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와 줘서 고맙네. 출신은? 이름이 뭔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아볼 수 있을까? 자네와 계약하려면 견적을 짜야 하거든."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저택에서만 수련하고 공부하니 이런 데까지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군.'
백작가에선 새로 들어온 다크호스였지만 이 테알 슬럼가에선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경쟁마 교육을 위해 양자로 들어간 자', 한 줄로 끝나는 정보. 더구나 저택 내에서만 주로 생활을 했고, 일부러 분위기와 모습까지 다르게 위장을 했기에 알아볼 리가 없었다.
만약 알아봤다면 알아본 대로 꾸며 낸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모르면 그냥 편하게 적당히 떠벌리면 돼서 오히려 편해진 베오날드였다.
"이름은 없습니다. 그저 사정이 있어서 바람 따라 강 따라 떠도는 몸이니까요. 다만 돈이 되는 일거리가 있다는 소리에 델마인 영지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실력은… 모자라지만 검을 좀 씁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보...."
"이 정도면 될까요?"
순간 바알의 눈앞에서 빛나는 보랏빛 오러가 맺힌 검. 바로 마나 호흡법을 익힌 '기사'의 증거였다.
인간을 넘어선 인간. '하급 기사'라고 해도 인간을 초월한 힘과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족가(家)에서 영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용병계에 진출하면 못해도 작은 그룹의 대장 혹은 대형 길드의 간부로 들어갈 수 있는 레벨이었다.
"기, 기사? 마, 맙소사!"
"아뇨.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저 비극의 산물이지요."
"아… 아아! 그렇군! 그렇군. 사정이 있다는 거군! 이거 참! 기사급이라니! 하하핫! 이보게! 쟝 비서! 이 싸움, 이걸로 우리의 승리가 확정된 거나 다름없어! 하하핫!"
"돈만 제대로 지불하신다면 '검'이 되어 드리지요."
"기사님을 상대로 장난칠 생각은 없네! 보수 이야기부터 하지."
기사급 전력이 들어온 것은 이 불안한 상황에서 최고의 행운이었다. 베오날드의 노림수가 적중한 듯 바알은 극진히 그를 모시면서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다.
그리고 계약금부터가 '금화' 단위로 엄청난 액수인 데다, 앞으로의 전황 및 상황에 따라서 추가적인 보수까지 든든하게 계약을 맺어 두었다.
'다른 곳에 소문이 퍼지면 말렉 그놈이 더 큰 대가로 계약을 덮어 버릴 수 있으니… 든든하게 대접해 놔야지.'
'무명(無名)과 떠돌이는 이게 좋지. 어디 속하는 약점이 없는 만큼 순수하게 대가로만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야.'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먹고 튀는 건데… 하나 기사급 전력이 합류했다는 소문만 돌아도 전황은 달라진다!'
실제 영주 간의 전쟁도 아니고, 일개 슬럼가 양아치들 싸움에 기사급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면 상대는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바알은 그 점을 노리고 베오날드에게 큰 지출을 감안한 것이다.
베오날드 또한 그의 생각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확실하게 바알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를 받아 챙기고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 경계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이 건물과 지켜야 할 영역을 안내 받아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전쟁을 하기 전에 주변을 살피는 건 당연하니까요. 물론 업무는 제 호위입니다. 아셨죠? 기사님."
"기사라기엔 부끄러운 몸인데.... 아무튼 고용주님께서 칭하시는 게 편하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안내자를 바로 보내 드리죠."
베오날드는 그렇게 미소 지으면서 바알 사장의 방을 나섰고, 바알은 비서를 시켜서 곧바로 그에게 안내자를 붙여 주고는 비서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 왔냐? 안내역은 잘 붙였겠지?"
"유렐과 제시, 가룰을 붙였습니다, 사장님."
"네가 보기엔 아까 그 방랑 기사 청년, 어때 보이나?"
"일단 범상한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화는 그렇다 쳐도 행동거지가 정말 잘 단련된 칼날 같았습니다. 한순간도 보폭이 흐트러지거나, 대접한 차를 마실 때의 예의범절을 비롯한 기품이 흐트러지지 않았지요."
"그런가?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았는데… 하긴 귀족가 출신인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
귀족가 출신인 비서 쟝의 시선으로 베오날드의 평가를 들은 바알은 일단은 안심했다.
행동거지와 기품으로 보아선 양심 없이 날먹하고 튈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걸 보장받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우리가 기사급 영입했다는 거 여기저기 뿌리고, 다크티스에도 알려. 아마 그쪽도 우리랑 같이 움직일 거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그는 아니었기에 사람을 붙이는 것을 유지하면서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소식은 곧바로 아그라샌더 그룹의 두목인 말렉에게 전해졌다.
한참 돈 써 가며 용병들을 다수 고용하고 전쟁 준비에 만반을 갖추었는데, 바알라스 쪽에 기사급 전력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그를 당혹시킬 만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기사'가 왜 그 새끼를 돕는 건데? 귀족 새끼들은 그렇게 굴러다니는 걸 방치해? 당장 영입하든가, 영지를 내려서라도 데려오려고 하는 게 정상이지!"
"그, 그게… 아마 어느 귀족가의 사생아라든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모시던 영주가 죽고 떠도는 기사라든지.... 아예 가능성 없는 존재도 아니기도 하고… 요새 전란이 좀 심합니까?"
"젠장! 그거야 그렇지."
수년간 계속해서 제국에서 일어나는 분쟁 때문에 백작가에서 출병하는 일이 잦았던 것을 보았을 정도였다.
이런 세계의 상황이었기에 떠돌이 기사 한둘쯤 생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왜 꼭 이 분쟁에서, 그것도 자신들 쪽에 걸리지 않고 경쟁하려는 바알라스 그룹에 붙었냐는 게 문제였다.
"그야… 썩어도 기사라고, 저희처럼 마약을 파는 조직에 붙는 건 좀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럼 저 술팔이, 여자팔이 새끼는 정상이냐?"
"창관이나 술집은 꼬추 달려 있으면 당연히 가는 곳이죠, 두목."
"염병할!"
콰앙! 쩌적!
분을 이기지 못한 말렉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그래도 마약 조직의 두목답게 용력이 있어서인지 나무로 된 책상은 반 토막이 나며 부서졌다.
지금 상황이 매우 더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대에 기사급이 있다고 하면 지금 고용한 용병들이 다들 제대로 싸워 줄 리가 없었다.
다들 칼질해서 돈 벌려고 이 일을 하는 거지, 모가지 날아가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두목… 다크티스에서 마침 회담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일단 서로 칼부림부터 하지 말고 모여서 오해부터 풀자고 말이죠."
"딱 봐도 이거 대장급만 모여서 암살하려는 거 아니야?"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데려오고 싶은 만큼 다 데려오라고 하는데요?"
"즉, 회담 결렬이면 그냥 칼부림을 하겠다는 거군. 끄으으으응...."
말렉은 상대의 수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바알라스에서 '기사급'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림과 동시에 다크티스에서 이런 연락이 왔다는 건 둘이 함께 손잡고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움직임이었다.
여차하면 2 대 1로 싸우겠다는 의미까지 내포한 좋은 수였다.
"두목, 어떻게 하죠? 응하실 겁니까?"
"응해도 별로 안 좋은데… 하지만 응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이미 기사급을 영입했다고 잘난 체하는 저 바알라스의 말에 휘둘려야 해. 그냥 블러핑이면 좋겠지만, 아니면...."
"아니면 우리도 기사급을 영입했다고 블러핑을 치는 건?"
"지금 와서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야? 이미 '회담'이라는 카드를 던진 시점에서 그건 불가능해. 우리도 기사급을 진짜 데려오지 않는 이상 무리다. 저 '마지막 회담'에 데려가야 할 테니 말이야."
말렉은 역시 상대가 자신들의 라이벌이라 생각하며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거액을 들여서 용병들과 계약까지 했는데 그냥 물러날 순 없었지만, 상대에 '기사급'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이미 용병들의 사기가 내려가고, 또 싸움을 할 수 없어질 것 같은 건 문제였다.
"…어쩌겠습니까?"
"일단 회담 잡아. 그리고 그 기사급이라는 놈에 대한 정보를 얻어 와서 접촉해 봐. 요점은 그놈만 우리 편으로 돌리면 승산이 다시 생긴다는 거니까!"
"아, 예!"
말렉은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무엇인지 빠르게 판단했고, 그 원인만 제거하면 판도는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사'. 이 상황 속 힘의 밸런스를 어그러뜨린 원인인 그놈만 잡아 놓으면 결국 승기는 다시 돌아오기에 곧바로 그를 노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 회담은 승낙하되 기간은 나중으로 잡는 걸로 결정짓는다.
그렇게 결국 모든 혜택은 이 상황을 꾸민 베오날드에게 돌아왔다.
바알라스 조직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동시에 몰래 들어온 아그라샌더 그룹의 제안을 슬쩍슬쩍 조율하면서 그쪽에서도 돈을 받았고, 자신의 무력을 테스트하려는 건지 보내온 다크티스의 암살자를 혼내 주자 이젠 거기까지 수작을 부린답시고 알랑방귀를 뀌는 이 상황이 너무나 행복한 그였다.
"그,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역시… 세상은 돈이 최고니 말이야."
"하하, 역시 그렇죠."
'연구 자금도 돈, 영지 운영도 돈, 군사도 돈,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지. 아무튼 상황이 아주 즐겁게 흘러가는군.'
베오날드는 바알라스 조직에서 제공해 준 와인을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테알 슬럼가. 어떤 악당들이 있나 싶었지만 결국 전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휘두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또 아그라샌더 그룹을 움직이기 위해선 아무나 못하는 특수한 기술을 가져야 했지만 말이다.
'연금술 배우길 정말 잘했다니까~ 평생을 넘어서 후생까지 우려먹는 기술이네. 기연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해야 하나?'
베오날드는 자신이 익힌 연금술의 유용함에 한 번 더 감탄했다.
연금술. 지금의 베오날드에게 있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중요한 학문으로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로 익히려고 한 건 아니고, 본래라면 익힐 일도 없던 기술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우리를 겁주려고 데려간 감옥탑에서 설마 기연을 만날 줄은....'
그와 연금술의 인연은 정말 의도치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가문의 대죄인이자, 가문을 모욕한 자들을 가둔 감옥탑에서 연금술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 그 빵을 내게… 주, 주십시오, 도련님… 그러면 당신에게 지혜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그걸 안 줬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감옥탑 한구석에 갇혀서 삐쩍 마른 채 죽어 가던 한 연금술사에게 도시락으로 챙겨 간 빵 조각을 주고 연금술의 기초 중의 기초를 배운 것이 시작. 그것이 베오날드의 연금술사로서의 첫 페이지가 열린 순간이었다.
이렇게 연금술로 득을 볼 때마다 늘 그때 생각이 안 날 수 없었던 베오날드는 추억을 되씹으며 와인 잔을 계속해서 기울였다.
[37화]
'아무튼 역시 이런 건 안에서 깨부수는 게 백번 편하지. 외부의 힘으로 부수려고 하니까 그동안 실패한 거다.'
기사들이 다수 있는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해결 못한 이유를 곧바로 떠올리는 베오날드였다.
이런 조직은 평소엔 서로를 멸망시키려고 싸우더라도 이 '테알 슬럼가'라고 하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선 서로 뭉치고 협력할 수 있는 놈들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단순히 무력으로 테알 슬럼가를 모조리 쓸어버린다고 해도 도망친 놈들로 인해 새로운 테알 슬럼가가 생길 뿐이고, 조직 단위로 쓸어서 없애면 그 자리에 다른 조직들이 새로이 생겨날 뿐이다.
이 캘러메인 영지라는 시장과 도시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걸 막으려면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 압도적인 행정력과 질서 유지 능력을 보유하든가, 아니면 이렇게 내분으로 폭파시킨 다음 바지 사장을 만들어서 휘두르는 방법뿐이었다.
'아무튼 드디어 결말이 다가오는군. 확실한 마무리까지 긴장 풀지 말고 일해 볼까?'
"어디로 가십니까?"
"그야~ 순찰 한번 해 보는 거지. 먹고 마시기만 하면 미안하잖아요. 어떤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베오날드는 사실상 감시역인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을 데리고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순찰이 아니라, 이 분쟁을 더 크게 키울 마지막 폭탄을 놓기 위함이었다.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이 따라붙긴 하지만 그래 봐야 무지렁이들. 베오날드의 수작을 아무도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음, 저기가 바알라스의 창고군."
"예. 심장이나 다름없기에 가장 엄격히 관리되고 있는 곳입니다. 상시 가장 많은 규모의 조직원과 마법 결계까지 설치되어 있지요. 각종 물건에서 수금한 돈들까지 중요한 게 전부 보관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으쌰! 야! 힘 안 주냐? 빨랑 가! 옮길 게 한둘이 아니야!"
"예!"
마침 순찰하는 그들의 옆으로 수레를 이용해서 돈과 무기, 주류를 옮기는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이 보였다.
아그라샌더 그룹과의 전쟁 전인 만큼 중요한 물자와 자금을 더 안전한 곳에 모아 두는 건 상식. 베오날드는 그 수레들의 행렬을 보다가 슬쩍 아래에 작은 주머니 3개를 떨어뜨렸다.
"아, 이봐, 거기~ 이거 수레에서 떨어뜨린 것 같은데? 무게를 보니 돈이 든 것 같은데."
"네? 으악! 크, 큰일 날 뻔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짜식아! 일 제대로 안 해? 이게 다 우리 조직 운영비인데!"
베오날드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은 아무 의심 없이 베오날드에게서 그것을 받아서 수레에 실었다.
그리고 뒤에서 감시하는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도리어 베오날드가 떨어뜨린 주머니를 진짜 떨어뜨린 걸로 착각하고는 그 수레를 끈 부하를 질책했다.
그것을 보며 베오날드는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면서 계속해서 순찰을 연기하며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
며칠 뒤, 테알 슬럼가 중앙 골목.
드디어 세 조직의 회담이 성사되었고, 회담 장소는 이 슬럼가에서 그나마 넓은 장소가 있는 중앙 골목으로 정해졌다.
3개의 조직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용병, 거기에 구경을 나온 슬럼가 식구들까지 합쳐서 모인 인파의 총 숫자는 약 1천 명가량. 그나마 넓다곤 하지만 이 골목은 사람들로 가득 찬 지 오래였고, 주변 건물에도 가득 차서 마치 미로에 쥐들을 잔뜩 풀어 둔 것처럼 사방이 북새통이었다.
"자, 조직 대표들은 다 모인 것 같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나 들어 보자고~ 바알, 그리고 12345 친구들~"
"애초에 이 전쟁을 시작하려고 한 건 자네 아닌가? 오히려 이야기는 우리가 들어야지."
"하! 뻔뻔스럽긴! 남의 밥줄을 끊으려고 작정한 게 누군데! 바알, 이 양아치 새끼야! 술장사, 여자 장사로 그렇게 벌었으면 된 거지! 남의 밥상까지 노려?"
"무슨 헛소리냐? 약팔이 새끼들아, 너네가 돈 버는 꼴이 꼴받긴 했지만 우리가 하루아침에 마약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냐?"
"지랄하고 있네! 우리 신제품이랑 연금술사 어딨어?"
결국엔 이자들 모두 근본은 범죄자들이면서 무법자. 회담 자리라곤 할 수 없는 저열한 어휘와 표현으로 서로에 대한 비방을 하기 시작하는 말렉과 바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크티스 쪽은 그냥 입을 닫은 채로 말다툼을 하는 그들을 지켜보았고, 바알 쪽 호위로 서 있던 베오날드는 이 슬럼가 양아치들의 품위와 지성 없는 대화에 검을 휘두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냈다.
'후우~ 내가 참는다. 이건 회담이 아니라 사실상 그냥 패싸움 전에 하는 양아치들 기 싸움이네.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지.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내가 손써 놓은 게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는데?'
회담 중에 바알라스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창고와 여러 곳의 확인을 요구하는 흐름으로 갈 것을 예상해서 바알라스 조직의 창고에 자신이 만든 환상의 꽃 마약을 슬쩍 넣어 두었는데, 이런 막장 싸움으로 가니 그런 수고가 허무하게 끝날 것 같았다.
"당장 우리 연금술사 내놔!"
"우리한테 없다고! 멍청한 약팔이 새끼들아! 그걸 왜 가져가?"
"아니면 제거해서 강에 파묻었냐?"
"대체 무슨 약을 만들었기에 그 지X을 하는 건데? 약팔이 자식아. 약이 다 그게 그거 아니냐?"
"뭐야? 너 지금 우리 업계 모욕했냐? 짜샤? 진짜 약 맛(?) 좀 볼래?"
"약이 그럼 그게 그거지."
어린아이들 말다툼 레벨까지 전락한 대화에 베오날드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싸움을 준비했다.
하나 그 순간, 말렉이 갑자기 노예를 끌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품에서 가루가 든 주머니를 꺼내 곧바로 노예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잠시 뒤, 노예는 발작하면서 마약, 환상의 꽃의 쾌락에 절규하기 시작했다.
"끼요오옷! 흐에헤헤헤으헤헤! 으아… 어어어어!"
"그게 그거? 이게 그게 그거로 보이냐?"
"…저, 저게 뭐야?"
"맙소사...."
바알은 물론이고, 이 촌스러운 싸움을 지켜보던 다크티스의 간부들도 경악했다.
말렉의 충격적인 행동도 행동이었지만, 이 캘러메인 영지에서 범죄 조직으로 쭉 군림하던 그들에게도 저 하얀 가루로 된 마약으로 인해 일어난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오날드는 좌중들의 그런 반응을 보면서 500년간 후퇴한 문명과 결국 거창하게 이름 지었어도 시골 양아치는 시골 양아치들이라는 한계를 또 한 번 느꼈다.
"자, 봤지? 이 혁신적인 신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가 왜 중요한 건지? 단순히 나른함과 편안함, 무기력함과 중독성이 있던 그 풀때기에 비하면 이건 신이 내린 약이라고!"
"아니, 그런 위험한 걸 여기다 유통시키려 했다고?"
"희석해서 쓰면 괜찮아! 하하하하핫! 그리고 술장사하는 놈 입에서 그따위 말이 나오니 우습네! 아무튼 우리 연금술사 어딨어? 어딨냐고!"
"없다고! 미친 약팔이 새끼야! 이 반응 보면 모르겠냐? 그 정도일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알까 보냐! 아무튼 퉷! 어디 한바탕해 보자고! 얘들아! 족쳐!"
결국 '회담'이라고 모여 놓고 서로 신경전만 벌이다가 발끈한 말렉의 말과 함께 본격적으로 테알 슬럼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좁은 골목과 길거리 각지에서 용병과 각 조직원, 불량배들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조직원들을 검으로 베어 넘기면서 일단 밥값을 하는 척을 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무, 무슨! 컥!"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기인 줄 알고 검을 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갑자기 궤도를 바꾸는 검격에 목이 그대로 달아나는 용병이었다.
검째로 벨 수 있었지만, 가능한 한 힘을 아끼고자 베오날드는 달려드는 자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며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암기 또한 방어해 냈다.
"젠장! 저 막장 약팔이 새끼! 기어이 일을 저지르는구나! 가끔 보면 저 새끼도 마약 하는 것 같다니까?"
"약팔이들은 보통 약을 안 합니다만?"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기사님! 자, 방어는 제 부하들에게 맡기고! 기사님은 가서 저 말렉의 목을 따 와 주십시오. 저놈의 목이 있어야 이 싸움이 끝납니다!"
"죽어! 죽어!"
"으아아아! 와아아!"
이 골목부터 시작해서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전. 일단 전투 상황은 역시 전문적으로 칼밥을 먹고 무장도 탄탄한 용병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돈을 들여 그들을 많이 고용한 아그라샌더 그룹이 전장에서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
테알 슬럼가에서 일하는 불량배들은 대부분 허세 부리고, 약자만 괴롭히던 놈들이며 무장에 투자를 잘 안 하는 놈들이기에 자신들이 상대가 안 되는 걸 알고 같은 다른 조직의 불량배를 공격하거나 아니면 돌이나 활 같은 원거리 무기로 상대하고 있었다.
"크억!"
"젠장! 다크니스 자식들!"
"다들 챙겨 온 해독약 먹어!"
"제길! 대체 어떻게 조합한 독이기에!"
하나 본래라면 아그라샌더 그룹의 압도적인 전력에 모조리 쓰레기처럼 쓸려 나가야 했지만, 그나마 분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크티스의 협력 덕분이었다.
각종 암기와 독, 암살과 도둑질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들 조직원들이 곳곳에서 지원해 준 덕분에 자기 목숨 귀한 줄 아는 용병들은 방패를 들고서 진을 짜고 전진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의 꽃은… 기사지.'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이식(二式)-블랙 맘바'.
보랏빛 오러를 두르고 질주한 베오날드는 검을 크게 들어 마음 가는 대로 휘둘렀다.
남부 정글에 서식하는, 시체까지 공격하는 성격이 더러운 검은 뱀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이 검. 귀족의 기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검법들은 모두 섬세하고 예리한 반면 유일하게 난폭한 검술이었다.
하나 이런 난전에선 최적의 검술로, 오러를 두른 베오날드의 검에 용병들의 방진은 마치 두부처럼 손쉽게 무너지며 그의 검에 닿는 모든 것이 분쇄기에 갈리는 고기처럼 자비 없이 갈려 나갔다.
"지, 진짜 기사급?"
"말도 안 돼! 기사급이 여기 왜 있어?"
"허세 아니고 진짜였어? 말렉 개자식아!"
전열의 용병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갈려 나가고, 보랏빛 오러와 함께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흉광을 본 후열의 용병들은 익히 전장에서 본 '기사급' 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면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바닥에 시체만 늘리는 일이라는 걸 아는 그들은 각자 무기도 버리고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야 이 새끼들아! 이게 뭐 하는 거야?"
"기사급을 어떻게 이기냐? 나중에 위약금 배상할게!"
"심지어 저거 하급도 아니야! 중급은 족히 될 역량이야! 말렉 개새끼야!"
"바알 새끼, 어디서 저런 걸!"
'제, 젠장할! 아니! 망할 자식! 내가 돈을 얼마나 줬는데? 우리 용병들을 이렇게 처치하며 온다고?'
말렉은 그래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베오날드에게 나름 대가를 지불했는데, 상대는 그런 것을 잊었는지 미친 듯이 돌파해 오고 있었고, 그것을 보며 말렉은 분을 삭였다.
기사급의 등장이 진실로 밝혀지면서 전황은 다시 뒤집어졌다.
전쟁에 이골이 난 용병들도 도망을 치는 판국에 일개 불량배들은 보랏빛 오러를 보자마자 이미 공포에 질려서 도망친 뒤였다.
"제, 젠장할! 네놈! 우리도 섭섭지 않게 대가를 지불했는데...! 돈만 먹고 튄 거냐?"
그래도 두목이라고 체면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사급을 상대로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인식한 것일까?
말렉은 베오날드를 향해 비겁하다고 책망했지만 그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새삼~ 마약팔이 새끼들에게 의리를 왜 지켜? 너희는 사람을 마약에 중독시켜서 골수까지 빨아먹는 주제에, 그렇게 당하는 게 억울하나?"
"망할 새끼."
"그래도 뭐, 너는 내 계획대로 아주 잘 움직여 줬어. 고맙다는 이야기 정도는 해 두지."
"뭐라...."
오늘 처음 직접 만난 기사의 알 수 없는 말에 말렉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질문을 하려고 하지만, 이미 보랏빛 오러가 그의 눈앞을 지나간 지 오래였다.
'죽음'의 감각을 느끼는 동시에 말렉의 눈동자엔 베오날드의 손에 살짝 들려 있는… 변색된 피부 가죽이 비춰졌고, 죽어 가는 그 순간에야 말렉은 자신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38화]
'뭐, 아주 모르고 죽으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지.'
씨익 웃은 베오날드는 땅에 구르는 말렉의 목을 챙겨 돌아갔다.
이미 전세는 다 기울어져서 바알라스의 조직원들이 아그라샌더 그룹의 인간들을 포로로 잡거나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알라스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다가오는 베오날드를 보며 기뻐했다.
"오오! 역시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용이군! 말렉의 목! 하하하하! 역시 굉장해. 돈 들인 보람이 있군."
"받은 만큼은 일해야 하는 법이죠."
"하하핫, 이걸로 이제 이 테알 슬럼가는 내 것이나 다름없군. 흐...."
푹!
흥겨워하며 말렉의 목을 보고 웃던 바알은 갑자기 가슴에서 후끈한 통증이 일어나자 깜짝 놀랐다.
베오날드의 검이 바알의 심장을 찌른 것이었다.
놀라움과 죽음의 공포를 동시에 느끼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기 위해 베오날드를 노려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데… 당신 목을 비싸게 쳐준다는 곳이 있어서 말이죠."
"너… 이런...."
"부하들까지 포함해서~"
베오날드는 바알이 죽는 것조차도 바라보지 않고, 그대로 보랏빛 잔상을 남긴 채로 달려가 놀라는 바알의 측근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미 눈치를 챈 몇몇 놈들이 흩어져서 도망쳤지만, 그들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다크티스의 암살자와 도적들에 의해 마저 제압됐다.
다크티스의 간부들은 바알의 목과 말렉의 목을 거두고는 베오날드에게 와서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사님."
"난 대가만 받으면 그만이다."
"예. 바알라스 조직과 아그라샌더 그룹의 재산 절반 확실히 정산해서 보내라고 하신 곳에 그 기간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렇다. 사실 베오날드가 손을 잡은 것은 바알라스와 아그라샌더뿐만이 아니라, 다크티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 그룹의 성향이나 사상을 살펴본 결과 다크티스가 이곳 테알 슬럼가의 주인이 되는 게 가장 조용할 거라고 판단해서 그들을 밀어준 것이었다.
바알라스 조직이 마약 산업까지 손에 쥘 경우나 아그라샌더가 바알라스 조직의 산업을 그대로 물려받으면 아무 변화가 없지만, 태생이 다른 도적&암살자 길드인 다크티스가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번 싸움으로 깔린 시체들의 숫자를 대략 파악해 보면 전면전으로 인해 상당한 숫자의 불량배들이 죽었기에 당분간 테알 슬럼가는 예전만 한 위세를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다크티스가 지배 체제를 굳히는 시간과 또 여기저기서 불량배들이 흘러들어 오려면 족히 수년은 더 걸릴 테니 말이다.
'게다가 또… 저 다섯 간부진이 지배하는 형태를 가진 만큼 언제 또 분열하고 서로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이게 가장 이상적이지.'
암살자와 도적 길드의 협력 구조. 지배 체제를 굳히고 나면 이제 슬슬 다섯 간부진들 각자가 이 테알 슬럼가의 유일한 주인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것을 위해 서로 싸운다면 최적의 정리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 견제하면서 지낼 테니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장 깔끔하게 이 테알 슬럼가의 힘을 줄이고 정리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덤으로 이 선택지가 바로 다른 조직들보다 베오날드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니, 다른 것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뭐,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 정리는 끝까지 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테알 슬럼가에 큰 혼돈을 불러와 이익을 챙긴 베오날드는 다크티스가 정리해서 가져올 바알라스와 아그라샌더 그룹의 재산들을 거둘 준비를 위해 곧바로 움직였다.
이 정리하는 작업까지 완벽하게 끝내야 테알 슬럼가의 평정은 끝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
며칠 뒤, 델마인 남작 영지 인근 숲.
베오날드는 우선 둘 중 정리되는 쪽의 재산을 오늘까지 먼저 이곳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었다.
혹시나 자신의 말을 거역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기사급의 힘을 봐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력뿐만 아니라 음습한 계략을 꾸미는 베오날드의 능력을 눈치채서인지, 다크티스 조직은 당연히 베오날드의 명에 거역하지 않고 수레와 마차 여러 대에 금화와 예술품을 포함한 각종 재보를 실어서 가지고 왔다.
"그… 말과 수레의 비용도… 재산에 포함되었습니다."
"음, 좋아. 그럼 가 보도록. 그리고 저기 나무 뒤에 있는 친구들도 같이 돌아가라고 말해 주게. 안 그러면 죽일 것 같거든?"
"히, 히이익! 예! 아, 알겠습니다."
"나머지도 꼭 약속한 날에 맞춰서 잘 배달해 주게."
그래도 그냥 주기는 아까웠는지 추적하는 인원을 붙인 것을 눈치챈 베오날드가 협박을 하자, 그제야 완벽하게 물러나는 다크티스의 조직원들이었다.
베오날드는 그들이 멀리 갔을 시간이 되어서야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잠시 후 델마인 영지 쪽에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바로 델마인 남작의 병사와 기사들로, 그들은 사전에 베오날드와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앞서 온 말을 탄 기사는 베오날드의 옆에 놓인 수레를 보자 깜짝 놀라서 말했다.
"세상에, 이, 이게 사실이었습니까? 도련님?"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나? 자~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빨리 옮기게."
"아, 알겠습니다! 다들 빨리 와서 이것들을 성으로 옮겨라!"
"예!"
그리고 기사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곧장 수레와 마차에 탑승해서 그것들을 델마인 남작의 영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것도 베오날드의 계획으로, 어차피 이 막대한 재보를 자신이 보관하거나 옮길 장소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으니 정치적으로라도 써먹고자 델마인 남작에게 절반을 넘기자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나른 막대한 재보와 함께 델마인 남작의 저택에 들어온 베오날드는 그와 독대하게 되었다.
"하하하, 베오날드 도련님의 선물, 정말 잘 받았습니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엄연히 적대 파벌이지만 그래도 엄청난 보물을 선물로 준 마당이니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귀한 복덩이를 가져다준 손님을 푸대접할 이유가 없는 델마인 남작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베오날드에게 최고급 차와 시녀까지 붙여 주면서 어떻게 이 막대한 재보를 얻었는지 묻기 시작했다.
"늘 그렇지만 영지라는 걸 유지하는 데 돈은 무한정 들어가니 말이죠. 하하하핫. 그나저나 어디서 이만큼의 재보를...?"
"백작님께서 테알 슬럼가의 일을 좀 보라고 하셔서 말이죠. 거기 분쟁에 살짝 끼어들어서 얻었습니다. 후우~ 하지만 결국 일은 실패하고 말았죠."
"아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걸 저희에게.... 그래도 백작가에 바쳤다면 나쁜 평은 듣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델마인 남작의 말대로 백작이 내려 준 임무에 실패했을지언정 저만한 재보를 백작가에 모두 바쳤다면 베오날드의 평가는 오히려 올라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히려 손해만 끼친 저 테알 슬럼가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어서 영지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으니 이건 누구나가 인정할 만한 큰 공훈이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고개를 저으면서 델마인 남작의 의견을 부정했다.
"그래 봐야 고작 칭찬 몇 마디가 다이고, 제 처지는 더 위험해질 뿐이겠죠. 그럴 바엔 차라리 이렇게 델마인 남작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오해를 푸는 데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라? 하하, 도련님과 저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나요?"
베오날드의 말에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하는 델마인 남작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모두 열심히 서로를 쳐다보면서 각자의 이득을 계산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귀족과 귀족의 시야.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자신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는 말입니다, 남작님. 제 분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절반은 천한 용병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가주 대리님은 상관 안 하시지만 백작님을 비롯한 다른 귀족분들은 용납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크, 크흠! 그… 뭐, 아니라곤 말씀 못 드리겠군요."
"솔직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결국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는 랄트 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고 있으니까요."
델마인 남작의 눈이 커질 정도로 의외인 이야기가 베오날드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델마인 남작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말에는 의도가 깔려 있을 확률이 높고, 또 귀족이라면 마음에 없는 말도 진실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으니 말이다.
"호오? 진심이십니까? 하면 왜 가주 대리님의 양자 제안을 승낙하신 건지?"
"그야 랄트 도련님이 지금 이대로 후계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작님."
"흠~ 글쎄요. 물론 지금은 좀 부족할지는 몰라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 안 하는 건 무례한 게 아닐는지요."
"무능하면 물론 남작님에게도 좋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생충도 숙주가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지금 저보고 기생충이라고 한 겁니까? 도련님."
의도적으로 델마인 남작을 멸시하는 호칭을 섞어서 도발한 베오날드. 그 도발에 넘어간 델마인 남작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면서 베오날드를 강하게 노려봤지만, 베오날드는 능구렁이처럼 머리를 숙여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 보니 말이죠. 그러면 역으로 물어볼까요? 캘러메인 백작가가 갑자기 몰락하면 델마인 남작님이 그 아래의 다른 귀족들과 세력을 모두 규합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으으으음!"
무례한 베오날드의 말에 화낼 것처럼 위협하긴 했지만, 그다음 곧장 나온 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델마인 남작이었다.
그래, 캘러메인 백작 아래에서 최대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파벌 전체를 마음껏 휘두르는 입장은 아니었다.
당장 메이라 부인과 그녀의 본가만 해도 자신과 같은 파벌이지만 상황에 따라선 자신이 후달릴 때도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메이라 부인과 그녀의 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죠. 그녀의 본가는 분명 델마인 남작님보단 한 수 아래라 볼 수 있지만, 메이라 부인에겐 '정통'의 '혈통'인 랄트 도련님이 있습니다. 메이라 부인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일부를 손에 쥘 자격이 있지요."
"…고로 나는 안 되지만, 메이라 부인은 캘러메인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순탄하진 않겠지만, 결국 승리하는 건 그녀일 겁니다. 그 정통성을 쥐고 있는 이상, 상급 기사 말데로브 경도 그녀를 따를 테니까요. 그러면 이길 수 없겠지요?"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기껏해야 용병의 천한 피를 받은 15살짜리...! 아니지, 이게 갓 성인이 된 시골 출신 도련님이라고?'
흥분한 가슴을 진정시킨 델마인 남작은 문득 자신이 현재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작 15살짜리 시골 출신 소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나 눈앞에서 기품 있게 찻잔을 들어 마시는 소년은 어디를 보아도 품격이 느껴지는 한 사람의 '귀족'이었다.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어. 베오날드 도련님이 15살이라는걸!'
자신은 15살 때 어땠던가? 가주였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어설픈 행동들을 하나하나 고쳐 가던 것과는 천지 차이로, 눈앞의 이 소년은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해 나가며 의견을 조율하는 수준이었다.
같은 나이 때, 자신은 영지 내의 상인과 인부들에게도 큰소리치기 힘들었는데!
오싹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는 그에게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아무튼 제 목적은 하나입니다. 캘러메인 백작가에 큰 혼란이 생기지 않는 평화로운 미래. 그래야만 제 친부모님들도 무사하실 테니까요. 그래서 랄트 도련님이 메이라 부인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또 그분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힘을 혼자 휘두르지 않게 견제할 수 있는 힘을 누군가가 가지는 것. 델마인 남작님이 바로 그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 그렇군. 하지만 도련님이 가져온 재화로는 그 엄청난 계획을 이루긴 힘들 텐데요."
"당연히 남작님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상대의 가문이 2개이니까요. 캘러메인은 그래도 적어도 백작가이고, 중앙에 연줄까지 있습니다. 또 따르는 집안도 많고 말이죠. 그러니 밸런스를 맞추려면 젤커드 자작과 손을 잡아야겠죠."
"젤커드 자작이라고요?"
"예."
베오날드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발언에 델마인 남작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젤커드 자작. 자신과는 다른 상대 파벌의 수장.
집안은 별 볼 일 없으면서도 '기사'이자 지휘관이라는 것만으로 작위를 얻은 자로, 순수 캘러메인 영지의 수호자가 말데로브 경이라면 젤커드 경은 캘러메인 백작가에 속한 군벌에 가까운 세력이었다.
아무튼 결국 이 난세에 '검' 하나만으로 작위를 얻은 자이며 귀족으로서의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델마인 남작 같은 전통 귀족들은 싫어하는 이였는데, 갑자기 베오날드의 입에서 그와 손잡자는 이야기가 나오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39화]
"물론 불쾌한 소리인 건 압니다, 남작님. 하지만 들어 보십시오. 결국 지금은 난세입니다. 강력한 검과 말발굽 앞에 오랜 전통과 긍지, 명예가 무너지는 시대이고, 너도나도 왕이니 황제니 떠드는 시대입니다. 볼레아 왕국, 고작해야 북방 야만인들과 싸우던 촌구석 야만인들 주제에 자기가 왕이라고 떠들질 않나, 다이나 왕국은 마탑에 열등감을 가져서 금지된 실험이나 하던 놈들이 왕이니 뭐니 하고 있고… 푸하하하!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 그런가요?"
"그중에서도 특히 어처구니없는 건 '한 제국'이지요. 500년 전만 해도 부족 단위로 놀던 남쪽의 소수 민족이었는데… 제국이라니, 참~ 어처구니없지만, 그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남작님."
"그, 그래서? 요점이 뭔가요?"
"그러니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험악한 관계 정도는 개선해 두는 게 좋다는 겁니다. 예, 젤커드 자작과 말입니다. 또 랄트 도련님의 정신도 성장시켜서 모친의 영향이 아닌 자신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주인이라는 것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장래에 다가올 혼돈을 막고자 하는 것이지요. 후우~"
긴 이야기를 마친 베오날드는 숨을 몰아쉬면서 차를 들이켰다.
그동안 델마인 남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즉, 요점은 베오날드의 구상에 따라서 랄트의 성장을 돕는 것을 도와주는 게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할 수 있는 일이며, 추가로 젤커드 자작과 관계도 우호적으로 돌리는 게 좋다는 장대한 브리핑이었다.
"두서없이 이야기해 버렸군요. 아무튼 나쁜 제안은 아니니 생각해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저는… 같은 제안을 젤커드 자작에게 하러 가야 해서~"
"예, 도련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떠난 뒤에, 좀 더 깊게 생각하기 위해서 정보를 모으던 델마인 남작은 상황을 파악하면 할수록 베오날드가 얼마나 대단한 수를 두었는지를 알게 되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테알 슬럼가의 문제는… 캘러메인 백작님이 내리신 임무. 그것을 해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막대한 재보를 가져온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 막대한 재보를 스스로 소유한 게 아니라...."
캘러메인 백작 아래 파벌로 자리 잡고 있는 귀족인 자신과 젤커드 자작에게 흔쾌히 넘기면서 귀족으로서의 전통과 현실을 모두 고려한 비전을 제시해서 자신의 입지를 단숨에 세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 비전은 허무맹랑한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기에 거부할 수도 없는 것. 너무나 좋은 제안이고 상황이었지만 역으로 고작 15살짜리에게 쉽게 지배당하는 기분을 느낀 델마인 남작은 불쾌감과 소름이 동시에 돋았지만 이윽고 인정하게 되었다.
"백작 대리님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군.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 더스티클록 영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 모두 다 저분의 짓이었겠군. 하하하!"
베오날드가 태어난 곳은 엄연히 시골 더스티클록 영지. 그곳의 분쟁에 손을 댔다가 귀중한 기사 2명을 잃은 적이 있는 델마인 남작은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정도 책략을 짤 수 있는 두뇌를 지녔다면 몇 살 어려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니.... 드디어 범인을 찾아낸 그였지만,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인 것에 웃으며 이젠 그와 손을 잡게 된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
그리고 델마인 남작의 영지를 떠난 베오날드는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젤커드 자작에게 남은 재보를 바치고 그와의 관계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이쪽은 델마인 남작보다 생각도 유연하고, 무인(武人)이자 전장에 나선 경험이 많아서인지 실리적이었다.
그는 베오날드의 제안을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음, 역시 가주 대리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군요, 도련님."
"과찬이십니다, 자작님. 아무튼 저는 그럼 이제...."
"도련님, 하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 부탁?"
쉽게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베오날드는 의아해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젤커드 자작은 베오날드에게 다가와서 검집째로 검을 들어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오날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지금 딱 좋게 이야기를 결말지은 마당에 무례한 짓을 저지를 순 없었다.
'뭘 하려는 거지?'
"그냥 가시면 섭섭하니 대련 한 수 어떠신지요? 말로 하는 대화도 좋지만, 역시 그 흉흉한 테알 슬럼가를 제패한 무용을 한번 보고 싶군요."
'하여간 기사들이란....'
상상도 못한 제안에 베오날드는 급하게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젤커드 자작은 '중급 기사'로 이 캘러메인 영지의 세력권에서 상당한 무위를 자랑했다.
중급 기사 중에서도 최상위의 실력을 지녀서 상급 기사 후보로 떠오르는 자였던 것이다.
지금은 일단 마나를 잘 갈무리해서 들키지 않고 있었지만, 그와 겨루었다가 자신이 기사라는 것을 들키게 될까 두려웠던 베오날드는 거절했다.
"아… 그게, 지금 다른 일로 시간이 없어서 말입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으면 합니다, 자작님. 그리고 저 테알 슬럼가의 경우엔 3개로 나뉜 파벌의 사이를 이간질해서 얻은 성과이지, 제 무용으로 얻은 것은 아닙니다."
"흐음… 그렇다곤 해도 소문에 의하면 도련님은 홀로 새끼 그리폰을 잡으시고, 곰을 비롯한 각종 맹수를 사냥하신 용맹한 분입니다. 특히나 어지간한 위험 지역보다 더 위험한 테알 슬럼가를 제패하셨으니… 그 담력과 용맹은 배우고 싶을 정도겠지요."
'하여간 무인들이란!'
"하긴, 귀중한 시간을 맨입으로 빼앗을 순 없겠지요. 좋습니다. 대련을 한 번 해 주신다면 갖고 오신 재보 전부를 베오날드 도련님의 것으로 하지요. 제가 보관할 테니 언제든 찾아가시면 됩니다."
파사삭!
젤커드 자작의 말에 열심히 계산을 하던 베오날드의 주판이 순식간에 부서진다.
베오날드는 검술을 배우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태어난 가문의 상황과 자신의 혈통의 불리함을 뒤집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순수한 무인의 마음가짐과 상향심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던 베오날드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순간 멈칫해 버린 것이다.
"…뭐, 뭐라고요?"
"뭣하면 신관님을 불러서 공증을 하도록 하지요. 수수료가 조금 들겠지만, 이런 일에 적격 아니겠습니까?"
"아, 아니, 정말로 대련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무튼 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베오날드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뇌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 재보들을 자신이 보관하고 쓰기 힘들어서 정치적 목적으로 젤커드 자작과 델마인 남작에게 넘겨 버린 것이었지만, 마음 같아선 자신이 모두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의 주 전공인 연금술은 말 그대로 돈 먹는 하마 같은 학문이었기에 돈을 가질 수 있으면 무조건 가지고 싶었다.
'전쟁으로 사용한 자금이 빠지고, 급하게 처분할 수 있는 것들만 추리고, 다크티스에게 준 절반을 빼서 내 몫이 된 금화는 약 1,400개. 그것을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에게 각각 나눴으니 약 700개… 대련 한 번에 금화 700개. 끄으으으으응!'
"어떠신지요?"
"정 그렇다면 하도록 하지요."
대련 한 번에 금화 700개. 이건 손익 계산이 도무지 안 되는 건이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을 따라서 그의 개인 수련실로 갔고, 경무장과 검을 받아서 대련을 준비했다.
무가(武家)라서 그런지 비법을 지키기 위한 수련실은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보안이 철저한 건지 단둘만 들어온 베오날드와 젤커드 자작이었다.
검을 뽑은 베오날드는 예리하게 갈려 있는 날을 보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젤커드 자작을 바라보았다.
"으음… 이거 진검 대련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손속은 두겠습니다. 또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서 신관님을 밖에 불러 놨으니 부상 걱정은 없을 겁니다."
"후우우~"
"하하하, 너무 그렇게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아뇨. 그러니까...."
자신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예리하게 빛나는 검을 받아서 난감한 건 베오날드 측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라면 전력을 다하면 되지만, 베오날드는 그동안 누구와 함께 단련을 하거나 목숨을 걸지 않은 대련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대련 자체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중급 기사인데....'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후우우~ 내가 돈에 눈이 멀었지. 젠장!'
생전에도 이렇게 계산 자체가 깨져 버리는 상황에서는 정신 차리기가 힘들었던 베오날드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제대로 이야기가 안 된 채로 싸우다가 젤커드 자작이 다치거나 죽게 되면 상황이 왕창 꼬여 버리는 것이다.
결국 한숨을 크게 쉰 베오날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자작님, 하나만 맹세해 주십시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요. 기사와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모두 걸고 말이죠."
"으음? 도련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기꺼이… 맹세하죠."
"후우~ 좋습니다. 그러면...."
베오날드는 검을 뽑고, 마나를 끌어 올리면서 젤커드 자작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했기에 최대한 적게 마나를 끌어 올려서 아주 은은한 보랏빛 오러가 그의 몸에 둘러졌고, 그것을 본 젤커드 자작의 동공이 일순 커졌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그랬군요. 베오날드 도련님은 천연 기사이셨군요."
"가능하면 끝까지 감추고 싶은 카드였습니다만… 하아~ 내가 미쳤지. 혼자서 검술을 배웠고, 늘 실전만 했기에 손속을 둔 대련은 잘 못합니다. 그러니 몸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이 젤커드, 엄연히 중급 기사이며, 10년 넘게 전장에서 싸워 온 몸입니다. 마음껏 들어오십시오. 선수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패까지 드러내 줬고, 사전에 경고했으니… 이만하면 어떻게든 죽진… 않겠지? 오러로 몸을 감싸고 있고 말이지.'
선수를 양보한 젤커드 자작은 푸른 오러를 일으키면서 베오날드의 검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것을 본 베오날드는 방비가 되어 있다 생각하고 한번 그 힘을 테스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베오날드는 곧바로 발을 굴러서 시동을 걸어 달렸고, 보랏빛 잔상만을 남기며 그대로 검을 찔러 들어가는데, 젤커드 자작의 눈엔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어느새 검이 목에 날아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런! 흠!"
'음, 좀 더 느리게 해야 하나? 내가 전생에 기사였어야 뭘 알지~'
"후우… 이, 이건 대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검을 피한 젤커드 자작을 보며 베오날드는 아직도 감이 오지 않는 지금 시대의 '기사'들의 수준과 자신의 격차에 대해 고민하면서 전생의 지식에 대입하려 했지만, 본인이 기사가 아니었기에 도저히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나름 전력으로 한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하하하."
하나 일단 젤커드 자작의 표정을 보니 그가 상상 이상으로 놀란 것 같아서 베오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게 마치 전력인 것처럼 발언을 했다.
"그, 그렇습니까? 역시 그렇군요! 하하하,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공격이라니.... 하하하, 도련님은 의표를 찌르는 데 능숙하시군요."
'…힘, 더 빼야겠다. 그리고 기왕 하는 것, 중급 기사의 수준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하고 가자. 500년 전 기준이랑 확실히 다른 것 같으니. 우리 노이멀 가문은… 솔직히 무(武)로는 전통 무가(武家)들보다 수준이 낮았으니까.'
돈에 정신이 팔려서 결국 자신의 카드 하나를 보여 줘야 했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이 시대의 중급 기사인 젤커드 자작을 기준으로 전체적 무력 수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베오날드는 아까보다 더더욱 힘을 빼고 검을 휘둘렀다.
[40화]
"흠! 읏! 솜씨가… 내 예상 이상이군!"
'아, 이 정도 속도면 되는 건가 보군.'
"그 정도 지혜에 이 정도 무의 기량이라니! 정말 부러울 지경이군! 하!"
'하지만 저쪽도 눈치가 빨라서 더 이상의 하향 조정은 무리이려나?'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젤커드 자작의 감탄만이 들리는 수련실에서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의 수준을 검증하기 위해 여러 수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공세를 지속했다.
하나 젤커드 자작도 전장에서 뼈가 굵은 군인이자 한 사람의 기사. 베오날드의 공격이 점점 막기가 수월해짐을 느끼면서도 그가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자신을 재려고 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천연 기사인데… 수준은 날 능가한다는 것인가?'
'음, 이 정도까진 막는 것 같은데....'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구나… 나도 나름 빠른 성장과 강함으로 이름을 날렸건만!'
젤커드 자작이 중급 기사가 된 시기는 10대 후반. 그때만 해도 세상이 자신에게 내린 평가는, 천재라는 수식어는 당연하고 장차 인간의 정점인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의 우러러보는 시선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중급 기사의 경지로 약 20년을 넘게 보내면서 상급의 벽 앞에서 헤매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눈앞에 이제 막 성인이 된 약관의 소년은 딱 봐도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듯했다.
즉, 상급 기사의 경지. 자신이 20년간 도달하지 못한 그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에 충격을 안 받으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하, 하하하. 결국 나도 필부였단 말인가? 아니지, 필부가 된 거라고 해야 옳겠군."
"갑자기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도련님. 그저… 도련님 정도라면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아아아!"
'엑?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젤커드 자작이 마나 호흡을 크게 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 둘러진 푸른 오러의 기류가 짙어졌다.
베오날드는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의 '전력'이라는 발언과 심상치 않은 기운에 경계하며 짓쳐들어오는 그의 공격을 받아 냈다.
'이 작자! 내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러니까 이 난리를 피우지!'
"전력을 다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군요! 하! 확실하게 저보다 강한 자는 이 근처에선 말데로브 경밖에 없었으니까요!"
"큭! 아니!"
전력을 다하는 젤커드 경은 신났지만 베오날드는 죽을 맛이었다.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아 주는 입장. 거기에 힘 조절을 아직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손을 대기가 껄끄러워 결국 소심한 반격 정도나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젤커드 자작은 아주 좋아했다.
"오오… 역시 신이 내린 이 창조의 기적 앞에선 인간은 얼마나 허무한가!"
'내 재능 같은 걸 생각하나 본데! 아니라고! 이 검술! 검법! 모두 인간의 의지로 만든 거라고!'
자신을 천연 기사로 오해한 데다 제대로 된 반격을 안 하니 '검법'에 대해서 모르는 젤커드 자작의 말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검술, 마나 호흡법, 모두가 그가 있던 노이멀 가문의 상향심이 만들어 낸 유산들인데, 일방적으로 내려진 신의 기적 취급을 당할 줄이야.
물론 15살이 가질 수 없는 역량에 감탄해서 나온 반응이라는 걸 알았기에 딱 거기까지였다.
"그나저나! 자작님! 이 대련,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둘 중 하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겠죠? 하핫!"
"…아니, 기사급끼리의 체력을 생각하셔야...."
"비싼 돈 냈는데, 값어치는 해야지 않습니까? 도련님! 흠!"
채애애앵!
강하게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며, 베오날드는 그렇게 젤커드 자작이 지칠 때까지 계속 검술 상대를 해 주었다.
젤커드 자작의 말대로 대련 한 번에 금화 700개만큼의 값어치는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베오날드는 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약 2시간 동안이나 검술을 받아 줘야만 했다.
"하아… 하아...."
"이렇게 땀 흘려 본 적은 참 오랜만이군요. 하하하핫!"
'힘든 게 뭐가 즐거운 건데? 아드레날린 중독인가? 진짜 나도 단련했지만 근육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마나를 이용해서 신체가 강화된 '기사'들의 체력은 일반인과 달랐다. 젤커드 자작은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땀을 흘리고 몸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베오날드 쪽도 힘 조절에 신경 쓰면서 젤커드 자작을 상대해야 했기에 마찬가지로 지쳐 쓰러진 채였다.
그는 근본부터가 저런 땀과 근육으로만 가득한 운동계가 아니라 효율과 이성을 중시하는 두뇌파라서, 지친 상태에서 즐거워하는 그의 감성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이제 되셨습니까?"
"예,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하하하. 그나저나 베오날드 도련님, 이 정도 능력이라면 충분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지혜와 무용을 모두 겸비하신 혈통인데 말이죠."
"용병의 더러운 피가 절반인데…어불성설이죠."
"지금 시대에 그 잘난 혈통이 뭐가 중요합니까?"
"자작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꽤 중요합니다. 혈통이라는 거 말이죠."
전형적인 실력주의 사상을 가진 젤커드 자작의 말에 베오날드는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던 것을 떠올렸다.
왕당파 말석의 백작이 되었을 때, 자신의 연금술 지혜와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던 혈기왕성한 시절. 당연히 독자적으로 여러 사업을 벌였다가 큰코다친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때 생각하면 참~ 나도 어리석었지. 그냥 무지성으로 상업이니 개발이니 같은 거 하면 다 잘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건 어디까지나 치열한 귀족 간의 정치판을 견제하고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겨우겨우 깨달은 베오날드였다.
물론 이제는 완숙된 몸이기에 그런 혈기에 취하는 실수는 안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난세입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같은 영웅이 활약하기 더없이 좋은 시대이지요. 여섯 나라가 서로 자웅을 겨루는 이 현실 속에서 결국 힘과 능력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캘러메인 백작가는 별로 먹을 곳이 못 됩니다. 여긴 그래도 아직 혈통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가문이니까요."
"…제가 도와드려도 말입니까?"
"먹는다 쳐도 델마인 남작 같은 자들의 반발로 못해도 내전으로 10년 이상 까먹을 테고, 주변 귀족들이 기생충처럼 몰려들어서 엉망진창이 될 건데, 그런 걸 먹을 필요가 있습니까? 평생 캘러메인 백작가의 질서 재정립이나 하다가 죽겠죠. 그 이후엔 뭘 하고 싶어도 확장하기 힘들 거고! 안 먹는 게 나아요. 그따위 영지는!"
"그러면 그 힘과 지혜로 무엇을 드시려고 합니까? 도련님."
"이 대륙."
"하! 하하하하하핫!"
젤커드 자작은 터무니없는 베오날드의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캘러메인 백작가를 안 먹고 6개의 나라로 나뉜 이 거대한 대륙을 손에 넣을 야망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베오날드 또한 이미 한번 대륙을 손에 쥔 적이 있는 대귀족인 자신이 하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취급하는 젤커드 자작의 반응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물론 상당한 세력이 있는 백작가로 시작해서 한 번에 황제의 신임을 사서 권력을 쥐었지만, 그 이후 수십 년 동안이나 권력을 지킨 자신의 정치력과 국가 운영 능력에 대해선 스스로도 자신할 수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이 양반이 날 무시하나? 하아~ 그냥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15살로밖에 안 보일 테니.... 게다가 난 여신에게서 그 임무를 받고 온 거라고!'
결국 여신이 내린 지령인 용사를 돕기 위해선 이 대륙의 정세를 손에 쥐어야 하니 신의 뜻과도 일치하는바, 부정할 요소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어느샌가 젤커드 자작의 웃음소리가 끊긴 것을 깨닫고 베오날드가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보인 것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젤커드 자작의 모습이었다.
"…저기, 자작님?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일이신지?"
"저는 베오날드 도련님이 꾸는 꿈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부디 소신도 베오날드 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저의 이 몸과 가문을 바쳐서 도련님이 하시는 일을 돕겠습니다."
'이거 참 골치 아프네. 나에 대해 상당히 깊은 오해가 새겨진 것 같은데… 성향 더럽게 안 맞을 텐데....'
굳이 따지면 전통 대귀족의 성향에 가까운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 같은 실력주의 인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차라리 부하를 둔다면 그로선 델마인 남작같이 생각을 읽기 쉽고, 계산에 따라서 움직여 주는 타입이 편했다.
그렇기에 예상외의 행동의 연속인 젤커드 자작의 제안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금화 700개를 맡아 줘야 하니, 영 껄끄럽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또 안 받아들이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도련님?"
"자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 모자란 게 너무 많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실험해야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제가 20살이 될 때까진 결정에 유예를 두었으면 합니다."
"으으음...."
"또 혹시나 그때 되면 생각이 달라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젤커드 자작이 생각하기에도 베오날드의 설명은 이해가 가는 것이었기에 승낙은 했지만, 이해한 것과는 별개로 그는 이미 주군을 모시는 신하인 양 베오날드를 대하기 시작했다.
검과 물건들을 솔선수범해서 치우질 않나, 엄연히 이 영지의 주인인데 무슨 집사라도 된 양 앞장서서 수련실의 문을 열지를 않나, 목욕의 준비가 끝나니 베오날드부터 밀어 넣질 않나.
'이 망할 기사, 말이 정말 안 통해!'
"하하하, 도련님, 어떠십니까? 물의 온도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예. 좋습니다."
분명 자금과 각종 물자를 비밀리에 공수해 줄 수 있으며,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 한 파벌의 수장이 부하가 된 건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저 성향은 다루기가 성가실 거라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오늘의 성과가 과연 득인지 실인지 열심히 계산을 하며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본래 오늘 떠나려고 했던 젤커드 자작의 저택에서 결국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식사 자리에서부터 계속해서 떠들며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그에게 맞춰 주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식사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그러고 보니 계속해서 베오날드 도련님의 의사를 전하고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아, 하긴 그렇겠네요. 금화 700개를 또 막 들고 다니는 것도 문제고...."
"마침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손을 도울 수도 있고 말이죠. 얘야! 어서 들어오렴."
쿵! 쿵!
젤커드 자작이 박수를 치자, 멀리서 묵직한 쇳소리와 발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무거운 갑옷이라도 입은 건가 싶어 모습을 드러낸 자에게로 시선을 옮기는데, 그곳엔 풀 플레이트로 완전 무장을 한 '기사'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특징은 베오날드보다도 큰 거구의 장신으로, 키만 족히 190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전령이라기엔… 좀 크군요. 게다가 보아하니… 마나가 느껴지는 걸 봐선 진짜 '기사' 같은데… 그러면 엄연히 영지의 주요한 전력이 아닐지?"
"제 충성심의 증거입니다. 하하핫! 자, 투구를 벗고 인사드리렴. 하이디."
"예, 아버님."
투구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묘하게 하이 톤인 것에 깜짝 놀란 베오날드는 눈앞의 상대가 투구를 벗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투구를 벗자마자 드러난 건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과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기사인 것도 놀라운데, 여성이라는 점에 베오날드는 더더욱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41화]
"하이디 젤커드라고 합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아버님의 명에 따라 이제부터 도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따님인가요? 그보다 기사 같은데...."
"그렇습니다. 하하핫! 보통이 아니죠? 올해… 열일곱이 되는 아이입니다. 기사로서 자질은 있지만, 아직 정식 서임은 받지 않았습니다."
'열일곱에 이 성장이라니. 보통은… 아니지. 뭐, 외모는 나쁘지 않네.'
베오날드 자신도 단련해서 보통 체구가 아닌데, 그보다 더 큰 약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와 체구가 인상적인 그녀를 보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강렬한 첫인상에 당혹스러웠지만 베오날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일단 그녀를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편하게 있으세요, 하이디. 그리고 뭐, 흔하지 않은 '여성 기사'라서 놀랐을 뿐… 그 외의 능력이 좋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보통은 딸아이에게 마나 호흡법이라든가 검술을 전수하진 않을 텐데...."
"예. 보통 귀족가나 기사 가문의 전통은 그러하지만 저 아이가 워낙 천부적인 무골이라서 말이죠. 도저히 원석을 다듬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어차피...."
"다른 가문에 시집보내기도 그러니까… 이지요? 보통 귀족가에서 원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저 키로 인해 남편을 내려다보게 되는 점부터 해서… 드레스도 안 어울리고, 안 좋은 시선을 받겠죠?"
"예… 뭐, 그렇지요. 불쌍한 것. 사내아이로 낳아 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젤커드 자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베오날드는 슬쩍 하이디의 상태를 살폈다.
본인도 자신이 일반적인 여성적 매력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여태껏 그런 취급을 받아 온 것에 익숙한 듯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미소를 띤 채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베오날드를 내려다보게 된 그녀가 송구스러워서 허리를 숙이고 몸을 뒤로 빼려던 찰나, 베오날드가 그녀를 번쩍 들더니 공주님 안기처럼 안아 올렸다.
"도, 도련님?"
"뭐, 저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답고 귀여우면서 기사로서 기량까지 보유하고 있다니, 좋은 게 더 좋은 거지요."
"소, 송구스럽사옵니다, 도련님! 그, 그보다 어서 내려 주십시오. 갑옷의 무게까지 합쳐서 상당히 무거우실… 겁니다! 그… 그...."
"으음~ 갑옷 무게를 제하면… 깃털을 드는 느낌인데?"
"아… 아으으으...."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처음인지라 하이디는 새빨개진 얼굴을 얼른 양손으로 가렸다.
베오날드는 그 소녀스러운 반응에 흐뭇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생전의 그는 여성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은 축에 속한 편으로, 보통 귀족 가문이라면 싫어할 하이디 정도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지, 하이디."
"예.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전령을 비롯해서 호위까지 모두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그보다 슬슬 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그… 이런 건 처음이라, 적응이 안 돼서...."
"아~ 그러도록 하지."
그렇게 새로운 호위이자 전령까지 얻은 베오날드는 다음 날 하이디와 함께 젤커드 자작의 영지를 떠나서 캘러메인 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이 마련해 준 은신처에 도착하자, 그곳엔 마법사인 셀리나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나, 도련님, 오셨나요?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뭐죠? 일단은 제가 돌보고 있었는데요."
'뭐긴, 내가 만든 약물의 피해자들이지. 그나저나 오지 말라고 했는데 또 왔군.'
"으으으...."
"으어어어어… 약을 줘어...."
그를 반기는 4급 마법사 셀리나의 옆에 있는 삐쩍 마른 두 노인과 남자는 본래 아그라샌더 그룹이 다루던 노예들로, 베오날드가 만든 환상의 꽃에 중독된 자들이었다.
본래 이 시대에 없던,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재앙인 만큼 베오날드는 직접 치료하기 위해 다크티스에 말해서 그들을 챙긴 것이었다.
"이래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아무튼 하이디! 오자마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만 저 둘을 저택 안으로 옮겨서 감시해 주게. 구속해도 좋네."
"예! 도련님!"
하이디 경에게 지시를 내린 베오날드는 슬쩍 셀리나를 지나쳐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베오날드의 앞을 막아서면서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저는 뭐 도와 드릴 거~ 없으려나요? 일단은 저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게 돌봐 드리곤 있었는데 말이죠."
"감사는 나중에 표하지.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네. 이제부터는 내 일이니 말이야. 아니면 혹시… '내부'를 봤나?"
"아하하핫, 아주 조금...."
터엉!
그 대답이 나온 순간 베오날드는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셀리나의 코앞에 생긴 반투명의 막에 순간적으로 막혀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베오날드가 성가신 마음에 오러를 끌어 올려 한 번에 베어 버릴까 생각하는데, 그 모습을 본 셀리나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만요, 도련님! 그거 '오러'죠? 짜잔! 안 되었네요! 저기, 10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보고 싶어서 본 것도 아니고! 일단 도련님이 '연금술'을 하는 것에 대해서 비밀로 해 드릴 수 있어요."
"이 세상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말해도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지. 바로 가족, 친구, 그리고 마법사."
"편견이에요. 대체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뭐긴, 경험이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생전에 마탑 마법사들에게 겪었던 일을 주구장창 늘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미 조용히 죽이기엔 상황이 더럽게 꼬여 버렸다.
상대는 아주 실력 없는 마법사는 아닌 건지 목숨을 지킬 수단을 마련해 놓은 걸 봐선 좀 더 힘을 써야 할 텐데, 그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나 컸다.
'일단 저 여자는 이 영지의 중요 인물 중 하나다. 마탑에서 파견한 조언자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고, 가주가 소집하는 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을 만큼 핵심 인물인데… 지금 내가 딱 들어온 타이밍에 실종되면 골치가 아파질 거다.'
"그, 그래도 조용히 계신다는 건 이야기를 들을 의사가 있으시다는 거죠?"
'물론 죽이고 적당히 몬스터들의 서식지에 던져두면 연구하러 갔다가 실종된 걸로 속일 수도 있을 테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가. 게다가 하이디 경도 있으니 일단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볼까?'
베오날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이디를 저택 밖에 대기시켜 둔 채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여차할 경우엔 죽일 생각이었기에 다른 짓을 못하게 연금술 정제 시설을 만들어 둔 지하실로 데려가서 마주 보고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럼 어디 짧고 간략하게 부탁하지. 지금… 가뜩이나 시간도 지연돼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
"제게 연금술을 알려 주세요."
"좋아. 유언은 잘 들었다. 이제 죽여 주지."
더 들을 거 없이 검을 뽑는 베오날드. 알아선 안 될 것을 속속 알아 버린 자를 더 이상 살려 둘 필요가 없었기에 살기를 뿜으면서 셀리나에게 다가가는데, 그녀는 팔을 휘저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요. 왜 말만 하면 죽이니 마니 그러세요?"
"이건 마탑에서도 통용되는 질서일 텐데? 본인의 허락 없이 남의 연구실이나 실험실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캐면 죽여도 상관없는 거 말이야."
"아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지금은 안 그런다고요. 그보다 시골 출신인 도련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그거 아카데미 형식으로 변하기 전의 진짜 '탑'이었던 시절에나 행해지던 아주 오래된 과거 이야기인데? 아무튼 그럼 조수 한 명 구한다 생각하고 받아 주시면 안 돼요? 직접 배우는 게 아니라 등 뒤로 훔칠 테니까요."
"아주 대놓고 훔친다는 소리를 하는군."
"게다가 제가 있으면 저택 내부에 연금술 실험 시설을 만들어도 위장이 되고, 백작가의 자금도 끌어다 쓸 수 있어요. 물론 전부 도련님의 것으로 할게요. 게다가 귀찮은 작업이나 데이터 수집도 대신 할 수 있잖아요."
셀리나가 내민 조건에 베오날드는 조금은 솔깃한 기분이 들었다.
백작가의 자금을 합법적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일일이 해야 하는 기초 작업 같은 것을 맡아 줄 사람. 그렇게 되면 시간을 엄청 아낄 수 있다는 점이 메리트였다.
문제라면 역시 자신이 연금술을 쓰는 것을 안다는 것과 저택 내의 정치 상황이 복잡해질 거란 점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미 저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가 자신에게 붙었을 때 그건 이미 복잡해진 문제였다.
'이미 한 번 치기 시작한 파도, 두 번 치든 세 번 치든 다를 건 없겠지. 메리트가 좀 더 있긴 해.'
아슬아슬하게 죽여서 얻는 이득보단 살려서 조수로 삼는 편이 이득이 더 많다고 결론을 짓는 베오날드 머릿속의 주판이었다.
"후우~ 좋아. 단,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두지. 만약 내가 말한 비밀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거나, 혹은 수상한 행동을 할 시엔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라.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걸 각오하라는 거다. 알았나?"
"예, 기꺼이 그러죠."
"그리고 하나 더. 내 지시엔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 어기거나 또는 의심할 요소가 많을 시엔 죽이겠다. 감당 못한다면 거부해도 좋다."
"아… 무섭지만, 그래도 하겠습니다. 혼돈 속에서 진실의 빛을 좇는 게 마법사의 사명이니까요."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진짜 정신이 나간 것 같군.'
승낙하는 셀리나를 보며 베오날드는 아무튼 허락했으니 그녀에게 주의 사항에 대해 이리저리 알려 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연금술'을 쓴다는 점과 마나 호흡법과 검술을 '기사'급으로 익혀 두었다는 점 등등,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도를 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알았나? 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말고, 알려고 하지 마라. 예를 들어 내 기술과 지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예. 꼭 기억하겠습니다, 도련님."
"좋아. 그럼 이제야 본격적으로 뒷정리를 할 수 있겠군. 일단 셀리나, 너는 저 노예들을 데려가서 중독 증상이 끊길 때까지 계속해서 돌봐 줘라. 명분은 신종 마약 연구용이라고 하면 대충 납득할 거다. 적절한 성과와 결과물은 나중에 마련해 주지."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먼저 셀리나를 저택으로 돌려보낸 다음 베오날드는 하이디와 함께 따로 캘러메인 백작의 저택에 귀환하였다.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하러 나온 것은 자신의 전속 시녀 역할을 맡고 있는 세인으로, 그가 없는 동안 상당히 걱정했는지 안도하는 눈빛으로 인사를 해 왔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할 게 많지만, 우선은 알테리오에게 가시길 바랍니다. 식사는 주고 있었지만 함부로 밖에 내놓을 수 없어서 계속 가둬 놓은 상태라 상당히 민감합니다."
"음, 알았다. 녀석을 돌보느라 수고 많았다, 세인."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보다 옆에 계신 그분은?"
"젤커드 자작님의 따님인 하이디 양이다. 그리고 이젠 내… 가신이라고 해야 맞겠지. 아무튼 먼저 백작님에게 보고할 게 있으니 만나 뵐 수 있을지 확인해 봐라. 난 그동안 옷을 갈아입겠다."
"예, 도련님. 곧바로 집사장님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에라솔 님도 곧 오실 겁니다."
세인에게 지시를 내린 뒤, 베오날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알테리오를 잠시 위로하고는 에라솔과 하이디, 세인에게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다음 집사장에게서 백작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그와 함께 곧장 백작의 응접실로 향했다.
"백작님, 베오날드 도련님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베오날드가 문을 열고 응접실에 들어서자, 그곳엔 백작뿐만 아니라 메이라 부인까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베오날드에게 보내는 시선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그 시선을 통해 베오날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이 백작가에 테알 슬럼가의 일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42화]
'내가 없는 동안 이리저리 소식이 들려왔겠지.'
테알 슬럼가의 일을 해결한 뒤 베오날드가 델마인 영지, 젤커드 영지를 도는 동안 분명 여러 수단을 통해 테알 슬럼가에 이변이 일어난 사실을 백작가에서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도 이 영지의 주인이자 이 도시의 지배자인 만큼 리스크를 생각해서 직접적인 해결은 못하더라도 3대 조직의 근황과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메이라 부인은 베오날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니, 그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다는 걸 알고 소식을 듣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으리라.
"베오날드 캘러메인,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어머님."
"허허, 그래, 왔느냐? 베오날드.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네겐 좀 버거운 임무를 맡긴 듯했는데, 어땠느냐?"
"예. 정말 거대한 세상의 벽을 느꼈습니다. 버거운 임무라 느꼈으나 그것 또한 백작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도전을 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해 버리고 말았지요. 정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백작이었지만 눈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걸 봐선 역시 자신이 들었던 사실과 달리 베오날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리라.
베오날드는 슬쩍 눈치를 보는 척하면서 그런 백작의 반응을 캐치해 냈고, 둘은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속에는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꼴좋다! 늙탱이 자식, 당혹스럽겠지. 여기서 내가 공적을 부정할 줄은 몰랐을 테니 말이야.'
'이, 이런 무례한 놈을 봤나?'
'설마 고작 15살 된 핏덩이가 자신을 엿 먹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아마 백작은 베오날드가 테알 슬럼가에서의 공적을 자랑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메이라 부인과 함께 그에 대비할 수를 준비해 놨는데, 베오날드가 아예 첫 문답으로 그 판을 깨 버리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 저 자신의 부족함은 물론 테알 슬럼가에서 인간의 잔혹성과 밑바닥, 악의를 다시금 확인했지요. 후우~ 좀 더 많은 경험으로 기량을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실망시켜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알았다. 애초에 너에겐 기대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깨달은 게 있다면 오히려 득인 거겠지. 어서 돌아가서 다른 일을 명할 때까지 네 할 일을 하여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베오날드가 그렇게 예를 갖추고서 응접실에서 물러나자, 응접실 안에는 메이라 부인과 백작 둘만 남게 됐다.
베오날드의 발소리가 사라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메이라 부인은 곧바로 참아 뒀던 분노를 터뜨리면서 백작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버님! 왜 저 아이를 그냥 보내신 겁니까? 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꼴을 어째서 그냥 두고 보셨습니까? 저 아이가 부린 수작을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다 알고는 있다. 하나 저 아이는 애초에 그것을 부정했다. 자신의 공적이 될 그 일을 말이다. 그냥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지."
"하나 거짓인 걸 아시잖습니까? 따지셔야지요!"
"어떻게 따진단 말이냐? 저 아이가 테알 슬럼가를 어떻게 제패하고 구워삶았는지 보이지가 않는데!"
부하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다곤 해도 그저 사람과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말과 글자들뿐, 베오날드에게서 직접 듣지 않는 한 누구도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사람을 집어넣어 뒀다고 해도 그 슬럼가 3대 조직의 핵심까지 집어넣는 건 힘든 일이었기에 백작이 알 수 있는 정보는 그저 베오날드가 임무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3대 조직 간에 분쟁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정보의 디테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테알 슬럼가의 3대 조직에 신형 마약으로 인한 분쟁이 생기면서 각자 전쟁 준비를 위해 용병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았고, 전쟁이 일어났는데 승자는 다크티스로서 '방랑 기사'를 고용해서 이겼다, 까지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럼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에게 돈을 준 사실을 따지면 되잖습니까?"
그 말대로 백작과 메이라 부인은 이미 베오날드가 이 영지로 돌아오기 전에 델마인 남작의 영지와 젤커드 자작의 영지에 들러 그들에게 거액의 재물을 건네줬다는 첩보를 받아 알고 있었다.
메이라 부인은 그 점을 지적했지만 백작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면서 혀를 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그걸 따지는 순간 내 한심함만 드러내는 꼴이다. 용케 그 아이 앞에선 참았구나!"
"그, 그야 아버님께서 이야기하셔야 하니 나서지 않은 것입니다만… 그래도 그런 재보를 얻었으면 당연히 자신이 속한 가문에 바쳐야지요! 테알 슬럼가는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지, 거기에서 나온 것을 빼돌린 것은 엄연히 대죄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한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냐? 델마인 남작에게 증언해 달라고 할 거냐? 아니면 젤커드 자작에게 증언해 달라고 할거냐?"
"저 아이만 불러와서 첩자가 진술한 걸로 심문하면 되잖습니까?"
"용병의 피가 섞였지만 저 아이도 엄연히 우리 혈족이다! 이 멍청한 것아! 심지어 경쟁마 교육을 시키겠다고 우리가 불러서 양자로 삼은 아이야! 그걸 우리 첩자들 말만 듣고 먼저 잡아서 신문한다고 해 보자!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이 와서는 당연히 받은 적 없다고 반발하겠지. 그러면 외부에 어떻게 보이겠느냐? 생각을 좀 하거라! 생각을!"
생각이 1차원적인 며느리가 답답한지 캘러메인 백작은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화를 냈다.
그 말대로 베오날드가 다른 가문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냥 부하나 기사라면 추궁해 봄 직했다.
하지만 베오날드는 가문의 혈족이자 자손, 그것도 시골에 버려둔 집안의 아이 상태가 아니라 양자로 들여서 '캘러메인'의 성을 준 아이다.
메이라 부인의 말대로 하면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기밖에 되지 않는 꼴이었고, 캘러메인 백작가의 아래에 있는 젤커드 자작과 델마인 남작의 신뢰까지 깎아 먹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직도 놈이 둔 수가 얼마나 영약하고 예리한지 모르는 게냐? 방금 내가 괜히 그냥 보낸 줄 아는 게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보낸 거란 말이다! 정말 천한 용병의 피가 섞이지 않고 정당한 혈통이었으면 지금 바로 내 손으로 랄트를 암살시키고 렌겔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싶을 정도다!"
"그, 그 정도란 말입니까?"
백작의 충격적인 발언에 메이라 부인은 경악했다.
스스로 그렇게 사랑한 자기 손자를 암살해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베오날드라는 아이를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봐라. 저 테알 슬럼가를 제패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로 인해서 막대한 재보가 생겼는데 거리낌 없이 우리 가문 아래에 있는 귀족 파벌의 수장에게 절반씩 나눠 주고 직접 방문해서 그들과 협상한다는 방안을 내놓는 놈이다. 이게 15살짜리 머리에서 나올 계략이란 말이냐? 후우~ 캘런 그 아이가 대체 어떻게 기른 건지, 참...."
"그,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일단은 확인할 것이 몇 가지 있다. 베일 집사! 가서 말데로브 경을 불러와라!"
"예, 백작님."
백작은 우선 집사에게 지시를 내려 말데로브 경을 불러왔다.
아무튼 제대로 한 방 먹은 만큼 이대로 베오날드를 그냥 둘 순 없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를 불러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일단 하나 수상한 것은 바로 베오날드가 '기사'인지에 대한 여부. 첩자의 말로는 테알 슬럼가의 분쟁을 끝낸 방랑 기사는 흑발에 청안의 남성이라는 진술까진 올라온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아, 마님도 계셨군요."
"말데로브 경, 급히 물을 게 있어서 불렀네. 베오날드에 대해서 말이지."
"어떤 것입니까? 백작님."
"그 아이, 혹시 '천연 기사'인가? 상급 기사인 자네라면 분명 파악하고 있을 거라 보는데...."
"그랬다면 진작 보고드렸을 겁니다, 백작님."
자신의 주군인 백작의 추궁이었지만 말데로브 경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베오날드와 사전에 약속한 대로 맹세를 지켜 그에게 거짓을 고한다.
지금 저기 랄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이 있기에 캘러메인 백작가의 미래를 위해 베오날드가 '천연 기사'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은 백작은 무거워진 표정으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으음, 자네가 모른다니 그보다 더한 보증은 없겠지. 후우우~ 정말 모를 일이로군."
"아버님! 지금까지도 놀라울 따름인데, 그 아이를 천연 기사라고까지 생각하셨습니까?"
"안 그러면! 테알 슬럼가에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나타난 것을 어떻게 설명하라는 말이냐? 휴우~ 그건 너도 알고 있는 게 아니더냐?"
"그저 거기 싸움에 낀 용병들이 도망치기 위해 댄 핑계라고 생각했지요."
"용병들이야 그렇다 쳐도, 내 정보망엔 '기사'도 구분 못하는 멍청이는 없단다, 얘야. 아무튼… 그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후우우~"
한숨을 크게 쉬며 갈등하는 캘러메인 백작. 가주 대리를 맡은 렌겔의 말대로 재능과 능력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혈통에 대한 건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부러 불가능한 과업을 내렸는데, 놈은 자기 식대로 해결하고, 막대한 재보까지 얻어 정치적인 연줄까지 만들었다.
하나 그렇다곤 해도 후계자론 절대 삼을 수 없었다.
"그래, 결국 혈통… 정당한 혈통은 중시되어야 해."
자신들 귀족은 평민과 다르다.
아무리 난세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은 신에게서 받은 고귀한 혈족. 그렇기에 평민들보다 뛰어나며, 그렇기에 그들을 지배하고 지키고 인도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정의였다.
더구나 같은 시대에 이 제국의 어느 공작가의 후계자는 유일한 남성 혈통이었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로 자그마치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작 대리'라는 직함으로 불렸고, 죽고 나서야 '공작'의 작위와 대우를 받은 대굴욕도 있었기에 캘러메인 백작은 아무리 베오날드의 가치가 높아도 랄트를 후계자로 할 생각이었다.
"네가 너무 답답해서 심한 말을 했지만 아가야, 나는 아직도 좀 모자라더라도 정당한 혈통인 랄트를 후계자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버님."
"하지만 문제는 렌겔이다. 그 아이는 나와 생각이 달라.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의 가치에 눈이 팔려서 진짜 중요한 걸 생각 못하고 있단다. 그래선 안 돼."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기는.... 네가 다른 혈족에게 한 방법을 그대로 해야겠지."
메이라 부인은 백작의 눈빛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백작 모르게 다른 사내아이들을 완전 범죄처럼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백작에게는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 반대로 백작이 그것을 알고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귀족은… 가문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가문은 혈통과 후계자가 가장 중요하지. 너는 랄트를 만들었기에 가치가 있는 거란다. 알았느냐? 만약 그 반대였다면 너는… 그리고 네 가문엔 그동안의 죄를 물어서 모조리 고문실에 처넣어도 모자랐을 게다."
"…힉!"
"그러니 너도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고, 랄트의 관리를 잘하려무나.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랄트'만 없으면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
"우리도 손을 못 댄 테알 슬럼가를 단신으로 정벌하고 온 아이다. 심지어 이젠 젤커드 자작과 델마인 남작과의 정치적 선도 잇는 능력을 보여 줬지. 그런데 랄트는? 네 치맛바람 안에서 노느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거나 다름없지. 그러니… 간수 잘하거라. 나는 네 편이다만, 그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다. 알았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백작의 충고를 들은 그녀는 유례없는 두려움이 가슴에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이미 들켰다는 것도 두려움의 일부였지만, 더 두려운 것은 베오날드가 그저 친아들인 랄트의 앞길을 방해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아들은 물론 자신의 생명과 친가를 위협할 수 있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떠올라 버렸다는 점이었다.
[43화]
백작과 메이라 부인이 긴장감 있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베오날드는 새로이 자신에게 합류한 사람들을 서로에게 소개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메이드인 세인, 젤커드 가문의 하이디, 말데로브 경의 아들 에라솔 총 3명이 모두 베오날드의 방에 모여서 다과회를 가지며 서로에 대한 소개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오오…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의 아드님이셨습니까? 아버님에게 말데로브 경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 캘러메인 영지 최강의 기사라고! 그 아들인 에라솔 님도 강한 기사일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대련이라도...."
"죄송합니다. 전 아직 기사가 아닌 종자라서 말씀 안 높이셔도 됩니다. 아무튼 같이 베오날드 도련님을 따르는 입장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도련님, 소문에 의하면 테알 슬럼가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맡으셨는데… 그거랑 백작님과의 면담은 어찌 되었습니까? 지금 그 화제로 저택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백작님과 선대도 해결 못한 일을 떠넘겼다고 막 웅성거렸다니까요."
세인은 베오날드의 무용담을 듣고 싶은지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알테리오의 깃털을 쓰다듬어 주며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던 베오날드는 슬쩍 세 사람의 눈치를 보더니 미소 지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으음~ 나는 딱히 한 게 없어. 그저 세 조직이 싸우는 혼란 속에서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웠을 뿐. 운이 아주 좋았지."
"그러면 거기서 하신 건 딱히 없으시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그...! 아차차!"
"하나 소문으로는 그곳에… 아!"
'이 두 기사 지망 녀석들은 아직 비밀을 감추는 것에 익숙지 않군. 나중에 따로 교육해야겠어. 아무튼 생각보다 이번 일로 인한 저택 내의 여파가 크군. 다크티스 놈들… 날 이용할 셈인가?'
세인에게서 들은 저택 내의 동향을 통해서 보면 집사, 병사, 기사들 모두 베오날드가 홀로 테알 슬럼가를 제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바로 다크티스 조직의 전략과 베오날드의 생각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겹쳐진 탓이리라.
베오날드의 수작 덕에 사실상 테알 슬럼가를 거저먹은 거나 다름없었고, 암살과 도적 길드를 중심으로 한 다크티스 조직은 기존에 각종 사업으로 테알 슬럼가를 주름잡던 바알라스와 아그라샌더 그룹을 소화시키고 재편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용병을 비롯해서 다른 세력들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그들은 이번 분쟁에서 핵심적인 조커 역할을 했던 '수수께끼의 방랑 기사'를 마치 자신들의 주인이자 새로운 흑막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이 캘러메인 성과 저택에서는 그 '수수께끼의 방랑 기사'의 정체를 베오날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으음~ 뭐, 그러면 나도 그 이미지를 이용해 볼까?"
"도련님께 오히려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슬럼가의 쓰레기들인데 말이죠."
"어차피 이미 용병 잡종 소리 듣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거 하나쯤 더 늘어도 상관은 없지. 아무튼 백작님이 주신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한동안 시간이 나는데… 입장을 좀 확실히 해야겠군."
"입장이라면? 가문에 대한 입장 말씀이십니까?"
"아니, 여기 있는 너희와 나의 입장. 이번 일로 인해서 내 이름이 캘러메인 백작가에 퍼진 만큼 날 노리는 자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 주변 정리라고 해야 할까? 아, 물론 하이디 너는 상관없네. 이미 확인했으니 말이야."
이번 일로 인해서 예상 이상으로 베오날드가 대두되면서 어쩌면 캘러메인 백작가 내부의 암투나 권력 다툼에 말려들 수 있으니 모두에게 자기 위치를 정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젤커드 가문의 여식인 하이디는 이미 젤커드 자작이 충성을 바쳤고, 베오날드에게 보낸 거나 마찬가지이니 예외였다.
"전 아버님께서 베오날드 도련님을 충실히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제가 위험할 거라면 미리 언질을 주셨거나 빠져나오라고 별도로 말씀하셨겠지요. 그러니 전 끝까지 베오날드 도련님을 따르겠습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충직하네. 가문 내력인가? 하지만 그래도 결국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데.... 캘러메인 백작가와 나를 저울질하는 문제에 대해선 결국 소심해질 테니 말이야.'
"저, 저기, 그…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결국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면 이 캘러메인 백작가 쪽에 더 입장이 기울어질 것 같아서."
"그럼 설마! 도련님은 이 가문을 적대하실 것입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집안끼리의 권력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지. 실제로 메이라 부인이 날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에라솔에게 차분히 설명하면서 베오날드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다시 알려 주었다.
집안 내부 싸움에 휘말릴 수 있으니 입장을 정하라는 것을 다시금 이해시켰고, 에라솔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그렇게 되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역시 뭐랄까? 캘러메인 백작가에 충성을 하지만 그 안의 다툼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요."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집안 다툼은 집안사람끼리, 그다음 기사로서, 종자로서 승리한 자에게 충성한다도 나쁘지 않겠지. 만약 의문이 생긴다면 직접 말데로브 경과 이야기해 보도록."
"죄송합니다, 도련님. 확실히 정하지 않아서...."
"아니, 당연한 일이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러면 이제 세인, 네가 문제인데...."
그녀는 베오날드의 시선에 흠칫하며 살짝 몸을 떨었다.
베오날드의 전속 메이드로 임명되었지만 그녀는 엄연히 메이라 부인 측 사람이자 첩자였다.
내심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지만 일단 자신의 임무는 베오날드를 감시하는 것이자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여기선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베오날드 도련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말이죠."
"흐으음~ 묘한걸. 나는 세인을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지만, 너는 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따르고 싶다는 거지? 나로서는 아직 관계가 빠르게 진행될 만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윽!'
의구심이 깃든 베오날드의 눈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지나갔다.
그 말대로 가까워지기엔 기간이 너무 짧았던 베오날드와 세인의 사이. 개인적인 호감은 있지만 결국 메이라 부인의 부하로서 베오날드의 신변을 지켜보기 위해서 다가간다는 생각도 있던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놀랄 필요 없다. 그저 가벼운 장난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상당히 복잡하니까 말이야. 그래도… 내가 호감을 가진 세인이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는 건 아주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
"예, 예. 도련님."
"아무튼 나는 세인 네가 스스로 잘 생각해서 결정한다면 그것을 존중할 것이다. 그럼 오랜만에 하지 못했던 수련이나 하러 가야겠군. 하이디, 따라와라. 기사에겐 수련이 필수이니까. 세인은 알테리오를 부탁한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베오날드는 하이디를 데리고 수련실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이 하이디만큼은 확실하게 자신의 부하를 자청한 젤커드 자작의 딸인 만큼 다른 고민할 거 없이 곧바로 신경 써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말데로브 경이 마련해 준 수련방이다. 보안과 방음이 철저하지. 즉, 안심하고 단련할 수 있으며 수련 방법과 기술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저는 도련님에게 충성을 다할 겁니다."
"좋은 대답이다, 하이디. 하지만… 충성 하나만으론 나와 네가 이 험한 전장을 같이 넘어가기엔 힘들지도 모르니, 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어쩌면 너의 가문에 대한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진실 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나?"
"혹시… 검술과 마나 호흡법에 대한 것입니까?"
"감이 좋군. 그래, 무가(武家)에 있어선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재산이자 기밀이라 나는 아주 조심해서 너에게 물어보고 있는 거다. 안 되면 안 된다고 해도 된다. 그러면 이야기는 거기까지이니."
베오날드는 지금 선을 명백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자신의 편 안에서도 자신의 지식과 기술, 능력을 나눠 줄 수 있는 선 안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다.
예의 있고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하이디는 그의 눈빛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저는 그, 가문의 비밀이 될 만한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마나 호흡법은… 기초 중의 기초적인 것이고, 무기 사용법은 기본적인 베기, 찌르기 같은 것만 반복했습니다."
"그런가?"
"예."
딱히 거짓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자질이 있고 신체 조건이 좋아도 결국 하이디는 여성. 후계자 문제가 곤란해지거나 아니면 영지 내에 다른 혼란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젤커드 자작이 제정신이면 마나 호흡법을 정식으로 가르치거나 가문의 무예를 가르치진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좋아. 그럼 어디 서로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 수 겨뤄 볼까? 무기는 뭘 쓰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확인하기 전엔 그것을 순수하게 믿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아, 장창을 선호합니다."
베오날드는 수련실 벽에 걸려 있는 무기 중 장창을 꺼내 던져 주었다.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라는 듯 날이 아주 잘 갈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베오날드는 저번에 젤커드 자작을 상대할 때, 하수를 상대로 힘 조절이 하는 게 힘들었는지 일부러 목검을 선택했다.
"그럼 전력을 다해서 와라. 죽을 생각으로 덤벼도 좋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네 손에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내 한계인 거지. 걱정 마라. 여기서만 말하는 거지만, 나는 네 아버지보다 더 강하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좋아, 이걸로 자연스럽게 아까 전 말이 거짓인지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겠군.'
베오날드는 사람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는다.
말에 따른 제반 사항이나 상황,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언제나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이디가 정말 기본적인 마나 호흡법과 기초적인 병장 기술만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련을 신청한 것이다.
"그럼! 갑니다!"
"그래, 전력으로 와라!"
"흠!"
콰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련실 바닥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하이디는 그 큰 키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속도로 베오날드를 향해서 창을 휘둘러 왔다.
무장은 단단히 한 데다 오러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결국 가주인 젤커드 자작의 딸이니 그보단 약할 거라 생각해서 긴장을 늦추고 있던 베오날드였는데, 하이디의 속도와 힘은 예상 이상이었다.
'뭐야, 이거?'
"하아아아아아아앗!"
그래서 그녀의 움직임을 놓쳤고, 그래도 그동안의 단련이 무색하지 않은 듯 간신히 자신에게 떨어지는 창을 피했지만 수련실의 바닥은 마치 운석에라도 맞은 듯 파였고, 돌조각을 뿌리면서 폭발했다.
베오날드는 정말로 충격을 받은 듯 그녀를 바라보는데, 이 위력도 위력이고 방금 속도도 모두 그녀가 말한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야. 실제로....'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오러는 아주 미약했다.
아주 하찮은 기초 중의 기초 마나 수련법으로 단련한 기사급도 되지 않을 만큼의 오러인 건 확실했다.
그러나 그녀가 폭발시키는 기량은 그 오러에 맞지 않게 엄청난 위력과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는 건 곧 이것이 그녀의 순수 무력(武力)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베오날드는 감탄하며 손을 들어 달려오는 그녀를 제지하고는 칭찬의 말을 내뱉었다.
[44화]
"세상에! 정말 놀라워. 그 나이에 어떻게 이 정도 기량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어릴 때 혹시 자작이 뭔가 특별한 걸 먹이거나 무슨 마법적인 조치를 취했나?"
"…아, 아뇨. 그… 기초적인 마나 호흡법이랑 단련만 했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런데 어떻게 자작이 이 정도 기량을 가진 널 나에게 보낸 거지? 말이 안 되지 않나? 이건 거의… 중급 기사의 역량인데?"
"그게 저… 제가… 일부러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님께서 마나 호흡법과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알려 주셨지만 오라버니라든가… 남동생들은 제가 강해지는 걸 반가워하지 않았거든요. 일부러 초급인 척, 체구만 큰 허당인 척… 행동했습니다."
언뜻 보면 젤커드 자작이 그녀의 자질을 인정하고 갑주를 입히고 기사로 키워 주는 것 같았지만, 엄연히 한계를 두고 있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따른 투자를 해야만 했지만, 마나 호흡법은 오직 기초 레벨만 가르쳤다.
'원석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만, 결국 입에 발린 거짓이었나? 아니지, 무가의 전통과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도 파격적인 조치라는 건가?'
즉, 젤커드 자작도 결국은 어디 시집보내기도 애매한 그녀를 놔두자니 아까워서 이거라도 시키기 위해서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난세라서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전통 무가인 젤커드 자작가에서 여성인 그녀가 엄연히 남성들의 전유물인 기사의 영역에 들어오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무리들도 있을 것이다.
"더 강하다는 걸 보여 준들… 제게 향하는 불쾌한 시선만 늘어나고, 또 너무 강하다는 걸 들키면 아버님도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군. 너희 가문에 대한 말은 함부로 못하겠지만 아무튼 대강 사정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그 재능을 시원하게 보여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그저… 저, 저에게도 그렇지만 메이드인 세인 양을 존중하시는 것을 보고 도련님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정도의 재능이다. 전후 사정 따위 상관없지."
겉으로는 이래도 베오날드는 자신의 계산을 넘어선 재능을 가진 하이디를 보며 표정 관리를 하느라 괴로워하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하는데, 기쁨을 참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제국의 정권을 잡은 노이멀 공작 시절, 황실의 힘을 빌려서 횡포를 부리는 만큼 황실 기사단을 비롯한 하부 조직들의 관리와 친목 유지는 필수였다.
거기에 노이멀 가문이 원했던 마나 호흡법과 검술의 습득, 그리고 계속해서 도전해 오는 다른 귀족들로부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선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진 인물들을 포섭해야 했기에 그는 무가 사람들이나 황실 기사단을 통해서 무가의 지식과 사람을 알아보는 견식을 배워 놓았다.
'맙소사!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런 대박이 뽑힐 줄이야! 이 정도면 못해도 제국의 장군감인데?'
"도련… 님?"
"아, 잠시만 생각하느라. 그게… 이 정도의 재능일 줄은 몰라서 너무 놀라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고 해야 하나?"
"…아름답다니요. 그저… 흉흉한 모습인데...."
"흉흉하기는! 아! 그 마나 호흡법은 기초만 배웠다고 했었지? 그리고 다른 무예는 배우지 않았다고? 아무튼 혹시 나에게… 네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 있느냐? 그렇다면 그 찬란한 재능을 반드시 빛나게 해 주… 아니지! 내가 보여 준 게 없으니 이 제안은 성급하겠군. 그러면 보거라.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의 값어치를!"
베오날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러난 다음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오러를 끌어 올리고,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검술 중 가장 어렵고 화려한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 십식(十式)-쌍두사'를 펼쳤다.
본래는 더 빠른 속도로 해야 하지만, 보고 있을 하이디를 배려해서 일부러 속도를 살짝 늦춰 베기를 보여 주었다.
"이게… 뭡니까? 아!"
일부러 속도까지 늦춰 주었기에 겉보기엔 자신의 눈앞에서 검을 한 번 휘두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아주 잠시 뒤, 양 볼에서 느껴지는 후끈함, 거기에 피가 동시에 흘러내리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도련님? 부, 분명 한 번이었을 텐데...."
"어떻게 되긴~ 그러니까 검법이지. 아, 그리고 상처는 걱정하지 마라. 흉터가 남지 않게 치료해 줄 테니. 사실 이건 몸으로 체험하는 게 가장 빨라서 말이다. 아무튼 이번 건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해서 속도를 늦춘 거고… 본래는! 흠!"
그 순간 하이디의 눈에는 보랏빛 오러의 잔영만이 남았고, 어느새 자신의 양 볼에 흉터가 하나씩 더 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의 그 차갑고 뜨거운 고통과 함께 그녀는 베오날드가 지닌 검술의 수준이 자신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수하게 감탄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차원이 다른 검술을 직접 체험한 것은 물론 베오날드의 저 여유 있고, 고고한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든 것이었다.
"무지한 제게 이런 배려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저 하이디, 도련님에게 이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바치는 믿음과 충성만큼 너 또한 나에게 은혜를 입을 것이다. 괴로운 일, 슬픈 일이 있더라도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거라. 나는 네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뿐만 아니라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건 비단 기사로서의 삶뿐만이 아니다. 정말 찬란히 아름다운 하이디, 네 마음만 허락한다면 너와 가족이 되어 모든 영광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예?"
베오날드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하이디는 귀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얼굴은 충분히 미녀상이었지만, 여성적으로 보기 힘든 큰 키와 체구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담조차도 오가지 않은 그녀는 이런 돌직구와 칭찬엔 전혀 내성이 없었다.
심지어 올해 열일곱, 꽃다운 소녀 아닌가? 내색은 안 해도 나름 연애 같은 것을 동경할 나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준수한 외모에 자신의 이상형인 단련된 체구와 강한 무력, 귀족으로서도 아버지와 견줄 정도로 감각까지 뛰어난 베오날드의 고백은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는데, 문제는 너무 강렬한 자극이었기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그그게! 그게! 그게! 저기! 너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그게! 이, 일단 집에… 물어봐야 되기도 하고… 그… 말씀은 너무나 고맙지만… 으으...."
'뭐, 결국은 어린아이지. 그 점이 귀엽긴 하지만~'
"으으으으...."
오버히트.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뇌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베오날드는 표정과 눈빛 관리를 하면서 그녀의 귀여운 반응을 즐겼다.
전생에 가주가 된 백작 시절부터 그는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연애에도 매우 열정적으로 힘을 써 왔다.
"그렇지. 너무 급한 이야기였구나. 인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도 한순간에 결정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데.... 그러면 일단 보류하고, 네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마."
"예… 감사합니다."
'뭐, 밀어붙이면 여기서 잠자리까지 갈 수 있겠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망할 벨릭스 개자식.'
그러면서도 여성에 대한 배려심은 갖춘 베오날드였는데, 그가 이런 연애 및 결혼 방식을 택한 것은 부친이자 선대 가주인 벨릭스 때문이었다.
여성을 그저 후계자를 생산하는 기계로만 보고, 심지어 영지 내 여성들에게서 자신의 아이 한 명을 세금으로 거둘 정도로 후계자에 집착하던 악마 같은 행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원치 않은 임신. 반항하면 권력이 가능한 선에서 그 여자의 가족들을 죽이거나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협박하는 건 물론 영지 추방 등등, 자신이 그런 각종 악독한 수단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망할 아버지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는 베오날드였다.
'…다른 건 귀족으로서, 가문으로서 납득이 가지만 이건…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어.'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베오날드였지만 이것까지 본받아 버리면 그 지독하게 싫어하는 벨릭스와 자신이 다를 게 없어지는 걸 알기에 연애, 결혼, 혈족 생산의 문제만큼은 그와 완전히 반대의 노선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 귀여운 아가씨의 재능을 개화시키는 게 먼저이니 말이야.'
베오날드는 그렇게 붉어진 얼굴에 부끄러움과 혼란으로 가득한 표정을 한 하이디에게 본격적으로 자신이 아는 옛 제국의 황실 기사단의 마나 호흡법과 황실 기사단의 무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한데 노이멀 가문의 검법이 아니라 황실 기사단 것을 알려 주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논리로, 아류 노이멀 가문엔 창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타고난 무의 재능이 있는 것을 알기에 굳이 더 약한 걸 가르칠 필요 없이 제대로 된 것을 가르쳐도 되는 것이었다.
"자, 그럼 지금 가르쳐 준 마나 호흡법부터 천천히 해 보거라. 지켜봐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남에게 함부로 알려선 안 되는 건 알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이디가 앉아서 마나 호흡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베오날드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사람이란 정말 신기하게도 가장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기억은 꼭 이런 순간에 같이 딸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벨릭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하이디에게 대하듯 연애와 결혼에 관해선 최대한 여성들을 배려하기로 한 베오날드였지만, 세상일엔 어디까지나 예외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은 지금 베오날드의 생애에 오점으로 남아 있었다.
'후우~ 가능하면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은 떠오른다니까… 그… 여자.'
정실, 첫째 부인. 이 자리는 상대에 따라서 가문의 명예를 상승시킬 수 있으며 더 큰 지위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위치였기에 오로지 정치, 권력적인 면모만 따져야 했다.
그것을 따지지 않기엔 너무나 큰 가치와 메리트가 존재했기에 베오날드도 싫었지만 가문과 권력을 위해서 애정, 사랑, 계약 모든 것을 무시하고 한 결혼이 존재했던 것이다.
딱 한 명, 부부가 되긴 했지만 부부로서 취급한 게 아닌 그저 가문을 위한 사다리로 취급한 여자. 이렇다 할 재능이나 매력, 능력도 없고, 오로지 출신 가문만 보고 결혼한 여자.
장식용 꽃처럼 취급하고 마음 따위 주지 않았던 여자.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고 화내기라도 했으면 죄책감이라도 덜하련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원망하지 않은 여자.
하나 그랬기에 이렇게 죽고 나서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이번에는…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
"도, 도련님! 뭔가! 이거 너무 굉장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던 마나 호흡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자신이 배웠던 흔해 빠진 마나 호흡법과 대륙을 정복했던 제국 황실 기사단이 쓰는 마나 호흡법의 차이는 저 드높은 하늘과 땅속 지하급이었기에 그것을 느낀 하이디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베오날드는 그녀가 계속 집중하도록 지적하며 하이디가 자신의 강력한 창으로 단련되길 기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