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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No.388 깃털뱀 제단 (1)

'뭐 이런 걸 주냐.'

큼지막한 루비가 내 손 위에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루비 마탑의 고유한 마력이 깃든 정수.

거래를 한다면 무조건 금화 단위고, 아이템의 제작이나 업그레이드에 써도 높은 등급이 보장된다.

고작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려 주는 대가로는 과한 감이 있었다.

기실 비공개 정도는 같은 팀원끼리 도의적인 측면에서 그냥 해 줄 수도 있고, 뭘 주더라도 가볍게 간식이나 커피 정도로 해결을 보는 편이다.

해서 홍연화가 루비를 내밀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고.

그랬더니 훨씬 더 큰 루비가 튀어나온다.

또 거절했다간 다음에는 뭐가 나올지 몰라서 일단은 받았지만, 마냥 횡재했다고 좋아할 건 아니다.

이건 그냥 낼름 집어삼키면 체할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루비 쪽에 가져가 보고,'

그쪽 부장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다.

어차피 루비 마탑에도 찾아가 볼 일이 있을 테니.

루비를 가져가는데 손님 대접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던전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빨리 끝나긴 했네.'

분명 이번 소탕 공략전의 취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살피며 관찰력을 길러 보라는 것이었을 텐데,

나와 홍연화 듀오는 무슨 타임 어택 하듯이 던전을 순식간에 주파해 버렸다.

'홍연화가 잘해 줬어.'

낭비를 줄이기 위해 극도로 효율적인 동선을 짜서 움직인 결과라 하겠지만, 홍연화가 그 동선을 잘 따라와 주어서 더욱 수월했다.

내가 금방금방 몬스터를 찾아내더라도, 처치하는 데 오래 걸리거나 놓치기라도 하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반면 홍연화는 몇 마리가 튀어나오건 순식간에 불살라 버리는 시원시원함을 보였다.

'보스 상대로도 괜찮게 싸웠고.'

쌍둥이 트롤을 상대로도 제법 분전했다.

사실 이 쌍둥이는 무작위로 정해지는 여러 보스 중에서도 뽑기운이 정말 나쁘면 나오는 놈들로, [강적] 딱지가 붙은 참수자 고블린보다 강하다.

그걸 혼자서 상대하면서 30%가량 체력을 깎았으니, 얘도 유망주 이름값은 하는구나 싶었다.

막바지 즈음에는 힘에 부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세했지만, 그때까지 필요한 만큼은 봤다.

복사할 만한 스킬을 정할 때까지는.

▷복사-스킬[2/2]

1. 오버히트(D)

2. 도둑걸음(B)

오버히트.

완성된 화염 스킬 하나를 흡수하고, 지속시간 동안 흡수한 스킬의 위력에 준하는 육체 능력을 얻는 스킬이다.

작은 화염 폭발을 일으키는 [컴버스천]보다는, 큼지막한 화염구를 만드는 [플레임 오브]를 흡수했을 때 능력치가 더 많이 증가한다는 뜻.

나에게 화염 계열 스킬은 단 하나뿐이다.

대신 아주 무지막지한 놈으로.

'인페르노 피스트.'

위력이 위력이라 흡수할 시 육체 능력도 대폭 증가하리라 예상한다.

인페르노 피스트는 금지 스킬인 만큼 상황을 많이 봐가면서 써야 하는데, 이제 리플레이가 돌아가는 중에도 오버히트 제물로는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증가한 육체 능력과 B랭크 도둑걸음, 그리고 서예인에게 받은 신발까지 더해지면....

'3학년과도 술래잡기 정도는 가능하겠지.'

기동성에서는 당분간 눈을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서브 퀘스트:4주 차 공략전](완료)

▷목표:공략전 던전 클리어

▷완성도 100/100%

▷보상:[복사-특성] 슬롯+1

복사-특성[1/2]

1. 원소 저항(S)

2. (없음)

100% 소탕 보상은 [복사-특성] 슬롯 추가.

이제 [원소 저항]을 덮어씌우지 않고도 새로운 특성을 복사할 수 있게 되었다.

특성은 스킬과는 달리 발동하는 전조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보유 여부를 파악하기가 더 까다로운 편이다.

랭크를 가늠하는 건 더 까다롭고.

EX급 환생 퀘스트의 여파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교체된 지금, 다른 학생이나 교직원들의 특성을 알아내려면 다소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이건 조금 미뤄 두고, 확실하게 내가 알고 있는 대상을 노린다.

지하층 던전에 자리하고 있을 보스 몬스터들을.

* * *

"김 형."

저녁.

약속 시각에 맞춰 던전동으로 향하는 길, 고현우를 마주쳤다.

나란히 걸으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공략 다 외웠냐."

"물론이오. 지시한 대로 토씨 하나 빼먹지 않았다오."

"똑같이 따라 할수록 좋고, 실수로 몇 개 틀리는 것까진 괜찮아. 너무 헤매지만 마라."

"결코 김 형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겠소."

"믿는다."

던전동 입구에 다다르니, 기다리던 신병철이 우리를 보고 씩 웃으며 반겼다.

"왔구만. 준비들 되셨나?"

"그럼."

"좋아요, 좋아. 우선 이것들 받으시고."

신병철이 준비해 온 물건들을 하나씩 건넸다.

하나는 넥타이에 꽂는 은색 핀.

2학년 핀이다.

현시점에서 1학년은 지하로 내려갈 수조차 없는데, 넥타이핀이 흰색이다?

그 자리에서 선도부실행이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려면 2학년 핀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

넥타이핀 교체는 교칙 위반이며 잡히면 가중 처벌을 받지만, 안 잡히면 그만 아니겠는가.

두 번째 아이템은 사람 얼굴 모양의 뱃지였는데, 이목구비 대신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개 뱃지]

뱃지를 앞주머니에 달고 다른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고현우도 나와 신병철을 번갈아 보고 감탄사를 흘린다.

"오, 이래서 아무개로군."

두 사람의 얼굴이 흐릿한 것 같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다.

일종의 인식 방해 마법이 걸린 아이템으로, 사람 얼굴을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준다.

다만 마나를 눈에 집중하면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눈에 확 띄는 데다, 예리한 사람은 금방 위화감을 눈치채기도 한다.

여러모로 허술한 아이템이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냥 평범한 얼굴로 보이니 그냥 지나치게 되고 얼굴도 기억에 안 남는다.

위와 합쳐서 허술하지만 의외로 잘 통하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이 아무개 뱃지 역시 불순한 의도로 많이 쓰이다 보니, 소지 금지 아이템 리스트에 올라 있다.

종합하면 던전동 지하층 무단출입, 학년별 핀 교체, 소지 금지 아이템 착용까지, 교칙 위반 항목이 벌써 3개다.

학생이 이렇게 교칙을 줄줄이 어겨도 되냐고?

'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다.'

교칙을 안 어기면 히든 피스를 못 얻고,

히든 피스를 못 얻으면 성장이 늦어지고,

성장이 늦으면 추후 만날 강적들에게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세계가 멸망한다.

EX급 퀘스트가 그렇다니까 아마 맞을 거다.

신병철은 자신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듯, 비열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자, 그럼 내려가 보실까?"

"그럽시다."

우리는 신병철의 안내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지하실 계단 같던 것이, 점차 폭이 넓어지며 커다란 원형 계단으로 바뀌었다.

난간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원형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불이 제법 환하게 밝혀져 있음에도 저 깊은 아래는 어두컴컴하게 보일 정도.

한참이나 원형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다 보니 분기점이 나왔다.

이대로 계속 내려가거나, 오른쪽 통로를 통해 벗어나거나.

앞장서는 신병철이 손짓한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또 내려가는 계단.

처음 내려가던 원형 계단에 비교하면 다소 폭이 좁지만, 아래로 향한다는 점은 같다.

그렇게 한참 내려가면 다시 분기점.

두 갈래 길도 있고 세 갈래 길도 있고.

그럴 때마다 신병철은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쪽."

"거기 말고."

"이쪽으로."

다만 일부러 외진 곳만 골라서 가는 느낌이라, 궁금증이 동했는지 고현우가 물었다.

"신 형, 하나 물어봐도 괜찮소?"

"엉, 물어보셔."

"그냥 내려가는 것과 신 형처럼 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요?"

그냥 처음 밟았던 원형 계단만 타고 내려가면 넓고 쾌적한데, 굳이 복잡하게 미로를 만들면서 갈 필요가 있냐는 뜻이다.

다 이유가 있다며 신병철이 답했다.

"솔직히 우리가 떳떳하지는 않잖냐. 최대한 피해 다녀야지."

당연한 얘기지만 지하층을 배회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공략전을 하는 2, 3학년은 기본이요, 선도부나 교직원들도 주기적으로 순찰을 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루트일수록 위험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최대한 인적이 뜸한 길만 고르고 골라 내려가는 것이다.

신병철이 엄지로 본인을 척 가리키며 호언장담했다.

"걱정하지 말고 이 신병철만 믿고 따라오라! 쥐새끼 하나 마주치지 않게 해 드리지."

그러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5분도 안 돼서, 신병철이 움찔하곤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급하게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한다.

'자연스럽게 지나가자. 자연스럽게.'

곧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2학년 한 파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렬로 서서 한쪽으로 붙었고, 상대방도 반대쪽으로 붙었다.

"...."

"...."

스쳐 지나가는 순간 두어 명의 눈동자가 우리 쪽을 향했다.

마치 '우리 학년에 저런 애가 있었나?'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나 더 깊게 알아볼 필요까지는 못 느끼는지 곧 시선을 돌려 버렸다.

막 던전 공략을 끝낸 참이라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겠지.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2학년들이 위쪽으로 사라지고,

고현우와 내가 말없이 신병철을 바라보았다.

쥐새끼 하나 마주치지 않게 해 준다며?

신병철이 즉시 변명한다.

"...방금은 운이 없었다. 나 믿지?"

"...."

고현우는 격려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얼마나 왔소?"

"번호로 치면 700번대일걸."

"700번대라 하면?"

"F급. D급은 한참 더 내려가야 돼."

고현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허어. 던전동이 광활하다고는 익히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D급까지 가는 데에만 이토록 오래 걸린다면 심층부라는 곳은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할지...."

"괜히 심층부가 아니거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 갑시다."

사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느낌이 드는 건 우리가 지하층에 몰래 내려온 탓이 컸다.

걷는 게 귀찮거나 시간이 아까운 학생들을 배려하여, 지하층 곳곳에 승강기나 순간이동 마법진 등의 층간 이동 수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시설들을 이용하려면 기본적으로 학생증을 스캔해야 하고, 수정구가 설치되어 있어서 기록이 남는다.

조금 편하자고 기록을 남길 수는 없으니 보고도 무시하고 지나쳐야 했다.

가이드의 수준이 높으면 수정구를 속이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신병철은 우리와 같은 1학년이었다.

결국 부지런히 뚜벅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2학년을 두 팀이나 더 마주쳤다.

시간대도 나름 사람이 적은 저녁 시간대를 골랐고, 최대한 인적이 뜸한 루트를 탔는데도 이렇다.

"하하.... 이거 좀 미안하네."

신병철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한 번쯤이야 운이 없다고 치부하고 넘길 수 있지만, 세 번이나 반복되면 그것도 염치가 없어진다.

하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쟤도 겨우 한 번 내려와 봤다니까.

다 이러면서 경험을 쌓는 거다.

"안 잡혔으면 됐지. 다음부터 운전 잘해."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객님. 이쪽으로 오시죠."

지긋지긋한 계단을 벗어나 개미굴 같은 통로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곳저곳에 입을 벌리고 도전자를 기다리는 D급 던전들.

순간이동 포탈마다 생김새가 제각각이고, 안쪽에서 언뜻언뜻 비추는 풍경도 다 다르다.

[No.396] [대응표국]

[No.394] [제7실험실]

공통점이라면 인공 던전보다 몇 배는 흉흉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

우리는 그런 포탈들을 계속 지나치다가 한 곳에서 정지했다.

[No.388] [깃털뱀 제단]

"잠깐 기다려 봐."

입장하기에 앞서.

신병철이 인벤토리에서 몇몇 장치들을 꺼내더니 부산스레 돌아다니며 설치하기 시작했다.

일대를 감시하는 수정구를 잠시 교란시키고, 나중에 추적당할 여지를 안 남기기 위함이다.

이것 역시 도둑 동아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일환이다.

빠르게 설치를 끝낸 신병철이 손을 탁탁 털었다.

"다 됐고. 얼마나 걸려?"

"금방 끝나."

"오라잇.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다."

거기까지 말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나는 고현우와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례차례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시야가 급변했다.

63화 No.388 깃털뱀 제단 (2)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한 하늘.

빽빽하게 초목이 우거진 열대우림.

그런 열대우림 사이로 보란 듯 길이 쭉 나 있다.

먼 저편에는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눈에 띈다.

이번 던전의 핵심, 깃털뱀 제단이다.

다음 순서는 누가 보기에도 명료하다.

눈앞의 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목적지인 제단에 도달하겠지.

그러나 과연 그 길이 순탄할지는 의문이다.

- 쐐액!

가느다란 것 여러 개가 고현우와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슬쩍 옆으로 비켜서자, 우리를 지나쳐 뒤쪽 땅이며 나무에 푹푹 꽂힌다.

날카롭게 깎은 나무창이다.

뒤이어 풀숲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야만인들.

몸에 걸친 의복이 별로 없는 대신 붉고 흰 물감 같은 것을 덕지덕지 처발랐다.

"저러니까 좀 쎄 보이는데."

표정이 험상궂어서 더 그래 보이기도 하고.

역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것 같다.

"제물이다!"

"산 채로 잡아라!"

- 쉬익!

산 채로 잡으라면서 무기를 쓰는데 거리낌이 없다.

야만인들 일부는 재차 투창을 하고, 일부는 나무창을 앞세워 돌진해 왔다.

나는 한 손을 가볍게 저었다.

[윈드포스]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놈들의 진형을 한차례 강하게 헤집었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지는 야만인들.

넘어지지 않은 놈들이 창을 찔러 오지만,

- 서걱!

고현우가 모두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대충 정리를 하니 또 길을 따라 일단의 야만인 무리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는 상황.

고현우가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건투를 빌겠소."

"너도."

그리고 달려 나가 야만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철검이 번뜩일 때마다 피가 흩뿌려진다.

던전 공략을 숙지하게 하면서 미리 정해 놓은바,

지금부터는 각자 행동할 것이다.

고현우는 저대로 길을 따라 제단까지 전진하게 두고, 나는 길을 벗어나 방향도 제대로 모를 열대우림 안으로 진입했다.

미리 사 온 F급 정글도를 X자로 휙휙 휘두르며 수풀을 뚫고 나아간다.

깃털뱀 제단의 핵심 규칙은 [레이드].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최대 인원인 4인 파티가 입장해서, 덮쳐 오는 야만인들을 뚫고 제단까지 도달한다.

제단에는 의식 준비가 한창이라, 더 많은 야만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놈들과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다 보면 마침내 보스 몬스터, 깃털뱀 제사장이 등장한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레이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을 저지함과 동시에, 제사장과 야만인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 내야만 한다.

어떻게든 보스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하면 던전 클리어.

'정석적으로는 그렇고.'

당연한 얘기지만 정석적인 방식으로, 보이는 길만 따라가선 히든 피스는 꿈도 못 꾼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곳을 열심히 파헤쳐야 뭐가 나오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팍!

정글도로 강하게 후려치자 앞길을 가로막던 나뭇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제법 트인 공간이 나왔다.

곳곳에 희미하게나마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들을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게 부락이 나오지.'

조잡하게 지은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락.

야만인들이 있으면 당연히 야만인들의 본거지도 있게 마련이다.

[깃털뱀 제단]은 워낙 노골적으로 나아갈 길과 목표를 보여 주는 편이라 놓치기 쉬운데, 이 사소한 맹점을 파악하느냐가 히든 피스의 획득 여부를 가르는 것이다.

부락 내에는 야만족의 숫자가 적었는데, 대부분이 제단 쪽으로 몰려서 그렇다.

모닥불을 피우던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일단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 안녕들 하십니까. 식사는 하셨나요?"

"제물?"

"제물이 찾아왔다."

"산 채로 잡아라!"

- 쉬익!

그러면서 대뜸 죽창을 집어 던지신다.

그것도 정확히 내 가슴팍을 노리고.

사람은 심장이 날카로운 것에 꿰뚫리면 죽는데, 이래놓고 어떻게 산 채로 잡으려는지 모르겠다.

죽을 생각도 잡힐 생각도 없어서, 날아오는 창에 윈드포스를 집중시켰다.

창이 부르르 떨더니 급격히 속도를 잃고 내 손에 턱 잡혔다.

그것을 도로 집어 던지는 동시에 바람을 강하게 쏘아 보내자,

- 퍽!

원래 주인의 몸을 관통하고 나아가 그 뒤 야만인의 몸에 틀어박혔다.

이런 식으로 일점에 물리력을 집중시키면 투사체의 속도를 늦추거나 가속할 수도 있다.

근접 계열 클래스가 우월한 근력과 마나를 써서 던지는 것이나 원거리 계열의 고유한 투사체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보통 이상의 파괴력은 나와서 잘 써먹는 중이다.

홍연화와 공략전을 할 때는 이 방법으로 트롤의 손도끼를 받아치기도 했었다.

"강한 제물!"

"무조건 잡아야 된다!"

"산 채로 잡아라!"

동료 두 명이 쓰러졌는데 야만인들은 오히려 더욱 흥분한 기색이었다.

눈빛에서 복수심보다는 제물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이 엿보인다.

그래도 뭐 물어보면 답변은 해 주지 않을까?

해서 넌지시 물었으나,

"족장님 안에 계신가요?"

"죽어라!!"

대답 대신 장창이 찔러 들었다.

방금은 산 채로 잡으라면서요.

그새 생각이 바뀌었나.

아무튼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가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들이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간다.

앞길을 가로막는 놈들은 윈드포스로 멀찍이 튕겨 내고, 손에 잡히는 건 사람 팔이든 목덜미든 족족 위로 집어 던진다.

"으아아—"

비명 소리가 하늘 높은 곳으로 멀어져 간다.

착지는 알아서들 잘할 거라 생각한다. 아님 말고.

인간의 벽을 불도저처럼 뚫으며 전진한다.

야만인 족장, 제사장을 찾으려고 이곳저곳 헤집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냥 부락 내에서 제일 큰 오두막으로 가면 된다.

상식적으로 제사장이란 양반이 조촐하게 부락 한구석에 거처를 마련했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 펑!

그때까지도 달려드는 야만인들을 가볍게 날려 보내고,

입구에 쳐진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윽한 향냄새가 나를 반겼다.

한켠에 마련된 간이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 앞에는 제사장으로 추정되는 중년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였다.

제사장이라 그런지 온몸에 깃털 장식이 치렁치렁하고 얼굴 분장도 더 짙다.

"...."

인기척을 느낀 제사장이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나를 발견했다.

품평하듯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한다.

"...보기 드물게 강한 기운을 품은 놈이로다. 좋은 제물이 되겠구나."

"거 보는 놈들마다 제물 얘기밖에 안 하네. 다른 주제는 없소?"

"기르는 가축에게 긴말해서 무엇 하겠느냐. 어차피 결국에는 배를 가를 운명인 것을."

"그건 맞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장이 매우 자비로운 어조로 제안했다.

"순순히 잡힌다면 고통스러운 순간도 짧아질 것이다."

"저는 잡히는 것도 아픈 것도 싫은데요."

"그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 보고 싶거든요."

"그러려무나."

제사장이 인자하게 웃었다.

야만인 몇 명이 따라 들어와서 내 배후를 점했고,

"잡아라."

일제히 나에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가장 가까운 놈의 인중을 후려친 다음, 목덜미를 움켜잡고 제사장에게 집어 던졌다.

제사장 주변의 반투명한 막에 충돌하고 벽에 처박힌다.

- 텅!

'D급 배리어.'

연달아 네다섯 명을 더 집어 던졌으나 별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

물론 내 노림수는 배리어를 뚫는 게 아니었다.

나가는 길을 막는 놈들을 치우는 거지.

인파 사이에 생긴 약간의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얄밉게 한마디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잡아 봐라."

- 콰쾅!

금빛 기운이 방금까지 내가 지나간 자리를 짓이겼다.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제사장이 제 거처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덧붙여 부락 내의 모든 야만인이 주변을 둥글게 포위하는 상태.

날아드는 금빛 기운과 투창을 피하며 생각했다.

'최소 조건은 클리어했고.'

[깃털뱀 제단]의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최소 전제조건.

바로 제사장을 부락에 묶어 두는 것이다.

제사장이 제단에 도달하는 순간 잠자고 있던 히든 피스가 저절로 제사장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고현우가 완전히 소유권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분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굳이 숲을 뒤져 가며 부락까지 찾아온 거고.

여태까지는 전부 계획대로 돌아가는 중이다.

- 쾅!

땅을 걷어차며 물러나자 또 황금색 빛 뭉텅이가 떨어져 내렸다.

나를 추격하던 야만인 몇 명이 대신 얻어맞고 온몸이 찌그러졌다.

저건 원소 공격이 아니라서 한 대라도 맞으면 골로 간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안 맞으면 되지.'

피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인페르노 피스트]

주먹이 검붉은 불꽃으로 달구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서 제사장이 죽어 버리면 고현우가 히든 피스를 얻기 전에 던전이 닫혀 버린다.

당분간은 살려 둬야 하니 참는다.

내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시전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오버히트]

주먹에 깃든 막대한 힘이 온몸으로 퍼지며 에너지를 공급했다.

날아드는 금빛 기운을 피하며 앞으로 돌진했다.

- 팟! 팟!

바닥을 박찰 때마다 시야가 휙휙 변하고 제사장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제사장이 눈을 부릅뜨고 방어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내 손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손은 투명한 막을 단숨에 깨뜨리며 제사장의 가슴팍에 닿았다.

- 펑—!

제사장의 신형이 거처 안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안쪽에서 와장창하고 집기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쓸만하네.'

나는 조금 얼얼해진 손을 털었다.

오버히트로 강화한 육체에 윈드포스를 담아서 후려쳐 봤는데, D급 배리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박살 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명색이 보스급이라 본체에는 별 피해가 없을 거다.

안쪽에다 대고 말했다.

"거, 방어에도 신경 좀 쓰고 그러세요. 너무 허술한 거 아닐까 싶네—"

즉시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선명한 황금빛 막대기가 지나갔다.

안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요. 화가 많이 나셨네."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 콰콰쾅!

이제 황금빛 뭉텅이가 두 개, 세 개씩 떨어져 내린다.

이것 역시 의도대로였다.

깃털뱀 제사장의 최우선 순위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

어설프게 어그로를 끌면 전투 도중에 떠나 버리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잔뜩 화를 돋워 놓으면 된다.

- 콰콰콰쾅!

물론 그만큼 피하는 난이도가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나는 열심히 발을 놀리면서 흘긋 뒤쪽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우뚝 솟은 깃털뱀 제단에서 지금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잘해라, 고현우.'

나머지는 너 하기에 달렸단다.

64화 No.388 깃털뱀 제단 (3)

- 서걱!

피육음과 함께 야만족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놈이 마지막이었다.

고현우는 조금 금이 간 철검을 바닥에 푹 꽂았다.

머지않아 부러질 듯하니, 전투 중에 부러지게 놔두는 것보다 지금 보내 주는 게 나으리라.

인벤토리에서 새 철검을 꺼내 들고, 길을 따라 마저 이동하기 시작했다.

"...."

빠르게 걷던 고현우가 우측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눈에 담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매복이라.'

공략본에 다 적혀 있었으니까.

적들이 선공을 가하도록 기다려 줄 이유가 없었다.

고현우가 바위 쪽으로 몸을 날리자, 숨어 있던 야만족들이 깜짝 놀라 모습을 드러냈다.

"들켰다!"

"죽여라!"

투창들이 날아들었다.

고현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철검을 부드럽게 긋자 그를 향해 쇄도하던 투창들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고, 다음으로 야만인들의 목이 떨어졌다.

- 서걱!

고현우의 검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는 놈들에게 자비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풍경 속에서도 고현우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즉시 다음 장소로 몸을 날린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지금쯤 김호는 목숨을 걸고 보스 몬스터와 일대일로 겨루는 중일 터.

자신이 히든 피스를 얻을 수 있도록 가장 어려운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최대한 신속하게, 그리고 최대한 정확하게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깃털뱀 제단] 공략본을 모두 숙지하고 던전에 들어와서 깨달은 사실은, 실제로는 생각처럼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몇 개 틀리더라도 무리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듯했다.

아마 첫 지하 던전임을 감안해서 단순하고 쉬운 걸 내줬겠지.

그러나 고현우는 어중간하게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한다.'

그리하여 증명할 것이다.

이보다 더욱 위험천만한 심층부 던전에서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는 사실을.

고현우의 상념이 끊김과 동시에 길이 끝나며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깃털뱀 제단은 멀리서도 뚜렷하게 들어올 정도였는데, 눈앞에서 보니 더욱 웅장했다.

시야 한쪽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제단 앞에서는 의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곧 산 제물로 바쳐질 포로들이 줄줄이 묶여 가축처럼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순응한 듯 눈빛에 생기가 없었다.

야만족들 몇몇이 그 주위를 맴돌며 연신 바구니에 든 무언가를 뿌려 댄다.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양념?'

한편, 야만족들은 나름대로 무장을 갖추고 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이미 고현우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당연했다.

사방에서 적개심 가득한 시선들이 쏟아진다.

고현우는 그 시선들을 받으며 당당한 걸음으로 인파를 가로질렀다.

"뭣들 하나! 당장 잡지 않고!"

"죽여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외침에 장내의 모든 창칼이 고현우를 향해 겨누어졌다.

이때부터 고현우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앞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단칼에 베어 넘기며 한쪽 방향으로 쭉 달렸다.

창을 찔러 오는 놈을 스치듯 지나쳤다.

다음 순간 놈의 가슴팍에 긴 상처가 생겨났다.

다른 놈이 방패를 앞세우고 검을 휘둘렀다.

고현우가 몸을 슬쩍 기울인 다음 철검을 쓱 긋자 방패와 함께 두 쪽이 나 버렸다.

"으악!"

"크엑!"

단말마들을 뒤로하며 빠르게 나아간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미리 숙지해 둔 상태.

고현우의 목적지에는 거한 하나가 서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눈에 띄게 큰 키와 비대한 몸집.

얼굴 분장도 울긋불긋한 것이 일반적인 야만인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저자가 뚱뚱이로군.'

제단에서 대기하는 인원 중에는 부제(副祭)가 둘 존재한다.

제사장의 바로 아래 지위를 가진, 쉽게 말하면 중간보스들이다.

김호의 공략본에는 '뚱뚱이'와 '홀쭉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 뚱뚱이는 괴력을 살려 굵은 통나무를 휘두르고, 홀쭉이는 날렵하게 뛰어다니며 독침을 쏜다.

- 두 명이 협공을 시작하면 몹시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한번 싸워 보고 싶기는 하군.'

무인으로서 호승심이 일었으나, 고현우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공략을 그대로 이행할 뿐.'

"...."

뚱뚱이는 고현우와 시선을 맞추더니, 근처 바닥에 박힌 굵은 통나무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힘을 주자 통나무가 점점 땅 깊숙한 곳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는 동안 고현우의 신형은 시시각각 놈과 거리를 좁혀 갔다.

공략본의 다음 내용은 무엇이고 하니,

- 두 명이 협공을 시작하면 몹시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 하지만 굳이 두 놈을 동시에 상대할 필요가 있나?

뚱뚱이가 통나무를 다 뽑아 들기 직전.

상대가 가장 무방비해지는 그 순간, 고현우의 철검이 한 줄기 직선을 그렸다.

[급류(急流)]

등 뒤에서부터 강렬한 바람이 불어 갔다.

고현우의 일검이 그 흐름을 타고 더욱 가속했다.

장삼과의 대결을 통해 다듬어 낸 쾌검이 펼쳐졌다.

- 팟!

다음 순간, 뚱뚱이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뚱뚱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이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거체와 통나무가 연달아 바닥과 충돌하며 먼지를 피워올렸다.

- 쿠쿵!

고현우는 부스러지기 시작하는 철검을 놓아주고 새 검을 뽑았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뚱뚱이의 팔을 붙잡고 팔찌를 뜯어냈다.

"우선 하나."

다음 순간 홱 몸을 돌리면서 검을 긋는다.

- 따당!

무언가가 철검에 맞고 튕겨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언뜻 확인해 보니 미세하리만치 얇고 짧은 독침이었다.

고현우의 눈이 그를 둘러싼 야만족들을 찬찬히 훑다가, 사이사이로 잽싸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포착했다.

십중팔구 '홀쭉이'이리라.

- 쉬익!

재차 날아드는 독침을 옆으로 반보 움직여 피한다.

발사한 곳을 눈으로 좇으니 그새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수많은 야만족을 벽처럼 세워놓고 독침을 날려 대는 전법.

'성가시군.'

고현우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무인으로서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전법이었다.

한 가지 희소식이라면 야만족들의 방어는 박나리의 반려 호랑이처럼 견고하지 않다는 점.

뚱뚱이를 미리 치워 둔 점이 주효했다.

공략본의 다음 지시는 고현우의 마음에 쏙 들었다.

- 곧바로 홀쭉이를 추격하지 말고, 먼저 야만인들의 수를 줄여 놓을 것.

정면 승부에는 자신이 있는 그였으니까.

파도처럼 몰려드는 적들을 앞에 두고 철검의 움직임이 점차 느릿해졌다.

[청류(淸流)]

부드러운 바람이 야만족들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 카가가가각!

"크아아악!"

바람에 담긴 검기가 범위 내의 야만족 십수 명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동족이 쓰러진 빈자리를 뒤쪽의 놈들이 채웠으나 또다시 바람이 불며 목숨을 앗아 갔다.

죽음도 불사하고 달려드는 광신도 같은 놈들이었지만, 일검에 한 무더기씩 쓰러지니 별수가 없었다.

인간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그사이에 몸을 숨기던 사내가 드러났다.

몸이 해골처럼 깡마르며 입에는 길쭉한 대롱을 물고 있다.

고현우는 남의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 형이 별명 하나는 잘 짓는군.'

홀쭉이라는 별명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라고.

- 훅!

독침을 쏘아 보내는 홀쭉이.

고현우의 태도는 이전과 달리 느긋했다.

계속해서 천천히 검을 허공에 긋자, 독침이 날아가던 도중 저절로 닳아 없어져 버렸다.

"!!"

홀쭉이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 떠졌다.

잠시간 그 자리에 굳은 놈에게 고현우가 검을 똑바로 겨누었다.

마치 다음은 네 차례라고 말하는 것처럼.

홀쭉이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아무리 재빠르더라도 바람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는 법.

[청류]가 집중되자 온몸이 마구 뒤틀리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곧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자된 덩어리가 바닥에 몸을 뉘었다.

"...."

고현우는 홀쭉이의 시신에 다가가 목걸이를 회수했다.

뚱뚱이의 팔찌와 홀쭉이의 목걸이.

그 둘을 합쳐 보니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딱 맞았다.

그것은 구불구불하게 똬리를 틀고 온몸이 깃털로 장식된 뱀 모양 상징물이었는데,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칠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이다음은 제단을 오른다.'

제단을 오르는 동안에는 이전보다 훨씬 방해가 덜 들어왔다.

부제 둘이 목숨을 잃은 뒤 야만족의 기세가 한풀 꺾인 느낌이다.

덧붙여 제단 자체가 함부로 발을 올려선 안 되는 성지인 듯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간혹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한두 명만 단칼에 베어 넘길 뿐이었다.

제단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꺼운 석문으로 굳게 닫힌 채였는데, 고현우가 다가가자 즉시 반응했다.

손에 든 뱀 상징물이 부르르 떨리더니, 문이 환영한다는 듯 저절로 열린 것이다.

내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장검 한 자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금으로 만들었으나 광택은 적고, 검날에 무수한 상형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다.

검보다는 예술품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깃털뱀 주술검(D)]

본래 이 주술검은 깃털뱀 제사장에게 귀속된 무기다.

마지막 결전 도중 제사장이 제단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데, 이를 막지 않고 그대로 두면 주술검으로 무장하게 된다.

이후부터는 근거리와 원거리 전투에 동시에 능한 마검사와 싸워야 한다.

다만 김호가 제사장을 부락에 묶어 둔 상태고, 고현우가 먼저 제단에 도달하면서 주술검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한 단계가 더 남았다.'

고현우가 주술검을 쥐고 제단을 나서자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을 주술검이 탐욕스럽게 집어삼켰고,

[깃털뱀 주술검(D+)]

▷깃털뱀 부족의 영혼 100/100 (완료)

▷깃털뱀 부제의 영혼 2/2 (완료)

▷깃털뱀 제사장의 영혼 0/1 (진행 중)

랭크가 D에서 D+로 반 단계 올랐다.

검날의 마모된 부분들이 제법 수복되었으며 상형 문자들도 더욱 선명해졌다.

야만족과 부제들의 영혼을 흡수하며 강화된 것이다.

마지막 하나만 더 하면 강화를 완벽하게 끝마칠 수 있을 터.

'부락으로 간다.'

고현우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김호가 중간중간 표식을 남겨 두었다 했으니, 부락을 찾기는 쉬울 것이다.

* * *

- 콰콰쾅!

나는 몇 번째 날아오는지 모를 황금빛 뭉텅이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잠시 멈춰서 장내를 시야에 담았다.

자연재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풍비박산이 난 부락.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야만족들.

대부분은 제사장의 작품이었다.

나에게는 도망 다닌 죄 밖에 없다.

가끔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윈드포스로 날려 보내기는 했으니 10% 정도의 과실은 인정하겠다.

"이런...!"

제사장이 열심히 마법을 퍼붓다 말고 제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술검과의 연결이 끊겼다는 사실이 전달된 것이다.

주술검의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건 누군가 침입에 성공했다는 뜻이고, 그 말은 중간보스 둘이 쓰러졌다는 뜻이다.

'끝났나 보네.'

나는 매우 흡족해졌다.

지금까지 걸린 시간을 가늠해 보니 예상과 거의 들어맞는다.

공략본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갔나 보다.

고현우가 호승심을 못 이기고 뚱뚱이와 홀쭉이를 동시에 상대했다면 시간을 많이 빼앗겼을 터.

또한 홀쭉이를 잡을 때도 내가 시킨 대로 야만인들부터 처치하지 않았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 이후 주술검의 목표치인 야만인 100명을 마저 처치해야 했을 것이다.

내 공략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고 이행했기에 예상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었다.

'합격이야.'

이만하면 충분히 다음 히든 피스도 믿고 맡길 수 있겠다.

"놈을 막아라! 나는 제단으로 가겠다."

제사장이 나를 가리키며 몇 안 남은 야만족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아저씨, 혼자 어디 가요."

['증폭'을 사용합니다.]

['윈드포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A+)]

[지속시간 00:01:57]

[재사용 대기시간 00:49:57]

- 후웅—!

정면에 맞바람을 불게 했다.

엄청난 물리력이 가해지자 제사장은 있는 힘껏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내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다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친다.

"놈!!"

"싸우다 말고 가기 있습니까? 사람 섭섭해지게."

"방해하지 마라!!"

"거기 가 봤자 뭐 없어요. 어차피 다 끝났는데."

굳이 안 가도 어차피 고현우가 이쪽으로 오는 중이다.

주술검을 강화하기 위한 마지막 목표, 바로 제사장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다.

오는 길에 장애물도 없겠다, 내가 표식도 남겨놨겠다.

이곳까지 오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도 슬슬 끝을 봅시다."

내 주먹이 검붉은 불꽃을 머금었다.

65화 No.388 깃털뱀 제단 (4)

제사장을 처치하기는 해야 하는데, 사실 D랭크 던전 보스는 아직 고현우가 맞상대하기는 버겁다.

이건 내가 해야겠지.

불주먹을 내지르기 전에,

'미리 복사부터 해 두고.'

['복사-특성'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제사장(D)'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특성[2/2]

1. 원소 저항(S)

2. 제사장(D)

깃털뱀 제사장의 주요 특성인 [제사장]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능력이 섞인 특성인데, 그 중 '마나 감응력 증가'만 해도 마법사에게 매우 유용하다.

"놈!!"

제사장이 지팡이를 뻗자 금빛 빛 뭉치가 또다시 떨어져 내렸다.

여태까지 잘만 피하던 터라 맞아 줄 일은 없었다.

가볍게 스텝을 밟아 피하며 접근한다.

한 손은 불타는 주먹을 움켜쥔 채, 반대쪽 손을 앞으로 뻗는다.

[윈드포스]

- 후웅—!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불며 제사장을 압박했다.

몸을 움직이려 해 봤자 옴짝달싹할 수 없을 거다.

"이, 무슨...!"

제사장이 제자리에서 덧없이 꿈틀대는 사이, 나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갔다.

동시에 움켜쥔 주먹도 더욱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것을 보고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는지, 제사장이 삼류 악역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다음에는 반드시—!"

"그래요, 다음에 또 봅시다."

제사장의 안면에 인페르노 피스트가 꽂히고,

전방의 모든 것이 밀려드는 화염 폭풍에 삼켜져 버렸다.

- 콰콰콰콰콰—!

"김 형!!"

뒤이어 도착한 고현우.

제법 놀란 표정이었는데, 화염 폭발을 보고 나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나 보다.

멀쩡한 나를 보자 곧바로 안도한다.

"어, 왔냐."

"다 끝났나 보오."

"딱 너 오기 전에."

아주 훌륭한 타이밍이었다.

고현우가 제 검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제사장의 영혼을 흡수했을 테니, 안 봐도 어떤 옵션일지 뻔하다.

[깃털뱀 주술검(C)]

▷높은 수준의 내구도 보호

▷내구도 자동회복

▷원소 저항(F)

C급치고는 거창한 능력이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내구도 측면에서는 C급 이상이라 봐도 좋을 정도.

덧붙여 F급이나마 [원소 저항]이 붙어 있어 마법을 후려칠 때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고현우를 위한 맞춤형 아이템인 셈이다.

능력치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밝았다.

"이런 성능이라니...! 전부 김 형의 안배였구려. 고맙게 쓰겠소."

"우리 둘이 같이 해낸 건데 뭐. 대신 이건 내가 먹는다."

제사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무 상자 네 개가 놓여져 있었다.

[깃털뱀 제단 랜덤박스(D)] *4

고현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오? 본인은 이 검만으로도 차고 넘친다오."

"그래. 나가자."

던전이 서서히 붕괴되어 간다.

던전의 핵심이자 보스 몬스터인 제사장을 처치했기에 유지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계속 머물러 있어서 좋을 게 없으니 빨리 나가야 했다.

밖으로 나오자 신병철이 우리를 반겼다.

"오, 진짜 얼마 안 걸렸네?"

"금방 끝난다니까."

D급 던전임에도 짧은 시간 내에 완벽하게 공략했다.

고현우와 손발이 척척 맞은 덕분이었다.

밖으로 나와 돌아보니 큼지막한 문 크기였던 던전 입구가 주먹만 하게 줄어들고, 색깔을 잃어버려 흑백이 되었다.

핵심이 파괴된 던전은 저렇게 입구가 폐쇄되며 출입이 불가능하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핵심이 재생성될 때까지.

그때가 되면 우리가 쓰러뜨렸던 깃털뱀 부족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던전 내부를 활보할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입장하고, 핵심이 파괴되고, 재생하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겠지.

아무튼 이걸로 첫 번째 지하층 던전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돌아가는 일이 남았거든.'

우리는 지하층 던전을 공략하는 절차를 아무것도 밟지 않고, 몰래 입장해서 핵심을 파괴했다.

신병철이 흔적은 최대한 지웠어도 던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다.

곧 누군가가 사태를 파악하러 내려올 것이다.

십중팔구 던전동을 관리하는 교직원 중 하나가.

가능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신병철이 앞장서며 우리를 재촉했다.

"빨리빨리 올라가자. 이러다 걸릴라."

* * *

계단이란 내려갈 때보다 올라갈 때가 더 힘든 법이다.

내려가는 길도 밑도 끝이 없이 느껴졌는데, 그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가려니 장난이 아니었다.

지상으로 나올 즈음엔 마나로 단련된 육체조차 고통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올라가면서 교직원이나 선도부를 마주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올라가면서는.

밖으로 나와서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송천혜와 한소미를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한소미가 세상 해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안뇽안뇽!"

"...."

우리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지하층에서 나온 건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이대로 자연스럽게 가자는 결론이 나왔다.

마주 손을 흔들어 주자 한소미가 손을 흔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반면 송천혜는,

- 파지직,

신병철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손에서 스파크를 튀겼다.

그냥 만나기만 하면 무슨 나쁜 짓을 꾸미는 건 아닌가 조건반사적으로 의심을 하는 모양이다.

대머리 가발 훔치기부터 시작해서 업보를 많이 쌓기는 했지.

신병철은 또 얼굴 가죽이 보통 두꺼운 게 아니라,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넨다.

"아이고, 선도부 여러분. 굿 이브닝입니다."

"여긴 무슨 볼일이시죠."

날 선 질문에 신병철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답했다.

"던전동에 무슨 볼일이겠니. 당연히 던전 공략이지."

"잘 안 믿기는데요."

송천혜가 눈가를 지그시 좁혔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을 대강 짐작해 보면,

'네가? 공략전을? 월요일부터? 진짜로?'

정도가 되시겠다.

신병철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 속고만 사셨나? 사람 말을 못 믿네. 야야, 너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 말 좀 해 봐."

나에게 지원사격 요청이 들어왔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도움을 주는 게 나을 것이다.

송천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도 공략전 치고 오는 길이냐."

"그런데요."

"몇 퍼센트?"

"몰라도 돼요."

"그러냐."

말하기 싫으면 말든가.

애초에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 화제를 전환하려고 물어본 거였다.

신병철이 의심을 벗어난 것 같으니, 이제 '수고하고 좋은 밤 되십쇼!' 말하고 떠나면 된다.

그렇게 내가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아이, 뭐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점수가 좀 안 나왔으면 말 못 할 수도 있지."

신병철이 다 된 밥에 잿가루를 한 움큼 뿌렸다.

딴에는 도와주려고 꺼낸 말일 텐데, 방향이 심히 엇나간 것 같다.

송천혜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은 걸 보면 말이다.

송천혜가 화를 삭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쪽이 몇 퍼센트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그쪽보단 높을 겁니다."

"그건 아닐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그야 나는 100%니까.'

소탕전에서 100%를 넘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몬스터를 만들어서 잡는 게 아니고서야.

하지만 나는 일단 말을 아꼈다.

그편이 더 이득일 것 같아서.

"그냥 감이야."

"감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그럼 내기할까? 누구 완성도가 더 높은가."

"뭐 거는데요."

예상대로 송천혜는 물러나지 않았다.

보면 얘도 지는 걸 엄청 싫어하는 성격 같다.

"가볍게 소원권 어때."

"소원권이요?"

"어. 부탁 하나 들어주거나 궁금한 거 알려 주는 걸로."

송천혜가 잠시간 눈썹을 찡그리고 고민하다가, 이내 내기를 수락했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소원권이라 지더라도 크게 문제는 안 되리라 생각했겠지.

"...좋습니다."

"셋 세면 동시에 말하기?"

"그러죠."

"그럼 센다. 셋."

"둘."

"하나."

"100%"

"97%"

송천혜의 얼굴에 금이 쩍 갔다.

* * *

송천혜는 한참이나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매우 사소한 내기였지만 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혹은 나보다 공략전 성적이 낮다는 점이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우리는 이때다 싶어서 잽싸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뒷일은 한소미가 알아서 하겠지.

소원권은 당분간 마음의 빚으로 달아 두기로 했다.

어차피 거창한 요구를 하려고 건 내기도 아니었으니, 나중에 선도부 쪽 근황이나 물어볼 생각이다.

다음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깐 비는 시간.

서예인, 고현우와 한적한 장소에 모여 앉았다.

신병철은 심부름센터 일이 바쁘단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인벤토리에서 나무 상자 네 개를 꺼냈다.

[깃털뱀 제단 랜덤박스(D)] *4

"...."

고현우가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상자들을 내려다보고, 서예인도 드물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상자를 콕콕 찔러 보았다.

고현우가 물었다.

"이걸 열면 무엇이 나오는 거요?"

"나도 몰라. 워낙 종류가 많아서."

정말 온갖 아이템이 튀어나오는 데다 확률도 공개된 게 없어서, 나조차도 내용물을 완벽하게는 모른다.

다만 꽤 자주 나온다고 알려진 아이템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내 목표는 '제사장의~' 수식어가 붙은 아이템들.

수식어가 붙기만 하면 D등급이니, 종류는 뭐가 되었든 만족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개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영혼 없어 보이지만 저게 쟤가 할 수 있는 최대 리액션이다.

나는 랜덤박스 하나를 들어 마술쇼를 하듯 이리저리 보여 준 다음에,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고 덮개를 열어젖혔다.

- 번쩍!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썩 밝지는 않다.

그래도 내용물을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

[랭크 업(E)]

'나쁘지 않아.'

랜덤박스의 등급을 고려하면 중박 정도라 하겠으나, 랭크 업은 나에게 꽤 중요도가 높은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그저 감사히 받았다.

"다음."

두 번째 상자를 개봉한다.

이번에는 제자리에 둔 채 덮개만 슬쩍 열었다.

- 번쩍—!

"오."

"오."

고현우와 내가 동시에 감탄성을 흘렸다.

첫 번째보다 확연히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검은 팔찌(D)]

'나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사장' 아이템인 데다 내가 선호하는 장신구 쪽.

거기에 앞서 나온 랭크 업까지 포함하면 본전치기 이상은 한 셈이다.

해서 나는 한결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한 번씩 열어 볼래?"

"그래도 괜찮겠소?"

주술검만으로 충분하다며 나에게 모든 랜덤박스를 양보하기는 했지만, 내심 내용물이 궁금하기는 한가 보다.

고현우가 조심스레 세 번째 상자를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덮개를 들어 올렸다.

- 달칵.

[깃털뱀 부족의 나무잔(F)]

"크흠...."

고현우가 무안한지 연신 헛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열 때부터 빛이 한 줄기조차 안 보이더니, 역시나.

가끔씩 랜덤박스에서 전투와는 아예 무관한 생활 계열 아이템도 나오곤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없군."

"김 형에게 면목이 없구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럴 수도 있지."

대리깡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하기, 남 탓하지 않기가 이 바닥의 관례다.

고현우가 운이 없다 한들 맡기기로 결정한 건 나이기 때문이다.

나무잔은 고현우가 찻잔으로 쓰기로 했다.

이제 남은 랜덤박스는 하나.

고현우와 내 시선이 서예인에게 집중되었다.

분위기상 부담감을 느낄 만도 한데, 서예인은 무덤덤한 얼굴로 랜덤박스를 제 앞으로 가져가더니, 더없이 자연스럽게 열어젖혔다.

- 번——쩍——!

66화 No.388 깃털뱀 제단 (5)

- 번——쩍——!!

섬광탄을 터뜨린 것처럼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빛이 가신 뒤에도 고현우와 서예인은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이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기에 나 역시도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무슨 아이템이 나왔나 확인해 보았다.

단출한 디자인을 가진 큼지막한 쿠션.

유감스럽게도 방금 고현우가 뽑은 나무잔과 같은 생활 계열 아이템이다.

그런데 생활 아이템의 등급이 예사롭지 않다.

[깃털 쿠션(B)]

'쿠션 주제에... B랭크나 돼?'

D급 랜덤박스에서 C, B급 아이템이 나오는 건 가능은 하지만, 확률이 지극히 낮아서 그냥 없다고 치부해도 될 수준이다.

그런데 서예인이 그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 이 쿠션을 뽑아 버릴 줄은.

B랭크는 대개 3학년들이 착용하는 등급으로, 서예인이 쓰는 [투명 길리슈트]나 일전에 선물 받은 [구름밟이]같이 귀하디귀한 것들이다.

그런 귀한 장비들과 등급이 같다는 건 쿠션의 가치도 그와 엇비슷하다는 뜻이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무슨 옵션이 덕지덕지 많이도 붙었다.

[깃털 쿠션(B)]

알 수 없는 신수의 깃털이 들어간 쿠션.

▷피로 해소 속도 가속

▷정신 계열 상태이상 회복

▷장기간 사용 시 정신 계열 상태이상 저항력 소폭 증가

....

….

피로 해소 가속은 쉽게 표현하면 1시간 수면으로 2시간어치 피로를 해소한다는 뜻.

정신 계열 상태이상 회복과 저항력 증가도 알차다.

그 외에도 불면증 해소, 목디스크 완화 등, 사용자의 숙면을 돕는 이로운 효과들이 가득하다.

성능만 놓고 보면 심층부 던전에서 드랍하는 장비들 못지않다고 해야겠지만....

'잘 때 쓰는 물건인 게 아쉽네.'

생활 아이템들의 옵션은 '편안하고 윤택한 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전투와 성장을 중요시하는 극한의 효율충이라, 저 옵션 중 절반 정도는 별로 필요하지 않다.

자유 시간 대부분을 트레이닝 센터에서 보내기에 쿠션을 쓸 일이 적기도 하고.

물론 전투, 성장 관련 옵션만 놓고 봐도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바에는 처분해서 다른 아이템을 확보하는 편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B급 생활 아이템쯤 되면 구매할 사람이 꽤 많을 테니까.

'심부름 센터 쪽에 넘겨 볼까, 경매에 내놔 볼까.'

여러 방향으로 고민을 하던 도중 서예인을 보니,

"...."

쿠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늘상 그렇듯 아무 표정도 없지만,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린다.

척 봐도 엄청 갖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갖고 싶냐?"

"...."

확인차 묻자 즉시 고개를 끄덕인다.

보통은 반응이 반 박자가량 늦게 돌아오는데,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라니.

이게 쿠션의 위력?

나는 '우린 친구니까!'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마음속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질문은.

팔아먹는 게 나은가?

얘한테 주는 게 나은가?

'이건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서예인의 하루 수면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잠이 많은 건 확실하다.

쿠션의 피로 회복 가속 옵션을 쓰면 휴식 시간을 꽤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휴식 효율이 올라가면 그만큼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날 테고, 크게 보면 수련 시간이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물론 예상과는 달리 변화가 없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걸어 볼 만해.'

성공했을 때 확보될 여유 시간을 생각하면, 충분히 B급 생활 아이템을 내줄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쿠션을 서예인 쪽으로 슬쩍 밀어 주었다.

"그래, 줄게."

"정말?"

내가 선뜻 준다고 하니 안 믿기는지, 아니면 남한테 뭘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지, 반신반의한 기색이다.

나는 아예 쿠션을 들어 서예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어. 선물."

"...고마워."

서예인은 잠시 자기 품속의 쿠션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 * *

월요일부터 공략전을 뚝딱 해치워 버리고 나니, 남은 시간은 오롯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랭크 업(E)'을 사용합니다.]

['증폭'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E->D)]

[지속 시간 2:00->3:00]

[재사용 대기시간 50분->40분]

랜덤박스에서 나온 E급 랭크 업은 [증폭]을 올리는 데 사용했다.

지속 시간이 짧고 대기시간이 긴 스킬이라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하는데, 앞으로 더 등급을 올리면 그런 제약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다음은 깃털뱀 제사장에게서 복사한 특성, [제사장].

이 특성을 우선순위로 삼은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마나 감응력 증가.

모든 마법적 행동에 긍정적인 보정이 붙고, 그중에서도 [코어]를 쌓는 속도를 가속해 준다.

관련 아이템인 [제사장의 검은 팔찌]에는 이 마나 감응력을 배가시켜 주는 효과가 있고.

거기에 일전에 얻은 [블랙 미스릴 밴드]까지 더하면, 특수연공실에는 못 미치더라도 제법 만족스러운 효율이 나온다.

'이대로 C급까지 달린다.'

보유한 스킬들의 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슬슬 D급 [코어]만으로는 버거워지던 참이다.

다음 단계로 올려놓아야 전투 도중 마나 부족에 허덕일 일이 없다.

며칠 이내, 심층부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해결을 볼 심산이었다.

나는 날이 저물고 다시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마나 연공에 매진했다.

* * *

다음 날,

방과 후 신병철이 나를 불러냈다.

용건이야 안 봐도 뻔했다.

"야, 전에 심층부 던전 말인데."

"어떻게 됐냐."

신병철은 다소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게 좀.... 일이 복잡해졌다. 누님이 한번 보재."

"뭐 그럽시다. 지금?"

"지금 오면 좋고."

"바로 가지."

그렇게 신병철과 함께 다시 찾은 도둑 동아리 부실.

또 어디서 주워 왔는지 중고 가구들이 잔뜩 늘었다.

인테리어가 전보다 더 난잡해진 느낌이다.

부실이 부원들로 붐비는 것도 그 난잡함에 한몫을 더했다.

동아리 부실보다 선술집에 더 가까운 분위기.

가죽이 까진 소파에 쌍둥이를 비롯한 남정네 여럿이 구부정하게 앉아서 카드를 치는 중이고, 태블릿 여학생은 한쪽 구석에서 바쁘게 태블릿을 두들겨 댄다.

그리고 당규영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나무 테이블 위에 같은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할 일 없는 한량 같은 자세인데 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인기척을 느끼곤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움직인다.

그와 동시에 신병철이 말했다.

"누님, 데려왔습니다."

"어, 왔냐."

당규영은 반갑게 인사하려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표정 관리를 했다.

쌍둥이 하나가 카드에서 시선을 떼고 내 얼굴을 기웃거렸다.

"이 친구가 그 친구요? 누님이 요즘 작업한다던?"

그가 말하는 '작업'이란 나를 도둑 동아리로 영입하는 것을 말한다.

임시 보관소 침입 후에 제안이 들어왔었지.

사실이기는 했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당규영이 눈썹을 찡그렸다.

"작업? 너 단어 선택이 좀 그렇다?"

"아, 맞지 않소. 마법공학 동아리하고도 한바탕 하셨더만, 우리 후배한테서 손 떼라고."

다른 쌍둥이가 추가타를 넣었다.

"내 말이. 봉재석 선배 까였다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누님 그런 모습은 내 살다 살다 처음 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래에서부터 큼지막한 그림자 손아귀가 솟아올라 얼굴을 콱 움켜잡았기 때문에.

아이언 클로가 아주 제대로 들어갔다.

- 드드드드득,

인간의 두개골에서 나기에는 다소 험악한 소리가 울리고, 버둥거리던 쌍둥이가 축 늘어졌다.

그림자 손이 검지를 펴서 문 쪽을 가리켰다.

"다 나가."

도둑 동아리 부원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태블릿 여학생도 그들과 함께 나가려 했으나 당규영이 그녀를 불렀다.

"다빈이는 남아. 병철이도."

순식간에 조용해진 동아리실.

그림자 손이 내 근처에 의자 하나를 빼 주었다.

의자에 편하게 기대자 당규영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흠, 흠, 방금 들은 건 신경 쓰지 마라."

"예. 선배님."

"...조금은 신경 써."

"생각해 볼게요."

두루뭉술하게 답하자 당규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도둑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같은 대답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

곧장 본론으로 넘어간다.

"일이 복잡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응, 문제가 좀 생겼어. 외적인 문제."

던전 공략이나 보수 같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논하기 전에, 내 의뢰를 받을 수 있냐 없냐부터 논하는 게 순서다.

그리고 당규영이 말하는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의뢰가 성사되지 않는다.

지하층 관련해서 외적인 문제라면 십중팔구,

"입찰이 걸렸나 보네요."

"그래."

"일반 입찰입니까, 우선 입찰입니까?"

"우선 입찰이야."

입찰.

지하층 던전들은 한번 핵심이 파괴되면 시간이 흘러 재생성될 때까지 입장이 불가능하다.

고현우와 내가 [깃털뱀 제단]을 공략한 후, 포탈이 회색이 되며 막혀 버린 것이 좋은 예시다.

이처럼 일정 주기 내에 특정 던전에 도전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제한적이고, 좋은 보상을 드랍하는 던전에는 반드시 경쟁이 붙는다.

이 경쟁을 원만한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용살학원에서 도입한 것이 입찰 제도.

입찰하는 파티들의 전투력, 기존 공략의 성공률, 예상 공략 기간 등의 데이터들을 취합하고, 가장 적합한 파티부터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입찰 방식이고,

각 동아리마다 일정 횟수의 [우선 입찰권]을 보유하고 있다.

[제작 VIP 티켓]을 쓰면 대기열을 무시하고 최우선으로 제작 의뢰를 넣을 수 있듯이, 우선 입찰권을 쓰면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가장 먼저 던전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지금 [흑사방]에 이 우선 입찰권이 걸려 있단다.

우선 입찰권이 걸렸다는 건 해당 동아리가 그 던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

이를 무시하고 들어가 버리면?

'대놓고 싸우자는 소리지.'

분쟁이 발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의뢰주 측에서도 이런 던전은 가급적 피해 가려는 편이고, 도둑 동아리 측에서도 내 의향을 확인하고자 부른 것이고.

"어쩔래? 다른 데 알아봐 줘?"

다만 여기서 문제라면, 지금 나에게 흑사방 공략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흑사방에서 획득할 수 있는 특정 보상이.

다음 기회를 노리기도 애매한 것이, 심층부 던전같이 막대한 에너지를 내포한 던전은 한번 핵심이 파괴되면 재생하는 데 매우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비슷한 보상을 주는 다른 던전을 공략하기에는 난이도가 훨씬 높고.

해서 나는 상대측 동아리와의 충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니요, 강행했으면 합니다."

당규영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우선 입찰이 걸렸는데도 뚫어 달라고?"

"예, 안 돼요?"

"...."

웬만하면 피해 가려 하지만, 보수만 충분하다면 안 될 것도 없다.

나에게 보수를 지불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도 보여 줬었다.

그럼에도 당규영은 여전히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

우선 입찰을 건 세력이 도둑 동아리를 주저하게 만들 정도의 거대 세력이라는 뜻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어느 동아리인데 그래요."

"...좀 큰 데야."

이어지는 당규영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술 동아리."

...거긴 좀 크긴 하지.

67화 심층부 (1)

검술 동아리.

4대 세력 중 무림연맹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동아리다.

가입 조건은 오직 하나,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할 것.

검은 만병지왕이라는 말이 있듯, 검을 쓰는 생도의 수는 다른 무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덧붙여 검을 쓰기만 한다면 무림연맹 외 세력에 속해 있더라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검사들이 한 곳에 모여 형성한 것은 용살학원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초거대 세력.

그나마 백마법 동아리가 그에 견줄 만하고, 아래 동아리들과는 체급 차이가 엄청나다.

전면전에 들어간다면 도둑 동아리 같은 중견급 동아리는 순식간에 압사당할 테니, 당규영이라도 아예 눈치를 안 볼 수는 없다.

물론 동아리 부장급 정도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무마할 수단 몇 개쯤은 갖고 있다.

아마 당규영의 걱정은 대부분 나를 향한 것이리라.

"너도 알 만큼 알겠지만, 검술 동아리한테 찍히는 건 에메랄드한테 찍히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그래도 할 거야?"

"예,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없이 답하자 당규영이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쯤 되면 물러나겠지 싶었나 보다.

"...한다고? 진짜로?"

"진짜로요."

조금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지금 이 시점에 정확히 검술 동아리와 내 목표가 겹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무림연맹 쪽과도 거래를 하든, 충돌을 하든, 접점이 생길 예정이었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는 것 외에는 대수로울 게 없다.

"뒷감당은 제가 다 합니다. 진행해 주세요."

"...."

당규영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그래. 우리 200번 넘게 졸업하신 후배님한테 또 무슨 방법이 있으시겠지. 그럼 진행하는 걸로 하고, 언제 내려갈 건데?"

"시간 꽤 잡아먹는 던전이니까 금요일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응, 내가 보기에도 금요일이 괜찮겠다. 누구누구 가? 저번에 본 잘생긴 애랑 회색 머리 예쁜 애?"

아마 고현우와 서예인 얘기인 것 같다.

에메랄드 마탑과의 결투에 참관하며 서로 가볍게 안면 정도만 터놓은 상태다.

"잘생긴 친구만 같이 가요."

"월요일에도 걔랑 D급 갔었지? 병철이 길잡이로 세우고. 심층부는 거기에 두 명이 더 붙을 거야. 나랑 얘."

당규영이 자신과 태블릿 여학생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신병철이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누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이왕 할 거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 대신 인건비 더 받고. 어때?"

그러면서 당규영이 내 의향을 물었다.

나야 동아리 부장쯤 되는 실력자가 커버해 준다면 인건비가 더 나온다 해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저도 확실한 게 좋습니다."

"좋아."

당규영은 그림자를 써서 동행하는 인원들의 기척을 없애 줄 테고, 물리적인 장치들은 신병철이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수정구 같은 마법공학 장치를 무력화하는 건 당연히 태블릿 여학생의 몫.

한편 태블릿 여학생은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한쪽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손만 쉴 새 없이 태블릿을 두들기면서.

당규영이 나와 태블릿녀를 번갈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얘네 왜 이리 어색하지? 싶은 표정이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렸는지 눈썹이 반짝 치켜 올라갔다.

'어색한 게 아니라 초면이거든요.'

임시 보관소 침입 때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혼자 태블릿을 들고 다녀서 알아봤지, 아니었으면 감도 못 잡았을 거다.

당규영이 그 점을 뒤늦게 눈치채고 소개했다.

"아, 얘는 채다빈이다."

넥타이핀을 보니 2학년이었다.

채다빈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의뢰니까 같이 내려가는 건 상관없는데, 얘 1학년이잖아요. 얘가 B급을 깬다구요?"

"그게.... 이거 그냥 설명하려니까 복잡하네. 야, 나 '그거' 말해도 되냐?"

당규영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나는 '그거'가 무슨 뜻인지 캐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채다빈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성격 같지는 않았고, 만에 하나 떠벌리더라도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당규영이 나를 소개했다.

"얘가 인페르노 피스트야."

"!!"

채다빈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봤다.

설마 곽승재를 쓰러뜨린 실력자가 1학년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나 보다.

"그게 너였어?"

"예, 그게 접니다."

"그러면.... B급이 가능할 수도 있... 나? 가능해요?"

자기 수준에서는 확신이 안 가는지 당규영에게 묻는다.

그러나 당규영 역시 확신이 안 가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김호야, 솔직히 말해 봐. 너 나보다 쎄?"

"당연히 아니죠. 제가 어떻게 3학년을 이겨요."

"그럼 어쩌려고? B급은 내가 들어가도 엄청 고생하는데."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이거 보시죠."

당규영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흑사방] 공략본.

빠른 이해를 위해 고현우에게 준 것에서 내용을 많이 간추렸다.

첫 장부터 당규영의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슥슥 넘길 때마다 입가에서 연신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야....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해 왔대?"

궁금해진 신병철과 채다빈이 뒤쪽에 서서 어깨너머로 공략본을 훔쳐봤다.

점점 세 사람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변해선, 나를 흘끔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요약하면, 들어가서 알맹이만 쏙 빼먹고 나온다? 이거 완전....

- 완전 도둑놈 마인드네요.

- 도둑놈이 따로 없네.

- 내가 말했지. 쟤는 딱 우리 동아리에 걸맞는 인재상이라니까?

- 지금 보니까 조금 야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 저는 처음부터 알았거든요. 동족의 기운이 느껴졌달까?

어쩐지 다시 영입 제안이 들어올 타이밍 같아서, 당규영이 입을 열기 직전에 선수를 쳤다.

"어때요, 가능할 것 같아요?"

"...! 하여간 눈치 하나는 귀신같아선. 그래, 네 공략대로면 싸울 일이 적기는 하겠다."

이어서 당규영이 공략본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런데 이 부분 보니까, 기관진식 해체해 줄 사람이 하나 필요하겠더라."

"안 그래도 그것까지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멀리 갈 필요 있나, 여기 계시는데."

모두의 시선이 신병철에게 집중되었다.

신병철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들어가라고요? B급 던전에요?"

"너 저번에 그랬잖아. 이 몸한테 걸리면 기관진식 그딴 거 애들 장난이지! 하고."

"아니, 그러기는 했는데요, B급은 좀 아니죠.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네가 위험할 게 뭐 있어? 공략 봤으면서. 그리고 여차할 땐 긴급 탈출 쓴다잖아."

"잘못되면 어떡해요? 그럼 그냥 훅 가는 건데!"

"잘못 안 되게 잘해야지!"

한동안 당규영과 신병철의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항상 동아리 부장의 권위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던 신병철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쉽게 물러서지 않고 맞선다.

당규영도 던전 내에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강압적으로 나가기보다 가급적이면 설득을 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그 균형이 매우 절묘해서 이대로 놔두면 하루 종일 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도중에 내가 대화를 끊었다.

"보수 얘기를 해 볼까요.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아, 난 안 해. 보수로 뭘 주든 절대 안 해. 진짜 안 해. 때려죽여도 안 해. 그냥 안 해."

신병철이 온몸으로 B급 던전에 들어가기 싫음을 표현했다.

"그래? 후회할 텐데."

"차라리 후회하고 말지. 나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미안한데 진짜 다른 선배님 알아보는 게—"

"유령무영(幽靈無影)."

"...!"

"...!"

도둑 동아리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유령무영]은 은밀함을 중요시하는 직업군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히든 피스다.

살수인 장삼과 왕필마저 덥석 물었고, 눈앞의 도둑들도 마찬가지다.

당규영이 물었다.

"그거 실존하는 거였어? 도시 전설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실존합니다."

찾는 방법도 알고 있다.

다소 시간은 걸려도 이번 학기 내로는 찾겠지.

그리고 그 히든 피스를 눈앞의 세 명과 공유하는 것.

그게 내가 내걸은 보수였다.

"물론 심층부 한 번에 유령무영이면 제가 손해니까 몇 번 더 부탁을 드릴 거고요."

"그건 당연한 거고. 다빈이는?"

"...."

채다빈은 생각 중인지 미간을 좁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엄청난 히든 피스가 보수로 걸리니 믿기 힘든가 보다.

당규영에게 재차 확인을 구한다.

"얘 믿어도 되는 거 맞아요?"

"적어도 없는 말 지어내는 성격은 아니야."

"...그럼 놓칠 수 없죠. 저는 이 의뢰 받을게요."

"나도. 병철이가 빠졌으니까 그 자리만 새로 구하면 되겠다. 기관진식 잘 뚫는 애가 누가 있더라."

당규영과 채다빈은 벌써부터 신병철을 인선에서 제외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신병철이 순식간에 태세를 180도 전환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헤이, 잠깐 타임, 타임. 빠지긴 누가 빠진다고 그래요? 기관진식은 이 신병철을 빼먹으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

"목숨이 왔다 갔다 해서 안 간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공략 잘 보고 따라가면 괜찮을 것 같거든요. 그치?"

신병철이 내 동의를 구했다.

나는 방금 들었던 신병철의 말을 되돌려 주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지 않았니?"

"내가? 언제? 모름지기 사나이라면 짧고 굵게 가야 하는 법이지. 암."

시치미를 뚝 떼는 신병철.

얼굴 거죽이 어찌나 두꺼운지 야만족이 창을 던져도 안 박힐 것 같았다.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신병철의 함정 해체 능력만큼은 2, 3학년에 버금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배를 타겠다면 환영한다.

대신 기본은 해 줘야겠지.

나는 빙긋 웃으며 서류 한 뭉치를 더 꺼내 들었다.

"이거, 금요일까지 다 외워."

[흑사방] 공략본.

당규영이 들고 있는 요약본이 아니라, 고현우에게 외우게 한 것과 같은 원본이다.

신병철이 서류의 두께를 확인하곤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양이 좀 많은데, 이틀 만에 다 외우기는 조금 빡세지 않을까?"

직접 던전에 입장하는 입장에서는 숙지할 것이 훨씬 많으니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심층부 던전 공략을 대충 외우는 것도,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른 걸 포기해야겠지? 심부름센터 일을 덜 받든가, 잠을 줄이든가."

"...."

"싫으면 안 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러자 신병철이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공략본을 받아 들었다.

"싫을 리가요. 이리 주십쇼. 아주 그냥 머릿속에 싹 다 입력해 놓을라니까."

"나중에 시험 본다. 틀리면 안 데려가."

"걱정하지 마셔. 다 외운다니까 그러네?"

당장 시작하려는지 신병철이 서류를 갖고 부실 구석으로 향했다.

작게 하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내가 살면서 공부를 하는 날이 다 오네...."

68화 심층부 (2)

철 인형이 주먹을 뻗어 왔다.

고현우는 마주 달려들며 손에 든 주술검을 휘둘렀다.

일순간 허공에 금빛 궤적이 그려지고,

- 깡—!

주먹과 검이 충돌하며 철 인형이 반걸음 물러났다.

고현우는 그 기세를 살려 빠르게 전진하며 철 인형의 머리를 후려쳤다.

- 깡—!

철 인형의 신형이 옆으로 휘청 굽으며 쓰러졌다.

또 다른 인형이 길쭉한 쇠막대기를 휘둘러 왔다.

고현우는 내력을 검에 집중한 뒤, 놈의 목 부위를 강하게 찔렀다.

- 콱!

뒤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철 인형.

고현우는 주술검을 허공에 가볍게 몇 번 그었다.

'제법 손에 익었군.'

길이나 무게감 등이 철검과 많이 달라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으나, 며칠간 철 인형들과 대련을 하며 감을 잡았다.

이제는 실전에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으리라.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트레이닝 센터에서 밤을 새웠다.

아직 수업까지는 시간이 꽤 널널하니, 특수연공실에서 마나 연공을 하다가 등교하면 될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간단하게나마 요기를 해 두는 게 좋겠지.

오늘 아침 메뉴도 평소와 같이 칼로리바 아니면 벽곡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공간을 뒤지던 고현우가 미간을 좁혔다.

'불찰이군.'

벽곡단도, 칼로리바도 다 바닥나 버렸다.

근래 여러 일로 바빠서 채워 놓는 걸 깜빡한 것이다.

아무리 수련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되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 기량도 함께 무너지게 마련이니까.

'오랜만에 아침 식사를 하겠군.'

칼로리바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산하여 용살학원에 입학한 이래로, 식도락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고현우의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실력을 배양하고 사문의 숙원을 이루는 목표가 우선이었기에, 아쉬워도 많이 참고 포기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공간이 텅 비었다면, 학생 식당에서 칼로리바를 보충하는 김에 한 끼 식사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이다.

고현우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트레이닝 센터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저 앞에 걸어가는 김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밤새 수련을 했던 모양이다.

고현우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오, 김 형."

"일찍 나왔네. 평소엔 더 늦게 나오지 않나?"

"아침 식사를 하려고 말이오."

"네가 웬일이냐, 아무튼 같이 가자."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고현우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서 소저는 오지 않소?"

김호와 서예인은 거의 매일같이 붙어 다니곤 했으니 당연히 오늘 아침 식사도 같이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물은 건데,

"벌써 먹었다네?"

김호는 자기도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그러면서 서예인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 준다.

[김호:밥?]

[서예인:(도리도리 토끼 이모티콘)]

[김호:먹었어?]

[서예인:(끄덕끄덕 토끼 이모티콘)]

"서 소저가 이리도 일찍? 별일이구려."

고현우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서예인이 일찍 일어나는 건 그가 아침을 먹으러 학생 식당까지 가는 것과 비슷하게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김호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교실 가면 있겠지. 우리 밥이나 먹자고."

아침 메뉴는 보통 삼각 김밥보다 몇 배는 큰 대왕 삼각 김밥.

안에는 한 움큼이나 되는 고기 폭탄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현우에게는 그야말로 호재였다.

'운이 좋군....'

효율을 중시하는 것은 두 남정네가 같았기에, 교실로 이동하면서 대왕 삼각 김밥을 먹었다.

도착할 즈음에는 모두 깔끔하게 빈손이 되었다.

3반에 도착하자 과연 서예인이 먼저 등교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익숙한 종이봉투가 들린 게 보인다.

동시에 고소한 냄새가 고현우의 코끝을 스쳤다.

'과자로군.'

오늘 아침 식사를 따로 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는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쿠키를 구운 듯했다.

쿠키를 구운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김호가 엊그제 랜덤박스에서 나온 베개인지 쿠션인지를 선물이라고 서예인에게 줬는데, 나름대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모양이었다.

'선재(善哉)로다, 선재로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고현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김호가 쿠키를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 서예인이 슬며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다음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뭐 같아?"

"...!"

'저 질문은!'

고현우가 속으로 기함했다.

자신에게 저 질문이 날아왔던 때를 회상해 보면,

- 이거 뭐 같아?

- 마치 도마뱀이 살아 숨 쉬는 것 같구려.

- ....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답했건만, 돌이켜 보면 매우 심각한 오답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서예인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으니.

그 결과 지금 자신에게는 과자는커녕 과자 부스러기조차 안 떨어지게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문제는 2차전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2차전의 향방에 따라 김호 역시 자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고현우가 눈에 공력까지 집중해 가며 쿠키를 관찰했다.

초코칩 쿠키.

초코칩이 균등하게 박혀서 맛 부분에서는 이전보다 발전했다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미관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퇴보한 느낌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형태로다....'

그나마 가장 흡사한 것을 꼽자면 물고기? 혹은 몸을 웅크린 토끼?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란 말인가?

확신하기 어려웠다.

"...."

김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시간을 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도통 못 알아보겠다는 말과 같고, 그것은 오답이나 다름없으니.

시간제한이 걸린 셈이다.

"...."

대답이 늦어지자 서예인의 낯빛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매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살짝 가늘어진 것도 같다.

'지금 나서야 한다.'

김호가 마지못해 입을 열려는 찰나.

고현우가 두 사람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크흐흠.... 물고기가 제법 생동감이 있구려. 방금 호수에서 건져 올린 것 같소."

그런 다음 곁눈질로 슬쩍 서예인의 반응을 살피니, 미간이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오답.

그렇다면 남은 정답은 하나.

"토끼, 맞지?"

"...!"

서예인의 낯빛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김호가 자신은 아무 고민도 안 했다는 양 매우 자연스럽게 쿠키를 입에 집어넣고 음미했다.

"맛있네. 실력이 더 늘었어."

"더 먹어."

서예인은 김호가 쿠키 하나를 해치우기 무섭게 다음 쿠키를 입에 물려 주었다.

여전히 고현우에게는 부스러기조차 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떨어지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후회는 없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 * *

쿠키 모양 맞추기 챌린지는 고현우의 적절한 개입 덕분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고현우도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고, 서예인의 일그러진 미적 감각이 발휘되는 한 언제든 3차전, 4차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일 없이 금요일까지 흘러갔다.

2 대 2 대인전 보고서를 일필휘지로 써서 내고, 공략전 숙제인 던전 지도 그리기 역시 순식간에 그려서 제출했다.

앞으로도 필기 부분에서는 거의 만점을 먹고 들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내내 트레이닝 센터에 틀어박혀 지낸 결과,

['코어'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D->C)]

금요일에 맞춰 코어의 등급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만하면 심층부 던전에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마나량은 확보한 셈이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다.

[흑사방]에서 내가 원하는 보상을 얻기만 하면,

'드디어 무기다운 무기가 나오겠지.'

일전에 제1공방에서 만든 [부유의 철봉]을 꺼냈다.

부품의 수준에 비해 철봉을 이루는 금속의 질이 낮아 E랭크밖에 못 받았었다.

그 탓에 여태 별다른 활약을 못 하던 참이었고.

마나를 슬쩍 불어 넣자 미약한 상승 기류가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사라졌다.

마치 나에게 빨리 제대로 된 본체를 구해 달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최고의 금속을 써서 만들어 줄 테니까.

* * *

금요일 밤.

던전동 근처에서 도둑 동아리 부원들과 고현우를 만났다.

당규영은 우리를 쓱 훑어보더니,

"다 왔냐? 가자."

하고 태연하게 앞장섰다.

고현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선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무언가 잊은 것 같지 않소?'

월요일에는 나름 넥타이핀도 바꾸고 아무개 뱃지도 달았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으니 준비가 부족한 느낌이 드나 보다.

심지어 오늘은 던전동 심층부라는 지극히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데 말이다.

나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앞장서는 도둑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계속 지켜봐.'

다른 건 몰라도 의뢰에는 언제나 철저한 이들이다.

그렇게 신뢰도가 쌓여야 다음 의뢰도 들어오니까.

게다가 도둑 동아리 부장이 직접 나서는 의뢰인데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었다.

의뢰주인 우리는 괜한 걱정 말고 마음 편히 따라가면 그만이다.

그래도 고현우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자면,

'어설픈 눈속임은 안 통하거든.'

아무개 뱃지 따위가 심층부에 상주하는 실력자들에게 먹히겠는가.

덧붙여 이런 눈속임은 대부분 '내려가는 도중에' 누군가를 마주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내려가면서 아무도 안 마주칠 자신이 있다면?

굳이 눈속임할 필요도 없다.

그 자신감을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당규영은 지하층에 들어서자마자 실력을 발휘했다.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작고 까만 나비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영접비행(影蝶飛行)]

나비들이 작은 날개를 열심히 팔랑거리며 원형 계단 아래나 통로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당규영은 날려 보낸 그림자 나비의 경로를 따라 일행을 이끌다가, 이따금씩 정지하거나 방향을 틀곤 했다.

그러면서 또 영접을 만들어 곳곳에 퍼뜨린다.

정찰병.

먼저 그림자 나비를 보내 놓고, 누군가가 걸려들면 일행을 이끌고 멀찍이 피해 버린다.

술식을 극도로 집중해서 만들어 낸 정찰병이기에, 일반적인 탐색 계열 마법보다 훨씬 먼 곳의 상황까지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비가 매우 은밀하게 움직여서 순찰을 도는 선도부 등에게 발견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

아마 당규영과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채다빈 역시 자기 실력을 십분 발휘했다.

그녀의 손은 원형 계단을 밟을 때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우리가 지나가는 곳곳에 설치된 수정구나 방범 장치 등이 단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두 선배가 길잡이를 맡은 덕분에 오래 걸을 필요도 없어졌다.

당규영이 일행을 승강기 앞에 멈춰 세우자,

신병철이 재빨리 달라붙어 장치 몇 개를 만지고 채다빈이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러자 학생증을 찍지도 않았는데 승강기가 저절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승강기를 타고 한참 내려가서, 또 당규영의 안내를 따라 다음 승강기까지 이동한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니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거리를 이동했다.

신병철을 따라 뚜벅거릴 때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거의 다 왔네.'

마지막 승강기가 우리를 심층부 초입 부근, C급 던전들이 모인 곳에 내려 주었다.

심층부로 직행하는 승강기는 발각될 확률이 매우 크기에, C급에서 걸어 들어가기로 정한 상태였다.

"...."

던전동 하층과 심층부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모두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느긋하던 당규영 역시 제법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퍼뜨려 두었던 그림자 나비를 모두 회수한다.

아무리 은밀한 그림자 나비라고는 하나 발각될 여지가 조금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작은 여지 때문에 심층부 전체에 비상이 걸릴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는 안 꺼내는 게 낫다.

우리는 여태까지보다 확연히 조심스러워진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드디어 심층부 초입에 들어섰다.

69화 No.104 흑사방 (1)

초입에 불과한데도 심층부의 경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일정 간격마다 교직원들이 상주하는 초소가 세워져 있고, 천장에 박힌 수정구의 숫자도 지하층의 두 배 이상이다.

게다가 당장 눈에 띄는 3학년 선도부만 둘.

순찰을 도는 듯 일정한 구역을 규칙적으로 배회한다.

우리가 이곳을 뚫을 수 있을까?

'저 둘이면 될 것도 같은데.'

당규영과 채다빈이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임시 보관소 침입 당시는 3학년 선도부 하나 뚫기도 버거웠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 지옥부 선배는 보관소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었던 반면, 저들은 우리가 오늘 밤 이곳에 침입하리라는 사실도, 목표가 104번이라는 사실도 모르니까.

넓은 공간에 늘어선 던전들을 모두 경계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규영쯤 되는 실력자라면 그런 빈틈을 파고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고.

다만,

'혹을 달고서는 어렵지.'

그 혹이란 당연히 나를 비롯한 1학년들이다.

나는 [도둑걸음] 외에 기척을 죽이는 스킬이나 특성이 없고, 고현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신병철은 그나마 몇 개 배웠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낮고.

이런 혹이 셋이나 달렸다면 아무리 도둑 동아리 부장이라도 무리다.

'그러니 혹을 집어넣어야지.'

당규영이라면 그 방법을 갖고 있을 테고.

"...."

"...."

당규영과 채다빈은 준비해 온 약도와 눈앞의 풍경을 대조하며 입 모양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선도부 두 명의 동선을 살펴보고, 어떻게 따돌릴지 즉석에서 작전을 보완하는 듯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는 즉시 채다빈의 손이 미친 듯이 태블릿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다다다다다닥,

너무 빨라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

수정구의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난 만큼 두 배로 바빠진 것 같다.

당규영 역시 마나를 끌어모아 제법 큰 규모의 마법을 준비했다.

발밑의 그림자가 점점 새까맣게 짙어진다.

신병철이 당규영 근처로 다가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모여, 이쪽으로.'

그새 저 수많은 수정구들을 모조리 무력화했는지, 채다빈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하는 것을 신호로,

'됐어요.'

당규영도 준비한 술식을 해방했다.

[쉐도우 파우치(Shadow Pouch)]

발밑에서 그림자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더니 커다란 그림자 주머니가 생성되었다.

주머니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입을 벌리고 우리를 날름 집어삼켰다.

시야가 새까만 그림자로 뒤덮였다.

바로 옆에 있는 고현우와 신병철만 어렴풋이 보이는 상태.

곧 몸이 좌우로 흔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당규영이 우리를 그림자 주머니 속에 넣어 놓고 이동하는 모양이다.

고현우가 신기했는지 벽면을 더듬거리려고 했으나 내가 제지했다.

'가만있어.'

'크흠....'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바깥에서 이동하는 당규영과 채다빈에게 영향이 갈지도 모른다.

최대한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다.

잠시 후, 그림자 주머니가 우리를 퉤 뱉는 느낌이 들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No.104] [흑사방]

목표로 하는 던전 포탈이었다.

나는 고현우와 신병철에게 눈짓하며 입구를 가리켰다.

'바로 들어간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언제 선도부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당장이라도 입장해야 한다.

당규영과 채다빈이 입 모양으로 한마디씩 했다.

'살아서들 보자.'

'행운을 빌어.'

그리고 신병철에게는 추가로 한마디씩 더.

'올 때 선물.'

'올 때 간식.'

'...예, 누님.'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곧장 순간이동 포탈에 발을 들였다.

* * *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낡은 민가 같은 곳이었다.

버려진 지 오래된 듯 바닥이 두꺼운 먼지로 뒤덮인 채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고현우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아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감상에 젖게 내버려 두고 신병철 쪽을 살피니,

"...."

평소의 장난기 많은 표정은 어디 가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자신이 기어코 B급 던전에 들어와 버렸다는 실감이 나나 보다.

실제로 위험한 곳이라 이해를 못 할 일은 아니지만, 계속 저렇게 움츠러든 채로 두면 성공할 작전도 실패할 거다.

사기를 북돋울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존재하는데,

"쫄?"

한 글자로 사나이 호승심 자극하기.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신병철이 즉시 표정 관리를 하며 피식 웃는다.

"에헤이, 또 뭔 소리여. 쫄기는 누가 쫄았다고."

"다리가 막 덜덜 떨리는데?"

"습관이야, 습관. 난 원래 서서도 떨어."

"습관은 어쩔 수 없지."

나는 대충 납득한 척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신병철의 표정이 한결 풀린 걸 보니 사나이 호승심 자극은 성공적이라 하겠다.

민가 밖으로 나와서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점점 길이 넓어지고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저잣거리에 들어선 것이다.

곧 우리는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자연스레 활기가 넘치고 시끌시끌해야 하는데, 기이하리만치 가라앉은 분위기에 소음이 적었다.

또한 사람들의 면면에 떠오른 표정에도 불만, 슬픔, 두려움, 체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했다.

원인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근방에서 안 좋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면 이런 현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가령 일대를 다스리는 문파나 방파의 횡포가 심하다거나, 매일같이 사람들이 사라진다거나, 시체를 치운다거나.

그리고 그 방파는 말할 필요도 없이,

'흑사방.'

먼발치에 커다란 전각이 떡하니 세워져 있다.

이 일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던전의 핵심.

저 흑사방을 무너뜨리고 방주와 부방주를 처치하는 것이 이 던전의 목표다.

'원래 목표는 그렇고.'

지금 우리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

고로 우리들의 목표는 알맹이만 쏙 빼먹고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알맹이를 찾아 저잣거리를 계속해서 걸었다.

한구석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객잔을 발견할 때까지.

<얼큰 오리탕>

색 바랜 간판은 읽기가 어렵고, 낡은 나무 문이 반쯤 닫혀 있어 영업을 하기는 하는지 의심이 든다.

그러나 나는 주저 없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가게의 내부 역시 외관과 마찬가지로 낡고 허름했다.

밖에서부터 짐작했지만 우리 말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신경 쓰지 않고 탁자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다리다 보니 점소이가 주방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손님을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을 보면 장사가 얼마나 안되는지 알 만하다.

그래도 점소이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다가와서 주문을 받는다.

"뭐 드려요?"

"오리탕 셋에 만두."

"예, 잠시만요."

점소이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뜨끈한 만두 한 접시를 갖고 나왔다.

"금방 막 쪘어요."

탁자 한가운데에 접시를 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 뒷모습을 신병철이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쟤 잡으러 온다고?"

"어."

신병철 역시 반강제로 공략본을 외웠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우리가 이 객잔을 찾은 이유는 바로 흑사방의 다음 목표가 저 점소이이기 때문.

무슨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 목표로 삼는 건 아니다.

흑사방은 단순히 육식 동물이 식사를 하듯 주기적으로 청년들을 한 명씩 데려갈 뿐이고.

공교롭게도 이제 점소이의 차례가 되었을 뿐이다.

셋이서 만두를 먹으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접시가 거의 깨끗해졌을 무렵,

낡은 나무 문이 열리며 새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 손님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가에 버티고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색 무복을 입은 사내 둘.

손등의 검은 뱀 문신이 그들의 소속을 말해 준다.

'흑사방의 말단 무사.'

무사 하나가 우리 쪽을 탐색하려는 듯 날카로운 기세를 보냈으나, 우리는 일단 반응하지 않고 남은 만두를 마저 먹었다.

그때, 점소이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그들을 발견하고 뻣뻣하게 굳어졌다.

흑사방 무사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그리며 말문을 열었다.

"장사 좀 되나? 웬일로 손님이 있군."

점소이가 쩔쩔매면서 대꾸했다.

"이, 이번 달 상납금은 다 채웠잖아요."

"아니, 오늘은 다른 일로 왔다."

"...!"

그 다른 일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점소이의 표정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반면 말단 무사의 입에 걸린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우리와 함께 가자."

"그, 그건...."

"안 됩니다!"

주방에서 숙수로 보이는 중년인이 헐레벌떡 뛰쳐나와 외쳤다.

점소이를 보호하려는 듯 감싸고 돈다.

"...."

그러나 흑사방 무사가 기세를 피워 올리며 노려보자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무인이 가하는 압박감을 일반인이 이겨 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중년인은 필사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흑사방으로 끌려간 청년 중에 돌아온 이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부들부들 떨며 겨우 입을 열지만,

"제, 제 아들만은 안 됩니다. 부, 부디—"

- 퍼억!

중년인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말단 무사가 뻗은 발길질에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말단 무사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중년인을 일별하고, 우리 쪽으로 다시금 날카로운 기세를 보냈다.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

그런 다음 점소이에게 말한다.

"따라와라."

"...."

"계속 미적거리면 베겠다."

허리춤의 검을 슬슬 쓰다듬으면서 말하니, 아무 힘도 없는 점소이로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여기서 더 반항했다간 중년인의 시체를 치우게 될 테니, 얌전히 흑사방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아아...."

흑사방 무사들과 점소이의 모습이 밖으로 사라지고,

중년인은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나는 그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중년인이 나를 의식하고 시선을 들어 올린다.

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가서 데려올까요?"

중년인의 낯에 일말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상대가 그 흑사방의 무사들이라 내심 별 기대는 안 되는 눈치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듯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해 주면요?"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나는 씩 웃었다.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

70화 No.104 흑사방 (2)

객잔을 나서서 흑사방 말단 무사 둘의 발자취를 좇았다.

금방 검은 무복 둘과 점소이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저쪽에서도 금세 우리의 기척을 눈치챘는데, 대놓고 티를 내면서 추적해서 그렇다.

놈들은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를 어딘가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 역시 순순히 놈들을 따라 이동했고, 곧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흑사방 무사 A가 우리를 알아보고 말했다.

"객잔에 있던 놈들이군. 협객 놀이를 하러 왔느냐?"

"어. 불의를 보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

히든 피스는 더 못 참고.

옆에다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고현우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어찌 눈앞에서 죄 없는 청년이 끌려가는데 지켜만 보겠소."

"용기는 가상하다만 어리석구나. 그 의협심이 네놈들의 명을 재촉할 것이다."

- 스릉,

즉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드는 무사 A.

한편 무사 B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A에게 말한다.

"근골이 제법 튼튼하군. 써먹을 수 있겠어."

"이놈들도 방으로 끌고 가나?"

"그래,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해라."

"팔다리 한두 개 정도는 잘라도 상관없을 테지?"

"물론."

마치 우리를 제압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태도였다.

나 역시 고현우와 신병철에게 언질을 주었다.

"옷은 안 상하게."

"알겠소."

쟤들 무복은 써먹어야 하니까.

아무 예고도 없이 무사 A에게 [윈드포스]를 시전하자 전투가 막을 열었다.

"무슨—"

바람이 내 쪽으로 불며 몸이 끌려가자 놈은 잠시 당황했으나,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되레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팔을 자르려 했다.

나는 고개를 슬쩍 기울인 다음 놈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 쾅!

제법 맷집이 좋은 놈인지 거기서 바로 무력화되지 않고, 바닥에 누운 채로 검을 휘두른다.

나는 발목이 잘리기 직전 한 뼘 가볍게 뛰어올라 칼날을 피해 내고, 다시 윈드포스를 시전하며 놈을 들어 올린 뒤 바닥에 메다꽂았다.

- 쿵!

그러고도 아직 정신이 남아 있길래 머리를 붙잡고 관자놀이에 무릎을 찍어 버렸다.

- 콰직!

저쪽 상황은 어떤가 시선을 돌려 보니, 고현우와 말단 무사 B가 손속을 교환하는 중이다.

주먹과 손이 허공에서 빠르게 얽힌다.

신병철은 그 근처를 서성대며 다리를 걸거나 뒤통수를 갈기려는 시도를 하다가 한 대씩 얻어맞곤 했다.

'어째 싸움이 조금 지저분한데.'

고현우가 주무기인 검을 안 써서인지, 신병철이 본래 싸움을 지저분하게 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눈 뜨고 못 봐 줄 촌극은 결국 신병철이 뒤에서 헤드락을 걸고, 고현우가 명치에 일권을 꽂아 넣으며 끝났다.

제압한 두 말단 무사의 무복을 홀랑 벗기고, 꽁꽁 묶은 다음 대충 던져 놓았다.

저들이 깨어나거나 저들의 부재가 알려졌을 즈음에는 이미 우리가 던전을 뜨고 난 뒤일 것이다.

신병철은 그 짧은 전투에서 이곳저곳 많이도 얻어맞았는지 온몸이 쑤시는 기색이었다.

연신 자기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대며 묻는다.

"아니, 얘네가 말단 무사라고? 간부급 아니고?"

"어. 얘네가 여기서 제일 약해."

말단 무사는 맞지만 심층부, B급 던전의 말단 무사.

어지간한 하급 던전의 정예나 중간 보스급쯤은 된다.

나나 고현우는 몰라도 신병철은 일대일이 안 될 거다.

그러니 가능한 전투를 피해야 하는 거고.

어쨌든 첫 단계는 해냈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는 점소이에게 말했다.

"돌아갑시다."

* * *

"아들아!"

"아버지!"

두 부자는 몇십 년은 못 본 것처럼 와락 끌어안고 가족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제법 애틋한 장면이라 하겠지만 나는 너무 여러 번 봐서 별 감흥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봤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무례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감동적인 와중에 미안한데, 계산할 건 계산해야죠."

"아, 예! 제가 뭘 해 드리면 될지...?"

"이거 가져가도 돼요?"

내 손에는 자그마한 조각상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객잔 한구석을 장식하던 달마상을 주워 왔다.

주인장은 '대체 저게 왜 필요하지?'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달마상쯤이야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십쇼."

"감사합니다. 오리탕은 돼요? 만두로는 조금 부족하네."

"당연히 됩니다. 바로 준비하지요."

주인장과 점소이가 요리를 마저 하러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달마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곳저곳이 마모되고 깨져나가 매우 볼품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면 묘한 정취가 느껴진다.

곁에서 같이 달마상을 뜯어보던 고현우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구려."

신병철 역시 기웃대다가 한마디 했다.

"그거 진법에 쓰는 거 같은데, 아니야?"

"맞아. 진법에 쓰는 거."

정확히는 특정한 진법을 파훼하는 용도로 쓰인다.

일종의 열쇠라 생각하면 된다.

뿐만 아니라,

"뭐가 보이냐."

질문과 함께 달마상을 건네자, 고현우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아리송한 태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이건...!"

고현우의 짐작대로, 이것을 조각한 자는 보통 고수가 아니다.

한낱 달마상을 조각하는 데에 자신의 무리(武理)를 담을 정도의 실력자.

조각상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마치 예리한 검기가 지나간 흔적 같다.

긴 세월 상당 부분이 풍화되었음에도 그 흔적이 선명하기 그지없다.

계속 관찰하고 연구하다 보면 무리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터.

고현우 같은 무인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보물이다.

반면 나한테 중요한 건 진법을 파훼하는 부분뿐.

해서 나중에 쓸 일이 생길 때까지 고현우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당분간 갖고 있어. 여러모로 연구도 해 보고."

"이런 귀한 걸 본인에게 빌려줘도 괜찮소?"

"목숨 걸고 들어온 던전인데, 그 정도는 얻어 가야 셈이 맞지."

항상 나를 믿고 따라오는 고현우라면 그만한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

고현우가 감격해서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김 형의 배포에는 항상 감탄하게 되는구려. 고맙소."

"빨리 강해져라. 다른 던전도 같이 가게."

"최선을 다하겠소."

달마상이 고현우의 인벤토리로 들어가고.

때마침 점소이가 쟁반에 오리탕 셋을 받쳐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주문하신 오리탕이요."

그리고 우리 앞에 하나씩 내려놓는데....

그릇 안에 용암색 액체가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척 보기에도 엄청 매워 보인다.

게임으로서 접하던 때에도 이 집 오리탕은 맵기로 유명했었다.

객잔 이름이 <얼큰 오리탕>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숟가락을 들어 동시에 한 입씩 떠 넣고 동시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공통적으로 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좀 매운데?'라고 말하려는 찰나, 신병철이 허세를 부렸다.

"하나도 안 맵네. 이 정도면 그냥 맹물이지."

나와 고현우가 시선을 교환하고,

"이만하면 먹을 만하구려."

"먹다 보니까 괜찮네."

사나이들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원래는 이 집 오리탕이 그렇게 맵대서 호기심에 맛만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나이, 아니, 되다 만 어린애들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 탓에 전투적으로 오리탕을 흡입했다.

결과는 모두 꾸역꾸역 다 비워서 무승부.

이런 경우 오리탕을 팔아먹은 가게 쪽이 승리하는 셈이지만, 주인장이 돈을 받지 않았으니 그렇지도 않았다.

오리탕을 해치우고 나서는 장난기를 다 빼고, 본격적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흑사방의 공략법은 큰 틀에서는 깃털뱀 제단과 비슷하다.

흑사방주를 비롯한 주력을 내가 묶어 두는 동안, 고현우와 신병철이 목표 아이템들을 확보하는 것.

깃털뱀 제단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하나 꼽자면, 흑사방주가 너무 강해서 처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꺼내 봐."

내 말에 고현우가 탁자 위에 아이템 두 개를 올렸다.

학생 상점에 비싼 포인트를 지불하고 구매한 것들이다.

작전 도중 서로의 상황을 전달받기 위해 귀에 꽂는 조그마한 통신 기기를 샀고,

다른 하나는 복잡한 마법진이 각인된 양피지 한 장.

[긴급 탈출 스크롤(B)]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고도 탈출할 수 있도록 임의로 출구를 생성하는 일회성 아이템이다.

엄청나게 강력한 효과를 가졌지만, 뚜렷한 제약이 존재해서 함부로 썼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기에 스크롤을 가리키며 재차 강조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반드시 안전지대까지 나와서 써야 돼."

"엄한 데서 쓰면 어떻게 되는 거요?"

"정말 운이 좋으면 탈출 포탈이 열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포탈이 어디로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정체불명의 다른 던전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확실하게 출구를 열려면 모든 일을 끝내고, 안전지대에서 스크롤을 써야 한다.

가령 우리가 처음 발을 들인 폐가 같은 곳에서.

신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하여간 공략대로만 따라가면 된다는 거네."

"본인도 숙지했소."

그 외에도 공략의 중요 요소 몇몇을 거듭 되새긴 다음,

객잔을 나서서 두 사람과 갈라졌다.

"그럼 김 형, 무운을 빌겠소."

"너네도. 중간중간 연락들 하고."

고현우와 신병철이 이번 공략의 시작 지점인 '비밀 통로'로 이동하는 사이, 나에게는 잠깐의 시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저잣거리를 거닐며 선물 몇 개를 샀다.

당규영과 채다빈이 올 때 간식을 사 오라고 말한 게 떠올라서 대부분 그쪽 위주로.

인벤토리 한켠을 간식으로 가득 채울 즈음, 귀에 꽂아 둔 통신기를 통해 고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소.]

"그래, 시작합시다."

짤막하게 답한 뒤 흑사방으로 직진했다.

정문에는 문지기 둘이 삐딱하게 기대고 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물음을 던졌다.

"웬 놈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문지기들은 내 걸음걸이가 당당하고 똑바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온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듯했다.

질문을 던진 놈의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즉시 칼을 뽑아 들어 겨누었다.

"웬 놈이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다가갔다.

그러자 문지기가 돌진해 오며 칼을 휘둘렀다.

놈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내 주먹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미약한 연기를 흘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목을 베어 오는 칼을 슬쩍 흘리며 파고들어 그대로 주먹을 뻗자,

- 콰콰콰콰콰—!!

화염 폭풍이 내달리며 눈앞의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문지기 두 명도 함께.

정문이 자리했던 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휑해졌고, 전각에 옮겨붙은 불길이 점점 크기를 키워 간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잘 타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싸움을 건 것도 나고 불을 붙인 것도 나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다.

곧 안쪽이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 뭐야! 무슨 일이냐?

- 정문 쪽이다!

- 불! 얼른 불부터 꺼라!

갑자기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싶겠지.

나는 흑사방도들의 상황 파악을 도와주기로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한껏 목청을 끌어 올려 외쳤다.

"적습이다—!"

이리 오너라!

71화 No.104 흑사방 (3)

일단의 흑의인들이 불길을 넘어 정문(이었던 것)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사람이 많으니 군데군데 실력자들도 눈에 띈다.

조장급, 대주급, 단주급....

개중 단주급으로 보이는 무사가 방금 들었던 질문을 또 던졌다.

"웬 놈이냐?"

"적습이라니까."

"...미친놈이군."

"그 말도 맞다."

지금 하는 짓이 반쯤 미친 짓이기는 했기에 선선히 수긍했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단주급 무사가 명령을 내렸다.

"쳐라."

흑의인들이 부채가 펼쳐지듯 옆으로 늘어서며 나를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해 들어왔다.

칼날 여러 개가 사방에서 나를 노린다.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 후, 한 손에 [윈드포스]를 담아 오른쪽 흑의인을 후려쳤다.

- 펑!

흑의인의 신형이 뒤에 있는 동료들의 몸과 뒤엉키며 함께 나가떨어졌다.

나는 잠깐 벌어진 틈을 비집으며 포위망을 빠져나왔고, 가장 가까이 추격해 온 놈에게 두 번째 [인페르노 피스트]를 갈겼다.

- 콰콰콰콰콰—!

흑의인 십수 명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화했다.

반면 조장급 이상 무인들은 재빨리 화염 폭풍의 범위에서 몸을 피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확실히 B급 던전쯤 되니 잘 안 통한다.

금세 다시 포위망이 형성되었으나, 방금 보고 겪은 게 있다 보니 쉽사리 치고 들어오지 못했다.

나에게 처음 말을 건넸던 단주가 대화를 시도했다.

방금 전에 미친놈 취급을 한 것치곤 상당히 정중한 말투로,

"귀하는 혹시 염패(炎覇)의 후인이 아닌가?"

'염패?'

저건 또 무슨 소리래.

인페르노 피스트 때문에 화염 계열 무공에 능한 전대 고수의 별호가 튀어나온 걸까?

이렇게 오해를 해 준다면,

'오히려 좋아.'

저들의 이목을 끌기가 더 쉬워진다는 뜻이니까.

나는 일부러 한층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파 나부랭이 따위에게 돌려줄 대답은 없다."

"...."

그 말에 저들끼리 알아서 납득을 하며 시선을 교환하는 흑의인들.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걸 보니 나는 염패의 후인으로 확정된 듯하다.

일반적인 사파 무인이라면 이 시점에서 제 한 목숨 건사하겠다고 뿔뿔이 도망쳐야 정상인데, 흑의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다.

단주가 발이 빨라 보이는 자에게 지시하고,

"너는 서둘러 방주님을 모셔 와라."

모두 결사 항전을 각오한 듯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 쉬익!

이번에는 단주가 앞장서서 검을 찌르며 들어왔다.

내가 간발의 차로 칼날을 피하며 파고들었으나, 단주는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도 나와 몇 합을 교환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몇 합 다음에는 결국 가슴팍에 윈드포스를 얻어맞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물론 내 상대는 단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즉시 땅을 걷어차 몸을 피하자, 방금 내가 자리했던 곳을 흑의인들의 검이 갈가리 찢었다.

바짝 쫓아오는 흑의인 하나를 붙잡고 날려 보내며 압축된 공기를 함께 쏘아 냈다.

흑의인의 몸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갔으나, 다른 자들은 받아 주지 않고 비켜났다.

결국 흑의인은 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거, 좀 받아 주지.'

매정한 놈들 같으니.

아무튼 그로 인해 잠깐의 틈이 만들어졌고, 그 틈을 노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앞으로 뻗어 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자,

"피해랏—!"

복면인들이 내 정면에서 우르르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페르노 피스트를 안 썼으니까.

나는 주먹을 앞으로 뻗은 채 피식 웃었다.

"쫄기는."

"!!"

"이놈이...!"

몇몇 흑의인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끝내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기한다.

저런 모습만 봐도 얼마나 훈련이 잘되었는지 알 만하다.

그러나 흑의인들의 차례는 당분간 오지 않을 듯했다.

휑해진 정문 쪽에서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흑의를 입은 중년인 하나가 서 있었는데, 뱀 같은 인상이나 날카로운 분위기 등이 똬리를 튼 한 마리 구렁이를 연상시켰다.

방주, 흑사(黑蛇).

마침내 흑사방의 우두머리이자 이 던전의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사방주는 다른 자들이 했던 질문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오면서 부하들한테 전해 들은 게 있나 보다.

"염패의 제자라고?"

"아닌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저씨 제자 아닌데. 쟤들이 오해한 건데.

흑사방주가 단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염패의 제자가 확실합니다. 단지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장내의 모든 이가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흑사방주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잔뜩 행패를 부려 놓고 인제 와서 발뺌하면 살려 보내 줄 성싶으냐?"

"이러나저러나 살려 보낼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다. 본 방에 입힌 피해는 네 목숨으로 갚도록 해라. 염패의 제자라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가능하시다—"

나는 말을 하던 도중 고개를 홱 젖혔다.

새까만 것이 간발의 차로 내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면. 말은 다 끝내게 해 주시지."

"그걸 피하다니, 제법이구나."

흑사방주의 손가락은 먹잇감을 움켜쥐려는 매의 발톱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의 무공은 조(爪)법 계통.

상대를 할퀴어 상처를 내는 데 특화된 무공이다.

또한 손가락 끄트머리와 손톱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는데, 이는 매우 지독한 독공을 연성했다는 증거다.

긁히는 즉시 극독이 상처로 스며들고, 오리탕 한 그릇 할 시간도 되기 전에 한 줌 핏물로 화할 것이다.

"어디 이것도 피해 보거라."

극독을 머금은 다섯 손가락이 내 가슴팍으로 뻗어 왔다.

나는 미세하게 옆으로 이동하며, 윈드포스를 집중해 스쳐 지나간 팔을 툭 밀어냈다.

조금 밀려나나 싶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며 나를 할퀴어 왔다.

하는 수 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으나, 흑사방주가 조금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바짝 따라붙었다.

두 손을 뻗어 내 왼 어깨와 오른팔을 동시에 노린다.

나는 뒤로 달리기 대회를 하는 사람처럼 열심히 뒷걸음질 쳤다.

흑사방주가 계속 따라붙으며 두 손을 할퀴었지만 애꿎은 허공만 긁어 댈 뿐이었다.

부득 이를 가는 흑사방주.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치는구나."

"제가 좀 빨라요."

딴에는 뒷걸음질 정도야 금방 따라잡겠지 싶었던 모양인데, 내가 잡힐 듯 말듯 잡히지 않으니까 점점 열이 뻗치나 보다.

그렇다면 불난 데 기름을 붓지 않을 수 없지.

막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손톱을 보고 감상평을 남겼다.

"어우, 손톱 좀 봐. 아주 씨꺼멓네. 좀 깎고 다니세요. 아니면 칫솔 갖다가 빡빡 문지르든가."

"뭐, 뭐라—"

흑사방주의 얼굴이 한순간 멍해졌다.

살면서 저런 폭언은 처음 들어 보는 듯한 반응이다.

하기야 누가 저 인간 앞에서 함부로 손톱이 어쩌고 했겠는가.

조금만 심기를 거슬러도 극독을 퍼먹일 텐데.

어쨌거나 나는 하던 트래쉬 토크를 마저 했다.

"그런 손으로 뭐 집어 먹으면 병 걸려요, 병! 식중독 걸리면 고생한단 말입니다!"

"...네놈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해 주마."

흑사방주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손끝이 덜덜 떨리기까지.

이내 한층 더 매서워진 기세로 나를 공격해 왔다.

'응, 그래도 내가 더 빨라.'

그래 봤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 나도 마찬가지라, 이전과 같은 구도가 펼쳐졌다.

뒷걸음질 치는 나를 흑사방주가 열심히 뒤쫓으며 허공을 할퀴는 구도.

또 한참이나 기묘한 추격전이 이어지다가, 흑사방주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셈이냐?"

'고현우 쪽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요.'

연락이 오면 뒷걸음질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서 전력 질주로 도망칠 거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시간을 끌 거고.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티를 내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흑사방주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하는 모양이니, 이쯤에서 나도 한 방 정도는 먹일 때가 됐다.

"정 실력이 보고 싶으시면 보여 드려야지."

"...!"

내 주먹이 검붉게 물들자 흑사방주가 대응을 위해 잠시 공세를 늦추었다.

그러나 주먹에 깃든 불꽃은 내질러지는 대신 고스란히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오버히트]

불길이 온몸으로 번져 나가며 막대한 힘을 공급했다.

흑사방주가 안면을 굳히고 그 불길을 관찰했다.

"...과연 염패의 제자가 맞기는 하구나."

"아니라니깐 그러네."

"아직도 부인할 셈이—"

이번에는 흑사방주가 말을 끝내기 전에 내가 기습적으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며 이동해 등 뒤에서 나타난다.

흑사방주가 즉시 몸을 돌려 나를 할퀴었으나, 한 박자 늦은 반응이었다.

내가 다시 반대쪽으로 이동해서 손을 뻗자 흑사방주의 눈앞에서 한 줌의 압축된 공기가 폭발했다.

- 펑!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단순히 눈만 살짝 찡그리게 하려는 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주 짧은 찰나 시야에 사각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나는 그 사각을 절묘하게 파고들며 흑사방주의 정면으로 이동했다.

[인페르노 피스트]

[윈드포스]

흑사방주의 복부에 불타는 주먹, 그리고 물리력이 가미된 권풍이 정통으로 꽂혔다.

- 콰콰콰콰콰—!

흑사방주의 신형이 순식간에 흑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뒤따라 화염 폭풍이 몰아치고, 처박힌 부근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그럼에도 흑의인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건조했다.

자기네 방주가 막 날아간 참인데 모두 굳은 얼굴로 서서 포위망을 유지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방주님!' 하고 외치는 자도 없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질 리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이다.

나 역시도 별 기대는 안 했다.

'이걸론 턱도 없지.'

[인페르노 피스트]는 페널티가 강한 스킬인 만큼 랭크 대비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B랭크 던전의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기에는 조금 아쉽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제법 큰 부족의 제사장이 D등급 보스인데, 어떻게 일개 흑도방파의 방주가 B등급을 받는가?

그리고 어떻게 인페르노 피스트를 정통으로 맞고도 무사한가?

정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일개 흑도방파가 아니거든.'

- 콰아아아아!

흑사방주가 처박힌 곳에서 시커먼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무너져 내린 건물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인영이 나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흑사방주의 온몸에서 지독한 마기(魔氣)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과거 정마대전에서 패해 사분오열된 천마신교.

그리고 흑사방주의 정체는 한때 그 천마신교의 흑사각을 맡았던, 이른바 간부급 인사다.

흑사방주, 아니 흑사각주가 나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오늘 네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갈겠다."

그리고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런 말은 잡은 다음에나 하시고."

72화 No.104 흑사방 (4)

한편, 고현우와 신병철은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비밀 통로는 흑사방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 만들어졌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점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급기야는 전대 흑사방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모조리 '교체'되며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을 김호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잠입 경로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 쿠쿵!

먼 곳에서 울린 굉음이 통로를 타고 전달되고, 부스스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김 형이 시작했구려."

"요란하구만."

김호가 정문에서 난리를 피운다는 증거.

잠입하기 더욱 수월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니, 그 기회를 살리려면 서둘러야 했다.

두 사람이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밀 통로를 넘어 들어선 흑사방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웬 괴한이 정문에 벽력탄 비슷한 것을 터뜨렸는데 혼란스럽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 뭐야! 무슨 일이냐?

- 정문 쪽이다!

- 불! 얼른 불부터 꺼라!

바쁘게 뛰어다니는 흑사방 무사들은 고현우와 신병철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는데, 앞서 빼앗은 흑의 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손등의 뱀 문신은 신병철이 대강 따라 그렸고.

어쩐지 뱀이 조금 어설퍼 보였지만 고현우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 소저보다는 나을 테지....'

서예인이 그렸다면 뱀이 아니라 지렁이였으리라 생각하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흑사방의 비고는 지하 깊은 곳에 자리했다.

해서 정문 쪽으로 몰려드는 여타 무사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으니, 간혹 마주치는 자들이 '이놈들은 어딜 가는 가지?' 싶은 눈초리를 보내며 지나갔다.

일부는 잠시 멈춰 서서 고현우와 신병철을 자세히 뜯어보려고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영 생소하다는 표정으로.

그럴 때마다 신병철이 정문 쪽에 삿대질을 하며 버럭 외쳤다.

"이봐! 못 들었나? 정문이다, 정문!"

그 뒤 고개를 갸웃거리는 흑사방 무인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이런 얕은 수작은 본격적으로 지하에 들어선 뒤부터는 통하지 않았다.

초입 부근에서 경계를 서는 흑의인 둘.

이 난리 통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실력을 가늠해 보니 객잔 쪽에서 상대한 자들보다 반수에서 한 수 정도 더 뛰어난 듯하다.

아마 흑사방의 정예 무사이리라.

고현우와 신병철이 접근하자, 무사 하나가 고현우를 잠시 응시하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침입자로군."

"...."

고현우가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는지 눈짓으로 묻자, 정예무사가 답했다.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목이 날아간 자가 몇인데, 방도라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또...."

그는 썩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너같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은 본 기억이 없다."

기생오라비 같다는 말은 남정네들 언어로 번역하면 재수 없게 잘생겼다는 뜻.

옆에서 대화를 듣던 신병철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시발 인생 불공평하네. 너무 잘생겨서 걸렸다고? 나도 좀 걸려 보자.'

그러나 애석하게도 흑의 무복을 입은 신병철의 모습은 위화감이 전혀 없는, 완벽한 흑사방 말단 무사 C였다.

신병철이 마음속으로 세상을 욕하는 한편,

고현우는 빙긋 웃더니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본인의 외모를 칭찬해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허나 부디 이해해 주길 바라오."

"무엇을?"

- 번쩍!

순간 고현우의 손에서 금빛 섬광이 번뜩였다.

정예 무사의 반응도 보통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이내 자신의 검과 함께 두 쪽이 나 버렸다.

어느새 고현우의 손에는 황금빛 주술검이 들려 있었다.

허물어지는 상대를 내려다보며 고현우가 말을 끝맺었다.

"당신을 베어야 함을."

그리고 신병철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야, 야! 도움! 헬프! 빨리!"

수세에 몰려 연신 뒷걸음질 치는 중이다.

말단 무사 상대로도 두들겨 맞을 실력인데 정예무사는 오죽하랴.

하는 수 없이 고현우가 가세해서 검을 휘둘렀다.

쓰러지는 정예 무사를 뒤로하고,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신 형은 더욱 정진해야겠소."

"아니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솔직히 이건 너네가 괴물같이 센 거지."

1학년이 B급 던전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또 신병철은 나름대로 할 말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칼 쓰러 온 거 아니고 기술자로 불려온 거거든? 고급 인력이란 말씀."

"알고 있소. 신 형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오."

고현우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 역시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신병철의 실력이 자기 분야에서는 상당히 뛰어나다는 사실도.

'어설프게 숟가락만 얹을 실력이라면 김 형이 진작 쳐 냈을 터.'

그게 아니니 이 작전에 참여한 것이고.

김호의 보증을 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대가 크다는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신병철이 길다란 젓가락 같은 공구를 꺼내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기관 장치가 나오기만을 벼르는 기색이다.

"금방 보여 준다, 딱 기다려."

비고로 향하는 길은 여러 형태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힌 구조.

정예 무사들이 진을 치고 대기하는 통로도 있고, 기관 장치가 가득한 통로도 있다.

그리고 공략본에서는 기관이 설치된 곳만 집중적으로 뚫으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복도가 좋은 예시였다.

겉보기에는 말끔하나 벽 너머로 미약한 덜그럭거림 같은 것이 감지된다.

높은 확률로 기관 장치.

마침내 신병철이 활약할 순간이 온 것이다.

신병철이 흑사방 무사의 근엄한 말투를 따라 했다.

"똑똑히 봐 두도록. 이 신병철 님이 활약하는 모습을."

"하하...."

신병철은 한쪽 벽에 붙어서 게걸음으로 나아가더니, 잘 보이지도 않는 틈새에 느닷없이 젓가락 두 개를 쑤셔 넣고 마구 휘저었다.

이내 안쪽에서 뚜렷하게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귓가에 잡히던 미약한 덜그럭거림이 일제히 멎었다.

"끝난 거요?"

"어. 갑시다."

신병철이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된 게 맞나 의심이 들었기에 고현우는 만에 하나 기관 장치가 발동될 것을 대비했다.

그러나 통로는 끝내 잠잠하기만 했다.

또다시 함정이 의심되는 통로가 나오고,

이번에는 신병철이 태연하게 나아가다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을 몇 군데 콩콩 두드려 보고는 고현우를 손짓으로 부른다.

"여기 밟아 봐."

고현우는 신병철이 가리키는 부위에 한쪽 발을 갖다 댄 다음, 천근추의 묘리를 이용해 지긋이 내리눌렀다.

- 콰직,

발이 푹 꺼지며 자그마한 공간이 드러났다.

언뜻 보기에도 기관의 중추처럼 생긴 것이 설치되어 있다.

신병철이 거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 하나를 푹 꽂아 넣더니 몸을 일으켰다.

"다음. 넘어갑시다."

그 뒤로도 신병철은 연이어 등장하는 함정들을 너무나 쉽게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고현우가 솔직한 심정을 담아 감탄했다.

"신 형의 기관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구려."

"봤냐? 봤냐고. 사람이 기술을 쓸 줄 알아야 한단 말이야. 칼만 휘두르면 그거 안 돼."

우쭐거리며 자기가 아는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신병철.

고현우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설명을 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손을 들어 올려 말을 끊고, 전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기역 자로 굽어진 통로 모퉁이 너머, 접근하는 기척이 셋.

고현우가 기세를 끌어올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단숨에 돌파하겠소.'

예상대로 정예무사 셋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고현우를 발견하자 그들도 앞서 경계를 서던 자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침입자!"

그 즉시 두 놈은 검을 뽑아 달려들고, 한 놈은 등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 했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이 반응했을 때는 이미 고현우가 출수한 후였다.

[급류(急流)]

바람 한 점 없는 지하에 돌연 한 줄기 강풍이 불어 갔다.

고현우가 그 강풍과 하나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

정예무사 둘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고현우가 스쳐 지나가는 게 더 빨랐다.

다음 순간 그들의 가슴팍에 깊은 검상이 생겨났다.

"억!"

"크헉!"

그리고 쏘아져 나가는 속도를 그대로 살려 도망치는 자의 등을 꿰뚫었다.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쾌속했는지 세 명의 몸이 거의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고현우가 신병철을 뒤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기술도 좋지만 무력을 함께 보완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렇게 합죠."

다시 겸손을 되찾은 신병철이었다.

번갈아 활약하며 계속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흑사방의 비고에 다다랐다.

정확히는 비고의 한쪽 벽면에.

입구에는 이제까지 만난 무사들보다 더욱더 뛰어난 실력자들이 보초를 서고 있을 테니, 일 처리를 조용히 하려면 쥐구멍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신 형, 잠시 물러서 계시오."

신병철이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자 고현우가 검을 부드럽게 몇 번 그었다.

두꺼운 석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며 기관 장치로 이루어진 한 겹의 벽이 드러났다.

당연히 이 부분은 신병철의 몫이었고.

신병철이 젓가락 몇 개를 푹푹 꽂아 넣고 신호를 보내자 고현우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과연 비고 안에는 귀하고 값진 물건들로 가득했다.

금은보화, 도자기, 명검, 비급, 영약....

이곳저곳 둘러보며 신병철이 입에서 군침을 줄줄 흘렸다.

"크으으.... 이거 하나라도 갖다 팔면 대체 얼마냐...."

그러나 목숨이 아깝다면 군침을 흘리는 것에서 그쳐야 한다.

모든 물건에 검은색 부적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흑사방주의 무공을 통해 특수하게 제조한 하독부(下毒符)다.

손가락 하나라도 닿으면 부적들이 일제히 독무를 뿜어내고, 이 자그마한 방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독무로 가득 차 버릴 것이다.

독공에 대한 만반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안 건드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서 부적이 붙어 있지 않은 물건은 오직 하나.

'저기 있군.'

고현우는 안력을 돋우고 비고 내부를 구석구석 살피다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자그마한 궤짝을 발견했다.

온통 검은 칠이 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보고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어쩌면 당대 흑사방주도 무심코 지나치는 바람에 부적을 못 붙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방주의 검은 궤짝]

신병철이 궤짝을 넘겨받고 좌우로 슬슬 흔들어 보았으나,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 맹렬하게 흔들어 보려는 찰나 고현우가 제지했다.

"나중에 하고, 서두릅시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소."

"그건 그래."

여기까지 오면서 베어 넘긴 흑사방도의 숫자가 제법 되니, 시간을 끌수록 발각될 확률도 올라간다.

해서 두 사람은 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이미 기관 장치들을 무력화해 놓은 상태라 제법 속도가 붙었다.

이대로 흑사방을 나가 안전지대로 이동하면 끝.

신병철은 벌써부터 긴장이 풀려서 헛소리를 해 댔다.

"야, 진짜 쉽긴 쉽네. 뭐 이상한 거 튀어나오지도 않고."

"신 형, 부정 타는 말 마시오."

"아, 넵. 제 주둥이가 방정입죠."

신병철이 장난스레 자기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얼마 가지 않아 선두를 뚫던 고현우가 급격히 속도를 줄이고,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또 뭔데 그러...."

신병철이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현우의 시선 끝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그 노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백색 일색이었다.

피부는 핏기가 전혀 없어 창백하며, 두 눈의 동공마저 새하얗다.

보통 백색은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어야 정상인데, 이 노인은 그것이 과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고현우는 이런 특이한 인상착의를 가진 노인이 누구인지, 김호에게 정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현우가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어지간하면 마주칠 일이 없다 하였거늘,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노인은 죽은 흑사방도의 몸에 난 상흔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려 고현우를 마주 보았다.

"솜씨가 매우 깔끔하구나. 네가 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고현우가 솔직하게 수긍한 뒤, 정중히 예를 갖추며 되물었다.

"혹시 노인장께선 천마신교의 장로, 백혁서 선배님 아니십니까?"

본명이 언급되자 노인의 눈빛에 이채가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혁서. 그의 정체는 흑사방의 부방주.

과거에는 마교의 원로 고수이자 흑백쌍사 중 하나였다.

"노부가 바로 백사(白蛇)다."

히든 보스, 백사.

흑사방 공략에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상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73화 No.104 흑사방 (5)

백사(白蛇).

사분오열되어 수면 밑으로 숨어든 마교의 몇 안 남은 장로.

방주인 흑사조차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로, 흑사방 공략에서는 매우 불확실한 변수로 작용한다.

어떤 뚜렷한 규칙성 없이 흑사방 내부를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정말 운이 없으면' 마주치게 되는 것.

그리고 지금이 바로 정말 운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현우가 백사의 경지를 가늠해 보려 했으나, 그의 안목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B급 던전의 히든 보스답게 실력이 고현우보다 한참은 윗줄인 것이다.

'승부를 겨룬다면 필패.'

그것도 열 합 이내에 승부가 갈릴 것이다.

무공의 차이가 월등하니 도주 또한 불가능할 터.

그러나 아직 절망하기는 이르다.

'아직은 활로가 남았다.'

김호는 공략본을 만들 때 이 희박한 확률 역시 계산 내에 두었다.

당연히 백사를 마주치는 상황의 대처법도 존재했다.

다만 그 대처법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문제가 남았고, 그건 앞으로 고현우가 하기에 달렸다.

한편, 백사 역시 새하얀 동공으로 고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현우의 기도가 읽히는지 나지막이 감탄한다.

"약관도 안 되는 나이에 그 정도 성취라니 대단하구나."

"전부 스승님과 친우들의 덕입니다."

"좋은 스승과 친우를 두었다. 허나 아쉬운 일이야."

백사는 고현우를 제법 좋게 보는 듯했으나, 그럼에도 흑사방의 일원으로서 할 일을 다하려는 모양이다.

갈무리된 기세가 조금씩 풀려나며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10년, 아니, 5년만 더 주어졌어도 뛰어난 검수로서 이름을 날렸을 터인데, 오늘 노부를 만나게 되었으니.... 네 운이 없음을 탓하거라."

백사의 소매가 펄럭이려던 찰나.

고현우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선배님께서는 현양진인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백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과거 정마대전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

이는 당시 그를 제압했던 도가의 고수, 현양진인이 마지막 순간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백사와 약속한 것이, 언젠가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를 죽일 일이 생기거든 그 역시 한 번 자비를 베풀라는 것.

고현우가 하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목숨 빚 갚아라, 우리 보내 줘라'가 되겠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전대 고수들 간의 약속을 들먹이자니 마음이 한켠이 불편한 고현우였으나, 이 또한 공략의 일부려니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백사가 답했다.

"노부가 분명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다. 허나 너에게 자비를 베풀 가치가 있는지는 확인해 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를 살려 보내기로 했으니,

전도유망하지 않으면 그냥 죽이겠다는 뜻.

신병철이 속으로 항의했다.

'아니, 방금은 대단한 성취라면서요? 노친네가 말을 막 바꾸시네?'

그러나 왠지 지금 입을 열었다간 처맞을 것 같아서 잠자코 찌그러져 있었다.

고현우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실력을 보는데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 있겠느냐? 노부의 손에서 삼 초식을 버틴다면 보내 주도록 하마."

'...여기까지는 됐다.'

고현우가 늘어뜨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공략대로 어떻게든 삼 초식 버티기로 끌고 가는 데는 성공했다.

백사와의 정면 승부는 절대 상대가 안 되지만, 삼 초식이라면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상황에서 활로를 여는 유일한 방법이다.

"선배님의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좋다. 너는 준비하도록 해라."

물론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보인다 뿐이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겨우 삼 초식에 불과할지언정 자신보다 몇 단계는 더 뛰어난 고수의 손에서 버텨야 할 테니까.

백사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일반적인 장검과 비슷했다.

다만 자루에서부터 검병, 검날까지 모든 것이 하얗고, 끄트머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둘로 나뉘어 있었다.

백사의 독문 무기, 사설검(蛇舌劍).

백사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말했다.

"선수를 양보하겠다."

"그럼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고현우가 공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불어 가는 거센 바람에 올라타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

강하게 일점을 찔러 상대방의 방어 초식을 유도한다.

그걸로 삼 초식 중 하나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급류(急流)]

"...."

백사의 새하얀 동공이 찔러 들어오는 고현우를 눈에 담았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친다.

"...바람뿐만 아니라 기의 흐름까지 제어하는군. 보통 절기가 아니로다. 허나."

백사의 미간이 고현우의 주술검에 꿰뚫리려는 찰나.

백사가 검세를 취하더니 이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초식의 형태가 매우 낯익었기에 고현우는 보는 즉시 그것을 알아보았다.

'독사수동?'

독사수동(毒蛇守洞).

독사가 똬리를 틀고 동굴을 지키는 모양새를 흉내 낸 초식이다.

삼재검법 같은 기본공 다음으로 잘 알려진, 매우 단순한 초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백사가 펼치는 독사수동은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식이 펼쳐지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사설검이 뱀 혓바닥처럼 양옆으로 쩍 갈라졌다.

사설검은 칼날이 유연하게 휘는 연검(軟劍)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갈래로 휜 칼날들은 각기 다른 두 개의 검로를 그려 냈다.

주술검에 한껏 집중한 검기가 독사수동 하나와 충돌하더니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뒤이어 두 번째 독사수동이 고현우를 덮쳐 왔다.

전신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고, 고현우의 신형이 뒤로 날아가서 벽을 부수고 처박혔다.

- 콰지직!

"크으으으...."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거대한 뱀 꼬리에 후려 맞은 느낌.

백사가 고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맹한 맛은 있으나 뒷일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초식이구나. 동귀어진에나 쓸 법하다."

"...."

"다음 준비하거라."

두 번째 초식.

선수를 양보했으니 지금부터는 백사가 공격할 것이다.

고현우가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즉시 백사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가까워져 온다.

아래로 늘어뜨린 사설검에서 어떤 초식이 펼쳐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끄트머리가 부르르 떨리며 갈라지는 모습을 보면 그 순간이 임박했음은 분명하다.

어차피 보고 대처한다고 대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최선의 한 수로 맞설 뿐.'

[청류(淸流)]

고현우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이 점차 칼날에 감겨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백사를 향해 겨누어졌다.

백사의 사설검도 구불거리며 둘로 갈라졌다.

백사는 그것을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찔러 들어왔다.

이번에도 매우 눈에 익은 초식이었다.

[독사출동(毒蛇出洞)]

투로가 훤히 보이는 찌르기 둘.

그러나 고현우의 눈에는 굵은 뱀 두 마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짓쳐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압도적이라 투로가 보인다 한들 쳐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해내야만 한다.'

고현우의 눈이 굳은 결의를 머금었다.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사설검의 아주 미세한 구부러짐 하나까지 읽으려 했다.

그렇게 마주 청류를 휘두르기 직전.

문득 그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달마상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달마상을 이루던 무수한 선들.

그중 하나가 눈앞 허공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고현우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선을 따라 청류를 그었다.

- 번쩍!

순간 스쳐 지나간 깨달음 덕일까.

방금 그의 청류는 여태까지 그가 펼쳤던 어떤 것보다도 완벽했다.

그럼에도 백사의 독사출동을 방어하기에는 완벽함이 부족했다.

백사는 한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반면, 고현우의 신형은 한참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쿨럭."

내부가 진탕되어 코와 입에서 죽은 피가 터져 나왔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흐르는 피가 주술검을 타고 흐른다.

'이렇게까지 해도 역부족이란 말인가....'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는 검초를 펼쳤는데도 상대를 단 한 발짝도 물러나게 하지 못하다니.

아직 둘 사이에 그만큼 아득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에만 집중한 탓에 고현우는 깨닫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백사를 한자리에 멈춰 세운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백사 역시 그렇게 생각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 나이에 노부의 독사출동을 이리도 수월하게 막아 내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백사가 사설검을 칼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뜨렸다.

그 상태에서 공력을 더욱 끌어올리자,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압박감이 장내를 짓눌렀다.

"노부도 실력을 더 보이는 게 옳겠지. 마지막이다. 받아 보거라."

유형화된 기운이 압축되며 점차 백사의 외견과 같은 백색을 띠었다.

백색 투기를 두른 백사의 모습은 한 자루 날카로운 명검 같기도 했고, 똬리를 튼 거대한 구렁이 같기도 했다.

눈앞의 구렁이가 고현우를 노려보며, 곧 튀어 나가려는 것처럼 한껏 몸을 웅크렸다.

고현우는 직감했다.

백사가 곧 절기를 펼칠 것이며, 그 절기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그러나 아직 쓰러지기에는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사부가 남긴 뜻이 있었고, 해결해야 할 사문의 숙원이 있었으며,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친우들이 있었다.

아직은 그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이내 고현우는 어떤 결심을 한 듯했다.

주술검을 중단으로 세우고 기세를 끌어올린다.

어디선가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

백사의 눈이 바람과 하나 된 기의 흐름을 읽었다.

그리고 고현우가 지금 펼치려는 것이 매우 수비적인 초식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적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극도로 유(柔)에 치중한 초식.

그러나....

'이게 전부인가?'

백사의 눈에는 영 차지 않았다.

차라리 두 번째 격돌 때 사용한 초식이 나아 보였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든 수비적인 측면에서든.

'저게 다일 리가 없다.'

백사 자신이 더 강력한 초식을 꺼내는데, 고현우가 더 약한 초식으로 대응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분명 다른 수단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노부의 알량한 자비심을 기대하는 거라면.... 너는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마침내 백사가 초식을 전개했다.

[백리등천(白螭登天)]

거대한 백색 이무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며 고현우에게 짓쳐 들었다.

그에 비하면 검 한 자루를 내세우고 서 있는 고현우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한없이 미약해 보였다.

- 콰아아아아—!

내세운 주술검이 부르르 떨리며 금이 쩍쩍 가고 고현우의 코와 입가에서 죽은 피가 줄줄 흘렀다.

백사의 예상대로, 고현우의 방어 초식은 백색 이무기를 흘려보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예상대로 백리등천을 흘려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이무기가 눈앞의 먹잇감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착각이 드는 찰나,

고현우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파아앗!

모든 것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잠깐의 정적.

"...."

백사의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이었다.

고현우는 여전히 주술검을 세운 자세 그대로였다.

그러나 반대쪽 손에는 어느새 길쭉한 것이 들려 있었다.

낡은 천으로 돌돌 말고 쇠사슬로 감아 두었던 것이, 일부가 찢어져 묵빛 광택이 드러났다.

검집째로 든 장검.

그것이 백사의 마지막 절초를 해소해 버린 듯했다.

"쿨럭."

고현우가 또 한 움큼 죽은 피를 게워 냈다.

조금 전보다 안색이 훨씬 파리해진 것으로 보아 잠깐 저 장검을 쥔 것만으로도 제법 큰 대가를 치른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대단한 명검이로다....'

백사가 감탄했다.

보통 경지에 오른 고수를 보면 잘 벼려진 한 자루 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건 그 반대였다.

검 대신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사이를 가로막는 느낌.

도대체 저 장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장검을 소유한 고현우의 정체는?

궁금한 건 많았으나, 승부는 끝났다.

더 물어봤자 구차할 뿐이었다.

백사가 사설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노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길을 열어라."

이미 장내에는 소란을 듣고 흑의인들이 잔뜩 몰려든 상태였는데, 백사의 명령에 썰물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고현우는 바로 발걸음을 떼지 않고, 백사에게 더없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하마."

그리고 신병철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흑의인들 중 대주급 무사 하나가 백사에게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놈들의 수급을 취해 돌아오겠습니다."

말장난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현양진인과의 약속을 되짚어 보면, '백사'가 살려 준다고 했지, '흑사방 무사'가 살려 준다고 한 적은 없다.

또한 백사가 살려 준다고 한 것은 고현우지, 그 옆의 신병철과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수하를 보내 해한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백사는 고개를 저었다.

"가게 두어라. 노부를 졸렬한 필부로 만들 셈이냐?"

이미 넘치도록 자격을 증명한 고현우였다.

백사는 방금 전의 승부를 더럽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파와 사파, 마교를 나누기 이전에 그 또한 한 사람의 무인인 것이다.

이토록 백사의 의지가 확고함에도, 대주급 무사는 추격조를 보낼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비고가 뚫렸습니다. 이대로 보낸다면 방주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 서걱!

사설검이 쭉 갈라지더니 대주의 몸을 휘감고 단숨에 세 토막을 내 버렸다.

이제 백사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노부의 은원보다 그깟 비고의 물건 몇 개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

"...!"

흑의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백사가 고현우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모습.

투지로 불타오르는 눈빛.

저런 자는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저놈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 * *

고현우는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통로를 걸었다.

신병철이 연신 뒤쪽을 살폈으나 흑사방 무사들은 정말로 더 쫓아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노친네가 말장난은 안 하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기는 이르지만,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한 상황은 지난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신병철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고급진 유리병 안에 붉은 액체가 찰랑거린다.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가자. 마셔."

고현우는 신병철이 넘겨주는 포션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보통 쓴 게 아니었는지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으나, 곧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후우.... 한결 낫구려. 고맙소."

"한결 나아야지. 안 나으면 이상하지."

회복을 확신한다는 어조였다.

고현우가 그제야 시선을 내려보니 빈 유리병부터가 보통 고급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물의 가치도 결코 낮지 않을 터.

"이건...."

"하이포션이라는 물건이시다."

"신 형의 출혈이 컸겠소. 이런 귀한 물건을 내주다니."

"컸지. 대출혈이지. 근데 별수 있나?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언젠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상황을 대비해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둔 하이포션이었다.

신병철 본인은 한 방울도 못 마셔 봤다.

그러나 운이 지지리도 없게도 히든 보스를 조우했고, 고현우가 목숨을 걸고 싸워 준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사지 멀쩡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손해 득실에 민감한 신병철이라지만, 뒷짐만 지고 모른 척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고현우가 내상을 잔뜩 입은 채로는 도저히 속도가 안 나고, 만에 하나 추격대가 붙었을 때 답이 없을 테니 선뜻 하이포션을 꺼낸 것이다.

고현우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 형도 중요한 순간에는 배포가 크군. 진정 사나이라 할 수 있소."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야. 잘 기억해 둬."

"하하, 이를 말이오?"

다만 하이포션의 가치가 가치이다 보니 미련이 아예 안 남을 수는 없었다.

신병철은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마침 고현우와 백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물었다.

"근데, 다시 찾아뵙는다고?"

"그렇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어차피 다음에 오면 저 양반은 너 기억 못 할걸?"

이 던전에는 이미 검술 동아리의 입찰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던전을 파괴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 재생성된 흑사방에서 백사는 고현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고현우는 굳게 다짐한 듯했다.

"그가 본인을 기억하고 못 하고는 중요치 않소. 중요한 것은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지."

백사가 과거의 은원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가 과거의 은원만을 중요시했다면 구태여 '전도유망한지 시험해 보겠다'라는 핑계를 대며 손속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실력 차가 그 정도나 난다면 한눈에 기도가 보이고, 손속을 섞더라도 한 수로 충분했을 테니까.

아마도 삼 초식이나 교환하게 된 진짜 이유는, 언젠가 성장한 고현우와 제대로 겨루어 보고 싶다는 무인의 호승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들, 전후 사정을 설명한다면 기꺼이 승부에 임하리라.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