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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아앙~♥"

"거기! 거기이잇~!"

달뜬 신음이 룸 전체에 울려 퍼진다.

점점 고조되는 교성. 어딘가 후덥지근해지는 공기. 달짝지근하면서도 시큼한 향기.

"이제 어쩌실 겁니까 행님?"

숀이 한껏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은 안마의자에 앉아 우리 대신 전자마약에 취한 여자들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주르륵.

어딘가에서 흘러내린 투명하고 끈적한 물이 안마의자 아래로 흘러내렸다.

녀석이 나라 잃은 얼굴이 됐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어쩌긴. 이제부터 뒤져봐야지."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서, 사실은 이랬다.

나는 헐벗은 몸으로 안겨 오는 그녀들을 일단 진정시키고 안마의자와 전자마약에 관해서 물었다.

그녀들은 처음이었냐면서 오히려 좋다는 얼굴로 얼굴을 붉히며 설명했다.

약을 먹고 이 안마의자에 다 같이 누우면 일종의 소규모 사이버스페이스로 진입할 수 있는데, 그곳에선 현실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섹스를 해도 지치지 않고, 하는 내내 쾌락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 최소 100번 이상의 절정을 느낄 수도 있다면서.

그녀 둘은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되는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다리를 비비 꼬면서 말했다.

"······혹시 그곳에서 너희 둘끼리 하는 걸 구경할 수도 있나?"

"으흥~ 그런 취향이시구나?"

"충분히 가능해요. 사이버공간이라 임의로 물건을 만들면 되거든요."

"······? 물건을 만들어?"

"그쪽 사타구니에 달린 물건이요. 후훗. 아니면 그쪽이 물건을 2개 만들어서 저희 둘과 동시에 즐겨도 되고요."

"······."

나는 잠시 물건이 2개 달린 걸 상상했다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흥미롭군. 깨어나고 싶을 땐 어떻게 하지?"

"후훗~ 그런 생각 따윈 들지도 않을 걸요? 그곳은 오직 쾌락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요."

그녀들이 내 가슴을 은근슬쩍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옆에선 숀이 충혈된 눈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안마의자로 그녀들을 유도하며 말했다.

"기대되는군. 그럼 바로 시작하지."

"좋아요!"

그녀들은 자그마한 백에서 약을 꺼냈다. 모 자양강장제가 생각나는 갈색병에 담긴 물약이었다.

"자. 그거 마시고 누워요."

그녀들은 마치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거침없이 약을 비우고 안마의자에 앉았다.

나는 숀에게 작게 말했다.

-너는 먹지 마.

-네? 저, 저는 왜······ 네, 넵!

반항하려는 녀석을 지그시 바라보자 녀석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약을 비우고 안마의자에 앉았다.

"어? 저분은?"

"화장실이 급하데. 이따가 합류해도 되지?"

"흐응~ 괜찮아요. 그런데 어차피 싸게 될 텐데. 굳이 화장실 안 가도."

"어머! 얘는!"

뭘 싸게 된다는 건지 몰라도 그녀 둘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그 얘기에 숀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희미한 원망마저 섞인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지 생각해주는 줄도 모르고.

그러는 사이 약 기운 때문인지 슬슬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체열이 40도는 훌쩍 넘어선 것 같았다.

"시작하지."

"네. 그럼 오늘 우리가 천국으로 뿅가게 보내드릴게요. 오른쪽 버튼을 누르세요."

"이건가?"

하고 누르는 순간, 내 의식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 * *

암흑으로 뒤덮였다 싶더니 어느새 새하얀 공간이다.

온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증폭된 감각으로 몰려오는 정보량에 머리가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나는 물끄러미 양손을 내려다봤다.

'현실이 아니로군.'

내려다본 손은 모래알갱이 같은 무언가가 뭉쳐져서 만든 것 같은 형태를 띠었다. 얼핏 보면 손이었지만, 증폭된 감각은 손의 구성을 알알이 파악했다.

그것은 모래알갱이가 아니라 숫자와 문자로 이뤄진 데이터조각이었다. 너무나 작기에 모래알갱이처럼 보였지만, 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코드가 바뀌는 명백한 데이터였다.

'사이버스페이스 다이브가 이런 형식인가······?'

말로만 들었지 경험해본 건 처음이다. 애초에 브레인 소켓도 없는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이걸 안마의자처럼 생긴 기계가 처리했다고?

'아니. 이건 약의 힘이 크다.'

무슨 원리인진 모르겠으나, 약물이 말초신경과 중추신경의 뉴런을 자극해서 증폭시키고, 그 신호를 안마의자가 캐치해 사이버스페이스로 끌고 들어오는 형식 같았다.

'소켓도 없이 이런 게 가능하다니······ 이건 부작용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겠는데?'

명색이 정부 공인 마약샵인데 이런 걸 판매한다고?

그때 어느새 여성체로 보이는 모래알갱이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흐으응~ 하악! 어, 어쩌시겠어요? 저희끼리 흐응! 먼저 시작할까요?"

"그래. 나는 없다고 생각하고 너희끼리 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군. 그래야 나도 마음이 동할 것 같으니까."

"흐, 흐응~ 좋아요. 못 참고 저희를 덮치게 만들겠어요."

그녀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서로 키스를 하며 애무를 시작했다.

모래알갱이로 보이는 데이터들은 서로 섞이며 마치 한 몸처럼 오갔다.

"하앙~ 하아앙~♥"

"거기! 거기이잇! 하앙!"

금세 둘의 신음은 짙어졌다.

서로 허리를 흔들어대며 거침없이 교성을 내질렀다.

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관찰했다.

'데이터가 섞이면서 신호가 바뀌는군. 무엇보다 서로 다른 모양의 데이터가 점점 동기화되듯 같아지고 있어.'

정말 하나로 합쳐지기라도 할 것처럼, 둘을 이루고 있는 구성체의 모습은 점점 서로를 닮아갔다.

아무리 사이버스페이스의 구성체라지만 저렇게 데이터가 복사되듯 같아지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괜히 구성체의 코드가 전부 다른 게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걸 임의로 섞는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서로 기억을 공유한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아예 다른 인물이 될 수도 있겠지. 구성체는 곧 정신을 말하고, 그건 육신에도 영향을 줄 테니.'

그때 나는 온몸의 감각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균형이 흐트러졌다.

폭증했던 감각들의 감도가 서서히 옅어지고, 알알이 파악됐던 모래알갱이의 데이터조각들은 점점 구분할 수 없게 됐다.

때가 된 거다.

'슬슬 깨어날 시간이로군.'

이윽고 새하얀 세계의 균열이 일어난 그 순간.

번쩍!

나는 눈을 떴다.

"······!"

그러자 바로 코앞에 보이는 미지의 형체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우, 우억! 해, 행님!"

그건 숀의 얼굴이었다. 녀석은 바닥에 엎어진 채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그러게 왜 그렇게 가까이서 나를 쳐다보고 있어. 소름 돋게.

나는 달아오른 체온을 느끼며 녀석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났지?"

"1, 1분 정도요?"

"흐음······ 1분이라."

내가 깨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초재생」.

몸 안에 마약이 들어온 순간부터 체내에선 마약을 해독하기 시작했고, 거센 열을 발산하며 마침내 지금 해독이 완료된 거다.

하지만.

'초재생으로도 1분이나 걸릴 정도라니. 확실히 정상적인 마약은 아니야.'

이 약과 블루필이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은?"

"여, 여깄습니다."

"좋아. 너는 이대로 빠져나가."

"네? 혀, 형님은요?"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남은 일을 처리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구린내가 진동하거든."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3)

109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골든에그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브는 3D 입체 공간분석을 시작했다.

이 욕망과 쾌락이 점철된 공간이라면 분명 숨겨진 공간이 있을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발견했다.

지하에 대규모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어디를 봐도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건 없었다.'

그건 곧, 외부인과는 격리된 장소에서 내부인들만 출입 가능한 비밀통로가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

'입구부터 찾아야겠군.'

나는 존재감을 흐트러뜨린 채 골든에그 곳곳을 배회했다.

그 누구도 내가 수상한 곳을 지나다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층 상점들의 내부는 물론이고, 클럽 주방까지 드나들었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쓸모가 많네.'

나는 이걸 '은신술'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뭐, 실제 작용기전은 '은신'보다 사람들의 '인식저하'가 맞겠지만.

어쨌든 안 걸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이것도 포스를 전신운용하는 기술이기에 하염없이 사용할 순 없다.

그러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저기는?'

유일하게 떡대들이 지키고 있는 출입문 입구를.

통로 가운데에 아예 의자와 테이블도 몇 개 가져다 놓고 자기들끼리 쉬고 있었다.

나는 워치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이브야. 저 출입문 너머 스캔 가능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스터. 집중 스캔 시작. 3, 2, 1.

-체크 완료. 출입문 너머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

드디어 찾았다.

놈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공간을.

나는 입구의 떡대들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몰래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지하 공간의 규모도, 용도도 몰랐고, 무엇보다 어떤 방식으로 보안이 설계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턱대고 들이닥쳤다가 폐쇄라도 돼버린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폐쇄된 걸 뚫고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기엔, 이곳이 정부 공인이라는 게 걸린다. 형식상이지만, 분명 SCPD도 근처에 있었고 말이다.

만약 놈들이 지하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밝혀내지 못한다면, 범죄자는 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굉장히. 아주 굉장히 불편한 일이 생긴다.

'일단 기회를 노려서 주의를 돌려봐야겠군.'

나는 잠시 꺾이는 통로에 숨어서 기회를 기다렸다. 분명 저 안을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생길 거다.

그때 지하통로 출입문이 열리며 몇몇 떡대들이 뛰어나왔다. 나름 양복 비슷한 걸 걸쳐 입었으나, 원판이 갱인 녀석들의 모습은 숨기지 못했다.

"너희! 혹시 수상한 사람 못 봤어?"

"수상한 사람이요? 이곳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제길! 너! 너! 둘만 남고 나머지는 나 따라와!"

"네!"

떡대들이 우르르 몰려서 사라졌다. 다행히도 내가 숨어있던 통로가 아니라 반대편 통로로 말이다.

'운이 좋군.'

놈들이 여기로 뛰어왔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밀려났을 텐데.

그렇게 운이 좋게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떡대들이 전부 사라지고 지목당한 둘만 남았다.

놈들도 사라지는 동료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해지자 서로 대화를 나눴다.

"무슨 일이래?"

"몰라. 아까 작업실 열렸다고 했는데 목표가 달아나기라도 했나?"

"작업실에서 탈출? 에이. 그게 가능한가? 일단 그 약에 취하면 뼈가 삭을 때까지 해대잖아?"

"사이버스페이스 멀미라도 했나 보지. 가끔 안 맞는 사람도 있잖아."

"쯧쯧! 불쌍한 놈이네. 어차피 잡혀서 끌려올 거,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만이라도 신나게 섹스했으면 덜 억울할 거 아냐?"

"푸핫! 그건 그렇네!"

놈들은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눴다.

나는 놈들의 대화에서 떡대들이 찾아다니는 게 나와 숀이라는 걸 알아챘다.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었군.'

하긴, 말 한마디 했다고 이상하게 생긴 최상층 룸에 데려왔을 때부터 의아하긴 했다.

'들어보니 그곳이 작업실로 불리고, 그곳에서 약에 취한 놈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 같은데······ 이유는 뭐 뻔하겠군.'

약에 취해 정신없는 사람을 납치하는 이유는 사실 몇 가지 없다.

고가의 임플란트 장비와 살아있는 장기를 적출하기 위함과 그게 아니라면 각종 인체실험 용도.

마약사업을 벌이는 놈들이 돈이 없어서 임플란트를 빼먹진 않을 테니, 이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즉, 인체실험을 위한 인간수급 말이다.

'지하공간은 그럼 인체실험실인가?'

나는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아무리 썩어빠진 도시라지만, 이렇게 거대한 장소를 만들어서 인체실험실을 만들다니.

게다가 의도 자체가 악(惡)했다.

인체실험에 선과 악이 어디 있겠느냐만, 애초에 이 마약샵의 목적이 인체실험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실종돼도 이상하지 않은 약쟁이들이 알아서 찾아오게 하고, 심지어 약에 찌든 놈들 말고 멀쩡한 사람들도 수급하기 위해 국가공인 간판까지 달아놓고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악마들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놈들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도 함께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규모 인체실험을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신종 마약개발? 거기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필요할까?'

나르시스는 마약조직이다.

인체실험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대규모로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 길거리에 널린 부랑자들과 약쟁이들에게 샘플로 나눠주면 되니까.

그럼 대체 뭘까? 이렇게 은밀하고 위험하게 실험을 할 만한 일이?

'······이거 나르시스 말고 다른 놈들도 엮인 것 같은데.'

이 도시에서 이렇게 대담하게 미친 짓을 할만한 놈들이라면······.

'기업 놈들이로군.'

빌어먹을. 또 기업 놈들인가?

물론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이 게임의 주빌런은 기업이 맞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생충 같은 미친놈들도 많으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는 수밖에.'

나는 그대로 놈들에게 쇄도했다.

어느새 양손엔 팔꿈치 길이의 군용단검이 들려 있었다.

군용대검은 놈들의 심장을 뚫고 그대로 콘크리트 벽까지 뚫어버렸다.

"어?"

"윽?"

이게 놈들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나란히 벽에 꽂힌 채 매달린 놈들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얼핏 보면 벽에 기대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피만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워치 연결선을 뽑아 출입문 패널에 연결했다.

삐빅!

지하로 통하는 출입문이 열렸다. 나는 지체없이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 * *

골든에그 컨트롤 센터.

"그 새끼들! 아직도 못 찾았어?"

두들러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1시간 전에 작업실로 보냈던 목표가 사라졌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 하, 한 놈은 이미 빠져나갔고 다른 하나는 사라졌습니다."

"튄 놈이 누구야?"

"그 옆에 있던 곁다리 멸치입니다."

"군인 출신이라는 놈이 사라졌고?"

"네, 넵!"

두들러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필 군인 출신이 사라져? 빠져나가지 않은 건 확실하고?"

"저희 출입문은 입구밖에 없잖습니까? 멸치 놈도 그곳으로 나간 걸 확인했고요."

"흐음······ 그럼 아직도 안에 있다?"

두들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5층 작업실을 확인하고 기다렸다는 듯 한 놈은 빠져나가고, 한 놈은 사라졌다? 그것도 약을 확인하러 왔다는 새끼들이?'

으득!

이를 악물었다.

불쾌한 감이 왔다. 이건 쥐새끼들이 확실했다.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건진 몰라도, 분명 뭔가 알아내기 위해 들어온 놈이 틀림없다.

'어디지? 셀리케 쪽인가? 아니면 최근에 귀찮게 굴었던 그 기자놈 끄나풀?'

씨발! 어떤 놈이건 상관없다. 이곳을 몰래 헤집어보겠다고 들어온 이상, 놈은 이미 뒈진거나 다름없으니까.

"큭! 건방진 놈! 그 몸을 갈가리 찢어서 모조리 샘플로 써주마."

두들러의 입매가 비틀렸다. 입가를 비집고 섬뜩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침입자 경보 걸고 경계태세 최고로 올려!"

"어, 네? 그, 그럼 손님들은······?"

"손님은 씨발! 오늘 장사 접는다!"

두들러는 그 군인 출신이라는 놈의 뼈와 살을 직접 발라주리라 다짐했다.

* * *

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본의 아니게 지금부턴 타임어택이로군.'

누군가 출입문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간 발각된다. 나를 찾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놈들을 봤을 때 오래 숨기긴 어려웠다.

'그 전에 찾는다.'

계단은 꽤 길었다. 적어도 지하 5층 높이는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순간 계단이 끝났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

"······이게 무슨?"

마치 야전병원 같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지하 공간엔 투명한 가림막이 처진 텐트가 수십 개는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한곳의 가림막이 열려 있었는데, 온통 피투성이다.

그곳엔 절반쯤 해체된 시체가 수술대 위에 놓여있었다. 멀쩡한 부위는 팔, 다리밖에 없었다. 머리는 뚜껑이 따여서 뇌가 사라진 상태였고, 벌려진 가슴엔 멀쩡한 장기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줄지어 늘어선 다른 텐트들을 쳐다봤다.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졌을 광경도 이것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이런 개새끼들!"

단순히 인체실험 수준이 아니라 해체쇼를 하고 있었다니. 대체 이놈들의 목적이 뭐길래?

그때 어디선가 하얀색 수술복을 입은 떡대들이 사람 한 명을 끌고 가는 게 보였다.

개 목줄마냥 목줄을 찬 사람은 떡대들이 이끄는 대로 비틀거리며 끌려갔다.

얼굴을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다. 많이 봤던 얼굴이기도 했다. 약에 찌들어 사고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중독자였다.

놈들은 이내 가림막이 처진 텐트 중 하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예정인지는 뻔했다.

나는 놈들이 나왔던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그곳엔 창살을 덧댄 감옥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었는데, 남녀들이 옷을 벗은 채 뒹굴고 있었다.

한쪽에선 쉴 새 없이 섹스가 벌어졌고, 다른 쪽에선 빨거나, 먹거나, 맞는 형태로 마약을 한 중독자들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약에 잔뜩 취한 상태로 섹스판으로 뛰어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그저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군."

이 지하공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원초적인 본능에 지배당한 동물같은 자들과 그런 동물들을 해체하는 백정들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때 갑자기 천장에 붙은 전등들이 빨간색으로 점등되며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어디선가 '침입자 경고다!' '다들 무기부터 착용해!'라는 소란이 들려왔다. 아마 입구의 시체가 발각된 듯싶었다.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점멸하는 빨간색 전등이 지하 공간을 빨갛게 물들였다. 마치 영화에서 묘사되는 지옥의 광경처럼 말이다.

나는 빨갛게 물든 지하 공간과 요란하게 울려대는 경고음 속에서 결심했다.

"이곳은 없어져야 할 곳이다."

이 쓰레기 같은 공간을 없애버리기로.

천천히 칼을 꺼냈다. 은빛 칼날이 빨간색 전등의 불빛을 반사하며 요사스런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흐트러뜨렸던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발산된다.

"어?"

"누, 누구?"

감옥 앞에서 담배인지, 마약인지 모를 연초를 피우던 떡대 둘이 놀란 듯 연초를 떨어뜨렸다.

나는 입매를 비틀며 대답했다.

"저승사자다 씹새들아."

서걱!

놈들의 목이 날아갔다.

이제부터 청소 시작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4)

110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혼란은 전염된다.

난데없이 울려대는 경고음에 놈들은 우왕좌왕하며 쓸데없이 텐트 사이를 헤집고 뛰어다녔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놈들을 거침없이 베어갔다.

요란스러운 사이렌과 점멸하는 빨간 불빛 아래서 주인 잃은 목이 굴러다녔다.

놈들은 아직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조차 못 한 채 고함만 외쳐대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는 족족 놈들의 머리를 날리고 있는 와중에.

투타타탕!

드디어 첫 총성이 울렸다.

"죽어라!"

용케 나를 발견한 놈이 회심에 찬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어?"

툭.

데구르르.

그게 놈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어?'하는 표정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쓰레기에게 어울리는 조촐한 죽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놈의 죽음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았다.

"적이다!"

"여기야!"

"이런 개새끼!"

총성은 떡대들을 불러왔다.

나를 발견한 놈들은 거침없이 총을 쏴 갈겼다.

투타타탕!

나는 줄지어 늘어선 텐트를 넘나들며 탄환을 피했고, 내 움직임을 쫓는 놈들의 총구 역시 따라왔다.

난잡하게 쇄도하는 탄환들.

나름 머리를 굴려가며 방아쇠를 당겼지만, 내 움직임을 쫓아오기엔 무리다.

하지만 약쟁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쏘아진 탄환은 창살을 넘어 약쟁이에게도 향했다.

약쟁이들이 죽어 나갔다. 약 대신 총알이 몸에 꽂혔고, 쾌락 대신 죽음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집단섹스를 하던 놈들이 그 자세 그대로 픽픽 쓰러졌다. 사방이 난리건만, 그리고 코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건만 놈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허리를 흔들어댔다.

몇 군데 몸에 구멍이 뚫려도, 약과 쾌락에 중독된 놈들의 허리 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체액 대신 피를 질질 흘리면서 놈들은 죽어갔다.

약쟁이들다운 비참한 최후였다.

그러는 사이 떡대들 숫자가 꽤 많이 줄었다.

나름 비싸 보이는 방탄 슈트와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한 놈들이었으나, 그런 기본적인 무기로는 내 칼날을 막을 수 없었다.

놈들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알아챘는지, 슬슬 주변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말이다.

'끝났군.'

사기 또한 전염된다.

사기가 꺾여 도망칠 구석을 찾는다는 게 내 눈에 보일 정도면, 놈들끼리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다.

계기만 생긴다면 놈들은 그대로 총을 버리고 줄행랑을 치겠지.

그런데 그때.

쿵쿵!

내가 내려왔던 계단 반대쪽 문이 열리며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도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은 전부 워 머신을 착용했다.

'워 머신 10대라. 일개 마약조직에 어울리는 무장은 아니로군.'

10대에 달하는 워 머신의 등장은 전장의 판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이다.

나는 얼굴이 구겨졌고, 반대로 떡대들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저런 막강한 화력을 가진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놈들도 이것까진 몰랐었나 보다.

부아앙!

일렬로 늘어선 워 머신들의 팔에서 기관총이 맹렬히 회전했다. 드르륵 갈겨진 기관탄환은 그대로 전장을 덮쳤다.

나와 떡대들을 향해서.

"커, 커억!"

"이런 ㅆ··· 컥!"

"사, 살려······"

나는 기관탄환이 발사되는 그 순간 몸을 날려 궤적을 피했지만 떡대들은 아니었다.

떡대들은 쏟아지는 기관탄환에 분쇄된 고기가 되어 그대로 갈려 나갔다.

늘어섰던 텐트는 모조리 찢겨나갔고, 내부에 들어있던 수술 기계들은 터져나갔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약쟁이들의 시체도 함께 갈려 나갔다.

"이 쥐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온 거냐!"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걸어 나왔다. 뒤따라온 다른 워 머신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내가 묻고 싶군. 너희들 대체 여기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냐? 시 정부에서 이걸 눈감아줄 것 같으냐?"

"흥! 그건 네놈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곧 저 수술대 위에 올라가 온몸에 해체될 네놈 미래를 걱정해야지!"

놈이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별로 감출 생각도 없는지, 수술대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제 입으로 떠들었다.

"글쎄. 내가 아는 미래는 네놈들 모가지가 전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미래인데."

"건방진 놈! 팔, 다리를 생으로 뽑아도 똑같이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마!"

부아아앙!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기관총이 쇄도했다.

이번엔 처음처럼 흩뿌리듯 대충 쏜 게 아니라, 나름 화망의 구조를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탄환의 해일이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몇몇 워 머신들은 따로 움직였다.

양옆으로 갈라진 2대의 워 머신은 그대로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고, 3대의 워 머신은 뛰어오르더니 부스터를 내뿜으며 날아왔다.

그야말로 포위하듯 쇄도하는 공격들.

보통 칼잡이를 처음 보면 방심하기 마련인데, 놈들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기꺼운 미소를 지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말. 기억하도록 하지."

네놈 말대로 팔, 다리가 뽑혀도 지금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나는 그대로 몸을 튕겨 올렸다.

콰직!

무게중심의 이동과 밀어내는 반탄력에 디딤발을 짚은 바닥이 그대로 갈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대가로.

쐐애애액!

폭발하듯 날아오르며 부스터를 뿜어내는 워 머신에게로 쏘아졌다.

* * *

골든에그 컨트롤 센터.

두들러는 난데없이 들려오는 총성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시, 실험실에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뭣!?"

화들짝 놀란 두들러가 재빨리 보안 카메라 화면을 전환했다. 건물 곳곳을 비추던 화면이 지하 실험실 내부로 바뀌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칼잡이가 보였다. 어찌나 빠른지 보안 카메라의 화면이 쫓아가질 못했다. 이 화면에서 저 화면으로 널뛰듯 넘어다녔다.

"이런 씨발! 언제 여길 기어들어 온 거야?"

분명 외부에서 사라진 지 1시간 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대체 언제 여기로 숨어들었단 말인가?

이곳을 어떻게 알아냈지? 출입문은 언제 뚫린 거고?

두들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친위대 소집해! 직접 친다!"

"지, 직접이요? 대장님께 알리지 않으시고 말입니까?"

"대장이 지금 어디에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저 새끼 움직이는 거 안 보여? 대장 기다렸다가 실험실 다 쓸린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 후, 두들러는 친위대와 함께 실험실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칼잡이를 보자마자 기관총을 갈겨버렸다.

다른 워 머신에 탄 친위대들도 두들러의 사격에 거리낌 없이 기관총을 갈겼다. 분명 싸우고 있는 다른 조직원들을 봤음에도 말이다.

"이 쥐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온 거냐!"

시원하게 조직원들을 다짐육으로 만들어버린 두들러가 칼잡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의 시선은 칼잡이에게만 또렷이 고정됐다.

"내가 묻고 싶군. 너희들 대체 여기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냐? 시 정부에서 이걸 눈감아줄 것 같으냐?"

"흥! 그건 네놈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곧 저 수술대 위에 올라가 온몸에 해체될 네놈 미래를 걱정해야지!"

"글쎄. 내가 아는 미래는 네놈들 모가지가 전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미래인데."

"건방진 놈! 팔, 다리를 생으로 뽑아도 똑같이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마!"

부아아앙!

기관총이 쏘아지고 친위대들도 진형을 펼쳐서 칼잡이에게 쇄도했다.

무려 10기의 워 머신의 공격.

분명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여야 하건만······.

'웃어?'

두들러의 시야엔 비웃음을 짓는 칼잡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등골이 싸해졌다.

마약 조직에 있으면서 미친놈들 본 게 한두 명이 아니다. 머리 절반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웃음을 터트리며 뒈지던 미친놈이나, 쾌락을 위해 그곳에 소형미사일을 넣었다가 터져 죽은 미친년도 봤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저 칼잡이는 미친 게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비웃음이었다.

워 머신 10기의 공격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비웃음 말이다.

'제깟 놈이 무슨 수로······?'

제아무리 온몸을 크롬으로 떡칠해도 워 머신 10대의 무력은 감당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워 머신의 이름이 워 머신도 아닐 테고, 미친 듯이 비싼 가격에 거래되지도 않을 거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놈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일 경우인데, 그랬다면 애초에 조직원들과 싸우는데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지도 않았을 거다. 사이보그는 애초에 총탄이 먹히지 않으니까.

그렇다는 건, 분명 사이버웨어나 몇 개 걸치고 있는 인간이라는 건데 도대체 저 자신감은 뭐지?

그때 비틀어진 칼잡이의 입술 사이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 기억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두들러의 시야에서 칼잡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

워 머신의 초고속 카메라와 인지능력 증폭기술로도 따라갈 수 없었던 움직임.

보안카메라로 확인했었던 미친듯한 움직임마저도 뛰어넘는 속도였다.

'어, 어디로!'

콰쾅!

흔들리는 시선으로 놈을 찾기도 전에, 폭음이 먼저 들렸다.

그러자 날아올랐던 워 머신 한기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저기를 뛰어올랐다고?'

두들러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미터 거리를, 그것도 공중에 떠 있는 워 머신을 향해 뛰어들어?

그때 희끗한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자 또 한 번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다른 워 머신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날아다니기라도 한단 말인가!'

순식간에 워 머신 두 기를 잃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제대로 칼잡이의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움직임이 제법 빠르다는 건 알았으나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고, 심지어 공중에서 저렇게 움직이리라곤 예상조차 못 했다.

그러는 사이, 하늘로 날아올랐던 워 머신 중 마지막으로 남은 워 머신은 강현재의 접근을 알아챘다. 앞서 날아가던 두 기의 희생 덕분이었다.

'이런 개새끼가!'

분노로 반쯤 눈이 돌아간 그는 강현재가 타겟으로 잡히기 무섭게 최종무기를 사용했다.

치익!

워 머신의 가슴이 전면개방되며 손바닥만 한 소형미사일이 한꺼번에 쏘아져 나갔다.

크롬 버스터(Chrome Buster).

어떤 방어형 사이버웨어도, 크롬으로 둘둘 두른 육체도 꿰뚫는 궁극의 미사일이다.

고성능 사이버웨어로 총탄을 무효화하는 대상에게 사용되는, 일명 즉살의 무기.

그런 크롬 버스터 100발이 추진체에 불을 내뿜으며 칼잡이에게 쇄도했다.

'좋았어! 잡았······!'

하지만 그 순간.

지잉!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크롬 버스터를 스쳐 갔다.

그러자 칼잡이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던 크롬 버스터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지상으로 추락했다.

퍼버벙!

'······!'

그사이 칼잡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워 머신을 타고 있던 친위대도 놀라긴 했으나, 뻔히 시야로 보고 있던 상황. 이미 앞서 두 기의 워 머신의 희생으로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워 머신의 주먹을 칼잡이의 면상에 찔러넣었다.

공중에서 나는 재주가 있지 않은 한 분명 주먹을 막을 수밖에 없을 거다. 제 면상이 터져나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콰드득!

칼잡이는 막는 선택이 아니라, 반격을 선택했다.

그 결과 내뻗었던 팔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크윽!"

짧은 신음을 내뱉은 그는 재빨리 부스터의 방향을 틀어 칼잡이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칼잡이는 혼자서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일단은 동료들과 합류한다. 놈의 움직임이 아무리 신출귀몰해도 하늘을 나는 게 아닌 한 방향을 바꾼 자신을 쫓진 못할 거다.

······라고 생각했다.

툭.

그 칼잡이가 자신의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기 전까진 말이다.

"······!"

칼잡이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 바이저 너머로 보고 있건만 칼잡이는 정확히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강현재가 역수로 쥔 칼을 그대로 찔러넣었으니까. 칼날은 정확히 머리를 관통해 가슴까지 꿰뚫었다.

주인을 잃은 워 머신이 방향을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강현재가 워 머신을 밟고 훌쩍 뛰어내렸다.

이 모든 건 설명은 길었으나, 전부 숨 몇 번 내쉬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

"······."

그리고 무엇보다.

이 광경을 지켜본 두들러와 지상의 친위대들은 그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5)

111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목격한 두들러와 친위대들은 저절로 얼어붙었다.

'저게 대체 뭐야?'

두들러는 뭔가 꺼림칙했던 자신의 느낌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보안 카메라 영상을 보는 순간 느꼈다.

이놈은 평범한 놈이 아니라는 걸. 사이버웨어의 힘을 빌렸더라도 저런 움직임을 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는 걸.

그리고 이제 와서야 어디선가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소드마스터. 네놈이 바로 소드마스터로구나."

언젠가부터 들려왔던 소문이다.

칼 한 자루로 워 머신을 갈라버렸다는 소드마스터에 관한 소문.

솔직히 이 바닥엔 워낙 뜬소문과 헛소문들이 많아서, 이것도 포장을 잘한 소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진짜였을 줄이야.'

두들러가 싸늘한 눈빛으로 강현재를 노려봤다.

"해결사가 대체 이곳엔 무슨 일이지? 실종자라도 찾으러 왔나?"

"그거야 네가 알 바는 아니지."

"······여기서 멈춰라, 소드마스터. 해결사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네 잘못은 눈감아주겠다. 물론 입단속은 잘해야겠지만."

이건 어마어마한 양보였다.

칼 들고 찾아온 적을. 그것도 내부에 침입해 인명피해까지 낸 적을 순순히 보내주겠다는 조건이었으니까.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뒷골목의 생리에선 최소 받은 만큼 갚아주거나, 아예 상대를 끝장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상대가 적대 조직이 아닌 해결사라는 점. 그리고 뜬소문인 줄만 알았던 막강한 실력이 진짜였다는 점이 이 양보를 만들었다.

계속 싸운다면, 분명 강현재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피해는 더 쌓일 테니까.

그건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해결사의 명성과는 별개로, 해결사 자체는 결국 도구에 불과했다.

피의 대가는 이 일을 의뢰한 의뢰인이 책임져야지, 해결사에게 지우는 건 하책이었다.

······라고 두들러는 생각했다.

그런데 강현재는 아니었나 보다.

입매를 비튼 그의 입에서 독설이 흘러나왔다.

"누굴 병신으로 아나? 돌아가면? 친구들 모아서 나를 치려고?"

"우릴 뭘로 보는 거냐! 우리가 그런 양아치 따위나 할 짓을 할 것 같으냐!"

두들러가 분노를 터트렸다.

이 새끼가 기껏 참고 참아서 양보해줬더니 뭐가 어째? 일개 해결사 따위가 감히!

그건 다른 친위대들도 마찬가지인 듯, 순간적으로 살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피식.

오히려 강현재는 비튼 입매에서 비웃음까지 내뱉었다.

"차라리 양아치가 낫지. 네놈들이 이곳에서 하고 있던 짓거리에 비한다면 말이야."

"······선을 넘지 말라고 했다, 소드마스터."

"선은 이 새끼야. 니들이 넘었어, 이 쓰레기들아."

"이런 씨발 놈이! 저 새끼 그냥 죽여!"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워 머신들이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이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퍽퍽 소리와 함께 깨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엔 두들러 역시 합류했다. 강현재의 실력을 확인한 이상,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감히 도구에 불과한 해결사 따위가!'

두들러의 워 머신은 다른 워 머신보다도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특별했다.

군용 워 머신 중에서도 장교를 대상으로 지급된, 혼자서도 일반 워 머신 10대쯤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특수 워 머신이었다.

두들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강현재의 무력을 확인하고서도 자신있게 공격을 시작한 이유였다.

강현재가 벌였던 일쯤은,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까.

'오만한 놈! 소드마스터라는 이명도 오늘로 끝이다!'

* * *

강현재는 달려드는 워 머신을 상대했다.

원래도 묵직한 주먹 위에 또 한 번의 재무장을 거친 거대한 주먹이 철퇴처럼 내려 찍혔다.

카캉!

주먹과 맞부딪친 칼날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강현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조금 전까지 다른 워 머신의 장갑을 갈랐던 칼날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푸하하하! 제법 좋은 무기를 가진 모양이다만, 그런 날붙이 따위론 어림도 없다!"

사실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워 머신은 부스터 때문에 경량화된 워 머신이었다.

어차피 경량화가 돼도 평범한 총알은 통하지 않기에 전술적 우위를 위해 장갑을 걷어낸 모델이다.

하지만 지상의 워 머신들은 아니었다. 날 필요가 없으니 당연히 경량화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특히, 지금 상대하는 워 머신들은 대전차미사일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특수장갑까지 덧댄 워 머신이다.

미사일도 막아내는데 한낱 날붙이 따위는 통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크하하하! 죽어라!"

칼날이 통하지 않는 걸 확인하자 워 머신들은 거침없이 몰아쳤다.

거대한 체구와 질량에서 오는 위압감. 그리고 그 거체를 질주하도록 만드는 출력이 더해지자, 전장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다.

내진설계로 지어진 지하공간이 두부 으깨지듯 터져나갔다. 주먹질 한 번, 발길질 한 번에 모든 게 가루가 됐다.

부아아앙!

후방에선 기관총을 단 워 머신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기관탄환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어지럽게 쇄도했다. 어차피 워 머신들에겐 통하지 않는 탄환이라 그들 역시 공격에 거침없었다.

장갑을 덧댄 워 머신들과 다르게 강현재의 피륙은 기관탄환을 막지 못할 테니까.

그때.

"이게 네놈들 재주의 끝이냐?"

친위대를 상대하던 강현재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이런 건방진!"

"일개 칼잡이 따위가 감히!"

친위대들이 분노에 찬 눈으로 강현재를 노려봤다.

이게 궁지에 몰리니까 돌아버리기라도 한 건가? 들지도 않는 칼을 들고 날뛰는 일개 칼잡이 주제에!

"틀렸어."

"······뭐?"

"일개 칼잡이가 아니라 소드마스터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소드마스터란 이름이 네놈 목숨을 살려준다더냐!"

"들지도 않는 칼로 소드마스터는 개뿔이!"

두들러와 친위대들은 강현재를 마음껏 비웃었다.

죽음의 공포에 진짜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간신히 벼랑 끝에서 버티는 주제에 소드마스터가 뭐?

그런데.

씨익.

그런 그들의 비웃음을 듣고 있던 강현재의 입꼬리가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그 비틀린 입매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똑똑히 기억해라. 지옥에 가서 누구 손에 죽었냐고 물어보면······"

뚝뚝.

비릿한 혈향이 피어오른다. 칼을 쥐고 있는 강현재의 손을 따라 핏물이 칼날을 뒤덮는다.

그 순간, 여태껏 은빛 궤적을 그리던 칼날의 궤적에 붉은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칼날에 맺힌 은빛은 분홍빛으로, 주홍빛으로, 그리고 이윽고 완전한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번쩍!

워 머신의 눈앞에서 붉은 벼락이 터졌다. 폭발하듯 번쩍인 빛무리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

그 찬란한 빛을 정면에서 마주한 워 머신은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반으로 갈라진 시체가 말을 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쿵!

양쪽으로 갈라진 워 머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갈라진 단면으로 시뻘건 쇳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타올랐다.

강현재가 시체가 된 워 머신을 한번, 그리고 난데없이 벌어진 일에 멈칫한 두들러와 친위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꼭 소드마스터 손에 뒈졌다고 말하도록."

* * *

두들러는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번쩍거리며 칼을 휘두를 때마다 워 머신들이 쩍쩍 갈라졌다.

'대, 대체 저 무기가 뭐란 말인가?'

초진동 단분자 커터? 광입자 플라즈마 소드? 그것도 아니면 신무기?

워 머신의 특수장갑을 갈라버리는 칼날이라니. 그것도 워 머신의 크기에 비해서 이쑤시개처럼 보이는 칼인데 말이다.

그 사이, 칼잡이는 근접 워 머신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붉은빛으로 물든 칼날 앞에선 워 머신의 특수장갑은 더 이상 소용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뚫릴 걸 알았다면, 차라리 속도에 치중할 걸 그랬군.'

이제 칼잡이와 마주하는 건 자신 혼자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상했다. 자신은 칼잡이를 볼 수 있어도 칼잡이는 바이저 너머를 보는 게 불가능할 텐데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때 칼잡이의 입에 비웃음이 걸렸다.

마치 망설이는 자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런 개색······!"

두들러가 발끈하며 달려들려는 그 순간.

"······!"

칼잡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전에도 봤던 귀신같은 움직임.

두들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순간적으로 파동센서를 사용해 놈이 달려들 곳을 예측했다.

"······?"

그런데 어디에도 놈은 없었다.

사라졌으면 분명 나타나야 하는데······?

'뭐지?'

그 순간.

"크악!"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기관총으로 화력지원을 하던 원거리 워 머신들에게서.

재빨리 돌아간 시선에 이미 허리가 반으로 나뉘어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워 머신과 휘젓는 양팔을 통째로 잘라버리는 칼잡이의 모습이 잡혔다.

"저런 개새끼가!"

자신을 도발하며 비웃더니 저기로 갔어? 그야말로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아닌가?

눈이 뒤집힌 두들러가 달려갔다.

그건 분명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3대의 원거리 워 머신이 전부 바닥에 쓰러지긴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반으로 갈라져서 말이다.

"이 비겁한 새끼야! 어딜 자꾸 뛰어다니는 거냐!"

뒤늦게 도착한 두들러의 공격을 훌쩍 뒤로 물러서며 피한 칼잡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열 기나 되는 워 머신을 뒤집어쓰고 온 새끼들 입에서 들을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이익!"

"아무튼, 잘 됐다. 드디어 네놈 혼자 남았구나."

"······!"

칼잡이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두들러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분노에 차서 생각 없이 뛰어왔는데, 어느덧 이 지하 공간엔 자신과 칼잡이만이 남았다.

"내, 내가 혼자일 것 같으냐! 조금만 기다리면 친위대의 전 병력이 이곳에 몰려올 거다!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죽는 건 기정사실이라는 소리지!"

칼잡이가 피식 웃으면서 반문했다.

"내가 왜 기다려야 하지? 난 기다릴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지, 지금이라도 보내줄 테니까 꺼져라! 떠나면 잡지 않을 거고, 이 문제 역시 내가 책임지고 묻어······"

"야. 네 문제점이 뭔지 알아?"

"그, 그게 무슨 소리······?"

말이 끊긴 두들러가 차마 끊긴 말을 잇기도 전에.

"혓바닥이 존나 길다는 거야."

번쩍!

단 한 번의 번쩍임이 두들러의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

어느새 몇 걸음 앞에 서 있는 칼잡이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진이라도 찍은 건가?

그런데 자신을 올려다보던 칼잡이의 고개가 점점 내려갔다. 천천히 눈높이가 맞춰지더니, 어느덧 칼잡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들리는 쿵!하는 소음과 함께.

"······끄, 끄아아악!"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전신에서 엄습했다. 머리가 새하얘지며 저절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두들러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쓰러진 자신의 몸엔 달려있어야 할 팔, 다리가 사라져 있었다.

콰직!

칼잡이가 머리와 몸만 남은 두들러의 가슴을 즈려밟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어디 다시 지껄여봐. 내 팔, 다리를 뽑으시겠다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6)

112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공포에 질린 두들러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묻는 족족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직 물어보지 않은 일까지도 말이다.

나는 머리만 남아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두들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미 약에 취할 대로 취한 놈들에게 약을 더 때려 박아서 죽였다, 이 말인가?"

"아, 아닙니다! 약으로 죽이는 게 아니라, 죽을 정도의 약을 투여해서 관찰한다는 겁니다! 세포조직이 괴사하지 않고 적응반응을 보인 자들의 장기만 수거한 거예요!"

놈이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죽이기 위해서 약을 투여한 게 아니라는 게 억울했던 걸까? 아니면 장기만 수거하려고 했는데 죽었다는 걸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거지. 결국, 치사량의 약을 투여해서 죽거나, 거기서 살아남아도 그걸 네놈들이 죽인다는 거잖아. 뇌를 비롯해서 장기란 장기는 전부 싹 털어갔더만."

이놈들이 하는 인체실험은 간단했다.

무식하게 치사량 이상의 약을 투여해서 거기서 살아남는 자들의 신체조직. 즉, 장기를 수거하는 일이었다.

치사량의 약을 투여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결국 신체가 적응했다는 뜻.

아마 최종적으론 그 매커니즘을 연구해서 약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실험이겠지.

"거기서 사용된 약은? 혹시 이 약인가?"

나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5층에서 마셨던 자양강장제처럼 생긴 약이었다.

"같은 성분이긴 합니다. 그건 희석한 거고요."

"그래? 마침 잘됐군. 이 약, 평범한 마약은 아니지?"

"그, 그걸 어떻게?"

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설마 마약을 짚고 넘어가리라곤 생각조차 못 한 눈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군. 5층의 안마의자. 아마 딥다이브 기계겠지. 그런데 말이야. 소켓도 연결하지 않고서 소규모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이 된다? 심지어 특정 감각이 극도로 증폭된 상태로? 이게 마약소굴에 어울리는 기계라고 생각하나?"

"그, 그건······."

"아니지. 그런 기계는 기업의 연구시설에나 있을법한 기계지. 이런 마약소굴이 아니고 말이야. 그럼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뭘까? 그 안마의자가 특별한 기계로 변한 이유. 딱 하나밖에 없잖아? "

"······."

"이 약. 이 약이 분명 뇌에 뭔 짓거리를 한 영향이겠지. 네놈들이 실험한 시체에서 꼬박꼬박 뇌를 꺼내 가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말이야."

놈이 입을 떡하고 벌렸다. 바닥에 누워 머리만 남은 녀석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뭔가 더 극적이긴 했다.

사실 해결사가 이런 일에 깊이 개입하거나, 호기심을 드러내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받은 만큼만 일하는 게 대부분 해결사의 모토였으니까.

나 역시 비슷했지만, 이 일은 의뢰가 아니었다. 내 삶과 앞으로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대답해라. 이 약, 정체가 뭐냐?"

나는 놈을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파괴된 연구실에서 생산되던 약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파괴된 연구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곳에 방문하기 바로 직전, 40구역의 나르시스 보급거점에서 들었던 내용이.

[저, 저도 그 약은 소문으로만 들어서 모릅니다! 오직 그레이트 필드 공장에서만 제조됐었는데, 지금은 시설이고 기술자고 죄다 죽어버렸어요!]

바로 내가 빙의됐던 감자농장을 언급하며 말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 약은.

"블루필?"

"허, 헉! 그 이름을 대체 어떻게!"

내가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계기. 바로 블루필이었다.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두들러를 내려다봤다. 기겁을 하는 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그 태도를 봤을 때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 블루필이 뭔 줄 알고 있군?"

"요, 용도는 모릅니다! 그냥 그 약이 완성되면 이 도시를 우리가 집어삼킬 수 있다는 말만 들었어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시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

"누가 그랬지?"

"보스! 보스가 그랬습니다!"

"흐음······."

두들러가 말하는 보스라면 나르시스의 주인을 말했다.

마약왕 파블로.

놈이 직접 말했다면 마냥 헛소리는 아니라는 건데······.

'도시를 집어삼킨다라······. 만약 블루필이라는 이름이 우연히 붙은 마약 이름에 불과하다면 납득할 수 있다.'

아마 마약 시장을 집어삼킨다는 뜻이거나, 이 마약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걸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 진짜 파란약을 의미한다면······'

맹렬히 돌아가던 사고의 흐름이 결론을 향해서 치닫는다. 그리고 그건 결코 유쾌한 결론은 아니었다.

'놈도 소피아처럼 이 세계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건 이 세계의 비밀을 아는 존재가 더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하울의 주인과 마약왕.

벌써 두 명이다. 그럼 그 다음은? 그 다음이 없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있나?

'소피아에겐 대답을 못 들었지만, 놈에게선 대답을 들어야 한다.'

과연 놈이 이 세계에 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란약의 진짜 용도가 뭔지 말이다.

이로써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마약왕을 만나야겠군.'

나는 두들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놈들이 수거한 조직샘플들. 어디로 가는 거지?"

이미 확인한 대로, 이곳의 인체실험은 다른 실험을 위한 재료를 구하는 용도였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서 확보한 재료를 갖고 실험하는 또 다른 장소가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진짜겠지.

"고, 골든 구스로 갑니다!"

"골든 구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웃기는군."

이곳의 이름은 골든에그. 황금알이다.

골든에그와 골든구스.

즉, 황금알이 뜻하는 건, 인체실험으로 얻은 뇌와 심장 같은 신체장기를 말한다. 그 황금알을 갖고 실험하는 모체가 골든구스니까.

"싸이코 새끼들답게 병신 같은 이름을 지어놨어."

이런 인간도축장을 황금알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골든구스의 위치는?"

"말하면······ 살려주실 겁니까?"

놈은 슬슬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는 걸 느꼈는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유난히 삶에 집착하는 놈의 모습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팔, 다리가 잘리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굴복한 것부터, 묻는 족족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것까지.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면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래서 더욱 묘했다.

그렇게 본인의 삶엔 집착하는 놈이, 인간도축장을 운영하며 무수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이 말이다.

놈은 어땠을까? 놈도 살려달라는 희생자들의 부탁을 들어줬을까?

나는 놈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죽이진 않겠다."

묘하게 다른 대답에 놈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상관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골든구스는 49구역에 있습니다. 정확한 좌표는 저 문을 따라 나오는 컨트롤 센터에 있고요."

두들러가 자신이 걸어 나왔던 격납고처럼 커다란 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도 녀석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한번 쳐다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즉, 너를 살려서 컨트롤 센터까지 데려가라?"

"그렇습······"

"개수작을 부리는군. 그곳에 뭔가 있나 보지?"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개수작에 이어 개소리까지? 아마 그 근처에 가면 네놈과 연결된 보안설비를 사용할 수 있겠지. 하다못해 패닉룸을 만들어서 그곳을 폐쇄할 수도 있을 테고."

"그, 그게······."

정곡을 찔렸는지 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말없이 내려다보는 시선을 놈이 슬그머니 피했다.

나는 녀석을 삐뚜름하게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중력조작을 일으켰다.

쿠쿵!

그러자 놈을 중심으로 사방에 쓰러져있던 워 머신의 잔해들이 모여들었다. 반으로 갈라진 워 머신들이 귀신처럼 흐느적거리며 날아왔다.

"그, 그래도 49구역에 골든구스가 있다는 걸 말해줬잖습니까! 사, 살려주세요! 살려준다고 했잖습니까!"

갑작스러운 변화에 놈이 급하게 소리쳤다.

"누가 죽인 댔나?"

나는 손안으로 빨려 들어온 말통을 들고 놈에게 뿌렸다.

톡쏘는 독한 알콜 냄새가 진동했다. 놈들이 인간을 해체할 때 썼던 소독용 에탄올이다.

"이, 이건 왜!"

모여든 워 머신들의 시체에 깔린 놈이 소리쳤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더러워서. 소독 좀 해주려고."

찰칵.

굴러다니던 플라즈마 라이터를 켜서 그곳에 던졌다.

화르륵!

라이터의 불꽃이 닿자마자 거세게 타오른다. 소독용 에탄올이 흩뿌려진 곳이 먼저 타올랐고, 뒤이어 워 머신의 잔해에 있던 윤활유와 전자장비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매캐한 연기를 줄줄 내뿜는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끄, 끄아악! 살려! 살려줘! 씨발! 살려주겠다고 했잖아!"

불기둥 안에서 두들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가?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 살려주겠다고 말하진 않은 것 같은데."

"이 개새끼야! 이게 죽이는 거지! 끄아악! 지금이라도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발! 제에바알! 씨바알!"

나는 놈의 비명과 함께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의 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이건 불타 죽는 거지,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이, 이런 개색······"

처절했던 비명은 오래가지 않아 침묵했다.

타닥타닥!

그저 거세게 불타오르는 불꽃의 연소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악당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 * *

쾅!

막고 있던 철문을 걷어찼다. 움푹 찌그러진 철문이 통째로 뜯겨 날아갔다.

그러자 보이는 골든에그의 심부.

놈이 말했던 컨트롤 센터가 한눈에 보였다.

사방에 달린 보안 카메라는 골든에그 곳곳을 비추고 있었고, 중앙에 달린 화면은 지하 공간.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인체실험을 비추고 있었다.

"전부 도망간 건가?"

나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은 컨트롤 센터 내부를 확인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이곳에서 훤히 상황을 보고 있었으니, 두들러와 워 머신들이 모조리 박살난 것도 확인했겠지.

아마 그다음은 자신들 차례라고 생각하고 모조리 도망친 걸 테고 말이다.

뭐,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결국, 이곳에 온 건 맞았으니까.

물론 목적은 놈들 목이 아니라 정보였지만.

"이브."

나는 워치의 연결선을 골든에그의 데이터뱅크에 연결했다.

-보안시스템 장악 시작.

-경계경보 종료.

-각 구역을 순차적으로 폐쇄합니다.

이브는 곧바로 시스템을 장악하더니, 아직도 요란스럽게 점멸하는 빨간등과 울려대는 사이렌을 껐다. 그리고 구역 폐쇄를 시작했다.

나는 보안카메라 화면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소방설비인지, 경호설비인지 모르겠는 차단벽이 내려오며 골든에그 모든 구역을 격리했다.

어물쩍거리며 1층에 모여있던 SCPD들이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아마 골든에그 옆에 장식처럼 서 있던 경찰차의 주인들이겠지. 내부에서 소란이 벌어졌으니 출동하긴 했는데, 이곳까지 내려오긴 싫었던 모양이다.

그때 이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스터. 정체불명의 비행선이 건물 옥상에 도착했습니다.

"비행선?"

갑자기 웬 비행선이란 말인가?

-화면 전송하겠습니다.

그러자 렌즈 시야 위로 화면이 떠올랐다. 상공에 뜬 이글아이로부터 전송된 화면이다.

화면엔 이제 막 옥상에 도착한 비행선 한 대가 천천히 내려앉는 게 보였다.

그리고 비행선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들은 곧바로 옥상의 문을 열고 내부로 진입했다.

나는 그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내린 인물을 확인하곤 미간을 찡그렸다.

"······귀찮게 됐군."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다른 자들보다 머리 2개는 더 있을법한 거구. 특히나 기형적으로 거대한 크롬어깨와 팔은 그자의 상징과도 같았다.

몰살의 다이크.

나르시스의 친위대장이었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1)

113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나르시스는 이 게임의 주요 퀘스트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게임의 볼륨을 위해서 설정된 조직으로, 대부분 언급만 되는 수준이다. 사이버펑크에 거대 마약조직이 빠질 순 없으니까.

다만, 선택지에 따라 나르시스와 적대조직 간의 전투를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게 다이크다.

'단 한 번의 등장씬이었지만, 그 임팩트가 어마어마했지.'

그곳에서 다이크는 상대 조직에 고용된 마스터급 해결사 둘을 혼자서 찢어버린다.

말 그대로다. 진짜 양손으로 잡고 사지를 찢어서 죽였다.

실로 압도적인 강함이요, 적들에겐 전율스러운 공포였다.

그 전쟁의 결과가 현재 소울 시티의 마약시장이었다. 이 거대한 도시의 마약시장 절반을 독식하는 결과 말이다.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만큼 이곳이 중요하단 뜻이겠지.'

"이브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적들이 지하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1분 27초가량입니다. 데이터 카피는 58초 남았습니다.

"제길. 시간이 촉박한데?"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적들과 마주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두들러를 비롯한 워 머신들을 상대한 후유증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포스를 억지로 끌어쓴 것도 아니고, 전투 시간도 길지 않아서 멀쩡했지만, 여기서 저들과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후유증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이크의 존재가 문제였다.

나는 원래 시나리오 속도보다 빠르게 강해졌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레이드 각성종」인 귀신 거북을 잡았다는 것 자체가 증거였다.

문제는 다이크가 시나리오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거다.

즉, 어느 정도로 강한지 가늠할 수가 없다.

게다가 설정상 주인공보다 강하게 설정이 된 캐릭터다 보니, 이제 겨우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시점에서 부딪치기엔 부담이었다.

'만에 하나 나보다 강하다면 오히려 내가 죽게 될 테니.'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쾅!하는 소음과 함께 이곳까지 미세한 흔들림이 전해진다. 이어서 폭음을 뚫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어느새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거다.

'어쩔 수 없나?'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곤 천천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미 닥친 상황에 걱정하는 건 미련한 짓.

피할 수 없다면, 빠르게 돌파한다!

그때.

-데이터 카피 완료. 마스터께 지금 즉시 탈출할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이브의 경쾌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움켜쥐었던 손잡이를 놓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나가자!"

-탈출 루트 안내 시작합니다.

* * *

쾅!

폭음과 함께 강철로 된 차단벽이 떨어져 나간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4개의 차단벽을 박살냈다.

떨어져 나간 차단벽으로 진입하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다이크가 눈을 빛냈다.

'보안시스템까지 장악했다, 이거겠지.'

누군가가 떠올랐다.

보안을 뚫고 시설 내부로 침입한 것 하며, 능숙하게 시스템을 장악한 것까지.

바로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는 건, 같은 놈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쾅!

또 하나의 차단벽을 뚫고, 이윽고 지하실험실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평소였으면 빽빽하게 늘어섰을 수술용 텐트가 모조리 쓸려나가 있었고, 강화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사방이 깨지고 조각나고 박살났다. 걸을 때마다 탄피와 쏘아진 탄환들이 발에 챘다.

찰박.

어딘가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핏줄기를 따라가자 창살 안에서 모조리 죽어버린 약쟁이들이 보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허리를 놀려댔는지, 약쟁이들의 하체는 전부 엮여있다.

그야말로 초토화된 실험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마치 캠프파이어라도 하듯 실험실 중앙에서 활활 불타고 있는 워 머신들의 잔해였다.

다이크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시체 더미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역시 이미 당했나.'

예상은 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마당에 두들러와 친위대가 멀쩡하리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남겨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할 수 없었다.

감히 나르시스의 심부에 침입해서 이런 여유라니? 그것도 이렇게 보란 듯이 불장난을 해?

'우릴 우습게 보는군.'

대체 뭐하는 놈일까? 나르시스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할 정도면 최소 기업 놈이거나, 더 위에 있는 메가 코프에 끈이 닿아있는 놈일 수도 있다.

'놈. 네놈만 뒷배가 있는 게 아니다.'

다이크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체 더미를 훑었다. 푸르게 변한 눈동자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광량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흉수가 남긴 흔적을.

'놈이다.'

역시나였다.

깔끔하게 잘린 워 머신의 단면들. 누가 봐도 날붙이가 가르고 간 흔적.

이 정도 솜씨라면 40구역 보급거점에 침투했던 칼잡이가 분명했다.

'아니. 이건 일개 칼잡이가 아니다.'

워 머신 10기를 쪼개버린 존재를 칼잡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이 자는 검사(劍士)다. 오롯이 경지에 이른 달인이며, 스스로의 검을 완성한 자다.

이런 자를 칭하는 이름은 많지 않았고, 여기서 소울 시티 뒷골목을 떠들썩하게 만든 존재는 더더욱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우연찮게도 최근 들어 자주 들려오는 이름이 있었다.

'소드마스터.'

검의 주인.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

하지만 직접 현장을 눈으로 보고 났더니, 더이상 오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는······ '진짜'였다.

'재밌는 놈이 나타났어.'

다이크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걸린 웃음은 명백한 조소였다.

해결사들은 욕망의 화신들. 그게 돈이 됐든, 권력이 됐든, 끝없이 욕망을 위해 삶을 던지는 자들이다.

그리고 다이크는, 그렇게 찬란하게 삶을 불태우는 존재를 철저히 짓밟는 악취미가 있었다.

이렇게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해결사들만큼 갈가리 찢었을 때 희열을 느끼게 하는 존재도 드물었다.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군.'

그의 발걸음이 컨트롤 센터로 이어졌다.

뜯겨나간 듯 날아간 철문.

역시 전투는 지하실험실에서 전부 벌어졌지만, 놈의 흔적은 이곳까지 이어졌다.

지하실험실을 초토화시켜버린 놈이 왜 이곳까지 왔을까?

'놈은 이곳을 단순히 공격한 게 아니야. 무언가 목적이 있다.'

생각이 이어진다. 연관성을 찾기 위해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놈이 거쳐 간 흔적을 되짚었다.

'놈이 처음 나타난 곳은 40구역 보급거점. 그다음이 이곳 골든에그다.'

그 말인즉, 보급거점에서 해킹한 데이터를 통해 골든에그까지 찾아낸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골든에그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40구역 보급거점을 방문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게 뜻하는 바는 단 하나다.

'놈의 다음 목표는 골든구스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얻어낸 데이터를 통해, 골든구스로 물건이 흘러가는 걸 알아낼 거다.

놈의 정확한 목표나 목적이 뭔 줄은 몰라도 이건 확실했다.

'놈은 분명 찾아온다.'

아마 이번처럼 알아내자마자 바로 찾아오려고 하겠지. 상대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몰아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니까.

다만.

'이번엔 좀 다를 거다.'

다이크가 눈을 빛냈다.

놈의 목적지를 알아냈으니 해야 할 일은 뻔했다.

바로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뒤늦게 눈치채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소드마스터. 그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거다.'

그리고 그 육체는 살점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해체해서 실험용으로 써주마.

* * *

49구역.

아우터(Outer)라고 불리는 이곳의 크기는 소울 시티 전체보다도 컸다.

오염체 전쟁 당시, 소울 시티와의 완충 지역 역할을 한 터라 사실상 소울 시티 외곽 지역 전부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런 49구역에서도 바깥쪽.

그나마 정기적으로 오염체 토벌을 진행하는 49구역과 달리, 아예 야생으로 남아있는 도시 밖 익스터널(External)과의 경계지역에 걸친 외딴 건물.

'알고도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군.'

나는 멀리서 그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으로 이뤄진 대한민국이 모델답게, 울창한 산속에 지어진 건물은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기 어려웠다. 인접한 도로가 없으니 더더욱.

다행히 근처를 살피던 중 비행선이 줄지어 나타나면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이글아이의 카메라에 잡힌 화면엔 위장된 천장이 갈라지고 그곳으로 쏙 들어가는 비행선이 보였다.

'운이 좋군.'

혹시나 찾았더라도 저게 멀쩡한 건물인지, 아니면 49구역에 널린 버려진 건물 중의 하나인지 알 수 없었는데 비행선의 접근으로 확실해졌다.

골든 구스.

적출한 인체샘플을 갖고 실험하는 진짜 인체실험실.

저곳이 그곳이다.

나는 하늘을 힐끗 올려다봤다.

내리쬐는 태양이 아직 중천에 머물러서 사방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밤을 기다려야겠어.'

* * *

침엽수림이 빽빽하게 우거진 산속.

그곳에 일단의 무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하나, 둘 모여든 그들은 금세 백여 명에 가까운 대인원이 됐다.

소음은 크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부끼는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그들 귓가로 동시에 통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걸걸하면서도 허스키한 사내의 목소리다.

-다들 무사히 도착했으리라 믿는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던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대답했다.

"물론이지, 단장!"

"도착은 진즉에 했지!"

"기다리느라 죽을 뻔했다고!"

잠시 소란 아닌 소란이 일어났다. 각자 한마디씩 던지는데, 얼마나 격의 없는 사이인지 오가는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하겠다. 이번 작전의 위험성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리라 생각한다.

통신 너머 사내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서렸다.

-하지만 이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낮고 비천한 자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것! 그리고 도시를 좀먹는 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좋은 기회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연설이다.

낮고 비천한 자들을 위한 복수는 무엇이며, 도시를 좀먹는 자들이라 함은 누굴 말하는 걸까?

하지만 모인 무리의 반응은 격렬했다.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으면 그거로 족하다고!"

"맞아! 여긴 그놈들 부랄을 걷어찰 수 있으면 자기 부랄도 떼놓을 놈도 있을걸?"

"아······ 부랄은 좀······."

"어차피 써먹을 데도 없는데 좀 떼라 넌!"

"뭐 이 새끼야? 너는? 기껏 써먹는 게 남자 뒷구멍에 박아대는 게 전부면서!"

"뭐? 이참에 네놈 뒤에도 박아줄까? 잠잘 때 조심해라 너."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가 한참을 오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류해서 더러운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들 입으로 직접 꺼내진 않았지만 알고 있는 탓이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이······ 어쩌면 전부 다, 내일 뜨는 해를 못 보고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이 됐다. 다들······ 꼭 살아서 보자.

"걱정 말라고 단장!"

"다들 가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그들은 곧바로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다. 고고히 빛을 내뿜은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엔 무성한 수목만이 가득했다.

* * *

밤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린 산속은 달빛조차 들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 몸을 싣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닳고 부서진 콘크리트와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바람에 쓸려온 썩은 낙엽이 곳곳에 쌓여있었고, 말라붙은 동물 사체가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비행선이 들어간 걸 못 봤더라면 건물을 잘못 찾았나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적막한 어둠 속, 어지러이 널린 공간에 스며들 듯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하고 오래돼 보이는 철문을.

마치 격납고의 문처럼 거대한 철문은 때가 타고 녹슬어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속이지 못했다. 저건 인위적으로 녹을 묻혀놓은 거다.

'저기가 입구겠군.'

건물이 산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 지하에 연구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과연 생체실험을 하는 비밀연구시설다웠다. 아마 이 철문 아래로 연결되어 있겠지.

그렇게 철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그 순간.

"······!"

철문이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치이익!

그그그극!

압력 프레스가 육중한 중량을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철문이 개방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앙―――!

열리는 철문 틈으로 한발의 총알이 쏘아졌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2)

114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총이 아니라 포가 쏘아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굵직한 총성이 뒤늦게 들려왔다.

나는 간단히 어깨를 틀어 탄환을 피했다. 나를 스쳐 지나간 탄환은 그대로 콘크리트 벽을 꿰뚫고 밖으로 사라졌다.

탄환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한줄기 달빛이 스며들었다. 대물저격총에서나 보일법한 위력이다.

"과연 골든에그가 털렸을 만 하군. 근거리에서 발사된 저격 탄환을 그리 간단히 피해내다니."

서서히 열리는 철문 사이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쳐다봤다.

이제 와 몸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놈들은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걸 알았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진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 알았지?"

그래서 의문이다.

나는 어떤 흔적도, 증인도 남기지 않았다. 놈들이 찾을 수 있을 만한 흔적이라고 해봤자 내가 휘두른 칼자국뿐.

'그걸로 내가 이곳에 방문할 걸 알았다고? 심지어 만에 하나를 생각해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찾아왔건만.'

"40구역 보급거점과 골든에그. 둘 다 네 작품이겠지?"

"······."

골든에그야 워낙 크게 난리 쳤으니 걸렸으리라 예상했지만, 설마 40구역 보급거점도 나와 연관 지었을 줄이야.

이건 내 실수였다.

숱한 거점 중에 하나에 불과한. 그것도 거점 전체를 파괴한 것도 아니라 그곳 관리자만 없앴는데 그걸 연결시키다니.

나는 완전히 개방된 철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다이크."

그곳엔 다이크가 있었다.

최대한 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일을 서둘렀건만, 결국 이렇게 만나게 돼버렸다.

"오호? 나를 아나?"

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표정.

"몰살의 다이크. 최강, 최악의 광전사. 네놈 손에 죽은 동료만 백 명이 넘어간다지? 지금 네 옆에 있는 그 친구들은 언제 죽일 생각이야?"

"······놈!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편히 죽진 못할 거다."

다이크의 눈동자가 붉게 물든다.

놈은 강하다. 놈이 착용한 사이버웨어인 반중력 사이버 암은 개발중인 차세대 무기로 아직까지 전 세계에서 적합자가 많지 않은 무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직 '개발중'이라는 거다.

반중력 암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사용해 전자기장을 조작, 그 영향으로 인한 중력을 굴절시켜 무기화한 사이버웨어다.

엄청나게 고도화된 무기지만, 덕분에 그걸 사용하는 사용자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강요했다.

결국, 사이버웨어를 컨트롤하는 건 인간의 뇌다. 보조 프로세서를 달아도 뇌에 엄청난 부담이 된다.

이건 반중력 암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사이버웨어가 마찬가지다. 다만, 반중력 암이 특히 심할 뿐.

그래서 발생되는 부작용이 바로 사이버네틱 사이코시스(Cybernetic Psychosis)다.

바로 전뇌 광증.

사이버웨어의 부하를 견디지 못해 미쳐버리는 정신병이다. 미친놈이 된다는 소리다.

나는 그런 미친놈이 된 놈의 손에 죽은 동료를 언급한 거다. 놈들의 사기를 꺾기 위함이다.

쿵쿵! 쿵쿵!

다이크의 뒤로 워 머신들이 쏟아져나왔다. 얼핏 봐도 50기는 훌쩍 넘는 것 같다. 워 머신이 이렇게 흔했나 싶을 정도다.

놈들의 날선 시선이 내게 향했다.

고조되는 분위기. 숨 막히는 긴장감. 워 머신의 동력이 운행되는 엔진소리.

당장에라도 불꽃이 튀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전장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때.

"워워. 아직 죽이면 안 됩니다. 저놈 입을 먼저 열어야 해요."

불빛을 토해내는 워 머신들 뒤에서 워 슈트를 입은 사내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 * *

사내의 등장으로 고조됐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살기를 풀풀 풍기던 다이크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구지?'

나는 사내를 살폈다.

이곳의 우두머리는 두말할 것 없이 다이크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르시스의 친위대장보다 높은 건 보스인 파블로뿐이니까.

그럼 놈이 파블로인가?

'그건 아니다.'

현실의 누군가를 모델로 한 파블로는 남미계 사람이다.

하지만 저 사내는······.

"반갑습니다, 소드마스터. 저는 이치로라고 합니다."

일본인이었다.

나는 말없이 사내를 바라봤다. 그 역시 나를 마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제가 궁금하시겠죠? 음,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려나······"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이치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아큐마 제약의 보안팀장······ 이라고만 소개하면 될 것 같군요. 그 이상은 불필요할 테니까."

"······!"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아큐마 제약.

5대 메가 코프 중 하나로, 바닐라 시티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제약그룹이다.

핵전쟁의 영향으로 일국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일국인들은 세계를 향해 탈출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일국인들이 향한 곳이 동남아 지역의 섬들이 모인 바닐라 시티다.

바닐라 시티의 전신(前身) 국가가 일국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곳에 아큐마 제약이 등장한 건 의외였다.

"아큐마 제약이 언제부터 소울 시티의 마약사업에 손을 댔지? 다른 메가코프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바로 아큐마 제약은 바닐라 시티가 거점이었으니까.

아무리 세계를 상대하는 메가 코프라도 남의 도시에서 마약사업을 하는 건 리스크가 컸다.

"오해가 있군요. 우린 마약사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은데."

나는 턱짓으로 다이크를 비롯한 나르시스의 친위대를 가리켰다. 소울 시티의 마약시장을 지배한 나르시스와 함께 일하면서 뭔 개소리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이치로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핫! 이곳은 마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굳이 꼽자면 실험에 사용하는 재료일까요? 하지만 마약을 재료로 사용하는 기업이야 널렸으니 이걸 트집 잡을 순 없을 겁니다."

"무슨 실험을 하길래 이렇게 쥐새끼처럼 숨어서 하는 거지? 그것도 마약조직의 도움을 얻어서."

골든에그에서 적출하던 뇌와 장기의 최종 사용처가 이곳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대체 그걸로 무슨 실험을 하는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원래는 신생 마약. 그것도 블루필과 관련된 실험을 하는 거라 여겼는데······ 아큐마 제약이 튀어나오면서 모든 예상이 뒤집어졌다.

이치로의 말대로 아큐마 제약 같은 메가 코프가 마약이나 만들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진 않을 거다.

'분명 내가 모르는 목적이 있다.'

리셋과 블루필처럼 이것도 게임에선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애초에 게임에선 49구역 외곽까지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게, 내가 튜토리얼 지역을 초토화시켰던 스노우볼이다.

그곳이 멀쩡했다면 아직도 마약생산기지로 사용하고 있었을 테고, 골든에그가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이곳에서 쥐새끼처럼 몰래 실험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지.

내 눈동자에 깃든 의문을 봤음일까? 이치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그건 저야말로 궁금하군요. 대체 해결사 나부랭이 따위가 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거죠? 듣자 하니 골든에그도 털었다던데······ 어디의 사주를 받았습니까? 셀리케? 도그마? 설마 미우라는 아닐 테지요?"

"말해주면? 너도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할 건지 알려줄 건가?"

"하핫! 정보교환이라······"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이치로의 입매가 비틀렸다.

"아쉽지만 그건 어렵겠군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해드리죠."

나를 빤히 바라보는 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비릿한 웃음이 놈의 입가에 걸렸다.

"편히 죽여드리겠다고 말입니다."

* * *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미안하지만, 죽는 건 내 선택지엔 없는 것 같군."

"하하핫!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당신에겐 선택지를 고를 권한이 없어요. 그저 내려진 심판에 순순히 따를 건지, 아니면 개처럼 뒈질 건지만 선택하면 됩니다."

"그럼 너는? 너는 어떻지?"

"네? 저 말입니까?"

동그랗게 눈을 뜬 놈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비틀린 웃음을 내뱉는 놈의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렸다.

"나는 너 같은 길거리 놈들을 언제라도 짓밟을 수 있는 위치지.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그따위 이름은 우리가 훅하고 불면 꺼지는 성냥불과도 다를 바 없는 거야."

놈이 재밌다는 듯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역겹게 느껴지던 존댓말도 더는 하지 않았다.

"모두 각자 정해진 자리가 있단다. 신발을 머리에 쓰는 사람 봤나? 신발은 발에, 모자는 머리에. 너는 시궁창에 젖은 신발, 나는 모자. 그게 현실이다."

"······."

"그러니 헛짓거리하지 말고 대답해. 네놈 뒤에 있는 게 누구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놈이 흥분 섞인 분노를 터트린다.

여태껏 연기하던 가면을 이제야 벗어던진 놈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나는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놈의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이 세계엔 정상적인 놈이 하나가 보이질 않는다.

"왜 웃지? 지금 상황이 웃기나?"

미간을 꿈틀거린 놈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웃기지. 너야말로 착각하는 것 같아서."

"착각?"

"모자든, 시궁창에 젖은 신발이든, 그따위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빌어먹을 세계의 진리는, 더 강한 자가 짓밟는다는 거다."

"그래서 네가 더 강자다? 하하하! 미친 소리를 하는군! 정녕 네가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목소리 톤이 올라간 놈이 한껏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주변의 나르시스 친위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요, 나르시스 친구들. 저놈이 하는 말 들었어요? 자기가 더 강하다네요? 완전 미친 거 아니에요?"

"······."

워 머신을 착용한 친위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놈들이 풍기는 분위기에서 느껴졌다.

놈들 역시 바이저 안의 얼굴엔 비웃음이 떠올라있을 거다.

"평화가 오래되긴 했나 봐요. 저런 비루한 칼잡이 따위가 당당히 미친 소리를 내뱉다니. 예전이었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개처럼 그만 왈왈대고."

나는 개소리를 떠들어대는 이치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곤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덤벼. 좆만 한 놈들아. 어디 시궁창에 젖은 신발에 짓밟혀보도록."

와락 얼굴을 구긴 놈이 버럭 소리쳤다.

"저 새끼! 머리만 남겨두고 가져오세요!"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

* * *

부아앙!

기관총의 총열이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투타타타타타탕!

늘어선 워 머신들이 동시에 쏘아대는 기관탄환은 순식간에 공간을 뒤덮었다.

사각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수십 기의 기관총이 맹렬히 회전했고, 거기서 쏟아진 탄환은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덮쳐오는 탄환의 해일에 호흡을 가라앉혔다.

'피할 수 없다면 막는다.'

스릉!

칼날이 회전한다.

손끝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칼날이 한 번, 두 번, 세 번······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수백 번을 휘돌았다. 회전하는 칼날의 잔영마저 따라잡는 속도.

그리고 그 속도는 이내 매끄러운 막이 되어 전면에 떠올랐다.

검막.

정점에 이른 칼잡이의 기예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펼쳐진다.

티티티팅!

검막에 부딪친 탄환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마치 물살을 가르듯 탄환의 해일이 갈라진다.

튕겨 나간 탄환들이 콘크리트를 파먹는다. 깨지고 부서진 콘크리트의 잔해들로 금세 흙먼지가 일어났다.

놈들은 이런 기예에 전혀 놀라지 않고 다음을 준비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막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뒤이어 날아든 건 대물저격탄환이었다.

탕―! 탕―!

저격탄이 검막을 두드릴 때마다 묵직함이 느껴졌다. 그게 이어지자 검막마저 흔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뚫리진 않았다.

'버틴다!'

놈들은 무한정으로 사격할 수 없다.

탄약의 숫자는 물론이고, 달아오른 총열은 무조건 식혀야 한다. 그걸 무시했다간 무기 자체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즉, 조금만 버티면 사격이 멎는 순간이 온다는 뜻.

'그때부턴 내 시간이다.'

근접거리로 붙는 순간부터 나도 위험하지만, 놈들 역시 위험해질 거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었다. 놈들을 모조리 반으로 갈라버릴 자신이.

그런데 그 순간.

'······미친!'

탄연과 흙먼지로 가득한 놈들 진형에서 기다란 레이저가 내게 드리워졌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3)

115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레이저의 빛이 먼지로 자욱한 공간을 물들인다.

희뿌연 공간을 헤집고 늘어진 새빨간 빛줄기. 그리고 그 빛줄기의 끝은 나를 향한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유도탄.'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거뭇한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불붙은 추진체의 궤적이 고스란히 허공에 그려졌다.

쐐액!

쐐애액!

쐐애애액!

······그것도 여러 개가.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검막이 탄환까진 막아줘도 미사일은 위험했다. 비록 크기는 한 뼘 남짓한 작은 크기지만, 내용물에 따라 폭발력과 효과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탄두가 꼭 단순히 폭발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탄두의 종류는 수없이 많았다.

소이탄이라면 백린(白燐)이 들었거나 네이팜(Napalm)을 사용해 터지는 즉시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 테고, 세열탄이라면 특수강으로 만들 철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갈 거다.

고폭탄이 흔히 생각하는 폭탄의 기본적인 형태인데, 이것 역시 개량에 따라 폭발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이 모든 건 변수에 속한다.

'굳이 변수를 감수할 필요는 없지. 확인하고 대처해도 늦지 않는다.'

콰콰쾅!

조금 전까지 있던 자리에 유도탄이 내리꽂히며 그대로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후끈한 열기가 불어온다. 폭발력에 의한 폭압이 해일처럼 밀려들며 나를 덮쳤다.

'역시 수작을 부려놨을 줄 알았다.'

나는 그 폭압에 저항하지 않고, 밀어내는 방향을 따라 건물 밖으로 튕겨 나갔다.

공기로 만든 거대한 망치가 후려친 느낌이다. 그나마 폭발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맞았더라면 타격이 있었을 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자그마한 미사일이 터진 영향이라고 하기엔 과할 정도로 충격파가 컸다.

그건 유도탄의 탄두가 평범한 탄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열압력탄두라니. 대체 언제부터 내가 올 걸 알고 준비한 거지?'

열압력탄두.

일반적인 폭탄과 달리 화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폭탄이다. 산화에틸렌이나 프로필렌 같은 가연성 혼합물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분무운을 만들어 공간 전체를 발화, 증기운 폭발(UVCE)을 일으켜 타격하는 무기였다.

이 열압력탄두가 나를 노린 무기인 까닭은, 열압력으로 인한 고압의 충격파가 내장파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상은 유효반경 안에 있는 생물체.

즉, 워 머신이나 워 슈트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 '나'다.

만약 유도탄을 경시해서 칼로 막아냈다면, 저 충격파는 고스란히 내 내부를 걸레짝으로 만들었을 거다.

쿵쾅쿵쾅!

나를 따라 놈들도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기관총이 훑고 간 벽을 유도탄이 시원하게 뚫어버리며 건물 한쪽이 완전히 날아갔다.

다시 전열을 서는 워 머신들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도망가는 겁니까, 소드마스터! 다시 그 건방진 혀를 놀려보시죠!"

새끼. 목청 한번 좋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전개는 달라졌다.

기관총이 소용없다는 걸 파악한 놈들은, 이번엔 유도탄만 쏘아댔다.

기다랗게 늘어진 레이저가 허공을 유영하며 나를 따라다녔고, 레이저의 유도에 따라 유도탄이 곡예비행을 하며 내게 날아들었다.

나는 탄환 대신 날아드는 유도탄을 피했다. 유도탄의 탄두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이상, 더더욱 검막으로 막는 다거나 칼날로 쳐내는 선택은 할 수 없었다.

사방이 터져나간다. 땅이 뒤집어지고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나간다.

언젠가부터 소이탄도 섞이기 시작했는지, 터져나간 흙바닥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백린 특유의 역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불길은 금세 번져 주변의 나무를 집어삼켰다. 칠흑 같았던 밤이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요란스러운 폭음과 치솟는 불길. 매캐한 연기와 탄내. 어둠을 뚫고 붉게 일렁이는 불빛. 사방엔 온통 적들과 끝없이 펼쳐진 산뿐.

그 정신없는 혼란 속에서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온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관탄환도, 유도탄도 결국 소모품이다. 무한정 쏟아낼 수 없다.

놈들은 내가 피하기만 하자 자신감이 붙었는지 먼저 달려들었다.

어느새 워 머신의 양팔엔 특수강으로 만든 칼이 돋아나 있었다. 손등 위로 마치 질럿처럼 솟구친 칼날은 은백색으로 반짝였다.

쐐애액!

몇 번의 도약으로 내게 접근한 놈이 자신 있게 칼날을 내질렀다. 바람을 찢는 파공성이 나를 단번에 쪼개버릴 기세다.

나는 피하지 않고 칼을 올려쳤다.

"그딴 이쑤시개 같은 칼로 뭘 하겠다는 거냐!"

놈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워 머신의 칼날은 넓이만 한 뼘이 넘어갔다. 그에 비해 내 칼은 평범한 인간의 칼이었다. 당연히 그 크기나 위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놈의 실수였다.

기세 좋게 떨어져 내리던 놈의 칼날이 내 칼과 부딪치자.

카캉!

그대로 튕겨 나간다.

"아닛!?"

워 머신의 출력이 담긴 칼날을 받아내자 놈들이 놀란다.

나는 튕겨 나간 칼날의 주인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누군지 못 들었나?"

서걱!

튕겨낸 칼날의 틈을 노려 단번에 놈의 팔을 잘라버렸다.

아무리 단단한 워 머신의 장갑이라도 그 관절부위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끄윽!"

잘린 팔이 허공을 날고 놈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다른 놈들이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콰지직!

어느새 붉게 타오르는 칼날이 물러서는 놈을 갈라버렸다.

붉은색 검기는 워 머신의 장갑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타 있던 친위대도 마찬가지였다. 반으로 갈린 놈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내가 소드마스터다."

칼날의 두께와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나무가 불타는 냄새가 아니라 피륙이 새까맣게 타며 내는 불쾌한 냄새다.

"피터!"

"이 새끼가!"

그제야 분노에 찬 칼날이 양쪽에서 찔러 들어왔다.

나는 뒤늦게 쇄도하는 칼날을 상대하지 않고 유유히 몸을 피했다.

쾅!

그새 배후에서 다가온 다른 놈이 도끼처럼 생긴 무기를 내려찍고 있었으니까.

"다들 방심하지 마라! 저놈 손에 골든에그 친위대 열이 당했다!"

멀리서 다이크의 외침이 들려왔다.

'친위대라면 나보다 네놈이 더 많이 죽였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친위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소 들떴던 기세는 가라앉았고, 대신 싸늘한 분노가 자리 잡았다.

'확실히 정예는 정예로군.'

놈들을 도발시키려고도 해봤고, 방심하게도 유도했으며, 기세를 누르기 위해 퍼포먼스도 보여줬다.

다른 놈들이었다면 이쯤에 눈이 돌아가서 앞뒤 없이 달려들었던가, 아니면 기세에 눌리기라도 했을 텐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나는 하늘을 힐끗 바라봤다. 치솟는 붉은 불길에도 밤하늘은 점점 깊어질 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길겠어.'

* * *

이치로는 미친 듯이 날뛰는 칼잡이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저! 저! 비루한 칼잡이 새끼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감히 시궁창에서나 뒹굴던 칼잡이 따위가 뭘 어쩌겠다고? 짓밟아? 5대 메가코프의 보안팀장 자리에까지 오른 나를? 천한 놈이 제 주제도 모르고!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당장에라도 무릎 꿇고 개처럼 빌어도 분이 안 풀리는 마당에 저렇게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니?

"친위대장! 언제까지 두고 볼 겁니까!"

이치로의 날선 시선이 칼잡이에게서 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다이크가 팔짱을 낀 채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치로의 시선을 느낀 다이크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 놈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다. 방수가 있을 수도 있어."

다소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그 태연한 태도에 열이 받은 이치로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이런 산골짜기에 무슨 방수가 있습니까!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에 튀어나왔겠죠!"

"······기업은 그렇게 일하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무엇보다 걸리는 게 있거든."

"걸리다뇨? 뭐가 말입니까?"

"놈은 뛰어난 칼잡이다. 그건 네 눈으로 보듯 의심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분명 놈이 침투한 흔적엔 혼자가 아니었다. 단시간에 보안시스템을 통째로 장악할 정도로 뛰어난 사이버러너가 함께했지."

다이크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칼잡이가 40구역 보급 거점과 골든에그의 보안시스템을 제 손안에 넣고 가지고 놀던 모습을.

그건 마치 조롱처럼도 보였다. 너희는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라는 비웃음 말이다.

이치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사이버 러너? AI일 수도 있잖습니까?"

"몰라서 묻나? 우리 역시 안티-AI로 아이즈원의 보안시스템을 사용한다. AI가 접속하는 경로의 방화벽은 단시간에 뚫리지 않아. 오히려 안티-AI에 걸려 파괴될 거다."

"그렇다면······."

"그래. 이번에도 분명 혼자일 리 없다. 어쩌면 놈이 시선을 끌고, 그사이에 침입하려 할 수도 있지. 어차피 놈들이 노리는 건 데이터일 테니."

이게 다이크가 팔짱을 낀 채 칼잡이가 날뛰는 모습을 보고만 있는 이유였다.

중요한 건 칼잡이의 목숨이나, 숨어있는 방수가 아니었다. 연구소가 뚫리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러다가 도망가면! 저놈 날뛰는 것 좀 보세요! 이대로 도망간다고 해도 잡을 수나 있겠습니까?"

"······이치로 팀장.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다이크의 스산한 눈빛이 이치로를 향한다.

"너를 존중하는 건 네 뒤에 회사 때문이지, 네 능력 때문이 아니다. 그만 건방 떨고 입 닥치고 지켜보도록."

"가, 감히······!"

"왜? 그 입을 찢어줘야 닥치려나?"

"······이익!"

이치로가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이크의 경고대로 더 말을 잇진 못했다. 그도 다이크의 악명을 누누이 들었던 탓이다.

제 동료도 눈 돌아가면 거리낌 없이 쳐 죽이는 놈이다. 괜히 자극했다가 수틀리면 진짜 입을 찢고도 남을 놈이다.

그런 이치로를 힐끔 바라본 다이크가 콧방귀를 뀌며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모든 신경은 전장과 혹시 모를 침투에만 쏠려 있었다.

침음성을 삼킨 이치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개 마약상 따위가 감히!'

길거리를 탈출해 이 자리까지 오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던가.

온갖 더러운 일은 마다치 않고 했으며, 경쟁자는 서슴없이 제거했고, 한때 동료였던 이들을 배신하며 끝없이 위로 올라섰다.

이 자리는 그렇게 이룩한 자리다. 피로 얼룩진 자리며, 배신으로 점철된 자리다.

그렇게 올라선 윗공기는 너무나 달콤했다.

5대 메가코프의 보안팀장이란 자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봤다.

잘나가는 사업가라며 턱에 힘주고 다니던 놈들도 신분을 확인한 순간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펴고 다니던 갱단 보스들은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고상한척하던 부유층 놈들도, 하층민을 착취하는데 열을 올리는 기업 놈들도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그런데! 그런데 감히!

일개 마약상 따위가 이 자리에 오른 자신을 능욕해?

지잉.

이치로는 바로 전뇌 통신을 열었다. 눈동자에서 희미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보안 4팀. 대기 병력 전부 연구소로 집결한다.

-실장님 오더입니까?

-비상상황이다. 4팀장 권한으로 소집하겠다.

-알겠습니다.

통신은 길지 않았다. 그저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부하들을 호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치로는 알고 있었다. 그 후폭풍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그래. 어디 내 능력을 보여주마. 모조리 뒈지고 난 다음에도 똑같이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자신의 능력은 곧 회사의 능력이나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 회사에 헌신했고, 그 결과가 보안팀장이라는 직책이었다.

'건방진 길거리 새끼들. 메가코프의 보안팀이 얼마나 대단한지 똑똑히 보여주마.'

이치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 *

과연 만만치 않았다.

골든에그에 있던 놈들도 친위대라고 들었는데, 이놈들은 또 달랐다. 친친위대정도라고 느껴질 정도다.

친위대장과 같이 움직이는 놈들이니 정예 중의 정예인 것도 맞을 테고, 아마 나를 알아보고 미리 준비한 탓도 클 테지.

한참을 놈들과 드잡이질하는 와중에 여태껏 조용하던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정체불명의 비행선들이 접근중입니다.

배를 가르려는 자들 (4)

116화. 배를 가르려는 자들

'비행선?'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49구역에서도 도시 밖 익스터널에 가까운 지역. 비행선이 지나다닐 만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이 시점에 아무 상관 없는 비행선이 접근할 리가 없다.

그 말인즉, 그 비행선의 목적지는 이곳이라는 뜻.

-비행선 확인을 시작합니다. 면허코드 SC-AKM-20772049. 아큐마 제약 소유의 비행선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어진 이브의 목소리가 비행선의 정체를 알려왔다.

'아큐마 제약.'

내 시선이 이치로에게 향했다.

놈은 일그러진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다이크와 대화하고 있었다.

'좋지 않다.'

메가코프의 개입.

그것도 악명높은 메가코프의 보안팀은 변수가 컸다.

내가 상대했던 가장 강했던 적은 인형술사였다. 스스로에게 망가진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임플란트한 것도 모자라, 저주받은 바이오웨어인 발할라까지 사용하며 종국엔 폭주까지 했던 미친놈.

하지만 메가코프의 보안팀엔 인형술사 같은 놈들이 널려있다.

인형술사가 망가진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구했던 것도, 아직도 개발중인 발할라를 구한 것도, 결국 돈 때문이다. 그리고 돈은 메가코프가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였다.

결국, 이 게임의 최종 빌런들은 싫든 좋든 전부 메가코프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 자체가 메가코프가 지배한 세계나 다름없으니까.

즉, 지금은 변수를 줄여야 할 때다.

"인벤토리를 준비해줘."

타타탕!

나는 쇄도하는 워 머신의 칼날을 막아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 마스터. 좌표이동. 인벤토리 개방 준비합니다.

짧게 들려오는 이브의 목소리.

이제부터 탐색범위는 줄어들겠지만, 언제라도 내키는 순간 인벤토리 사용이 가능했다.

'비행선이라······ 마침 잘됐어.'

나는 눈을 빛냈다.

상공에서 날아오는 변수라면, 내리기 전에 추락시켜버리면 사라지겠지.

변수 자체가 말이다.

* * *

하지만 변수는 의외로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발생했다.

"공격!"

"모조리 쏴버려!"

불타는 수목을 헤치고 난데없이 등장한 무장세력이 총을 갈겨댔다.

투타타탕!

처음엔 놈들의 지원군이 왔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총구는 명백히 워 머신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티티팅!

하지만 워 머신들에게 총이 통할 리 없다. 방탄 슈트만 입어도 소총탄 대부분이 상쇄되는 마당에 특수강으로 만들어진 워 머신에겐 소용없었다.

늘어난 적들의 숫자에 워 머신들의 진형이 바뀐다. 나를 상대하던 일부가 무장세력을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등장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끄, 끄으윽!"

"피해! 피하면서 사격······ 커억!"

워 머신의 칼날이 거침없이 그들을 썰어버렸다. 그들도 나름 무장을 꾸리긴 했으나 워 머신의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선 그저 짓밟힐 뿐이었다.

'대체 뭐지?'

나는 상대조차 안 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황당한 감정을 느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나타난 거지? 워 머신들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왜? 신종 자살법인가?

그때 공간을 뚫고 무언가가 쇄도했다.

그건 길다란 쇠막대기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던 쇠막대기는 그대로 워 머신에 틀어박혔다. 가슴과 목의 경계선에 정확히 박힌 쇠막대기는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이, 이게 뭐야?"

틀어박힌 쇠막대기를 움켜쥔 워 머신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놀랐을 뿐 어떤 이상도 생기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쇠막대기는 워 머신을 뚫고 박힌 게 아니라, 장갑과 장갑의 연결부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것에 불과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부위를 노렸음에도 그걸 뚫지 못한 거다.

'저 정도로는 워 머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

그런데 그 순간.

번쩍!

콰르릉!

난데없이 낙뢰가 떨어졌다.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든 밤하늘에 낙뢰라니?

그 새하얀 빛줄기는 그대로 밤하늘을 가르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는 쇠막대기 위로.

콰과과과!

하늘의 분노가 지상에 강림했다. 한순간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번개는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워 머신이 요란한 불빛을 토해낸다. 붉게 달아오른 쇠막대기 주위로 파지직거리는 잔뢰의 흔적이 퍼졌다.

순간, 퍽!하고 워 머신 곳곳이 터져나갔다. 관절부위부터 시작된 작은 폭발은 이내 워 머신 전체로 퍼졌다.

과전압으로 인한 부하. 그에 잇따른 내부장치의 폭발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탑승자에게도 전달됐다.

"······커허헉!"

워 머신에게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낙뢰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으니 멀쩡할 리 없다. 원래였다면 이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연결부위에 틀어박힌 쇠막대기가 피뢰침 역할을 하며 낙뢰 전부를 흡수해버린 까닭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우연일 리 없다.'

난데없이 나타난 쇠막대기가 공중에서 춤을 추다가 하필 워 머신의 연결부위에 틀어박히고,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낙뢰가 떨어진다? 그것도 구름 한 점 없는 이 날씨에?

'그럴 리가.'

이런 걸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능력자뿐이다.

'하지만 능력자 한둘로는 저 워 머신들을 전부 상대할 수 없다.'

언젠가 말했지만, 기프트는 사용에 임계치가 있다.

낙뢰는 자연계 능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괴의 힘. 그걸 여러 번 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반대로 워 머신의 숫자는 아직도 수십 기가 남았다.

'내가 최대한 많은 숫자를 상대해준다고 해도, 그 전에 저들이 먼저 쓸려갈 거다.'

"각성자다!"

"리코!"

"이 개새끼들!"

워 머신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그들도 각성자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소총을 갈겨대는 잔챙이를 무시하고 고개를 홱홱 돌리며 각성자로 보이는 타겟을 찾고 있었다.

그때.

화르륵!

워 머신들 사이로 불길이 솟구쳤다. 그건 소이탄이 태우는 불꽃과는 달리 진짜 불꽃이었다.

갑자기 치솟는 불길에 워 머신들이 멈칫했다. 이미 각성자의 존재가 확인됐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기현상을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노렸던 걸까?

후우우웅!

워 머신들이 멈칫한 사이 강한 돌풍이 그들을 휘감았다. 주변의 흙먼지며, 소이탄의 흔적으로 불타는 흙바닥과, 부서진 나뭇조각과 자갈들이 휘날렸다.

그리고 이내.

그 중심에서 불타오르던 불길이 돌풍을 타고 하늘로 치솟았다.

거대한 불기둥.

마치 지옥의 불길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불기둥이 워 머신을 뒤덮었다.

깜짝 놀란 워 머신들이 불기둥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중심지에 있던 몇몇은 이미 당했으나, 비교적 바깥에 있던 워 머신들은 불기둥을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치이익!

그새 달아오른 워 머신의 장갑이 찬바람을 맞으며 식어갔다.

분노에 찬 음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 개 같은 돌연변이 새끼들이!"

"사정 보지 말고 전부 죽여!"

"이런 씨ㅂ······? 엇!?"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들던 워 머신 몇몇이 기우뚱하며 쓰러졌다.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이게 뭐야?"

"갑자기 웬 늪이?"

어느새 그들이 밟고 선 대지는 진창으로 변해있었다. 육중한 워 머신의 무게가 진창을 짓밟자 그대로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크윽! 이깟것!"

하지만 그 정도로는 워 머신의 발길만 조금 늦출 뿐이었다. 전천후 장비로 설계된 워 머신은 온갖 부품을 추가할 수 있었다.

푸슈슈슈!

등갑에서 불길이 토해지며 늪에 가라앉던 워 머신의 몸이 위로 떠오른다. 원래는 강을 건너거나, 전술돌진을 위해 착용한 부스터였으나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핫! 이 건방진 돌연변이 새끼들! 이제 죽여주······ 어엇?"

늪 위로 떠오른 워 머신이 호기에 찬 음성을 내뱉는 그 순간.

촤르르륵!

까드득! 까드득!

늪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촉수가 워 머신을 휘감았다.

"씨, 씨발! 이게 무슨 개 같은······!"

그게 마지막 대사였다.

촉수는 그대로 워 머신을 끌고 늪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장면은 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상식을 파괴한 기현상들.

전부 능력자들의 기프트다.

그건 능력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뜻과도 같다.

그리고 현시점에, 이 정도 숫자의 능력자를 보유한 세력은 내가 알기론 단 하나.

"소드마스터가 우리 편이다!"

"이길 수 있다! 저깟 깡통 따위 별거 아니라고!"

"우워어어!"

누군가의 목소리에 환호하는 대답들.

나를 알고 있고,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닌 세력.

'해방전선.'

이 거대한 도시의 가장 외진 곳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다.

* * *

다이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침내 등장한 강현재의 방수를 확인한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었다. 딱 봐도 볼품없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쇠막대기가 날아다니고, 번개가 내리치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 이건 그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는 힘이었다.

'각성자.'

1년 전쯤부터 도시에 나타나기 시작한 돌연변이들.

다이크의 차가운 시선이 강현재에게 향했다.

워 머신들의 출력에도 물러서지 않는 힘과 오히려 그걸 능가하는 속도.

심지어 아무리 살펴봐도 외부로 드러난 사이버웨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경계를 했는데······ 저 불가해한 힘과 움직임이 각성자라서 가능했던 거로군.'

하긴 그래야 납득이 됐다. 제아무리 사이버웨어를 둘둘 둘렀더라도 강현재가 보여준 능력은 이해 못 할 정도였으니까.

이제야 안심이 됐다. 저 움직임이 사이버웨어에 의한 게 아니라, 돌연변이기에 가능했던 움직이라면······.

'놈의 뒤에 다른 메가 코프가 없다는 의미겠지.'

피식.

다이크의 입매가 비틀렸다.

배후에 어떤 괴물이 숨어있을까 걱정했는데, 이걸로 확인이 끝났다.

놈의 능력도 알아냈고, 숨어있던 방수도 드러났으니 이제 더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의 시선이 워 머신과 싸우는 해방전선을 향했다.

쓰레기들이 제법 준비를 한 모양이다만······.

'그깟 돌연변이 능력 따위 철저히 짓밟아주지.'

팔짱을 푼 다이크가 전장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 다이크 친위대장?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움찔한 이치로가 다급히 물었다. 다이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져서."

놈은 모를 거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각성자를 상대했는지. 그리고 그 각성자들이 어떤 신세가 됐는지 말이다.

다이크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마침 실험체가 부족했는데 잘됐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