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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르 백작의 혀(3)

"대체 뭘 하려는지 궁금한 표정이군?"

블라르의 물음에 마레크는 순순히 주억였다.

"그리 자신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간단하다. 강력한 사랑의 묘약이다."

블라르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묘한 색깔의 액체가 담긴 수정병이었다.

"사랑의 묘약이라? 그런 것은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오? 실제로 타인의 정신을 강제하는 물약은 부작용이 심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소."

마레크는 비열하고 간편한 수단을 좋아했기에 사랑의 묘약이란 것에 혹했다. 하지만 미심쩍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블라르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묘약은 실전된 고대 지식의 정수이다. 네놈은 이 묘약에 얼마나 고등한 마법이 부여된 건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여기서 그 효과를 보여주지."

"뭐? 뭐라? 설마 엘프 공주를 상대로 할 심산이시오!"

엘프 공주는 어느새 두려운 표정으로 입가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블라르는 마치 먹잇감을 앞둔 사자와 같은 눈빛을 하며 묘약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찢어 피를 묘약 안에 흘려 넣었다.

찐득한 피가 수정병 안의 액체를 탁하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들여다보며 블라르가 설명했다.

"이것은 단순히 상대의 정신을 강제하는 게 아니다. 물약을 통해 주인과 노예라는 두 영혼을 강력하게 묶어주지."

"영혼을 묶는다니? 그런 수법이!"

"일단 사랑의 감정에 함락된 뒤에는 노예는 주인 외에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게 된다. 지금껏 쌓아왔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지."

블라르 백작은 묘약을 엘프 공주에게 내밀었다.

"자, 마셔라."

엘프 공주는 굴욕감을 애써 참아내는 표정을 지었다.

"이딴 약물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효과가 없다면 그만이겠지. 다만, 우리 사이의 약속을 잊지 말도록."

"큭···."

엘프 공주는 미간을 찡그리며 망설이다가 결국 묘약을 마셨다. 마레크는 숨도 못 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는 입을 멍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허······!"

엘프 공주 알테아의 도자기 같은 피부와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공허한 눈동자가 빠르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묘약을 삼킨 이후 그녀의 볼에 온기가 피어나더니 몹시도 사랑스러운 홍조를 품었다. 또한 아름답지만 생기 없던 눈동자가 찬란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시체의 한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는 요염하고 농밀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하아아······."

나직이 내쉬는 엘프 공주의 한숨에 마레크는 심장이 덜컥 떨어질 뻔했다. 그제야 그는 자기 눈앞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걸 실감했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공주의 가늘게 뜬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은 매력이 넘쳐났다.

그중 가장 가슴 떨리는 건 그녀의 눈빛에서 남자를 향한 강한 갈망과 열정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마레크는 지금까지의 무례를 당장 사과하고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주가 바라보는 자는 그가 아니었다. 어느새 블라르 백작에게 바짝 붙어서는 두 팔을 그에게 휘감고 있었다.

둘은 키스를 시작했고, 엘프 공주의 긴 혀가 블라르의 애정을 갈구하며 끈적끈적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더 이상 창백한 시체는 없었다. 터지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남자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는 요녀가 있을 뿐이었다.

마레크는 사랑의 묘약이 가진 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매혹적인 광경에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블라르가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사라져라. 나는 이 여자를 안아야겠다."

"아, 알겠소···."

"앞으로 공주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 내 것이니."

결국 마레크는 공주의 정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몹시도 비참한 심경이었다. 떠나는 그의 등 뒤로 여성의 달콤한 신음이 들렸다. 마치 그것은 세이렌의 목소리처럼 아름다웠다.

마레크는 후회하고 후회했다.

'여왕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여자였구나.'

블라르 백작이 부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버린 게 아니고선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라 불리는 블라르의 여자를 건드릴 수도 없는 일.

'최근 저 미친놈이 태양 교단도 대놓고 엿 먹이고 있다지. 뱀파이어면서도 태양을 다루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줄이야. 과연 대마두라 할 만하다···.'

마레크는 블라르를 더욱 믿게 됐다. 묘약의 효과 따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엘프 여왕을 굴복시키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야욕에 타올랐다.

블라르 백작이 제시한 두 가지 방법이면 이 구혼 전쟁에서 완승을 거둠과 동시에, 이후 일곱 봉우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사니까 천상의 신들이 날 돕는구나!'

* * *

"갔습니다. 좀 떨어지시는 게···?"

나는 엘프 공주를 밀쳐냈다. 무슨 낙지처럼 달라붙어서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아니, 같이 연기를 하기로 한 게 맞긴 한데 설마 이리 적극적으로 나올 줄이야.

키스를 한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져서 연기고 뭐고 다 잊을 뻔했다. 엘프 공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날 흉내 냈다.

"이제 사라져라. 나는 이 여자를 안아야겠다."

"윽···!"

"놀리려는 게 아니다. 그대는 그 순간, 내 열정적인 연기에 호응해 한없이 진심에 가까운 감정을 토로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우리가 그 금태양을 완벽히 속였다는 거다."

엘프 공주 알테아는 어느새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다만 여전히 볼에는 생기가 넘쳐났다. 실제로 그녀는 성적으로 흥분한 건 아니다. 뱀파이어가 아니랄까 봐, 가짜 묘약에 섞인 내 피에 극렬하게 반응한 거였다.

"아무튼,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자유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를 못 할까? 미안해할 것까진 없다. 꽤 좋았다. 용서해 주지."

공주는 섬섬옥수로 자신의 입술을 살짝 쓰다듬고 있었다. 이쪽을 보는 눈길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거렸다. 살짝 혀로 자기 입술을 핥으며 내 입술을 쳐다보고 있다.

"혹시 다음에 또 하는 건가? 마레크를 속이기 위해?"

그때 갑자기 낙인이 있는 손바닥이 누가 꼬집는 것처럼 아팠다.

슬쩍 보니 불길한 파란색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대폭락을 앞둔 차트가 파란색을 살짝살짝 띄우고 있는 것처럼 무서웠다.

'위, 위험하다!'

나는 서둘러 엘프 공주에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더 했다가는 두 번째 사도가 되지 못 할 겁니다."

"···음? 어째서?"

아직까지 손바닥이 계속 아팠기에 서둘러 아부를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었습니다. 제 모든 마음은 성녀님께 있습니다."

그제야 손바닥의 푸른빛이 사라졌다. 엘프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신과 사랑이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니, 그만큼 섬기는 신을 향한 마음이 지극하다는 거겠지?"

"뭐···."

"그 정도 신앙은 있어야 사도를 하나 보군. 나는 못 할 듯하구나."

아니, 그게 아니다.

진짜로 대신격 앞에서 연인 선언을 했으니까.

내 모험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뱀파이어 성녀랑 사귀는 게 됐을 정도다. 하지만 아직은 먼 길이었다.

'언젠가 만날 수야 있겠지만···.'

* * *

황량한 바람과 바위의 차원.

그곳에서 소신격 뱀파이어 성녀는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입술이 무슨 오리처럼 튀어나온 상태였다.

새벽의 시종 세티스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혹여나 기분이 상하신 겁니까?"

대답 대신 뱀파이어 성녀는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거대한 소렌의 황금빛 동상에 검은 천이 내려앉았다.

"오늘은 보지 않을 거예요."

그 말만 남기고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제법 거대하고 그럴 듯한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를 섬기는 사악한 바람의 정령들이 밤낮으로 노역한 탓이다.

뱀파이어 성녀는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가 처박혔다. 혼자 뭐가 그리 심란한지 계속 방을 왔다 갔다 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곁에서 수행하는 세티스는 주인의 저런 태도가 처음이라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조심스레 묻자 뱀파이어 성녀가 동문서답을 했다.

"신탁을 내릴 거예요!"

성녀는 근처의 책상에 가서 앉더니 드래곤의 손가락뼈로 만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비스듬하게 놓인 대리석판 위에 글씨를 끄적였다.

-한눈팔지 말아주세요.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성녀가 글자를 쓰다듬으면 신탁이 내려가 소렌의 꿈속에서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간결하고 명확한 메시지에 만족한 성녀는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이고는 글자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 순간 세티스가 놀라서 말렸다.

"안 됩니다! 주인이시여!"

"이게 무슨 방해인가요? 물러나세요. 세티스."

"신탁이란 신의 말씀입니다. 하오니 그것은 공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어찌 사도에게 사사로운 내용을 전하려고 하십니까?"

"아니이―!"

"무엇이든 처음처럼 중요한 게 없습니다. 그것이 선례를 만들고 앞으로의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주인께서는 첫 신탁을 기어코 자신의 조바심을 표현하는데 쓰시겠다는 겁니까?"

"아윽!"

구구절절 이어지는 맞는 말에 결국 뱀파이어 성녀는 포기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 정말! 신이 되고 왜 이리 제약이 많나요!"

"···송구하오나 그것이 신입니다."

뱀파이어 성녀는 혼자 침대를 이리저리 뒹굴며 생각에 잠겼다. 이불을 말고 말아 무슨 애벌레처럼 변한 채로 혼자 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시나요?"

"동상이요."

"오늘은 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도에게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라요. 저도 노력해야 해요."

다시 동상으로 간 뱀파이어 성녀는 손가락을 튕겨 천막을 치우고는 신성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동상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었다. 소렌 본인과 연결하는 게 목표로, 물질계의 소렌이 받는 피해를 동상으로 전이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신성마법이다.

가령 현실의 소렌의 팔이 떨어질 피해를 입으면 대신 동상의 팔이 박살 나는 식이다.

분명 대단한 도움이 될 터였다.

뱀파이어 성녀는 집중해서 신성력으로 동상의 내부 회로를 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티스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대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사도는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만."

"사도가 블라르를 이용할수록 블라르와 가까워질 테니까요. 둘의 만남은 시간문제예요."

"그걸 염려하시는군요."

"과연 그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래도 저는 소렌을 믿어요."

뱀파이어 성녀 걱정스러웠지만, 고개를 흔들어 근심을 떨쳐내고는 동상에 열심히 신성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저기, 세티스?"

"네, 말씀하십시오."

"역시 신탁 내리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믿으신다면서요."

"······."

이후 성녀는 세티스가 불러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 * *

세계수 프로젝트.

엘프 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 기획이 드디어 시작됐다. 나는 변신 능력을 써 새로운 신분으로 위장하고 마레크 공작을 찾아갔다.

"네가 블라르 백작이 자신의 혀와 같다고 극찬한 자인가?"

"주군께서 과분한 말씀을 해주셨군요. 그리 불리고 있긴 합니다. 저는 다렌 소켄발트라 합니다."

마레크는 뭔가 굉장히 어색한 이름이라 여겼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찾아와줘서 반갑다. 다렌이여."

마레크 공작은 나를 꽤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일 얘기로 들어가고자 했다.

"블라르 백작에게 대강 어떤 식으로 사람을 모을지 듣긴 했다. 하지만 실무에선 네가 전문인 듯하니 구체적인 계획을 말해 보라."

"간단합니다. 투자자들의 계급을 나눌 겁니다."

"계급?"

"네, 계급에 따라 투자금 대비 돌아오는 수익이 점점 커지는 구조로 할 생각입니다."

똑같이 10골드를 투자해도 누군 2골드를 배당받고, 또 누군 4골드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 차이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마레크 공작 역시 바로 관심을 보였다.

"호? 그런데 그 계급은 어떻게 나누는 거지?"

"간단합니다. 주변의 지인을 많이 데려올수록, 투자를 많이 할수록 투자자의 계급을 올려주는 겁니다. 다들 더 많은 이득을 위해, 그리고 남들보다 높은 계급이라는 허영심을 위해 앞다퉈 달려들 겁니다."

나는 그 계급을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순서로 나누겠다고 했다. 마레크는 대번에 이것의 효용을 알아봤다. 아무리 양아치니 뭐니 해도 그도 위정자니 말이다.

"놀랍군. 허영심이라면 그 엘프 개돼지 새끼들이 최고지."

"더불어 공작님께서도 계급이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차등해 대우하십시오. 이후 정국이 공작님께 유리해질수록 다들 높은 계급을 얻어 잘 보이려 들 것입니다."

"세상에! 이리 골수까지 빼먹는 방법이!"

마레크 공작은 감탄을 거듭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다렌! 그대가 나의 지혜주머니로군!"

"개나 말처럼 하찮은 힘이지만 공작님을 위해서라면 성심을 다할 뿐입니다."

며칠 뒤, 준비를 마치고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아직은 작은 규모였지만 마레크의 인맥으로 꽤나 유력한 자들이 섞여 있었다.

개중에는 거상이라 불리는 구혼자 라이트풋도 보였다. 아무래도 마레크가 새로운 돈줄을 찾았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흥미를 끈 듯했다.

나는 레그너 3세가 선물해준 팔찌를 끼고는 앞에 나서서 인사를 했다.

"귀하신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보시죠."

내 말이 끝나자 허공에 마법으로 만든 거대한 조감도가 떠올랐다. 그것은 장대한 세계수가 뿌리내린 엘프 왕국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자, 보십시오. 앞으로 영원히 엘프들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을 에버송의 모습을! 저는 이 엄청난 기회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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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르 백작의 혀(4)

처음이라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투자설명회는 생각보다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유력 인사들이 몇이나 참가한 데다가, 마레크가 재산을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던 까닭이다.

"이 마레크! 세계수를 가져오는데 모든 것을 걸 생각이오. 이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오."

마레크는 그 자리에서 구혼을 위해 가져온 수많은 예물을 내놨다. 대부분 여왕과 궁정의 엘프 관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마레크는 그중 태반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쿠웅!

마레크의 수하들이 묵직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안에는 다크엘프의 금화가 가득가득했다.

좌중은 술렁였다. 이 분위기에서 내가 나서서 이번 투자에 중요한 조건이 있다고 했다.

"투자자의 등급에 따라 이후 배당이 달라질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어떻게 투자자의 등급이 나뉘는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나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줬다.

-많이 투자할수록.

-빨리 투자할수록.

-지인을 데려온 만큼.

"이 세 가지로 회원등급이 조정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부로 이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대륙을 뒤흔들 사건의 시작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훗날 두고두고 떠올릴 것입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나는 여기에 대고 2차 설명회는 더 크고 성대하게 열 거라고 했다. 이에 사람들은 들뜬 얼굴이 됐다. 물론 아직 의심을 품고 미심쩍은 얼굴을 한 자들도 여럿이다.

하지만 반복된 거짓말은 결국 승리하는 법이다.

지금 저기서 '나는 저런 수상한 것에 넘어가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자들조차, 주변에서 세계수 프로젝트에 투자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흔들릴 게 뻔했다.

* * *

투자설명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마레크와 축배를 들었다.

"대단한 재능을 가졌군. 세 치 혀로 모여든 명사들을 농락하는 게 아주 볼 만했다."

"과찬이십니다."

"아니, 결코 과찬이 아니야. 모여든 자들이 사탕을 쫓는 어린애 같은 눈빛으로 다렌 그대만 쳐다보는 걸 보며 이 일이 대성공할 것임을 확신했어."

확실히 전망이 좋긴 했지만 아직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나는 이런 점을 설명하고는 반드시 포섭할 인물로 하플링 거상 라이트풋을 뽑았다.

"라이트풋은 에버송에 모인 사내 중 최고의 재산가입니다. 당연히 그가 돈을 굴리면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겠지요. 라이트풋이 이번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순풍을 타고 나아가는 범선과도 같을 겁니다."

"나도 그대 생각에는 동의한다. 다렌. 하지만 설득이 결코 쉽지 않을 거다."

라이트풋은 돈에 관해서라면 큰 깨달음을 얻은 자다. 수많은 양민과 동업자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며 돈을 다루는 법을 익힌 악덕 사업가였다.

그런 백전노장이라면 이미 이번 일의 문제를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속인다는 건 몹시 어렵겠지.

그는 키가 작은 하플링이지만, 돈으로 쌓아올린 지위 덕에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남자였으니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방법을 제시했다.

"아예 아군으로 끌어들이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라이트풋을 속여 넘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일의 본질을 알려주고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호···?"

"직접 라이트풋에게 이 난장판이 끝나고 통합된 엘프 왕국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그가 무엇에 혹하리라 생각하나? 다렌."

"다행히 저는 라이트풋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건 힘과 권세입니다. 돈은 많지만 하플링이자 장사치라고 은근히 무시당하기 때문이지요."

하플링은 수는 제법 되지만 대놓고 괄시받는 종족이다. 제대로 왕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방랑하며 지내는 탓이다. 일종의 집시라고 보면 됐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라이트풋이 이번 구혼에 참여한 것도 자신의 혈통적인 문제와 별 볼 일 없는 지위를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엘프 여왕과 혼인해 국서(國壻)가 된다면 겉으론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과연 자네의 말이 맞네."

"만약 우리가 그걸 채워준다면 굳이 더 경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쪽 편에 가세할 수 있겠지요."

"다렌! 참으로 그 혜안이 놀랍군."

나는 마레크에게 라이트풋을 반드시 아군으로 끌어들이거나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소동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금전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의 적이 된다면 앞장 서 폭로할 텐데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맞아. 아주 맞는 말이야!"

내 지적에 금태양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당장이라도 라이트풋을 생선포처럼 떠 버릴 기세다. 역시 양아치 새끼라 그런지 제 앞길에 방해가 될 거 같으니 성질 머리를 못 참는다.

"다만 라이트풋을 죽이면 그 여파가 장난 아닐 겁니다. 특히 지금 같은 구혼자 파티 때는 더더욱요. 그러니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게 최선입니다."

"다렌, 어떤 조건이 좋다고 보나?"

"간단합니다. 공작님의 따님을 주십시오. 그리고 사위로 삼으면 됩니다."

"뭐라!"

마레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어이없는 소리는 처음이란 태도다.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공작님께는 그 미모가 대단한 따님이 있잖습니까? 분명히 라이트풋은 거절하기 힘들 겁니다."

다크엘프 왕국 실세의 딸과 혼인은 라이트풋이 원하는 지위를 얻기 충분하다. 또한, 아름다운 다크엘프 공녀는 그가 가진 혈통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방법이기도 했다.

뭐, 그 공녀의 성격이 지랄이기로 유명하지만 라이트풋도 만만치 않으니 유유상종이겠지.

다만 마레크는 격분했다.

"어찌 하플링 따위에게 딸을 준단 말인가! 그 천박하고 멸시 받는 게 당연한 부류에게!"

"거절하시겠다면 저도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정도를 걸지 않으면 이번 판을 성공시키긴 어렵다는 점입니다."

"크음···."

"수많은 이를 속이는 겁니다. 공작님께서도 그만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마레크는 고민하는 기색이 됐다.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긴다.

"공작님,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사위가 돈이 많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저것 뜯어먹기도 하고, 앞으로 공작님께서 벌이실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음······. 그건 그렇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공작님께선 제 주인과 함께 일곱 봉우리로 진격하게 될 겁니다. 그때 엄청난 전비가 들 텐데 그 비천한 하플링이 감당해 준다면 참으로 이득 아닙니까?"

그 말에 마레크는 표정이 바뀌었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은 막대했고, 모든 군주의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무슨 수를 써도, 주머니에 구멍 난 것처럼 빠져나가는 전비만큼은 해결책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감당해줄 호구가 나타났다?

마레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종족 차별적인 발언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여름날 숲의 삼선 모기만큼이나 불쾌한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부침개 뒤집듯 돌변한 태도에 나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자를 가족으로 맞이하러 가야겠군! 이제부터 이 몸은 종족적 다양성의 수호자라 불리고자 한다!"

그 말과 함께 마레크는 돌풍처럼 밖으로 사라졌다. 한시라도 바삐 라이트풋을 설득하고자 함이었다.

마레크 놈, 행동력 하나는 대단하구나.

* * *

놀랍게도 마레크는 하플링 거상 라이트풋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대강 들어봐도 상당히 파격적인 약속이 오간 모양이다. 뭐, 그 내막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튼, 그때부터 '세계수 프로젝트'를 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돈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라이트풋이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한다는 얘기에 점점 광풍이 풀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아주 가관이었다.

"이 정도 금이면 골드 등급에 가기 충분할 터! 어서 처리해 주시오!"

"기다리십시오. 저쪽에 계신 플래티넘 등급 투자자님의 일 처리가 우선입니다."

"아니, 내가 더 먼저 오지 않았소! 게다가 저자보다 내 작위가 더 높단 말이오! 저치는 남작이고, 난 백작인데 어찌 이런 무례를!"

"죄송합니다. 이곳에선 투자자님의 등급만을 볼뿐입니다. 모든 걸 공정하게 처리하고자 함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투자 등급이 세속의 작위나 지위를 다 무시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오로지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몬드만이 있을 뿐이다.

투자설명회는 몇 차례 계속 이어졌고, 연일 만원사례였다. 나 역시 그 과정에서 꽤나 유명인이 됐다.

"다렌! 다렌! 다렌!"

"감사합니다. 하하하."

설명회가 끝난 후 이번 파티에 참가한 구혼자 중 하나인 벤마르 후작이 마레크에게 악수를 청하는 게 보였다.

"놀라운 사업이오. 크게 관심이 가는구려."

하지만 마레크는 상대방의 손을 보고도 무시해버렸다. 마치 공기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벤마르 후작이 겨우 실버 등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벤마르 후작은 인간 왕국에서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가진 존재였지만, 꽤나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선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점점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있었다. 주변에서 누군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골드랑 플래티넘 지나가는데, 웬 실버 새끼가 길을 막는구만. 캬악! 퉤!"

그 말에 벤마르 후작은 큰 모욕감을 느끼고는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그는 가져온 재산을 털어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곧장 올라섰다. 역시 잘 나가는 후작이라 그런가 돈이 많았다. 그렇게 다이아몬트 등급이 된 후작은 다시 턱을 세우고 다녔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즐겁게 지켜봤다.

왜냐하면 이 프로젝트의 총무 겸 회계담당이 바로 이 몸이기 때문이다. 즉, 돈 관리는 다 내가 했다.

"세상에··· 황홀하군."

나는 눈앞에 쌓여 있는 엄청난 재화를 보며 입이 절로 벌어졌다. 목록은 대충 이랬다.

-엘프 골드로 만든 금화: 엘프 골드는 인간의 누런 금과 달리 은은한 빛깔의 합금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각종 희귀한 광물: 흑철이나 진은 같은 광석 덩이들.

-각종 보석과 요정의 가루 같은 희귀한 마법 재료.

-한 병에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전설적인 술.

-순수한 금과 은, 구리 등.

그 외에도 온갖 가치 있는 게 투자금으로 모여들었다. 이 모든 게 아주 무방비하게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레크는 날 의심하지 않았고,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다니느라 바빴다.

요즘 에버송은 온통 세계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놀란 엘프 여왕이 근거 없는 소리라 발표했지만, 다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엘프 여왕이 마레크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걸 두려워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구혼에 관한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리고, 다들 투자에 대해서만 떠들어댔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자 흥미인 사람들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귀족이나 존귀한 이들만 이 투자에 끼어들었으나 평민 중에서도 재산이 있는 자들이 소문을 듣고 기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레크를 찾아가 이 모든 것의 대미를 장식할 최종 설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마치 축제와도 같이 화려하게 일을 벌이고 모두에게 꿈 같은 비전을 제시하는 겁니다. 이제 이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습니다."

"알겠다. 더 끌어들이고 싶지만 욕심이겠지."

"새로운 중대 발표가 있다고 알리십시오. 기왕 이렇게 된 거 에버송에 있는 자들을 몽땅 끌어들인다는 각오로 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개돼지 같은 평민까지도 말인가?"

"네, 그들의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라기보다 여론이 중요하니까요. 평민들에게 빵과 술을 마구 베푸십시오. 그걸 받고자 몰려들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알겠다!"

그렇게 마레크 백작과 헤어진 뒤 엘프 공주 알테아를 찾아갔다.

"전하,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사도의 낙인을 내려받고 탈출하시지요."

"드디어인가."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밤 안에 떠나시길 바랍니다."

내가 미리 언질을 해준지라 엘프 공주는 순순히 끄덕였다. 이미 살림살이도 조금씩 정리해온 것 같다.

나는 뱀파이어 성녀에게 부탁해 그녀를 두 번째 사도로 임명해 달라고 했다. 정해진 의식을 절차대로 수행한 뒤 기도문을 읊조렸다.

"알테아 실버리프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려주십시오. 그녀가 비록 불신자이나 가엾게 여기시고 도와주시길 간청합니다."

다행히 성녀께선 내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엘프 공주에게 두 번째 사도직을 내렸다. 한시적인 데다가 첫 번째 사도인 내게 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 가능했다.

"놀랍군···!"

엘프 공주는 왼손에 새겨진 낙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공할 힘이 느껴진다. 혹시 필요한 때만 낙인을 받을 수는 없는 건가?"

이 녀석 이거, 임시 사도로 꿀 좀 빨다 탈교하고, 다시 임시 사도를 하다가 탈교하는 걸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임시라고 해도 사도의 직을 저버린 자는 영원히 다시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거구나···."

"아무튼, 서두르십시오. 이제 이곳에 오래 머물러봐야 좋을 건 없습니다."

"알겠다. 도움에 감사한다."

"서로 괜찮은 거래였습니다."

블라르를 사칭할 수 있는 건 모두 엘프 공주 덕이었으니 말이다.

* * *

이틀 뒤.

에버송의 광장에 온갖 부류의 인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오늘은 연이어 문전성시를 이룬 투자설명회의 마지막 날.

놀랍게도 마레크 공작은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의 앞에서 비전을 설명할 거라고 했다. 가뜩이나 사는 게 무료한 엘프들이다. 뭔가 신기한 일이 없나 기다란 귀를 쫑긋하며 몰려들었다.

심지어 과일과 빵, 우유, 술 등을 마구 나눠준다고 하니 집구석에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무슨 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달아오른 분위기를 보며 마레크 공작은 아주 흡족했다. 오늘은 자신이 주인공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단상 위에 올라섰을 때 지지자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아! 마레크 공작 만세!"

"세계수의 수호자! 세계수가 선택한 자!"

이미 광풍에 휘말려 많은 금액을 투자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마레크는 진리이며 정답이어야 했다. 이제 그를 향한 비난을 공공연히 내뱉을 자는 없어졌다. 마레크는 이런 변화에 몹시 만족해 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이 마법에 의해 증폭돼 퍼져나갔다.

"친애하는 모든 분들께, 오늘 이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우리의 새로운 삶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계수가 함께하는 그 미래를!"

마레크는 일장연설을 해댔다. 거짓말과 허풍과 허영으로 가득했지만 투자자들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와아아아아! 에버송!"

"세계수! 세계수! 세계수!"

그 열렬한 환호 속에서 마레크 공작이 외쳤다.

"자, 이쯤에서 제 친우이자 여러분의 안내자인 다렌을 불러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가 해줄 것입니다."

다렌이란 말에도 환호가 터졌다. 실제로 그는 연이은 연설에서 보여준 현란한 언변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중요한 실무자란 걸 알았기에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애를 썼다.

"다렌! 다렌! 다렌!"

"다렌! 다렌!"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구호가 터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커다란 호응에도 불구하고 다렌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가 싶어 더더욱 외쳤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다렌! 다렌? 다렌······?"

"어? 뭐야?"

"안 나오는데?"

삽시간에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여유롭던 마레크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측근에게 서둘러 물었다.

"다렌은 뭐하고 있는 건가? 빨리 알아봐라!"

"네! 알겠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마레크 공작은 애써 웃으며 좌중을 진정시켰다.

"다렌 이 친구가 갑자기 배탈이라도 난 모양입니다. 금방 돌아올 터이니 잠깐만 기다······."

막 그렇게 마레크가 모두를 진정시키려 할 때 누군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큰일났다! 큰일!"

사람들의 일제히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 외쳤다.

"투자금이 모두 없어졌다! 투자금이 없어졌다고! 그리고 다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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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드워프가 부리고 돈은 뱀파이어가(1)

그 갑작스러운 폭로에 행사장은 난리가 났다.

"무슨 소리냐!"

"다렌이 사라졌다고?"

"돈은? 내 돈은!"

하지만 거기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렌의 도주에 대해 폭로했던 미지의 인물도 군중의 혼란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난처한 건 마레크 공작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이번 일의 핵심이니까.

유력한 투자자들이 이제 행사고 뭐고 상관없이 마레크가 있는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공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서 해명 바랍니다."

"아니죠? 네? 아니죠!"

자신의 돈과 지위를 자랑하며 한껏 거들먹거리던 유력자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레크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몇몇은 숨을 못 쉬겠다는 듯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슴을 때려댔다.

"이럴 게 아니라, 공동 금고로 가봅시다!"

누군가 그런 제안을 하자 모두 찬동했다.

"맞소! 그게 좋겠소!"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공연한 소란일지도 모르오. 자, 침착하게 행동합시다!"

일부는 이성을 부여잡으려고 노력 중이었지만 줄줄 흐르는 식은땀은 어쩌질 못했다.

"자, 갑시다!"

"어서! 마레크, 당신도 따라오시오!"

어째서인지 투자자들은 마레크를 둘러싸고 이동했다. 마치 경호라도 하는 모양새였지만 실상은 도망가지 못하게 가둔 것이다.

그 때문에 주변에선 마레크의 부하와 투자자들의 부하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작님께 무슨 무례냐! 존귀한 분이시다!"

"닥쳐! 존귀한지 아닌지는 가보면 알 거다!"

당장이라도 드잡이질이 일어날 것 같아서 마레크가 서둘러 말렸다.

"동지들이여. 모두 진정하게. 나야말로 이번 일에 가장 큰 투자를 했다는 걸 잊었나!"

마레크의 일갈에 소요가 좀 잦아들었다.

"일단 금고부터 봅시다!"

"맞소. 다렌도 찾아보고. 각자 수하를 풀어 다렌 그놈을 수소문해 보시오!"

그렇게 마레크와 투자자들은 우르르 공동 금고로 몰려갔다. 하지만 금고의 입구에서 탄식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보안을 위한 룬문자 배열이 바뀌었소! 마법사! 어서 확인을!"

"알겠습니다! 잠시만···. 음? 어제 밤에 바꾼 흔적이 있습니다."

"아니, 이런 빌어먹을! 열 수는 없는가?"

"기존 패턴을 꼬아서 더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뭐라!"

소렌은 도망가면서 보안 룬문자의 배치를 마구잡이로 바꿔놨다. 본인도 기억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해둔지라 해석에 나선 마법사들은 땀을 줄줄 흘려댔다.

당연히 야단이 났다.

"차라리 파괴합시다!"

"소용없소. 이 금고에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잊었소? 억지로 개문하거나 주변의 벽을 부수면 안에 있는 물건이 사라지게 되어 있소! 무작위한 외차원으로 날아간단 말이오!"

"이런, 악랄한!"

결국 룬문자를 해석하는 게 최선이었다.

"마법사를 더 데려와라!"

"이럴 때는 여럿이 붙어야 해!"

결국 그 뒤로 반나절이 지나갔다. 화려하던 행사는 진작 망해서 구경 온 사람들은 다 떠났다. 금고 앞에는 거액을 투자한 핵심관계자들이 모여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있는 마레크는 죽을 맛이었다.

"이보게들. 나 역시 피해자란 말이야. 피해자!"

변명을 해봤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주변에선 다렌을 마레크의 끄나풀 정도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공작!"

"다렌이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그토록 명사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게 다 공작의 덕이 아니오? 이런데도 모르시겠다?"

"모르면 투자가 끝나나? 응?"

"우리가 아주 만만하게 보였나 보군."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분위기였다. 그나마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처지로 남아 있는 금고 덕이었다. 그것은 관측하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었다.

마레크는 지금 상황에 숨이 턱턱 막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다렌!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놈이!'

갑자기 가장 영광된 처지에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어질어질하기만 했다.

'설마 이 모든 게 블라르 백작의 흉계인가? 대체 왜?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마레크는 너무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대체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나아갈지 감도 안 잡혔다.

"열렸다!"

그때 마법사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작업에 매달린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철컥!

육중한 소리와 함께 룬문자의 배열이 완성되고 마법문이 열렸다. 투자자들은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비켜! 비켜보라고! 씨발."

"밀지마라! 으윽!"

그렇게 안으로 몰려간 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금고 안이 텅텅 비어었었기 때문이다. 일부 마법 물품만 남겨놓고 금은보화는 싹 가져간 상태.

털썩.

자기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다 빠져 주저앉는 자가 속출했다.

"이게···."

"대체? 조상신이시여!"

수많은 투자자들의 탐욕처럼 빛나던 금고 안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텅텅 빈 선반을 보고 있자니 다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모두가 그런 생각을 동시에 품었다. 누군가 헐떡대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탓하지 못했다. 당장 자기도 그럴 지경이었으니까.

특히 엄청난 투자로 다이아몬드 등급에 올랐던 벤마르 후작의 고통과 절망은 더욱 컸다. 왜냐하면 그는 한동안 이 투자를 미심쩍게 보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투자에 손을 댔고, 이후에는 폭주했다.

왕국의 고고한 존재인 자신이 다른 구혼자 나부랭이와 같은 급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벤마르 후작은 진짜 가슴에 단검이 박힌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아예 처음부터 속았으면 몰랐겠지만, 그는 이 사태를 유유히 피해갈 기회가 있었다. 아주 신선처럼 말이다. 한데 나름대로 안목을 갖고 있음에도 남들보다 더 심하게 당했다. 당연히 울화통이 터졌다.

"이! 이 빌어먹을! 이런 일이 용납될 것 같나! 다크 엘프!"

그는 마레크 공작에게 버럭 화를 냈다. 충격은 이미 감정의 소용돌이로 바뀌어 있는 상태. 벤마르 후작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 빌어먹을 시커먼 귀쟁이 새끼가! 너 이 자식! 이리 안 와!"

그의 분노에 충격과 혼란, 절망에 빠져 있던 자들이 일제히 깨어났다. 그리고는 다 같이 마레크에게 달려들었다. 일제히 손을 뻗는 게 마치 좀비 떼 같았다.

삽시간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놔라! 비천한 인간이 돌았나!"

"야이, 좆같은 귀쟁아. 내 돈 내놔!"

"체통을 차리시오! 떨어지란 말이오! 말로 해결합시다."

"이 호구 새끼 말하는 것 좀 보게! 이런 상황에서 말로 하자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게 마치 격류에 휘말린 듯 혼란했다. 급기야 누군가 마레크 공작의 뺨을 때리며 외쳤다.

짜악!

"이 새끼도 똑같은 놈이야! 잡아!"

"맞아! 잡아라!"

결국 참다못한 마레크도 폭발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알아주는 강자. 구혼자 중에서도 비범한 자들이 여럿이었지만 마레크의 무위는 모두를 압도했다.

"꺼져! 나도 피해자라고!"

마레크는 한번에 십여 명을 밀쳐내고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에 눈깔이 돌아간 투자자들이 검을 빼들고 쫓았다.

그 꼴에 밖에서 대기하던 수하들도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잡아라! 마레크가 도망간다! 잡아!"

"공작님을 지켜라! 음모다! 빠져나가야 한다!"

"쳐라! 죽여버려!"

갑자기 도검이 난무하고 일대가 피바다로 변했다. 비단옷과 금장식을 한 귀족이 배에 피를 흘리며 줄줄이 쓰러졌다. 급기야 마법까지 폭발하자 여기저기서 사람이 하늘로 떠올랐다.

콰아아앙! 쾅!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투자자 무리는 마레크에게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상대가 강자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잃어버린 돈에 대한 분노가 용기를 최고치로 채워주고 있었으니까.

"마레크의 목을 잘라라!"

"다렌 놈이랑 같이 내걸겠다!"

소란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폭력은 점입가경이 됐다. 여왕의 군대는 그저 이 사태가 도시로 번지는 걸 막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투극은 더욱 극렬해졌다.

마레크 같은 강자도 사방에서 칼날이 날아오니 금방 피투성이가 됐다. 그는 급기야 자부심인 귀가 한쪽 잘리기까지 했다.

"으악!"

"마레크를 잡아라! 저 귀 잘린 놈이 마레크다!"

마레크도 인정사정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한 번에 강자를 서너 명이나 베어 넘기는 미친 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포위망은 더욱더 그를 좁혀왔다.

"마레크! 어림없다! 오늘 네 무덤은 여기다!"

"저놈이 강해도 곧 지칠 터!"

"저 새끼를 족치면 결국 우리 돈도 돌아올 것이오!"

피와 분노가 뒤섞인 격전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근처의 건물 위에서 느긋이 내려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아까 군중 앞에서 금고가 비었다고 소리치고 홀연히 도망쳤던 자로, 그 정체는 소렌 다켄발트였다.

"마레크 새끼,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 좀 보게. 키키킥."

이 꼴을 보려고 그는 태양 저항 물약까지 챙겨 먹은 뒤였다. 그래도 맛없는 물약 때문에 입이 좀 텁텁했던 그는 튀긴 옥수수를 주전부리로 챙겨 먹고 있었다.

와그작! 와그작!

튀긴 옥수수를 씹는 소리는 경쾌했고, 소렌은 사는 게 즐거웠다.

* * *

금고를 턴 덕에 엄청난 재산을 얻게 됐다. 어느 정도냐면, 대강 계산해 보니 금 45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재화였다.

며칠 사이에 모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그야말로 광풍이 불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최종 투자설명회 전날 밤 나는 느긋하게 재화를 싹 털었다. 마법주머니가 부족해 레그너 3세에게 몇 개 빌리기까지 했다.

다만 몇 가지 마법 물품은 그대로 뒀다. 딱 봐도 가보 같은 종류라 추적 마법이 걸려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미심쩍은 물건 몇 개 빼고도 돈은 넘칠 만큼 많았으니 상관없었다. 나는 재화를 모두 담아서 비밀스러운 곳에 감췄다.

'골짜기로 돌아가서 이 돈으로 멋진 건물을 많이 올릴 수 있겠구나. 고맙다. 마레크.'

생각해 보면 내 모험은 기묘했다. 때가 되면 항상 은인을 만나곤 했던 것이다. 아단, 케일런, 마레크까지···. 그들은 태도는 거칠었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걸 헌신적으로 내어주곤 했다.

'사실 다들 날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서 이토록 사랑 받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마레크라는 이름을 항시 기억하고 고마워하기로 했다.

마음속에 은인 목록이 업데이트 됐다.

-삼촌 아단.

-친우 케일런.

-비지니스 파트너 마레크.

모두 품성이 넉넉한 자들이었다.

'아주 고맙다.'

이후 나는 태양 저항 물약을 챙겨 먹고는 한창 행사가 진행 중인 광장에 가서 소리를 질렀다.

"투자금이 모두 없어졌다! 투자금이 없어졌다고! 그리고 다렌이 사라졌다!"

···라고, 말이다.

그 뒤로 싸움이 벌어졌고 마레크와 투자자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꼴을 구경 중이다.

'와, 전투씬이 리얼해서 진짜 재밌네.'

하지만 언제까지 보고 있을 순 없는 법.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 했다. 솔직히 마레크가 여기서 잡힐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저놈은 진짜 강하다.

다른 건 다 엉망이지만 무력만큼은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벤마르 후작의 기사들을 무슨 잡초처럼 베어넘기고 있었다.

'역시 마레크와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건 미친 짓이지.'

아마 마레크는 탈출에 성공할 것이다. 그렇기에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고, 나는 드워프 왕 레그너 3세를 찾아갔다.

이미 그는 내 요청대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에버송 바깥에서 주둔 중이었다. 내가 찾아가자 매우 반색했다.

"뱀파이어 공!"

"폐하."

"대체 왜 날 밖에 대기하게 한 건가? 듣자니 도시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네.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폐하, 그것 때문에 폐하를 도시 밖에 계셔달라 부탁드린 것입니다. 제 청을 들어주셔서 다행입니다."

"나야 자네를 믿으니 말이야. 대체 무슨 사정인지 설명 좀 해보게. 답답해서 죽겠군. 혹여나 그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네? 그녀?"

어쭈? 이놈 봐라? 언제 엘프 여왕과 그리 가까워진 거지? 내 물음에 레그너 3세는 당황해서 헛기침을 한다.

"크헉! 큼! 커음!"

"폐하, 여왕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싸움은 구혼자들끼리 벌어졌으니까요. 무슨 일인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계책을 차례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계획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말해줬다.

"마레크는 결국 에버송 밖으로 도주에 성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격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 그러니 길목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군대와 함께 습격해서 마레크를 붙잡으십시오. 폐하께서 이름을 떨칠 절호의 기회입니다."

"세상에······!"

내 모든 계획을 들은 레그너 3세는 전율했다.

"그 투자계획부터 시작해서 결국 패퇴한 마레크를 짐이 붙잡는 일까지······ 모두 계획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 애초에 그럴 게 아니었으면 시작도 안 했다. 마레크 놈은 분명 대단한 강자긴 하지만 약해진 상태라면 레그너 3세도 해볼 만하다.

그가 이번 사태의 주역을 당당히 쓰러뜨린다면 이어질 평가는 말해 무엇할까?

"물론입니다. 폐하."

"두, 두렵구나. 어디까지 내다봤던 건가 대체···? 그 심계에··· 감히 자네와 척을 질 생각도 못하겠어."

"폐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폐하의 친구입니다. 일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친우라고."

레그너 3세는 마레크와 시비가 붙었을 때 단호한 태도로 나를 친우라 칭했다. 그게 내가 그를 어찌 대해야 할지 정하게 만들었다.

"저는 친구로 여기는 자를 버리지 않습니다. 잘 되길 바랄 뿐이지요."

"···뱀파이어 공!"

"폐하, 아직 감정적으로 되긴 이릅니다. 이제부터 가까운 람 언덕으로 향하십시오. 람 언덕은 엘프 왕국에서 다크 엘프 왕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니 마레크도 그쪽으로 도주할 것입니다."

"알겠네!"

"폐하, 마레크는 강자입니다. 승리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소 우려를 표하며 묻자 레그너 3세는 호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그 귀쟁이 새끼의 귀를 다 뽑아버릴 테니. 짐도 스스로 자부심이 있는 전사라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폐하."

나는 게임에서 알고 있던 마레크의 약점과 공략법을 모조리 레그너 3세에게 전수해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이제 꼬마 왕이라고 모욕받았던 남자가 복수와 함께 영웅이 될 시간이 왔다. 레그너 3세가 외쳤다.

"전군! 람 언덕으로 이동한다!"

그러자 철갑을 두른 드워프 전사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왕 중의 왕! 레그너 3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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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드워프가 부리고 돈은 뱀파이어가(2)

당연한 얘기지만 나도 람 언덕으로 드워프 군대를 따라갔다.

'이런 개꿀잼 이벤트를 놓칠 수는 없지.'

150여 명의 중무장한 드워프 전사들이 자신들의 왕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람 언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언덕의 공제선 너머로 몸을 숨기고 매복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갔다. 주변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마레크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다행히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수십여 명의 다크 엘프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격전을 치른 탓에 꼴이 다 엉망이었다. 갑옷이 깨지고 옷이 너덜너덜했으며 피투성이가 아닌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미 주변이 어두웠지만 횃불을 들고 있는 자는 없다. 엘프나 드워프나 모두 적외선 시야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님! 여기만 넘어가면 놈들이 쫓아오기 힘들 겁니다! 힘을 내십시오!"

"공작님께서 많이 다치셨다! 조심히 모셔라!"

다크 엘프들이 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마레크 놈은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걸음을 절뚝이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고 해도 지옥 한가운데서 탈출했으니 저럴 수밖에. 솔직히 용케 도망 나왔네 싶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곧장 박살 났다. 레그너 3세가 언덕 위로 몸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용맹한 전사들이여! 일어나라! 쥐새끼들이 우리 그물망 안으로 들어왔다!"

그 외침과 함께 공제선 뒤에 매복해 있던 드워프들이 몸을 드러냈다. 드워프들이 든 폴암이 일제히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일어났다.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반면 마레크의 부하들은 서른 명이 안 됐으니 병력의 차이가 막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나타난 드워프 무리에 다크 엘프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런 비열한 것들!"

"매복이다!"

다크 엘프들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지만 드워프들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레그너 3세는 쌍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서 준엄하게 외쳤다.

"마레크! 이 사악한 자여! 수많은 이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는 이렇게 도망칠 수 있다고 믿었더냐! 악적이 달아나는 건 짐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자 잠시 멍하게 있던 마레크가 곧 실성한 듯 웃어댔다.

"크하하하하! 그래, 이거였어! 네놈이었구나! 이 난쟁이! 네놈이 다 꾸민 거였다! 그 창녀 같은 여왕에게 넋이 나가서 날 함정에 빠뜨렸구나! 너 같은 놈에게 지혜가 있을 리가 없고, 설마 여왕이 사주한 건가!"

그 말에 레그너 3세는 한심하다는 듯한 기색이 됐다.

"참으로 못난 꼴이로군. 자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존엄하고 명예로운 여인을 모욕하다니. 그녀는 얼마 전까지 네놈이 청혼하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닥쳐라! 이제 알겠다! 그 더러운 창녀가 엘프의 피를 더럽히려고, 처음부터 네놈이랑 붙어먹었던 거구나!"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군. 마레크. 그대는 품성은 그 지위와 힘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감히! 날 내려다보듯 말해? 이 마레크를! 드워프! 용기가 있다면 이 몸에게 맞서라. 그 많은 병사들 뒤에 숨지 말고!"

위기에 몰린 마레크는 결투를 제안해왔다.

그가 원하는 바는 간단했다. 자신이 이기면 이대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대신 지면 순순히 항복하겠다고.

사실 제 놈이 유리한 제안에 불과하다. 레그너 3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병력을 동원해 놈들을 일망타진하면 그만이니까. 그래서인지 왕을 보좌하는 드워프들이 결투를 말리고 있었다.

레그너 3세는 그들을 잠시 물리더니 수정구로 내게 연락을 해왔다.

-어찌하는 게 좋겠나?

-안전하게 가시려면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레크와 같은 강자를 결투로 쓰러뜨린다면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더군다나 마레크는 지치고 부상을 입어 유리한 형국이다.

-제가 알려드린 약점과 공략법을 유념하시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켜보면서 조언을 해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도전해 보십시오.

-음···, 알겠네. 좋아. 해보지.

레그너 3세는 어깨 위의 망토를 풀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마레크가 들고 있던 엘프식 양손 세이버를 들고 해죽 웃었다.

"이 몸이 지쳤다고 승산을 점쳤다면, 심한 착각이라고 해주마. 땅딸보, 아직 네놈 같은 비열한 드워프의 목을 칠 기력은 충분하다."

무례한 도발을 서슴지 않는 마레크를 보며 레그너 3세는 묵묵부답이었다. 저 진중한 드워프의 성격상 저런 태도는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렌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서로 말다툼을 하면 화가 나는 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법칙이었다. 나는 즉각 오더를 내렸다.

-폐하, 이리 대꾸하십시오.

황급히 할 말을 알려주자 레그너 3세가 당혹해했다.

-정말 그리 말해도 되겠는가?

-어서!

-···알겠네.

레그너 3세는 도끼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참, 아까··· 오는 길에 다렌을 봤다."

"뭐? 정말이냐! 드워프!"

"그렇다. 네놈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

"뭐라 했냐! 어서 말해라!"

마레크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범의 얘기가 나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레그너 3세가 다소 난처하다는 말투로 답했다.

"그 뭐라고 했냐면······ 네 금화 존나 달더라, 꺼억··· 이었나?"

익숙하지 않은 도발은 어색함을 동반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

설마 고상한 레그너 3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던 마레크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는 곧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른 듯 폭발했다.

"이놈! 감히!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딴 망발을!"

레그너 3세는 애초에 다렌을 만난 적도 없고, 그저 자신을 농락하려고 허튼소리를 했다고 여긴 것이다.

격분한 마레크는 양손 세이버를 꼬나 들고 돌격했다.

"죽여버리겠다! 이 새끼!"

마레크의 공격은 중요한 특징이 있다. 한 번의 공격이 3단계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처음 1단계는 속임수다. 현란하게 검을 휘둘러 상대의 대응을 유도해 빈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2단계에서 진짜 공격을 날려 치명상을 입힌다.

마지막 3단계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안전하게 뒤로 빠지며 펄스 엣지(False Edge)로 상대의 몸에서 돌출된 손목 같은 부위를 베는 것이다.

즉, 속임수→진짜 공격→안전거리로 빠지며 잔공격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딱 지 성격에 어울리는 비열한 방법이지.'

마레크는 그 운용을 너무 완벽하게 해서 처음 겪는 자라면 꼼짝없이 당하곤 한다. 하지만, 레그너 3세에게 이미 해법을 알려줬다.

과연 레그너 3세는 훌륭한 전사답게 방법만 알자 제대로 응용했다. 처음의 속임수에 휘말리지 않고, 두 번째 진짜 공격을 도끼로 막아냈다.

수가 막히자 마레크는 낭패한 얼굴로 뒤로 빠지며 펄스 엣지로 비열한 손목 공격을 해왔다. 마치 뱀의 공격처럼 은밀하고 교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알고 있던 레그너 3세는 도끼를 든 손목을 올려 그걸 피했다. 그리고 올렸던 도끼를 그대로 앞으로 내던졌다.

부웅!

도끼가 무서운 파공음과 함께 회전해 날아가더니 마레크의 손목을 강타했다.

카앙!

마레크의 검은색 건틀렛이 깨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도끼날은 반 이상 박혀서 마레크의 한쪽 손이 삽시간에 무력화됐다.

'됐다!'

싸움이 아주 유리해졌다. 마레크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네놈? 어떻게 파훼법을···?"

마치 겪어본 것처럼 대응하는 모습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한데 레그너 3세는 거기에 대한 대답 대신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아, 맞아. 이런 말도 있었다. 마레크, 너는 도구이자 발판이었다고. 제법 튼튼하고 쓸 만하다고 했나?"

"이 자식이 아직도 그 소리인가!"

마레크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 거의 기절할 지경인 것 같았다. 상대가 끝까지 자신을 농락하며 진지하게 싸우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사실 그게 아닌데 말이지.'

원래 레그너 3세가 알려준 건 내 기준이라면 속사포처럼 그 자리에서 바로 쏟아냈어야 했던 거다.

하지만 레그너 3세에겐 버거웠던지 싸우다 중간중간 말하는 거다. 좀 그만둘 법도 한데 쓸데없이 성실한 성정 때문에 어떻게든 알려준 대사를 다 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이제 이성마저 놔버린 마레크가 크게 다친 왼손도 개의치 않고 다시 돌격해 온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아는 공격법이라는 것.

'굴름스 갬빗이군.'

저 기술은 마레크답게 페이크로 시작하는데 이후에 결정적인 순간 검끝이 12개로 분화하는 게 특징이다.

다크 엘프식 체스에서 초수를 놓는 자리가 12가지라, 거기서 딴 이름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자들을 학살하고 대응법이 없는 절초였다. 왜냐하면 저 공격은 본 놈들은 다 죽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아앙!

레그너 3세는 현란하고 요사스럽게 분화한 12개의 검 진짜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그리고 곧장 반격까지 이어갔다.

빠각!

둔탁한 도끼의 넓은 면에 내리 찍힌 마레크가 피를 뿜으며 고개가 뒤로 꺾이고 있었다. 옥수수 떨리듯 허공으로 날아오른 이빨들은 덤이었다.

털썩.

그대로 마레크는 대자로 뻗어버렸다. 흰자위가 드러나고 입에는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지켜보던 드워프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병장기를 흔들어댔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반면 다크 엘프들은 절망에 어린 표정으로 들고 있던 무기를 버렸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레그너 3세는 쓰러진 마레크에게 가 무언가 말했다. 나는 뱀파이어의 놀라운 청력 덕에 들을 수 있었다.

"다 못 말했으니 누워서 듣도록. 다렌이 말하길 너는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도구일 거라고 했다. 맞아, 놔주지 않겠다고 했지. 끝까지 비지니스 파트너로서 예우하겠다고 하더군."

거기까지 말한 레그너 3세는 내 오더를 다 완수했다는 듯 홀가분한 한숨을 내쉬더니 도끼를 번쩍 들어 올렸다.

"폐하! 만세!"

"폐하! 만세!"

그는 몰려든 드워프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지켜보던 나도 감동해서는 기립박수를 쳤다.

뭐랄까, 방금 전의 레그너 3세는 가히 이 소렌의 아바타와 같은 모습이었다. 내 언변과 전투 노하우가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었으니까.

'빛나는 승리입니다. 폐하. 오늘 폐하를 장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을 겁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 레그너 3세는 비밀의 방에서 망상에 빠져 있는 찐따였다.

한데 그런 그가 마레크를 쓰러뜨리고 에버송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대로라면 엘프 여왕의 호의를 사는 건 따놓은 당상.

뭐랄까? 열심히 육성한 캐릭터가 빛을 보는 기분이랄까?

"잘하셨습니다! 아주 잘!"

마레크도 잡혔겠다 덕분에 나도 빼돌린 거액을 뒤탈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잘못은 마레크가 한 거고 그 많은 돈은 영영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다렌은 자신의 이름 한 줄을 남기고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 * *

끌려온 마레크는 분노한 투자자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자리에서 맞아 죽지 않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돈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혹한 심문으로 투자금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찾으려 했지만, 마레크도 모르는데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결국 투자자들은 마레크를 붙잡고 그의 가문에 몸값을 요구하기로 했다. 마치 전쟁 포로처럼 말이다.

당연히 다크 엘프의 명문가인 마레크 가문은 발끈했다. 당장 공작을 내놓지 않으면 피를 볼 거라는 망발을 뱉었고, 이에 투자자들이 단체로 발끈했다.

투자자들은 독기가 잔뜩 오른 데다가 모두 한 가닥 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이 똘똘 뭉쳐서 압박하자 결국 마레크 가문도 손을 들고 말았다.

이후에는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마레크 가문은 최소 비용으로 공작을 되찾아 가려 했고, 투자자들은 엄청난 손실을 약간이라도 만회하려 했다.

의견 충돌이 크게 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에 아마 협상은 몇 달은 더 걸릴 듯했다.

여기서 엘프 여왕은 에버송과 이번 일은 무관하다며 발을 뺐다. 다크 엘프의 왕도 거기에 호응했다. 정권을 쥐고 흔들었던 마레크의 실각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투자자들과 마레크 가문의 문제로 국한됐다.

사라진 다렌을 찾으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지만 그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다신 보이지 않았다.

가을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러는 사이 놀라운 소식이 에버송을 격동시켰다.

그건 바로 엘프 여왕이 임신했다는 것이다.

구혼자들이 잔뜩 몰려든 상태에서 갑자기 임신이라?

사람들은 경악했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요?"

"아니, 대체! 짐작도 안 가는구만!"

"마레크랑 구혼자들이 그놈의 프로젝트로 들썩이는 동안 여왕의 침소에 숨어든 영리한 자가 있었군!"

많은 사람들이 괴이한 사업에 휘말려 피를 봤지만, 위대한 승리자가 하나 나온 것이다.

나는 즉각 레그너 3세를 찾아갔다.

"폐하!"

한데 어째서인지 레그너 3세가 눈을 피하더니 도망가는 것이었다.

"지금은 할 말이 없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 먼저 올라간다더니! 저 새끼가 저거 내가 좆뺑이 칠 때 임신 코인을 타?

부들부들.

재주는 드워프가 구르고 돈은 뱀파이어가 먹는 줄 알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이 난리통의 최대 승자는 한 순정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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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드워프가 부리고 돈은 뱀파이어가(3)

* * *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레그너 3세가 엘프 여왕의 마음을 어떻게 얻은 건지.

열심히 도망가다 결국 붙잡힌 레그너 3세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볼을 긁적이더니 하나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네의 도움이 가장 컸지. 구혼자들이 세계수에 열광한 탓에 여왕을 향한 관심을 줄어들었어. 그 틈에 여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네."

천제관측용 망원경이 좋은 핑계가 됐다고 한다. 둘은 밤늦게까지 별을 보며 대화를 했다고.

"짐과 그녀는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공감이 가는 게 많았지. 그리고 별을 보며 서로의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네."

레그너 3세의 평가에 의하면 내가 언급했던 것과 달리 여왕은 꽤 낭만적이고, 소녀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였단다.

'게임에서 보던 외면과는 다르구나.'

하긴 게임 속 정보로는 한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데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걸 레그너 3세는 본 것이다.

"훌륭하십니다. 폐하. 그런데 애는 대체 언제 생긴 겁니까?"

"크흠··· 그게 말일세. 어느 날 별빛이 찬란한 밤이었네.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보냈어. 한데도 작은 어색함도 없었지. 그러다 어느 순간 약속한 것처럼 서로 눈이 마주쳤네."

레그너 3세의 그 눈빛을 본 순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게 그런 경우더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네. 그렇게 여왕의 옷을 벗길 때도 그녀는 수줍고, 행복한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있더군."

"아, 그러십니까···."

"짐의 인생에서 그 정도 기쁨은 처음이었다네! 그저 바라만 보던 별과 같은 존재가, 짐에게 깊은 애정으로 자신의 모든 걸 맡기는 모습이란!"

"······."

나름대로 아름다운 얘기였다. 하지만 듣는 놈이 소인배인 게 문제였다. 슬슬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솔직히 부러웠다. 너무, 부러웠다.

"그날 밤, 짐이 두 눈으로 본 아름다움은 어떠한 창의적 표현으로도 설명하지 못할···!"

"됐습니다. 더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말을 끊을 적당한 핑계가 있었다. 폐하의 무용담에 흥미가 돋는 게 사실이지만, 사적인 영역이니 듣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레그너 3세는 감탄한 기색이었다.

"자네는 참으로 예절이 바르군. 짐이 어리석어 그날의 기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별없이 입을 놀릴 뻔했네."

아니, 그냥 속이 좁은 거였다. 그런데 그때 손바닥이 다시 꼬집듯 아팠다. 혼자 망상에 빠져 있는 레그너 3세를 내버려두고 슬쩍 보니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 더 듣고 싶으셨구나.'

성녀께선 드워프 왕과 엘프 여왕의 로맨스에 관심이 지대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말을 끊은 것에 적극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림없습니다."

낙인이 있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말했다. 그러자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이 밀려오더니 왼손의 푸른빛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음? 갑자기 무슨 말인가?"

레그너 3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아무튼, 결국 제가 구혼자들의 관심을 돌린 게 큰 도움이 됐단 소리군요?"

"맞네. 심지어 가장 위협적이었던 마레크까지 몰락시켰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나. 이보게, 뱀파이어 공."

레그너 3세가 무척 진지한 목소리였다.

"네, 폐하."

"드워프가 엘프와 맺어졌네. 천지간에 이런 기묘한 조화가 일어난 것은 자네의 계책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일세. 짐이 이 일에 크게 보답해야 도리에 맞겠는데,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사실 이 일의 대가로 바라는 바가 두 가지 있었다.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오, 어서 말해보게."

"첫 번째는 스킨크 부족과 방위조약을 맺어주십시오."

쉽게 말해 가장 강한 수준의 동맹을 맺어달라는 것으로, 스킨크가 침공 당하면 드워프도 자동으로 참전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이것은 막중한 일이라 레그너 3세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왕이 뜻을 가지고 추진하다면 이룰 수 있을 터.

"방위조약이라···."

레그너 3세도 신중하게 이것저것 고민해 보는 기색이었다. 한참 생각하더니 그가 물어왔다.

"스킨크들이 자네에게 그리 소중한 건가? 자네가 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건 알고 있네. 그렇다고 직접 통치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내가 통치하고 안 하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곱 봉우리의 스킨크들은 일종의 시드머니라서 그렇다. 앞으로 그들은 이 행성 전체에 스킨크 어머니의 이름을 퍼뜨려갈 것이다. 떡상이 예정돼 있으니 반드시 보호해야 했다.

한데 일곱 봉우리에는 고블린이나 오크 같이 악랄한 놈들이 너무 많다. 드워프 인부들을 인계철선처럼 박아 두긴 했어도 부족했다.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고 그게 방위조약이다.

물론 이런 건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네, 중요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음··· 알겠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방위조약을 성사시켜 보겠네."

"감사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처리되자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그너 3세는 신하들과 논의해 보겠다고 했지만, 별문제 없을 거다. 스톤헤븐에선 왕권이 막강하니까.

"참, 두 가지라 했지? 또 다른 부탁은 무엇인가?"

"신전 하나만 근사한 거로 지어주십시오."

"건축인가? 그거라면 어렵지 않아. 드워프의 주특기라네."

하지만 내가 부탁하는 적당한 규모의 신전이 아니다.

뱀파이어 성녀의 위엄을 세울 수 있도록 아주 근사한 건물을 부탁했으니,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똑같은 걸 요구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외형과 크기에 대해 설명하자 레그너 3세는 허허, 웃어댔다.

"엄청난 건축물을 지으려고 하는군."

실제로 파르테논 신전은 델로스 동맹의 금고에 상당한 타격을 줬을 정도로 자금이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기서 지으려고 하는 건 파르테논 신전의 위용과 독특한 아름다움이 분명 여러 종족들에게 큰 감탄을 끌어 낼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성녀의 위엄을 올리는 일. 신앙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다.

다만 워낙 큰 공사다 보니 드워프들이 부자라곤 해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던져보긴 했지만, 사실 나도 공짜로 해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이쪽도 적당히 공사비를 부담할 생각이 있었다. 다만 레그너 3세의 태도에 따라 그 부담하는 액수가 유동적일 테지만 말이다.

한데 레그너 3세는 이것에도 응했다.

"좋네. 자네가 말한 신전을 지어주지. 우리 건축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완공해 줄 걸세. 이 정도면 짐이 진 빚을 갚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나는 잠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싼 걸 공짜로?

"당연히 폐하께선 제게 아무 빚도 남지 않으실 겁니다. 이 소렌,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건데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다소 우려를 표하며,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드워프의에게 작은 근심을 표했다(물론 그렇다고 내 돈 한 푼이라도 내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자 레그너 3세가 답했는데, 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가 있었다.

"말해둘 게 있네."

이어진 얘기를 들은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짐과 그녀는 혼인할 걸세. 그리고 스톤헤븐과 에버송은 연합왕국을 이룰 거야."

두 왕국이 합친다고? 세상에, 살다살다 엘프와 드워프의 연합왕국은 또 처음 들어 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조합이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할 것이란 건.

즉, 이번에 그가 엘프 여왕과 맺어진 건 단순히 사모하는 여인을 얻은 걸로 그치지 않는다. 레그너 3세의 엄청난 정략적 승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내 무리한 요구도 팍팍 들어준 거군.'

연합왕국이 성공만 하면 그는 더욱 막대한 부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 * *

다르코 블라르 백작의 거처.

"미안하군···."

인간 왕국에는 '블라르 백작은 사과하지 않는다'란 격언이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자는 결코 남에게 숙일 필요가 없단 뜻이다.

뱀파이어 블라르 백작이 얼마나 유명한지 인간 사회의 격언에 등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상대는 헐벗은 채 이불로 몸을 반쯤 가리고 있는 새블릿 남작부인이었다.

새블릿 남작부인은 블라르 백작의 충직한 부하이자 광신도에 가깝게 그를 추종하는 이였다.

오래간 블라르 백작을 섬겨온 아름다운 뱀파이어 여성으로, 때때로 밤 시중까지 들곤 했다.

명목상 밤 시중이긴 해도 새블릿 남작부인에겐 행복한 일이었다. 그녀는 블라르 백작을 오래전부터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히 블라르 백작과 맺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종종 같이 밤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블라르 백작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 새블릿 남작부인은 차분하게 기다렸지만 아무런 요구조차 없었다.

그녀는 애가 탔다. 자신에게 질린 건지, 매력이 떨어진 건지, 번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주변에선 여전히 그녀가 뱀파이어 중에서도 빼어난 미인이란 평가뿐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매혹적인 둔부 덕에 과거 블라르 백작의 열정적인 시선을 많이 받기도 했다. 한데 언젠가부터 백작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그가 이상해진 건 오래전부터였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미녀를 품던 블라르 백작의 여성 편력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다.

지금 그의 곁을 지키는 여자라곤 새블릿 남작부인 단 한 명뿐이었다.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했다.

결국 고민 끝에 그녀는 주제넘지만 먼저 블라르 백작을 유혹하기 위해 나섰다. 아껴둔 옷을 입고 어렵게 구한 향료를 사용했다. 그리고 최대한 꾸미고 방으로 찾아갔다.

다행히도 블라르 백작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줬다. 하지만 잠자리보다는 밤새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새블릿 남작부인은 그게 불만이었고, 기어코 동침에 나섰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간단한 요약이 제일 정확했다. 맞다. 그냥 잘되지 않았다. 이에 블라르 백작은 처음으로 사과했다.

그 모습에 새블릿 남작부인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거의 반평생을 섬겨온 우상이 고개 숙인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미어졌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새블릿 남작부인은 자신이 뱀파이어라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 무너지는 표정을 본 건지 블라르 백작은 그녀의 작고 고운 손을 잡아줬다.

"네 잘못이 아니야."

"백작님···."

"지금은 혼자 있고 싶구나."

"···알겠어요."

새블릿 남작부인은 옷가지를 챙겨서 떠났다. 블라르 백작은 홀로 남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문뜩 옆에 있는 거울을 보니 그곳에는 생기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사내가 보였다.

한때 패기 넘치던 얼굴에는 그림자가 완연했다. 누구든 굴복시킬 수 있던 이 사내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약해 보였다.

블라르 백작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빈껍데기 같군···."

결국 뱀파이어라고 해도 세월은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인간들은 뱀파이어가 천년만년 살아가는 줄 알지만 실상은 달랐다. 세월이 그들을 죽였다. 블라르 백작의 욕정과 열망도 공허함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의 삶은 마치 난파선과 같이 언젠가부터 목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요즘 작은 위안이 되는 게 있었다.

바로 위대한 시인 R3의 새로운 시집이었다.

시집의 제목은 <생의 환희, 꿈꾸는 엘프의 숲>으로 불과 얼마 전에 출간됐다. 블라르 백작은 그것을 보고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한 번 꼭 뵙고 싶군. 이분은."

하지만 R3라는 뜻 모를 필명 외에는 단서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찾자면 시집에 엘프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었다.

블라르 백작은 R3가 어떤 인물일지 상상해봤다.

'틀림없이 이 감수성 넘치는 문체로 보건데 여성이겠지. 종족은 엘프고.'

그의 머릿속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숲에서 한 엘프 시인이 고상하게 글씨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시인 R3에게서 세월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지혜가 느껴진다. 만약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나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할수록 블라르 백작은 시집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어렴풋이 단서를 하나씩 잡아갔다. 딱히 무언가를 파헤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에 등장하는 자연의 묘사가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장소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방문했던 엘프의 도시 에버송이 떠올랐다.

'설마 시인께서는 에버송의 주민인가?'

그렇다면 한 번 꼭 찾아가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짜고짜 그러는 건 무례한 일이기에 블라르 백작은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안타깝군."

그때 창문에 까마귀가 한 마리 나타났다.

까악! 까아악!

블라르 백작이 손짓을 하자 창문이 열렸고 녀석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발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블라르 백작의 세작이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이렇게 온갖 지역에서 오는 첩보를 확인하는 건 블라르 백작의 주요한 업무였다.

"수고했다. 검은 친구여."

블라르 백작은 까마귀를 치하하며 발에 묶인 쪽지를 풀었다. 그러자 쪽지는 갑자기 커다란 두루마리로 변했다.

안에 담긴 정보는 매우 놀라웠다. 그것은 에버송에서 일어난 세계수 프로젝트라는 대단위 사기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사건의 경과를 읽어본 블라르 백작은 매우 감탄했다.

"맙소사, 세상에는 참으로 경탄할 만한 악당들이 많군···!"

한데 생각지도 못한 게 있었다. 사기극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마레크 공작이 자신도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모든 건 블라르 백작의 사주였다고 했던 것.

순간 블라르 백작은 혈압이 오르는 기분을 맛봤다.

'분명 지난번의 태양 교단 일과 같은 놈이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어떤 간악한 놈이 그의 이름을 팔며 사방팔방에서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블라르 백작은 노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잠깐?"

무언가 울화가 치미는 이 기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언데드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마치 지금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분노가 그에게 잃어버렸던 혈기를 돌려줬던 것이다.

'이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

블라르 백작은 결국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에버송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인 R3가 에버송의 주민으로 추정됐다. 또한 사칭범이 사고를 친 곳도 에버송이었다.

'엘프라······.'

블라르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힘 빠진 자신의 얼굴이 비추는 거울의 반대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젊은 날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쏘아보는 눈매, 그야말로 제왕의 상이었다. 블라르 백작은 홀린 듯 일어나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기울어져 있던 초상화를 똑바로 고쳤다.

"에버송으로 가야겠다."

참으로 오랜 세월 무력하게 성채에 박혀 있던 그가 무엇을 할지 결정했다. 동시에 잃어버렸던 활력이 몸에서 솟아났다.

어서 에버송으로 가고 싶었고 그는 필요한 것만 챙겨서 성을 나섰다. 중간에 부하들이 놀라서 행선지를 물었지만, 짧게 대꾸해주고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식어버린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다시 한번 모험이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성채의 정문을 나서자 차가운 초겨울의 바람이 불어왔다. 블라르 백작은 그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달을 보고 걸었다.

한데 그때 그의 앞에서 차원 관문이 열리며 공간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 셋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길쭉한 송곳니와 창백한 피부를 가진 오우거 뱀파이어였다. 그들 중 우두머리는 피부가 연푸른색이었고 머리에는 악마처럼 뿔이 돋아 있었다.

"블라르! 이 쥐새끼 같은 놈! 드디어 성에서 빠져나왔구나! 크하하하핫!"

오우거 뱀파이어 셋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모두 블라르 백작의 원수들로, 그가 자기 성을 떠나길 오래간 기다려왔다. 마침 부하도 없이 나오기에 이리 나선 것이다.

"네놈은 실수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이 사무친 원한을 갚을 수 있겠구나! 각오하라!"

오우거 뱀파이어 셋은 대단한 강자들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삼인조는 태양 교단의 특별관리목록에 올라가 있을 정도의 위험 인물들이었다. 한데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도 블라르 백작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적들이 달려드는 그 순간까지도 딴생각하다가 무기가 머리로 떨어지기 직전에야 상대를 쳐다봤다.

그와 함께 오우거 뱀파이어들의 팔다리가 일제히 터져나갔다.

퍼엉! 펑!

살점이 찢어지고 뼈가 박살나며 끈적하고 검은 피가 튀었다. 그들의 거대한 몸은 마치 망가진 장난감처럼 바닥을 굴렀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블라르 백작이 쳐다본 것만으로도 오우거 뱀파이어 셋은 팔다리를 잃고 굼벵이처럼 기어야했다.

"쿼어어어어어!"

"크으아아!"

"크아아아악!"

오우거 뱀파이어 셋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이 어찌나 끔찍하던지 원귀들조차 두려움에 떨며 도망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놈들을 내려다보는 블라르 백작의 표정은 무심했다.

"너희를 건방진 그 늙은이가 보낼 걸 알고 있다. 분명 뒤에서 충동질했겠지."

그 말에 오우거 뱀파이어의 우두머리가 악을 쓰며 답했다.

"감히 위대하신··· 크윽! 에인션트께 늙은이라 하다니! 무례한 놈!"

"흥, 가서 전해라. 이 블라르는 노인네들 변덕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네놈···!"

"뭣보다 관심이 없다. 지금 이 몸의 흥미를 끄는 건 그딴 게 아니다."

그 말과 함께 블라르 백작은 팔다리가 터져서 바둥대는 거구의 오우거 뱀파이어들을 지나쳤다.

간만에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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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1)

가을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그 끝 무렵까지, 구혼자들은 상실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많은 자들이 사기 사건에 휘말렸고 엘프 여왕은 임신했다. 처음 에버송으로 향하며 품었던 모든 기대가 실패로 끝나버린 것이다. 이미 여럿이 에버송을 떠났다.

남은 이들은 마레크 가문과 손해 배상 문제로 씨름하는 이들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놀라운 소식이 에버송을 뒤흔들었다.

바로 드워프 왕 레그너 3세가 엘프 여왕 에나노르 실버리프에게 정식으로 청혼했으며, 여왕이 수락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모두 여왕이 누구의 아이를 임신했던 건지 알게 됐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구혼자들은 저마다 모여 한탄을 터뜨렸다.

"키 작은 드워프에게 지다니. 비참하구려."

"여왕을 향한 내 사랑은 진심이었소! 중간에 투자에 넋이 나가긴 했지만···. 아무튼, 여왕이 그 드워프의 품에 안겼을 걸 떠올릴 때마다 심장에 칼이 박히는 느낌이오."

"대체 우리가 뭐가 부족하다고 난쟁이에 진 거란 말입니까?"

질투심을 나타내는 이가 많았지만 순순히 레그너 3세를 인정하는 이도 있었다.

"키를 가지고 그를 폄하하지 마십시오. 레그너 3세가 처음 나타났을 때를 잊었습니까?"

"맞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거인을 탄 영웅이었죠. 당시 그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와 그자의 기량 차이였던 건지도 모릅니다."

"마레크를 쓰러뜨린 게 레그너 3세라는 걸 잊지 마시오. 아무도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소이다."

그런 의견이 나오자 구혼자들 사이에서는 점점 레그너 3세를 인정하는 의견이 많아졌다.

"저는 그녀가 드워프 왕의 곁에서 보여줬던 미소는 구혼자들이 모인 파티에서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왕의 마음을 닫고 있던 빗장을 연 레그너 3세를 존경합니다."

"드워프와 엘프라니, 이상하지만 어쩐지 동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놀랄 만한 발표는 그다음이었다.

결혼으로 그치지 않고, 스톤헤븐과 에버송의 연합왕국이 탄생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점입가경이군!"

"앞으로 외교적 구도가 어떻게 변하겠소?"

"글쎄요, 다크 엘프 놈들이 에버송을 집어삼키려는 시도는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요."

구혼자들은 다 한 지역의 유력자이며 정치적인 인간들이다. 엘프 여왕을 향한 쓰라린 마음도 잠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어졌다.

* * *

에버송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갑작스러운 결혼과 연합왕국의 발표, 투자자들에 대한 마레크 가문의 보상 문제까지.

하지만 이제 나는 별 관심 없었다. 에버송에서 내 일은 이제 마무리 단계였으니까.

'지지든 볶든 알아서들 해라.'

마치 내 상태는 포만감으로 소파에 늘어져 있는 것과 비슷했다. 엄청난 재화를 챙긴 탓에 이후의 일에는 무관심해졌다.

'마지막 일만 끝내고 돌아가야지.'

드워프 왕과 했던 약속을 지켰다. 그 결과 레그너 3세는 자신이 동경하던 존재와 맺어졌다. 이후로 어떻게 될지는 오롯이 그에게 달린 일.

동화처럼 둘은 영원히 행복했습니다, 같은 전개야 없겠지만 레그너 3세라면 잘 해낼 거라 믿었다. 그는 굳센 남자였고, 현숙한 반려자까지 얻게 됐으니까.

그래서 오늘 밤 약속만 처리하면 곧장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퍼엉!

박쥐로 변신하고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파닥파닥!

열심히 날갯짓을 하자 버려진 유적이 보였다. 다 무너져가는 그곳에 내려앉아 뱀파이어로 돌아갔다. 그러자 곧 미성이 들려왔다.

"왔구나."

고개를 돌려 보니 두건을 쓰고 지팡이를 든 자가 보였다. 바로 엘프 공주 알테아 실버리프다.

엘프 왕국에서는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유폐됐던 동굴에서 탈출한 지 꽤 됐다. 현재 그녀가 머물던 동굴은 비었으나 워낙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탓에 들키지 않았다.

그래도 대비책이 필요해서 조만간 공주의 측근이었던 데이워커가 변신해서 머물 계획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여왕이 직접 동굴로 오지 않는 한 발각될 리 없지.'

아무튼, 그렇게 자유를 얻은 엘프 공주지만 나와는 정산할 게 남아서 다시 만나게 됐다.

"전하."

"이제 그렇게 부를 것 없다. 전하도 뭣도 아닌 존재니까. 나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다."

"음, 알겠습니다. 실버리프 님."

그 말에 실버리프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알테아라고 다정하게 불러다오. 내 첫 키스를 가져간 사내가 그리 쌀쌀맞게 구니 속상하구나."

실버리프가 미려한 콧대를 가까이 내밀었다. 달달한 향기가 났기에 슬쩍 뒤로 빠졌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딱딱하기는!"

이제부터 실버리프가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다. 게임에서 그녀는 자유를 갈구하다가 마레크의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원하던 자유를 찾았다. 과연 어떤 미래가 그녀에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빼어난 마법사니 알고 지내면 도움이 되려나?'

두고 볼 일이었다. 마법사는 유용하지만 그만큼의 위험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렌, 이걸 받아다오."

실버리프가 내민 건 그녀의 피가 든 수정병이었다. 안에는 데이워커의 인자가 들어있었다. 이것을 제대로 연구하면 분명 나도 태양이란 증오스러운 존재에게 적응할 날이 올 터. 이번 여정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고맙습니다."

"그 병 안에 내 정기가 녹아 있다. 소중히 해다오."

데이워커의 인자는 단순히 채혈한 피가 아니다. 그런 거였으면 이 고생도 안 했다. 그냥 길 가던 데이워커 하나 잡아다 피를 뽑아도 되니까.

뱀파이어가 권속을 만들 때 뱀파이어 인자를 피에 섞듯, 이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돌연변이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제작에는 두 달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야 받게 됐다. 손바닥에 피를 내고 악수를 하는 뱀파이어간의 약속을 했기에 믿을 만했다.

실버리프는 섀도우타운 같은 곳에 가고 싶어 했기에 약속을 어길 리가 없었다. 그녀는 독야청청 홀로 지내는 것에 진력이 난 여자였으니까.

"알겠습니다."

"고맙구나. 참, 그런데 이게 안 없어진다."

실버리프는 왼손의 낙인을 내게 보여줬다.

"음···?"

그건 나도 의외였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성녀의 낙인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벌써 몇 달이나 됐는데? 예상 밖의 일이었다.

"희한하군요. 제가 성녀께 기도해 보겠습니다. 해가 되진 않을 테니 일단 기다려 보시죠."

임시로 부여받은 낙인은 오래가지 않는다. 단발성이고, 이후에는 다신 낙인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왜?'

성녀께 무슨 뜻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가? 일단은 그럼 지켜보겠다. 나중에 문제가 될 거 같으면 연락하겠다."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실버리프와 작별했다. 그녀는 커다란 새로 변해서 저 멀리 날아갔다.

실버리프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서 머무는지는 모른다. 그저 한 가지, 간절히 원하는 삶을 만끽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원래라면 비참하게 죽었을 존재가 웃으며 떠나는 모습은, 지켜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 * *

"돌아갈까?"

실버리프가와 헤어진 뒤 나는 고즈넉한 고성을 한가롭게 걸었다. 사실 뱀파이어니 고즈넉하게 느끼는 거지, 인간이었으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소름 돋는 풍경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밤의 존재. 어둠은 익숙하고 포근한 것이었다. 적어도 내 감지가 닿는 범위 내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걷던 중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기 젊은이, 잘 됐구만. 잠깐, 나 좀 보세나."

굵직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음성이 날 불러왔다. 별다른 악의는 없었지만 순간 소름이 쫘악 돋았다.

'뭐, 뭐야?'

분명 주변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내겐 아단의 신체개조 4단계인 '강화된 감각'이 있다. 그 덕에 일대가 레이더로 훑는 것처럼 감지됐다.

어느 정도냐면 저 나무 둥치에 잠든 다람쥐나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일대의 사냥감을 찾는 부엉이까지. 모든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즉, 어쭙잖은 실력으로 과신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정체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들리지 않는가? 젊은이?"

재차 물어오자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보지 않아도 알겠다. 가슴이 콱 눌리는 것 같은 게 압도적인 강자였다.

'달아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화로 풀어야 한다. 서둘러 몸을 돌리자 덩치 큰 사내가 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무언가 생각 중이라. 하하하, 그런데 누······?"

누구냐고 물으려고 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큰 키에 위풍당당한 체격, 카라를 세운 고급스러운 의복과 존재감을 과시하는 붉은 눈동자,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듯한 외형.

그자를 보자마자 비명이 터지지 않은 건, 오로지 지금껏 사선을 넘나든 내공 덕이었다.

'블라르 백작! 시팔! 블라르 백작이잖아? 여기 왜? 뭐지, 꿈인가?'

물론 마음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 내면의 심상을 그리면 뭉크의 절규가 딱일 정도였다.

"아,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랐나 보구만. 나는 다르코 블라르 백작이라고 하네, 젊은이여. 갑작스럽지만 동족을 만나서 반갑군."

숲에 드리워진 밤 그림자를 헤치고 장엄한 사내가 가까이 왔다. 나는 그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솔직히 지금 무릎이 땅에 닿지 않은 것만으로 진이 빠지고 있었다.

대신 고개만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어둠의 숲을 다스리는 분이시군요. 그 존귀하고 높으신 이름은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백작님."

내 인사에 블라르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허허, 예절이 바른 젊은이군. 요즘 젊은이들은 나만 보면 밉상인 건지 고개를 땅에 박고 눈을 마주쳐 주지 않는다네. 말도 하기 싫은지 대답도 짧게 하고 말이야. 자네는 좀 달라서 좋군."

아니, 그게 무서워서 그런 거겠지. 이 눈치 없는 양반아.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설마 지금껏 벌인 일이 들킨 건가? 그래서 웃는 얼굴로 내 뼈와 살을 분리하러 온 거고? 이 소렌이 드디어 순살치킨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는 건가?

'아니, 그래도 이 정도의 거물이 날 직접 잡으러 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그간 블라르의 이름을 많이 팔았으니 사달이 날 줄은 알았다.

하지만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 여겨 여유만만이었는데, 블라르 본인이 나타날 줄이야. 이건 상정한 범위가 아니었다.

'이런 거물이 움직인 거면 나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도?'

머릿속이 점점 혼란해지고 공포로 숨이 턱턱 막혔다. 지금처럼 내가 뱀파이어라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렇게 감사한 적은 없다. 안 그랬으면 벌써 가슴팍에서 북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을 테니까.

"별 볼 일 없는 자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귀하신 분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조심스럽게 묻자 뜻밖의 얘기가 돌아왔다.

"에버송으로 가고자 하는데 길을 방향을 잃어서 말일세.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겠나? 길 좀 물어보러 불렀다네."

그 말에 나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내 입장에선 그간 이름을 팔아먹던 본인이 나타나서 개같이 놀란 상황이지만, 저쪽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길 가다 동족이 있기에 뭐 좀 물어보려는 걸 수도 있다.'

애초에 블라르 백작은 나에 대해 모른다. 게다가 자기 이름을 팔아먹은 자가 뱀파이어인 것도 모를 테고. 에버송으로 향한다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었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나. 일단 에버송 위치만 알려주고 튀자.'

나는 블라르에게 성심성의껏 에버송으로 가는 길을 알려줬다. 그러자 블라르 백작은 만족했다는 듯 끄덕이며 답했다.

"과연, 그렇군. 하면 앞장서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길 안내를 지시하는 블라르 백작. 군시절 정자를 들어서 옮기라고 했던 연대장 새끼도 이 정도는 아니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작님, 저기 그게···, 저는 할 일이."

그 말을 듣자마자 싸늘한 안색으로 물어오는 백작.

"설마, 거절하는 건가?"

숨이 턱 막혔다. 한 가지를 깨달은 것이다. 블라르 백작은 평생 거절당해 본 적이 없는 남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절한 자는 다 죽였으니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즉, 살고 싶으면 얌전히 안내해야 했다. 나는 바로 태세전환에 들어갔다.

"하핫! 설마 그릴 리가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백작님! 돈키호테를 모시는 산초처럼 충직하게."

"산초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네랑 잘 어울리는 것 같군. 앞으로 산초라고 부르겠네."

"아, 그러시지요······."

같이 에버송으로 향하며 블라르 백작이 다시 물어왔다.

"그나저나 산초 자네는 제법 건실한 젊은이인가 보군. 에버송은 엘프의 도시라 우리 같은 자들에게 민감하네. 그런 곳에서 머물기 쉽지 않을 텐데."

"백작님, 저는 딱히 에버송에 거처가 있지 않습니다."

"크하핫, 겸손 떨 거 없네. 자네 몸에서 엘프 냄새가 풀풀 나는데 어찌 모르겠나?"

구라가 사전에 차단당했다.

"산초, 도시에 거처도 마련했겠지? 그리로 가세. 오늘은 거기서 머물러야겠군."

이제는 남의 집에 들어와 눕겠다고 선언한 블라르 백작. 나는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

"거처라니요. 길바닥에 눕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백작님 같이 존귀한 분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

그 말에 블라르 백작은 겸손한 태도로 웃어 보였다.

"근심할 것 없네. 나는 객을 위해 자리를 내주는 주인장에게 감히 허물을 물을 생각이 없으니. 아니면 설마······."

갑자기 다시 블라르 백작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두 눈이 맹수처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거처가 없나? 자네 혹시 무언가 내게 거짓말이라고 하고 있는가?"

이제는 정말 에버송에 거처가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다고 이 전설적인 뱀파이어를 엘프의 궁전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그야말로 난리가 날 터.

즉, 블라르 백작이 머물만 하면서도 에버송 내에서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아니면 나는 이 자리에서 블라르 백작에게 팔다리가 뜯어져, 그가 자랑하는 '굼벵이 형벌'에 처할 확률이 높았다.

'생각해라, 생각해.'

빠르게 두뇌 풀가동에 들어간 나는 마침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맞아. 엘프 공주의 동굴!'

그곳이라면 시설도 좋고, 에버송에 가서도 들키지 않는다. 심지어 공실이니 딱 좋았다. 나는 안도하며 블라르 백작에게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블라르 백작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손을 싹싹 비비며 말하자 블라르는 흡족해했다.

"역시 좋은 젊은이었어. 어서 가자고. 산초."

나도 같이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 죽을 맛이었다.

'좆됐다. 진짜.'

그렇게 적과의 동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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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2)

* * *

사실 블라르 백작은 소렌을 만나기 전, 진작 에버송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의 방문에 에버송 일대를 담당하고 있는 세작이 놀라고 감동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이 미천한 종 페린이 전심으로 방문을 환영합니다."

"수고가 많군."

온갖 왕국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는 블라르 백작의 정보망은 에버송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은 백작에게 포섭된 페린이란 엘프가 담당했다. 그는 지주 계급의 부유한 엘프로 뱀파이어의 삶을 바라고 있었다.

"백작님, 무언가 급박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직접 오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조사할 게 있다."

"분부만 하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우선 얼마 전 에버송에서 있었던 투자 사기 사건에 알고 싶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워낙 특이한 경우라 제법 소상히 조사했습니다. 자료를 정리해서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이후 블라르 백작은 페린의 자료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리고 잠적한 다렌이 이번 일의 핵심임을 알게 됐다.

"다렌은 못 찾았나?"

"···면목이 없습니다. 마치 아침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에버송의 누구도 다렌을 본 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블라르 백작은 나름의 통찰력과 경험으로 한 가지 가설을 내놨다.

"어쩌면 변신 주문이었을 수도 있겠군."

"헛···? 과연!"

"그렇게 종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라면 의심해 볼 부분이다. 누군가 대단히 강력한 변신 주문으로 다렌의 행세를 했고, 용도가 다하자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에버송의 엘프 중에는 수준 높은 마법사가 많습니다. 또한 몰려든 구혼자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는데······."

"속단하지 마라. 세상에는 그런 심리를 파고드는 사기꾼이 많으니까.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고등한 수법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만약 다렌이 변신으로 이뤄진 가짜였다면, 이제 와서 찾기는 힘들겠다고 블라르는 생각했다. 대신 그는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하면 이번 일에서 누가 가장 이득을 봤나?'

답은 명확했다. 바로 드워프 왕 레그너 3세였다. 그는 엘프 여왕을 얻은 데다가 마레크를 결투에서 물리쳐서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득을 봤으면 범인일 확률이 높다는 게 블라르 백작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페린에게 레그너 3세에 대해 더욱 자세히 조사하라고 일렀다.

"명 받들겠습니다!"

조직의 수장이 방문한 탓에 페린은 큰 열의를 갖고 임했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드워프 전사들은 과묵해서 자기 왕에 관한 얘기는 일절 입에 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작은 틈새는 있기 마련. 드워프 왕의 친위대에서 포섭된 자가 나왔다. 최근 에버송의 도박판에서 크게 빚을 지고 처지가 곤궁해진 자였다.

부유한 페린은 빚을 갚아주며 그 드워프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페린의 연기는 완벽했고 그저 선의로 드워프를 도운 것으로만 보였다.

심지어 그는 다시 도박판에 뛰어들려는 드워프를 필사적으로 말려서 더 큰 신의를 쌓게 됐다.

이후에는 쉬웠다.

페린은 소렌이라는 뱀파이어가 드워프 왕의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곧 취합한 정보를 가지고 블라르 백작에게 보고했다. 그의 상관은 큰 흥미를 보였다.

"드워프 왕에게 뱀파이어가? 희한한 일이군. 그 땅을 파고 사는 놈들은 뱀파이어라면 질색하곤 하는데."

"저도 처음엔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만 친위대원의 말에 의하면 에버송까지의 여정에서 왕과 같은 마차를 탈 정도였다고 합니다."

블라르 백작은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 왕의 마차를 탈 정도로 친밀한 뱀파이어라? 너무나 수상쩍었다.

"심지어 여정 중에 거인과의 싸움에서 소렌이란 뱀파이어가 괴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뭔가 있군. 더 자세히 조사해 보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스톤헤븐에서 태양 교단이 축출된 일에도 뱀파이어가 관여되어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드라크린이란 드워프가 자기 사촌이 태양 교단과 유착한 걸 폭로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드라크린은 자신을 도운 이가 블라르 백작이라 밝혔다.

'드워프 왕과 친밀한 소렌이란 뱀파이어와, 드라크린이란 자를 도왔다는 뱀파이어. 같은 인물일 확률이 높겠지.'

왜냐하면 둘 다 인간족 뱀파이어란 점 때문이다. 스톤헤븐에 사는 인간도 적은데, 인간 뱀파이어가 둘이나 있을 확률은 몹시 낮았다.

이후 집중적인 조사 덕에 다양한 행적이 드러났다.

섀도우타운에서 벌어진 소렌과 케일런의 재판 결투도 그중 하나였다. 블라르 백작은 솔직히 감탄했다.

"대단한 놈이로군."

케일런은 그도 알고 있는 강자였다. 그런데 해골로 만들어 버리다니!

취합한 정보에 의하면 소렌은 알려지지 않은 뱀파이어에 불과했다. 한데 이름난 중견인 케일런을 박살낸 건 블라르 백작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는 건가?'

소렌에 대한 블라르 백작의 흥미와 관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이미 자신을 사칭했던 것으로 인한 분노는 희미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계속 소렌의 행적을 역추적하던 도중 일곱 봉우리에서 일어났던 장대한 사건을 알게 됐다.

고대신 룩스 움브라의 조각이 부활한 일이다. 워낙 큰 규모로 일어났던 데다가 스킨크는 드워프보다 입이 쌌다. 세작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애 구슬리듯 달콤한 걸 주면 술술 불었다고 한다.

"백작님, 그 소렌이란 작자가 핏빛 새벽의 여신을 섬기는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였나. 어쩐지 범상치 않더라니."

이후 룩스 움브라에게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태양 교단이 난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헛수고만 했고, 모든 영광은 소렌이 차지했단다.

결국 태양 교단은 돌아갔지만 한 명이 남았는데 발레나 공녀란 존재였다. 거기까지 듣던 블라르 백작은 검지를 세워 보고를 멈췄다.

"잠깐, 발레나 공녀?"

"네, 그렇습니다."

"인질로 남은 건가?"

"정황상 그런 듯한데 꽤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거 점점 확실해지는군."

블라르는 본인이 뒤집어쓴 누명을 차례로 조사해왔다. 그중 첫 번째는 어둠의 숲에서 자신이 오크를 부추겨 태양 교단을 공격한 일이다. 그 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봤는데, 당시 원정대에 발레나 공녀란 인물이 있었다는 걸 파악한 상태.

그 발레나 공녀가 또 여기 나타난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소렌이란 놈이 대체 어디서 뚝 떨어졌냐는 건데···. 일단 더 조사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다시 얼마간이 지나자 페린은 새로운 정보를 얻어왔다. 소렌이 네크로맨서 아단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는 것. 또한 아단의 골짜기는 현재 공사로 북적북적하다고 했다.

"공사?"

"네, 드워프들이 땅을 파내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스킨크들이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인부 몇을 구슬려서 이것저것 알아냈습니다. 아단이란 네크로맨서는 연구를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골짜기는 에레미나라 불리는 작은 뱀파이어가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렌이 매우 신뢰하는 자라는데, 물증은 없지만 권속인 것 같습니다."

"그 에레미나에 대해 파봐."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페린은 뭔가 그럴싸한 걸 물어왔다.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자신이 없나 보군. 하지만 우려하지 말도록.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큰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편히 말하게."

"네, 그 에레미나란 뱀파이어가 어쩌면 어둠의 숲 출신인지도 모르겠단 판단이 듭니다."

"근거는?"

페린은 에레미나의 용모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몹시 아름다운 걸 지적했다.

"그 정도로 빼어난 외모라면 수소문하기 편해지는 법입니다. 어둠의 숲에서 외적으로 매우 유사한 소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붉은 머리칼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주근깨까지 똑같더군요. 심지어 이름까지 에레미나였습니다."

"어둠의 숲에 있었던 에레미나에 대해 말해보도록."

"사냥꾼의 딸이라 했습니다. 근방에서 아이의 외모에 대해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몇 해만 지나면 지역의 영주가 첩실로 들일 거란 얘기도 있었다는군요. 하지만 오크가 마을을 습격한 이후 실종됐습니다."

페린은 어둠의 숲에 있던 사냥꾼의 딸 에레미나와 골짜기에 있는 어린 뱀파이어 에레미나가 용모가 매우 유사한 걸 근거로 동일인물이라 의심 중이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지라 보고에 망설였던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의 말대로 증거는 없다. 단지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우연히 이름이 같고, 연령대가 비슷하고, 외모의 특징까지 일치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봤다.

'낮아. 많이 낮지.'

블라르 백작은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도 위에 소렌의 동선을 그려봤다.

어둠의 숲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듯 나타났다. 그 뒤의 행방은 미혹의 산에서 드워프들의 스톤헤븐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이곳 에버송까지 닿았다.

'중간중간 수많은 사건을 일으키면서 말이야.'

이쯤 되자 블라르 백작은 확신하게 됐다. 그의 사칭범이 이동한 루트와 소렌의 루트가 완전히 겹쳤기 때문이다.

"재밌군. 아주 재밌어."

블라르 백작은 아주 오랜만에 흥미와 열정이 자신을 자극하는 걸 느꼈다.

주목할 만한 여러 사건들이 결국 그 소렌이란 뱀파이어를 중심으로 엮여 있었다. 블라르 백작은 그와 대면할 필요를 느꼈다.

"소렌을 만나야겠군."

"제거하실 겁니까?"

페린의 물음에 블라르 백작은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본래라면 이런 괘씸한 놈은 단번에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전과 달랐다.

이렇게 감탄하게 해주는 존재는 오랜만이었고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면 알수록 비범한 행적이야.'

지금껏 무력을 자랑하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사기 행각이라니? 고지식한 옛사람인 블라르 백작에겐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특히 에버송에 벌인 세계수 프로젝트는 자신의 상상력으로는 감히 구상도 못할 일이었다.

'실버, 골드, 다이아몬드 같은 등급으로 차등을 두는 건 실로 무시무시했다. 상위 회원이 하위 회원을 뜯어먹는 이 구조. 마치 우리의 삶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 같군.'

솔직히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그 작은 사탄의 뇌를 열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한데 그런 놈을 제거한다? 블라르 백작은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없애버리는 건 간단한 일이야. 하지만 그런 놈을 또 만나는 건 긴 삶에서도 드물지.'

솔직한 심경으로 아직 더 지켜보고 싶었다. 다만 기왕 보는 거 가까이서 보면 더 재밌으리라. 더 이상 남의 이름 파는 짓도 못 하게 할 수 있고.

"만나보고 정하겠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 * *

결정을 내린 블라르 백작은 소렌을 찾아갔다.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금방 박쥐로 변해서 어디론가 부지런히 날아가는 걸 발견했으니까.

'무슨 일이지?'

벌써 흥미가 동했다. 계속 따라가니 웬 다 무너져가는 고성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엘프를 만나는 것이었다.

'밀회인가?'

뱀파이어와 엘프의 금단의 사랑이라? 블라르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더욱 집중했다. 어째서인지 요즘은 이런 사랑 얘기가 좋았다.

하지만 몰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밀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놀랍게도 저 여성이 엘프 공주였기 때문이다. 블라르 백작은 공주가 유폐된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왜 밖에 있는지 의아해졌다.

하지만 계속 들어보니 소렌이 공주를 해방해 준 걸 알게 됐다. 그 모습에 블라르 백작은 약간이나마 소렌을 좋게 보게 됐다.

왜냐하면 블라르 백작은 실버리프 왕가의 굴곡진 가정사와 공주가 겪었던 가여운 운명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블라르 백작은 젊은 날이었으면 그딴 건 신경도 안 썼겠지만, 부쩍 연민이 많아진 탓에 공주가 자유를 얻어 떠나는 게 보기에 좋았다.

'그나저나 저 소렌이란 놈, 여기저기 안 끼는 곳이 없구나.'

블라르 백작은 공주가 떠난 뒤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드디어 사칭범과의 대면이었다.

"거기 젊은이, 잘 됐구만. 잠깐, 나 좀 보세나."

그러자 움찔하며 놀라는 게 재밌었다.

'감지를 못했을 테니 당연하지. 모골이 송연할 거다. 이놈.'

소렌이 대단하긴 해도 블라르 백작의 시선에서 보면 아직 애송이였다.

그 뒤로는 아주 재밌었다. 블라르 백작은 능청을 떨다가 한 번씩 정색했는데, 그럴 때마다 소렌의 낯빛이 죽어갔다.

이후 엘프 공주의 거처였던 게 분명한 동굴에 가게 됐다.

"백작님, 관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됐네. 나 정도 되면 관이 없어도 별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말게나. 그나저나 좋은 장소군. 뭔가 여성스러운데?"

"아, 그것이···. 전주인의 물건이 남아서요. 지금은 제가 물려받은 곳입니다."

"그렇군."

블라르 백작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커다란 거울을 쳐다봤다. 여인이 화장할 때나 쓸 법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거울로 잠깐이지만 소렌의 반항적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본디 뱀파이어는 거울에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소렌은 특이한 팔찌 때문인지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웠고, 거울에 모습도 비췄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아무튼, 그 덕에 찰나의 순간 지나간 소렌의 표정을 블라르 백작은 놓치지 않았다.

'이놈 봐라?'

그건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이쪽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블라르 백작은 점점 흥이 올랐다.

'좋다. 어디 해보거라. 이 몸을 즐겁게 만들란 말이다.'

블라르 백작은 소렌이 재밌는 동안은 살려두기로 했다. 다만 흥미가 떨어지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무슨 짓을 하든 즐겨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중에 네놈 수작질은 다 알고 있었다고 하면 그 표정이 볼만하겠군.'

하지만 소렌은 블라르 백작의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일상이었다.

그는 블라르 백작과 마주쳤다는 이 불합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좋아. 기왕 블라르 놈이 출현한 거, 지금껏 에버송에서 있었던 블라르의 음모가 모두 사실이었다는 방향으로 나가야겠군.'

블라르 백작의 이름을 팔아서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진짜가 나타났다? 당연히 떠돌던 이야기는 모두 진실로 변할 터였다.

거기에 더해, 엘프 공주 알테아의 탈출 건도 블라르 백작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었다.

소렌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블라르 백작의 위협에 대해서도 재평가하게 됐다.

'그래! 이번에도 은인이었어!'

그렇게 늙고, 젊은 두 뱀파이어가 동상이몽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백작님, 엘프의 명주입니다. 한 잔 하시죠."

"그래, 기꺼이 받지. 산초."

일단 겉으론 사이가 좋았다. 물론 그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겠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정확히 사흘 뒤.

소렌은 광분한 투자자들을 이끌고 엘프 공주의 동굴을 포위했던 것이다.

"나와라! 블라르 이 새끼야!"

"감히 내 돈을 떼먹어! 오늘 그 면상 좀 보자!"

"블라르고 나발이고 너는 이제 뒤졌다!"

눈이 돌아간 투자자들은 마늘과 은, 말뚝으로 무장하고 지상최강의 뱀파이어 레이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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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3)

* * *

소렌의 배신 사흘 전.

아직은 서로 칼 대신 술잔이 오갈 때고 분위기가 좋았다. 소렌은 블라르 백작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백작님, 어찌 에버송까지 오셨습니까? 찾으시는 게 있으신지요?"

노리는 먹이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그 목적을 알아야 한다. 소렌은 선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칼을 품은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어진 블라르 백작의 직구에 하마터면 표정이 풀릴 뻔했다.

"이유 말인가? 간단해. 최근 어떤 고약한 놈이 날 사칭하고 있더군. 에버송에 있는 것 같아서 붙잡으러 왔다네."

그리 말한 블라르 백작은 지그시 소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렌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위에 선 듯 아찔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몹시도 자연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참으로 고약한 놈이군요. 그런 놈은 분명 어머니도 없을 겁니다."

그 대답에 이번엔 블라르 백작의 표정이 풀릴 뻔했다.

'놀랍군···! 뻔뻔하게 잡아떼기 위해 제 애미도 아무렇지 않게 팔아먹다니!'

다시 봐도 보통 놈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새끼는 진짜 엄마가 없는지도 몰랐다. 블라르 백작은 평범한 압박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놈! 날 이 정도로 진지하게 만들다니. 제법이구나.'

잠시 블라르 백작은 카운터 펀치를 맞고 흔들렸지만, 이러니까 더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압박에 진실을 토설하며 싹싹 빌었다면 흥미가 팍 식었을 것이다. 아마 곧장 굼벵이 형을 내렸을 터. 하지만 놈은 강했다.

"그렇겠구만. 하하하. 참, 남을 사칭하는 고약한 놈을 찾는 것 말고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네."

"무엇입니까?"

소렌의 물음에 블라르 백작은 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작은 시집이었다. 제목은 <생의 환희, 꿈꾸는 엘프의 숲>이었다.

"시집이군요? 이것이 왜?"

"읽고 크게 감명해서 시집을 발간한 시인을 찾고 있네."

그 말에 소렌은 다소 당황했다. 설마 블라르 백작이 시를 읽을 줄이야? 일단 받아서 살펴보니 시인의 필명은 'R3'였다.

"음···?"

뭔가 익숙한 분위기에 소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친김에 시도 몇 편 읽어봤는데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고, 일단 시집을 돌려줬다.

"제가 답을 드리면 좋은데 모르겠습니다. 백작님."

"아니, 괜찮아. 괘념치 말게."

"아닙니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맙군. 부탁하지."

소렌이 괜히 돈도 안 되는 일을 맡겠다고 나선 게 아니다. 마침 동굴 밖을 나갈 핑계가 생겼다고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 *

배신 이틀 전.

소렌은 마침 시인 R3에 대해 짐작이 가는 점이 있다며 동굴을 벗어났다. 다행히 블라르 백작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 뒤, 소렌은 든든한 우방인 레그너 3세를 찾아갔다.

"폐하!"

마침 또 사랑에 관한 시를 짓고 있던 레그너 3세는 화들짝 놀라서 종이를 치우고는 소렌을 맞았다.

"크흠! 무슨 일인가? 자네."

"큰일났습니다! 블라르 백작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크흐흐흐! 무슨 농담도. 그 전설적인 뱀파이어가 에버송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레그너 3세는 허튼 소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소렌은 진지했다.

"정말입니다. 지금 엘프 공주가 머물던 동굴에 있습니다."

그제야 웃던 레그너 3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뭐라? 진짜인가?"

"폐하, 이런 중요한 일을 어찌 거짓으로 고하겠습니까?"

소렌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알렸다. 그러자 레그너 3세는 콧김을 내뿜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악적이 에버송에 나타나다니! 용서할 수 없군. 당장 짐이 도끼로 놈을···."

"폐하, 안 됩니다!"

소렌은 재빨리 레그너 3세의 팔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기 때문이다.

"어찌 짐을 말리는가?"

"이런 말씀 송구합니다만, 폐하께서 블라르 백작과 붙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짐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폐하,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최근 마레크를 깨부수고 사기가 충천하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상대는 그 블라르입니다."

"크흠······."

"이제 꿈 같은 신혼 생활이 코앞인데, 벌써 먼 곳으로 가시렵니까?"

어렵게 맺어진 엘프 여왕을 생각하자 레그너 3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는 술에서 깬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더니, 자신의 말을 취소했다.

"블라르 백작과 싸우지 않겠다. 아직 죽을 순 없지."

"영명하십니다. 폐하."

"하면 어찌하는 게 좋겠나? 뱀파이어 공."

"언제나 그렇듯, 폐하의 꾀주머니인 제게 계책이 있습니다. 마침 궁정 여기저기서 어슬렁거리는 구혼자들을 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렌이 제시한 방법은 간단하며 효과적인 것이었다. 구혼자겸 투자자들인 그들에게 블라르의 위치를 알리고 공격하게 만들자는 것.

아무리 상대가 전설적인 뱀파이어라고 해도 잃어버린 돈 때문에 눈깔이 돌아가서 나설 게 분명하다고 했다.

"승리한다고 해도 꽤 많이 죽겠군···."

레그너 3세가 우려를 표하자 소렌은 오히려 호재라고 했다.

"본디 손님과 생선은 사흘이면 썩은 내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골치 아픈 놈들이 여기 머문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어갑니다. 훗날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니 이참에 우환을 제거해야 옳습니다."

구혼자들 중에는 강자도 여럿이고,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도 있다. 그런 이들이 에버송에 계속 머무는 건 부담이기도 했다.

"아예 이참에 치고받고 싸우다 다 뒤지게 하시죠?"

"······자네는 정말 현명하면서도 악랄하군. 하지만 묘안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못하겠네."

레그너 3세는 소렌의 사고방식에 매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런 자가 같은 편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좋다. 구혼자들을 모아서 일을 비밀스럽게 계획해야겠군."

* * *

배신 하루 전.

블라르 백작은 동굴 밖으로 나와 세작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때 엘프 여왕의 구혼자였던 놈들이 동굴로 들이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게 정말인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블라르 백작의 모습에 페린은 황급히 간했다.

"탈출로를 확보했습니다. 백작님. 제때 움직이시면 아무 문제없이···."

"그게 아니다. 페린이여."

블라르 백작이 놀란 건 공격 계획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부추긴, 소렌의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행동력에 입이 벌어진 것이다.

'일부러 틈을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배신을?'

블라르 백작이 시집을 보이며 시인을 찾아달라고 한 건 이유가 있었다. 소렌이 동굴을 떠나 돌아다닐 핑계를 주기 위해서였다.

열심히 돌아다니기에 뭔가 하는 줄 알았지만 며칠 만에 대규모 공격을 준비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닌가? 뒤가 없는데?'

새삼 블라르 백작은 소렌이라는 그 사탄의 종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건지 궁금해졌다.

'살다 살다 이렇게 남의 인생이 궁금한 건 처음이네.'

하지만 금방 웃음이 터졌다.

"크하하하핫!"

강력한 적들이 자신에게 몰려오는 상황이 됐다. 블라르 백작은 그들을 홀로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겁먹기는커녕 혈관을 타고 불길이 흐르는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블라르 백작의 빈 껍데기 같은 가슴 속에 투쟁심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나이를 먹은 이후 오래간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정말 자신에게 이런 격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지만, 동시에 반갑고도 기뻤다.

블라르 백작은 이런 감정을 되돌려준 소렌에게 최고의 보답을 하기로 했다.

* * *

배신 당일.

분노한 투자자들이 완전무장하고 몰려들었다. 그 면면들은 화려했다.

하이엘프의 몰락한 왕자 문브라이트.

전설적인 엘프 방랑기사이자 절세 검객인 윈드러너 경.

실프를 다루는 게 특기인 공기의 마법사 에이실리온.

화염의 군주라 불리는 마법사 할시온.

용병 출신의 강력한 전사이자 인간 왕국의 남작인 마가르.

이 외에도 영웅이라 불릴 자들이 많았다.

거기에 기사와 병사들까지 합치면 블라르 백작이 있는 동굴을 포위한 인원은 물경 오백이 넘어갔다.

뱀파이어 하나 잡자고 이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이다. 레그너 3세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꼈다.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갑주와 창검을 보고 있자니, 비싸디비싼 태양 저항의 물약을 마신 게 안 아까울 정도였다.

한자리에 모인 투자자들은 블라르 백작을 향한 욕설을 한동안 쏟아내더니,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 논의에 들어갔다.

"블라르 놈은 동굴에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름난 자들을 선발해 들이쳐야 합니다."

"데려온 병사들은 어찌하려고요?"

"동굴을 포위하게 하지요. 블라르 백작이 도주하는 걸 막아주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전투가 벌어지면 병사들은 도움이 안 됩니다."

"동굴에 있다고 하니 들어가지 말고 불을 피워 연기를 집어넣는 건 어떻겠소?"

"이런 무식한! 블라르 백작이 무슨 겨울잠 자는 곰인 줄 아시오? 연기로 시야가 어지러워지면 놈이 도망가기 유리할 뿐이오!"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레그너 3세에게 조언했다.

"폐하께서 후방에 남아 포위망을 담당하겠다고 하시지요."

"알겠네."

이미 블라르 백작과 싸울 생각을 접은 레그너 3세는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그가 포위망을 담당하겠다고 하니 모두 수긍했다.

"좋습니다. 폐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방이 든든하겠군요."

"내 병사들도 통솔해 주시오. 나는 동굴로 들어가야겠으니."

레그너 3세는 세계수 프로젝트에 투자한 당사자가 아니니 후방이 적당했다. 게다가 투자자들은 블라르 백작을 처단한다는 영광을 탐내고 있었다. 그러니 강력한 전사인 레그너 3세가 뒤에 남는다는 걸 기꺼워했다.

어차피 이 정도만 몰려가도 충분하단 판단을 하고 있기도 했고.

그렇게 레그너 3세는 포위망을 담당하게 됐고, 동굴 안으로 가 블라르 백작과 싸울 인원이 선발됐다.

공격대의 수는 총 37명.

다들 자기 지역에서 이름깨나 날리고 있는 자들이니 실로 막강한 진용이라고 할 만했다. 나 역시 레그너 3세의 추천으로 그 37명 가운데 하나로 끼게 됐다.

"이자는 내가 신뢰하는 전사요. 일전에 거인을 처리할 때 옆에서 도운 자니 무력은 확실하오이다."

레그너 3세가 적극 추천했기에 다들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태양 저항 물약을 다시 물처럼 들이켰다.

"좋소! 모두 의기를 모아 오늘 반드시 악적을 처단합시다!"

공격대의 대장은 가장 신분이 높은 하이엘프 왕자 문브라이트가 맡았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지만 그 혈통만은 진짜인 듯, 모두를 독려하는 목소리에서 위엄과 품위가 넘쳐났다.

"개문하라!"

문브라이트의 명령에 동굴의 입구를 닫고 있던 철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써늘한 공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설명하기 힘든 한기에 다들 움찔했지만 다시 고함을 지르며 용기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37명의 공격대가 엘프 공주의 동굴로 진입했다.

* * *

'휴, 살 것 같네.'

동굴 안으로 들어와 태양을 피하게 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속시간도 짧은 태양 저항의 물약만으로 버티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까.

데이워커의 인자를 받긴 했지만, 성녀에게 소원을 빌고 안착시키기까진 시일이 걸릴 예정이었다.

"거대한 기운이 느껴지오. 모두 전투를 대비하시오."

하이엘프 왕자 문브라이트가 준엄한 목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저 앞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수를 믿고 기세등등했던 공격대도 긴장감에 마른침을 연신 삼키고 있었다.

'맙소사, 37명이 1명을 잡으러 가는데도 이런 분위기라니.'

아무리 블라르 백작이 고강하다고는 하나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는데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법. 언제 내 인생에 빠꾸가 있었나? 이러나저러나 들이박는 직진이었다.

우리는 곧 한때 엘프 공주가 가꾸던 정원에 도착했다. 원래 대리석 정자가 있던 곳에는 커다란 석재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근처의 돌을 잘라 대강 만든 형태였지만, 그 위에 앉아 있는 위엄찬 이와 잘 어울렸다.

"모두 어서들 오라."

블라르 백작이 그곳에 앉아 턱을 괴고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공격대가 발끈했다.

"네놈이 만악의 근본이었군! 오늘 참해주마!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블라르, 당신의 죄악을 끝내드리겠습니다!"

"화염으로 정화해 주지!"

다들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지만, 내가 보기엔 겁먹은 개가 짖는 것만 같았다. 반면 블라르 백작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다 떠들었나? 원한다면 언제든지 덤벼도 좋다."

그 여유에 일순간 공격대가 압도됐다. 기가 꺾인 누군가가 무기를 슬그머니 내리려던 그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바로 공격대장 문브라이트였다.

"전원 공격! 정의를 위하여!"

문브라이트의 외침과 함께 그의 검이 동굴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과연 영웅은 영웅이었다.

그와 함께 모두 용기를 되찾고 블라르 백작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37 대 1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쳐라!"

"블라르의 목은 내 것이다!"

하지만 첫 공격은 너무나 허무하게 막혔다. 블라르 백작의 주위로 검은 화염이 폭발하더니 다들 달리던 속도보다 빠르게 튕겨 나갔다. 그것만으로 사방에 피가 뿌려지고 터진 팔다리가 날아다녔다.

그러나 모든 건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블라르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바닥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작은 달이었다.

"블러드문이여!"

블라르 백작이 손을 올리자 작은 달이 동굴의 천장으로 떠올라 사방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모두에게 용기를 주던 문브라이트의 찬란한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주변의 모든 게 붉게 물들었다.

그와 함께 이 일대의 모두가 숨이 절로 막히는 고통에 빠져들었다.

손발이 느려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재차 블라르 백작에게 달려들려다가 막대한 부하에 눌려 무릎을 꿇는 자들이 여럿 나왔다.

"마법! 마법을 퍼부어!"

"어서 공격 마법을!"

무기를 든 자들이 악을 쓰며 외쳤지만 마법사라고 사정이 나을 리가 없었다. 주문을 외우기 위한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고, 시약을 꺼내고 수인을 맺을 손이 말을 듣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름난 마법사인 화염의 군주 할시온이 공격 마법을 성공시켰다.

퍼어엉!

화르르르르!

폭발이 일어나고 용오름 같은 화염이 블라르 백작을 휘감았다. 그 장대한 열기에 지켜보는 자들은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할시온! 할시온!"

저 정도 공격이면 블라르 백작에게 타격을 줬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화염의 군주 할시온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고 다음 주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검 한 자루가 그의 배를 관통하며 튀어나왔다.

"허업!"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헛바람 내뱉는 소리와 함께 할시온이 쓰러졌다.

그를 습격한 자는 공격대의 일원인 야만전사 갈트였다. 북부에서 무용이 높았던 자로 칼 하나로 온갖 마물을 썰어왔다고 한다. 주변에선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갈트! 배신인가!"

"이 빌어먹을 자식!"

하지만 갈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한 번에 십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아군을 공격해댔고 삽시간에 주변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때 용오름 같은 화염도 사라지고 블라르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킥킥 웃으며 옷에 붙은 불길을 털어내고 있었다. 언뜻 봐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은 모습이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외쳤다. 블라르 백작은 화염이 몸을 가리고 있을 때 주문을 완성했던 것이다.

"대규모 최면 마법이다! 마법사! 정신 저항 주문을!"

그제야 아직 멀쩡한 마법사들이 최면을 막기 위해 주문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말렸고, 공세를 완전히 내줬다.

마법사들이 블러드문의 압박과 악전고투하며 최면을 풀 때쯤 블라르 백작이 또 다른 극악의 주문을 완성했다.

바로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이었다.

주변에 녹색 안개가 뒤덮이더니 공격대의 몸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생명력이 실처럼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아!"

"아아아악! 크아아!"

산 채로 생명력을 잡아 뽑히는 고통은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골수를 뽑히는 것 같다고 했다.

당연히 바닥을 구르며 눈을 까뒤집은 자들이 여럿 나왔다. 뱀파이어인 나는 다행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완패다. 못 이겨.'

완전히 예상이 어긋났다. 블라르 백작은 게임에서보다 훨씬 강했고, 절망적이란 말이 어울렸다. 이제 나는 싸움이고 뭐고 도망갈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한데 그 순간, 빛살 같은 존재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바로 엘프 방랑기사이자 절세 검객인 윈드러너 경이었다.

공격대에서 최강자라 불릴 만한 인물로, 에너지 드레인을 이겨내며 자신의 검과 하나가 되어 블라르 백작을 향해 쇄도했다.

너무나 빨라 내 능력으로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건 공격이라기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정도로 완성도 높은 기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분명 저것이라면···!

하지만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블라르 백작이 왼손으로 윈드러너 경의 검을 너무나 간단하게 붙잡아 버렸다.

걸리는 뭐든 건 베어버릴 듯한 그 공격이 맨손에 저지된 것이다. 윈드러너 경이 검을 빼내기 위해 힘을 줬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놈! 크윽!"

블라르 백작은 이런 상황에서도 윈드러너를 보지 않았다. 대신 내게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블라르 백작은 붉은 눈이 날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생생했다.

"산초, 그러지 말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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