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규방(閨房)
손 태의는 진찰해야 되는 사람이 사방화라는 것을 알고, 어리둥절해 했다. 진강이 자신에게 시녀를 진찰하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손 태의는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진강이 재촉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온화하게 말했다.
“손을 나에게 주시오.”
사방화는 손 태의를 쳐다봤다. 그녀는 손 태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황궁의 태의원(太醫院)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황제와 황후를 진찰하는 태의였다.
사방화는 천천히 손을 손 태의에게 내밀었다. 손 태의가 손목의 맥을 짚으려고 할 때, 갑자기 손수건 하나가 날아와 사방화의 손목을 덮었다.
손 태의는 순간 놀라 긴장하였고, 사방화는 손수건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진강이 의자에 앉아 자기 몫의 차를 한 잔 따른 후, 연석과 이목청에게도 따라주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너는 시녀인데, 어찌 태의의 귀한 손을 더럽히겠느냐. 손 태의는 매일 폐하를 진찰해야 하는 분이다.”
사방화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손 태의는 한참 이상한 표정으로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맥을 짚었다.
연석과 이목청은 암암리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진강은 시녀가 태의의 손을 더럽힐까 봐 그리 한 것일까? 아니면 태의가 저 시녀의 손을 더럽힐까 봐 그리한 것일까?’
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오로지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사방화는 손 태의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황제와 황후를 진찰하는 태의이며 오랫동안 태의원의 수장이었으니, 보통 의원은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잠시 후, 손 태의는 점점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한껏 좁혔다.
진강은 의자에 기대어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태의의 그런 얼굴을 보면서도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사방화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목청은 한 번도 손 태의의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참 태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진강과 연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연석은 사방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 벙어리 시녀의 매력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런 평범한 시녀는 경성에 이미 흘러넘치고도 남는데, 어떻게 하여 그녀가 진강의 마음에 든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잠시 후, 태의가 사방화에게 말했다.
“다른 손도 주시오.”
사방화는 손을 바꿔 그에게 주었다. 태의는 아까 진강이 했던 대로 그녀의 손목을 손수건으로 덮었다.
사방화는 자신의 손목을 덮은 손수건을 보며, 불현듯 예전에 진강이 억지로 자신에게 건네준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의 모든 손수건에는 매화와 그의 이름이 수로 새겨져 있었다. 손수건에 수를 놓은 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솜씨가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만 했다.
사방화가 오랫동안 수를 바라보고 있자, 진강이 설명했다.
“매달 어머니가 나에게 새로 수를 놓은 손수건을 주신다. 어머니가 수를 놓지 않은 것은 사용하지 않지.”
사방화는 깜짝 놀라 몸을 바짝 굳혔다.
‘진강 앞에서 넋을 놓고 있다니! 죽으려고 작정했군!’
연석이 고개를 돌린 후, 진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강 공자, 막북에 가지 못하여 기분이 안 좋소?”
“그래 보이시오?”
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다고 하지.”
진강이 단번에 인정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연석이 입을 삐죽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기다림에 지친 듯 손 태의에게 물었다.
“이미 한참 맥을 짚어보셨는데,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오?”
손 태의가 긴장하며 손을 떼더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청음의 병이 깊어 손 태의도 알 수 없는 것이오?”
이목청이 진지하게 사방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목청의 집안은 비록 영친왕부와 충용후부, 영강후부보다는 그 위세가 약하였으나, 증조부부터 부친까지 삼대가 관직에 오른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은 우승상(右丞相) 이연(李延)으로 좌상보다 존귀한 문무백관의 수장이었고, 그런 부친의 그늘 아래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심취해, 일찍이 현명한 지혜를 갖추게 되었다.
손 태의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손을 바꿔 맥을 짚었다.
진강은 어쩐 일로 인내심을 보였다. 그저 천천히 차를 마실 뿐, 태의를 재촉하지 않았다. 진강이 가만히 있으니 연석과 이목청도 할 수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태의는 다시 손을 바꿔 계속해서 맥을 짚었다. 그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 * *
차를 세 잔쯤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손 태의가 드디어 손을 놓았다. 하지만 손을 놓은 후에도 그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사방화는 태의를 한 번 본 후, 손수건을 접어 진강에게 전해주었다. 진강이 찻잔을 내려놓고,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상으로 주겠다.”
그녀는 연석과 이목청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손수건을 품 안에 넣었다.
“맥이 매우 독특합니다. 저는 평생을 의원으로 지냈지만, 한 번도 이런 맥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팔맥(八脈)은 정상적인 길로 순환을 하지만, 청음의 맥은 역으로 순환하며,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흐릅니다.”
태의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진강의 눈썹이 올라갔고, 연석과 이목청도 깜짝 놀랐다.
“청음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어떤 약물이나 공격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서 초래된 것 같습니다.”
손 태의가 말했다.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니? 그럼 치료가 가능한 것이오?”
연석이 태의를 보며 물었다.
“경락(經絡)이 매우 특이하여, 치료를 한다고 해도 완치가 가능한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확신을 못 하겠다는 것이오? 아니면 치료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오?”
진강이 묻자 태의가 잠시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삼 할 정도는 확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태의는 보통 의원이 아니시니, 그것보단 더 확신을 가져도 될 것 같소.”
진강이 책상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치료해 주시오! 태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처방을 내려주시길 바라오.”
태의가 놀라 외쳤다.
“진강 공자님!”
“태의께서 평생 동안 보지 못한 체질이라면 정말 드문 일인데, 치료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이오? 반드시 완치를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주면 되오.”
진강은 담담한 말투로 태의를 자극했다.
놀란 손 태의는 점점 낯빛이 침착해지고 있었다. 의원으로서 한 번 치료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진강에게 말했다.
“만일 약을 잘못 쓰게 되면 완치를 못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걱정하지 마시오. 청음은 앞으로도 나의 사람이오. 내가 주인이니 치료를 받다가 무슨 일이 생긴다 하여도 당신을 탓하지 않겠소.”
진강의 말투는 가벼웠다. 그의 말에 연석과 이목청은 ‘나의 사람’ 이라는 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하지만 사방화는 속으로 조용히 분개하고 있었다.
‘당신의 사람이라고? 꿈 깨시지!’
“진강 공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시험 삼아 한 번 해보겠습니다.”
태의가 숨을 한 번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오늘 먼저 7일간 복용할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7일 후에 제가 다시 와서 맥을 짚어보겠습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삼 개월 내에 좋아질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진강 공자님께서는 다른 분을 모셔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의는 책상에 앉아 약 처방을 써준 후, 진강에게 건넸고, 처방전을 받아 살펴본 진강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청언, 들어와라!”
청언이 안으로 들어오자 진강이 처방전을 그에게 주면서 분부했다.
“오늘부터 너는 직접 약을 받아 끓인 후에 청음이 마시는 것을 지켜봐라. 자그마한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된다.”
청언은 손이 떨렸다. 이 임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안심하십시오. 공자님.”
진강이 손을 저으며 또 한 번 분부했다.
“태의를 모셔다드리고, 후하게 사례를 해드려라.”
“네!”
청언은 미리 준비 해둔 붉은색 봉투를 태의에게 전달했다. 이내 손 태의는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청언을 따라 낙매거를 나갔다.
연석이 진강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대체 청음에게……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나?”
진강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연석 그대가 본 그 뜻이지!”
‘내가 본 뜻 그대로라고? 대체 무슨 뜻이지?’
연석은 질문의 답을 알아내지 못하자, 이목청을 끌고 왔다. 하지만 이목청은 연석의 기대와는 다른 말을 꺼내었다.
“연석, 진강 공자는 이미 어제 마신 술이 다 깬 것 같고,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이니 우리도 돌아가지. 어제 스승님이 주신 숙제를 아직 마치지 못했소. 공자도 아직 못 했을 것 같은데, 만일 오늘 수업에서 또 숙제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밀린 숙제로 산을 이룰 것이네.”
연석은 이목청이 자신에게 협조해주지 않자, 할 수 없이 입을 삐죽거리며 일어났다.
“공자의 말이 맞군. 가지!”
“식사도 하지 않고 가나?”
진강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영친왕부 전체가 청음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 식사를 할 정신이 어디 있겠어?”
연석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붙잡지 않겠어. 멀리 나가지 않을 테니, 알아서 잘 가게!”
진강이 의자에 기대면서 말했다. 연석과 이목청도 그의 배웅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 낙매거를 나갔다.
사방화는 자신을 주시하는 눈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강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다가, 돌연 눈을 뜨며 말했다.
“약 먹는 것을 싫어하느냐?”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가, 급히 생각을 바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강이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싫어하지 않는다면, 약을 마실 때 청언에게 꿀에 절인 전과를 준비하지 말라고 하겠다.”
사방화는 더 이상 진강과 한 방에 있기 불편하여,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 * *
사방화는 문 앞에 서서 정원에 가득한 매화를 보며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오늘 이후로 그녀의 신분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 앞으로 이곳을 빠져 나갈 수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청음!”
밖에서 갑자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명의 시녀가 선객래 화분 두 개를 들고 낙매거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 명은 귀엽고, 한 명은 애교가 넘쳐 보이는 것이 두 사람 모두 무척 생기발랄해 보였다. 사방화는 그들이 영친 왕비가 보낸 사람들이라는 걸 눈치 채고, 앞으로 나가 맞이했다.
“저는 취하(翠荷)라고 하고, 이 아이는 취연(翠蓮)이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영친 왕비마마를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왕비마마께서 공자님께 이 화분을 가져다드리라 하셨습니다.”
둘 중 영민해 보이는 취하가 웃으며 물었다.
“공자님은 계신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취하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화분을 그녀에게 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가세요! 공자님의 방에는 허락 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사방화가 어쩔 수 없이 화분을 받아 양팔에 하나씩 들었다.
“아이참, 화분을 그렇게 한꺼번에 다 드시다가 깨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취연이 놀라 말했다. 사방화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먼저 하나를 갖다 놓고, 다시 오셔서 가져가세요.”
취연이 재촉했다. 사방화가 할 수 없이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진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화분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나가 화분 하나를 또 들고 왔다.
그 때, 진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선객래는 키우기 어렵지 않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고 더운 것을 싫어한다. 매일 화분의 흙이 마르지 않게 유지해야 하지만, 물을 너무 많이 주어도 안 된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
진강은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매일 해가 뜨면 볕이 좋은 곳에 두어 햇볕을 쬐어야 한다. 연기가 있는 곳에서는 잘 성장하지 않고, 말라버리게 된다. 너무 추워도 얼어 죽고, 너무 더워서도 안 된다. 또한, 위치는 공기가 신선하고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두어라.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곳에 두어서도 안 된다.”
사방화는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하마터면 화분을 던져버릴 뻔했다.
‘이게 안 어렵다고? 차라리 조모님을 모시는 것이 백 번 낫겠네!’
“기억했느냐? 앞으로 매일 내가 말한 대로 해라.”
그 말에 사방화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