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해방(2) >
'여긴······.'
다양한 높이의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고, 그 너머로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하늘 위로는 반투명한 파란색 막이 보였다.
익숙한 풍경.
띠링!
[지구가 성계 대항전 최종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보상으로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을 획득합니다!]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
[성계 대항전에서 우승한 성계에게 지급되는 특전.]
[적용 시 모든 스텟이 + 17% 상승합니다.]
'내가 죽었구나.'
안우정은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5경기가 마지막이었으니, 대기실이 아닌 팜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우정."
"다녀오셨어요, 우정이 형!"
"오오, 결국 지구가 우승했군! 상위 리그에서 우승이라니!"
"우정! 가면은 어디 갔는가!"
안우정의 등장에, 반갑게 맞이해 주는 천사와 팀원들.
"다녀왔습니다."
그는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팀의 천사, 지슈엘은 할말이 있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갓 상위 리그에 올라간 것치고 대단한 활약을 펼쳤더구나. 정말 대단하다!"
그러고는 그를 연신 칭찬했다.
"절 이끌어 준 지슈엘 님과, 훈련을 도와준 팀원들 덕분이죠."
"우정도 돌아왔으니, 모두 서둘러라. 이 상태라면 오늘 내로 시작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말이다!"
"걱정 마십쇼, 지슈엘 님. 자, 자! 다들 슬슬 움직이자고!"
지슈엘의 말에 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터에 테이블을 깔고, 그릇을 놓고, 식당에서 각종 요리들을 들고나왔다.
성계 대항전을 뛰고 온 안우정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안우정은 직전의 일을 상기했다.
'렌이 우진이였구나······.'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 착하던 동생이 콜로세움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렌이었다니.
거기다 이번 성계 대항전도 혼자서 우승시키지 않았던가.
안우정이 봤을 때, 동생은 이미 고위 플레이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씁쓸하네.'
대견하다기보단, 안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칼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지구인이 콜로세움에서 적응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아니까.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였을 땐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했을까.
안우정 또한 겪어봤기에, 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와 내가 죽었다고 자책하고 있었겠지.'
동생은 유독 가족에 대한 유대감이 큰 아이였으니까.
감옥에서 어머니와 자신의 비보를 듣고, 무척 괴로워했을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군.'
사실 동생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
하지만 우진이는 그 모든 걸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기에.
동생의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을 나눠 받으려면, 안우정이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슈우우우웅―
"게이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공터 한쪽 구석에 워프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리고 등장한, 고급 예복을 입은 한 남성.
"앗! 루디악 님!"
팀 불굴의 주인, 루디악이었다.
"모두들 잘 지냈느냐."
"4급 주천사, 지슈엘이 루디악 님을 뵙습니다."
"신이시여."
그의 등장에, 공터에 있던 모든 존재가 고개를 숙였다.
어느 정도 팀이 정상화된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것이다.
"오, 거기 있었군. 정말 고생 많았다, 우정."
안우정을 발견한 루디악이 성큼 다가왔다.
"어쩐지 잘 싸운다 싶더라니, 렌의 형이라지? 과연, 이제야 그 넘치는 재능이 이해가 되는군."
안우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루디악.
작은 읊조림이었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헉!"
"안우정이 렌의 친형이었다고?"
"이럴 수가!"
"그걸 왜 이제야······?"
루디악의 등장에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안우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이제 알았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가장 놀란 건 안우정 본인이었으니까.
"루디악 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우정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상대는 자신의 처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위 존재.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루디악.
"후후, 이러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사실 방금 전에 팀 투지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왔다. 내 살아생전, 그렇게 높은 금액을 제시받은 건 처음이었지."
"······."
루디악의 말을 들은 안우정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언제 다시 동생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경기에서 만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았다.
동생은 곧 고위 리그로 올라갈 테니까.
'지금 상태로는 우진이의 속도를 따갈 수 없어.'
한마디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둘 중 한 명이 팀을 옮기는 것.
그러나 이어지는 루디악의 말에 안우정은 실망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대는 우리 팀에 꼭 필요한 플레이어니까."
"······예."
그런 그의 감정이 드러나서였을까.
루디악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어차피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서 소원을 이루면, 원하는 상황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느냐. 두 사람이 함께."
"······."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나봤자 무얼 하겠는가. 언제 동생이 죽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작정이더냐? 콜로세움이란 환경에선 형제가 조우해봤자 좋은 상황이 나올 수 없느니라."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안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악 님의 말이 맞아.'
동생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전혀 없는 상황.
오히려 루디악의 말처럼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냉정해지자.'
안우정이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
어머니, 나, 동생.
세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분명 다시 올 것이다.
"루디악 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팀 불굴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확신이 담긴 안우정의 대답에, 루디악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좋다! 나도 최선을 다해 밀어주도록 하지. 지슈엘?"
"예, 루디악님."
루디악의 부름에 지슈엘이 황급히 다가갔다.
"오늘 파티는 자유롭게 진행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파티에 방해될 테니, 난 이만 가봐야겠군. 모두들 마음껏 마셔라!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팀원들을 향해 외친 루디악이, 이내 워프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후우······."
'후우.'
그리고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안우정과 지슈엘.
팀원들은 마음껏 먹고 마셔도 된다는 말에 기뻐하기보다, 서둘러 달려와 안우정을 둘러쌌다.
"정말이냐, 우진? 정말 그 살인귀······."
"어허! 이봐, 말조심해!"
"렌 님, 아니 동생분 성격 어때요? 정말 막 피도 눈물도 없고 그래요?"
"가면 벗은 모습이 너무 궁금한데! 우정의 동생이라면 분명 잘생겼겠지?"
"어렸을 땐 어땠어요? 아무리 대단한 플레이어라고 해도 과거엔 분명 귀여웠을 거야. 맞죠? 맞죠?"
그러고는 안우정을 향해 질문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어서 파티 준비를······."
"불과 번개를 다루는 형제라니, 완전 멋지군! 혹시 다음에 만나면 살살해달라고 전해줄 수 있나?"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전에 특수 부대 같은 곳에 있었나요? 움직임이 말도 안 되던데!"
"동생의 이름은 뭐지? 렌은 닉네임일 거 아냐!"
팀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지슈엘이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후우, 쉽지 않겠는데.'
집중되는 팀원들의 관심에, 안우정은 무척 곤란했다.
* * *
'다들 왜 이러는 거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형, 형. 이제 가면 안 쓰시는 거예요?"
"가면 벗은 게 훨씬 멋지네요, 안우진 님."
"맞습니다. 이 잘생긴 얼굴을 가리고 다닌 이유가 궁금할 정도입니다."
"악귀가 그려진 가면 쓰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아요!"
내가 가면을 벗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팀에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나를 보기 위해 체력 단련실로 찾아온 것이다.
"가면 벗으시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졌네요. 멋있어요."
"음······. 이 정도면 나랑 잘 어울릴지도······."
그중 가장 눈을 빛내는 건 당소소와 카이로시아였다.
'곤란하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구슬땀을 흘려야 할 체력 단련실이 시장통이 된 상황.
나는 상황을 정리할 겸 손뼉을 짝! 쳤다.
"모두 조용."
그러고는 마력을 꽉꽉 눌러 담아 한마디를 내뱉자,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잘 들으세요. 전 앞으로도 팜에서 가면을 쓰지 않을 겁니다. 이후로도 쭉 볼 수 있을 테니, 다들 어서 정해진 일과에 따라 훈련을 진행하세요."
"······."
"모용악 님, 고건하 님, 지그 님, 제이스 님, 루치아노 님."
"예."
"부르셨습니까?"
"여러분이 팀원들을 인솔해서 각자 자리로 데려가 주세요."
내 지시에, 다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원래 위치로!"
"지금부터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지옥 훈련이 뭔지 보여드리죠."
"흠, 흠. 이만 훈련하러 가볼까?"
그러자 순식간에 흩어지는 플레이어들.
나는 그 중 두 사람을 붙잡았다.
"주창범씨, 카이로시아. 두 사람은 잠깐 얘기 좀 하지."
"네, 형."
"저는 왜요?"
내 부름에 고개를 갸웃하는 두 사람.
나는 먼저 주창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어떤 걸 느꼈죠?"
"어······. 하하, 제가 정말 부족하더라구요. 누구 하나 저보다 떨어지는 플레이어가 없었어요."
주창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위 리그는 정말 괴물들이 많네요. 나름 철벽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비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수비가 숭숭 뚫릴 때의 기분이란······."
"스텟 차이가 많이 났을 테니까."
"근데 그 괴물들도 형 앞에선 꼼짝을 못하더라구요. 우리 형이 이렇게 대단한 플레이어였구나, 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 것 같아요."
주창범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자기가 느낀 바를 얘기하라 했더니, 돌고 돌아 내 칭찬으로 돌아온 셈.
나는 이번엔 카이로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배웠지?"
그러자 미간을 찡그리는 카이로시아.
"왜 그렇게 수비를 강조했는지 깨달았어요. 마법을 제대로 쓸 기회조차 없더군요."
"어디서든 마법사는 첫 번째 타깃이니까."
아마 제법 답답했을 것이다.
자신의 장점은 전혀 살리지 못한 채, 상대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전투를 치렀을 테니.
"그래서 앞으로는 근접 일대일 전투에 더욱 치중할까 해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두 사람은 아직 상위 리그에서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한 상태.
그래서 내심 걱정이 많았다.
첫 경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쓰러진 플레이어들이 한가득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이번 성계 대항전을 통해, 리스크 없이 첫 경기를 경험한 상황.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주창범과 카이로시아, 둘 다 눈빛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알아서 잘 헤쳐 나갈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날 찾아오도록."
내 말에 두 사람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딱 하나.
「동생아, 형은 잘 지내고 있다. 렌이 내 동생이란 걸 알고는 팀원들이 한동안 졸졸 쫓아다녀서 곤욕을 치른 것 빼고는.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한편으론 걱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올라갈수록 더 강한 상대와 마주칠 테니까.
하지만 형은 동생을 언제나 믿는다. 우진이 너라면 분명 고위 리그에서도 잘 적응해 나가겠지.
-중략-
힘들겠지만, 우리 함께 노력하자.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위해. 행복했던 우리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다음 편지 기다릴게. 형은 언제나 동생을 사랑한다.」
형의 편지를 읽은 나는 서둘러 종이와 볼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미소 띤 채 팜에서의 일상과 내 훈련 루틴들, 팀원들과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잘 부탁드립니다, 포르도엘 님."
"휴우, 그래도 제가 나름 상위 천사인데······. 우편배달부 역할을 맡게 될 줄은 몰랐네요."
편지를 건네자, 짧게 푸념하는 포르도엘.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1주일에 한 번만······."
포르도엘은 형에게 내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계속해서 팀 불굴의 팜을 오가는 상황.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헤, 그 표정 보려고 장난친 거예요. 가면이 없으니까 좋네요!"
그러자 갑자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는 포르도엘.
"······."
"저도 지슈엘이랑 수다 떨 겸 가는 거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녀올게요!"
그녀가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후우. 다행이군.'
원래대로라면 타 팀의 팜에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팀의 분위기나 훈련법, 매뉴얼 등등 다양한 정보를 훔쳐 나올 수도 있기 때문.
하지만 팀 불굴 측에서도, 형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 특별히 허락해 준 것이었다.
뭐, 팀 투지의 수준이 훨씬 높아서 훔쳐 갈 정보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고.
'형한테 보낼 걸 골라 볼까.'
포르도엘이 나가는 걸 본 나는, 중개 거래소에 접속해서 지명판매권을 쓸어 담았다.
띠링!
[<지명판매권 >을 260,000 G에 구입하셨습니다.]
[<지명판매권 >을 264,000 G에 구입하셨습니다.]
[<지명판매권 >을 270,000 G에 구입······.]
'저주셋 위주로 보내 줘야겠군.'
타 팀의 플레이어에게 물건을 보낼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지명판매권.
지명한 상대에게만 노출이 되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이었구나.'
물론 나도 이런 아이템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지,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다른 팀의 플레이어에게 물건을 보낼 일이 없었으니까.
[플레이어 '룬'에게 <지명판매권 >을 사용합니다.]
[<목걸이:피의 속삭임>을 1 G에 판매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
가격은 모두 1골드.
이건 형만 볼 수 있을 테니까, 아마 잘 도착할 것이다.
'훈련을 시작해 볼까.'
이걸로 집무실에서 해야 할 일은 끝.
이제 정신 스텟을 올릴 시간이었다.
똑― 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아세리안인가?'
"들어오셔도 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집무실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당소소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일단 앉으시죠."
내가 의자를 권하자, 사뿐히 앉는 당소소.
"훈련을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꺼냈다.
"어떤 도움을 원하시는 겁니까?"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요."
"······?"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이름 : 당소소]
[근력 : 74] [민첩 : 79] [체력 : 76]
[정신 : 71] [지력 : 62] [마력 : 68]
그동안 훈련을 열심히 한 건지, 제법 준수한 스텟을 가지고 있는 당소소.
하지만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부분에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약한데?'
팀 투지엔 그녀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많았으니까.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라······. 좋습니다. 그럼 실력 좀 보죠."
< 183화. 해방(2) > 끝
< 184화. 해방(3) >
띠링!
[초승달이 떴습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 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달빛의 힘으로 인해 <목걸이:영롱한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5%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 >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63%]
당소소와 함께 찾은 특수 중력 대련장.
챙! 카앙! 채챙! 캉!
"거기서 그렇게 들이대면 안 되지! 칼 맞아 죽을 일 있어?"
"죄, 죄송합니다!"
"여기선 이렇게 움직여야 해. 잘 봐!"
내부에서는 무수히 많은 팀원들이, 달빛 아래에서 대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당소소와 싸울 만한 상대를 물색했다.
당소소는 준네임드급 플레이어.
어지간한 플레이어들로는 그녀의 실력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대련할 상대가 없다고 날 찾아온 상황.
나는 당소소보다 더 강한 플레이어를 붙여줄 생각이었다.
"지그 선배님! 이번에 새로운 공격법을 익혀서 그러는데, 저랑 대련 한 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 시간 뒤에 하자."
"옙!"
마침 대련장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그.
'음, 지그가 좋겠군.'
상위 플레이어인 지그라면, 당소소 실력의 한계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그 님."
"······? 아, 안우진 님."
한동안 날 빤히 쳐다보던 지그가 뒤늦게 반응한다.
가면을 벗은 지 며칠 됐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
"혹시 다음 대련 일정이 있으십니까?"
"아뇨. 안우진 님이라면 있어도 빼야죠."
"그럼 대련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바로 준비할까요?"
검을 꺼내 들며 몸을 푸는 지그.
나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제가 아니고 당소소 님입니다."
"아······."
내 말에 지그가 흠칫했다.
그가 당소소의 고운 얼굴을 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
"어떤 이유로 제게 대련을 부탁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당소소 님의 실력을 보려고 하시는 거죠?"
"맞습니다."
"그럼 안우진 님이 직접 싸워보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
지그의 대답에 나는 팔짱을 꼈다.
'그 정도라고?'
내가 직접 싸워 보라는 것.
한마디로 당소소의 실력이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그에게서 당소소와 싸우길 꺼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독이랑 암기 때문이겠지.'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사천당가는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투명가.
그 입지를 독과 암기만으로 세웠다고 했다.
당소소는 그곳의 적장녀嫡長女.
당연히 독과 암기에 능통할 것이다.
'악마의 눈으로 봤을 때도 독과 관련된 각성 능력을 많이 갖추고 있었어.'
다만 내가 놀랐던 건, 나름 상위 플레이어인 지그에게 저 정도의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상대해 보죠."
지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당소소를 데리고 대련장의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플레이어 '렌'에게 30G의 중력이 적용됩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압력이군.'
그러고는 당소소와 비슷한 수준의 움직임이 나오도록 중력을 설정했다.
"따로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괜찮아요."
내 물음에 고개를 젓는 그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맵 : 폐허 원형 투기장]
[3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신하게 대답한 당소소가, 녹색 무복을 펄럭이며 허리에 둘러진 연검을 꺼내 들었다.
[2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보자······. 마력 상쇄, 뇌신 끄고. 이 정도면 되겠지.'
열반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비활성화시킨 나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녀에게 주는 핸디캡이랄까.
이 정도는 되어야, 당소소가 상대할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1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자만심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비해 내가 너무 강해졌을 뿐.
[경기 시작!]
'실력 좀 볼까.'
검을 돌려 가볍게 손목을 푼 나는, 경기 시작 콜과 동시에 당소소에게 돌진했다.
그녀의 무기는 연검軟劍.
탄성이 강해서 검신이 무척 유연하다는 특징이 있다.
'저 정도면 채찍처럼 휘두르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내가 들고 있는 검보다 리치가 훨씬 길기 때문에, 거리 조절이 필수였다.
'움직임이 굉장히 가볍군.'
내가 거리를 좁혀오자,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당소소.
그녀가 크게 휘두르자, 연검이 내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치 채찍이 번뜩이는 느낌.
'연검을 쓰는 것 치고는 너무 정직한 공격인데.'
그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나는 검을 가볍게 들었다.
그때였다.
채애앵!
"······?"
연검과 내 검이 부딪히자, 공중으로 비산하는 하얀 가루들.
'독!'
그 광경에 흠칫한 나는 재빨리 숨을 참으며 뒤로 빠져나갔다.
띠링!
[<독:마비쇄백분痲痺碎魄粉 >에 중독되었습니다.]
[<마비 > 상태에 빠집니다.]
[10초당 민첩 스텟이 1%씩 하락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63%]
[10초당 정신 스텟이 0.3%씩 하락합니다.]
[<귀걸이:대천사의 눈물>이 정신 계열 공격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쯧.'
하지만 나름 민첩하게 반응했는데도 이미 가루를 들이킨 후였다.
'마비 독이군.'
상태창을 힐끗 살핀 나는 당소소를 주시했다.
연검에 독 가루를 미리 뿌려뒀던 모양.
그때부터 전세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하앗!"
내가 중독됐다는 걸 눈치챈 당소소가 마구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허벅지와 가슴을 향해 연검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챙! 채챙! 챙!
'실제 전투였으면 간담이 서늘했겠어.'
나는 당소소의 공격을 막아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연검에 독 가루가 뿌려져 있을 줄이야.
어쩐지 연검을 꺼내 들고 조신하게 서 있더라니, 독 가루가 흩날릴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았다.
챙! 챙! 채챙!
'그래도 이 정도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어?'
뭐지?
순간 나는 움찔했다.
쇄도하는 연검을 막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
감각에 집중하니, 아주 작은 크기의 바늘이 내 가슴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마력장이 아니었다면 알아채기가 쉽지 않을 정도의 은밀한 공격.
'까다롭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암기가 작을수록 던지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저 암기들을 날린 것이다.
쐐애애애애액!
'알아채는 게 어려울 뿐이지, 못 피할 정도는 아닌······.'
그래서 날아드는 암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빼는데, 연검이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며 날아들었다.
그 절묘한 공격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을 정도였다.
'와······. 이건 무조건 맞으라는 거잖아?'
첫 번째 독, 마비쇄백분으로 인해 민첩이 많이 깎인 상황.
지금 상태에서 연검과 바늘을 동시에 쳐내는 건 무리였다.
아니, 마음 먹으면 피할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실력을 체크 중인 상황.
굳이 전력을 다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연검을 맞아줄 수도 없고.'
맞는 순간 몸이 찢겨나갈 것이다.
판단을 내린 나는 검을 휘둘러 연검을 쳐냈다.
그리고는 왼팔을 들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바늘을 맞아 주었다.
푹! 푹!
[<독:무형화혈독無形化血毒 >에 중독되었습니다.]
[독에 의해 내장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뭐?'
상태창을 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내장이 녹아 내리기 시작한다고?
"끄으으윽······."
그 순간, 무시무시한 통증이 찾아왔다.
마치 온몸이 불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후우, 별의 별 독이 다 있군.'
나는 이를 앙다문 채, 날아드는 연검을 막는 데 전념했다.
챙! 채챙! 챙! 챙! 챙!
두 개의 독에 중독된 순간부터 당소소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연검과 바늘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쉽지 않네.'
스텟과 스킬을 봉인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밀려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녀는 단순히 스텟만 보고선 판단할 수 없는 경지였던 것이다.
서걱!
마비와 통증 때문에 움직임이 느려진 사이, 연검의 끄트머리에 어깨가 살짝 베였다.
띠링!
[<독:역산속근독力散束筋毒 >에 중독되었습니다.]
[<근육 경직> 상태에 빠집니다.]
[10초당 근력 스텟이 1%씩 하락합니다.]
'여기엔 또 다른 독이 발라져 있었어?'
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한데,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사이 연검이 번뜩이며 날아들고,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바늘이 쇄도한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당황하기 바빴을 것이다.
'지그가 난색을 표할 만 했군.'
독은 모르면서 당하니까 위험하다.
그런데 사천당가에서 독을 사용한다는 건 무림인이라면 다 알만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 당가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투명가로 꼽힌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암기를 다루는 뛰어난 테크닉, 그리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독을 사용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 심리전.
그런 것들이 사천당가의 진정한 저력인 것 같았다.
"······."
그때 연검을 휘두르다 말고, 갑자기 녹색 소매로 코를 가리는 당소소.
'또?'
그 순간, 나도 재빨리 숨을 참았다.
그리고 울리는.
띠링!
[<독:신선폐神仙廢 >에 중독되었습니다.]
[<마력 경색> 상태에 빠집니다.]
[10초당 마력 스텟이 1%씩 하락합니다.]
독에 중독되었다는 알림창.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무섭네.'
이로써 나는 네 개의 독에 중독되었다.
게다가 근력, 민첩, 체력, 정신, 마력까지 다섯 개의 스텟이 하락하고 있는 상황.
―사천당문의 독인에게는 열 걸음 이상 다가가지 말라.
언젠가 모용악이 내게 해준 말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말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볼 필요도 없겠어.'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인정한다.
이 정도면 주창범이나 모용악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제대로 해볼까.'
마음을 먹은 나는 당소소에게 짓쳐 들어갔다.
쐐애애액! 쐐애액!
그러자 연검을 휘두르며 뒤로 빠져나가는 당소소.
'어림 없지.'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독에 중독됐고, 스텟이 하락했고, 통증이 심하고, 암기가 까다롭다?
고작 그런 것들에 발목 잡힐 내가 아니었다.
"······!"
순식간에 가까워지자, 당소소가 서둘러 암기를 날린다.
워낙 얇은 데다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상황.
'초감각 앞에선 소용없어.'
팅! 팅! 팅! 팅! 팅!
나는 손목만을 움직여, 얇은 바늘을 검 끝으로 툭툭 쳐냈다.
서걱!
그러고는 도망가는 그녀의 허벅지를 베었다.
'끝이군.'
기동력을 상실한 이상, 당소소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찔러넣으려 할 때였다.
"항복이에요."
당소소의 차분한 목소리.
내 검이 그녀의 턱 밑에서 멈췄다.
'후우.'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대련일 뿐, 굳이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정말 놀라운 실력이네요. 깜짝 놀랐습니다."
검을 갈무리한 나는 그녀를 극찬했다.
진짜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렇게나 잘 싸울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는 당소소.
"혹시 뭔가 부족한 점이라던가, 고쳐야 할 점이 있었나요?"
'음······.'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스텟이야 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낮은 게 당연하고.
연검과 암기의 연계도 무척 뛰어나다.
굳이 보완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딱 하나.
"연검의 기교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명의 강자와 일대일 승부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다대일 상황에서 독을 믿고 싸우기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더군요."
"스텟 하락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러는 거죠?"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짚어주자면, 목 위로도 공격을 하는 게 좋겠더군요. 안 그러면 공격을 읽힐 수도 있으니까요."
당소소의 공격은 허벅지부터 목 아래까지, 상반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연검에 베인 곳도 어깨였고, 암기는 복부 쪽으로만 찔렸다.
그 무엇 하나도 머리 쪽으론 날아오지 않았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수련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버릇이 든 모양.
"아, 그건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내기 싫어서 그랬어요."
그러나 이어지는 당소소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후우.'
얘 또 이러네.
팜에 들어온 이후, 잠잠해졌다 싶더라니.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이럴 땐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무튼, 당소소 님이 어떤 취지로 훈련을 도와달라고 하신 건지는 공감했습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돼죠?"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훈련을 도와달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다만 문제는.
'도와줄 만한 게 있나?'
내가 독에 관한 지식은 전무하다는 것.
그렇다고 연검의 기교를 수련하겠다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정도라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상대에게 하독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 중이라서요."
하독 할 방법을 연구중이다라······.
한마디로 독에 중독되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뜻.
'흠.'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다양한 독에 중독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독은 효율적인 데다가, 극강의 살상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독을 쓰는 플레이어와도 마주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다 보니, 나한테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좋습니다. 다양한 스타일, 다양한 무기로 상대해 드리죠. 매일 이 시간이면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는 스텟 단련을 해야 해서 저도 이 시간이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당소소와의 훈련.
그날 이후, 나는 하루하루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장기가 녹아내리고, 한번은 피부가 갈라지고.
가끔은 환각에 정신줄을 놓기도 했다.
그리고.
"기분이 이상하군요. 이것도 독입니까?"
"어머, 실수로 잘못 사용했네요. 절혼환락산이라는 독이에요."
"무슨 효과인데요?"
"욕정에 미치는 효과요."
"······!"
때로는 이상한 독에 중독되기도 했다.
< 184화. 해방(3) > 끝
< 185화. 해방(4) >
'후우, 정말 다행이군.'
커뮤니티를 살피던 미카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게시글을 뒤져봐도, 누군가가 타락했다는 소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렌의 타락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
진정한 의미에서 초대형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정말 수고 많았다."
미카엘이 성계 대항전 준비와 진행을 맡은 천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미카엘 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휴우, 드디어 끝났네요.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더니 죽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엔 좀 불안하긴 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군요."
그러자 미소 띤 얼굴로 우는소리를 하는 휘하 천사들.
그 모습이 마치 '저 이만큼 고생했으니 더 칭찬해 주세요!'라고 어리광 부리는 아이들 같아, 미카엘은 쿡 하고 웃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긴 했지."
"미카엘 님이 냉정하게 판단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마기 폭주 이슈로 척살조를 보냈다면, 성계 대항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위 리그 운영에도 큰 차질이 있었을 거구요."
2급 지천사 파사엘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계 대항전을 발판 삼아, 상위 리그의 정상화를 노리고 있던 상황.
그런데 여기서 타락 이슈가 터졌다면, 상위 리그의 정상화는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리그의 중단이 치천사의 타락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였으니까.
리그 재오픈에 대한 우려가 훨씬 심해졌겠지.
"그런데 괜찮을까요? 완전한 타락화는 아니지만, 오염이 꽤 많이 진행된 것 같던데······."
그때, 곁에 있던 3급 좌천사 카서디엘이 우려를 표했다.
한번 오염이 진행되면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야 타락화를 피할 수 없기에, 그녀의 걱정은 당연했다.
"걱정 말거라. 아리엘, 아니 아세리안 님이 팀 투지의 주인이니 지금쯤 정화가 모두 끝났을 것이다."
"아······!"
미카엘의 말에 탄성을 지르는 천사들.
"그럼 정말 다행입니다, 플레이어 렌에겐 천운이 따랐군요!"
'천운이라······.'
이어지는 그녀들의 말에 미카엘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행운이 따른 건지, 아니면 예견되어 있던 일인지는 나중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짝!
"이제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다. 예정했던 대로 당장 다음 주부터 상위 리그를 오픈한다."
"알겠습니다."
"성계 대항전 진행으로 모두들 피곤하겠지만, 조금 더 힘 내주길 바란다. 정상 궤도에 오르면 지금보단 훨씬 편해질 것이다."
"예!"
"파사엘만 남고 모두 업무에 복귀하도록."
미카엘의 말에, 천사들이 업무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남게 된 두 존재.
"따로 지시하실 게 있으십니까?"
"그대는 렌의 승급전을 준비해 줄 수 있겠나?"
"렌의 승급전······."
파사엘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렵겠나?"
"당장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요즘 마계 쪽이 너무 조용해서요. 그렇다고 중간계로 보내자니, 렌 수준과 너무 안 맞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파사엘.
미카엘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플레이어라고 하기엔 렌의 수준이 너무 높았으니까.
상위 리그라는 틀 안에서 경기를 만들어야 할 게임 메이커에게, 지금처럼 곤란한 상황이 또 없었다.
"혹시 그냥 승급시키는 건 안 되겠습니까? 모두들 렌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파사엘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승급전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그건 지금까지의 전통과 관례.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음······. 중간계 쪽에 수상한 정황이 없는지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면 지구 성계로 보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쪽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지구······?"
파사엘이 떨떠름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미카엘이 씨익 웃었다.
"전에 보고 받기로, 성계의 안위를 위협할 만한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환경이 타 성계와 완전히 달라, 마땅히 보낼 만한 플레이어가 없었죠."
지구의 경우, 냉병기 시대가 끝난 지 오래.
칼을 들고 다니기만 해도 국가 단위의 추격을 받는 곳이다.
타 성계의 플레이어가 잘못 들어갔다간, 미션 자체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마침 잘 됐군. 렌이 지구 출신이라지? 그라면 충분히 미션을 수행할 수 있겠어."
미카엘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구는 더 말이 안 됩니다.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수행이 어렵다는 것뿐, 사실 무력 면에선 타 성계와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한 곳 아닙니까? 렌한텐 너무 쉬울텐데요."
"그거야 게임을 만드는 우리가 조절하면 될 일. 렌을 지구로 보내는 걸로 하지."
파사엘의 설득에도 의지를 꺾지 않은 미카엘.
결국 파사엘은 미카엘의 의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파사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홀로그램에 나와 있는 날짜를 확인했다.
"앞으로 한 달 후. 하이블러드나이트143. 그때가 좋겠군."
그렇게 해서 렌의 승급전이 확정되었다.
* * *
당소소와 첫 대련을 한 이후, 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
오전에는 명상과 근력 단련을 하고, 오후에는 당소소의 독공 연마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독공 연마를 도와주다 보니, 생각 외의 장점이 있었다.
[정신 : 73]
'이렇게 빨리 올릴 수가 있다고······?'
무수히 많은 독에 중독되는 과정에서, 정신 스텟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그 덕분에 정신 스텟이 벌써 마의 구간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한 달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사실 독의 증상을 생각해 보자면, 정신 훈련에 특화되어 있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내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 툭하면 나타나는 환각, 게다가 다양한 욕망을 억누르는 것까지.
모두 정신력이 좋아야 버틸 수 있는 것 뿐이었다.
"이후 정신 스텟 단련으로, 독을 먹이는 커리큘럼을 추가해야겠군."
작게 읊조린 혼잣말.
"······!"
그러자 집무실 한쪽 옆에 서 있던 클로에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나는 클로에를 올려다 보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세워 뒀군요."
"아, 아니에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저보다 훨씬 바쁘시잖아요."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을 짓는 클로에.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찾고 있는 스킬이 있어서요."
"네, 말씀해 주시면 바로 찾아 드리겠습니다."
"혹시 중개 거래소에 어둠 속성 스킬이 있습니까?"
이번에 내가 찾는 속성은 어둠.
물론 내가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당소소한텐 어둠이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녀가 다루는 무기는 독毒, 암기, 그리고 연검.
가루, 얇은 바늘, 그리고 연검은 모두 시각視覺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공격들이다.
어둠 속성으로 그 부분을 조금 덜어주면, 훨씬 위협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음······. 빛 속성은 많은데, 어둠 속성은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긴 했지.'
아무래도 어둠 속성이 타락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주로 마계의 악마들이 많이 사용하는 속성이었으니까.
중개 거래소엔 타락과 관련된 아이템을 올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있긴 있다는 거죠?"
"네. 지금까지 두 개에서 세 개 정도가 올라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팔려서 없구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는 어둠 속성 스킬도 같이 체크해 주세요."
"네, 어둠 속성 스킬이 올라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혹시 독과 관련된 아이템도 있습니까?"
나는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스텟은 아직 부족하지만, 당소소는 그걸 넘어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
조금만 더 보완이 되면 충분히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없으면 뭐, 자기 복이지.'
솔직히 별로 기대를 하진 않았다.
독이라는 게 사용하기 까다로운 만큼, 그와 관련된 아이템의 숫자도 적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클로에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 있습니다."
"······있다고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에.
"독 자체는 없지만, 그걸 보조해 줄 만한 아이템은 있습니다."
비극심우선, 차폐의 면사.
클로에가 추천해 준 아이템은 두 개였다.
[<부채:비극심우선秘棘沈雨扇 >]
[무림팔선 '하선고'가 사용하던 접부채.]
[착용 시 마나에 바람의 힘이 깃든다.]
[착용 시 <아공간 >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아공간 > ― 부채의 접히는 부분에 아이템을 넣을 수 있는 가상 공간이 존재합니다. 물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템을 꺼낼 수 있습니다.]
[Tip : 부채를 휘두를 때 사용하면 물체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등급 : 전설]
[판매가 : 3,800,000 G]
'흠······.'
아이템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독과 관련된 아이템이라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
비극심우선의 옵션은 두 개.
마나에 바람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과,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설마 저 아공간이라는 능력 때문에 독과 관련된 아이템이라고 생각한 건가?'
아공간이라······.
검지로 책상을 톡, 톡 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무기로 독을 사용한다면······ 어?'
당소소가 사용했을 때의 모습을 시뮬레이션으로 돌리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휘두를 때 사용하면 물체가 날아가기도 한다는 것.
그 말은 즉, 부채를 휘두를 때마다 암기가 날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진짜 대박인데?'
암기가 아니라 가루 형태의 독을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당소소도 함께 중독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두 번째 아이템을 확인했다.
[<면사:차폐의 면사>]
[특별한 영기를 지닌 누에, 천잠天蠶의 실로 만든 면사.]
[착용 시 호흡으로 들어오는 모든 기운을 차단한다.]
[등급 : 고귀]
[판매가 : 1,089,999 G]
"······하."
차폐의 면사를 본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루 형태의 독을 뿌리면 당소소가 중독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와 관련된 아이템이 나온 것.
'확실히 제법이야.'
내심 클로에에게 감탄했다.
독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정말 적절한 아이템들을 추천해준 것이다.
가루 독을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시전자 본인이 중독되지 않는 것도 무척 중요했으니까.
아마 클로에도 내가 생각한 활용법을 미리 알아차리고 추천한 게 분명했다.
"어떠신가요?"
클로에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제대로 추천해 주셨군요. 딱 제가 원하던 아이템들입니다."
띠링!
[<부채:비극심우선 >을 3,800,000 G에 구입하셨습니다.]
[<면사:차폐의 면사>를 1,089,999 G에 구입하셨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이템들을 구입했다.
부채는 380만 골드, 면사는 109만 골드.
적은 돈은 아니지만, 성능 대비 가격으로 봤을 땐 오히려 싸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공짜로 줄 것도 아니니까.'
내 손바닥 위에 생겨난 부채와 면사.
그걸 보고 클로에가 활짝 웃었다.
"찾으시던 거라서 정말 다행이네요."
"네, 딱 제가 원하던 거군요. 추천해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어둠 속성 스킬도 나오면 바로 보고드릴게요."
"네, 부탁합니다."
내 대답에, 허리를 꾸벅 숙인 클로에가 집무실을 나섰다.
2주일 후.
짧은 시간이었지만, 팀 투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고신高神으로 승격했습니다.]
[팜의 레벨이 4로 상승합니다.]
[플레이어 '렌'의 플레잉 코치 정산율이 5% → 7%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에 거액을 베팅한 아세리안.
그녀가 벌어들인 포인트를 사용해, 고신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로 인해 직경 1킬로미터였던 팜의 크기가 5킬로미터까지 넓어졌다.
'이제는 어지간한 도시들을 압도할 정도군.'
넓이로만 보면 이전보다 25배나 넓어진 셈.
그러다 보니, 각종 건물들로 빼곡하던 팜이 휑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봐! 똑바로 안 따라와? 내가 한눈팔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자칫 잘못하면 길 잃으니까."
어마어마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건물 여기저기를 오간다.
그들 중 태반은, 처음 보는 얼굴의 신입 플레이어들이었다.
'이젠 이름 외우는 건 불가능하겠군.'
이번에 새로 뽑은 신입 플레이어의 숫자는 1만 5천 명.
단일 팜 규모에서는 이례적인 숫자였다.
너무 많아서 관리할 수가 없을 테니까.
"이봐요, 거기! 왜 혼자 있어요? 선임 훈육자 누구예요!"
"아, 7기수의 데니얼 님입니다······."
"7기수 데니얼? 어휴, 일로 따라와요."
하지만 우리 팀은 지금까지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키워진 팜.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관리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안우진 님."
"아, 예."
그때, 지나가던 한 플레이어가 내게 인사했다.
"모두들 인사하세요. 1기수 안우진님이세요. 팀 최초로 고위 리그를 앞두고 계시죠."
"우와, 고위 리그······."
"안녕하십니까? 8기수 단테입니다. 웨스테로스에서 왔고 용병 출신······."
"8기수 퀘이드입니다! 하이퍼보리아에서······."
"잠깐! 바쁘신 분이니까 기수, 이름만 딱 얘기하고 끝내!"
그리고 내게 인사하는 신입 플레이어들.
"모두 반갑습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곤, 집무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후우, 돌아다닐 수가 없군.'
어딜 가나 내게 인사로 공격한다.
그 숫자가 백 명도, 천 명도 아닌.
무려 만 오천 명.
하나하나 다 받아주다 보니까, 이젠 진이 빠질 정도였다.
똑― 똑―
그때, 집무실 문 너머로 들리는 노크 소리.
"안우진 님, 아세리안이에요!"
"아, 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축하해요!"
"······?"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축하한다고?
내가 축하받을 일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기억을 돌이키는 순간.
'혹시?'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리고.
"헤헤, 오퍼가 들어왔다구요. 그것도 무려 승, 급, 샷!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티켓이요!"
아세리안이 설마를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 185화. 해방(4) > 끝
< 186화. 해방(5) >
"헤헤, 오퍼가 들어왔다구요. 그것도 무려 승, 급, 샷!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티켓이요!"
"오퍼가 벌써 들어왔습니까?"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의아했다.
'리그를 정상화하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텐데.'
플레이어의 절반 가량이 죽으며 거의 초토화 직전까지 갔던 상위 리그가, 당장 저번 주부터 다시 열리기 시작한 상황.
처리할 일이 제법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내 승급전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연락을 받고 저도 좀 의외였어요. 당분간은 산적해 있을 중간계 미션 위주로 뿌릴 것 같았거든요."
아세리안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날짜는 언제입니까?"
"하이블러드나이트143. 딱 한 달 남았어요."
'한 달이라······.'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승급전 오퍼치고 준비 기간이 짧은 편.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새롭게 의지를 다진 이후, 언제든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야 좋지.'
지금 당장 출전하라고 해도 문제 없이 수행할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미카엘이 일을 잘하네.'
1급 치천사 미카엘.
네 명밖에 없는 사대 천사 중 한 명이자, 열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
나는 그녀에게 새삼 감탄했다.
내 독주를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도 성계 대항전을 잘 마무리했으며, 그걸 발판 삼아 단숨에 상위 리그를 재오픈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일찍 내 승급전을 연다는 건?
'정상 궤도로 올릴 추진력을 만들겠다는 뜻이겠지.'
현시점에서 티켓 파워가 가장 센 건, 바로 나일 테니까.
"게임 유형은 어떻게 됩니까?"
"이번에도 단독 미션이에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요즘 삼지옥이 잠잠해서, 안우진 님을 위한 경기를 만들기가 까다로울 테니까요.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격차도 심하구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리그 문턱에 있다 보니, 리그의 미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대충 감이 오는 상태였다.
중간계, 그리고 무스펠하임과 니플헤임, 헬하임으로 이어지는 삼지옥에서 마계의 준동을 막는 것.
그게 플레이어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수락한다고 회신할까요?"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아세리안.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답을 정해놓은 채로 물어보고 있는 거였으니까.
'승급전······.'
상위 리그에서의 마지막 경기.
과거의 나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거대한 벽을 두드릴 기회.
1회차와 2회차, 그 모든 걸 가를 전환점.
"네. 참가하겠습니다."
전력으로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그 기로 앞에 서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세리안.
"······안우진님이랑 제가 어느덧 여기까지 왔네요. 고위 리그."
그녀는 과거를 상기하듯,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 사이 목소리가 제법 촉촉해져 있었다.
'감회가 남다르겠지.'
고위 플레이어를 배출하는 순간, 그녀의 위상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질 테니까.
그런 아세리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내가 묵례하자, 똑같이 고개를 숙이는 아세리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훈훈하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
"······?"
그때, 아세리안이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아, 참. 이번 경기는 특히 어려울 테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그랬어요."
"어려울 거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 메이커가 난이도에 대해서 미리 얘기해준다는 게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미션이 나오길래? 라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특히 어려울 테니까, 라······.'
잠시 상념에 잠겼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고위 리그로 올라가는 길이 쉽다면, 오히려 과거의 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테니까.
어떤 미션이 나오든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승리로서 증명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각오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머리가 핑 돌면서 주변 사물이 여러 줄기의 선으로 갈라져 보였다.
"쿨럭, 쿨럭!"
입에선 끝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항복이에요."
당소소의 차분한 목소리.
띠링!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백독불침百毒不侵 >을 각성하셨습니다.]
'하······. 백독불침이라.'
눈앞에 뜬 알림창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피를 게워 냈더니 로브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거기다 무슨 독을 썼는지 피부 가죽도 벗겨지고 있고, 온몸엔 붉은 반점이 오돌토돌 돋아났다.
완전 걸레짝이 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누가 이긴 건지 모르겠군.'
반면에 당소소는 무척 멀쩡한 모습이었다.
녹색 무복에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달까.
"오늘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는 당소소.
'독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나는 그녀에게 치를 떨었다.
지그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부채를 휘두를 때마다 독 가루가 흩날리고, 암기가 쇄도한다.
비극심우선과 차폐의 면사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 그녀에게서 독공을 막아내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그 탓에 나는 매일같이 걸레짝이 되고 있었고.
[정신 : 94]
'만능 해독제만 없으면 진짜 무시무시할 텐데.'
그래서 무척 아쉬웠다.
콜로세움은 잘린 팔도 다시 붙여주는, 엘릭서라는 전설의 물약도 존재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만능 해독제 같은 물약도 있었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적어도 상위 리그까진 그녀의 상대를 찾기 힘들었으리라.
뭐, 전투 중에 해독제를 마실 수는 없겠지만.
"수고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보죠."
"네. 감사합니다. 휴우, 저도 이만 독을 만들러 가봐야겠네요."
조막만 한 주먹으로 어깨를 톡, 톡 치는 당소소.
나는 그녀와 함께 대련실을 빠져나갔다.
"으으······."
"아직도 어지러운 것 같아······."
"우웩!"
공터로 나오자, 비척비척거리며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 하나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없을 정도였다.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사람, 눈이 퀭해서 넋을 놓고 돌아다니는 사람.
"우웩!"
그리고 간간이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까지.
'좀비가 따로 없군.'
"안우진 님!"
그런 그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외침.
안색이 하얗게 질린 카이로시아가 나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당소소를 찌릿! 하고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안우진 님이 건의해서 만들어진 훈련이라면서요?"
"맞아."
"그럴 줄 알았어. 어휴, 이렇게 정신 나간 훈련을 안우진님이 아니면 또 누가 생각하겠어요?"
투덜대는 카이로시아를 뒤로하고, 나는 플레잉코치 시스템으로 그녀의 스텟을 확인했다.
기존에 카이로시아의 정신 스텟은 91.
그런데 지금 보니 MAX 스텟인 99까지 상승해 있다.
'나쁘지 않네.'
그 모습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정신 스텟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을 줄이야.'
내 건의로 인해 최근, <독 원샷하기> <독 샤워하기> <독 찍어 먹기> 같은 훈련 커리큘럼이 추가된 상황.
덕분에 카이로시아뿐만 아니라, 팀 투지에 소속된 모든 팀원들이 정신 스텟에서 급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파급력은 굉장했다.
'대박이야.'
체력 30% 미만 구간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근민체도 폭발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로 가면, 초반의 나와 비슷한 속도로 스텟을 올릴 수 있는 팀원도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스텟이 전체적으로 훨씬 상승했다는 건.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더 늘어나겠는데?'
플레잉코치 시스템을 통해 들어올 포인트의 양도 훨씬 많아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아세리안의 표정이 안 좋던데.'
독이 생각보다 엄청 비싸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독의 재료가 고가라는 데에 있었다.
팀 투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가 2만 명에 가까워진 상황.
그에 따라 커리큘럼 운영에 들어가는 금액이 어마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부활 가능한 대련장을 하나 더 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꼭 지어야 할까요?
―독의 치사율이 너무 높아서요. 수련 중에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휴우······.
그에 따라 최근 낭비되는 골드가 없도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아세리안.
대련장을 새로 지어달라고 했을 땐 기겁을 할 정도였다.
―안 지어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정말요? 다른 방법이 있어요?
―죽으면 그냥 운 나빴구나 생각하는 거죠, 뭐.
―······지어드릴게요.
나중에는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신 스텟 훈련의 효율이 너무 좋아,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찌릿! 하고 나를 째려보긴 했지만.
"당소소 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모두들 방독면이랑 위생용 장갑까지 꼈나요?"
"네!"
"알겠어요. 안우진 님, 아세리안 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용인의 부름에 총총 걸어가는 당소소.
그러자 100명의 사용인이 그녀를 호위하듯 따라붙기 시작했다.
'돈 들어갈 곳이 많긴 하겠군.'
모두 당소소를 위해 고용된 사용인들이었다.
현재 팀 투지에서 독을 제조할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
그런데 2만 명 분량의 독을 제조해야 한다.
혼자서 그 모든 걸 만들려면 24시간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뭐, 서로 윈윈이지.'
아세리안은 중개 거래소에서 보기 힘든 독을 구해서 좋고, 당소소는 아세리안의 돈을 이용해, 다른 성계에서 나오는 각종 재료들로 독을 제조해볼 수 있어서 좋고.
서로가 원하는 걸 하나씩 주고받았다고나 할까.
"참나, 별꼴이야. 그냥 제조법만 알려주면 될 걸."
그 모습을 보던 카이로시아가 투덜댔다.
그녀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배어 나왔다.
이전에 팀 투지에서 전속 사용인이 붙은 건 나밖에 없었으니까.
'별걸 다 부러워하는군.'
그런데 당소소에게 전속 사용인이 붙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독은 가문의 비기秘技.
누군가에게 공유할 수 없으니, 직접 통제해서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팀 내에서 당소소의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불가한 인재가 되었으니까.
"흥! 저도 효율적인 훈련법을 만들어 내고 말겠어요."
"효율적인 훈련법?"
그런 당소소에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카이로시아.
"네! 안우진 님이 깜짝 놀랄 만한 걸로요."
그녀는 호언장담을 하며, 배정된 연구실로 향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훈련을 하지.'
멀어지는 카이로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고위 플레이어의 탄생. 플레이어 렌, 다가오는 하이블러드나이트143에서 승급전을 치른다.
'드디어 내일이군.'
통유리로 된 천장에서 달빛이 쏟아진다.
침대에 누워서 달빛을 맞던 나는, 커뮤니티를 보며 피식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개노잼이 예상되는 승급전은 처음이네ㅋㅋㅋ
└인정 ㅋㅋㅋ 솔직히 렌이 너무 강함 ㅎㄷㄷ 어떤 미션이 나오든 다 개박살 낼 듯 ㅎ
└이거 그냥 눈 가리고 아웅 아니냐? 걍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거잖아 ㅡㅡ
└차라리 그냥 고위 리그로 올려보내면 좋겠음. 틀 안에 가둬놓기엔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함.
└심지어 중간계에서 펼쳐진다고?ㅋㅋㅋㅋㅋ 아이고 배야 ㅋㅋㅋ 그냥 조금 더 뒤로 늦췄다가 수준에 맞는 미션 나오면 진행하지 뭐가 급하다고 ㅋㅋㅋ
커뮤니티에 달린 승급전의 반응이 무척 미지근했기 때문.
성계 대항전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탓에, 내 승급전에 대해서 신들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저 반응은 내가 경기장에 들어가는 순간 180도 달라지겠지.
'더 어려울 거라고?'
중간계에서 어려움을 느낄 만한 난이도라고 그랬으니까.
'슬슬 잘 준비해야겠군.'
커뮤니티를 닫은 나는 <시스템 상점>에 접속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0,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0,000 P를 소모하셨······.]
[정신 : 99]
그리고는 정신 스텟을 한계까지 맞췄다.
이걸로 경기 출전 준비는 끝.
'마지막 경기.'
두근― 두근―
심장이 쿵쾅거렸다.
승급전.
고위 리그로 올라갈 마지막 계단.
그 모든 게 내일이면 결정 날 것이다.
띠링!
[<달빛 게이지>가 1% 상승합니다. (100/100)]
[<달빛 게이지>가 가득찼습니다.]
[<달빛의 가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 남은 건, 단 한 번의 승리뿐.
'이만 자 볼까.'
아세리안에게 부탁해, 천장을 통유리로 개조한 숙소.
쏟아지는 달빛과 별빛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여긴······!'
경기장으로 들어온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텁텁하고 탁한 공기가 폐를 찌르고, 깜깜한 밤하늘 위 보름달이 나를 반겨준다.
주변엔 온통 초록빛의 나무들로 가득하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야산과 다를 바 없는 풍경.
띠링!
[경기 : 상위 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43의 8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척살(개인 PvP)]
[게임명 : 영리한 여우]
[맵 : 서울(대)]
[관객 수 : 4,901,084 명]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들 너머로, 촘촘한 빛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린다.
빵― 빵―
그 사이사이로 익숙한 자동차의 클락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색하면서 동시에 낯이 익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울······?'
이번 단독 미션이 펼쳐지는 곳은 지구 성계였던 것이다.
< 186화. 해방(5) > 끝
< 187화. 해방(6) >
서울.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천만 명이 살고 있는 거대 도시.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자, 가지고 있는 모든 추억, 후회, 기쁨, 슬픔이 잠자고 있는 곳.
[미션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독재자를 처치하세요.]
[이번 경기엔 제약 조건이 있습니다!]
[제약 조건 1 : 국제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성계입니다. 타국의 영향력을 이용한 미션 수행을 금지합니다.]
[제약 조건 2 : 플레이어의 기초 스텟이 '20' 으로 하락합니다.]
[제약 조건 3 : 플레이어라는 신분을 노출시켜선 안 됩니다.]
[제약 조건 4 : 지구의 물건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습니다.]
[제한 시간 : 720:00:00]
'북한의 독재자를 처치해라.'
미션 내용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14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미션만 생각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승급한 채로 팜에 돌아가는 것.
'근데 북한을 어떻게 들어가지?'
어떤 식으로 수행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한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내 기초 스텟은 20.
그냥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다니기엔 터무니 없이 낮은 스텟이다.
게다가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군의 색채가 강한 국가.
원래는 한 나라였지만, 현 상태에선 남한인에겐 금지된 땅.
다른 의미로 진짜 어려운 미션이 나온 것이다.
'일단 들어갈 방법부터 찾아야겠군.'
└어? 지구???????
└와 ㅋㅋㅋㅋ 진짜 지구네?! 지구 성계에서 열리는 거 최초 아님!?!?!?
└ㄴㄴ 콜로세움 초창기 시절엔 몇 번 열리긴 했음 ㅎ
└지구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ㅋㅋㅋ 진짜 거의 4년만 아닌가? 근데 지구는 왜 리그가 안 열림?
└열릴 때마다 미션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경찰 뭐시기라고 불리는 자경단한테 사살당했음.
└저기 ㅈㄴ 웃긴 동네임 ㅋㅋㅋㅋ 무기 들고 있으면 잡아가고, 복장 이상해도 일단 잡고 봄 ㅋㅋㅋ
└ㅋㅋㅋㅋ 그것만이 아님 ㅋㅋㅋ 국경 넘을 때도 무슨 종이 쪼가리 없으면 못 넘고 골드도 거래할 때 어디서 난 골드냐고 물어봄 ㅋㅋㅋㅋㅋㅋ 개 빵터짐 ㅋㅋㅋㅋ
└고도 문명화돼서 그래요 ㄷㄷ 냉병기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고, 사회 체계도 복잡해서 미션을 내려줘도 뭘 할 수가 없음 ㅠ
└근데 기초 스텟 20이면 너무 낮은 거 아니냐? 렌 툭 치면 죽겠누 ㅠ 저걸로 어떻게 깸?
└ㄴㄴㄴㄴ 여긴 그래도 됨. 육체 능력치 개쓰레기임 ㅋㅋㅋ 그래도 마침 렌이 지구 출... 어? 쟤 누구임?
└뭐냐? 왜 렌이 안 오고 이상한 애가 있음?
└아닌데? 입고 있는 거 보면 쟤가 렌 맞는데??
└뭐야!! 가면 어따 두고 왔어!!!!! ㅅㅂ 렌 분위기는 가면빨인데ㅠㅠ
인벤토리에 창을 집어넣은 나는 은밀하게 산을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나는 가죽 갑옷에 워커, 그 위에 검은색 로브를 두른 상태니까.
지구의 누군가가 보면 위화감을 느낄 만한 복장이었다.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닌다며 경찰에 신고하겠지.'
자칫 잘못했다간 경찰이 출동해서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어서 주의해야만 한다.
<평창1길 >
산 아래에는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골목에는 단독 주택들로 가득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산 아래에는 온갖 별들이 반짝였다.
가로등의 등불, 창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형광등의 불빛 등등.
그 사이사이를 돌아다닌 나는 어렵지 않게 옷을 구할 수 있었다.
옥상에 빨래가 널려져 있는 집이 있었기 때문.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군.'
착용하고 있던 장비를 벗은 후, 검은색 트레이닝복 세트로 갈아입은 나는 1골드를 꺼내 바닥에 두었다.
금의 가치로 봤을 때, 이 옷보다 몇십 배는 더 거액일 것이다.
'정보를 좀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옥상에서 내려온 나는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돌아다녔다.
트레이닝복에 워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남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을 테니까.
'다른 성계인들이 수행하기엔 까다롭겠어.'
정보를 구할 방법을 찾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얻는 건 어렵지 않다.
컴퓨터라든가, 아니면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면 끝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나한테 그 두 가지가 없다는 것.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여기서도 문제가 있었다.
'골드를 함부로 쓸 수 없는 곳이지.'
골드.
즉, 금을 팔면 손쉽게 돈을 구할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은 금을 팔 때도 신원을 확인하는 나라다.
물론 다른 판매 루트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 또한 핸드폰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돈을 구해야 한다는 뜻.
'어쩔 수 없지.'
돈을 구할 수 없다면, 뺏는 수밖에.
'명동이 어느 방향이더라.'
눈먼 돈, 그리고 검은돈은 탈이 나지 않을 테니까.
└ㅋㅋㅋㅋㅋ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네 ㅋㅋㅋ 진짜 개ㅈ같은 성계네 ㅋㅋㅋㅋ
└ㄹㅇ;; 지구인들이 콜로세움에 들어와서 얼타는 이유를 알았음... 이런 곳에서 살다가 팜에 들어오면 진심 패닉일 듯 ㄷㄷ
└솔직히 학살, 끝! 이런 레파토리일 줄 알았는데, 지금은 ㅈㄴ 궁금함 ㅋㅋㅋㅋ
* * *
"이봐요, 아저씨.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바보야? 엉?"
"······."
"원금 천만원에 이자율 20프로. 분명 아저씨가 계약서에 싸인 했잖아. 안 그래?"
"아, 아니 당연히 일 년에 20프로인 줄 알았죠······."
명동, 율재 컨설팅 사무실.
손님과 채무 상담중인 동생들을 뒤로하고,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던 이수철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팔뚝에 새겨진 잉어와 용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렸다.
'씨발, 이번 달에 빵꾸가 왜 이렇게 많아?'
이번 달에 회수하지 못한 돈만 1억 원.
그런 탓에 그는 현재 무척 날카로운 상태였다.
"분명 계약서에도 나와 있잖아! 자, 눈 뜨고 잘 봐! 여기 뭐라고 써 있어?"
"하, 한 달에 20프로······."
"그치? 근데 그걸 못 본건 아저씨 눈깔이잖아. 안 그래? 아저씨가 잘못 본 건데 왜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하냐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6개월만에 3천만원으로 불어납니까?"
"잘 들어. 첫 달 1,200만원. 그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둘째 달 1,440만원. 셋째 달 1,728만원. 넷째 달 2,073만 6천원. 벌써 여기에서 이미 2천만원이 넘었잖아."
"······."
"그리고 저번달에 이미 2,488만 3,200원으로 불어났네. 이번 달에 2,985만 9,840원이 됐고. 내가 깔끔하게 9,840원은 빼 줄테니까 딱 말해. 언제까지 줄 수 있어?"
"드리고 싶어도 돈이······."
콰아앙!
"아니, 씨발. 아저씨. 남의 돈을 갖다 썼으면 재깍재깍 갚아야 할 거 아냐. 엉? 배 째라야 뭐야!"
정중하게 돈을 갚아달라며 애걸복걸하는 동생들.
하지만 손님은 채무를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쯧.'
"야, 나와 봐."
"예, 부장님."
그 모습에 이수철은 하는 수 없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봐, 김종률씨."
이수철의 부름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는 손님.
"예, 옛!"
이수철은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돈 못 갚겠다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뿜어져 나온 담배 연기가 손님을 때렸다.
"아, 아뇨. 당연히 갚아야죠!"
"근데?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갚으면 되잖아."
"다만 이자를 좀 낮춰 주셨으면 해서······."
"이자? 낮춰주면 갚을 수는 있고?"
이수철의 물음에 고개를 번쩍 드는 손님.
손님의 눈동자에서 기대감이 한가득 배어나왔다.
"물론이죠! 갚을 수 있습니다!"
이수철이 쪼그려 앉으며 손님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자를 좀 낮추면 갚을 수 있다라······."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있던 손님의 손등이 재떨이라도 되는 양 담뱃불을 비벼 껐다.
"끄아아아악!"
"그럼 나도 좀 부탁하자. 내가 좀 힘들어서 그러는데, 이자율 좀 더 올려주면 안 될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치? 말도 안 되지? 근데 왜 당신이 하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엉? 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이수철의 거대한 손이 손님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휘어잡았다.
"내 말 똑똑히 들어. 당신, 딸만 셋이나 있던데."
끄덕.
"만약 두 달 안에 안 갚으면 당신 딸들. 당분간 볼 수 없을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 있는 동생들이 잘 교육시킨 뒤에, 어디 근사한 곳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있을 거라고. 알았어?"
이수철의 말에 눈을 부릅 뜨는 손님.
"제, 제발! 가족들 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바아알!"
그가 이마를 땅에 찧으며 애걸복걸했다.
하지만 이수철은 혀를 차며 턱짓할 뿐이였다.
"야, 치워."
"예, 부장님! 이봐, 아저씨. 돈 생기면 그때 다시 찾아와. 알았어?"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제발!"
"어허! 빨리 안 나가? 야, 니네. 다리 잡아. 저기 골목 옆에 던져버리게."
사정사정하는 손님의 팔 다리를 잡아 채는 동생들.
이수철은 그 모습을 뒤로하고, 의자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꼭 좋은 말로 하면 들어 쳐먹질 않아요. 어휴.'
"제가 불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동생 하나가 두 손으로 공손히 라이터 불을 켰다.
그때였다.
철컥―
뚜벅. 뚜벅.
거칠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웬 남성.
"뭐야, 당신?"
검은 트레이닝복에 워커를 신은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누군데 남의 사무실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어? 이 새끼 봐라. 씨발, 사람이 말을 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는 것 보소."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동생들이 우르르 일어나 트레이닝복 남성을 경계했다.
그러나 건장한 덩치의 여섯 남자가 에워싸는데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는 남성.
그 모습에 이수철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구지?'
형사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2인 1조로 움직이기 때문.
아니, 설혹 형사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들 진정하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 한마디에 동생들을 진정시킨 이수철.
그가 미소를 띠며 당당하게 물었다.
만약 형사라고 해도 자신들은 거리낄 게 없었으니까.
사채도 엄연히 대부업이라는 하나의 사업이고, 실제로 사업자 등록증도 나온다.
게다가 이 사무실엔 계약서가 단 한 개도 없다.
사진만 찍어놓고, 바로 파쇄기에 돌려버리기 때문.
'털어 봤자 나올 게 하나도 없지.'
그런 이유로 형사라고 해서, 이수철이 기 죽을 이유가 없었다.
"청소하러."
그제야 첫 마디를 뱉는 트레이닝복 남성.
순간 이수철의 이마 힘줄이 꿈틀했다.
남성이 초면부터 반말질을 해댄 것이다.
주변에 있던 동생들의 얼굴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수철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정중하게 물었다.
"혹시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저흰 청소 용역을 쓰지 않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여기 인간 쓰레기들이 널려 있잖아."
'뭐?'
"인간······ 쓰레기······?"
그 말을 들은 이수철이 폭발했다.
"뭐야, 씨발. 웬 미친 새끼가 와 가지고! 야, 내보내!"
"알겠습니다, 부장님. 이봐, 남을 대할 땐 정중하게 하라고 가정 교육 안 받았어?"
"빨리 안 나가?"
목과 손목을 돌리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동생들.
그중 한 명이 남성을 밀치기 위해 손을 뻗을 때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
툭― 우드득! 빠악!
털썩-
'뭐, 뭐야?'
순식간이었다.
다가오는 팔을 잡아 꺾고, 인중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그 간결한 움직임에 이수철이 눈을 치켜떴다.
"이런 미친!"
"개새끼가!"
그 광경에 눈이 돌아버린 5명의 동생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툭― 빠악! 빡! 툭! 빡!
가볍게 툭툭 친 것 같은데, 네 명이 쓰러지기까지 고작 3초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게······ 된다고?'
그 비현실적인 장면에 이수철의 정신이 멍해졌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모두들 손목이나 발목 하나가 기형적으로 꺾인 채 쓰러지고, 남은 사람은 딱 한 명.
'녀석이라면.'
석호균.
영등포 일대를 주름잡던 육월파 출신으로, 의리 있고 깡도 좋은 녀석이라 이수철이 공들여 영입한 녀석이었다.
깜방에 들어간 사이 육월파가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품을 수 없었을 만큼 싸움 실력이 뛰어났다.
"이 새끼, 가만두지 않겠어!"
이수철은 마지막 남은 석호균에게 기대를 걸었다.
막대 형태로 된 잭나이프를 꺼내 드는 석호균.
버튼을 누르자, 툭 하고 시퍼런 칼날이 튀어나왔다.
트레이닝복 남성이 격투기를 배운 프로라고 해도 칼 앞에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뭐?'
긴장한 채로 석호균과 트레이닝복 남성의 대치를 지켜보던 이수철.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칼을 꺼내든 석호균을 본 트레이닝복 남성이 피식하고 웃은 것이다.
"죽어!"
그 미소에 눈이 뒤집힌 석호균이 남성의 복부에 칼을 찌르려 달려들었다.
그리고.
퍽! 퍽! 퍽!
"끅!"
칼 잡은 손목을 가볍게 툭, 하고 친 남성이 석호균의 명치를 때린다.
그와 동시에 손날로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킨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
그리곤 이수철에게 눈을 돌리는 남성.
트레이닝복 남성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던 잭나이프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발끝으로 찼다.
"으악!"
이수철의 얼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잭 나이프.
뺨을 스쳐 지나간 잭나이프는 의자에 달린 헤드레스트에 꽂히며 바르르 떨었다.
'미친······!'
그 광경에 이수철은 확신했다.
트레이닝복 남성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녀석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무심하게 칼을 발로 찰 수 있을 리가 없다.
'죽을 수도 있어.'
곱상하게 생긴 얼굴.
가지런히 정돈된 짙은 눈썹.
오똑한 코와 얇은 입술.
무척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남성의 눈동자를 본 이수철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바들바들 떨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한 눈빛이었으니까.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리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랑 다른 세계의 인간이야.'
과거에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명동의 왕이라고 불리는 주 회장.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경호하던 한상민 실장이 딱 저런 눈빛이었다.
"도, 돈이 필요해서 오셨습니까? 얼마가 됐든 그냥 드리겠습니다!"
상대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깨달은 이수철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으면 끝.
그는 책상 아래에 있는 금고를 열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책상 위에 꺼냈다.
땡그랑!
얼마나 다급했는지, 골드바를 그냥 던지듯 올려둘 정도였다.
'제발······.'
오만원 권 지폐 뭉치가 대략 40개.
현 시세로 3,300만 원이 넘는 한국 금 거래소 375그램짜리 골드바 일곱 개.
총 4억이 넘는 금액이었지만, 이수철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저 이 저승사자가 돈을 받고 물러나 주기만을 기도할 뿐.
그때였다.
"······!"
지금까지 무표정 일색이던 남성이 갑자기 인상을 찡그린다.
'씨발······.'
그 모습에 이수철의 심장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 * *
[중급신 '팔라스' 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김종률이라고 불린 남성의 계약, 파기하게 만들기.
[보상 : 10,000 P]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대신 '헤카테' 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아름다운 조각품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들을 구해와 주실 수 있나요?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보상 : 100,000 P]
[서브 미션을 거절하였습니다.]
[고신 '에우노미아' 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지구 성계에 왔을 때 가장 먹고 싶었던 것 먹기.
[보상 : 30,000 P]
'뭐야?'
지구에 왔을 때 먹고 싶었던 거?
상태창을 본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먹고 싶었던 거라······.'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스타벅스에 들러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딸기 딜라이트 요거트 블렌디드나 한 잔 마셔야겠군.'
< 187화. 해방(6) > 끝
< 188화. 해방(7) >
율재 컨설팅 사무실.
아니, 사채업자의 소굴을 빠져나온 나는 스타벅스에 들렸다가, 택시를 타고 동대문에 도착했다.
'저 사람이 좋겠군.'
띠링!
[지구인 '송윤일'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길거리를 지나가던 한 학생의 그림자를 밟은 후, PC방으로 향했다.
혹시 경찰이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뒤쫓기게 될 경우 탈출하기 위한 용도였다.
신고하면 죽이겠다고 살기를 뿌려대며 협박했지만, 앞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비회원 후불 카드 하나 주세요."
"저희는 후불 개념 없어요. 자리에 앉아서 회원 가입하고 키오스크에서 충전하셔야 해요."
"비회원 선불도 안 됩니까?"
"되긴 하는데 그럼 1시간에 1,500원인데요."
"그럼 비회원으로 만 원치 해주세요."
"네에, 네에."
몇 년 만에 PC방을 와보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말 많이 변했군.'
귀찮음이 한가득 배어 나오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뒤로한 채, 주변을 살펴본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데스크 위에 써 있는 볶음밥, 피자, 만두, 커피 등등 엄청나게 다양한 메뉴들.
여기가 식당인지, 카페인지, 아니면 PC방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요."
알바생이 내미는 카드를 챙긴 나는 내부를 스캔했다.
출구는 두 개.
내가 방금 들어온 곳의 반대편에 또 다른 문이 있다.
'후문으로 나가는 길이 있나 본데.'
반대편 문을 열고 나가니 보이는 좁은 계단.
계단을 타고 1층으로 올라가자, 건물의 주차장 쪽으로 나가는 출구가 존재했다.
'이쪽으로 나가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겠어.'
주변 지형을 눈에 담은 나는 다시 PC방으로 돌아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정문과 후문의 딱 중간 지점이었다.
└와 ㅋㅋㅋㅋ 여기 진짜 많이 발전한 성계인데?
└깜놀;; 지구 성계 처음 봄 ㄷㄷ
└자동차도 그렇고, 컴퓨터라는 것도 그렇고 신기한 게 진짜 많네.
컴퓨터를 켠 나는 곧바로 검색 사이트에 접속했다.
지금부터 내가 조사할 것은 두 개.
첫 번째는 북한 독재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북한에 침투할 방법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까다롭네.'
검색창에 등장한 정보들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재자의 위치가 명확하게 나와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을뿐더러, 예상되는 은신처만 해도 십수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또한 매일같이 은신처를 돌아다니며, 지하에는 따로 탈출 루트도 있고, 경호 인력도 굉장히 많은 모양.
보안과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식 행사에 나왔을 때 죽이는 게 베스트이긴 한데.'
그때만큼은 명확하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 난이도가 수직 하락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제한 시간 : 719:58:12]
'하염없이 기다릴 순 없어.'
이번 미션엔 제한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
그냥 죽이러 가도 30일이란 시간은 빠듯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직접 침투해서 정보를 모으는 수밖에.
└쟤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독재자임?
└와 ㅋㅋㅋ 일국의 왕이 저렇게 볼품없어 보이는 건 처음인데 ㅋㅋㅋ
└ㅋㅋㅋㅋㅋ기다려 보셈 내가 겁나 웃긴 서브 미션 걸어보겠음.
은신처 위치와 관저, 자주 다닌다는 지역들을 체크한 나는, 그다음부터 침투 경로를 물색했다.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비무장 지대를 지나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북한 주민들의 탈북 루트를 거꾸로 오르는 방법이다.
'비무장 지대는 쉽지 않겠어.'
비밀스럽게 철책을 넘어, 주변을 수색할 군인들 몰래 침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데 문제는 비무장 지대 곳곳에 박혀 있을 지뢰.
그것만큼은 초감각으로도 찾는 게 불가능했다.
초감각은 미세한 움직임, 작은 소리, 그리고 초음파처럼 퍼져 나가는 마력장을 통해 공간을 읽어내는 능력이었으니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으며, 땅속에 박혀 마력장으로 읽을 수도 없는 지뢰는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는 건데.'
그때부터 나는 밤새도록 침투 경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띠링!
[대신 '로키' 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타깃 죽일 때,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어? 얘가 아니네? 미안, 잘못 찾아왔어.'라고 귀에 속삭이기.
[보상 : 100,000 P]
다음 날 아침.
PC방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정장부터 한 벌 맞췄다.
어느 시간, 어디에 있든 위화감을 가장 적게 주는 복장이기 때문이다.
카페에 있으면 미팅을 위해 누굴 기다리는 것, 사우나에 있으면 일하다 말고 땀 빼러 온 것, PC방에 있으면 일하다 말고 농땡이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슬슬 출발해야겠군.'
동대문에서 나머지 볼일을 처리한 나는, 택시를 타고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앞.
주변에 CCTV가 없는지 체크하는데, 다가온 50대 중반의 여성.
"제일 기획 주창범 대리님?"
그녀는 어눌한 발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맞습니다. 하진화 님?"
"어? 동포셨군요!"
'뭐야?'
순간 나는 당황했다.
여성이 중국어로 내게 친근함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자동 번역 시스템.'
콜로세움에는 자동 번역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
어느 성계를 가든, 소통이 원활하도록 자동 번역이 되게 해준달까.
덕분에 미션 수행을 할 때 용이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존재했다.
바로,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
'쯧, 중국인인 척 해 야겠군.'
한마디로, 중년 여성의 귀엔 내가 지금 능숙한 중국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 동포셨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서류 좀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여성에게 미리 준비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길림 연변 국제 호텔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정확히는 호텔과 길림 은행 사이에 있는 골목이요. 진짜 중요한 서류니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뻘뻘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는데, 하진화가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낸다.
"불법은 아니죠?"
"물론입니다. 그냥 서류 봉투일 뿐이에요. 만져 보시죠."
"흠······."
"비행기 탈 때 소지품을 스캔하는데, 불법적인 거면 이렇게 드리지도 않습니다. 몸 어딘가에 숨기지 않는 이상 들통날 테니까요."
"그렇긴 하죠."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하진화.
하지만 그녀의 의심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보내요? 팩스로 보내거나 국제 우편으로 보내면 되잖아요."
"급한 계약 서류라 그렇습니다. 날인 때문에 원본을 보내야 하는 거구요."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여기, 선금 500만 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하얀 돈 봉투를 건넸다.
5만원권 100장.
"무사히 건네면 천만 원을 더 드릴 겁니다. 여기 보시면 도장 보이죠? 이게 훼손되면 추가금은 드리지 못하니까 주의해 주시구요."
서류 봉투에는 중세 시대처럼 왁스를 녹여 찍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뜯을 때 굳은 왁스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누군가가 열어보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용물은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A4용지였지만.
'디테일은 완벽해.'
오늘 아침, 동대문에 있는 인장印章 거리에서 급하게 만들어 찍은 것.
이 정도면 하진화 쪽에서도 크게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어요. 제가 잘 전달할게요."
"내일 저녁까지입니다. 도착 장소에서 가슴 높이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으면 누군가 올 거예요. 10분 전에 저한테 문자 주시구요."
"네."
고개를 끄덕이곤, 홍대입구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하진화.
나는 서둘러 그녀의 그림자를 밟았다.
띠링!
[지구인 '샤젠화夏珍花'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이걸로 여권 문제는 끝.
'됐어.'
이제 북한에 들어갈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진화와 헤어진 나는 다시 PC방으로 돌아왔다.
'이쪽 산으로 우회하면 되겠군. 여긴 뭐지? 군부대인가? 그럼 이쪽으로······.'
그리고는 하루 종일 구글 지도를 보며 북한의 지리를 숙지했다.
침투한 뒤에 움직여야 할 방향, 거리, 그리고 타깃이 있는 평양 시내의 구조 등등.
보다 완벽에 가깝게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도 맵을 다 볼 수 있다고? ㅋㅋㅋㅋㅋㅋ 이거 그냥 맵핵 아니냐?
└야, 아그야. 오늘은 '짜파게티'라는 걸 한 번 먹어보너라.
└ㅋㅋㅋㅋㅋㅋㅋㅂㅅ 그걸 서브 미션으로 걸어야지, 여기다 대고 쓰면 렌한테 보이겠음?ㅋㅋㅋㅋㅋ
└무슨 한 공간 안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어 ㅋㅋㅋㅋㅋㅋ 진짜 개 사기네 ㅋㅋㅋㅋㅋ
└ㄹㅇ ㅋㅋ 맵핵으로 적진 한번 싹 스캔해주고, 가만히 앉아서 정보 얻어내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화장실도 갈 수 있음 ㅋㅋㅋㅋ
'여긴 변한 게 없네.'
콜로세움에 들어간 이후, 지구엔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북한의 독재자가 도발하고, 남한은 그저 유감만 표명할 뿐.
'미카엘이 왜 여기로 보냈는지 알 만하군.'
그렇게 생각하자, 왜 지구 성계에서 미션을 수행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중간계, 즉 지구를 위협할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겠지.
[제한 시간 : 675:17:42]
지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렇게 밤을 새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울리는 핸드폰 진동.
이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건 하진화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때가 됐군.'
상태창에 있는 그림자 표식 목록을 확인하니, 북쪽으로 6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빨간 점 하나가 깜빡거린다.
대략 서울에서 연변까지의 거리.
'슬슬 움직여 볼까.'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블랙진 청바지,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모자, 그리고 까만 마스크.
이 정도면 어둠 속에 잘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 이동.'
[지구인 '샤젠화'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간 시야가 반전되며, 가로등 하나가 비추고 있는 깜깜한 골목이 보였다.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나를 등진 채 서 있었다.
"하진화 씨?"
"어맛! 아이고, 깜짝 놀랐잖아요. 주창범 씨한테 서류 받으시는 분이죠?"
"맞소."
"여기요. 한 번도 안 열어봤어요."
"음. 물건 잘 수령했소. 천만 원이라고 그랬던가?"
내 물음에 눈을 빛내는 하진화.
진짜로 천만 원을 다 줄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 맞아요."
"여기있소. 안전하게 배달해 줘서 고맙군."
"근데 중국분이 왜 한국 돈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인이 배달올 수도 있다고 그래서 미리 환전해 뒀소. 그럼, 이만."
"정말 고마워요. 사업 잘되시길 바랄게요!"
몸을 돌려 골목을 나서자, 뒤에서 들려오는 하진화의 외침.
나는 굳이 대답해 주지 않은 채,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야 해.'
내가 향하는 곳은 북한의 남양.
개마고원보다도 위에 있는, 함경북도 최북단 지점이었다.
사실상 평양에서 가장 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압록강을 통해 들어가는 것보다, 무려 3배 가까이 멀다.
'체력 분배의 싸움이겠군.'
그럼에도 내가 남양을 선택한 건, 단 하나였다.
압록강 쪽으로는 평야밖에 없으니까.
북한은 이동이나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는 나라다.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조차 여행증이나 통행증이 없으면 불가능.
심지어 수도인 평양은 특별한 허가증이 없으면 출입 자체가 안 된다.
'정말 개같은 나라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평양까지 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가는 동안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는 것.
그러려면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함경북도에서 이동할 수밖에.
인적이 드문 외곽까지 빠져나온 나는, 인벤토리 안에서 달의 메아리를 꺼내 몸에 둘렀다.
띠링!
[그믐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달빛의 힘으로 인해 <영롱한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5%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 >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36%]
중천에 뜬 그믐달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미리 음력을 계산해보고 왔기에, 오늘 그믐달이 뜰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연변에서 북한의 국경까지는 26킬로미터.
그 사이를 거대한 장백산맥이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밤 안에 대동강을 건널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황.
'달빛이 얕을 수록 좋지.'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 리그]
[근력 : 35(+5)(+10)] [민첩 : 41(+5)(+16)] [체력 : 35(+5)(+10)]
[정신 : 49(+5)(+24)] [지력 : 30(+10)] [마력 : 35(+5)(+10)]
[적용 특전]
[역천자 : 모든 스텟 +20%] [최강의 성계 : 모든 스텟 +17%]
[달의 메아리 : 모든 스텟 +1%] [영롱한 달빛 : 모든 스텟 +10%]
[천뢰십보 : 민첩 +30%] [열반 : 정신 +30%] [대천사의 눈물 : 정신 +40%]
이 정도 밝기면 충분히 침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러 가볼까.'
* * *
[대신 '로키'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어? 미안하다. 너가 아니네?' 미션 안 받을 거냐?
[보상 : 130,0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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