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홍연화와의 대련은 한 주 내내 이어졌다.
홍연화의 마법진 운영은 점점 더 매끄럽게 다듬어졌고, 나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트위스터'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E+->D+)]
난이도가 높은 스킬이라 성장이 상당히 더디지만, 지난주부터 멘토링 보너스를 받으며 질리도록 난사한 덕분에 기어이 D랭크 승급에 성공한 것이다.
상대가 1학년이라면 충분히 실전에서도 활용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목요일.
아레나.
다른 조원들과 당규영을 따라 관중석 한 켠으로 이동하는데,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한 팀이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서 걷는 학생은 3학년 선배였고, 뒤에 1학년들을 달고 가는 걸 보면 당규영과 마찬가지로 멘토인 듯했다.
그의 얼굴은 한눈에 두꺼비를 연상시켰는데, 미남미녀가 가득한 이 게임 속 세상에서 두꺼비를 닮았다면 인생에 굴곡이 제법 많지 않았을까 싶다.
뒤따라 걷는 1학년 세 명.
그 셋 중에서 둘은 낯이 익었다.
하나는 지난 2대 2 대인전에서 상대방으로 걸렸던 일공.
당시 나는 서예인을 윈드포스로 혼내 주었고, 일공은 고현우와 마지막 초식까지 겨루었으나 결국에는 패했었다.
그리고 일공 역시 나를 알아봤는지 빙그레 웃으며 합장했다.
다음은 고현우의 리플레이에 같은 편으로 등장했었던 북궁한설.
한빙 계열의 장법으로 박나리네 호랑이를 몰아붙이려 했지만, 공격력이 조금 부족한 탓에 실패로 돌아갔다.
세 명째는 아예 초면이었는데, 앞선 두 명의 클래스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무투가 팀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두 팀이 서로를 그대로 지나치려는 찰나,
두꺼비 인상을 한 선배가 당규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규영."
"김갑두."
3학년 두꺼비, 김갑두가 따지듯이 말했다.
"메시지는 왜 안 받나."
"차단했는데?"
"...왜지?"
"왜긴, 자꾸 쓸데없는 걸로 연락하니까 그렇지."
"쓸데없다니, 나는 진심이었다."
"아무튼, 나는 받아 줄 생각 없으니까 그만하자."
대화의 흐름 상, 김갑두가 당규영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대다가 메신저 차단을 당한 모양이다.
당규영이 단호하게 끊었음에도 김갑두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요즘 1학년 하나에 푹 빠졌다고 들었는데, 그놈이 그렇게 잘생겼나?"
"푹 빠져—"
당규영은 어이가 없어서 반박하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를 자기 옆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내 어깨에 팔을 척 얹는다.
"솔직히 얘 정도면 그럭저럭 생긴 편이지. 눈매가 좀 고약하긴 해도."
일명 '남친 생겼으니 신경 꺼' 작전.
당규영이 한 번만 좀 맞춰 달라고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냈기에, 나는 눈치 없게 '선배님,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요,' 하고 묻지는 않았다.
잠자코 서 있으니 김갑두가 부러움 반, 시기와 질투 반이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놈이 그 1학년이군. 사귄 지 얼마나 됐나?"
"아직 안 사귀는데?"
차마 이것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당규영이 솔직하게 답했다.
김갑두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렇다면 나한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이로군."
"아니지. 전혀 없지."
당규영이 또 단호하게 끊자, 김갑두는 또다시 상처받은 두꺼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슬픔과 분노는 고스란히 나를 향했다.
"...저 1학년의 실력이 궁금하군. 너와 함께할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있건 없건 그게 너랑 뭔 상관이야."
"단순히 궁금한 것뿐이다. 마침 그쪽도 네 명, 이쪽도 네 명인데, 한번 붙어 보는 게 어떤가?"
이 제안에는 당규영도 곧바로 거절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김갑두의 조는 무투가 클래스.
초근접 거리에서 공방을 걸어오는 이들이라, 올라운더를 목표로 하는 마법사라면 반드시 대비해야 하는 상대다.
그렇다면 랜덤 매칭을 잡는 것보다 저들과 붙어 보는 쪽이 더 좋은 경험이 될 터.
여기까지 결론을 내렸는지 당규영이 되물었다.
"네 명이라며, 한 명은 어디 갔는데?"
"일이 있어서 조금 늦는다. 금방 올 거다."
"그래? 그럼 한번 붙어 보지 뭐."
당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갑두가 거기에 넌지시 제안을 덧붙였다.
"이왕 하는 거, 판돈이 걸리는 쪽이 재미있지 않겠나?"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만 좀 질척거려라."
"질척거린다 말해도 좋다. 우리가 이긴다면 나한테도 한 번만 기회를 다오."
멘티들의 승패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려는 김갑두.
하도 질척거리니 이젠 궁금해지는지 당규영이 물었다.
"한 번 들어나 보자. 무슨 기회를 달란 건데."
"우리가 이기면...."
3학년 두꺼비가 점차 빨간 두꺼비가 되었다.
이내 김갑두는 바닥 한 곳을 응시하면서 더듬더듬, 그러나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이기면.... 나랑 주, 주말에 번화가에서 데데, 데이트해 다오!"
도 넘은 구차함에 장내의 모든 이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당규영은 물론이고 송천혜, 홍연화, 곽지철, 심지어는 북궁한설까지도.
일공만이 잔잔히 가라앉은 얼굴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도호를 외울 뿐이었다.
"무량수불...."
125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0)
"아.... 어지럽네, 진짜."
당규영이 현기증이 난다는 양 이마를 짚었다.
공개 고백 및 조건부 데이트 신청을 2연타로 얻어맞았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일단 공사 구분부터 좀 하자. 멘토링 중이잖아. 애들은 왜 끌어들여?"
"...타당한 지적이다."
김갑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양측의 머릿수가 같은데다, 무투가와 마법사 두 클래스는 서로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 둘수록 도움이 된다.
그러니 대인전을 붙인다는 취지 자체는 좋다.
다만 그 결과로 이득을 보는 것이 멘토라면, 게다가 그 이득의 내용이 사랑놀음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라면, 이후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걸로 동기부여가 될 리도 없지. 따라서 너희들에게 제안하겠다."
김갑두는 제안을 하기 전에 잠깐 뜸을 들였다.
보상으로 뭘 내걸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게 아깝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내 크게 심호흡을 하며 결심을 다지더니,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선언한다.
"오늘 나, 인벤토리 턴다. 이기는 팀은 영약 파티다."
"...!"
"...!"
영약의 효과는 뛰어났다.
안쓰러운 눈으로 김갑두를 바라보던 무투가 조원들이 곧바로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무인이라는 족속들은 심히 단순해서, '기연,' '영약,' '신병이기' 같은 단어만 나오면 눈이 뒤집혀 버리곤 한다.
당장 고현우만 봐도 그렇고.
그런데 영단 하나, 하수오 한 뿌리가 아니라 무려 영약 파티란다.
"무량수불...."
일공은 여전히 평온한 신색을 유지하며 도호를 외우고 있었는데,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는 점이다.
저거 중 아닐지도 몰라.
우리 쪽도 김갑두의 영약 파티 선언에는 조금 혹했으나, 그보다는 당규영의 손을 들어주는 추세였다.
지면 강제 데이트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곽지철만이 들뜬 기색을 보이다가 송천혜의 눈총을 받고 찌그러졌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김갑두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당규영, 네가 어지간해서는 이 내기를 아예 고려조차 안 하리란 것도 알고 있다. 넌 타산적인 여자니까."
"어. 잘 아시네."
"그렇더라도 나는 좋다! 이제 내가 내거는 조건을 들어봐라. 충분히 혹할 만한 것으로 준비했으니까. 너희가 이긴다면...."
무투가 멘토를 맡는 대목에서 짐작했지만, 김갑두는 무투가 동아리 부장이기도 했다.
그의 입에서 부장으로서 넘겨줄 수 있는 온갖 이권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거기에는 2학기 특수연공실 시즌패스, 제작 VIP 티켓 등도 포함이었다.
'저걸 내기 한 번에 다 태운다고?'
나는 김갑두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모아둔 영약들을 터는 것만 해도 출혈이 큰데, 저렇게 이권을 잔뜩 넘겨 버리면 부장으로서의 입지가 흔들릴 위험성도 크다.
그만큼 이 내기에 상당한 각오를 걸었다는 뜻.
요약하면 한심하게 멋진 두꺼비다.
물론 그런 평가와는 별개로,
'이건 그냥 못 지나치지.'
이런 파격 조건이 걸린 내기는 쉽사리 오지 않는다.
당규영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방금 전처럼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진 상태.
나는 그런 당규영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받죠, 내기."
"지면 데이트인데?"
"이기면 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나도 고민 안 해."
"저도 압니다. 그래도 필승 카드는 하나 있죠."
그 필승 카드란 당연히 이전 두 경기에서 유망주급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바로 나.
상대측은 이 사실을 모르기에 더욱 효과적이다.
당규영이 나를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력 좀 보이게? 여태 잘 숨기고 다니더니."
"적당히만요. 그 대신 저도 지분을 받았으면 하는데요."
내기에서 이기는 데 힘을 쓰는 대신, 김갑두가 내건 이권 몇 개를 넘겨 달라는 뜻.
당규영이 승낙한다는 뜻으로 턱을 조금 까딱였다.
"그럼 1승은 챙겼다 치고, 나머지는?"
"우리 쪽에 유망주급이 둘이나 되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그래도, 만에 하나 지면?"
나는 눈짓으로 김갑두를 가리켰다.
"만에 하나 지면, 선배님은 저분이랑 데이트 한 번 하시고, 저는 동아리 입부하는 걸로 하죠."
당규영의 얼굴이 '데이트'라는 단어에서 구겨지려다가, '입부'라는 단어를 듣고 반색을 했다.
"진짜? 입부? 다른 데 아니고 우리 쪽?"
"예, 도둑 동아리요."
이것이 당규영의 고민을 상당 부분 덜어 준 듯했다.
이기면 영약 파티에 이권 잔뜩이니 대박.
지면 김갑두와 데이트를 한 번 하더라도 나를 동아리로 데려올 수 있으니 손해보다 이득이 크다.
"좋아, 받자. 근데 네가 웬일이냐, 입부 얘기를 먼저 꺼내고."
"우리가 이길 거니까요."
"...아예 입부할 생각이 없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
내가 말없이 빙그레 웃자 당규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커흐흠!"
당규영과 내가 계속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을 하는 게 눈꼴 시려웠는지, 김갑두가 크게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끌었다.
"당규영, 슬슬 답변이 듣고 싶은데."
"어. 받기로 했어."
"정말 잘 생각했다!"
김갑두는 잠시나마 행복한 두꺼비가 되어 부담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당규영은 그것을 못 본 척하고 빠르게 대화를 진행시켰다.
"규칙은?"
"각 팀에서 한 명씩 나와서 일대일로 겨룬다. 중복참여 불가능, 누구를 먼저 보낼지는 멘토가 임의로 정하는 걸로."
"블라인드야?"
"그렇다."
예를 들어, 당규영은 1차전에 곽지철을 내보낼지, 홍연화를 내보낼지 등을 정할 수 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블라인드 매칭이라는 것.
상대측에서 누구를 내보냈는지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곽지철을 내보냈는데 북궁한설이 상대로 걸릴 수도 있으니, 눈치를 잘 봐 가면서 운영해야 한다.
"3선승이지?"
"그렇다. 만에 하나 2대2가 됐을 때는 다시 논의해 보도록 하지."
당규영이 김갑두 뒤의 멘토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너네 애들은 몇 점씩이야?"
"600점대 둘, 900점대 둘이다."
일공과 이름 모를 무투가A가 600점, 북궁한설이 900점대, 그리고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한 명이 900점대란다.
당규영이 눈썹을 찡그렸다.
"뭐? 이쪽은 한 명 빼고 다 600점 근처인데."
"홍연화는 유망주급 아닌가. 900대라 해도 손색이 없지."
"점수를 놓고 봐야지. 이러면 시작하기도 전에 불공평하잖아."
당규영이 따지고 들자 깁갑두는 주눅 든 두꺼비가 되었다.
"...인정하지. 한 경기만 핸디캡을 걸겠다. 이러면 불만 없나?"
"핸디캡 내용은 내가 정하고?"
"서로가 납득할 만한 수준이라면."
"좋아."
세부 규칙까지 합의가 끝났다.
두 멘토가 단말기를 조작해 합의된 사항들을 입력하고, 이어서 멘티들이 학생증을 스캔했다.
곧 무대 앞에 큼지막한 단체 순간이동 마법진이 떠올라 빛을 발했다.
모두가 그 위에 발을 올리자 시야가 급변했다.
* * *
기암괴석이 가득한 협곡.
고저가 아주 높지는 않으나, 계단처럼 층이 져 있어 위쪽으로 올라갔을 때만 주변 지형을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그리고 곳곳에 자리한 기암괴석 중에서도, 유독 등대처럼 우뚝 솟아 빛을 발하는 암석이 있었으니.
바로 이번 지형의 성소였다.
한편 우리는 훨씬 높은 절벽에 소환되어 그 협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곳이 관중석 비슷한 역할을 했다.
김갑두의 팀은 반대편 절벽 어딘가에 소환됐겠지.
당규영이 협곡을 한 번 내다본 다음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첫 경기는 누가 나갈래?"
그러자 송천혜가 즉시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먼저 해 보고 싶어요."
처음부터 강수를 둬서 적의 예봉을 꺾는다.
상대측에서도 강한 카드인 북궁한설을 먼저 꺼낼 가능성이 높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당규영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선선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갔다 와."
송천혜가 자그마한 마법진에 발을 내딛자 슉 하고 모습이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저 아래에 나타났다.
곧 반대편에서도 아까 봤던 무투가A가 나타나고, 스코어보드에 두 사람의 정보가 출력되었다.
[송천혜 988점 vs 손형택 631점]
"칫, 600점대네."
당규영이 혀를 찼다.
내심 상대측에서 북궁한설을 내보내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력을 비교하자면 송천혜가 반수 정도 더 뛰어나기에, 900점대 한 명을 쓰러뜨리고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송천혜의 얼굴에도 순간 아쉬운 기색이 비쳤으나, 상대가 누구든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인 듯 자세를 다잡았다.
크리스탈 충전에 승패가 좌우될 수 있는 만큼, 점수 차만 믿고 안일하게 임했다간 자칫 허를 찔릴지도 모른다.
[3]
[2]
[1]
[Start!]
[송천혜 100%] vs [손형택 100%]
[크리스탈 0%]
- 파지지지직!
한 줄기 뇌전이 되어 질주하는 송천혜.
순식간에 층이 잔뜩 진 절벽 꼭대기로 올라가 주변 일대를 살핀다.
때마침 반대편 절벽에 오른 손형택과 눈이 마주쳤으나, 둘은 일단 서로를 무시하고 주위를 관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른 것보다 먼저 크리스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
이내 손형택의 시선이 한 곳에 우뚝 멈추더니, 땅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송천혜는 크리스탈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무작정 같은 방향으로 따라 달렸는데, 손형택이 향하는 곳에 크리스탈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 파지지직!
다시 한 줄기 뇌전이 되어 질주하는 송천혜.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발견했을 때에는, 벌써 손형택이 간이 제단을 발견하고 크리스탈을 회수한 상태였다.
"...."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치는 손형택.
전투는 크리스탈과 성소를 이어 놓은 다음에 벌여도 늦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 뒤를 한 줄기 뇌전으로 화한 송천혜가 추격한다.
- 파지지지직!
"어, 어?"
손형택의 입에서 경호성 비슷한 것이 튀어나왔다.
예상보다 송천혜가 따라붙는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달리는 데도 거리가 계속해서 좁혀져 간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0이 되는 순간,
송천혜는 온몸에 뇌전을 두른 채, 손형택을 그대로 몸통 박치기로 들이받아 버렸다.
- 쿠르르릉! 쾅!!
"크아아아악!"
커다란 뇌명과 함께 손형택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126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1)
[송천혜 100%] vs [손형택 78%]
[크리스탈 0%]
몸통 박치기 한 방에 손형택의 체력 게이지가 뭉텅 깎여 나갔다.
손형택은 그 충격으로 크리스탈을 놓치고 말았으나,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와중에도 순발력을 발휘하여 도로 잡아 챘다.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벌떡 일어나 자세를 다잡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육체 계열 클래스답기는 했다.
"...."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손형택이었다.
앞으로 내딛으며 허공에 빠르게 주먹질을 해대자 권풍 여러 개가 쏘아져 나갔다.
- 파파파팟!
송천혜가 마주 내디디며 날아오는 권풍을 하나하나 쳐 내는 사이, 손형택은 그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은 저게 최선이지.'
전투력은 물론 이동속도마저 송천혜가 우위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지금 맞서 싸우는 건 하책이다.
크리스탈을 충전하며 버티는 것만이 손형택이 승기를 잡을 유일한 방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겁하게 보일지라도 일단 성소까지 도망쳐야 한다.
곧바로 추격하는 송천혜.
달리면서 한 손을 펴자, 묵빛 장갑 위에서 전류가 두 갈래로 나뉘더니 벌새 두 마리로 조립되었다.
[허밍버드]
- 치지직,
뇌전의 벌새 두 마리가 유려한 비행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
손형택은 속도를 유지하며 흘끔 어깨너머를 확인하더니, 첫 허밍버드가 짓쳐들어오는 순간 보법을 밟았다.
바닥에 불규칙적인 발자국들이 찍히며 그의 신형이 아주 짧은 찰나 잔상이 남듯 흐릿해졌고, 허밍버드는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저걸 못 맞추네....'
조금만 더 세밀하게 조작하면 되는 건데.
컨트롤 부족은 송천혜가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아."
송천혜 본인도 빗맞히리라곤 예상하지 못 했는지 순간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에 금이 쩍 갔다.
그러나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라는 듯, 금세 표정을 회복하고 자연스럽게 다음 허밍버드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 파지직!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적중했다.
손형택의 움직임이 짧은 시간 눈에 띄게 느려졌으나,
"흡!"
강하게 기합을 주자 온몸에서 옅은 기파가 퍼져 나가며 움직임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모종의 디버프 해제 스킬로 마비 상태를 풀어낸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계단처럼 층이 진 절벽들을 마치 평지처럼 오르내렸다.
- 파지지지직,
전류가 되어 쇄도하는 송천혜.
다시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져 간다.
"...크윽!"
손형택은 등 뒤를 확인하고 다급해졌다.
이대로라면 또 몸통 박치기를 허용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는지, 달리면서 사방팔방에 주먹질을 해 댔다.
- 쿠쿠쿵!
지나다니는 길목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이 박살 나며 쓰러지고, 땅바닥이 뒤집어 엎어지며 크고 작은 암석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뒤쫓는 송천혜로서는 그것들을 피하거나 막느라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춰야 했다.
- 위잉—
한발 앞서 성소의 범위 내에 들어선 손형택.
등대처럼 선 암석과 크리스탈이 굵은 광선으로 연결되고,
[크리스탈 1%]
충전 게이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손형택은 그러고도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는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도망만 다니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그렇지, 잘한다.'
손형택 화이팅!
나는 당규영이 근처에 있어서 큰 소리는 못 내고,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기왕이면 더 더티하게 흙먼지도 자욱하게 내고, 도발 멘트도 곁들여 주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저렇게 도망 다닐 거거든.'
지금 손형택이 설치고 다니는 만큼 이후 내 행동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논리.
그때 가서 상대방이 뭐라 하면,
- 그만 좀 도망 다녀라!
- 왜? 손형택이 했던 거 똑같이 하는 건데?
라고 되받아쳐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다소 실망스럽게도, 손형택은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각종 비매너 행각들을 벌어지는 않았다.
무투가란 일반적으로 정면승부에 익숙한 족속들이라, 이렇게 술래잡기를 하는 일 자체가 생소할 거다.
때문에 비매너 행위까지 생각이 안 닿는 거고.
그래도 도망 다니는 것만큼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손형택이었다.
- 콰콰쾅!
마구잡이식 주먹질에 근처 절벽에서 낙석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송천혜가 거의 따라잡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장애물들을 만들고, 다시 거리를 벌린다.
또 따라잡으면 또 장애물을 만들어 거리를 벌린다.
[크리스탈 22%]
그러는 동안 충전도는 야금야금 올라가는 중이었다.
송천혜가 스코어보드에 시선을 주더니 미간을 좁혔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닐 수만은 없다.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행동에 나섰다.
무슨 특별한 묘안을 떠올린 것은 아니고, 단지 마력을 더욱 잔뜩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마법이라도 들어가는 마나량이 세 배, 네 배가 되자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 치지지지지직!
온몸에 두르던 뇌전의 굵기가 점점 굵고 강렬해지더니, 결국에는 아예 온몸을 벼락이 뒤덮어 버렸다.
- 쿠릉, 쿠르릉,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뇌명이 계속해서 울릴 지경.
"흡!"
또다시 손형택이 날린 권풍에, 절벽 위 바윗덩어리가 여러 개로 박살 나며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송천혜는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제 앞에 아무 장애물도 없다는 양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잔해들은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버렸고, 손형택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이런."
장애물 작전은 이제 안 통한다는 뜻이니까.
거리가 계속 좁혀져 온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리스탈 27%]
[크리스탈 24%]
성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그라들며 충전도가 뚝뚝 떨어졌다.
도망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무심코 성소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크윽...."
더 이상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손형택이 멈춰 서서 빙글 몸을 돌렸다.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그 역시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몸에 두르고, 가진바 최고의 방어 스킬을 시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이번 경기에서 두 번째로 격돌했다.
- 쿠르르릉!! 콰콰쾅!!
"크아아아아악!!"
손형택이 처절한 비명을 흘리며 뻥 튕겨 나갔다.
그렇게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통통 튕기다가 어떻게 두 다리로 버티고 서기는 했지만, 이미 정신이 육체를 탈출하기 직전이다.
눈빛이 흐릿해지고 몸이 비틀비틀 흔들리는 상태.
송천혜는 매정하게도 그런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가까이 달려들며 있는 힘껏 벼락을 내리찍었다.
- 콰콰쾅!
[송천혜 Win] vs [손형택 Lose]
"수고하셨습니다."
"...."
송천혜는 죽은 개구리마냥 뻗어 있는 손형택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관중석으로 돌아오자, 당규영이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송천혜 역시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못 이기는 게 이상한 승부였기에 서로 이렇다 할 리액션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당규영이 고개를 돌려 홍연화와 곽지철을 눈에 담았다.
둘 중 누굴 내보낼까 고민하는 기색이다.
나는 아예 마지막 경기로 밀려나서 고려 사항이 아니고.
그런데 웬일로 곽지철이 손을 들어 올렸다.
"2경기는 제가 나가보고 싶습니다."
"홍연화를 보낼까 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일단 이유는 들어 보겠지만, 단순한 공명심 때문이라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당규영은 멘토로서 감정적인 측면을 최대한 배제하고, 팀이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곽지철도 나름 생각한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형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김갑두 선배님에 관해서."
"승재가? 뭐랬는데."
"무투가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음, 내가 들은 거랑 비슷하네."
당규영 팀은 처음부터 선봉으로 900점대인 송천혜를 앞세운 반면, 김갑두 팀은 600점대인 손형택을 내보냈다.
반쯤은 버림패 역할이었고, 손형택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낸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김갑두가 소문대로 '지나칠 만큼 신중'하다면, 다음 2경기도 마찬가지로 600점대인 일공을 내보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니 점수대가 비슷한 자신이 그를 상대하겠다는 것이 곽지철의 주장이었다.
당규영이 물었다.
"그러다 북궁한설이 걸리면? 이길 수 있어?"
아무리 김갑두가 신중한 성격이라도, 2경기에서 1승을 챙기고자 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곽지철이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그래도 강한 카드 하나를 낭비하게 하는 셈이니까 손해는 아니라 봅니다. 그리고...."
곽지철이 나와 홍연화를 번갈아 본 다음 이어서 말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쟤들 실력이 저보다 조금은 낫잖아요."
이왕 버림패를 쓴다면,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자신이 맡는 게 가장 낫다는 뜻.
당규영이 재차 확인했다.
"그래서, 일공은 이길 수 있다?"
"크리스탈부터 먼저 회수하고 방어를 굳히면 될 것 같습니다. 지형도 저랑 잘 맞고요."
다른 건 몰라도 방어 하나만큼은 든든한 에메랄드 마탑 목토술사.
이번 지형 역시 암석이 가득하여 토속성 마법을 활용하기 안성맞춤이다.
그러니 비슷한 점수대라면 여러모로 승산이 보인다.
당규영은 얼마간 곽지철을 응시하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갔다 와라."
곽지철이 꾸벅 목례한 뒤,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곧 스코어보드에 양측 참가자의 이름이 출력되었다.
[곽지철 620점 vs 일공 670점]
과연 일공이 상대로 잡혔다.
김갑두는 소문처럼 지나치게 신중한 두꺼비였던 것이다.
한편 나는 이쯤에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신중한 양반이 어쩌다 저런 내기를....'
4대4 대결도, 내기도, 미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뒤 걸었다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정한 느낌이 강했다.
판돈도 영약에 동아리 이권까지 무리하게 끌어왔고.
어쩌면 당규영이 나를 예비 남친으로 내세우는 걸 보고 조급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게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신중한 두꺼비가 사랑에 눈이 멀면 이렇듯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일은 이미 벌어졌고, 중요한 건 '앞으로의 경기가 어떻게 풀리는가'였다.
나는 곽지철에게 응원을 보냈다.
'굳세어라, 곽지철.'
너랑 홍연화까지 이기면 나는 안 나가도 돼.
127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2)
[3]
[2]
[1]
[Start!]
[곽지철 100%] vs [일공 100%]
[크리스탈 0%]
곽지철은 경기가 시작되는 즉시 지팡이를 저었다.
커다란 흙 접시가 빚어져 땅에 놓이고, 그 위에 올라타자 땅에서 손 두 개가 솟아올라 그를 받치고 빠르게 운반했다.
그는 파도타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빠르게 층층이 진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찾았다."
주위를 얼마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곽지철이 번뜩 눈을 빚냈다.
그새 크리스탈의 위치를 특정한 것이다.
이런 소소한 운은 참 좋은 녀석이다.
그는 다시 흙 접시를 타고 신속하게 이동했다.
반면, 일공의 속도는 거의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인전이 아니라 산책을 나왔나 싶을 정도로 유유자적한 태도.
곽지철 역시 이따금씩 상대측 방향으로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걸로 보아, 아직 일공의 대머리를 구경조차 못 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할 때였다.
크리스탈을 회수하고 곧장 성소로 향한다.
- 위잉—
[크리스탈 1%]
성소와 크리스탈이 굵은 광선으로 연결되자 유유자적 걷던 일공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굵은 광선의 끝에 곽지철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제서야 일공은 조금 속도를 냈으나, 여전히 급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탈 28%]
마침내 일공이 곽지철과 마주쳤을 때는 이미 크리스탈 충전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
그는 합장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소승이 조금 늦었습니다."
"조금? 많이 늦었지."
곽지철 역시 여유로운 웃음을 보냈다.
그로서는 일공이 늦게 와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덕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으니까.
이미 일대가 온갖 토속성 마법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겹겹이 세워지고 보강된 석벽이 곽지철을 둘러싸고 있고, 골렘 두 마리에다 어스 클러스터까지.
일공은 계속 부드러운 웃음을 유지한 채 그것들을 천천히 눈에 담은 뒤 곽지철에게 한마디 건넸다.
"그럼 손을 쓰겠습니다."
"와라, 얼마든지."
일공이 공력을 끌어올리자 온몸이 은은한 황금빛을 머금었고, 곽지철의 어스 클러스터는 서서히 회전하는 속도를 높여 갔다.
- 파파팟!
일공이 재빠르게 황금빛 장력을 세 번 날려 보냈으나, 석벽 하나가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저절로 높이가 치솟더니 장력을 대신 맞고 박살이 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석벽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채운다.
- 두두두두!
어스 클러스터가 쏘아보내는 흙과 자갈 탄환들.
일공은 쌍장을 마주 날렸지만 흙탄환의 숫자가 더 많아, 남은 것들이 그의 몸을 약하게 두들겼다.
[곽지철 100%] vs [일공 99%]
- 부웅!
거기에 더해 골렘 두 마리가 육중한 주먹을 휘두른다.
매우 느리고 단순해서 피하기 쉽지만, 어쩌다 맞기라도 하면 골로 간다.
따라서 일공의 입장에서도 아예 무시하기는 껄끄럽다.
- 두두두두!
신경이 분산되니 더 많은 흙탄환을 몸에 허용하고, 피해가 계속해서 누적된다.
[일공 97%]
[일공 95%]
[일공 94%]
[크리스탈 41%]
안전하게 세워 둔 요새 안에서 골렘과 어스 클러스터를 활용해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지극히 곽지철다운 전투 방식이었다.
"...."
그러나 경기를 지켜보는 당규영은 물론, 송천혜와 홍연화의 안색도 썩 밝지 않았다.
"이건 안 좋네요."
"많이 어려워졌네."
분명 곽지철 쪽이 일방적인 우위를 가져가는 중이기는 했다.
다만, 일방적일 뿐 압도적이지는 않다.
마법사로서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준비를 갖추고 상대를 맞이했는데도 약간의 우위가 전부라면 기뻐할 일이 아니다.
[일공 92%]
[일공 91%]
예시로 한참이나 흙탄환들을 잔뜩 퍼부었는데도 아직 일공의 체력은 10%도 안 깎였다.
일공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금빛 기운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탓이다.
능마불영금강기(凌魔佛影金剛氣)라는, 튼튼하기로 이름 높은 호신강기다.
'허밍버드도 저거에 막혔었지.'
송천혜에게 복사했기에 위력이 E랭크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의 마비효과도 없이 완벽하게 막혔었다.
저 호신강기의 성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였다.
- 두두두두!
[일공 90%]
좀처럼 대미지가 안 들어간다는 사실을 곽지철도 인지하고 있긴 했는지 그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로서는 이렇다 할 공격수단이 남지 않은 듯했다.
기껏해야 토속성 마법 몇 개를 곁들여 견제하는 게 전부.
"...."
반면 일공은 아직까지도 평온한 신색을 유지하며, 날아오는 흙탄환을 쳐내거나 골렘들의 주먹질을 피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곧 꺼내 들 패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알맞은 것이라면,
'쟤는 그냥 박살 나는 거지.'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골렘 두 마리의 공세 사이를 누비던 일공이 돌연 몸을 홱 돌렸다.
그가 한 손을 곧게 펴서 밀듯이 앞으로 내밀자 손이 순간적으로 두세 배로 확 커진 듯한 착각이 들고,
[대수인(大手印)]
- 쾅!
골렘 한 마리의 상반신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남은 잔해가 하릴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뒤이어 일공은 민첩하게 앞으로 보법을 밟아 두 번째 골렘의 공격을 따돌린 다음, 겹겹이 서 있는 석벽에 일권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곽지철이 가소로운 웃음을 흘렸으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 퍼억!
"크억?"
곽지철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마치 누군가가 복부를 주먹으로 세게 강타하기라도 한 반응이다.
[곽지철 92%] vs [일공 89%]
- 퍼억!
"크엑."
또다시 묵직한 타격음이 울리고 곽지철이 복부를 움켜쥐었다.
[곽지철 83%] vs [일공 89%]
그의 두 눈은 고통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을 이렇게나 두껍게, 여러 겹으로 세워 놨는데, 무슨 수로 그것들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피해를 줬단 말인가?
한편 나는 전후 사정을 한눈에 파악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빡빡이가 배우기는 제대로 배워 왔네.'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
산을 때려 소를 친다는 말처럼, 바로 앞의 물체를 타격하여 멀리 떨어진 대상에게 피해를 전달하는 무공이다.
무척이나 상승의 무학인 만큼 아직 숙련도가 상당히 낮아 보이지만, 힘없는 마법사 하나 두들겨 패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벽을 겹겹이 세워 봤자 보호받지 못하니, 일공은 곽지철의 완벽한 카운터였던 것이다.
- 퍼억!
"커헉."
[곽지철 77%] vs [일공 88%]
눈에 띄게 뚝뚝 떨어져 가는 곽지철의 체력.
사실상 난타전이 된 셈인데, 그렇다면 이대로는 전혀 승산이 없다.
[크리스탈 65%]
지금 최선은 어떻게든 남은 충전도를 마저 채우는 것.
곽지철이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손을 크게 휘저었다.
석벽과 골렘, 어스 클러스터가 일제히 부서지며 해일처럼 일공에게 짓쳐 든다.
- 콰콰콰콰—!
그렇게 시간을 벌어 두고 자신은 흙 원반에 올라타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크리스탈 68%]
[크리스탈 69%]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곽지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했으나, 이내 경악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언제 따라붙었는지 바로 근처에 있는 일공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오는 기척조차 없어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심지어는 눈치를 챈 지금도 일공의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래로 시선을 내렸을 때 곽지철은 흙 접시에 올라타서 빠르게 이동하는 중인 반면, 일공은 두 다리로 곧게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즉, 일공의 발은 움직이지도 않는데 둘의 이동속도가 같다는 뜻이었다.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라는 보법의 응용이었으나, 곽지철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미치고 팔짝 뛰기 직전인 그에게 일공이 타이르듯 제안했다.
"시주, 이만 멈추시지요."
당연히 곽지철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고, 일공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흘리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퍼억!
곽지철이 흙 접시에서 나가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다가오는 일공에게 흙을 뭉쳐 만든 주먹을 휘두르지만, 이번에도 가볍게 막히고 나가떨어진다.
- 퍼억!
[곽지철 61%] vs [일공 88%]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곽지철에게 일공이 천천히 다가가며, 또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제안했다.
"크리스탈을 넘겨주시겠습니까?"
"흐, 흐흐.... 차라리...."
곽지철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스태프의 에메랄드가 강렬한 초록빛을 머금고,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 흔들렸다.
이윽고 그가 한 발을 땅에 강하게 내리찍자,
"차라리.... 기권을 하라 그래라—!"
- 콰아아아—!
대지가 뒤엎어지며 흙과 자갈, 바위의 해일이 일공에게 짓쳐 들었다.
일공은 시종일관 평온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기세를 끌어올렸다.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 온몸의 황금빛 기운이 집중되고 손이 두세 배는 크게 보였다.
[능마불영대금강수인(凌魔佛影大金剛手印)]
거대한 황금빛 장력이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 퍼어엉—!
흙의 해일이 무너져 내리며 곽지철의 신형도 뒤로 한참이나 쭉 밀려났다.
그는 분한 기색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겨우 버티고 서 있다가, 정신이 흐려져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일공이 황급히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곽지철 Lose] vs [일공 Win]
* * *
"죄송합니다."
곽지철은 정신이 들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다.
자기를 보내 달라 먼저 부탁해 놓곤 지고 돌아왔으니, 믿고 맡긴 당규영을 볼 낯이 없는 것이다.
당규영은 무덤덤한 눈으로 곽지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물음을 던졌다.
"최선을 다했지?"
"네."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써 봤고."
"네."
"또 붙어도 질 것 같아?"
"...네."
"그럼 됐다."
"...?"
곽지철이 고개를 들어 올리곤 '더 화 안 내세요?'라며 눈빛으로 묻자 당규영이 답했다.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냐. 부족한 실력은 앞으로 키우면 그만이야. 나중에 복기해보는 걸로 하고, 일단 가서 쉬어."
"...네."
곽지철이 조금 감동하여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고,
당규영이 나한테 다가와서 슬쩍 귓속말을 건넸다.
"김호야, 솔직히 말해 봐. 너 3대 0 버스 기대했지."
"아예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죠."
곽지철이 이기면 당연히 좋았겠지.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보니 일공의 실력이 이전보다 훨씬 급격히 상승한 터라, 버스 타기는 진작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결과적으로 현재 스코어는 1대 1. 남은 경기는 둘.
"어쩔 수 없이 너도 실력 발휘 좀 해야겠다."
"그래야죠. 그런데 북궁한설 말고, 마지막 하나는 아직 공개 안 됐어요?"
"글쎄, 나도 물어봐야 돼."
당규영이 메신저 화면을 비추었다.
저쪽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부득이하게 김갑두의 메신저 차단을 풀어 줘야 했다.
[당규영:야 너네 마지막 한 명 언제 와]
[김갑두:아직 않와썽 ㅠ.ㅜ 거의 다 와 간뎅....ㄱㄷㄱㄷ]
[당규영:아니 그래서 걔가 누군데]
[김갑두:비밀이양! 오면 말해 줄께!ㅎㅎ]
[김갑두:(귀여운 개구리 이모티콘)]
[김갑두:(앙증맞은 개구리 이모티콘)]
"차단 마렵네...."
당규영이 개구리를 한 대 패고 싶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혼잣말을 흘렸다.
나 역시 그 혼잣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저 선배님이 저런 캐릭터였구나.
아무튼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기에 당규영이 물었다.
"다음은 북궁한설 고정이네. 둘 중에 누가 나갈래?"
"...."
홍연화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모양새.
바로 옆에 멘토 놔두고 왜 나한테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북궁한설과 붙이는 게 나아 보이기는 했다.
네 번째 경기에서 나올 900점대와 홍연화는 상성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승낙하는 의미로 눈짓을 보내자, 홍연화도 마주 눈짓으로 답하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갈게요."
"그게 좋겠다. 핸디캡 걸어 달라 그럴까?"
900점대가 김갑두 팀에 하나 더 많으므로, 한 경기만 핸디캡을 걸기로 사전에 합의를 봤다.
그러나 홍연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그런 거 없어도."
홍연화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128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3)
[홍연화 688점 vs 북궁한설 968점]
홍연화는 스코어보드에 떠오른 이름과 점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900점.
배치 고사에서 3연승을 거둔 이들이 모이는, 실력자들만의 리그다.
한때는 900점에서 시작하지 못했다는 점이 미친 듯이 분하던 때가 있었다.
홍예화에게 듣기로는 올해 유망주급,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은 전부 900점대로 올라가 버렸다고 했으니까.
유독 자기만 뒤처진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600점대에서 대인전을 치르는 자신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이겨서 점수가 올라도 900점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게 느껴졌으며, 지기라도 하면 더한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대인전 점수는 분명 실력을 나타내는 유의미한 지표이기는 하다.
하지만 점수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실력을 전부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 살아 있는 증거가 바로 그녀의 조에 있었다.
1승 2패로 300점대에서 시작한 김호.
점수는 홍연화보다 낮았지만, 막상 붙어 보면 도저히 손도 못 쓸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 차가 느껴졌다.
또 다른 예시로, 최근 들어 600점대 상대들이 너무 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홍연화는 이번 주 들어 두 명의 무작위 상대와 크리스탈 대인전을 치렀는데, 둘 다 그녀가 제대로 마법을 연계하기도 전에 픽픽 쓰러져 버렸다.
돌이켜 보면 김호와 매칭이 잡혔을 때 뚜드려 맞은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다른 대인전에서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앞으로 학기가 이어지며 대인전을 치를수록 그녀의 점수는 올라가기만 하리라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900점에 대한 갈망은 상당히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일말의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900점대를 상대로는 얼마나 통할까?
이전에는 통했을까? 더 강해진 지금은?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볼 것이다.
[3]
[2]
[1]
[Start!]
[홍연화 100%] vs [북궁한설 100%]
[크리스탈 0%]
홍연화가 완드를 앞으로 뻗었다.
루비가 빛나며 순식간에 발밑에 커다란 파이어 필라 마법진을 그려 냈다.
안 그래도 캐스팅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빠른 그녀인데, 요즘 들어서는 시간이 더 단축된 것 같았다.
완성된 파이어 필라를 오버히트를 통해 흡수하자 홍연화의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육체 능력이 잔뜩 강화된 상태에서 땅을 몇 번 박차자, 금세 층층이 진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
맞은편 먼 곳 절벽 위에 북궁한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발 먼저 올라와서 크리스탈을 찾는 것이다.
홍연화도 빠르게 주위로 시선을 돌렸고,
'저기다.'
절벽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간이 제단을 발견했다.
슬쩍 북궁한설의 눈치를 살펴보니, 저쪽은 아직인 듯 계속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이쪽으로 눈길을 보내는데, 홍연화가 크리스탈을 먼저 찾았을 경우 곧바로 뒤따라가려는 듯했다.
'그렇다면....'
홍연화가 일부러 흠칫 놀라는 척하며 크리스탈을 찾은 티를 심하게 냈다.
그러곤 우당탕탕! 발을 구르며 절벽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 모습을 북궁한설이 놓칠 리가 없었고, 그녀 역시 홍연화가 향하는 곳으로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흥."
그러나 홍연화는 절벽 아래로 내려와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방향을 홱 꺾었다.
일부러 티 나게 행동했던 것은 페이크를 주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북궁한설을 보낸 곳은 크리스탈이 위치한 곳의 정반대 방향.
그 틈에 홍연화 본인은 유유히 간이 제단으로 이동해 크리스탈을 집고 성소로 직진했다.
"아이고, 한설아...."
경기를 지켜보던 김갑두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런 얕은 속임수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다니.
빨리 북궁한설이 그 사실을 눈치채 주길 바랐으나, 그녀는 홍연화의 의도대로 한참이나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녔다.
- 위잉—
먼 발치, 성소 쪽에서 내리쬐는 광선이 보일 때까지.
[크리스탈 1%]
"!?"
북궁한설은 이 갑작스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섰다.
언제 저기까지 갔지?
이 근처에서 나랑 크리스탈을 수색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제야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당했구나!'
어쩐지 같은 방향으로 향했음에도 홍연화를 마주치기는커녕 그림자도 안 보인다 싶더니, 페이크에 걸려 버린 것이다.
[크리스탈 4%]
한편, 홍연화는 흘끔 스코어보드에 눈길을 주면서 생각했다.
'슬슬 눈치챘겠네.'
성소와 크리스탈이 연결됐으니 전부 들통 났을 터.
지금쯤 이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벌었다.
완드에 박힌 루비에서 연신 붉은빛이 번쩍거렸다.
그럴 때마다 바닥에 자그마한 마법진이 하나씩 늘어간다.
홍연화는 파이어 마법진을 연달아 설치하며 일대를 장악해 나가는 중이었다.
[크리스탈 19%]
잠시 후, 장내에 도착한 북궁한설은 홍연화에게 달려들려다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새겨진 엄청난 숫자의 마법진들 때문에.
일대가 완전히 지뢰밭이었다.
사소한 속임수에 걸려든 것 하나로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아니, 할 수 있어.'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다.
2경기에서 곽지철도 완벽하게 요새를 구축해 놓고 일공에게 패하지 않았던가.
싸워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북궁한설이 투지를 불태우던 중,
- 화르륵,
홍연화가 인사치레라는 양, 그리 크지 않은 불덩이를 하나 내던졌다.
'이까짓 거.'
북궁한설은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불덩이를 응시하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한 손에 시릴 듯이 차가운 냉기가 모여든다.
그녀가 익힌 절기, 빙극설혼장법(氷極雪魂掌法)이 발현되는 것이다.
화염과 얼음은 서로 상충하는 관계라, 더 위력이 강한 쪽이 반대를 밀어내게 되어 있다.
손에 적당한 냉기를 주입했으니 저 정도 화염 덩어리 쳐내는 건 일도 아니리라.
북궁한설이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불덩이를 후려치는 순간,
- 화르르륵!
픽 하고 꺼졌어야 할 화염이 장력을 그대로 집어삼키면서 손에 불이 붙었다.
"어, 어? 이, 이게."
북궁한설이 다급하게 냉기를 끌어올렸으나 족족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더 급해져서 공력을 잔뜩 주입하니 그제야 서서히 밀려난다.
불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생각보다 내공 소모가 극심했다.
'이런 불꽃이라니....'
상성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한 줌밖에 안 되는 작은 불씨로 자신의 냉기를 압도하고 녹여 버렸다.
그러자 뒤늦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더 떠올렸다.
홍연화가 익혔다는, 루비 마탑의 화염술사들 사이에서도 매우 희소하게 발현된다는 강력한 특성.
'아쿠아플레임!'
이제 보니 제대로 카운터를 맞은 듯했다.
한편, 홍연화는 오만한 태도를 유지한 채 상대방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뭐야? 쟤 왜 저래? 뭐지?'
마찬가지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던진 불덩이였는데, 북궁한설이 그것을 후려치다가 손에 불이 붙더니 혼자서 마구 허둥거렸다.
결국 떨쳐 내기는 했지만, 그 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일말의 두려움이 담긴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맞다, 아쿠아플레임. C급 됐지.'
홍연화의 기억 속에 아쿠아플레임은 E랭크로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랭크가 낮아, 냉기 속성 적에게 화염 마법을 쓰더라도 적들이 어느 정도는 대응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만년한철 합금을 녹이면서 등급이 두 단계나 상승해 무려 C랭크.
현시점 1학년들의 스킬/특성 랭크 상한선은 대개 C급, 평균은 D정도다.
C랭크라면 1학년 선에서는 모든 상대에게 능히 통용되는 수준인 것이다.
여기까지 머리로 알기는 했어도, 빙속성 상대를 만날 일이 없어서 정확한 위력은 이제야 막 시험하는 참이다.
그런데 900점대가 고작 불덩이 하나 떨쳐 낸다고 저렇게 쩔쩔맬 줄이야.
아쿠아플레임은 생각보다 더 강한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자기도 모르게 카운터를 쳐 버린 홍연화였다.
북궁한설은 얼굴을 굳히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무조건 피해야 돼.'
어떤 화염 마법이든 절대로 적중당해선 안 된다.
대강 날려 보낸 불덩이에 이만큼 고생을 했다면, 제대로 시전한 화염 마법은 결코 그녀가 감당 못 할 수준일 테니까.
그렇다면 쏟아지는 마법들을 모조리 다 피하면서 홍연화에게 접근해 크리스탈을 뺏어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북궁한설이 전장을 가득 메운 마법진들을 눈에 담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것들이 마법진이 아니라 맹렬하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홍연화 100%] vs [북궁한설 94%]
[크리스탈 34%]
그러나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크리스탈 충전도는 고민하는 지금도 시시각각 늘어나는 중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차피 패배할 뿐이었다.
북궁한설이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두 손에 머금은 뒤, 장력을 쏟아 내며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 파파파팟!
홍연화는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장력들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피해야 하나?'
맞으면 좀 아플 것 같은데?
해서 옆으로 몸을 움직이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빠르게 마법을 캐스팅하고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자,
- 콰아아—
화염 방사기처럼 불줄기가 뿜어져 나가며 장력들을 집어삼켰다.
예상대로, 아쿠아플레임이 가미된 화염이라 북궁한설의 원거리 공격도 어렵지 않게 해소가 가능한 것이었다.
"...!"
자신의 공격이 이리도 쉽게 막힐 줄은 몰랐는지 북궁한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러나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공격해 오는 기세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녀가 재차 장력을 쏟아 내려는 찰나,
홍연화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북궁한설의 바로 앞에 위치한 마법진이 붉게 물들더니,
- 콰아아아—!
"!!"
선명한 불기둥이 솟구쳤다.
북궁한설은 가까스로 순발력을 발휘해 파이어 필라에 닿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적진 한복판에 깊숙이 들어온 상태.
온 사방이 마법진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하나는 바로 발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데다, 붉게 빛나기까지.
'붉게... 빛나?'
- 콰아아아—!
북궁한설은 곳곳에서 솟구치는 불기둥을 피해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진영 중심에 위치한 홍연화를 노리는 것보다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 콰아아아—!
그녀는 우왕좌왕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면서도 끝끝내 마법진들의 범위를 벗어났다.
가쁜 숨을 고르며 북궁한설이 생각했다.
'그, 그래도 이만하면 꽤 소모시켰어.'
설치한 마법진은 한 번 마법을 시전하면 사라지기 마련.
조금 전의 정신없는 달리기로 파이어 필라를 수십 개는 발동시켰으니, 비슷한 짓을 몇 번만 더 하면 홍연화에게 닿지 않을까?
그러나 곧이어 북궁한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빈 공간을 빠르게 채워 가는 새 마법진들이었다.
북궁한설은 문득 집에 가고 싶어졌다.
129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4)
전황이 갈수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북궁한설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연화 100%] vs [북궁한설 92%]
[크리스탈 51%]
크리스탈 충전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으로 짐작해 보면,
'기회는 많아야 두세 번.'
그 안에 적진 중심의 홍연화에게 도달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방금 전에는 이곳저곳에서 치솟는 불기둥들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바빴다.
그래도 조금 도망을 다니고 보니 900점대답게 나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본능적으로 감이 잡힌다.
최소한 첫 시도보다는 두 번째, 세 번째가 더 수월할 것이다.
북궁한설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다시금 마법진들이 가득한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치솟는 불기둥.
- 콰아아아—!
북궁한설은 민첩하게 보법을 밟아 불기둥을 우회하며 전진했다.
바로 앞의 마법진이 붉게 빛났지만 그것 역시 발동되기 전에 빠르게 지나쳐 버렸다.
다음으로 전방의 마법진 세 개가 동시에 빛나고,
- 콰아아아—!
불기둥 셋이 솟구쳤다.
북궁한설이 그 사이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으나, 이미 예측했는지 틈새로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 화르륵,
"!!"
북궁한설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 옆으로 보법을 밟았다.
추격하듯 불화살들이 연달아 날아오고, 그녀는 그것들을 피해 더욱 옆으로 이동했다.
반항하듯 장력을 몇 번 날려 보았으나 불화살 하나조차 떨어뜨리지 못했기에, 일단 최대한 피하면서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 콰아아아—!
막 발을 디디려는 곳에서 솟구치는 파이어 필라.
북궁한설은 또 멈칫해서 방향을 틀었고, 뒤이어 연사되는 불화살들이 그녀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다.
- 화르륵,
불화살과 불기둥 사이사이로 보법을 밟으며 북궁한설이 생각했다.
'조금만 더!'
홍연화의 전법은 플레임 애로우와 파이어 필라를 절묘하게 연계해, 자신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 의도대로 북궁한설은 계속해서 비슷한 곳만을 맴돌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 보면 결국에는 크리스탈 충전이 다 끝나 버릴 거다.
그러나 북궁한설의 눈에는 보였다.
홍연화가 계속 파이어 필라를 발동시킬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빈틈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은 마법을 사용하면 사라지고, 술자가 새것을 새기기 전까지는 빈 공간으로 남는다.
홍연화의 캐스팅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 빈 공간이 금방금방 채워지지만, 북궁한설이 영역 내를 바쁘게 헤집고 다니는 탓에 소진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빈 공간이 점점 더 늘어난다는 말이다.
'얼마 안 남았어.'
그녀는 계속 상대방의 의도에 놀아나는 척하면서 그 빈틈을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 콰아아아....
홍연화가 시전한 파이어 필라가 막 사그라드는 순간, 북궁한설은 강하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마법진이 소진되어 비어 있는 공간들만 골라서 밟으며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간다.
동시에 미리 조금씩 끌어 올려 두었던 내공을 일거에 소모하며, 가진바 가장 강력한 초식을 펼친다.
그녀의 온몸이 시릴 듯한 냉기로 뒤덮이고, 그 냉기가 두 손바닥에 집중되며 전방으로 발출되었다.
[빙극설혼장(氷極雪魂掌)]
- 콰콰콰콰콰—!
북궁한설은 이 회심의 한 수만큼은 반드시 먹혀들리라 확신했다.
아쿠아플레임으로 인한 상성 관계는 존재하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초식이라면 잠시나마 홍연화를 무력화할 수 있을 터.
상대가 마법진들을 운영하지 못한다면 이후 제압하기는 더욱 수월해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북궁한설이 본 것은, 가소롭다는 듯 말려 올라가는 홍연화의 입꼬리였다.
홍연화가 완드를 바닥에 늘어뜨리더니 근처의 마법진 하나를 척 가리켰다.
그 상태에서 선을 그리듯 일자로 완드를 길게 긋자, 마법진 여러 개가 하나로 연결되며 동시에 빛났다.
피어오르는 불기둥들이 합쳐져 거대한 화염의 벽을 형성했다.
[파이어 월]
- 콰아아아아—!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의 벽에 닿자, 빙극설혼장은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수증기로 화했다.
거기에 화염의 벽이 해일처럼 자신을 향해 덮쳐 왔기에, 북궁한설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
"...!"
그렇게 물러난 북궁한설은 전투 중이라는 사실도 있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입은 충격받은 심리를 대변하듯 조금 벌어진 채였다.
이것도 함정이었구나.
'이런 간단한 함정에 당해 주다니....'
한편 홍연화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간단한 함정에 당해 주다니....'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북궁한설의 모습에 순간 자신의 며칠 전 모습이 겹쳐 보였다.
김호와 대련할 때, 마음이 급해서 사소한 함정에 그대로 걸려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그 대가는 나무에 머리를 콩 박고 큼지막한 혹이 생기는 걸로 치렀었지.
북궁한설의 심리 상태가 그 때의 자신과 같다면 걸려들 가능성이 꽤 높겠다 싶어서 함정을 파 본 건데, 정말 그대로 걸려들 줄은 몰랐다.
덕분에 한참 시간을 끌었고,
'크리스탈 충전도 거의 끝나 가네.'
[크리스탈 84%]
홍연화가 자기를 마주 보다 말고 스코어보드를 확인하자, 북궁한설도 멍해졌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곧바로 전투가 재개되었다.
북궁한설은 해 오던 대로 보법을 밟아 가며, 파이어 필라 및 파이어 애로우를 피해 홍연화에게 접근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에는 이전과 다르게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일정 거리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유령이 춤추듯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게 고작이었다.
빈틈으로 보였던 것이 빈틈이 아니라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파고들 엄두가 안 난다.
북궁한설은 홍연화에게서 거대한 벽을 느꼈다.
'쟤도 유망주가 맞기는 맞구나....'
그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숱하게 들으면서 자라 왔고, 그런 천재들이 모인다는 용살학원에 입학해서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망주'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대단한가 실감이 되지 않았다.
자신과 별반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그 몇 명한테만 유망주, 유망주 거리고 특별 취급을 해 주니.
또 홍연화가 배치 고사에서 1패를 했다는 소문, 그리고 600점대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비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 600점? 유망주 맞아?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홍연화가 유망주 타이틀을 받은 데에는, 그리고 600점대에 머무르면서도 그 이름값이 유지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당히 지쳐 가는 자신과는 달리, 홍연화는 여전히 처음의 여유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만한 눈빛이 고작 이게 다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홍연화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다.
다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조금 더 당황스러운 쪽에 가까웠다.
'...뭐지? 이게 끝이야? 진짜? 더 없어?'
아무래도 900점대인 만큼 상당히 고전하리라 예상했는데, 경기 내내 긴장되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북궁한설의 보법 자체는 나름 세련되었지만, 의도가 뻔해서 다음 수가 훤히 읽혔다.
거기에 자신이 화염 마법으로 제어할 때마다 가라는 대로 순순히 움직여 주었다.
불화살을 쏴서 왼쪽으로 보내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보내면 오른쪽으로 가고, 불기둥을 피워 물러나게 하면 물러났다.
반면 김호와의 대련은 어땠는가.
화염 마법으로 제어하는 건 턱도 없고, 어디로 움직일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퍼붓는 화염 마법들을 다 피하면서 다가와 머리를 콩 때리고,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해 두었는데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와서 머리를 콩 때리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절대 못 뚫고 들어오겠지 했는데 들어와서 콩 때린다.
"...."
떠올리고 있으니 김호가 콩콩 때려 댄 곳이 괜히 얼얼하게 느껴져서, 홍연화는 가만히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그런데 나 실력이 늘긴 늘었구나.'
고인물에게 매일같이 시달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력이 쑥쑥 증가한 홍연화였다.
[크리스탈 96%]
충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하릴없이 좌우 무빙만 해 대던 북궁한설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결국 제자리에 정지했다.
그리고 축 처진 어조로 기권을 선언했다.
"졌습니다...."
[홍연화 Win] vs [북궁한설 Lose]
* * *
"죄송합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과 달리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북궁한설.
그러나 김갑두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다, 한설아. 고생 많았다."
북궁한설이 지극히 불리한 경기임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전혀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또한 홍연화를 상대로 붙인 것은 멘토인 김갑두의 판단 미스이기도 했다.
그가 알기로 홍연화의 아쿠아플레임은 E랭크에서 진전이 없었고, 그 정도는 북궁한설이 내공으로 충분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예측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아쿠아플레임은 C로 껑충 뛴 상태라, 완벽한 카운터매칭이 돼 버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곽지철과 북궁한설을 붙여 손쉽게 1승을 가져가고, 홍연화는 일공이 상대하게 하는 편이 더 승산이 높았을지도 모른다.
'후.... 다 지난 일이다.'
김갑두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어 일말의 후회를 떨쳐 냈다.
이제는 다음 일을 생각할 때다.
상대와의 스코어는 1 대 2.
한 경기를 더 내준다면 김갑두 팀의 패배다.
그럼에도 김갑두의 얼굴은 절망적으로 어둡지는 않았다.
그가 무리한 조건을 내걸면서까지 4인 대인전을 신청한 것은 단순히 홧김에 그런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승리를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필승 카드라고 해도 무방할, 강력한 패를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저가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 조금 어두워지려던 김갑두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왔구나."
그가 등을 돌리자 그곳에는 곰 같은 덩치에 온몸이 근육질인, 도저히 1학년으로 보이지 않는 남학생이 서 있었다.
평소에는 선도부 완장을 달고 다니지만, 지금은 멘토링을 받으러 왔기에 집어넣은 상태.
1학년 선도부의 일인이자, 유망주급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자.
권왕의 후인, 조벽.
그가 바로 김갑두가 이끄는 무투가 조의 마지막 멤버였다.
130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5)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홍연화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귀환했다.
900점대인 북궁한설을 경기 내내 압도하며 실력을 증명했기에,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
삽시간에 겸손함을 되찾고 눈치를 살핀다.
자신은 900점대를 압도했지만, 바로 앞에 그런 자신이 손도 못 쓰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게 눈알을 살살 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한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있어 보이는데, 아마 이번 경기에 대한 피드백이 듣고 싶은 거겠지.
만약 홍연화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약하게 살랑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칭찬할 점은 칭찬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수고했어. 같이 연습한 대로 잘 운영했네."
"...!"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쁜지 홍연화의 안색이 한층 더 밝아졌다.
꼬리가 있었다면 맹렬한 꼬리 프로펠러가 돌아갔을 것 같았다.
홍연화는 일단 여기까지 하고, 나는 당규영에게 물었다.
"이제 저만 남았네요. 저쪽에는 누가 나온답니까?"
"다시 물어봐야지."
김갑두 팀의 마지막 멤버는 무슨 일을 처리하고 오는지 한참 늦어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늦더라도 지금쯤은 도착했어야 한다.
과연 당규영이 메시지를 보내자 금세 답장이 돌아왔다.
[당규영:왔음?]
[김갑두:웅 왔엉! >.<]
[당규영:누군데]
[김갑두:그럼 공개합니당! 대망의 마지막 멤버는 바로...!]
[김갑두:두구두구두구...!]
[김갑두:(드럼 치는 개구리 이모티콘)]
[김갑두:조벽!입니당!]
"뭐? 조벽?"
당규영이 눈썹을 찡그렸다.
김갑두가 저렇게 마지막까지 꽁꽁 숨길 정도라면 900점대 중에서도 꽤 실력 있는 멤버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하니 선도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규영:아니 지금 장난해?]
[당규영:이럴 거면 처음부터 얘기를 했어야지]
[당규영:(방망이 든 여우 이모티콘)]
[김갑두:서프라이즈양!]
[김갑두:(깜짝 개구리 이모티콘)]
[김갑두:(윙크하는 개구리 이모티콘)]
[당규영:(정색하는 여우 이모티콘)]
[당규영:(방망이 든 여우 이모티콘)]
[김갑두:....]
[김갑두:핸디캡 뭐 걸어 줄까]
'조벽'이라는 두 글자가 나온 순간부터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당규영은 갑자기 선도부가 튀어나와서 허를 찔리기는 했어도, 나라면 어련히 잘하겠다 싶은지 크게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홍연화 역시 내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고.
반면 송천혜의 표정은 급격히 심각해졌다.
같은 선도부원으로서 조벽이 강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반면, 내 실력은 아직 확실히 가늠이 안 되니 조벽이 이기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곽지철은 조벽 쪽에 거는 걸로도 모자라 은근히 내가 졌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자기만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조벽한테 두들겨 맞는 게 기대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들어서 조금만 갈구기로 했다.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내 눈이 어때서 말이냐."
"상당히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는데."
"...잘못 본 거다."
잘못 봤다면서 슬며시 시선을 돌리는 곽지철.
찔리기는 찔리나 보다.
나는 조금 더 눈빛으로 갈구다가, 고개를 돌려 당규영에게 물었다.
"이거, 제가 지면 어떻게 돼요?"
"2대 2니까 매치 포인트 한 경기 더 하겠지."
그리고 그 마지막 경기에는 각 팀에서 가장 강한 카드, 송천혜와 조벽이 출전해서 승부를 겨루게 될 것이다.
당규영이 송천혜에게 물었다.
"조벽 상대로 승률은 어때?"
"누가 우위라 보기 어렵습니다."
송천혜와 조벽은 대인전 매칭 또는 선도부 간의 대련으로 여러 번 맞붙어 보았는데,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편이란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고.
굳이 따져야만 한다면 4.8대 5.2 정도로 조벽이 아주 미세하게 높다.
즉, 경기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송천혜가 나한테 물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르지, 핸디캡 잘 걸면."
"뭘로 거실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규영 역시 기다리던 중이었기에, 나는 당규영에게 답했다.
"크리스탈 충전 속도 가속으로 할게요."
"충전 속도 가속, 나쁘지 않네. 배율은?"
"3배로요."
충전 속도가 3배라면 1%씩 충전되던 크리스탈이 3%씩 충전된다는 뜻.
충전이 훨씬 빨리 끝나는 만큼 경기 시간도 대폭 단축된다.
당규영이 다시 김갑두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메시지 창을 슬쩍 보니 귀여운 개구리 이모티콘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당규영의 무표정에 아주 미세한 변화조차 없는 걸로 보아, 저 두꺼비 선배님은 이번 경기 끝나면 바로 다시 차단 아닐까 싶다.
어쨌든 두 사람은 잠시간의 협상 끝에 나름의 합의점에 도달한 듯했다.
"3배는 안 되겠고, 2.5배로 하잔다."
"일부러 높게 부른 건데 어떻게 2.5배가 됐네요."
"이건 우리 쪽에 맞춰야지. 저렇게 조벽으로 뒤통수를 쳤는데."
원래는 2배 정도가 목표였지만, 당규영은 조금 더 유리한 조건을 받아 왔다.
협상을 잘한 것도 있고, 김갑두 역시 조벽에 대해 마지막까지 숨겼다는 점이 찔려서 반걸음 양보한 것 같다.
따라서 크리스탈 충전 속도는 2.5배가 되었다.
'이걸 곽지철한테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600점대끼리의 대결에 김갑두가 핸디캡을 걸게 해 줬을 리가 만무한데다, 해 줬더라도 곽지철이 자존심을 세우면서 거절했을 거다.
저놈은 이래저래 일공한테 뚜드려 맞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순간이동 마법진에 오르는데, 송천혜가 나에게 당부했다.
"안 되겠다 싶으면 어떻게든 소모전으로 끌고 가세요. 그럼 마지막은 제가 해 볼게요."
"아니, 이건 그냥 이길란다."
"...자신 있으신가요?"
"당연하지, 작전도 미리 다 짜 놨어."
이름하여 손형택 작전.
나는 크리스탈을 들고 열심히 도망 다닐 셈이었다.
"크리스탈 충전 속도 2.5배다."
김갑두가 조벽을 앞에 두고 핸디캡을 설명했다.
"여러모로 시간이 촉박할 거다. 그래 봤자 상대는 600점도 안 되니 이기는 건 어렵지 않겠지. 정말 중요한 건 다음이다."
핸디캡이 어떻든 김호를 쓰러뜨리고 동점을 만드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어질 송천혜와의 매치포인트가 본 경기라 봐도 무방하다.
같은 선도부원으로, 조벽의 입장에서도 결코 녹록하지 않은 상대.
"그러니 첫 경기에서는 가능한 힘을 비축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미안하다, 내 욕심 때문에 두 경기나 수고를 시키는구나."
김갑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당규영 팀이 자리하고 있을, 맞은편 먼 곳의 절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내기하는 거, 궁상맞고 구차하다는 거 나도 안다. 이겨 봤자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지. 데이트 한 번에 극적인 변화가 있으랴? 하지만...."
"...."
"1학년부터 해 온 짝사랑이다. 이대로 포기하기보다 아주 작은 기회라도 바랄 뿐이야."
조벽은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전혀 없었기에 김갑두의 심경이 어떨지 공감하지 못 했다.
그래도 그가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고, 다 제쳐 두더라도 이건 대인전이었다.
해서 그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한다."
조벽이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아래로 이동하자, 스코어보드에 양측의 이름이 떠올랐다.
[조 벽 993점 vs 김 호 569점]
'김호.'
조벽이 김호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오며 가며 소문 몇 개를 주워들은 게 전부.
본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그 온갖 소문 중에 단 하나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고현우의 친우라고 했다.'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고현우와 조벽의 승부는 철검이 파괴되며 어중간하게 끝났었고, 조벽은 언젠가 제대로 겨룰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그의 이름을 뇌리에 새겨 두었다.
이후 고현우의 소문은 김호와는 달리 상당히 자주, 그리고 대개 긍정적인 쪽으로 들려왔는데, 공략전 배치 고사 1위를 달성한 뛰어난 검술 실력에 준수한 외모, 그리고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쉽게 다른 학생들의 호감을 샀던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셀 수도 없었으나, 고현우가 계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탓에 아무도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김호에 대해 넌지시 물었을 때, 고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했단다.
- 김 형은 본인이 인정한 친우요. 본인에게는 과분한 인연이지.
이것이 조벽에게는 아주 강한 의미를 가졌다.
그 고고한 학 같은 고현우가 인정한 사내라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할 터.
그렇다면 김호의 500점대라는 점수, 또는 세간의 '겁쟁이'라는 평가 등에 미혹되어 그를 경시했다간 자칫 허를 찔릴지도 모른다.
김갑두는 송천혜와의 경기에 대비해 힘을 비축하라 당부했지만,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전력을 다해 임한다.'
조벽의 각오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3]
[2]
[1]
[Start!]
고지대에서 주변 환경을 살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특히 이번 주 대인전에서는 크리스탈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기에 최우선 순위다.
조벽은 절벽을 빠르게 올랐다.
곰 같은 거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순식간에 꼭대기에 다다라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반대편의 김호와 금세 마주칠 줄 알았는데,
'없군.'
절벽 위는 아무도 없이 그저 휑했다.
김호가 조금 늦게 올라오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일단은 크리스탈에 집중한다.'
조벽이 시선을 내려 절벽 아래 일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런데 찬찬히 시선을 옆으로 옮기던 도중, 시야 한 켠에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걸렸다.
'저건....'
그 무언가는 바로 절벽 위쪽에는 그림자조차 안 비추었던 김호였다.
그는 무작정 한 방향을 잡고 달리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간이 제단과 크리스탈이 있었다.
마치 크리스탈의 위치를 미리 파악해 둔 듯한 움직임.
김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늦었군.'
선수를 빼앗겼다는 것.
허나 조벽은 김호를 따라 간이 제단 쪽으로 달리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다.'
크리스탈을 충전해야 하니 반드시 성소 쪽으로 이동할 터.
따라서 그는 먼 곳에 등대처럼 우뚝 솟은 암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성소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
- 위잉-
성소가 자신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빛기둥을 내려보냈다.
빛기둥이 가리키는 곳은 크리스탈이 있는 곳이자 김호가 있는 곳.
일찌감치 성소로 직행했기에 그와의 격차를 상당히 좁힐 수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탈 2%]
[크리스탈 5%]
2.5배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크리스탈 충전도가 무서운 기세로 차오르고 있었다.
김갑두의 말마따나 이번 대인전은 시간이 촉박하다.
- 탓!
조벽이 더욱 강한 기세로 땅을 걷어차며 내달렸다.
동산처럼 불룩불룩 솟은 절벽을 오르내리고 기암괴석들을 지나쳐, 마침내 김호가 시야에 들어올 정도까지 따라잡았다.
"...."
계속 등을 보이며 달리다가, 슬쩍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김호.
그 눈빛에 다급한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고 나서 너한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달려 나간다.
"놓치지 않겠다."
조벽이 공력을 두 다리에 집중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김호가 도망치는 속도도 빨랐으나, 조금씩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거의 김호의 등 뒤까지 따라잡은 조벽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일권을 막 앞으로 뻗어 내는데, 돌연 김호가 등을 홱 돌리며 한 손을 마주 앞으로 뻗었다.
- 펑—!
손과 주먹이 충돌하고 조벽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131화 7주 차 멘토링, 대인전 (16)
"...."
격돌 후, 김호는 관심이 떨어졌다는 양 이쪽을 흘긋 일별하더니 다시 등을 돌려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조벽은 곧바로 추격을 재개하며 생각했다.
'뭐였지, 방금 그건.'
여태까지 셀 수도 없는 고수들과 붙어 보았지만, 이렇게 뒤로 쭉 밀려난 적은 매우 드물었다.
대개 상대와의 내력 싸움에서 압도당했을 때 이런 결과가 나오곤 했는데, 이건 그 경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 벽 100% vs 김 호 100%]
[크리스탈 24%]
내력 격차가 있었다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었어야 한다.
그러나 양측의 체력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여러모로 생소한 경험이지만,
'다시 확인해 보면 될 일.'
조벽이 속도를 높여 빠르게 김호의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그리고 일권을 내지르는 순간, 틈틈이 어깨 너머를 확인하던 김호가 등을 돌리고 마주 손을 뻗었다.
- 펑—!
다시 주르륵 밀려나는 조벽의 신형.
그러나 이번에는 시야를 더 넓게 갖고 주의 깊게 관찰했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바람.'
김호의 손에 모여들고 압축되는 바람.
그것이 소용돌이의 형태로 폭발하며, 마치 용수철처럼 그를 밀쳐 낸 것이다.
김호가 캐스터 계열 클래스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저건 십중팔구 바람 마법일 테지만, 자신을 멀찍이 밀쳐 낼 정도라면 물리력도 어느 정도 가미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조벽은 세 번째로 김호에게 따라붙는 것과 동시에, 내력을 끌어올려 갑옷처럼 몸에 둘렀다.
고현우와의 대결에서, 그가 시전하는 [청류(淸流)]에 비슷하게 대응했었다.
이윽고 조벽의 주먹질에 김호가 마주 바람 마법을 해방시켰다.
- 퍼엉—!
조벽은 또 주르륵 밀려나기는 했으나, 그 거리는 이전의 절반도 안 되었다.
고작 한 번 막은 것치고는 내력 소모가 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정답이었던 것이다.
김호 역시 두 눈에 이채를 머금었다.
"빨리 맞췄네."
자신의 수법이 간파당했음에도 그의 표정에서는 한 점의 위기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조벽의 뛰어난 눈썰미를 기꺼워하는 기색에 더 가까웠다.
여전히 남은 패가 많지 않고서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않고서야 보일 수 없는 여유.
이런 자가 겁쟁이라니,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된다.
조벽은 더욱 긴장하면서도, 정답을 맞히며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밀려난 거리가 얼마 안 되었기에 공격을 이어 가기에는 충분했다.
앞으로 성큼 내디디며 번개처럼 연속으로 주먹을 내지른다.
- 파파파팟!
김호는 좌우로 몸을 기울이고 틀며 짓쳐 오는 주먹들을 피하고, 두어 개는 묵빛 단창을 갖다 대 슬쩍 옆으로 빗겨 냈다.
동시에 빈손에 빠르게 모여들고 압축되는 바람.
조벽이 즉시 내력을 둘러 대응하자,
- 펑—!
자신은 가만히 있는 반면, 마법을 시전한 김호가 되려 포물선을 그리며 훨훨 날아갔다.
그리고 층층이 진 절벽 위에 사뿐 내려앉더니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조벽은 쉽사리 당황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그 광경을 보고서는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응용도 가능하군.'
상대가 잘 안 밀리니 역으로 자기 자신을 날려 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닭 쫓던 개마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즉시 땅을 박차 추격을 이어 갔다.
스코어보드를 확인해 보면,
[조 벽 100% vs 김 호 100%]
[크리스탈 48%]
겨우 세 합 교환했는데 벌써 크리스탈 충전도가 절반.
2.5배 조건이 걸린 탓에 차오르는 속도가 엄청나다.
조벽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시간을 절반이나 소모했음에도 아직까지 크리스탈을 빼앗거나 적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폭발하는 바람 마법에 밀려나거나, 김호가 자기 자신을 날려 버린다.
따라서 조벽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 쪽으로 전법을 바꾸어 보았다.
꽉 움켜쥔 주먹이 앞으로 뻗어지며 권풍을 쏘아 낸다.
- 파파파팟!
김호는 등 뒤를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달렸다.
그러면서 보법을 밟아 요리조리 미끄러지듯 움직이는데, 그럴 때마다 권풍들이 절묘하게 그를 스쳐 지나가곤 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조벽이 계속 권풍을 날리며 말을 걸었다.
"끝까지 도망만 다닐 건가."
"안 싸워도 되면 굳이 힘 뺄 건 뭐야. 참고로 이거 다 형택이한테 배운 거다."
늦게 도착한 탓에 직접 관전은 못 했지만, 손형택이 송천혜를 상대로 이 전법을 구사했다고 한다.
차이점이라면 손형택은 끝내 붙잡혀 버렸고, 김호는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벽이 재차 물었다.
"싸울 생각이 전혀 없나?"
"어, 미안하지만 없다. 최소한 이 경기에서는."
내기에 꽤 많은 것이 걸려 있어서, 실력을 겨루는 것보다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하겠다는 의미였다.
조벽이 침음하며 생각했다.
'외통수군.'
이동속도 자체는 그가 내력을 극도로 끌어올리면 김호보다 조금 더 빠른 편이다.
그러나 접근했다 싶으면 저 정체불명의 바람 마법으로 도로 거리를 벌려 버리니 큰 의미는 없다.
원거리에서 권풍을 날려 보내는 것도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서 전혀 안 통하고.
'내 능력 부족이다.'
조벽이 빠르게 인정했다.
이 구도를 뒤집을 뾰족한 방법이 없다.
여태껏 대부분의 적들과 정면승부만을 해 왔기에, 저렇게 작정하고 도망만 다니는 상대에 대한 대처법은 전혀 준비해 두지 못한 그였다.
크리스탈 대인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점 역시 실책이었다.
경기를 이어 가 봐야 시간 낭비일 뿐.
그러나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크리스탈 67%]
아직 한두 초식쯤 펼칠 시간은 된다.
조벽의 기세가 급격히 치솟았다.
"받아 봐라. 버티면 내가 진 걸로 치겠다."
"뭐, 그럽시다."
김호는 그냥 무시하고 계속 달리려다가,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맞춰 주자 싶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조벽을 마주했다.
조벽의 기세가 계속해서 팽창하며 일대에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이내 그의 곰 같은 거체가 날렵하게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한순간 손이 여러 개인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뒤이어 내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손바닥과 주먹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 콰콰콰콰—!
"...."
김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한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뿅 하고 자그마한 먹구름이 나타났고, 그것을 단창에 휘감자 길쭉한 먹구름 막대기가 되었다.
그 상태로 김호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미끄러지는 듯 유려한 발걸음으로 쏟아지는 권력(拳力)과 장력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며, 먹구름 막대기를 이곳저곳에 휘휘 젓는다.
그 모습은 일견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듯 무의미해 보였으나, 신기하게도 막대기에 닿는 권력과 장력이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와해되고 있었다.
- 콰콰콰콰—!
조벽의 절초에 크고 작은 절벽들과 기암괴석들이 모조리 파괴되며 무너져 내렸다.
일대가 단숨에 쑥대밭이 되며 자욱한 흙먼지로 뒤덮였다.
김호의 모습은 그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조 벽 100% vs 김 호 100%]
[크리스탈 88%]
스코어보드를 보면 그가 아무 대미지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벽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훌륭하군.'
상대가 경기 내내 도망만 다닌 것은 크리스탈 대인전이라서 졌느니, 핸디캡 때문에 졌느니 변명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 쏟아부은 절초까지 완벽하게 해소한 지금은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조벽이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겠다. 언젠가 제대로 겨루어 보고 싶군."
"나중에, 기회 되면."
그리고 김호는 심드렁한 태도로 답했다.
조벽의 머릿속 강자 리스트에 김호의 이름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조 벽 Lose vs 김 호 Win]
* * *
송천혜는 보면서도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기셨네요."
"다 작전을 짜 놨다니까."
손형택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예상대로 조벽은 본 실력에 비해 추격전에는 많이 취약했던 것이다.
'그래도 난 놈이긴 했지.'
단 두 합 만에 윈드포스와 트위스터의 연계를 파악하는 관찰력.
곰 같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눈치가 상당히 빠르다.
이후의 대처 역시 훌륭해서, '손형택 작전'과 더불어 준비했던 '무한 조벽 밀치기 작전'은 금방 폐기해야 했다.
물론 나 자신을 날려 보내는 응용법에는 손쓸 방도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또한 마지막 초식은 응하든 응하지 않든 내 머리 위에 떨어질 터라 그냥 정면에서 받았는데, 먹구름을 통한 충격 흡수가 조금이라도 엇나갔으면 [왜곡]이 발동될 뻔했다.
그만큼 위력적인 절초였다는 뜻이다.
"수고했어."
당규영도 다가오며 공치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 묻는다.
"...근데 너 이거 괜찮냐? 조벽 상대로 퍼펙트 게임인데."
선도부 급 강자를 상대로 모든 공격을 피하면서 승리를 거뒀으니, 자연히 리플레이를 확인한 이들의 관심을 끌 거다.
하물며 그것이 비슷한 점수대도 아닌 500점대라 더욱.
그건 가급적이면 몸을 낮추고자 하는 내 의도와 정반대 아니냐는 물음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생각처럼 크게 부각은 안 될 겁니다."
크리스탈 대인전이기도 했고, 충전속도 2.5배라는 핸디캡까지 붙었다.
거기에 내내 등 돌리고 도망만 다녔으니, 다 회피를 했더라도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지지는 않을 거다.
바뀔 평가를 예측해 보자면 '겁쟁이인데 잘 피함' 정도가 아닐까.
"다 숨길 수도 없고요."
조벽 같은 강자를 상대로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고 이기는 것도 욕심이다.
그렇다면 공간계열 특성 [왜곡]을 공개하는 것보다는, 잘 도망 다니고 잘 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훨씬 낫다.
당규영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지 수긍했다.
"그래, 너만 괜찮으면."
"이제 정산하러 가시죠."
"흐흥, 그래. 가자 얘들아."
다음은 두꺼비 선배님한테서 영약을 한 움큼 뜯어낼 차례다.
우리는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기장을 나섰다.
132화 뜨거운 심장의 두꺼비
김갑두는 내기를 걸 때는 구차하기 짝이 없었으나, 결과에는 군말 없이 깔끔하게 승복했다.
"우리가 졌다."
이윽고 그가 인벤토리를 열어 영약들을 잔뜩 꺼냈다.
3학년에 멘토를 맡을 정도의 실력자인데다, 무투가 동아리쯤 되는 중견급 동아리의 부장이다 보니 밑천이 어마어마하다.
그래도 하나하나가 귀한 것들이라 내놓기 아까울 법도 한데, 약속은 약속이다 싶었는지 미련없이 그것들을 분배했다.
[태청단(B)]
[삼백년 산삼(B-)]
'당분간은 마나연공실에서 등교하겠군.'
태청단은 환단 계열에서 한 손에 꼽히는 명성도를 지녔고, 삼백 년 산삼도 오랜 세월 기운이 쌓인 만큼 제법 급이 높다.
그 막대한 기운을 다 녹여 내서 [코어]의 양분으로 삼으려면, 얼마간은 매일 마나연공실에 들락거리며 밤을 새워야 할 거다.
나 혼자 받은 것만 이렇고, 우리 조원은 네 명이었다.
이만큼이나 영약을 잔뜩 풀었으면 출혈이 상당할 텐데, 김갑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 멘티들에게도 영약을 나누어 주었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그러고도 아직 인벤토리가 바닥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투가 동아리 부장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이어서 김갑두가 당규영에게 말했다.
"약속한 이권들 역시 바로 양도하도록 하지."
"아니, 서두를 거 없어."
그러나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당규영.
어차피 이쪽으로 넘어올 이권이라면 한 번에 모조리 가져올 필요는 없다.
지금 다 받으면 당장은 풍족하겠지만 무투가 동아리에서 김갑두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테고, 2학기에는 동아리장이 교체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체된 동아리장이 당규영 및 도둑 동아리에 우호적이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었다.
반면 천천히 하나씩 넘겨받으면 김갑두가 동아리 내의 여론을 제어하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할 테니, 졸업할 때까지는 자리가 보전될 거다.
동아리 하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쪽이 훨씬 이득이다.
'나도 급하지는 않고.'
내가 실력의 일부를 보이는 대가로 약속된 지분은 2학기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와 제작 VIP 티켓.
이제 겨우 1학기 중반부인 지금부터 2학기 시즌 패스를 받아 봤자 쓸데도 없고, 제작 VIP 티켓은 재료부터 다 모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김갑두 역시 위와 같은 의도들을 이해했는지 감사를 표했다.
"고맙군. 덕분에 목은 붙어 있겠어."
그러더니 잠시 입을 다물고 당규영을 응시하다가, 쓸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나로는 안 되는 것이냐."
"응, 짱싫음."
당규영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두꺼비의 가슴에 대못을 푹 박았다.
김갑두의 얼굴이 급격히 처량해지며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갔으나, 겨우겨우 눌러 참은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규영이 한층 진지해진 태도로 다시 답했다.
"미안하다. 마음이 안 생겨."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다. 백년해로해라 당규영."
"백년—"
오해 사기 딱 좋은 단어를 던져 놓고, 김갑두가 푹 한숨을 내쉬더니 이번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호라고 했나?"
"예, 선배님."
"잠깐 얘기 좀 했으면 좋겠군.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김갑두를 따라 아레나 한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도중, 등 뒤로 당규영이 열심히 해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다. 그런 사이 비슷한 것도 아니야. 오해하지 마."
"...."
곽지철과 송천혜 등의 눈초리가 묘한 것으로 보아 그 해명이 통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뒷일은 당규영이 어련히 잘 처리하겠지 싶어서 맡겨 두고, 나는 김갑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걷다가, 근처에 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김갑두가 말문을 열었다.
"보통 실력이 아니더군. 조벽의 절초를 그리도 쉽게 해소할 줄은 몰랐다."
"얕은 잔재주입니다. 안 맞으려고 열심히 도망 다니는 게 고작이죠."
"그게 바로 실력이다. 얼마나 더 감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보인 것만으로도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김갑두는 3학년 부장급답게 전투의 전말을 전부 꿰뚫어 본 듯했다.
해서 나는 그만 겸손을 떨기로 하고 담담히 칭찬을 받았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실력이라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지. 허나 앞일은 예측할 수 없는 법. 언제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회복 포션은 구비해 두었나?"
"부끄럽습니다만 구비하지 않았습니다."
맞고 회복하기보다 애초에 안 맞으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고인물다운 마인드.
또 회복 포션은 생각보다 가치가 높은 아이템이라, 그걸 얻는데 들어갈 자원을 스펙업에 투자하는 게 낫다.
그러나 김갑두는 내 마음가짐을 이해하기에는 덜 고인물이었기에 미간이 좁아졌다.
"이런 면에서는 아직 안일하구나. 받아라."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받고 나서 확인해 보니 그것은 농축된 액체가 담긴 자그마한 유리병 세 개였다.
[보급형 엘릭서(B)]*3
엘릭서는 여벌의 목숨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회복력을 가진 포션.
물론 이건 보급형이라 진품에 비해서는 효능이 상당히 떨어지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상처는 단숨에 치료가 가능하다.
신병철이 흑사방에서 고현우의 내상을 치료하는데 썼던 하이포션보다도 윗급이다.
그것이 무려 세 개.
"이런 귀한 물건을 주시는 저의를 모르겠군요."
"네가 예뻐서 주는 게 아니야. 괜히 다쳐서 걱정 끼치지 말고, 항상 곁에 있다가 혹시 당규영이 위험에 빠지면 쓰라고 주는 거다."
그러니 잠시 맡아 두었다 생각하고 허투루 낭비하지 말라며 툴툴거리는 두꺼비 선배였다.
나는 김갑두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상향 조정했다.
나와 당규영의 사이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짝사랑을 홀랑 채간 상대까지 걱정하여 귀한 아이템을 내놓을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특히 엘릭서 같은 강력한 포션은 직접 쓰기에도 부족한데, 선뜻 내놓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규영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하더라도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김갑두는 매우 뜨거운 심장을 가진 두꺼비였던 것이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규영한테는 비밀로 해라. 이만 가겠다."
김갑두는 내 감사 인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등을 돌려 빠르게 멀어져 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언젠가 좋은 인연이 함께하기를.'
* * *
멘토링 시간대가 지나기도 했고, 김갑두 팀과의 4대 4 대인전으로 피로가 꽤 쌓이기도 했기에 다들 휴식을 취하러 뿔뿔이 흩어졌다.
당규영과 나만 남아 아레나 관중석에 나란히 앉았다.
"김갑두가 뭐래?"
"별 건 없었고, 대인전 얘기 잠깐 했습니다."
"뭐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하디?"
"그냥 좋은 말 많이 해 주셨어요."
좋은 엘릭서도 세 개나 주셨고.
다만 이건 김갑두의 요청에 따라 일단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냐. 착한 놈이기는 하지."
당규영은 대강 납득하고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김갑두와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도, 평소 인식은 그냥저냥 괜찮았던 모양이다.
"...."
"...."
한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당규영은 평소보다 복잡한 표정으로 경기장 쪽을 응시하다가, 이따금씩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나를 보곤 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그냥,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네."
이 선배님도 사람이라, 김갑두에게 관심이 없더라도 오늘 일을 곧바로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지는 못할 거다.
"그럴 때 아주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는데요."
"...뭔데?"
솔깃하여 되묻는 당규영에게, 나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
"대련이죠. 격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모든 잡념이 날아가게 마련입니다."
"...."
당규영이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내 얼굴에 가져다 대더니 양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아주 머릿속에 대련밖에 없지, 요 녀석아."
"으그 즌쯔 틍흐그든요(이거 진짜 통하거든요)."
당규영은 얄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볼따구를 죽죽 잡아당겼다.
말랑말랑해서 땡기기 좋다더니, 요새는 완전 버릇이 됐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래, 가서 몸이나 풀자."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경기장에 들어가 마주 선 우리들.
곧 당규영이 자기 상반신만 한 그림자 망치를 움켜쥔 채,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내가 도둑걸음을 시전하며 뒷걸음질 치자 간발의 차이로 바닥을 쿵쿵 찍어 댄다.
"오늘따라 저돌적이시네요."
"이왕 몸 풀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근데 이거 진짜로 효과가 있네."
"그렇다니까요."
벌써부터 한결 마음이 편해 보이는 당규영이었다.
내가 계속 물러나자 당규영이 바닥을 쿵쿵 찍던 망치를 힘껏 집어 던졌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오던 그림자 망치가 잘게 쪼개지면서 갖가지 다양한 그림자 암기로 변해 쏟아졌다.
그에 대응해 내가 뿌리로 전방을 가리키자, 바람이 모여들더니 강렬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 휘잉—!
그 탓에 쏟아지던 그림자 암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려다가, 형태가 또다시 변해 십수 마리의 그림자 나비가 되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나는 계속 뒷걸음질 치며 뿌리를 뻗었고, 또다시 전방에 회오리가 일며 그림자 나비들을 중심으로 확 끌어모았다.
- 휘잉—!
하나로 뭉쳐진 그림자 덩어리가 이번에는 길쭉하게 늘어나고, 당규영은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자 장검을 마구 그어 댔다.
동작이 망치를 휘두를 때와 비슷하게 역동적이지만, 어조는 평소처럼 일상적이다.
"그러고 보니까, 주말에 같이 나가는 건 안 까먹었지?"
"얘기한 지 며칠 됐다고 까먹겠습니까. 동아리 일이라면서요."
"응, 나만 따라다녀도 재미있을걸. 기대해도 좋다."
당규영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견학으로 내 흥미를 유발해서 도둑 동아리에 입부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
다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런 일에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 닳고 닳은 고인물이었다.
저들이 준비하는 이벤트가 블랙 마켓이라는 사실도 진작에 알아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당규영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말이다.
'거기 가면 주워 먹을 게 많거든.'
그것도 임시 보관소보다 더.
133화 사전 답사 (1)
주말.
기숙사 근처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당규영이 정시에 맞춰 나타났다.
교복 차림이라는 점은 평소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더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다.
거기에 더해,
"향수 뿌리셨어요?"
"평소에도 뿌리는데?"
"오늘은 냄새가 다른 것 같아서."
"완전 개코네. 맡아 봐."
당규영이 손목을 내 코앞에 가져다 대자 꽃향기와 과일향 중간쯤 되는 향기가 코를 간질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 코끝을 톡 건드리면서 씩 웃었다.
"오늘은 신경 좀 썼지."
비단 나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부터 우리가 갈 곳에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면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한단다.
"그럼 슬슬 출발하자."
"예, 선배님."
셔틀버스를 타면 이동은 편하지만, 자칫 추적당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해서 우리는 목적지까지 도보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규영이 가는대로 내가 뒤따라 걷는다.
방향은 번화가의 위치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이따금씩 길이 나있지 않은 숲 속을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다.
잠자코 따라가고 있으니 조금 앞서 걷던 당규영이 어깨 너머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하러 가는지 안 궁금해?"
사실 안 궁금하기보다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굳이 초를 치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얘기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너는 가끔 보면 관심이 없는 건지, 참을성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얘기해 줄게."
적어도 우리가 뭐 하러 가는지, 기본적인 목적 정도는 파악해 두는 편이 나을 테니까.
당규영이 이내 단어 하나를 입에 담았다.
"암시장. 블랙 마켓이야."
도둑 동아리가 주체가 되어 열리는 이벤트로, 밴 리스트에 올라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이 활발히 거래된다.
이 시기에 블랙 마켓이 개최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바로 멘토링을 꼽는다.
던전선 외부에서 유입되는 멘토들 십중팔구는 과거 용살학원에 다녔던 졸업생들.
그렇기에 재학생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고, 거기에 맞는 아이템들만 엄선해서 인벤토리에 바리바리 싸 들고 들어온다.
"학생들한테 팔면 이윤이 꽤 남거든."
더군다나 상대가 학생이라고 구매력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게, 대부분 명문가, 길드, 기업, 마탑 등 쟁쟁한 세력들의 자본력을 등에 업고 있다.
해서 상당수의 아이템들이 멘토링 기간 4주 내내 활발하게 거래되는 반면,
"금지 아이템 거래는 아무래도 조심스럽지."
팔면 이윤이야 일반 아이템보다 훨씬 많이 남겠지만, 걸리면 압수는 기본에, 멘토로서의 평가에 악영향이 가는 데다 소속된 세력에까지 소식이 닿는다.
이러니 졸업생 멘토라 한들 학사 측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그럼 안 팔면 그만 아니야? 일반 아이템만 팔아도 충분하지 않나?'하고 묻는 이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또 수요가 엄청나단 말이야."
이 시기에 블랙 마켓이 열리는 큰 이유 하나 더.
바로 중간고사가 코앞이기 때문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성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 만큼, 금지 아이템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더 힘들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두면 나머지 학기가 편해진다는 마인드다.
요약하면 멘토들은 멘토링이 끝나고 던전섬을 떠나기 전에 인벤토리를 최대한 비우고자 하는 입장.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대비해 쓸 만한 금지 아이템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꾸준히 증가하다가, 결국 최고점에 달하는 8주 차 주말.
즉 다음 주 주말경에 블랙 마켓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최자로서 도둑 동아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구매자랑 판매자 연결해주고, 선도부한테 안 걸리게 잘 숨겨 줘야지."
선도부 측에서 블랙 마켓이 열리리란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밴 웨이브 다음에 도둑 동아리가 임시 보관소 침투를 시도하는 것처럼, 블랙 마켓 역시 연례행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뭘 거래하려는 낌새만 채더라도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해올 거다.
"뭐, 이거는 당연한 거고, 중요한 건 디테일이야."
어떻게 선도부의 이목을 피해, 안전한 거래를 주선하는가.
그리고 걸리더라도 어떻게 추적당하지 않고 깔끔하게 꼬리를 자르는가.
이 전략은 매년 도둑 동아리 부장과 차장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올해 도둑 동아리의 주요 전력은 당규영과 채다빈.
당규영은 그림자 술사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범위에 들어오는 아군의 기척까지 숨기는 게 가능하다.
임시 보관소 및 심층부에 잠입할 때도 [그림자 안가] [쉐도우 파우치] 등, 은신술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었다.
채다빈은 던전동 심층부의 마법 공학 시스템을 가볍게 뚫고 들어가 무력화하는 실력을 지녔다.
내가 평가하기에도 저것 하나 만큼은 이미 학생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니 아마 이런 강점들을 적극 활용해서 블랙 마켓을 준비할 테고, 그 모습을 지켜보라는 의도로 오늘 당규영이 나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전 답사 같은 거네요."
"맞아, 사전 답사."
당규영이 고개를 끄덕거려 긍정했다.
그리고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허름한 3층짜리 건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건물 입구로 다가가다가, 나는 시선을 위로 들어올려 물끄러미 옥상 쪽을 쳐다보았다.
당규영이 나한테 '왜?' 하고 물으려다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같은 곳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반쯤 놀란, 그리고 반쯤 흥미로운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좋은 친구네."
이윽고 허공이 한 차례 일렁거리더니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학미채 길리슈트를 뒤집어쓰고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우리 앞에 가볍게 착지한다.
남성은 신병철과 동급으로 뺀질거리는 첫인상이지만, 차이점이라면 머리숱이 풍성하고 미남이다.
여성은 눈꼬리가 축 쳐져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에,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포인트.
그리고 공통적으로 우리보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
'졸업생들이군.'
내 짐작이 맞았는지 당규영이 그들이 내려앉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굽혔고, 나도 눈치껏 뒤따라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응, 규영이 왔냐. 그리고 옆에는...?"
"제가 아끼는 후배예요."
"아, 후배구나."
뺀질이 사내의 시선이 내 가슴팍으로 이동했는데, 넥타이핀 색깔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두 남녀의 눈이 동시에 이채를 머금었다.
"...1학년?"
1학년이 투명 길리를 착용한 자신들의 은신을 꿰뚫어 보았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안정미도 내 고인물 센서에 발각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지.
"한 실력 하나 보네. 아니면 내가 한물간 건가."
"얘가 좀 1학년 답지 않은 데가 있어요."
"그렇지? 역시 내가 퇴물일 리가 없다. 도둑 동아리의 미래가 밝구만."
그 말에는 당규영이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정작 내가 부원이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몰래, '왜 빨리 입부 안 해?' 하고 묻는 눈빛을 보냈으나, 내가 일부러 딴청을 피우자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러나 졸업생 둘을 앞에 둔 상태라 오래 한눈을 팔지는 못하고, 눈물점 여성에게 묻는다.
"왜 밖에 나와 계세요. 쉬고 계셔도 괜찮은데."
"너무 가만히만 있기도 뭐해서, 혹시 누구 안 오나 보고 있었어."
이 건물에서 모인다는 사실을 행여 선도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고에 감사드려요."
"별것도 아닌데 뭘. 이만 들어가자."
"예, 선배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서 카드를 치던 이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전에 봤던 쌍둥이들과 신병철, 그리고 2, 3학년들.
맞은편에는 졸업생들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더 있었고, 당규영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규영이 안녕."
"안녕하세요."
뺀질이 남성과 눈물점 여성을 포함해 졸업생이 총 다섯.
이들 중 대부분은 과거에 당규영 또는 도둑 동아리와 인연을 맺었거나, 용살학원 외부에서 활동하는 도둑길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거다.
혹은 밀접한 연관이 없더라도 멘토들 역시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기에, 암시장 건에 한해서는 선도부보다 도둑 동아리의 손을 들어 주는 편이다.
해서 이 중 한두 명 정도는 당규영이 따로 찾아가 의뢰를 했을 테고.
그래도 졸업생이 다섯 명이나 일을 거드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선도부 쪽에 졸업생이나 교직원이 몇 명이나 붙을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다섯만 해도 꽤 막강한 전력이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버스 타는 맛이 있겠군.'
하는 일 없이 금지 아이템만 주워 먹을 수 있으면 그게 최선 아닐까?
건물 더욱 깊은 곳으로 이동할수록 시끄럽게 웅웅 울리는 기계음이 귀를 때렸다.
그 기계음의 정체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수십 개의 모니터들이었다.
대부분은 검은 화면이지만 몇몇은 다른 빈방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 바쁘게 태블릿을 두들기는 채다빈.
이따금씩 시선을 들어올려 모니터를 확인하고, 다시 태블릿을 두들기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검은 화면 하나에 불이 들어온다.
이렇게까지 세팅을 했다면 이곳을 잠시 모이는 곳이 아니라, 아예 컨트롤 타워로 활용하려는 모양이다.
당규영이 그런 채다빈을 바라보다가, 잠시 손이 멈췄을 때를 틈타서 끊었다.
"다빈이 잠깐 나와."
"네."
채다빈은 즉시 태블릿을 집어넣고 따라 나왔다.
회의실 같은 옆방에, 도둑 동아리 부원들과 졸업생들이 모두 모였다.
의외로 졸업생 다섯 중에 발언권이 가장 강한 사람은 뺀질이 사내인 모양이다.
자연스레 상석으로 이동하는 데다 모두 그에게 이목을 집중하는 걸 보면 말이다.
뺀질이가 좌중을 한 번 훑은 다음 말문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해 봅시다."
134화 사전 답사 (2)
"부장님? 말씀하시지요~"
뺀질이 사내는 애초에 모두의 집중을 이끌어 내는 것만이 목적이었는지,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발언권을 넘겼다.
상석에 선 당규영이 이어서 말했다.
"이미 다들 들으셨겠지만, 작년도 블랙 마켓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작년도 블랙 마켓의 검거율은 역대 최대치에 달했다고 한다.
운영된 방식이 기존과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상대측인 선도부의 역량이 크게 증가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당시 신입생이었던 곽승재.
전투력은 선도부치고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간혹 2, 3학년의 종적을 잡아낼 정도의 색적 능력을 보유했다.
통찰력도 뛰어나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순식간에 꼬리를 잡고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온다.
거기에 나무문으로 공간을 연결하는 고유 마법까지 사용하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곳저곳에서 나무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통에 엎어진 거래가 한둘이 아니었다고.
"올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막고 싶습니다. 무력이 떨어지는 건 이해해도, 첩보전에서마저 뒤처지면 도둑 동아리의 존재 의의가 흐려지니까요."
그 말에 졸업생 아저씨 A가 동조했다.
"옳은 말이다. 우리가 도둑놈 도둑놈 소리를 듣고 살기는 하지만, 도둑놈한테도 나름의 긍지가 있고 자존심이 있다. 결코 물러날 수 없는 순간도 있는 법이지."
눈물점 여성 역시 한마디 보탰다.
"자존심만 걸린 것도 아니야. 멘토들 사이에서도 벌써 부정적인 소문이 돌고 있어. 제대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런 의구심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면 블랙 마켓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지도 몰라. 신용을 되찾아야 해."
그리고 신용을 되찾을 유일한 방법은 이번 블랙 마켓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뿐이다.
당규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해서 올해는 더욱 만전을 기하고자, 선배님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겁니다."
졸업생들도 단지 당규영이나 도둑 동아리와의 인연 때문에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에게 약속된 대가 역시 적지 않을 터.
그런 졸업생이 다섯이나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블랙 마켓을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아저씨 졸업생 A와 B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각오다. 확실히 당 부장은 배포가 남다른 데가 있군. 헌데.... 우리는 이 건물만 지키면 된다고? 정말 그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이곳이 이번 계획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모니터가 가득한 방을 보고 짐작했듯, 이 건물이 바로 컨트롤 타워다.
오직 채다빈을 위해 마련된 공간.
작년, 전대 도둑 동아리 부장은 채다빈이 1학년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에는 마침내 당규영이 실권을 잡았고, 채다빈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펼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당규영이 눈짓을 보내자 채다빈이 담담한 어조로 보고했다.
"접선소와 거래소 내외부 및 인근의 시야를 장악하는 중입니다."
모니터가 가득한 방에 잠시 들렀을 때, 그곳에 비친 것들은 거리, 후미진 골목, 건물 내의 빈 방 등이었다.
즉, 채다빈이 장악 중이라는 대상은 곳곳에 설치된 방범용 수정구들이고, 그 시야를 몰래 훔쳐서 블랙 마켓에 활용하려는 것이다.
"진행도는?"
"현재 17% 정도 진행됐고, 수요일 이내로 모두 확보 후 안정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빠르군."
졸업생 하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방범용 수정구인 만큼 보안이 철저하여 제대로 한두 개 뚫기도 힘든데, 그것을 동시에 수십 개나, 심지어는 앞으로 며칠 만에 끝마치고 안정화에 들어간다니 감탄이 나올 만도 했다.
당규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당일에는 컨트롤 타워의 인원들이 화면을 통해 곳곳을 모니터링하다가,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하는 즉시 전달 드릴 겁니다."
요약하면 이곳은 도둑 동아리의 또 다른 눈이나 마찬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면 위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선도부에게 점거당하는 즉시 장님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자칫 역으로 일망타진당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두 분께 이곳의 은폐 및 보호를 부탁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과연, 잘 알겠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지."
두 졸업생 아저씨가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답했다.
질문을 던질 때만 해도 이곳에 둘씩이나 붙는 건 낭비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기색이었으나, 지금은 그 중요성을 실감한 듯했다.
당규영은 다음으로 뺀질이 남성과 눈물점 여성, 그리고 졸업생 아저씨 C에게 차례차례 눈길을 주었다.
"선배님들은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현장에서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그 다음 모두 보라는 듯이 손을 펴 올리자, 꾸물꾸물 그림자가 모여들더니 지도를 그려 냈다.
내 입장에서는 하도 익숙했기에, 보자마자 그것이 번화가 지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지도 몇몇 군데에 그림자로 이루어진 건물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단기 임대로 건물을 몇 채 대여했어요. 해당 건물들의 위치를 반드시 숙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핵심적인 정보라 진작에 숙지했을 텐데도, 모두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지도 속 건물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건물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거래소.'
블랙 마켓의 모든 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당규영이 눈물점 여성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이 거래소들에는 내가 손수 짠 진법들을 설치해 놨어.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은 그걸로 충분히 쫓아낼 수 있을 거야."
가령 일반인 또는 블랙 마켓과 무관한 학생 등이 거래소 근처에 발을 들인다면, 자동으로 진법이 발동하여 그들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도록 유도한단다.
진법에 빠졌다는 위화감을 느낀다면 쓸데없는 의심을 살 테니,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말이다.
용살학원 졸업생이 손수 짠 진법이라면 그 성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터.
다만 건물 내부에도 각종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 데다 그런 거래소의 숫자가 여럿이니, 그녀는 그것들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질 것이다.
이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졸업생 아저씨 C가 말을 받았다.
"내 역할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거래소 내부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는 거겠지. 내가 준비한 마법은 이렇다. 잘들 봐라."
그는 벽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였는데, 모두가 바라보는 앞에서 갑자기 상반신이 스르르 벽으로 파묻히듯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스르르 벽에서 빠져나온다.
'통과걸음.'
통과걸음(Throughwalk).
말 그대로 벽을 넘나드는 마법이다.
미궁처럼 벽을 잔뜩 세워 사람을 헤매게 만드는 던전에서 정찰 용도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저 아저씨는 이것을 자신뿐만 아니라 거래소에 입장하는 '손님들'도 통과할 수 있도록 손을 쓰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벽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리므로 건물 자체가 자그마한 미궁으로 바뀌는 셈.
보안이 더욱 철저해지며, 사정을 모르는 선도부 입장에서는 추적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진다.
당규영이 설명을 이어 갔다.
"물론 이러면 손님들까지 헷갈릴 수도 있죠.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때마침 도둑 동아리 부원 하나가 수레 같은 것을 덜덜거리며 끌고 들어왔다.
수레 앞면에는 눈에 확 띄는 문구로 대문짝만하게 '아이스크림!' 이라 적혀 있다.
당규영이 수레에 손을 척 얹었다.
"여기, '접선소'에서부터 티켓을 배부하는 겁니다."
블랙 마켓의 접선소들은 아이스크림을 팔든, 핫바를 팔든, 붕어빵을 팔든.
각종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으로 위장하여 티켓을 나누어 줄 것이다.
당규영이 시범을 보이려는 듯 아이스크림 카트를 드르륵 열고 콘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냅킨 한 장으로 그것을 감싸 앞으로 내미는데, 마치 '흘리지 말고 드세요'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내 아이스크림은 중요치 않다는 듯 뒤로 휙 던져 버리고, 남은 냅킨을 가볍게 슬슬 흔들어 보인다.
그러자 아주 잠깐이나마 빼곡하게 적힌 술식이 비쳤다.
아이스크림 등 먹거리는 눈속임이고 냅킨이 본체, '티켓'이었던 것이다.
"이 티켓이 손님들의 길잡이 역할을 대신해 줄 겁니다."
교란 진법에 헤매고 다니거나 쫓겨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 주고, [통과걸음]의 영향을 받아 미로처럼 얽힌 건물 내에서도 정확히 어떤 벽을 통과하면 될지 알려 준다는 뜻이다.
위 과정들을 한 번에 요약하자면.
블랙 마켓에 참여하고 싶은 이들은 먼저 노점상으로 위장한 접선소에 들러 특수한 술식이 부여된 냅킨, 즉 티켓을 넘겨받는다.
이 티켓이 이끄는 대로 거래소로 이동하고, 진법과 벽들을 넘는다.
마지막으로 지정된 장소에서 구매자와 판매자가 만나, 가져온 물건을 사고팔면 끝.
그리고 컨트롤 타워의 채다빈 팀이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문득 뺀질이 사내가 손을 들어올렸다.
졸업생들의 역할이 모두 분명한데 자기만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장님?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선배님께서는 예비 전력입니다. 대기하시다가 유사시에 도움을 주셔야 할 거예요."
"아무 일도 없으면 그냥 놀아도 되나?"
"아무 일도 없으면요."
당규영이 싱긋 웃음 지었는데, 어쩐지 그 웃음에 어림도 없다는 속내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선도부가 블랙 마켓을 훼방 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과연 아무 일도 없을까.
뺀질이 사내 역시 이 사실을 알기에 안색이 급격히 피곤해졌다.
아무리 봐도 이 양반은 잘생긴 신병철이다.
당규영은 그런 뺀질이를 일별하고 채다빈에게 물었다.
"시야 확보는 어디까지 끝났어?"
"A거래소, E거래소는 안전해요."
"좋아."
당규영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앞서 말씀드린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 보죠. 컨트롤 타워 팀을 제외하고 모두 번화가로 이동합니다."
135화 사전 답사 (3)
번화가에 학생 두셋도 아니고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수십 명이 전부 도둑 동아리 부원들이라면 '우리 수상한 놈들이에요~ 우리 수상한 짓 하러 왔어요~'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따라서 우리는 소규모로 쪼개져 목적지에 모이기로 했고, 나는 다시 당규영과 단둘이 되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당규영이 물었다.
"좀 지켜보니까 어때?"
"흥미롭네요. 준비를 많이 하신 게 보입니다."
졸업생 멘토들이 무려 다섯이나 참여한 점, 안전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걸어 보안을 철저히 하는 점 등.
작년도 블랙 마켓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더니, 올해는 나름대로 칼을 갈아 온 듯하다.
다만 학생선도부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일지는 지켜봐야 알 것이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당규영이 기분 좋게 웃었다.
"흐흥, 역시 데리고 나오길 잘했네."
오늘 나에게 견학을 시켜주는 일차적인 목표는 내 흥미를 유발하는 것인데, 내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기대치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러면서 나한테 넌지시 제안을 던진다.
"한 다리 걸칠래?"
임시 보관소 침입 때처럼 용병으로 참여할 생각이 있냐는 물음이다.
당연히 관심은 있지만, 끝까지 다 들어보고 결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되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그 재수 없게 생긴 선배님 있지? 거기 붙어."
당규영 입장에서 재수 없게 생긴 선배라면 백 프로 졸업생인 뺀질이 사내일 거다.
그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예비 전력으로써 대기하다가 돌발 상황 시 힘을 보태라는 뜻이다.
"글쎄요, 저한테는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요. 2, 3학년 선도부하고 부대낄 깜냥은 못 되는데."
"누가 싸우랬냐. 그냥 적당히 훼방 놓다가 빠지면 돼.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그럼 좋습니다. 보수는요?"
"너, 금지 아이템 찾는 거 있지?"
"당연히 있죠."
블랙 마켓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이들은 대개 졸업생들.
따라서 학기 초 임시 보관소보다 훨씬 많은, 그리고 훨씬 고등급의 아이템들이 매물로 올라온다.
금지 아이템을 확보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다.
당규영이 그럴 줄 알았다며 씩 웃었다.
"찾는 거 말해 봐. 매물 올라오면 바로 알려 줄게."
도둑 동아리는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거래될 금지 아이템들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내가 찾는 매물을 확보하고 거래 우선권을 주겠다는 말이다.
내 입장에서는 바라던 바였다.
EX급 퀘스트의 영향으로 등장인물이 교체되었으며, 자연스레 그들이 소지한 아이템들에도 변화가 있었을 터.
따라서 이번 블랙 마켓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여러모로 발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둑 동아리가 그 수고를 대신해 준다면 시간과 노력 등이 상당히 절약된다.
그리고 내가 찾는 금지 아이템의 종류는 임시 보관소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원소 페널티 아이템.'
당시 주워 온 아이템은 두 가지.
[인페르노 피스트] 스킬북, 그리고 아직도 기숙사 한구석에서 고이 잠자고 있는 [심뢰옥] 두 개다.
사용 시 막대한 원소 페널티가 뒤따르지만, 내 경우는 S급 [원소 저항]으로 거의 완벽히 무효화할 수 있다.
사실상 페널티 없이 장점만 취하는 셈이니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다.
해서, 나는 당규영에게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이렇게 찾고 있습니다."
"뭐야, 벌써 리스트까지 만들어 놨어?"
"제 쪽에서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제안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당규영.
그러나 우선 목록부터 보자 싶었는지 종이쪽지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목록을 읽어 내려갈수록 서서히 미간이 좁혀든다.
"...무슨 마공(魔功)이 이렇게 많아. 김호야, 넌 어떻게 맨날 살벌한 것만 찾아다니냐. 인페르노 피스트도 그렇고."
"다 세계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다 때려 부수면 평화가 찾아오거든요.
당규영은 이제 나도 모르겠다는 듯 체념한 기색이었다.
"예에, 그러시겠지요. 아무튼 이것도 요령껏 잘 써먹는 거지? 큰 문제 안 일으키고?"
"아시잖아요. 감당 못 할 짓은 안 합니다."
"그래, 알았다. 한번 찾아볼게."
이후에도 당규영과 블랙 마켓에 관해 몇 가지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번화가에 들어선 것이다.
번화가는 지난주와 같은 활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줄줄이 늘어선 노점상들도, 길거리 공연들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가령 서예인에게 트럼프 카드를 줬던 가면 신사는 아직도 그때 그 장소에서 마술쇼를 벌이는 중이다.
처음 봤을 때는 웬 이벤트 보스가 여기에서 튀어나오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정말로 마술쇼만을 위해 던전섬에 들어왔나 보다.
그러나 길거리 공연에는 나도 당규영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우리는 앞만 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첫 목적지는 접선소.
우리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부원이 아이스크림 카트에서 이런저런 도구를 꺼내 들며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우리를 발견하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다.
"어서 옵쇼."
당규영이 몇 초간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맛 할래? 바닐라? 초코?"
"반반할게요."
"그럼 나도 반반."
그러자 부원이 콘을 꺼내 들고 아이스크림을 척척 퍼 담았다.
다만 완성된 형태가 심히 엉망이라, 보다 못한 당규영이 한마디 건넸다.
"연습은 조금 해야겠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접선소라지만 노점으로서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심이 갈 만한 요소는 적을수록 좋다.
도둑 동아리 부원이 두어 번의 추가 시도를 거친 후, 상대적으로 덜 일그러진 소프트 콘을 냅킨에 싸서 하나씩 건넸다.
회의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냅킨이 본체.'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겹의 얇은 냅킨이 겹쳐진 모양새다.
겉면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면, 안쪽에는 정교한 마법 술식이 빽빽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냅킨 겉면 한 귀퉁이에는 원래 그려진 문양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화살표가 하나.
우리가 아이스크림 카트를 떠나 걸음을 옮기자, 화살표가 나침반처럼 기울면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당규영의 냅킨을 슬쩍 곁눈질로 보니 가리키는 방향이 같다.
그대로 따라가면 다음 장소인 거래소가 나올 터.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든 채 계속 이동했다.
당규영은 주위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슬쩍 입을 가린 채, 컨트롤 타워의 채다빈과 통신을 주고받는 듯했다.
"우리 보이지. 응, 뭐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고? 알았어, 바로 A거래소로 간다."
그렇게 도착한 A거래소는 작은 상가 같은 건물이었다.
그 앞에는 눈물점 여성과 졸업생 아저씨가 느긋하게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설치해 둔 진법과 통과걸음, 그리고 냅킨의 효과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해서 원하시는 대로 건물에 다가가려는데, 문득 당규영이 내 냅킨을 덥석 잡았다.
뭔가 싶어서 손에서 힘을 빼니 샥 하고 뺏어 간다.
마주 보니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하길래 내가 물었다.
"갑자기 냅킨은 왜 가져가십니까."
"없이 가 봐, 딱 한 번만."
"이정표 없이 진법을 통과하라고요?"
"응, 응."
"이렇게 해서 선배님이 얻으시는 게 뭐에요."
"그냥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다시 보니 눈빛에 장난기뿐만 아니라 기대감도 가득하다.
내가 절진 안을 허우적거리면서 헤매고 다니다가 마침내는 쫓겨나는 모습이 보고 싶으신가 본데, 유감스럽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선배님, 죄송하지만 제가 헤맬 일은 없어요."
"이정표 없어도 괜찮다고?"
"잘만 하면요."
그러자 시트콤 보듯 흐뭇하게 우리를 지켜보던 졸업생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먼저 눈물점 여성이 말했다.
"그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네. 내 나름대로 신경 써서 설치한 진법이거든. 간단히 뚫리지는 않을 거야."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느낌이다.
내 말이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렸나 보다.
나는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선배님의 실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남들보다 감이 조금 좋은 편이라, 이번에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뿐입니다."
"...."
눈물점 여성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첫 만남 때 투명 길리슈트를 쓰고 은신한 그녀를 곧바로 간파했으니, 감이 좋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 있게 설치한 진법마저 무력화할 정도인지는 다소 미심쩍어 보인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졸업생 아저씨였다.
블랙 마켓에서 이 아저씨의 역할은 건물에 [통과걸음]을 적용해 미로를 만드는 것.
그가 자신의 작품인 A 거래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감이 좋으면, 이정표 없이 저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한가?"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못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군."
졸업생 아저씨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내 두 졸업생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상의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내 쪽을 힐끔거리는 걸 보면 백 프로 내 얘기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 잠시 뒤 결론이 나왔는지 나에게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는 저 건물 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한번 이정표 없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와 봐라."
"만약 제가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공하면, 이번 블랙 마켓에 나오는 매물을 뭐든지 하나 구해다 주마."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당규영이 나에게 약속한 것은 매물을 확보하고 거래를 주선해 주는 것까지.
그 금지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거래에 사용할 만한 값진 물건이라면 실상 홍연화에게서 얻은 큼지막한 루비 정도인데, 보석 계열 아이템은 나중에 사용처가 많아서 조금 아깝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성공하면 그 값나가는 금지 아이템을 대신 사 준단다.
실패한다고 뭘 잃는 것도 아니라, 나로서는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들의 시험을 받아들이겠습니다."
136화 사전 답사 (4)
내기를 수락하자 졸업생 아저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먼저 들어가 기다리마."
그가 눈물점 여성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고, 둘은 함께 건물 한쪽 벽면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벽을 통과해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당규영이 물었다.
"김호야, 솔직히 내 장난에서 시작된 거긴 한데.... 이거 일을 너무 키운 거 아니냐?"
당규영은 그저 내가 잠깐이라도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냅킨을 뺏어 간 거지만, 내가 불쑥 이정표 없이도 가능하다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을 거다.
거기다 대고 뭐라 답하기도 전에 졸업생들이 대화에 끼어들었고, 고작 몇 마디 만에 일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더니, 말릴 틈도 없이 내기까지 성사되어 버린 것이다.
당규영의 입장에서는 난감하게 느껴질 만한 상황이었다.
나 역시 일이 커졌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실패했을 때 모양새가 안 좋기는 하겠죠."
내기의 발단을 되짚어 보면, 내가 본의 아니게 그들의 자존심을 슬쩍 긁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니 실패한다면 졸업생들의 내 인식은 '괜히 객기 부리다 호되게 당한 1학년' 정도로 각인될 거다.
그런 나를 '아끼는 후배'라고 소개한 당규영에게도 덩달아 마이너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그러니까 성공하면 그만 아닐까요."
"...하여간 자신감 하나는 알아줘야 돼. 네 감이 그렇게 좋아? 믿을 만한 거 맞아?"
"최소한 저는 믿습니다."
여기서 내 '뛰어난 감'의 정체란?
바로 무수한 경험으로 단련된 고인물 센스다.
S급 영웅들을 공장처럼 찍어내며 나 자신의 실력도 꾸준히 키워 온 결과, 나는 아주 작은 위화감이라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눈썰미를 갖게 되었다.
오래전에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도 하나하나 따졌었던 것 같은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잘한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건 그냥 척 보면 안다는 거지.'
상대가 투명 길리슈트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한눈에 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규영은 이제 나도 모르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그래라. 우리 200번 졸업한 후배님, 아니 대—선배님께서 다 잘하시겠지."
그리고 뒤로 조금 물러나 팔짱을 끼고 섰다.
방관자 모드로 전환한 모양이다.
나는 당규영의 시선을 등진 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현재 나와 A거래소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로, 아주 조금만 걸으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을 거다.
'진법에 잘만 대처하면 말이지.'
내가 어설프게 대처한다면 이 짧은 거리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 고인물 센스가 신호를 보내왔다.
진법의 영향권 내에 들어섰다는 뜻.
동시에 어떤 종류인지도 대강 파악이 되었다.
'교란 진법이네.'
범위 내에 들어온 대상의 거리감과 속도감, 방향감 등에 혼동을 주는 진법.
예를 들어,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다고 인식하지만 실상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는 중일지도 모르고,
골목이 나와서 90도로 꺾었다고 인식하지만 실상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중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거래소 근처를 기웃거리는 불청객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고, 끝내는 일대를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이 진법의 목적.
그리고 눈물점 여성의 말에 따르면 그 과정이 걸린 사람이 깨닫지도 못하도록,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단다.
'지금처럼.'
몇 걸음 더 내딛자 고인물 센서가 신호를 보냈고, 나는 즉시 방향을 확 꺾었다.
그런데 그렇게 급격히 방향을 꺾었음에도 눈앞에 비추는 풍경은 조금 전과 완전히 똑같았다.
진법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려 했고, 나는 그것을 간파하여 진로를 바로잡은 것이다.
그대로 조금 더 나아가다가, 나는 갑작스레 게걸음을 하며 옆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렇게 옆으로 걸으면 눈앞의 A거래소도 시야 반대편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오히려 나는 조금씩 앞으로 가까워져 가는 중이다.
이번에도 일부러 게걸음을 해서 진로를 바로잡은 것이며,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내가 똑바로 걷는 모습만 보일 거다.
이제 입구가 바로 앞에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아직 안 끝났다.'
나는 들어가지 않고 또 방향을 45도 틀어 건물 외벽으로 직진했다.
내 고인물 센서를 100% 신뢰했기에 아예 눈까지 감아 버렸다.
그리고 몇 초 뒤에 다시 눈을 뜨니, 나는 외벽과 충돌한 게 아니라 건물 내부로 들어온 상태였다.
진법을 파훼해 버린 것이다.
'일단 반은 성공했고.'
물론 진법은 내부에도 깔려 있기에 방심은 금물.
덧붙여 두 졸업생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려면 [통과걸음]이 적용된 벽들까지 넘어야 한다.
좌우를 둘러보니 굳게 문이 닫힌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에 다가가, 내 집 안방인 양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처럼 꾸며 놓은 방.
누군가 방금 전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디테일이 살아 있다.
이런 방을 한두 개도 아니고 건물 몇 채분을 꾸며 놨을 테니, 도둑 동아리가 블랙마켓에 얼마나 노력을 들이는지 짐작이 되었다.
나는 감탄하는 한편, 고인물 센서가 가리키는 대로 한쪽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구만.'
그리고 똑바로 벽을 향해 걷자, 아무런 부딪히는 느낌 없이 옆방으로 넘어갔다.
옆방 역시 사무실처럼 꾸며놓은 방.
나는 이번에도 곧바로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이쪽.'
그리고 거침없이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 * *
"...?"
당규영은 멍하니 두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방금 자신이 지켜본 광경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업생 선배는 이 진법을 '상대가 빠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법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나게 마련이다.
약간이라도 우왕좌왕하거나, 주춤거리거나 두리번거려야 맞다.
그런데 당규영의 눈에 보인 것은, 김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터벅터벅 걸어서 건물에 들어가는 모습뿐이었다.
마치 그곳에 진법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태도였다.
당규영은 조금 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일단 자기가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귀에 꽂아 놓은 수신기를 조작했다.
컨트롤 타워와 연락을 주고받는 용도다.
"채다빈."
- 네, 부장님.
"보고 있어?"
- 보고 있어요.
"방금 전 거, 영상 따서 보내 줘 봐."
- 네, 잠시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채다빈이 메시지로 영상 하나를 전송했다.
수정구를 통해 내려다본 김호의 모습 촬영본이다.
당규영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수정구는 위쪽에 설치되어 있었으니 구도가 다르다.
따라서 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뭔가 잡아내지 않을까 싶었지만,
"...."
기대와는 달리, 김호의 걸음걸이는 자신이 본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다는 말이다.
교차 검증을 마치자, 다음으로 머리를 치켜드는 것은 의구심.
'이거, 제대로 안 하신 거 아니야?'
선배님이 진법을 허술하게 설치하신 건가?
아니면 설치조차 안 하셨나?
왜지? 몰래 김호랑 짰나? 나 골탕 먹이려고?
이거 몰래카메라인가?
그러나, 혼란에 빠진 것은 두 졸업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컨트롤 타워 측에서 공유해 주는 화면을 통해 김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당규영이 본 것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문 섞인 시선을 보냈다.
아저씨 졸업생이 물었다.
"제대로 설치한 거 맞나? 진법."
"당연히 제대로 했지. 제대로 했는데...."
눈물점 여성이 아리송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혹시 내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건 아닐까?
가령 계산을 잘못하거나 범위를 잘못 설정해서, 진법이 본래 성능을 못 내는 건 아닐까?
[통과걸음]술식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건 영상 속 김호가 거침없이 이 방 저 방 넘나드는 모습으로 증명이 됐다.
반면 진법의 발현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처럼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계통은 더욱.
상대방이 헤매는 것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김호의 걸음걸이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진법을 설치한 장본인마저 미심쩍음을 느끼는 것이다.
"으으음...."
당규영은 턱을 괴고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가, 눈썹을 찡그렸다가, 폈다.
이 방면 저 방면으로 생각해 봐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직접 해 보면 되지.'
진법이 제구실을 하는 중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몸소 겪어 보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다칠 일도 없고, 부장으로서 성능 검증도 되고.
당규영이 근처에서 대기하던 부원에게 냅킨을 건넸다.
"이거 잠깐만 들고 있어 봐."
"넵."
이정표를 넘겨주었으니, 지금부터는 자신 역시 진법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터.
당규영이 김호의 발자취를 따라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A거래소 입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진짜 안 하신 거 같은데?'
이상한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점은, 그녀가 걸을 때마다 주변 환경이 움직이는 속도가 어딘지 모르게 더디다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나아가던 당규영은 뒤늦게 찾아온 위화감에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금방 들어섰어야 할 거래소가 제법 걸었는데도 거의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은 번화가에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당규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성능 확실하구만."
자기도 모르는 새, 아주 자연스럽게 쫓겨나 버렸다.
진법의 성능이 여실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김호가 그 진법을 돌파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감 좋네, 진짜로."
137화 낙서
"믿을 수가 없군...."
두 졸업생의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내가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속도로 진법과 미로를 돌파하여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수정구를 통해 낱낱이 지켜봤을 테니 충격이 한층 더할 것이다.
건물 내외의 교란 진법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낌새가 보일 때마다 즉각 즉각 반응해 빠져나왔고,
통과걸음 술식으로 미궁처럼 엮어 놨던 방들 역시 내 집처럼 넘나 들었다.
어느 곳이 벽이고 어느 곳이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통로인지 둘러보지도 않고 정답을 맞혀 버리니, 그들 입장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처음에는 '감히 1학년 주제에 건방지게?'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은데, 결과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런지 지금 그런 기색은 씻은 듯 사라진 상태다.
뿐만 아니라 일말의 경외심까지 비추는 것 같다.
졸업생 아저씨가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혹시 감지, 탐색계열 스킬이나 특성을 보유하고 있나?"
저들의 상식으로는 그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 그렇게 착각할 만도 했다.
실상 나는 고인물 센스 하나로 다 해 먹은 거지만, 그건 설명하는 것도, 납득시키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대강 둘러 답했다.
"죄송합니다. 확실하게 답을 드릴 수가 없어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두 졸업생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내가 강력한 감지계열 스킬 또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으로.
이 게임 속 세상에서 상대의 스킬이나 특성에 대해 세세하게 캐묻는 것은 자칫 큰 실례가 될 수도 있다.
'네 실력을 분석하고 약점을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다.'라고 해석되기 쉬운 탓이다.
해서 내가 한 번 정중히 사양하자,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당규영이 벽을 넘어 나타났기에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 친구가 선도부에 안 들어간 게 천만다행이군. 도둑 동아리에 암흑기가 찾아올 뻔했어. 안 그런가?"
"그, 그렇죠."
당규영은 그다지 동의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감'이 놀랄 만큼 좋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인페르노 피스트가 선도부라니.
그래도 일단 선배의 말이니 맞장구를 친다.
"이런 실력자를 미리 알아보고 선점했으니, 당 부장의 안목이 참 대단해."
"하하, 안목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당규영이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전혀 몰랐던 데다, 그 이전에 나는 부원도 아니었기에 뭐라 답하기가 참으로 애매해 보였다.
졸업생 아저씨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약속대로, 블랙 마켓에 나오는 매물이라면 어떤 것이든 구해다 주마. 너 같은 인재에게 투자하는 거라면 전혀 아까울 게 없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특별히 찾는 물건이 있나?"
"목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부장님이 갖고 계세요."
"그래? 한번 보도록 하지."
당규영이 또다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번화가로 오는 길에 받아 두었던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두 졸업생은 나 정도 되는 실력자가 대체 무슨 물건을 찾는 걸까 궁금증이 치솟는지, 한껏 집중하여 리스트를 읽어 내려갔다.
"...!?"
그리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고위험 아이템들의 향연에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고 말았다.
* * *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졸업생 아저씨와 눈물점 여성은 그 후에도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질문 공세를 이어 갔다.
또한 졸업생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조언을 구했는데, 자신들이 설계한 교란 절진과 통과걸음 미궁에서 특히 눈에 띄는 허점이 있었는지, 보완점이 있다면 무엇일지 등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내기 보상이라고는 하나 받을 물건의 급이 상당히 높았기에, 조금은 밥값을 해야겠다고 여겼다.
덧붙여 이번 블랙 마켓이 잘 풀려야 내년, 내후년에도 별 탈 없이 이용할 수 있을 거다.
해서 나는 힘닿는 선에서 성심성의껏 그들에게 피드백을 해 주었고, 그런 조언들을 토대로 거래소의 보안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어느 정도 블랙 마켓 관련 일이 일단락되었을 무렵,
당규영이 꼬치구이를 포함한 온갖 군것질거리들을 가지고 나타났다.
접선소 노점상들을 돌면서 쓸어 온 모양이다.
나한테 닭꼬치 하나를 내민다.
"같이 먹자."
"감사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꼬치구이를 베어 물었다.
그러다가 당규영이 나와 학사 쪽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이제 가려고?"
"가야죠, 슬슬."
따로 수련도 해야 하고, 따로 수련도 해야 하고, 김갑두에게 받은 영약의 기운도 녹여 내야 하니,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
그런데 문득 당규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상태가 꽤 오래 이어지길래 내가 물었다.
"선배님, 왜 그렇게 보세요."
"이거 갑자기 촉이 온단 말이야. 어쩐지 가다가 딴 길로 샐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이 선배님도 눈치가 상당히 비상한 편이었지.
이 경우는 단순히 감으로 때려 맞춘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답이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잠깐 들릴 곳이 있긴 합니다."
"네가 번화가에 들릴 곳이 있어?"
"정확히는 확인할 게 있어요."
그러자 당규영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궁금해지네, 나도 갈래."
"따라와 봤자 볼 것도 없어요."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할게."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억지로 떨어뜨려 놓기도 뭐하고, 떨어뜨려 놔도 몰래 쫓아올 것 같았다.
해서 나는 당규영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번화가 한구석에 위치한 골목.
넓은 벽면 전체가 낙서로 가득 들어차 지저분하다.
"왜? 거기다 뭐 쓰게?"
"그 반대입니다. 찾는 쪽이죠."
"...?"
당규영이 얘가 무슨 낙서를 찾으려는 건가, 왜 찾는 건가 궁금증을 갖고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드넓은 벽면을 끄트머리에서부터 세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낙서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대충 끼적여 놓은 그림부터,
'XX월 XX일 OOO 왔다 감!' 또는 두 커플의 이름 사이에 하트를 그려 놓은 사소한 낙서,
'목종화 좀팽이 같은 놈, 불연성 생활 쓰레기'같이 당사자한테 대놓고 못 하는 뒷담화에,
차마 타인에게 알릴 수 없는 은밀한 비밀까지.
그렇게 거의 반쯤 왔을까,
'있다.'
무릎 어림에 낙서 하나가 눈에 띄었다.
끄적여 놓은 지 얼마 안 된 듯 보였는데, 서예인과 지난주에 잠깐 들렀을 때는 없었던 것이다.
짧은 막대기 여러 개가 이리저리 그어져 있고, 군데군데 점이 찍혀 있다.
내가 한 자리에 우뚝 멈춰서 낙서를 응시하고 있으니, 당규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깨 너머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도둑 동아리 부장답게 곧바로 낙서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거 암호문 아니야?"
"맞아요, 암호문."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무슨 뜻인데?"
"알면 다칩니다."
"아, 좀 알려 줘!"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하신다면서요."
실제로 자기가 한 말이었기에 당규영이 말없이 입술만 삐죽거렸다.
평소였다면 그럼에도 어떻게든 내 대답을 들으려고 살살 꼬셨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내 표정이 사뭇 진지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진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낙서, 즉 암호문을 새긴 자는 보통 상대가 아니다.
'비밀 결사.'
그것도 용살학원의 적대 세력에 속한 자들이다.
놈들에게 장래의 영웅들이 모이는 용살학원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다 성장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숫자를 줄여 놓고 싶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삼엄한 경비를 뚫고 던전섬에 잠입해야 한다.
그 최적의 시기가 바로,
'멘토링 기간이지.'
졸업생들을 포함해 외부에서 엄청난 인원이 유입되기에, 던전섬의 방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는 시기다.
아마 번화가에서 마술쇼를 벌이는 이벤트 보스도 이맘때에 흘러 들어왔다고 추측한다.
놈들 역시 잠입에 성공했기에 여기에 암호문이 적혀 있는 거고.
또한 이 암호문의 의미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
즉,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림과 동시에, 해당 시간과 장소에 접선하자는 뜻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놈들이 하나로 뭉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낙서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직 한쪽은 이것을 확인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면....'
일이 조금 더 쉬워지지.
주술단검을 꺼내 벽을 슥슥 긁자, 낙서에 작대기 몇 개와 점 몇 개가 추가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감쪽같이.
결과적으로 그들이 접선할 시간과 장소는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낙서를 한쪽은 바람을 맞을 것이고,
낙서를 확인할 쪽은 엉뚱한 곳으로 향할 것이다.
지켜보던 당규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고친 거야? 암호문을?"
"맞아요."
"어떻게 알고?"
"비밀입니다."
"...."
'내가 안 가르쳐 준다', '비밀이다'로 일관하고 있었으나, 당규영은 더 이상 입술을 삐죽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그.... 세계 평화랑 관련된 일이야?"
"...."
'세계 평화'나 '졸업 200번' 같은 키워드는 평소 우리 사이에 우스갯소리처럼 오가는 것이었지만, 간혹 진지하게 쓰일 때도 있었다.
선도부실을 나와 산책을 했던 그날 밤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당규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시선을 맞췄다.
"위험한 일인거 알아. 그래도 나는 돕고 싶어. 말했잖아."
'내 사람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이 정말로 내 진심이라면, 앞으로도 기꺼이 내 공범이 되어 주기로.
마주 보는 눈에서 당규영의 각오가 전해져 온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나 완전한 승낙은 아니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때가 되면 전부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약속."
당규영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나도 새끼손가락을 마주 내밀어 걸었다.
138화 이거 뭐 같아?
적대 세력이 던전섬 잠입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나,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멘토링 기간 중에는 던전섬 전역에 졸업생들이 득실거리는 탓에, 아무래도 놈들이 활동하기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무슨 사건을 일으키든 금방 진압되고 끝날 테니, 피해를 극대화하려면 알맞은 시기를 기다려야 할 거다.
1차 멘토링 기간이 종료되고 졸업생들이 다 빠질 때까지.
'아마 중간고사쯤부터 손을 쓰겠지.'
암호문에 적혀 있던 날짜도 그 근처였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실력을 배양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나는 남은 주말에도 당규영을 불러내 대련 시간을 가졌다.
'선배님 대련해요, 대련.' 하고 졸랐더니, 귀찮다 귀찮다 투덜거리면서도 못내 어울려 주는 당규영이었다.
다만 아무리 멘토라도 부장급 3학년의 시간을 무한정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머지 시간에는 나 혼자서도 따로 수련을 했다.
최우선 순위가 멘토링 이벤트를 통한 스킬 랭크작이라면, 다음 순위는 마나연공실에서 코어를 다듬는 것.
김갑두에게 받은 영약은 [태청단]과 [삼백 년 산삼]이었고, 이 중 상대적으로 기운이 약한 삼백 년 산삼을 먼저 복용한 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물론 '상대적으로' 약할 뿐, B랭크 영약에 담긴 기운은 실로 막대한 수준이다.
특수연공실에서 주말 밤을 꼬박 새우고 월요일 아침이 됐는데도 다 녹여 내지 못했을 정도.
아쉽지만 일단 학사 일정을 수행하고 밤에 마나 연공을 이어서 해야 할 듯했다.
늘상 그렇듯 서예인을 깨워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웬일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예인:(빼꼼 고양이 이모티콘)]
[서예인:(툭툭 고양이 이모티콘)]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저 인간 나무늘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먼저 연락을 해 오다니,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지만 아예 없지는 않았다.
[김호:쿠키 구웠냐]
[서예인:ㅇㅇ]
[서예인:(요리사 고양이 이모티콘 1)]
[서예인:(요리사 고양이 이모티콘 2)]
[서예인:!!]
[김호:(입맛 다시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밥은?]
[서예인:아직]
[김호:밥부터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