게 박혀 있었고, 빽빽하게 새겨진 고대어 주문 회로가 은은한 붉은 빛을 흘렸다.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황금 욕조. 저게 흡혈 일족의 권좌이자 성물이었고, 그때는 지금과 달리 테사이아가 가장자리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물론 저렇게 마력을 머금고 있지도, 피가 가득 차 있지도 않았다.
번지는 피 냄새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옆으로 손을 뻗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군단장의 대검을 꺼내는 사이.
솨아아-
황금 욕조에 넘칠 듯 고여 있던 핏물 표면에 파장이 일었다.
넘친 핏물이 욕조 표면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내리고, 그 안에서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솟아올랐다.
장인이 공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 피처럼 붉은 눈동자. 어깨 아래까지 이어진 금발과 흰 피부.
방금까지 피로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그녀의 머리칼과 피부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산뜻한 윤기가 흘렀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진혈의 주인.
"...."
이안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곧바로 달려들지 않은 건, 욕조에 응집된 엄청난 양의 마력 때문이었다. 이미 완성된 주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임의 황금 욕조는 그저 배경에 불과했으니까.
확실한 건, 무시하고 달려들었다간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란 사실 뿐이었다.
주문을 확인하거나, 응집된 마력이 흩어지길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스킵도 못하게 만들어 두다니.'
짧게 혀를 차는 사이, 여제가 욕조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이안은 그제야 그녀의 키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인족만큼은 아니었지만, 2미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아마 항상 이런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뱀파이어들의 진혈을 전부 흡수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육체로 재구성된 거겠지.
촤아아아-
그녀가 밖으로 나왔음에도, 욕조의 수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꽃잎들이 그 안으로 떨어지면서 더 늘어나서, 핏물이 계속 흘러넘쳤다.
욕조를 중심으로 뭉근한 붉은빛이 번졌다.
여제가 발을 뻗었다. 순식간에 모여든 꽃잎이 하나의 핏덩이로 변해 그녀의 발을 받쳤다.
그 위에 올라선 여제가 미소 지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 보는 건 처음이군요. 반가워요, 이안 경.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장으로 만들어진 머리로 들었을 때와는 달리, 아주 듣기 좋은 우아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쌍둥이의 눈을 마주 보았을 때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시야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제가 의도한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지금 그녀가 품은 마력이 너무 강대한 나머지,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주문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을 뿐.
혼돈력을 끌어올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 아주 철저하게도 준비하고 기다리셨더군."
"그게 당신이 바란 것 아니었나요? 덕분에…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여제의 눈매가 우아한 호선을 그렸다.
"당신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주는 것뿐이에요. 원하는 건 모두 얻지 않았나요? 기어코 그 가여운 아이도 살려냈고. 여기서 멈춘다면, 나는 조용히 루 사드를 떠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여정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겠죠. 나는 아직도 당신이 싫지 않거든요."
일말의 긴장감이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후련하고, 조금은 설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안은 지금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제는 정말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걱정 마라. 충분히 싫어지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안타깝군요. 우리가 끝까지 싸운다면, 이득을 보는 건 전혀 다른 자들일 텐데요. 나와 일족의 자리를 노리는 것들. 우리를 이용하려는 자들.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 하지만 당신이 마음을 바꾼다면, 아니, 그걸 넘어 내 손을 잡아준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거예요. 어때요?"
여제가 길고 흰 손을 슬며시 앞으로 내밀며 미소 지었다. 이안의 시선을 순간 요동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마침, 나는 방금 다시 혼자가 된 참인데."
끌어올린 혼돈력을 신성력에 섞어 넣으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널 위해 자결한 남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군."
"물론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도 알고 있었어요. 언젠간 이렇게 되리란 걸."
"거절하지. 위대한 사랑 따위엔 관심 없거든. 그보단…."
"...?"
"네가 줄 경험치에 관심이 있지."
내뱉은 이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욕조에 응집되어 있던 마력이 사그라든 것과 거의 동시였다.
대검을 늘어뜨린 채 질주하는 그를 바라보며, 여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아쉽군요. 아니,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겠어요. 강제적인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죠."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욕조에서 흘러나와 흥건하게 번지던 핏물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피는 순식간에 하나하나가 화살만 한 크기의 가시로 변해 뿜어져 나갔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대검을 몸 앞에 비스듬하게 치켜든 그가 넓적한 검면 뒤에 몸을 숙였다.
카가가가가-
피의 가시가 폭풍처럼 그 위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안의 돌진을 멈추지는 못했다.
여제가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검면에 부딪쳐 흩어졌던 핏방울들이 다시 가시가 되어 뭉쳤다.
동시에 그녀의 발아래에서 솟구친 거대한 그림자 칼날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칼날과 가시에 포위당한 형상.
슈확-!
이안이 뛰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전신에 맺혀 있던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삽시에 천장 가까이 솟구친 이안이 단숨에 여제를 향해 밀려들었다. 오른손으로 으스러질 듯 움켜쥔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쏜살같이 여제의 앞으로 날아든 꽃잎들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치더니 이내 딱딱해졌다.
얼음 결정 같은 형태였다.
콰지지직!
이안의 대검이 그 한복판을 후려쳤다. 방패 전체에 균열이 번졌지만, 어쨌거나 깨지지는 않았다. 응축된 마력이 만들어 낸 반발력이 이안을 허공에 멈춰서게 했다.
하지만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전혀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솨아아-
솟구쳐 쇄도하는 그 잠깐의 사이에, 이미 주문이 완성되었으니까.
방패 너머, 여제의 여유로운 얼굴을 응시한 이안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공을 움켜쥔 것처럼 오므린 손 한복판, 맹렬하게 회전하는 정수가 빛났다.
여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아-
용의 숨결처럼 터져 나온 불길이 그대로 피의 방패를 불태우고, 여제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눈부신 섬광과 열기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이안은 허공에서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끝까지 불길을 여제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열기에 타들어 간 꽃잎과 핏물이 붉은 수증기로 변해 자욱해졌다.
푸스스-
이윽고 불길이 잦아들었다. 허공을 돌아 떨어져 내리면서도, 이안은 새카만 덩어리만 남은 여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철퍽-
그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착지한 순간, 그녀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붉은 수증기가 허공에 맹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슈화아아아-
거대한 붉은 보호막 속에서, 여제의 전신이 순식간에 재생성되기 시작했다. 붉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여제가 미소 지었다.
"역시 대단하군요, 이안. 꼭 한번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기대 이상이에요."
그래,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여제가 덧붙였다.
"원하는 만큼 계속해 보세요. 당신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죽어줄 테니까."
#167화
그녀의 말투는 아주 차분했다.
실제로도 몇 번이고 되살아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 안에서는.
이 일대의 꽃잎과 피가, 전부 그녀의 생명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의 무한 체력이라 이거지.
"네가 진짜 죽어야 풀릴 것 같은데."
주위의 모든 변화를 인식하려 애쓰면서도, 이안은 태연하게 내뱉었다.
아무리 게임일 때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고 해도, 여제가 2챕터의 보스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되살아날 수 없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여야 하는 식의 공략이 나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
그러니 분명 다른 명확한 약점이 있으리라. 자신의 권역 아래라 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 그럴 만한 건 아무리 봐도 하나밖에 없긴 하지만….'
너무 대놓고 존재하니 오히려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지금 주변의 변화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딱히 다른 특이점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사방에 가득한 오염된 마력 때문에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럼, 서로 최선을 다해 봐요."
그때,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여제가 손을 까딱였다. 자욱하던 안개가 삽시에 가라앉고, 그녀의 주위로 수많은 피의 칼날이 피어올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옆으로 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칼날들의 궤적은 그가 앞으로 달려가리라 예상한 듯 앞으로 넓게 쏟아지고 있었다.
촤아아아아-
따라붙은 칼날의 소나기가 이안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사이 여제가 손가락을 튕겼다. 흥건한 핏물들이 형태를 갖추며 솟아올랐다. 박쥐, 곰, 늑대 따위의 형태를 가진 피의 사역마들.
'반 불사인 걸 빼면, 게임의 테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칼날비가 잦아들자 이안은 비로소 여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사역마들이 밀려들었다.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대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궤적에 휩쓸린 사역마들이 핏덩이로 돌아가며 터져 나갔다. 핏물을 뒤집어쓰며 대검을 휘둘러 대는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최선을 다하는 남자의 모습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어느새 다시 만들어진 피의 칼날들이 여제의 목소리와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죽여 달라더니, 염병을 하네.
이안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요리조리 몸을 피하는 대신, 대검으로 몸을 가리며 마력 역장을 만들어냈다.
카가가각-
그의 뒤를 따라 붉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몇몇은 검면에 막혀 흩어지고, 몇몇은 끝내 역장에 부딪혔다. 이안의 전신에 푸른 빛이 번쩍였다. 이내 역장이 부서지고, 그 사이로 붉은 마력을 머금은 이안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놀랍군요.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중에도 주문이 깨지지 않다니. 그 비법은, 나중에 꼭 배우도록 할게요."
날아드는 그림자 칼날까지 피해 내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거의 잡은 물고기 취급이었다.
하긴. 지금 여제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사지를 잘라내는 정도로 끝낼 생각일 터였다. 그리고 강제로 뱀파이어로 만들려는 것이리라. 자신의 반려로 삼기 위해서.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는 착각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으니까.
대검을 얼굴 앞에 더 단단히 치켜들면서, 이안은 늘어뜨리고 있던 왼손을 활짝 펼쳤다.
콰르르르-
그가 지나치는 궤적을 따라 넘실대는 불의 물결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화염 해일.
넘실대는 불의 파도는 피의 가시는 물론, 바닥에 고인 핏물들까지 태워 버리며 사방으로 번졌다.
불길을 전부 토해내고 나자, 이안은 화염 해일이 멋대로 날뛰게 풀어버렸다. 삽시에 사방이 넘실대는 불길과 연기로 자욱해졌다.
여제가 장내를 뒤덮은 불길을 내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이것도 놀랍군요. 이런 상위 마법을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펼친 거죠? 알려 줘요."
쉬학, 불길 사이에서 이안이 솟구쳤다. 전신에 검붉은 연기를 두른 채, 그가 내뱉었다.
"못 할 거다."
용의 피를 마셔서 이렇게 된 거니까.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이 양손으로 준 대검을 내리쳤다.
콰지지직-
거대한 궤적이 여제의 전신을 휩쓸었다. 어깻죽지부터 사선으로 쪼개진 여제가 땅에 떨어진 건, 이안이 이미 그녀를 지나쳐 착지한 뒤였다.
"...!"
그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이안을 찾던 여제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이미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넘실대는 불길의 물결 너머, 홀로 솟아 있는 황금 욕조를 향해서.
"이안…! 멈춰요!"
그녀의 입에서 피가래 끓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물론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그녀의 전신이 핏물로 화해 흘러 내렸다. 내달리던 이안이 대검을 치켜들며 뛰어 오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솨아아아-
욕조 표면에 새겨진 고대 주문 회로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핏물이 콸콸 흘러넘치고, 삽시에 피어오른 피의 장막이 욕조 주위를 뒤덮었다. 장막 표면이 불길하게 출렁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그 내부에서 응집되는 마력을 느낀 이안이, 치켜들었던 대검을 등뒤로 늘어뜨리며 몸을 비틀었다. 넓적한 검면이 완전히 그의 몸을 가릴 찰나.
쩌엉!
그대로 폭발한 장막이 붉은 충격파를 토해냈다. 대검을 부러뜨리지는 못했지만, 이안을 날려 버리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콰장창창-
튕겨 나간 이안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충격파는 흩어지던 불길까지 단숨에 꺼뜨렸다. 이미 휘몰아치고 있던 피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번졌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허락할 수 없는 건 있답니다. 이건 일족이 탄생한 태초의 요람이자, 강대한 힘을 품은 유물이거든요."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장내로 미친 듯이 밀려들고 있는 꽃잎들을 올려다보며 피식댔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지."
"무의미하게 힘을 낭비하지 말란 거죠. 당신의 힘으로는 욕조에 닿을 수 없을 테니까. 그냥 내게 힘을 쓰도록 해요. 당신의 상대는, 나잖아요?"
"나랑 함께하고 싶다더니. 가장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군."
"그게 뭐죠?"
"거짓말. 모든 관계는, 신뢰를 잃으면 그걸로 끝인 거야."
내뱉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이안이, 떨어진 대검을 주워 들었다. 눈꺼풀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여제가 덧붙였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그 육체, 진짜 네가 아니잖아?"
"...!"
여제가 굳어진 사이, 숨을 한차례 크게 들이쉰 이안이 다시 욕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제를 향해서이기도 했다.
재생을 끝마친 여제가 놀람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내뱉었다.
"정말 당신은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 군요.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낸 거죠?"
동시에 마력이 응집되는 것을 느낀 이안이, 대검을 치켜들며 내뱉었다.
"잘."
피의 가시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그림자 칼날이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몸을 젖혀 피하면서, 이안은 황금 욕조를 눈에 담았다.
아무리 봐도 약점이 분명한 욕조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게 이상하다 여겼는데.
답은 늘 그렇듯 간단명료했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제의 본체는 저 안에, 진혈과 함께 담겨 있으니까.
공중에 떠 있는 저 여제는 분신에 불과했다.
그리고 욕조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형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지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솨아아-
날아드는 칼날 비 뒤로 사역마들이 솟아올랐다. 저것들도 이안에게 단서가 되어 줬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건, 여제의 육체가 썰려 나간 뒤에도 욕조에 새겨진 주문 회로가 작동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활성화되면 계속 유지되는 종류의 주문이라면 모를까. 저런 부류의 주문 회로는 사용자의 제어 없이는 작동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군단장의 대검이 만들어 낸 궤적을 따라 피의 사역마들이 물방울처럼 터져 나갔다. 엇박자로 달려드는 것들은 휘두르는 주먹에 터져 나가거나, 또 그대로 어깨로 부딪혀 터뜨려 버리기도 했다.
전신이 피범벅이 됐지만, 이안은 더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다.
쉬아아악- 콰콰콰-
그림자 칼날은 피하고, 그림자 파동은 대검을 땅에 찍어 뛰어 넘었다. 그러면서 서리 방패를 시전해 뒤따라 날아드는 피의 가시들을 막아내고, 대검을 검면 방향으로 휘둘러서 터뜨려 버리기도 했다.
모든 과정이 빠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여제는 거의 모든 뱀파이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안은 바로 그 뱀파이어들을 전부 죽인 장본인이었으니까.
물론 위력 자체는 여제 쪽이 월등했지만, 기본적인 특징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긁히거나 찔린 상처들이 생겨나는 것까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이안은 자신의 회복력을 믿었다. 그렇게 쉴 새 없는 전진을 이어가던 한순간.
"정말이지, 어쩔 수 없게 만드는군요."
머리 위에서 불쑥 번진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마력이 대기를 가르며 쏟아졌다. 날아든 여제가 손톱처럼 기다랗게 드리운 그림자 칼날을 내리치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기다렸다는 듯 뛰어오른 이안이 여제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피어난 마력 역장이 그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
즉각적인 반응에 놀란 듯 여제의 분신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이안이 대검을 힘차게 올려치며 덧붙였다.
"어쩔 수 없게 하려던 거거든."
카드드득-!
역장을 깨뜨린 그림자 손톱이 이안의 어깨를 할퀴고, 바람 칼날이 맺힌 대검이 여제의 가슴팍을 가로로 찢어버린 건 거의 동시였다.
그대로 자루를 쥔 왼손을 놔버린 이안이 주먹을 쥐었다.
찢겨나가 기울어지는 분신의 얼굴로, 신성력이 맺힌 쇠주먹이 틀어박혔다.
꽈직-!
주먹이 분신의 한쪽 얼굴을 두부처럼 으깨며 날려버렸다.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이안이 착지와 동시에 다시 달려나갔다.
그림자 손톱에 긁힌 어깨와 팔뚝에서 피가 흘렀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퍼버벙-
허물어지는 피의 사역마들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면서, 이안은 아공간에서 정수를 꺼냈다. 동시에 끌어올린 마력을 오른손에 든 대검으로 밀어 넣었다.
솨아아아-
욕조 표면의 주문 회로에 마력이 번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이미 팔과 허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전신의 붉은 신성력이 한순간 타오르고, 대검 검면에 새겨진 고대어에서 푸른 마력이 번뜩였다.
"흡…!"
이를 악문 이안이, 있는 힘껏 대검을 내던졌다.
콰아아아-
회전하는 대검이 새하얀 궤적을 허공에 새기며 욕조를 향해 뻗어 나갔다. 욕조 주위로 피의 장막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쩌어엉-!
대검이 장막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틀어박혔다. 동시에 검신에 남아있던 마력이 일제히 분출됐다.
콰과과-
막대한 냉기가 장막 표면을 뒤덮었다. 뒤이어 궤적에서 만들어진 냉기 칼날들이 그 위로 쏟아졌다.
장막이 출렁이며 충격을 흡수했다.
다시 욕조를 향해 내달리던 이안이 주문을 완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안은 어느새 머지않은 욕조를 올려다보며, 샛노랗게 달아오른 정수를 내밀었다.
쿠- 화아아아-!
불기둥이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함께 치솟았다.
혼돈력과 정수로 증폭된 일점 폭발. 마법을 시전한 이안 조차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알현실 천장까지 솟구친 불길이 사방으로 넘실대며 번졌다.
천장에 나풀대던 꽃잎들이 타들어가고, 동굴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폭발의 중심에 위치한 피의 장막도 무사하지 못했다. 끓듯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를 끝도 없이 토해냈다. 그 내부의 욕조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장막이 완전히 깨지거나 녹아내리지 않은 건 그 덕분이리라.
욕조 표면의 주문 회로가 발작하듯 점멸하며 끝없이 마력을 토해냈다.
쉬하악-
그 앞으로, 어느새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쇄도했다. 시선은 잦아드는 불길 사이의 욕조에 흔들림 없이 고정된 채였다.
'이 정도면 증발이 아니라도 익어서 굳어지긴 해야 하지 않나? 하여간 마법이란.'
어쨌건, 아까처럼 충격파를 토해낼 여력이 없는 건 확실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이안이, 정수를 집어 넣으며 꺼내든 부러진 단죄의 검을 검집에서 힘차게 뽑아냈다.
들쑥날쑥한 푸른 신성력이 치솟고, 이내 새파란 궤적이 되어 부글대는 장막으로 뻗어 나갔다.
카가가각-
장막이 갈라졌다. 불길이 넘실대며 잘린 단면을 태우는 가운데.
"멈춰요! 이안-!"
그 와중에도 재생을 시작한 여제의 분신이 소리쳤다.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신성력이 가득 맺힌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는, 그대로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콰과과과-
폭주하듯 난폭하게 뻗어 나간 푸른 궤적이, 붉은 마력이 번쩍이는 욕조의 표면을 휩쓸었다.
검이 부러진 이후로 좀처럼 느낀 적 없던 저항감에 이를 악물면서도, 이안은 검을 끝까지 내리쳤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한 다음 순간.
"안돼…."
내뱉던 분신의 목소리가 바람 빠지듯 사라지더니, 욕조 표면에 장식된 보석들이 차례로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욕조에도 균열이 번졌다. 표면의 주문 회로가 단말마 같은 붉은 빛을 토해내고, 다음 순간 깨져 나가면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안이 아직 신성력이 남은 단죄의 검을 검집에 회수하는 사이.
쿠구구구구-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번쩍 고개를 치켜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쩍, 쩌저적-
"...!"
미친, 시발.
동굴 천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반파된 욕조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의 양에도 변함이 없었다.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이안이, 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낚아채듯 집어 들며 몸을 날렸다.
뒤이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168화
쿠웅-! 콰광!
조각난 바위가 흙먼지를 흩뿌리며 떨어졌다. 한발 앞서 피한 이안은, 대검을 던지듯 아공간에 쑤셔 넣으며 내달렸다.
등골이 쉬지 않고 오싹댔다. 육감이 보내는 경고였다.
'이 정도 깊이면 죽는 것보다 깔리고도 사는 게 더 최악이겠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급하게 멈춰선 이안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르르- 뒤이어 부서진 돌덩이들이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무너지는 건 천장만이 아니었다. 바닥의 판석이 쩍쩍 갈라져 깨지고, 알현실 전체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지진에도 굴하지 않고, 이안은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
위급한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높은 정신력 수치는 늘 이런 순간에야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의 두 특성인 집중력과 육감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한계치까지 발휘되며 어우러지고 있었고, 덕분에 시야에 닿지 않는 곳조차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와르르르-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안이 방향을 틀며 내달렸다. 인지 능력이 고도로 가속화되어 길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채 십 초도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붕괴는 급속도로 가속화되고 있었다.
알현실을 벗어나 무사히 계단까지 들어설 수 있을지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무너지는 게 천장이 전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에는 미로 저택이 있었다. 곧 뒤따라 저택도 붕괴하리라.
무엇보다 육감이 일단 여기를 나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안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무려 특성씩이나 부여된 능력이 아닌가.
'그런데….'
왜 퀘스트 완료창이 안 뜨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이 뇌리를 스친 건 그때였다.
이안의 무의식은 그 와중에도 단숨에 답을 도출해냈다.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으니까.
'2 페이즈가 있단 건가.'
너무하네, 정말.
바닥을 구르면서도, 이안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다음 페이즈로 넘어갈 때 발생하는 이벤트 컷 씬에 불과하리란 의미였기 때문이다.
또 컷 씬 따위에 목숨이 위험해질 줄이야.
우르르르-
하지만 어느새 더는 피하거나 도망칠 틈도 없었다. 크고 작은 바위와 돌덩이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친 알현실 중심부에선 어느새 저택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불길처럼 이글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앙-!
이안은 앞을 가로막는 돌덩이를 주먹으로 힘껏 후려쳐 부숴 버리고는 그사이를 뚫고 내달렸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히고 깨부술 뿐이었다. 크지 않은 돌덩이들은 팔로 머리를 가린 채 몸으로 부딪쳐 견뎌냈다.
'정말 오늘 겪은 상황이 전부 게임에서도 있던 게 맞나?'
제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이 시기에 이걸 다 해내진 못했을 것 같은데.
당장 결론을 내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의문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쿠구궁-
떨어진 돌무더기가 통로 앞까지 가로막기 시작했으니까.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은 언제 떨어져 나간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양팔로 머리를 가린 이안이 돌진했다.
떨어지는 돌무더기 사이를 끝내 쓰러지지 않고 내달린 그가, 한순간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콰과과과-
온몸으로 돌 더미를 뚫어낸 이안이 이윽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비로소 통로였다.
"...!"
다시 일어나 내달리려던 이안이 이내 멈칫했다. 길게 이어진 통로 저 너머, 계단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육감의 경고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안은 통로 주변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마석의 불빛이 전부 꺼지고 지진이 쉴새 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 통로는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붕괴한 건 위로 이어지는 계단, 그리고 알현실뿐이었다.
하긴, 그것만 해도 이 지하 궁전의 절반이 넘는 공간이었다.
'보스전 안 끝난 거 맞네.'
생각과 달리, 극한까지 치달았던 위기감과 집중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기다렸다는 듯 뒤를 이었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계가 머지않았다는 경고 신호.
하지만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후…."
피와 흙먼지로 범벅인 주먹을 꾹 움켜쥐면서, 이안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알현실은 쏟아지는 잔해와 흙먼지로 내부를 제대로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진동과 굉음이 쉼 없이 이어졌다.
천장은 이미 다 무너졌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건 미로 저택의 잔해들이었다.
푸스스….
이윽고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안의 숨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잦아드는 흙먼지 사이로 불그스름한 달빛이 내리쬐었다.
온갖 파편으로 뒤덮인 장내가 드러났다.
입구부터 완만한 오르막을 그리며, 잔해의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다.
천장의 뻥 뚫린 구멍으로 달빛이 흘러들고, 어느새 모여든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이걸 운치 있다고 해야 할지.'
실없는 생각도 잠시,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장내에 오염된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고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흐릿한 정신파가 번지더니, 단숨에 볼륨을 높인 것처럼 뇌리를 가득 채웠다.
분노와 슬픔. 갈망과 비관. 체념과 증오.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저마다 뒤엉켜 날뛰었다. 시야가 붉게 출렁였다. 이안의 저항력조차 뚫을 정도이니, 평범한 사람은 단숨에 동화되어 미쳐버렸을 터였다.
혹시 일행에게도 이 정신파가 닿았을까? 아니기를 바랐다. 메브나 테사이아는 몰라도, 필립과 샬롯은 정신을 잃고 발광할 터였다.
어쨌든, 이안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고 긴장감이 되살아났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소음이 오히려 두통과 현기증, 몸의 떨림을 전부 날려 버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혼돈력의 한기가 선명해졌다. 동시에 피부 표면은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문신을 타고 번진 신성력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남은 양이 얼마나 되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솨아아아-
달빛이 붉게 일렁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동시에 언덕을 구성하는 잔해 사이사이에서 선홍색 핏물이 역류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이안은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거대하게 뭉치는 핏방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지름이 3미터는 될 듯했고, 땅 위로 살짝 부유한 채 은은하게 출렁댔다.
내부에서 엄청난 밀도로 응축된 마력이 느껴졌다.
저 거대한 덩어리가 전부 진혈이었다.
그 내부에 흐릿한 실루엣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까지 확인한 순간, 이안은 구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예 진혈 속에 녹아들어 있었던 거였나.'
언덕으로 들어서면서, 이안은 구체의 실루엣을 다시 눈에 담았다.
뇌와 신경계, 혈관과 뼈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근섬유가 올올이 피어나 그 위를 덮었다.
사방에 어지럽게 메아리치던 정신파는 이제 저 안에서부터 웅웅 번져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극도로 불안정한 파장이었다. 진혈 구체 표면에도 불 규칙적인 파장이 꿈틀대며 번졌다.
여제가 욕조 속에 녹아들었던 건, 그게 진혈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뱀파이어들은 품은 진혈이 많을수록 강해지지만, 동시에 그만큼 이성이 흐려지고 충동적으로 변했다.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건 저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여제의 본체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엄청난 양의 진혈을 품게 되는 만큼 극도로 강하고, 동시에 불안정하리라.
이안이 달리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저대로 여제가 온전히 눈을 뜨면,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반대로, 지금은 무방비 상태겠지.'
게임에서도 종종 있던 패턴이었다.
봉인에서 풀려나거나 본모습을 되찾거나 강림 의식이 무사히 끝나면, 아예 클리어할 수 없게 설계된 보스들.
그 전에 죽이는 게 최선이지만. 최소한 빈사 상태로 만들어 놓거나, 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게는 해야 했다.
솨아아아-
왼손의 정수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빛을 머금었다.
주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한 번 더 마력이 빠져나가고, 한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안은 이를 악물며 언덕 위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쿠- 콰아아아-!
진혈 덩어리를 중심으로 눈부신 불기둥이 솟구쳤다. 폭발은 천장에 뚫린 구멍 위까지 치솟으면서 내리쬐던 달빛을 밀어냈다.
최대한의 증폭을 더한 일점 폭발.
퍼석, 정수가 부서져 흩날렸다.
폭발에 휩쓸린 잔해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안은 굴러떨어지는 파편들을 뛰어넘으면서, 불기둥 한복판의 진혈 덩어리를 눈에 담았다.
효과가 있는 건 분명했다. 진혈이 부글부글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가 불길에 뒤섞였다.
그만큼 구체의 크기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달렸다. 불기둥의 연기가 온몸을 익히는 것 같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진혈 덩어리는 아직도 거대했다.
태아처럼 웅크린 내부의 실루엣도 여전히 아른거렸고,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바람결에 불길이 뒤섞여 일렁였다.
이안은 언덕 아래, 툭 튀어나온 지붕의 잔해를 짓밟으며 도약했다.
쿠우- 콰르르르-
짓눌린 잔해가 무너져 내렸다.
몇 미터나 솟구친 이안이 양손으로 움켜쥔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표면에 푸른 빛이 맺힌 대검이 새하얀 궤적을 흩뿌렸다.
동시에 이안의 주위로 아른거리던 불길까지 검신을 타고 솟구쳤다.
콰치지지지지-
타들어 가는 진혈 덩어리의 표면에 온갖 마법을 머금은 대검이 떨어져 내렸다.
단숨에 갈라버릴 수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검날은 구체 표면에 커다란 파장을 만들며 박혔을 뿐이었다. 아주 단단한 물풍선을 내려친 듯한 느낌.
하지만 어쨌거나 검날은 튕겨 나가지 않았다. 이안은 턱이 부서질 것처럼 이를 악물며 양팔을 내리눌렀다.
투쟁의 축복이 타오르면서 한계에 다다른 그의 사지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치이이이이-
대검 날이 달궈진 인두처럼 진혈 덩어리를 녹이며 파고들었다.
현저하게 작아진 구체 속, 웅크린 여제의 본체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안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제의 본체는 분신보다도 더 컸다.
심지어 등에는 기다란 날갯죽지까지 좌우로 돋아 있었다.
다만 아직도 완벽하게 생성을 끝내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제 막 피부가 덮이기 시작했을 뿐, 온전한 육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우드득-
마침내 검날이 그녀의 한쪽 날갯죽지에 닿았다. 엄청난 저항감에도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꽈지직, 마침내 대검이 그녀의 한쪽 날개를 완전히 으스러뜨리고, 그 아래의 등판까지 닿았다.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가 움푹 파이기 시작한 그때.
슈화악-
진혈이 여제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단숨에 스며들었다.
검날이 우뚝 멈춰 버린 다음 순간, 여제의 몸속에 응축되어 있던 마력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
대검이 튕겨 나가고, 그걸 쥔 이안까지 트럭에 치인 것처럼 날아갔다.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이안은 충격파에 휩쓸려 일제히 터져나가는 꽃잎들을 눈에 담았다.
솨아아-
피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잔해 아래에서도 자욱한 피 안개가 치솟았다.
이안이 놔 버린 대검이 잔해의 언덕 중턱에 떨어져 박히는 가운데.
"키아아아아아-!"
언덕 한복판에서, 여제가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포효했다.
콰지지직-
이안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알현실 벽면에 처박혔다. 벽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졌다.
왼팔과 갈비뼈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지만, 이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이안은 여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아아아-!"
짐승처럼 네 발로 땅을 짚은 채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
핏줄이 비칠 만큼 얇고 번들거리는 피부.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얼굴은 코와 입술은 물론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새빨간 눈알과 뻥 뚫린 콧구멍, 훤히 드러난 뾰족한 이빨들.
으스러진 한쪽 날갯죽지와 갈비뼈 사이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흐으으…."
이윽고 포효를 끝낸 여제가 숨을 들이켜며 몸을 웅크렸다.
쏟아져 내리던 핏물이 그녀의 주위로 쏜살같이 모여들었다.
일부는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일부는 주위에 남아 저마다의 형태를 이뤘다.
머리 위로 피의 왕관이 돋아났다. 날갯죽지를 따라 흘러내린 핏물이 날개의 형상을 이뤘고, 한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날갯짓도 없이 날아올랐다.
사실상 날개에 매달려 끌려 올라가는 듯한 형상이었다.
쿠우웅-
이안이 아래로 뛰어내려 착지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는 으스러진 어금니 조각을 피와 함께 뱉으며 일어섰다.
온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여제를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새카맣게 가라앉은 채였다.
날개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던 여제의 고개가 삐걱, 그를 향해 돌아갔다.
멋대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던 붉은 동공이 우뚝 멈추더니, 뒤이어 광망을 토해냈다.
거대한 피의 날개와 왕관, 전신에 아른거리던 피 안개가 일제히 타올랐다.
"이아아아아안-!"
여제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울부짖었다.
터져 나온 정신파가 이안을 휩쓸었다. 그조차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는 파장이었다. 게임에서의 테사이아가 절로 뇌리를 스쳤다. 그때의 그녀도 무작위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정신파를 발산했었다. 매혹, 착란, 공포, 광란, 마비 등등.
이번 경우에는 광란 상태인 모양이었다.
언제나 가슴 속에 품고 살던 억울함과 분노, 증오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투쟁의 축복이 그의 감정에 응답하듯 타올랐다. 파편이 폭주하듯 혼돈력을 쏟아냈다.
여제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오오오오오-!"
보랏빛 눈으로 포효한 이안이 그녀를 향해 마주 내달렸다.
#169화
상태 이상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안의 돌진은 최선의 선택이 됐다.
솨아아아-
뒤로 물러났다면 여제의 주위로 피어올라 일제히 흩뿌려진 피의 가시들과, 그녀의 양손에 드리운 칼날 손톱의 연계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여제가 코앞까지 가까워지고 나서야, 이안은 자신이 칼조차 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콰지직-!
대신 주먹이 있었으니까.
이안이 내뻗은 오른 주먹이 여제의 한쪽 안면을 후려쳤다.
쇠 장갑이 우그러지면서 손가락을 조였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주먹이 틀어박힌 커다란 머리통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얇은 피부 아래, 한쪽 광대뼈가 깊이 함몰되고, 그 위의 눈알이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카가가가각-
거의 동시에 여제가 휘두른 양팔이 그의 뒤를 지나쳤다. 이미 피의 가시들이 틀어박힌 벽면 위로, 열 가닥의 할퀸 흔적이 덧새겨졌다.
이안이 오른손을 회수하면서 왼 주먹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아까 왼팔에 금이 갔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뇌리를 스쳤지만 상관 없었다.
꽈드드득-
왼 주먹이 여제의 반대편 얼굴을 깊이 함몰시키며 틀어박혔다. 동시에 팔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지만, 이안은 이미 거의 본능적으로 주문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진공 폭발.
콰직-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얼굴 한쪽이 움푹 함몰된 여제가 튕겨 나갔다. 이안도 그대로 옆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벌떡 일어난 그의 시선이 문득 왼팔로 내려갔다. 팔뚝을 뚫고 부러져 뒤틀린 뼈끝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테사이아에게 피를 먹이느라 팔목 보호대도 벗어 던졌던 탓에, 끔찍한 상태가 더 적나라했다.
"하…."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리며, 오른손으로 뼈를 대충 밀어 넣었다. 나머지는 그의 회복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태초의 생명력은, 심각한 부상일수록 그 효과가 커지니까.
동시에 그는 가슴 속에 들끓던 분노와 증오가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어긋나 있던 본능과 이성이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조금의 아쉬움이 뒤를 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정신력과 저항력 덕분에 아예 이성을 잃은 정도는 아니지 않았던가.
정신이 맑아지면서. 멀지 않은 곳에 박혀 있는 군단장의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내달렸다.
우득, 우드득-
그때 바닥을 나뒹굴던 여제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반쯤 날아갔던 그녀의 머리가 이리저리 부풀면서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안이 몸을 날려 대검 자루를 움켜쥔 건 그때였다. 잔해더미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며 검날을 놓아준 그때.
"키… 아아아-!"
그를 돌아보는 여제의 안광이 다시금 타올랐다. 그녀의 주위로 수많은 피의 칼날이 피어올랐다.
역시, 본능적으로 원거리 전투를 유도해야겠다 결론 내린 게 분명했다.
아마 육체가 온전히 완성되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금은 방어력이 치명적일 정도로 낮았다.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근접전으로 가야지.'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고, 여제가 칼날을 일제히 분사하면서 날개를 펼쳤다.
푸- 화악-!
내달리던 이안의 주위로 거센 돌개바람이 터져 나왔다. 솟구치던 여제의 몸이 순간 흔들릴 정도였다.
혼돈력을 가득 머금은 휘몰아치는 방벽. 지금은 혼돈력을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없어서, 그저 모든 마법에 최대치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개바람은 칼날 비의 궤적을 일제히 흩어 버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이안까지 함께 휩쓸어 날려버렸다.
정확히 여왕이 솟구치는 방향이었다.
대검을 무게추 삼아 빙글빙글 돌면서, 이안은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했다.
화르르르-
주위로 수십 개의 춤추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안은 그대로 불덩이를 날려 보내면서 대검을 치켜들어 균형을 다잡았다. 그가 뻗어나가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사실상 불덩이들의 뒤를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여제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쉬하아아악-
주위에 아른거리던 피 안개가 삽시에 피의 장벽을 만들어 냈다.
콰과과과광-
그 위로 불덩이들이 연달아 터져 나갔다. 뒤이어 이안이 대검을 내리치며 장벽을 산산조각 냈다.
대검을 내민 채 쇄도하는 이안을 향해 여제가 손을 내뻗었다. 이안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지지직-
여제의 손아귀가 역장을 움켜쥐었다. 잠시 눈부시게 점멸한 역장이 손아귀에서 으스러졌다. 이안이 다시 한번 휘몰아치는 방벽을 사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푸확-!
터져 나온 돌풍이 여제가 균형을 잃고 휘청이게 하고, 다시 한번 이안을 위로 날려 버렸다.
이안은 빙글빙글 돌며 솟구치는 와중에도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이윽고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은 그가, 검날에 맺힌 바람을 흩뿌리며 여제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잃었던 균형을 되찾은 여제가 다급하게 팔을 치켜들었다.
콰지지직-!
대검이 여제의 팔뚝에 깊숙이 박혔다. 바람 칼날을 추진력으로 사용한 데다 한 손으로 내리친 탓에, 팔뚝을 잘라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콰직-!
이어 검날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진공 폭발이 여제의 팔뚝을 터뜨려 버렸으니까.
"끼아아아악-!"
여제가 비명을 토해내며 추락했다. 날개가 하나여서 다행이었다. 둘 다 무사했다면, 아까는 물론 이런 순간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날아올랐을 터였다.
뒤따라 떨어지면서, 이안은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는 여제를 눈에 담았다.
'할 수 있을까…?'
없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대검 날을 아래로 드리운 이안이,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도 자루를 함께 움켜쥐었다.
쿠웅- 콰르르르-
여제가 폐허 한복판에 등부터 떨어졌다. 충격으로 무너진 잔해들이 허물어지는 가운데, 여제가 잘린 왼팔을 치켜들며 허우적댔다.
눈에 띄게 숫자가 줄어든 꽃잎들이 삽시에 핏방울로 화해 모여들었다.
피의 칼날이 완성되는 것보다, 이안이 그녀의 복부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게 더 빨랐다.
콰지지직-!
새파란 마력이 맺힌 검신이 여제의 복부를 꿰뚫듯 박혔다. 서리 칼날이 그녀의 몸속을 찢어발기며 터져 나왔다. 반쯤 얼어붙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안은 냉기 칼날을 사용한 직후, 적색 하위 마법까지 연달아 시전했다.
콰아아아-
혼돈력을 머금은 화염 방사가 넓적한 검면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냉기 칼날이 찢어발긴 몸속을, 이번에는 불길이 휩쓸고 지나갔다.
허리가 휠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힌 여제의 눈에서 새빨간 광망이 타올랐다.
"캬- 아아아아악!"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포효. 동시에 여제의 전신에서 정신파가 섞인 마력 폭발이 터져 나왔다.
"...!"
이안은 대검 자루를 거의 매달리듯 움켜쥐며 몸을 움츠렸다.
거대한 해일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 같은 충격.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터지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몸이 굳으면서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무슨 상태 이상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공포.
뱀 앞의 개구리처럼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이안은 끝내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여제의 위에 있었다.
이안이 비로소 쥐고 있던 자루를 놓아버린 그때.
쉬아아악-
충격파에 휩쓸려 터져 나간 꽃잎들이 일제히 가시로 화했다.
여제는 자신의 몸이 꿰뚫리는 것조차 상관없다는 듯, 가시를 일제히 자신의 복부로 흩뿌렸다.
이안은 아직 공포를 떨치지 못한 상태에서도, 기어코 서리 방패를 시전하며 오른팔을 들었다.
마력 역장도 거의 동시에 피어 올랐다.
카드드드득-
서리 방패는 상반신을 노리는 가시를 전부 막아냈다.
하지만 비스듬하게 하반신으로 날아드는 몇 개의 가시들은 역장이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발악하듯 번쩍이던 마력 역장이 이내 부서졌다.
콰직-
끝내 이안의 왼쪽 허벅지에 가시 하나가 틀어박혔다. 가시는 그의 허벅지를 꿰뚫은 순간 그대로 녹아내렸다.
출혈은 피할 수 없게 됐지만.
'시발, 왼쪽 수난 시대네.'
덕분에 적어도 공포 상태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굳어 있던 근육과 감각들이 삽시에 되돌아왔다.
쒸에엑-!
그때 여제가 기습적으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이안이 한쪽 다리만으로 펄쩍 뛰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가가-
아슬아슬하게 발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손아귀와 날카로운 손톱의 궤적이 선명했다. 이안은 손아귀를 타고 휘몰아치는 마력의 결까지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넝마가 될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듯한 기묘한 느낌.
역시, 집중력 끌어올리는 데에는 위기만 한 게 없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아공간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몸을 비틀어 빙글 도는 것만으로 검집을 날려버렸다.
솨아아아-
푸른 신성력이 맺힌 부러진 검날이 드러났다. 단죄의 일격을 사용하고도 아직 남은 신성력이 톱날처럼 들쭉날쭉하게 솟구쳤다.
그 사이로 이안이 뿜어낸 혼돈력이 섞였다.
신성의 칼날이 삽시에 보랏빛으로 물들며 기세를 되찾았다. 전에도 써먹은 적 있는 수법이었다.
이안은 그대로 마저 허리를 휘돌리면서, 아래에 드리운 여제의 팔뚝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각-
보랏빛 궤적이 여제의 오른 팔뚝을 할퀴고 지나갔다.
길이에 비해 얇은 팔뚝이 톱날에 썰리는 것처럼 잘려나갔다. 혼돈력과 신성력이 뒤엉킨 잔재가 잘린 단면을 태웠다.
"키-아아아악-!"
여제의 놀란 듯한 비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콰직-
이안이 여제의 가슴 위로 갈비뼈를 부러뜨릴 듯 착지했다.
왼쪽 다리로 저릿한 느낌이 번졌다. 흘러내리던 피가 종아리를 끈적하게 적셨다.
신성력 조차 쓰지 않은 채, 이안은 검 자루를 역수로 돌려 쥐었다.
동시에 혼돈력이 다시 한번 검날에 뒤섞였다.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안이 여제의 갈비뼈 위로 보랏빛 칼날을 내리쳤다.
콰과과과과-
칼날이 여제의 가슴을 가르며 박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쇠를 뚫는 듯한 반발력, 여제의 전신이 발작하듯 들썩였다.
슈화아악-
동시에 그녀의 날개에 맺힌 피와 머리 위의 왕관이 무수한 칼날로 화하며 솟구쳤다.
검신을 내리찍는 이안의 눈동자가 푸르게 일렁였다.
서리 방패. 그 뒤로 푸른 역장이 피어났다.
콰드드드드-
칼날들이 넓게 번진 방패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좁은 범위인 터라 서리 방패로도 전부 막아낼 수 있었다. 다만, 칼날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쩍, 쩌적-
방패 전체에 새하얀 균열이 번졌다.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검을 찔러 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미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피한다면 여제는 대검에 꿰뚫린 몸을 찢어서라도 다시 날아오를 테고, 주위의 피를 흡수해 재생을 시작할 터였다.
그때는 이안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의 왼팔과 왼 다리는 격렬한 움직임을 이어갈 수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불과 몇 분 만에 이런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문신에 남은 신성력도 한줌에 불과했다.
마력도, 혼돈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지금 끝을 봐야 했다.
저 칼날들이 끝내 그의 몸을 찢어발길지라도.
콰지직-
그때 서리 방패가 깨졌다.
남은 칼날들이 뒤에 일렁이는 마력 역장으로 쏟아졌다.
콰과과과-
이안은 너덜너덜한 왼손까지 검의 무게추 위에 얹어 내리눌렀다. 부러진 검날이 여제의 갈비뼈를 가르며 점점 더 깊이 박혔다.
콰장창-
역장이 터진 것과 단죄의 검이 끝까지 박힌 건 거의 동시였다.
여제의 가슴 속에서 뭔가 퍽 터지는 느낌이 이어졌다. 발작하듯 버둥대던 여제의 몸이 굳어졌다.
철퍽-
피의 칼날들이 핏덩이로 허물어지면서 이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손아귀의 감촉에 집중했다.
여제의 몸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탄식 섞인 숨결이 번졌다. 본능에 완전히 지배당하던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녀 본연의 목소리.
잘린 양팔과 입, 그리고 몸 아래에서 뭉근한 피가 번졌다.
여제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진혈의 여제는 죽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주위로 번지던 진혈이 맹렬하게 끌어 오른 건, 이안이 미간을 좁힌 찰나였다.
푸화악!
진혈이 품고 있던 마력을 토해내며 솟구쳤다.
이안이 검을 뽑으려 했다.
쩌적,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여제의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벌어졌다.
파리지옥처럼 이안을 둘러싼 갈비뼈 사이로 새빨간 마력이 휘몰아쳤다.
"...!"
마력에 사로잡힌 이안이 눈을 치켜떴다. 흐릿하게 아른거리던 카르하의 신성력이 일렁였지만, 진혈이 토해내는 마력을 전부 불태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이런, 시발?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전신의 모든 상처에서 피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안은 온 정신을 집중해 피에 섞인 마력과 혼돈력을 다시 끌어당기려 노력했다.
하지만 피를 빨아들이는 진혈의 힘이 조금 더 강했다.
전신의 피가 조금씩, 그러나 계속해서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새끼들은 자폭이 패시브인가?'
이를 악물면서도, 이안은 피를 다시 되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릇을 잃은 이상, 진혈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도 주위로 솟구친 진혈은 계속해서 연기처럼 증발해 사라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으리란 사실이었다. 끌기는커녕 그전에 과다 출혈로 죽게 되리라.
아무리 애써도 피가 빠져나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게 전부였다.
전신에서 가느다란 촉수처럼 번지는 그의 피 줄기들이 어느새 육안으로도 보였다.
'시발….'
이안은 탄식을 삼키며 상태창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의 의식이 스킬창으로 향하고, 이윽고 공용 스킬인 태초의 내성에서 멈출 찰나였다.
두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림이 번졌다. 막 태초의 내성을 하나 올리고, 다시 하나를 더 올리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혼돈의 파편이었다.
또 하나의 심장처럼 두근댄 파편이, 곧 이안을 거들듯 혼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바꾸기엔 충분한 변화였다.
이안은 상태창을 닫아 버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빨려 나가던 피 줄기들이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냥 안 죽고 버티면 알아서 해결되는 이벤트였던 건가.'
이안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스킬 포인트를 단 하나만 사용하고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는 태초의 내성을 최고 레벨까지 올리고, 비전 스킬인 주문의 흐름도. 그걸로도 부족하면 남은 능력치 포인트를 전부 정신력에 투자할 생각이었었다.
그렇게 된 후에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면, 말 그대로 피눈물이 흘렀으리라.
"...?!"
잡념이 단숨에 날아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어느새 피가 전부 몸속으로 되돌아왔건만, 파편의 맥동이 여전히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편은 이제 거꾸로 진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멈춰보려 했지만, 파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갈비뼈 사이로 촉수처럼 끌려 들어온 선홍색 진혈 가닥이, 이윽고 이안의 찢겨나간 왼팔에 닿았다.
솨아아아-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진혈이 이안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삽시에 시끄러워졌다.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어지럽게 메아리치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 한복판으로 선택 퀘스트 창이 불쑥 떠올랐다.
진혈의 주인.
'타락자 전용 퀘스트인가.'
선택권이 없다면 모를까, 오래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안은 퀘스트를 거절했다.
동시에 혼돈의 파편이 기다렸다는 듯 진혈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확 뒤집히면서 모든 감각이 사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아니, 거절했잖아…?'
#1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