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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0화

보르시파의 상점가에 위치한 카페 '라일락'.

졸업생이 차린 가게 중 하나로 다양한 꽃들로 화사하게 꾸며져 있기로 유명해 생도들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온 방문객으로도 늘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여기 점장님이 우리 인챈트 학부 졸업생이신데 진짜 장난 아냐. 카페에 있는 꽃들에 전부 인챈트를 해둬서 365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거든."

"...."

"아, 이게 또 인챈트를 모르면 안 와닿을 수도 있는데 꽃처럼 살아있는 생물에 인챈트를 걸어서 그 품질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렵냐면...."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소녀, 레아 클로델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장장이와 자주 협업하는 직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인챈터라고 대답한다. 무구를 만들어내는 대장장이와 완성된 무구의 힘을 더욱더 끌어올리는 인챈터.

정말 외골수처럼 지내는 게 아니라면 엮일 수밖에 없는 것이 대장장이와 인챈터의 관계인 것이다.

'레아 클로델이라....'

그렇다 보니 대장장이라면 유명한 인챈터에 대해서는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고, 눈앞의 레아 클로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챈터 업계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 천재. 희귀 등급의 무구를 무려 두 단계나 끌어올려 전설 등급의 무구로 탈바꿈시킨 미치광이.

그것이 바로 눈앞의 소녀 레아 클로델의 미래인 것이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바벨에 있었을 줄이야...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

뛰어난 영웅은 대부분 바벨에서 배출되니 연령대가 비슷하다면 어지간해서는 모두 바벨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세훈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유명한 인물을 쉽게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진짜 레아 클로델이라면 나쁠 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인연이 성립된 상황. 미래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인연석의 효과 역시 나쁘지는 않으리라.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은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중요한 건 혈류를...."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럴까?"

"...."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쌓아뒀던 이야기들을 꺼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본론."

"아. 아. 그래. 본론이지 본론."

자신의 입을 두드린 레아는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인 다음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본론을 말하자면, 네가 만들었다는 그 팔찌에 인챈트하고 싶어."

"이거 말이야?"

이세훈이 소매를 살짝 걷어 묵주환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에 레아의 두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팔을 살짝 움직이니 그 뒤를 쫓아 고개를 움직인다. 그 푹 빠진 듯한 반응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하긴. 묵중암이면 그럴 법도 하지.'

영웅 등급인 데다 나오는 족족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묵중암을 일반 생도가 어디 구하기 쉽겠는가.

처음 봤던 탁한 눈은 어디 갔는지 생기가 감도는 눈으로 쳐다보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오른팔에 찬 묵주환을 풀어 내밀었다.

"...어?"

"정보창도 못 봤잖아. 한 번 봐봐."

"어? 아. 정보... 정보창? 이거 설마 고급... 아니, 희귀 등급?!"

두 눈을 부릅뜨며 손에 들린 묵주환을 내려다보는 레아. 그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별종이긴 하네.'

다른 사람과 대화를 자주 안 했다는 것도 그렇고 학과수석인 자신도 모르는 것을 보면 외부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오직 인챈트와 관련된 것에만 흥미를 보인다.

회귀 전에도 인챈트에 미친 사람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이 느껴졌다.

사람에 따라서 상당히 꺼려질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어찌 됐든 실력은 있으니까 말이지.'

쥐뿔도 없으면서 미친놈이면 곧장 망치행이지만,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

"묵중암으로 만든 희귀 등급의 무구. 게다가 마력 흡수에 저장 기능까지 있다니. 여기에 몇 가지 수식만 더하면... 아니지, 이걸로 끝내기엔...."

묵주환을 바라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마구 중얼거리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재촉하지 않고 앞에 놓인 스무디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분, 30분, 1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주변에 샌드위치를 사 먹는 생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쯤.

"아. 안 돼."

묵주환을 내려놓은 레아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주문해 둔 샌드위치를 먹으며 물었다.

"생각보다 별로야?"

"아니. 무구는 문제없어. 오히려 생각한 것 이상이라서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야."

벌써 네 잔째인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며 레아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흐음. 그래?"

"그래! 이 팔찌 이상하다고! 묵중암으로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호환성이 높은 거야?! 넣을 수 있는 수식이 너무 많아서 되려 뭘 골라서 넣어야 할지 결정이 안 되는...."

또다시 이야기를 쏟아 내려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미리 주문해 둔 샌드위치를 앞에 가져다 놓으며 말을 잘라냈다.

"한마디로 인챈트할 수 있는 종류가 생각보다 많아서 고민된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런 거라면 딱히 상관없겠네."

"어?"

의아해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은 반대쪽 소매를 올려 묵주환을 보여주었다.

"더 있거든."

"...."

"아, 그리고."

이세훈이 돌려받은 묵주환을 가져다 댔고, 그 사이로 공명 현상이 일어나며 부르르 떨렸다.

"이거 공명 현상도 있어서 인챈트할 거면 참고해."

"...."

눈앞의 광경에 레아가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자신의 미간을 매만지다가 블랙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잠깐만. 지금 과부하 걸린 거 같아서. 조금만 기다려."

새로 나온 커피를 마시고 샌드위치까지 꾸역꾸역 먹은 레아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너 도대체 뭐야?"

통성명까지 참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며 이세훈이 답했다.

"이세훈. 제련학부 1학년이고, 올해 보르시파 학과수석."

"1학년? 아, 그래도 학과수석이면 그럴 만한가. 대단하네...."

이세훈의 소개에 살짝 감탄한 레아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인챈트 학부 3학년인 레아 클로델이야. 그리고... 음... 또 뭐 설명해 줄 만한 게 있나?"

"글쎄. 내 무구에 인챈트하고 싶다면 실력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얼추 파악했으니 이제는 실력을 볼 차례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만한 걸 보여줬으니 나도 답례는 해야지."

딸깍.

땋은 머리카락에 끼워져 있던 헤어핀 중 하나를 뽑은 레아가 의기양양하게 이세훈에게 건네주었다.

푸른색 보석을 중심으로 은빛 몸체를 지닌 헤어핀. 언뜻 보기에는 유성과도 같았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은데... 설마.'

혹시나 싶은 생각에 이세훈은 곧장 건네받은 헤어핀의 정보창을 살펴보았다.

[머큐리 Mk.1]

[등급 : 희귀] [품질 : 최상]

수성의 형태를 모방한 헤어핀.

수 속성 마력이 담긴 광석을 가공하여 그 힘을 정제하고 별의 기원을 모방하여 부여된 스킬의 위력을 강화한 물건.

*착용자의 수 속성 저항력, 지배력을 증가시킵니다.

*스킬 '워터 코멧'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희귀 등급 최상품이라. 재료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잘 만들었네.'

재료에 비해 등급도 높고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완성도가 훌륭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감을 잡는다면 당장에라도 영웅 등급의 물건을 만들어내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물론 그 감을 잡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지만 준비가 갖춰졌느냐 마느냐는 차이가 컸다.

'역시라고 해야 할지... 대단한데.'

이세훈이 흥미롭게 헤어핀을 살펴보고 있을 때. 카페의 입구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냥 단체로 밥을 먹으러 왔겠거니 하며 이세훈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야야. 뒤."

"...하아."

자신을 뒤를 가리키는 레아와 등이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나운 인상의 청년. 그 얼굴과 주변에 서 있는 생도들을 훑어본 이세훈은 금방 그들의 정체를 떠올렸다.

'에리카 부하들이네.'

저들이 왜 갑자기 저런 살벌한 표정을 한 채로 자신을 찾아왔는가.

짚이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이세훈이 뭐라도 말해보라는 듯 그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 잠시 나가지 않겠나?"

건네는 말은 권유지만 눈빛만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다. 처음 정류장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상황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한다.'

눈빛을 보건대 이제 서로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해결을 봐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세훈이 여러 방법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나가긴 어딜 나가?"

이세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먼저 대화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조용히 해결하고 싶다. 잠깐이면 되니 부탁하지."

노골적으로 말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이세훈에게만 이야기하는 청년, 세이츠의 모습에 레아의 눈매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입꼬리를 비틀었다.

"주인님 말만 듣는 개새끼답게 사람 말은 알아먹지도 못하나 보네."

"...뭐?"

"알아듣게 말해줄까? 멍! 저리 꺼져 병신아 멍!"

개소리까지 직접 내며 비아냥거리는 레아. 그 노골적인 조롱에 세이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노려보았다.

"학과수석 자리도 못 지킨 퇴물주제 건방진 건 여전하군."

"하! 학과는커녕 학부수석도 한 번 못 따본 새끼가 그걸 지금 도발이랍시고 말하는 거냐? 진짜 어이가 없어서...."

"도발이라니.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도발이 되는 건지 모르겠군. 시험마다 실패작을 가져와서 성적이 떨어진 게 거짓말은 아니지 않나."

빠드득.

세이츠의 비웃음에 레아의 이가 갈리더니 두 눈이 이글거리며 입가가 비틀렸다.

"하. 하. 하. 그래도 아직 상위권이거든? 누가 들으면 실력도 없으면서 졸업하고 일자리 한번 얻어 보겠다고 후배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니는 개새끼라도 된 줄 알겠어."

"너...."

"왜?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잖아. 아, 그 대단하신 '도련님' 종놈 짓 해온 걸 빼먹어서 그래? 미안하게 됐네~"

빠드득.

두 사람 사이로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기류.

신경전을 넘어서 당장에라도 치고받을 듯한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이세훈은 담담하게 필요한 정보만 되새겼다.

'슬럼프라. 이건 좀 의외인데.'

회귀 전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당연히 승승장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힘든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레아가 왜 묵주환에 흥미를 가졌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인연이 성립된 것인지 알아차린 이세훈은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짜악!

가볍게 박수를 쳐서 이목을 모은 이세훈은 눈이 반쯤 돌아 있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뭔데?"

"인챈트 학부 중에 추천해 주고 싶은 부전공 있어?"

조금 둘러서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못 알아들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세훈이 긍정적인 대답에 레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고대 인챈트학. 여기가 교수님도 좋으시고 끝내주는 선배님도 한 명 있어서 아주 좋을 거야."

"참고해 둘게."

어차피 인연은 성립됐으니 자세한 것은 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알아봐도 늦지는 않으리라.

인연석도 그때 살펴보기로 한 이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서 있던 세이츠를 비롯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곳에서 말하자며. 안내해."

"...따라와라."

"그 새끼가 이상한 짓 하면 나중에 나한테 말해!"

레아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온 이세훈은 부하들을 따라서 쭉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상점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저주학부. 보르시파에서 입지가 높은 부서 중 하나였는데 본관도 그렇고 주변 숲도 음산한 느낌이 가득한 장소였다.

"여기서부터는 둘이서 가지."

다른 부하들을 남겨두고 단둘이서 숲으로 들어가는 이세훈과 세이츠. 그 기묘한 분위기에 이세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없는 으슥한 숲속이라. 참 정석적이구만.'

예상한 그대로의 상황에 이세훈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을 때. 앞서 걸어가던 세이츠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입학 첫 일주일이면 한창 바쁠 시기일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지."

"해봐."

고개를 까딱이며 재촉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세이츠가 눈매를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에리카 아가씨께 무례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사과해라."

"난 무례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이세훈의 태연한 대답에 세이츠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심호흡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가씨께서 건네주신 초대장을 두 번이나 남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발겨 놓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그 아가씨가 찢어 보라고 했다만."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그걸 왜 이쪽에 따진단 말인가. 이세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지...."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제이크 마이어스에게 초대장을 받지만 않았다면."

"그건 또 뭔... 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세이츠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던 찰나. 제이크가 해준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노블레스 교류회란 생도 중에서도 휘황찬란한 배경을 지닌 녀석들이 모이는 장소.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 모두가 한편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관계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은원으로 얽힌 관계도 있을 터.

'마이어스랑 이노우에가 썩 사이가 안 좋나 보구만.'

이노우에 에리카가 두 번이나 권유한 초대장은 찢어서 내다 버리고는 제이크 마이어스가 건네준 초대장은 받았다.

상황만 놓고 보면 우연에 지나지 않지만, 저런 교류회에 참석하는 음습한 놈들이 그만한 가십거리를 놓칠 리가 없다.

'그거 때문에 체면이 상해서 이렇게 찾아온 건가.'

이세훈의 입장에서는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자신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녀석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대강 상황을 파악한 이세훈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세이츠에게 물었다.

"에리카가 시킨 거냐?"

"아가씨께선 상관없다. 내 독단으로 벌인 일이다."

세이츠의 대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퍽이나 그러겠다.'

집단의 명성을 중시하는 녀석이 독단으로 이런 짓을 벌인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눈앞의 세이츠가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진 않았다.

잠깐 머리를 굴리던 이세훈은 금방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도련님인가 뭔가 하는 그놈인가 보네."

"...아가씨께 사과해라. 그러면 그냥 끝날 거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이츠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그 도련님이라는 녀석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차기 당주인 이노우에 렌이겠지.'

에리카의 오빠이자 먼 미래에 이노우에 가문을 지휘했던 식신술의 천재.

영웅 중에서도 뒤가 구리다는 이야기를 종종 빙견 아미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녀석이 먼저 나선 건가.'

확실히 회귀 전 행보를 생각해 보면 가문의 체면에 신경을 많이 쓸 법도 하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이세훈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숲 주변을 살폈다.

"안 한다고 하면 뭐, 여기서 죽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까진 하지 않는다. 다만...."

따악.

세이츠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순간. 숲 곳곳에서 마력이 솟구치더니 스산한 공기가 주변을 둘러싼다.

결계가 발동되었음을 알려주는 현상. 적의를 드러낸 세이츠가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연히 저주학부의 시설에 들어가 버려서 상처를 입은 채로 발견될 수는 있겠지."

티가 안 날 정도로 두들겨 패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겠다. 세이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한 이세훈은 피식 웃었다.

"그래. 뒤탈 없게 다 준비해 뒀다 이거구만."

그렇다면 이쪽도 굳이 참을 필요는 없다. 결론을 내린 이세훈은 세이츠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너. 내가 무구 다음으로 잘 만드는 게 뭔지 알아?"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세이츠의 눈길에 이세훈이 생도복 자켓을 벗으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사람."

"...뭐?"

당황한 세이츠의 되물음에 이세훈이 자켓을 뒤로 내던졌다.

"멍청한 새끼 사람 만들기라고."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1화

"...."

자신만만한 이세훈의 모습에 세이츠는 분노보다도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세간의 주목을 받는 학과 수석인 만큼 이세훈에 대한 정보는 이미 수면 아래에서 어느 정도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정보에 의하면 이세훈의 신체 능력은 올해 신입생들 중에서도 최하위.

별도로 전투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마땅한 무장조차 없었다.

'그나마 변수라면 입학식 때 선보인 무기들인데, 그것도 안 보이고....'

자신이 혹시 놓친 게 있나 싶어 다시 살펴보았지만 이세훈에게 딱히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건가.'

이세훈이 보이는 자신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세이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바벨에 입학할 정도니 숨겨둔 한 수 정도는 있겠지. 아마 전력을 다하면 다른 녀석들과는 비교조차 안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바벨에서 자신이 가장 특별할 것이라는 그런 근거 없는 생각. 이는 집안이 보잘것없는 생도들 사이에서 종종 나타났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여긴 바벨이다. 모든 생도가 그런 재능과 힘을 가지고 있고, 너도 결국 그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겠나?"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만나볼 환경이 없다 보니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된다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게 그런 신입생들은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쓴맛을 보게 되기 마련.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다."

오늘이 이세훈에게 바로 그런 날이 되리라.

키이잉!

세이츠의 마력에 결계가 반응하자 주변의 환경이 바뀌었다.

몸을 휘감듯이 짓눌러오는 음산한 공기와 그림자가 짙어지며 어두워지는 숲.

그리고 그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수풀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파스슥!

낮게 울리는 기묘한 울음소리가 마치 들짐승을 연상케 했지만, 그늘에 가려져 그 형상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어둠과 짐승에 대한 공포를 자극해 오는 광경. 여기까지만 본다면 결계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스각!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간 그림자가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고 경고해 주었다.

"흐음."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

이세훈이 담담하게 그것을 바라보자 세이츠가 차가운 눈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 기회다. 아가씨께 사과드려라."

이렇게까지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깨닫게 만들면 될 뿐이다. 세이츠의 경고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방금 그거. 네 이야기냐?"

"...뭐?"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거 같아서. 1학년 때 까불다가 제대로 얻어터진 모양이지?"

예상을 뛰어넘은 대답에 세이츠의 입은 떡 벌어졌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해는 한다. 내가 최고인 줄 알았다가 그런 일을 당하면 씁쓸할 만도 하지."

"너... 너...!"

"그래도 자존심은 지켜야지. 본인이 성장할 생각은 안 하고 남한테 빌붙어서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니고...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은 이세훈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세이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개새끼라는 소리나 듣고 다니잖아."

담담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한 마디. 이에 세이츠의 인내심이 단번에 끊어졌고.

"닥쳐!!!!"

전신의 마력이 폭발하며 숲속의 그림자들이 이세훈을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

괴성을 내지르며 이빨을 드러낸 수십 마리의 검은 이리.

세이츠의 주력기술인 '귀랑아사晷狼牙射'로 대상의 움직임을 억제하며 그림자 이리를 만들어내는 C급 결계였다.

타닥!

이 그림자 이리들은 기본적으로 결계가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마력을 추가로 주입하면 실체를 가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렇기에 실체와 허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전신이 넝마가 되는 까다로운 스킬이었지만.

'흑령사.'

어디까지나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푸화악!

검은 거미줄로 뒤덮인 이세훈의 손이 그림자 이리를 꿰뚫은 순간.

그 형태가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뭐...."

"역시 마력으로만 이뤄진 건 아니었군."

경악한 세이츠의 시선을 받으며 이세훈은 자신의 손에 잡힌 물건을 바라보았다.

약 20cm 정도로 보이는 검은 비수. 겉면에는 주술식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는데 방금까지 마력이 주입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비수를 매개체로 마력효율을 높이고 허상일 때도 공격이 가능하게끔 만든 건가. 발상은 나쁘지 않네."

"그걸 어떻게...?"

단 한 번 만에 자신의 주술과 응용법을 꿰뚫어 보다니. 세이츠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야. 소리가 대놓고 들리는데."

"소리? 잠깐, 설마...."

매개체로 사용한 비수의 파공음. 처음 스쳐 지나갔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세이츠가 당황하는 사이 이세훈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비수의 수는 대략 25개 정도. 한 번에 쓸 수 있는 건 10개 정도인 듯하지만... 그래도 썩 좋지는 않아.'

장기전으로 가면 체력과 마력이 부족한 이쪽이 불리하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간단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인연각인.'

[인연각인 '탐철'이 발동됩니다.]

콰드득!

이세훈의 오른손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자 손에 쥐어져 있던 비수가 녹아내리듯 안쪽으로 스며든다.

S급 영웅 웨폰이터 류은하의 인연석. 철을 먹어 힘을 얻는 '탐철'이 이세훈의 오른손에서 한정적으로 발동된 것이다.

"잠... 멈춰!!!"

한 자루에 100만 원이 넘는 특제비수가 이세훈의 손아귀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그 모습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이츠는 모든 마력을 끌어올려 그림자 이리를 모조리 돌진시켰다.

이세훈의 무력이 자신의 상상 이상임을 깨닫고 뒤늦게 전력을 발휘한 것이지만.

'아.'

그 판단은 한참 늦은 상태였다.

'이런 맛이었나....'

평범한 음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입에서부터 전신을 찌르듯 올라오는 무구의 맛.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서부터 끓어오른 피가 순식간에 전신을 질주한다.

머리카락 끝이 아주 희미하게 불꽃처럼 변한 이세훈이 주변을 덮쳐오는 그림자 이리를 천천히 훑어보았고.

'폭환.'

그 몸이 바닥을 박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압축시켰다.

채채챙!

무시무시한 기세로 덤벼들던 그림자 이리들이 허공을 덮쳤고 안쪽의 비수들이 서로 부딪치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사이를 단숨에 돌파한 이세훈이 세이츠의 눈앞까지 도달했고.

빠아악!

꽉 움켜쥔 주먹이 아랫배를 꿰뚫을 기세로 올려쳤다.

"커헉!?"

죽기 직전까지도 펼쳐진 결계는 유지해야만 한다.

그것이 결계술사들에게 흔히 내려오는 격언이었지만, 세이츠의 귀랑아사는 단 일격에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이세훈의 주먹이 끔찍하게 아팠기 때문이다.

"잠...."

무슨 방법을 쓴 건지 몰라도 저 주먹에 이 이상 맞았다가는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을 직감한 세이츠가 어떻게든 말을 걸어 이세훈을 멈춰 세우려 했지만.

콰악!

그보다 먼저 이세훈의 손이 우악스럽게 목을 움켜잡았다.

"켁!"

발언권을 박탈당한 세이츠가 떨리는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까 말했지?"

이세훈은 자신을 얕봤다거나, 무시하던 게 아니었다.

"멍청한 새끼 사람으로 만드는 게 특기라고."

그저 아무런 감정 없이, 마치 작업대 위에 놓인 재료를 품평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세훈에게 있어 이번 싸움은 일종의 '제련'.

"자, 잠깐...."

그리고 제련이란 무구가 완성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돼라."

어깨를 가볍게 푼 이세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면 멈출 테니까."

* * *

"말해봐."

이세훈의 물음에 얼굴이 퉁퉁 부은 세이츠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후 사정과 관계없이... 막무가내로 저희의 입장만 강요한 것에...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제 모자란 부분을 남에게 투영하며... 명령받은 것 이상의 월권행위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흐음...."

뭔가 아쉬움이 느껴지는 이세훈의 목소리에 세이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럴 때마다 사람이 덜됐다고 다시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차라리 맞다가 기절이라도 했으면 편했을 텐데 무슨 수를 썼는지 더럽게 아프기만 하고 정신은 또렷하다.

신기하면서도 끔찍한 이세훈의 구타에 세이츠가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뭐, 좋아."

이세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선배인데 내가 너무 심하게 할 수는 없지."

"...."

이게 심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심한 것은 어느 정도인가.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광경에 세이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이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야기를 이었다.

"대신 돌아가서 그 도련님한테 확실히 전해. 이런 쓰잘머리 없는 싸움에 끼어들게 하지 말라고."

"...."

"대답."

"예, 예...."

마지못해 대답하는 세이츠의 모습에 이세훈은 혀를 차면서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빠악!

"끄악!"

"에휴. 한심한 놈...."

집단이라고 다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고작 이런 일로 사람을 보내는 곳이 잘나 봐야 얼마나 잘나겠는가.

본인은 이노우에라는 가문의 일원이 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세훈이 보기에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 일로 깨닫는 게 있겠지.'

만약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부품으로 쓰이다가 언젠가 망가져서 버려지리라.

세이츠에 대한 생각을 털어낸 이세훈은 바닥에 던져놓은 자켓을 집어 들었다.

"간다. 뒷정리는 알아서 해둬."

"예...."

"그리고 다음에 또 마주치면 알아서 해."

그 말을 끝으로 이세훈이 돌아온 길 그대로 걸어나갔고,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이츠는 그대로 힘이 풀려 바닥에 드러누웠다.

"...빌어먹을."

신입생에게 경고하러 왔다가 도리어 두들겨 맞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상황을 수습하라는 명령까지 듣다니.

처량해도 이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지만, 세이츠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분을 못 이겨 필요 이상으로 수를 쓴 시점에서 이미 책이 잡혔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까지 하고도 졌다는 게 가장 문제인가.'

3학년에서 중상위권이긴 하지만 제대로 싸운다면 상위권 이상은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착각에 빠져 있던 것은 이세훈이 아니라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자신의 모습에 세이츠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끝났네."

숲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아, 아가씨...?"

자신의 앞에 나타난 소녀, 에리카의 모습에 세이츠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언제부터 지켜본 것인가. 자신의 월권행위가 모조리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이츠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게...."

"당신 변명은 관심 없어. 지금부터는 질문에만 대답해."

두 눈을 자신을 향해 있지만, 거기에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무기물로 보는, 이세훈보다도 더욱 공허한 시선에 세이츠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세훈이 네 비수를 흡수해서 뭔가를 펼쳤었지?"

"예...."

"그 비수. 가지고 와."

"예!"

에리카의 명령에 세이츠가 곧장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수를 살펴보다가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왜 14개뿐이야.'

이세훈이 하나를 부쉈으니 24개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사라진 10개의 비수. 그 행방을 어렴풋이 깨달은 세이츠의 입이 떡 벌어지던 그때.

"뭐해?"

"가, 갑니다."

뒤에서 들려온 재촉에 세이츠가 다급히 남은 비수를 모조리 가져다주었고, 에리카가 곧장 그 겉면을 훑어보았다.

'역시 강탈방지 인챈트가 새겨져 있어.'

매개체로 쓰이는 무구는 적에게 강탈당하면 곧장 무력하기에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에 세이츠의 비수 역시 그런 인챈트가 걸려 있었는데 이세훈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파훼해 버린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건 그 검은 거미줄 같은 주술....'

형태와 효과를 보건대 로버트 교수의 '혈진사'와 자신이 보여준 '무령진'을 토대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두 결계가 지닌 범용성만을 고스란히 떼어내 한층 더 최적화시킨 주술.

아직 미숙한 부분이 보였지만, 하나의 '스킬'로 인정받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그동안 이세훈이 보여준 잠재력을 떠올린 에리카는 천천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평가를 수정했다.

'제련기술의 적성은 S이상. 주술의 적성 B에서 A이상으로 상향조정.'

이만한 잠재력이라면 아무리 부진하게 되더라도 최저치까지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에리카가 세이츠를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오라버니에게 보고할 거지?"

"...예."

"보고하지 않아도 돼."

에리카의 담담한 이야기에 세이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러면 도련님께서...."

"괜찮아. 내가 당주님께 따로 보고 드릴 테니까. 알겠어?"

"아, 예!"

"그리고 당신은 내일부터 내 밑에서 일하도록 해."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세이츠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지만, 금방 정신을 다잡았다.

이미 자신은 쫄딱 말아먹은 상황. 그렇다면 이 알 수 없는 흐름에라도 편승해서 어떻게든 버텨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명령하실 일은 있으십니까?"

"이세훈의 곁을 봐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줘. 그게 네 주 업무야."

에리카의 명령에 비장하던 세이츠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다시 마주치면 알아서 해라고, 이세훈이 분명 그렇게 경고를 남기고 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수 10개를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는 것을 보면 마주칠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지 불 보듯 뻔했다.

"저... 다시 마주치면 구타를 당할 수도...."

"그래?"

세이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리카가 차갑게 대답했다.

"스트레스 해소도 될 테니 잘됐네."

"...."

"온 힘을 다해 맞아줘."

"...."

우르의 주술부서 3학년 세이츠.

그의 남은 아카데미 생활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2화

[대상 '이노우에 에리카'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뭐야."

숲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나타난 알림창의 내용에 이세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 소식도 없던 에리카의 인연이 왜 갑자기 성립이 된단 말인가?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세훈이 자연스레 방금 상황을 떠올렸다.

'혹시 훔쳐봤나?'

그동안 애매하던 자신의 평가가 세이츠라는 녀석과의 전투를 보고 상향되어 인연이 성립되었다.

너무 과한 상상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에리카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싸했다.

'근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

자신이 능력을 드러내자 인연이 성립된 것을 보면 실리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에리카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금방 머릿속의 생각을 지웠다.

'아무렴 어때.'

어쨌든 인연은 성립됐으니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살펴보면 알게 될 일이다.

일단은 상태부터 점검하기로 한 이세훈은 오른팔에 장착해뒀던 류은하의 인연석을 살펴보았다.

[인연 - 탐철]

[등급 : 고급] [품질 : 최상]

철을 먹어치우며 열량을 만들어내는 철.

맞닿은 철에 침식하여 그 핵을 자신의 안쪽으로 녹여냅니다.

*철을 포식하여 '광혈鑛血'을 만들어냅니다.

*남은 내구도 : 78%

'품질이 높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안 깎였네.'

이 정도라면 앞으로 두세 번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예상보다 크지 않은 소모에 미소를 짓던 이세훈은 방금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그게 류은하가 무구를 먹으면서 느끼는 '맛'이었겠지.'

무구를 먹은 순간 전신을 타고 흐르던 맛. 살면서 비싼 음식들도 몇 번 먹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건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평범한 음식 따위로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 아직도 입가에 남아 있는 텁텁하면서 진한 맛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자기가 무표정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더니....'

이런 격렬한 맛을 매번 느끼면서 살아가는데 평범한 자극에 반응이 무뎌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회귀 전의 류은하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게 된 이세훈은 무구의 맛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흠. 이 정도면 앞으로 입맛도 노려볼 수 있겠네.'

류은하에게 무구를 만들어 줄 때 가장 난해했던 것이 '입맛'을 맞추는 것이었던 만큼 무구의 맛을 느껴본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득이다.

이 부분을 잘 활용한다면 아마 인연석을 원활하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레벨도 빨리 올릴 수 있으리라.

'이것들도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이고.'

세이츠에게 위자료로 받아온 비수 10개.

이대로 쓰기에는 영 조잡하지만 몇 가지만 손을 보면 흑령사와 연계해서 그럭저럭 쓸 만해질 것이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소득에 이세훈은 만족스러워하며 시간을 살폈다.

'오후는 광물분석학이었나.'

김인철 교수가 도맡아서 가르치는 수업으로 제련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공 중 하나였다.

'뭐니뭐니해도 100대 장인이니까 말이지.'

전 세계의 수많은 장인 속에서 100명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 영웅 등급은 A급이긴 했지만, 실질적인 가치는 사실상 S급에 준하리라.

'어떤 식으로 수업을 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제련학부 본관에 도착한 이세훈은 곧장 강의실로 올라갔다.

"...."

"...."

어느 정도 시끌벅적하던 강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이세훈을 향해 일제히 시선이 쏟아졌다.

이제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시선에 이세훈은 그러려니 넘기며 곧장 구석진 곳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좀 피곤하네....'

제이크와의 대련에 이어서 세이츠와의 싸움. 거기에 탐철을 사용해서 신체 능력을 급격히 끌어올린 반작용인지 몸 곳곳이 욱신거린다.

체력과 마력의 부족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탈진증세. 그 붕 뜨는 감각에 이세훈이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드르륵─

강의실의 문이 열리며 김인철이 안으로 들어섰다.

뒤쪽에는 큼지막한 수레가 밀어주는 사람 없이 홀로 뒤따라왔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의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골렘인가.'

흔히 대장장이들은 무구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광석을 다룬다면 어떤 것이든 관여한다.

특히 골렘은 마법사와 협업으로 만드는 물건이라 인기가 많았는데 회귀 전 이세훈도 몇 번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제가 골렘도 잘 만들었는데.'

삼견 중 폭견, 루이제 발렌트를 떠올린 이세훈이 그녀에 대해서 떠올리던 그때.

"수업을 시작하겠네. 모두 교재의 16페이지부터 펼치게."

교탁에 선 김인철이 곧장 수업을 시작했고 그 내용을 듣던 이세훈은 금방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냥 이론수업이잖아.'

교재에 있는 내용에 자신의 경험담을 더해서 적절히 설명해 주는 김인철.

그럭저럭 유용한 내용도 있었기에 다른 생도들은 집중해서 들었지만, 경력으로 따지면 김인철 못지않은 이세훈에게는 지겨운 이야기였다.

'너무 기대했나....'

금속제련이나 도구 이해는 몸이라도 움직이니 할 만했지만 이쪽은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세훈이 무심한 표정으로 김인철의 수업을 대충 흘려듣고 있을 때.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지."

교재를 덮은 김인철이 옆의 수레에서 자그만 한 철괴들을 꺼내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올렸다.

"설명했다시피 똑같은 금속이라 할지라도 마력배열을 어떻게 변형시키느냐에 따라 형태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네."

우웅─

김인철의 손끝으로 마력이 피어올랐고, 이어서 책상에 놓인 철괴들을 가볍게 툭툭 때렸다.

우웅─

그러자 철괴들이 희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각각 다른 현상을 일으키며 변화되기 시작했다.

우드득! 파칵! 키기긱!

안쪽으로 오그라들거나 나선형으로 비틀리거나 활짝 펼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하는 철괴들.

그 모습에 생도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세훈도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잘하는데.'

저만한 크기의 철괴에 배열을 어떻게 해야 저렇게 변하는지 완벽하게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연륜과 뛰어난 감각을 함께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형태변화를 어떻게 응용하는가에 따라 무기의 다채로움이 결정되는 법. 그렇기에 대장장이라면 자신이 다루는 금속의 잠재력에 대해서 완벽히 파악할 필요가 있지."

툭툭!

김인철이 다시금 철괴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 형태로 수복되었다.

"와...."

따로 스킬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철괴를 저렇게 완벽히 복원하다니. 그 모습에 생도들이 혀를 내둘렀고 김인철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이었다.

"오늘은 이 철괴를 통해 금속의 변형법에 대해서 연습해 볼 걸세. 일반적인 철괴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조정을 거친 물건이니 조심히 다루도록."

생도들에게 철괴가 하나씩 배분되었고, 이세훈도 하나를 받아와 살펴보았다.

'흐음. 마력배열과 광핵을 연결시켜서 변형에 민감하도록 만든 건가.'

미하엘 부학원장이 이를 갈기에 김인철이 마도제련법은 아예 배척하는가 했더니 또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김인철이 철괴를 들어 올렸다.

"우선은 기초부터 시작하겠네. 마력배열을 조작해서 철괴의 가운데에 3cm 정도 되는 흠집을 만들어낸 뒤 수복해 보게나. 제한시간은 10분으로 하지."

김인철의 지시에 생도들이 철괴에 양손을 얹어 앞서 배운 대로 마력배열을 조작해 철괴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어, 어어... 이게 왜 이러지?"

"...원래대로 안 돌아가는데?"

말로 듣는 것과 직접 펼치는 것은 천지 차이.

대부분의 생도들은 변형을 성공하지도 못했고, 상위권의 생도들도 흠집의 위치와 깊이를 조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 혼란에 속하지 않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끝났습니다."

"완료했습니다."

바로 수석인 이세훈과 차석인 한스였다.

"그럼 두 사람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배열을 예시로 보여줄 테니 적용해 보도록."

김인철은 곧장 다음 단계의 변형을 허공의 홀로그램으로 보여줬고, 두 사람은 지체 없이 철괴의 마력배열을 조작하여 형태를 바꾸었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배열을 완수해내는 두 사람. 이세훈이 조금 더 빠르긴 해도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고, 그 무언의 경쟁에 다른 생도들의 이목도 모여들었다.

'된다... 이번에는 할 수 있어...!'

속도도 조금 밖에 차이 나지 않고 완성도 역시 크게 밀리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이세훈을 따라잡기 위해 한스가 이를 악물며 철괴를 변형시켜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인철은 담담하게 다음 배열을 허공에 비춰주었다.

"...다음은 이 배열이다. 적용해 보도록."

도대체 어떤 식으로 변형이 될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배열. 그 앞에서 드디어 두 사람의 반응이 갈렸다.

"...."

"이거다...!"

철괴를 변형시키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이세훈. 반대로 이번에도 곧장 철괴를 변형시키기 시작한 한스.

X자로 갈라진 철괴가 곡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천천히 말려 들어간다. 곡선을 그리는 4개의 뼈대로 이뤄진 작은 구. 그 모습에 한스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됐어!'

누가 봐도 완벽하게 변형된 철괴의 형태.

반면 이세훈은 여전히 철괴를 바라보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모습에 한스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승전보를 울리듯 완성했음을 말하려던 순간.

"한스 바르무트."

김인철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 이름을 호명했다.

"철괴를 본래 형태로 되돌려보게."

"...예?"

"말 그대로일세. 되돌려보게나."

갑작스러운 지시에 한스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이 변형시킨 철괴에 손을 얹었고, 이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변형시킨 마력배열을 되돌리려 해도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 이건...."

완전히 '손상'되어버린 철괴.

그 모습에 한스가 멍하니 바라보자 김인철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 철괴로는 방금의 변형법을 견뎌낼 수 없었다. 즉 처음부터 '틀린' 가공법이었다는 뜻이지. 알고 있었나?"

"저, 저는 그냥 교수님께서 시키셔서...."

"앞에 말했을 텐데. 금속의 잠재력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단순히 변형을 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만 한다. 김인철의 이야기에 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작한 배열을 복원시키는 게 불가능하면 장비는 변형이 아니라 '변질'이 되어버리네. 이는 품질과 성능에 큰 변수를 만들어내니 앞으로는 이런 부분도 꼼꼼히 살펴보게나."

김인철의 지적에 한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모처럼 만들어낸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리다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 한스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그걸 단번에 알아차렸단 건가?'

어쩌면 그냥 변형법을 따라 할 수 없어 멍하니 있다가 얻어걸린 걸 수도 있지 않은가.

한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세훈을 바라보던 그때.

"흠."

작게 중얼거린 이세훈이 손안의 철괴를 한스와 같이 구의 형태로 빚어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되겠네."

촤락─

변형되었던 철괴가 보란 듯이 복원됐다.

"...."

"...."

그 광경에 묘한 침묵이 강의실에 흘렀고, 이내 한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이세훈 생도."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냈지만, 거기에 묘한 떨림이 서린 것을 생도들 모두가 느꼈다. 그 긴장된 부름에 이세훈이 뒤늦게 김인철을 바라보았다.

"예?"

"철괴를 가지고 나와보게."

"아. 예."

의아한 표정을 지은 이세훈이 강의실 아래로 내려갔고, 김인철이 굳은 표정으로 손에 들린 철괴를 바라보았다.

"방금 펼쳤던 변형. 다시 해볼 수 있겠나?"

김인철의 눈동자에 감도는 붉은색 빛과 마력. 제대로 확인해 보려는 건지 스킬까지 사용한 그 모습에 이세훈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아, 이런... 착각하게 만든 건가.'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말로 설명할까 싶었지만 그보다는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았기에 이세훈이 곧장 손안의 철괴를 변형시켰다.

촤작─

네 갈래로 갈라졌다가 곡선을 그리며 한 꼭짓점으로 모여 구를 형성해내는 철괴. 그리고 이어서 만들어진 과정을 되감기하듯이 철괴가 본래의 형태로 완벽하게 돌아간다.

처음 보여준 것에 약간의 변주가 가해진 변형식. 신입생이 즉석에서 수정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기에 김인철은 감탄하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이 '철괴'라서 가능했던 것인가."

김인철이 보여준 변형식은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철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지만, 오늘 실습에 쓰인 것은 생도들이 쉽게 다룰 수 있도록 몇 가지 첨가제를 더한 물건.

그렇기에 일반적인 철괴라면 불가능했을 변형이 이세훈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것도 못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니....'

자신의 추태에 쓴웃음을 짓는 김인철. 하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놀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교재에 실린 철괴의 변형식을 만들어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루트비히 학원장과 같은 완등자 '성화공聖火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을 텐데.'

탑을 완등하기 전인 S급 영웅 시절에 배포해서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깨진 적이 없는 '철의 진리'.

모든 대장장이에게 있어 풀어야 할 난제이자 동시에 근본으로 취급되는 것이 바로 이 변형식이었다.

'이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에게 품기엔 과한 기대 같지만,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생각한다면 미래에는 또 어찌 될지 모른다.

그동안 쭉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에 확신을 가지게 된 김인철은 결심을 내리며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기존의 변형식을 응용했다 해도 철괴의 상태에 맞춰 바꾸기가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군. 잘했네."

"감사합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게나."

철괴를 챙긴 이세훈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주변에서 힐끔힐끔 시선들이 쏟아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인철 교수에게 저리 칭찬을 받다니. 이세훈이 즉석에서 펼쳐낸 기교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스레 체감한 것이다.

"...."

그중에는 격차를 너무 느껴 풀이 죽다 못해 생기가 사라진 한스도 있었는데 이세훈은 그 모습에 피식 웃다가 철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철의 난제라....'

완등자이자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성화공 리 켄세.

그 시끄럽기 그지없던 영감의 모습을 떠올리던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부수면 두 번째겠구만.'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철괴는 다음 수업까지 연습하는 데 사용하게나."

수업이 끝나자 생도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고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선 이세훈의 눈동자가 살짝 풀렸다.

'아... 온다.'

안 그래도 체력이 없던 상태에서 수업시간 내내 철괴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는 마력까지 바닥나 버렸다.

슬금슬금 밀려오는 탈진증세와 그에 저항하듯 뿜어져 나오는 엔돌핀. 체내의 마력이 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낀 이세훈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이세훈 생도."

아직 나가지 않은 김인철이 이세훈을 불렀다.

"예?"

"잠시 할 이야기가 있네만... 시간 괜찮은가?"

오늘 수업은 방금이 마지막이라 남은 일정도 없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럼 연구실로 가지."

본관 건물 2층에 있는 김인철의 연구실로 넘어온 이세훈은 방 안을 슬쩍 살펴보았다.

연구실 내부는 개인적인 물건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방주인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대장장이는 공방을 봐야 알지.'

생각보다 볼거리가 없는 연구실에 이세훈이 재미없다는 듯이 훑어보고 있을 때. 김인철이 소파에 앉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게나."

"예...."

소파에 엉덩이가 닿기 무섭게 온몸에 긴장감이 빠지며 몸이 휘청거렸고, 그 모습에 김인철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괘, 괜찮은가?"

"아, 예. 괜찮습니다. 오늘 여러모로 좀 바빠서...."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어제도 중급제련을 하지 않았나."

"약간 일이 몰려서 그렇습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게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실제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이세훈의 몸에서 기묘한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했기에 김인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뭐... 아, 그게 어제 만든 무구인가?"

손목에 채워진 묵주환을 발견하고 흥미를 보이는 김인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소매를 걷었다.

"예. 한번 보시겠습니까?"

"부탁하지."

이세훈에게서 묵주환을 건네받은 김인철은 정보창과 겉을 살펴보더니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 묵중암을 벌써 이만큼이나 다루다니... 내부 술식이 독특한데 뭘 쓴 건가?"

"이번에 따로 배운 결계의 구조를 응용했습니다. 어떻게 만들었냐면...."

딱히 숨길 만한 수준도 아니었기에 이세훈은 묵주환을 만들어낸 과정을 설명해 주었고 그 이야기를 듣던 김인철이 속으로 감탄했다.

'배운 지 얼마 안 된 주술을 이렇게 능숙하게 무구에 녹여 내다니....'

주술을 배우는 것과 그것을 무구 안에 녹여내는 것은 비슷한 것 같아도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이렇게 능숙하게 해내다니. 바벨에서 교수로 생활한 지도 오래됐지만 이만큼 잠재력이 폭넓고 뛰어난 생도는 난생처음이었다.

'방금까지도 긴가민가했지만...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눈앞의 이세훈에게는 제련학부, 더 나아가 대장장이 업계에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잠재력이 있다.

1학기 동안은 차근차근 지원하며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확신한 김인철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세훈 생도.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네."

묵주환을 돌려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김인철. 달라진 분위기에 이세훈도 늘어진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죠."

"혹시 내가 가르치는 부전공 수업을 들을 생각이 있나?"

어느 정도 예상한 범위 내의 제안. 그에 이세훈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부전공 수업이라면 '무구 근원학' 말씀이십니까?"

"맞네. 뭘 다루는지는 알고 있나?"

"예. 미리 알아봤었습니다."

김인철이 가르치는 '무구 근원학'은 말 그대로 무구를 이루는 근원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수업이었는데 외부에도 알려질 만큼 인지도가 상당했다.

100대 장인이 가르친다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벨에서 지원받는 예산이 모든 수업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루트비히가 특히 관심이 많다고 했었지.'

바벨은 유망주들을 육성하는 아카데미이자 동시에 교수들을 지원해 주는 연구기관이기도 했다.

그런 조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영웅들 중에서도 실력 있는 자들을 교수로 쓰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돈보다도 학원장이 그 양반이니까 가능한 거지.'

영웅의 탑을 완등한 이는 그 이름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기 마련.

그렇기에 바벨이라는 장소가 성립할 수 있었고, 그런 인물의 관심을 받고 있는 김인철의 무구 근원학도 자연스레 주목받는 것이었다.

'결말은 썩 안 좋았던 것 같지만....'

회귀 전 이세훈은 김인철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무구 근원학이라는 학문 역시 허무맹랑한 개소리로 취급받고 있었다.

아마 어떤 연유로든 김인철이 마땅한 성과를 내지 못해 루트비히의 지원이 끊어지고 잊힌 것이리라.

'미래를 생각하면 들어가 봐야 시간 낭비겠지만....'

현재를 생각한다면 제련학부에 존재하는 수업 중에서 루트비히에게 가장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수업.

무구 근원학이 어찌 됐든 저 안에서 활약을 펼친다면 루트비히의 관심을 더 받을 수도 있고 콩고물도 많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나? 신청한 부전공이 꽤 되는 걸로 아는데...."

"아뇨. 이것까지 해봐야 셋... 아니, 네 개밖에 안 되는 걸요 뭘."

결계구성학에 신체제어학, 고대인챈트학과 무구근원학. 그리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딱 적당히 고른 것 같았다.

'다른 쪽이 필요하다 싶으면 나중에 서클 쪽으로 살펴보면 되겠지.'

1학기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이세훈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김인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눴고, 그 사이 이세훈이 자연스럽게 인연을 추출했다.

[대상 '김인철'에게서 인연을 추출해냅니다.]

[제작자 '이세훈'과의 인연은 Lv.1 입니다.]

'흠... 아직 레벨이 오를 기미는 안 보이네.'

아무래도 수업을 들으면서 좀 더 활약을 보여줘야 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한 이세훈은 추출을 끝낸 뒤 손을 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피곤할 텐데 붙잡아서 미안하네. 그럼... 아, 이런 그걸 깜빡하고 있었군."

자리에서 일어서던 김인철이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작은 목갑 하나를 가져와 내밀었다.

"이건...?"

"입학 선물일세. 자네가 바벨로 와준 덕분에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준비해 봤네."

예상치 못한 선물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짓자 김인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닐세. 한 번 열어보게나."

김인철의 권유에 이세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갑을 열어보았다.

후웅!

목갑 안쪽에 놓인 붉은색의 육각형 광석.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빛과 열기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홍염옥이네요."

"자네가 홍염을 다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준비해 봤네."

홍염옥. 이름 그대로 이세훈이 습득한 화속성마력인 홍염의 정수가 담긴 광석이었는데 상당히 유용한 물건이었다.

이 안에 담긴 정수를 추출하여 체내에 흡수하면 홍염을 영구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라더니. 순도가 꽤 높은 걸 구해왔네.'

이 정도라면 홍염을 단순히 강화하는 게 아니라 한 단계 '진화'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적절한 선물에 이세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잘 쓰겠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좋겠군. 아 추출은 혼자서 할 수 있겠나?"

정수를 추출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과일의 껍질과 알맹이를 훼손시키지 않고 깔끔히 분리시키는 것.

이제 막 입학한 생도는 물론이며 상급생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괜찮습니다."

이세훈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혼자서 할 수 있겠네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김인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가서 편히 쉬게나."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이세훈이 언제 지쳤냐는 듯이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인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젊음이 좋군.'

* * *

기숙사로 돌아온 이세훈은 곧장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 정도면... 잔존마력이 7%인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던 마력들도 대부분 사라졌고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마력을 깨닫기 전 순수한 인간의 육체. 그 상태에 가까워진 이세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베스트는 1% 미만이지만... 처음이니까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거실의 바닥에 앉은 이세훈은 양반다리로 앉은 다음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묵주환을 살펴보았다.

묵주환의 중앙에 생겨난 푸른색 선. 굵기가 3분의 1 정도였는데 안쪽에 저만큼 마력이 차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 양이면 담금질도 되겠고... 슬슬 해볼까.'

모든 준비가 갖춰졌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김인철에게서 받은 홍염옥을 꺼내 살펴보았다.

[홍염옥]

[등급 : 희귀] [품질 : 최상]

홍염의 정수가 담긴 광석.

광석을 녹여 액체로 만드는데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뒤섞인 광석을 빠르게 녹여낼 수 있습니다.

'역시 좋구만.'

이만한 품질의 홍염옥이라면 천 가까이는 되지 않을까.

회귀 전이면 모를까 아직 생도인 지금은 귀한 물건이었기에 이세훈이 두 눈을 빛냈다.

'골수까지 싹싹 긁어 내주마.'

홍염석을 양손에 올려둔 이세훈은 천천히 눈을 감고 지금부터 시작할 '단조'에 대해서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속성마력은 특수한 스킬을 보유하지 않으면 2~3개밖에 다루지 못한다.

복수의 속성마력이 체내에 존재할 경우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등급이 오를수록 위험도도 오르고, 잘 조절한다고 해도 서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지.'

전투직이야 그런 사소한 영향쯤은 상관없겠지만, 정밀한 공정이 필요한 대장장이에게는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대장장이들은 적성에 맞는 속성마력 하나만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세훈은 달랐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이세훈은 홍염옥에 정신을 집중했다.

내부에 맥동하고 있는 홍염의 정수. 자신이 다루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순한 불꽃을 느낀 이세훈은 천천히 그것을 내부로 끌어들였다.

치이익!

손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어서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비 오듯이 땀이 쏟아진다.

본래라면 체내의 마력이 열기를 막아줬을 테지만 지금은 마력이 거의 바닥나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부글부글─

피가 끓어오르는 감각과 함께 팔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홍염의 정수.

마력이 거의 바닥난 육체가 반사적으로 비슷한 홍염의 정수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불꽃이 흐르는 감각.

몸 안쪽이 타올라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은 어지간한 영웅들조차도 견뎌내지 못할 만큼 끔찍했으나, 이세훈은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리는 것만으로 참아냈다.

'젊어서 그런가... 몸이 아주 쌩쌩하구만....'

회귀 전에는 죽어가던 몸이라 그런지 라이터로 지지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달군 쇠로 전신을 지지는 것 같았다.

그 고통 속에서 이세훈은 몸 안을 마구잡이로 파고드는 홍염의 정수를 인지하고, 특정한 길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이쪽.'

앞으로 어떤 속성마력을 사용하든 혼선이 빚어지지 않게끔 몸 안에 오직 홍염만을 위한 마력회로를 새롭게 구축한다.

전신을 관통하는 한 줄기의 길. 머릿속으로 도면을 그려내자 홍염이 그것을 이해했다는 듯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우우웅!

자신에게 배정된 마력회로를 신나게 질주하는 홍염.

이대로라면 마구잡이로 달리다가 결국 휘발되기에 이세훈은 천천히 정신을 가라앉히며 상상 속의 망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껏 자신의 몸을 향해 후려친 순간.

카앙─!

귓가에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이세훈의 몸이 들썩였다.

"쿨럭!"

정신이 번쩍 드는 통증과 함께 터져 나온 마른기침.

온몸이 망치에 으스러진 듯한 아찔한 감각에 이세훈이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됐다.'

몸 안쪽에 새롭게 자리 잡은 마력회로와 홍염의 정수.

육체가 확실히 '단조'되었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묵주환에 저장된 마력을 단숨에 체내로 흘려보냈다.

'폭환.'

우웅!

묵주환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홍염에 의해 달궈졌던 육체를 식혀주며 바짝 말라 있던 전신에 파고들었다.

방금까지 느껴졌던 열기를 잊게 만드는 청량감. 전신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이세훈은 그동안 꾹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증기처럼 퍼져나가는 입김.

모든 공정이 끝났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벌써 어두컴컴하게 변한 바깥.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벨의 야경을 보며 이세훈이 씩 웃은 순간.

[스킬 '영연신마법(S)'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영연신마법'의 효과로 모든 스탯이 대폭 상승합니다.]

[속성마력 '홍염(F)'이. 홍련(E+)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눈앞에 연달아 떠오르는 알림창.

그 요란한 내용들에 이세훈은 곧장 몸이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했다.

[이세훈]

근력 - D(105) 내구 - D(100)

마력 - D(119) 민첩 - E(87)

[영연신마법靈硏身磨㳒] 『S』

육체란 대장장이가 갈고닦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재료.

체내의 마력회로를 제련함에 따라 신체능력이 상승하며 그 안에 담긴 힘을 강화시킵니다.

*마력회로 [홍련] : 불꽃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며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홍련] 『E+』

진홍빛의 불꽃을 연상케 하는 화속성마력.

금속을 녹여 액체로 만드는데 특화된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접촉한 불꽃에 '흐름'을 부여할 수 있다.

"오...."

회귀 전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뒤였기에 습득한 뒤에 별 차이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스탯의 증가폭부터 엄청났다.

물론 기존의 스탯이 워낙 형편없는 상태였기에 이만큼 극적으로 상승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여전히 신입생 평균 아래긴 하지만... 중요한 건 효율이지.'

스탯이 오른 것뿐만 아니라 마력을 다루는 효율도 같이 증가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스탯창의 1.5배로 봐야 한다.

단숨에 성장한 육체의 상태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처음 이 영연신마법을 배웠을 때를 떠올렸다.

'재료가 있는데 그걸 다뤄볼 생각도 안 하고 포기하다니. 머저리도 아니고 그래서야 되겠느냐?'

남들은 자살행위라고 말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시도하고, 그것을 정말로 성공해낸 불세출의 천재.

그리고 그걸 평범한 자신에게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 반죽음으로 만들었던 인면수심의 괴물.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사부의 모습을 살짝 떠올렸던 이세훈은 이내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그래. 쓸 수 있는 건 다 써봐야지.'

그게 미래의 아군이든, 적이든 가릴 이유는 없다.

이번만큼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이세훈은 다시 자신의 몸을 가다듬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4화

금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세훈은 늘 그렇듯 주변과 기억을 점검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웅─

축 늘어져 있던 어제와 달리 튕기듯이 일어선 몸.

전신에 도는 활력과 홍련의 희미한 열기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데.'

밤중에 묵주환을 빼고 자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영연신마법이 몸을 움직이는 효율을 증가시켜준 것이 가장 컸다.

'오늘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가야지.'

금속제련 수업에서 납품할 물건을 만드는 날.

명색에 학과 수석인 만큼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몸 상태도 그나마 쓸 만해졌기에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건 나중에 착용하기로 하고....'

묵주환을 따로 챙긴 이세훈은 몸을 씻은 다음 곧장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여느 때와 같이 묘하게 웅성거리는 기숙사 입구. 이제는 익숙한 그 상황에 이세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타닥─

이세훈이 입구를 나오기 무섭게 옆으로 따라붙는 발소리.

그에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에리카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제련학부에 용무가 있어서."

"근데 왜 여길 와?"

"너랑 같이 가려고."

변함없이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얼굴을 살펴보았다.

'인연이 성립된 것치곤 변화가 안 보이는데.'

물론 Lv.1인지라 대단한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에리카처럼 성립되는 과정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면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걸 어떻게 확인해 볼지 고민하던 이세훈은 그냥 간단하게 확인해 보기로 결정하며 입을 열었다.

"에리카."

"응."

"넌 나랑 친해져서 뭘 하고 싶은 거냐?"

이세훈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대화가 끊어지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걸으면서 눈길도 주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는 두 사람.

보는 이들이 어색함을 느낄 만큼 기묘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그 묘한 침묵이 계속되려던 찰나.

"날 완성시킬 거야."

"완성?"

"그래. 가문이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로."

가문이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 그 이야기에 이세훈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가문의 당주 자리를 노리는 건가.'

이노우에쯤 되는 가문이라면 당주가 되기 위해선 무력뿐만이 아니라 대외적인 힘 역시 필요로 할 터.

그런 의미에서 재능 넘치는 유망주들을 미리 포섭해두는 것은 어찌 보면 기본 중의 기본이리라.

"그럼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네."

"맞아. 하지만 후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후보라...."

상당히 속물적인 대답이라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마음에 들었다.

에리카의 인연을 올리는 방법이 생각보다 쉬울 것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당주가 되는 데 도움을 주면 되는 거겠지.'

회귀 전 미래에는 오빠인 렌이 당주가 되었고, 에리카는 소속원으로서 활동하다가 훗날 마인이 되어 토벌당했다.

거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에리카가 당주가 되도록 돕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건과 접촉하고 마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좀 더 깊은 부분들은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된다.

사정은 어느 정도 파악했기에 이세훈은 마지막으로 인연석을 빚어낼 '제조법'을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가치가 높아질수록 대우도 좋아지냐?"

"...."

에리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고, 몇 발자국 더 걸어가던 이세훈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와 같이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좋아질 거야."

에리카의 눈동자 너머로 기이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단순한 기대감일까. 그도 아니면 인재를 향한 독점욕일까.

처음으로 보게 된 에리카의 진심에 이세훈은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확실하게 느낌이 왔다.

'이건 만들 수 있겠어.'

당장에라도 에리카의 인연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곧 있을 제련에 집중해야 한다.

나중에라도 잊지 않기 위해 에리카의 모습을 눈 안에 담은 이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다시 나란히 걸음을 옮겼고, 본관에 도착해서 헤어지기 전에 에리카가 앞에 섰다.

"이거."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편지봉투. 그것을 건네받은 이세훈이 반사적으로 훑어보자 에리카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찢으면 안 돼."

"흠. 초대장은 이미 받았는데."

"알아. 하지만 많아도 나쁠 건 없어. 그만큼 네 가치가 오를 테니까."

확실히 한 가문에게 초대받아서 온 것보다야 두 가문에게 초대받아서 왔다고 하는 쪽이 조금 더 능력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게다가 쓸데없는 싸움도 좀 덜해질 테니.'

초대장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정확히 언제 열리는 거야?"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선배들이 모여서 날짜를 정하는데 보통은 몇 주 뒤에 열려."

입학했을 때의 성적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기량도 보기 위해서일까. 상당히 널널했기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을 챙겨 넣었다.

"그래. 고맙다."

"...."

초대장을 챙긴 이세훈을 바라보던 에리카는 돌연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음?"

"악수."

너무 뜬금없는 요청이었기에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인연을 미리 추출을 할 수 있으니 이쪽도 나쁠 건 없다.

"뭐. 좋아."

이세훈이 자연스럽게 에리카가 내민 왼손을 맞잡았고 동시에 인연추출을 발동했다.

[대상 '이노우에 에리카'에게서 인연을 추출해냅니다.]

[제작자 '이세훈'과의 인연은 Lv.1 입니다.]

'과연 어떤 능력일까.'

이만큼 괴팍한 성격에 재능이라면 상당히 쓸 만한 녀석이 나올 것 같다.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

에리카가 맞잡은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볍게 흔들었으니 이제 뗄 법도 한데 꽉 잡은 채로 놓아주지를 않는다. 붙어 있는 시간만큼 점점 모여드는 주변의 시선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뭐 문제 있어?"

"아니. 그냥...."

손을 떼어내며 자연스럽게 이세훈의 손바닥을 훑은 에리카가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기보다 크고 거칠어서."

"...."

그럼 대장장이 손이 다 그렇지 뭐란 말인가. 반응하기가 난감한 소감에 이세훈이 묘하게 보고 있을 때.

"다음에 봐."

짤막하게 말을 남긴 에리카가 어디론가 걸어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본 이세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야.'

에리카에 대한 생각을 잠시 뒤로 밀어낸 이세훈은 곧장 제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생도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고, 이세훈도 빈자리에 앉아 장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망치도 구해야 하나?'

여태까지는 바벨에서 준 보급형 제련 망치를 사용했지만, 앞으로 제대로 된 물건들을 만들려면 좀 더 쓸 만한 망치가 필요하다.

회귀 전에 마지막까지 썼던 사부의 망치가 가장 손에 익숙하긴 했지만 지금은 구할 수도 없었고, 그걸 다시 얻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쯧."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이세훈은 고개를 가로저어 털어내고는 다시금 망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떤 망치가 좋을지 머릿속에 떠오른 도면을 살피고 있을 때. 제련실의 문이 열리며 한인성 조교가 수레형 골렘과 함께 들어섰다.

"오늘은 지난 수업 동안 만든 물건들을 마무리할 거다. 완성된 물건이 교내와 외부에 납품될 예정인 건 알지?"

생도들이 동시에 대답했고 한인성이 설명을 이었다.

"물론 바로 납품하는 게 아니라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검수 과정을 거친 다음에 진행되게 될 거야. 불합격일 경우 기본예산만, 합격일 경우 판매값에 따라서 예산이 정해질 거야."

앞서 회수한 제작품들을 돌려준 한인성이 진중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만들 물건이 1학기 전체의 흐름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러니 후회가 없게끔 최선을 다해 만들어. 알겠어?"

"예!"

"그럼 지금부터... 시작!"

한인성의 호령에 생도들이 저마다 제작에 들어갔고, 이세훈 역시 자신이 앞선 수업에 만들어둔 검들을 바라보았다.

'개판이구만....'

회귀 전 기준이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봐도 개판이다.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만들어보려고 한 흔적은 보이지만, 몸이 받쳐주지 않았던 탓에 미세하게 어긋난 부분들이 많았다.

이런 아주 작은 흠집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거대한 균열이 되기 마련. 화로에 불을 지핀 이세훈은 작업복의 상의를 벗어 허리춤에 둘러맸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군.'

작업복에 걸린 방온마법이 없으면 제련실 내부의 열기 때문에 체력이 금방 떨어지지만, 영연신마법으로 홍련을 품은 지금은 오히려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 해줄 것이다.

검은색 언더셔츠만 걸친 이세훈은 달궈지는 화로를 지그시 바라보다 곧장 검신을 집어넣었다.

화르륵!

검신이 붉게 달궈지자 내부의 마력배열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형태가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헐거워지는 중간점.

그 지점에 다다른 순간 이세훈은 곧장 검신을 꺼내 모루에 얹어 단조를 시작했다.

카앙! 카앙! 카앙!

여전히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정하게 휘둘러지는 망치.

이전과 똑같아 보이면서도 더 정확해진 망치질에 조금씩 어긋나 있던 검신의 밸런스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우웅─

전에는 한 번의 망치질을 하는데 전신의 근육을 쥐어 짜내야 했다면 지금은 영연신마법의 마력회로가 움직임을 보조해 준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

그 일련의 과정에 이세훈은 회귀 후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로 '제련'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카앙! 카앙!

아직 어설프고, 조잡하며,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이세훈은 슬쩍 웃으며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드리며 모양을 잡았다.

치이익!

"후우...."

담금질까지 끝낸 이세훈은 새롭게 벼려낸 검신을 살펴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나머지는 시간상 안 되겠네....'

전에 만들어둔 검신은 총 다섯 개였지만, 지금 속도로는 전부 고쳐서 완성하기 어려웠다.

'하나라도 제대로 만드는 게 맞겠지.'

적당한 수준으로 다섯 개를 만드는 쪽이 예산이야 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되면 학과 수석이라는 자신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한 자루에 집중키로 한 이세훈은 숫돌을 놓은 다음 자세를 잡았다.

사아악─ 사아악──

마력이란 힘은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축복이자 재앙이라고 표현한다.

축복은 기존에 불가능한 방식의 변형과 수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고, 재앙은 그만큼 변수 역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지금이 좋아.'

대장장이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무구 역시 한계를 넘어 강해진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에게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아악─ 사아악──

숫돌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날이 벼려지는 검신.

그 안에 조금씩 새겨지기 시작한 예리함에 이세훈의 두 눈이 그 검날을 향해 집중되었다.

'더욱 날카롭게....'

날이란 결국 휘두를수록 무뎌질 수밖에 없지만, 검이 만들어진 첫 순간에 마력배열을 어떻게 세워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사아악─ 사아악──

단순히 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검을 만들어내듯, 이세훈의 손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주변에 들려오던 자잘한 소음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도 흐릿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이세훈의 모든 정신이 손안의 검으로 향한 순간.

쏴아아─

지긋지긋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

세계가 멸망해가는 소리.

그 적막하면서도 고요한 파도 소리에 이세훈은 이가 갈리면서도 한편으로 온몸이 편안해졌다.

이 소리가 들릴 때면 자신은 언제나 좋은 물건을 만들어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온몸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이다.

'우습구만.'

세계의 단말마를 들으며 기뻐하는 게 과연 사람으로서 괜찮은가. 그런 사소한 의문이 들었지만, 이세훈은 금방 그것을 머릿속으로 지워냈다.

지금은 그저 오랜만에 느끼는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다. 그 일념하에 이세훈의 모든 감각이 두 손의 검을 향하며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대장장이로서의 기예를 펼쳐냈다.

쏴아아─

회색이었던 검날의 껍질이 벗겨지며 드러난 새하얀 자태.

예기銳氣 백광白光.

일시적인 예리함이 아닌, 검신 그 자체에 새겨지는 빛.

백광을 머금은 날에 검신의 마력배열이 자연스럽게 그 형태를 바꿔 완벽히 자리 잡았고.

스아악─

숫돌의 겉면이 아주 얇게 잘려나갔다.

"...후우 ...후우."

그것을 본 이세훈의 움직임이 멈췄고,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돌아오며 거친 숨소리와 심장박동이 귓가에 울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전신과 바닥난 마력.

체력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지만 고작 검날을 하나 새운다고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하나는 제대로 만들 수 있었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만족감과 개운함. 그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며 손에 들린 검신을 살펴보았다.

'회귀 전에 비하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아.'

지금 몸 상태로는 이것이 최선이다. 적당히 미련을 떨쳐낸 이세훈은 검날을 가볍게 닦아낸 다음 곧장 보호대와 손잡이를 조립시켰다.

'완성.'

새하얀 예기를 뽐내는 장검.

그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했다.

[무구 '백광장검'이 완성되었습니다!]

[훌륭한 대장장이란 기본기만으로도 그 뜻을 펼쳐내는 법!

재료가 지닌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올려 새로이 날을 세운 대장장이의 기술은 일류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판정 결과 '백광장검'의 등급은 '고급'입니다]

[스킬 '백광류(C)'를 습득하셨습니다.]

'뭐, 이 정도면 그럭저럭인가.'

등급은 고급이지만, 일반 철만 사용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결과. 거기에 오색화도를 만들었을 때는 일류에 근접했다던 내용이 이제는 일류를 넘어섰다고 하지 않는가.

'아주 조금이지만 본래 기술을 끌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만족스럽게 웃은 이세훈이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았고.

"난 도대체...."

"아...."

"진짜 싫다...."

자신의 무구를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급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5화

[백광장검白光長劍]

[등급 : 고급] [품질 : 상]

새하얀 예기가 벼려진 장검.

섬세하게 연마된 검날이 마력배열과 맞물려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운 예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대장장이의 작품.

*마력을 부여할 경우 절삭력이 강화됩니다.

"으음...."

"이건...."

"쓰읍...."

눈앞에 놓인 새하얀 검날의 철검, 백광장검을 본 세 명의 제련학부 교수들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검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순히 성능으로만 따지자면 이보다 뛰어난 철검은 바벨 내에서도 널리고 널렸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인성 씨. 이게 정말 순수하게 철괴만 사용한 겁니까? 다른 재료나 스킬을 사용한 게 하나도 없고요?"

"예, 예... 맞습니다."

"확실합니까?"

"진짜 맞아?"

잘못 본 게 아니냐는 듯 재차 물어보는 교수들. 그 의심의 눈초리에 한인성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교수님들도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만한 완성도는 이상하지 않나?"

납득을 하면서도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교수들. 그 반응에 한인성은 억울함을 넘어 황당함을 느꼈다.

아무리 생도가 잘 만들었다고는 해도 조교인 자신의 눈을 의심하다니.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이해 가기도 했다.

"현역도 아니고 어떻게 신입생이 이런 걸 만들 수가 있지?"

"현역? 그놈들 중에 10분의 1이라도 이만한 걸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구만"

"이렇게 기본기에 정통한 검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이야 정말...."

그동안 수많은 생도의 검을 평가해 온 교수들조차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은 물건.

그것이 바로 눈앞의 철검, 이세훈의 제출품인 것이다.

"형님. 이 정도면 뭐, 고민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최고가로 크게 한 번 때려 버리죠."

키가 작고 몸통이 굵은 중년의 사내, 리스 교수의 제안에 김인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값은 확실하게 측정해야 하네. 잘못하면 우리가 만들어낸 천재란 이미지가 생길 수도 있으니."

"형님도 참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일반 철괴에 기본기만으로 고급 등급을 만들어냈는데 그런 취급을 받겠습니까?"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하지만 소문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법이다. 신중해야 해."

만약에라도 자신들 때문에 이세훈의 미래에 영향이 간다면 그만큼 미안한 일이 없다.

오해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김인철이 적절한 금액을 고민하던 그때.

"이게 학과 수석이 만든 검입니까?"

미하엘을 필두로 열 명의 교수들이 공방에 들어섰다.

그 등장에 공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김인철을 필두로 한 순수제련학파. 그리고 미하엘 바르무트를 필두로 한 최신제련학파.

두 파벌이 만들어내는 무거운 분위기에 한인성이 바짝 긴장하며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훌륭하군요. 역시 학과 수석이라고 해야 할지... 참 기대가 큽니다."

담담하게 웃으며 이세훈의 검을 칭찬하는 미하엘. 그 모습이 조금 의외였지만, 김인철 파벌의 교수들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사람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뒤통수를 치는 것이 미하엘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번 검수는 저희가 맡기로 했을 텐데요."

"말씀을 뭐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저는 그저 학과 수석이 만들어낸 검을 보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시면 되겠군요."

그걸로 끝이라는 듯 눈길도 주지 않는 김인철. 그 모습에 미하엘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벼랑 끝까지 몰렸던 주제에 기회 한 번 잡았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군.'

마음과 같아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쳐내고 싶었지만, 이러나저러나 아직까지는 지도교수이며 루트비히 학원장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거기에 이세훈이라는 괴물 같은 녀석이 밑에 붙어버렸으니 여태처럼 쉽게 내보낼 순 없으리라.

'이런 상황일수록 신중해야 한다.'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미하엘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만한 검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기회를 활용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심사로 바쁘니 짧게 말씀해 주시지요."

"동급생들과 겨루는 건 무의미한 듯하니 다음 주에 있을 2학년들의 정기경매에 같이 편성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침 '철검'이라는 주제도 딱 겹치고 말입니다."

"뭐? 그걸 말이라고...."

미하엘의 제안에 리스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세훈이 만들어낸 백광장검이 분명 뛰어나긴 하지만, 곧 열릴 2학년의 정기경매에 참여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2학년들이 출품하는 물건들은 각종 스킬과 가공품을 사용해 능력을 끌어올렸기에 조건 자체가 불공평했기 때문이다.

"학과 수석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만."

"2학년은 겨울방학부터 준비한 제출품 아닙니까! 거기에 끼워 넣으라는 게 말이...."

"그거 괜찮군요."

김인철의 담담한 수락에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럼 이세훈 생도는 2학년들처럼 경매의 입찰가를 기준으로 예산을 측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형님 그게...."

"시끄럽네."

리스의 말을 가로막은 김인철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미하엘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의견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가시지요."

다시 눈길을 돌리고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김인철.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습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하엘은 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스는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김인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저놈이 경매에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거기에 대뜸 물건을 보내주시는 겁니까!"

"학과의 얼굴인 학과 수석인데 설마 그러겠느냐."

"아니. 지금 농담을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김인철의 태연한 대답에 리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미하엘은 자신의 실권을 위해 학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 정도는 예삿일로 여겼다.

실제로 그 수작질에 경질된 교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제련학부가 지금처럼 위상이 떨어진 것도 100%는 아니어도 미하엘, 정확히는 바르무트 일파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대로면 진짜 학부가 녀석들 손에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다른 두 명의 교수들도 리스의 의견에 동조하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세 사람의 반응에 김인철이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쯧쯧...."

이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백광장검을 가리켰다.

"봐라."

"예?"

"보고도 느끼는 게 없느냐?"

김인철의 이야기에 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입니까?"

잘 만들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과는 관계없지 않은가. 다른 교수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김인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두고 보거라."

그리고 새하얗게 빛나는 검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 * *

토요일 아침.

바벨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찾아온 주말에 신입생들은 저마다 한껏 꾸미며 거리로 나섰고, 그런 신입생들을 향후 자신들의 서클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학생들이 덩달아 나섰다.

행사가 열릴 때를 제외하고는 바벨 내부가 가장 북적거리는 시기. 어떻게 보면 신입생들이 입학하기 전 꿈꾸던 풍경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여긴가...."

이세훈은 홀로 인챈트학부 본관에 있는 강의실 앞에 서 있었다.

[고대 인챈트학]

레아에게 소개받은 인챈트학부의 부전공 수업. 그 강의실에 도착한 이세훈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 들어와!"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에 이세훈이 문을 열자 온갖 잡동사니들로 꽉 들어차 있는 강의실의 풍경이 드러났다.

"...개판이네."

장식장과 책상. 그리고 바닥을 비롯해 빈 공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내부.

강의실이라기보다는 창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지저분한 광경에 이세훈이 떨떠름하게 보고 있을 때.

푸화악!

"고대 인챈트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구 옆 잡동사니 속에 숨어 있던 레아가 요란스럽게 튀어나오며 맞이해 주었다.

"...."

온몸에 정체 모를 천과 부적.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레아. 그 엉망인 모습에 이세훈은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금 무안해질 만큼 냉담한 반응이었지만.

"이야. 좋은데?"

레아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그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워진 눈. 아주 좋아."

"...뭐가 좋다는 거야?"

"이런 상황에 흥분하는 타입은 인챈트랑 안 어울리거든. 나처럼 냉철하고 이성적인 쪽이 더 좋다고나 할까?"

몸에 붙은 종이들을 떼어내며 레아가 씩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넌 훌륭해. 정신적인 잠재력은 나와 대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칭찬인지 욕인지 잘 구분이 안 가는 이야기였지만, 어련히 좋은 말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인 이세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강의실은 원래 이래?"

"아니,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닌데...."

강의실을 슬쩍 둘러보던 레아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보여줄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이것저것 꺼내다 보니 이렇게 됐네."

"참... 대단하구만."

"그렇지? 후배를 위해서 이 정도까지 하는 선배는 흔치 않다고."

알면서 저러는 건지 몰라서 저러는 건지 뻔뻔하게 대답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교수님은?"

"아. 오늘 일이 있으셔서 자리 비우셨어. 신청 건은 나한테 맡기고 가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뭐 시험 같은 거라도 보나?"

"그 정돈 아니고 간단한 면접 정도? 잠시만 기다려봐."

잡동사니 사이를 요령 좋게 지나간 레아가 화려한 장식이 달린 커다란 상자의 뒤로 가더니 뚜껑에 박힌 붉은 보석을 눌렀다.

슈와아악!

그러자 강의실 내부에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이 순식간에 상자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고 잠시 후 장식장에 있는 물건들을 제외한 모든 잡동사니가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그 광경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인챈트 된 물건을 자유자재로 수납하는 건가?"

"오. 알아봤어? 처음 봤는데 그걸 알아볼 정도면 역시 재능이...."

"근데 그것만으로는 저만한 성능이 안 나올 것 같은데... 아, 분열이구만."

"...어?"

당황한 레아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이세훈은 여전히 상자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물건이 보관되어 있을 때를 완전한 상태로 가정해서 복구하는 개념으로 흡수하는 거네. 그리고 물건끼리 합쳐지지 않도록 인챈트 안에 고립시키는 술식도 추가한 거고. 맞지?"

"아, 응. 그럴 거야...."

"생각보다 수준이 높은데. 설마 오자마자 이만한 물건을 볼 줄이야."

흥미롭게 상자를 살펴보는 이세훈의 모습에 레아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며칠 사이에 흥미가 떨어졌을까 봐 재능이 있든 없든 잔뜩 추켜세워서 부전공을 듣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정보창을 본 것도 아니고, 수납되는 과정만 보고도 저걸 다 알아낼 수가 있나?'

인챈트야 마력에 민감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적용된 술식까지 파악하는 것은 단순히 감이 좋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인챈트라는 분야에 박식하거나 그만한 수준으로 센스가 있다는 것. 신입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진짜 좋은데....'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억누른 레아는 깔끔하게 정리된 자리를 가리켰다.

"구경은 좀 있다 느긋하게 하고 우선 면접부터 끝내자."

"아. 그래."

이세훈이 자리에 앉자 레아가 맞은편에 앉아 허리를 쭉 펴며 반듯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껏 분위기를 잡은 채 물었다.

"이세훈 생도."

"...예."

"인챈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죠?"

성향에 따라 갈리는 질문.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기에 이세훈은 자신의 생각대로 즉각 답했다.

"조화로움이겠죠."

아무리 인챈트를 잘한다고 해도 바탕이 되는 물건이 별로라면 힘이 떨어지기 마련.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이세훈의 생각이었다.

"음. 그렇군요."

이세훈의 대답에 레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피식 웃으며 박수쳤다.

"좋아. 면접 합격! 앞으로 잘 부탁해 후배님!"

"참 성의없구만...."

"그만큼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는 거지. 그보다."

의자에 바짝 붙어 앉은 레아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면접도 끝났으니 이제 좀 더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속이 빤히 보이는 그 물음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묵주환의 인챈트 말이지?"

"그것도 좋고, 네가 만든 다른 게 있다면 그것도 좋아. 내 생각에 네가 만든 물건이라면 뭐든지 좋을 느낌이야."

"인챈트라...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이세훈의 긍정적인 대답에 레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지금 당장 내 공방으로...!"

"단."

레아의 말을 잘라낸 이세훈이 무심히 바라보았다.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시켜준다면 말이야."

미래의 레아 클로델을 생각한다면 실력이야 확실하겠지만, 지금은 자신도 몰랐던 슬럼프에 빠진 시기.

당분간 계속 사용해야 하는 묵주환을 맡기려면 좀 더 까다롭게 볼 필요성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슬럼프에 빠졌는지 확인도 해봐야 하고.'

여러 이유가 담긴 이세훈의 제안에 레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보고 싶은데?"

"일단 기본기가 좋겠지."

"흠... 좋아."

레아가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본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가?"

"기본기 보여달라며."

뒤돌아본 레아가 씩 웃었다.

"내 일터로 가자고."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6화

레아를 따라 아칼쿠프의 번화가에 방문한 이세훈은 눈앞의 풍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많네."

어딜 둘러봐도 식당의 간판밖에 보이지 않는 거리. 그리고 점심시간에 맞춰 거리를 꽉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파.

자칫 잘못하면 휩쓸릴 것 같은 그 엄청난 수에 이세훈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원래 이렇게 많냐?"

"입학 첫 주라 더 많은 것도 있는데 평소에도 크게 다르진 않아. 아칼쿠프 쪽에 맛집이 많거든."

"그런가...."

이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리면 조금 혼잡스러울 만도 하지만, 실제로는 강물이 흐르듯 원만하게 사람들이 움직인다.

생도들이나 교직원들이나 다 기본은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 부딪치지 않게 자연스레 피하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광경은 또 바벨에서밖에 못 보겠구만.'

물결과도 같은 인파의 모습에 이세훈이 가만히 보고 있을 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레아가 뒤돌아보았다.

"뭐 해. 꾸물대지 말고 빨리 와."

"알았어."

한창 사람들을 피해 걸음을 옮기던 레아는 이윽고 번화가의 중심에 위치한 한 점포 앞에 멈춰섰다.

[아칼쿠프 철물점]

깔끔하게 정리된 주변의 점포와 달리 온갖 조리도구들이 입구 앞에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철물점.

그 낡아 보이는 모습에 이세훈이 레아를 바라보았다.

"여긴?"

"말했잖아. 일터로 간다고."

더 설명이 필요하냐는 듯 안으로 들어서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도 주변을 살피며 뒤따라 들어갔다.

주변이 식당가라 그런지 안쪽에도 대부분 주방과 관련된 도구들이 잔뜩 걸려 있었는데 그 물건들을 살펴보던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꽤 잘 만들었는데?'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습만 보면 잡동사니처럼 보이지만, 기본기가 숙달된 장인이 만들어낸 흔적이 엿보인다.

이 정도면 제련학부에서 교수직도 충분히 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세훈이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

"할머니! 저 왔어요!"

레아가 우렁찬 목소리로 가게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촤르륵─

커튼처럼 줄줄이 걸려 있던 국자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노인.

젓가락을 비녀 대신 꽂고 헐렁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눈매에 아래로 삐뚜룸하게 내려간 입꼬리가 상당히 사나운 느낌을 주었다.

"귀 안 먹었다."

"안 먹었는데 이렇게 안 부르면 안 나오시잖아요."

"시끄러워."

레아를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대답한 노인은 곧장 시선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뭐냐. 남자친구냐?"

"에이. 그럴 리가요. 올해 들어온 후배예요. 후배."

"흐음. 신입생인가."

레아의 대답에 노인이 노골적으로 이세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혀를 찼다.

"쯧쯧. 바벨도 다 죽었군. 이런 물렁한 녀석을 데리고 들어오고."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그 평가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실제로 물렁하긴 하지.'

신체 능력만 따지자면 올해 신입생 중에서도 최하위권.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서 합격했던 거지 회귀했다고 기억상실이나 그런 거에 걸렸다면 바벨에 입학도 못 했으리라.

이세훈이 불쾌해하기는커녕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고, 그 모습에 레아가 씩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겠어요?"

"뭐가?"

"애가 이래 봬도 올해 보르시파 학과 수석이거든요. 그것도 제련학부."

"...이놈이?"

정말로 예상 못 했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노인. 그 반응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제련학부 1학년인 이세훈이라고 합니다."

"...헬레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

이세훈의 모습에 노인, 헬레나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빨리 일이나 하고 가라. 이번 주는 신입생들 때문에 많이 쌓였으니까."

"네네. 이쪽으로 와."

레아가 이세훈을 데리고 후라이팬으로 가려져 있던 통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조금 낡기는 했지만 화로부터 시작해 필요한 도구들은 다 갖춰져 있었고 상태 역시 나쁘지 않다.

거기에 하나같이 제대로 관리를 해온 '세월'이 녹아들어 있었는데 실력 있는 대장장이의 공방에서만 볼 수 있는 흔적들이었다.

'저 노인네. 생각보다도 더 실력이 좋은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 철물점 같은 걸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수준.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으아...."

레아가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주방 도구들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심하긴 심하네...."

질색을 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도 곁으로 다가가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수리하려고 가져온 것들인가.'

겉을 보아하니 인챈트가 새겨졌던 흔적이 보였는데 오래 사용하면서 모두 벗겨진 것으로 보였다.

그것을 본 이세훈은 레아가 이야기한 일터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여기에 인챈트하는 게 일인가 보지?"

"정답! 돈도 벌 수 있고 재룟값 걱정 없이 인챈트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그럭저럭 괜찮다고."

인챈트가 다 벗겨진 후라이팬을 보여주며 씩 웃는 레아.

이런 조리도구들을 인챈트해 봐야 얼마 받지도 못할 터. 아마 인챈트를 실컷 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자자. 내 인챈트가 보고 싶다고 했지? 이리와 봐."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 레아는 곧장 옆에 놓여 있는 '인챈트 팔레트'를 자신의 옆으로 끌고 왔다.

인챈트 팔레트 안에는 각종 마석을 갈아서 만들어낸 색색의 가루들이 채워져 있었는데 총 16가지로 그 종류가 상당했다.

'기본이 8색인 걸로 아는데... 꽤 다채롭게 다루는군.'

이세훈이 흥미롭게 살피고 있을 때. 레아가 소매 안쪽에서 자신의 인챈트 붓을 꺼내 들었다.

"시작한다."

우웅

붓의 끝에 레아의 마력이 깃들어 푸른색으로 빛났고, 붉은색 마석 가루에 담그자 붉은빛으로 물들며 일렁였다.

코팅을 끝낸 레아는 손에 들린 후라이팬을 뒤집어 바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붓을 움직였다.

스스슥─

벗겨진 인챈트의 술식 위로 레아의 붓이 시원시원하게 지나갔고,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던 후라이팬의 바닥에 다시금 붉은색 기운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살아 숨쉬기 시작한 인챈트. 그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감탄했다.

'손상된 인챈트를 이렇게 간단하게 살리다니. 꽤 하는데....'

한 번 손상된 인챈트를 다시 살리는 것은 옷으로 따지자면 찢어진 옷에 헝겊을 덧대서 기우는 것과 비슷했다.

헝겊의 색이 달라도 눈에 띄고, 바느질이 어설퍼도 눈에 띈다.

심지어 어느 부위냐에 따라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보니 보통은 전부 벗겨내고 새로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키잉!

하지만 레아는 어느 부위가 손상되었든 간에 흠잡을 데 없이 인챈트를 살려냈고 하나같이 새로 새겨넣은 것처럼 완벽하게 복원시켰다.

그 복원 과정을 살펴본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한 기본기. 그 덕분에 슬럼프의 원인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관찰할 필요도 없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뭐 금방 끝나겠는데.'

어떻게 해결하면 될지 얼추 방법이 떠오른 이세훈이 레아가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막 말을 걸려던 찰나.

퉁!

인챈트를 끝낸 레아가 후라이팬을 옆에 던져놓고 새 냄비를 집어 들었다.

"...."

두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쉴 새 없이 붓을 움직이며 인챈트하는 레아.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그 모습에 이세훈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씩 웃었다.

'좋네.'

저렇게 몰두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다.

슬럼프로 헤매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토대를 쌓아가고 있는 인챈터계의 천재. 끝날 때까지 놔두기로 한 이세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공방을 둘러보았다.

'진짜 어지간한 도구들은 다 있네. 차라리 여길 잠깐 빌려서 새로운 망치를 만드는 것도... 음?'

구석구석을 주변을 살펴보던 이세훈은 한쪽에 줄지어 놓여 있는 돌들을 발견하고 두 눈을 번뜩였다.

가지각색의 색을 띠고 있는 직사각형의 돌. 전부 숫돌이라는 것을 알아본 이세훈은 곧장 그 앞으로 걸어갔다.

'전부 특제네.'

단순히 날을 세울 뿐만 아니라 마력배열과 공명시켜 특수한 효과를 가미하는 데 쓰이는 특제 숫돌.

각 숫돌마다 정해진 효과가 있었기에 정확한 사용법을 모르면 검날을 망가트리는 까다로운 물건이었는데 이세훈은 대강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꽤 좋은 날인데....'

숫돌의 겉을 쓰다듬는 것만으로 완성되었을 때의 예기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안 그래도 어제 오랜만에 '백광'을 새겨넣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제대로 된 도구들을 보고 있으니 날을 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졌다.

어떻게 할지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써봐라."

통로 쪽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 수 있다면 말이야."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삐딱하게 바라보는 헬레나. 딱 봐도 실력을 한 번 보겠다는 듯한 그 눈빛에 이세훈이 숫돌을 가리켰다.

"진짜 써도 됩니까?"

"그래. 물건은... 저쪽에 쌓인 것 중에 아무거나 해봐라."

공방의 한쪽에 쌓여 있는 식칼들. 그 종류도 다양했는데 죄다 날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직접 갈 물건들이었나.'

대신 부려먹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저만한 특제 숫돌을 사용해 볼 기회라면 오히려 남는 장사다.

"알겠습니다."

헬레나의 제안을 수락한 이세훈은 숫돌을 고르기보다 먼저 쌓여 있는 식칼들을 살펴보았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된 물건으로 해야지.'

식칼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던 이세훈은 투박하게 생긴 식칼을 집어 들었다.

쌓여 있는 물건들 중에서도 가장 볼품없어 보이던 평범한 식칼. 하지만 그것을 본 헬레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로 하려고?"

"예. 흔적을 보니 꽤 실력이 좋은 사람 같아서요. 갈아주는 맛이 있을 것 같네요."

같은 칼을 쓰더라도 그것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흔적이 남기 마련. 그리고 이세훈이 보기에 이 식칼을 사용한 자는 검술에 상당한 조예를 가진 자였다.

'칼날이 모두 고르게 닳아 있고 축도 비틀리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 절반만 되어도 잘 안 썰린다고 가져왔겠지만, 이 식칼의 주인은 자신의 기술로 한계까지 사용한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검을 다루는 데 있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것이 분명하리라.

'보자. 숫돌은... 이거구만.'

놓여 있는 숫돌 중에서도 마력 입자가 가장 고르게 압축된 물건. 이만한 기술자라면 날을 한계까지 세워줘도 적절하게 다룰 수 있으리라.

촤악─

숫돌에 마석 가루를 희석시킨 물을 뿌린 이세훈은 곧장 자세를 잡고 식칼의 날을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사아악─ 사아악──

칼날이 숫돌을 저미듯 움직일 때마다 식칼의 예기가 다시금 새하얗게 살아난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이세훈의 모습에 헬레나가 삐딱하게 서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자신이 보고 있는 녀석이 정녕 올해 입학한 신입생이 맞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헬레나가 손에 들린 식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공방 안에 붓 소리와 칼 가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소리가 잦아 들어갈 때.

"끝!!!"

마지막 국자에 인챈트를 끝낸 레아가 여태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고 소리쳤다.

"어. 뭐야. 할머니 언제 왔어요?"

"...몰라."

"뭐야. 왜 이렇게 신경질... 아하."

칼날을 살펴보고 있는 이세훈을 발견한 레아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리고 씩 웃었다.

"우리 후배 흠집 한 번 잡아볼라다가 된통 당하셨나 보네. 그쵸?"

"시끄러워."

따악!

"끄엑!"

깐죽거리는 레아의 이마를 쇠젓가락으로 후려친 헬레나가 칼갈이를 마친 이세훈에게 다가갔다.

"다 끝낸 거냐?"

"음...."

헬레나의 물음에 이세훈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검날을 바라보았다.

검날의 위로 굽이치듯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푸른빛의 예기. 주변의 마력이 검의 마력배열에 자연스레 이끌리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특제 숫돌을 통해 날이 제대로 갈렸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지만 이세훈은 눈매를 찌푸렸다.

'완전하진 않아.'

본래 이 숫돌로 만들어졌어야 할 예기와 비교한다면 겉핥기로 따라 한 수준. 그 어중간한 완성도에 이세훈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력만 좀 더 받쳐줬어도... 쯧.'

속으로 혀를 찬 이세훈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헬레나에게 순순히 대답했다.

"지금으로써는 이게 끝입니다."

"...그래. 그럼 둘 다 이만 가봐라."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쇠젓가락으로 통로를 가리키는 헬레나. 그 무심한 반응에 이세훈도 미련 없이 식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신경질이야... 가자!"

"그래그래."

이마를 쓰다듬은 레아가 이세훈의 팔을 잡아 냉큼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다음에도 이만큼 할 수 있나?"

식칼을 내려다보며 묻는 헬레나. 그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씩 웃었다.

"다음에는 더 잘 갈게 될 겁니다."

"...일손이 부족하면 연락하마. 관심이 있으면 와라."

무뚝뚝하게 이야기하는 헬레나의 뒷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고, 공방에 남은 헬레나는 홀린듯이 이세훈이 간 식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묘한 침묵이 공방을 가득 내려앉던 그때.

"누님! 제련 중이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공방으로 들어섰다.

"뭐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불러도 대답이 없던 거요?!"

"...시끄럽다."

"첨부터 대답했으면 시끄러울 일도 없지! 그보다 식칼은? 지금 주문이 밀려있단 말이요!"

연신 재촉하는 사내의 외침에 헬레나가 눈매를 찌푸리며 흘겨보았다.

"도대체 그 식당은 언제 때려치울 거냐? 검술학부 지도교수라는 놈이...."

"남 취미생활 가지고 뭐라 하지 마쇼. 그보다 식칼은... 아 거기있구만!"

자신의 식칼을 발견한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집어 들더니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뭐야. 누님 어제 또 술 퍼마신 거요? 날 상태가 조금 그런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날이 평소의 7할 정도밖에 안 되는구만. 단골한테 이러면 섭섭해."

심통 난 듯한 사내의 이야기에 헬레나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갈아 놓은 거 아니라고."

"뭐? 그럼 이걸 누가 갈았어? 옛날에 친하게 지내던 조교놈들 불러다가 시킨 거요?"

"신입생."

"...뭐?"

당황한 사내, 검술학부의 지도교수 카사르의 물음에 헬레나가 묘한 열기가 깃든 눈으로 대답했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이 갈았다고."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7화

"전 교수라고?"

"응. 5년 전에 정리하고 아칼쿠프에 철물점 차렸다고 하시더라고. 신기하지?"

공원을 걸으며 레아의 이야기를 듣던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련학부의 교수까지 하던 양반이 그런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다니?

실력이 없으면 모를까 세계 100대 장인인 김인철과도 견줄 수 있어 보였기에 더더욱 의아한 행적이었다.

"뭔가 사연이라도 있어?"

"글세... 나는 딱히 들은 게 없어서 모르겠네. 뭐 좀 물어보면 맨날 시끄럽다고만 해서."

"흐음...."

"아. 근데 뭐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야. 요 10년 사이에 제련학부에서 교수님들이 꽤 나가셨거든."

"...그래?"

회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정보. 그 내용에 이세훈이 살짝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10년 전부터 교수들이 나갔다....'

그냥 개개인의 사유로 나간 걸 수도 있겠지만, 제련학부가 바벨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약소 부서가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한번 알아봐야겠는데.'

제련학부가 커질수록 자신을 향한 지원도 늘어날 테니 도움이 될 만한 부분들은 어느 정도 알아보는 편이 좋다.

이세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레아가 어깨를 툭툭 쳤다.

"그보다 내 인챈트 어땠어?"

"아. 괜찮았어. 기본기는 확실히 흠잡을 곳이 없던데. 다시 봤어."

"...크흠. 뭘 그 정도 가지고."

이 정도로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멋쩍게 웃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도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근데 속이 너무 좁아."

"...뭐?"

딱딱하게 굳는 레아의 얼굴.

정곡을 찔린 것처럼도 보였고, 자존심이 긁힌 것처럼도 보였다.

자신이 정확히 파고들었음을 확신한 이세훈은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아까 철물점에서 인챈트했을 때.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데도 안 했었지?

"그... 그렇긴 한데... 아니, 도대체...."

이세훈의 지적에 레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벗겨진 인챈트를 확인하고 붓을 움직이기 전에 아주 잠시 망설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차이를 알아보다니?

이제는 인챈트의 재능이 있다든가 그런 걸로 설명이 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아는데도 못하는 건 달라. 특히 그 이유가 두려워서라면 뭐, 자질이 없는 거나 다름없지."

"으...."

"인챈트나 제련이나 제작자의 상상력은 매우 중요해. 그 자체가 무기이자 재능인데 그걸 억누른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

"큭...."

무심한 이세훈의 평가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레아의 몸이 비수에라도 찔린 것처럼 흠칫거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누군 몰라서 그러나....'

자신의 문제점은 진작 파악했고,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 1년이 넘도록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온갖 방법을 강구했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공방의 금고에 처박혀 있는 그 물건. 자신을 슬럼프에 빠뜨린 그 사건의 여파가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빠드득─

어린 후배에게 지적받았다는 수치심. 그리고 자신을 향한 자괴감. 그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가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빛냈다.

'과연... 이런 녀석이었구만.'

슬럼프를 숨기려는 행동들 때문에 레아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보이지 않았는데, 이걸로 완벽하게 갈피가 잡혔다.

원하던 목적을 이룬 이세훈은 채찍질을 멈추고 준비했던 당근을 꺼냈다.

"이거 봐봐."

이세훈의 부름에 레아가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 쥐어진 짧은 비수. 검은색 바탕에 간단한 인챈트가 새겨져 있었는데 묵주환에 비해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왜?"

"뒤에 일이 있어서 길게는 못 보여주니까 집중해서 봐."

"...?"

영문을 모르겠다는 레아의 반응에 이세훈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회귀 전 인챈트에 대해서는 제련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편식하듯이 골라 배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구조는 이해하고 있다.

'처음부터 쌓아 올라가 만들어내는 제련과 달리 인챈트는 완성된 그림을 덧씌우는 감각.'

수면 아래에 돌을 넣으라 하면 제련은 돌을 만들어내 집어넣는 것이고, 인챈트는 수면 위에다 잠겨 있는 돌의 형상을 새겨 넣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챈트의 본질이란 모방과 재현. 실체가 없지만 보는 이는 구분해낼 수 없는, 흔히 말하는 '꿈'과 같은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기본기로만 보여주는 건 힘들지만... 때마침 적당한 게 있지.'

검은 비수에 새겨진 인챈트를 가볍게 훑어본 이세훈은 손으로 덮은 다음 속성마력인 홍련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손안에서 타오르듯 피어나는 진홍색의 마력.

방호술식까지 새겨져 있던 인챈트를 단숨에 지워 버린 이세훈은 이어서 이번에 새롭게 익힌 스킬을 사용했다.

'백광류.'

스으으─

검은 비수의 위로 피어나는 새하얀 예기.

마력을 통해 불완전하게 재현된 백광의 모습에 레아가 놀란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뭐 이런 방식이 다 있어...?'

보통 무구를 강화하는 스킬이라면 겉을 둘러서 강화시키는 구조가 대부분. 하지만 이세훈의 백광류는 무구의 안쪽, 그것도 심부가 아니라 겉에 걸친 '껍질'만 강화시켰다.

어째서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르는 걸까. 그 구조에 레아가 의문을 품던 그때.

"한 겹으로 안 된다면, 층을 나눠."

백광류의 위로 이세훈의 홍련이 새롭게 스며들었다.

"위에서 볼 때는 한 겹으로 보이게. 하지만 그 내부는 확실하게 구분하는 거지."

백광류의 예기. 그리고 홍련이 지닌 '흐름'의 성질. 그 두 가지가 뒤섞이자 새하얗게 빛나던 예기가 붉게 물들며 점차 흐르기 시작한다.

두 가지를 뒤섞어 비수에 코팅한 이세훈은 이어서 레아에게 잘 보이도록 옆쪽의 화단에 내던졌다.

푸욱!

꽃잎을 꿰뚫고 지면에 박힌 검은 비수.

그것만 보자면 평범히 마력을 실어서 던진 것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서걱─

비수에 닿지도 않은 아래의 꽃이 깔끔하게 양단되며 범상치 않은 기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

검신에 맺힌 예기가 홍련이 지닌 흐름의 성질에 의해 아래로 흘러내리며 꽃을 양단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칼날로 변한 상황. 따지고 들면 다르지만, 인챈트라고도 볼 수 있는 그 기법에 레아의 얼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되려나....'

회귀 전에 알고 있던 지식과 가진 바 기술을 활용한 임기응변. 제대로 된 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레아의 눈에는 다를 것이다.

오랜 시간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고민하며 뭉쳐 있던 상황. 누군가는 슬럼프가 정체라고 말하지만 이세훈은 천재들에 한해서는 다르게 생각했다.

'막힌 게 아니라 모으는 거지.'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 천재라는 놈들은 망설이는 와중에도 다음으로 나아갈 방도를 무의식중에 마련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막혀 있던 것이 아주 사소한 계기로 뚫린다면.

"후배!!!"

그야말로 무너진 댐처럼 영감이 쏟아지는 것이다.

"나, 나, 저거 빌려줘! 제대로 만들어서 돌려줄 테니까 제발제발제발!!!"

탁한 초록색 눈이 빛이라도 토해낼 기세로 번쩍였고, 흥분으로 온몸이 잘게 떨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깨를 붙잡고 화단에 꽂힌 비수를 가리키며 애원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애는 좀 심하네.'

슬럼프가 깨지는 순간이니 당연히 흥분할 수도 있다곤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안 준다고 하면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은 마침 잘됐다 싶어 챙겨 다니던 비수 9개를 같이 꺼냈다.

"이것도 들고 가서 같이...."

"고마워! 사랑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네준 비수와 화단에 박힌 비수를 챙기고는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레아.

그 정신 사나운 뒷모습에 이세훈은 잠깐 맞닿았던 손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젊구만.'

[대상 '레아 클로델'에게서 인연을 추출해냅니다.]

[제작자 '이세훈'과의 인연은 Lv.1입니다.]

* * *

레아를 돌려보낸 뒤. 이세훈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대신 아칼쿠프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늘은 따로 찾아가 볼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많네....'

근처로 왔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한다. 신입생부터 재학생들까지 다양하게 뒤섞인 인파.

지금 바벨의 모든 관심사가 이곳에 향해 있음을 알려주는 풍경에 이세훈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학관인가.'

고리타분한 이름과 달리 현대식으로 지어진 6층 건물.

아칼쿠프를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로 내부나 외부나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당장 오늘 인파만 봐도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야기로만 듣던 것보다도 훨씬 큰 규모에 이세훈이 흥미롭게 보고 있을 때.

"어?"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너도 보러온 거야?"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오는 금발의 청년.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너도 보러 왔냐?"

"아. 나는 친구들이 가자고 해서."

제이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네 명 정도 되는 생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입학 전부터 친하게 지낸 녀석들이 분명하리라.

"혼자 왔어?"

"뭐, 그렇지."

"음... 그럼 우리랑 같이 볼래? 너라면 애들도 반겨줄 거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권유하는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이놈이 나한테 느끼는 건 승부욕일 텐데....'

속으로는 이를 박박 갈면서도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다니. 정말 순해 빠진 녀석이거나 아니면 음흉한 녀석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별다른 흑심이 보이지 않는 제이크의 표정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어. 혼자서 편안하게 보고 싶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몇 가지 확인해봐야 할 것들도 있다. 이세훈의 대답에 제이크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손을 저으며 일행에게로 돌아가는 제이크를 바라보던 이세훈이 고개를 돌렸고.

"...."

무학관의 입구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에리카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제이크도 그렇듯 다른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남쪽 입구로 걸음을 옮겼고.

"...."

언제 이동했는지 입구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에리카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너 뭐 하냐?"

"기다리고 있었어."

이세훈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하는 에리카.

여기까지 오면 정말 컨셉이 아닐까 싶지만, 진짜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 그냥 사람이 별종인 모양이다.

회귀 전에도 특이한 인간들은 질리도록 봐왔기에 이세훈은 그러려니 하며 내려다보았다.

"가라고 하면 갈 거냐?"

"갈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봐도 되니까."

"...그렇겠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 걸 뭐라 할 수도 없고, 사실 옆에 누가 있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결론을 내린 이세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턱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자."

"응."

무학관의 입구로 들어서자 관리위원들이 생도증이나 티켓 같은 것을 확인했고, 이후 통로 끝에 다다르자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음식과 음료를 팔고 있는 가게들. 거대한 스포츠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에 이세훈은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살폈다.

'진짜 쓸데없이 화려하단 말이지....'

외부에서 영웅들을 초청할 때도 쓴다고는 하지만 평상시에는 생도들밖에 안 쓸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거창하게 지어둔 것일까.

종잡을 수 없는 바벨의 스케일에 이세훈이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와아아아!!!

안쪽의 경기장에서 우렁찬 환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예정된 경기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은 이세훈은 매점가를 벗어나 곧장 객석의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에서부터 쏟아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관람석에는 어림잡아도 수천 명의 생도가 모여 있었고, 그 중심의 경기장에는 두 명의 생도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벨에 입학한 신입생 여러분들! 우리 무학관의 명물 랭킹전에 찾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스피커로부터 활기찬 목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허공에 4방향으로 이뤄진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머리카락을 좌우로 동그랗게 묶어 만두 머리를 한 동글동글한 인상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로 말하자면 오늘 열릴 이벤트전 중계를 맡은 무투학부의 '최연소' 교수! 란 팡이라고 합니다. 모두 잘 부탁해요!

양손을 흔들며 외치는 여성, 란 팡의 인사에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바벨에는 생도들의 실력향상 도모하기 위한 친선전이란 명목으로 만들어진 여러 행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 바로 이 무학관에서 열리는 '랭킹전'이었다.

바벨에 있는 모든 생도가 무학을 겨루고 순위를 매기는 심플한 행사.

단순하지만 누구나 피가 끓을 수밖에 없었고, 무력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외부에서도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매년 랭킹에 따라 보상도 챙겨주니까 안 할 이유가 없지.'

이길 자신만 있다면 명성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손해 볼 것이 없는 행사. 그것이 바로 랭킹전이었다.

-우선 오늘의 선수부터 소개해야겠죠. 우선은 이쪽!

란 팡의 외침에 왼쪽에 서 있던 생도, 가느다란 세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금발의 여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내리꽂혔다.

-아칼쿠프의 4학년 학과 수석이자 S급 영웅을 빠짐없이 배출해내고 있는 마이어스 가문의 차기 가주! 그리고 무학관의 랭킹 1위를 3년째 제패하며 신기록을 갱신 중인 완전무결의 초인! 우리들의 챔피언!

마치 본인에게서 빛이 새어 나오듯 조명의 아래서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여인.

과하다 싶은 해설조차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화려한 모습에 모든 생도가 감탄하자 란 팡이 쐐기를 박듯이 외쳤다.

-아리아 마이어스!!!

수천 명의 생도에게 환호를 받으며 손을 흔드는 금발의 여인, 아리아의 모습에 이세훈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쯧. 생각보다도 일찍 보게 됐군....'

현 바벨에서 가장 강한 생도이자, 이미 현역 A급 영웅으로 인정받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진짜 천재.

그리고 회귀 전에는 기어코 영웅의 탑을 완등해낸 '성검사聖劍士' 아리아 마이어스.

지금껏 봐온 유망주 중에서는 가장 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세훈은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보기 싫었는데.'

언젠가 볼 사이였지만, 그래도 될 수 있다면 뒤늦게 보고 싶었다. 그만큼 이세훈에게 아리아 마이어스란 존재가 불쾌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오늘의 첫 선수!

그런 이세훈의 기분을 헤아린 것처럼 란 팡의 해설과 함께 자연스레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한다.

"...."

십자창을 아래로 가볍게 겨눈 채 정면만을 바라보는 검은 머리칼의 청년.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도 여전히 강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에 이세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칼쿠프의 창술학부 3학년 수석이자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인 염륜잔화창의 전수자. 무학관의 랭킹 10위를 자랑하는 차세대 유망주!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두 눈동자에서 마신의 앞에 섰을 때와 같은 투지가 엿보인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씩 웃었고.

-염성하!!

미래의 망나니이자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개놈들 중 한 명. 광견 염성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8화

아칼쿠프의 4학년 학과 수석인 아리아 마이어스. 그리고 창술학부 3학년 수석인 염성하.

바벨의 현 재학생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성과 무력을 지닌 두 생도의 등장에 경기장의 열기가 더욱더 후끈 달아올랐다.

-자! 대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적을 살펴볼까요?

그 분위기에 본인도 신난 것인지 란 팡이 싱글벙글 웃으며 허공에 정보창을 띄웠다.

[아리아 아이어스] - 932전 932승 0무 0패

[염성하] - 1,238전 714승 128무 396패

두 사람의 전적기록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 경기장에 모인 모든 생도가 탄성을 내뱉으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염성하의 승률도 랭킹 10위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지만, 전승을 거둬온 아리아와는 비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두 생도는 유독 서로 간의 대련이 잦았는데 공식적으로만 256전. 여기에 비공식 대련까지 합하면 무려 400전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률은....

잠시 뜸을 들인 란 팡은 탁상을 손바닥으로 힘차게 내려찍으며 외쳤다.

-아리아 마이어스의 전승!!!

400전이 넘는 승부에서 무승부조차 내주지 않은 아리아.

그 이야기를 들은 관중석의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했고, 수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내리꽂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자연스레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저 녀석이 이런 취급도 다 받는구만.'

지금의 염성하도 분명 재능으로나 실력으로나 부족함이 없지만, 이번에는 정말 상대가 나빴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 이거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그럼 잡다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잠시간의 정적이 경기장에 맴돌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리아와 염성하가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며 서로에게 겨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에서 솟아오른 황금빛과 검붉은빛의 마력들이 대기를 불태운 순간.

-시작!

란 팡의 호령과 동시에 두 사람이 격돌했다.

파아앙!!

검붉은 마력을 휘감은 염성하의 창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질러진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아리아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세검을 휘둘렀다.

황금빛의 마력으로 뒤덮인 일검. 그 움직임은 마치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지만.

카앙!

염성하의 창날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크게 튕겼다.

순식간에 크게 드러난 허점. 그 틈새를 아리아가 곧장 파고들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염성하의 마력이 움직였다.

화르르륵!

창날이 스쳐 지나간 궤적. 그곳에 흩뿌려진 마력이 일제히 폭발하듯 불꽃을 터트렸고, 그 강렬한 기세에 아리아가 살짝 제동하며 세검을 재차 휘둘렀다.

후웅!

이번에도 가벼운 일검에 불꽃이 흩어졌지만 염성하가 자세를 다잡기에는 충분했다.

회전해서 돌아온 창날이 재차 매섭게 휘둘러졌고, 얇디얇은 세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거세게 쳐낸다.

콰가가강!

경기장의 중심을 장악하는 불꽃의 창과 그 사이를 누비는 황금빛의 검.

도저히 생도의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한 수준에 멍하니 바라보던 관객석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첫 경기부터 후끈 달아오른 경기장의 열기에 이세훈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는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역시 어리긴 어리네.'

기본적인 신체 능력부터 기술까지 무엇하나 광견 시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31년 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수준 이하라는 점이었다.

'염륜잔화창의 후계자라고 하니 지원도 빵빵하게 받았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일까.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묘하게 아쉬운 염성하의 상태에 이세훈은 조금씩 변해가는 경기의 판도를 바라보았다.

'벌써 거리가 좁혀지는 건가.'

창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이점인 거리가 점차 사라져간다.

염성하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어떻게든 간격을 유지해 보려고 했지만 아리아는 가볍게 그 저항을 뚫고 차근차근 따라 잡아갔다.

'이것 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 누구보다도 염성하와 가깝게 지냈기에 이세훈은 고쳐야 할 점들이 속속들이 보였다.

염성하의 고질적인 버릇과 염륜잔화창이 지닌 단점.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불협화음 등등.

지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나 자신의 분야인 무구였다.

'공격과 방어를 능숙히 펼칠 수 있는 열십자 형태. 창대에 유연성을 가미해 지금처럼 상대가 거리를 좁혀왔을 때도 쉽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었군.'

창대에 소용돌이치는 검붉은색 마력이나 주변에 간간이 터져 나오는 파동을 보건대 저장된 마력을 사방에 흩뿌리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보였다.

완성도로만 따지자면 이세훈도 크게 나무랄 부분이 없는 그럭저럭 쓸 만한 창이었지만.

'하여간 보는 눈이 없다니까.'

광견 염성하와 어울리느냐고 하냐면 전혀 아니었다.

카앙!

창날이 다시 한번 쳐내졌고, 앞전과 같이 궤적을 따라 흩뿌려진 마력이 불꽃을 토해내려 한다.

파앙!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리아의 손날이 잔류한 마력을 베어 넘기며 거리를 단숨에 압축했다.

자세는 무너졌고 염륜잔화창이 만들어내는 불꽃의 '궤적' 역시 끊어졌다.

이미 결착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염성하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투웅!

창대를 과감하게 포기하며 자세를 다잡고 주먹을 휘두르려는 염성하. 승리에 대한 집착이 엿보이는 그야말로 악착같은 한 수였으나.

스윽─

그 몸이 움직이기도 전에 아리아의 황금빛 세검이 목에 닿았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 상황 속에서 염성하는 가만히 목에 겨눠진 세검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졌다."

"수고했어요."

짧게 이야기한 아리아가 세검을 거뒀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란 팡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대련 종료!! 승자 아리아 마이어스!!!

선언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우렁찬 함성.

같은 바벨의 생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대련에 생도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현역 영웅들이 찾아와 똑같은 대련을 펼쳤다면, 그냥 먼 미래라고 생각하며 대단하다는 반응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껏 해봐야 2~3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같은 생도들. 그 신분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이 관객석에 있던 이들의 승부욕과 향상심을 자극한 것이다.

'다들 기운차군 그래....'

누군가는 훗날 재능의 차이를 깨닫고 좌절하겠지만, 그래도 바벨인 만큼 몇 명은 저 뒤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참 신기한 장소다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이세훈은 문득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옆을 바라보았다.

"...."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심히 바라보는 에리카. 그 무미건조한 반응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었냐?"

"응. 분야가 다르니 참고할 게 그리 많지 않네."

"...그럴 거면 왜 찾아온 거야?"

이세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에리카가 담담히 대답했다.

"네가 누굴 보러왔는지 궁금해서."

"...."

처음부터 조금 이상한 녀석이었는데 어째 인연이 성립되고 나니 더욱더 이상해진 것 같다.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경기장에서 란 팡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지금부터 두 선수의 인터뷰를 진행하... 기로 하였으나 염성하 생도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생긴 관계로 아쉽지만 아리아 마이어스 생도의 인터뷰만 진행하고 다음 대련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란 팡의 안내와 함께 염성하가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졌고, 대련장 위의 모든 빛이 아리아를 향해 쏟아졌다.

마치 그녀가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듯한 광경. 실제로 오늘 열린 이벤트전의 명칭이 '아리아 마이어스의 9연전'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연달아 랭킹 9위와 싸우는 건 아무래도 힘드니까... 빈 인터뷰 시간은 생략하는 대신 제 질의응답으로 대신할까요?"

아리아의 물음에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그 사이 염성하가 대련장 아래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간다.

겉보기에는 평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 염성하를 봐온 이세훈은 그게 기분이 상했을 때의 걸음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새끼....'

여러 방면으로 미숙하던 시절이긴 한 모양이다.

피식 웃은 이세훈은 곧장 몸을 돌렸고, 그 모습에 에리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려고?"

염성하를 보러 온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일까.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대련장 아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환한 조명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듯 서 있는 아리아. 인류의 희망이라 불리던 미래의 성검사 시절에나, 아직 생도인 시절이나 그 존재감은 여전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조차 절로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카리스마. 바벨의 생도라면 동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나.

"난 저런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해."

이세훈은 꺼림칙한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재수없거든."

그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는 이세훈. 그 뒷모습을 본 에리카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동안 이세훈이 저렇게까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여유로움이 느껴졌던 이세훈이었기에 더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라버니를 보러온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 저 모습도 조금이지만 신경 쓰인다. 예정을 바꿔 그 뒤를 따라가기로 한 에리카가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그에 에리카가 천천히 연무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흥미 있는 신입생? 글쎄요...."

이쪽, 정확히는 이미 밖으로 나간 이세훈의 등을 쫓던 아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 * *

와아아!

뒤쪽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랭킹 9위와의 전투가 시작된 거 같지만, 그쪽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렸기에 이세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놈 성격상 바로 돌아갈 리가 없는데....'

염성하는 눈이 돌아가면 광견이라는 별명 그대로 완전히 미친개가 되지만, 평소에는 자존심이 강하고 싸가지만 없는 그럭저럭 멀쩡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체면을 굉장히 중요시하기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게 다 가라앉을 때까지 혼자 있는 버릇이 있었다.

'녀석이 좋아할 만한 장소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이세훈이 무학관 근처를 돌아다녔고, 이내 근처의 공원 구석진 곳에서 한 청년을 발견했다.

"후우... 후우...."

두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가다듬고 있는 염성하.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된 이세훈은 조금이지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살아 있는 건가....'

조금 개 같은 녀석이긴 했지만 이러나저러나 결사대의 기둥 중 한 명이었으며, 마지막에는 기어코 목숨을 던져 멸해의 마신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성격이나 행실이 어찌 됐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사람이었다보니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뭐... 그래도 아직은 삐뚤어지기 전이니 이번에는 조금 원만하게 되려나.'

어느 정도 대화의 물꼬를 틀기만 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이용해서 회귀 전과 같이 인연을 성립시켜 인연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세훈이 막 다가가려던 찰나.

"신입생인가"

두 눈을 감은 채 염성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대련을 보고 있었나?"

"...예. 뭐."

염성하의 물음에 이세훈이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저놈한테 존댓말을 해야 한다니.'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뒤틀리는 기분이지만, 지금은 자신이 알던 염성하와 다를 수 있으니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세훈이 속으로 참고 있는 사이 염성하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나를 찾아내다니. 꽤 실력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던 염성하가 이세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이내 말을 멈추며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왜 저래?'

누가 봐도 썩 좋지 않은 반응. 예상과 달리 묘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이세훈이 잘못되었음을 느끼던 찰나.

"보르시파의 학과 수석인가."

조금 가라앉은 염성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긴 뭐하러 온 거지?"

"이야기를 조금 나눴으면 해서... 요."

염성하가 몸담고 있는 염화문의 미래. 염륜잔화창의 개선점. 그리고 오직 삼견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자질'.

한 번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가라."

염성하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기 시작한 염성하. 이쪽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 모습에 이세훈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선... 배에게도 나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한 번 들어나...."

"모르는 것 같으니 딱 한 번만 말해주지."

이세훈의 말을 툭 잘라낸 염성하가 눈을 감은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약한 녀석을 싫어한다."

"...."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 같잖은 재주가 있다고 나와 비슷하거나 대등하다고 여기는 녀석은 더욱이 그렇지."

담담하면서도, 그 경멸감이 느껴지는 단호한 목소리에 이세훈은 불현듯 회귀 전의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역할은 뒤에서 무구를 만드는 것뿐이다. 주제넘게 앞으로 나서지 마라.'

회귀 전. 인류의 연합전선에 들어온 염성하와 처음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 그때는 그냥 성격이 더러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세훈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돌아가라."

염성하는 단순히 성격이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대장장이."

자신보다 약하면 사람으로도 취급해 주지 않을 만큼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닌 성격 더러운 개놈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삼견도 어린 시절에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 글러 먹은 놈들이 단순히 어리다고 해서 착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이세훈은 다시금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광견 시절에 비하면 양반이네.'

회귀 전이었다면 가라고 했는데 다시 말을 건 시점에서 창으로 배때지를 쑤셨을 텐데 한 번 더 설명해 주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니.

개과천선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본 이세훈은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다.

'저 꼬라지를 보니 말로 풀릴 가능성은 없겠지.'

지금 염성하는 일단 한 대 정도는 갈겨놔야 대화가 성립된다. 문제는 자신이 염성하에게 한 대를 갈길 수 있냐는 것.

빈틈이야 노리려면 얼마든지 노릴 수 있지만 신체 능력이 또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탐철로 끌어올릴 수 있어도 마땅한 물건이... 아.'

불현듯 오른손에 시선이 향하고,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방금까지 만났던 정신 사나운 소녀에 대해서 떠올렸다.

자신의 재능을 숨기지 않으며 도움이 될 이에게 서슴없이 접근하는 성격. 그런데도 희미하게 자신에 대한 불신을 지녔지만, 이제는 그것이 사라져가고 있다.

우웅─

그 이해도를 따라 이세훈의 손아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이내 하나의 광석으로 빚어져 모습을 드러냈다.

[인연 - 착폭화錯爆化]

[등급 : 고급] [품질 : 최상]

여러 색이 뒤섞인 형형색색의 광석.

뒤섞인 재료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증폭제로서 탁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합성된 재료의 잠재력을 끌어올려줍니다.

인챈트 팔레트의 마석 가루를 마구잡이로 뭉쳐둔 것 같은 형형색색의 광석. 잡스럽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형태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데.'

이거라면 지금도, 앞으로도 유용할 인연석이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이득에 이세훈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아무래도 갈 생각이 없나 보군."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염성하가 다시금 눈을 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제는 참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리는 염성하. 그것만으로도 전신이 무겁게 짓눌렸지만, 이세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마주 보았다.

"들은 게 있으니 나도 딱 한 번만 말해주지."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무심하게 걸어오는 염성하. 그 차분하면서 무거운 모습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염륜잔화창의 역사는 너 때문에 끊어질 거야."

그 말이 끝난 순간. 천천히 걸어오던 염성하의 몸이 굳었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숨이 멎었다.

올해 입학한 후배, 거기에 자신보다 한참 약한 이에게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말뜻을 오해 없이 완벽히 이해한 염성하의 몸이 재차 움직였고.

쿠웅-!

단 한 걸음만으로 이세훈의 코앞까지 쇄도해 왔다.

꽉 움켜쥔 주먹과 그 궤적을 뒤쫓아 흩뿌려진 마력. 이대로 적중한다면 머리가 박살 나고 몸뚱이는 뒤따르는 불꽃에 흔적도 없이 폭발해 버릴 것이다.

[인연각인 '탐철'이 발동됩니다.]

어디까지나 바보처럼 맞아줬다는 가정하에.

투웅!

앞으로 뻗은 이세훈의 양 손바닥이 염성하의 주먹과 맞닿음과 동시에 부드럽게 공격을 오른쪽으로 흘려보냈다.

손바닥에 맺힌 마력으로 힘을 흘려낸 뒤 이어서 왼손으로 손목을 밀어낸다. 그 깔끔한 방어에 염성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흘려냈다고?'

가볍게 내지른 일격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마력이 담겼던 주먹. 아칼쿠프의 1학년 학과 수석이라면 모를까 보르시파가 막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대장장이는 자신의 공격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주 태연하게 흘려보낸 것이다.

'그래도 학과 수석이다, 이거군.'

머리카락의 끝이 불꽃처럼 일렁이며 체내에서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마 신체를 강화한 것이 분명할 터.

상황의 파악을 끝낸 염성하는 이세훈이 자신에게 말을 붙일 자격 정도는 있었다고 뒤늦게 인정하며, 두 눈을 빛냈다.

'그걸로 끝이다.'

주먹은 빗나갔지만, 그 궤적을 뒤따르는 마력 '잔화殘火'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피어올라 폭발하는 불꽃이야말로 염륜잔화창의 진정한 힘.

그렇기에 염성하는 폭발에 휩쓸려 바닥을 나뒹구는 건방진 신입생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렸고.

우웅!

홍련을 끌어올린 이세훈의 오른손이 폭발 직전인 잔화와 맞닿았다.

콰아아아앙!!!

두 사람 사이에서 터져 나온 어마어마한 불꽃.

염성하가 마력을 조절해 온도를 낮춰뒀기에 주변이 그을리는 일은 없었지만 충격파만으로 꽃들이 꺾이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요란하기 그지없는 여파. 그 중심지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조금씩 잦아들었고,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후우...."

충격파로 머리와 옷이 한껏 흐트러진 이세훈.

"...."

그리고 폭발에 휩쓸려 옷 곳곳이 그을려 있는 염성하.

자신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에 염성하가 굳어 있을 때. 이세훈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씩 웃었다.

"내 말 맞지?"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9화

'...뭐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염성하는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본래 염륜잔화창이 남기는 잔화는 시전자가 만들어낸 '수폭收爆'이라는 마력 파동에만 반응하여 폭발한다.

그렇기에 오늘 대련에서 아리아처럼 흩뜨리는 거라면 모를까 제어를 빼앗기는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빼앗겼다.'

자신의 잔화에 마력을 휘감은 녀석의 손이 닿은 순간. 모든 폭발의 궤적이 뒤틀려 자신에게로 쏟아졌다.

염륜잔화창이 완전히 '파훼'당했다는 것을 이해한 염성하의 사고가 잠시 멈췄고.

후웅!

본능적으로 이세훈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파앙!!!

이세훈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주먹.

방금 휘둘렀던 일격이 전치 4주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12주는 물론이며 장애가 생길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이 새끼. 눈 돌아가기 직전이네.'

눈동자에서 생각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졌다.

회귀 전 염성하가 광견이라고 불리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저 앞뒤 가리지 않는 실행력이었다.

하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든 말든 반드시 실행한다. 강박에 가까운 집념이었고, 그 성격을 보여준 첫 사건이 바로 본인의 사문인 염화문 학살극이었다.

'타고난 성격이라더니... 둘러댄 말은 아니었구만.'

개소리로 치부했던 염성하의 푸념이 진짜였음을 깨달은 이세훈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덤벼드는 주먹을 요령 좋게 피하고 흘려냈다.

투웅! 파앙!

레아의 인연석인 '착폭화'가 탐철에 흡수되어 만들어낸 광경. 하지만 이세훈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탐철의 효과도 거의 끝나가고... 몸도 솔직히 한계야.'

폭발음을 듣고 누가 오기는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늦으면 저 주먹에 맞고 최소 중상을 입게 되리라.

'...어쩔 수 없나.'

내키지는 않지만, 할 수밖에 없다.

적당히 인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염성하를 박살 내기로 이세훈이 맘을 고쳐먹은 순간.

후웅!

거대한 주먹이 마력을 휘감은 채 코앞까지 쇄도했다.

콰아아앙!!!

공터 전체를 휩쓴 충격파. 머리를 박살 내고도 남았을 주먹을 휘두른 염성하는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주먹을 두 손으로 잡아낸 금발의 청년, 제이크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냐?"

"예, 예... 일단은...."

염성하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두 손을 부르르 떠는 제이크.

어떻게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을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해 손부터 시작해 전신이 저려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이 끼어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맞았더라면 최소 중상, 최악의 경우 죽었을지도 모르리라.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세훈의 행동에 제이크가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염성하는 말없이 그 뒤편에 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담담하게 바라보는 이세훈. 위축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염성하가 자신의 주먹을 거둬들였다.

"...가라."

"알겠습니다! 세훈아 가자!"

염성하의 이야기에 제이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세훈의 등을 공원 밖을 향해 쭉쭉 밀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저항도 못 하고 밀려나던 이세훈은 고개만 돌려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내 말 기억...."

"이상한 소리 말고 얼른 가...!"

제이크의 떠밀림에 말도 끝맺지 못한 채 공터 밖으로 사라진 이세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염성하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숨을 골랐다.

'위험했군....'

염륜잔화창이 파훼당했다고 상대를 반죽음으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염륜잔화창의 명성이 그대로 곤두박질쳤을 것이고, 자신과 사부님 역시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리라.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염성하는 불현듯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

과연 자신은 스스로 정신을 차린 것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위협을 느끼며 깨어난 것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그 건방진 후배의 모습을 떠올린 염성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세훈...."

첫 만남에 기억된 이름.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 *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선배한테 시비를 건 거야?"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제이크의 물음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뭘 시비를 걸어. 맞는 말만 했구만."

"아니... 너 아까 진짜 잘못했으면 죽었을 수도 있다니까?!"

호들갑을 떠는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죽기는 무슨. 끽해봐야 바닥 몇 번 구르고 끝이었겠지."

"...뭐?"

염성하가 익힌 염륜잔화창은 거칠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섬세한 마력방출이 필요한 기술.

방금 주먹도 겉보기엔 죽일 기세로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염성하가 마음만 먹는다면 역으로 마력을 방출해 얼마든지 위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휘두른 주먹. 끝장내려는 게 아니라 떨어뜨리려고 휘두른 주먹이었지.'

회귀 전 염성하와 지겹도록 붙어 있었던 이세훈이었기에 구별할 수 있는 차이.

그렇기에 자신도 마지막 일선을 넘기 전에 빠르게 멈춘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회귀 전보다 물렁한 건 확실하구만.'

어린 염성하가 아니라 광견이었다면 둘 중 한 명은 큰일 나지 않았을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세훈이 피식 웃고 있을 때.

[대상 '염성하'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떴네.'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의 내용에 이세훈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 난리를 피웠는데 인연이 성립되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하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세훈은 다음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인연을 어떻게 추출하고, 인연 레벨을 어떻게 올리느냐지.'

이세훈은 염성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견 염성하'였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겪은 일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기 마련. 특히 방금 보여준 물렁한 모습만 하더라도 광견과 동일인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약간의 조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만....'

어쩌면 인연석의 효과도 조금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고난 자질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세훈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뭐, 일단 이 부분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염성하에 관한 것을 얼추 정리한 이세훈은 자신의 곁에서 의아해하고 있는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도 역시 괜찮단 말이지.'

염성하가 마력을 거둘 새도 없이 재빠르게 끼어들더니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고 공격을 막아냈다.

전력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아직 1학년, 거기에 아직 영웅의 탑에 들어간 적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기량이었다.

'역시 유용하겠어....'

제이크에 대한 가치를 한 단계 높인 이세훈은 공격을 막았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괜찮냐?"

"아. 괜찮아. 이쪽은 다른 곳보다 더 튼튼하거든."

보란 듯이 손을 쥐락펴락해 보이는 제이크. 실제로 살짝 빨갛게 변하긴 했지만 어딘가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손이 튼튼하다라....'

제이크의 특성을 머릿속에 새겨넣으며 이세훈이 여러 후보군을 점쳐보고 있을 때.

"그보다."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린 제이크가 굳은 표정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너 혹시 경기 보면서 뭔가 이상한 소리 했었어?"

"이상한 소리?"

"그래. 혹시 그... 누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든가...."

"누님이면... 아리아 마이어스?"

이세훈의 되물음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한 말 없었어?"

"글세... 별다른 말은 안 했는데."

"정말? 근데 왜...."

"저런 스타일은 재수 없어서 싫다고 말한 정도?"

"...."

이세훈의 대답에 제이크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경고를 했어야 했나...."

골치 아프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제이크는 피곤한 표정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조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누님이 너한테 흥미를 가져 버려서."

"나한테?"

"응. 네가 경기장에서 한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더라고."

"...."

제이크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생도의 환호와 대화 소리가 시끌벅적하던 경기장. 거기에 몇백 미터는 떨어진 관객석과 경기장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니?

청각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력 자체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이미 A급 영웅 수준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괴물같구만.'

미래의 완등자답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는 스펙이다.

본의 아니게 아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해버렸음을 깨달은 이세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흥미 정도야 어떻겠어."

"그렇게 가볍게 넘길 게 아니라니까. 네가 몰라서 그렇지 누님은...."

"속 좁고 음흉하다고?"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허를 찔린 듯 움찔거렸고, 이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정하기보다 무언의 긍정을 해버린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그래도 누굴 사주해서 두들겨 팬다거나 그런 짓을 할 정도는 아니잖아?"

"그, 그 정도까지야 아니지만 조금 인생이 고달파진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는 괜찮아. 오히려 바라던 바지."

방금 상태를 보건대 염성하의 최대관심사는 아리아에게 이기는 것.

그렇기에 그 라이벌의 관심을 자신이 받는다면 자연스럽게 존재감이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염성하를 개과천선 시키는 것도 훨씬 수월해지리라.

"...도대체 뭐 때문에 누님을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

그런 이세훈의 반응에 제이크는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보통 대장장이라면 자신이 만든 무구를 써줬으면 좋겠다던가 그런 이야기만 할 텐데 이세훈은 왜 이렇게 적의를 보이는 것일까.

제이크의 의문이 담긴 시선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것도 별 볼 일 없는 검이었네.'

권태로움에 찌든 목소리와 질린듯한 시선.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만마전의 군단을 향해 걸어가던 뒷모습.

인류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완등자 중 한 사람인 성검사는 그렇게 돌연 사라졌고.

"글쎄."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마신이었던 괴물의 잔해를 검으로 삼은 '멸광의 마신'이었다.

"관상이 좀 그래."

지금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이미 벌어졌던 일이다. 그러니 선입견 없이 저 싸이코패스 나르시스트를 봐줄 수는 없으리라.

"간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끝낸 이세훈이 몸을 돌려 떠났고, 그 뒷모습을 본 제이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모르는 둘 사이의 무슨 일이 있는지. 아니면 정말 관상이라는 기묘한 방식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상성이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우웅─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제이크가 휴대폰을 꺼내 도착한 메시지를 읽었다.

[재밌는 친구가 생긴 거 같네. 앞으로도 이것저것 이야기해 줘.]

앞으로도 자신을 중간다리로 써먹겠다는 것일까. 제이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메시지의 끝으로 시선을 내렸고.

[속 좁고 음흉한 누나가 부탁할게^^]

"아."

이세훈보다도 자신이 더 큰 일 났음을 깨달았다.

* * *

월요일 아침.

기숙사 밖을 나선 이세훈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눈매를 찌푸렸다.

'너무 무리했다....'

잔폭화와 탐철을 이용한 신체 강화의 부작용. 온몸이 조각조각 찢어진 것처럼 쑤셔왔는데 이것도 영연신마법이 있어서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진짜 몸 어디가 터져 버렸으리라.

'하루를 꼬박 쉬었는데도 회복이 안 될 줄이야.'

잔폭화처럼 쓸 만한 재료를 단번에 소모하는 데다가 육체의 반동도 너무 크다. 앞으로는 상황을 봐가면서 쓰기로 결심하며 이세훈이 강의실에 도착했다.

"후우...."

자리에 앉은 이세훈은 천천히 강의실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일주일이나 지나니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다들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긴 하지만, 시선이 닿으면 움찔거린다.

"그... 교류회도... 조만간... 일정이... 잡힌다고...."

특히 한스는 시선이 툭툭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며 말을 더듬었는데 차석이라 감각이 뛰어난 만큼 더욱 민감하게 시선을 느끼는 듯했다.

'재밌네.'

그 반응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연신 한스를 괴롭히고 있을 때.

덜컹덜컹─

강의실의 문이 열리며 짧고 굵직한 인상의 교수가 수레 골렘을 탄 채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 강렬하다면 강렬한 모습에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수레에 올라타 있던 교수가 뒤쪽의 보드판을 두드렸다.

"주목해라!"

작은 키와 다르게 우렁차게 뻗어 나가는 목소리.

그 외침에 다소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생도들이 자세를 바로 했고, 수레에 올라탄 교수가 팔짱을 꼈다.

"앞으로 2주간 제련수업을 맡을 리스 도바이다. 가르칠 과목은 '속성제련'이지."

필수전공인 제련은 1학기 동안 일정 기간마다 교수가 바뀌며 다양한 분야를 접하게 한다. 생도의 잠재력을 확인하여 2학기에 세부적인 전공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기본기인데 대충 들어도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놈들 있으면 마음대로 해라. 나도 마음대로 낙제점을 줄 테니까 말이야."

으름장을 놓는 수레 위의 교수, 리스의 이야기에 생도들이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련학부에서 리스 교수는 상당히 유명한 편이었는데 과거 집안을 믿고 협박하던 재학생의 멱살을 붙잡고 모루 위에 올려 망치로 갈비뼈를 박살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명심해.'

'개한테 자존심 세우겠다고 뻗대는 사람 본 적 있냐?'

'물리기 싫으면 피해.'

선배들에게 들은 조언을 떠올린 생도들이 자세를 가다듬었고, 그 모습을 내려다본 이세훈이 얼추 분위기를 파악했다.

'좋은 교수인가 보군.'

이세훈이 슬쩍 웃고 있을 때. 리스가 수레 위에 털썩 앉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난주에 있었던 제련수업의 제출품에 대한 평가와 1학기 예산부터 나눠주마."

바벨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받는 예산. 사적으로 사용해도 크게 문제가 없는 돈이었기에 생도들이 모두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호명하는 대로 나와서 가져가라."

리스가 한 명씩 호명하며 종이를 나눠주었고, 그 내용을 읽은 생도들이 기뻐하거나 분해했다.

그리고 차례가 지나면 지날수록 모두의 시선들이 한 곳으로 향했다.

'얼마나 받을까?'

'나보다 세 배는 더 받을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압도적인 물건을 만들어냈던 이세훈. 입학 이후 여러 파란을 만들어낸 학과 수석은 과연 얼마나 예산을 받아낼 수 있을까.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이세훈."

"예."

"너는 아직 예산이 안 나왔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생도들이 모두 깜짝 놀랐고, 리스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네가 만든 제출품의 완성도가 높아서 이번 수요일에 2학년들과 공개경매에 출품하기로 했다. 그때 낙찰가를 토대로 예산을 정하기로 했으니 잠시 기다리도록."

리스의 설명과 그 표정을 본 이세훈은 얼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굳이 따로 빼낸 걸 보니... 또 뭔가 꾸민 건가.'

만약 미하엘이 주도한 일이라면 썩 좋은 건 아니겠지만, 이세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문제가 될 정도라면 김인철이 막았을 터. 아마 충분히 해결 가능한 수준이기에 받아들인 것이리라.

'그리고... 재밌는 광경을 볼 수도 있겠네."

슬쩍 웃은 이세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이는 이세훈의 모습에 리스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좀 따지고 그러지 뭐가 좋은 줄 알고....'

만약 이의를 제기하면 그걸로 어찌 해결해 보려 했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어졌다. 한숨을 푹 내쉰 리스는 화제를 돌렸다.

"그럼 수업으로 돌아와서... 오늘은 화속성마력을 제련에 응용하는 법부터 배워볼 것이다. 구체적으론 무구에서 마력이 휘발되지 않게끔 '잔류마력'을 다루는 법이지."

리스의 설명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불꽃에 잔류마력. 절묘하게도 주말에 만났던 염성하가 곧장 떠오르는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인연석을 얻기 전에 기본기를 좀 가다듬고 싶던 참이었다. 이세훈이 만족하는 사이 리스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이 잔류마력에 대한 수업을 도와주기 위해 지원을 자처해 준 생도가 한 명 있다."

"생도?"

"누구지?"

모두가 의아해하던 그때. 무언가 알아차린 이세훈이 반사적으로 강의실의 문을 바라보았고.

"들어와라."

드르륵─

주말에 보았던 염성하가 무뚝뚝한 얼굴로 들어섰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0화

"...."

예상치 못한 등장에 이세훈의 입이 작게 벌어졌고, 다른 생도들은 더 나아가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

"아니, 저 선배가 왜...."

"뭐야 도대체."

이세훈에게 염성하는 그저 미친개일 뿐이지만 다른 생도들에게는 달랐다.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인 염륜잔화창을 전수받았으며 미래의 S급 영웅으로서 주목받는 유망주.

무엇보다도 무학관의 랭킹으로 따진다면 현 바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력을 지녔으니 일반 생도들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의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번 수업 동안 임시조교를 맡게 된 아칼쿠프의 창술학부 3학년 염성하다. 얼마나 유명한지는 너희들도 알 테니 잘 받들어 모시도록."

"...."

리스의 거침없는 소개에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한 염성하.

그 이야기에 놀란 눈으로만 바라보던 생도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실력과 재능, 배경까지 무엇하나 빠질 구석이 없는 유망주.

친분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호의적으로 기억되기만 해도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이득일 것이다.

모든 생도가 염성하의 눈에 들기 위해 의욕을 불태우던 그때.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구만.'

설마 자신이 다시 찾아가기도 전에 이렇게 제 발로 올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본인의 배경인 염화문,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염륜잔화창이 끊어질 거라고 말하고는 진짜로 그걸 정면에서 파훼했다.

기술의 파훼법이 외부로 유출되었을 때 생겨날 일들을 생각하면 밤중에 복면을 뒤집어쓰고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만나러 온 거면 적대적인 건 아닌가.'

어떻게 움직일지 이세훈이 흥미롭게 내려다보았고, 그 시선을 느낀 염성하도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로 감도는 기묘한 긴장감을 다른 생도들도 눈치채려던 찰나.

"수업 중이다 이놈들아."

탕탕!

교탁을 때린 리스가 생도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공부할 때도 이렇게 열의를 낼 것이지... 쯧."

그런 생도들의 태도에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리스가 수레의 높이를 살짝 내린 다음 교탁의 패널을 조작했다.

"소개는 이 정도면 됐고, 본격적으로 실습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하게 개념부터 잡고 가도록 하지."

허공에 몇 가지 글귀와 마력배열의 형태가 떠올랐고, 리스가 수레 위에 털썩 앉은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무구의 제작에서 잔류마력의 쓰임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체적으로 마력을 흡수, 생산해내는 독립형. 그리고 외부에서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충전형."

독립형은 출력이 낮고 유지력에 특화되어 있으며 충전형은 반대로 출력이 높고 유지력이 떨어진다.

각자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난이도로 따지자면 독립형이 훨씬 어려웠다.

'마력을 흡수하거나 생성할 수 있는 핵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 범위를 확장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

예를 들어 이세훈의 묵주환은 마력을 흡수해서 저장할 수 있지만 독립형으로 분류할 수는 없었다.

대기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착용자에게서만 마력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독립형은 만들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재료와 기술, 그리고 제작자의 마력에 따라서 마력핵을 구성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지."

교본에서 제시되는 영역이 아니라 스스로 고찰해서 알아가야 하는 방식. 그렇기에 관련된 스킬이 있거나, 이미 아는 게 아니라면 쉽사리 만들 수 없는 종류였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우선 충전형부터 시작한다. 이미 만들 줄 아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좀 더 가다듬는다고 생각하고 듣도록. 조교."

리스의 부름에 염성하가 앞으로 걸어 나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스스스─

허공을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손길과 그 궤적을 뒤따라 그려지는 검붉은 마력.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박제되어가는 마력에 생도들이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았다.

"화속성마력은 확산성을 지니고 있어 휘발성이 강하다. 그래서 마력을 고정시켜야 하는 잔류마력으로 쓰기가 어렵지"

화륵!

어렵다는 리스의 설명이 무안해질 정도로 허공에 빼곡히 잔류해 있던 마력에 불길이 치솟으며 형태가 가다듬어진다.

불꽃으로 이뤄진 세 개의 고리.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된 '염륜炎輪'이 제자리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그 확산성을 억누를 수만 있다면 잔류마력으로서 매우 뛰어난 유지력을 보여준다. 그 예시가 바로 지금 조교가 펼치고 있는 기술, 염륜잔화창이다."

마력을 공급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타오르는 염륜.

염륜잔화창의 섬세한 마력운용법이 타오른 불꽃을 완벽히 보존하는 것이었는데 염성하는 그것을 무려 세 개나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와...."

"화속성마력을 저렇게까지 다루다니...."

"난 화로 조절하기도 힘들던데."

무학관에서 보여줬던 염성하의 창술이 단순히 '강함'이라는 느낌만 주었다면 눈앞에서 염륜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로서 '경외감'을 느끼게 만든다.

화속성마력이 얼마나 제멋대로며 난폭한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조교가 너무 가볍게 펼치니 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군. 또 다른 예시로는...."

생도들을 슬쩍 둘러보던 리스는 이내 맨 윗자리에 앉아 있는 이세훈과 눈을 마주쳤다.

"학과 수석이 적절하겠군. 화속성마력은 보유하고 있나?"

"예."

"그럼 조교처럼 화속성마력을 고리의 형태를 만들어봐라."

2학년 중에도 만들어낼 수 있는 녀석이 극소수인 기교. 그 유명한 학과 수석도 쉽사리 해낼 수 없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인선이었는데.

"이렇게 말입니까?"

이세훈의 손 위로 불꽃의 고리가 가볍게 형성되었다.

양 손바닥에서부터 솟구쳐 만들어진 염륜. 염성하와 달리 손바닥과 연결되어 있긴 했지만 추가로 마력을 공급받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염성하와 방법은 다르지만 잔류마력으로 완벽하게 염륜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

그 모습에 리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고, 염성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어색해지는 강의실의 분위기. 그 속에서 이세훈만이 자신이 만들어낸 염륜을 바라보았다.

'흠. 역시 지금 몸으로는 따라 하기가 버겁구만.'

염륜을 만들어내는 것은 회귀 전 광견에게 들은 것이 있어 어렵지 않았지만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버거웠다.

이것도 영연신마법과 홍련이 가진 '흐름'이라는 성질 덕분에 된 거지 아니었으면 만들어내자마자 무너졌으리라.

'...괜히 학과 수석이 아니었군.'

예시를 드는 데 실패했지만, 아연실색한 생도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굳이 어렵다는 것을 이해시켜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

헛기침을 한 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었다.

"잘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예."

"크흠. 뭐, 이래저래 설명이 길었다만 결국 이번 수업 테마를 정리하자면 이거다."

헛기침으로 생도들의 이목을 다시 모은 리스가 패널을 조작해 공중에 한 단어를 띄웠다.

[염륜]

"모처럼 좋은 조교가 와줬으니 기회를 살려야지. 무엇을 만들어도 좋다. 하지만 화속성마력과 충전식 잔류마력. 그리고 염륜이라는 테마는 유지하도록."

수레에서 일어선 리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제출 기간은 다음 주 목요일. 그 전에 제출하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 좋다. 물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니 나도 조금 깐깐하게 볼 거다."

관심이 없다고 해서 대충 만든 물건을 제출하고 딴짓을 하려고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리스의 경고에 생도들이 바짝 긴장하면서도 두 눈을 빛냈다.

지난주에는 기본기를 본다는 명목으로 제련방식에도 제약이 있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무엇보다도 염성하라는 중요한 관중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설명은 끝났으니 슬슬 제련실로 이동하지. 몇 가지 예시도 보여줄 테니 빨리빨리 움직여라"

수레를 탄 리스가 먼저 강의실 밖으로 나섰고, 염성하는 말없이 강단의 위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

"...."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가려던 생도들이 그 모습에 서로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마음과 같아서는 옆으로 다가가서 말을 붙이고 싶은데 염성하의 무심한 표정과 묵직한 중압감이 차마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묘한 눈치 싸움이 계속될 때. 한 사람이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염성하 선배님."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한스.

방금까지 이세훈의 눈길을 받고 흠칫거리던 인물과 동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한 태도였지만.

"저는...."

"꺼져라."

"...예."

염성하의 차가운 한 마디에 초라하게 물러섰다.

지금은 어떻게 말을 붙여볼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생도들이 염성하에게 찍힐까 봐 하나둘씩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강의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염성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세훈."

강단에 선 채로 묵묵히 올려다보는 염성하.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과도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이 의자에 앉은 채로 내려다보았다.

"왜?"

"넌 누구지?"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염성하로서는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었다. 주말 동안 따로 조사해서 알아낸 것이라고는 재해에 휩쓸린 불우한 가정사뿐.

뛰어난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입학 전에 엄청난 재능을 뽐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염륜잔화창을 파훼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추측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한 정보. 그렇기에 염성하는 그냥 본인에게 물어보는 방향으로 선택한 것이다.

'다짜고짜 물어보는 것도 여전하네.'

주변을 파고들거나 지켜보는 게 아니라 당사자에게 찾아가 묻는다.

거침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식하다 싶을 정도였는데 이 순간이 염성하를 상대할 때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놈은 고민이라는 걸 안 하니까.'

여기서 간을 보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 순간. 염성하는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만으로 판단을 내린 뒤 바로 움직인다.

즉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 '적'이라고 인식당하면 무슨 말을 하든 무시당하고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광견 시절보다야 덜하긴 하겠지만... 괜히 일을 귀찮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염성하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자신의 신상이 아닐 터. 그렇기에 이세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염륜잔화창의 성취도는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염륜의 숫자로 판가름한다던데... 아까 그게 그 염륜이지?"

"...."

"세 개를 부리는데도 여유로웠으니 아마 제대로 한다면 다섯 개... 아니, 너라면 여섯 개는 유지하겠네."

현재 염화문의 문주이자 S급에 근접했다는 A급 영웅 임대문이 여덟 개의 염륜을 동시에 유지해내는 팔륜의 경지.

자신보다 수십 년을 앞선 문주의 기술을 벌써 따라잡고 있는 것이 바로 염성하인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대답이나 해라."

하지만 여기까지는 외부에도 흔하게 알려진 사실. 그렇기에 염성하는 말없이 대답을 재촉했고, 이세훈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너. 예전에 칠륜까지 유지한 적 있었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

이세훈의 이야기에 염성하의 무뚝뚝한 얼굴에 금이 새겨진다.

문주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단 한 사람에게 밖에 말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눈앞의 신입생이 알고 있단 말인가?

너무 상정하지 못한 사태에 염성하의 사고가 멈추려던 그때. 그 낌새를 알아차린 이세훈이 곧장 이야기를 이었다.

"입학식 때 봤으면 알겠지만, 내가 불꽃을 다루는데 좀 재능이 있거든. 흔히 말하는 천재라고 해야 하나?"

스스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틈만 나면 머리가 고장 나서 주먹부터 휘두르는 녀석을 설득하려면 노골적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학관에서 네가 휘두르던 불꽃을 살펴보고 있자니 좀 이상하더라고. 여력이 남아 있는데 그걸 제대로 터뜨리지 못하고 어영부영 날린다고 해야 하나...."

"...."

"그래서 원인이 뭘까 혼자서 생각해 보다 결론을 내린 게 그거였지."

부정하지 못하는 염성하를 내려다본 이세훈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염성하의 기량은 본래 더 높았고, 지금은 오히려 떨어진 상태라고."

다른 이들이 들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이세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앞의 이야기 모두가 회귀 전 당사자인 광견 염성하에게 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실력이 퇴보했을 때는 본래 펼치던 육륜도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차이를 모르겠다고 했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지. 내가 변해 버린 건가 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렇게 느끼는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염성하는 몇 년 동안이나 육륜의 경지에서 헤매게 되었는데 이 정체기가 바로 광견 염성하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비틀린 시발점이었다.

'그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직접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네.'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세훈이 보기에도 염성하의 불꽃에는 심각한 뒤틀림이 존재했다.

아마 저걸 제대로 인지하고 바로잡지 못하는 이상 기술의 성장은 절대로 기대할 수 없으리라.

"...너는 원인을 알고 있나?"

"확신은 못 하겠지만... 짐작 가는 건 있지."

"증명할 수 있나?"

"할 수는 있지."

이글거리는 염성하의 두 눈에 이세훈이 눈을 마주 본 채 슬쩍 웃었다.

"보여줄 필요성은 못 느끼지만."

이렇게 위아래가 확실해졌을 때는 간을 봐줘야 한다.

염성하에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가도 없이 도와줘 봐야 돌아오는 건 '어쩌란 거지?' 같은 싸가지 없는 대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걸 말해라."

처음 보는 신입생의 제안도 넙죽 받아들일 만큼 간절한 것일까. 상당히 협조적인 염성하의 태도에 이세훈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첫 번째. 앞으로 받게 될 내 조언과 도움에 대해서는 모두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거래라는 것을 인식시킨다.

"두 번째. 무슨 일이든 생각을 놓을 것 같다 싶으면 내게 상담할 것."

그리고 자신이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게끔 연결고리를 만들어둔다.

이세훈의 제안에 염성하가 살짝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다.'

자신을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협력 체재를 만들려는 형태. 지금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큰 이득이었지만, 염성하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정육점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돼지가 된 기분. 무슨 헛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았다.

"할 거야 말 거야? 수업 들으러 가야 하니까 빨리 말해."

"...."

"나갈 때까지 대답 안 하면 없던 일로 한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옆을 지나 강의실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하겠다."

목소리를 쥐어 짜낸 염성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증거를 보여준다면."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로 보는 염성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씩 웃으며 문밖을 가리켰다.

"바로 보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