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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군. 그런데 왜 갑자기 마수 토벌을 하시는 겁니까?"

리베라가 묻길래. 솔직히 답해주었다.

"사실 마수 토벌하러 나온 게 아니야."

"그럼요?"

"룬드나."

"이대로 진격하는 겁니까?"

"아니. 그런 짓은 안 해."

하나하나 힘으로 굴복시키고 반발 세력을 다 죽이면 제국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효율조차 좋지 않다.

'우린 더 강해져야 돼.'

그러려면, 도시들 하나하나마다 확실한 우군을 만들어야 했다.

카시미르의 은퇴와 함께 갤란의 노련한 전사들이 그의 뜻을 받들어 내 휘하로 들어온 것처럼.

"믿어 보려고. 룬드나 안에서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우호 세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아...! 압박용이었군요. 이건 마수 토벌이 아닌.... 마수 몰이!"

"역시 똑똑해."

리베라 피에트로. 크시아스의 폭정에 맞섰던 남자.

그래. 룬드나에도 이런 남자가 있을 거라 믿고 싶다.

"레테, 그 남자죠? 저도 세아 아가씨 보고서에서 읽었습니다."

"응. 사람이 뜻이 있는 것 같더라고. 뭐 뜻만 있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렇습니다만...."

리베라는 대화를 하다 말고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전군! 추격하지 마라! 도망치는 마수들은 내버려 둔다!"

어느새 우리 군이 마수 무리를 격파했다.

도망치는 마수들을 추격하려던 기병대가 멈칫, 고삐를 잡아챘다.

역시 유능한 부하는 좋다니까 알아서도 척척척이잖아?

도망치는 마수는 내버려 둬야지. 저쪽 방향에 룬드나가 있으니까.

"그런데 주군. 이런 송사리들을 룬드나 방향으로 계속 밀어낸다고 해도.... 효과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룬드나가 썩었어도 이 정도는 버티지 싶은데...."

"버티겠지. 오히려, 진짜 뜻있는 전사들만 더 힘들게 할 거야. 근데 내가 기다린 건 이런 송사리들이 아니라서."

그리 말하며 나는 천천히 칼자루 쪽으로 손을 옮겼다.

"온다."

"예? 뭐가...."

마침내 감각에 걸려든 하나의 거대한 존재감.

변경 지역에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마수들.

그것도 물론 심상치 않은 위협이지만 진짜 위협은 따로 있었다.

"괴이(怪異)가 온다."

괴이(怪異).

일반 마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이질적인 그 존재들에게 우리는 그런 이름을 붙였다.

운명의 책엔 붉은 점으로 표시되는,

비틀린 세계선을 품은 마물.

갑자기 늘어난 붉은 점은 우려스러운 것이지만.... 지금은 이것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룬드나시(市)를 압박할 카드로써.

그러니까 이건 내가 룬드나시(市)에 던지는 질문이었다.

소드마스터인 벌슨마저 고전케 했던 괴물 중의 괴물.

너희는 과연 이런 괴물을 견뎌 낼 수 있을까?

견뎌 내지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래?

"전방에 괴이(怪異) 발견! 모두 포효에 대비하라!"

리베라의 명령에 기병대는 말에서 하마하고, 전사들은 번다한 무장을 잠시 땅에 내려놓은 채 자세를 낮추고 입을 살짝 벌린 후,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괴이(怪異)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 크허어허어엉!

놈은 오자마자 고개를 치켜들고 어마어마한 포효를 쏟아 냈다.

그 포효가 만든 충격파에 몸이 드드드득! 떨렸다.

나야 그냥 버텼지만 일반 전사들 같았으면 고막이 터지고 넘어지고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위력.

때문에 미리 자세를 낮추게 하고 귀를 막게 하는 등 포효에 대비를 시켰다.

여러 차례 괴이(怪異)와 싸워 가며 체득한 공략법.

한데,

'이번 녀석은 좀 다른데?'

포효 소리도 다른 놈들보다 크고 위력적이었지만, 가장 다른 점은 외형이었다.

'이쁘게 생겼잖아?'

그동안 오며 가며, 닥치는 대로 괴이(怪異)들을 사냥했다. 다른 전사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한 놈들이었으니, 카트리나와 바렌이 함께 나서거나, 벌슨이 나서거나, 이번에 투항한 소드마스터 토르반을 보내기도 했고, 여차할 땐 내가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다 토벌하고 마지막 남은 게 이곳 로엔시(市)와 룬드나시(市) 사이에 존재하는 두 마리의 괴이(怪異).

그간 가장 많이 보아 온 놈들의 특징은 꿈틀꿈틀 촉수와 같은 것이었다.

털이 있으면 그 털 하나하나가 애벌레처럼 꿈틀거렸고, 꼬리나 혀 쪽에는 꼭 길쭉한 뱀과 같은 촉수를 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적은 부류는 충격파를 터뜨리는 놈들이었다.

신체 중 일부가 반드시 북이나 피리처럼 소리를 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소리만으로도 사람을 터뜨려 죽이거나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생김새가 추악하다는 것이었다.

근데 이번 놈은... 장엄하고 멋지고 이쁘기까지 하다.

'붉은색의 대호(大虎)라....'

길고 붉은 털이 바람에 멋들어지게 날리며 반짝반짝 윤기를 만들어 냈다.

두 눈은 벼락을 품은 것 같고 꼬리는 아름답게 타올랐다.

이놈은 생긴 것만큼이나 능력도 남달랐다.

'빠르다.'

콰아앙!

정작 땅을 박찰 때는 소리도 나지 않더니, 바람을 찢고 달려들 때는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두 눈이 번뜩! 하고 빛을 뿜는 순간...

"억...!"

"끅...!"

황급히 전투 준비를 하던 병사들이 돌처럼 굳었다.

붉은 털이 바람에 흩날리며, 이리저리 빛을 반사하면, 그에 홀린 병사들이 균형 감각을 잃고 풀썩풀썩 쓰러졌다.

거대한 호랑이가 살육극을 벌이기 위해 코앞으로 짓쳐들어오는데, 대열은 이미 무너졌고 싸울 수 있는 병사는 남지 않았다.

그리고...

'꼬리는 안 돼. 위험해.'

내 직감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살랑- 하고 흔들리는 호랑이의 불타는 꼬리. 저걸 그냥 두면, 큰 피해가 발생할 거라는 싸늘한 경고.

반로아의 칼자루를 잡았다.

'벤다.'

검의 의지와 나의 의지를 합치시켰다.

그 순간, 호랑이와 내가 눈이 마주쳤고....

콰아아앙!

달려들던 호랑이가 그대로 땅을 짓밟았다.

쿠콰아앙!

달려오던 관성을 모조리 대지에 박아 넣어 으깨 버리곤, 그대로 몸을 돌려 뒤로 달렸다.

그러니까....

"...어?"

"...주군. 저거 도망가는 겁니까?"

호랑이는 날 보자마자 도망쳤다.

전속력을 다해.

순식간에 지평선 저편으로 멀어졌다.

"...하?"

괴이(怪異)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영악해서 불리하다 싶으면 도주하기가 기본이긴 했는데....

"이번 놈은 진짜 다르네."

날 보자마자 도망친 놈은 이놈이 처음이었다.

"어쨌든.... 한 놈은 됐으니까, 다른 놈 몰러 가자."

룬드나시(市) 근처에서 발견된 붉은 점은 총 2개.

나는 둘 다 룬드나로 보내 버릴 작정이었다.

* * *

란센을 만나기 전,

괴이(怪異), 붉은 호랑이는 분노한 상태였다.

기껏 부하로 삼은 마수 무리를 음식에 불과한 인간들이 사냥해 댔으니까.

놈들을 먹고 마셔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평선 너머에 인간들의 군대가 느껴졌다.

크르르르-

분노를 담아 있는 힘껏 마지막 도약을 감행한 순간.

오싹-

붉은 호랑이는 갑자기 온 세상이 한 점으로 압축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 단 한 사람. 저기 멀리 떨어진 작디작은 존재 하나만을 비추었다.

방금 막 칼자루를 틀어쥔 남자.

그리고....

죽는다!

붉은 호랑이는 제 목 위로 떨어지는 칼날 같은 경고를 느꼈다.

베인다-

두 걸음, 아니 한 걸음만 더 들어가도 저 존재의 간격 안.

온 사방에서 보이지 않는 칼날이 솟아나 자신의 목을 겨누는 듯한 환상.

캬이이이이?!!?

쾅!

고민보다 행동이 빨랐다.

호랑이는 비명을 지르며 방향을 비틀고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귀를 접고 꼬리를 감춘 채.

저 무시무시한 존재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먹어야 해!

공포가 일으킨 반작용일까?

호랑이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더 먹고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호랑이는 달리고 또 달렸다.

룬드나시(市)가 있는 쪽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87화 기다림

레테는 작금의 룬드나시(市)를 도무지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에시르.... 이 개자식들."

호리호리한 체형의 미남, 레테는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결국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여기는 로버랜드니까 이게 정상이긴 해. 하룬 님이 계실 때가 특이했던 거고."

중얼중얼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해 보려 했지만....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돼!"

결국 터져버린 레테였다.

무너지고 있었다.

아일룬을, 그리고 룬드나를 지켜 온 정예 전사들이 너무나도 급속도로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장.... 전선 상황이 이렇게 힘든데... 저 혼자...."

고개를 푹 숙이고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후배 전사를 보며 레테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다리 잘린 놈이 뭐가 죄송해. 내가 꼭 에시르 새끼들한테서 위로금이라도 뜯어낼 테니까 돌아가서 편안하게 지내."

"죄송합니다...."

변경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수들이 흉포해졌고 빠르게 늘어났다.

그런 탓에 여러 이유로 이탈하는 전사들이 속출했다.

"후.... 형씨. 미안해."

오랜 시간 함께 싸워 온 용병대장도 연초를 태우며 속 쓰린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어지간하면 형씨 봐서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이 수당에는 이런 전투 감당 못해. 우리는 여기까지인 거 같다."

"네.... 이해합니다."

숙련된 용병대 하나가 통째로 빠져나갔다.

레테에게 있어선, 그러니까 룬드나 마수 토벌 연대의 사령관인 그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뼈 아픈 사건이었지만 어떻게 붙잡을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용병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았으니까.

그런 일이 계속 벌어졌다.

"성과급 짤렸다면서요...? 그걸로 프로포즈 목걸이 사려고 했는데...."

침울해하는 신입을 볼 땐 마음이 아팠고,

"어떻게 너까지 그래. 응? 룬드나를 누군가는 지켜야지!"

오래 믿고 의지해 왔던 동료마저 등을 돌릴 때는 레테조차도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장. 나 그거 봤어."

"뭘?"

"그 소문의 괴물."

레테가 흠칫 놀랐다.

"그건 그냥 뜬소문이잖아. 너도 알잖아. 그런 마수는 없어."

"아니. 진짜 있더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마수가 아냐. 난.... 룬드나를 뜰 거야. 미안해 대장. 이렇게 도망쳐서."

그렇게 레테는 자신의 곁을 떠나는 수많은 전사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인원이 부족해진 만큼 싸움은 더욱 힘들어졌다.

레테는 정말 악전고투 끝에 사기를 다잡고 기책을 발휘해 마수들을 몰아붙여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시에 돌아오니 어느새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일단 씻고, 좀 쉬다가 부하들이 먼저 한잔 걸치고 있을 술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억!"

"크악!"

그곳에서 부하들이 얻어맞는 장면을 목격했다.

도시를 위해 죽어라고 싸우다 돌아와서 이제 쉬려던 부하들이 개처럼 처맞고 있었다.

"컥.... 크르륵...."

그중 하나는 한 손으로 목이 졸린 채, 허공으로 번쩍 들려서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고.

울컥한 레테는 즉시 나서려 했으나,

'에시르 가문의.... 익스퍼트들?'

그들의 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곤 참아야만 했다.

물론 속으론 두 배는 더 끓어올랐다.

전장에서는 코빼기도 안 비치던 에시르의 전사들이 정작 도시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온 전사들을 두드려 패다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그래도 꾹 참고 다가가 싸움을 중재했다.

"그만하지?"

목이 졸리고 있는 부하부터 챙겼다.

익스퍼트의 팔을 잡고 그대로 끌어내렸다.

힘으로 보아 익스퍼트 중급쯤 되는 것 같았지만, 레테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넌 뭐야?"

험상궂게 윽박지르는 에시르의 전사들에게 레테는 가볍게 답했다.

"나? 레테."

"레, 레테?!"

"익스퍼트 최상급...!"

그제야 꿀꺽 침을 삼키며 물러서는 전사들.

레테는 29살에 동안이었기에, 얼핏 보면 얕보기 쉬웠던 탓이었다.

"가라. 그만 싸우고. 우리 오늘 복귀했어. 좀 봐줘."

솔직히 맘 같아서는 다 두들겨 패고 싶지만, 그럼 에시르 가문이 가만 안 있을 테니까. 되레 체면을 살려 주면서 다독여야 했다.

"크, 크흠. 사령관의 면을 봐서 이만 물러나겠소."

끝까지 건방을 떠는 놈들.

레테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 대장.... 쟤네가 먼저 시비 걸었어.... 우리더러 마수 냄새난다고 씻고 다니라고...."

부하의 말을 들으니 더욱 한숨이 나왔다. 아니 열이 뻗쳤다.

에시르 가문은 대체 이 도시를 얼마나 더 망치려고 저러는 걸까?

이젠 정말 모르겠다.

'이럴 바엔.... 란센한테 투신할 걸 그랬나? 대인배잖아? 이딴 룬드나에도 계속 관세 면제를 해 주는.'

그날. 하룬이 죽던 날.

레테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땐 하룬의 뜻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고향, 룬드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룬드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한데 가면 갈수록 모르겠다.

룬드나시(市)를 통치할 역량을 가진 건 에시르 가문뿐인데.... 과연 그들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 것인지?

레테의 눈동자는 낙엽색을 닮았다.

고민하는 레테.

그 낙엽빛의 눈동자는 한층 더 가을처럼 깊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보았다.

그날 자신을 등진 동료가 말했던.... 그 괴담처럼 떠돌던 그 터무니없는 괴물을.

그 괴물이... 그것도 무려 두 마리가, 무수한 마수를 거느리고 룬드나시(市)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판단은 빨랐다.

'이건.... 나는 못 막아. 에시르 가문도.... 못 막아. 절대.'

그가 사랑하는 고향, 룬드나의 멸망이 지금 눈앞으로 다가왔다.

* * *

난 기다린다.

올까?

안 올까?

저 앞은 룬드나시(市)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일종의 경계선.

그 위에 서서,

기다린다.

만약 온다면 그는 어떤 모습일까?

허겁지겁 도망쳤을까? 피로 길로 뚫었을까?

이번 작전은 철저히 세아가 가져온 정보에 기반하고 있었다.

'레테.'

자신의 고향, 룬드나를 사랑하는 전사.

29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무수한 시민들과 전사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

하나 오랫동안 지방 호족으로 군림해 온 에시르 가문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한 비운의 영웅.

그는 그날 하룬의 시신 앞에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자신의 고향이 나와 손을 잡지 않자 슬그머니 그쪽 편에 선 영악한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우직하고 강직했던 카시미르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지만.... 사실 이게 원래 로버랜드 스타일이다. 카시미르가 이상한 거지.

도리어, 나랑 비슷한 쪽은 오히려 레테였다.

그만큼 고향이 소중하다는 거니까.

나 역시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약속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고 배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기에 믿었다.

레테라면,

움직일 거라고.

그 붉은 호랑이는 룬드나가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감당 가능했다.

룬드나의 모든 저력을 하나로 모아 조직적이고 전술적으로 대항한다면 충분했다.

그만큼 룬드나는 강한 도시였다.

하나로 뭉친 익스퍼트는 능히 소드마스터를 죽이고, 하나로 뭉친 군대 역시 그러했으니.... 내가 룬드나 쪽으로 밀어낸 두 마리의 괴이(怪異)도 해볼 만했다.

'그런데 너희가 그럴 수 있을까?'

에시르 가문의 방탕은 룬드나 전체를 약화시키고 전사들의 단합과 신뢰를 깨뜨렸다.

과연 그런 에시르 가문이 위기를 맞이해, 도시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레테, 너라는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 거냐?

나는,

레테가 스스로 나를 찾아오길 바란다.

사실,

더 쉬운 방법도 있다.

그냥 룬드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구하는 것이다.

그 후 돼지 같은 에시르 가문을 멸족시키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룬드나를 지배하는 거지.

그런데 나는 그보다는 훨씬 더 욕심이 많았다.

내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그런 그림은 원치 않았다.

룬드나의 사람들이 스스로 의지를 내어 움직이길 바란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신뢰 가능한 '나의' 세력이 될 테니까.

스스로 성문을 열어 나를 맞이해 주길 원한다.

그런 기다림이었다.

룬드나의 경계에 서서 안으로부터의 초청을 바라는.

기다림이라는 건 어쩌면 운명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나는 네가 올 거라 믿고 너는 내가 여기 있으리라 믿는 것.

우리가 하나의 운명 아래에서 만날 수 있다고 믿어 보는 것.

하지만 그 믿음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레테. 너는 이미 목이 잘려 효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괴물들에게 이미 뜯어 먹혀 손가락 하나 건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는 운명의 책을 꺼내 [탐색] 페이지를 살폈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두 개의 붉은 점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결 더 신중해진 모습.

아마 도시를 향해 자기들이 모은 마수를 밀어 넣고 반응을 살피고 있는 거겠지. 또 갑자기 나 같은 녀석이 튀어나오진 않을까 하고.

만약 이 두 괴이(怪異)가 움직일 때까지 레테가, 혹은 그 누구라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내가 먼저 움직일 작정이었다.

룬드나시(市)의 멸망을 바라진 않았으니까.

그때가 오면, 내 손으로 직접 괴이(怪異)와 마수들을 참할 것이다.

그다음엔 무능한 에시르의 혈족을 다 죽여야겠지?

그땐 욕심을 버리고 그냥 힘으로 통치를 해 버릴 거다.

그래.

모든 게 뜻대로 될 리는 없으니까.

감화계고 신뢰할 수 있는 신하고 뭐고 간에, 그냥 힘으로 지배를 해 버려야지 그때에는.

그런데도 여태 여기서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는...

결국 내가 운명을 믿기 때문이었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자기 손으로 운명을 개척할 자가 있을 거라고.

누군가 강제로 고치기 전에, 스스로 바꿔낼 인물이 한 명쯤은 있을 거라고.

나는 그런 이와 반드시 만나고 말 거라는... 그런 믿음.

그가 올 것 같았다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가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진격할까 싶었을 때쯤.

다그닥-

그가 왔다.

피투성이였다.

그의 아일룬 백마는 어찌나 무리를 했는지 거품을 물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사투 끝에 마수 무리를 뚫고 온 그 남자는, 낙엽과도 같은 색깔의 눈동자를 품고 있었다.

그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

룬드나의 경계 지역에, 나와 나의 기병대가 쭉 늘어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곧 당황을 감추곤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말에서 내려 나를 빤히 마주 보았다.

나 역시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 잘생기셨네.'

레테. 나보다 2살 많다는 이 남자는 세아가 말해 준 정보 그대로의 남자였다.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할 줄 아는.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 들어가도 돼?"

그러자, 그는 내 앞에 에시르 가주의 목을 던졌다.

털썩- 데굴....

잠깐이지만 아일룬 제2의 대도시를 다스렸던 지배자가, 그 몸뚱이는 어디에다가 두고 왔는지 볼품없게 흙바닥을 뒹굴었다.

"제발요."

레테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이 닥쳐오는 도시에서, 서로를 싫어하는 두 세력 간에 말로 다 하기 어려운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 곡절이 아니었다.

레테가 도시의 지배자를 직접 참하고, 내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모든 것을 걸고.

그러니,

내가 방금 받은 것은 에시르의 머리가 아닌 룬드나 전사들의 마음.

난 훌쩍 말 위에 올라타고,

"기병대."

다각-

경계 안으로 한 발 들어갔다.

"돌격."

괴물들을 참하고 룬드나시(市)로 개선하기 위해.

"하!"

나의 기병대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일제히 말을 달렸다.

#88화 결론

전원이 아일룬 백마에 올라탄 기병대는 먼 거리도 단숨에 주파했다.

머지않아 룬드나시(市)의 성벽과 두 마리의 거대한 괴이(怪異)가 보였다. 성벽 위로 뛰어오르는 무수한 마수 무리도.

부유한 도시답게 외성마저도 돌로 쌓아 아주 높고 튼튼했지만, 전황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저 꼬리가 위험했네."

호랑이 괴이(怪異)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놈의 벼락같은 안광과 마주치면 병사들은 몸이 굳었고, 현란한 털의 빛깔에 시선이 빼앗기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꼬리.

불타는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면, 그것을 본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갔다.

자연발화 현상이라고 해야 하나.

몸 내부에서부터 타오른 불길이 코와 입으로 뿜어지며 끔찍한 죽음을 선사했다.

룬드나의 전사들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싸우느라 끔찍한 피해를 강요 받았다.

거기다가 감은 어찌나 좋은지,

기세를 최대한 숨기고 달리는 중이었는데도, 놈은 뭔가를 느꼈는지 흠칫 놀라더니 나를 정확하게 주시했다.

"먼저 간다."

또 도망치게 둘 순 없지. 즉시 박차를 가했다.

히이이이잉-

한때 하룬의 애마였던 이 백마는 나의 검푸른 오러를 잔뜩 머금고 터무니없는 속도로 내달렸다.

체검(體劍)의 묘리까지 응용해 말의 앞에서부터 공기를 양옆으로 갈라 내니, 녀석은 정말 숨 한 번 쉬지 않고 공간을 찢듯 나아갔다.

호랑이가 화들짝 몸을 틀었다.

도망치려고?

놈의 모습이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내 두 눈에 들어온다.

이번엔 못 가.

"미안. 버텨라."

콰아아앙!

[가속]

[템페스트]

이미 어마어마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 말등을 밟고,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돌진을 펼쳤다.

체검(體劍)으로 몸무게를 깃털처럼 가볍게 하지 않았더라면 말의 허리가 부러졌겠지만, 녀석은 주저앉는 정도로 간신히 반동을 받아 냈다.

아무리 몸무게를 가볍게 했어도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었을 텐데. 진짜 영물이라니까.

덕분에 호랑이는 미쳐 땅을 박차기도 전에 나를 마주쳤다.

크르릉!?

반가워.

놈의 목을 베고자 했다.

그 뜻을 품었을 때, 이미 내 검은 놈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검아일체(劍我一體)의 경지.

뜻과 행동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니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더없이 정교하다.

서컥!

—————!!!

괴이(怪異)의 단말마는 세상의 그 어떤 흉악하고 공포스러운 단어를 다 모아서 반죽을 해도 표현이 안 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한껏 예리해진 내 감각 위로 성벽 위의 전사들이, 성벽 너머의 시민들이 그 단말마에 충격을 받아 졸도하고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지,

파아아앙!

오러를 뿜어 허공을 걷어차며, 다시 한번 가속했다.

내가 이곳으로 쫓아낸 괴이(怪異)는 둘.

하나가 호랑이.

하나는 볼이 비정상적으로 부푼 두꺼비.

말이 좋아 두꺼비지, 사실 끔찍하게 못생긴 대가리만 존재하는 괴물이었다.

거대한 주제에 공기 사이를 떠다니는.

놈은 호랑이보다도 반응이 느렸다.

쩌저적!

놈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번 오러를 뿜어 급강하하며 놈의 대가리를 수직으로 쪼갰다.

————!!!

반토막 난 주제에 기어코 마지막 단말마를 토해 내며 죽는 괴이(怪異).

놈들의 시신은 반로아의 기운 탓에 하얗게 불타올랐다.

난 얼른 그 안에서 심장을 꺼내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괴이(怪異)가 참살당하자, 놈들에게 지배당하던 마수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끼에에에-

끄아아아아-!

열심히 들이받던 성벽을 내팽개치고, 돌연 끔찍한 비명소리를 내며 뿔뿔이 도망치는 마수들.

어딜 가려고?

"전원! 돌격!"

리베라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전속력으로 달려온 나의 기병대들이 마수 무리를 도륙했다.

그렇지.

이거지.

이게 아일룬 백마지.

보통의 말들로는 괴수와 정면 충돌 같은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의 허리와 다리가 먼저 부러질 테니까.

하지만 오러를 품을 수 있는 아일룬 백마가 익스퍼트를 그 위에 태우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가장 선두에 선 익스퍼트들이 마수 무리를 찢어발겼고, 그 뒤를 따라온 엘리트 전사들이 남은 마수들을 갈아 버렸으며, 일반 전사들은 이미 맛이 가 버린 마수들을 확인 사살했다.

룬드나시(市)를 뒤덮었던 재앙이 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 * *

룬드나의 성문이 열리고.

마수 무리를 소탕한 우리는 그대로 도시 안으로 들어서며 개선 행진을 시작했다.

룬드나는 항구도시였다.

바다만큼 넓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엘룬드 호수를 끼고 있었다.

제국과 글로리랜드의 무역선들이 이 천혜의 무역항으로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세아의 보고서에 따르면, 룬드나는 중계 가공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올드랜드에서 온 질 좋은 실크를 글로리랜드의 화사한 염료들로 염색하여 되팔았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색색깔의 염료가 넘쳐 나는 도시였다.

"와아아아아-!"

"란센 대공 전하 만세!"

"만세!"

외침과 함께 여기저기서 뿌려지는 알록달록한 색깔들.

이렇게 화려한 개선 행진은 처음인데...?

드넓은 중앙도로.

그 양옆에서, 또 도로를 따라 늘어선 3~5층 건물의 창문과 테라스에서도, 몸을 힘껏 내민 시민들은 바구니에서 염료 가루를 한 줌씩 쥐어 하늘에 뿌렸다.

"만세!"

"란센 대공 전하 만세!!!"

흩뿌려진다.

색이.

쏟아진다.

축하가.

물처럼 튀고, 싸락눈처럼 떨어져서 우리를 온통 알록달록 물들였다.

'분위기 좋네.'

소드마스터의 감각은 한없이 정밀하다.

그런데 이제 검아일체를 이루어 사람들의 의지마저 희미하게 읽을 수 있게 되자, 정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니까,

다들 날 좋아했다.

시민들은 대충 저렇게 강한 사람이 우릴 지켜 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참 잘 됐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룬드나의 토박이 전사들도 열광적이었다.

그냥 내가 밀고 들어왔다면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들 스스로 에시르 가주의 목을 바쳐 나를 초청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티 없는 기쁨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 마음이 느껴지는지, 나의 전사들도 환하게들 웃었다. 그 험악한 얼굴들에 어울리지 않게 정말 활짝.

온 거리와 하늘 위로 팡팡 터지는 화려한 색채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기쁨에 대한 현란한 증명.

내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봐라. 저기.

아이들이 웃고 있잖아?

환하게 웃으며 염료 가루를 던져 대는 룬드나의 아이들을 보니, 그간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싹 녹는 기분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오늘 원정에 따라온 동생은 둘.

그중 하나가 미카 세이투스다.

이 녀석은 아까부터 내 옆에 딱 붙어서 졸졸 따라오는 중이었다.

녀석은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색채의 향연을 구경했다.

가끔씩 손과 어깨를 들어 제 몸을 뒤덮은 화려한 빛깔을 감상하기도 했다.

'좋냐?'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좋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네가 더 넓어지기를.

좀 더 진지하게 기사의 길에 임해 주기를.

누구보다 강해지길.

세이투스 공작가를 재건하고 부흥시키길.

먼저 간 네 친오빠, 로이 세이투스보다도 더 강해져서 그의 자랑이 되길....

그게 내 의무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이번 원정에 널 데려왔었다.

문득, 내 시선을 눈치챈 미카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몽롱하던 녀석의 시선이 점점 또렷해졌다.

"오빠. 나도 오빠처럼 강해지고 싶어."

녀석이 돌연 그렇게 말했을 때, 녀석의 얼굴은...

"가르쳐 줘. 강해질 거야."

내 친구 로이와 꼭 닮아 있었다.

알록달록 색깔에 물든 채로도,

녀석의 두 눈동자는 자주색 불꽃을 선명하게 빛냈다.

* * *

괴이(怪異)의 시체는 아예 중앙 광장에 전시해 버렸다.

그리고 술과 고기를 풀었다.

황금을 쏟아 온갖 산해진미를 대령하고 시민과 병사들 모두를 먹였다.

사실 이건 상식에 맞는 행동은 아니었다.

점령군이 승전 연회를 열면 그 술과 밥에 독을 타서 싸그리 죽여 버리는 게 로버랜드의 전통이라서.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1차로, 내가 이들이 보이는 호감이 진짜임을 확인했고,

2차로, 같은 음식과 술을 시민들, 그리고 토박이 전사들에게도 대접할 것이며,

3차로, 행여나 에시르가(家)의 잔당이 수를 쓸까 엄중히 감시했고,

무엇보다 내가 있었으니까.

홀로 도시 하나를 멸할 힘을 가진 내가 있는 이상 그 어떤 수작질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나도 알고 저들도 아니까.

그렇게 승전 연회가 열렸다.

나의 전사들은 한없이 들떠서 외쳤다.

"아일룬을 일통했다!"

그러자 룬드나의 토착 전사들이 외쳤다.

"패왕 란센 만세!"

온 시민들이 함께 연호했다.

"패왕 란센 전하 만세!"

그래. 내가 하룬을 죽였으니, 날 새로운 5왕(王)에 넣은 건 알겠다.

알겠는데.

'...내가 왜 패왕이야?'

울컥.

패왕(覇王)은 그거 아냐? 힘으로 무식하게 지배하는?

내가 부드럽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칭호가 울려 퍼졌지만, 일단 참았다.

분위기는 맞춰 줘야지.

적당히 먹고 마시다가 세아의 옆자리를 찾아 털썩 앉았다.

"세아야."

"응?"

"황제가 꾸미는 게 뭔 거 같아?"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세아는 알아들었을 거다.

갑자기 늘어난 마수.

예전엔 볼 수 없던 격이 다른 괴물, 괴이(怪異)의 잇따른 발생.

이걸 설명할 수 있는 건, 황제라는 변수뿐이었으니까.

괴이(怪異)는 누가 봐도 사교와 관련된 것이고, 이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교도는, 적어도 우리가 알기론 황제밖에 없었으니까.

역시나 세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을 내놨다.

"인위적인 웨이브. 그걸 노리는 거겠지."

나랑 생각이 같았다.

"그런 웨이브가 노르베르쥬 전역에서 일어난다면?"

"지금의 마수 증가 추세. 그리고 괴이(怪異)의 존재를 감안할 때... 노르베르쥬의 절반은 소멸할 거야."

녀석의 예상은 내 예상보다도 암울했다.

"...우리가 개입해서 최대한 많은 도시를 구한다면?"

"그럼 3분의 1 정도만 소멸하겠지."

많다. 너무 많았다. 노르베르쥬 전체의 3분의 1이 소멸한다는 이야기는 7개 가까운 도시가 세상에서 지워진다는 것.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는다.

어린아이들도 백만 단위로 죽을 것이다.

세아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부연했다.

"어쩔 수 없어. 지금보다 괴이(怪異)가 더 많아진다고 가정하면, 아주 강력한 기사가 더 많이 필요해. 최소, 마갑을 입은 벌슨 아저씨 수준으로."

벌슨은 소드마스터이자 고대 기준의 하급 익스퍼트.

그런 기사는 나를 제외하면 벌슨 하나뿐이었다.

세아는 특유의 무덤덤한 눈빛으로 선언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어. 최소 1명은 우리 영역을 지켜야 하니까. 구하러 간다고 해도 1명밖에는 못 움직이잖아? 구할 수 있는 영역에 한계가 있어."

옳은 말이었다.

혼자서 노르베르쥬 전체를 구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벌슨급의 강자가 더 많아야 한다는 거잖아?"

"응. 당장은 방법이...."

"만들어 내자. 그런 기사."

"응?"

"만들면 되지."

"만들어...?"

세아의 눈동자에 드물게 당황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 힌트를 줬다.

"드라키움."

"아!"

드라키움은 땅속에서 발견되는 천고의 영약.

단순히 오러를 늘려 주는 게 아니라 복용자의 '가능성' 그 자체를 깨워 준다고 알려진 그런 영약.

그거라면 바렌과 카트리나 정도는 충분히 소드마스터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다.

세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나는 확인 사살하듯 말해 주었다.

"우리 지금 많이 갖고 있잖아?"

드라키움은 그 씨앗이 땅에 심기고 나서 대략 1만 년 정도가 흐르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씨앗이 무엇이냐.

100년 전의 유명한 학자가 발표했다.

드라키움으로 변해 가던 수백 개의 중간 단계 샘플들을 조사하여 밝혀 낸 그것.

"상궤를 벗어난 괴물의 심장."

그러니까 괴이(怪異)의 심장 같은 거.

그게 씨앗이었다.

그 심장을 심으면 1만 년 뒤에 드라키움이 만들어지는 거다.

난 그런 심장을 지금 7개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쩜 이렇게 아귀가 딱딱 맞는 건지....

팔락.

운명의 책을 펼쳤다.

[탐색] 페이지.

룬드나에 들어오자, 아주 신경 쓰이는 게 새로 하나 생겨났거든.

토박이 병사 하나를 불러서 물어보았다.

"병사! 저쪽에 섬 하나 있지?"

"예? 예! 대공 전하!"

"거기에 특이 사항이 있나?"

"그쪽에는 마도 시대의 유적이 있습니다!"

거봐.

이렇다니까.

나는 실실 웃으며 운명의 책을 세아에게 보여 주었다.

[탐색] 페이지.

여기에서 괴이(怪異)는 붉은점으로 표시되었다.

그럼 저쪽 섬에 찍힌 이 붉은색 직사각형은 무엇을 의미할까?

꼭 문처럼 생긴 이건...

"다녀올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통로가 아닐까?

그게 내 가설이었다.

아니면? 그럼 말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강하게 예감이 왔다.

아일룬을 일통한 오늘.

난 다시 1만 년 전으로 향하려 한다.

가서 드라키움의 씨앗을 미리 심어 두기 위해.

#89화 혈통

끼이익-

끼익-

혼자 나룻배를 타고 천천히 노를 저었다.

하늘엔 별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

이오딘이 늘 올려다보고 있던 그 별.

다른 13주신의 이름들은 듣고도 죄다 까먹었지만, 미바바르만큼은 여전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저게... 11악마였나?"

고대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

예를 들면 저 하늘의 무수한 별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가장 특별한 24개의 별. 그런 거.

그게 바로 13주신과 11악마다.

언제나 같은 위치에서 변하지 않는 13주신은 대륙 어디서나 나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반면, 늘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빠르게 하늘을 거스르는 11악마는 우리에게 시간과 날짜를 알려 준다.

푸르게 빛나는 13주신과 붉게 빛나는 11악마.

끼익-

어느덧 배가 섬에 닿았다.

"여기구나."

언덕 위로 오르자 오래전에 있었던 발굴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패이고 저기 쌓인, 울퉁불퉁 난장판.

"신전이 있었으려나?"

그 사이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매끈한 돌기둥들이 대조되었다.

땅에 거의 묻힌 채, 여기 삐죽 저기 삐죽 솟은 기둥들은 작은 탑처럼 보일 정도로 크고 장엄했다.

허나 예쁘긴 한데...

뭔가 얻을 게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긴 뭐가 있었어도 예전에 다 파헤쳐 갔겠지.

"이쪽으로 더 가야 되는 것 같네."

나는 운명의 책을 보며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우우웅-

운명의 책에 표시된, 붉은색 직사각형.

그곳을 향해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반응이 왔다.

"여기다."

역시. 직사각형,

이거 시간 여행이 가능한 장소를 표시하는 거 맞았다.

팔락-

운명의 책을 펼쳤다.

연둣빛을 내는 페이지가 있었다.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두 페이지?'

빛을 내는 페이지가 두 개라는 것.

'아.... 저번에 업데이트가 되었다고 하더니, 그거 때문이구나?'

꿈속에서 웬 우는 아이 달래 주고 났더니 갑자기 생겨난 기능들.

---

- 이제부터 시간 여행이 강제되지 않습니다. 해당 기록을 소리 내어 읽을 때에만 시간 여행이 발동합니다.

- 시간 여행이 가능한 목적지를 선택 가능해집니다. 1레벨 당 목적지가 하나씩 늘어납니다.

- 임무 완수까지 소요되는 시간의 추정치가 제시됩니다.

---

덕분에 마음이 느긋해졌다.

이젠 갑자기 고대 시대로 튕겨 나가는 일이 없겠구나.

나는 빛을 내고 있는 두 개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

[루세라스력 4681년. 2월 13일] 밤.

한밤중에 담벼락을 넘어 든 참입자들은 참으로 기괴한 행색이었다. 사람이 맞긴 한 것인지....

(예상 임무 소요 시간 8시간)

[루세라스력 4663년. 10월 29일] 화려한 달빛.

신님. 제발 우리를 지켜 주세요. 모두가 본래 모습을 찾고... 이기게 해 주세요....

(예상 임무 소요 시간 3일)

---

'엄청 좋아졌는데?'

예상 임무 소요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그 밑에는 지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첫 번째 기록은... 올드랜드? 그쪽에서 뭔가를 하게 된다는 건가?'

올드랜드라니. 신기해. 이렇게 먼 곳에서?

근데,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드라키움의 씨앗을 심어야 하는데 올드랜드에 심어 두면 회수하기가 힘드니까.

이건 기각.

다행히 두 번째 기록은 아주 적절했다.

'여기는... 그냥, 여기네?'

지도가 가리키는 위치가 현재 내가 서 있는 무인도와 딱 겹쳤다.

'가까워서 좋은데?'

임무 소요 시간은 3일.

'그것도 좋아.'

업데이트가 되며 시간 비율도 12대 1로 조정되었으니, 대충 돌아오면 6시간 정도 지났을 거다.

이제 막 아일룬을 일통해서 오래 자리 비우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잘 됐다.

좋아. 마음 정했다.

나는 두 번째 기록을 소리 내서 읽었다.

"루세라스력 4663년. 10월 29일. 화려한 달빛. 신님. 제발 우리를...."

그 순간,

번뜩-!

어?

저 하늘에, 11악마가 타오르듯 붉게 빛났다. 평소보다 2배는 더 밝았다.

'별이 빛을 내?'

그동안 늘 실내에서 시간 여행을 해서 몰랐는데...

설마 시간 여행할 때마다 저렇게 빛났나?

운명의 책이 11악마와 관련이 있나?

왜 기분 나쁘게 악마랑....

그런 의문과 함께, 나는 퉁-! 하고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시간의 강물이 나를 휘감았다.

이젠 제법 익숙하고 편안하게.

* * *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찬란했다.

'와.... 이게 뭐지...?'

일단 밤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색색깔 빛의 커튼이 온 세상을 밝혔다.

어릴 때 망망해 위에서 본 오로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찬란하고 다채로운 오로라.

붉고 푸르고 노랗고.... 온갖 빛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위대한 신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건...

'뭐야 이거?'

솜털이 쭈뼛 서는 섬뜩함.

오로라라 생각했던 것은 사이키델릭문이 내뿜는 색색깔의 형광빛이었다.

그것이 하늘에서 어떤 장막과 부딪혀 장엄한 오로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볼 때마다... 참 불길한 달이야.'

사이키델릭문. 저건 정체가 대체 뭘까? 세아도 잘 모르던데. 고고학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했을 뿐, 딱히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진 못했다.

어쨌든 하늘을 물들인 황홀한 빛의 정체가 사이키델릭문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저절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지난번에 저 달을 봤을 땐, 너무 많은 죽음을 봐야 했으니까.

'근데 이번엔 아무도 없네?'

나는 조금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이 달리고 있는 수상한 남자들도 없고,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무서운 사람도 없고,

대뜸 악수를 청하는 낯선 여자도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저 나 홀로,

화려하게 빛나는 밤에,

절벽을 깎아 만든 좁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아무런 힌트도 없이.

'이 옷이 무슨 힌트인가?'

나는 웬 겉옷을 하나 입고 있었다. 순백색의 품이 넓고 긴 로브.

'근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란 거야? 일단 계단을 올라가? 아니면 내려가?'

아니면, 일단 드라키움의 씨앗부터 심고 볼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차였다.

웬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님. 자애의 비샤티님. 어 그리고 또... 아! 통찰의 오도테트... 테트님."

간절히 기도하는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곧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절벽을 둥글게 깎아서 만든 공터였고, 그 깎인 면에 13개의 신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여자아이는 공터 중앙에 활활 타오르는 화로 앞, 평평한 돌바닥에 무릎을 꿇어앉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되게 어려 보이는데? 이 밤에? 혼자?'

난 일단 그늘에 몸을 숨기고 아이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더 이상 아무도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모두들 아픈 거 낫게 해 주세요. 제발 우리를 지켜 주세요."

가만히 지켜봤다.

"특히 우르굴락 아저씨요. 아프지 않게. 죽지... 않게. 제발요. 진짜 진짜요."

근데 애가 울잖아?

얼굴이 다 젖도록 방울방울 눈물이 넘쳐흘렀다.

대체 무슨 일이야?

궁금해서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그래도,

일단 지켜봤다.

"삼가 여러 신님께 간곡히 부탁드려요. 그래서...."

아이가 뽀시락뽀시락 옆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뒤졌다.

"제가 제일 아끼는 동화책이에요. 그리고...."

화르륵!

아이는 타오르는 화로 속에 책을 던졌다.

어... 일종의 제물인가?

"제일 소중한 친구가 선물해 준, 제일 소중한 인형이에요."

화르륵!

"또... 그리고 이건...."

아이가 갑자기 몸을 떨었다.

"이건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두 배는 더 많은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써 준 편지랑... 엄마 옷.... 아직 잘 맡아 보면 엄마 냄새도 나요."

소중하게 움켜쥔 편지와 옷이 화로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이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일단 상황을 지켜봤는데,

"진짜진짜... 기도 꼭 들어주셔야 돼요...?"

아이는 그 소중하다는 옷과 편지를 화로 위에 떨어뜨리려 했다.

아, 미쳐 버리겠네.

덥석.

검아일체의 경지란 게 그렇다.

뜻이 일면, 이미 그곳에 도달해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이미 아이를 번쩍 안아 든 다음이었다.

행여나 아이의 소중한 편지와 옷가지가 화로 속에 떨어질까 봐 신경 써서 안아 들었다.

"...어?"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얀 로브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쓴 내 모습을 보더니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순례자 아저씨예요?"

아무래도 이 하얀 로브가 순례자의 복식인 모양이다.

아이는 조그맣고 말랐다.

들고 있는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가벼웠다.

"너. 몇 살이야?"

"저요? 7살이요."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는데?"

"1년 전에요...."

후,

그래. 신중해야지. 상황도 모르고 여기서 내가 해야 하는 임무가 뭔지도 모르니까.

"소원이 뭔데? 자세히 말해 봐."

"소원이요?"

그러니까.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는 거다.

막말로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임무를 해야 하는 거면 어쩌려고?

애기한테 상처만 입힐 뿐이지.

"어. 말해 봐.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안다. 다 아는데.

"뭐부터 해 줄까?"

몰라. 못 참겠어.

* * *

"이름은?"

"셰네릴이요. 근데 진짜 약속한 거예요? 다 들어주는 거예요?"

"그래. 뭐부터 할까?"

"아! 일단 아픈 사람들! 빨리! 빨리!"

셰네릴은 내 소매를 잡아끌더니 신이 나서 계단을 도도도 달려 내려갔다.

"천천히 가라. 그러다 넘어질라."

물론 넘어지는 게 아니라 옆에 절벽으로 떨어져도 내가 잡아 주겠지만.

"빨리요!"

셰네릴이 이끄는 대로 계단을 한 번 꺾어 내려가니 거대한 협곡과 그 안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기자기한 건물이 협곡의 비탈을 따라 죽 늘어서 있다.

눈대중으로 보니, 보통 사람이 설렁설렁 걸어도 1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동네였다.

"필그림밸리."

계단을 거의 다 내려오니 커다란 돌에 적힌 마을의 이름이 보였다.

하늘에는 여전히 알록달록 빛의 커튼이 춤을 추는데... 마을의 진입구엔 웬 남자가 그 빛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잠깐."

기척이 좀 이상하긴 해도 사람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사람이 아니다.

"괴물."

얼른 셰네릴을 등 뒤로 숨기고 칼자루에 손을 얹는데,

"여어~ 셰네릴 이제 내려오냐."

그 괴물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2미터를 넘는 체구.

짙은 갈색의 피부.

크고 툭 튀어나온 사각턱에 입 속에서 번뜩이는 톱날 같은 이빨.

잘 아는 괴물이었다.

변경에서 자주 출몰하는.

"오크...?"

오크가 날 슥 돌아보더니 한마디 했다.

"왜? 오크 처음 보나?"

아니.... 너 괴물이잖아?

왜 말을 하지? 사람처럼?

"타르굴 아저씨!"

셰네릴이 도도도 달려서 타르굴이라는 오크에게 안겼다.

"그래.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다."

오크는 나를 흘깃 보더니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순례자 양반, 촌놈이구만?"

으음....

오크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고 보니, 그런 학설도 있었지?'

오크가 한때는 지성을 가진 이종족이었을 수도 있다는 학설이 있었다.

'그게 맞나 보네.'

사람만 보면 미쳐서 죽이려고 달려들던 그 오크가 저 7살 애기를 소중하게 안아 드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1만 년 전.

이곳은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든다.

* * *

오크, 타르굴을 따라가는 동안 마을에서 내가 본 건 수없이 많은 부상자들이었다.

"...너무 많은데?"

당장 타르굴부터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팔이 날아간 사람. 다리가 잘린 오크가 거리 곳곳에 패잔병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이러면... 약속 지키기가 쉽지 않은데....'

최상급 포션은 많지 않아도 중급 이하 포션은 많았다. 중급 이하는 로레인한테 박스 단위로 받았으니까.

그런데 부상자가 너무 많고 그중에 중상자의 숫자도 상당하니, 난감했다.

저 정도면 내가 가진 포션으로도 감당이 안 된다고.

그런 걱정을 하며 타르굴과 셰네릴의 뒤를 졸졸 따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

그곳엔 40명쯤 되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10명쯤 되는 상처 입은 기사들이 완전 군장을 한 채로 아이들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 저기 셰네릴도 왔군. 이제 1시간 내로 이곳을 탈출한다."

리더로 보이는 기사가 그리 말을 했다.

그리고...

'뭐야 이거?'

하늘을 불태우듯 휘어 감는 오로라 탓일까?

이 풍경이 어쩐지 익숙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깨어질 듯 뛰기 시작했다.

바짝 붙어서 떨고 있는 아이들.

비장한 얼굴로 무기를 점검하는 기사들.

그 얼굴 하나하나 위로, 반로아를 탈출하던 우리의 모습이 겹쳐졌다.

울컥.

가슴 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르고,

두 눈이 뜨겁다.

시야가 일그러진다.

지금 내 두 눈은 타오르고 있겠지.

타르굴이 불쑥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여? 이제 보니 너 고대 영웅의 후손이었어?"

"뭐?"

"눈. 네 눈 속에 불꽃 말이야. 그거 영웅의 혈통인데... 모르나? 오크인 나도 알어."

오크답게, 타르굴 그 녀석은 목소리가 제법 컸고,

"영웅의 혈통?"

"고대의 혈통이라고?"

"그럼 성자의 자질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돌연 주변 사람들이 웅성대며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진짜다! 눈 속에 불이 있어!"

그리고 비명처럼 외치는 한마디.

대체 뭐지?

눈 속의 불꽃은, 반로아에서는 평범한 왕족과 귀족의 상징일 뿐인데...?

#90화 올옴니마

고대 영웅의 혈통?

성자의 자질?

'반로아의 혈통이... 그런 거라고?'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오, 진짜다! 동공에 불꽃...!"

"고대 영웅의 혈통을 여기서 볼 줄이야...."

"되는 거 아니야? 성령과 소통하실 수 있는 거 아니야?"

웅성웅성웅성-

절뚝거리는 다리, 피가 철철 흐르는 머리를 하고도 다들 내게 다가와서 내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진짜야 진짜."

"세상에... 난 처음 봤어."

뭐야. 눈 속에서 귀화가 타오르는 거.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아, 물론 대단하긴 하다.

반로아에서도 귀족이나 왕족의 혈통을 진하게 타고 난 자들만이 눈이 이렇게 타올랐으니까.

그런 이들은 다들 재능도 특출났다.

하지만,

'성자라니? 고대 영웅이라니?'

특출 나긴 하지만, 그게 다른 국가의 귀족들을 엄청 압도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냥 어디 왕족은 눈동자 테두리에 금색 띠가 있다거나, 어디 귀족은 머리칼이 하늘색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그냥 외형적 특색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아무리 특별해도, 성자니 고대 영웅이니 이런 건 조금... 당황스럽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는데...

"성자님!"

셰네릴이 두 눈을 글썽이며 내 바짓가랑이를 움켜쥐었기에, 차마 그 말을 뱉어 낼 수 없었다.

"진짜 성자님이었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뚝뚝 구슬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녀석은 나에게 매달렸다. 까치발까지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성자님.... 제발... 제발 구해 주세요."

아니 7살짜리 애기가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려서 그게 막 땅에 부딪혀 산산이 깨지는데... 어떻게 거기다 대고, '나 그런 거 아닌데요?' 하겠냐고....

모르겠다.

사실 애초에 반로아 혈통의 기원을 나도 모르니.

저들 말대로 고대 영웅이니 성자니 하는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덥썩

일단 난 셰네릴을 안아 들었다. 7살치고도 가벼운 이 녀석. 난리통에 씻지도 못했는지 웬 걸레 빤 냄새 같은 게 나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셰네릴을 안은 채로 날 둘러싼 사람들과 시선을 쭉 마주쳤다.

기대, 열망, 희망....

그러니까,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대체 뭘 바라는 건데?

그러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절뚝이는 기사 하나가 걸어 나왔다. 붕대를 맨 허벅지에선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성기사 루이스입니다. 제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성기사.

그게 진짜 있구나.

글로잉스틸에 있을 때 이야기만 들어 보았다.

이 시대에는 신의 이적을 행사하는 사제와 성기사라는 존재가 있다고.

그들은 오러나 마법이 아닌 전혀 다른 힘, 신성력을 다룬다고.

그렇다면 눈앞의 남자 루이스, 이 남자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건가? 그건 대체 어떤 힘이지?

'전혀 모르겠다.'

너무 특별해서 그런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오러 외에는 느껴지는 게 없었다.

"이쪽으로."

그래도 기사답게 의지력은 대단한지.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그는 날 인도하려고 했다.

아,

그 전에.

셰네릴. 얘는 내려놓고.

꼬오옥!

내려놓으려고 몸을 기울였는데, 이 녀석 날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저도요! 저도 갈래요!"

응? 그래도 돼...?

다들 탈출하려고 모인 거 같은데.

그런 눈빛을 담아 아까 그 리더로 보이는 기사를 쳐다보았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순례자께서 성자의 힘을 각성할 수 있다면, 저희로서도 굳이 지금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 밖에도 준비할 게 남아 있으니 잠시 다녀오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셰네릴을 다시 안아 들었다.

이 작고 꾀죄죄하고 걸레 빤 것 같은 냄새가 나는 꼬마애는 내 품에서 오들오들 떨었지만, 서서히 퍼지는 온기에 안심했는지 곧 잠잠해졌다.

루이스를 따라 언덕 위로 쭉 뻗은 길을 올랐다. 필그림밸리라는 이 마을은 언뜻 보기에도 아기자기 예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엉망진창이었다.

"성자님. 성자님. 주의하셔야 할 게 있어요."

내 품속에서 셰네릴이 조잘거렸다.

"첫째.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도 거기에 귀 기울이면 안 돼요. 몸이 뻥! 하고 터질 수 있거든요."

그래. 이런 꼬마 아이가 웬 끔찍한 규칙들을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둘째. 가려워도 절대 긁으면 안 돼요. 그 부위가 점점 변해서 꿈틀꿈틀 이상한 게 돋아날 수 있거든요."

안 그래도. 보였다. 그런 사람들이.

몸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살갗이 자꾸 터지며 피로 물들어 가는 사람.

그는 두 귀를 틀어막고 부르짖었다. 제발 그만! 그만! 너무 시끄러워! 하면서.

또 어떤 청년의 팔과 허벅지에선 손가락 길이 정도 되는 실 같은 것들이 옷을 뚫고 돋아나 꿈틀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꼭 붙들고 있는데도 청년은 자꾸 몸을 긁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셋째, 하늘이 갑자기 번쩍이고 밝아져도 절대 올려다봐서는 안 돼요. 두 눈이, 그리고 나중엔 얼굴 전체가 피로 녹아내려요."

아, 보이네. 저기 저 여자. 붕대로 칭칭 감은 두 눈 아래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밖에도 싸우다 다친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건물 계단마다 앉아 있었고, 이미 죽은 시신들은 천에 덮여 여기저기 뉘어져 있었다. 유가족들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조롱이라도 하듯, 알록달록한 빛으로 절규하는 얼굴들을 쓰다듬는 하늘.

'신체가 변형되는 건, 그때 그 사도 놈의 거머리를 떠올리게 하고, 이 망할 알록달록한 달빛은 그 늑대 괴물 때를 떠올리게 하고....'

나는 통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서 걷는 루이스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루이스는 뒤를 돌아볼 힘도 없는 것 같았다. 헐떡이며 대답했다.

"빌어먹을 사교도들이 만상수(萬象樹) '올옴니마'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사교.

역시 그 죽일 놈들이 아니면 이런 끔찍함을 만들어 낼 순 없지.

근데,

올옴니마?

그게 뭐지?

잘 모르겠으니 일단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루이스는 헐떡이면서도 알아서 설명을 해 주었다.

"순례자께선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성지를 통과하시면서 거대한 나무를 보셨지요?"

"예."

사실 못 봤지만.

성지가 뭔지도 모르지만.

일단 본 척을 한다.

"그게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 님께서 심으셨다고 기록된 올옴니마입니다. 세상 모든 종류의 과일과 꽃 그리고 풀을 품고 있다고 해서 만상수(萬象樹)라고도 하지요."

"그걸 왜 노리는 거죠?"

"알 수 없습니다. 사교도놈들은 신화 시대의 것이라면 뭐든 탐내고 보는 것들이니까요."

후....

길게 한숨을 내쉰 루이스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올옴니마는 그저 상징이 아닙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올옴니마를 관리하고 그곳에서 열리는 열매와 꽃 등을 채집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지요."

아....

그 나무가 없으면 마을 하나가 굶어 죽는 거구나?

"사실 이 근처 도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채집을 하면 주변 도시들이 가공을 해 상품을 만드니까요. 올옴니마가 사라지면... 적어도 100만 명은 일자리를 잃을 겁니다. 식량값도 폭등하겠죠."

100만 명?

나무 하나에?

로버랜드 웬만한 도시 전체 인구보다도 큰 규모인데?

"또 올옴니마는 오크들의 성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인간도, 오크도...."

"지원군은 없습니까?"

"...그것만 믿고 있습니다만, 사교도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마법 통신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정면으론 길을 뚫을 수가 없어서 성지 쪽 우회로로 전령을 보내 보았지만... 다들 저주에 먹혀 죽은 것 같습니다."

성지. 흘깃 돌아보는 루이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저 언덕 아래, 협곡이 끝나는 부분부터를 성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괴물들과 싸우는 건 저기 협곡 위쪽이고 협곡 아래쪽은 뚫려 있다는 거지?

근데 그쪽으로 나가면 저주가....

응? 잠깐? 저주?

나는 내 품에 조용히 안겨 있는 셰네릴을 흘깃 내려봤다. 녀석은 '저주' 그 말을 듣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저기 잠시만요. 마을 밖으로 나서면 저주에 걸린다고요?"

"네. 물론 마을 안에도 저주가 떨어지고 있긴 합니다. 오시면서 본 기이한 환자들이 저주에 당한 이들이지요.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훨씬 더 심해집니다. 지금 마을엔 정화 결계가 펼쳐져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저주가 침습해 오고 있죠."

"아까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탈출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목소리는 저절로 뾰족해졌고, 루이스의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았다.

"더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곧 마을을 지키는 결계도 깨지고, 머지않아 방어선이 무너질 테니까요.... 성기사들이 최대한 지켜 주며 아이들을 대피시켜 본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루이스의 목소리엔 회의감이 가득 묻어났다.

그 역시 그 작전이 성공하리라 믿지 않는 듯했다.

그저 방법이 없어서 시도하는 최후의 발버둥일 뿐.

으음.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네.

"솔직히 지금 몰려드는 괴물들을 생각하면 호라이즌 기사단에서 와주는 수밖에는 없는데... 소식을 전할 방도가 없으니...."

라이테나 대공의 친위대.

세계최강.

호라이즌 기사단이 필요한 정도라는 거지?

이제 상황은 대충 알 것 같았다.

딱 하나 빼고는.

그거 하나만큼은 아직도 도통 모르겠다.

"그런데 고대의 혈통? 성자의 자질? 그게 지금 중요한 문제인 겁니까?"

그냥 당장 칼 들고 나가서 싸우는 게 먼저 아닐까?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딱 잘라서 엄숙하게 말했다.

"신전에 계시던 열 명의 사제님들이 모두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분들이요?"

"네. 사교도의 저주와 침습을 막기 위해 성령의 힘을 과도하게 받아들이신 바람에... 모두 어제 순교하셨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진 버텼지만... 이제 곧...."

그는 오로라가 요동치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랬다.

'신이라....'

여전히 동화처럼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이젠 나도 그 존재를 마냥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토록 광범위한 지역에 저토록 강력한 저주를 막아 낼 수 있는 힘은... 신의 은총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워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사제분들이 순교하셔서 결계가 무너지는 중이고, 만약 저한테 성자의 자질이 있으면 그걸 복원할 수 있다... 이 말씀입니까?"

"네. 자질이 있고 그걸 조금이라도 일깨울 수 있다면...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루이스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저도 지금 이게 억지란 거 압니다. 고대 영웅의 혈통 중에 성자의 자질을 타고난 이들이 유독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봤자 100명 중 1명꼴이니까요. 그중에서 진짜 성자로 각성하시는 분은 다시 1,000명 중 1명도 안 되고...."

근데 그만큼 절실해서 그럽니다...하고 덧붙이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그때 셰네릴이 내 품에서 짹짹거렸다.

원래 아이들이란 어른의 기분을 빠르게 눈치채는 것들이라서... 되레 루이스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밝게 말했다.

"루이스 성기사님! 걱정 말아요! 진짜 성자님이에요! 제가 기도했더니! 짠! 하고 나타나셨거든요! 신님들이 보내 주신 진짜 성자님이에요!"

음....

솔직히 모르겠다.

성자의 자질?

그런 게 나한테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난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는걸?

그래도.

다짐했다.

'그런 자질이 있든 없든 약속은 지킬게, 인마.'

전부는 못 되어도.

중요한 거 대부분은 어떻게든 내가 지켜 낼게.

뭐, 어차피.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마을을 지키는 게 이번 임무 같았으니까.

나는 셰네릴의 떡진 머리카락을 대충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만 감겨 주면 우리 캐치나 제페토처럼 근사한 은발 머리가 될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안 씻은 개털 같았다.

#91화 성물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언덕을 모두 올랐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장엄한 신전.

룬드나시(市)의 무인도에서 발견한 그 기둥과 똑같은 것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진짜 여기였구나.'

조금 의아했었다.

분명 운명의 책에 따르면 이곳은 룬드나시 남쪽에 있는 무인도였다.

바다와도 같은 대호수 나엘룬드에 있는 무인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호수는커녕 연못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협곡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현대에 봤던 그 기둥들이 멀쩡히 신전을 이루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여기가 거기임을 알 것 같았다.

루이스 성기사가 길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후.... 저기 올옴니마가 보이네요. 성지(聖地) 입구에 우뚝 솟은."

그를 따라 뒤를 바라봤더니 진짜 보였다.

'뭐냐...?'

구불구불 이어지는 협곡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그 끝에 깊디깊은 분지가 있었다. 거기에, 터무니없이 거대한 나무가 하늘에 기댄 듯이 서 있었다.

오래 바라보다 보면 원근감이 고장 날 것만 같은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그 거대한 나무는 가지가지마다 색이 다 달랐고 열린 이파리와 꽃들도 온갖 종류들로 서로 달랐다.

그야말로 천태만상을 다 담은 듯한 나무.

저게 만상수(萬象樹) 올옴니마구나.

와....

저걸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가 심었다고?

'저런 게 있으니까 신을 믿지.'

그런 찬탄이 절로 나오는 어마무시한 존재감.

신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

저 정도 되니까 100만 명을 먹여 살리는구나.

그리고 나무 뒤로 펼쳐진 끝없는 분지가 보였다.

'이제야 알겠네.'

그제야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1만 년 동안 이 땅이 어떻게 변한 건지.

이곳 사람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저 거대한 분지가 내 시대에는 '나엘룬드 대호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까마득한 시간 속에 분지는 완전히 물에 잠겨 바다와 같이 거대 호수가 되었고,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속한 이 신전은 무인도에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형을 바꿔 놓는 걸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감탄을 느꼈는지 루이스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실렸다.

"저곳이 성지(聖地), 고요한 평원입니다. 그리고 드넓은 성지 전체를 뒤져도 몇 없는 만상수죠. 엘릭서의 원료인 장생과도 저기서 열리고, 영혼을 각성시키는 혼백초도 저기서 자라지요. 실로 여신님의 은총입니다."

응? 잠깐.

장생과?

혼백초?

엘릭서의 원료라고?

영혼을 각성시켜?

꿀꺽.

저절로 침이 넘어갈 만큼 탐이 났다.

"그거 지금도 있는 겁니까?"

셰네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내 욕심이 불현듯 타올랐다.

그런 게 있으면 당연히 아공간에 쓸어 가야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얼마 전에 추수를 해서 지금 있는 건 사시사철 계속 자라는 영녕꽃과 빛깔꽃 같은 것들밖에 없을 겁니다. 애초에 장생과는 10년에 한 번씩만 열리고요."

...거짓말 아냐?!

로버랜드 사람이라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못 믿을 말이었다. 하지만...

"성자님. 이제 다들 괜찮아지는 거죠?"

내 품속에서 자꾸 조잘대는 꼬마애가 자꾸 내 발목을 붙들었다.

'후....'

...그래. 애초에 저런 걸 노리고 온 게 아니니까.

믿자. 믿어.

이런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을 거 아냐?

없다고 했으니 없겠지. 장생과든 혼백초든.

지금은 그저 빨리 움직여야 할 때다.

이 마을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억지로 미련을 털고 등을 돌렸다.

"안내해 주십쇼. 루이스 성기사님. 그 성자의 자질이란 게 있나 없나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에 괴물들을 어떻게든 해야겠으니까."

마음을 굳게 먹고, 나는 신전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드높은 기둥.

하늘을 닮은 천장.

장엄한 신전이었지만, 이 안의 사람들도 바깥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슬픔. 상실감.

어딘가 한 군데씩 다친 기사들과 그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상처를 돌보는 견습 사제들.

그들 중 나이가 좀 있는 견습 사제들이 그간 말로만 들어봤던 '신성력'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우웅-

땀을 뻘뻘 흘리며 손에서 희뿌연 빛을 뿜어내는 견습 사제들.

그 빛이 머물면, 천천히 상처가 아물고 저주로 변이되었던 신체가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신기하네....'

진짜로 마법도 오러도 아닌 힘이었다. 아니... 마법과 오러가 합쳐진 듯한 기묘한 힘.

환골탈태를 한 나는 그 구조가 어렴풋이나마 보였지만... 마나를 직접 다루지 못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비한 힘으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나도 얼핏 보인다 뿐이지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마나를 저렇게 가공하고 제어할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어딘가에서 힘이 계속 전달되고 있어.'

견습 사제가 쓰는 신성력의 근원은 그의 몸속에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흘러든 힘이 그 손을 통해 뻗어 나올 뿐.

그 모습에 나는 솔직히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설마... 진짜 신이 있는 거야?'

대체 어디서 힘이 내려오는 거지?

정말 신이라면... 어째서 우리 시대에는 신이 없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신학적 고민이 나를 덮쳐왔다.

짧은 사이에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그렇게 신전 깊은 곳까지 나아가던 길.

"루이스 형제?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기세가 남다른 성기사 2명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한 명은 익스퍼트 최상급 정도 되는 것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헤르만 단장님. 그게 저도 터무니없는 줄은 알지만...."

루이스가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가 헤르만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헤르만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가 진중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고대 영웅의 혈통이시라고요?"

"...감정이 격해질 때 눈동자 속에 불길이 타오르는 걸 의미하는 거라면... 네, 맞습니다."

절박함.

성기사단장이라는 헤르만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도 남들과 같았다.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혹시...? 하는 기대를 품는 그것.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신학 수업은 들어 보셨습니까?"

"아뇨."

"세례는요?"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성회에는 참석하신 적이...."

"아쉽게도...."

"기도는...."

"밥 먹기 전에 한 번씩...."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면 할수록, 헤르만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후.... 이건... 도무지 기대를 할 수가 없군요. 설령 성자의 자질이 있다고 해도, 적합한 교육을 받지 않으면 각성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음....

땀 나네.

사실 나도 내가 성자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진짜 성자였다면, 적어도 어릴 때부터 신비한 일이 일어나거나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듣는 것 같은 일들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반로아의 혈통이 성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셰네릴이 또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헤르만 아저씨! 이분은 진짜 성자님이에요!"

자꾸 품속에서 꼼지락거리길래 내려 줬더니, 대뜸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고 헤르만에게 항변하는 것이었다.

"으... 응?"

당황한 헤르만에게 셰네릴은 또박또박 말했다.

"신님들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신 거라고요! 맞죠, 성자님? 진짜 성자님이죠?"

한 아이의 순수하기까지 한 믿음을 두 눈으로 목도하니...

가슴이 콕콕 쑤셨다.

이젠 그냥 나도 내가 진짜로 성자였으면 좋겠네.

그냥 말없이 셰네릴의 푸석푸석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헤르만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시도는 한번 해 보지요."

"네. 저희로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걸어 봐야만 하는 형편이라서...."

헤르만은 죄송하다는 듯 내게 고개를 숙이고 신전 깊숙한 곳으로 앞장서 안내했다.

그곳에 성물(聖物)이라는 것이 있었다.

천장이 뻥 뚫려 있어 알록달록한 달빛이 고스란히 떨어지는 지점에.

온몸으로 달빛을 맞으며 둥실 떠 있는 성물.

'성스럽게 생겼네.'

생김새는 단순했다.

그저 지름이 2미터 정도 되는 완벽한 구체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고귀한 하얀 색깔을 띠고 있었으며 그 표면은 금속처럼 매끈한 듯도 하고 깃털처럼 부드러운 듯도 하였다.

땅에서 10cm 정도 떠올라서 은은한 서광을 흩뿌리는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알처럼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데 딱히 대단한 힘이 느껴지진 않아.'

어떤 힘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성물이라 불릴 정도로 기적 같은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정말 성물 맞나?

아니면 너무 고차원적인 힘이라서 내가 못 느끼는 건가?

그때 헤르만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소리 같은 게 들리시진 않습니까?"

전혀?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또 낙심한 듯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군요.... 보통 성자분들은 성물에 다가가기만 해도 신어(神語), 그러니까 계시를 듣는 경우가 있어서...."

한 발 한 발,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성자가 아니란 가능성이.

셰네릴은 불안한 듯 내 옷자락을 꼭 쥐었다.

나는 어쩐지 얼굴이 달아올라서 손바닥으로 눈가를 한 번 쓸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성물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손을 올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신의 이름을 부르고 간절한 기도로 성령과 교통하십시오."

"성령.... 검령과 비슷한 겁니까?"

"전혀 다릅니다!"

헤르만은 잠깐 버럭! 했지만,

"...하지만, 처음이시니 그런 느낌으로 접근해 보시는 것도 방법일 수는 있습니다."

곧 체념한 듯 대충 받아들였다.

그냥 한번 해 보기나 해라. 되면 좋고.

이 정도까지 기대감이 내려온 것 같았다.

나도 비슷했다.

이걸 진짜 해야 하나.

셰네릴의 무한한 기대.

내 혈통에 대한 호기심.

이곳 사람들의 간절함.

이런 게 내 등을 떠밀어서 한번 해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엄청 민망했다.

이러고 성자가 아닌 걸로 판명이 나면?

'대충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뻥친 다음, 오러를 화려하게 일으키며 뛰쳐나갈까....'

셰네릴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영 껄끄러웠다.

민망함과 부담을 집어삼키며 나는 성물에 다가갔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묘하게 부드럽고 따뜻한 그것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작게 기도를 읊조렸다.

내가 아는 유일한 신.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시여...."

만약 당신이 정말 있다면, 정말로 있는 거라면, 좀 도와주면 안 됩니까?

그. 시원하게. 너 성자 해라. 함 해 주십쇼. 사람들이 다 바라잖아요.

검령을 부르듯, 내 영혼을 뻗어 성물 깊은 곳을 더듬었다.

그런데,

'...어?'

정말로 무언가가 있었다. 어떤 영혼이 성물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성령?'

확실히 검령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그보다는...

'묘하게 마갑(魔甲)의 갑령과 비슷한 것도 같고....'

근데 또 그것도 아니었다.

갑령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무언가.

검령은 작은 동물 같아서, 내가 섬세하게 다가가서 보듬어야 하는 것이었다.

갑령은 훈련된 반려동물 같아서 손 하면 손, 발 하면 발, 서로 신호를 맞추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성령이라는 것은 쿨쿨 잠이 든 거인과 같았다. 깊숙이 다가가 있는 힘껏 흔들어 깨워야 했다.

'좀... 일어나라!'

힘껏 영혼을 뻗어 흔들었다.

그러자,

우웅-

성물의 표면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속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언어였다.

이게 아까 헤르만이 말한 신어(神語)일가?

근데 왜 나는 이 언어가 이해가 되는 거지?

거기다가 말투가...

묘하게 사무적이고 묘하게 공손한 게....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섬멸천사 때도 이랬던 거 같은데?

[신원을 확인합니다.]

무언가가 내 몸을 훑었다.

이것마저도 섬멸천사 때와 같다.

그때도 그 천사가 나를 이렇게 훑고 그러고 나서....

'잠깐? 그럼 너도 혹시?'

불현듯 스치는 예감과 함께,

[「제로코드」 확인. 휴면상태를 완전 각성 모드로 전환합니다.]

그 단어를 또다시 들을 수 있었다.

'제로코드!'

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성물이 진동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서광을 뿜어냈다.

'힘이...?'

돌연,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수 없는 힘이 벼락처럼 성물을 가득 채웠다.

나는 빠르게 그 힘이 오는 방향을 추적했다.

잠깐?

'...하늘? 하늘에서 힘이 내려오고 있어?'

천상에서 오는 힘이라니.

뭐야.... 진짜 신이야?

성물의 서광이 점점 더 밝아졌다.

아깐 그저 표면만을 은은히 비추던 빛이 이젠 드넓은 신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밝게 타올랐다.

오러도 아니고, 마법도 아닌 어떤 힘.

아니 정확히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사용되고 그 이상의 알 수 없는 원리가 적용된, 고차원적인 힘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 찬란함에 여기저기서 모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분주히 환자들을 돌보던 견습 사제도,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끙끙거리던 환자들도, 모두 몸을 벌떡 일으키고 눈시울을 붉혔다.

"성휘(聖煇)!"

성기사단장 헤르만이 비명처럼 외쳤다.

"오오... 비샨티시여...."

누군가는 털썩 무릎을 꿇었고,

"신께 영광을!!"

어떤 이는 두 손을 부여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누워 있던 부상자들마저도 눈, 가슴, 입을 한 번씩 손바닥으로 덮고서 두 손을 모았다.

13신교의 성호.

내 주변의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히 성호를 그은 후, 검 자루를 왼손으로 눌러 땅을 향하도록 하고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의 종, 기사 헤르만이."

"기사 루이스가."

"기사 헤이네스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외쳤다.

"성자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성자님!!!"

셰네릴이 나를 불렀다.

타오르는 성휘보다도 더 밝은 웃음을 온 얼굴에 함박 머금고.

여전히 온갖 의문점들이 한가득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

성자가 맞긴 맞았나 보다.

#92화 성자

성물 녀석은 공손하게 말했다.

[블레스 시스템 C113 알파. 코드네임 <에아 > 대기 중입니다.]

하지만 눈앞의 성기사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인 듯했다.

"에아?"

[네. 에아. 지시 대기 중입니다.]

성물은 대답을 했고.

"오오! 성령과 소통을 하신다!"

"늘 그 자리에 계시는 하늘의 13주신이시여. 그 이름이...."

성기사들과 견습 사제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감탄하고 갑자기 기도문을 외고....

'난감하네.'

신이 진짜 있는 건지, 이게 신의 성물이 맞는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지만, 일단 저들이 생각하는 것과 실제 '이것'이 좀 다른 존재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시 대기 중입니다.]

전에 섬멸천사도 그러더니, 이것들 나한테 너무 저자세잖아?

성령이라며? 그럼 인간들을 굽어보고, 좀 막 불쌍하게 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나한테 이렇게 순종적일까?

그래서 난감했다.

대놓고 좀 캐묻고 싶은데, 지금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일단은 정중하게 말을 해 봤다.

"성령이시여.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솔직히 될 거라 생각했다. 그때 섬멸천사는 마도 시대의 언어로 말을 걸어도 알아들었으니까. 그런데...

[오류.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의념 통역 기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의 언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녀석.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

조용-

두근거리는 정적.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내 등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내가 성령과 소통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 기대감이 따끔따끔하게 등을 찔렀다.

음....

나도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성기사가 뒤집어지고 견습 사제들이 까무러치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다고.

'근데 말이 통해야...!'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나, 쟤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있잖아?

처음 듣는 언어인데도 완벽하게 이해되고 있다고... 그렇다면?

큼큼.

목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어?"

말했다.

마도 시대 언어가 아니라... 지금 저 성물이 말하고 있는 언어로. 그러니까, 아마도 신의 언어로!

[네. 듣고 있습니다.]

...이게 진짜 되네.

마도 시대에 처음 왔을 때도 이곳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자연스러웠다.

누군가 경탄했다.

"맙소사...!"

숨을 꼭 참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터뜨리며 아주 난리가 났다.

"방언! 방언의 은사라니...!"

"저걸 직접 눈으로 볼 줄이야...!"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 저게 신어(神語)인 걸까?"

셰네릴은 그 한 가운데서, "거봐요! 맞죠? 성자님. 제가 데려왔어요!"하며 으쓱거리고 있었다.

음, 보기 좋네.

그래... 계속 그렇게 경배들 해라. 저 꼬맹이도 좋아하니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뭐.

아무튼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내가 쓰는 신의 언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으니 이젠 좀 편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제로코드가 뭐야?"

저번에 섬멸천사에게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에아 >라는 성물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이번엔 답을 들을 수 있겠지?

[제로코드란... 오류.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당 정보를 검색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카식 레코드가 뭔데 아까부터...."

[아카식 레코드란... 오류.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당 정보를....]

"아 됐고. 그 제로코드라는 게 내 혈통하고 관계가 있는 거야? 눈동자 속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그거."

[오류.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를....]

"때려 쳐, 인마."

안 될 거 같다.

어떻게 된 게 신과 관련된 존재들은 나만 보면 공손하게 구는데... 정작 그 이유인 「제로코드」에 대해서는 답이 나오질 않으니 갑갑했다.

나는 이 <에아 >라는 녀석의 말을 끊어 버리고 다른 걸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실용적인 질문.

"그럼 아는 게 뭔데? 뭘 할 수 있는데?"

그러자 술술 답변이 흘러나왔다.

[저는 상처의 치유, 유독 물질의 해독, 침리(浸理) 현상의 저지 또는 정화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반경 200미터까지 '힐링 필드' 형성, 반경 2km까지 '생츄어리' 구축을 할 수 있으며, 반경 40km 안에서 통신과 스캔 및 에너지 전송이 가능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힐링필드 성능은 어떻고 침리 현상이라는 건 뭔데?"

그렇게 알게 된 에아의 능력은 엄청났다.

힐링 필드 내에서는 어지간한 상처는 모두 회복시킬 수 있고, 생츄어리로는 지금 바깥에서 쏟아지는 침리 현상, 즉 저주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다고 했다.

[현재 보호 지정 코드를 지닌 이들의 요청으로 생츄어리가 약식 기동 중입니다. 정식 발동을 요청하실 경우 현재 기능의 최대 20배까지 강화할 수 있습니다.]

보호 지정 코드를 지닌 이들의 요청.

아마도 결계를 발동하고 죽었다는 사제들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의 20배 출력?

지금 있는 결계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해 보이는데 그것의 20배?

상상이 안 되는 수준의 힘이었다.

"그럼 내가 바쳐야 되는 대가 같은 건 없어? 지난번에 사제들이 힘을 끌어다 쓰다가 다 죽었다던데?"

[오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3일 전 보호 지정 코드를 지닌 자들의 요청에 의해... 오류. 해당시기는 휴면 모드 상태였으므로 오류 1건에 의한 오작동으로 분석됩니다.]

오작동?

쉽게 넘길 수 없는 단어였다.

'그게 잘못 작동한 거라고?'

힐끗 뒤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감동에 가득 차 있는 성직자들의 얼굴. 신은 오류가 없으며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이들.

저들이 '오작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럼. 오작동이 아니면 내가 치러야 되는 대가 같은 게 없어? 위험하지도 않고?"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에아 >는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제들이 죽은 건 성물을 오작동을 시켜서 그랬다는 거잖아?

근데 여기 성직자 중에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사람들이 성물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다는 거네....'

머릿속이 복잡했다.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던 마도 시대를 몇 번이나 오가고 있지만, 오히려 수수께끼가 점점 늘어나는 기분.

모르겠다.

그냥 기억만 해 놓자.

"일단 알겠고. 그럼 마저 설명해 봐. 통신하고 스캔은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에너지 전송이라는 건 뭐야?"

[에너지 전송은... 오류.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를 읽을 수 없습니다. 에너지 전송은, 에너지 전송입니다.]

근데 말이야.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얘... 말하는 게 좀 멍청한 거 같지 않나?'

무슨 벽이랑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섬멸천사 때는 말투가 좀 딱딱해서 그렇지, 대화 자체는 부드럽게 이어졌던 것 같은데... 얘는 뭐, 아카식 레코드인지 뭔지가 없으면 그냥 말을 못 하는 수준인데?

갑갑해서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지.'

어쨌든 대충 이 성물로 뭘 할 수 있는지 파악을 했다.

이젠 그걸 최대한 효율 좋게 사용해야 할 때였다.

그렇다면 성물을 멸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삼가고 존귀하게 여기는 쪽으로, 지금부터 마인드 컨트롤을 해두는 게 좋다.

그래야... 멋있으니까!

전쟁에선 군대의 사기가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난 꺾이고 또 꺾인 사람들의 사기를 한 번에 치솟게 할, 그야말로 사기적인 카드를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보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모습을!

자신 있었다.

이런 건 내 전공이나 다름없으니.

* * *

셰네릴은 성자님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주변은 팔팔 끓는 물처럼 소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기도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다.

신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어주다니.

심지어 가장 소중한 제물은 바치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착한 아이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셰네릴이었다.

지금 이 모든 순간이 이미 기적 같았으니까.

희망을 잃었던 이들이 벌떡 일어나고,

지쳐있던 이들이 열광하는,

보글보글 끓는 감동

보글

보ㄱ...?

"성자님?"

어느덧 주변은 고요해졌다.

아름다운 신어(神語)로 성령과 교통하시던 성자님이 갑자기 말씀이 없어지셨기 때문이었다.

넓은 등이, 아무 말도 없이 고요했다.

"성자님...?"

셰네릴은 다시 한번 성자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현듯 불안해졌다.

두려움과 절망에 푹 절여졌던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랬다.

무언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하다.

왜 성자님은 아무 말이 없는가?

왜 불러도 답이 없는가?

절망 끝에 기적적으로 떠오른 희망이 왜 침묵하고 있지?

뭔가 잘못된 건가?!

"성자님!!!"

어른들은 그 공포를 꾹 참고 기다렸지만, 아직 어린 셰네릴은 무서움을 참을 수 없었다.

있는 힘껏 자신의 성자님을 외쳤고,

마침내 응답이 있었다.

"두려워 말라."

아주 깊은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듯, 나직하면서도 편안함을 주는 목소리가 신전의 작은 그늘 하나하나까지도 어루만졌다.

아,

셰네릴은 탄성을 터뜨렸다.

'두려워 말라.' 이 한마디로 시작하는 성경의 구절이 있었다.

고작 7살인 그녀도 알고 있는 엄청나게 유명한 구절.

"내가 너희를 지키고."

성자님이 한 손을 들었다.

후우우웅-!

동시에 성물이 어마어마한 성휘(聖輝)를 뿜어냈다. 오색찬란한 서광이 하늘로 치솟아 신전을 넘어 이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아!"

셰네릴은 바로 느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조용해졌어!'

자꾸 귀를 간지럽히던 이명이 사라졌다. 슬금슬금 기어오르던 간지러움이 사라졌다. 번뜩이던 눈부심도 사라졌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끝없이 스며들던 저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아아아...."

그걸 느낀 다른 이들도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더 이상 온 세상을 알록달록 비추던 오로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밤하늘을 은은하게 감싼 결계가 사이키델릭문의 현란한 달빛마저 완벽히 잡아먹으며 온 세상을 고요케 했다.

그 조용한 감동 속에서 성자가 또 다른 손을 들었다.

"내가 너희를 낫게 하며."

"...낫게 하며."

이번에는 하나둘 그 구절을 조용히 따라 읊었다.

또다시 몰아치는 찬란한 휘광.

"아아아아-!"

돌연 터져 나오는 감격의 울부짖음.

셰네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앙증맞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낫고 있어...!"

환자들이 회복되고 있었다.

피가 멎지 않던 기사의 상처 위로 새살이 돋았다.

부러진 뼈가 저절로 붙었다.

심지어,

"도, 돌아온다! 손이 다시 돌아온다!"

손이 잘리거나 다리가 뜯겨 나간 자들마저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찬란한 서광이, 손이 있던 자리와 다리가 있던 자리를 채우며 상처 하나 없이 고운 새 손과 새 다리를 빚어냈다.

셰네릴도 느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긴장해서 지내느라 욱신욱신하던 몸이 개운해졌다.

셰네릴은 얼른 성자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그랬다.

찬란한 빛 속에서 성자님이 이제 고개를 천천히 들어 하늘을 우러른다.

'...아!'

이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다음 구절을.

이 중에 가장 어린 셰네릴도 알고 있었다.

다 함께 다음 구절을 따라 읊었다.

"내가."

"내가...!"

"저들을."

"저들을...!"

"두렵게 하리라."

성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스르릉-!

성기사들이,

어느새 부상을 완치하고 일어선 기사들이,

병사들과 심지어 마을 아저씨들까지도,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성자의 기도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 한목소리가 되어 화답했다.

"모두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어느새 성자는 성물을 등지고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 검푸른 빛이 모두의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전투 준비.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두 신전으로 불러 모으라. 그들을 회복시키고 무도한 사교 무리를 심판할 것이다."

"예, 성하(聖下)!"

성자의 권위란 교황과 동등한 것.

성기사와 기사들은 지극한 예를 다해 성자의 명을 받들었다.

'아아....'

그때, 처음으로, 셰네릴은 실감했다.

'여기 계시구나.... 바로 이곳에. 지금 우리와 함께....'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신의 존재를.

7살짜리, 셰네릴은 지금 온몸으로 실감했다.

검푸르게 빛나는 성자님의 머리칼과 눈동자 속에서.

아직 어린 마음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어떤 꿈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93화 전황 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