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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의 목을 치는데 망설임은 없었 다.

'음험한 녀석들이다. 여지를 주면

안 되지.'

전생의 나는 다크 엘프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천성이 조용하고 음모를 꾸미기 좋 아하는 종족이라, 보고 있어도 속내 를 알기가 어려웠다.

비쩍 마르고 약한 주제에 엘프에 대한 자긍심만 얼마나 세던지.

"끄륵...

고꾸라지는 다크 엘프.

산에 배치된 경비대는 총 30.

모두 모이기 전에 개별로 각개격파 를 했다.

가로막는 다크 엘프들을 쓰러트리 고 산 정상에 도착했다.

강렬한 암흑 마나의 중심부.

화려한 액세서리로 몸을 꾸민 다크 엘프가 모종의 의식을 진행하는 중 이었다.

'아까 블랙 썬더를 쓴 게 이 녀석 이었나.'

마법진에 좌정한 채로 있는 늙은 다크 엘프.

몸에서 풍기는 기세로 볼 때 제법 고수의 면모가 느껴졌다.

늙은 다크 엘프는 나를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닌 것 같다.'

나는 늙은 다크 엘프를 살펴보고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너. 그 의식 준비하느라 제대로 못 움직이지?"

다크 엘프 대장의 얼굴에서 처음으 로 당혹감이 감돌았다.

후후.

상당한 마력을 지닌 다크 엘프다.

전장에서 힘을 보탰다면.

동족 수십 명이 쉽게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크 엘프는 동족애가 대단하거 드 ,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블랙 썬더.

다크 엘프 중에서 '장로' 급이 되 어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강력한 비전 마법.

굳이 동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 를 노렸다면.

이유를 유추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

다.

나는 의식을 진행 중인 다크 엘프 의 목덜미에 칼을 대었다.

"너네. 한국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 고 하는 거냐."

주르륵.

붉은 피 한 줄기가 흑색 칼날과 맞닿은 목덜미에서 흘러내렸다.

늙은 다크 엘프는 눈을 꾹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대답 안 할 거지?"

기대도 안 했다.

다크 엘프는 고집이 세거든.

근데, 굳게 닫혀 있던 놈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칼을 휘두르려다 말고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기다렸다.

"위대하신 마왕. 데이모스를 위하 여!"

아.

그러니까 이놈들은 마왕 데이모스 의 부하들이었구나.

...응? 그럴 리가 없잖아?!

52 화

와락-

다크 엘프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데, 데이모스 님께서 다시 이 세

상에 강림하셔서 죽음을 풀어놓으

실 "

다크 엘프의 입가 너머로 붉은 액 체가 흘러나왔다.

나는 놈의 맥을 짚었다.

'제길. 마나를 폭주시켰다.'

다크 엘프의 눈동자에서 총기가 점 점 사라졌다.

내부에 있는 암흑 마나를 폭주시켜 서 스스로를 해한 것이다.

"야. 너 할 말만 하고 뒈지면 어떻 게 하냐'?!"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데이••••••

남의 속이 타는지도 모르고.

다크 엘프 대장은 죽기 전까지 헛 소리만 하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는 한참 동안 다크 엘프의 사체 를 내려다봤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머릿속을 휘젓 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감정이 무 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분노였다.

"이 쓰레기 자식들이!"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격렬한 감정에 손이 덜덜 떨렸다.

콰아앙-!

화가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혼돈기를 실어서 땅을 내려찍자, 무언가가 폭발하듯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내 이름을 사칭하고 있다 고!"

투장 데이모스.

비록 전생이지만, 나는 살면서 부 끄러운 짓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투마 일족으로 태어나 투마답게 죽 었다.

그런데.

제깟 놈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내 이름을 팔아먹는다고?!

쾅 쾅!

야산에 때아닌 재앙이 들이닥쳤다.

산책로 일부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 고 무너져 내릴 때쯤.

"후우...

길게 한숨을 쉬면서 분노를 가라앉 혔다.

'놈들의 목적을 알아내야 한다.'

내 정체성은 전생과 현생이 반반씩 섞여 있다.

현생의 나.

전민철의 냉철한 판단력이 발휘되 면서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지금은 분노를 터트릴 때가 아니 야.'

마음속에서 끝없이 타오르는 분노.

이 감정은 웃기지도 않은 장난을 친 장본인을 마주했을 때 터트릴 것 이다.

다크 엘프는 모두 죽어버렸다.

'죽은 놈들한테는 입이 없으니 물 어볼 수가 없다.'

남은 단서는 하나.

다크 엘프 대장이 진행하던 의식을 조사하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터에 새겨진 의식 마법진을 훑어봤다.

'어디에 쓰는 거지?'

특이한 룬어 배치.

잊힌 고대 문자.

무 대륙의 언어도 있었다.

전생의 지식을 뒤져봐도 본 적 없 는 마법진이다.

이럴 때 유용한 스킬이 있지.

나는 [진실의 눈]을 사용해서 의식

마법진의 정보를 살폈다.

[파장 증폭진]

분류 : 진법

등급 : A

완성도 : 81%

특정한 파장에 반응, 그 마력을 증 폭시켜주는 마법진이다.

총 12개의 룬(Rune)어, 무 대륙의 한자, 그리고 크투나 차원의 고대어 가 접목되었다.

'특정 파장을 증폭시킨다고?'

더 자세한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 다.

하지만 충분한 힌트가 되었다.

'저 마법진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대규모 의식을 위한 밑바탕.

다크 엘프들이 설치하던 마법진은 커다란 계획 일부에 불과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내 이름을 걸고 엉뚱한 짓을 꾸미고 있었다.

'정보가 필요해.'

지구에서는 판데모니엄에 관한 정

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나한테는 남들에게 없는 쓸 만한 부하가 있었다.

전화기를 잡고 재다이얼 버튼을 눌 렀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베르데한테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 지만, 죄다 부재중 메시지만 들렸다.

아. 게이트 들어간다고 했었지.

젠장.

개똥도 쓰려고 하면 없다고 하더 니.

미간을 찌푸렸다.

'내 이름을 팔아서 헛짓거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대안을 생각 했다.

다크 엘프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 는지도 궁금했지만.

그 음모에서 내 이름을 언급하는 게 더 괘씸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네놈들의 헛짓거리를 박살내주마.

'혼자서는 막을 수 없다.'

서울은 넓다.

은밀한 암흑마나의 유동을 일일이 확인하는 건 어렵다.

먼저 떠올린 건 헌터협회였다.

'괜히 들쑤시는 것밖에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판데모니엄의 준동을 알렸 다가는 놈들이 더 안쪽으로 숨어들 것이다.

내가 전생의 기억과 경험이 있어서 암흑마나를 감지한 거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다.

'성간 연합은?'

성간 연합의 힘은 강대하다.

하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인맥은 지부장 선이 최대였다.

전투 골렘 몇 기.

금전으로 동원할 수 있는 용병 몇 명.

전력이 부족했다.

'이 탈색 귀쟁이 놈들을 어떻게 하 면... 아, 엘프?!'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신유미.

엘프 대사관과 한국인 부부 사이에 서 생긴 하프 엘프다.

몇 달 전에 치른 헌터 시험.

푸른 파수꾼 레이드를 두고 내기를 걸어서 밥 한 번 얻어먹겠다는 약속 을 받아냈다.

'엘프라면 다크 엘프의 준동에 대 해 관심이 있을 거다.'

엘프와 다크 엘프.

원래는 같은 종족이었지만, 급진파 엘프 일부가 판데모니엄과 손을 잡 은 후로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두 종족의 사이는 철천지원수!

다크 엘프가 한국에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 을 보일 것이다.

곧장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낭랑한 목소리.

그때 대화를 나눴던 음색과 비슷했 다.

다행히 맞는 번호인 것 같다.

"전에 헌터 시험에서 만났던 사람. 전민철이다."

-아, 그때!

"시험에서 했던 내기. 기억하고 있 지?"

-호호호. 물론이죠. 근데 연락이

많이 늦으셨네요.

"내가 좀 공사다망해서. 참, 한 가 지만 물어봅시다."

-음.... 개인적인 이야기만 아니 면 좋겠네요.

선을 긋는 신유미.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거든요.

"다크 엘프. 혹시 알고 있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확인차 다시 한번 말하려고 할 때 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 죠?

신유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다크 엘프라는 단어 한 마디에 여 러 말이 튀어나왔다.

오호.

엘프 대사관.

이미 다크 엘프에 대한 냄새를 맡 은 걸까?

신유미한테 전화하기를 잘한 것 같 다.

"밥 약속. 아직도 유효하지?"

나는 씩 웃었다.

* * *

나는 통화를 마치고 전투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을 보낸다... 라.'

신유미와의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 졌다.

그녀는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야산에서 벌어진 일을 최대한 짧게 축약했다.

-이쪽에서 수습할 사람들을 보낼 게요.

엘프 대사관에서는 이미 다크 엘프 의 준동을 파악한 게 분명했다.

산 아래.

전투를 벌인 흔적이 눈에 들어왔 다.

주위를 가득 메운 암흑 마나.

이 주변은 여전히 다크 엘프들의 교란 마법의 영향을 받았다.

파훼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교란 마법을 그대로 뒀다.

'이걸 거둬내면 암흑 마나의 기척 이 퍼지겠지.'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엘프 대사관에서 뒤처리를 해준다 고 했으니,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킁킁-

상큼한 과일 향이 코끝에 감돌았 다.

정령의 기운이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귀쟁 이들.

대사관에서 파견된 엘프였다.

"반갑습니다. 실례지만 전민철 헌 터가 맞으십니까?"

1그렇다."

"엘프 대사관에서 파견 나온 그리 프입니다."

나는 선두에 선 엘프의 어깨를 힐 끔거렸다.

잎사귀 5개가 그려진 브로치가 옷 에 걸려 있다.

'저건 친위대일 텐데?'

엘프들은 브로치에 달아놓은 잎사 귀 개수로 전사 계급을 구분한다.

잎사귀는 종 6개.

그중 5개가 달린 계급이라면, 엘프 의 사회에서도 뛰어난 전사라는 걸 의미했다.

엘프, 그리프는 싱글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엘프를 보는 게 처음이 아니십니 까?"

"처음이지."

물론.

현생의 나는 말이다.

"많이들 놀라시는데. 민철 헌터는 아니신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는 너는 엘프치고 말이 많은 편 같은데."

"하하. 엘프가 다 과묵하지는 않습 니다."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 과묵해.

뒷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 다.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물어봐 도 되겠습니까?"

"어. 실례니까 물어보지 마."

"에이. 그러지 말고 이야기 하나만 해주십쇼."

엘프가 저렇게 사회성이 밝다니.

참 적응 안 되는 캐릭터다.

"말해봐. 하나만 대답해주지."

"당신 혼자서 타락한 자들을 해치 운 겁니까?"

그리프의 시선이 전투 현장을 향했 다.

야산 산책길은 전의 흔적을 찾아보 기 어려울 만큼 망가졌다.

암흑정령과 흑마법.

정령의 힘을 섞은 궁술.

산책로와 숲 곳곳에는 격렬했던 전 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렇지."

"저희 아가씨랑 같이 시험을 봤다 고 들었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는 그리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바람에 휘날리는 초록색 머리카락, 그 사이에 드러나는 눈동자가 초롱 초롱하게 빛났다.

그녀는 잠시 내 눈치를 보면서 입 을 오물거리더니.

"저랑 한 판 붙어보지 않겠습니 까?"

생각도 못 한 발언을 던졌다.

...뭐요?!

'진심인 것 같은데.'

눈빛에 섞인 호승심.

다른 감정이 일체 섞이지 않은, 순 수한 투쟁의 불꽃이 일렁였다.

"저기. 지금 다크 엘프들의 뒤처리 를 하러 온 거 아닌가?"

"아, 아! 맞죠. 강해 보이셔서 무턱 대고... 죄송해요!"

이 여인.

엘프가 아니라 투마라고 해도 믿겠 다.

"헤헤. 죄송합니다. 다크 엘프와 교 전을 벌였을 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습니까?"

"그러지."

다크 엘프의 전력.

의식 마법진의 존재.

나는 그리프한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줬다.

"아마 저 마법진이 키워드인 것 같 다."

"알겠습니다. 이곳의 수습은 저희 에게 맡기세요."

그리프가 손짓을 했다.

"파치. 치에. 시작하자."

"네. 그리프 님."

두 엘프는 하늘 위로 팔을 뻗었다.

진한 녹색을 띤 빛이 손가락에 맺 혔다.

정령의 기운이다.

-나. 계약자의 말. 따른다.

-그대여. 나를 불렀나요.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

땅의 정령 노움이 나타났다.

"이곳을 파괴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려주세요."

-계약자. 말대로. 따른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정령들이 힘을 발휘했다.

부러진 나무가 시간을 역행하듯 재 생 했고.

노움이 팔을 땅에 찍자 파괴된 산 책로가 원래대로 복구되기 시작했 다.

주위를 가득 메웠던 유황 냄새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자연의 마나가 활성화되면서 암흑 마나를 정화시킨 것이다.

'이래서 엘프들은 편해.'

정령술.

자연의 정령을 다루는 힘이다.

정령을 부리는 힘은 복잡한 계산이

나 수련보다는 타고난 정령 친화도 에 좌우된다.

전생의 나는 악마였기에 정령술과 전혀 연관이 없었지.

뒤에 있던 엘프 한 명이 내 옆에 섰다.

그리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민철 헌터를 모실 거예 요."

"날 모신다고?"

"예. 아가씨와 만찬을 드시기로 했 다고 들었는데요."

호오.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건가.

식사 약속을 이렇게 빨리 진행할 줄은 몰랐다.

예정에 없던 일.

'잘 됐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변수는 언제나 존재했다.

성천조계공을 수련하다가 암흑 마 나를 느낀 것도 하나의 변수였다.

중요한 건 '변수'가 아니라, 변수가 생겼을 때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 이다.

"좋아. 가지."

"네. 그랑, 아가씨의 손님이니 실수 없이 모셔야 해."

나는 엘프의 안내를 따라 산 아래 로 내려갔다.

다크 엘프의 준동.

그리고 엘프와의 이야기.

'얻어낼 수 있는 건 모두 얻어낸 다.'

정보와 인력.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요소가 모 두 부족했다.

그렇기에.

예정에도 없던 저녁 식사는 매우 중요했다.

엘프들을 부려먹어서라도 내 이름 을 사칭한 놈들을 박멸시켜주겠다.

의욕을 불태우면서 안내역을 맡은 엘프의 뒤를 따랐다.

53 화

앞서나간 엘프가 차로 안내했다.

"대사관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 봤다.

'엘프와 이렇게 연을 맺게 될 줄은

몰랐네.'

기분이 묘했다.

전생 때는 엘프와 마주쳤을 때 싸 운 기억밖에 없었다.

엘프 제국 '바나하임'은 천계 - 엘 리시움의 든든한 우방 중 하나다.

당연히 판데모니엄과는 적대관계 다.

'근데 인류와 엘프는 사이가 꽤 좋 은 편이지.'

2차 대격변 후, 인류는 천계와 마 계 외에도 여러 차원의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그중에서 엘프는 인류에게 우호적 인 태도를 비친 종족이었다.

-인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번영을 이루어 나갈 동료입니다.

엘프 차원의 유일 제국.

바나하임의 황제인 아드리에 시안 나델의 성명서다.

엘프들은 인류와의 교류를 적극적 으로 추진했다.

덕분에 지구에 퍼진 엘프의 이미지 는 굉장히 좋았다.

'저 허여멀건 하고 약한 놈들이 뭐 가 좋은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말라서 힘 하나 없어 보이는 저 팔을 봐라.

숟가락이나 제대로 들 수 있겠나.

과일 향 비슷한 체취는 또 뭐야.

자기들이 걸어 다니는 방향제라도 되는 건가.

근데 마냥 밉게 보이지도 않는다.

엘프의 외형은 현 인류의 심미안으 로 볼 때 미형이었다.

선남선녀.

현생의 내 심미안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

'전생 땐 그저 우락부락한 근육을 좋아했는데.'

O으

지금은... 글쎄올시다.

솔직히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 보면 좋잖아?

잡생각을 하면서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엘프 대사 관.

인류가 엘프와 교류를 시작한 이후 북악산 동쪽에 있는 공원 일대 부지 에 세워졌다.

대사관 정문.

경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신원 확인 부탁드립니다."

"대사관님께서 만찬에 초대하신 분 입니다."

안내역을 맡은 엘프가 대꾸했다.

경비는 뒤에 있는 나를 쓱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구궁-

문이 열리고 대사관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사관은 유럽에 있는 고풍스러운 성과 비슷하게 생긴 저택이다.

하얀색으로 된 성벽과 하늘 위로 치솟은 첨탑.

앞은 넓게 펼쳐진 정원이 있다.

저택 입구에 정차한 차량.

내리자마자 낯익은 사람이 나를 맞 이했다.

"전민철 헌터. 오래간만이에요."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 카락, 그리고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 인 미인.

신유미였다.

"그러게. 두 번째인가."

"약속 기다렸는데. 꽤 오래 연락을

안 주셨네요."

"왜 기다린 거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 요."

"뭐, 그렇군."

입구에서 만찬장으로 이어지는 통 로.

신유미는 돌연 몸을 돌려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이번 식사는 내기의 대가로 대접 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말이지?"

"만찬. 아빠가 민철 헌터를 초대한

거니까요."

"엘프 대사와 식사라...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거든.

대사관에서의 만찬.

신유미가 엘프 대사의 딸이라곤 해 도, 일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걸 굳이 짚고 넘어가는 이유가 뭐지?'

예상하지 못한 건 신유미의 반응이 었다.

그녀는 내 눈빛에 섞인 의구심을 알아챘는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만찬장에 들어가면 부담스러워할 까 봐 미리 말하는 것뿐이에요."

"인생에서 해보기 힘든 경험도 해 보고, 잘됐네."

"참 한결같네요."

"뭐가?"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잖아요. 푸른 파수꾼 때도, 지금도."

"엘프도 결국 사람인데 긴장할 필 요가 있나."

내가, 마.//(생략)

전생에는 용족 군주나 판데모니엄

의 차원장들하고 밥도 먹고 술도 먹 은 사이라고.

신유미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당신은 참 신기해요."

"내가 좀 유니크하지."

"안하무인이면서도 신념은 확고하 고, 선을 넘는데도 기분이 안 나빠 요."

야.

이 정도면 면전에 대고 욕하는 거 아닌가.

"집으로 초대해놓고 나랑 싸우자는 건 아니지?"

"푸훗. 생각나는 느낌을 말해봤어 요."

"시비 거는 것 같은데."

"다음에는 제가 식사 대접할게요. 이건 우리 아빠가 초대한 거니까 요."

그게 차이가 있는 건가?

잘 모르겠군.

"뭐, 그럽시다."

나는 신유미의 알쏭달쏭한 말에 대 충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를 받아서 통로를 지나 만찬장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고급 샹들리 에.

TV에서 볼 법한 기다란 탁자.

주인 자리에는 녹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빠. 데리고 왔어요."

"청년이 다크 엘프의 흔적을 발견 한 전민철 헌터인가?"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훤칠한 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외모와 잡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

신유미의 '아빠'라고 하기에는 너

무 젊어 보였다.

'상대는 엘프잖아.'

엘프의 평균 수명은 700살.

저 대사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 만, 엘프로 치면 아직 한창일 것이 다.

"참. 내 소개를 안 했군. 내 이름 은 바리스 실린이라네."

"실린, 바나하임 황족의 방계 출신 이었군요."

"호오. 우리 엘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나?"

"그 정도는 상식이죠."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실린은 시안나델 황가의 방계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 는 엘프.

알고 보면 황족 출신이라는 거지.

"재미있는 청년이군. 이리 앉게. 우 리 공주님도 옆에 앉고."

엘프 대사, 바리스 시안나델은 빙 그레 웃으면서 자리를 권했다.

"아빠.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 지 말라니깐."

"깜박했네. 우리 공주님. 미안해 요."

바리스 실린은 시종일관 느긋하고 장난기가 있었다.

강자의 여유다.

'엘프 녀석들. 지구를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군.'

바리스는 단순히 황족의 방계 출신 이 아니었다.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강력한 정령력.

평범한 사람은 볼 수 없지만.

내 눈에는 바리스의 기운이 오색으 로 빛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 다.

만찬장 전체가 바리스의 '영역'이 나 다름없다.

나는 [진실의 눈]을 사용했다.

바리스 실린

종족 : 엘프 / 나이 : 325

적성 : 정령술

근력 : ??? / 민첩 : ??? / 맷 집....

용인 라우 때와 마찬가지였다.

최소 성체에 이른 용과 어깨를 겨

룰 수 있는 강자.

그 정도면 바나하임 제국 내부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실력자다.

피부가 만찬장 안을 가득 채운 정 령의 기운에 반응해서 찌릿찌릿했 다.

꿀꺽.

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붙어보고 싶다.'

호승심이 불쑥 치솟는 것을 참았 다.

"청년. 제법 눈매가 뜨거운데 어쩌 지? 난 이미 임자가 있거든."

"그런 취향 없습니다."

"크크. 농담이라고. 배도 출출할 테 니 뭐라도 먹고 나서 이야기를 해볼 까?"

짝!

바리스가 박수를 쳤다.

문이 열리고 고용인들이 들어와서 탁자 위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배나 겨우 채우겠군.'

엘프 대사관에서 먹는 만찬.

큰 기대는 안 됐다.

엘프는 채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즐기는 종 족.

혹자는 그걸 우아하다고 하는데, 풀떼기만 먹어서는 어디 힘이 나겠 나.

킁킁-.

'이 냄새는...?'

철판으로 가려진 접시.

안쪽에서 기름진 냄새가 올라오면 서 코를 자극했다.

"걱정 마세요. 아빠가 민철 헌터 입맛에 맞는 음식도 준비를 부탁했 으니까요."

신유미가 가벼운 투로 이야기했다.

음음.

멋쩍어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저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 았다.

신유미한테 넌지시 물어보니, 이 안에는 인간 고용인도 상당수 거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용인들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항 시 요리사가 상주한다나.

'다행이야.'

덕분에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 다.

"청년. 선호하는 후식이 있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됩니다."

"난 식후에 와인을 즐기는 편이라, 미리 양해를 구하겠네."

"뜻대로 하시죠."

"참, 공주님. 이 친구랑 따로 이야 기하고 싶은데 먼저 올라가 주지 않 겠어?"

" 알았어요."

신유미가 자리를 비켜줬다.

탁자 위에 있던 음식을 모두 치우 고, 금세 와인과 커피가 나왔다.

넓은 만찬장.

탁자 사이를 두고 앉아 있는 건 나와 바리스, 두 명뿐이다.

바리스는 와인 한 잔을 따르더니 내 눈을 직시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청년은 다크 엘프와 어떻게 마주친 건가?"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좀 전의 상황을 간결하게 설 명했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바리스.

설명이 다 끝나자, 컵에 따라둔 와 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정말 운이 좋았어."

"그렇죠. 운 좋게 암흑 마나를 감 지하지 못했다면...

"나는 청년의 운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거야."

바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 졌다.

만찬장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죽음의 해역에 발을 들이민 것 같 은 압박감이 몸을 잠식했다.

"다크 엘프는 하나하나가 B급 헌 터 수준의 실력자다. 알고 있나?"

"B급 정도를 실력자라고 부르기는 좀 아쉽죠."

"청년의 수준으로 보면 충분히 강 적이지. 모든 성장 잠재력이 E급으 로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다만."

"뒷조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이야기 를 늘어놓는군요."

이런 걸 압박이라고 하다니.

역시 엘프들은 순진하단 말이야.

단둘이 되자, 바리스는 여태 숨겼 던 의심을 드러냈다.

'내 말을 순순히 믿기는 어렵겠지.'

의혹에 찬 눈빛.

이해가 갔다.

다크 엘프는 각 개체가 타고난 전

사다.

엘프의 빠른 몸놀림을 그대로 계승 했고 강력한 암흑 친화력으로 암흑 마법과 정령을 다룬다.

내가 헌터가 된 지는 고작 3개월 정도.

평범한 헌터라면 다크 엘프 무리를 압살할 실력을 갖추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청년은 우리로 치면 은인이네."

"은인

"다크 엘프가 준동했다는 걸 알았 지만,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거 드 "

"은인에게 대하는 것 치고는 꽤 거 친 태도인데."

"그래서 조심스러운 거다."

바리스는 목이 탄 듯,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하물며 그 제보자가 우리 딸과 연 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야..."

"어떤 부분 말이죠?"

"헌터 시험 때부터 지금 만남을 계 산해둔 건 아닌지 말이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웃음을 참지 않고 그대로 터

트렸다.

"큭, 크크크."

"뭐가 우스운가?"

"세상이 엘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고 생각하는 건가."

벌컥벌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마시 고는 빈 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웃기지 마쇼.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나는 청년을 의심할 수밖에 없 어."

"의심의 근거는 다크 엘프를 혼자

서 무찌를 수 없다?"

"그렇지."

엘프 대사, 바리스는 손가락을 튕 겼다.

사라라락!

만찬실을 장악한 정령의 기운.

일부가 실체화되면서 내 주위를 휘 감았다.

녹색을 띤 벽.

Im 간격을 둔 방벽은 사방을 차단 했다.

"이건?"

"외부와 모든 흐름을 차단하는 보 호막이라네."

"이게 엘프가 은혜를 갚는 방식인 가."

"미안하네. 하지만 내 딸과 관련된 일,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만 참아주 게나."

바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

이거 기분 더럽네.

'귀쟁이 새끼들은 이래서 문제라니 까.'

적이라고 생각하면 손을 쓰든지.

아니면 성급하게 이를 드러내지를 말아야지.

바리스는 나름 최선의 수를 썼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어정쩡한 모습에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다크 스타를 검으로 변형시켰 다.

"스피릿 월. 정령의 기운으로 만든 벽이라네. A급 헌터도 이 벽을 뚫 어내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려주게. 나도 은인에 게 이렇게 대하는 게 마음에 내키지 는 않아."

"이게 은인을 대하는 태도인가."

"조사단이 오면 청년에 대한 혐의 도 벗겨지겠지."

아까 야산에 왔던 엘프들을 말하는 건가.

단순히 상황 수습만 하러 간 건 아니었구먼.

엘프 대사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정령을 사용하면 다크 엘프와 내가 싸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내 혐의도 벗겨지겠 지.

근데 그건....

기분이 더러웠다.

'이 귀쟁이 새끼들이 누구를 어떻 게 보는 거야?!'

내가 그런 좀생이 같은 방법을 쓸 것 같나!

변형시킨 다크 스타를 허리춤에 대 고, 발검 준비를 했다.

"소용없는 짓을. 자네의 힘으로는 뚫을 수 없...

"그 입 닥쳐."

나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답답한 엘프 놈들. 머리 한 대 쥐어박아 줘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칠성마검 - 1초식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280을 소모합니다.]

낙일검 (落日 劍).

일순간, 저택 일부가 어둠으로 잠 겼다.

하늘의 별을 떨어트리는 검이 펼쳐 졌다.

"그러니까 소용없...?!"

흑색 검기가 금색 결계를 통째로 박살 냈다.

자리를 박차면서 바리스의 목덜미 에 다크 스타를 갖다 대었다.

"하던 말 계속해보시지."

이 귀쟁이 새끼야.

어디서 여유를 부리고 있어?

54 화

바리스가 내보인 한순간의 방심.

그 틈이 만들어낸 결과는 컸다.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칼날.

바리스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 을 내비쳤다.

"쯔 w

人,•

복부를 노리고 있는 푸른 칼날.

정령력을 뭉쳐서 만든 칼이다.

결계를 베고 거리를 좁힌 찰나의 순간, 바리스도 급히 정령력을 끌어 다가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서로 급소를 노리는 대치상황.

일방적으로 빈틈을 노린 것 치고는 아쉬운 결과였다.

'내 검의 속도에 맞춰 반응을 하다 니.'

한 방 먹여주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크로스 카운터잖아.

[진실의 눈]으로도 제대로 파악하

지 못한 실력자.

기습공격에 취약한 정령사인데도, 내 공격에 어떻게든 반응을 했다.

놀란 건 바리스도 마찬가지인 모양 이다.

"스피릿 월을 뚫다니. 대단한 실력 을 숨기고 있었구나."

"귀쟁이야.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 은 똑바로 하자."

"그건 무슨 말인가?"

"난 힘을 숨긴 적이 없어. 너희가 안 믿은 거지."

순간 말문이 막힌 바리스.

나한테 진짜로 악의가 있었다면.

만찬장 안에서 독대를 한순간, 충 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손에 힘만 주면 엘프 대사 의 어깨 위를 허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대신 나도 그만큼 피해를 입겠지 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리스는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 다.

"사과하지. 내가 청년의 실력을 과 소평가했다."

나는 다크 스타를 거뒀다.

이 자리에 온 목적은 귀쟁이와 승 부를 내려는 게 아니었다.

바리스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 젠장.'

이 귀쟁이 놈들.

다크 엘프에 관한 정보를 물어다 주니까 헛짓거리나 하고 있고!

'내 이름을 사칭하는 놈들 때려잡 기도 바쁜데.'

괜한 의심을 품은 엘프보다 더 중 요한 게 있다.

서울에 나타난 다크 엘프 무리.

알 수 없는 의식을 치르면서 그 배후로 내 이름을 대고 있다.

[투장 데이모스]

그 이름을 이런 식으로 더럽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다크 엘프와 앙숙인 엘프의 손을 빌리려고 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힘만 썼다.

"더 하지 않을 건가?"

"당신을 죽일 거라면 바로 칼을 휘 둘렀겠지."

"대사에게 칼을 겨눈 건 중죄라네.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그럼 한 판 더 붙던가. 중죄 따지 지 못하게 해줄 테니."

"이거, 원. 농담도 못 하겠군."

바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야.

난 진짜로 화났거든?

귀쟁이 녀석이 장난칠 상황인지 아 닌지 분간을 못 하네.

"청년. 자네의 이름을 직접 알려주 지 않겠나."

"전민철이다."

"민철군. 다시 한번 사과하지. 자네 는 그런 치졸한 방법을 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처음으로 나온 진지한 목소리.

바리스의 허리가 아래로 굽혀졌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 지?"

"난 자네 같은 자의 눈빛을 알고 있다. 투사의 눈이지."

"귀쟁이한테 관상을 보는 취미가 있나."

"과거 전장에서 그런 눈을 가진 존 재를 봤거든. 민철 군도 그와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이 든다네."

뭐야.

자존심 강하고 자기들만 고고하다 고 생각하는 귀쟁이가 진심으로 사 과를 하잖아.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사과 한마디로 풀어질 것 같으면 세계평화도 말 하나로 해결됐겠지.

똑똑-!

굳게 닫힌 문이 울렸다.

"대화 중에 미안하군. 안으로 들여 보내도 될까?"

"맘대로 하쇼."

"들어오게."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이미 일면 식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프.

잎사귀 5개 등급의 전사다.

"대사님. 조사를 마치고 복귀했습 니다."

그리프는 주먹을 가슴팍에 올리는 것으로 군례를 했다.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아, 아까 제보하신 분 도 계셨군요."

"신경 쓰지 마."

"마침 조사 결과를 말씀드리려고 했었습니다만...

그리프는 말끝을 흐리면서 바리스 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네. 당사자이니 들을 자격이 있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다크 엘프 의 목적을 파악했습니다."

호오.

그 마법진만 보고 놈들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알아챈 건가?

'전에 조사하던 자료가 좀 쌓였겠

지.'

다크 엘프들은 파장 증폭진을 설치 했다.

정해진 마력 패턴에 반응해서 파장 을 증폭시켜주는 마법진.

[진실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다.

마법진을 조사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다.

바리스도 궁금한 듯 그리프를 채근 했다.

"다크 엘프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옛 차원에 유폐된 존재를 깨우는

것입니다."

"옛 차원이라니...

바리스가 얼굴을 굳혔다.

탈색 귀쟁이 놈들. 아주 끔찍한 일 을 준비하고 있었잖아.

'옛 차원'은 무너져버린 세계를 가 리키는 말이다.

수백 개의 차원으로 구성된 다중차 원 우주.

그중에서는 새로이 태어난 차원도 있고, 억겁의 세월 동안 발전을 이 룬 차원도 있다.

전자는 지구.

후자는 판데모니엄과 엘리시움이 좋은 예다.

모든 차원이 번성과 발전을 이루면 좋겠지만, 멸망을 맞이한 차원도 꽤 있다.

"그 존재가 무엇인지 짐작 가는 것 이라도 있는가?"

"다크 엘프들은 투장 데이모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야.

그 악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데이모스? 과거 지구에서 소멸했 던 차원장 아니던가."

"예. 현재까지는 투장 데이모스를 지구로 다시 강림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게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아나.

헛볼 차고 있네.

그 양반은 이미 뒈져서 너희 눈앞 에 떡하니 환생해있다고!

입이 근질거리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소멸한 차원장을 다시 강림 시킬 방법이라."

"악독한 다크 엘프들입니다. 숨겨 둔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본국과 엘리시움에도 알려야 겠군."

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고구마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느 낌이 다.

남의 속이 타는지도 모르고, 두 엘 프는 계속 내 속에 불을 질렀다.

"그리프. 다크 엘프의 흔적은 찾아 냈느냐?"

"그것이... 추적할 수 없었습니 다. 죄송합니다, 대사님."

"의식 완성의 예상 시간은 얼마

지?"

"마법진의 완성 수준으로 짐작해보 면 하루에서 이틀 사이인 것 같습니 다."

"그런가...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의식은 코앞이군."

고개를 숙이면서 짧게 낙담하는 바 리스.

돌연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 다.

"민철 군. 아까 암흑 마나를 감지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만."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게."

호오.

일이 이렇게 풀리나?

귀쟁이 놈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 양이다.

"투장... 아니, 인류에게는 마왕 이라고 불리는 자가 다시 강림할지 도 모른다네."

응. 아니야.

순간 마음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입술이 근질거리는 걸 겨우 참아냈

다.

나는 짧게 대꾸했다.

"그래서?"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 청년의 힘 이 절실해!"

"아. 그렇게 절실하셔서 아까 나를 격리시킨 거였어?"

바리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귀쟁이 놈이 한 방 먹은 표정 을 보니 고구마가 쑥 내려가는 기분 이다.

"오늘 엘프가 은인을 어떻게 대접 하는지 잘 봤습니다."

나는 다시 존대를 붙였다.

비꼬는 감정을 잔뜩 담아서.

바리스의 낯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크크크, 이거 이용 해먹을 수 있 겠잖아?'

달아오른 바리스의 반응.

다크 엘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다.

'그 사칭범들을 혼내줘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건 그거고.

얻어낼 수 있는 게 있으면 또 챙 겨가야 하는 게 도리지.

나는 몸을 홱 돌려서 바깥으로 나 가는 통로를 향해 걸었다.

다급해진 바리스가 옆에 따라붙었 다.

"처, 청년. 아니. 민철 군. 아까의 무례는 잊어주게."

"예예. 제가 좀 마음이 작아서 금 방 잊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다 인류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시겠죠. 근데 오늘 시간을 많 이 뺏겨서 좀 바쁘네요."

뚜벅뚜벅.

빨라지는 발걸음.

바리스가 내 팔을 붙잡으면서 늘어 졌다.

"제발 부탁이니 내 실수는 잊어주 지 않겠나?"

"가슴 아픈 상처를 잊기 위해서는 합당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죠."

"무엇이 필요한가. 말만 하게!"

"정말 말만 하면 다 해주는 겁니 까?"

"물론이지. 바리스 실린의 이름과 대사의 직위를 걸고 맹세하겠네!"

"그 맹세. 꼭 기억해두시는 게 좋

을 겁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 리스 실린을 보며.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갔다.

어둑어둑해진 밤이 되어서야 수련 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으으. 피곤해.'

탑에서 돌아오자마자 암흑 마나를

감지하고 다크 엘프 무리와 싸웠다.

엘프 대사, 바리스 실린과도 한 판 붙었다.

'그 덕에 이걸 받아놨지.'

손에 들려있는 백지 수표.

엘프 대사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이 다.

당장 필요한 게 생각이 나지 않아 서 받아왔다.

축 늘어진 몸.

나는 성천조계공을 운용하면서 지 친 몸을 채찍질했다.

'탈색 귀쟁이를 잡을 수 있는 날은

얼마 안 남았어.'

대사관에서는 다크 엘프가 준동한 지 약 한 달 정도 지났다고 했다.

직접적인 증거를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 때문에 의식이 완성단계에 이르 렀을 때에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 었다.

'귀쟁이 새끼들 때문에 내가 고생 하잖아.'

엘프.

다크 엘프.

지금은 둘 다 꼴 보기 싫었다.

특히 내 이름을 사칭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다크 엘프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우선 암흑 마나를 찾아야 한다.'

파장 증폭진.

다크 엘프는 수련장 근처 야산에 설치한 마법진을 서울 여러 곳에 배 치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일일이 뒤져보는 것이다.

놈들이 사용한 인식 왜곡 마법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아낼 수 없 다.

'시간이 충분하면 구간을 정해서 찾아보겠지만.'

서울은 넓었다.

나 혼자 서울 곳곳을 일일이 돌아 다니면서 암흑 마나를 찾는 건 비효 율적이고, 시간도 부족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손가락에 혼돈기를 집중, 대마력 집속진에 갖다 대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바로 반응을 일으키면서 환한 빛을 뿜어냈다.

주위에 있는 마나가 모여들면서 순 식간에 수련장의 마나 농도가 짙어 졌다.

푸른 안개가 수련장 안에 나타났 다.

마력이 눈에 보일 만큼 비이상적으 로 농축된 것이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마법진 중심에 앉았다.

뭉글뭉글.

검은 기운이 팔과 다리, 이윽고는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몸에서 흘러나온 혼돈기였다.

혼돈기는 수련장 안에 감도는 푸른 안개를 빠른 속도로 잠식해 들어갔 다.

동조화.

죽음의 해역에서 깨달은 마나 운용 방식이다.

혼돈기는 이윽고 수련장 전체를 검 게 물들였다.

'너희들은 내 눈이다.'

동조화시킨 막대한 마나.

이제부터 이 기운은 암흑 마나를 찾아낼 눈이 되어줄 것이다.

'오늘 밤. 서울 전역을 모두 뒤져

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스아아앗!

암흑 기류가 창문을 비집고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게 물든 하늘이 한층 더 어둡게 물들었다.

55 화

하늘 위를 향해 솟구치는 검은 기 우

혼돈기와 동조된 마나가 주변 일대 의 별빛을 모두 가렸다.

'한 번에 서울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서울.

상주인구 1,000만의 대도시다.

도시 전역을 탐색 범위로 두면 과 부하에 걸려서 뇌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과장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탐색 구획을 머릿속으로 분류 했다.

'우선 6시 방향, 사당 쪽부터 시작 해볼까.'

주아아아앗!

이 일대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기 류가 남쪽을 향해 쏟아졌다.

내 혼돈기와 동조화를 이룬 마나.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이 급격하게 넓어진다.

그만큼 머리가 소화해야 할 정보의 양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용산 남쪽 영역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진다.

마치 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

10km, 20km, 30km.

인지 영역이 늘어나면서 지도도 빠 르게 확장했다.

"으 W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급속도로 넓어지는 인지 영역.

정보의 홍수가 한꺼번에 밀어닥치 니, 뇌가 버텨내지를 못했다.

'감각을 둔화해야 해.'

확장된 감각.

마력이 깃든 것이라면 물건, 사람 을 따지지 않고 나한테 신호를 보냈 다.

헌터.

마도 장비.

그 외에도 마나를 발산하는 건 많 았다.

'모든 정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

어.'

필요한 것은 하나.

감추어진 암흑 마나의 기척이다.

나는 일부러 동조화시킨 혼돈기의 '영역'의 인지능력을 둔하게 만들었 다.

일종의 다운그레이드다.

머릿속의 지도.

그 안에서 파란색으로 체크된 불이 하나둘 꺼져간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처음보다는 나았다.

넓게 퍼트린 인지 영역에서 오랜 시간 집중하며 암흑 마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여기 있다.'

얼마나 집중했던가.

인지 영역에서 구멍이 뻥 뚫린 지 역을 발견했다.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감춘 곳.

대신 미량의 암흑 마나가 그 지역 주위를 감돌았다.

'찾았다.'

휴대전화로 지도를 켰다.

위화감을 느꼈던 장소를 대조 검색 하고 체크했다.

이제 한 곳.

서울은 넓었고, 살펴본 지역은 일 부에 불과했다.

'탈색 귀쟁이 새끼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희 말이야.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알려주 마.

나는 다시 한번 동조화시킨 마나를

운용해서 다른 지역을 탐색했다.

米 * 米

창문 너머.

햇볕이 드리우면서 불 꺼진 수련장 내부를 밝혀주었다.

'아침... 인가.'

후욱, 훅-.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볼을 타고 흘러 내린다.

아래로 내려간 땀은 턱 끝에서 모 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U2 TE

=『, =『•

베가 온 것처럼 흠뻑 젖은 바닥.

모두 내 몸에서 나온 것이다.

"아. 숨질 것 같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죽음의 해역에서 단련을 했던 때보 다도 더 힘든 것 같다.

그때는 몸이 힘들었지.

지금은 뇌가 푹 익어버린 것 같다.

'바닥이 차네.'

마루 재질 바닥.

지면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과열된 머리를 조금 식혀주었다.

지난밤.

한 번도 쉬지 않고 마나를 움직여 서 서울 전체를 훑었다.

동조화시킨 마나는 오직 암흑 마나 에만 반응하도록 감각을 조정했다.

그럼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 시간도 못

버텼겠지.'

손등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뜨겁다.

머리 위에 얼음을 얹으면 그대로 녹아버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꾹 누르며, 밤새 완성한 지도를 살 펴봤다.

'수상한 장소는 10곳인가.'

내가 감지한 장소를 쭉 이으면 원 이 그려졌다.

파장 증폭진.

의식이 일어나는 장소가 서울 안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이 중에 의식 마법진의 중심이 있 는 건가?'

암흑 마나의 편차는 크지 않았다.

어느 곳이 의식의 중심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밤새 찾아놓은 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신유미한테 자료를 보냈 다.

[010-XXXX-XXXX]

고마워요. 대사관 측에서는 바로 움직일 것 같아요.

바로 답장이 왔다.

엘프 대사관에서 내 대답을 애타게 기다린 모양이다.

이쯤이면 백지수표 값은 다 했겠 지.

'헛소리하는 탈색 귀쟁이들은 너희 한테 맡기마.'

투장 데이모스의 이름을 멋대로 빌 려서 음모를 꾸민 다크 엘프.

내가 직접 나서서 팔과 다리를 분 질러놓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바로 나설 수는 없어.'

몸은 멀쩡했지만.

오래 혹사당한 뇌와 심상 세계가 비명을 질렀다.

성천조계공은 내 정신 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 대륙으로 치면 상단전을 사용하 는 심법.

현 상태에서 전투를 치르면 낼 수 있는 힘이 평소의 20%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의식이 곧 완성될지 모르는 시급한 상황.

탈색 귀쟁이들의 처분은 원조 귀쟁 이들에게 맡겼다.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먼저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대마력 집속진으로 풍부해진 마나.

이번에는 혼돈기로 주변에 마나를 장악하지 않았다.

'심법을 수련하면 나아질 거야.'

과열된 머리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역시 심공을 운용하는 것이다.

나는 성천조계공의 구절을 외우면 서 심상 세계를 관조했다.

드넓은 우주.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이 대칭을 이룬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성천조계공을 수련하려면 별의 기 운을 받아들여야 하지.'

성천조계공은 별의 기운을 심상 세 계로 빨아들여서 정신 속의 소우주 를 구축하는 심법이다.

낮은 태양의 시간.

햇빛이 별을 가려서 볼 수 없듯.

태양의 기운이 지구를 뒤덮어서 별 들의 기운을 가리기 때문에 심법을 수련할 수 없다.

'지금은 다르다.'

대칭의 접점이자 우주의 중심.

환한 빛을 뿜어내는 태양이 자리 잡았다.

세계석의 정수가 뭉친 별.

강대한 기운을 발산하며 빛의 성운 과 암흑 성운에게 힘을 전해주었다.

'이 힘을 녹여낸다.'

나는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의 힘 을 이끌어 냈다.

상반된 힘이 부딪치면서 빚어지는 혼돈기.

흑색 기운을 실타래처럼 풀어내어 세계석을 감쌌다.

화아악!

태양이 한층 더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한없이 따뜻한 빛.

뜨겁거나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았 다.

'세계석의 기운이 느껴진다.'

시련의 탑 튜토리얼 보상으로 얻은 세계석.

그 힘이 심상 세계에 자리를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온전히 흡수하지 는 못했다.

일종의 보관 상태.

강대한 힘 중 극히 일부만 받아들 인 것이다.

'시간을 들이면 저 힘을 모두 흡수 할 수 있겠지.'

그렇게만 되면.

성천조계공의 성취는 엄청나게 상 승할 것이다.

심상 세계, 곧 소우주의 완성은 성 천조계공의 완성이기도 하다.

나는 신중하게 공을 들이면서 세계 석의 기운을 녹여냈다.

슷 I

7,,•

환한 빛이 둘로 분리된다.

하나는 빛이요, 다른 하나는 어둠 이다.

분리된 기운은 대칭을 이루고 있는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 무리에게 스 며들었다.

[혼돈력이 0.1 늘어납니다.]

[성천조계공의 성취도가 0.1% 상 승합니다.]

나는 혼돈기를 조심스럽게 다루어 서 세계석을 사탕 핥듯 천천히 어루 만졌다.

지난밤의 혹사로 한껏 달아오른 심 상 세계.

세계석의 기운이 쏟아지자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좀 살겠네.'

머리를 짓누르던 편두통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나는 성천조계공의 구결을 끊임없 이 외우면서 심상 세계를 안정화시 키고 세계석의 기운을 흡수했다.

얼마쯤 집중했을까.

달아오른 머리가 완전히 식었다.

고요해진 소우주.

빛의 성운과 암흑 성운이 원래의 색을 되찾고 화려한 빛을 흩뿌렸다.

'역시 정신을 다스리는 건 심법을 운용하는 게 최고야.'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성천조계공은 정신이 안정을 되찾 자 외부로 감지 영역을 넓혔다.

꿈틀.

'이번에는 또 뭔데?'

심상 세계의 혼돈기가 외부의 기운 에 반응했다.

다크 엘프들의 준동을 알아차렸던 때와 비슷했다.

'집중 좀 하려고 하면... 진짜. 도와주지를 않네.'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도 외부의 기 운을 감지하려고 감각을 가다듬었 다.

심상 세계를 넘어, 성천조계공의 감각이 외부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 지하는 순간.

하마터면 운기를 중지하고 눈을 부 릅뜰 뻔했다.

'왜 혼돈기가 외부에서 느껴지지?'

성천조계공을 자극한 기운.

심상 세계에 있는 혼돈기와 동일한

파장이었다.

간밤에 서울을 훑었을 때만 해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혼돈기를 어째서 놓친 걸까.

고민하던 나는 금세 맹점을 깨달았 다.

'암흑 마나만 감지했잖아.'

서울을 뒤져보려고 혼돈기를 마나 에 동조화시켜서 감각을 방대하게 확대했다.

막대한 정보량.

뇌의 과부하를 방지하려고 인지 영 역의 감각을 상당수 제한했다.

그 때문에 혼돈기가 외부에서 발현 된 것을 놓친 것이다.

'이 감각... 어디선가 느껴본 적 이 있어.'

혼돈기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 래 걸리지 않았다.

'게이트 브레이크!'

2달 전.

검은색 코볼트를 토해냈던 게이트 브레이크 때 감지했던 것과 동일한 혼돈기 였다.

米 * 米

협회의 게이트 감시 체계.

일명 [DOS]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차원의 변곡점을 파악하고 바로 해 당 기관에 전달한다.

DOS 체계가 완성된 후, 게이트는 더 이상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오 지 않았다.

예방할 수 있는 위험.

헌터들에게는 기회와 도전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DOS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고 갑 자기 나타나서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일명 00동 게이트 브레이크 사건 이다.

나는 그때,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있었다.

'혼돈기를 품고 있던 괴물이 있었 지.'

게이트 안에서 나온 괴물.

전신이 검게 물든 코볼트였다.

검은색 코볼트는 몸에 혼돈기를 품 고 있었다.

다크 엘프의 의식이 진행 중인 상 황.

혼돈기가 느껴진 것은 우연일까?

'둘이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검은색 게이트와 다크 엘프.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나는 둘을 굳이 연관 지어 생각하 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색 괴물들이 또 나오겠지.'

게이트에서 나온 흑색 괴물.

움직일 이유는 차고도 남았다.

할짝-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걸어 다니는 영약을 놓칠 수는 없 잖아?'

검은색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물들 은 체내에 혼돈기를 품었다.

괴물의 몸에 깃든 혼돈기를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쓰러트린 직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체내에 있던 혼돈기가 흩어져버렸다.

누구한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다크 엘프와 관련이 있든 없든, 그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전처럼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지도 모르잖아.'

겸사겸人}.

사람도 구하고 말이다.

나는 운기행공을 중단하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검은 게이트가 일어난 장소.

방향과 거리는 머릿속에 들어있었 다.

"참. 혹시 모르니 연락을 해두는 게 낫겠지?"

[전민철]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가 이 있어서 먼저 가본다. 상황 정리되면 이쪽으로 와보던가.

신유미에게 문자를 남겼다.

검은 게이트.

다크 엘프와 관련된 건가.

아니면 정말로 '우연'이 겹친 걸까.

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잖아?'

엘프한테 탈색 귀쟁이들을 맡기기 를 잘했다.

까닥하면 이런 기연을 놓칠 뻔했 다.

나는 검은 게이트가 있는 곳을 향 해 빠르게 뛰었다.

56 화

남산에서 오른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도로 하나를 마주한 산이 있 다.

매봉산.

검은 게이트가 나타난 곳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아무도 못 본 것 같군.'

인적이 드문 산속.

게이트는 산책로가 아닌, 수풀이 무성한 곳에 있었다.

일그러진 공간.

공간을 비집고 나온 흑색 기운이 주위를 조금씩 검게 물들였다.

'저번처럼 바로 브레이크가 일어나 지는 않았다.'

늦지 않았다.

게이트를 벗어난 괴물들이 사방으 로 흩어졌다면.

놈들을 쓰러트리고 혼돈기를 흡수

하는 데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피해를 보는 사람도 나 왔을 것이고.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지.'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하지도 못하고, 구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죽도록 방관 할 수는 없잖아?

'혼돈기도 먹고 시민도 구하는 거 지.'

흉흉한 기운으로 휘감긴 게이트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일순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매봉산 의 푸른 수풀 대신 황량한 대지가 나타났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나무 몇 그루가 서 있지만, 앙상하 게 말라 죽은 지 오래였다.

바닥에 발을 비벼봤다.

치이익-

말라붙은 지면이 긁히면서 마른 먼 지가 일어났다.

쩍쩍 갈라진 대지.

수백 년 동안 비 한 번 맞아본 적 없는 모습이다.

대기에 머무는 마나도 희박했다.

마치 멸망해버린 세계를 보는 기분 이다.

'설마.'

나는 [진실의 눈]을 사용했다.

차원 - @#$@!%

황혼을 맞이한 세계.

오래전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서 대

부분의 영체가 소멸했다.

'여기였구나.'

다크 엘프가 준비한 의식.

서울 곳곳에 파장 증폭진을 설치한 건 모두 검은 게이트를 열기 위해서 였다.

이런 걸 빙고...? 라고 해야 하 나?

"크르르릉!"

먼 곳에서 소리가 났다.

사자보다도 더 커다란 늑대, 다이 어울프였다.

원색인 황갈색 대신 검게 물든 털.

검은색 코볼트와 마찬가지로 혼돈 기의 영향을 받은 괴물이다.

'협회 분류로는 C급이었지?'

[진실의 눈]으로 검은 다이어울프 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다이어 울프

근력 : 150 / 민첩 : 150 / 체력

: 80 / 맷집 : 70

역시.

게이트 브레이크 때의 코볼트와 마 찬가지 였다.

'신체 능력은 예티와 비슷해.'

스탯 총합 450.

B급 괴물인 예티의 총합이 440이 었다.

순수하게 수치만 놓고 보면 예티보 다도 10포인트 위.

근력과 민첩이 과하게 높고 맷집과 지구력이 떨어져서 장기전에는 적합 하지 않았다.

반대로 보면 단기전에 강하다는 것.

"크르릉! 킁!"

" 컹!"

먹이의 냄새를 맡았는지.

다이어울프는 동료를 불렀다.

순식간에 10마리로 늘어난 다이어 울프.

내 주위를 감싸고는 간격을 유지했 다.

빈틈을 보이면 바로 달려들 것처럼 이를 으르렁거리는 모습.

이 녀석들은 단체사냥에 익숙했다.

'그건 약자들의 방식이지.'

진정한 강자는.

무리를 지어 사냥하지 않는 법이 다.

[섬전비도술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35를 소모합니다.]

번쩍이는 흑색 섬광.

비도로 변한 다크 스타가 정면에 선 다이어울프의 이마를 꿰뚫었다.

"구경만 하냐? 덤벼."

말은 안 통해도 도발을 하는 건

아는 건지.

동족의 죽음에 화가 난 건지.

다이어울프 무리는 포위망을 좁히 면서 일제히 달려들었다.

나는 오른손 검지를 까딱였다.

태앵!

다이어울프의 사체에 박혀 있던 비 도가 빠르게 돌아왔다.

얇은 실이 손가락과 비도 사이에 연결되어 있다.

다크 스타를 변형해서 만든 실이 다.

손에 비도가 들어오자마자 바로 창

으로 변형했다.

악가창법.

우직하면서도 곧게, 정면으로 상대 를 분쇄하는 강맹한 창술이 펼쳐졌 다.

곧게 나아가는 창.

창대 주위로 혼돈기가 회전한다.

"크르릉!"

가장 먼저 달려든 다이어울프.

창날이 쩍 벌어진 아가리에 들어가 면서 천장과 입 아래를 모두 찢어발 겼다.

나는 창을 빠르게 회수, 재차 뻗었

다.

두 마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크르릉!"

창대의 간격 안으로 파고든 다이어 울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뻗은 창을 회수하지 않 고, 다크 스타를 초기 형태로 돌렸 다.

양다리를 살짝 벌리면서 상체를 살 짝 틀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다이어울프.

거친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파황붕뢰권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70을 소모합니다.]

콰르르릉!!!

마른하늘에 뇌전벽력이 울려 퍼졌 다.

주먹을 휘감은 푸른 번개.

내력이 빚어낸 뇌기(雷氣)가 다이 어울프의 털을 새까맣게 태워버렸 다.

A급 무공, 파황붕뢰권이다.

파황붕뢰권을 정면으로 맞은 다이 어울프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넷이 쓰러졌지만, 다이어 울프들은 멈추지 않았다.

당황하는 기색 없이 등 쪽으로 파 고든 다이어울프가 앞발을 크게 휘 둘렀다.

나는 몸을 틀면서 왼손을 펼쳤다.

오른손으로는 파황붕뢰권을 펼치면 서 왼손으로는 다른 무공을 준비했 다.

[대수인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70을 소모합니다.]

손바닥을 펼치면서 그 안에 깃든 혼돈기를 해방했다.

서방 세력.

포달랍궁의 절기가 내 손에서 재현 되었다.

손바닥 모양을 띤 혼돈기가 허공을 격하면서 다이어울프의 복부를 가격 했다.

퍼엉-

북을 친 것처럼 공기가 터지는 소

리가 났다.

대수인에 정면으로 두들겨 맞은 다 이어울프.

장법에 실린 힘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면서 10미터 뒤로 날아갔 다.

'내력을 사용하면서 초식을 펼치면 척력이 발동된다.'

물체를 밀어내는 힘.

그 힘은 다이어울프를 밀어내는 한 편, 몸뚱이에 스며들어서 내부를 파 괴했다.

외형은 멀쩡해도.

내부의 뼈와 근육, 그리고 장기가 충격에 의해 찢기고 부러졌을 것이 다.

남은 다이어울프들이 주춤거렸다.

"기회를 줘도 못 잡는군."

나는 다크 스타를 검으로 변형했 다.

한 명한테 붙을 수 있는 숫자는 제한적이다.

특히 다이어울프처럼 큰 괴물들은 한 번에 서넛 정도가 협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무공을 십분 활

용, 놈들의 합공을 무너트렸다.

"안 오나? 이쪽에서 가지."

어정쩡하게 선 다이어울프에게 접 근, 남궁세가의 상징, 창궁무애검법 을 펼쳤다.

서걱!

다이어울프의 머리와 몸통이 깔끔 하게 분리되었다.

"크르룽! 크릉!"

"끼잉, 크릉!"

남은 다이어울프들은 신호를 주고 받더니 바로 등을 돌려서 전장을 이 탈했다.

"어딜 도망가?"

처음부터 놈들을 놓아줄 생각은 없 었다.

운류보를 밟으면서 다이어울프에게 쏜살같이 다가갔다.

제법 발이 빠른 다이어울프였지만.

경신법까지 사용한 나한테서 벗어 나지 못했다.

'한 놈도 놓칠 수 없지.'

하나하나가 소중한 혼돈기 공급원 들이다.

발 달린 영약이 도망치는데.

두 눈 뜨고 어떻게 둘 수 있나?

나는 도망치는 다이어울프들의 숨 통을 하나씩 끊었다.

조금 거리가 벌어지면 바로 비도를 던졌다.

"크르릉! 컹!"

최후의 다이어울프는 도주를 포기 하고는 이를 드러내면서 반항했다.

덕분에 귀찮음을 덜었다.

다이어울프 10마리를 정리하기까 지 채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쓰러트린 상대의 체내에서 혼돈의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성천조계공을 운용해서 혼돈의 기 운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후후.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시스템 알람이 재차 확인을 해주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검은색 다이어울프의 사체에 서 혼돈기를 흡수했다.

[혼돈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성천조계공의 성취가 0.3% 상승 했습니다.]

[혼돈력이 0.3 늘어났습니다.]

마리당 0.3 포인트!

네 마리만 잡아도 혼돈력을 스탯을 1 늘릴 수 있다.

레벨을 올렸을 때 얻을 수 있는 능력치가 5포인트.

20마리만 잡아도 1레벨을 올린 것 과 같은 보너스를 얻는 셈이다.

나는 혼돈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조 금 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새로 익힌 무공을 실전에서 모두 활용한 건 처음이다.'

검법 - 창궁무애검법.

장법 - 대수인.

권법 - 파황붕뢰권.

비도 - 섬전비도술

하나 같이 절륜한 위력을 발휘했 다.

특히 근접전에서 권법과 장법을 동 시에 다루니, 전혀 빈틈이 나지 않 았다.

쌍수호박.

전혀 다른 무공을 양손으로 전개하 는 무 대륙의 기술이다.

단점도 있었다.

'상승 무공은 역시 내력 소모가 엄 청나다.'

상승 무공을 사용하니 혼돈기 소모 가 전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났다.

'기본 무공과 적절히 섞어야겠어.'

상승 무공은 다이어울프를 상대로 펼치기 아까웠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은 격.

섬전비도술을 사용할 때 아쉬움도

있었다.

'제대로 사용하려면 비도 여분을 만들어야겠다.'

섬전비도술은 원래 비도 끝에 은사 를 연결, 각 손가락에 고정시켜서 비도 10개를 다루는 무공이다.

다크 스타로 구현할 수 있는 무기 는 1개.

2차 해방을 마치면 2개까지 구현 할 수 있다.

비도 열 개를 준비해야 하는 섬전 비도술과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일일이 회수해야 하는 것도 귀찮 고.'

이번 일을 해결하면 마르탄한테 비 도 제작을 의뢰해야겠다.

생각해보니 세계뱀 망토도 각인도 맡겨야 하는데.

상승 무공을 전부 활용해보니, 아 쉬운 점과 보완해야 할 것들이 하나 씩 눈에 들어왔다.

'놈들은 저쪽인가.'

혼돈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고 옛 차원의 안쪽을 향해 출발했다.

米 米 *

흰색 머리카락과 긴 귀.

대비되는 검은 피부.

다크 엘프들은 내 존재를 알아채고 금세 반격에 나섰다.

입구 근처에 머무르던 다이어울프 가 죽으면 신호가 가게끔 되어있는 듯했다.

"마왕 데이모스 님의 적에게 죽음 을!"

"마왕님의 부활을 위하여!"

다크 엘프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 다.

개중에는 채찍을 든 마수 조련사도

섞여 있었다.

"크르릉!"

"컹! 컹!"

다이어울프들은 훈련된 개처럼 마 수 조련사의 말을 따라 나를 공격했 다.

-크키키킷. 나락으로 떨어져라.

-절망으로 물들여줄게.

암흑정령이 발목을 붙잡거나 마탄 을 발사했고.

원거리에서는 화살과 마탄이 시시 때때로 날아들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신 것들.'

[성화(聖火)가 전신을 휘감습니다.]

[혼돈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치유의 축복이 몸에 깃듭니다.]

백염을 두르고 우직하게 정면으로 뛰었다.

앞을 가로막는 다이어울프 무리.

최소한으로만 쓰러트리고 포위망의 틈을 만들었다.

운류보로 사이를 파고들어서 돌파.

후방에 있는 다크 엘프들을 향해 곧장 전진했다.

피융!

날아오는 화살은 몸을 살짝 틀어서 피해 주고.

"블랙 플레어!"

"프로스트 웨이브!"

정면으로 날아오는 마법은 창궁무 애검법을 응용, 검막을 펼쳐서 튕겨 냈다.

검기에 성스러운 불꽃을 더하면서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충격조차 줄

수 없었다.

"하등 종족 주제에!"

"두려움도 모르는 건가?"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다크 엘프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 웠다.

달리는 도중, 섬전비도술을 펼쳤다.

섬광을 흩뿌리면서 날아간 다크 스 타. 다이어울프들을 부리던 마수 조 련사의 가슴팍에 박혔다.

"끄륵...

마수 조련사는 한 줄기 비명을 지 르면서 고꾸라졌다.

"크르릉? 컹?"

"컹컹, 크릉?"

다이어울프 무리가 순간적으로 혼 란에 빠졌다.

마수 조련사의 영향에서 벗어난 탓 이다.

게이트 안에 있는 괴물.

어차피 쓰러트려야 할 적이지만.

마수 조련사를 죽이면서 만든 작은 틈이면 충분했다.

'탈색 귀쟁이 놈들을 혼내주기에 충분하지.'

감히.

여기서도 전생의 내 이름을 가지고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어?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오늘.

이 게이트에서 단 한 놈도 성히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57 화

멸망해버린 세계의 파편.

나는 몇 번의 격전을 치른 뒤에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군.'

다크 엘프의 포진.

전투 인원을 밀집시키지 않고 소규

모로 분산,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침입자의 발을 묶는 진형이다.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은 포진이 지.'

침입자 다수가 왔을 때 유효한 전 략.

나한테는 호재였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각 무리를 격파하면서 의식 장소에 무사히 도 착했다.

'혼돈의 기운도 제법 흡수했고.'

[혼돈력 : 250 _ 280]

[혼돈기 : 4,250 _ 4,760]

검은 게이트.

이곳은 역시 영약(?)의 보물창고였 다.

몇 번 전투를 벌였는데도 힘이 들 지 않았다.

오히려 혼돈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몸의 피로도 씻겨나갔다.

'해볼 만하겠어.'

탑에서 나오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 지만.

2시간 정도 운기행공을 하고 혼돈

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컨디션이 최 상에 가까워졌다.

상태 점검을 마치고 곧장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의식 장소는 멀지 않았다.

"침입자가 들어왔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돌파당한 거지?"

"괴수들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응.

그 녀석들은 불러도 안 올 거야.

걸어 다니는 영약은 모두 내가 해 치웠거든.

"너희 짐승 육질 쩔더라?"

수비 병력은 5명.

여태 그랬던 것처럼 화살과 암흑정

령으로 나를 저지하려 들었다.

'허튼짓을 하네.'

화르륵!

성스러운 불꽃이 '검'으로 변한 다

크 스타의 칼날을 휘감는다.

미카엘의 권능, 성화.

암흑 마나를 다루는 존재한테는 상

극인 기운이었다.

팅!

화살이 튕겨 나가고.

화륵!

암흑정령은 성화가 깃든 검에 썰려 서 정령계로 강제 귀환했다.

'그 닭 새끼. 이렇게 편리한 권능 을 다뤘단 말이야?'

무공을 펼치면서 성스러운 기운을 두르니 한 번 휘젓기만 해도 어지간 한 공격을 모두 무효화시켰다.

다크 엘프는 대부분 근접전에 취약 했다.

원거리 견제 능력을 상실하면 전투 력이 반감된다.

서걱!

접근 후에 수비 병력을 쓰러트리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 다크 엘 프 장로한테 칼을 겨눴다.

"어이. 뒈지기 싫으면 그만하지?"

다크 엘프 장로가 눈을 떴다.

입가에 감도는 웃음.

조롱기가 가득한 미소였다.

"흐흐. 이미 늦었다. 의식은 완성되 었고, 너는 헛걸음을 했다."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뭐가 그렇 게 좋아?"

"동포들은 모두 위대하신 존재의 뜻을 따랐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이 탈색 귀쟁이 새끼가.

네가 뭔데 남의 죽음에 가치를 매 기고 있는 거야?

한 번 죽어봐야 저런 소리를 안 하지.

"조리 있게 개소리를 하네. 이미 죽은 데이모스를 따라서 어디에다가 쓰냐?"

말하던 중 얼굴이 찌푸려졌다.

스스로한테 고인 능욕을 하니 기분

이 영 안 좋네.

다크 엘프 장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흐흐흐.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우리는 이미 소멸한 투장 따위를 따 르지 않는다."

"그럼 누구를 따르지?"

"그건••••••

콰아아아!!

그때.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이 굉음을 내 면서 찢겨나갔다.

'아. 타이밍 한 번 죽이네.'

다크 엘프의 배후.

내 이름을 빌려서 일을 벌인 놈의 정체를 들으려는 순간이었는데.

솟구치는 짜증에 이마에 주름이 잡 혔다.

장로가 양팔을 하늘 위로 올렸다.

"오시 오소서. 오랜 잠에서 깨어나 이 땅에 혼돈을 가져다주시옵소서!"

광풍이 지면을 휩쓸고 지면이 갈라 졌다.

이미 소멸 직전인 세계가 비명을 지르면서 찢겨나갔다.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옛 차원.

다크 엘프 장로는 의기양양한 모습 으로 외쳤다.

"두려워해라. 그분이 강림하시면 너 따위는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되어서...

"그거 참 이상하다."

"뭐가 말인가."

"그 위대하신 존재가 왜 안 나타날 까?"

서서히 잦아드는 바람.

대지의 흔들림도 조금씩 가라앉았 다.

하늘 위의 균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이 조 금씩 입을 닫았다.

"안, 안 돼!"

"돼."

퍼억!

주먹으로 다크 엘프 장로의 안면을 강타했다.

내력을 싣지 않아서 힘이 크지는 않았지만.

약해빠진 다크 엘프에게 통증을 주 기는 충분했다.

"쿨럭! 이럴 리가 없다. 분명 그분 께서 알려주신 대로 의식을 진행했

단 말이다!"

"여기서는 그랬겠지."

"여, 여기서라니. 무슨 말이지?"

"파장 증폭진. 그거 다 박살났어."

의식이 완성된 걸 알면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

나는 이미 [진실의 눈]으로 의식의 중추가 되는 마법진을 살펴봤다.

[증폭률 - 8%]

후후.

원조 귀쟁이들이 일을 잘 수행해줬 다.

내가 검은 게이트를 치는 동안, 서 울 곳곳에 설치했던 파장 증폭진 중 대부분이 파괴된 것이다.

의식의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 다.

'내가 아니었으면 절대 못 찾았겠 지.'

지난밤에 파장 증폭진을 찾아내느 라고 온갖 고생을 했다.

다크 엘프 장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 다.

아주 뺑이를 친 보람이 있네.

"아까 하던 이야기나 해봐. 누가 너한테 이걸 시켰다고?"

"마, 마왕 데이모스 님...

"헛소리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잘라낸다."

"히, 히끅!"

에휴.

이 녀석. 다른 다크 엘프와는 달리 기개가 없어요.

'이런 놈이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 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느니, 의미 있

는 희생이라느니.

나는 이런 부류가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버리고 싶지 만, 꾹 참았다.

포로로 잡으면 배후 세력에 대해 많은 것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콰르르릉!!

" 어?"

거센 바람이 검은 게이트를 마구 휘저었다.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닫혀가던 차원의 균열.

무저갱을 떠올리게 만드는 검은 공 간 너머.

번쩍!

녹색 눈동자 한 쌍이 나를 노려봤 다.

"씨 X...

이거.

아무래도 엿 된 것 같은데?

米 米 #:

하늘 일부가 무너졌다.

그 말 이상으로 적합한 표현을 찾 을 수가 없었다.

선명한 검은색 구멍이 노을빛 하늘 가운데에 생겼다.

그 주위로 새겨진 수많은 상흔.

깨진 유리창을 보는 것 같다.

r 크르르르!』

쿠 쿵!

검은 균열이 점차 크기를 넓혀갔 다.

다크 엘프 장로의 얼굴에서 화색이 감돌았다.

"돼, 됐어!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 로야!"

"되기는 뭐가 돼'?"

퍼억!

반대쪽 뺨을 맞고 바닥을 구르는 장로.

얄미운 녀석.

지근지근 밟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이 안에 갇혀있던 거 야?'

다크 엘프가 지구에 풀어놓으려고 했던 괴물.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긴장을 유지한 채 균열이 벌 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이윽고.

쩌저저적!

무언가가 검은 균열을 강제로 비집 으면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늑대였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약 10m.

전신을 뒤덮은 검은 털.

광기에 물든 초록색 눈동자가 흑색 털 사이에서 번뜩였다.

『아우우우우-!』

늑대는 크게 울부짖었다.

쿠르르릉!

이미 한계에 다다른 차원.

늑대의 하울링이 공간을 울리자, 하늘 위에 새겨진 균열이 더욱 규모 를 키워갔다.

다크 엘프 장로는 몸을 일으키더니 늑대를 향해 뛰어갔다.

"펜리르이시여! 제가 그대를 깨웠 나이다!"

마침내.

다크 엘프들이 깨우려던 '신살자'

의 정체를 알았다.

유감스럽게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쳇.

나는 혀를 찼다.

'엄청난 놈을 불러왔잖아.'

신 포식자 펜리르.

신화시대의 괴물이다.

과거 번성했던 아스 신족을 멸절시 킨 신살자이며, 차원을 무너트린 멸 망의 괴수였다.

탑에서 만났던 요르문간드하고는 형제지간이기도 했다.

'근데 펜리르가 저렇게 작았나?'

기록에 따르면 펜리르의 크기는 턱 을 벌리면 하늘과 땅이 맞닿는다고 했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형제인 세계뱀, 요르문간드의 크기 를 생각하면 전혀 위화감이 없는 비 유였다.

'저건 못 이기겠다.'

투장 데이모스 시절 때의 힘이 있 으면 모를까.

지금의 실력으로 덤벼드는 건 훌륭 한 자살행위였다.

슬며시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크르르르릉!』

"시, 신살자이시여?"

당혹감을 감추지 않는 다크 엘프 장로.

펜리르의 광기 어린 눈동자는 다크 엘프 장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 이건 뭔가 잘못...

콰아아앙!!

집채만 한 발이 지면을 후려쳤다.

메마른 대지가 크게 흔들리고, 지

면에 커다란 상흔이 새겨졌다.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다크 엘프랑 같은 편 아니었어?'

펜리르를 불러내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자신했던 다크 엘프.

결과는 정반대였다.

『크르릉.』

펜리르는 앞발에 묻은 피를 핥았 다.

'이건 좀 이상한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펜리르를 바라봤다.

짙은 위화감.

펜리르의 행동은 어딘가 부자연스 러웠다.

'이성이 없어.'

사자를 며칠 동안 굶겨놓으면 저런 모습일까.

발을 핥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깔아 뭉갠 지면에 혀를 갖다 대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상한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조금 전.

다크 엘프 장로를 후려쳤을 때.

펜리르의 힘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 았다.

'불러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가?'

나는 [진실의 눈]을 사용했다.

펜리르

종족 : 신수 / 나이 : ???

적성 : 본능, 격투

근력 : 543 / 민첩 : 495 / 맷집

: 501 / 체력 : 420 / 마력 : 407

*불완전한 의식의 여파로 힘 대부 분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큰 충격으로 이성이 마비되었습 니다.

역시나.

펜리르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 72좌의 악마 군주, 요르문간드 와 버금가는 존재.

펜리르가 정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공격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소멸했을 것이다.

'귀쟁이 놈들이 제대로 일해준 덕 분에 살았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리스 실린이 이끈 엘프 부대.

엘프 부대가 서울 곳곳에 설치해놓 은 파장 증폭진을 효과적으로 제압 한 덕분이다.

펜리르 정도의 괴수를 불러내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의식은 파장 증폭진을 제압당한 시 점에서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 다.

하지만 옛 차원에 갇힌 펜리르가 자신의 힘을 써서 억지로 벽을 허물 고 이곳으로 넘어왔다.

'대신 진실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약화 되었지.'

신 포식자.

신화시대의 괴물이다.

힘의 일부라도 발휘할 수 있다면 [진실의 눈]으로도 상태를 간파해내 지 못했을 것이다.

『크르르릉.』

문제는.

힘 대부분이 봉인되었어도 엄청나

게 세다는 것이고.

그 괴물이 나를 주시했다는 사실이 다.

'피할 수는 없겠어.'

의식을 방해하려고 게이트 끄트머 리까지 도달했다.

경신법을 극성으로 운용해도, 저 괴물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졌다.

'싸운다.'

꿀꺽.

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광기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놈은 지금.

나를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펜리르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아내 자, 몸이 움찔거렸다.

"일이 재밌게 됐잖아."

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 강적.

투쟁을 갈구하는 전생의 업이 꿈틀 거렸다.

상대는 이성을 잃고 대부분의 힘이

봉인된 괴물.

강인한 육체를 지녔지만, 그저 살 육과 굶주림에 잠식당한 본능의 노 예였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다.

왜냐면....

나는 투장 데이모스이자 전민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싸우는 것 으로는 우주에서 제일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똥개야. 오늘 한 번 매타작 좀 하 자."

나는 다크 스타를 꽉 쥐었다.

58 화

화르륵!

성스러운 불꽃이 온몸을 휘감는다.

성천조계공과 성스러운 불꽃이 중 첩되면서 능력치가 크게 상승했다.

'이걸로는 부족해.'

상대는 신화시대의 괴수.

대부분의 힘이 봉인되었다고 한들, 모든 버프를 사용한 나보다 압도적 으로 강했다.

그렇기에.

'내가 선수를 가져간다.'

운류보를 전력으로 전개했다.

동시에 혼돈기 일부를 발에 집중, 터트렸다.

레기온과 벌였던 결전.

그리고 시련의 탑 2층에서 종종 사용했던 활용법이었다.

『크르•릉?』

순간적인 가속에 내 움직임을 놓쳤

는지.

펜리르의 눈동자가 좌우로 돌아가 면서 나를 찾았다.

"덩치가 커서 못 보는 곳이 많지?"

[대수인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70을 소모합니다.]

퍼엉-!

턱 밑.

시야의 사각지대로 들어와서 커다 란 턱을 올려 쳤다.

『깨갱?』

위로 홱 젖혀지는 펜리르의 머리.

고개를 한 번 갸우뚱했지만 금세 충격에서 벗어나서 나를 노려봤다.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더럽게 단단하네.'

턱을 친 손바닥이 얼얼하다.

대수인에는 명중한 적을 밀쳐내는 강력한 척력의 묘리가 깃들어있다.

하지만 펜리르를 밀어내지는 못했 다.

힘과 맷집 차이가 커서 상승 무공 의 묘리를 접목시켜도 밀어내지 못

한 것이다.

펜리르가 강력한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나는 놈이 주춤거리는 동안 다음 무공을 펼쳤다.

[오호단문도를 사용합니다.]

[혼돈기 56을 소모합니다.]

베는 데 특화된 도법.

흑색 기운을 머금은 태도로 펜리르 의 앞발을 베어냈다.

강철도 쉽게 잘라내는 도기.

펜리르의 털을 잘라내고 피부에 얕 은 상처를 입혔다.

"털이 두꺼워서 칼도 잘 안 들잖 아."

「크르르릉!!』

분노에 찬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 게 울렸다.

펜리르는 조금 전에 내가 벤 앞발 을 들더니 지면을 그대로 찍어 눌렀 다.

이크.

제 자리에서 발을 튕기면서 물러났

다.

보지 않고 휘두른 공격. 눈이 없으 니 정확도도 떨어졌다.

쿠르릉!

발을 한 번 휘두르니 대지가 갈라 졌다.

돌 파편 여럿이 사방으로 튀었고, 일부는 내 볼과 갑주를 스쳐 지나갔 다.

핏.

볼에 새겨진 상흔.

성스러운 불꽃이 베인 상처에 스며 들면서 금세 회복을 시켜줬다.

'자잘한 건 무시한다.'

놈의 정면 공격을 한 번만 허용해 도 끝이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 아니, 그 이상으로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났다.

대신.

몸이 큰 만큼 사각도 많았다.

"덩치가 크다는 건 말이다. 때릴 곳이 많다는 거다."

운류보를 응용, 옆으로 돌면서 흑 색 도기로 뒤쪽 다리를 한 번 그었 다.

r크르르르르!』

펜리르는 제 자리에서 짧게 도약했 다.

광기 어린 녹색 눈동자가 내 위치 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전처럼 사각을 노릴 수 없게 되었 다.

도약한 상태로 나를 노려보니 시야 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펜리르는 몸뚱이를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았다.

나는 재차 운류보를 사용, 자리에 서 벗어났다.

조금 벌어진 거리.

『킹!』

펜리르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면 으로 돌진했다.

퍼어엉!

단순한 도약만으로 지면이 뭉개지 고 갈라졌다.

엄청난 박력.

레일 위에 서서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하면 이런 느낌일까.

빠르고, 또 강했다.

치이는 순간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겠지.

놈이 지면에서 발을 떼는 순간.

옆으로 몸을 날린 덕에 돌진 궤도 에서 벗어났다.

간발의 차이였다.

위이잉-

이명이 귀를 어지럽혔다.

'젠장. 빠르긴 하네.'

돌진만으로 커다란 강풍이 일어나 고, 주위가 압력으로 인해 바스러진 다.

이를 악물면서 중심을 잡았다.

『크르르르?』

펜리르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화르륵!

검붉은 화염이 발밑에서 타올랐다.

지옥의 겁화.

전 서열 11위의 악마 군주, 그랑지 오스의 권능이다.

"똥개야. 내가 그냥 도망만 칠 줄 알았나?"

돌진 궤도에서 벗어나기 전.

암흑 마나 300을 쏟아부어서 내가 있던 곳에 지옥의 겁화를 뿌려놓았 다.

꺼지지 않는 지옥불은 펜리르가 돌 진할 때 몸에 모두 엉겨 붙었다.

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 다.

'타격이 크지는 않아.'

엉겨 붙은 지옥불은 두꺼운 털을 태우는 게 고작이었다.

명색이 신화시대의 괴수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힘이 봉인되었고, 영격마저 쇠락한 짐승에 불과했지 만.

지옥불에 바로 집어삼키지 않고 저 항했다.

『크르르르!!』

펜리르는 앞발을 휘둘렀다.

사아아악!

발톱 끝에 모인 흉흉한 기운이 공 기를 찢어냈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드는 무형의 칼 날

[창궁무애검법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56을 소모합니다.]

남궁세가 특유의 빠르면서도 강맹 한 초식을 펼쳐서 펜리르의 공격을 상쇄했다.

기운 일부는 받아내지 않고 흘려보

냈는데, 지면 일부가 썰어놓은 무처 럼 조각조각 잘려 나갔다.

『크릉, 크으으으!』

펜리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단순한 호흡인데도.

광풍이 몰아치면서 펜리르의 입으 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펜리르가 뭘 할 생각인지 깨 달았다.

'저건 아직 시작도 안 한 거다.'

브레스.

신화시대 기록에는 펜리르가 불을 내뿜어서 신들을 불살랐다고 전해졌

다.

놈이 숨을 들이마실 때가 기회다.

나는 아까처럼 시야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펜리르의 목구멍에서 불길이 쏟아 진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 다.

콰아아아!

지옥불에 버금가는 열기!

넘실거리는 화염이 대지를 덮쳤다.

이미 말라버린 지면은 화염의 숨결 에 닿자 지글지글 소리를 내면서 녹 아내 렸다.

브레스에 닿은 일대가 해저 화산의 바닥처럼 부글부글 끓는 용암으로 변했다.

"그렇게 눈앞에서 큰 공격을 준비 하면 다 피하지."

나는 재차 대수인을 펼쳤다.

짜악!

혼돈기로 된 커다란 손바닥이 펜리 르의 볼을 가격했다.

『깨애행!』

이번에는 충격이 있었다.

브레스를 내뱉던 펜리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주춤거렸다.

시뻘건 화염이 이빨 사이에 번들거 렸다.

내가 입을 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화염의 기운이다.

『켁! 켁!』

기침을 하면서 화염 기운을 발산하 는 펜리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정수리 위로 올라탔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

다크 스타를 태도로 변형, 하늘 위 로 치켜세웠다.

이러니까 망나니가 된 기분인데?

"따끔할 거다."

태도에 혼돈기를 불어 넣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펜리르의 목덜 미에 칼을 휘둘렀다.

태앵-

반탄력과 함께 태도가 튕겨 나갔 다.

조금 잘린 털. 피부도 살짝 붉어졌 지만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한 번이 안 되면 두 번이다.'

나는 오호단문도의 다음 초식을 펼 쳤다.

두 번, 그리고 세 번.

커다란 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 큼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찌이익.

두꺼운 털이 찢겨나가고 피부에 상 처를 냈다.

핏방울이 칼이 스치고 지나간 상처 위로 뭉글뭉글 맺혔다.

펜리르가 다급한 기색으로 울음을 흘렸다.

휘이익!

뒤에 있던 꼬리가 나를 향해 날아 들었다.

채찍처럼 길게 휘어져서 범위가 넓 었다.

나는 크게 도약하면서 꼬리를 넘기 고 지면 아래로 몸을 날렸다.

'먹힌다.'

두꺼운 털과 가죽.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내구력을 지녔다.

하지만.

두 번, 세 번을 시도하면 뚫어낼 수 있다.

검이 통하기만 하면 된다.

물방울을 떨어트려서 바위에 구멍

을 내듯.

쉬지 않고 두들겨서 몸에 상흔을 새겨줄 것이다.

"벌써 지친 건 아니지?"

『크르르르르!』

내 조롱에, 펜리르가 괴성을 터트 렸다.

米 #: 米

전고 10미터의 괴물.

펜리르는 사방으로 날뛰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아니면 그냥 본능에 몸을 맡기고 화풀이를 하는 건지.

내 생각에는 후자였다.

쾅!

땅거죽이 뒤집히고.

차라랑-

하늘에 새겨진 균열이 점점 규모를 키워갔다.

이미 멸망한 세계.

명맥만 유지하던 옛 차원은 펜리르 가 몸부림을 치면서 붕괴가 가속화

되었다.

"똥개야. 그렇게 느려서는 나를 잡 을 수가 없어요.''

나는 끊임없이 펜리르를 도발했다.

본능만 남아있을 텐데, 내가 말할 때마다 알아듣는지 더 화를 내면서 뒤를 쫓았다.

'나한테는 그게 편하지.'

혼에 쌓아 올린 업.

업은 영체의 격을 상징하는 것이 며, 고위 영격체일수록 업에 더 미 련을 가진다.

영혼의 힘은 그 생명체의 본질이

다.

펜리르도 마찬가지다.

'날뛰는 짐승은 무서울 게 없다.'

아무리 빠르고 강해도.

이성 없이 본능에 몸을 맡긴 짐승 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내 정신은 전투가 이어질수록 점점 고양되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커녕, 순간 순간마다 최적의 판단을 하면서 펜 리르의 몸뚱이에 상처를 새겼다.

『크릉!』

펜리르는 뒷다리에 힘을 주면서 몸

을 일으켰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자유로워 진 앞발 두 개를 마구 휘둘렀다.

쾅 쾅!

발톱 자국이 지면에 새겨졌다.

뒷걸음질 치면서 펜리르의 공격 범 위를 이탈,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섬광비도술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35를 소모합니다.]

비도가 펜리르의 어깨에 박혔다.

접전 중, 내가 놈의 몸뚱이에 새겨 놓은 상처였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비도가 박 히기에는 충분했다.

비도 끝에 달린 기다란 줄.

다크 스타로 구현한 은사를 꽉 잡 고 옆으로 달렸다.

어깨를 파고든 비도는 빠지지 않고 내 무게를 잘 지탱해줬다.

"난다, 날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바닥을 걷어차 면서 도약했다.

밧줄에 몸을 의지하고 클라이밍을

하는 것처럼 허공을 빙 돌았다.

나는 펜리르의 등 뒤를 점했다.

다크 스타를 그대로 둔 채. 가까운 거리에서 파황붕뢰권을 사용했다.

콰르릉!

넘쳐나는 뇌전의 기운을 놈의 척추 부분에 쑤셔 박았다.

상체와 하체를 연결시켜주는 급소 부위.

펜리르는 살짝 움찔거리더니 나를 떨쳐내려고 등을 마구 흔들었다.

'욱. 진짜 힘 하나는 엄청난 녀석 이다.'

잠깐 버티다가 다크 스타를 회수하 고는 지면으로 떨어졌다.

공중에서 자세를 잡으면서 낙법을 한 덕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나는 남은 내력을 체크했다.

'절반 정도 남았나.'

나는 전투 내내 상승 무공을 사용 했다.

펜리르의 몸은 단단했다.

두꺼운 털과 피부.

그걸 찢어내고 안에 상처를 입히려 면 A급에 해당하는 상급 무공을 사 용해야 했다.

앞다리와 어깨, 그리고 급소 부위.

한 번 공격한 부위를 계속 노려서 상처를 계속 벌려놓았다.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군.'

이성을 잃은 괴물.

그야말로 광전사였다.

뒷발은 검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화르륵!

지옥의 겁화는 꺼지는 일 없이 펜 리르의 몸뚱이를 조금씩 잠식했다.

간혹 불길에 저항이 성공해서 꺼지 려고 하면 암흑 마나를 불어넣어서 유지 시 켰다.

'암흑 마나만 충분하면 계속해서 태울 수 있다.'

전생에도 그랑지오스를 상대할 때 저 불꽃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 가.

놈과 겨루어봤기에.

지옥의 겁화를 다루는 방법도 누구 보다 잘 알았다.

여기저기에 난 상처.

지옥불에 타고 있는 뒷다리.

윤기 흐르던 검은 털은 난동을 부 린 탓에 흙먼지가 가득 묻어서 탁해 졌다.

반면 나는 이마에 맺힌 땀 빼고는 멀쩡했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요단강 익스 프레스 편도행 티켓 끊는 거다.'

펜리르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력 적이었다.

압도적인 근력과 민첩, 그리고 마 력 수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힘.

매번 공세를 피하거나 흘려낼 때마 다 사선을 오가는 기분이다.

발 한번 잘못 내디디면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싸움.

'이게 싸움이지.'

씩 웃었다.

지금의 나는 '전민철'보다 투장 데 이모스에 가까웠다.

거칠게 타오르는 투쟁의 혼.

놈을 쓰러트리거나, 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싸움.

그때.

쿠르르릉-!

귀를 자극하는 묘한 소리.

불길한 마음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 7"

생각도 못 한 변수가 나타났다.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59 화

하늘이 무너진다.

다크 엘프의 의식으로 생긴 균열.

노을빛으로 물든 천장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갈라졌다.

와장창.

깨진 유리 파편이 떨어지듯.

하늘을 구성하던 조각이 지면으로 떨어지고, 흑색 기운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너무 날뛰었나.'

진실의 눈을 사용해서 검은 게이트 의 상황을 확인했다.

차원 - @#$@!%

황혼을 맞이한 세계.

오래전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서 대 부분의 영체가 소멸했다.

최근 큰 충격을 연달아 받으면서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했

다.

[붕괴까지 00:42:37]

[충격이 더해지면 붕괴 시간이 빨 라집니다.]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멸망해버린 세계의 파편.

펜리르와의 싸움에서 파생한 충격 이 검은 게이트 내부를 뒤흔든 것이 다.

『크릉! 크르릉!』

아가리를 한껏 벌리면서 머리를 들 이미는 펜리르.

합장 후 양손으로 대수인을 전개, 펜리르의 입천장과 턱 아래를 가격 했다.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킹!』

펜리르의 초록색 눈동자가 터질 듯 이 커졌다.

입을 벌린 채로 주춤거릴 때.

다크 스타를 검으로 변형, 창궁무 애검법을 펼쳤다.

칼날에서 솟구치는 검기.

패도적인 기운을 흩뿌리면서 펜리 르의 천장을 마구 쑤셨다.

『크어어엉!』

펜리르는 고통에 겨운 소리를 내질 렀다.

동시에 벌린 입을 닫으면서 나를 씹어 먹으려 들었다.

오른손으로는 비도를 던지고.

왼손으로는 다시 한번 혼돈기를 사 용해서 대수인을 펼쳤다.

퍼엉-!

잠시 주춤거리는 펜리르.

입 밖으로 이어지는 은사를 확 당

기면서 벗어났다.

'진짜 더럽게 튼튼하잖아.'

곳곳에 새긴 상처.

반복적으로 타격을 한 덕에 펜리르 의 두꺼운 털과 가죽을 뚫고 상흔을 새겼다.

상처는 많았지만.

대부분 치명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명 약점이 있을 텐데.'

상처를 입혀도 꿈쩍하지 않는 펜리

경이로운 맷집이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존재는 없다.

차원을 지배하는 신들조차도 취약 점을 하나씩 품고 있다.

펜리르에게도 통용되는 '약점'이 있을 것이다.

'좀 더 몰아붙여야겠어.'

[지옥의 겁화에 기운을 불어넣습니 다.]

[암흑 마나 400을 소모합니다.]

검붉은 화염의 기세가 더욱 강렬해 졌다.

내 암흑 마나를 땔감 삼아 거세게 타올랐다.

한순간이지만, 놈의 초록색 눈동자 가 살짝 찌푸려졌다.

발에 대고 라이터로 지지고 있는 데.

당연히 아플 것이다.

『아우우우!』

펜리르는 상체를 위로 들더니 앞발 로 지면을 쾅, 찍었다.

쿠르릉-

지축이 흔들렸다.

주변 일대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들썩이면서 땅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바위가 위로 불쑥 솟거나, 지면 일 부가 푹 꺼졌다.

『크르르.』

펜리르의 초록색 눈동자가 살짝 휘 어지면서 반달을 그렸다.

오호.

그러니까 지금... 내 운신을 제한 하려고 수를 쓴 거야?

'점점 전략적으로 움직이잖아.'

놈의 눈동자 위로 드리운 광기가

조금 옅어졌다.

거듭되는 전투 속에서 본질을 조금 은 되찾은 모양이다.

" 어쩌라고."

입술 한쪽을 올리면서 비웃어줬다.

고작 그런 걸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운류보를 사용합니다.]

[초당 혼돈기 1을 소모합니다.]

운류보의 가장 큰 특징은 '안정'이 다.

어느 상황에서도 안정된 속도와 자 세를 유지해준다.

절벽을 거닐거나 하는 건 안 되지 만.

운류보의 효능 덕에 전혀 감속하지 않고 다시 펜리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나한테는 무공이 있다.'

심해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인 몸 이다.

울퉁불퉁한 지면 정도는 충분히 극

복할 수 있다.

팟, 파팟!

곳곳에 솟아난 바위를 지지대 삼아 지그재그로 튀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내 신형을 쫓아서 좌우로 마구 움직였다.

『크르릉!』

펜리르가 먼저 움직였다.

뒷발로 땅을 걷어차면서 돌진. 맹 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알고 있었다.'

펜리르가 돌진을 시도하리란 것도.

경로와 속도.

놈의 공격 패턴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졌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간발의 차로 펜리르의 돌진을 흘려 보냈다.

'본능대로 몸부림치는 걸 읽는 건 어렵지 않다.'

지면을 부술 때는 이성이 조금 돌 아왔나 했는데, 여전했다.

강하고 빠른 공격.

맞춰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근력과 속력, 그리고 반사 신경에 이르기까지.

펜리르는 내 능력치를 월등히 상회 했다.

그럼에도 놈은 내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내가 예전에는 좀 잘나갔거든.'

전생에 쌓아 올린 투쟁의 업.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면서 깨우친 경험이 펜리르의 동작을 모두 읽어 냈다.

싸움에 한해서는 거의 예지에 가까 운 능력.

내 전생이 투장 데이모스이기에 가 능한 움직임이었다.

"똥개야. 그만 좀 날뛰어라. 이러다 가 여기 망하게 생겼다."

서걱!

붉은 선혈이 검은 털 사이에서 솟 구쳤다.

몇 번이고 베었던 발목.

다시 한번 태도를 휘두르니 상처가 벌어졌다.

『캬오오오!!』

펜리르가 고통에 격분했다.

나는 세계 붕괴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붕괴까지 00:37:55]

미친.

내가 느끼기로는 고작 1분도 안 지났는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충격이 더해지면 붕괴 시간이 빨 라집니다.

불현듯 상태창의 메시지가 떠올랐 다.

'저놈이 날뛰어서 시간이 줄어든 거구나!'

펜리르가 괜히 힘을 줘서 지면을

박살 낸 덕에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우선 놈의 발을 묶는다.'

나는 펜리르의 앞발을 집요하게 노 렸다.

뒷다리는 이미 겁화를 점화시켜서 계속 태우는 중이다.

'기동력을 봉쇄하고 놈의 약점을 찾는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나는 적당히 안배했던 혼돈기를 마 구 사용했다.

콰콰콰콰!

다크 스타를 휘감은 흑색 검기가

한층 진해졌다.

성스러운 화염은 보조용으로만.

지옥의 겁화에는 계속해서 암흑 마 나를 불어넣어 주면서 불길을 키워 냈다.

『아우, 아우우!』

펜리르의 반격도 더 거칠어졌다.

끊임없이 가해지는 고통.

이슬비에 몸이 젖어 들 듯, 노린 곳만 거듭해서 노리니 상처도 더욱 크게 벌어졌다.

심상 세계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혼 돈기.

그러나 성천조계공이 빚어낸 기운 에도 한계는 있었다.

'혼돈기가 바닥이다.'

빛의 성운과 암흑성운은 모든 기운 을 짜내면서 품고 있는 색을 잃어갔 다.

순간적으로 속도가 떨어졌다.

『크릉, 크르르르르!』

펜리르는 기분이 좋은 듯 낮게 그 르렁거리면서 돌진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나는 레인보우 링을 어루만졌다.

[무지개의 축복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원기를 회복시킵니다.]

[축복의 효과로 갖가지 부상과 저 주를 씻어냅니다.]

화아악!

7가지 색이 몸에서 터져 나왔다.

무지개의 축복.

24시간마다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레인보우 링의 내장 스킬이다.

우우웅!

빛이 꺼져가던 심상 세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기력 회복.

무지개의 축복은 모든 체력과 마력 을 회복시켜줬다.

거칠어졌던 숨이 안정을 되찾았고, 팔과 다리의 근육의 떨림도 잦아들 었다.

주춤했던 몸에 힘이 들어왔다.

투우를 하듯, 다시 한번 아슬아슬 하게 돌진을 흘려보냈다.

[오호단문도를 사용합니다.]

[혼돈기 56을 소모합니다.]

푸아악!

칼침 한 번 먹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2라운드 시작이다. 개자식아."

나는 씩 웃으면서 이를 드러냈다.

* * *

전투는 갈수록 격해졌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

나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반대편에는 펜리르가 신음을 흘리 면서 나를 노려봤다.

『크....』

까맣게 타버린 뒷발.

무릎 언저리까지 올라온 지옥의 겁 화는 그 기세를 더욱 키워갔다.

앞발에도 기다란 상흔이 새겨졌다.

울컥울컥.

붉은 피가 벌어진 상처 사이로 솟 아났다.

펜리르의 가공할 만한 돌진력은 어 느 정도 무력화시켰다.

물론.

폭발적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아냈 을 뿐. 여전히 펜리르에게 치명상은 없었다.

남은 시간은 약 15분.

'이제 놈은 나를 쫓을 수 없다.'

경신법을 전력으로 응용하면 펜리 르를 떨쳐낼 수 있다.

이성을 잃은 녀석이니, 게이트를 찾아서 넘어올 리도 없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하고 맞지 않는다.'

피가 끓어오른다.

오래간만에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강적을 만났다.

등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저 녀석. 안쓰럽잖아.'

광기에 미쳐서 본능대로 날뛰는 펜 리르의 모습.

과거, 신을 포식하고 세계를 멸망 시킨 괴수의 격과 맞지 않는 모습이 다.

왠지 모르게.

광기로 가려진 눈동자에 내 모습이 덧대어져 보였다.

'나도 모든 걸 잃고 바닥에 내던져 졌지.'

분신으로 지구에 강림했다가 인류 의 영웅에게 최후를 맞이했다.

본체로 돌아가야 할 영혼은 갈 길 을 잃고 인간으로 환생하고 말았다.

과거의 위용을 잃어버린 펜리르의 모습에서 현생의 나를 투영했다.

'그러니 내 손으로 죽여주마.'

이 차원은 곧 소멸한다.

차원과 차원의 틈.

펜리르는 여태 그랬듯, 억겁의 세 월 동안 눈만 뜬 채 시간을 보낼 것이다.

게이트에서 나가지 않고 놈의 숨통 을 끊어주는 것.

정신을 혼란시키는 광기가 사라지 지 않는 한, 그 방법밖에 없다.

같은 처지에 놓였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자비였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광기에 미쳐서 본능으로만 움직이 는 괴물.

그럼에도.

정말 강했다.

수십 분 동안 이어진 격전.

단 한 번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 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저 날카로 운 발톱이 내 몸뚱이를 찢어발길 걸 알고 있었다.

'놈이 이성이 있었다면 반대였을 거다.'

광기에 젖은 펜리르는 본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모든 능력치에서 나를 압도했지만 움직임이 극도로 단순하고 직선적이

었다.

지닌 마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 다.

결전기인 브레스는 궤도와 타이밍 을 모두 읽혀서 나한테 닿지 않았 고.

고작해야 기운을 발톱에 응집시켜 서 날리는 정도에 그쳤다.

'어린애가 반찬 투정하면서 숟가락 던지는 정도지.'

이성을 갖춘 펜리르는 얼마나 셀 까.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궁금한 마음 도 들었다.

'슬슬 승부수를 낼 때가 되었다.'

시시각각 붕괴하고 있는 차원.

[진실의 눈]으로 시간을 체크하고 있지만.

이곳은 멸망해버린 세계의 파편.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른다.

나는 재차 펜리르를 향해 접근했 다.

쿠르릉!

앞발로 지면을 헤집었다.

전방 수십 미터의 땅거죽이 들썩거 리면서 바위와 돌 파편들이 앞을 가 로미았다.

'예상했지.'

운신이 불편해진 펜리르.

취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은 한정적 이다.

아니. 한정적인 상황이 되도록 내 가 유도했다.

미리 읽고 있던 공격이기에, 한껏 땅을 박차고 뛰면서 공격을 뛰어넘 었다.

[다크 스타 - 검]

날이 양쪽으로 나 있는 검으로 창

궁무애검법 후반부 초식을 펼쳤다. 칼날에 깃든 검기가 방출되었다.

외부로 벗어났음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뻗어나가는 검기.

검이 일으킨 바람, 검풍(劍風)이다.

펜리르는 다시 한번 앞발을 휘둘렀 다.

마력이 응축된 무형의 칼날.

쌔애앵-

매서운 소리를 내면서 나를 향해 날아든다.

흑색 검기와 무형의 칼날이 허공에 서 충돌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놈의 앞발을 밟으면서 한 번 더 도약했다.

정수리 뒤.

펜리르의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유독 한 곳을 공격했을 때만 반응 이 컸지.'

무릎, 아킬레스건, 척추, 심장 등.

생물체의 급소 부위를 여러 번 노 려봤다.

펜리르는 튼튼한 몸뚱이를 믿고 내 검격을 그대로 맞았다.

단한 곳.

목덜미를 빼고 말이다.

[다크 스타 - 칠성검]

검의 형태가 바뀐다.

검마 서류민의 독문무공, 칠성마검 만을 펼치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다.

비록 성능은 외형만 딴 것에 불과 하지만.

그 형태를 갖추어야만 진정한 칠성 마검의 위력을 낼 수 있다.

나는 낙하 중에 자세를 잡았다.

허리춤으로 향하는 오른손.

다크 스타 일부가 변형을 일으키면 서 칠성검을 덮는 칼집이 되었다.

'저곳이다.'

목덜미에 새겨진 붉은 상흔.

아까 올라탔을 때 태도를 휘둘러서 새긴 상처다.

'펜리르의 가장 취약한 곳. 기회는 한 번밖에 없어.'

목을 노리기 위해.

발만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펜리르 의 기동력을 앗아갔다.

파츠츠츳!

막대한 기운이 칼집 안에서 꿈틀거 렸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그 강대한 힘을 개방했다.

60 화

수 미터 길이로 치솟은 검기.

칠성마검 첫 초식이 펜리르의 목덜 미, 아까 오호단문도로 만든 생채기 를 향해 펼쳐졌다.

푸아악!

크게 벌어진 상처.

다량의 피가 솟구쳤다.

『깨개갱?!』

펜리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통과 혼란.

눈꺼풀을 덮고 있던 광기가 사그라 지고 당혹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 했다.

'본능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역시.

내가 본 건 틀리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칠성마검의 2초식을 연결해서 펼쳤다.

2초식, 유성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중압의 묘리.

발검으로 만든 상처가 쩍 벌어지 고, 그 사이를 다크 스타가 파고들 었다.

촤아악!

근육과 살이 찢겨나갔다.

수십 분의 혈전 끝에 처음으로 펜 리르에게 치명상을 새길 수 있었다.

『크르릉! 크르르르르!』

광분하는 펜리르.

몸을 마구 흔들면서 나를 떨쳐내려 했다.

나는 발에 혼돈기를 집중, 요동치 는 펜리르의 몸뚱이에서 튕겨 나가 지 않고 버텼다.

'2초식으로도 부족한가.'

내 몸뚱이로는 칠성마검 3초식으로 이어갈 수 없다.

다크 스타를 다른 무기로 변형하려 는 찰나.

짙은 위화감이 들었다.

'펜리르가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이유가 있나?'

살을 가르고 뼈가 드러나는 상처.

일반적인 생물체라면 중상이다.

이놈은 명색이 신수.

목덜미 좀(?) 파였다고 곧 죽을 것 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난리를 칠 정 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심장을 노렸다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겠지.

'뭔가 더 있어.'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나는 펜리르의 상처를 훑어봤다.

놈이 이성을 잃었음에도, 목에 집

착한 이유.

그걸 알아내야 한다.

'목뼈 안에 뭔가 있다.'

뼈와 뼈마디 사이.

탁한 보라색을 띤 돌멩이가 박혀 있었다.

집중해서 보지 않았더라면 알아채 지 못했을 만큼 작은 크기였다.

'저게 펜리르의 약점인가?'

장담할 수는 없었다.

판데모니엄에 있는 펜리르의 기록 에서도 이 괴물의 약점이 개제되지 는 않았다.

[진실의 눈]을 사용하기에는 상황 이 촉박했다.

길게 늘어난 꼬리가 내 등을 노렸 다.

나는 제 자리에서 도약했다.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꼬 리.

펜리르가 안도한 기색으로 신음을 흘렸다.

이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를걸?

등짝.

등짝을 보자!

내 손에는 어느새 비도로 형태를 바꾼 다크 스타가 쥐어져 있었다.

[섬전비도술을 사용합니다.]

[혼돈기 35를 소모합니다.]

공간을 격하면서 날아가는 비도.

소음 하나 없이, 빛마저도 죽이면 서 빠르게 날아들었다.

콰직!

뼈마디 사이에 껴 있는 보라색 돌.

비도와 돌이 부딪치는 순간, 충격 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나버렸다.

『쿠우우우우우!』

펜리르가 괴성을 질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강렬한 비명 소리였다.

초록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입에는 광견병 걸린 개 마냥 끓는 거품이 아른거렸고.

팔과 다리는 지탱할 힘을 잃고 부 들부들 떨렸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격한 반응이

었다.

'저게 정말로 약점이었어?'

나는 발광 중인 펜리르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전투 불능.

수없이 검기와 도기, 그리고 장법 과 주먹을 꽂았을 때도 꿈쩍 않던 펜리르였다.

몸 안에 심어진 돌 하나를 부쉈다 고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다니.

펜리르는 땅에 고개를 처박더니 간 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혹시라도 나를 속이려는 건 아닐

까.

1분 정도 관찰했지만, 다른 움직임 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무리를 지어주지.'

펜리르의 모습에서 현생의 나를 겹 쳐 봤다.

그렇기에.

이성을 잃고 날뛰는 놈의 숨통을 끊어주는 것은 내 몫이다.

나는 다크 스타를 다시 한번 칠성 검으로 변형했다.

'단번에 목을 쳐주마.'

목덜미에 크게 난 상처.

뼈가 훤히 드러나 있는 곳을 다시

벨 생각이었다.

그때.

『 O o o n

J1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

허스키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음성이다.

칼자루에 올려둔 손이 잠깐 움찔거

렸다.

『아. 목... 엄청 아파.』

달싹거리는 입술.

말을 꺼낸 존재는 조금 전까지 거 품을 물고 있던 펜리르였다.

米 米 #:

고개를 살짝 젖힌 펜리르.

눈동자를 휘감고 있던 광기가 사라 졌다.

『여,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뭐야.

제정신을 차린 건가?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펜리르의

물음에 답해줬다.

"넌 펜리르다."

『맞아! 내 이름은 펜리르였어. 그 럼 너는 누구야?』

"지금은 그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 은데."

나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 다.

팔을 움직이기만 하면.

응축한 기운을 바로 발출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칼을 뽑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 혼란스러웠다.

'죽기 직전에 이성을 되찾았다고?'

우연으로 치기에는 너무 상황이 공 교로웠다.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펜 리 르.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목덜미에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래 도 상대는 펜리르다.

이성이 돌아온 상태로 싸움을 벌이 면, 무조건 필패다.

'제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펜리르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 비를 했다.

"움직이지 마라."

『왜?』

"함부로 움직이면 목에 바람구멍을 뚫어줄 거다."

펜리르의 눈동자가 등 뒤를 향했 다.

유연하게 젖혀진 고개 덕분에 목덜 미에 난 상처를 눈으로 확인했다.

사태를 파악한 펜리르.

『아, 결국 난 라그나로크에서 패

배했구나.』

낙담하며 중얼거렸다.

잠깐.

라그나로크라고?

"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야?"

『라그나로크. 난 신들이랑 싸우던 중이었어. 아니. 풀려나서 싸우려고 준비를 하려고 했었나?』

펜리르는 두서없이 횡설수설했다.

이 녀석.

뭔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다.

"펜리르."

『응?』

"신들과의 전쟁. 너는 최고신을 잡 아먹고 세계를 멸망시켰다."

신 포식자 펜리르.

차원을 지배하는 신족을 잡아먹고 세계를 멸망시킨 전대미문의 괴물.

나는 판데모니엄의 기록을 통해 펜 리르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난 분명 신들과 싸 우던 도중이었어.』

"그럼 내가 신으로 보이나?"

『아니. 필멸자, 미물, 인간이야.』

이 똥개 녀석.

기억은 제대로 못 하면서 팩트로 겁내 치네?

후.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잘 들어. 너희 형제는 신들을 멸 망시켰어.

『이상하네. 나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어.』

"네 동생 요르문간드는 판데모니엄 의 72좌 중 하나를 차지했고."

『내 동생이 그 악마 소굴에 들어 갔다고?』

의문에 가득 찬 펜리르의 대답.

눈가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내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다.

이럴 땐 물증을 보여주는 게 정답 이지.

"이걸 봐라."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가죽을 꺼 냈다.

세계뱀 망토.

각인을 거치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지만, 가죽 안에 깃든 요르문간드

의 기운을 느낄 수는 있었다.

『이건 내 동생의 기운이다!j

"선배... 아니, 요르문간드가 준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요르문 간드는 나랑 같이 전쟁을 준비... 으으, 잘 기억이 안 나己

확실하다.

이 녀석의 기억은 정상이 아니었 다.

'언제 적에 벌어진 일인데, 그걸 몰라?'

펜리르의 기억에 생긴 혼선.

아까 내가 파괴했던 돌의 영향일 까.

짐작만 할 뿐, 확실한 답을 내리지 는 못했다.

쩝.

진실의 눈으로 아이템 내역을 확인 한 다음 부술 걸 그랬나.

"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뭐 지?"

『잠깐. 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 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으, 으으 으. 머리가 지끈거려.』

틀려 먹었군.

펜리르의 상태는 안 좋았다.

신 포식자라고 불리는 괴수가 제정 신이 아니라니.

'이대로 두는 건 안 되겠다.'

나는 처음의 결심을 다시금 상기했 다.

이대로 두면 차원의 틈새에 갇혀서 영원토록 의식만 남은 채 공간과 공 간 사이를 헤맬 것이다.

불완전한 기억을 가진 채로 말이 다.

그럴 바에는.

'자비를 베풀어주자.'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채앵.

칠성검이 칼집과 마찰을 일으키면 서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인간. 아까 필멸자라고 해서 화 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칼에서 손 좀 떼고 이야기 하자. 나 무서워.』

저기요.

집채만 한 몸으로 그렇게 이야기하 셔도 전혀 설득력이 없거든요.

네가 팔을 휘두르기만 해도 나는

가루가 될 거다."

『형이 지금 내 목을 겨누고 있는 데. 어떻게 그러겠어?』

호칭은 언제 인간에서 언제 형으로 바뀐 건지.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한 번 둬봐.』

으으으

머리가 지끈거린다.

신화시대의 괴수.

전생의 나조차도 문헌으로만 알고 있는 고대의 존재가 맞는 건가.

『형. 봐봐. 지금 형이 날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야?』

음.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

펜리르의 이빨과 가죽?

신화시대의 괴수이니 엄청난 가치 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근데 못 챙기겠지.'

장소가 안 좋았다.

무너져가는 세계.

앞으로 10분 뒤에는 사라질 게이 트다.

10m에 이르는 거구를 손질하고 가 죽과 뼈, 이빨을 챙겨가기에는 시간 이 부족했다.

고민 끝에 짧게 답했다.

" 없지."

『헤헤. 그렇잖아.』

"그렇다고 널 살려둘 이유는 없 다."

『그렇다고 죽일 이유도 없지.』

이 똥개 녀석.

기억에 혼선이 있어서 머리 아프다 고 할 땐 언제고.

쓸데없이 논리적이라서 반박을 못

하겠다.

'왜 이 녀석의 말에 휘말리고 있 지?'

뒤늦게 위화감을 깨닫고는 다시 마 음을 다잡았다.

"너는 적이다. 이유는 그걸로 충분 하다."

『부탁이 하나 있어.』

" 부탁?"

『형. 나 좀 한 번만 살려주라.』

"널 믿을 수 없다."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성을 되찾은 펜리르.

그래서 더 위협적이었다.

광기에 잠식되어서 이성을 잃고 본 능만으로 행동했을 때가 차라리 나 았다.

내가 점한 우위가 없어지는 순간.

광기를 떨쳐낸 펜리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냥, 살고 싶을 뿐이야!』

"유감스럽지만 네가 너무 강하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 손을 써야 해."

『신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 그래

서 가만히 있던 날 묶어두고 괴롭혔 단 말이야!』

펜리르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울 분이 가득했다.

신들?

과거, 펜리르가 포식했던 신적 존 재들을 말하는 듯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펜리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고. 살고 싶어 서 싸웠을 뿐이야!』

"어떻게 너를 믿을 수 있지?"

『형을 주인으로 모실게.』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몇 번이고 눈꺼풀을 감았다가 뜨면 서 펜리르의 말을 곱씹었다.

'나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신화시대의 괴수.

고고하기로는 엘리시움의 천사들에 버금가는 고대종이 내게 복종하겠다 고 했다.

자존심보다 목숨을 택한 것이다!

태고의 신비를 품고 있는 신화시대 의 괴수들.

그들은 하나 같이 자존심이 엄청났

다.

차라리 죽으면 죽지, 자존심을 굽 히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생을 연장하 지는 않는다.

전생의 나는 그런 괴수들과 몇 번 싸워봐서 그들의 자존심을 잘 알았 다.

"믿기 어렵군."

『형이 원하면 바로 종속의 맹세를 할게!』

"기억이 꼬였다면서 종속의 맹세는 또 어떻게 아나?"

『신들이 나한테 종속의 맹세를 하 라고 귀 따갑게 말했거든.』

"그때는 안 했잖아."

『턱에 칼을 쑤셔 넣고 그렇게 이 야기하는데. 날 아프게 해서 싫었 어.』

종속의 맹세를 언급하는 펜리르.

여전히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고민했다.

결정을 기다리는 펜리르의 초록색 눈동자가 떨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61 화

"네 종속을 받아들이겠다."

『고마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펜리르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좌우로 살랑거리는 꼬리.

이 녀석.

정말로 기쁜 모양이다.

『나, 로키의 아들 펜리르는 당 신... 아, 형 이름이 뭐야?』

"전민철."

『전민철을 섬길 것을 내 영혼에 걸고 맹세합니다.』

혹시라도 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두려운 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로 종속의 맹 세를 했다.

보이지 않는 맹약의 끈이 나와 펜 리르의 영혼을 연결했다.

베르데 때와 마찬가지였다.

『주인님! 고마워!』

바로 호칭이 형에서 주인님으로 바 뀌었다.

이 녀석.

태세 전환 속도 보소.

"난 살려준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 는데?"

『뭐, 뭐야. 그건 사기잖아!」

"농담이다."

『그런 농담은 심장에 해롭다고. 멍!』

정신이 멍해진다.

고향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뽀삐를 보는 것 같다.

신화시대의 괴수.

신마저 집어삼킨 존재와 뽀삐가 겹 쳐져 보이다니.

엄청난 괴리감에 머리가 어지러웠 다.

'알고 보니 펜리르의 사촌 동생이 라든지. 이런 건 아니겠지?'

[진실의 눈]으로 진명을 확인했는 데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상태창이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돌연 펜리르가 급히 날 불렀다.

『아, 아야! 주인님!』

"왜지?"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목이 끊어 질 것처럼 아파!』

끊어질 것처럼 아픈 게 아니라.

정말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참아라."

혼돈기에서 성력을 분리했다.

성스러운 화염.

나는 펜리르의 상처에 손을 뻗었

다.

[성화(聖火)를 사용합니다.]

[성력 300을 소모합니다.]

[치유의 축복이 대상의 몸에 깃듭 니다.]

하얀 불꽃이 목덜미에 난 상처에 붙었다.

따스한 기운은 다크 스타가 만든 흔적을 어루만져주었다.

『헤헤. 따뜻하다. 통증이 잦아들 어.』

"떠들지 마. 상처 덧난다."

발을 태우고 있던 지옥의 겁화도 해제했다.

나는 검은 게이트 소멸 시간을 확 인했다.

[붕괴까지 00:05:33]

"펜리르."

「주인님. 왜?』

"너 뛸 수 있겠냐?"

『아니. 목이랑 다리가 아파서 뛰 는 건 어려워. 조금 쉬면 될 것 같 아.」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조금 쉬었다 가는 요단강 익스프 레스 탈 것 같다."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본 펜리 르.

잠시 후, 사태를 파악한 듯 눈동자 를 잘게 떨었다.

『주, 주인님. 이대로 있으면 위험 한 거 아니야?』

"엄청 위험하지. 그래서 물어본 거 다."

『난 지금 못 뛴단 말이야. 주인님 아. 방법을 생각해봐!』

펜리르를 쓰러트리고 나 혼자 나갈

생각만 했지.

이 녀석과 함께 나갈 상황은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진짜 위험한데?'

저 큰 덩치를 들고 갈 수는 없다.

무공을 펼쳐도 마냥 힘을 늘려주거 나 하지는 않으니까.

권속으로 거둔 펜리르.

놈을 놓고 혼자 게이트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변신할 수 있어?"

『변신?」

"몸을 줄일 수 있냐고."

『응! 잠깐 기다려!』

펜리르의 몸이 환한 빛으로 뒤덮였 다.

빛이 꺼진 뒤, 10m의 괴수가 자취 를 감추었다.

대신 40cm 정도 되는 푸들 한 마 리가 목과 다리를 다친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설마.

저렇게 귀여운 푸들이... 펜리르 라고?

멍!

-주인님. 어때?

진짜였다.

펜리르의 사념이 강아지 짖는 소리 에 섞여 있다.

'신 포식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 는 건가.'

푸들로 변한 펜리르는 신 포식자라 는 위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 이었다.

이건 좀 반칙이잖아.

무릎에도 안 닿는 멍멍이랑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생각하니 실소가 나 왔다.

외형은 고위 영체에게 「틀」에 불 과하다지만.

저 모습은 쉽게 적응이 안 됐다.

'됐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푸들 펜리 르를 품에 안았다.

멍! 멍!

-나. 남자 품에 안기는 취향은 없 는데.

"아니면 여기서 뒈지시든가."

멍!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미안합 니다.

진즉에 그래야지.

한 손으로는 펜리르를 안은 채, 나 는 게이트 입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 렸다.

>k 米 米

검은 게이트 입구로 돌아가는 과정 은 순탄하지 않았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대지가 갈라졌 다.

노을빛 하늘은 이미 대부분 어둠에 잠식되었다.

대지는 펜리르와 내가 싸운 여파로 쪼개지면서 한 폭의 지옥도로 변해 버렸다.

갈라진 지면 사이로 용암이 솟구치 는 곳도 있었다.

-주인님! 앞에 커다란 벽 있어!

"나도 알아."

앞에 치솟은 커다란 바위.

크기가 꽤 커서 돌아가거나 넘자 니, 시간 소모가 컸다.

나는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가 펼쳤 다.

양손으로 펼치는 대수인.

혼돈기를 더 불어넣었더니, 손바닥 에 맺힌 기운이 두 배 이상 커졌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바위가 산산조각 났 다.

부글부글-

이번에는 용암의 강이 앞을 막았 다.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여기서 여기로, 저길 건너뛰면 된 다.'

눈으로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머리는 빠르게 경로를 계산해냈다.

동시에 내력을 응용해서 운류보를 유지했다.

나는 용암의 강 위에 떠 있는 돌 을 밟았다.

돌은 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가 라앉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경신법을 응용하면서 다 음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팟!

용암 강의 길이는 수백 미터.

아직 녹지 않고 강 군데군데에 떠 있는 바위나 돌을 밟으면서 전진했 다.

강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피부가 익을 것 같다.

휘이이잉!

광풍이 용암의 강 표면 위로 몰아 쳤다.

파문이 일어나면서 용암 일부가 솟 구쳤다.

"아...

발판으로 점찍어둔 바위가 광풍이 일으킨 용암 파도에 삼켜졌다.

바위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주인님. 우리 이제 용암 목욕하는

거야?

"재수 없는 소리 마라."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가 있던 자리를 향해 도약했다.

-펜리르 죽어요! 보신탕은 싫어!

발이 용암에 닿기 직전.

나는 응축시킨 혼돈기를 아래로 방 사했다.

용암을 밀어내는 혼돈기.

나는 그 힘으로 다시 한번 도약, 그 뒤에 있는 발판에 겨우 착지했 다.

-주인님. 그렇게 다닐 수 있으면서

왜 발판을 밟은 거야?

"힘 많이 들어."

임 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재도약하 는 게 쉬운 줄 아냐.

펜리르와 벌인 격전.

이어서 용암의 강을 건너기까지.

땀이 쏟아지고 입에서 단내가 났지 만.

나는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강을 무사히 건넜다.

'아. 이번에는 좀 위험했어.'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 어내렸다.

등 뒤로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 졌다.

광풍과 뇌성벽력, 그리고 이따금씩 솟구치는 용암.

세상의 종말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겠지.

나는 살풍경한 광경을 뒤로 하며 게이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검게 물든 시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따스한 햇볕

이 온몸을 감싸주었다.

그런데.

게이트에 들어갈 때와는 풍경이 조 금 달라졌다.

"전민철 헌터!"

신유미.

그리고 엘프 수십 명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뭐야. 단체로 환영이라도 해주려 고 모인 거야?"

"하... 당신이란 사람은 진짜."

신유미가 눈을 흘겼다.

"왜. 말을 해, 말을."

"지금 농담이 나와요? 우리가 현장 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게이트, 소멸 직전이었어요."

"알아. 그래서 급히 나온 거야."

"안에서 별일은 없었어요?"

"보다시피. 멀쩡하잖아."

나는 펜리르를 안고 있지 않은 왼 팔을 붕붕 돌렸다.

"무슨 일 있었으면 난처했을 거라 고요."

"날 걱정해준 건가?"

"걱정은 무슨! 대사관이나 아버지

의 입장이 곤란했다고요."

왜 이렇게 날을 세우나.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 가요?"

"다크 엘프의 의식."

나는 검은 게이트 안에서 벌어진 일을 짧게 설명했다.

검은 게이트가 옛 세계의 파편이라 는 것.

그리고 다크 엘프가 옛 존재를 불 러내는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말

했다.

신유미 일행은 경악을 금치 못했 다.

"그들은 그 의식으로 마왕을 부활 시키려고 했을까요?"

아.

시바. 마왕 아니라고요.

울컥, 솟아오르는 화를 겨우 진정 시켰다.

"데이모스는 아니었어."

"그럼 누군데요?"

"모르지. 파장 증폭진이 무너지면 서 의식도 실패했거든."

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쏙 바꿔서 말했다.

모두 솔직하게 말하면 이 녀석의 정체도 알려줘야 되거든.

신 포식자 펜리르.

놈들이 불러낸 신화시대의 괴수는 지금 내 품에 안겨서 꼬리를 살랑거 렸다.

"알겠어요. 전민철 헌터가 도와주 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요."

"감사의 마음은 현물로 표시해줘."

"푸훗. 아빠한테 말씀드릴게요."

입을 가리면서 웃는 신유미.

나를 보던 중, 시선이 아래로 향했 다.

이내 팔에 안겨있는 펜리르를 발견 했다.

"그거. 강아지 아닌가요?"

"아. 으응."

"설마••••••

신유미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나 를 노려봤다.

'이 녀석이 펜리르라는 걸 알아채 는 건 아니겠지?'

엘프 대사관 측 인원이 게이트 앞

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반신반의하면서 문자를 보냈는데 정말로 왔네.

신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게이트 안에 강아지를 데리고 들 어간 건가요?!"

얘는 또, 이상한 오해를 하네.

그래. 이 푸들이 펜리르라고 설명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오해를 해주 는 게 낫지.

"오다 주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귀

여운 강아지를 그 위험한 게이트에 데려가요!"

"버려진 것 같은데 그냥 둘 수는 없잖아."

멍! 멍!

-주인님. 난 버려진 거 아니거든!

펜리르야. 너까지 왜 나서냐.

앞에서는 신유미가 호들갑을 떨고 아래에서는 펜리르가 짖어댔다.

환장의 하모니가 내 귀를 괴롭혔 다.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제발...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 게 해주라.

사면이 막힌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수정구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전신을 감싼 로브.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철저하게 감추었다.

음울한 보랏빛을 흩뿌리는 수정.

수정의 표면 위로 검은색 게이트가 무너진 모습이 투영되었다.

"믿을 수 없다."

한 명이 중얼거렸다.

로브 아래로 살짝 드러난 눈.

뱁새를 떠올리는 작은 눈 사이로 불신의 감정이 감돌았다.

『무엇이 믿을 수 없다는 거지?』

화르륵!

수정구 위.

주황색을 띤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 다.

그 빛은 강렬해서 방에 있는 어둠 을 대부분 걷어냈다.

불꽃 위에는 사람의 눈과 코, 그리 고 입이 달려 있었다.

"구, 군주님!"

『박사. 사정을 설명해보실까?』

"지금이라도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변명은 죄악이라는 걸 알고 있겠 지?』

불꽃 일부가 '박사'라고 불린 인물 의 손등에 튀었다.

치이이익!

매캐한 연기와 함께 손등이 타올랐 다.

"끄읍... 끅!"

『의식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호 언장담했는데 결과가 이 모양이로구 나.』

"끄으으...

박사는 대꾸하는 대신 신음을 참았 다.

「짐의 기대를 저버리면 곤란해.』

"그럴 일은... 더 없을 겁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짐이 박사 를 지원해주는 의미가 있지 않겠

나.』

"후욱. 고작 한 번의 실패입니다."

박사는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자 신 있게 대꾸했다.

『제히트여.』

"군주님의 부름에 답하나이다."

여태 말을 아끼던 다른 존재가 대 꾸했다.

젊은 남자의 음색이었다.

『박사를 도와 다음 임무를 수행하 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불꽃은 다시 한번 박사를 내려다보 았다.

『다음 결과를 기대해보지. 하지만 기대치에 차지 않을 경우에는...

••••』

"후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담한 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합당한 보상을 내려주마.』

팟!

불꽃이 사그라졌다.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 았다.

"제히트. 이번에는 내 명령을 따라

라."

"인간 따위를 도와야 하다니."

"불만이면 당신네 군주님께 따지던 지."

"...알았다."

젊은 목소리의 사내는 몸을 한차례 떨고는 낙담하듯 짧게 대꾸했다.

62 화

검은 게이트 붕괴 후.

엘프 대사관은 다크 엘프의 흔적을 쫓았다.

순탄치 않았다.

전장에서 이탈한 다크 엘프들은 자 취를 감췄다.

불온한 움직임이라도 나타나면 좋 겠지만, 거짓말처럼 흔적을 지우고 잠적해버린 것이다.

바리스 실린은 직접 나한테 연락을 했다.

"민철 군. 힘을 한 번만 더 빌려주 지 않겠나?"

"이미 내 역할은 충분한 것 같은 데. 거절하죠."

나는 바리스의 제안을 딱 잘라서 거절했다.

'더 얻을 건 없지.'

데이모스를 사칭했다는 증거를 잡

아냈다.

그리고 검은 게이트에서 혼돈의 기 운을 흡수했고, 신화시대의 괴수 펜 리르를 거뒀다.

있을지도 모르는 다크 엘프의 흔적 을 쫓는 건 시간 낭비였다.

바리스도 크게 기대를 안 한 듯 개의치 않았다.

"우리도 자네에게 너무 많은 걸 의 지하면 안 되겠지."

"전에 도와준 것에 대한 보상이나 확실히 주쇼."

"물론이지. 기대해도 좋네."

"백지 수표랑 퉁 치는 건 안 되는 거 알죠?"

"나는 이래 봬도 황가의 방계다. 그런 수를 쓸 만큼 곤궁하지 않다."

하긴.

귀쟁이 놈들의 고지식함은 예나 지 금이나 똑같지.

보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 다.

"탈색 귀쟁이놈들의 배후도 알아내 면 알려주쇼."

"물론이라네. 민철 군의 협력이 아 니었다면 잡아내지 못했을 놈들이

니...

바리스는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엘프 대사관 측에서는 파장 증폭진 을 덮치는 중 다크 엘프 몇 명을 포획했다.

검은 게이트에서 치러진 의식.

그리고 다크 엘프들.

바나하임 제국에서는 두 가지 단서 를 가지고 다크 엘프들의 배후와 의 도 등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일단 전생의 나를 따르는 건 아니 라고 못 박았으니까.'

검은 게이트에 들어간 것은 나밖에

없다.

나는 다크 엘프가 옛 세계의 어떤 존재를 소환하려 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

뭔지는 끝까지 말 안 했지만.

그래서 다크 엘프의 배후는 투장 데이모스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아.

진짜... 어떤 악마인지, 알아내면 가만히 안 둘 거다.

'뿔을 뽑아서 프로펠러를 돌려주 마.'

이름 모를 악마를 향한 적대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다크 엘프 무리가 벌인 소동은 이 렇게 일단락되었다.

米 米 #:

나는 수련도 관두고 집에 들어왔 다.

작은 자취방이 반갑게 느껴지는 날 이 올 줄이야.

'심법 수련을 하면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기분이다.'

성천조계공만 수련하려고 하면 이 상한 기운을 감지해서 사건에 휘말 렸다.

우연이겠지만.

지금은 또 다른 사건에 말려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지쳐서 쉬고 싶은 마음뿐.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여태 억눌렀던 피로가 터지면서 전 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잠기운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잠 들었다.

얼마쯤 눈을 감고 쉬었을까.

할짝.

축축하고 물렁한 물질이 볼을 자극 했다.

'뭐야?'

이질적인 감각에 눈을 떴다.

멍!

내 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푸 들... 아니, 펜리르가 있었다.

-주인님. 나 배고파.

"...그래. 네가 있었지."

펜리르를 생각 못 했다.

생긴 건 강아지인데.

개 사료라도 사가지고 와야 하나?

"넌 뭐 좋아하냐."

-헤헤. 아무거나 상관없어.

"아무거나, 라는 말이 제일 어려운 거다."

몸을 일으켜서 냉장고를 향해 어기 적어기적 걸어갔다.

벌컥-

문을 여니 시원한 한기가 뺨을 스 친다.

이제 좀 정신이 드네.

냉장고를 빠르게 훑어봤다.

핫바 몇 개와 우유, 시리얼, 그리 고 계란 몇 개.

'먹을 만한 건... 대충 이 정도인 가.'

우유와 시리얼을 꺼냈다.

시리얼은 고향 집 뽀삐한테 가끔 간식으로 주곤 했다.

주식으로 주면 안 되지만, 가끔 특 식(?) 느낌으로 먹는 걸 덜어줬는데 잘 받아먹었다.

-멍 이거 나 주는 거야?

"오냐. 먹어봐라."

-잘 먹겠습니다!

펜리르는 입을 벌리더니 시리얼과 우유를 꼴깍꼴깍 넘겼다.

그리고.

-푸우우웁!

먹은 것 그대로 원룸 바닥에 뱉었 다.

-웩. 못 먹겠어. 주인님, 이건 먹 는 게 아니야.

"...적극적인 의사 표현 고맙다. 이 똥개야."

-흥! 못 먹을 걸 준 주인님 잘못 이지!

펜리르는 괴수다.

생긴 건 이렇지만, 본체는 세계를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괴물.

쇠락해서 크기가 줄어들었다지만, 평범한 강아지하고는 입맛이 다른 모양이다.

다음은 핫바였다.

30초 정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펜리르에게 한 입 베어 물게 했다.

퉤.

이번에도 핫바를 뱉어냈다.

-시큼하고 맵고 짜고 맛이 이상해.

날달걀을 줬을 때는 그나마 반응이

괜찮았다.

하지만 뒷발로 귀를 긁으면서 못마 땅함을 표현했다.

-주인님. 이런 걸로는 배가 안 차.

"뭘 먹으면 배가 차는데?"

-전에는 안 먹어도 배가 찼었거든. 나도 잘 몰라.

나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입맛 까다로운 녀석 같으니.

'수인들이 먹는 음식을 주면 괜찮 을까?'

오.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잖아.

수인이라고 하면, 물어볼 사람이 있었다.

뚜- 뚜-.

-민철 헌터?

벨소리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

았는데, 바로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음색.

엘리 였다.

"물어볼 게 있어서."

-게이트 섭외인가요? 당분간은 수 련을 하신다고 해서... 죄송해요.

난색을 표하면서 사과하는 엘리.

꼭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시간만 나면 게이트에 들어가는 사람 같잖 아.

아니. 사실이던가?

"그런 건 아니고, 미안해할 건 없 어."

-호호, 그럼 무슨 일로 연락 주셨 어요?

"수인들은 뭐 좋아해?"

-...수인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라도 생기신 건가요?

나는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범위가 너무 넓었다.

"미안. 너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아니에요. 갑자기 수인에 관해 물 어보실 줄 몰랐어요.

"수인이 먹을 만한 걸 추천해줬으 면 해."

-종마다 선호 메뉴가 다르긴 하죠.

"견족이야."

-헤에. 혹시 알고 물어본 건 아니 죠?

"뭘 알고 물어봐."

-제가 견족이잖아요.

아, 그랬나.

참 놀라운 우연이었다.

-보통은 육류를 좋아하지만 개체 마다 기호 차이가 있죠.

"그래? 범위가 좀 넓네."

-그 친구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요?

"어린 녀석이라 자기 입맛을 잘 몰 라."

-그럼 직접 먹어보고 판단하는 게 빠르겠네요.

펜리르를 흘겨봤다.

-멍! 주인님. 어서 뭐 먹고 싶다. 녀석은 꼬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이 녀석의 입맛에 맞는 고기를 찾 아야 한다니.

'아주 개 팔자가 상팔자여.'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좀 도와드려요?

"그러면 나야 좋긴 한데. 업무도

아니잖아."

-업무죠. 지부장님은 민철 헌터의 보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거든요.

"그 땅딸보 녀석이?"

-물론이죠.

"그럼 부탁 좀 할게."

-호호, 금방 모시러 갈게요.

왠지 엘리의 목소리가 들뜬 것 같 은데.

착각이겠지.

-그럼 우리 뭐 먹으러 가는 거야?

" 오냐."

펜리르 때문에 계획에도 없는 외출 을 하게 되었군.

킁킁-

어제 안 씻고 그대로 잤더니 몸에

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나갈 준비 해야겠네.'

후우-.

나는 아까 참았던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米 米 米

엘리는 전처럼 전용 기사를 대동하 고 찾아왔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어요?"

"나는 보이지도 않냐."

"호호, 민철 헌터는 자주 봤잖아 요."

나는 슬쩍 아래를 바라봤다.

품 안에 안겨있는 검은 푸들.

펜리르였다.

"어머, 어머...!"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젠장.

펜리르가 수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 챈 건가?

"너무 귀엽잖아요!"

엘리는 양손을 뻗어서 내 품에 안

겨있던 펜리르를 낚아챘다.

멍?

"아이야. 너 어디 가문이야?"

-나는 로....

"아. 그건 몰라. 얘는 기억상실증이 거든."

나는 급히 펜리르의 말을 가로막았 다.

엘리가 펜리르의 신상에 대해 물어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펜리르도 내 눈치를 보더니 더 말 을 하지 않았다.

휴.

다행이야.

"그래요? 이 아이, 유서 깊은 가문 의 핏줄을 이은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어?"

"체취가 다르거든요."

킁킁.

엘리는 펜리르의 몸에 코를 가까이 대고는 냄새를 맡았다.

평소에는 못 느꼈는데.

코를 킁킁거리는 모습을 보니 견족 이 맞긴 하네.

"향이 엄청 세요. 명문가도 이만큼 진하지는 않은데...

엘리의 눈빛에 의구심이 감돌았다.

펜리르는 어디서 났는지.

가문은 어디인지.

궁금증이 가득한 눈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금방 밑천이 바 닥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헤헤. 예쁜 누님이다.

"어머. 지금 나보고 예쁘다고 한 거야?"

-응. 예쁜 누님 보니까 마음이 설 레고 뱃가죽이 떨려.

꼬르륵.

펜리르의 배에서 격렬한 소리가 났 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건 배고파서 그런 거다."

"절 보니 설레서 배가 떨렸을 수도 있죠. 안 그래요?"

엘리가 바로 반박했다.

"예예... 그러시겠죠."

"많이 배고픈가 보구나. 누나가 맛 있는 거 사줄게!"

-헤헤. 예쁜 누님은 마음도 착하구 나.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엘리.

펜리르는 엘리 옆에서 꼬리를 흔들 며 아양을 떨었다.

엘리야. 속지 마.

그 개새끼가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수천 년도 더 산 괴물 중 의 괴물이야.

'...차라리 잘 된 건가.'

더 이상 펜리르의 신상을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다.

근데.

왜 저 멍멍이한테 진 느낌이 들 지?

"참. 이 아이, 이름은 뭐예요?"

-내 이름은 페....

" 펭구."

펜리르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풋, 엘리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펭구요?"

-아. 주인님! 왜 이름을 멋대로 바 꾸냐!

"얘가 자기 이름을 펜리르라고 우 기더라고."

"펜리르면 신을 먹어 치운 괴

물의 이름이네요."

"어. 기억이 온전하지가 않아서 허 언증이 있는 것 같아."

" 어쩜••••••

엘리가 펜리르를 안쓰러운 눈빛으 로 보더니 등을 쓰다듬었다.

펜리르 녀석.

나한테 반박하고 싶은 눈빛을 띠면 서도, 엘리의 손길에 좋아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에휴.

동생인 요르문간드하고 완전 딴판 이야.

잠시 후, 차량은 성간 연합 용산

지부 앞에서 멈췄다.

"여긴 왜 왔어?"

"이종족과 관련된 상품을 다루는 건 성간 연합이 제일이에요."

엘리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 했다.

맞는 말이다.

반박할 말이 없군.

나는 펜리르를 품에 안은 채로 내 렸다.

"민철 헌터. 그 아이는 변신을 못 하나요'?"

"어. 무슨 충격을 받아서 그런다고

하던데, 이유는 잘 몰라."

"어쩜... 누나가 잘 챙겨줄게."

-멍! 누님은 예쁘면서 마음씨도 착하다.

엘리의 저런 모습.

몇 개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 었다.

'사무적인 부분은 선을 확 그었으 니깐.'

그녀는 마르탄에 비해 나를 편하게 대했다.

그럼에도, 사적인 부분은 관여하지 않고 본인의 감정도 잘 비추지 않았

다.

펜리르가 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드러내는 모 습.

문득,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 다.

"얼른 가요. 저도 배고프네요."

"아,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군."

펜리르가 배고픈 것만 신경 썼지.

정작 나도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지 꽤 지났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엘리의 뒤를 따라 성간 연합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63 화

성간 연합 빌딩 5층.

층 전체가 식당이었다.

번화가에 있는 백화점을 보는 기분

이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이종족이 참 많아.'

엘프, 드워프, 수인족.

그 외에도 여러 이종족들이 식당을 이용했다.

[털보네 24시 피 식당]

[오크 혈관 국숫집]

피 식당에 들어가는 뱀파이어. 혈관을 폭풍 흡입 중인 오크.

이색적인 풍경이다.

한국에 이렇게나 많은 이종족이 있 는지 미처 몰랐다.

"호호, 놀라셨죠?"

"어. 메뉴가 꽤 참신하네."

"차원마다 취향을 타는 종족이 있 으니까요."

혈관 국숫집이라.

악마 중에서도 별식을 즐기는 녀석 들은 많았다.

전생의 나는 얌전히 암흑 정수만 먹어서 특이한 메뉴를 접해보지 않 았다.

엘리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이에요!"

[망그앙의 대장 고기]

꽤 희한한 간판을 달아둔 고기 매 장이 나왔다.

-맛있는 냄새 난다.

펜리르의 코가 찡긋거렸다.

"자리 잡아주세요. 제가 챙겨올게 요."

매장 안쪽,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 자리에 착석했다.

엘리는 형태가 다른 생고기 몇 점 을 접시에 담아서 왔다.

"생으로 먹는 건 아니지?"

"당연히 생이죠."

"난 인간이다. 고기를 생으로 어떻

게 먹냐."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펭구 입맛

에 맞는 것부터 알아봐야죠."

단호하다.

박력 있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엘리는 싱긋 웃으면서 고깃덩어리 여러 개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에 담아온 고기는 일반 정육점 에서 파는 것이 아니었다.

오크 삼겹살, 블랙 카우 허벅지 살 등 괴물이나 이종족의 육신에서 발 라낸 고기였다.

"펭구야. 하나씩 먹어볼래?"

-우와. 아까 주인님이 준 거랑 다 르게 맛있어 보여.

펜리르의 입가에서 침이 뚝뚝 떨어 졌다.

놈은 작게 썰린 고기를 종류별로 맛봤다.

오물오물.

덩치는 작은데도 고기를 뱃속으로 잘도 넘겼다.

펜리르의 안색이 밝다.

나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이건 입맛에 좀 맞나보다.'

시리얼이나 핫바, 날달걀을 먹었을 때와는 표정이 달랐다.

한참 후에 고기 시식이 끝났다.

"뭐가 입맛에 맞아?"

-주인님! 난 이게 제일 맛있었어!

펜리르가 가리킨 것은 은은하게 빛 나는 붉은 고기였다.

"어머. 그거 루비 고기네요."

"루비 고기?"

"고기가 품고 있는 마나가 빛에 반 응해서 붉은빛을 낸다고 해요."

"설명 들으니까 되게 비싸 보인 다."

"1인분에 20만 원. 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아뇨.

충분히 비싼데요.

'난 그냥 컵라면이나 전투식량으로 때우기 일쑤인데.'

1인분 기준으로 하루 세끼면 60만 원.

헌터로 각성한 뒤 벌이가 커진지 라, 엄청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섰지만.

한편으로는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누가 신화시대의 괴수 아니랄까 봐, 입도 엄청 고급이네.'

괜히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는 펜 리르를 노려봤다.

녀석은 내가 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근데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있긴 한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정육식당에는 돼지고기와 소고기처 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고기도 팔 았다.

개인화로도 있어서 생으로 먹는 상 황은 피했다.

각자 식사를 하던 중.

별안간 엘리가 입을 뗐다.

"우리, 언제 봐요?"

"지금 보고 있잖아."

"밥 사준다면서요. 오늘 같은 공석 에서 말고."

탑에 들어가기 전.

엘리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 무심코 약속을 해버렸다.

"그건••••••

탑에 들어간 뒤로 한 달 정도 지 났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많은 일을 겪으면서 엘리와의 약속 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에, 에이. 설마."

"제가 옆에서 민철 헌터를 꽤 지켜 봤는데 말이죠."

"...지켜봤는데?"

"당황하면 티가 꽤 많이 나더라고 요."

엘리는 젓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지금처럼."

젠장.

잊어버린 걸 들켰군.

더 발뺌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깜박했다."

"다음에 근사한 걸로 얻어먹을 거 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누굴 얼마나 벗겨 먹으려고."

"제가 먼저 밥 먹자고 했나요?"

"미안합니다."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입을 막아버리는구먼.

엘리는 의기양양한 기세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언제...

"아이고! 여기 계셨습니까?"

걸걸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 다.

저 멀리.

마르탄이 반가운 기색을 띠면서 다 가왔다.

엘리는 입을 뻥긋거리다가 말고 식 사에 집중했다.

'덕분에 살았다.'

휴, 땅딸보 드워프가 이렇게 반가 운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지부장도 여기서 밥을 먹나 보군."

"평소에는 따로 먹습니다. 오늘 들 르신다고 해서 내려와 봤죠."

마르탄은 잘 익힌 스테이크와 맥주 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스테이크.

하얀 거품 사이로 기포가 보글보글 솟아나는 맥주잔.

와.

반칙 수준이잖아.

억울한 마음에 한 마디 툭 던졌다.

"점심인데 술을 먹는 건가?"

"맥주는 드워프한테 소울푸드 아니 겠습니까? 껄껄."

쳇.

들은 체도 안 하는군.

나는 개인 화로에 올려놓은 고기에 젓가락을 뻗었다.

성간 연합에서 먹은 식사는 꽤 만 족스러웠다.

펜리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 은 게 가장 큰 성과였다.

식사를 마친 뒤, 마르탄의 집무실 로 올라갔다.

"부탁할 게 있다."

"도울 게 있으면 말씀만 해주십 쇼."

"이거. 각인할 수 있겠어?"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색을 띤 기 다란 천을 꺼냈다.

세계뱀 망토.

탑 2층에 잠든 존재, 요르문간드한 테서 받은 선물이다.

"이, 이건 대체 어디서 나신 겁니 까?"

"탑."

"아... 그렇군요. 출처를 알 수

없는 게 아쉽습니다."

마르탄은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출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을 금 방 깨달은 것이다.

탑을 오르는 도전자들은 원래 세계 에 돌아왔을 때, 탑에 대한 이야기 를 할 수 없다.

"꽤 대단한 물건 같은데 어디 한 번 볼까요."

손을 비비는 마르탄.

푸른 알갱이가 손바닥 사이로 흘러 내렸다.

형상화된 마나로 손바닥을 감싸서

망토를 쥐었다.

우우웅!

검은 망토가 마르탄의 마나에 반응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옅어 지고, 마르탄의 이마에도 땀이 하나 둘 맺혔다.

"큽.... 제 실력으로는 어렵습니 다."

마르탄은 세계뱀 망토에서 잽싸게 손을 떼었다.

"네 실력으로도 안 돼?"

"이거 정체가 뭡니까. 감정 단계에

서 막히는데 각인이 될 리가 없습 죠."

"세계뱀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

"혹시 제가 아는 세계뱀 맞습니까? 어디 물뱀한테 붙인 이름 말고요."

"싱겁기는. 진짜 세계뱀의 가죽이 다."

"오, 오오오. 이런 귀한 물건을 만 져보는 건 처음입니다!"

"만져보면 뭐하냐. 각인도 못 하는 데."

마르탄은 금세 풀이 죽었다.

"됐고. 네 선에서는 해결 못 하는

거냐?"

"제 스승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쩝. 너무 성능이 뛰어나도 문제 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세계뱀 망토.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펜리르 의 동생이자, 전직 악마 군주인 신 화시대의 괴수.

망토 안에 깃든 힘은 너무나도 강 해서 마르탄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 다.

'당장은 쓸 수 없겠군.'

선배님이 준 선물.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가치를 지닌 듯했다.

"지부장. 이거 각인 가능한 실력자 섭외해줄 수 있어?"

"세계뱀 망토를 만져보는 거라면 흥미를 가질 장인이 몇 있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예. 맡겨주십쇼."

"그리고... 하나 더 주문할 게 있 다."

[다크 스타 - 섬전비도]

섬전비도술 전용으로 제작된 비도.

나는 다크 스타를 변형시켜서 섬전 비도의 형태를 재현했다.

"이걸 10개만 만들어줘."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한 번 살 펴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는 마르탄.

다크 스타로 재현해낸 비도를 만져 보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무게 중심과 날의 형태가 특이하

군요. 애초에 던지는 걸 전제로 만 든 칼인 것 같습니다."

"역시 예리하군. 맞아."

"잠깐 이 녀석을 빌려주실 수 있습 니까?"

"방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상관없 다."

"흐흐. 감사합니다. 눈대중만으로는 구조를 모두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요."

섬전비도술.

명색이 무 대륙의 암흑을 쥐었던 살문의 절기다.

'비도술을 펼치기에 최적화가 되어 있지.'

살문은 섬전비도술의 효과를 극대 화할 수 있는 무기를 제작했다.

그게 바로 다크 스타로 구현해낸 섬전비도다.

다크 스타의 등급이 낮아서 기껏 구현한 섬전비도도 [일반] 등급에 머무르고 있지만.

경매에서 미스릴과 오리하르콘을 얻고 2차 해방을 하면 무공의 위력 이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투척 무기라. 소모품으로 사용하 실 겁니까?"

"아니. 끝에 구멍이 있지?"

" 예."

"실로 연결해서 손가락에 걸고 회 수할 거다."

"호오. 그럼 일일이 수거할 필요가 없겠군요. 아라크네의 실을 사용하 면 될 것 같습니다."

아라크네의 실.

샤우스 차원의 거미 괴물 아라크네 에게서 추출한 실로 신축성과 내구 력이 매우 뛰어난 재료다.

천 재질의 방어구나 로브 등, 고성 능 아이템을 만들 때 사용한다.

부우웅-!

돌연 진동음이 울렸다.

"아. 잠시 전화를 좀 받아도 되겠 습니까?"

"급한 전화인가 보네."

"수련장 건축을 의뢰했던 친구입니 다."

수련장 옆에 생활공간을 개수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다.

빨리 처리해주면 나야 고맙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주문할 건 다 했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마르탄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마 르탄과 달리 가늘고 높은 톤이었다.

'같은 드워프인 줄 알았는데, 아니 었나 보군.'

나는 느긋하게 전화가 끝나기를 기 다렸다.

그때.

"미, 민철 헌터!"

마르탄의 찢어질 것 같은 고성에 상념이 끊어졌다.

"응? 뭔데."

"수련장에 무슨 마법진을 설치하신 겁니까?"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나 했네.

투장한테 대대로 내려오는 대마력 집속진을 본 모양이다.

'본다고 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완성된 마법진은 수학 문제의 답을 적어둔 것과 같다.

답을 산출하려면 여러 공식을 대입 해야 하는데, 마법진을 새겨 넣으려 면 그 공식을 머릿속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게 뭐가 어째서."

"건축업자 녀석이 흥분해서 당장이 라도 민철 헌터를 뵙고 싶답니다."

"제법 보는 눈이 있는 녀석이군. 근데 왜 보자는 거지?"

"그 마법진의 공식을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거래를 하려고 하네.

바로 거절하려는 찰나.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보자고 해."

후후.

이거 잘만 하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지겠는걸?

64 화

덜컹!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양쪽으 로 젖혀졌다.

"마법진!"

소리를 지르면서 들어오는 여인.

내 허리 정도에 닿을까 말까 하는

키.

양 갈래로 땋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볼 위에 주근깨가 인상적이었다.

'노움이었군?'

노움.

드워프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손재 주를 가진 종족이다.

두 종족은 전문 분야가 조금 다른 데, 드워프가 기술자라면 노움은 과 학자였다.

노움 여성은 날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네가 건물에 마법진을 그린 사람

인 것인가요!"

"그렇긴 하다만."

"나, 나랑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에요."

꽤 말투가 특이한 친구일세.

노움 여인의 눈동자는 내 바짓가랑 이라도 붙잡을 것 같은 기세였다.

마르탄이 나와 여인 노움 사이를 막아섰다.

"또 눈 돌아갔네. 진정 좀 해라."

"짜리몽땅 드워프랑 나눌 이야기는 없는 것이에요."

"키도 나보다 조그만 게 뭐라고 하

는 거야."

"흥! 나 정도면 노움 중에서는 매 우 큰 것이에요. 하지만 마르탄은 그렇지 않은 것이에요."

"뭐라고?! 나 정도면 그렇게 작은 편 아니거든!"

키로 논쟁을 벌이는 드워프와 노 움.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티격태격하고 있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주지?"

가만히 두면 둘의 언쟁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

노움 여성은 본론을 상기한 듯 나 를 올려다봤다.

"위 공기를 맡는 분. 내 이름은 하 린 린스우드인 것이에요."

노움, 하린 린스우드는 명함을 내 밀었다.

[린스우드 건설사]

[하린 린스우드 사장]

"전민철이다. 사장이라면 높으신 분이었군."

"예전에는 성간 연합에서 일했는데

누구 밑에 있기 싫다고 회사를 차린 겁니다."

"불필요한 설명은 필요 없는 것이 에요."

하린은 곁눈질로 마르탄을 째려봤 다.

입을 다무는 마르탄.

하린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당신이 그 마법진을 그린 것이에 요?"

"그렇지."

"지구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한 마 법진인 것이에요."

하린은 손바닥을 마주쳤다.

홀로그램 하나가 허공에 비쳤다.

내가 수련장 바닥에 새긴 마법진이 다.

"마법진 표면에는 18개의 룬어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에요. 하지만 자 세히 보면...

하린은 홀로그램을 확대했다.

룬어와 룬어 사'이.

글자 획과 마법진의 도형 사이로 숨겨놓은 새로운 룬어가 모습을 드 러 냈다.

"이 마법진은 천상의 룬어를 모두

사용한 것이에요."

24개의 룬어.

그중 6개는 엘리시움과 판데모니엄 만 다루는 '천상의 룬어'라고 불렸 다.

천상의 존재.

인간이 천사와 악마만 알고 있는 룬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하린의 질문에는 그 의미가 생략되 어 있었다.

"그럼 묻지. 그 마법진의 용도는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잠깐 고민하는 하린.

왼손으로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렸 다.

"아마 주위 마나를 끌어모으는 역 할일 것이에요."

"호오. 판단 근거는?"

"룬어의 배치. 18개의 룬어가 둥글 게 한쪽으로 모이는 형태는 마력을 집중시키는 전형적인 배치인 것이에 요."

"과연... 지부장의 친구라고 들었 는데 당신도 유능하군."

"저 짜리몽땅보다는 10배쯤 유능 한 것이에요."

하린은 가슴을 펴면서 당당하게 이 야기했다.

마르탄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 야기에 껴들지는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천상의 룬 어를 배우고 싶은 것이에요."

"거절하지. 그건 알려준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은 천상의 룬어를 자유자재로 쓰고 있는 것이에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 사정. 알고 싶은 것이에요."

"룬어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혼의 격이 필요하다."

룬어를 알려준다 한들, 그녀는 그 힘을 다룰 수 없다.

천상의 룬어는 그 격을 감당할 수 있는 고위 영체에게만 허락된 힘이 다.

나도 아는 것은 '단어'뿐.

그 단어를 조합해서 힘으로 발현하 는 건 마법에 능통한 악마 / 천사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린은 곧장 내 말을 부정했다.

"당신은 인간인 것이에요. 마찬가 지 아닌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뒤늦게 내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 은 하린.

"설마!"

같이 듣고 있던 마르탄도 놀라서 사색이 되었다.

"미, 민철 헌터!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

"아니. 네 친구는 이 말을 들을 자 격을 충분히 지녔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 녀석도 쓸모가 있겠어.'

마르탄과 엘리.

두 사람을 내 곁에 둔 이유는 간 단했다.

뛰어난 능력과 그에 어울리는 자신 감.

하린 린스우드의 능력도 두 사람에 뒤처지지 않았다.

18개의 룬어 사이에 숨겨둔 천상 의 룬어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하린 의 능력은 증명된 셈이다.

나는 씩 웃었다.

반면 하린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렸

다.

"그걸 나한테 왜 알려주는 것인지 요?"

"왜. 내가 어떻게 할 것 같나."

"죽이겠지요. 입을 닫을 확실한 방

법은 그것뿐인 것이에요."

하린은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 군.

"아니. 그렇지 않아."

고개를 저으면서 하린의 말을 부정 했다.

나는 그녀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

루는지 알고 있다.

마도 공학에 대한 열정.

하린에게서 전생의 내 모습을 엿봤 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했었지.'

무 대륙에서 닥치는 대로 무공을 익힌 것도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여러 차원을 돌면서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연구했다.

하린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천상의 룬어를 보자마자 여기로 달 려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된다.'

천상의 룬어는 알려줘도 다룰 수 없다.

나한테는 다른 지식도 있었다.

무 대륙의 진법.

진법은 마법진과는 다른 식으로 마 나를 응용해서 자연의 기운을 조종 했다.

'이 정도면 합격이지.'

능력과 욕망.

하린은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 었다.

[다크 스타 - 검]

나는 검으로 변형시킨 다크 스타를 쥐었다.

파츠츠츠!

검기가 칼날을 검게 물들였다.

"미, 민철 님! 하린에게 손을 쓰시 는 건!"

"꺄아아!"

마르탄과 하린이 격한 반응을 보였 다.

아나, 그러니까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라고.

카가각!

검기는 대리석 재질로 된 집무실 바닥을 어렵지 않게 긁어냈다.

나는 칼날 끝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무 대륙의 진법이다.

"하린 린스우드."

"네, 네!"

"여기에 마나를 불어넣어봐라."

"힘없는 노움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에요."

하린은 두려움이 가득한 기색으로 검상이 새겨진 바닥을 만졌다.

진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돌연 안개가 솟구쳐서 집무실의 시 야를 모두 가렸다.

"이건 뭣이에요?!"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민철 헌터, 어디에 계십니까?"

드워프와 노움은 당황해서 손을 허 우적거렸다.

육진도 (大 陣圖).

무 대륙의 명가, 제갈세가의 진법 이다.

제갈세가는 자연의 기운을 다루는

기문둔갑과 진법에 능통했다.

육진도는 제갈세가에 내려오는 진 법, 팔진도를 축소해서 만든 진법으 로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오감을 흩 트리는 힘을 지녔다.

'지금은 시야만 방해되지만, 조금 지나면 오감이 마비되지.'

나는 검을 재차 휘둘렀다.

카각!

진법 일부가 검격에 훼손되었다.

자욱하게 졌던 안개가 사라지고, 집무실 내부의 모습이 다시 육안에 들어왔다.

"하린 린스우드. 조금 전 기술의 원리를 알 수 있겠나?"

"저, 전혀 모르는 것이에요."

"이건 진법이라고 하는 거다."

하린은 대꾸하는 대신 훼손된 진법 을 내려다봤다.

굳게 닫힌 입술.

고민하는 듯 침묵하다가 나를 올려 봤다.

"이걸 저한테 보여주신 이유는 무 엇인 것이에요?"

"너 나하고 일 하나만 같이 하자."

나는 씩 웃었다.

* * *

하린 린스우드는 호기심과 물욕이 많은 노움이다.

노움 종족은 유쾌하고 느긋하다.

뛰어난 마도과학을 바탕삼아 평화 롭고 불편함 없는 삶을 영유했지만 욕심이나 야망이 크지 않다.

'난 그렇게 심심하게 살고 싶지 않 은 것이에요.'

어릴 적부터 변종 소리를 많이 들 었다.

마도공학자로써의 호기심.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

하린의 욕망은 고향 행성에서는 절 대로 채울 수 없었다.

'좁은 곳을 벗어나서 새로운 도전 을 하는 것이에요.'

다차원 은하 종족 간 공동체 군사 동맹 및 상인연합.

통칭 성간 연합에 취업을 했다.

노움은 타고난 마도공학 기술자 종 족이다.

그중에서도 하린의 실력은 매우 뛰 어난 축에 속했다.

마르탄을 만난 것도 성간 연합에서 일할 때였다.

몇 개의 차원이 공동으로 진행했던 대규모 프로젝트.

두 사람은 그때 호흡을 맞춰서 뛰 어난 성과를 거뒀고, 많은 보상을 받았다.

하린은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은 걸 얻을 것이에요.'

그때.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변방의 차원 하나가 폭풍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지구였다.

시련의 탑을 둘러싼 엘리시움과 판 데모니엄의 갈등.

판데모니엄의 네 차원장 중 하나가 지구에서 소멸했고, 그 결과 불가침 지대가 선언되었다.

'지구는 기회의 땅인 것이에요.'

다중 차원 우주를 뒤흔든 대사건.

하린은 지구를 주목했다.

실물로 나타난 시련의 탑.

양대 세력의 합의로 생긴 중립지 대.

변방의 차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중 차원 우주에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사직서 를 냈다.

-야. 하린 린스우드! 너 왜 잘 다 니던 회사를 관두냐!

평소 친하게 지냈던 마르탄은 멱살 을 잡을 기세로 성을 내면서 뜯어말 렸다.

두 사람은 프로젝트에서 큰 역할을 하고 성공 가도를 걷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마르탄의 말이 맞 았지만.

-짜리몽땅 드워프야. 나는 내 욕망 을 채우고 싶은 것이에요.

하린은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구는 마도공학의 발전이 상대적 으로 더뎠다.

마나를 느낀 이들은 아직 소수.

마력 운용과 기술력을 모두 지닌 연구원들은 많지 않았다.

하린은 그 점에 주목, 모아놓은 돈 을 모두 써서 지구에서 사업을 시작 했다.

[린스우드 건설사.]

자신의 성을 따서 만든 건설사다.

하린은 건축에 마도공학을 대입, 건설 과정에 마법을 사용해서 건축 시간을 빠르게 줄였다.

건물 곳곳에는 마법진을 설치해서 여러 마법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 들었다.

모두 노움의 기술력이다.

사업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투자했던 금액을 상회하는 수입을 얻었다.

빠른 건축.

그리고 마법진.

지구에서 기존에 사업을 운영하던

건설사들과 차별화를 둔 덕분이었 다.

하지만.

하린은 사업이 확장되는 걸 보면서 어느 정도 한계를 느꼈다.

'내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에 요.'

지구의 대기업들은 마도공학을 자 체적으로 연구했다.

성간 연합이나 다른 차원에 있는 회사에서도 본격적으로 지구를 향해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경쟁사는 늘어나는데 하린의 역량 은 한정적인 상황.

그때.

지인인 마르탄의 의뢰에서 한 마법 진을 발견한 것이다.

'이건 천상의 존재만 다룰 수 있는 6개의 룬어인 것이에요!'

이게 왜 지구에 있는 걸까.

집주인은 평범한 지구 출신 헌터라 고 들었다.

그 자한테서 룬어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녀의 사업도 멈추지 않고 성장할 것이다.

들뜬 마음에 성간 연합 용산 지부 를 방문했다.

하린은 그곳에서 악마와도 같이 지 독하고, 천사와도 같이 자비로운 기 회를 준 사람을 만났다.

-너 나하고 일 하나만 같이 하자.

진법.

마도공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나 를 통제하는 기술이다.

마도공학에 능통한 하린마저도 한 번 본 것만으로는 궤를 파악하기 어 려웠다.

'이걸 배우면 차별성을 둘 수 있는 것이에요.'

그녀의 촉이 꿈틀거렸다.

전민철의 제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린은 전민철이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65 화

나는 하린과 계약을 맺었다.

첫 번째는 로열티.

건설에 활용 가능한 '진법'의 사용 방법을 알려주고, 대신 건축을 할 때마다 진법 사용료를 나한테 지불 해야 한다.

'진법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 지.'

무 대륙은 극히 폐쇄적이다.

기(氣)를 다루는 능력은 뛰어나지 만, 그 외적으로는 크게 발전을 이 루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차원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내가 무 대륙과 연을 맺은 것도 보기 드문 우연이 겹치면서 된 일이 었다.

'건물에 진법을 도입하면 꽤 쏠쏠 할 거다.'

마법을 응용한 것과 차별성을 둘 수도 있고, 효과도 마법에 전혀 뒤 처지지 않았다.

두 번째는 비밀 보장이었다.

내가 천상의 존재라는 것을 비밀로 하는 것.

"비밀은 당연히 지키는 것이에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아."

계약서 내용은 만족스러웠다.

린스우드 건설사가 성장할수록 내 주머니도 두둑해진다.

반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린에게 진법의 용도와 설치 방법을 알려주

는 것뿐.

'린스우드 건설사가 망하면 그냥 꽝이지.'

그렇게 되면 괜히 진법을 알려주느 라 시간만 날린 셈이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나는 전생에서 하린 같은 눈을 가 진 사람을 몇 명 봤다.

목표를 향한 욕망.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원하는 것 을 쟁취하는 눈이다.

'진법을 주지 않아도 성공할 눈이 다.'

나는 하린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뿐이다.

"하린. 혹시 투자금도 받나?"

마르탄은 계약이 끝날 때까지 눈치 만 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흥. 20년 전에 나 말린 건 기억을 못 하는 것이에요."

"그땐 무모했다고 생각했고. 근데 지금은 달라."

"뭐가 다른 것이에요?"

"민철 님의 진법. 그거라면 다른 업체와 충분히 차별화를 둘 수 있다 고 본다."

마르탄도 내 제안에서 돈 냄새를 맡았는지, 재빨리 돈을 투자한다고 나섰다.

하린은 묘한 눈빛으로 보다가 고개 를 저었다.

"연합의 지원은 거절하는 것이에 요."

성간 연합은 돈으로 영혼도 사는 놈들이다.

그들의 지원을 받게 되면 회사 운 영에도 사사건건 개입을 받게 될 것 이다.

한때 하린도 성간 연합에서 일해본 적이 있어서인지, 바로 제안을 거절

했다.

"연합의 지부장 입장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뭐인 것이에요?"

"내가 개인적으로 모은 돈이 있어. 그걸 모두 린스우드 회사에 투자할 거다."

"그거라면 환영인 것이에요."

드워프와 노움은 손을 맞잡았다.

둘 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잘 어 울리는 모습이다.

"민철 님은 나한테 진법을 빨리 알 려주는 것이에요."

초롱초롱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하린의 눈동자 위로 열정과 욕망이 뒤엉켜졌다.

이런 눈빛,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경매가 끝나면 시작하지."

"왜, 왜인 것이에요?"

"밀린 일이 좀 있거든."

나한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남아있었다.

바로 성천조계공 수련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