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 * *

마력 고갈 증세였다.

순간이동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이었다. 순간이동은 쿨타임이 짧고,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신 어마어마한 마력을 소모한다고 했다.

'나랑 진세아 두 명을 데리고 연달아 썼으니.'

마력이 고갈 될만도 하다.

"잠시만요."

나는 지난번 게이트에서 푸른 꽃으로 만들었던 물약을 건넸다.

"고마워요."

그걸 받아 마신 윤서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와 물약을 번갈아 본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요?"

"제가 잘 만들었나보죠."

"지한씨가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러고보니 지난번 게이트 공략 때 윤서현은 협회의 지원을 부른다고 미리 돌아갔었다.

"나도, 나도 줘요!"

진세아가 내 쪽으로 다가와선 손을 내밀었다. 뭐, 어차피 만들기는 어렵지 않으니까. 녀석에게도 한 병을 건넸다.

"헉. 뭐야, 이거."

요리 스킬과 포션 제조 스킬이 합쳐져서 맛이 좋은가 보다. 그보다 윤서현에게도 고유 서클 생성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마력 부족은 이걸로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서현씨, 이거 한 번 보시죠."

나는 고유 서클을 불러왔다. 심장 주변을 도는 게 아닌, 내 몸 전체를 공전하는 마력의 원.

"뭐에요? 어떻게······?"

"아, 맞다! 언니 내가 알려줄게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스킬이라 그런지 윤서현의 관심을 보였다. 걸인 송정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방식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잠시 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와, 언니 맞아요. 그거에요!"

윤서현은 고유 서클 생성을 1분만에 깨우쳤다. 사실상 보자마자 그대로 해냈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

'진짜냐.'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내 입이 슬쩍 벌어졌다.

'윤서현의 재능도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그녀의 언니인 윤지은은 최후의 11인 중 하나인 무한의 궁사였다. 윤서현도 그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윤서현은 원래대로라면 게이트에서 죽었을 운명이었으니까.

어쨌든 윤서현도 고유 서클을 개방했다. 도움 받은 것도 있고 앞으로도 여러번 도움을 받을테니 미리 알려주는 게 낫다.

'그러고보니 새로운 특성이 있었지. 한 번 다시 사용해 볼까.'

나는 타재간파를 활용했다.

『 '무재조정 : 타재간파'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대상 윤서현에게 잠든 재능을 확인 합니다. 』

버서커 신아람에게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재능을 미리 확인해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되는 건가.'

『 대상에 대한 정보가 현저히 적습니다. 』

『 대상 윤서현의 개화 가능한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초공간인지 : S

- 차원도약 : SS

- 절대 공간 창조 : SS

'미친.'

그녀가 가진 재능을 확인하는 내 미간이 좁혀졌다. 각 항목의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윤서현이 가진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건 충분히 확인했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고유 서클 생성을 너무 빨리 익혀서 놀랐을 뿐입니다."

"후후, 이래봬도 저 협회 공채 1등으로 들어간 사람이에요. 이 정도야 간단하죠."

둘 다 착각하고 있나본데, 일반적인 헌터가 익히려면 3개월 걸리는 걸 단숨에 해낸 거다. 나야 무재조정 덕에 경험치가 10만배라고 쳐도······.

'윤서현 헌터를 협회에 남겨 두는 건 너무 아까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윤서현의 재능 중 하나를 선택했다. 그나마 재능 개화 난이도가 낮은 초공간인지부터.

『 재능 '초공간인지'를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난이도는 S입니다. 』

타재간파를 통해 타인의 재능을 개화시키면, 나 또한 그 수혜를 받는다.

『 대상 윤서현을 마력 폭주 상태로 만들 것 』

'이건 불가능해보이는데.'

마력 폭주 상태는 마력 고갈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너무 많은 마력이 한 번에 체내로 흘러 오는 탓에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

마력 폭주 상태에선 스킬과 능력의 제어가 불안정해진다. 생명이 위험할 수 있으니 접어두는 게 맞다.

'지금은 윤서현의 재능을 확인해 둔 것만으로 만족하자.'

나머지 재능들의 개화 난이도는 전부 SS급. 지금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는 김에······.'

진세아의 재능도 미리 확인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조건이 맞는다면 재능을 개화 시켜줄 수 있으니까.

『 대상에 대한 정보가 충분합니다. 』

- SSS급 영웅, 최후의 11인, 환세의 도둑, 기인······.

『 진세아의 개화 가능한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신속(神速) : A

- 절대은밀기동 : S

- 리미트 해제 : SS

'허.'

목록을 살피는 내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가장 맨 처음에 있는 신속(神速). 이건 히든 특성 중 하나였다.

'최후의 5인 천성호도 가지고 있던 특성이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속도가 빨라진다는 단순한 효과지만, 그 사기성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전투 중에 계속해서 강해지는거나 다름 없었으니.

『 재능 '신속'을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난이도는 A입니다. 』

『 대상 진세아가 1시간 이내에 자신의 등급보다 두 단계 높은 마수를 5마리 사냥할 것 』

'가만보자. 지금 진세아가 D등급이고, 여기에 있는 권속들이 B등급이니까.'

굉장히 해볼만하다. 오히려 거저 먹는 수준인데.

"진세아, 강해지고 싶냐?"

"그걸 말이라고 해요? 완전 강해지고 싶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우리는 동굴의 내부를 계속해서 나아갔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딘가 숨어 있을 중독의 마족을 찾아야 했다.

'신태양이 있었으면 바로 찾아냈을 수도 있었을텐데.'

동굴 내부는 전혀 어둡지 않았다. 다만 어디에서 권속이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긴장감을 유지하며 나아갔다.

5분쯤 갔을까.

콰드득!

벽 속에 숨어 있던 권속 고블린 하나가 뛰쳐나왔다. 놈의 손에 들린 시퍼런 나이프.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진세아였다.

푸욱, 푸욱!

놈의 심장과 목에 두 차례 단검을 박아 넣은 진세아는, 그대로 권속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깜짝이야."

놀란 것 치고는 침착한 대처다.

"아직 안 끝났어."

굴 너머에서 마력 탄환이 몇 개 날아왔다. 나는 대검으로 탄환을 전부 쳐냈다. 우리의 앞과 뒤를 포위한 권속들이 달려왔다.

"전부 죽여버려!"

"그대로 뭉개!"

콰아아앙!

윤서현의 손 끝에서 쏘아진 검보랏빛 광선이 큰 폭발을 일으켰다. 레이저처럼 바닥을 훑은 마력이 권속들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형태의 스킬이었다.

"어, 어?"

스킬을 시전한 윤서현도 얼떨떨한 표정.

"고유 서클 생성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거 장난 아니네요."

펼쳐지는 전투는 권속들이 불쌍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우리의 압도적인 승리. 놈들은 다시 동굴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으음, 이 둘 중 하나가 확실해요."

"두갈래 길이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결국 진세아의 절대 직감에 의존해 동굴을 나아갔다. 워낙 미로 같은 곳이라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해매었을까.

검은 기운에 휩싸여 있는 중독의 마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땅으로 내려왔다.

"용케 여기까지 왔구나.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잘려나갔던 팔 한 쪽이 마기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녀석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봤다.

어째 마족들은 반응이 하나같이 비슷하다. 마족이란 종족에 대한 끝 없는 긍지. 다른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오만한 말투.

놈의 주변부로 퍼져나가는 마기.

그곳에서 다시금 권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오는 길에 대부분이 토벌 당했기에 남은 건 세 명 뿐.

"뭐냐, 다 어디갔어."

"죄송합니다. 전부 당했습니다."

남아 있는 권속들도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중독의 마족이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작 인간 세 놈한테 당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저런 열등한 종족에게 내 권속들이 죽었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대검을 들고 그 앞으로 걸어나갔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야."

고유 서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마력이 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땅을 박차고 놈을 향해 뛰어 나갔다.

중독의 마족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화르륵!

검은 마기가 불처럼 타오르며 내 앞길을 막았다. 그러나 일자베기 한 번에 모든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중독의 마족은 자신의 권속을 발로 차서 밀어냈다. 그걸 미끼 삼아 다시금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이번에는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녀석을 중심으로 동굴의 붉은 벽이 촉수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놈을 중심으로 모여든 붉은 가닥들은 하나의 구를 이루더니, 커다란 거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히, 히익!"

"사, 살려주십쇼!"

살아남은 세 마리의 권속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의를 상실한 놈들을 처리하는 일은 간단했다.

놈들의 뒤로 다가간 진세아가 단검을 꽂아 넣었다. 몇 번의 전투를 거치는 동안 진세아의 움직임은 한결 더 빠르고 날렵해져 있었다.

"다 잡았어요! 근데······. 저거는 어떻게 하죠?"

살덩이들이 뭉쳐 만들어진 거인을 바라보는 진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겉모습만 보면 그럴만도 하다.

공포스럽다기보단, 징그러운 쪽에 가깝지만.

"모두 끝장내 주마."

마족의 목소리가 동굴 내부로 쩌렁쩌렁하게 퍼져나갔다.

『 마도(魔道)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중독 : 체력과 마력이 급속도로 줄어듭니다. 』

제대로 작정을 한 것 같다. 이 공간에 얼마나 마기를 많이 모아둔 건지, 거인의 관절 부분에서 연기처럼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질 것 같은 생각이 안든다.

띠링.

『 타재간파의 발동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

『 진세아의 재능 '신속(神速)'이 개화합니다. 』

타재간파 그 두번째 능력이.

『 특수 스킬 '신속 Lv.1'을 획득합니다. 』

『 해당 스킬의 유지 시간은 30분 입니다. 』

내게 깃들었으므로.

66화 마계의 틈(3)

10m가 넘는 크기의 거인.

붉은 가닥들이 엮여서 만들어진 녀석의 몸은 기괴했다. 그 중심부에 융합 되어 있는 중독의 마족이 광기에 젖어 소리쳤다.

"전부 죽어라!"

쿠우웅!

내 키만한 크기의 주먹이 지면을 강타했다. 붉은 동굴의 바닥이 크게 쪼개지며 튀어올랐다.

『 스킬 '신속(神速) Lv.1'을 발휘합니다. 』

『 전투 중 지속적으로 속도가 1% 증가합니다. (최대 50 %) 』

카가각!

나는 대검으로 파편을 막아내며 돌진했다. 바로 왼편에서 진세아 또한 거인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게 보인다.

'진세아의 재능 신속.'

본래는 진세아의 히든 특성이지만, 나는 타재간파의 힘을 빌어 잠시 스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금 거인의 팔이 휘둘러졌다. 거인의 몸에서 나온 촉수들이 가공할 속도로 지면을 꿰뚫었다.

'움직임이 전부 보인다.'

나와 진세아는 양 옆에서 쏟아지는 촉수들을 전부 피하며 달려나갔다. 신속의 효과는 가히 사기적.

시간이 지날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콰아앙!

양 옆으로 내려찍은 거인의 주먹. 나는 그 위에 올라탔다. 주먹에 대검을 꽂아넣고서 놈의 어깨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카가가각!

대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거인의 팔을 갈래 갈래 헤짚어 놓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진세아 또한 나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딜!"

거인의 흉부에 상반신만 내놓은 중독의 마족이 양 손을 펼치자, 거인의 몸에서 돋아난 촉수들이 나와 진세아를 노리고 쏟아졌다.

"으아악!"

달려가던 진세아가 주춤하며 멈춰섰다.

그 수는 자그마치 수백 개.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지만.

『 스킬 '신속(神速)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신속(神速) Lv.3'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신속(神速) Lv.4'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신속(神速) Lv.10'을 획득합니다. 』

일순 눈 앞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날이 선 채로 다가오는 수백의 촉수 하나하나가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마족이 온 마기를 쏟아부어 만들어 낸 산물이, 내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

'이게 최대 레벨의 신속.'

나는 마력이 담긴 대검을 휘둘러 놈들을 모두 지워냈다.

촤아아악!

거인의 어깨를 박차고 뛰어 올라 진세아가 있는 반대편 어깨까지 단번에 도달했다. 내 칼날에 잘려나간 촉수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왓! 엥?!"

갑작스런 내 등장에 진세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내 스킬은 신속의 원 주인인 진세아를 뛰어 넘었다.

진세아를 노리고 쏟아지던 촉수들 또한 대검 앞에 전부 잘려나갔다.

"지금이에요!"

윤서현의 외침과 함께 거인 주위의 허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촤르륵! 촤르륵!

허공에서 솟아난 네 줄기의 보랏빛 사슬이 거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대단한데.'

진세아 뿐만 아니라 윤서현도 확실하게 강해졌다.

"이, 이 새끼들이! 인간 주제에 감히!"

거인의 가슴팍에 박혀 있는 중독의 마족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악을 쓰는 걸 보니 놈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

나는 가볍게 뛰어 중독의 마족을 향했다.

"어째서냐, 마족인 내가 왜 인간 따위에게 지는 거냐!"

그들은 언제나 최상위 포식자로서 군림해 왔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세계 전반에 깔린 마기는 마족들을 더없이 강하게 했고, 마계와 비슷하게 조성된 이 세계는 놈들의 필드나 다름 없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내가 있는 한 마족들이 인류 위에 군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칭호 마계의 재앙 덕분에 내 데미지는 10배.

내가 그어낸 선은 위 아래로 끝없이 뻗어나가 한 줄기의 기둥이 되었다. 강력한 섬광이 거인의 중심부를 꿰뚫었다.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동굴 전체를 헤짚어 놓았다.

쿠구구구!

마지막 순간, 중독의 마족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인간에게 당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일인 거겠지.

'내 생각보다 위력이 엄청난데.'

나는 사뿐히 바닥 위로 착지했다.

뒤늦게 동굴 내부로 휘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업적 정산이 완료 되었습니다. 』

『 압도적인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이계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최하위 마족 부동, 중독 처치

- 기록 : 데미지 S, 전투 S, 특수 스킬 SS, 영향력 SS, 능력 활용 S······.

- 종합평가 : S+

『 이계 규율에 따라 보상을 지급합니다. 』

* * *

또 다른 마계의 틈새.

유적 제단의 한가운데.

"그럼 슬슬 시작하도록 하겠다."

기록의 마족이 선언했다. 두루마리 형태의 마기의 원천을 손에 쥔 기록의 마족은 자신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런 마족을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김상욱이 있었다.

'젠장, 이거 떨리네.'

빌런 조직 '환령'을 소탕하고, 프로젝트 마기에 사용할 제물을 들고 간 김상욱. 그는 계약을 통해 이미 이지한에게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한테 너무 위험한 임무를 주는 거 아니냐고. 실패하면 내 모가지가 날라갈 판인데.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고.'

어제 김상욱은 이지한의 말대로 기록의 마족의 일기장을 훔쳐봤다. 명령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마기를 사용해 해석한 마족의 일기장.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 미친놈들, 지구를 싹 다 갈아 엎을 생각이었잖아.'

단순히 이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야욕 정도가 아니었다. 철저히 파괴하고 인류라는 종을 멸절 시킬 계획. 세계를 마계와 다름 없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

그게 마족들의 진짜 목표였다.

'아무리 내가 성공에 눈이 먼 놈이어도 이건 아니지.'

마족에게 줄을 잘 서서 미래에 부유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게 김상욱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그저 노예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전부 죽고, 마족의 발닦개로 살아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 프로젝트 마기는 내가 무조건 막는다.'

물론 이지한의 명령이 있었으므로 거부할 권리는 없었지만.

'이지한······. 당신은 이걸 전부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대체 뭐하는 사람이신겁니까. 아니지, 그건 아닌가.'

김상욱이 좌우로 머리를 털어냈다. 이지한을 향한 맹목적인 찬양이 노예 계약 탓인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응?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냐?"

기록의 마족의 붉은 눈동자가 김상욱을 향했다.

"아뇨,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김상욱은 완전무결한 미소를 연기했다. 어차피 기록의 마족의 능력으론 자신의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섬세한 의식이니 절대로 방해하지 말아라. 특히 제단 내부로는 들어오지 말아라."

마족의 말에 맞춰 권속들이 제물로 사용될 빌런들을 끌고 왔다. 기록의 마족이 마기의 원천을 위로 들어 올리자, 제물들의 심장에서 검은 기운이 뽑아져 나왔다.

국내에 하나 남은 마기의 원천.

기록의 마족은 억지로 프로젝트 마기를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김상욱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의식이 진행되는 유적의 가장 자리를 부수랬지.'

자신의 주인인 이지한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른다. 그리하면 어떤 원리로 의식이 실패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오오, 기록의 마족이시여!"

"주인님의 강대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양 팔을 들어 올리고 기록의 마족을 찬양하는 권속들.

김상욱은 의식에 참여하는 척 양팔을 들고, 천천히 물러났다.

유적의 가장자리.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장소. 그 끝 부분을 마력을 담은 발로 세게 밟았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커허어억!"

기록의 마족에게로 흘러들어가던 마기가 갑자기 역류하기 시작했다. 얼굴과 목에 잔뜩 핏대가 선 기록의 마족이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괘, 괜찮으십니까?!"

"일단 의식을 멈춰라!"

당황한 권속들이 기록의 마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된건가?'

김상욱도 마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제단 위로 올라간 권속들의 심장에서 검은 기운이 뽑혀나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폭포처럼 쏟아진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 권속들의 몸에서 빠져나간 마기는 허공으로 모여 들어 구체를 형성했다.

"커허억······!"

"주인이시여······!"

마기를 잃은 권속들의 피부가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기록의 마족도 폭주하는 마기를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크으윽, 어째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목을 부여 잡은 기록의 마족. 실패한 의식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제단 주위의 권속이 지닌 마기까지 빼앗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김상욱은 뒷걸음질쳤다. 아니, 아예 뒤돌아서 도망치려고 했다.

콰아아아앙!

마계의 틈새를 뒤덮는 강력한 폭발만 없었더라면 그리 했을 것이다.

* * *

『 칭호 '마족의 천적'을 획득합니다. 』

『 1. 마(魔)속성 대상으로 25% 데미지 상승

2. 마도 - 제약 무시 5% 』

'필드에 제한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칭호잖아.'

이제 하위 마족인 '발전의 마족'과의 전투만을 남겨 두고 있다. 마족들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그 강함 또한 비약적으로 강해진다.

최하위 마족을 가볍게 썰어 버릴 정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상대해야 할 마족은 앞으로도 계속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칭호는 의미가 있다.

"여기요, 열쇠. 보수는 나누는 거 맞죠?"

"그래."

진세아가 가지고 있던 검은 열쇠를 내밀었다. 이건 발전의 마족의 연구소로 갈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근데, 진짜 궁금한게 오빠······."

열쇠를 넘긴 진세아가 미간을 좁혔다.

"왜 이렇게 세요? 아무리 그래도 저건 심하잖아요."

녀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검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일자베기에 의해 생겨난 구멍이었다.

윤서현도 한마디 거들었다.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죠? 분명히 F급이었잖아요.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이건 정말로······."

믿기지가 않는다는 투다.

"딱히 숨긴 건 아닙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특수했던 것 뿐이고요."

실제로 진세아의 재능 개화와 마계 필드가 겹쳐 이만한 시너지가 났을 뿐이다. 앞으로도 이런 행운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거고.

"잠시만요."

나는 뻥 뚫려 있는 구멍 근처로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져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 마기의 정수 』

'뭐야, 이건.'

마정석이 아니라 특이한 보석이 떨어져 있었다. 오색찬란한 빛을 내는 자수정 같다. 그걸 인벤토리에 집어 넣는 순간이었다.

드드드······.

주인을 잃은 공간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마계의 틈새에서 벗어나 우리들은 버려진 놀이공원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어, 어라? 던전 바깥?"

던전 자체가 마족들이 생성해낸 장소라 그런건가.

"그럼 이걸로 공략은 끝이네요. 모두 고생했······."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세 명의 스마트폰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 서울 시내 A급 게이트 발생, 브레이크 발생 가능성 농후

- 근처의 시민들은 안전한 장소로 대피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셋의 전화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각자가 자연스레 전화를 받아들었다.

"지금 협회에서 긴급 소집이요?"

"엥, 택배가 왔다고요?"

진세아는 별로 급한 용무가 아닌 것 같다.

나도 전화를 받아들었다.

김상욱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이제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의식은 저지했나?"

- 그것 때문에 난리 난 겁니다! 지금 서울에 생성된 게이트, 위험하니까 절대 가까이 가지 마십쇼!

김상욱이 프로젝트 마기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나보다. 그렇다면 더더욱 기회였다. 마족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기회.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 게이트 근처에서 망보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까 그거 폭발한다고 왜 말 안해줬습니까! 저 죽을 뻔했다고요!

그래서 가장 자리에서 하라고 알려준 거다.

"어쨌든 잘했네. 기록의 마족은 살아 있나?"

-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설마 여기로 오시려는 건 아니죠?

나는 지시 사항을 몇 개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협회와 전화 통화를 끝낸 윤서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긴급 소집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방금 재난문자에 나온 게이트로요. 들어보니까, 상위 길드들이 단체로 공략에 나선다는데······."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나는 손에 쥔 검은 열쇠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으며 물었다.

프로젝트 마기의 실패로 생긴 게이트. 틀림 없이 의식 장소와 연결 되어 있을 거다.

그곳에서 열쇠를 사용해 발전의 마족까지 일망타진할 기회였다.

"그거야 괜찮죠."

윤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공간이 천천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동할게요. 세아야, 미안한데 돌아가는 건 혼자 갈 수 있지?"

"자, 잠깐! 나도 갈래요!"

진세아가 급하게 우리 쪽으로 달려오며,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게이트 붕괴까지 얼마 남았어?!"

"장비 준비 확실하게 해!"

"야, 거기 주변에서 얼쩡대지말고······."

게이트 주변은 임시로 설치한 천막으로 가득했다. 번화가에 갑자기 생성된 고위험군 게이트.

게이트가 붕괴하기 전에 공략하는 게 급선무.

때문에 협회는 여러 길드에 동시에 공략을 요청한 것 같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인원 제한이 있는 게 아닌 경우, 사람이 많을수록 안정적인 공략이 가능하니까.

"저는 협회 쪽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일단 은빛의 날개로 가셔도 될 거에요."

윤서현이 급하게 사라졌다.

"너, 괜찮겠어?"

나는 진세아에게 물었다. 이미 던전 하나를 공략해서 피곤할텐데.

"물론이죠. 그리고 아까 던전에서 굉장히 강해졌거든요? 몸이 더 가벼워졌다고 해야하나."

히든 특성인 신속을 새로 얻었을 거다. 내 타재간파 덕분이지만, 딱히 생색을 낼 수 있는 스킬이 아니네 이거.

은날이 위치한 천막을 찾아 가는 도중.

'잠깐만.'

부산스러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의외의 얼굴이 보였다. 익숙하지만, 가장 경계해야하는 인물.

"저 사람은······."

67화 합동 공략(1)

지극히 평범한 얼굴.

잘 생기지도, 못 생기지도 그렇다고 특징적이지도 않은 생김새.

그러나 나는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대마법사 김민수.'

최후의 5인 중 하나.

그는 피난민과 함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리더 천성호, 성녀 채아연과 같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 영웅······.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민수는 배신자다.'

인과역전 물약의 효과로 미래에 갔다가 돌아오던 때에 나는 내 최후의 순간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유일한 회귀 포탈로 내가 빨려들어가는 순간 김민수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 남아 있던 검은 기운이 기억에 선명하다.

보호막을 해제하고, 마력 포탄의 침입을 허용한 것도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가 인류를 배신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일개 피난민 신분이었던 내가 영웅들의 사정을 낱낱히 알 수는 없는 법이지만.

'배신의 시기는 언제부터였던거지?'

만약 처음부터 김민수가 마족의 끄나풀이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김민수를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낀 김민수의 시선이 나와 맞부딪혔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이내 관심을 돌린 김민수는 자신의 길드원들을 향해 무어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김민수는 오성 길드의 길드장이다.'

대한민국 3대 길드 수호, 은날, 오성.

오성은 현재 길드 순위는 3위지만 대기업 오성의 자본력을 뒤에 엎은 탄탄한 길드였다. 그곳의 길드장이 김민수다.

'당장은 천천히 살피는 수밖에.'

그가 배신자라고 해도 그걸 증명할 증거가 없다. 그저 동향을 살필 뿐이다. 어쨌든 주의할 필요는 있었다.

"저기, 은빛의 날개가 있네요!"

진세아가 가리킨 방향, 흰 천막 아래에 은날의 길드원들이 모여 있었다. 은날 부길드장 윤지은과 긴장한 표정의 신아람도 보인다.

"우리는 저기로 갈거야."

"엥, 은날이 아니라요?"

"너는 은날로 가도 돼."

은빛의 날개 밑에 있으면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하다. 대형 길드일수록 체계가 잡혀 있어 위쪽의 명령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기가 어렵거든.

"으음······."

잠시 고민하던 진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오빠 따라갈래요."

녀석의 직감은 그런 답을 내놓은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여러 길드들이 많이 왔네.'

갑작스런 고위험 게이트 출현. 시내에 발생한 일인만큼 언론의 주목도는 높았다.

안전선 바깥에서는 연신 플래쉬 세례가 터져나왔고, 허가를 받은 기자들이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다.

때문에 이번 공략에 참여하는 길드의 수가 꽤 많았다.

'어림잡아 서른 길드는 되겠는데.'

어떻게든 한 숟가락 얹어 보겠다는 심산이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 게이트 공략에 참가하는 길드 수가 많을수록 공략 성공률은 올라가니까.

나는 여러 천막을 지나쳐, 삼각형의 심볼이 새겨진 곳을 찾아갔다. 보라색 천막이었다.

"어? 여긴 백묵 아저씨네 길드?"

심볼을 알아 본 진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보 길드 호라이즌.

임시 천막 아래 장발의 여성이 나를 먼저 알아봤다.

"이지한 헌터님이시군요. 백묵님의 비서 박정현입니다.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직접 뵙게 될 줄이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백묵님은 해외에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셔서 귀환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백묵님께서 이지한씨의 편의를 최대한 봐달라고 하셨거든요."

다른 길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여야 하니,

호라이즌의 이름만 빌려서 공략에 들어갈 생각이다.

* * *

"현재 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게이트 등급은 A입니다. 내부는 숲이지만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총 세 개의 길드를 필두로 공략이 진행 될 예정이고요."

나와 진세아에게 배지를 나눠준 박정현은 덤덤히 게이트 정보를 브리핑했다. 차가운 목소리와 눈빛이지만 어쩐지 친절함이 느껴진다.

"세 개의 길드라면······."

"맞습니다. 수호, 은날, 오성입니다."

"A등급 게이트라고 판정이 났으니, S급 헌터들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겠군요."

일반적으로 A등급 게이트 공략에는 S급 헌터가 참가하지 않는다. 공략 도중 더 높은 등급의 게이트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첫번째 이유다.

현시점 존재하는 최대 난이도의 게이트는 S급.

최상위 게이트 공략을 대체할 인력은 전무하니까. 다른 이유는 길드 간의 견제와 후임 헌터 양성과 같은 이유가 차지하고 있다.

"해서 수호 길드는 '신태양'을 필두로, 은날 길드는 '신아람'을 필두로 공략에 나설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성은 아직입니다. 오성에서 리더를 정하는대로 게이트 공략이 시작될 거구요."

신태양은 그렇다고쳐도, 신아람은 은날에 들어간지 하루가 막 지났을텐데. 그만큼 신아람의 실력이 믿을만하단 거겠지.

박정현의 설명을 듣던 진세아가 나를 쳐다봤다.

"신태양이면 그때 그 사람 맞죠? 그 재수 없는 느끼남."

"맞아."

"그러고보니까 오빠는 신태양 그 사람이랑 어떻게 알아요? 스승이라고 부르던데······. 진짜에요?"

"그 녀석이 멋대로 부르는 거야. 말하자면 복잡해."

나는 호라이즌 길드의 배지를 가슴팍에 달고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여기 호라이즌 길드 맞습니까······?"

"잘 찾아 왔군."

김상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에 휘말렸다 그랬나. 옷이 엉망이었다. 나는 그에게 호라이즌 길드의 배지를 건넸다.

"우리는 호라이즌 길드의 이름을 걸고 들어간다."

"들어간다고요?!"

김상욱의 얼굴이 하얘졌다.

"지금 저기를 들어간다고 하시는······! 커헉."

"잠시 이야기 좀 나누지."

발작하려는 김상욱을 조용히 천막 뒤쪽으로 끌고 갔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저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조용히 말해. 듣는 사람 있을 수도 있다."

내 말에 주변을 슬쩍 살핀 김상욱이 목소리를 낮췄다.

"기록의 마족이 폭주한 뒤로 최하위 마족들이 그 자리를 메꾸려는 탓에 난장판이라고요."

"그러면 더더욱 잘 됐네."

"네?"

나는 호라이즌 길드의 배지를 김상욱의 가슴팍에 달아줬다.

"전부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겠어."

"미, 미친 거 아닙니까? 상대는 마족이라고요, 마족."

"그게 우리 적이잖아."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는 나를 바라보며, 김상욱이 머리를 쥐어 뜯었다.

"아니, 진짜로 이거 미친 짓이라니까요······."

그리 말하면서도 터덜터덜 걸어 나를 따라온다. 그렇게 천막으로 다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서 코코아를 홀짝이던 진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상욱을 쳐다봤다.

"그러면 이 수상하게 생긴 아저씨까지 합쳐서 저희 세 명이서 가는 거에요?"

"어이, 어린 친구야. 수상하다니. 나처럼 믿음직하게 생긴 사람이 어딨다고."

"일단은 그렇지."

때마침, 밖에 나가 있던 박정현이 돌아왔다.

"오성에서 리더가 정해졌습니다. 정도현이라는 오성 유망주입니다. 이지한씨 일행은 오성의 지원을 맡아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백묵 덕분에 활동하기 편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준비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던전을 공략하려고 나왔던 거니까.

"그러면 공략 출발하죠."

"와, 이런 대규모 공략은 처음이라 왠지 설레요."

"저만 어떻게 봐주시면 안 됩니까?"

응, 안 된다.

* * *

공략 개시.

우리는 오성 길드의 뒤를 따라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끝 없이 펼쳐진 울창한 숲.

'생각보다 게이트 내부는 멀쩡한데.'

김상욱의 말에 따르면 보스방이 문제란다.

어쨌든 게이트 내부는 정확히 세 갈래 길로 나뉘어져 있었다. 편의상 루트 A,B,C로 부르기로 했다.

오성은 루트 A를 맡기로 했다.

"뭐를 기대하고 여기에 오셨을지는 대강 짐작이 갑니다만······.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크게 없을 겁니다."

오성의 유망주 정도현이 지원 나온 길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공략에서 오성은 1순위로 보스를 공략할 겁니다. 그러니, 뒤쳐지는 길드가 있더라도 굳이 끌고 가지 않겠습니다.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빨리 후방으로 빠지던가 하세요."

잘난 듯이 말하는 정도현. 그러나 거기에 토를 다는 인물은 없었다.

'오성에서도 실력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헌터니까.'

홍염 정도현.

그는 대마법사 김민수의 제자로 매스컴에도 자주 출현하고 이름이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와, 되게 재수 없네. 뭐에요? 저 사람?"

얘는 티비도 안 보나. 재수 없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정도현은 S급을 눈 앞에 둔 헌터다. 실력만큼은 확실하다.

특히 잠재력은 현시점 대한민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

"뭐, 정도현 정도면 양반이지."

뒤쪽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날은 왠 듣도보도 못한 신인을 데려다 놨던데."

"신아람이던가? 수호 길드 신태양 따라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우리는 정도현만 따라가면 피 볼 일은 없겠어."

사람들의 여론은 이러했다.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무렵.

콰아아앙!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붉은 폭발이 치솟아 올랐다. 지축을 울리는 강렬한 굉음. 오성을 따라 움직이던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뭐, 뭐야?"

수백여 마리의 까마귀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저기 루트 C 아니야?"

"은날이 공략하는데잖아. 뭔 일 난 거 아니야? 내 그럴 줄 알았다."

"저 정도로 강한 마수가 있다고?"

사람들은 수군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게 마수의 짓이 아니란 게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아앙! 콰아앙!

연달아 터져나오는 폭발. 나무의 키를 아득히 뛰어 넘어 치솟는 흙먼지. 그것은 틀림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역시 신아람.'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동급에선 사실상 무적이나 다름 없다.

그녀의 활약은 전파 마법을 통해 오성이 있는 장소까지 금방 전해졌다. 앞서가던 정도현이 못 믿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사고가 난 게 아니라 공략 중이라고? 무슨······."

그러나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루트B에 해당하는 숲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푸른 빛의 섬광이 고속으로 뻗어나갔다. 눈부신 은하수처럼 길게 늘어진 광휘. 예술적이기까지한 기예에 사람들의 눈은 순식간에 현혹 되었다.

"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한 순간.

동시에 숲 위에 새겨진 별빛 하나 하나가 강렬한 빛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폭죽놀이처럼 연달아 터져나가는 별빛의 무리.

그것은 숲에 난 길 전부를 헤짚고 지나가는 폭격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말을 잃었다. 도무지 사람이 보여주는 능력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기술이다.

지금까지 자신만만했던 정도현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뭐합니까, 빨리 버프 안 걸고!"

그리하여 수호, 은날, 오성 사이의 보이지 않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정도현은 마력을 쏟아부어가며 화염 기둥을 소환했다.

마수들을 재로 만드는 홍염의 기둥.

그런 대규모 마법을 난사하는데 버텨낼만한 마수들은 없어보였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뭐야, 이럴 거면 안 따라왔죠."

진세아가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요, 친구가 말 한 번 잘 꺼냈네. 이런 별 거 없는 게이트 그냥 빨리 돌아갑시다."

김상욱은 정말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던 진세아가 킥킥댔다.

"아저씨가 잘 모르시네. 이 오빠 한 번 꽂히면 다른 사람 말 절대 안 듣거든요. 근데 또 그게 말이 되니까 문젠데······."

그런 잡담을 하며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공략은 순조로웠다.

앞서가는 정도현만 빼고.

은날과 수호 길드를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허억, 허억······. 포션."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게 보였다. 그런 그를 보조하는 길드원들이 버프와 포션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대규모 마법을 너무 난사했어. 마력 고갈 증세가 심해졌을텐데.'

어쩐지 김상욱도 조금 초조한 표정으로 불평했다.

"거 참. 말은 그럴싸하게 해놓고, 벌써 지치면 어쩌자는 건지. 보스가 있는 장소로 갈수록 마수들이 강해질 겁니다. 의식 실패 때문에 마계에서 온갖 마수들이 튀어나오고 있을 거라고요."

"저기 가서 말해주지 그래."

"그건 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그랬던가. 앞서가던 수색꾼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뭔가 날아옵니다!"

쿠웅!

어디선가 날아 온 바위 덩어리가 우리의 앞에 떨어졌다. 충격파와 함께 흙먼지가 50명 가량의 사람들을 뒤덮었다.

"퉤, 퉤. 아놔."

입에 들어간 흙과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던 진세아가 상대를 확인하고선 눈을 반짝였다.

"설마 골렘?"

서서히 몸을 일으킨 놈은 온 몸이 바위로 이뤄져 있는 거인이었다. 그 몸 군데군데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근데 골렘과는 뭔가 다른데.

김상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괴암종 그롤······."

네임드 마수였다.

괴암종은 몸 자체가 바위인 종족.

화염 속성의 정도현과는 상성이 안 좋다.

"그래, 슬슬 질릴 참이었는데 이 정도는 나와줘야지."

땀을 뻘뻘 흘리며 씩 웃는 정도현.

어쩐지 허세처럼 밖에는 안보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불길이 괴암종 그롤의 위로 떨어졌다. 하늘 높이 올라가는 불꽃의 기둥. 그 위력만큼은 확실해 보였으나.

쿠웅, 쿠웅!

그롤은 화염 기둥을 뚫고 두 걸음만에 정도현에게로 다가갔다. 놈의 손에 쥐어진 돌망치가 정도현을 강타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머리 위를 지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크허억······."

날아간 건 정도현이었다. 바닥을 수십 차례 구르고나서야 멈춰선 그는 추욱 늘어졌다. 각종 보호마법과 버프를 받았음에도 기절할 정도의 충격.

동요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동요가 혼란으로 이어질 뻔한 가운데.

"다, 다들 진정하십쇼! 일단 대열을 갖춰야 합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숲 전체로 울려 퍼졌다. 오성 길드의 다른 헌터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래, 마법사들 캐스팅 준비해!"

"장벽 마법부터 빨리!"

덕분에 사람들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진정 스킬인가.'

과연 상위 길드의 공략대답다. 후방에 있던 헌터들이 정도현의 상태를 살피러 달려가고, 탱커 스킬을 가진 헌터들은 전방으로 나아갔다.

카앙! 카앙!

헌터들의 칼날이 그롤에게 부딪혔지만, 작은 먼지만 만들어낼 뿐 데미지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크아악!"

오히려 그롤이 망치를 휘두르자, 전방에서 주의를 끌던 탱커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상욱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롤 저 놈, 힘은 그렇다쳐도 진짜 무서운 건 방어력입니다. 날붙이 면역이라고요. 타격계 공격이 아니면 통하지도 않습니다."

"헐, 그러면 어떻게 해요?"

"도망 가야하지 않을까?"

내 눈치를 보는 김상욱.

그도 나름 A급 헌터일텐데.

그렇게까지 겁먹는 걸 보면 상대하기 까다롭단 의미였다. 그리고 저 너머엔 저 놈 같은 괴물이 한참이나 더 있을테고.

"파이어볼!"

"마력 탄환 갑니다!"

"매직 애로우!"

후열에 있던 딜러들이 마법과 함께 소리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그롤을 향해 떨어지는 마법 세례.

콰광! 콰앙!

그롤은 피할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잠시 웅크려서 공격을 받아낸 그롤. 놈의 몸에 있는 마정석들이 반짝였다.

'저걸로 마력 피해를 흡수한 건가.'

놈은 다시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뭐, 저런 괴물이 다있냐?!"

김상욱이 기겁을 했다.

어쨌든 김상욱의 정보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나섰다.

"노다지가 눈 앞에 있는데 도망가면 안되지."

놈의 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정석은 꽤 탐이 난다.

날붙이가 먹히지 않는다면, 깨부수면 되는 거 아니야.

『 오르티마가 '곡괭이 Lv.1' 의 형태를 취합니다. 』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1'을 발휘합니다. 』

나는 근처에 숨어 있던 바위를 향해 곡괭이를 내리찍었다.

콰아앙!

산산조각이 나는 바위 덩어리.

그롤도 온 몸이 바위라면 원리는 같을 터.

『 스킬 '채굴 Lv.11'을 발휘합니다. 』

내가 이런 건 특히 잘하거든.

68화 합동 공략(2)

부웅!

괴암종 그롤이 휘두른 돌망치가 헌터들을 몰아냈다. 근육처럼 온 몸을 가득 채운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응축된 힘.

헌터들은 쉽사리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쿠우웅!

망치가 땅을 크게 내려찍자 땅이 움푹 파였다. 자칫 정통으로 맞았다간 뼈도 못추릴만한 공격이었다.

A급 게이트에 나타난 네임드 마수. 그 능력치는 일반 마수들과 비교 불가능한 정도였다.

카앙!

어쩌다가 헌터들이 그롤에게 공격을 해도 문제였다. 그들의 칼날은 단단한 바위 피부를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다들 진형 유지해요! 방어막 전개 부탁합니다!"

오성 길드의 사람들이 최전선에서 어찌어찌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그래도 조금은 버티겠지.'

나는 뒤를 돌아 무리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김상욱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후퇴하신다는 판단!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저 숲 너머에는 그롤보다 더한 놈들이 득실 거릴 거라구요."

"후퇴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뒤쪽에서도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숲에서 뛰쳐나온 늑대 몇 마리가 후미를 교란하고 있었다.

"정도현부터 치유사한테 보내!"

"저한테 버프 좀 부탁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마수들도 전부 A급. 일반 마수라지만, 수가 많아지면 주의를 요해야 한다.

"무조건 막아요!"

나는 그곳을 향해 뛰어 들었다.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1'을 발휘합니다. 』

새하얀 빛을 흩뿌리며 달려나간 장소엔 늑대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A급 마수라.'

능력치만 놓고 본다면 아직 부족하다. 내 랭크는 C급 상위. 60레벨.

그러나 각종 스킬들과 미래에서 배워 온 신태양의 검술이 조합된다면.

서걱—!

일반마수 따위는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았다. 양 손으로 쥔 대검이 늑대 하나를 양단했다.

"뭐, 뭐야. 저 사람."

"어디 길드야?"

전투에 갑작스럽게 뛰어든 나를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들도 A급 헌터. 전투의 양상을 읽는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다.

『 이로운 버프가 몸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

나를 향해 버프가 쏟아졌다. 그 기세를 몰아 나머지 늑대 다섯 마리를 처리했다. 버프가 더해지니 몸 놀림이 한층 더 가벼워졌다.

푸욱!

마지막 한 마리의 복부에 대검을 찔러 넣었다.

'이 녀석은······.'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내가 그롤을 놔두고 굳이 후방으로 온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곡괭이로 변한 오르티마를 꺼내들었다.

'오르티마가 변신한 물건은 레벨을 가지게 된다.'

곡괭이도 마찬가지.

지금은 Lv.1짜리 평범한 곡괭이지만.

늑대를 잡아 경험치를 먹인다면 쓸만한 무기가 될 거다.

콰앙!

곡괭이로 늑대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무수한 빛이 곡괭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 곡괭이(오르티마)의 레벨이 오릅니다. 』

『 곡괭이(오르티마)의 레벨이 오릅니다. 』

···

『 곡괭이(오르티마)의 레벨이 오릅니다. 』

'좋았어.'

나는 아이템 정보를 살폈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곡괭이(오르티마) Lv.100

- 효과 : 공격력 + 30

- 최대레벨 추가효과 : 채굴력 50% 상승

'미쳤는데.'

30의 공격력이면 레어 아이템 못지 않은 능력치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다시 괴암종 그롤이 있는 최전선을 향해 달려나갔다.

"엑, 어디 가시는 겁니까!"

"뭐야, 설명 좀 해줘요!"

그 뒤를 김상욱과 진세아가 따라나섰다.

* * *

"크아악!"

전면에서 그롤을 막아서던 탱커가 나가떨어졌다. 뒤쪽에서 힐과 버프를 넣어주는데도 이 정도였다.

오성 길드원 김준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젠장, 이젠 못 막아.'

그는 이번 공략에서 오성의 리더로 발탁 된 정도현의 서브였다. 지휘 능력은 자신이 훨씬 뛰어났기에 어느 정도 버텼다지만 이제 한계였다.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는 헌터가 이 파티에는 없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냐.'

물리 공격을 무시하는 단단한 외피와 마법 공격도 흡수하는 마정석. 보스급의 마수가 도대체 왜 길 한복판에서 막아서는지 이해가 안갔다.

'대체 이 게이트 보스는 얼마나 강하길래, 벌써부터 저런 놈이 나와.'

그는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정도현, 정도현은 어딨습니까?!"

"지금 치료 중입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했는데, 마력 고갈이 심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답니다."

"포션 먹여서 끌고 오십쇼! 지금 상황 급한 거 안 보입니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루트에 있는 길드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라고 있는 통신석이기도 했고.

"지원 요청 하시죠. 이거 안됩니다."

"후방 마력도 거의 다 떨어져 간답니다."

김준석은 이를 악물고, 그런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젠장, 내 손으로 오성 이름에 먹칠을 할 순 없잖아.'

더군다나 루트 B와 C를 이끌고 있는 건 신태양, 신아람 같은 신인이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라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도현 시켜서 폭파 마법 준비하라고 합시다."

이건 정도현을 짜내서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문제는 그런 그의 판단이 명백한 실수였다는 것이다.

콰아아앙!

탱커 셋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방어 마법이고, 버프고 소용이 없었다. 귀찮게 굴던 전열이 사라지자 바위 거인은 단숨에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돌진.

"이, 이런! 막아! 막으란 말입니다!"

당황한 김준석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런 그의 외침이 무색하게 바위 거인은 전열을 뚫고 들어왔다.

"으악!"

"일단 물러나!"

"거기 조심해!"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한 진영.

놈은 그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돌망치를 들어 올렸다.

김준석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 젠장!'

미처 피하지 못한 김준석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

모든 걸 포기한 김준석이 눈을 질끈 감으려 한 순간.

뒤쪽에 있던 남자 하나가 뛰어 올랐다. 그런데 그 남자의 손에 들린 물체가 너무도 예상외의 것이었다.

"고, 곡괭이?!"

푸른 마력을 뿜어내는 곡괭이 한 자루.

김준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제대로 된 무기를 가져와도 될까 말까한데 곡괭이라니.

그러나 적어도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그 남자가 김준석의 구세주였단 거다.

카아앙!

시원하게 휘둘러진 곡괭이가 바위 거인의 팔을 깨부쉈다. 그 단단하던 바위 피부가 유리처럼 튀어오른 것이다.

"이거지."

괴암종 그롤의 팔 한짝을 떼어낸 이지한이 미소지었다.

* * *

모든 생물에게는 약점이 있다.

가령 슬라임은 베는 공격에는 약하지만, 타격에는 강하다. 말랑한 신체와 내부의 체액이 충격을 완화해 주기 때문이다.

반면 골렘은 참격에 강하지만 타격에 약하다. 외부에서 전달 되는 충격을 몸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눈 앞의 네임드 마수 괴암종 그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점을 노리는 스킬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암석이나, 단단한 지반을 깨부수는 내 스킬 채굴. 일반적으로는 마수에게 사용되는 스킬이 아니다.

그렇기에 비전투 스킬이라고 불리는 것이지만.

'그롤은 채굴의 조건에 딱 맞다.'

조건만 갖춰진다면 더 없이 효과적인 스킬로 변모하는 게 바로 이 비전투 스킬이었다. 그 효과는 벌목 스킬로 진작에 확인했었다.

카아아앙!

수 십 조각으로 쪼개진 그롤의 팔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야말로 폭약을 터트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 스킬 '중급 채굴 Lv.1'을 획득합니다. 』

'미쳤군.'

재능의 파편을 두 개 모은 덕일까. 놈의 팔이 부숴지는 것과 동시에 중급 채굴 스킬을 획득했다.

"마정석은 내가 모을게요!"

한구석에서 뛰쳐나온 진세아가 파편 중에서 마정석만을 골라내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크어어어!

팔 한 쪽을 허무하게 잃은 그롤이 괴성을 내질렀다. 마기가 담긴 함성이 대기를 울렸다. 몸이 저릿저릿하게 떨려온다.

뒤편에 있는 헌터들은 몸을 움츠렸지만, 나는 다시 곡괭이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를 발휘합니다. 』

카아앙!

내가 휘두른 곡괭이가 그롤의 어깨 부근을 강하게 타격했다. 파편들이 미친 듯이 솟구쳐 올랐다.

『 스킬 '중급 채굴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중급 채굴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중급 채굴 Lv.10'을 획득합니다. 』

다시 땅으로 착지했을 때엔, 그롤의 몸이 반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

걸걸한 소리를 내뱉는 그롤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후회, 할 거다."

그리 말하는 놈의 전신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온 마기는 그롤의 몸을 재구성했다.

콰득, 콰드득.

그런 그롤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눈에 경악이 새겨졌다. 오성의 서브 리더 김준석만이 그런 상황에서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빠, 빨리 저 사람한테 버프 몽땅 다 거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시지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 바람 정령의 가호를 받습니다. 속도가 증가합니다. 』

『 거신의 축복을 받습니다. 힘이 증가합니다. 타격 범위가 증가합니다. 』

『 초목의 향기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체력이 증가합니다. 』

···

쏟아지는 버프의 향연.

대형 길드의 리더는 이런 버프들을 받고 있는 거였다. 새삼 감탄스럽다.

다른 루트의 신태양과 신아람도 이런 느낌으로 게이트를 공략해 나가고 있으니, 그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게 당연했다.

부우웅!

마기로 왼팔을 재생성한 그롤이 망치를 휘둘러왔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곡괭이를 정확하게 휘둘렀다.

카아아앙!

놈의 돌망치와 내 곡괭이가 맞부딪혔다. 그롤의 크기는 내 세 배. 크기로 보건데, 당연히 내가 밀려나야 마땅했지만.

쩌적, 쩌저적!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중급 채굴 Lv.11'을 획득합니다. 』

『 채굴력이 100% 상승합니다. 』

망치 한 가운데를 정확히 노린 공격에 그롤의 망치로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나갔다. 나는 더욱 힘을 주었다.

『 스킬 '거인의 힘 Lv.10'을 발휘합니다. 』

콰아앙!

그롤의 망치가 산산조각이 나며 수 백개의 조각으로 나뉘었다. 놈의 무력화 된 지금, 나는 그 틈으로 파고들었다.

카아앙! 카아앙!

쉴새 없이 곡괭이를 휘둘러 놈을 채굴한다. 그 몸에 남아 있는 마정석을 남김 없이 채굴하겠다는 생각으로 곡괭이를 내리 찍었다.

압도적인 상성 앞에 그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산산히 부숴졌다.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2'를 획득합니다. 』

곡괭이를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녀석의 형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후, 저도 다 주웠어요. 이거 팔면 대박. 집 살지도."

옆에서 열심히 튀어나간 마정석을 줍던 진세아가 자랑스레 브이를 했다. 잘 챙겼다. 내가 잡은 마수인데 보상은 확실히 챙겨야지.

나는 고개를 들어 뒤에 있는 헌터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못 이기던 마수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으니 그럴만도 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오성 길드의 김준석이었다.

"어디 소속이십니까?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나는 말없이 가슴팍에 매단 뱃지를 보여줬다.

"호라이즌······. 정보 길드인 줄만 알았는데. 굉장하군요."

"상성이 좋았던 것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어쨌든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침 전용 기술을 가진 분이 계실 줄이야."

김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까지 묻지 않는 걸 봐선, 상성이 좋았다고 보는 것 같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우리는 잠시 쉬면서 부상자들의 치료와 정도현의 회복을 기다렸다.

다른 루트에서 간간히 폭발이나 섬광이 터져 나왔기에 오성 입장에서 조급할 법도 하다.

그래도 방금 일을 계기로 진행을 늦추기로 판단한 모양.

나는 급격하게 말이 없어진 김상욱을 바라봤다.

"아직도 돌아가고 싶나?"

"그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놈이 아닌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근데 저런 놈들이 저 안에는 더 많다는 게 문제죠."

"네 정보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김상욱이 그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서 한결 대처가 쉬웠다. 그리고 저 앞에는 루트 B와 C를 공략 중인 신태양과 신아람이 있다.

'단체로 몰아붙인다면······.'

승기는 우리 쪽에 있다.

나는 김상욱에게 마족들의 규모를 더 상세히 들었다. 최하위 마족 여섯에 권속 스물 정도.

'충분히 할만한데.'

어쩌다보니 협동 전투가 되었는데, 이걸 기회로 삼는다면 훨씬 순조로운 공략이 가능해 질 것 같다.

"잠깐, 저거 뭐에요?"

문득 진세아가 루트 B에 해당하는 숲 건너편을 가리켰다. 보랏빛의 거대한 촉수가 위로 치솟아 올랐다.

"미친 저건 또 뭐야?!"

구름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난 촉수가 루트 B의 길목을 향해 떨어졌다.

쿠우우웅!

그 충격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려왔다. 비현실적인 광경 앞에 주변의 모든 헌터들이 얼어붙었다.

적막히 가라앉은 침묵 속.

치직, 치지직.

김준석이 들고 있는 통신석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루트 B. 수호 길드 신태양 및 다수 행동 불능, 긴급 지원 요청 바람.

69화 합동 공략(3)

통신석에서 지원 요청이 흘러나왔지만, 선뜻 나서는 헌터는 없었다.

방금 전에 괴암종을 상대로 쓴 맛을 본 뒤라 더욱 그랬다.

루트 B에서 솟아난 보랏빛 촉수.

그것이 바닥으로 엎어지자마자, 통신석이 울렸다.

루트 B에는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 있다는 건지.

헌터들은 서로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됐다.

"저희 길드가 지원 가도 되겠습니까. 이 두 사람하고 같이 가죠."

"잠깐, 저희가 지원 가는 겁니까?"

"그럼 우리가 가지 누가가."

김상욱이 기겁하며 물었다. 아마 김상욱은 루트 B에 나타난 마수의 정체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더더욱 같이 가야지.

'그리고 신태양을 구해야 한다.'

미래의 검성이자, 어쨌든 내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놈이다. 녀석은 앞으로 해야할 일이 산더미만큼 있다. 이런데서 쓰러지게 둘 순 없다.

지원을 간다는 말에 오성의 김준석이 화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호라이즌 길드셨죠. 그래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저희 오성에서도 사람을 하나 보내겠습니다."

지원 요청을 받았으니, 명목상 한 명은 보낸다는 거였다. 여성 헌터 하나가 우리쪽으로 붙었다.

추가적으로 지원을 받았으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김준석은 쓰게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게이트 바깥으로도 사람을 보냈을테니 금방 지원이 올 겁니다. 조금만 힘내주세요."

오성도 해당 루트를 완전히 비워둘 순 없었다. 저 앞에서 늑대 무리가 대열을 이뤄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붙잡지는 않는 걸로 봐서, 아까 괴암종을 잡을 때 내 역할은 다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도끼 정령 파괴자로 변한 오르티마를 들어 올렸다.

루트 A와 루트 B는 빽빽한 숲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곳을 뚫고 가려면 나무를 베어서 길을 개척해야 한다.

진세아 정도면 나무 위를 뛰어서 이동할 수도 있겠다만. 나한테는 없는 재주다.

『 스킬 '벌목 Lv.11'을 발휘합니다. 』

쩌어억! 쩌억!

고유 서클이 생기고 나서부터 자연스레 무기에 마력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마력을 담아 휘두른 도끼날이 나무를 사정 없이 쪼갰다.

"우와, 역시 벌목 기계."

진세아가 감탄했다.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나무가 쓰러지며 길이 생겨났다. 번잡한 수풀도 도끼를 내리찍는 걸로 깔끔하게 잘려 나간다.

'너무 늦지만 말아라.'

신태양이 쓰러졌다곤 해도, 수호 길드의 헌터들은 실력 있기로 유명한 자들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헌터들만 모아둔 곳이니까.

그렇게 약 5분 정도.

콰아앙!

우리는 루트 B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들 보호막 최대한 유지해! 곧 있으면 지원이 올거야!"

"마력 전부 쏟아부어!"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초토화 된 땅.

그리고 거대한 황금빛 방패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보호막이 되어 전방에서 쏟아지는 보랏빛 촉수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쉴 새 없이 촉수들이 금빛 방패를 두드렸지만, 방어막은 견고했다. 그 방어막을 생성한 장본인은 수호 길드의 서브 리더 이수연이었다.

'황금 방패 이수연.'

S급 헌터조차 그녀의 방어막은 뚫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방어 마법에 특화된 인물이었다. 그녀가 막고 있는 장소는 정면.

"루트 A에서 지원입니다!"

우리는 측면으로 나왔기에 헌터들에게 쉽게 합류할 수 있었다.

"지, 지원이다!"

"근데 누구······?"

한순간 환호성이 일어날 뻔했으나, 우리의 모습을 살핀 헌터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가 그만큼 강력하단 의미였다.

"이리로 오세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그곳으로 가보니 힐러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일단 쓰러진 부상자들을 옮겨주세요. 게이트 바깥에 있는 S급 헌터들이 올 때까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쓰러진 사람들 중에 신태양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신태양이 입은 옷이 붉은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외상은 회복 되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모양.

"엇, 그 분은 수호 길드 리더세요. 지금은 그 쪽보다······."

나는 힐러의 말을 무시하고 신태양에게 다가갔다.

'이 정도로 쓰러질 녀석이 아닌데.'

어느새 다가온 김상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안 좋은데요. 정신 오염에 제대로 당한 것 같습니다. 저 권속 놈은 그런 기술을 쓰거든요."

"그런 거였구만."

외상은 회복 되었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한마디로 디버프에 걸려 있는 상태다.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붉은색 약병을 꺼냈다.

나는 약병을 뒤집어 신태양의 입으로 한 방울을 흘려보냈다.

"무슨 짓이에요!"

힐러가 뒤늦게 달려와 제지하지만 이미 먹였다. 신태양의 몸으로 퍼져나간 유니콘의 피가 녀석의 모든 상태를 정상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으음······. 스, 스승님?"

정신을 차린 신태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 * *

"······여기는 저승인가요."

"뭔, 개소리야."

"크흑, 설마 스승님도 그 놈한테 당해서 죽으신 건가요?"

"헛소리말고 일어나."

"컥."

나는 신태양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다시 싸워야지."

여기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쿠우웅! 쿠웅!

권속의 공격이 포탄세례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폭격.

전방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는 금빛 방패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신태양은 잠시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계셨군요. 옆에 두 분은 제 팬? 일리가 없죠. 젠장."

진세아와 김상욱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은데 원래 이런 놈이다.

신태양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졌습니다. 스승님도 어서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세요. 저 놈은 S급 헌터들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이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싸우러 가야지. 이대로면 S급 헌터가 지원 오기 전에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을텐데."

"그래도 저건 진짜 괴물이라고요. 공격이 하나도 안 먹힙니다. 그런 놈을 어떻게 이겨요."

옆에 있던 김상욱이 신태양의 말을 거들었다.

"거 말 잘하셨네. 저 놈은 진짜 괴물 맞습니다."

그러고보니 김상욱은 저 권속의 정체를 알고 있다.

"자세히 말해봐."

"여기서요?"

"그래."

함께 온 오성의 헌터는 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갔다. 여기에 남은 건 우리들 뿐이다. 잠시 눈치를 보던 김상욱이 입을 열었다.

"놈의 이름은 이형생물 로바크. 하위 마족의 권속인데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약점은?"

"촉수가 마력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라, 고밀도의 마력이 아니면 유효타를 주기 힘들 겁니다. 본체를 노려도 되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죠."

술술 말하는 김상욱.

그런 그를 신태양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근데, 이 분은 누구······?"

"아, 내 부하."

"부하라뇨, 더 좋은 말 없습니까?"

"노예."

"······."

콰아아앙!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앞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나왔다. 전방을 보호하고 있던 황금 방패가 산산히 부숴지는 소리였다.

저 멀리 요사스런 마기를 흩뿌리는 권속의 모습이 보인다.

"지원은 아직 안 온 것 같고."

"이러면 어쩔 수 없네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낸 신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쥔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

"스승님 앞에서 너무 약한 소리만 해버렸네요. 그래도 버텨봐야겠죠."

그게 검성이 될 신태양이니까.

"그러고보니 스승님하고 같이 싸우는 건 처음이네요."

신태양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형생물 로바크라 그랬나.'

온갖 버프를 중점적으로 받은 신태양이 이기지 못할 상대이니, 쉽지는 않을 거다. 더군다나 하위 마족의 권속이란다.

'지금껏 상대했던 최하위 권속들과는 차원이 다를 거다.'

최하위에서 하위. 그 단계가 하나 올라가는 것만으로 마족 간의 격차는 지대해진다. 권속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그걸 극복할만큼의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그러려면······. 우선은 이거다.'

나는 신태양을 바라보며 특성 타재간파를 사용했다.

『 '무재조정 : 타재간파'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대상 신태양이 소유한 잠재 재능을 확인 합니다. 』

『 대상에 대한 정보가 충분합니다. 』

- SSS급 영웅, 검성, 버서커의 스승, 공간을 베는 자······.

타재간파는 내가 미래에서 알아낸 정보까지 담고 있다. 하여 신태양에 대한 것들은 충분히 알고 있다. 미래에 가서 직접 검술을 배워오기도 했을 정도니.

『 재능 개화 난이도가 감소합니다. 』

『 신태양의 개화 가능한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오러 블레이드 : A

- 저주 받은 재능 : S

- 리미트 해제 : SS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재능이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일반적으로 검에 마력을 두르는 것을 마력 부여라고 한다. 이것이 정교한 형태가 되면 검기라고 부른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마력을 무기 위로 발산 시킨다면 검은 폭발적인 절삭력과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을 오러 블레이드라고 부른다.

'이 재능을 지금 개화할 수 있다면······.'

전투의 양상 자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개화 조건을 확인했다.

『 재능 '오러 블레이드'를 선택하셨습니다. 』

『 대상 신태양이 자신보다 뛰어난 경지를 마주할 것 』

이 세계에서 검을 가장 잘 쓴다는, 검의 천재보다 더 뛰어난 경지를 보여준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근데 될 것 같다.'

그 개화 조건은 내게 있어 더 없이 유리했다.

콰아앙! 콰앙!

"도, 도망가!"

"전부 피해!"

하늘 위로 뻗어나간 촉수가 지면을 강타했다. 방패를 잃은 헌터들은 마구잡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뭐? 입구가 닫혀? 그게 무슨 소리야?"

수호 길드원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멀쩡하던 게이트 입구가 닫혀 버렸단다. 신태양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이거 무조건 이겨야겠네요."

그말대로였다. S급의 지원을 받는 건 불가능해졌다.

"그래, 까짓꺼 해봅시다! 에이씨, 돌아갈 생각도 없으신 것 같은데 한 번 죽었다하고 해보죠!"

옆에 있던 김상욱이 가면을 꺼내 쓰며 말했다.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멋쩍은 듯 변명했다.

"아니, 제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안들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거야 그렇다.

"진세아하고 김상욱 둘은 주변으로 다가오는 다른 마수들을 처리해줘. 저 로바크는 나랑 신태양이 처리한다."

"좋아요. 부르면 바로 달려 갈게요!"

진세아는 전투에 참여할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신속 특성이 있다. 일단 예열해 놓고 있다가 전투에 참여시키면 도움이 될 거다.

그 전에.

"신태양 우선 이걸 봐라."

"네?"

신태양이 봐야만 할 게 있다.

흐읍.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 마셨다.

일대는 촉수에 의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다.

헌터들은 대열을 형성하지 못하고 도망쳤고, 촉수들은 그러한 헌터들을 덮쳐왔다.

후우.

나는 들이마신 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솟아난 보랏빛 촉수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은은한 빛을 흩뿌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콰아앙! 콰앙!

내 움직임을 감지한 촉수 서너개가 바닥에서 솟아났지만 애꿎은 땅만 때리고 사라질 뿐이었다.

"으응? 인간!"

가까이 다가가니 이형생물 로바크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등 뒤에서 돋아난 촉수를 다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쑤우욱!

놈의 손짓 한 번에 바닥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 스킬 '태양류 검술 Lv.11'을 발휘합니다. 』

터엉! 터엉!

신태양의 말대로였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쳐내는 것은 가능했다.

'그렇다면.'

모든 힘을 극한까지 끌어 모아 아래에서 위로 대검을 휘둘렀다.

터어엉!

『 스킬 '거인의 힘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순간적으로 근력이 30% 증가합니다. 』

튕겨나간 촉수들 사이로 보이는 틈.

나는 그곳을 향해 뛰어 올랐다. 태양의 발걸음에 의해 가속된 움직임이 그걸 가능케 했다.

순식간에 로바크의 지척까지 다가온 나는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뭐?!"

로바크의 붉은 눈이 커진다.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대검 위로 내가 가진 마력을 쏟아부었다.

푸른 마력이 칼날 위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다시 한 번 검은색으로 재점화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잘 봐둬라, 신태양.'

미래에서 배워 온 너의 보법과 검술이다. 지금의 너는 아직 완성하지 못했을 미지의 영역.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그 답을 지금 내가 보여줄 것이다.

콰아아아!

허공에 그어진 한 줄기의 선이 로바크의 촉수를 사정 없이 잘라냈다. 근처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압도적인 힘.

로바크는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촉수를 바닥에 박아 넣었다. 분노한 로바크의 눈이 붉은 빛으로 번뜩였다.

"인간!"

놈의 외침과 함께 땅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윽고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거대한 촉수. 10m가 넘는 촉수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콰아앙!

촉수는 그대로 나를 후려쳤다. 무지막지한 힘에 떠밀린 나는 바닥을 굴렀다. 지독한 고통이다.

『 이형생물의 '정신 오염'이 당신의 정신을 침식합니다. 』

정신을 갉아먹는 듯한 기이한 감각.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을만한 디버프였다. 그러나 그건 잠시 뿐이었다.

『 스킬 '정신력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을 발휘합니다. 』

내가 딴 건 몰라도 정신 관련해서는 스킬이 꽤 있거든.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단숨에 말끔해졌다.

"인간······."

분노한 로바크의 표정이 생생히 보인다. 녀석은 잘려나간 촉수를 순식간에 복구 시켰다.

'회복이 더럽게 빠르네. 촉수도 단단하고.'

신태양이 이기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 화려하고 날렵한 공격 위주인 신태양의 검술은 로바크의 촉수 앞에서 무력하다.

그래도.

이젠 달라질 거다.

"스승님."

나를 바라보는 신태양의 눈 위로 푸른 이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녀석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떨림이나 초조함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 타재간파의 발동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

『 신태양의 재능 '오러 블레이드'가 개화합니다. 』

콰아아아——!

그와 동시에 신태양의 검 위로 한없이 뻗어나가는 마력의 불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는 수준이었다.

"그러냐."

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어딘가 크게 다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질 것 같지가 않다.

『 특수 스킬 '오러 블레이드 Lv.1'을 획득합니다. 』

『 해당 스킬의 유지 시간은 30분 입니다. 』

내 검 위로도 푸른 마력이 미친 듯이 치솟기 시작했으니까.

70화 이계규율의 상점(1)

부족했다. 한참이나 부족했다.

스승을 바라보는 신태양의 마음은 그러했다.

'내가 스승님의 검을 구현해 낼 수나 있을까.'

검에 관해서라면 자신을 따라올 자는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지한은 그런 신태양의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그 다음을 보여줬다.

압도적인 일자베기.

'스승님 말대로 죽을만큼 노력한다면, 나도 분명히······.'

따라잡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신태양은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이지한이 보여준 경지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기에 나타난 마수에게 패배하고 정신 오염에 걸려 의식을 잃었을 때도.

좌절은 했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다.

스승과 함께 한다면 또다른 돌파구가 보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신태양 우선 이걸 봐라."

그 말을 남기고선 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는 스승.

콰아앙!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지한이 보여준 모습은 신태양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스승이 휘두르는 대검의 끝은 화려하지만 날이 서 있었고, 내딛는 발걸음은 현란하면서도 실속있었다.

'어떻게······.'

쏟아지는 수 십 개의 촉수들을 피해 적을 향해 파고드는 이지한의 모습. 거기엔 신태양 자신이 이루고자 한 이상(理想)이 담겨 있었다.

현시점에선 막연히 상상으로만 품고 있던 검술과 보법의 완성.

'스승님, 당신은 대체······?'

전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신태양은 전율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눈 앞에서 펼쳐진 검술의 정수를 눈에 담는 것 뿐.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스승이 보여주고 있는 검술과 보법이 얼마나 신태양이 꿈에 그리던 것인지.

콰아아—!

이지한의 검이 허공에 지울 수 없는 선을 남겼을 때. 스승이 만들어 낸 선은 더 이상 신태양이 알고 있는 일자베기가 아니었다.

일자베기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

그제서야 신태양은 깨달았다.

'그렇구나.'

따라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보고 배우는 것.

이지한이 알려준 길을 착실하게 배워나가며 실행하는 것.

그게 신태양 자신이 우선 나아가야할 길이었다.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순간.

『 특수 유니크 스킬 '오러 블레이드 Lv.1'을 획득합니다. 』

신태양의 검 위로 전에 없던 마력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검 위로 일렁이기 시작하는 짙은 마력.

콰아아아!

자신의 왼편에 선 스승의 대검에서도 그러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의문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다.

'이길 수 있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그저 이지한을 스승으로 두고 있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타앗!

이지한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신태양. 그를 향해 보랏빛 촉수가 덮쳐 왔지만 신태양은 차분하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마력의 담긴 칼날조차 모조리 튕겨내던 촉수였지만, 오러 블레이드 앞에선 그러한 특성도 무용지물이었다.

신태양의 검에 잘려나간 촉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부글거리는 땅에서 솟아오른 촉수들이 동시에 신태양을 향해 떨어졌지만.

서걱—!

신태양의 일자베기에 촉수 다발이 일제히 잘려나갔다. 동시에 푸른 이채가 신태양의 눈가에 스며 들었다.

『 스킬 '일자베기 Lv.10'을 획득합니다. 』

언제 도달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경지.

이지한의 검술과 보법을 확인한 신태양은 단번에 이해했다.

처음부터 스스로 돌파할 필요는 없었다.

촤아아악!

스승인 이지한이 그 길을 훤히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 * *

신태양의 활약은 눈부셨다. 녀석을 향해 쏟아지는 촉수들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로바크의 촉수를 상대로 나와 신태양은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딱 한 번 보여줬을 뿐인데.'

검술과 보법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애초에 미래의 신태양이 만들어낼 기술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지만.

"이, 인간들!"

자신이 자랑스레 만들어낸 촉수들이 사정없이 갈려나가자, 로바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슬슬 한계가 오는 모양이군."

나타나는 촉수들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끝을 낼 때가 됐다.'

타재간파에 의해 일시적으로 획득한 오러블레이드. 대검에 맺힌 마력의 불길은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촉수 하나를 베어내던 것이.

세 개, 네 개도 거뜬히 베어낸다.

심지어 일자베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미친듯이 대검을 휘두르며 로바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 스킬 '오러 블레이드 Lv.10'을 획득합니다. 』

이미 내 오러 블레이드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져 있었다.

"크윽, 인간!"

촤르르륵!

놈의 등 뒤에 있던 촉수가 나를 막기 위해 쇄도했다. 동시에 놈의 양 옆에서 솟아오르는 15m 크기의 거대 촉수.

"죽어라!!"

로바크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근거리에서 덮쳐오는 촉수의 위력은 이미 맛본대로 강력하다. 제대로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리겠지만.

"스승님! 제가 막겠습니다!"

이번에는 신태양이 있다. 우측에서부터 태양의 발걸음을 사용해 빠르게 달려온 신태양이 거대 촉수 하나를 단번에 잘라냈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좌측의 거대 촉수가 여전히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나이스, 신태양."

신태양을 믿고 로바크를 향해 대검을 들어 올렸다. 힘을 끌어모아 대검을 휘둘렀다.

지극히 단순한 움직임.

그러나 그 힘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일자베기에 오러 블레이드가 결합되어 있다면, 그 앞을 가로막는 게 무엇이라해도 갈라낼 수 있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오러블레이드와의 조합 효과가 적용됩니다. 』

『 특수 조합 효과 : 데미지, 파괴력 300% 증가 』

콰아아아!

오색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오러 블레이드가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의 선을 만들어냈다. 피부가 저릿해질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

나조차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위력이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섬광이 로바크를 집어 삼켰다. 녀석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섬광 속으로 사라졌다. 그 어마어마한 일격에 나또한 멀쩡할 순 없었다.

"크윽!"

나는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류가 나를 계속해서 밀어냈다.

"컥!"

그 충격에 날아간 것은 신태양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구르는 나와 신태양의 앞으로 누군가가 앞서 나왔다.

"여러분, 제가 왔습니다!"

파아앗!

금빛 마력과 함께 허공 위로 거대한 방패의 형상이 생겨났다. 수호 길드의 이수연이었다.

그녀의 방패가 일자베기의 후폭풍을 막아내고 있었다. 거센 기류가 잦아들고, 대기를 가득 채웠 마력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살아계십니까?"

뒤쪽에서 다른 마수들의 접근을 막아주던 진세아와 김상욱이 서둘러 달려왔다. 나는 김상욱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태양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했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로바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결합된 일자베기의 위력은 내가 했지만 실로 놀랍다.

"저희가 이긴 겁니까?"

"그래."

뒤쪽으로 물러났던 헌터들이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 괴물을 진짜로 쓰러뜨렸잖아."

"저 사람 대체 누구야?"

"덕분에 살았습니다!"

신태양와 나를 향한 감탄과 경외의 눈빛.

수호 길드의 서브 리더인 이수연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지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호라이즌 길드 소속이신건가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는 이수연. 그녀도 로바크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꽤 고생했을 거다.

이번 전투는 그녀의 공적도 컸다. 신태양이 회복할 시간을 벌어줬으니까.

"아직 감사인사 받기엔 이릅니다."

나는 우리가 향하는 숲길의 끝을 가리켰다.

화창했던 하늘이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불길하게 솟아오르는 마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 * *

작은 회의가 열렸다.

"계속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저희가 지체되는 사이 루트 A와 C는 벌써 많이 전진했습니다."

수호 길드의 이수연들이 뒤쪽의 헌터들에게 설명했다.

지금 공략 중인 게이트는 붕괴의 위험이 있다. 때문에 루트 A, B, C를 동시에 정리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 앞에는 더 위험한 마수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 준비가 된 분들만 나아가는 걸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수연과 신태양이 헌터들에게 의견을 말하는 동안, 나는 권속 로바크가 쓰러진 장소로 다가갔다.

'뭔가 없으려나.'

설마 아이템까지 날아간 건 아니겠지. 내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김상욱이 슬쩍 붉은 보석 하나를 꺼냈다.

"아, 이거 찾으시는 겁니까? 제가 미리 챙겨놨습니다."

『 이형 생물(로바크)의 영혼석 』

마정석 대신에 이게 남아 있었다.

'그러고보니, 네임드 마수 중에는 영혼석을 뱉어내는 경우도 있지.'

내게 영혼석을 넘긴 김상욱은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반신반의 했습니다."

"뭘?"

"마족들을 처리하러 가신다길래. 그게 가능할까 생각했었습니다. 근데, 지금보니까 가능하겠네요."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김상욱이 자신있게 말했다. 초토화 된 땅을 가리키면서.

"진짜 미쳤네요. 이 정도면 그냥 다 쓸어 버려도 되겠는데요?"

"인정."

옆에 있던 진세아도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든다.

'문제는 이게 내 능력이 아니란 거지.'

타재간파 덕분에 신태양의 능력을 일부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 개화시킨 신태양의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아하니 루트 C의 신아람도 순조롭게 공략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게이트 입구가 닫혔다던데 그건 누구 짓이지?"

"발전의 마족이라는 하위 마족이 있습니다. 로바크는 그 마족의 권속이거든요. 게이트 조작이 가능한 수준은 하위 마족부터니 아마 맞을 겁니다."

"발전의 마족이라."

찾으러 갈 수고를 덜었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의 기술자이자 책임자. 놈을 잡는 걸로 내 레벨 제한은 해제 된다.

『 스킬 '오러 블레이드 Lv.10'의 유지 시간이 끝났습니다. 』

『 스킬 '오러 블레이드'가 타재간파의 서에 흔적을 남깁니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때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이게 있었지.

『 타재간파의 서 』

- 광화(자아통제) Lv.10 [ 비활성화 ]

- 신속(神速) Lv.10 [ 비활성화 ]

- 오러 블레이드 Lv.10 [ 비활성화 ]

'기록 된다고 했었지.'

신아람의 광화, 진세아의 신속, 신태양의 오러블레이드.

이렇게 세 가지 스킬을 모았다.

'비활성화라는 건 활성화가 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내가 미간을 좁히며 타재간파의 서를 확인하는 순간, 또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 타재간파의 서 : 항목을 3개 채우셨습니다. 』

『 이제 포인트를 사용하여 목록을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이 스킬들을 다시 쓸 수 있단 말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엄청난 효과였다. 스킬 하나만으로도 말도 안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들인데, 만약 이것들을 동시에 활성화 할 수 있다면.

'미쳤군. 근데 포인트라니?'

포인트라면 인과역전의 상점을 이용할 때 사용했던 걸 의미하는 걸텐데.

'인과역전의 상점과 타재간파 둘 다 무재조정의 효과이니 당연하지만.'

문제는 지금 인과역전이 상점이 닫혀 있다는 거다. 시스템의 오류인지 뭔지, 자세히는 몰라도 상점을 이용하지 못한 채 꽤 시간이 지났다.

파지직.

눈 앞에서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 시스템이 기능의 오류를 감지합니다. 』

『 오류 복구 프로토콜 : '싱귤래리티 리커버'를 실행합니다. 』

'고쳐지는 건가?'

지난번 한계돌파 퀘스트 클리어 이후로 인과역전의 상점에 새로운 목록이 추가 되었을 거다.

만약, 고쳐지기만 한다면 이번 공략에 큰 도움이 될 터.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푸른 홀로그램 창 위로 게이지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 34% 』

『 42% 』

···

..

.

『 99% 』

쭉쭉 올라가던 퍼센트는 99%에서 멈춰섰다. 그대로 묵묵부답이었다.

'뭐가 문제지?'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경험치 10만배를 준다는 특성 무재조정 자체가 비정상적인 기능인데다가, 내가 소유한 이계규율과의 충돌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반박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응?'

『 이계 규율이 해당 오류의 수정을 요구합니다. 』

『 이계 규율이 오류 복구 프로토콜에 간섭합니다. 』

파직, 파지직!

더욱 거세게 터져나오는 스파크. 갑자기 끼어든 이계 규율에 의해 한순간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 이계 규율이 해당 기능을 덮어 씁니다. 』

『 '이계규율 : 인과역전의 상점'이 개방됩니다. 』

'뭐?'

촤르르륵!

그와 동시에 내 앞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방대한 양의 메시지.

지금껏 참아왔다는 듯 한꺼번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최하위 흐름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미래(未來) 광폭화 고블린을 처치하셨습니다. 』

『 오르티마 알을 획득하셨습니다. 』

『 인과를 초월한 기술을 습득하셨습니다. 』

『 오크를 처치하셨습니다. 』

『 타재간파 '광화(자아통제)'를 획득하셨습니다. 』

『 최하위 권속 '발렘'을 처치하셨습니다. 』

···

..

.

『 하위 권속 '이형생물 로바크'를 처치하셨습니다. 』

『 각 항목에 따라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

인과역전의 상점이 기능을 멈췄을 때부터 기록된 내 발자취였다.

은날 채용 시험에서부터 시작해 미래를 거쳐 방금 전 내가 잡은 하위 권속 로바크까지.

그 모든 게 기록되어 있었다.

'미친······.'

본래대로라면 포인트를 지급하는 것은 마수를 처치했을 때만이다. 그러나 이 항목에는 내가 달성한 행위들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었다.

마수를 처치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거쳐온 행적들에도 포인트가 지급된 것이다.

이계규율과 인과역전 상점의 결합.

그게 보상을 다르게 만들었다.

믿기지가 않아 메시지창을 몇 번이고 재확인했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진짜냐.'

내가 받을 포인트는.

『 5320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역대급이었다.

71화 이계규율의 상점(2)

"으음? 로바크가 당했다?"

발전의 마족은 검은 안경테를 고쳐 썼다.

새하얀 머리카락, 보랏빛 피부와 머리에 돋아난 뿔. 마족의 특징을 빼다박은 그였지만 그 외모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미형이었다.

"확실히 새로운 데이터군. 인간들의 잠재력이 내 예측보다 뛰어날 줄이야."

피로 물든 새하얀 가운을 걸친 그는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권속인 이형생물 로바크가 죽임을 당했으나, 당연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권속은 장기말에 불과한 존재였으므로.

"그건 그렇다쳐도."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발전의 마족에 손에 들린 심장이었다.

두근. 두근.

검붉은 피를 내뿜으며 박동하는 심장.

기록의 마족에게서 빼낸 심장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발전의 마족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록의 마족은 실패했다. 프로젝트 마기의 무리한 진행이 화를 부른 거지. 이목을 너무 집중시켰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아래로 머리를 조아리는 최하위 마족들. 그들은 공포에 몸을 떨고 있었다.

"네 놈들도 별반 다를 건 없지. 이때다 싶어 기록의 마족의 지위를 빼앗기 위해 달려든 승냥이떼와 다름 없으니까."

최하위와 하위. 한 단계 차이일 뿐이지만 거기에는 넘어설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존재했다.

기록의 마족이 폭주했을 때를 기회 삼아 권한과 유산을 챙기기 위해 달려든 최하위 마족들의 각축전.

발전의 마족의 등장으로 모든 게 무의미 해졌다.

싸움도 비슷한 사람끼리나 하는 거지, 너무 압도적인 격차가 나버리면 거기서부터는 전투가 무의미해지므로.

그런 최하위 마족들을 벌레 보듯이 하는 발전의 마족.

"이 건은 윗분들께서 말씀하신 방향과는 다르다. 확실히 선을 넘었어. 여기에 있는 네 놈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처벌은 각오하고 있겠지?"

그의 말에 열 명 가량 되는 최하위 마족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부디 용서를······."

"용서해주십쇼!"

"저흰 기록의 마족의 실패를 덮기 위해······."

콰아앙!

변명하던 최하위 마족 하나의 머리통이 통째로 날아갔다.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일격. 발전의 마족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싸늘한 침묵이 마족들 사이로 가라앉았다.

"진정으로 실패를 덮고 싶었다면 조용히 있었어야지. 프로젝트 마기는 이것으로 완전 폐기다. 굳이 이 나라가 아니더라도, 프로젝트를 실행할 나라는 많아. 네 놈들은 그냥 사리사욕에 눈이 먼 것 뿐이고."

프로젝트 마기를 위한 의식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그 후폭풍에 의해 도심지에 게이트를 발생시키고, 인간들의 이목을 끌었다.

심지어 의식이 진행 되던 장소는 마계의 틈새.

불안정한 마기는 결국 마계와의 통로를 이어버렸다. 오히려 마계의 마력이 새어나가는 참사였다.

'허나, 뭔가 있기는 있다.'

불과 어제.

마계의 틈에 위치한 마도 공학 실험 장치가 부숴졌다. 향후 전개할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위한 포석이었는데.

장치야 다시 만들면 된다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번 프로젝트 마기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의 마족이 억지로 의식을 행하다 폭주했다. 어떤 압력이 있었다는 건데.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계획을 저지하고 있을 확률. 얼마나 되는 거지?'

대체 누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그런 존재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족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깊어졌다.

'그건 차차 조사하도록하고······. 우선은 이 일의 매듭을 지어야겠지.'

발전의 마족은 손에 쥔 심장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최악. 백 번 죽어 마땅하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심장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기는 차가운 은빛 금속으로 변하여 심장을 덮어나갔다.

"만회할 기회를 한 번 주도록하지."

심장을 중심으로 조립되기 시작한 은빛 기계 장치. 그것은 골렘이라기엔 기괴했고, 생물이라기엔 이성을 띄고 있지 않았다.

으어어어!

마수로 재탄생한 기록의 마족의 절규가 게이트 내부로 울려퍼졌다.

* * *

"뭐, 뭐야?"

"방금 울음소리 들었어요?"

숲 길의 끝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괴성. 자리에서 회의를 나누던 헌터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설마······."

김상욱은 더욱 불안한 표정으로 숲 너머를 응시했다.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당장 두려워한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다.

나는 바위에 걸터 앉아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 보유 포인트 : 58301 point 』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포인트와 새롭게 얻은 포인트를 합산하니, 거의 6만에 달하는 포인트가 모였다.

'가장 먼저 확인할 건······.'

타재간파의 서.

『 포인트를 사용하여 스킬을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다. 』

앞으로의 싸움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인만큼, 확실하게 확인해 둬야 했다.

『 타재간파의 서 』

- 광화(자아통제) Lv.10 [ 비활성화 ]

- 신속(神速) Lv.10 [ 비활성화 ]

- 오러 블레이드 Lv.10 [ 비활성화 ]

※ 각 항목의 활성화 비용은 10,000 Point 입니다.

※ 활성화는 30분간 유지 됩니다.

'스읍, 싸진 않은데?'

스킬 하나 하나의 파괴력이 지대한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활성화하면 10레벨부터 사용하게 되니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11레벨에 도달하기라도 한다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테니.

'이계 규율이 아니었다면, 활성화할 엄두도 못 냈겠어.'

아니지.

'이계 규율 덕분에 이 정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 봐야하는 건가.'

쌩으로 1만 포인트는 절대 쉽게 모을 수 없는 양이다.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니, 원래대로라면 한 번 쓰는 것도 엄청나게 고민해야 할 정도였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이계 규율과 인과역전의 상점이 결합하며 엄청난 속도로 포인트를 획득하게 되었다. 약 2주일 간 모은 포인트가 약 5만이니까.

위급 상황의 조커 카드로 활용할 여지가 충분했다.

타재간파의 서가 제시하는 패널티를 이계 규율로 완벽히 뛰어넘은 셈이다.

'그러면 이제 상점을 확인해 볼까.'

동시에 3개의 기술을 활성화한다고 하면 2만 8천 포인트의 여유가 남는다.

『 이계 규율 : 인과역전의 상점 』

0. 소모품

1. 퀘스트 (NEW)

'좋아. 잘 된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점창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부디 이번 게이트 공략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원래 인과역전의 상점은 특성 무재조정의 효과로 생겨난 것. 그것이 내가 가진 이계 규율과 결합되며 복구되었다.

'내용물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우선은 소모품이다.

『 소모품 목록 』

- 재능환 레시피 교환권 : 1/1 ( 2000 Point )

- 재능 획득의 물약 레시피 교환권 : 1/1 ( 2000 Point )

- 재물 획득의 물약 레시피 교환권 : 1/1 ( 2000 Point )

- 이계규율 1★ 부여권 : 1/1 ( 100000 Point )

( 더보기 )

'와······.'

전부 레시피지만 그 점이 오히려 좋다. 재료만 갖춰진다면 계속해서 물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니까.

심지어 등급이 적혀있지 않은 걸로 봐선, 레어나 유니크급의 재능환이나 물약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이건 뭐냐.'

이계 규율 1★ 부여권.

10만 포인트라는 무지막지한 가격. 대강 짐작은 간다. 필드 마계에서 10배의 데미지를 주는 칭호 '마계의 재앙'이 무성(無星)등급이었다.

'1성이라면······.'

그 강함은 상상을 초월할 터. 애초에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등급인만큼 이계 규율의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는 항목이겠지.

근데 너무 비싸다.

나는 그 아래에 있는 '더보기'를 눌러봤다.

촤르륵.

- 최하급 체력 포션 ( 100 Point )

- 하급 체력 포션 ( 150 Point )

- 중급 체력 포션 ( 200 Point )

···

..

.

- 상급 마력 포션 ( 300 Point )

체력과 마력 포션의 리스트가 주르륵 떠올랐다.

'이건 진짜 유용하겠는데. 돈도 절약 되겠고.'

특히 위급할 때 아이템을 구매해서 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소모품은 언제라도 살 수 있으니 일단 놔두고.'

나는 소모품 창을 닫고, 퀘스트 항목을 열었다. 퀘스트를 구매한다는 것 자체가 꽤 낯선 개념이었지만 이계 규율이니 그러려니 한다.

파직, 파지직!

이번에는 가벼운 스파크와 함께 새로운 창이 열렸다.

『 퀘스트 목록 』

- 이계 규율 개방 ( 1 point )

목록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것도 고작 1point. 자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구매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 1 point를 사용하며 퀘스트를 구매하셨습니다. 』

『 퀘스트 - 이계 규율 개방 』

- 목표 : 변형 기록의 마족 처치 ( 0/1 )

- 보상 : 세번째 이계규율 개방, 상점 카테고리 추가, 10000point

'호오.'

거듭 느끼지만 무재조정 자체에 미래 예지 혹은 전지(全知)의 능력이 포함 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나아갈 방향을 퀘스트로 잡아주는가 하면, 인과를 초월해 이득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니까.

나는 저 멀리에 있는 숲의 종착점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있는 게 변형 기록의 마족이라는 건가.'

그리 보는 게 타당했다.

"아무래도 발전의 마족이 무슨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비명은 처음 들어 봅니다. 발전의 마족이 생체 병기를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게 아닐지."

내 옆에 있는 김상욱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다 쓸어버릴거니 뭐니 이야기하더만, 금세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다.

"그렇군."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는 정보였다.

"감당 가능할 것 같은데."

만약의 경우에도 타재간파의 서를 활성화하면 그만이다.

광화, 신속, 오러 블레이드.

세 개의 기술을 동시에 활성화 시킨다면.

'일시적으로 S급에 필적하는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태양이나 신아람 같은 걸출한 인물들도 함께한다.

참, 진세아도 있었지.

진세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홀로그램 창을 살피는 중이었다. 시스템 창은 고유의 영역이기에 타인에겐 보이지 않지만, 허공을 두드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뭔가 이상한데······."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물어보려던 찰나, 뒤쪽에서 회의를 끝낸 수호 길드의 헌터들이 소리쳤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이 앞으로는 실력에 자신 있는 분들만 가겠습니다."

수호 길드의 서브 리더 이수연이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무리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신태양이 뛰어서 내쪽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오래 기다리셨죠. 지금부터는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는데. 넌 앞에 나가서 마수 처리해야지."

"아뇨, 스승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억지로 내 주변에서 경계를 하기 시작한다. 그 탓에 우리 쪽으로 시선이 쏠린다.

"신태양의 스승?"

"어쩐지 말도 안되게 세더라."

"호라이즌 길드에 스승이 있었을 줄이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신태양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관심이 뜨겁네요. 이게 스타 헌터의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죠."

"아니, 저리 꺼져."

수호 길드가 공략하고 있는 길은 B 루트.

A루트와 C루트는 순조로운 공략을 이어나갔기에 지금은 이쪽이 뒤쳐진 상태였다. 다만 오성처럼 공략이 늦어져서 조급해하는 모습은 없었다.

꾸준한 페이스로 마수를 잡으며 나아갈 뿐이었다.

'과연 1위 길드라는 건가.'

그 뒤로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A급 게이트 답게 몸에 불을 두른 불꽃 늑대나, 골렘들이 나타났지만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다.

특히 오러 블레이드를 익힌 신태양의 활약이 눈부셨다. 녀석의 검에서 치솟는 불길은 눈 앞의 적들을 사정 없이 베어냈다.

그것이 신태양 특유의 화려한 검술과 합쳐지니 더더욱 막아낼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세아가 부러운 듯 물었다.

"저거 어떻게 하는 거에요? 엄청 쎄보이는데."

차마 신태양에게는 못 물어보겠는지 나한테 물어봤다.

"그러게."

나도 몰라서.

확실한 건 오러 블레이드는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거. 마력의 조종이 세밀하게 컨트롤 되는 S급 헌터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이다.

"아니, 오빠도 썼잖아요. 나도 알려줘요."

"야, 꼬맹이. 이게 아무나 쓰는 기술로 보여? 스승님이나 나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어림도 없어."

어느새 다가온 신태양이 진세아를 바라보며 이죽였다.

"저기요, 아저씨한테 안 물어봤거든요?"

"아, 아저씨? 이 꼬맹이가······. 스승님, 이 버릇 없는 꼬맹이는 놓고 가시죠."

"그냥 둘 다 조용히 하자."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루트 B의 끝에 도달했다.

촤아악!

신태양의 검이 마지막 불꽃 늑대의 목을 갈랐다. 서브리더 이수연이 통신석으로 상황을 공유했다.

"수호 길드, 루트 B 종착점 도착."

종착점에 있는 것은 반원형의 거대한 구조물. 축구 경기장만한 크기였다. 그 위를 두꺼운 나무 줄기가 뒤덮고 있는 형태였다.

- 루트 A, 오성 길드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 루트 C, 은날 길드도 준비 끝났습니다.

이어서 몇 번의 대화가 오가더니, 이수연이 눈 앞의 비석을 가리켰다.

"세 루트에서 동시에 마력을 불어 넣으면 다음 길이 열리는 구조겠네요."

그녀는 비석 앞으로 걸어가더니, 직접 마력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키만한 비석에 새겨진 음각의 문자들을 따라 마력이 채워졌다.

푸른 빛을 뿜어낸 비석.

『 두번째 길의 클리어를 확인 했습니다. 』

쿠우웅!

메시지를 띄운 비석은 돌연 바닥으로 쑥 꺼졌다.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지축.

드드드드······.

보스의 방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소름 돋는 비명이 다시금 그 내부에서 들려 온다.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신태양이 앞장섰다.

"그럼 가시죠."

* * *

내부로 진입한 우리는 복도를 따라 쭉 걸었다. 함정이나 별다른 마수들은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약 5분.

넓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좌측과 우측에서 다른 헌터들의 모습도 모였다. 오성과 은날이었다. 다들 마수들을 처리하며 오느라 그런지 지친 기색이었다.

그래도 모두가 모였으니,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자연스레 휴식을 취하면서 마지막 전투를 대비하는 분위기였다.

"와, 저 언니 완전 예쁘다."

진세아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은날의 신아람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은······."

신태양은 신아람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갔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잘 부탁합니다. 신태양입니다."

"네? 아, 네······. 저도······."

시원하게 인사를 건네는 신태양에게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이는 신아람.

미래의 스승과 제자의 감격적인 상봉이었다.

뭐,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나름 감회가 새롭다.

신아람은 어쩌다가 신태양의 제자가 된 걸까. 성격은 서로 상극처럼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아람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지, 지한 선배?"

나를 발견한 그녀는 한달음에 내 쪽으로 다가왔다.

"······."

버려진 신태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공략에 참가하셨었네요. 지한 선배 덕분에 은빛의 날개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이 말이 꼭 하고 싶었어요······."

"잘 됐네요."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날 보며 진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기요, 오빠. 아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두 분이 아는 사이셨습니까? 이거, 역시 스승님. 발이 넓으시네요."

벙쪄 있던 신태양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대로 잠시 자기 소개 시간을 가지나 싶었지만.

"자, 잠깐만. 여러분! 움직이지 마십쇼!"

뒤쪽에 빠져 있던 김상욱이 소리쳤다. 그러고보니 김상욱은 마족에게 마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마기의 흐름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김상욱의 경고.

그 예측은 진세아나 신태양보다 한발자국 빨랐다. 뒤늦게 진세아가 소리쳤다.

"다, 당장 벗어나야 돼요!"

"네, 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콰과과과!

주변의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헌터들이 어두운 땅 속으로 떨어져내렸다.

"사, 살려줘!!"

"으아아악!"

아니 반응했더라도 움직일 수 없었다.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제약(制約) : 체공 금지 』

마족의 습격이란 그런 것이었으므로.

72화 이계 규율의 상점(3)

제약.

마족들의 선천적인 능력이자,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는 법칙.

심지어는 제약을 시전하는 마족 본인조차 그 제약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약 앞에서는 모든 마족이 위계에 관계 없이 공평하다.

그러니 A급 헌터들은 함정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무너진 땅과, 생겨난 체공 금지 제약.

수십 명의 헌터들이 일제히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으아아!"

"이, 이런!"

"살려줘!"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헌터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A급 헌터.

본능적으로 바닥에 착지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조심해!"

문제는 그 아래에서 헌터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날카로운 창날이었다는 거다.

착지할 자리 하나 없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날카로운 창날.

저런 곳에 떨어졌다간 그대로 즉사였다.

상황 판단이 가장 빠른 건, 오성 길드의 정도현이었다.

"에라이!"

그는 양 손에 모인 붉은 화염구를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떨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쏘아진 붉은 구체가 땅에 닿으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

화염과 폭발이 뒤섞이며 바닥을 뒤덮었다. 그 폭발의 여파로 산산조각이 난 창날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날들이 오히려 위협적으로 헌터들을 덮칠 수 있는 상황.

허공으로 황금빛 기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아아!

한순간에 방출된 금빛 마력은 방패의 형상을 이루었다. 방패는 헌터들이 안전하게 착지할 바닥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아래에서 올라오는 폭발의 잔해를 막아냈다.

"사, 살았다."

"감사합니다. 이수연 헌터."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냐."

수호 길드의 이수연이 만들어낸 방패는 훌륭한 바닥이 되었다.

"크윽, 뭔가 이상한데."

"제약. 이것 때문인가? 뛸 수가 없어."

체공 금지 제약.

짧은 메시지였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금세 맥락을 이해했다. 허공으로 떠오르려는 행위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금지되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뛸 수조차 없었다. 양 발이 땅에서 떨어뜨리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단 한 고비 넘겼으니 빠르게 이동하시죠!"

벽면에는 길 하나가 뚫려 있었다. 그것이 보스의 방으로 이어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체공 금지 때문에 이미 떨어져 내린 위쪽으로는 이동할 수가 없었으니. 벽을 타고 이동하는 게 가능할 순 있어도, 어차피 길이 없다.

그런데 인원 수를 세어보던 이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 잠깐. 누가 없는데요? 저희 리더가······."

"시, 신태양 어디갔어?"

"미친, 신아람도 없어. 설마······.

가장 중요한 전력 둘이 사라졌으니,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지직.

그 순간, 통신석이 잡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 * *

"저희는 2층에서 공략을 이어가겠습니다."

- 2층에 길이 있던가요?

"없기는 한데······.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 네?

신태양이 통신석을 사용해 상황을 알렸다.

"신기하네요. 여기만 멀쩡해요······."

헌터들이 딛고 있는 땅이 전부 무너졌지만, 내 주변의 땅만은 그대로였다. 그 이유는 김상욱이었다.

"거, 힘들어 죽겠으니까. 말시키지 마쇼."

그는 마기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기록의 마족에게 그 힘을 받았단다. 그 덕에 주변의 땅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마기가 유용하긴 하네.'

스킬로 사용되는 마력과 달리, 마기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한 것 같다.

"근데 아까부터 가면은 왜 쓰고 있는거에요?"

"아이템이래."

나는 땀을 뻘뻘 흘리는 김상욱을 대신해 대답해줬다. 보아하니 오래 유지하는 건 어려운 모양.

우리가 위치한 이 장소는 흔히 '마족의 둥지'라고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미래에서도 간간히 볼 수 있는 장소였다.

그 내부를 김상욱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2층을 통해 보스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보스가 2층에 있다면 그대로 공략하면 되고, 1층에 있다면 바닥을 부수고 내려간다."

체공 금지 제약이 걸려 있는 지금, 그게 알맞은 공략 방법이었다.

"그, 그런데 길이 없는데 어떻게 하죠?"

주변을 둘러보던 신아람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걱정할 것 없단 투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곡괭이로 변한 오르티마를 들어 올렸다.

"길은 만들면 됩니다."

『 스킬 '중급 채굴 Lv.10'을 발휘합니다. 』

그대로 인접한 벽면에 곡괭이를 내리치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벽면이 부숴졌다. 중급 채굴 스킬의 효과는 뛰어났다.

투두두두두!

벽을 뚫고 길 하나를 그냥 창조해내는 수준이었다. 순식간에 세 명은 들어가도 될만한 길이 뚫렸다.

"으악, 퉤. 뒤에 있는 사람 신경 좀 써줘요."

"아, 미안."

흙을 뒤집어 쓴 진세아. 어쨌든 계속해서 전진했다.

나아갈 방향은 김상욱이 가진 내부 구조 지식과 신태양의 초감각을 적절히 활용했다.

"슬슬 우측으로 꺾으면 될 것 같습니다. 스승님."

"오냐."

"그러면 큰 방이 하나가 나와야 정상인데······."

투두두두!

채굴 스킬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사실 채굴과 같은 비주류 스킬들의 활용처는 그리 많지 않다.

'레벨이 낮으면 효과가 애매하니까.'

마수를 잡는데는 하등 쓸모 없는 경우가 대다수기에, 비주류 스킬의 레벨을 끝까지 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어서 레벨이 높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근데 일단 10레벨이 되고보니까 되게 좋네.'

골렘을 잡을 때도 그렇고 은근 사기적인 면모가 있다.

투웅!

마지막으로 돌벽을 두드리자 벽면이 부서지며 새로운 동공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맞게 찾아온 것 같다.

"취익, 떨어지지 않은 인간들이 있었나."

"마족님의 말씀대로 지키고 있기를 잘했어."

다섯 마리의 권속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뒤에 있던 김상욱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 마족들이 있었을 겁니다. 권속만 남기고 떠난 것 같은데······."

공터의 끝 부분에 푸른색 문 하나가 보인다.

'저기가 마계와 연결된 장소.'

마족의 둥지는 대개 저러한 틈새를 남긴다. 저곳을 통해 빠져나갔을 거다. 김상욱은 권속들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들 폼 잡고 있긴한데 한 놈 빼고는 별 거 없습니다. 대부분 기록의 마족의 권속이고, 하나가 발전의 마족의 권속입니다."

술술 말이 나오는 게 배신자다운 면모다. 물론 이런 상황에선 더없이 유용한 정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아래에서 강렬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구조상 이 아래에 보스가 있을 겁니다."

"어이, 거기 주절대는 놈. 네 놈 뭔가 익숙한데."

"응?"

권속들 중 하나인 어인(魚人)이 김상욱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김상욱은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너 같은 붕어 대가리는 처음본다야."

말은 능청스럽게 하는데 몸은 슬금슬금 뒤로 이동하고 있다.

"스승님, 우선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저도 도울게요."

신아람과 신태양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신아람은 인벤토리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걸 쭉 들이키자, 신아람이 잠깐 비틀거렸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신아람의 주변으로 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죠."

"우왓?"

그 기세에 놀란 진세아가 뒷걸음질 쳤다. 신태양도 놀란 표정이었다. 아까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얼마든지 와 봐라."

삼지창을 어깨에 댄 어인 권속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가 박살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초였다.

콰아앙!

신아람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검을 휘둘러 발산한 강렬한 마력이 어인을 벽면에 처박았다.

그걸 흥미롭게 바라보던 권속 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온 몸에 마기를 두른 검은 피부의 오크. 놈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거 상대하는 재미가 있겠군."

놈은 5초만에 쓰러졌다.

* * *

통로를 나아간 오성, 수호, 은날 3길드는 보스와 마주했다.

"저, 저게 뭐야······? 뭐 저렇게 생긴 게 다 있어?"

"징그럽네요."

거대한 기계 장치를 살점과 내장이 뒤덮고 있는 기괴한 모습.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체 골렘 정도가 딱일까.

두 개의 눈알이 헌터들을 주시했다.

으어어어!

놈의 비명이 보스의 방 전체에 울려퍼졌다. 심신을 관통하는 광역 공포 기술 피어였다. 피어를 정면으로 맞은 헌터들의 몸이 굳어졌다.

"허억."

"기, 기다려."

그런 와중에 생체 골렘의 입가로 검은 마기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 보스가 마도공학 브레스를 사용합니다. 』

떠오르는 메시지창에 가장 전방에 있던 이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게이트 공략 경험이 풍부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창을 띄울 정도라는 건.

콰아아아아!

그 공격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브레스라고 미친 거 아니야?!"

"드래곤도 아니고 무슨······!"

생체 골렘이 뱉어낸 브레스가 바닥을 훑으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실제 드래곤의 브레스보다는 못한 감이 있었다.

그대로 위로 뛰어 올라 피할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문제는 체공 금지 제약이었다.

'막아야 한다.'

수호 길드의 이수연은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 황금빛 방패를 생성했다.

보스의 피어 때문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지만 최선을 다했다.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콰과과과!

검은 파도가 이수연의 방패에 세차게 부딪혔다.

쩌저적, 쩌적!

황금 방패 위로 생겨나는 수많은 균열.

그래도 끝까지 형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역시 이수연! 자, 갑니다."

마력을 충전하고 있던 정도현의 양 손아귀에서 맹렬한 화염이 레이저처럼 뿜어져 나왔다. 생체 골렘의 머리를 노리고 쓴 필살의 일격이었다.

콰아아앙!

강한 폭발과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나왔다. 잇달아 다른 헌터들의 마법이 생체 골렘을 향해 집중되었다.

콰과과과!

헌터들의 마법 세례에 작은 폭발과 섬광이 골렘 주변을 뒤덮었다. 보스의 방에 남은 건 전부 A급의 헌터들이었다.

그들의 공격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쓰러뜨렸나?"

파스스······.

검은 연기가 걷히며, 생체 골렘의 모습이 드러났다. 처음부터 엉망인 꼴이었던지라, 타격이 먹힌 건지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우우우웅

그러나 다시 골렘의 입가에 검은 마기가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헌터들은 직감했다.

"미친. 멀쩡하다고?"

"젠장 다들 보호막 준비해! 이번에는 이수연의 방패는 못쓴다!"

"다들 피해!"

브레스 제 2파. 바닥을 헤치며 몰려오는 마기의 파동이 헌터들을 휩쓸었다. 헌터들의 힘을 합친 보호막이 형성되었지만, 브레스는 보호막을 유리처럼 깨부수고 밀려왔다.

브레스를 맞은 헌터들의 몸에 보랏빛 불꽃이 솟아 올랐다.

"크아아악!"

"몸이 녹는 것 같아!"

"제발, 살려줘!"

바닥을 굴러도 꺼지지 않는 저주 받은 불꽃. 뒤쪽에 포진하고 있던 힐러들이 나서서 저주를 해제하고는 있지만, 다음 브레스가 온다면 끝장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보스의 방.

다시금 보스의 입 주위로 마기가 모여들었다.

"젠장, 뛰어 오를 수만 있었어도."

"어떻게 다가갈 수 없나?!"

자세히 보니 보스를 구성하는 금속이 일부 녹아 있었다. 저 부분을 쳐내기만 한다면 승기를 잡아볼 수도 있을텐데.

"후퇴! 후퇴해!"

"다들 도망쳐!"

"일단 정비해야 돼!"

더 이상 승기는 없었다. 개죽음을 당하기 싫으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 보스가 마도공학 브레스를 사용합니다. 』

보스의 입에서 뜨거운 브레스가 뿜어져 나오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앙!

돌연, 보스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천장 속에서 나타난 것은 다섯 명의 헌터였다.

가장 먼저 붉은 마력이 골렘의 머리를 꿰뚫었다. 골렘의 입 안에 고여 있던 마기가 폭죽처럼 아래로 분출되었다.

신아람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은날 길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신아람!"

그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신태양이었다. 허공에서 크게 휘두른 신태양의 오러블레이드가 골렘의 팔을 잘라냈다.

크어어어!

고통스러운지 몸을 비트는 생체 골렘. 잘려나간 팔에서 검은 마기가 멋대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런 놈을 마무리 하듯 생겨나는 거대한 선.

콰아아아!

녹아 있던 생체 골렘의 뼈대가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5인은 그대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이제 2페이즈가 시작될 겁니다!"

이지한이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놈의 마지막 발악을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승기는 우리에게 있다.

어느덧 진세아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마한 상자. 이건 생체 골렘의 체내에 숨겨져 있었다. 발전의 마족이 발명한 제약 생성기.

『 부덕의 상자 : 체공 금지 』

진세아의 단검이 그것을 깨부쉈다.

콰드득.

『 제약 : 체공 금지가 해제 됩니다. 』

몸이 가벼워지며 가로막고 있던 답답한 벽이 사라진 듯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헌터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제약이 풀렸다!"

이제 생체 골렘은 사냥해야 할 마수에 지나지 않는다.

73화 한계 돌파 퀘스트(1)

으어어어!

금속 뼈대가 완전히 아작난 생체골렘은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었다. 중심부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며 검은 피를 내뿜었다.

피는 다시 살점이 되어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보스는 무서운 속도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수연 헌터 방패 준비 됐습니까?!"

"네! 회복 됐습니다."

보스가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는 순간은 헌터들에게 있어서도 회복 시간이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헌터들이 앞으로 나왔다.

오성의 리더 정도현 헌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큰일 날 뻔했어. 지원이 없었으면 여기에 있던 헌터 전원이 죽었을지도 몰라.'

그의 시선이 한 헌터 무리를 향했다. 신태양과 신아람. 각각 수호와 은날의 리더들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서 있었다.

중심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정도현의 눈이 커졌다.

'저 사람은······. 아까 그 곡괭이 쓰던 헌터잖아?'

오성 전부가 괴암종에게 애를 먹고 있을 때, 앞으로 달려나가더니 전황을 뒤바꾼 인물이었다.

대단한 활약이긴 했지만 상성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유명한 헌터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그러고보니 수호 길드가 위험에 빠졌을 때, 저 남자가 지원을 간 뒤로 일이 해결되었다.

'설마.'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른 헌터들을 이끌고 천장에서 내려와 보스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우연이겠지.'

정도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신태양과 신아람 사이에 껴서 콩고물을 잘 주워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정도현은 원체 타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데에는 재능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수호 길드의 리더 이수연은 다른 생각이었다.

'대체······.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거야? 양 길드의 리더하고 둘 다 아는 사이라고?'

이수연이 보기에 저 남자는 신태양과 신아람을 이끌고 있었다.

수호 길드를 몰아 넣었던 촉수 괴물을 쓰러뜨리는 모습까지 직접 목격한 탓에, 이수연은 이지한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호라이즌 길드에 저런 사람이 숨어 있었다니.'

정보 길드로써는 유명하지만, 저런 실력자를 데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간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정보 길드이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갔다.

"쓰러뜨려! 모든 공격을 퍼부어!"

"전격 마법 준비 됐습니다!"

"달려 들어!"

지금까지 당하고 있었던 것을 되갚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헌터들이 소리치며 보스를 향해 뛰어 들었다.

체공 제약이 사라지니, 모든 헌터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검은 마력 탄환이 쏟아졌지만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은 전부 A급.

각자의 방식으로 견제를 뚫고 나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닥을 쓸고 다가오는 검은 파도도 그저 허공으로 뛰어 오르면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촤아아악! 촤악!

헌터들의 공격이 보스의 살을 사정 없이 갈랐다.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데.'

2페이즈가 시작되고서도 이수연은 이지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방패와 방어막을 번갈아 생성하면서도 이지한을 바라봤다.

그의 움직임은 딱 평균적인 A급 헌터였다.

이지한의 실제 등급이 C급 상위라는 것을 안다면 경악했겠지만, 이수연은 당연히 그가 A급 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부러 힘을 숨기는 건가?'

촉수 괴물을 상대할 때만큼의 폭발력은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이지만 신태양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여줬었으니까.

'오히려 좋은 걸.'

힘의 배분을 생각하면서 싸운다라. 그 또한 마음에 드는 방식이었다.

이수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

"······호라이즌 길드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길드장에게 말해야겠어."

그런 의미에서 이수연은 이지한에게 더 많은 버프를 걸어줬다. 신태양 한 번 줄 때 이지한 두 번 줬다.

"신태양은 어차피 다른 길드에서 버프 넣으니까, 저 사람부터 지원해봐요."

"네?"

"빨랑요!"

호감을 쌓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 * *

『 금빛 선율이 당신의 귓가를 스칩니다. 』

'나한테 버프를 걸어주네.'

신태양이나 신아람에게 집중 될 줄 알았던 버프가 내게 들어온다. 잘못 줬나 싶어

고개를 돌리니 수호 길드의 이수연이 눈을 찡긋했다.

'······.'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고맙네.

나는 버프에 힘 입어 보스가 소환한 작은 살덩이 몬스터들을 베어냈다. 체공 금지 제약이 해제 되니 모든 헌터가 각자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쏟아지는 헌터들의 공격 앞에 보스는 무력했다.

콰드드득!

신태양의 오러블레이드가 보스의 심장을 갈랐다. 마기를 내뿜으며 저항하던 보스의 형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싸움이 끝을 맞이했다.

"이,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고생하셨습니다."

헌터들이 기쁨에 차 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 앉는 헌터들도 있었다.

그들의 장비와 무기는 새까맣게 타들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보스와의 싸움이 힘들었다는 증거였다.

"결국 죽었네요."

보스의 잔해를 바라노는 김상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도 한때 상사였다는 그런 감정인가?

"이제 뭐 먹고살지."

"······."

뭐, 뒤를 봐주던 마족이 죽은 거니. 다만, 여기서 끝이 아닐 거다.

다른 마족들이 김상욱을 장기말로 활용하기 위해 다가올 확률이 크다. 마족의 존재를 알고, 마기를 다룰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으니까.

김상욱만큼 약삭 빠른 놈을 찾는 건 어려울테니.

"바깥과의 게이트도 연결 되었답니다!"

"모두 진짜 고생하셨습니다!"

"으아, 드디어 끝났네."

공략을 마친 헌터들 모두가 지쳐 있었다. 각자 바닥에 주저 앉아 포션을 들이키거나 치료를 받았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성공적인 공략이었습니다. 이제 나가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날 겁니다. 후, 이걸로 스타 헌터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겠네요."

"그래, 많이 해라. 스타 헌터."

이번 합동 공략은 신태양의 커리어를 자랑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 거다.

"무슨 소리세요, 스승님도 이제 유명해지시는 거죠."

"난 빼줘라."

이번에 벌인 일이 있으니까 나를 숨기긴 힘들겠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어디까지나 신태양에게 가 있는 쪽이 편하다.

'너무 유명해지면 내 활동 하나 하나가 주목 받게 된다.'

헌터계 몸 담은 이상 이름이 알려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아직 용병으로 활동하며 해야 할 일이 더 있으므로.

"으아, 이제 꼼짝도 못해요. 나 돈 꼭 줘야 돼요."

힐러에게 치료를 받고 온 진세아가 말했다.

"그래, 고생했다."

보스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부덕의 상자를 꺼낸 건 진세아였다. 그 덕에 일이 쉽게 풀렸다.

신아람은 은날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어서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다. 나는 근처의 돌 위에 걸터 앉았다.

'보상을 확인해야지.'

『 퀘스트 '이계 규율 개방'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목표 : 변형 기록의 마족 처치 ( 1/1 )

- 보상 : 세번째 이계규율 개방, 상점 카테고리 추가, 10000point

『 이계규율 상점에 '무기' 카테고리가 추가됩니다. 』

'오오.'

이제 포인트를 모아서 직접 무기를 구매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 퀘스트 보상으로 1만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변형 기록의 마족을 처치하여 241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다수의 권속을 처치하여 520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이계 규율의 보너스가 적용된 수치입니다. 』

'와, 굉장한데.'

자그마치 1만 7610 포인트를 한 번에 획득했다.

『 보유 포인트 : 75,910 point 』

두둑한 은행 잔고를 바라보는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다. 그러나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남았다.

새로운 이계 규율의 개방.

『 이계규율 그 세번째 : 전직(클래스) 』

'클래스?'

메시지를 확인하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 역시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클래스란, 게임이나 소설 속에서는 흔히 나오는 직업이다.

전사, 궁수, 마법사, 도적처럼 나뉘어진 각 계열. 이런 것들은 대부분 스킬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마법 계열의 스킬이 많으면 마법사, 검 스킬이 많으면 검사 이런 식이지.'

시스템이 정의해주지 않고, 헌터 본인의 선택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재능만 있다면 도중에 무기를 갈아치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 대상의 적성에 맞는 클래스를 부여합니다. 』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한테 맞는 클래스가 뭐지······?'

신태양의 말에 따르면 내 검술 재능은 형편 없다고 그랬다. 회귀 전 내가 가지고 있었던 스킬은 근력 Lv.1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설마 짐꾼 같은 직업이 되려나.

『 이계 규율이 소유주의 적성을 파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

파직, 파지직!

아니나 다를까 홀로그램 창이 스파크를 내뿜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이런 식이다. 이번에는 좀 더 따갑다.

뭔가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이런 식으로 재능이 없냐고. 괜한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에는 답이 금방 나왔다.

『 인과적 타당성을 계산하여 특수 클래스를 지급합니다. 』

『 당신의 클래스는 '마법사'입니다. 』

'······?'

너무나 의외의 클래스에 나는 멍하니 메시지 창을 바라봤다.

'설마.'

최근에 했던 일을 떠올리니 이유가 떠올랐다.

마력 서클을 생성하고, 그것을 고유 서클로 변형 시켰다.

걸인 송정호에게서 제대로 배웠다.

마력은 크게 증대 되었지만 아직 고유 서클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

그 탓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은데.

『 기초 스킬 '매직 미사일 Lv.1'를 지급합니다. 』

'······대박이다.'

본래 마법을 배우려고 시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내 재능이 너무 미천하니까.

'그런 내가 마법을 배우다니.'

검과 같은 냉병기는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것을 따라하는 걸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을 사용하는 이유였다.

'반면에 마법은 보는 것만으론 그 작동 원리를 파악할 수 없다.'

마법사의 감각으로 이뤄지는 기적의 발현. 그러한 감각은 재능이 없다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미쳤군.'

당장이라도 벽에 매직 미사일을 갈겨 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이계 규율의 클래스 덕에 마법 스킬을 얻었다.

'마법사 클래스라. 나중에 더 많은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건가?'

아직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터 협회 입니다! 모두 괜찮으신가요?!"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부상자부터 이리로······."

때마침 협회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단 거다.

'여기 온 목적을 잊으면 안 되지.'

나는 벽면에 난 틈에 발을 딛고, 2층으로 뛰어 올랐다.

타악.

아직 부숴지지 않은 바닥에 착지했다.

그 벽면에는 푸른 철문 하나가 존재했다. 손잡이는 없다. 조그마한 구멍 하나가 있을 뿐.

『 열쇠 : 마계의 틈 - 마도공학 연구소 』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은 열쇠를 꺼냈다. 폐허가 된 놀이동산에 잠들어 있던 던전. 그 안에서 최하위 마족 두 마리를 처치할 때 얻은 열쇠다.

예비 부품과 함께 상자에 들어 있었다. 마족들의 만약을 대비한 장치였겠지만, 내가 직접 쓰게 되었다.

틈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부드럽게 열쇠가 돌아갔다.

철컥.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와 함께.

끼이익.

철문이 열렸다. 문 틈 사이로 푸른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그때였다.

『 동료 윤서현이 '순간이동 Lv.3'을 발휘합니다. 』

내 옆으로 윤서현이 나타났다. 협회 사람들하고 헌터들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 없는 줄 알았는데.

"자, 잠깐만요! 어디가요? 여기는 뭐에요?"

"어떤 마족의 은신처입니다. 그 계획을 막으려면 가야하는 곳이고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모두와 함께 가려고 했지만.

『 최대 입장 인원은 1명입니다. 』

발전의 마족이 걸어 놓은 제약인 것 같다. 미래 김상욱의 말에 의하면 두뇌 회전이 상당히 좋은 마족이랬다.

우리들이 그 뒤를 쫓는 경우까지 대비한 모양이다.

다만, 지금이 아니면 그곳으로 향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마족의 둥지라고 불리는 이 장소는 마계의 틈과 가장 가까운 장소.

'나는 놈의 은신처로 향하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

발전의 마족이 가진 의심이 확신이 되기 전에 움직일 필요가 있다. 놈이 꽁꽁 숨어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완성하게 된다면.

더 강한 마족들이 본연의 힘을 가지고 우리 세계로 넘어 오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내가 막아야 했다.

"여길 공략하고 올테니, 나는 게이트를 빠져나간 걸로 해주세요."

"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윤서현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나는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C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 저지( 0 / 1 )

- 클리어 보상 :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 1.5배, 지정 스킬 한계 레벨 1증가 및 각성

이제 내가 레벨업을 할 차례다.

74화 한계 돌파 퀘스트(2)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눈 앞에 보인 건 거대한 성이었다.

스산한 분위기의 성.

내가 있는 장소는 정원이었다.

관리 되지 않아 메마른 식물들로 가득한 곳.

『 마계의 틈 : 마도공학 연구소에 입장하셨습니다. 』

첨탑 위에 걸린 보랏빛 달과 흘러가는 검은 구름.

'여기가 발전의 마족의 은신처.'

이전에 목격했던 마족처럼 마계와 인접한 차원의 틈에 자신의 요새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발전의 마족은 마도공학에 있어 상당한 권위자라고 그랬지.'

미래 김상욱의 말을 빌리자면, 여기는 놈의 연구소이자 실험실. 여길 개판치고 발전의 마족을 죽이는 게 내 목적이다.

'나 하나의 힘으론 부족할 수도 있지만.'

스르륵.

내 몸을 두르고 있던 방어구가 은빛 액체로 변해 바깥으로 나왔다. 이윽고 슬라임의 형상으로 변했다.

통통.

내 다리로 다가와 부비적대는 녀석. 일단 이 녀석만해도 1인분 이상이다. 녀석은 무기 말고도 늑대로도 변할 수 있으니.

사용하기에 따라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 이계 규율 : 현재 필드는 마계(魔界)입니다. 』

마계의 틈은 마계와 한없이 인접한 장소. 당연히 마계의 재앙 칭호가 발휘된다.

『 칭호 '마계의 재앙(災殃)'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마(魔)속성 대상으로 1000%의 데미지를 줍니다. 』

쿠웅.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뒤 나는 내가 나온 푸른색 철문을 닫았다.

"그러면 움직여 볼까."

내 말을 알아들은 오르티마가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녀석은 금방 방어구의 형태로 녹아들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실험체 206을 찾는 거다.'

여긴 발전의 마족의 집이나 다름 없는 곳. 무턱대고 돌아다녔다가는 놈이 발명한 각종 마도 병기에 둘러싸여 목숨을 잃을 거다.

'내부 구조는 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강이다. 난 김상욱에게 들었을 뿐이니까.'

때문에 안내자로 적합한 인물 필요했다.

- 그런 미친 장소에 왜 갑니까? 농담도 잘하시네. 만약에 간다면 말입니까? 그렇다면······.

미래의 김상욱이 추천해 준 인물.

실험체 206.

'연구소의 실험체였다가 탈출해서 발전의 마족을 여간 귀찮게 하는 게 아니랬지.'

나는 머릿속의 지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스킬 '기억 탐색' 덕에 내 기억력은 천재나 다름 없다.

별다른 경비나 마수들이 보이지 않는 걸 봐선 내 침입이 들키진 않은 모양. 혹은 침입 당하더라도 문제 없다는 자신감이거나.

'실험체 206하고 만나려면······.'

그대로 성 외곽의 철조망을 뚫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두운 숲.

이곳은 연구소 밖의 시설이다. 발전의 마족도 관리하지 않는 미관리 구역.

불길한 표식이 새겨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마족의 문자로 무어라 표시되어 있다. 아마 접근 근지 이런 뜻이 아닐까.

15분 정도 나아갔을까.

크르르······.

바로 옆 수풀에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마수의 정체는 고블린. 아니, 고블린의 몸에 개의 머리를 이식한 정체 불명의 마수였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 대상 실험체 고블린의 랭크는 A 입니다. 』

실험의 실패작인가.

크르르!

놈은 침을 흘리며 나를 향해 달려 들었다. 움직임은 일반 고블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마치 미래의 광폭화 고블린을 보는 듯하다.

"오르티마."

나는 오른손을 쭉 뻗었다.

방어구였던 오르티마가 늑대로 변해 달려나갔다. 오르티마의 발톱이 단번에 마수를 찢었다.

콰드득!

산산조각 난 마수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A급 마수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

오르티마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마계의 재앙 칭호가 적용되서 그런가본데."

내 데미지가 1000% 올라가는 칭호 마계의 재앙.

무기이자 펫인 오르티마의 데미지가 강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때였다.

크르르······.

어두운 숲 너머로 붉은 눈동자 수십 쌍이 떠올랐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수풀을 빠져 나온 마수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이었다.

늑대의 등에 식물의 꽃봉오리가 달려 있는가 하면, 오크의 팔과 곰의 팔을 한쪽씩 달고 있는 마수라던지.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자, 잠깐만요—!"

소녀 한 명이 풀숲을 뚫고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마수들과 내 사이로 뛰어든 소녀는 양 팔을 벌리고선 소리쳤다.

"그 사람 하고는 싸우면 안돼요!"

정확히는 마수들을 향해 외쳤다. 마치 말이 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실제로 소녀의 말은 마수들에게 먹혀들었다.

마수들이 다시 숲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간 것이다.

"후우, 다행. 다행이에요."

가슴을 쓸어내린 소녀의 귀는 뾰족했다. 결정적으로 그 팔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206이라고.

실험체 206.

그 정체는 금발의 엘프 소녀였다.

* * *

이종족(異種族).

시스템과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지성 있는 종족은 인간 하나였다. 그러나 게이트가 열리고 인류는 그 속에서 타차원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멸망한 문명의 잔재, 스러져가는 고성과 마을. 혹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던 숲과 지형 등등.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정확히는 인간 수준의 지성을 가진 존재가 없었다.

초기엔 내부의 환경을 이해하고 내부의 존재들과 의사소통 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있었다.

오크와 고블린도 미약하지만 지성을 가지고 있긴 하니까. 그러나 그런 시도들은 무위로 돌아갔다.

'상상을 뛰어넘는 공격성과 맹목적인 살인 본능.'

마수들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때문에 인류는 이해하는 대신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히 문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장소도 있었다지.'

하위 게이트일수록 숲이나 평원 같은 자연지형이 주를 이뤘지만, 상위 게이트일수록 어떠한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잦았다.

'그렇다면 다른 지성 있는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러한 의문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인류는 그 답을 원치 않는 형태로 맞이하게 된다.

'마족의 침략.'

마족들은 세계를 뒤덮었고,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족의 말로 또한 인류와 비슷했으리라.

'따지고보면 마족도 있는데 엘프나 드워프 같은 종족이 없으리란 법도 없지.'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종족들은 대개 마족의 권속이었으니까.

"당신은 발전의 마족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에요. 나를 구해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실험체 206은 나를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풀잎을 우려서 차를 내왔다.

어린 외형과 달리 그녀의 말투는 차분하고 정돈 되어 있었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차를 오르티마에게 슬쩍 먹인 뒤, 이상이 없자 한 입 마셨다. 씁쓸한 향이 꽤 괜찮다. 아무것도 없는 마계의 틈새에서 용케도 찾아냈다.

내 질문에 실험체 206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세레네. 이곳의 실험체였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전지(全知)의 능력을 일부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목적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할 때 전지(全知).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인가.

그 덕에 여기서 살아남은 거고.

"당신은 발전의 마족을 죽이려고 하시는 거죠?"

"그래,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너도 발전의 마족과의 사이가 좋지는 않다고 알고 있는데."

내 말에 세레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제가 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저 혼자의 힘으론 부족했지만, 오늘 당신이 와서 부족한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저야말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통찰로 확인한 세레네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실험체 206. 세레네는 본래대로라면 마족에게 죽는다.'

미래 김상욱에게 들은 결말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배신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멸망한 세계에서의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때는 진짜 믿을 사람이 없었지.'

하여튼 세레네는 안내인의 역할로서는 충분하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기도 하고.

"나머지 설명은 나가면서 할게요. 따라와 주세요."

허름한 벨트와 녹슨 단검으로 무장을 마친 세레네가 오두막 집의 문을 열었다.

* * *

"발전의 마족이 위치하고 있는 건 성의 꼭대기.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에요. 외부는 경비가 없다시피 하지만, 그 내부는 각종 마도병기로 가득하거든요."

세레네를 따라 미관리 구역을 쭉 돌아 성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뒷문을 사용할 거에요. 당신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쓸데 없는 체력 낭비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땅이 한층 더 검게 변하는 부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그쪽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 구역에 상주하고 있는 마수들은 제 언어가 통하지 않거든요."

쿠구구구!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을 파헤치고 다가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대검으로 땅을 내리쳤다.

쿠웅!

그 충격에 의해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 두더지 한 마리.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이 놈의 몸을 두르고 있었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나는 일자베기로 깔끔하게 놈을 베었다. 나를 지켜보던 세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가 알고 있는대로 강하시네요.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런 말을 하긴 아직 좀 이른 것 같다. 검은 땅을 뚫고 스물스물 올라오는 해골과 삐걱대는 기계들. 그 수는 삼십이 넘는다.

"조금 도와드릴게요."

『 하이 엘프의 가호가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

『 모든 능력치 25% 상승 』

단순하지만 순식간에 몸에 힘이 차오른다. 나는 오르티마를 풀어 놨다. 늑대로 변한 녀석이 미친듯이 달려가 마수들 사이를 헤짚었다.

콰아앙!

콰지직!

마력이 깃든 오르티마의 발톱이 해골과 기계들을 박살냈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충분했다.

나는 시험삼아 멀리에 있는 미니 골렘 하나를 조준했다.

『 스킬 '매직 미사일 Lv.1'을 발휘합니다. 』

손 끝에 맺힌 푸른 빛의 타원형 구체.

그것은 내 의지에 따라 발사 되었다.

『 스킬 '명중 Lv.11'을 발휘합니다. 』

쇄애액—! 콰아앙!

허공을 가르며 미사일처럼 쏘아진 마력 탄환이 미니 골렘에게 적중했다. 돌로 구성된 놈의 몸체가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굉장한데.'

물론 마계 필드이기에 데미지가 강한 거 겠지만. 마력을 쏘아낸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시전 시간이 빨라서 견제용으로도 쓸만하겠어.'

『 스킬 '매직 미사일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매직 미사일 Lv.3'을 획득합니다. 』

『 스킬 '매직 미사일 Lv.4'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매직 미사일 Lv.10'을 획득합니다. 』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창들.

다시 마수 중 하나를 향해 매직 미사일을 사용하려던 순간이었다.

끼기긱······.

고막을 찢어 놓을 것 같은 음산한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당황한 세레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저 마수가 여기에······?"

"뭔데 그래요?"

"미확인 구역의 주인이에요."

세레네가 가리킨 방향은 숲 너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기감으로도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그저 시끄러운 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질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마수. 투명화 실험체에요. 물러나죠. 승산이 없어요."

"어디에 있습니까? 전지의 능력이 있으면 알 수 있는 거죠?"

"그게 문제인거에요.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 미래가 안 보여요."

전지의 능력은 미래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물러나야하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죠."

나는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켰다. 녀석은 보이지 않지만, 놈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정도면 위치를 알기엔 충분했다.

『 스킬 '고유 서클 생성 Lv.10'을 발휘합니다. 』

내 몸을 맴돌기 시작한 마력의 구체가 푸른 빛을 발한다. 가속하기 시작한 회전 속도에 내 실낱 같은 마력이 더해졌다.

파아아—!

손 끝에 맺힌 마력은 더 이상 작은 탄환이 아니었다.

대포알이나 다름 없는 크기. 그야말로 미사일.

『 스킬 '매직 미사일 Lv.10'을 발휘합니다. 』

"자, 잠깐만요. 그런 걸 쏘면······!"

세레네가 놀라며 내게 소리쳤지만 미사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난 뒤였다.

마법을 처음 써봐서 간과하고 있었다.

어째서 마법사들이 그리 대우 받는지. 강력한 딜러로서 추앙 받는지. 검만 써왔기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마법의 파괴력은 동급 최강이라는 걸.

하이 엘프의 가호로 내 모든 능력치는 25% 증대된 상태. 그것이 마계의 재앙 칭호로 인해 1000%의 데미지와 결합 되었으니.

결과는 뻔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75화 한계 돌파 퀘스트(3)

발전의 마족이 위치한 연구소 최상층.

숲에서 발생한 폭발의 여파는 그곳까지 미쳤다.

쿠우웅!

옅은 진동에 발전의 마족은 들고 있던 장비 하나를 놓쳤다. 장비는 그가 만들던 포탈형 기계 장치의 아래 쪽에 떨어졌다.

발전의 마족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무슨 일이지? 실험체 206의 짓인가?"

"미관리 구역에서 의문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명하신대로 실험체 A-231를 재배치하는 과정에 일어난 일인 것 같습니다. 미관리 구역이라 직접적인 확인은 어렵습니다."

그의 질문에 대기하고 있던 권속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A-231은 투명화 실험의 실패작이었다. 미관리 구역에 던져 놓기는 했지만, 통제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시험을 위해 불러들이려 했건만.

거기까지 생각한 발전의 마족은 눈을 찡그렸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만한 규모의 폭발은 일어날 리가 없다.'

현재 연구소에서 통제되지 않는 변수는 실험체 206(세레네)가 전부다.

띠링.

발전의 마족은 홀로그램 창을 불러왔다. 거기엔 성 주변에서 발생한 폭발의 규모와 실험체에 대한 정보가 떠올라 있었다.

투명화 실험체 A-231의 바이탈 사인을 확인하는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흐음. 실험체 206이 한 짓이라고 보긴 어려운데.'

녀석의 발악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방금 그 충격은 실험체 206이 일으키기에는 너무 큰 규모였다.

'설마, 그 게이트를 통해서 인간이 들어 온 건가?'

마족의 둥지와 은신처를 잇는 작은 틈.

대한민국 내에서 프로젝트 마기의 실패. 아직 가동하지도 않은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의 중심 구역 파괴.

마지막으로 메이저 게이트의 예비 부품까지 도난 당했다.

'그래, 거기서 열쇠를 챙겼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실험체206과 인간이 결탁한 거라면.

성과 인접한 미관리 구역에서 폭발이 발생한 것도 이해가 간다.

발전의 마족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솟아났다.

'미치광이가 따로 없군.'

애시당초 이곳에 입장 가능한 인원을 1명으로 설정해 두었다.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자가 정말 있더라도, 홀로 들어 올 리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만약 혼자서 들어오더라도 처리하면 그만. 헌터 하나가 깽판 쳐봤자, 자신의 손바닥 안일테니까.

'그런데, 정말로 혼자서 올 줄이야.'

제정신 머리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뭘 믿고 온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수준이다.

'마법을 꽤나 쓸 줄 아나본데 그걸론 부족할 거다. 힘과 기술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지. 내 연구소에 온 걸 후회하게 해주마.'

발전의 마족은 고개를 돌려 권속에게 명령했다.

"마력 저항 마도 병기를 내보내라. 놈의 자랑이 마법이라면, 그걸 완전히 박살 내주는 재미가 있을테니."

일단 붙잡고 나면, 놈이 어떻게 마족의 계획을 알아냈는지는 차근차근 캐내면 되는 문제였다.

* * *

매직 미사일의 위력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뜨거운 열풍이 훅 끼쳐왔다. 매직 미사일의 폭발에 나와 세레네 또한 휘말릴 뻔 했으나.

『 아이템 '무패의 반지 Lv.100'의 스킬 '방어막 Lv.10'을 발휘합니다. 』

순간적으로 방어막을 펼쳐 피해를 막아냈다.

"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에요······?"

매직 미사일이 명중한 장소에는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았다.

뻥하니 뚫린 숲의 크레이터를 바라보는 세레네는 멍한 표정이었다.

"전지(全知)의 능력도 완전하지는 않은가 봅니다."

"아니, 당신의 힘이 규격을 뛰어 넘은 거라구요. 이럴 리가 없는데······."

한참을 크레이터를 바라보던 세레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세레네의 등을 툭 쳤다. 살짝 쳤는데 세레네가 기우뚱하며 넘어질 뻔했다.

"뭐, 뭐에요?"

"빨리 전진하죠. 이만한 폭발이 있었는데, 발전의 마족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쵸, 그렇겠죠. 그렇다면 이쪽으로 전진하면······."

세레네의 안내를 따라 미확인 지역을 돌파했다. 가는 동안 전투는 없었다.

숲에 숨어 있던 실험체 마수들이 폭발에 놀라 도망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철조망을 자르고, 넘어 온 성의 뒤편. 잠시 주변을 살피던 세레네는 벽으로 다가가 손을 올렸다.

『 동료 세레네가 스킬 '다세계 해석' Lv.2를 발휘합니다. 』

세레네의 자그마한 손에서 퍼져나간 녹빛의 마력이 벽을 뒤덮었다.

쿠구궁.

숨겨져 있던 돌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와 세레네가 들어갈만한 틈이 만들어졌다.

"성 내부에는 영상 장치가 곳곳에 있어요. 최대한 들키지 않는 동선으로 이동하겠지만, 보장은 못해요."

"알겠습니다."

이 안은 발전의 마족이 지배하는 하나의 세상이다. 이미 침입을 들켰을지라도, 안전한 루트를 통해 움직이는 건 의미가 있다.

오래된 성의 외관과 다르게 내부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현대의 연구실과 비교해도 다르지 않다.

'마족의 발전 수준도 장난 아니네.'

헌터들은 그들이 가진 힘에만 집중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들이 가진 지식 또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쪽이에요."

세레네의 뒤를 따라 새하얀 복도를 쭉 달렸다.

"위쪽으로 올라가려면 보안 카드가 필요해요. 저희는 그걸 구하러 실험실 C-3으로 향할 거에요."

나를 슬쩍 돌아 본 세레네가 말을 덧붙였다.

"거기를 지키는 가디언과 전투는 피할 수 없어요.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복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실험실 앞에 도착했다. 새하얀 문 위에 페인트로 C-3이라고 적혀 있다.

세레네가 문 위에 손을 올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콰앙!

어디선가 날아 온 작살이 내 바로 앞에 꽂혔다. 철제 골렘이었다. 그 주변으로 보랏빛 기운이 은은하게 퍼져나오고 있었다.

콰앙!

다시 발사 된 작살. 나는 대검을 들어 쳐냈다. 작살은 세레네의 근처에 박혔다.

"꺄악!"

바닥에 넘어진 세레네를 일으켜 세웠다.

"오르티마, 세레네를 지켜라. 문을 열 때까지 제가 저 놈을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그, 그래요. 근데 저 놈 아마······."

내 손 끝에서 발사 된 매직 미사일. 이번에는 출력 조절을 생각하며 쐈다.

허공을 가르며 나아간 마력의 탄환은 철제 골렘에게 정확히 명중했다.

우우웅.

철제 골렘은 매직 미사일을 그대로 집어 삼켰다. 놈의 주위에 다가가자 매직 미사일이 그대로 증발했다.

세레네가 조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대(對)마법사용 마도 병기······. 마력이 통하지 않을 거에요. 괜찮으시겠어요?"

그 형태를 보다보니 미래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늘을 유유히 날아 폭격을 퍼붓는 기계장치 용.

산 하나만한 크기의 기동요새.

죽음을 모르고 진격하는 기계 장치들.

그들에 의해 유럽이 초토화 되었단 소문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다들 그랬었는데.

철제 골렘의 정교함을 보아하니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겠다 싶다.

"괜찮습니다. 제 주무기는 마법이 아니거든요."

"네?"

"빨리 문이나 열어주시죠."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 대상 마도병기(마력저항)의 등급은 A 입니다. 』

나는 땅을 박차고 골렘에게 달려갔다. 골렘의 양 팔에서 작살 두 개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몸을 틀어 두 개의 작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촤르륵!

『 스킬 '회피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회피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회피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회피 Lv.10'을 획득합니다. 』

『 공격 회피 확률 10% 증가, 회피 동작시 민첩 10% 증가 』

떠오르는 메시지창을 지나쳐 나는 골렘의 코어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푸쉬익!

증기를 뿜어낸 철제 골렘이 민첩하게 오른팔을 휘둘렀다.

카아앙!

골렘의 철제 팔과 내 대검이 부딪히며 푸른 불꽃이 튀어올랐다. 검에 두른 마력조차 빨아 들이는 신기한 물질이다.

심지어 그 단단함도 일반적인 물질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근데.'

마력을 실을 수 없다는 건 상당한 패널티였지만.

『 스킬 '거인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 추가효과 : 순간적으로 근력이 30% 증가합니다. 』

콰드드득!

『 칭호 마계의 재앙의 효과로 데미지가 1000%가 됩니다. 』

'이거 앞에선 답 없거든.'

순수한 파괴력만으로 찍어 누르는 공격. 철제 골렘은 압축기에 들어간 기계마냥 부숴졌다.

골렘의 몸을 이루고 있던 부품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 402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대검에 묻은 기름을 털어낸 뒤, 고개를 들었다. 마도병기는 이 놈 하나가 아니었다.

뒤쪽으로 열 대가 넘는 철제 골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심볼을 보아하니, 아까랑 같은 기종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골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지이잉.

실험실의 문이 열렸다. 우리를 습격한 골렘들은 전부 고철 덩이가 되어 복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면······. 발전의 마족도 기겁할 거에요. 이만한 수준의 골렘을 만드는 데 드는 자원과 노력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거든요."

다시 쓰러진 골렘에 눈길을 주는 세레네.

"발전의 마족 개인이 소유한 군단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까지 내가 숨어다닌 게 바보 같아질 정도잖아요."

적잖이 놀란 모양. 그 자리에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한 번 생각에 빠지면 골똘히 몰두하는 성격인가 보다. 나는 세레네의 등을 떠밀어 실험실로 들어갔다.

"이건 다 뭡니까······?"

실험실 내부에는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시험관 안에 갇혀 있는 정체 불명의 생명체들.

그 중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도 있었다.

"생체 병기일 거에요. 다들 살아있다고 보기엔 어려운 상태죠. 여기 어딘가에 보안 카드가 있을텐데."

세레네는 반대편에 있는 책장을 뒤졌다. 나는 시험관을 하나씩 살펴봤다.

다양한 종족을 전시해 놓은 것처럼 늘어 놓았다.

그러던 도중 중앙에 놓인 둥그런 구 하나를 발견했다.

『 유니크 아이템 '마도 : 마력 증폭 제어 장치' 』

- 일시적으로 마력 폭주 상태에 돌입합니다.

- 해당 상태를 제어합니다.

'이건······. 쓸만하겠는데.'

그런데 기계 장치에 의해 구속 되어 있어 빼낼 방법이 없다.

"이걸 사용하면 가져갈 수 있을 거에요."

어느새 다가온 세레네가 보안 카드를 들어 보였다.

철컥.

카드를 근처에 가져다대자, 구를 감싸던 구속이 해제 되었다.

"그건 쓸 수 있을 거에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세레네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보안 카드를 꼭 쥔 채 나를 바라봤다.

"이제 발전의 마족을 잡으러 가는 일만 남았어요."

"전지의 능력으로 승리할지 미리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까도 봐서 알겠지만, 솔직히 제 능력은 불안정해요. 정말로 모든 걸 알 수 있었다면 저는 이미 여기에 없었겠죠."

결국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아이템을 챙겨 다시 복도로 나오려는데 오르티마가 스르륵 한 시험관에 다가섰다.

마계어로 된 붉은 색 홀로그램이 떠올라 있는 시험관. 다른 것들하고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였다.

"응? 왜 그래?"

그 안에 담긴건 자그마한 용이었다. 시험관에 담겨 눈을 감고 있는 어린 용.

오르티마는 그 앞에서 통통 튀고 있었다.

'설마, 흡수할 수 있는 건가?'

오르티마는 다른 존재를 먹어치워 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앞서 확인한 바로는 고등급의 생물은 불가능했다.

새끼용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주의하라고도 적혀 있어요."

옆에 있던 세레네가 경고문을 읽어주었다. 손을 가져다대자 실험체에 대한 정보도 떠올랐다.

"이건······. 인공적으로 드래곤을 창조해내려고 한 것 같네요. 결과는 처참한 실패이니 절대 손대지 말라고 그러는데요."

그래도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콰아앙!

대검으로 시험관을 부수자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녹빛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왜, 왜 그러는 거에요?!"

영문을 모르는 세레네가 날 쳐다봤다.

그 순간.

삐이이이——.

붉은 조명이 점멸하며 비상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어차피 침입도 다 들킨 마당에.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기뻐합니다. 』

오르티마는 시험관에 놓인 새끼 드래곤을 향해 다가갔다. 드래곤을 삼킨 오르티마의 모습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 오르티마가 해당 개체의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

『 개체의 오류를 자가판단 하에 수정합니다. 』

『 오르티마가 '마공학 드래곤(해츨링)'의 형상을 기억합니다. 』

'그런 거였군.'

세레네의 말대로 진짜 드래곤이 아니었다. 마족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마공학 드래곤.

그렇기에 오르티마가 형상을 기억할 수 있었다.

크르르······!

검은 외형과 푸른 눈. 작은 날개는 비행용이라기엔 너무 앙증맞았지만, 오르티마는 마력을 사용해 허공으로 부유했다.

일단 눈을 끔뻑이는 세레네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오르티마, 이 실험실을 쓸어 버려."

발전의 마족이 모아둔 연구 기록.

하나도 남길 생각이 없다.

이제는 드래곤의 새끼인 해츨링으로 변한 오르티마의 입가에서 검은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강렬한 폭발이 실험실을 뒤덮었다.

그 위력은 내 매직 미사일 못지 않다.

'좋은데.'

복도로 나오니 다시 골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복도를 빽빽히 채운 골렘들.

"으앗?! 자, 잠깐만요!"

나는 세레네를 등에 엎었다. 말하는 투는 성인이지만, 외관은 어린 소녀다. 때문에 가볍게 업을 수 있었다.

"오르티마, 돌진해라."

허공에 부유한 오르티마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빛살처럼 쏘아진 오르티마가 골렘들을 도미노처럼 처부수며 나아갔다.

그렇게 생겨난 복도의 틈.

"지금부터 발전의 마족이 있는 곳까지 달립니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이제 놈을 잡고 레벨업 퀘스트를 클리어 할 시간이다.

76화 발전의 마족(1)

"주, 주인이시여. 출격 명령을 내렸던 마도병기가 전부 파괴 되었습니다. 놈들이 침입한 실험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보고 있다."

발전의 마족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럴 리가 있나.'

침입자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발전의 마족은 메이저 게이트 생성 장치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외부의 상황을 구태여 확인하지 않았다. 적이 아무리 뛰어난 마법을 쓰더라도, 마력저항 마도 병기 앞에선 무력할테니까.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에 발전의 마족은 확신했다.

'고작해야 인간 하나와 실험체. 내 마도병기들을 뚫을 순 없어야 하는데······.'

인간과 함께 실험체 206을 제거하는 걸로 사건은 마무리 될 거라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마도병기가 전부 파괴 당했다. 연구소 내부의 영상 장치를 확인하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검을 든 남자가 차례차례 마도병기를 깨부수고 있었다. 마법을 주특기로 다루는 놈인 줄 알았건만. 완전한 오판이었다.

영상을 분석하듯 자세히 살펴 본 발전의 마족이 헛웃음을 지었다.

'움직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대단하다고 치켜 세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이 파괴력은 대체 뭐냐. 내 마도 병기를 이렇게 간단히 압살한다고?'

영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식 같은 마도병기들이 산산조각이 날 때마다 발전의 마족의 심장도 갈갈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으므로.

"그것 뿐이 아닙니다. 현재 상황을 봐주십쇼."

부하가 띄워 올린 붉은 홀로그램 창에는 현재 놈들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앞을 빽빽히 막아서는 기계 장치들.

그 하나 하나는 A급 마수에 필적하는 강력한 놈들이었다.

콰과과과!

그곳을 미친듯이 돌파하는 검은 새끼용. 몸에 두른 검은 마력이 경비 골렘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허, 어떻게 이런."

여지껏 침착함을 유지하던 발전의 마족의 눈이 커졌다. 새끼용의 외관은 분명 자신이 연구하던 실험체 중 하나였다.

마공학 드래곤.

타차원의 종족들을 합성해 인공적으로 용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처참히 실패한 연구였다.

외형은 본땄으나 그 뿐이었다. 드래곤이 가진 힘과 지성, 마력 등은 가져올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건······.'

압도적인 파괴력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마력.

그야말로 드래곤이지 않은가.

'가지고 싶군. 잡아서 해체하고 분해하고 싶어.'

발전의 마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마도공학자로서의 탐구심이 그를 끓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게로, 네가 직접 나가서 시간을 끌어라. 나는 그 병기를 꺼내오지."

"그거 말씀이십니까? 연구소의 피해가 너무 심각해지지 않겠습니까?"

"저 놈들은 이미 내가 예측한 수준을 뛰어 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철저하게 해야겠지."

영상 속의 검은 드래곤을 바라 본 발전의 마족은 확신했다.

인간 하나와 실험체를 처리하는 일.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건 놓칠 수 없지."

하지만 저 드래곤만큼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 * *

골렘들을 박살내며 나아가는 검은 새끼용.

골렘을 하나 박살 낼 때마다 그 속도와 위력은 증가하고 있었다.

콰과과과!

처음에는 부딪히는 것을 파괴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닿는 것만으로 골렘들이 튕겨나가고 있다.

데미지 10배의 마계의 재앙 칭호와 성장이 합쳐지니 막을 수가 없는 수준이다.

동시에 내 옆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메시지들.

기분 좋은 레벨업 알림이었다.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녀석은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받으며 실시간으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오르티마의 레벨은.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Lv.101 』

카오!

신나서 울부 짖는 오르티마.

늑대로 변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잠깐, 레벨이 101?'

그런데 레벨이 뭔가 이상했다. 본래 오르티마가 변한 물건은 최대 레벨이 100이었다. 후라이팬이든, 무기든 전부.

그런데 지금 마공학 드래곤은 최대 레벨인 100을 넘겨 있었다.

『 소환수 정보 』

- 이름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 레벨 : 101 / 120

- 등급 : 특수 유니크

정보창을 확인하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최대 레벨이 120?'

흡수한 마수의 등급이 높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단 의미였다.

'좋은데.'

연구소에 들어와 생각치도 못한 이득을 얻었다.

"······이제 좀 내려주시면 안될까요?"

내 등 뒤에 업혀 있던 세레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계속해서 업고 달리고 있었다.

몰려오던 골렘들은 전부 처리했으니 내려줘도 된다. 얼굴이 붉어진 세레네는 설명을 시작했다.

"크흠, 이제. 상층부로 올라갈 거에요. 저희가 있는 이곳은 1층, 발전의 마족이 있는 최상층은 5층이지만 보안 카드를 쓰면 한 번에 갈 수 있어요."

벽면에 놓인 엘레베이터.

세레네가 그곳으로 다가가려는 때였다.

"꺅!"

화르륵!

좌에서 우로 길게 뻗은 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순식간에 불의 장벽이 생겨났다. 불길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이거야, 원. 난리도 적당히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험체 206. 특히 당신은 너무 거슬릴만한 짓을 많이 했네요. 주인님께서도 노하셨습니다."

흑갈색 피부,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외관이었다.

"전 발전의 마족님의 권속 게로라고 합니다."

"······염화족이라고 부르는 특수 종족이에요. 화염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요."

"어우, 그거 되게 성가시네요. 전지의 능력이라고 그랬나? 남의 정보를 나불대는 건 매너가 아니죠."

따악.

놈이 손가락을 튕기자 불의 장벽에서 생성된 구체 다섯 개가 세레네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그 공격을 놓치지 않았다.

'마력을 조절해서······.'

적당량의 마력을 담아 매직 미사일을 쐈다. 빠르게 날아간 매직 미사일과 불덩이들이 공중에서 부딪히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염화족 게로가 피식 웃었다.

"인간치고는 뛰어난 솜씨네요. 제 동료인 이형 생물 로바크를 쓰러뜨린 것도 당신이라던데 맞나요?"

"그렇다면 어쩔거지."

"충고하려고요. 그 녀석을 쓰러뜨릴 때 조금이라도 고전하셨다면, 당장이라도 꽁무니 빼고 돌아가는 게 나을 겁니다. 내 힘은 그런 허접한 놈하곤 차원이 다르거든요."

샤아아—!

게로의 등 뒤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고위 마법을 발휘 할 때 형성되는 마법진이었다.

"그대로 녹아 사라지면 됩니다."

문양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저 공격은 막을 수 없어요!"

세레네가 내게 경고했다.

그런데 마법을 사용하는 게로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놈은 세레나를 바라보며 조소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꺄악!"

강렬한 섬광이 복도를 뒤덮었다. 마지막 순간 나는 세레네를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저 권속 놈은 처음부터 세레네를 노리고 있었던 거다.

뜨거운 열기가 훅끼쳐 왔다. 뒤를 돌아보니 벽면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열기로 녹아 이글거리는 벽면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쳇, 용케 눈치 챘네요. 근데 다음은 못 피할 겁니다. 다음 공격은 복도 전체를 뒤덮을 거 거든요. 나는 염화족이라 폭발에 피해를 입지 않거든요."

권속 게로는 홀로그램 창을 불러오더니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런 걸 왜 알려주냐고요? 그게 재밌잖아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 주인님께선 막고 있으라고만 하셨지만, 제 생각에 그 쪽이 그리 강해보이진 않아서요."

- C-3 구역을 격리합니다.

기이잉! 쿠웅!

앞과 뒤쪽의 천장에서 격벽이 내려오며 우리가 있는 공간을 완벽히 격리 시켰다. 동시에 푸른 마력이 가볍게 내부를 뒤덮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발악해보세요."

다시금 권속의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내게는 방어 수단이 전무하다. 무패의 반지가 가진 방어막은 이미 썼고, 보호 계열의 스킬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일자베기로 베어낸다면 가능성은 있지만······.

세레네까지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나는 공중에 떠 있는 오르티마를 잡아챘다.

뀨?!

방금 전 실험실에서 얻은 아이템을 놈에게 가져다 댔다.

『 유니크 아이템 '마도 : 마력 증폭 제어 장치' 』

촤르륵.

구체는 그대로 금색의 허리띠가 되어 오르티마에게 장착되었다.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가 마력 증폭 상태에 돌입합니다. 』

『 해당 상태가 제어 장치에 의해 통제됩니다. 』

오르티마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넘실거린다. 오르티마가 내뿜었던 검은 브레스는 단순한 불길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력이 담긴 마공학 브레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쓸만하다.

나는 대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또 다른 권속인 이형생물한테 고전했냐고 그랬나. 확실히 조금 고전하기는 했다만."

"그렇다면 날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그 놈은 나보다 훨씬 약했거든요."

"근데 말이야."

확실히 앞서 싸웠던 하위 권속은 강력했다. 놈이 쉴 새 없이 소환하는 촉수들은 성가시기 그지 없었다.

"그 촉수 놈보다 네가 10배만큼 셀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는 마계 필드다.

나는 물론이고, 오르티마도 1000%의 데미지를 가진다.

"무슨 같잖은 소리를!"

염화족 게로의 몸에서도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오르티마의 입에서 광선과도 같은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

세차게 뿜어져 나온 검은 브레스가 게로의 폭발을 막아냈다. 두 힘이 중간에서 만나며 양보 없는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폭발의 여파로 붉은 화염이 쏟아졌지만.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촤아악!

마력조차 베어내는데 화염 정도야 가볍게 베어낼 수 있다. 오르티마의 검은 브레스는 끊임 없이 쏟아졌다.

"밀어내고 있어요!"

세레네의 말대로였다. 검은 브레스가 게로의 폭발을 억제하고 있었다. 밀어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폭발을 잡아먹고 있었다.

"뭐, 뭐?!"

당황한 게로가 소리쳤지만 한 순간이었다. 대처할 시간은 없었다. 놈은 나와 오르티마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콰아아아!

해일처럼 밀려든 검은 브레스는 이내 완전히 게로를 잠식했다. 적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 버리는 필살의 일격.

녹아내린 벽, 검게 그슬린 바닥. 권속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에 더해 브레스는 뒤쪽의 격벽까지 완벽하게 뚫어버렸다.

크앙!

공격을 마친 오르티마가 자랑스런 듯이 나를 바라봤다. 완벽한 승리였다. 세레네는 멍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진짜 드래곤 새끼하고 비교해도 될 정도인데요······."

"드래곤을 본 적 있습니까?"

"네, 어렸을 적이긴하지만요. 앗."

오르티마가 세레네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세레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

『 염화족 게로를 처치하셨습니다. 』

『 2031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의 레벨이 3 상승합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Lv.104 』

기분 좋은 알림이었지만.

권속을 잡았음에도 레벨이 3밖에 안 올랐다. 레벨 100부터는 경험치 통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건가?

'원래 오르티마 자체가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먹는 존재긴 하다.'

알에서 부화하는 데까지만 해도 엄청난 시간과 경험치가 필요했으니까. 기존이 최대 레벨을 넘어선 상태에선 이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게로는 별 다른 아이템을 뱉어내지 않았다. 애초에 통째로 녹아서 사라졌으니, 챙길 것도 없다만.

"이제 올라가죠."

"네."

머리에 새끼용을 얹은 세레네가 엘레베이터에 보안 카드를 가져다 댔다.

이제 남은 건 발전의 마족 뿐이다.

* * *

세레네의 말에 따르면 보안 카드의 등급이 높기 때문에 엘레베이터에서 방해를 받을 일은 없단다.

그 말대로였다.

우리는 순조롭게 최상층에 도달했다.

"여기가 발전의 마족이 거주하는 공간이에요. 제 고향으로 향할 수 있는 장치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아래층의 연구소와 그 인테리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전의 마족은 어디에······."

굳이 고개를 돌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보랏빛 피부. 안경을 걸친 발전의 마족.

그는 붉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놈은 몸에 특수한 금속을 걸치고 있었다. 단순한 방어구 같진 않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금속 슈트 같은 것이었다. 발전의 마족은 손을 까닥였다.

좌측과 우측의 벽면이 격납고처럼 열리더니 기계 골렘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더 이상 투박한 골렘이 아니었다.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다. 그런 놈들이 수 십 대. 발전의 마족의 뒤에 늘어섰다. 놈들의 시퍼런 안광이 우리를 향했다.

"게로까지 죽이고 넘어 오다니. 훌륭하네. 덕분에 좋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인간과 실험체의 눈물겨운 탈출기. 응, 참으로 감명 깊어."

완전히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이대로 그냥 죽이고 끝내지만, 나는 그런 야만적인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그러니까 특별히 허락하마."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거래를 하나 하지 않겠나?"

나는 그런 놈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놈은 뭔가 착각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놀러 온 게 아니다.

실수로 발을 들인 것도 아니다.

내 목적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 특성 '타재간파(타재간파)'를 발휘합니다. 』

『 타재간파의 서를 불러 옵니다. 』

『 타재간파의 서 』

- 광화(자아통제) Lv.10 [ 비활성화 ]

- 신속(神速) Lv.10 [ 비활성화 ]

- 오러 블레이드 Lv.10 [ 비활성화 ]

나는 헌터로서 놈을 사냥하기 위해 왔다.

77화 발전의 마족(2)

발전의 마족은 태연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네 옆에 있는 그 드래곤. 그걸 내게 내놓는다면 살려주마. 덤으로 실험체 206 네 녀석도 본래 있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주지."

그는 자신의 하얀 머리를 쓱 쓸어 올렸다. 승리를 확신한 얼굴이었다.

마족 특유의 오만함과 찌를 듯한 자신감이 곁든 그런 제안.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오르티마를 주면 살려줘? 개소리를 잘도 한다.

"싫다."

"흐음, 착각하고 있군. 이미 네 놈에 대한 데이터는 전부 쌓였다. 권속이 죽은 것은 아쉽지만 상정 범위 이내다. 네 녀석이 날 이길 확률은······."

발전의 마족 근처에서 복잡한 수식이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1% 미만이다."

그가 앉아 있는 붉은 소파 뒤를 가득 채운 안드로이드들. 그 외형은 SF 영화의 로봇과 비슷하다.

"실험체 206 네 녀석도 돌아와라. 아직 하지 못한 실험이 많이 있지 않나."

"······."

세레네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실험체로 있었던 동안의 공포가 그녀의 몸에 각인 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세레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 봤다.

"그냥 쳐부수죠."

대체 얼마나 나를 분석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예측 못할 거다.

나도 세 개의 능력을 동시에 활성화 시키는 건 처음이거든.

『 타재간파의 서에 기록 된 항목을 활성화합니다. 』

붉은색의 빛 무리가 내 몸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붉은 마력. 정신이 아득해질 것처럼 차오르는 힘이다.

『 '광화(자아통제) Lv.10'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

적혈의 버서커(광전사) 신아람의 능력 '광화'.

『 '신속(神速) Lv.10'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

환세의 도둑 진세아의 능력 '신속'.

『 '오러 블레이드 Lv.10'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검성 신태양의 '오러 블레이드'.

『 총 3만 포인트를 소모하셨습니다. 』

『 잔여 포인트 : 59,253 Point 』

3만 포인트라는 막대한 양이 소모되지만, 연구소에 들어 오고나서 얻은 포인트가 1만 포인트 이상이다.

하위 마족이라는 적을 앞두고 포인트를 아낄 필요는 없었다.

화르륵!

대검 마족 학살자 위로 화려한 마력의 불길이 치솟았다. 천장에 닿을 듯이 일렁이는 강력한 마력.

나는 기계 병사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콰아앙!

내가 발을 뻗은 자리에서 강렬한 마력이 휘몰아치며 기계 병사들을 튕겨냈다. 광화 상태란 온 몸이 무기나 다름 없는 특수 상태.

반대편에 있던 기계 병사 수십 마리가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 들었다.

『 칭호 마계의 재앙을 발휘합니다. 』

『 데미지가 1000%가 됩니다. 』

나는 가볍게 대검을 휘둘렀다.

붉은 마력이 파도처럼 쏘아져 나갔다. 발전의 마족이 자랑하는 기계 병사들은 그 압력에 견지디 못하고 찌그러지고 부서져나갔다.

콰득, 콰드득!

압축기에 눌리 듯 찌부러진 녀석들은 그대로 쓸려나갔다.

콰아아앙!

넓은 실험실의 벽면까지 도달한 마력은 기계병사들을 한쪽으로 몰아 붙인 뒤, 벽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그대로 밀려 바깥으로 떨어지는 기계병사들.

'진짜 미쳤군.'

세 개의 능력에 더해 칭호까지 합쳐지니 나조차 출력이 짐작되지 않을 정도였다. 병사들을 정리 했으니, 이제 발전의 마족의 차례다.

"허······. 크하하! 크하하하하!"

소파에 앉아 있던 발전의 마족은 오히려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내 역작들을 이리도 간단히 박살내다니! 네 녀석을 잡아 연구한다면 얼마나 더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감도 안 잡히는구나."

놈의 눈에 깃든 탐욕의 빛.

날 잡아다 연구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올 거다. 나만큼 재능 없는 사람도 없을테니까.

어차피 잡지도 못할테지만.

타재간파로 활설화 시킨 능력 3개.

광화, 신속, 오러 블레이드.

지금의 승기는 내게 있다.

나는 발전의 마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아아!

오러 블레이드가 둘러진 대검이 푸른 잔상을 남기며 공간을 베어냈다. 발전의 마족은 팔을 들어 내 대검을 막았다.

콰드드득!

놈은 전신에 기계 장치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이 갑주의 역할을 하며 검은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광화 상태의 오러블레이드를 앞두고 팔을 뻗은 건 놈의 실수였다.

콰드득!

칼날이 짙은 마기를 뚫고 발전의 마족의 팔을 파고들었다. 그제서야 여유롭던 놈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콰아앙!

발전의 마족이 급하게 마기를 응축시켜 폭발을 일으켰다. 그 반발력에 나는 뒤로 밀려났다.

『 스킬 '신속 Lv.10'의 효과로 전투 중 스피드가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

『 현재 증가된 스피드 : 35% 』

그러나 그 거리마저 단숨에 좁히고 들어간다.

"어딜!"

발전의 마족이 착용하고 있던 수트의 뒤에서 다섯 쌍의 기계 팔이 돋아났다. 그것들의 끝에서 쏘아지는 강렬한 마기의 광선.

나는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차고 뛰어 오르며 몸을 비틀었다.

다섯 줄기의 광선들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지나간다. 발전의 마족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양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출력의 마기. 흡사 오러 블레이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놈의 마기와 내 오러 블레이드가 격돌했다.

전신을 뒤흔드는 파공음이 실험실 내부를 울렸다.

셀 수 없이 많은 불똥을 공간 위에 아로새기며 나는 대검을 밀어 붙였다. 발전의 마족 또한 말 없이 자신의 마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타재간파의 제한시간 남은 시간 약 28분.

그 안에 결착을 내야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