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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어둠의 정령

쿠웅...!

[녹색갈기 대전사]

[신선도 최상 -> 중]

광일이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거대한 전사.

그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예쓰!'

대충 봐도 저번에 만났던 치프틴인가 하는 놈보다도 강해 보였던 괴물.

그런 엄청난 녀석을, 혼자서 쓰러트리다니?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어...!"

저 녀석에게 제대로 된 무예를 안겨 주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 고생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 전광일 상병님?"

"안 그래도 강한 분이시긴 했는데. 그래도 저건...!"

"아예 격이 다르잖아."

광일이가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던 나와 달리.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병사들.

그런 와중에.

눈썰미 좋은 몇몇은, 광일이의 강함이 아닌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설마."

민재 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광기를... 제어하고 있는 거냐?"

"완벽하진 않다는 것 같다만. 일단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맙소사. 양구군에는 동맹을 구하기 위해서 간 거 아니었나?"

"그렇긴 한데. 뭐.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아니. 광일이는 그렇다 쳐도, 다른 녀석들까지 저렇게 강해지다니. 게다가."

묘양사에서의 일을 마치고 복귀한 것은 나와 광일이뿐만이 아니었다.

본래도 군단의 정예 중의 정예였던 병사들.

그런 녀석들이, 각자 무예를 하나씩 익히고 돌아왔다.

그리고.

"...저 둘은 또 누구야?"

"우리 교관 될 놈들."

"...?"

두 명의 무예 교관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전장을 휩쓸고 있는 까망이까지.

지금 세상의 싸움은, 단순히 숫자로 정해지지 않는다.

한 명의 강자가 10명의 약자보다도 중요한 세상.

내가 데리고 온 10명 남짓한 전력은.

그 적은 숫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저놈들의 힘이 예전하고 같았다면 또 모를까.'

아리엘라의 후방 교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부족이다.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밀어낼 수 있겠지.

"뭐. 나도 지켜보는 건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나도 슬슬 일해야 하지 않겠냐.

양손에 [독고구식]과 [검정중식]을 꼬나 쥔 채.

전투 식량들을 꺼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광일이를 비롯한 이들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상황.

엄청난 버프가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응?'

광일이가 쓰러트린 '녹색갈기 대전사'.

그 녀석의 몸 근처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게 일렁거렸다.

'뭐야 저거?'

그 그림자 같은 것이 대전사의 몸 위에 안착하자.

그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저 아까운 걸!'

광일이의 공격을 맞고 쓰러지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치명상을 입고 기절했을 뿐, 목숨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던 녀석.

그렇다면.

'요리로 잘만 꼬드기면 내 건데...!'

김 중위나, 몇몇 범죄자들.

그리고 아리엘라를 내 아래로 들였던 것처럼.

저 녀석도 어떻게든 굴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뺏어 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렇게 조각난 대전사의 육체가, 허공에 떠오른다.

그리고.

파아아악!

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노리는 게 나였냐!?"

[식재료 감별(강화)]

[신선도 : 최하]

[종족 : 어둠의 정령(상급)]

그 검은 기운의 정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정령.

정수아가 생체 드론으로 사용하는 물의 정령이나.

저 녹색갈기 놈들이 사용하는 대지의 정령은 본 적이 있다만.

'어둠의 정령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이름.

딱 봐도 위험해 보였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당황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양손에 이미 쥐어진 두 식칼.

그걸 휘둘러, 나를 향해 쏟아지는 고기의 파편들을 쳐냈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을 베어 내고 깨달았다.

'너무 많다.'

조각조각 난 대전사의 몸이, 검은 그림자에 안겨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두 손으로 칼을 휘두른다고 한들.

모두 쳐내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의 양.

"신 병장님!"

"미친! 막아!"

내가 습격당하는 것을 본 부대원들이 급하게 지원하러 달려왔지만.

이 근처는 정리된 전장이라 여겼던 탓에, 근처에 있던 부대원들의 숫자는 적다.

내게 몰려들고 있는 저 공격에 대응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겠지.

명백한 위기.

그렇기에.

"...다행이다."

나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옛날이었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잖아.'

양손의 식칼이 공격을 쳐내고.

내 몸이 완전히 비어 버린.

그 순간.

카앙!

그림자 속에서.

커다란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어!?"

"저, 저건."

그 물체와 부딪히며, 튕겨 나가는 검은 그림자.

얼핏 보면 거대한 방패같이 생긴.

그 커다란 물체의 정체는....

"웍...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중식 요리에 자주 쓰이는, 넓은 팬.

웍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은 안개의 공격.

"...뭐야, 저건."

"프라이팬?"

"식칼에... 뒤집개는 또 무슨."

"저거 돈가스 망치인가?"

그 공격들에 맞추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요리 도구들.

카앙!

캉-

식칼이 대전사의 머리통에 박히고.

커다란 볶음용 철판과 웍, 프라이팬들이 나를 향한 공격을 차단한다.

"요리 도구들이 하늘을 날고 있어...?"

엄청난 숫자의 공격.

나 혼자서는 도무지 막아낼 수 없는 화력이었으나.

[보조 셰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보조 셰프'들.

보이지 않는 도우미들이, 나를 도와 공격을 방어해 주고 있었다.

저 보이지 않는 셰프들은 내 스탯을 공유한다.

특성과 스킬은 공유하지 않는 게 아쉽지만.

[적용 중인 요리 효과 - 4]

요리의 효과를 중첩시킨 내 스탯은.

상상을 초월하는바.

'4개나 중첩했으니... 나중에 엄청 고생하겠지만.'

당장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겠냐.

힘겹긴 하지만.

보조 셰프들의 도움으로 인해, 공격을 막아낼 수는 있었다.

다만.

튕겨 나간 시체의 파편들.

그것들이 다시금 돌아와 내게 쇄도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이거. 내가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거냐?"

부대원들도 다가오고 있으니.

몇 번은 막을 수 있겠다만.

...뭐.

좋다 이거야.

'나도 막기만 하는 건 취향이 아니거든.'

적이 내가 죽을 때까지 공격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답은 하나다.

'내가 먼저 요리해 주지.'

파악-!

양손에 사시미칼과 중식도를 쥔 채.

저 시체의 파편을 쏘아 내고 있는 본체.

[어둠의 정령]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고급 요리 비결 - '어둠의 정령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어둠의 정령은 굉장히 독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으로 식재료로 애용되지는 않지만, 특정 종족의 경우에는 없어서 못 구할 정도로 선호하는 식재료이기도 합니다.]

[실력 있는 술사가 아니면 이들과 계약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으며, 계약을 하는 행위 또한 금기로 여겨지는 문화가 많아 쉽게 보기는 힘든 재료로-]

내 머릿속에는.

녀석을 효과적으로 손질할 수 있는 방법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 * *

'의외로군요.'

다른 병사들이 서환에게 무예를 배울 때.

나는 미호를 비롯한 나머지 셋에게 새로운 무예의 창작을 맡겼다.

그녀 역시 서환과 마찬가지 방식을 취했다.

일단 대련을 본 뒤, 적합한 무예를 알려 주겠다는 것.

그 대련의 상대는, 서환에게 얻어 터졌던 돼지 인간.

저칠이었으나....

'이기어검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시기에, 이미 엄청난 경지에 도달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부힉.... 오히려 약골이군? 아까는 괜히 고개를 숙였어!'

결과는 뭐.

당연히 참패.

[보조 셰프]를 봤을 때는 아예 기겁을 했던 이들이었으나.

실제로 대련을 해 보니.

수인들도 내 전투 능력이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인마? 다시 붙어.'

'부히히. 원래 패배는 인정하기 싫은 법이지.'

'...이번엔 제대로 간다.'

하지만.

나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 번 이겼다고 의기양양해진 돼지.

그 모습을 그냥 보고 넘기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하잖냐.

[적용 중인 요리 효과 - (4)]

조금 무리를 해 버렸다.

후유증이 엄청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4개의 요리를 한 번에 도핑해 버린 것.

그 결과.

'부히이이익!? 뭐냐. 아까랑은 완전 다르잖아!'

'...과연.'

아무리 그래도 이기는 것은 힘들었지만.

약골이라는 말은 못 하게 할 정도는 가능했다.

'특별한 공능이 담긴 요리를 먹음으로써 새로운 이능을 발현할 수 있다...? 이게 은공의 힘이로군요."

'일단은.'

'참으로 신기한 공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천상의 신선들 중에서도 이런 공능을 발휘하는 자는 없을 텐데.'

내가 가진 여러 가지 능력들을 모두 알려 주자.

미호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하지만. 모르겠군요. 이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무슨 의미야?'

'은공의 능력은... 너무나도 특별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했다.

'본신의 능력은 뛰어나지 못하나, 저조차 불가능한 이기어검을 자유자재로 다루시지요.'

'정확히 말하면 좀 다르긴 한데....'

'이기어검으로도 모자라, 상황에 따라 음식물을 취함으로써 다양한 이능을 골라서 발휘할 수 있다니.'

그렇게 말하는 미호의 말투는.

단순히 감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묘하게 불안한 느낌.

'그게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건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답하는 미호.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은공을 위한 완벽한 무예를 만들기는 불가능합니다.'

뭐?

'숙수를 위한 무예라면, 조금 복잡하긴 할지언정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은공과 같이 특별한 이를 위한 무예를 만드는 것은, 제 알량한 지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시무룩해졌다.

'스승님이 돌아오신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야 뭐.

내가 생각해도, 나처럼 요리에 따라 능력이 이리저리 바뀌는 놈에게 '딱 맞는' 무예를 만들어 주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어떻게든 내 조건에 딱 맞게 만들어 본들.

다른 요리를 먹으면 그 조건이 변화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미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제가 만들어 드릴 것은, 뼈대입니다.'

'뼈대?'

'네. 은공을 위한 무공이 완성되기 전의, 뼈대.'

그렇게 말하던 미호의 눈에는.

이전과 같은 공허함이 아닌, 도전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이마저도 제 전력을 다해야 할 일입니다만... 도전할 가치는 있을 것 같군요.'

무각주라고 했던가.

그 지위는 괜히 얻은 게 아니었던 듯.

세상을 허무하게 바라보던 그녀였음에도 불구.

완전히 새로운 무예를 만들어야 한다는 도전.

그것에서 묘한 희열을 느끼는 모습.

그 미호와 사제들이 몇 주의 시간을 모조리 투자한 결과.

완성된 것이, 바로 이것.

[식食 - ???]

[숙련도 Lv.1]

광일이의 것처럼 SSS+도.

병사들의 것처럼 A+도 아닌.

???라는 알 수 없는 등급의 무예였다.

'미완성이니까 그런 것이겠지요.'

등급의 이유는 간단했다.

'제 지식으로는 은공에게 맞는 무예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은공 본인뿐이겠지요.'

'나?'

'이 무예는, 은공에게 맞춰서 완성되어 나갈 겁니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느냐에 따라.

뼈대만 완성된 무예에, 살점이 붙는다.

내가 가는 길에 따라 그 방향성이 달라진다는 것.

'그러다 어느 날. 그 경지가 충분해졌을 때.'

광일이가 가진 천살성이 보기 드물다고 한들.

광일이 전에도 존재는 했으며.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예 또한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익힌 것은 다르다.

전에도 없었으며.

아마 이후로도 나밖에 익히지 못할.

'은공만의 무예가, 완성될 겁니다.'

나만을 위한 무예.

[무예 – 식(食)이 요리의 효과에 반응합니다.]

처음 보는 문구가.

눈앞을 채웠다.

170화 무예

[무예 – 식(食)이 요리의 효과에 반응합니다.]

처음 보는 문구가 눈앞을 채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예.

이 무예는, 내 행동에 따라 그 방향성을 달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적용 중인 요리 효과 - 4]

[1. 코스 요리 - 전쟁]

모든 종류의 전투 행위에 보너스를 가져다주는 코스 요리.

광일이가 대전사를 쓰러트릴 수 있게 일조하기도 한,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먹었던 요리다.

내가 익힌 무예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

그 움직임을 통해.

나는 내가 익힌 무예의 효과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먹은 요리의 효과에 따라... 최적의 움직임으로 바뀐다.'

[2. 전쟁 요리사의 슬레이파 육포]

각력을 큰 폭으로 상승시켜주는 효과를 지닌 요리.

그 요리가 무예와 결합한다.

[무예 – 식(食)이 각력을 보조합니다.]

슬레이파를 통한 각력의 성장은 물론 강력하지만.

그 너무도 강력한 각력을 조절하는 것은 내게는 힘든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 각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내게 자리 잡았으니까.

파아아악!

순식간에 정면으로 날아가는 몸.

그 속도는,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었던 수준.

그러면서도, 목표를 향하는 몸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반격을 확인.]

내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요격 태세로 나오는 어둠의 정령.

'피해야 하나?'

하지만.

공격을 피한다면, 그만큼 놈에게 접근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가 익힌 무예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온다.

[3. 전쟁 요리사의 강철 리자드 육포]

어지간한 공격은 버텨 낼 수 있는 단단함을 주는 요리.

그 효과를, 무예가 인식했다.

[무예 – 식(食)이 방어 능력에 맞춘 전투법을 제시합니다.]

나를 요격하기 위해 날아오는 공격들.

본래라면 피해야 마땅할 화력이었으나.

무예가 가르치는 방향은, 정반대.

'뚫는다.'

짙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포화.

나는 그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콰지지지직!!!

'제기랄. 더럽게 아프구만.'

적의 공격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만큼.

몸의 외곽선을 찢어발기는 공격들.

하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

총알조차 버텨 내던 괴물, [강철 리자드]

그 요리의 효과로 인해, 피해가 크게 무마되었다.

그럼에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즉시 전투 불능에 빠질 만한 상처였으나.

'지금의 난, 평범한 인간은 아니니까.'

내 몸의 혈관을 내달리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밤의 귀족'의 피.

스르륵.

공격에 의해 짖이겨지고 찢겨 나간 피부.

그 피부와 살점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갔다.

나를 쫓아내기 위해 퍼부어진 공격.

그걸 피하지 않고, 한가운데로 돌파하자.

나는 오히려 최적의 경로로 '어둠의 정령'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혹시 몰라 만들어 둔 요리.

[4. 성스러운 기운의 갈릭 비프 육포]

성수와, 마늘을 듬뿍 집어넣어 만든 육포.

그 효과는 간단했다.

[항마의 기운]

[마(魔)에 속하는 존재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보너스를 획득합니다.]

저 검은 그림자 같은 녀석.

이름이 어둠의 정령이라고 했나?

"딱 봐도 사악해 보이는 이름이구만."

[무예 – 식(食)이 합당한 공격 경로를 제시합니다.]

그 효과에 맞추어.

손에 쥔 칼날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정령의 중심부를 향했다.

형태를 지니지 않은 정령.

본래라면 식칼 따위로 베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안개 같은 형상.

서걱-

실체가 존재하지 않을 터인 그 안개가.

내 식칼에 베여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 *

[...!@#!@#?!@%?!!!!]

그림자 녀석은, 자신이 베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일까.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

그림자의 형상이 거칠게 파도쳤다.

하지만.

'얕았다...!'

방금 공격으로는, 녀석을 완벽하게 손질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미완성이니까.'

내 무예는, 어느 정도 완성된 다른 녀석들의 것과는 다르다.

내가 공을 들여 차근차근 직접 완성해야 하는 무예.

그 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 녀석을 일격에 마무리할 정도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거다.

[손상을 확인. 있을 수 없는 일.]

이 녀석을 완벽하게 손질하려면.

앞으로 두 번은 더 칼질을 해야겠지.

아니, 그러고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솔직히 가능은 할까 싶은 일이다만.

"뭐. 내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착각하면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내 직업은 요리사.

그리고 이건, 전투직이 아니라.

'서포터 직업이거든.'

콰아아앙!

"신 병장님!"

"가세하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내 음식을 먹은 수십, 수백 명의 병사에게는 비빌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내 적 또한, 마찬가지.

"딱 봐도 사악해 보이는 녀석이구만!"

"다들, 대 마(魔)용 전투 식량 섭취!"

가세해온 병사들이 전투 식량을 섭취하자.

그들의 몸 주위에, 은은한 광채가 피어오른다.

[항마의 빛]

마에 속한 적을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빛이었다.

전투 식량으로 이루어진 버프.

뱀파이어 토벌전에 비하면, 그 빛은 조금 약한 편이었으나.

'병사들의 강함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

이제 남은 것은.

병사들과 함께, 저 녀석을 [요리]해 버리는 것뿐.

[가장 위협적인 존재 제거....]

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내 칼질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실패. 실패. 실패.]

"어?"

기세등등하게 나를 공격하던 검은 그림자가.

저 멀리 몸을 빼기 시작했다.

[도주! 도주! 도주!]

"어, 어어?"

"저 녀석! 도망간다!"

사르르-

엄청난 속도로 전장에서 이탈하더니.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다는 듯.

사르르 자취를 감추는 녀석.

"...저 녀석."

그렇게 뭔가 있어 보인다는 듯 등장한 데다가.

조금 전까지 나를 몰아넣은 녀석.

심상치 않은 존재인 것은 확실한데.

그런 녀석이, 설마.

"도망친 거냐?"

그야.

내가 습격당한 것을 본 부대원들이 합류한 상황.

그들과 힘을 합치면, 전투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지긴 할 테지만.

'이렇게 도망간다고?'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내 칼질 하나뿐이었다.

저 정령이라는 녀석.

생각보다 겁이 많은 성격인 건가?

띠링!

[어둠의 정령을 마주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어둠의 정령은 거대한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여러 차원에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 어둠의 정령에게서 살아남은 것은 물론, 역으로 격퇴하기까지 한 당신!]

[굉장한 업적에 대해,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눈앞을 가득 채우며 나타나는 메시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상급 요리 재료 : 정령핵을 획득합니다.]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

몰려드는 경험치는....

짜릿한 황홀감을 제공해 주었다.

* * *

전광일 상병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꿈 안에서.

그의 눈앞에는, 커다란 괴물이 서 있었다.

'무서워.'

너무나도 무섭게 생긴 괴물.

그 괴물이, 자신을 향해서 무기를 휘둘러 온다.

겁 많은 성격의 전광일은.

평소라면 몸을 움츠린 채, 온몸을 벌벌 떠는 것이 한계였을 테지만.

'어? 안 무섭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괴물을 보아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꿈속에서.

전광일은 괴물을 상대로 싸웠다.

그가 잘 싸우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해 주기도 했다.

'헤헤.'

남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전광일은 그 사실이 마냥 기쁘고 즐거웠다.

하지만 또 언제부터일까.

꿈속의 괴물들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전광일로서는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

'히잉.'

그가 싸움을 못 한다고 누군가 그를 탓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남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손에 커다란 장난감을 쥐여 주었다.

[천살신무 SSS+]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라도.

충분히 무찌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멋있는 장난감을.

그 장난감을 쥐고 휘두르자.

엄청나게 크고 사악한 괴물도 혼내 줄 수 있었다.

마치 만화 속의 영웅이 된 듯한 기분.

꿈속의 전광일은 기분 좋게 웃었다.

다시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뻤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의문.

'왜 안 무섭지?'

예전의 그였다면.

너무 무서운 나머지 발걸음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공포를 없애주었다.

'이 장난감은 또 뭐고?'

원래라면.

나약한 그로서는,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손에 장난감을 쥐여 주었다.

그 존재를 떠올리자.

전광일은 마음속에 깊은 은혜를 새겼다.

겁 많은 자신을 쓸 만한 놈으로 만들어 준 것으로도 모자라.

나약한 그를 강하게 만들 방법을 만들어 주고.

골치였던 광기마저 제어할 수 있도록 해 준 은인.

손에 쥐어진 이 장난감 역시.

그를 위해서 사용하리라-

"정신 차렸냐."

"...아. 예."

정신을 차리자.

아직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었다.

고개를 들자.

그의 곁에는 이민재 병장이 서 있었다.

"저 어떻게 된 겁니까?"

"뭐야. 제대로 기억 안 나나?"

"예에.... 아직은, 조절이 미숙해서."

"뭐... 설명해 주긴 어렵지 않지."

가볍게 웃은 이민재 병장이 말을 잇는다.

"네 덕에 이겼다."

"예?"

"저쪽의 대장 역할을 하던 괴물을, 정말 개 패듯 두들겨 패더라? 그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그놈이 기절하자마자 다른 괴물들을 사냥하러 가는 모습이란...."

"제, 제가 그랬단 말입니까?"

"그래. 한참을 그렇게 날뛰니, 저 짐승 같은 놈들도 너를 피하기 시작하더군. 그렇게 적이 없다 싶어질 때쯤에서야 기절했어."

전광일 상병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기가 그 정도의 활약을 펼쳤다니.

"...절 지켜 주시려고 여기 계셨던 거군요."

"생각보다 금방 정신을 차린 거 보니, 그럴 필요도 없었나 싶다만."

이민재 병장과는 그렇게까지 친근하지는 않은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그가 종종 이렇게 말없이 부대원들을 돕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대외적인 리더는 김현식 중위.

실제 리더는 신영준 병장.

그리고, 누구보다 부대의 내실을 다져 주는 사람은 이민재 병장이라는 느낌.

"아. 그러고 보니 신영준 병장님은...?"

"저기다."

자신이 정말 그만한 활약을 펼쳤다면.

그걸 가능케 만들어준 사람은, 신영준 병장.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

신영준 병장의 근처에는.

빛이 사라지고, 검은 공간이 전개되어 있었다.

신영준을 중심으로, 마치 다른 세계처럼 내려앉은 검은 빛.

그 중심에는.

처음 보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의 형상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존재가 내뿜는 불길한 기운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준.

그 불가사의한 존재에 맞서.

허공에 떠오른 요리 도구들을 휘두르는 신영준 병장.

"이, 이민재 병장님!?"

"음?"

"뭐 하시는 겁니까! 절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어서 신 병장님부터 도와 드려야...!"

"아아.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그의 손에는 거대한 번개의 창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아마 저 검은 그림자를 향해 던지려고 했던 모양.

하지만.

피식.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더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이민재 병장.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거대한 안개와 같은 형상의 존재.

악마를 연상시키는 그 사악한 기운에 맞서.

신영준 병장은, 새하얀 빛이 서린 사시미칼을 휘둘렀다.

-서걱.

그러자.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던 그림자.

그 일부가, 베어져 나간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른 병사들이 막 전투에 가세하려던 찰나.

[도주! 도주! 도주!]

신체의 일부를 베인 그림자가.

마치 공포에 질린 듯 저 멀리 도망치는 모습.

"거 봐."

"...."

"누가 누굴 돕겠냐."

그 모습을 본 이민재 병장은.

손에 쥐고 있던 번개의 창을 다른 적을 향해 날렸다.

전광일 상병이 쓰러트린 녹색갈기의 대전사는, 분명 엄청난 강자였다.

그를 쓰러트린 덕분에, 군단이 전장의 승기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확실하겠지.

하지만.

전광일은, 그 대전사를 또 상대하면 상대했지.

방금 보였던 저 검은 그림자를 상대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당연한 얘기다.

본체가 없어 보이는 존재를, 대체 무슨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렇기에.

전광일 상병은....

"흐흐."

"뭐, 뭐야,"

"흐흐, 흐하하하!"

"미친. 아직 광기가 남아 있는 건가?"

미친 사람처럼 웃어 재꼈다.

그 모습을 본 이민재 병장이 당황하며 마법을 시전하려 했으나.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그냥?"

"역시 신 병장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전광일 상병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맑아 보였다.

"제가 조금 강해졌나 싶으면, 저분은 한 발자국 더 가 계시는군요."

"...."

"대체 어디까지 가시려는 건지."

그 얘기에.

이민재 병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벽이라도 느껴지나?"

"설마요."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전광일 상병에게는, 언젠가 신영준 병장과도 대등해질 수 있을지 모르는 힘이 있다.

신영준 병장이, 직접 그에게 가져다준 힘.

'이 힘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 터.

아니.

그보다 앞서가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

그렇다면.

조급해질 이유 따위는 없다.

신영준 병장이 얼마나 앞서 가든 간에.

자신은 천천히, 스스로의 템포에 맞추어.

주어진 것을 연마해 나가면 그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광일 상병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도 다시 전투하러 가보겠습니다."

"벌써? 방금 걸로 꽤 지쳤을 텐데."

"모르셨습니까? 부상이 엄청 심한 거 아니고서야. 광기 버프 켜고 전투에서 활약할수록 체력도 회복됩니다, 저."

"...개사기구만."

"뭣보다."

그가 익힌 무예.

"숙련도작 좀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 숙련도는 아직 1에 불과하다.

171화 첫눈

"놈들이 도망칩니다!"

적들의 대장 격이었던 괴물이 죽고.

그 괴물을 이용한 공격 또한, 신영준 병장에 의해 사라지자.

아직 많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던 적 병력은 조금씩 후퇴를 시작했다.

"추격할까요?"

"그러자...고 말하고는 싶다만."

이민재 병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쪽 피해도 너무 크군."

"그럼...?"

"일단 부상자들부터 수습한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에.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지친 숨을 내뱉었다.

[스킬 - 보조 셰프의 발동을 취소합니다.]

스킬도 취소하자.

허공을 날던 요리 도구들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

"맙소사...."

그 모습을 본 부대원들이 묘한 감탄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익힌 스킬이나 특성들은 대부분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것들.

주로 서포트 용도의 기술들이 많았다.

특히, 겉으로 봤을 때 이거다 싶은 효과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지.

하지만.

이 [보조 셰프]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크흠. 조, 조금 멋있는 것 같기도?'

허공을 날아다니는 다양한 무기들.

겉으로 봤을 때의 화려함은, 이민재 병장의 번개하고도 비견될 정도다.

"멋있다...."

병사들의 선망 어린 표정.

약간은 우쭐한 마음도 들 정도였으나....

"요리도구만 아니였다면 더 멋있었을 텐데."

"...."

뒤이어 들려 오는 얘기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염동력 같은 건가? 역시 신 병장님. 하필 전부 요리도구인 게 유일한 흠이군."

"...."

"엄청 화려한 능력을 개화하셨군. 너무 강력한 능력이라 요리도구만 사용 가능한 게 페널티인 건가."

"...."

나와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 [보조 셰프]는 [요리 도구 숙련]만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도구를 줄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칼만 주기엔, 여러 도구를 주는 편이 범용성이 좋다.

공격을 막을 때는 표면적이 넓은 웍이나 프라이팬 등이 칼보다 나을 테니까.

그나마 칼이나 돈가스 망치 같은 건 괜찮지만.

아무래도 웍이나 뒤집개, 프라이팬 같은 게 허공을 날아다니다 보니.

화려하고 강력한 기술이라기보단.

뭐랄까.

'주방에서 일어난 폴터가이스트 현상 정도...?'

그냥.

신기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제기랄.'

서포터 직업 주제에 멋은 무슨 멋이냐.

우쭐해진 마음이 곧바로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망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나뿐만은 아니였다.

"이, 이병민 이병. 네가 이렇게 강했다고?"

나와 같이 무예를 익히고 돌아온 이들.

그들 모두가, 부대원들에게 경악의 눈빛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무예라는 걸 익혀서 그렇게 강해졌다?"

"예. 그렇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슴까."

평범한 편에 속했던 병사가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한 거다.

그와 비슷한 수준이였던 다른 병사들 입장에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일.

"그거, 우리도 익힐 수 있는 거냐?"

"예. 그러기 위해서 신 병장님이 교관들을 데려왔습니다."

"교관이라니?"

"엄청나게 강하고 기도 센 양반들임다. 신 병장님은 그 교관들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으신 건지."

뭐긴 뭐야.

불량식품 좀 먹여 주니 좋아하더라.

"신 병장님이라. 크흠."

이병민 이병과 얘기하던 박 일병이 슬쩍 목소리를 낮춘다.

"그 무예란 걸 익히면... 우리도 신 병장님처럼 칼을 날릴 수도 있게 되는 거냐?"

"예? 그럴 리가요."

"...."

"그딴 게 되는 건 신 병장님뿐인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저건 신 병장님이 무예를 익히기 전부터 가능했다고 들었슴다."

"...그, 그런 거냐."

다행히.

무예에 대한 설명은 다른 부대원들이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귀찮은 일이 하나는 줄어든 느낌.

'어디 보자. 그럼 나는.'

전후 처리를 시작해야겠지.

* * *

전투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느낌에 들어가자.

나는 민재 형을 찾아갔다.

"왔냐, 영준아."

"내가 너무 늦은 게 아닌가 모르겠네."

"설마. 딱 적당할 때 와 줬어. 부상자가 꽤 많긴 하지만... 전투의 성과에 비하면 적은 편이지."

민재 형은 다른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거의 다 정리됐고... 아. 그러고 보니."

"음?"

"이 인근의 창고 같은 곳에 생존자들이 단체로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그거... 네 짓이겠지?"

"아, 일단은."

정확히 말하면 내 짓은 아니다.

내 권속인 아리엘라.

그녀는 후방에서 마냥 분탕만 친 게 아니었다.

그녀가 확보한 영역 내의 인간들을 모아, 안전한 곳에 숨겨 둔 것.

"그 사람들은 정수아가 데려갔다."

"정수아가? 원래 생존자들을 담당하는 건 이상아 아니었나?"

"상아 씨는 요즘 생산직 쪽에서 일하느라 바쁘거든. 오히려 정수아가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인망이 조금 높아. 특히 우리 부대가 구출한 사람들이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더군."

그러고 보니.

노예로 갇혀 있던 사람들을 구출할 때마다.

꼭 그 근처에서 무언가 얘기를 하던 정수아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시킨 건 정령 드론 업무뿐인데. 얼마나 성실한 거야.'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할 줄이야.

원래도 사람들을 케어하는 데에 재능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원래 생존자들과 관련된 업무는 이상아 조장이 맡고 있었다만.

본인이 좋아해서 하는 일인 듯하니.

아예 관련 업무를 이관해도 괜찮을지도.

"그러고 보니, 광일이는?"

"도망치는 적 병력들을 추격하러 갔다. 멀쩡한 병사들 몇 명이랑, 네가 이번에 데려온 처음 보는 두 사람도 같이."

"오. 되게 호전적인데."

"그러게 말이다. 제 말로는 숙련도작을 해야 한다나...?"

숙련도 작이라니.

아무튼, 광일이는 많이 바쁜 모양.

"그건 그렇고."

대략적인 보고가 끝나자.

민재 형은 내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그림자 같은 괴물은 정체가 뭐냐?"

마지막에 나를 습격한 존재.

[어둠의 정령].

그 녀석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겠지만.

"나도 몰라."

"뭐?"

그게 뭐 하는 녀석인지 따위.

나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 자체는 알지만. 왜 나를 노렸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맞겠네."

저 녹색갈기 부족들은 '대지의 정령'을 사용했다.

[요리사의 눈]에 나온 정보에 따르면.

어둠의 정령은 굉장히 불길한 존재라는 것 같다.

일반적인 이들은 계약 자체를 하지 않는다든가.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라든가.

꽤나 보기 드문 존재인 것처럼 설명되어 있었지.

'그런 녀석이 왜 나를 노렸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어둠의 정령은 거대한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여러 차원에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녀석.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것 같더라고."

"뭐?"

그 얘기에.

민재 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악마라니. 그런 게 실제로 있다는 거냐?"

악마.

성경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

'이 시스템의 번역은 꽤나 대충이니까, 실제 그 악마와 같은 존재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리엘라가 실제로는 뱀파이어가 아님에도 불구.

그 특성은 여러모로 뱀파이어와 유사했던 것과 마찬가지.

저 악마 역시.

성경에 나온 그 존재가 아니라고 할지언정.

그와 굉장히 유사한 존재일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뭐.

나는 놀라는 민재 형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쯤 되면 뭐가 나와도 이상하진 않잖아?"

"그, 그렇긴 하다만."

민재 형은 그 존재의 이름을 듣고 크게 놀란 모양이지만.

나는 이전에도 한 번,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내 권속이 되어 버린 아리엘라.

그녀가 비슷한 말을 했었거든.

'뱀파이어의 선조는 악마라던가, 뭐라던가?'

악마는 그 말에 강제성을 지니며.

밤의 귀족에게는 그 피가 옅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에, 복종의 맹세를 하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다던가.

그때 처음 악마의 존재에 대해 들었다.

서환과 미호 등이 살던 세계를 멸망시킨 것도.

어쩌면 그런 녀석일 수도 있겠지.

"그 정령이 다루던 시체... 하나는 그 대전사라는 녀석이었고, 하나는 [대주술사]라는 녀석이더라고."

저들 부족의 주술사들은 정령을 다룬다.

아마 그 대주술사라는 녀석이, 자신마저 희생해가며 어둠의 정령을 소환한 거겠지.

"그럼 이 어둠의 정령이 널 노렸던 건, 설마."

"어허. 확실한 건 아니야."

"그 악마라는 녀석이... 널 노린 건가."

민재 형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악마라.... 그런 녀석을 상대로, 우리가 싸울 수 있을까."

"뭐, 당장 급한 건 아니잖아? 게다가."

나는 아직 요리의 버프가 유지되고 있는 칼을 들었다.

[항마의 기운]이, 내 칼에 깃든 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뱀파이어도 토벌한 전적이 있으니까."

저 어둠의 정령 역시.

이 기운에 피해를 입은 듯하니.

"상대하는 방법은 없지만은 않다는 건가."

사실, 내 요리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힘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역시, 사람.

'묘양사의 스님들. 전부 성기사 아니면 사제. 성직자 계열이란 말이지.'

우리 부대 최초의 사제.

신중수 일병도 불교도 출신이다.

그 후에 가입한 사제들 중에는 다른 종교 출신들도 많다만.

아무래도 스님들은 그 직업상.

이 게임에서 얄짤 없이 성직자 계열로 가 버리는 것 같다.

'진짜 대충인 전직 시스템이다 싶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스님들이 신이시여, 어쩌구 하는 꼴이 영 적응은 안 된다만.

자고로 악마를 패는 건 언제나 성직자 아니겠냐.

그냥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시도했던 영입이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든든한 우군.

당장 악마가 나타날 리도 없고.

대처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

물론.

정말 말처럼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름의 대비는 해 둬야겠지.'

적이 당장 나타나지만 않는다면야.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으니까.

"그건 그렇고, 스님들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응?"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질 않으니."

"아."

자세한 일을 길드 메시지로 설명하기에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좀 복잡한 일이라, 나중에 직접 만나서 알려 줄 생각이었다.

나는 민재 형에게 내가 부대를 떠난 뒤 겪은 일을 모두 알려 주었다.

"과연.... 왜 갑자기 한 달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겠다고 한 건가 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운이 좋았지."

"너와 함께 떠난 상인이 네가 아니라 웬 스님들과 같이 왔을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민재 형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광일이의 광기가 제어할 수 있게 되다니.... 다행이야."

"그러게. 녀석도 엄청 좋아하더라."

"뭐야. 그렇게 남 얘기처럼 말하기냐?"

"응?"

그야.

남 얘기가 맞으니ㄲ....

"너도 내심 신경 쓰고 있었잖아. 광일이가 광전사가 된 거."

"...크흠."

그 말에.

나는 민망하게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남들 생각을 많이 한단 말이지. 이 형은.'

내 능력들에 대해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이 형이었다.

내가 광일이의 광기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단 것 역시.

민재 형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

"네가 생각보다도 부대원들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

민재 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요리를 통해 부대원들의 멘탈 케어를 해 주고 있다는 것도. 갑자기 세상이 반쯤 멸망해 버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건, 아마도 네 덕분이 크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래. 부끄럽게."

"하지만. 나는 네 멘탈도 걱정될 때가 많다."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자.

조금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민재 형.

"다른 이들의 멘탈이야 네 요리가 어느 정도 케어해 준다지만. 너는 누구도 케어해 주지 못하니까."

"나야 뭐. 워낙에 강철 멘탈이라. 혼자서도 잘하네요."

"하하. 너 잘났다, 그래. 아무튼. 네가 신경 쓰고 있던 일 하나가 해결됐다고 하니. 나로서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 그건 그렇고. 무예라...."

민재 형은 혹시나 하는 말투로 물었다.

"그거, 마법사들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될 확률이 높겠지?"

"아마도?"

"...끄응."

아쉬운 한숨을 내쉬는 민재 형.

기본적으로 무예는 몸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신체 능력이 높지 않은 비전사 계열 각성자들은....

"익히는 것 자체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효율이 좀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네."

"너는? 넌 비전사 계열을 넘어서 비전투 계열이다만."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나는 논외로 쳐야지."

"...그렇긴 하지."

어쩌면 사수들은 조금이나마 활용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총검술이라든가, 뭐 그런 걸로.

하지만.

"마법사들이 활용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군."

익힐 수는 있겠지만.

투자하는 시간 대비 효율은 나오지 않겠지.

"조금 아쉽군."

"뭐 어때. 전열이 단단해지면 후열의 마법사들도 안정되니까. 화력도 더 늘어나지 않겠어?"

"그건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민재 형답지 않게도.

눈에 보일 정도로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 * *

그후로.

우리 부대는 부상자들을 정리하면서, 승전의 기세를 놓치지 않고 진격해 나갔다.

지난 전투에서 [녹색갈기 대전사]를 쓰러트렸던 덕분일까.

적들의 저항은 이전보다 약해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숫자는 엄청난 편이었지만.

무예를 익힌 병사들을 필두로.

여러 동맹 세력들이 앞장서 전투를 벌인 결과.

[ROK.17 지역의 영토, '소도시 (2)'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영토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동안, 추가적인 '점령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결국 우리는.

녹색갈기 부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인 화천군과 철원군.

그중 하나인, 화천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후우."

"아직 정리 못 한 지역이 훨씬 많을 텐데, 용케도 지배권이 인정됐네."

"우리 세력이 큰 것보단... 원래의 지배세력이 물러난 게 크겠지."

[요리사의 눈]을 통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녹색갈기 부족은 짧은 시간에 그 숫자를 불릴 수 있는 세력이다.

지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더 진격해 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띠링.

[무당 : 일단은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거다.]

익숙한 소리와 함께.

한 줄의 메시지가 눈앞을 채웠다.

'여기까지만 하라니.'

겨우 이긴 전투다.

이 승기를 몰아가도 모자랄 판에, 무슨 얘기인가 싶었으나.

토옥.

"...어?"

볼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 내리고 있던 것은.

"눈...."

강원도의 첫눈은 조금 빠르게 내린다.

겨울의 첨병이, 조금 이른 타이밍에 찾아왔다.

"첫눈이군요."

눈이라.

어렸을 적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렐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강원도의 군인들에게 있어서 저 눈들은 조금 이쁜 하늘의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멸망한 세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저 눈은....

'재앙이나 다름없겠지.'

여기까지만 해야 한다는 이유 역시.

짐작이 갔다.

'겨울을 버텨 내려면, 전투에 집중하고 있을 여유는 없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니.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온다.

"잘 견뎌내야 할 텐데."

겨울이 찾아왔다.

아마도.

21세기 이후, 가장 혹독할 겨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