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역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악명을 남기다
“라 장군. 연기종의 지위를 아셔야지요.”
혼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대륙과 백성을 보호하는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 년에 한 번 이방의 마인(魔人)들과 전쟁을 하지요.
벽락과를 얻는다면 우리 연기종은 더 큰 실력으로 천하를 보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일을 두고, 어찌 기어이 이득을 보고자 하십니까? 라가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기적이고 천하를 생각하지 못하는 가문이었습니까? 라 장군, 대체 무슨 낯으로 제게 조건을 제시하시는 겁니까? 천고의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면, 어서 그 벽락과를 건네십시오.”
혼비의 입에서 그들 연기종은 대륙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벽락과를 얻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라홍천이 거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연기종에게 이런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면 더더욱 불리해질 게 뻔했다.
“하하하.”
라홍천은 미친 듯이 웃었다.
“이게 바로 연기종의 소임이라는 것이오? 천하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소? 한마디로 위선적인 소인 아니오? 정말로 백성을 생각한다면, 왜 백성에게는 천만 금화를 건네지 않는 거요? 설마 연기종이 그 정도로 가난한 게요?”
짝짝짝!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수 소리가 마당 밖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멀리 찬란한 햇빛 아래, 마른 소녀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찬란한 빛이 그녀의 몸에 떨어지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맞습니다.”
고약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기종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가난해진 겁니까? 금화 천만 개도 없다니……. 쯧쯧쯧, 이래서 누가 연기종의 문하생이 되고 싶겠습니까? 아! 왜 오라버니께서 연기종을 거절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고약운!”
혼배의 얼굴이 보기 나쁠 정도로 구겨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갈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폐물, 고약운이 등장했다. 고생소처럼 연기종의 초청을 거절한 폐물!
고생소는 그나마 천재였다.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인지라, 연기종에선 고생소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그에 비해 고약운 저 계집은 가진 게 뭐가 있는가? 고작해야 폐물일 뿐인데,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온단 말인가?
‘아니,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지.’
혼비가 차갑게 웃었다.
“흥. 내가 널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날 줄이야. 마침 잘 왔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정신력을 모조리 뽑아내 시운 아가씨께 바칠 것이다.”
정신력은 수련자에게 있어서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정신력을 뺏긴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건 아니지만, 평생 수련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기엔 충분했다.
그의 말을 듣고 라홍천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신가요?”
고약운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가볍게 웃었다.
“내가 왜 내 정신력을 당신네 아가씨에게 바쳐야 합니까? 내게 좋을 게 없는데요. 그걸 모를 정도로 나도 멍청하진 않은데?”
“벽락과 정도야 우리 연기종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아니지만, 네 정신력은 확실히 필요하지.”
혼비는 지금 거의 반쯤 미쳐있었다. 시운이 알려준 계획과 주의할 점은 이제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저 빌어먹을 계집이 연기종을 거절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고약운 저 계집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고약운. 네 체질에 대해선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네 영해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 크다. 그렇지만 폐물인 네가 십 년을 수련한들, 무자 경지를 돌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폐물은 폐물이지.”
혼비가 고약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폐물이니 사람 한 명 돕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아무 쓸모가 없을 텐데, 대륙과 백성을 위해 희생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시운 아가씨로 하여금 제 정신력을 흡수시키도록 하려는 거군요. 아가씨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고약운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혼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참으로 맑았다.
“제가 보니, 시운 아가씨는 아주 음험하고 악독한 공법으로 수련을 했더군요. 살기 위해, 그리고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선 다른 이의 정신력이 필요하겠지요.”
라홍천은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연기종의 아가씨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무슨 독한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 이는 들어본 적도 없는 소리였다.
“흥.”
혼비는 고약운에 의해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고약운을 비웃을 뿐이었다.
“시운 아가씨는 우리 연기종의 천재이며, 대륙의 희망이다. 이 세상의 이방 마인을 물리치기 위해, 아가씨께선 대륙과 백성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셨지.
연기종과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건 강제적인 일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하는 행동이다. 고약운, 네가 살아있어 봤자 대륙의 자원 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대륙을 위해 희생할 자격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우리 연기종이 아니라면, 네가 세상에 이름을 새길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고약운, 나는 네게 대륙을 위해 희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넌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네게 이런 기회를 주겠느냐?”
고약운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누군가 혼비 당신을 죽이려 할 때 당신도 그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대륙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하게 죽은 수많은 이들이 품은, 연기종을 향한 억울함을 대신 갚아준 것일 테니 말입니다. 아, 아마 대륙 전체가 감사할 수도 있겠군요.”
쾅!
혼비의 몸에서 격한 분노의 기운이 폭발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약운을 바라봤다.
“고약운, 네 정신력으로 아가씨의 몸이 치유되고 심지어 아가씨의 실력까지 향상된다면, 넌 대륙을 위해 공헌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딴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다니. 구태여 악명을 남기고자 하는 셈이구나. 네가 굳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넌 반드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나중에 대륙이 위험해진다면, 그 원흉은 바로 너다! 그때 모두가 널 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너의 가족과 후손조차 널 수치로 여길 테지!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삶이냐?”
“하하!”
고약운은 크게 웃다가, 곧 조롱 섞인 비웃음을 지으며 혼비를 쳐다봤다.
“천하 사람들이 연기종의 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가 봅니다? 희생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천고의 죄인이란 말입니까?”
“당연하지.”
혼비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연기종의 의무는 이방 마인과 싸우는 것이며,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의 강대함은 곧 대륙의 강대함으로 이어진다. 네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게야.”
고약운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단단히 미쳤군.’
그녀는 전생과 현생을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인생에서 파렴치한 사람을 만난 게 이번이 두 번째인 건가. 물론 첫 번째는 아버지였고, 두 번째가 바로 이 자야.’
그녀 생각엔 두 사람이 현생에 형제라도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럼 제가 연기종에게 얻는 게 뭡니까? 저는 남을 도움으로써 느끼는 즐거움 따위는 모릅니다. 저는 제 이익만 알 뿐이죠. 세상 사람들이 다 죽더라도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제가 사랑하는 사람만 살아 있으면 됩니다.”
그 말에 혼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는 고약운의 정신력을 빼앗는 일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런 쉬운 일을 해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어디 또 있겠는가? 고약운은 모든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런데 대륙을 위해 희생을 못 하겠다니, 고약운은 폐물일 뿐만 아니라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난 세상 만인이 나와 연기종처럼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목숨 걸기를 두려워하는 소인이 있을 줄이야……. 나약한 것들한테 나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혼비는 고약운을 흘겨보다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은 듯 금세 눈을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고약운이 대륙 전체의 치욕이라 생각했다.
고약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라홍천이 먼저 혼비를 비웃었다.
“정말 견문을 넓힌 하루였소이다! 당당한 연기종이 본인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이 작은 소녀의 목숨을 희생시키려 하다니 말이나 되오? 그런데도 대륙을 위한 희생이라니, 실로 뻔뻔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연기종의 낯가죽이 두꺼운 건 사실이지만, 감히 이런 말을 연기종 사람 앞에서 하는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었다.
라홍천의 말을 듣고 혼비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라 장군,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혼비는 콧방귀를 뀌며 떠났다.
“연기종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라홍천은 장군부를 떠나는 혼비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연기종을 건드렸다 해도 3대 제지의 압력이 있을 테니, 감히 라 장군부를 해치진 못할 게야.”
지금 그의 등줄기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는데, 방금 혼비가 떠나기 전 그에게 준 압박 때문이었다.
“약운아, 앞으로 좀 귀찮아지겠구나.”
라홍천은 고개를 돌려 고약운을 바라봤다. 그러곤 얼굴에 밴 장난기를 없애고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사람이 적은 곳에는 가지 말거라. 연기종이 너를 그때 죽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네가 눈에 띄는 곳에 있어야, 그들도 널 죽이지 못한다.”
고약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안심하세요.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장군,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라홍천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저 소식을 물으러 온 줄 알았는데, 온 이유가 있었다니.
고약운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무기가 필요합니다. 수백 개의 무기요! 짧은 시간 안에 무기들을 제련해야 하는데, 이는 라 장군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라홍천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
라홍천은 물론 눈앞의 이 아이를 매우 좋아하고 아끼지만, 그렇게 많은 무기를 왜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살짝 경계가 되었다. 그는 청룡국의 장군으로서, 청룡국을 어지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안심하세요. 저는 청룡국에 관심이 없습니다.”
고약운은 마치 라홍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또 저 같은 일개 평민이 황위를 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제가 보기에 황위는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황권 위에 군림하면서 3대 제지와 대립하는 세력입니다.”
순간, 고약운에게서 끝없는 패기가 뿜어져 나왔다. 라홍천은 혹시 제 눈이 침침해진 건가 싶어 눈을 비비며 다시 고약운을 확인했다. 마치 십여 년 전 세기의 천재가 자신 앞에 다시 나타난 것만 같았다.
다만, 라홍천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었다.
라홍천은 몰랐지만, 몇 년 후 대륙 전체에 마귀와도 같은 세력이 나타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인원수가 많지 않으나 대륙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강하여, 3대 제지 역시 그들을 우러러보게 될 터였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마종(魔宗)이라 불리게 되는데, 귀신처럼 가는 곳마다 피를 묻히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종 뒤에 있는 수령이 바로 모두가 무시했던 이 폐물 소녀라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후에 있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