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이번 역은… 이번 역은….
익숙한 진동과 함께 안내 방송이 귀를 파고들었다.
출근길, 지하철 한복판이었다.
"...."
그는 잠시 미간을 좁히며, 자동문의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눈에 담았다. 문 옆의 손잡이를 쥔 손아귀에 살짝 땀이 묻어났다.
-내리신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는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평소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는 슬쩍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평소보다 10여 분 이른 시점이었다.
그래. 이 정도만 일찍 나와도 지옥철은 면했었지.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가 익숙했다. 맨 윗단추를 풀어헤친 셔츠도.
열차가 느려졌다.
지치고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이 주춤주춤 문 주위로 모여들었다.
한숨. 짧은 기침 소리.
곧 문이 열렸다. 승객들이 표정과 달리 재빨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도 플랫폼으로 나왔다. 같은 열차를 탔던 이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흔한 아침 풍경.
그는 그 모습을 차근히 눈에 담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띠딕-
개찰구를 통과한 그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좀 전부터 그의 코를 간질이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의 근원지가 저만치에 있었다.
"하…."
작은 웃음을 흘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만쥬였다. 호두과자도. 틀을 심드렁하게 뒤집던 사장이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드릴까요?"
"…네. 둘 다."
나지막하게 대답한 그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받아든 카드를 재빨리 긁은 사장이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
"...."
봉투를 받아든 그는 곧바로 만쥬 하나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따듯하고 달았다.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는 입을 우물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 옆 빵집, 가판에 놓인 온갖 빵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로케나 샌드위치를 먹을 걸 그랬나.
작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곁을 스쳐 가는 이들이 이 무슨 냄새인가 하는 눈빛으로 한 번씩 그를 힐끔댔다.
역에서 나올 때쯤, 그는 슬슬 목이 막히는 걸 느꼈다. 마침 저 앞에 카페가 여럿 보였다.
걸음이 곧바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카페까지 들르면 기껏 일찍 나온 보람이 사라지겠지만, 지금 그런 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는 유명한 프렌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평소엔 가지 않던 곳이었다. 한 블록 옆의 소형 카페 커피가 천 원 이상 더 쌌으니까.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그리고… 딸기 스무디 하나 주세요."
사이즈는 가장 크게. 마시고 가겠다고까지 내뱉은 그는, 주문을 기다리며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오전의 호사였다.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웅성대는 카페 내부. 테이블에 놓은, 입구를 접어 둔 종이 봉투.
우우웅-
그 모든 광경을 즐기던 한순간, 벨이 울렸다. 그는 곧바로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솔직히 제일 마시고 싶은 건 콜라나 맥주지만….'
생각하면서도, 그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약간 탄 듯한 쓴맛조차 기분 좋았다. 딸기 스무디는 새콤달콤했다. 하, 짧게 한숨 쉰 그가 종이 봉투를 열었다.
그사이 조금 식어 버린, 하지만 여전히 느끼하게 달콤한 만쥬. 그리고 쌉싸름한 커피.
그는 한마디 말없이 그 맛을 음미했다.
"네가 가장 원하던 게 이런 건가?"
내뱉으며, 누군가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특징 없는 인상을 가진.
그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스무디를 마셨다.
싱긋 웃은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렇지 않나?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는군. 탐이 나는데."
"...."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리란 건 본 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남자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남자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다.
스르륵, 얼굴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반전됐다.
검붉은 빛이 내리쬐는 거리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비정형의 길고 낭창낭창한 검은 실루엣들이 비칠대며 거리를 오갔다.
종이봉투가 바스락댔다. 손을 보니 만쥬 대신 반 토막이 난 커다란 벌레의 몸통이 다리를 꼼지락대고 있었다.
더러운 잔에 담긴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액체.
벌레를 툭 바닥에 던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나는 죽은 건가?"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리가 점점 위로 길쭉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변조된 음성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긴 그저 네 꿈이지. 너에겐 이게 더 애석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머리는 더 이상 머리로 보이지 않았다. 파충류의 꼬리 같기도, 촉수 같기도 했다.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정신이 으깨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이 남자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쩍, 쩌적-
그를 중심으로 보라색 균열이 번졌다. 균열이 빠르게 세상을 집어삼키고, 이윽고 뒤섞였다.
남자도 예외 없이 그 뒤엉키는 혼란 속으로 녹아들었다.
모든 게 흐려졌다.
"언젠간… 또… 다시…."
음성이 노이즈에 뒤섞여 바스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공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다시 어둠.
***
물감이 번지듯 의식이 되돌아왔다.
악몽의 잔재가 흐릿하게 뇌리를 스쳤다.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고로케에 콜라를 먹었어야 했는데….'
짧은 감상과 함께, 이안은 비로소 눈을 떴다.
회백색의 낯선 천장이 선명해졌다.
전신을 압박하는 감촉이 비로소 느껴졌다.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지어 팔다리는 부목으로 고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감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반신불수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어디 하나 없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다행이군.'
어렴풋한 기억을 곱씹은 이안은, 방심하지 않고 손가락과 발가락도 꼼꼼히 확인했다. 불편한 와중에도 감각이 전해졌다.
미구엘은 손목이 날아가도 손이 남은 느낌이라 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꼬물대는 것까지 느껴지진 않았을 터였다.
"하…."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안이 본능적으로 상태 창을 열었다.
남김없이 사라진 능력치 포인트.
그리고 그만큼 높아진 체력 수치.
'…이래도 힘이 더 높네.'
이안은 덤덤하려 애썼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러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나마 위안인 건 레벨 업 직전까지 오른 경험치였다.
'퀘스트 보상에 용의 경험치까지 다 들어온 건가.'
그의 레벨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다.
받은 퀘스트는 전부 완수되어 있었다. 보상은 다 합쳐 스킬 포인트 두 개. 그리고 여러 개의 물음표였다. 물음표 보상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현실에서 손에 넣게 되는 전리품인 경우가 많았다.
이안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스킬 창으로 이어졌다.
보상이 들어온 건 분명했지만, 잔여 포인트는 오히려 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생명력 자연 회복 수치를 높여 주는 공용 스킬인 태초의 생명력을 최고 레벨까지 올렸으니까.
다 찍을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른 이안의 입가에, 문득 쓴웃음이 스쳤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군.'
지금은 살아남은 거에 감사할 시점인데.
하지만 아쉬움을 깨끗하게 밀어낼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더 심각한 망캐가 된 셈이었으니까.
'…하긴. 이제 능력치만 봐도 도저히 마법사라고는 할 수가 없지.'
어쩌면 단추를 몇 개 완전히 잘 못 끼운 시점부터 예견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바구니를 든 여사제가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제야 장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누운 장식 없는 침대. 마찬가지로 장식이라고는 없는 탁상과 의자. 원형으로 뚫린 창문.
'어디인가 했더니. 교회였나.'
생각하며, 그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몸이 뻣뻣해서 벌떡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히, 히익…?!"
방을 정리하던 여사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눈을 치켜뜬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이안은 팔을 구부렸다. 으직, 팔을 고정하던 부목이 부러졌다.
이제야 좀 움직일 만하네.
"루 솔라 맙소사…. 정말 깨어나셨군요…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시는 걸 보고 찬란한 여신의 은총이라 여기긴 했지만… 이건 정말…."
그가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사이, 더듬대며 내뱉던 사제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입가를 압박하는 붕대를 슬쩍 풀며 내뱉었다.
"페르마 사제를 불러 주시겠소?"
***
이안이 깨어났음을 알게 된 사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침대에 걸터앉은 이안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루 솔라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적의 산물 취급이냐고….'
이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 사이의 페르마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며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기도를 끝낸 사제들을 슥 돌아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둘만 들어오고, 나머진 돌아가시오. 또 기도하러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평생 앞니 없이 살게 해 줄 테니까, 알아서들 전달하시고."
"예…!"
맨 앞에 선 사제 둘이 달려 들어왔다. 이안이 양팔을 펼치자, 그들은 말없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이안의 시선이 물러나는 사제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선 페르마에게로 돌아갔다.
"페르마 사제님."
"예. 말씀하십시오, 이안 경…."
페르마가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눈빛이 퀭했다.
어쨌든, 편하게 대화할 상대는 아니군. 내심 실소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루카스 경이 트라벨가에 와 있소?"
페르마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가서 불러오시오. 그와 얘기하는 게 편하겠군."
"그… 이안 경."
"...?"
"경께서 의식을 회복하시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누구?"
페르마가 난처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한 분은 울라프 대공 전하이시고 한 분은 교단의-"
"만날 생각 없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하니, 그들을 만나 봐야 장황한 개소리나 들어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깨어난 걸 알리지 마시오. 혹시 알려지면, 방문을 거부했다고도 알리시고."
단호하게 덧붙인 이안이 턱짓했다.
"가서 루카스 경이나 불러오시오. 페르마 사제님."
"…예."
페르마가 한숨을 삼키듯 눈을 감고는 몸을 돌렸다.
이안은 코웃음을 흘렸다.
어쨌건, 그가 타후므리트를 죽였다고 알려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건 한 올 한 올 정성껏 붕대를 벗기는 사제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의 사도 수준이 아니라, 화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날 새겠군.
"내가 얼마나 잔 거요?"
이안이 불쑥 입을 열자, 사제들이 황급히 손가락을 펼쳤다.
"교회에 도착하신 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걸칠 옷과 식사나 준비해 주시오. 이건 내가 할 테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안 경."
꾸벅 허리를 숙인 사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어쨌거나 거만한 작자들이 쩔쩔매는 꼴을 보는 재미만큼은 확실히 있었다.
끼익-
문이 다시 열린 건, 로브를 걸친 이안이 탁상에 놓인 빵과 수프를 거의 다 먹었을 무렵이었다.
"...?"
루카스일 줄 알았건만 또다시 페르마였다. 그의 뒤,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를 눈에 담은 이안이 심드렁하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루카스 경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루카스 경께는… 연락을 넣었습니다."
"방문도 거부하겠다 했었고."
"그게, 제가 모신 것이 아니라…. 이분은…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페르마 신부가 식은땀을 흘리며 횡설수설했다. 가뜩이나 퀭해진 얼굴이 이젠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때, 뒤에 선 자가 얼굴을 덮은 베일을 살짝 거둬 눈을 드러냈다.
그 눈동자를 본 이안의 입가에, 이내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그런 거였군…. 들어오시오."
내뱉은 말에 신경 쇠약 직전이던 페르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뒷걸음질 쳐 물러나는 그를 향해, 이안이 덧붙였다.
"페르마 사제?"
"예, 예에…?"
"복도 끝에서 기다리시오. 아무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루카스 경이 오면 기다리라 전해주시오."
"예…."
"이번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앞날이 더 피곤해지실 거요."
"...."
고개를 숙인 페르마가 물러났다.
베일을 눌러쓴 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탁, 문이 닫히자 베일 아래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졌다.
"설득할 생각이었거늘. 바로 허락해 주어 고맙구나."
여자 같기도, 미성의 남자 같기도 한 묘한 목소리.
"거절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피식한 이안이,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위대하신 백금룡께서, 거절한다고 쉽게 물러나실 리가."
"바로 알아봐 준 건 기쁘다만…."
멈춰선 그가 베일을 걷으며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베일 아래의 황금색 눈동자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그리 말하니 조금 서운하구나. 우리는 전우가 아니더냐?"
#121화
용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웃음을 삼킨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비슷한 거긴 했었지."
"비슷한 거라니… 고약한 농담을 즐기는구나. 날 여러 번 서운하게 해."
말과 달리 전혀 기분 나쁜 어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르케아스가 베일을 완전히 벗었다.
빛이 바랜 듯한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과 황금색 눈동자.
…이래서 얼굴을 가렸군.
"조금 덜 눈에 띄는 외모로 변하시는 게, 가리는 것보단 편하지 않으시겠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의태하면 불편하단다. 주문과 몸이 이 형태를 기억하고 있거든. 그러니 처음부터 다른 모습을 택했어야 하지만…."
이안의 건너편에 앉으며, 아르케아스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어린 나이엔, 누구나 눈에 띄는 걸 즐기는 법이잖니."
"지금은 꽤 불편하시겠소."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며, 이안이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 이 모습을 보고 한 첫 질문이 그런 거라니. 역시 넌 재미있구나. 보통은 정말 내가 소문대로 황금이 가득한 둥지를 가지고 있는지 묻거나, 성별을 확인하려 들거든."
"…그런 질문에도 대답해 주시오?"
"물론이지. 소문이 아예 거짓은 아니나 그런 취미는 수백 년 전에 버렸으며, 용은 성별이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원한다면 어느 쪽이든 될 수 있다는 것도, 전부 알려 준단다. 지금 이 몸이 어떤 성별인지도."
"친절하시군…."
친절한 절대자라. 적어도 이 세계에선 더없이 모순된 말이었다.
강자의 아량,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리라.
그도 아니라면 오래 산 자들이 늘상 그렇듯, 그저 떠들어 대는 걸 즐기는 것일 뿐일지도 몰랐다.
탁상에 팔꿈치를 얹은 아르케아스가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느긋하게 까딱였다.
"널 보고 있자니, 날 보던 인간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 것 같구나.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아."
"알고 있소. 그러니 내가 깨어나자마자 오신 거겠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대꾸한 이안이, 물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는 용을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어차피 긴장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적어도 그게 아르케아스를 기쁘게 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그가 말했다.
"그러니 너도 내 질문들에 친절하게 답해 주지 않으련? 내가 네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나도 귀하를 구한 건 마찬가지 같소만."
"물론 그렇지."
아르케아스가 로브의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곧 날이 부러진 검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죄의 검. 자루가 이안 쪽으로 향하게 내려놓은 그가 덧붙였다.
"난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이란다."
"…날 발견한 게 귀하셨군."
"그 폭발을 막아내고 뒤를 보니, 저 멀리 지원군이 보이더구나. 해서 나머지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네 뒤를 쫓았지.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더구나. 나는 아쉽고, 또 슬펐지. 그때였단다. 네가 또 내게 놀라움을 선사한 건."
이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미소 지었다. 그 거대한 백금룡이라고는 믿기 힘든 인간다운 감정이 묻어났다.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네 육체는 그토록 처참한 몰골이 되어서도, 끝내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더구나. 기적적인 일이었지."
"...."
능력치와 스킬을 찍은 보람이 있었네.
태초의 생명력은 잃은 생명력에 비례해 회복력이 높아졌다. 그때는 죽음 직전이었을 테니, 효과도 가장 강했으리라.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귓가로 아르케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면 네가 품은 그 혼돈 덕분일지도 모르겠군. 혼돈의 힘 역시 널 살리려 애쓰고 있었으니."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하긴, 그의 몸속에 자신의 마력을 잔뜩 밀어 넣었던 존재였다. 그가 품은 혼돈 따윈 진작 눈치챘으리라.
그보다 뜻밖인 건 혼돈력이었다.
그를 살리려 했다니.
'마력도 신성력도 될 수 있는 힘이니까….'
생명력이 될 수도 있었던 건가.
이안은 문득 악몽을 떠올렸다. 그를 중심으로 번지던 보랏빛 균열.
그 역시, 그가 품은 혼돈력이었던 모양이었다. 공허의 존재로부터 그의 의식을 지킨 것이리라.
이안의 눈빛 변화를 즐기듯 응시하던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하지만 힘에 부쳐 보였단다. 그대로 두었다면 너는 끝내 죽었을 거야. 해서 나도 조금 힘을 보탰단다. 네 회복력이 죽음을 앞지르도록."
"교회로 날 옮긴 것도 귀하셨군… 의문이 풀렸소. 왜 여기서 눈을 뜬 건가 했거든."
"뜻밖이구나. 네가 바로 알아챌 줄 알았건만. 저 겁 많고 엉덩이 무거운 자들을 움직일 이는 많지 않잖니."
"하긴. 그건 그렇소만…."
"내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줄 생각이 조금은 들었으면 좋겠구나. 보아하니, 넌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만."
그쪽은 말을 길게 하는 걸 아주 좋아하시고.
생각하며 피식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소. 그 후에 내 물음에도 답을 주신다면."
"흥정을 잘 하는구나. 그리하마."
"그래서, 뭐가 그리 궁금하시오?"
"가장 궁금한 건…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네 비법이란다.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지만, 너와 같은 존재는 처음 보았거든."
아르케아스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여러 신들의 총애를 받는 마법사라니. 심지어 혼돈까지 품고 있지. 그런데도 영혼은 전혀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니?"
"포괄적인 질문이시군…. 내 영혼이 오염되지 않는 이유는…."
이안은 잠시 턱을 긁적였다.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육신은 게임 캐릭터였다는 말이나. 그래서 아마도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타락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란 대답은, 물론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게 정확한 이유인지도 불분명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소. 혼돈의 파편을 품고 있어서거나,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혈통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소. 내 몸에는 고대인의 피가 흐르니까."
"호오… 고대의 혈통이라…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고대인의 피가 흐르지만, 너는 그보다 훨씬 진하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정말 타고난 것인가… 그래… 네겐 당연한 일이니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을 수도 있겠지. 아쉽구나…."
홀로 중얼대며 결론을 내린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작은 탄식을 흘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백금룡께서 아쉬우실 이유가 있소? 그 무엇도 귀하의 영혼을 오염시키진 못할 것 같은데."
"대답하자면, 아니란다. 물론 용의 영혼은 단단하며 고결하지. 그러나 무한한 시간을 이겨 낼 수는 없단다. 오히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기에, 모든 용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광기에 물들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대륙의 이변을 느꼈을 때, 거의 모든 동족들이 대륙을 떠났지. 타락과 광기가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게야."
"그럼 귀하께서도 떠나시면 되지 않소?"
"나는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으리라 여겼단다. 그저 그 순간을 유예할 뿐이겠지. 새로운 낙원을 찾는다 한들, 끝내 벗어날 순 없을 것이야. 타후므리트가 그랬듯…."
금색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예정된 미래를 헤아리는 것 같기도 한 흐린 눈빛이었다.
"그는 본래 아주 냉철하며 고고한 푸른 용이었지. 그런 그조차도 고작 사랑이란 광기에 물들어 타락했단다. 나 또한 언젠가는 그리되겠지. 예상치 못한, 아주 하잘것없는 이유로.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목소리에 초연함이 감돌았다.
"나는 이번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단다. 오염된 마력도 아주 많이 받아들였지. 그러니 정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단다. 회복하는 게 녹록지는 않겠지. 마력의 황혼기잖니.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테고, 함께 축적되는 독도 빼내야 할 거야. 어쩌면 그 과정에서 영혼에 흠집이 생길지도 모르지."
이안의 낯이 설핏 굳어졌다.
둘 뿐인 줄 알았던 용이 사실은 셋이었지만. 어쨌건 다시 둘만 남았다. 그중 하나는 어딘가의 지하에 봉인되어 있으니, 현재로서 남은 용은 아르케아스뿐인 셈이었다.
그마저 미쳐 버린다면,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리라.
솔직히 이자와 싸워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지금도 전혀 들지 않았다.
"…루 솔라께 도움을 청하시면 될 것 같소만."
"찬란한 여신께선 돕지 않으실 거란다."
"귀하는 교단의 성자이자 신의 사자가 아니셨소?"
"그래서 이렇게,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아량을 베풀고 계시잖니?"
아르케아스가 느긋하게 양팔을 펼쳤다.
"신들은 용을 좋아하지 않으신단다. 균형을 파괴하는 존재로 여기시지. 과거를 돌이켜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내가 이번 일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동족이 관련되어 있었던 덕분이란다. 그게 아니라면, 신들이 나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으셨겠지."
천벌이라도 내리는 건가.
하긴, 타후므리트가 자신의 권역을 형성한 이유가 하나 뿐일 리는 없었다.
생각하며, 이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결국 또 설정 놀음이었다.
속내를 읽은 듯,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내 질문은 이제 거의 끝났단다. 하나. 둘. 어쩌면 세 개 정도."
대답에 따라 질문의 숫자가 달라진단 건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본론만 짧게 해 주시오. 귀하의 호의에 따른 친절은, 이제 거의 다 닳아 없어지고 있소."
"저런. 내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았나 보구나. 그래, 하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아르케아스가 슬쩍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네 영혼은 오염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들의 손길도 전혀 닿지 않았더구나. 이유가 있느냐?"
"그 누구도 섬길 생각이 없기 때문이오."
"찬란한 여신이라 할지라도?"
"…여신께서 듣고 계실지도 모르오만."
"걱정 말거라. 신들은 지금 너와 나의 대화를 엿듣지 못해. 내가 그분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거든. 너는 지금 태양 옆의 반딧불인 셈이란다."
반딧불까지야…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대답했다.
"나는 이미 루 솔라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소."
"호오… 그럼 앞으로도?"
"그렇소. 그 누구도."
"그렇다면 공허는? 잊힌 고대의 신들이라면 네게 달콤한 속삭임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만."
"그것들은 죽여야 할 대상이오."
"혼돈의 진리와 비의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그 대가로 다들 돌아 버리더군."
"그래… 과연… 너는 마법사이지만 마법사가 아니구나. 그야말로 너다워."
아르케아스는 이안이 내뱉는 말의 진위를 즉각적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안이 짧게 코웃음 쳤다.
"말씀하신 질문 횟수는 이미 넘은 것 같소만."
"그래. 이제 네게 제안할 것만 남았구나. 이 말까지 하게 되리란 기대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는데."
"제안…?"
이안은 여전히 그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사고의 전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용이란 본래 죄다 이런 존재들인지도 몰랐다.
이안의 시선을 지레짐작한 듯, 아르케아스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염려 말거라. 네가 거절한다 해도 강제하지 않을 것이며, 탓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을 테니까. 나는 그저 제안하려는 것뿐이란다. 그러니 들어보지 않겠니?"
그 순간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백금룡의 제안.
그의 이야기를 듣겠다 수락하면 완료되는, 간단한 퀘스트였다.
'또 조건부 퀘스트인가.'
하지만 이안은 이것이, 아주 많은 조건을 달성해야만 비로소 해금되는 퀘스트이리라 직감했다.
앞선 문답만으로도 근거는 충분했다.
또 다른 연계 퀘스트의 시발점이기도 하리라.
그런 생각들과 달리 무표정을 유지한 채,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소만, 내 본업은 용병이오."
"합당한 보상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겠구나."
"바로 그렇소. 아무리 귀하라 해도, 나는 의뢰에 걸맞은 보상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소."
"이런… 무게추가 협상을 시작하기 전부터 기울어졌구나. 나는 이미 가진 패를 많이 보여 줬으니."
말과 달리, 이번에도 아르케아스는 전혀 기분 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안의 대답에서 희망을 본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귀하의 의뢰 내용을 자세히 듣기 전에, 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소. 보아하니 귀하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중간중간 물은 건 치지도 않는구나. 그래. 그 뻔뻔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 순서대로 말해 보렴."
"나는 귀하와 함께 싸웠소."
"그렇지."
"그러니 타후므리트의 유해에 대한 소유권은, 내게도 일부 있다 할 수 있소. 거기다 나는 죽다 살아나기까지 했잖소?"
"...."
아르케아스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잠시 입술을 움찔댄 그는, 곧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용의 앞에서 다른 용의 유해를 내놓으라 하다니! 내 수많은 인간을 보았지만, 정말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다. 넌 정말 나를 조금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
그게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이안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아르케아스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래서, 얼마나 주실 거요?"
아르케아스의 웃음이 커졌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지독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 않느냐? 너라면 난쟁이나 오크들조차 혀를 내두르겠구나. 그래… 본래는 네게 작은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을 듣고 보니, 그걸로는 부족해 보이네."
이윽고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곳에 남길 것이다. 북부가 용의 시련을 이겨 냈다는 증표로써. 나머지는 내게 양보하지 않겠느냐? 합당한 곳에 묻어 주어야 하니. 용의 뼈는 다루기도 어렵고 쓸 곳도 많지 않단다. 대신…."
타이르듯 말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그에 걸맞은 가치를 지닌 보물을 주마. 가치는 충분할 것이야."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애초에 그는 용의 뼈를 트라벨가에 팔아넘길 생각이었으니까. 일부 부위를 남기긴 했겠지만, 제국에 발을 들이고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야 가공할 수 있으리라.
그보단 당장 눈앞의 이 백금룡이 줄 보물이 더 값어치 있을 터였다.
"들어 보겠소."
"네게 세 가지 선택지를 주마."
물잔과 포크, 스푼을 집어 든 아르케아스가, 이안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북부의 대전사인 네게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또 하나는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인 너를 지킬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혼돈을 품은 마법사인 네게 신비를 더해 줄 것이란다."
그가 양손을 펼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무엇을 받고 싶니?"
"…다 주시면 안 되오?"
아르케아스가 다시 한번 웃었다.
이거, 재롱부리는 손주가 된 기분인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만. 신들이 노하실 거란다. 네게 이 셋을 전부 준다면, 내 손으로 세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 네 위업에 걸맞은 보상은 하나란다. 이에 필적하는 다른 보물은, 네 힘으로 손에 넣도록 하렴."
하여간, 신이란 것들이 제일 문제라니까.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어쩌면 이 역시 부여된 현실성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더 받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안이 물잔을 들었다.
"마법사의 보상으로 받겠소."
#122화
"뜻밖이구나. 나는 네가 이것만은 택하지 않을 줄 알았거늘."
아르케아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마법사인 걸 알아도 이런 반응이라니.
'하긴. 지금 날 보면 전사나 기사가 더 어울리겠지.'
하지만 그는 마법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익힌, 그리고 앞으로 익힐 스킬은 결국 거의 마법이니까.
심지어 한층 더 심각한 망캐가 된 지금은, 외적인 도움이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네 선택을 존중하마."
느긋하게 덧붙이며, 아르케아스가 소매에 손을 깊이 넣었다가 뺐다.
그의 손아귀에 빈 유리병이 들려 나왔다.
이 자도 아공간이 있나.
생각하는 사이, 병을 탁상 위에 놓은 아르케아스가 부러진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이안을 슬쩍 본 그가 남은 검날로 자신의 왼손 손아귀를 그었다.
베인 단면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저 선홍빛 속살만을 드러냈다.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그 위에 왼손을 가져간 아르케아스가, 설핏 미소 지었다.
"놀라는 척도 해 주지 않는구나. 이 또한 서운하군."
그가 실없는 농담과 함께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솨아아-
손가락 틈으로 황금색 빛이 아른거렸다. 금빛 액체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려 병으로 떨어졌다.
액체는 그대로 기화되어, 병의 둥그런 하단에 안개처럼 맺혀 일렁였다. 내부에 찬란한 황금빛이 가득 찰 때까지 지켜본 아르케아스가, 비로소 마개를 닫았다.
그는 단죄의 검을 다시 탁상에 놓으며, 병을 이안 앞으로 내밀었다.
병을 쥐는 이안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심장에서 여과한, 가장 순수한 용의 마력이란다. 마법사에게는 영약이나 다름없지. 어떤 상승 작용을 일으킬지 까지는 나도 알 수 없다만…."
"…어떤 식으로 작용하든, 영구적인 효과가 있겠군."
이안이 나지막이 말을 받았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유리병 속의 황금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용의 진원이란 이름이 붙은 정보창을.
최대 마력량, 마력 친화력, 마력 회복력, 시전 속도, 쿨 타임 감소 등등. 이 용의 진원은 아홉 가지 효과 중에서, 랜덤한 두 개의 상승효과를 영구적으로 부여해 주는 영약이었다.
증가 폭이 파격적으로 높은 건 아니지만, 충분히 유의미했다.
'기본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추가 효과도 더 커지겠고….'
…이왕이면 마력량이 늘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은 아르케아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바로 먹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천천히 마시렴, 빼앗아 가지 않을 테니까."
아르케아스가 손바닥을 슬쩍 들며 말했다. 어느새 손아귀의 상처는 흔적도 없었다.
자꾸 어린애 취급이군.
피식한 이안이, 마개를 열고 단숨에 내용물을 들이켰다.
아무런 맛도 없었다. 그저 열기가 입을 통해 들어오는 느낌뿐.
"...?"
이내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삽시에 번진 열기가 온몸을 질주하고 있었다. 몸속이 타는 것 같았다. 뒤이어 그의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노란 땀이 돋아났다.
"호오… 그래… 네겐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아르케아스가 미소 짓는 사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쉰 이안이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상태 창 상의 변화는 확인할 수 없었다. 게임에선 세부 설정으로나 확인 가능하던 능력치가 올라갔으리라.
어쨌든 적어도 최대 마력량이 오르지는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더럽게 찝찝하다는 것도.
"몸속의 불순물이… 빠져나온 건가?"
"아마도. 네 혈관이 더 깨끗하고 단단해졌겠구나. 어쩌면 더 넓어졌을지도 모르지. 결국,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수 있을 거란다."
"흐음…."
침음하며, 이안이 손을 쥐락펴락했다.
마력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험 삼아 끌어올려 보니, 마력이 몸속을 순환하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시전 속도가 올랐겠고. 다른 하나는 마력 친화도인가? 마력 회복량? 어쩌면 쿨타임 감소일지도.'
어느 쪽이건 최악은 아니었다.
옵션 중에는 속성 저항력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만하면 차선 정도의 결과는 얻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마법을 사용하는 전투를 겪어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훌륭하군…."
"만족스럽다니 다행이구나. 이만하면, 우리 사이에 남은 빚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소. 지금까지는."
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르케아스도 짧게 웃음 지었다. 분명 헛웃음이었다.
"앞으로의 거래는 별개라는 거구나. 하지만 그래, 아쉬운 쪽은 네가 아니지. 무릇 거래란, 아쉬운 쪽이 조금 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고 말이야."
"말이 참 잘 통하는 분이시오. 한 번쯤 강짜를 부리실 법도 한데."
"그래서 얻을 게 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네게 그런 게 통할 리 없잖니. 용들 간의 전투에 터벅터벅 걸어 끼어드는 이에게 무슨 으름장이 의미 있을까."
이안을 물끄러미 마주 본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덧붙였다.
"해서, 이제 내 제안을 들어 보겠느냐?"
"그러겠소."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오르는 가운데,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도적으로 대륙을 망가뜨리는 자들이 있단다. 이미 무너지고 있는 균형을 바로 세우는 것보다, 아예 전부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게 순리라 여기는 자들이지."
"…원탁 의회를 말씀하시는 거요?"
"그리 부르기도 한다더구나."
아르케아스는 이안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걸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놀란 건 이안이었다.
백금룡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저마다 다른 목적을 품고 모인 자들이라더구나. 그럼에도 원하는 바가 같다는 건,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지."
"그래서, 그들을 처리할 대행자가 필요하신 것이오?"
"그렇게까지 큰 부탁은 할 수 없단다. 그럼 내가 너무 많은 부분에 개입하는 것이 돼. 나는 작은 부분까지만 개입할 수 있단다."
"글쎄… 보통 이런 건 하나를 뽑으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나오던데 말이오."
"아마도 그들 하나하나가 그 줄기의 가장 아래에 위치할 거란다. 그러니 누군가 뽑혀 나온다면, 함께 드러나기 전에 먼저 끊어 내겠지."
아르케아스가 이안을 부드럽게 마주 보았다.
"네가 북부에 계속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너는 오히려 이곳을 떠나겠지. 남아 있다면 귀찮은 일이 많을 테니까. 네가 어디로 가든, 나는 개입하지 않을 거란다. 그래서도 안 되고. 다만…."
그가 길고 흰 검지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언제라도, 그들 중 단 하나만 줄여 주렴. 원탁에 앉는 자들 중 단 하나만. 당장이 아니라도 좋고, 내 의뢰 때문이 아니라도 좋단다. 그저 모든 게 더는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만 완수해 주면 돼."
작지만 작지 않은 의뢰로군.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이윽고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리라 보시는 거요?"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자신의 의도를 바로 알아챈 것이 흐뭇하다는 듯.
"아슬아슬한 균형은, 작은 무게추가 하나만 사라져도 깨지는 법이란다. 그 결과가 또 다른 혼돈을 낳더라도, 그것이 파멸보다는 낫겠지."
이안은 턱을 어루만졌다.
아르케아스는 그의 시선을 여상하게 받아들였다.
곧 이안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하가 아니라 신들이 나서셔야 할 문제 같은데."
"그게 그들의 교묘한 점이지. 그들은 결코 급박하게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단다. 세상이 조금씩 더 엉망이 되고, 끝내 모든 법칙이 무너지는 게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보이도록 만들지. 곳곳에 지엽적인 균열만을 만들어 내면서."
아르케아스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신들은 나서지 않으실 거란다. 오히려 몇몇을 도우실 수도 있겠지. 당장은 그것이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물론 우연히 신의 대행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설 수는 있겠으나…. 신들께서 나서는 건 아마도, 최후의 순간일 거야.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겠지."
"…그래서 귀하도,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시려는 거고."
아르케아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을 뿐.
비로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용의 대행자. 내용은 간단했다. 원탁의 일원 처치.
이안은 잠시 말없이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결정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임에선 원탁 의회와 크게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었으니까.
'굴러들어온 연결 고리를 내 발로 차낼 필요는 없지.'
그런 속내와 달리, 이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왜 나를 선택한 것이오? 귀하의 말이라면 목숨을 바칠 자들은, 나 말고도 많을 텐데."
"그렇기에 그들은 할 수 없단다. 보통 강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혼이 물들어 있지. 그들에겐 필연적으로 외부적인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단다. 그리고 그건 곧, 그들의 약점이기도 하지."
툭툭, 아르케아스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탁상을 두드렸다.
적어도 그가 지금 이 대화를 즐기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원탁의 그들은, 그걸 아주 손쉽게 이용할 거란다. 죽이거나, 회유하거나, 타락시키겠지. 하지만 너는 그런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란다.
신의 힘을 다루면서도 신을 섬기지 않고, 혼돈을 품고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았지. 거기다 용을 향해 스스럼없이 몸을 던질 용기도 지녔어. 어쩌면 네 그 불가사의한 부분은, 그저 특출나게 강한 영혼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불멸자의 영혼에 가까울 만큼."
아르케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현재로선, 그들과 맞설 수 있을 만한 존재는 네가 유일하단다. 너와 비견될 다른 선택지조차, 내겐 존재하지 않아."
"흐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까지 털어놓다니.
'용이라 배포가 남다른 건가. 아니면 이자만의 특징인가.'
어느 쪽이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었다면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어떻게든 덧씌우거나, 수틀리면 협박도 서슴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 와중에도 끝내 어떤 협박이나 강요도 하지 않은 것이다.
어쨌거나. 신들에게 눈엣가시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가 대륙을 사랑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옭아맨 수많은 제약 사이에서 어떻게든 빈틈을 찾고 계획을 세워 둘 리가 없었다.
"내가 그놈들 중 하나를 죽인다고 칩시다."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귀하께선 무엇을 보상으로 주실 거요?"
"재미있구나. 흥정이 그 어떤 맹세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다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양손을 펼쳤다.
"합당한 대가를 주마. 신들께서 노하지 않으실 정도까지만. 내가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건, 방금을 통해 알고 있지 않니?"
이번만큼은 아니라도, 꽤 좋은 걸 준단 얘기지.
이안은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더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완수 보고는 어떻게 하면 되겠소?"
"찬란한 여신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해야겠지."
아르케아스가 품에서 작은 부적을 꺼냈다.
"루 솔라의 전당에서 이걸 태우렴. 어디라도 상관없단다. 그럼 잠시 후에 날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의뢰는 성립되었소."
"받아 주어 고맙구나, 이안."
아르케아스는 그의 손에 부적을 놓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마주 쥐었다. 아르케아스의 눈동자에 금빛이 아른거렸다. 손의 온기만큼이나 따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이 순간부터 공식적이며 유일한 나의 대행자란다. 그러나 신들이 그러하듯 힘까지 빌려주지는 못해 미안하다. 다만, 네가 항상 무사하며 건강하길 언제나 온 마음으로 기원하마."
"미리 말하건대, 그 대행자라는 건 이번 의뢰까지만 유효한 거요."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 후엔 다시 옛 전우로 돌아가자꾸나."
"그 몸일 땐, 식사도 하시오?"
"할 수 있지. 필요하진 않다만."
"그럼 다음엔 술 한잔합시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기뻐 보였다.
"그래. 내 가장 좋은 술을 준비하고 기다리마."
이윽고 이안의 손을 놓은 그가 일어섰다.
"쉬거라. 사제들도 마음껏 부려 먹고."
"하나만 더 묻겠소."
"얼마든지."
"대공도, 귀하의 존재를 아시오?"
"물론이란다. 그 아이가 싹수가 노란 떡잎일 때부터 알았지."
"그럼 떠나시기 전에 한 번 들러 주시겠소? 날 귀찮게 하지 않도록."
"내 대행자의 첫 부탁이 고작 그런 거라니….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구나. 그리하마."
마지막까지 즐겁다는 듯 웃음 지으며, 아르케아스가 몸을 돌렸다.
다시 베일을 눌러 쓴 그가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이안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하다하다, 이젠 용의 대행자라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용의 부적을 아공간에 넣은 그때였다.
"이안 경…!"
문이 벌컥 열렸다.
경외로 가득한 눈빛의 루카스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 뒤로 퀭한 표정의 페르마 사제가 보였다.
그래, 역시 진작 와 있었군.
"오랜만이오."
"이토록 무사하시다니….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찬란한 여신께서 은총을 내리신 것이 분명-"
"귀하에게 들을 말이 많소."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궁금하신 부분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안 경."
보증도 서 주겠군.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페르마를 바라보았다.
"목욕부터 해야겠군. 목욕물을 준비해 주시겠소, 사제님?"
"예… 물론입니다, 이안 경."
"당장 욕실로 안내하시오. 물도 사제님이 직접 끓여 오시고."
"...."
눈을 질끈 감은 페르마가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르면서, 이안이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씻으며 듣겠소. 내 몸 냄새를 내가 못 견디겠군."
"알겠습니다, 이안 경. 저, 그런데…."
재빨리 따라붙은 루카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전에 나가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얼굴을 가리신 걸 보면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만."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용이었소. 백금룡, 아르케아스."
"...?!"
#123화
"-해서, 그 후에 지원군은 다시 출병했습니다. 지금쯤 장벽 인근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겠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저도 이곳에서의 할 일이…."
조곤조곤 이어지던 루카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욕조에 머리를 기댄 채 듣고 있던 이안이 한 손을 슬쩍 수면 위로 들었기 때문이다.
곧 욕실 문이 열렸다.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를 든 페르마 사제가 휘청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이안의 욕조에 물을 부었다. 넘친 물이 바닥을 적셨다.
이안이 눈도 뜨지 않고 물었다.
"내 보수는 언제쯤 도착하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두 분의 이름을 모두 거론했으니, 바로 처리될 겁니다."
페르마가 체념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안은 자신에게 지급될 금화와 새로 착용할 방어구의 수령을 그에게 맡겼다. 직접 방문했다간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바로 알리시오. 서두르시는 게 좋을 거요. 난 그걸 받기 전까진 안 나갈 거니까."
"…예."
고개를 숙인 페르마가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카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며칠간 사제님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경과 계약을 맺으라 종용한 게 사제님이셨으니, 교회의 관련 업무도 전부 떠맡으셨거든요."
"뭐, 자업자득이지."
"예…?"
"하던 얘기나 마저 이어갑시다."
말을 자른 이안이 덧붙였다.
"요새 수비군들은 어떻게 됐소?"
"말씀드렸다시피, 반 이상 살아 돌아왔습니다. 애석하게도 몇몇은 백치가 되긴 했습니다만… 전쟁에선 드문 일도 아니죠. 그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건 위대한 백금룡과 용살자 이안 경 덕분이구요."
이안은 자장가처럼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을 가만히 귀에 담았다.
그의 설명은 아주 자세했다.
그날 밤 트라벨가의 많은 이들이 상공을 가로지르는 타락용을 보았으며, 덕분에 귀환한 병사들이 영웅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안이 거기 타고 있었다는 걸 알린 게 입 싼 사제들뿐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겔루드 장군께서 모든 전황을 직접 증언하셨습니다. 덕분에 경과 백금룡의 업적은 빠짐없이 북부의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본국에서 유명한 화가를 모실 예정이라더군요. 교회 천장에, 그날의 위대한 전투를 기록할 거라고 합니다. 장군께서 감수를 책임지시고요."
"기록…? 천장화라도 그린단 말이오?"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예. 북부의 전설이 현실이 되었고, 끝내 이겨 냈으니 당연히 그 신화적인 업적을 기려야죠. 완성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완성 된 후엔 타락용의 두개골과 함께 전시될 겁니다."
"하…."
이걸 박제시키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북부인 당사자들이 그리겠다는데, 말릴 명분도 없었다.
어쩌면 이미 아르케아스에게 허락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라면 기꺼이 허락했으리라.
"겔루드 장군께선 다시 이안 경을 뵐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번 다신 안 봐야겠군.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돌렸다.
"야인 전사들은?"
"경께서 위중하신 동안에는 매일 성벽 앞에 모여들었었습니다. 경을 카르하와 거의 동일시하더군요. 하긴. 카르하와 싸웠다는 용을 경께선 죽이셨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점입가경이었다.
한숨을 삼킨 이안이 내뱉었다.
"지금도 그러고들 있소?"
"아뇨. 경께서 회복 중이시라는 걸 확인시켜 준 뒤에, 일단 정착지로 돌려보냈습니다. 지금쯤 요새의 복구 작업도 돕고 있을 겁니다. 며칠 뒤엔 그들도 경께서 깨어나셨단 소식을 듣게 될 테고요."
"…적어도 당장 귀찮아지진 않겠군."
이안은 교회를 나간 순간 곧바로 떠날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여기 계속 있다간, 관심과 칭송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터였다.
"용병들의 보수는. 내가 약속한 것이 있소만."
"제가 전부 처리했습니다. 누락되는 인원 없이, 전부 합당한 보수를 받았죠. 남은 건 이안 경뿐입니다. 물론 대공께선 직접 감사를 표하며 전달하고 싶어 하십니다만…."
"내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고 계시리라 믿겠소."
"이안 경은 정말이지…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으시군요. 그 누구보다도 명예로운 분이신데도요."
"난 명예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오. 필요도 없고. 그보단 돈과 전리품을 더 좋아하지."
"이런 순간에까지 그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은 원하신다면, 북부의 총사령관이 되실 수도 있으실 테니까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돌아보자, 루카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경은 북부의 대전사이자 용살자이며, 백금룡의 용기사이기도 하십니다. 경이라면 대공과 북부인들뿐만 아니라 사제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물론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따를 거고요. 물론…."
루카스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경께서 그리하시리란 기대는 크지 않습니다만. 고려는 해 보시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트라벨가에 머무시는 동안에라도요."
"...."
이놈도 결국은 귀찮게 하겠네.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난 며칠 안에 떠날 거요."
"…이렇게 바로 말씀이십니까?"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탄식이 이어졌다.
"어째서 그렇게 서둘러서…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요. 왜 굳이…."
아쉬워하고 난리야. 징그럽게.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이안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입에서 더는 헛소리가 나오지 않게 할 명분은 이미 있었다.
"백금룡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소."
"배… 백금룡께서요?"
루카스가 순간 숨을 멈췄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행자로서 수행해야 할 의뢰가 있지. 이 정도면 대답이 되겠소?"
"물… 론입니다. 백금룡께서 부탁하신 일이라면, 따라야지요. 혹, 대외적으로 알려져선 안 되는 일입니까?"
"상관은 없소만. 뭐, 이왕이면."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백금룡의 대행자께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방해가 될 수는 없지요."
뭘 또 맹세씩이나.
이안이 피식댔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턱을 어루만지던 루카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용히 떠나시긴 쉽지 않으실 겁니다. 경께서 채비를 하신다면, 곧 다들 알게 될 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경을 붙잡고자 애쓰겠죠."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 경께서 돕겠단 말로 들리는데."
"물론입니다. 경께는 내내 도움만 받았으니까요.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염려 말고 계십시오."
"마차면 충분할 거요. 내 말 두마리가 이미 마구에 있으니."
"그 말은 두고 가시죠. 가장 좋은 전마 두 마리를 내 드리겠습니다. 마차에 식량도 가득 채워서 대령하도록 하고요."
"그러시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소."
덕분에 또 손 안 대고 코 풀겠군.
이안은 기분 좋게 몸을 문질렀다.
기사들은 물론 냉정한 살인 병기 들이지만. 반대로 자신들이 인정하거나 충성하는 상대에게는 이런 호구가 또 없었다.
물론, 명예를 알고 신앙심이 깊은 기사들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끼익-
이윽고 문이 살짝 열렸다.
페르마가 문 앞에 선 채 내뱉었다.
"이안 경. 경께서 받으실 물건들이 도착했습니다."
"내 방으로 가져다 놓으라 하시오. 사제님은, 여기 뒷정리할 준비를 하시고."
"…예."
페르마가 다시 문을 닫았다.
사제는 아무리 부려먹어도 전혀 미안하지가 않군.
생각하며,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묵은 때를 벗긴 알몸이 드러났다.
온몸에 가득한 크고 작은 흉터들.
이 중 절반가량은 새로 생긴 흔적이었다.
'땅에 부딪히고 뼈가 살을 뚫고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던 거겠지.'
태연하게 물기를 닦던 이안이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몰골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회복했으니, 살아 있는 기적 취급을 받을 수밖에.
"그러고 보니, 경께 이 말씀을 드린 적은 없군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안 경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북부는 죽음과 혼란만이 가득했을 겁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조차 부끄럽군요. 저는 경의 경고를 듣고도, 끝내 장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으니까요."
…욕실에서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의뢰를 완수하려 최선을 다한 거요. 그리고 북부는, 그저 한 번의 위기를 넘겼을 뿐이지."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순간 굳어진 루카스가, 이윽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꿈에서 단숨에 깨어난 것 같은 얼굴.
수건을 툭 떨어뜨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검은 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잖소?"
"...!"
"그러니까…."
그의 검은 눈이, 루카스의 흔들리는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번엔 철저히 대비하시오. 그때는 백금룡은 물론이고 나 역시 없을 테니."
"명심… 하겠습니다."
이윽고 루카스가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신탁이라도 내린 것처럼 비장해져 있었다.
두 번 방심은 안 하겠구만.
시선을 거둔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부탁한 일은,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시오."
그가 밖으로 나갔다. 끼익, 흔들리던 문이 다시 닫혔다.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루카스가, 비로소 탄식했다.
"검은 벽의 침식이… 결국은 다시 시작된단 말인가."
근거라고는 없는 말이었지만, 결코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한 이가 북부의 새로운 초인이었으니까.
손끝을 가늘게 떨던 루카스는, 곧 으스러질 듯 주먹을 움켜쥐며 욕실을 나섰다.
벨리움 요새에서의 위대한 승리는, 이미 그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이안 경?"
이안이 방어구를 걸치는 걸 돕던 남자가 깍듯하게 물었다. 그를 돌아본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쪽 말투가 불편하군."
보상이 담긴 궤짝을 들고 온 건, 다름 아닌 트라벨가의 북문을 지키던 관문 대장이었다.
장비를 확인하고 검수한 뒤에, 병사 둘을 이끌고 직접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관문 대장이 머쓱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북부의 영웅께 ?게 대할 수는 없잖소. 심지어 난 벨리움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무슨 상관인지. 아는 얼굴이라 편하게 채비할 생각이었는데, 덕분에 별반 다를 것도 없군."
"왜 없겠소? 내가 귀하의 물건을 얼마나 꼼꼼하게 확인했는데."
풀썩 웃으며 대답한 관문 대장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턱짓했다.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바로 바꿔 올 테니까."
"필요 없소. 잘 골라 왔군."
이안이 장갑을 딱 맞게 조이며 대답했다.
사타구니까지 덮는 제국 강철로 만든 사슬 갑옷. 그 위에 겹쳐 입는 흉갑과 각반, 견갑 등등도 전부 제국 강철로 만든 희귀 등급의 방어구들이었다.
관문 대장이 하나같이 가장 좋은 물건들로 챙겨 온 것이다. 심지어 내구도 손실도 거의 없는, 관리가 잘 된 물건들이었다.
'이젠 사슬에 판금을 잔뜩 걸쳐도 별 불편함이 없네.'
북부에서 오른 힘 수치뿐 아니라, 이번에 잔뜩 올린 체력도 그의 육체에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제는 기사로 오해받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쓴웃음을 삼킨 이안이, 문 앞에 선 관문 대장을 돌아보았다.
"난 곧 트라벨가를 떠날 거요. 아마 길어야 사흘 내로."
"...!"
"아마 남문으로 나갈 거요.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이왕이면 조용하게 떠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소?"
"…그런 건 물으실 필요도 없소."
잠시 굳었던 관문 대장이, 오히려 기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귀하의 부탁이라면 죽는 것 빼고 뭔들 못 들어드리겠소. 며칠 밤새는 거야 일도 아니지."
"루카스 경에게 가시오. 내 부탁을 받았다고 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거요."
"걱정 마시오. 보고하고 바로 한숨 자러 가야겠군. 내일 아침부터 퇴근 없이 남문을 지킬 테니, 언제든 오시오."
고개를 까딱인 그가 몸을 돌렸다.
이래서 인맥이 중요하다니까.
생각하며 마무리를 마친 이안이, 문득 탁상 앞으로 다가갔다.
단죄의 검.
"…한동안 검 부러질 걱정 없어서 좋았는데."
읊조리며 검을 집어 든 이안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호오…?"
부러진 검신 내부에서, 아직도 옅은 신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보창을 확인해 보니 아직도 내구도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이름도 바뀐 채였다.
부러진 단죄의 검. 아직도 단죄의 일격을 사용할 수 있었다. 검의 내구도가 떨어지는 페널티가 추가되긴 했지만.
'원래도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잘 가지고 다녀야겠군.
생각하며 부러진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넣은 그는, 대신 북부 전사의 장검을 꺼내 허리에 찼다.
비로소 전신의 무게감이 은근하게 몸을 감쌌다.
벨리움 요새에서의 기억들이 절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나 같이 현실성이 없는 기억들이었다. 용과 싸우다니.
수많은 버프와 아르케아스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싸우긴커녕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몸에 남은 모양이었다.
"하…."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루카스에게 잘난 척 하며 말하긴 했지만.
그저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인 건,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는 타후므리트와 필적하거나 더 강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아직도 잔뜩 도사리고 있으니까.
이번과 같은 운과 도움을, 언제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오롯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런 괴물들과 맞서야 할 순간이 분명히 찾아오겠지.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이 망캐로?'
이안은 다시 한번 실소했다.
의미 없는 자문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해내야만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이안은 궤짝에서 묵직한 돈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의 무게가, 당분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주머니를 가볍게 던졌다가 받은 그는, 그대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로브를 갑옷 위에 억지로 뒤집어썼다.
로브에 달린 두건까지 깊이 눌러쓴 그는, 더는 미적거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끼익-
설산 두꺼비 여관의 문이 열렸다.
낮부터 적당히 북적이던 장내가, 몇 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다.
"...."
안으로 들어선 이안이, 눌러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물론, 심지어 여급마저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적막은 길지 않았다.
"대장…? 정말 대장이시오…?"
입에 머금은 술을 질질 흘리던 트루드가 이윽고 내뱉은 것이다.
개 더럽네 진짜.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대답했다.
"이제 대장은 아니지. 의뢰는 끝났으니까."
"루 솔라 맙소사… 북부의 초인이시여…."
탄식과 함께, 트루드는 물론 장내의 용병들이 하나둘씩 의자 아래로 내려갔다.
이안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또 시작이군.
"동작 그만. 지금부터 내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놈들은, 평생 무릎으로 걸어 다니고 싶다는 뜻으로 알 거다."
#124화
"...!"
엉거주춤 자세를 낮추던 용병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안은 하나둘씩 다시 의자에 앉기 시작한 그들 사이를 지나쳐, 트루드의 건너편에 걸터앉았다.
"샬롯과 테사는, 위에 있나?"
"어… 그게… 우리가 돌아왔을 땐, 이미 여기가 아니라 야인들과 지내고 있었소. 둘이 외곽의 집 한 채를 통째로 쓴다던데."
트루드가 더듬대며 말했다. 이안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외곽 지역?"
"이주민이나 빈민들이 많이 머무는 골목이 있소. 뭐, 그래도 샬롯 그 양반은 하루 한 번은 들러서 식사를 하고 가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못 본지 며칠은 됐군."
"...?"
술을 마시던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잔을 내려 놓은 그가 트루드를 마주 보았다.
"자세히."
"대장… 아니, 대전사… 아니, 어… 그냥 대장이라 하겠소. 도저히 형씨라고는 못 부르겠군."
이안의 잔에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르며, 트루드가 말을 이었다.
"대장이 실려 온 뒤로, 둘 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소. 야인들과 우르르 몰려다녔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지. 대장이 기적적으로 회복 중이란 걸 알고 나서야 안심한 얼굴들이 되더군. 야인들이 떠난 날, 샬롯이 여길 들렀었소. 술을 마시며 그랬지. 대장이 죽을 리 없다고.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게 마지막이오. 그날 이후론 본 기억이 없군. 요 며칠간 샬롯 본 놈 있냐?"
트루드가 소리쳤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용병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거나,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식의 대화가 간간히 오갔다.
"...."
이윽고 이안이 다시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그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 본 트루드가, 황급히 술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 집이 어딘지 알고 있는데, 모셔다 드리면 되겠소?"
술을 단숨에 털어넣은 이안이 일어섰다.
"당장."
***
트루드가 골목을 성큼성큼 나아갔다.
점점 외곽 성벽이 가까워졌다.
뒤따르는 이안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문득 내뱉었다.
"여긴 볕도 잘 안 들고 가장 살기 불편한 곳이오. 그래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오라고도 전했었소. 물론 거절당했지만.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소. 굳이 편하고 따듯한 곳을 놔두고 왜 여길 고집했는지."
그 녀석들에겐 여기가 오히려 더 안락했을 테니까.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예감은, 거의 틀리는 법이 없었다.
'테사가 배신했나? 아니면 또 다른 심판자…? 서로 싸웠을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피떡이 된 채로 교회에 실려간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으니까.
'아무리 회복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멀쩡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지.'
그는 테사이아와 샬롯을 힘으로 억눌러 왔다.
물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둘이 가까워지도록 유도하긴 했지만.
그가 약해졌다 여긴다면 언제든 균열이 일어날 수 있는 균형이었다. 그리고 그건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가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면, 심판자를 보내지 않을 이유 역시 사라지는 셈이었으니까.
"여기요. 다 왔소."
트루드가 멈춰 섰다.
낡아빠진 돌집 앞이었다.
천으로 가린, 깨진 창문.
끼이-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어둑어둑한 장내로 들어선 순간, 이안은 자신의 예감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신했다.
엉망진창이 된 내부. 옅은 피냄새와 누린내.
그건 상처 입고 궁지에 몰린 짐승에게서가 날 법한 냄새였다.
어둠 너머에서 주황색 눈동자가 살의를 머금고 번뜩였다.
이안이 두건을 벗었다.
"이젠 냄새도 못 맡나?"
뾰족하게 솟아 있던 수인의 동공이 확장됐다.
"이안…?!"
"그래. 나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얼어붙은 샬롯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부상 당했군."
"이건… 나는… 아니, 이건 전부 나 때문이다…."
샬롯의 안광이 목소리만큼이나 휘청댔다. 이안은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시벌, 이게 뭔…?!"
엉망이 된 장내를 그제야 눈에 담은 트루드가 입을 벌렸다.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이안이 말했다.
"가서 가장 독한 술과 붕대, 먹을 걸 챙겨 와라. 식탁이랑 의자도."
"아, 알겠소…!"
트루드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 사이 이안은, 몰라보게 수척해진 수인을 마주 보았다.
샬롯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안, 이건…."
"네 상처부터 보면서 얘기하지."
말을 자른 이안이 장갑을 벗었다.
샬롯이 뒤로 몸을 기댔다. 이안은 침대 주위로 대충 벗어 놓은 장비들을 슬쩍 훑어 보았다.
싸움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옆구리에 엉망으로 감긴 붕대를 풀면서, 이안이 물었다.
"테사가 이런 건가?"
"…그래."
이안은 드러난 환부를 바라보았다. 할퀸 흔적들 사이, 옆구리를 깊이 찌른 흉터가 선명했다.
다행히 아물고 있었다. 썩거나 감염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술은 필요 없겠군.
생각하는 사이,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먼저 그 녀석을 죽이려 들었으니까."
"처음부터."
이안이 샬롯을 올려다 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처음부터 말해. 야인들이 돌아간 직후인가?"
"…그래.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샬롯이 마른 혀로 입술을 훑고는 말을 이었다.
"테사보다 일찍 도착해야 했지. 그 녀석은 이틀을 굶어서, 근처로 먹을 걸 잡으러 갔었다. 나도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아서, 각자 배를 채우고 모이기로 했다. 그때 골목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붉은 눈이 보이더군. 처음에는 테사인 줄 알았다."
"…심판자였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리니 여기더군. 벽에 박힌 내 칼과, 우는 테사가 눈앞에 있었다. 그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찔렀고. 그 덕분에 정신이 든 거야.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에게 분노한 듯 낮게 그르렁댄 샬롯이,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내뱉었다.
"그 심판자 년들에게 홀렸던 거다. 그래서 내 손으로 그것들을 집에 들이고, 테사를 붙잡기 위한 함정을 팠던 거야."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붕대를 들었다. 샬롯의 허리에 붕대를 감으면서, 그의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부서진 식탁과 의자. 박살 난 가재도구들. 바닥에 떨어진 송곳니 검과 한쪽 벽면에 박힌 전투 도끼.
"심판자가 하나가 아니었군."
"둘이었다. 쌍둥이였지…."
샬롯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주황색 눈동자에 살의가 아른댔다.
"그것들은 나와 테사가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집안을 검게 물들인 채로. 외부와 공간을 차단한 거였겠지. 그것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계속 우릴 지켜보며 기다린 것 같더군. 우리가 둘만 남는, 그래서 서로를 죽이게 할 절호의 기회를."
"...."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본 뱀파이어들은, 괴벽이라 불릴만한 이상한 부분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스콜드는 강함에 대한 자신만의 괴상한 미학이 있었고, 프레야는 사랑에 대해 그랬다. 어쩌면 테사이아의 생존에 대한 집착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눈을 본 테사가 미소 짓더군. 그리고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다음 순간 그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는… 기꺼이 목을 내주었지."
이안은 그제야 살롯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털 사이로 피라냐에게 물린 듯한 흔적이 깊이 남아 있었다.
"그 녀석은 내 피를 힘껏 빨았다. 하지만 거기 취하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멈췄으니까. 내 귓가에 누워 있으라 속삭이더군. 그리고는 날 집어 던졌다. 나는… 그 녀석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으니까."
으득, 샬롯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번졌다.
"그 미친년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내 의식을 붙잡더군. 그것들은 역시 동료끼리 서로 죽이는 걸 보는 게 가장 즐겁다며 속삭였지. 그러면서 내 피는 맛있었냐고 물었다. 테사는 코웃음을 치더군. 수인의 피는 정말 맛대가리 없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언젠가는 죽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꾸욱, 샬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튀어나오면서 손아귀를 피로 적셨다.
이안이 혀를 차며 손아귀를 벌리는 사이, 샬롯이 작은 탄식을 흘리고는 내뱉었다.
"그리고는 어둠을 찢어 버리더군. 아마 매를 만들어 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사이를 뚫고 달아났지. 쌍둥이들은 당황했는지 그 뒤를 황급히 따라가더군.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한낮이었지."
"그 뒤로,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랬다. 테사도, 그 미친년들도."
"...."
샬롯의 손아귀에 붕대를 감으며,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를 놀라게 한 건, 테사이아의 선택이었다.
'살기 위해선 뭐든 하려던 녀석이….'
샬롯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진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이유까지 고결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샬롯이 살아남아 그에게 말을 전하기를, 그래서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바랐을 지도.
어쩌면 그저, 샬롯이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박혀 있었을 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내 잘못이다, 이안.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자책이나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샬롯을 가만히 마주 보며 덧붙였다.
"테사를 되찾으러 가야지."
휘청대던 샬롯의 눈빛이, 이윽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물론이다."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때였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개판이네."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든 여급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장내로 들어섰다. 그 뒤로 술병과 붕대를 든 트루드와, 식탁과 의자를 든 용병 몇이 따라 들어왔다.
"술집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대충 치우고 자리나 만들어."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트루드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고 샬롯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일이 일어난 지 며칠이나 됐지?"
"…이틀. 어쩌면 사흘."
탄식하듯 내뱉은 샬롯이 이안을 마주보았다.
"어쩌면 그 녀석은 지금쯤…."
"벌써 죽진 않았을 거다."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잘랐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테사를 필요로 하니까. 아마 꽤 오래 살려둘 거야. 녀석도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너부터 살린 걸 거다. 아마도."
"...."
샬롯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눈빛.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죽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그때는 복수해 줘야지."
"...."
샬롯이 굳어졌다.
이윽고 이안을 다시 마주 본 그녀가, 씹어 뱉었다.
"그래. 반드시."
"그 전에, 그 심판자 년들에게도 당한 걸 되갚아 주고."
"부디. 내게 먼저 기회를 주면 좋겠군."
"또 꼭두각시가 되려고?"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곱씹고, 또 곱씹었어. 그 미친년들만큼은… 내 손으로 찢어 놓기 위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진 모르겠다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일어섰다.
"지금은 먼저 일어나라. 복수도 나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
"...."
샬롯이 군말 없이 일어섰다. 용병들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식탁에 앉은 그녀가 말없이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굶으셨나 보네요."
샬롯의 잔에 물을 따른 여급이 중얼댔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돈 주머니를 꺼냈다.
"가장 큰 방을 부탁하지. 그리고 돌아가서 바로 목욕물을 준비해 줘. 이 녀석 꼴이, 너무 엉망진창이니까."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산뜻하게 대답한 여급이 몸을 돌렸다.
"대신, 대장님이 머무셨던 방에 용살자의 방이라는 이름을 붙일 거니까. 알아 두세요."
"...."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녀가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던 트루드와 용병들이, 그의 시선에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샬롯의 물건을 전부 챙겨라. 잘 닦아서 여관 방에 넣어 놔. 부서진 게 있으면, 바로 수리를 맡기고."
"알겠소…!"
용병들이 불에 덴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뭐가 이렇게 무거워…?"
"똑바로 들기나 해, 인마. 하나라도 잃어 버리면, 알지?"
곳곳에 널브러진 샬롯의 물건들을 집어 든 용병들이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장내가 조용해졌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삼키는 샬롯을, 이안은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군.'
방심할 틈이 없는, 개 같은 암흑시대 같으니.
불평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샬롯의 잘못이나 그녀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일어날 일이 어떤 식으로든 일어났을 뿐.
턱.
이윽고 샬롯의 건너편에 앉은 이안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앞에 내려놨다. 잔 두 개에 술을 나눠 따른 그가, 잔 하나를 샬롯의 앞으로 밀었다.
그대로 독주를 들이킨 이안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샬롯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듣고 싶지 않나?"
"...?"
"내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그녀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웅얼댔다.
"듣고… 싶다."
"좋아. 먹으면서 들어라."
빈 잔을 채우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나도 처음부터 이야기 해주지."
"...."
#125화
설산 두꺼비 여관.
주점으로 내려온 이안은 비로소 한 잔 들이켜며 숨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트루드와 용병들이 들어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거참 부지런들 하군.
입맛을 다신 그가 두 번째 잔을 따르는 사이, 트루드가 그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수인 양반은, 잠들었소?"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끝낸 샬롯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무리 강한 생명력과 회복력을 가진 수인이라도, 그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홀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낸 여파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이안이 보기엔 상처가 덧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마차는?"
이안이 물었다. 앞에 앉은 트루드가 미소 지었다.
"마구 옆에 가져다 놨소. 마구간지기한테도 몇 푼 찔러 줬으니, 언제 가셔도 바로 준비해 줄 거요."
***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그가 샬롯과 함께 있는 사이, 여관 앞으로 마차를 보낸 것이다.
대행자를 자청하고 나선 건 트루드를 비롯한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외곽을 한 바퀴 돌면서 조사도 해 봤소. 대부분 소란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더군. 집에 마법적인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오. 대신 커다란 은빛 새와 커다란 박쥐 두 마리가 성벽 너머로 날아가는 걸 본 자는 하나 있었소. 이틀 전 새벽이라던데. 술김에 헛걸 본 줄 알았다더군."
부탁하지도 않은 일까지 해 왔군.
생각하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테사이아가 도시 밖으로 나갔으리란 건 진작 예상한 부분이었다.
도망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도시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자충수일 뿐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붙잡히지 않고 도망 다니는 중일지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도시를 떠나는 게, 그녀가 냄새를 맡고 따라오기에는 더 편하리라.
"…그 은빛 새가, 테사이아가 맞소?"
"...."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트루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황급히 미소 지었다.
"그저 걱정되어서 여쭙는 것이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아서."
"그 녀석을 쫓는 자들이 있다. 루 사드에 도사린 마족들이지."
"마, 마족…?"
트루드의 눈이 커졌다. 주위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더 묻지 않을 줄 알았건만.
침을 삼킨 트루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그럼, 마족들에게 납치된 거요?"
"아마도."
"도대체 왜…. 혹시, 루 사드로 가시려던 것도 그래서였소? 마족들을 쳐 죽이시려고?"
"그런 셈이지."
"허… 역시…."
용병들 사이에 탄식과 감탄이 번졌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부담스럽게 일렁였다.
이들은 전부 벨리움 요새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이었다.
몇몇은 이안의 전투를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를 대륙의 어둠과 싸우는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딴 눈 하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트루드가 말했다.
"그럼 어서 따라가셔야겠소. 이대로 도시에 남아 계시다간 최소한 한 달은 꼼짝없이 발이 묶이실 거요. 듣자 하니 대공께서도 대장을 만나고 싶어 하시고, 화로의 사원과 제국의 대교회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던데."
대공은 그렇다 치고.
"화로의 사원에, 대교회라고?"
"소문이 돌고 있소. 대장의 위업을 칭송하고, 뭐, 교단의 성자나 사도로 모시려는 거 아니겠소?"
진짜 더럽게 유명해졌나 보군.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루시와 미구엘이 절로 떠올랐다.
다시 만난다면 분명 반갑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저 산뜻한 재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무사히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였다.
"…귀찮아지기 전에 떠나야겠군."
"입단속은 염려 마시오. 우린 용살자의 전사들이잖소. 그런 주제에 용살자의 발목을 잡을 순 없지."
"그놈의 용살자는…."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트루드를 비롯해 이안을 따라왔던 용병들은 용살자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의 용병단을 결성했다.
현재로선 트라벨가의 유일한 용병단인 셈이었다.
벨리움에서 함께 싸운 야인 전사들과 방위군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부상으로 남아 있던 용병들까지 단숨에 흡수하면서 입지도 탄탄하게 다졌다.
새로운 북부의 거대 용병단이 탄생한 것이다.
트루드가 황급히 말했다.
"대장을 따라다녔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아서 포기했지만. 어쨌든 대장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일은 없을 거요. 우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따를 거고. 이건 언제 어디서도 변치 않을 사실이오. 우리가 용살자의 전사들인 이상."
말은 잘하는군.
이안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용병들의 의리를 믿는 건 사제에게 헌신을 기대하거나 주문쟁이에게서 신뢰를 찾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그거야 너희 자유다만. 그 이름을 걸고 도적질이나 하고 다니다 걸리면, 용살자가 직접 멱을 따러 올 거란 사실만 알아 둬라."
"우릴 뭐로 보시고… 하하. 그보다, 라 드린과 벨 론데를 거쳐서 내려가실 거요?"
애써 웃음 지은 트루드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본 계획은 안전하게 제국령을 통해 루 사드로 향하는 거였다.
상당히 돌아가게 되겠지만, 루 사드에 발을 들이기 전까진 변방의 전쟁과 엮이는 일 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사이아가 사라진 지금은, 북부에 발을 들일 때 그랬듯 최단 거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트라벨가에서는 라 드린의 외곽과 벨 론데를 질러 남하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여기도 혼란스러워서 전처럼 정보가 빠르진 않지만, 라 드린은 지금 난장판이라고 들었소. 벨 론데와 가장 먼저 치고받은 나라잖소. 북부나 제국령으로 피난 온 자들의 말에 따르면 망조가 단단히 들었다고 하니까, 알아 두시오. 사방으로 싸우고 있는 벨 론데는, 더 말씀드릴 것도 없고."
"정보 고맙군. 참고하지."
"그럼… 쉬시오. 생각하실 것도 많아 보이는데, 그만 방해하겠소."
꾸벅 인사한 트루드와 용병들이 일어섰다.
"조용히들 마시다 올라가라. 대장 신경 거슬리시지 않게. 소리 크게 내다 걸리면, 목젖 뽑힐 줄 알아."
장내의 다른 용병들을 돌아보며 내뱉은 트루드가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조용하던 주점이 더 고요해졌다.
너희가 제일 시끄러웠는데.
피식댄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트루드의 말대로, 생각할 게 많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느덧 늦은 새벽이었다.
텅 빈 주점. 새 술병을 꺼내다 준 여급까지 자러 간 시간에도, 이안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비 효과라는 건 정말 예상할 수가 없단 말이지….'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그는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흡혈 여제는 기다리겠다 했지만, 이안은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물론 그의 방문을 대비하겠지만, 테사를 탈취하려는 시도까지 포기하진 않을 수도 있다 여긴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녀를 인파 근처에 두었고, 자신과도 멀리 떨어뜨리지 않았었다.
벨리움으로 떠나면서 둘을 야인들에게 보낸 것도, 그저 야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게임이었던 이 세계에는, 그가 어떻게 해도 끝내 막을 수 없는 종류의 흐름이 존재했다.
작게는 메브의 영락이나, 크게는 변방의 전쟁이나 북부 망자 군단의 침공처럼. 운명이나 필연이라 표현해도 무방한 사건들.
'애초에 호위 퀘스트 한 번 뜬 적 없던 녀석이니까. 내가 흐름을 억지로 막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빈틈이 생기자마자 쓸려 내려간 거고.'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추측들이었다.
이번에도 중요한 건 결국 대응이었다.
메브와 루시가 끝내 살았듯. 그가 용이라는 거대한 변수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듯이.
큰 흐름이라 할지라도 결과까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테사이아를 죽이지 않고 퀘스트를 끝낼 수 있는 루트가 존재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의 그녀가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진 않을 테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테사이아가 주던 퀘스트를 현재의 진혈의 여제가 주게 된다면….
또 한 번 같은 가정에 다다른 이안의 입가에, 문득 실소가 스쳤다.
'자연스럽게 그 녀석을 살릴 생각만 하고 있군….'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런 결론은 그저 희망 사항, 얄팍한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녀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확률이, 사실 훨씬 높았다.
녀석은 게임에 존재하던 보스이자 마족이니까.
테사이아가 먼저 죽게 되리란 가정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때는 복수만이 남을 테니까. 그건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결론을 내리며, 이안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독한 열기.
곧바로 술병을 든 이안은, 빈 병을 들었음을 깨닫고 옆의 다른 술병을 들었다.
이것도 어느새 반이나 비어 있었다.
"...?"
잠깐만.
잔을 채우던 그의 미간이 순간 꿈틀댔다.
내내 느끼지 못하던 이질감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의 시선이 술잔에 고정됐다.
"설마."
읊조린 그가, 방금 채운 잔을 다시 한번 단숨에 들이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잔을 더 따라 단숨에 들이켠 그가, 비로소 허탈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설마가 아니네…."
그는 본래도 쉽게 취하지 않았고, 취하더라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다. 숙취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독한 술을 마시다 보면 적당히 기분 좋은 취기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이 독한 술을 한 병 반이나 마시고, 거기다 추가로 석 잔을 연거푸 들이켰건만.
잠깐 목이 얼얼하고 살짝 현기증이 일어난 게 여파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래도 높던 정신력과 내성에, 이번에 새로 올린 체력 수치와 태초의 생명력 스킬까지 어떤 식으로든 추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틀림 없었다.
'알코올을 흡수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분해하거나… 아예 흡수하지 않거나… 시발, 알 게 뭐야.'
어쨌건, 더는 취할 수 없게 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개 같은 세계를 버티게 해 주는 몇 없는 즐거움이었건만.
"하…."
탄식하면서도, 그는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씁쓸함을 잊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앞으로 능력치를 떨어뜨리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도 찾아봐야….'
계단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깨어 있었구나. 이안."
샬롯이었다. 그녀는 장비까지 전부 갖춘 채로 계단을 내려왔다.
한결 안정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이내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거, 테사의 안대 같은데."
"맞다."
머쓱하게 대답하며, 샬롯이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안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애틋하군. 그 녀석이 알면 좋아하겠어."
"…그래서가 아니다. 그 미친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지."
"...?"
물잔에 술을 따르며, 샬롯이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 나오더군. 내가 마법에 걸린 건 그것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던 거야. 그러니 아예 눈이 마주치지 않게 가린다면… 그것들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피할 수 있겠지."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하려던 이안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즈에는, 마주 본 캐릭터를 정신 지배 상태에 빠뜨리던 랜덤 패턴이 분명히 존재했다.
최면술은 모든 뱀파이어가 가진 기술이라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 쌍둥이들의 진혈을 흡수해서 더 강화했던 거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하지만 눈을 가린 채로 상대할 만큼 만만한 것들이 아닐 텐데."
"쉽진 않겠지. 하지만 나도 그 녀석 못지않게 예민한 감각을 타고났다. 숙련된다면 눈을 뜬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만들 것이다."
샬롯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듯이.
…말린다고 될 게 아니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물었다.
"몸은?"
"아주 가볍다."
"다행이군."
"…당장 움직일 수 있을 정도야."
"...."
"너만 괜찮다면."
이안은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샬롯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당장 움직이고 싶단 거지, 이거.
"잊었나 본데."
이윽고 피식 웃은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난 일주일을 내리 잤다."
***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다각, 다각. 발굽 소리가 대로의 고요를 깨뜨렸다.
굳게 닫힌 관문의 망루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관문 대장이, 다가오는 마차를 눈에 담으며 피식댔다.
"거참, 성격 한번 급하시군."
읊조린 그가 병사들에게 문을 열라는 턱짓을 보냈다.
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간 그가 마차를 눈에 담았다.
마부석에 앉은 샬롯이 그를 알아본 듯 턱을 까딱였다.
병사들이 관문을 여는 사이, 관문 대장이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바로 떠나시오? 적어도 하루는 더 쉬실 줄 알았는데."
이안이 피식대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루 더 쉬려다가 한 달을 시달릴 것 같아서 말이오."
"누가 묻거든 용살자의 부탁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겠소. 그 외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거면 되겠소?"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칼을 들고 협박했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차피 떠나는데, 다 떠넘기시오."
관문 대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알아서 하겠소. 부디 어디서든 보중하시오. 북부의 용살자여."
"그쪽도. 그간 고마웠소."
문이 활짝 열렸다.
깍듯하게 인사한 관문 대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이안을 마지막으로, 마차가 멀어졌다.
문이 다시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관문 대장이 다시 망루에 올랐다.
관도를 나아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읊조렸다.
"매번, 정말 미련 없이 가시는군."
그가 이안의 예감이 정확했음을 알게 된 건, 바로 그날 오후였다.
그를 찾는 한 무리의 야인 전사들이 도시에 도착했으니까.
용살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튿날 타오르는 여신의 사제들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울라프 대공은 며칠 뒤 국경 초소에서 날아든 급보를 받고서야 그의 행방을 알게 됐다.
이안 호프는 북부를 떠났다.
#126화
어둠 한복판. 검붉은 안광이 소리 없이 번졌다. 뒤이어 주위가 은은하게 밝아졌다.
거대한 동공의 가장자리를 따라 검붉은 광원이 삽시에 번졌다.
석주 하나 존재하지 않는 드넓은 내부 곳곳에, 작은 동산처럼 쌓인 뼈 언덕들이 드러났다.
출입구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지하 동공은, 용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용이 영원한 안식에 든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산채로 영원한 고통 속에 남겨진 존재도 있었다.
"...."
깎아지른 절벽처럼 솟은 벽면. 그 한복판에서 피어오른 안광이, 숨소리와 함께 선명해졌다. 검붉은 마력이 용의 전신을 비췄다.
가슴 한복판과 복부를 꿰뚫고 벽면에 박힌 거대한 금속 말뚝. 활짝 펼친 양 날개에도 각각 두 개씩의 말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벽에서 이어진 굵은 금속 고리가 목과 꼬리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구속했다.
육각형을 그리는 말뚝과 고리 표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진언이, 검붉은 마력을 머금고 일렁였다.
그는 산채로 유폐된 죄인이자, 동공을 지키는 무덤 지기였다.
용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푸스스, 머리에 쌓여 있던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용의 시선이 저 먼 공동의 끝, 황금빛을 머금고 빛나는 거대한 진언으로 향했다.
그 한복판에서, 하얀 로브를 걸친 인간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안광이 설핏 가늘어졌다.
-오랜만이구나….
굵고 낮은 사념이 번졌다. 동시에 아주 부드럽기도 했다. 인간이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빛바랜 금발.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용의 시선을 정확히 마주하며, 아르케아스가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속삭이는 듯한 육성. 하지만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한동안 전혀 찾지 않더니…. 드디어 외로워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렇다 해도 반갑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나 역시. 그러나 오늘은… 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아르케아스가 걸음을 옮겼다. 로브 자락 아래로 금빛 마력이 번지더니, 그의 몸이 날듯이 동공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그가 텅 빈 공간에 멈춰선 그가 손을 내저었다.
허공에 거대한 황금빛 진언이 피어올랐다. 그 한복판으로 뼈 무더기가 소리 없이 쏟아졌다.
쏟아진 뼈는 흩어지거나 허물어지는 일 없이, 작은 동산처럼 자리를 잡았다.
주위의 다른 뼈 무덤이 그렇듯.
사념이 탄식했다.
-아직 대륙에 남은 동족이 있었던가…. 그래… 이 잔재는… 기억나는군…. 타후므리트인가….
"광기에 눈멀었던 푸른 용이, 비로소 안식을 찾았노라…."
아르케아스가 읊조렸다.
-그래, 그리 된 것이로군… 다시 우리 둘만 남았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용의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타후므리트가 순순히 안식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네 고통과 피로가 느껴진다, 아르케아스….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그럼에도 네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아….
"...."
아르케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눈으로, 영겁의 형벌에 처해진 동족을 바라보았을 뿐.
사념이 이어졌다.
-어째서지? 오랜만에 본모습으로 바깥세상을 거닐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무자비하게 동족의 목숨을 빼앗던 옛 기억에 다시 피가 끓어서인가. 그도 아니라면… 눈에 든 새로운 필멸자라도 나타난 것이냐…?
묵묵히 듣던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비로소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네 통찰력이 여전함에 기쁨을 감출 수 없구나. 라크마흐, 대륙에 남은 내 마지막 동족이여…."
비꼬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말투로 내뱉은 그가, 용을 돌아보았다.
"질문이 곧 해답이니… 굳이 더 답할 필요는 없겠구나."
그의 로브자락을 타고 황금빛이 번졌다. 아르케아스가 다시 동공을 가로질러 멀어졌다.
라크마흐가 낮게 웃음 지었다.
-너는 여전히 결코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만을 하는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너는 끝내… 나를 이해하게 되리라….
아르케아스가 빛을 잃은 진언 위에 올라섰다.
그가 라크마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읊조렸다.
"헛된 기대는 품지 말거라. 내 영혼이 광기에 물든다 한들, 신을 참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큰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그만큼 큰 증오를 낳는 법이니…. 어쩌면 네가 낳을 증오는, 그 누구보다도 거대할지도 모르지….
검붉은 안광이, 사념만큼이나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길 바라겠다….
진언이 눈부시게 빛났다.
무표정한 아르케아스가 그 너머로 사라졌다.
"...."
흩어지는 빛무리를 응시하는 용의 안광이, 이윽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새로운 대행자를 찾은 것이로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솨아아-
용의 전신에 마력이 일렁였다.
그럴수록 말뚝과 족쇄에 새겨진 진언이 짙게 빛나며,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검붉은 마력이 거미줄처럼 벽면 전체로 번졌다.
길고 긴 시간과 바깥세상의 혼돈은, 이 지하 깊숙한 무덤을 감싼 용의 진언에도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전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만큼 작디작은 틈이었지만.
한때 역천을 꿈꿨던 고룡은, 끝내 그 너머로 작은 손길을 뻗치는 데에 성공했다.
저 공허의 고대 신들이 그러하듯. 그의 속삭임을 듣고 받아들일 추종자를 기다리면서.
신탁을 내리듯 마력을 발산한 그가, 심장을 파고드는 고통을 즐기듯 웃음 지었다.
-둘 중 하나는… 끝내 또다시, 대행자를 잃는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
공동의 광원이 잦아들었다. 신들의 시선조차 닿지 않는 깊은 지하. 아직도 역천의 꿈을 꾸는 용이, 다시 눈을 감았다.
***
라 드린에 접어든 지 사흘째였다.
날이 따듯해졌다 느끼는 건, 그저 북부의 추위에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전혀 그런 풍경은 아니지만.'
의자에 기대 육포를 우물대던 이안은, 잿빛 하늘과 황량한 언덕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나마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저 멀리 은은하게 번지는 연기가, 눈에 보이는 비극의 전부였으니까.
망조가 들었으리라던 트루드의 말은 정확했다.
북부로 이어진 길목의 초소는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약탈당하고 버려진 마을. 말뚝에 못 박혀 전시되거나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들. 까마귀와 쥐가 들끓었고, 밤에는 원한을 품고 되살아난 망자들과 청소부를 자처하는 마물들이 들판을 배회했다.
라 드린 왕국은 이안이 기억하는 게임 속 변방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꾸로 북부부터 거치고 내려왔더니, 이제야 얼추 시기가 비슷해진 거겠지….'
타락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끝내 승리하지 못한, 혼돈과 파괴, 죽음과 약탈만이 가득한 전쟁.
하지만 그 한구석을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은, 뜻밖에도 상당히 평화로웠다.
샬롯은 막상 이동하기 시작하자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이안이 돌아오고 안정을 찾으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저 이안을 믿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라면 반드시 테사를 구해내리라고.
이안은 굳이 그 생각을 바로잡거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게다가 게임에서도 별 볼 일 없던 변방의 마물은, 설원 지대의 마물도 거침없이 베어 넘기던 수인 전사에게는 짚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직 완벽한 컨디션을 되찾은 상태가 아님에도 그랬다.
물론, 그건 이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인근의 마물들은 솔직히 말해, 몸풀기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이 동네 잡몹들은 3챕터가 넘어서나 짜증 났었지. 지금은 하수인들 정도나….'
육포를 씹으며 생각하던 이안이, 문득 눈동자를 굴렸다.
마부석의 샬롯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육포?"
이안이 손에 든 육포를 내밀며 물었다. 선선히 받아들면서도, 샬롯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언덕 너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안."
"...?"
"비명과 고함이 들리는군. 싸움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아, 그래…."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지.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시야가 가려지지 않게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황량하게 이어진 언덕길. 아직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 가라. 뭐건, 어차피 지나쳐야 할 길이니까."
"그러지."
덤덤하게 대답한 샬롯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언덕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귀에도 다급한 발굽 소리와 마차 덜컹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곧 언덕 위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말 한 마리가 끄는 낡은 짐 마차였다. 겁에 질린 얼굴의 여자가 마부석에 앉아 있었고, 짐칸에는 검과 방패를 어정쩡하게 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곧 말 탄 기수 몇이 마차 주위로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짐 마차의 둘과 달리, 제대로 무장을 갖춘 자들이었다.
"…약탈인가."
샬롯이 나지막이 그르렁댔다.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라 드린 왕국은 붕괴되고 있었다. 용병뿐 아니라 병사들도 강도질을 일삼고 있으리라. 거기다 곳곳에 암약한 타락자들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기까지 할 터였다. 그들에겐 백성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서브 퀘스트도 여럿 있었지.'
"저들을 구하긴 어렵겠군."
생각하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그들의 마차와 언덕 꼭대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전력으로 달려간다 한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으리라.
"그래도 복수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마차 지붕 위로 훌쩍 올라가며 이안이 대답했다. 명분 따위를 붙이지 않더라도, 저 강도들이 그들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악…!"
그사이,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던 남자가 비명을 터뜨렸다. 짐칸에 훌쩍 올라탄 강도의 칼이 그의 어깨를 내리찍은 것이다. 남자가 방패를 떨어뜨리자, 그대로 다가선 강도가 뽑아 든 칼을 가슴에 깊이 박아 넣었다.
"여, 여보-!"
마부석의 여자가 울부짖었다. 남자를 툭 밖으로 던져 버린 강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고삐를 당겼다. 짐 마차가 멈췄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마차를 보고 있지 않았다.
"...."
"...."
말을 탄 채 마차 옆을 따르던 다른 두 놈이, 그들 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고개를 돌려 서로 눈빛을 교환한 놈들이, 안장 옆의 쇠뇌를 집어 들고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본에 충실한 놈들이군….'
검을 뽑아 든 이안은 마부석 바로 뒤까지 이동해 자세를 낮췄다.
그가 슬쩍 발을 굴렀다. 두 겹으로 덧댄 나무 지붕은 아주 튼튼했다. 온 힘을 다해 도약하지만 않는다면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비로소 그의 눈에 잿빛 마력이 일렁이는 사이. 달려오며 마차를 겨냥하던 놈들이 쇠뇌를 발사했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옆으로 틀었다. 말을 노리고 날아들던 볼트가 마차 측면에 박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쇠뇌를 다시 안장에 건 놈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말을 지켜라. 천천히 따라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강도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다각- 다각- 다각-
차분히 기다리던 이안은, 놈들이 마차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으헉-?!"
그가 이런 식으로 달려 들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한 듯, 강도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안이 내리친 검이 놈의 머리 바로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꽈지직-!
북부 전사의 검이 도적의 머리를 가슴팍까지 쪼개며 박혀 들었다. 이안과 충돌한 놈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 이미 몸을 움츠린 이안이, 놈의 가슴팍을 힘껏 박찼다. 벨리움 요새에서 거인들을 상대하며 여러 번 반복한 바로 그 움직임이었다.
푸확-!
한순간 뿜어져 나온 바람이, 강도의 시체를 바닥에 처박다시피 튕겨냈다. 투쟁의 축복을 받던 그때만큼 힘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달려들던 속도를 상쇄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이안이 말 위에 착지했다.
허공에 피 보라가 휘몰아쳤다.
"뭐 저런, 미친…?!"
엉망진창으로 땅을 구르는 동료의 시신과 안장에 묘기 부리듯 올라탄 이안을 번갈아 본 남은 강도가, 황급히 말 머리를 옆으로 돌았다.
이안은 말머리를 돌려 곧바로 놈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휘몰아쳤다. 곧바로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이, 그가 탄 말까지 감쌌다. 도망치는 강도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시발, 오지 마-! 오지…!"
소리치며 뒤를 돌아본 놈은, 이안이 전력으로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 두 발로 올라선 것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이안이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바람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포물선을 그렸다.
콰직-!
도적이 몸을 비틀었지만, 고통만 더해질 따름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목덜미에 떨어진 칼이, 복부까지 깊이 갈라 버린 것이다. 놈이 걸친 사슬 갑옷과 가죽 견갑은, 바람 칼날이 더해진 이안의 검을 전혀 막아 주지 못했다.
"커… 허…."
단숨에 죽지 못한 강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잘린 단면에서도 피가 치솟았다.
이안은 놈의 내장이 쏟아지기 전에, 머리채를 잡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대로 놈의 안장에 올라탄 이안이, 느릿느릿 언덕을 오르는 자신의 마차를 일별하고는 고삐를 후려쳤다.
짐 마차 위. 순식간에 동료 둘이 죽는 것을 본 강도가 언덕 반대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마부석의 여자는 그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엉망이 된 채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겁에 질린 얼굴로 이안을 돌아본 강도가, 다급하게 재장전을 끝낸 쇠뇌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조준은 정확했다.
쒸엑-
말을 향해 날아드는 파공음. 이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팔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챙-
이안이 볼트를 쳐내자, 강도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127화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감각이 허물을 벗은 것처럼 예민했다.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졌고, 자신이 해낼 수 있는 한계치가 명확하게 그려졌다.
북부의 수많은 전투. 특히 벨리움 요새에서의 목숨 건 사투 이후로, 이안은 자신의 전투 수행 능력이 한 단계 더 진일보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능력치 자체는 버프를 몇 겹으로 둘렀던 그때가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이건 수치상으로 표현되지 않는 종류의 성장이었다.
'갈수록 몸 쓰는 것만 능숙해지는군.'
쓴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안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충돌한 순간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무모한 움직임.
꽈직-!
하지만 어깨로 강도를 들이받는 이안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순간 주저하거나 겁을 먹는 게 더 큰 부상으로 돌아오는 법이었다. 게다가 그는 몸에 걸친 방어구들이 충격을 어느 정도 분산시켜 주며, 자신의 몸이 이 정도의 충격에도 버틸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딘가 부러진다면, 그러는 대로 육체의 회복 능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확인할 기회가 되리라.
물론 그와 부딪힌 상대는 그렇지 못했다.
"커… 헉…!"
바닥에 처박힌 강도가 피를 토했다. 나무 바닥이 부서지면서 몸이 반쯤 박힌 듯한 형태였다. 이안은 놈의 몸을 짓누른 채로 검을 들었다.
푸욱, 검이 놈의 가슴을 두부처럼 가르며 박혔다. 고통에 헐떡이던 도적의 숨이 이내 끊어졌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나.
생각하며 일어선 이안의 눈매가, 이내 슬쩍 가늘어졌다.
언덕 반대편의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약탈당한 짐 마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언덕길을 따라 이어진 몇 대의 마차.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시신들과 한쪽 길가에 엎드려 처분만 기다리는 자들.
그리고 동료의 부름에도 미적대던 강도들은, 이안이 등장하자 그제야 고삐를 바짝 당기거나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시발…! 저 새끼 뭐야!"
"기사, 기사인가…?"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숨이 끊어진 아이의 시신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의 귓가로, 놈들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이안은 비로소 놈들을 돌아보았다.
남은 여덟 놈은 앞선 셋과 달리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다.
짐 마차 위에 피범벅이 된 채 우두커니 선 그를, 긴장과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쑥덕댈 뿐.
그 사이에는 비교적 여유로운 놈도 하나 있었다.
"어디서 오신 기사님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역시나, 놈이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믿는 구석이 있는 여유로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놈이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은 징집을 거부한 것으로도 모자라,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던 죄인들입니다. 귀환 명령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저희에게 칼을 들이밀기까지 했죠. 해서, 즉결 처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 그래. 하지만 너희는 정규군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얼굴에 튄 피를 슥 닦았는데, 닦이긴커녕 번져서 오히려 더 섬뜩해졌다.
하지만 대화가 통한다고 여긴 듯, 남자가 미소 지었다.
"저희는 용병입니다.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신 벨라드 백작께 고용되었고, 지금은 엘린더 경의 지휘를 받고 있습니다."
"엘린더 경이라…."
이안이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용병들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남자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직접 확인하셔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하루 정도면 도착할 거리에 머물고 계시니까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군.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이놈들의 대장이냐?"
"그렇습니다만."
"너희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너희가 나와 내 부하를 보자마자 쇠뇌를 쏘고 칼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대장의 미소가 굳어졌다.
칼을 들이민 것들은 죽음으로 책임을 진 게 아니냐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결과고,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른 대가는 따로 계산하란 말이었으니까.
전형적인 기사식 논리였다.
'위로금이라도 내놓으란 거겠지, 하찮고 쓰레기 같은 새끼.'
생각하면서도, 그는 애써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저희와 함께 가시죠. 엘린더 경께서 직접 합당한 사과와 위로를 전하실 겁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들의 본거지에 발을 들인 순간, 저 기사 놈은 죽은 목숨이었다. 엘린더 경이 저자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런 건 필요 없어. 난 그냥 부하 관리를 못한 놈이 책임지길 원할 뿐이다."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네 목을 내놔라. 그럼 엘린더 경에게도 오늘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지."
"...."
대장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이 미친 기사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와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캐내고 싶었을 뿐일지도 몰랐다.
눈빛이 서늘해진 것도 잠시.
그는 부하들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인상을 구겼다.
"뭘 그렇게 봐? 이 병신들아! 듣고도 몰라? 저건 그냥 우리랑 싸우겠다는 거잖아!"
챙, 그가 검을 뽑아 들며 덧붙였다.
"무기 들어!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가도 너흰 다 죽은 목숨-"
퍼억-!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광대뼈 아래에 단검이 박힌 놈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움찔댔다.
용병들이 숨을 들이켰다.
"미친… 대장…?!"
"또 나에게 무기를 들이미는군."
어느새 짐 마차 옆, 강도의 말에 훌쩍 올라탄 이안이 말 머리를 그들 쪽으로 돌리며 내뱉었다.
언덕 꼭대기로 올라오는 마차의 발굽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용병들을 응시한 것도 잠시.
이안은 예고 없이 고삐를 후려쳐, 그대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이, 이런, 시발-!"
"어차피 하나야! 죽여!"
그제야 용병들이 허둥지둥 쇠뇌를 들었다.
"쏴!"
일제히 발사된 볼트들이 달려오는 이안을 향해 쏟아졌다.
푸확, 돌개바람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방금 그건 뭔-"
그들의 의문은 끝을 맺지 못했다.
검을 옆으로 내뻗은 미친 기사가, 어느새 그들의 코앞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흐, 흩어져! 포위해!"
용병들이 다급하게 고삐를 후려치는 사이, 이안과 가장 가까운 놈이 말 머리를 돌리며 원형 방패를 들었다.
콰앙-!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직 닿을 거리도 아니건만. 이안의 검이 호선을 그린 순간 뻗어 나온 바람이 그대로 방패를 부숴 버린 것이다. 안장 위에서 휘청대는 놈의 머리 옆으로, 기다란 검날이 드리웠다.
콰직-!
놈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갔다. 이안이 지나가고 나서야 잘린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납죽 엎드려 있던 자유민들 사이에 억눌린 비명이 터졌다. 그들이 엉금엉금 소란의 반대편으로 기어가는 사이, 흩어진 용병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안은 놈들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 놈을 향해 달려가면서, 고삐를 놔 버린 왼손으로 투척용 단검을 뽑아 들었다.
퍼억! 키히이잉-!
"으억?!"
단검은 사람이 아닌 말에 날아가 박혔다. 깜짝 놀란 말이 몸을 치켜들었다가 나뒹굴고, 타고 있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사이 안장 위로 올라선 이안이, 가까워진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와악?!"
콰직-!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용병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내뻗었다. 몸을 비틀어 어깨로 놈의 검을 그냥 맞아 준 이안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용병의 검은 그의 견갑을 부수지 못했다. 오히려 미끄러지던 검날이 부러졌다. 하지만 이안의 검은 용병의 어깻죽지에 깊이 박혔다.
"커… 커헉…."
검을 뽑던 이안은, 용병의 몸을 밀어 버리는 대신 슬쩍 몸을 숙였다.
퍽, 용병의 등에 볼트 한 발이 박혔다. 하여간 의리 넘치는 새끼들.
생각과 동시에 투척용 단검을 뽑아 든 이안이, 축 늘어진 시신을 옆으로 밀어 버리며 내던졌다.
"컥…!"
가슴 한복판에 단검이 박힌 놈이 말에서 떨어졌다. 이안은 피범벅인 안장에 앉아, 곧바로 다음 놈에게로 달려갔다.
"시발…! 뭐 저런…!"
"분명해… 분명히 그자야. 붉은 기사라고…!"
남은 용병들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 찼다. 동료들이 순식간에 죄다 죽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피범벅인 저 미친 기사에겐 그들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것도, 하물며 투구조차 쓰지 않았건만.
콰직-!
그사이 하나가 더 죽었다. 썰려 나간 동료의 몸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본 두 놈이, 문득 눈을 치켜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남은 건 둘뿐이었다.
다각다각-
이안이 말 머리를 선회하고 있었다. 두 용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삐를 후려쳤다. 일단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
"사, 살았다…!"
이안이 동료 쪽으로 말머리를 트는 것을 확인한 용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새 무기조차 집어 던진 상태였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도망치면, 아무리 괴물 같은 기사라도 따라오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는, 저 미친 기사가 사실은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콰아아-
뒤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열기.
"...?!"
고개를 돌린 용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네다섯 개의 불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퍼버벙-!
그의 주위로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 하나에 휩쓸린 말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그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안장에서 튕겨 나갔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 너머, 검 끝을 자신 쪽으로 내민 기사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검신을 타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법…?'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거꾸로 땅에 처박힌 그의 목이 부러졌다.
콰직!
도망치던 마지막 용병의 머리가 쩍 갈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놈이 탄 말이 멈추지 않고 달렸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고삐를 당겼다. 시체를 태운 말이 멀어지는 가운데, 말 머리를 돌린 그가 약탈당하던 한복판으로 다가갔다.
"...."
"사, 살려… 살려 주…."
낙마하면서 다리가 부러진 듯 바닥을 기어가던 용병이, 발소리를 듣고 웅얼댔다. 이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가가, 놈의 등판에 검을 내리찍었다.
"후…."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들었다.
검을 회수하지는 않은 채였다.
싸움이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가장 강한 한 놈이 남아 있었다.
"이안! 뒤!"
저 멀리서 샬롯의 외침이 울려 퍼진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태연하게 몸을 돌리며, 손을 펼쳐 거기 멈춰 있으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꾸물대며 일어서는 덩어리가 보였다. 변이 중인 용병 대장이었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변이가 다 안 끝나다니… 허접한 놈이군.'
이안은 용병들을 처리하는 동안 이미, 놈에게서 번지는 오염된 마력을 느꼈다. 일단 놔둔 건, 느껴지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저놈은 타락자의 제대로 된 하수인이 아니라, 그 하수인의 끄나풀 정도에 불과한 놈이니까.
거기다 전투에 접어든 이안의 시간은, 실제보다 더 길고 세밀하게 흘렀다.
'여유로운 태도 하며, 엘린더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어쨌든 역시는 역시군….'
생각하며, 그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용병 대장이 비칠대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단검이 박힌 그대로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 갑옷은 부풀어 오르는 근육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고, 대신 보랏빛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난 비대칭의 근육이 훤히 드러났다.
게임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놈들이었다.
보스는 물론 네임드도 아니, 그저 정예 마물 정도로 분류되는 놈들.
심지어 변이되는 속도도 느려서, 그때도 변이 중에 두들겨 패서 피를 다 빼놓곤 했었다.
'지금은 그냥 죽일거지만.'
이미 완성된 춤추는 불꽃이 그의 주위로 이글거렸다. 한 줌의 혼돈력까지 더했으니, 저 되다만 타락자에게는 더 치명적일 터였다.
콰과과광-
연달아 뿜어져 나간 불꽃이, 거의 변이를 끝내가던 용병 대장에게 부딪혀 폭발했다. 피부 표면이 터져 나가면서 선홍색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에엑-!"
놈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불꽃의 뒤를 따라 내달린 이안이 솟구쳤다.
콰드드득-
그가 내리친 검이 뒤틀린 머리를 반으로 가르고 목 아래에서 멈췄다.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이놈을 양단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붉은 마력이 일렁이는 눈으로, 이안이 읊조렸다.
"확실히, 더 빨라지긴 했네."
콰아아-!
치솟아 오른 불길이, 그대로 용병 대장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일점 폭발. 불길 사이로 발을 밀어 넣어 놈을 박찬 이안이 멀찌감치 착지했다.
"기-아아아악-"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용병 대장이 타들어 갔다.
이안은 놈이 더는 꿈틀대지 않고, 경험치가 개미 눈물만큼 오르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그는 품에서 천을 꺼내 검날에 눌어붙은 피와 기름을 닦았다.
그런 그를 마부석에 앉아 지켜보던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방금 그건, 흑마법의 산물 같던데…."
고작 강도 중에 그런 존재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말투.
순간 의아해한 이안은, 그녀가 타락자나 변이된 것들을 접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떠올렸다.
아마 그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으리라. 그처럼 찾아다니는 게 아닌 이상, 타락자들의 본모습을 볼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별 것 아닌 놈이었다. 진짜 타락자나 놈들의 하수인은, 이것보다 훨씬 강하지."
덤덤하게 대꾸한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저만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생존자들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자들이 움찔대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그 사이의 노인 하나가 내뱉었다.
그뿐이었다. 다들 감사보다 두려움이 더 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허탕인가…?'
게임에선 이런 상황에 퀘스트를 줬었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딱히 실망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변방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을 일들이었다. 또 기회가 있으리라.
"잠시… 잠시만요…! 나리! 나리…!"
"...?"
마차에 타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언덕길을 구르듯 달려 내려오는 여자가 보였다. 처음 나타난 짐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있던 그녀였다.
기절했다 정신을 차린 모양.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리…!"
헐떡대며 주저앉은 그녀가 말했다. 얻어 맞아 엉망이 된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툭 내뱉었다.
"감사 인사는 됐소."
"나리가 바로… 소문의 그분이시죠?"
여자가 덧붙였다. 이안이 대답 없이 바라보자, 그녀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역시…! 뵌 순간 알았습니다…! 나리께서 바로 그 붉은 기사… 복수의 대행자 이시라는 걸요…!"
"...?"
#128화
고개를 갸웃하던 이안이 이내 실소를 삼켰다.
또 이 소리네. 전혀 안 닮았는데.
'피범벅이라 그런가….'
어쨌든, 딱히 기분 나쁜 오해는 아니었다.
뒤에서 가르릉 대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슬쩍 보니, 샬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 길고 오글거리는 소개를 시작할 태세여서, 이안은 눈짓과 함께 슬쩍 손바닥을 들었다.
샬롯이 혀를 날름대는 사이, 여인이 무릎을 꿇으며 덧붙였다.
"억울한 자들의 복수를 도와주신다 들었습니다. 부디 제 죽은 남편과 이웃들의 복수를 해주세요…!"
그녀를 내려다 본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잘못 봤소."
"네…?"
"나는 복수의 대행자가 아니오."
"하, 하지만… 분명히…."
눈을 치켜 뜬 여인이 더듬댔다.
믿고 싶지 않은 눈치. 이안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과 지인들을 눈앞에서 잃고, 본인도 죽다 살아났으니까.
"나는 용병이오. 복수의 대행자처럼 고결한 이유로 싸우지 않지. 저것들을 다 죽인 건, 날붙이를 들고 덤벼서고."
"...."
"그러니 원한다면 의뢰를 하시오. 부탁이 아니라."
이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지자, 여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제야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
주춤대며 다가온 노인이 그런 여인의 뒤에 멈춰선 건 그 직후였다.
감사 인사를 건넸던 그 노인이었다.
"일어나게. 감사를 표하고 보답부터 해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읊조리면서도 딱하다는 듯 한숨 쉰 그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리."
"용서할 것도 없소."
"그럼 부디,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허리를 숙이며 말한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가 길 한쪽의 짐마차로 걸음을 옮기며, 여전히 얼어 있는 주민들을 돌아보았다.
"뭣들 하는가. 은인을 그냥 보낼 참이야?"
"...!"
주민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뒤적이는 노인을 바라보던 이안이, 비로소 헛웃음을 짓고는 내뱉었다.
"보답 같은 건 필요 없소.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난 또 퀘스트라도 주려나 했네.
곧장 마차에 올라 탄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고삐를 쥐었다.
주저앉아 있던 여인이 마차로 달라붙은 건 그때였다.
"나리.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안이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말씀은, 의뢰라면 받아주시겠다는 뜻이셨습니까?"
"고민은 해 보겠단 거였소."
"그, 그렇다면…."
품을 뒤적인 그녀가, 피딱지와 흙먼지가 엉겨 붙은 꼬질꼬질한 양손을 내밀었다.
은화 몇 개가 그 위에 반짝였다.
"제 전 재산입니다, 나리. 부족하시다면 제가 나리의 하녀가 되어서라도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기사의 탈을 쓴 괴물을… 죽여 주세요."
이안의 눈앞에 비로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라 드린의 도적 기사.
기대를 버렸더니 뜨는군.
생각하며 내용을 응시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시간제한…? 전에도 이랬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해야 할 퀘스트였다.
보상에 능력치 포인트가 하나 있었으니까.
"대금이 너무 적다면… 이것도 받아 주십시오, 나리. 이 또한 부족하긴 마찬가지입니다만…."
이안의 표정을 오해한 듯, 어느새 여인의 곁에 선 노인이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그 주위로 다른 주민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나리, 제 돈도 받아 주십시오."
"제 것도요.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부디, 나리…."
난리 났네.
퀘스트 창을 닫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자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 있소?"
"제,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남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이안이 샬롯 쪽을 턱짓했다.
"설명하시오."
"...! 예."
순간 눈을 치켜떴던 남자가 몸을 돌렸다. 다시 여인을 돌아본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얹어져 있던 동전을 집어 들었다.
"의뢰는 성립되었소."
"감사… 감사합니다, 나리…!"
여인이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으며 내뱉었다. 노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안도와 흥분이 번졌다. 또 한번 소란이 번지려는 찰나, 이안이 내뱉었다.
"이제 물러들 나시오. 쓸데없이 힘 뺄 시간에, 가서 물건들이나 챙기는 게 좋을 거요."
주민들이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을 건조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주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한순간에 현실로 내팽개쳐진 듯한 얼굴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의뢰가 완수된 것도, 살아서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운 좋게 한 번의 위기를 넘겼을 뿐이었다. 그 운이 두 번 반복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요해진 와중, 설명을 끝낸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시선을 거둔 이안이 물었다.
"다 들었나?"
"그래. 충분히."
"그럼 출발해."
샬롯이 지체하지 않고 고삐를 후려쳤다. 이번에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마차가 난장판이 된 언덕을 지나쳐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주민들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막막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느덧 밤이었다.
이안은 육포를 씹으며, 먹구름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째 노을이 지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하늘은 어느 순간 어두워졌다가, 이윽고 다시 밝아졌다.
'이렇게 보니 침식의 전조가 노골적이긴 하네.'
타락자들이 딱 좋아할 환경이었다. 마물과 마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머지않아 더더욱 그렇게 될 터였다. 아마도 변방 지역 전체가.
개인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늘 그렇듯 눈앞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더 늦게까지 이동하도록 하지."
"알았다."
묵묵히 앉아 있던 샬롯이 대답했다.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있는 거 맞아? 눈매를 슬쩍 가늘게 뜨며 이안이 덧붙였다.
"길을 잃지 않게 신경 써라. 가뜩이나 좀 돌아가게 됐는데,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진 않아."
"걱정 마라. 놈의 소굴이 어디인지, 알 것 같으니까."
"알 것 같다고?"
"여긴 제국과 가까우니까. 상단에서 일할 때 몇 번 오간 적 있다. 통나무 집에 목책까지, 야인 마을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지. 지금도 그런 모습인진 알 수 없지만."
"훌륭하군…."
슬쩍 미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네 예상엔, 언제쯤 도착할 것 같냐?"
"아마 오후쯤. 적어도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내일 오후라. 아슬아슬 한데.
이안은 퀘스트의 제한 시간을 떠올리며 턱을 긁적였다. 정확한 수치가 표시되는 건 게임에서도 흔치 않던 일이지만. 어쨌든, 늦으면 어떤 이유에서든 실패로 끝나게 되리라.
"그럼 조금 더 서둘러야겠군."
"알았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샬롯이, 슬쩍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엘린더라는 기사가, 아까 그 괴물을 만들어낸 거냐?"
"아마도. 그게 타락자가 하수인을 늘리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힘을 주겠다고 유혹하고, 그걸 족쇄 삼아 복종시키지. 아까 본 그런 놈들이, 가장 말단 하수인이야."
"그래… 그렇다면… 그런 놈들은 내게 맡겨 줄 수 있겠나? 좋은 수련 상대가 될 것 같은데."
그녀의 목에 걸린 가죽 안대를 슬쩍 바라본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안 돼."
"…안 된다고?"
샬롯이 되물었다. 반발하는 게 아니라 눈치를 살피는 듯한 말투였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마차를 지켜야 하니까."
"마차… 그래…."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한 샬롯이, 앞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나는 이번 일에도 별 쓸모가 없는 모양이군…. 알겠다. 그렇게 하지."
뭐라는 거야, 얘가 또.
콧방귀를 뀐 이안이 내뱉었다.
"역할을 분담하려는 것뿐이야. 무장 강도가 우글대는 소굴에 굳이 정면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이안은 게임의 기억을 떠올렸다.
완만한 산기슭에 위치한 도적 기사의 본거지는, 사실상 목조 요새나 성곽에 가까웠었다.
마을을 멋대로 개조하고 증축해서, 무장 세력의 거점으로 만든 것이다. 말이 도적 기사지, 사실상 신흥 군벌에 가까웠다. 주위 마을을 약탈해 물자를 수급하고, 징집이란 명목으로 주민들을 납치해 부려먹는.
'그런 식으로 세력을 불려서 영주를 몰아낼 생각이거나… 모시는 놈의 세력에 합류하려는 거겠지.'
정확한 속사정 따윈 알 바 아니었다. 게임에서 거대한 산채였으니, 현실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리란 사실이 중요할 뿐.
굳이 경험치도 주지 않을 놈들이 득시글대는 곳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평소라면 대충 불을 질렀겠지만.
이번에 그랬다간 노예로 부려지는 이들이 여럿 타죽을 터였다.
"그러니까 조용히 들어가서, 그 기사 놈의 목부터 딸 거다. 잔챙이들은 덤비는 놈들만 죽일 거야. 대가리가 사라지면 끄나풀 놈들 빼곤 싸우는 척만 하다 튀겠지. 그것들은 굳이 쫓지 않을 거다. 그러니 마차만 두고 갈 수는 없어."
이안이 팔 받침대를 툭툭 쳤다.
"도망쳐 나온 놈들이 이걸 발견하면 그냥 지나칠 리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지키고 있으면, 몇 놈이 오든 빼앗길 일은 없겠지."
"그런 거군…. 알았다. 그게 내 역할이라면."
"그리고 앞으로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라."
"...."
샬롯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축 처진 어깨와 힘없이 늘어진 짤뚱한 꼬리.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쓸모없는 건 사실이다, 이안. 날붙이만으로 죽일 수 없는 족속들을 상대로는 특히."
"...."
얘기가 왜 거기로 튀어.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굳이 말을 끊지 않았다.
샬롯이 먼저 속내를 드러낸 건, 여정이 다시 시작된 이래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놈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대로면 결국, 루 사드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까."
"그런 힘을 손에 넣을 방법이 있다는 듯한 말투로군."
"…그래. 네가 용납할 리는 없겠지만. 나 역시 유혹을 느끼고 있을 뿐, 옳지 않은 선택이란 걸 알고 있다."
"...."
이안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개종을 고민하는 거군."
바로 눈치챌 줄은 몰랐다는 듯, 샬롯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곧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마 너는 타락이라 칭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고귀하던 태초의 야성은, 공허의 혼돈에 물들었으니까."
예전에도 그녀가 언급한 적 있던 이야기였다. 인간의 신들에 의해 공허의 변방에 유폐된 수인의 신.
턱을 긁적인 이안이 내뱉었다.
"네가 그를 섬긴다고 곧바로 힘을 내려 주진 않을 것 같은데."
"아마 내려 주실 것이다. 크룩시카께선 후손을 아끼시니까."
"후손?"
"그래. 우린 모두 그분의 후손이지. 찬란한 여신을 비롯한 다른 신들이 우리에게 신성을 내리지 않으시는 건 그래서야. 하지만 태초의 야성께선, 자신을 버렸던 자손이라도 기꺼이 품어 주시겠지."
"부작용도 함께 주실 테고."
"…물론이다. 그분의 뜻과는 관계없이, 공허의 힘에 취해 타락한 전사들을 여럿 보았지. 몇몇은 끝내 마족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래서 과거엔 은밀하게 태초의 야성을 섬기는 전사들을 멸시했었다. 이기적이고 나약한 것들이라 여겼지. 하지만…."
샬롯이 낮게 가르릉댔다.
"이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는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그녀가, 고해성사하듯 말을 이었다.
"대륙의 어둠과 맞서는 네게,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라면 내 갈등을-"
"잘 고민해 보고 결정해라."
"깔끔하게… 뭐라고?"
샬롯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잘 고민해 보고 결정하라고."
"…진심이냐?"
"나는 네가 충분히 네 몫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네가 갈증을 느낀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지. 내가 막는다고 사라지지도 않을 테고."
이안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샬롯이, 이윽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진심이구나, 이안."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네가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북부의 대전사이며… 교단의 성자인 백금룡의 대행자니까…?"
"그게 그들을 섬긴다는 뜻은 아니지. 난 그 누구도 섬기지 않아."
"...! …그래, 하긴. 이안, 너는 마법사이기도 했지."
눈을 치켜떴던 샬롯이 이윽고 뒤늦게 깨달은 듯 중얼댔다.
마법사이기도 한 건 뭐야. 그게 본업인데.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게 이 세계의 신들은 이용할 대상에 불과했다. 한때 데이터 쪼가리였던 것들을 섬길 생각은, 여전히 추호도 없었다.
그저, 필요하다면 어떤 힘이라도 이용할 뿐이었다.
혼돈의 파편을 품었듯이.
"나는 네가 누굴 섬기고 어떤 힘을 다루든 상관없다. 네가 자신을 잘 통제하기만 한다면.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것뿐이야."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샬롯의 주황색 눈을 마주 보았다.
"네가 광기에 물든 마수가 된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죽일 거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돼."
"...."
샬롯의 눈빛이 일렁였다. 갈등과 안도가 뒤섞인듯한 묘한 눈빛.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건, 알려주지."
"그러던가."
육포를 입에 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샬롯이 덧붙였다.
"하나만 더 묻겠다."
"또 뭐."
"아직도 내가, 전사보다 암살자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그걸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냐.
피식 웃은 이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
관도 좌우로 숲이 울창해졌다.
마차가 완만한 비탈길을 올랐다.
'그래도 늦진 않았네.'
이안은 벗어두거나 느슨하게 풀어 뒀던 장비들을 하나씩 제대로 착용하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여유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촉박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슬슬 마차를 세울 곳을 찾아 보겠다."
샬롯이 내뱉었다.
이안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강철 장화의 종아리 부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다.
곧 마차가 길 한쪽의 공터로 빠졌다. 이파리 하나 없이 길쭉하게 솟은 잿빛 나무들 저 너머, 분간하기 어렵게 빼꼼 튀어나온 망루가 언뜻 보였다.
곧 마차가 멈췄다.
"분명 도망쳐 나오는 놈들이 있을 거다. 말을 잘 지켜."
"그러겠다."
이안의 말에 대꾸한 샬롯이, 전투 도끼를 벗어 놓고 훌쩍 뛰어내렸다. 고정용 줄을 든 그녀가 근처의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많이 몰려 와도 단 한 놈도…."
산기슭을 타고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 그녀가 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피 냄새다. 이안."
"...?"
견갑을 조절하던 이안이 멈칫했다. 숨을 들이켰지만, 그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줄을 툭 떨군 샬롯이 몸을 돌렸다.
"저 위쪽 같은데. 확인하겠다."
그녀가 훌쩍 몸을 날렸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느낌이 쌔한데.'
곧 마차에서 내린 그가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저 위에서 샬롯이 손을 들었다.
"여기다, 이안."
그녀가 맡은 피 냄새의 근원지가 가까워졌다. 당연하게도 시체였다. 다만 하나가 아니었다. 전에 그들과 싸웠던 것과 비슷한 복장의 남자 넷이, 내장을 쏟아내거나 머리가 쪼개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타임 어택인가 했더니….
"선객이 있었군."
#129화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놈들이다. 아직 벌레도 꼬이지 않았어."
"보아하니 칼도 좀 쓰는 놈이고."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놈을 빼앗길 순 없지. 계획 변경이다. 마차 잘 묶어 놓고 따라와."
"...?! 알았다!"
달려 올라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눈을 치켜뜨며 바라본 샬롯이, 곧바로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사이에도 이안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어쨌든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예 늦진 않았을 것 같은데.'
곧 거대한 산채의 전경이 드러났다.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목책이 성벽처럼 펼쳐지고, 망루도 규칙적으로 솟아 있었다. 그 너머,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이어진 목조 건물들의 지붕이 보였다.
거주 시설까지 완비된, 훌륭한 목조 요새였다.
망루가 텅 비어 있다는 것만 빼면.
그래도 아예 늦진 않았으리란 예상은, 다행히 현실이 되었다.
저 멀리, 아직도 소음이 번지고 있었으니까.
'누군진 몰라도….'
이안은 반쯤 열린 정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피 냄새와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
'자신감이 대단한 놈들이군. 정면 돌파라니.'
죽음의 행렬은 통나무 집 사이의 굽이진 길을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은 선객들의 배포에 내심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선 시체들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었다.
여러 번 찔린 흔적이 있는 비교적 멀쩡한 시체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목이 잘리거나 내장을 철철 흘리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가로나 세로, 대각선을 가리지 않고 쪼개지거나 아예 토막 난 시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 단칼에 그렇게 된 게 분명했다.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한 것 같았다. 수수깡처럼 부러진 검과 빗나가 박힌 볼트가 곳곳에 보였다.
"살육이 펼쳐졌었군…."
뒤이어 마을로 들어선 샬롯이 감탄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렇다고 다 죽인 건 아니야."
이안은 건물 사이의 길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그 뒤를 따르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건물 내부의 숨죽인 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나치는 거의 모든 건물 안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달려드는 놈들만 죽이면서 올라간 거군."
"그래. …인간 타락자 할 것 없이 전부."
은은하게 번지는 소음의 근원지로 올라가면서, 이안은 널브러진 시체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도적 기사를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안 되면 힘으로라도 빼앗을 생각이니, 먼저 온 놈들의 실력을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푸확-!
"...!"
이안의 눈이 커진 건, 오르막길을 반 이상 올랐을 때쯤이었다.
저 멀리, 욕설과 고함이 번지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의 창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놀람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 그래. 누군가 했더니."
그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스쳤다.
선객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왜 보자마자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방에 이만한 칼 솜씨와 무모함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을 리 없건만.
"아는 자들인가?"
뒤따르던 샬롯이 물었다.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
말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았다.
콰장창 하는 굉음과 함께, 목조 건물 2층의 벽면을 뚫고 누군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건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였다. 투구만은 걸치지 않은 채였다. 벌떡 일어난 그가 자신이 부순 벽면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다들 당장 저 미친 새끼를 막아! 그렇게 겁먹은 표정으로 보지 말고, 이 병신들아! 그래…! 내가 네놈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지!"
소리치는 그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기다란 대검을 뽑아 든 그가, 검을 벽면의 구멍을 향해 내뻗었다. 날을 타고 오염된 마력이 번져 나갔다. 건물 내부에서 크고 작은 비명이 잠깐 울리더니, 뒤이어 가래가 끓는 듯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넌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이 개자식아-!"
"호오…."
걸음을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비로소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만나자마자 2페이즈인 거군…."
중얼대는 그를, 옆에 선 샬롯이 돌아보았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저놈이 우리 목표물이란 얘기지."
북부 전사의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이안이 옆을 턱짓했다.
"저놈은 내 거다. 넌 정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놈들을 맡아. 대신 이 강도들이랑 싸우는 자들은 절대 건드리지 마라.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는 특히."
"염려 마라.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내뱉은 샬롯이 훌쩍 몸을 날렸다.
담장을 박차고 가볍게 지붕에 착지한 그녀가 멀어졌다.
네가 죽을까 봐 한 말인데.
생각하며, 이안은 부러진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서 꺼내 들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저 도적 기사는 부하들을 희생시켜 도망치려는 게 분명했다. 저긴 건물 끝 쪽이니, 달려서 도망치거나 정문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자신 쪽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마구간을 지나쳤으니까.
'본진이 털리고 있는 것 치고 제한 시간이 넉넉하다 싶더라니. 저놈이 도망쳐 나가는 시간까지 포함이었던 거네.'
하긴. 도적 기사는 게임에서도 불리하면 도망 다니던 놈이었다. 재생력이 아주 뛰어나서, 궁지에 몰리면 부하들을 불러 모으고 도망쳐 체력을 회복하곤 했었다.
'그런데, 상태 창이 어떻게 이걸 미리 알고 제한 시간을 둔 거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이 뒤를 이었다.
예지력이라도 있는 걸까? 그보단 차라리 이 상황이 게임에서도 똑같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때도 제한 시간이 지나서,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친 서브 퀘스트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번에는 운 좋게 타이밍을 딱 맞춘 것이리라.
'이미 서브 퀘스트를 몇 개쯤 놓쳤으리란 뜻도 되겠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도적 기사가 그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보라색 광망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응시한 그가, 이윽고 물었다.
"넌 또 뭐냐?"
"널 죽일 사람."
"그 부러진 칼로?"
"널 죽이는 건 이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안의 태연한 대답에, 도적 기사의 얼굴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들이… 날 아주 우습게 보는군. 오냐. 죽여 주마, 이 고블린 똥 같은 새끼야!"
고오오- 그의 전신에서 오염된 마력이 휘몰아쳤다. 뿌득대는 섬뜩한 소리가 갑옷 아래에서 이어졌다.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혈관을 내달리고, 바람 칼날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전투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변이 중인 도적 기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이안이 훌쩍 솟구쳤다. 머리 위로 부러진 단죄의 검을 치켜드는 가운데, 지붕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얼핏 드러났다.
"괴, 괴물-! 살려 줘…!"
문을 박차고 나오는 두 놈.
끔찍한 몰골로 변이된 하수인들을 보고 혼비백산해 도망친 것이리라. 여기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셈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괴물은 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콰직-!
옆 건물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샬롯이 한 놈의 머리를 쪼갰다. 옆의 놈은 눈을 치켜뜬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암살자가 딱이라니까.'
"이 버러지야! 어딜 보는 거냐?"
도적 기사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놈의 변이는 말단 하수인들처럼 끔찍하고 요란하지 않았다. 갑옷이 버틸 수 있을 정도만큼만 덩치가 커졌고, 얼굴 전체에 보라색 핏줄이 돋아났을 뿐이었다.
온통 검보랏빛으로 변한 눈동자가, 가까워지는 이안을 똑바로 노려 보았다.
"겁대가리 없는 놈! 그대로 똥구멍까지 꿰어 주마!"
소리치며, 놈이 손에 든 검을 치켜들었다. 날이 기다란 대검을 한 손 검처럼 내뻗고 있었다.
"이래야 네가 안 튈 것 같아서."
내뱉으며, 이안은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솨아아아-
십자막이를 타고 푸른 빛이 번졌다. 날이 멀쩡하던 과거와 달리, 신성력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부러진 날의 단면 위로 치솟았다.
"뭣…?!"
도적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놈이 내뻗었던 팔을 황급히 당기는 가운데, 이안이 검을 내리쳤다.
푸른 궤적이 거칠게 대기를 갈랐다.
카드드득-!
앞을 막아선 대검 날을 불길처럼 넘실대며 지나친 신성력이, 도적 기사의 몸을 세로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놈의 발치에 착지한 이안이, 가랑이 사이를 굴러 지나치고는 멈춰 섰다.
푸-확-!
한 박자 늦게 피가 치솟았다. 쩍, 좌우로 갈라진 놈의 머리와 상반신이 지저분하게 벌어졌다.
'위력 자체는 부러지기 전보다 더 세진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빛이 잦아드는 검을 고쳐 쥐었다.
꿈틀꿈틀, 놈의 잘린 단면이 부풀면서 이어 붙고 있었다. 신성력에 타들어 가면서도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그… 그극…."
바퀴벌레 같은 놈.
이안은 놈의 등을 향해 남은 신성력을 모조리 뿜어내고는 단죄의 검을 아공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북부 전사의 검을 뽑아 들며 다시 한번 솟구쳤다.
쉬학-!
바람 칼날을 머금은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카가각, 쇠를 긁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목덜미가 깊이 패였다.
"그… 아, 윽…."
안 잘릴 줄이야. 혀를 찬 이안이, 그대로 놈의 등을 힘차게 박찼다. 도적 기사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다시 놈에게로 달려갔다.
안 잘리면 잘릴 때까지 잘라 주면 그만이었다.
콰직! 콰직!
이안은 재생 중인 놈의 목을 도끼질하듯 내리쳤다. 꾸물대며 끝까지 버티던 머리가 끝내 떨어져 나갔다. 이안은 데구르르 굴러가는 놈의 머리에 비로소 화염구를 한 발 쏘아 보냈다.
그 와중에도 다시 이어 붙으려 꾸물꾸물 번지던 살점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부들부들 떨리던 놈의 몸이 이윽고 축 늘어졌다.
퀘스트 완료 창이 뒤를 이었다.
창을 닫아 버리며, 이안은 익은 고깃덩어리가 된 머리와 축 늘어진 몸통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도적 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벌레 같은 최후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노른자만 쏙 빼먹었네.'
생각하며, 이안은 검을 회수했다.
옆의 벽면에 기댄 그가, 소란이 이어지고 있는 목조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선 괴성과 비명,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빛이 순간순간 번쩍였다.
굳이 도우러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기만 해도 충분하리라.
뻐억-!
얼마 지나지 않아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적 기사가 부쉈던 벽면에서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튕겨 나왔다.
"그… 으윽…!"
근육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변이된 하수인이었다. 바닥을 한 바퀴 굴러 멈춰선 놈의 움푹 파인 가슴팍이, 뼈 소리와 함께 다시 부풀어 올랐다.
부서진 벽면 너머로 낮게 깔린 붉은 신성력이 번진 건 그 직후였다.
곧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그 너머로 튀어나왔다.
피처럼 붉은 궤적이, 쓰러진 타락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직!
검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비대한 몸을 짓밟으며 착지한 붉은 기사가, 그대로 자루를 놓고는 주먹을 들었다.
콰직! 콰직!
신성이 맺힌 강철 주먹이 하수인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주먹질은 놈의 머리가 곤죽이 되고서야 비로소 멈췄다. 거친 숨을 내쉬며 일어선 붉은 기사가 가슴팍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 묻은 피를 휙 털어내며 몸을 돌린 다음 순간.
"...!"
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전에 봤던 카르하의 성상처럼, 신성을 머금은 기사의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얼어붙은 시선을 마주한 이안이 비로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때였다.
"으, 으악-?!"
뻥 뚫린 벽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벽면 끝에 간신히 멈춰선 갈색 머리의 청년이, 검과 방패를 볼썽사납게 펄럭이고 있었다.
뛰어내리려고 달려왔다가 마지막 순간에 겨우 멈춰선 모양이었다.
이윽고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그가, 검을 회수하며 쪼그려 앉았다.
하반신부터 건물 밖으로 내밀면서, 그가 주절댔다.
"아니, 여기서 어떻게 그렇게 뛰어내리신 겁니까? 읏… 어라…? 나리,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밑에서 저 좀 받아 주세요…!"
낑낑대며 벽면에 매달린 종자가 이윽고 소리쳤다. 그가 여전히 굳어 있는 기사를 돌아보았다.
"나리? 안 들리십니까?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마시고…. …그런데 뭘 그렇게 멍하니 보십니까?"
종자가 비로소 기사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의심하듯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이윽고 종자,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안 나리…?!"
#1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