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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

유적 입구에 서서 러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형님께서는 후위를 부탁드립니다."

유적을 탐사하려면 가장 강한 이들이 선두와 후위에 서는 것이 상식이다. 이제부터 유적 안으로 들어가야 할 러스가 저렇게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데 레펜하르트가 뺨을 긁었다.

"아니, 뭐 의욕은 알겠는데...."

레펜하르트가 유적 입구의 벽으로 가더니 뭔가를 매만진다. 그러자 벽이 스르릉 움직이며 통로가 드러났다.

"우리가 갈 곳은 유적 내부가 아니라 외곽이거든?"

러스가 경악해 물었다.

"뭐,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다들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반응 나올 줄 알았다. 레펜하르트가 미리 준비한 대로 태연스레 이야기를 지어냈다.

"우리 사부가 젊었을 때 이곳도 탐사한 적이 있었거든. 다 탐사하진 못했다는데, 그래도 이런저런 유적 정보에 대해 알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전해 들은 거야. 여기에 이런 통로가 있다고."

그러자 다들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왕 제라드는 한때 유적 탐사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유일한 제자에게, 자신이 탐사했던 유적에 대해 알려 주었다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유적에서 아는 척할 때는 죄다 사부 핑계 대면 되겠구먼.'

물론 시리스는 여전히 의아해하고 있었지만.

'그냥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마치 한번 와 본 사람처럼....'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미처 시리스의 안색 변화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다이만의 외곽 통로를 가리키며 그가 일행에게 손짓을 했다.

"자, 여기도 아주 안전한 것은 아니니까 일단 긴장은 풀지 말고. 그럼 들어가자고."

일행은 조심스레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엘류시온과 마찬가지로, 비밀 통로에서도 각종 마물들이 나왔지만, 그 수준은 오히려 세텔라드 산맥에서 만났던 몬스터들만도 못했다. 오러 유저가 둘씩이나 있는 이들의 상대는 아니었다.

별문제 없이 마물들을 해치우며 반나절 정도 걸어 내려갔을 때였다.

통로가 끝나며 커다란 홀이 나왔다. 희미한 빛이 천장 여기저기서 새어 나와 간신히 안을 밝히고 있었다. 수많은 기둥들이 나열되어 있는 장소였는데, 특이하게도 기둥 위쪽이 천장과 분리되어 있었다. 천장을 받치기 위해 세운 기둥이 아니란 의미다.

실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어보았다.

"여기가 그랜드 포지인가요?"

틸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는 제가 들었던 곳과는 전혀 달라요."

다들 당황하는 와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서슴없이 기둥 중 하나로 걸어갔다. 호크릴이라는 고대어가 쓰여 있는 그 기둥을 보며 잠시 감회 어린 표정을 짓더니, 대뜸 오러를 실어 정권을 날렸다!

콰앙!

기둥이 일격에 무너져 내렸다. 다들 놀라 그에게 달려갔다.

"뭐, 뭡니까? 형님?"

"뭐예요, 레펜 씨? 왜 그러는 거예요, 갑자기?"

그렇게 다들 당혹해하던 참이었다. 순간 실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무너진 기둥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다들 눈을 크게 뜰 때였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그들을 뒤덮었다.

"꺄악!"

"허억!"

비명을 지르며 모두 방어 자세를 잡았다. 빛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고 이내 사라졌다. 틸라가 눈을 껌뻑이며 중얼거렸다.

"뭐예요, 대체 무슨 짓을...."

순간 틸라의 말문이 막혔다. 사방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커다란 홀이 아니었다.

거대한 공동, 높이만도 5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공간이었다. 바닥은 질 좋은 화강암 벽돌로 보기 좋게 짜여 있었고 눈앞에 커다란 신전이 보였다.

거대한 기둥이 사방을 지탱하고 그 사이에 온갖 석상들이 웅장한 모습을 과시하며 서 있다. 망치와 도끼를 든 드워프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어찌나 섬세한지, 5미터가 넘는 석상인데도 수염이 정말 휘날리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신전 중심에 거대하게 새겨진 불꽃의 문양을 보며 틸라가 놀랍다는 듯 뇌까렸다.

"여긴 알 포트님의 신전... 여기, 설마 그랜드 포지예요?"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은의 시대 유적 중에는 가끔 공간을 왜곡시켜 원거리의 두 지점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진 것들도 있었다. 아마도 그 무너진 기둥에서 나온 빛이 그런 권능을 지닌 것이었겠지. 러스가 경외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연 은의 시대... 보름이 넘는 거리를 한순간에 이동하다니...."

다들 신기해하며 주위를 살폈다. 일행이 서 있는 곳은 신전의 서쪽 폐허였다. 아니, 사실 폐허는 아닌 것 같았다. 왕창 부서져 있긴 했지만 아직도 흙먼지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곳곳에서 돌멩이가 똑똑 굴러 떨어지고 무너진 단면이 선명한 것이, 아무리 봐도 무너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실란이 문득 인상을 썼다.

"저기, 레펜 씨...."

"응? 왜?"

"이거 혹시 우리 때문에 부서진 것은 아니겠죠?"

"맞는데?"

"네에? 이런 짓 하고도 괜찮아요?"

실란이 기겁하며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신탁에 다 있는...."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굳었다.

'어라? 가만?'

지금 그는 전생의 기억대로 이곳 그랜드 포지로 왔다. 물론 전생에서는 그러고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신전을 왕창 부숴 먹어도 알 포트가 알아서 다 신탁을 내려 줬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 알 포트의 신탁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생각해 보니 드워프들이 이 사태를 이해해 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우렁찬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신전이 무너졌다아아아!"

"침입자다아아아!"

"모두들 침입자를 격퇴하라아아아!"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하하하하...."

<4권에서 계속>

4권

제11장 그랜드 포지

1

공동과 연결된 통로 사방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리스나 실란, 틸라는 그저 소리만을 듣고 있을 뿐이지만 오러를 다루는 레펜하르트와 러스는 상대의 위치와 숫자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 대략 오십여 명 정도의 드워프들이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저마다 기둥이며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채 짙은 살기를 피워 올린다.

포위망을 구축하자마자 드워프 중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를 토했다.

"전원 사격 개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개의 화살들이 일행을 노리고 날아왔다. 다들 사색이 되어 무너진 신전 폐허 뒤로 몸을 숨겼다. 머리를 숙인 채 실란이 투덜거렸다.

"아으, 드워프들 성질 급하네요...."

아무리 자신들이 침입자라도 그렇지, 아무 말 없이 대뜸 화살을 날릴 줄이야?

"보통 이런 경우 기대하는 대화라는 것이 있잖아? 누구냐라든가, 꼼짝 말라든가... 뭔 사람들이 대뜸 보자마자 죽이려고 드냐그래?"

팅팅~ 탱탱~.

화살촉이 돌벽과 부딪치며 연신 맑은 소리를 울린다. 그래도 드워프 편들어 준답시고 레펜하르트가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며 입을 삐죽였다.

"너 같으면 자기 집 폭삭 무너트리고 들어오는 침입자에게 말 걸 여유가 나겠냐?"

"그래, 그걸 잘 아는 양반이 이런 미친 짓을 저질렀나요?"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 없지. 음."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 냈다. 화살 공격이 통용되지 않자 드워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저마다 도끼며 망치, 검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명백한 적의와 살의를 띄운 채 일행들을 노려본다.

사실 드워프들은 그리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드워프들은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처지, 발각된 시점에서 결코 이들을 살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레펜하르트 일행이 부순 것은 드워프들의 신, 알 포트의 신전이다. 그걸 부수고 나타난 일행들에게 고운 눈빛을 보낼 리가 없지.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서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쩝, 다들 눈빛이 장난 아닌데?"

"그러게요. 한밤중에 딸 침실 창문 부수고 침입한 외간 남자를 발견한 아빠의 시선 같은데요."

"...미묘하게 그럴듯한 비유일세."

러스가 안색을 굳히며 검을 들었다. 그가 드워프들을 굽어보며 호통을 쳤다.

"감히 미물들이 인간을 해하려 하느냐!"

드워프들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러스의 오만한 말에 분노한 것이 틀림없었다. 러스가 코웃음을 치며 힘을 끌어 올렸다.

웅웅웅!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백열하며 러스의 어깨 위로 살기가 피어오른다.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며 외쳤다.

"러스! 살기를 거두어라!"

"네? 하지만 형님...."

당황하는 러스를 뒤로 물린 채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전신을 훤히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드워프들이 놀라며 활시위를 당긴다. 십여 대의 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공격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기 위해 두 손을 위로 들기까지 했다.

팅팅팅팅~!

날아간 화살이 모조리 튕겨 나간다. 오러고 뭐고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단련된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고작 평범한 화살 정도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 것이다. 드워프들이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괴물이다!"

"화살이 통하지 않아!"

"심지어 대놓고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과시하면서 우릴 조롱하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닌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항복한답시고 손들었더니 오히려 드워프들의 표정이 더더욱 살기등등해졌다. 더 이상 시간 끌면 무슨 소리 나올지 몰라, 그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지의 아들들이여! 들어 주시오!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오!"

드워프들의 살기가 눈에 띄게 꺾였다. 다들 당황하며 서로를 향해 눈빛을 교차했다. 레펜하르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드워프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좋은 중년 드워프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간인 그대가 우리들의 적이 아니란 말인가?"

여전히 두 손을 든 채 레펜하르트가 대답했다.

"그렇소!"

확실했다. 눈앞의 저 침입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중년 드워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왜 이곳에 왔는가?"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누구냐고? 왜 이곳에 왔냐고? 물론 대답할 말은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으, 내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 쪽팔린데 이거....'

그래도 여기서 피 안 보려면 외칠 수밖에 없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레펜하르트가 다시 외쳤다.

"나는 그대들의 구원자! 알 포트의 신탁 속 인물이오!"

드워프들의 표정이 일거에 변했다. 더 이상의 살기는 없었다.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레펜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물론 드워프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우와, 레펜 씨, 제 얼굴이 다 화끈거려요. 그 대사 대체 뭐예요?"

"시, 시끄러! 나라고 좋아서 이런 말 한 줄 알아?"

막상 해 놓고 보니 정말 낯부끄러운 대사다. 레펜하르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스틸해머 일족의 인도에 따라 이곳 그랜드 포지에 대신관 마켈린을 만나러 왔소!"

뒤에서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러스가 혀를 찼다.

"아니, 형님. 아무리 그래 봤자 이들이 우리 말을 믿어 줄 리가...."

말이 채 끝나기도 무섭게 드워프들이 무기를 거두었다. 일제히 검을 검집 안으로 넣더니 다들 반색을 하며 외쳐 댄다.

"오오! 구원자시다!"

"일족의 구원자께서 오셨구려!"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아니, 근데 왜 멀쩡한 정문 놔두고 이런 곳에서 나타나셨대?"

조금 전의 살기는 온데간데없고, 다들 얼굴 가득 환대의 미소를 띠며 우르르 일행들에게 몰려들었다. 실란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와, 뭔 태도가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뀐대?"

☆ ☆ ☆

그랜드 포지는 세텔라드 산맥 지하 30미터에 위치한 지하 도시였다. 직경이 2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최하 30미터에서 최대 50미터까지 이르는 거대한 동굴 안에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두 줄기 강에는 강물 대신 끓는 온천수가 흘러 사방에 자욱한 수증기를 피운다. 도시 천장에는 100미터 거리마다 거대한 지열석이 박혀 빛과 열을 제공하고 있었다. 비록 지상의 한낮만은 못하지만, 적어도 사물을 구별하는 데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광량이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한 중년 드워프의 인도에 따라 그랜드 포지 중앙의 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제일 먼저 화살 날리라 소리쳤던 바로 그 드워프였다. 자신을 풀바트라 소개한 드워프는 그랜드 포지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도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련 장인들이 모인 대장간 구역입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살림집이 모여 있는 거주 구역이 나올 겁니다."

다들 갓 도시 올라온 촌놈들처럼, 사방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만든 걸까요?"

시리스도 동감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심지어는 같은 드워프인 틸라조차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긴, 도시 올라온 촌놈이라는 정의에 가장 적합한 것은 그녀일 것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 굉장하군요, 그랜드 포지는...."

새삼 일족에 대한 자긍심이 가슴 벅차게 피어오른다. 대부분의 엘프와 오크들은 이미 모든 문화와 전통을 잊었지만 드워프들은 아직도 이 정도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러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뇌까렸다.

"이해할 수 없군. 이 정도의 대역사가 가능하려면 아무리 드워프들이라 해도 엄청난 인원이 필요할 텐데...."

그만한 인원이 이 험한 오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지라는 것은 살기 힘들기에 오지라 불리는 것이다. 이 정도 대규모 건축이 가능할 정도의 드워프들이 과연 이 세텔라드 산맥 깊숙한 곳에서 제대로 생활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 정도 규모라면 왜 노예로 살아가는 동족들을 구하려 하지 않는 거지?"

"헤에, 러스 씨도 슬슬 드워프들이 노예로 살아가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나 보죠?"

"응? 그게 무슨 소리지, 실란?"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의문을 가질 리가 없으니까요."

"으음...."

놀리는 듯한 실란의 말에 러스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고정관념에 딱 박힌 러스라도 이런 엄청난 광경을 보니 패러다임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말에 풀바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 그랜드 포지는 우리들이 건설한 게 아닙니다."

원래 그랜드 포지는 은의 시대 유적, 즉 던전이었다. 그것을 이곳까지 쫓겨 온 드워프들이 수많은 희생을 내며 탐사를 거듭하고 내부를 개조한 끝에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대륙에는, 이미 탐사될 대로 탐사되어 버려진 유적들도 상당히 많다. 대다수는 그럴 경우 유적의 마력 코어를 잃어 이공간으로 사라져 버리지만 개중에는 이렇게 현실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은 인간이 부수거나 개조해 다른 용도의 건물로 쓰곤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그라임 왕국 왕성 델 그라임이었다. 원래 던전이었던 곳을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그라임 왕국 초대 국왕 델 그라임이 완벽하게 탐사한 뒤 지하를 개조하고 지상에 성을 올려 왕성으로 삼은 것이다.

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 어쩐지...."

이 정도 도시를 직접 건축하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안에 있는 것을 몰아내고 개조하는 데는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도 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노예 종족인 드워프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애초에 손재주 하나는 좋은 놈들이었으니.

그때 레펜하르트가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렇지만 이곳이 은의 시대에도 드워프들의 도시였던 것은 분명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형님?"

레펜하르트가 길가에 있는 건물들을 가리켰다.

"문턱이 낮잖아."

러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단순히 문턱이 낮은 정도가 아니다. 낮은 문턱, 낮은 천장, 그리고 지나치게 짧은 계단과 낮은 손잡이까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위해 지어진 것임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도시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 저 드워프 석상과 동상들은 누가 뭐래도 이 도시가 드워프의 도시임을 증명해 준다.

"즉, 은의 시대에는 드워프들이 자기만의 도시를 세울 만큼 번영하고 있었다는 소리지. 노예로 타고난 종족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겠지?"

"으음...."

러스는 신음을 흘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레펜하르트의 말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뿌리 깊은 인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생활 구역에 도착한 뒤, 풀바트가 일행을 한 가옥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중년 드워프 여인이 나와 그를 맞이한다. 여인에게 뭐라 말을 건넨 뒤 풀바트가 일행에게 말했다.

"일단 이곳에서 묵으시지요. 우선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풀바트가 내준 가옥은 근처 가옥에 비하면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그래 봤자 드워프 기준이었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며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개구멍 들어가는 기분이군.'

신장 192센티미터인 레펜하르트나 180센티미터인 러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시리스조차도 문턱을 넘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했다. 엘프답게 그녀는 소녀의 나이지만 이미 17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었으니까.

아, 물론 실란은 우울해하며 허리 쭉 펴고 들어갔다.

"나, 나도 허리를 굽히고 싶다...."

틸라가 피식 웃으며 실란 뒤를 따랐다. 적당히 방 여기저기에 짐을 풀자 풀바트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지금 대신관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변변치 않지만 허기라도 채우면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구려."

그렇잖아도 마물들의 습격으로 변변한 더운 음식 한번 못 먹어 본 일행이다. 다들 기대하는 가운데 중년 드워프 여인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

식사로 나온 것은 순무와 감자를 넣고 끓인 수프와 정체불명의 삶은 고기였다. 일족의 구원자 일행에게 대접하는 음식으로 치기엔 지나치게 검소하지 않은가 싶지만, 드워프들이 오지 중의 오지에 숨어사는 처지임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정성을 들여 대접한 것이 분명하리라. 다들 순수하게 고마워하며 숟가락을 떴다.

삶은 고기를 한입 베어 문 실란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이거 무슨 고기예요?"

뭐랄까, 묘하게 질기고 노린내가 난달까. 딱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히 맛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풀바트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바실리스크의 간을 삶은 것입니다."

다들 안색이 굳었다. 바실리스크? 그 몬스터의 내장이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실란과 러스가 비위가 뚝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크를 들었던 시리스도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고기 담긴 접시를 슬쩍 밀었다.

"에, 엘프는 원래 채식 위주예요, 호호."

"어제까지만 해도 육포 잘만 씹더니... 아얏!"

옆구리를 꼬집힌 실란이 울상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물론 제라드 밑에서 온갖 악식은 다 먹어 본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고깃덩이를 으적으적 잘도 씹고 있었다.

"먹을 만한데. 다들 왜 그래?"

맛은 둘째 치고 몬스터의 고기라는데 먹을 마음 드는 이가 누가 있겠나? 모두가 불편한 얼굴을 하자 풀바트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맛은 좀 그래도 상당히 귀한 물건입니다. 몸에도 좋고."

"어디에 좋은데요?"

"음...."

갑자기 풀바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게... 남자에게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구려...."

"오옷!"

"헉?"

러스와 실란이 눈을 빛냈다. 인간이건 드워프건, 남자라면 이건 먹지 않을 수 없다! 종족을 초월한 동질감을 느끼며 둘 다 열심히 바실리스크 간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틸라와 시리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짐승들."

"러스 씨야 그렇다 치고 실란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요."

"나도 곧 근육질의 몸매가 될 테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죠."

뭘 미리 준비하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준비성 투철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덕분에 분위기가 급 훈훈해졌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러스조차도 '드워프,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들이군!'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치자 밖에서 젊은 드워프 한 명이 들어왔다.

"풀바트 아저씨, 대신관께서 구원자 분을 중앙탑으로 모시라 하십니다."

기다렸다는 듯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갔다 오지. 다들 여기서 쉬고 있어."

☆ ☆ ☆

그랜드 포지의 중심, 천장과 종유석처럼 연결된 커다란 탑이 바로 알 포트의 대신관 마켈린이 거하는 곳이었다. 탑 아래까지 안내하더니 젊은 드워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이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탑을 올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못 드나드는 모양이군. 하긴, 대신관이 거하는 곳이면 일종의 성역...."

"아뇨, 그냥 올라가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데요."

"...."

생각해 보니 드워프란 종자들, 원래 이랬다. 헛웃음을 흘린 뒤 레펜하르트는 계단을 올라갔다. 탑 위쪽에 도착하니 사방이 갈색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왔다. 벽과 기둥에 온갖 그림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엔 금과 청동으로 장식한 커다란 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 제단 앞에서 늙디늙은 드워프가 레펜하르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신탁이 점지한 구원자여."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이며 눈썹이 길게 늘어져, 그야말로 수염에 뒤덮여 있는 것 같은 드워프였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 마켈린....'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였으며, 때로는 존경하고 의지하는 스승과도 같았던 이.

그의 모습은 30년이라는 세월의 벽을 두고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시리스나 타시드와 달리 전생에서 마켈린은 이미 드워프로서도 늙은 나이에 레펜하르트와 만났다. 30년이라 봐야 인간 기준으로는 7, 8년 정도, 마켈린의 모습이 딱히 달라질 일이 없는 것이다.

너무도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에 무심코 '우와, 마켈린! 오랜만이야!'라고 외칠 뻔했다. 목구멍까지 기어 나온 말을 애써 삼킨 뒤 레펜하르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응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알 포트의 대신관, 마켈린이여."

그러자 마켈린이 신기해하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봤다.

"방금 그 말은 진실이구려, 구원자여. 하지만 이상하군. 우리가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소?"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이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군. 나는 50년째 이곳을 떠난 적이 없거늘."

눈앞의 구원자 청년은 아무리 봐도 3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실은 20대 초반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를 알지만, 그대는 날 모를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다. 어느 누구라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진실의 소리를 듣는 드워프, 그들의 대신관인 마켈린이라면 그를 믿어 줄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내가 당신을 만난 시기는 지금부터 10년 후이니까요."

마켈린이 혼란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진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 말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나뿐이다.

'...설마 구원자께서 정신 질환을?'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뭐, 정신병자란 것이 척 봐서 알아볼 수 없기는 하지만 드워프의 신, 알 포트께서 설마 일족의 구원자로 정신병자를 점지해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아해하는 마켈린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온 자입니다."

2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대마도사로 대륙을 떠돌던 이야기, 10서클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이종족의 비의를 찾으며 그들과 교류를 쌓은 이야기, 손 닿는 대로 그들을 돕고 그 와중에 점점 인간의 세력과 충돌하며 이종족을 보호하던 이야기, 결국 안타레스 제국을 세워 마왕이라 불리게 되어 전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그의 최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누구를 만났는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다시 살아나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믿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분명 진실을 말했으니, 믿을지 말지는 당신의 몫입니다."

설명을 마친 뒤, 빙그레 웃으며 레펜하르트는 허리를 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마주 앉아 모든 말을 경청하던 마켈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라 할지라도 믿기 힘든 이야기임에는 분명하구려."

드워프들은 분명 진실의 소리를 듣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진실을 확실히 캐낼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상대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면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드워프들 귀에는 진실로 들리는 것이다.

"나 또한 알 포트 님의 신탁이 없었다면 그대를 정신병자 취급했을 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대의 말은 꽤나 그럴듯하지."

문득 마켈린이 눈을 빛냈다.

"시험을 해 봐도 되겠소? 그대가 정신병자인지, 아니면 진짜 시간을 초월한 현자인지 알고 싶소."

'시험이라?'

그도 호기심이 일었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켈린이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사천왕이라 불리는 그대의 수하였고, 그대와 친밀했다면 내 성격상 분명 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오. 그러니 묻겠소."

눈부시도록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켈린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내 수염은 무슨 색이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염 색을 물어보다니, 분명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보이는 것처럼 흰색이 아니란 것쯤은 확실하겠지. 마켈린은 유심히 레펜하르트를 관찰했다. 과연 이 젊은이는 어떤 대답을 하려나?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이 나왔다.

"수염이 없는데 색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마켈린, 당신 30년 후에도 그거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체질 안 변했어요."

"...슬프구먼."

마켈린이 우울해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풍성한 수염이 턱에서 뚝 떨어지며, 꽤나 중후하게 생긴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드워프들의 대신관다운 희고 풍성한 마켈린의 수염, 사실 이건 가짜였던 것이다.

"혹시 이 수염에 얽힌 이야기도 알고 있소?"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 포트의 은총이라 들었습니다만."

드워프 남자들 사이에서 풍성한 수염은 곧 남성미의 상징이다. 대머리는 용납해도 수염 없는 민턱은 징그럽다고 혐오하는 것이 모든 드워프 여성들의 공통된 취향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켈린은 슬프게도, 젊은 시절부터 이상할 정도로 수염이 나지 않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인간이었다면 가짜 수염이라도 달았겠지. 하지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드워프들 사이에서 가발이나 가모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더욱 구차해 보일 뿐이다.

뭐, 비록 수염은 없었지만 마켈린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인재였다. 놀라운 신성력과 지도력으로 그는 200년 만에 알 포트의 대신관으로 점지받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지상 대리자에게 드워프의 신 알 포트가 내려 준 것이 바로 이 풍성한 가짜 수염이었다.

진실의 눈으로조차 꿰뚫어 볼 수 없는 신성한 수염! 인간이 보기엔 참 알 포트 할 짓 없구나 싶겠지만,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이것은 마켈린이 진정으로 알 포트에게 사랑받는다는 명확한 증거인 것이다! 이 수염으로 인해 마켈린은 드워프들의 존경과 경외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드워프들조차 이 수염의 진위를 구별할 수 없는데 인간인 그대가 알아보았을 리는 없을 터, 그대의 말이 참됨을 이제 확신할 수 있겠구려."

다시 수염을 달며 마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레펜하르트가 정신병자라, 자신의 망상을 진실로 믿고 있다면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눈앞의 이 인간 청년은 진짜 시간을 거슬러 온 자인 것이다.

"원래 그대를 찾은 이유는, 그대에게 구원자로서의 운명과 앞으로의 갈 길에 대해 작은 조언이나마 던지려던 것이었소. 하지만 이미 그대는 구원자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구려."

갑자기 마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하나뿐."

마켈린이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중후한, 엄숙한 목소리로 그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알 포트를 섬기는 모든 드워프들을 대표해, 나 마켈린 포트 해머라인은 그대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무릎 꿇은 늙은 드워프, 마켈린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뜬금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랬으니까. 그렇다 보니 드워프들의 충성을 받게 되었다는 만족감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슴 한편에서 묵직한 중압감만이 느껴질 뿐.

이미 한 번 이들의 충성을 배신했다. 이토록 충성과 헌신을 받아 놓고 결국 자신의 무능으로 이들을 죽음과 고난으로 내몰았다.

과연 이번 생애에는 이들의 충성에 보답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친 뒤 레펜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일어나시게."

말투가 변했는데,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대의 말은 반은 틀렸다네, 마켈린."

몸을 일으키는 늙은 드워프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자네의 조언이 절실하거든."

☆ ☆ ☆

☆ ☆ ☆

다시 자리에 앉은 마켈린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한 번 실패했지. 나의 힘, 나의 마력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다 결국 인류의 공적이 되었고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전생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것이 현재 레펜하르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일단 마법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어서 여태까지 미루어 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염없이 미룰 수 있는 문제인 것도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안이 있긴 하지만, 역시 확실하다 할 수는 없고...."

마켈린이 물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계획이랄 정도는 아니고...."

레펜하르트는 잔잔한 목소리로 차탄 공국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엘프와 오크 노예들을 거두고 그들에게 인간이 받는 교육을 시키게 한 것, 그리고 그것이 유행이 되어 퍼지기를 기대했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듣고 마켈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음, 나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의식을 계몽해 점진적 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도 분명 이종족들에게는 희망적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인간이 이종족이지만, 레펜하르트 님께서 이해하시기 편하게 일단 이 표현을 쓰기로 하지요."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첨언했다.

"하지만 그래서야 족히 100년은 걸리겠군요. 엘프나 우리 드워프들이야 수명이 기니 견딜 만한 세월이겠지만, 그 전에 레펜하르트 님께서 늙어 버리지 않으실지?"

"그것이 문제지...."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평화적인 변화라는 것은 참 듣기 좋고 이상적이지만, 그만큼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을 설파하는 성인이라 해도 그가 올바른 평가를 받기까지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의 고정된 패러다임을 부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튀겼다.

"라이란."

작은 불꽃이 손가락 끝에서 생성된다. 화염 주문 중 가장 기초적인 발화 주문, 공격력 따윈 전무하고 그저 부싯돌 대용으로나 쓰는, 그야말로 마법에 처음 입문할 때 요령을 파악하기 위해 배우는 발화 주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마법 스펠 없이 시동어만으로 발동했다는 것은 레펜하르트의 마법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증거.

불꽃을 살짝 흔들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난 지금 마법을 되찾고 있다. 그리고 전생과 달리 또 하나의 힘도 얻었지."

불꽃이 피어오른 손가락, 그 위로 황금빛의 오러가 솟구쳐 불꽃을 감쌌다.

"사실, 마법만 되찾는다면 안타레스 제국을 다시 세우고 대륙을 공포로 지배하는 마왕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이미 한 번 해 본 짓이었다. 이종족들의 도움을 얻어 낼 자신도 있다. 전생과 달리 이제는 지치지 않는 육체도 있다. 게다가 전생에서는 딱히 나라를 세울 생각도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이종족들의 나라가 생겼던 케이스다. 처음부터 제대로 계획을 세워 제국을 건국한다면 도저히 실패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또다시 암흑 제국이 재현될 뿐이지."

암흑 제국을 다시 세워 봤자, 다시 인류의 공포의 대상이 될 뿐.

물론 수동적으로 움직였던 전생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의 왕국을 공격하고 그들을 지배하면서 세력을 넓힌다면 10년 이내에 대륙 전체를 정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전생에서도 그 정도 힘은 있었다. 인간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각개격파를 했다면 그런 결말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륙 전체를 전쟁의 겁화로 불태우겠다는 소리와 똑같다.

"그렇게까지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는 않다."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마켈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내 고민을 알겠는가, 마켈린? 힘으로 세상을 누르면 결국 실패한다. 하지만 나는 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세상을 변혁시킬지 아직 명확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 드워프의 현자여."

마켈린은 대답 없이 수염만을 쓰다듬었다. 생각을 정리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군요."

늙은 드워프가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레펜하르트, 나의 주군이여."

"말하라, 마켈린."

마켈린이 늙수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 너무 우습게 보고 계십니다."

"응?"

뜬금없는 소리에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마켈린이 혀를 찼다.

"힘으로 눌러서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으시겠다고요?"

"뭐, 뭐가 잘못되었나?"

마켈린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레펜하르트 님의 실패 원인은 힘으로 눌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마켈린이 단언하듯 말했다.

"힘으로'만' 눌렀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 수만큼의 신념과 의견이 있는 법이다. 그 신념과 의견의 절대 다수가 인정한 것, 그것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모두가 인정하고 포용하는 고정된 상식,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신념을 교환했을까?

"레펜하르트 님은 그 고정 상식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모자라지요. 힘으로 누르고, 말로도 설득하고, 때로는 자율에 맡기고 때로는 강제하면서... 그렇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해도 몇 년이 걸릴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레펜하르트 님의 꿈이자 야망입니다."

"으음...."

"그냥 힘으로 눌렀다가 실패했으니 이번엔 다른 시도를 해 봐야지~라고 할 정도로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실로 뼈아픈 지적이었다. 동시에 머릿속 한쪽이 활짝 개는 느낌도 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마켈린이 다시 물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인간을 증오하십니까?"

증오하냐라?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증오라? 별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이종족에게 애착이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딱히 오크나 엘프, 드워프나 트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아, 뭐 시리스가 엘프인 만큼 자신도 엘프였다면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 정도야 해 봤다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

마켈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인간을 좋아하십니까?"

이번엔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인 그가 보기에도, 인간은 워낙 추악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레펜하르트 님이 말씀해 주신 전생 속에, 인간 동료는 없었으니까요."

문득 마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드워프인 제가 이런 말하기는 좀 우습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나쁜 종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레펜하르트 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엘프나 오크, 트롤, 저희 드워프들을 사람 대접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푸대접하셨던 것 같습니다."

"응?"

"왜 전생에서, 안타레스 제국을 지키기 위한 군대에 인간을 포함시키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믿을 수도 없고... 게다가 그들의 전쟁도 아니지 않은가? 상관없는 전쟁에 동원시키려니까 미안해서...."

"그럼 왜 전생에서, 안타레스 제국을 움직이는 행정 관리에는 인간을 포함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을 수가 없고... 게다가 엘프나 드워프들이 아무래도 오래 살다 보니 그런지 부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 특히 드워프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판결 같은 것도 명쾌하게 잘 내리고. 나름대로 적재적소에 배치했다고 생각했는데?"

변명하듯 말을 더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뒤,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의무도 권리도 인간들에게는 부여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나?"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자기 딴에는 인간들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 정책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기본적인 세금만 걷고, 그 외에 전혀 강압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힘든 전쟁은 오크나 트롤, 혹은 그가 지배한 마물들이 대신 했다. 복잡한 행정이나 정치 같은 것은 드워프나 엘프를 시켰다. 인간들은 그저 속 편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만 즐기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인간들에겐 행정이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거?"

"그야 없는 쪽이 훨씬 잘 돌아가는데 굳이 끼울 필요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책망하듯 말했다.

"마왕이라 불릴 짓은 다 하셨군요."

"그, 그런가?"

레펜하르트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켈린의 말에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안타레스 제국의 인간들은 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륙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부패도 없고 가난도 적고 딱히 학대받는 이들도 없었고....

"이 정도면 됐잖아? 뭐가 문제인 건데?"

투덜대는 자신의 주군을 보며 늙은 드워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평범한 농민들에겐 세상 살기 좋아졌겠지요. 하지만 유능한 이들은? 지식이 있고 야망이 있는, 레펜하르트 님처럼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가는 추진력과 열정이 있는 인간들에게도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겠습니까? 꿈을 꾸려 해도 제도적으로 막혀 있고, 추진력을 가지고 달리려 해도 길이 없는 그 세상이?"

"...."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마켈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마왕이란 것이 꼭 선혈로 목을 축이고 생살을 뜯으며 시체로 산을 쌓고 정상에 올라서 광소를 터트려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드럽지만 엄격한,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듯한 어조로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이들의 의견만 들으며 자기 취향대로만 세상을 움직이려 한다면...."

표정을 굳힌 레펜하르트를 향해 마지막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것이 바로 마왕입니다."

☆ ☆ ☆

레펜하르트는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넘치는 체력을 가진 그가 지금 힘이 다 빠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마켈린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그렇기에 조금의 여과도 없이 그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대는 분명 선했지만, 분명 마왕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군주, 레펜하르트여."

언제나 그렇다.

세상에 진실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기운 빠져 허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데 이런 이야기, 전생의 저는 안 했습니까?"

생각해 보니 전생의 자신이 이런 말을 안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성격상 레펜하르트 밑에서 일했다면 미움을 받건 말건 할 말은 다 하고 살았을 텐데?

그러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사실 전생의 마켈린은 이런 소릴 하지 않았다. 마켈린이 레펜하르트의 밑으로 들어올 때, 이미 대륙은 드워프를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마물들을 모은다는 소문에 모든 인간들이 무리로 모여 있는 드워프 노예들에 대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저 드워프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리 현명한 마켈린이라 할지라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명한 신의 대리자답게 인간에게 무턱대고 증오를 보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어울리려는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안타레스 제국의 저 시스템, 지금 마켈린이 혀를 차며 성토하는 저 제도는 사실 절반 이상 전생의 마켈린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자 마켈린의 안색도 굳었다.

"그, 그렇습니까? 저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군요."

둘은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머리를 긁었다.

"어쨌거나,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지금부터 잘하면 되는 거야. 암."

그가 물었다.

"마켈린이여, 일단 전체적인 문제점은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가?"

힘으로만 눌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느 정도 강제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렇다면 그 강제력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마켈린이 대답했다.

"레펜하르트 님께서 전생에서 하신 가장 큰 실수는, 대결의 양상을 인간과 이종족의 구도로 몰고 간 것이라고 봅니다."

"응?"

좀 이해가 안 간다. 레펜하르트가 설명을 촉구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소린가?"

굳은 목소리로, 마켈린이 대답했다.

"인간 대 이종족의 구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구도 사이에 이종족이 한쪽 편을 들게 하십시오. 절반의 인간에겐 미움받지만 나머지 절반의 인간의 인식은 강제적으로라도 조금씩 변할 겁니다."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뒤에서 꼼수를 부려서 인간들끼리 싸움을 붙인 뒤 슬그머니 한쪽 편을 들라는 소리인가?"

마켈린이 피식 웃었다.

"굳이 꼼수를 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버려 둬도 자기들끼리 열심히 다투는 것이 인간들인데요."

듣고 보니 그랬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아무 짓 안 해도 어차피 대륙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전쟁은 일어난다. 권력을 얻기 위해, 부를 얻기 위해, 영토를 얻기 위해, 사소한 국가, 세력 간의 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굳이 꼼수 따위 부리지 않아도 인간들끼리의 다툼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그런 인간들의 분쟁에 슬쩍 끼어들어 그들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엘프나 드워프, 오크, 트롤들에 대한 대우를 완화시키라는 것이 마켈린의 조언이었다.

합리적으로 들리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그렇게 쉽게 이종족에 대한 편견을 버릴까?"

마켈린도 그렇게까지 인간에게 기대할 만큼 멍청한 드워프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한들 인간 중 이종족을 노예가 아니라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10퍼센트도 안 될 겁니다. 하지만 뭐든지 시작에서 큰 욕심 부리면 안 되는 법이지요."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짚었다.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 마켈린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내 이해할 수 있다.

힘으로 누르고, 상황적으로 이종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만들며, 사상적으로 현 세상의 모순을 짚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종족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시키며,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되살려 독립성을 갖추는 것. 이 모든 것을 다 시도해도 모자란 것이 바로 그의 꿈이요, 야망인 것이다.

"커어, 골치 아프네."

"많이 골 썩이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니까요."

푸근하게 웃으며 마켈린은 눈앞의 젊은 주군, 신이 점지한 그들의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았지만 그는 현명한 드워프, 이 이상은 레펜하르트가 판단할 몫임을 알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레펜하르트, 그렇다면 그의 행보는 그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선택, 판단이어야 한다. 만약 마켈린의 사상이 100퍼센트 옳았다면 알 포트는 그를 구원자로 삼지 굳이 레펜하르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하는 것은 그저 조언으로 레펜하르트에게 판단할 '정보'를 더 부여하는 것뿐.

"으음...."

뭔가 심각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마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

정신을 차리고 레펜하르트도 마주 일어났다.

"일단은 그랜드 포지에서 좀 지내고자 한다. 여기서 한 달 정도 지내야 할 필요가 있으니."

레펜하르트가 이곳, 그랜드 포지에 온 이유는 물론 마켈린을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알 포트의 지저 태양, 마그림을 한 달 정도 빌려야 하거든."

레펜하르트는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슬슬 일행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켈린이 배웅을 위해 뒤를 따랐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일행 분들을 위해서도 따로 묵을 곳을 마련하지요."

"고맙군, 마켈린."

3

차가운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산등성이, 검푸른 검불과 새하얀 눈이 어지러이 덮여 있는 그 능선 위에서 거대한 마수가 포효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거대한 피막의 날개와 30미터에 달하는 거체를 지닌 파충류형 몬스터, 드레이크였다. 날개는 이미 수십 개의 밧줄과 그물들이 엉켜 있는 상태, 전신에도 수십 개의 화살과 쇠뇌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그 주위를 쉰 명 정도의 드워프 무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단단한 근육에 두꺼운 무장을 갖추고 거대한 도끼며 망치를 든, 전사들이었다.

포효와 함께 드레이크가 입을 벌렸다. 순간 유황 냄새가 자욱하게 퍼지며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아아아악!

불길이 대지 위로 작열했다. 드워프 전사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브레스다! 방어를!"

붉은 불길이 채찍처럼 산 능선 위를 길게 후려갈겼다. 불꽃의 벽이 피어오르며 후끈한 열기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기 시작한다. 몰아쳐 오는 불길을 향해 드워프 전사들이 일제히 방패를 내세워 자신을 보호했다. 뒤에서 두 명의 드워프가 손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알 포트시여! 당신의 가호를 내리시어 화염 속에서 무사케 하소서!"

무쇠를 연상케 하는 회색빛의 성광이 주위를 뒤덮으며 드워프 전사들에게 열에 대한 내성을 올리는 신성 가호를 내렸다. 원래도 드워프들은 열기에 대해 저항력이 강하다. 거기에 신관의 가호가 깃드니 다들 화염 속에서도 용케 몸을 보전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비장의 무기가 통용되지 않자 드레이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틈에 드워프 전사들이 저마다 석궁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십 발의 쿼렐이 드레이크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갔다. 대다수는 두꺼운 비늘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지만, 비늘 사이의 틈에 박히는 화살도 꽤 많다. 고통으로 분노하며 드레이크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닥치는 대로 괴성을 터트리며 꼬리를 연거푸 휘두르고 앞발을 정신없이 내려친다. 드워프 전사들이 재주껏 피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저 거대한 드레이크의 사방으로 달려들며 도끼를 휘두르고 망치를 내려친다. 몇몇 드워프들이 꼬리며 앞발에 치여 날아가기도 했지만 비명을 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서도 얕은 신음만 흘릴 뿐, 두 눈 가득 전의를 태우며 다시 몸을 일으킨다.

전설 속의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드레이크는 한 개체만으로도 일개 인간 영지쯤은 가볍게 짓밟을 수 있는 강력한 마물이다. 어지간히 이름난 기사단이라 해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쉰 명가량의 드워프 전사들은 그런 마물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치고 빠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드워프 전사들이 드레이크의 기력을 어느 정도 빼 놓은 후였다. 드워프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지금일세, 카다마이트!"

"알겠소!"

우렁찬 목소리로 대꾸하며 드워프 전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도끼 창을 양손에 단단히 쥔 채, 카다마이트라 불린 드워프는 발 한번 구른 것만으로 거의 20미터 가까운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드레이크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드워프의 저 짧은 다리로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공한 스피드였다.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기합을 터트렸다.

"으랏타!"

도끼 창의 칼날이 검붉은 광채를 내뿜으며 찬란하게 빛났다. 그대로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휘둘렀다. 검붉은 오러가 거대한 빛의 칼날이 되어 드레이크의 어깻죽지를 그대로 갈랐다. 거대한 날개가 단숨에 뚝 끊어지며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카아아아아!

지독한 고통으로 드레이크가 비명을 토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재차 착지한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역수로 쥔 채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오오오오오!"

순간적으로 그의 전신에서 적갈색 오러가 폭발하며 부풀어 올랐다. 대지의 기운과 자신을 공명시켜 순간적으로 근력을 늘리는 드워프 전사들의 수법, 그것을 오러에 응용해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전신의 오러양을 열 배 가까이 증폭시킨 카다마이트가 우렁찬 외침을 터트리며 도끼 창을 내던졌다.

"가라! 할트론!"

웅웅웅웅!

적갈색 오러의 포탄이 드레이크의 몸통에 정확히 꽂혔다. 강철 같은 비늘을 간단히 가르고 두꺼운 근육도 가볍게 파헤치며 무시무시한 폭발을 자아낸다. 폭음이 진동하며 드레이크의 피와 살점이 허공 가득 나부꼈다.

카다마이트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그의 도끼 창, 할트론이 저절로 뽑히며 재차 그의 손아귀로 날아와 잡힌다. 전투 자세를 잡는 카다마이트를 보며 함께 싸우던 인간 검사, 러스는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군....'

카다마이트의 전투는 이미 몇 번이나 곁에서 보아 왔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러스였다.

올해로 백쉰 살이 갓 넘은 카다마이트는 드워프 중에서도 상당히 젊은 축에 끼는 전사였다. 그리고 그랜드 포지에서도 세 명밖에 없다는 오러 능력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처음 카다마이트의 존재를 알았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은 대단했다.

드워프 중에도 오러 능력자가 있었다니?

오러 능력이란 것은 야만적인 존재가 본능만으로 일깨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오랜 세대 동안 갈고닦은, 세련되고 전문화된 전투 기술의 궁극이 바로 오러다. 그저 야만성만으로 난폭하게 날뛰는 오크 검투사는, 비록 강력한 무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오러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것도 수십 세대에 걸쳐 최선의 방식이 구축된 무술에 대한 문화가 없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러 능력자인 것이다.

물론, 러스도 레펜하르트를 보고 스스로 오러를 각성하기는 했다. 그러니 저 카다마이트가 러스 급의 천재라 인간 오러 유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오러를 각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결코 그것은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본 드워프 오러 유저의 힘은 러스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짧은 신체 조건에도 불구, 카다마이트는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사지가 짧은 대신 기술 변화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강맹하다. 다리가 짧다는 것은 신체 중심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 보니 기술과 기술 사이의 허점이 거의 없고 자세가 조금 흐트러져도 금방 원상 복귀된다. 물론 인간에 비해 리치가 짧다는 단점도 있지만 오러 유저쯤 되면 그 단점도 사라진다. 오러를 길게 늘이면 되는 문제니까. 솔직히 지금의 러스로는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인간 오러 유저는 구현할 수 없는 오러 운용법, 순간적으로 엄청난 위력을 내는 저 증폭 방식은 심지어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막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모든 면이 인간과는 별개의, 드워프의 신체에 최적화된 기술이고 움직임이었다. 당장 저 오러 증폭만 해도 러스는 보고 바로 이해했을지언정,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카다마이트가 쓰는 오러의 용법은 인간의 몸으로는 구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드워프만의, 드워프에 의한 오러 용법,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드워프들도 오러 능력자를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지녔다는 의미.

'형님의 말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건가....'

그랜드 포지의 위용, 눈앞의 드워프 오러 유저의 존재,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이 험한 오지 속에서도 살아가는 자유로운 드워프들의 모습.

모든 것이 러스의 상식을 깨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붕괴되고 혼란스러운 지식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러스에게 카다마이트의 일침이 떨어졌다.

"이보게, 러스 경! 뭐 하고 있나?"

"아...."

한창 전투 중에 또 딴생각을 해 버렸다. 러스는 혀를 차며 검을 들고 몸을 날렸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를 내뿜으며 러스는 상처 입은 드레이크의 반대편으로 날아올랐다.

"허업!"

푸른 오러가 길게 늘어지며 예리한 칼날의 채찍이 된다. 그렇게 10여 미터의 거리를 격한 채 러스는 드레이크를 연신 후려갈겼다. 이제 오러를 늘리며 위력을 유지하는 용법도 꽤나 익숙해져서 이 정도 길이로 늘려도 오러의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콰콰콰쾅!

오러의 채찍이 드레이크를 후려갈길 때마다 폭음이 울려 퍼졌다. 비늘이 베이고 살점이 깎이며 드레이크가 미친 듯이 허공에 불길을 뿜어 댔다.

화아아아악!

불길이 러스를 노리고 어지러이 허공을 붉게 물들인다. 하지만 러스는 마치 나비처럼 우아한 움직임으로 모든 불길을 피해 냈다. 동시에 다시금 검을 휘둘러 블레이드 오러를 쏘아 냈다.

"세븐 슈레더Seven shredder!"

날카로운 외침을 터트리며 러스는 연거푸 검을 휘둘러 일곱 개의 오러의 칼날을 형성, 그것을 드레이크에게 쏘았다. 초승달 모양의 오러가 부메랑처럼 허공을 회선하며 드레이크의 전신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번엔 폭음이 없었다. 두꺼운 드레이크의 비늘이 모든 공격을 튕겨 낸 것이다.

"쳇!"

러스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이건 아직 무린가....'

일곱 개의 오러 칼날을 만들어 쏘아 내는 이 기술은 러스가 레펜하르트의 기격탄을 보며 직접 만들어 낸 것이었다. 기술명을 붙이는 쪽이 이미지도 잡기 쉽고 능숙해질 수 있다는 레펜하르트의 조언에 세븐 슈레더라는 이름도 붙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영 위력이 늘지를 않는 것이다.

오러를 길게 늘이면서도 위력을 유지하는 것은 그럭저럭 가능해졌다. 그동안 맹렬히 수련한 용법, 오러의 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수법을 몸에 익힌 덕에 꽤나 자유롭게 오러의 형태를 바꾸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오러를 투사체의 형태로 바꿔 멀리 쏘아 내는 용법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형님의 기격탄을 보면 대충 방법은 알겠는데 말이지....'

오러를 날리는 방식 자체는 요령에 가까운 것이라 오러양이 늘어나자 바로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요령을 바로 파악해 기술을 익힐 순 있어도, 그 기술을 위력적으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기량이 필요하다.

'역시 터득하는 것과 능숙해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군.'

입맛을 다시는 러스의 등 뒤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힐렌!"

30미터쯤 떨어진 산 능선의 바위 위에서, 시리스가 빛의 활을 들고 드레이크를 겨누고 있었다. 드워프 전사들이 드레이크를 몰아붙이는 동안 그녀는 계속 니힐렌에 정신을 집중, 위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시리스는 마력을 다루지 못하지만, 마궁 니힐렌은 자체적으로 마나 게더링의 힘이 있어 계속 파워를 충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티잉!

맑은 시위 놓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섬광이 드레이크에게 쏘아졌다. 빛의 화살, 얼마나 마력을 집중시켰는지 숫제 창처럼 보이는 섬광이 드레이크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채 러스가 놓친 부분을 시리스의 화살이 제대로 어루만져 주었다. 이젠 아예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드레이크의 거체가 서서히 침몰해 가더니 결국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드레이크를 보며 드워프 전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오오!"

"잡았다!"

"으하하하하!"

죽어 가는 드레이크를 향해 드워프들이 도끼를 들고 달려간다. 그 속에서는 굵직한 배틀 액스를 든 채 눈을 빛내는 틸라의 모습도 있었다.

시리스를 스쳐 지나가며 틸라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포식하겠는데요?"

시리스는 아무 말 없이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머물게 된 지도 어언 한 달, 러스와 시리스, 틸라가 드워프 전사들과 함께 지상의 마물 사냥에 참가한 지도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다.

그랜드 포지는 지하 깊숙이 있기에 지상의 마물들에 대한 방비는 꽤 쉬운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식량을 얻기가 힘들었다. 비록 그랜드 포지 곳곳에 박힌 지열석과 알 포트의 지저 태양, 마그림 덕분에 어느 정도의 광량은 확보되어 있고, 그래서 지하에서도 버섯이나 몇 가지 식용으로 쓸 수 있는 구근 식물은 재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천여 명에 가까운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을 모두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목숨을 걸고 이렇듯 지상으로 올라와 몬스터를 사냥해 식량을 보충하곤 했다.

물론 드워프들이 이들을 억지로 끌고 온 것은 아니었다. 무려 일족의 구원자 일행씩이나 되는 귀빈들한테 밥값 좀 하라고 닦달할 만큼 드워프는 치사한 종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며칠씩이나 하는 일 없이 공밥 먹고 있자니 미안해진 이들이 자진해서 끼어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드레이크 같은 상위 마물을 그저 식량 취급하다니....'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드워프들은 숨이 끊어진 드레이크의 사체에 모여 신 나게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먹을 만한 부위를 골라내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자르는 것이다. 저 모습은 몇 번이나 이들의 '사냥'에 따라 나왔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처음 이들의 '사냥'에 대해 듣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몬스터를 잡아먹겠다니... 물론 그랜드 포지의 생활 사정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역시 거부감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먹다 보니 또 괜찮은 것도 같고....'

아무리 드워프들이 사는 게 막장이라도 하피나 오우거 같은, 인간과 비슷한 몬스터까지 잡아먹지는 않는다. 보통 노리는 것이라면 오늘 잡은 드레이크나 바실리스크, 코카트리스 같은 짐승형 몬스터인데, 이게 또 먹어보니 은근히 먹을 만했다.

'코카트리스 고기는 좀 질긴 꿩고기 같은 맛이었고 바실리스크 고기도 생각보다 나쁜 맛은 아니었지....'

차곡차곡 해체되는 드레이크를 보며 러스는 입맛을 다셨다. 저놈은 무슨 맛이려나? 생각해 보면 드레이크도 파충류의 일종이고, 인간들도 뱀이나 악어 같은 것은 곧잘 잡아먹는다. 심지어 바다거북 같은 경우에는 꽤 진미 취급을 받지 않는가?

'그걸 생각하면 의외로 꽤나 맛있을지도?'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더니, 익숙해지지 않는다던 주제에 또 맛에 대한 호기심은 보이고 있는 러스였다.

10여 분쯤 지나자 드레이크는 완전히 해체되어 식용 고깃덩이로 변했다. 드레이크의 비늘이며 뿔 등은 과감하게 버렸다. 인간들에겐 저런 비늘이나 뿔도 귀한 것이겠지만, 어차피 금속으로 훨씬 뛰어난 갑주나 무기를 벼릴 재주가 있는 드워프들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미리 준비해 온 짐수레에 고기를 옮겨 싣고 남은 부분은 각자 등에 짊어지는 등 드워프들이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카다마이트가 선두에 서서 쾌활한 외침을 터트렸다.

"자~ 돌아갑시다~!"

☆ ☆ ☆

그랜드 포지의 입구는 산맥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중 주로 쓰이는 입구, 드워프들끼리 정문이라 부르는 입구가 바로 세텔라드 산맥 최고봉인 포트라이드 산의 중턱에 있었다. 원래는 1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 강철 대문이 좌우로 달려 있어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위용을 자랑하지만, 혹시 인간의 눈에 띌까 싶어 바위와 수목으로 은밀히 가려 놓은 곳이었다.

드레이크 고기를 짊어진 드워프 전사들과 시리스 일행이 대문 앞까지 도착하자 보초를 서고 있던 드워프 전사 두 명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오! 결국 이놈 잡은 겨?"

"오늘은 고기 국물 맛 좀 보겠군."

둘 다 신을 내며 일행을 통과시킨다. 다들 이제 곧 맛볼 고기에 대한 기대가 팽배한 표정이었다. 고생한 드워프 전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서로 기뻐하는 그 훈훈한 모습에 러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해도, 이들의 모습은 '인간'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를 따라라. 그리고 그 두 눈으로 보고 스스로 판단해라.

이곳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레펜하르트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굳은 얼굴로 러스는 다른 일행을 따라 그랜드 포지로 향하는 지하 통로로 향했다.

30분 정도 걸어 그랜드 포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문득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만치에서 붉은 머리 소년이 정신없이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아주 웃음꽃이 활짝 핀 것이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돌아온 주인 맞이하는 강아지 같달까?

'우, 우리가 돌아온 것이 그렇게 반가웠나?'

시리스며 러스, 틸라가 사냥을 나가는 동안 실란은 계속 그랜드 포지 안에 있었다. 그는 레펜하르트의 조언에 따라 한 달 내내 특별 체력 단련 프로그램을 짜고, 그것을 시행하느라 사냥에 참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치유술을 쓰지 않고 저 훈련을 소화하려면 아무래도 사냥에 따라갈 만한 몸 상태가 아니가 되니까. 그렇다 보니 계속 혼자만 남겨 놓았었는데....

'역시 외로웠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실란의 이런 태도도 이해가 갔다.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시리스는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실란. 우리 돌아왔...."

"으하하하!"

갑자기 실란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덩실거렸다. 그리고 시리스의 손을 잡고 틸라의 어깨를 잡더니 러스와도 악수를 하며 아주 신나게 손을 흔들어 댄다.

"뭐, 뭐야?"

"실란, 왜 그래요?"

"정신 차려요!"

"으히히히히히!"

시리스 일행이 놀라건 말건 실란은 계속 괴상한 웃음을 흘려 댈 뿐이다. 드워프들도 그 괴이한 모습에 웅성거릴 무렵, 비로소 실란이 웃음을 멈추더니 진지한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러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실란?"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실란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저 1센티미터 컸어요!"

"응?"

"키 컸다고요! 1센티미터나 컸어요!"

그렇다. 레펜하르트가 시키는 스케줄을 한 달간 소화한 실란의 육체가 드디어 정상적으로 성장을 시작한 것이다. 고작해야 1센티미터일 뿐이지만 열네 살 이후 단 1밀리미터도 크지 않은 실란에게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기적이다!

러스와 시리스도 의미를 깨닫고 제대로 놀라 주었다.

"오오!"

"정말이에요?"

실란이 평소 빈약한 자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지 익히 보아 온 시리스와 러스였다. 둘 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실란을 축하해 주었다.

"잘됐군, 실란!"

"그러게요! 축하해요, 실란!"

환한 미소를 짓는 시리스와 러스, 그리고 가운데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뻐하는 실란.

반면 틸라를 비롯한 다른 드워프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왜 저리 좋아한대?"

"키 컸대."

"그런데 왜 좋아한대?"

"모르겠는데? 인간은 키가 커야 가치를 인정받나?"

그제야 드워프의 특성을 떠올린 시리스가 간단히 통역(?)해 주었다.

"그러니까 드워프로 치면, 어깨 넓이가 1센티미터 커진 것과 같아요."

그러자 비로소 드워프들도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넨다. 오오! 자네 좋겠군! 굉장해! 축하하네! 등등.

드워프들에게 있어 남자다움의 상징은 어깨 넓이라든가 가슴 두께 쪽이지 키가 크고 작고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성들 역시 가슴이 풍만해졌다든가 엉덩이가 커졌다든가 하면 좋아하기는 해도 키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실란이 만인의 축하를 받으며 한창 신바람을 내던 중이었다. 문득 러스가 물었다.

"그런데 형님은?"

이 기적(?)을 창조해 낸 장본인에게 제일 먼저 결과를 알려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그러자 실란이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뭐, 여전하죠."

"아, 오늘도 거기 가 계신가?"

자신들이 이곳, 그랜드 포지에 한 달간이나 체류하게 된 이유를 떠올리며 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 마켈린과 만난 레펜하르트는 돌아오자마자 선언하듯 말했다.

-당분간 그랜드 포지에서 머무르겠다.

이유를 물어보니 모자란 마력을 보충하기 위한 기물이 이곳, 그랜드 포지에 있어 한동안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레펜하르트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랜드 포지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강철탑 안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밖에 나오는 경우는 밥 먹을 때와 잠잘 때, 그리고 육체와 무술의 쇠퇴를 막기 위해 따로 수련하는 시간뿐이었다.

딱히 시간을 지체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은 아무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급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란은 근육 키울 여유가 생겨서 도리어 좋아했다. 러스도 레펜하르트와의 대련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드워프 오러 유저와도 수시로 붙어 보며 자신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틸라와 시리스도 저마다 무술의 기량을 높이고 마물 사냥을 통해 경험을 쌓고 있었다. 여러 모로 충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걸까요?"

강철탑에 들어갈 때 레펜하르트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어느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지 말라고. 자신의 일행들은 물론이고 마켈린을 통해 드워프들도 절대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다. 실란이나 러스는 그렇다 치고, 시리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다니? 평소 레펜하르트의 태도와 영 맞지 않다.

러스가 그럴 수도 있다며 입을 열었다.

"경지에 오른 무인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홀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경우 작은 외부의 자극만으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더군. 마법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 비슷한 것이 아닐까?"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실란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건가?"

4

그랜드 포지의 중앙부에 위치한 거대한 강철의 탑, 상층에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의 거처가 있는 그 탑은 이 거대한 지하 도시의 핵심이었다. 그랜드 포지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열원인 지열석, 100미터 단위로 촘촘히 박혀 있는 수십 개의 지열석을 가동시키는 마력의 원천이 바로 이 강철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대륙의 다른 노예 신세의 드워프들이 마을을 꾸릴 경우, 인간 마법사가 이 지열석을 수시로 재충전해 준다. 하지만 그랜드 포지의 지열석은 드워프 마법사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은 강력한 마법 도구를 제작할 수 있는 드워프들를 두려워했고, 그렇기에 그들의 마법 지식을 단절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덕분에, 현재 그랜드 포지에는 알 포트의 신성 주문을 구사하는 신관과 오러에 각성한 전사는 있을지언정 마법의 지식을 가진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오러 능력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몰래 전수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로 대장장이의 망치질이나 건축, 광산 개발을 위한 곡괭이질 등으로 그 동작을 숨겨 온 것이다. 전래되는 무술을 춤의 형식으로 숨겨서 후세에 전수하는 방식은 인간들 중에도 꽤 흔하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지식보다는 지혜의 영역이다. 알 포트를 섬기는 가르침은 물론 심오한 지혜를 담고 있었지만, 그 정보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까놓고 말해서 알 포트의 성전 한 권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것이다.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이가 구전으로 전할 수 있을 정도라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드워프들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의 지식은 너무나 방대하다. 살아남은 드워프 마법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그 수준이 저급했다. 그리고 신관과 달리 마법사는 지식이 없으면 절대 기량을 높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미 모든 마법의 정보는 인간의 손에 의해 묻혀 버렸다.

위대한 지식을 모두 잃고 마법사의 존재조차 사라져 버린 드워프들, 이들을 구원한 것이 바로 알 포트의 신성한 지저 태양, 마그림이었다.

사방이 막힌 거대한 석실, 온갖 마력 전도용 파이프가 사방으로 펼쳐진 그 중앙에 직경 8미터 정도의 커다란 화염구가 떠 있었다. 마치 심장처럼 수시로 일렁이며 파이프를 통해 엄청난 양의 마력을 각 지역으로 보내는 불덩어리, 바로 그랜드 포지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지저 태양 마그림이었다.

연신 약동하는 마그림 앞에 웃통을 벗은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알차게 단련한 구릿빛 근육이 땀에 번들거리며 화염구의 형상을 은은하게 비춘다. 이마를 훔쳐 땀을 닦으며 청년,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역시 은의 시대는 대단하단 말이야...."

알 포트의 지저 태양이라 이름 붙어 있었지만, 이 마그림은 사실 은의 시대 유물 중 하나이지 결코 알 포트가 창조한 성물이 아니었다.

신의 권능은 그 권속의 세력에 영향을 받는 법, 대륙에서 드워프의 위세가 극히 떨어졌으니 그만큼 알 포트가 현실에 간섭할 수 있는 힘도 줄었다. 현재의 알 포트에게 가능한 것은 기껏해야 그의 피조물들을 위해 잠들어 있던 그랜드 포지의 심장, 마그림을 신의 힘으로 일깨우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현 시대의 어떤 마법사도 이루지 못할 기적인 것은 분명하니 신으로서의 위엄이 손상되었다고 할 순 없다. 드워프들이 알 포트의 지저 태양이라며 찬양하는 것도 아주 근거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뭐, 나도 작동시킬 줄은 알지만....'

레펜하르트는 턱을 긁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 그는 이 마그림을 거의 1년 가까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오직 신만이 다룰 수 있다는 지저 태양 마그림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10서클 궁극 파괴 마법, 뉴클리어 버스트도 창조해 냈다.

'한 방 쏴 보고 기겁해서 봉인하긴 했지만 말이지.'

최소 한 달은 술식 연산과 마력 충전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페널티가 있긴 했지만, 어지간한 한 나라의 수도조차 한 방에 소멸시킬 수 있는 이 초극대 주문은 고안한 레펜하르트조차도 치가 떨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전생에서 뉴클리어 버스트를 실전에서 쓴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바실리 왕국을 멸망시킬 때 적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위력 시범용으로 인적 없는 산 두어 개를 날린 것이 전부다. 천하의 레펜하르트라도 도저히 저 무식한 초광범위 파괴 마법을 사람에게 날릴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공포에 질린 바실리 왕국은 쉽게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도 장난이 아니었지.'

단숨에 마왕이라는 흉명을 대륙 전역에 자자하게 떨쳤지, 그 전까지는 적당히 눈치만 보던 다른 국가들도 사색이 되어 똘똘 뭉쳐 그를 적대하기 시작했지, 정작 막판에 이백만 대군이 쳐들어올 때는 마법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써먹지도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 이번엔 절대 뉴클리어 버스트는 쓰지 말아야지. 이건 뭐 위력이 지나치게 높아서 조절도 안 되고, 그렇다 보니 욕은 욕대로 처먹고, 준비 기간이 너무 길어 정작 효용성도 별로 없고....'

하여튼, 그렇게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슬슬 소모되었던 전신의 마력이 재충전되었다. 다시 마그림을 이용해 마법 수행을 해야 할 때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에휴...."

그러더니 땅을 보고, 천장을 보고, 정말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내 해 왔지만 이 짓거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지금 그는 마그림의 마력을 이용, 이 테스론의 육체를 마력 친화적인 체질로 바꾸는 작업을 수행 중이었다.

연산 능력은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이용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다. 이제 다음 문제는 부족한 마력을 채우는 것. 그런데 이 육체는 도무지 마법이랑은 담 쌓은 체질인지라 아무리 마력을 운용해도 영 기대했던 만큼 체내 마력 허용량이 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모자란 마력 자체를 채울 방법은 많았다. 전생에 써먹었던 사방신의 유물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은의 시대 유물 중에는 마나 드레인이 먹히는 아티팩트가 제법 된다. 그러니 지금처럼 열심히 기억 속 유적을 털어 유물을 모은다면 마력 자체를 모으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호수에서 물을 퍼 나를 수 있다 해도, 물 담을 그릇이 고작 작은 옹기 수준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단은 그릇 자체를 키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펜하르트가 선택한 것이 강력한 마력의 집합체와 자신의 마력을 공명시켜 마력 허용량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대단히 섬세한 마력 운용이 필요한 고난이도의 작업이었지만, 대마도사였던 그에게는 별로 어려운 축에 끼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대륙 남부에 위치한 유적, 달카스에 있는 마나 코어 유드람으로 수행할 생각이었지만 마그림도 사실 효과는 비슷하니 상관은 없었다.

문제는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마력 집합체와 최대한 접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더욱 문제는 마력의 공명을 위해서 둘 사이에 아주 사소한 이물질의 존재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그렇다. 이 체질 개선 수행은 반드시 알몸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아, 쪽팔려...."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가 바지를 벗었다. 단단하게 근육이 박힌 탐스러운 엉덩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앞쪽으로는 뭔가 큼지막한 게 덜렁거리기도 한다.

홀랑 벗고 알몸이 된 레펜하르트는 우선 기감을 차단했다. 마력 공명에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다른 감각이 끼어들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마그림 위로 폴짝 뛰었다.

찰싹!

이글거리는 화염구 표면에 알몸의 레펜하르트가 사지를 쭉 펴고 대자로 달라붙었다. 불덩이 위에 달라붙었지만 전혀 뜨겁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마력의 공명이 일어난 이상, 마그림의 열기는 전혀 레펜하르트를 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 모습이 아무리 봐도 오뉴월 땡볕 아래 담벼락에 달라붙은 개구리로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거구의 근육질 사내가 알궁둥이 훤히 드러내고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 참으로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이다. 체중 조절이 필요한 이가 본다면 참 지대한 효과를 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절대 남에게 보여 줄 몰골이 아니란 것만은 분명했다.

'절대 안 돼! 이런 꼴 아무한테도 못 보여 줘! 특히나 시리스만큼은 절대 안 돼!'

새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그림에 달라붙었다. 마그림 표면이 이리저리 움직이자 달라붙은 레펜하르트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때마다 붉은 열기가 구릿빛 엉덩이(!) 위로 번들번들 비친다.

자고로 생선도 때 되면 뒤집어야 노릇노릇 잘 구워지는 법. 어느 정도 정면의 마력 공명이 끝났다 싶은 레펜하르트는 이번엔 등 쪽을 마그림에 갖다 댔다. 허리 쭈욱 펴고 등짝을 마그림에 붙이니 필연적으로 앞쪽에서 뭔가(!)가 덜렁거린다.

'아, 이게 무슨 꼴이냐, 흑흑....'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고난쯤은 극복해야 하는 법! 레펜하르트는 벌게진 얼굴로 열심히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제발 하루라도 빨리 이놈의 체질 개선이 끝나기만을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그나마 아무도 안 보고 있으니 망정이지, 이 꼴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으이그....'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미처 몰랐다. 이 석실 구석에는 은밀하게 거울 반사를 이용한 감시용 구멍들이 뚫려 있다는 사실을. 이 지저 태양 마그림이 위치한 석실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다. 혹시나 잘못될 것에 대비해 항상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석실로부터 30미터쯤 떨어진 마그림 관찰실.

그곳에서 한 무리의 드워프 아낙네들이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침을 후르륵 삼키고 있었다.

"등 좀 보소. 꼼꼼하게 갈라졌구먼. 에휴, 우리 영감과는 차원이 다르네."

"팔뚝 봐요, 팔뚝."

"궁디가 토실토실한디."

다들 결혼 생활 족히 몇십 년은 해 본 베테랑 아줌마들이다. 외간 남정네의 나신을 보는 것에 대한 수치심 따윈 옛날 옛적에 소멸한 분들이다. 모두 아주 희희낙락하며 레펜하르트의 근육을 감상하고 있었다. 드워프 여성의 특성상 아줌마라 할지라도 외관은 소녀 같고 그저 가슴만 풍만할 뿐. 생기기는 10대 소녀처럼 생긴 이들이 모여서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으니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어머머! 뒤집는다! 뒤집는다!"

"오메, 가슴 두툼한 거 봐."

"물건도 실하구먼."

"좋은디~."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레펜하르트는 여전히 마그림에 전신을 비비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자, 열심히 하자!'

☆ ☆ ☆

그랜드 포지에서 머문 지 40일째 되는 날, 마그림이 위치한 석실 안에서 레펜하르트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끝났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양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읊기 시작한다.

"하스트 가라타드 델피나드. 한설의 아들, 북풍의 존재여, 내 뜻에 따라 이곳에 임하라! 프로스트 엘레멘터!"

양손이 빛나며 강렬한 마력의 폭풍을 허공에 형성한다. 이내 3미터가 넘는 얼음의 소용돌이가 생겨나 사방에 냉기를 뿌려 댔다. 레펜하르트는 씨익 웃었다. 빙설의 정령수를 소환하는 5서클 소환 주문, 프로스트 엘레멘터를 훌륭히 성공시켰다.

"좋아, 제대로 결과가 나왔군."

손을 한번 휘두르자 프로스트 엘레멘터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마력의 여파가 남아 저릿저릿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명상을 하고 또 해도, 그동안은 마력의 최대치 자체가 워낙 낮아 4서클 이상의 주문은 도저히 구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5서클, 좀 무리한다면 6서클 주문까지도 가능하다.

드디어 체질 개선이 끝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알궁둥이 내놓고 불덩이 위를 데굴데굴 구를 필요가 없다!

감개무량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우선 잽싸게 바지부터 입었다. 그리고 그제야 여유가 생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 한 달 잡고 시작했는데 40일이나 걸려 버렸네. 하여튼 이놈의 육체는 왜 이리 마법이랑 담을 쌓았냐?"

레펜하르트는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마력량을 측정해 보았다. 빈약하기 짝이 없던 체내의 마력이 놀랍도록 높아져, 슬슬 원래 육체가 20대 중반에 지녔던 수준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모자란 마력을 높이기만 하면 되겠군."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후련한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는 석실을 나섰다. 그랜드 포지 내를 빠르게 걸어 숙소로 향하며 그는 앞으로의 일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사방신의 유물부터 차례대로 찾을까? 아니, 그 전에 슬슬 봄이잖아? 그럼 일단 차탄 공국부터 들려야 하려나? 마켈린의 조언을 따르려면 크로방스 왕국도 들러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일단 유적을 들러서 그쪽부터 가 봐야겠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레펜하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어쨌거나 이놈의 체질 개선이 끝나고 나니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40일 동안 혹여나 들킬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마그림에 달라붙었었나? 실로 하루하루가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결국 안 들켰지. 후후후후.'

레펜하르트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걸었다. 어째 길을 걷는 그을 향해 드워프 아낙네들이 음흉한 표정으로 웃거나, 이유 없이 숙덕거리거나, 심지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등 기묘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지만... 가련한 레펜하르트는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채 신 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실란이 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레펜하르트는 살짝 감탄했다.

'어라? 이 녀석, 근육 좀 붙었네?'

40일 동안 착실히, 치유술을 봉인한 채 육체 훈련에만 열중한 실란의 모습은 꽤나 변해 있었다. 뭐, 변해 봤자 딱히 남자다워졌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청순가련형 병약 미소녀가 생기발랄한 건강 미소녀가 됐다 정도? 실란이 어엿한 남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하겠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해 버리는 것은 어른의 자세가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살짝 입에 침을 바른 뒤 입을 열었다.

"오오! 실란, 제법 남자다워졌는데?"

"아?"

턱걸이를 마친 실란이 땀을 닦다 말고 레펜하르트를 돌아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쪼르르 달려온 실란이 그를 향해 물었다.

"어? 진짜요? 정말로 그렇게 티가 나요?"

"그, 그럼...."

고개를 끄덕여 주자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한다. 왠지 죄책감이 느껴져 레펜하르트는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뭐, 실제로 키도 제법 컸고 티가 안 나는 것은 아니니까.

실란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웬일로 식사 시간도 아닌데 벌써 돌아왔어요?"

"아, 드디어 끝났거든."

뭐가 끝났다는 것인지는 실란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슬슬 그랜드 포지를 떠나겠네요?"

"응."

그러자 실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새 정 들어서 이곳 떠나기가 싫어진 거야?"

"아,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실란은 체력 단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을 취할 때마다 드워프들에게 필라넨스의 가르침을 포교하고 있었다. 필라넨스의 가르침이란 게 사실 알고 보면 연애 가이드, 혹은 부부 생활 지침서에 가까운 물건인지라 드워프들 사이에서 상당히 반응이 좋았던 것이다. 역시 남녀 문제는 종족을 초월해 모든 이들의 공감을 얻는 법이랄까?

열심히 공을 들였으니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 실란이 떠나기를 주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실란이 난감해하는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다.

"그게, 러스 씨가 갑자기 뭔가 느낌이 온다고 레펜 씨처럼 석실 하나 빌리고 처박혔거든요?"

듣자하니, 드워프 오러 능력자와 수시로 대련을 해 오던 러스가 이틀 전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면서 조용한 방 하나를 받아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나올 때까지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면서 식량도 일주일 치쯤 싸 들고 들어갔어요."

"어쩐지 요새 러스가 통 안 보인다 싶더라니...."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오러를 각성할 정도의 무인이라면 가끔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며칠 정도 세상과 담을 쌓고 처박히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의 스승, 제라드도 젊은 시절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아직 그런 무술적인 깨달음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을 뿐인데....

'아니, 오러 각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깨달음이야?'

오러에 눈뜬 지 4년이 다 되어 가는 레펜하르트도 아직 저런 깨달음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러스는 그새 뭔가 실마리를 잡았는지 바로 수행에 들어간 것이다. 역시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랄까?

상황을 이해한 레펜하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쩝, 그럼 당분간 거기서 안 나오겠구먼."

인생을 통틀어 저런 기회는 몇 번 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할 수는 없으니 지금은 러스가 제 발로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뭐, 닷새 정도 더 있다가 출발한다고 큰일 생기는 건 아니니까. 아, 그런데 틸라랑 시리스는?"

"틸라 양은 다른 드워프 전사들이랑 수행 중이에요. 시리스는 그냥 산책 나간다고 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 ☆ ☆

"사악한 드레이크! 내 망치를 받아라!"

"나의 도끼는 하늘을 꿰뚫을 도끼다!"

"야, 그랜드 포지에서 하늘 뚫으면 안 되지? 다 무너지잖아."

"아, 그런가?"

실제 드레이크처럼 정교하게 조각한 커다란 목조상, 한 무리의 드워프 어린이들이 그것을 둘러싼 채 목제 망치며 도끼 등을 휘두르고 있었다. 역시 드워프답달까? 어린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무기라지만 절묘한 무게 중심이며 섬세한 세공법이, 인간이라면 실제로 무기로 써도 충분히 위력이 나올 것들뿐이었다.

그것들을 휘두르며 아이들은 나무로 된 드레이크를 여기저기 때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놀이지만 이 아이들도 언젠가 진정한 전사가 되면 강철로 된 무기를 들고 일족을 위해 전투를 벌여야 한다. 다들 표정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계단에서, 시리스는 그 모습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저 광경 위로 희미한 영상이 환영처럼 덧씌워진다. 척박한 황무지, 뜨거운 햇볕이 끝없이 내리쬐는 그 혹독한 열사의 대지 위에서 뛰어오는 작은 엘프 아이들의 모습이.

-나 사코 도마뱀 잡았어!

-나, 나도 실파드 풀을 찾았어!

-우와! 그 뿌리 맛있는데!

혹독한 환경이었다. 그저 하루의 식량을 마련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던 힘든 삶이었다. 단하임 일족의 어린 엘프들에게 놀이란 어른들을 돕기 위해 함께 식량을 채집하는 행위였다. 놀이가 곧 훈련인 저 드워프 아이들처럼, 시리스와 함께 자랐던 어린 엘프들의 놀이 역시 생존을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 인간 손에서 자란 엘프나 드워프들처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린 엘프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저 어린 드워프들과 마찬가지로.

"하아...."

가슴 한구석에 몰아치는 시린 바람을 느끼며 시리스는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몇십 년도 지난 아득한 옛 기억이었다.

'말끔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떠올릴 일도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어째서일까? 저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며 가슴 한구석이 사무치게 아파 온다.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미련도 가지지 않은, 꿈이라고만 여겼던 어린 시절의 추억.

시리스는 힘없이 웃었다. 그때였다.

"시리스?"

시리스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를 찾아 그랜드 포지 내를 한참이나 돌아다녔던 레펜하르트였다.

"여기서 뭐 해?"

시리스가 무심코 대꾸했다.

"아이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가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드워프 어린이들을 보는 그의 옆모습을 시리스는 말없이 응시했다.

레펜하르트.

그의 주인, 한때는 그냥 단순한 변태라고 생각했던 이. 하지만 놀라운 무술과 마법의 힘마저 지니고, 이종족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어이없는 꿈마저 꾸는 자.

그리고... 언제나 따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남자....

시리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자유롭군요."

레펜하르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직한, 묘하게 처연한 음성이 이어졌다.

"힘든 고난의 삶이 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저 아이들 중 살아서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도 있겠지요...."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시리스는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일단 열린 입술은 계속 심중의 말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 아이들은 자유롭군요. 마치, 어릴 적 제 일족들처럼...."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는다. 입을 다물며 시리스는 혀를 찼다. 대체 왜 이런 소릴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투정도 아니고....

그녀는 애써 표정을 굳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문득 고향이 생각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시리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일찍 돌아오셨네요.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보는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고향이라....'

시리스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라임 왕국 서부, 대륙 서쪽의 오지 중 오지인 스펠라트 사막, 인간의 접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오로지 모래와 바위뿐인 척박한 대지. 그녀의 가족, 단하임 일족이 살아갔던 통곡의 땅.

전생에서는 레펜하르트도 시리스와 함께 몇 번이나 가 본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처갓집(?)인데 안 찾아볼 수가 없었지.'

그때 문득 레펜하르트는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는 한 번도 찾아가질 않았잖아?'

시리스는 모든 일족이 다 죽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은 좀 달랐다. 어린 시리스가 노예상에게 납치되었을 당시 단하임 일족이 궤멸 상태까지 쫓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간신히 탈출한 엘프들이 몇 있었고, 그래서 다시 통곡의 땅을 찾았을 때는 상당수의 엘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시리스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크, 기분상 이미 다녀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스스로를 탓하며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쳤다. 시리스가 얼마나 기뻐할 지 잘 알면서도 여태 생각조차 떠올리지 않았다니... 과거로 돌아와 미래의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좋은데, 역시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기억이 있다 보니 자꾸 혼동이 오는 것이다.

"끙, 나도 무심했군."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마침 러스 때문에 닷새 정도 여유도 생긴 상황, 이 기회에 시리스한테 점수 좀 따 놓아야겠다!

레펜하르트가 앞서 걷는 시리스의 손을 붙잡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시리스!"

"네."

그의 부름에 시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말 나온 김에, 잠시 고향에 다녀오지 않을래?"

그러자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감정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당황하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둘이서만."

사실, 그가 진짜 노리는 것은 이쪽이긴 했다. 둘만의 여행, 얼마나 오붓하고 좋은가?

시리스가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여기서 그곳까지 가려면 족히 두 달은 걸릴 텐데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이곳 세텔라드 산맥과 통곡의 땅이 있는 스펠라트 사막은 거의 대륙 북쪽 끝과 서쪽 끝이다. 여기서 가려면 대륙의 절반을 횡단해야 한다. 잠시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만만한 거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도 명색이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던 대마도사였다. 비록 테스론의 육체 덕에 자꾸 단순 무식하게 주먹으로 일 처리하는 습관이 들기는 했다만, 그래도 그 정도도 고려하지 못할 만큼 멍청해지지는 않았다.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여기, 그랜드 포지에서는 방법이 있거든?"

제12장 추억과의 조우

1

대마궁 가이라크의 심장부, 심연의 옥좌.

어제까지만 해도 지상 최대의 건축물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이 홀은 지금 폐허가 되어 있었다.

굳건하던 화강암 벽은 참혹한 파괴의 흔적으로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대리석 바닥은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파헤쳐지고 갈라져 있다. 곳곳에 화마가 넘실거리며 뜨거운 열기를 뿌린다. 갈라진 천장 틈새로 싸늘한 새벽 햇살이 새어 들어온다.

그 희미한 여명의 빛 아래,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로브를 걸친 검은 장발의 남자가 상대를 향해 힘없는 목소리를 건넸다.

"강하구나, 권왕 테스론...."

철탑을 연상케 하는 거구의 중년 사내가 입에 묻은 피를 닦으며 대꾸했다.

"우리의 승리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테스론은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드디어 이 '대륙의 악몽'을 꺾어 눌렀다.

마왕 레펜하르트.

암흑 제국 안타레스의 제왕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강, 최악의 마도사.

백만의 어둠의 군세를 거느리고 이계의 악마를 사역하여 대륙 절반을 불태우고 수백만을 학살한, 그야말로 인세에 강림한 진정한 마신.

인류에 대한 무한한 증오만을 불태우는 이 사악한 마도사를 쓰러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졌는가?

수백만의 군대가 생명을 던지며 어둠의 군세 사이로 길을 뚫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목숨을 바쳐 이계의 악마를 상대했다.

피를 강처럼 흘리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도 그들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간신히 이곳까지 왔다. 태양이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새벽이 오기까지 모든 힘과 역량을 다해 마왕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대륙의 악몽 레펜하르트의 권능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검술, 무투술, 신성력, 마법 등등, 각자 자기 분야에서 극에 달한 동료들조차도 마왕의 무한한 마력 앞에서 하나 둘, 피를 토하며 쓰러져 갈 뿐이었다.

새벽의 냉기가 사위를 뒤덮을 때쯤 그들 중 서 있는 이는 단 한 명, 가장 강인한 육체를 지닌 자, 그래서 '언브레이커블'이라고까지 불리던 권왕 테스론뿐이었다.

동료들이 모두 쓰러졌지만 테스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절망을 한 자루 의지의 칼날만으로 헤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강철의 의지로 자신의 생명을 모두 불태워,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빈사 상태의 육체를 움직여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쿠, 쿨럭!"

레펜하르트는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다. 썩은 듯 검게 물든 핏물, 그의 육체가 급속도로 죽어 간다는 증거였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감회 어린 표정으로 테스론은 중얼거렸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희생, 끝없는 고통, 마성에 휩싸여 날뛰는 오크와 드워프, 트롤, 엘프들의 손에 죽어 가던 수많은 동료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제 다른 놈들도 마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이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크도 엘프도 드워프도, 원래대로 온순하고 선한 성품을 되찾고 인류의 친구로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다.

"사라져라, 대륙의 악몽이여!"

엄숙한 목소리로 테스론은 주먹을 쥐었다. 이제, 최후의 일격을 가해 저 사악한 마왕에게 심판을 날릴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였다. 레펜하르트가 흐릿한 웃음을 띠었다.

"크크큭...."

죽어 가던 마왕의 얼굴에 사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테스론은 흠칫 놀랐다. 대체 어떤 간교한 수작을 부리려고 이 상황에서 미소 짓는단 말인가?

그때 마왕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붉은 빛의 작은 보석이었다. 고개 숙인 레펜하르트로부터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 페르트 뎀 이스테드 사피아... 나, 정명한 법칙을 비틀어 운명의 눈을 속일지니...."

"크윽!"

테스론은 놀라며 전신의 힘을 끌어 올렸다. 마왕이 꺼낸 붉은 보석, 그곳에서 정체 모를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너무나 강대해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지의 파동!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테스론이 허겁지겁 몸을 날렸다.

'설마 아직까지 여력이 있었을 줄이야!'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두 눈동자에서 기괴한 빛이 새 어나왔다.

"...흐름을 거슬러 역천의 법 아래 머물러...."

"어림없다, 이놈!"

테스론의 거구가 쏘아진 포탄처럼 홀을 갈랐다. 막아야 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막아야 했다.

"으아아아아!"

마지막 힘마저 불태운 테스론의 정권이 레펜하르트의 마력장을 후려갈겼다. 황금빛 투기를 두른 주먹이 마력장을 뚫고 붉은 보석을 향해 맹렬하게 내뻗어졌다.

동시에, 지옥에서 울부짖는 듯한 사악한 음성이 테스론의 귓가 가득 울려 퍼졌다.

"...나, 시공을 뒤트는 자가 되리라!"

☆ ☆ ☆

테스론은 눈을 떴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허공에 뻗은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또 이 꿈인가....'

쭉 뻗은 오른손, 강인하게 단련되긴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주먹을 보며 테스론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을 내린 채 몸을 일으켰다.

'으음, 잠깐 졸았나.'

어젯밤, 마법과 권술의 수행을 병행하느라 밤을 새웠더니 아무래도 잠시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잠시 누워서 머리만 식힐 생각이었는데....'

혀를 차며 테스론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오후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테이블 위에는 온갖 서류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가 조사한, 이 시대의 강자들과 '강자가 될 예정'인 인물들의 신상명세였다.

옆에는 미래에 닥칠 기상이변이라든가 각국의 정세 등이 적힌 책자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흐릿한 옛 기억을 열심히 더듬고 더듬어 간신히 되살려 놓은 소중한 정보들이었다. 인간의 기억력은 믿을 수가 없으니, 열여섯 살 때 이 시대로 전생한 이후 시간 날 때마다 적어 둔 것들이었다.

서류와 책자들을 내려다보며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해...."

지난 6년 동안,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여 왔다.

극한까지 익혔던 오러의 경지, 그것을 이용해 그는 이 레펜하르트의 육체로도 스무 살 때 오러에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걸로 델피아의 마탑 원로들을 협박해 정규 마법사의 지위도 손에 넣었다.

세상을 나와 미래의 강자들과 교분도 쌓았다.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언젠가 강해질 그들과의 친분은 훗날 그에게 큰 힘이 될 터였다.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은의 현자의 일원이 되는 데도 성공했다. 은의 현자는 극비이던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냈으며, 미래조차 예지하는 테스론의 '현명함'을 접한 뒤 그를 적대하기보다는 한 편으로 삼는 것이 이롭다는 결정을 내렸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았다. 교분을 쌓은 이들이 원하는 만큼의 '강자'가 되기 위해선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은의 현자가 되었다 해도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같은 은의 현자, 이라나드 공작의 후원을 받게 된 것이 전부였다.

'이 정도로는 마왕을 해치울 수 없어!'

테스론은 서류를 구기며 이를 악물었다. 오러를 각성하고 5서클에 달하는 마법을 익혔지만, 그는 여전히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과거의 자신은 강했다. 그만큼 그의 진정한 육체는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그 마왕에게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탈취하는 것도 실패했다. 마왕의 마법이 얼마나 회복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초조했다. 미칠 듯이 초조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 대륙의 악몽은 힘을 되찾을 것이다. 그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의 공포가 되어 또다시 대륙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테스론은 부르르 떨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끔찍한 미래가 오도록 놔둘 수는 없어!'

다행히 아직 마왕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모든 대비를 해야 했다. 그는 계속 서류를 들여다보며 미래의 계획을 짜고, 또 짰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이내 노크 소리와 함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테스론? 들어가도 돼?"

테스론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들어 와, 필레나."

문을 열고 적갈색 로브 차림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에 채 주근깨가 사라지지 않은, 2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리 미녀라 할 수는 없지만 꽤나 귀여운 인상이다. 테스론과 함께 델피아의 마탑을 나선 여마법사, 필레나 레이그림이었다.

필레나가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그녀는 새삼 이해 못 하겠다는 눈으로 테스론을 바라보았다. 테스론이 피식 웃었다.

"사소한 것 묻지 않기로 했었지?"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그 속에 담긴 엄격함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필레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테스론은 가라앉은 눈으로 필레나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레펜하르트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마법을 배워 온 동기이자 소꿉친구였다. 테스론이 이 시대로 부활해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그를 옹호했던, 이 시대에 있어 몇 안 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엄격한 마탑 속에서 그가 오러를 각성할 시간적 여유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레펜하르트의 친구겠지만....'

어차피 모든 시간은 뒤집어졌다. 이 시간대의 제라드가 더 이상 그의 스승이 아니듯, 이 여인 역시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소꿉친구가 아닌 것이다.

필레나가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며 테스론을 빤히 바라본다. 그 속에 담긴 애정 어린 빛을 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웃었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네가 나의 것을 빼앗은 만큼, 나도 네 것을 빼앗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미래는 결코 달라지지 않아!'

차가운 미소가 테스론의 입매 가득 떠오른다. 필레나가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테스론, 그렇게 웃으니까 꼭 예전 같아."

"예전?"

"응, 네 이름이 레펜하르트였을 때...."

"이상한 소릴 하는군."

테스론은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됐어?"

그제야 자신의 용건이 떠올랐는지 필레나가 소매 안에서 한 줌의 종이 뭉치를 꺼냈다. 테스론에게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역시 권왕 레펜하르트의 명성이 꽤나 세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어. 신기하지 않아? 어릴 적의 너와 같은 이름이라니...."

"내 이름은 더 이상 레펜하르트가 아니야."

"응, 알아. 그래도 재미있는 우연이잖아?"

"...별로 재미없어."

고개를 저으며 테스론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황금기사 유서스가 엘류시온의 유적을 탐사한 지도 어언 한 달째. 그라임 왕국에는 지금 새로운 소문이 자자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믿은 황금기사가 사실은 새로운 오러 능력자에게 굴욕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소문이었다.

테네스 백작가의 성장을 시기하는 다른 가문에서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지만, 테네스 백작가에서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거짓 소문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인 것이다. 마갑 엘드라드까지 박살 난 데다가 그 광경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입단속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문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황금기사 유서스의 명성이 높았던 만큼, 그를 쓰러뜨린 레펜하르트의 명성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그를 제라드의 뒤를 이은 새로운 권왕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테스론을 향해 필레나가 입을 삐죽였다.

"솔직히 나는 대체 저 새로운 권왕이 뭘 했다고 저렇게 명성을 떨치는지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남의 집 쳐들어가서 도둑질하다 안 되니까 다 때려 부순 놈이다. 대체 저 행위 어디에 칭송할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테스론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강함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법이지."

실은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는 무문 자체가 워낙 무식하게 역사를 쌓아 온 바가 있어서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는 면이 컸다. 전생의 테스론도 걸리는 족족 패 죽이면서 명성을 쌓지 않았던가? 뭐, 죽이려고 한 건 아닌데 패다 보니 결과적으로 죽어 있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하여튼 테스론도 도덕적으로 살아서 명성 얻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약자가 억울하게 당하면 상대를 비난하지만, 강자가 억울하게 당하면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 그리고 유서스 경은 만나 보았어?"

"응, 시킨 대로 서신 전달하니까 바로 만나 주더라."

"답장은?"

필레나가 품에서 또 다른 서신을 꺼내 건네며 웃었다.

"테스론의 예상 그대로이던걸?"

"그렇겠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테스론은 서신을 받았다.

'기사라면 이런 굴욕을 씻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저 치욕적인 불명예를 씻기 위해 유서스는 레펜하르트와 재대결해 그를 꿇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현재 유서스가 가진 힘, 마갑 엘드라드는 빠르게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신 한계도 명확했다. 엘드라드의 힘을 한계까지 구사하고도 패한 유서스에게 더 이상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방법 따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유서스에게 테스론이 보낸 서신은 간단했다.

-그자를 이기고 싶다면 나를 따르라.

서신을 펼치자, 단정한 글씨체로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따르겠소.

필레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시킨 대로 여기 위치 알려 줬어. 그랬더니 신변 정리를 하고,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했어."

"응, 수고했어, 고마워."

"으, 으응."

칭찬을 받자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두 눈 가득 담긴 애정의 빛이 필레나가 테스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 준다.

테스론은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필레나....'

그의 영혼은 결코 젊지 않다. 이 젊은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쯤 못 알아볼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테스론은 자신이 그 사랑에 응답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이 육체, 레펜하르트지 결코 시간을 거슬러 와 육체를 차지한 테스론이 아니다... 같은 로맨틱한 이유는 물론 아니었다.

비록 요즘 들어 머리가 꽤나 좋아진 테스론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였다. 지상 최강, 최고, 최악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무문의 정식 후계자인 것이다. 그런 그가 저런 달달한 생각 따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있나?

테스론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신의 뜨거운 근육으로 꾹 눌러 주고 훌륭한 씨앗을 뿌려 튼튼한 자손을 낳는 영광을 주는 행위!'인 것이다. 결혼? 그런 보편적인 개념 따위 안 키운다. 왜 자신의 훌륭한 씨앗을 보다 많은 여인들에게 펼치지 않고 한 여자에게만 허용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참 여자들이 보면 기가 차 상대도 안 할 사상 같지만, 전생의 테스론은 저따위 사고방식으로도 여자 꽤나 후리고 다닐 수 있었다. 의외로 세상에는 두꺼운 가슴 근육과 선명한 식스 팩만 있으면 대가리 속 개념 유무 따위는 신경 안 쓰는 여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 만큼, 평소의 테스론이라면 진작 필레나를 안았겠지만....

'미안하구나, 필레나. 내 본연의 육체라면 거리낄 것 없이 네게 훌륭한 씨를 뿌려 주었겠지만 이 빈약한 육체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너에 대한 모독이겠지.'

그렇다. 지금 테스론은 진지하게 필레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뭐랄까, 마초에게도 마초 나름대로의 양심이란 것이 있달까? 그야말로 여심이랑은 담 쌓은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세상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 정도 되니까 마초라고 불리는 법이다.

하여튼 속마음이야 어떻건 덕분에 테스론의 겉 태도만큼은 꽤나 신사적이었다.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다 말고 필레나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테스론이 말하던 조건이랑 엇비슷한 사람이 하나 있었어."

방금 보고받은 일 말고도 테스론은 필레나에게 따로 일을 시킨 것이 있었다. 현 시점에서 레펜하르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나름대로 세력과 무력이 있어 동료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비록 '강자 예비군'과 이런저런 친교를 쌓기는 했지만 그들을 동료 삼아 레펜하르트를 죽이려 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던 것이다. 미래에 마왕이 될 자이니 미리 죽이자고 하면 미친놈 취급 받을 것이 뻔하고....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응? 누구지?"

"스테반 폰 알티온. 바실리 왕국 알티온 백작가의 차남이야."

"들어 본 적 없는 놈이군."

테스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기억하는 미래의 강자들 중 스테반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즉, 오러도 각성 못하는 쓰레기(?)라는 의미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마왕을 상대할 이 중에서는 쓸 만한 놈이 전혀 없으니....

'쓸 만하지 않다면, 쓸 만하게 만들면 되는 거지.'

결심을 내린 테스론이 물었다.

"그 스테반이란 친구는 지금 어디 있지?"

☆ ☆ ☆

가혹한 태양이 끝없이 대지를 달구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와 바위가 한낮의 열기로 대기마저 끓어 올려 한껏 일렁인다. 사방을 모두 돌아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열사의 대지뿐. 그 장엄하기까지 한 사막 가운데 유일한 그늘이 하나 있었다.

오랜 세월 풍화 속에서 기괴한 형태가 된 커다란 바위, 그 어둑한 그늘에서 갑자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연기가 피어오르며 암석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이어 사람의 그림자가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왔다. 단단한 육체를 지닌 청년과 날씬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다.

여인이 주변을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통곡의 땅이군요...."

청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난 척을 해 댔다.

"내가 금방 올 거라고 했잖아?"

시리스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물과 식량을 챙겨 그랜드 포지 서쪽에 위치한 알 포트의 신전으로 향했다. 반쯤 허물어진 그 신전 폐허에서 시리스가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긴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하지 홈 지고르 후토르바티아, 나는 계약된 자, 각인을 부여해 권리 얻은 자이니 자격 있는 자의 이름을 받아 그 흐름을 제어하노라...."

굉장히 긴 주문이었다. 얼마나 길었는지 시리스가 슬슬 지루함을 느낄 때,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복잡한 수인을 맺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내 앞에 그 공허를 열지어다! 알사스 다이만 포털 바이탈리티!"

갑작스럽게 생겨난 빛의 소용돌이, 시리스가 멍한 얼굴을 하는 사이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바로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 차렸을 때 시리스는 이미 그랜드 포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거대한 검은 석실, 바로 유적 다이만이었다.

시리스는 이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챘다. 그랜드 포지로 향했을 때처럼, 지금 레펜하르트는 은의 시대 유적을 이용해 역으로 이곳 다이만 던전에 돌아온 것이다. 시리스가 레펜하르트를 돌아보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 쌍방 통행이 가능한 것이었나요?"

"전부는 아니고. 몇몇은 포털을 활성화시키면 가능해."

태연하게 대꾸하며 레펜하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기둥에 쓰인 고대어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반색을 하며 시리스에게 손짓을 했다.

"찾았다, 티다엔 다이만 포털."

원래 이곳 다이만 던전은 은의 시대, 일종의 정거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대륙 곳곳에 마력의 포털을 설치한 뒤, 공간을 뛰어넘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은의 시대 특유의 교통수단인 것이다. 대부분의 시스템이 망가져 있었지만 몇몇 포털은 아직 비활성화된 상태로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구했지만 결국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포털은 일곱 개밖에 없었지.'

과거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그리운 얼굴로 티다엔이라 적힌 기둥을 어루만졌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시키는 이 유적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이종족들을 안타레스 제국으로 옮길 수 있었던가?

반대편 도착지에 위치한 포털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기에, 살아남은 포털들은 전부 인간의 손이 채 닿지 않은 오지로 향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노예 신세를 피해 숨어 사는 이종족들 대부분이 그런 오지에서 거하고 있었으니, 그중 단하임 일족이 숨어 살던 스펠라트 사막행 포털이 건재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가자, 시리스."

"네, 네에...."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는 시리스를 대동한 채, 레펜하르트는 이번엔 티다엔 다이만 포털을 활성화시켰다. 그렇게 포털을 통과하니 나온 곳이 바로 반쯤 허물어진 은의 시대 유적의 지하, 당연히 각종 마물이 들끓는 곳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번에도 별거 아니라는 듯 곧바로 샛길을 작동시켰다. 이내 마물이니 언데드니 하나도 없는 비밀 통로가 보란 듯이 입구를 드러냈고, 덕분에 시리스는 은의 시대 유적 한복판에 떨어졌음에도 전투 한번 안 하고 안락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말문을 잃은 얼굴로 시리스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30여 분 전까지 혹독한 북풍이 불어 닥치는 한겨울의 산맥 속에서 거하고 있었거늘, 순식간에 계절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그리고 그 위로 지독하게 내리쪼이는 열기. 후끈하기까지 한 대기의 내음.

틀림없었다. 그녀의 고향, 통곡의 땅, 스펠라트 사막이었다.

시리스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은의 시대 유적을 활성화시킬 정도면 엄청난 고위 마법사나 가능하다던데...."

별거 아니란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겸양을 떨었다.

"포털을 활성화시키는 마법은 그렇게 고위 마법이 아니야. 그냥 헝클어진 마나 기류를 제 순서에 맞게 재배치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걸? 배치 방식만 알고 있다면 6서클 마법 정도로도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여전히 시리스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쇠가 있고, 돌릴 힘이 있다면 누구나 문을 열 수 있겠지. 하지만 열쇠를 직접 제작하려면 전문적 기술을 지닌 열쇠 장수여야 하지 않겠는가?

노예 경매장에서 슬레이어로 교육을 받으며 시리스도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쯤은 배웠다. 포털을 여는 것과, 포털을 여는 술식을 알아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6서클 종사자가 열 수 있을 정도의 포털이라면, 그 활성화 술식을 연구해 알아내는 데 최소 8서클 이상의 대마도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도 스승이란 분이 가르쳐 주신 건 아니겠죠?"

권왕 제라드가 마법에도 정통했다는 소문 따윈 들은 적이 없다. 그녀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스승님 친구 중에 마법사도 있었거든. 안 그러면 내가 어디서 마법을 배웠겠어?"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수상한데에....'

권왕씩이나 되는 제라드라면 친구쯤 되는 마법사는 당연히 대마법사일 것이다. 그러니 레펜하르트가 그 친구란 작자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것도 꽤나 그럴듯하다.

그래, 딱히 꼬집을 구석은 없다. 앞뒤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은 기분이 드냐고?'

시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납득을 하자니 자꾸 여자의 감이 뭔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고....

"알았어요!"

야멸차게 대꾸하며 시리스는 바위 그늘 밖으로 나섰다. 뜨거운 햇살이 매끄러운 갈색 피부 위로 강렬하게 쏘아진다. 하지만 시리스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혹독한, 하지만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햇살이었다.

성큼성큼 앞서 가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쟤 또 왜 삐졌지?'

아, 전생이나 현생이나 여자들 마음은 알 수가 없구나! 이번에 마법의 힘을 모두 되찾으면 여심을 '해독'해 주는 10서클 주문이라도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

야심찬(?) 야망을 품은 채 레펜하르트도 고개를 저은 뒤 시리스의 뒤를 따랐다.

2

모래를 뚫고 나오며 2미터가 넘는 거체가 이빨을 들이댄다.

"카아아아!"

싯누런 비늘로 온몸이 뒤덮인, 마치 악어를 연상케 하는 거구의 도마뱀, 샌드리저드였다. 바위도 부수는 강렬한 턱 힘에 소나 말쯤은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꼬리 힘을 지니고 있어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점심일 뿐이죠."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덤벼 오는 샌드리저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꼬리를 대뜸 손을 뻗더니 턱 하고 잡아 버렸다.

"꾸잉?"

맨손의 인간이 자신의 꼬리치기를 그냥 잡아 버리다니? 이 듣도 보도 못한 사태에 샌드위저드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손을 들었다. 신장 2미터의 샌드리저드지만, 레펜하르트의 키도 무려 192센티미터다. 손을 올리니 샌드리저드가 허공에 대롱대롱 뜬다. 이 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작태에 기가 막힌 샌드리저드가 아가리를 벌리며 막 독액을 뿜어내려던 찰나.

퍼억!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샌드리저드를 바닥에 내리쳤다. 바닥이 바위가 아니라 모래라 그런지 한 번 내리친 정도로는 딱히 죽질 않는다. 뭐, 그래 봤자다. 레펜하르트는 마치 무슨 빨래하듯 샌드리저드를 연신 바닥에 퍽퍽 내리쳤다. 샌드리저드도 살아 보려고 어떻게든 요동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뭔 놈의 인간이 독액도 안 먹히고 이빨도 안 들어가고 그러는 와중에 점점 의식은 흐릿흐릿....

"꾸에...."

조촐한 비명을 끝으로 샌드리저드는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시리스, 밥 먹고 가자!"

보통 여인이었다면 이 무식한 광경에서 기가 질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스는 이 사막이 고향인 처자였다. 아까부터 '우와, 샌드리저드 진짜 오랜만에 먹어 보네?'라는 기대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랄까, 엘프가 지을 표정은 아닌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제가 껍질 벗길게요."

"응, 난 불 피울게."

사막 한 복판에서 때 아닌 캠핑이 이루어졌다. 피크닉 하기에는 지나치게 따사로운 날씨가 아닐까 싶지만, 두 사람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배리어 오브 다크!"

마법으로 어둠의 장막을 머리 위로 치니 이내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진다.

"프레임 필드!"

바닥에 작게 프레임 필드를 깔아 놓으니 모래 위에서도 바로 불을 피울 수 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구사하는 동안 시리스도 노련한 솜씨로 샌드리저드의 가죽을 홀랑 벗기고 피를 뽑았다. 뽑은 피는 버리지 않고 벗겨 놓은 가죽을 용기 삼아 따로 모아 둔다. 사막에서 수분이란 귀중한 법,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시리스가 다듬은 샌드리저드를 굽기 좋게 토막 치는 동안, 레펜하르트가 피를 담은 가죽 용기에 재차 마법을 걸었다.

"아쿠아 드레인."

수분 추출 마법을 샌드리저드의 핏물에 거니 이내 피 떡과 깨끗한 물로 나뉜다. 이걸로 사막 여행의 가장 두려운 요소인 수분도 확보한 셈이다. 사실 마법은 전투보다는 이런 실용적인 부분에서 더욱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 이렇게 편한 걸 이제까지 못 썼으니....'

척척 돌아가 주는 자신의 술식 연산력에 스스로 감동하며 레펜하르트는 익어 가는 샌드리저드 고기를 바라보았다. 자글자글, 기름이 떨어지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리스도 아까에 비해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온 덕인 듯했다.

심지어, 레펜하르트에게 고기를 건네기까지 한다.

"레펜하르트 님, 먹어 볼래요? 잘 익었는지...."

"응! 응!"

맛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손수 먹여 주는 고기 맛이 나쁠 리가 있나! 넙죽넙죽 받아먹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잠시 빙그레 웃었다. 뭐, 금방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에 비해 훨씬 표정이 풀려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즐겁게 점심 식사를 즐겼다. 고기를 씹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시리스, 고향이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사실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는 없다. 시리스가 잠시 주변 지형을 살피고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엘프답게 그녀는 인간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대기에 깃든 정령을 느껴 현재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 위치를 파악하더니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는 쪽으로 반나절 정도만 걸으면 될 거예요."

무려 50년 만에 돌아가 보는 고향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기대의 빛이 두 눈에 가득했다. 하지만 시리스는 이내 깨달았다. 땅은 그대로라도, 사람은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살아남은 이들은 없겠지만...."

풀 죽은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레펜하르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세상일 모르는 거잖아, 안 그래?"

"...?"

왠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 시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반나절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단하임 일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시리스가 말문을 잃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고 있는 사구砂丘 아래 검불을 얼키설키 얽어 만든 원시적인 오두막들, 그리고 그 옆에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는 오아시스 하나.

인간들의 마을에 비하면 허름하다 못해 무슨 짐승 우리처럼 보인다. 이것이 아득한 옛 시절에는 위대한 정령의 후예라고까지 불리던 고귀한 하이엘프들의 현주소인 것이다.

시리스는 그리운 눈으로 오두막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검불 지붕 아래 모래 먼지가 가득 쌓인 목재 식기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스러질 것만 같다.

시리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고 그것들을 매만졌다. 추억 속의 목소리들이 환청이 되어 들려왔다.

-우리의 딸, .... 너도 자라서 우리 일족을 지켜야 한단다.

-잘하는구나. 검은 그렇게 휘둘러야 한단다. ....

-이것 봐라, ...! 나도 이제 아버지를 도울 수 있어!

수많은 엘프들의 목소리다. 그녀의 모든 아버지들, 어머니들, 함께 뛰놀던 어린 엘프들의 목소리가 기억을 따라 귓가 가득 울려 퍼진다. 한 번 봇물이 터진 기억의 댐이 끝없이 추억을 내뱉는다.

시리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처마 아래로 불어오며 텁텁한 모래를 옮기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 없는데....'

밀어닥친 추억의 홍수가 그녀의 심장을 가혹하게 할퀴며 수마의 흔적을 남긴다. 가슴이 아프다. 수백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통증을 호소한다.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차라리 오지 않았다면,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차라리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 아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추억은 잔혹한 파랑이 되어 끝없이 그녀의 귓가에서 몰아칠 뿐이다.

-이걸 봐, ...!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한 가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같이 가자, ...! 오늘은 사막 전갈을 잡으러 갈 거야!

부모의 얼굴, 친구의 목소리, 그리운 형제자매들의 숨결과 내음마저 뚜렷하게 떠오르는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를 부르던 그 목소리.

-...!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을 부르던 이름, 그녀가 모두로부터 받아 모두로부터 불리었던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쾅!

시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내리쳤다. 쥐고 있던 나무 그릇이 박살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화를 내도 원하는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시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50년 전에 멈췄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이곳을 찾았을 때, 건재하던 단하임 일족의 모습을.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상들의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간직하고 있던 그 순혈의 하이엘프들을 레펜하르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체 왜 아무도 없는 거야?'

당혹해하는 레펜하르트의 눈에, 실의에 빠진 시리스가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이는 그가 기대한 광경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일족을 만나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싶어 이곳까지 데려왔다. 결코 저렇게 슬프게 하고 싶어 저지른 짓이 아니다.

"설마...?"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자신이 이 시대로 회귀한 탓에 원래는 생존하고 있을 단하임 일족이 멸망해 버린 것일까?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인과율이란 아주 작은 일그러짐만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그렇게까지 일그러질 짓은 안 한 것 같은데, 나....'

초조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눈을 빛냈다. 이 폐허가 된 마을을 보고 있자니 뭔가 어색했다.

'어색하다? 뭐가? 뭐가 어색하다는 거지?'

그는 고민했고 이내 해답을 찾았다.

레펜하르트가 화색이 되어 시리스를 불렀다.

"시리스!"

"...네?"

시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돌리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남은 기운 없어 죽겠는데 뭐 그리 신 났냐며 힐난하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마을, 뭔가 이상하지 않아?"

"...폐허가 된 마을 처음 보시나요?"

시리스가 퉁명스레 대꾸한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마을, 뭔가 어색하지 않냐고."

"뭐가요?"

"시리스, 네 말에 의하면 단하임 일족이 멸망한 게 50년 전이랬잖아?"

굳이 아픈 추억을 들추어내는 레펜하르트의 무신경함에 막 시리스가 화를 내려던 찰나였다.

"이 마을이 그럼 50년 동안이나 이 상태로 유지되었다는 소리야?"

"...아?"

그제야 시리스도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뀔 시간이다. 게다가 이곳은 혹독하기로 이름 높은 스펠라트 사막이었다. 웅장한 거암도 50년쯤 지나면 풍화되어 귀여운(?) 괴석이 되어 있을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고작해야 검불로 만든 이 마을이 50년 동안 폐허인 상태를 유지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녕 단하임 일족이 50년 전 멸망했다면 이 자리에는 모래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린 시리스가 허겁지겁 바닥에 손을 짚었다. 잘 살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확실했다! 이 마을이 텅 비게 된 것은 아무리 잘 쳐줘 봐야 2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패닉에 빠져 시리스가 중얼거렸다. 혹시 단하임 일족이 멸망한 뒤, 다른 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오두막의 형태나 식기 모습 등이 지나치게 단하임 일족 특유의 양식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얼마 전까지 이곳에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분명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가족이....

"사실은 살아 있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시리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순간 희미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세요....

"왜 그래,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그녀의 태도에 의아해하며 묻는다.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의 청력은 엘프인 시리스보다도 오히려 위다. 그런 그가 듣지 못한 소리를 시리스가 들었다?

고개를 저으며 시리스가 역시 환청이었나 보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와주세요....

다시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아득히 먼 곳에서 울리는 듯한, 하지만 더더욱 확실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래, 마치 귀가 아닌 영혼에 울리는 듯한 소리....

-제발 도와주세요....

동족의 소리였다.

시리스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리에 꽂혀 있던 니힐렌이 미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녀가 검을 뽑았다. 레펜하르트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리스? 갑자기 왜 검을...?"

시리스가 두 다리로 모래를 박찼다. 단련할 대로 단련한 탄력 있는 두 다리가 가벼운 엘프의 육체를 힘차게 밀어붙인다. 그렇게 시리스는 마을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나더니 정신없이 사막 저편을 향해 뛰어간다.

"...시리스?"

☆ ☆ ☆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꽂히는 사막, 그 위로 마흔 명 정도의 무장한 이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하나같이 험상궂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상처 가득한 얼굴에 제멋대로 자란 수염, 그야말로 얼굴에 '난 악당이오.'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듯한 인상의 소유자들뿐이었다. 남자 나이 마흔이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더니, 책임을 지나치게 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양심 없이 산 티가 팍팍 나는 이들이었다.

그 무리의 뒤에서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세 명의 엘프가 밧줄에 묶인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리따운 엘프 여인과 아직 어린아이인 소년, 소녀였다. 헐벗다 못해 누더기에 가까운 차림, 다들 말라붙은 입술로 간신히 호흡하며 절망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간에 선 사내 한 명이 품에서 가죽 푸대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에이, 씨발. 야! 빨랑빨랑 안 움직여!"

어린 엘프 소녀가 그 기세에 넘어지며 신음을 흘린다.

"아으으...."

가녀린, 채 성숙하지 않은 육신이 뜨겁게 달구어진 사막의 모래 위를 뒹군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모습에서 동정심 따위를 떠올리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품에서 채찍을 꺼내 휘두를 준비를 한다.

엘프 여인이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 네티나.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

"네... 샤일렌 언니."

고통 속에서도 소녀는 울지 않았다. 독기를 품은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다시 몸을 일으킨다. 막 채찍을 휘두르려던 사내가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채찍을 거두었다. 그리고 툴툴거렸다.

"뭐라는 거야, 이것들?"

엘프어로 나눈 대화이기에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저 '야생동물'들이 뭐라고 울건 인간인 그들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다시금 엘프들을 끌고 사막을 건너며 중간에서 걷던 사내가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 고생 하고도 고작 이거밖에 못 건지다니."

곁에 있던 대머리 사내가 달래듯 말을 건넸다.

"브라이트 형님, 그래도 이거라도 갖다 팔면 돈 좀 되지 않을까요?"

"병신아! 여기까지 들어온 경비를 생각하면 적자란 말이다!"

브라이트는 신경질을 내며 사내를 구박했다. 그리고 다시금 물을 마신 뒤 혀를 차 대기 시작했다.

"씨발, 좋은 자리 다 놓치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는데... 이것도 영 돈 안 되고. 인생 참 살기 힘들다."

브라이트는 원래 바실리 왕국 동부, 라키드 산맥 근처에 자리한 크롬 시의 투기장 소속 용병이었다. 투기장의 일은 사실 별로 할 것이 없었다. 그냥 관객들 중 난리 피우는 일을 제압하거나 어쩌다, 진짜 어쩌다 가끔 도망치는 노예들을 잡아 오는 것이 임무의 전부였다. 한가하고 봉급 많은,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도 몇 년 전에 끝이 났다. 임무 하나를 실패하며 투기장에서 가차 없이 해고되었던 것이다.

사실, 아무리 용병이라 해도 임무 한두 번 실패했다 해서 그리 쉽게 해고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임무가 정말 별것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냥 투기장에서 도망친 오크 새끼 하나를 붙잡아 오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브라이트 본인조차도 귀찮기는 할지언정 어려운 임무는 아니라 확신했으니,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 산골 촌놈 만난 다음부터 모든 일이 꼬였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브라이트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오크 노예를 쫓다가 산에서 만난 그 덩치 좋은 촌놈, 그놈 때문에 오크 노예를 놓치고 반병신도 되었다. 정말이지, 그 상태로 크롬 시로 돌아간 자신들의 정신력에 스스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무슨 오지 탐험하는 기분으로 하산했었다.

얼마나 오지게 두들겨 맞았는지, 브라이트와 그의 수하들은 그 이후 꼬박 반년을 누워 지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이미 크롬 시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오크 노예를 쫓다가 산속의 기인을 만나 그 꼴이 되었다는 브라이트의 말을 믿어 주질 않았다. 당연히 오크 노예를 놓치고 말을 지어낸다고 믿었다.

심지어, 무식한 놈답게 지어내도 참 허술하게도 거짓말을 지어냈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브라이트가 솔직하게 '그놈, 근육이 얼마나 단단하던지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 버린 덕분이었다. 세상에 칼 안 들어가는 몸뚱이라면 최소 오러 유저란 소리인데, 오러 유저가 뭐가 아쉬워서 오크 노예를 도망치게 해 준단 말인가?

결국 일거리 하나 못 얻게 된 브라이트 일행은 쫓기듯 다른 나라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왠지 일도 계속 꼬여 의뢰주를 잃거나 일을 실패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결국 노예 사냥꾼이 되어 이 지옥 같은 사막까지 오는 처지가 된 브라이트 일행이었다.

"아, 더럽게 덥네. 진짜...."

연거푸 손바람을 부치며 브라이트는 하늘의 태양에 원망의 눈길을 열심히 보냈다. 그러더니 앞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시오, 클론토! 어떻게 좀 시원해지는 마법 같은 거 없습니까?"

낙타를 타고 가던 중년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없어! 자네는 마법이 무슨 만능인 줄 아나!"

대뜸 반말로 대답한 뒤 마법사, 클론토는 다시 로브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낙타를 몰았다. 브라이트는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이런 사막까지 와서 저런 로브 뒤집어쓰고 다니는 클론토를 보며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여기서도 그 차림을 고집 하냐?'라며 비웃었는데, 막상 사막에 들어서고 나니 오히려 저게 더 시원한 차림이다. 그래도 저 로브는 이 지옥 같은 햇살은 차단해 주는 것이다.

"에이, 있는 돈 다 털어서 저 양반까지 고용했는데...."

클론토를 보니 또다시 열불이 차오른다. 브라이트는 인상을 구겼다.

이곳, 스펠라트 사막에 야생화된 엘프 부락이 있단 정보를 듣고 처음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평범한 엘프 암컷 스무 마리만 잡아도 인생 역전이었다. 그 금액이라면 번듯한 곳에 주점이라도 하나 차리고 과부 하나 꿰어 차서 엉덩이 두들기며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전 재산을 다 털어 이번 사냥을 준비했다. 장비와 식량을 사고 모자란 병력을 채우기 위해 용병도 고용하고, 심지어 없는 돈에 마법사까지 불렀다. 무려 6서클에 종사하는 고위 마법사라 고용비도 엄청나게 비쌌다. 그래서 부하들 쌈짓돈까지 박박 긁어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걸고 이곳으로 왔다.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는 듯싶었다. 마법사 클론토는 이 넓은 사막 속에서 엘프 부락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야음을 틈타 엘프 부락을 습격하는 데도 성공했다. 엘프들의 숫자는 끽해야 이백여 마리 정도, 전투로 일생을 보낸 용병 마흔 명이면 충분히 짓밟을 수 있는 병력이었다. 심지어 이쪽에는 마법사도 있지 않은가? 그때만 해도 금은보화가 눈앞 가득 아른거렸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놈의 엘프들이, 한밤중에 습격했는데도 당황하긴커녕 놀랄 정도로 빠르게 대처를 해 갔던 것이다.

수컷들은 칼을 들고 그들 앞을 막고 암컷들은 뒤에서 함정을 작동시키고 화살을 쏘더니, 어느새 노인과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피해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 평소부터 대피 훈련에 이골이 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대체 야생화된 놈들이 뭐하러 저런 훈련을 해 왔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습격을 받았었나?

하여튼, 덕분에 브라이트가 얻은 것은 엘프 몇 명의 시체와 채 도망가지 못한 아이 둘, 그리고 그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남은 엘프 여인 하나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도망쳤다. 심지어는 클론토의 마법으로도 탐지가 되지 않았다.

"어휴,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만날 일이 꼬이는 거냐!"

누구는 조상이 물려준 엘프 경매장 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호의호식하는데, 누구는 사막을 이토록 헤집고 다녀도 대박 한번 안 터진다. 실로 원망스러운 하늘이었다.

툴툴대는 브라이트를 견디다 못한 수하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달랬다.

"그래도 한 푼도 못 건진 건 아니잖습니까? 세 마리나 잡았는데...."

"어린 것들은 거의 돈 안 된단 말이다!"

엘프는 워낙 성장 기간이 길어, 어린놈들은 경매장에 갖다 팔아 봐야 몇 푼 못 받기 마련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고작해야 열한두 살 정도로만 보이는 저 엘프 아이들도 제값 받을 때까지 키우는 데 30년은 족히 걸린다. 그만큼 노예 경매장에서도 손이 많이 가다 보니 어린 엘프들을 반기는 곳 따윈 없다.

"게다가 한 놈은 수컷이기까지 하지!"

브라이트는 신경질을 냈다. 엘프 수컷은 암컷의 10분의 1 정도 가격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다 자란 야생 엘프 수컷의 경우엔 워낙 자살률이 높아 아예 사 주지도 않았다. 그나마 어린놈은 씨 내리는 용으로 싼값에라도 사 주는 이들이 있어 이렇게 끌고 가는 것이었다.

"아, 저거 대체 얼마에 팔리려나?"

브라이트는 뒤따르는 엘프 여인을 보며 고민했다. 이대로 저걸 팔아 봤자 대적자다. 하지만 저 엘프 여인은 제법 칼을 쓸 줄 알았다. 어린 것들을 지키겠답시고 조악한 검을 휘두를 때 유심히 봐 뒀다. 그냥 엘프 노예라면 몇 푼 못 받겠지만, 예비 슬레이어로 판다면 그럭저럭 본전치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며 브라이트가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뒤따라 걷고 있는 용병 하나가 사막 저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응?"

뭔가를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용병이 브라이트를 불렀다.

"브라이트 대장! 웬 엘프 암컷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는데요?"

엘프! 게다가 암컷이란 말인가! 브라이트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오오! 다 자란 암컷이잖아!"

사막 저편에서 백금발의 엘프 소녀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성숙한 여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사춘기는 지난 것이 충분히 제값 받을 수준으로 보였다. 왜 저렇게 달려오는지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제 딴에는 동족들 구하겠답시고 덤벼드는 모양이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 절대적인 무력 차이를 보고도 혼자서 덤벼든단 말인가? 역시 엘프들은 어리석은 야생 짐승이다.

검을 뽑아들며 브라이트가 신 난 목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금화 주머니가 달려온다! 챙길 준비 하자!"

3

두 다리로 사막을 박찬다. 두 눈에 모래 저편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갈색 피부에 백금발을 가진, 마치 소나 말처럼 묶인 채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가고 있는 그녀의 일족들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틀림없었다. 수백 년 동안 이 오지에서 살아가던 단하임 일족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멸망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저들을 데리고 가는 인간들의 모습도 똑똑히 보였다. 시리스의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으으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노예로 살아가며 항시 느꼈던, 얼음같이 차갑게 가슴속에 스며들던 소리 없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저 외면하고 무시하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 슬프고 힘없는 분노가 아니었다.

전신의 열기가 사막의 열풍을 누른다.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뜨겁디뜨거운 분노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끓어오른 분노가 불길이 되어 전신을 태우는 듯하다. 시리스가 기합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한편 브라이트 일행은 당혹해하는 표정으로 달려오는 시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돈 생겼다며 좋아했다. 이쪽에서 쫓지 않아도 알아서 덤벼주니, 발품 팔 일 없겠다며 이 행운을 순진하게 기뻐했다. 그런데 어째 점점 가까워지는 저 엘프 소녀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물론 브라이트 일행이 시리스의 기세를 느끼고 경각심을 느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감 좋은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레펜하르트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았으리라. 그들이 의아해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수하 중 한 명이 멀뚱멀뚱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 저년 옷이 어째...."

이곳의 야생 엘프들의 옷차림은 쉽게 말해서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선인장 섬유와 검불을 엮어 만든, 그저 푸대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의 누더기가 이 야생 엘프들의 주된 의복이었다. 그런데 저 엘프의 옷차림은 마치 이름난 귀족가의 여검사나 입을 법한 고급품이 아닌가?

게다가 들고 있는 시미터도 날이 바짝 선 것이 보통 검이 아니어 보였다. 야생 엘프들이 주로 쓰는, 석검이나 청동검, 나무를 갈아 만든 목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품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시리스가 브라이트 일행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용병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뭐, 그래 봤자 엘프 암컷이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용병이 도끼를 들고 위협하듯 크게 올렸다. 자, 이대로 내려치면 넌 뒈져. 무섭지? 무섭지?

그 순간 용병의 전신에 푸른 섬광이 세 번 번뜩였다.

"...어?"

용병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가득 담긴다. 동시에 그의 몸이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접근한 시리스가 한 호흡에 네 번의 칼질을 날려 그를 난도질한 것이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병 사내의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어서 선혈이 분수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얼굴에 뜨끈한 무엇인가가 튀어 흘러내린다. 브라이트가 멍한 음성을 흘렸다.

"...어라?"

시리스가 재차 몸을 날렸다. 낮은 자세로 뱀처럼 좌우 스텝을 밟으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른 용병 하나에게 덤벼든다. 용병이 그제야 기겁하며 검을 들어 공격을 가로막는 순간이었다.

"으에에엑!"

타탕!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용병의 검이 부서져 버렸다. 안목 없는 이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지금 시리스가 든 시미터는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명장들이 그녀의 체격에 맞게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명품 중 명품이었다. 미스릴과 강철로 주조하고 거기에 마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레펜하르트가 시간 날 때마다 보조 마법도 걸어 주었으니, 일개 인간 대장장이가 대량 생산용으로 벼른 검과 비교가 될 리가 없었다.

쩌억!

용병의 검을 부순 시리스의 시미터가 그대로 상대의 가슴을 갈랐다. 심지어 이 용병은 사막이라 덥다면서 제대로 갑주를 갖춰 입지도 않고 있었다. 부담 없이 뼈와 살을 가를 수 있었다.

파아아악!

또다시 피분수가 사방으로 퍼졌다. 황금빛 모래 위로 붉은 바다가 가득 펼쳐진다. 브라이트는 눈을 부릅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보통 엘프가 아니다!

"씨, 씨발! 다들 저년 잡아!"

브라이트가 악을 쓰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제야 용병들도 정신을 차리고 진지한 얼굴로 시리스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 ☆ ☆

백금발이 사막의 태양 아래 화려하게 반짝인다. 머리칼을 휘날리며 시리스는 몸을 틀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회전을 실은 시미터가 사방으로 칼날을 흩뿌린다. 좌우에서 덤벼들던 용병들의 손목이 깊게 베이며 새하얀 뼈를 드러낸다.

"으아악!"

"아악!"

비명을 지르며 두 용병이 손목을 붙잡고 뒤로 물러선다. 허공에서 시리스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핏물을 떨쳐 냈다. 방금 베어 낸 인간의 피와 기름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칼날을 따라 흩뿌려졌다. 마치 머위 잎사귀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위해 걸어 준 수분 및 유분 차단 마법 덕분이었다. 마법검에는 거의 필수로 부여하는 샤프니스 마법은 아직 인챈트할 정도 수준이 되지 못했기에 못 걸었지만, 이것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검의 예기를 늦추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인간의 피와 기름이다. 시리스의 시미터는 아무리 사람을 많이 베어도 인간의 기름기로 인해 검이 무뎌지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마치 죽음의 여신처럼 피를 날리는 그녀의 모습에 용병 하나가 기가 차 소리쳤다.

"이런 쌍! 엘프 주제에 뭐가 이리 사나워!"

이 상황에서까지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여전히 섬뜩한 예리함을 발하는 시미터를 머리 위로 곧게 세운 채 시리스가 착지하며 내려 베기를 날렸다. 도끼를 들어 용병 하나가 열심히 검격을 막았지만, 기세가 실린 그녀의 시미터는 도끼 자루를 통째로 베어 버리며 상대의 머리통을 두 조각 내 버렸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회색빛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동료를 잃은 브라이트 일행이 광분하며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시리스의 움직임도 더욱 빨라졌다. 비록 실란의 가호는 없었지만, 몇십 년 동안 검을 수련한 그녀는 이미 한 마리 맹수나 다름없었다. 마치 흑표범을 연상케 하는 탄력 있는 움직임으로 용병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사방으로 피를 뿌린다. 용병들의 비명이 연이어졌다.

"커헉!"

"으아악!"

또다시 네 명의 동료들이 사지 하나씩을 잃고 모래 위를 뒹군다. 남은 용병들의 표정에 더 이상 경시의 빛이 사라졌다. 더 이상 상대를 한낱 엘프 암컷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용병들이 진지해지자 시리스의 움직임도 제한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밑바닥을 구르는 이들이라지만 명색이 용병들, 평생을 칼 밥 먹으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결코 일개 농민 봉기처럼 수만 믿고 덤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압!"

용병 셋이 호흡을 맞춰 기합을 터트리며 검을 찌른다. 날카로운 찌르기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든다. 순간 피할 곳이 떠오르지 않는 공격, 하지만 시리스는 오히려 콧방귀를 켰다.

"흥!"

예전 같았다면 이 상황에서 팔뚝 하나쯤은 내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도 레펜하르트를 따라다니며 상당한 경험을 쌓은 후였다. 오러 유저의 전투를 지겹도록 보며 안목도 높였다. 이 정도쯤은 더 이상 위기 상황도 아니다!

그 찰나의 순간, 시리스는 찔러 오는 세 개의 칼날의 속도를 바로 파악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칼날을 향해 몸을 던졌다.

시미터를 들어 손잡이로 상대의 검 끝을 가로막는다.

텅!

손잡이 끝과 검 끝이 맞부딪치며 튕겨 나간다. 그 기세로 몸을 틀며 등을 향하던 찌르기 일격을 시미터의 검신으로 막는다. 비교적 면적이 넓은 시미터의 검신은 타이밍만 잘 맞추면 훌륭한 방패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등 쪽의 공격을 가로막자마자 칼날을 미끄러트리며 나머지 한 놈의 목을 거꾸로 베어 간다.

서걱!

섬뜩한 음향과 함께 마지막 찌르기를 날린 용병의 목이 뎅겅 잘렸다. 이 모든 것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공격한 용병들도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 못 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물론 시리스에게는 상대가 이해심을 높일 때까지 기다려 줄 이유가 없다.

'찬스!'

기회를 잡은 그녀는 곧바로 시미터를 좌우로 휘둘렀다. 잠깐의 틈을 보인 남은 두 놈도 이내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브라이트가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아,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난 거야!"

그때, 등 뒤에서 중후한 음성이 울렸다.

"자후드 론 켈리파티나. 열기여, 내 손에 임하라. 적을 치는 불길이 되어라! 파이어 볼트!"

이제야 낙타에서 내려온 마법사 클론토가 시리스에게 마법을 쓴 것이었다. 불꽃의 탄환이 허공을 가르며 시리스를 향해 쏘아졌다. 화들짝 놀란 시리스가 뒤로 물러서며 시미터를 옆으로 세웠다. 불꽃의 탄환이 시미터에 부딪쳐 폭발이 일어났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는 연거푸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치명타는 막았지만 폭발의 여파만으로도 전신이 흔들리며 자세가 흐트러진다. 그때 클론토의 주문 영창이 이어졌다.

"세피로 디 크로텔, 대지여, 그 손을 뻗어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을 거두라! 아이언 스틸!"

순간 시리스는 극심한 중량을 느끼며 시미터를 놓쳤다. 클론토가 곧바로 무장 해제 주문을 구사한 것이었다. 빈손이 된 시리스를 보며 브라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이제야 잡았네."

맨손이 된 시리스를 향해 브라이트 일행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갑자기 사막 저편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직이면 죽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브라이트 일행이 그 자리에서 동상처럼 굳었다. 이상했다. 용병으로 살아오며 온갖 욕설이며 협박을 자장가처럼 들어왔던 그들이다. 그런데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 모를 오한이 들며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뭐, 뭐야? 내가 왜 이래?'

무슨 마법도 아닌데 그저 목소리만으로 이런 효과가 날 리가? 스스로의 행동이 스스로 이해가 안 가는 묘한 상황, 브라이트 일행은 무심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굳었다. 소리를 지른 자가 사막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뛴다'라거나 '달린다'라는 인간미 넘치는 묘사가 허락되는 동작이 아니었다. 정말 발 한번 구를 때마다 20~30미터씩 죽죽 달려오는데, 발을 구를 때마다 무슨 마법이라도 터진 것처럼 폭음과 함께 모래 기둥이 높이 솟아오른다.

펑! 펑! 펑!

요란한 소음 속에서 용병 중 누군가가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몬스터인가?"

하지만 브라이트와 그의 원조 부하들, 크롬 시 투기장에서부터 함께했던 이들은 결코 저 친구처럼 느긋하게 중얼거릴 수 없었다. 저기 저 비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덩치 큰 청년을, 그들은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거...."

"에에에?"

"으히히힉!"

저마다 괴음을 내는 가운데, 청년이 단숨에 그들에게 다가와 착지했다. 그리고 오만하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얼씨구? 이거 구면일세?"

☆ ☆ ☆

레펜하르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참 웃기는 우연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머나먼 대륙 서쪽 끝까지 와서 아는 얼굴과 조우하게 될 줄이야.

물론 이 조우가 결코 유쾌하지 않으니 그의 표정이 화기애애할 리 없다.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브라이트를 노려보았다.

"이번엔 여기서 노예 사냥꾼 노릇을 하고 있었나 보지?"

브라이트는 사색이 되어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날의 공포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정말 죽도록 얻어맞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로 얻어맞은 그날의 추억이 뇌를 콕콕 쑤시며 전신을 빳빳하게 굳히고 있었다.

"다, 당신은...."

정말이지,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토록 인생이 불운한 것인지 신을 원망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클론토가 고함을 질렀다.

"뭐 하고 있나, 브라이트? 에너지볼트!"

브라이트 입장에서는 악몽의 재현이겠지만 클론토에게는 그냥 새로운 적의 등장일 뿐이다. 얼마든지 침착하게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강렬한 마법의 에너지가 부메랑처럼 허공을 회전하며 레펜하르트에게 날아갔다.

위이잉!

날아오는 에너지볼트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오른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오러를 끌어 올려 방어할 셈이었다. 그때, 문득 생각이 미친 바가 있었다.

'가만, 이제 굳이 몸으로 때울 필요 없잖아?'

마법의 힘도 꽤나 되찾았는데 여전히 무식하게 손발 놀리면서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들어 올린 오른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레펜하르트가 수인을 맺었다.

"섬광의 방패, 아케인 실드!"

푸른 섬광이 솟구치며 빛의 방어막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감쌌다. 마법을 전문으로 방어하는 3서클 항마 주문, 아케인 실드였다.

퍼어엉!

에너지볼트가 아케인 실드에 명중해 빛을 발하며 소멸했다. 에너지볼트도 그리 높은 서클의 주문은 아니었기에 아케인 실드의 항마력을 뚫을 위력은 없었다. 클론토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뭐야? 마법사였나?"

그것도 상당한 경지로 보였다. 아케인 실드를 시동어만으로 구사하는 걸 보면, 적어도 5서클을 시전할 정도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저 나이에 이 나와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란 말인가?'

긴장한 클론토가 브라이트에게 외쳤다.

"저자를 묶어 두게! 이번에는 제대로 주문을 준비할 테니!"

그제야 브라이트도 정신을 차렸다.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 잠시 굳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자신들의 숫자는 서른 명이 넘는 데다가 고위 마법사도 함께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고작 젊은놈 한 명을 상대하지 못할 전력이 아니다.

검을 뽑아 들며 브라이트가 없는 용기를 쥐어짜 소리쳤다.

"쳐라!"

남은 용병들이 일제히 레펜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상대가 마법사란 걸 안 이상, 한시라도 빨리 접근해 주문 영창을 방해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당할 뿐이다. 다들 경험 많은 용병들이라 이쯤은 숙지하고 있었다.

"타아앗!"

"으랏차차!"

저마다 개성 있는 기합을 내지르며 용병들이 레펜하르트의 사방으로 돌진해 왔다.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주문을 시전할 마력을 모으기 위한 룬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타필 란드 델피로드 케타나...."

물론 그사이 용병들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다들 저 커다란 과녁을 향해 부담 없이 검을 찔러 갔다. 찌르기, 내려치기, 올려 베기, 레펜하르트의 전신에 칼날이 내리 꽂혔다. 일단 마법사는 주문 영창만 방해하면 적이 될 수 없다! 성공이다!

...라고 막 용병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였다.

탱! 탱탱탱!

막 검을 날린 그 순간 무슨 바위에라도 휘두른 것처럼 강력한 반탄력과 함께 검들이 오히려 튕겨 나와 버린 것이다. 개중에는 기세를 못 이겨 손아귀가 찢어진 이들도 있었다. 용병들이 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얼레?"

"으엑?"

"뭐, 뭐야?"

당황한 용병들을 그대로 둔 채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주문 영창을 이었다.

"대지의 힘은 창공에, 창공의 힘은 대지에. 떨어진 두 권능이 맞잡아 힘을 얻노라."

의지를 담은 언령을 통해 끌어모은 마력을 엮어 술식화한다. 계속 주문을 영창하며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천천히 비볐다. 가벼운 정전기가 파직 일었다. 이걸로 주문 시전에 필요한 촉매도 완성되었다.

"주, 죽여!"

"마법을 완성하게 두지 마라!"

용병들이 사색이 되어 연거푸 검을 휘둘러 댔다. 물론 여전히 소용은 없었다. 뭔 놈의 몸뚱이가 전혀 칼이 들어가질 않는 것이다! 그때 먼저 주문을 완성시킨 클론토가 고함을 질렀다.

"...나, 위대한 불꽃을 사역하노라! 파이어 블래스터!"

한 줄기 불길이 사막의 열기를 가르고 레펜하르트에게 쏘아졌다. 용병들이 놀라며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 사이를 뚫고 불꽃의 기둥이 정확히 레펜하르트를 적중했다.

콰아앙!

대폭발이 일어났다. 자욱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용병 중 한 명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주, 죽었나?"

그때였다. 검은 연기 사이로 두꺼운 팔뚝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락부락한 손가락이 기묘한 자세로 꺾여 있고, 그 사이로 푸른 전격이 파직거리며 맴돈다.

진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가라, 천공의 아들이여. 내 적을 쳐라! 체인 라이트닝!"

콰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거대한 전격의 뱀이 연거푸 먹이를 삼킨다. 푸른 뇌전이 사방으로 방전하며 수십 명의 용병들을 연쇄적으로 치며 달렸다. 거대한 번개의 그물이 용병들의 머리 위를 덮친 듯한 광경이었다. 강렬한 전격이 순식간에 스무 명이 넘는 용병들을 후려갈기며 모래 위로 치달렸다. 끔찍한 비명이 아우성쳤다.

"으아아악!"

"크어어억!"

"아아아악!"

아비규환이었다.

4

고기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브라이트는 연신 눈을 껌벅였다.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

그의 발밑에는, 스무 명도 넘는 용병들이 검게 그을린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살아남은 것은 브라이트와 크롬 시에서부터 함께한 원조 부하들뿐이었다. 레펜하르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처 덤비지 못한 그들만이 저 악몽 같은 공격에서 간신히 벗어난 것이다.

등 뒤에서, 몰이해로 가득한 클론토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뭐, 뭔가, 저건? 대체 어떻게 마법을 완성시킨 게야?"

상대가 마법 한 방으로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을 싹 죽여 버렸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고위 마법사의 주문이라면 이 정도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그래서 용병들 모두 필사적으로 주문을 방해하기 위해 덤벼들었다. 공격을 실패하지도 않았다. 열심히 찌르고 후려갈기고 베어 넘겼다. 제대로 모든 공격이 들어갔다. 그런데....

"...저거 왜 칼 맞아도 안 죽어?"

클론토는 그저 눈만 연신 껌벅대고 있었다. 맨몸으로 칼 튕겨 내는 것도 기가 막힌데 저 괴물은 심지어 그의 마법, 파이어 블래스터마저도 맨몸으로 버텨 낸 것이다. 한 방이면 커다란 짐마차라도 단숨에 숯덩이로 만들 수 있는 그 강력한 주문을!

"...."

뜨거운 태양 아래 차가운 침묵이 맴돌았다. 브라이트도 클론토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용병들도 모두 입만 쩍 벌린 채 레펜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지나치게 상식을 초월해 버려 잠시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았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이런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고도 뭐가 불만인지 연신 툴툴거리고 있었다.

"끙, 원래대로라면 싹 다 숯덩이가 되었어야 했는데... 역시 마력 부족이 크네."

게다가 시전 속도도 만족스럽지 않다. 주문 외우면서 칼침을 한 20~30대는 맞은 것 같았다. 전생에서는 체인 라이트닝 정도의 주문이라면 그냥 시동어 한 방으로 간단하게 시전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계속 엘류시온의 목소리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예상했던 수준이긴 하군.'

주먹을 쥐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튼튼한 몸뚱이 믿고 미친 척 질러 본 마법이었다. 자신이 아직 6서클 마법인 체인 라이트닝을 실전에서 쓸 수준이 아니란 것쯤은 레펜하르트 본인이 더 잘 아는 것이다.

간단한 시험이었다. 마력 연산과 충전에 있어서는 이놈의 싼 티 나는 테스론 헤드(?) 덕분에 영 부실하지만, 집중력이나 마력 제어 감각 등 영혼에 기인한 영역은 그대로 살아 있을 것이라는 게 그가 예상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론이 그렇듯, 실제로 증명하지 않는 한 그것은 가설일 뿐. 그동안 실전에서 마법을 써 보질 못해 살짝 불안했는데 시험해 보니 꽤나 훌륭하게 감각이 반응해 주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슬슬 다시 마법사 간판 걸어도 되겠는데?'

나름 만족하며 레펜하르트는 브라이트와 클론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떨어진 시미터 곁에서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시리스가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재차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나는 위대한 마나의 사역자, 그 힘을 빌려 뿌려진 것을 거두노라. 디스펠 매직."

녹색 섬광이 손끝에서 쏘아져 떨어진 그녀의 시미터를 감쌌다. 시미터에 걸린 중량 증가 마법이 풀리며 원래의 무게로 돌아갔다. 시리스가 잽싸게 무기를 회수했다. 클론토가 경악해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내 마법을 저리 간단히?"

마법 해제 주문, 디스펠 매직은 비록 서클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상대 마법의 마력 패턴이나 술식,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가능한 마법이다. 저 젊은 마법사는 놀랍게도 50년 가까이 마법에 매진한 자신보다도 더 수준 높은 마법사였던 것이다. 주문 시전 속도나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급수라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착오였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물론 이는 사실 현재 레펜하르트의 경지가 꽤나 불균형스러워 생긴 일이지만, 클론토 입장에서 저기까지 알 리는 없다. 단숨에 자신의 주문을 날려 버리는 레펜하르트의 솜씨에 클론토는 바로 전의가 꺾였다.

그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저 엘프들 때문에 이러는 거요? 그렇다면 드리겠소! 다 가지시오!"

그는 아직도 레펜하르트가 자신들이 가진 엘프들에게 욕심을 품고 습격해 왔다고 믿고 있었다. 뭐, 상황을 볼 때 그 이상의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브라이트도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외쳤다.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네?"

아니, 그럼 왜 우리를?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브라이트가 입을 쩍 벌렸다. 레펜하르트가 안색을 굳히며 앞으로 나섰다.

문득 그가 물었다.

"몇이나 죽였지?"

브라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희가 누굴 죽였다고 그러십니까?"

"몇이나 되는 엘프들을 죽였냐는 말이다."

순간 브라이트 일행은 눈만 껌벅껌벅 하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엘프를 몇이나 죽였는지를 왜 갑자기 물어본단 말인가? 브라이트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한, 마흔 마리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자신들의 실력을 보고 부하로 삼으려나 싶어 숫자를 조금 뻥튀기하기도 했다. 살짝 자랑조차 섞인 그의 대꾸에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분노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순간 레펜하르트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럼 이제 그들의 핏값을 받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브라이트의 머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퍼엉!

육편과 뇌수가 꽃잎처럼 사막의 모래 위로 흩날린다. 클론토와 다른 이들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는 순간, 레펜하르트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 ☆

요란한 폭음이 연거푸 울렸다. 황금빛 오러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마법의 화염과 전격이 그 뒤를 이었다. 살의 가득한 레펜하르트가 전의를 잃은 이들을 격살하는 데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들 제대로 반항도 못해 보고 죽어 갈 뿐이다.

"아악!"

"으악!"

"으어어억!"

비명이 메아리치는 열사의 대지, 시야를 가득 메우는 대학살의 광경 속에서 클론토는 멍하니 서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으으...."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매진해 왔던 위대한 마법의 언령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압도적인 공포만이 뇌리를 가득 메운다. 감히 반항하겠다는 생각 따윈 할 엄두도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용병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 간다. 저 잔혹한 자의 주먹에 스칠 때마다 피떡이 되어 사막 여기저기 널브러진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의 저 청년은 실로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닳고 닳은 용병들을 아이처럼 다루는 권술에, 평생을 매진한 자신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마법이라니?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 우물만 파도 모자랄 판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분야를 모두 충족하다니, 그것도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그리고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도대체 왜 우리를 저렇게까지 죽이려 하는 건가?'

"커억!"

몇 남지 않은 용병 중 하나가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다. 시체를 뒤로 던지는 레펜하르트의 두 눈은 일렁이는 불길을 담고 있었다. 저 두 눈에 피어오른 것은 틀림없는 증오의 빛.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엄청난 증오를 받을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마지막 용병 하나를 처리한 레펜하르트가 클론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심 마법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저 마법사는 모든 용병들이 시체가 될 때까지도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 몰리고도 제대로 주문을 시전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지닌 자라면 저 나이에 고작 6서클에 머물러 있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려 클론토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불쑥 손을 뻗어 가느다란 마법사의 목을 움켜쥔다. 이제 가볍게 힘을 주기만 해도 이 수수깡 같은 목은 단숨에 부러져 나가리라.

"잘 가라."

막 손아귀에 힘을 주려던 찰나였다.

"자, 잠깐만!"

클론토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레펜하르트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엘프들의 목숨은 가차 없이 앗아 간 이들이 자신의 목숨은 그래도 귀하단 말이지? 경멸을 담아 레펜하르트가 클론토의 목을 조르려던 참이었다.

클론토가 남은 힘을 끌어모아 외침을 이었다.

"대체 왜 죽는 지나 알려 주시오!"

"...하?"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손아귀의 힘도 살짝 빠졌다.

'역시 마법사....'

평소라면 상대도 하지 않고 바로 목을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란 호기심에 살고 죽는 생물, 이자 역시 자신의 목숨이 걸린 와중에서조차 생명의 위협보다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는 쪽이 더 중한 것이다. 레펜하르트 역시 경지에 올랐던 마법사였다. 그 심정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최소한 죽는 이유만큼은 알려 줘도 되겠지.'

살짝 힘을 풀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대꾸했다.

"아까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죽어간 엘프들의 핏값을 받겠다고."

아니나 다를까, 클론토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무슨 미친 소리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뭐, 그동안 지겹게 보아 온 것이라 별 감흥은 없지만.

하지만 역시 마법사라 그런지 다른 놈들과는 조금 반응이 다르다.

"...그 엘프들 사이에 혹시 인간이 있었소?"

혹시 이 청년의 지인이 그들의 전투에 휘말려 죽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자의 분노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클론토의 상식선에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일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가차 없이 그의 질문을 부정했다.

"난 분명 엘프들의 핏값을 받겠다고 했다."

"그럼 정말로 엘프를 죽였다는 이유로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목소리로 클론토가 언성을 높였다.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법'이 아직 없겠지. 하지만 '법'이 없다 해서 엘프들이 저렇게 죽어 가도 되는 존재들은 아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프들을 죽이며 느끼지도 못했던 거냐? 그들이 진정 짐승이었나?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그들을 살해하면서도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나?"

클론토가 표정을 구겼다.

"당신, 미쳤군...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해서 그럼 그놈들을 사람 취급하란 말이오?"

"욕망 때문에 날뛰는 네놈들보다는 훨씬 사람답다고 본다. 그대는 마법사겠지. 그렇다면 알고 있을 터."

싸늘한 어조로 레펜하르트가 질문을 던졌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클론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에 와 닿는 악력이 더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여기서 함부로 대답하면 바로 목이 꺾일 것이 분명했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요.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함을 아는 이성을 지니고 스스로의 자아조차 의심하며, 본능을 넘어선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보이지 않는 죽음이 다가옴을 두려워하는 이가 바로 사람이오."

마법사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배웠던 철학적인 대답이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대체 엘프가 저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나?"

이를 갈며 클론토가 빠르게 대꾸했다.

"인간 중에서도 사람답지 않은 이들은 많소. 인간 중에서도 자신의 죄로 인해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소. 심지어 엘프는 노예로 타고난 종족이오. 그대는 노예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오?"

"그렇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세상보다도 자신이 더 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오?"

싸늘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클론토를 바라보았다. 클론토도 어느새 죽음의 공포를 잊고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일 리는 없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다."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

당연했다. 세상 그 누구도, 노예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다면, 남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원칙.

"이 당연한 생각의 어디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클론토는 어이없어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새끼, 미쳐도 아주 논리적으로 미쳤구나.'

참 오래 살다 보니 별 더러운 꼴을 당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래저래 굴곡 많은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거늘, 늘그막에 이렇게 '제대로 미친 놈'에게 걸리다니!

그래, 말은 옳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이론대로만 굴러가던가? 얻는 자가 있으면 빼앗기는 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지배당하는 자가 있으면 지배하는 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섭리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설사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런 대학살을 저지를 이유는 아니지 않소?"

클론토는 악을 썼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대로 죽기가 너무나 억울했다.

"당신 이론대로 우리가 죄를 지었다 칩시다! 하지만 이종족을 사냥하는 행위는 대륙 어느 곳에서도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소! 애초에 죄라 배우지도 않았고 죄라 인식하지도 못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해서 죽어야 할 이유가 된단 말이오?"

모르고 저지른 행위에 죄가 성립될 수 있는가? 클론토는 치죄 원칙의 근본적인 부분을 짚으며 레펜하르트의 눈치를 보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모르고 행했다 해서 법상으로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현실보다는 이론을 앞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그렇게 나간다. 상대의 논리를 논파하는 것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희, 이쪽이 이론적인 문제를 공략한다면 상대의 말을 막히게 할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미친놈이니, 잘하면 살아날 수 있을 지도....'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지... 확실히 그대들은 자신들의 도덕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지."

'흐음?'

기대 어린 눈으로 클론토는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먹힌 것인가? 하지만 클론토의 안색은 이내 새까매졌다.

"그대들이 마을을 습격하기 전이었다면, 엘프들이 살해당하기 전이었다면 나도 이런 잔혹한 짓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차가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발밑의 참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그대들을 그냥 놓아준다면, 죽어 간 엘프들의 원한은 누가 풀어 준단 말인가?"

클론토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목을 조르는 손아귀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엘프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행위를 그저 '모르고 저지른 행위이므로 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이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끅! 끄으윽!"

점점 호흡이 가빠져 온다. 클론토는 눈을 부릅뜨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마치 바위 사이에라도 끼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비록 죄인 줄 몰랐다 해도, 알지 못해 저지른 일이라 해도, 이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양심에 거리낌 없는 행위였다고는 해도...."

레펜하르트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죄가, 죄가 아니게 되지는 않지."

최후의 힘을 담아 클론토가 악을 써댔다.

"그럼 그대는 자신의 신념만으로 타인을 재단하겠다는 거냐? 그 무슨 극도의 오만이란 말인가!"

"그래, 그것은 실로 오만이지."

레펜하르트의 팔뚝 근육이 실룩였다.

"하지만 뒤틀린 사회의 상식을 따르는 것이, 그것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니 따라야 한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일 바에는...."

뚜둑!

클론토의 목이 기묘한 각도로 뒤틀렸다. 조금 전까지 생기를 담고 있던 늙은 마법사의 눈동자가 빠르게 빛을 잃는다. 레펜하르트는 손을 놓았다. 클론토의 시체가 붉게 물든 모래 위로 털썩 떨어졌다.

"...나는 차라리 오만해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