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

< 뒷골목 마법사의 회귀생활 >

* 글: 카이로스

* 책 소개

자유를 찾아 은퇴를 결심했다.

한데, 이게 웬걸?

"반갑네. 내 이름은 파헤른 폰 데큘란."

옘병... 사냥개 하나 도주하는데 가주가 나서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엉?

"다시 데큘란의 그늘로 돌아오게."

뭬? 다시 그늘 아래로 돌아오라고? 이거 정말이지 썩 끌리는 제안...은 개뿔!

어떻게 결심한 은퇴인데, 다시 개가 될까 보냐!

피할 수 없는 죽음.

하나, 당당히 맞서겠다! 안락한 개로 살아갈 바에는, 자유로운 와이번으로 죽으리라!

...그런데.

짤그랑!

"...?"

죽지 않았어?

"으흐흐. 그래, 그렇단 말이지?"

옛말에 이르길 대현자의 복수는 백 년도 이르다고. 진정한 대현자(?)의 복수를 보여 주마!

부랑아로 시작하는 뒷골목 마법사의 회귀 생활!

***

◈ 1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데큘란가(家).

동부 대륙에 뿌리를 둔 위대한 마도 가문, 데큘란의 전직 트러블슈터 되시겠다.

하면 트러블슈터가 무엇이냐.

쉽게 말해 사냥개.

주인의 명령에 살고 죽는 사냥개처럼, 가문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 일은 참으로 다양한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경쟁 가문에 들어가 비밀을 파헤치고, 데큘란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다.

그러다 걸리면?

그때부턴 죽도록 째야 한다.

어쨌든 이런 게 트러블슈터의 일인데, 사실 트러블슈터에게 은퇴란 없다.

생각해 봐라. 트러블슈터가 하는 일은 하나같이 들켜선 안 되는 악행이요, 발각되는 날에는 임무 성과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데.

그 누가 살려서 은퇴를 시킬까.

'나 같아도 안 시키지.'

한데, 어떻게 내가 '전직' 트러블슈터냐.

난 은퇴했거든.

일이 힘든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일 자체는 적성에 맞았다 해야겠지.

언제 한번은 동부 제일 검술 명가(名家) 로르텔에 쫓긴 적이 있는데, 나 하나 잡으려고 기사단 하나가 칼을 빼 들고 달려들더라.

그때는 정말―

끝내줬지.

'아주 재밌었어.'

얼굴이 시뻘게져서 쫓아오는데 약 올리는 재미가 있더라. 웬만한 명가에는 다 쫓겨 봤는데 로르텔의 반응이 가장 볼만했달까.

무식한 칼잡이 놈들.

이 무식한 칼잡이 놈들로 말할 것 같으면 할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어쨌든.

일 자체는 할 만했다.

재미있었거든.

한데, 어째서 은퇴를 했느냐―

'글쎄.'

딱히 이유는 없었다.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와이번이 날고 있더라. 구름을 가르고 창공을 선회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자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지.

물론, 그 와이번이 나를 잡아먹으려다가 도리어 내 배 속에 들어간 건 별개의 사건.

'그놈 참....'

맛있었지.

며칠을 굶다가 먹어서 그런가, 별미였다. 그렇다고 또 먹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내가 이처럼 화려한 은퇴식을 치르는 건 바로 이런 이유였다.

"이제 네놈 하나만 남았군."

난장판이 된 대지.

스산한 바람이 공간을 휩쓸었다.

여느 때와 같이 불어오는 바람이건만, 그에 담긴 향은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비릿한 혈향.

나를 잡으러 온 데큘란의 마법사들이 드러누운 자리로 한 사내가 자리했다.

"1호 네놈... 실력을 숨겼구나. 트러블슈터 따위가 가지고 있을 실력이 아닌데."

데큘란의 혈족 놈.

이름은... 모른다. 그저 트러블슈터들 사이에서 재수 없는 관리자 1로 통할 뿐.

"질문은 내가 한다."

명치에 주먹을 가볍게 박아 주자, 녀석은 좋아 죽겠다는 듯 몸을 웅크렸다.

나는 그런 놈의 눈앞에 서책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이게 마도서라고?"

"...."

"대답."

혈족 놈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설마 네놈 하나 따위를 잡으려고 이리도 몰려온 줄 알았더냐."

"하긴, 알았으면 더 개떼처럼 몰려왔겠지. 그렇지 않냐?"

혈족 놈은 답하지 않았다.

아마 제 스스로도 동의를 하기 때문인 듯한데, 나 역시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사용법은?"

"모...른다."

"몰라?"

되묻는 것도 잠시.

곧 납득했다.

"하긴, 알고 있었으면 이걸 비고에 그렇게 처박아 두지는 않았을 거야."

데큘란의 욕심이 어디 보통인가? 욕심쟁이 고블린도 한 수 접는다.

그런데, 사용법을 알고 있는 마도서를 가만히 썩혀 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동안 지켜봐 온 데큘란이라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흐음, 뜻밖의 소득이기는 한데.'

아니, 마도서를 획득했다는 건 단순히 소득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무려 마도서다. 쓰기에 따라 대륙의 판도를 바꾸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힘.

오죽하면 지닌 마도서의 개수로 마도 명가의 우열을 판가름할까.

하나 이것이 과연 내게 좋은 일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마 지옥 끝까지 쫓아올 거야.'

아무리 사용법을 모른다지만 데큘란은 마도서를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다. 말했다시피 그 욕심은 욕심쟁이 고블린보다 더한 것이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지금이라도 마도서를 내놓아라. 그러면 내가 가주께 선처를 부탁드리지."

혈족 놈의 말에 픽 웃음이 터졌다.

"그럴 힘은 있고?"

"...."

대답은 없었다.

그럴 테지.

제 놈이 제아무리 혈족이라고는 하나, 트러블슈터나 감독하던 관리자. 기껏 해 봐야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패배자니까.

"그래서 유언은?"

"개자식...."

"결국 스스로 정체성을 깨달았구나. 바람직하다."

역시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깨달음을 얻는 것 같다.

어쨌든, 난 혈족 놈의 자그마한 성취를 축하하면서 그 목을 움켜쥐었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이건 이거니까.

그렇게 그 목을 꺾으려는데....

그 순간이었다.

"...!"

섬찟한 느낌.

본능이 경고했다.

위험하다.

온몸의 솜털이 삐쭉 곤두서고, 전신의 땀샘으로 식은땀이 줄줄 샘솟는 가운데, 귓가에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제법 감각이 좋은 편이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웬 중년인 하나.

태연자약하다.

시체가 가득한 대지를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미소로 걸음을 옮기는데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오직 겉모습뿐.

그 걸음마다 중첩되는 기세는 자못 흉악할 지경.

"...."

내가 아는 한, 이런 기세를 내뿜을 수 있는 강자는 데큘란에서도 단 한 명뿐이다.

데큘란의 가주(家主).

동부 대륙 제일 마도 가문의 수장이자... 역대 최강이라 평가받는 마법사.

오직 그뿐이었다.

"반갑네. 내 이름은 파헤른 폰 데큘란. 자네가 쥐고 있는 얼간이의 백부이자, 데큘란의 수장이라네."

가주는 여유롭게 소개를 한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면 조카와 마도서를 넘겨받고 싶네만. 이야기는 그 후에 하도록 하지."

* * *

트러블슈터로 십수 년.

반평생 데큘란에 몸담아 온 나이지만, 데큘란의 주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끔 상상은 했다.

동부 대륙 제일의 마도 명가 데큘란의 수장, 개인으로는 역대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마법사는 과연 어떤 자일까.

한데 그 감상은....

"재수 없네."

"...?"

나는 마도서를 아공간에 수납하며 입을 열었다.

"데큘란이 염치없는 도둑놈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사람이 애써 얻은 전리품을 날로 가져가겠다고?"

이런 취급이 처음이었던 걸까.

가주는 '허'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는데, 사실 속은 말이 아니었다.

'옘병할 와이번.'

그때 와이번을 잡아먹지 말았어야 했나. 설마 가주가 직접 행차하다니.

직접 눈으로 본 가주는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그 기세는 내가 본 그 어떤 마법사보다 흉악하고 또한 압도적이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빈틈.

거기까지 파악했을 때 가주가 말을 건넸다.

"그럼 어찌하고 싶은가. 내 손에 잡혀 죽을 텐가? 나 역시 그리하는 편이 편하긴 하네만...."

"꿍꿍이가 있는 듯한데, 본론이나 빨리 꺼내 봅시다. 이깟 얼간이 하나 잡혔다고 미적거릴 위인은 아니지 않소?"

손아귀에 힘을 주자, '으으....'하고 신음을 토해 내는 혈족 놈. 가주는 그 모습을 보며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자란 놈이긴 하지만, 그래 봬도 내 조카라네. 그렇게 고통받는 걸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아."

아니, 굉장히 편해 보였다. 애초에 가주는 단 한 번도 혈족 놈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으니.

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응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기 때문이다. 가주 역시 내 심정을 알아차린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좋네. 그럼 본론을 꺼내지. 사실 전투를 전부 지켜보았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진 않지."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지켜봤다면 데큘란에 존재하는 개자식은 비단 내 손아귀에 잡혀 있는 이놈뿐이 아닐 거라고.

"그럼 넘어가지. 어쨌든 참으로 인상적이었어. 본래는 이 손으로 자네를 잡아 죽일 생각이었는데, 전투를 보고 나니까 생각이 바뀌어 버렸단 말이지."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잡설이 긴 걸까.

잠자코 기다리는데, 그 입이 열렸을 땐 뜻밖의 제안이 흘러나왔다.

"다시 데큘란의 그늘로 돌아오게. 마도서만 내놓는다면, 자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묵인해 주지."

"허."

나도 모르게 헛숨이 터져 나왔다.

"내 손에 죽은 데큘란의 숫자가 얼만지는 알고 하는 말이오?"

"물론이지. 전투를 지켜보았다 하지 않았나. 내 하나하나 셈까지 했지."

"수를 셈했다고?"

제 딴에는 나름대로 농담이라고 지껄인 것 같은데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다만, 아리송하던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데큘란의 개자식은 한 명이 아니다. 바로 이 자리에 둘이나 있는 것이다.

"어떤가.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자네의 재능은 아주 놀라워. 왜 여태 알아보지 못했나 한탄스러울 지경이야."

"흠."

난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가주는 내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잠자코 기다려 줬는데, 내 고개가 끄덕여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좋소."

나직한 대답이었다.

하나, 가주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드리웠는데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가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왜냐. 기분이 좋을수록 기대가 깨졌을 때 기분이 더러운 법이니까.

"단, 조건이 있는데."

"뭔가."

"가주 자리를 주면 생각해 보지."

"...."

굳게 다물어지는 입. 그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종일관 태연하던 가주의 얼굴에 감정이 드리운 것이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다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참."

"...?"

"분명 숫자를 셈했다 하지 않았소?"

가주는 의아하다는 듯 날 눈에 담았는데, 난 그 눈빛을 마주하면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콰득.

나직한 파열음.

손아귀에 쥐고 있던 혈족 놈의 목이 꺾이는 소리였는데, 난 담담히 말했다.

"그러면, 이제 얼마지?"

정말 수를 셈하는 것인가. 말이 없어진 가주.

그러거나 말거나 축 늘어진 혈족 놈의 시체를 데큘란가 마법사들 사이에 추가했는데, 가주의 입이 열린 건 그즈음이었다.

"이상하군."

"이상하다?"

"왜 굳이 내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지? 분명 자네라면 알 수 있을 텐데. 자네는 내 상대가 아니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 그에 난 픽 웃음을 터트렸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겠소?"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다네. 자네와 나 사이의 격이 그러하지."

맞는 말이다.

처맞는 말.

타앗.

"...!"

자리를 박차고, 곧장 데큘란 가주의 면상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하나, 과연 데큘란의 가주인 것인가.

미처 대응할 틈을 주지도 않았는데 주먹이 막혔다. 그 짧은 사이에 역장을 두른 것이다.

파지직.

내 주먹에 둘린 마력과 가주의 역장이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눈빛이 교차했다.

"정녕 이렇게 나오는 건가. 죽을 수도 있다네."

"이젠 개밥 먹는 것도 질렸거든."

"좋아, 그렇다면 격의 차이를 보여 주도록 하지. 한번 직접 확인해 보게나."

가주를 중심으로 흉악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

그런 가운데, 내가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겠다면? 데큘란의 그늘로 돌아가겠다면?"

"그럴 텐가?"

언뜻 옅어지는 가주의 기세.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리가."

다시 또 한 번의 일격.

파지직!

전투의 시작이었다.

◈ 2화. 후회는 개뿔

"쿨럭."

핏물이 가득한 대지 위, 한 움큼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워낙 많은 핏물이 흩뿌려져 있던 터라 티도 나지 않았지만, 난 가만히 웅덩이에 섞이는 한 움큼 핏물을 눈에 담았다.

'...옘병.'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입가로 흘러내리는 선혈이 멈추지 않았다. 로르텔가 기사 놈들과 엮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대단하군. 죽을 줄 알았는데, 용케 버텼어."

재수 없는 낯짝.

가주 놈이었다.

가주는 만신창이가 된 나와는 달리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그는 날 내려다보며 너그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자네와 나 사이의 격은 굳이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더럽게... 세긴 하더군."

과연, 그 말대로였다.

호기롭게 전투를 시작한 것과는 달리, 그 과정은 실로 허무했다.

아니, 그 과정 자체만 본다면 더없이 치열했다 할 수 있겠지. 오직 내게만 말이다.

데큘란 가주의 마법은 견고하며, 또한 흉악했다. 그야말로―

재앙(災殃).

발을 구르면 대지가 갈라지고 손짓 한 번에 벼락이 비처럼 쏟아지니, 그야말로 자연과 대적하는 것 같더라.

그 와중에 오직 나만이 가주에게 닿기 위해 필사적일 뿐.

전투를 복기하던 와중, 가주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이제는 좀 대화를 할 준비가 된 듯한데. 어떤가, 못다 한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그러니까, 다시 데큘란가의 그늘 아래로 들어오라?"

"그렇네."

선선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전투 도중 복부를 다쳤는지, 웃을 때마다 복근이 아려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다시 트러블슈터가 되라는 말인가?"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우스웠을 뿐. 한데 왜일까. 가주는 내 말에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다시 트러블슈터가 되라는 말은 아니었네. 그러니까...."

불현듯 제 품을 뒤지는 가주. 그는 곧 내게 뭔가를 건넸다. 그것은 옥색 빛이 맴도는 패(牌)였는데, 가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뭔지 알아볼 거라 생각하네."

"...!"

그 말 그대로였다.

난 가주의 설명 없이도 곧장 패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몰라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봉신패(封臣牌).

제아무리 위대한 데큘란이라 하여도, 홀로 빛이 날 수는 없는 법. 데큘란을 떠받치는 기둥 역시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봉신가.

그리고 봉신패는 데큘란에 충성을 맹세한 가문에게 내주는 증표였는데, 지금 데큘란의 가주가 내게 제안한 것은 이거였다.

그러니까....

"나보고... 봉신가의 가주가 돼라?"

"정확하네."

나는 말없이 봉신패를 눈에 담았다.

'허, 이런 미친.'

만약, 억만금의 재물을 쥐고 권유했다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본디 나는 트러블슈터. 재물 따위야 중요치 않았다. 필요하면 털면 그만이고, 온갖 명가의 비고가 곧 내 것이나 다름없으니.

하나, 봉신가의 가주 자리는 달랐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야. 자네가 원한다면, 좋은 땅에 자리를 내주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

그래, 봉신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가주가 한 말이 가장 적합하겠지.

동부 대륙 제일의 마도 명가 데큘란의 위세는 황권을 넘본다.

오죽하면 황제는 제국을 다스리고, 데큘란은 동부 전체를 다스린다 할까.

"어떤가?"

난 가만히 가주를 바라봤다.

"역시, 목적은 이거겠지?"

난 품에서 고서(古書) 한 권을 꺼냈다. 데큘란의 비고를 털어 올 때 의도치 않게 얻어걸린 물건, 바로 마도서였다.

마도서를 무사히 얻을 수 있다면 봉신가의 지위쯤은 얼마든 내줄 수 있다는 거겠지. 그 속셈은 알 만한 것이었다.

한데 왜일까. 별안간 웃음을 터트리는 가주.

"하, 하하."

메마른 웃음이었다. 듣기 거북한 소리. 하나 그 표정은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했는데, 별안간 그 웃음이 뚝 하고 그쳤다.

"자네는 아무래도 자네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하군. 보게, 자네가 만든 풍경을."

가주의 눈빛이 돌변한 것은 그 직후였다.

그는 보란 듯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내 손에 명을 달리한 데큘란의 마법사들. 한차례 벌어진 가주와의 전투로 현장이 소실됐지만, 여전히 그 흔적은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누가 믿겠나. 더러운 흑백 지대 부랑아가 이런 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비전이라고는 트러블슈터들이나 익히는 쓰레기를 익히고서."

그 목소리는 갈수록 힘이 더해졌는데, 그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광기까지 어려 있었다. 하나 날 바라보는 감정은 지극한 호의.

그는 말을 이었다.

"난 궁금하네. 자네의 재능에 데큘란이라는 날개가 달린다면,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자네라는 칼을 쥔 데큘란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그 눈동자는 어느새 날 담고 있지 않았다.

아니, 분명 날 담고 있지만 그가 보는 것은 조금은 먼 미래이리라. 날 데큘란에 담았을 때 펼쳐질 영광된 미래.

위대한 데큘란이 더 위대해진 그 모습.

그는 은근하게 내 선택을 종용했다.

"데큘란의 그늘로 들어와. 그리고 함께 올라서는 것이네. 내 바로 옆에서, 데큘란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걸세. 자네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거야. 물론, 마도서는 돌려줘야겠지만."

내 시선은 봉신패에 못 박힌 듯 고정됐다.

'....'

본디, 나란 사람은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법이 없다. 하물며 내가 정하지 않은 신분 따위야 곱씹으면서 한탄할 계제도 없었지.

다만, 궁금하긴 했다.

태생이 흑백 지대 부랑아. 배움이 늦었다. 한데, 만약 데큘란이라는 날개를 단다면? 과연 나는 어디까지 올라설 수 있을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래, 잘 생각했네."

내 손은 이미 봉신패로 향하고 있었다.

손끝으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가운데, 문득 가주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에 깃든 감정은 지극한 기쁨.

그의 손이 떨어지고, 봉신패가 오롯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마도서를 내밀었다.

"가져가시오."

"고맙네. 이것으로 자네의 만행은 모두 없어졌네. 앞으로는 데큘란과 함께할 영광만이...."

가주의 만면에 띤 미소가 짙어졌다. 그 목소리는 어딘지 들뜨기까지.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화르륵.

"...!"

삽시간에 솟아오른 불길.

가주의 손길이 마도서에 닿기 직전, 자그마한 불길이 마도서를 집어삼켰다. 공간으로 나직한 파열음이 울려 퍼진 건 그 직후였다.

콰득!

이번에 부서진 것은 봉신패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부수었다고 말하는 게 옳겠지.

가주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잠시 굳었다가, 이내 싸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거지?"

"흐흐, 뭐 하긴. 가져가라 하지 않았나. 다 타 버린 것도 좋다면 말이지."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웃었고, 데큘란의 가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메마른 바람이 데큘란의 마법사들이 눈을 감은 대지를 다시금 휩쓸고 지난 건 바로 그때였다.

아니, 바람이 아니다.

나와 가주 사이로 불어닥친 것은 한 줄기의 살기(殺氣).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데큘란 가주가 내뿜은 짙은 살심이었다.

난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록 와이번이 날고 있진 않았지만, 그날의 하늘이 눈에 훤했다. 그러니까, 내가 은퇴를 결심한 그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었어.'

은퇴를 결심한 건 그 하늘. 창공을 나는 와이번이 너무도 자유로워 보여서였지만, 애당초 하늘을 올려다본 데에는 이유가 있음이라.

"가주, 들으시오."

"자네는 편히 죽지 못할 것이네."

"알겠으니, 닥치고 들으라고."

나는 입을 열었다.

"본디, 나는 트러블슈터라 딱히 은퇴 자금이 필요치 않았지. 우리 목숨값이야 종잇장보다 못한 건 우리도 알거든."

종잇장이 뭔가. 깃털보다도 가벼운 게 트러블슈터의 목숨값이라.

다른 트러블슈터들이었다면, 은퇴 자금은커녕 은퇴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하나, 난 달랐다.

"한데, 왜 이런저런 걸 챙겼느냐? 이게 또 은퇴 이유와 엮이거든. 혹 데큘란의 소가주가 집어삼킨 트러블슈터를 아시오?"

"...."

가주는 답하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날 죽일 듯 노려보던 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렸다.

하긴, 그럴 수밖에.

데큘란가(家)의 소가주 놈은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을 건드렸다. 제 아비와는 달리 재능이 한참 부족했기에 그것을 채우려 발악을 한 거다.

그러니까, 놈이 건드린 건....

금지된 마법.

소가주는 그것으로 내 동료들을 먹어 치웠고, 이 사실이 데큘란가(家)에 알려졌을 때. 데큘란은 사건을 철저히 은폐해 버렸지.

"하면, 복수라도 하겠다고?"

"흐흐, 내가 왜?"

목숨값 비루한 건 나도 알고, 내 동료들도 안다. 한데, 그 싸디싼 목숨값을 뭐 하러 갚아 주겠는가.

다만....

"놈들이 하고 싶은 거나 이루어 줄 생각이었지. 근데, 그러려면 돈이 또 많이 필요하거든. 그런 이유요. 음, 그런 이유지."

그날, 하늘을 올려다본 건 그런 이유였다. 동료들의 개죽음에 들끓는 화를 삭일 수가 없어서, 그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러다 보니, 은퇴가 하고 싶더라.

복수야 제 놈들 못나서 뒈진 거니까 그렇다 쳐도, 녀석들이 꿈꾸던 거나 이루어 주려고.

"아, 하나가 더 있군."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겠군.

"기껏 결심한 은퇴인데, 다시 개집에 들어오라니? 목줄 좀 번쩍번쩍하고 집이 좀 넓다고 개집이 아닌 건 아니잖나? 흐흐."

"유언은 끝인가?"

"하려면 평생을 떠들 수도 있는데. 어디 한번 계속 들어 보시겠소?"

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끝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없었다.

치지직....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따끔한 통증, 고개를 내려 보니 푸른 귀화가 일렁거렸다.

"데큘란이 자랑하는 청화(靑火)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지. 그 속에서, 네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거라."

"후회는 개뿔."

발끝부터 천천히 육체를 좀먹는 통증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 와중에도 정신은 또렷했다. 하나, 역시 후회는 없었다.

'누가 다시 개가 될까 보냐?'

어림도 없는 소리!

대대손손 충성하며 데큘란의 개가 될 바에는, 차라리 더러운 흑백 지대로 돌아가겠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죽음도 나쁘지 않다.

"흐, 흐흐."

미쳐 버릴 듯한 고통 속에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인가.

살아서 벗어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았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와이번이 되리라.

'온종일 광활한 창공을 노닐다가, 심심하면 지상으로 내려오는 거야. 데큘란가 놈들을 찾아서 괴롭히는 거지.'

자유도 찾고 복수도 하고. 그야말로 고블린 잡고 오크도 잡는 일이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상상에 웃음을 짓는데.

번쩍―!

눈앞이 번쩍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의아함에 고개를 든 나는 곧 주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넘실거리며 육체를 좀먹던 청화의 불길이 굳어 버리고, 가주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는 건 단 하나.

꾸물꾸물.

'...마도서?'

내 왼손에 쥐어져 있던 마도서의 잿더미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마치 슬라임처럼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데,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츠즈즉.

피부로 파고드는 잿더미.

아니, 잿더미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의 형태였다.

'이게 대체....'

살갗에 스며든 괴문자는 팔을 타고 올라오더니, 이내 가슴으로 몰려들었다.

정확히 왼쪽 심장 위. 겹쳐지고 겹쳐져 형태를 잃어 가는 괴문자들.

그러다 이내 한 번 번쩍이더니.

콰득.

단 하나의 문자만 남겨 둔 채 사라져 버렸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

짤그랑.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지... 않았어?'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무언가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눈앞의 풍경이 너무도 익숙하달까.

손에 쥔 잔뜩 찌그러진 깡통도 그렇고, 그 안에 담긴 동전도 그렇다.

심지어 골목길 풍경마저도 익숙했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듯,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랄까?

묘한 기시감에 고민하기를 잠시.

"아."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딘지 기억이 난 것이다.

이곳은....

흑백 지대.

트러블슈터가 되기 전 하루하루를 빌어먹던 바로 그곳, 그 골목이었다.

'설마....'

시간을 되돌아왔다고?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 3화. 난 만족하는데?

쨍쨍한 햇살 아래, 강물은 도도히 흘러갔다.

다리 위에는 마차가 지나다니고, 행인들이 분주히 거니는 가운데 나는 강가를 찾았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꼬."

슬쩍 강물에 얼굴을 비추어 봤다.

수면이 맑지는 않았다.

흑백 지대 강물은 똥물과 민물 그 언저리라, 색 자체가 탁한 것이 특징.

하나, 내 얼굴을 비추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분명 난데."

분명 나다.

잘생긴 얼굴은 어렸을 때도 잘생긴 법.

꾸정꾸정한 강물조차 밝게 보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그리 흔치 않았다.

당연히 내 얼굴이다.

"근데, 어려졌단 말이지."

왜일까?

모르겠다.

다만, 짚이는 부분은 있었다.

"화인(火印)."

왼쪽 가슴팍에 선명히 자리 잡은 괴문자 하나.

정신을 잃기 직전, 마도서의 잿더미가 파고들어 만들어 낸 모양과 동일했다.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왔는데, 이것만 그대로이니 의심을 하기엔 충분하겠지.

"뭔진 몰라도 마도서가 작용한 건 분명한데...."

마도서가 이런 일도 가능한 물건이었나? 잠깐 고민해 봤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마도서는 유수의 명가(名家)들이 탐을 낼 정도로 초월적인 기물.

'그 엉덩이 무거운 데큘란 가주 놈이 직접 온 것만 봐도 그 취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 수 있는 부분이지.'

그 취급만큼이나 알려진 정보도 많지 않았다. 온갖 명가를 다 들쑤시고 다닌 나조차도 마도서에 대한 정보는 접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끄응.

"도통 모르겠구나."

꿈을 꾸는 건가 싶다가도, 이처럼 생생한 꿈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나는 '왜?'를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무렴 어때."

좋은 일이다.

음, 좋은 일이고말고.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세일 강의 구리구리한 냄새가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보라, 이 광경을.

비록 똥물과 민물, 그 어딘가에 걸친 더럽디더러운 세일 강이지만, 이 모든 것도 살아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살아만 있느냐?"

비쩍 마른 손.

비록 너무 작아 고블린 모가지 하나 따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 자체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힘세고 강한 아침."

젊음!

산전수전, 공중전만 빼고 다 겪은 백전 맹장의 노련함에 젊음의 기회가 추가됐다?

이건 뭘 해도 크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니, 무조건 크게 돼야지.

하면, 크게 된다는 게 무엇이냐.

하늘을 올려다봤다.

꾸정꾸정한 세일 강과는 달리,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청명했다.

물론, 와이번 따위는 날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그날의 하늘은 저 위가 아닌, 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으니.

"꿈이 있었지."

그래, 꿈이 있었다.

죽기 전엔 와이번으로라도 태어나 자유로이 살면서 데큘란 놈들을 하나씩 빼다 괴롭혀 주려 했지만, 본래는 계획이 있었다.

이는 내 동료들의 꿈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본래, 내가 은퇴를 결심했던 이유.

- 1호, 우리는 본디 흑백 지대 부랑아라 있는 거 없다.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웠지. 너는 이 중 가장 서러운 게 뭐라 생각하냐.

그때 나는 대답했다.

- 못 먹은 거.

근데, 동료 놈 생각은 조금 다르더라.

- 못 먹기만 했으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일은 없었겠지.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인생이 이 시궁창으로 빠진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냐.

- 난 만족하는데?

- ...우리 인생이 시궁창으로 빠진 이유는....

- 난 만족한다고.

- 이 X발이.

대판 싸웠지. 그날 정말 둘 중 하나가 죽기 직전까지 치고받고 드잡이했다.

물론, 내가 이겼다.

"1호니까."

한데 뭐가 그리 서러운 걸까. 펑펑 울더라. 아주 하늘이 무너져라 처우는데,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 결국 말을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그러더라.

- 배우지 못한 게 가장 큰 서러움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혔다면, 저 명가(名家) 놈들에게 잡혀 이리 살지는 않았겠지.

본디 트러블슈터들에게 은퇴란 없다. 하지만, 녀석은 은퇴를 한다면 꼭 하고 싶은 꿈이 있다 말했었다.

"도서관을 짓고 싶다 했지."

출생, 신분, 성별, 국가, 소속을 떠나서 누구나 자유로이 찾아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장소.

책을 보는 데에 동전 한 푼 받지 않고, 모두에게 배움을 제공할 거라 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갈 거다.

"탑을 쌓는 거야. 이유는 필요 없지. 그냥 높은 게 좋으니까, 높이 쌓을 거야."

장소 역시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흑백 지대에 있는 터라, 눈앞에 그 그림을 상상했다.

흑백 지대 정중앙, 하늘을 뚫을 듯 거대하고 높은 탑이 우뚝 솟아올랐다.

누구든 찾아올 수 있는 탑.

"그 안에는 책을 채워 넣겠지. 종류는 상관이 없어. 책이면 뭐든 다 돼."

나도 한두 권 써서 채워 넣을 거다. 그냥 일기일 수도 있고, 트러블슈터로서 알게 된 데큘란의 치부가 빽빽이 적힌 책일 수도 있다.

"여기서 빠져선 안 되는 게 있지."

그게 무어냐.

"데큘란의 비전!"

흐흐.

위치는 1층 입구 바로 앞.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비치할 거다.

탑에 들어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책장을 보게 되겠지.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계속 눈에 밟히면 손이 가는 법이니까.

한번 상상해 보라.

"흑백 지대 부랑아도, 웬 귀족가의 서자도, 푸줏간의 백정들도 책을 한 권씩 끼고 있는 거야."

상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책의 표지에는 '데큘란'의 문양이 자리하고, 그 속에는 놈들이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비전이 들어 있겠지."

흐흐.

"흐흐흐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동네 꼬마들도, 너도나도 한 번씩 데큘란의 비전서를 탐독하고, 옆 동네, 옆 옆 동네 처자들도 데큘란의 비전을 익히는 거야."

본디, 데큘란과 싸워서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내가 다시 태어났다 해도 마찬가지. 한 백 번쯤 다시 태어나면 가능할 테지만 백 번씩이나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나, 이렇게 데큘란의 비전을 널리 퍼트린다면 어떨까.

'좋아 죽겠지.'

그때는 놈들도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다.

왜냐. 데큘란의 비전을 계속 보고 싶은 놈들이 내 탑을 지켜 줄 테니까. 아니, 꼭 지켜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쯤 되면 데큘란의 비전이 널리 퍼졌을 거야.'

하나, 문제가 있었다.

'비전을 어떻게 구하냐는 건데....'

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방법이야 어떻게든 생길 거다. 트러블슈터로서의 장기를 살릴 수도 있는 노릇이고.

어쨌든, 그 문제는 오늘의 내가 아닌 미래의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

"현자의 복수는 백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 나는 현자가 아니지만 상관없겠지."

음.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현자가 아닐 이유가 있나? 없었다.

탑을 짓고 거기에 책을 채워서 모든 사람이 보게 하는데, 그게 현자가 아니면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그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내 제자나 마찬가지인 것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만인의 스승이군. 현자로 부족하다. 그래, 대현자쯤은 되어야 구색이 맞겠군."

후후.

이름하여 대현자 아스터.

"그것이 바로...."

바로 그때.

빡!

뒤통수에 불이 튀었다.

내 머리에서 났다고는 믿기지 않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눈앞이 번쩍하며 별이 날아다녔다.

욕설은 그다음이었다.

"이 새끼가, 한참 찾았잖아! 자리를 지키고 있으랬더니 이런 데에 짱박혀 있어? 엉?"

뻑! 뻑!

"어억!"

변성기가 막 지난 듯, 듣기 싫은 목소리와 함께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나는 너무 갑작스러워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녀석이 기습의 묘리를 너무도 잘 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산전수전, 공중전만 빼고 다 겪어 본 백전의 트러블슈터.'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얼굴과 복부를 보호한 후,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잠시.

턱!

"어, 어쭈! 막아?!"

내 옆구리를 찍어 들어오는 녀석의 발을 잡아채고는, 그 얼굴을 올려다봤다.

유난히 얍삽하게 생긴 부랑아 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뭐, 뭐 인마!"

"네놈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오늘 하는 꼴을 보면 나를 때린 게 하루 이틀은 아니겠지."

눈깔에 힘을 빡 주며 말하자, 부랑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본디 나는 대범한 사람이라 사소한 원한은 가슴에 새기지 않고 지나친다.

"너 방금 일곱 대 때렸다. 딱 그 열 배만 맞자."

"무, 뭐...."

"죽을 줄 알아라."

나는 자리를 박차고 녀석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뻗었다.

아래에서 곧게 올라가는 주먹, 맞기만 해도 골이 진탕되며 정신이 혼미해지겠지.

녀석은 그 상태에서 제 삶을 후회할 거다. 한 대만 덜 때릴걸, 뭐 그런 생각을....

틱!

"응...?"

"...?"

우리는 눈을 마주했다.

하나, 나는 녀석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황하는 녀석의 상판을 담고, 그다음에는 뻗어 냈던 내 주먹을 바라봤다.

"이게 왜...."

꺾이지?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꺾여 버린 손목. 고통은 서서히 엄습해 왔다.

눈앞에 별이 번쩍인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뻐억!

"이 씹새가! 때려? 때려? 형님을 때려? 막내 주제에 형님을 때린다고오?!"

"어억! 억!"

나는 몸을 웅크렸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하지만, 연신 두들겨 맞는 육체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이라.

그리고 그 구타는, 나를 때리던 녀석이 자빠지기 전까지 계속됐다.

나를 어찌나 열심히 때리던지, 제 발밑의 돌부리도 보지 못하더라. 결국, 놈은 균형을 잃고 휘청이다 그만 강물에 빠져 버렸다.

첨벙!

"막내, 이 새끼가!"

저 혼자 빠진 녀석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인상을 와락 구기는 녀석.

그 꼴이 꼭 물에 빠진 시궁쥐 같았는데, 난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차분히 망막에 새겼다 하는 게 옳으리라.

그러기를 잠시.

"얼굴 기억했다."

나는 녀석을 일별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는 건 아니었다.

작전상 후퇴.

'총 쉰일곱 대다.'

녀석이 나를 때린 횟수다. 가슴에 달아 뒀다.

본디 나는 대범한 사람인지라 사소한 원한은 넘어가는 편이지만, 사람을 쉰일곱 대나 때린 건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거다.

...아마도.

* * *

나는 부랑아를 따돌린 후, 흑백 지대의 어느 이름 모를 골목에 들어섰다.

"심각한걸."

바닥에 앉아 내 몸뚱어리를 내려다봤다.

피골이 상접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너무도 가느다란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펜대만 굴리던 샌님도 아니고, 때리다가 손목을 접질리다니."

차라리 그랬다면 이 상황을 이해해 보기라도 했으리라.

하나 나는 산전, 수전, 공중전만 빼고 다 겪어 온 백전의 트러블슈터.

본질은 마법사이지만 주먹질도 제법 잘했다. 한데 손목이 접질릴 지경이면 그만큼 지금의 몸이 약골이라는 소리였다.

"탑이고 자시고 이 몸뚱어리 먼저 어떻게 해야 쓰겠는데...."

씁.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와중,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륵.

뱃속에서 밥을 달라고 내지르는 비명이다.

워낙 경황이 없어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미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기 직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배고파?"

"...."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꼬맹이 하나.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 아냐?"

"모르는데."

그래, 모를 것 같았다.

'딱 봐도 부랑아가 아니거든.'

며칠을 못 씻었는지 꾀죄죄한 몰골. 옷도 잔뜩 더러워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예사 원단으로 짠 옷이 아니다.

부랑아 따위는 평생 가도 만질 수 없는 고급품.

'뭐, 가끔 몰락한 명가(名家) 자제들이 흑백 지대에 흘러들어 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니, 상관이 없어야지.'

흑백 지대에 흘러든 명가의 자제들은 길어 봐야 한 해를 넘기지 못한다.

'제 놈들이 괜히 몰락했겠어? 세력 다툼 하겠다고 드잡이하다가 꼬꾸라졌지.'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후환을 남기지 않겠답시고, 몇 년이 걸리든 꼭 찾아낸단 말이지. 그중 제일 먼저 뒤지는 게 흑백 지대고.'

다시 말해, 저 녀석은 폭탄 덩어리란 소리.

"꼬마야."

"난 데미안이야."

"어쨌건."

"우리 엄마는 비앙카고."

"...."

녀석을 쫓아낼 심산으로 말하는데, 어째 알면 안 될 사실만 늘어 가는 느낌이었다.

"너, 혹시 어디 모자라냐?"

"엄마가 없어."

"...."

어딘지 슬픈 대답이다.

본디 흑백 지대 부랑아란 어머니만 없는 게 아니지만, 슬픈 건 매한가지.

나는 잠시 녀석을 흘겨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난 아빠도 없는데. 이건 내가 이겼구나. 그럼, 이제 갈 길 가자."

그렇게 말하고 가려는데.

저벅.

저벅.

겹쳐 울리는 발소리.

"따라오지 말고."

"여기가 내 갈 길이야."

"...그래, 그럼 너 먼저 가고. 나는 여기 조금 더 있다가 가는 거로 하자."

난 녀석이 먼저 움직이길 기다렸는데, 녀석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가라는 길은 안 가고 애꿎은 손가락만 쭉쭉 빨아 대는 녀석.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안 가냐?"

"너랑 같이 갈 건데."

"...X발."

저걸 한 대 쥐어 팰까?

아니, 그랬다가는 더 귀찮아질 수도 있다.

그냥 저런 놈과는 되도록 안 엮이는 게 상책. 적당한 곳에서 따돌릴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녀석이 다가왔다.

"근데, 너 안 아파?"

"...."

"내가 고쳐 줄까?"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손을 뻗어 오는 데미안.

"내가 낫게 해 줄게."

한데.

"...!"

그 손끝이 이상했다.

꾀죄죄한 손바닥에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 빛이 곧 내게로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손목이었다.

그 뒤로, 몸 구석구석을 훑으며 머리로 올라오는 빛무리.

"이건...."

"약손."

해맑은 데미안의 목소리에 경탄성을 내뱉었다.

부랑아 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뚱어리. 모든 것이 깨끗이 나았다.

그러니까, 저 빛이 내 몸을 치유한 건데....

"...옘병."

트러블슈터로서의 직감이 얘기한다.

지금, 무언가, 굉장히 더럽고 위험한 일에 엮인 것 같다고.

◈ 4화. 처맞는 말은 아니고

마도 명가 블란도.

데큘란에 의해 몰락을 맞이한 명가 중 하나인 블란도에는 한 가지 특별한 비전이 있었다.

'치유의 빛.'

바로 좀 전에 데미안이 펼쳐 보인 건, 누가 봐도 블란도의 치유의 빛이었다.

착각했을 리는....

'없지.'

암, 없다.

이처럼 확실하고 즉각적인 효과를 보이는 치유계 마법은 치유의 빛이 유일하니까.

'한데, 가만.'

나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데미안을 눈여겨봤다.

'아직 이 시기에 블란도는 제법 강성했을 텐데?'

블란도가 멸망을 맞이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한참은 더 지난 미래의 일.

그러니까 내가 한창 트러블슈터 현역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렇다면, 아직 블란도는 멀쩡하다는 말인데....'

한데, 어째서 블란도가의 아이가 이곳에 있을까. 특히나 치유의 빛을 쓰는 걸 보면 혈족, 그중에서도 직계가 분명했다.

"데미안, 데미안이라...."

"불렀어?"

"...."

아리송한 기억.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에 미간을 좁혔다.

한데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는 워낙에 오래된 기억이라 그런 걸 수도 있었다.

특히.

'내가 블란도의 몰락에 개입한 건 극후반이지. 최후의 결전 때나 참가했으니.'

애초에 내 주력 임무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물론.

쭙, 쭙.

데미안이 손가락을 빠는 소리가 은근히 거슬려, 떠올리기 더 힘든 것도 있었다.

휘이잉.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제법 거센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눈을 가리고 있던 데미안의 앞머리가 흩날렸다.

그리고 백금발에 가려져 있던 데미안의 눈동자가 어설피 드러났을 때.

"아, 옘병."

나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데미안의 눈동자.

결코 평범치 않았다.

한쪽은 바다를 머금은 듯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반면, 반대쪽은 그와 대조적으로 피를 머금은 듯 붉다. 이름하여....

'...오드 아이.'

데미안이 블란도의 혈족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백금발은 물론이고, 데미안이 선보인 치유의 빛이 바로 그 증거였으니.

하면.

'블란도의 혈족이면서, 오드 아이의 특징을 가진 건 단 한 명밖에 없지.'

왜 몰라봤을까.

블란도와 데큘란, 그 최후의 결전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마법사가 하나 있었다.

단신으로 수십의 데큘란 마법사들을 찢어 죽인 장본인.

독하기로 이름난 데큘란의 마법사들조차 그 괴물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정도였으니.

블란도의 괴물.

죽여도 죽지 않는다.

블란도 특유의 회복 마법을 끝없이 시전하며, 데큘란의 마법사를 도륙했던 자.

그가 바로....

"...데미안 폰 블란도."

설마, 그게 저놈이었다니.

'어떻게 몰라봤지?'

나는 손가락을 쭙쭙 빨고 있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녀석은 어느새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기어가는 개미들을 셈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알아챌까. 알아챘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내 기억 속의 데미안은 말 그대로 미치광이였다.

데큘란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퍼붓는 와중에도 광소(狂笑)를 흘리며 적과 맞선다.

끝내 포화되는 마법 속에서 목숨을 잃는 와중에도, 그 웃음은 멈추지 않았지.

그러니까.

'진짜배기 미친놈.'

괴물이었다.

그러니까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일이다.

설마, 그런 괴물이 저런 칠푼이였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난 미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데, 대체 왜...?'

아까도 말했지만, 데미안은 직계다.

게다가 그냥 직계도 아니다. 무려 가주의 외아들, 적법한 가문의 계승자란 말이다.

그런 놈이 어째서 이런 흑백 지대에서 뒹굴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갔을 때.

데미안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생긴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똑바로 눈에 담았다. 그러며 하는 말.

"밥."

"뭐?"

"밥 먹자. 나도 배고파. 엄마가 그랬어. 아프지 않으려면 잘 챙겨 먹어야 된대. 네가 아픈 것도 안 먹어서 그래."

맞는 말이다.

'처맞는 말은 아니고.'

그런데....

"돈은 있고?"

나는 데미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무리 봐도 돈이 있는 몰골이 아니다. 한데.

"이거?"

있었다.

제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를 슬쩍 열어 보이는 데미안. 한데, 그 안에는 글쎄....

번쩍번쩍.

'...어마어마하군.'

금화가 한가득이다.

아니, 금화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야무지게 담았는지, 은화에 동화, 심지어 보석도 몇 개 보인다.

필시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을 주머니 속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여, 그걸 보는 내가 다 눈이 부실 지경.

난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데미안."

"응?"

"우린 친구다."

"갑자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친구라면 우리는 친구인 거야. 알겠지? 그리고 친구는 가진 걸 나눠야 하지."

"으음...."

어딘지 석연치 않은 듯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나는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자, 친구."

"친구!"

데미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덕분에 녀석의 손에 흥건히 묻어 있던 침이 잔뜩 튀었는데, 이 정도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한데,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미안.

"근데, 넌 가진 게 뭐야?"

"난...."

잠시 망설이다 대꾸했다.

"친구를 가졌지."

"멋진 말이야."

본디 나는 트러블슈터.

태생이 흑백 지대 부랑아라, 친구를 가려 사귀지 않는다.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는 이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이도 비슷하고 말이지.'

곱게 자라서 그런지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시기의 데미안도 나와 나이가 비슷했다.

지금 내 나이가 그러니까... 대략 열두어 살쯤 됐을까. 흑백 지대 부랑아라 정확한 셈은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쯤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너 몇 살이냐?"

"열두 살!"

나도 나이를 정했다.

"그럼 난 열네 살이다."

두 살 차이.

그러니까 내가 두 살이나 더 많았지만, 말했다시피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어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미래의 미친놈이라 해도, 그것이 무에 중요할까.

그런 거였다.

* * *

"꺼억."

흑백 지대 번화가에 자리한 여관.

나는 푹신한 침대에 앉아 배를 두드렸다.

"잘 먹었다."

정말, 잘 먹었다.

데미안은 정말 부자였다.

주머니는 역시나 확장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고, 그 안에는 각종 금은보화가 즐비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중 은화 몇 개로 여관을 잡고, 꾀죄죄한 몰골을 씻어 낸 후 식사를 마쳤다.

한편, 데미안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내가 물었다.

"뭐 하냐?"

"몰랐어."

"뭘?"

"밥 먹는 곳 위에 집이 있었구나. 나는 맨날 밖에서 잤는데. 처음 알았어."

"아, 그래."

돈도 많은 놈이 왜 이리 꾀죄죄한가 했는데, 여관을 몰라서 그랬나 보다.

"맞다."

데미안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날 바라봤다.

"왜."

"나도 아빠 없어."

"...."

진 게 분했던 걸까. 내심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넌 있어."

이게 어디서 뻥카를.

"엄마가 없다 그랬는데?"

"있을걸."

데미안의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데미안의 아버지는 살아 있다.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좀 더 지난 미래는 아니지만.

"그리고 너... 엄마도 있지 않냐?"

내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하는 말.

"어디? 없는데?"

"여기에야 없지."

"여기 없으면 없는 거야."

"...."

그제야 깨달았다. 데미안이 왜 아버지가 없다고 했는지.

'여기 없으면 없는 거구나.'

아마 블란도가의 가주 역시 그런 논리로 없어졌겠지. 가문을 비우고 잠시 출타를 했다던가,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근데, 왜 혼자 있냐?"

"도망쳤어."

도망?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에 쫓기던 적이 있었나?'

말했다시피, 아직까지 블란도가의 위세는 대단하다.

한데 직계 혈족이, 그것도 가주의 친아들이 홀로 쫓겨 도망을 나오다니?

무어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얼굴에 그늘이 진 데미안이 낮게 읊조렸다.

"가문에서 날 데리러 올 거야."

"그래, 그렇겠지."

가주의 아들씩이나 되는 직계 혈족을 이 시궁창에 언제까지고 방치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물었다.

"도망쳐 나온 지는?"

"열 번 잤어."

"열흘인가."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미안이 고개를 저은 건 그때였다.

"난 낮잠도 잘 자."

무슨 말일까.

"하루에 두 번도 잘 수 있지. 물론 낮잠을 말이야. 어쨌든 총 열 번 잤어."

"...그럼, 대충 사나흘 됐다는 거지?"

데미안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기 와서는 낮잠을 안 잤어. 땅바닥은 너무 불편했거든. 밤에만 열 번 잤어."

이게 무슨 옘병할 화법인지.

어쨌든 대강 상황을 정리했다. 사실, 데미안을 어찌할지는 진작 결정을 내린 터였다.

'블란도는 데큘란의 훌륭한 적이지.'

설령 데큘란가에 의해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곤 해도,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

나쁘지 않은 연을 맺어 두면, 훗날 데큘란과 맞부딪칠 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거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명가엔 책이 많아.'

본인들이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책이라도, 그 가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데미안."

"우린 친구다."

"맞아, 친구지."

순진하게 대답하는 데미안.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나중에 가문에서 오면 꼭 그렇게 말해라. 아주 좋은 친구라고."

"맞아! 넌 좋은 친구야!"

물론, 공짜로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름지기 공짜로 먹는 밥은 언제고 탈이 나는 법.

내 역할은 간단했다.

가문에서 그를 찾으러 돌아올 때까지 데미안의 돈으로 호의호식... 아니, 큼, 흠, 호의호식이 아니다.

'보모 노릇을 하면서, 혹시 모를 위협에서 데미안을 지켜 주는 거지.'

흐흐. 위험할 일이 있겠냐 싶지마는, 뭐든 만약을 대비해야 좋은 거 아니겠어?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본디, 나는 워낙 대범한 성격이라 사소한 원한은 금방 잊지 않지만, 최근에 사소하지 않은 원한이 하나 생겨 버렸다.

'빌어먹을 부랑아 놈.'

쉰일곱 대짜리 원한.

그 복수를 해야겠지.

"데미안."

"응?!"

"나 이제부터 누울 건데,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큰일 나니까."

사실 호흡법은 앉아서 하든 누워서 하든 상관없었다. 다만, 처음에는 누워서 하는 게 더 편할 뿐.

아마 이렇게만 말해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치유의 빛을 사용하는 걸 봐서는 데미안 역시 호흡법을 익힌 게 분명하니.

역시 데미안은 알아들었다.

"숨쉬기 운동해?"

"응, 그거."

"나도 그거 자주 해! 요즘은 못 했어! 그거 하면 여기 간질간질한데!"

제 가슴에 손을 얹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시늉을 하는 데미안.

난 그런 데미안을 뒤로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래, 그거. 나 끝나면 너도 해라. 기다려 줄 테니까."

"응! 알았어!"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촛불이 만들어 낸 희미한 불빛은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차단됐다.

완벽한 어둠.

'좋아, 한번 해 보자.'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 * *

'배우지 못해 서럽다.'

사실, 동료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딱히 그런 생각을 해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더라.

'트러블슈터가 된 뒤에는 여러 비전을 찾아 익히기 위해 뛰어다녔었지.'

임무만 생각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아니, 과장 조금 더 보태면 미친 짓이었지.

로르텔가, 마도 명가, 그 외 유수의 명가들에 잠입해 비전을 털어 댔다.

'걸려서 죽을 뻔한 적도 많았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 준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땅에 묻혔을 터.

그렇게 고생 고생해 가면서 비전을 익혀 왔다. 그것들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우선 큰 축은 마도(魔道).

트러블슈터에게 지급되는 보급용 비전으로, 마법에 기반을 두고 힘을 키웠다.

하나, 마도(魔道)만을 익혔다면 트러블슈터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겠지.

그 위에 강체(剛體), 기사들의 신체 단련법을 덧대고, 그 밖에도 여러 잡다한 비전들을 섭렵했다.

정령은 물론이고, 소환, 연금, 기본적인 간단한 병장기 활용법까지.

익히는 과정은 제법 힘겨웠다만, 덕분에 선택지는 다양했다.

'이를테면 아예 강체(剛體)를 익혀서 기사들과 같은 길을 걷는다거나.'

아니면 다른 비전을 익혀 미래를 대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선명한 장면 하나. 데큘란의 가주 파헤른과의 전투.

손짓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들고, 하늘을 찢어 버리던 그 광경.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벼락과 그악스럽게 사위를 휩쓰는 태풍 앞에서, 나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재앙.'

단 한 명의 개인은 결코 명가의 저력을 당해 낼 수 없다.

하지만 데큘란의 가주를 떠올리면 어째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때문에, 결정했다.

'이번에도 마도(魔道).'

익힐 비전은... 데큘란 기본공, 천원공(天元功).

모든 속성의 마력을 포용할 수 있는, 대륙의 유일무이한 마도 비전.

'기본공에 불과하지만, 모든 데큘란 비전은 천원공에 뿌리를 두지.'

그렇다면 나도 닿을 수 있으리라.

정점, 가주가 보여 준 그 경지에.

물론, 쉽지는 않을 터였다. 모든 데큘란 비전이 천원공에서 뻗어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비전이 천원공에 담긴 것은 아니니.

'하지만, 가능성이면 충분해.'

전생에 내가 천원공을 입수했을 때는, 이미 트러블슈터의 비전을 익혀 배우지 못했지만....

'연구차 외워 뒀던 게 이렇게 쓰이는군.'

양쪽으로 당겨지는 입꼬리.

"후우."

깊은숨을 내쉬면서 호흡을 전개했다.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직후였다.

― 바람을 확인했다.

"...?"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

고통이 엄습했다.

"...!"

고통의 발원지는 가슴 정중앙에서 살짝 왼쪽에 자리한 화인(火印).

타는 듯한 통증이 전신으로 번져 갔다.

― 호흡법을 전개해라.

찰나의 순간 여러 상념이 뇌리를 스쳤지만, 나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해야 할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집중할 뿐.

'....'

차분히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뿜었다.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 날숨.

깊고 또 짙은 숨이었다.

◈ 5화. 한두 명이 아니었군

"...."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괴롭히는 가운데, 나는 천원공을 운용했다.

'뜨겁다.'

너무 뜨겁다.

천원공이 이토록 괴로운 비전이었나.

화인에서 시작된 작열통과는 별개로, 천원공을 통해 받아들인 마력도 육체를 헤집었다.

이는 마치 용암이라.

'옘병.'

본디 호흡법을 수행하는 중에는 잡념은 금물이나, 도저히 욕지거리를 떨쳐 내기 힘들었다.

그만큼 빌어먹을 통증인 탓이었다.

하나, 그런 와중에도 나는 천원공을 착실히 운용했다.

그저 고통뿐이었다면 견디기 힘들었겠지만, 이는 대가가 있는 고통이다. 그 대가란 다름이 아니었으니.

탁, 타닥.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마치 장작이 타는 듯한 소리.

실제로, 무언가 타들어 가고 있기는 했다.

'불순물.'

본디, 마도(魔道)는 어린 나이에 입문할수록 성취에 유리했다.

이유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회로에 불순물이 쌓이기 때문인데....

어찌 된 일인지, 모종의 마력이 회로에 쌓인 불순물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비전을 하나 알고 있었다.

마나 샤워.

명가의 수준 높은 마법사가 직계 혈족들에게만 시행하는 비전으로, 인위적으로 마력을 밀어 넣어 회로에 쌓인 불순물을 불살라 버린다.

명가의 직계들이 수준 높은 성취를 보이는 건 그 덕.

'이것이 천원공의 묘리일 리는....'

없다.

천원공이 그토록 대단한 비전이었다면, 고작 기본공에 그치지 않았겠지.

제아무리 천원공이 데큘란가의 뿌리라고는 하나, 그런 효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원인은 화인. 아니, 그보다는....

'화인으로 변한 마도서겠지.'

분명하다.

마도서가 무언가 공능을 부린 것이 분명한 상황.

나는 지독한 작열통 속에서 천원공을 운용하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원공의 첫 번째 호흡을 끝맺었을 때.

마침내 끝나는 고통.

"파하―!"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타닥, 탁.

한데 왜일까. 분명 천원공을 끝냈는데, 어쩐 일인지 뭔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계속됐다.

하나, 전과는 달리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불티를 튕겨 내며 닳아 없어지는 초가 보였다.

난 타들어 가는 소리를 잠시 귀담아듣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쌕, 쌕.

데미안은 옆 침대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고, 창밖엔 별이 가득했다.

일상이라면 일상적인 광경이었지만, 나는 어딘지 이질감을 느꼈다.

'...안개가 걷힌 기분이네.'

오감이 예리해진 것이다.

"바람을 들어준다는 게 이런 거였나?"

허공에 질문을 던져 봤다.

천원공 호흡 직전에 들려온 목소리를 의식한 말이었으나, 공허한 바람 소리만 귓가에 일렁였다.

나는 잠시 더 기다리다가, 이내 픽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뜻밖의 선물이군."

그리고 커다란 선물이었다.

불순물 가득한 회로는 전생에도 내 발목을 잡던 요인 중 하나였으니까.

'어떻게든 개선해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지. 극복하지 못했어.'

때문에, 회로를 청소하기보다는 마력의 순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순도 높은 마력일수록 회로를 지날 때 저항을 덜 받게 되니까.

한데, 지금은....

'회로는 물론이고.'

마력도 정순하다.

'마력의 정순함은 전생, 어쩌면 그 이상인가.'

하지만 여전히, 데큘란가를 이기기란 백 번을 태어나도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들이 세월을 거듭해 쌓아 온 저력,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힘.

그것은 일개 개인이 감당키 힘든 것이니.

하지만, 분명한 건....

'가능성이 올라갔군.'

본디 나는 트러블슈터.

가능성을 따져 일을 도모하지만, 이번 생에는 조금 무모해져 보기로 했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이라도, 하나씩 늘려 가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뭐, 사실 전생에도 그렇게 치밀한 성격은 아니었다.

* * *

날이 밝았다.

나는 데미안을 깨워 끼니를 해결하고, 흑백 지대 거리로 나섰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 신기해!"

고개를 숙인 데미안이 제 앞머리를 바라보며 처음 한 말이었다.

"머리가 갈색이야!"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데미안의 외모 특징을 최대한 은폐하는 작업이었다.

'백금발은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띄지.'

백금발이라고 모두가 블란도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머리칼도 아니다.

내친김에 옷도 갈아입혔다.

'아무리 꾀죄죄한 모습이래도, 눈썰미 좋은 놈들이면 금세 알아볼 거야.'

데미안을 쫓는 놈들은 물론이거니와, 날파리가 붙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짜잔."

데미안은 앞머리를 있는 대로 내리고 빵모자를 쓴, 다소 음침하긴 하지만 영락없는 심부름꾼 소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새 옷이 마음에 드는지 옷가게 거울 앞에 제 모습을 요리조리 비춰 봤다.

'이 정도만 해도, 손쉽게 들키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난 변한 데미안의 모습에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우선 급한 일은 피했고.'

밥값은 했다.

이제 남은 건, 원한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앞잡이 놈.'

앞잡이.

'이 시기엔 참 많이도 맞았지. 할당량 못 채운다고 맞고, 많이 먹는다고 맞고.'

구타, 구타.

하루라도 안 맞으면 뭔가 어색해서 잠이 안 올 정도로 맞았다.

그리고 나를 때렸던 게 바로 앞잡이, 어제 바로 그놈이었다.

으득.

그때를 생각하니 새삼 이가 절로 갈렸다.

'....'

나는 천진난만한 데미안을 이끌고 오래된 기억을 따라 거닐었다.

워낙 오래된 기억이라 명확하진 않았지만, 어찌어찌 길을 찾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군."

나는 흑백 지대 외곽, 다 쓰러져 가는 폐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버려진 지 오래인 폐가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활감이 물씬 느껴지는 곳.

그러니까 이곳은 앞잡이를 포함하여, 과거에 내가 속해 있던 부랑아들의 아지트였다.

좋은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오래 흘러서인지 정겨운 기분.

조작된 향수에 취해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폐가 안쪽에서 부랑아 하나가 나왔다.

"으잉? 뭐냐, 너흰."

녀석은 방금 식사를 마친 듯 이를 쑤시다가 나와 데미안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왜일까. 그 멍청한 얼굴을 보니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장면 하나.

- 막내, 이 새끼야! 내가 오늘 내 것까지 채우라고 했어? 안 했어!?

"음, 떠올랐다."

"뭐야, 너. 막내 아니야? 이 새끼,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와?!"

"날 때렸던 게 한두 명이 아니었군."

나, 사소한 원한 따위는 대체로 넘기는 대범한 트러블슈터.

하지만, 그렇다고 한번 떠오른 원한을 애써 잊을 정도의 대인배는 아니다.

"이 썩을 놈이! 어딜 갔다 왔냐니까?! 얼레? 꼴은 또 뭐야. 세일 강 똥물에 샤워라고 했냐?"

나는 눈깔을 부라리며 다가오는 부랑아를 차분히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말에 답해 주고 싶었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러니까....

몇 대를 맞았는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뭐야, 이 꼬마는 또. 돈은 좀 있어 보이는데... 커억!"

녀석은 새 옷을 입은 데미안으로부터 돈 냄새를 맡았는지,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픽 하고 고꾸라졌다.

나는 녀석의 명치를 후빈 주먹을 거둔 후, 차분히 읊었다.

"일백스물세 대."

눈앞의 부랑아가 나를 때린 횟수였다.

아니, 사실은 정확하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고, 사람인 이상 그 모든 걸 다 기억할 수는 없을 테니.

다만, 그냥 그런 거다.

'내가 그 정도 맞은 기분이었다고.'

반대로 말하자면―

'그냥 내가 그렇게 때리고 싶다고.'

우선 첫 놈은 일백스물세 대.

"뭔데!"

"점박이! 무슨 일이야!"

나는 폐가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랑아들을 찬찬히 바라봤다.

"후."

주마등도 아니건만 뭐 이리 떠오르는 기억이 많은지.

죄수 번호처럼, 녀석들의 머리 위로 숫자가 하나씩 떠오르는 기분이다.

숫자는 대체로 세 자릿수.

"무섭구나."

오늘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우득, 우둑.

나는 목과 어깨를 풀며, 가장 숫자가 적은 첫 놈부터 조지기 시작했다.

옹골찬 타격음, 가열찬 비명, 그리고 악에 받친 욕지거리가 뒤따랐다.

* * *

"...."

앞잡이는 눈앞의 광경을 빤히 바라봤다.

빡! 퍽!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그럴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어억! 억!"

"대체...."

앞잡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열댓 명으로 이루어진 패거리.

나름 부랑아들 사이에선 친다 하는 놈들이 속수무책으로 처맞고 있었다.

심지어 그냥 처맞는 것도 아니었다.

"아프면 안 돼. 내가 치료해 줄게."

맞아서 나가떨어지면, 웬 처음 보는 꼬맹이가 다가와서 손을 댄다.

손이 번쩍이는가 싶으면 금세 상처가 회복되고 말끔한 모습이 되는데....

"고, 고맙... 커억!"

그 위로 다시 쏟아지는 구타 세례.

차라리 맞고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나가떨어지면 그때그때 치료를 해 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악독하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나, 이 비현실적인 광경보다 더 믿기 힘든 건 따로 있었다.

꿀꺽.

'막내, 저놈이....'

저렇게 잘 쳤나?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한테 속수무책으로 처맞던 게 막내다.

아니, 자신한테만 그럴까.

패거리 중 가장 약해, 동네북처럼 매일 맞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몇까지 셌냐?"

"까, 까먹...."

"그럼 처음부터 다시 맞자. 다시 한번 잘 들어. 넌 173번이다, 알겠냐?"

"네, 넵."

'세상에.'

흡사 악마 그 자체가 아닌가!

흑백 지대 부랑아한테 세 자릿수를 셈하라니.

두 자릿수까지만 셈할 수 있어도 패거리 브레인 소리를 듣는 마당인데!

'평생 때리겠다는 거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이지도 않고 때릴 거야.'

앞잡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막내를 찾아내 혼쭐을 내 주리라 마음먹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앞잡이는 폐가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도망가자.'

그게 답이다.

세 자릿수를 셈하라면 셈할 수는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닐 거다.

아니, 애초에 세 자릿수만큼 맞는다는 사실도 굉장히 끔찍했다.

'죽을 거야. 분명, 분명 죽을 거라고.'

일단 도망치자.

도망친 다음에, 자존심이 좀 상하더라도 다른 패거리에 도움을 청하자.

그래야만 살 수 있다.

"...두고 보자."

앞잡이는 어디서 들어 본 멘트를 던지며, 폐가 뒷문을 빠져나갔다.

아니, 빠져나가려 했다.

"가면 안 되는데."

"...?"

어느새 뒷문을 막고 있는 소년 하나.

평범한 심부름꾼 행색을 한 소년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저놈은....'

막내가 패거리를 쥐어 팰 때마다, 자비(?) 없이 다가가서 치료를 해 주던 놈이었다.

'어, 언제 여기까지...?'

앞잡이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막내의 곁에서 패거리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빙글빙글 웃으며 제 할 말만 내뱉었다.

"가면 안 돼."

"...."

"얌전히 여기서 기다려. 네 차례를 기다리란 말이야. 너도 같이 놀아야지."

겉모습은 이토록 천진난만할 수가 없건만, 그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다.

대꾸하는 것도 잊은 채 연신 침만 삼키던 앞잡이가 움직인 것은 소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이후였다.

"...허어!"

앞잡이는 깊은숨을 토해 내며 주저앉았다.

길게 덮인 앞머리 사이로 슬쩍 드러난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아니, 그보다 더 섬뜩한 건 따로 있었다.

'저게 노는 거라고...?'

미친놈도 저런 미친놈이 또 있을까. 보통 미친 게 아닌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어디 골병들 일은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미친놈들한테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세 자릿수를 때리겠다는 막내 녀석이나, 심부름꾼 행색의 꼬마 녀석이나 미친 건 매한가지였으니.

◈ 6화.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

"수고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찬 외침.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만신창이가 된 부랑아들은 기합이 바짝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뿌듯하구나.'

뿌듯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열댓 명.

하나같이 백 대를 넘게 맞아야 하는 놈들이었다.

합치면 이천 대가 넘는데,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놈들을 다 때릴 수 있을까.

'그뿐이냐? 아니지.'

이놈들이 날 엿먹이려는 건지 계속해서 숫자를 까먹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때린 숫자까지 헤아리면, 이천 대는 훌쩍 넘을 거다.

하나, 해냈다.

'훌륭히 해냈지.'

처음 계획했던 숫자를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모두 채워 냈다.

전날 앞잡이에게 처맞았던 쉰일곱 대까지, 통 크게 열 배로 불려 대갚음해 줬다.

이는 산전수전, 공중전 빼고 다 겪은 백전의 트러블슈터인 나로서도 새로운 도전.

"저, 저기...."

날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을 정리했다.

"뭐."

앞잡이였다.

"저희, 그,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요? 맞을 만큼은 다 맞은 것 같은데...."

"그래, 가 봐."

한데 어쩐지 어물쩍거리는 앞잡이.

"뭐 해? 안 가고."

"저, 그게...."

"...?"

앞잡이가 곤란하다는 듯 공터 한편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난 곧 앞잡이가 하려는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다.

"여기가 저희 집인데...."

"우리 보고 가라?"

"...."

입을 꾹 다무는 놈.

난 부랑아들을 바라봤다.

해도 지고 갈 곳도 없겠지. 아무리 부랑아라지만, 길거리에서 자기는 싫은 법이다.

하지만.

"그건 좀 곤란한데."

좀 힘들겠다.

"저, 그... 아무래도 그러시겠죠? 그러면, 저희가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건 원한이 아니다.

'정말 곤란한 거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지내고 있는 집까지 뺏을 정도로 못 돼먹은 놈은 아니다.

그저....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나는 앞잡이를 뒤로하고 공터 너머를 바라봤다.

"...."

어둠에 물들어 가는 공터.

전생보다 정순해진 마력 덕일까. 경지는 한참 낮아졌건만, 감각은 예리했다.

그리고 그 감각이 말한다.

저 너머.

'누군가 있다.'

극도로 정제된 기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진다. 그야말로 맹렬한 속도. 하지만 그럼에도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은밀하다는 의미.

즉, 트러블슈터와 같이 음지에서 움직이는 자들, 그 특유의 기척이었다.

'아마....'

나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떠나가는 부랑아들을 향해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녀석. 한 손은 여전히 입에 물고 있었는데, 그 어떤 낌새도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하나, 분명하다.

'추격자군.'

데미안을 쫓고 있는 자들.

'쯧.'

입맛이 썼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찾은 걸까. 설마, 블란도가보다 먼저 찾아올 줄이야.

'좋지 않군.'

그래도, 뭐. 상관없다. 사람 일이란 게 언제나 생각처럼 흘러가는 건 아니니까.

체내의 마력량을 가늠하고 수단을 강구했다.

'이 정도 마나량이면....'

마법 하나 발현시키지 못한다.

육탄전도 통하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누군가. 전직 트러블슈터. 자랑은 아니지만 마력이 풍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이런 상황도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기회는 한 번인가.'

손끝에 피어오르는 푸른색 아지랑이.

워낙 미약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난 마력의 아지랑이를 응축시켰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새끼손톱만 한 마력탄.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압축, 압축, 압축. 그렇게 정확히 여덟 번 압축했을 진행했을 때.

마력탄의 최종적인 크기는 밀알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기회는 단 한 번.

급소를 정확히 뚫을 수 있다면 크기는 중요치 않다.

탓!

수풀 밖으로 추격자가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한데, 왜일까.

"...?"

갑자기 무릎을 꿇는 추격자.

추격자의 정체는 머리가 벗겨진 노년의 사내였는데, 그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바닥을 미끄러져 돌진해 왔다.

촤아아악―!

그렇게 바닥을 쓸며 데미안의 앞으로 도달했을 때.

돌연 고개를 조아리며 하는 말.

"아이고, 도련니임―!"

데미안은 깜짝 놀랐다.

"아, 알프레도!"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셨습니까아! 이 불쌍한 집사는 도련님 걱정에 한잠도 이루지 못했는데... 크흑!"

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대머리의 사내는 사실 추격자가 아니었다. 그 기척은 분명 음지 특유의 성질을 띠고 있었지만, 대화를 보니 분명한 블란도의 일원.

'...심지어 집사라고?'

난 집사 알프레도와 데미안의 눈물겨운 상봉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떨어져!"

"안 됩니다요! 다시 또 도망가시면 어찌합니까! 가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절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쇼!"

"싫어, 안 가! 집으로는 절대 안 갈 거야!"

데미안이 도망친 건, 다른 누구에게서도 아니었다.

'...가출이었군.'

맞다. 가출이었던 거다.

* * *

생각해 보니, 데미안은 이렇게 말했었다.

- 왜 혼자 있냐?

- 도망쳤어, 가문에서 날 데리러 올 거야.

어디서 도망쳤는지, 쫓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두워진 표정에 내가 지레짐작했을 뿐.

'그게 설마 가문에서 도망쳤다는 말일 줄이야.'

어쨌든, 데미안은 가문으로 돌아갔다.

알프레도가 급히 공수해 온 마차를 타고 흑백 지대를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하나, 한 가지 의문인 건....

"아이고, 도련님. 옷이 그게 뭡니까? 그런 옷은 도련님 격에 맞지 않습니다!"

"싫어, 불편해."

여긴 누구고, 나는 어디인가.

나는 달리는 마차에 앉아, 집사 알프레도와 실랑이 중인 데미안을 바라봤다.

데미안은 심부름꾼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알프레도가 보기엔 못마땅한 모양.

하나, 데미안의 의지는 확고했다.

"싫어."

아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녀석.

알프레도는 그런 데미안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게 의문이었다.

본디, 의도는 데미안을 지켜 주고 블란도가와 연을 맺으려던 것이지만.

데미안의 도망은 사실 가출이었으니, 블란도가 입장에선 나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눈치껏 빠져 주려는데....

나는 집사 알프레도를 빤히 바라봤다.

-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 ....

- 데미안 도련님께서 소년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시면 많이 아쉬워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허허.

'속내를 알 수 없군.'

이건 명가의 방식이 아니었다.

대저 명가란, 더러운 것을 배척하고 신분 낮은 것을 꺼리는 게 기본이거늘.

'뭐, 상관없지.'

식사나 한 끼 얻어먹고, 나는 갈 길 가면 그만이었다.

'마침 블란도가면 도시 하젠으로 통하는 길목이지.'

도시 하젠에는 동부 대륙 제일이라 평가받은 제니온 아카데미가 있다. 또한 제니온 아카데미가 보유한 도서관 라피테르 역시 동부 제일.

'언젠가 한 번은 들를 생각이었는데, 이참에 한번 들러 보는 것도 괜찮겠어.'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머릿속에서 어렴풋한 경로를 수정해 나갔다.

기왕지사, 탑을 세워 최고의 도서관을 만들기로 한 바에야, 동부 제일 도서관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 * *

블란도가 심처, 가주 부부가 머무는 본관으로 한 노인이 걸음을 옮겼다.

똑똑.

노인이 찾아간 곳은 블란도가의 안주인, 마녀 비앙카의 서재였다.

"들어와."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인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끼릭, 탁.

문이 닫히자 책상에 닿아 있던 비앙카의 눈동자가 노인, 알프레도에게 향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데미안은?"

"제7 흑백 지대에 계시더군요. 좀 전에 모셔 오는 길입니다."

"...."

비앙카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 초, 이 초.

한 삼 초쯤 지났을까?

알프레도가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는 가운데, 무지막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쾅!

산산이 부서지는 탁자.

앤티크 가구가 흡사 싸라기눈이라도 된 것처럼 조각이 나, 이리저리 흩날렸다.

"제7 흑백 지대?!"

"예."

"데미안은 괜찮나? 혹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당장 말해라. 만약 데미안에게 터럭만큼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아닙니다."

흑백 지대.

보통은 그 이름을 들으면 못 먹고, 못 사는 이들이 모인 빈민가를 떠올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흑백 지대의 무수한 단면 중 하나.

그 초라한 포장지를 한 꺼풀 벗기면, 때로는 상상도 못 할 세상이 존재했다.

비앙카가 격분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

"진정하시고 제 얘기를 들어 보시지요."

"...어디 말해 봐라."

알프레도는 마차에서 데미안에게 들은 가출기를 비앙카에게 전달했다.

'추웠다', '배고팠다'가 주를 이룬 데미안식 화법의 이야기였지만, 알프레도는 이미 데미안식 화법에 정통해 있는바.

능숙하게 그 말을 풀이했는데, 사견과 추측을 섞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흠, 그렇게 된 거군."

비앙카는 평정을 되찾고는 자리에 앉았다.

의자는 부서지고 없었으나, 땅으로부터 나무가 솟아올라 의자를 만들었다.

"다행이군."

"다행이지요."

비앙카에게도 다행이고, 데미안을 상처 입혔을 사람에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비앙카.

한때 피의 마녀라 불리던 블란도가의 안주인은 제 아들 일이라면 정도가 없어지니.

그 종잡을 수 없는 분노가 어디까지 미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알프레도가 내심 안도를 하는 그때, 비앙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고생이 많았다."

"별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블란도가 소가주의 가출 사건. 사실, 이는 가문의 마법 전단 전부가 총동원되어도 결코 과하지 않은 중대 사태였다.

하나, 그렇게 되면 날파리가 꼬일 소지가 다분하기에.

집사장인 알프레도가 은밀히 데미안을 찾아 나선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렇게 얼추 사태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알프레도가 입을 열었다.

"한데, 특이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특이 사항?"

"이번에 사귀었다던 친구 말입니다."

"아스터라고 했나? 그 친구가 왜?"

비앙카는 좀 전에 알프레도가 풀이해 준 데미안의 가출기를 떠올렸다. 가출기 막바지에 만난 흑백 지대 부랑아 태생의 친구.

이번에 함께 가문으로 들여왔다는데.

"그 친구가 조금 특이합니다."

"특이하다?"

"예, 제 기척을 알아차리더군요."

"흐음, 자네의 기척을?"

비앙카는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네가 착각한 건 아니고?"

"아닙니다."

알프레도는 첫 만남을 떠올렸다.

'분명....'

데미안 도련님을 발견했다는 반가움에 맹렬히 돌진하던 그때.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깨닫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니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수풀에서 튀어나오는 순간부터, 데미안 도련님께 닿기까지.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던 눈동자.

그리고 그 손에는....

'마력탄이었나.'

티끌만 해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지만, 알프레도의 기감도 보통은 아니다.

즉, 그 소년은 자신을 일찍이 발견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소리.

비록 작정하고 숨긴 기척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흥미롭단 말이지.'

알프레도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비앙카에게 가감 없이 얘기해 주었다.

"확실히 놀라운 재능이긴 하군."

"그래서 말입니다, 가모님. 혹 부탁 하나 드려도 괜찮으실는지요? 소년의 과거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가주 직속 정보단을 움직여 주신다면, 확실할 것 같은데...."

"흐음, 그 뒤에는?"

"만약 과거가 깨끗하다면, 제 뒤를 잇게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뜻대로 하게."

알프레도는 수십 년을 가문에 헌신한 인물. 후계로 삼고 싶은 이가 생겼다는데, 가주 직속 정보단 정도는 움직여 줄 수 있다.

그 마음에 알프레도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아마, 며칠이면 데미안 도련님과 함께 온 소년의 과거를 낱낱이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며칠 후.

알프레도는 아스터가 머물고 있는 별관을 찾았다.

"소년, 제 후계가 되십시오."

정보단의 보고서에 적힌 아스터의 과거는 깨끗했다.

흑백 지대 부랑아라 정확한 출생은 알 수 없지만, 어려서부터 흑백 지대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

후계를 제안한 알프레도는 자신만만했다. 아스터가 거절할 거란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명가의 집사이니까.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소득에 심지어 명예까지. 가주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지라, 그 위세도 만만치 않다.

한데, 누가 이 자리를 거절할까!

...라고 생각했는데.

"옘병."

"...?"

알프레도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옘병? 옘병? 옘병이 뭐지? 친구, 옘병이 뭐야?"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데미안 도련님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으니.

한데, 소년은 참 뻔뻔했다.

"옘병이라니? 난 모르는 소리다. 집사장님은 들으셨습니까? 물론 못 들으셨겠죠. 왜냐,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흠흠."

...라고 지껄이더니, 세상 다시없을 공손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는, 하는 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집사장님의 후계라니. 하지만 괜찮습니다. 너무 감사하지만 저는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것 같군요. 아, 다시 말하지만 정말 감사하긴 합니다."

전혀 감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 7화. 와이번쯤 될 거 같은데

'옘병'으로 노래를 부르던 데미안은 어디선가 튀어나온 사용인에게 연행돼 갔다.

가모가 붙여 놓은 감시 격 같은데, 데미안은 그 와중에도 '옘병'이 뭔지를 묻고 있었다.

그렇게 데미안의 목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

"대체 왜...."

알프레도는 허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명가의 집사.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혈족이 아닌 이가 명가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중 하나이다.

한데, 이런 자리를 거부하다니.

'아.'

알프레도가 뭔가를 깨달은 건 그즈음이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눈앞의 소년을 보라.

가진 것 없이 흑백 지대 부랑아로 태어나, 타고난 재능으로 홀로 마력을 익혔다.

비전서를 얻었든, 기연이 생겼든 스승 없이 마력을 익힌 건 대단한 일이다.

'제 잘난 걸 아는 거겠지.'

이해한다.

한때 자신도 그랬다.

흑백 지대 부랑아까지는 아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마력을 익혔다.

그때는 참, 세상 넓은 줄 모르고 까불고 다녔는데.

'으음, 음.'

문득 바라본 소년의 모습에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벌써부터 오뚝한 콧대, 자라면 여자깨나 울릴 것 같은 얼굴에, 반전 조로 반항기 어린 눈빛까지.

딱 자신을 빼다 박았다.

어쩌면 숨겨 둔 아들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알프레도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살짝 웃고는, 심호흡.

그러고는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 세상은 넓습니다."

"좁진 않죠."

"지금이야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세상을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것 같을 겁니다."

"그렇진 않은데."

순간 알프레도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에 주먹을 한 대 박아 주고 싶지만, 섣부른 행동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법.

어차피 후계자가 되고 나면 기회는 많았다.

집사란 가문을 지키는 자들. 데큘란가의 트러블슈터와 같은 명가의 그림자들로부터 저택과 혈족의 안위를 수호해야만 한다.

그 훈련이 어찌 쉬울까.

'...그때 보도록 하겠네, 소년.'

간신히 화를 내리누른 알프레도. 하지만 그 인내는 오래가지 못했다.

"협곡 안 고블린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지금 소년이 딱 그런 상태입니다. 협곡 안에서만 자라서, 그 밖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는...."

"전 와이번쯤 될 거 같은데요."

"...."

투둑.

이마로 볼록 튀어나오는 Y 자 핏줄.

간신히 내리누른 화가 다시 솟았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상대는 어린 소년.

흑백 지대에서 자라나, 세상의 넓이를 알지 못한다. 배우지 못해 알지 못하는 무지(無智)는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닌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넓이를 알려 주는 것이... 또한 어른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알프레도의 인내심이 픽 하고 사그라들었다.

"단언컨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알프레도.

쾅!

의자가 벽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지고, 테이블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소년은, 모릅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는 한편, 터질 듯 점차 부풀어 오르는 몸뚱어리. 넉넉하던 턱시도 아래로 우락부락한 근육이 존재감을 뽐냈다.

그 부담스러운 비주얼에 아스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데, 알프레도가 말했다.

"그러니, 이 집사가 손수 알려 드리죠.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또 무서운 곳인지."

알프레도는 자신이 있었다.

이 소년에게 세상의 쓴맛을 알려 주어, 기필코 집사 후계로 삼아 내리라.

'선생님!'

저 건방진 핏덩어리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가르침을 갈구할 날을 상상하자, 들끓던 의욕이 폭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복도를 가로지른 알프레도가 아스터를 인도한 곳은 블란도가의 어느 수련실.

끼이익.

석실 문이 열리자, 수련에 매진 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모두가 10대 초중반으로 아스터의 또래였는데, 아이들은 곧 알프레도를 발견하고는 수련을 멈췄다.

"집사장님을 뵙습니다!"

"집사장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오와 열들 맞춰 도열하는 아이들. 그 행동은 어린 나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일사불란한 면이 있었다.

그 모습에 알프레도는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소년."

"뭐가요."

"저들 한 명, 한 명이 블란도에 재능을 입증받은 인재들. 모두 소년과 비슷한 또래이지요. 분명 느껴지는 바가 있으실 겁니다."

"흐음."

아스터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수련장이 블란도에는 한두 개가 아니죠. 하면 대륙 전체를 두고 생각해 볼까요?"

"..."

"어떠십니까. 이제 좀 느껴지십니까?"

무엇이 느껴지는지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블란도가, 확실히 제법이야.'

10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련되어 있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이니.

하지만 알프레도의 요지는 결코 이들이 뛰어나다는 게 아니다.

'이만큼 뛰어난 놈들이, 대륙 전체로 보면 결코 드물지 않다는 거지.'

이해는 했다. 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넓이를 모르는 건 과연 자신일까? 아니면 눈앞의 저 아이들일까.

수련생들의 기세는 과연 매서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꽤나 우스운 것이었다.

알프레도와 교관이 곁에 있어 대놓고 표출하지는 못하지만 기를 죽이려 한달까. 악의적인 기세의 집중. 명백한 의도가 엿보였다.

특히나 저 눈빛들은 어떤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우월감. 딱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스터가 웃은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에 반응을 해 줄 필요도 없는지라.

"예, 참 넓네요."

적당히 넘어가려는데, 알프레도의 욕망은 꽤나 끈질긴 것이었다.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제 뒤를 이어서 집사장이 된다면, 소년도 저 아이들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빛날 재능을 가지고 있지요."

알프레도의 불타는 눈동자.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빛을 싫어해서...."

"소년, 어째서...."

수십 명의 수련생을 앞에 두고 벌어진,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대블란도의 집사장이 흑백 지대 부랑아에게 열렬한 스카우팅을 하고, 흑백 지대 부랑아는 짜게 식은 눈으로 연신 거절을 하다니?

그때였다.

"집사장님."

손을 들고 알프레도를 부르는 수련생.

알프레도는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윈스터 수련생? 할 말이 있나?"

"세상이 넓다는 집사장님의 말씀 저희도 잘 들었습니다. 느껴지는 바가 작지 않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생각 말이지?"

윈스터라는 수련생이 아스터를 눈에 담았다.

그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명백한 적의, 그리고 시기와 질투였다.

그는 그 감정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 아스터를 보며 웃어 보였다.

"만약 제가 그 소년이고. 집사장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다면, 결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뭐, 이런 생각이라 할까요?"

"흐음."

그 말에 알프레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만약 이 아이들을 보고 정말 세상의 넓음을 깨달았다면 결코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윈스터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저한테 기회를 주시면, 제가 그 소년한테 세상의 넓이를 알려 주고 싶은데...."

"대련을 하고 싶다?"

"뭐, 대련이랄 것까지 있을까요? 그냥 마법이 어떤 건지, 살짝 맛만 보여 주는 거죠."

알프레도는 윈스터를 가만히 바라봤다.

수련생 주제에 자신에게 말을 던지는 꼴이 건방지기 짝이 없다. 교관은 제 모습 탓에 하얗게 질려 있는데,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의도 역시도 딱히 순수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

알프레도는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 여겼다.

"소년, 어떠십니까? 저 친구와 간단하게 대련을 해 보시는 것이?"

알프레도가 조심스럽게 묻자, 수련생들의 시선이 아스터에게 몰렸다.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사실 아스터에 대한 수련생들의 감정은 이미 최악을 찍고 있었다.

소가주의 가출 사건은, 소가주가 돌아온 시점부터 딱히 비밀로 할 것도 없어진 터라. 덩달아 아스터에 대한 소문도 퍼져 나간 것이다.

그 인식은....

'운 좋은 부랑아 새끼가.'

'소가주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감히 더러운 부랑아 따위가?'

'버러지답게 시궁창에서나 구를 것이지. 왜 소가주님을 따라와서는....'

딱 이런 정도.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아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

"흐음."

아스터의 고개가 더 삐딱해졌다.

"무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소년."

알프레도 역시 저 적대감을 느끼고 있는바. 때문에 슬며시 만류를 하려 하는데.

아스터가 웃어 보였다.

"상대는 제가 골라도 됩니까?"

"...음."

알프레도는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윈스터는 우수한 수련생이다. 이미 블란도 최고의 마법사단 중 하나인 '여명(黎明)'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놈.

싸가지는 없지만, 그 실력만큼은 특출나다.

그러니, 윈스터보다는 다른 수련생들과 대련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한번 골라 보십시오."

알프레도의 대답이 떨어졌을 때.

아스터가 말했다.

한데, 한 명이 아니었다.

"너, 너, 너, 너. 그리고... 그래, 너까지."

"...?"

윈스터를 포함한 다섯 명의 수련생들.

그들이 아스터의 지목에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아스터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다섯 명, 한꺼번에 상대하겠습니다."

"...."

알프레도는 침묵했다.

수련생들도 침묵했다.

다만 아스터만 입을 열었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다섯 명의 수련생들이 알프레도를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

아스터를 향한 적대감은 물론이고, 들끓는 투지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렇게 허락을 바라는 눈빛을 알프레도에게 쏘아 보내고 있을 때.

"흐허허허허!"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

알프레도는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래야 내 후계로서 자격이 있지.'

이 모습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딱 빼다 박았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모습. 패배할지언정 자존심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안 그래도 탐나던 인재였는데, 이제는 그 욕심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소년,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소년이 내뱉은 말은, 어찌 보면 블란도를 모욕하는 말과 같은데...."

아스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딱 1분. 1분만 버텨도, 소년은 그 말에 책임을 진 거라 여기겠습니다. 하지만...."

알프레도가 눈을 빛냈다.

"만약 1분을 버티시지 못하면, 저는 소년에게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아, 대신에 1분을 버티신다면 선물 하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뜻 듣기로는 스산한 말이었다.

명가의 이름과 '모욕', 그리고 '책임'이라는 말이 함께 나왔으니.

하지만 아스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하, 이 영감이....'

어디서 코를 꿰려고.

저기서 말하는 책임이란, 결국 제 뒤를 이어 집사가 되게 한다는 소리이다.

"좋습니다. 하시죠."

이쯤 되니, 아스터도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 8화. 세상은 넓고, 쓰다

판이 깔렸다.

수련생들이 둥글게 빙 둘러앉아 마련한 공간, 대련 참가자들은 그 중앙에 자리했다.

모두가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명. 교관만이 울상이었다.

"저, 집사장님. 이건 아무래도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말이죠?"

"그, 아스터 군은 소가주님의 손님이시기도 하고. 또 마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덜컥 이렇게 맞불을 붙여 버리시면...."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저 고집, 언젠가 한 번 깨져야 하는 것. 저 고집이 깨지고 나면, 아스터 군은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입니다."

"...."

그 단호한 어조에 교관은 의사소통을 포기했다.

반쯤 눈이 회까닥 돌았다.

저 상태의 알프레도 집사장을 말릴 수 있는 건 딱 세 사람.

가주님과 가모님, 그리고 소가주님뿐이다.

그리고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가모님, 가모님께서 오셔야 돼.'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누가 가모님을 불러올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

수련장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 하나.

그 옆엔 낯익은 사용인도 있었는데, 교관은 곧 소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소, 소가주님!"

"응?"

한달음에 데미안에게 달려간 교관.

"지, 지금 친구분께서 아주 위험한 상황이십니다. 제발 집사장님 좀 말려 주십시오. 수련생 다섯 명이랑 대련을 시키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련?!"

"네, 맞습니다. 대련!"

살짝 굳은 데미안의 표정에 교관이 쾌재를 불렀다.

'됐다! 됐어! 집사장님을 말릴 수 있어!'

듣자니, 끔찍이 아끼는 친구라는데 저 위험을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으실 거다.

집사장님도 소가주님께 따끔하게 한 소리 들으면 이성이 돌아오시겠지.

'...다행이다.'

수련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교관의 책임이 있다. 그것은 제아무리 집사장 알프레도의 독단이라 해도 마찬가지.

천성이 소심하여 가늘고 길게 안정적인 수익으로 삶을 영위하고 싶은 교관에게 지금의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한데.

"난?"

"네...?"

"나도 놀래."

"...."

교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 소년만 해도 소가주의 손님인지라 자신의 삶이 위태로울 지경인데, 여기에 소가주님까지 가세한다?

저 소년이 자신의 삶에 불어온 자그마한 산들바람이라면, 소가주는 모든 것을 날릴 태풍이다.

몇 개월 감봉이니 뭐니 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고, 수명이 감축되겠지.

하지만 다행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가주님?"

"응?"

사용인의 부름에 데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에 껴서 노시면, 가모님께 혼나실 겁니다."

"안 들키면 돼."

"'옘병'처럼 말이죠?"

"...."

데미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사용인이 '옘병'에 대해서 감춰 주기로 한 모양이었는데.

이제는 데미안 역시 그 뜻은 몰라도 '예법 교육'을 받아야 될 정도로 안 좋은 말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난 그런 단어 몰라."

"네, 저도 모릅니다. 도련님께서 저기 껴서 놀지만 않으신다면 말이죠."

"...."

데미안은 입을 꾹 다물고는 구경꾼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수련생들은 데미안을 보고 황급히 인사하려 했지만, 그 댓 발 나온 입술을 보고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사용인은 휙 하고 걸음을 돌렸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네, 제발... 부디."

교관은 숫제 애원하듯 읊조렸다.

부디 빨리 가모님을 모셔 오길.

하지만 그런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교관, 뭐 합니까? 이리 와서 대련을 진행하십시오."

귓가에 울리는 알프레도의 지시.

"저, 저쪽에 데미안 도련님께서 오셨는데...."

시간을 끌어 보려고, 구경꾼들 틈에 섞인 데미안을 팔아 봤으나, 알프레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는군요. 도련님께서는 심기가 불편하실 때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대련을 보고 싶으신 거 같은데, 어서 시작해야지 않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교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급이 깡패다.

집사장 알프레도는 현 가주조차 그 권위를 존중하는 인물이라. 자신 같은 말단 교관이 그 말에 항거할 수는 없었다.

다만, 모든 사태가 끝났을 때 자신의 노력은 좀 전의 사용인이 증명해 주리라.

그런 생각이었다.

교관은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 아스터와 수련생들 사이에 자리했다.

"그럼 룰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대련 형식은 턴제...."

"음, 턴제보다는 섬멸전으로 가지."

'하.'

교관은 한숨을 씹어 삼켰다.

턴제는 마법사들 간의 약식 대련 방식으로,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는 형태다.

역장이 깨지면 패배로 간주하는데,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데, 섬멸전이라면....

어느 한쪽이 항복을 할 때까지 실전과 다름없는 공방을 주고받는다.

턴제보다는 사고의 위험이 훨씬 큰 형식.

하지만 다시 말했듯 직급이 깡패다.

"형식은 섬멸전. 어느 한쪽이 완전히 항복을 할 때까지 결투는 지속됩니다. 단, 교관의 판단하에 대련을 중단할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고...."

거기까지 말하고는 교관은 품에서 동전을 꺼냈다.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시작하면 됩니다. 양측 위치로 가시고."

이미 아스터와 수련생들은 위치를 잡아 둔 상태라 따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동전을 던지겠습니다. 참고로 마법의 여파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련생들이 역장을 만들어서 여파가 번지지 않게 할 테니."

그 말처럼 수련생들이 만들어 낸 둥근 돔 형태의 역장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어쨌든, 그 말을 끝으로.

챙!

하늘 위로 솟구치는 동전.

그리고 그 동전이 떨어졌을 때.

챙그랑.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회귀를 한 후 고작 며칠.

매일같이 천원공을 운용한 아스터이지만, 그가 모은 마력량은 보잘것없었다.

전생에 드높은 경지를 이룩했다고는 하나, 그 경지가 현생에 미치는 영향은 고작 정신에 그치는 법이라.

제아무리 아스터라 해도 마력을 빠르게 모을 방법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반면 윈스터를 비롯한 다섯 명의 수련생들은 어떠한가.

나이는 어리지만, 동부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도 명가의 일원으로서 꾸준한 훈련을 받아 왔다.

익힌 비전은 블란도에서 제공하는 수준 높은 비전이었으며, 마력은 블란도의 지원 덕택에 꽤나 풍족하다 할 수 있었다.

객관적인 수치로 생각한다면, 결코 아스터가 이길 수 없는 대련.

이것은 아스터의 배경을 알든 모르든,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 다섯 명, 한꺼번에 상대하겠습니다.

과연, 이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빌어먹을 부랑아 주제에.'

윈스터는 그런 아스터를 보며 열불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소가주께서 어여삐 여기시니, 세상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된다.

거기에 집사장님의 어여쁨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세상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짓밟아 줄 것이다. 마침 소가주께서도 자리에 있으니, 저 더러운 부랑아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리라.

이것이 윈스터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은 다른 네 명의 수련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데, 왜일까.

챙그랑!

대련이 시작한 순간, 윈스터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퍼억!

"컥!"

명치로 짓치고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충격.

'대체... 뭐지? 왜?'

마법을 사용하는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무언가 명치를 때린다. 그 고통은 가치 쇳덩이로 두들겨 맞은 것과 같아서....

"커헉, 헉...."

호흡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가운데.

'도, 도와....'

윈스터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한데, 그런 그의 시야에 비친 광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끄윽, 윽."

"허억!"

자신처럼 명치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버르적거리고 있는 수련생들.

다들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는지, 그 눈빛에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깃들어 있다.

다섯 명의 수련생들이 서로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때,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은 넓다. 그리고 쓰지."

모두의 시선이 아스터에게 향했다.

그리고 곧 수련생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천장을 향해 있는 아스터의 손바닥. 그 손가락 위로 떠올라 있는 푸른색의 구체들.

크기는 작다. 고작 해 봐야 손톱만 한 크기일까? 그 형태도 익숙했다.

'마력...탄?'

이건 마법도 아니다.

마력을 처음 익힌 마법사들이 공격 마법을 배우기 위해 수련하는 마력 운용.

하나, 마법사들 간의 전투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었다.

즉발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 마력 소모량은 마법을 발현시키는 것에 비해 워낙 큰 터라.

또한 마력 그 자체로 공격을 하는 것이다 보니, 마법사들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마법사들의 마력 저항력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데, 도대체 이 파괴력은....

윈스터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시금 아스터가 말했다.

"내가 이제부터, 세상이 얼마나 넓고 쓴지 몸소 일깨워 주겠다. 너희도 몸소 배워 보도록."

피빗, 핏!

"커억!"

다시금 다섯 발의 마력탄이 수련생들을 때리고.

아스터가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의 마법은 없었다.

"커억! 컥!"

그저 손발을 이용한 무자비한 구타.

오직 그것만이 있을 뿐.

* * *

비장하게 시작한 대련은 실로 허무하게 끝났다.

물론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수련생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만든 공간 안, 여전히 아스터는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그 형태가 대련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을 뿐.

"커억, 제발... 컥!"

"아니야, 항복하지 마라. 아직 하지 마."

아스터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련생들을 쥐어 패고 있었는데, 수련생들이 항복을 하려 할 때면 귀신같이 마력탄을 쏘아 말을 끊었다.

그뿐이냐.

"아프면 안 돼!"

언제 역장 속으로 비집고 들어간 건지, 수련생들을 치유해 주는 데미안.

한데 쓰러진 수련생을 치유해 주는 게 아니라, 아스터가 패고 있는 수련생들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

'제발, 소가주님....'

차라리 쓰러져 있을 때 치료라도 해 주면, '항복'이라는 한마디로 편해질 수도 있으련만.

맞고 있을 때 치료를 하는 탓에 쓰러지지도 못하고, 계속 맞고만 있다. 아스터는 쓰러질 때까지 때리는데, 쓰러지지 못하니 고통만 길어지는 것이다.

교관은 그 광경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모르겠다, 난.'

이미 감봉이고 책임이고 머릿속이 하얗다.

반면, 그 광경을 보는 알프레도는....

'...대단하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게 마력탄이라고? 도대체 몇 번 압축한 거지?'

마력탄이 저 정도 위력을 보이려면, 한두 번 압축해서는 불가능하다.

족히 네댓 번은 압축이 이루어져야 저런 위력을 보일 수 있을 터인데....

그 광경을 보니,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첫 만남에서도 아스터는 마력탄을 손에 피워 올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마력탄'이라는 생각에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지금 보니 새삼 등골이 섬찟한지라.

물론 자신은 수련생들과 다르기에 큰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놀라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정말 놀라운 건....

'천부적인 마력 운용이다.'

마력탄을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이들은 저게 안 되니까.

제아무리 경지가 높은 마법사라 해도, '마법'이 아닌 '마력'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은 까다로운바.

그저 기감이 타고났다 여겼는데, 그저 재능이 있다 여겼는데. 이제야 비로소 아스터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한 기분.

그리고 조금 다른 의미의 놀라움도 있었으니.

"허어."

알프레도는 수련생들을 줘 패는 아스터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찌나 저렇게 잘 패는지."

한두 번 때려 본 솜씨가 아니다.

몸은 하나인데, 다섯 명을 이리저리 패는 게 꼭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달까.

그렇게 모두가 얼이 빠져 광경을 지켜보는데.

그때였다.

"알프레도!"

수련장 입구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가, 가모님...?"

가모님이 여긴 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

그제야 알프레도의 머릿속에 이성이 피어올랐다.

수련장 한가운데.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고 있는 수련생들.

소가주의 손님인 아스터 군은 수련생들을 축제 날 고블린 패듯 때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소가주님이 해맑게 웃으며 돕고 있었다.

이보다 혼란스러운 광경이 또 어디 있을까.

아마, 없을 터였다.

◈ 9화. 잘 치더군요

가모 비앙카의 등장에 수련장의 공기가 싸늘히 얼어붙었다.

이미 교관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인생을 반추하고 있었고, 수련생들은 그제야 상황이 잘못됐음을 인지했다.

그런 와중에 가장 괴로운 것은 알프레도 그 자신.

"이게 어찌 된 일이지?"

"...."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하나, 가모의 질문에 침묵은 용서되지 않는 터라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저, 그게... 간단한 테스트를 진행하고자 했는데."

"테스트? 이게 테스트라고? 런펫 교관."

"예, 가모님. 당장 가서 짐을 싸겠습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언제나 평안하시길 기원하며...."

"...?"

해탈한 런펫 교관의 모습에 의아한 것도 잠시.

비앙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가 잘리는 일은 없을 거다. 일단 수련생들을 수습해 물러가도록. 데미안, 넌.... 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고. 아스터 군도 런펫 교관을 따라가세요."

그 명령에 런펫 교관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이미 모든 걸 해탈한 터라, 잘리지 않는다는 말에도 기쁨은 없었다.

그저 생각을 포기하고, 가모 비앙카의 말에 따라 수련생들을 수습해 수련장을 떠날 뿐.

데미안은 가모 비앙카를 데리고 온 사용인들과 함께 방으로 향했다.

"친구! 이따 봐!"

"오냐."

가모 비앙카는 태연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데미안과 아스터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나, 그런 것도 잠시.

수련장에 알프레도만이 남게 됐을 때, 비앙카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알프레도."

"예, 가모님."

"자네의 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야. 후계? 구하고 싶겠지. 하지만 이번엔 도를 지나쳤어."

"죄송합니다, 가모님. 제가 이성을 잃고 그만...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알프레도가 처벌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련생들이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기는 했지만, 상황 자체가 큰 사고 없이 끝났으니.

또한, 이런 일로 처벌을 내리기엔 그간 알프레도가 가문에 헌신한 바가 적지 않았다. 아마 내려져도 형식상의 처벌만 내려질 터.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비앙카는 이제야 본론을 꺼냈다.

"한데 어떻게 된 일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아스터 군 말이야. 듣자니 수련생들과 대련을 한 것 같은데...."

처음 수련장에 들어왔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광경은 비앙카에게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수련생 다섯 명과의 대련. 교관과 알프레도... 아니, 알프레도는 이성을 꽤나 잃은 상태이니 빼더라도.

교관 런펫이 있기에 큰 사고는 없을 거란 막연한 추측은 있었다.

다만 소가주의 손님으로 온 아스터 군에게 문제가 생기면, 이는 블란도 전체의 위신이 떨어지는 일.

그 때문에 급히 달려왔는데, 막상 비앙카가 마주한 건 생소한 광경이었다.

"혹, 데미안이 도와준 건가?"

그렇다면 말이 된다.

나이에 비해 어수룩해 보이지만, 데미안의 마법적 재능은 블란도 역대라 칭할 수 있는 것.

하나, 알프레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면?"

그렇다면 어떻게 흑백 지대 부랑아가 다섯 명의 수련생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 의문에, 알프레도의 답은 이랬다.

"그게...."

"그게?"

"굉장히 잘 치더군요."

"...."

다시금 싸늘하게 얼어붙는 공기.

반쯤 나가 있던 알프레도의 정신이 돌아온 것도 그 공기 탓이었다.

"어, 그. 죄송합니다."

"...아닐세. 다만, 슬슬 후계자를 알아보는 게 좋겠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빵 줄 사람은 마음이 한가득인데, 막상 받을 사람은 내켜 하질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다시금 말해 보게."

"...예, 알겠습니다."

알프레도는 차분히 자신이 본 바를 읊어 주었다.

그리고 그 설명이 끝났을 때.

"흐음."

비앙카는 아스터에 대한 판단을 전면 새로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알프레도의 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는 그런 수준을 상회하는 수준이니.

'그렇단 말이지....'

비앙카가 살짝 눈을 빛냈다.

* * *

교관 런펫을 따라 이동한 곳은 근처의 또 다른 수련장.

아이들은 그곳에 모여서 비앙카의 처분을 기다렸는데, 오래지 않아 알프레도가 찾아왔다.

이 사태의 책임자는 오직 알프레도 한 사람으로 못 박힌 상태. 그는 내게 다가와 정중한 사과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는 비앙카가 보낸 조사관들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야 했는데, 그들의 태도는 결코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전후 사정을 읊어 놓았을 때.

"후우."

난 몸에 찌든 땀을 닦으러 샤워실을 찾았다.

몇몇 수련생들이 날 발견했지만, 선뜻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물기도 안 닦고 샤워실을 서둘러 나갈 정도니.

덕분에 난 쾌적한 환경에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노라니, 몇 가지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력량이 너무 아쉽군.'

회로는 깨끗하다. 또한 마력 역시 정순하다.

하지만 당장 쌓은 마력이 없으니, 귀찮음을 감수하고라도 마력탄을 사용해야 했다.

물론 마력탄도 압축을 거치면 그 위력이 부족하지 않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지금의 딱 세 배. 아니, 두 배만 되어도 기본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본래, 내 전공은 마법보다는 마력을 직접 활용한 전투. 여기서 말하는 마력 활용이란, 마력탄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그 궤가 달랐다.

최소한의 마력이 필요했는데....

'뭐, 금방 해결되겠지.'

안 그래도, 좀 전의 만남에서 알프레도에게 전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샤워실 밖으로 나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하나 있었다.

"네가 아스터라는 놈이냐?"

백금빛 머리칼. 직계는 아니다.

가주의 아들은 데미안 하나였으니.

'방계 혈족이군.'

나이는 20살 전후쯤 되었을까. 아직 얼굴에는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뭣, 아니라고?"

"응, 아냐."

"우중충한 잿빛 머리칼, 어딘지 모르게 재수 없는 눈빛, 모든 게 다 네놈인데?"

나는 빤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귀찮은 예감.

이럴 때는 단호하게 시치미를 떼는 게 최고였다.

"머리칼의 색이야 빛에 따라 얼마든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 눈빛을 봐라, 어디를 봐서 재수가 없냐."

최대한 눈을 착하게 떴다.

방계 혈족 놈은 내 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착해 보이는 눈이군."

"그래, 그렇지."

"착각해서 미안하다. 이만 갈 길 가 보도록."

"그래, 다음에 또 볼 수 있어도 보지 말자고. 아스터는 꼭 찾기를 바라."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떼려는 그 순간,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사용인 하나.

그 사용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스터 님, 가모님과 데미안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

"...."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네놈...."

내가 말했다.

"아, 사람 잘못 봤습니다. 저는 아스터가 아닙니다. 그냥 그 비슷한 사람이지."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용인은 센스가 없었다. 그리고 눈치 또한 없었다.

"아스터 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비앙카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

나도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래요, 갑시다."

방계 혈족이 발작하듯 소리 지른 건 그즈음이었다.

"그 눈빛! 역시 맞았군! 그렇지, 죽은 고블린 눈깔을 닮은 재수 없는 눈동자가 그리 흔치는 않지!"

"네네, 맞습니다."

"지금은 그냥 보내 주겠다만, 내일 내가 다시 찾아가지! 기다리고 있어라! 오늘 신나게 까불었다 들었는데, 내가 네놈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방계 혈족을 그 자리에 두고 걸음을 옮겼다.

사용인은 방계 놈의 발작이 익숙한 듯,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를 안내했다.

* * *

무뚝뚝한 사용인을 따라가면서 아스터는 생각했다.

'쯧.'

슬슬 귀찮아지겠다.

집사장 알프레도가 자신을 탐내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보는 눈이 있다면, 이 재능을 보고 탐내지 않을 리가 없지. 이게 다 내가 잘난 탓이다.

한데, 오늘의 대련 탓인지 귀찮은 날파리가 붙어 버렸다. 아니, 붙을 것 같았다.

'블란도가도 조만간 떠야겠어.'

블란도가의 생활은 편안하고 아늑했지만,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더 귀찮아지기 전에 뜨는 게 맞았다.

블란도가와 끈끈한 유대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데미안이면....

'나중에 데큘란가랑 붙을 때 모른 체하진 않겠지.'

제 놈들에게도 데큘란가는 적이었으니까.

물론, 가장 좋은 건 자신의 힘이 충분해질 때까지 데큘란과 마찰이 없는 거지만.

'당장 내일 떠나겠다고 비앙카에게 말해야겠다.'

조금 갑작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애초에 이만큼 있었던 것도 오래 있던 거다.

아스터는 그런 생각이었다.

비앙카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스터 군, 왔군요."

비앙카는 고풍스러운 응접실에서 아스터를 맞이했다.

그 옆에 앉은 데미안은 입 안 가득 쿠키를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비앙카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목함 하나를 아스터에게 밀었다.

"이건...."

"알프레도에게 영약을 부탁했다고 들었습니다."

- 대신에 1분을 버티신다면 선물 하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터는 목함을 가만히 바라봤다.

확실히 대련이 끝난 후, 찾아온 알프레도에게 영약을 부탁한 바가 있었다. 한데 이렇게 빨리. 그것도 가모가 영약을 준비해 줄 줄이야.

"열어 봐도 좋아요."

비앙카의 말에 아스터가 목함을 열었다.

딸칵.

듣기 좋은 경첩 소리와 함께 곧 그 내용물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건....'

열자마자 방 안 가득 퍼지는 향.

단순히 향만 맡은 것뿐인데도 혀끝으로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맛이 감도는 것 같다.

한눈에 보기에도 하품(下品)은 아니다. 최소한 중품(中品)의 영약.

하지만 영약의 실제 등급은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상품(上品)의 영약입니다. 블란도에서도 오 대 마법사단에 입단하는 재원들에게만 제공하는 것이죠."

"...."

그 말에 아스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름지기, 선의는 식사 대접까지만이다. 선물까지 오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

비록 알프레도와의 내기를 통해 얻어 낸 영약이라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딱 중품까지였다면 그저 지극한 호의겠거니 하고 받아먹었겠지만, 무려 상품. 그것도 가문의 인재들에게만 제공되는 귀물이었으니.

속내를 알아차린 걸까.

비앙카가 해명했다.

"안심하고 받아도 됩니다. 일전에 듣기로 흑백 지대에서 데미안을 도와줬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오늘 일의 사과의 의미도 함께 담은 겁니다."

"흐음."

해명이 부족했던 걸까.

가늘어진 아스터의 눈매는 되돌아올 줄 몰랐다.

"혹, 이걸 먹으면 블란도에 소속돼야 한다거나...."

"아닙니다."

"그도 아니면, 무언가 독이 들어 있다거나...."

"...아닙니다."

"정말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말입니까?"

"네,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받아도 좋아요."

인자하게 웃으며 권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아스터는 그제야 영약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 겁니다."

그 말에는 아스터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블란도가 어떤 가문인가.

상품의 영약 정도는 얼마든 구할 수 있는 명가 중의 명가였다.

무한정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여길 것도 없다는 소리.

아스터가 뜻밖의 소득에 눈을 번뜩이는데, 비앙카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로, 아스터 군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스터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 품에 챙긴 목함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비앙카에게 밀어 주려는데.

다행히 비앙카의 제안은 영약을 돌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이상했을 뿐.

"데미안과 함께, 아카데미에 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입학권 하나를 마련해 주죠."

◈ 10화. 헛된 꿈은 꿔야 맛이지

다음 날.

나는 꼭두새벽부터 시작한 천원공의 수련을 마친 후, 햇살과 함께 눈을 떴다.

'역시....'

과연 상품의 영약이었다.

심장에 위치한 코어. 그 안에 똬리를 튼 마력의 양은 눈에 띄게 증가해 있었다.

체내에 녹아든 약성. 그중 고작 일 할만 마력으로 녹여 냈다는 걸 감안한다면, 십 할 전부를 녹여 냈을 때는 기본은 갖출 수 있겠지.

그리고 화인(火印)으로 변화한 체질 덕분일까.

본래 약성을 마력으로 녹여 낼 때는 어쩔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하는데, 놀랍게도 그 손실이 전무한 수준이었다.

또한 영약으로 흡수한 마력은 그 성질이 어느 정도 탁할 수밖에 없는데, 따로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기존의 마력과 녹아든다.

즉, 기대 이상의 효과인 셈.

나는 가뿐한 기분으로 내부 관조를 마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전날, 비앙카가 했던 말이 귓가에 돌았다.

'아카데미라....'

뜻밖의 제안이었다.

가문의 일원도 아닌 내게 아카데미를 제안하다니?

물론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

'데미안.'

그놈이 말썽이었다.

- 본래, 데미안의 아카데미 입학은 작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극구 반대해서 결국 올해로 미뤄졌죠. 그런데....

가출을 한 거다.

흑백 지대로.

이쯤 되니, 비앙카의 입장에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아카데미에 들여보내려니 다시 또 도망갈까 겁나고, 마음을 돌리자니....'

마땅한 방법이 없다.

- 그래서 부탁하는 겁니다. 데미안도 아스터 군과 함께라면 좋다고 하니.

물론, 내게도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아카데미, 좋지.'

본디 세상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움직인다.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같은 지역 출신이면, 그래도 한두 대는 덜 때린다.

혈연은 말할 것도 없다. 명가 놈들이 혈연으로 뭉친 놈들이니.

학연은?

'아카데미지.'

저들끼리 밀어주고, 끌어 주고, 당겨 준다.

혼자 달리다 엎어져도, 명찰 한번 확인하고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면 일으켜 준다.

밖에서 보면 더럽지만, 그 울타리 안에 속하면 느낄 수 있는 그 따뜻함이란....

좋다. 좋기는 한데.

"쓰읍."

뭔가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코를 꿰려는 것 같기는 한데.'

조건이 없었다.

상품의 영약이야 이런저런 이유를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아카데미라니? 아무리 블란도가라 할지라도, 아카데미 입학권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도, 가문에 충성하는 일원들에게 쓸 일이지.

그럼에도 조건이 없다라....

'뭘까. 분명 뭔가 있기는 한데.'

쯧.

나는 찝찝함에 혀를 한 번 차고는 생각을 거뒀다.

- 우선,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답을 미룬 건 그 때문.

여태껏 궁리해 봤음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더 생각해 봐야 무의미한 일.

나는 이 복잡미묘한 기분을 떨쳐 내고자, 별관에 딸린 작은 수련장으로 향했다.

한바탕 달리기로 땀이나 쏟아 내 보려는데....

"아스터!"

"...?"

예기치 못한 손님이 다가왔다.

재수 없는 얼굴에 백금발. 어제의 그 방계 혈족이었다.

"어제는 감히 나를 속였겠다? 각오는 해 뒀겠지. 이 몸을 속인 대가는 아주 큰데 말이야."

안 그래도 미증유의 찝찝함에 기분이 더러운데, 귀찮은 날파리까지 붙었다.

"후."

치솟는 짜증에 나는 쪼그리고 앉아, 애꿎은 모랫바닥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래서."

"무, 뭣?"

"그래서 어쩌자고."

방계 혈족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을 붉히는 녀석.

"겨, 결투다!"

"결투?"

"그래!"

그래, 결투라 그 말이지.

마침 머리가 복잡했는데 잘된 것 같다.

달리면서 땀을 빼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지만, 진짜 좋은 건 따로 있다.

치는 거.

마침 마음껏 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그럼, 지금 시작할까?"

"흥. 무슨 배짱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련생들 따위랑은 수준이 다르다는 것만 알아 둬라. 블란도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말이다!"

"우습게 본 적 없는데."

"흥, 웃기지 마라."

보아하니,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놈인 듯. 수련생들이 형편없이 깨졌다는 말에, 쓸모없는 시간 쪼개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시작해도 된다고?"

"그래... 캭!"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방계 혈족 놈의 얼굴에 뿌렸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제 눈을 비비는 녀석.

하나, 그래도 혈족은 혈족이라는 건가.

"이, 비겁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중심으로 역장을 펼치는데, 확실히 수련생들과는 달랐다.

츠즈즈―

빠르게 형성되는 역장. 수련생들에 비해 몇 배는 견고하다.

하지만.

"느려."

허공을 가르는 짱돌. 모래를 움켜쥘 때부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놈이었다.

짱돌은 곧장 날아가 형성되는 역장의 틈을 파고들더니....

빡!

"억!"

방계 혈족 놈의 이마를 정확히 강타했다.

'역시.'

흑백 지대 부랑아나, 수련생들 따위랑은 그 손맛이 달랐다.

짱돌을 던졌는데 무슨 손맛이 있겠냐마는, 이것도 아는 사람만 아는 맛.

나는 다시 또 느꼈다.

'패는 맛은....'

혈족이 제일이다.

"억! 어억! 그, 그만!"

평화로운 수련장.

공허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 * *

사각, 삭.

이른 아침임에도 블란도가의 안주인, 비앙카는 업무에 한창이었다.

외부로 나간 가주를 대신해 가문의 대소사를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왜일까.

"...."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비앙카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딱히 가문에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좋은 일이 있는 걸 수도 있었다.

'데미안.'

그토록 골치를 썩였던 데미안의 아카데미행이 잡음 없이 잘 처리된 것이다.

데미안의 고집을 잘 아는 터라, 어찌해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누구 덕인지는 명확했다.

'아스터.'

데미안이 흑백 지대로 가출을 했다가, 길거리에서 데리고 들어온 부랑아.

'그 아이가 참 좋은 친구야.'

재능도 제법 괜찮았다.

그 성정은....

알프레도의 표현을 따르자면 가끔 싸가지, 아니 당돌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는데.

그거야, 뭐.

'그 나이 때에는 다들 그런 법이니.'

제일 마음에 드는 건 그 눈빛이었다.

흑백 지대에서 살다 왔음에도,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배경을 알았음에도.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태도.

'그릇이 달라.'

해서, 생각했다.

곁에 둘 만하다.

그 때문이었다.

알프레도의 부탁에 따라, 아카데미 입학에 대해서 자그마한 장난을 친 것은.

똑똑.

"부인, 알프레도입니다."

마침 방문한 알프레도에 비앙카는 아예 펜을 내려 두고 업무를 일단락했다.

"들어와요."

알프레도는 근엄한 표정으로 들어와 예를 취하고는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글쎄요."

교차하는 눈빛.

곧,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알프레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눈치채지 못했군요."

"당연한 일이죠. 무언가 미심쩍어하는 기색은 있었지만, 데미안의 이야기를 하니 곧 납득하는 기색이었어요."

"훌륭합니다."

"대답은 미뤘지만, 반응이 긍정적이었던 걸 봐서는...."

"수락할 겁니다. 소년의 열정, 그 눈동자에 타오르는 불꽃, 저는 압니다. 수락을 하고 나면...."

어찌 보면, 아스터의 짐작은 맞았다.

블란도가의 혈족도 아닌 자신에게 아카데미 입학권을 주는 것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분명, 자신의 코를 꿰기 위해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종류의 수작은 없었다.

그저 수작을 부리기 위한 준비 단계였을 뿐.

알프레도의 계획은 이러했다.

제니온 아카데미.

동부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라는 이름답게, 그 등록금도 만만치 않았다.

한 학기 등록금이 평민 가족 반년 치 생활비에 맞먹는달까.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집안이라면 그다지 부담될 것은 없겠지만, 일반 평민, 그리고 아스터의 기준에서는 어마어마한 돈.

한데, 그뿐만이 아니다. 명가의 입학권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그 몇 배의 등록금을 납부해야 하는바.

"첫 학기는 괜찮을 겁니다. 저희가 내주니까요. 하지만, 그다음 학기는 어떨까요."

비앙카는 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알프레도가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혼자, 뭔가에 홀린 듯 근육을 부풀리며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가는 알프레도.

"아마 초조할 겁니다. 왜? 더 배우고 싶을 테니까요. 하지만, 힘들 겁니다."

흑백 지대 부랑아가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구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때, 구원의 손길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소년은 크게 감동할 것이다.

자신이 한 번 그 손을 뿌리친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손을 내밀다니.

"저는 그날 후계자가 생기는 겁니다. 그 이름은, 아스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여운에 젖은 알프레도.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이런! 시간이 다 되었군요. 식사 준비가 되었는지, 주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알프레도는 그런 와중에도 투철한 직업 정신을 떠올리며, 황급히 방을 나섰다.

쿵!

"후."

비앙카가 한숨을 내쉰 건 그 직후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알프레도와 함께,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이건만.

그가 나가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저었다.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되겠어?'

안 될 거다.

그녀가 본 아스터는 자유로운 새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 하고, 어디에 속한다 해도 결코 평범하지 않으리라.

블란도가, 아니 명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어디 용병단에 들어간다면 들어가겠지.

하나, 굳이 알프레도의 단꿈을 깨트리지 않은 건....

'입학금을 지가 내겠다는데, 뭐.'

선뜻 아스터의 입학금은 물론이고, 향후 등록금까지 후원을 해 주겠다는 알프레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곁에 둘 만해.'

이 마음은 진심이었다.

사람을 곁에 두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꼭 알프레도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들여, 같은 그릇을 써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 방법은 차차 고민해 볼 일.

문득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

비앙카는 알프레도가 닫고 나간 문을 잠시, 아주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언뜻 스치는 동정심.

'알프레도, 불쌍한 인간.'

알프레도라고 바보가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허술한 작전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저리 확신을 갖는 건 아마....

'본인이 비슷한 방법에 당했기 때문이겠지.'

언뜻 전대 가주에게 전해 듣기로, 당시에도 선대 집사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 * *

식사를 마쳤다.

나는 가뿐한 기분으로 배를 두드리며, 별관에 딸린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블란도가.'

음식이 장난이 아니다.

본래도 좋았다.

트러블슈터 때는 구경도 못 했던 산해진미가 식탁 위로 올라왔는데....

오늘은 특히 더 끝내줬다.

마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라칸 산맥의 외뿔 산양 등심으로 만든 스테이크.

집중력을 고조시켜 주는 켄티 열매 샐러드.

'뇌물인가.'

그럴 수도 있다.

데미안의 아카데미행이 내게 달린 일이니, 부디 선택을 잘해 달라는 거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내가 수락을 했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처럼 좋은 기회를 넘길 리 없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제니온 아카데미.

동부 대륙에서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제니온이다.

수백 년 전 현자가 세운 교육 기관으로,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아니.'

내게 딱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탑에 들어가는 모든 책을 내가 채우는 건 불가능해.'

한 개인이 아무리 많이 책을 만져 봐야, 그 수는 작은 도서관을 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소한 후원이 있다면, 책은 얼마든지 채울 수 있지.'

어디까지나 소소한 후원이다.

그리고 그런 후원자를 구하는 데에 있어, 제니온 아카데미는 최적의 장소.

현자니, 뭐니 하는 이상향에 취한 놈들이 유독 많은 곳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실제로, 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제니온 아카데미.

'입학한다.'

분명 의뭉스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호시탐탐 내 코를 꿰려는 알프레도도 알프레도이거니와, 데미안의 어머니 비앙카의 말투에서도 분명 무언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나는 미래의 대현자.

무계획이 계획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으면, 그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마음가짐이 또 있을까.

'머무는 동안 라피테르도 살피고, 후원자도 얻고. 일석이조지.'

그렇게 비앙카와의 접견을 위해 복도를 거니는 도중, 다가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아스터 군, 마침 잘 오셨습니다. 부인께서, 아스터 군을 찾고 계셨습니다."

예의 그 사용인이었다.

그는 나를 비앙카에게 안내해 줬는데, 난 그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내뱉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겠습니다."

"...호."

이토록 빨리 답이 나올 줄 몰랐던 걸까.

비앙카는 한번 놀라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빠른 시일 내로 준비를 해야겠군요. 그동안 편히 지내시길."

그리고 그날.

왠지 모르게 별관 근처 어딘가에서 알프레도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헛된 꿈은 꿔야 맛이지.'

그래, 그런 거다.

◈ 11화. 왼손잡이군

비앙카와의 만남 후.

나는 평소 머물던 별관이 아닌, 블란도가 부지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블란도가는 명가라는 이름답게 그 부지가 웬만한 마을만큼 크고 넓었다.

'하나의 마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지.'

실제로 블란도가 부지 바깥으로는 사용인들과 마법사들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형성될 정도였다.

어쨌든, 지금 내가 걸음을 옮기는 곳은 블란도가의 외당.

마학관(魔學關).

마법 연구 기관이었다.

'설마 그 머저리 같은 방계 놈이 부관주의 동생이었을 줄이야.'

흠씬 두들겨 맞은 방계 놈이 날 찾아온 건, 비앙카와의 만남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 너, 이 새끼... 아까는 잘도 날 때렸겠다?

- 덜 맞았나 보구나.

- ...맞기는 충분히 맞았다. 지금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야. 우리 형님이 널 좀 보자고 하신다.

- 그래, 그 전에 넌 좀 더 맞자.

여기까지는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원래 누군가를 두들겨 팰 때는 그놈으로 끝난다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놈들은 언제나 고블린처럼 무리를 짓기 마련이고, 한 놈이 처맞은 뒤에는 정신을 못 차린 다음 놈이 찾아오니까.

물론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했다.

'머저리 다음에 부관주라니.'

마학관의 부관주가 어떤 위치인가.

마도 명가에서 주요 인물을 순서대로 쪼르르 줄 세우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못 들어도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권력자이다.

만약 직계를 제외하고 수를 꼽는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

'통상 부관주 직책이 그러한데, 거기에 혈통까지 받쳐 주니....'

직책과 혈통.

두 가지를 부족함 없이 갖춘, 그야말로 실세 중의 실세랄까.

비유를 하자면 고블린이 얼쩡거려서 혼내 줬는데 부락에 쳐들어가니 오우거, 아니 와이번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

하나, 내가 누구인가.

'아무도 아니지.'

전생에도 썩 대단한 신분은 아니었다. 트러블슈터였으니까. 그리고 현생에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흑백 지대 부랑아.

그러니 안 가도 괜찮다.

그리고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안 가는 게 사리 분별 잘하는 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탑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아직 탑은 없지만....'

세울 땅도 없다.

'책도 없지만....'

책 살 돈도 없다.

어쨌든 내 마음속에는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으니, 제아무리 블란도가 마학관의 부관주라도 위축될 필요가 있을까?

없다.

그렇게 도착한 마학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입구로 들어서자, 말단으로 보이는 마법사 하나가 앞을 막아서고 물어보았다.

나는 오전 시간, 방계 머저리가 말해 줬던 이름을 떠올려 대답해 주었다.

"헨지 님이 불러서 왔습니다."

"아, 네! 부관주님 말씀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말단 마법사는 금세 경계를 늦추더니, 손수 날 부관주실까지 안내해 주었다.

나는 마학관을 지나치며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한데, 뭐랄까.

'다 죽어 가는군.'

복도를 지나치며 마주치는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그 걸음에 힘이 없었다.

언뜻 열린 문밖으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으아아! 이게 아니라고!"

"안 돼, 안 돼!"

절망에 찬 비명.

잠시 걸음을 늦춰 그 틈을 들여다봤을 때, 보이는 것은 오직 시체뿐이다.

'....'

아니, 시체는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니까.

다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의 마법사들이 양피지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하, 하하. 저희가 항상 저렇지는 않습니다. 마침 주간 회의가 내일이라."

"아, 네."

더 무섭다.

주간 회의 전날이라 저렇다는 말은, 매주 저 꼴로 살아간다는 말인데.

'펜대 잡는 놈들은 어디나 저런가 보군.'

여기서 말하는 펜대란, 행정직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여기 마학관에 있는 이들처럼 이론적인 마법 원리를 연구하는 마법사들.

그들을 총칭한다.

나는 트러블슈터 생활을 하면서 이런 기관에 많이 잠입해 봤는데, 그 특징은 이랬다.

첫째.

'황량한 모발.'

펜대들은 모두가 머리가 휑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산길에는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도 자주 잡아 뜯다 보니까, 머리칼이 안 자라는 거지.

둘째.

'툭 치면 죽을 것 같지.'

진짜 죽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런 느낌을 받을 뿐이지.

실제로 내 동료 중 하나가 펜대를 툭 쳐 봤는데, 죽지는 않고 잠들었다더라.

아니, 자는 척하더라고.

'침입자한테 연구 과제를 뺏겨서 분노하기보단, 잠들 빌미가 생겨서 행복해한댔지.'

문득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말단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음, 1단계군."

"네?"

"아닙니다."

이 더운 날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보니, 벗겨지는 와중.

그 사실을 부정하고자 머리를 감추는 것이 1단계요, 드러내는 것이 2단계이다.

3단계가 되면 저기 저, 마주 오는 마법사처럼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린다.

'아, 아니군. 저 사람은 4단계야.'

머리를 민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두피가 반들반들 빛을 반사하는데 거기서부터가 바로 4단계였다.

'그리고... 왼손잡이군.'

오른쪽 머리가 유난히 반질거리는 게 그 증거였다. 간혹 이렇게 묻는 놈들도 있다. 왼손잡이인데 왜 오른쪽이 반질거리냐.

이유는 간단했다.

'왼손은 펜을 잡거든.'

머리를 쥐어뜯던 버릇이 남아서 놀고 있는 오른손이 머리를 자꾸 더듬는 것이다.

물론 5단계도 있었다.

'불가능한 마법을 연구하는 시점이지.'

머리칼이 자라게 하는 마법.

불가능하다.

역대 천재들조차 한 번씩은 발 담갔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

오히려 잘린 팔다리를 붙이는 게 더 쉬웠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광인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4단계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고, 하나의 훈장으로서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렇게 펜대들의 경지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부관주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참, 문을 여신 후에는 머리 위를 조심하시길."

"...?"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말단 직원.

나는 문 앞에서 잠시 그 말뜻을 고민하다가, 우선 노크로 내 존재를 알렸다.

"들어오십시오."

정중한 말투.

끼릭.

문을 열고 안쪽에 들어서자, 내 머리 위로 한 무더기의 서류가 떨어져 내렸다.

촤라락, 촥.

"...."

머리를 조심하라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문을 열고 들어선 부관주실은 그야말로 서류의 바다, 아니 공간 그 자체였다.

짙은 먼지에 기침을 콜록 내뱉는데, 내 앞으로 손이 내밀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반갑습니다, 아스터 군. 저는 헨지 폰 블란도. 제 동생을 혼내 주셨다고요?"

* * *

"우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늦둥이 동생이라 오냐오냐했는데, 설마 소가주의 손님에게 그런 무례를 저지를 줄이야."

헨지는 특이한 사내였다.

제 동생과는 딴판.

이름 모를 동생 놈은 여느 명가에서나 볼 수 있는 모자란 놈의 표본이었는데, 헨지 자신은 속이 꽉 찬 인격자랄까.

또한 그 모발은 어떠한가.

'풍성하군.'

풍성하다.

날 보며 사람 좋게 웃는 헨지의 머리 위로는 블란도가 방계 특유의 탁한 백금발이 찰랑이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백금발이 '있었다'가 아니라, '찰랑인다'는 거다. 그러니까 찰랑일 정도로 모발이 풍성하다는 뜻.

그리고 심지어....

'젊군.'

젊기까지 하다.

무려 블란도가 마학관의 부관주씩이나 됐는데, 그 나이는 서른 중후반. 제 동생과는 꽤 차이가 나지만, 부관주치고는 젊은 나이이다.

설마 블란도가쯤 되는 명가가 혈통으로 부관주를 앉히지는 않았을 테고.

'그만한 실력은 된다는 건데.'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헨지가 빙긋 웃었다.

하나, 내 속내를 알아채서 지은 웃음은 아니었다.

"아스터 군은 특이하군요. 동생의 말을 들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일반적인 흑백 지대 부랑아들과는 결이 좀 다르네요."

그 역시 나름대로 날 관찰한 것이다.

난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차라리 날을 세우고 들어왔다면 무어라 반응이라도 했을 텐데,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꽤나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저 선한 웃음을 봐라.

'...으음.'

본디, 난 상대가 누구든 침을 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그 이유는 누구든 내게 먼저 침을 뱉어 오기 때문이었다.

한데, 침은커녕 저런 선한 웃음이라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으며 뱉을 수 있다 자부했건만 막상 앞에 두니 이토록 어렵다.

이른바, 인간 상성이랄까.

하나 헨지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내가 곤혹스러워하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참,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을 권유받으셨다죠? 축하드립니다."

"아, 네."

그저 전해 들은 소식으로 말문을 트고.

"좋은 기회일 겁니다. 배울 것도 많죠. 사실은 저도 제니온 아카데미 졸업생입니다. 참고로 제 기수는 145기랍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아카데미를 운운하며 학연을 맺었다.

이쯤 되니 슬슬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마학관의 부관주, 헨지가 날 찾은 이유는 무얼까.

만약 동생의 복수를 하는 거라면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데큘란의 가주도 이처럼 날 괴롭게 하지는 못했으니까.

이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일까.

"아, 미안합니다. 제니온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다니까, 반가운 마음에 그만. 아무래도 혈족끼리는 동문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서요."

"아, 네."

그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본디, 흑백 지대 부랑아란 학연이나 혈연이랄 게 없다. 심지어 지연은 악연에 가까워서 밖에서 마주치면 서로 불신할 지경.

어쨌든 헨지는 그 말을 끝으로 화제를 마무리하곤 곧장 본론을 꺼냈다.

"사실 아스터 군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닙니다. 동생 일에 대한 사과를 할 생각도 있기는 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죠."

"이유라면...."

"그 전에 제가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헨지를 물끄러미 바라봤을 뿐.

뭐라고 해야 할까.

'흐음.'

투명한 눈동자. 그 눈매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희고 밝아서 선한 인상이 물씬 풍겼다.

그 눈은 또 어찌나 맑은지.

하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들여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읽을 수가 없군.'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눈동자에는 어느 정도의 감정이 비치는 법이다.

이는 철저히 훈련받은 암살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상하게도 헨지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즉.

'가면을 쓰고 있었구나.'

그냥 가면이 아니었다. 제 스스로조차 속일 정도로 정교하고 진짜 같은 가면이었다.

아니, 저쯤 되면 가면이 아니었다. 가면으로 쓰고 있던 모습이 본모습과 뒤섞여 버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겠지.

이 사실을 깨달으니, 난 그제야 자세를 편히 할 수 있었다.

"...?"

그 모습에 헨지는 의아한 듯 눈을 살짝 치켜떴는데, 그 선하고 맑은 모습에도 이제는 거북하지 않았다.

뭐라 해야 할까.

난 늪지대 고블린과 같아서 맑은 시냇물보다는 구정물이 더 편했다. 그리고 헨지는 세일 강처럼 둘이 뒤섞인 상태.

어쩐지 동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은 푸근함에, 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답했다.

"뭔지나 들어 보죠."

"그럼 묻겠습니다, 아스터 군."

"네."

"혹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겠습니까? 블란도가의 명운이 달린 일입니다. 혹, 목숨을 걸 수 있다면...."

헨지가 테이블 위로 한 권의 서책을 꺼내 올려놓았다.

"이 책을 드리죠."

"...!"

난 그 표지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당혹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블란도가의 핵심 비전,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근원.

치유의 빛.

그 술식이 적혀 있는 비전서였으니.

◈ 12화. 아, 그럼 죽이든가

난 가만히 서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헨지를 응시했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그때.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질문에 대해 궁리할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 눈앞의 보상을 보고 섣불리 답하지 마시길."

헨지가 내 대답을 막았다.

하나, 난 고개를 저었다.

"당장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해 보시죠."

"싫습니다."

헨지가 멍한 눈동자로 나를 담았다.

난 담담히 그 눈빛을 마주했는데, 헨지의 눈빛은 꼭 내게 제정신이냐 묻는 듯했다.

당연히 제정신이었으니,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뭐,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얘기나 들어 봅시다. 할 만하다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데, 그거나 한번 들어 보자는 심정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도? 만약 듣고도 거절한다면 제가 아스터 군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헨지의 눈동자에 언뜻 스산한 빛이 스쳤다.

그것은 명백한 살기.

그러니까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은 진심인 것이다.

내 말투가 삐딱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 그럼 죽이든가."

"...."

잠깐의 침묵.

스스스―

부관주실로 끈적한 살기가 들어차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파라락, 파락.

수백 장의 서류들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가운데, 티 없이 선하던 헨지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눈빛도 좀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가면을 완전히 집어 던져 버린 본모습이랄까.

"하하, 재미있군요. 아스터 군은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소가주의 위세를 믿고 그러는 거라면 크게 후회할 텐데...."

그 눈동자가 내 몸을 훑었다.

냉혈 동물의 그것과 같은 기질.

하나, 나도 지지 않았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죽음이 다라고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아스터 군. 제 개인 공간에 가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여 줄 수 있거든요."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광기(狂氣)는 유전인가.'

헨지의 눈빛은 보통 미쳐서는 나올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블란도의 가주, 데미안의 아버지 역시 한번 관찰해 보고 싶었으나...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차' 싶었다.

'아, 난 두 번 뒈지는 거구나.'

하지만 괜찮다.

솔직히 예상은 했다. 이런 성격이면 오래 살지는 못하겠구나.

전생에는 얕은 야산의 고블린처럼 가늘고 길게 연명하다가 끝내는 와이번도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지만....

이번 생은 노는 물이 너무 커졌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내가 먼저 갈까?"

"정말 후회...."

...라고 말하는 즉시, 무어라 입을 열려던 헨지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 거리라면, 마법이 아니라 주먹질이 최고였다. 그리고 내 주먹질은 평범하지 않았다. 전생의 동료들과 연구한 기술을 가미한 것이니까. 하지만....

'역장에 막히겠지.'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견제 수. 전투의 흐름을 내게 가져오기 위한 자그마한 조약돌이랄까.

...라고 생각했는데.

뻐억.

"...?"

경쾌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우당탕!

허공에서 한 세 바퀴 휘돌고는 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지는 헨지.

그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몇 차례 팔다리를 떨어 댔는데, 딱 봐도 쇼크를 먹은 듯했다.

내가 때렸지만, 적잖이 황당했다.

'왜... 안 막지?'

헨지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쉬이 막을 수 있을 만한 타격이었다. 그래서 이 타, 삼 타를 연달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절호의 기회!

나는 재빨리 달려가 헨지를 즈려밟았다. 아니, 즈려밟으려 했다.

번쩍―

환하게 비추는 빛.

블란도가의 핵심 비전, 치유의 빛이 동반하는 현상이었다.

"후후. 아스터 군, 시험은 합격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군요. 그나저나 희한한 비전을 쓰는 것 같던데...."

헨지는 좀 전처럼 선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는데, 그 모습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나, 그 팔다리가 몇 차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봤기 때문일까. 처음과 같은 귀족적이고 엘리트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그런 헨지를 보며 내가 물었다.

"한데 시험이라면...?"

보통이라면 믿지 않겠지만, 나는 믿었다.

왜냐하면 헨지 정도 되는 마법사가 공격을 못 막을 리 없거든.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거다. 마법을 발현한 것도 아니고, 마법사의 주먹질이 이처럼 빠르고 위력적인 경우는 없었으니까.

그런 사소한 실수는 뒤로하고.

헨지가 답했다.

"흠, 흠흠.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사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근데 또 블란도가 사람이면 안 되는지라...."

다시 자리로 돌아온 헨지.

하나, 기분 탓일까.

파르르.

그 손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하나 내 기분 탓이 아니었는지 은은하게 흐르는 빛무리. 헨지가 치유의 빛을 다시 시전한 것인데, 그 뒤로 떨림이 완전히 멎었다.

잠시 후, 헨지가 말을 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