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이안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재정비 겸 휴식에 들어선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루 사드와 장벽 요새의 소식을 기다리며, 지난 여정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마냥 늘어져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할 건… 해야지."
이안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물 위를 소리 없이 헤엄치던 늪지의 원한이 쏜살같이 그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홀로 목욕할 때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안은 몸의 물기를 닦으며 텅 빈 방으로 나섰다. 본래는 트루드가 쓰던 여관에서 가장 큰 방.
이안의 시선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옷과 장비들을 훑었다.
"방금 씻었는데…."
입맛을 다시면서도, 그는 기계적으로 옷가지들을 걸치기 시작했다.
대부분 새로 산 것들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오늘은 페르마 사제를 만나야 했다. 트라벨가에 도착한 다음 날 교회를 방문했지만, 그를 바로 만나지는 못한 것이다.
평사제가 대신 나와 용무를 전해 듣고 서신들까지 받아 든 채로 돌아갔고, 하루가 지나서야 만남을 요청하는 답신이 도착했다.
유물의 보증이 확실하고 소유권도 인정하겠으니, 유물을 감정하고 처분에 대해 논의하자는 내용이었다.
'논의할 게 뭐가 있다고.'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혹시나 했건만. 페르마도 다른 사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작자가 분명했다.
루카스의 소개를 받았으니, 이안 역시 신실하고 등쳐 먹기 좋은 기사이리라 여긴 것일지도 몰랐다.
'뭐… 사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도 크게 상관없긴 하지만.'
두툼한 누비옷 위로 새로 산 사슬 갑옷을 걸치며,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속 편한 결말이기도 했다.
루카스 덕에 귀찮은 과정을 다 생략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아무리 후려쳐도 금화를 수십 개는 줄 테니까. 지금 가진 돈까지 더하면, 제국에 발을 들일 때까지는 충분히 쓰고도 남을 터였다.
그 이후의 돈 걱정은 어차피 할 필요도 없었다.
하비에르에게 얻은 강철 금고의 열쇠가 있으니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금고 안에는 수수료를 떼고도 칠백 개가 넘는 금화가 잠들어 있었다.
거기다 사제를 잘못 건드렸다간 아주 귀찮은 부작용도 뒤따랐다.
교단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기본이고, 수배령이 내려지거나 신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교단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좋지만, 다른 페널티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게임에선 한 번 죽으면 풀렸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하여간, 여러모로 짜증나는 작자들이었다.
퍽 하면 교단을 끌어들이는 그들에 비하면, 머리를 열어보겠다고 달려드는 마법사 쪽이 차라리 뒤끝이 없었다.
'입씨름할 생각만 해도 벌써 피곤하네. 씁….'
단죄의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은, 이윽고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내부의 왕관을 확인한 그가, 비로소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어… 그… 안녕하시오."
그의 등장에 복도를 어슬렁대던 몇몇이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복수하겠답시고 나서는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용병들은 다들 그를 두려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겐 악마나 다름없던 샬롯이, 그에겐 말대꾸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거기."
이안이 툭 내뱉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용병들이 멈칫댔다.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다 싶은 놈, 와서 이거 들어라."
"…예."
찰나의 눈치 싸움 끝에, 한 놈이 달려왔다. 얼굴 한쪽이 아직도 부어있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샬롯과 싸운 놈들 대다수는 강냉이 몇 개 털린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방에 몸져 누운 놈들의 앓는 소리가 복도를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물론 이안은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시비를 건 것도 날붙이를 들고 덤빈 것도 저쪽이었으니까.
"떨어뜨리거나 엎으면 네 인생도 그렇게 된다."
봉인함을 받아드는 이 놈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앳된 얼굴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싹수가 노랗다는 뜻이었다.
"예, 예…!"
보아하니 이놈은 조만간 그만 두겠네.
바싹 얼어붙은 얼굴을 보며 내심 콧방귀를 뀐 이안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
흐릿하게나마 빛이 내리쬐는 대낮의 주점은 밤과 달리 고요하고 고즈넉했다.
"식사 금방 내올게요."
기다렸다는 듯 말한 여급이 주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이 온 이래로 주점의 분란이 사라진 덕에, 주인장과 여급 모두 이안 일행을 아주 좋아했다.
피식댄 이안은, 이내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앉은 테이블에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군. 듣기론 한 시간이 기본이시라던데."
덩치 큰 북부인 용병, 트루드였다.
"그러게. 빨리 나왔네, 이안."
안대를 한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샬롯이 매일 쥐를 잡아다 준 덕에, 낮임에도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던 샬롯도 고개를 들었다.
이안에게 눈인사를 건넨 그녀가, 뒤따라 온 용병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는 지금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방어구는 말 그대로 넝마나 다름없는 상태여서, 새로운 물건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는 신체 구조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쓰는 몇몇 방어구는 맞춤으로 제작해야 했다.
그렇다고 기존의 물건들을 버리거나 팔아 넘긴 건 아니었다.
샬롯은 본래 쓰던 장비를 방에 잘 모셔 두었다.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닐 거라는데, 그녀의 성격상 빈말은 아닐 터였다.
어쨌건, 샬롯의 무장 여부는 그녀에게 두들겨 맞은 녀석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였다.
"좋은 시간… 되십쇼."
남은 의자에 봉인함을 공손하게 내려놓은 녀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장내에 남은 건 그들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일찍 나오신 모양이군. 교회로 가신댔지…."
봉인함을 바라보며 중얼댄 트루드가, 자리에 앉은 이안을 힐끔댔다.
"이 안에 뭐가 들었기에 교단에 들고 가시는 거요?"
"모르는 게 네 신상에 좋을걸."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샬롯도 고개를 끄덕였다.
"귀쟁이 말이 맞다. 주제넘은 호기심은 명을 단축하는 법이지."
"...."
트루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여급이 식사를 대령한 건 그때였다. 계란과 구운 고기, 따듯한 스튜와 독한 술 한잔.
"충분해. 가서 쉬어라."
대낮부터 술이라니, 좋군.
술잔부터 집어 든 이안이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기다리던 이유나 말해 봐. 루 사드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고 왔냐?"
"맞소. 이 두 분께는 좀 전에 대충 말씀 드렸소만."
트루드가 냉큼 입을 열었다.
"루 사드도 전쟁을 선포했단 얘길 들었소. 이제 변방의 모든 왕국이 전쟁 중인 거요."
그가 말하는 사이, 테사이아는 다른 테이블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샬롯은 다시 음식을 씹으며 맹하니 자신만의 생각에 잠겼다.
턱을 긁적인 트루드가 덧붙였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오. 다른 나라들도 굳이 루 사드는 안 건드리고. 지금 전쟁에 끼어들어서 이득 볼 게 없어 보이는데 말이오. 윗분들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그렇겠지.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 자체가 목적일 테니까.
이안은 묵묵히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흡혈 일족은 루 사드의 백성들을 흑마법의 제물로 바치거나 하수인으로 만들고 있을 터였다.
전쟁보다 그런 짓거릴 눈에 띄지 않게 할 방법은 많지 않으리라.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아마도 그때는 테사이아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루 사드도 혼란스러워 지리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진혈의 여제는 그 사이에서 이안의 방문을 착실히 대비하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이게 어젯밤에 들어온 소식이오. 마침 그 근처를 거쳐 온 상인이 있어서 얘길 들었지. 불과 얼마 전 일이라더군. 이 얘길 끄집어내느라 술을 여러 잔 샀소."
"...."
고기를 우물대면서, 이안은 트루드를 쓱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재빨리 미소 지었다.
"달란 얘긴 아니오. 형씨 덕분에 나도 좋은 정보를 미리 알았으니까. 결국엔 다들 알게 되겠지만, 미리 대비하는 쪽이 언제나 한 푼이라도 더 버는 법이잖소."
"전쟁이 커져서 좋은 모양이군."
"왜 아니겠소? 혼란이 커질수록 우리 몸값도 오를 텐데. 줄만 잘 잡으면 금화를 궤짝으로 받을 수도 있을 거요."
그래, 그러시겠지.
싸늘하게 코웃음 친 이안이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라."
"몇 개만 묻고 가겠소."
"뭐."
"그쪽들은 루 사드로 가실 거요?"
"글쎄. 아마도."
"전쟁에도, 참전하시고?"
이게 본론이군.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건조한 눈으로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어떨 것 같냐?"
"흠… 그래. 하긴. 댁들이 귀족들 비위 맞추면서 촌놈들이나 찔러 죽이고 다닐 것 같진 않소."
움찔한 트루드가, 이윽고 혼자 납득한 듯 중얼댔다.
"그럼, 일 잘 보시오. 난 올라가서 좀 자야겠소. 아침까지 마셨더니 피곤하군."
능청스럽게 내뱉으며 일어선 그가 쌩하니 멀어졌다.
…저런 것들이 죄다 모여서 서로 죽여 대다가 그 사달이 난 건가.
트루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한 이안이, 이내 시선을 거두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게임에서 본 대로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면, 저것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다고 말릴 생각은 없었다.
저들의 선택이니까. 그가 나설 명분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죄다 죽어 나가는 거지.
생각하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샬롯에게서 멈췄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냐?"
이어진 말에 그녀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별 것 아니다. 오늘은 교회에 네 시종 자격으로 동행하는 거니까."
그녀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널 소개할 문구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을 꾸미는 건… 어렵군. 네 전 시종들은, 말재간이 대단한 자들이었어."
"...."
뭘 그렇게 고민하나 했더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이안은, 이내 턱을 긁적였다.
딱 질색하는 짓이긴 했지만.
이번 같은 경우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용도로.
"…이왕 할 거면, 네 장기를 조금 더 살려 볼 생각은 없냐?"
이안이 포크를 놓으며 말했다.
샬롯의 눈을 마주 본 그가, 옆의 계단을 턱짓했다.
"일단 올라가서, 갑옷부터 걸치고 와라."
"...?"
***
"…늪지대의 용 사냥꾼."
이안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교회. 개인 집무실에서 이안을 맞이한 페르마 사제의 능글맞은 미소는, 뒤따라 들어온 중무장한 수인을 본 순간 굳어졌으니까.
그녀가 책상 위에 봉인함을 내려놓자 어깨를 떨기까지 했다.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아겔 란의 마물 참수자."
샬롯은 그런 사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주파 섞인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아겔 란의 구원자이자 벨 론데의 학살자. 불씨의 운반자이자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며…."
페르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불과 1분 남짓이면 충분했다.
"…거인 왕국의 종지부를 가져온 징벌자이자, 하얀 악마를 참살한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이안 호프 경입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기나긴 소개가 마침내 끝났다. 철컥, 봉인함의 뚜껑을 여는 샬롯의 손끝에 날카로운 손톱이 반짝였다.
페르마를 바라보며 흐릿하게 미소 지은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설핏 드러난 송곳니를 빤히 응시하던 페르마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선 이안이 비로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으로 페르마를 빤히 바라볼 뿐.
페르마는 그제야, 무시무시한 건 수인의 목소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카스가 쓴 서신에는, 방금 그가 들은 내용의 반도 담겨있지 않았다.
"훌… 륭한 업적을 많이 쌓으셨군요, 이안 경."
이윽고 페르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부분 피로 쌓은 업적이니, 자랑스러울 일도 아니오. 기사도 아니니 경이라 부르실 필요도 없고."
물론 내용까지 부드럽진 않았다.
페르마의 어깨가 다시 한번 굳어졌다. 이안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감정은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사제님."
"...!"
그제야 페르마의 고개가 득달같이 봉인함 쪽으로 돌아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들을 마주 보느니, 이 왕관을 들여다 보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루카스 경이 말하길, 사제님이라면 공정하게 감정해 주실 거라더군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이안과 그의 바로 뒤에 선 샬롯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페르마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던 그가, 이윽고 감정서에 숫자를 재빨리 휘갈겨 내밀 때까지.
***
'이게 되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은 다시 한번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교회에서 받아낸 금화는 백 오십 개였다. 강철 금고의 열쇠를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떨어진 이래 가장 큰돈을 얻은 셈이었다.
"…사제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군."
합류 이래 최대의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샬롯은 정작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루 솔라의 신도라더니. 그녀에게조차 사제는 존중의 대상인 모양이었다.
"네가 한 건 최선을 다해서 날 소개한 것뿐이야. 협박을 한 것도,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지."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사제님이 멋대로 겁먹는 것까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루 솔라께서 도우셨다고 생각해라."
"음… 그래. 틀린 말은 아니군."
혀를 날름대는 샬롯을 돌아보며, 이안은 기분 좋게 주점의 문을 열었다.
가장 비싼 술을 몇 모금 마시면, 그녀도 루 솔라의 은총에 감사하게 되리라.
"...?"
분위기가 묘하다는 걸 깨달은 건, 장내로 몇 걸음을 들어섰을 때였다.
묘한 표정의 용병들.
이안의 표정 역시 묘해졌다.
"이안! 야옹아! 여기 봐!"
소리치며 손을 흔드는 테사이아의 옆으로, 북부 야인 전사 몇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켈과 합죽이 입이 된 발레리를 비롯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었다.
"대전… 아니, 이안 님…!"
다가오는 이안과 눈이 마주친 전사들이 차례로 고개를 까딱이며 예의를 표했다.
이안은 이윽고 아스켈을 마주 보았다. 평소처럼 무덤덤해 보이지만 다소 굳은 얼굴.
그래.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니군.
생각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멈춰 선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냐?"
#111화
"한 시간쯤 됐습니다."
아스켈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안이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얼마 전이건만. 이안은 녀석의 얼굴이 묘하게 더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덩치도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이러다 금방 다른 놈들처럼 우락부락해지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이주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정착지에 저희가 쓸 공간을 마련해 뒀더군요. 이안 님께서 다녀가셨단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 잘 됐군."
"정착지의 전사들이 이안에게 도전했었다. 물론 전부 두들겨 맞았지만."
전사들과 반가움의 눈빛을 주고받던 샬롯이 덧붙였다. 발레리와 눈빛을 교환한 아스켈이 피식댔다.
"저희도 들었습니다. 뭐든, 직접 겪어 봐야 믿을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무튼…."
아스켈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저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모두?"
"예. 설원 지대를 지나는 동안 마물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거든요. 다들 카르하께서 지켜주셨다 여겼지만, 글쎄요. 제가 볼 땐 여러분들이 저희가 갈 길을 미리 정리해 주신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다들 감사하고 있지만요."
어깨를 으쓱인 아스켈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이주를 하지 않았거나 조금만 늦었다면, 저희 모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거든요."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대는 사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스켈이 입을 열 찰나였다.
"그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군."
이안이 말을 자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듣던 용병들이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2층에 있는 놈들 전부 내려보내."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스켈을 제외한 나머지 네 야인 전사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덧붙였다.
"아스켈과 오붓하게 대화하고 싶은데. 아무도 2층에 못 올라오게 계단을 지켜 줄 수 있겠나?"
"예…!"
전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발레리가 맡겨만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 이제 눈빛에 잔머리 굴리는 게 안 보이네.
이안이 낮게 피식대는 사이.
우당탕-
계단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을 둘러업은 용병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
부상자의 숫자가 수상할 정도로 많다는 걸 깨달은 듯, 전사들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샬롯과 테사의 작품들이다. 난 구경만 했어. 올라가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는 그를 향해 여급이 재빨리 덧붙였다.
"술 한 병 올려 드릴까요?"
"좋지."
대답하며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튕긴 이안이, 소란스러운 장내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야인 친구들 식사도 챙겨주고, 여기 있는 놈들한테도 전부 술 한 잔씩 돌려."
***
"확인 끝났어. 계단 앞은 덩치들이 지키고 있고."
여급의 뒤를 따라 들어온 테사이아가 침대에 펄쩍 뛰어올랐다.
샬롯이 마주 앉은 이안과 아스켈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여급은 능숙하게 술병과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이안은 아스켈이 쥐려는 잔을 빼앗아, 그 안에 물을 채우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하려던 얘기나 해봐라."
"…예."
고개를 끄덕인 아스켈이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이안 님이 떠나시고 한 주쯤 지나서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불만이 많았죠. 물건들을 많이 버리고 왔거든요. 영감님은 들은 척도 안 하셨지만요."
노인네, 어지간히 밀어붙인 모양이군.
우르드를 떠올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장벽 요새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엔, 불만을 가지던 사람들도 오히려 영감님께 감사하게 됐습니다."
아스켈이 천장에 등잔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이안과 샬롯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북쪽 저 먼 하늘에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했거든요. 눈보라가 칠 건 알았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래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죠. 밤이 밀려오는 것처럼요."
"...?"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현상 같진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희 마을도 그 어둠에 삼켜졌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 안에 계속 있었다면 좋은 꼴을 보진 못했겠죠."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에선 그런 걸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용의 마법인가.'
이름 모를 고대의 용이 깨어났으리란 건, 망령들이 산맥으로 집결 중이란 얘길 들었을 때부터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여왕과 악마가 모두 죽은 이상, 거인 왕국의 망령들을 지배할만한 건 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놈의 존재 자체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어쨌건 당장 놈과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괴물이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으니까.
게임에서 그가 다른 용과 싸운 건, 3 챕터 막바지 무렵이었다.
그놈은 형벌에 가까운 봉인을 당한 터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약점도 훤히 노출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끔찍하게 강했다.
이안에게 가장 많은 게임 오버 화면을 선사한 보스 중 하나일 정도였다.
심지어 약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데미지를 입힐 수도 없었다.
물리 저항은 물론 속성 저항력도 엄청나게 높았으니까.
그러니 2 챕터에 불과한 지금 용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형평성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퀘스트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어쨌건 거인 여왕은 엄연히 게임에도 존재하던 보스였으니까.
하지만 용이 모종의 마법으로 망령 군단을 지원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전개였다.
물론 이것도 이안의 예상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거인 여왕을 죽였으니, 그 나비 효과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조건부 보스를 죽였는데 메인 퀘스트가 오히려 더 어려워질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하냐고….'
게임에서도 이랬던 거라면, 제작자는 악마 같은 새끼였을 게 분명했다.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치면서 쾌감을 느끼는.
'하긴. 애초에 그런 요소가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이런 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이안이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는 사이, 아스켈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관문 요새에서, 이안 님을 알고 있다는 분도 만났습니다."
"…루카스 경?"
"예. 아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곧 카링기온으로 갈 거라 했었는데."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 운이 좋았다고요. 저희가 도착했을 때, 그분은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거든요. 아무튼, 이안 님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경고하신 바가 현실이 된 것 같다고. 최대한 대비해 두었으니, 염려 마시라고요."
"흠…."
이안은 침음을 삼키며 술잔을 들었다.
그가 경고한 건 정신 나간 망령 군단이지, 알 수 없는 마법과 함께 밀려오는 망령 군단이 아니었으니까.
"…느낌이 좋지 않군."
묵묵히 듣던 샬롯이 읊조렸다.
동의하듯 그녀를 돌아본 아스켈이 입을 열었다.
"저도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쯤, 그 먹구름이 장벽에 닿았을지도 모르고요. 물론 장벽이 뚫리는 일은 없겠지만…."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아스켈은 물론 샬롯도 잠시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장벽 요새가 함락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스켈이 이윽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어쩌면. 아마도."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
"내가 왜?"
"...?"
아스켈의 어리둥절한 시선에, 이안이 나지막히 코웃음을 쳤다.
"난 일개 용병일 뿐이야. 그런 거대한 문제는 자치령에서 해결할 일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카링기온에 주둔 중인 군단이 절반만 나오더라도, 망령 군단 따윈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정말 북부가 위험해진다면 제국에서도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스켈을 안심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원이 오더라도, 북부가 난장판이 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면, 대비해야지. 너희 터전을 지킬 수 있도록."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물론 내게 의뢰한다면 거절하진 않을 거야. 너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탁, 술병을 내려놓은 이안이 아스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어쩔 테냐?"
"...."
이안의 눈을 마주 보며 잠시 입을 뻐끔댄 아스켈이,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군요. 이안님 덕분에 목숨을 구해놓고, 또 당연하게 의지하려 하다니. …새로운 터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시 떠날 수는 없죠."
읊조리듯 말한 그가, 이윽고 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희는 저희대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습니다. 만약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이안님께 의뢰하는 건 그때 다시 고민해 보겠습니다."
냅다 받아들여서 퀘스트가 생길 줄 알았더니. 헛다리 짚었군.
생각과 달리, 이안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물론 그는 망령 군단과 싸울 생각이었다. 다만 거기에 정의감이나 사명감 같은, 어떤 거창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싸우려는 건 그저, 퀘스트와 경험치 때문이니까.
'기다리다 보면 뭔가 굴러들어오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생각하며 술잔을 비운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출하군. 내려가자."
"…예."
아스켈과 야인 전사들은 다음 날 오전 곧바로 정착지로 돌아갔다.
다급한 얼굴의 파발이 트라벨가를 가로지른 건, 그로부터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상인들이었다. 내성으로 들어간 파발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것인지 알려지기도 전에, 그들은 채비를 꾸려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상인들은 위험을 돈 냄새만큼이나 빠르게 감지하는 자들이니까.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저들의 생각은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 불바다에 휩쓸리는 건 피하고, 불이 다 타면 돌아와 그 사이에서 이문을 챙기려는 것이리라.
상인의 뒤를 이어 반응을 보인 건 용병들이었다. 그들 역시 트라벨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기 남아있다간 정체 모를 괴물들을 상대하게 될 테니까.
차라리 변방 전쟁에 합류하는 게 생존과 수익에 모두 유리하단 계산일 터였다.
그런 변화가 휘몰아치는 건, 이안 일행이 머무는 설산 두꺼비 여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오…."
정오쯤 느지막이 방을 나선 이안을 맞이한 건, 짐을 들쳐 맨 일련의 용병 무리였다.
밤중에도 우르르 눈치를 보며 도망을 나가더니. 오늘은 아예 죄다 짐을 싸서 방을 빼고 있었다.
"야, 임마. 골론, 진짜 날 두고 그냥 가는 거냐?"
"미안하게 됐다. 그렇다고 걷지도 못하는 널 업고 그 먼 길을 갈 수는 없잖냐. 걱정 마. 방위군도, 팔다리 부러진 놈까지 동원하진 않을 테니까."
"이 의리 없는 새끼…! 그래, 썩 꺼져라! 촌놈들 눈먼 칼에나 맞아 뒈지길 루 솔라께 기도하마!"
"축복 고맙군. 잘 살아라."
아주 의리가 넘치고 훈훈하네.
복도 곳곳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촌극을 한 귀로 흘리며 가로지른 이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점도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낸 용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장, 정말 같이 안 갈 거요? 지금 결정 안 하면, 우린 이대로 조시프네 패거리로 붙을 거요."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고, 그냥 같이 가자니까? 당장 내일부턴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게 될 수도 있다고."
몇몇 용병들이 말을 건네는 건, 구석 테이블에 앉은 트루드였다.
놀랍게도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술만 마셔대고 있었다.
콧방귀를 뀐 트루드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개소리들 그만하고 빨리 꺼져라. 너희 아니라도 기분 개 같으니까."
"왜 그렇게 개 같은 건데?"
그의 건너편에 걸터앉으며 이안이 물었다.
바로 옆 테이블의 용병이 튕겨 오르듯 일어서 자리를 비켰다.
움찔한 건 트루드도 마찬가지였다.
야인 전사들이 다녀간 뒤로, 이안을 보는 그의 눈빛은 또 한 번 달라졌다. 무슨 역사에 나올 위인을 대하듯 어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북부의 대전사라는 말을 들은 것이리라.
"그게… 파발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건지 다들 알게 됐소."
주저하며 말한 트루드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여급이 새로 가져다준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장벽이 무너졌나?"
"...?!"
놀란 눈으로 술잔을 내려놓은 트루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소?"
#112화
"추측이다. 야인 전사들에게 북쪽이 심상치 않단 얘길 들었으니까."
"하… 어쩐지. 그날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난 또 오늘 아침에 새로 들어온 전령이 가져온 소식이라도 알아내신 건가 했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트루드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걸 미리 아시고서도, 왜 아직도 안 떠나고 계셨소?"
"그러는 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린 트루드가, 이윽고 하나둘씩 여관을 떠나는 용병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술잔을 들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북부인인 모양이오. 머리로는 저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는군, 시벌…."
"흠…."
이안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떠나는 용병들 사이에 북부인도 있긴 했지만, 어쨌건 남는 자들은 전부 북부인이었다.
돈벌레처럼 굴던 것들이 막상 북부에 문제가 생기니 남겠다니.
그야말로 모순된 짓거리였지만, 이안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뱉었다.
"들은 얘기나 해 봐."
"먹구름과 어둠이 장벽을 집어삼켰다더군. 그게 첫 파발이 들고 온 소식이오. 그자 말로는 일식이 일어나는 것 같았더군.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수없이 들렸다고 했댔소. 요새를 나와 말을 몰고 달리는 내내 계속. 장벽이 무너지는 걸 직접 보진 못한 모양이지만… 아마도… 시벌…."
술을 벌컥 들이킨 트루드가 덧붙였다.
"옛 북부 왕국들의 전설이 전부 사실이었던 거요. 정말 거인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망자 군단이 있었던 거지. 아… 북부의 초인이여…."
마지막엔 혼잣말처럼 탄식한 트루드가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안은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장벽 요새가 얼마나 버텼을지는 몰라도, 지금쯤이면 함락되고도 남았으리라.
"오늘 아침에 온 전령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건진 모르지만, 좋은 소식은 아닐 거요. 낯이 당장 뒈질 것처럼 파랬다니까."
"곧 알게 되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점을 떠나는 용병들을 눈에 담던 이안의 눈빛이, 이내 묘해졌다.
"…어쩌면 바로 알게 될지도 모르겠군."
"...?"
고개를 갸웃하던 트루드도 다시 주점의 문을 바라보았다.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짐을 꾸린 용병들을 경멸하듯 돌아보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이안에게서 멈췄다.
이안의 행색을 훑어본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혹시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거인 여왕의 징벌자인 이안 호프 경이 맞으시오?"
"...?!"
트루드를 비롯한 주변의 용병들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부르는 걸 보면, 교회에서 나온 작자인가?
"맞소만. 기사가 아니니 경이라 부르실 필요는 없소."
기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정한 여신께서 인정하셨는데 서임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반갑습니다, 이안 경. 저는 자치령 2군단에 소속된 기사, 밀드레드 아니스라고 합니다."
"반갑소, 밀드레드 경. 그런데, 무슨 일로?"
"경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말을 흐리며, 밀드레드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용병들이 눈을 돌렸다.
방금 내려와서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시발….
생각하며 작게 한숨 쉰 이안이, 트루드의 술병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올라갑시다."
***
"떠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역시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께선 다른 용병들과는 다르시군요.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꼬리를 흔들어 대더니, 정작 정말 북부에 위기가 닥치니 죄다 꼬랑지를 말고 도망치는 꼬락서니라니-"
"나도 다를 바 없는 용병이오."
이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떠들어대는 밀드레드의 말을 잘랐다.
밀드레드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가 잔에 술을 따르며 덧붙였다.
"내가 남아 있는 건 돈 될 일이 생길 것 같아서일 뿐이지. 지금 경과 마주 앉아있는 것도, 그래서고."
밀드레드의 입가에 억지로 빚은 미소가 번졌다.
"하, 하하… 들은 것처럼 단호한 분이시군요."
이안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얘긴 어디서 들으셨소?"
"교회에서 들었습니다. 페르마 사제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거인 왕국 최후의 여왕을 참수한 징벌자가 이곳에 있으니, 도움을 청하라고요. 엄청난 업적을 이룬 분이니 백인대에 버금가는 전력이 되어 주실 거라 했습니다. 용병들을 이끌 구심점이 필요하니까요."
비로소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아무래도 페르마 사제가 원한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이 도움이지,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에 그를 밀어 넣으려는 게 분명했으니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퀘스트만 있다면야.
'다음 전리품 정리도 그 사제를 찾아가야겠군. 거인 머리라도 들고 갈까….'
술잔을 들며 이안이 내뱉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오. 나 같은 일개 용병에게도 손을 벌려야 할 만큼."
밀드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그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젊은 기사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감정선이 들쭉날쭉한 언행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일 터였다.
"…혹시, 북쪽의 상황이 어떤지 들으신 바가 있으십니까?"
"대충은. 장벽이 어둠에 먹히고, 망자들이 울부짖고…."
"그렇다면 대화가 편하겠군요. 오늘 들어온 소식입니다. 장벽을 뒤덮었던 어둠이 남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너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상태는 아니겠죠. 앞으로 어둠에 덮일 도시와 요새들도 그럴테고요. 그러니까-"
"본론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본론만 간결하게 하시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나도 아니까."
"…울라프 대공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부정한 것들이 트라벨가 인근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고요. 해서 용감한 겔루드 장군이-"
이 자는 말을 짧게 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군.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하긴, 이런 미친 명령을 짧고 간결하게 설명하면 아무도 설득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경의 말은."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밀드레드의 장광설을 잘랐다.
"트라벨가가 아니라 길목인 벨리움 요새에서 망령 군단을 막을 거고, 병사가 부족하니 함께 싸우다 죽을 용병들이 필요하단 말씀이시군."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는 겁니다. 성벽이 함락될 것 같으면 퇴각할 거고요. 어쩌면… 망자들보다 지원군이 먼저 도착할지도 모르죠."
잠시 굳어졌던 밀드레드가 이윽고 덧붙였다. 목소리가 공허한 건, 그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이안은 낮게 실소했다.
사실 이 명령 자체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대공은 게임에서도 같은 명령을 내렸었으니까.
'그래놓곤, 정말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는 식이었지. 그 늙은 대머리 새끼.'
이안의 표정을 오해한 듯, 밀드레드가 재빨리 덧붙였다.
"이미 출정 준비를 거의 끝마쳤습니다. 늦어도 내일 오후에는 본대가 출정할 겁니다. 몇 시간 뒤에 용병들에게도 동원령을 내릴 예정이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이안 경께서 이룩한 업적은 들었습니다. 분명 큰 힘이 되어 주실 겁니다. 뜻을 함께할 용병들을 모아서-"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무려 두 개였다.
지원군 모집. 벨리움 항전.
루카스가 주던 퀘스트인데, 이런 식으로도 받을 줄이야.
생각하며 퀘스트 창을 닫은 이안은, 아직도 떠들고 있는 밀드레드를 바라보았다.
불안을 잊기 위해 필사적인 젊은 기사.
"밀드레드 경."
"루 솔라께서도 우리를- 예?"
"경도 함께 가시오?"
"…예."
"그럼 헛소리 그만 하시오. 경도 이게 죽으러 가는 거랑 다를 바 없단 건 이미 아시잖소."
"...."
밀드레드가 입을 몇 번 달싹였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피식한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러니 차라리 현실적인 제안을 하시오. 살아 돌아오면 받게 될 보수라던가."
밀드레드의 눈이 커졌다.
비로소 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이안 경께는 최소한 제국 금화 오십 개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경이 모집한 이들에게도 스무 개씩 드리겠습니다. 모두, 공평하게."
"최소라면 더 받을 수도 있단 건가?"
"공적에 따라서 충분히요."
"그래… 하지만 진짜 공평하려면 전부 오십 개씩 주셔야지. 어차피 살아 돌아와야 받을 수 있을 텐데."
"맞습니다. …그렇게 하죠. 교단의 지원이 있으니, 허락될 겁니다."
"그리고?"
"또요…? 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트라벨가의 병기고에는 제국 강철로 만든 물건들이 많다던데."
"…그건 군에 요청해야 될 일인데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없던 일이 될 계약인데. 그 정도도 자신 없으시오?"
"...."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된 밀드레드가, 이윽고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이안 경뿐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용병이 하나씩 받을 수 있도록요. …또 이 조건을 붙이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훌륭하군.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소."
"마지막… 절차요?"
"방금 한 계약을 문서로 써 오시오. 군단의 인장이나 교단의 인장까지 찍어서."
"...."
이렇게까지 하리라곤 예상 못한 듯 밀드레드가 입을 뻐끔댔다.
이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는 귀족이나 교단과의 구두 계약은 전혀 믿지 않았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의 계약은 특히나.
방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또 초대할 때 뜸 들이기만 해 봐. 이안한테 다 이를…."
샬롯에게 내뱉으며 들어서던 테사이아가 멈칫했다. 안대 두른 얼굴을 밀드레드 쪽으로 돌린 그녀가 덧붙였다.
"손님이 있었네."
"...."
밀드레드가 당황한 듯 둘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서 준비해 오시오. 의뢰는 그때부터가 시작이니까."
"…아!"
화들짝 일어선 밀드레드가 곧바로 방을 나섰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저거?"
"의뢰인이다."
그녀를 지나쳐 느긋하게 복도로 나서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이번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은 어디 가?"
"식사하러. 둘 다 따라와라."
***
어느새 주점은 고요했다.
트루드를 비롯해 말없이 앉아 있던 몇몇이, 이안의 턱짓에 두 말 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괜찮은 걸까요?"
음식을 놓으며 여급이 물었다.
그녀를 흘깃 올려다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여기 잘 붙어 있으면, 죽지는 않겠지."
"그렇겠죠?"
"아마도."
여급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주방 너머로 멀어지자, 테사이아와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거리 분위기 장난 아니야. 다들 축 쳐져서, 관문은 바글대고 병사들도 엄청 바쁘게 움직여."
"출진을 준비하는 것 같던데.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이해 안 되는 짓에, 내가 동참하게 됐다."
스튜를 퍼먹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샬롯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라고…?"
"방위군을 따라 벨리움으로 갈 거다. 용병들을 모아서."
"벨리움이라면… 그때 우리가 지나친 그 계곡?"
"그래. 너희는 자세히 알 필요 없어. 너희 둘은 이번 일에서 빠질 테니까."
이어진 말에 샬롯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빠지다니. 네가 가는데 내가 어떻게 빠진단 말이냐?"
"맞아. 우리 셋은 한 몸이잖아."
"한 몸은 너희 둘이지, 내가 아니라."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나무 수저를 테사이아를 가리켰다.
"몇이나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중 누군가는 이 녀석이 싸우는 걸 보게 될 거다. 그럼 뒷수습이 피곤해져."
"그럼 귀쟁이만 두고 가는 건…."
"알 텐데. 너희 둘은 한 몸이야. 네가 곁에 있어야 내가 안심하고 싸울 수 있을 거다."
"...."
샬롯의 입이 닫혔다.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너도 샬롯과 있는 게 더 안심될 테고."
"사실 야옹이가 나 없인 안 되는 거지만."
"그러니까 당장 짐을 싸라. 곧바로 야인 정착지로 가. 그 녀석들은 반겨줄 거다. 그리고 정착지를 함께 지켜. 벨리움이 뚫리지 않더라도, 성벽을 넘어가는 것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냥 여기 조용히 있으면… 읍."
테사이아의 입을 틀어 막은 샬롯이 그대로 그녀를 들고 일어섰다.
"그렇게 하겠다. 다만… 무사히 돌아와 주면 좋겠군. 반드시."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걱정 마라. 네 꼬리를 안고 죽진 않을 테니까. 올라가는 김에, 트루드도 내려오라고 해."
"…꼬리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다."
나지막이 덧붙인 샬롯이, 반항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테사이아를 든 채로 몸을 돌렸다.
이젠 걱정을 다 해 주네.
낮게 실소한 이안은 다시 묵묵히 앞에 놓인 음식을 입에 넣었다.
트루드가 배를 긁으며 내려온 건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였다.
잠들었다 깬 듯,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부르셨소…?"
빈자리에 걸터 앉은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씹던 고기를 삼킨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계속 남을 거냐?"
"…그러니 아직 있는 거요."
"병사들이 벨리움 요새로 떠난 거다. 아마 오늘 오후부터 물자부터 옮기기 시작할지도 모르지."
"벨… 리움 말이오?"
"그래. 아마 도시에 남은 용병들도 동원할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아니, 너희에게 남은 선택지는 세 개야."
스튜를 우물대며, 이안이 세 손가락을 펼쳤다.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헐값에 따라가거나, 또 하나는 밤중에 튀거나."
"…마지막 하나는 뭐요?"
"나한테 미리 자원해서 함께 가거나."
"...?!"
"위험할 거다. 난 너희 사정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싸울 거니까. 대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아 돌아오면 금화 오십 개와 제국 강철로 만든 병장기를 손에 넣을 수 있지."
"제국제라고…?"
"선택은 네 몫이야."
트루드의 입이 벌어졌다. 잠은 이미 진작 달아난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안은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그가 다시 트루드를 마주 본 건, 앞에 놓인 접시를 전부 깨끗이 비운 다음이었다.
"어쩔래?"
술로 입을 헹군 이안이 물었다. 그때까지 수많은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던 트루드가, 이윽고 내뱉었다.
"대장… 을 따르겠소."
"좋아."
주점의 문이 열린 건, 이안이 싱긋 미소 지은 그때였다.
숨을 헐떡이는 밀드레드가, 손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계약서… 가져 왔습니다."
오늘은 타이밍이 잘 맞는군.
일이 잘 풀릴 징조인가, 생각하며 트루드를 마주 본 이안이 턱짓했다.
"보이지? 그럼 당장 일어나서, 도시에 남은 놈들에게 죄다 말을 전해라. 살아 돌아오는 놈들은, 모두 같은 보수를 받게 될 거야. 숫자가 많을수록 살아 돌아올 확률도 높아지겠지."
"...! 알겠소!"
눈을 치켜뜬 트루드가 우당탕, 의자를 밀치며 달려 나갔다.
그 사이 느긋하게 일어나 밀드레드에게 다가간 이안이, 그의 손에서 받아든 계약서를 차근히 눈에 담았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주점으로 내려온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래, 훌륭한 계약서군."
비로소 계약서를 말아 든 이안이 밀드레드를 마주 보았다.
"내 친구 둘을 북문 밖으로 먼저 내보내 주실 수 있으시겠소, 밀드레드 경?"
"…예. 못 할 것 없지요."
밀드레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안이 비로소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용병들에게도 동원령이 내려진 건, 마차 여러 대가 북부 관문을 넘은 오후였다.
그날 밤 남아 있던 용병들 몇이 몰래 성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이안은 스무 명 남짓한 용병들을 이끌고 북문을 나섰다.
벨리움으로 향하는 행렬의 가장 끝 열이었다.
#113화
먹구름 자욱한 하늘 아래.
"어머니…."
"루 솔라여… 부디 찬란한 광명으로 필멸자를 굽어 살피시고…."
벨리움으로 향하는 급속 행군에 들어선 병사들의 사기는, 시작부터 바닥을 치고 있었다.
기도와 중얼대는 목소리가 연신 이안의 귓가를 스쳤다.
"생각 잘 못 한 것 같은데…."
"무조건 죽겠군… 제기랄…."
그건 이안의 뒤를 따르는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 한들 바꿀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닌 데다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임에선 고작 10분만 버티면 도착했던 지원군이, 현실이 된 지금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반나절. 한나절. 어쩌면 하루도 넘게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거기다 지금은 용이라는 큰 변수도 존재했다.
'놈이 원하는 게 왕국의 재건이 아니라 복수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망자 군단의 목표는 왕관이 있는 트라벨가나 여왕의 목을 벤 이안일 터였다.
그건 벨리움 요새로 밀려오는 망자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리란 의미였다. 게임에서처럼 북부 전역으로 흩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사실이라 한들,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병력이 게임보다 늘어났지만, 망자 군단도 그렇겠지. 그래도 아예 큰 틀이 바뀌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거인 전사 위주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멈추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뿐.
게임에서의 기억과 스치듯 본 공략 글의 내용, 그리고 북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행군은 새벽이 되어서야 멈췄다.
기진맥진한 병사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냄비 여러 개에 보존 식량을 때려 넣은 스튜를 끓였다.
기도할 기운도 남지 않은 병사들이 줄지어 스튜를 배급받았다. 용병들과 함께 줄에 선 이안은, 천막도 치지 않고 모여 앉은 겔루드 장군과 수뇌부들을 힐끗 눈에 담았다.
'저쪽도 초상집이 따로 없군.'
밀드레드를 포함한 기사들이 그에게 연신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마법사인 게 분명한 두툼한 로브를 걸친 남자도 때때로 뭔가를 첨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표정했지만, 희망적인 얘기가 오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알아서들 하겠지.'
저자들도 죽고 싶진 않을 테니까.
용병들이 피운 모닥불에 자리를 잡은 그는, 꿀꿀이 죽이나 다름없는 스튜를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는 곧바로 장비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를 연신 힐끔대면서도, 용병들은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직접 엮인 적은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쨌든 소문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벨가에 발을 들인 첫날 설산 두꺼비 여관의 용병들을 죄다 두들겨 팬 폭군. 야인 전사들의 존경을 받는 전사. 방위군 소속의 기사가 직접 찾아와 의뢰를 제안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용병.
티르 엔의 성전사라던가 북부의 대전사 같은 믿기 힘든 소문들은 차치하더라도, 용병들의 존중과 두려움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그… 대장."
용병들의 시선에 떠밀려 입을 연 건, 결국 트루드였다.
단검 날을 닦고 있던 이안이 시선도 주지 않고 내뱉었다.
"뭐."
"술이라도 한잔하고 자면 안 되겠소? 다들 말은 안 해도, 불안해하고 있소. 그냥 두면 새벽에 최소 몇은 도망칠 거요."
"...."
이안은 비로소 몇 개의 모닥불에 나눠 앉은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눈빛들.
"…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대로들 해라."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튀고 싶은 놈은 튀어도 돼. 병사들에게 걸리면 목이 매달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막지 않을 거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 몇몇 의 인상이 구겨졌다.
트루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대장,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중요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살아남을 자신이 없고 두렵다면 그렇게 해야지. 대신 끝까지 따라오고 살아남은 놈들의 보상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받게 해줄 거다. 계약대로."
가라앉은 눈으로 용병들을 대충 돌아본 이안이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귀찮게 하지 말고."
그가 다시 손에 든 운철 단검을 기름 먹인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무심함을 넘어 무책임한 모습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용병들의 표정은 오히려 풀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안은, 그들 모두가 죽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
"…그렇다면야, 뭐."
서로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이던 용병들이, 이윽고 하나둘씩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육포를 비롯한 보존 식량들이 담긴 포장지도 꺼내져 나왔고, 두런두런 이야기가 번졌다.
"이보쇼. 대충 나눠 드시오."
몇몇은 곁을 지나가는 초병들에게 술을 건넸다.
평소라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을 테지만. 바로 며칠 뒤면 다 같이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은 그런 경계 따윈 의미 없었다.
"…고맙소."
술을 받아간 병사가 자신의 모닥불로 가 동료들과 나눠 마셨다.
용병들로부터 시작된 느슨한 분위기가 조금씩 주위로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취기가 오른 용병 몇몇이 나지막한 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우렁차기보단 애잔한 느낌이 드는 가락이었다.
북부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인 듯, 인근의 다른 용병들은 물론 북부인 병사들까지도 중얼대듯 노래를 따라 불렀다.
겔루드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굳이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든 술잔을 홀짝이며 야영지의 병사들을 눈에 담을 뿐.
"...."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는 건 이안 뿐이었다.
죽으러 간다고 광고들을 하는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트루드의 술을 한 모금 빼앗아 마시고는 그대로 모포에 들어갔다.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 만큼이나 잔잔하게 이어지던 돌림 노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곯아떨어진 자들의 요란한 코골이가 그 빈 자리를 채웠다.
***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행군이 예고 없이 멈춘 건,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숲길 한복판.
"저건 또 뭐야…?"
"야인들 같은데. 지원군인가…?"
앞에서부터 이어진 술렁임에, 이안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열 엎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저것들이….'
행렬 앞을 막아선 일련의 무리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등에 멘 활과 허벅지의 화살집. 모피를 이어붙여 만든 옷과 망토. 저마다 기다란 장창이나 도끼를 손에 쥔, 야인 전사들.
"그러니까, 벨리움 요새에 함께 가고 싶단 말인가?"
겔루드 장군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맥에서 저주받은 망자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대전사께서 허락하신다면요."
대답하는 건 다른 전사들보다 작은 체구의 소년, 아스켈이었다.
"대전사…?"
"장군께 허락받는 게 아니라…?"
말에 탄 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용맹한 전사들이 합류한다면 환영할 일이지. 북부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음이 감격스럽군."
기꺼운 얼굴로 말한 겔루드가, 이내 덧붙였다.
"헌데 그대들이 말하는 대전사는 누구를 뜻하는 것이지?"
"그건…."
"아마 나를 말하는 걸 거요."
대답은 아스켈 대신, 겔루드의 뒤쪽에서 이어졌다.
"...?"
고개를 돌린 겔루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용병들의 우두머리인 이안 호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 님…!"
전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한 건 그때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들이 이안을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
겔루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멈춰 선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휘하의 밀드레드를 통해 알고 있었다.
교단이 그 이름이 기록될 정도의 업적을 쌓은 유능한 용병이자,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
그럼에도 곁에 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내심 정말 고귀한 자가 떠돌이 용병 일이나 할 리가 없다 여겨서였다.
물색을 밝히는 모습 역시,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하지만 이 순간, 겔루드는 그 평가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 자존심 강한 북부의 야인 전사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북부인 같지도 않은데….'
이안이 그를 올려다본 건 그때였다.
"잠시 이들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겔루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끝내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럴 겁니다."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전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움찔한 몇몇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선 둘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
"…면목이 없군."
샬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옆에 선 테사이아가 그녀의 팔뚝을 때렸다.
"없긴 뭐가 없어. 우린 말렸어, 이안. 얘들이 멋대로 난리를 치더니, 대전사를 따라야 한다고 뛰어나온 거라고."
"...."
그래, 그랬겠지. 생각하며, 이안이 비로소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아스켈이 결연한 눈으로 내뱉었다.
"대전사께서 망자들과 싸우시는데, 저희들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따르게 해 주세요."
"하…."
한숨과 함께, 이안이 다른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죄다 두들겨 패서 어디 하나쯤 부러뜨리는 게 아닌 이상, 말이 통하지는 않을 것 같은 눈빛들이었다.
'말은 대전사 어쩌고 하면서, 순 제멋대로라니까.'
왜 이렇게 못 죽어서 안달인지.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북부의 전사들. 이들과 함께 벨리움 요새로 가는 게 첫번째 목표였다.
야만 전사는 북부에서 끝까지 날로 먹었나 보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내뱉었다.
"너희가 다 나오면 마을은 누가 지키고."
"전사들을 제법 남겨 뒀습니다. 정당한 승부를 통해 결정지었죠. 게다가 노인부터 여인까지 모두 싸울 줄 아니, 별일 없을 겁니다."
"별일 없긴…."
이안은 아스켈을 잠시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이 놈을 비롯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 분위기를 주도한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들이 합류하면 큰 힘이 되긴 할 터였다. 이미 병사와 지휘관들의 기대에 찬 눈빛이 뒤통수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기다려라."
내뱉은 그가 몸을 돌려 겔루드에게 다가갔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저들이 합류하면 정착민들은 위험에 노출될 겁니다. 그러니 남은 주민들은 트라벨가에 들여보내고 싶습니다만."
"관문을 닫아 버렸을지도 모르니, 통행증을 써 달란 건가?"
"예."
뜻밖의 제안이라는 듯 겔루드가 턱을 긁적였다. 물론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는 부탁이었다.
곧바로 말에서 내린 그가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보아하니 저들은 자네 말만 들을 것 같은데. 임시 백인 대장으로 임명하겠네, 이안 경. 오늘부턴 회의에도 참여하게."
"…그러죠."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대답하자, 겔루드가 한쪽 장갑을 벗었다.
중지에 인장이 새겨진 반지가 드러났다.
"통행증은 바로 만들어 주지."
겔루드가 기사들에게로 몸을 돌리는 사이, 다시 전사들에게 돌아온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들었겠지. 정착민들은 전부 트라벨가로 보낼 거다."
"감사합니다, 대전사님…!"
이안은 대답하는 아스켈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이끌고 가는 건 네 역할이다, 아스켈."
"예…? 하지만-"
눈을 치켜뜨는 아스켈을 무시한 채,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 녀석을 도와라. 바로 움직여. 반항하면 끌고라도 가."
"그러지."
대답한 샬롯이, 망설임 없이 아스켈의 뒷목을 후려쳤다.
휘청 쓰러지는 녀석을 그대로 붙잡아 어깨에 들쳐 맨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트라벨가에서 기다리겠다."
"무사히 돌아와야 돼. 이안."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테사이아가, 겔루드에게로 향하는 샬롯의 뒤를 따랐다.
"...."
이안은 남은 전사들을 눈에 담았다.
발레리는 물론, 회색 계곡 출신이라던 볼베르도 끼어 있었다.
나한테 얻어터진 놈들 투성이군.
"명령 똑바로 따라라. 멋대로 굴면 어디 하나 부러질 줄 알아."
이윽고 내뱉은 말에 전사들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농담 아닌데.
생각하며 한숨 쉰 이안이, 행렬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라 와라. 우린 맨 뒤니까."
***
벨리움에 도착한 건 이른 새벽이었다.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곧바로 쉴 수는 없었다.
겔루드 장군은 곧바로 요새의 상태를 확인하고 수성을 준비했다.
굳게 닫힌 관문 위로 몇 겹의 빗장이 더 덮였다. 해자에는 오물 대신 땔감과 기름이 부어졌고, 성벽과 망루 위에는 투척을 위한 바위가 켜켜이 쌓였다. 준비해 온 몇 개의 노포도 적당한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망자 군단을 맞이할 최소한의 준비가 끝나고서야, 이안을 비롯한 병사들은 간이 막사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물론, 휴식은 길지 않았다.
"...!"
불현듯 눈을 뜬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운 막사를 돌아본 그가, 이내 발치의 트루드와 발레리를 걷어찼다.
화들짝 깨어난 그들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전부 깨워. 당장."
"갑자기 그게 뭔…."
멍하니 되묻던 트루드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설마…?"
"그래."
느슨하게 풀어뒀던 흉갑의 이음새를 조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놈들이 온다."
서로를 돌아본 트루드와 발레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어 올랐다.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데엥- 데엥- 데엥-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114화
막사 앞.
'몇 시쯤 된 건지 전혀 모르겠군.'
이안은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하늘을 볼 여유가 있는 건 그뿐이었다.
"어서 집결해! 꾸물대지 마라!"
"장비를 점검해라! 빠뜨려도 다시 막사에 돌아갈 여유는 없으니까!"
다급한 지휘관들의 외침과 허둥지둥 집결하는 병사들. 각종 보급품을 운반하는 병사들까지, 사방이 어지러웠으니까.
집결한 병사들은 그대로 줄지어 성벽으로 향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몸에 새겨진 대로 움직이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어이! 빨리들 모여!"
"이러다 우리가 제일 늦겠네, 씁."
가장 먼저 준비를 시작했던 용병과 야인 전사들은 정작 이제야 모여들고 있었다. 개개인은 쓸 만할지 몰라도, 군단의 관점에선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겔루드가 이안을 백인 대장으로 임명한 건, 이것들을 알아서 잘 통제하라는 의미였을 터였다.
물론, 끝까지 이것들을 지휘할 생각은 없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지.'
"용병들 다 모였소."
"전사들도 모두 모였습니다."
트루드에 이어 발레리가 우물대며 말했다.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눈빛이 이안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을 덤덤하게 마주 보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성벽 위로 올라가면 뿔뿔이 흩어져라. 알아서들 적당히 빈 자리를 찾아가. 그리고 가까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라."
"그럼, 대장은…?"
트루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가장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싸울 거다.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무모한 짓도 하지 마라. 특히 너희들."
이안이 야인 전사들을 싸늘하게 훑었다.
"내 뒤를 따라다닌다든가, 흥분해서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다든가 하는 짓거리는 절대 하지 마라. 자리를 지켜. 그러기만 해도 성벽을 기어오르는 놈들의 골통을 원 없이 쪼갤 수 있을 거다."
용병과 야인 전사를 번갈아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너희 개개인의 능력은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뛰어나. 그러니 너희가 병사들을 지킨다고 생각해라. 잊지 마. 우린 지원군이 도착하는 게 목표야. 알아들었나?"
"예!"
전사들과 용병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대답들은 참 잘하는데….
못 미더운 듯 혀를 찬 이안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계곡 저 너머까지 이어진 성벽이 가까워졌다.
전에도 느꼈지만, 게임일 때보다 훨씬 길고 높았다. 그만큼 지켜야 할 범위가 넓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확실히, 혼자 전부 감당하긴 쉽지 않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은 성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올라갔다. 사방이 침침한 와중에도 횃불 하나 없이 도열 한 병사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장궁을, 한 손에는 화살을 든 그들이 떨리는 숨을 골랐다.
이안은 계단 끝에서 뒤를 돌았다.
"선두는 제일 끝으로 가라. 잊지 마. 너희가 지키는 거다."
그는 곁을 스쳐 지나가는 용병과 전사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멋대로인 것들에게 사명감을 조금이라도 심어 줘야 했다.
마지막 하나를 바로 옆으로 보낸 그가, 비로소 성벽 위에 발을 들였다.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선이, 비로소 성벽 너머의 풍경을 훑었다.
"...."
어둑어둑한 잿빛 계곡 저 너머, 이상할 정도로 낮게 깔린 새카만 먹구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웠다.
안개처럼 꿈틀대는 질감을 가진 어둠이었다.
'검은 벽이 따로 없네….'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게임에선 본 적 없는 현상이라는 게 더 확실해졌다.
어쩌면 단순히 난이도만 어려워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거인 여왕을 죽여야만 해금되는, 벨리움 항전 퀘스트의 진면모가 아닐까. 물론, 이제 와선 중요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어둠을 뚫고 튀어나오고 있는, 저 수많은 푸른 안광들.
거인은 물론 인간과 난쟁이가 뒤섞인 언데드들이, 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짐승처럼 땅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두침침하고 칙칙한 환경과 어우러져, 수많은 푸른 반딧불들이 꿈틀대며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덤덤한 감상을 느끼는 건 이안뿐일 터였다.
"루 솔라여… 부디 이 필멸자를 가엽게 여기시어…."
"제기랄… 시발… 뭐가 저렇게…."
병사들의 겁에 질린 속삭임과 거친 숨소리가 쉬지 않고 귓가를 스치고 있었으니까.
"이안 경."
그 사이에서 번진 익숙한 목소리에, 비로소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밀드레드였다.
검을 든 그가 태연한 얼굴로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용병과 야인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던데. 왜 혼자 움직이시는 겁니까?"
"한곳에 모여 있는 것보단 그게 더 도움 될 것이오. 나도 마찬가지고."
내뱉으며 이안이 멈춰 섰다.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관문 중앙에 툭 튀어나온 망루에, 겔루드 장군과 경호병 몇, 그리고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보였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눈앞에 두니 느낌이 다르군요. 어쩌면 오늘이, 루 솔라의 곁으로 가게 될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계곡으로 달려오는 망자들을 눈에 담으며, 밀드레드가 내뱉었다.
싸우기 전부터 죽음을 받아들이다니. 나약했지만,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저런 광경을 마주하면 아마 대부분은 비슷한 결론을 내릴 테니까.
"난 죽을 생각 없소. 우린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거요."
덤덤하게 내뱉으며, 이안은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물론 당장 쓸 일은 없었지만, 전투 태세는 갖춰 둘 생각이었다.
어느새 선두의 망자들이 계곡에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
검을 고쳐 쥐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신성력이 번지고 있었다.
투쟁의 축복.
'이놈이 웬일로 도와주네.'
이안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마력을 아껴서 사용해야 하는 지금, 투쟁의 축복이 활성화되는 것만큼 좋은 상황은 많지 않았다.
밀드레드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이안 경, 그건 대체…?"
"카르하가 축복을 내리고 있는 거요."
"카르하가…? 그럼, 귀하가 정말 북부의 대전사란 말씀이십니까…?"
"이건 그저 카르하가 멋대로-"
내뱉던 이안이 멈칫했다.
신성력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신성이 그의 몸속으로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후끈한 열기가 아랫배에 응축되면서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니, 이게 대체, 시발…?'
배 속에서 용암이 들끓는 듯한 느낌에, 이안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안 경, 괜찮으십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데요…?"
밀드레드가 더듬대며 물었지만, 그는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몸속이 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비명을 내질렀을 터였다.
그리고 그때, 한없이 뜨겁게 응축되어 있던 열기가 천천히 위로 솟아올랐다. 용암이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고. 시발아.'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열기를 억누르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건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빨라졌고, 거칠게 분출되려 했다.
결국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이안은, 움츠렸던 몸을 활짝 젖히며 솟구치는 열기를 토해냈다.
"오오오오오-!"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이 대기를 울렸다.
***
"...?!"
망루에 서 있던 겔루드 장군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몸이 울리는 듯한 전투 함성.
"저건…?!"
그 근원지를 확인한 겔루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붉은 신성력의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폭발하듯 번지고 있었다.
그 중심부에 선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하는 이안 호프였다.
신성력의 파장이 성벽 위를 휩쓸고, 겔루드가 선 망루도 스치고 지나갔다.
파장에 담긴 열기에 겔루드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사이.
"오오… 오오오오-!"
"카르하여-!"
야인 전사들의 포효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는 그들의 전신에도 붉은 신성력이 맺혀 있었다.
붉은빛은 심지어, 몇몇 용병과 병사들에게도 감돌았다.
"북부의 초인이여-!"
장궁을 움켜쥔 북부인 병사가 울부짖는 광경을 묘한 눈으로 지켜보던 마법사, 멘데스가 이윽고 내뱉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정말 말로만 듣던 북부의 대전사인 모양입니다. 흥미롭군요. 카르하의 축복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나 역시 믿지 못했었네만…. 사실이었군…."
탄식하듯 읊조리며, 겔루드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포효를 끝낸 그는,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카르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면, 역사에 남을 만한 전투가 될지도 모르겠군."
이윽고 읊조린 겔루드가 결연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계곡을 가득 채우며 밀려드는 푸른 안광들이 눈에 들어왔다.
루 솔라 교단으로 개종하긴 하였으나, 그 역시 카르하의 업적을 듣고 자란 북부인이었다.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손에 쥔 검을 으스러질 듯 움켜쥔 그가,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전군, 사격 준비-!"
***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화살을 재장전하는 병사들의 뒤에 선 이안이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백정 새끼 같으니.'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전투 함성이라니.
아마도 퀘스트에 딸려 오는 부가 이벤트 같은 것일 터였다.
투쟁의 축복은 광역으로 적용되는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짐작 가는 바는 북부의 전사들 퀘스트뿐이었다. 아마도 이건 일련의 야만 전사 전용 퀘스트의 대미를 장식하는 퀘스트일 터였다.
부가 이벤트 역시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준비되어 있던 것이리라.
'현실이 된 지금은… 변덕을 부린 거겠지.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었거나.'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어쨌건 결과적으로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야인 전사들까지 전부 축복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몸에 깃든 신성력의 밝기로 미뤄 볼 때 그의 축복만큼 강하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망자 군단을 상대로는 유의미한 전투력 상승을 기대할 수 있었다.
'누군 받고 누군 아니라는 건… 자기를 섬기는 자들한테만 축복을 내린 건가. 신도도 필요 없는 놈이, 쪼잔하게 구는군.'
성벽 위의 모든 병사들에게 축복을 내렸다면, 전투가 아주 쉬워졌을 텐데.
"발사!"
그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겔루드가 또다시 외치자 화살이 일제히 솟구쳤다.
흐릿한 포물선이 쏟아져 내렸다.
효율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두개골이 깨져 사그라드는 안광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화살은 망자들에게 별다른 대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드문드문 섞인 거인 전사들에게는 아예 의미가 없었다. 놈들에게 타격을 주려면 노포를 쏴야 했다.
다행히 지휘관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지, 몇 대 없는 노포는 오로지 거인 전사들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두 병사가 양쪽에서 온 힘을 다해 도르래를 돌려 사위를 당기고, 화살을 장전하는 병사는 위로 삐죽 튀어나온 실루엣만을 겨냥했다.
"재장전!"
"재장전!"
어쨌거나, 일제 사격도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거기다 조준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망자 군단은 어느새 계곡을 득시글하게 뒤덮고 있었으니까.
먹구름 아래 드리운 어둠은 아주 천천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왜 같이 오지 않는 거지. 속도에 제약이 있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안이 게임에서 경험한 망자들의 공격은, 현실이 된 지금은 1페이즈에 불과할 터였다. 저 어둠이 요새를 뒤덮은 다음부터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리라.
'그러니까 미지의 영역에 접어들기 전에 최대한….'
이안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은 병사와 지휘관들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머잖아 개인의 용력이 전투의 균형을 좌우하는 순간이 오게 될 터였다. 이안이 움직이는 건 그때였다.
'나 혼자서 다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가까워진다! 조준해서 쏴!"
몇 번의 일제 사격이 반복된 후, 마침내 지휘관들이 성벽 앞에 다가섰다.
망자 군단이 계곡 중턱, 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까지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화르르르-
허공에서 피어오른 불덩어리들이 주위를 밝힌 건 그때였다. 겔루드 앞에 나선 마법사가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안의 그것과 비슷한 크기의 춤추는 불꽃이 연달아 쏘아져 나갔다. 폭발이 망자들의 물결을 뒤덮었다. 산산이 흩어진 뼛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법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화르르- 콰앙-!
화염구가 달려오는 거인 전사 하나의 머리통을 불태웠다.
병사들도 쉬지 않았다. 손에 피가 맺히도록 화살을 쐈고, 그 사이의 야인 전사들과 용병들도 장궁과 쇠뇌를 쉬지 않았다.
"불을 붙여라!"
지켜보던 지휘관들이 소리쳤다.
불붙은 화살 몇 발이 연달아 해자 위로 떨어졌다.
화르르르-
미리 쌓여 있던 기름 먹은 장작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번지면서 장벽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끝내 살아남은 선두의 언데드 몇이 그 앞에 도달했다.
주춤대며 멈춰서는 놈들의 머리통으로 화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끝끝내 해자를 뛰어넘은 언데드 몇몇이 성벽에 들러붙었다. 놈들은 벌레처럼 성벽을 기어올랐다.
몇몇 병사들이 활을 내려놓고 옆에 쌓여 있던 돌을 들어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콰지직-
하나하나가 상당히 묵직한 바위였다. 언데드들의 낡은 두개골 정도는 충분히 박살 내고도 남았다.
훌륭한 대응의 연속이었다. 이들이라면 망자들이 끝끝내 성벽을 기어오르더라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게임에서도 그랬다.
'…저것들만 없다면 말이지.'
가라앉은 눈으로 성벽으로 밀려드는 물결을 훑던 이안의 시선이, 마침내 한 곳에서 멈췄다.
저만치, 노포 사격과 마법 공격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거인 하나가 성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게임에선 저것들이 성벽에 닿으면서부터 균형이 무너졌었다.
현실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러니까… 이번에는 한 놈도 붙지 못하게 만들 거다.'
생각하며 단죄의 검을 고쳐 쥔 이안이, 비로소 몸을 날렸다.
붉은 궤적이 성벽을 가로질렀다.
#115화
"막아-! 화살을 쏴!"
사색이 된 지휘관이 성벽 아래로 다가오는 거인 전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성벽은 놈들을 막기 위해 쌓았음을 증명하듯 더 높았지만. 그 사실이 지금 병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두개골 위에 살점만 얇게 펴 바른 듯한 끔찍한 머리가, 그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놈이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으아아아-!"
병사들이 놈의 머리를 향해 화살을 날려 댔지만 역부족이었다. 거인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비켜라-!"
소리친 건 전신에 붉은 신성력을 머금은 야인 전사였다. 투창 자세를 잡은 그가, 어금니가 으스러지게 이를 악물며 창을 내던졌다.
쒸에엑- 퍼억-!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의 몸이 기우뚱 뒤로 밀려났다. 치켜든 놈의 얼굴 한쪽에 창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죽은… 건가…?"
병사 하나가 내뱉을 찰나, 거인이 자세를 다잡았다. 놈이 분노한 숨소리를 내며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광대를 꿰뚫은 창대에서 부스러진 살 가루가 떨어졌다.
"…힘이 부족했나."
야인 전사가 혀를 찰 찰나였다.
"아니. 잘했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이안이 내뱉었다. 그가 그대로 거인을 향해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단죄의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지직-
검날이 거인의 머리를 갈랐다. 정수리부터 턱 윗부분까지 완전히 쪼개진 거인의 몸이 휘청대며 허물어졌다. 몸을 움츠린 이안이 놈의 머리를 힘껏 박찼다.
붉은 궤적이 포물선을 그렸다.
촤아악-!
성벽 위에 미끄러지듯 착지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입을 떡 벌린 기사를 바라본 그가, 곧바로 내뱉었다.
"던질만한 창, 더 없나?"
"이, 있을 겁니다. 인원수 몇 배로 챙겨 왔습니다."
기사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야인 전사를 턱짓한 이안이 내뱉었다.
"그럼 최대한 전부 성벽 위로 올리라고 해. 이 녀석들이 거인을 저지해 줘야 하니까."
내뱉은 이안의 시선이 야인 전사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로 안 되면, 여러 개 던져라. 그러다 보면 내가 올 거야."
"예, 대전사…!"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이안은 이미 저만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또 다른 거인이 성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콰직-! 퍼엉-
'또 한 놈….'
거인의 눈두덩이 깊이 찔러 넣은 검날에 진공 폭발을 시전한 이안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박차고 솟구쳤다.
투쟁의 축복과 바람 칼날에 더해 집중력과 육감까지 고도로 발휘된 그는, 지금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면 엄청난 근육통과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무기력감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것도 살아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터억-
성벽 끝에 착지한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발레리.
이안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분의 창이 성벽 위로 올라올 거다. 거인이 다가오면 그걸 집어서 대가리가 부서질 때까지 던져. 시간만 끌어도 돼. 내가 올 테니까."
이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는 멈추지 않고 성벽 앞의 상황을 훑었다.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성벽에 도끼를 박아 넣는 데 성공한 거인 전사는 나오지 않았다.
게임의 벨리움 항전 퀘스트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거인 전사들이었다.
놈들은 성벽을 부수려 하는 데다가, 성벽에 붙어 있기만 해도 언데드들이 놈들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성벽 위로 뛰어들기 때문이었다.
계속 방치하면 끝내 이 낡아빠진 성벽을 부수는 데에 성공했고, 그때부터는 상황이 더 피곤해졌다.
언데드들이 그 사이로 기어들어 가 요새 내부로 침투하는 데다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뒤에서도 병사들을 덮쳤으니까.
그때쯤 되면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안의 일 순위 목표는 처음부터 거인 전사였다.
그것만 제대로 수행해 내더라도, 전투의 균형을 유지하는 무게추의 역할을 해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셈이었다.
콰직-!
"돌을 계속 떨어뜨려! 이봐 보급대! 돌 계속 운반해! 우릴 다 죽일 셈이야?!"
"기어 올라온 놈들과 싸울 때는 야인 전사들 옆에 붙어! 보조만 맞춰라!"
사방이 고함과 비명, 폭음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전황은 전혀 나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야인 전사들도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콰직-!
"카르하여-!"
전신에 신성력을 머금은 그들은, 말 그대로 야만인처럼 날뛰었다.
이안이 그들을 넓게 퍼뜨린 덕분에, 언데드들이 기어오르는 상황 속에서도 전선에 구멍이 뚫리는 일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소 위기에 처한 전선이 있더라도, 그 상황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콰직-! 빠각-!
붉은 궤적을 흩뿌리며 달려온 이안이 망자들을 말 그대로 분해해 버리고는 지나쳤으니까.
"저것이 북부의 대전사…."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조차 듣지 않고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뇌리에, 불과 한 시간쯤 전까지만 해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 번지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
'저 새낀 언제까지 주문만 외우려는 거지.'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준비하기에.
바닥을 구르며 혀를 찬 이안이, 관문 망루 위의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화염구를 연신 날려 대던 놈은, 좀 전부터 지팡이를 치켜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력의 응집이 느껴지는 걸 보면 주문을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넋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북부의 초인이여-!"
저만치의 성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거인과, 놈을 향해 창을 내던지는 야인 전사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으니까.
'시발, 하필 또 반대편이야….'
이를 간 이안이 성벽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내달렸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높아진 민첩과 집중력, 육감을 믿고 움직일 수밖에.
퍼석- 콰직-!
성벽 위로 올라온 언데드 몇을 박살 내며 도착한 이안은, 이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이번에는 조금 늦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벽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을 때, 거인 전사는 이미 머리 위로 치켜든 도끼를 내리치고 있었다.
둔탁한 궤적을 그리는 도끼날을 응시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한번 해 봐?'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아래로 비스듬하게 화살처럼 몸을 날린 이안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후우웅-
커다란 도끼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이 회전하던 그대로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카드득-
검날이 도끼를 움켜쥔 거인의 손목을 비스듬히 가르며 떨어졌다. 잘린 손목을 매단 도끼가 성벽에 움푹 틀어박혔다. 중간에 손목이 날아간 덕에 힘이 끝까지 실리지는 않은 채였다.
그사이 회전하는 이안은, 거인의 얼굴 한복판에 부딪히고 있었다.
퍼억, 끔찍한 촉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짧은 순간. 이안은 단죄의 검을 냅다 내리찍었다.
콰직, 거인의 입술 옆에 검날이 틀어박혔다. 놈의 새파란 안광이 얼굴에 매달린 이안을 좇았다.
검 자루를 쥔 채 훌쩍 몸을 돌려 놈의 입술에 발을 얹은 이안이, 잿빛 마력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퍼엉.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거인의 안면이 움푹 바스러졌다. 거인의 머리를 박찬 이안이 성벽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턱,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성벽 끝에 걸렸다.
"대전사…!"
야인 전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재빨리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이었다. 회색 계곡의 볼베르.
"하아… 하아…."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이안이 숨을 헐떡였다.
'개 힘드네, 진짜….'
입에서 벌써 단내가 나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저릿했다. 전투의 한복판이라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뿐, 아마 지독한 편두통이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때 나타나는 흔한 부작용.
투쟁의 축복은 분명 그의 신체 능력을 초인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려 줬지만, 그렇다고 정말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게 발동된다는 건, 그만큼 개 빡센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인 거 아니야…?'
지금까지 본 카르하의 성격상,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에야 축복을 내려 주고서, 대전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게임의 요소가 억지스럽게라도 현실성을 갖춘다는 사실을 미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낮은 확률이라는 모호한 문구가 있는 스킬이니 더더욱.
"괜찮으십니까? 저희한테는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그때 볼베르가 그를 일으켰다.
"꼬우면 네가 대전사 하든지."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이안은 그가 건넨 수통을 받았다. 어쨌건 무모한 짓을 한 보람은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거인의 도끼는 성벽에 얌전히 박혀 있는 게 아니라, 성벽 윗부분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을 테니까. 아마 이 녀석은 물론이고 주위의 병사들도 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을 터였다.
헐떡이며 술통을 입에 가져간 이안은 이내 눈썹을 치켜들었다.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오히려 좋은데…?'
좋은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술을 들이켜는 사이.
콰르르르르-
마법사의 주문이 마침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통을 입에 댄 채 그 광경을 돌아본 이안의 입꼬리가, 비로소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가 했더니.'
지팡이 끝에서 뚝뚝 떨어져 번져나가는 샛노란 불길은, 틀림없는 화염 해일이었다. 적어도 그와 비슷한 마법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이안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파도였다. 혼돈력과 정수의 증폭을 모두 거쳐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법한.
주문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주문의 위력을 최대한 증폭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콰르르르-
넘실대는 불길이 주위를 대낮처럼 밝혔다. 성벽으로 밀려들던 망자들이 해일에 휩쓸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
망루 끝에 선 마법사가 피를 토하며 휘청댄 건, 해일이 성벽 앞을 한차례 전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밖으로 떨어지려는 그를 경호병들이 간신히 붙잡아 안아 들었다.
'그전에도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었을 텐데. 애썼군.'
수명이 몇 년은 줄었겠는데.
피식한 이안이 통제를 잃고 마구 날뛰는 불길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사가 마력 탈진을 무릅쓰고 상위 마법을 펼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남은 망자 군단 대다수가 불길에 휩쓸려 사라졌고, 지금도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다들 멈추지 마라! 저 저주받은 괴물들의 끝이 보인다!"
겔루드 장군이 소리쳤다. 살아남으리란 희망에 찬 함성을 내지르며, 병사들이 다시금 무기를 들었다.
"...?"
이안이 문득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본 건 그때였다.
흔적만 남은 손바닥의 낙인이, 문득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마력의 흔적도 없는데…?'
미간을 찌푸리던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내내 성벽 인근에만 집중한 터라 보지 못했던 저 너머의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어둠과 넘실대는 먹구름.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이윽고 구겨졌다.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이 요새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토록 선명하던 어둠의 장막이, 정작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드리운 것이다.
"저, 저기…!"
"맙소사, 루 솔라여…."
변화를 눈치챈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염 해일이 잦아들자, 병사들도 주위가 어느새 한밤중처럼 어두워졌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계곡의 나무들이 활활 타들어 갔지만,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병사들이 탄식한 건, 그저 어둠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런… 미친…."
계곡 저 너머에 일렁이는 수많은 푸른 안광들.
지금까지 상대한 것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망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아주 천천히.
"하하, 시발. 끝이 없잖아…?"
"우린 다… 죽을 거야…."
찾아올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채 저 계곡 너머의 망자들을 응시하는 가운데.
오직 이안만이 넘실대는 먹구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아귀의 낙인이 욱신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혼돈의 파편 역시 꿈틀대고 있었다.
무언가에 공명하는 것처럼.
"...!"
이안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숨이 턱 막히는 거대한 마력이 불현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다가 한순간에 생겨났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설마….'
먹구름 한복판을 응시하는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지는 가운데.
-■■내… 찾았노라….
뇌리를 울리는 사념이, 전장을 침묵으로 물들였다.
그 사념의 의미를 일부나마 이해한 건 이안뿐이겠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오오오-
갈라지는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미동도 없던 그 한복판에서 푸른 빛이 푸스스, 피어올랐다.
거대한 안광이었다.
"하…."
이안이 헛웃음을 흘린 다음 순간.
눈을 뜬 용이 포효했다.
#116화
자욱한 먹구름이 눈부시게 명멸하며 천둥과 벼락을 흩뿌렸다.
용의 포효와 뒤섞여,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이어졌다.
"...."
"...."
하지만 성벽 위의 그 누구도 그 광경에 비명을 내지르거나 도망치지 못했다.
강건한 야인 전사들조차,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진 순간 무기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성벽 위의 모두가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번쩍이는 먹구름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거대한 형체를 눈에 담을 따름이었다.
이안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주저앉지 않은 게 고작이었다.
게임에서도 최고 수준의 무력화와 공포 상태를 유발하던 용의 포효는, 그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 공포 상태에까지 빠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건 그래선가? 아니면 그저 의도적으로 감춘 걸지도. 육체를 잠재운 건 그게 이 권역을 유지하기 더 편해서일 수도 있겠어. 혹은 힘을 아껴야 한다거나.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그의 뇌리로는 온갖 생각들이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답을 알 수 없는 추측과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건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일어날 리 없다 여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곧 높은 확률로 놈과 싸우게 되리란 것도.
'그리고 비슷한 확률로 죽게 되겠지.'
그런 결론까지 곧바로 도출해 내면서도, 이안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건 비단 높은 정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게 정말 멀쩡한 용이라면.'
과거 언급했듯, 지금은 용이 등장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했다면, 그에 걸맞은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이건,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건 그의 역량에 달렸겠지만.
'시발….'
이안이 내심 탄식하는 그때, 포효를 끝낸 용이 크게 날개를 펄럭였다.
놈은 지금까지 날갯짓 한 번 하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새카만 먹구름을 몰고 다니며 포효 한 번에 천둥과 벼락을 흩뿌리는 모습에 비하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용이 구름 사이로 솟구쳤다.
그의 날갯짓에 휘몰아친 먹구름이 요란하게 번쩍이며 뒤늦게 굉음을 흩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계곡으로 미끄러지듯 하강한 용이 요새가 잘 보이는 위치에 착지했다.
거인을 막기 위해 높다랗게 지은 성벽은, 용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놈의 형태는 원근감을 무시하듯 또렷했다.
'작은 아파트 정도는 되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놈의 전신을 차근히 훑었다.
그가 기억하는 용에 비하면, 어쨌거나 다소 깡마른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은 완전히 압도당해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 용은 뼈 위에 마른 가죽을 덮어 놓은 것처럼 앙상했다.
일종의 미라화가 진행된 것처럼 보였다. 눈이나 얼음 속에서 오랜 시간 마력만을 추출 당하고 있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놈이 날개를 접자 날개의 관절을 따라 투두둑, 비늘이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저게 용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 거인 여왕의 상태로 미뤄 봤을 때, 공허의 마력을 축적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고.
"------!"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용이 다시금 울부짖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뿐 아니라, 아까처럼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계곡과 요새를 휩쓸었다.
먹구름이 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밀려나면서, 벼락을 온 사방으로 흩뿌렸다.
'포효를 또 한다고…?'
이안의 미간이 구겨지는 사이.
"컥...."
"...."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 몇몇이 풀썩 쓰러졌다. 이안의 근처에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잃은 것이기를 바랄 뿐.
근처에 주저앉은 발베르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탁 풀린 동공에는 전혀 생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타고 침이 줄줄 흘렀다. 어느새 신성력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후...."
하지만 이안은 이번에도 견뎌냈다.
또다시 버틸 수 있었던 건 혼돈력 덕분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공명하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파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아주 적은 양의 혼돈력만이 몸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까처럼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무력감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저릿저릿해서, 힘은커녕 여전히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크르르르….
포효를 끝낸 용이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계곡 주위로 번개가 번쩍이며 떨어지는 가운데,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이 성벽을 응시했다.
"...!"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놈이 정확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한 대가를… 치■■라…
그르렁대는 듯한 사념이 뇌리를 후벼 파더니, 놈의 아가리로 푸르스름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입자화되는 마력. 저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용의 숨결.
'미친…?'
이안의 눈이 커졌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쩌면 그가 한 생각들은 그저 현실 도피성 망상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공포 상태에 완벽하게 저항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이성이 멀쩡하다고 여긴 것조차 착각일지도.
그런 불길한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이안은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마력은 평소처럼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포효의 여파가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도망치는 대신 상태 창을 열었다.
이 힘 빠진 몸으로는 아무리 애를 쓴들 용의 숨결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애먼 희생만 늘릴 뿐.
"후…."
그래서 이안은 한편으론 마력과 혼돈력을 일으키려 애쓰면서, 포인트를 정신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몸속의 마력이 다시금 그의 통제에 따를 때까지.
효과는 몇 개쯤 올린 순간부터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용의 아가리가 벌어진 건, 이안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이 맺히기 시작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벌어진 용의 아가리에서 새하얀 숨결이 불길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저건 대기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지독한 냉기였다.
이안은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며 날아드는 용의 숨결을, 마력이 아른대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주문은 완성됐다. 앞에 얼음 결정이 피어오르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빙하 방벽이라도, 밀려드는 저 숨결을 온전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도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용에게 죽다니.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의 최후치고는 멋지다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솨아아아아-
눈부신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생성되던 빙하 장벽을 산산이 깨뜨리면서, 황금빛의 거대한 역장이 성벽 앞에 돌연 피어오른 것이다.
반투명한 역장이 성벽 앞을 가득 채우며 번져 나갔다.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이 그대로 역장을 뒤덮었다. 마력이 가득한 냉기가 역장 위로 분수처럼 솟구치고, 황금빛이 눈부시게 명멸했다. 솟구친 숨결이 그대로 얼어붙으면서 산산이 바스러졌다. 역장의 구조가 그 사이사이로 드러났다.
촘촘하게 이어진 벌집을 떠올리게 하는 육각형의 윤곽.
이렇게나 거대하고 정교한 마법을 순식간에 펼칠 만한 존재라면….
"...!"
이안은 목을 꺾듯이 위로 치켜들었다. 상공 한복판, 황금색 장막이 공간을 가르며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허여멀건 한 비늘을 가진 거대한 용이 장막을 가르며 날아드는 중이었다.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아르케아스…?'
저 용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대륙에 단둘만 남은 용 중 하나.
수많은 칭호와 아명을 가진, 백금룡 아르케아스.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순리를 거스른 자, 타후므리트.
"하…."
백금룡과 함께 타락용을 처치하라는 내용을 눈에 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번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가 겪은 건, 일종의 보스전 이벤트 컷 씬에 불과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가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인가 하는 분노 섞인 의문이 뒤를 따랐다.
일찍 나타났다면 무고한 희생이 쌓이는 일도, 그가 능력치 포인트를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기척을 감췄던 건가? 동족이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고?'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푸스슷-
흐릿하던 붉은 신성력이 선명하게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력화 상태의 여파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 역시 퀘스트에 포함된 이벤트일지도 몰랐다. 저 두 용의 싸움에 끼어들려면, 고작 2챕터 수준의 캐릭터로는 턱도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이안의 시선이 문득, 손에 쥔 단죄의 검으로 향했다.
검신 내부에 신성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날을 타고 은은하게 번져 나왔다.
'하난 야만 전사고, 하난 기사 버프라 치면.'
그럼 마법사는?
생각할 찰나, 용의 숨결과 함께 황금빛 역장이 잦아들었다. 저 너머, 타후므리트를 향해 날아가는 백금룡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의 의문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결국,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부딪혀 보면 알게 되겠지.'
검 자루를 쥔 이안의 손아귀에, 비로소 힘이 들어갔다.
***
콰아아아-
아르케아스가 내뿜은 숨결이 타후므리트를 휩쓸고, 그 뒤의 망자 군단까지 불태우며 뻗어나갔다.
샛노란 불길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캬아아아-!
그 한복판에서 타후므리트가 포효했다. 훅, 힘찬 날갯짓 한 번으로 허공에 멈춰 선 아르케아스가 마주 울부짖었다.
허공에서 맞부딪힌 마력의 파장이 산산이 흩어지면서 대기를 찢어발겼다.
뼈와 재가 뒤덮인 계곡에 흙먼지가 치솟았다.
다음 순간 타후므리트가 솟구쳤다.
숨결이 휩쓸고 간 부분의 가죽이 타들어 가서, 내골격을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말라붙은 근육과 뼈대 사이로 새파란 마력이 혈관처럼 번쩍였다.
쩌어엉-
두 용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아르케아스의 주위로 황금색 역장이 번쩍였지만, 그건 타후므리트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란 마력의 장막이 번개처럼 터지며 황금색 역장을 깨뜨렸다.
콰르릉-!
새하얀 뇌전이 아르케아스를 관통했다. 백금룡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아가리에서 솟구친 황금색 마력이 그대로 먹구름 한복판에 번뜩였다.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마력 회로가 번졌다. 꿈틀대던 검은 먹구름이 휘청대며 밀려났다.
콰드득- 그의 목덜미를 타후므리트가 물어뜯은 건 그때였다. 피가 튀거나 가죽이 찢겨나가지는 않았지만, 용을 추락시키기엔 충분한 공격이었다.
쿠우웅-
뒤엉킨 두 거체가 계곡 한복판을 굴렀다. 튕겨져 나온 타후므리트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휘청대던 먹구름이 다시금 검게 물들면서, 그 사이의 황금빛 마력 회로를 집어삼켰다.
아르케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먹구름 사이로 흐릿한 빛이 아른거렸다.
두 용 모두, 마력을 끝도 없이 소모하며 인간은 짐작하기도 힘든 방식의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은 일대를 어둠에 물들이기 위해서. 또 한쪽은 그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서.
"루… 솔라여…."
관문 망루 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겔루드 장군의 입에서, 비로소 나지막한 탄식이 흘렀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그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아까 기절한 마법사인 멘데스는 미동도 없었고. 경호병들은 하나 같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겔루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 중인 두 용을 바라보며, 빛의 신께 기도를 올릴 뿐.
백금룡의 전신에서 마력이 빛의 기둥처럼 솟구친 건 그때였다.
-■■■… ■■… ■■■■…!
웅혼한 사념이 뇌리를 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고대어. 겔루드로선 백금룡이 타락용에게 무언가 의사를 전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 ■■■- ■■■■-!
"컥...."
이어 뇌리를 울리는 사념에, 겔루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타락용이 분노했다는 것만큼은 명확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타락용의 전신에서 새파란 마력이 솟구쳤다. 선명한 푸른빛이 아니라, 옅은 보랏빛이 섞인 듯한 불길한 색.
두 용이 뿜어낸 마력이 하늘의 먹구름을 뒤덮고, 물감처럼 얽히며 빙글빙글 돌았다.
콰아아-
백금룡이 타락용을 향해 달려든 건 그때였다. 쩍 아가리를 벌린 백금룡이 타락용의 비쩍 말라붙은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타락용이 앞발로 백금룡을 후려치며 뒤엉킨 건 그 직후였다.
말 그대로 짐승의 싸움을 보는 듯한 원초적인 사투.
아르케아스와 타후므리트가 서로의 마법을 상쇄하는 데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있음을. 마력이 먼저 고갈되기 전에 교착 상태를 끝내려 육탄전에 돌입한 것임을 겔루드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전설처럼 전해 들었던 존재인 백금룡, 아르케아스가 끝내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할 따름이었다.
저 강대한 존재들의 싸움에 끼어 봐야, 한낱 미물에 불과한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
겔루드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때였다.
계곡 한복판, 누군가의 뒷모습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용에 비하면 작디작은. 전신에 타오르는 붉은 신성력을 두르고, 푸른 빛이 번지는 검을 움켜쥔 자.
"...!"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겔루드의 눈이, 이윽고 찢어질 듯 커졌다.
전투 내내 병사들을 수없이 위기에서 구해낸, 티르 엔의 성전사이자 북부의 대전사.
"이안… 호프…!"
그가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용들을 향해서.
#117화
'시발….'
재와 뼈가 가득한 서걱대는 땅을 밟으며, 이안은 탄식을 삼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건 일종의 본능이 보내는 경고였다.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는.
그건 눈이 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이기도 했다.
저 앞에, 날개 달린 거대 괴수들이 한데 뒤엉켜 날뛰고 있었으니까.
콰아아- 쿠우우-
놈들이 맞부딪칠 때마다 대지가 들썩이고, 충격파가 이안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준 높은 주문이나 권능 따위가 만들어 내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저 두 용의 힘과 마력이 서로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여파일 뿐.
'정말 가기 싫어지네….'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굳이 달리지 않는 건, 당장은 별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저 괴수들의 사투가 조금은 진정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사이에 들어갔다간,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꼴이 날 테니까.
콰아아-
그런 바람과 달리, 두 용의 격돌은 점점 더 격해졌다. 빛을 반사하면 노랗게 빛나는 아르케아스의 비늘이, 타후므리트의 발톱에 찢겨 후두둑 튀어 올랐다. 아르케아스는 그런 놈의 등을 날개로 내리찍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타후므리트가 골격이 훤히 드러난 날개로 그를 후려쳐 밀어냈다.
타락용은 이제, 말라비틀어진 껍데기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탈피한 것처럼, 뼈와 근육만으로 이루어진 끔찍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뼈와 근육 사이로, 보랏빛이 섞인 푸른 마력이 핏줄처럼 일렁이고 번쩍였다.
서로를 향해 짧게 포효한 두 용이, 다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충격파.
고개를 숙여 견디면서,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전장이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건 두 용의 크기와 형태만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얼마나 강하고 빠르기까지 한지도 와닿았다.
단순한 근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저것들이 나누는 일격 일격에 담긴 마력은, 매번 그가 가진 마력의 총량보다도 많아 보였다.
솨아아-
물론 그의 전신을 감싼 신성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넘치고 감각이 허물을 벗듯 예민하고 선명해졌다.
단죄의 검 역시 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손에 감겼다. 티르 엔이 내리는 신성력은 갈수록 짙어져서, 이젠 푸른 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손에 든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사실들이 이안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진 못했다.
'지금도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 즉사일 것 같은데.'
그가 인간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저 살아 움직이는 천재지변들을 상대로 겁 없이 날뛰다간, 신성이 서린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리라.
그렇다고 멀리서 마법을 쏴 댈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가장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시전하는 마법 따위, 저 타락용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을 테니까.
'결국 접근해서 나는 안 맞으면서 신성력으로 쑤셔야 된단 건데.'
말로만 쉬운 얘기였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호각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놔두면 끝내 패배하는 쪽은 아르케아스가 될 것 같았으니까.
퀘스트가 그런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여긴 타후므리트의 권역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이 권역이 놈에게 어떤 식으로든 힘을 부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백금룡이 권역부터 정화하려 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권역의 정화하는 동안 타후므리트가 자신을 노리기를 바랐으리라.
하지만 타락용은 광기에 물든 와중에도 옳은 선택을 했다.
백금룡을 공격하는 대신, 자신의 권역을 지키는 걸 우선한 것이다.
이미 오염된 권역을 유지하려는 쪽과 정화하려는 쪽이 맞붙으면 전자가 더 유리한 건 당연한 일.
아르케아스가 먼저 타후므리트에게 달려든 건 그래서일 터였다.
'용도 마력이 정말 무한하지는 않은 거야.'
하늘에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회수하지 않는 건, 그 순간 뒤가 없어지기 때문일 터였다.
소모전에 돌입한다면, 강대한 권역을 이미 소유한 타후므리트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테니까.
여기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작전상 후퇴겠지만, 아르케아스는 대신 놈과 맞서는 걸 선택했다.
이유야 어쨌건, 이안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물러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어쩌면 북부 전체도.
'그래서 물러나지 않은 건가…?'
어쨌든, 아르케아스에겐 지원군이 필요했다. 같은 의미에서, 이안도 그를 도와야 했다.
콰앙-!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를 덮쳐 땅에 내리찍은 건 그때였다. 놈의 앞발이 백금룡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날개를 펼쳐 목덜미를 보호하던 아르케아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문득 저만치의 대지를 훑었다.
붉고 푸른 신성력을 두른 인간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더는 다가오지 말거라, 고귀한 자여…!
이안의 뇌리로 다급한 사념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제국 공용어였다.
-네 의지는 숭고하며 고결하나, 끝내 죽음만이 기다릴 지니…!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죽거든?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하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르케아스의 날개를 물어뜯으려던 타후므리트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른 안광이 타올랐다.
-제■■… ■■오다니… 고■■나….
사념과 동시에 놈의 아가리로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밑에 깔려 있던 아르케아스가 다급하게 몸을 틀어, 앞발로 타후므리트의 턱을 떠밀었다.
콰아아아-
숨결이 치솟아 올랐다. 잿빛에 가까운 냉기가 구름 바로 아래까지 치솟다가, 그대로 결정이 되어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쏟아졌다.
타타탓-!
이안이 달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그의 시선은 타후므리트의 훤히 드러난 목뼈와 그 아래로 굵고 길게 이어진 쇄골에 고정되어 있었다.
쩌엉-!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의 앞발을 쳐낸 건 숨결을 모두 토해내고 난 다음이었다.
쿠- 확-!
그때 바람 칼날을 두른 이안은 이미, 놈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푸른 섬광이 타후므리트의 거대한 목덜미를 훑었다.
카가가가각-
불똥 같은 푸른 신성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성력이 실린 단죄의 검으로도 용의 뼈를 단숨에 잘라낼 수는 없었다. 뼈에 붙은 근육 줄기들을 베어내고, 새카만 뼈에 할퀸 듯한 흔적을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캬오오오오-!
하지만 타후므리트를 분노하게 만들기엔, 그걸로도 충분했다.
'원래 날파리가 위험해서 거슬리는 건 아니거든.'
생각하며 눈을 빛내던 이안이, 다급하게 허공을 박찼다. 울부짖음과 동시에 타락용의 거대한 앞발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쩍 벌어진 뼈 사이로 휘몰아치는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푸화악-!
스친 것만으로도 이안은 바닥에 처박히듯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 이안은, 몇 차례 튕기고서야 간신히 착지했다. 이걸 낙법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죽지는 않았다.
투쟁의 축복 덕분이리라.
가슴이 뜨끔거렸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불만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오히려 팔다리가 무사한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주위로 얼음 파편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한가롭게 그것들이나 막아낼 틈은 없었다.
'이런 시발….'
콰아아아-
헛발질을 한 타후므리트가, 이번엔 반대로 몸을 꺾으며 그를 향해 날개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뼈와 근육만 붙은 너덜너덜한 날개라는 사실은,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주위에 가득 일렁이는 마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벽 같은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저기 휩쓸리면 몸으로 다이빙하는 수준의 충격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공격 두 번 만에 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혼돈력을 불어넣어 휘몰아치는 방벽을 펼쳤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서리 방패나 빙하 방벽은 의미가 없었다.
돌개바람이 에어백 역할을 해 주며, 그를 튕겨내 주길 바랄 뿐.
콰과과과-
하지만 언제나 그를 지켜 준 돌개바람은, 용의 날갯짓에 맥없이 찢겨나갔다.
밀려드는 거대한 뼈들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쩌저저정-!
피어오른 황금빛 역장이 이안의 앞을 뒤덮은 건 그때였다. 몇 장은 그대로 날개뼈에 휩쓸려 터져 나갔지만, 그 사이의 마력으로부터 이안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했다.
콰지직-!
동시에 아르케아스가 타후므리트의 목덜미를 물며 솟구쳤다.
타후므리트의 관심이 이안에게 쏠린 빈틈을 정확히 노린 것이다.
두 거체가 치솟는 사이, 역장이 바스러졌다.
하지만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
이안은 단 한 장만 남은 육각형의 역장을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았다.
그의 장갑 손등 부분에 황금빛 진언이 맺혀 일렁이고 있었다. 진언에 담긴 막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거기서부터 마력을 공급받는 게 분명한 한 장의 역장은, 마치 커다란 방패처럼 이안의 팔뚝 위에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떠 있었다.
"이게 진짜 기사 버프인가…?"
이건 그냥 티르 엔의 가호고?
신성이 아른거리는 단죄의 검을 내려다본 이안이, 설핏 실소했다.
황금빛 마법 방패에 성검이라니.
콰아아앙-!
그사이 아르케아스에게 목덜미를 물린 타후므리트가 땅에 떨어졌다. 아르케아스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놈의 목을 놓지 않았다.
타후므리트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발톱과 날개로 아르케아스의 몸통을 후려치고 할퀴었다. 백금색 비늘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
검을 고쳐 쥔 이안은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둘에게는 작은 솟구침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성벽에서부터 내내 달리기만 하네.'
이번에는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저만치에서 수많은 푸른 안광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르케아스의 숨결에 휩쓸린 뒤론 지켜보고만 있던 망자들이, 죄다 이안을 향해 달려왔다.
타후므리트의 명령일 터였다.
아르케아스와 싸우는 동안, 날파리 같은 원수의 발을 묶어 놓으려는.
두 용의 몸부림에 휩쓸린 놈들이 마구 터져 나가고 있었지만, 망자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지 않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투쟁의 축복이 끓어 올랐다.
"아아아아아아-!"
시발. 의지와는 관계없는 함성을 토해내며, 역장 방패를 치켜든 이안이 선두의 언데드와 맞부딪혔다.
콰장창-!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방패로 몇 놈을 밀어 버린 이안이, 왼팔을 후려쳐 그 뒤의 망자 두어 마리를 동시에 산산조각 냈다.
그제야 비로소 단죄의 검이 호선을 그렸다.
퍼석-! 콰직-!
푸른 빛이 쉴 틈 없이 어둠을 수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 호선에 휘말린 망자들이 터져 나갔다. 검을 휘두르며 만들어진 반동은 방패 강타로도 이어졌다. 어느새 시야에 망자 군단이 가득했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베고 휘두르고 후려치고 내리찍는 것의 끝없는 반복.
"그-아아아…."
전투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 전사가 초승달을 그리는 푸른 섬광에 허리가 잘려 허물어졌다.
새파란 곡선과 황금빛 섬광이 춤을 추듯 휘몰아쳤다.
이안의 뒤로 뼈 무더기로 이루어진 길이 쉬지 않고 만들어졌다.
콰장창-!
그러던 한순간,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저 옆에 작은 동산처럼 서로 뒤엉킨 용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를 뚫은 것이다. 아직도 저 너머에서 푸른 안광들이 밀려오고 있는 게 보이긴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끌고 내려온 거야.'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후웅, 아르케아스의 날개가 만들어 낸 충격파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뒤로 따라붙던 언데드들이 거기 휩쓸려 와장창 흩어졌다.
타후므리트는 목덜미를 물어뜯는 아가리를 떨쳐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아래에 깔려 있었다.
좀 전까지와 달리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안의 개입이 전투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복수에 눈먼 용이 끝끝내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놈이 휘두른 발톱을 고개를 젖혀 피한 아르케아스의 황금색 눈이, 문득 저 옆에서 달려오는 이안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두 시선이 교차했다.
그는 이번에는 물러나라 말하지 않았다.
'왜, 막상 도움이 좀 되냐?'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타후므리트의 머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화는 없었지만, 생각이 통한 게 분명했다. 아르케아스는 날아드는 타후므리트의 날개를 막거나 피하는 대신, 그대로 어깻죽지를 내어주며 앞발을 뻗었다. 거대한 발톱이 돋은 발에 짓눌린 타후므리트의 머리가 땅에 내리 찍혔다.
쿠웅-!
굉음에 이어진 충격파를 역장 방패를 들어 막으며, 이안은 놈의 푸른 안광을 마주 보았다.
놈도 이안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푸른 안광이 분노로 타올랐다.
짓눌린 와중에도 타후므리트의 아가리에 마력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집념이 엄청나시군.'
하지만 나도 한 독기 하거든.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안은 두 다리에 더 박차를 가했다.
바람 칼날이 발작하듯 그를 떠밀었다. 거대한 머리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생명체들의 공통적인 약점을 향해 팔을 힘껏 내뻗으면서,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타오르듯 뿜어져 나온 섬광이, 거대한 푸른 안광을 관통했다.
#118화
카- 가가가각-
손아귀에서 엄청난 저항감이 느껴졌다. 이안은 이를 악물면서 끝까지 팔을 뻗었다.
퍼석.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안광이 폭발하듯 번쩍였다. 뻗어 나가지 못하고 응축되던 신성력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반작용을 더는 버티지 못한 이안이 뒤로 튕겨 나갔다.
키- 아아아아-!
타후므리트의 분노한 절규가 숨결과 함께 터져 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이안을 향해 숨결이 마구 밀려들었다.
콰직!
백금색 날개가 그 앞의 땅을 내리찍으며 가로막았다. 숨결이 날개에 막혀 사방으로 흩어지며 얼어붙었다. 날갯죽지 너머로 황금색 마력이 눈부시게 점멸하며 숨결과 포효를 막아냈다.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설핏 구겨진 순간.
콰아아!
타후므리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보랏빛 충격파가 그의 거체를 밀쳐냈다. 한데 뒤엉켜 소용돌이치던 하늘의 마력이 번쩍였다.
더 강하게 튕겨진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 밀려나냐고…!'
그는 이를 악물며 왼팔을 땅에 찍듯 휘둘렀다. 카가각, 팔 끝의 역장 방패가 땅에 박혔다. 이안의 왼팔은 강력한 자력에 고정된 것처럼 방패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절벽에 매달린 듯한 자세.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와중에, 이안은 단죄의 검을 간신히 거꾸로 쥐었다. 검날도 땅에 박혔다.
콰과과-
방패와 검이 땅을 갈듯 밀려났다.
진언에 담긴 마력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어이없게도 망자들의 공격을 막거나 후려칠 때보다, 지금 소모되는 마력이 더 많았다.
어쨌거나 어깨의 고통도, 밀려나는 속도도 줄어들었다.
이안의 발이 땅에 닿은 그때.
쿠우웅-
멀지 않은 곳에 아르케아스가 떨어졌다. 지축이 흔들리고 충격파가 역장 방패 위를 훑고 지나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이안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크르르….
하지만 아르케아스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력을 폭발시킨 타후므리트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른 빛이 아니라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놈의 안광이, 마력이 뒤엉킨 하늘로 향했다.
놈이 치솟았다.
자세를 다잡은 아르케아스가 날개를 펼친 건 그 직후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날아오르지 않았다.
대신 눈매를 슬며시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하아… 하아…."
꼬리 위로 뛰어올라 몸을 타고 오르는 인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케아스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아르케아스는 감히 자신의 몸을 밟는 인간에게 분노하거나, 불경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거대한 송곳니를 슬쩍 드러내고는, 몸의 비늘을 살짝 세워 주었다.
그가 밟고 오르기 편하도록.
동시에 그의 전신에 옅은 금빛이 아른댔다.
떨어져 사라졌던 전신의 비늘이 전부 한순간에 새로 돋아났다.
양 날개뼈 사이의 비늘은 몇 겹으로 돋아나며 위로 솟아올랐다.
그사이 거의 달리듯 기어 올라온 이안은, 자신의 가슴 아래까지 여러 겹으로 돋아난 비늘 사이로 왼팔을 단단하게 끼워 넣었다.
"...!"
그 순간 아르케아스는 그의 몸속에 아른거리는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흐릿한 공허의 힘과 선명한 신성력도.
마법사라니.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라는 감상은, 물론 찰나에 불과했다.
타후므리트가 어느새 저 높이까지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아르케아스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의 거체가 대기를 찢으며 솟구쳤다.
***
콰과과과과-
눈도 뜨기 힘든 엄청난 풍압 한복판.
'이게 맞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이안은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다.
이게 정말 옳은 공략법인가 하는.
공략 글을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
돌이켜 보면, 그가 공략을 제대로 읽은 시간은 불과 삼십 분도 되지 않았다.
스크롤을 휙휙 내리며 자신의 캐릭터가 왜 망캐인지 알아본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다른 것들에 사용한 시간은 채 절반도 되지 않으리라.
본래의 그는 그다지 똑똑하지도, 활자를 읽는 걸 즐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캐릭터를 새로 키우면서 중간중간 찾아가며 읽으면 그만이기도 했고.
'다른 직업 설명이나 퀘스트 목록을 훑어볼 시간에, 주요 퀘스트 공략이나 진득하게 읽을걸.'
하다못해 그렇게나 많이 건너뛴 북부의 공략이라도 차근히 눈에 담았더라면, 그는 지금 용의 등이 아니라 안전한 지상에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르케아스가 타후므리트를 다시 지상으로 끄집어 내려 주기를 기다리면서.
물론, 지금에 와선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저 새끼를 죽이면, 그게 옳은 공략법이 되는 거지.'
비로소 압력이 조금 줄어들었다.
휘몰아치는 구름 바로 아래였다. 거대한 마력의 바다를 머리 위에 둔 느낌. 저 소용돌이에 담긴 마력이 얼마나 방대한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력을 이렇게나 쓴 채로 싸웠는데도 그 정도였단 말이지….'
아르케아스가 상승을 멈췄다.
저 너머, 타후므리트가 보였다. 놈은 소용돌이에서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묵은 갈증을 해소하듯 필사적으로.
아르케아스는 물론 기다려 주지 않았다.
콰아아아-
솟구치는 동안 이미 응집되어 있던 마력이, 용의 숨결이 되어 눈부시게 뻗어나갔다.
타후므리트는 피하지 못했다.
콰과과과과-
눈부신 폭발과 열기가 놈을 집어삼켰다. 비늘 사이에 더 깊이 손을 끼우며, 이안은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곧 불길에 삼켜졌던 타후므리트의 모습이 설핏 드러났다.
어느새 놈의 전신에 보랏빛이 뒤엉킨 마력이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놈도 온전하진 못했다.
근육은 완전히 타서 눌어붙고, 뼈 역시 마찬가지였다.
'깨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다니.'
타후므리트의 날개 위로 두 장의 날개가 더 펼쳐진 건 그때였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날개였다.
거의 동시에 소용돌이 사이로 번진 황금빛 마력이 아르케아스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솨아아아-
아르케아스의 날개 위로도 황금빛 마력 날개가 돋아났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몸 속으로 밀도가 엄청난 마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용의 마력.
백금색의 커다란 비늘 하나가 왼손 손아귀에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느껴졌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이게 마법사 버프인가…?'
이제야 그가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게 분명했다.
마력이 무한대로 늘어난 것 같은 고양감이 뒤를 이었다. 그의 머리는 이 순간에도 그 이면의 진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 마력은 아르케아스에게는 티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마 그가 아무리 마법을 쏟아낸다 하더라도, 바다에서 물을 몇 냄비 퍼내는 것에 불과하리라.
'그렇다면….'
생각하며, 이안은 단죄의 검을 옆으로 뻗었다.
푸른 신성력이 검신을 타고 뻗어나가는 가운데, 황금빛 마력이 그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치칙- 치치칙-
마력은 곧 새하얀 뇌전으로 화해 거미줄처럼 번져나갔다.
포효한 타후므리트가 날아든 건 그 직후였다. 놈의 목표는 이안이 틀림없었다.
아르케아스도 마주 뻗어나갔다.
쩍, 이안의 손아귀에 붙어 있던 비늘이, 안장 역할을 하는 비늘들 사이로 들러붙었다.
쩌엉-!
두 용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들은 아까와 달리 추락하지 않았다. 마력 날개가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공중전이 이어졌다. 포효와 마법, 숨결이 난무했다. 둘은 서로의 턱을 후려치거나 몸을 회전하며 숨결을 피하고, 역장과 충격파를 토해내 마법을 상쇄시켰다.
위와 아래의 구별이 무의미한 어지러운 전투. 요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신화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기분이리라.
그리고 그 한복판의 이안은, 뜻밖에도 크게 괴롭지 않았다.
투쟁의 축복뿐 아니라 용의 마력까지 그의 능력치를 높여주고 있었다.
'버프가 대체 몇 겹인지.'
생각하며, 이안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단죄의 검은 어느새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뇌전이 아니라 빛의 검을 든 것 같았다.
용의 마력에는 마법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안은 거기에 혼돈력까지 섞어 넣었다.
마법을 더 증폭시키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그게 타후므리트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놈은 지금 공허의 마력까지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혼돈력은 같은 공허의 존재들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걸, 이안은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이런 식으로 타락자들과 싸우는 거겠지.'
이안은 지금이라면 마법을 끝도 없이 증폭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단죄의 검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농담 삼아 강철 마법봉이라 부르긴 하지만. 어쨌건 검은 대부분 마법을 부리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검으로 마법을 쓰면 내구도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
그거 예비 성물인 이 튼튼한 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검 내부 어딘가에 자리한 신성의 근원이 휘청대는 게 느껴졌다.
내내 신성력을 한계까지 뽑아내며 휘두른 여파이기도 하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다행히 적당한 순간은, 검이 더는 마법을 버틸 수 없게 되기 전에 찾아왔다.
쿠와악-
아르케아스의 앞발에 뒤엉켜 있던 타후므리트가 불쑥, 기습적으로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이안을 그대로 찢어발기려는 듯, 보랏빛 마력을 머금은 아가리가 벌어졌다.
"댁도 좀 따끔할 거요."
아르케아스를 향해 내뱉은 이안이, 그 한복판으로 빛의 검을 내뻗었다.
용의 숨결조차 뇌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새하얀 빛 덩어리 같은 뇌전이 타후므리트의 아가리를 관통했다.
파삭-
일렁이던 보랏빛 마력이 으깨졌다.
타락용의 뼈 사이로 새하얀 빛이 번쩍이고, 뒤이어 새하얀 뇌전 줄기가 거체를 뒤덮었다.
캬- 아아아아-!
놈에게도 확실히 깜짝 놀랄 정도의 충격인 모양이었다. 용의 마력과 혼돈력이 놈의 강대한 저항력을 뚫어낸 게 분명했다.
…이정도면 인간의 마법은 초월한 것 같은데.
생각하는 사이, 아르케아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카드득-!
뇌전이 자신에게도 타격을 입히는 것을 감수하고, 타후므리트의 어깻죽지를 깊이 깨문 것이다.
그러면서 황금빛 마력이 가득 맺힌 양 앞발을 놈의 갈비뼈 한복판으로 틀어박았다.
번쩍이며 상쇄되는 마력과 충격파.
꽈지직-
기어코 그의 발톱이 타락용의 가슴을 으스러뜨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찬 절규를 토해내며, 타후므리트도 아르케아스의 목덜미를 깊이 깨물었다. 아르케아스는 방어에 돌릴 마력 조차 전부 공격에 동원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백금색 비늘이 으스러지며, 용의 피가 치솟았다.
튀어 오르자마자 기체가 되어 승화하는 황금색 마력.
까드드드득-
그사이, 타후므리트의 가슴이 점점 더 으스러졌다.
아르케아스는 목덜미를 깊이 물린 상태에서도 다시 한번 힘을 줬다.
그의 거체에 어마어마한 힘이 실리는 것이 이안에게도 전해졌다.
타후므리트가 조금씩 위로 솟았다.
아르케아스가 놈의 가슴에 박아넣은 양 앞발을 점점 벌리면서 치켜들고 있었다.
우지직, 어깨와 이어진 아르케아스의 목덜미가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피가 치솟으며 금빛 안개가 자욱해졌다.
마침내 백금룡의 살점을 한가득 입에 문 타후므리트가 고개를 젖혔다.
고통과 증오가 뒤섞인 절규.
곧 살점을 뱉어낸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의 목을 물어뜯었다. 아르케아스도 물러나지 않고 놈의 뼈만 남은 목을 물었다.
"...."
하지만 이안은 두 용의 뒤엉킨 머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르케아스가 치켜든 앞발 사이.
으스러진 티후므리트의 가슴이 좌우로 쩍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시선은 그 한복판, 거대하고 새카만 덩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부에 엄청나게 응축된 마력이 전해졌다.
용의 약점.
본래라면 몇 겹의 뼈와 마법으로 보호받는 용의 심장이, 같은 용에 의해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쩌적-
이안은 비늘에 붙어 있던 왼팔을 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아르케아스의 어깻죽지 끝에 멈춰 섰다.
단죄의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강대한 마법을 펼친 여파로 위태롭게 깜빡이던 신성력이, 어느새 다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이안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서 볼 때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건만. 여기선 모든 게 장난감처럼 보일 만큼 작았다.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짙은 어둠. 그 한복판, 불길과 재에 뒤덮인 폐허가 된 계곡과 벨리움 요새.
공포에 질린 것처럼 울부짖는 망자들.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겠지?'
다음 순간, 그는 심장을 향해 몸을 날리며 단죄의 검을 치켜들었다.
#119화
푸른 궤적이 거대한 심장 윗부분에 틀어박혔다.
콰직-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단단함.
매달린 채로 검 자루를 고쳐 쥔 이안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긋기 시작했다.
타후므리트가 순간 굳어졌다.
카- 드득-
그 사이에도 심장에는 깊고 기다란 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푸른 신성력이, 균열을 타고 번지는 오염된 마력을 불태웠다.
키아-아악-!
타후므리트가 비로소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검신이 심장을 조금씩 계속 내리 갈랐다. 비명이 더 커졌다. 으직, 다음 순간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안의 전신을 울리던 비명이 사그라들었다.
아르케아스가 물고 있던 타후므리트의 목을 꺾어 버린 것이다. 기괴한 각도로 비틀어진 타락용의 거대한 머리가 축 늘어졌다.
보랏빛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쿠르르….
소용돌이치던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렸다. 잿빛 눈보라가 그 사이로 번지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막대한 양의 오염된 마력이, 증발하는 것보다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 한복판.
"...."
뒤틀려 꺾인 채 늘어진 타후므리트의 머리를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한쪽 목덜미가 찢겨 나간 아르케아스. 죽음을 맞이한 동족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슬프고, 지쳤을 뿐.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이윽고, 심장 한복판의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나 좀 받아 주시오."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우지직, 타후므리트의 갈비뼈에 깊이 박혀 있던 한쪽 앞발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는 한 팔로도 이 거대한 용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시체는 어쩐다. 내 지분도 3할 정도는 있으니까….'
생각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기대고 있는 거대한 심장으로 돌아갔다.
중요한 의문이 고개를 든 것이다.
왜 퀘스트 완료 창이 안 뜨지,
'…설마.'
이안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게임에서도 약점을 공격한다 해서 보스가 반드시 한 번에 죽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 상대는 용이라는 상식을 초월한 존재인 데다, 심지어 언데드이기까지 했다.
목이 부러지고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죽음을 유예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솨아아-
그 예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번져 나온 보라색 마력이 심장의 갈라진 틈을 이어 붙였다. 검날을 옭아매는 압력이 느껴졌다. 푸른 신성력이 발작하듯 타오르고, 마력이 그 사이로 치솟았다.
푸스스, 옆에서 보랏빛이 번졌다.
'이런 씨…!'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축 늘어진 타후므리트의 머리에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안을 노려보는 채로.
아르케아스도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앞발을 다시 갈비뼈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타후므리트의 기습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키- 아아아아-!
어긋난 턱뼈가 벌어지며 절규를 토해냈다. 자욱한 잿빛 눈과 흘러내리던 오염된 마력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콰과과과과-
폭발과 충격파가 사방을 뒤덮었다.
충격의 대부분은 엉겨붙은 두 용이 막아 주긴 했지만, 이안도 몸을 움츠리며 역장 방패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복수■■… 반드시 이■■니…!
처절한 사념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폭발이 거세졌다.
아르케아스가 황금빛 역장을 두르기 시작했다. 이안도 검을 내리그으려 애썼다.
'마력 밀도가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하지만 온 힘을 다해도 검신은 아주 조금씩만 움직였다. 검이 부러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타후므리트가 축 늘어져 있던 날개를 펼쳤다. 끝에서부터 가루가 되기 시작한 두 장의 마력 날개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놈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안은 단죄의 검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건 최후의 발악이었다. 검은 나중에 유해에서 회수하면 되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심장에 발을 얹고 도약을 준비한 순간이었다.
솨아아-
오염된 마력이 흐릿한 막을 형성해 벌어진 가슴을 감쌌다.
-너는 결■ 벗어나지 못■■■…!
으직, 으지직-
사념과 함께, 아르케아스의 앞발이 박힌 타후므리트의 갈비뼈가 으깨지기 시작했다. 곧 가슴 한쪽이 통째로 부서졌다. 앞발 하나가 함께 떨어져 나갔지만, 타후므리트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캬오오오-!
아르케아스가 놀란 듯 포효했다.
하지만 몸이 조각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갯짓을 시작한 타후므리트는, 이미 그에게서 벗어난 뒤였다.
몸을 거꾸로 뒤집은 채, 만신창이가 된 타락용이 솟구쳤다.
"...!"
역장 방패로 마력 장막을 후려치던 이안의 눈이 이내 커졌다.
먹구름에 맺힌 마력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보라색 마력 장막 위로 충격파가 끝없이 터져 나왔다. 몸을 숙인 이안은 벌어진 갈비뼈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이 폭발하면서 아르케아스를 추락시키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자세를 다잡았다. 그를 중심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기 시작한 황금빛 역장이, 이안의 눈에 느릿느릿 새겨졌다.
콰아- 과과과과-
종말이 온 것 같은 폭발이 역장을 뒤덮는 걸 마지막으로, 모든 풍경이 멀어졌다.
***
"...."
트라벨가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 누구도 거리를 오가지 않았다.
북쪽 하늘 너머에서 굉음이 번진 순간부터 시작된 적막이었다.
카링기온에서 온 지원군이 북쪽으로 향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점.
벨리움 요새가 위치한 북쪽의 굉음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몇 채의 집에 나눠 모인 야인 정착민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아스켈이 집을 오가며 다독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기척을 좇던 테사이아의 얼굴에도, 옅은 불안이 감돌았다.
"이안은 괜찮은 거겠지? 설마-"
"헛소리는 내뱉지도 마라."
벽에 기대선 샬롯이 말을 잘랐다.
"이안은 절대 죽지 않아. 그렇게 약속-"
쿠구구구구-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굉음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수인과 흡혈 요정이 말을 멈췄다.
테사이아가 안대를 벗으며 샬롯의 눈을 마주보았다. 곧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의 지붕 위로 튀어 올라갔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폭음을 귀에 담으며 지붕 몇 개를 타 넘은 그들은, 이윽고 높고 좁은 굴뚝 위에 나란히 섰다.
밖의 전경이 드러났다.
어둠. 북쪽에 자욱한 먹구름과 저 먼 하늘에 번지는 번쩍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탄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녀의 귀가 문득 쫑긋댔다. 홱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빛이 붉게 번뜩였다.
침묵에 잠긴 어둠.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민 몇몇이 슬쩍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는 테사이아를, 이윽고 샬롯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아니야. 뭔가 기분이 쌔 했어."
읊조린 테사이아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곧, 그녀는 자신이 느낀 불길함을 깨끗하게 잊었다.
저 먼 하늘. 밤하늘을 가린 먹구름을 뚫고, 허공에 보랏빛 궤적을 수 놓는 거대한 존재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포물선 같은 궤적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동쪽을 향해 날고 있었다.
그 존재가 이윽고 트라벨가에서 머지않은 상공까지 다가오자, 테사이아가 더듬대며 내뱉었다.
"용…? 용이야, 저거…?"
샬롯은 눈만 끔뻑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랬다. 저만큼 거대한 크기를 가진 날개 달린 존재는, 용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생김새만큼은 아주 괴상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데다 온몸이 너덜너덜하고, 결정적으로 거꾸로 뒤집어져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상하게 꺾인 채로 축 늘어진 건, 꼬리가 아니라 머리였다.
허공을 수놓는 보라색 궤적은, 두 장의 날개가 부스러지면서 만들어 내는 마력의 잔해였다.
그때 용이 궤적을 틀었다.
한쪽 날개가 깊이 가라앉으면서, 누가 찢어발기고 헤집은 것처럼 엉망이 된 몸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샬롯의 입이 더 벌어졌다.
보랏빛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 한복판, 어딘가 낯이 익은 붉은 빛과 푸른 빛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 아아아-!
용이 섬뜩한 비명을 흩뿌렸다. 이어 잿빛 숨결이 땅으로 쏟아졌다.
번쩍이는 푸른 빛이 짙어졌다.
그 사이로 설핏 드러나는 작은 실루엣.
그대로 멀어지는 용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샬롯이, 이윽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이안…?"
***
'시발….'
간신히 뽑아 든 검을 움켜쥐며, 이안은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이건 게임에선 없었던 상황이 분명하다고.
제아무리 악랄한 제작자라도, 플레이어를 이런 상황에까지 밀어 넣는 건 말이 안 됐다.
물론 지금에 와선 달라질 것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미 죽어가는 용의 심장 위에 선 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추락하고 있었다.
고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나랑 같이 죽을 생각이네.'
속으로 내뱉으며, 이안은 머리 위를 뒤덮은 마력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심장을 다시 찌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놈은 곧 알아서 죽을 테니까.
이 순간에도 심장에 담긴 마력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놈이 땅에 추락하기 전에 먼저 탈출해야 했다.
'착지는….'
이안은 몸속의 마력을 확인했다.
손아귀의 비늘은 어느새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도 그의 몸속에는 용의 마력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휘몰아치는 방벽과 돌풍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뼈만 몇 군데 부러지는 정도로 착지할 수 있으리라.
아니라 해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찰나의 순간 만에 결정을 끝낸 이안은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검신에 균열이 생긴 것이 느껴졌지만, 신성력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콰드득-!
이안은 마력 장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효과는 충분했다. 몇 번 만에 깨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장막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용■■… 너는 ■■ 함께… ■■하리라….
사념과 함께, 이안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게 날개라는 걸 깨달은 이안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우드득, 남은 하나의 앞발도 억지로 움직여 그 위를 덮었다.
이안의 머리 위로 용의 뼈를 얼기설기 엮은 새로운 가림막이 생겼다. 틈이 작진 않았지만, 타오르듯 일렁이는 마력을 보아하니 손을 댈 수도 없을 터였다.
'진짜 작정을 했네, 이 새끼.'
이안이 이를 갈았다. 저 뼈를 전부 갈라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균열이 시작된 검으로는 더더욱.
결국, 그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향했다. 이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이번에야말로 놈을 완전히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콰직-!
양손으로 자루를 쥔 이안이 심장 한복판을 내리쳤다. 신성력과 맞부딪힌 마력이 불똥을 튀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리쳤다. 검신의 균열이 점점 더 커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신성력 역시 더 짙어지고 있었다.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는 것처럼.
콰지직-!
심장을 두르고 있던 마력이 깨졌다. 검이 그 아래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안은 온 힘을 다해 검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의 의지를 읽은 것처럼, 신성력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쩍, 쩌적- 쩌저적-
심장 전체에 균열이 번졌다. 그 사이로 보랏빛 마력이 치솟고,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키- 아- 아-
발아래에서 타후므리트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단말마였다.
퍼억-!
검신이 폭발하면서, 동시에 심장이 사방으로 조각나 흩어졌다. 아래로 떨어진 이안이 착지했다.
퀘스트 완료 창이 비로소 뒤를 이었다. 이안은 창을 닫으며, 부러진 단죄의 검부터 눈에 담았다.
'…고마웠다.'
감상은 짧았다. 타후므리트의 몸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꽃이 피듯 몸통을 감쌌던 날개와 다리가 흘러내렸다.
비로소 밖이 보였다.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땅이 멀지 않았다.
솨아아-
조각난 심장 파편들에서 마력이 휘몰아친 건 바로 그때였다.
'미친-!'
콰과과광-
이안이 몸을 날린 것과 파편들이 폭발한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은 마구 회전하며 튕겨 나갔다.
고통과 함께 몸속, 용의 마력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마력 폭발로부터 그의 몸을 지키고 대신 승화한 게 분명했다.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방벽. 동시에 돌풍이 거세게 회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뻗어 나왔다.
몸의 회전이 줄어들었지만,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콰과과과과-
타후므리트의 시신이 땅에 추락했으니까.
흙먼지와 산산조각난 용의 뼈가 이안의 앞으로 솟구쳤다.
"...!"
이안은 앞으로 치솟은 뼈를 바라보며 황급히 역장 방패를 들었다.
카드드득, 방패가 뼈 표면을 긁듯 스치며 이안의 궤도를 틀었다. 진언이 사그라들면서 방패가 깨졌다.
다음 순간 휘몰아치는 방벽이 그의 몸을 밀쳐냈다. 높이 솟은 또 다른 뼈가 그의 팔을 스쳤다.
이안은 그것만으로도 왼팔이 부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투쟁의 축복과 용의 마력도 물리적인 충격에선 완전히 그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다시 휘몰아치는 방벽을 펼치고는, 바로 앞으로 보이는 땅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푸확-!
돌풍이 한순간 뻗어 나왔다. 속도가 아주 조금 줄어든 게 전부였다.
다음 순간, 엄청난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다시 떠올랐다.
이안은 자신이 비스듬하게 떨어지며 땅에 박힌 게 아니라, 축복과 용의 마력이 만들어 낸 반발력으로 튕겨 올랐음을 깨달았다.
용의 마력이 전부 흩어졌다. 몸 곳곳의 뼈가 부러진 게 느껴졌다.
의식을 잃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안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흩어져 쏟아지는 용의 뼈. 어둠과 흙먼지. 다시 가까워지는 땅. 그리고 상태창.
돌개바람이 몰아치는 걸 느끼며, 그는 남은 능력치 포인트를 전부 다 체력에 투자했다.
그리고는 태초의 내성 스킬 바로 옆, 이미 과거에 1레벨을 찍어 두었던 공용 스킬인 태초의 생명력을 다섯 개 전부 올렸다.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1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