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6

***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라··· 그냥 찾으려고 했으면 평생이 지나도 못 찾았겠군.]

마물의 숲 깊은 곳에 위치한 비밀 연구 시설.

음산함이 가득한 그곳에서 한 아크리치가 침음을 흘렸다.

그가 바로 교단이 사활을 걸고 추적에 나선 대상이자, 마지막 파편에 대한 정보가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상대.

불사왕의 후예, 한스였다.

할리의 강화 연구를 끝내고 마침내 자유 연구에 들어갔던 그가 뜻밖의 정보를 접하고서 고민에 빠진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이거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지금의 한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교단의 심장부에 바로 쳐들어가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내부에 어떤 방비가 더 되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니. 기다리다 보면 조만간 기회가 올 터. 큭큭큭···.]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이제 마지막 파편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지금은 그저 확실한 때를 기다리며 기반을 쌓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가 지금 하는 연구도 여러모로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이 또한 그때를 대비한 준비의 일환. 일단 성녀의 추적을 확실하게 따돌릴 수단을 찾아야겠지. 결계 안에만 있느라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가 없어 답답할 노릇이니.]

이미 대략적인 가닥은 잡힌 상태였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문제였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았으니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당장 우선 목표였던 할리의 강화는 한창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으니 말이다.

***

한스의 비밀 연구 시설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숲속.

파사삭—

울창한 나무 위에서 검은 표범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목표는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어리석은 인간.

그는 아직도 표범의 습격을 눈치채지 못한 듯 불의의 습격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듯 보였으나···.

"카핫! 어림도 없지!"

표범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순간.

그 인간, 할리는 어느새 돌아서서 표범과 마주 보고 있었다.

끝이 뾰족하게 세워진 두 귀를 쫑긋거리는 채로.

기습이 실패했다는 것을 느낀 검은 표범이 재빨리 앞발을 뻗었지만, 그는 이빨을 보이며 포악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미 전투 준비는 끝난 상태였으니까.

뿌드득—

한순간에 그의 오른쪽 팔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며, 손가락 끝에서 다섯 개의 칼날 같은 손톱이 튀어나왔다.

"후읍!"

"크허엉—!"

교차하는 인간과 짐승의 기합성.

표범의 앞발이 할리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으나, 그는 고개를 숙여 피하며 단단하게 근육이 압축된 왼팔로 그 궤도를 흘렸다.

여러모로 잘 써먹고 있는 하인리히의 「성전사 전투술」에 포함된 체술이었다.

그리고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한쪽 손으로, 빈틈이 드러난 표범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콰득! 푸욱—!

"케헥!"

커다란 손아귀에 달린 칼날 같은 다섯 개의 손톱은 단순히 표범의 목덜미를 꿰뚫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카가각—

쥐어짜듯 살점을 파헤치고 목뼈를 긁어내는 손톱.

털썩!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목덜미의 살점이 모조리 뜯겨나간 채 쓰러진 검은 표범과 달리, 할리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키햐~! 짜릿하구만?"

한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가 이제는 손아귀 한 번에 찌부러지다니.

할리가 이렇게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에는 하인즈 2세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남기고 간 피가 할리의 든든한 영양제가 되어주었으니까.

물론 하인즈가 가진 힘의 근원인 혈마력이나 다양한 능력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혼혈진화」로 강화된 하인즈의 육체는 절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부풀어 올랐던 오른팔의 근육이 압축되며 부피가 줄어 날렵해졌다.

그리고 그 팔은 곧장 검은 표범의 심장 부분을 파고들었다.

푸욱— 촤악!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에 딸려 나온 검은 표범의 마석.

그것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 그는, 어느새 상어처럼 빼곡하게 돋아난 이빨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결정을 씹어 먹었다.

콰직! 까드득— 까득!

'이제 검은 표범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

「돌연변이」는 다양한 종류의 유전자를 획득해 진화해 나가는 특성.

같은 종을 반복해서 먹어 치우다 보면 아무래도 효율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석을 뽑아 먹는 이유는 단순했다.

「돌연변이」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었으니까.

'드래곤 하트라도 구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마석의 끝판왕인 드래곤 하트.

당연하지만 매물은 물론 그 소재조차 파악된 곳이 없었다.

어디선가는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정보를 그가 알 수 있을 턱이 없으니.

"개체가 반복된 행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괴식」을 획득합니다."

그렇게 검은 표범의 마석을 다 먹어갈 무렵, 익숙한 알림창이 눈 앞에 떠올랐다.

"오? 나한테 딱 어울리는 스킬이잖아?"

「괴식」은 무엇이든 좀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쓸 만한 스킬이었다.

부수적으로는 소화가 빨라지게 해서 에너지 보급을 돕는 유용한 점도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

그보다 최근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는데···.

"와하하핫—!"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호탕한 웃음.

딱히 웃기지도 않건만, 왠지 모르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돌연변이」를 얻고 나서 할리의 성격이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 터프하다고 해야 할지···.

"풉··· 파하하핫!"

'그냥 툭 까놓고 말해 싸이코 같군.'

평소에는 나름 괜찮은 편인데, 전투하거나 피를 본 직후가 되면 어김없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거듭된 인체실험과 그로 인해 얻게 된 스킬들이 아바타의 개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렇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업자득이라, 남 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흠흠··· 계속 이러고 있다 보니, 이건 이것대로 나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시원하게 웃으니까 마음이 상쾌해졌다.

···역시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개체 정보>

-개체명 : 할리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돌연변이」, 「육체변이」, 「재생」, 「괴식」

-특이 사항 : 갖은 실험을 통해 육체가 돌연변이에 적응했다. 새로운 유전자를 획득할 때마다 최적의 조합으로 진화하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육체를 변이시킨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그에 맞는 형태로 변해 주변에 적응한다.

「육체변이」는 보유한 유전자의 다양한 조합으로 신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이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용할 때마다 열량이 급격하게 소모된다는 점일까.

하지만 덕분에 이런 짓도 벌일 수 있었다.

뿌드득, 뚜둑—!

전신의 근육이 팽창하며 뼈대가 굵어진다.

어깨가 넓어지고 시야가 한층 높아졌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후.

할리는 어느새 2미터가 넘는 근육질 거구가 되어 있었다.

"역시 싸움에는 체격이 큰 게 유리하니까. 적어도 이 정도 덩치는 되어 줘야겠지!"

답답하게 끼는 상의를 찢듯이 벗으며 다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러모로 조절하며 시험해 봤지만, 역시 할리의 능력을 온전히 쓰려면 체격을 키울수록 유리하군.'

마수를 포함한 몬스터들은 신체에 깃든 마나를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변질시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을 발휘한다.

인간의 육체로는 사용할 수 없는 힘.

그리고 할리는 겉은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을 이루는 뼈와 근육 등은 이미 마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직 살육을 위해 특화된 놈들의 신체는 인간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했으니까.

꼬르륵—

그 반대급부로 에너지의 소모 효율이 극악이긴 했지만, 이제는 「괴식」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런데 「육체변이」 후유증까지 동시에 겹치니 허기가 엄청난데.'

주르륵—

어느새 할리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선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검은 표범에게 고정된 채였다.

'···「괴식」도 있으니 괜찮겠지?'

무엇이든 탈나지 않고 소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때마침 여기에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먹을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나.

부북—!

할리는 검은 표범의 앞다리 한쪽을 뜯어, 대충 가죽을 벗기고 입가로 가져가 허겁지겁 먹어 치웠었다.

날카롭게 변한 이빨에 뜯겨나가는 마물의 생고기.

뚝뚝 떨어지는 핏물.

할리의 입가와 가슴팍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아니, 역시 아무리 봐도 미친 것 같아.'

어지간하면 각 아바타의 개성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리만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지속해서 언행에 신경 쓰다 보면 여러모로 더 피곤해지겠지만, 지금의 성향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야만인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응? 야만인?'

다양한 인종과 종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아우테리카 차원.

당연히 이곳에도 야만인들은 존재했다.

그것도 제법 큰 세력을 이룬 채로.

대륙 남부에 위치한 척박한 야만의 땅, 그곳에는 야만족들의 부족연맹 국가까지 세워져 있었다.

'야만인··· 야만 전사··· 괜찮을 것 같은데?'

커다란 체구와 곳곳에 자리한 문신.

터프한 웃음을 터트리며 커다란 도끼로 적의 골통을 깨부수고, 사냥감의 피로 목을 축인다.

"오! 좋은데?!"

입을 오물거리던 할리가 다시 흥분해서 포효했다.

그래서 얌전히 고기나 먹도록 제어에 신경을 쓰며,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요즘엔 야만족들에게도 문화가 전파돼서 이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뭐, 어디에나 또라이는 있는 법이니까.'

거친 야생의 야만 전사 할리.

왠지 느낌이 좋았다.

학창 시절 이후 식었던 게이머의 혼이 다시 들끓었다.

'일단 마수 머리 가죽으로 투구를 만들고, 뼈 목걸이를 비롯한 장신구와 커다란 도끼를 구해야겠어.'

편견과 사심이 가득 담긴 코디였다.

교양적인 요즘 세대 남부인들은 치를 떨만한 스테레오 타입의 패션.

그들이 본다면 괜히 남부 야만인들 전체에 대한 선입견을 심는다고 난리를 치리라.

물론 나는 그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줄 생각이 없었다.

'하인리히가 도끼술도 배워서 다행이군. 남들 앞에서는 도끼를 사용하고 혼자 있을 때 「육체변이」를 사용하면 되겠지.'

나만 즐거우면 된 것 아니겠는가.

"하핫! 신나는군! 그럼 계속해서 움직여 볼까?!"

다 먹은 앞다리 뼈를 내동댕이친 할리의 다리 근육이 팽창하고, 그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숲을 가로질렀다.

두 눈은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고, 코와 귀는 쉴 새 없이 움찔거리며 주변의 정보를 탐색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일단 이곳에 존재하는 마물들의 유전자를 최대한 획득해 두는 것이 먼저였으니.

그렇게 약 한 달.

언데드들의 도움까지 받은 할리가 근방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마물들을 사냥해 유전자 정보를 획득하고,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진 시간이었다.

#52

할리 (3)

새로 소환할 수 있게 된 아바타는 '휴버트'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게 이름을 짓기까지는 무수한 고뇌와 갈등이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하' 발음만으로는 작명에 제한이 생기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 틀을 깨부숴 'H'로 한계를 넓히고자···.

···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쓸데없는 고민 끝에 나오게 된 이름.

사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지게 된 스킬이었다.

휴버트의 초기 스킬은 「감정」.

물건의 정보를 볼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능력이었다.

'진짜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 능력의 숙련도가 낮은 탓인지, 그렇게 정확한 정보는 볼 수 없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은 그 물건의 개략적인 정보 정도.

'물론 막 능력을 얻은 참이니, 앞으로 성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지.'

미래의 거상, 휴버트의 첫 임무는 할리가 마수의 숲에서 드잡이질하는 동안 그가 사용할 물품들을 준비하는 것.

이동할 수 있는 도시를 돌며 「감정」으로 할리가 쓸 만한 무기를 고르고, 가죽 장인에게 마수 머리의 가공을 맡겼다.

<흑철강 양날 양손 도끼>

-훌륭한 실력의 장인이 무겁고 단단한 흑철 합금을 두드려 만든 양손 도끼. 튼튼해서 쉽게 망가지지 않지만, 매우 무거워 어지간한 힘으론 들 수 없다.

<흑표범 머리 투구>

-평범한 장인이 마수 검은 표범의 머리를 가공해 만든 투구. 모양을 만드는 데 집중한 터라, 재질 이상의 방어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그 외에도 휴버트는 할리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개인적인 취향을 듬뿍 반영해서.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대륙 서부에 위치한 툴크 왕국의 북부 아오니아 백작령, 타라크의 한복판에.

웅성웅성—

"세상에, 저게 뭐야?"

"남부 야만인인가? 서부까진 무슨 일로 온 거지?"

"엄마— 저게 뭐야?"

"쉿, 보지 마! 빨리 집에 가자."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할리에게 집중되었다.

성문을 지나며 경비병들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눈길이었다.

'후, 이 몸이 좀 멋지긴 하지.'

할리에게 쏟아지는 동경 어린 시선.

그만큼 그의 모습에는 주변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으니까.

2미터가 넘는 거구에 맹수처럼 부리부리한 눈.

뒤집어쓴 검은 표범의 머리에 연결된 가죽이 망토처럼 어깨와 등을 덮었다.

목에는 짐승의 이빨이 주렁주렁 엮인 채 걸려있고, 벌거벗은 상체에는 위압적인 근육이 꿈틀거렸다.

얼굴과 몸 곳곳에 붉은 염료로 그려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과, 등에 메인 채 양 어깨로 삐죽이 튀어나온 커다란 도끼의 손잡이 두 개.

그러면서 방어구라고는 철판을 덧댄 가죽 조각이 중요 부위 몇몇에 배치된 것이 전부였다.

요즘엔 볼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나 봤던 야만 전사가 이곳에 있었다.

"후후후."

나직하게 웃으며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할리의 아름다운 근육에 압도된 이들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경로에서 비켜섰다.

사실 이렇게 요란하게 차려입은 것에는 취향 외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목적은 대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웅이 되는 것.

영웅의 조건에는 일신의 능력 말고도 유명세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강자와, 누구나 알고 있는 강자.

어느 쪽이 더 영웅에 가까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도 영웅 지망생인 할리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음, 그렇고말고. 절대 사심만으로 이런 건 아니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마친 호탕한 야만 전사 할리는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대로를 가로질러 용병 길드로 향했다.

콰앙—!

길드의 문이 부서질 듯 시원하게 열렸다.

한순간에 입구로 집중된 시선.

'살짝 밀려고 했는데, 할리의 근력을 생각 못했네.'

내심 민망했지만, 상남자 할리는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법.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러 창구로 향했다.

"뭐야?"

"야만인?"

용병 산업이 발달한 도시이기 때문일까.

길드의 내부는 깔끔하면서도 나름대로 세련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은행처럼 마련된 창구와 그 앞에 줄을 선 채 기다리는 사람들.

터프하지만 예의를 모르지 않는 할리는 얌전히 가장 짧은 줄 뒤에 서서 기다렸다.

여유가 생긴 김에 잠깐 딴짓 좀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테니까.

"후욱, 후욱."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거친 숨소리에 앞에 선 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흠흠···, 그러고 보니 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는 괜스레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길드를 빠져나갔다.

왠지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 밥을 안 먹었더니 배고픈데, 일단 먹고 다시 와야지."

"내 정신 좀 봐. 약속 있던 걸 까먹었네."

그의 앞에 선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피하고, 줄은 순식간에 줄어들어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쯧쯧쯧, 사람들이 이렇게 건망증이 심해서야.'

안타까운 현실에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급한 용무가 있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할리는 기다리는 동안 두 개의 도낏자루를 겹쳐 하던 바벨 스쿼트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끼가 두 개니 날을 양쪽으로 하면 무게도 잘 맞고 좋네. 양손 도끼라 손잡이가 길기도 하고.'

그래봤자 이 정도 무게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도끼를 척척 정리해 다시 등에 걸며 창구로 향했다.

"그, 이곳에는 무슨 일로···."

2미터가 넘는 근육 덩어리가 앞에 서자,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핫핫핫! 당연히 강철의 성채로 향해서 사냥을 하기 위해서지! 이곳은 그러기 위한 도시가 아닌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

할리가 굳이 타라크로 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강철의 성채 위쪽에 있는 산맥에서 출몰하는 다양한 몬스터들을 사냥해, 더 많은 유전자 정보를 획득하고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사실 남부의 부족연맹과 야만족들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으니, 바로 그쪽으로 향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칭을 하려면 현지인들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게 유리하지 않겠는가.

'일단 강해진 후 유명해 지면 방법은 어떻게든 생기게 되는 법이니까.'

당장 다른 아바타들도 전부 바빠진지라 더 이상 할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상 이제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했다.

그리고 명성을 위해서는 정식 절차를 밟는 것이 좋으니, 용병으로서 의뢰를 받아 산맥에 들어가기 위해 굳이 타라크에 먼저 온 것이다.

생각해 둔 할리의 진로는 두 가지.

야만족 출신으로서 이름을 떨쳐 남부 부족연맹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거물이 되든가, 전사로서 용병계에서 명성을 쌓아 용병왕이 되든가.

'둘 다 될 수도 있지.'

사실 그게 목표였다.

"파하하핫—!"

당장은 이제 막 용병이 된 신출내기였지만···.

그렇게 야만 전사 할리는 용병이 되어 북부 산맥으로 향했다.

***

하인리히는 오늘도 한가하게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예상했듯이, 지난 근무 기간은 계속 평화 그 자체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이 대신전 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남아도는 정신력을 다른 아바타에 배분하고 있을 때였다.

"음?"

그가 지키고 선 길목 안쪽에서 뭔가 부산스러운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고위 성직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향하는 통로.

아무래도 교단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알아도 될 이야기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싶어 신경을 끄려던 찰나.

"앗! 하인리히 경,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좋네요!"

안쪽 통로에서 성녀가 나타났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지금 날씨는 한창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중이었다.

"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나오거든요. 꼬물꼬물 얼마나 귀여운데요!"

이 아가씨의 감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 줘야겠지.

"예···. 그 길쭉하고 번들거리며 꿈틀거리는 그··· 굉장히 귀엽죠. 네."

"역시 하인리히 경은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지렁이의 귀여운 점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그 작은 생명체가 꼼지락거리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하하···. 그런데 교단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뭔가 들뜬 듯한 기색인데···."

대화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서둘러 주제를 바꿨다.

하인리히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라면 대화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

"아! 이번에 다른 세력과의 협력이 결정됐거든요."

아무래도 자신이 알아도 되는 이야기였나 보다.

아무리 성녀가 철딱서니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명색이 성녀이니 지킬 것은 철저히 지킬 테니까.

···그렇겠지?

"에나멜 대륙의 엘븐 킹덤에서 하이 엘프가 파견되기로 했어요. 어쩌면 불사왕의 후예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에나멜 대륙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온 대륙의 사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 작은 대륙이었다.

그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들.

사실상 에나멜 대륙 전체가 이종족 연합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하이 엘프라면 엘븐 킹덤에서 상당히 고위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저희를 돕기 위해 바다 건너 이곳까지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간 한 번도 불사왕에게 침공당한 역사가 없는 에나멜 대륙인 데다, 엘프들은 아우테리카에 몇 존재하지 않는 소수 교단인 세계수를 섬기는 이들이니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도 저희 쪽에 바라는 것이 있으니 협력 작전이 성사된 거죠. 엘븐 킹덤은 인간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저희 주신교단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엘프들이 세계수를 섬긴다고 해서 주신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주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과 숭배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주신교단도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만큼,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주기적으로 교류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안인 것 같은데,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어차피 곧 공표될 거예요. 엘븐 킹덤의 사절을 맞이할 준비도 해야 되니까요."

다행히 성녀도 따질 건 다 따져보고 이야기해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인리히 경 정도면 이 정도는 알아도 괜찮아요! 세례를 받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주교급 신성력에 가까워지다니! 어쩌면 나중에 성자급까지 오르실지도 모르니까요!"

···진짜 제대로 판단해서 이야기해준 게 맞겠지?

그간 겪어본 성녀는 이상할 정도로 하인리히에게 호의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신성력이 강한 이들을 친밀하게 여긴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큰 차이가 있었다.

'사실 나한테 나쁜 일이 아니긴 하지. 성녀가 직접 말해줬다고 하면 뭐라고 따질 사람도 없고.'

그래도 이 순진한 아가씨가 어떤 못된 악당에게 속아 중요한 정보를 술술 불어 버릴까 봐 심히 걱정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내가 옆에서 잘 지켜주면 되겠지.'

우리 착한 성녀님을 이용해 먹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까!

"아앗! 쉬는 시간이 끝나 버려요! 하인리히 경이랑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전 지렁이를 봐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성녀는 일방적인 인사를 남기고는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음, 그런 능력을 지렁이를 관찰하는 데 사용하다니."

일전에 비가 오는 날 성녀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쪽은 우산을 들고도 흥건히 젖은 채였건만, 성녀는 맨몸으로 화단에 쪼그려 앉아 지렁이를 관찰하는 와중에도 뽀송뽀송한 상태 그 자체였다.

투명한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빗방울이 그녀의 일정 범위 안으로 범접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지렁이들에게 신성력을 퍼부어서 치유와 축복까지 걸어주고 있었지.'

성녀의 축복을 받은 지렁이라니.

처음 그걸 목격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신도라도 쉽게 받을 수 없는 호사건만.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전환했다.

'그나저나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라···.'

그들의 존재가 어떤 변수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딱히 접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으니까.

'설마 들키진 않겠지?'

성녀의 눈길에서는 벗어났지만,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 미지수인 하이 엘프까지 가세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결계를 좀 더 보강해 둘까.'

다른 차원의 술법을 좀 더 섞어서 공을 들여 놔야 할 것 같았다.

***

그리고 불과 며칠 후.

하인리히가 광휘수호 성기사단에서 근무할 날이 절반 정도 남은 시점에.

엘븐 킹덤의 사절단이 대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방문했다.

#53

엘프 (1)

오늘은 아침부터 대신전 전체가 들썩거렸다.

엘븐 킹덤의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모두가 분주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바쁘네요."

내부의 경비를 맡은 우리만 빼고.

한가하게 내뱉은 하인리히의 말에, 그와 함께 게이트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고 선 라이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갑자기 정해진 일이었으니까요. 하이 엘프까지 참여하는 교류의 규모에 비해, 일이 결정되고 실행되기까지 기간이 무척 짧았어요. 준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겠죠."

그녀의 말대로, 엘븐 킹덤과의 협력이 결정되고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이건 어느 한쪽에서만 서두른다고 되는 일정이 아니었다.

양쪽이 모두 합의하고 최대한 서둘러야만 가능한 일.

'교단 측이야 불사왕의 후예를 추적하는 일이 시급하다 판단했다고 쳐도, 엘븐 킹덤에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건가?'

사실 교단이야 사절을 맞이할 준비만 하면 된다지만, 정작 바다를 건너는 것은 저들이었다.

대륙을 이동하는 일이 쉬울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서두른다는 것은, 상당히 급한 용무가 있다는 뜻인데···.

'그들의 목적이 뭐든, 여기서 내가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지.'

먼저 정보를 입수한 덕에 결계를 보강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당장은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도 저희만 이렇게 여유로우니 뭔가 미안해지는데요."

"어쩔 수 없죠. 이게 우리 일인걸요."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들.

만약의 불순한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강화하고 순찰하느라 바쁜 외곽 기사단과는 달리, 내부 경비를 맡은 광휘수호는 딱히 그런 것도 없이 평소의 업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신전 내부를 향한 침투 경로 점검은 이단심문관측에서 한다고 하니.'

물론 평소 이상으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것들을 전부 감안한다고 해도 지금 저들 정도는 아니었다.

"저희의 본격적인 업무는 사절단을 맞이하고부터 시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때가 되면 정말 숨 쉴 틈도 없을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아, 아뇨··· 아쉬워한 건 아닌데···."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눌 무렵, 통로 저편에서 성녀를 위시한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슬슬 시간이 되었나 보군요. 이제부턴 사소한 실수라도 하지 않게 정말 긴장해야 합니다."

"옙."

그들이 정면을 응시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라이린 경, 하인리히 경. 오늘은 두 분이 이곳의 경비를 맡으신 건가요?"

뒤에 사람들을 줄줄이 매단 채로 성녀가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습니다, 성녀님. 성녀님께선 엘븐 킹덤의 사절단을 맞이하러 가시는 거지요?"

"네! 동부에 있는 신전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이제 게이트를 두 번만 넘으면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물론 그런 성녀의 행동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만큼,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성녀를 대하는 데 익숙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사를 받고 대화를 나눈 라이린은 곧바로 슬쩍 물러나며 게이트 쪽을 가리켰다.

"그럼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요. 서둘러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앗! 그렇죠. 지금쯤이면 이미 한 번은 넘었을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성녀가 게이트로 향하다가 잠시 멈칫하고는 하인리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채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

갑자기 이어진 침묵.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하인리히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러지? 설마 인사를 안 했다고?'

라이린이 인사할 때 같이 묵례했는데. 못 봤나?

그렇게 그가 지금이라도 다시 인사를 건네야 하나 고민하던 중.

"하인리히 경도 같이 가죠?"

성녀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 엘븐 킹덤의 사절단을 맞이하러요. 굳이 두 명이나 여길 지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황급히 덧붙이는 그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지금 굳이 통로를 둘이나 지킬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의 면면이 워낙 화려했으니까.

성녀 본인은 둘째치더라도···.

불사왕 토벌대를 이끌었던 라티우스 대주교를 비롯한 고위 사제들, 두 명의 팔라딘을 포함한 고위 성기사들까지.

그들이 직접 게이트로 향하는데 일반 성기사 한둘 정도는 있으나 마나 별 차이도 없었다.

"굳이 그를 데려가려 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애초에 괜히 경비를 세워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괜찮다고 경계 인원을 자의적인 판단으로 움직이는 게 버릇이 된다면, 나중에 경비에 구멍이 뚫리고 체계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으니.

아직 어린 성녀인 만큼 그런 부분은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라티우스 대주교의 말에 성녀가 답지 않게 쭈뼛거렸다.

분위기를 보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하인리히 경에게 미리 많은 경험을 하게 해 주고 싶어서요."

"확실히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이 유망한 인재이긴 합니다만, 지금 교단에서 하는 지원도 결코 가벼운 수준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가···."

아무리 하인리히가 독보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가치를 증명했다고 해도, 너무 과한 편애는 다른 이들의 불만을 살 수 있었다.

물론 신앙심이 투철한 주신교단이니만큼, 그것이 신성력이 강한 상대라면 납득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사실 신참인 하인리히가 지금까지 별다른 마찰 없이 모두에게 인정받은 것도 그 영향이 컸으리라.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이성대로만 조절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괴감을 느끼고 마음의 병을 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 잘 설명은 못하겠는데···. 왠지 신경 쓰여서요. 관심이 가고, 뭐라도 챙겨주고 싶고···."

성녀가 허둥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성녀와 하인리히 사이를 왕복했다.

"흠··· 그 말씀은···."

무언가를 생각하던 대주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문제라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물론 그들의 눈에 사심이라곤 일절 담겨있지 않았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긍하는 라티우스 대주교와 일행들.

"그렇게 됐으니 잠깐 혼자 여기를 지켜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는가? 라이린 세트리 경?"

"네! 문제없습니다. 맡겨주시지요."

주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성녀의 말이다.

그 말인즉슨, 그녀는 무의식중에 주신의 의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오호~ 확실히 성기사 서임식에서 축복을 받을 정도로 주신께서 관심을 보이시는 인재라고 듣긴 했지. 이거 욕심나는데? 너 혹시 이단 놈들의 골통을 부수는데 관심 없나?"

검은 머리를 짧게 친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싱긋 웃으며 하인리히에게 말을 걸었다.

두 명의 팔라딘 중 하나, 흑마법사와 악마 숭배자들을 사냥하는 데만 전력을 다하는 검은삭월 성기사단장이었다.

"하인리히 경은 성기사단에 관심이 없다는 것 같더군. 그래도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우리 은빛날개가 먼저라는 걸 잊지 말고."

옆에서 슬쩍 끼어드는 팔라딘 투스킨 경까지.

갑작스러운 거물들의 관심에 심히 곤란해졌다.

고위 인사들의 호의를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보다 성녀가 유독 나한테 친근하게 대했던 게 주신의 영향을 받아서였나?'

확실히 주신이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긴 했다.

축복까지 내려줄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아무래도 그런 점과 신성력이 강한 상대에게 호의를 가지는 성녀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터.

어쨌든 이쪽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당장 도움이 되기도 했고.

"흠···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늦어버리겠군요. 이제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인리히까지 포함된 일행은 서둘러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절단이 먼저 오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곧 게이트가 가동합니다."

게이트 룸에 도착한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그곳을 관리하는 대사제의 말이 들려왔다.

"휴~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요! 그래도 다행히 딱 맞춰서 왔으니까요! 아하하···."

성녀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잘못한 건 아는지 민망한 표정이었다.

우우웅—

때마침 게이트의 중심에 푸른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용돌이에서 하나둘 빠져나오는 인영들.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은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곧바로 대열을 갖췄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곧 선두에 선 이를 필두로, 한쪽에서 기다리던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엘븐 킹덤의 사절단 여러분. 로셀리아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주신교단의 성녀, 리에스타 세인트 하티아누스입니다."

그들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성녀가 앞으로 나서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환영의 말을 건넸다.

공적인 자리여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진지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 라포리 그랜우드라고 합니다."

선두에 선 하늘색 머리의 미남자가 가슴에 한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절단 일행들.

그렇게 엘프 사절단이 로셀리아 대신전에 발을 내디뎠다.

***

엘프 측의 급한 요청으로 빠르게 자리가 마련되었다.

자신들의 사정에 의해 먼저 도움 받을 수 있겠냐고 구한 양해를 주신교단 측에서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하인리히는 성녀의 배려로 엘프 측과의 대담에 참석할 수 있었다.

성녀와 라티우스 대주교, 두 명의 팔라딘의 뒤에 서서 그들을 수행하는 자리에서.

엘븐 킹덤 측은 하이 엘프 라포리를 제외하고 남녀 두 명이 참석했다.

그들 셋이 사절단의 수뇌부이리라.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

하인리히는 성녀의 뒤에 서서 슬쩍슬쩍 그들을 곁눈질했다.

그의 주 관찰 대상은 어깨까지 닿는 부드러운 하늘빛 머리를 가진 하이 엘프, 라포리 그랜우드였다.

새하얀 피부와 날씬한 체형, 뾰족한 귀는 상상했던 그대로.

이마에 그려진 나무를 형상화한 듯한 녹색 문양도 특이했지만 신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별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였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와, 동공이 별 모양이야. 거기다 금색.'

짙은 푸른색의 홍채와 금빛의 별 모양 동공은 마치, 새벽하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엘프들의 눈은 평범한 걸 보니 종족 특징은 아닌 것 같고. 하이 엘프의 상징? 물어보면 실례이려나?'

그렇게 그를 힐끔거리며 딴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제 눈동자가 신기하신 모양이군요."

갑자기 들려온 라포리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상대가 무례하게 받아들이면 문제가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하인리히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흠흠···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눈동자가 굉장히 아름다우시군요. 마치 하늘에서 빛나는 별 같아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헛기침하며 애써 침착하게 사과를 건네는 성녀.

···아무래도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라포리의 눈동자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 같다.

"괜찮습니다. 마침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요. 이 눈동자는 하이 엘프의 징표입니다."

'역시!'

궁금증이 풀려서 속이 시원해진 하인리히는 편해진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저도 처음에는 평범한 엘프였습니다. 세계수께 선택받아 개안하게 되고, 하이 엘프라고 불리게 된 것이지요."

하이 엘프는 일종의 제사장이었다.

엘프들과 그들의 신앙의 대상인 세계수의 사이를 잇는 가교.

"저희에게 하이 엘프는 굉장히 소중합니다. 하이 엘프가 될 수 있는 적합성을 가진 이가 별로 없거든요. 한 세대에 두세 명이 태어나는 게 고작이랄까요?"

당연하지만 장수하는 엘프 기준에서의 한 세대는 인간과 큰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 그들 모두가 하이 엘프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적성을 타고난 엘프가 성장해서 어떠한 조건을 달성하게 되면, 세계수께 선택받아 하이 엘프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세계수의 인도를 받아 그것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게 되면, 세계수가 내려주는 열매를 먹고 하이 엘프로 개안하게 된다고 한다.

"현재 남은 하이 엘프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나이가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새로 탄생하는 하이 엘프가 매우 간절한 상황이죠."

눈치를 보아하니 열 명에 많이 못 미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주신교단을 믿는다고 해도 모든 사정을 오픈하기에는 무리였겠지.

"그런데 얼마 전, 세계수께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 이온 대륙에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아이가 탄생했다고."

옛날에 대부분의 이종족이 에나멜 대륙으로 이주했지만, 이온 대륙에 남은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의 후손 중 하나가 자격을 갖추게 된 모양.

그런데 도저히 자력으로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듯했다.

"···노예 사냥꾼을 거쳐서 흑마법사의 제물로 팔려 갔습니다. 그들의 손에 넘어간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시간을 지체할수록 위험하니 최대한 빠른 수색이 필요합니다."

세계수의 계시로 알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전 대륙에 걸친 교단의 정보망이 필요하다고.

"최대한 상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있을 곳이 유력한 위치나, 대상자의 외모도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좋습니다. 주변 풍경에 대한 묘사도 최대한 상세했으면 좋겠군요."

성녀의 옆에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라티우스 대주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예 사냥꾼들의 손에 이끌려 북부 산맥의 어딘가로 향한 것까지는 파악했습니다. 흑마법사들에게 넘어가고부터는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더군요."

"북부 산맥은 넓습니다. 사실상 이온 대륙의 북쪽은 대부분 북부 산맥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요.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외모는 아직 개안을 하지 않아 평범한 엘프와 다를 것 없습니다. 외형은 인간의 나이로 십 대 중반, 연두색 머리와 주황색 눈을 하고 있습니다."

'응?'

"음, 일단 최대한 교단의 정보망을 동원해 보겠습니다. 아, 혹시 그분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세실리입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저희도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돕도록···."

'어라? 이거···.'

그들이 이후의 일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했지만, 이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

"하하하핫—! 이거 곤란하게 됐구만!"

할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정확히는 검은 표범의 머리 가죽을 긁적였다.

"그래, 꼬마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그는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물론 피가 잔뜩 튄 얼굴로 그래봤자 흉악해 보일 뿐이었지만.

"세···세실리···. 세실리예요."

연두색 머리와 주황색 눈을 한 엘프 소녀.

아무래도 할리가 먼저 찾아버린 모양이었다.

#54

엘프 (2)

며칠 전.

"후웁— 하! 산이 가까워서인지 상쾌하군."

할리는 북부 산맥과 맞닿은 툴크 왕국의 경계, 강철의 성채에 도착했다.

타라크에서 용병으로서의 첫 시작을 알린 그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은 법.

할리의 아름답고 우람한 근육을 보고도 미개하니 뭐니 하며 시비를 거는 얼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저게 그 랄프 패거리를 박살 냈다는···."

"쉿! 눈 마주치지 마."

제법 명성을 떨친 놈들이었는지,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덤빈 것 같았다.

전사가 다루는 기운인 오러(Aura)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

"맨손으로 사지의 뼈를 몽땅 분질러 버렸다지?"

"칼도 잘 안 들어간다는데?"

처음 시비가 붙었을 때, 할리는 인간과 싸워본 적이 없는 만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영웅이 될 그가 힘 조절 하나 못해 도시 내에서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하나하나 붙잡아서 곱게 뼈를 비틀어 주었지!'

그렇게 하면 실수로 죽일 염려는 없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몸이 어느 정도의 힘에 부서지는지 체득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거기다 오러를 쓰는 법도 배울 수 있었고.'

발악하는 놈들의 몸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급격하게 단단해진 몸뚱이.

그래봤자 힘을 더 주니 뚝 하고 부러져 버리긴 했지만, 신체 능력의 증가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쓸 만하다 여겨서 놈들을 쥐어박아 그 방법을 알아낸 건 좋은데···.'

이 몸뚱이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몸은 평범한 인간보다는 마수에 더 가까웠으니까.

인간의 육체를 상정해 만들어진 기술을 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몸의 성분을 인간의 것으로 되돌려 오러를 쓰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강했으니, 어찌할 수도 없는 계륵 그 자체였다.

'일단 뭐든 알아두면 나중에 쓸 일이 있겠지.'

할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당장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사냥감을 찾아 북부 산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크워어엉!"

"후하하핫—! 뒤져라!"

눈이 돌아간 할리는 광소를 터트리며 커다란 곰의 형상을 한 마수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오른손의 도끼가 두 발로 선 놈의 무릎을 찍고 지나가자마자, 왼손의 도끼가 오금에 틀어박혔다.

"크워억!"

곧바로 내려쳐지는 곰의 앞발.

그는 옆으로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공격을 흘리고, 다시 오른손의 도끼를 놈의 팔오금에 박아 넣었다.

야생적인 할리의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도끼술.

양손에 들린 쌍도끼가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마수의 전신을 유린했다.

콰직!

"끄어어···."

그렇게 거듭된 도끼질에 놈이 자리에서 비틀거린 순간.

"후읍!"

숨을 들이쉰 할리가 마수에게 달려들며 허리를 한껏 비틀었다.

팽창하는 근육, 그리고 회전의 반동을 통해 한껏 강화된 힘으로 곰의 다리에···.

쩍—!

로우킥을 날렸다.

한순간에 마수의 다리뼈가 박살 나며 놈의 몸이 공중에서 구십도 회전해 바닥에 처박혔다.

"으랏차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냥꾼, 할리는 곧바로 점프해 곰의 목에 도끼를 내려찍었다.

"꾸어억!"

질긴 가죽과 강철 같은 근육에 도끼날이 깊이 박히지 않는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부풀어 오른 근육의 양손을 번갈아 내려찍으며 신명 나는 도끼질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크하하핫! 제법 힘든 상대였군!"

마침내 숨이 끊어진 마수의 위에 올라선 할리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도끼를 집어 던지며 날카롭게 변형시킨 손을 사냥감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단단한 마수의 신체를 깊숙이 파고드는 손톱.

이윽고 주먹만 한 마석이 할리의 손아귀에 딸려 나왔다.

그는 그것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 후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무기를 쓰는 것보다 맨몸이 더 강하다니···.'

애써 외면했던 잔혹한 진실.

기껏 도끼까지 구하고 도끼술도 연마했는데, 정작 몬스터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신체에 깃든 마나를 변질시켜 이용하는 놈들의 육체 강도는 상상 이상이라, 아무런 기운이 담기지 않은 무기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지금은 압도적인 괴력을 이용해 우격다짐으로 해치울 수 있었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아무리 단단한 흑철강 도끼라도 망가져 버릴 터.

그렇다고 힘을 적당히 주면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차라리 전력을 다할 수 있는 맨몸이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이래서야 진정한 힘을 감추고 약한 척하는 숨은 고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잠깐 유혹이 밀려왔지만, 자신의 목표에 맞지 않으니 안 될 말이었다.

"후아— 이제 의뢰품을 챙겨 볼까?"

할리는 마석을 통해 육체의 성분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손톱을 날카롭게 뽑았다.

그리고 의뢰품인 웅담을 적출하기 위해 곰의 배를 갈랐다.

'「육체변이」로 마수의 힘을 사용하면 이렇게 쉬운데, 어째서 무기를 쓰면··· 응?'

한순간 그의 동작이 정지했다.

신체에 깃든 마나를 변질시킨 마물들의 힘, 생체력.

흡수한 마나를 체내에서 정제한 전사들의 힘, 오러.

'어쨌든 몸 안의 기운을 자신에게 맞게 가공한 힘이라는 건 같다. 다루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마물들은 타고난 신체로 본능적으로 마나를 이용해서 복잡한 정제 과정이 필요 없었다.

인간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마나를 이용하기 위해, 오러를 정제하는 법과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같다.

그럼 그 두 가지 장점을 합쳐서···.

'정제 과정은 건너뛰고, 오러를 다루는 법을 이용해서 생체력을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

실상 오러 단련법에서 중요하고 복잡한 부분은 마나를 정제하는 과정이었다.

수준 높은 기술은 각 세력의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하지만 다루는 법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까다로운 기술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전에 얻은 오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돌연변이」와 「육체변이」를 이용해, 인간의 육체와 현재 육체의 차이점을 분석하며 괴리감을 조율해 나갔다.

흑마력, 혈마력, 신성력.

그간 많은 기운을 다뤘던 경험 덕에 작업은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열량이 부족해지면 곰 고기를 뜯어 먹어가며 생체력을 다루기 위해 집중하던 순간.

머릿속에서 섬광이 스쳤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생체 오러」를 획득합니다."

한 손에 들려있던 도끼에서 흐릿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흐··· 후하하하핫—!"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오는 할리의 광소.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인간의 힘을 손에 넣는 순간이었다.

***

촤악—!

목이 베인 커다란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쿠웅!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가 쓰러지며 주변의 대지에 진동이 일었다.

"크흐흐··· 그놈 참 오지게도 강하구만."

그 자리에 주저앉은 할리가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그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고 입에서는 지금도 계속 역류한 혈액이 쏟아져 나왔다.

「재생」이 쉴 새 없이 발동하고 있었지만, 조각난 왼팔은 아직도 수복 중이었다.

꼬르륵—

그 와중에 밀려오는 미칠 듯한 허기.

전투를 벌이며 「육체변이」와 「생체 오러」, 「재생」으로 에너지를 펑펑 써댄 덕에 그간 쌓아둔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것이다.

"끄응···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겠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할리가 쓰러진 오우거에게 다가가며 오른손의 도끼에 오러를 덧씌웠다.

5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

그 전신은 압도적인 밀도의 근육으로 채워져 있어, 근력은 물론 순발력까지 초월적인 수준이다.

감각도 얼마나 예리한지 태평하게 드러누워 자고 있던 놈에게 몰래 다가가 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반응해 반격해 올 정도.

"역시 근육밖에 없어서인지 너무 퍽퍽한데."

전투 도중 전신의 뼈가 몇 번이고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됐지만, 끝까지 「재생」으로 버티면서 「생체 오러」를 이용해 차근차근 놈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하하핫—! 그래도 결국 승자는 이 몸이지!"

이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괴식」 덕분인지 드디어 웃을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강한 놈인 만큼 효과도 좋구만. 애써 사냥한 보람이 있어!"

잔뜩 배를 채워 에너지를 비축하고, 마석까지 씹어 먹자마자 곧바로 터져 나오는 육체의 반응.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압축되고를 반복한다.

뼈대가 단단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으며 피부가 한층 더 질겨졌다.

"후우··· 좋군."

한층 강해진 육체에 만족감을 느끼며 오우거의 사체를 마저 해체했다.

그렇게 희귀한 소재로 아공간 마도구가 가득 찰 정도로 전리품을 챙기고, 놓쳤던 왼손의 도끼도 회수한 후 이동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지?"

울창한 숲속.

오우거와의 격한 전투로 주변이 뒤집어져 방향이 가늠되지 않았다.

할리는 곧바로 근처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드넓게 펼쳐진 광활한 나무의 바다에 속이 시원해졌다.

"아핫핫! 이거 신나서 너무 깊게 들어온 모양인데?"

그는 요 며칠간 마수의 발달된 후각을 이용해 여러 종류의 사냥감을 추적했는데, 무작정 새로운 냄새만 따라가다 보니 깊은 곳까지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북부 산맥의 광활함을 생각지 못하고 다양한 유전자에만 눈이 멀어 무작정 이동한 끝에 벌어진 사고.

"뭐, 밤이 되면 별을 보고 이동하면 되겠지!"

물론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젠 그도 아우테리카 생활이 일 년이 넘은 만큼, 별을 통해 방위를 확인하는 것 정도는 간단했으니 굳이 전송진까지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쿨타임 중이라 쓸 수도 없었지만.

나무에서 내려온 그는 밤이 오기 전까지 사냥이나 더 할 생각으로 다시 숲속으로 향했다.

그렇게 날이 슬슬 어두워질 무렵···.

킁킁—

"음?"

예민한 마수의 감각에 뭔가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오랫동안 맡아온 고향의 향취와도 같은 추억 어린 감각.

"흑마력 냄새?"

그것도 은폐장을 통해 억눌러진 듯한 희미한 마력의 잔향이었다.

한스의 비밀 실험실에 제법 오래 머물렀던 경험으로 봤을 때, 이건 백 프로였다.

"흑마법사가 숨어있나?"

잠시 고민하다가 냄새가 느껴지는 곳으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마수의 감각에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으니까.

그 끝에 발견할 수 있었다.

흑마법으로 펼쳐진 결계를.

'이것도 익숙한데.'

할리의 눈을 통해 본 그 결계를 곧바로 한스가 해석해 결과를 내놓았다.

초창기, 한스가 첫 번째 불사왕의 파편을 취해 데미리치가 된 직후 접했던 결계.

역천의 서약이 사용하던 은폐 결계였다.

'놈들이 여기도 숨어있었나? 하긴 탈리아 왕국에만 있다고 보기엔 사이즈가 큰 놈들 같긴 했어. 그때도 놈들에게 무슨 금제가 걸려있었고.'

영혼이 모두 어딘가로 빠져나갔었지.

지금의 한스라면 그 금제를 무시할 수도 있을 텐데, 성녀의 추적을 피해 숨어만 있느라 놈들을 찾을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해 버렸네.'

왠지 모를 반가움이 밀려온 찰나···.

'응?'

할리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미세한 흑마력의 유동을 감지한 한스가 새로운 진단을 내놓았다.

'제물 의식이 진행 중? 그리고 이건···.'

「금단의 지식」의 흑마법 지식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이 정도 제물 의식은 어떻게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곧바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제물을 바친 직후의 흑마력으로 음차원 게이트를 생성해 이동하기에 추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즉, 여기서 놓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

"후흐··· 겨우 이렇게 만났는데, 얼굴이라도 봐야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웃은 그가 양손에 도끼를 꺼내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오우거를 사냥해서인지 한층 짙어진 아지랑이가 도끼를 감싸고 피어올랐다.

그렇게 전신에서 생성된 생체 에너지가 두 개의 도끼날에 담기고.

"후하하하—! 부서져라!"

어깨 뒤로 넘어갔던 두 개의 도끼가,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결계를 강타했다.

콰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결계에 구멍이 뚫리고, 숨겨져 있던 동굴이 드러났다.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할리는 개의치 않고 내부로 당당히 들어섰다.

"내가 또 너희 잘되는 꼴은 못 보지."

한스의 뒤통수를 치고,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던 놈들과 한 패거리였다.

이쪽이 이용할 여지가 있다면 모를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전력으로 방해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 와중에 뭐라도 건질 수 있으면 좋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튀면 되니까!

'절대 뒤끝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그렇게 흑마법의 기운이 짙게 풍기는 곳으로 달리던 도중, 안쪽에서 한 무리의 인간들이 튀어나왔다.

"뭣?! 네놈은 누구냐!"

"막아!"

흑마법사의 하수인들이었다.

기사급 한 명과 용병 수준의 다섯.

'기다려줄 필요 없지! 곧바로 전력으로 간다!'

할리의 다리 근육이 팽창하고, 그의 몸이 습격 직전의 맹수처럼 웅크려졌다.

그 직후.

콰앙!

그는 이미 기사급인 놈의 코앞에 있었다.

"크윽! 이놈이 감히!"

뽑은 검에 짙게 피어오르는 흑마력.

갑작스러운 습격에도 그는 능숙하게 무기를 휘둘러 할리의 도끼를 쳐냈다.

카앙—

"무슨?!"

하지만 그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괴력에 그의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

스걱!

할리의 반대편 손에 들린 도끼가 그의 목을 치고 지나갔으니까.

'방심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인 법.'

무기를 휘두르는 것과 흑마력의 수준으로 봤을 때 결코 이렇게 쉽게 죽을 수준이 아니었지만, 할리를 일반적인 전사라고 생각했던 것이 죽음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다.

"카하핫! 한꺼번에 덤벼라!"

그는 광소를 터트리며 남은 하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할리는 전신에 피가 튄 모습으로 다시 통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잡졸들은 딱히 신경 쓸 정도도 아니군. 흑마법사들은 전부 안쪽에 있나?'

그렇게 놈들과의 결전을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그의 감각에 땅속에서 뭔가가 급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적의 본거지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호의적일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곧바로 도끼를 휘두르려는 찰나.

"꺅!"

땅속에서 작은 소녀가 쑥 튀어나왔다.

허름한 옷차림과 목에 걸린 검은 족쇄로도 감출 수 없는 귀여운 외모.

뾰족한 귀와 연두색 머리, 주황색 눈을 하고 품 안에 웬 나뭇가지를 안고 있는 엘프 소녀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할리는 이 소녀가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하하하핫! 이거 곤란하게 됐구만!"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꼬마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 본인에게 다시 확인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흑마법사 소굴에서 처음 만난 근육질의 사내가 대뜸 이름을 물었지만, 엘프 소녀는 조금 움츠러들었을 뿐 순순히 질문에 답했다.

"세···세실리···. 세실리예요."

역천의 서약 아지트 한가운데에서.

하이 엘프 후보 세실리와 야만 전사 할리가 조우한 순간이었다.

#55

엘프 (3)

작전 변경이다.

원래는 되는 대로 적당히 깽판을 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소환 해제로 도망가려고 했는데···.

"저, 저기···."

엘븐 킹덤과 주신교단이 찾고 있는 엘프 소녀.

'이 상황, 써먹을 수 있겠는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할리의 이름값을 높이고, 하인리히는 교단에 공을 세울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음! 내 이름은 할리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여기서 나가고 싶은 거겠지?"

"···네!"

흑마력의 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동굴 안쪽에서 엄청난 수의 적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럼 잠깐 실례하지!"

"네? 우햣—!"

한손에 든 도끼를 등에 걸고, 세실리를 옆구리에 낀 채 그대로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다리 근육이 팽창하고, 그의 몸이 폭발적인 속도로 가속했다.

"흐우우—!"

할리의 옆구리에 매달린 상태로 두 눈을 꾹 감은 세실리.

여전히 그 품에는 나뭇가지를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그 나뭇가지는 뭐야? 소중한 거?"

빠른 속도로 입구로 이동하며 잠깐 여유가 생긴 김에 그녀에게 물었다.

얼핏 봐서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기에.

"흐에? 아, 이건··· 세계수님의 가지예요. 덕분에 안쪽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성실히 대답하는 그녀.

제물 의식이 한창 진행 중일 심처에서 어떻게 할리가 있는 곳까지 빠져나왔나 했더니, 세계수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가지가 제물이었던 그녀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상황이 급박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굉장히 순종적으로 따르는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세실리는 줄곧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경계할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는데도.

흑마법사의 소굴에서 마주친 근육질의 벌거벗은 남정네.

몸의 곳곳에 핏방울이 튄 것은 물론, 양손에는 아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쌍도끼까지 든 상태였다.

'어후, 나라도 기겁하겠네.'

물론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미관상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그저 약간 위축된 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추게 되면 세계수의 인도를 받게 된다고 했던가.'

무사히 세계수가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준다고 했다.

아무래도 세계수는 할리가 이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협조해주면 나야 편하고 좋지. 그런데 세실리의 목에 걸린 저거···.'

다시 빠르게 분석 결과를 내놓는 흑마법의 대가, 한스 선생.

'흑마법을 이용한 봉인 마도구. 제법 수준이 높아. 힘으로 강제로 풀면 위험하겠군. 한스였다면 해제할 수 있었겠지만···.'

마도구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조절하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는데, 할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했는데 정작 직접 할 수가 없다니.'

아마 저것 때문에 하이 엘프인 라포리가 세실리의 위치를 찾지 못한 것이리라.

'할리가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호응한 걸 보니, 세계수는 세실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긴, 주신 만큼은 아니지만 세계수도 엘프들의 신앙을 받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아마 직접 알려줄 수 없는 다른 제약이 있었겠지.

"핫핫핫! 이제와선 아무 상관 없지!"

등 뒤에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흑마력이 느껴졌지만, 이미 동굴 입구가 코앞이었다.

밖으로만 나간다면 괴물 같은 체력으로 도망 다니는 그를 쉽게 잡진 못할 터.

그때.

다시 땅속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명백한 살의.

문제는 그것이 다가오는 방향이 그들이 향하는 바깥 숲 쪽이라는 것이었으며···.

콰아앙—!

정확히 입구의 땅에서 솟구친 그것의 덩치가 동굴을 통째로 막을 정도로 컸다는 점이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하지만 할리는 개의치 않고 입구를 막은 거대 지렁이, 어스웜에게 속도를 더 높여 달려들었다.

"히이익—?!"

옆구리에 낀 상태였던 세실리를 휘릭 돌려 제대로 끌어안고, 최대한 그녀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고정한 뒤···.

퍼어엉!

그대로 몸을 띄워 놈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꾸어어엉—!]

충격에 꿈틀거리는 어스웜.

하지만 그 육중한 무게와 바닥에 고정된 나머지 신체 부위 때문에 여전히 입구에는 조금의 틈도 생기지 않았다.

반동으로 뒤로 튕겨 나갔던 할리가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하며 실소를 흘렸다.

"후흐흐··· 어째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다."

아무리 봐도 입구를 뚫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저 뒤에서 몰려오는 놈들과의 싸움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가씨, 정신 차려. 아무래도 이제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흐어어~ 네에?"

격한 움직임으로 어지러움에 시달리던 그녀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할리는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세실리를 내려놓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검은 표범 투구에 망토처럼 연결된 가죽을 길게 찢었다.

가운데를 잘라 두 갈래로, 다시 양쪽 자락의 윗부분을 잘라 좀 더 길게 이어지도록.

"자, 이쪽으로 와!"

"네, 넵!"

그리고 세실리를 품에 안은 채, 두 갈래의 가죽으로 그녀를 번데기처럼 둘둘 말아 자신의 몸과 단단히 고정했다.

그의 등판을 덮던 가죽이 워낙 커서 아예 밖을 볼 수 없도록 숨구멍만 남기고 둘러쌀 수 있었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처럼, 커다란 근육 덩치에게 매달린 자그마한 가죽 뭉치··· 아니, 엘프 소녀.

'등에 업는 것보다는 이 편이 보호하기 좋겠지. 마수 가죽이니 어지간하면 쉽게 끊어지지 않을 테고.'

그렇게 할리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양손에 도끼를 틀어쥐는 와중에도, 어스웜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입구를 지키고만 있었다.

본능적인 마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움직임.

확실히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놈이었다.

"핫하! 그럼 본격적으로 간다! 일단 네놈부터 족쳐주마!"

할리는 에너지를 아낌없이 퍼부으며 전신에 「생체 오러」를 끌어올렸다.

다른 놈들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입구부터 뚫기 위해서.

***

"네? 뭐라고 하셨어요, 하인리히 경?"

성녀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의 반응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라티우스 대주교와 팔라딘들은 물론, 라포리를 비롯한 엘프들까지.

"그 세실리란 분.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제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그런 시선에도 꿋꿋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음··· 혹시 경에게 특정 대상을 추적하는 축복이라도 있는가?"

조심스럽게 묻는 라티우스 대주교.

확실히 믿기 힘들 터였다.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가 말을 꺼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들의 목표를 찾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아까웠다.

"축복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느껴집니다. 연두색 머리에 주황색 눈을 한 엘프, 세실리라는 분의 존재가요. 하지만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이들의 기색이 일변했다.

엘프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성녀를 비롯한 교단의 고위층을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수행인으로 보이는 이의 갑작스러운 말을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성녀는 하인리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엘프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인리히 경은 믿을 수 있어요. 그는 주신께서도 관심을 보이는 분이니까요.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저희는 교단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엘프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하인리히를 바라봤다.

"그럼 바로 움직이죠. 그곳의 위치가 어디죠?"

그와 똑바로 마주치는 그녀의 두 눈에는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대륙 서쪽에 있는 툴크 왕국의 접경지인 북부 산맥입니다. 게이트를 이용해 아오니아 백작령에 있는 타라크 신전으로 이동하면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죠."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성녀는 그 와중에도 성표를 쥐고 작게 중얼거리다가, 하인리히를 돌아보았다.

"바로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해뒀어요. 가면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거예요."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 혹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가?"

"가까이 가면 제 '축복'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강철의 성채 북쪽 어딘가라는 것밖에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의 모두가 하인리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성녀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영향을 끼쳤을 터.

이제 그 믿음에 보답하기만 하면 교단에서 그의 신뢰도는 크게 상승할 것이다.

그렇게 서둘러 이동한 그들은 금세 게이트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와중 아주 잠깐 사소한 실랑이가 발생하긴 했지만.

"성녀님은 안 됩니다."

"팔라딘 둘에 대주교 하나, 거기에 하이 엘프까지 가는데 굳이 성녀님까지 가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하하핫! 이단 놈들은 저희에게 양보해 주시지요!"

자연스럽게 게이트로 이동하려던 성녀가 교단의 인물들에게 제지당한 것이다.

그녀의 볼이 미세하게 부풀었지만, 외부인인 엘프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뭐라 항변도 하지 못했다.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 추가 인원을 소집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과한 전력이었으니까.

"위치만 안다면 저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이 엘프 라포리도 자신 있게 덧붙이니, 그녀는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녀가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우웅—

서쪽 끝에 있는 탈리아 왕국만큼은 아니었지만, 대륙의 중심인 이곳과 서부에 있는 툴크 왕국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동 거리에 따라 막대한 신성력이 필요했으니, 지금 바로 한 번에 이동하기 위해서는 성녀의 도움이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럼, 모두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걱정 마십시오.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걱정스레 인사를 건네는 성녀에게 하인리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이들의 전력이라면 별다른 피해도 없이 일을 마칠 수 있을 테니.

'사실 문제는 시간을 맞출 수 있느냐는 것뿐이지.'

당장은 할리 혼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놈들이 전력을 쏟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슬슬 조짐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

"후하하핫!"

할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난쟁이 몬스터, 그램린의 머리를 도끼로 찍으며 사납게 웃었다.

그의 주변은 이미 온갖 종류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숲을 지나며 이미 사냥했던 몬스터부터 처음 보는 생소한 놈까지, 거기에 흑마법사의 하수인 놈들은 덤이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놈들을 해치우고 또 해치웠지만, 사방의 숲에서는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동굴 밖으로 빠져나온 건 좋은데.'

입구를 막은 어스웜을 뚫고 나오긴 했으나, 그 와중에 흑마법사들에게 따라잡혀 버렸다.

더욱 큰 문제는 흑마법사들이 몬스터를 부리는 데 특화된 놈들이라는 점이었다.

몬스터가 넘쳐나는 북부 산맥이니만큼, 놈들과의 시너지가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부터 그걸 감안하고 여기에 똬리를 튼 거겠지!'

숲에서 불러들이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흑마법사들이 따로 소환한 놈들도 문제였다.

이놈들은 완전히 각양각색의 생소한 특징을 가진 놈들이었으니까.

한 가지 다행이라면 놈들도 제물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는지, 일부러 세실리를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를 방패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공격을 해오는 몬스터들이 로봇처럼 그들의 명령을 철저하게 수행하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저 서로 조심하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을 뿐.

'그래도 이대로 가면 곤란하다. 할리의 장점은 몸을 돌보지 않고 들이받는 저돌성인데, 지금 상태로는 움직임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세실리를 내려놓고 싸우면 놈들이 그녀만 홀랑 집어 가 버릴 테고, 그렇다고 이 상태가 계속되면 에너지가 떨어지는 순간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게이트를 통해 타라크에 도착한 하인리히 일행.

하이 엘프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려 빠른 속도로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여기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마침 한쪽에서 몬스터들을 조종하느라 여념이 없는 흑마법사 하나가 보였다.

주변에 몬스터들을 호위를 두르고 방어막까지 펼친 모습이긴 했지만···.

"후읍!"

오른손의 도끼날로 짙은 오러가 밀집되고, 그의 허리가 휘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원심력으로 크고 아름다운 원을 그린 오러의 궤적은.

쐐액— 콰직!

"꾸헠—!"

미사일처럼 날아가 방어막을 박살 내고 흑마법사의 몸에 틀어박혀, 그와 함께 허공을 비행해 할리의 시선 밖으로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제어가 풀리자 멈칫하는 몬스터들.

할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광소를 터트리며 놈들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푸확—

왼손의 도끼는 계속해서 유려한 선을 그리며 적을 유린하고, 괴물같이 변한 오른손은 몬스터들의 마석과 함께 심장을 뜯어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쉴 새 없이 보충되는 에너지와 넘치는 체력.

이렇게 가면 하루 종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적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지만.

카앙—!

갑자기 날아든 창을 오러가 깃든 손톱을 휘둘러 쳐냈다.

기습이 실패하자 다시 몬스터들의 틈으로 숨어드는 창을 든 사내.

"라이칸스로프인가? 뭔가 다른데··· 변종?"

한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챙!

반대편에서 날아든 화살이 도끼 면에 맞고 튕겨 나갔다.

"우리의 제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걸로 보니 마물의 피가 섞인 것은 아닌데."

말과 동시에 또 다른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어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 이놈들 더럽게 싸우네.'

상대에게 극찬을 날리며 할리는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전투가 거세지다 보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 「육체변이」까지 아낌없이 사용해야 했다.

"크흐흐흣."

흉포하게 부풀어 오른 전신의 근육, 상어처럼 돋아난 이빨과 발달한 턱.

눈, 코, 귀도 이미 인간의 형상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거 괜찮나? 안 그래도 마음이 조금 아픈 아이인데.'

싸움이 계속될수록 할리의 육체가 광기에 물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계속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언제든 제어할 수 있으니 사고를 칠 염려는 없겠지만, 한스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되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잠깐 고민하던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야성」를 획득합니다."

한순간 감각이 뒤집혔다.

그렇게 갑작스레 느껴진 괴리감에 잠시 멈칫한 찰나, 육체는 본능만으로 움직였다.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가고.

까드드득—!

잠깐의 틈을 노리고 날아든 검이 할리의 톱날 같은 이빨 사이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딜레이 없이 휘둘러진 왼손의 도끼가 습격자의 몸을 동강 내고 나서야 「야성」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로지 본능만으로 움직여 공격성을 극대화한 스킬.

하지만 그러면서도 몸에 각인된 기술은 잊지 않는다.

좀 더 자유롭고 거칠기는 했으나, 그건 틀림없이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도끼술과 체술이 베이스가 된 것이었으니.

한순간에 몸을 낮춘 할리의 코와 귀가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파앗— 뚜득!

"끅!"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사이에 파고들어 오른손으로 창을 든 사내의 목을 비틀었다.

이성은 별거 아니라고 흘려버렸던 정보를, 본능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거 괜찮을지도?'

「야성」을 이용한 방법은 지금까지 그가 사용해왔던 전투 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의 최대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마음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계산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으니까.

게임을 하듯 제삼자의 입장에서, 압도적인 정신력으로 모든 변수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

하지만 그 방식은 할리와 맞지 않았다.

무수한 몬스터들을 잡아먹고 진화한 그 육체를 온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것이 아닌 새로운 전투 방식이 필요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발동을 조절하는 게 가능하잖아!'

할리의 광증을 온전히 「야성」에 쏟도록 조절할 수도 있었으니까.

필요한 전투에서만 미쳐 날뛰는 광전사처럼!

'이 정도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건 충분하겠는데?'

놈들은 알지 못하는 제한 시간이,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56

엘프 (4)

"젠장, 대체 저놈은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지?"

역천의 서약의 장로, 누라베는 갈가리 찢겨나가는 몬스터와 부하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원인은 갑자기 등장한 저 인간인지 라이칸스로프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괴물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놈.

공들여 준비한 제물을 빼돌려 도주 중인 놈이었다.

'최근 운이 좋다 싶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시작은 평소와 같이 노예 상인을 통해 엘프를 구했을 때였다.

그가 속한 학파는 제물 의식을 통해 더욱 강한 악마나 소환수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 가치가 높은 제물일수록 그 효과가 뛰어났다.

그렇게 노예들을 관리하던 중에 발견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손아귀에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제물이 있다는 것을.

'운이 좋았지. 마침 소환했었던 악마가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

그는 곧바로 악마의 조언을 받아 평소보다 더욱 강한 봉인 마도구를 제물의 목에 채웠다.

인과율에 따라 세계수가 제물의 정보를 쉽게 노출하지 못하도록.

그러고도 불안해서 최대한 빨리 의식의 날짜를 잡았다.

엘프들에게 하이 엘프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놈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제물을 되찾으려고 할 터였다.

그 전에 깔끔하게 의식을 마치고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는데···.

'세계수의 가지까지 사용한 건 욕심이었나?'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자'와 '하이 엘프'의 가치가 같을 리가 없었다.

기껏 얻은 최상급 제물을 좀 더 제대로 써먹고 싶다는 욕심이 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래서 조직에서 보관 중이던 세계수의 가지를 이용해 제물과 함께 의식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진짜 하이 엘프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가지를 매개로 삼아 일시적으로 '유사 하이 엘프'로 삼을 수는 있었으니까.

세상의 모든 행운이 그를 돕는 것만 같았다.

일을 마친 직후 곧바로 이동할 생각으로, 대부분의 인원을 불러들이고 의식을 시작할 때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갑자기 결계에 구멍이 뚫리기 전까진.

'설마 그 순간에 세계수가 끼어들 줄이야!'

의식이 흔들린 아주 찰나의 순간을 노린 개입이었다.

세계수의 가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진 줄곧 봉인된 상태였고, 의식이 시작된 후부터는 법칙에 의해 간섭이 차단됐을 터였다.

그 의식이 흔들려 버린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여러 가지 제한으로 인해, 세계수의 가지만을 매개로 삼아 발현된 이적은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제물을 동굴 가장 깊은 곳에서 조금 바깥쪽으로 이동시킨 것이 전부였으니까.

복잡한 동굴의 구조를 생각하면, 직선거리로는 얼마 되지도 않으리라.

그 제물을 홀랑 집어 들고 달아나 버린 놈이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행히 금방 뒤쫓을 수 있었다.

'아직 봉인구가 걸려있으니 이곳의 위치가 발각되진 않았을 거야. 그래도 최대한 빨리 제물을 회수해야 의식의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처음엔 몬스터들을 쏟아 부어 놈의 체력을 바닥내고 안전하게 제물을 회수하려 했지만, 현재 상황을 보아하니 그것도 무리인 듯했다.

"크하하하—! 덤벼라!"

한껏 부풀어 오른 전신의 근육과 인간과 마수를 반씩 섞어놓은 듯한 외형.

하지만 그런 야성적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정련된 움직임에 휘하의 암흑기사들이 맥을 추지 못할 정도였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군. 더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혹시 몬스터 혼혈인가 싶어 통제를 시도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의 마물들의 살점으로 체력을 회복하는 모습은 몬스터 이상이었다.

누라베가 흑마법사들에게 눈짓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준비된 소환진.

그리고.

전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카하핫—! 곤란해! 아주 곤란해! 핫핫핫!"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정확히는 새로운 놈들이 전장에 합류하고부터.

또다시 몸을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지고, 할리의 「야성」이 곧바로 반응했다.

촤아앙—!

흑마력에 휩싸인 검은 대검이 그의 도끼에 튕겨 나갔다.

동시에 광석으로 이루어진 볼트 한 대가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할리의 오른손이 기묘하게 꺾이는 볼트를 낚아채고 그대로 부숴버렸다.

'까다롭군. 역시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흑마법사들도 본격적으로 나서려고 마음먹었는지, 상당한 수준의 소환수들을 전장에 투입했다.

[제법이구나, 잡종!]

심지어 악마까지도.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며 쉴 새 없이 그를 압박하는 3미터가 넘는 악마를 비롯한 소환수들 때문에, 그도 상당한 피해를 보아야만 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것은 물론이고···.

'그래도 「야성」이 있어서인지 한쪽 눈이 없는 것치곤 전투력 저하가 크지 않네.'

가장 큰 피해는 역시 왼쪽 눈을 상실한 것이다.

악마와 소환수들의 갑작스러운 참전으로 한순간에 난전이 벌어지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까 전의 볼트가 날아와 눈에 박혀버렸다.

'그것뿐이었다면 「재생」으로 수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광석으로 이루어진 볼트가 그대로 터져 나가는 바람에 어찌할 틈도 없이 눈 하나를 잃었다.

거기다 이쪽이 「괴식」을 사용해 체력을 회복하는 것을 경계했는지, 흑마법사들이 자잘한 몬스터들을 뒤로 물려 버려 에너지 회복도 힘들어졌다.

아예 소수의 강한 소환수들만으로 상대할 심산인 것처럼.

'그래봐야 놈들도 내 소중한 영양식이 되었을 뿐이지만.'

지금은 그 강한 놈들도 대부분 쓰러진 후였으니까.

하지만 놈들에게선 마석만을 겨우 회수했을 뿐, 회복을 저지하려는 저쪽의 방해가 너무 심해 에너지가 고갈되기 직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실리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줄여도 되었다는 점.

표범 가죽에 함께 둘러싸인 세계수의 가지에서 은은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충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한 것이다.

'간접적인 충격을 흡수하는 정도지만, 이거라도 없었으면 더 움직임에 제한이 생겼을 테지.'

아무래도 격한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적들이 그녀를 직접 노리진 않는다고 하지만, 싸움의 여파가 누적되면 그녀도 몸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오래 못 갈 것 같긴 하지만. 세계수도 상당히 무리하나 본데?'

가죽 틈새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가지의 끄트머리가 물기 하나 없는 것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져 있었으니까.

분명 처음 봤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후우웅—!

그때 검게 타오르는 흑마력에 휩싸인 대검이 날아들었다.

할리가 곧바로 대응하려는 순간.

'큭! 저게 또!'

아주 잠깐의 경직.

하지만 찰나가 생사를 가르는 전투 중에 벌어진 치명적인 일이었다.

다급히 오러를 끌어올려 대검을 쳐낼 수 있었지만, 다시 팔뚝에 기다란 상처가 생겼다.

'후우, 일단 저놈부터 족쳐야 할 것 같은데.'

악마와 함께 가장 까다로운 상대.

저 뒤쪽에서 금속으로 이루어진 석궁을 겨누고 있는 보석 인간이었다.

'비싸 보이는 몸이네. 몸값이 상당하겠어.'

전신이 은은한 녹색 광택의 보석으로 이루어진 인간 형상의 소환수.

그의 한쪽 눈을 앗아간, 염동력을 사용하는 저격수였다.

'저 이마의 눈이 문제인 것 같은데.'

세 개의 초록색 눈을 가진 놈이었지만, 이마의 눈만이 유난히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놈이 볼트를 조종하거나 염동력을 가할 때마다 그 눈이 반짝거리기도 했으니 아마 틀림없겠지.

"후흐흐··· 이거 빠듯하구만."

사방을 몬스터들이 둘러싸고 있건만, 눈앞의 놈들이 「괴식」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놈들은 회복하려는 찰나에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놈들이라 무시할 수도 없다.

흑마법사들이 퍼붓는 온갖 저주를 「생체 오러」로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몸에 힘이 빠지고 감각이 무뎌졌다.

부족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재생」까지 억눌러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크크큭. 포기할 생각이냐, 잡종?]

앞에 선 악마가 대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할리를 조롱했다.

"카하핫! 일대일로는 쪽도 못 쓰는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덩치가 아깝다!"

[헛소리! 네놈의 품에 있는 제물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널 토막 냈을 거다, 잡종!]

발끈해서 이를 드러냈던 악마가 멈칫하더니 다시 대검을 똑바로 쥐며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 속셈인가 본데. 어림없다!]

그리고 곧바로 대검을 휘둘러 왔다.

그와 맞춰 동시다발적으로 할리에게 쏟아지는 공격들.

"틀린 말은 아닌데? 이쪽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지만! 하핫핫!"

할리는 「야성」을 통한 감각으로 사방의 공격에 대응하면서도,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한쪽에 몰려있는 흑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위치를 눈에 각인시키듯이.

그 직후.

팟—

"···뭣?!"

"신성력? 갑자기?"

흑마법사들이 뭉쳐있는 곳의 바로 위에 섬광이 터져 나온 것과 놈들의 기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동시였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허공에서 나타난 하인리히가 몸을 튕겨 전신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는 중이었다.

주교급에 가까운 신성력으로 뽑아낸 커다란 빛의 검을 두 손에 쥔 채로.

스카카카칵—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날카롭게 벼린 상극의 기운이 수차례나 이어지며, 순식간에 주변의 방어막을 갈아버렸다.

「축복 : 강체」에 덧씌워진 대주교의 강화 성법, 근접에 특화된 온갖 스킬들.

전력을 다한 하인리히의 빛의 검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이 늦은 이들의 전신을 유린했다.

"크헉!"

"이게 무슨···!"

그 신성력의 폭풍 속에서 무사한 이라고는 찰나의 순간에 반응한 한 명뿐.

나머지는 운 좋게 외곽에 있어 휩쓸리지 않은 이들이었다.

"네놈! 어떻게···!"

하인리히의 기습에 반응했던 한 명.

적의 수괴로 보이는 노인이 용암같이 붉어진 얼굴로 볼을 푸들거렸다.

그의 '어떻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지만···.

"하압—!"

물론 대답해 줄 의무가 없는 하인리히는 개의치 않고 남은 흑마법사들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흑마법사 무리 중 절반 이상이 첫 기습에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제어가 풀려 혼란에 빠진 주변의 몬스터들.

계약자를 잃어 사라지는 소환수와 살아남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급히 이동하는 소환수까지, 전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크윽! 이노옴—!]

대검의 악마가 급하게 하인리히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악마와 맞서고 있던 할리는 순간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해방감.

「괴식」을 통해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에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할리의 다리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순식간에 보석 인간에게 쇄도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놈만은 놓칠 수 없었다!

"하핫! 어딜 한눈을 팔고 계시나?"

그가 버젓이 남아있음에도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있다니!

할리는 그대로 달려들어 보석 인간에게 오른손을 찔러 넣었다.

[——!]

녹광이 반짝이는 이마의 눈동자에 할리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전투 내내 최후방에서 다른 이들의 보호만 받던 놈이다.

원거리 공격과 지원 타입인 놈의 염동력은, 바로 앞에 접근한 그의 근력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콰직!

날카로운 벼려진 할리의 손톱이 순식간에 보석 인간의 이마로 파고들며, 수은과도 같은 은빛 액체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하하핫—! 드디어 잡았다, 이놈!"

이놈 때문에 한쪽 눈을 잃었다.

애꾸눈 야만 전사라니!

물론 그것도 멋질 것 같기는 하지만···.

'아니, 역시 아직 일러. 그건 좀 더 연륜이 쌓였을 때 생각해 보자.'

하지만 다른 부위면 모를까, 지금의 재생력으론 눈처럼 복잡한 기관이 새로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초재생」이었으면 순식간에 수복됐을 텐데. 그래도 「돌연변이」가 있으니 적당한 눈을 이식하면 될 것 같긴···. 가만?'

이왕 새로 이식할 거, 성능이 좋은 걸로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예를 들어···.

[——!]

지금 그의 손아귀에 있는 이런 거라던가.

"어이, 너. 눈 좋은 거 쓰더라?"

마침 이 녀석은 눈도 세 개였다.

이쪽은 놈 때문에 눈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불합리한 상황.

따라서 하나 정도는 그가 가져가도 괜찮을 터.

이건 엄연히 정당방위였다.

"하하핫—! 좋은 건 같이 쓰자고!"

그대로 망설임 없이 영롱한 녹색 빛깔의 보석을 뽑아냈다.

[——!]

묘한 진동음을 내는 보석 인간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전신을 구성한 광석이 빛을 잃으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아, 통째로 팔면 비싸 보였었는데. 아까워라.'

이제는 그저 칙칙한 광석 무더기로 보일 뿐이었으니.

아무래도 이마의 보석이 그 존재의 근원이었던 모양이다.

'이게 규소 기반 생명체인지 하는 놈인가?'

지금까지 봐 왔던 생명체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

어디선가 주워들은 지식이 떠올랐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판타지 세계인만큼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할리는 손에 쥔 보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광택이 흐르는 눈알에 섬세하게 조각된 듯한 눈동자.

생체 조직이라기보단 그냥 영롱한 보석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는 손에 들어온 보석을 그대로 자신의 비어버린 왼쪽 눈에 집어넣었다.

생각대로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해 보면 알겠지!'

지금은 야만 전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의 본질은 다른 유전자를 탐해 거듭된 진화를 추구하는 생물의 정점.

육체의 구성 성분이 다르긴 했지만 놈도 생명체라면 할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단순한 보석은 아니었는지, 「돌연변이」가 발동하며 보석에 시신경이 연결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구조가 너무 달라서인지 제대로 호환되지 않는다.

「마인드 허브」로 안구 부위의 극심한 통증이 감지되었다.

왼쪽 눈 주변의 핏대가 서고, 주변 근육이 경련하는 것이 느껴진다.

'역시 이건 안 되는 건가? 종이 너무 달라서?'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핫!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까지 그가 먹어 치운 마수와 몬스터들이 몇이던가?

그들은 언제 종이 비슷해서 그의 양분이 되었던가?

이 눈은 결정화되어있지만 생체조직의 일부였다.

거기다 이미 자신과 하나로 연결된 상태.

그렇다면, 이건 이미 자신의 것이다.

꾸드드득—

할리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정신력을 동원한 강한 암시가 이어지고.

시신경이 연결된 부위의 보석이 「육체변이」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를 제외한 부위가 하얗게 변하며 인간의 눈처럼 말랑말랑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신체를 이식했습니다. 특수스킬「돌연변이」의 영향으로 스킬「보석안 : 염동」을 획득합니다."

"와하하핫—! 역시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니까?"

어느새 평범한 야만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할리.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몬스터 고기를 씹어 에너지를 회복했다.

물론 그가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휘이이잉—

삽시간에 몰아치는 엄청난 폭풍이 일대를 휘젓고.

화아악—

찬란한 광휘가 주변 일대를 뒤덮어 공간을 차단했으며.

"골통을 깨부숴 주마 이단 놈들아! 하하핫!"

"하압!"

두 명의 팔라딘까지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으니까.

[크워어어!]

그때 흑마법사 쪽에서 전신에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악마가 등장해 그들과 충돌했지만, 그나마도 오래 버틸 수는 없어 보였다.

'세실리를 온전히 회수하려고 지금까지 꺼내지 않았던 놈인가···.'

확실히 사방에 불길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 녀석은 특정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데엔 적합하지 않았다.

주변을 모조리 파괴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래봐야 지금은 사냥당하는 신세지만···. 악마들은 소환체라서인지 먹을 수 없어서 아쉽단 말이지. 저놈 고기라도 좀 먹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미 앞서 몇 마리의 악마를 먹으려고 시도해 봤지만, 전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놈들을 먹기 위해서는 마계까지 찾아가 본신을 노리는 수밖에 없겠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할리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와중···.

"엇! 깜박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앞가슴에 매달고 있던 가죽을 풀어 헤쳤다.

용케 끊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가죽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축 늘어진 엘프 소녀가 튀어나왔다.

이젠 불쏘시개로밖에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 하나를 꼭 쥔 채.

"어이~ 아가씨, 괜찮아?"

숨은 쉬는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걱정스러워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나 불렀을까.

"답답해···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요···."

세실리가 웅얼거리며 꿈틀거렸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핫핫핫! 무사하니 다행이군!"

그는 태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던 거대한 악마가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목표 완수. 이번 임무는 스릴 있었네.'

전투를 통해 그도 제법 성장할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물론, 얻을 게 여기서 끝은 아니지.'

전장이 정리되고···.

주변에 바람을 두른 라포리와 엘프들이 하늘을 날아, 할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57

밖의 행운 (1)

"후우··· 다 끝났나?"

하인리히는 가볍게 검을 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번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수준이 수준인 만큼,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자연이 분노한 듯 거세게 몰아치는 번개 폭풍과 대지에서 솟구치는 가시에 죽어 나가는 몬스터들.

빛의 심판이 부정한 존재들을 불태우고, 놈들이 소환한 거대한 악마조차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마계로 쫓겨났다.

'이게 이 대륙 최상위권의 강자들···.'

물론 이들이 정점인 것은 아니다.

교단에는 공개된 팔라딘만 열 명에 달하고, 전투 사제나 이단심문관 등을 포함하면 이 정도 수준의 강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니까.

하이 엘프도 라포리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 마찬가지고, 그 외에도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엘븐 킹덤에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 대륙을 기준으로 봤을 때지.'

대륙의 넓이를 따져보면, 결코 이들의 경지를 깎아내릴 수 없으리라.

물론 흑마법사들도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준은 아니었지만, 놈들이 맥을 못 춘 데에는 하인리히의 탓이 컸다.

마물을 소환해서 싸우는 게 주특기인 놈들 틈에 갑자기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데, 저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적의 수괴로 보이는 노인이 어찌어찌 거대한 악마를 소환하기는 했으나···.

"커헉—! 교단 놈들이 어떻게 여길··· 컥!"

집중 공격을 받은 악마가 사라짐과 동시에 검은삭월 단장의 검에 유명을 달리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소환계 마법사의 최후였다.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 수고했네. 경 덕에 수월하게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어."

한쪽에서 신성한 불길로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재로 만들던 라티우스 대주교가 인자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 대주교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성표는 여기 있습니다."

하인리히가 공손하게 대주교에게 받았던 성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타라크에서 북부 산맥으로 빠르게 날아온 그들.

하지만 하인리히도 목표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으니, 그들을 제대로 안내할 수 없었다.

그는 「축복 : 도약」을 통해 할리가 인지한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

그래서 나온 방법이, 자신의 신성력을 담은 성표를 하인리히에게 건넨 대주교가 그것을 추적해서 남은 이들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생각 이상으로 잘 풀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하인리히 때문에 혼란에 빠져, 적들이 외부에서 다가오는 이들에 대한 대비를 미처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생포해서 심문하지는 않으십니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그 배후도 일망타진할 수 있을 텐데."

"이단심문관이 아닌 이상, 악마 추종자를 비롯한 흑마법사들은 마주치는 즉시 사살하는 것이 원칙이네. 놈들은 언제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거든. 또 하나같이 금제가 걸려있기도 하고."

하긴, 워낙 기괴한 수단이 많은 흑마법이니까.

어쩐지 꼼꼼하게 놈들의 시체를 불태운다 싶었다.

"그나저나 저쪽의 엘프 아가씨가 그 하이 엘프 후보인가 보군."

대주교가 한쪽을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작은 엘프와 커다란 야만인이 있는 그곳에, 라포리를 비롯한 엘프 일행이 다가가고 있었다.

"정말 경의 말이 맞았어. 대체 어떻게 안 건가? 성녀님의 말씀이기에 우선 따르기는 했네만···. 정말 별다른 축복도 없이 대상을 찾을 줄이야."

"하하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불현듯 깨달은 거라서요."

"정말 주신께서 굽어살피고 계신가 보군! 영광스러운 일이야."

그렇게 재차 감탄한 대주교가 어느새 다가온 팔라딘들과 함께 잠깐의 기도 시간을 가진 후.

그제야 하인리히는 그들과 함께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덕분에 세실리 양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명예로운 전사로서 위험에 처한 이를 돕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너무 신경 쓰지 마쇼. 딱히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 핫핫핫"

"과연, 훌륭한 가치관을 가지고 계시군요."

잠깐의 통성명 후에 이어진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라포리는 할리의 외견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하이 엘프.

젊게 보인다 해도 그 나이가 절대 적지 않았으니, 할리의 패션도 그 상식선의 매우 모범적인 남부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부족하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시지요."

"이거 참, 곤란하구만! 하핫핫!"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할리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그가 내미는 물건을 받아들였다.

라포리의 손목에 걸려있던, 가느다란 나무줄기로 알록달록 빛나는 여러 보석들을 엮은 팔찌.

줄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싱싱한 상태였다.

"라···라포리 님, 그건···!"

라포리의 옆에 있던 남성 엘프가 당황해서 뭐라 하려 했으나, 그는 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휘저었다.

"저희의 근거지는 이곳 대륙이 아닌지라, 당장 보답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교단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지요."

그 때문에 나중을 기약할 수도 없었다.

당장 그들도 교단을 도와야 하는 만큼, 언제 에나멜 대륙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알지 못했으니.

"물론 추후에라도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최대한 힘이 되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저희 쪽에서 교단과 협의해 두도록 하지요."

다른 대륙이 근거지인 그들이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우선 교단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후에 엘븐 킹덤 차원에서 교단에 대가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저희 교단의 일을 도운 거나 마찬가지기도 하니까요. 제가 잘 처리해 놓겠습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라티우스 대주교가 라포리의 말을 받았다.

할리 덕분에 교단의 일이 편해졌으니 그에 대한 보답도 겸하기로 한 것.

엘븐 킹덤 측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교단의 고위층에 연줄이 있는 할리로서는 당장 손에 들어온 팔찌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챘을까, 라포리는 곧바로 그 팔찌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속성 친화력과 저항력은 기본에 자연력 증폭, 정령 소환 시 추가 보정까지.

거기다 상징적인 의미로도 이 팔찌 자체가 굉장히 귀한 물건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엘프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면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하긴 하이 엘프가 직접 사용하던 것이니 당연하겠지.'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 되어 갈 무렵.

라티우스 대주교에게 도움을 받아 목에 채워진 마도구를 해제한 세실리가 깨끗해진 모습으로 할리에게 다가왔다.

그동안의 고생과 전투 중에 튄 피로 지저분해진 걸, 라포리와 함께 온 여성 엘프가 정령을 이용해 씻겨준 것이다.

'흠흠··· 「괴식」 때문에 앞의 가죽에 흘린 피가 좀 많긴 했지···.'

도저히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리 님이 와 주지 않으셨다면, 전 지금쯤 살아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하핫!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세실리.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잠시 할리를 쳐다보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저기··· 할리 님? 잠깐 자리에 앉아 주실래요?"

그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는 소녀가 밑에서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

할리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자, 그제야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을 수 있었다.

"그대에게 대자연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세실리는 너덜너덜해진 검은 표범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화아아—

'음? 이건··· 세계수에서 느껴지던 기운?'

뭔가가 그에게 깃든 것은 분명했지만, 별다른 시스템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이 엘프가 내려줄 수 있는 가호입니다. 그것도 대자연의 가호면 자주 사용할 수 없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지요."

옆에서 라포리가 조용히 첨언했다.

개안하지 않은 상태의 세실리가 하이 엘프의 가호를 사용했다는 것에 상당히 놀란 기색으로.

"아직 완전한 하이 엘프가 아니라 원래의 가호보다는 효과가 좀 떨어져요. 제가 개안하게 되면 제대로 다시 해 드릴게요. 할리 님은 몸을 험하게 다루시는 것 같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말을 들어보니 속성 저항력이 올라가는 종류의 가호라는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할리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뿌듯하게 웃던 세실리.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때까지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할리에게 내밀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기운까지 끌어 써서인지 이젠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세계수의 가지였다.

"그··· 제가 지금 당장 가진 게 없어서요.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제대로 된 선물을 드릴게요."

세실리는 본인도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기운이 다했다고 해도 세계수는 세계수.

공짜로 주는 걸 마다할 리가 없는 할리가 냉큼 그것을 받아들였다.

"세계수께서 그 가지로 무리하게 힘을 행사하신지라 영맥이 끊어졌지만, 주변 공기를 정화하고 기운을 맑게 해 주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집 안의 화분에 꽂아두고 물만 주시면···, 음···."

다시 라포리가 거들 듯이 옆에서 조언을 건네다가 멈칫했다.

할리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보다가, 다시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도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은, 맹수 머리를 뒤집어쓴 2미터가 넘는 근육질 거구를.

"음, 인정할 만한 상대를 쓰러뜨린 후 그 앞에 묘비 대신 박아 두시면···. 아니면 땔감 대신 사용하면 화력도 강하고 오래갈 겁니다. 사실 드워프들이 욕심내는 이유이기도 한데···."

갑자기 라포리가 혼란이 온 듯 횡설수설했다.

'이 양반 원래 이런 인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할리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그와, 점점 더 민망해하는 세실리를 도와주기 위해 얼른 감사의 말을 건넸다.

'이건 지구의 방에 놔두면 되겠지.'

최고의 공기청정기가 될 테니 나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엘프들과의 인사가 일단락되고, 그는 교단의 일원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만큼 엘프들처럼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교단의 인사들도 할리에게 제법 관심을 보였다.

"자네 눈이 굉장히 특이하군. 혼혈인가? 음··· 아니, 실례했네. 괜한 걸 물었군."

그의 왼쪽 눈이 주목받기도 했지만, 무슨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딱히 그 주제로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오호~ 이거 훌륭한 육체로구만. 우리 하인리히 못지않은데? 너 혹시 성기사가 돼서 이단 놈들 골통 부수러 다닐 생각 없나?"

그렇게 간단한 대화를 나누던 와중 나온 검은삭월 단장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둘이 직접 마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할리는 야만 전사의 이미지에 맞게 여러 번의 자체 성형을 거친 만큼, 하인리히와는 인상부터가 달랐다.

「초회복」을 이용한 극한의 단련을 통해 육체를 한계까지 강화하고, 마침내 「축복 : 강체」까지 얻은 후에도 하드 트레이닝을 멈추지 않은 하인리히.

지금까지 「괴식」으로 먹어 치운 몬스터만 수십 종, 그중에서도 「돌연변이」와 「육체변이」로 우월한 유전자만을 선별해 이상적인 몸을 만든 할리.

"흐음···."

"호오···."

이렇게 직접 비교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인리히가 갑옷을 입고 있어 좀 더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

"···자네들 뭐 하는가?"

그렇게 자신의 몸에 취해있던 것도 잠시, 라티우스 대주교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너무 심취했군.'

자신도 모르게 몸 이곳저곳에 힘을 주며 근육을 비교하다 흠칫했지만, 팔라딘들은 이쪽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라티우스 대주교님, 저희처럼 몸을 쓰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그럼! 무릇 사내라면 근육이 있어야지! 아, 대주교님보고 뭐라 그러는 건 아닙니다? 크크큭."

주신교단의 성기사는 모두 초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의 신봉자들이었으니까.

***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당분간은 이온 대륙에 머물 것 같으니, 그 기간엔 직접 힘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두 명이 추가된 일행은 바람의 정령을 통해 빠르게 타라크로 복귀했다.

그곳에서 이어진 할리와의 작별.

"할리 님, 그럼 저는 가 볼게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구요."

"하핫핫! 나야 튼튼함 빼면 시체지! 아가씨도 조심히 가라구!"

그렇게 할리는 타라크 시내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하인리히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흠, 저 전사와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보지? 초면일 텐데 서로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군."

"뭔가 좋은 인연이 느껴지는군요. 앞으로 자주 마주칠 것 같습니다."

"호오~ 하인리히 경의 예감이라면 무시할 수 없지. 교단에서도 좀 더 신경 쓰도록 해보겠네. 용병이라고 했으니, 교단 차원에서 용병 길드를 통해 감사를 전하는 것도 괜찮겠군."

'됐다.'

겨우 분위기 좀 잡은 걸로, 신뢰도가 올라간 하인리히의 이름을 팔아 할리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교단의 이름을 등에 업게 되면 앞으로의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터.

'이 정도면 얻을만한 건 다 얻은 것 같은데.'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

올 때와는 다르게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경로상에 있는 각 신전의 협조를 받고 최대한 당긴 일정.

그렇게 돌아오고 휴식까지 가진 다음 날, 다시 엘프들과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교단 측의 도움으로 큰 문제없이 세실리 양을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경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포리의 감사의 말로 시작된 자리는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이번엔 교단의 용건인, 불사왕을 추적하는 건에 대하여.

"세계수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의 뿌리이십니다."

그는 진지한 어투로 불사왕을 찾을 방도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하이 엘프는 세계수 님의 힘을 빌려, 나무가 존재하는 곳 주변의 기운을 탐지할 수 있습니다."

일정 이상의 자연력을 품고 있는 나무들을 매개로 지역을 스캔하는 방법.

물론 한계 또한 명확했다.

나무가 없는 지역은 시도조차 할 수 없고, 한 번에 확인 가능한 범위도 제한적이다.

사전 준비도 까다로워 급히 세실리를 찾을 때는 사용하지 못한 수단이었다.

"이온 대륙 전체를 탐지하려면,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군요."

그나마도 나무가 없는 지역을 제외했을 때의 기간을 추측한 것.

하지만 제약이 큰 만큼 그 효과는 탁월했다.

"놈이 나무가 있는 지역에 숨어 있다면, 장담하는데 절대 탐지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은 대부분 나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

그는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확실히 저 방법으로도 찾지 못하더라도 그 후보 범위를 좁힐 수 있을 테니 좋은 기회였다.

'음, 동굴 주변의 나무들을 미리 싹 밀어버려? 어느 범위까지? 너무 많이 없애면 오히려 눈에 띌 텐데···. 그냥 때를 맞춰 소환 해제해야 하나.'

하인리히는 태연한 표정으로 남몰래 고민했다.

결계를 보강해 두기는 했지만, 저 당당한 태도를 보아하니 살짝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라포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신만만한 태도에 비해 뭔가 제한 사항이 이것저것 많은 것 같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기운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제가 불사왕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시간이 좀 더 소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밀집된 흑마력을 추적할 수밖에 없다 보니, 정확도를 위해 기간이 반년까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어지간하면 그 전에 발견할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불사왕의 기운에 대한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그 전에 부디 양해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기는 한데···."

그의 말에 성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 직후.

"···이번 기회에 하인리히 경도 알아두시는 게 좋겠죠. 저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뭔가를 고민하던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린 한 마디.

···순간, 심장이 뛰었다.

얻을 건 다 얻은 줄 알았는데, 진짜는 따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58

뜻밖의 행운 (2)

할리는 엘프들과 헤어진 후, 언제나처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타라크의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정령이라는 거, 굉장히 편한데?'

바람의 정령으로 이동을 보조하는 것은 물론, 물의 정령으로 몸을 씻기는 것까지 가능했으니.

그는 자신의 깨끗해진 몸을 둘러봤다.

타라크로 이동하기 직전에 엘프들에게 받은 서비스.

직접 경험하고 나니 그에 대한 욕심이 더욱 커졌다.

'그런데 장비들이 많이 상했네. 조만간 새 걸로 구해야겠군.'

그 와중에 손상된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단한 흑철강 도끼들은 이가 나간 것은 물론, 실금이 생긴 곳도 있었다.

맹수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는 전투 중 줄이 끊어져 온데간데없었고, 검은 표범 투구는 완전히 누더기가 되었다.

···사실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착용한 장비들도 별로 없었으니.

'그것도 전부 장식용이지. 뭐, 도끼야 이제 제법 쓸 만해졌지만.'

「육체변이」의 특성상 몸에 맞춘 장비를 입을 수 없는 할리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야만 전사 컨셉이 찰떡이었다.

그의 진짜 무기는 괴물 같은 육체 그 자체였으니까.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맨발로 거리를 거닌 그는 시내 한편에 위치한 평범한 주택으로 향했다.

덜컥—

자신의 집인 듯 힘차게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선 할리.

하지만 안에 있던 집주인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할리 이후에 타라크에 전송된 아바타, 휴버트였다.

"와하핫—! 「감정」이 있으니까 바로 물건을 확인할 수도 있고 편하군!"

그의 왼쪽 눈동자에 초록빛이 반짝이고, 들고 있던 물건들이 허공을 날아 자연스럽게 휴버트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눈을 이식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게된 「보석안 : 염동」.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할리에게 호환된 덕분인지 그의 생체 에너지로도 발동할 수 있게 된 염동력은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있었다.

이제 그에게도 원거리 공격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기도 했고···.

'몸도 띄울 수 있으니 말이지. 거기다 이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오드아이로 보일 뿐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변이」에 동화된 보석안은 얼핏 보면 평범한 녹색 눈동자로 보였다.

물론 여전히 미묘한 이질감은 남아있지만, 그 정도야 큰 문제도 아니었다.

'온갖 인종과 종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거기다 이 험상궂은 덩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따질 사람도 없을 테고.'

할리가 그렇게 염동력을 시험하는 동안 휴버트는 곧바로 물건들의 감정에 들어갔다.

<하이 엘프의 정령 팔찌>

-뛰어난 거장이 세계수의 가지로 다수의 정령석을 엮어 만든 팔찌. 착용자의 자연력과 정령 소환을 보조함과 동시에, 속성 친화력과 저항력을 크게 증폭시킨다. 이전 사용자의 영향으로 정령석에 바람과 번개, 대지의 성질이 강해졌다.

<메마른 세계수의 가지>

-한때 세계수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기운을 무리하게 사용한 나머지 원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여러 가지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듯하다.

"흐음··· 애매하군."

세계수의 가지야 기념품 용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둘째 치고, 팔찌도 사용처가 마땅치 않았다.

물론 라포리는 자신이 가진 물건 중 가장 귀한 걸 내어준 거겠지만···.

'성능 자체는 좋은 것 같은데. 쓸 수 있는 아바타가 없네.'

정령사에게는 최고의 보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정령사가 없었다.

욕심과는 별개로 정령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별로 없었고.

지구의 귀환자 중에서도 정령사는 유난히 적은 편에 속했다.

대자연의 존재인 정령과의 친화력은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자연과 벗 삼아 살아왔다던가, 그쪽 계통의 고유스킬이라도 각성하지 않는 한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리고 내 아바타는 본체와 같은 조건으로 생성된단 말이지.'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오며 인스턴트식품을 입에 달고 살아온 그에게 자연과 친화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증폭'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가진 게 있어야 효율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그에게도 숨겨진 정령 친화력이 있지 않을까?

휴버트는 자기 손목에 슬쩍 팔찌를 끼웠다.

그것이 불편하지 않게 자동으로 사이즈가 조절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손목의 팔찌에 집중하며 자연력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평온해진 마음에 떠오르는 산과 바다를 비롯한 자연의 심상.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휴버트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개뿔, 아무것도 안 느껴지네."

···그래도 첫 시도니까, 계속 차고 있다 보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따로 쓸 사람도 없으니 휴버트가 계속 착용하기로 했다.

할리가 가지고 있다간 그 전투 스타일 때문에 언제 망가질지 몰랐으니.

그렇다고 아크리치 한스나 뱀파이어 하인즈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이제 내 기본 수준도 쉽게 비명횡사할 수준은 아니니까. 최소한 휴버트가 기습당하더라도 죽기 직전에 소환 해제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팔찌를 찬 손목은 잘 가리고 다녀야겠지만.

사업을 시작하면 여러모로 노려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 문제도 이번에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은데.'

곧 할리가 주신교단과 인연을 맺은 것이 용병 길드를 통해 알려질 테니, 그와 동업자의 신분으로 사업을 시작하려 했던 휴버트 입장에서는 큰 호재였다.

현대가 아닌 만큼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신경 쓸 점들이 많았다.

제대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자본뿐만 아니라 무력이나 인맥 등이 필수.

그 때문에 할리의 활동 지역인 타라크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그 이름을 빌려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교단과 인연까지 있다? 이건 게임 끝이지.'

일단 교단의 이름으로 정식 공표되면, 그 인연이 크든 작든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부담스러운 인물이 될 터.

그가 함께 참여한 사업을 건드리는 데에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할리가 동업자로서 쏠쏠한 성과를 얻는 동안, 휴버트는 시장 조사를 하며 팔 만한 물건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일단 시작은 후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우테리카에서 후추의 최대 생산지는 대륙 남동부.

타라크는 서북부 지역이니 운송에 따른 가격 차도 가장 크다.

'몬스터 산업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상인들을 비롯한 유동 인구가 많으니 상품만 좋으면 문제없어. 주 소비자가 될 고위층인 마탑 지부가 많기도 하고.'

계획은 모두 세워둔 상황.

"으엇차~! 피곤하구만!"

할리가 집 안의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동안, 휴버트는 이번에 구매한 마도구와 세계수의 가지를 챙겼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

"흐음··· 기념품으론 나쁘지 않네."

나는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말라 죽은 식물이 담긴 화분에, 세계수의 가지를 꽂아 넣었다.

물까지 한 컵 부어주자, 기분 탓인지 벌써부터 뭔가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뭐, 이건 됐고. 교역품은 하인즈를 통해 혈맹에게 준비시키면 되겠지. 마도구 판매도 그쪽을 통하면 될 테고.'

기껏 쓸 만한 세력을 집어삼켰는데, 이럴 때 쓰지 언제 쓰겠는가.

'헤테로시스를 키우는 건 순조롭고, 브로코슬락 클랜은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겠지.'

틈틈이 벌인 하인즈의 탐색 활동으로, 탈리아 왕국의 뱀파이어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

「은폐」와 「투명화」로 몸을 숨기고, 「간파」로 정보를 수집한 결과···.

어이없게도 놈들이 대귀족의 저택을 통째로 본거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귀족이 클랜 로드일지도 모르고.'

상세한 정보를 완벽히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인즈의 최우선 과제는 우선 헤테로시스를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었으니까.

본격적인 클랜 접수 작업은 그 이후 이뤄지게 되리라.

"흠흠··· 자, 그럼···."

이번에 큰 사건을 겪었으니, 카르마를 정산할 차례였다.

'본격적으로 아우테리카 활동을 하기 전에 카르마 포인트가 30만이 좀 넘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 있었던 주요 사건.

하인리히가 성기사로 서임 받아 교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한스의 비밀 연구실에서 할리가 완성되고, 마물을 사냥하며 성장해 야만 전사로서 용병이 되었다.

'여기까진 딱히 특별한 일이 없군.'

대부분 개인적으로 성장한 시간에 가까웠으니,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럼 이번에 얻은 카르마의 대부분은 하이 엘프 후보인 세실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거라는 말인데···.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8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668,189』

'애매하군. 세실리는 아직 후보라 그런가?'

엘븐 킹덤과 하이 엘프 라포리, 주신교단의 성녀를 비롯한 고위층까지 엮인 일치곤 좀 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당장의 카르마가 전부가 아니었지.'

저번에도 경험했듯, 카르마는 그가 끼친 영향이 이후 세계에 변화를 줄 때마다 유동적으로 증가했었다.

그 말은 이후 세실리가 정식으로 하이 엘프가 되고 뭔가 큰일을 할 때마다 그의 카르마에도 영향을 준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번 일에 엮인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터.

'이젠 상관없겠지. 어차피 조만간 카르마를 폭증시킬 수 있는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당장 고유스킬을 강화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운명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

"무례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라포리 님."

"아닙니다. 중요한 사안이라는 건 저도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교단 측에서 준 도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녀의 사과가 연신 이어졌다.

일을 진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라포리가 교단의 '침묵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하이 엘프는 엘븐 킹덤의 수뇌부였기에 이는 외교적 결례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시원하게 수락했다.

그만큼 이번에 교단에 진 빚이 컸다고 여긴 것이다.

저벅저벅—

그들은 지금 복잡한 통로를 지나 교단의 심처로 향하는 중이었다.

성녀와 라티우스 대주교, 하이 엘프 라포리.

그리고 이단심문관장과 하인리히까지 다섯 명.

'설마 진짜 나까지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당연히 이제 성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들어올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그의 신성력이 주교급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불사왕의 파편에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도는 대주교급 이상.

그 때문에 라티우스 대주교는 이번에도 우려를 표했지만, 하인리히가 바로 직전에 세운 공이 있어서인지 크게 반대하지는 못했다.

당시에 대주교 본인도 주신의 인도가 있었다며 크게 감탄하지 않았나.

물론 성녀라고 마음대로 그를 봉인지에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으로."

앞장서서 일행을 이끄는 검은 후드와 사제복을 입은 자.

이곳의 총책임자인 이단심문관장이었다.

이곳은 성녀의 관할이 아니라 그의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의 출입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규율에 철저한 그도,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으니···.

'주신께서 하인리히 경을 불사왕의 대적자로 삼으시려는 것 같아요.'

성녀의 말에는 커다란 무게가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엄청 꼭꼭 숨겨져 있네.'

기존에 알고 방비하던 지하 통로는 시작에 불과했다.

미로처럼 얽힌 복잡한 복도, 특정 조건에서만 열리는 비밀의 문, 곳곳에 깔린 성법 함정과 결계까지.

대체 어떻게 이런 공간이 숨겨져 있었나 의문일 정도로 길고 복잡한 복도가 이어졌다.

'···성법 결계. 그것도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아득한 수준의···.'

그도 「아우테리카 성법」을 습득한 만큼 제법 성법에 조예가 있었지만, 이건 그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정식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벽을 부숴서도, 땅굴을 파서도 도달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공간.

그런 곳의 한가운데에 마지막 '불사왕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교단을 무너뜨리고 차근차근 통로를 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겠는데? 그게 가능할 리도 없지만.'

통로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중간에는 여러 개의 게이트 중 하나를 발동시켜, 단거리 이동을 통해서야 다음 장소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강박적인 보안을 거친 끝에 도달한 장소.

"이곳···."

일행은 마지막 보안을 해제하고 방 내부로 들어서는 이단심문관장의 뒤를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대단하군.'

순백의 방 내부 전체에는 흑마력을 억제하기 위한 금빛 기도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열고 들어왔던 문짝에까지.

그리고 그 중앙에 있었다.

신에게 바치듯 쌓아 올린 제단 위.

주변을 둘러싸듯 세워진 다섯 개의 기둥에 연결된 가느다란 은빛 쇠사슬에 감싸인 그것.

'저게 마지막 불사왕의 파편···.'

하인리히의 코앞에, 그것이 있었다.

#59

뜻밖의 행운 (3)

"이게, 그···."

라포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가 입을 닫았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제단 위의 그것을 바라보았다.

봉인이 몇 겹이나 겹쳐있는데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불길한 아우라.

그 지독한 죽음의 기운에 그것을 보는 이들의 인상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이건 생각 이상인데?'

그간 두 개의 파편을 흡수하며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기운이었지만, 저것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첫 번째 파편은 역천의 서약에서 가지고 있던, 결손이 심해 주변의 정보를 빨아들이던 것.

두 번째 파편은 브로코슬락 클랜에서 가지고 있던, 단단하게 응집돼 굳어있던 것이었는데···.

'저건 별다른 하자가 없어 보이는군.'

거기다 그 크기도 앞선 두 파편을 합친 것만큼 컸다.

물론 정확히 삼등분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라포리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의 몸에서 자연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제단 쪽으로 향해, 봉인 밖으로 삐져나온 죽음의 기운과 접촉했다.

파직—

순식간에 오염되기 시작한 기운.

그는 황급히 연결을 해제하고 식은땀을 훔쳤다.

"크흠, 확실히 생각했던 것과 다르군요. 단순히 흑마력이 밀집된 것으로만 여기고 탐색을 시작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잊지 않고 기억 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그 자리에 선 채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 그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남은 일행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던 와중···.

"하인리히 경."

성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것을 직접 본 소감이 어떠세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파편을 노려보는 그 눈빛은, 그동안 보였던 허술한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뭐랄까···. 그냥 대단하군요. 저런 것을 한 존재가 품게 되니, 대륙의 재앙이 되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품는 게 아니에요. 잡아먹히는 거지."

성녀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정정했다.

"천 년 전, 차원의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저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작스레 대륙에 등장했어요."

'불사왕의 심장'에 대한 더욱 내밀한 이야기였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쓰레기통, 온갖 부정적인 찌꺼기들이 한 곳에 고인 심연 속에 존재해야 했던 것.

"아마 더 강한 힘을 추구했던 흑마법사의 소행이었겠죠. 심연을 열고 저걸 불러올 정도면 당시에도 대륙 최고 수준은 되었을 텐데···."

"힘에 대한 욕망은 한 번 빠지면 끝이 없으니까요."

성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륙에 존재하게 된 물건이니 이렇게 봉인하는 게 최선이었죠. 돌려보내겠다고 다시 심연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어떤 존재도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저건 차원의 밑바닥에서 오랜 세월 고이고 응축된 '죽음'이라는 개념의 일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마인드 허브」가 대단해 보이네.'

물론 스킬의 위력이 강하다기보다는, 그 발동 구조 덕분이었다.

방사능을 제대로 밀폐하는 시설을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곳의 출입구를 관리하는 것에는 수고가 덜 드는 것과 같은 문제.

'외부로 새어 나오는 방사능을 막는 것만으로 「마인드 허브」가 상시 발동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언데드는 정신 공격에 면역이니까, 저번처럼 정신세계에서 직접 공격당하지만 않는다면 딱히 위험할 일은 없었다.

"솔직히 저도 왜 하인리히 경을 이곳에 데려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또한 주신의 뜻이겠지요.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성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라포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미묘해진 기분으로 슬쩍 천장을 쳐다봤다.

'주신님, 도와주시는 건 좋은데···.'

왠지 짬처리 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윈윈이니 좋기는 하지만, 뭔가 기분이···.

"···후우,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그때 라포리가 심호흡하며 돌아섰다.

기운을 각인시키는 작업이 무사히 끝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나가도록 하죠."

성녀의 말에 다시 앞장서는 이단심문관장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절차를 역순으로 밟아 나갔다.

그렇게 라포리가 조금 지친 것 외에는 큰 문제 없이 모두가 바깥으로 나온 순간···.

"그럼."

봉인지의 구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들리는 목소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단심문관장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로 따져도 팔라딘급일 것이다.

추후 일을 벌일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일 터.

"오늘은 라포리 님이 무리하신 것 같으니, 이만 쉬고 내일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시종일관 조용히 참관하던 라티우스 대주교의 말에 곧바로 자리가 파해졌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라포리를 귀빈 숙소로 안내하고 나서, 곧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됐다.'

봉인지의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뜻하지 않은 행운.

이제 남은 것은 결행일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

[큭큭큭··· 드디어.]

기다려왔던 순간이 찾아왔다.

거기다 지금까지 공들여 하던 연구에 도움이 될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성녀의 추적을 피할 수단을 찾는 것.

'성녀가 추적하는 건 결국 '불사왕의 파편'이란 말이지. 그럼 그것만 감출 수 있다면 해결되는 문제.'

기본 골자는 아공간에 파편을 넣고, 흑마력의 연결만 유지한 채 힘을 공급받는 것이었다.

그동안 시간이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종속 아공간 연구와, 제대로 써먹을 수 없었던 「불사」 스킬을 합쳐 세워진 제법 그럴싸한 계획.

하지만 실험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식으로든 파편을 아공간에 넣을 수 없었으니까.

처음엔 워낙 막대한 에너지가 담겨 있어서 그런가 싶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었는데···.

이번에 성녀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파편의 기원에 대해서. 어쩐지 그동안 도무지 아공간에 들어가지 않더라니.'

차원의 심연에서 끌어올려져 세상에 현현한 물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세계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존재를 이용한다면 모를까.'

그래.

이세계에서 온 각성자처럼.

'지금까지 한스가 파편을 가지고 자유롭게 차원을 넘었던 것처럼 말이지.'

한스는 굉장히 특이한 존재였다.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아바타」의 특성 때문에 본체와 연결되어 각성자로 인정받는 상태.

[크하핫! 결국 이 몸뚱이를 이용하면 해결되는 문제렷다!]

차원의 이면을 이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개체에게 종속된 아공간을 생성하는 것에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며 한스의 빈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아까는 없었던 해골 지팡이가 그 손에 들린 채로.

'아직 공간이 만족할 만한 크기는 아니지만,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지.'

그럼 이 종속 아공간을 한스 본인과 동일시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조율이 좀 필요하겠군. 종속 아공간의 좌표를 이 몸과 겹치게 설정하고, 경계를 흩트리는 방법으로···.]

이미 가닥은 잡힌 상태였으니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 후에 남은 것은 「불사」로 근원을 추출해 종속 아공간에 담고 연결을 유지하는 것뿐.

흑마력 통로가 연결된 만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겠지만, 부족한 부분은 지금처럼 몸에 은폐장을 구축하는 정도로 차단할 수 있을 터.

그 정도만 되어도 대륙을 활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리라.

'그래, 이 연구가 끝나면 마지막 파편을 얻고 난 뒤에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겠지.'

하인리히가 파편이 봉인된 곳의 코앞까지 진입한 이상, 이제 그것은 한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지금 바로 갈 순 없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직접 확인해 본 바로, 마지막 파편의 크기는 한스가 지금까지 흡수한 두 개를 합친 것과 비슷했다.

그만큼 강한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

그런 것을 흡수한 직후 바로 기운을 숨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수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고···.

'그런데 교단 측에서 그걸 기다려줄 리 없지.'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고, 파편을 흡수하는 것도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다.

아마 파편을 손에 넣자마자 곧바로 소환 해제로 도망쳐야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만한 흑마력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로 뿜어낸다면, 가디언들에게 곧바로 위치를 들키고 추적이 시작될 거야.'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잘 숨겨왔지만, 당장 가진 것과 같은 크기의 파편을 흡수한 직후에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계속 불러내지 않을 수도 없고. 설령 본체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소환 직후 헤어진다고 해도, 어떤 수단의 추적이 이어질지 몰라.'

안 그래도 번천회와의 갈등이 시작된 직후이지 않은가.

설령 한스와의 접점을 들킨다고 해도 당장 의심받지는 않겠지만, 인제 와서 그런 위험부담을 지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크흐흣— 됐다! 이건 가능하겠어! 카하핫!]

게다가 이제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 실험이 끝난 뒤엔 파편의 기운을 제대로 숨길 수 있게 될 테니까.

***

"라포리 님.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예,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잠깐 지친 것뿐이니까요."

불사왕의 파편을 확인하고 나온 다음 날.

그들은 다시 자리를 가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나눴다.

불사왕을 어떻게 추적할 지에 대해서.

"일단 엘븐 킹덤에서 같이 온 제 일행들이 근처에 의식을 하기 적합한 숲을 찾아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사전 준비를 해두는 중이지요."

"예,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희 측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지원하기도 했지요. 그럼 수색은 언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흠···."

라티우스 대주교의 질문에 라포리는 잠깐 뭔가를 계산하다가 그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

"사전 준비는 이틀 안에 마무리가 될 테니, 본격적인 의식은 사흘 내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교단 측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들도 지속해서 수색 작업을 진행 중이었지만, 딱히 성과가 없었던지라 이번 일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 어느 지역부터 수색할지 미리 순서를 정해둬야겠군요."

대륙의 숲을 전부 확인하는 데는 최대 한 달 정도 걸린다지만, 운이 좋다면 훨씬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

촤르륵—

커다란 테이블 위에 대륙 전도가 펼쳐졌다.

나무가 많은 지역에 따로 숫자까지 표시된, 이번 작전을 위해 준비된 지도.

"그럼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짚어 보죠. 숫자가 큰 부분이 확률이 높다 판단된 곳인가요?"

성녀가 자리에 동석해 있던 검은 사제복의 사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작전을 위해 참석한 정보를 담당하는 이단심문관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간 이어졌던 수색 작업의 진척도와 이전까지 이어졌던 놈의 행적을 토대로 확률을 계산했습니다."

눌러쓴 후드와 검은 마스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울한 목소리.

'이단심문관이 제대로 말하는 걸 들은 건 처음이네.'

봉인지를 안내했던 이단심문관장도 단답형으로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하긴 성녀가 직접 질문하기도 했고, 그만큼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일 터.

성녀의 뒤에 서 있던 하인리히가 지도를 슬쩍 훑었다.

그도 이번 수색 작업에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마물의 숲은··· 응?'

<28%>

가장 높게 표시된 확률이 50% 전후였으나, 그걸 감안해도 다른 지역보다 숫자가 낮은 편이었다.

불사왕의 후예가 가장 먼저 발견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낮은데. 역시 전에 대대적으로 수색한 게 원인이겠지?'

처음으로 한스의 종적이 시작된 곳이었던 만큼, 탈리아의 불사왕 토벌대는 그 부근을 샅샅이 조사한 전적이 있었다.

아마 그 결과가 수치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으음, 그럼 이 지역을 우선으로···."

"일단 여기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그 숫자를 토대로 의논을 나누고 순서를 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물의 숲은 제법 뒷순위로 밀릴 것 같네. 이 정도면 탐색이 시작되기 전에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겠어.'

수색이 시작될 시간에 따라 행동 방침을 변경할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굉장히 좋았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정도로.

#60

폭풍전야 (1)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

빛 하나 없이 캄캄한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돌로 만들어진 화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간이 되었군."

인기척 하나 나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그 장본인은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화로 쪽으로 다가가 거리를 두고 섰다.

그 순간.

화르륵—

화로에서 보라색 불꽃이 삽시간에 천장에 닿을 듯 솟구치더니, 이내 서서히 모닥불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보랏빛이 감도는 공간에는 어느새 화로를 둘러싼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모두··· 모였나.]

[그래, 이번에 뒤진 얼간이만 빼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림자들.

[뭐가 그리 급해? 서로 안부부터 묻고 천천히 하자고? 키키킥.]

[넌 제발 닥쳐라.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모두 이번 소식은 들었나 보군."

워낙 개성이 강한 이들이 모였다 보니 회의의 진행이 빠르지 않았다.

서로 친목을 다지고자 마련된 자리가 아닌 만큼, 빨리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위해선 쓸데없는 말은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좋았다.

[아아, 들었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

[크히힛~ 나도 그래. 세계수의 가지까지 가져가 놓고 그렇게 어이없이 뒤질 줄이야. 크킥킥.]

마침내 제대로 진행되는 정기회의.

그들은 지난 일들에 대해 서로 아는 정보들을 교환했다.

"그럼, 교단과 하이 엘프가 어떻게 누라베를 찾아내 습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군."

[하! 세계수가 개입한 게 아니겠나? 그 멍청한 놈이 제물에게 제대로 목줄을 걸지 않았나 보지.]

[흐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노인네, 저한테 봉인구까지 제대로 받아 갔는걸요?]

다시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만큼 바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불사왕의 파편을 독점하겠다고 혼자 지랄하던 마르코스에 이어서, 나름 잘 숨어 지내던 누라베까지. 이거 너무 긴장이 풀어진 거 아니야?]

"그 불사왕과 관련해서 말인데···. 요즘 교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다시 이어지는 정보의 교환.

[그 불사왕의 후예. 우리가 이용할 수는 없을까?]

[크히힛! 마르코스야 이미 뒤져버린 걸 어쩌겠어? 뜻만 맞는다면 손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

보랏빛의 공간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의견 제시, 반박, 대안, 합의 등이 한참 동안 오간 후···.

"그 건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럼 다들 그 외의 별다른 안건은 없는 거겠지?"

[그럼요~ 제국은 언제나 평안하답니다.]

[동부도··· 이상 없음···.]

결론이 도출된 동시에, 역천의 서약의 정기회의가 종료되었다.

***

"진소란, 이것들도 전처럼 처리하도록."

하인즈가 여러 업무를 보고 있던 진소란의 사무실에 찾아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비롯한, 하나같이 값비싼 마도구들.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빛냈다.

"와··· 로드, 이런 물건들은 어디서 계속 가져오시는 거예요?"

이미 이전에도 몇 번이나 봤었지만, 그녀는 재차 감탄사를 터트리며 그가 내놓은 물건들을 살폈다.

마도구는 귀환자들만 얻을 수 있다 보니 그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방법이 있지. 그보다 저번에 준비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

"아, 후추요? 일단 사람들 시켜서 전부 다시 포장하고 보관해 놨어요."

역시 부릴 사람이 있으니 편했다.

지시만 내리면 자잘한 문제들은 알아서 처리하니까.

'플라스틱이나 비닐에 담긴 물건들을 그대로 팔 수는 없으니, 번거롭지만 한 번 더 손을 거칠 필요가 있지.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하면 그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구에서 후추는 별로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아우테리카에선 달랐다.

나름 고급 향신료인데다 주 생산지와 거리도 멀어 마진도 만족스러운 수준.

교역의 시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처음엔 지구에서 만들어진 인공 보석 같은 걸 팔아볼까도 생각했는데.'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인공 보석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불순물이 적어 깨끗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세일즈 포인트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구에서 만들어졌다 보니 마법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지.'

아우테리카에서 보석이 비싼 이유는 단순히 미학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법 실험이나 결계, 마도구를 만드는 등 신비를 보조하는데 다양하게 쓰이는 재료로서의 가치가 포함된 것.

그런 상황에 신비에 사용할 수 없는 불량품, 단순히 예쁘기만 한 보석을 팔았다가는 괜한 분란에 휘말릴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는 지금 괜히 시선을 끌어서 위험을 부담할 필요는 없지. 그건 나중에 자리를 잡고 나면 프리미엄으로 판매해 보자.'

물론 그 좋은 사업 아이템을 사장하기도 아까웠다.

그런 특이한 특성 또한 개성 있는 차별점으로 둔갑시켜 팔아치우는 게 장사 아닌가.

돈 많은 이들은 오히려 그런 희소성에 가치를 부여해 열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지?"

생각을 정리한 하인즈가 주변을 둘러보며 진소란에게 물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확연히 줄어든 인원들.

대충 절반 이상이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아, 인천 쪽에 잠깐 문제가 생겨서요. 진석 씨가 직접 갔으니까 금방 정리될 거예요."

헤테로시스가 몸집을 키우며 많은 이들이 그 그늘에 새로 합류했다.

기존 강경파는 물론 온건파와 중립파에 속해 있던 이들까지.

그중에는 강경파의 간부였던 진석이라는 감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순종적이란 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으면 혈정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는데.'

지방 쪽을 담당하느라 별장에 오지 않았던 그는, 나중에 하인즈가 직접 찾아갔을 때 곧바로 그 자리에서 꼬리를 말고 충성을 맹세해왔다.

생존 본능에 충실한 그 덕분에 이후 강경파의 흡수가 빨라진 덕도 있어 나름 흡족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알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한 건 여전히 아쉽지만. 놈도 이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이미 한국을 떴다는 의미겠지?'

8레벨의 흡혈귀로 추정되는 기존 강경파의 수장, 알파.

기회가 될 때 처리해 두려고 했는데 놈의 행적은 그날 이후 줄곧 오리무중이었다.

혈맹을 집어삼키면서 그 영향력으로 계속 수색하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정말 로드 덕분에 혈맹의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당연히 그를 주도하는 우리 헤테로시스의 발언권도 점점 커지고 있고요."

하인즈로부터 비롯된 무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한 헤테로시스는 혈맹을 주도해 급격하게 세를 불렸다.

물론 직접적으로 규모를 부풀리면 가디언이나 이능관리국에서 경계할 수밖에 없으니, 암중에서 뒷세계의 조직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의 은밀한 작업이었다.

'그때 금괴를 팔았던 놈들도 휘하에 들어왔었지.'

마도구의 판로를 물색하는 데에 제법 쓸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던가.

확실히 그때 거래할 당시를 떠올려 보면 나름대로 능력 있는 놈들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이사도 가고 해야 하는데···.'

그동안은 번천회를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가 복잡해 사치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될 테니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도 되리라.

'물론 당장은 말고.'

"인천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지?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 내가 직접 가 보지."

최대한 빨리 혈맹을 안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아우테리카를 뒤흔들 빅 이벤트를 코앞에 둔 상태.

이 이벤트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 작전이 시작되고, 하인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

하이 엘프 라포리의 불사왕 탐색이 시작된 지 보름째.

우선순위에 따라 그동안 제법 많은 숲을 탐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하나의 후보군을 전부 훑은 후에 마련된 중간 회의에 동석해 진행 상황을 함께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도 이번 작전에 깊게 관련된 만큼, 성기사단의 업무보다 이쪽을 우선하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뒤에서 참관하면서 수발을 드는 게 전부지만.'

라포리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조사가 끝난 지역의 서류를 정리했다.

"···흠,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지역들은 전부 훑었는데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으니, 자신만만하게 나서 놓고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민망한 듯한 라포리의 말에 성녀와 대주교는 그렇지 않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포리 님이 이렇게 노력해 주시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탐색 순서를 정한 것도 저희 교단 측이었고요."

"사실 숲이 없는 완전히 다른 지역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지역을 크게 좁힐 수 있으니, 나쁜 일만은 아니지요."

"덕분에 지금도 교단의 수색대는 숲이 없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으니까요. 효율이 크게 증가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죠."

그들의 말대로, 계속해서 운용 중이던 수색 인원은 사막이나 황무지를 비롯한 지역을 위주로 파견되었다.

물론 아직 숲의 탐색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교단 측에선 미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라티우스 대주교는 벽에 걸린 대륙 전도와 우선순위가 정리된 서류를 살폈다.

"그럼 다음 순위의 후보군을 살펴볼까요. 어디 보자··· 이번엔 대충 30% 전후의 지역들이군요."

"하아, 이제 와선 그 확률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요."

"흠흠, 그야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성녀님."

"앗! 그렇죠. 그것도 많은 분들이 노력한 결과일 텐데. 제가 너무 무신경했네요."

성녀가 자책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 심적으로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부터는 이 지역들을 차례로 훑어보겠습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라포리 님. 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그렇게 자리가 파해지고, 한스 수색 작전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참관하던 하인리히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드디어 인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탐색이 시작된 지 보름째 되는 날, 대륙 서쪽에 위치한 마물의 숲이 다음 후보군으로 포함되었다.

'그래도 시간에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야.'

방금 막 연구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하인리히가 숙소로 향한 것과 같은 시간.

[후흐··· 후흐하하핫—! 드디어 성공했다!]

한 동굴 속에서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음산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역시, 이 한스 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이런 것쯤은 별것도 아니지.]

불사왕의 후예, 아크리치 한스는 검은 로브의 앞섬을 활짝 열어 갈비뼈를 노출하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새하얀 갈비뼈의 허전한 틈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나의 물건.

마치 심장과 같이 주기적으로 맥동하는 검은 보석, '불사왕의 심장'의 파편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었으니.

그 모습이 선명하지 않고 불투명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크크큭···. 이 몸을 이용한 위상 아공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이 몸은 더욱 완전에 다가섰으니! 크하하핫!]

그의 존재와 겹친 공간을 생성해 그곳에 「불사」로 추출한 심장을 넣었다.

쉽게 말해 한스의 몸뚱이 자체를 아공간 마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었다면··· 아니, 살아있는 존재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기행.

물론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라 완전한 단절을 포기하고, 공간도 갈비뼈 내부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 문제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의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말이지!'

몸 자체를 유사 아공간으로 만들면서 파편의 제한을 무시했으며, 흑마력을 수급하기 위한 통로도 원활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존재도 쉽게 감출 수 있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전체를 노출시키고 있을 때와 통로 하나로만 연결됐을 때, 그것을 숨기는 난이도가 같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불사」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전신이 가루가 되더라도 통로를 통해 공급받은 흑마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공간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일격이나, 그것을 다루는 마법이 필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스가 그런 공격을 순순히 맞아 줄 리가 없지.'

여러모로 뿌듯한 결과.

마물의 숲에 라포리의 탐색이 시작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61

폭풍전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