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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화. 흑암룡 (2)

스칼이 홀로 아르카나 대륙을 누볐던 이유는 하나였다.

하나같이 시시했기 때문이었다.

샤이닝, 천하통일, 보헤미안....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들의 목표가.

-"우리가 손을 잡으면 샤이닝을 넘어설 수 있다."

-"이제부터 솔로 플레이는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부디 우리에게도 기회를...!"

현실과 완벽히 다른 세계.

아르카나에서 추구하는 게 고작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라니.

그런 건 현실에서도 실컷 하고, 해왔던 스칼이었으니까.

그러나 호열만큼은 달랐다.

그는 강하지만, 강함을 내세우지 않았다.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언제나 스스로 최전방에 나서서.

타인을 마음부터 움직이게 했다.

거기까지는 단순히 호기심이 생긴 수준이었다.

-"이호열이라."

그저 나처럼 특이한 녀석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건방지게 말을 뱉지 않았었나?

왜, 세계 각국의 취재진 앞에서.

-"떨거지는 필요 없다. 이호열, 나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대단하신 악룡 사냥꾼 씨."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언동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만물의 왕을 굴복시키고.

그 위에 오르고 말겠다는.

허무맹랑한 목표를 비웃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호열이었으니까.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스칼은 호열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웃음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지.'

언제나처럼.

더없이 진중한 태도와 자세.

가끔은 자신조차도 무리라고 생각했던 목표를 듣고도 호열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첫 만남이 바로, 스칼이 성전 연합군에 합류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까.

"장담하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그대는 흑암룡에 다다를 수 없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도.

스칼은 찻잔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호열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흑암룡.... 모든 드래곤들이 울부짖었던 이름인만큼. 유달리 위대한 드래곤이겠지요. 어쩌면 용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용기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며 알게 된 정보가 몇몇 있었다.

아득히 먼 과거.

마탑과 드래곤이 전쟁을 벌였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대부분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땅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만물의 왕이라 불리는 드래곤들 사이엔 뚜렷한 서열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모든 왕들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스칼은 진지한 감상을 뱉어냈다.

"어째서 그토록 단호히 말씀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진정한 용기사라는 원대한 목표.

그것만 보고 달려온 스칼이었거늘.

흑암룡의 위엄 앞에서는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귀한 말씀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열 경."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호열이 조언을 해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스칼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야 목격하지 않았던가?

아르카나 대륙은 넓고, 드래곤은 많다는 사실을!

흑암룡을 제외하고도 목표로 삼을 드래곤들은 많았으니까.

이내, 스칼의 얼굴에 다시금 화색이 돌았다.

스칼이 호열에게 물었다.

"그보다 노룡, 유낙서스는 무사한 겁니까?"

.

.

.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게, 십 년도 넘게 신비주의로 살아왔던 스칼이 맞나?

어째,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데...?

스칼이 돌아가고 나서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다.

"이런."

오죽 수다를 많이 떨고 갔으면.

그랑펠 입에서 '이런' 소리가 다 나왔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스칼.

'주고받은 게 있어서 넘어간 거지.'

평상시 그랑펠의 뒤끝을 고려하면....

삼고초려가 뭐냐.

백고초려를 해도 다음부턴 만나주지 않았을걸.

그러나 이 순간.

나, 이호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있었으니.

'...어찌어찌 넘어갔구나, 흑암룡.'

흑암룡을 타고 싶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땐,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한테 목마라도 태워달라는 건가, 싶었거든.

당연하게도.

그랑펠의 격식에 누군가를 목마를 태운다는 있을 리가 없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거에도 질색하는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고.

'하나뿐인 내 조카, 아랑이를 태우는 거라면 또 몰라.'

그러니 냉랭한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스칼은 내가 흑암룡인 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래서 사람이 죄짓고는 편히 못 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혼자 식겁해서는, 과민반응을 하고 말이야.

그래서 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의 말투가 하도 단호했어야지.

스칼이 낙담하는 건 아닐까, 싶었거든.

물론.

'용밖에 모르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스칼은 곧장 다른 드래곤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어쨌거나 현명하다, 스칼.'

흑암룡 말고도 탈 수 있는 드래곤은 많으니까.

물론, 드래곤 최초 탑승 업적은 내가.

나도 모르게 습득하기는 했는데....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선 그대도 노력해야겠군."

그정도 시련은 감당해라, 스칼...!

업적 효과 없이 드래곤 위에 올라타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마는.

나도 경험해서 알게 된 건데. 중간과정을 건너뛰는 게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나야 워낙 뻗쳐놓은 게 많아서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다.

워낙 파놓은 살 구멍이, 우물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부족한 중간과정이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보충하는 건 내겐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업적을 마냥 부러워하지 마라.

'...이 꼴을 보면 부러워할 리가 없겠지만.'

스스슥─

지치지도 않고 집어 든 건 역시나 깃털펜.

스칼과의 수다에 빼앗긴 시간을 고려하면 찻잔을 기울일 새도 없겠구나.

이걸로 끝이 아니다. 마탑에도 수석으로서의 할 일 또한 남아있을 터.

'...출탑 신청이야 고양이가 처리했다고 해도.'

내가 자초한 막중한 업무가 추가되지 않았던가?

접속기 사용 허가 신청서 심사.

그 대상은 마탑 마법사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출탑 신청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청서가 집무실 책상에 쌓여있겠지.

그걸 처리하면 정말로 끝 아니냐고?

그럴 리가 있겠냐.

새롭게 갱신된 클래스 퀘스트.

거기에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지긋지긋한 퀘스트 목표가 있는데.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구나.'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얼어 죽고.

현실에선 돌아오자마자 과로사를 하게 생겼다.

내 팔자가 이렇게 기구하다....

*

아르카나 대륙.

아이언 캐슬 호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지도자, 체인워커.

대장장이, 월스와일.

조종사, 거너.

각자 맡은 책무를 떠나서.

모든 드워프가 망치를 두들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쇳소리가 아이언 캐슬 호 구석구석에서 울린다.

깡깡!

두꺼운 손가락이 저릴 정도로.

쉴 틈이 없다.

거너가 맺힌 땀을 간신히 닦아내며 소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종사 따위 거들떠도 안 봤지, 내가!"

매 비행마다 목숨을 거는 만큼 조종사에겐 장점이 있다.

잡다한 아이언 캐슬 호의 업무에서 제외되는 특혜 말이다.

단지, 이번 사태가 잡다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거너가 아직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갑자기 드래곤이, 그것도 떼로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드워프 다리 길이가 배로 늘어나는 상황인가, 대체!"

아이언 캐슬 호의 유일한 약점.

악천후.

고도로 발달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아이언 캐슬 호라고 한들.

자연 앞에서는 그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는 법.

"추락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게, 거너."

"물론, 그건 다행이지만...."

"그럴 시간에 못 하나라도 더 박는 게 어떤가?"

"에휴."

그러니 드래곤이 나타나고.

울부짖던 그 시간은.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았다.

깡깡!

체인워커는 망치를 두들기다가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슬퍼서 이런 비를 뿌린 겐가...."

전례 없던 폭우였다.

얼마나 세차게 내렸는지.

아이언 캐슬 호에 물이 샐 정도였으니 말이다.

드래곤이나 엘프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긴 세월을 살아온 자신들이었다.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월스와일이 퉁명스럽게 입을 연다.

"말하지 않았나? 흑암룡 때문이겠지."

"흑암룡이라...."

"그게 뭔지는 몰라도 으슬으슬하구만."

"어째서인가?"

"전례가 없던 일이니 말일세, 체인워커."

드래곤 하나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놀랄 일이었거늘.

그 머릿수가 대략 십여 마리는 되는 듯했다.

드래곤도 아니고.

드래곤'들'에게.

저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대륙에 변화가 찾아오겠지."

확신할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드래곤들.

맑게 갠 하늘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으니까.

"저들이 그 흑암룡이란 걸 찾아낸 것 같으니."

"...솔직하게 두렵군."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깡!

월스와일은 망치에서 손을 떼고 대륙을 바라봤다.

세찬 비가 먼지조차 말끔히 씻겨내린 덕분에 시야가 훤히 트여 지평선 너머까지 또렷이 보였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제국은 물론, 악마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양이니."

만물의 왕이 울부짖었으니 만물에게도 그 소리가 전해졌을 터.

체인워커와 월스와일.

두 드워프는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새로운 전설이 쓰일 수밖에 없겠어."

그 이름 하야.

흑암룡 전설.

체인워커가 월스와일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서운하지 않은가, 우리 전설의 대장장이께서는?"

전설에는 힘이 담긴다.

전설을 써내려 가 보았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월스와일이었다.

"서운하다라."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한들.

전설이라 불릴 것들은 많지 않다.

서운하지 않느냐고, 물은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흑암룡의 전설에 오랫동안 회자될.

귀철의 탄생이 퇴색되고 말았으니.

그러나 월스와일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체인워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설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말이지."

귀철의 탄생 전설이라.

그 주인인 호열의 활약에 따라.

나중에야 더더욱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수 있겠지만....

당장의 흑암룡 전설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저쪽의 전설은 그야말로.

아르카나 전역에 울려 퍼졌다고 하더라도 무방하다.

더 나아가서.

"드러낸 게 아닌, 언급만으로 세상을 떨게 하였네."

실체, 흑암룡은 아직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서운함을 느낄 이유 따윈 없었다.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도 되지 못했으니까.

다만, 여전히 우려할 뿐이었다.

"부디 새로운 전설이 날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

그런 의미에서 체인워커와 월스와일은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채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거늘.

공교롭게도 두 드워프는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경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별안간.

하늘에서 무언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갈라지는 허공.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형체.

드래곤이었다.

"!!!"

수리 도중.

그 탓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아이언 캐슬 호였다.

드래곤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체인워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젠장, 만물의 왕님께선 귀까지 밝으신 건가?"

"난들 알겠나."

"빌어먹을, 이런 최후는 사양하고 싶은데."

아이언 캐슬 호의 창을 완전히 시야를 가리는 드래곤의 육체.

그런데, 그 외관이 어째서인가...?

낯설지 않았다.

"흠?"

월스와일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비바람이 몰아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들.

한 차례 목격했던 드래곤이기에 익숙하게 느끼는 것인가 싶었거늘.

그게 아니었다.

익숙하게 보이는 건 오직.

찬란하게 빛나는 '날개'뿐이었으니까.

설령 크기가 다를지언정.

"...저, 저건?"

월스와일.

대륙 최고 대장장이의 눈썰미는 곧 알아차렸다.

날개 위로 겹쳐서 떠오르는 잔상.

확실하다, 찬란하게 빛나는 저 드래곤의 날개는....

호열이 착용하고 있던 마도구와 같은 것이다!

"...저, 저게 어떻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 가능성.

그러나.

그 잡생각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살랑─

아이언 캐슬 호.

고고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정령.

하이엘이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드래곤에게 나아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으니까.

"비로소 주군의 뜻을 깨달았군요, 유낙서스."

그 말에 드래곤이 화답했으니까.

"흑암룡을 의심하다니, 나의 명백한 불찰이었군."

그 짧은 대화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체인워커, 월스와일, 거너....

아니, 모든 드워프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서, 설마 그 흑암룡이 호열 경이었단 말인가...?"

◈ 254화. 전설이라 부르라 (1)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치고 해는 쨍쨍했건만, 아직도 몸은 으슬으슬 떨렸다.

역시,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모자란 아우는 형님을 흉내 낼 수 없나 봅니다...."

드래곤의 출현.

계란으로 바위 치기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쉬는 신속히 움직였다.

혹시 모를 드래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하지만 드래곤과 마주하는 순간.

내쉬는 얼어붙었다.

황궁 마법사란 칭호가 무색하게도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래서야 황제 폐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형님....

"분명, 형님이셨더라면...."

언제나 화룡을 넘어서겠다고 다짐하시던 형님이셨더라면...!

드래곤 앞에서도.

그 불같은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으셨을 텐데.

물론, 그 화룡이 진짜 드래곤이 아니었거늘.

누군가 그 점을 지적해도.

낙담한 내쉬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

자책하던 내쉬를 일깨운 건.

그의 주군, 황제였다.

황제의 음성에 내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다짜고짜 면목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송구하게도 소인은 황궁 마법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드래곤에 위축되어 본분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내쉬에게 다가갔다.

"...?"

그러고는 어리둥절해하는 내쉬의 어깨를 두들겼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내쉬. 진정한 왕 앞에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게 되는 것은. 내게 용서를 구할 것 없네. 애초에 나부터도 똑바로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으니."

황제의 시선이 내쉬에게서 창밖, 안토니움의 전경으로 옮겨간다.

악마에 이어 반군마저 막아냈던 한 수도성.

덕분에 돌았던 활기가 무색하게도.

안토니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황제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용서를 구할 것도, 자책할 것도 없네. 지금은 그저 감사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물러간 것에 기뻐하게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물론, 쉽지 않으리란 걸 안다.

이 순간, 안토니움이 고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드래곤이 자취를 감춘 원인.

그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흑암룡.'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는 제국에서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대다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책으로 엮어낸 것뿐.

그러니 진실이라고 칭할 만한 것은....

'역시, 용마대전밖에 없겠지.'

마탑과 드래곤의 전쟁.

황궁에 남겨진 몇 장 남짓한 기록은 선대 황제들이 마탑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받아온 유일한 답례품이었다.

수백 가지의 마도구를 마탑에 내어주고 받아온 게 고작 몇 장의 종잇장이라니.

누군가는 제국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나조차도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

하지만 드래곤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

몇 장 남짓한 용마대전의 기록은 제국에게 귀중한 지표가 될 터였다. 그리 생각하고 조금 전까지, 자신도 그 기록들을 살펴보고 왔으니까.

그러나.

'마탑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라.'

용마대전의 기록에도 흑암룡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고뇌 중이었다.

아득히 먼 과거, 용마대전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흑암룡이다.

그런 존재가 어찌 드래곤들에게 이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심히 의문이구나."

문득, 황제가 황궁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바닥 너머, 황궁의 지하를 바라보았다.

『전황의 서고』

지하에는 그것이 있다.

질문에 관한 해답이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한다면, 그 해답을 알려주는 『전황의 서고』가 있다. 흑암룡의 존재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당장에라도 의문을 해결할 수 있겠지.

허나.

"...."

황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진정으로 그것을 사용할 때가 맞는가?'

『전황의 서고』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많다.

내쉬를 비롯한 대신들은 물론이요, 지금은 모험가들의 세계에 있는 하르콘도 그 존재에 관해서는 알고 있을 터.

그러나 그 답변을 듣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 황제, 자신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여태껏.

그것을 사용해 온 이들은 선대 황제들밖에 없었으니.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르콘.'

황제가 고개를 떨군 채 고뇌하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황궁에 내리쬐던 따사로운 햇살이 사라졌다.

황제와 내쉬는 순간 흠칫했다.

"...?"

혹,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다시금 드래곤이 나타난 건가.

재차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폐하?"

내쉬가 말꼬리를 흐린다.

태양을 가린 건 드래곤도, 소나기를 품은 먹구름도 아니었다.

익숙한 비행정.

드워프들의 아이언 캐슬 호였다.

그렇기에 황제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드워프들이 어찌하여 다시...?"

당분간 안토니움에 들를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혹시, 무언가 위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황제는 내쉬에게 명했다.

"저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내쉬."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러고는 곧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와 마주했다.

황제의 추측은 절반 정도 맞았다.

체인워커가 다급히 입을 열었으니까.

"긴히 전할 소식이 있어 제국을 다시 찾아왔소."

그래, 소식은 다른 의미로 급한 소식이었으니까.

"제국, 그대들에게는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을 시간조차 부족하오. 한시라도 빠르게 움직여 제국의 세력을 복구하고 과거의 영광을 수복하시게!"

"...그게 무슨 말인가, 드워프여? 그대들도 보아서 알고 있지 않은가? 드래곤이 나타났네. 백성들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겐가?"

"충격에 빠질 일이 아니니까."

"...무어라?"

"그건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니 말일세."

"두려워할 게 아니라니, 대체 무엇이 말인가?"

되묻는 황제에게 체인워커가 말을 잇는다.

"흑암룡."

.

.

.

체인워커에겐 확신이 있었다.

"경이라면 대륙이 두려움에 떠는 걸 원치 않겠지."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부정적인 감정이 악마들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호열이니까.

지금이야 인간과 악마, 모두가 드래곤 앞에 벌벌 떨고 있지만....

"악마는 주제 파악이란 걸 알지 못하는 족속이니."

미련한 악마는 두려움조차 망각하는 족속.

이 평화는 절대 오래갈 수 없으리라.

체인워커는 결단을 내렸다.

"맹약이라는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이를 기회로, 대륙에 깔린 부정적인 감정을 반전시키겠다고.

그걸 가능케 하는 데에는 많은 게 필요치 않았다.

그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안토니움 본성 위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

안토니움의 백성들이 우려가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본다.

체인워커는 다시금 아이언 캐슬 호에 올라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월스와일이 물어왔다.

"체인워커 자네, 제대로 전달한 게 맞는가?"

드래곤들이 울부짖던 흑암룡.

그가 바로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호열이다.

그런 사실을 전해 들은 것치고는....

백성들은 물론.

황제의 표정 또한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가?

그 우려에 체인워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월스와일, 자네라면 알고 있지 않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전설이 어떻게 전해져 내려오는지를."

"...?"

수수께끼 같은 말에 월스와일은 인상을 구겼다.

뜨거운 용광로 앞에 붙어사는 만큼 다른 일 앞에서는 인내심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월스와일이었으니. 체인워커는 곧장 핵심을 말했다.

"제아무리 전설적인 사건과 존재라고 해도 결국, 인간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전설이라 불릴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무언가를 전설로 격상시키는 건 인간들의 몫이라는 것을."

"...!"

그랬다.

아무리 대단할지언정 널리 알려지지 않으면 전설로 거듭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널리 알리는 건 오로지 인간들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렇구만...."

은둔이 일상인 자신들은 물론.

드래곤 혹은 엘프가 무언가를 널리 퍼트릴 이들은 아니었으니까.

체인워커가 흡족한 눈빛으로 안토니움을 지켜본다.

"우리 성전 연합군에게 필요한 건 반전. 그것도 극적인 반전이네, 월스와일. 두려움에 뒤덮인 아르카나 대륙을 뒤집을 수 있는, 큰 거 한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길세."

월스와일이 물었다.

"그걸 위한 담금질이라는 건가?"

체인워커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것도 보통 공을 들인 담금질이 아니겠지.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느냐에 따라 그 전설이 가지는 무게감 또한 달라질 테니까."

체인워커가 껄껄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보다 더한 적임자도 없지 않겠는가!"

.

.

.

황제가 말한다.

"그대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뱉으면서도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도 겁먹지 않았던 것처럼 내뱉고 있거늘.

악마 앞에서.

반군 앞에서.

그리고 드래곤 앞에서.

누구보다 두려움에 떨었던 자신이었으니까.

"...."

그러니 지금의 침묵이 조금도 야속하지 않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성의 시선에서.

존경심이나 경외 따위를 기대하기에는.

황제로서 증명한 게 무엇 하나 없었으니.

'부끄럽지 않다면, 내가 바로 악마일 터.'

광활했던 제국의 영토.

그러나 현시점에서 영토라고 할 수 있는 건 수도성, 안토니움.

그리고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재건되었다는 프로스트뿐이었다.

나머지 영토와 그 백성들을 살피지 못한 시점에서 자신은 더는 황제라 불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러니 황제의 이름으로 고한다."

자신은 필사적으로 황제를 연기해야만 한다.

그래, 허울뿐인 황제일지라도.

자신의 말에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 힘을 '그'에게 실어줘야 했으니까.

"그대들은 흑암룡을 두려워 마라."

이럴 때는 어린 시절, 황자로서 받아온 교육이 도움되었다.

철저한 연습 끝에 내뱉은 발성과 화법은.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황제는 알고 있었다.

'저들을 진정으로 일깨우는 건 내가 아니다.'

자신은 징검다리 역할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더 위엄 있게 지껄였다.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다면 결코 낼 수 없었을.

위엄 넘치는 황제의 목소리를 뱉었다.

"그대들은 흑암룡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황제의 시선이 향한 곳엔 드레드센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 말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역시나.

당사자인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들이었다.

제국 끝자락에 있는 드레드센이다.

제국의 소식 같은 건 닿지도 않는 산골 마을.

게다가 자신들은 안토니움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흑암룡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고...?

"...!"

란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 설마?"

그렇다.

그 설마가 맞다는 듯.

황제의 발언이 이어진다.

"흑암룡, 그는 드레드센의 구원자."

"그와 동시에 안토니움의 영웅이자."

"한없이 깊은 어둠."

황제의 입에서 전설이 공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모험가, 이호열. 그가 바로 흑암룡이다!"

"...!!!"

*

...귀가 간지럽구나.

마탑에 복귀.

집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귀가 간지럽다니.

좋지 않은 징조다, 이거.

그러나 그랑펠의 격식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행동 따위.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으니.

애써 가려움을 무시하고 책상으로 눈을 옮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탑 출탑 신청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출탑 신청서에 찍힌 고양이 발바닥이었다.

마르셀로가 말했던.

탑주가 대신했다는 업무가 출탑 신청서 심사인가?

나는 통과된 출탑 신청서를 살펴보다가 읊조렸다.

"그대의 성의는 충분히 알았다."

근데 그....

있으나 마나 한 배려라는 게 있다.

지금 탑주의 호의가 그러했다.

누구에 빚지고는 못사는 그랑펠이니까.

'그래서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지만.'

정말, 고양이 세수에 버금가는 고양이 일 처리구나...!

아니,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출탑 허가를 찍으면 어쩌자는 거야?!

"허나, 바로 잡아야 할 건 바로 잡아야겠군."

내가 다시는 탑주, 그 고양이를 믿나 봐라.

물론, 모든 건 그랑펠의 까다로운 놈의 성격 탓이었으니.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 성격엔 주고받는 게 최선이다, 그래.'

그런 의미에선 모두에게 당부하고 싶어진다.

'다들, 날 위해서 뭐 할 생각은 자제해 주라.'

그 뒷감당에 시달리게 될 내가 불쌍하다면 말이야.

그나저나 서두르자.

오늘이 가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많다.

말했다시피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

체력 단련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하는 나였으니까.

서둘러 출탑 신청서부터 수정하자고.

'그러니.'

나는 깃털펜을 휘갈겼다.

스스슥─

유감스럽게도.

이번 출탑 신청서도 불합격으로 정정하겠다.

벤쉬 윌리엄 선임.

.

.

.

[전설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당신의 전설이 실체화합니다.]

◈ 255화. 전설이라 부르라 (2)

호수 위의 백조는 언제나 고고하다.

발버둥 치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묻는다면....

지금 내 모습이 딱 백조 꼴이었거든.

집무실 책상으로 들이 쬐는 아침 햇살.

나는 뻔뻔하게도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늦었군."

세상에.

태양에게 게으르다고 핀잔을 주는 건 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보다 밤을 꼬박 새운 주제에.

일찍 일어난 척하지 마라, 그랑펠.

달칵─

녹차로 하루를 시작하며 지난밤을 되돌아본다.

잠시 숨 돌릴 틈조차 없었지.

특히 새벽부터 시작된 단련 퀘스트는 유달리 고되게 느껴졌다.

'서러워서 울 뻔했다, 진짜.'

[집념 : 3]

상승한 집념 1포인트.

나의 개고생을 시스템조차 알아주지 않았으면.

정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다 큰 놈이 엄살을 부린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직접 시달려 봐야 엄살이 아니란 걸 알 텐데.'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이 개고생이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고되더라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참을 수 없는 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이 뻔뻔함이다!

억울하다.

억울한 걸 넘어서 따져 묻고 싶어진다니까?

아주 그냥 한결같은 것도 정도가 있지.

"기대가 되는군."

이 정도면 성인군자 아니냐, 그랑펠?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시달리다가 억울해서 죽겠다.

하지만 이런 절규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망설일 것은 없겠지."

나도 슬슬 체념의 단계다.

아니, 체념이라기보다는....

앞서서 생각하게 된달까.

'고집이 꺾이길 기대할 바에는.'

나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굴려본다는 거다.

내뱉었던 대로 보름치 일과를 하루 만에 끝난 나였다.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 지속 효과도 끝났겠다.

망설일 것 없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해야겠지.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까 말이야.'

이번엔 되도록 빠르게 현실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사실 지난번이 특이한 경우였다.

차원의 틈과 절대영도의 효과가 겹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던 거였으니까.

'아르카나 시간으로는 두 달인가.'

보자, 시간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이번엔 아무리 늦어도 현실 시간으로 하루 내에 복귀할 계획이었다.

밀렸던 일과를 처리하면서 확실하게 느꼈거든.

"내겐 찰나조차 아쉬운 상황이니."

앞으론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되겠구나, 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라, 누구 때문인지 말은 안 하겠다만....'

아주 그냥 그놈의 긍지 때문에.

나서서 떠맡은 일이 한가득이잖아? 특히나 접속기 사용 허가 심사까지 짊어진 시점에서 정해진 일과가 배로 늘어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드륵─

그러니까 이렇게.

집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을 열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몇 개 있다.

그래,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가넷 홀.

우선, 대여했던 마도구를 반납해야 한다.

모든 마도구를 반납하겠다는 건 아니다.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만큼.

시슬리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일부는 반납. 일부는 대여 기간을 연장하겠다."

그저 절차를 무시할 수 없는 깐깐한 긍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한 탓일까.

숙련 마법사, 라란은 말꼬리를 더듬었다.

"안녕하세요, 이호열 수석님! 건네주신 마도구들은 반납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마도구의 대여 기간을 연장하실 필요는 없으시지 않을까요...?"

촤르륵─

그러면서 양피지 책자를 펼치더니.

내가 자필로 적어넣은 대여기간을 보여준다.

확실히, 내 필적으로 틀림없이 적어놨구만.

──────

대여기간 : 사망하는 순간까지.

──────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다.

...나, 이쯤 되면 귀찮은 일을 자처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나서서 남들이 착각할 거리를 뿌리고 다니는 수준이잖아, 이건.

'전부 네 탓이다, 그랑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한 번 억울하구나.

그러나 별수 있으랴.

이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젊은 날의 과오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다. 대여기간이 다했으니 연장하겠다."

하나 마나 할 정도로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얼어 죽었다는 사실은 나밖에 모른다. 용의 신전에서 내 최후를 지켜봤던 드래곤들조차 내가 얼어 죽었는지는 몰랐거든.

그저 쨍그랑─

소리가 나더니만.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만 했지.

드래곤도 몰랐던 죽음을.

적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죽음을.

내 입으로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게 될 줄이야.

이쯤 되면 긍지가 아니라 긁어 부스럼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적잖이 당황스럽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이 성격이 또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할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스슥─

나는 깃털펜으로 대여기간을 새롭게 명시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얌전하게 좀 적자구나.

그랑펠.

"하루면 충분하겠군."

"...네, 네!"

보자, 이걸로 한 점의 마도구를 제외.

반납 혹은 대여기간 연장을 끝마쳤다.

누군가 나머지 한 점은 어디에 팔아먹었느냐고 물어본다면....

역시나 한 치 부끄럼 없이 당당히 말하는 수밖에 없다.

"백색의 겉날개에 관해서는 절차에 따라 진행하지."

"아, 넵! 그런데 그.... 반출된 마도구가 분실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어서요! 절차상에 그 사유를 확실히 명시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서요...."

그렇게 어렵사리 말할 것 없다, 라란.

어차피 자진 납세하려고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절차인 이상.

"절차에 예외는 없어야 하는 법. 훌륭한 일 처리군, 라란 숙련 마법사."

내가 거절할 수 있겠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라란에게 곧장 말을 이었다.

"나보다도 날개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나보다도 날개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백색의 겉날개를 건네주고 왔다."

"...네?"

어째 육하원칙을 지키는 법이 없구나, 그랑펠.

맞는 말도 참 거창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있어.

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마법부여학 숙련 마법사 주제에 수석님께 주제넘은 참견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백색의 겉날개를 이호열 수석님만큼 적절히 활용하실 수 있는 분은 아르카나 대륙, 전역을 샅샅이 뒤져도 있지 않을 거라고. 마르셀로 수석님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민망하게도 그런 고평가를 해줬구나, 마르셀로.

사실 백색의 겉날개의 효과야, 나한테는 맞춤 수준이지.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마력에 시달릴 필요가 적어진 지금.

내겐 그리 간절한 마도구까지는 아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나보다는.

날개를 상실한 유낙서스에게 절실한 마도구라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그러한 사정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허나, 날개는 날개를 잃은 이가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할 터."

"...날개를 잃은 이라면?"

"날개를 잃은 노룡을 말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드래곤.

노룡이란 단어에 라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놀라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역시나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용마대전의 앙금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이번만큼은 그 입방정을 칭찬한다, 그랑펠.

마탑과 드래곤.

이제부터라도 사이좋게 지내야지, 같은 편인데.

왜, 백색의 겉날개가 그 화해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명분이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마도구를 분실한 책임도 무마할 수 있을 터.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확실히, 단순한 분실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있어 보이기도 하고?

'뭐, 넘어갈 수 없다고 해도.'

청렴결백.

개처럼 벌어서 쓰지도 않는 내가 아니던가.

억 소리 나는 마도구라고 하더라도 배상금을 걱정할 이유는 없겠지.

이내, 나는 한층 가벼운 걸음으로 가넷 홀을 빠져나왔다.

'이제 하르콘만 기다리면 되겠네.'

어째서 마탑에서 하르콘을 기다리느냐 묻는다면.

접속기가 마탑, 크리스탈 홀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게 처음으로 접속기 사용 허가를 받은 건.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었으니까.

*

하르콘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의 뜻은 알아들었네."

인자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 눈빛에는 맹수의 기세가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과 마주한 여인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알아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검게 늘어진 긴 머리칼.

간혹가다 시선이 마주치기는 하지만.

이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하하...."

그것도 모자라 멋쩍은 듯 웃는다.

누군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여인이 자신 앞에서 잔뜩 위축됐다고 평가하겠지.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훌륭한 시선 처리로군.'

상대는 제국 역사상 최흉의 죄인.

그림자 용병단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하르콘은 침묵한 채 키치를 바라보았다.

저 목에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있다.

무려 작은 왕국 몇 개나 사들일 수 있을 정도의 거액.

일개 용병 단장 목에 그런 현상금이 붙을 수 있었느냐, 묻는다면.

'굵직한 사건만 나열해도 충분하다.'

귀족 암살, 청부살인, 보물 강탈....

그런 건 그림자 용병단 기준에서 악행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

전국시대부터 그림자 용병단은 뒷세계의 거물이었으니까.

하르콘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악마가 등장하기 이전. 가장 악마에 가까웠던 존재들.'

과거, 그림자 용병단의 악행은 악마와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순간, 하르콘이 키치와 말을 섞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르콘은 방금의 대화를 곱씹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네, 얼마든지요!"

-"그대는 과거를 후회하는가?"

-"갑자기요? 으음, 후회하느냐고 물으신다면...."

키치는 더없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후회하고 있습니다. 더없이요."

하르콘은 호열을 떠올렸다.

'경이라면 분명....'

저들의 과거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겠지.

악마에게는 자비가 없지만.

인간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경이니까.

왜, 그림자 용병단을 성전 연합군에 합류시킨 결정만 봐도.

호열은 저들을 신뢰한다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하르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기회를 그대에게 양보하지, 키치."

"...진심이신가요?"

"물론."

"와아!"

키치는 그제야 하르콘과 눈을 마주쳤다.

"누구보다 제국과 황제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셨을 텐데....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르콘 단장님!"

"아니, 안토니움과 폐하가 무사하다는 것은 경을 통해 확인한 참이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건 단순한 욕심일지도 모르지."

"하르콘 단장님의 배려 때문이라도 반드시 되찾아오겠습니다!"

하르콘이 키치에게 아르카나 대륙 진입 기회를 양보한 이유는 간단했다. 키치의 진입 목적이 호열과 성전 연합군에 도움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르콘이 키치에게 덧붙였다.

"부디, 그 의뢰서를 되찾길 바라겠네."

.

.

.

"명백한 절차 위반이군."

나는 하르콘 대신 크리스탈 홀에 나타난 키치를 바라봤다.

평상시의 그랑펠 성질머리였다면.

곧장 키치를 돌려보냈겠지.

"...기한을 지키지 못한 점 송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치의 목적은 확실히 타당했다.

──────

목적 : 그림자 용병단 아지트 접근 / 의뢰 장부 습득

──────

왜, 의뢰 장부에서 냄새가 풍겨왔으니까.

'거악의 의뢰라.'

짙은 악마 냄새가 말이지.

절차만 지켰다면.

하르콘의 신청서보다 먼저 채택했을 정도로 말이다.

키치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의뢰는 오래전부터 장부에 적혀있던 의뢰라고 했다.

키치가 멋쩍게 웃었다.

"선대 단장님들께서 워낙 많이 받아드신 모양인지라.... 상시 최우선으로 수행 중인 의뢰였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성공하진 못했지만요."

그 의뢰 장부라는 걸 확인한다면.

거악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하르콘이 양보를 했으니.

아무리 절차가 중요해도 참자, 그랑펠.

때론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도 있다고.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하르콘의 긍지를 저버릴 수 없겠지."

넙죽 고개를 숙이는 키치에게 말을 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아르카나 기준으로 나흘이다."

늦어도 24시간 내에는 다시 현실로 복귀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때는 마력을 쥐어짜 내서라도 2인용 포탈을 발현해 내야 한다.

'레이먼 션, 속이 시커먼 자식.'

편도행이 뭐냐, 쪼잔하게.

접속기엔 로그아웃 기능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명심해라, 키치.

그랑펠 성격에 약속시각에 늦으면 두고 가고도 남을 테니까.

재회할 장소는 안토니움 정문.

나는 키치가 접속기에 몸을 눕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내, 접속기에선 포탈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키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도 곧장 마력을 쥐어짜서 포탈을 발현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좀 익숙해지네.'

나는 곧장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메시지들과.

[전설이 요동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진입 메시지가 바뀌었다?

멸망을 향해가는 대륙에서.

전설이 요동치는 대륙으로.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사건이라도 벌어졌나 싶었거늘.

나는 곧 깨달았다.

[전설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설마, 요동친다는 전설이 내 이야기였어?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흑암룡 이호오오오여여여열?!

...대체 누가 내가 흑암룡이라는 걸 말한 거냐?!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 여기서 뒤통수를...!!

아니, 그것보다....

[당신의 전설이 실체화합니다.]

그 해괴한 전설이 실체화한다니, 이건 또 무슨 끔찍한 소리냐?!

◈ 256화. 부탁이 아니다 명령이다 (1)

[심미]나 [집념]을 습득.

혹은 [칭호] 시스템을 개방했을 때처럼.

[전설]에 관한 지식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거 말로 설명하기가 좀 그렇다...?

앞서 언급한 스탯들과 다르게 효과가 명확하지 않았다.

왜, 전설 이름값을 한달까.

흔히 들을 수 있는 전설들이 전부 두루뭉술한 것처럼.

[전설]의 효과도 쉽사리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건 확실히 성장형 시스템이었다.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 효과가 배가 되는....'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이쯤에서 기뻐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됐는데.

그게 일회성도 아니고, 성장형이란다.

무엇보다 그 명칭도 [전설]로 더없이 거창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순간,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전설의 이름이 흑암룡 이호열이라니...!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선.

그 끔찍한 전설을 더욱더 널리 퍼트려야 한다니...!

심정 같아서는 이대로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진다.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현실에서의 개고생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내가 바로 흑암룡이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그런데 그 고생이 무색하게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이미 전설이 될 정도로 소문이 났을 줄이야.

'누구냐, 대체!'

나는 하이엘을 불렀다.

하급 정령 시절부터 아르카나 대륙 소식에 정통했던 하이엘이다.

전설이 될 정도로 회자된 내 소식이라면 그 근원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지.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이엘이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여왔다.

"하이엘이 주군, 흑암룡을 뵈옵니다."

...하이엘, 너까지 그러기야?!

주군만으로도 매우 수치스럽거늘.

거추장스러운 이명까지 덧붙이지 말아주라, 제발.

그런데 그 호칭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유낙서스, 드워프, 그리고 황제...?'

흑암룡 이호열 전설.

그건 드래곤, 정령, 드워프, 인간이 연합해서 만들어 낸 합작 전설이었으니까! 하이엘이 말을 끝마친 순간, 나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누구한테 따져 물을 수도 없다.'

하도 관련자가 많아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따져 물을 수 없다는 의미다.

게다가 의도.

그 의도가 그랑펠의 기준에 더없이 흡족했다.

"현명한 판단이로군."

흑암룡 전설로 악마들의 기세를 억누르겠다니.

짬밥을 괜히 먹은 게 아니구나, 다들.

나는 상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아르카나 대륙의 기세를 반전시킬 줄이야.

'결국, 이쪽도 호의였다는 건가.'

탑주의 고양이 일 처리도 너그럽게 용납했던 그랑펠이 아니던가?

호의에서 비롯된 사태이니만큼.

나, 이호열의 심정은 어찌 됐든.

나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낙서스와 체인워커, 하이엘은 그렇다고 치자.

셋은 내 편이니까.

그것도 모자라 콩깍지가 씌어서는.

나를 지나치게 고평가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황제, 당신은 대체 왜 그런 거야...?

'우상화 작업에 왜 동참한 건데?'

하이엘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무려 안토니움 백성 앞에서 정식으로 선포했단다.

모험가, 이호열이 바로 그 흑암룡이었다고.

'...그 자리에 없던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의 이름으로 공언을 해버렸으니.

아르카나 대륙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면....

내 행적이 전설로 거듭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구나.

그보다.

"덕분에 전부 보기 좋게 엎드려 있는 모양이니."

전설의 약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새롭게 개방한 시스템, [전설]의 효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악마 사냥꾼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악마의 기척.

바로 직전,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을 때에 비해서.

악마들의 그 기척이 확실히 누그러졌다는 의미다.

'이러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어쩌겠냐, 결국 이것도 내 팔자겠지.

하지만 이걸로.

나는 현실도 모자라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필사적이어야만 한다.

왜, 아르카나 대륙에서 떠도는 이놈의 전설이.

현실로 범람하지 않게 최대한 막아내야 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키치를 입단속 시키는 게 최선이겠군.

당연한 말이지만, 키치가 아르카나 대륙.

어떤 장소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잘하겠지.'

다만, 키치가 내가 걱정할 만큼 나약한 인물은 아니니까.

약속장소와 기한도 정해놨겠다.

키치를 걱정할 시간에 내 앞날이나 걱정하자, 호열아.

나는 하이엘에게 물었다.

"엘프에 관한 소식은 들은 것이 있나, 하이엘."

"송구하게도 답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과할 것 없다. 그 또한 그들의 능력일 테니."

하이엘의 정보 수집은 자연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나뭇잎의 기억을 읽는다든가.

마찬가지로 흩날리는 꽃가루의 목소리를 듣는다는가.

그러나 엘프 또한 유사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셨군.'

얼마나 뒤가 구린 짓을 하고 다니길래.

자연에까지 입단속을 시키는 건지.

겸사겸사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

그런 의미에선 아젠트레스와 그가 이끄는 엘프들의 위치를 특정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도 인벤토리를 보여주리라.

아르카나 대륙에서 보는 [마안(魔眼)의 망원경]이다.

왜, 현실에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보이지 않겠어?

*

콰득─!

아젠트레스는 돌무더기를 짓밟았다.

흔히 굴러다니는 돌부리가 아니다.

웬만한 공성 병기로도 무너트릴 수 없는 성벽의 잔해였다.

"부디 목숨만 부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콰직─

머리를 바닥에 세차게 박는 건 악마였다.

급으로 나뉘는 악마도, 진명의 악마도 아니다.

그는 왕이라 불리는 악마들의 왕, 마왕이다.

서열 30위.

마왕, 샬키라위는 머릿속이 혼란했다.

주륵!

어찌나 머리를 세게 바닥에 처박았는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흠뻑 뒤덮는다.

그러나 혼탁한 시야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고 있다.

'전멸이다.'

널브러진 시체들.

대략 일만(一萬)의 정예 마왕군과 삼십의 악마 군단장.

자신을 제외한 전군이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나절.

'고작 백 명에게...!'

마왕과 평범한 악마 사이에도 벽이 존재하듯.

엘프와 자신 사이에서도 벽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벽의 두께는....

'나와 하급 악마의 차이보다 두껍다.'

그런 벽을 이르는 말은 따로 있다.

그래, 이건 '격'의 차이였다.

샬키라위는 체감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왕의 체면 따윈 내던지고 머리를 박았다.

격이 다른 존재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아젠트레스는 그런 샬키라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악마들의 왕이여."

"왕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어르신!"

"마왕에게 어르신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아젠트레스가 비웃음을 뱉었다.

"너는 다른 왕과 달리 대화를 나눌 태도를 갖췄구나."

인간 못지않게 저열한 족속, 악마.

아젠트레스가 그와 말을 섞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젠트레스가 싸늘하게 말을 잇는다.

"내게 거악, 식탐의 행적을 말해라."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지고 있다.

반나절 만에 무너진 마왕성은 그 증거였다.

어머니의 축복이 온전하던 때였다면 말 그대로.

찰나에 함락시켰을 테니.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

자신과 동족, 모두.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자신이었다.

태초의 엘프인 자신은 동족보다도 훨씬 긴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그렇기에 아젠트레스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부터 식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고.

한데 유감스럽게도 일이 틀어졌다.

"너희는 어디에 숨겼는가, 그 거악을."

그날 이후, 식탐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아젠트레스는 축복의 행방을 쫓는 동시에 식탐 또한 쫓았다.

그러던 중 마주치게 되었다.

어쩌면 식탐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왕, 샬키라위를.

"저는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르신...!!"

그러나 대답이 기대 이하였다.

아니, 저열한 족속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예상했던 그대로라고 해야 하나.

저벅.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샬키라위는 직감했다.

아젠트레스가 완전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은 그대로 화살받이가 되어 숨통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샬키라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

아젠트레스가 몸을 절반가량 돌린 상태에서 멈춰 섰다.

내뱉는 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다.

샬키라위가 말을 이었다.

"저를 비롯한 마왕들을 수소문하셔도 절대 거악의 행적을 찾아내지 못하실 겁니다. 절대 그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악마는 자신밖에 생각지 못하는 저열한 족속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젠트레스가 묻는다.

"이유는?"

"거악과 저희는 근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근본이 다르다?"

"그렇습니다."

거악.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과 마계가 연결되기 전부터.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던 악이었다.

샬키라위는 여전히 머리를 납작 엎드린 채 말을 이었다.

"저희 미천한 마왕들과 거악은 협력 관계 같은 게 아닙니다. 언제라도 서로의 목덜미를, 세력을 물어뜯길 원하는 경쟁 관계입니다!"

꿀꺽─

극도로 긴장한 탓인가.

거기까지 말을 끝마치자 목이 타들어 갔다.

샬키라위는 흐르는 피로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머리를 굴렸다.

'...거악을 팔면 살 수 있다.'

엘프가 속을 꿰뚫어 보아도 상관없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샬키라위는 더없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어르신! 거악, 그 녀석 때문에 어르신에게 죽는다는 것이 억울합니다. 그러나 알아주십시오. 이 억울함은 어르신을 향한 게 아닌 거악, 식탐을 향한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샬키라위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몇 안 되는 주제 파악을 할 수 있는 악마였다.

그것이 특출나지 않은 샬키라위를.

서열 30위 마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게 한 힘이었다.

그러나.

휙─

상대를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아젠트레스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더니만.

"미천한 것들의 사연 따윈 궁금하지 않다."

결국, 물었던 것에 관한 답변은 없지 않은가?

아젠트레스가 완전히 돌아선 순간.

팽!

활시위가 놓이고.

쌔액!

뻗어져 나간 화살이.

푹!

그대로 샬키라위를 관통했다.

즉사였다.

서열 30위 마왕의 최후라고 하기엔 더없이 보잘것없었다.

"진정으로 격이 떨어지는 대화였다."

아젠트레스가 손짓했다.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

그러자 엘프들이 정렬하여 움직일 채비를 마쳤다.

허나 그들의 발걸음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종족보다 뛰어난 오감.

그를 바탕으로 한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멀리서 일렁거리는 마력의 빛 무리.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더없이 위험하다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활을 치켜드는 이가 없었다.

정확히는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전신이 돌처럼 굳어서 발이 떨어지지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심지어는 시선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저 간신히 입을 여는 게 고작이었다.

"아젠트레스 님...?"

아젠트레스 님이라면 분명.

원인을 알아내시고 해결해 주실 터.

엘프들은 아젠트레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사내에게도.

적대의 시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이 순간.

'...믿을 수 없다.'

자신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아젠트레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찌푸려짐을 넘어선 일그러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보아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찬란한 은빛.

그것은 클라우디의 것이 확실했으며.

느껴지는 기척은.

어머니의 축복이 확실했다.

아젠트레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단 말이다!"

.

.

.

마왕성을 무너트렸다고 칭찬해 줄 생각은 없다.

너희들의 불순한 의도는.

[마안(魔眼)의 망원경]을 통해서 전부 확인한 참이니까.

그러니까 현장을 떠날 생각은 하지 마라.

너희, 전부 현행범이거든.

[첫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나와 엘프의 관계는.

악마 사냥꾼과 악마 이상의 천적관계.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뱉을 말에 책임을 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랑펠의 발언이 얼마나 오만하다고 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격을 운운하지 말거라."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니까.

[엘프, 아젠트레스 및 엘프들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 257화. 부탁이 아니다 명령이다 (2)

클라우디 가문의 설정.

드래곤에 관한 설정도 끄적거렸던 나였는데.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치는 건 몰라도.

내가 엘프를 그냥 지나쳤겠냐고.

심지어 엘프에 관한 설정은 드래곤보다도 구체적이었다.

그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엘프에 관한 소문은 드래곤보다 많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싸가지 없기로.'

시슬리에서 대부분을 보냈다는 엘프였다만.

드래곤과 다르게 엘프는 시스템상의 이유로 구속되지 않았다.

왜, AAU의 정보에서도 그에 관해 명시되어 있었지.

'몬스터가 아닌 NPC 역할이었으니까.'

실제로 엘프는 대격변 이전.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몇 차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러니까 싸가지 없다는 소문도 떠돌았던 거고.

그 무성한 소문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왜, 엘시도어의 첫 등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악마를 가차없이 썰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까지 문답무용으로 공격했던 엘시도어였으니까. 뭐, 지금이야 화원의 잡초나 썰고 있지만....

'엘프가 만만치 않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이호열.

나의 치기가 가만히 있었겠냐고...!

『클라우디와 엘프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엘프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상.

좋은 건 다 때려 박으려는.

중2병 감성이 도지는 건 당연한 일.

『엘프는 클라우디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분명 하찮은 인간이거늘. 그 어떤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도 부족한 구석이 없는 클라우디의 존재를.』

진짜 중증이었다, 호열아!

'설명하기도 싫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직접 적어서 그런가 알량한 의도가 훤히 보인다. 아마도 그랑펠의 수려한 외모에 관한 추가 설정이 필요했던 거겠지, 과거의 나란 놈은....

그러니까.

'엘프도 질투할 정도의 외모 설정이라니.'

지독하게 부끄럽다, 과거의 나야...!

디엔드가 흑역사를 일깨워 준 덕분에.

그 뒤로 이어지는 설정들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찬란하게 빛나는 클라우디의 상징.

은빛 머리칼은 엘프조차 가지지 못한 것이었으며.

아름다움을 찾아 살피는 심미안 또한 엘프에 뒤처지지 않았고.

더 나아가 드높은 품위는 엘프조차 주눅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런 전적이 있는 나였기에.

지금 내게 쏟아지는 적대적인 시선이 이해가 간다.

정말로 물이 기름을 밀어내듯.

'...눈빛 한번 살벌하다, 다들.'

일백(一百)의 엘프가.

나를 향해 거친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곧장 [축복의 위계질서]를 내세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들이군.

왜, 한 명만 빼고 말이야.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엘프의 지도자, 아젠트레스.

그의 표정은 다른 엘프들과는 사뭇 달랐다.

적대적이기보다는 경악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역시, 너는 알고 있는 거구나.'

클라우디 가문의 존재를.

그러니까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란 거겠지.

물론, 처지를 바꿔 생각해 봐도 놀랄만할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이 시기할 정도로 거슬리는 인간들이 있었는데.

그런 인간 중 하나가.

난데없이 어머니의 축복을 드러내며 나타난 꼴이니까.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까 흉신악살처럼 인상을 구겨도 이해한다.

근데, 말했다시피 그렇게 노골적으로 협박해도.

내가 겁먹을 이유는 없어서 말이야.

아까도 말했잖아.

'격'이 다르다고.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착각하고 있군, 아젠트레스."

"...?"

"그대는 무언가를 용납하는 위치에 있지 않지 않은가?"

"...!!!"

어떠냐, 자존심을 박박 긁는 그랑펠의 화법이.

근데, 어째 아젠트레스 당사자보다도.

나머지 엘프들이 더 충격을 받은 눈치다.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저런 모욕을 듣고만 계시는 거지?"

"조용히 해. 다 생각이 있으실 거다."

"그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얘네,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봤구나?

'진짜 오냐오냐 자란 모양인데.'

하긴 시슬리라는 온실에서 제대로 나온 적이 없을 테니까.

어리둥절한 반응도 이해가 된다.

아마도 모든 게 처음이겠지.

그탓에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어떠한 입장인지.

어째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어째서 아젠트레스가 상황을 보고만 있는지를.

사실 말로 설명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너희 현행범이라고.

아무리 마왕을 사냥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 의도가 더없이 불순했다고.

나는 역시나 속을 박박 긁는 화법으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우습지 않은가, 아젠트레스?"

아젠트레스가 빠득─ 이를 갈았다.

"...우습다?"

"고작 영생을 위해서 악마의 힘을 빌겠다니. 그대들은 그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족속이었나. 그러면서 격을 운운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심히 유감이군."

"닥쳐라."

당연하게도.

나는 닥치지 않는다.

아니, 그걸 넘어서 한술 더 뜰 거거든?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말이지.

"과거에도, 지금도 주제를 알지 못하는 자존감에 유감을 표하겠다."

"...!"

갑자기 웬, 자존감 타령이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

다른 엘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건 이해한다.

이건 클라우디와 엘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아젠트레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모욕이었으니까.

특히 '과거에도'가 포인트라고.

'클리우디 가문, 자존감 참 대단하다....'

역시 알아들은 거겠지.

아젠트레스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러나 마냥 말대꾸를 듣고 있을 정도로.

'나도, 그랑펠도 친절한 편은 아니라서 말이야.'

심지어 그냥 악마도 아니고.

거악과 거래를 하려고 한 시점에서.

그대들에겐 더더욱 자비는 필요하지 않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꿇어라."

"!!!"

확실하게 깨닫게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세계수, 드래곤, 선악과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엘프들의 태도가 불순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렇다.

훈육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털썩!

내 말에 아젠트레스를 비롯한 엘프.

전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고개가 저절로 땅으로 떨어졌다.

심히 부담스러운 광경 속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거창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짓밟은 마왕성이다."

"...?"

"자신들의 행동에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전까지."

쉽게 말하자면.

"일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무릎 꿇고 반성 좀 하라는 소리야.

.

.

.

부들부들.

'내가,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다고...?'

태어나 세 번째로 느껴보는 굴욕감이었다.

아젠트레스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러고는 굴욕감을 곱씹었다.

첫 번째로 느꼈던 굴욕은 도마뱀을 향한 열등감이었다.

드래곤, 그들은 더없이 완벽한 족속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축복이 있었기에.

태생적인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느꼈던 굴욕은 아르카나 대륙에서였다.

인간, 그 하찮은 족속에게 굴욕을 느끼게 될 줄은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꽃처럼 만발했다고 한들 금세 시들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세 번째, 지금 느낀 굴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두 번째 굴욕을 맛보게 했던 은빛 머리칼, 클라우디. 대륙에 돌아왔다는 그가 어머니의 축복을 앗아간 존재였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빌어먹을.'

치미는 분노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들은 저 사내의 말에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무릎에 느껴지는 차디찬 바닥이 그 증거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였다면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았겠지.

그러나 동족들이 있었다.

시슬리의 품에서 아무런 위해 없이 지내온 탓일까.

기본적인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는 가엾은 동족들이 말이다.

아젠트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굽히겠다.'

허나 영영 굽히겠다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재차 굴욕을 선사했다고 한들, 인간에 불과했다.

아젠트레스는 자신이 있었다.

놈의 의식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그 목을 취할 자신이.

제아무리 어머니의 축복을 거머쥐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치고 대단한 육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살아온 세월에서 비롯된 경험은 비교되지 않을 테니.

아젠트레스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협조하겠다."

"...!!!"

순간, 동족들의 동요가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다.

아젠트레스는 생각했다.

'녀석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의식의 허점을 유도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 첫걸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가치를 깨달았는가?"

아까부터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인가?

아젠트레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깨닫지 못했다.

마왕성이 보였기에 쳐부쉈을 뿐이다.

물음에 답하지 못했기에 쳐죽였을 뿐이다.

그 행동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아젠트레스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해를 바란다."

그러자 대답이 이어졌다.

"과연, 기대대로군."

"...?"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대로라는 의미다."

...저건 마왕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아닌가?

그 말인즉.

사내의 시선이 악마를 바라보던 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동족을 위해.

어떤 치욕도 참겠다던 아젠트레스의 인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그러니 이해하지. 그것만으로도 발전이라 할 수 있으니."

"...."

이유야 어찌 됐든.

아젠트레스는 곧 고개를 들 수 있었으니까.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기 무섭게 사내가 말해온다.

"내가 그대들을 찾은 목적은 간단하다."

"협조하겠다. 말해라."

"나는 시슬리에 진입하길 원한다."

시슬리라니.

고작 인간이 시슬리에 어떤 목적이 있단 말인가?

아젠트레스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시슬리는 자신들의 고향이었다.

더 나아가.

'놈에게는 낯선 장소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실수와 방심은 잦아지는 법.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신이 거악, 식탐의 행적을 놓쳤던 것처럼.

시슬리에서라면 사내도 분명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알아서 일이 풀리는구나.'

그 틈을 노려 놈의 숨통을 거둘 수 있다면.

어머니의 축복 또한 자신들에게 돌아올 터.

번거롭게 시슬리로 복귀할 수고까지 던 셈이 아닌가.

아젠트레스는 기쁜 내색을 숨기고 말했다.

"약속한 대로, 협조하겠다."

그러니 당장 제약을 풀어라, 건방진 인간.

아젠트레스가 그런 심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던 때였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뭐든 좋았다.

놈을 시슬리로 데려갈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이 이어진다.

"그대들은 드래곤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갑자기 도마뱀을 언급한다고?

끝까지 나의 심기를 건드는구나, 인간.

아젠트레스는 화를 억누르고 되물었다.

"묻는 의도가 무엇이지?"

그러자 기어코 화를 돋구려는 말이 돌아온다.

"그대들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작 인간이.

드래곤과 엘프의 사이에 관여하겠다는 것인가?

엘프인 자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만하신 만물의 왕.

도마뱀들께서도 이런 발언은 들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그러니 대답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의심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아젠트레스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뱉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나쁠 것은 없겠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만물의 왕께선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그때부터였다.

의아한 일이 벌어진 것은.

사내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말했다.

"그렇다면 이로써 관계는 회복되었다, 믿겠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단 말인가?

자신들에게 달린 게 아니다.

드래곤의 생각에 달린 일이다.

분명하게 말했거늘.

마치 도마뱀들의 의사를 확인한 것처럼....

'확신을 한다...?'

의문을 가진 와중이었다.

"...?!"

아젠트레스의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뒤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형상.

틀림없었다.

아젠트레스가 말을 더듬었다.

저건...!

"드, 드래곤...!"

.

.

.

아젠트레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런데, 방금은 확실하게 실수했군.

감히 '흑암룡' 앞에서 드래곤의 의사를 묻다니 말이야.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실체화합니다.]

자,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시간이다.

◈ 258화. 내게 맡겨라

새롭게 개방된 시스템, [전설].

그 효과는 습득한 전설을 실체화하는 것.

실체화라고 해서 내가 진짜 흑암룡으로 변신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랑펠식 화법은 주어를 밥 먹듯 생략해도.

나는 주어를 똑바로 보고 있다고.

그렇다.

흑암룡으로 실체화하는 건 내가 아니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전설'이다.

내 의지로 실체화시킨 전설이어서인가.

굳이 뒤를 돌아서 확인하지 않아도.

확실하게 느껴진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아젠트레스의 동공이 거울처럼 나의 모습을 비춘다.

잔잔하게 펄럭거리는 여명의 재킷.

그 뒤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검은 형체.

저게 바로 실체화한 나의 전설, 흑암룡이다.

'이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백 번 설명한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겠어?

한 번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하지만 막상 전설을 실체화한 나도 흠칫할 정도였다.

그게 흑암룡이라는 게 커도 너무 컸거든...!

'...뭔데?'

솔직하게 말하겠다.

'흑암룡 이호열'이란 전설을 습득했다는 메시지를 목격한 나는 기쁘지 않았다. 수치심을 떠나서 그 전설이란 걸. 내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나, 의구심이 앞섰거든.

'그야 또 겉만 그럴싸할 것 같았으니까.'

언제나 말하지만 내 특기는 주제 파악이다.

더 나아가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에서 프로즈낙스와 사투를.... 아니, 훈육을 하며 드래곤과 인간의 체급 차이를 여실히 실감했던 나였다.

'아마 [천적관계]가 발동됐어도 졌을 거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유낙서스와 협공해도 프로즈낙스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한 나였으니까. 막말로 세니오스의 공략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몇 합 만에 황천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전투력만이 아니야.'

다른 관점으로 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드래곤들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것과 다르게.

나는 포탈을 발현하는 데 마력 탈진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심지어 접속기의 구조를 모방하지 않았다면 그조차도 불가능했겠지.

그러니까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단 것이다.

겉만 그럴싸한 내가.

흑암룡 전설을 실체화해 봤자.

겉만 더더욱 그럴싸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거, 예상이랑 조금 다르다.'

우선,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겉이 그럴싸하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실체화한 흑암룡은 거대했다.

유낙서스보다는 물론, 프로즈낙스.

아니, 전룡을 통틀어도.

지금 내 뒤에 실체화한 흑암룡보다는 그 덩치가 작았다.

그러니 유낙서스를 도마뱀이라 부르는 아젠트레스도 놀란 거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거대한 덩치만큼 시선 또한 높디높을 터.

과연, 모든 것을 내려다 살펴보는 흑암룡답구나.

'진짜....'

흑암룡 이호열 전설,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저런 도마뱀은 보고 들은 적이 없단 말이다!!"

어째, 이젠 잔머리 굴릴 여유조차 없어졌나 본데.

여태까지 고분고분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아젠트레스가 노골적인 적의를 띠고 말해온다.

대답이야 어렵지 않지만, 굳이 하고 싶지 않군.

'아무리 그래도 내 입으로....'

저게 나의 전설.

흑암룡이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 쫌...!

그러니까 나는 그랑펠식 화법을 빌려 왔다.

태연하게 지껄였다는 것이다.

"보고 있지 않은가."

"...!"

"그대들이 보고 있는 그 자체다."

나의 말에 화답하듯.

실체화한 흑암룡이 움직인다.

유달리 거대한 날개를 한 차례 들썩인다.

그것만으로 엄청난 풍압이 일어난다.

'...깜짝이야.'

다시금 말하지만, 내가 흑암룡이 된 게 아니다.

내게서 비롯된 전설이 흑암룡이 된 것이다.

그런 흑암룡의 통제권은 내게 있지만.

일거수일투족까지 신경을 쓸 순 없다는 뜻.

쉽게 비유하자면....

'충직한 분신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인 거지.'

하이엘, 디엔드, 귀철과 다르게.

실체화시킨 이상.

누구라도 알아차리게 되는.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거대한 분신이 말이야.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

내가 이렇게 수치심을 무릅쓰고 친절하게 보여줬으니까.

아젠트레스, 너도 이해가 됐겠지?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이로써 그대들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믿겠다."

"...."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흑암룡에 놀라서인가.

아젠트레스는 분한 듯 입을 다물고 반박하지 않았다.

'드래곤과 엘프, 강제 화해 성공인가.'

어째 아젠트레스의 표정에서 어린 시절.

치고받고 싸우던 나와 웬수가 겹쳐 보이는군.

나도 그땐 억지로 포옹하고, 강제로 화해하곤 했었지.

'덕분에 그 감정을 이해한다만.'

어쩔 수 없다.

막말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감정의 골이다.

그 깊은 골을 천천히 회복시킬 자신은 없다.

이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나중 가면 이런 것도 다 추억 아니겠냐?

내가 웬수랑 싸운 걸 추억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젠트레스는 몰라도, 유낙서스는 기뻐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내가 신경 쓸 건 등 뒤의 흑암룡이다.

우선 마력의 잔량을 확인해 보자.

완전히 새롭게 개방된 독자적인 시스템이라 그런가.

'일단, 마력 소모는 없다.'

기왕 실체화했으니.

효과의 한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무엇보다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하다.

어째서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닌.

진짜 드래곤 못지않은.

아니, 진짜 드래곤을 능가하는.

흑암룡이 튀어나온 건지 알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사실 짐작되는 바가 있기는 하다.

'전설은 나의 강함에 비례하는 게 아니야.'

널리 울려 퍼질수록 해당 전설이 강해진다고 했겠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고.

흑암룡 이호열 전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울려 퍼졌는지를.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이거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드래곤의 주둥이....'

그것도 보통 드래곤의 입이 아니다.

유낙서스와 동시대를 살아온 대지룡.

쿠드하낙스의 드래곤 피어로부터였다.

그 우렁찬 목소리 덕분에.

전룡 앞에서 흑암룡이라는 이명(異名)이 알려졌고.

그게 하이엘을 통해서 드워프들에게.

드워프를 통해서 황제에게.

황제를 통해 제국에, 아르카나 대륙에 울려 퍼졌겠지.

충분히 끔찍한 일이거늘, 거기서 끝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

모험가들의 세계이자 나의 고향.

현실에서도 흑암룡에 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아르카나 대륙보다 더하지 않을까.

현실은 악마에 의해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 비하면 무사하다. 그것도 모자라 현실에는 어떤 소식이든, 순식간에 세계로 전달할 수 있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던가.

예를 들자면 뉴스 속보나 SNS처럼...! 덕분에 흑암룡에 관한 떡밥이 최소 수억, 수십억 번씩은 떠돈다는 의미다.

그러니 [전설] 시스템이 개방된 시점에서.

흑암룡은 실시간으로.

한계 없이 강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다른 두 세계에서 회자되는 전설이다.

그래, '흑암룡 이호열' 전설은.

그 이름만큼이나 [『기이』]한 전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했어.'

한 줄 요약하자면.

흑암룡은 나를 둘러싼 갖가지 과대평가와 소문들이 실체화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진짜 드래곤과 비교하더라도 밀리지 않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다.

'나, 정말 엄청난 걸 개방했구나.'

[전설] 시스템, 장난이 아니잖아?

물론, 효과가 상당한 만큼.

지속시간이 길 리가 없었다.

['흑암룡 이호열'이 전설이 되어 흩어집니다.]

그저 지속시간이 다한 것뿐이었거늘.

진짜, 입만 살아서는.

나는 그랑펠식 표현으로 감상을 내뱉었다.

"전설은 세상을 떠돌 때 비로소 전설인 법."

하루라도 허세를 자제하면 덧이라도 나는 거냐, 그랑펠.

어쨌든, 이걸로 확실하게 알게 됐다.

[전설]은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능력이란 걸.

'기껏 개방한 거 하나에 만족할 순 없지.'

지금이야 '흑암룡 이호열'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훗날 또 다른 전설을 습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한마디로 써먹을 구석이 많은 능력이라는 뜻.

어디보자.

새로운 능력에 관한 파악도 끝났겠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아젠트레스를 바라봤다.

그럼 슬슬 목적지, 시슬리로 출발할까?

*

시슬리.

고오오─

아젠트레스가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로 호열이 발을 내디뎠다.

분명, 계획했던 대로다.

시슬리에 건방진 인간을 데려왔거늘.

아젠트레스는 기쁘지도, 마음이 놓이지도 않았다.

그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참을 수 있었다.'

클라우디.

그리고 어머니의 축복.

두 번의 굴욕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도마뱀이...?'

그러나 세 번째 굴욕.

놈의 뒤에서 드래곤이 나타날 줄이야.

아젠트레스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드래곤은 마력으로 빚어낸 환상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진짜 드래곤도 아니었다.

어찌 확신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토록 검고 거대한 도마뱀은 본 적이 없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커다란 날개는, 한 번이라도 목격했다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가 걸렸다.

만물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은 분명 드래곤의 그것과 비슷했다.

빠득─

자신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 시선과.

아젠트레스는 호열을 흘겨봤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사내와 도마뱀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와 동족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폭발 직전의 아젠트레스.

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건 동족들의 반응이었다.

'기뻐하다니, 미련하다.'

나약하다.

전부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기뻐한단 말이냐.

동족들은 그저 시슬리로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축복이 코앞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잘근─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도 나의 실책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완전한 시슬리에 머문 것이 오히려 동족들에게 독이 되었단 말인가? 아젠트레스가 좀처럼 동요를 진정시키지 못하던 때였다.

호열이 입을 열었다.

"과연, 기대대로군."

아젠트레스는 속으로 대꾸했다.

'네놈이라면 알아보겠지.'

시슬리가 얼마나 완벽한 땅인지를.

시슬리는 하찮은 아르카나 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어머니, 세계수가 선택한 땅이니까. 그 기대치가 얼마나 높았건 시슬리는 그것보다....

"기대하지 않은 그대로다."

...발끈!

"!"

아젠트레스의 머리가 말했다.

이 순간, 적대심을 드러내 봤자.

어머니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과 동족들은 놈에게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경계심을 키울 수 있는 불필요한 행동이다.'

그러나 가슴이 소리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모욕은 참을 수 있을지라도.

자신들이 택하고, 어머니가 뿌리를 내렸던 시슬리였다.

그런 시슬리를 모욕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다고.

결국, 아젠트레스는 참지 못했다.

"그 건방진 혀로 시슬리를 모욕하지 마라."

설령 자신들이 어머니의 기대를 져버렸을지언정.

어머니가 시슬리에 뿌리를 내리고.

묻혔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으니까.

"네놈은 시슬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젠트레스가 맹렬하게 호열을 노려본 순간이었다.

호열의 시선이.

시슬리의 풍경에서 아젠트레스로 옮겨졌다.

이내,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모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뭐라고?"

"그대에게는 들리지 않는가."

대체 무엇이 들린단 말이냐?

"악마의 비웃음이."

"...!"

비웃음?

그보다 시슬리에 악마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슬리는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땅이다.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자신과 동족.

그리고 도마뱀들뿐.

열등한 악마가 어찌 시슬리에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심정으로 호열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호열이 말을 이었다.

"착각이었군."

"착각이라니, 무슨 의미지?"

"시슬리는 그대들의 땅이 아니다."

더없이 충격적인 말을.

"애초부터 악마의 땅이었다."

.

.

.

[히든피스, 시슬리에 진입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전신으로 와 닿는 악마의 기척.

악마 사냥꾼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시슬리의 악마는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그 증거가 메시지로 떠올랐다.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절멸의 위기에서 세계수는 씨앗을 뿌리기 위한 열매를 맺었다. 허나,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열매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고 나뉘어 맺히게 되었으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선과 악을 분리한 죄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성공)

─시슬리에 뿌리내린 태초의 악과 조우하라. (진행 중)

그래.

선악과가 시작이 아니었구나.

태초의 존재, 세계수부터 악에 물든 거였어.

'태초의 악이라니. 이름부터 요란하구나.'

그러나 상관없다.

뿌리가 잘못되었다면.

뿌리부터 바로잡으면 되는 일.

'내가 누군데.'

그렇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

세계수를 포함한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의 소유자.

마지막으로 [히든피스, 품격의 화원]의 주인.

이 복잡한 상황에 더없는 전문가란 말이다.

◈ 259화. 일어설 자격을 갖췄군

선악과.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시점부터 묘한 위화감은 느껴졌다.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분명 세계수의 씨앗을 삼켰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시체를 양분으로 씨앗을 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었지.

당연하게도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내가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발견한 씨앗은 뭔데?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도래한 아르카나 대륙 절멸의 위기.

거대한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워라.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라. (진행 중)

●현재 발견한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선악과는 선과와 악과로 나뉘었다.

드래곤들은 악과를 삼켰으니.

내가 싹 틔운 씨앗은 선과가 품고 있던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것까진 눈치로 때려 맞힐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씨앗을 누가 대륙에 뿌렸느냐는 거지.

그게 궁금해서 유낙서스한테 물어봤었지만.

-"송구하게도 그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그랬다.

덕분에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세계수에서 선과 악이 나뉜 건....

내 예상보다 훨씬 오래전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는.

왜, 발견했던 씨앗의 상태를 떠올려볼까?

씨앗은커녕 바위라 착각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게 씨앗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누가 아르카나 대륙에 선과를.

세계수의 씨앗을 뿌린 건지.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증거를 찾아내지 않는 이상.

모든 건 추측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시작부터 모든 게 악마의 계획이었든, 뭐든.

"세계수는 악에 잠식되었던 것이다."

세계수와 드래곤, 그리고 엘프의 관계가 단절된 틈을 타 악마는 행동에 돌입한 거겠지. 세계수에서 선과 악을 분리. 먼저 세계수에서 선을 밖으로 내쫓고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이다.

아젠트레스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악이 깃들었다고?"

역시나 발끈해서는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인간이여. 시슬리는 우리의 땅이다. 악마가 이 땅을 밟았다면 그 존재를 우리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너희, 엘프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게다가 말은 똑바로 들어야지.

세계수에 악이 깃든 게 아니라니까?

"아젠트레스."

"지껄여 보아라, 인간."

"빛, 그 이면에는 반드시 어둠이 따르는 법이다."

"...뭐라고?"

"선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반드시 악이 존재한다."

애초에 진짜 세계수의 씨앗이 뭔데?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선악과의 씨앗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건 상식.

그 말인즉.

세계수가 멀쩡할 때도.

세계수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아젠트레스를 비롯한 엘프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감히 어머니를 능멸하는 것인가?"

능멸이라니 서운한 소리를.

그러나 서운한 내색은 할 수 없다.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세상에 완전한 존재는 없다. 세계수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그랑펠의 입에서.

이런 의젓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흠칫하기도 잠시, 나는 이유를 덧붙였다.

"그것이 섭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워낙 확신에 찬 상태로 말해서인가.

아젠트레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찰나에 불과했다.

"선과 악을 빛과 어둠에 비교하지 마라."

그래, 사실 비약이긴 하지.

"어머니가 당신의 몸에 악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의 어머니이자 만물의 어머니다. 만물을 위해서라도 악 따위는...! 애초에 품고 계시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유감?"

"그대는 아직도 온실이 옳다 믿는 모양이니."

"...!"

온실.

그 소리에 아젠트레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동족들을 바라본다.

용케도 말뜻을 알아차린 걸 보니까....

'너도 내심 신경 쓰고 있었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사실, 나 이호열도 이해하지 못했다.

[선악과] 클래스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을 때부터 의문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할 필요가 있나, 싶었거든.

물론,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나, 그랑펠 덕분이었다.

"세계수는 믿었다."

정확하게는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 덕분이었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

"선이 존재하는 이상, 악은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그랑펠에게 악이란.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는 열등한 것에 불과했으니.

그런 악을 두려워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걸 넘어서.

애초에 사전에 없는 일이란 것이다.

'새삼스럽게 대단하다. 정말.'

세계수와 공감대를 형성하다니.

효자를 넘어서 하늘을 찌르는 긍지로다...!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누구에게도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아젠트레스가 지적해 왔다.

"섭리? 하! 지금의 꼴을 보아라. 네 말대로 시슬리가 악마의 땅이 되고, 어머니가 악에 잠식되어 쓰러진 지금도. 네 녀석은 언제나 선이 악을 굴복케 한다고 자신할 수 있단 말이냐?"

나, 이호열.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정확하게는 머릿속 꽃밭을 엿보인 느낌이군.

'나라고 그걸 모르겠냐.'

아니, 사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랑펠의 긍지론이야말로.

세상 그 무엇보다 억지에 가깝다는 것을.

얄팍하게 세상을 알고 있는 만큼.

세상 두려울 게 없었던 중2 시절의 긍지였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자신하지."

그렇기에 꺾이지 않는다.

꺾이지 않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엔 그 꽃밭을 실현해 낼 테니까.

"내가 그리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말은 잘한다고 지적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지켜봤다면 알고 있지 않나?

이래봬도 나, 공약 이행률은 꽤 준수한 편이거든.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설령 그 과정이 구질구질했을지언정.

지금보다 더한 악조건 속에서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던 결과를 내놓았던 나란 말이다.

그러니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젠트레스.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길을 열어라, 아젠트레스."

태초의 악이 뿌리를 내린 곳으로!

*

그저 오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저건 오만을 뛰어넘은 '무언가'의 영역이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세계수는 태초의 존재다.

그런 어머니가 악에 지배되었을 줄이야.

그것도 스스로 품고 있던 악에 잠식되었다니....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었거늘.

꾸욱─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자신과 동족은 사명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가 시들어 메마르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낌새를 알아차리고.

축복마저 거두어 가던 순간에야 어머니 앞으로 찾아갔었으니까.

'어쩌면 막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족이 아니더라도.

나 하나라도 사명을 다했다면....

아젠트레스는 그 사실이 분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의 실책이다.'

영겁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자책을 할 정도로.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내는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또각─

걸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곧게 뻗는 보폭에서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잠식한 태초의 악(惡).

그 수식어만으로도.

긴장케 하는 존재에게 나아가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칵─

그 손에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찻잔까지 쥐고 있었으니까.

'도마뱀도 저럴 순 없다.'

사내는 만물의 왕이라 칭송받는 드래곤조차 하지 못할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오만조차 넘어선 '무언가'의 영향일까. 아젠트레스는 문득, 사내가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내가 그리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에 하나, 사내가 그리한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러나 곧 주먹을 쥐고 말았다.

'아니, 어느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다.

녹빛 잎사귀는 시들어 떨어진 지 오래였고, 그 육신도 장작처럼 메말랐다. 사내가 어머니를 잠식한 악을 몰아낸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또한.

'우리의 과오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긋나도 한참 전부터 어긋났다.

어쩌면 사내의 말대로.

태초부터 모든 게 어긋났는지도 모른다.

슥─

아젠트레스는 사내를 바라봤다.

'비참하군, 아젠트레스.'

스스로를 비웃었다.

사내는 진정으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자신의 열등감을 인정해서인가.

아젠트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고 말았다.

사내라면 정말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는.

그러나 세계수와 마주한 순간.

"...어머니?"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축복의 행방을 찾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떠난 자신들.

시슬리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그사이.

처참하게 꺾여 있었다.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

허나, 아젠트레스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러니 어떤 책망이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얼마든지 비웃어도 좋다, 인간.'

말했다시피 기대는 사라졌다.

제아무리 사내라고 하더라도.

어머니가 저런 모습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정말로 딱히 손을 쓸 도리가 없겠지.

아젠트레스가 무기력하게 참상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또각─

"...?"

사내, 호열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 어떤 독설조차 받아들이겠다 생각했거늘.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아젠트레스가 호열을 응시하던 순간이었다.

호열이 세계수의 잔해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마의식."

아젠트레스로서는 알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허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장, 변화가 시작됐으니까.

화르륵!

"...!!!"

널브러진 어머니의 잔해가 타올랐다.

꺾인 기둥.

남겨진 밑동.

메마른 뿌리.

꺾여서 널브러진 나뭇가지.

무엇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아...."

동족들이 동요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축복의 위계질서 때문에?

아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어머니...?"

타오르는 불꽃이 푸르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피워냈던 잎사귀처럼.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듯.

녹색의 불꽃이 싱그럽게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

온기가 느껴졌다.

축복을 상실한 이후.

느낄 수 없던 온기가 온몸으로 와 닿았다.

그것은 만물을 자애롭게 보살피는 따스함.

어머니의 온기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니다.'

아젠트레스는 착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어서 타들어 가고 있다.

그러니 이 온기는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온기란 말인가?

바라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호열이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

움직이는 것은 오직 은빛 머리카락뿐.

아젠트레스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아젠트레스가 어머니의 뜻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만물을 굽어살피는 드높은 시야.

그 어떤 하찮은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살피는 심미안.

그 어떤 참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격식.

그 모든 걸 포용한 것이야말로 '무언가'.

그렇다.

세계수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

.

.

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성공)

─시슬리에 뿌리내린 태초의 악과 조우하라. (실패)

─태초의 악을 추적하라. (진행 중)

두 동강이 나버린 세계수.

덕분에 세계수 속에서 갇혀있던 태초의 악은 사라졌다.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도 예정된 스토리였을까?

왜, 대마법사나 용기사의 클래스 퀘스트처럼.

악마 사냥꾼 클래스 퀘스트의 정해진 스토리인 거지.

이런 시련을 통해 최후의 악마 사냥꾼인 나를.

조금 더 성장시키려는 목적으로 말이야.

'글쎄,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낼 뿐이다.

악에 잠식된 세계수를 구마의식을 통해 화장했으니.

퀘스트 목표대로 태초의 악을 추적하는 것.

그게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이번에도 결국, 궁상맞게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는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질문에도 '글쎄'라고 답해주겠노라.

이 순간, 점멸하는 메시지는.

퀘스트 메시지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숭고의 효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히든피스, 시슬리와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히든피스, 시슬리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털썩─

그와 동시에.

귓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아젠트레스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축복의 위계질서] 효과는 아니다.

진짜라니까?

역시나 떠오르는 메시지가 그 증거다.

[엘프, 아젠트레스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엘프, 아젠트레스 휘하 107인의 엘프]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아까도 무릎을 꿇렸는데.

한 번 더 무릎을 꿇릴 정도로 야박한 사람은 아니거든, 내가.

나는 입을 열었다.

"일어나도 좋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이 의외였다.

"일어나지 않겠다."

...아,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늦게나마 철이 들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건 그거고....'

지금은 다들 일어나야 한다니까?!

그게 이놈의 성격이.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클래스 고유 스킬, '악크샨의 수호령'을 습득하셨습니다.]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

새롭게 습득한 스킬을 지금 막 발동시킨 참이었거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일어나라, 다들...!

그러지 않으면.

"...?!!"

악크샨의 수호령.

아우우우우─!!

『악크샨 늑대』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니까.

◈ 260화. 고양이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