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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이거 좀 싸한데.

'이놈을 쳐 죽이는 데 5초면 충분하다.'

상대를 제압하는 선에서 그치려던 첫 의도와 달리.

그의 몸을, 광기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뭣!?"

이전에도 속도와 힘으로는 압도하고 있었으나.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움직임은, 아예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콰직!

광기에 지배당한 전광일 상병의 거대한 손아귀가, 갑옷남의 투구를 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투구를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까드득....

"사, 살려...."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투구가 으스러진다.

투구 안 쪽에 있던 남자의 머리통이 터져버리기 직전.

"멈추시오!"

갑옷남의 뒤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그 목소리를 듣고 급하게 손에 힘을 빼려고 한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끄, 끄윽."

손이 그 명령을 듣는 것은 조금 늦었다.

그의 손이 투구를 파고 들어가고.

머지않아 그 안의 살을 으깨기 직전.

팍!

소리를 지른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손에 든 봉을 휘둘러 그의 손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전광일 상병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허, 허억. 허억...."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어찌 되었든 간에, 덕분에 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

'내가 무슨 짓을.'

전광일 상병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뒷걸음질 쳤다.

이성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광일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를 잡아당겨 준 사람.

신영준 병장의 얼굴이 보였다.

"신 병장님."

믿고 맡겨달라고 한 주제에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일 뻔했다.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는 전광일 상병이었으나.

"잘했다."

탓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두들기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신영준.

"마지막에 실수한 건 조금 아쉽지만, 사실 그건 내 탓이기도 하고... 덕분에 좋은 걸 봤거든."

"예?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잘했다. 쉬고 있어."

전광일 상병은 의아해하며 뒤로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신영준과 전광일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많이 다쳤군. 괜찮은 게냐."

"죄, 죄송합니다. 제가 힘이 모자란 탓에."

"됐다."

갑옷을 입은 두 사내도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사내가 남자의 몸 위에 손을 올리자.

하얀 빛무리가 그 위에 쏟아지며 상처를 치료했다.

'힐러! 사제 각성자인가?'

군단의 의무병.

중수가 치료를 할 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 치곤 싸움을 말리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지.'

전광일 상병과 싸우던 갑옷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머리를 으깨려던 손을 쳐낸 그 봉술에 담긴 위력도 상당했다.

사제라기보단.

아마 전투와 치료를 병행할 수 있는 직업.

'...성기사라던가.'

신영준 병장이 그렇게 상황을 관찰할 때.

상협은 해명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이분들은 탈영병이 아닙니다! 진짜 군부대에서 나온 군인분들...."

"진짜 군인이라니. 군부대는 모두 전멸했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는가! 탈영한 병사들이 총을 들고 온갖 패악질을 부린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내가 비록 졌지만, 힘만 있었다면!"

"아니. 잠시만."

전광일 상병과 싸우던 남자는 화를 내며 반박했으나.

뒤에 등장한 남자가 그 말을 끊었다.

"저 사람들. 남쪽에서부터 올라온 것 같구나."

"예? 아. 그랬던 것 같군요."

"그래. 너는 남쪽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

"...저번 회의 때도 얘기했을 텐데. 남쪽에 큰 군부대 하나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아."

그 얘기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후우. 뻔하지. 듣는 척만 하고 있었던 게로군."

"그, 그게. 죄송합니다."

"됐다. 응급치료는 끝났다. 혹시 모르니 나중에 추가적인 치료를 받도록."

전광일과 싸우던 남자가 뒤로 물러나고.

싸움을 말렸던 쪽의 남성이 앞으로 나서며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소문의 군부대에서 나오신 분들 같습니다만."

"예! 예! 그쪽에서 온 게 맞습니다!"

"탈영병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투구를 벗으며 말을 잇는 남자.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던 투구.

그 안에서 나온 것은....

'....'

머리카락이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

깔끔한 대머리의 장년인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어쩌다 저렇게....'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이었으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 절을 찾아온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예. 실은 거래를 제안드리고자... 예?"

상황이 진정됐으니 본론을 꺼내려던 상협이었으나.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 말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절을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소."

절이라니.

그렇다는 건 저 대머리의 남자는.

'스님, 이라고.'

스님인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

산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들.

우리처럼 산속에 있는 군부대가 아니고서야.

이런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을 만한 세력은 드물다.

'그 정체가 절의 스님들이라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얘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돌려 상협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까.

저 사람이 스님이고.

여기가 절이라고 하면.

"상협 씨. 당신 설마."

"...."

"절에다가 육포를 팔자고 하신 겁니까?"

이 미친 양반아.

* * *

장사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아는 거래의 상식이란 게 있다.

'수요와 공급.'

뭘 팔려고 하면.

일단 그걸 살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육식을 금하는 절에 가서 육포를 팔려고 했다니.

수요가 0인 곳에 공급만 하겠다는 뜻인데.

"...상인 맞아요?"

"그, 그게.... 이상하네요. 제가 가진 정보에는 절이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

그러고 보니.

아까도 이 세력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식의 얘기를 하긴 했다.

'생각해 보니 이 양반, 아직 레벨이 10도 안 됐지.'

직업은 '초보 상인.'

가지고 있는 특성도 아마 최하급이겠지.

'정보 습득 숙련이 있다고 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해야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절에다가 육포를 팔자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나보다도 상협이 훨씬 더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괜찮을 수도 있나?'

이런 세상이다.

저쪽도 식량에 마냥 여유가 있지는 않을 터.

살기 위해서라면 금계 하나쯤은 빼고 고기를 구매하려 할지도 모른다.

확률로 따지면 상당히 높겠지.

'뭐.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상행은 어디까지나 얹어가기.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다.

주목적은 동맹.

그쪽으로는, 사실 꽤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광일이가 잘해줬지.'

광일이가 진심으로 상대를 몰아쳐 준 덕분에, 갑옷남도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마지막에 광기를 켰을 때는 조금 식겁했다만.'

그건 제어가 불가능한 힘.

게다가,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녀석을 광전사로 만들어 버린 내가 문제기도 하다 보니.

'광일이를 탓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광기를 킨 상태의 광일이에게는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그 점이 상대의 전력 파악에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상당히 강해.'

광일이와 싸운 남자도 물론 강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나타난 저 대머리의 스님.

'광일이를 밀칠 때의 움직임.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앞서 싸우던 남자와 비교해도, 훨씬 더 압도적인 몸놀림.

단순히 스탯이 높거나 한 게 아니다.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술'을 사용한다는 느낌.

저 두 사람이 이 단체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 정도의 인물들이 평균이라고 한다면.

우리와 비견될 만한 단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거짓말은 아니게 되는 셈이다.

"거래라니. 무슨 거래 말입니까?"

"그게. 식량을 좀 가지고 왔는데 말이죠."

상협이 말하자.

"식량...!"

특히 식량이라는 부분에서 눈이 크게 떠지는 스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그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그들을 제외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그가 다시금 상협을 보며 물었다.

"그 말. 진짜입니까."

"예에. 그런데 이게 좀 문제가-"

"...그렇다면."

뭔가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 무기는 반납해 주셔야겠습니다."

"그건 즉."

"...주지 스님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주지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식량에 대한 얘기는 비밀로 해 주십쇼."

* * *

부대원들은 무기를 모두 내려놓았다.

우리도 잘 알지 못하는 세력.

무기를 내놓는다는 건 좀 위험한 판단이긴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무기를 든 자들을 입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들 입장에서도 무장한 군인들을 안쪽으로 들이기는 어려울 테니.

우리 쪽에서 한발 양보해 주기로 한 것.

"여기 있소."

"...엄청 큰 글러브로군."

그렇게 한 명씩 무기를 반납하고.

내 앞의 광일이까지 반납을 마치자, 내 차례가 왔다.

"여기 있습니다."

"음? 무기는 이게 전부입니까?"

"예."

내가 그에게 건넨 것은.

한 자루의 권총이었다.

"권총이라. 하긴, 총이 있으면 다른 무장은 거추장스러울 뿐이겠지."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군부대에서 지급받은 물건인지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내 진짜 무장은 저런 권총이 아니다.

식칼들은 모두 그림자 속에 넣어 두었다.

'평소에 권총도 들고 다니길 잘했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나까지 무기를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무기의 반납이 끝난 뒤.

나와 부대원들은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산을 오르자, 이런저런 자재들로 보강된 넓은 벽이 보였다.

그 벽 근처를 돌아다니는 갑옷 입은 사람들까지.

그들을 지나, 절의 산문을 넘어.

그 안의 풍경을 본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절 안을 돌아다니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

원래도 좀 유명한 절이었던 것일까.

상당히 넓은 부지를 자랑하는 절이었으나, 그마저도 모자란 것일까.

곳곳에는 텐트를 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종병 데려올 걸 그랬나?'

지금은 사제로 각성해서 '신이시여....' 같은 기도문을 외우는 녀석이지만.

우리 부대 군종병.

중수는 본래 불교도였다.

이 정도로 큰 절이라면 아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데려오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

나와 부대원들이 사람들을 보며 신기해하자.

"...사람들이 많은 게 신기한가 보군요."

"아. 예. 조금."

"근처의 생존자들이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모두 받아들이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요."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인원이라니.

난 솔직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대단하다니요?"

응?

"그야. 이만한 인원수라니. 상당히 큰 세력을 일구셨다는 거 아닙니까. 순수하게 대단하다는 뜻이었는데요."

"...아. 과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군요."

뭐랄까.

스님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그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뭐지?"

산문에서 광일이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결과.

이들은 정체불명의 기술 같은 걸 익히고 있다.

아마도 소속원 한 명 한 명이 상당한 강자.

'거기에다가 인원수까지 많다면... 좋은 거 아닌가?'

표정이 어두워질 이유가 있나 싶다만.

"크흠."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이.

헛기침을 한 그가 발걸음을 빨리했다.

"죄송합니다만, 잡담을 나눌 여유는 없습니다. 가급적 빠르게 주지 스님께 얘기를 전하고...."

그 순간.

"승주 스님!"

저 멀리서.

누군가가 우리 쪽을 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이럴까 봐 서두르려 했던 것인데...."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스님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진수 아버님."

"승주 스님. 뒤에 저 사람들은 또 누구입니까? 또 외부인을 늘리시려고...."

우리와 스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덩치 큰 중년 남성.

그가 우리의 면면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군복...? 설마. 탈영병들을 절 안으로 데리고 오신 거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진정하시지요."

"진정하라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소리를 지르며 스님에게 따지고 드는 남자.

"안 그래도 사람들이 굶어 죽냐 마냐 하는 판인데. 여기서 사람들을 더 데려와요!? 그것도 탈영병들을!?"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레벨이 올라가며 나름대로 마력 같은 것에 익숙해진바.

우리를 안내하던 이 승수 스님이라는 양반.

'꽤 고레벨이야.'

아까 광일이와 싸웠던 남자가 공손하게 굴었던 것도 그렇고.

각성자들 중에서도 꽤 지위가 높은 인물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 스님한테 저렇게 강하게 나오다니.

저 아저씨가 그렇게 대단한 양반인 건가? 싶었으나.

[식재료 감별(강화)]

[홍정수]

[영장류 - 인간종]

[신선도 - 상]

그 외의 내용은 없었다.

즉.

각성자는 아니란 건데.

'...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안감.

나는 최대한 마력에 집중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사람.

그중에서....

각성자로 느껴지는 기척은 매우 적었다.

산문에서 만난 이들의 강함이라면 각성자를 늘리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을 텐데.

이 숫자라.

'멸망의 날' 직후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대원들을 모두 각성시켜야 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시절의 기억.

-한 명이라도 각성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례가 생기면, 자기도 못 하겠다고 우기는 놈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올 거야.

그때.

민재 형과 나눴던 대화까지.

-각성한 병사들과 안 한 병사들 간에 마찰도 생길 수 있고. 그런 불화가 생기면, 결국 분열로 이어지겠지. 그러면....

-부대가 약해지겠군.

상당히 강력한 각성자로 보이는 스님.

그 스님이,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눈치 보던 모습에.

스님에게 삿대질을 해 가며 소리치는 중년인.

그 모습을 팔짱 끼고 지켜보는, 수없이 많은 비각성자들까지.

"이거 좀 싸한데."

그것도.

아주 싸했다.

147화 이대로 가면 망할 겁니다.

"이거 좀 싸한데."

"예? 뭐가 말입니까?"

"그냥 혼잣말. 신경 쓰지 마."

그 와중에도.

여전히 스님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중년인.

"중요한 일을 정할 때는 사람들끼리 상의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또 스님들은 멋대로.... 각성자들이 하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라, 뭐 이런 겁니까? 사람들 생각은 하지도 않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그런 게 아닙니다. 타 지역에서 오신 각성자분들이신데."

"각성자라고?"

자신과 대화하던 승주 스님을 제치고.

우리 쪽을 향해 삿대질하는 장년인.

"어이, 거기 아저씨!"

하필이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아저씨. 각성자시라고?"

아니.

우리 아빠랑 형님 동생 할 만한 나이로 보이시는구만.

언제 봤다고 나보고 아저씨래.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뭐, 각성자라면 직업이 있을 거 아니에요? 직업은 뭔데."

그 말에 나는 조금 불쾌함을 느꼈다.

각성자들 간에 상대의 직업을 묻는 것은 실례다.

상대는 각성자가 아니니, 그런 것도 모르는 거겠지.

"...요리사입니다만."

"허, 요리사?"

뭐, 레벨이나 스탯까지는 실례라고 쳐도.

직업 정도는 알려 줘도 되겠다는 생각이었으나.

"각성자들 중에 그런 직업도 있나? 마귀인 걸 속이려는 건 아니고?"

"이제 그만 하시지요. 진수 아버님."

"내가 세상이 이 꼴 나기 전에는 식당을 몇 개씩 운영했는데 말이야. 아주 우리 가게에서 일하던 주방 아줌마들도 다 각성자라고-"

"...시주님!"

승주 스님이 장년인의 말을 끊었다.

"그만하십시오."

"허. 이제는 외부인을 싸고 도는 겁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물러나 주십시오."

"...쯧."

짧게 혀를 차더니.

몇 걸음 물러나는 남자.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번엔 넘어갑니다만."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스님들이 또 외부인을 들여왔다는 거, 내일 회의에서 언급하게 될 테니."

"...."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장년인은 그런 말을 남기고 멀어져 갔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승주 스님.

그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진수 아버님이 저렇게 남한테 막말을 하는 분은 아니셨는데. 세상이 이렇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셨나 봅니다."

"아니 뭐. 전 괜찮습니다. 스님께서 사과하실 일도 아니고."

"...시주님께선 마음이 넓으시군요."

정말 별생각 없어서 한 말이었으나.

스님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각성한 직업이 요리사라고 하셨지요?"

"...예."

"괴물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비전투직으로 각성한 것만 해도 힘든 일이지요. 거기에. 식재료 하나 구하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다름 아닌 요리사.... 분명 고난이 많으셨겠죠."

많다고 하면 많기는 했다만.

아마 이 스님이 생각했던 그런 느낌은 아니었을 건데.

"어. 뭐, 그렇죠?"

"안 그래도 쌓인 것이 많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저런 모욕적인 발언을 참고 넘기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스님.

"저는 출가한 몸임에도 화를 참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만.... 시주님을 본받아야 할 것 같군요."

이 양반.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저 중년인의 말에도 내가 화나지 않은 이유.

그건 딱히 내가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다.

'너무 같잖으면 화낼 생각도 안 들어서.'

각성조차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남을 까내리는 것에 바쁜 사람의 말 따위에 흔들리기에는....

나는 내가 걸어온 길에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정말로 내 직업이 하찮은 것이었다면 또 모르겠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쯤 되면,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거든.

* * *

"그래. 거래를 하러 오셨다고?"

잠시 뒤.

우리는 이 절의 주지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예. 스님. 저는 이상협이라고 하고, 직업은 상인입니다."

"상인이라. 그건 각성자로서의 의미겠지요."

"예? 아아. 물론입니다."

물론이라는 말에 묘하게 쓴웃음을 짓는 주지 스님.

"아무튼, 거래라면 저희도 환영입니다. 마침 식량이 없어서 곤란해하던 참.... 저희가 충분한 대가를 치를 수 있을지가 문제겠군요."

"그게, 사실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만."

"예?"

가방을 연 상협이 그 안에 있던 전투식량을 꺼내 보였다.

작은 종이에 쌓여 있는 육포.

"그게. 제가 가져온 식량이 이거라서."

"육포, 로군요."

"예. 그게. 여기가 절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혹시나 거래가 불발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상협이었으나.

"과연. 무슨 걱정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작.

주지 스님의 반응은 꽤 무난한 것이었다.

"고기...인데요? 고기를 드셔도 되는 겁니까?"

"하하.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육식을 금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예?"

"오히려 탁발을 하며 받은 것은 가리지 않고 먹으라 가르치셨죠. 그 과정에서 고기를 받았다면 육식을 해도 상관은 없었던 겁니다."

"그, 그렇습니까?"

"육식을 금하게 된 것은, 훗날 계율 중의 하나인 불살계를 더 중히 여기게 되며 생긴 변화였습니다만."

싱긋.

가볍게 웃는 주지 스님.

"저희는 이미 불살계를 어긴 땡중들인지라."

"...."

과연.

그 말대로였다.

[식재료 감별(강화)]

[각성자 : 법현]

[직업 : 하급 사제 Lv.17]

이곳에 오면서 봤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스님들은 모두 각성을 마친 상태였다.

그냥 각성자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원이 상당한 고레벨.

'레벨만 따지면 423대대 출신 병사들하고 비슷한 수준....'

우리 병사들이 각성 후에 쉬지 않고 괴물을 사냥하며 레벨을 올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 역시 '멸망의 날'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각성을 마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옛날부터 각성법을 알았던 이들인데도, 각성자 숫자는 많지 않다는 게 문제지.'

그렇기에.

아까부터 느낀 싸한 느낌에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저희는 이미 생명을 해한 땡중들. 그 생명이 마귀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들 이미 계율을 어긴 셈이니, 고기를 먹는다고 더 문제 생길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 말도 맞네요!"

아무튼.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상협은 더없이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거래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게 사실 그냥 육포가 아니거든요. 특히 각성자분들한테 참 좋은 건데, 이게 말로 설명하기가 참."

아니나 다를까.

바로 작업을 치기 시작하는 상협.

"으음. 그런 귀한 물건일 줄이야.... 우리가 가진 물건 중에 교환할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에이. 걱정하지 마십쇼. 이런 시기인데 같은 사람들끼리 도와야죠. 제가 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오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마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가격이 되지 않을까 싶다만.

뭐, 그건 상협이 알아서 할 일이고.

"사실. 그런 일은 저보다 잘 아는 스님이 따로 계십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눠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산 주변의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나가 계신 상황이라. 빨라도 3일 뒤에야 뵐 수 있을 것 같군요."

상협과의 대화는 일단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주지 스님이라고 해도 물품 관리까지 모두 도맡아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3일 뒤에 온다는 그 스님하고 대화를 나눠 봐야겠지.

* * *

그렇게 상협이 떠나고 난 뒤.

나는 여전히 방에 남아 있었다.

"...시주분께서는 다른 용건이 있으신지?"

그런 나를 보고 주지 스님의 의아한 듯 물었다.

'용건은 스님들이 나한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자세를 바로잡은 뒤 입을 열었다.

"거래는 저 상인과 진행하면 될 겁니다. 제가 찾아온 건 저 거래도 거래지만, 다른 이유가 있거든요."

"다른 이유?"

"남쪽에 군부대가 살아있다는 얘기는 들으신 걸로 압니다."

"음.... 그쪽에서 왔다는 각성자를 만난 이들이 종종 있었지요. 헛소문일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춘천이 던전에서 해방된 뒤.

그대로 도시에 남은 이들이 대부분이긴 했으나.

고향을 찾아 이동한 이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을 통해 우리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져나간 거겠지.

인터넷이고 뭐고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소문이 퍼지는 게 느릴 만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저희 부대의 위치는 좀 멉니다만. 아무튼 춘천과 인제군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최근에 어떤 괴물 세력과 교전하게 되었죠."

녹색갈기 부족에 대한 얘기.

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소규모 교전은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만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적이라는 점까지.

나는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허어."

"으음. 다른 지역은 그런 상황이었다니."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 세상에는 괴물들이 넘쳐납니다. 반면 인간의 숫자는 너무 많이 줄고 말았구요."

"...많은 이들이 죽었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살아남은 이들끼리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저들의 영역은 이 도시하고도 겹쳐 있으니, 원래는 같이 힘을 합쳐서 대응하자고 제안하려고 했었죠."

"동맹을 맺자. 그 얘기로군요."

"일단은 그랬었습니다."

그때.

얘기를 듣던 중 승주 스님이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부터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예. 맞습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며 말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이상할 정도로 적은 각성자.

산문을 지나 여기에 올라오기까지.

많은 걸 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동맹을 맺으려고 해도. 그럴 만한 단체여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요!"

"실례였다면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사람들이 많더군요."

"...."

"각성자는 얼마 없고."

여기 오기 전에 만난 약탈자 그룹을 떠올렸다.

30여명 중에 20명 정도가 각성자였던 그룹.

각성법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과거.

20~30여 명의 그룹당 각성자가 한두 명 정도 보통이었으나.

이제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나, 각성법도 많이 알려졌다.

그 결과가, 저 그룹.

살아남은 이들은 적지만.

그들은 천천히 강해지고 있다는 거다.

"당신들만 빼고 말입니다."

"...!"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못 해도 이 절에 머무르는 사람이 천 명은 되는 것 같던데. 그중에 각성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산문에서 만난 갑옷남의 강함.

그 정도 강자가 소속된 그룹에, 이만한 숫자가 모인 단체라면.

근처 일대에서 약탈자 그룹이 활동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강한 세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약탈자 그룹의 습격을 받았다.

그렇다는 건.

'이 단체. 나사가 빠져 있다는 거겠지.'

내가 생각해도 조금 무례하긴 했던지라.

승주 스님은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 왔다.

"뭘 묻기 전에 우선 예의를...!"

하지만.

"승주 스님."

"주지 스님?"

"그만합시다."

승주 스님을 붙잡은 것은 주지 스님이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주님께선, 저희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계신 것 같군요."

"예. 저희도 비슷한 꼴이 날 수도 있었던지라."

"허허. 질문하신 게 각성자의 숫자였습니까. 알려 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이제 막 100명을 넘긴 정도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멸망의 날' 초기.

우리 부대는, 살아남기 위해 각성자를 늘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었다.

그때 당시.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이 하나 있었다.

'총원 각성. 열외는 용납할 수 없다.'

모든 부대원들을 억지로라도 각성시켜야 한다는 것.

겁 많던 광일이 녀석을 억지로 각성시켜 광전사로 만든 게 그 예시.

만약 한 명이라도 각성에서 열외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각성하고자 하는 이가 줄어들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한 단체가 각성자와 비각성자로 나뉜다면.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지.'

단체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

내 직업은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든 요리사.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

어떻게든 막아냈던 상황이었다만.

"아마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들은 우리와 달랐다.

그 상황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

"이 절. 이대로 가면 망할 겁니다."

148화 한 글자도 안 겹치잖아.

"처음부터 이렇게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평범한 절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

괴물들은 절에 있던 사람들을 죽이고, 숲속으로 납치해갔다.

숲속으로 끌려간 이들이 괴물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으리란 건 짐작하기 쉬운 일.

높은 산에 위치한 절은, 탈출조차 힘들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괴물들이 나타난 첫날 행방불명이 되었던 스님 한 분이 살아서 돌아왔지요. 그것도, 각성법을 깨우친 채로 말입니다."

"...!"

"저기 있는 승주 스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 말에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주 스님.

'나름 강해 보이는 양반이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중요한 입지에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이 절에서 최초로 나타난 각성자.

우리 부대로 따지면 나하고 비슷한 입장이라는 뜻이니.

"처음에는 각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말이 많았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불살계를 어기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너무 위험하다는 얘기였지요."

"각성이 하루 늦춰질 때마다 더 많은 사람이 죽는 셈인데도 말입니까?"

"바깥과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었잖습니까. 기다리면 군부대가 구출을 올 거라는 얘기도 있었으니....그나마 승주 스님의 설득이 잘 먹힌 덕에 빠르게 각성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그 말에 내 시선이 승주 스님을 향했다.

"어떻게 설득하셨길래?"

"...승병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승병이라.

교과서에 나오는 거 아닌가?

"그, 임진왜란 때 스님들이 일본군하고 싸웠다던 그거 말입니까?"

"비슷합니다. 나라가 위험해질 때, 호국의 각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난 스님들을 승병이라고 부르지요. 이곳, 묘양사는 그런 쪽으로 역사가 깊은 절입니다. 왜란에서 활약하신 유현 대사가 이곳 출신이시지요."

"아...."

"상대가 달라졌을 뿐,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 것은 비슷한 셈. 계율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무기를 들고 일어나야만 한다고 설득했을 뿐입니다."

덕분에 스님들은 상당히 빠르게 각성을 거쳤다.

각성한 스님들이 도시로 내려가 사람들을 구출해 절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피신을 온 시주님들 대부분이 각성을 거부하더군요."

꺼림칙하다든가.

괴물을 죽여야 한다는 게 무섭다든가.

"어쩌다가 각성을 거친 이들 중에서도 전투에 나서길 거부하신 분이 많았지요."

우리 부대에서도 있었던 유형이다.

광일이가 대표적인 예.

단체의 생명을 생각했다면, 절대 용납해선 안 되는 유형이기도 하다.

"그걸 그냥 넘어간 겁니까?"

"두려워하는 이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라니. 심지어 살해를 종용하라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허."

"그래도 도움을 주시려는 시주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성자가 100명이 되어 길드라는 이름을 받은 것도 일주일 전에 새로운 시주분이 합류하신 덕으로...."

"1주일 전이요?"

"예에."

1주일 전이라.

난 얼굴을 푹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협이 북쪽에 있는 단체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게 1주일 전이었다고 했지.'

100명이 넘어 길드 단위가 된 게 일주일 전.

딱 길드가 된 시점에서, 상협의 특성이 발동한 것이리라.

'우리도 일단은 길드 단위의 단체니까.'

'군단과 비슷한 규모'라는 말도.

마냥 틀린 얘기는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꽤나 심각해진다.

초창기에 각성법을 깨달았다는 전제까지 동일함에도 불구.

우리는 423대대가 있는 산을 내려오기도 전에 달성한 수준에.

이들은 얼마 전에야 도달했다는 뜻이니.

"오히려 아직까지 버티신 게 용할 지경이군요. 다른 건 몰라도, 식량은 어떻게 한 겁니까? 저만한 사람들을 먹인다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

"각성한 승병들이 도시로 내려가 식량을 구해왔지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던지라...."

주지 스님은 등 뒤에 있던 물건 하나를 꺼냈다.

"지금은 이 물건에 기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딱딱한 호밀빵]

딱딱한 호밀빵.

상점에서 10포인트에 파는, 더럽게 맛없고 딱딱한 빵이었다.

"...이걸로 버텼다고요?"

"예."

"수천 명분의 식사를? 이걸로?"

"아껴 먹으면 하나로 두 끼 정도는 해결 가능한 물건이지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하게 감당이 되더군요."

"...하핫."

이쯤 되면 화도 안 난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호밀빵... 호밀빠앙?'

상점에서 파는 호밀빵.

우리 부대원들은 입에도 대지 않은 지 몇 개월은 지난 물건.

물론 평범한 각성자들은 저걸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식량 수급 자체가 어려워진 세상.

맛이나 영양가는 둘째치더라도, 아무튼 탈 없는 음식인 셈이니까.

하지만 문제가 없는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가격이 너무 비싸.'

10포인트.

이렇게 말하면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일 수 있다만.

1000포인트를 모으면 능력치 물약 하나를 구매할 수 있다.

저 맛대가리 없는 호밀빵 100개 가격이면 능력치를 최소 1.

운 좋으면 3까지 올릴 수 있다는 것.

그걸 알기에, 평범한 각성자들도 어지간하면 다른 식량을 구하려고 한다.

호밀빵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이 세상에서 능력치를 올리는 방법은 레벨업과 능력치 물약 정도인데. 그 귀한 포인트를 모두 빵에 투자하셨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

이들은 식량이 너무 모자란 나머지.

그 호밀빵이 아예 주식으로 채택돼 버렸다는 것.

"돌겠네, 진짜."

이렇게 돼 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인원수에 비해 너무 적은 각성자.

'천여 명의 잉여 인원을 100명이 먹여 살려야 하니, 여유가 있을 수가 없지.'

전투 가능 인원 100.

비전투 인원 최소 1천.

과거였다면 이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비율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의 군인만 해도 전체 인구의 1% 정도.

병사는 전쟁을 위한 직업.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특성상, 전투 인원을 부양해야 할 생산 인력보다 많아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생산조차 각성자들이 담당한다.'

괴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평범한 생존자들은 돌아다니는 것조차 위험하다.

어디 식량을 구하러 가는 것도, 심지어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모든 면에서 각성자들이 일반인보다 뛰어나니까.

심지어 지금은 식량을 모두 포인트로 구매하는 호밀빵에 의존하는 상황.

생산과 무력.

양쪽을 모두 각성자들 담당하고 있다는 거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만."

"무엇 말입니까?"

이런 구조라면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들은 얘기대로라면, 각성자들이 귀족처럼 군림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거든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실제로 몇몇 생존자 그룹들의 경우에는 각성자들이 그룹 내의 생존자들을 아랫것처럼 다루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반대.

'여기 올라올 때 만났던 생존자.... 마치 자기가 윗사람인 것처럼 떠들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승주 스님은 이 절의 첫 번째 각성자.

상당한 위치의 각성자일 텐데도 비 각성자에게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저희도 그 부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각성자들이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 잡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지요."

"...그건 뭐. 훌륭한 선택입니다만."

우리 부대도 어느 정도는 비슷했다.

부대원들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치곤 생존자들 말에 좀 눌리시는 느낌이던데요."

문제는 이들은 그 정도가 아니란 거다.

각성자와 생존자가 동등한 것을 넘어, 각성자들의 세력이 더 약한 모습.

이건 좀 이상하거든.

"아무래도, 각성자인 저희보다는 비각성자인 저쪽이 사람이 많으니까요."

내 말에, 승주 스님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주지 스님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즉.

"...다수결이라고요?"

"예. 불공평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초창기에 정한 규칙 중 하나지요."

"...."

100명의 각성자는 수천의 생존자들을 상대로 학살도 벌일 수 있다.

이들이 다른 생존자들을 노예로 다루며 귀족처럼 군림해도 이상할 건 없는 일.

하지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살해를 종용할 수 없다며 각성조차 시키지 않고 넘어간 이들이다.

그딴 짓이 가능할 리도 없으니.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가며 단체를 운용한 결과.

"소수의 각성자들이 다수인 생존자들을 먹여 살리는... 노예가 되어 버린 거군요."

"...."

꽤 무례한 말이었지만.

승주 스님조차, 이번에는 뭐라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 * *

"하. 오히려 신기하네."

이쯤 오니,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화도 나지 않는다.

나는 궁금한 점 하나를 묻기로 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어떻게 살아남다니요. 그저 열심히 싸워서...."

"생존자들의 숫자가 못 해도 천 명은 될 것 같던데. 호밀빵으로 그 식량을 감당하고 있다고 했으니, 전투로 번 포인트는 전부 식량에 나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능력치 물약 같은 건 구매도 못 해 보셨을 거고."

능력치를 올리지 못하면 결국 약해진다.

수천 명을 먹여 살릴 만한 포인트를 수급하려다가 역으로 사냥당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첫날에 실종된 승주 스님이 다시 나타났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예."

"그때 스님이 가져온 것이 각성법뿐만이 아니었던 게지요."

"...?"

"저는 주지이지만. 본래 이 절에서 수학하진 않았던지라, 절의 자세한 부분까지 알지는 못했습니다만. 이곳 묘양사는 예로부터 승병의 역사가 깊은 곳."

"예에...."

"승병으로 이름을 날린 저 고승, 유현 대사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무예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겁니다. 승주 스님께서는 그 무예를 찾아오신 것이구요."

무예라.

아마 광일이와 싸운 갑옷남이 쓴 그 기술을 말하는 것 같은데.

슬쩍 고개를 돌려 승주 스님을 바라보자.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항마 승병 무예라고 하는 기술입니다. 직접 보셨으니 알고 계시겠죠."

"...항마 승병 무예, 라."

"음?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라도."

"아뇨, 아닙니다."

승주 스님의 말대로.

이들이 뭔가 특별한 기술 같은 걸 익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음....

'항마 승병 무예란 말이지?'

뭐.

일단 그렇다고 치고.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만. 스님들. 이대로 가면 이 절은 망할 겁니다."

"음. 우리도 문제가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때.

주지 스님의 말에 끼어든 것은 승주 스님이었다.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생존자들을 강제로라도 각성시키는 것!"

"승주 스님....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저 군인분이 하신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상황이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목숨 바쳐 싸우는 사람들이 편안히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명령을 들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 대해서 이들끼리도 꽤 얘기가 많이 오갔던 모양인지.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얘기에 몰두하는 두 스님.

"그래도. 강제로 각성시킨다는 건 안 됩니다. 마지막 인간성마저 저버릴 생각이십니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승주 스님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 저 군인분들과 함께 온 상인이 있잖습니까."

"예."

"그에게서 식량을 구매하되, 식량의 보급에는 제한을 두는 겁니다."

"제한을 두자니. 그게 무슨?"

"저희가 가진 포인트도 이제 다 떨어져 가는 참 아닙니까. 안 그래도 식량에 제한을 두기는 해야 했습니다. 대신, 각성하기로 한 이들에게는 식량을 조금 더 얹어준다는 식으로-"

어쩐지.

산문을 넘기 전에 식량 얘기는 남들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니.

이걸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는 생각이었던 모양.

"그게 각성을 강제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이오!"

"그럼 이대로 다 같이 메말라 죽자는 뜻이십니까!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주지 스님! 외부에서 온 사람이 고작 몇 분 본 것만으로 우리 상황이 위태롭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란 말입니다. 주지 스님의 인품은 존경합니다만, 이대로 가면 저희는 모두 다 죽습니다!"

서로 점잖은 말투로 대화를 나누던 이전과 달리.

점점 격해지는 대화.

그나저나.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쉽겠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나라면, 꽤 쉽게 해결 가능할 것 같다고.

"저기. 잠시만요."

"시주님. 미안하지만 지금은 우리끼리 얘기 중이니 잠시-"

"그러니까. 사람들을 강제로 각성시키면 안 되지만, 자발적으로 각성시키는 건 상관없다. 이거죠?"

"...?"

"그거.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게.

각성을 하고 말고에 대한 문제는, 우리 길드 또한 예전에 겪었던 일이다.

그건 즉.

이미 옛날에 해결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거든.

"해결할 수 있다니. 그게 무슨."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각성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생존자들이 스님들을 노예처럼 쓰는 상황도 해결해드릴 수 있구요."

"...그, 그런 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안 되오."

"그런 쪽으로는 걱정하지 마시고."

폭력하고는 가장 거리가 먼 수단일 테니까.

"대신. 대가를 하나 받고 싶습니다만."

"대가라니."

"정말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일이지만, 저희가 그런 엄청난 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지."

"있습니다. 쉽게 지불하실 수 있는 거."

나는 시선을 돌려.

승주 스님을 보고 말했다.

자칭.

'항마 승병 무예'의 계승자라는 양반.

"그 항마 뭐시기라는 기술 말입니다만."

"아...! 무예의 전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다만 이 무술은 기본적으로 봉술이라...."

"아니. 가르쳐주는 건 당연한 거고요."

"으음?"

어딜 날로 먹으려고.

그거 하나 가르쳐 주는 거로는 모자라지.

"일단은 어디서 얻었는지부터."

"...."

"어떤 경위로 얻게 된 기술인지. 정확히 어떤 개념의 기술인지.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까지...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얘기에.

주지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그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전부터 승병으로 유명한 절이라, 예전 유현 대사님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무술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계신 겁니까?"

"예?"

내가 지긋이 시선을 보내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주지 스님.

"그렇다면 뭐. 이 얘기는 여기서 끝입니다만."

"허허. 진정하시지요. 젊은 시주님. 시주님이 원하시는 게 대체 뭔지, 저로서는 잘...."

"주지 스님은 몰라도."

"?"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스님을 바라보았다.

"승주 스님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나 말을 들은 주지 스님의 시선 또한 승주 스님을 향했다.

그러자.

"스, 승주 스님?"

"...."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무슨 땀이 이렇게."

"아, 예. 그게. 그."

중요한 것을 들킨 사람처럼.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승주 스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허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기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일제와 싸운 유명한 승병의 무술?

능력치 물약도 못 먹어서 안 그래도 약해진 이들이, 그 무술 덕에 괴물과 싸울 수 있었다고?

'소림사 무술도 그런 건 안 되겠다.'

애초에.

이름부터가 문제였다.

[식재료 감별(강화)]

[각성자 : 승주]

[직업 : 중급 성기사 Lv.27]

[능력치 : ....]

[특성 : ....]

[스킬 : ....]

[무예]

[A - 회풍천류봉법 Lv.6]

'항마 승병 무예라고?'

한 글자도 안 겹치잖아, 이 양반아.

149화 어차피 땡중이니.

"승주 스님....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주지 스님."

"죄송하다니. 대체 뭐가."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믿어 주십쇼. 절대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닙니다."

이쯤 오니.

아무리 눈치가 둔한 사람이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승주 스님.... 항마 승병 무예. 유현 대사로부터 내려져 온 게 아닌 게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허어! 처음 들었을 때도 너무 허무맹랑한 얘기라고는 생각했지만."

무슨 영화에나 나오는 소림사도 아니고.

조선 시대 때 승병이 익혔던 무술이, 지금의 각성자들의 전투력을 향상시켜 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부대에도 무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있다.

대표적인 게 전광일 상병.

권투부터 시작해서 복싱 무에타이, 주짓수 등.

겁 많은 성격을 고치기 위한 일환으로, 온갖 격투기를 배웠더랬지.

장담하건대.

그런 무술은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각성자의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

'평범한 인간과 각성자는 신체 능력부터가 다르니까.'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으로 펼칠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무술.

그게 아무리 뛰어나 봐야.

인간을 뛰어넘은 신체 능력을 가진 각성자에게 맞을 수가 없는 것.

나는 슬쩍 주지 스님을 바라보았다.

[각성자 : 법현]

[직업 : 하급 사제 Lv.17]

[무예]

[C - 항마승병무예 Lv.2]

적어도.

저 승주라는 양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상태창에 있는 것은, 항마 승병 무예가 맞다.

하지만 문제는 등급.

승주 스님이 익힌 무예는 A.

항마 승병 무예라는 건 C.

저런 식의 표기는 처음 보지만.

두 기술의 차이가 크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항마 승병 무예라는 건... 승주 스님이 가진 기술의 아득한 하위 호환.'

내가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자니.

승주 스님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몸을 떨며 말했다.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뭐. 나름의 노하우 같은 게 있다 보니."

"...."

"애초에. 너무 말도 안 되는 설정 아닙니까? 조선 시대 무술이 뛰어나 봐야 인간용이지. 각성자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고."

"...."

"이걸 누가 속습니까.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커, 커흠!"

마지막 말에 주지 스님의 얼굴이 약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저도 조금 허무맹랑한 소리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이토록 뛰어난 기술이 갑자기 땅에서 튀어나올 리도 없는 일. 뭔가 기원이 있기는 할 테니."

"결국 저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셨다, 그거군요."

"...큼."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주지 스님.

"후우."

잠시 뒤.

식은땀을 흘리며 떨고 있던 승주 스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눈치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다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뭐, 대충은."

"당신 말이 맞습니다."

역시나.

"제가 익힌 기술은 항마 승병 무예가 아닙니다. 유현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이란 것도 거짓말이었지요."

"이, 이름부터가 거짓말이었다는 말입니까?"

"...예. 스님들에게 전수한 것은 제가 가진 무예를 간략화한 겁니다. 빠르게 익힐 수 있게 만든 대신, 대성하기는 힘들다는 단점이 있죠. 항마 승병 무예라는 이름은... 제가 적당히 정한 겁니다."

처음 들켰다고 생각했을 땐 벌벌 떨던 양반이.

이제는 어차피 들켰다는 건지, 오히려 뻔뻔하게 말했다.

"...꽤 당당하시네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신 사실 아니었습니까?"

음.

다른 스님들의 무예가 간략화한 버전이라든가.

그런 건 몰랐는데.

"게다가, 어차피 저는 이미 살계를 어긴 땡중.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겼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큭큭. 뭐, 그렇긴 하네요."

조금 어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니 오히려 마음에 든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느냐."

"가능합니다. 저희도 이미 겪었던 일이기도 하니까요."

"으음.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잠시 뒤에 눈을 뜬 그가 말했다.

"값은 후불로 치러도 상관없겠습니까?"

"그 말은."

"당신이 말한 그 방법이라는 게 성공한다면, 그때 내가 가진 무예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원래는 이들하고 동맹을 맺는 게 목적이었다만.

와서 보니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집단이라 꽤 실망했다.

반대로 말하면.

'문제만 해결해 주면 상당히 쓸 만해질 집단이기도 하다는 뜻.'

어쩌면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란 게 생각보다 별거 없을 수도 있으나.

이들을 정상적인 집단으로 돌려놓는 건, 어차피 해야 했을 일.

그렇게 이들이 동맹할 만한 가치가 있는 단체로 거듭나기만 한다면.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승주 스님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일어나시다니. 어딜 가시려고...."

"저희도 좀 바쁘거든요.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은 없어서."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씨익.

"말씀하신 문제. 바로 해결 봅시다."

"...!"

"일단은. 여기 주방 좀 씁시다."

* * *

나는 두 스님들을 데리고, 절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왜...."

"그러고 보니, 직업이 요리사라 하셨죠."

"허어! 요리사.... 그런 직업도 있습니까?"

"...끄응."

주지 스님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뭐 어쩌겠냐.

이 직업으로 각성한 사람이 그만큼 드문 탓이니, 내가 그러려니 해야지.

'단순하게 [용기]의 요리를 먹이는 걸로 해결되면 좋겠지만....'

우리 부대의 경우.

모든 부대원을 각성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용기]의 요리를 먹이는 걸로 충분했다.

내가 지속적으로 감정이 담긴 요리를 먹이면서 그들을 케어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선 불가능한 방법이지.'

난 이 절 소속이 아니니까.

여기에 주야장천 머물며 각성할 차례가 온 생존자들에게 일일이 밥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조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주방 바닥에 앉아 육포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전쟁 요리사의 엿듣는 알라우르 육포]

"뭐 하시는 겁...."

"쉿."

[일시적으로, 특성 : 예민한 청각을 획득합니다.]

스님들의 질문을 차단하고 정신을 집중하자.

산 곳곳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짐승들이 땅을 밟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좀비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오늘 낮에....

-군인들이?

-군대는 망했다고 분명....

사람들의 목소리.

나는 그들이 나누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님들."

잠시 뒤.

나는 몸을 일으킨 뒤, 주방의 솥에 불을 켰다.

요리를 준비하며.

스님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땡중이니, 거짓말 좀 해도 상관없다고 하셨죠?"

* * *

대한불교 조계종 묘양사.

지금 그곳에는 양구군의 생존자들 상당수가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대표 격에 해당하는 사람이 몇 명.

그중 한 명은 본래도 지역 유지였던 인물.

홍정수.

일명, 진수 아버님.

그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 낮에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절을 돌아다니는 걸 봤소."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라니. 군인이란 겁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마 아닐 확률이 높겠지. 다들 잘 알잖소. 군부대는 전멸했다는 거."

"그, 그렇다는 건."

"탈영병일 확률이 높겠지."

그 말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스, 스님들이 왜 탈영병들을."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게 숨기려고 했던 시점에서, 우리한테 좋은 이유는 아닐 거란 것이지....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하지만."

"짐작 가는 이유요?"

조심스럽게 말을 여는 홍정수.

"내 생각에는, 스님들의 지금의 구도를 바꾸려는 게 아닌가 싶소."

"지금의 구도라면."

"크흠. 스님들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는 이 상황 말이지."

사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어딜 보나 각성자들이 유리했으니까.

"조금만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저 스님들이 마치 귀족처럼 굴기 시작해도 이상할 건 없다는 거요."

"귀족처럼 굴다니."

"뭐, 자기들 덕에 우리가 먹고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자기들 말을 들으라든가... 그런 거 있잖소."

"그, 그래도 스님분들이신데. 그렇게까지 할까요?"

"하. 스님들이라고 해 봐야 사람 아니오. 지금 같은 상황이 이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타락할 수도 있는 일이지. "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최대한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오. 그래야 우리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

몇몇 사람들은 조금 꺼림칙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이거 너무 스님들을 이용하기만 하는 느낌 아닙니까?"

"스님분들 덕에 저희가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정수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 그렇게 생각하시면 곽씨 부부께선 가서 각성하고 스님들을 도우시오. 아무도 안 말릴 테니까."

"...."

"다만. 그렇게 각성하고 나면 스님들과 함께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저번에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셨던가. 저 괴물 놈들에게 잡아먹혀서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 갈 거면 가시오."

그러자.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던 두 남녀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하아. 지금처럼만 하면 스님들의 보호 아래에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데, 왜 자꾸 얘기를 이상하게 끌고 가는지. 쯧쯧...."

혀를 찬 정수가 말했다.

"양심에 찔리는 게 있을 수는 있지만. 생각을 바꿔보시오. 저분들은 스님이잖소."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수련하고 공덕을 쌓아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분들이란 말이지.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됐다고 갑자기 귀족처럼 변해서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거나 그러면, 지금까지 쌓아온 수양을 모두 날리는 꼴 아닌가!"

반면.

스스로를 희생해 가며 사람들을 보호한다면.

"그건 다 공덕이니, 부처가 될 확률도 늘어나는 셈이고."

"그,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런 거요. 그분들의 수행을 위한 일이란 거지.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가 없다 이 말이야."

여전히 찝찝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누구도 따로 나서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들도 괴물하고 싸우는 건 싫은 주제에. 왜 착한 척이야, 착한 척은.'

크흠.

"아무튼. 우린 그런 일이 생기는걸 막아야 한다는 거요. 왜 탈영병들을 데려온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일 아침에 예정된 회의가 있으니까, 그때 알게 되겠지."

"후우. 걱정이군요."

"중요한 건 하나요. 그때 대화가 어떻게 흐르든 간에, 스님분들이 타락하지 않는 쪽으로 말을 맞추는 것!"

"알겠어요."

"나도 괴물하고 싸우는 건 싫으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정수는 씨익 웃었다.

'스님들은 더럽게 순진한 양반들이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 편을 드는 이상... 아무 말도 못 할 거다.'

여론이 이쪽의 편을 들고 있는 이상.

저 순진해빠진 스님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노예처럼 일해야 할 것이다.

* * *

스님들이 무슨 말을 해도, 현 상황을 유지하는 쪽으로 말을 맞추자.

그런 약속을 하고, 다음 날의 전체 회의에 나선 생존자들이었으나.

"12군단에서 나왔습니다."

"...12군단?"

그들의 대화 상대는.

스님들이 아니었다.

군복을 입고, 총과 각종 장비로 무장한 군인들.

'무슨 덩치가....'

평범한 군인도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덩치.

그중 한 명은 키가 2미터도 넘어 보였다.

군복의 색도 묘하게 다른 것이.

일종의 특수부대 같은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마 평범하게 생긴 건... 한 명뿐인가?'

그 덩치들 사이.

평범한 체격의 남자도 한 명 있었다.

어디까지나 덩치들 사이에서 평범하다는 뜻이지만.

그럭저럭 잘생긴 얼굴.

하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 때문일까.

살짝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군인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12군단 예하 직할부대 423대대에서 나왔습니다. 신영준 병장이라고 불러 주십쇼."

"저, 정말 군인이란 건가?"

"아니. 군부대는 전멸한 걸로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신영준 병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는 건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군부대가 괴멸한 것도 사실이지요."

"...."

"하지만. 살아남은 군부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 12군단은 그런 군부대를 규합해서 괴물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오...!"

그 얘기에.

사람들 사이에 흥분이 퍼져 나갔다.

괴멸한 줄로만 알았던 군대.

그 군대가 남아 있으며, 자신들을 구해 주러 왔다는 것.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멍청한... 저걸 믿는다고?'

하지만 한 사람.

홍정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많은 군부대가 괴멸한바. 저희도 여유가 많지는 않...."

"이봐요, 당신!"

신영준 병장이 무언가 말을 이어 나가려 할 때.

홍정수는 그 말을 끊으며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얼굴이시군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어디 부대 출신이다 뭐다 말은 잘하는데. 군부대가 괴멸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얘기란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군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정수.

저놈의 얼굴은 익숙했다.

어제 승주 스님이 데려왔던 바로 그 군인.

스님들과 무슨 작당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당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당신이 탈영병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홍정수는 그런 생각으로 군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잠깐."

"있냐는 말이오-"

"누가 멋대로 움직여도 좋다고 했습니까?"

철컥.

"...엉?"

다가오는 홍정수를 향해.

권총을 꺼내 드는 신영준 병장.

"허. 왜, 그걸로 쏘기라도 할-"

타아앙!!!

갑작스러운 총성이.

신성해야 할 경내에 울려 퍼졌다.

"...."

홍정수.

그는 시종일관 당당하고, 여유와 자신감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절에 모인 수많은 생존자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지금.

그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슬쩍 시선을 돌려서 바닥을 보자.

"...꿀꺽."

양발 사이의 바닥에 박혀 있는.

한 발의 총알이 보었다.

"방금은 경고 사격입니다. 또 한 번 말 없이 움직인다면...."

신영준 병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홍정수의 미간을 향했다.

그 손에 쥔 권총의 총구와 함께.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겠지."

"...."

그 순간.

절에 모여 있는 모든 생존자들이 직감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150화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쯧."

산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사람을 향해 권총을 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니, 그보다는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

신영준 병장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바, 방금 진짜로 쏜 거야?

-그럼 가짜로 쏜 거겠냐.

-조, 조용히 해요! 괜히 자극하지 말고.

그때.

신영준 병장이 말했다.

"그 뭐냐. 진수 아버님이라 했습니까."

"저, 저 말입니까?"

"제가 존댓말로 대해 드리니까, 군인이 아주 쉽게 보이셨나 본데."

"...."

불과 수십 초 전까지만 해도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였던 홍정수였으나.

아무리 그런 그라고 한들, 다리 사이에 총알이 한 발 박힌 상황이다.

다음은 빗나가지 않을 거라는 경고까지 들은 마당에 당당할 수가 없었다.

"오래 살고 싶으시면 조용히 계세요.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예, 예에. 죄 죄송합니다."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세상이 멸망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면 높은 확률로 나오는 존재.

'타락한 군인들.'

군부대의 강력한 힘을 악용.

사람들을 약탈하거나, 노예처럼 혹사시키거나 하는 이야기.

"어디까지 말했더라.... 후. 그러게 왜 끼어들고 난리야."

"...."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신영준 병장은, 그런 이미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존재였다.

'저, 저 군인이 저렇게 날뛰는데 스님들은 대체 뭘....'

사람들의 시선이 슬쩍 다른 곳을 향했다.

본래라면 이런 이들을 막아줬어야 했을 각성자들.

그들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으나.

"...크윽.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후우!"

"다들 참으시게. 괜히 도발했다가는 큰 화를 입을 테니."

자신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분한 한숨을 내쉬며, 패악질을 지켜보고 있는 각성자들.

'저 군인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황스럽지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무튼. 말씀드렸다시피 많은 군부대가 괴멸한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저희 군단은 현재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특히 군인의 수가 크게 모자란 상황이죠."

"...."

"당장은 서북부에 발생한 대규모 몬스터 집단을 견제하느라 전력의 대부분을 쏟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전선도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만. 전선이 무너지는 순간 그 괴물들이 강원도 전역으로 퍼져 나갈 테니 병력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죠."

그때.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저, 저기.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예. 하시죠."

"그. 저희한테 이런 말을 하시는 이유가 뭔지...?"

그 말에.

신영준 병장은 권총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말했잖습니까. 여유가 없고, 특히 군인이 많이 모자란 상황이라고."

"...예, 예에. 거기까진 이해했습니다."

"그럼 결론은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희가 여기에 온 것은 군인을 징병하기 위해서입니다."

"...!"

"무, 무슨!"

갑작스럽게 던져진 한마디에.

동요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용!"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총을 든 신영준 병장이 소리치자, 순식간에 침묵하는 사람들.

"징병이라고는 했지만, 가만 보니 대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요. 저희 징병 대상에 일반인은 포함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 그럼 누굴 징병한다는 뜻입니까?"

"각성자들만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스님들과, 스님들에게 협력해 각성을 거친 사람들.

"평범한 인간들은 전력으로 쓰기도 힘드니까요. 예전이었다면 어떻게든 훈련시키기라도 했겠지만... 지금 저희는 일일이 병사를 훈련할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괴물을 죽여 본 경험이 있는 각성자들만 징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영준 병장 역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징병이라고 하니 안 좋은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나쁜 얘기는 아닐 겁니다."

"그게 어떻게 나쁜 얘기가 아닐 수 있단 말이오."

"저희는 많은 양의 식량과 무기를 확보한 상태입니다. 몇몇 농지를 안정화시킨 뒤에는 농사를 지어 장기적인 식량 보급책도 마련한 상태죠.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겁니다."

"...."

"게다가, 저희 군단에는 이미 수많은 각성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장 저만 해도."

말을 있던 그가 슬쩍 고개를 숙이더니

바닥에 있던 돌 하나를 주웠다.

파사삭....

그 손안에 쥐어진 돌이, 가루로 변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레벨이 30이 넘는 각성자죠."

"강한 각성자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전투에서 사망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뜻이로구려."

징병이라는 단어가 문제일 뿐.

확실히 나쁘지 않은 조건.

각성자들이 정말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생존자들 사이에 공포가 확산되었다.

"그,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냐니. 뭘 말입니까."

"저 각성자들이 우리를 지켜 줘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단 말입니다. 저 사람들이 떠나면...."

그러자.

말을 꺼낸 남자를 바라보는 신영준 병장.

그 시선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딴 걸 저희가 신경 써 줘야 합니까?"

"그, 그딴 거라니."

"말했잖습니까. 서북부에 대규모 몬스터 집단이 자리 잡고 있다고. 그놈들을 막고 있는 전선이 뚫리는 순간 근방의 생존자들은 모두 몰살되고 말 겁니다. 우리는 그걸 막기 위해 전력을 확충하려고 하는 거고요."

"...."

"그런데 뭐? 너희들 살겠다고 이걸 막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알 바 없다 이거냐?"

퉷.

신영준 병장이 바닥에 거칠게 침을 뱉었다.

"아니. 오히려 궁금하군. 혹시 당신들은 각성자가 되는 법을 모르나?"

"아, 알고는 있습니다. 괴물을 사냥하면 된다고...."

"그럼 왜 아직까지 일반인으로 남아 있는 거지? 각성자가 30명 이상 모여 있는 단체라면 각성자를 늘리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건."

"큭큭. 뻔하군. 당신네들이 거절했겠지. 괴물들하고 싸우는 건 싫으니, 얌전히 보호나 해 달라고 말이야. 당신 같은 이들이 한둘이었을 것 같나?"

마치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눈빛.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도,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새끼들.... 그러면서 치열하게 싸워온 이들과 같은 취급을 받기를 바라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쓰레기들."

"...."

"우리 군단은 강원도 지역 방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쓸모없는 인간 몇 명이 도태되는 것까지 신경 써 줄 여유는 없어."

"쓰, 쓸모없다니...!"

"맘 같아선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다. 제발... 더 이상 날 화나게 하지 마."

생존자들의 반발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각성자들을 바라보는 신영준 병장.

"우리는 각성자를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습니다. 저 쓰레기들과 달리,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해 오신 분들이니까요. 저희와 함께한다면, 강해지기 위한 모든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

"물론. 가볍게 내리기 힘든 결정임은 이해합니다. 3일 뒤에 다시 방문 드리도록 하죠."

"3일이라...."

"현명한 선택,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굳어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떠나가는 신영준 병장.

그 뒤를 따라, 군단의 병사들이 절을 떠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덩치 큰 병사 한 명이, 생존자들을 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이 근처에서만 활동하던 겁니까?"

"예. 일단은...."

"역시."

거구의 병사가 한숨을 내쉰다.

"당신들. 우리 부대에게 발견된 걸 행운으로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으면서!"

"하지만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죠. 강제로 끌고 가지도 않았고."

진심으로 안쓰럽다는 듯.

가여운 눈빛으로 말을 잇는 거구의 남자.

"우리가 아닌 다른 세력이었다면... 이렇게 점잖게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점잖다고?

무슨 소린가 싶은 생존자들이었으나.

그 의미는 간단했다.

"우리는 민간인을 존중하고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저희 군단장님의 의향을 따른 결과죠."

"...."

"진지하게 묻겠습니다만. 다른 이들도 그럴 것 같습니까?"

신영준 병장과는 달리.

그나마 온순한 성격으로 보이는 거구의 군인.

"저희는 괴물과의 전투를 위해 각성자만 징집해 가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평범한 민간인들도 그냥 두지 않아요. 전투 인원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뿐, 노예나 장난감으로써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그는 이들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사람들에게 조언을 건넸다.

"평생 이 절에 숨어서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신 모양입니다만. 우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른 세력에게 발각되었을 겁니다."

"그, 그런."

"세상이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각성자가 생산과 무력을 모두 담당하는 세상이 왔어요.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구분이 시작되고... 머지않아 얼마나 강한 각성자인지에 따라서 지위가 결정되는 세상이 되겠죠."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두려운 건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이 변화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차라리?"

"빠르게 결단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자는 도태될 뿐이니 말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려 산문 밖을 향하는 군인.

사람들은 그 등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후."

"이게 대체 뭔 일이래."

군인들이 떠나고.

거처로 돌아간 각성자들과 달리, 생존자들은 충격으로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여전히 앉아 있었다.

"아, 아직 모르는 일이오."

그사이에 앉은 중년의 남성

홍정수가 말했다.

"모르다니? 뭘 말입니까."

"말했잖소. 스님들이 지금 상황을 바꾸려고 탈영병들을 데려온 걸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그 얘깁니까?"

"아까는 제대로 못 물어봤지만, 저들이 진짜 군인이라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지 어떻게 알아!"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 얘기를 들은 중년 여성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정말 스님들이 우리를 배신하려고 하는 거라면, 우리가 막을 방법은 없는 거 아니에요?"

"그, 그건. 그렇긴 하지...."

사람들 사이에 무력감이 퍼져 나갔다.

"아주머니가 말한 것도 맞지만, 아마 저 군인들이 거짓말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음?"

"아시잖습니까? 저 얼마 전까지 남쪽 근처에서 숨어 지내다가 얼마 전에야 이쪽으로 왔다는 거."

"아... 그랬지."

"사실. 스님들에게 구출되기 전에는 더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습니다. 그쪽에 대규모 군부대가 남아 있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

"어디까지나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한테 들은 소문이긴 했지만. 그 도시는 진짜로 각성자만 천 명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군부대에서 식량을 풀어서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한다던가."

저 군인이나 스님들이라면 모를까.

생존자들 사이에 섞여 지낸 지 몇 주가 되는 남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소문이란 건 실제로 퍼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뜻.

그 실체가.

방금 전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고.

"그, 그럼 군인은 맞다고 치고. 스님들이 그놈들을 왜 들여보냈냐 이거요. 일부러 우리를 적대하려고 한 게 아닌 이상, 애초에 스님들 선에서 막았어야-"

"아마 스님들도 원하지 않았을걸요."

"뭐?"

"제가 지내는 텐트. 스님들 갑옷 보관하는 창고랑 가까운 거 아시죠."

이번에 나선 것은 또 다른 남자였다.

"이거. 오늘 거기에 버려져 있던 물건입니다."

사내가 가져온 물건은.

기괴한 모양으로 찌그러진 철제 투구였다.

"이 자국. 보이세요?"

"이건."

"사람 손자국입니다. 조금 크긴 하지만."

"...."

투구는 머리에 쓰는 것.

그 투구에 이런 자국이 있다는 건.

"...설마."

"그대로 머리를 터트려서 죽일 셈이었다는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죠."

꿀꺽.

잔인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머리를 한 손으로 쥐고 터트리려고 했다는 것은.

투구를 쓰고 있던 자와.

거기에 손자국을 남긴 자.

그 둘의 힘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뜻.

"이 투구. 각성자들 중에서도 두 번째로 강하다던 혜연 스님 겁니다. 오늘 산문의 경비를 서던 분이셨는데, 지금은 병실에 누워 있답니다.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채로요."

"그렇다는 건."

"스님들은 군인들을 막아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 결과가 이거구요."

그 얘기를 듣자.

홍정수는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낮에 반말했던 군인. 그게 저 병장이라는 놈이었지.'

그가 군인을 향해 따지고 들자.

승주 스님이 그를 말렸었다.

'그때 만약 내가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다면....'

자신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권총을 쐈던 병장.

그 무감정한 표정을 다시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깐. 그렇다는 건.'

당시에는 스님들이 무언가를 꾸미기 위해 외부인을 들여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접근하는 것을 본 승주 스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갈 때도.

'잘 걸렸다'라고만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승주 스님은... 저 군인을 보호하려 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 표정이 썩어들어간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위험한 짐승에게 겁 없이 다가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것.

상대가 괴물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채.

뭣도 모르고 덤벼들던 남자.

'...나를 지켜주려 하신 거였어.'

불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호구같이 착해빠진 스님들을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었던 남자, 홍정수.

'계속 방해만 됐을. 나를.'

그 마음에.

커다란 빚이 자리 잡았다.

151화 절밥

"그, 그러고 보니, 그 병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레벨이 30이 넘는다고 했잖아."

"스님들이 정확한 레벨을 알려주진 않지만, 승주 스님도 20레벨 후반대 정도일 텐데."

"...일개 병장이 이 절에서 가장 강한 승주 스님보다도 고레벨이라고?"

"그럼, 그 부대의 간부들은 얼마나 레벨이 높다는 거야."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 때문이야."

"뭐?"

"각성자들은 포인트 모아서 강해진다고 들었는데. 저 군인들은 군부대에 속해 있었잖아. 편안하게 포인트를 모으고 성장했겠지."

"...."

"반대로 스님들은 모은 포인트로 우리를 먹여야 했으니, 성장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스님들이 군인들에게 패배한 것.

"어찌 됐든. 확실한 건 하나뿐이군요."

"뭔"

"지금 상황에서, 약해빠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

그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한 채.

시간은 천천히 지나갔다.

* * *

결국.

아침에 펼쳐졌던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되었다.

스님과 각성자들은 따로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절 주변의 보초를 서는 이들 외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시주님들."

"...?"

이 절의 가장 큰 어른.

주지 스님이 생존자들 앞에 서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같이들 드시지요."

"식사... 말입니까?"

"예. 절밥이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너무도 뜬금없는 얘기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아침의 일로 충격받은 사람들은 뭐라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의욕도 없었다.

얌전히 스님들의 안내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

그곳에는.

"...우와."

"이, 이게 다 뭡니까?"

엄청나게 호화로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절인 만큼 육류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

심지어 양도 엄청나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것 같은 양이었다.

물론.

'갑자기 이런 식사라니.... 말이 안 되잖아.'

무언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으나.

"설명은 나중에 해 드리겠습니다."

"설명이라니."

"이상한 음식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니, 안심하고 드셔도 될 겁니다."

꿀꺽.

지난 수개월.

제대로 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맛없고 딱딱한 호밀빵만 먹어야 했던 이들.

"에라이!"

"이, 이봐! 진짜 먹을 셈인가!"

"이상한 게 있어 봐야 죽기밖에 더하겠어!"

결국.

참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군인들이 각성자들 징병해 갈 거라며. 아무것도 못 하는 난 천천히 죽을 목숨인데, 먹고 죽지 뭐!"

그렇게, 차려진 요리를 한 입 입에 담는 순간.

음식을 삼킨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마, 맛있어...!"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맛있어, 맛있어...!' 하면서 음식을 입에 쑤셔 넣는 남자.

"그, 그 정도라고?"

"...끄응."

그냥 차려진 음식만 봤다면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저렇게 신나게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을 보고도 참기란 힘든 법.

"제길."

"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님들이 나쁜 짓을 하진 않겠지."

결국.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뭐, 뭐야. 진짜 맛있잖아...!"

"최근에 호밀빵만 먹어서 그런가. 크흑. 입에서 살살 녹네."

"뭐, 뭔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것보다도 맛있는 거 같은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기분 탓이겠지."

군인들이 다녀간 뒤.

긴장감과 무력감에 힘을 잃었던 사람들.

하지만 맛있는 요리가 배를 채우자.

기분이 좋아진 이들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식사에 몰입했다.

그 광경을.

스님들은 그저 웃으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꺼억."

그렇게.

모든 식사가 끝난 뒤.

'...막상 먹어보니 더럽게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기는 했는데.'

'그래서 결국 뭐였던 거야? 이 요리.'

'절밥치곤 너무 말도 안 되게 맛있었는데. 뭐 이상한 거라도 탄 거 아냐?'

식사를 마친 이들이 눈치를 보며 속닥거리자.

주지 스님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맛있게들 드셨습니까."

"예, 예에."

"정말 잘 먹었습니다만... 그래서 결국 뭐였던 겁니까? 이거."

"다 먹고 나면 설명해 주시기로 하셨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주지 스님.

"말씀드렸던 대로. 이상한 음식은 아닙니다."

"그럼 이만한 요리를 할 식재료가 대체 어디서."

"그 군인들이 주더군요."

"...!"

애써 잊고 있었던 그 군인들이 다시 언급되자.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다.

"군인들이 이런 걸 왜...?"

"저희 각성자 숫자가 100명쯤이란 걸 알고는, 3일 뒤에 자신들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먹으라고 건네주더군요."

100명의 각성자가, 하루 세끼.

3일을 먹는다고 하면 대충 900인분.

천여 명의 생존자를 먹이기에 적당한 양이었다.

"그러면서 말하더군요. 자신들 아래로 들어오면 이렇게 충분한 식량이 제공되고. 저희보다 강한 각성자들도 많으니, 쉽게 힘을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 식량을 왜 저희에게."

"허허. 탁발을 받아 온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허허 웃으며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여는 주지 스님.

"참으로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갑자기 터져 나온 거친 말에 사람들이 당황했으나.

주지 스님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식량을 줄 것이면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지, 각성자들에게만 따로 전해 주다니요. 얘기를 나눠보니, 저들은 각성자만 인간으로 취급할 뿐. 그 외에는 마치 벌레를 보듯 대했습니다."

"끄응."

"그래서. 저희는 얘기를 나눠 본 결과...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저, 저항이요?"

"싸움을 거부하는 이들조차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며,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니. 불도에 어긋나는 일. 아니,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벗어난 일! 그런 단체에 합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스, 스님들...!"

사람들이 스님들을 보며 격한 감정을 느꼈다.

이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스님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거기에.

이제는 자신들을 버리기만 한다면 좋은 취급을 받으며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스님들은 그 기회를 거부했다.

이런 세상이 되었음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본래 절의 생존자들 다수는 향화객 출신.

그 숭고한 모습에 감명받은 이들 몇몇이 눈물을 흘렸다.

"방금 식사는 마지막 만찬입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는 약합니다. 저항을 선택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요."

"그럴 수가. 스님들은 엄청나게 강하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약탈자 그룹의 각성자들은 상대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저희도 그런 줄 알았으나, 저 군인들을 만나고 나서야 그게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 말에.

사람들은 아침에 보았던 투구를 떠올렸다.

머리를 통째로 으깨 버리려는 듯 손 모양으로 찌그러져 있던 투구.

"저들이 산문을 넘는 것을 막아 보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혜연 스님이 크게 다치셨습니다."

"...!"

"저항한다 한들, 결국은 저들의 힘에 굴복하게 되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지켜 드릴 여유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도망치십시오."

"도망이라니."

"식사 맛있게들 하시지 않았습니까? 굶주린 상태로는 멀리 가지 못할 테지만, 지금은 다들 어느 정도 기운이 생기셨겠지요."

그제야.

스님들이 식량을 푼 이유를 알게 된 사람들.

"이 절은 저희가 지키고 있었기에 안전했던 겁니다. 저희가 끌려가는 순간, 괴물들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겠지요. 그러니... 숨어 지낼 수 있을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아가셔야 합니다."

그때.

주지 스님의 뒤에 서 있던 스님 중 한 명이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각성자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작은 목소리였으나.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는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잖습니까. 각성자가 조금 더 많았다면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그 얘기에.

승주 스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 한 명 한 명은 저들에 비해서 크게 꿀리지 않습니다. 저희는 특별한 무예를 익혔고. 저들은 포인트를 투자해 압도적인 능력치를 얻었지요. 아마 평균적인 전력은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아까 하신 말이랑은 다른 것 아닙니까? 분명 못 이길 거라고."

"문제는 숫자입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승주 스님.

"우리가 꽤 강하다는 건 저들도 알지만, 우리 인원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사람만 조금 더 많았더라면 저들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지는 못했겠지요."

"...!"

"아니. 그 전에 포인트로 능력치를 키우기만 했더라도, 저런 무뢰배들은 이겨낼 수 있었을 텐데."

스님들이 능력치를 키우지 못한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생존자들을 어떻게든 먹이기 위함이었지.

그렇다면.

"그, 그럼. 지금부터라도 늘리면 안 됩니까?"

"예?"

"저희가 각성해서 스님들한테 힘이 되어 드리면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나쁜 얘기는 아니긴 한데."

"그게 되겠어? 각성자들도 각성 직후에는 그렇게까지 강한 건 아니라던데."

다른 생존자들이 조금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을 때

승주 스님은 턱을 주억이며 말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예?"

"처음 각성한 사람들은 능력치가 낮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익힌 무예는 조금 특별하지요. 능력치가 낮은 사람이라도, 이 무예를 익히면 능력치의 몇 배의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 군인들 상대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저 군인들은 서북부의 대규모 몬스터 세력을 억누르느라 인력을 빼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지금의 묘양사 정도라면.

군인들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희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저들로서도 부담이 커질 겁니다. 저들이 가진 전력을 모두 동원한다면 모를까. 그 전력의 대부분은 괴물을 막는 데 쓰고 있으니."

"그, 그렇다면."

"정말 가능할지도."

"아니. 아마 높은 확률로 가능한 얘기일 겁니다. 하지만...."

승주 스님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려면 생존자분들이 각성을 거치셔야만 합니다. 그 후에는 제 가르침을 받아야만 하구요. 괴물을 상대로 싸우며 힘을 키워야만 할 텐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애초에.

그 두려움 때문에 아직까지 각성을 거부하고 있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군인들한테,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수 아버님?"

그 때 말을 꺼내 든 것은.

지금까지 스님들이 하는 일마다 반대 의견만 세우던 남자.

진수 아버님.

즉, 홍정수였다.

"우리는 스님들한테 의지하기만 하느라,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지.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적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들을 상대로 언제나 언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스님들을 이용해야한다는 말을 밥 먹듯 했던 그였으나.

지금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점잖은 것이었다.

"...진수 아버님까지 그렇게 생각하실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그 얘기에.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승주 스님.

"그럼, 이제부터 생존자분들의 각성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예!"

"저들은 3일 뒤에 온다고 했으니. 그전까지 최대한 많은 분들이 각성하고, 무예를 익혀야만 할 겁니다. 꽤 강행군이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하, 무슨 나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저희도 각오는 했습니다. 늦은 만큼 더 빡세게 달려 보죠, 뭐."

그렇게.

절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구분 없이 한 마음으로.

그리고.

저 멀리 있는 또 다른 산봉우리에.

"잘된 것 같군요."

"으. 안 하던 연기를 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빡세냐."

절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한 취사병이 있었다.

152화 저놈들도 사실 좋은 녀석들이었어.

"으. 안 하던 연기를 하려니까 죽겠네."

"하하. 그런 거치곤 엄청 잘하시던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와, 신 병장님 엄청 살벌해서, 뒤에서 보는 저도 식은땀이 그냥."

절을 떠난 뒤.

나와 병사들은 절이 내려다 보이는 다른 산봉우리의 암자에서 지내고 있었다.

스님들이 안내해준 장소.

여기에 모여서, '예민한 청력'으로 절에서 나눈 대화를 듣고 있던 것.

"애초에 니들이 맡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

어찌어찌 잘 풀린 것 같으니 다행이다만.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왜 이 짬 먹고 이런 짓을."

"에이. 저희는 돼지같이 몸만 커서 그런 역할로는 잘 안 어울립니다."

"영화로 따지면 까불다가 얻어맞는 조폭 엑스트라 느낌이랄까. 반면...."

내 얼굴을 바라보는 병사들.

"신 병장님은... 뭐라고 해야 하나."

"아니. 막 못 생겼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잘 생기셨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 인상이 조금 날카롭고, 아주 약간 살벌하다는 거.

"영화로 따지면 흑막 역할인 싸이코 살인마 같은 느낌이시지."

"맞아. 웃으면서 사람 고문할 것 같고."

"...."

몇 번 들었던 얘기기는 하다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나처럼 순한 놈이 어디 있다고.

"신 병장님 같은 사람이 미친놈처럼 굴어야지. 와, 진짜 뭐가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 하고 긴장하게 된다, 이겁니다."

아무튼 뭐.

잘됐으니 다행인가.

작전 자체는 간단했다.

예로부터 혼란스러운 내부를 결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빵인 녀석.

'외부의 적.'

우리가.

바로 그 외부의 적이 되어 주기로 한 것.

"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잘 풀리나?"

"신 병장님 각본이 그만큼 훌륭했던 거지."

그 말은 고맙다만.

사실.

'각본만으로 이렇게 잘되긴 힘들었겠지.'

작전 자체는 심플했지만.

작전이 심플하다고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일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저 상황까지 가서도, 누군가는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스님들을 원망했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그래도 자기는 무섭다고 도망쳤을 수도 있는 일.

그런 변수를 차단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 했지만, 뭐.

방법이랄 게 뭐가 있겠냐.

내 직업은 요리사.

그러니까.

'요리를 먹었지.'

[전쟁 요리사의 벅차오르는 감정의 절밥 세트]

어쩌면 저들 중 누군가는 스님들이 자신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도.

'오, 개꿀.'

정도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리의 효과는 직빵.

감정이 벅차올라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거다.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컨셉이다 보니, 육류는 아예 없이 만들어야 하는 게 정말 고통이었지....'

스님들에게는 일단 생존자들에게 요리를 제공한 뒤.

아무튼 감동을 줄 수 있을 만한 분위기를 연출해 달라고만 말했다.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던 게.

'주지 스님하고 승주 스님 말고는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나와 부대원들하고 대화를 나눈 건 그 두 분뿐.

나머지는 멀리서 우리를 보기만 했거나.

아니면 광일이에게 뚜드려 맞아 기절해 있는 사람이 전부다 보니.

그 둘과의 대화 내용만 적당히 꾸며서 전달하자.

스님들도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한 태도가 나와 버린 것.

그렇게 스님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이 저항할 것을 각오하고 이야기하자.

평소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로 넘어갔을 사람들조차, 요리의 효과로 인해 그 모습에 감동.

저렇게 단결할 수 있다는 거다.

'원래도 조금은 느끼게 됐을 감정을 부풀렸을 뿐이야.'

요리에 이상한 효과가 끼어 있다는 건 눈치채지도 못할 것이다.

본인들이 원래 느껴야 했을 감정을 부풀린 만큼.

감정의 잔재도 오래 남을 터.

내가 머물며 추가적인 요리를 해 줄 필요도 없겠지.

'이걸로 이 절의 각성자들은 무난히 늘어날 거다.'

늘어난 각성자만큼 전력에 여유가 생기니.

그 전력으로 밭 하나를 점거하고 개간하는 식으로 식량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무예'에만 기대고 있을 뿐.

속은 썩어 곪아 버린 단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름도 제거되고, 정상적이고 강력한 단체로 거듭날 것이다.

그래.

'동맹을 맺기에 적합한 단체로.'

* * *

3일 뒤.

다시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짜가 되자.

군단의 병사들은 다시금 절을 찾아갔다.

"오셨소이까."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님과 생존자들이 군단원들을 맞이했다.

신영준 병장은 그 모습을 보며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현명한 결정을 했을 거라 믿습니다."

"음."

"저희도 귀찮은 건 싫으니, 군단에 합류할 각성자들은 이리로."

당연히 모든 각성자들이 합류를 할 것이라고 믿는 듯한 태도였으나.

각성자들은 아무도 음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신영준 병장.

"...각성자들의 숫자가 늘었더군요. 당연히 군단에 합류하고 싶은 이들이 각성을 거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반대요, 시주. 우리는 징병을 거부하겠소."

"이유가 뭡니까. 각성자들한테는 최고의 조건을 약속했을 텐데. 우리가 그럴 만한 여유가 있다는 건 그때 넘겨준 식량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딱히 거짓말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오. 하지만 군인들한테는 군인들의 방식이 있듯, 중한테는 중의 방식이 있는 법. 군인분들이 괴물을 막으며 분투하시는 건 잘 알겠소. 하지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도록 하고자 하오."

"...어리석긴."

스윽.

그는 잠깐 사람들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숫자가 이렇게 늘어서야... 힘으로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겠군."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들리지 않을 정도.

하지만, 각성자들이라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

"...!"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고 하긴 했으나.

새롭게 각성한 각성자들이 '됐다!'라는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신영준 병장은 생각했다.

'여기까진 잘 왔고.'

이제.

다음 단계로 갈 차례다.

'우리 부대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나빠서야, 동맹을 맺을 수도 없을 테니.'

잠깐 고민하는 듯 시간을 끈 뒤.

이내 입을 여는 신영준 병장.

"우리한테 합류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걸 거부한 건 당신들이니, 나중 가서 후회하지나 않았으면 좋겠군요."

"...잘못된 선택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의 대가는 우리가 감당하겠소이다."

"흥. 그건 당연한 거고. 합류를 거부한다면 다음 제안이나 들어 보시죠."

"제안...?"

그가 거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최선의 선택을 걷어찼으니, 차선책을 제시해 드리겠다 이겁니다."

"차선책이라니. 그게 뭡니까."

"우리 군단과 동맹을 맺읍시다."

"...!"

"물론 체급 차이가 있으니, 완전히 동등한 관계는 아니겠지만."

그다음 얘기는.

자칭, 돼지 같이 몸만 큰 녀석.

전광일 상병이 맡기로 했다.

이때를 위해, 3일 전에도 슬쩍 착한 역할을 맡았던바.

"큼. 저희를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군단은 괴물들을 제거하고 일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절의 생존자들을 벌레 취급했던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시는군요."

"그 과정에서 조금 과격한 짓이 있었던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덩치에 비해, 평소에는 순박한 성격의 전광일.

그가 비교적 온화한 말투로 말하자, 사람들도 일단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북서부의 대규모 몬스터 집단은 이미 철원군과 화천군, 두 지역을 점거한 상태입니다. 지능이 높은 몬스터들이라, 그 일대의 군부대를 습격해 노획한 무기를 운용하는 모습까지 보이더군요."

"괴물들이 군대의 무기를 쓴다, 이 말이오?"

"저희가 확인한 것은 전차까지였습니다. 다행히 아직 미사일 등의 무기까지 활용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

그 얘기에, 모여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안 그래도 인간 정도는 가볍게 찢어 죽일 수 있는 괴물들.

그런 괴물들이, 군대의 최신식 무기까지 다룬다는 뜻이었으니까.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해당 지역 내의 인간은 대부분이 살해당한 것 같더군요. 일단은 그 이상으로 퍼져 나오지 못하도록 저희가 막고는 있습니다만. 전선이 뚫리게 된다면 놈들은 근처 일대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닐 겁니다."

"...시주들께선, 자신들이 선한 단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그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끼어든 것은 신영준 병장이었다.

"선이니 악이니, 그딴 건 상관없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구요."

"신 병장님의 말대로입니다. 저희는 군단장님의 명령에 따라, 최대한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괴물을 틀어막는다는 것도 그 일환이죠."

어찌 되었건 간에.

저들이 생각하는 악랄한 약탈자는 아니라는 거다.

"동맹이란 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저희가 펼치고 있는 군사 활동에 협력해 주십시오."

"결국 징병하겠다는 뜻 아닌가!"

"대신, 충분한 양의 식량과 장비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다른 스님들을 대신해.

주지 스님이 차분한 말투로 그 제안을 정리했다.

"징병이 아니라. 고용에 대가를 지불하는... 용병 같은 관계를 맺자. 이 말이시구려."

"우리는 전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반면 여러분들은 장비와 식량 같은 게 필요하겠죠. 서로 필요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등한 동맹이라기보단, 일종의 하청 같은 관계가 되겠습니다만."

스님 중 한 분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군사 활동이라는 거. 죄 없는 사람들을 향해 진행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설마."

그 말에.

작게 웃으며 대답하는 신영준 병장.

"당신들이 그런 짓을 하는 순간 우리가 직접 토벌하러 나설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쇼."

"...."

마치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는 듯한 웃음.

그 살벌한 미소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농담 좀 해 본 건데.'

크흠.

약간 마음에 상처를 입은 신영준 병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군사 활동이란 건 간단합니다. 서북부의 도시를 점거한 괴물들. 그놈들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것. 저희는 거리가 먼 이곳까지는 방어하기 힘드니, 당신들이 그 역할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나중에 토벌 작전을 펼치게 된다면 그때도 힘을 좀 실어주셔야겠고."

"만약에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막지 못한 괴물들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니게 될 뿐. 정말 그걸 원하면 얼마든지 거절하십쇼."

그 얘기에 잠시 고심하는 주지 스님.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정도라면... 저희에게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좋습니다."

팔짱을 푼 신영준 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과 장비는 주기적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인원수가 많은 만큼 모두한테 먹일 만한 양을 공짜로 제공해 드리긴 힘들 테니... 대신, 저희 부대와 거래하는 상인이 있습니다. 그와의 거래를 소개해 드리는 걸로 하죠."

"상인이라?"

"모자란 식량 같은 건 그를 통해서 구매하시면 될 겁니다."

"...고맙소."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식량 문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자, 고개를 숙이려는 주지 스님이었으나.

신영준 병장이 그를 막았다.

"굳이 고개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군사 활동에 협조해 주는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니까."

그 말에.

사람들이 조금 의외라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 양반. 미친 싸이코패스 군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제대로 된 군인인 것 같기도 하고.'

마냥 폭력적이고 타락한 군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약간 강압적인 부분이 있을 뿐.

'생각해 보면 각성도 안 하고 보호받기만 바란 우리가 문제였지.'

'반면 저들은 일찌감치 각성해서 그 힘으로 괴물들을 막아주고 있었던 셈이니....'

'우리를 경멸한 것도 이해는 가는군.'

이런 상황에도 불구.

원한다면 일대의 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괴물을 저지하고 국토를 방어한다는.

군인의 의무를 지키고 있는 부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저놈들도 사실 좋은 녀석들이었어....'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하하! 대박입니다!"

상협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식량 원조를 해 주기로 약속했지만.

천여 명을 먹여살리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힘들었다.

'대가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기에.

저들에게 상인... 상협과의 거래를 주선해 주었고.

지금, 그 첫 번째 거래가 이루어진 것.

"대박이라니. 그 정도입니까?"

"예! 아무래도 직접 먹어 본 적이 없는 양반들이라, 이 전투식량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건지 설득하느라 조금 고생하긴 했습니다만."

흐흐, 하고 웃는 상협.

"이번 일로 경험치를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정말이지, 덕분에 얼마나 큰 이득을 봤는지. 모두 다 군단 분들 덕분입니다!"

"알면 다행입니다. 앞으로 잘하세요."

"예! 저 상인 이상협, 군단을 상대로는 언제나 최고의 조건만을 제시하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

글쎄다.

저 말을 진짜 믿어도 될는지.

* * *

아무튼.

그렇게 상협의 거래도 마무리가 되고.

"오셨습니까. 시주님."

"말씀하신 대로, 해결해 드렸습니다."

나는 승주 스님을 찾아갔다.

중년의 스님이 경외감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잘 해결될 줄이야. 거래를 제안해 놓고 이런 말은 좀 그럴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잘될 거라고."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그런데.

스님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제가 대가를 치를 차례군요."

웃으면서도 묘하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데다가.

자세히 보니, 작은 종이에 뭔가 글씨를 적고 있는 모습.

"뭡니까 그건?"

"아. 별거 아닙니다. 대가를 치르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게 있어서요."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작게 접어 편지 봉투 같은 것에 넣는 승주 스님.

슬쩍 고개를 내밀어서 그 봉투를 바라보자.

[유 서]

"...."

뭔가.

뜬금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간 글자다 보니.

제대로 본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확인을 해 보려 했으나.

"뭡니까, 이거?"

"아. 유서입니다."

뭐야, 제기랄!

잘못 본 것도 아니었잖아.

"유서라니. 갑자기 웬...!"

"그야. 제가 익힌 무예를 어디서 얻었는지 알려 달라고 하신 건 본인이시지 않습니까."

"아니. 그거랑 이게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를 바라보자.

허허, 하고 웃는 승주 스님.

"그곳으로 안내하는 순간, 전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다 보니."

153화 트레이너 NPC

"그곳으로 안내하는 순간, 전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다 보니."

죽을 확률이 높다니.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승주 스님.

"아까의 대련,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절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부대원들과 승주 스님 간의 간단한 대련이 있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저희 절에 소속된 각성자들 말고도 이렇게 강한 이들이 있을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싸웠던 덩치 큰 시주님의 움직임이란...."

전광일 상병을 말하는 거겠지.

녀석이 좀 대단하긴 하다.

"정말 굉장한 힘이었습니다. 금강역사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충분할 정도의 강함이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승주 스님 역시 그 부분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강한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승주 스님과 우리 부대원들 사이에 펼쳐진 대련.

그 결과는....

'우리 부대원들의 참패였지.'

그나마 광기를 해방하지 않은 상태의 광일이가 동수를 이룬 정도.

우리 부대를 키우기 위해 불철주야 개고생을 해온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허무할 정도의 결과였다.

'이 아저씨. 엄청난 실력자다.'

산문 앞에서 만났던 혜연 스님이라는 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강자.

부대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 능력치에도 불구.

그 정도의 전투 능력을 보여 준 거다.

우리 부대에서 만들어진 장비 등을 착용한다면.

광기를 해방한 전광일 상병과 자웅을 겨뤄 볼 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치열하게 투쟁해 온 우리 부대의 최정예와도 비견될 정도의 강함.

그 근원이 바로.

"무예...라고, 일단은 상태창에 등록은 되어 있지요."

이 절의 스님들이 익히고 있는.

바로 그 기술이다.

"아마 시주님께서는 이 힘을 공유받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슬쩍 손을 뒤로 뻗어.

등 뒤에 있던 상점산 철봉을 꺼내는 승주 스님.

"아까의 대련에서도 보셨겠지만. 저희가 익힌 무예는 기본적으로 봉술입니다."

"예. 그건 저번에도 얘기하셨죠."

"저희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전에, 기본적으로 이 '승병 무예'를 먼저 어느 정도 가르칩니다. 각성하기 전에는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무술이지만, 이 방법을 쓰면 각성 후에도 봉술 숙련 특성을 가질 확률이 높아지더군요."

과연.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 효율적인 각성을 위한 노하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문제는.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겠죠."

"그야 뭐."

나만 해도, 직업은 '요리사'.

가지고 있는 무기 특성은 '단도 숙련'이다.

스킬북을 통해 새롭게 익힐 수 있는 스킬과 달리.

특성은 새로 익히기도 어렵다.

"익힐 수만 있다면, 시주 님들의 능력이 몇 배는 훌륭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만. 제가 가진 것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

이 스님이 가진 '무예'라는 게 아무리 특별하고 뛰어나다고 한들.

관련 특성도 없는 상태에서 냅다 봉을 쥘 수도 없는 일.

"그러니, 제가 기술을 익힌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이라면 군인분들께 필요한 무예를 얻을 수도 있을 테지요."

뭐, 그거까진 좋다.

애초에 어디서 얻었는지까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던 건 나니까.

"거기 가면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문제는.

왜 갑자기 이 양반이 유서를 쓰고 자빠졌냐는 거다.

"함정이라든가, 괴물이라든가. 그런 거라면 말씀하십쇼. 우리 부대가 그런 거 해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군요."

자세 고치고 말하는 스님.

"일단 준비는 끝났으니,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여전히 의문은 남았지만.

나는 승주 스님을 따라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주님."

"예에...."

"절에서 다른 스님들이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셨습니까?"

그 말에 조금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이 절에 오래 머물러 있던 건 아니다 보니.

많은 걸 보지는 못했다만.

"음. 산문에서 광일이랑 싸웠던 스님도 아주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고, 주지 스님도 많은 신뢰를 보내는 것 같더군요. 그때도 뭐, 승주 스님 덕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든가, 공덕이 엄청나든가."

"하하...."

"처음으로 각성한 사람이라고 하셨죠? 게다가 저 [무예]라는 걸 익히고 사람들한테 전파한 것도 스님이라고 하셨으니, 실제로 많은 사람을 구한 거 아닙니까. 저 사람들이 각성을 반대한 게 문제였지."

그 말에 민망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스님.

"솔직히 말하죠. 전 그 평가가 부끄럽습니다."

"아~ 그 기분은 저도 좀 이해합니다."

내가 여러모로 노력해 온 건 사실이긴 하다만.

너무 지나치게 치켜세워 주면, 이게 또 부끄럽긴 하단 말이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

"제 경우엔, 정말로 부끄러워해 마땅한 얘기라서."

그런데.

승주 스님의 경우는, 나와는 조금 다른 얘기라는 모양.

이윽고.

승주 스님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산의 높은 곳에 세워진 절.

그 절에서도, 가장 구석진 장소.

"여긴...."

"보시는 대로, 절벽입니다."

그곳에 펼쳐진.

가파른 절벽이였다.

"세상에. 실수로라도 발을 디뎠다간 바로 죽겠는데요. 일단 떨어지지 않게 막아 뒀으니 다행이긴 한데."

"의외로 그렇진 않습니다."

"예?"

"보기보단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 않거든요."

...응?

"암벽등반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일반인이라도 어찌어찌 살아서 내려갈 수는 있지요."

"그렇습니까?"

"예. 이 사실을 아는 건 아마 절에서도 저뿐일 겁니다."

어.

뭐라고 해야 하나.

"내려가 보신 것처럼 얘기하십니다?"

"예. 실제로 내려가 봤으니까요. 두어 번 정도."

"여길 굳이 왜...?"

"처음엔 실수였습니다."

묘한 눈빛으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승주 스님.

"그 괴물들이 나타난 날. 제가 뭘 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주지 스님 말로는, 첫날에 실종돼서 죽은 줄 알았다던가."

"여기로 도망쳤습니다. 괴물들이 무서워서."

"...!"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승주 스님을 쳐다보았다.

도망이라니?

"괴물들도 절벽을 거슬러 오르는 건 힘든지, 대부분 산문 쪽으로 오더군요. 절에 갇혀 있던 다른 스님과 손님들이 좋은 미끼가 되어 준 셈이지요."

우리 부대와 이 절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문제는.

사람들을 각성시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부대원들을 모두 각성시키려고 한 이유를 떠올렸다.

'그렇게 하지지 않으면 부대가 약해지니까.'

부대가 약해진다면.

부대에 있는게 불안해진 병사들이 탈영을 하며, 약화가 가속될 수 있다.

그런 판단이었다만....

이 양반.

'그 탈영병이었냐....'

이 절의 1호 탈주자.

그게 바로 승주 스님이었다는 거다.

* * *

"흡... 끄윽."

중년의 남성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흐느낀다.

튀어나온 돌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절벽 아래로 발을 딛는 남자.

"하, 한 명이라도 살아야 하는 거잖아...."

스님이 되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승주는 사실 불심이 깊은 편은 아니었다.

난다긴다하는 고승들 중에는 사실 꽤 알부자가 많다던가.

먹을 걸 가리지도 않고, 절에서의 삶이 빡세 보이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대학을 다니고 자격증을 따서 스님이 되었을 뿐.

흔히 말하는 떙중이라는 녀석이 있다면 자신일 것이라고.

그도 스스로 생각했을 정도.

그럼에도.

절에서의 생활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일과가 끝난 뒤에는 다른 스님들과 족구를 하며 지내는 게 취미인 평범한 인간.

그 평범한 인간이, 어느 날.

같은 족구 동아리의 스님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끅...."

묘양사는 유명한 사찰이었다.

스님들은 물론, 방문객들도 많았다.

그런 사찰이 먹을거리가 널려 있는 식량 창고쯤으로 여겨진 것일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수들.

놈들은 절의 담장을 넘어 사람들을 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숲속으로 사라진 경우는 양반이지.

내장을 뜯어먹혀 사망한 동료 스님이, 끄어어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일단은 무기가 될 만한 걸 챙겨봅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니.

나름대로 정신력이 뛰어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회의를 하기도 했다.

장식용으로나 쓰던 승병용 장봉 같은 것을 들고 무장하는 등.

여러 대처가 있기는 했으나.

'저 괴물들이 동네 똥개도 아니고. 봉으로 때린다고 죽겠냐고...!'

승주가 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대응이였다.

-탈출은... 역시 불가능할 것 같군요.

-예. 저 괴물들.... 절 주변을 아예 에워싸고 있어요.

-하. 차라리 바로 습격할 것이지.

-가둬 놓고 배고플 때마다 한 명씩 빼서 먹을 셈인가.

탈출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다른 스님들과 달리.

승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저, 절벽.'

삼면은 포위당한 상황이지만.

절의 가장 뒤쪽.

절벽에서는 아직 괴물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승주는 다른 스님들 몰래 술을 홀짝이다가 저 절벽에 떨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저 가팔라 보이는 절벽이, 사실은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을.

의외로 조심만 한다면.

내려가기도, 기어오르기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괴물들은 뷔페에 몰린 손님들처럼 절의 3면에 몰려 있었다.

어떻게든 괴물이 적은 절벽으로 도망친 다음, 산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도시의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 저기.

그런 생각에.

절벽에 대한 것을 말하려 한 승주였으나.

-왜 그러십니까 승주 스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괴물들이 산문 근처에 몰려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어차피 도망치지 못하고 갇혀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절벽으로 우르르 도망치는 걸, 괴물들이 잘 가라고 보내 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절벽을 통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괴물들의 시선이 절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몰래 탈출한다.'

양심의 가책이 없지는 않았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다른 이들을 모두 버리고 도망치는 꼴이니까.

하지만.

어차피 절에 있어 봐야 변하는 것도 없다.

'나라도 탈출해서 절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알려야지...!'

그런 자기 합리화를 거친 끝에.

그날 밤.

승주는 절벽을 타고 탈출을 결행했다.

"끄흑...."

어둠 속에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스마트폰의 불빛에만 기댄 채.

절벽을 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탁.

결국은 그 높은 절벽을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승주.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바로 그 순간.

-크르륵....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승주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아, 아아...."

아침에 갑자기 나타나, 그의 직장 동료들을 잡아먹은 괴물들.

그 괴물 중 한 마리가, 절벽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심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쳐 나왔는데.

그 결과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혼자 죽는 것이라니.

"흐, 흐흐.... 업보로다."

중형견 한 마리도 제대로 이길 자신이 없던 승주다.

괴물을 상대로는 싸워 볼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때.

승주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가 타고 내려온 절벽.

그중 한 부분에, 검은색 장막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뒷걸음질 치는 그의 발걸음이.

우연히도 그 장막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

* * *

"히, 히익...!"

괴수가 그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

콰직!

"...콰직?"

승주의 등 뒤.

그곳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괴물의 목을 쥐었다.

"무, 무슨."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있던, 검은색 장막.

그 안에서 튀어나온 긴 팔이 보였다.

빠직.

벽에서 튀어나온 손이 괴물의 목을 비틀자.

'깨갱'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는 괴물.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저 손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

-후우. 지나치게 나약한 존재로군.

"예?"

-하지만 내게도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나.

승주가 감사를 표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너. 살고 싶으냐.

그 손이, 승주를 가리키며 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아무튼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승주는 눈물 콧물을 모두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거래를 하지.

"거, 거래. 말입니까?"

-괴물의 시체들을 가져오너라.

"예...!?"

장막 안에서 나타난 손.

그 자체로도 당황스러웠으나, 이어진 말은 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괴물들을 죽이라니. 계율...은 그렇다 치고. 저놈들은 맨몸으로 산문을 부수는 괴물들이란 말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니."

-네가 거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장막 안의 손이 승주의 머리를 만지더니.

바닥에 기절해 있는 괴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내가 네게, 살기 위한 힘을 줄 것이니.

그 후.

그 '손'은 그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평범한 인간의 무술과는 격이 다른 기술.

각성자의 신체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무예'를.

* * *

"무예를 익히는 데에는 3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

"그 후에 절에 복귀하려는 저를 보며 그 손이 당부하더군요."

-기술을 열화해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까지는 허용하겠다.

-원본을 남에게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내 존재를 남에게 알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

-만약 이를 어길 경우....

-내 직접 네 심장을 씹어 먹어 줄 것이다.

"여기까지입니다."

"...흠."

"저로서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목숨을 대가로 다른 목숨을 바치라 하는 존재... 그런 게 정상적인 존재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승주 스님의 과거 이야기.

본인은 나름대로 죄책감을 가지고 부끄러운 과거를 입에 담은 것이겠으나.

"그런 존재와 거래를 하기로 한 것이니... 그자가 함구를 명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솔직히 중간부터는.

'다른 부분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어.'

신경 쓰이는 점은 단 하나.

승주 스님이 말한 대로라면.

그 장막 너머의 손이라는 녀석은 아마도.

'트레이너 NPC...!'

대박이다.

154화 뭔 개소리야?

승주 스님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트레이너 NPC라니...!'

트레이너 NPC.

요즘은 어떨지 몰라도, 예전에는 게임마다 거의 필수적으로 있었던 존재다.

이들의 역할은 지극히 간단하다.

자신을 찾아오는 플레이어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

'아니. NPC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승주 스님의 말에 따르면.

놈은 여차하면 이 스님도 죽여 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하니까.

몬스터의 일종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조건만 맞으면 새로운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특수한 몬스터.

나는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스님이 말한 그 검은 장막이란 건... 아마 던전이겠지?'

다만 의아한 것은.

그 존재는 던전에서 팔을 꺼내 바깥에 관여했다는 거다.

내가 지금까지 본 던전은 두 곳.

[검은모래 산란지]와, [침식이계 다스무르]였다.

'두 곳 모두 던전 안의 존재가 바깥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었어.'

지금까지 겪은 두 던전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저 절벽 아래에 있다는 장막이라는 게 이상한 걸까.

그러고 보니.

"그 손이라는 게, 괴물의 사체를 달라고 했다고요?"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다행히 그 장막은 이 절벽의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서, 사냥한 괴물들의 사체를 종종 저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더군요."

얘기대로라면, 접근해 온 괴물을 일격에 기절시킨 존재.

그런 녀석이 왜 직접 사냥을 안 가고 거기에 사체를 조달할 것을 부탁한 걸까.

'...손만 빼는 게 한계라든가?'

설마.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존재가 그런 한심한 이유로 그럴까 싶다마는.

"...그런데."

트레이너 NPC라는 생각에 흥분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그 얘기대로라면.

"저한테 말한 시점에서 그 계약을 어기게 된 셈이신데...."

"예. 맞습니다."

"왜 그런 짓을."

이 스님.

지금은 그 존재와의 계약을 어긴 상태라는 거다.

계약을 어기면 심장을 뜯어먹어 버리겠다고 하는 협박을 들었음에도.

"어차피 제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어떻게 눈치챈 건지는 아직도 감이 안 옵니다만."

"그래도. 남에게 들키는 거랑 직접 말하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요. 다만."

손에 쥔 봉을 슬쩍 내려다보는 스님.

상점에서 파는 철봉이었으나.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한 듯, 사용감이 역력했다.

"이 봉술은, 그냥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해 주는 방법이 아닙니다."

"?"

"기술을 익히고 단련해 나갈수록, 마음이 가라앉고 조금씩 정돈되더군요. 어쩌면 본래는 정신 수양을 위한 무예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저는 아직까지 화를 참지 못할 때가 많으니, 그전의 제가 얼마나 못난 놈이었을지 매일 같이 체감하게 되더이다."

자신을 향한 살해 협박이 언제 실행될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허허롭게 웃는 승주 스님.

"사람들을 배신하고 혼자서 살고자 한 죄. 못난 과거의 제가 저지른 가장 큰 업보입니다."

"...설마."

"정말로 당신이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고. 사람들에게 살길을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저 하나 죽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숨 하나 따위.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싸게 먹히는 편이겠지요."

식량을 제한해서 생존자들을 각성시켜야 한다거나.

주지 스님에 비하면 꽤 강압적인 방법을 얘기했던 스님이다만.

'결국은 그것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지.'

정말로 이 스님이 제 안위만을 챙겼더라면, 이 절을 떠나 버리면 그만이다.

누가 봐도 서포터 직이라 부대를 버릴 수 없었던 나와는 달리.

'승주 스님의 직업은 성기사.'

훌륭한 전투 능력과 회복 능력을 모두 갖춘.

솔로 플레이에 최적화된 직업이니까.

그럼에도 절을 떠나지 않은 것은.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다는 거다.

"저는 이미 결심을 마쳤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스님...."

"문제는 제가 아닌 여러분들이지요."

자세를 바로 한 스님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안에 있는 존재는... 아마도 평범한 괴물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존재일 겁니다. 당시에는 몰랐습니다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던져 준 이 무예만 해도 저희 절이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준 엄청난 것이었지요."

"...흐음."

"지금이야 조건을 어겨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라고 하나, 놈과 거래를 맺은 것 자체는 정말로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 트레이너 NPC를 찾아간다고 한들.

우리까지 운 좋게 무예를 전수받고 끝나리라는 법은 없다는 거다.

"운이 좋다면 제 다음 거래 상대로 지목되어, 그 대가로 무예를 전수받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스님이 조건을 어겼다는 것에 대한 분풀이로, 저희까지 같이 처리해 버릴 수도 있겠죠?"

"예."

그 '손'을 찾아간다면, 무예를 익히게 될 수도 있으나.

반대로 처참하게 살해당할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손'을 찾아가지만 않는다면.

승주 스님이 언젠가 놈에게 살해당할 뿐.

우리에게까지 피해가 올 가능성은 적겠지.

"선택은 자유입니다."

난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일단 이 절의 사람들과의 동맹이 성사되었다.

저 '녹색갈기' 들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방어선이 형성된 셈.

하지만.

'역공을 해서 토벌하기에는 여전히 모자라.'

더 강한 한 방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이 스님이 가진 무예 같은 것이.

"제가 혼자 정할 일은 아니군요."

일단은.

부대원들의 의견을 물어봐야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