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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6화 참지 않는 자(1)

6. 참지 않는 자(1)

[아직 튜토리얼이 진행 중임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어?"

예상 밖의 메시지에 잠시 강현의 뇌가 정지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왜? 뭔데 그래?"

"튜토리얼 중이라고 사용이 안 된다는데?"

"하하하!"

강현의 말에 아현이 방이 떠나가라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아, 미안. 그럼 튜토리얼 끝까지 다 깨야하는 거야?"

"그건 어차피 각오한 건데... 조금이라도 빨리 제대로 능력을 써야 안전해지지 않을까?"

이제 본격적으로 현실이 변하기 시작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큰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전보다 강해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벌써 어느 정도 적용이 된 것 같은데?"

"뭐?"

알 수 없는 아현의 말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네 몸을 보라고. 며칠 사이에 완전 삐쩍 골은 멸치에서 정상인 수준은 됐잖아? 아니 가만 봐봐. 좀 근육질인데 너?"

아현이 강현의 몸을 더듬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씨. 이게 징그럽게 왜 이래?"

강현은 질색하며 아현을 밀쳐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확실히 뭔가 달라지긴 했어. 살도 붙었고 근육도 제법 살아있단 말이지.'

완전히 근육질에 멋진 몸매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 일반인 치고는 꽤나 괜찮은 수준은 된 것이다.

몸무게를 달아보진 않았지만 아마 10kg 정도는 불어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말 몸이 좋아졌는데? 지금까지 고블린 생각만 하느라 몰랐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봐. 남들 다 튜토리얼 2단계 3단계에서 실패했는데 너는 혼자 8단계까지 깨는 거라고. 그러면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어?"

강현을 위해서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하는 아현이었다.

"확실히 그러네. 그래! 하다 보면 언젠가 끝나겠지."

그러나 강현은 차근차근 천천히 튜토리얼을 완료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순히 열심히만 해서는 안 돼. 최대한 빨리 튜토리얼을 깨고 완전한 능력을 갖는다.'

이미 능력이 적용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강현은 최대한 빠르게 튜토리얼을 통과하기로 다짐했다.

"나 오늘도 회사 쉬어."

아현은 오늘도 휴가를 냈다.

처음 튜토리얼이 시작된 날과 마찬가지로 밖이 혼란스러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도로 한가운데 던전이 나타나 교통이 마비됐고, 경찰과 군인들이 잔뜩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돈 몇 푼을 위해 미련하게 회사를 나갈 생각은 없었다.

"잘했어. 일단 밥부터 먹자."

"어."

간단하게 차려진 식사.

강현은 복잡한 생각에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는 느낌이었다.

"후우, 배부르다."

"그러게."

"..."

식탁까지 치우고 나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강현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인터넷부터 확인하자."

인터넷은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5년 지나기 전에 빨리 던전 돌고 렙업해야 하는 거 아님?

-보니까 한 달 정도면 던전 터진다는데 얼른 클리어해야지.

-능력자란 놈들 빨리 다 집어넣어라. 일반인 못 들어간다잖아.

-저기 뭐가 있을 줄 알고 들어 가냐?

-생사람 잡을 새끼들이네 이거.

벌써부터 능력자들을 집어넣어야 한다느니, 목숨이 위험하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으음..."

모든 능력자는 1단계를 클리어했다. 그 말은 최소한 2단계를 겪었으며 괴물을 마주했다는 뜻이다.

튜토리얼부터 그런 괴물들이 나와 죽었는데, 본 게임에서 어떤 괴물들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이곳은 현실.

죽으면 그대로 끝이었다.

-튜토리얼 대상자 중에 1단계 클리어한 사람이 절반 정도, 2단계는 그 반에 반도 안 된다더라.

-네, 다음 뇌피셜.

-그런데 내 주위만 봐도 윗댓이 틀린 말은 아닌 듯. 열 명 모이면 2단계 까지 깼다는 애들이 끽해야 한두 명이다.

-내 친구 한명 4단계까지 깻는데?

-ㅈㄹ. 3단계도 못 깬다.

포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던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어째 도움이 되는 글이 하나도 없네."

"그러게."

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도 2단계까지 깬 사람이 엄청 적은 가봐. 너는 5번이나 뒤졌긴 하지만 깼잖아?"

"6번이다."

"그게 그거지."

"이게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

어느 정도 소화가 된 강현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뭐하냐?"

"운동해야지."

"갑자기 웬 운동?"

"너는 이 몸이 그냥 나올 것 같냐?"

"쯧, 별로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호들갑은."

아현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강현이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갔다.

팔굽혀펴기 200개

제자리 뛰기 200개

팔 벌려 뛰기 500개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해봤자 별 게 없었다. 게다가 강현은 원래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나마 알 고 있는 운동 몇 가지를 죽어라 반복했다.

"허억, 헉!"

처음 한 번은 할만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세트로 들어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몸이 지쳐갔다.

그렇게 점심 식사 직후 시작한 운동은 저녁 6시가 돼도 끝나지 않았다.

"너 그러다 죽어."

"헤엑, 헥."

아현의 말에도 강현은 숨을 내쉬느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실이었으면서 무슨 운동을 그렇게 무식하게 해."

"하아, 후..."

"내 말 안 들려?"

"너도... 몇 번 뒤지다 보면! 후우! 생각이, 바뀔 거다!"

흔히 죽을 고비를 넘기면 사람은 한층 성장한다고 말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몇 번만 헤쳐 나와도 베테랑 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강현은 생사를 넘나드는 것을 넘어서 아예 죽어버렸다.

"이렇게 운동해서 칼빵 하나 덜 맞으면 그걸로 족하다."

"미친놈..."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강현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저녁 먹고 슬슬 준비해야겠네."

**

[강현 님의 튜토리얼 입장을 환영합니다]

[현재까지 튜토리얼 2단계를 완료했습니다]

[3단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

[당신의 용기가 지구를 구원하기를]

익숙한 메시지와 함께 눈앞이 깜깜해지고,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세 번째 단계(stage 3)]

[어떠한 상황도 견뎌내는 당신의 끈기와 인내를 증명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 쿠르카 족장을 처치하십시오]

[실패 조건 : 사망]

[Tip.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입니다]

메시지와 함께 강현의 눈앞이 밝아졌다. 동시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강현은 평소와 달리 자신이 엎드려 있으며, 무언가로 덮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풀인데..?'

온갖 풀, 잡초들이 강현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강현은 이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길리슈트.'

흔히 저격수들이 은신하기 위해 입는다는 위장옷이었다.

대충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강현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쿠르륵, 꾸룩!"

멀지 않은 곳에서 꽤나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그곳을 바라보자 처음 보는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쿠르카 주민]

[쿠르카 전사]

150cm 정도에 갈색 피부, 근육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놈들이었다.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는데, 대부분이 주민이었다.

'분명 쿠르카 족장이란 놈을 잡으라 했지. 그렇다면 저기 깊숙한 곳에 족장이 있는 건가.'

주민들은 목에는 거대한 짐승의 이빨이 걸려 있었다.

간혹 보이는 전사들은 그런 이빨을 두 개나 달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그것의 개수에 따라 계급이 갈리는 듯했다.

'전반적으로 키는 고블린보다 작은데 몸이 근육질이네. 숫자도 많고.'

이번 단계의 테마는 끈기와 인내.

클리어 조건도 족장을 처치하는 것이라 했으니 저들 모두를 상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 기다려 보자.'

그 뒤로 강현은 죽은 듯이 엎드려 기회를 엿봤다.

"..."

계속. 계속 기회만 엿봤다.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 맞아?'

처음에는 견딜만했다.

전과 달리 무서운 불지옥도 없었고, 당장 괴물들과 칼을 들고 싸우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답답해서 미치겠어!'

꼼짝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강현의 생각보다 훨씬 피곤했고,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가끔씩 쿠르카들이 옆을 지나칠 때면, 놈들의 손에 들린 도끼가 머리에 내려칠 것 같은 기분에 떨어야만 했다.

'지금 상태에서 들키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죽어야 하는 건데.'

몇 번의 죽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면 이골이 났다 생각했지만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고문이었다.

차라리 당장 검을 들고 놈들과 마주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돼... 하루에 한 단계씩 클리어 해도 아직 5단계, 최소 5일은 남았다. 여기서 더 늦추지 않으려면 신중해야 해.'

집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튜토리얼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클리어해서 성장하고, 능력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인내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날이 어두워졌다.

그동안 강현은 쿠르카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1. 놈들은 50마리 이상으로 원시적이지만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다.

2. 숲의 공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놈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식량을 확보한다.

3. 족장은 나이가 들고 병약해 보이는 노령의 쿠르카이며 공터 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번째였다.

팁에서 말해준 기회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강현이 생각하기에 가정 적절한 기회는 강해 보이는 전사들이 사냥을 떠나는 그 순간이다.

'그래도 내부에 놈들이 많겠지만 전부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아. 여차하면 무시하고 족장만 찔러도 괜찮고.'

생각을 하며 강현이 자신의 손에 들린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제 날이 어두워져서 사냥을 나갈 것 같지는 않은데...'

-꼬르륵

한창 생각하는 도중 뱃속의 알람이 강현을 다그쳤다.

'배도 고프고, 근질거려 미치겠네.'

이미 반나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배가 고픈 것도 문제였지만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는 느낌에 당장 스트레칭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킁, 킁..

멀리서 놈들이 조잡하게 끓여 내는 음식 냄새가 강현을 유혹했다.

'지금 나가면 이때까지 기다린 거 말짱 도루묵이다. 적어도 밤까지는 기다려야 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는 강현의 눈이 조금씩 감겨왔다.

**

"쿠르륵, 쿠룩!"

"쿠룩! 쿠룩!"

갑자기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강현이 번쩍 눈을 떴다.

'시발! 설마 잠든 거야?'

엎드린 강현의 시야에는 꼬질꼬질한 수십 개의 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잠든 사이에 뒤척이다가 놈들에게 적발된 것 같았다.

'x됐다. X됐다고!'

위기기 닥치자 강현의 머리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크흠, 얘들아... 우리 대화로 해결하는 게 어때?"

"..."

"너희 원시인들도 나름 문명 생활이란 걸 하잖아..? 그지? 하하하!"

회전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어쨌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강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표현하려 했다.

"우리 우선 신사적…."

-퍽

계속해서 횡설수설하던 강현은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 도끼를 보고 체념했다.

그게 강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야아아!"

깨어난 강현이 거칠게 손을 흔들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야아아아아아!"

"닥쳐! 왜 아침부터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내가! 내가 몇 시간 동안 바닥에 엎어져 있었는데! 으아아아!"

강현은 평생 움직이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처럼, 미친 듯이 방을 뛰어다녔다.

"아래층에서 민원 들어온다고! 작작해 새꺄!"

"쿠헉!"

그 난동은 아현의 발차기에 얻어맞아 바닥을 구를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하루 종일 가만히 누워만 있다가 죽었다고?"

"그래."

잠시 후, 강현의 말을 들은 아현이 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푸후흐흡.."

"너는 오빠가 죽었다는데 웃음이 나와? 미친 거 아냐?"

"아니 여기 멀쩡히 살아있는데 죽긴 누가 죽어. 그냥 너무 병신같.. 푸흡, 아냐. 내가 미안해."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어디가."

"아침 먹어야지. 나 오늘 회사 쉴 거니까 같이 생각해 보자."

**

하루 종일 둘이 머리를 맞대 고민한 결과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 초반에 전사들이 사냥을 떠나 있을 때 쳐들어간다.

부족 안에는 여전히 많은 쿠르카들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여성이거나 어린아이들이었다.

잘만 하면 놈들을 헤치고 들어가 움막에 위치한 족장의 목을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 완전히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이 방법이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어떻게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열 시간을 넘게 버텨?"

7화 참지 않는 자(2)

7. 참지 않는 자(2)

세상에 못할 일은 없었다.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참자...'

강현이 바닥과 혼연일체가 된 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 위에 걸려있던 해가 달로 바뀐 걸로 봐서 일단 10시간은 넘게 지났을 것이 분명했다.

'하아, 거의 다 된 거였는데..!'

강현의 예상대로 대부분의 쿠르카들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강현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공터를 노려볼 뿐이었다.

'무슨 괴물 주제 보초를 서?'

무려 4마리의 쿠르카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둘 중 하나였다.

기약 없이 놈들이 졸기를 기다리거나, 조심스럽게 접근하거나.

'일단 앞으로 간다.'

튜토리얼에 입장하기 전, 강현은 저격수에 대한 글을 찾아봤다.

그중 마음에 드는 스토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헤스콕이라는 전설의 저격수에 대한 글이었다.

헤스콕은 적진에서 1분에 30cm씩 이동하여 총 3박 4일을 기어간 끝에 상대 장군을 저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강현의 이동속도는 1분에 10cm.

'난 새로운 전설을 쓰고 있는 거야...'

반쯤 맛이 간 상태로 중얼거린 강현은 느릿하게 앞으로 기어갔다.

위장막을 덮은 상태로 이동하는 강현을 보초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스르륵

바닥에 몸이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옷 안과 머리칼을 기어 다니는 벌레.

결국 지려버린 팬티와 바지.

온몸이 굳어버린 듯한 통증.

많은 것들이 강현을 괴롭게 했지만, 지금 강현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제발! 일어나서 스트레칭 한 번만 하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10시간 넘게 버텼다. 게다가 지금도 개미보다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강현은 그런 자신이 대견했다.

아마 몇 번의 죽음을 겪지 못했다면 절대 이렇게 빠르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르륵

손끝과 발끝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밀어 움직이기를 두 시간.

강현이 마침내 보초 옆을 지나칠 수 있었다.

그가 지나는 곳은 주위의 다른 곳보다 땅이 조금 꺼져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조금 쉰 냄새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바지에 지린 게 이제 올라오나?'

갑자기 올라오는 시큼함에 강현은 왜 아까 지린 냄새가 이제야 나는 건지 의아했다.

"쿠룩?"

그 순간, 옆쪽에 서있던 보초가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터벅, 터벅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강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뭐야?! 왜 오는 건데? 그냥 가. 제발, 제발, 그냥 가라고..!'

마침내 보초가 강현의 바로 옆에서 멈춰 섰다.

"쿠루르..."

-쪼르르르르...

동시에 뒤통수가 축축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강현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쿠루룩, 꾸루룩!"

그렇게 한참을 비워내던 놈은 어쩐지 들뜬 목소리를 내며 바지를 추슬렀다.

멀어져 가는 놈의 뒷모습을 보는 강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시발... 돼지 같은 새끼 오줌이나 쳐 맞으려고 이 고생을 했다니.'

심지어 냄새까지 지독했다.

한동안 신세를 한탄하던 강현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아직 족장이 있는 움막까지는 거리가 있어.'

족장의 움막은 공터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아직 공터 외곽에 있는 강현은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집중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당장 일어나서 뛸 수 있다면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이제 마지막이다. 강현아! 잘 해왔잖아? 할 수 있어!'

그때였다.

"쿠룩..?"

근처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던 쿠르카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킁, 킁

일어난 놈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내 강현의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코를 벌렁거렸다.

"쿠루룩! 쿠룩!"

그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굳이 해석하자면 왜 이런 지린내 나는 풀 더미를 여기 두었냐는 말이었다.

'아, 시발... 엿됐네.'

"쿠루룩! 쿠루루룩!"

'내 뒤통수에 오줌 싼 새끼는 반드시 죽인다.'

판단을 마친 강현이 벌떡 일어나 놈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커룩.. 컥..."

다행히 단검이 제대로 들어간 것인지 놈은 별다른 소리를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놈을 받아내며 강현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 잘하면 이대로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히죽 웃은 강현이 놈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던 때였다.

"쿠루루룩! 쿠룩! 쿠룩! 케루룩!"

아까 강현에게 시원하게 오줌발을 갈긴 쿠르카. 놈이 강현을 발견하고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런, 씨벌!"

강현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족장의 움막까지 달려가 족장을 찌른다면, 가능성은 낮지만 튜토리얼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족장의 움막이 아닌 저 보초에게 달려간다면, 보초를 죽일 가능성은 높지만 튜토리얼은 절대로 깰 수 없을 것이다.

"쿠룩! 쿠룩! 케루룩! 쿠라락!"

그 고민은 놈의 면상을 보자 바로 해결되었다.

"넌 죽이고 간다. 이 개새끼야아아!!!"

-띠링!

[스킬 분노의 사자후가 생성됩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그런 것을 확인할 때가 아니었다.

완전히 눈이 까뒤집힌 강현은 미친 듯이 놈에게 달려갔다.

언제 집어 든 것인지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쥔 채였다.

"쿠루룩?!"

"으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강현의 기세에 당황한 놈이 뒷걸음질 쳤다.

"쿠루룩! 쿠룩!"

가까이 다가가자 잔뜩 놀라 동그랗게 떠진 놈의 눈동자가 보였다.

놈이 다급히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늦었어. 이 새꺄!"

강현은 달라가던 기세 그대로 도끼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내려쳤다.

-퍽!

뒤통수에 도끼가 박힌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허물어졌다.

"하아, 하아... 꼴좋다. 하하하!"

"..."

"아까 오줌 쌀 때는 아주 신났지? 어?!"

이미 죽어서 대답할 수 없는 놈의 시체 앞에서 강현이 온갖 화풀이를 가했다.

"쿠르르르르..."

"쿠루룩! 쿠루룩!"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강현이 천천히 돌아섰다.

"어..? 음..."

그곳에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쿠르카 수십 마리가 모여 있었다.

"그래. 해보자. 해보자고. 퉤!"

손바닥에 침을 뱉은 강현이 쿠르카의 머리에서 도끼를 뽑아냈다.

**

"으게우웨으엑으게엑!"

잠에서 깬 강현이 미친 듯이 침대에서 버둥거렸다.

강현이 걱정되어 이른 시각부터 지켜보고 있던 아현이 정색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으게우엑우에으게에우엑!"

"닥쳐!"

이불 위로 날아드는 강력한 발길질에 강현이 발악을 멈추었다.

"하아..."

그 뒤로 강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난 못해."

"뭐가?"

"못한다고."

"뭐를?"

뜬금없는 강현의 말에 아현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못해! 못한다고! 그걸 어떻게 다시 버텨?! 못해! 안 해!"

"어휴, 저 병신..."

다시 시작된 강현의 발악에 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해! 못해! 못해!"

"그럼 하지 마! 미친 새꺄!"

그렇게 남매가 사자후 대결을 펼치던 그때, 갑자기 인터폰이 울렸다.

-띵동~ 띵동~

"네~"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꾼 아현이 현관문을 열자 피곤한 표정의 주인아줌마가 보였다.

건물주인 그녀는 소일거리로 빌라의 경비도 겸하고 있었다.

"이봐요. 아가씨."

"네..?"

아줌마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다 같이 사는 세상 아니에요? 내가 다른 집에서 민원 들어와도 그 집 처자가 그럴 일 없다면서 알아본다 했는데..."

"..."

"오늘 내가 와보니까 소문보다 더하네요."

"아, 저기... 그게..."

집주인, 경비 아줌마의 말에 당황한 아현이 말을 더듬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힘든 건 알겠지만 조용히 좀 부탁해요. 적어도 아침이랑 밤. 그때만이라도."

"네. 죄송합니다..."

"그럼 수고해요."

-쾅!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인아줌마가 떠나갔다.

아현이 뒤를 돌아보자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강현이 보였다.

"풉..."

"이게 다 너 때…!"

다시 소리를 지르려던 아현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잔뜩 인상을 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지만 강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너도 조만간 사자후 생기겠다."

"뭔 개소리야!?"

**

[강현 님의 튜토리얼 입장을 환영합니다]

"스킵, 스킵"

이제 지겨워진 메시지를 넘기며 강현이 눈앞이 밝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세 번째 단계(stage 3)]

[Tip.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입니다.]

메시지는 보는 강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기회?"

처음 튜토리얼이 시작할 때 전사들은 이미 사냥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사냥감을 가지고 부족으로 돌아온다.

"이딴 개같은 팁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

언제 전투를 벌이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

강현은 단연코 확신할 수 있었다.

튜토리얼이 시작하는 그 순간이 가장 최상의 컨디션이다.

"아, 잠깐만."

바로 쿠르카에게 달려가려던 강현이 잊은 것이 떠올렸다.

"분명 뭔 사자후라는 스킬을 얻었는데."

분노의 사자후(D)

능력 : 주변 적들의 능력치와 사기를 하락시킨다. 자신에게 걸린 각종 디버프(D등급 이하)를 해제한다.

설명 :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낸다. 이것은 적들에게 공포를 주며 자신에게 해로운 효과들을 날려버린다.

"뭐야... 왜 이렇게 좋은 스킬이 나온 거야?"

무려 D등급이다.

지금까지 F등급 외에 받아본 적이 없는 강현은 신기한 눈으로 설명을 읽었다.

"음... 그래서 사용법은 뭐야?"

[사용방법 : 스킬명을 떠올리며 힘찬 고함을 내지릅니다]

강현의 물음에 메시지가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심플하네."

스킬 확인을 끝낸 강현이 천천히 위장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이딴 걸리적거리는 풀떼기 당장 벗어야지."

위장옷을 벗어던진 강현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기다릴 필요 없이 족장 목만 따면 끝나는 게임이었어."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는 말에 끔뻑 속아 두 번이나 죽어버렸다.

사실 정석적인 공략은 그게 맞는 것이지만 강현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짓을 또 하라고? 못하지. 차라리 이 돼지새끼들 전부 멱을 따버리고 레벨업해서 깨는 게 빠르겠어."

준비를 끝낸 강현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단검은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게 낫겠지."

이름 : 평범한 롱소드

등급 : E

내구도 : 200 / 200

설명 : 시골 마을 경비들이나 차고 다닐법한 평범한 롱소드다. 투박하지만 나름 잘 만들어져 등급에 비해 매우 높은 내구도가 특징이다.

2단계를 클리어하고 받은 롱소드.

딱히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기존의 F급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케이. 준비 끝났고. 그러면..."

강현이 천천히 머릿속에 스킬을 떠올렸다.

"흐읍~"

그리 숨을 크게 들이 킨 다음 한 번에 터뜨린다.

"야아아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와씨, 뭐가 이렇게 커'

자신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에 강현이 깜짝 놀랐다.

그러한 놀람과는 별개로 다행히 스킬은 성공적이었고, 메시지를 확인한 강현이 곧장 놈들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쿠루룩!? 쿠룩?!"

"비켜!"

-퍽!

앞을 막아서는 작은 쿠르카를 걷어차며 강현은 시작 2분 만에 족장의 움막 앞까지 도달했다.

지난 도전에서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10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더 분통이 터졌다.

"쿠르륵! 쿠룩!"

근처에 있던 전사들이 도끼를 집어 들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전사들이 모이는 순간 끝이다. 그전에 끝내야 해.'

다행히 족장의 거처를 지키는 놈은 하나뿐이다. 저 놈만 잡는다면 족장까지 얇은 천막 한 장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흐압!"

놈에게 달려가던 강현이 넘어지듯 바닥을 굴렀다. 낮게 날아오던 도끼가 아슬아슬하게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퍽!

다시 도끼를 휘두르려는 놈을 걷어차서 넘어뜨린 강현이 곧장 천막을 열어젖혔다.

"쿠르륵..!"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만, 죽어줘야겠다!"

강현이 검을 들어 족장을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뭐야..?"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왜이래!?"

"쿠룩, 쿠룩!"

[스킬 하급 마력 구속에 당했습니다]

"시발! 무슨 튜토리얼 주제에 마법까지 써!?"

사실 정상적인 공략 루트로는 만날 일이 없는 마법이었다.

온몸에 힘을 주며 용을 쓰던 그때 강현의 머리가 번뜩였다.

"흐으읍! 풀려라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하급 마력 구속이 해제됩니다]

"됐다!"

"쿠르르르..."

짧은 환호도 잠시.

강현은 어느새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일곱 마리의 쿠르카 전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족장은 마법이 성공하자마자 빠져나간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쿠룩..."

"엘리베이터 씬 한번 가자. 드루와, 드루와 이 개새끼들아!"

-퍽, 스걱! 퍽!

**

"아..!"

눈을 뜨고 익숙한 천장을 마주한 강현이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화가 나서 움직일 수가 없어..."

며칠 사이에 매일같이 살갗이 베이고, 찢어지고, 구멍이 나고, 팔다리가 잘리는 등 날붙이로 겪을 수 있는 온갖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었다.

그 말은 더 이상 어지간한 고통 가지고는 정신을 잃거나, 충격을 받을 일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속에 차오르는 이 분노는 어쩔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는데... 다 깬 건데!"

결국 강현은 7마리의 쿠르카 전사 중 한 마리밖에 처치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한 마리의 목에 검을 찌른 순간 사방에서 날아온 도끼에 순식간에 난도질당했다.

"진짜 다 깼는데아아!!!"

"시발! 잠 좀 자자!"

-쿵, 쿵!

벽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아현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시무룩해진 강현은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8화 참지 않는 자(3)

8. 참지 않는 자(3)

잠에서 깬 아현은 방문을 여는 순간 기절할 뻔했다.

"뭐해?! 미친 새끼야!"

강현이 팬티만 입은 채로 허공에 부엌칼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하고 있는데?"

"하려면 너 네 집 가서 해. 이런 이 미친 또라이가!"

아현은 재빨리 부엌칼을 뺏어 들고는 강현을 방으로 밀쳤다.

"아니, 우리 집 없는…."

"시끄러!"

-쾅!

강현이 공허한 표정으로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운동이나 해야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체념한 강현이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

그렇게 한참을 운동하고,

"우걱, 우걱!"

점심시간이 되자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후욱, 후욱!"

식사 후 다시 운동을 하고,

"우걱, 우걱!"

저녁시간이 되자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그런 강현을 아현이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야..."

"어?"

순진무구한 강현의 눈망울에 아현이 눈을 돌렸다.

"아니다. 밥이나 먹어."

'식충이 같은 새끼...'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은 삼키며 아현이 TV를 틀었다.

한창 뉴스가 진행 중이었는데, 멀끔하게 생긴 앵커가 격앙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한 남자가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윌리엄 브라이언 씨는 3일 전….

"쩝쩝, 벌써 클리어한 사람이 나왔나 보네?"

강현이 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그러게. 역시 미국은 미국인가. 어쨌든 다행이다."

하지만 앵커의 이어진 말에 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던전에 들어간 10명 중 단 3명만이 살아 나온 것으로 보이며 자세….

10명 중 3명.

단순 계산으로도 사망률 70%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미친..."

"인터넷 또 난리 나겠는데?"

강현이 서둘러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확인했다.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초장부터 사망률 70%면 말 다한 거 아님?

-저기 들어간 애들 그냥 히어로 영화 오타쿠임. 정상인들이 가면 다를 것 같은데.

-오타쿠든 히키코모리든 튜토리얼 통과한 얘들이다. 심지어 한 명은 2단계도 통과한 놈임. 헤이스북 확인했음.

-살아남은 3명 중에 하나가 2단계 통과자라고 오피셜 떴다.

그 외에도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올라온 정보들을 추려보면 대략 이러했다.

1. 던전은 능력자만 들어갈 수 있다.

2. 던전의 입장과 퇴장은 자유롭다.

3. 던전을 클리어하는 방법은 내부에 위치한 던전의 핵(Core)을 파괴하는 것이다.

사실 워낙 초기이고 표본이 적었기에 최대한 확실한 것 위주로 정리했다.

그럼에도 100%라는 것은 없기에 강현도 참고만 하기로 했다.

"너는 던전 안 들어갈 거지?"

뉴스를 보던 강현이 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미쳤냐. 목숨이 남아돌아도 저런 데는 안 들어가."

"그래. 혹시나 해서."

그녀의 대답에 속으로 안도하며 강현이 그릇을 정리했다.

자기 몫의 설거지를 깔끔하게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강현을 아현이 불렀다.

"야. 지금 잘 거야?"

"씻고, 조금 있다가 자야지."

"그럼 같이 마트 좀 가자. 혼자 가기 좀 그래..."

아현이 괜히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평소와 달리 움츠러들어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심정을 말해주었다.

"너 쫄았냐? 크큭, 어차피 네 얼굴만 보면 다 도망... 아! 아파! 아프다고!"

결국 대충 모자를 눌러쓴 남매가 빌라 밖으로 나왔다.

강현은 튜토리얼이 시작되고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뭐 뉴스에서 난리부르스를 떨어도 생각보다 조용한데?"

"어휴 이 히키코모리. 그 조용한 게 문제다. 오늘 주말이잖아."

평상시의 주말 저녁 8시는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거리에서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가게마다 한주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넘쳐났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아... 듣고 보니 그러네. 군인들도 돌아다니고."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묘하게 긴장감이 흐르는 거리를 지나 마침내 마트에 들어섰다.

"음, 사야 할 것들이….

한창 아현을 따라 쇼핑을 하던 도중이었다.

"야. 저번에 우리 형이 튜토리얼 2단계 깼었다고 말했잖아."

바로 옆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이 이번에 튜토리얼 깬 친구들이랑 몰래 던전에 들어갔다 왔데."

"와씨, 대박!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뭐 몬스터 같은 거 존나 나왔데?"

흥미가 동한 강현이 천천히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자세히 듣기 위해 학생들 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였다.

굉장히 대놓고 수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뭐하냐."

"쉬이잇!"

옆에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는 아현.

강현은 그녀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검지를 코에 가져댔다.

"미친놈."

강현은 다시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무슨 고블린이 한 번에 열 마리나 나와서 다 죽을 뻔했대."

"뭐? 고블린?"

"그래! 그 형들 중에 한 명이 꿈에서 고블린이랑 싸운 형이었는데, 그 형 말 듣고 존나 튀어서 겨우 살았다는데?"

"지랄, 고블린이 세 봤자 얼마나 세다고 그거 보고 도망을 가냐. 던전 들어간 것도 구라 아냐?"

이야기를 듣던 강현이 대뜸 학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퍽!

"어억!"

머리를 부여잡으며 짜증을 내던 학생이 잔뜩 인상을 쓰며 돌아섰다.

"아씨! 누구야?!"

뒤를 돌자 보이는 것은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

"누, 누구세요..?

그 눈빛에 기가 죽은 학생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다시는 고블린을 무시하지 마라."

"예..?"

"한 번만 더 고블린 무시하면 그땐 뒤진다."

"이 미친 새끼야! 뭐하는 거야!"

결국 아현에게 똑같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강현이었다.

**

"다 덤벼! 이 개새끼들아아!"

"쿠룩, 쿠루룩!"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강현은 튜토리얼에 입장하자마자 스킬을 발동하고 거침없이 내달렸다.

"쿠르륵!"

"꺼져!"

몇몇 쿠르카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대부분 당황하며 허둥지둥될 뿐이었다.

그런 놈들을 강현은 닥치는 대로 베어내며 금세 족장의 천막 앞에 도착했다.

"쿠루룩!"

천막 앞을 지키고 있는 쿠르카 전사. 놈이 강현을 보고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이까짓 거!'

강현은 물 흐르듯이 그 공격을 피하고 그대로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단번에 급소를 찔린 쿠르카가 허무하게 쓰러지고, 강현은 그 시체를 넘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쿠르륵! 쿠룩!"

[스킬 하급 마력 구속에 당했습니다]

강현이 천막에 들어오자마자 날아오는 마법.

족장은 마법이 걸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천막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디가 이 개새끼야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하급 마력 구속이 해제됩니다]

"쿠룩?!"

강현의 검이 단번에 족장의 목을 베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족장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켜떠진 채였다.

[축하합니다. 3단계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중급 육체 재생(B)'을 받습니다]

[레벨업!]

[튜토리얼 3단계 최단 시간 통과! 신기록을 세우셨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임시 칭호 '참지 않는 자'를 획득합니다]

"이야아아아아! 깼다아아!!!"

환희에 찬 강현이 만세를 하며 뛰어다녔다.

"으아아! 힘들었다. 그래도 고블린 때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이번 튜토리얼로 또 다른 성장을 이뤄낸 느낌이었다.

"일단 보상을 확인하자."

강현은 가장 먼저 칭호를 확인했다.

참지 않는 자 : 인내와 끈기를 테스트하는 튜토리얼 3단계를 가장 빠르게 통과한 청개구리에게 주어지는 칭호. 기록이 바뀔 시 자동으로 칭호의 소유 또한 넘어간다.

효과 : 모든 스텟 +1

"오, 좋은데? 이제 다들 튜토리얼이 끝났으니 소유가 넘어갈 일은 없겠네. 아니야. 그건 아직 모르는 거구나."

만 18세가 되면 자동으로 튜토리얼에 입장한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튜토리얼 입장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글을 봤기 때문에 확실할 것이다.

"그래도 이 기록이 쉽게 깨질 리는 없지."

무려 3분도 걸리지 않아서 3단계를 깨버렸다. 처음 튜토리얼을 겪는 학생들이 쉽게 깰만한 기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음은 스킬인가?"

중급 육체 재생(B)

능력 : 신체에 가해진 손상을 마력을 이용해 재생, 복구한다.

설명 : 절단, 화상, 동상 어떤 상처든 마력을 이용해 저절로 회복한다. 중급에 달한 육체 재생은 박살난 뼈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회복하는 기적을 보인다.

설명을 보는 강현의 턱이 잔뜩 벌어졌다.

"엄청나네... 벌써부터 이렇게 대단한 걸 줘도 되는 거야?"

아직 튜토리얼 3단계밖에 클리어하지 못했는데 보상으로 B등급 스킬이 나왔다.

물론 던전에 들어갔더니 지천에 널린 게 A급 스킬이더라!-라는 전개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이 몇 날 며칠 검을 휘둘러서 얻은 능력이 F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전개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강현이었다.

"이제 능력치만 올리면 끝이네."

▫이름 : 강현

▫칭호 : 참지 않는 자

▫레벨 : 4 → 5 new!

▫상세 능력치 :

·근력 13 (+1)

·순발력 12 (+1)

·체력 12 (+1)

·마력 14 (+1)

·추가 스텟 : 0 → 1 new!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최하급 검술(F), 최하급 방패술(F), 최하급 석궁술(F)

▫스킬 : 분노의 사자후(D), 중급 육체 재생(B)

굉장히 다채로워진 상태창을 본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추가 스텟 1을 체력에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띠링!

마침내 모든 보상 확인이 끝났다. 하지만 강현에게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능력이랑 스킬이랑 다른 점이 뭐지?"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 정확한 판단은 어려웠다.

"뭔가 관련이…"

[대기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튜토리얼에서 퇴장합니다.]

강현의 생각은 메시지와 함께 끊어졌다.

**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크크크크... 이 오라버니 팔 좀 만져봐라."

"미친새끼..."

강현이 팔에 힘을 준채 정신 사납게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완전 돌덩이 아니냐?"

강현이 계속 자랑을 하자 호기심이 동한 아현이 조심스럽게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지랄, 돌덩이는 지금 네 대가리 안에 든 게 돌덩이지."

"아니 이년이 내가 뭘 했다고 시비야?!"

"네 존재 자체가 시비다!"

옥신각신하며 서로 펀치를 날리는 것도 잠시, 먼저 지친 아현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현도 그녀를 따라 바닥에 누웠다.

"그나저나 너 회사 안 가냐?"

"아직 좀 더 쉬어도 된데."

"무슨 회사가 매일매일 쉬라는 말만 하네. 유급 휴가?"

사실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안심한 강현이었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삐딱한 말이 나왔다.

"어휴, 이런 놈도 오빠라고. 요즘 같은 때 뉴스도 좀 보고 해. 지금 몰래 던전 들어갔다가 실종된 사람이 확인된 것만 100명이 넘는 거 알아?"

"그러냐..."

"게다가 군인 경찰들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말이야."

"..."

"어제는 어떤 미친놈이 장검을 들고 사람을 찌르고 다녔다는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회사를 나가?"

아현의 말을 들은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장검이면 롱소드인가...'

아마 2단계를 클리어하고 받은 보상을 이용한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은 인벤토리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정상적으로 튜토리얼을 끝냈다면 인벤토리, 상태창 사용이 가능했을 테니까.

"그런 거 말고 뭐 다른 이야기는 없어?"

"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서울을 시작으로 차차 던전을 클리어할 예정이래. 몇몇 국가들은 벌써 시작했고."

"괴물 앞에 특수부대가 뭔 소용이야. 던전에 총이라도 가지고 간데?"

"어."

"아, 그러냐..."

강현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던전 내부에서 모든 전자기기는 전부 먹통이지만, 나머지는 상관없데."

"그건 다행이네."

"우리한테는 그렇기는 한데 군인들한테는 아니지. 벌써부터 가족들이 시위하고 난리가 났어."

"왜?"

"위험하니까 그렇지! 어떻게 보면 이건 군인을 실험용으로 밀어 넣는 거나 다름없어."

"음, 확실히 좀 그렇긴 하다."

아직은 던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총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안전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철저하게 지원자로만 한다는데, 확실한 건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아."

아현의 말을 들으며 강현은 새삼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긴... 아현이는 어릴 때부터 꼼꼼하고 늘 침착했지.'

그런 어른스러운 성격 덕에 강현도 자주 그녀를 의지하곤 했었다.

"야. 강아현."

"왜."

"조금만 기다려. 조만간 내가 8단 계 까지 깰 테니까."

"..."

"그때가 되면, 아마 이 오라버니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일지도 모르지."

"지랄도 풍년이네. 아침에 일어나서 소리나 안 지르면 다행이지."

**

일주일 뒤.

"이 씨발 새끼들아아! 제발 말 좀 들어!"

강현의 앞에는 4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모두 불만에 가득 차있는 뚱한 표정이었다.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응? 너네도 살아 나가야 하지 않겠니?"

강현은 여전히 튜토리얼 4단계에 있었다.

9화 공포의 리더십(1)

9. 공포의 리더십(1)

강현의 고통은 튜토리얼 4단계에 입장하는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강현 님의 튜토리얼 입장을 환영합니다]

[현재까지 튜토리얼 3단계를 완료했습니다]

[4단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가자고!"

3단계 클리어 후, 자신감에 차오른 강현은 힘차게 튜토리얼 4단계에 입장했다.

[당신의 용기가 지구를 구원하기를]

메시지와 함께 눈을 뜨자 벽돌로 이루어진 어두운 통로가 나왔다.

통로는 일정하게 횃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마치 게임에 나오는 오래된 성(城)처럼 느껴졌다.

[네 번째 단계(stage 4)]

[모두를 이끌 수 있는 당신의 리더십을 증명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 던전의 핵(Core) 제거]

[실패 조건 : 사망]

[던전의 핵을 제거하면 자동적으로 던전 밖으로 나가는 포탈이 생성됩니다]

[Tip. 한 명의 파티원도 낙오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Tip.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메시지가 확인함과 동시에 강현의 눈앞에서 처음 보는 네 명의 남녀를 나타났다.

말다툼을 하고 그들을 보며 강현이 상황을 파악했다.

'이놈들을 데리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건가 보네.'

강현이 우선 파티원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각각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이진모]

검과 거대한 방패를 들고, 무거워 보이는 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여기는 딱 봐도 탱커고.'

[윤애선]

커대란 수정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꾀죄죄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성이었다.

'이쪽은 마법사 인가.'

[한태림]

나무 지팡이에 푸른 계열의 기품 있어 보이는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다.

'마법사일 수도 있지만... 분위기를 보니 사제, 힐러에 가깝겠어.'

[김연지]

탄탄한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가죽 방어구에 단검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소냐처럼 노출도가 오를수록 강해지는 클래스일 리는 없겠고. 도적인가?'

잠시 파티원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핀 강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롱소드, 가죽 방어구, 배낭까지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네.'

강현이 자신이 착용한 생소한 가죽 방어구를 확인했다.

이름 : 평범한 가죽 방어구 세트

등급 : E

내구도 : 457 / 500

설명 : 투구, 장갑, 부츠, 상의, 하의까지. 모두 평범한 가죽 방어구 세트다.

'좀 성의 있게 만들 것이지.'

강현은 전부 뭉뚱그려서 뜨는 메시지에 잠시 기분이 상했지만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냐.'

이번 단계를 클리어하는데 핵심은 파티원이다.

지금 눈앞에서 다투고 있는 넷은 실제 사람이 아닌 시스템 상 만들어진 사람들.

말하자면 게임 속의 NPC와 비슷할 존재일 것이다.

'이놈들을 정해진 시나리오대로만 유도한다면, 자연스럽게 이번 단계도 클리어할 수 있겠지.'

판단을 마친 강현이 파티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진모! 어떡할 거야? 여긴 어제 도 왔던 곳이잖아!"

잔뜩 흥분한 김연지가 벽에 긁힌 자국을 가리켰다.

"이거 보여?! 어제 내가 지나가면서 표시해둔 거라고."

그들의 앞에는 펼쳐진 것은 두 갈래의 통로. 그리고 일행은 이미 왼쪽 통로를 지나친 상황이었다.

"결국 이틀이나 뺑뺑 돌아서 제자리로 왔다는 거라고!"

"그럼 오른쪽으로 가면 되잖아."

김연지의 외침에 방패를 든 남자 이진모가 대답했다.

"그러다가 거기서도 길을 잃으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건..."

"이제 식량도 거의 남지 않았어. 언데드 던전이라 먹을 것도 못 구하는데 어떡할 거야?! 이번에도 길을 잃으면 그땐 끝이라고!"

잔뜩 흥분한 김연지가 외쳤다.

"그래서 뭐?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돌아가면 하루 만에 빠져나갈 수는 있고? 벌써 여기 들어온 지 열흘이나 지났어.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식량이 다 떨어질 거야."

둘의 설전을 들은 강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은 떨어지고, 길을 잃었다... 전형적인 상황이네.'

그사이에도 둘의 다툼은 끝날 줄을 몰랐다.

"왔던 길 그대로, 함정이 해제된 곳만 잘 골라서 가면 돼."

"..."

"그러면 삼일! 빠르면 이틀 안에 도착할 거야. 식량을 아껴먹으면 충분해."

"그건 네 생각이지!"

말을 하는 김연지와 이진모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이젠 서로 삿대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진모 네가 이 던전에 들어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을 없었어."

"야! 다 같이 동의해서 들어와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몰라 나는 돌아갈 거야. 이렇게는 못 죽어. 너희들도 알아서 해."

결국 참지 못한 김연지가 그대로 뒤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모야. 나도 연지 말이 맞는 것 같다. 돌아가는 게 살 가능성이 더 높아."

"한태림. 지금 연지랑 사귄다고 편드는 거냐? 냉정하게 생각해. 목숨이 달린 일이야!"

"지금 여기서 사귀는 게 왜 나와?!"

사제, 한태림이 대화에 끼어들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얼씨구.'

강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끼어들기로 결정했다.

"잠깐!"

갑작스러운 강현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우리 조금만 침착하자."

"충분히 침착하고 있거든?"

강현의 말에 김연지가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우리가 던전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지?"

"여긴 해가 없어서 확실하진 않은데... 열흘은 넘은 것 같아."

분명 팁에서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전처럼 팁을 무작정 신용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잘못된 정보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일반적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는데 얼마나 걸려?"

"이 정도면 길어봐야 열흘이지."

이진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우린 이미 목표에 거의 다 도달한 걸지도 몰라. 지금까지 앞으로 나아갔잖아?"

"하지만…."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우리는 지금까지 8일 동안 문제없이 이동했지?"

"그건 그렇지..."

강현의 말에 김연지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래! 이제 정말 목표에 거의 도달했을 거야. 아직 가지 않은 오른쪽 통로로 간다면, 분명 하루 이틀 안에 코어가 나올 거야."

강현이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나름 조리 있게 설득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길을 하루 만에 돌아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도중에 길이라도 한번 잘못 들면, 그때는 진짜 굶어 죽게 될 거야. 이럴 때일수록 더 뭉쳐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말을 하는 강현은 확신에 들어찼다. 분위기도 완전히 자신에게 넘어온 상태다.

'됐다.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훌륭한 연설이었어.'

"만약 저 길로 갔는데 하루 안에 코어가 안 나오면 책임질 거야?"

"어?"

그러나 갑작스럽게 김연지의 입에서 책임론이 나오자 강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임질 거냐고? 책임 못 지잖아.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야 함정 해제할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김연지와 이진모의 대화를 들으며 강현이 생각했다.

'던전에 함정이 존재하는 건가? 김연지는 그 함정을 해제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렇다면 다른 놈들은 몰라도 김연지는 꼭 있어야 해.'

계산은 빠르게 끝났다.

"책임질게."

"뭐?"

"책임진다고."

"어, 어떻게 책임질 건데?"

당당한 강현의 말에 당황한 김연지가 말을 더듬었다.

"지금 내가 가진 식량 전부 너한테 줄게."

"..."

"그럼 너는 하루 이상 시간을 버니까 그만큼 코어를 찾을 확률도 늘어날 거야."

"하아..."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김연지가 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지금 당장 줘."

'이년이...'

그 모습에 강현이 이를 갈며 배낭을 열었다.

생수 한 병과 말린 육포 조금, 빵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 내용물을 모두에게 확인시킨 뒤, 강현이 곧장 김연지에게 배낭을 건넸다.

"자 가방 통째로 너 줄게."

"흥! 됐으니까 식량만 넘겨. 가방은 네가 들어."

"..."

억지 미소를 짓던 강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 그래..."

김연지가 강현의 식량을 건네받고, 일행은 오른쪽 통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끼익, 철컥

김연지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며 온갖 함정을 해제했다.

그녀가 무언가를 조작할 때마다 멀리서 화살이 날아오거나, 바닥에서 창이 올라오는 등 고전적인 함정들이 발동되었다.

'김연지를 데리고 온건 역시 현명한 판단이었어.'

"멈춰!"

계속해서 길을 가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김연지가 작게 소리치며 일행을 멈춰 세웠다.

"적이야. 해골 병사가 4마리, 기사가 한 마리야."

"좋아. 그럼 하던 대로 가자."

김연지의 말에 이진모가 방패를 들며 자세를 잡았다.

"기다려 버프부터 받아. 헤이스의 축복. 인디아의 가호. 성스러운 힘!"

[순발력이 10분간 1스텟 증가합니다]

[체력이 10분간 3스텟 증가합니다]

[무기에 성스러운 기운이 깃듭니다. 10분간 언데드 몬스터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생각보다 사제의 역할도 크겠어. 언데드 던전이라면 더욱.'

버프로 인해 강현의 스텟이 상승하고 들고 있는 검에 새하얀 기운이 맺혔다.

"내가 먼저 한방 먹일게."

마지막으로 꾀죄죄한 로브를 입고 있던 윤애선이 앞으로 나섰다.

"폭발하는 화염!"

그녀가 지팡이를 내밀며 외치자 불덩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던 불덩이는 이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적들의 사이에 폭발을 일으켰다.

'원래 이렇게 오글거리게 스킬 명을 외쳐야 하나?'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강현이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달그락, 달그락!

뼈만 남은 해골이 넷.

갑옷을 차려입은 해골 하나.

총 다섯의 적들이 검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놈들의 뼈가 불에 그을려있고 곳곳이 부서진 걸로 봐서 마법이 제법 효과가 있는 듯했다.

"흐아! 전사의 외침!"

해골이 근처까지 다가오자 이진모가 스킬을 외쳤다. 그러자 모든 해골들이 이진모에게 달려들었다.

그 빈틈으로 김연지가 단검을 휘둘렀다.

"강현. 뭐해!? 너도 공격해!"

김연지의 다급한 외침에 강현이 재빨리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파각!

아무 생각 없이 횡으로 휘두른 검에 해골의 팔 한 짝이 날아가 이진모의 머리에 부딪혔다.

"정신 안차려?!"

"미안해!"

'파티 플레이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해골 병사들은 지금껏 싸웠던 고블린이나 쿠르카보다 강력했다. 특히 해골 기사는 일대일로 붙었다면 필패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났다.

그런 상황에서 중간에 강현의 실수가 있었음에도 사냥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파티원들이 하나같이 잘 싸우네.'

강현은 다시 한번 이번 단계의 핵심이 본인의 능력이 아닌 파티에 달려있다고 확신했다.

"휴우... 다들 수고했어."

이진모가 방패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리품은 별다른 게 없네. 놈들이 쓰던 검은 딱히 돈이 안 되고, 기사 갑옷도 너무 망가져서 못쓰겠다."

"드롭템은 따로 없어?"

"없어. 마정석이나 꺼내자."

놈들이 지니고 있던 아이템 외에도 별도의 드롭아이템이 존재하는 듯했다.

-끼익, 끽!

파티원들은 각자 두개골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잠시 단검으로 그 속을 파내자 작은 보석 같은 것이 나왔다.

"자 여기. 이건 강현 네 몫이야."

아이템을 받아 든 강현이 설명을 확인했다.

이름 : 마정석

등급 : F

설명 : 해골 병사의 마정석이다.

'이걸 어디에 쓰는 거야?'

고블린이나 쿠르카를 잡았을 때는 보지 못했던 물건이다. 아마 몸속을 따로 헤집어야 찾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눠가지는 걸 보니 중요한 거겠지.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 놓자.'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일행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강현! 우리가 잡을 동안 어그로만 끌어줘! 버티기만 하면 이겨!"

몬스터는 몇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

이번에는 등장한 적은 무려 여섯.

해골 병사 넷과 기사가 둘이었다.

꽤나 많은 적이었기에 모든 어그로를 끌 수 없던 이진모가 해골 기사 하나를 강현에게 맡겼다.

-챙!

강현은 날아오는 검을 받는 순간 손에 쥔 검을 놓칠 뻔했다.

'뭐가 이렇게 세?'

해골 기사의 검을 받아낸 손아귀가 약간 찢어졌다.

다행히도 새로 얻은 '중급 육체 재생' 덕에 금세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챙! 챙!

"크윽..!"

검을 통해 전달되는 충격에 당장에라도 검을 놓칠 것 같았다.

강현은 이를 악 물며 버텼다.

'여기서 도망치면 안 돼!'

몇 번의 전투로, 공격을 맞대지 않고 도망친다면 어그로가 풀린다는 것을 배웠다.

이러나저러나, 살기 위해서는 적을 붙잡고 버텨야 하는 것이다.

"으아아! 아직 멀었어?!"

"이제 간다!"

강현은 그렇게 5분을 버텨냈다.

그리고 다른 몬스터를 정리한 파티원들이 합류한 덕에 마지막 해골 기사를 정리할 수 있었다.

"휴... 이번에는 위험할 뻔했다. 그래도 다들 잘해줬어."

이진모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야영을 하자."

이진모의 말에 파티원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야영 준비라고 해도 간단하네."

야영 준비는 각자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눕는 것이 전부였다.

던전 내부가 밀폐되어 있고 온도가 적당한 곳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늘 하던 대로 제비뽑기로 불침번을 정하고 6시간만 자도록 하자. 처음 불침번이 두 시간을 서는 거야."

"알겠어."

제비뽑기 결과 강현이 첫 번째 불침번이 되었다.

"하나당 한 시간이니까 두 개 다 태우면 다음 순번 깨워."

이진모의 말을 끝으로 일행이 모두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10화 공포의 리더십(2)

10. 공포의 리더십(2)

타들어가는 향을 보며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전자기기를 쓸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시간을 확인하는구나.'

-화르르

벽에 걸린 횃불이 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변은 고요했다.

-달그락… 달그락…

아주 희미하게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움직이는 놈들의 소리가 통로를 울려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야. 레벨업도 잘 되고'

강현이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강현

▫칭호 : 참지 않는 자

▫레벨 : 6

▫상세 능력치 :

·근력 13 (+1)

·순발력 13 (+1)

·체력 13 (+1)

·마력 14 (+1)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최하급 검술(F), 최하급 방패술(F), 최하급 석궁술(F)

▫스킬 : 분노의 사자후(D), 중급 육체 재생(B)

튜토리얼을 클리어하지 않고 사냥만 했을 뿐인데도 레벨이 올랐다.

게다가 파티 단위로 움직이니, 혼자 사냥할 때보다 훨씬 안정감 있는 느낌이다.

'너무 꿀인데..?'

시작하자마자 식량을 전부 김연지에게 주어서 배를 굶주린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튜토리얼의 난이도들을 생각하면 이깟 배고픔 따위, 힘든 축에도 못 들었다.

정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김연지도 생각보다 조용히 따라오고 말이야.'

솔직히 몇 번의 전투가 치러져도 던전의 핵이 보일 기미가 없을 때, 김연지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군말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생각만큼 나쁜 애는 아닌 건가. 나도 이대로 던전의 핵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조금 불안했는데 말이지.'

순간 강현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려쳤다.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갑작스레 파고드는 불길한 생각을 강현이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하지만 한번 든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년 이거 튀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고 되뇌었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야. 혼자서 뭘 하겠어.'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지니고 있던 2개의 향이 모두 타버린 것을 확인한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불침번을 깨워야지.'

공교롭게도 다음 불침번은 바로 김연지였다.

조심스럽게 김연지에게 다가간 강현은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으응..."

잠시 뒤척이던 김연지가 눈을 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다음 순번이야."

"어..."

"그럼 수고해."

김연지가 완전히 깨어난 것을 확인한 강현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안 와...'

피곤함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안한 생각에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뭐하나 살펴볼까..?'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던 강현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연지와 눈이 마주쳤다.

"안자?"

김연지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이건 무조건이다.'

강현은 200% 확신했다.

김연지는 도망칠 생각이다.

"어. 자야지. 피곤한데 잠이 안 오네."

"내가 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고마워."

웃으며 인사를 건넨 강현이 눈을 감았다.

'시발... 걸리기만 걸려라.'

강현은 피곤함에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힘껏 허벅지를 꼬집으며 버티기를 수차례.

마침내 김연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자 한태림을 깨우고 있는 김연지가 보였다.

흥분한 강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불침번은 윤애선 아니야?"

"어!? 그랬나? 내가 착각했나 봐. 하하..."

강현은 점점 다가가고 당황한 김연지는 뒤로 물러났다.

"착각한 거 맞아? 내 생각엔 둘이서 튀려 한 것 같은데."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지금 상황에 믿음이 제일 중요한 거 몰라?"

"그래 믿음이 중요하지. 그러니까 배낭은 내려놓고 말하…. 컥!"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강현의 의식이 끊어졌다.

**

"어떡해... 어떡하냐고!"

날카로운 외침에 두개골이 울리는 것 같았다. 강현이 인상을 쓰며 눈을 뜨자 울고 있는 윤애선이 보였다.

"연지랑 태림이도 없이 우리끼리 어떡해!"

결국 우려하던 대로 커플이 야반도주를 했다.

'그 연놈들..!'

"일어났냐."

옆에서 힘없는 이진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연지랑 한태림이 튀었다. 도망치면서 식량도 다 챙겨 갔어."

"하... 씨발..."

강현이 마른세수를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게 다 강현. 너 때문이야! 연지랑 태림이 말대로 처음부터 돌아갔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피곤하고 배고프고 짜증까지 나는 상황이다. 강현은 윤애선의 어이없는 말에 대꾸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때려치워. 이제 나도 모르겠다."

강현이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웅! 부웅!

그리고 다짜고짜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뭐해."

이진모가 미친놈 보듯이 강현을 바라봤다.

"신경 꺼. 나는 이렇게 오늘을 날릴 수 없거든. 연습이라도 좀 더 해야지."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신경 끄고 네들 알아서 하라고. 가다가 뒤지든지 말든지."

"뭐 이 자식아?!"

이진모가 발끈하며 일어났지만 강현은 본 체도 하지 않고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내버려둬. 미쳤나보지."

"후우... 우리끼리라도 조금 더 가볼래?"

이진모의 말에 윤애선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식량이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둘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강현, 정말 안 갈 거야?"

-부웅, 부웅!

이진모가 마지막으로 강현을 불렀으나 강현은 무시로 일관했다.

'여기서 스텟 올릴 때까지 휘둘러보고 죽기 직전에 움직이자.'

오늘 클리어는 이미 글렀으니 최대한 이득을 취하고, 정보나 모으자는 속셈이었다.

"하... 무리야 도저히 못하겠어."

몇 시간 후. 지친 강현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가 고파서 도저히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체력이 올라서 그런가. 이제 스텟 하나 올리는 것도 일이네."

이를 꽉 깨물고 더 해보려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배고픔에 실신할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이 이진모와 윤애선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약 10분이 흐르고.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는 윤애선의 시체가 나타났다.

"독화살 인가..."

피격 부위가 심각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 단순한 화살은 아닌 것 같았다.

강현은 윤애선이 쓰러진 위치를 유심히 확인한 뒤 길을 걸었다.

"후우..."

다시 30분 후.

한 무리의 해골 병사들과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진모는 그 사이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미련한 새끼들... 그냥 뒤돌아 가기나 할 것이지."

괜히 시체를 보자 마음이 착잡해진 강현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강현이 크게 호흡을 들이켰다.

"야아아!"

강현의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열 쌍의 텅 빈 안광이 모여들었다.

"다 덤벼! 이 뼈다귀새끼들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언데드는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적들의 능력치가 일부 감소했습니다]

**

"안 자?"

역겨운 말투로 김연지가 물어왔다.

'이 가식적인 년...'

다음날.

강현은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튜토리얼을 진행했다.

마침내 불침번을 교대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강현은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냈다.

"연지야."

"어..?"

강현이 갑자기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김연지가 당황했다.

"조금만 더 가면 던전의 핵이 나올 거야. 정말 다 왔어."

"그래..."

"그러니까 오늘 한 번만 참아주면 안 되겠니?"

김연지보다 더 가식적인 강현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도망가려는 거잖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그걸 어떻게...!"

놀란 김연지의 눈이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네 눈빛만 봐도 안다니까. 연지야. 우리 조금만 더 견뎌보자. 제발 부탁이야. 응?"

강현은 다정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강아현이 봤다면 당장에 헛구역질을 할 법한 장면이었다.

"휴우... 알겠어.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여.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고맙다. 고마워! 연지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현은 절대 잠들 생각이 없었다.

'도망가기만 해 봐라...'

눈을 감은 채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버티기를 한참. 마침내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또 한태림을 깨워서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작게 실눈을 뜬 강현의 시야에 빠르게 다가오는 단검의 끝이 보였다.

**

"으아아아! 이 씨발년아!!!"

"이 미친새끼가 아침부터 왜 쌍욕이야?!"

강현은 눈을 뜨자마자 괴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강아현이 강현을 힘껏 걷어찼다.

"후우, 내가 다시는 믿나 봐라!"

그 뒤로도 강현은 계속해서 죽었다.

우선 김연지의 배신으로 한 번.

다시는 믿지 않는다 했지만 결국 한 번 더 설득을 시도하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한 것이다.

'차라리 방법을 바꿔보자.'

후에 생각을 고쳐먹은 강현은 처음부터 김연지와 한태림을 보내버렸다. 그리고 이진모와 윤애선만 데리고 던전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함정 위치는 다 기억하고 있어.'

제법 실력이 늘은 강현이 악전고투를 벌였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지쳐버린 윤애선이 포기를 선언하고, 그 모습에 이진모까지 멘탈이 흔들려 2번을 더 죽었다.

사실 그 둘이 포기하지 않았더라도 마지막까지 가는 일은 요원했을 것이다.

"으아아아!"

다시 튜토리얼에 입장한 강현.

이번에는 독특한 컨셉으로 나아가로 했다. 바로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작전.

"여기서는 독화살이 날아올 거야."

"다음은 해골 병사 넷. 해골 기사 하나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모든 함정을 꿰뚫고, 어떤 적이 나올지 척척 알아맞히는 강현의 모습에 일행들은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강현이 경험한 곳을 모두 통과하고, 알지 못하는 부분에 접어들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도전 8일째...

"이 씨발 새끼들아아! 제발 말 좀 들어!"

강현의 앞에는 4명의 남녀가 서있었다.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응? 너네도 살아 나가야 하지 않겠니?"

"드디어 미친 거야?"

김연지의 말에 강현의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갔다.

"그래. 미쳤다. 미쳤지. 왜 미쳤을까? 응? 내가 왜 미쳤을까?! 어!?!"

강현이 김연지의 멱살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야! 쟤들 말려!"

이진모와 한태림이 달라붙어 둘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너도 똑같은 새끼야. 알아?! 김연지 꽁무니 따라다니니까 뭐 좋은 거라도 떨어지든?!"

갑자기 김연지에서 한태림으로 타깃을 바꾼 강현이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냈다.

"이 새끼 이거 왜 이래?"

"으아아아! 다 꺼져! 나 혼자 깰 테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이 씹새끼들아아!"

결국 폭발한 강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잠시 후...

"이 병신 함정에 걸렸네."

"그러게 왜 혼자 뛰쳐나가서..."

어쩐 일인지 네 명이 모인 일행은 혼자 나아가다 화살에 맞아 쓰러진 강현을 발견했다.

**

다시 다음날.

'침착해. 침착해. 침착하라고, 침착!'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함정의 위치를 잊어버렸다. 다시 튜토리얼에 입장한 강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검을 챙겨 나갔다.

"강현! 어디가?"

뒤쪽에서 이진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다 죽여 버리겠어..."

**

또다시 다음날.

강현은 해골 병사 넷과 해골 기사 하나를 만났다.

고전 끝에 결국 병사 넷을 모두 처치했지만, 결국 기사의 검에 몸이 이등분되고 말았다.

그나마 레벨업을 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

다시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 다음날…

**

"야."

"왜."

식사 도중 아현이 강현을 불렀다.

"눈 까리에 힘 좀 풀어. 소름이 다 끼치네. 누구 죽이러 가?"

아현의 말에 강현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니... 나는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입술을 내민 채 먼 산을 바라보는 아현을 잠시 지켜보던 강현이 다시 밥을 욱여넣었다.

'이 새끼 진짜 사고 치는 거 아냐..?'

아현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다.

**

[강현 님의 튜토리얼 입장을 환영합니다]

[네 번째 단계 진행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곧바로 이동합니다]

[당신의 용기가 지구를 구원하기를]

평소처럼 떠오르는 메시지를 강현이 멍하니 바라봤다.

"벌써 며칠 째지...?"

고민해 봐도 알 수 없었다.

튜토리얼에 입장한 강현은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이름 : 강현

▫칭호 : 참지 않는 자

▫레벨 : 14

▫상세 능력치 :

·근력 17 (+1)

·순발력 16 (+1)

·체력 16 (+1)

·마력 14 (+1)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하급 검술(E), 최하급 방패술(F), 최하급 석궁술(F)

▫스킬 : 분노의 사자후(D), 중급 육체 재생(B)

어느새 레벨은 14에 도달해 있었고 검술 또한 한 단계 상승했다.

그동안 강현은 단순히 적을 많이 죽인다고 해서 레벨과 스킬 등급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레벨은 자신의 강함을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레벨로 인한 능력치 증가는 그것과 별개로 자신을 강하게 해 주었다.

"지난번 싸움에서 분명 던전의 핵을 확인했어. 오늘 이 새끼들 데리고 끝낸다."

11화 공포의 리더십(3) - 20.02.29

11. 공포의 리더십(3)

"야아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튜토리얼에 입장한 강현이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파티원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해 버렸다.

강현이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뚜벅, 뚜벅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앞으로 걸어간 강현이 일행의 중심에 멈춰 섰다.

"우리가 여기 들어온 지 열흘이나 지난 거 알아."

파티원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강현이 말을 이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식량은 떨어지고, 불안하겠지. 그래. 나도 이해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모습이 정말 가슴 깊이 이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순간 강현의 분위기가 돌변하며 완전히 눈이 돌아 버렸다.

"너 갑자기 왜이래..?"

그 모습에 당황한 이진모가 말했다.

"닥쳐! 이제부터 전부 내 말에 따른다. 죽기 싫으면 그냥 따라와."

"네가 뭔데 따라오라 말라야?! 나는 돌아갈 거야.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김연지의 말에 강현이 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노려봤다.

'어차피 실제 사람도 아니야.'

강현이 칼끝이 눈 깜짝할 사이 김연지의 목에 닿았다.

"여기서 죽든지 나를 따라오든지 선택해라."

"너 진짜 미쳤냐?"

그 모습에 한태림이 소리치며 강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퍽!

"크악!"

강현은 단숨에 검면으로 한태림의 얼굴을 후려쳤다.

한태림의 입에서 새하얀 이가 빠져나오며 피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여기서 죽던지 나를 따라오든지 선택해."

**

그 후, 파티는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이미 모든 함정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김연지가 해제할 틈도 없이 강현이 앞서서 함정을 발동시키고 모두 피해버렸다.

"얘 뭐야...?"

파티원들은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윤애선! 마법 날리고 한태림은 버프!"

[순발력이 10분간 1스텟 증가합니다]

[체력이 10분간 3스텟 증가합니다]

[무기에 성스러운 기운이 깃듭니다. 10분간 언데드 몬스터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혼자서도 던전의 핵, 바로 앞까지 갔던 강현이다.

이제는 마법으로 일차적인 타격을 주고 버프까지 받자, 그야말로 미친 듯이 적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챙! 쾅!

-달그락, 달그락!

날아오는 검을 쳐낸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해골 병사 하나를 발로 쳐서 날렸다.

그사이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해골 기사의 검을 피하고.

강현이 그대로 기사의 목을 내려쳤다.

"크읍!"

그때 뒤쪽에 있던 해골 병사의 검이 강현의 등을 갈랐다.

갑옷이 갈라지며 불에 댄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강현은 작은 신음만 내뱉고 곧장 병사의 두개골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말도 안 돼..."

5분도 지나지 않아 강현의 주위에는 부서진 뼛조각만이 남게 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눈을 빛내는 강현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보였다.

"야... 괜찮은 거야?"

이진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강현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놔두면 알아서 회복될 거야. 계속 간다."

"그러다가 쓰러져! 조금이라도 쉬어야지."

강현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평소에 말을 아끼던 윤애선까지 강현을 말렸다.

"닥쳐! 아니, 아니야. 한태림 나한테 힐 넣어. 회복 후에 이동한다."

완전히 명령조였지만 강현의 기세에 압도된 한태림이 얌전히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으음..."

상처가 조금 회복되는 것을 느낀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혼자서 갈 때는 금방 마력이 떨어져서 회복하는데 오래 걸렸지.'

3단계를 클리어하고 받은 '중급 육체 재생(B)'은 충분히 등급 값을 했다.

어떤 상처라도, 심지어 팔이 잘리더라도 금세 회복됐던 것이다.

그러나 강현의 마력은 고작 14.

처음 받은 스텟에서 한 번도 성장하지 않았다.

결국 마력이 고갈됨을 느끼며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솔로 플레이의 한계를 느꼈던 강현이었다.

'확실히 버프에 힐까지 받으니 좋긴 좋네.'

그렇게 몇 차례의 전투가 더 이어졌다.

이제는 파티원들도 강현의 옆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돕고 있었다.

강현의 기세에 어쩌면 살아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별다른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몇 시간.

마침내 그들이 넓은 홀에 도착했다.

"코어가 있어. 저것만 부수면 살 수 있다고!"

무려 다섯이나 되는 해골 기사가 자리를 잡은 홀의 중앙.

그 기사들 사이에 위치한 던전의 핵을 보고 김연지가 외쳤다.

"호들갑 떨지 마. 침착해야 돼. 이번에 무조건 깬다."

김연지가 들뜨며 방방 뛰어다니자 강현이 싸늘하게 노려봤다.

"어. 그래야지..."

강현의 눈빛에 기가 죽은 김연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애선이 마법을 날리면 내가 세 마리 어그로를 끈다. 너네끼리 두 마리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

파티원들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나를 도와서 나머지를 처리해. 그럼 모두 살아서 나가는 거야."

"좋아!"

무려 하루 만에,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도착했다.

첫날에 절반 정도 지점에서 야영했던 것을 생각하면 모두 피로에 절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모두가 피곤함도 잊고 전의를 다졌다.

"가자!"

"폭발하는 화염!"

해골 기사가 뭉쳐있는 지점에 화염이 터지고.

동시에 강현이 앞으로 달려갔다.

'폭발에 사야가 가려져 있어. 그사이에 한 마리를 처리한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강현이 온몸의 무게를 실어 검을 휘둘렀다.

-스걱!

그 검격에 해골 기사 하나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남은 놈들이 텅 빈 안광에서 빛을 내며 강현에게 달려들었다.

"어그로 분산시켜!"

"흐아! 전사의 외침!"

강현의 외침과 동시에 이진모가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세 마리의 해골 기사가 이진모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진모의 탱킹 능력으로 세 마리는 무리야.'

재빠르게 판단한 강현이 해골 기사 하나에게 달려들어 주의를 돌렸다.

"어디가 이 새끼야!"

-챙, 챙!

"흐아아압!"

해골 기사 둘이 정신없이 강현을 몰아붙였다.

'이 자식들, 다른 해골 기사들보다 더 강해!'

놈들은 지금껏 던전에서 봤던 해골 기사보다 훨씬 더 강했다.

하지만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 너희 둘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

-채앵!

강현이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검을 쳐올리자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해골 기사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검을 손에서 놓친 놈을 걷어차고.

강현이 나머지 한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제 해골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제발 뒤져!"

놈들은 이미 죽어있는 해골이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퍼걱!

-달그락, 다라락...

강현이 검을 비틀며 투구 사이로 밀어 넣자 해골 기사의 붉은 안광이 희미해졌다.

-깡!

강현이 바닥에 검을 내려쳐 검에 꽂힌 기사의 머리를 박살 냈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다른 놈의 상체를 발로 밀어 누르고는 검을 역수로 쥐어 두개골을 내려찍었다.

-콰직!

"후우..."

뒤를 돌아보자 파티원들도 하나의 해골 기사를 처리한 것이 보였다.

거기에 강현이 합류하자 금세 마지막 해골 기사까지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해냈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고!"

"후우... 이제 정말 끝난 건가."

이 스테이지에서 몇 번이나 죽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클리어에 성공했다.

파티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까지 흘리며 뛰어다녔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이 전리품을 챙겼다.

[해골 기사의 마정석을 습득합니다]

인벤토리를 열자 제법 쌓인 마정석들이 보였다.

[해골 병사의 마정석 x247]

[해골 기사의 마정석 x56]

[해골 기사의 검 x5]

[해골 기사의 투구 x4]

[해골 기사의 건틀릿 x5

[해골 기사의 흉갑 x3

[해골 기사의 다리갑옷 x4]

[해골 기사의 구두 x6]

마정석은 보이는 대로 챙기다 보니 어느새 300개를 넘겨버렸다.

그 외에 장비는 가장 상태가 양호해 보이는 기사의 것들만 챙겼다.

'응..?'

그때 강현의 눈에 평소와 다른 아이템이 보였다.

"책..?"

[일도양단]

아무래도 스킬과 관련된 것 같았다.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두자.'

강현이 전리품 확인을 끝냈을 시점에 모든 파티원이 모였다.

"이제 가자."

"그래."

다섯 명의 일행이 던전의 핵(Core) 앞에 멈춰 섰다.

핵은 고풍스러운 거치대 위에 마치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는데, 기묘한 힘이 느껴졌다.

'잘가라.'

강현은 망설임 없이 검으로 핵을 내려쳤다.

그러자 4명의 남녀가 사라지고, 눈앞에 푸른 포탈이 열렸다.

강현은 곧장 포탈에 뛰어들었다.

[축하합니다. 4단계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강인한 정신의 반지를 받습니다]

[레벨업!]

레벨업과 함께 강현이 클리어 보상을 확인했다.

"강인한 정신의 반지..?"

이름 : 강인한 정신의 반지

등급 : B

내구도 : 100/100

설명 : 헨델릭 제국에서 근위기사들에게 지급했던 반지이다. 비록 보급형이나 최고에 위치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물건인 만큼 뛰어난 성능 자랑한다.

능력 : 착용자에게 A등급 이하의 모든 정신 관련 마법, 정신 관련 상태 이상에 면역을 부여한다.

반지의 설명을 본 강현이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좋은 건 맞는데..."

A등급 이하라면 A등급도 포함된다는 뜻이리라.

그 모든 정신 관련된 것에 면역이 된다면 굉장히 뛰어난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당장 강현에게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다.

"뭐 언젠간 쓸 일이 있겠지."

확인을 마친 강현이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강현

▫칭호 : 참지 않는 자

▫레벨 : 14 → 15 new!

▫상세 능력치 :

·근력 17 (+1)

·순발력 16 (+1)

·체력 16 (+1)

·마력 14 (+1)

·추가 스텟 : 0 → 1 new!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하급 검술(E), 최하급 방패술(F), 최하급 석궁술(F)

▫스킬 : 분노의 사자후(D), 중급 육체 재생(B)

"괜히 뿌듯해지네."

상태창을 본 강현이 콧잔등을 문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뭐를 올리지? 기분 같아서는 마력에 투자하고 싶은데..."

혼자 다닐 때도 마력만 충분하다면 어떤 상처든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력을 올린다고 당장의 전투 능력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추가 스텟 1을 마력에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강현은 고민 끝에 마력에 스텟을 투자했다.

"뭔가 잡캐가 되어가는 기분이긴 하다만 어쩔 수 없지."

[대기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튜토리얼에서 퇴장합니다.]

**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날.

"후욱, 후우..."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강현이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맨몸 운동으로는 잘 지치지도 않네.'

벌써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강현은 아직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헬스장. 아니 하다못해 집에 간단한 운동 기구라도 사면 좋겠는데...'

그러나 강현이 돈이 없지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사실 얼마 전까지 염치도 없었지만, 이제는 제법 철이 들었다.

'몸이 편하니까 잡생각이 드네. 더 빡세게 가자.'

강현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 운동을 이어갈 때였다.

"꺄아아아!"

-끼이익, 콰앙!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비명소리가 들리고 건물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당황한 강현이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이게 뭔..."

강현의 집 앞에 있던 던전.

그 던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문에서 무장한 고블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투두두두!

곧이어 대한민국에서 듣기 힘든 총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시벌! 우리 집 앞에 던전 치워달라고 그렇게 민원을 넣었는데!"

정부에서 앞장서서 던전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전체 던전의 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심지어 던전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결국, 최초의 던전이 생성된 지 한 달이 지난 오늘.

아직 한 번도 클리어되지 않은 모든 던전의 문들이 일시에 열렸다.

"아현이! 아현이를 구해야 해!"

당장 부모님이 계신 고향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아무런 방법이 없다.

강현은 우선 회사로 출근한 강아현부터 구하기로 했다.

"이런 때에 출근이라니 도대체 뭐하는 회사야?!"

강현은 불과 얼마 전까지 회사가 너무 많이 쉬는 게 아니냐며 빈정댔으나.

막상 이런 때에 아현이 출근을 하자 회사 욕부터 튀어나왔다.

"무기가 될 만한 게 있어야 해..."

집을 둘러봐도 도저히 쓸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저거다."

그때 눈에 들어온 부엌칼을 빼 든 강현이 곧장 집을 뛰쳐나갔다.

12화 재앙 속의 영웅(1)

12. 재앙 속의 영웅(1)

-우야야야야~ 우야야야~

지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분위기의 힙합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발 받아라! 제발!"

-여보세요?

컬러링이 끊어지고, 다급한 아현의 목소리 들려왔다.

"너 어디야? 괜찮아?!"

-나 지금 회사 화장실이야...

"거기서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박혀있어! 알겠지?"

-야! 뭘 어쩌려고….

강현은 다급히 통화를 종료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빌라의 입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고블린이 보였다.

"케륵!"

"나와! 시간 없어 새꺄!"

-부웅!

날아오는 검을 숙여 피했다.

그리고 부엌칼을 고블린의 턱 아래에 쑤셔 넣었다.

"케.. 케르..."

"이건 고맙다."

강현은 머리에 칼이 꽂힌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고블린의 손에서 장검을 뺏어 들었다.

"이제 꺼져."

-퍽

검을 뺏기고도 움직이지 못하는 고블린. 그런 놈을 발로 차서 날려버린 강현이 거리로 나왔다.

"꺄아아아!"

"살려줘!"

-탕! 탕!

거리는 혼란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강현의 고막을 때렸다.

'뛰어가면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제발 그때까지 무사해라!'

다행히도 아현의 회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예전에 아현과 함께 지나가며 봤었던 회사 건물을 떠올리며 강현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와줘요! 여기... 컥!"

고블린의 신체능력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다. 일반 성인 남성이라면 충분히 맨몸 격투를 벌여볼 만한 수준.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거대한 장검을 휘둘러대는 녹색 괴물은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죽어라!"

"케엑!"

다행히 몇몇 사람들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 고블린과 맞서는 모습이 보였다.

'튜토리얼을 깬 사람들인가.'

심지어 거대한 창을 꺼내 들어 고블린을 찔러 죽이는 남자도 있었는데, 아마 2단계를 클리어한 사람인 것 같았다.

"으아아앙!"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엄마의 등에 업혀 울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잠시 강현의 눈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어차피 지금 나서서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짐만 될 뿐이다.'

강현은 애써 시선을 두고 다시 달렸다.

"케르륵, 케엑!"

"케륵!"

두 마리의 고블린이 강현의 앞을 막아섰다.

"꺼져!"

스킬 분노의 사자후를 쓰려했지만 역시나 사용이 되지 않았다.

-챙! 스걱.

예상했던 일인지라 강현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단칼에 고블린 두 마리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이봐요! 여기 좀 도와줘요!"

그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보던 한 중년 남자가 강현을 불렀다.

강현은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아현의 회사를 향해 달려갔다.

"이봐! 좀 도와달라고! 야이 새끼야!"

"케륵! 케르..."

강현이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자, 남자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쳤다. 그 소리에 고블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 어? 이봐 내가 미안해. 도와줘! 제발!"

"켈켈켈!"

-쾅!

모여든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건물 입구를 박살 나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안 돼! 으아아!"

수많은 비명 소리를 뒤로 하고 강현은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뒤, 처음 보는 몬스터가 강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새끼 타란크]

[성체 타란크]

거미와 비슷한 모습의 몬스터.

그러나 그 크기는 새끼조차도 강현의 허벅지까지 올 정도로 거대했다.

성체는 거의 강현의 어깨까지 올라올 정도로 수백 킬로그램은 나가 보였다.

'이 근처에 있는 던전이 세 개였지.'

강현은 아마 그중 하나에서 나온 몬스터일 것이라 짐작했다.

"키에에엑!"

몇 마리의 새끼 타란크들이 강현을 보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키에에..."

-스걱!

강현이 앞을 막아서는 새끼 타란크 하나를 단칼에 두 동강 냈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이 더욱 많았지만 일일이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하나하나 상대하다간 끝이 없어.'

타란크를 베어낸 검에 알 수 없는 끈적한 체액이 묻었다.

강현이 체액을 떼어내기 위해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챙, 채앵..

그러자 검이 단숨에 반 토막이 나며 부러져 버렸다.

"이건 또 왜이래?!"

사실 타란크의 몸속에 있는 산성 주머니를 베어서 부식된 검이 떨어져 나간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강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여간 고블린 새끼들은 도움이 안 돼!"

하다못해 인벤토리에 있는 롱소드도 이렇게 쉽게 부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키에엑!"

"케륵!"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성체 타란크와 고블린 몇 마리가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끼리도 싸우는 건가?"

-촤악

"케에에에엑!"

타란크의 입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가고, 그것을 뒤집어쓴 고블린이 무기도 내팽개친 채 바닥을 뒹굴었다.

얼굴의 감싼 고블린의 손 사이로 안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거다!'

"케륵!"

강현은 땅에 떨어진 검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 모습을 본 고블린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케엑!"

-퍽!

검을 들고 달려드는 작은 체구의 고블린을 강현이 힘껏 걷어찼다.

발차기에 맞은 놈은 순식간에 몇 미터를 날아가 성체 타란크에 처박혔다.

"케... 케륵! 케륵!"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고블린을 타란크가 날카로운 다리로 꼬치 꿰듯이 뚫어버렸다. 그리고 거대한 턱으로 고블린의 머리를 뜯어버렸다.

"너희들 하던 거. 마저 해라!"

그 틈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든 강현이 다시 동생의 회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케르륵?"

고블린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강현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허억, 헉!"

정신없이 내달리기를 10분.

마침내 커다란 빌딩 앞에 강현이 멈춰 섰다.

'분명 회사는 6층, 7층을 사용한다고 했지.'

앞을 막아서는 고블린의 목을 쳐내며 강현이 빌딩 내부로 들어섰다.

사방에 피가 난자하고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간간이 고블린의 사체도 있었지만 대부분 인간의 그것이었다.

"엘리베이터!"

-탁탁탁탁

강현이 정신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씨발!"

"케륵! 케륵!"

그때 계단 위쪽에서 고블린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상구를 뚫을 수밖에 없겠어."

열려있는 비상구를 따라 올라 가자 3층 입구에서 잡다한 물품들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고블린과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막아!"

"케엑! 케륵!"

책상과 사물함 따위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바리케이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그 사이로 밀대 따위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앞에서 네 마리의 고블린들이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 검을 휘두르며 용을 썼다.

"다 꺼져!"

놈들의 뒤에서 나타난 강현은 검을 휘둘러 단번에 한 마리의 목을 날려버렸다.

"케륵?!"

-퍽!

강현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 한 놈의 명치에 검을 찔러 넣음과 동시에 옆에 있는 놈을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케엑!"

그 위력에 허공을 날아간 놈이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케, 케에엑!"

순식간에 동료 셋이 당하자 공포에 물든 마지막 한 마리가 괴성을 내질렀다.

강현은 가볍게 놈이 휘두른 검을 피하고 곧장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후우..."

강현은 벽에 머리를 부딪쳐 쓰러져 있던 마지막 놈까지 목뼈를 밟아 확실히 마무리했다.

강현이 검을 챙겨 들고는 다시 위로 향하려던 때였다.

"이봐요!"

"저 바쁩니다."

"우리 좀 도와줘요!"

"여기 검 놔두고 갈 테니까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지켜요."

강현의 말에 안쪽에 있던 여성이 발끈했다.

"아니 그렇게 강하면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어떻게 저런 걸 휘둘러서 괴물을 처리해요?!"

계단을 오르려던 강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바리케이드 앞으로 다가간 강현이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소리 지르면 놈들이 더 몰려올 거야.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지껄이고 있어."

순식간에 합죽이가 된 사람들.

그들의 눈에 진한 공포가 어렸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집어 들었다.

"여기 이거 받아요."

강현은 고블린이 사용하던 검을 바리케이드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별거 없는 놈들이니까 힘을 합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

"이거 세 자루 줄 테니까 잘 버텨봐요. 뭐, 이 방벽이 안 뚫리는 게 가장 베스트지만."

"감사합니다..."

강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제발 아현이가 있는 층도 이렇게 막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아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괜찮아?

"지금 네 회사 도착했어."

-미친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강현이 자신의 회사까지 찾아왔다는 말에 아현은 깜짝 놀랐다.

-안 다쳤어?

"괜찮아. 거기 몇 층이야? 6층? 7층?"

-여기 7층...

"다 왔으니까 꼼짝 말고 있어!"

통화를 종료한 강현이 속력을 높였다.

-타다다다!

4층, 5층, 6층 모두 입구가 텅 비어 있었다.

얼핏 보이는 내부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피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다!'

마침내 7층에 도착하자 3층과 마찬가지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는 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뒤져!"

"케엑?!"

강현은 등장하자마자 한 놈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크윽."

그러나 미처 보지 못한 칼이 강현이 얼굴을 스쳤다. 강현의 뺨에 얇은 실선이 생기며 피가 흘러나왔다.

"이 새끼가!"

분노한 강현이 그대로 고블린의 두개골에 검을 박아 넣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으니 치료는 기대하면 안 돼. 신중하자.'

좁은 장소에서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검을 모조리 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강현은 신중하게 움직이려 했지만 조금씩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케에엑!"

"이제 네들도 질린다!"

피하고, 막아내고, 베어낸다.

짧은 기간이지만 수없이 해내 왔던 행위들이 빛을 발했다.

마침내 마지막 고블린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강현이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어째서인지 튜토리얼 때 보다 훨씬 빨리 지치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인지, 현실이라는 무대로 인한 긴장감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 당신 뭐야..?"

고블린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강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강아현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이 물건들 좀 치워 주시죠."

"안 돼요! 그 사이에 놈들이 오면 어쩌려고요?!"

"맞아! 당신은 다른 곳을 알아봐."

강현의 말에 안쪽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반발했다.

'시발...'

짜증이 난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화가 날 때마다 강현이 하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참자... 강현아. 그래도 아현이랑 같은 회사 사람들이야.'

"제가 아래쪽에 있는 놈들까지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얼른 열어요."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누간가의 대답에 빙긋 웃은 강현이 전력으로 검을 후려쳤다.

-콰앙!

그 충격에 순식간에 바리케이드가 박살 났다.

"그냥 열라면 열어. 부수고 들어가기 전에."

**

"괜찮아?"

"어...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이 오빠를 뭐로 보고. 한 달 동안 내가 베어 넘긴 괴물들만 천 마리는 될 걸? 이 근육 좀 봐라."

강현이 자신의 팔을 접었다 폈다 하며 근육을 과시했다. 확실히 전과 달리 두툼하고 단단하게 올라온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농담하지 말고. 다친 곳은 괜찮아? 치료해야 될 것 같은데. 기다려봐."

강현의 뺨에 있는 상처를 본 아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냐 이 정도는 다친 축에도 못 껴."

적어도 강현의 기준에서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확인하니 뺨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쓰읍. 헛소리 하지 말고 얼른 소독하고 지혈해."

"평소 같았으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건데..."

새삼 스킬의 소중함을 깨달은 강현이었다.

비상용 구급상자를 가져온 아현이 강현의 상처를 조심히 소독했다.

"안 아파?"

"응. 하나도 안 아파. 오늘 네 오빠 좀 멋있는 것 같지 않냐."

"지랄."

강현의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이 왜 그러지? 친오빠 맞냐면서 뭐라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뭐하는 사람이냐, 제정신은 맞는 거냐, 뭐 이런 말 해서. 너 혹시 무슨 짓 했어?"

"너무 멋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씨, 적당히 해라."

**

그날 저녁까지 몇 차례 더 고블린의 습격이 있었다.

고블린의 숫자를 확인한 강현은 과감하게 바리케이드를 치우자고 말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안 된다며 강현을 뜯어말렸다.

-이대로 두면 소리를 듣고 더 많은 놈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게 나아요.

-하지만 어떻게...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여러분들은 뒤로 빠져 계세요

결국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강현은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단신으로 고블린들과 마주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됐다.

"와... 뭐하는 사람이지?"

"현우 씨도 튜토리얼 2단계까지 깼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아니... 크흠."

그러한 장면이 몇 번 반복되자 사람들도 안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블린의 시체만 봐도 구역질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제법 가까이서 지켜보며 응원까지 하고 있었다.

"해치워요!"

"그렇지!"

"강현 씨, 힘내요!"

흡사 영웅이라도 된 듯한 강현을 보며 아현이 실소했다.

'하하... 이게 무슨 일 이래...'

13화 재앙 속의 영웅(2)

13. 재앙 속의 영웅(2)

늦은 저녁.

말 그대로 폭풍처럼 몰아쳤던 하루에 모두가 지쳐 있었다.

하지만 7층의 생존자들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여 앉았다.

"이제 어쩌죠..."

"조금만 기다리면 군인들이 해결해줄 거예요."

"맞습니다. 우리한테는 강현 님도 있잖아요."

마지막은 강현에게 '당신은 다른 곳을 알아봐'라며 소리쳤던 남자의 말이었다.

그사이 강현의 호칭은 '당신'에서 '님'까지 수직 상승해 있었다.

-탕, 탕...

밖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들려왔다. 상황이 진정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듯했다.

"여기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죠?"

튜토리얼에서의 경험으로 먹을 것의 중요성을 배운 강현이 말했다.

피곤한 상태에서 배까지 고파진다면 인간이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간단한 간식 종류랑 도시락이 조금 있습니다."

"물은요?"

"혹시나 해서 정수기 물을 최대한 많이 받아 놨어요."

확인해본 결과 아직 수도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럼 수돗물도 받아 두죠.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니까요."

"예."

'물은 그렇다 쳐도 먹을 게 너무 부족해.'

당장 이 층에 있는 사람은 스무 명 남짓.

먹을 것이라고는 과자 몇 개와 먹다 남은 도시락이 전부였다.

'물만 있으면 일주일은 충분히 버티겠지만...'

강현의 시선이 고블린의 사체로 향했다.

'저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자.'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도록 하죠."

강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이서 한 조, 한 시간 반씩 서면 될 것 같습니다. 순번은 제비뽑기로 정할게요."

그때 한 중년 남자가 손을 들었다.

"크흠. 이보게."

"예."

"나는 빠지도록 하지. 나이가 있어서 그런 건 힘들어."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지금 장난하나..?'

강현은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장님이라 불렸던 사람이었다.

"이봐요."

"뭐, 뭔가?"

"지금 장난합니까?"

강현의 눈에 조금씩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딴…!"

남자를 윽박지르려던 강현은 아현이 자신의 손을 붙잡자 멈췄다.

'그래. 강현아, 참자...'

"하아... 지금 제 말 따르지 않으면 아현이만 데리고 여기서 나갈 겁니다."

"뭐, 뭐?! 자네 지금 협박하는 거야?!"

대화를 듣는 직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못 했지만 강현이 떠날 거라는 말에 그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지금 상황에 빠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시네."

"이 사람들이! 자네들 지금 제정신이야?!"

벌떡 일어난 부장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나 지금 화났어! 포즈였다.

"다들 멀쩡하게 회사 다시니 싫어? 어?!"

부장이 작정하고 소리치자 금세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해졌다.

"지금 이 상황이 계속될 거라 생각한다면 말이야. 아주 큰 오산이야. 자네들 전부…. 커헉!"

제집 안방 마냥 소리를 치고 있는 부장. 그에 다가간 강현이 거칠게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 부장이 고통에 발버둥 쳤다.

"대단하신 부장님.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강현이 팔을 바짝 당겨 부장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씨발놈아.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그땐 괴물들 사이에 던져 버릴 거야. 뼛조각만 남도록. 내 말 알아들어?"

"으윽...! 윽!"

"알겠으면 고개 끄덕여."

강현의 말에 부장이 목이 빠져라 고개를 흔들었다.

강현은 힘껏 부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켈록, 켈록!"

쓰러져 기침을 토해내는 모습이 동정을 살만 했지만 사람들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제비뽑기를 하죠."

"예."

"그리고 미리 말했듯이 조용하셔야 합니다. 불빛 같은 것들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

밤이 깊고,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강현과 아현이 함께 누웠다.

강현은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고, 피까지 흘려 말 그대로 피로에 절어있는 상태였다.

'잠이 안 오네...'

하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이런저런 생각들에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야. 자냐?"

그때 아현이 말을 걸어왔다.

"아니."

"오늘 좀 멋있더라. 다시 봤어."

강현이 작게 웃었다.

"반했냐?"

"하여간 비행기 좀 태워주면 적당히를 몰라요."

"크크큭..."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또 아닌가 봐."

뜬금없는 아현의 말에 강현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뭔 소리야?"

"오늘 선배가 너 멋있다며 소개해주면 안 되냐고 묻더라. 부장 멱살 잡을 때 완전 뿅 갔다던데?"

"크흡!"

큰 소리로 웃을 뻔한 강현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로?"

"내가 묻고 싶네요. 실화냐?"

"그럼 아침마다 쌍욕 하면서 일어나는 남자라도 괜찮은가 물어봐."

"푸흐흡, 야. 웃기지 마. 사람들 다 자고 있다고."

터져 나오는 웃음에 입을 틀어막으며 낄낄거리기도 잠시.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괜찮겠지..?"

"당연하지. 지금 나온 놈들은 별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금방 군인들이 정리할 거야."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만...'

강현이 뒷말을 삼키며 아현을 위로했다.

"오늘은 제법 오빠답네. 하아... 피곤하지? 말 시켜서 미안. 자자 이제."

"그래. 잘 자."

"응. 너도 잘 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현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강현은 잠들지 못했다.

'튜토리얼을 얼른 깨야 하는데...'

오늘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장비라도 쓸 수 있었더라면 훨씬 수월하게 아현을 구했을 것이다.

아직까진 큰 무리가 없었지만 만약 해골 기사 정도 되는 놈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지금 상태로는 절대 무리였다.

'하다못해 레벨 업, 아니면 능력치라도 더 올려야 해. 부모님도 여기로 데려와야 하고.'

다행히 강현의 부모님이 사는 동네에는 그리 큰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행운이 계속될 리가 없었다.

"후우..."

잠든 아현의 얼굴을 보며 고민을 이어가던 강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

[강현 님의 튜토리얼 입장을 환영합니다]

[현재까지 튜토리얼 4단계를 완료했습니다]

[5단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결국 잠들었나 보네."

익숙한 공간에서 도착한 강현이 중얼거렸다.

"가야지. 얼른 마무리 하자."

[당신의 용기가 지구를 구원하기를]

눈앞이 점멸하며 몸이 떠오르는 감각이 느껴지기도 잠시. 강현은 처음 보는 공간에 서있었다.

[다섯 번째 단계(stage 5)]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지혜를 증명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 인간으로 위장한 몽마, 서큐버스를 처치하십시오]

[실패 조건 : 사망]

[Tip. 서큐버스는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는 존재는 가장 먼저 표적이 될 것입니다]

'지혜를 증명하라니...'

강현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지혜였다.

학창 시절부터 자신은 주입식 교육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하던, 흔치 않은 학생이었던 강현이다.

'그래서 수학이 참 싫었지. 기본 문제는 공식만 외우면 되는데 어려운 문제를 풀 수가 없어.'

수학 공식과 지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강현이 지혜와 동떨어진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하아..."

막막함에 한숨을 내쉰 강현이 주변을 살폈다.

'리더십 때보다 사람이 더 늘었네.'

자신을 포함해서 열 명의 사람들이 오솔길을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서큐버스가 남자일 리는 없고...'

몽마 서큐버스.

게임 좀 한 사람이라면 모두들 알고 있는 이름이다.

밤에 잠을 자고 있는 남자를 덮쳐 정기를 뺐어간다는 여자 악령.

'일행 중 여자는 총 4명.'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서 남자가 여섯, 여자가 넷이었다.

'충분히 할 만해.'

생각을 정리한 강현이 차례대로 여성들을 살펴봤다.

[김연지]

'저 개같은 이름이 왜 또 나오는 거야?'

강현이 한 여성의 머리 위에 뜬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인상착의는 전혀 달랐다.

턱선 위로 깔끔하게 잘린 단발에 편해 보이는 가죽 옷, 옆에는 장검을 착용한 여성이었다.

'일반 전사 포지션인가...'

[한송주]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가죽 위에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고 있었다. 등에는 작은 방패를 지닌 채였다.

'이쪽은 탱커겠고.'

[정예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얀 판금 갑옷에 메이스, 큰 방패까지 등에 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성기사, 팔라딘 계열이겠네.'

[조나윤]

머리를 뒤로 묶은 전형적인 청순한 여성상이었다. 옆에는 단검, 등에는 활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은 궁수.'

강현은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봤지만 외형만 봤을 때는 특별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부 쓸 데 없이 예뻐!'

흔히 서큐버스는 매혹적인 미모를 지니고 남자를 홀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강현은 단순하게 가장 미인이 서큐버스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래.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지난 단계에서 무려 3주가 넘게 걸렸다.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강현이 마음을 다잡았다.

'급하더라도 돌아가랬다. 조급하게 행동하다 오히려 망치는 수가 있어.'

강현은 우선 길을 걸으며 상황을 더 파악하기로 했다.

"태성아~ 우리 여기서 쉬면 안 될까?"

김연지가 앞장서서 걷던 남자에게 애교를 부렸다.

큰 눈망울을 끔뻑거리는 것이 남자 꽤나 울렸을 것 같은 모습이다.

'아... 그 김연지가 생각났어.'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인 그 김연지가 저런 애교를 부린다고 생각하자 괜히 토악질이 올라오는 강현이었다.

"역겨운 교태를 부리는 거 보니 저년이 서큐버스가 확실한 것 같네."

강현이 성기사라 추측한 정예진의 말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인상에 걸맞은 서늘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현은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걸크러쉬 장난 아니네. 그나저나 서큐버스가 있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야?'

강현의 예상과는 달리, 일행은 이미 이들 중 서큐버스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흥. 왜? 부러워? 별 같지도 않은 걸로 트집이야."

"얘들아 싸우지 마. 우리끼리 분란을 일으키는 게 서큐버스의 진짜 목적일 거야. 이러면 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라고."

태성이라 불린 남자가 나서서 둘을 말렸다.

"보나 마나 한송주가 서큐버스겠지. 쟤는 이번 던전에 처음 합류했잖아. 뻔한 거 아냐?"

김연지가 붉은 머리칼을 하고 있는 한송주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흐음... 처음 합류했다. 너무 용의자 1순위라 오히려 아닐 것 같긴 한데, 아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어.'

그때 주변을 살피던 강현이 김연지와 눈을 마주쳤다.

[매혹에 저항합니다]

'응?'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이쁨이 묻었나?"

"그런 것 같네. 오늘따라 더 예쁘다?"

강현이 웃으며 말을 받아주었다.

'넌 뒤졌다.'

**

길을 걸으며 몇 차례 전투가 있었지만 일행들은 모두 능숙한 전사였다. 강현은 딱히 나설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로 하루가 저물었다.

"여기서 야영하자!"

태성의 말에 일행은 익숙하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어떻게 김연지를 처리하지...'

저녁 식사 후 구석진 곳에 쪼그려 앉은 강현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김연지가 서큐버스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처음에는 그냥 무작정 달려들까 했지만 강현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 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상황이야. 게다가 남자들은 이미 대부분 넘어간 것 같고.'

자칫 공격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클리어는 거의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지..."

"무슨 생각해?"

"씨발, 깜짝이야!"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코앞에서 말을 거는 김연지를 보며 강현이 깜짝 놀랐다.

"왜 욕을 하고 그래?"

"아... 미안. 뭐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하는데?"

"그냥... 별거 아니야. 하하!"

"피이~ 안 알려줄 거야?"

김연지가 입술을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강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야? 왜 이렇게 귀여워!?'

[매혹에 저항합니다]

잠시 홀렸던 강현이 강인한 정신의 반지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후우, 엿될 뻔했네.'

마음을 가다듬은 강현이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혼잣말이라니까..."

"흥, 연지 삐졌또!"

"우엑!"

김연지가 혀가 반쯤 잘린 발음을 하자 멀리서 정예진이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나 잠시 소변 좀 보고 올게."

강현은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떻게 다른 얘들한테 김연지가 서큐버스인 걸 알릴 수 있을까...'

무턱대고 말했다가 괜한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강현아 생각하자. 생각. 지혜로 헤쳐 나가야 하는 관문이야."

"그냥 미친놈처럼 달려가서 뒤통수를 내려찍어?"

"아냐. 그랬다가 실패하는 순간 이번 튜토리얼은 무조건 망하는 거야."

강현이 정말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딱히 시간제한은 없는 것 같으니 일단 오늘은 이대로 넘어가자. 급할수록 돌아가랬어."

어차피 자신은 죽어도 살아난다.

이번 단계에서 클리어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는 것이다.

괜히 조급하게 움직여서 기회를 날리기보다는 최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현명했다.

"여, 왔냐."

"어."

"슬슬 자야겠다."

고민을 끝낸 강현이 자리로 돌아가자 일행들이 하나 둘 침낭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현. 네가 마지막 불침번인 거 알지?"

"어."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잠들면 안 되겠지..?'

'아냐. 그래도 불침번까지 있는데 괜찮지 않을까?'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강현은 잠을 잘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다.

'아냐아냐! 지금 이 상황에 잠을 자겠다고? 당장 죽을지도 몰라.'

'그런데 오늘 밤을 새우면 내일 피곤한 상태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생각을 이어가던 강현의 눈꺼풀이 점차 내려앉았다.

14화 재앙 속의 영웅(3)

14. 재앙 속의 영웅(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