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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00

90화. < 혈린회와 상무위원 >

이틀 후.

한유진은 베이징의 싼리툰 지역에 자리한 국정원 요원들의 안가 위치를 공유받았다. 대사관과 국제 상업 시설 등이 많아 외국인 활동이 자연스럽고 보안이 너무 빡빡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어디 보자.'

언제나처럼 무용이를 품에 안은 채로 대균열을 나온 그는 스마트폰 지도를 통해 위치를 파악한 뒤, 한순간 자색빛으로 화해 엄청난 속도로 하늘 높이 쏘아져 나갔다.

그는 오행천둔술을 시전할 때면 가끔 자신이 이동하는 게 아니라 주변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빠르게 밀려나는 감상을 받았다.

오행이 의미하는 물질의 모든 상태를 통과해 이동할 수 있다는 건 공기저항을 포함한 모든 방해와 구속을 무시할 수 있단 뜻이다.

그러니 속도를 높이면 당연히 발생해야 할 많은 요소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하여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그저 의지에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절로 영감이 떠오르는 일이었다. 몽환유심이랑 잘 섞으면 어떻게 법술의 효과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하나 그것을 제대로 정리해 보기도 전 벌써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게 됐다. 전력으로 날아오지 않았음에도 채 십여 분밖에 안 걸린 것이다.

'완전히 능숙해지면 이삼 분 만에도 오갈 수 있겠네.'

결단기에 오르자 지구가 확 좁아진 느낌이다. 지금 이 속도대로라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도 반나절 정도밖에 안 걸릴 터다.

새삼 자신이 초인 중의 초인이 되었음을 느끼면서 그는 공유받은 정보를 확인해 국정원 요원들의 안가를 찾아갔다.

현지 협력자를 몇 동원하여 창립한 작은 무역 회사 건물이었다. 실제로 무역 업무를 행하기도 하는 등 모르는 자가 보기에 의심받을 구석이 전혀 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건물에 자리한 이들 중 누가 국정원 요원인지 판별하기는 별 어렵지 않았다. 굳이 신통이나 법술을 동원할 것도 없이 신식으로 행동거지만 살펴도 느낌이 왔다. 그들의 위장이 어설퍼서라기보단 한유진의 신식 감각이 너무 대단한 탓이었다.

이렇듯 비공식적으로 숨어서 활동하는 요원이라면 블랙요원일 가능성이 크다.

순직했을 때조차 그 이름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며, 그저 국가정보원 중앙 현관 조형물에 불규칙한 시기로 은빛 별 하나만 남기게 되는 이들이다.

여담으로 시기가 불규칙한 이유는 그래야만 해당 요원의 사망 시점과의 연결고리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유진은 자신의 방문을 최대한 감출 필요가 있었고,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미 몽환유심으로 모습과 기척을 은폐한 상태였다.

하여 오행천둔술로 건물 안에 스며든 그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유진 스스로는 태연하게 걸어 다녔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렇게 지나치는 이들 중에는 감지계 이능력을 가진 요원도 몇 있었지만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건물 상층부의 지사장실이었다.

그 안에선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안경 쓴 남자가 컴퓨터로 뭔가 열심히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슬쩍 뒤에서 보니 진짜로 무역에 대한 업무다.

톡톡-

가볍게 상대의 어깨를 두드려 자신의 존재를 알린 그때.

지사장은 무심결에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털다가 문득, 모니터의 검은색 플라스틱 테두리에 비친 한유진의 신형을 보곤 얼어붙는 기색이었다.

"놀라지 마세요. 저 오늘 찾아오기로 한 한유진입니다."

"······그, 그러, 그러십니까?"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렇게까지 놀라실 줄 알았다면 그냥 밖에서 노크라도 하고 들어올 걸 그랬네요."

지사장의 뒤에서 움직인 그가 실내 한쪽 테이블에 자리한 의자를 빼 앉았다. 그런 한유진을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지사장이 곧 정신을 차렸다.

"여기 위치를 알려드린 지······ 분명히 삼십 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요?"

"정보 받고 바로 왔습니다."

"설마 이미 베이징에 도착해있었던 겁니까?그러면 교통편 이용 흔적이······."

"한국에서 바로 날아온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첩보 분야는 잘 모르지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하나 지사장은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날아오셨다고요? 비행 능력으로? 그러면 더 문제입니다. 요즘 대공레이더 성능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왔으니까 더는 관련 이야기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직후 한유진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이어 처음 나타났던 자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지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뭘 염려하시는지 알겠지만, 제 은폐 능력은 현실을 꿈처럼 왜곡하는 원리라서 현존하는 과학기술로는 탐지할 수 없습니다. 이해되셨지요?"

"현실을 꿈처럼 왜곡한다고요?"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법한 말이다. 하나 한유진은 계속 얼빵한 모습만 보여주는 상대와 더 깊게 교류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상대가 일부러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리 능력 좋은 S급 헌터라지만, 이런 쪽으론 아무것도 모를 20대 애송이 주제에 괜히 참견해서 일을 망치려 든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지적해선 심리적 우위를 차지한 뒤 행동을 제어하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그냥 여태까지 조사한 정보만 제게 건네주시면 됩니다. 전부 이 자리에서 살핀 다음 놓고 나갈 테니, 더 이상 뭔가 협조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조금 달라진 기색으로 말했다.

"제가 전해 들은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군요."

"어떻게 다르죠?"

"무력이 필요한 부분에서 도움을 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가령, 폭력 조직 혈린회의 거점을 변장한 채 습격해서 특정 자료를 탈취하거나 이목을 끌어주는 식으로요."

한유진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세세히 공개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정보가 전달된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혈린회와 영원의 여신교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음······."

잠시 침음하며 고민하던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 몰라서······ 서류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말로 설명해 드릴까요?"

"말로 설명해 주세요. 빠트리는 것만 없으면 괜찮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여기 책임자이니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혈린회는······."

관련 이야기가 시작됐다.

혈린회(血麟會)는 중국의 유서 깊은 폭력 조직으로 그 역사가 자그마치 청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외국에는 블러드 스케일(Blood Scale)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일본의 야쿠자 조직처럼 너무 유명해서 온갖 미디어 소재로 쓰이기도 하는 등,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중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려 도저히 소탕할 수 없게 된 이들이기도 하다.

한데 최근 그 혈린회 내부에서 새로운 계파가 탄생했는데 그 계파의 이름이 영원비문(永遠秘紋)으로 상당히 독특한 성격을 띤다고 했다.

바로 종교적인 성격을 말이다.

무엇보다 이 영원비문 계파는 중국의 고위 정치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모양이었다. 문화재단 및 연구소 등 각종 비영리 단체에 배정된 자금이 흘러 들어간 정황을 포착했다고 하니까.

"어떻게 포착했나요?"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이주 노동자들의 실종이 단서 중 하나였고, 한중 공조 과정에서 중국 공안이 이상하게 해명하지 못하던 부분들도 있었고······ 원래 파악하고 있던 한국 내 혈린회 관련 위장 회사들의 자금 흐름도 추적했고, 해킹도 많이 했지요."

그렇게 말한 지사장은 곧 덧붙였다.

"하지만 전부 정황일 뿐 결정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 고위 정치인이 누굽니까?"

"그런 비영리 단체들을 동원해서 은밀하게 놈들을 후원하려면 CPPCC 주석이 제일 유력합니다. 아, 그러니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상무위원 리하오쯔입니다."

"상무위원이라······."

상무위원이라면 중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어마어마한 권력자다. 베이징과의 연관성이 충분한 셈이다.

생각하는 때 지사장이 마침 관련 정보를 말해 주기도 했다.

"상무위원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 바로 베이징의 중난하이 지역이고, 멀리 간다고 해 봤자 외곽의 순이구 지역 정도입니다."

이어 그가 문득 다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이 정도까지 밝혀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정치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을 그런 건수인데, 그쪽으로는 꼭 명백한 증거가 없어도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대로 된 증거를 얻기 위해 감수해야 할 위험이 기대효과보다 너무 큽니다."

"대략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유진이 물었다.

"그 리하오쯔가 사는 곳이 어디죠?"

* * *

만약 이것이 영화였다면, 아마도 한유진은 국정원과 협력해 혈린회의 특정 거점을 습격하는 식으로 우선 정보부터 얻는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그렇게 정말로 상무위원이 놈들과 연관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영원의 여신교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는 등, 무언가 성과를 내고서야 다음 작전을 짤 수 있었을 터다.

상식적으로 상무위원 정도면 감히 그냥은 건드릴 수 없는 대단한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관련 정보를 더듬어가다가 놈들의 비밀거점을 찾아낸 뒤 들이쳐 마침내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그런 전개가 상식적이면서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하나 한유진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그리고 이건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으니 흥미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는 상무위원 리하오쯔에 대한 정보를 얻기 무섭게 바로 위장 무역 회사 건물을 벗어났다. 마주 대화하던 지사장조차 그가 그렇게 벗어나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행천둔술로 이동하며 몽환유심으로 존재를 감춘다. 결단기에 오른 신식이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평범함을 아득히 초월한 인지력이 사람 하나하나를 훑어 감별한다.

상대의 거주지와 동선을 알고 있는 마당인지라 찾아내긴 매우 쉬웠다.

마침 상대는 주변 이목을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는 베이징 외곽 순이구 지역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특히 크고 웅장한 별장의 모습이 과연 중국 최고위 권력자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하다.

바로 진입하려던 때, 웬 40대 남성이 밖으로 나서는 것을 본 한유진은 그를 먼저 심문해 보기로 했다.

"음?"

평소처럼 걸음을 옮기던 중년 남자는 불현듯, 눈앞에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한유진을 보곤 눈을 크게 뜨며 멈춰 섰다.

둥그스름한 턱선이 순한 느낌을 주며 매우 잘 웃을 것 같은 인상의 남자다. 그렇게 한유진이 짧은 감상을 떠올리는 새, 이미 발휘된 환몽심탈술이 상대를 꿈속으로 빠트려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주변 곳곳에 자리한 공안부 소속 경호 요원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펼쳐지고 있는 몽환유심에 모든 이목이 가려진 탓이었다.

잠시 후.

중년인, 상무위원 리하오쯔의 수석 비서가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한유진은 자신이 초장부터 제대로 찾아왔음을 깨닫고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국정원의 정보 덕분에 수고를 많이 덜었다.

만약 국정원이 생각보다 무능했거나 아예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베이징의 주목할 만한 인사들을 하나하나 전부 심문해 봐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알게 된 정보는 꽤 충격적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귀(鬼)종족 새끼들이, 감히 내 고향을 노려?'

이놈들이 바로 미래에 귀신 아포칼립스를 일으킨 원흉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고작 '사도' 한 명만이 차원 충돌 현상에 휩쓸려 불시착해선 암약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91화.영원여신교의 사도

수석 비서의 머릿속에 있는 리하오쯔는 국가주석과 정치적으로 은근히 대립하는 자였다. 서로의 정치적 기반이 다른 것은 물론 추구하는 노선도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주석이 중앙집권적 통제와 이념 강화를 추구한다면 리하오쯔는 반대로 학문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선호했다. 시장경제 확대와 국제 협력 강화 등을 주장하면서.

그렇게 중국 내 신흥 엘리트 파벌의 대표격 인물로 자리 잡고선 주로 경제와 외교 방면에서 국가주석과 여러 마찰을 일으켜왔다. 이는 외부에서 보기엔 그가 온건파적이며 중재자적인 느낌의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 그렇게 공식 석상에서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행보를 보여온 것과는 반대로.

사적으로 그는 매우 욕심이 많은 자였다.

감히 국가주석과 권력을 두고 대립하는 것 역시 그러한 욕심의 발로였으며, 단지 욕심이 많은 수준을 넘어 스스로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다소 비이성적인 언사를 종종 내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영원의 여신을 섬긴다는 '사도'라는 존재를 만나 영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자신과 주변인들만을 제외한 전 지구를 배신하면서까지 말이다.

'귀신으로 영생하는 게 진짜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한유진이 알기로 귀신은 많은 면에서 불완전한 존재였다. 어마어마한 세월을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게 결코 완전한 영생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결국 완전함을 손에 넣으려면 선도를 걸어 진선기에 오르는 일 이상의 고난을 겪어야 할 터였다.

태생적인 약점을 메우고 보강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만약 그게 정말로 쉬웠다면 우주의 대다수 존재들이 알아서 귀도(鬼道)를 걷지 않았겠는가? 선도 역시 그런 쪽으로 치우쳐졌을 테고.

생각하는 사이.

그는 쓰러졌던 수석 비서를 일반적인 방법으론 깨어날 수 없을 끔찍한 악몽 속에 빠트린 후,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반인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법술을 펼쳤으니, 추후 죽든 아니면 운 좋게 살든 무조건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하나하나 전부 찾아내서 심판할 생각은 없지만 이미 극악한 죄인임을 알게 된 자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지구 인류를 배신한 대가를 치러야지.'

자신이 이런 각성 능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정말로 십여 년 후 지구가 그런 꼴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겠는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그는 일직선으로 상무위원 리하오쯔가 자리한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닫힌 문을 통과해 들어서서는, 내부에 펼쳐진 난잡한 광경에 인상을 찡그렸다.

노인은 침대에서 약에 취한 듯 제정신 아닌 여인들과 꼴 보기 싫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냥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일종의 채음보양술을 펼치는 것이었다.

채음보양이란 여성과 관계를 맺으며 상대의 정혈을, 생명과 힘을 갈취하는 기술이라고 보면 된다.

보나마나 그 사도라는 놈이 알려준 지식일 터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수명과 힘을 늘리기까지 한다니, 실로 타락한 자를 유혹하기에 딱 적절하지 않은가.

퍽-!

"억···!"

보이지 않는 힘에 후려맞은 노인이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벌거벗은 상태인 탓에 더욱 꼴 보기 싫은 광경이 펼쳐졌으나 한유진은 바로 환몽심탈술을 펼치며 그것을 무시했다.

한데.

그렇게 상대를 꿈속으로 빠트린 순간 그 꿈에 보이지 말아야 할 존재가 눈을 뜨며 한유진을 직시해 왔다.

- 넌 뭐냐? 감히 내 추종자를 건드리다니?

뼈와 가죽만 남은 듯 느껴지는 칠흑빛 괴이한 존재였다.

팔이 두 쌍에 바닥까지 끌리는 암적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등에는 잿빛 후광을 뿜어내는 날개인지 촉수인지 모를 기관이 딱 하나 돋아났다. 이목구비는 인간과 제법 비슷했지만 눈동자가 온통 검은색이고, 무엇보다 체구가 3미터는 족히 넘었다.

그러나.

- 지금 나한테 감히라고 지껄인 거냐?

으르렁거린 한유진의 뒤편으로 육도윤회가 떠올라 후광을 발했다. 그 신통에 직격당한 상대는 찢어지는 비명을 내더니 즉시 한 줄기 검은 연기로 흩어져 버렸다.

'귀신 특유의 기술인가.'

아마도 추종자의 영혼에 자신의 정신 일부를 남겨놓고 보호 겸 감시를 행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고작 법혼기에 턱걸이한 수준의 힘일 뿐이다.

육도윤회의 기충도를 집중해 펼쳤는데도 비명 지르며 도망치는 정도로 끝난 건 제법이긴 했지만.

어쨌든.

방해를 깨끗이 치워버린 그는 노인의 기억 중 필요한 정보를 모두 획득했다. 영원의 여신교에 대해서는 물론 그 비밀거점이 어디인지도 포함된 정보였다.

'톈진이라······.'

베이징에서 남동쪽으로 약 120km 정도, 차로 한두 시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지역이다. 상무위원인 리하오쯔가 자주 오가면서 활동할 수 있을 만하다.

또한 중국 북부 최대 항구인 톈진항이 있어 혈린회 같은 폭력 조직을 이용한 해상 밀수나 희생자 수송 등에 유리하고 국제적으로 뻗어나갈 잠재력을 품었다.

대도시이긴 하나 외곽으로 나가면 농촌과 빈민 구역이 많고 항구 근처의 창고들 또한 무언가를 은폐하기에 딱 좋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의 조계지였던지라 어느 새로운 종교의 특수성을 은폐할 문화적 기반도 존재한다.

전부 리하오쯔의 머릿속을 뒤져 알아낸 정보였다.

'세력을 키운 후 대규모 생령제의로 지구의 시공간 좌표를 본거지에 전송할 생각이었다, 이 말이지.'

그렇게 '진짜 영원의 여신교' 세력을 끌어들여 귀신 아포칼립스를 일으켜 버릴 심산이었을 터다.

'그 미래에서 이놈은 과연 바라던 보상을 얻었을까?'

왠지 회의적인 느낌이 들어, 한유진은 추잡한 꼴의 노인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놈은 많은 이들에게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권력자였을 테지만, 결단기에 오른 자신에겐 그럴 이유만 있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죽여 없앨 수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실력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법.'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힘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짧은 상념과 함께 그는 수석 비서에게 펼친 것과 똑같은 법술을 걸어줬다.

다른 관련자들을 응징하는 일은 본거지를 치는 일보다 급하지 않다.

그는 즉시 자색빛으로 화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며 톈진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 * *

한국에서 베이징까지도 십여 분 만에 도착했는데 톈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산맥 따위를 그냥 일직선으로 통과한다면 더욱 그렇다.

컵라면 하나가 익을 시간도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폐쇄된 농장 지대에 자리한 다수의 인기척을 신식으로 감지했다.

당연히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다. 전부 영원의 여신교에 깊이 심취하여 부작용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온갖 힘을 부여받은 놈들이었다.

십년흑귀 또는 백년흑귀 등으로 불리는 귀신을 사역하거나.

스스로 귀신화하여 여느 A급 헌터와 비견되는 힘을 얻었거나.

그렇게 얻은 능력으로 놈들은 교세를 퍼뜨리면서 희생양들을 더 많이 끌어모으고 있었다. 혈린회 같은 폭력 조직과도 연계하면서 말이다.

즉.

전부 죽어도 억울할 이유가 없는 놈들이다.

하늘에 뜬 채 그 폐농장 지대를 내려다보던 한유진은 순간 몽환유심의 은폐를 거두며 반대로 존재감을 증폭시켰다. 도저히 쳐다보지 않고선 견딜 수 없게끔.

동시에 육도윤회를 펼쳐 등 뒤편으로 찬란한 후광을 일으켰다.

일대에 자리하던 모든 영원의 여신교 인원들이 그런 한유진을 저절로 직시하게 됐다. 심지어 건물 안이나 지하에 있던 놈들마저 마치 모든 장애물을 투과하듯 그런 한유진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여섯 세계들이 윤회하는 후광을 두르고서 그 역광에 이목구비가 가려진 채, 어느 신비롭고 드높은 존재처럼, 모두의 이목을 끈 그가 심언(心言)을 발했다.

- 자결해라.

절대적인 신의 뜻처럼, 동시에 머릿속을 둔중하게 울리는 범종 소리처럼 명령이 떨어진다.

이곳에서 결단기 수사의 신통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기충도의 감정에 완전히 장악당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자기 자신을 가장 처참하고 확실하게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오고 피와 뇌수와 살점 등이 흩뿌려진다.

흑귀를 부리던 놈들은 사역귀들을 자폭시킴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찢어발겨 먹어 치우도록 만들었고, 스스로 귀신화했던 놈들은 두 손으로 제 머리나 가슴을 박살 낸 후 뇌를 짓뭉개거나 심장을 뜯어 터뜨렸다. 그러고도 좀처럼 죽질 않아서 몸의 중요한 모든 부분을 마구잡이로 해체해 흩뿌리다가 결국 끔찍한 꼴로 쓰러져 죽었다.

그런 대살육의 현장을 지나쳐, 한유진은 오행천둔술로 지하 깊숙이 파고들었다.

모든 구조를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도착한 장소는 지하에 만들어졌다곤 믿기 힘들 만큼 드넓은 장방형 공간이었다.

중앙에 자리한 계단식 원형 제단은 아직도 마르지 않은 핏물에 범벅이 된 상태였으나, 그것을 장식한 금과 옥 따위는 기이할 만큼 빛을 발하며 사람을 홀리는 느낌을 풍겼다.

제단의 가장 위 중심부에는 흡사 옷걸이를 연상시키듯 날카로운 고리들이 무수히 달린 금속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온갖 법문으로 치장된 채 그곳엔 이미 죽었거나 거의 죽어가는 상태의 사람들이 참혹하게 꿰어져 있었다.

제단 주변으로는 핏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신식으로 따라가 보니 특정 장소에 고여 모종의 신비학적 효과를 품은 마약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을 그런 광경이다.

그리고 이런 극악한 문화를 지녔음이 분명한 영원의 여신교의 끄나풀, 자칭 사도라는 놈은 장내의 가장 안쪽 인간의 뼈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모습을 드러낸 한유진을 직시해 오고 있었다.

- 이곳 지구에 너 같은 존재가 숨어있었다니······ 역시 마냥 쉽지만은 않구나.

놈은 경계에 가득 찼으면서도 크게 두려워하진 않는 기색이었다.

- 하나 그래봤자 이제 막 개방되기 시작한 세계의 미개인에 불과하지. 너는 이 우주에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존재들이 많은지 아느냐?

놈이 검은빛으로 뼈와 가죽만 남은 듯한 손을 들어 올렸다. 과장된 행동이었으나 놈이 발하는 목소리와 어우러져 상당히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 네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마. 이 세계의 잠재력이 내 짐작보다 더 크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겠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원여신교 앞에 이곳은 그저 모래성일 따름이다.

그렇게 말한 놈이 한유진을 칠흑빛 눈으로 계속 직시해 왔다.

- 고작 나 정도를 보고 우리를 판단치 말라. 그리고 감히 우리와 대적하려 들지 말라. 너는······ 우리와 합류해 진정한 일원이 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한유진은 딱히 반박하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육도윤회에 저항했던 걸 보면 환몽심탈술이 안 통할지도.'

그러니 진짜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시험해 보기 전 상대가 알아서 정보를 털어놓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무언가 함정을 발동하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수작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광범위하게 펼쳐진 신식에는 그 어떤 이상 징조도 감지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둘 사이의 실력 차가 너무 컸다.

상대는 고작 법혼 중기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 너희 지구 인간들이 가진 생명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버려라. 우리야말로 진정한 생명이며, 당연하게 장수하고, 끝내는 영원에 도달할 수 있을 궁극의 존재일지니!

"그냥 귀신 아닌가?"

- 바로 그것이 짧디짧은 이해라는 뜻이다! 우리 여신교의 주인께서 어떻게 영원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셨다고 생각하느냐?

"진짜로 영원한 존재인가? 그, 입시시무스 정도라도 되나?"

과거 드래곤 카사르녹스에게 들었던, 수선자의 진선기 경지와 비견된다던 경지의 이름을 한 번 말해 보자.

무언가 계속 열변을 토할 기세이던 놈의 눈이 크게 뜨이며 행동이 멈칫했다.

- 네가 그런 걸 어떻게······ 너, 지구인이 아닌 거냐, 설마?

"진짜로 너희 교단의 여신이 입시시무스급 존재라고?"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기에 한유진이 다시 물었다. 상대편 세력의 수장이 무려 진선과 같은 존재라면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던 중.

- 너······ 마법사냐?

놈이 매우 중요하다는 느낌을 담아 그렇게 물어왔다.

잠시 고민하던 한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수선자인데."

그 순간 원래도 커졌던 놈의 눈동자가 더 크게 뜨였다. 경직되는 수준을 넘어 고개와 상체를 확 뒤로 빼는 것이 분명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흡사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 수··· 수선자······!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놈이 이제야 죽음의 위기를 느끼는 듯 반응했다.

-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리고는 갑작스레 검은빛 안개를 폭발시키며 십여 갈래로 갈라져선 장내를 탈출하려했다.

동시에 한유진에게서 자색빛이 터져 나와 주변 전체를 꿈으로 물들였다.

- 어딜 도망가려고?

그가 발하는 심언과 함께, 사도는 꿈처럼 변한 환경 속 아무리 도망쳐봤자 계속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을 깨닫곤 거의 공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 안 돼-!! 이렇게 먹힐 수는 없어-!!

대체 수선자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졌는지 모를 절규를 내지르면서였다.

92화. 지구 구원의 카르마

놈이 공포에 질린 덕에 환몽심탈술로 일부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단지 일부에 그친 이유는 과연 귀종족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지 정신 저항력이 뛰어나서 많은 기억들이 먹칠이라도 한 듯 어두웠기 때문이다.

'법혼기 수준의 힘으로 추종자의 영혼에 자기 정신 일부를 심어놓았을 정도이니······.'

귀신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크게 놀라운 일까진 아니다.

어쨌든.

놈이 이토록 공포에 질린 이유는, 영원의 여신교가, 놈은 영원여신교라고 좀 더 단출하게 줄여 말하는 그 세력이 수선자들에게 역사적으로 많은 수탈을 당한 탓이었다.

영역과 제물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그들 자신마저도 닥치는 대로 포획당해선······.

정말로 잡아먹혔다.

'귀혼증신단이라!'

법혼기급 이상의 귀종족을 재료로 매우 무자비한 연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그 단약은, 정신계 능력에 출중한 귀종족의 특성을 바탕삼아 수선자의 신식을 강화해 준다는 모양이었다.

수사에게 있어 신식이란 모든 오감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영적 감각이다.

괜히 신식비술이 통천령보만큼이나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닌 바, 당연히 신식 자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영단 역시 보통의 수련 성과를 높이는 단약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다.

'혈령적화주병으로 흡수하면?'

잠깐 생각하던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색다른 술이 만들어지긴 하겠지만, 제대로 그 특성을 살려 연단해 낸 귀혼증신단보단 못할 것이 분명하다.

다른 강렬한 기억들도 몇 살펴볼 수 있었다.

영원여신교의 주인, 영원의 여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사도의 기억에 따르자면 마구스(Magus)급 존재였다. 그녀의 세력 자체가 스스로 입시시무스에 오르기 위한 발판이자 수단인 것이다.

마구스라면 다행히 합체기 경지와 비견되는 정도였다. 물론 합체기 역시 무시무시한 경지이긴 하지만 진선기와 비교하자면 선녀일 수밖에 없다.

그밖에 귀종족의 대략적인 특성들도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령 이놈들이 말하는 '장생'이라는 게 살아있는 존재의 영혼 일부를 꾸준히 포식해야만 가능하다든가, 그 희생양들의 강렬한 감정도 함께 빨아들여야만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든가.

영원여신교 본단의 풍경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어둑한 하늘에서부터 대지를 향해 내리꽂힌 듯 자리한 위압적인 첨탑들, 새까맣게 얼어붙어 아무런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대지, 얼핏 초목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혼 조각들을 기워 붙여 만들어낸 귀기 어린 식생들, 한곳에 피라미드처럼 자리한 거대한 건축물,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태의 조형물들, 한쪽 상공을 흐르는 암적색 알 수 없는 기운의 흐름.

그렇게 계속 기억을 살펴나가던 어느 순간.

- 아아아아···!!

놈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비명과 함께 발버둥 쳤다. 동시에 한유진은 그 기억 속 어느 특별한 '상징'을 목격하곤 본능적 위기를 느끼며 즉시 환몽심탈술을 끊어냈다.

다행히 그는 위험을 피했지만 사도는 이미 무언가가 촉발돼 버린 듯 정신이 마구 폭주하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육도윤회 신통으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붕괴는 상당히 끔찍했다.

'사도라더니, 그냥 본인조차 모르던 폭탄 목걸이가 달린 졸개에 불과했구나.'

아마도 놈은 이 지구의 좌표를 성공적으로 본단에 전송했을 때의 공적을 스스로 미리 계산해서 사도를 자칭한 듯했다.

놈들의 성장은 수련이나 포식을 통해서가 아닌, 쌓은 공적을 바탕으로 여신에게 은총을 받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했으니 말이다.

'합체기급 수장이 있는 세력에 법혼기급 사도는 확실히 안 어울리긴 하지······.'

아무리 사도라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다지만 그래도 수준 차이가 너무 극심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사이.

결국 모든 정신이 붕괴해 버린 놈은, 상대가 수선자라는 것을 알고 저 혼자 겁에 질려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끔찍한 꼴로 전락했다.

겉보기로는 큰 이상이 없었지만 자아가 완전히 박살 났으니 끔찍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저 최소한의 본능만이 남아 벌레보다도 못한 반응만을 보이게 된 놈을 지켜보던 한유진은, 잠시 몇 가지를 고민하다가 혈령적화주병을 내밀어 놈에게 흑선을 쏘아 보냈다.

놈은 제대로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 아주 약간의 흙먼지만을 남기고서 완전히 소멸했다. 그리고 혈령적화주병에는 분명한 액체감이 차올랐다.

'살짝 맛만 보고 따로 보관하다가 원희를 줄까.'

아무래도 이미 결단기에 오른 자신보다는 이제 막 선도를 걷기 시작한 이원희에게 훨씬 더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 싶다.

상대를 굳이 온전하게 옥함 따위에 보관하려 들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제압해 보관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도 하고, 놈이 차고 있던 폭탄 목걸이의 존재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물론 놈의 정신이 완전히 박살 나면서 그것도 용도를 다했겠지만, 또한 그 폭탄 목걸이에 위치추적 같은 위험한 기능이 달려있었다면 진즉에 뭔가 사달이 났겠지만.

그래도 괜히 찜찜해서 보관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감상을 정리하던 때.

불현듯.

"오오······."

결단기에 오른 심신으로도 순간 당황하여 그런 감탄성을 흘려냈을 만큼,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카르마가 흘러들어와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쌓여가는 카르마의 양을 가늠하던 그는 저절로 활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무엇도 아닌 세상을 구했는데 이 정도는 쌓여야지!'

그야말로 압도적인 양이었다.

그가 여태 쌓아왔고 사용해 왔던 카르마 전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니, 단순히 그런 식으로 비교할 수 없을 엄청난 차이였다.

'최소······ 최소 백 배!'

이만한 양의 카르마라면 원영기에 오를 때까지 펑펑 써재낄 수 있을 것 같다. 화신기에 오를 때는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데.

희열에 차 몇 번이고 거듭 계산하던 그는 문득, 욕심에 의해서가 아닌 매우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이것이 그렇게까지 많은 보상이 아님을 눈치챘다.

'분명히 많은 양이긴 한데······ 지구를 구원했다기엔 적은 거 아닌가?'

자연스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지금 자신이 세계를 완전히 구원한 것이 아닌, 그저 종말을 일정 기간 유예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차올랐던 희열이 조금 식는 기분이다.

하나 어쨌든 엄청난 보상임은 확실했기에 고양감이 완전히 사그라들진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게 잘했다고 마구 칭찬을 받는 느낌인지라 더 이상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제 뒤처리를 해야지.'

계속 고양감에 취해있을 수만은 없는지라, 그는 이곳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즉시 움직였다.

모두 구해서 치료하고 밖으로 빼낸 다음 이 지하 전체를 매장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 * *

사흘.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다. 그 한유진이 여길 방문하곤 유령처럼 떠나버린 지가.

한데 그 사흘 사이에 믿기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졌다.

'아니지······ 따지자면 우리가 정보를 얻는 데 걸린 시간이 사흘일 뿐, 실제로 사건들이 벌어진 건 채 하루도 안 걸렸을 거다.'

한국 국정원의 비밀거점으로 쓰이는 위장 무역 회사, 그곳의 지사장은 모니터에 한유진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놓곤 심각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CPPCC 주석이 완전한 미치광이 폐인으로 화했다. 회복은커녕 빨리 죽여주는 게 도와주는 일 아닌가 싶은 극악한 증상을 보이는 채로.

자연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리 만무하니 누가 저질렀는지는 뻔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아무리 상무위원들 중 비교적 권력이 약한 자리라지만, 이렇듯 S급 헌터 한 명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호위를 위해 배정된 중국 측 S급 헌터가 다수의 A급 헌터를 대동하고 일 분 안에 나타났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그 버튼이 눌릴 일 없도록 온갖 전자장비와 요원들을 통한 경계가 삼엄하기도 하고.

'현실을 꿈처럼 왜곡하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중국의 상무위원이 이런 식으로 처리당했다면 전 세계의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하다. 즉, 한유진은 지구 역사상 최강의 암살자가 될 수도 있단 뜻이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였다면 이렇게까지 경악하진 않았을 터다.

리하오쯔와 긴밀한 연관이 있던 측근들이 모조리 같은 꼴로 전락했다. 그들이 있던 장소와 상황을 불문하고서.

게다가 폭력 조직 주제에 무려 S급 헌터가 자리 잡고 있는 혈린회의 영원비문 계파가 전부 설명하기 어려운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에 대해 생각하던 지사장은 한유진이 두 번째로 자신을 찾아왔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방문한 그는 혹시 혈린회에 위장 잠입한 요원이 있는지를 물었고, 다음으로는 영원비문 계파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아직 상무위원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신고된 각성 이능력은 그저 마나 관련 지식이라고 적혔을 뿐인데, 이게 과연 지식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현실을 꿈처럼 왜곡한다는 능력도 놀랍고, 혈린회의 영원비문 계파 조직원들이 죽은 모습을 보면 그것도 너무나 놀랍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정신계 혹은 그만한 환상계 능력을 갖췄다고밖에 안 보여졌으니까.

그는 컴퓨터를 조작해 화면에 띄워놓았던 한유진의 정보를 치웠다.

대신 띄워 넘겨보기 시작한 건 혈린회의 영원비문 계파 조직원들이 죽은 광경을 특수드론과 카메라 등으로 촬영한 사진, 그리고 부가적인 정보들 따위였다.

그들은 모두 일반인이라면 보는 순간 토악질을 할 만큼 참혹한 방식으로 자해하며 죽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원교를 찬양한다'는 식의 고함을 내지르면서.

그렇게 무슨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죽은 이들의 수가 자그마치 수백 명이었다. 어느 한 지역에서만이 아닌 홍콩, 톈진,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등 여러 대도시들에서 전부 그랬다.

'심지어 고작 하루 만에.'

덕분에 지금 중국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돼서 '영원'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사이비 종교들이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자해하도록 시킬 수 있다면 다른 짓도 얼마든지 시킬 수 있겠지.'

확실한 것들만 대략 정리해 보자면 이랬다.

최소 다른 S급 헌터들과 비견되는 수준의 무력.

하루 만에 중국 전역을 마구 돌아다닐 수 있는 기동력.

그러면서 어떤 수단으로도 감지되지 않는 은폐력.

상대를 자살에 이르도록 만들 수 있는 정신 지배력.

아마도 기억을 읽어내는 방식이라고 추정되는 정보수집력.

'······이게 사람인가? S급이라고?'

이건 도저히 그냥 S급이라고 볼 수가 없다. 우스갯소리로나 존재하는 EX급이라고 칭해도 무리가 없을 수준이다.

세계 랭킹 1위라는 에단 크로스조차 이런 짓을 저지르진 못한다.

아마도.

아니, 아마도가 아닌 분명하게.

한유진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S급 헌터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소란을 일으킬 수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정도다.

'설마 여기서 더 성장한다면······.'

과거에 그저 우려에서 그쳤던 '절대자'가 진짜로 탄생해 버릴지도 모른다.

지사장은 스스로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었음에도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엔, 이건 인류에게 있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두운 지사장실에서 모니터 화면을 보며 침묵에 잠긴 지사장의 표정이 확연하게 좋지 않았다.

* * *

영원의 여신교에 대한 뒤처리까지 모두 마친 한유진은 이제 수많은 선택지들을 놓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것이 명확했다.

'종말 후 지구에 과연 변화가 있을까?'

스스로의 각성 능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파악해 볼 겸,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93화.종말 후 지구의 비밀

과연 '종말 후 지구' 세계는 변화한 현실의 조건을 바탕으로 함께 변화했을 것인가?

아니면 이미 한 차례 특정한 조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처럼 계속 잔존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비록 현실의 조건이 변화했다지만 여전히 십여 년 후 다가올 종말을 막지 못해 비슷한 상황일 것인가?

'세 번째일 가능성은 낮겠지.'

그랬다면 이렇게나 막대한 양의 카르마가 들어와 쌓였을 리 없다. 적어도 종말을 상당한 기간 유예했기에 이런 풍부한 카르마를 얻게 됐을 터다.

안전가옥에서 미환진기를 통해 보안을 챙긴 그는 일하는 내내 얌전히 있어 준 무용이와 충분히 놀아준 후, 침대에 누워 각성 능력을 발동했다.

곧.

대기 공간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인 무용이를 살피곤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어 끝없이 변화하는 문 앞에 서선 어떤 식으로 바람을 떠올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우선 그 종말 후 지구로 가보자.'

단지 미래의 지구를 바라며 문을 고정시키는 것보다 좀 더 확실하게 자신의 각성 능력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터다.

'입문기 때가 마지막 방문이었지.'

하나 이젠 결단기에 올랐으니 그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다를 것이다. 설령 똑같은 세계에 방문하게 된다 해도 말이다.

생각하며 문에 손을 댄 즉시 형상이 고정됐다.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의 문이었다.

녹슨 현대의 비상구 방화문에 '종말 후 지구'라며 떠오른 은빛 글자들까지도.

"음······."

변화한 현실과 상관없이 계속 방문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가능성 작다고 판단한 것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종말을 막지 못한 걸까.

살짝 무거워진 마음으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버려진 지 수십 년 이상 지난 듯한 도시의 풍경을 보며 긴장감을 조였다.

느껴지는 모든 영기가 변질되어 귀기를 띤 상태였다. 음산하고 차가우며 지속적으로 정신을 약화시키고 두려움을 일으키는 성질로.

테라포밍을 당한 건지 무자비한 약탈로 황폐화된 건지 모르겠다.

이제부터 그걸 알아볼 시간이었지만, 그 '원희'와 관련된 부분을 먼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원고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지금 이 세계가 현실이 변화했음에도 결국 종말하게 된 건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이미 영원고는 다른 재단에 인수되어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한 줄기 자색빛으로 화한 그가 몽환유심으로 존재감을 은폐한 채 빠르게 움직였다. 신식에 감지되는 수많은 귀신들 중 아무도 그런 한유진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장 귀신이랑 싸워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그건 전혀 급하지 않다. 지금 알든 나중에 알든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 외엔 별 도움이 안 된다.

잠시 후.

그는 기억 속 선명한 그 영원고등학교를 눈앞에 둔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현실이 어떻게 변화했든 이 세계는 독립적으로 유지되는 모양이군.'

설마 현실에서 이 학교가 다시 원래의 영원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을 리는 없다. 사이비 종교이자 마약 범죄 조직이 세운 재단에서 사용하던 이름인 데다가, 이번에 그가 '영원'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사이비 종교들의 이미지를 완전히 나락으로 처박아버렸으니까.

'무수한 가능성의 한 갈래로서 실존하는 건지, 아니면 이전에 문이 고정됐었던 기록이 남아 시뮬레이션처럼 재구성되는 건지······.'

이에 대해선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세계가 현실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알아봐야 할 것들이 많이 줄어든다.

그는 감히 신식을 밀어넣기조차 꺼려지는 그 영원고등학교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순간 한쪽으로 쏘아져나갔다. 베이징이 있는 방향이었다.

십여 분 후.

귀무가 잔뜩 낀 채 썩어가듯 상태가 안 좋은 바다를 건너 도착한 중국의 수도 외곽부에서, 그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섰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거나 영원여신교의 귀신들이 활개치는 그런 풍경을 마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게 대체 뭐야.'

거의 지평선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구멍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귀기가 비정상적인 힘을 품은 어둠을 형성해 시야는 물론 신식까지도 가로막는다.

이 정도 크기와 깊이의 구멍이면 우주에서도 뻥 뚫려 보일 것이 분명했다.

'대체 지구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행성 전체를 무슨 제물로 쓰기라도 할 작정인가? 그게 의미가 있나?

영원여신교에 대한 무언가를 더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더욱 조심해서 모습과 기척을 은폐한 채 구덩이 주변부를 돌아다녔다.

평범한 이라면 며칠이 걸려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둘레의 구멍이었다. 하지만 결단기 수사이자 오행천둔술까지 익힌 한유진은 금방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었다.

떵······!

떠덩······!

가끔씩, 내부에서 그런 거대한 금속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위쪽으로 올라왔다. 그 소리마저 귀기에 오염된 저주처럼 듣는 순간 소름이 돋게 했다.

이미 충분히 처벌했음에도 새삼 리하오쯔에 대한 한심함과 짜증이 치민다.

외계의 귀신들과 결탁해선 지구를 이따위 꼴로 만들어 버리다니.

인류가 쌓아온 역사와 품고 있던 가능성이 완벽하게 파괴되어 버린 광경에는, 평소 딱히 인류애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그조차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됐다.

'이러나 저러나 내 고향이란 말이다.'

아무리 이곳이 현실에 영향받지 않는 독립된 세계일지라도, 더는 실현되지 않을 미래에 불과할지라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

외곽에서 별 수확을 얻지 못한 그는 결국 어둠 가득한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내려갈수록 강렬해지는 냉기와 위축되는 감각 및 신식을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

'지금 내 실력으로도 이 정도라면, 입문기나 법혼기 때는 아예 진입이 불가능했겠군.'

생각하며 좀 더 깊이 들어가길 잠시.

스스스스슥······!

드디어 귀종족 놈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한데 놈들의 실력이 심상찮았다.

가장 약한 놈이 법혼 후기급이었고, 그런 귀신들 십여 마리를 대동한 채 순찰을 도는 놈은 결단기급이었다.

'뭘 경계해서?'

이미 완전히 정복한 세계일 텐데 이런 식으로 침입을 경계한다는 점이 의심스럽다.

자세히 보니 그냥 순찰을 도는 게 아니라, 간간이 주변에 힘을 투사하며 어둠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 어둠에 파묻혀 윤곽만 간신히 보이는 놈들의 모습은 실로 섬뜩했다.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기운을 뿜어내는 탓이다.

다행히 평범한 결단기 수사가 아닌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들키지 않고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내려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끔찍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밑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옅어져서가 아니라 그걸 강제로 찢어발기며 뚫고 나오는 빛무리였다.

저게 대체 뭘까.

지구에 저런 게 원래부터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귀종족 놈들의 어떤 수작이 만들어내는 현상일까.

짙어져가는 호기심 속에서 빛무리의 형상이 제법 뚜렷해졌을 때, 주변을 경계하며 어둠을 강화하는 귀신들의 경지는 무려 원영기급에 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유진이 들키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그에겐 단지 밝게만 느껴지는 그 빛무리가 귀종족에겐 마치 섬광탄처럼 작용하는 듯, 원영기급에 달한 귀신들조차 감각이 매우 위축된 기색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빛 속에 몸을 숨기듯 좀 더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빛무리가 귀종족 놈들의 수작질이 아니라는 것.

'구덩이의 어둠이 이걸 억제하고 가리기 위함이구나.'

그렇게 판단하며 계속 움직인 그는 마침내 근원지에 다다라 주변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빛의 근원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띠는 넓적평평한 무언가였다. 그것이 지하 거대한 공동 중심부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다.

그 주변으로는 빛무리에 힘을 투사하며 억제하는 강력한 귀신들이 무려 세자릿수에 달했다.

가장 약한 귀신도 결단 후기급이었고 원영기급 귀신도 심심찮게 보였으며, 특히 화신기급으로 짐작되는 두려운 기세의 귀신이 열 이상이었다.

전부 인간을 닮았지만 칠흑빛으로 물든 채 묘하게 뒤틀린 형상으로 불가항력적인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 순간.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몇 화신기급 귀신의 시선이 한유진을 향했다.

주변 가득한 빛무리에도 불구하고 흡사 심연으로 떨어져 버린 듯한 오싹함과 냉기가 들이닥친다. 우연인가 싶어 급히 위치를 바꿨으나 놈들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화신기급 귀신들의 시선이 쏘아져 와 저절로 숨이 막히면서 냉기에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놈들은 아무런 의사도 표해오지 않았다. 매우 중요할 것이 분명한 장소에 웬 인간이 나타났음에도 그 어떤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으며 계속 쳐다만 봤다.

마치, 그때 그 영원고에서 원희가 그랬던 것처럼.

'사도라는 놈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을 느낌이라 더 공포스럽다. 그저 다른 종족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 우주에 절대로 존재해선 안 될 무언가를 목도하는 듯해 저절로 몸이 떨린다.

놈들의 시선.

그 칠흑빛 눈동자에 담긴 불가사의한 느낌이 머릿속 생각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렇게 꼼짝없이 무력화당하는가 싶던 순간.

떠엉-!!

구덩이 밖에서 몇 번 들었던 예의 거대한 금속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떠어엉-!!

찬란한 빛의 근원, 타원형의 물체가 터뜨리는 소리였다. 게다가 그 굉음이 발생할 때마다 빛이 더욱 강해지며 귀신들을 일제히 밀어내기까지 했다.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린 한유진은 살길이 하나뿐임을 깨닫고 즉시 그 타원형 물체를 향해 날아갔다.

문득.

날아가면서 눈에 담은 그 물건의 형태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얼핏 커다란 거울인가 싶었지만, 기이하게도 더 강렬하게 떠오르는 표현이 있었다.

'문···?'

바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여태까지보다 더한 위기감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뭔가 대처하기도 전 칠흑빛 거대한 '손가락'이 나타나 그를 찰나에 짓눌러 으깨버렸다.

고통 따위를 느낄 틈도 없는 말 그대로 찰나였다.

'죽었구나.'

그는 속으로 탄식하며 사방이 어두워진 광경 속 은빛 문자들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대체 뭐에 죽은 거지.'

손가락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화신기급 귀신 중 한 마리가 손을 쓴 것 같진 않았는데, 그 타원형 물체에서 굉음과 빛이 터져 나오며 놈들을 밀어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설마 합체기급 귀신이······ 그 여신이라는 존재가 직접 손을 쓰기라도 했나?'

어쩌면 합체기보다는 반 단계 낮은 연허기급 귀신이 존재해서 그놈이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불현듯 이상을 감지했다.

은빛 문자들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왜?'

자각한 순간 느껴진 당혹스러움은 단연 살면서 경험한 것 중 가장 컸다.

하나 다행히도 그 직후.

저절로 주변 어둠이 걷히며 모든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선뜻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도, 그는 처음 이 종말 후 지구 세계에 발 디뎠던 그 장소로 돌아온 상태였다.

마치 이전의 모든 일들이 전부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뭐야, 대체?"

반사적으로 의문을 중얼거린 그가 일단 모습을 감췄다.

다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해 봐야 했다.

94화. 착한 선배

전부 환상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작다.

몽환진룡도체의 정신 방어력은 장식이 아니다. 그 원리마저 신묘해서 어지간히 수준 차이가 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교묘하게 그 자신을 환상에 빠트릴 수는 없다.

설령 상대의 수준이 너무 높아 어쩔 수 없었다더라도, 모든 환상에서 벗어난 후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 정도는 자각할 수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세상에 나타나자마자 환상을 걸지 않았다면 필시 어딘가에서 위화감이 발생했을 거다.'

환상은 대상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시전자의 역량으로 구성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여태 환상을 자주 사용해 오며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점이다.

즉, 지금 이 상황은 환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공간이 돌아갔다는 이야기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데······.'

여기엔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다.

귀종족 놈들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수선자의 경우 원영기 경지에서부터 시공간 관련 감각이 트인다. 그 감각에 아무리 한계가 있을지라도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뭔가가 틀어졌음을 눈치챌 수는 있단 뜻이다.

심지어 거기엔 화신기급에 달한 귀신들도 있었고, 한유진 자신을 손가락 하나로 짓뭉개버렸던 최소 연허기급으로 추정되는 귀신도 있었다.

그 연허기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귀신이라면 분명히 방금 전 상황을 전부 기억하고 있을 터다.

'어쩌면 지금 사라져 버린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하며 그는 다시 베이징의 구덩이에 찾아갈 생각을 접었다. 지금 거길 찾아간다는 건 말 그대로 죽여달라는 시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해야 좋을 것인가.

어차피 무언가를 더 알아보긴 글렀으니 얌전히 탈출이나 해야 할까? 아니면 정장 귀신이나 원희와 싸워 실력 검증이라도 해 보는 게 나을까?

계속 모습과 기척을 감춘 채로 고민하고 있을 때.

툭···!

투둑··· 툭···!

불현듯.

비가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지한 순간 소름이 쫙 돋게도, 평범한 비가 아닌 새빨간 핏물로 이뤄진 비였다.

하늘은 어느새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았구나.'

환상이 아닌 시공간이 돌아간 상황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이 혈우는 그 최소 연허기급으로 추정되는 귀신이 자신을 찾기 위해 힘을 행사한 것이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액체에 한 방울이라도 맞지 않기 위해 그는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를 조용히 지켜봤다.

- 어흐흐흑······.

- 끄허헉··· 끄허억···!

- 아아아······ 아아아아······.

혈우가 본격적으로 거세지자, 사방 곳곳에 얌전히 자리해 있던 귀신들이 무언가에 고통받는 듯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는 흐느끼고, 누군가는 신음하며 헐떡이고, 누군가는 아우성치면서, 그렇게 조용히 숨어있던 상태를 벗어나 주변 사방으로 퍼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우르릉······!

한순간.

핏빛 뇌광이 번뜩이며 심하게 어두워진 하늘에 어느 형체가 얼핏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신식으로 그 광경을 감지한 한유진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가 하늘 전체를 뒤덮은 채 하늘거리면서,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한 쌍의 눈동자가 피를 흘리며 아래 대지를 살피는 광경이었다.

'저놈이구나.'

결단기에 불과한 지금 실력으론 상대의 정확한 수준을 가늠할 수 없다. 하여 합체기급이라던 그 영원여신교의 주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조금 더 땅속 깊숙이 들어갔다. 이제는 가히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혈우가 점점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킬 때 들키더라도 과연 얼마나 오래 숨을 수 있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이런 것이 다 경험 아니겠는가? 현실에서 비슷한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주의해야 할 건······.'

비록 하늘에 떠오른 저 거대한 귀신 형상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하나, 놈은 찾으려는 상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이곳을 집중적으로 살피진 못할 터다.

따라서 오래 숨고 싶다면 근처를 마구 돌아다니는 하찮은 귀신들을 더 조심해야 했다.

- 아아아아아···!

바로 그때, 근처를 예의 정장 귀신이 나타나 스쳐 지나갔다.

한유진은 입문기 때 경험했던 그 공포가 되살아나는 느낌에 전신의 털이 죄 곤두섰다.

'결단기급······ 일 텐데, 느낌이 이상하군.'

놈이 기이하게 상체를 비틀대며 움직일 때마다 주위를 왜곡시키는 광경이 지금 봐도 전혀 이해가 안 된다. 결단기급에 불과하면서 벌써 시공간 감각이 트여 그것을 이용할 리는 없었고 말이다.

'공간계 이능력을 가졌던 헌터가 귀신이 된 건가.'

그는 놈이 신식으로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주의를 집중했다.

비록 귀신화되었다지만 생전의 생김새가 조금은 남아있었던 만큼 현실에서 찾아볼 심산이었다. 귀신화된 후 결단기급 능력을 갖추게 됐다면 최소 진영근 상위권의 재능일 테니까.

'나이도 별로 안 많아 보였으니, 일찍 주워서 한번 키워볼 수 있을지도.'

설령 키우기 부적절한 사람일지라도 신상을 파악해 두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렇게 대략 생각을 마무리하면서 주의를 다시 몸 주변으로 돌렸을 때였다.

문득.

신식 외곽부를 은밀하게 파고들어 오는 무언가가 감지됐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고 만일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면 놓쳤을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희미했다.

머리카락들이었다.

'원희···!'

하필 또 방향이 영원고등학교가 있는 쪽인지라 바로 흉수가 짐작이 된다.

정장 귀신이 결단기급이었다면 놈이 두려워하여 감히 영역을 침범하지 못했던 원희는 더 높은 수준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원영기급일 확률이 높단 뜻이다.

이전에 구덩이에서 원영기급 귀신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빛무리가 놈들의 감각을 위축시켜 준 덕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원희를 마주친다면 무조건 들킨다.

판단하며 몸 돌려 움직이려던 순간.

"······."

그는 차마 비명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얼어붙었다.

신식으로는 분명 땅밖에 없어야 할 공간.

그곳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원희의 얼굴이, 거의 코가 맞부딪힐 듯한 지척에서 그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귀기로 인해 검은빛으로 물든 피부에, 그보다 더 공허하고 어두워 심연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동자가 보이고, 조용히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핏물이 시야에 박혀들 듯 선명하다.

그렇게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고서야, 대체 어떻게 여태 못 느꼈는지 모를 무시무시한 냉기와 혈향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실로 귀신에게 홀렸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

한유진이 석상처럼 굳은 상황 속.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공포스러운 침묵이 흐른다.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듯하면서도 영원히 이 상태로 두려움이 지속될 것 같은 모순적인 느낌과 함께.

솔직히 그는 원희를 다시 마주하면 현실 이원희의 모습을 일부 떠올리면서 이전보다 덜 공포스럽게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실력이 결단기에 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하나 직접 마주하자 그것이 전부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이 원희는, 그 이원희가 결코 아니다.

영원여신교에게 정복당해 버린 지구에서, 아마도 그 여신교의 상당한 고위층 귀신 혹은 여신 본인에게 직접 은총을 내려받았을, 그런 존재였다.

천영근자라면 수선계에서도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인 만큼 충분히 그럴만하다. 보유한 이능력도 귀종족에게 매우 잘 어울리기에 더더욱.

짧은 생각을 이어가는 그 찰나.

땅속에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변 사방 어둠이 요동치고 무수한 속삭임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너무추워아파괴로워죽어외로워계속너무아파죽어슬퍼우울해죽어무서워도와줘싫어대체왜나한테죽어저리가어두워죽어너무아파어디있어싫어죽어구해줘싫어죽어너죽어내가죽어서너희가나를죽여서추워싫어아파죽어도와줘싫어죽어보고싶어죽어왜너희가나를죽였어너무추워어둡고괴로워구해줘싫어너도결국죽어왜나를죽였어대체내가뭘잘못했는데이렇게죽어서그래서나도죽였어그러니까너도죽어그러니까너도죽어그러니까너도같이죽어너도죽어너도죽어너도나처럼죽어너도같이죽어지금죽어버려죽어나처럼죽어버려죽어그냥죽어버려.

숨이 턱 막힌다.

몽환진룡도체의 정신 방어력이 아니었더라면 이 순간 공포에 질려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그런 어마어마한 부정적 감정의 파도가 마치 송곳처럼 영혼을 헤집어 찢으려는 듯하다.

'대략 원영 후기급······.'

그런 와중 간신히 상대의 실력을 파악해 낸 한유진은 이미 살기 글렀음을 깨닫고 마음 한구석이 오히려 편해졌다.

설령 지금 상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치더라도, 그렇게 발생한 기척 때문에 하늘에 드리운 거대한 형상의 귀신에게 주의를 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설픈 도망을 시도하는 것보다 그냥 탈출 법술로 정신건강을 지키면서 빠져나가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여기서 운 좋게 구사일생해 봤자 뭔가를 더 알아보거나 얻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닐 테고 말이다.

바로 그래서 한 마디를 그나마 담담히 내뱉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파도치듯 밀려오는 무수한 속삭임들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렇게 괴롭다면, 내가 언젠가 꼭······ 여기서 구해주마."

그 순간.

살의가 증폭되듯 점점 더 강해지며 밀려오던 무수한 속삭임들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이어 잠시 침묵이 흐르던 중.

땅속임에도 전혀 저항이 없는 듯, 느릿하나 부드럽게 움직인 원희의 검은빛 피투성이 손이 웬 종이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익숙한 외형의 편지지였다.

한유진은 어쩔 수 없이 미세하게 손을 떨면서도 그걸 받아 들어 살폈다.

- 착한 선배, 분명 죽었었는데.

그리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적혀있음을 확인한 그때.

- 내가 분명히 봤는데.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선명한 여자 목소리의 속삭임이 들리고.

채 뭔가를 대처할 새도 없이 가공할 속도로 주변 사방에서 머리카락의 파도가 들이닥쳤다.

반사적으로 발동한 몽환유심이 그것들을 전부 꿈으로 뒤바꾸려 했으나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이어 펼쳐진 자금광휘와 파법뇌벽 역시 찰나의 시간만을 벌었을 뿐 오행천둔술로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주진 못했다.

'역시 원영 후기급인가.'

짧은 상념과 함께 그는 육체와 영혼이 마구잡이로 썰려 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익숙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번엔 별다른 이변 없이 은빛 문자들이 신비롭게 떠올랐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아마도 그 거울인지 문인지 모를 빛을 뿜어내던 물체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일 터다.

'언제쯤 되어야 그게 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으려나.'

생각하며 대기 공간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과연 예상대로, 수확물 선택지로 그 종이카드가 떠올라있는 것이 보였다.

- 착한 선배, 분명 죽었었는데.

그 종이카드에 적힌 글씨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리다가 허공에서 소멸하는 모습이다. 역시 이번에도 선택에 필요한 카르마는 전혀 없었다.

'나를 아는 기색이었어.'

여전히 소름이 돋으면서도 한유진은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예전 입문기 때 영원고에서 만났을 때도, 카드에 분명 나보고 선배라고 했었지.'

그냥 선배도 아닌 무려 착한 선배였다. 당시엔 그냥 귀신의 장난질로만 여겼는데 지금 다시 보니 뭔가가 있는 듯했다.

그 종말한 세계선에서 자신이 원희를 만나 선배라고 불리게 된 일이 있었던 걸까. 마치 강호무림 세계에서 처음 누군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그때처럼.

하나 단지 추측만 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종말 이전 시간대의 문을 열 수 없단 사실을 이미 예전에 확인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생인 이원희를 만나 단순한 선배라고 불릴 일 없는 관계를 형성했으니······.

'나중에 사역귀로 삼았을 때 물어보면 될까 모르겠네.'

그는 잠시 더 대기 공간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이번 종말 후 지구 방문으로 자신의 각성 능력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됐고, 그곳에 지금으로선 확인이 어려운 매우 중요한 느낌의 비밀이 존재한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변화한 현실의 조건에 따라 지구의 미래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오행종 유적을 방문해 꿈에도 그리던 통천령보를 손에 넣을 차례였다.

95화. < 정복당한 지구 >

박세룡은 잠시 대균열에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더 지나야만, 아마도 보름 정도는 더 지나야만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던 한유진의 일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관련 정보를 접한 모든 고위 인사들이 진위를 몇 번이고 의심했을 만큼.

대균열 바로 밖의 방어시설에 자리한 숙소에서, 그 정보를 몇 번이고 태블릿으로 살피며 박세룡은 두근거림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중국의 상무위원을 하루 만에······ 그 어떤 흔적도 없이?'

심지어 그 한 명만을 처리한 것도 아니고 핵심 관련자들 전부와 폭력 조직 혈린회의 수백 명에 달하는 한 계파를 통째로 박살 냈다.

역시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만약 한유진이 국정원과 미리 접선해 정보를 받지 않았더라면 도대체 누가 저지른 짓인지 이 세상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터였다.

중국은 그 인구수를 바탕으로 한국보다 S급 헌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대부분의 S급 헌터들이 국내 곳곳에 퍼져 중요 인물을 호위하거나 불온한 세력을 억제하는 등의 임무에 투입돼 있다.

즉, 한유진은 그러한 S급 헌터들까지 동원된 감시와 보호를 뚫고서 그런 짓을 하루 만에 저질렀다는 뜻이었고, 이는 박세룡이 짐작하던 그의 능력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누구라도 흔적 없이 죽일 수 있단 뜻이겠지.'

게다가 혈린회 조직원들이 죽은 모습을 보면 다른 방면으로 더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정신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끔찍하게 자해하며 죽는 짓까지 시킬 수 있는데 그냥 자신을 따르게끔 만드는 일은 더 쉽지 않겠는가?

박세룡 스스로는 아닐 것 같다고 이미 판단을 내렸지만, 정말로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여태 한유진을 도왔던 모든 일이 상대의 정신계 능력에 홀려서일지도.

'제거할 수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터였다. 상대가 방심한 틈에 머물고 있는 장소를 미사일 따위로 폭격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연히 그런 건 한국의 입장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이다. 자국의 S급 헌터를 죽이기 위해 자국 도심지에 미사일을 때려 박는 미친 짓을 대체 어떻게 저지르겠는가?

'그렇지만 만약, 미국이나 중국에서 알게 된다면, 그들의 고위 정치인들이 한유진의 실체를 낱낱이 알게 된다면······.'

한국을 멸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자'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면 정말로 저질러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국으로서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정보를 어디에 섣불리 알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취할 수 있는 행동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당연히 회유책이다.

다행히 한유진은 여태 상당히 '애국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왔고 주변인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취합해 봐도 우려스러운 느낌이 적었다.

이와 관련하여 박세룡은 정부 측에게 모종의 부탁을 받은 상태였다. 애초에 그 부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중요하고 상세한 정보를 이렇게나 빨리 받아보진 못했을 터다.

사실, 꼭 그런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박세룡은 스스로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마침내 망설임을 접고 스마트폰을 조작해 한유진에게 연락을 넣었다.

* * *

박세룡에게서 온 부재중 통화 기록과 메시지가 아니었더라면 바로 다시 능력을 사용해서 미래의 지구 상태를 확인했을 것이다.

무슨 용무인가 싶어 전화를 걸고,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말에 그를 안전가옥으로 초대한 지 약 삼십 분 후.

즉시 달려온 듯 빠르게 도착한 박세룡은, 인사를 나누며 거실 소파에 앉는 내내 묘하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표정과 태도는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결단기 수사인 한유진은 그의 심장박동이나 육도윤회로 느껴지는 감정을 통해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딱히 음료 같은 게 마련되어 있지 않은지라 그는 영액주병의 내용물을 컵에 따라 대접했다. 별생각 없이 감사하다며 그걸 받아 한 모금 마신 박세룡의 표정에 순간 놀라움이 떠오른다.

"술이로군요."

"몸에 좋은 겁니다."

덕분이랄지 박세룡은 긴장이 살짝 누그러지는 듯했다.

의례적인 짧은 한담이 이어진 후.

"그래서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한유진의 질문에 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며 머뭇거렸다.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주고서야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선생님의 진정한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진정한 목적이라, 이 세계에 대해서 말이겠죠?"

"예. 중국에서 벌이신 일은······."

"벌써 전부 들은 모양이군요. 정말로 인맥이 넓으십니다."

가볍게 말하던 한유진은 문득,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부분을 바로 짚어낼 수 있었다. 결단기 수사로서 상대의 태도 등 여러 단서들을 보면서도 계속 모를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위협을 줬나요, 제가?"

짧게 침음한 박세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선생님과 교류가 있는 저로서도 이런 상황이니, 아마 다른 이들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놈들이 지구를 배신하고서 십여 년 후 종말을 불러올 예정이었으니까요."

"······그, 그 귀신들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네."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된 상대를 보던 한유진이 덧붙여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말했었죠. 저는 권력욕 같은 게 딱히 없다고. 우물 안에서 아웅다웅하는 꼴을 보고 어떻게 욕심이 나겠느냐고. 게다가······."

말하면서 그는 소파 등받이에 조금 더 몸을 기댔다.

"제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현재 지구는 너무 취약합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세계 정복이 가능할 저조차, 우물 밖에선 다른 강력한 존재에게 손가락질 한 번만으로 짓뭉개져 버릴 신세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할 겁니다."

"어쩔 수 없지요. 안타깝게도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저는 필요하다면 계속 빠르게 움직여야 하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겁에 질릴 것을 일일이 배려해 줄 수가 없어요. 만약 누군가가 저를 방해하려 든다면······ 대응할 수밖에요."

그렇게 말한 한유진이 박세룡을 조금 더 빤히 쳐다봤다.

"그런 건 저로서도 원치 않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박세룡 씨가 한 번 해결해 보시겠습니까?"

* * *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긴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리고 결코 쉬운 대화도 아니었다.

다행히 예전에 환몽심탈술로 지구 종말의 광경을 보여줬었고, 그 증거라 할 수 있는 이원희의 존재를 박세룡 스스로 찾아냄으로써 최소한의 믿음을 살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신계 능력을 갖췄다고 밝혀진 순간 그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상대를 설득시키기 매우 어려웠을 터다.

또한 한유진은 스스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일이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이미 단서를 제공했었고, 이번에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설득력을 얻었다.

각성 능력과 연관되어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모종의 영향을 끼쳐야 한다던, 그러니 이왕이면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편이 좋으니까 지식과 각성초 따위를 보급하려 한다던 일을 말함이다.

단순하고도 온전한 선의라는 건 의심받기 쉽지만 그 선의에 이득마저 포함돼있다면 믿음을 사기 쉽다. 박세룡 같은 이에겐 특히 더 그렇다.

'과연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박세룡의 수완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이건 쉽게 해결되리라 단언할 수 없는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정치인 등을 직접 솎아내야 할 수도 있다.

스스로는 국가와 인류를 위해 움직인다는 신념을 품었을지도 모를 이들을 말이다.

'그냥 당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불가피하나 전혀 유쾌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다행히 도심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저 한 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꼬일 것이 분명하기에 골치가 아플 뿐.

'나는 확실히 마냥 호인은 아니야.'

정말로 너무 골치가 아파지고 도저히 손 쓸 수 없을 만큼 꼬여버린다면, 아헤티 종족에게서 얻을 차원유랑 비술을 통해 아예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사랑하는 고향이라지만 스스로의 모든 것을 내던져가면서까지 지킬 수는 없다는 마음이었다. 심지어 그 지키려는 대상이 똥볼을 마구 차대면서 발악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왜 그런 짓을 벌이는지 이해는 하겠지만 그런 어리석은 발악에 당해주는 건 정말로 성미에 안 맞는다.

어이없게 공멸하느니 혼자라도 살아남아서 추후 복수를 행하는 게 여러모로 현명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대화를 마치고 다시 혼자가 된 그는, 미환진기를 발동시켜 재차 안전을 확보하곤 침대에 누웠다. 이어 무용이를 옆구리 쪽에 놓고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각성 능력을 발동했다.

잠시 후.

대기 장소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더없이 능숙한 움직임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도 무용이는 데려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과연 성공적으로 문이 고정될까.'

종말 후 지구의 문이 고정됐었던 일은 사실 지구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었기에, 이번의 성공을 확신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던 첫 각성 능력 사용에서 그냥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정시킨 문이 바로 그 세계였을 뿐이다.

약간의 걱정을 품은 채 그는 어떤 식으로 바람을 떠올려야 좋을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그렇게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재차 얻고서야 손을 뻗어 천변만화하는 문과 접촉했다.

고정된 문의 형상은 다행스럽게도 지구의 미래가 맞았다.

하나 불행하게도 종말을 못 막았는지 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번에도 현대식 방화문이었다. 아마도 종말이라는 느낌을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문인 모양이다. 강철 방화문이라는 것이 지구 문명을 대변하기에도 나름 적절할 테고 말이다.

문제는 그 방화문의 상태가 여기저기 녹슬고 우그러진 등 거의 최악이라는 점이었으며, 떠오른 은빛 문자들의 내용마저도 한숨이 나오게 했다.

- 정복당한 지구

'뭐에 정복을 당했는데?'

단순한 종말이나 멸망이 아닌 것을 보면 어느 제대로 된 문명을 가진 외계 지성체 종족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 같다.

대략 그런 추측을 떠올리면서 그는 문을 열고 진입했다. 동시에 몽환유심으로 기척을 은폐하며 주위를 살폈다.

어느 어두컴컴한 실내였다. 웬 감옥처럼 느껴지는 장소였는데, 평범한 교도소 따위가 아닌 특별하게 만들어진 시설인 듯했다.

그는 감옥 내부가 아닌 좌우로 감방들이 늘어선 복도에 자리한 채였고, 한쪽은 막혀있었으며 오직 반대편 쪽으로만 나가는 문이 존재했다.

그리고 십여 개 정도 되는 감방 내부에는 각각 네다섯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대로 구분된 채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사람은 있군.'

종말 후 지구 세계에서 보단 정보 얻기가 쉬울 듯하다.

그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 소란을 일으키는 대신,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한 중년인을 주목했다.

딱-!

희미한 소리가 반사적으로 그 중년인의 주의를 끈다. 느릿하게 그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허공을 향했을 때.

그곳에 웬 자색빛 눈동자 한 쌍이 자리한 광경을 목격한 즉시, 그는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중년인은 살짝 어지러운 기색으로 머리를 흔들며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자색빛 눈동자를 목격했던 허공을 쳐다보다가 이내 미약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전부 잠깐 졸면서 헛꿈을 꿨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유진은 계속 몽환유심으로 기척을 은폐한 채 복도에 우두커니 서선 방금 얻은 정보를 정리하며 살짝 혼란에 빠져있었다.

종말 후 지구에서 확인했던 종말의 날짜는 2032년이었다.

다행히 여기 중년인의 기억 속 세상은 2057년까지 멀쩡했다. 즉, 현실 지구의 시점으로부터 약 35년 정도는 별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35년 동안······ 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었지?'

이곳이 정말로 지구의 미래라면 분명 한유진 자신이 그 상당한 기간 동안 뭘 해도 했을 텐데.

중년인의 기억 속에서는 그런 내용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96화.< 카마유스굴 제국 >

'내가 진짜로 탈주해 버린 건가? 지구에 질려버릴 만한 일이 생겼어서?'

하필 이곳에 오기 직전 박세룡과 나눴던 대화가 대화였던 만큼,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잠시 후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설령 탈주했더라도 이미 추진 중이었던 지식과 각성초 보급을 중단시키진 않았을 터다. 어쨌든 대량의 카르마를 벌 수 있는 중요한 계획이었으니까.

게다가 탈주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큰 모험인 만큼, 한동안 신분을 감춘 채 활동하다가 각성 능력으로 힘을 기른 후 모든 불리한 상황을 단숨에 엎어버리는 계획을 우선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성공했을 가능성 역시 매우 크고.

하여.

떠오르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다른 것이었다. 종말 후 지구에서 얻은 여러 단서들을 바탕으로 한 가설이기도 했다.

'이렇게 방문한 지구 미래에서는 내가 없다. 아니, 한유진이라는 사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이 각성 능력을 보유한 내가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의해 '중요하게 변화한' 현실 조건이 반영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영원의 여신교가 박멸된 일 등.

'그 중요한 변화라는 건 아마도, 카르마가 흘러들어와 쌓였을 만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된 큰 변화일 테고.'

거의 즉흥적인 느낌으로 떠올린 가설이었지만 이는 결단기 수사의 지능과 직감이 작용한 가설이기도 하다.

'지구 미래 세계에서 이 각성 능력을 보유한 내가 없는 이유는······.'

딱히 어렵게 생각할 거리가 없었다.

한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천지개벽하듯 성장하는 스스로의 모든 가능성을 반영한 미래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반영할 수 없을지 모른다.

흡사 거울이 스스로를 비췄을 때 상이 무한히 늘어나 버리는 것처럼.

즉.

이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정보는 몇 가지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하나는 2057년까진 세상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부터 적들의 은밀한 사전작업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적들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그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지금 그들을 구해봤자 이 정복당한 지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리라 여기며 유일한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바로 오행천둔술로 그 문을 통과하려다가 문득 멈칫하게 됐는데, 수선계풍 진법이나 판타지풍 마법진 결계와는 또 다른 느낌의 금제가 깔린 것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신식으로 그것을 샅샅이 훑으며 한유진은 대략 판단을 내렸다.

'진법이라기보단······ 부적술 느낌에 가까운데.'

선도 진법이나 마법진 결계가 각종 보안시스템이 설치된 문이라면, 이것은 모종의 부비트랩과 같다.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클레이모어 따위가 폭발하게 되는 그런.

'그렇다고 딱히 허술하지도 않고.'

일단 지구를 정복한 놈들이 수선자나 마법사는 아닌 듯하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조금 더 원리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던 한유진은, 초월적 이해력과 향상된 지능에 힘입어 빈틈을 포착한 후 그곳으로 오행천둔술을 통해 넘어갔다.

건너편 역시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하나 다른 점이라면 아주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종족 넷이 엄중한 태도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체형은 인간과 매우 유사했다.

그렇지만 회청색 피부에 푸르고 검은 얼룩과 점들이 자리했고, 금빛 눈동자의 동공은 십자 형태였다. 길고 유연하면서 질겨 보이는 꼬리를 가졌고, 머리카락 대신 검은빛 비늘이 흡사 투구처럼 급소를 보호하는 외양이다.

신식으로 몸 내부를 살피자, 척추가 무려 셋이나 됐고 심장이 둘이었으며 움직임에 방해받는 일 없도록 자리한 뼈들이 근육과 어우러져 전신을 갑옷처럼 보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폐를 보자니 그저 코로만 호흡하는 게 아니라 피부 전체로 호흡하는 듯 영기가 흘렀다. 눈에도 저절로 영기가 고여 특정한 문양을 그리는 것이 영안술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허.'

생물학에 그다지 빠삭하지 않음에도 한유진은 놈들의 신체가 인간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그냥 깨달을 수 있었다.

이족보행에 훨씬 더 적합하면서 전투적으로도 우월하고 신비학적으로도 뛰어나다. 이런 문명을 이룬 것을 보면 당연히 지능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을 터다.

바로 그렇기 때문인지, 풍기는 기세는 입문기급 수준에 불과했지만 조금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혹시 외물의 힘을 빌리는 건가 싶어 놈들이 착용한 장비를 꼼꼼하게 살폈으나, 최하급 법기 수준이라는 점만 파악해 냈을 뿐이었다.

'그래도, 최하급이라지만 어쨌든 법기 수준이란 말이지.'

진짜 강한 놈들은 법보 수준의 무구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관찰을 통한 정보수집을 마친 그는 더욱 신경 써서 몽환유심으로 기척을 은폐하며 경비 한 명에게 환몽심탈술을 펼쳤다.

바로 그렇게 꿈속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대상자의 정신을 아주 쉽게 제압했으나 그 정신이 다른 주변의 세 명과 연결된 것을 느끼고 살짝 놀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진입한 탓에 그 연결을 통한 이상신호가 전달되며 놈들이 눈치를 챘다.

"이건···?"

"정신 침탈이다!"

"죽여!"

놈들은 아주 능숙하게 반응했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정신에 침입해 왔는지 모를 적을 찾으려 들기보단, 제압된 것이 분명한 아군을 향해 일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어 휘두른 것이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하나 일반적인 적을 상대로는 통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상대는 무려 결단기에 오른 수선자였다.

찰나에 펼쳐진 원력대수가 아군을 처리하려던 세 경비병을 후려쳐 분쇄시켰다. 튼튼한 갑옷과 육체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짓뭉개져 으스러지는 광경이다.

그렇게 놈들이 죽은 즉시 모종의 영적 파장이 퍼져나가며 이 시설에 경보를 울렸다.

"쯧······."

한유진은 혀를 찼으나 그래도 크게 짜증이 나거나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다.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짧은 시간 만에 그는 대상이 꿈속에서 보름 이상의 시간을 보내게 만들며 여러 중요한 정보들을 얻었다.

'카마유스굴 제국의 유스굴 종족이라.'

신정일치의 제국으로, 아헤티 종족처럼 차원을 넘나드는 비술을 통해 여러 세계에 뿌리내린 초거대 세력이다.

이들의 경지 체계는 직위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역시 황제는 최소 연허기급, 아마도 합체기급으로 추정되는 존재였다.

'개나 소나 합체기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하던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 우주에서 다른 세계를 침공하고 정복할 정도의 문명 세력이라면 그 수장이 너무 약하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또한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진짜 합체기 경지의 수선자와 비교했을 때 과연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목할 점은 이들의 신비학 체계였다.

크게 두 기둥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하나는 여러 생명체의 장점을 이식해 오는 유전공학적 느낌의 체계였고, 다른 하나는 신묘한 원리의 문신을 새기고 성장시켜 힘을 강화하는 체계였다.

유전공학적 느낌의 체계는 어떻게 수확으로 얻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나 그 문신에 대해서는 꽤 흥미가 동했다.

'일종의 법결이겠지. 나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을.'

판단을 마친 그는 복도를 지나쳐 홀로 나섰다. 그렇게 나서는 즉시 유스굴 전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선두에 선 법혼기 수준의 전투원이 뭔가를 느낀 듯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 크리아타, 씨시쓰마-!!

그들의 종교적인 고유명사로 해석되는 외침이 울려 퍼진 직후.

손에서 빛이 번쩍이고 연보랏빛 광휘가 장내를 휩쓸었다. 꽤 강력한 감지계 법술이었다.

하나 한유진의 몽환유심 신통을 파훼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는 놈들의 몸 곳곳에서 빛을 뿜어내는 문신을 여유롭게 살핀 후에야 손을 썼다.

빛살처럼 쏘아진 이십여 줄기의 순양극염탄사가 놈들이 비명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잿더미로 만든다. 그렇게 흩뿌려지는 열기와 잿가루 사이를 뚫고서 한유진은 다시 움직였다.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시설 곳곳에서 잔뜩 긴장한 채 경계 태세를 취한 놈들을 보이는 대로 죽인다. 딱히 거리를 구분하지 않고 좀 더 활발히 움직이는 놈들부터 처리했는데, 모든 장애물을 한순간에 녹여 관통하며 쏘아지는 순양극염탄사를 그 누구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렇게 3층으로 구성된 넓은 시설 전부를 초토화시키기까지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안 걸렸다.

'일종의 연구소인가.'

정리하면서 동시에 살핀 건물의 시설들은 그런 느낌을 풍겼다. 특히 1층, 사람들이 갇혀있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실험실에서는 잔혹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핏자국 등은 딱히 안 보였으나 공기 중엔 여전히 혈향이 감돌았다.

그리고 한쪽에는 인간의 것이 분명한 온갖 신체 부위 및 장기들이 표본으로 보관돼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따로 쓸데가 있는지 인간의 뼈 무더기가 담긴 상자들이 자리한 모습이었다.

방 중앙의 몇 실험대와 근처에 나열된 각종 도구들만 봐도, 여기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익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마치 현대 지구의 실험실 속 쥐들처럼 말이다.

"네 지인이 여기서 죽기라도 했나?"

그때 불현듯, 뒤편에서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한유진은 이미 신식으로 상대가 등장하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별 당황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얼핏 마법사의 로브 같으면서도 현대식 코트와 비슷한 양식이 섞인, 전투원이라기보단 확실히 연구자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옷차림의 유스굴 한 명이 그를 보며 서 있었다.

특이하게도 눈동자 색이 선명한 핏빛이었다.

"너 정도 실력의 인간이 전략적으로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 장소를 타격하다니, 너무 감정적인 움직임이 아닌가?"

"아직 살아남은 저항군이 있는 모양이지?"

"음?"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 일에 상대가 의문을 표하는 순간.

한유진의 두 눈동자에서 자색빛이 폭발해 상대를 덮쳤다. 하나, 상대의 몸 곳곳에서 비슷한 자색빛 문신이 빛을 발하며 환몽심탈술에 저항했다.

그 순간 육도윤회가 펼쳐지며 광휘를 흩뿌리고 한유진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색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끄···허억···!"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마도 놈은 꽤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결단 중후기급으로 느껴지는 기세를 풍기면서, 문신을 통한 더 뛰어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을 테니, 그만한 힘이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을 가질 법도 하다.

동시에 이 지구를 정복하며 경험했던 인류의 무력 수준을 바탕으로 확신까지 품고 있었을 터다.

안타깝게도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말이다.

놈은 육도윤회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그렇게 감정의 폭풍에 한 번 휩쓸리자 몽환유심으로 강화된 환몽심탈술에도 즉시 휩쓸려버렸다.

천락도의 행복을 잠깐 맛보여주다가 기대의 인욕도를 거쳐 슬픔의 망혼도에 떨어트린다. 저항하는 놈이 자연스레 느낄 감정을 확 증폭시켜 분노의 야수도에 잠식당하게 만든 후 바로 혐오의 기충도로 넘겨 자아에 균열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절망의 심연도에 처박는다.

동시에 환몽심탈술로 기억 대부분을 읽어내어 중간관리자 수준임은 분명한 놈의 유용한 지식을 빼먹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놈이 인간들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다뤘는지도 알게 됐다.

단지 육체적으로 뿐만이 아닌, 희생자의 가족과 애인 등을 데려다 놓고 정신적으로도 괴롭히면서 자신의 가학심을 만족시키는 등.

아무리 다른 종족이라지만 뚜렷한 지성을 가진 상대를 믿기지 않는 정도로 처참하게 유린했다.

"좋아, 이게 너희 종족 평균이라는 말이지."

육도윤회의 역광으로 이목구비가 가려진 모습의 한유진은, 자색빛을 뿜어내는 두 눈으로 엎드려 벌벌 떠는 상대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나도 딱 비슷하게 대해주마. 마침 너희 종족이 몸에 새기는 그 문신에 꽤 흥미가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가죽을 통째로 벗겨도 억울하진 않겠지? 너도 자주 했던 일이잖나."

"아, 안··· 안 돼···! 안 돼···!!"

원력대수에 붙잡혀 허공으로 떠오르는 놈이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마저 공포에 질려 고함쳤다.

그 직후.

연구실 한쪽 벽면, 그림자로 비치는 놈의 신형에서 대량의 액체가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과 함께 가죽이 흡사 영혼처럼 벗겨져 나가는 광경이 연출됐다.

지옥에서 올라오듯 끔찍한 느낌 가득한 비명과 절규가 메아리치는 채였다.

97화. < 미래 확인 완료 >

놈의 가죽을 최대한 손상 없는 방식으로 벗겨낸 후, 그 신체 안쪽으로도 각종 유전공학적 느낌의 이식을 받은 흔적까지 한 번씩 살핀 뒤.

좀 더 죗값을 치르게 해 줄까 싶다가 스스로 고문에 별 취미가 없음을 깨닫고는 그냥 불태워 죽이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물론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어 편한 죽음을 선사해 주진 않았다. 비교적 약한 불꽃으로 휘감아 놈이 처참하게 죽였던 사람들의 고통을 일부라도 겪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조금 후련해진 마음으로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서도 땅을 파고 있었다니······.'

이번엔 베이징이 아닌 한반도의 북쪽, 지린성의 창춘시 지역이다. 아쉽게도 기억을 읽어낸 놈이 지위가 낮은 탓에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명확했다.

'지구 내부에 뭔가 아주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 있단 말이지.'

이미 결론을 내린 문제였음에도 그는 다시금 고민되는 것을 느꼈다.

종말 후 지구 세계에서 깨어난 뒤 현실에서 베이징 지하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그 빛의 근원체가 현실에서도 존재한다면, 겨우 결단기 수준밖에 안 되는 자신이 접촉했다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려 세 자릿수에 달하는 강력한 귀신들이, 그것도 화신기급이 열 이상이나 포함된 귀신들이 달라붙었는데도 어쩌지 못했던 물건이다. 심지어 한유진 자신을 손가락 하나로 뭉개버렸던 그 연허기급 이상 귀신마저 그곳에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면······.

'합체기급은 되어야 안전을 확신하고 접근해 볼 수 있을, 그런 물건일 터.'

다행히 그 물건이 딱히 뭔가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 듯했다. 적어도 이 유스굴 놈들이 침공해 오기 전인 2057년까지는.

'아니지.'

어쩌면 그 물건은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떠오른 가정이었지만 상당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 지구에 차원 충돌이라고 명명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까? 영근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일종의 신통과 같은 이능력을 각성하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지구가 운이 없어서, 지구 인류가 특별해서는 아닐 터다.

'그러니까, 지구가 여러 방식으로 종말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그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건가.'

현실에서 깨어나는 즉시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필시 대단하기 짝이 없는 물건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시기상조였다.

차원 충돌이나 이능력 각성 등은 이미 일어나고 있던 현상이다. 하여 지구 인류는 나름대로 적응을 마친 상태다.

그러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얌전히 각성 능력으로 힘이나 기르는 것이 최선이다.

2057년까지는 무려 35년이라는 세월이 남았다. 그 정도면 각성 능력을 얼마나 많이 사용할 수 있을지 선뜻 계산이 안 될 만큼 충분히 여유로운 시간이다.

최소한 시간이 부족해서 합체기에 이르지 못할 걱정은 없다.

그리고 자신이 합체기에 이른다면 카마유스굴 제국의 침공을 걱정할 이유가 없을 테니, 시간이 더 많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그 문제는 일단 됐고, 이제 가볼 곳은······.'

이 유스굴 놈들의 문신에 대한 지식이 보관된 도서관이었다.

* * *

연구소에서 벌어진 이변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유스굴 놈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는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도서관이 건설된 장소로 향했다.

이곳이 종말 후 지구와 다른 부분이라면, 카마유스굴 제국 놈들은 지구를 무작정 황폐화시키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원주민을 전부 실험체로 삼고 도륙 내지도 않아서, 드물게나마 인간이 활동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물론 그 인간들의 신세가 전혀 좋지는 않았다. 그냥 노예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그런 신세였다.

얻은 지식에 따르자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지구 인간들도 결국 유스굴 종족화되어 카마유스굴 제국에 흡수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를 택한 인간들은 전부 도태되거나 생물종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보관'될 테고.

잠시 후.

도착한 도서관 건물은 아주 크고 웅장했다. 미리 기억을 읽어내지 않았더라면 꽤 놀라면서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대략 어떤 종류의 금제가 어디에 펼쳐져 있는지도 파악해 냈기에 그는 쉽사리 빈틈을 파고들어 내부로 스며들 수 있었다.

기타 잡서들이 보관된 저층을 지나 3층에 올라서자 본격적인 '주술서'들이 나타났다. 전부 기초적인 내용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지금 한유진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이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기초만큼 중요한 것이 또 없다.

연구소에서 읽어냈던 기억은, 오히려 놈이 결단기급 기세를 풍기던 나름의 실력자였기에 스스로 필요 없다고 여긴 분야에 대한 기초지식이 결여돼있었다.

한유진은 기척 은폐에 신경 쓰면서 수많은 책들을 신식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결단기에 오른 만큼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진 속도였고 필요한 내용을 기억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카마유스굴 제국의 책은 특이하게도 전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금속을 가느다란 실처럼 뽑아낸 뒤 천처럼 짜내어 엮어놓는 것인데, 당연히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수놓듯이 새겨지며 일부 글자나 그림들은 살짝 입체적인 형상을 띠기도 한다.

이를 전담하는 장인들이 따로 있고 여러 도구들이 다양하게 발전되기도 한 일종의 예술 기교였다.

안타깝게도 바로 그런 탓에 이 책들을 전부 수확물로 선택하려면 카르마를 필요 이상으로 낭비하게 될 터였다. 일단 재료가 되는 금속부터가 그냥 평범한 금속이 아니었으니까.

하나 다행스럽게도 굳이 수확물로 선택할 필요 없을 만큼 그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전부 기초에 불과한 내용이었는지라 딱히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그는 백 권이 넘는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저장하고서 4층으로 향할 수 있었다. 유스굴 종족의 책이 지구 문명 책보다 훨씬 크고 정보 저장량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로 방대한 내용을 기억한 것이었다.

그렇게 4층에 완전히 올라선 순간.

한유진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감상은 잘 끝내셨나?"

마치 상대가 인간임을 배려해 주듯, 이번에도 유창한 영어가 들려온다.

4층의 입구, 도서관 사서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웬 은빛 갑옷을 입은 유스굴 전투원 한 명이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은빛을 띠는 창을 한쪽 어깨에 기대어 놓은 채였다.

"알면서 방해를 안 한 건가?"

"그래.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봤거든. 실력으로나 행동으로나. 우리 주술 체계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그는 말하다가 재밌다는 듯 큭큭 웃었다.

"책마저 읽었으니 우리 언어에도 능통하다고 보면 되겠나?"

이번의 말은 영어가 아닌 카마유스굴 제국어였다. 당연히 초월적 이해력을 가진 한유진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발음도 아주 유창하군. 하긴, 너 정도 되는 녀석이면 언어 하나를 통달하는 데는 하루이틀밖에 안 걸리겠지."

잠시 침묵하고 있자니 상대가 용건을 꺼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예상한 범위 내에 있는 용건이었다.

"내가 속한 트림비아 가문에서 진화 시술을 직접 진행해 주마. 주술 문신도 기본 재사관급으로 새겨주지.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추후 성주교까지 오를 수도 있을 거다."

"굳이 나를?"

"그래, 굳이 너를. 짐작하겠지만 어려운 임무들이 주어질 거다.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확실할 테지. 무엇보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지금 네게는 거부권이 없다. 복종하거나 죽거나, 선택해라."

복종하는 척하면서 어떤 사건들이 전개되는지 구경해 보는 것도 어쩌면 괜찮을지 모른다.

마치 강호무림 세계에서처럼, 이 카마유스굴 제국에서도 작정하고 오랜 세월을 지내며 수색 활동을 펼쳤을 때 여러 대단한 수확을 얻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안 끌렸다. 나중에 심심할 때라면 몰라도.

"보상들이 너무 하찮은데."

그래서 한유진은 상대처럼 웃으면서 답했다.

"······뭐라고?"

"별 대단치도 않은 걸 보상이랍시고 내밀면 안 창피하나? 조금 더 제시해 봐라. 혹여 내 마음이 움직일지도 모르니."

상대가 헛웃었다.

"자존심만 산 미친놈이었군. 일단 팔다리를 잘라놓고 이야기해야겠어."

그 직후.

놈의 한쪽 어깨에 걸쳐져 있던 창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결단기 수사인 한유진의 인지력으로도 그랬으니 실제로 얼마나 빨랐을지는 감히 계산이 불가능했다.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선명한 핏빛 뇌전들이 뿜어져 나와 주변 사방을 감옥처럼 둘러싼다. 그것이 창날의 움직임과 더해져 딱 치명적이기 짝이 없는 경로들로만 들이닥친다.

대응하여 펼쳐진 몽환유심이 그 공격들 중 일부를 꿈으로 치환하고 자금광휘와 파법뇌벽이 동시에 펼쳐져 여파를 막아냈다. 동시에 한 손으로 꺼내 든 혈령적화주병에서 흑선들이 쏘아져 상대를 노렸다.

"하!"

바로 그 순간.

놈의 몸에 새겨진 문신 일부가 기묘한 빛을 발하고 공간이 휘어졌다.

불가사의한 각도로 날아든 창날이 혈령적화주병의 모든 공세를 스쳐 그것을 든 한유진의 팔을 날려 버리고 반대편에서 휘어져 온 벼락 줄기들이 두 다리를 집중적으로 노린다.

'원영기급이었나.'

적어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적이다. 풍겨오는 기세가 유달리 희미하여 미처 확신하지 못했다.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육도윤회가 펼쳐졌으나 놈의 갑옷이 마주 빛을 발하고 핏빛 뇌전이 더욱 강렬해지며 그 육도윤회의 허영을 순식간에 흩어버렸다.

이어 파악할 수 없는 속도와 궤적으로 연신 휘둘린 창날이 자금광휘를 꿰뚫어 찢고 파법뇌벽을 빨아들여 흡수하면서 그의 심장을 노렸다.

"음···!"

하지만.

이미 심장을 노렸다는 점부터가 육도윤회를 완벽히 막아내지 못했단 뜻이었다. 의도적으로 증폭시킨 야수도의 분노가 원래 상대의 사지만 끊어내려던 놈의 심경에 일순 살의를 불어넣은 것이다.

사실 한유진의 의도는 적이 분노를 폭발시켜 이 도서관에 큰 훼손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나 놈은 고도로 훈련받은 전사임이 분명하게도 아주 절제된 방식의 분노만을 표출했다.

결국, 한유진은 심장을 터뜨리고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빠져나가는 상대의 창날을 보며 마지막 조롱을 날렸다.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너는 이게 팔다리로 보이느냐?"

"···감히!"

이미 심장이 터졌으나 결단기 수사로서 즉사할 만큼의 치명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계속 싸워봤자 손해만 볼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상대가 더 분노하는 모습만 확인하곤 바로 웃으며 자신의 법단을 폭주시켰다.

얌전히 탈출 법술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대가 도서관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니 자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더없이 안정적인 상태이던 명치 부근의 법단에 무수한 균열이 발생하며 힘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느낀 상대가 놀라며 무어라 외쳤으나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음 순간 모든 오감이 끊어지고 신식마저 폭주에 휩쓸려 증발하듯 사라졌다. 결단기 수사로서도 참기 힘든 고통이 영혼을 휩쓰는 것만이 느껴졌다.

다행히 그 고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잠시 후.

- 당신은 죽었습니다.

포근한 어둠 속에서, 한유진은 적을 비웃고 조롱했던 태도와 달리 한숨을 내쉬었다.

- 수확물을 선택하십시오.

신경 써서 벗겨냈던 가죽을 제외하면 딱히 선택할 거리가 없다.

우습게도 법단을 폭주시켜 없애버린 상태를 매우 부정적이지만 일종의 '수련 성과'라고 여기는지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당연히 쳐다봐서도 안 될 것이었다.

대기 장소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즉시.

그는 현실 침대에서 깨어나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내가 너무 약하구나······.'

스스로 그런 위험을 찾아다닌 감이 매우 짙지만, 또한 이것이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움직이기에 발생하는 일임을 알지만.

결단기에 올라 천하무적이 된 것 같았던 느낌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자만심을 다스리는 수준을 넘어 자부심을 지켜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다행히 더 강해질 방법은 아직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었다. 그 방법을 실현해 낼 카르마 역시도.

지구의 미래에 대한 필수적인 확인을 마쳤다.

그러니 이젠 오행종 유적을 방문해 성장을 꾀할 차례였다.

'태을오행도경을 품은 오행진령거석.'

현재 보유한 카르마라면 틀림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 물건을 기대하며, 그는 급한 연락이 없나 스마트폰을 간단히 확인한 후 바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찍-! 찍!

무용이가 왠지 불만스러운 듯 놀아달라고 보채는 통에 잠시 일어나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98화. 오행진령석

찌직! 찍-!

"그래, 이 형님이 항상 얼마나 고생하는지 이제 좀 알겠지? 괜히 널 안 데려가는 게 아니란 말이야."

품속 무용이가 놀라서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한유진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산길을 올랐다.

우중충한 하늘과 말라비틀어진 나무들, 메말라 쩍쩍 갈라진 대지와 그 어떤 생명도 느껴지지 않는 대기.

말법의 재앙이 덮친 세상 속 오행종 유적으로 향하며 그는 여기서 자신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를 가늠해 봤다.

'작정한다면 몇 년 정도?'

몽환진룡도체의 지구력 덕분이다. 심지어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는 상태를 기반으로 가늠했다.

물론 그렇게나 오래 머무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용이와 함께 온 만큼 더더욱.

어차피 오래 머무를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법력을 아낄 이유도 없는지라, 그는 중간중간 둔술을 발휘하며 순식간에 산을 올랐다. 이어 함께 온 무용이에게 외문 구역을 대략 구경시켜 준 후 내문 구역으로 향했다.

목표한 연기각에 들어서선 바로 최상층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다시 마주하게 된 거대하고 매끈한 칠흑빛 바위, 오행진령거석은 여전히 눈길을 잡아끄는 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지금 가진 카르마라면, 이걸 포함해서 그 귀혼번 통천령보랑 산해주 동천 보물까지 전부 수확물로 선택할 수 있을지도.'

예전 그것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를 생각하면 당장 전부 소유해 버리고 싶다.

하나 그는 곧 귀혼번 통천령보를 머릿속에서 배제했다.

그걸 지금 얻어봤자 종말 후 지구 세계의 원희를 당장 사역귀로 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강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원여신교에게 은총을 받으며 어떤 구속을 받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걸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자칫 현실로 데려왔을 때 모종의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엔 원희를 통해 영원여신교가 지구의 좌표를 알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아는 신비학 상식대로라면 가능성은 작다고 여겨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가져갈지 말지 고민해 봐야 하는 물건은 하나뿐이었다.

'동천 보물이라······.'

고민하면서 그는 일단 오행진령거석을 챙겼다. 커다란 바위였지만 그래도 저물대에 못 넣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수납하기 위해 일반적인 경우보다 서너 배 많은 법력을 소모해야 했다.

큰 바위가 저물대의 입구 부근에서 축소되어 안으로 수납되는 광경을 보던 한유진이 새삼 감탄했다.

'다시 보면 이 저물대도 참 대단한 법기란 말이지.'

초창기 수선계에서의 저물대는 원영기 수사쯤이나 되어야 겨우 하나 마련할 수 있는 아주 귀하디귀한 보물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실로 어마어마한 세월을 거쳐 각 종문들에 의해 제작법이 개량되고 또 개량되면서, 동시에 저물대 제작에 필요한 각종 영재들이 번성하고 확충되면서 점점 흔해진 것이다.

입문기 수사조차도 너무 가난하지만 않으면 하나쯤 하급으로나마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무엇보다 한 번 완성된 저물대는 공간과 연관된 특성 덕분에 좀처럼 파괴되지 않을 만큼 튼튼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저절로 물량이 쌓이게 된 점도 흔해진 이유 중 하나였다.

'수선계의 역사가 좀 길어야 말이지.'

당장 한유진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저물대도 오행종 유적에서 주워 온 것이고, 그 이전에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몇 명의 주인을 거쳤을지 모를 그런 물건이다.

어쨌든.

무난하게 오행진령거석을 손에 넣은 그는 예의 바위로 막혀있는 구역을 향해 이동해 갔다.

도착한 그곳에서 중심부 광장에 서자 여전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법포를 걸친 열두 구의 수사 해골들이 중심부 반투명한 옥 받침대에 놓인 수박만 한 구형 금속체를 둘러싸듯 널브러진 모습이다.

금속 구체의 외양은 금빛과 은빛이 섞여 산과 바다를 양각해 낸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그가 내심 산해주라고 이름 붙인 동천 보물이었다.

찍! 찌직!

"그래, 그래. 여기 사람들은 다 죽었어. 말법의 재앙이라니까?"

이곳을 처음 와보는 무용이에게 관련 설명을 짧게 해주며, 그는 한편으론 마지막 고민을 이어갔다.

이 동천 보물을 지금 얻는 게 과연 맞을지, 과소비를 하는 건 아닐지에 대해서였다.

'과소비는 아닐 거야.'

앞으로의 계획은 법보 제작을 위해 선협 요소가 섞인 SF 느낌의 세계를 방문해 보는 것이다. 만약 그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방문을 실패한다면, 정통 수선계 느낌의 세계로라도 가서 어떻게든 좋은 법보를 만들 심산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세상에 가게 되든, 그곳에서 상당히 긴 시간을 보내게 될 확률이 높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얻게 될 터다.

'그럴 때 이런 동천 보물을 갖고 있다면, 더 많은 종류의 수확물을 노릴 수 있겠지.'

동천 보물은 저물대와 비교해 그냥 드넓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내부에 영맥이 흐르기에 이동이 쉽지 않은 여러 도구나 장비들을 마음껏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온갖 영식을 기를 수도 있고, 영기 농도만 만족스럽다면 안에서 수련하며 생활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즉, 어차피 언젠가 얻을 생각이라면 이번 기회에 얻는 것이 근거 충분한 투자 행위가 되는 셈이다.

결론을 낸 그는 금속 구체를 저물대에 넣으며 어떤 방식으로 복원할지도 대략 결정했다.

과거 이것을 대기 장소에 가져갔을 때 두 가지 방법으로 복원할 수 있음을 파악했다.

하나는 전성기 때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초기 상태로 성능만 멀쩡하게 복원하는 것인데, 일단은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카르마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면 당연히 전자가 좋겠지만, 후자라고 해서 딱히 쓸모에 큰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행진령거석도 비슷한 방식으로 복원을 진행하게 될지 모른다. 당장 이곳에 있는 귀혼번 통천령보도 그랬으니까.

'필수적인 건 다 챙겼고.'

말법 세계의 가혹한 메마름이 영 적응이 안 되는 듯,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는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 놓친 게 있는지 한 번 둘러보기나 해야겠다.'

결단기가 된 이후의 첫 방문이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자신에겐 쓸모가 없을지라도 혹시 이원희에게 중요할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옥로주병을 꺼내 무용이와 나눠마시면서 느긋하게 움직였다.

* * *

모든 둘러보기를 마치고 탈출 법술을 통해 대기 장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행진령거석과 산해주가 모두 선택지에 있으면서, 둘 다 예전에 알아봤던 그 두 가지 방식에 따라 복원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전성기 상태로 복원하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카르마가 필요했다.

특히 오행진령거석은, 전성기 상태로 복원하려면 놀랍게도 현재 보유한 카르마의 4할이나 되는 엄청난 양을 요구했다. 초기 상태로 복원하는 데는 그 반의반의반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너무 지나치게 비싸잖아.'

필시 통천령보가 품은 영성 때문일 것이다.

전성기 상태의 오행진령거석이 품은 영령이라면, 인간 모습으로 화형하면서 기본 원영기급 이상의 힘을 스스로 발휘할 수 있을 터다.

심지어 기본이 원영기급이란 뜻이고 어쩌면 화신기급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막대한 카르마 요구량을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과연 그 정도 힘을 가진 영령이 한유진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할 것인지였다.

최악의 경우 대량의 카르마를 소모하고서도 상전처럼 오행진령거석을 모시며 비위를 맞춰야 하거나, 혹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욕심내지 않는 것이 좋다. 어차피 그가 진짜로 원하는 건 오행진령거석보단 그것이 품고 있는 태을오행도경이었으니까.

하여 결국.

그는 두 가지 물건을 모두 초기 상태로만 복원하며 수확물로 선택했다. 그리고 기대감을 품은 채 현실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기 무섭게 옆에서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크기로 도저히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칠흑빛 바위가 자리해 있었다.

'이거 중량이······.'

혹시 이 안전가옥 아파트 바닥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 그는 급히 어물술로 거석을 들어 올렸다. 마침 그때 무용이도 곁에서 깨어나선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쩌적···!

선명한 균열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한유진이 뭔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

쩌적···! 쩌저적-!

콰지지직-!

그 커다란 바위에 무수한 균열이 생겨나더니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황망한 와중에도 파편들을 모조리 허공에서 어물술로 받아내며 그는 중심부를 살폈다.

새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겨우 축구공만 한 크기의 바위만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백색 빛무리는 마치 다섯 종류의 색상이 뒤섞인 듯 언뜻언뜻 색채가 흐트러지는 모습이다.

잠시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추가적인 붕괴는 없겠다 싶어 파편들을 저물대에 수납한 뒤.

그 축구공만 한 크기의 오행진령거석, 이제는 그냥 오행진령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물건을 끌어와 손으로 잡아 들었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살짝 찌릿한 느낌을 주면서도 부드럽다. 무게 역시 제멋대로 변하면서 내부의 무언가가 요동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태을오행도경은······?'

신식으로 내부를 살피려 해 봤으나 신기하게도 전혀 뚫고 들어가질 못했다. 게다가 모종의 반발력까지 느껴지는 것이, 무리해서 시도했다간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듯했다. 그 자신에게나 이 물건에게나.

아마도 삼경조화결로 제련해야 될 것 같다.

판단하며 잠시 더 그것을 살피다가 슬쩍 제련을 시도해 보자.

그 즉시 내부의 영령이 느껴졌다. 영령 역시 한유진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한 듯 꽤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파파팍···!

공기가 희미하게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오행진령석 위쪽으로 또 다른 빛무리가 형태를 이룬다. 살짝 긴장하여 그것을 보던 한유진은 완성된 형태를 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참새 같았다. 크기적으로나 형태적으로나.

삐약- 삐약-!

게다가 울음소리는 무슨 병아리를 닮았다. 이제 막 태어났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하나 그럼에도 느껴지는 힘이 입문기 초기 정도는 되는 듯했다.

아마도 일정 수준까진 빠르게 성장해서 금방 법혼기를 넘어 결단기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무려 통천령보의 영령이니까.

"안녕."

한유진은 영령의 여러 뒤섞인 감정들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모든 감정들의 바탕에 깔린 순수함을 느끼면서 애매한 표정 대신 미소를 띠어 보였다.

삐약-! 삐약삐약! 삐약-!

"그래, 뭐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제련하면 의사소통도 가능해지겠지."

말하면서 그는 조금 더 주의하는 채로 삼경조화결을 운용했다. 그것을 느낀 오행진령석의 영령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기색이었다.

날개를 파닥이면서 폴짝폴짝 뛰다가 한유진의 팔에 내려앉아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옆쪽에서 까만 눈을 빛내며 코를 씰룩이는 무용이를 쳐다보기도 한다.

'설마 태어나자마자 자존심이 강해서 제련을 거부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는 때.

다행히 영령은 순진해서인지 아니면 스스로 판단을 내릴만한 근거가 있는지, 한유진의 심경 단계 제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통천령보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게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고 느낌 또한 순조로웠다. 계속 이대로라면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아 체경 단계 제련까지 전부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슬슬 제련을 통해 연결되기 시작한 덕인지 그는 오행진령석 내부의 무수한 법문법결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저절로 두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걸 애써 참았다. 오행진령석을 들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행여나 영령이 놀랄까 싶었기 때문이다.

태을오행도경(太乙五行道經)이 분명하다.

자그마치 통천령보라는 물건을 통해서 보관해야 했을 만큼 귀중한, 오행에 대한 공법 중에선 아마도 수선계 최고를 다투지 않을까 싶은 그런 도경이다.

그 자신의 사기적인 각성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손에 넣지 못했을 보물 중의 보물이기도 했다.

'합체기 수사쯤 되어야 이걸 쟁탈해서 손에 넣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바로 그런 물건이 지금 이렇듯 눈앞에 있다. 오행진령석이라는 통천령보와 함께.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얼마나 감격이 컸는지, 함께 수확물로 선택했던 동천 보물 산해주의 존재를 잠시 잊었을 정도였다.

99화. 루미너스 은하제국 

오행진령석을 제련하며 그 영령과 충분히 교감한 뒤.

그는 저물대에 잠시 보관했던 파편들을 꺼내 살폈다. 아무래도 통천령보를 이루던 물질인 만큼 범상치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연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통천령보의 일부였던 물질이 평범할 리 없다.

해당 파편들은 오행의 속성을 품은 돌이자 금속이었다. 정말로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의외로 이런 특성을 가진 물질은 지구에도 존재했다.

자철광이라든가, 황철광이라든가.

어쨌든 실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선물이었다. 원래 법보 재료로 삼으려 했던 그 무엇보다도 적절하게 느껴진다. 무려 오행 속성의 통천령보를 구성하던 재료이지 않겠는가?

'여기에 몽환 쪽 특성을 가진 재료만 추가됐으면 좋겠는데······.'

그런 건 아마도 이번에 넘어가게 될 세계에서 찾아봐야 할 듯하다.

다음으로 살핀 것은 당연히 산해주였다.

이것 역시 삼경조화결로 제련해야 했지만 지금은 딱히 주인이 없는 상태인지라 손쉽게 작동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산해주는 빛을 발하며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지더니 하나의 출입구로 변하게 됐다.

안쪽으로 드러나는 풍경은 놀랍도록 쾌청한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생기 넘치게 푸르른 산봉우리, 그리고 반대편 한쪽의 작지도 크지도 않은 호수의 경관이었다.

'이게 초기 상태란 말이지.'

전성기 상태였을 때는 아마도 산봉우리가 아닌 산맥이, 호수가 아닌 수평선을 이루는 바다가 자리해 있었을 터다.

지금은 연청빛 구름 같은 느낌의 시공간 경계가 몽환적이지만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어 마치 비경을 둘러싸며 짙은 안개가 낀 듯했다.

"가보자."

무용이를 품에 안고, 오행진령석을 옆 허공에 띄운 채로 그는 산해주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만족스럽게 와닿는 것은 싱그러운 산내음이었다. 기온은 봄날 혹은 가을날처럼 딱 좋게 포근하면서 시원했고, 영기 농도는 지구의 두 배가 좀 안 되는 수준으로 예상보다 높았다.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한 산봉우리엔 여러 형태의 지형이 알맞게 분포해 있어 어떤 종류의 건물도 무난하게 지을 수 있을 듯했다.

또한 보이는 모든 식생들이 비록 수준이 낮을지언정 일종의 영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몇 종류 나무는 천원성 강의를 통해 들어본 것이었다.

'잎을 가공해서 부적지를 만들 수 있는 나무였을 텐데.'

하급 중에서도 아주 흔한 종류라지만 어쨌든 영식이다.

신식을 광범위하게 펼쳐보니 식물 이상의 생명체가 감지되진 않았다. 식물만으로 이 생태계가 잘 유지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제련을 하면서 천천히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용이는 이 장소가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필시 지구보다 짙은 영기 농도 때문일 것이다. 자연적인 환경도 녀석에게 훨씬 더 익숙할 테고.

대략 산봉우리 탐사를 마친 후엔 호수로 이동했다.

호수라고 칭하긴 했지만 사실, 물에 염분이 포함된 것을 신식으로 감지한 터라 작은 바다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게 느껴졌다.

산봉우리와 그 작은 바다 사이에 적당한 크기의 담수 못이 따로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나중에 진짜 호수가 될 것 같다.

작은 바다 내부에는 역시 물고기 등이 없고 모양 예쁜 해초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부 일종의 영식이었고 말이다.

산해주는 확실히 영보급 동천 보물이었다.

법기, 법보, 영보, 통천령보로 나아가는 보물 등급 중 영보급이라는 건, 특히나 이것이 동천류 보물임을 고려했을 때 다른 비교할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물건임을 뜻한다.

고작 법기급에 불과한 저물대가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강성한 세력의 종문 보물로 삼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이지.'

정황상 오행종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말법의 재앙 속에서 고위층 인사들의 최후 피난처로 삼아졌을 정도니까.

안타깝게도 그 피난처 계획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진지하게 시도됐었다는 점이 이 보물의 가치를 증명한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되다니.'

은은하지만 뿌듯하게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그는 어디에 어떤 형태의 집을 지으면 좋을지, 다른 건물이나 창고 등을 지을 필요가 있을지, 여러 요소들을 고민하며 느긋하게 내부를 거닐었다.

이것으로 장기간 이세계를 방문할 모든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 * *

영원여신교를 처리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양의 카르마를 얻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지식과 각성초 보급이 성과를 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터다.

사실 지금이라도 기다려도 될 만큼 성과가 눈앞에 다가온 상태였지만.

일의 진행에 혹시 모를 암초가 나타날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세계를 다녀온 후 붕 뜨지 않은 정돈된 심신으로 문제에 대처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녀왔을 때 체감 시간이 얼마나 지나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이원희를 만나고 박세룡과 대화하는 등 일종의 쉼표를 하나씩 찍어두었다.

대균열에서도 또 한 차례 괴물들을 쓸어버리면서 미리 여유를 확보해 두기도 했다.

그렇게 사소한 부분들까지 한 번씩 전부 살핀 뒤.

미환진기를 설치한 안전가옥에서 그는 눈을 감고 각성 능력을 발동했다.

깨어난 대기 장소에서 무용이 챙기기를 포함한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천변만화하는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여태 이 각성 능력은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느낌의 세계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설마 이 드넓은 우주에 그런 세상이 하나 없을까.'

믿음과 함께 뻗어진 손이 문의 형상을 고정시킨다.

곡선의 아치 형태를 가진 문이었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금속이 곳곳에 투명한 수정을 품은 채 테두리를 구성했고, 표면에 기하학적 패턴처럼 새겨진 법문이 시선을 잡아끈다.

특별히 손잡이가 보이진 않았으나 손만 대면 바로 열릴 듯, 문 중앙에 입체적 빛의 형상을 띄워내는 패널이 자리해 있었다.

- 루미너스 성역의 루미너스 은하제국 소속 G-164 거주행성.

성역(星域).

낯설지만 한 번 들어봤던 표현이다. 바로 강호무림 세계에서 암영마교를 토벌할 때 만났던 그 인피가 언급했었다.

어느 성역의 어느 천(天)에서 왔느냐면서.

'그렇다면, 우주가 여러 성역으로 구분돼 있고, 그 아래 천이라는 분류가 존재한다고 보면 되는 건가.'

생각하면서 그는 홀로그램 패널 같은 부분에 손을 올렸다. 그 즉시 문이 부드럽게 좌우로 열리며 건너편 광경을 드러냈다.

여지없이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품고서 문을 통과한다. 그 문이 환상처럼 사라질 때쯤, 품에 늘어져 있던 무용이가 하품과 함께 정신을 차리곤 주위를 둘러봤다.

'흠.'

SF적 느낌 가득한 도시 한곳에 도착하게 되리란 예상은 틀렸다.

아주 먼 거리를 두고서 그런 느낌을 품은 도시의 모습이 보이긴 했다. 하나 막상 그가 서 있는 장소는 너무나 자연 친화적이었다. 전혀 관리받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숲과 호수와 평원 등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일단 몽환유심으로 기척을 감추고 오행천둔술로 주위를 빠르게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았다. 당연히 환몽심탈술로 기억을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한 그는, 상대 무리의 행색과 천막 등의 거주지를 보며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마치 유목민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하고 세련된 도시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잠시 후.

그들 무리의 외곽에서 한 장년인의 기억을 성공적으로 읽어내자 대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로 유목민이었군.'

이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이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 행성이 루미너스 은하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명맥이 끊기지 않은 원주민들이었다.

제국은 이들을 탄압하거나 하는 대신, 이들이 원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준 채로 일종의 문화유산처럼 보호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어째서 여기에 문이 열렸는지 알겠다.'

고도로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명확한 신분이 필수적이다. 반면 이들의 경우 워낙 전통적인 방식대로 살아가는지라 제국에서조차 이들의 신원을 전부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즉.

한유진 자신은 이 원주민 유목 부족 출신으로 뿌리를 위장할 수 있을 터였다. 마침 장년인의 기억을 읽어냄으로써 배경지식도 얻은 상태였고.

'딱 좋군.'

유목 부족민들이라고 해서 전부 한마음 한뜻으로 이 생활을 기꺼워하는 것이 아니다. 매년 제국의 문명을 동경해 이탈하는 자들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니 자신도 그렇게 제국의 문명에 동경을 품은 유목 부족민으로 위장하면 될 것이다.

'아주 떳떳하게 명확한 신분을 얻는 셈이지.'

아마도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으로 짐작되는 만큼 실로 괜찮은 방법처럼 느껴졌다.

유목민 장년인의 기억 속, 제국의 시민이 되길 원하는 이들은 그냥 무작정 멀리 보이는 도시를 향해 나아갔었다. 그리고 몇 명은 자신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보여주려고 이곳으로 돌아왔다가 배신자 취급이나 받으며 쫓겨났던 기억도 존재했다.

즉, 성공적인 방법임이 명확하니 그대로 따라서 하면 될 일이었다. 옷차림도 이들 유목민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입혀진 상태였으니 훔치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무용이는······.'

찍! 찍!

그의 고민을 느낀 듯 무용이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래, 유목민이 애완동물 한 마리 데려갈 수도 있는 거지."

그 애완동물이 무려 법혼기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지만, 일단 몽환유심으로 위장해 보다가 정 문제가 될 것 같으면 그때 산해주로 들여보내면 될 것이다.

장년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프로필 한 편을 뚝딱 완성해 낸 그는 빠르게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십여 분 뒤.

도시가 그냥 눈으로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음을 체감할 때쯤, 그는 도시를 둘러싼 장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상함을 들키지 않게끔 속도를 줄인 상태였다. 대략 입문기 수사가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이건 일종의 진법인가, 아니면 기술로 만들어진 물질인가.'

도시를 둘러싼 장벽은 신기하게도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모습이었다. 땅과 맞닿은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여 그 존재가 쉽게 눈에 띄지만 위쪽 하늘로 갈수록 점차 투명해지며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광경이다.

동시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윤곽이 그저 매끄러운 것이 아니라 여러 육각형 면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정말로 SF스러운 느낌을 가득 풍기는 구조였다.

우웅···!

신식으로 파악해 보려 한 순간 은은한 공명음이 흘러나와 즉시 거둬들여야 했다.

'확실히 정식으로 신분을 얻는 게 좋겠군.'

도시 전체를 이런 방어벽으로 둘러쌀 수 있는 수준의 문명이라면, 어설픈 속임수로 숨어들었다간 허무하게 발각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방벽을 따라 정문 따위가 나타나길 바라며 얼마를 이동했을까.

마침내 어느 군사기지의 검문소를 연상시키는 정문이 나타났다. 평소에도 이런 식인지 출입하려는 이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매우 한가한 풍경이었다.

다행히 그냥 기계장치 따위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 여섯 명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경찰 느낌이 나는 제복에 SF적 느낌이 나는 금속 부츠와 건틀릿, 그리고 몸통 방어복을 착용한 모습이다.

그들은 진작부터 감시장비를 통해 한유진의 존재를 파악한 듯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결단기 수사인 한유진의 신식에 그들의 대화 내용이 여지없이 잡혀 든다.

"두 달 만의 시민권 신청자인데, 누가 상대할래?"

"내가 할까?"

"네가? 웬일이야?"

"그냥 좀 따분해서. 접수처 근처에 볼일도 있고."

딱히 유의해서 들을 필요는 없는 잡담 같았다.

적당히 접근했을 때, 한유진은 마침 시선이 마주친 한 명에게 슬쩍 환몽심탈술을 펼쳤다. 당연히 이 세계에서의 빠른 적응을 위해 정보를 얻을 심산이었다.

그렇게 외부에서는 0.1초도 안 될 짧은 순간, 그러나 대상이 빠진 꿈속에서는 족히 십여 분이 넘도록 흐른 순간.

한유진은 현실 세계에서 표정을 찡그릴 뻔했다.

'······입문기 수준밖에 안 될 녀석의 정신 방어력이란 말이지, 이게.'

검문소의 인원들은 모두 머릿속에 웬 이상한 칩 같은 것을 하나씩 박은 채였다. 그 칩이 주변의 온갖 시설 및 장비들과 연동되어 정신 침입을 방어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그냥 평상시의 방어 상태로만 보였으나 그럼에도 상대의 기억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전부 뭉개져 온갖 노이즈가 섞인 영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만일 여기서 더 적극적인 정신 침입을 시도한다면 바로 빨간불이 들어올 것임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뚫는 일 자체는 쉽지만 그 과정에서 안 들킬 수가 없다는 뜻이다.

자연히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이게 됐다.

하나는 강제로 정신 방어를 뚫고서 기억을 한 번 좌르륵 읽어낸 뒤, 이번 방문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재방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짜 유목 부족민처럼 상대의 절차에 따라 하나하나 배우면서 이 세상에 적응해 보는 것이다.

'편하기는 전자가 훨씬 낫겠군.'

하지만.

이곳이 매우 수준 높은 문명을 갖춘 세계임을 새삼 느끼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만 조금도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정 답답하면 그때 다시 첫 번째 방법을 노려봐도 되겠지.'

그리고 도시 안쪽에선 이런 정신 방어가 없는 적당한 대상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을 내린 그는 몽환유심만을 펼치며 자신과 무용이의 기세를 감춘 채 검문소에 도착했다.

100화. 정착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