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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오늘 행사 담당 보안업체의 수준이 워낙 낮아서 사람 하나 무대 뒤로 데려오는 건 쉬웠다.

차우진이 차유리를 장태호가 있는 곳 근처로 데려갔다.

"저놈 보이지?"

"어."

"일단은 감시만 해."

"이유는?"

"수상해서."

차유리가 얼굴을 구겼다.

"이 아마추어. 너 겨우 그런 이유로 오빠들을 응원하는 나를…."

"오빠? 누가? 설마 블루퍼핏? 딱 봐도 나보다도 어린데?"

"이런 데 오면 다 오빠다."

"수연이가 누나를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였구나."

"지금 그게 중요해? 난 무대 보러 돌아갈 거다."

"여기 있으면 노래하는 쟤들 나중에 우연히 볼 수 있다니까?"

차유리가 코웃음쳤다.

"네 얼굴 보니까 다 뻥이네. 본다는 게 핵심이 아니라 '우연'이 핵심이지? 못 보면 할 수 없고?"

"어…."

사실이다.

차우진이 다른 대가를 제시했다.

"저번에 가자던 호텔 뷔페, 내일 가자. 내가 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호텔 뷔페로 가는 거냐?"

"그래. 어디가 제일 비싼지는 모르지만 거기."

"부자 동생아. 형사가 원래 미행 전문가잖냐. 종종 이용해라."

차우진은 차유리에게 장태호를 맡기고 무대로 돌아갔다.

지금 무대는 블루퍼핏의 시간이다.

곽민지는 게스트라서 노래 한 곡만 하고 내려갔지만, 정식 출연자인 블루퍼핏은 시간을 꽤 많이 받았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관객과 대화를 했다. 그 대화가 끝나면 다시 새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무대에 젊은 미녀가 올라왔다. 블루퍼핏의 리더가 손님을 소개했다.

"저희 공연을 응원하기 위해 와주신 게스트입니다!"

문제가 생겼다.

"인기 배우 정예지 씨입니다!"

차우진은 당황했다.

"네가 왜 거기 있어?"

정예지는 무대 주변을 둘러보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그녀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차우진을 가리켰다.

"뭘 잘했다고 손가락질이냐."

블루퍼핏 리더가 자랑했다.

"저희도 정예지 씨가 출연하신 친구와 연인 사이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물론 운명의 풍차도요."

"어머. 고마워요. 저도 여러분 노래 좋아해요."

"제일 좋아하시는 노래가?"

"아하하하."

"설마 모르…."

정예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농담이죠. 꼭두각시를 제일 좋아해요."

"하하하."

차우진이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상황이 조금 심각해졌다.

"젠장. 저기는 좀 위험한데."

정예지와 눈이 다시 마주쳤다. 차우진이 얼른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정예지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니, 거기 위험하니까 내려오라고."

무대 위까지 그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차우진이 방법을 찾기 위해 주변으로 움직였다.

"무전기라도 있어야 내려오라고 하지."

차우진이 무전기를 관리하는 운영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웅성대는 게 보였다. 그들의 대화도 들렸다.

운영팀 직원이 말했다.

"개인용 무전기 하나가 상태가 이상한데요?"

동료가 물었다.

"누구 거였지?"

"모르겠습니다. 블루퍼핏 넷 중 한 명인 건 확실한데 누군지는 파악이 안 됩니다."

"뭐가 문제야?"

"통신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무전기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지금은 행사 중단 못 시킨다. 나머지 셋은 통신이 잘 되니까 알아서 진행하겠지."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통신이 끊어져?"

멸망한 세계에서는 곧잘 일어나던 일이 하나 생각났다.

'미끼 폭탄?'

미끼의 몸에 폭탄을 붙이고 적진으로 밀어 넣는 건 멸망한 세계에서는 흔히 사용된 방법이다.

빌런들은 그 미끼로 사람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는 현대 문명이 살아 있는 서울 한복판이다.

"여기서 그런 짓을 하리라곤 생각 안 했는데….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무대 시설에서는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차우진이 가수들의 몸수색까지 할 수는 없다.

"무대가 아니라 사람의 몸에 폭탄이 있어."

지금 정예지가 무대 위에 있다. 만약 저기서 폭탄이 터지면 정예지도 휘말린다.

차우진은 전기 전문가다. 최근에는 방송국 세트장이나 방송 관련 장비를 많이 다뤄보았다. 특히 이 공개홀은 며칠 동안 다니면서 어떤 장비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모두 확인했다.

'조명장치 트러블은 아직 해결 안 됐어.'

차우진이 찾아낸 결함이 모두 수리된 건 아니다.

차우진이 주변을 확인한 후에 조명 제어 장비를 건드렸다. 목격자는 없었다.

무대 위를 비추던 조명이 갑자기 꺼졌다. 주변 불빛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무대 위는 사람 형상만 겨우 보였다.

운영팀에서 당황한 소리가 나왔다.

"뭐야? 무전기도 답답한데 이제 조명까지 말썽이야?"

"빨리 고쳐!"

시간은 조금 벌었다. 조명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차우진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블루퍼핏은 네 명이다. 차우진이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멤버부터 덮쳤다.

"어?"

차우진이 그의 등 뒤에 붙은 전기의 본체를 뜯어냈다. 그건 손바닥 크기의 사각형 통신기였다.

"뭐, 뭐야!"

차우진이 무전기를 도로 빼앗으려는 멤버를 손으로 밀며 장비를 확인했다.

'밀봉된 타입의 무전기야. 분해하기 전에는 내부를 알 수 없어.'

차우진은 무전기 안에 폭탄이 들어있다고 의심했다. 그런데 하나만 봐서는 이 무전기가 폭탄인지 알 수 없다.

차우진이 다른 멤버에게도 달려들어 두 번째 무전기도 등 뒤에서 뜯어냈다. 두 개를 양손으로 들어보았다. 무게가 같았다.

블루퍼핏은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마, 막아!"

그들은 관객들을 신경 쓰느라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대신에 손을 뻗어 차우진을 붙잡으려 했다.

차우진이 세 번째 멤버를 향해 움직였다. 세 번째가 손을 크게 휘둘렀다. 무대 위라서 주먹은 쓰지 않았지만, 손바닥으로 차우진을 쳐내려고 했다.

차우진이 그 손을 툭 밀며 상대의 뒤를 잡았다. 허리 뒤에 사각형 무전기가 있었다. 그것도 뜯어냈다.

"으악!"

무대 의상 때문에 허리에 감지 않고 붙여놓은 무전기가 뜯겨나갔다.

무전기 세 대는 무게가 같았다. 차우진이 리더를 돌아보았다.

리더가 도망치려고 했다.

차우진이 무대 위에서 한 걸음을 크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리더의 등에 손이 닿았다.

"내놔!"

"너 뭐야!"

차우진이 무전기를 뜯어냈다.

이번 무전기는 무게가 달랐다. 이게 더 무거웠다.

차우진이 재빨리 물었다.

"이 무전기 고장 났지?"

"당신 누구야!"

"대답해!"

옆에서 정예지도 얼른 말했다.

"빨리 대답해!"

리더는 정예지가 차우진의 옆에서 편드는 걸 보고 당황했다.

어둠 속에서도 정예지가 눈을 부라리는 게 보였다. 리더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정예지가 하라고 하니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조금 전에 고장…."

"이거구나."

정예지가 물었다.

"이게 뭔데?"

차우진이 차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새끼 지금 뭐 해?"

"손으로 귀를 막는데? 어? 웃고 있다?"

차우진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귀는 보통 큰 소리가 들리기 전에 막는다. 폭탄이 터지면 큰 소리가 난다.

"젠장."

'시한폭탄.'

그 폭탄이 지금 차우진의 손에 있다. 바로 옆에는 정예지도 있다.

차우진이 재빨리 폭탄의 위력을 계산했다.

'무전기 내부 공간에 폭약을 끼워 넣었겠지. 폭약의 양이 적어서 위력이 크진 않을 거야.'

이걸 들고 안전한 곳까지 갈 시간이 없다. 장태호가 이미 귀를 막고 있다. 곧 터진다는 뜻이다.

차우진이 정예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무대에서 내려가!"

정예지는 차우진과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해봤다. 괜히 이것저것 묻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즉시 거리를 벌렸다.

차우진은 오늘 공구 지갑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거기에 소형 드라이버나 니퍼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져왔다.

'이걸 여기서 쓰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급해졌다. 차우진이 사람이 없는 쪽으로 걸어가며 공구 지갑에서 작은 칼을 꺼내 무전기 귀퉁이에 꽂았다. 꽂을 때 관통력 강화 스킬을 사용했다.

무전기 케이스에 구멍이 푹 뚫렸다.

'걸리는 게 없어.'

차우진이 관통력 강화 스킬을 다시 사용하며 칼날로 무전기 케이스를 빙글 돌려 그었다. 단단한 케이스의 한쪽 면이 마치 통조림 뚜껑을 딸 때처럼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차우진이 뚜껑을 살짝 들고 작은 틈을 통해 내부를 살폈다. 그러면서 공간이동 스킬을 준비했다.

뚜껑에 연결된 감압 센서는 없었다.

'정밀한 폭탄은 아니야.'

차우진이 뚜껑을 떼어내고 무전기 내부를 확인했다. 조명이 어두워도 전투 센스의 도움을 받으면 내부를 볼 수 있다.

'있다.'

내부에 작은 폭탄이 숨어 있었다. 좁은 공간에 집어넣기 위해 간단한 구조로 만들어진 소형 폭탄이었다.

178. 폭탄

차우진이 눈대중으로 초소형 폭탄의 위력을 계산했다.

'무전기에 남는 공간이 적어서 폭약의 양도 적어.'

문제는 폭약의 종류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저성능 폭약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무전기 폭탄이 블루퍼핏 리더의 허리 뒤에서 폭발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 대신에 이렇게 개봉한 상태라면 폭발력은 급감한다.

'고성능 폭약이라면?'

그 경우, 무전기 폭탄이 허리 뒤에 붙어 있는 상태로 폭발하면 사람이 찢긴다.

리더만 죽는 게 아니다. 바로 옆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도 죽거나 다칠 수 있다.

'창수 형은 무대가 날아갔다고 했어.'

그게 꼭 무대 전체가 폭발에 휘말려서 날아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유할 위력은 나왔다는 뜻도 된다.

'고성능 폭약이겠지.'

초소형 폭탄은 무전기 내부에 간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차우진이 연결 부분을 작업용 소형 나이프로 잘랐다.

공격력 강화 스킬을 연달아 사용했더니 체력이 쭉쭉 빠졌다. 대신에 작은 칼날이 마치 초진동 나이프처럼 대상물을 서걱서걱 잘라냈다.

차우진이 초소형 사제 폭탄을 무전기 케이스에서 꺼냈다.

이런 폭발물은 단단한 케이스에 들어있는 상태로 터트려야 강하게 폭발한다. 그래야 위력도 제대로 나온다.

외부로 노출된 화약은 불을 붙여도 폭발하지 않고 그냥 불탈 수도 있다. 설사 터진다 해도 위력이 약해진다.

문제는 기폭장치다. 이런 개조 폭탄은 기폭장치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모른다. 지금은 해체를 위해 기폭장치 내부 구조를 확인할 시간이 없다.

지금 예상 가능한 건 이 작은 폭탄의 위력뿐이다.

'케이스에서 꺼냈으니까 근거리에서만 안 터지면 돼.'

차우진은 며칠간 이 공개홀에서 일하면서 무대 주변의 내부 구조를 파악했다. 어디에 얼마만큼의 공간이 비어 있는지 잘 안다.

차우진이 폭약 표면을 칼끝으로 쓱쓱 그은 후에 무대 뒤쪽 구석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폭탄이 구석으로 날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우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해치웠나?"

블루퍼핏 리더가 팀원들과 함께 차우진에게 다가왔다. 다들 기세가 등등했다.

리더가 화난 목소리로 따졌다.

"이봐요. 당신 미쳤어? 지금 우리 무대 중간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는 관객석을 신경 쓰느라 목소리를 크게 내진 않았다. 그렇지만 화가 많이 났다. 차우진이 무대를 망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대충 해체했으니까 폭발해도 위력이 줄어서 위험하진 않을 거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무전기 부품이 왜 폭발…."

무대 뒤쪽 구석에서 기폭장치가 작동했다. 화약이 반응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져 어두운 곳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하지만 폭탄이 폭발하진 않았다. 화려한 불꽃만 쏟아냈다.

그 정도 불꽃은 무대 특수효과로도 쓰곤 했다. 평소의 특수효과보다는 불꽃이 컸지만, 관객들이 기겁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겁한 건 블루퍼핏 리더였다.

"으헉! 저, 저거 뭐야!"

블루퍼핏 멤버들은 조금 전에 차우진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거 폭발할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해체했다고…."

리더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손으로 허리 뒤를 더듬었다.

"저게 조금 전까지 내 허리에 있었어!"

다른 세 명도 급히 허리 뒤를 만졌다. 그러다 차우진이 이미 빼앗은 무전기 세 대로 시선이 향했다.

"저, 저기도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저건 그냥 무전기다. 폭탄이 들어있던 건 하나뿐이니까."

"그럼 지, 진짜 폭탄…."

"히이익!"

"저게 여기서 터졌으면 나 죽는 거였어요?"

"우리 다 죽을 뻔한 거야?"

차우진이 말했다.

"안 죽었으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네? 네?"

지금 바닥에는 방금 잘라낸 무전기가 떨어져 있었다.

차우진이 그걸 집으며 말했다.

"공연을 계속하는 게 좋을 텐데. 여기 온 사람들이 실망하면 안 되니까."

"네?"

"오늘은 블루퍼핏한테 중요한 공연 아닌가?"

민수연은 그래서 이 공연을 직관하면서 응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렇죠. 맞습니다!"

"그럼 계속해야지."

"저기, 폭탄은…."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은 게 있었다면 이미 터졌겠지."

차우진이 블루퍼핏을 남겨두고 무대를 내려가다가 옆을 보았다. 정예지가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한복판은 아니고 무대 옆쪽이었다.

"무대에서 내려가랬더니?"

그녀가 씩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믿고 있었다고."

"피하라고 할 땐 말 좀 들어라."

"이제 다 해결된 거지?"

"어."

차우진이 조명 제어장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 만지는 사람이 있었다.

'조명이 나간 원인을 찾았으면, 곧 불이 들어오겠네.'

"난 내려간다."

차우진이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러면서 차유리에게 연락했다.

"그놈 잡아."

그가 내려가자마자 무대 위로 다시 조명이 들어왔다. 블루퍼핏 네 명은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정예지가 갑자기 무대 한복판으로 가서 두 팔을 옆으로 벌리며 관객석을 향해 외쳤다.

"서프라이즈!"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사고가 아니라 이벤트였어?"

"무슨 이벤트를 이렇게 해?"

정예지가 옆을 가리켰다.

"조명장치에 잠깐 문제가 있었나 봐요. 그것 때문에 특수효과용 폭죽 하나가 먼저 불꽃을 쐈지 뭐예요?"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폭죽 아직 많아요. 폭죽값은 방송국이 낼 거예요."

사람들이 웃었다.

정예지가 블루퍼핏에게 손짓했다.

블루퍼핏은 폭탄이 작동하는 걸 보긴 했다. 그나마 폭발하는 게 아니라 화약이 연소하는 걸 봤기 때문에 충격은 조금 덜했다.

그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노래를 준비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리더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오늘, 죽다 살아난 마음으로 노래하겠습니다. 진짜입니다."

***

로드 매니저 장태호는 귀를 막고 씩 웃고 있었다.

'곧 터지겠지?'

차유리가 다가갔다.

"이봐요. 거기."

귀를 막아도 목소리는 대충 들렸다. 장태호가 옆을 휙 돌아보았다. 그는 재미있는 일을 하는데 누가 끼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짜증 난 얼굴로 물었다.

"뭡니까?"

차유리는 장태호를 잡으라는 말만 들었지, 왜 잡아야 하는지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절차는 지키려 했다.

"경찰입니다. 잠시 협조해주시죠."

장태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경찰이 왜요? 여기서 길이라도 잃었습니까?"

"그 손 빼요. 당장."

"아. 경찰이 빼라고 하시면 빼야…."

장태호가 손을 뺐다. 손에 소형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었다.

장태호가 그 드라이버를 차유리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드라이버의 끝이 마치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날아왔다.

차우리가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그 손을 후려쳤다. 드라이버가 손에서 빠져나가 옆으로 날아갔다.

"큭."

장태호가 뒤로 훌쩍 물러나며 손을 주물렀다.

"젠장. 경찰이라고 좀 치나 보다?"

"선생…. 아니, 씨발. 이 상황이면 이제 선생님은 아니지?"

장태호가 두 손을 앞으로 올리고 스탭을 밟았다.

"내 불주먹 맛보고 싶지? 그치?"

차유리가 인상을 쓰며 다가갔다.

"권투 배웠냐?"

"나 대회도 나갔다. 선수의 주먹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그래. 발버둥이라도 쳐봐."

장태호가 차유리의 얼굴을 향해 레프트훅을 날렸다.

차유리가 상체를 젖히며 주먹을 피했다.

장태호의 오른쪽 주먹이 곧바로 날아왔다. 처음부터 두 개의 공격이 연동되어 있었다.

차유리의 상체가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움직임이 빠르고 부드러웠다.

장태호의 오른쪽 주먹도 허공을 갈랐다. 그는 당황했다.

"어?"

그는 아마추어 대회에 나갔을 때 상대 선수가 그의 주먹을 피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선수는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

장태호가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다.

갑자기 차우리의 오른쪽 주먹이 장태호의 배에 꽂혔다.

"컥!"

장태호는 배에 쇠몽둥이가 꽂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커, 컥…."

차유리가 장태호의 손에 수갑을 걸며 말했다.

"너 주먹이 좀, 느리다?"

***

차우진이 차유리를 찾아갔다. 장태호가 수갑을 찬 채로 쓰러져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또 어디 부러뜨렸냐?"

차유리가 물었다.

"안 부러지게 잘 쳤다. 근데 이놈은 뭐야?"

"폭탄 테러 범인."

차유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테러?"

"아니면 암살이거나."

"빨리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저놈이 블루퍼핏 멤버의 무전기에 폭탄을 숨겨놨어. 무대 위에서 공연하다가 터지게."

"걔들은 괜찮아?"

"괜찮아. 터지기 전에 처리했으니까."

"휴우. 오빠들이 안 다쳐서 다행이다."

차우진이 차유리를 쳐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누나한테 오빠일 수가 있냐고. 블루퍼핏은 수연이보다도 젊은데."

"이런 곳에서 보면 다 오빠라니까?"

민수연이 뒤늦게 그곳에 도착했다. 그녀는 차유리가 불렀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진 장태호를 보더니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언니. 괜찮아?"

"난 괜찮아."

"아니. 그놈 괜찮냐고. 또 어디 부러뜨린 건 아냐?"

"이놈 폭탄 테러범이래. 아니면 암살자든지."

"어? 암살자?"

"블루퍼핏을 폭탄으로 죽이려 했다더라."

"앗! 그럼 아까 그 폭죽이…. 왜 살살 쳤는데? 좀 부러뜨리지 그랬어?"

"지금이라도 그럴까?"

"내가 할까?"

"아니야. 내가…."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방송국이나 블루퍼핏 쪽에서 신고했을 거야. 지금 어디 부러뜨리는 걸 출동한 사람들이 보면 참 좋아하겠다."

민수연이 걱정했다.

"앗. 이 새끼가 기절한 척하면서 우리 이야기 다 들은 거 아냐?"

차우진이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우리가 실제로 어딜 부러뜨린 건 아닌데, 혼자 떠들어봤자 누가 믿겠어?"

"하긴. 파렴치한 놈으로 찍히기나 하겠지."

***

형사들이 공개홀에 도착했다. 경찰특공대도 출동했다.

장태호 옆에는 차유리 혼자 있었다.

경찰특공대 팀장이 차유리를 알아보았다.

"어? 차 형사가 왜 여기 있어?"

"제가 신고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늦게 오신 거 아녜요?"

"상황이 종료됐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럼 저놈은 차 형사가 잡은 거야?"

"그렇죠."

"어디 부러진 데는…."

"누구요?"

"설마 차 형사겠어? 저놈이지."

"안 부러졌어요."

팀장이 팀원들을 주변으로 보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동생이 전기 전문가인데, 여기서 며칠 일했어요. 그러다 저놈이 수상하다면서 저보고 감시하라더라고요."

"그러다 살인미수를 알게 된 거야?"

"결론만 말하면 그렇죠."

"이야아. 동생이 큰일 했네."

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차 형사 동생은 어디 있어?"

"누구 좀 만나러 갔어요."

"누구?"

"오늘 죽을 뻔한 사람이요."

차유리가 작은 소리로 투덜댔다.

"나쁜 새끼. 블루퍼핏 만나게 해준다더니 또 뻥이었어. 거기에 나도 데려갔어야지."

"어? 뭐라고?"

"아니에요."

***

블루퍼핏의 매니저 실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우리 애들이 다 죽을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진 않았을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다른 멤버들은 운이 좋으면 다치기만 하고 목숨은 건졌을 겁니다."

"예?"

"폭탄이 옆에서 터졌는데 상처 하나 없긴 어렵잖습니까?"

"그, 그럼 상혁이는…."

"상혁이요?"

"쟤 말입니다."

실장이 가리킨 건 폭탄 무전기를 허리에 차고 있던 리더였다.

"아아. 저 친구. 음…. 그게 허리에서 터졌으면."

차우진이 두 손을 위아래로 벌렸다.

"일단 몸이 좀 분리…."

실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 그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블루퍼핏 네 명은 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공연은 어떻게 마치고 내려왔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박상혁은 그 말을 듣고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히이익!"

다른 세 명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우린 망했어. 마지막 노래 다 망쳤어."

"지금 노래가 문제야? 우리 다 죽을 뻔했는데?"

"그치? 살았으니까 다행인 거겠지?"

리더 박상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차우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무대에서 막 그런 건, 무슨 일인지 몰라서…."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요."

"저기, 그런데…. 그게 폭탄인 건 어떻게 아셨…. 아! 의심하거나 그런 게 아니고요! 너무 신기해서요!"

"꿈에서 봐서?"

"네?"

"농담입니다."

179. 조사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전기 전문가라서 그 무전기에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겁니다."

블루퍼핏 리더 박상혁은 그 폭탄이 허리에 붙어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차우진이 적당히 둘러댔다.

"방송 장비와 그 무전기의 통신에 문제가 생겼는데, 트러블 패턴이 좀 이상하더군요. 뭐랄까. 마치 무전기 속에 뭔가 들어있어서 말썽이 생긴 느낌?"

박상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만 가지고 폭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무전기나 통신을 좀 아시나?"

"네. 취미로 드론을 만집니다."

차우진이 즉시 말을 바꾸었다.

"거기 폭탄이 들어있다는 건 몰랐습니다."

"네? 그런데 어떻게…."

"그런데…. 내가 아까 여기 로드 매니저하고 복도에서 시비 붙은 거 압니까? 그놈이 시비를 걸던데."

매니저 실장이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건 그놈이 연예인을 맡았다고 어깨뽕이 너무 들어가서…."

"어깨뽕이 아니라 맛이 간 거겠죠."

"예?"

"그때 그놈이 맛이 갔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사람이라도 죽일 것 같은 느낌?"

"아니, 그래도 그 정도는…."

블루퍼핏 리더 박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우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납득하려고 애썼다.

"아. 그러니까 놀라운 직관력으로 장태호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셨군요."

"그놈 이름이 장태호군요. 맞습니다. 그놈이 많이 수상하더군요."

"어? 잠깐만요. 그럼 무전기 폭탄은 설마…."

"장태호가 무대 옆에서 블루퍼핏과 여기 실장님을 번갈아 보면서 아주 수상하게 웃던데요."

"헉!"

"그때만 해도 폭탄이라는 건 몰랐지만, 뭔가 저지를 거란 건 그때 알았습니다. 거기다 무전기의 이상한 트러블 패턴. 두 개를 조합하면, 거기에 뭔가 심각한 수작을 부렸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박상혁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억. 헉. 장태호가 저를 죽이려고…. 아니, 왜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차우진이 질문했다.

"그놈하고 사이 나쁩니까?"

"좋지는 않았죠. 사람이 좀 이상해 보였거든요."

"원래부터 알던 사이는?"

"아뇨. 회사에서 처음 봤습니다."

실장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저기, 선생님. 그런 추측만 가지고 애들한테 캐묻듯이 그러시는 건 좀…."

차우진이 옆을 돌아보았다.

"음. 뭐지? 목숨을 살려주다가 나도 죽을 뻔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걸 막으시네?"

"예? 아니, 그게 아니라…."

"남의 일인데 괜히 목숨 걸고 구해줬나? 구경만 할걸."

블루퍼핏 리더 박상혁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히이익!"

실장은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라, 상혁이가 보기보다 대가 약합니다. 그리고 블루퍼핏의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 상황에서도 노래를 끝까지 부른 점을 홍보하면 응원을 받으면 받았지 욕을 먹지는 않을 텐데."

차우진이 실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이러실까? 블루퍼핏이 아니라, 회사에 뭐 찔리는 거라도 있으시나?"

실장이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절대로 아닙니다."

"반응이 많이 이상하시네? 그런 거 아니면 그냥 구경하셔야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리실까?"

실장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런 심각한 사건의 원인이 얘들에게 있다고 의심받으면, 고만고만한 팀인 블루퍼핏은 끝장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자세히 형사들이 물을 겁니다.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그거야 회사에서 어떻게든 힘을 쓰면…."

"폭탄 테러가 힘 좀 쓴다고 막아지겠습니까? 블루퍼핏 소속사가 5대 기획사라도 되나? 아니지. 그건 5대 기획사도 못 막지."

"그건 아닙…."

차우진이 계속 압박했다.

"아니면 뭐, 그 회사도 나인세븐 엔터 같은 곳인가?"

나인세븐이라는 말에 매니저가 펄쩍 뛰었다.

"우리는 그런 회사가 아닙니다!"

"그 회사가 어떤 곳이었는지 아나 봅니다?"

"어떻게 망했는지는 업계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면 대답하시죠? 숨기는 게 뭡니까? 알아야 대비를 하지요."

실장은 차우진의 연이은 압박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짧게 말했다.

"연 상무님이 꽂은 애라서, 공채가 아니니까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연 상무?"

실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닙니다. 그건 그냥 우연입니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십시오."

***

현장에서 폭발물이 터지긴 했지만, 폭탄처럼 터진 게 아니라 폭죽처럼 불탔다. 인명피해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건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형사들이 박상혁을 조사했다. 공개홀에는 과수대가 투입됐다.

담당 형사가 서장과 과장 앞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범인이 저항할 때 사용한 드라이버는 무전기를 분해할 때 사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확실해?"

"사이즈가 딱 맞습니다. 그래서 드라이버와 나사 머리의 긁힌 흔적을 국과수에 정밀분석 요청했습니다."

보고를 받던 형사과장이 말했다.

"서장님. 이건 계획적입니다."

"폭탄을 가져간 시점에서 이미 계획적이야."

형사는 무전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폭탄으로 변했는지도 알아냈다.

"범인은 매니저라는 신분을 이용해 운영팀으로부터 무전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소지하고 있던 드라이버로 뒤뚜껑을 열고 초소형 폭탄을 심었습니다."

"범인이 폭탄 전문가인가?"

"그런 경력은 없습니다. 초소형 폭탄은 외부에서 입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는 현재 조사 중입니다."

서장이 화면 속 사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케이스는 뭐로 잘랐는데 저렇게 깔끔하게 잘렸어? 공업용 레이저 커터라도 썼어?"

"현장에 있던 직원이 소지하고 있던 공구로 잘랐습니다."

서장은 당황했다.

"휴대용 공구로 잘랐는데 저렇게 된다고?"

"예. 자르는 모습을 본 목격자가 다섯 명이나 됩니다."

"허…. 공구를 얼마나 좋은 걸 쓰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서장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계속 들어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일단 보고하러 갈 테니까 새로운 거 나오면 바로 연락해."

"알겠습니다."

***

이 사건의 범인을 현장에서 체포한 사람은 차유리다.

그녀는 사건 관할 지역 경찰서에서 형사과장과 형사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차유리를 아는 사람도 있었다.

차유리가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래서 그놈을 조사하기 위해 다가갔는데, 갑자기 저한테 드라이버를 휘둘렀습니다. 어휴. 진짜 위험했습니다. 그거 맞았으면 죽었을 뻔."

형사과장이 물었다.

"차 형사 소문은 나도 들어서 아는데, 그런 걸 맞을 사람은 아니지 않나?"

"아. 들으셨구나. 어디서 들으셨을까?"

뒤쪽에 앉아 있던 형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들었다.

"윤 선배한테 들으셨구나."

형사과장이 물었다.

"그 드라이버를 피한 후에는?"

"자기가 권투 선수였다면서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길래, 저도 딱 한 대만 때렸습니다."

"음? 범인이 권투 선수라고?"

윤 형사가 설명했다.

"확인해봤더니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한 이력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차 형사가 범인을 뼈가 나갈 정도로 팼구나."

차유리가 말했다.

"뼈는 안 부러뜨렸는데요?"

"병원에서 그러는데, 그놈 갈비뼈에 금이 갔다더라."

"그놈 뼈가 약하네요. 멸치라도 좀 먹지."

"하, 하하. 하여간 수고했어. 차 형사 덕분에 범인을 잡았으니까. 안 그랬으면 우린 범인 찾는다고 개고생하고, 아직도 못 잡았냐고 욕은 욕대로 먹었겠지."

"에이. 관할은 달라도 돕고 사는 거죠."

"차 형사 덕분이라고 내가 위에 확실히 이야기할게."

"와. 승진…은 어렵겠죠? 제가 그동안 작살 낸 놈이 좀 많아서…."

"이런 실적 계속 쌓이면 어떻게든 될 거야."

형사과장이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차 형사. 그놈이 범인인 건 어떻게 알았어?"

"동생이 전기 전문가인데요. 그 공연장 무대 공사 일을 며칠 했거든요. 오늘은 현장 안내 일도 하고요."

"동생이 고생하면서 힘들게 사는구나."

"그렇게 일하다가 수상한 놈을 발견했답니다. 그래서 저한테 감시하라고 한 거고요."

"그래. 수상한 놈을…."

형사과장은 깜짝 놀랐다.

"어? 잠깐만. 혹시 동생이 현장에서 폭탄을 해체한 그 사람이야?"

"네. 맞습니다."

"혹시 동생이 군대에서 폭발물 전문가로 복무했나?"

"취사병 출신인데요?"

"어? 취사병 출신이 폭탄을 어떻게…."

"그건 군대고, 사회에서는 전기 전문가라니까요."

형사과장이 불평했다.

"아니, 전기 다루는 사람이 왜 폭탄을 함부로 만져? 잘 해결돼서 다행이지만, 아마추어가 건드리면 큰일 날 뻔한 거 몰라?"

"욕먹을 짓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 동생 아니었으면 블루퍼핏은 오늘 다 죽었어요. 그럼 여기 계신 분 중에도 옷을 벗는 분이…."

"어…. 그렇지? 나도 고마워하고 있어. 그래도 아마추어가 그랬다니까…."

윤 형사가 서류를 쓱 내밀었다.

"과장님. 이거 과장님만 보시죠."

"이게 뭔데?"

"차우진 씨 신원조회 서류인데요. 그, 직업이…."

형사과장이 인상을 썼다.

"왜? 전기 전문가라는 것도 가짜야?"

"전기 전문가는 맞는데요."

"그럼 직업이 왜? 지금은 전기 안 하고 다른 거라도 하…. 어?"

서류를 읽어본 형사과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사 이름이 왜 이리 많아? 지금 이 중에 어디 근무한다는 거야?"

"전부 다입니다."

"어?"

형사과장은 당황했다.

"차 형사의 동생이 이 회사들에서 임원으로 재직한다고? 하나가 아니라 전부 다?"

"예."

"이거 진짜야?"

"건강보험공단 쪽에 요청해서 조회한 겁니다."

"한 사람이 이걸 다?"

"예."

형사과장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차유리를 보았다.

"차 형사. 동생이 기업 이사야?"

차유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이렇게 여러 회사에서?"

차유리가 서류를 힐끗 보며 물었다.

"지금은 몇 개인데요? 자꾸 늘어나서 저도 다는 모르는데."

"어? 어? 계속 늘어나?"

"임원으로 오라는 곳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몇 개인데요?"

"직접 봐봐."

형사과장이 서류를 내밀었다. 차유리가 그걸 읽어보았다.

"여기엔 회사 다닌다는 것만 나오는구나."

"응? 그럼 뭐가 더 있어?"

회사 지분도 있다.

"아닙니다."

"차 이사 동생분이 참… 잘나가시는구나."

어느새 호칭이 바뀌었다.

"제가 잘 가르쳤습니다."

"그, 그래? 아니, 차 형사는 체육계 아닌가? 뭘 가르쳤…."

"과장님. 사건에 집중하셔야죠. 저 집에 가야 하는데요."

"어? 어. 그렇지. 내가 좀 당황해서 그랬어. 아니, 그런데 말이야. 차 형사 동생분은 이렇게 잘나가면서, 왜 공개홀 세트장 공사를 했대?"

차유리가 물었다.

"제 동생이 참사를 막아서 몇 분 옷 벗는 걸 막아줬는데, 혹시 의심하시는 건지…."

"의심하는 거 아니야.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차유리가 서류를 슬쩍 본 후에 설명했다.

"제 동생이 LPP 엔터에도 이사로 근무하잖아요. 방송 현장을 생생하게 알려고 일부러 현장 일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언더커버죠. 언더커버."

"아! 언더커버!"

"제 동생이 원래 영화 촬영장이나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종종 일해요. 그것도 다 현장을 알기 위해 하는 일이죠."

형사과장이 감탄했다.

"아. 역시 차 형사 동생분처럼 대단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

차유리가 경찰서 밖에서 차우진을 만났다.

"너 이 새끼."

"왜 보자마자 욕이야?"

"너 다니는 회사가 더 많아졌더라?"

차우진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거 명함만 박아놓은 거야. 명함만."

"명함만 박는데 의료보험료가 왜 나가? 월급을 주니까 나갈 거 아냐?"

"굳이 월급까지 주더라고. 돈이 남아도나 봐."

"LPP 엔터는 또 뭐야? 너 거기도 이사 명함만 박은 거야?"

그녀는 형사과장 앞에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던 것처럼 둘러댔다.

그런데 LPP 엔터에도 차우진의 자리가 있다는 건 차유리도 오늘 처음 알았다.

"어…. 그 회사에는 지분도 좀 있지?"

차유리가 목을 옆으로 뚝뚝 소리가 나게 꺾은 후에 말했다.

"부자 동생아. 일단 소고기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내가 오늘 배가 많이 고프다."

"내일 호텔 뷔페 쏜다니까."

차우진은 그 조건을 걸고 오늘 차유리를 움직여 로드 매니저 장태호를 잡았다.

차유리가 말했다.

"너 의료보험료 참 많이 내더라?"

"그것도 봤냐?"

"소고기 사라."

"주말에 사줄게."

"한우."

"알았다고."

"그럼 오늘은 보족세트?"

"동족 아니냐?"

"반사."

180. 조사 II

정예지가 전화를 걸어 물었다.

- 우진 오빠. 혹시 아직도 경찰서에서 조사받아?

"난 간단한 참고인 조사만 받고 나왔다. 너는?"

- 난 현장에서 그냥 몇 가지만 물어보고 끝나던데?

차우진이 충고했다.

"나중에 누가 찾아가서 더 물어볼 수도 있어. 그때 괜히 상상력 발휘하지 말고 본대로만 말해."

무대 위에서 차우진이 뭘 어떻게 했는지 본 사람은 네 명이나 더 있다. 정예지가 차우진을 돕겠다고 이야기를 꾸미다가 꼬이면, 오히려 의심만 산다.

정예지가 큰소리쳤다.

- 우리가 어디 장사 한두 번 하나. 잘 알지.

"우리가 같이 뭘 했다고?"

- 나 오늘 초대손님이어서 그 무대에 올라갔던 것뿐이니까, 그것만 말하면 되지?

"그러면 되는데, 왜 오늘 블루퍼핏의 게스트로 나온 거야?"

- 우진 오빠가 목동 공개홀에 있으면 놀래주려고?

"재밌냐?"

- 재밌지. 덤으로 스릴도 있어서 좋았어.

"스릴 너무 좋아하지 마라. 다친다."

- 혹시 나 걱정해주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다."

- 흐흐.

***

경찰은 목동 공개홀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사건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경찰 방침은 일단 비공개 수사였다.

당시 현장에는 기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연예 전문 기자였지만, 강력사건이 전문 기자인 도정민도 있었다.

도정민 기자는 1년쯤 전에 실종됐다가 최근에 돌아왔다.

그는 실종 기간에는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했지만, 집에 돌아오고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기억도 돌아왔다.

도정민 기자가 차우진을 만나 말했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1년 만에 돌아왔는데 바로 복직된 건, 회사도 제 사건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우진도 무슨 상황인지 안다.

"용구가 KMTV 보도국의 부장급 기자였으니까요."

최용구가 1년 전에 도정민을 절벽에서 밀었다.

"예. 그래서 복직은 했는데, 저한테 사회부 일을 맡기기엔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기사로 터트리는 게 무서워서?"

도정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그래서 일단 문화부 쪽으로 복직됐습니다. 당분간 여기서 일하다가 사회부로 돌아가야지요."

도정민은 목동 공개홀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

그때 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궁금해하는 연예 기자는 더 있었다.

그런데 보통은 그 사건을 해프닝이나 사고 관점에서 접근했다. 깊게 파지도 않았다. 기사를 쓰더라도 단순한 조명 사고인 줄 알고 짧게 몇 줄 정도만 나갔다.

하지만 강력사건 전문 기자인 도정민은 그 상황을 다르게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관할 경찰서부터 취재했다.

"그러다 거기서 차우진 씨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뭐라던가요?"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정도?"

"딱 맞는 판단이군요."

"그때 느낌이 왔습니다. 아. 차우진 씨가 현장에 있었구나. 이거 사건이구나."

차우진이 혀를 찼다.

"이러라고 구해준 게 아닌데요."

도정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이야기부터 들어보려고 왔잖습니까? 차우진 씨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기사부터 냈을 겁니다."

차우진이 도정민을 보았다. 도정민은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아직 기사화하면 안 됩니다. 이거 아직 해결된 거 아닙니다."

"장태호는 이미 잡혔다고 들었는데요?"

"도 기자님은 사고당하기 전에는 보도국의 에이스 기자였다더니, 벌써 많은 걸 알아내셨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해결된 게 아니란 게 무슨 뜻입니까?"

"잡힌 놈이 범인인 건 맞는데, 꼭두각시일 수도 있잖습니까?"

도정민의 눈이 번뜩였다.

"주범이 따로 있다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멸망한 세계에서는 오늘 무전기 폭탄을 사용한 장태호가 어떻게 됐는지 듣지 못했다.

'제거됐을 수도 있겠지.'

박창수는 멸망한 세계에서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목동 공개홀이 반년 동안 폐쇄됐다고 했다. 그리고 반년 후 재개장할 때 공개홀이 무너졌다고 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 사건은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체포된 범인은 장태호. 블루퍼핏의 로드 매니저입니다."

"예. 그건 들었습니다."

"블루퍼핏 소속사에 윤 이사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장태호를 로드 매니저 자리에 꽂았다더군요."

도정민이 바로 알아듣고 말했다.

"친인척 관계일 수도 있고, 뇌물을 먹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윤 이사도 이번 사건에 개입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걸 알아보시죠. 직접 뛰면 위험하니까 그러진 마시고."

"저는 원래 직접 뛰는 스타일인데…."

"윤 이사가 꽂았다는 건 경찰도 알아낼 겁니다. 그러면 조사 안 할 리가 없죠. 아는 경찰이 있다면서요. 경찰이 뭔가 알아내면 그걸 물어보시죠."

"아. 그러겠습니다."

"뭔가 알아내면 저한테도 좀 알려주시고요."

***

주말에 차우진이 곽민지와 김세나를 소고기 전문점에서 만났다. 지난번 공연 때 차우진은 곽민지에게 소고기를 사준다고 했다. 오늘이 그걸 사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차유리도 따라왔다. 차유리에게도 소고기를 산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한 방에 약속 두 개를 해치울 수 있다.

차우진이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누나야."

차유리가 툴툴댔다.

"야. 넌 나 소고기 사준다는 게 이렇게 끼워서…. 어?"

차유리가 곽민지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너 연예인 아니니?"

곽민지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예인은 아니고요. 그냥 드라마에 몇 번 나갔던 거예요."

"너 노래도 하잖아."

"노래도 그게 다예요."

"그럼 지금은?"

"학교 다녀요. 학생이거든요."

고기는 차우진이 구웠다.

김세나는 고등학생답게 잘 먹었다. 곽민지는 더 많이 먹었다.

하지만 먹는 양으로는 차유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야. 먹는 게 자꾸 끊기잖아. 고기 빨리 구워라."

"빨리 굽기만 하면 최고의 맛을 끌어낼 수 없어. 귀한 건데 정성을 다해 구워야지."

"내가 구울 테니까 비켜."

"어허. 집게는 양보 못 하지."

고기와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다가 차유리가 형사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세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미녀 형사! 진짜 멋있으세요!"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미녀는 아니지."

"닥쳐."

차유리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학생 미래에 꿈이 혹시 형사?"

"오늘부터 형사를 목표로 하려고요!"

"하지 마."

"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곽민지도 물었다.

"범인 잡아보셨어요?"

"자주 잡아. 며칠 전에도 한 놈 잡았다. 목동 공개홀에서."

곽민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거기에 범인이 있었어요?"

"응? 어. 있었어. 잔챙이 한 마리. 그놈이 이렇게 반항하길래 내가 이렇게 팍 잡았지."

"우와아!"

차유리가 차우진을 돌아보며 자랑했다.

"우진아. 이 어린 양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보이냐? 내가 이런 사람이다."

"좋냐?"

"좋지. 이런 맛이라도 있어서 이 일 하는 거니까."

신당읍 출신 루나페어리 멤버 김세린에 관한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

차우진이 김세나에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랑하시더라. 김세린이 특별한 날에 초콜릿 많이 받았다고."

"네. 엄청 받았죠."

차유리가 물었다.

"그런 특별한 날에는 여자는 사탕 받는 거 아냐?"

"언니가 사탕을 안 좋아해요. 줘도 안 먹어요. 우리 동네 오빠들은 그걸 다 알아요. 그래서 사탕 줄 일이 있으면 대신에 초콜릿을 줘요. 다들 그렇게 해요."

곽민지가 옆에서 말했다.

"나도 사탕보다는 초콜릿이 좋아."

"나도 그래. 그래서 개꿀이지. 그거 언니 몰래 애들한테 팔아서 용돈도…. 앗! 형사 언니! 아니에요! 안 그랬어요!"

"언니라고 불러서 용서해줬다."

"언니!"

"초콜릿 더 팔아도 돼."

"진짜요?"

"걸리지만 않으면 돼."

***

차우진이 딥어스테크에 출근했다.

오늘은 연구소만 방문하고 조사팀은 소집하지 않았다.

조사팀원 송미소는 비서실 소속이다. 차우진이 출근하면 그녀가 같이 움직인다.

송미소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이번에 목동 공개홀에서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기사화된 건 조명 해프닝 뿐인데 뭘 어디서 어떻게 들었을까?"

"목동 공개홀 비리를 조사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알아보다가 경찰 쪽 소식을 들었어요."

"열심히 일하네요."

송미소가 질문했다.

"차 이사님. 혹시 목동 공개홀 사태를 예상하시고 미리 조사하라고 하신 건가요?"

"기본 전제가 틀렸습니다."

"네?"

"그곳을 조사한 덕분에 우연히 범인의 수작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건가요?"

"그런 겁니다."

송미소가 차우진을 잠시 보다가 공손하게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목동 공개홀 조사는 이제 중단할까요?"

"계속해요."

"네? 사건은 이미 끝났는데 왜…."

"그 사건은 우연히 알게 됐다니까요."

"네. 그런 거라고 하셨죠."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닐 것 같아서."

"아…."

차우진이 단서를 달았다.

"대놓고 알아보지는 말아요. 저절로 흘러나오는 첩보만 수집해요. 조사팀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가 노출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닙니다."

"네. 주의할게요."

***

차우진은 오후에는 SL 제약으로 갔다.

성혜리가 커피 두 잔과 도넛을 가져왔다.

'차 이사님한테는 먹을 게 먹히는 느낌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며칠 전부터 유명한 수제 도넛 전문점에 매일 들렀다.

그녀가 가져온 도넛을 차우진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성혜리가 그걸 보며 뿌듯해했다.

'먹히나? 먹히는 거지? 먹힌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거 맛있군요. 어디서 산 겁니까?"

"제가 또 사다 드릴게요."

"그러면 미안해서."

"어머! 꼭 사다 드리고 싶어요."

문제는 대화의 주제가 도넛이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도넛을 만드는 방법부터 여기 들어간 재료가 뭔지 분석하는 단계까지 갔다.

성혜리가 한참을 떠들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거 아니야! 도넛만 먹히면 안 돼! 도넛은 메인이 아니라고!'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제안했다.

"차 이사님. 저번에 전화로 말씀드린 CF 제작이요."

"SL 제약에서 무슨 약을 팔려고요?"

"약이 아니라 비타민 음료요. 우리가 전문 의약품만 만드는 건 아니잖아요. 영양제도 만들고, 비타민 음료도 만들어요."

"아. 그렇죠."

"그건 CF를 가끔 해줘야 하니까요. 이번 분기 CF는 비타민 음료로 잡혔어요."

"그건 내가 도와줄 일이 없어 보이는데?"

성혜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차 이사님은 대중음악이랑 영화 제작에 조예가 깊으시잖아요."

"얕아요."

"네?"

"조예가 얕습니다."

"아니, 제가 저번에 보고 들은 게 있는데…."

"잘못 보고 잘못 들은 겁니다."

"노래 만드시는 것도 보고…."

"민지가 만드는 거 방향만 잡아준 겁니다."

"영화 제작에도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윤 감독님이 말씀하시고…."

"촬영장에서 사고 날 뻔한 거 막아준 이야기였는데 오해하셨구나."

성혜리가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을 안 맡으려고 둘러대는 거겠지?'

그래서 미끼를 준비해두었다.

"우리 CF에는 메인 모델 외에도 조연 자리가 있어요. 거기 곽민지가 나오면 딱이에요. 차 이사님이 그 부분을 맡아주시면…."

"공부해야 하는 고딩을 CF에 출연시키면, 걔가 학교를 편하게 다니겠습니까?"

"네? 하지만 곽민지는 연예인…."

"민지는 자기가 연예인이라는 자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CF 출연료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감수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지만 곽민지는 음원을 발표했잖아요. 목동 공개홀에서는 노래도 불렀다면서요."

"그건 매일 TV에 얼굴이 나오는 CF와는 다르죠. 민지는 공연도 거의 안 하고 행사도 안 뜁니다."

성혜리가 시무룩해졌다.

"그럼…. 안 도와주시는구나."

"음…."

"저는 차 이사님이 분석팀 일을 시키면 진짜 열심히 했는데…."

"어…."

"나만 열심히 했어."

차우진이 그녀에게 일을 많이 시키긴 했다. 앞으로도 시켜야 한다.

"뭘 도와주면 됩니까? 본격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간단한 거라면…."

성혜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도 다시 반짝거렸다.

"그냥 회의도 같이 참석해주시고, 현장 답사만 같이 가주세요. 실무 제작 쪽 일도 도와주시면 좋…."

"회의 몇 번에, 답사 한두 번. 거기까지."

"네! 일단 그렇게 해요."

성혜리가 큰 꿈을 꾸었다.

'답사를 둘이서 배 끊기는 섬으로 가면….'

"오호호호!"

"이상하게 웃네."

"어머! 아니에요."

181. 잠복

차우진이 SL 제약 홍보팀의 비타민 음료 CF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기획 회의에 올라온 콘셉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 CF는 예지 씨가 하면 어울리긴 하겠는데….'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차우진 마음대로 꽂을 순 없다. 사장에게 부탁하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그럴 만한 일은 아니다.

차우진은 출연자 후보 목록에 정예지의 이름도 한 줄 추가하는 정도로만 의견을 내놓았다.

'예지 씨가 최선이면 알아서 뽑히겠지.'

성혜리가 그걸 보고 생각했다.

'정예지는 탈락시켜야지. 누구 좋으라고.'

회의 도중에 CF 촬영 장소 답사 이야기가 나왔다.

성혜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제안했다.

"섬은 어때요?"

"섬?"

"서해안에 딱 좋은 섬이 있어요.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그리고 배도 일찍 끊기고.'

그녀가 속마음을 감추며 설명했다.

"거기 가면 진짜 시원한 느낌으로 CF를 찍을 수 있어요."

회의를 진행하던 과장이 말했다.

"그러면 거기도 후보로 둡시다. 차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차우진이 이번에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냈다.

"목동 공개홀도 가보고 싶군요."

성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거기는 우리 이번 CF랑 딱히 접점이 없는데…."

"있는지 없는지는 가서 현장을 보고 확인하고 싶군요."

가서 현장을 본다는 말에 성혜리가 자동으로 반응했다.

"어머! 오늘이 마침 딱 비어요."

***

차우진이 성혜리와 함께 목동 공개홀을 방문해 홍보 담당자를 만났다. 지난번에는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홍보 담당자가 설명했다.

"공연장 전체 관리는 저희가 하지만, CF 무대 세트 제작은 SL 제약에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공연장이 아니라 건물 내부 시설을 CF의 배경으로 삼고 싶습니다. 사무실 같은 곳이요."

"네? 공연 무대가 있는 공개홀이 아니라 왜 굳이 사무실을…."

"CF 콘셉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후보지를 찾기 위해 몇 군데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곳을 선정해야 합니다."

"그럼 기존 공연 스케줄을 조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죠. 여기로 정해진다면 휴관일에 조용히 찍고 가겠습니다."

홍보 담당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야 뭐 문제 될 게 없겠네요. 내부를 보여드릴 테니까 일단 같이 가시죠."

"사진촬영을 좀 했으면 합니다만?"

"사무실 내부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혹시 옥상도 볼 수 있겠습니까?"

홍보 담당자가 자랑했다.

"그럼요. 우리 옥상 정원은 탁 트인 전망이 기가 막힙니다."

"옥상에 정원이라…."

옥상 정원이 있으면 보통은 그곳과 연결된 활짝 열린 출입구도 있다.

차우진이 씩 웃었다.

"마음에 드는 환경이군요."

***

차우진은 목동 공개홀 내부 사진을 실컷 찍은 후에 성혜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성혜리가 의견을 냈다.

"여기는 우리 CF랑은 안 맞는데요? 특별함도 없고 특색도 없고 그냥 사무실 복도인데, 이런 곳은 많잖아요."

"CF는 여기서 안 찍어도 됩니다."

"네? 차 이사님이 여기를 미니까 답사까지 오신 줄 알았는데요?"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언제요? 저랑 같이 다니셨잖아요."

"틈틈이 잘?"

그녀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답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서해안 섬을 밀었기 때문에 여기가 탈락했다는 건 오히려 반가운 소리였다.

"그럼 우리 저녁 먹으러 갈래요?"

오늘 그녀와 저녁을 먹으면 좋은 알리바이가 생긴다.

차우진이 말했다.

"내가 잘 아는 가게가 있는데."

성혜리가 기대했다.

"앗! 뭐 파는 곳인데요? 스테이크? 오마카세? 중식 코스?"

"국밥."

"네?"

"국물이 끝내줍니다."

***

차우진이 그날 밤에 목동 공개홀로 돌아왔다.

공개홀의 건물 높이는 높았지만, 차우진의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건너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 옥상에 나타났다.

옥상 정원에 CCTV가 없다는 건 아까 확인했다.

"역시 밤에도 옥상 정원 출입문을 잠그지 않아. 여긴 이럴 것 같더라."

옥상에는 정원과 연결된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문제는 CCTV인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 아까 내부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 건물 1층에는 CCTV가 많았다. 공연장 쪽에도 CCTV가 있었다.

이 공개홀을 방문하는 관객들은 1층과 지하주차장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 경로에는 CCTV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공개홀이 아니라 사무실 쪽의 2층은 CCTV가 거의 없었다. 사무실 3층부터는 엘리베이터 외에는 CCTV가 아예 없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는 이 공개홀이 무대 폭발사건으로 폐쇄됐다가 반년 후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때는 관객이 공연을 보던 중에 공개홀이 무너졌다.

"이제는 상황이 변했으니까, 건물을 무너뜨리는 시기도 변하겠지."

지난번 무전기 폭탄 사건은 차우진이 막았다. 덕분에 이 공개홀은 반년 동안 문을 닫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당장 일주일 후에 다음 공연이 열린다. 경찰 몇 명이 공연 당일에 이곳에 배치될 예정이다.

"범인은 경찰이 온다고 해서 그만둘 놈은 아니야."

멸망한 세계에서 공개홀이 반년 만에 문을 열 때, 그 세계의 경찰이 보안이나 경비에 신경 안 썼을 리 없다. 같은 일이 재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현장 수색도 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건물이 무너졌다.

이번에 경찰 몇 명이 이 건물을 주시한다고 해서 범인이 포기할 리는 없다.

차우진이 얼굴을 가리고 계단을 이용해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목동 공개홀은 보안업체의 출입 제한장치나 동작 감지기도 2층 입구까지만 있었다.

3층 사무실 문은 잠겨있기는 했다. 그런데 대부분은 디지털도어락이나 출입카드 감지기가 아니라 열쇠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옛날 건물이라 그런가. 이런 곳에는 돈을 안 쓰는구나. 이러면 폭탄을 설치하기 참 쉽지."

차우진이 먼저 자물쇠 방식으로 잠긴 곳부터 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잠긴 문을 열어야 할 일이 자주 있었다. 어떤 곳은 때려 부수면 되지만, 문이 튼튼한 곳은 자물쇠를 따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차우진이 철사 두 개를 문 손잡이의 구멍에 꽂고 긁었다.

사무실 문이 간단히 열렸다.

"누가 침투를 시도해도 쉽겠는데?"

차우진이 사무실 내부를 확인했다.

그나마 PC는 꺼놓고 갔다. 그런데 그중 한 대는 로그인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가 키보드 바닥에 붙어 있었다.

차우진이 탄식했다.

"이 공개홀의 보안은 그냥 없는 수준이구나."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와 차유리에게 물었다.

"공개홀에서 무전기 폭탄을 터트리려던 그놈 말이야."

"장태호?"

"그래. 그놈. 어떻게 됐어?"

"네가 왜 경찰 수사에 관심이… 있어야지. 너도 그때 현장에 있었는데."

"자백은 했어?"

"하긴 했는데,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저질렀다고 하더라."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사람 몸에 폭탄을 붙이진 않지. 다른 복수 방법도 많은데."

"그렇긴 하지."

"그 폭탄은 어디서 구했대?"

"현장에 파편밖에 없어서 제대로 확인하긴 어려운데, 수제품일 확률이 높다더라."

"경찰이 일을 대충 하네. 그럼 수제품이지 폭탄 무전기가 기성품이겠냐? 어디 뭐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아?"

차유리가 인상을 썼다.

"야. 왜 나한테 시비야? 내가 수사 담당자냐?"

"그놈이 수제품 폭탄을 어떻게 만들었대? 폭탄 전문가야?"

"인터넷에서 샀대."

"진짜로 그런 걸 판다고?"

"쇼핑몰은 아니고, SNS로 연락해서 퀵으로 받았다더라."

"누가?"

"판 놈은 찾는 중이지."

차우진이 질문을 다시 했다.

"아니. 누가 먼저 제안했냐고."

"어?"

"장태호가 폭탄 파는 놈을 어떻게 찾았겠어? 인터넷에 검색한다고 사제 폭탄 판매 쇼핑몰이 나올 리는 없는데."

"그러네?"

"파는 놈이 먼저 장태호에게 연락한 거겠지."

"그 추리도 그럴듯한데? 야. 그래도 그 정도는 담당자가 조사하고 있겠지."

***

목동 공개홀 사건 담당 형사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폭탄 판매자의 SNS 계정 추적은 실패했습니다. 일단 외국 계정인데, 그것도 몇 바퀴 돌려서 만든 것 같습니다."

팀장이 인상을 썼다.

"젠장. 사이버수사팀에 요청해서 더 찾아보라고 해."

다른 형사가 보고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폭발물 잔해를 분석해 화약의 성분을 확인했습니다. 화학 쪽 전문가라면 만들 수 있는 폭탄이랍니다."

"그러면 그런 폭탄의 제조가 가능한 전문가를 전부 다 찾아."

"팀장님. 그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국내에만 몇만 명은 될 겁니다."

"그렇게 많아?"

"우리나라에는 화학 전공자가 많습니다. 가능한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젠장. 어렵네."

팀장이 머리를 긁다가 말했다.

"차 형사가 조금 전에 전화해서 그러더라. 폭탄을 장태호에게 판 놈이 진짜 범인일 거라고."

"저도 차 형사한테 연락받았습니다."

"장태호는 목동 공개홀에서 무전기 폭탄을 터트리려고 했잖아. 차 형사 말대로면, 폭탄을 판 놈도 그걸 거기서 쓸 거라는 걸 알았을 거야. 그 공개홀과 원한 관계인 사람들은?"

"조사 중입니다."

"블루퍼핏은?"

"그건 이미 하고 있습니다만, 나오는 게 없습니다."

"소속사와 갈등이 있는 곳도 다 조사해."

"알겠습니다."

팀장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놈을 찾으려면, 타깃이 블루퍼핏인지 아니면 목동 공개홀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범인은 타깃과 원한 관계인 사람 중에 있겠지."

****

이튿날 밤에 차우진이 다시 목동 공개홀에 침투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장태호가 체포되지 않았으면 죽여서 추적을 피할 생각이었겠지. 멸망급 테러 빌런 새끼가 그런 거 잘했는데…."

차우진은 목동 공개홀이 다시 공격받으면 이번에는 아예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안다.

멸망급 테러 빌런은 내세우는 이념도 있고 목적도 있었다. 그 이념이 개소리고 목적은 헛소리지만, 그래도 뭔가 내세우긴 했다.

문제는 타깃을 정하는 방식이다.

"그놈이 뒤에 있다면 목동 공개홀이나 블루퍼핏은 목표가 아니야. 그놈에게는 사람 목숨이 그냥 수단이니까."

멸망 초기의 범죄 전문가들은 그 멸망급 빌런을 분석한 영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책을 쓴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암살당한 전문가도 있었다.

"근데 그 새끼가 지금 시기에 한국에 수작을 부린다…."

나중에는 한국에서도 테러를 저지르지만, 그건 몇 년 후의 일이다.

"이 시기에 이미 한국에 부하를 심어놓고 몇 년 동안 준비했겠지."

왜 목동 공개홀에서 폭탄을 터트리려고 했는지도 안다.

"그 테러 빌런 새끼한테는 이게 다 연습게임이니까."

***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차유리가 물었다.

"너 요 며칠 밤마다 어디 돌아다니냐?"

"약속이 자꾸 생기네?"

"냄새가 나."

목동 공개홀에 침투한 정도로는 몸에 특이한 냄새가 묻지는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소매를 코에 대보았다.

"무슨 냄새?"

"여자 만나는 냄새."

차우진이 멈칫했다.

"뭐?"

"딱 걸렸지?"

"누나 같은 사람이 형사를 하는데 범인이 잡혀줘?"

"야. 나 검거율 높다."

"그런 검거율로 왜 헛다리를 짚냐?"

"여자 아니냐?"

"아니야."

차유리가 납득했다.

"하긴. 네 와꾸로 여자는 무리지."

"반사."

"야. 난 나보다 약한 놈은 안 만나는 거야."

"100살 돼서 주먹에 힘 빠지면 그때 만나게?"

"너 왜 이렇게 잔소리야? 너 이 새끼! 나 내보내고 이 소파를 차지하려고!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왜 결론이 소파냐."

***

이튿날 밤에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에 다시 침투했다.

"어라?"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3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밤이 늦었지만, 직원이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차우진이 인기척이 난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오케이. 한 놈 찾았다.'

182. 침입

직원이 늦은 밤에 사무실에 혼자 있을 수는 있다. 야근일 수도 있고 집에서 싸우다 쫓겨나 갈 곳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혼자 있는 직원이 저렇게 얼굴을 싸매고 있을 리는 없다.

'외부 침입자인 건 당연하고.'

박창수는 이 공개홀이 어떤 공격으로 무너지는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건물로 미사일을 쏘거나 지하주차장에서 폭탄 트럭을 터트려 무너뜨리지는 않겠지.'

멸망 초기에는 한국에서도 그런 짓이 곧잘 벌어진다.

하지만 현대 문명과 치안이 유지되는 현재 한국에서 그런 미사일을 빌런이 손에 넣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트럭 짐칸을 채울 만큼 폭약을 만드는 것도 어려워.'

그래도 그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래서 범인을 찾지 못하면 공개홀 행사 당일에 지하주차장을 조사할 생각은 있었다.

차우진은 건물 폭파에 다른 방법이 사용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 건물의 취약지점에 폭탄을 설치하는 게 더 간단해.'

그는 그 짓을 하는 놈을 찾으려고 며칠째 이 건물을 밤마다 확인했다. 그러다 오늘 한 놈 걸렸다.

최상만이 사무실의 PC를 이용해 자료를 검색했다. 그가 사용한 PC는 로그인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가 키보드 밑에 붙어 있었다.

"이거군."

그가 PC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 사무실을 나와 디지털 도어락으로 잠겨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3층 사무실은 대부분 자물쇠와 열쇠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곳은 열쇠가 아니라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다.

최상만이 도어락의 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실패였다.

"아래층과 같은 번호를 쓸 텐데…. 그럼 뒷문 출입구 번호인가?"

최상만이 네 자리 번호를 다시 눌렀다. 잠금장치가 스르륵 풀렸다.

차우진이 그걸 보며 생각했다.

'건물 외부에 노출된 도어락과 내부 도어락에 같은 번호를 써? 역시 이 건물은 보안 수준이 폐급이구나.'

최상만이 그 방으로 들어갔다.

차우진이 안쪽을 슬쩍 보았다. 구석에 엄폐 가능한 책장이 있었다.

'저놈이 들어간 걸 보면 저 안에도 CCTV는 없겠지.'

그런 게 있다면 경비실에서 이 상황을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최상만은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었다. CCTV가 없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해 그 방 내부의 책장 너머로 이동했다. 그곳은 설사 내부에 CCTV가 있다 하더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위치였다.

최상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이 열렸나? 어디서 바람이 부는 거야?"

최상만의 위치에서는 차우진이 보이지 않는다.

차우진이 책장 뒤에서 내부를 슬쩍 확인했다. 그곳은 문서 자료실이었다. 자료 검색용 PC도 한 대 있고 서류철도 많았다.

최상만이 책자 형태로 보관된 서류를 뒤지다가 서류철 하나를 찾아냈다.

"여기 있었군. 흐흐."

그가 서류철을 펼치고 한 페이지씩 카메라로 찍었다.

작업을 마친 최상만은 그 서류철을 도로 꽂아놓고 그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2층으로 이동했다.

2층 화장실에는 CCTV가 없었다. 창문도 잠겨있지 않았다. 최상만이 그 창문 밖으로 몸을 빼냈다.

목동 공개홀은 관객석과 무대가 있는 쪽은 내부의 천장이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사무실이 있는 쪽은 2층의 높이가 평범했다. 그쪽으로는 침투하거나 뛰어내리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최상만이 창틀에 매달렸다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런 후에 손을 털며 그곳을 벗어났다.

최상만은 한참을 걸어서 이동한 후에 대포폰을 켜고 전화를 걸었다.

"말씀하신 자료를 찾았습니다."

- 흔적은?

"모든 페이지의 사진을 찍은 후에 서류는 그대로 집어넣었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 잘했군.

최상만이 실실 웃었다.

"그런데 내가 이거 찍다 보니까, 이게 사이즈가 꽤 커다란 일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 돈이 더 필요한가?

"말이 통하는 분이시네. 시원하게 따블로 갑시다.

- 그러지.

상대가 순순히 동의하자마자 최상만이 가격을 더 올렸다.

"아니, 따따블."

상대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 어디까지 올릴 생각이지?

"따따블은 좀 그런가? 그래도 따블은 아닌 거 같으니까, 그 중간으로 합시다. 처음 이야기한 거에 세 배. 석 장이면 내가 더는 욕심 안 부리겠습니다."

- 내일 밤에 만납시다. 돈은 현금으로 석 장 채워서 줄 테니까.

"이번에는 어디서 봅니까?"

상대가 시간과 주소를 불렀다. 최상만이 씩 웃었다.

"오케이. 내일 밤 열한 시에 쿨거래합시다."

통화가 끝났다.

최상만이 대포폰의 전원을 끈 후에 손을 비볐다.

"흐흐흐. 내일 돈이 들어오니까 오늘은 하우스에 가서 끝까지 달려보자."

차우진이 바로 옆 2층 건물 옥상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내일 밤에 만난다라…."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로 돌아갔다.

"그럼 나는 오늘 저놈이 문서 보관실에서 뭘 찾았는지 확인해야겠다."

***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에 다시 잠입했다. 최상만은 창문을 통해 들락거렸지만, 그는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옥상을 통해 진입했다.

최상만은 사무실 PC를 먼저 조사하고 문서 보관실로 이동했었다.

차우진은 PC는 건너뛰고 곧바로 보관실로 가서 도어락 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는 최상만이 누를 때 봐두었다. 차우진의 위치에서는 그때 최상만의 손가락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깨의 움직임을 보면 어느 순서로 누르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차우진이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에 최상만이 봤던 서류철을 찾아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펼쳤다.

"건물 도면이구나."

그건 일반적인 건물 설계도면과는 조금 달랐다. 볼펜으로 적어놓은 메모가 많았다.

건물 수리 기록이나 안전점검 기록 같은 참고자료도 있었다. 공개홀을 지은 후부터 지금까지 수리를 크게 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기간이 꽤 길어서 자료가 제법 많았다.

건물의 취약지점은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곳을 수리할 때는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하라는 경고도 적혀 있었다.

"이 도면을 보고 공개홀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으려는 거겠지. 그럼 방법은 역시 폭탄일 테고."

차우진이 그 자료를 카메라로 모두 찍은 후에 서류철을 원래 자리에 꽂았다.

"그럼 나도 이걸 분석해서 어디가 위험한지 알아야겠는데…."

차우진은 전기 전문가이지 건축 전문가가 아니다. 대신에 건축도 가끔 하는 토목 회사의 조사팀을 움직일 수 있다.

"이걸 조사팀에 맡겨야 하나…."

그러면 일이 간단해지지만, 이걸 딥어스테크 조사팀에 통째로 맡길 수는 없다. 그랬다가 여기서 문제가 터지면 나중에 차우진을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도면을 보여주지 않고 해결해 보자."

***

이튿날 차우진이 조사팀원 중 한 명을 회의실로 불렀다.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어디를 터트려야 합니까?"

"폭파 공법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건물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정확히 어느 건물인지 알려주시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타깃이 목동 공개홀이라는 건 알려줄 수 없다.

"들판 한복판에 서 있는 건물이라 주변 피해는 신경 쓸 필요 없고, 폭약은 부족한 상황이라면요?"

"그렇다 하더라도 건물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만…."

"건물 형태별로 다 들어봅시다."

조사팀원은 다양한 건물 사진을 찾아서 화면에 띄워가며 설명했다.

그중에는 목동 공개홀처럼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건물들도 있었다.

차우진은 그 부분을 특히 집중해서 들었다. 질문도 수시로 던졌다.

그런 후에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조사팀원이 물었다.

"그런데 차 이사님. 이건 왜…."

차우진이 둘러댔다.

"새로 지은 사무동 건물을 폭파로 철거하면 어떨까 해서요."

조사팀원은 화들짝 놀랐다.

"헉! 그걸 부수실 겁니까? 그 건물은 보강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어떤 방법이 있는지 물어만 본 겁니다. "

"예전 사장이 자재를 많이 빼먹었지만, 저희가 사용할 건물이라서 부족한 자재를 알뜰하게 썼습니다. 보강만 잘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럼 뭐, 그냥 놔둬야겠군요."

"휴우."

***

차우진은 딥어스테크를 나온 후에 태블릿 PC에 목동 공개홀의 도면 사진을 띄웠다.

그 도면에는 볼펜으로 적은 메모가 많이 있었다. 그중에는 취약점에 대한 경고도 있었다. 그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부분을 확인했다.

차우진이 건축 전문가는 아니지만, 현장에서 도면을 본 경험은 많다. 어떤 표식이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안다.

거기다 조금 전까지 딥어스테크의 전문가에게 목동 공개홀과 비슷한 건물로 특강을 들었다.

차우진이 도면과 거기 적힌 메모를 오후 내내 분석했다.

결론이 나왔다.

"목동 공개홀을 짓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건축 자재를 많이 빼먹었어. 아니지. 자재는 요즘도 잘 빼먹지. 당장 딥어스테크가 직접 지은 건물만 봐도 그러니까."

딥어스테크는 예전 사장이 일으킨 사태를 아직도 수습하는 중이다. 사무동 건물은 보강작업을 하고 있다.

"그걸 고려하면 목동 공개홀도 도면 그대로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자체 수리나 안전점검 후 적어놓은 메모들을 보면, 건물이 대충 지어졌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차우진이 도면을 손끝으로 짚었다.

"여기, 여기, 여기, 여기. 폭탄 네 개면 무너뜨릴 수 있겠는데?"

폭파 철거 공법으로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당연히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피해가 생기든 말든 건물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된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어제 최상만이 이 도면을 가져가서, 오늘 밤에 의뢰한 놈과 거래하기로 했다.

"그놈도 이 도면을 받아갔으니까, 여기 이 네 곳을 노리겠지."

***

그날 밤에 차우진은 서울의 한적한 재개발 예정지로 이동했다. 그곳은 밤에는 목격자가 없는 불이 꺼진 동네였다.

차우진이 목적지 근처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최상만과 청부한 놈이 만나기로 한 시간은 밤 11시였다.

차우진은 10시 50분쯤 됐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양쪽 다 아직도 안 와?"

한 명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보통은 최소한 한쪽은 조금 먼저 와서 주변을 확인한다.

차우진이 그 지역 주변을 확인했다. 움직임이 없었다. 설사 정시까지 온다고 해도 지금쯤은 누군가 와야 한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제 공개홀에 침투한 놈은 상황이 의심되면 안 올 수 있는데…. 여기를 접선 장소로 지정한 놈은 와야 하잖아."

차우진은 깨달았다.

"당했구나."

차우진이 당한 게 아니다.

"어제 바로 보자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늘까지 시간을 준 건,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거였어."

어제 공개홀 사무실에 침투한 최상만은 어젯밤에 도박장에 간다고 했다.

"밤새 도박한 놈을 습격해서 자료를 빼앗은 거야. 그놈은 처음부터 여기 올 생각이 없었어."

건물의 약점이 표시된 설계도면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면, 뭘 할지는 뻔하다.

차우진이 서둘러 목동 공개홀로 이동했다.

"폭탄을 벌써 터트릴 리는 없어. 공개홀은 관객이 있을 때 무너뜨릴 계획일 테니까."

멸망한 세계의 범인은 공개홀이 재개장할 때까지 반년을 기다렸다가 무너뜨렸다.

다만, 이번에는 반년이 아니라 이틀 후에 새로운 공연을 한다.

차우진이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옥상으로 침투한 건 아니야. 역시 어제 그 창문 쪽인가? 그 문은 잠그지 않는다는 건 내부 직원이 알려줬나?"

내부에 정보 제공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 취약지점이 표시된 설계도면이 존재한다는 건 외부인은 알기 어려운 정보다.

적극 가담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술자리에서 내부 상황 이야기를 해주거나, 문단속을 대충 한다는 것만 알려줘도 충분하니까."

차우진이 아래로 내려갔다. 3층까지는 CCTV가 없다. 2층은 일부 지점에만 있다.

1층과 지하에는 CCTV가 충분히 있다. 거기서 뭔가 저지르면 경비실에서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경비를 제압하면 공연이 열리기 전에 경찰이 찾아온다.

"2층과 3층 취약지점을 노리겠지."

설계도면에는 몇 개의 취약지점이 있었다. 그중 2층과 3층에 있는 것 네 개만 폭탄으로 날리면 건물은 무너진다.

차우진이 3층에 도착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이 도면에서 취약지점이라고 경고한 기둥으로 이동했다. 폭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기둥에 소방도구함이 하나 붙어 있었다.

차우진이 도구함을 열었다. 내부에 설치된 폭탄이 보였다.

"역시 여기를 노렸어."

차우진이 폭탄의 종류를 확인했다.

"원격제어 방식에 시한폭탄 기능이 조합된 타입. 거기에 감지 센서까지."

차우진은 이런 형태의 폭탄을 본 적이 있다.

"이거, 창수 형이랑 처리했던 그 폭탄이네."

183. 사원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폭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원격제어로 터트리는 폭탄이다. 여기에 무선 수신기 대신에 시한장치를 붙이면 시한폭탄이 되지."

차우진이 물었다.

"원격수신 모듈과 시한장치 둘 다 붙일 수는 없나?"

"그 빌런 새끼도 너랑 똑같은 생각을 했지."

"함정?"

"맞아. 시한폭탄의 시간이 남아있어서 사람이 직접 해체를 시도하면."

박창수가 손가락을 모았다가 폈다.

"원격제어로 쾅 터트리는 거지. 그러면 폭탄을 해체하던 사람들까지 죽일 수 있으니까."

차우진이 눈앞의 폭탄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에는?"

"이제는 그렇게 이중으로 기능을 달기엔 부품이 부족하잖아. 이건 원격제어 폭발장치만 달려 있다."

"이거 해체는 어떻게 해?"

박창수가 폭탄에 노출된 선을 하나 톡 잘랐다.

"이거. 원격제어장치는 이게 없으면 무선 신호 수신이 안 돼. 쉽지?"

"쉽네. 그런데 창수 형. 이 폭탄에 대해서 되게 잘 안다?"

박창수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이건 그 테러 빌런 새끼가 즐겨 쓰던 폭탄이거든. 멸망 초기에 그 새끼한테 당한 폭발물 해체반이 한둘이 아니다."

차우진이 주변을 경계했다.

"그럼 이 지역에 그 멸망급 빌런 새끼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그 새끼는 멸망 초기에 유럽에서 뒈졌다더라."

"확인된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그 새끼가 왜 한국에 있겠어? 이건 부하가 배워서 쓰는 거겠지."

"그럼 그 부하라도 근처에 있겠네."

***

차우진이 시한폭탄을 보며 인상을 썼다.

"창수 형이 그때 설명해준 그 폭탄과 구조가 같아. 이쪽이 구형이라 그런지 디테일이 다르지만."

멸망한 세계의 폭탄은 없는 물자를 끌어모아 만들어야 했다. 그 세계는 부품이 부족해서 폭탄에 다양한 옵션을 달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현대 문명이 멀쩡하고 생산과 유통도 살아 있다. 화약을 제외한 부품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차우진이 투덜댔다.

"이 새끼들이 폭탄에 옵션을 다 발랐네. 젠장."

이 폭탄에는 시한장치와 무선 원격폭파장치가 다 달려 있었다.

"거기다 센서까지."

건드리면 반응하는 감지 센서까지 있었다.

"왜 폭탄을 풀옵션으로 만드냐."

그래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차우진이 폭탄을 관찰했다.

"무선 수신장치는 선만 자르면 되는데."

시한장치까지 해체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박창수와 함께 발견했던 폭탄에는 시한장치가 없었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시한폭탄을 볼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다양한 시한장치도 다뤄보았다.

그런데 그 시한장치들은 없는 자재를 긁어모아 만든 것들이다. 남아도는 부품으로 만든 이 시한장치와는 구조가 좀 달랐다.

"시한장치는 어차피 이틀 뒤로 세팅되어 있으니까, 그 부분의 해체는 나중에 폭발물 해체반에게 맡기자."

무선으로 작동하는 원격제어 장치는 본체에 손댈 필요 없이 선 하나만 자르면 먹통이 된다. 지금은 그거라도 막아놔야 한다.

문제는 공간이다.

감지 센서 때문에 폭탄 사이의 빈틈으로 손을 넣어서 선을 자르는 건 어려웠다. 그러다 손이 센서를 건드리면 폭탄이 터지거나 시한장치가 작동할 수 있다.

손은커녕 니퍼가 들어갈 공간조차 부족했다.

"센서를 피할 수 있는 건 드라이버밖에 없네."

차우진이 휴대용 공구 지갑에서 일자 드라이버를 꺼냈다.

차우진이 드라이버를 폭탄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소형 일자 드라이버의 끝부분이 선에 살짝 닿았다.

차우진이 그 상태로 관통력 강화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의 적용 대상은 소형 일자 드라이버였다.

그러면서 드라이버를 앞으로 밀었다.

일자 드라이버의 끝부분이 선을 톡 자르고 지나갔다.

차우진이 드라이버를 천천히 빼낸 후에 숨을 내쉬었다.

"휴우."

관통력 강화 스킬은 체력을 잡아먹는다. 그래도 폭탄 하나는 해결했다.

차우진이 두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두 번째 폭탄은 3층 기둥 옆 라디에이터 안쪽에 숨겨져 있었다.

차우진이 그것도 같은 방법으로 선을 잘랐다.

"이제 절반 해체했다."

차우진이 2층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2층에서 움직이는 놈들이 셋 있었다. 그들의 대화도 들렸다.

"이게 마지막 폭탄이다. 조심해서 작업해."

"나 누군지 몰라? 내가 실수할 거 같아? 나 지금 무시하는 거냐?"

"씨발. 그냥 조심하라고 한 거잖아."

"하여간 이 새끼들은 다 돌았어."

"너도 돌았으니까 이 일을 받았지. 이 새끼야."

"키히히히. 그건 그래."

세 놈이 실실 웃으며 마지막 폭탄을 설치했다.

그런 후에 폭탄이 설치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끝났냐?"

"보고도 모르냐?"

"이제 가서 잔금 받자고."

세 사람이 이동했다.

차우진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게 네 번째."

세 번째 폭탄은 세 놈이 네 번째 폭탄을 설치하는 사이에 찾아내서 선을 끊었다.

차우진이 네 번째 폭탄이 숨겨진 곳을 열고 드라이버로 선을 잘랐다. 이미 세 번이나 같은 작업을 한 덕분에 해체 속도가 빨라졌다.

차우진이 다시 움직였다. 세 놈이 도망치기 전에 쫓아가야 한다.

그 세 놈은 어제 도면을 복사해간 최상만과 같은 방식으로 화장실 창문을 이용해 공개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우진이 그놈들을 보며 말했다.

"무선 원격폭파장치는 막았으니까."

폭탄을 설치한 놈들은 누군가에게 잔금을 받으러 간다고 말했다.

"이제 폭탄 설치를 청부한 놈의 얼굴 좀 보자."

차우진도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

목동 공개홀에 폭탄을 설치한 세 놈은 픽업트럭을 타고 서울을 벗어났다. 뒷좌석이 있어서 다섯 명까지 탈 수 있는 픽업트럭이었다.

"씨발. 왜 내가 뒷좌석이야? 이 차는 뒤가 더 불편한데."

"그럼 네가 운전하던가."

"난 누워서 가야겠다."

그 차는 대포차다. 그래서 번호판을 조회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승용차가 아니라 픽업트럭을 쓴 건 공개홀 근처 공사 차량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로 향했다. 목적지는 강원도에서도 인적이 드문 지역이었다. 그곳은 한밤중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뒷좌석에 누워 있는 놈이 말했다.

"불꽃쇼를 직접 못 보는 게 아쉽다."

"터질 때 가서 보면 되지."

"언제 터지는지 모르잖아."

조수석에 앉아있는 놈이 말했다.

"인도자께서 실수로라도 우리 모습이 노출되면 안 된다고 하셨으니, 나중에라도 거기 갈 생각은 하지 마라."

"이 새끼는 인도자가 보는 것도 아닌데 여기서도 높여 부르네?"

"어허. 이 믿음도 부족하고 조심성도 부족한 새끼. 평소에 말조심해야 앞에서도 실수하지 않는 거야."

"이 꼼꼼한 새끼. 하나 배웠다."

세 사람의 차가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 회색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주변에 다른 집 없이 단독으로 서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1층에 수십 명쯤은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꽤 높은 담장도 쳐져 있었다.

"여기가 옛날에는 교회 비슷한 거였다더라."

"비슷한 건 또 뭐야?"

"진짜 교회는 아니었다는 거지."

그들이 정문을 통과해 건물로 걸어갔다. 현관이 열렸다. 안에서 네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두 팔을 벌렸다.

"형제들. 오셨는가."

세 사람이 머리를 숙였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임무는?"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한 놈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 어플을 실행한 후에 인도자에게 보여주었다. 폭탄이 설치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인도자가 그 사진을 보며 말했다.

"실수 없이 잘 처리했는가?"

"통신 모듈과 시한장치, 센서까지 모두 연습한 대로 세팅했습니다. 완벽합니다."

인도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아직 완벽이라고 하긴 이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한국 경찰이 너희들을 찾아낸다면, 우리까지 위험해질 테니까."

세 명은 공손히 그의 말을 듣다가 멈칫했다.

"어?"

그들은 말이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뒤로 주춤 물러나는 놈도 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인도자가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희를 움직이는 건 결국 내가 주는 돈이었으니, 너희가 경찰에 잡히면 나를 팔겠지."

"아니, 우리가 안 잡히면 되잖습니까?"

"너희가 살아 있으면 결국 잡힐 것이다."

청부업자 한 놈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번 일만 처리하면 외국으로 나가게 해준다며! 거기서 신전 관리를 맡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라며!"

"너희 같은 반사회성 부적응자에게 신전 관리를 맡기다니. 신성모독이다."

"씨, 씨발…."

세 놈이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냈다.

칼을 가지고 다니면 일이 틀어졌을 때 몸수색만 받아도 들킨다. 그래서 잭나이프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이 꺼낸 무기는 나사를 조이고 푸는 데 쓰는 드라이버였다.

인도자가 손을 들었다. 그의 뒤에 있던 셋이 칼을 뽑았다. 그들의 칼은 단검이 아니라 기다란 장검이었다.

같은 실력이라면 드라이버로 장검을 이길 수는 없다. 청부업자들도 그걸 알았다.

세 놈이 도망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마당에 들어올 때 통과한 철문은 모터의 힘으로 이미 닫혀 있었다.

인도자가 말했다.

"저항하지 말아라. 그러면 고통 없이 신께 가리니."

"씨발!"

"어허. 이 신성모독을 보라. 감히 이곳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꺼내다니. 뭣들 하느냐? 단칼에 신께 보내어라."

"예!"

인도자의 부하 셋이 장검을 앞으로 겨누며 셋을 향해 걸어갔다.

셋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씨, 씨발. 이게 아닌데…."

드라이버를 버리고 두 손을 비비는 놈도 있었다.

"사, 살려주십쇼!"

동료가 화를 냈다.

"빌지 마, 새끼야! 항복해도 죽어!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아!"

차우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멀쩡한 판단을 하는 놈이 하나쯤은 있구나."

그들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차우진이 담장 위에 서 있었다.

공개홀에 폭탄을 설치한 청부업자가 다급히 물었다.

"누, 누구야!"

차우진이 인도자를 가리켰다.

"저 사이비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너희들끼리 싸우더라. 그래서 구경하는 중이다."

청부업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가 급히 외쳤다.

"도와줘!"

"내가 왜?"

"어?"

"너를 왜 도와줘야 하지?"

"인도자를 잡으러 왔다며! 같이 싸워야 유리하지!"

"잡으러 왔다고는 안 했는데?"

"씨, 씨발…. 그럼 뭘 하려고 왔는데!"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뭘…."

"쉐도우?"

차우진은 그 말을 하며 일곱 놈의 얼굴을 모두 살폈다.

목동 공개홀에 폭탄을 설치한 청부업자는 셋이다. 그중 하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씨발! 그게 뭔데!"

장검을 든 세 놈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인도자는 표정이 굳었다.

차우진이 인도자의 표정 변화를 확인하고 씩 웃었다. 그가 담장 아래로 뛰어내린 후에 인도자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넌 들어본 적 있나 보다?"

인도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건 마귀다! 저 마귀부터 목을 쳐라! 당장!"

세 놈이 장검을 앞으로 세우며 차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차우진이 손을 앞으로 휙 뻗었다. 손도끼가 날아가 첫 번째 놈의 가슴에 박혔다.

"컥!"

적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칼을 놓쳤다. 차우진이 바닥에 떨어져 앞으로 미끄러져 오는 칼을 발로 툭 찼다. 칼이 위로 튕기듯이 섰다.

차우진이 칼을 잡았다.

폭파범들은 차우진이 던진 손도끼를 알아보았다. 트럭 짐칸에 위장용으로 실어둔 작업용 손도끼였다.

"저거 우리 거…."

차우진이 인도자를 향해 걸어갔다.

부하 두 놈이 차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놈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차우진이 그 칼을 방금 빼앗은 칼로 막았다. 칼날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틈에 왼쪽 놈이 옆으로 치고 들어왔다. 칼날이 그의 목을 노렸다.

차우진이 몸을 뒤로 슬쩍 젖혔다. 칼날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오른쪽 놈이 칼을 위로 번쩍 들어 차우진을 내려치려고 했다. 적의 앞이 활짝 열렸다.

차우진이 오른쪽으로 칼을 던졌다. 칼날이 적의 가슴에 푹 꽂혔다.

"컥!"

적이 뒤로 넘어갔다. 적의 몸에 박힌 칼날을 바로 뽑을 수는 없다.

왼쪽 놈이 그 기회를 노리고 다시 공격했다. 칼날이 이번에는 차우진의 허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움직였다.

적의 칼날이 차우진의 허리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허공을 베고 지나갔다.

적은 간발의 차이로 공격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다. 차우진은 일부러 그 간격으로 피했다. 그래야 반격하기 좋다.

적의 칼질이 빗나가면서 빈틈이 크게 생겼다. 차우진이 그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적이 칼을 옆으로 비틀어 차우진을 견제하려고 했다.

늦었다.

차우진이 적의 손목을 잡으며 턱을 올려쳤다.

"켁!"

적의 손에 힘이 빠졌다. 차우진이 적의 칼을 잡아챈 후에, 적의 가슴에 푹 꽂았다.

"끄아악!"

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폭탄 청부업자 셋이 그걸 보고 환성을 질렀다.

"이겼다!"

"씨발! 우리가 이겼어!"

차우진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아니다."

"어?"

"내가 이긴 거다."

184. 다섯 개

차우진이 말했다.

"숟가락 얹지 마라."

폭탄 청부업자가 실실 웃었다.

"흐흐흐. 알겠수다.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 이긴 거지. 그러면 뭐 어때? 내가 살았으면 됐지."

청부업자는 셋이다. 다른 두 놈이 기세를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저 인도자 새끼 죽여버리자!"

"편하게 죽이지 마! 드라이버로 죽을 때까지 찍어서 죽여!"

세 놈이 드라이버를 쥐고 기세등등하게 인도자를 향해 걸어갔다.

인도자가 차우진을 힐끗 보며 혀를 찼다.

"쯧. 저 마귀는 고수였군."

청부업자가 히죽히죽 웃었다.

"흐흐흐. 다들 인도자라고 불러주니까 뭐라도 된 거 같아?"

"어차피 사이비 교주 새끼면서 말이야."

"난 저 새끼 언제 한 번 손봐주려고 했어."

인도자가 그들에게 제안했다.

"저 마귀를 너희 손으로 죽이면, 너희는 살려주마. 약속한 돈도 주고, 외국으로 보내 신전 관리도 맡기겠다."

"이 새끼가 우리를 아주 등신으로 보네?"

"우리가 아직도 네 신도로 보이냐?"

"저 사람이 마귀든 아귀든 상관없어. 넌 이제 우리 손에 죽는다."

인도자가 혀를 찼다.

"쯧쯧. 이용가치가 없으면, 너희부터 죽어야겠구나."

"크흐흐. 이 새끼가 미쳤…."

인도자가 옷 속에 손을 넣어 권총을 뽑았다. 9mm 반자동권총이었다.

"어?"

"초, 총?"

인도자가 권총 슬라이드를 젖히고 엄지로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그런 후에 두 손으로 권총을 잡고 조준했다. 거기까지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졌다.

"사, 살려…."

인도자가 청부업자들을 향해 사격했다. 방아쇠 당기는 속도가 빨랐다. 명중률도 높았다.

한 놈당 두 발씩, 순식간에 여섯 발이 날아가 몸통에 꽂혔다.

"으아악!"

"커억!"

한 놈은 도망치려다가 등에 두 발을 맞았다.

"끄아악!"

빗나가는 건 한 발도 없었다. 세 놈 다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인도자가 그들의 머리를 향해 한 발씩 더 발사했다. 확인사살이었다.

차우진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권총 잘 쏘네. 많이 쏴봤나 보다?"

그가 셋을 다 죽인 후에 차우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왜 구경만 하는 거지?"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들하고는 같은 편이 아니라니까. 죽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지."

"내 기사들은 왜 죽였지?"

인도자의 부하 셋이 차우진의 손에 죽었다.

"너 또라이냐? 네 부하들한테 나 죽이라며? 죽어줄 순 없잖아."

인도자가 인상을 썼다.

"어째서 그렇게 여유가 있지? 내 권총의 불벼락이 무섭지 않나?"

"총은 좀 익숙해서."

인도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쉐도우라는 말, 왜 한 거지?"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일단 넌 쉐도우가 아니구나. 그건 알겠다."

인도자가 권총으로 차우진을 정확히 조준하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똑바로 대답해라."

"야. 대답하면 살려주는 거냐?"

"들어보고 판단하겠다."

"믿기 힘든데? 그냥 하나씩 주고받자."

"뭐?"

"내가 먼저 대답하지. 내가 쉐도우한테 받을 게 있어. 그래서 만나러 왔다."

"그게 무슨 소리지?"

차우진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내 질문. 쉐도우는 지금 어디 있냐?"

인도자가 인상을 더 썼다.

"아는 게 없는 놈이구나. 그분이 계신 곳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도 괜찮아. 지금 한국에 있냐?"

인도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신성한 땅에 계시다!"

"유럽이구나?"

인도자가 멈칫했다.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맞췄나 보다?"

"어째서 너만 질문하지? 나도…."

"아. 하나씩 주고받자는 거? 그걸 믿었냐? 당연히 구라지."

"이, 이…."

"조만간 유럽에 가야겠네. 쉐도우 목 따러."

"뭐?"

"내가 받을 게 그거거든. 쉐도우의 목."

"이 불경한 놈!"

인도자가 화를 내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불꽃과 함께 총탄이 발사됐다.

그 총탄이 총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차우진이 인도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차우진이 서 있던 곳을 향해 정확히 날아간 총탄은, 그대로 공간을 가르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헉!"

인도자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가 급히 두 손으로 권총을 꽉 쥐고 앞쪽을 두리번거렸다. 손가락은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게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인도자는 혼란에 빠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차우진이 서 있던 장소에는 갑자기 몸을 숨길 곳이 없다. 그런데도 차우진이 사라졌다.

그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 왜 사라져!"

그의 뒤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낮아진, 무게가 있는 목소리였다.

"너는 내가 아직도 사람으로 보이느냐."

"히이익!"

그가 뒤로 돌아서려 했다.

차우진이 그런 그의 양쪽 어깨를 내리치고 다리를 걷어찼다.

인도자의 두 팔과 손은 힘을 잃었다. 어깨를 맞을 때의 충격으로 방아쇠가 당겨졌다. 땅바닥을 향해 총탄이 발사됐다. 그 충격으로 권총이 힘을 잃은 손에서 빠져나갔다.

인도자의 두 다리도 뒤에서 걷어찬 힘 때문에 꺾였다.

인도자가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차우진이 그의 등 뒤에서 말했다.

"내가 너의 신이다."

인도자가 악을 썼다.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나는 악마다. 너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왔지."

인도자는 겁에 질렸다. 상식을 벗어난 현상과 등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 때문에 공포에 질렸다.

"왜, 왜 나를…."

"쉐도우는 마귀니까, 그 하수인인 너도 지옥에 가야지."

"아, 아니야. 나는…."

"쉐도우가 천국을 약속하더냐? 그곳에 너만을 바라보는 미녀가 열 명쯤 기다리고 있다더냐?"

"그, 그게…."

"그걸 현실에서 누리게 해준다고 했겠지."

인도자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렸다.

"다, 다 알고…."

"다 알고 왔다."

차우진이 말하는 건 쉐도우가 부하를 포섭할 때 쓰는 수법으로 알려진 것이다.

***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말했다.

"교주의 명령으로 성전을 치르다 죽으면 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건 사이비가 신도를 속일 때 흔히 쓰는 수법이지."

"천국에서 미녀가 열 명쯤 기다리는 거?"

"그렇지."

"그런데 그 경우는 그 미녀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나? 남자 하나를 여자 열 명이 나눠 가지자고? 십 등분의 남편인가? 그러면 호러 아닌가?"

박창수가 웃었다.

"흐흐. 거기까지 생각하는 놈이면 그런 말을 믿었겠냐?"

"쉐도우도 그렇게 부하들을 모았어?"

"아니. 쉐도우의 방법은 더 강력했지. 죽은 후의 천국을 현실에서 미리 맛보게 해줬거든."

"어떻게?"

"사람에 따라 방법은 다르지만, 원하는 걸 실컷 하게 해줬다더라."

"미녀 열 명?"

"그걸 원하면 그걸 줬지. 충분히 많은 돈을 뿌려서."

"그 멸망급 빌런 새끼가 부자일 거란 이야기는 들었어."

박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쉐도우의 정체를 각국의 부자 쪽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 유럽, 중동, 중국, 러시아, 미국 등등."

"못 찾았잖아."

"세상에는 부자가 생각보다 많은데, 그런 부자들은 누가 자기를 조사하는 걸 되게 싫어해. 그래서 그 시도는 흐지부지됐다고 들었다."

***

차우진이 인도자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하던 부귀영화를 현실에서 누리니까 좋더냐? 그 업보가 지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인도자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었다.

"부디 용서를…."

"모든 죄는 쉐도우가 원인이지. 원인을 제거하면 너는 구원받을 수 있다. 원하느냐?"

"원합니다!"

"쉐도우의 진짜 이름이 뭐지?"

"그건 저도 모르…."

인도자는 멈칫했다.

"어?"

의문이 들었다.

"악마가 그걸 왜 모르지?"

"그것만 빼고 다 아느니라."

의심이 커졌다.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갈 힘이 있는 악마라면, 그분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너의 눈앞에서 사라지던 내 모습을 보고도 의심하느냐."

인도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눈속임이 있었겠지! 방송 나오는 마술사들처럼 내가 착각하게 기술을 쓴 거겠지!"

인도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넌 가짜다! 악마가 아니야! 사람이었어!"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들켰네."

인도자의 얼굴이 확 펴졌다. 사람이라면 죽일 수 있다. 사람은 총에 맞으면 죽는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 조금 전에 어떻게 한 거야! 무슨 마술 기술로 내 눈을 속인 거냐!"

"스킬을 쓰긴 했지!"

"역시 방송에서 보던 그런 거였어!"

"그런데 말이야. 너 같은 사이비가 기적을 믿지 않는다니…. 역시 넌 현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좋았던 거냐?"

"그게 어때서! 다들 그걸 원하잖아!"

"남들은 너처럼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폭파하진 않아."

"아니야! 남들도 나처럼 해! 다른 놈들은 기회가 없어서 못 했던 것뿐이야!"

차우진이 제안했다.

"좋아. 거래를 하자. 쉐도우를 넘겨라. 그러면 넌 살려주지. 지금까지 네가 받은 걸 가지고 계속 그렇게 현실에서 누리고 살아라."

"씨발!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유럽 어딘가에 있겠지!"

"살길을 알려줘도 알아듣지를 못하는구나."

"죽는 건 너야!"

기회를 보던 인도자가 갑자기 앞으로 뛰었다. 무릎을 꿇고 있다가 뛰어나가는데도 빨랐다.

차우진이 도망치는 인도자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고 있으면서 추진력이라도 얻었냐?"

인도자가 몸을 뒤로 휙 돌리며 어깨에 붙어 있던 장신구를 잡아 뜯었다.

뜯어낸 장식 끝에 구멍이 두 개 보였다.

그건 장신구로 위장한 22구경 2연발 초소형 권총이었다.

그런 권총은 총신이 워낙 짧아 명중률이 형편없다. 하지만 인도자는 이 거리에서는 빗나가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따위 마술 속임수에 이젠 속지 않아! 내가 눈을 부릅뜨고 너를 보고 있다!"

"그러든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의 쿨타임은 이미 다 채웠다.

인도자가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초소형 권총에서 총탄 한 발이 발사됐다. 22구경은 위력이 약한 편이지만, 그래도 총은 총이다. 이 거리에서 급소에 맞으면 죽을 수 있다.

총탄이 발사되는 것과 동시에 차우진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인도자는 경악했다.

"헉!"

분명히 바로 앞을 두 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는데, 차우진이 또 사라졌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이게 속임수라고 생각하나?"

"으아아악!"

인도자가 뒤로 돌아서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차우진이 그 팔을 툭 밀었다.

인도자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구가 자기 자신의 가슴을 향했다.

총탄이 발사됐다. 근거리에서 발사된 22구경 총탄이 가슴을 뚫었다.

"커억!"

인도자가 뒤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즉사는 아니었다.

그가 초소형 권총을 차우진 쪽으로 뻗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나가는 총탄이 없었다.

"너, 너, 저, 정체가…."

"저승사자. 너를 유황불에 던져넣으러 왔다."

"커컥!"

인도자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손에는 초소형 권총을 꽉 쥔 상태였다.

차우진이 죽어버린 인도자를 내려다보았다.

"쉐도우를 잡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수인을 잡았네. 그게 좀 아쉽다."

차우진이 주변을 보았다. 이곳에서 일곱이 죽었다.

"이놈들이 누구인지는 경찰이 알아낼 테지. 난 단서나 찾자. 쉐도우의 위치를 알 만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차우진이 총에 맞아 죽는 폭탄 설치범들을 보았다. 그중 한 놈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건 목동 공개홀에 설치된 폭탄 사진을 찍을 때 사용한 휴대폰이다.

차우진이 그 휴대폰에 들어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

"폭탄이 설치된 위치 네 개 다 찍어왔…. 어?"

문제가 생겼다. 폭탄 사진은 다섯 장이었다.

차우진은 아까 네 개의 폭탄을 찾아내 해체했다. 그 네 곳만 폭파해도 목동 공개홀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탄 사진은 한 장이 더 있었다.

"이 새끼들이 계산을 잘못했구나. 네 개면 충분한데 다섯 개는 터트려야 하는 줄 알았던 거야."

차우진은 폭탄 자체를 해체한 게 아니라 원격 수신장치를 먹통으로 만들었다. 그러면 외부에서 신호를 보내도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그런데 폭탄은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였다.

목동 공개홀에 마지막 시한폭탄이 남아있었다.

185. 처리

목동 공개홀에 설치된 폭탄은 원격으로 폭파할 수도 있고 시한폭탄으로 쓸 수도 있다.

차우진이 그중 네 개는 원격 수신장치를 먹통으로 만들어놨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었다.

"폭탄을 이미 터트리지는 않았겠지만…."

그 폭탄에는 시한장치가 같이 붙어 있다.

"송신기가 여기 어디에 있겠지."

차우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는 강당이 있었다. 의자도 많아서 신도들을 모아놓고 사기 치기 좋았다.

차우진이 건물 내부를 빠르게 수색했다.

2층에 노트북이 하나 있었다. 화면 속 숫자가 1초마다 1씩 줄어들었다.

"젠장. 이미 시한폭탄을 활성화했구나."

폭파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53분 17초였다.

"인터넷으로 여기서 작동시키면 그 근처에 있는 송신기가 폭파 신호를 보내는 건가? 아니면 그 폭탄들이 여기서 보낸 신호를 다이렉트로 받나?"

폭탄에 신호를 직접 보낼 수도 있지만, 추적을 피하려고 중간에 몇 단계를 거칠 수도 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미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다.

목동 공개홀은 공연이 시작된 후에 폭탄이 터져야 피해가 극대화된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그런 참사가 벌어졌다.

차우진도 그걸 알기 때문에 이놈들이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든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지금부터 2시간 후에 공개홀의 폭탄이 터진다.

"1층 경비실에는 직원이 있으니까, 막긴 막아야지."

차우진이 노트북 화면 속 버튼들을 확인했다. 시간 재설정과 연장 버튼이 보였다. 누군가 시간을 연장하거나 취소하지 않으면 결국 폭탄이 터지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기능을 사용하는 이유는 뻔했다.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폭탄이 자동으로 터지게 했어. 남은 시간이야 터트리기 전까지는 몇 시간마다 한 번씩 연장하면 되니까. 꼼꼼한 놈이네."

차우진이 화면 속 시간 재설정 버튼을 눌렀다.

"그럼 이 시간을 999시간으로 바꿔놓으면 해결…."

또 문제가 생겼다.

시간 재설정 버튼을 눌렀더니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젠장."

비밀번호는 모른다. 그걸 아는 놈은 이미 죽었다.

차우진은 전기 전문가이지 해커가 아니다. 2시간 안에 이 노트북에서 비밀번호를 찾아낼 방법은 없다.

차우진이 이 장소에서 목동 공개홀까지의 이동시간을 생각했다.

지금부터 차를 타고 밟으면 두 시간 안에 목동 공개홀에 도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쓸 수 없다. 그렇게 움직이면 차우진이 노출된다.

차우진이 결론을 내렸다.

"남은 폭탄은 경찰에 맡기자."

목동 공개홀에서 사람을 대피시킬 시간은 충분히 있다. 폭탄이 터지는 것만 경찰이 해결하게 하면 된다.

차우진이 폭파 청부업자가 떨어뜨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 휴대폰에는 통화 기능이 없었다. 그건 카메라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차우진이 밖으로 나가 청부업자의 몸을 뒤졌다. 다른 대포폰이 있었다. 전원은 꺼져 있었다.

차우진이 그 대포폰을 켠 후에 다른 휴대폰의 사진을 그 폰으로 전송했다.

그러고 나서 대포폰으로 경찰에 신고 문자를 보냈다. 폭발물 신고 문자였다.

"이것만 보내면 부족하지."

차우진이 신고 문자에 사진 다섯 장을 첨부했다. 다섯 장 다 폭탄이 설치된 위치가 촬영된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폭파 청부업자가 보고용으로 찍은 것이다.

차우진이 목동 공개홀의 폭탄을 처리할 때 사용한 방법은 통신모듈을 먹통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차우진이 그 방법도 문자로 설명했다.

그런데 시한장치가 이미 작동한 마지막 폭탄은 그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 정도는 경찰에서 해결하겠지."

차우진이 문자를 마저 보낸 후에 대포폰의 전원을 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