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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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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란 녀석을 손 봐주는 걸로 대금을 지불하는 건 어떠냐.]

"염성하 이놈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자고 일어나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이세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다 싶어 대금을 처리하려고 사적보복을 권유하다니. 회귀 전보다 덜하다뿐이지 인정 사정 안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였다.

'이런 놈을 다시 끌고 다녀야 한다니... 내 팔자도 참....'

염성하에게 개짓거리 하지 말라고 답장을 보내둔 이세훈은 곧장 제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며칠 철야라도 한 것처럼 힘이 쭉 빠진 제이크의 목소리. 그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응? 아아...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보다 무슨 일이야?

"전에 부탁한 정보들 어떻게 됐나 해서."

-아 그거라면... 잠시만.

인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지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제이크가 다시금 이야기를 이었다.

-반년 전에 그 사건에 관해서 찾아보니까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게 있긴 하더라고.

"어떤 건데?"

-일단 바벨의 '상아탑'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상아탑. 우르의 번화가 쪽에 위치한 30층짜리 고층건물로 마법 분야의 생도들이 주로 이용했는데 실질적으로는 그 안에 자리 잡은 '후원재단'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마법 분야의 교수와 졸업생.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단체들에게 후원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재단법인 상아탑.

바벨과는 별도로 지원을 했기에 마법 분야의 생도들에 한해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상아탑이었다.

"어느 정도는 알지."

-상아탑이 학년마다 특기생을 선발하는데 반년 전에 게르윈 선배가 2학년 특기생을 노렸다네. 그리고 그때 같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루이제 발렌트였다는 거구만."

이제야 흐릿하던 윤곽이 확실하게 잡혔다. 곰곰이 생각하던 이세훈은 이어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비에르 바르무트 쪽은?"

-UD그룹이랑 바르무트 가문이 몇 년 전부터 사업협력을 맺어서 집안끼리 교류가 좀 있었어. 서로 사돈 관계이기도 하고.

"사돈?"

-크루거 가문의 22번째 딸이 바르무트 가문의 장남이랑 결혼했거든. 사업협력을 맺기 직전에 했으니까 아마 정략결혼이었을걸?

"지저분한 이야기구만."

그래도 이걸로 게르윈과 비에르가 손을 잡고 루이제를 노렸다는 것이 얼추 확실해졌다. 머릿속으로 정리한 이세훈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이외에 또 뭔가 신경 쓰이는 건 없었어? 루이제 발렌트랑 연관된 쪽으로."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었던 부분. 지금은 루이제가 사용하고 있던 그 '흡입기'의 출처에 대해서 알아내야 했다.

-다른 거라면... 아. 그래. 루이제 발렌트랑 비에르 바르무트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던 건 알아?

"그건 알고 있어."

-루이제 발렌트가 패소하고나서 비에르 바르무트가 역으로 고소했을 때. 원소학부의 찰스 교수가 중재했다네. 지금도 개인적으로 후원하면서 도와주는 모양이야.

"...그렇구만."

듣기에는 은사가 제자를 도운 훈훈한 미담이겠지만, 이세훈에게는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뻔히 보였다.

"고맙다. 그 정도면 될 것 같네. 그럼 나중에...."

-아. 자, 잠깐만.

"음?"

-그... 으음... 한 가지 부탁이....

선뜻 말하기가 어려운지 머뭇거리는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그래?"

-그... 널 걱정하는 사람이 좀 많거든. 염성하 선배라거나... 에리카라거나....

"...."

-시간 있으면 괜찮다고 말이라도 좀 전해줄래? 눈총이 따가워서....

한쪽은 빚을 갚을 절호의 기회라고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다른 한쪽은 침 발라뒀던 인재를 다치게 했다고 분노에 차 노려본다.

그 둘의 괴팍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아마 상당히 시달리고 있으리라.

'거기에 아리아까지 거들었으면....'

제이크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한 이세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염성하한테는 아까 보내뒀으니 에리카한테도 보내둘게."

-고맙다....

"내가 더 고맙지. 나중에 또 알아낸 거 있으면 연락 주고."

통화를 끝낸 이세훈은 그새 염성하에게 도착한 답장을 확인했다.

[알았다.]

"알기는 개뿔이...."

제이크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내둔 이세훈은 에리카에게도 이야기하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눌렀다.

"...없네."

생각해 보니 매번 에리카가 마중을 나오거나 '우연히' 마주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보니 연락처를 교환한 적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뭔 일이야 있겠어.'

염성하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도 에리카는 별다른 사고는 안 칠 것이다.

나중에 제이크를 통해서 이야기를 해놓기로 한 이세훈은 바쁘게 옮기던 걸음을 멈췄다.

어제도 방문했던 루이제의 병실. 그 문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누구세요."

"어제 도와줬던...."

콰앙!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의 문이 부서져라 열리더니 새하얀 두 손이 튀어나와 이세훈의 멱살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이글거리듯이 타오르는 푸른색 눈동자. 체내의 마력이 감정과 호응하며 두 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빡돌았네.'

회귀 전의 폭견이었다면 전치 4주가 나올 때까지 마법을 퍼부었을 수준. 그 모습에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견적을 짜 맞추고 있을 때.

"이─."

분노로 이성을 잃은 루이제의 입이 열렸다.

"개─ 새─ 끼─ 야────!!!"

마력을 담은 것도 아닌데 귀가 저릿할 만큼 어마어마한 성량. 그 격렬한 환영에 이세훈이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욕이야?"

"갑자기? 갑자기라고?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는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2주간의 절대안정. 여기까지는 루이제도 자업자득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안정완 교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아무래도 지금 재활실험의 강도가 자네에게 너무 부담스러웠나 보군. 실험 강도를 1단계로 낮추고 다시 차근차근 진행해 보는 게 좋겠어.'

지난 반년 간 악착같이 올려왔던 재활실험의 강도가 10단계에서 1단계로 다시 떨어졌다.

물론 그게 부상이 악화됐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이정표삼아 병동에서의 생활을 버텨왔던 루이제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교수님한테 말만 안했어도...아니, 마력불능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로 겁만 안 줬어도...!"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며 멱살을 흔들어대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반짝였다.

"어제 그 흡입기 안 썼냐?"

"그래. 안 썼다 왜! 너 같으면 쓸 수 있겠냐!?"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재활에 차도가 안 보이는데 부상이 악화된다느니 마력불능이 된다느니 그런 소리를 듣는데 어떻게 쓰겠는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쓰는 거였는데...!'

루이제가 속으로 불만을 터트리고 있을 때. 이세훈이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폭견 때와는 다른가.'

마력결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 그런지 그와 관련된 일에는 조금 느슨한 경향이 보인다.

생각한 것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다 싶어진 이세훈은 멱살을 흔드는 루이제의 팔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 말을 믿는다는 거네?"

"헉... 헉... 안 믿어! 내가 누구 좋으라고 너 같은 개새...."

"마력결상을 치료할 수 있다 해도?"

이세훈의 물음에 쌍욕을 퍼부으려던 루이제가 움찔거리며 두 눈을 마주 보았다.

3분 동안 멱살을 붙잡힌 채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는 눈동자.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그 모습에 루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너 마력결상이 뭔지 알고나 말하는 거야?"

"완등자들도 어쩔 방법이 없다는 불치병이지. 아직까지는."

"...."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무시했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이세훈이기에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희귀 등급 무기에 유사 검기를 담아낸 생도 등장!]

[실패로 돌아갔던 검기 무구의 양산화, 새로운 돌파구가 나타나는가.]

[불칸 아카데미 학원장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면 새로운 학파가 나타나게 될 것']

본래 기술이란 수천, 수만 명의 범재보다 단 한 명의 천재에 의해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 나가기 마련.

그리고 눈앞의 이세훈은 그런 천재 중의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마력결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저 허무맹랑한 말에도 왠지 모를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젠장....'

어쩌면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비에르 바르무트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듣지도 않고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쉴 새 없이 피어나는 의심과 한참 동안 씨름하던 루이제는 이내 이를 악물며 결정을 내렸다.

"또 개소리 같으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알겠어?"

"또라니. 내가 언제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시끄러! 쓸데없이 말꼬리 잡기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루이제가 꽉 붙잡고 있던 이세훈의 멱살을 놓아주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들어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루이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차가운 반응. 그 뒷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여기 앉아."

책상 쪽의 의자를 빼서 앉은 이세훈은 침대에 걸터앉은 루이제와 마주 보았다.

허공에서 얽히는 검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 서로 피하는 기색도 없이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 이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할 게 많은데... 우선은 네가 가장 궁금한 것부터 해결해 보자고."

서랍에서 검은 케이스를 꺼낸 이세훈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은색 흡입기를 집어 들었다.

"이건 누구한테 받은 거야?"

"그건...."

"아니. 뭐 됐다. 원소학부의 교수가 몰래 구해다 준건데 대놓고 말하기 어렵겠지."

"뭐...?"

두 눈이 휘둥그레진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하며 손에 들린 흡입기를 까딱거렸다.

"이 흡입기. 정식 명칭은 모르지만 나는 이걸 '마력침식기'라고 불러."

"마력침식기라고...?"

"그래. 자잘하게 설명하면 기니까 한번 보여줄게."

"뭐? 아니, 잠깐...!"

깜짝 놀란 루이제가 막기도 전에 마력침식기를 입에 문 이세훈은 버튼을 누른 다음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우웅─

마력침식기를 통해 체내로 스며드는 녹빛의 마력.

기묘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마력의 존재감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영연신마법을 통해 임시통로를 만들어냈다.

철컥─

안내를 따라 새로운 길에 들어온 녹빛의 마력은 얌전히 체내를 순환하며 자신이 머무를 장소를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온 길, 마력회로 안에 다른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콰드득─

본색을 드러내며 마력회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 변태새... 어?"

이세훈에게서 마력침식기를 빼앗으려고 달려들려던 루이제는 눈앞의 풍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신이 은은하게 녹빛으로 빛나는 이세훈. 겉보기에는 단순히 마력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루이제는 그 변화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누구야 저건....'

분명히 겉모습은 싸가지 없는 대장장이 놈이 맞는데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이질적인 광경에 루이제는 그제야 이세훈이 이야기한 '침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마력회로를... 통째로 바꿔 버린다고...?'

단순히 마력만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력회로 전체에 뿌리를 내려 그 성질 자체를 바꿔 버린다. 그 깨달음에 루이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언제나 상처 입은 목을 치유해 주듯이 머무르던 녹빛의 마력.

하지만 그 진실은 마력결상 때문에 저항력마저 사라진 자신의 마력회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윽...!"

자신의 목 안에 수백 마리의 기생충이 파고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은 감각.

당장에라도 목을 뜯어 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루이제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자 자신의 몸을 살피던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저거 저러다가 또 역류하겠네.'

이번에 마력역류가 일어나면 아예 집중관리에 들어가서 따로 만나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루이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세훈은 재빠르게 임시로 만들어낸 마력회로 안에 홍련을 집어넣었다.

화르륵!

홍련에 휩쓸려 그대로 불타오르는 녹빛의 마력.

차후 문제가 없도록 작은 뿌리 하나까지 모조리 불태운 이세훈은 홍련을 다시 수습한 다음 재빠르게 루이제의 손목을 붙잡았다.

"목 움켜잡지 말고. 심호흡해."

"하아... 하악...."

이쪽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몸을 웅크린 채로 계속해서 떠는 루이제.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루이제의 얼굴을 잡아 시선을 억지로 맞췄다.

"눈감지 마. 내 얼굴 보고 심호흡해. 당장."

눈을 감으면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면서 발작이 더욱 심해지기에 뭐든 현실의 물건을 보게끔 만들어야 한다.

회귀 전에 여러 번 해봐서 익숙했기에 이세훈은 눈을 마주한 채로 계속해서 심호흡을 명령했고, 루이제의 상태도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하아... 후우...."

거칠어졌던 호흡이 조금씩 진정되고 두 눈이 또렷해진다.

발작이 멎어가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두 손을 떼어낸 다음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간신히 원래대로 돌아온 루이제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됐어. 그보다 왜 마력불능이 된다고 했는지는 이해했냐?"

이세훈의 물음에 루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식이 계속 진행됐으면 목만 다른 마력회로로 변했을 테고... 그때부터 체내의 마력회로와 충돌을 일으켜 마력을 아예 사용할 수 없게 됐겠지."

간단히 말하자면 루이제의 마력회로는 본디 110v였지만, 침식당한 목 부분의 마력회로는 220v 전용으로 바뀐다.

그 결과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결국 과부하가 일어나 마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

모든 진상을 알게 된 루이제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목을 다치고 상아탑에서 내쳐졌을 때도, 법정에서 누명을 쓰고 퇴학을 당할 뻔했을 때도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주었던 은사.

'너라면 마력결상도 극복해낼 수 있을 게다. 그러니 어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인지하게 웃으며 흡입기를 건네주던 초로의 노인, 찰스 교수의 모습이 루이제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며 비에르 바르무트와 같은 비웃음으로 변한 순간.

콰득─

루이제가 이빨을 꽉 깨물었다.

자신은 그저 뛰어난 영웅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인가.

그 비참한 현실에 루이제는 억울함과 분함. 그리고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반드시... 반드시 되갚아주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에게 이런 불행을 가져다준 놈들에게 똑같이, 아니 속이 풀릴 때까지 수백, 수천 배로 되갚아주고 말 것이다.

빠드득─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루이제의 이빨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갈렸고 동시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웅─

갑작스럽게 떨리기 시작하는 병실 내의 마력. 루이제의 '의지'에 호응하는 그 광경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좋구만.'

루이제의 고유스킬인 '마력동화'의 흔적.

아직 각성은 못 하겠지만 저 정도라면 폭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마법'은 얼마든지 익힐 수 있으리라.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으르렁거리는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찰스 교수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알아보고 있으니까 확실해지면 이야기하자고. 알겠지?"

"...알았어."

"그럼 다음은 마력결상에 대해서야."

이세훈의 이야기에 움찔거린 루이제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

"일단 정확히 말해두자면 마력결상 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나는 대장장이지 치료사가 아니니까."

"...."

"하지만 네가 마법을 쓸 수 있게끔 '교정'을 해줄 순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의 실력으론 힘들겠지만 폭견, 루이제 발렌트의 재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이제가 가만히 두 눈을 마주 보았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능력에 대한 의심은 사라졌지만 목적에 대한 의심은 찰스 교수의 일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어설프게 이야기하면 관계를 쌓는 데 좋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이세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게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야. 첫 번째는 훗날 내가 육대마경을 탐색할 때 도와줄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잠시 말을 멈춘 이세훈이 긴장한 루이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누구보다도 강해질 것."

"...."

"네가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다면 복수든 재활이든 있는 힘껏 도와줄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이제가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씩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누가 할 소리를."

자연스럽게 왼손을 맞잡은 채 악수하는 두 사람.

인연레벨이 올랐다고 따로 뜨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확실하게 신뢰관계가 구축된 것이 느껴졌다.

퇴원하기 전까지 루이제를 훈련시킬 수 있게 됐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문득 책상에 올려둔 마력침식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잘하면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

한 번 더 사용해서 확인해 보기로 한 이세훈이 책상에 올려둔 마력침식기를 다시 잡았고.

"한 번만 더...."

"하지 마!"

입에 물기도 전에 루이제에게 빼앗겼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3화

다음 날.

루이제의 병실을 다시 찾은 이세훈은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받아."

"뭔데?"

"오늘 쓸 훈련 도구."

"뭣...."

심드렁한 이세훈의 이야기에 대수롭지 않게 받으려던 루이제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력결상을 교정하여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들어줄 훈련 도구. 자신의 구명줄과도 같은 물건이라고 하니 긴장한 것이다.

"뭐해. 빨리 받아."

"아, 알았어."

마른침을 삼킨 루이제가 조심스레 비닐봉지를 건네받아 안쪽을 힐끔 보았고.

"...뭐야 이게."

윤기가 흐르는 체리의 모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체리잖아."

"정확히 말하면 제이슨 체리지. 심리 안정 효과에 당도도 높아서 비싼...."

"아니. 그런 건 됐고 훈련 도구는 어디 있는데?"

루이제의 물음에 이세훈은 봉지 안의 체리를 가리켰다.

"거기 있네. 훈련 도구."

"...."

미친놈이라도 보듯 싸늘하게 쳐다보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턱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제대로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서 앉아."

"...알았어."

영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심을 꾹꾹 눌러 담으며 루이제가 방 안으로 들어갔고 이세훈도 뒤따라 들어갔다.

병실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화이트보드와 책상, 의자. 조촐하게나마 만들어진 교실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회귀 전에도 그렇지만 이런 거 참 좋아한단 말이지.'

자신이 배울 때도, 남에게 가르칠 때도 늘 환경과 분위기를 중시하던 폭견.

밥 먹다가도 뜬금없이 가르침을 전수하던 자신의 사부와는 정반대였는데 이세훈도 그 정성은 마음에 들었었다.

'성취도가 안 따라주면 자기 정성을 무시한다고 개지랄을 떨었지만....'

34시간 연속으로 수업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이세훈이 치를 떨고 있을 때. 자리에 앉은 루이제가 노려보았다.

"뭐해. 빨리 시작해."

"그래그래. 간다."

화이트보드 앞으로 간 이세훈은 위에 놓인 보드펜을 집어 들었다.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네 목 상태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고."

이세훈이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화이트보드 위로 목과 그 안쪽에 엇갈리게 이어진 마력회로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기본적으로 마력결상은 이렇게 회로가 본래의 길에서 벗어난 채 회복된 상태를 말해. 증세는 마력을 사용할 때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거고."

"...."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부분이야"

어긋나 있는 마력회로에 동그라미를 친 이세훈이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마력결상이 통증을 느끼는 '마력'은 어떤 마력인가."

"...뭐긴. 정제된 마력이지."

마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력회로를 통해 정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표현만 거창하지 마력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체내에서 반사적으로 이뤄지며 어린아이조차 자연스럽게 해내는 신체작용이었다.

"맞아. 마력결상은 정제된 마력에만 반응하지 평범한 마력에는 반응하지 않아. 지금 네 체내에 마력이 순환하고 있음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고."

화이트보드에 이야기한 내용을 간추려 적어낸 이세훈은 씩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마력결상의 통증을 유발하지 않고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지."

툭툭─

"여기서 마력을 정제시키면 되는 거야."

"...."

화이트보드를 두드리는 보드펜의 끝, 입안을 가리키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그게 될 거라고 말하는 거냐?"

마력은 얼마나 정제를 거치느냐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며 특히 마법은 그 차이가 매우 크게 작용했다.

원소학부의 생도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중급 마법은 전신의 마력회로를 사용해 4번 이상 정제를 거쳐야 했고, 기초인 초급마법조차 최소 1번은 정제해야 했다.

그런데 그걸 신체의 극히 일부분인 입안에서만 한다? 사실상 권총으로 미사일을 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아... 그럼 그렇지. 내가 괜한 기대를...."

"다른 사람들이야 안 되겠지."

루이제의 말을 잘라낸 이세훈이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는 가능해."

폭견 루이제 발렌트.

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며 영웅과 마인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마법사를 죽였던 최악의 테러리스트.

그 흉악한 재능은 이 비효율적인 방법조차 하나의 무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크흠."

확신을 담아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뭐, 일단 들어나 보자.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일단은 입안의 마력회로부터 단련해야지. 캐스팅 때 쓰이기는 해도 비중이 별로 없다 보니 아무래도 둔하거든."

"흐음. 입안이면 혀인가...."

입안에서 혀를 굴려보던 루이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체의 말단 부분인 만큼 마력회로의 비중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 그런데 이것만으로 전신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정제마력과 어떻게 견준단 말인가.

'애초에 마법이 발동될지도 모르겠고.'

애꿎은 볼만 혀로 꾹꾹 누르고 있을 때. 불현듯 루이제의 시선이 체리를 향했다.

"그래서 결국 이 체리는 결국 뭐야?"

"훈련 도구라니까. 이제부터 써야지."

"이거를?"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이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입안의 마력회로를 단련하는데 체리를 어떻게 쓴단 말인가. 루이제가 당황하고 있을 때 이세훈이 손을 내밀었다.

"한 알 던져봐."

"아, 응."

루이제가 봉지에서 체리 한 알을 던져주자 이세훈이 가볍게 낚아채 곧장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우물거리는가 싶더니 혀를 삐쭉 내밀었고.

"...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묶여 있는 체리의 꼭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기초형태. 혀의 마력회로를 세밀하게 조작해서 묶는 거야."

"...."

"구강 내에서 마력을 움직여 보조하는 방법도 있지만 처음에는 어려울 테니까 그냥 이빨을 써.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며 화이트보드에 혀를 움직이는 방법을 그리는 이세훈. 진지하게 설명하는 그 모습에 루이제가 지그시 눈을 감았고.

'내가 미쳤지.'

천재가 아니라 진짜 미친놈과 엮였음을 깨달았다.

* * *

체리 매듭 훈련법을 전수한 뒤. 이세훈은 몇 가지 훈련법을 추가로 알려주었다.

"간장내가공장그린공장장은그림은강잘공장장이고그린된장그림이고공장네가공장...."

콰작

"으그윽?!"

발음이 어려운 말 두 개를 즉석에서 겹쳐 이야기하는 훈련법.

"좀 더 악을 담아서!"

"이상한 짓 좀 그만 시켜 이 미친새끼야!!!"

마력과 감정을 한데 담아서 있는 힘껏 소리치는 훈련법.

"발음 흐트러지면 안 된다?"

"그냐 주어."

입안을 꼬이게 만드는 캐스팅 훈련용 막대를 물고 말하는 훈련법.

남들이 보면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가 싶을 만큼 황당한 훈련들이었지만 이세훈은 시종일관 진지하게 가르쳤고, 루이제 역시 불평하면서도 따라갔다.

"달아...."

"쓴 것보다야 낫지. 그냥 먹어."

한 알에 1,000원이나 하는 제이슨 체리를 하루에 100알도 넘게 먹었고 혀와 입술은 잊을 만하면 씹어 상처가 줄어들지를 않았다.

거기에 평소보다 목을 자주 쓴 탓에 목소리도 쉬었지만 그런데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훈련이 계속되기를 일주일째.

"됐다...!"

루이제의 혀 위로 육각형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체리 꼭지들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육각형.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완성된 그 모습에 이세훈이 박수 쳤다.

"오. 진짜 완성했네. 대단한데?"

"내가 말했지. 이까짓 거 별거 아니라고!"

"음음. 훌륭해."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육각형의 매듭을 일주일 만에 완성했다. 그 모습에 이세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본인이 만든 훈련법이라 그런가. 순식간에 적응하네.'

2주 동안 얼마나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

이세훈이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

"...아아악!!"

매듭을 보며 웃던 루이제가 갑자기 머리를 마구 긁어대며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래?"

"왜냐니! 그동안 늘어난 게 이딴 개짓거리밖에 없으니까 그렇잖아!!"

혀를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고 아무리 어려운 문장도 꼬이지 않고 단숨에 말할 수 있게 됐다.

거기에 발성과 발음도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는데 녹음해둔 음성을 들어보면 아나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일주일 만에 이뤄진 성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결과물이었지만.

'이게 마법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아무리 봐도 마력결상의 교정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쓰잘데기 없는 훈련에 몰두했다는 허탈감. 그 쓰잘데기 없는 훈련에 엄청난 재능을 드러내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으그으으아아악!!!"

돌연 밀려오는 감정에 루이제가 힘겹게 완성한 육각형 매듭을 꽉 움켜쥐며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씩씩거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하아아...."

혀를 그렇게 씹어가며 열심히 만든 매듭에 화풀이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몸을 축 늘어뜨린 루이제는 힘없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미안... 요새 머리가 좀 오락가락하네."

"뭐. 그럴 수도 있지."

"훈련이나 계속하자. 다음 매듭은 뭔데?"

자포자기한 얼굴로 체리를 씹어 먹는 루이제. 그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이번 훈련은 '언령마법'에 쓰일 마력을 정제하는 법이야."

"그래. 언령... 언령마법?"

또 매듭이겠거니 했던 루이제의 두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고, 그 격렬한 반응에 이세훈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단 한번 보여줄 테니까 잘 봐둬."

정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안으로 모여드는 마력. 그 양이 충분해진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혀의 마력회로를 일깨우며 가볍게 튕겼다.

스으윽─

구강에 모인 마력이 혀에 튕겨져 이리저리 뭉친다.

루이제는 입안의 마력회로만을 사용해서 마력을 정제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우웅─

언령마법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술식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마력. 그리고 그것을 마법으로서 발현시킬 수 있는 강한 의지, 정확히 표현하자면 '심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려낸 마법의 형태가 정확하고 선명할수록 언령마법은 그 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것이다.

'우선은 잘 보여줘야 하니까... 구형이면 되겠지.'

마법의 심상이 완벽히 그려진 순간. 입안에 뭉치던 마력이 술식으로 변해 체내의 마력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술식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이세훈이 가볍게 입을 벌렸고.

"<구형>"

쏘아진 언령이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며 구현되었다.

우우웅─

주먹만 한 형태의 반듯한 구형. 특별한 효과는 없었지만 오직 입안의 마력회로만을 사용해 완성해냈다.

"...."

그 모습을 바라본 루이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력결상을 교정하여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반신반의하던 이야기가 정말로 눈앞에서 증명된 것이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루이제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고, 이세훈은 구형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오늘 컨디션 좋은데.'

회귀 전에는 구형을 만들어내면 열에 여섯은 찌그러진 채로 나왔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한번 만에 깔끔하게 나왔다.

그 깐깐한 폭견이 보더라도 좀 치네? 라고 인정해 줄 수준. 그 모습에 이세훈은 옆에서 멍하니 보고 있는 루이제를 힐끗 쳐다봤다.

'잘되는 것 같으니까 좀 더 보여줄까.'

루이제의 재능을 생각하면 금방 자신을 추월할 테니 이럴 때 최대한 대단한 모습을 보여서 뭘 하더라도 신용하게끔 만들어둬야 한다.

눈앞에 떠 있는 구형을 바라본 이세훈은 조금 더 어려운 언령마법을 사용했다.

"<변형>"

촤라락─

공중에 뜬 구형이 꽈배기처럼 비틀리며 길게 늘어지더니 나선 형태의 가느다란 창으로 변한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흠잡을 곳 없는 조형.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괜찮네.'

이것도 열에 여덟은 형태가 조금 불안정하게 나오는데 비틀림 없이 아주 깔끔하게 잘 나왔다.

오늘이 날이다 싶어진 이세훈은 과감하게 또 다른 언령마법을 펼쳤다.

"<속성부여>"

나선의 창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회전부여>"

창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말벌 같은 소리를 낸다.

눈앞에서 완성되어가는 흉흉하기 짝이 없는 마법의 모습에 이세훈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이렇게 잘 되지?'

성공확률 40%를 뚫고, 30%를 뚫고 이어서 10%를 뚫더니 5%도 뚫어버렸다.

실패하면 취소하려 했던 마법이 계속해서 진화하자 병실의 공기가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맹렬하게 회전하는 무시무시한 화염창.

그 마법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실의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속부여>"

투웅─!

쏘아진 화염창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박살 낼 것처럼 흉흉히 빛난다.

엄청난 대폭발을 일으킬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마지막 언령을 내뱉었고.

"<고정해제>"

피융─── 펑!

작은 불꽃이 허공에서 맥없이 터졌다.

"방금 뭐였지?"

"몰라. 훈련실 쪽에서 난 거 아냐?"

바깥을 산책 중이던 사람들이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별 볼 일 없는 소리. 하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그 형편없는 위력에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차로 비유하자면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던 트럭을 브레이크를 밟는 게 아니라 모조리 분해해서 멈춰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회귀 전.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 없는 언령마법의 성공에 이세훈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스킬 '언령 : 부여(C)'를 습득하셨습니다.]

회귀 전에 다룬 스킬이 또 하나 복구되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4화

[언령 : 부여] 『C』

사물에 마력을 부여하는데 특화된 언령.

언령에 사용되는 심상과 마력의 양, 사물의 재료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사물과 언령의 상성에 따라 유지시간이 증가합니다.

새로운 스킬을 살피던 이세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걸 벌써 습득할 줄이야....'

회귀 전에는 입이 부르틀 때까지 언령을 써서 겨우 습득한 스킬이 시범을 위해 딱 한 번 쓴 것만으로 습득되었다.

그 사실에 이세훈은 기쁨보다는 의심스러움을 느꼈다.

'왜 이렇게 잘되는 거지?'

이전에 마광수한테 배운 호신술들도 그렇고, 오늘 사용한 언령마법도 그렇고 회귀 전에는 잘 써지지도 않던 것들이 능숙하게 펼쳐진다.

그나마 호신술은 회귀 전의 엉망이었던 몸이 멀쩡한 시절로 돌아와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언령마법은 달랐다.

'이건 순수하게 재능의 문제야.'

마력결상에 걸린 루이제도 사용할 수 있듯이 언령마법은 몸이 젊고 늙음이 관계없다.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언령마법에 대한 재능뿐. 그리고 이세훈은 창시자인 폭견에게 직접 배웠음에도 제대로 다루기까지 5년이 걸렸던 둔재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실력이 늘어난다라....'

보통 때라면 자기가 잘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번은 조금 경우가 다르다. 스킬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세훈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건가.'

단순히 젊어진 것이 아닌, 회귀로 인한 변화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가르쳐줘."

넋이 나가 있던 루이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세훈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면 돼? 아니, 일단 뭐부터 할까. 이제 네가 가르쳐주는 건 뭐든지 다 할게. 뭐든 말해줘. 빨리!"

두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미는 루이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던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괴팍한 훈련들이 정말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힘이 안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진정하고 앉아. 가르쳐줄 테니까."

"알았어."

대답과 동시에 재빠르게 책상에 앉는 루이제.

그 빠릿빠릿한 모습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화이트보드에 방금 사용한 '구형'의 술식을 적었다.

"언령마법은 마력과 심상을 얼마나 완벽하게 결합시키느냐가 중요해. 그걸 위해서라면 술식의 구조나 완성도, 효율 같은 건 조금 무시해도 상관없어."

필요한 것은 불을 보고도 물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신.

설령 그것이 기존 마법체계에서 비효율적이라 할지라도 언령마법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구사해낼 수 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마법처럼, 마법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 바로 언령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엄청 괴팍하네. 즉흥적이고."

"그렇지. 물론 그렇다고 이론이 약해도 되는 건 아니야. 기본적인 바탕이 있어야 다채로운 심상을 품을 수 있으니까."

고정관념을 가지진 않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며 다른 마법사들보다도 폭넓은 지식과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재능이 없으면 때려치워야 할 기술이었다.

"중요한 건 심상이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 자신에 대한 확신과 의지가 가장 중요해."

"...알았어."

"직접 해보면 좀 더 이해될 거야. 일단 구형부터 해보자고."

"좋아."

대략적인 설명을 모두 들은 루이제는 곧장 이세훈에게 배운 대로 마력을 정제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입안에 마력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루이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리 근래 익숙해졌다고 해도 혀를 튕겨서 술식을 짠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런 자신의 미숙함을 의식하기보다는 이세훈이 말한 '의지'에 신경을 집중했다.

'술식이야 조금 어설플 수도 있지...!'

마력을 더 쓰든 연산과정이 길어지든 마법으로 구현만 된다면, 아픔만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다.

두 눈을 이글거리며 루이제가 자신의 의지. 그리고 머릿속의 심상을 입안에 뭉쳐진 술식에 모조리 때려 박았고.

"<구형>"

투웅─

쏘아진 언령이 구형으로 맺어졌다.

눈동자만 한 작은 크기의 구형. 형태는 갖췄지만 마력을 결집시키지 못해 크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언령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도 애송이일 때가 있구나.'

회귀 전에는 매번 이것도 못하냐고 갈구던 모습만 봤는데 이렇게 자신보다 못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루이제가 만들어낸 작은 구형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은 이세훈이 조언을 위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Rebuild>"

이어진 언령이 구형의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우웅─

작게 맥동치며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구형. 그리고 일순간 손톱만 한 크기로 압축되었고.

파앙!

얼굴의 두 배만 한 구형이 충격파와 함께 허공에 펼쳐졌다.

마력이 새어나가고 형태가 조금 찌그러지긴 했지만 '마법'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형태. 그 모습에 이세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그냥 구형을 만들어낸 것만 해도 사나흘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언령을 덧대는 식으로 완성해버리다니?

누군가는 두 번 써서 완성했으니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언령마법은 이쪽이 더 어려웠다.

'언령 안에 담긴 심상이 조금만 달라도 충돌을 일으키니까.'

회귀 전 이세훈이 반년은 족히 연습해서 익혔던 응용법. 그것을 루이제는 본능적으로 단숨에 펼쳐낸 것이다.

'재능이 어디 가진 않는 건가....'

아무래도 언령마법으로 잘난 체하는 것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완성된 구형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문득 루이제가 조용한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구형을 바라보는 루이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붕대가 감겨 있는 자신의 목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안 아파."

분명히 마법을 썼는데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느껴지는 것은 약간의 어지러움과 무겁게 느껴지는 몸. 술식을 짜내느라 소모된 정신력과 언령에 빨려 나간 마력의 공백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마법을 쓴다는 것은 본래 이런 것이었다.

반년밖에 안 지났음에도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그 감각에 루이제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끄윽...."

당장에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처럼 글썽거리는 두 눈. 하지만 루이제는 펑펑 우는 대신 고개를 젖히고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아냈다.

그 필사적인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참아? 그냥 한 바가지 쏟아내지."

"아직은... 아니야."

마법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목 이렇게 만든 그 개새끼들... 그 새끼들 목구멍도 죄다 찢어놓기 전까지는 절대 안 울어."

눈물을 글썽인 채 이글거리며 빛나는 푸른색 눈. 그 열의를 불태우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래야지.'

마법을 쓸 수 있게 됐다고, 그것만으로도 기쁘다며 독기가 빠져 버리면 어쩌나 했지만, 역시 타고난 성격은 어디로 안 가는 모양이다.

루이제가 눈물을 참아내는 동안 이세훈은 다시금 완성된 구형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하루 만에 이 정도 완성도란 말이지....'

이 주 동안 기본기만 다져두고 병동에서 조금씩 실력을 쌓게 할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그냥 만나기 쉽게 퇴원시키는 것이 좋아 보인다.

'마침 언령부여도 얻었고... 괜찮겠구만.'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견적을 뽑아낸 이세훈은 고개를 젖힌 채 코를 훌쩍이는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네."

"킁... 다음 단계?"

"그래."

휴대폰을 꺼내든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트라우마 극복."

* * *

상아탑에 마련된 모의 훈련장.

그 위로 수많은 인영이 한데 얽혀 발 바쁘게 움직였다.

"으악!"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젠장...!"

채앵! 카앙!

다급한 표정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일곱 명의 생도들. 무기는 제각각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모두가 올해 입학한 1학년이라는 것. 두 번째는 평범하거나 그리 좋지 않은 가정형편의 입학생들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터엉!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적들이 검은 뼈로 만들어진 스켈레톤들이라는 것이었다.

'스켈레톤이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사령술에서 가장 기초적인 언데드인 스켈레톤.

근육을 비롯한 신체기관을 재현하지 않다 보니 한계가 뚜렷하고 보잘것없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 언데드였다.

후웅!

하지만 눈앞의 검은 스켈레톤들은 별도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힘과 기술만으로 자신들을 압도하고 있다.

고작 스켈레톤 따위에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에 신입생들의 얼굴에 자괴감이 떠올랐고, 연무장 밖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갈색 머리의 청년이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쓸 만한 놈은 한 명도 없군...."

전투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서 부른 건데 기억해둘 만한 녀석이 없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전투에 청년, 게르윈 크루거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앙─!

검은 마력이 스켈레톤을 훑고 지나가자 텅 빈 동공에 검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콰앙! 터엉! 빠악!

"컥!"

"크헥!"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진 스켈레톤들의 공격에 일곱 명의 생도들이 순식간에 연무장 밖으로 떨어졌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나가떨어진 신입생들의 모습에 게르윈이 눈매를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 이래서 신입생들을 가려서 받아야 하는 건데..."

조금 쓸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받아들이니 이런 못 써먹을 녀석들도 같이 들어오지 않는가.

스켈레톤들을 아공간 속으로 회수한 게르윈은 바닥에 널브러진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쓸모없으니까 다 꺼져."

"예, 예!"

게르윈의 축객령에 끙끙거리던 생도들이 재빠르게 일어서지 못하는 이들을 부축하며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모두 집안이 UD그룹과 연결된 이들인지라 오너일가인 게르윈의 심기를 거슬러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만 낭비했네...."

조만간 치러질 상아탑의 특기생 선발. 작년에는 별 탈 없이 차지했지만, 올해는 또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기에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됐다.

'지금 가장 거슬리는 건... 레아 클로델인가.'

입학 후 성적이 쭉쭉 떨어져 수석 자리도 지키지 못한 녀석이었지만, 최근 모든 수업을 빼먹고 공방에 틀어박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른 곳이면 모를까 천재들이 즐비한 바벨에서는 오히려 저런 은거가 가장 위협적이다.

'가능하면 정리해두고 싶은데... 이 녀석은 조금 힘들겠군.'

반년 전에 처리했던 원소학부의 떨거지처럼 집안이 보잘것없었다면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때처럼 비에르한테 부탁해 볼까.'

어떤 식으로든 특기생 선발에서 제외시키기만 하면 된다. 게르윈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웅─

갑작스레 울리는 휴대폰. 발신자에 '비에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본 게르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게르윈. 타워의 게시판에 도전장이 올라왔다.

"...도전장이라고?"

-일이 귀찮게 됐다. 빨리 확인해 봐라.

조금 다급해 보이는 비에르의 목소리에 게르윈이 곧장 타워를 열어 게시판을 살펴보았다.

1위. 도전장 [485]

인기게시판 1위에 올라가 있는 짤막한 제목. 그것을 본 게르윈은 무언가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게시글을 눌러보았다.

[도전장]

오랜 재활 끝에 마력결상을 극복하고 부족하게나마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학하기에 앞서 반년 전 신세를 졌던 사령학부의 3학년 학부 수석인 게르윈 크루거 생도에게 대련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오늘로부터 일주일 뒤 오후 1시. 장소는 무학관.

혹여 부상이 염려되어 참여하실 수 없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테니 부담 갖지 마시고 답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휴학생 루이제 발렌트 올림-

용건만 간단히 적혀 있는 도전장.

하지만 그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생도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중환자였던 나랑 싸우는 게 겁나면 거절해라.

노골적이면서도 유치한, 그리고 거절할 수가 없는 도전장의 내용에 게르윈 크루거의 눈매가 점점 일그러졌고.

"이... 개...."

콰득─

애꿎은 휴대폰이 박살 나며 복귀전이 성사되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5화

루이제의 공개도전장이 인기게시글 1위로 올라간 뒤. 하루도 지나지 않아 타워 전체가 뒤집혔다.

[익명 24] : 루이제 발렌트가 누구임???

ㄴ[익명 31] : 선배한테 물어보니까 반년 전에 게르윈 크루거랑 대련해서 졌던 사람이라는데.

ㄴ[익명 35] : 원소학부 2학년 학부 수석이던 사람임. 근데 그때 대련에서 크게 다쳐서 휴학 중이었다함.

ㄴ익명[24] : 근데 다시 도전한다고? 대단하네...?

[익명 25] : 마력결상을 극복ㅋㅋㅋ 무슨 개소리 적어둔 걸 인기게시글에 올리네.

ㄴ[익명 26] : ㄹㅇ 관리 개판이네. 본인이 적었을 리는 없고 사칭 아니냐?

ㄴ[익명 28] : 밑에 생도증 인증 있잖아. 진짜임

ㄴ[익명 43] : 진짜 치료된 거면 기사감인데....

25번째 아들이라 해도 완등자인 UD그룹의 오너일가이자 사령학부의 3학년 학부 수석. 그리고 상아탑의 특기생 중 한 명.

각 학년의 3명씩밖에 없는 학과 수석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높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지닌 생도가 바로 게르윈 크루거였다.

[익명 26] : 애는 나중에 영웅으로 활동하기 싫은갑다 ㅋㅋ

ㄴ[익명 31] : ㄹㅇ ㅋㅋㅋㅋㅋ

ㄴ[익명 33] : 퇴학하기 전에 그냥 확 지른 거 아님?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 이렇게 도전장을 던지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생도들은 자연스럽게 루이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됐고 반년 전의 대련에 대해서도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 뒤의 대련을 두고 바벨 전체가 떠들썩해졌고.

"야이 미친새끼야!!!"

화제의 주인공이 이세훈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별거 아니라며!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별거 아니지. 살인예고를 한 것도 아니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트라우마 극복이라길래 목의 상처와 관련된 일인 줄 알았더니 멋대로 도전장을 보내다니.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루이제는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의심마저 생겨났다.

'이 새끼 이거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 아냐?'

아무리 자신이 언령마법을 쓸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 거기다 지난 반년 동안 재활에만 힘쓰느라 모든 기량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반년 동안 더 성장했을 게르윈 그 자식과 붙으라니? 아무리 봐도 자신을 처리하려는 속셈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루이제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이세훈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진정해라. 설마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짓을 했겠냐?"

"...하아."

한숨을 푹 내쉰 루이제는 구겨진 이세훈의 옷깃을 팍팍 펴주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래. 당연히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어련하시겠어...."

스케일이 엄청나서 당황하긴 했지만 어찌 보면 언령마법의 기초를 가르칠 때도 이러지 않았던가.

반쯤 체념한 루이제는 여유로워 보이는 이세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이 있는데?"

"앞에도 말했지만 언령마법은 정확한 계산보다는 자신의 의지가 중요해. 본능적인 마법이라 그만큼 무의식의 영향이 크고. 자, 이게 뭘 뜻할까?"

"...사용자의 상태에 민감하다?"

"정확해."

언령마법으로 불꽃을 만들어낼 때. 불을 좋아하는 마법사라면 더욱 강력하고 다채로운 불꽃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불꽃에 트라우마를 가진 마법사라면 제어가 힘든 것은 물론이며 아예 마법이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의식중에 불꽃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너는 반년 전 사건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어. 어제 성공하고도 남았을 구형마법이 반만 성공한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다행히 마법을 쓰고 싶은 갈망이 더 크긴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제약이 너무 심해. 간단히 비유하자면... 원래 네 발로 달릴 걸 두 발로 달리고 있는 느낌?"

"그 비유 참...."

"그만큼 네 재능이 진짜란 거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악몽은 언령마법으로 극복했지만, 그때 겪었던 정서적인 충격과 심리적 불안감은 단숨에 해소되지 않는다.

상처가 치료되어도 흉터가 남듯이 루이제의 무의식에도 아직 그 잔재가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대로 놔두면 악용당할 가능성도 있고.'

회귀 전 마력불능이 된 폭견은 그것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여명黎明』이라 불리는 집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불법적인 인체실험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전신의 마력회로를 개조당하며 '목줄'이란 장치가 심어졌는데 그 발동구조가 바로 체내에 침식한 마력을 사용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앞에 마력침식기도 그렇고 어떤 방법으로 다시 수작을 부릴지 몰라. 그러니까 이번에 확실하게 처리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침식된 마력을 뿌리째 뽑는 거지만, 그쪽은 아직 루이제의 상태가 좋지 않아 마력결상이 악화될 위험도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써는 원인이 되는 트라우마를 극복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번 대련이 반드시 필요해. 힘들어도 이해해 줘."

이세훈의 진지한 이야기에 루이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니 해야지 뭐. 뭐든지 한다고 했으니까."

"알아주니 고맙네."

"근데 만약에라도 내가 지면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는 거 아니야? 그런 중요한 일이면 더 신중하게 했어야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네."

"뭐?"

"네가 그딴 놈한테 질 리가 없잖아."

위르겐의 25번째 아들이든 뭐든, 회귀 전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애송이에게 당할 만큼 폭견의 재능은 가볍지 않다.

확신을 담은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이제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개오글거려."

"잔말 말고 준비나 해. 가능하다고 했지 시간이 여유롭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래그래. 오늘은 뭐하는데? 대련이니까 전투랑 관련된 언령 연습해?"

언제 화냈었냐는 듯 기분 좋게 대답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미리 챙겨온 위생 장갑을 꺼내며 대답했다.

"검사."

"...응?"

의아해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장갑을 꾹꾹 잡아당기며 다시금 대답했다.

"구강검사."

* * *

아스쿠스의 제2병동.

복도를 지나가던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고 그 사이로 흑발의 소녀가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무심한 인물, 소문으로만 접했던 에리카의 모습에 몇몇 이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그 에리카 맞지? 우르에 1학년 학과 수석."

"맞는 거 같은데. 여기는 무슨 일로 왔대. 다친 곳도 없어 보이는데."

"그 왜. 이세훈인가 보르시파 쪽 1학년 학과 수석 입원해 있잖아. 그 녀석 보러 온 거겠지."

"허. 그럼 전에 그 소문이...."

흥미롭다는 듯이 무언가 속삭이는 이들. 에리카의 예민한 감각은 그 대화를 완벽히 잡아냈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저런 별거 아닌 헛소문에 하나하나 반응할 만큼 한가롭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은 이세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크게 다치지 않았다지만 제대로 확인해야 해.'

경매장에서 즉흥적으로 선보였던 백광장검의 연마.

유사 검기나 다름없던 예기를 사용해 검날을 세운 그 '기예'는 미세한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섬세한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번 부상으로 그 감각을 잃어버렸다면? 대장장이 업계는 물론 에리카에게도 엄청난 손실이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그냥 넘기지 않아.'

자신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식은땀을 삐질거리던 제이크. 그 모습을 떠올리며 에리카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져 가고 있을 때.

"야!!!"

방문을 뚫고 울려 퍼지는 고함.

잡담 한 번 들리지 않던 병실의 방음마저 간단히 뚫어버리는 우렁찬 외침에 에리카의 시선이 자연스레 명패를 향했다.

[204호실] [루이제 발렌트]

자신이 찾던 병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에리카는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은발의 소녀와 그 맞은편에 서 있는 흑발의 청년.

조금 가까이 붙어 있어도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귀청 떨어지겠다 임마."

언제 다쳤냐는 듯 눈매를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루이제의 입안 구석구석을 만지고 있는 이세훈.

"벼태새기."

그리고 치과에 온 것처럼 입을 벌린 채 수치심과 분노로 두 눈을 파르르 떨고 있는 루이제.

"...."

보고도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광경에 에리카가 입구에서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뒤늦게 그 등장을 알아차렸다.

"어? 네가 여기엔 왜 왔어."

"우왁! 뭐, 뭐야?! 누군데!!"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세훈과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이며 기겁하는 루이제.

극과 극인 두 사람의 반응에 에리카가 담담히 용건을 이야기했다.

"마이어스가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나한테 부탁한 물건을 맡겼어."

"그래? 나한테는 오늘 할 일 없다고...."

"갑자기 생겼어."

아무튼 그렇게 됐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에리카. 그 반응에 이세훈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리고 쓰게 웃었다.

"그래그래. 그럼 부탁한 물건은?"

"여기."

에리카의 아공간 포켓에서 나오는 작은 케이스. 그것을 건네받은 이세훈은 곧장 잠금을 풀고 물건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중심부 쪽에 작은 불꽃이 봉인되어 있는 은빛의 금속주괴. 이세훈의 옆에서 그것을 본 루이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거 투영합금 아냐?"

"맞아."

입학 첫 주에 자기소개 시간에 사용했었던 특수한 금속.

케이스의 안에서 투영합금을 꺼내든 이세훈은 가볍게 상태를 살펴보았다.

[투영합금]

[등급 : 고급] [품질 : 최상]

마력감응도를 극도로 끌어올린 합금.

제련과 단조, 연마의 과정을 생략하고 부여된 마력에 따라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변형이 완료된 이후 재가공을 시도할 경우 내구도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마력을 부여하여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괜찮은 걸로 보냈네."

본래 투영합금은 제대로 된 무구를 만드는 데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이 정도 품질이라면 충분히 써먹을 만한 하다.

제이크의 일 처리에 이세훈이 만족스러워하려던 찰나.

"내가 구해온 거야."

에리카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

"응. 마이어스가 아니라 내가 구한 거야."

착각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에리카. 그 모습에 이세훈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대단하네."

"...."

"다음에는 이런 일 있으면 너한테 먼저 부탁해야겠네. 그래도 괜찮지?"

"얼마든지."

연달아 이야기하니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카. 그 알기 쉬운 반응에 이세훈이 피식 웃고 있을 때.

"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이제가 이세훈의 팔을 툭툭 쳤다.

"그래서 이걸로 뭐할 건데. 빨리 설명해 줘."

"알았어. 뭐 그리 급하다고 재촉을... 아, 이제 돌아가도 돼. 고생했어."

"...."

이세훈의 이야기에 에리카가 투영합금과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무구 만드는 거야?"

"뭐, 그렇지?"

"그럼 나도 볼래."

"음? 그건...."

"뭐라는 거야?"

이세훈보다 먼저 툭 튀어나온 목소리. 눈매를 찌푸린 루이제가 짜증 난다는 듯 에리카를 노려보았다.

"일 끝났으면 나가. 방해하지 말고."

"...."

"내 말 안 들려? 내 병실에서 꺼지라고."

신경질적인 루이제의 이야기에 에리카가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나도 볼래."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투명인간처럼 무시해 버리는 에리카. 그 노골적이다 못해 적나라한 대응에 루이제의 눈매가 일그러지며 이가 갈렸다.

빠드득─

눈 깜짝할 사이에 싸늘해진 공기와 두 사람의 감정에 대응하듯 요동치는 마력.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이세훈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기는... 궁금하면 보고 가."

"응."

"야!"

루이제가 사납게 소리치며 항의했지만 이세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가갔다.

"자자. 시간 아깝다. 빨리 입 벌려."

"윽...."

손가락을 까딱이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가 항의하듯이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입을 벌렸다.

새 위생 장갑으로 갈아 낀 이세훈은 다시금 루이제의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안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세세히 살폈다.

"설명을 계속하자면 넌 완드나 스태프 같은 무기랑은 안 맞아. 일반적인 마법보다 발동과정이 많이 짧거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검사를 받느라 말을 못 하는 루이제를 대신해 질문하는 에리카. 그 물음에 이세훈이 담담히 설명했다.

"무기를 제대로 쓰려면 그 안에 정제된 마력을 불어넣어서 신체의 일부분처럼 사용해야 하는데 얘는 입안에서만 마력을 정제하거든."

"부위의 문제구나."

"그렇지. 무기를 입으로 물면 정제된 마력을 넣을 순 있겠지만 그러면 애는 마법을 못 쓰거든."

결국 언령마법을 쓰는 이들은 신체 능력을 보조해 주는 물건만 쓰거나 아니면 그 형태에 맞는 '전용무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구강검사가 그런 전용무기를 만들기 위한 과정 중 하나지. 이제 이해됐냐?"

"...."

전용무기를 만드는 것과 입안을 더듬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루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성격이 괴팍하긴 해도 이세훈이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 녀석은 좀 내보내지....'

무심하게 이쪽, 정확히는 자신의 입안을 살피고 있는 이세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에리카.

방금처럼 자신에게는 눈길도 안 주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이제는 묘하게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첫인상부터 좋지 않아서 그런지 그냥 얼굴이 보이기만 해도 묘하게 짜증이 난다.

특히 방금 대화 때문인지 몰라도 묘하게 자기가 이긴 것처럼 기세등등해 보이는 느낌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 모습에 루이제가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갈려고 할 때.

"야야. 내 손 있다."

"아. 미아."

루이제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입을 벌리자 이세훈이 어금니 쪽을 쓰다듬었다.

"웬만하면 맨입으로 이빨 갈지 마. 나중에 차가운 거 먹을 때 이 시린다."

이세훈의 담담한 조언에 루이제가 콧방귀를 꼈다.

"느그이 가으 서리 하기느."

"늙은이는 무슨.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야."

"시그러."

들은 체 만 체하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조언들은 모두 미래의 본인, 폭견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늙기 전에는 모르는 거지.'

아이스크림만 가져다주면 얼굴을 찌푸리던 폭견. 그 모습을 떠올린 이세훈이 피식 웃자 루이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윽! 야 너 방금 일부러 깨물었지."

"모라."

"모르긴 뭘 몰라. 이걸 확 그냥...."

"으읍?! 야! 혀 잡아 땡기지 마!"

구강을 검사하는 와중에도 투닥거리는 두 사람.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해 보여.'

입원 첫날부터 만났다고 해도 이제 일주일 조금 지났을 텐데 마치 몇 년을 알고 지낸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진다.

특히 누구를 상대하든 묘한 거리감을 내비치던 이세훈이 저런 친밀감을 보이니 마치 다른 사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그 이질적인 광경에 에리카는 처음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은발의 소녀, 루이제 발렌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제이크 마이어스나 류은하 학과장보다도 경계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루이제를 향한 에리카의 평가가 바뀌었고.

'눈깔 더럽게 뜨네 저거.'

두 사람의 사이의 골이 더욱더 깊어졌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6화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게르윈이 도전을 수락했을 때쯤. 이미 반년 전의 사건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널리 퍼졌다.

그때 당시야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끝났지만 지금 와서 살펴보니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특기생 선발전 시기랑 우연히 겹쳤던 거 아니야?"

"그 일만 아니었으면 루이제 그 사람이 받았을 텐데? 그리고 그때 폭발한 무기 만든 사람이 비에르 바르무트라잖아. 크루거 가문이랑 협력 관계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크루거나 바르무트나... 들리는 소문으로 생각하면 진짜 모를 일이지."

처음에는 작은 의혹이었지만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넘어갈수록 그 크기가 점점 커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바벨을 넘어 바깥으로도 흘러갔고.

-쯧. 한심한 놈.

게르윈의 본가인 UD그룹에서도 그 소문을 접했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녀석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 구설수를 만들어? 집안 이름에 먹칠을 해도 정도가 있지.

전화기 너머로 짜증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내, 3번째 아들인 다니엘 크루거의 비난에 게르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우리가 개입해 봐야 괜히 일만 더 커지게 될 테니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알겠어?

"...알겠습니다."

-멍청한 놈 같으니....

뚝─

차갑게 전화가 끊어지고 휴대폰을 쥐고 있던 게르윈의 손이 꽉 움켜쥐어졌다.

파각!

손안에서 단숨에 부서져 버린 휴대폰.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 분노에 게르윈은 고개를 숙인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위르겐의 3번째 아들인 다니엘의 나이는 올해로 73세.

사실상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간의 그런 화목한 교류는 없었다.

나이를 떠나 UD그룹의 수많은 계열사를 두고 다투는 정적. 그렇기에 지금 다니엘에게 이번 사건은 게르윈을 쳐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아버지께서 도와주신다면 단숨에 해결될 텐데....'

UD그룹의 총수이자 세계에 몇 없는 완등자. 그 위르겐 크루거가 직접 움직인다면 이런 사소한 일 정도는 가볍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설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 일도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고 손을 벌렸다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낮추며 그만큼 재산과 권한을 회수해가리라.

"빌어먹을...."

분명히 잘 해결됐을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단 말인가.

게르윈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왔다.

"게르윈."

금발을 깔끔하게 넘긴 올백 머리에 굵직한 인상의 청년. 생도답지 않은 중압감을 지닌 그 모습에 게르윈이 입가를 비틀었다.

"이게 누구야. 내 절친한 친구인 비에르 바르무트잖아?"

"...."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지? 우리 둘이서 반년 전에 그 버러지를 정리한 게 사실이라고 주변에 알려주고 싶어서 온 건가? 응?"

게르윈의 비아냥거림에 금발의 청년, 비에르 바르무트는 아무런 말 없이 응시했다.

그 모습에 게르윈의 미소가 점점 일그러지더니 이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이 멍청한 새끼야. 감옥에 처넣고 퇴학시켜서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계획을 바꾼 게 너였잖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찰스 교수의 뜻이었나?"

본래 게르윈은 뒤탈이 없도록 루이제를 바벨에서 완전히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에르가 찰스 교수로부터 제안을 받으면서 고소를 취하했고, 그 결과 상황이 여기까지 틀어진 것이다.

그때는 자신에게도 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받아들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날카로운 게르윈의 시선에 비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군. 내 실수다."

"나는 그딴 쓸데없는 대답을 들으려고 물어본 게 아니야."

비에르의 앞으로 걸어간 게르윈의 검은 마력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 해결책을 내놔. 너도 같이 계승권 밖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바르무트 가문의 계승권 다툼도 크루거 가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게르윈의 이야기에 비에르가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련 당일 무학관 동력실에서 간단한 점검이 있을 거다. 별일은 없겠지만 도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방벽의 반응이 조금 느려지겠지."

"...."

"그때 '우연히' 대련 중이라면 위험하지 않겠나. 사고가 나지 않도록 직원에게 주의해두는 게 좋겠군."

비에르의 이야기에 게르윈이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다면 실망인데."

"...저쪽의 상태를 망가뜨릴 수 있는 물건이 있다. 잘 풀린다면 쓰러질 테고, 아니어도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될 거다."

"흠. 좋아. 그 정도면 쓸 만하겠군."

지난번에는 일 처리가 조금 허술했지만 바르무트만큼 철두철미한 곳이 없다. 저렇게 확언을 할 정도라면 이번에야말로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나가봐."

"...건투를 빌지."

쿠웅─

문이 거세게 닫혔고, 그 소리를 들은 게르윈이 피식 웃었다.

'주제도 모르는 놈....'

최근 들어 입지를 넓혔다고 조금 기고만장한 듯하지만 결국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굳어졌던 비에르의 얼굴을 떠올린 게르윈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장식되어 있는 아공간 포켓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그 녀석도 간단히 이길 수 있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게르윈은 아공간 포켓을 열어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스아아─

순식간에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검은 안개. 전신을 충만하게 채우는 마력에 게르윈의 두 눈이 검은빛으로 반짝였다.

* * *

에리카와 루이제가 곁눈질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 검사를 끝낸 이세훈이 손을 빼냈다.

"이 정도면 됐어."

"턱 아파 죽겠네... 그래서 이걸로 끝이야?"

루이제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 하나만 더 준비하면 돼. 둘 다 잠깐만 나가 있어."

"응."

"그런 건 미리미리 좀 준비하지...."

고개를 끄덕인 에리카가 먼저 나갔고 그 뒤로 루이제가 투덜거리며 따라 나갔다.

그에 이세훈은 루이제의 등을 미는 척 자연스럽게 인연을 추출해냈다.

[대상 '루이제 발렌트'에게서 인연을 추출해냅니다.]

[제작자 '이세훈'과의 인연은 Lv.1입니다.]

우우웅─

손을 타고 스며드는 인연. 그 양을 확인한 이세훈은 살짝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많네.'

목을 좀먹던 마력침식도 알려주고 언령마법도 가르쳐줬으니 어느 정도 심상이 쌓였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좋게 봐줬던 모양이다.

"아 밀지 마."

"그럼 빨리 나가."

툴툴거리는 루이제까지 병실 밖으로 내보낸 이세훈은 문을 닫기 전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싸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

"...."

그동안 칼같이 대답하던 에리카가 입을 다물었고 루이제 역시 슬쩍 시선을 피한다. 벌써 원수라도 된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냥 치고받고 싸워."

어중간하게 신경전 하느니 그냥 싸워서 결판내는 게 낫다. 문을 닫은 이세훈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루이제의 인연석이라....'

회귀 전에 인연레벨을 Lv.5까지 올린 사람 중 한 명인만큼 간단하게 발현해낼 수 있었지만 이세훈은 처음부터 신중히 쌓아 올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 타인에게도 강하게 호소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감정적이고 다혈질에 싸가지 없다고 말하지만, 이세훈은 그냥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진심을 다한다면 상대도 거기에 응답해 주리라는 막연한 믿음. 그 멍청함이야말로 루이제 발렌트라는 인간의 근간이었다.

'폭견은 그걸 부정하게 됐지만.'

그런 바보 같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폭견과 루이제의 차이였으며 동시에 지금 만들어내는 인연석의 차이였다.

우웅!

투명한 풍선에 물을 채워 넣은 것 같은 형태.

손에서 느껴지는 촉감도 고무에 가까웠으며 약간의 흔들림에도 출렁거리는 것이 광석보다는 슬라임에 가까워 보였다.

그 물렁물렁한 느낌의 인연석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너무 다른데?'

본래 폭견의 인연석은 먹물을 풀어둔 것 같은 시커먼 색에 표면에 닿는 즉시 가시가 솟아나 마력을 침식하려 들던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루이제의 인연석은 질감을 제외하면 모두 정반대였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효과도 크게 달라졌을지도.'

생각보다 장비를 만드는 과정이 달라지겠다 싶어진 이세훈은 바로 인연석의 정보를 확인했다.

[인연 - 염수석染水石]

[등급 : 고급] [품질 : 최상]

물과 같이 투명한 광석.

광석에 부여된 마력의 특성을 반영하여 성질을 특화시킵니다.

*함께 사용된 재료의 특성을 반영해서 특화됩니다.

'특화된다는 건 똑같은데 방식에 차이가 생겼구만.'

회귀 전에는 '장악'해서 특화된다고 적혀있었는데 지금은 '반영'해서 특화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 차이를 확실히 보기 위해 이세훈은 조심스레 염수석을 집어 들었다.

꿀렁─

'물렁하구만. 이러면 내구도는....'

염수석을 이리저리 만지며 살펴보던 이세훈은 살짝 힘을 줘서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투웅─

가볍게 튕기며 두 덩어리로 나뉘는 염수석. 품질에 변화도 없었고 다시 가져다 대니 언제 분리되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합쳐졌다.

'강도는 약해졌지만 복원력은 더 좋아졌네.'

염수석의 성질을 모두 확인한 이세훈은 이어서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스스스─

마력이 스며들어 혼탁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염수석. 그리고 안쪽이 완전히 물들었을 때쯤. 작은 떨림과 함께 변화가 일어났다.

우웅─

마구 뒤엉켜 있던 색들이 밝은 순서대로 정리된다.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인연석의 효과가 어떻게 달려졌는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좀 더 협조적으로 변한 거구만.'

회귀 전에는 다른 재료를 자신에게 맞췄다면 지금은 자신을 다른 재료에 맞춰줬다.

간단히 말하자면 회귀 전은 이기적이었고 지금은 관대해졌다고 보면 되리라.

'흐음... 괜찮은데?'

이런 효과라면 기존에 생각해둔 것보다 더 좋은 무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구상해둔 무구의 도면을 즉각 수정한 이세훈은 염수석에 불어넣은 마력을 회수했다.

후웅─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투명한 색으로 돌아온 염수석.

재료에 변화가 생기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밖으로 내보낸 두 사람을 안으로 불렀다.

"...."

"...."

이제는 서로 노려보지도 않는 에리카와 루이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몰라도 그 짧은 시간에 사이가 더 나빠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세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싸울 수도 있지.'

자신도 삼견과 미친 듯이 싸웠지만 결국 나중에는 협력해서 싸우지 않았던가. 사이가 좋든 나쁘든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다 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제 시작할 테니까 에리카 너는 거기서 보고 있어. 루이제 너는 여기 와서 앉고."

"어? 나?"

"그래. 빨리 와."

루이제를 의자에 앉힌 이세훈은 두 손을 모으게 한 다음 그 위에 염수석을 올려놓았다.

"거기다 색이 더 이상 안 변할 때까지 마력을 집어넣어. 정제할 필요는 없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아, 알았어."

"긴장할 필요 없어. 지문등록 같은 느낌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루이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력을 염수석 내부로 흘려보냈다.

스스스─

천천히 희뿌연 색으로 물들어가는 염수석.

지저분할 정도로 여러 색이 뒤섞여 있던 이세훈과는 정반대였는데 아무래도 본인의 인연석인 만큼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좋아. 그대로 계속하고 있어."

루이제가 염수석에 마력을 불어넣는 사이 이세훈은 맞은편에 앉아 책상에 올려둔 투영합금을 붙잡았다.

'폭견 때랑 비교하면 이빨도 손상이 거의 없고 마력회로도 멀쩡해.'

회귀 전에는 상태가 좋지 않아 교정에 초점을 뒀었지만 이번에는 상태도 좋고 재료도 받쳐주니 힘을 이끌어 내는 쪽으로 만들어 봐도 괜찮으리라.

우우웅─

투영합금에 마력이 스며들자 중심부의 불꽃이 녹아내리며 막 제련을 끝낸 쇳물처럼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정사각형의 형태로 쭉 펼쳐지는 투영합금. 크기가 커질수록 그 두께가 점점 얇아졌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 에리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만큼 얇게 펼쳐냈는데도 두께가 일정해.'

투영합금은 사용자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재료인 만큼 아주 사소한 잡념에도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정밀한 작업을 시도할 경우 한시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안 됐는데 이세훈은 저 얇은 철판을 만들어낼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가공할 생각이지...?'

다른 금속은 몰라도 투영합금은 재가공을 시도할 경우 내구도가 급격히 떨어지기에 첫 가공에 완벽히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대부분 바로 무구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세훈은 재가공이 필요해 보이는 철판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모르겠어.'

평범하지 않은 시도에 에리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철판의 확장이 멈춤과 동시에 변화가 일어났다.

드드득─

철판 전체에 세밀하게 나타난 마력회로.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얽힌 구조에 에리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렇게 복잡한 마력회로를 완벽하게 인지한다고...?'

알고 있던 지식을 하나씩 연상해가며 떠올리는 것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인지'하고 있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비유하자면 퍼즐 조각을 흩뿌려놓고 하나씩 찾아가며 맞추는 것과 잡히는 대로 망설임 없이 바로 맞춰내는 것.

대장장이로서의 실력보다는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기교인 것이다.

'...평가를 다시 수정해야 할지도.'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에 에리카의 눈동자가 깊어지고 있을 때. 마력회로가 완전히 새겨진 것을 확인한 이세훈이 입을 열었다.

"루이제. 끝났어?"

"어? 아, 응. 된 거 같네."

완전히 은색으로 물든 염수석. 그 모습을 확인한 이세훈이 루이제의 손 아래로 철판을 가져다 댔다.

"여기 위에 조심히 내려놔."

"알았어."

꿀렁─

루이제가 손을 벌려 철판에 조심스레 염수석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마력회로의 안쪽을 파고들며 채우기 시작했다.

"오...."

"...."

살아 있는 듯한 염수석의 움직임에 두 사람이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그사이 이세훈은 입안에 마력을 굴리며 언령부여를 사용했다.

"<마력증폭>"

치이익─

염수석이 채운 마력회로 위로 새겨지는 언령마법.

납땜을 하듯 이세훈은 계속해서 각 마력회로에 적합한 언령을 부여했다.

"<술식보정>, <음성증폭>, <통증완화>...."

이세훈이 새롭게 습득한 스킬 '언령 : 부여'의 장점은 정교한 술식을 요구하는 인챈트와 다르게 원하는 효과를 간단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단, 그만큼 효과가 약하고 지속성이 떨어지는 등 영구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했는데 루이제의 인연석인 '염수석'을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스스─

자신에게 부여된 특성을 반영해내는 염수석의 효과. 그것이 효과를 강화시키고 지속성을 높여주면서 단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철판에 73가지의 언령마법을 부여한 뒤. 이세훈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우우웅─

가지각색의 색이 절묘하게 맞물린 채 완성된 철판.

무구보다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 형태에 루이제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쁘네."

부여된 언령마다 염수석의 색이 달라지면서 만들어진 현상.

회귀 전 폭견의 인연석이었다면 볼 수 없었을 그 광경에 이세훈도 슬쩍 웃었다.

"그러게."

이걸로 무구를 완성하기 위한 밑 준비는 모두 끝났다.

철판을 바라본 이세훈은 자신이 나누어 둔 구획을 따라서 천천히 조립을 시작했다.

끼리릭── 키잉!

설계도가 그려진 종이를 접듯 철판이 스스로 구부러지고 꺾이며 서로 맞물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공정이 완료되어 마지막 파츠가 결합된 순간.

찰칵─

루이제만을 위한 무구가 완성되었다.

[무구 '바르그'가 완성되었습니다!]

[훌륭한 대장장이란 상식을 뛰어넘은 무구를 만들어내는 법!

재료가 지닌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올려 새로운 형태의 무구를 만들어낸 대장장이의 상상력은 일류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판정 결과 '바르그'의 등급은 '희귀'입니다]

"후우...."

눈앞의 결산창을 본 이세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용한 재료가 워낙 빈약해서 등급이 떨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희귀까지는 뽑아낸 것이다.

'폭견의 무기는 특히나 돈을 많이 먹었으니까.'

회귀 전에 시행착오 과정에서 날려 먹은 물건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아마 작은 도시 하나는 살 수 있었으리라.

'보자. 효과는....'

[바르그Vargr]

[등급 : 희귀] [품질 : 상]

인간 '루이제 발렌트'를 위해서 만들어진 특수한 무구.

세밀하게 새겨진 언령마법과 마력회로는 사용자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끌어주는 무구로 변했습니다. 마력에 담긴 의지를 강화하여 보다 강력한 언령을 내뱉을 수 있게 됩니다.

*무구에 부여된 73가지의 언령이 상황에 따라 복합적으로 적용됩니다.

*스킬 '변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흠. 적당히 나왔구만.'

재료만 조금 받쳐줬으면 턱걸이로 영웅 등급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세훈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게 내 무구라고?"

완성된 무구를 본 루이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봐도 무구라고 볼 수 없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으음... 한번 써봐도 돼?"

반쯤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루이제. 그 반응에 이세훈이 씩 웃으며 바르그를 건네주었다.

"상관없는데 최대한 약한 마법으로 써라."

"왜?"

"조절이 안 될 테니까."

호언장담을 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무구, 바르그를 바라보았다.

'...약한 바람 정도면 괜찮겠지?'

* * *

"하아...."

병동의 복도를 걷던 안정완 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얌전히 있는다 싶더니 그런 짓을 하다니...."

바벨을 떠들썩하게 만든 생도가 자신의 환자라니. 어젯밤 갑자기 쏟아진 전화를 떠올린 안정완은 골이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세훈 그 친구 그렇게 안 봤는데... 쯧.'

루이제와 어울리며 이상한 훈련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안정완 교수는 두 사람에게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 위험한 훈련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루이제가 이전보다 활기차게 변하며 무리해서 재활 실험을 하려는 낌새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마력결상을 교정할 수 있다느니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단순히 어울리는 거라면 모를까 건강에 문제가 생길 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혹시라도 탈이 났을까 싶어 안정완 교수가 걸음을 더욱 빨리하며 루이제의 병실 앞에 도착한 순간.

콰아아아앙───!!!

병실 안쪽에서 들리는 어마어마한 폭음. 그에 안정완 교수가 깜짝 놀라 문을 열었고.

"...미친."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한 병실의 중앙에서 루이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7화

아칼쿠프에 위치한 무학관.

학기 초에는 생도들이 대련을 벌이는 경우가 잘 없어 보통 한적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1,000명이 넘는 생도들이 찾아오며 활기를 띠었다.

"진짜로 올까?"

"대놓고 도발까지 했는데 설마 안 나오겠어."

"퇴학하기 전에 깽판 치는 걸 수도 있지. 마력결상 때문에 사실상 영웅도 못하게 됐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찾아오긴 했지만 그중 루이제가 정말로 대련에 나올 것이라 믿는 이들은 소수였다.

마력결상을 극복했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상대인 게르윈이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반년 전의 사건을 재조명받게 하려고 던진 게 맞다니까."

"벌써 해외로 도망쳤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허탕이면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주말이고 하니 산책 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생도들.

벤치에 앉은 채 그 반응을 살피던 이세훈은 3분의 1쯤 남아 있는 삼각김밥을 털어 넣으며 이야기했다.

"거봐. 너한테 별로 기대 안 한다니까?"

"시끄러."

퉁명스럽게 대답한 루이제는 손에 들린 삼각김밥을 먹으며 살짝 흐트러진 모자를 다시금 꾹 눌러쓰고 콧대에 걸쳐진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누가 봐도 수상쩍게 보이는 그 괴상망측한 변장에 이세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 가지고 대련은 어떻게 될지...."

"아. 시끄럽다고 임마!"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남이 보기에 어쨌든 저렇게라도 가리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니 어쩌겠는가. 바짝 긴장한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은 말없이 옆에 앉은 채로 새로운 삼각김밥의 포장을 뜯었다.

'대련까지 30분....'

이쯤이면 슬슬 안쪽의 대기실로 들어가야 했지만 루이제는 벤치에서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년의 재활 후 처음으로 벌이는 대련. 거기에 상대는 자신을 쓰러뜨렸던 인물이고 1,000명이 넘는 인파가 그것을 구경하러 찾아왔다.

이쯤 되면 사실 긴장하지 않는 쪽이 문제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앞에도 말했지만, 넌 어떤 상황이든 위축되면 안 돼."

하지만 이세훈은 그것을 이해해 주는 대신 오히려 더욱더 몰아붙였다.

"언령마법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면 그만큼 위력이 떨어져. 이런 대련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 실전에서는 본래 실력의 반의반도 못 꺼내게 될걸."

좋은 언령술사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회귀 전 폭견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고 실제로도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연습 중에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고 한들 실전에서 선보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알아. 잔소리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던 루이제는 마지막 남은 삼각김밥을 입안에 우겨놓고는 턱 아래로 내려놓은 마스크를 올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을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

"내가 이길 거라고 했지?"

"당연하지. 질 이유가 없어."

"...그래."

질 이유는 없다. 마스크 안쪽으로 그 말을 중얼거린 루이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다."

"그래. 시작하기 전에 대기실에 갈게."

"집중 안 되니까 오지 마."

퉁명스럽게 대답한 루이제가 무학관의 안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순수하게 능력만 본다면 정말로 이번 대련에서 루이제가 질 이유가 없다.

본인의 기량과 자신이 만들어준 바르그의 성능. 그리고 상대와의 '상성'까지 생각한다면 절대로 질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냐는 건데....'

자신이 알고 있는 루이제, 폭견의 성질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긴장하더라도 실전에 돌입하면 머리에 피가 쏠려서 미친 듯이 날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루이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폭견과 달리 애송이나 다름없는 상태.

즉, 이렇게 다 깔린 판에서도 실수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흐음... 좀 더 격려를 해줘야 하나.'

폭견이라면 지랄 말고 꺼지라고 했겠지만 루이제라면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루이제를 개과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 이세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까짓것 좀 해주지 뭐."

회귀 전에 너는 어디 가서 칭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몇 번 듣긴 했지만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면 저쪽도 어련히 알아먹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이세훈이 무학관의 안으로 들어선 순간.

삐이이───

귓가에 울리는 기이한 이명.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이명이었지만, 이세훈은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뭐지?'

지금 자신의 신체 능력은 바벨에서도 하위권. 청각만 따진다면 주변에 있는 생도들이 훨씬 뛰어날 텐데도 이명을 들리는 듯한 반응이 아예 없다.

무언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그 풍경에 이세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무언가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거다.'

평상시라면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진 않겠지만 오늘은 루이제의 대련이 벌어지는 날.

그리고 『여명』이라면 루이제가 대련에서 승리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을 것이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내기로 한 이세훈은 곧장 마력을 운용하여 청각을 끌어올렸다.

삐이──

하지만 주변의 소리가 선명해진 것에 비해 이명은 더욱 작아졌고 그 반응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가능성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마력을 가라앉히고 영연신마법을 운용했다.

촤르륵─

체내에 펼쳐지는 임시통로. 아직 마력이 정착하지 않은 텅 빈 통로가 자리 잡은 순간 귓가에 들려오던 이명이 다시금 변했다.

삐이이이───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명해진 이명. 그리고 텅 빈 통로 곳곳에서 무언가 파고드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반응에 이세훈은 귓가에 들리는 이명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마력침식!'

자신의 체내에 뿌리내렸던 녹빛의 마력. 그 잔재가 이명에 반응하여 체내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진상을 알아차린 이세훈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빠르게 이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렸다.

'뭘 노리는 건지 몰라도 빨리 멈춰야 해.'

루이제 몰래 마력침식기를 몇 번 더 사용하긴 했었지만 그때마다 홍련을 사용해서 나름대로 정리했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잔재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장기간 침식당한 루이제에게는 더욱 영향이 강할 터.

어떤 효과일지는 몰라도 최대한 빠르게 원인을 제거하고 루이제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이런 방식이면 대기실이나 경기장 근처일 거야.'

루이제의 대기실이 있는 장소는 3층.

계단을 타고 단숨에 올라온 이세훈은 팔다리에 채운 묵주환에 억지로 마력을 집어넣으며 체내의 마력침식을 더욱 가속시켰다.

삐이이이─────!

희미하던 이명이 이제는 귓가를 긁어대듯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 쯤에 있는 것인지 대략적으로 방향이 잡혔다.

후웅!

아공간 포켓에서 제이크에게 받은 흑염의 망치를 꺼내 고쳐 잡은 이세훈은 3층 복도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창고의 문을 향해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콰아앙!

잠겨져 있던 문고리가 단숨에 박살 나고 동시에 비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창고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안의 물건들을 재빠르게 훑어본 이세훈은 그중 커다란 종이 박스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저거다.'

귓가에 들리는 이명의 원인.

그것을 알아차린 이세훈이 곧장 망치를 움켜잡으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개꿈을 참 오래도 꾸는구나."

뒤쪽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익숙하지만 반대로 이곳에서 절대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이세훈의 몸이 일순간 굳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고 있을 셈이냐? 보는 내가 다 쪽팔린다."

"...."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않느냐? 그딴 쓰레기 같은 단검이 너를 먼 과거로 보내줬다는 게."

이죽거리는 여인의 물음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아니. 그럴 수 없어. 넌 늘 되도 않는 상황에서 억지를 부리는구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고 주변의 풍경이 흐려진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역시 익숙한 소리.

쏴아아─

저 멀리 밀려오는 검은 파도가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그리고 젊은 시절로 돌아온 몸 역시 파도 앞에서 허물어져 갔다.

피투성이로 엉망진창인 몸. 그리고 눈앞에 힘없이 앉아 있는 세 명의 뒷모습. 멸망해가던 세계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꿈이란 것이 그렇지. 꾸고 있을 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지지만 깨어나고 나며 덧없이 짧아."

"...."

"파도가 밀려온다. 추하게 살아 있을 테냐."

등 뒤까지 다가온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손에 들린 망치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쥔다.

저 파도에 집어 삼켜지기 전에 머리를 깨부숴라. 그렇게 부추기는 여인의 목소리에 이세훈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한 가지 고칠 점."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을 사부의 환영에게 이야기했다.

"사부는 나가뒤지라는 말을 그렇게 길게 하지 않아."

후웅!

마력을 한껏 실은 망치가 앞으로 날아갔고 눈앞을 가득 채운 환각이 찢어 발겨진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짓이겨진 종이상자. 귀에 들리던 이명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후우...."

마력을 머금은 묵주환이 팔다리를 끌어당겼고 마력이 바닥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이곳이 꿈이 아니라고, 현실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거짓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냈다.

'뭐가 됐든 지금은 현실이야.'

아침에 확인했으니 오늘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 확신에 이세훈의 몸 곳곳에 남아 있던 녹빛의 마력이 완전히 녹아들어 사라졌고.

[스킬 '깨어나는 꿈(C)'을 습득하셨습니다.]

처음 보는 스킬이 새롭게 습득되었다.

'이건...?'

회귀 전에도 본 적 없는 스킬. 의아한 표정으로 보던 이세훈은 이내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나중에.'

몸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곧장 종이 박스를 깔아뭉갠 망치를 치우고 안쪽을 살펴보았다.

치지직─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부서진 기계장치.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자세히 살피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화르륵!

갑자기 불이 붙더니 재도 남기지 않고 타버리는 기계장치. 눈앞에 있던 증거가 갑자기 사라져버려 허탈할 법도 했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두 눈을 번뜩였다.

'여명 그 새끼들 맞구만.'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여명』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술식처리.

회귀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이세훈은 바로 알아본 것이다.

'증거를 놓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동안 추측만 하고 있던 적들의 배후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쉬움을 털어낸 이세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대련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이명의 효과는 마력이 침식된 대상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자해하게 만드는 것. 침식을 가속시켰다 해도 자신이 이 정도라면 루이제는....

'아니... 괜찮을 거야.'

이전이라면 몰라도 2주간 성장한 루이제라면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이세훈은 다시금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 *

"후우...."

대기실에 도착한 루이제는 자리에 앉아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초조한 머릿속과 달리 차분한 얼굴.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안정된 그 모습에 긴장이 조금 누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몸 상태도 좋고 정신도 말끔하다. 그러니 질 이유가 없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루이제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할 수 있어."

설령 그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믿는 것이 언령술사로서의 마음가짐. 이세훈의 조언을 떠올리며 루이제가 계속해서 자기암시를 걸고 있을 때.

삐이이이───

귓가에 희미하게 울리는 이명.

그리 크지 않은데도 묘하게 거슬리는 소리에 루이제가 눈매를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건가?'

천장에 붙어 있는 스피커. 곧 대련이니 그전에 테스트를 하다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있으면 바로 잡히겠거니 생각하며 루이제는 귀를 막고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었다.

삐이이이───

하지만 이명은 도통 멈출 생각을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대로면 대련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된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루이제가 대기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어?"

돌연 사라진 이명.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진 주변에 루이제가 묘한 표정으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분명히 해결됐는데도 묘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념을 털어낸 루이제는 잡았던 문고리를 놓으며 몸을 돌렸고.

"...."

새하얀 붕대를 두른 자신의 목이 보였다.

씻을 때도, 잠들 때도 절대로 풀지 않았던 붕대. 이제는 한 몸처럼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루이제는 자신의 모습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미 다 나았는데 둘러매고 있어서 그런가.'

아무리 자신이 다 나았다고 말해도 이런 모습을 해서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에 루이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내렸다.

'...괜찮아.'

혼자서 붕대도 못 갈던 과거와는 다르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루이제는 테이프를 떼어내고 몇 겹으로 둘러싸인 붕대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도 새하얀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고.

스륵─

목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거울 너머로 비쳤다.

진찰 중에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아니, 그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어 결국 설명으로만 들었던 흉터.

'괜찮아....'

이미 완치된 상처였고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새겼지만 루이제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아...."

숨이 거칠어지고 전신에 오한이 들며 시야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에 다른 곳을 보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두 눈이 흉터로부터 떨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후읍... 큭...."

거칠어진 호흡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전신에 오한이 들며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속이 뒤틀리는 듯한 구토감.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한 의식 속에서 루이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붕대로 목을 졸랐다.

"컥...."

뒤엉킨 붕대가 목을 파고들었지만 두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손에 남아 있는 붕대가 없어졌을 때. 루이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 그리고 처음보다 더 꽁꽁 싸매진 목. 그 형편없는 모습에 루이제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이세훈이 알려준 신비로운 언령마법도, 그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준 바르그도 자신을 바꿔내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루이제의 마음속에 한 의문이 피어났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지금의 자신이 정말로 게르윈 크루거를 이길 수 있을까.

녀석 혼자만이라면 몰라도 그 배후에는 비에르 바르무트. 그리고 자신이 믿고 의지했었던 은사인 찰스 교수도 있었다.

"...."

경기장에 무슨 술수를 써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대기실 안에도 자신 몰래 무언가를 준비해뒀을지 모른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의심과 공포가 루이제의 마음을 갉아먹었고 거울 너머로 보이던 대련실의 풍경이 일그러져갔다.

그 광경에 루이제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의 목을 향했고.

콰득─

꽉 둘러맨 목의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큭...."

이미 다 나은 상처가 갑작스레 벌어질 일은 없다.

눈앞의 광경이 발작에 의한 환각임을 알고 있음에도 루이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꽈아악─

지혈을 위해 목을 조르다시피 눌렀지만 손 틈새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린다.

모든 것이 환각이다. 자신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그 중얼거림이 무안하게 거울에 비친 루이제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눈으로 보이는 풍경을,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상대의 기습에 당해 정말로 상처가 벌어진 것이라면, 환각이 아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생각에 루이제는 더 이상 눈앞의 광경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상처를 막아야 해... 지혈을 할 만한 게....'

주변을 살피던 루이제는 거울 앞에 놓인 수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잡기 위해 오른손을 황급히 뻗었고.

으직─

갈기갈기 찢긴 오른손 너머로 반 이상 뜯겨나간 목이 비쳤다.

"───!"

피인지 위액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입 밖으로 토해내고,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진 루이제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싫어.'

저것이 이세훈이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자신의 트라우마다.

넘어서야 하는 난관이 눈앞에 찾아왔지만 루이제는 맞서 싸우는 대신 외면해 버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이 저런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실패하고 다시 비참해질 텐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번에 실패한다면 과연 이세훈은 자신을 도와줄까.

녀석이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은 자신의 재능. 그런데 그 재능이 실은 보잘것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할까.

수렁에 빠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점차 그 의식이 깊이 가라앉으려던 순간.

콰앙!

부서져라 열린 문이 그 상념을 단숨에 끊어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8화

"후우... 후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이는 이세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 모습에 루이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된 걸까.

처음 본 이세훈의 지친 모습에 루이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이세훈이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른 건... 없나.'

이 이상 수작을 부리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다른 함정이 없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한숨을 내쉬며 루이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이세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쓰러져 있는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뭐 하냐?"

"뭐?"

"대련 전에 한숨 자려고?"

"...윽!"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앉는 루이제. 그 재빠른 반응에 이세훈이 피식 웃다가 물었다.

"아까 이상한 이명 같은 거 들렸었지?"

"...어떻게 알았어?"

"나도 들렸거든. 저쪽에서 준비한 물건 같은데 방금 부수고 오는 길이야."

이세훈의 설명에 루이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체내에 침식해 있는 마력을 자극해서 스스로에게 정신계열 저주를 걸게 만드는 물건이었는데 트라우마를 건드리더라고. 덕분에 고생 좀 했지."

"트라우마...."

왜 갑자기 목에 감긴 붕대가 신경 쓰였나 했더니 그때부터 저주에 휩쓸려 발작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진상을 깨닫게 된 루이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였나...."

외부에서의 개입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분통을 터뜨릴 상황이었지만 루이제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트라우마와 마주치게 하는 것은 적들의 수작이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것은 순전히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한심하지 않아?"

"뭐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 녀석들의 수작에 놀아나서 이러고 있다는 게."

바닥을 나뒹굴면서 머리는 다 헝클어졌고 붕대는 엉망진창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으며 어디서 긁혔는지 왼손에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루이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처럼 우울해하는 게 녀석들이 노림수라는 건 알거든? 나도 아는데... 뭔가 다잡아지지가 않네."

자기암시의 무서움은 쌓아 올린 것이 한 번이라도 무너지는 순간. 그 잔해에 짓눌려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무릎을 감싼 채 힘없이 앉아 있는 루이제. 그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한심하긴 하네."

"...그렇지?"

"싸우기도 전에 쫄아 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데 대견해 보이면 그게 이상하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좀 깬다고 해야 하나. 복수하기 전에는 울지도 않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더니 그새 풀 죽어서 침울하게 있는 게 좀... 그 얄팍하지?"

"...."

"뭐.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사람이 한 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지. 언령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특히 그런 부분이 중요한데 벌써부터 어기는 걸 보면... 에휴 아니다. 너도 힘들 텐데."

꾸욱─

이세훈의 신랄한 평가가 계속되자 루이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모습에 말을 멈췄겠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측은하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근데 너무 실망하지 마라. 나처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벽하게 성장한 사람이 아니면 원래 힘들어. 어중간한 천재의 숙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만."

"네 나름대로 노력한 거니까 속상해하지 마라. 안 되는 걸 못했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힘내서...."

"그만해 이 재수 없는 새끼야!!!"

빠악!

끝없이 쏟아지는 핀잔에 기어코 눈이 돌아간 루이제가 이세훈의 팔뚝을 후려치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애초에 천재니 뭐니 부추긴 게 누군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고 부추긴 것도 누군데!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부추겼으면서 이제 와서 뭐? 한심해? 얄팍해? 어중간해?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부담감과 불만들을 모조리 토해내듯 루이제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천재라고 할 때마다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알아? 그 괴팍한 훈련도 그래! 언령마법이란 걸 알려줬으면 처음부터 열심히 배웠을 거 아냐. 나 무안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거냐? 어?!"

"...."

"매번 설명도 없이 멋대로 진행해놓고 자기가 언제 틀린 말한 적 있냐는 듯이 뻔뻔하게 쳐다보고. 사실 여부를 떠나서 설명부터 해주는 게 상식이잖아 이 개념 없는 새끼야!!!"

퍼억! 빠악!

배에 올라타 가슴과 팔뚝을 마구 두들겨 패는 루이제. 소리만 요란하지 물렁하기 그지없는 주먹에 이세훈은 말없이 가만히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주먹이 더욱더 느려져 토닥이는 수준이 되었을 때. 떨리는 손으로 멱살을 움켜쥔 루이제가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재수 없는 새끼... 개 같은 새끼...."

이런 상황에서도 뭐가 문제냐는 듯이 올려다보기만 한다. 그 재수 없는 모습에 루이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더 추하게 느껴졌고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왜 나만....'

어째서 자신만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가. 그 억울함에 루이제는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내가 지면... 잘못되면... 전부 네 탓이야... 다 네 탓이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에게 이만큼 배은망덕한 이야기가 있을까. 자신이 내뱉고도 자괴감이 느껴지는 외침에 루이제의 표정이 일그러지던 그때.

"그래. 내 탓이야."

이세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긍했다.

"...뭐?"

"네가 지면 다 내 탓이라고."

한결 차분해진 루이제와 두 눈을 마주 본 이세훈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언령마법을 가르친 것도, 무기를 만들어준 것도, 대련을 내보낸 것도 모두 내가 한 일이야."

"...."

"그렇다면 잘못된 책임도 당연히 나한테 있지. 왜 너한테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상치 못한 이세훈의 물음에 루이제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틀렸어."

루이제의 말을 잘라낸 이세훈이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약속했고, 너는 받아들였지.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야 할 건 하나밖에 없어."

멱살을 붙잡은 손을 감싼 이세훈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끝까지 믿고 최선을 다할 것."

"...."

"그 이외에는 모두 내가 책임질 것들이야."

이야기가 끝나고 두 사람의 눈동자만이 계속해서 서로를 응시한다.

힘겹게 떨리던 푸른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엿본 듯 천천히 잦아들었고 이내 꾹 다물어졌던 루이제의 입이 열렸다.

"구라치지 마. 그딴 놈한테 지냐고 뭐라 했을 거면서."

"...아닌데?"

"말은 잘해요. 말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이세훈의 얼굴에 루이제가 피식 웃고 있을 때. 대기실의 스피커에서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5분 뒤 게르윈 크루거 생도와 루이제 발렌트 생도의 대련이 시작됩니다. 양 생도는 경기장으로 입장해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련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안내음. 그에 루이제는 멱살을 놓아주고 배에서 내려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에서 볼 거야?"

"나? 관객석에서 볼 생각이었는데."

"올라가지 마."

"왜?"

이세훈을 지나친 루이제가 문을 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 전에 끝날 테니까."

언제 풀 죽었냐는 듯 자신감으로 가득 찬 모습. 익숙한 그 뒷모습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곧 뒤따라갈게."

"먼저 간다."

대기실에서 나온 루이제는 곧장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 예전이라면 이 적막함이 두려웠겠지만, 지금은 저 너머로 보이는 빛밖에 보이지 않는다.

두근─!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전신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와중에 루이제는 목 언저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걸리적거리네."

이제 피도 안 나는데 왜 이런 걸 감고 다녔을까.

목에 감긴 붕대를 단숨에 풀어낸 루이제는 때마침 상처가 난 왼손에 대충 둘러맸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목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이 새겨진 흉터.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작았고 아프지 않았다.

'이 정도였구나.'

보기 흉하겠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못하는 흉터에서 손을 떼어낸 루이제는 복도를 벗어나 경기장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쏟아지는 함성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조명.

1,000명이 넘는 생도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선명히 느껴진다.

어쩌면 저 사이에 자신의 적이 있을지도 모르며, 언제 어떤 방식으로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때.'

어떻게 습격해 오든 자신은 그저 최선을 다해 받아치면 그만이다. 주변의 시선을 흘려넘기며 루이제는 저 멀리 자신의 맞은편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갈색 머리칼에 거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머저리, 게르윈 크루거가 검은색 지팡이를 손에 쥔 채 한탄했다.

"반년 전에 큰 교훈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모하게 덤비다니. 한때나마 경쟁했던 라이벌로서 참 안타깝네."

"...."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게르윈의 모습에 루이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서는 좀 더 크고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키도 비슷하고 몸도 얄팍한 게 돈을 처발라서 강해졌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때의 부상에 대해서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언데드나 꺼내."

"뭐?"

즉 이 상황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무것도 못 하고 쪽팔리게 실려 나가기 싫으면."

전혀 질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

두 사람의 대화가 증폭기를 통해 경기장 전체에 퍼졌다.

곳곳에서 자그맣게 들려온 비웃음에 게르윈은 손에 들린 검은 지팡이, 영웅 등급 무구 '망자의 안식'을 꽉 움켜쥐었다.

스스스─

그 뜻에 반응하듯 주변으로 퍼지는 검은 안개.

마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언데드의 강화. 그리고 지배력을 높이는 물건으로 사령계열의 영웅들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살려고 할 만큼 강력한 물건이었다.

"그래. 전력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줘야지."

반년 동안 재활이나 하던 상대에게 영웅 등급 무구까지 사용해서 이겨봐야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만, 이제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귀기 서린 눈으로 루이제를 노려본 게르윈은 힘차게 망자의 안식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기기기긱─

소름 끼치는 귀곡성과 함께 검은 마력이 늪처럼 경기장의 3분의 2를 뒤덮었고 이어서 허공이 살짝 벌어지며 아공간으로부터 게르윈의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스켈레톤들부터 시작해 생전에 육체를 고스란히 지닌 짐승형 키메라들. 거기에 3m에 육박하는 좀비골렘까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언데드들의 모습에 경기장이 웅성거렸다.

"강화 스켈레톤이 30마리라고...?"

"저 키메라 한 마리가 몇천만 원이라는데. 진짜 돈으로 싸우네...."

"좀비골렘은 아예 속성계열 몬스터들만 사용해서 만든 거 같은데. 마법사가 저걸 상대할 수 있나?"

기본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억을 사용한 값비싼 언데드들이 게르윈의 앞에 몰려나와 진형을 갖췄다.

사용된 자본이나 내구도로나 성벽에 버금가는 언데드 군단. 그 모습에 경기장 곳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왔고 게르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년 동안 놀고만 지냈던 건 아니라서 말이야."

이전에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법에 대응하지 못해서 질 뻔했었지만 망자의 안식에 원소저항력을 지닌 좀비골렘도 있으니 압도적으로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세등등해 하는 게르윈의 모습에 루이제는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아공간 포켓의 버튼을 눌렀다.

툭─

손 위로 나타난 자신만의 무기인 '바르그'.

눈앞의 대군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루이제는 그것을 쥔 것만으로 조금 남아 있던 긴장감까지 떨쳐냈다.

"후우."

모두에게 자랑하듯 자신의 손에 들린 바르그, 검은 초커를 목에 가져다 댄 루이제는 곧장 잠금장치를 걸었다.

찰칵─

은색 버클에 검은색 몸통을 지닌 깔끔한 디자인의 초커.

공중에 떠 있는 화면을 통해 목에 나 있는 흉터가 깔끔하게 가려진 것을 본 루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쓸데없이 섬세하다니까.'

불편함보다는 묘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바르그의 감촉에 루이제가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을 때. 맞은편에 서 있던 게르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비장의 무기인가? 무슨 개목걸이도 아니고...."

마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자신의 손에 들린 망자의 안식과 비교하면 같은 무기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노골적으로 비웃는 게르윈의 모습에 루이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가 한 명 있거든."

"...?"

"그 녀석이 밑도 끝도 없이 너는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데... 처음에는 무슨 개소리인가 싶더라고."

언령마법은 사용자의 심상이 명확할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이세훈에게 매일같이 듣던 말이지만, 루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가 없었다.

이론과 계산으로 이뤄진 마법만을 배워오다가 하루아침에 그런 감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어디 쉽겠는가.

"근데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우우웅─

루이제의 주변으로 요동치기 시작하는 마력.

강한 의지에 마력이 반응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그 규모가 달랐다.

쿠구구궁───!

수천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무학관의 경기장 내부가 단 한 사람의 의지에 반응하여 격렬하게 울린다.

피부로 직접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진동. 그리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루이제의 무시무시한 적의에 게르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

어떻게 일개 생도가, 그것도 반년이나 병원에 처박혀있던 환자가 이만한 수준의 마력감응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마력과 완전히 '동화'된 것 같은 모습.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게르윈이 이를 악물며 루이제를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을...!"

"지난 반 년간. 이 순간만을 떠올렸어."

악몽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을 때도, 재활 중에 목을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을 때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가 버리고 싶을 때도 루이제는 단 하나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자신의 목을 이렇게 만든 녀석들을,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놀았던 개자식들의 목덜미를 반드시 똑같이 찢어발기고 말겠다는 일념.

그 어떤 마법의 형태보다도 선명하게 새겨진 심상을 되새기며 루이제가 바르그의 버클을 가볍게 눌렀다

키리릭─

검은색 초커로부터 얇은 철판이 올라와 순식간에 루이제의 입을 덮으며 힘차게 맞물렸다.

카앙!

그리고 나타난 것은 검은 이빨.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난 금속 마스크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물건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장착한 순간 루이제의 분위기가 더욱 사납게 변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방금까지가 단순히 호응이었다면, 이제는 경기장에 퍼진 마력 전체가 게르윈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다.

"이, 이건... 말... 말도 안 돼...."

거대한 짐승의 입안에 들어온 감각. 그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과 두려움에 게르윈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을 깨달았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3

양측의 준비가 끝나며 시작된 카운트 다운.

자신의 입을 뒤덮은 검은 이빨을 쓰다듬은 루이제가 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게르윈을 바라보았다.

-2

"부탁할게."

그리고 숨김없이 자신의 진심을 담아 게르윈에게 이야기했다.

-1

"오래 버텨줘."

자신보다 수십 배는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겠노라고.

-시작!

"당장 죽여!!!!!!"

경기장의 중앙을 가로막던 방호막이 풀린 순간. 게르윈은 발작하듯이 망자의 안식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 외침에 언데드들이 기껏 쌓은 대열을 무너뜨리고는 저마다의 무기를 치켜들며 루이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든다.

아무런 마법도 준비되지 않은 루이제와 모든 전력을 소환해둔 게르윈.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는 명백했으나.

[Set─]

루이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우우웅─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언령.

불완전하게 육성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마력으로만 형성된 의지가 경기장의 마력을 장악하고 심상을 재현해낸다.

채앵!

가장 먼저 달려오는 스켈레톤의 목에도, 그 뒤를 따르는 키메라의 목에도, 육중한 걸음을 옮기는 좀비골렘의 목에도 붉은빛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목줄처럼 생겨났다.

"뭐...."

그 모습에 게르윈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Death Bite]

무형의 이빨이 모든 것을 물어뜯었다.

카아앙─!

강철이 맞물리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머리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쿠구궁! 콰앙!

달려가던 그대로 중심을 잃고 경기장 바닥에 널브러지던 언데드 군단.

처음의 웅장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꼴사납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게르윈의 눈이 부릅 떠졌다.

'말도... 말도 안 돼.'

일격. 별다른 캐스팅과 마법진도 없이 그저 두 단어를 내뱉은 것만으로 자신의 언데드들이 모두 쓰러진 것이다.

압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광경에 게르윈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순간. 그 모습을 깨닫고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아니, 아니야! 아직이다!!'

일반적인 소환수라면 모를까 언데드들이라면 자신의 마력으로 얼마든지 수복해서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게르윈이 망자의 안식을 사용해 자신의 마력을 다시금 끌어올렸고.

채앵!

그보다 빠르게 붉은 마법진이 게르윈의 목을 둘러쌌다.

카아앙──!

"컥─!"

목이 끊어지는 듯한 무시무시한 통증.

마력을 끌어올리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바닥에 넘어진 게르윈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목을 내려다보았다.

"허억... 허억...."

쩌저적─

전신에 착용한 장비들이 만들어낸 두꺼운 장벽.

원소학부의 3학년 학부 수석이 전력을 다한 마법도 가볍게 막아냈던 장벽이 방금 일격으로 절반 이상 파괴된 것이다.

'장벽으로 막았는데도 이만한 통증이라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 괴상한 마법에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머리를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언데드들의 모습을 본 게르윈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상해... 뭔가 이상하다고....'

저 강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리고 상태를 약화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왜 저렇게 멀쩡하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 끊어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머릿속으로 피어나는 수많은 의문에 게르윈이 당황하고 있을 때.

"그 장벽."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루이제가 내려다보았다.

"꽤 튼튼해 보이네."

"자... 잠깐. 항...."

[Set─]

채앵!

게르윈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전신에 수십 개의 붉은 마법진이 빽빽하게 채워진다.

그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게르윈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다 이내 애원하듯 루이제를 향했고.

[Revenge Bite]

마스크 너머로 입가를 비틀며 언령을 쏘아냈다.

콰득콰득콰득콰득!!!

무형의 이빨이 게르윈을 셀 수 없이 난도질했고 방벽과 장비가 박살 남과 동시에 전신이 잘근잘근 씹혀졌다.

몸이 잘려나가지만 않았을 뿐. 엄청난 압력에 전신의 뼈가 부서지고 근육과 마력회로가 으깨진다.

"────!!!!!"

본래라면 대련이 중단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량이었지만 동력실에서 발생된 '우연한' 고장이 그 반응을 1초 정도 느리게 만들었다.

터엉─!

그리고 뒤늦게 발동된 경기장의 방호장치가 루이제의 마법을 막아냈을 때.

"쿨럭... 커흑...."

경기장의 위에는 숨만 겨우 붙어 있는 무언가만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승자 루이제 발렌트]

무학관의 대련 시스템이 승자를 선언했지만 처음과 같은 함성은 없었다.

기존에 알려져 있는 언령마법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과 잔혹함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적막 속에서 루이제는 말없이 자신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고.

"나한테 시비 거는 새끼들은 다 이렇게 될 줄 알아."

흠잡을 곳 없는 복귀식을 끝마쳤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