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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불청객

"포상이요?"

"이미 말하지 않았나,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자네들에게는 적절한 포상이 있을 거라고. 아무렴 겨울성에서 자네들의 노고에 보답하지 않을 거라 여긴 건가?"

그러고 보니 얼핏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그리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일단 준다고 하니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정확히 어떤 포상입니까?"

"포상금은 총 15골드고, 그중에서 벨이 10골드, 알리시아가 5골드일세. 또한 자네들 모두에게 한 달간의 포상 휴가가 주어질 거네."

10골드의 포상금은 솔직히 말해서 지금 시점의 나에게 있어서 그리 큰 숫자는 아니었지만, 당연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았다.

거기다가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휴가가 한 달이라고요?"

"그렇다네. 고생한 자네들에게 걸맞은 휴식이라고 볼 수 있지."

무려 한 달 동안의 파격적인 휴가.

이는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소득이었다.

겨울성은 마경과 인접한 만큼 강해질 수 있는 무수한 기회들이 널려 있었고, 한 달은 그 기회 중 하나를 쟁취하게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휴가는 제가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일세. 지금 당장도 자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 주지."

과연 에드릭다운 호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히 한 달이라는 시간은 매우 유용하고 또한 좋은 기회였지만, 적어도 지금은 휴가를 사용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보는 게 맞겠지.'

내가 이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마경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장 내가 가진 게 많기는 해도, 아직은 마경에서 생존을 자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변종이라는 변수까지 생각한다면 마경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아.'

최근에 등장한 변종은 나로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 조심할 수 있는 건 조심하는 게 좋았다.

통제되지 않는 변수는 늘 예상치 못한 위험을 초래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휴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말하게."

에드릭이 껄껄 웃으면서 슬쩍 알리시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 자네는?"

"저도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알겠네. 언제든지 말하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하게."

"저에 대해서 난 소문, 혹시 대장이 한 짓입니까? 우레의 마법사니 뭐니 하는 거요."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설마 내가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후안무치한 인간으로 보였는가? 안심하게. 내 자네의 공을 널리 알렸으니 말이야."

"...."

아무리 봐도 나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한 것 같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괜히 이것에 대해서 더 반응을 해 주었다가는 재미가 들린 에드릭이 더 이상한 소문을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 말은 모두 끝났나?"

"더 있겠습니까?"

"그것참 다행이군."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 * *

다시금 훈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다만,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나날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알리시아의 존재 때문이었다.

"어디 가요?"

"...화장실."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안 돼."

업화의 마법사 토벌 이후부터 알리시아는 이상할 정도로 나를 쫓아다녔고, 이 광경을 처음 보는 콘란과 알비노는 그 광경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둘이 눈이라도 맞았나?"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뭔데?"

"나야 모르지."

"그나저나 우레의 마법사라... 참 어울리는 별명이군."

"동감한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나날 속.

간간이 겨울성을 향한 마수들의 공격이 있기는 했으나, 제4 특무대까지 출동해야 할 정도로 특수한 상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제4 특무대 자체가 특수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보니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억지로 출동시키는 것보다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게 상부의 판단이라고 하던가.

'나로서는 잘된 일이지.'

어쨌거나 그 덕분에 나는 그동안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면서 중간중간에 익명 게시판을 살피며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역시나 변종에 대한 정보였다.

-김수박 : 제국 동쪽 상황 괜찮냐? 거기 요즘 변종 출몰한다던데.

제국 동쪽에서의 변종 출몰 소식.

당연히 그에 대해서는 여러 유저가 관심을 가지고 댓글을 달았다.

-익명21 : 변종? 동쪽? ㅇㅋ 간다.

└김수박 : 보통 변종 아님. 네임드급이야.

└익명21 : 원래 변종이 전부 네임드급 아니었음? ㅋㅋ 새삼스럽게.

└김수박 : 그러니까 그중에서도 특출 난 놈이라고.

└김수박 : ...아니다. 그냥 맘대로 하셈.

-히히힝 : ㅋㅋ 체념하는 거 개 웃기네.

-츄르릅 : 수박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위험한 놈인듯? 저번에도 변종 잡는다고 깝치던 놈 하나 안 보이던데.

-폴인 : ㅇㅈ ㅋㅋ

변종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익명 게시판 유저들에게 있어서 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변종이라는 존재 자체가 승천석 파편에 의해서 변질된 마수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변종을 잡는다면 승천석 파편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승천석 파편.

혹은 ■■■ 파편.

그것은 이 세계에서 이방인인 익명 게시판에 있는 유저들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물건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단서가 바로 승천석 파편, 즉 ■■■ 파편이었기 때문이다.

승천석 파편은 이 세계의 가장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 또한 변종에 대해서 관심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뒤로 미뤄 두었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변종들은 상대적으로 본래 종 자체가 지닌 강함이 그리 강하지 않은 개체들이었으나, 만약 진짜배기 마수들의 변종을 만나게 된다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굳이 급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겨울성에 머물다 보면 변종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

마경과의 국경.

그 이야기는 곧 마수가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장소라는 뜻이었고, 곧 다른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서 찾아다니는 변종을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게 꼭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변종에 대한 건 잠시 접어 두고서 나는 곧 다른 게시 글로 시선을 옮겼다.

비단 변종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익명 게시판 내에는 꽤 양질의 정보가 많았으니 시간이 있을 때 틈틈이 살펴 두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익숙한 세계임과 동시에 더없이 낯선 세계다.

얼핏 모순적인 말처럼 들릴 수 있으나, 실제로 그러했다.

그렇기에 정보를 습득하는 걸 게을리해서는 안 됐다.

-익명7454 : 하... 집 가고 싶.

-얼굴다탔어 : 남쪽 진짜 더워서 못 있겠다. 기회 생기면 북쪽으로 튀어야지.

-뉴들박77 : 저번에 온 뉴비 아직 살아 있음? 있으면 답글좀.

물론 익명 게시판 특성상 양질의 정보보다는 뻘글의 빈도수가 월등히 많기는 했지만, 나는 익명 게시판을 살피기를 멈추지 않았다.

-추측성뇌피셜3 : 뉴비 사냥꾼,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찰.txt

음, 이건 꽤 괜찮네.

-마법사114 : 저번에 나타났다던 업화 마법사인가 지금 어디 있음?

죽었는데.

-김박사 : ■■■ 파편의 경도와 강도에 대한 몇 가지 간단한 실험.

이건 조금 재밌을 수도.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적당한 수준의 정보는 꽤 많아.'

그러던 도중이었다.

내가 익명 게시판에서 익숙한 닉네임의 유저를 발견한 것은.

-루나 : 루나의 요리 시간) 오늘은 치킨 튀겨봄!

루나.

왜인지 모르게 나를 찾고 있었던 익명 게시판의 유저.

특별한 내용의 게시 글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루나라는 인물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기에 나는 잠시 루나의 게시 글을 살폈다.

-루나 : 오늘따라 날씨가 좋넹!

-루나 : 오늘 사냥 인증.

-루나 : 배고프당... 오늘은 카레 해 먹어야지.

'...음?'

그러던 나는 곧 어떤 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루나가 작성한 게시 글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뻘글을 쓰는 건 평소와 같았으나, 그 패턴들에서 한 가지 변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예전에 보았던 루나의 게시 글 중 대부분은 항상 누군가를 찾는 게시 글이었고, 그 대상은 게시판 내의 반응이나 여러 정황상 나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더 이상 카인을 찾거나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우연인가?'

그토록 카인을 찾던 루나가 더 이상 카인을 찾게 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는 카인을 포기했거나.

혹은, 이미 카인을 찾았거나.

이 세계에 카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전자일 가능성이 컸으나, 나는 왜인지 마냥 그렇게 여길 수만도 없었다.

루나의 게시 글이 변한 시기.

그 시기가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매장에서 하이마의 펜던트를 손에 넣은 시점과 거의 일치해.'

하이마의 펜던트는 카인이 직접 지니고, 또한 멸망룡과의 일전에서도 사용했던 아이템이다.

내가 그 아이템을 손에 넣기 무섭게 애타게 카인을 찾던 루나의 행동이 변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과연 이 모든 걸 우연이라고 치부해도 되는 걸까?

'흐음....'

루나의 행동이 갑작스레 변한 게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하이마의 펜던트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까지와는 달리 루나에 대해서 주시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야. 혹시라도 어떤 행동에 나설 것 같다면 나도 대응에 나서야 해.'

루나가 익명 게시판에서 보이는 카인에 대한 감정은 명백히 호의였으나,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법.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 호의가 진심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섣부르게 루나에게 접근했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혹시 아는가? 루나의 존재 자체가 카인을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지.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지.'

그렇게 루나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를 한 나는 다시금 익명 게시판을 살폈다.

혹시나 나에게 또 위협이 될 수 있는 정보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루나 외의 변수를 발견한 건.

아니, 오히려 관점에 따라서는 이쪽이 훨씬 더 큰 변수라고 볼 수 있었다.

루나 같은 경우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변수였지만, 지금 생겨난 변수는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으니까.

-익명999 : 혹시 아이추웡 님 아직 계심?

처음 본 게시 글은 그저 아이추웡의 행방에 대해서 묻는 글이었다.

아이추웡.

물의 보옥으로 함정을 파고서 기다리다가 나에게 죽임을 당한 유저.

'이제 와서 아이추웡을 찾는다라....'

당연히 나는 이 게시 글을 무시했고, 해당 게시 글의 주인 또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글은 묻히는 듯했다.

또다시 그 글이 올라오기 전에는.

-익명999 : 아이추웡 본 사람?

불행히도 이번에는 제법 성과가 있었다.

아이추웡에 대해서 아는 유저가 나타난 것이다.

-익명123 : 아이추웡? 마경 쪽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칠드런 : 뭐, 무슨 보옥 사용법 물어보지 않았었나?

-gkwtr : 아, 님, 혹시 겨울의 보옥인가 먼가 찾고 있는 거임?

적지만 댓글이 달리긴 했고, 그 댓글은 아이추웡이 마경 쪽에 있다는 정보를 익명999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때부터는 이미 내가 막을 수 없는 흐름이 생긴 뒤였다.

-익명999 : 흠... 정보 ㄱㅅ 함. 직접 가보는 게 좋겠네.

-익명999 : 북부행 출발.

-익명999 : 북부 진짜 조옷나 춥네... 온돌도 없는데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거냐?

-익명999 : 곧 겨울성 도착.

겨울성에 불청객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42화 불청객 (2)

일단 지금까지 익명999가 익명 게시판에 작성한 게시 글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익명999가 겨울성까지 찾아온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아이추웡이 남긴 흔적.

그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추웡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함정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정말로 유산이 되어 버린 그 흔적을 찾아서 새로운 유저가 난입한 것이다.

이 일련의 사태는 나에게 어느 정도 생각할 거리를 줄 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섰어야 했나?'

지금껏 나는 익명 게시판 내에서 돈을 벌기 위한 질문 게시 글 활동 등을 제외한다면 별도의 게시 글이나 댓글을 남긴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 익명999가 겨울의 보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게시 글에도 그러했다.

웬만해서는 소위 말하는 눈팅족을 유지했다는 뜻.

굳이 익명 게시판 내에서 활동하거나 어그로를 끌어서는 내가 볼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그 덕분에 지금껏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미 경험했듯이 익명 게시판 속 유저들은 별세상 속 이들이 아닌, 분명히 나와 같은 세계를 살고 있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한다면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 나한테까지 그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겪게 될 일 역시도 그러한 외면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움직이기에는 늦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내가 움직이지 않았기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섣부르게 움직이는 건 더 위험했다.

익명999가 말하기를 곧 겨울성에 도착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곧 외부에서 찾아오는 방문자가 있을 터.

겨울성 자체가 상당히 폐쇄적인 환경을 지니고 있다 보니, 외부인이 있다면 어떻게든 티가 나게 되어 있다.

일단은 그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외면할 수는 없어.'

이미 아이추웡의 전례로, 유저들이 그저 선한 목적이나 뻘글 용도로 익명 게시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다.

어떤 게시 글은 특정한 목적성을 지니기도 한다.

그렇기에 익명999의 게시 글 역시도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또다시 외면한다면 나는 다시금 그 외면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가만히 있거나, 움직이거나.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서둘러!

-짐수레를 더 가져와!

-다들 움직여!

왜인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나 또한 막사 밖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막사를 나서니, 남문 쪽에서 한창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숨결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상자들을 품에 들고서 마차에 가득 쌓여 있는 짐들을 내렸다.

겨울성에 있는 병사들 역시도 그들을 도와서 짐들을 받아서 한곳에 정리했다.

"한슨! 그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예, 알겠습니다!"

나는 현장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경비조장을 향해서 슬쩍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자네로군."

"오랜만입니다."

경비조장이 나를 보고는 알은체했다.

지난 임무 이후, 에드릭이 나에 대해서 제법 잘 말해 주었는지 경비조장은 나에게 꽤 살갑게 대해 주었고, 실제로도 오다가다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일단 이 정도 질문은 해도 무시당할 사이는 아니라는 소리다.

"요즘 우레의 마법사라 불린다지? 겨울성에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

"허명일 뿐입니다."

"하하, 역시 마법사답지 않다니까. 에드릭 경도 자네가 마법사답지 않다고 하더군."

"그건 그렇고, 무슨 일입니까?"

"별일은 아니고... 페가수스 상단이 막 도착했다고 해서 말이야."

"페가수스 상단이요?"

페가수스 상단.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상징으로 삼고 있는 상단으로서, 나도 알고 있는 상단 중 하나다.

페가수스 상단은 제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건 물론이고 타 국가와의 교역 역시도 주도하는 거대 상단이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페가수스 상단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정기 교역일세."

"아...."

그 말만으로도 나는 하필이면 지금 시기에 페가수스 상단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겨울성 크로이츠는 제국에서 생산되는 온갖 물자들이 소비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국 최대의 마수 소재 생산지이기도 하다.

마수 소재는 상태나 등급에 따라 달라도 대부분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동시에 겨울성 크로이츠는 늘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한다.

팔 게 많고, 살 것도 많은 곳.

이런 매력적인 거래처를 돈 냄새라면 귀신같이 맡는 상인들이 못 맡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연일 리는 없겠지.'

익명999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겨울성 내에 아이추웡을 비롯한 다른 유저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여행자로서 홀로 겨울성에 방문하기보다는 페가수스 상단을 이용하는 것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명료했다.

"쯧."

유감스럽게도 겨울성에 찾아온 불청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 * *

겨울성 크로이츠는 겉보기와는 달리 외부인에 대해서 그리 배타적이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혹한의 기후를 가진 데다가 마경과도 인접해 있는 북부 지대까지 오는 여행자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하는 유저들까지도 북부는 그리 선호하는 지역이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북부는 외부인의 방문에 대해서 배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환대하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페가수스 상단 여러분을 모두 환영합니다."

페가수스 상단의 방문에 겨울성 크로이츠에서는 무려 성주인 변경백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환대했다.

평소 변경백이 겨울성 내에서조차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오오, 변경백께서 직접 나오셨군!"

"저쪽에 계신 분이 변경백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모를 만도 하군. 맞네. 크로이츠의 성주이신 헨리크 볼츠만 변경백님이시지."

"헨리크 볼츠만... 변경백이라고요?"

"허... 아무리 입대한 지 얼마 안 됐어도 그렇지, 설마하니 변경백님의 존함도 몰랐나?"

변경백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이로써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내가 알고 있는 변경백과는 달라.'

내가 알고 있었던 겨울성의 변경백은 알베르트 볼츠만 변경백이라는 이름의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었다.

반면, 지금 모습을 드러낸 헨리크 볼츠만 변경백은 내가 알고 있는 변경백과는 전혀 달랐다.

"혹시 전대 변경백님은 누굽니까?"

"응? 아, 현 변경백님의 조부이신 알베르트 볼츠만 변경백님이시지."

역시는 역시라고 해야 할까.

일전에 게시판에서 얻은 정보대로, 지금의 시점은 내가 멸망룡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난 한참 후였다.

아무리 머리가 희끗했다고는 해도, 그 건장했던 변경백이 죽고 나서 한참은 시간이 흘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흐음.'

기회가 된다면 한번 현 변경백인 헨리크 볼츠만 변경백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겨울성에서 꽤 오래 지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나는 다시금 페가수스 상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려 겨울성의 성주가 직접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페가수스 상단의 위용을 알 수 있었다.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는 겨울성이지만 이번 교역을 기념해서 무려 성주가 직접 곳간을 열어서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다.

제4 특무대에도 술과 고기가 지급됐다.

평소에 먹던 스튜에 들어 있는 몇 조각이 아니라, 정말로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수준의 고기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순수하게 이 호사를 즐기지 못한 건, 역시나 지금도 꾸준하게 업데이트되고 있는 익명999의 게시 글 때문일 것이다.

-익명999 : 일단 오긴 왔는데... 여기부터가 노답이네

-익명999 : 아이추웡 님 진짜 죽었나? 소식 아시는 분?

안 그래도 확신에 가까웠던 익명999의 겨울성 방문이 이제 확실로 바뀌었다.

지금 익명999가 겨울성 안에 와 있다.

그것도 페가수스 상단의 동행자 중 한 명으로서.

"음."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익명999가 어떤 인물인지 나는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정말로 그 목적처럼 순수하게 물의 보옥을 노리고서 온 자인지, 아니면 그와 더불어서 아이추웡이 지녔을 터인 승천석 파편까지도 노리고 있는 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는 인물인지.

지금으로서 나는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익명999가 나를 먼저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결과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택해야 할 자세는 한 가지뿐이었다.

마치 겨울성의 풍경처럼 동화되는 것.

처음부터 이곳의 병사였던 것처럼, 그러나 겨울성에 끌려온 지 얼마 안 된 범죄자답게 조금은 어색하게.

그게 지금 내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였다.

'한 가지 염려되는 게 있다면, 최근 겨울성 내에서 나에 대한 소문이 적지 않게 돈다는 점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최악의 경우에 익명999가 나를 찾아낸다면, 나 또한 어떤 결심을 해야 할 테니까.

* * *

성대한 환영식과 물자 거래가 마무리된 후, 페가수스 상단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겨울성 내에 거대한 캠프를 만들었다.

단순히 겨울성과 하는 직접적인 거래뿐만 아니라 겨울성 내에 있는 영지민이나 군인 같은 개인들과도 거래하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성주인 변경백과 합의가 되었는지, 제4 특무대 내에도 관련된 지침이 하달됐다.

"당분간 성내에 페가수스 상단이 머무를 걸세. 원한다면 그들과 개인적인 거래를 해도 좋아. 아니,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바일세."

그에 콘란이 머쓱해하면서 말했다.

"흠, 그...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빈털터리인데."

"음? 최근에 봉급이 나가지 않았나? 적지 않은 액수였을 텐데."

"...다 썼습니다만."

슬쩍 시선을 피하는 콘란의 말에 에드릭이 알겠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뭐... 자네의 개인사는 됐고,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다행히 물물교환도 받아 준다고 하더군. 특히 마수 소재 쪽 값을 잘 쳐주겠다고 하더군."

"마수 소재 쪽 값을 잘 쳐준다고 해도, 당장 가진 게 없습니다만."

"그것 또한 걱정하지 말게. 페가수스 상단이 겨울성에 머무르는 동안 대대적인 마수 토벌 작전이 벌어질 걸세. 이는 성주이신 변경백님이 직접 하달한 사안일세."

이 시기에 마수 토벌 작전이라니... 참으로 의도가 명확한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뭐, 그렇다 한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겨울성 내에 있는 군인들에게도 크게 나쁠 게 없었다.

겨울성은 모든 게 부족한 곳이다.

아무리 제국에서 파격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해도, 겨울성에서 소모하는 물자를 완전히 충족할 수는 없다.

그나마 풍족하다고 할 만한 게 바로 마수를 잡아서 생긴 소재였는데, 그건 다행히도 상당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페가수스 상단쯤 되는 거대 상단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서 직접 마경과의 국경까지 올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이해관계가 적절히 맞아떨어진 덕분에 페가수스 상단의 존재는 겨울성에 있는 군인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기회가 되어 주었다.

겨울성에서도 군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걸 보급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이런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에드릭이 말했다.

"자네들 역시도 개별적으로 마수 토벌 작전에 참여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참여해도 좋네. 아, 참고로 제4 특무대에는 단독 작전권이 있으니 개별 행동을 해도 크게 상관없네."

어딘가 에드릭의 말이 묘하게 느껴졌기에 내가 말했다.

"대장님은 안 가십니까?"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이래 보여도 꽤 바쁜 몸이거든."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흠, 그러면 우리끼리 가면 되나? 굳이 다른 곳에 끼어서 할 필요가 없잖나?"

콘란의 말에 알비노가 조소했다.

"내가 왜 네놈과 같이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응? 안 할 거야? 그러면 말고. 거기 너희 둘은 어때?"

콘란이 나와 알리시아를 향해서 물었다.

지금의 시점에 내가 정한 행동 원칙은 겨울성의 풍경에 동화되는 것.

당연히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도 가지."

"저도요."

나와 알리시아가 모두 동의하자, 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우리 셋이 가면 되겠군."

그에 알비노가 끔뻑이는 눈으로 나와 알리시아를 한 번씩 보더니 곧이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나도 특별히 함께해 주지."

"아니, 딱히 필요 없는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 자식, 안 본 사이에 조금 뻔뻔해진 것 같은데?

"그러면 전부 가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콘란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한번 크게 벌어 보자고."

43화 불청객 (3)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겨울성에 대대적인 마수 토벌 작전이 선포되었다.

지금껏 겨울성 내에서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서 성을 수비하고 있던 온갖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겨울성에 군인이 이렇게 많았나?"

그야말로 압도적인 인파에 입이 떡 벌어진 콘란의 말에 알비노가 말했다.

"외곽 임무로 나가 있던 부대까지 일시적으로 복귀한 거겠지. 그만큼 겨울성에서 이번 토벌 작전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고."

알비노의 말마따나, 현재 겨울성에는 페가수스 상단과 더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인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살을 에는 북부의 한파마저도 사람들이 만드는 열기에 덥혀 져서 시원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흠, 그렇군. 어쨌든 이러면 서둘러야겠군. 우리 사냥감을 다 뺏기겠어."

"제까짓 놈들이 해 봤자지."

"얼마 전까지 의무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해 놓고 허세는."

"네놈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의무대 침대가 그립나 보지?"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콘란과 알비노가 서로 으르렁댔으나, 언제나처럼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었기에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출발 준비는 모두 마쳤고, 남은 건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준비됐으면 이만 가지."

"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알리시아가 따라서 일어났다.

곧, 서로 으르렁대던 콘란과 알비노 역시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이봐! 같이 가!"

북쪽 성문은 현재 마수 토벌 작전에 참가하는 부대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에 우리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비교적 사람이 적은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비록 거리상으로는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저 인산인해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조금 돌아가더라도 빠르게 겨울성을 나서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남쪽 성문에는 아는 얼굴도 있으니 출입이 조금 더 편할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경비조장님."

"아, 벨 자네로군."

"또 뵙는군요.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응? 아아, 물론일세."

그 덕분에 우리는 늘어져 있는 줄을 기다리지 않고서 먼저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인맥 아닌 인맥이 조금은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무운을 빌겠네."

"예. 경비조장님도 무운을 빌겠습니다."

"무운은 무슨. 오늘도 밤새워서 출입 관리 하게 생겼네. 근무 취침은 시켜 줘야 하는 것 아닌지 원...."

"하하. 고생하십시오."

"자네도 수고하시게."

성문을 나서며 알비노가 무언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네놈 정도 되는 마법사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그래서 줄도 안 서고 바로 나왔잖아?"

"...정말로 너는 알 수 없군."

"너도 그래."

콘란이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디로 갈 셈이지? 나는 북쪽 지리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와 함께 자연스레 알비노와 콘란 그리고 알리시아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겨울성 인근에 있는 마수는 모조리 사냥당했을 테니, 겨울성 인근을 돌아 봐야 별 의미 없겠지."

"그러면?"

"우리는 마경으로 간다."

콘란과 알비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경이라니... 미쳤군."

"...진심이냐?"

이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경(魔境).

끝없이 펼쳐진 수해와 그곳을 거닐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마수가 살고 있는 터전이자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조차 않는 혹한의 기후를 지닌 제국의 최북단에, 겨울성 크로이츠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

그렇기에 일반적인 인식으로 마경은 인간에게 있어서 금역 중의 금역이었다.

"크게 걱정할 건 없어. 우리가 가는 곳은 마경의 외곽일 테니 위협적인 마수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실제로 마경이 금역이라 한들, 나는 이미 물의 보옥을 얻을 때 마경을 다녀온 적이 있다.

마경은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지만, 마수들의 활동 영역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 영역의 경계를 일종의 길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섣불리 마경에 들어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네놈이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알지만, 네놈을 믿고서 마경에 들어간다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 틈을 타서 겨울성을 빠져나가는 게 더 좋아 보이는데, 어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시탐탐 도주를 생각하던 알비노다운 말이었다.

실제로 에드릭 없이 겨울성 밖에 나와 있는 지금이라면 알비노가 그토록 원하던 탈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굳이 알비노를 막을 생각은 없었고 말이다.

"가려면 가라. 막을 생각은 없지만, 함께 떠날 생각도 없으니."

물론 알비노가 탈영한다면 남아 있는 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게 알비노처럼 늘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이와 함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아군의 존재는 적보다도 더 거슬리는 법이었으니.

거기에 더해서 여차하면 그냥 마수 토벌 중에 전사했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에드릭이라면 알면서도 속는 척해 주지 않을까.

"...대체 네놈 정도 되는 마법사가 무엇 때문에 겨울성에 남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이봐 덩치, 너는?"

"나는 남겠다."

"...남겠다고? 여기에서 병사 노릇이나 하겠다는 거냐?"

"있어 보니까 꽤 나쁘지 않더라고. 밥도 맛있고. 지긋지긋한 교단 놈들한테 쫓기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지 않겠어?"

"어이가 없군."

알비노의 시선이 알리시아에게로 향했다.

"너는?"

"저는 남을 거예요."

알리시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쯧. 하나같이 미련하기는...."

알비노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갈 건가? 간다면 막지 않겠다."

알비노가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겠다."

"언제는 간다더니?"

"네놈 정도 되는 마법사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겨울성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지, 그걸 알아야겠다."

"별 이유 없는데."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진짠데.

내가 겨울성에 남는 이유는 그저 이곳에 있는 게 훨씬 더 빨리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이곳에서라면 승천석 파편을 지닌 변종을 조금 더 자주 마주칠 수 있다는 점 정도일까.

"어쨌든, 정했으면 가자고,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

"...알겠다."

잠깐의 소란이 있기는 했으나, 상황은 결국 알비노의 탈영 포기로 결론이 났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저런 선택을 한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알비노를 지켜보기로 했다.

알비노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전력상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앞으로 얼마나 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멀쩡해 보이니 어느 정도까지는 버티겠지.'

솔직히 말해서 설사 버티지 못하더라도 그리 상관없었고 말이다.

비록 알비노가 같은 제4 특무대 소속이기는 해도, 어떤 전우나 동료라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나는 시선을 돌렸다.

"다들 준비됐나?"

"이제 가는 건가?"

"그래."

"흠, 마경이라... 기대되는군."

콘란이 한껏 전의를 끌어올렸다.

"...흥."

곁에 있는 알비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조금 전처럼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

마지막으로 알리시아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조금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가지."

마경으로 향할 때다.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경으로 가는 길로 예전에 썼던 지름길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 그런 지름길의 존재를 알려 줄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물의 함정을 만들어 냈던 물의 보옥이 지금 내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마경 외곽에 있는 마수들의 영역을 직접 돌파해야만 했다.

"...이봐, 이쪽 길 맞아?"

"맞다."

"아무리 봐도 위험한 길 같은데.... 마경으로 들어갈 거라면 차라리 이미 마수들이 토벌된 곳으로 가면 되지 않나?"

콘란의 말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겨울성에서의 대대적인 마수 토벌령이 선포된 후, 겨울성의 부대들은 겨울성 인근은 물론이고 마경이 있는 북쪽 지역까지 진출하며 마수들을 사냥했다.

이미 잘 닦인 길이 존재한다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능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으니까. 사냥감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아니겠지?"

"허어...."

콘란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이유는 있었지만, 이들에게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잠깐."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길이 얽히고 꼬여 있고, 그늘진 나무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사뭇 음산하다.

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익숙한 풍경.

그래, 확실하다.

"마경이다."

"벌써?"

"제국과 마경의 경계는 지도처럼 일직선으로 그어진 게 아니야. 인간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마수들의 영역이 시작되는 곳, 그곳부터가 마경이다."

애초에 제국에서도 그 영역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에 지도가 그처럼 대충 그려진 거지만 말이다.

"허, 마경이 이리 가까이 있을 줄이야...."

"제국 지도에 그려진 북부의 영토 중에서 겨울성의 영역을 벗어난다면 사실상 마경이나 다름없어. 어차피 마경이라는 것 자체가 마수들의 영역을 의미하는 거니까."

알비노가 끼어들었다.

"잘도 그런 걸 알고 있군.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마수를 사냥할 셈인가?"

"아니, 우리는 조금 더 들어간다."

"뭐?"

알비노의 눈썹이 꿈틀댔다.

"보통 마경 외곽에 있는 마수일수록 약한 마수로 알고 있다. 마경에서의 영역 싸움에서 밀려났기 때문이지. 그런데 어째서지?"

타당한 의문이었다.

그 말마따나 마경 외곽에 있는 마수들은 중앙에 있는 마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종들이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비교 대상이 중앙의 마수일 뿐이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쉬우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마경 외곽에 있는 마수들은 마수 간의 싸움에서는 밀려났지만, 반대로 인간이나 마법사와의 싸움에는 상대적으로 능해. 그렇게 적응한 종이니까."

지금껏 기나긴 제국의 역사에서 마경을 제국의 영토로 개척하려는 시도는 무수히 있어 왔다.

결과적으로 그 시도가 모두 무위로 돌아갔기에 마경이 마경으로 남을 수 있었고,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지금까지 마경의 외곽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마수들은 하나같이 인간에 대해서 적응을 마친 종들이라는 소리다.

비록 절대적인 강함은 그 안쪽에 있는 마수보다 못할지 몰라도, 상대하기에는 훨씬 더 까다롭다는 뜻.

알비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 마경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아무리 네놈이 대단한 마법사라 해도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일 텐데."

"답해 줘야 하나?"

"...됐다."

어차피 물었어도 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더 묻지 않겠다니 나도 말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그 순간.

"잠깐."

부스럭....

작은 소리였지만 남다른 기감을 지닌 제4 특무대원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쉭, 쉭쉭....

-시시싯!

어둠으로 물든 수해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명백히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의 소리였다.

마수.

이 영역의 주인들이 그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44화 불청객 (4)

"다들 준비."

내가 말하기 무섭게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쉭! 쉭쉭!

-쉬이이익...!

수해의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하고도 낯선 존재감.

평소였다면 영역 간의 경계에서 마수들을 마주할 일은 없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겨울성에서 벌이는 대대적인 마수 토벌 작전이 마수들의 생태에도 영향을 준 듯했다.

'본래였다면 이곳에서 외곽 지역 마수와 전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하게 되었다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외곽 지역 마수를 지나서 마경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한 건 같은 수고로 상대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 마수 소재를 손에 넣기 위해서지, 이것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으니까.

"망할! 한번 해보자고!"

"흥."

콘란이 흉성을 토해 내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거대 거미와 유사한 형태의 마수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Lv.2]

[네스큘라]

하나, 둘, 셋, 넷....

'눈에 보이는 게 일곱이니, 최소 그 두 배는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네스큘라는 거미를 닮은 모습답게 음흉한 사냥 방법을 지닌 마수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숫자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많을 거라 여기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저것들이 움직인다!"

콘란의 외침과 함께 네스큘라 무리가 우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기회를 엿보는 거라 여기겠지만, 네스큘라는 그런 무의미한 행동보다는 확실히 실속 있는 행동을 선호하는 마수였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네스큘라들은 우리를 돌면서 하얀색 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뭐야? 거미줄?"

"망할! 거미줄에 맞지 마라, 덩치! 묶이게 되면 그대로 끝이야!"

그나마 네스큘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한 알비노가 검을 휘두르며 날아드는 거미줄을 쳐 내려 했다.

그러나 네스큘라의 거미줄은 검에 베이기는커녕 오히려 검에 엉겨 붙으면서 순식간에 알비노의 검을 묶었다.

"망할!"

비단 알비노뿐만 아니라, 콘란과 알리시아 역시도 순식간에 무기를 붙들렸다.

아무리 날카롭게 베고 또 무겁게 베어도, 네스큘라의 거미줄은 층층이 겹치면서 점차 제4 특무대원들의 무기를 옭아맸다.

"...놔!"

이게 놈들의 사냥 방식이었다.

주위를 배회하면서 사냥감을 옭아매고, 마침내 사냥감이 무력화되었을 때 무리의 피해 없이 사냥을 완료하는 것.

이미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들에게서 살아남은 마수다운 교활함이 아닐 수 없었다.

"우오오!"

콘란이 악을 쓰면서 어떻게든 도끼에 엉겨 붙은 거미줄을 떼어 내려 했으나, 거미줄은 그럴수록 더욱더 엉겨 붙었다.

"이봐! 무슨 방법 없나?!"

콘란이 나를 보며 외쳤다.

"물론 있지."

"뭐? 그러면 당장 안 하고 뭐 해?!"

"안 그래도 할 거다."

거대 거미형 마수 네스큘라는 마경의 외곽에 자리를 잡은 마수답게 분명히 매우 성가신 마수다.

그러나 놈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불행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는 네스큘라에게 상극이나 다름없는 물건이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화염 속성을 지닌 물건이.

화르륵....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서 뽑혀 나온 업화의 송곳니가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건...."

업화의 송곳니를 본 알비노의 눈동자가 살며시 떨렸다.

마법에 꽤 해박한 알비노라면 이것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아봤을 터.

네스큘라의 거미줄은 분명히 성가시기 짝이 없는 능력이지만, 타오르는 업화 앞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내가 업화의 악마와 거래를 하고서 얻어 낸 마법은 매개체인 업화의 송곳니에 깃든 업화와 매개체에 닿은 업화를 다루는 것이다.

내가 업화를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런 상관 없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업화의 송곳니는 늘 타오르는 업화를 품고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지금처럼.

화르륵──!

업화의 송곳니가 휘둘러지기 무섭게 송곳니의 검신을 타고서 치솟은 업화가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네스큘라의 거미줄을 불살랐다.

그럴듯한 검술은 필요 없었다.

그저, 손에 들린 업화의 송곳니를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 주변에 있는 거미줄이 모조리 불타오르며 네스큘라가 만들어 낸 덫이 사라지고, 불길이 거미줄을 타고서 네스큘라들에게로 역류했다.

-뀌이이익!

-뀍! 뀍!

제 형제들이 역류한 업화의 제물이 되는 동안 영악한 놈 몇은 거미줄을 끊어 냈으나, 이미 네스큘라들 사이에서는 혼란이 번지고 있었다.

"뭣들 해?"

"으응?"

"움직여. 기회다."

그에 가장 빨리 움직인 건 알리시아였다.

"죽어."

평소와는 달리 묘한 살의를 띤 알리시아는 네스큘라들 한복판에서 마법을 터트렸다.

번쩍!

징벌 교단 이단 심문관의 마법.

단번에 시야를 앗아 가는 이단 심문관의 마법에 의해서 여덟 개나 되는 눈을 가진 네스큘라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뀍! 뀌이익!

-뀌릭!

그것을 일종의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으으... 이런 마법을 말도 없이 쓰는 게 어딨어?"

"정신 차리고 움직이기나 해."

"알았다고."

콘란이 반쯤 눈을 뜬 채로 알비노와 함께 네스큘라들을 향해서 달려갔다.

나 또한 상황을 주시했다.

'웬만하면 병기 소환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지.'

총이라는 무기는 여러모로 요란한 무기다.

총이 지닌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특히 총성 특유의 굉음 같은 경우는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도 들릴 정도로 거대한 데다가, 그것이 총성이라는 걸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특이하다.

만약 총성을 들은 게 이 세계의 원주민들이라면 그저 벼락이 친 굉음쯤으로 여기겠지만, 만약 현대인이 총성을 듣는다면?

단번에 내 존재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곳이 마경 외곽 지역이라고 해도, 절대적인 거리만 본다면 겨울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것만도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겨울성 바깥에 무수한 토벌대가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

'굳이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광고할 필요는 없지.'

물론 병기 소환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업화의 마법사 토벌을 통해서, 나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생겼으니까.

화르륵!

본격적으로 내가 싸움에 가세하기 시작하자, 업화의 송곳니에서 뿜어진 불꽃들이 넘실거리면서 네스큘라들 사이를 누볐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쐐애애액──!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선전수적순패(旋轉水的盾牌)'를 전개합니다.]

물의 방패가 네스큘라가 쏘아 낸 독액을 가볍게 막아 낸다.

거기에 더해서 몸놀림이 한결 가벼워지며,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휘둘렀다.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물의 보옥'에 의해서 '하이마의 저주' 효과가 강화됩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체 능력이 40% 향상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출혈'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크게 감소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신체 능력 향상.

업화의 송곳니가 만들어 낸 열기는 북부의 기후에 억압되어 있던 물의 보옥의 힘을 다시금 일깨웠고, 그 물의 보옥은 나를 지키고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하이마의 펜던트가 지닌 힘을 더욱더 증폭했다.

물론 그로 인해서 출혈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 역시도 더 낮아졌지만, 그거야 물의 보옥이 있는 나에게는 크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물의 보옥.

하이마의 펜던트.

업화의 송곳니.

그 세 개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서로의 효과를 증폭시켜 주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장비 간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괜히 익명 게시판에서 웃돈을 얹어 주면서까지 장비 세팅 문의를 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뀌이익!

-뀍, 뀌에이이...!

사방에서 번지는 업화와 제4 특무대원들의 공격에 네스큘라들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인간과의 싸움에 익숙한 놈들답게 전황이 불리하면 일단 도망치는 게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가 보이면 다시금 달려들겠지.'

물론 우리 또한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이놈들! 어딜!"

마수의 피에 흠뻑 젖은 콘란이 흉성을 토해 내며 네스큘라들의 뒤를 쫓았다.

-뀌이익!

콘란의 도끼가 춤을 추면서 네스큘라 몇 마리를 도륙한다.

"흥! 거미 새끼들 따위가!"

"...죽어."

알비노와 알리시아 역시도 그에 질세라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도망치는 네스큘라들의 등을 찔렀다.

-뀌이익!

-뀟, 뀌잇!

그러나 그 추격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도망친 네스큘라들이 수해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콘란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퉷! 더 안 쫓는 건가?"

"이곳은 놈들의 안마당이니까. 괜히 따라가면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 더 잡아도 의미 없기도 하고."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마수 토벌이 아니야. 마수 사냥이지."

"아."

그 말마따나 이미 여기에서 얻고자 한 건 다 얻었다.

굳이 더 잡아서 수고를 늘릴 필요는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정리하자고."

내가 남아 있는 네스큘라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그제야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가 네스큘라의 소재를 챙기기 위해서 각자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뽑아 들었다.

"휘유... 상태가 말이 아니군. 이렇게 타 버린 놈들은 상품성이 그리 없지 않나?"

"상관없어.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도 전부 가져가지 못할 테니."

"하긴."

업화에 그을린 네스큘라들의 가죽은 그 가치가 크게 떨어지기는 하지만, 애초에 네스큘라 자체가 가죽보다는 내장이나 다른 쪽에 더 가치가 있는 마수였으니 큰 상관은 없었다.

경지에 이른 사냥꾼들은 사냥할 때 마수의 소재가 최대한 상하지 않게 사냥을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그런 건 사치였으니 말이다.

알비노가 말했다.

"조금 전에 사용했던 게 업화의 마법인가?"

"그래."

"업화의 마법사와 마주하고서 업화의 마법을 손에 넣고서 돌아 왔다라.... 어이가 없군.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아니, 애초부터 업화의 마법을 다룰 수 있었던 거냐?"

"마음대로 생각해."

"괴물 같은 놈."

알비노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네스큘라의 사체를 손질하던 콘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벨, 원래 사용하던 마법은 왜 사용하지 않았지? 네 마법이라면 도망치는 놈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총을 소환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이유가 더 컸지만, 그것까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너, 설마...."

그러나 옆에 있는 알비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는지, 나를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아니, 아니다. 업화의 마법사를 잡았다더니 너도 무사하지는 못했나 보군."

알비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것 같았으나, 굳이 그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모든 마법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당연히 내가 평소에 사용하던 병기 소환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마법으로 보였을 테고, 지금 내가 병기 소환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 역시도 대가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로서도 병기 소환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어설프게 둘러대느니 저렇게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게 편했으니 말이다.

"괜찮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리시아가 나에게 다가와서 그렇게 말했다.

"멀쩡해."

"정말요?"

"어."

나를 대하는 알리시아의 태도가 얼마 전부터 달라졌다는 건 안다.

그리고, 그것이 업화의 마법사를 토벌하고 난 뒤부터였다는 것 역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한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유 없는 호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이유가 있는 호의라면 나로서도 나쁠 게 없었으니까.

특히 그게 지금처럼 누가 내 등 뒤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는 세상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으... 마수 사체는 언제 봐도 구역질 난단 말이지."

"시끄럽고, 마무리나 해, 덩치."

그렇게 네스큘라의 사체 손질이 거의 끝나 갈 무렵.

-꾸루루루....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괴음.

그러나 이 괴음은 명백히 네스큘라와는 다른 괴음이었다.

알비노가 말했다.

"피 냄새를 맡고 왔나 보군. 네스큘라의 울음소리가 아니야."

"네스큘라가 아니라고?"

콘란의 의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곧이어서 땅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이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쿵!

쿠웅─!

"저건...."

"망할! 준비해!"

굳이 어둠 속을 주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 거체는 자신이 지닌 압도적인 크기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으니까.

[Lv.5]

[배회하는 카수유]

네임드 개체.

단지 그뿐만이었다면 나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놈의 머리 위에 달린 뿔이 내 이목을 단번에 앗아 갔다.

'변종.'

그것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45화 불청객 (5)

배회하는 카수유.

비록 나도 처음 보는 네임드 개체였지만, 놈의 이름이나 행동 방식을 보았을 때 어떤 유형의 마수인지는 바로 곧장 알았다.

'영역 배회형 마수.'

마경에서 대부분의 마수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일 때고, 영역에서 피 냄새가 퍼진다면 얼마든지 다른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영역 배회형 마수 같은 경우가 그중 하나였는데, 놈들은 평소에는 은밀하게 마수들의 영역을 거닐다가 피 냄새 등의 흔적이 생기면 피 냄새가 난 영역을 찾아서 약해진 마수들을 사냥한다.

바로 지금처럼.

-크오오오오오오──!!!

카수유의 포효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콘란과 알비노는 물론이고 알리시아의 얼굴까지도 하얗게 질렸다.

무려 5레벨의 네임드 변종의 포효에는 능히 인간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흠.'

물론 우리가 지금껏 5레벨 개체를 잡아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에드릭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을 때다.

과연 에드릭이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끼리 5레벨 네임드 변종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차피 선택지는 없어.'

5레벨 정도 되는 마수가 작정하고 추격한다면 인간의 발걸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 세계에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들이 숱하게 있었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의 우리는 아니었다.

"온다!"

쿵!

쿠웅!

배회하는 카수유는 배회형 마수답지 않게 거대한 몸집을 지닌 마수였다.

보통의 배회형 마수들은 기회를 엿보는 사냥꾼의 습성을 지녔기에 날렵한 몸을 지닌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무래도 머리에 달려 있는 승천석 파편으로 인해서 어떤 변이가 일어난 듯했다.

'차라리 잘됐어.'

만약 놈이 날렵한 몸을 지니고서 어둠 속에서 기회를 엿봤다면 우리로서도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렇게 거대한 덩치로 대놓고 달려들어 주니, 대응하기에는 훨씬 더 수월했다.

그냥 정면에서 깨부수면 될 뿐이었으니까.

쿵!

쿠웅──!

카수유가 곧장 나를 향해서 돌진한다.

"피해요!"

비명 섞인 알리시아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서 정면에서 달려드는 카수유를 응시했다.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진대사가 크게 향상됩니다.]

전신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마치 피가 증발하는 듯한 열기와 함께 나는 아슬아슬하게 카수유의 돌진을 피해 냈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거리를 허용한 후에 피한 것이었다.

"지금!"

내 외침과 함께 한차례 돌진에 실패한 카수유를 향해 제4 특무대원들이 달려들었다.

"으랴압!"

선두에 선 건 콘란이었다.

콘란의 도끼가 무식할 정도의 기세와 함께 휘둘러지며 카수유의 등을 후려치고, 곧이어서 알비노의 손바닥이 카수유를 향했다.

"잃어라."

감각에 관여하는 마법.

-쿠우...?

아니나 다를까, 알비노의 마법이 적중하기 무섭게 카수유가 이상행동을 보였다.

마치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죽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알리시아가 검을 들고서 맹공을 퍼부었다.

비록 콘란에 비해서 한 번 한 번의 파괴력은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일찍이 보아 왔듯이 정식으로 배운 듯한 그 검술은 단번에 카수유의 급소들을 뱀처럼 찔러 댔다.

-쿠오오오오!!!

카수유가 괴성을 내지르면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우왓!"

"조심해! 덩치! 저 거체에 한 번이라도 휩쓸리면 끝이다!"

처음에는 주변에 있는 건 마구잡이로 휩쓰는 것에 불과했던 카수유의 몸부림이 점차 제4 특무대원들을 정확히 노리기 시작했다.

알비노가 펼친 감각 마법의 유효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대로 카수유가 다시 날뛰게 내버려 둔다면 아군 쪽에서도 만만치 않은 피해가 나올 터.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카수유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카수유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병기 소환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총기를 사용하면 총성이 어디까지 퍼질지 알 수 없을뿐더러, 애초에 저런 거체를 지닌 5레벨 네임드 변종에게 총기가 얼마나 통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급소를 노린다고 해도 총기로는 한 번에 끝내기에 어려워.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나에게 남은 방법 중에서 카수유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펼칠 수 있는 마법은 제한적이겠지만... 충분해.'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고서 조용히 업화의 마법을 일으켰다.

업화의 송곳니에 한정해서 일으킬 수 있는 작디작은 마법.

그러나 이 마법은 분명히 업화의 악마와 연결되어 있다.

곧, 이것을 매개로 삼는다면 새로운 계약을 선언하는 것 역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바로 지금처럼.

"약식 계약 선언."

이것은 공정의 천칭을 통한 정식 계약이 아니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계약.

그렇기에 단발성으로 끝나는 일시적인 계약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충분했다.

"계약의 대가는 배회하는 카수유의 피륙."

놈을 전부 먹어 치우게 해 주겠다.

화르륵...!

계약의 대가에 흡족이라도 한 건지, 업화의 송곳니에 깃든 업화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업화석척알지도(?火???地道)."

나지막이 울려 퍼진 주언과 함께.

쿠구구구구구...!!!

진정한 업화의 마법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건...?"

"뭐, 뭐야, 저게?"

내 손에서 치솟기 시작한 업화의 불길에 알비노와 콘란 그리고 알리시아의 몸이 굳었다.

"...어떻게?"

오만 가지 감정이 묻어나는 알리시아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로 나는 업화의 송곳니에서 치솟고 있는 마법을 통제했다.

[쉬쉿, 쉬쉬쉿...!]

업화로 만들어진 샐러맨더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카수유를 응시한다.

"먹어 치워, 전부."

[쉬쉿!]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업화로 이루어진 샐러맨더가 카수유의 눈을 통해 파고들었다.

-쿠에에에엑...!!!

카수유가 괴성을 내지르면서 몸부림쳤으나, 눈을 시작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한 업화의 불길은 사그라들기는커녕 순식간에 카수유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쉬쉬쉿!!!]

업화의 샐러맨더의 꼬리가 카수유의 코나 입 밖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끄룩, 끄루룩....

당연히 그 전신은 모두 업화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카수유의 기관지를 비롯한 내부 전체가 타올랐다.

싸움은 그게 끝이었다.

카수유는 얼마 버티지 못해서 쓰러졌고, 자신의 역할을 마친 업화의 샐러맨더 역시도 자연스럽게 연소되었다.

남은 건 흩날리는 잿더미뿐.

과연 업화의 마법답게, 지나간 자리에 재밖에 남기지 않았다.

[네임드 변종, '배회하는 카수유'를 처치하였습니다!]

['업화의 송곳니'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흩어지는 잿가루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콘란과 알비노였다.

"이게 대체...."

"...그 정도의 마법을 또 가지고 있었나. 이제는 놀라는 것도 지칠 지경이군."

콘란은 여전히 경악을 감추지 못했고, 알비노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알리시아였다.

"그거, 어떻게 된 거예요?"

"뭘?"

"업화의 마법. 어떻게 된 거죠?"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마치 업화의 불길이 비치는 것 같다.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정말인가요?"

알리시아의 눈이 보인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눈.

도대체 왜 나를 저렇게 보고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

"...믿을게요."

알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잠시 굳어 있을 때, 콘란이 카수유의 뿔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휘유... 이건 못 써먹겠는데? 전부 타 버렸잖아. 그나마 뿔이라도 남아서 다행인가? 이건 그을리지도 않았군."

변종의 뿔.

달리 말하면 승천석 파편.

당연히 저걸 다른 이에게 넘길 생각은 없었기에 내가 나섰다.

"그건 내 몫으로 받고 싶은데. 괜찮겠지?"

"뭐... 벨 네가 잡은 거나 다름없으니 이견은 없을 거다. 그렇지?"

콘란이 알비노와 알리시아를 향해서 동의를 구하듯이 시선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라."

"...저도 동의해요."

알비노와 알리시아의 말에 콘란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견은 없군."

"좋아. 그러면 이건 내가 챙기지."

본래였다면 예정에 없었을 소득이 손에 들어왔다.

물론 마수 사냥을 위해서 마경까지 왔을 때 이럴 가능성 역시도 어느 정도 의도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첫 사냥 때부터 변종을 마주할 줄은 몰랐다.

"그러면 돌아가지."

겨울성으로 돌아갈 때다.

* * *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길.

"으으... 더럽게 무겁군."

"...이번만큼은 동감이다, 덩치."

콘란과 알비노가 이를 악물고서 마수 소재가 잔뜩 실려 있는 임시 수레를 끌었다.

물의 보옥으로 바퀴를 만들어 낸 임시품이었지만, 나름대로 쓸 만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돌아가게 되면 분배는 어떻게 하지? 그냥 네 명이서 공평하게 나눌까?"

콘란의 말에 내가 답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건 그렇고, 사실 지금 나에게는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는 게 낫겠지.'

당연하지만 나는 승천석 파편을 든 채로 겨울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 겨울성 안에는 익명999가 있을 테고, 그런 이에게 승천석 파편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가능하다면 변수는 최대한 제거해 두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

"끄으으...."

"이봐, 덩치! 네가 힘을 안 주면 이쪽이 밀리잖아!"

"알았다고."

제4 특무대원들이 잠시 수레에 한눈이 팔려 있는 사이, 나는 품속에 있는 승천석 파편을 어루만졌다.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이것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승천석 파편'을 흡수합니다.]

[위대한 하늘에 이르는 길에 크나큰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

.

[위대한 하늘이 당신을 봅니다.]

[마(魔)의 침식이 시작됩니다.]

승천석 파편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일어나고, 나를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한다.

순수한 마(魔).

승천석 파편으로부터 비롯한 그 기운이 점차 나를 향해서 다가온다.

'이건....'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승천석 파편을 품고 있었던 변종들은 하나같이 마(魔) 속성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승천석 파편을 품은 이들 역시도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마(魔)에 침식당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그 어떤 마(魔)도 감히 나에게는 닿지 못함이니.

['멸망 유예자'의 효과로 마(魔)의 침식이 무효화됩니다.]

나를 향해서 다가오던 그림자가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갔냐는 듯이 멈췄다.

멸망 유예자의 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멈춘 그림자를 점차 옭아매기 시작했다.

스스스...!

멸망 유예자의 힘이 그림자를 완전히 옭아매더니, 이윽고 그것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마(魔)가, 오히려 나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는 것을.

['멸망 유예자'의 힘이 마(魔)를 온전히 통제하였습니다!]

['마기(魔氣)' 능력치를 습득하였습니다.]

46화 불청객 (6)

[인간에게 주어져서는 안 될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2 → 3]

마기 능력치를 손에 넣기 무섭게 단번에 레벨이 상승했다.

그만큼 마기라는 것이 품고 있는 힘이 거대하다는 뜻이리라.

"후우...."

호흡을 내뱉기 무섭게 내쉰 숨결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기(魔氣)의 잔재.

그것은 곧 내가 조금 전에 스며들었던 마기를 온전히 통제하고, 또한 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일전에도 말했듯이, 공정의 세계에서 마 속성은 매우 드물다.

몇몇 최상위 마수나 악마 같은 존재들이나 가진 속성.

그런데 내가 인간의 몸으로 마기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멸망 유예자의 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이적이었다.

'그런데... 승천석 파편을 일정 이상으로 흡수하자마자 마기가 침식하기 시작했다는 건, 다른 유저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건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유저에게는 나처럼 마(魔)에 대항할 수단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공정의 세계에서 마(魔) 속성이 드문 만큼이나 그것에 대항할 방법 역시도 거의 없었으니까.

곧, 승천석 파편을 일정 이상으로 흡수한 유저들은 이미 마기에 침식을 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마기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기운이 아니야. 정신과 육체가 모두 오염되고 있을 터.'

당장 마기와 가깝디가까운 존재인 마수조차도 마기와 접촉하고서 변종이라는 전혀 새로운 종으로 탄생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유저들의 정신과 육체가 강건하다 해도, 마기에 침식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보통 일이 아니야.'

만약 인간이 마기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침식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죽는 게 정상일 테지만, 강인하게 단련된 유저들의 정신과 육신이 그리 쉽게 무너질 거라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는 유저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마기에 오염된 채로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터.

물론 유저들이 지닌 강인함이 마기의 침식조차도 이겨 낼 수도 있었으나, 솔직히 말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처음에야 견딜 만하더라도, 승천석 파편을 손에 넣으면 넣을수록 마기의 침식은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익명 게시판에 알려야 하나?'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설사 이 사실을 익명 게시판에 알린다고 해도, 과연 누가 이 사실을 믿을까?

오히려 ■■■ 파편을 독식하려는 어설픈 수작이라며 비웃음이나 살 것이 뻔했다.

실제로 나보다 승천석 파편을 많이 흡수한 유저가 한둘이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나 또한 익명 게시판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조차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이미 알렸지만 무시당했거나.

혹은 애초에 알릴 생각이 없었거나.

그중 무엇이든지 간에, 아니 둘 다이더라도 결과적으로 이 사실은 익명 게시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승천석 파편, 아니 ■■■ 파편은 이미 익명 게시판 유저들에게 있어서 이 세계에서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실제로 나 또한 승천석 파편이 지닌 이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승천석 파편을 모으는 걸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아직 승천석 파편이 품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을뿐더러, 승천석 파편을 모아서 생기는 여러 이점 역시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겠지.'

호기심과 욕심.

승천석 파편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적어도 승천석 파편에 깃든 마기가 나에게는 그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활용할 수 있는 힘으로 깃들기까지 했다.

'일단 그 부분부터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

승천석 파편과 마기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서, 나는 왼쪽 귀를 어루만졌다.

새롭게 변했을 터인 정보 창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이름 : 벨 블랙우드

레벨 : 3

체력 : 4

근력 : 4

정신력 : 4

마기 : 1

특성 : [멸망 유예자(EX)], [병기 소환(??)], [인내(D)], [화염 내성(C)]

기예 : [생존 검술(D)]

마법: ─

──────────────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드러난 정보 창 속에서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역시나 레벨과 마기 능력치의 존재였다.

마기가 정확히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일단 매우 치명적인 힘을 지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면....'

나는 잠시 미뤄 두었던 나머지 알림 역시도 확인했다.

[게시판 레벨이 상승합니다.]

[Lv.2 → Lv.3]

[현재 게시판 레벨은 'Lv.3'입니다.]

.

.

.

['병기 소환(??)' 특성이 성장합니다.]

['병기 소환(??)'의 특성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Lv.2 → Lv.3]

['병기 소환(??)'의 소환 가능 목록에 'Lv.2' 탄환 목록이 추가됩니다.]

['병기 소환(??)'의 소환 가능 목록에 'Lv.3' 병기 목록이 추가됩니다.]

이번에 처치한 변종이 지녔던 승천석 파편의 크기가 제법 컸기 때문일까.

얼마 전까지 2레벨이었던 내 게시판 레벨과 병기 소환 특성이 모두 단번에 3레벨으로 상승했다.

솔직히 말해서 한 두어 번 정도는 더 승천석 파편을 흡수해야 레벨 업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승천석 파편의 크기가 레벨 업에 큰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일단 확인할 것부터 해야겠지.'

나는 곧장 새롭게 추가된 접근 가능 게시판 목록 역시도 확인했다.

────────────

[접근 가능 게시판 목록]

[익명 게시판] [Lv.1]

[경매장] [Lv.2]

[길드 게시판] [Lv.3]

────────────

새롭게 추가된 게시판 목록을 확인한 나는 잠시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길드 게시판이라고?'

지금 시점에 길드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가?

'...아니,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이기에 길드가 더 의미가 있는 건가.'

아무래도 길드 게시판에 대해서는 한번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길드 게시판을 살펴보기에 앞서,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길드 게시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보다도 더 먼저 알아봐야 할 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번에 새롭게 3레벨을 달성한 병기 소환 특성에 대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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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기 소환]

등급 : ??

종류 : 액티브

레벨 : 3

병기와 탄환을 소환한다.

레벨에 따라서 소환할 수 있는 병기와 탄환의 종류가 증가한다.

현재 소환 가능한 병기 종류 : 3

현재 소환 가능한 탄환 종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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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병기 소환 특성의 레벨 업.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는 2레벨 탄환 정도만 추가되어도 만족스러웠을 터인데, 무려 특성 레벨 업과 더불어서 소환 가능한 탄환의 종류와 병기 종류가 모두 늘어났다.

이제껏 있었던 병기 소환 특성의 성장 과정을 생각한다면, 한 번에 무려 두 단계가량을 성장한 것이다.

'소환할 수 있는 탄환은 보나 마나 2레벨 병기인 B686 더블 배럴 샷건의 탄환일 테고... 중요한 건 새롭게 소환할 수 있게 된 병기가 뭐냐는 건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직접 병기 소환을 사용해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주변에 보는 눈들이 있었으니 미뤄 두기로 했다.

물론 이들 앞에서 병기 소환을 사용하는 게 한두 번은 아니었으나, 위급한 상황도 아닌 때에 저들이 마법이라 생각하는 병기 소환을 사용하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지닌 특성을 마법이라 믿고 있는 동안에는 남발하지 않는 게 낫겠지.'

모든 마법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했고, 굳이 그 상식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이미 실컷 보여 주기는 했지만 말이지.'

병기 소환 특성을 대략적으로 살핀 나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병기 소환에 대한 것 역시도 매우 중요하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은 자세히 알아보기 애매했으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길드 게시판]

'길드 게시판이라....'

여타 온라인 게임이 그렇듯이 공정의 세계에도 길드 시스템이 존재했다.

나야 솔로 플레이를 선호했으니 길드 같은 것에 그리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공정의 세계에서 길드는 꽤 의미 있는 시스템이었다.

유저들이 결성한 거대 세력.

당장 멸망룡 레이드를 주도했던 세력 중 하나인 오성 역시도 다섯 개의 대형 길드를 뜻하는 것이었으니, 공정의 세계 내에서 길드가 구축한 세력은 매우 거대했다.

그런데 이번에 3레벨 권한을 습득하고서 나타난 기능이 길드 게시판이라니....

'직접 보면 알겠지.'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살필 여력이 있었다.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 모두가 마수 소재가 가득 담겨 있는 수레를 밀고 당기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말이다.

[길드 게시판을 열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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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중인 길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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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운드 제로] 그라운드 제로에서 5레벨 이상 베테랑 유저분들 모십니다.

▶ [적송] 적송赤松에서 함께하실 분들을 모집합니다.

▶ [헬파티] 함께 이 게임 클리어 하실 분.

▶ [좃망겜수호단] 大모집!

▶ [달빛기사단] 친목 취미 길드.

▶ [베리타스 혈맹] 혈맹원 모집 中 나이 제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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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눈에 익은 인터페이스.

이건, 공정의 세계에 존재했던 길드 게시판과 같은 인터페이스였다.

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그중에서 묘하게 이름이 익은 길드가 작성한 게시 글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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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송赤松에서 함께하실 분들을 모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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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이름]

◆적송

[길드 소개]

◆붉을 적(赤) 소나무 송(松).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남으실 분들 모아 봅니다.

◆레벨 제한은 따로 없으며, 길드와 함께 성장하실 분들이면 좋겠습니다.

◆길드 가입 문의는 가입 신청 전에 먼저 1:1 문의 부탁드립니다.

[가입 신청 및 1:1 문의]

◆길드 가입 신청

◆1:1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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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라서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다.

길드 시스템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둘째 치고, 이렇게까지 길드가 활성화되어 있다고?

'잠깐, 그러고 보니....'

익명 게시판에서도 간혹 무슨무슨 기사단이니, 무슨 클랜이니 하는 것들을 모집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혹시 그것들이 길드를 의미하는 것이었던 건가?

'...어이가 없군.'

이미 곳곳에서 길드의 존재가 드러나 있었건만, 정작 나는 그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에게 있어서 길드란 그리 의미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속해 있었던 길드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의 의미 없었지.'

나에게 있어서 길드란 길드만이 지닌 콘텐츠나 혜택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실제로 나중에 가서 길드가 주는 혜택이 더는 쓸모없다고 생각됐을 때 미련 없이 길드를 나오기도 했었고.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겠지.'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를 이루는 동물이다.

애초에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한 인간의 본능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었고, 길드라는 시스템이 있다면 당연히 유저들 역시도 서로 뭉치려 할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세계에서 혼자보다는 여럿이 살아남기에 유리하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길드라....'

과연 이 세계에는 몇 개나 되는 길드가 있고,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승천석 파편과 ■■■ 파편.

마기(魔氣).

위대한 하늘.

길드.

그중 무엇 하나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만큼은 확실했다.

'살아남는다.'

어떻게든.

47화 불청객 (7)

"괜찮아요?"

"응? 아."

"표정이 안 좋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게 티가 났는지, 알리시아가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

"정말요?"

"정말로."

이게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뭐,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너는 괜찮나?"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러면 안 되나?"

"아뇨, 그건 아니죠. 다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기분 탓일까.

왠지 알리시아의 얼굴이 조금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들 떠들어. 도착했다."

콘란의 말과 함께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서서히 겨울성의 그림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마수 사냥의 끝이 보였다.

"후... 드디어 집이군."

"집은 무슨. 여기가 네놈 집 같나?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이제 슬슬 받아들이는 게 어때? 그렇게 엇나가 봤자 네 손해일 텐데."

"흥. 웃기는 소리."

콘란과 알비노가 언제나처럼 투닥거리거나 말거나, 겨울성에 돌아온 나는 곧장 에드릭부터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제쳐 두고서 익명 게시판과 길드 게시판을 더 살피고 싶었지만,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응? 자네 왔군."

따로 바쁜 일이 있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에드릭은 집무실에서 뺀질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저렇게 집무실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말해서 멸망 유예자의 냉정함에 균열이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집무실에서 놀고 있을 거면 그냥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나?

"복귀했습니다."

"나를 보는 시선이 조금 묘한 걸 뺀다면 고생했네. 사냥이 꽤 길었던 것 같은데... 마수 소재는 원하는 만큼 챙겼나?"

"가지고 오느라 꽤나 고생했을 정도로요."

실제로 마수를 비롯한 변종을 잡는 것보다도 그 소재들을 지니고서 겨울성까지 돌아오는 여정이 배는 더 힘들었을 지경이었다.

만약 오면서 마수 무리라도 또 마주쳤다면 싸움보다 짐이 배로 늘어난다는 걸 걱정해야 했을 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겨울성 인근에서 마치 축제처럼 마수 토벌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었으니,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운 결과였겠지만 말이다.

"그것참 훌륭하군. 페가수스 상단은 조만간 떠날 테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걸세. 장사치들은 시간마저도 셈에 넣거든."

"조언 감사합니다."

"대장으로서 해야 할 조언일 뿐이지만, 자네가 그렇게 받아들인다니 뿌듯하군."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알비노 같은 이가 탈영하지 않았을지 묻지 않을까 했는데, 에드릭은 그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마치 알비노가 탈영할 가능성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아무튼... 여전히 알 수 없는 양반이라니까.'

에드릭은 참 의문점이 많은 대장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나에게는 에드릭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안 그래도 눈앞에 닥친 일들이 한 트럭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장님 말씀대로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요."

불청객으로 인해서 하게 된 겨울성의 풍경으로서의 일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막사로 돌아가는 대로 마기나 길드 그리고 새롭게 얻은 3레벨 병기 등에 대해 확인하려면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 그 전에."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페가수스 상단에서 자네를 찾더군. 데니스라고 하던가? 혹시 아는 자인가?"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그자가 저를 왜 찾는 겁니까?"

"용무는 자세히 듣지 못했네. 그래도 듣기로는 페가수스 상단 내에서 꽤 명망이 높은 자인 듯하니, 시간이 난다면 한번 찾아가 보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네에게도 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데니스라....

에드릭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페가수스 상단의 고위직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페가수스 상단의 고위직이 나를 찾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것이 우연 같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데니스가 누구이기에 나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앉은자리에서 고민해 봐야 답은 없었기에 나는 일단 모든 일을 제쳐 두고서 그 데니스라는 자를 만나 보기로 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게."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제 시선이 묘한 건 기분 탓입니다."

"하하, 알고 있네."

나는 언제나처럼 껄껄 웃는 에드릭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로 에드릭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면....'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성을 찾아온, 초대받은 자인지 불청객인지 모를 자를 만나기 위해서.

* * *

-어이! 그쪽이야!

-더, 더, 더, 좋았어! 멈춰!

페가수스 상단이 임시 캠프를 차린 곳에서는 한창 분주한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로 겨울성에서 매입한 마수 소재들을 마차에 싣는 일이었다.

얼핏 보면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막상 보면 마차에 챙겨 둔 건 이번에 겨울성에서 얻은 교역품들뿐이고, 팔 물건들은 여전히 진열되어 있거나 임시 창고 안에 가득 쌓여 있다.

마치 이번에 거래를 안 하면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마치 상대의 초조함을 자극하게끔 의도한 풍경처럼 보이는 건 단지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내가 캠프를 서성거리고 있자, 척 봐도 페가수스 상단 소속의 상인으로 보이는 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으리,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따로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말하면 상인은 당장이라도 나에게 페가수스 상단이 취급하는 품목들이 쓰여 있는 양피지를 내밀 기세였다.

페가수스 상단이 취급하는 물건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나에게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데니스라는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데니스 님을 찾으시는군요. 실례지만 어떤 용무로 데니스 님을 찾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다행히 상인은 데니스라는 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페가수스 상단의 고위직이라는 에드릭의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데니스라는 분이 저를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나으리, 혹시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벨 블랙우드라고 합니다."

"벨 블랙우드 님이시군요. 확인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에드릭은 말했다.

상인은 시간조차도 셈에 넣는 자들이라고.

그에 대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천막 안으로 사라졌던 상인이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법사님이셨군요! 그런 분이신 줄 모르고 기다리게 했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데니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본디 제국 내에서 마법사라는 존재는 모두가 경원시하는 존재였건만, 눈앞의 상인은 그러한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굽신댔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돈이 최우선이 상인들에게 있어서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훌륭한 손님이 되어 주고는 하니까.

"이쪽입니다."

나는 상인의 안내를 따라서 유독 거대한 천막 하나 앞에 섰다.

드나드는 이들의 복색만 봐도 이곳에 있는 이가 페가수스 상단 내에서 상당한 고위직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를 안내한 상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막을 살며시 들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데니스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곧이어서 안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상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군요."

상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살며시 물러갔고, 나는 천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막 안의 풍경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뭐라고 해야 할까... 겉에서 보이는 웅장함에 비해서는 조금 조촐했다.

뭐, 애초에 천막이라는 것 자체가 임시 거처라는 걸 생각한다면 실용적인 물건들만 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말이다.

"오, 이런! 겨울성에서 소문이 자자한 우레의 마법사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데니스라고 합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데니스를 마주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구나.'

익명999.

* * *

내가 눈앞의 불청객을 익명999로 판단하는 데는 그리 거창한 근거까지도 필요 없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유저와 NPC를 구별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캐릭터의 외견을 보는 것이다.

성능에만 치우쳐진 NPC들의 외견과는 달리, 유저들은 소위 말하는 룩과 성능을 모두 신경을 쓴 장비 세팅을 하곤 한다.

아무래도 온라인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 캐릭터의 개성이나 외견을 챙기는 건 유저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혹은 의도적인 해괴함이든 말이다.

지금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데니스 역시도 그러했다.

"벨 블랙우드입니다."

"하하, 마법사답지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 것 같군요.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저를 찾은 용무가 뭡니까?"

데니스, 아니 익명999가 나를 찾은 용무는 무엇인가.

그 진의를 알아야 한다.

만약 그 진의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나는 하나의 결단을 내려야 할 테니까.

"현재 라크나 대륙은 혼란스럽습니다. 모두가 종말의 현신이라 여겼던 멸망룡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이후, 이제껏 등장하지 않았던 변종들이 출몰했고, 제국의 정세 역시도 많이 바뀌었죠."

"그게 저를 찾은 용무입니까?"

"벨 블랙우드, 이곳에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레의 마법사, 천둥을 다루는 자, 얼음의 마법까지 다룬다는 소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답지 않은 성품까지."

"허명일 뿐입니다."

데니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저한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같은 플레이어니."

데니스는 내 예상을 뛰어넘어서 곧장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 없다는 듯이.

눈앞에 있는 상인 데니스가 익명999로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니까요."

내가 짐짓 시치미를 뗐음에도 불구하고 데니스는 그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눈은 조금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도통 못 알아듣겠군요. 알아듣게 설명을 해 주시죠. 플레... 이어? 그게 뭡니까?"

"흠. 역시 그렇게 나오시는군요. 그렇다면 저희 측에서도 가진 패를 드러내는 게 도리겠지요."

가진 패?

나는 언제든지 병기 소환을 발동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준비를 한 채로 데니스를 응시했다.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으니.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신다면... 그래요, 10골드를 드리겠습니다.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라면 충분한 대가겠지요?"

여기서 유저가 아닌 이 세계의 원주민이었다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

아마, 조금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공짜로 생길 10골드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데니스의 노림수 역시도 그것일 터였으나, 지금 나에게는 거부할 명분이나 실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좋습니다. 무슨 소린지는 몰라도, 그냥 듣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이 부분은 또 마법사다운 현명함을 지니셨군요."

곧, 데니스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나는 혹여 무기를 꺼내지는 않을까 싶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나, 데니스가 꺼내 든 것은 무기 따위가 아니었다.

"혹시 이런 광석을 본 적 있으십니까?"

데니스가 보인 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익숙한 빛을 내는 광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승천석 파편이었으니까.

48화 불청객 (8)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데니스가 자신의 정체를 순순히 밝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이 된 사태였지만, 데니스는 대놓고 나에게 승천석 파편을 내밀었다.

여기서 어설픈 반응을 보였다가는 그대로 데니스에게 확신이라는 무기를 쥐여 주겠지.

"어디서 본 것도 같군요."

"어디서 봤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변종들의 뿔이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군요."

"혹시 지금 가지고 있으십니까?"

명백히 나를 떠보는 말.

당연히 내가 승천석 파편을 지금 손에 들고 있을 리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흐음... 그것참 묘한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이것이 다른 곳에는 있다는 뜻입니까?"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마수 소재를 처리할 때 한 번에 처리를 한 것 같거든요."

데니스가 나를 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긴 건 명백한 의심.

그러나 세상의 모든 거짓은 진실 속에 숨기는 법이었다.

"외견도 그렇고, 워낙 진귀한 것이라 한번 보셨다면 이걸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에 남으실 만도 한데요."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불길함이 느껴지더군요. 오래 지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불길함이요?"

"예. 굳이 말하자면... 마치 계약 당시처럼 끈적이고 불쾌한 느낌이었죠."

그에 데니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내가 말한 계약 당시가 어떤 계약을 의미하는지 데니스가 모를 리가 없을 터.

악마는 마(魔)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승천석 파편 역시도 마기를 품고 있는 물건이다.

진실 속에 숨긴 거짓은 어느덧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법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정확히 보셨군요. 이것은 불길한 물건입니다, 인간이 함부로 품어서는 안 될 만큼."

"그런 것 같군요, 지금 눈앞에서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 오래 보여 드릴 물건이 아니었죠. 죄송합니다.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실수를."

데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승천석 파편을 자신의 품 안에 갈무리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이것을 파편이라 부릅니다."

"파편?"

내가 짐짓 모른 척하자, 데니스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예. 무엇의 파편인지는 모르나, 일단은 그렇게 부르고 있지요."

데니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파편의 불길함을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이것은 인간이 품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저것을 품으려 든다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되지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승천석 파편이 품고 있는 마기는 나처럼 매우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인간에게 있어서 극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데니스가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저에게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알아주셨으면 할 뿐."

데니스가 덧붙였다.

"우레의 마법사, 벨 블랙우드 님, 한 가지만 명심해 주십시오."

"무얼 말입니까?"

"인간이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매혹적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파편에 깃든 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심하죠."

"단순히 명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조금 전부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와 함께 왜인지 모르게 데니스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나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병기 소환을 사용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여기에서 데니스 정도 되는 고위직이 죽어 나자빠진다면 적잖은 소란이 벌어지겠지만, 나 또한 최악의 경우 겨울성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무수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 때, 데니스가 침묵을 깼다.

"아아... 이런. 제가 우레의 마법사님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부디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데니스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에 대해서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약속한 대가만 주신다면요."

"그 부분은 또 확실히 마법사다우시군요. 물론입니다. 약속한 10골드는 바로 제국 금화로 드리죠."

데니스는 마치 준비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서랍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약속드렸던 제국 금화 10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서 직접 주머니를 열어서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제국 금화 10개. 정확했다.

"정확하군요."

"상인에게 신용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습니까?"

말은 번지르르하기는....

어차피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아, 잠시만요. 아직 드릴 게 남아 있습니다."

데니스가 서랍 안에서 또 다른 주머니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앞으로 저희의 바람직한 관계를 위한 선물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주머니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하니, 페가수스 문양이 양각된 금화가 들어 있었다.

내가 알기에 현재 유통되는 금화 중에서 이런 문양의 금화는 없을 터인데....

"이게 뭡니까?"

"저희 상단 내에서 쓰는 화폐입니다. 라크나 대륙 어디서든 페가수스 상단의 지부가 있는 곳에서라면 금화 한 개 치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고 다시 페가수스 상단을 찾아 주십사 하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데니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일종의 상품권이랄까요?"

"상품권?"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데니스는 끝까지 뻔뻔한 얼굴로 어떻게든 나를 낚아 보려 했으나, 내가 저런 어설픈 수에 낚여 줄 리가 만무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뵈었으면 합니다."

"적절한 대가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하하. 예. 알겠습니다. 아주 두둑이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데니스가 머물고 있는 천막을 나섰다.

데니스와의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남은 만남이기도 했다.

'확실히 나를 의심하고 있어.'

하긴, 유저의 입장에서 볼 때 갑작스럽게 두각을 드러낸 이들을 유저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거는 그뿐만이 아니야.'

나는 돌아가는 길에 비친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허리춤에 달린 업화의 송곳니를 제외한다면 특별할 게 없는 무장.

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는 대부분 아이추웡이 착용하고 있었던 장비들이었다.

즉, 현재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 역시도 데니스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유저 냄새'가 난다는 소리였다.

내가 의심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차림으로 온 이유는, 굳이 데니스를 만나러 갈 때 장비를 바꾸는 것이 더 수상하기 때문이었다.

최악을 피해서 차악을 택한 셈.

'이미 내 정체는 들켰다고 보는 게 맞겠지.'

데니스, 아니 익명999가 이곳을 찾은 목적이 물의 보옥이라면 얼음의 마법을 다룬다는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비록 데니스에게 확신이라는 무기만 쥐여 주지 않았을 뿐이지, 심증은 차고 넘칠 터.

'어쩔 수 없나.'

가능하다면 불청객과 엮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먼저 나를 찾아냈다면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상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적어도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한번 낚아 볼까.'

나는 그에 대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 * *

페가수스 상단의 캠프를 나선 나는 곧장 에드릭을 찾았다.

"자네 왔나? 데니스라는 자는 잘 만나고 왔나?"

"예, 뭐. 이것저것 물어보더군요."

"그래? 뭘 물어보던가? 굳이 자네를 부를 정도였다면 꽤 중요한 정보였을 것 같은데."

"그냥 변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페가수스 상단에서도 그에 대해서 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변종에 대해서라.... 하긴, 그것도 그럴 만하지. 고생했네. 이만 들어가서 쉬게."

내가 이 말만을 하러 올 거였다면 애초에 에드릭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 전에, 잠시 겨울성 밖을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응? 그건 왜?"

"데니스라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변종에 대해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번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흠, 그런 일이라면 나도 함께 가지. 자네 혼자 가기에는 위험하지 않겠나?"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에드릭의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마치 모든 걸 꿰뚫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괜찮겠나?"

"예. 충분합니다."

"뭐... 자네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럴 테지. 알겠네. 외출증은 바로 발급해 주지."

에드릭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하는 듯한 모습도 없었다.

마치 알면서도 속아 주는 느낌이랄까.

에드릭이 이런 대장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기에 놀랄 필요는 없었다.

에드릭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일단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매우 좋은 대장이었으니까.

* * *

에드릭의 집무실을 나선 내가 막사를 나서려 하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알리시아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퀭해 보이기도 한 알리시아는 마치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 가요?"

"잠깐 밖에 볼일이 있어서."

"같이 가요."

지금 내가 마주하려는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안 될 소리였다.

"안 돼."

"왜요?"

"개인적인 일이야."

"제가 같이 가면 안 되는 건가요?"

"어."

"그래도 따라간다고 한다면요?"

알리시아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슬슬 나 또한 오랜 시간 품어 왔던 궁금증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업화의 마법사와의 일전이 있었던 이후, 나를 대하는 알리시아의 태도가 확연히 바뀌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저, 대강 짐작만 할 뿐.

그렇기에 이제는 알아야 했다.

알리시아가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알리시아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간신히 토해 냈다.

"...결심했으니까요."

"뭘?"

"그건... 말 못 해요."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아무튼, 지금은 안 돼."

"하지만...."

"안 돼."

알리시아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입술을 닫았다.

알리시아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를 듣는 건 지금이 아니었다.

"네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아니야. 다음에 마땅한 기회가 있을 거다."

"...네."

알리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나를 따라오겠다는 고집도 한번 접은 듯했다.

"그래. 그러면 이따 보자고."

"몸조심해요."

뭐... 매몰차게 말을 하기는 했으나, 알리시아 같은 미녀의 걱정이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면 좋았지.

그 대화를 끝으로 막사를 나선 나는 에드릭이 발급해 준 외출증을 가지고서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왜 굳이 남쪽 성문이냐면, 남쪽 성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페가수스 상단이 만들어 놓은 임시 캠프를 지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페가수스 상단의 무수한 눈들이 내가 겨울성 밖으로 나가는 걸 지켜볼 터.

'한번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초청받은 손님이 될지, 아니면 불청객이 될지는 그때 정해질 것이다.

49화 불청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