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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습격

고단했던 하루가 마침내 끝이 난다.

"으으... 죽겠군."

"그러게나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 대단하던데? 다시 봤어. 이제 허약한 마법사 양반이라고 말도 못 하겠군."

콘란이 껄껄 웃었다.

오늘 나에게 처음으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콘란은 그리 여의치 않는 듯했다.

온종일 꽁해 있다가 그로 인한 여파로 마법을 난사한 알비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오늘 하루도 끝났겠다, 나는 언제나처럼 막사로 곧장 돌아가는 것이 아닌 모닥불로 향했다.

"어디 가나?"

"볼일이 있어서."

"뭐, 그래라."

그때였다.

"...."

이제껏 가만히 있던 알리시아가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나한테 볼일이라도?"

"...."

"뭐, 마음대로 해."

어차피 묻는다고 해서 저 과묵한 여자가 대답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굳이 따라오겠다는 걸 내가 힘으로 막을 수도 없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별일이 있을 것 같기도 않고.'

그대로 막사를 나선 나는 자주 쓰던 모닥불로 향하고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서 앉았다.

모닥불을 맞으니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며 얼어 있었던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

그에 살며시 눈치를 보던 알리시아 역시도 나와 살짝 떨어진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는 몰라도, 나는 일단 할 일을 했다.

스으으....

['물의 보옥'에 약간의 온기가 전해집니다.]

['물의 보옥'의 냉기가 일시적으로 완화됩니다.]

['물의 보옥'의 힘이 사용자에 스며듭니다.]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치유합니다.]

느껴진다.

조금씩 찢어졌던 근육들이 다시 재생되고, 육체가 회복되는 것이.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물의 보옥은 착용자를 치유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치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신체의 신진대사를 급속도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진대사가 크게 향상됩니다.]

꿈틀, 꿈틀....

전신의 혈관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혈류속도가 증가하면서 신진대사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체내의 모든 에너지가 신체를 재생하고 찢어진 근육을 키우는 데 쓰이는 이 순간에 필요한 건 당연히 영양 보충이었다.

그것도, 양질의 단백질 보충.

주섬, 주섬.

나는 품 속에서 미리 구매해 두었던 육포를 꺼내서 하나씩 먹었다.

육포를 입에 넣기 무섭게 퍼지는 단짠의 조합.

아, 이 속세의 맛이란....

사실 이 육포는 겉으로 보기에는 겨울성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육포지만, 평범한 육포가 아니다.

다름 아닌 경매장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구매한 것이었으니까.

어딘가에 전문적으로 이걸 제조하는 공장이라도 있는 건지, 대용량 육포가 꽤 저렴한 가격에 올라왔기에 최근 단백질 보충 겸 즐겨 먹고 있다.

아무리 겨울성 내의 식사가 그리 나쁜 수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단백질 보충은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맛있고.'

겨울성에서 구할 수 있는 육포라고 해 봐야 소금에 절이고 어설프게 말린 것들뿐이었지만, 이건 간장을 베이스로 만들어 낸 진짜배기 육포였다.

당연히 단백질 보충이라는 목적 달성은 물론이고 맛까지도 있었으니, 겨울성에서의 지친 삶에 내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내가 육포를 먹고 있을 때, 나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알리시아가 살짝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육포를.

'아.'

왠지 알 것 같았다.

알리시아가 굳이 내 뒤를 따라온 이유를.

앞서 말했듯이 겨울성 내에서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하기란 쉽지 않다.

거기에 더해서, 보급되는 식사의 양도 적지는 않지만 알리시아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당연히 소모하는 칼로리 역시도 많을 터.

당연히 쉽게 배가 고파지고 늘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도대체 어디에서 냄새를 맡은 건지는 몰라도, 일단 알리시아의 목적이 이 육포라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다.

"먹을래?"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알리시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그럼 내가 다 먹는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남아 있는 육포를 하나씩 입에 털어 넣자, 알리시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당황한 알리시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조금 귀엽게 느껴졌으나, 이 이상으로 놀렸다가는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 나를 귀여워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먹어."

내가 육포 하나를 건네자, 알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로요?"

"그래."

그렇게 조심스레 나에게서 육포를 받아 든 알리시아가 그것을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그리고 육포의 맛을 음미한 순간.

"...!"

알리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긴, 겨울성 같은 곳에서 주는 정체 모를 수프나 먹다가 정밀하게 배합된 간장 베이스의 단짠단짠을 맛보면 저럴 수밖에 없지.

"더 줄까?"

알리시아의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졌다.

속세의 맛을 앞두고서 체면을 차릴 정도로 육포의 맛은 만만하지 않았다.

"여기."

그렇게 육포 몇 개를 더 주었으나, 알리시아는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이 그것을 먹어 치웠다.

배가 고픈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육포의 맛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리라.

순식간에 모든 육포를 먹은 알리시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

"이제 없어."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알리시아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물론 여전히 여유분의 육포가 있기는 했지만, 이걸 전부 줄 생각은 없었다.

"다음에 생기면 또 줄게."

그제야 비 맞은 강아지 같던 알리시아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전까지는 참 알기 어려운 유형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더없이 알기 쉬운 유형이었다.

"...고맙습니다."

"뭘, 같은 특무대끼리."

알리시아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진중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자기가 은혜를 갚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혹시 아는가? 이때의 선행이 훗날 내 목숨이라도 구해 줄지.

그 순간.

[지친 몸에 활력이 깃들며 찢어졌던 근육이 성장합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1)]

[2 → 3]

[찢어진 근육이 빠르게 회복되며 근육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합니다.]

[근력이 상승합니다. (+1)]

[2 → 3]

'호오....'

체력과 근력 능력치가 모두 3이 되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능력치 하나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장세가 아닐 수 없었다.

'역시 하이마의 펜던트와 물의 보옥 조합이 사기긴 하네.'

만약 물의 보옥과 하이마의 펜던트가 온전한 힘을 발휘했다면 더욱더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겠지만, 반대로 지금의 내가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 정도 수준이 오히려 딱 좋았다.

'그러면....'

슬슬 모닥불에서의 볼일도 끝났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지."

"...아."

그에 알리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내 뒤를 따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제껏 위험한 여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보니 뭔가 먹이를 원하는 아기새 같은 느낌이었다.

막사로 돌아갈 때다.

* * *

──────────────

이름 : 벨 블랙우드

레벨 : 1

체력 : 3

근력 : 3

정신력 : 2

특성 : [멸망 유예자(EX)], [병기 소환(??)], [인내(D)], [화염 내성(D)]

기예 : [생존 검술(D)]

마법: ─

──────────────

* * *

막사로 돌아온 나는 간단하게 씻은 뒤에 곧장 취침 준비를 했다.

그렇게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익명 게시판을 살피려던 순간.

-부우우우우웅...!

요란하기 짝이 없는 뿔피리 소리가 막사를 가득 덮었다.

"뭐, 뭐야?"

"...."

이 뿔피리 소리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야 뻔했다.

이곳은 겨울성 크로이츠.

마수들의 본거지이자 인간에겐 금역이나 다름없는 마경과의 인접 지대다.

이런 곳에서 일어날 일이라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습격이다!

-다들 일어나!

하긴, 그 악명 높은 겨울성치고는 근래에 너무 평온하다고 생각은 했다.

아무리 겨울성 측에서 주기적으로 마수 토벌을 한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했을 터.

마경은 그 크기가 감히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영역을 지니고 있다.

당연히 마경 인근에 있는 마수 군락지 몇 곳을 토벌해 봤자, 결국 마수들은 어디선가 또다시 나타난다.

그것이 제국이 넘어서는 안 될 영역까지 손을 뻗친 것에 대한 대가였으니까.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오고 있을 때, 이미 막사 내에 있는 제4 특무대원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콘란, 알리시아 그리고 나.

비록 셋뿐이긴 했어도 지금부터 무얼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을 한 것이다.

"다들 이미 준비했군. 훌륭해."

곧이어서 들이닥친 에드릭을 본 우리는 무장을 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군인이 된 지 시간이 조금 됐다는 건지, 다들 한 명씩의 군인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변종입니까?"

에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번엔 변종 출몰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 제4 특무대가 맡은 임무는 다른 특무대와 함께 북동쪽 성문을 사수하는 거다."

"다른 특무대요?"

"그래, 제3 특무대가 우리와 같은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다른 특무대라....

이제껏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은 없지만,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건 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우리가 제4 특무대였으니 제3이나 제2 같은 것도 있는 게 당연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하지. 상황이 다급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막사를 나서기 무섭게 우리를 반긴 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병사의 모습이었다.

"으아아아아!"

쿵!

대체 몇 미터를 떨어진 건지 모를 병사는 바닥에 추락하기 무섭게 그대로 절명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처럼 보였으나, 이러한 광경을 납득시키는 존재들이 곧이어서 하늘에서 나타났다.

"저건..."

콘란이 입을 떡 벌린 채 하늘에 나타난 불청객들을 바라보았다.

[끼에에에에에!!]

비행형 마수.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무리가 겨울성의 하늘을 배회하며 병사들을 말 그대로 사냥하고 있었다.

"으음. 상황이 좋지 않군. 벨, 가능하겠나?"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아무리 나에게 총이 있다고 해도, 콜트 패리슨 B-09의 실질적인 유효사거리를 생각해 본다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비행형 마수는 영 상성이 좋지 않다.

그나마 B686 더블 배럴 샷건 같은 경우는 유효사거리는 짧아도 타격 범위가 넓으니, 날개가 약점인 비행형 마수에게 상당히 유효하겠지만, 문제는 내가 지닌 B686 더블 배럴 샷건의 탄이 두 발뿐이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해야겠지.'

어렵다고 해서 우는소리를 하며 포기할 수는 없다.

총을 지닌 내가 까다롭다 여길 정도였으니, 실제로 겨울성 내에서도 비행형 마수에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궁병 부대가 나름대로 열심히 활을 쏘아 대고 있기는 했지만, 문제는 비행형 마수가 겨울성 머리 위에서 날뛰고 있다는 점이다.

즉, 쏘아 낸 화살을 맞히지 못한다면 결국 그 화살비는 아군을 향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끄악!"

"궁병 부대, 발사 중지!"

실제 전쟁터에서는 아군 오사 비율이 낮지 않다고 한다.

그러한 사례를 증명하듯이 지금 겨울성에서는 비행형 마수가 초래한 혼란에 의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철컥.

총구를 하늘에 겨누었다.

인간을 마치 장난감처럼 죽이고 있는 비행형 마수들이 보인다.

[키에에에에───!]

그 괴성이 마치 비웃음 소리처럼 들려왔으나,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스으읍...."

호흡을 멈춘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하이마의 펜던트가 가져다준 혈류속도 상승은 곧 뇌에 공급되는 혈류의 증가를 불러왔고, 그것은 곧 사고 속도의 증가를 불러왔을 테니.

'지금.'

타아아아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그려진 총알의 궤적이 비행형 마수의 몸을 아슬하게 비껴 나갔다.

그러나 빗나간 건 아니다.

적어도 그 총알은 비행형 마수의 날개에 그럴듯한 구멍을 내 주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키에에에에!]

날개에 총알 구멍이 난 비행형 마수가 괴성을 뱉으며 몸부림치고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웅!!!

그와 함께 위기감을 느낀 건지, 겨울성의 하늘을 맴돌던 다른 비행형 마수들이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물론 기회가 생기면 언제고 다시금 병사들을 노릴 테지만, 일단 가장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역시 굉장하군."

"아닙니다."

"자네의 마법에 대해서는 참으로 궁금한 게 많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겠지."

에드릭이 말했다.

"가지, 아직 할 일이 많으니."

28화 습격 (2)

겨울성의 가장 큰 존재 의의는 마경으로부터 쏟아지는 무수한 마수들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겨울성 크로이츠는 북부 요새라 불리며 마수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마치 지금처럼.

계속해서, 끊임없이.

[쿠루루! 쿠루루!]

[크르릉...! 킁! 크릉!]

불가침의 방어를 자랑할 것만 같은 겨울성의 성벽 위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에 맞선 겨울성의 군인들이 필사적으로 창을 찌르고 기름을 들이부으며 마수들을 막아섰으나, 끝없이 밀려드는 마수 중 일부는 기어이 성벽 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놈이 올라왔다!"

"막아!"

다만, 그것도 잠시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병사들의 창질에 의해서 이제 막 성벽 위에 오른 마수들이 벌집이 되어서 그대로 추락했다.

쿵!

쿵! 쿠웅!!──

그렇게 떨어져 내린 마수들의 사체가 어느덧 차곡차곡 쌓여 간다.

[칵! 카악!]

[끼에에에에엑!!]

그중 몇몇 마수는 채 죽지 않은 채로 발악했으나, 이내 성벽 아래에 있는 다른 병사들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피와 불꽃이 어우러진 붉은빛이 사방에 점등하며 온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기름 더 가져와! 마수들이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름이 모두 동났습니다!"

"취사장이라도 가서 가져와!"

"그곳도 바닥났습니다!"

악을 쓰는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 이것이 겨울성의 일상적인 풍경이겠지.

"거의 다 왔네. 다들 준비하게."

에드릭의 말은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현실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이제껏 내가 겪어 왔던 게 전투였다면, 지금부터 내가 겪어야 할 것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새삼스레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 겨울성에 왔을 때부터 이러한 일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

나는 살며시 허리춤에 있는 아이추웡의 검과 주머니에 넣어 둔 콜트 패리슨 B-09을 어루만졌다.

만전의 상태를 가정한다면 아예 B686 더블 배럴 샷건 역시도 미리 소환해 두는 게 옳았겠지만, 이건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눈에 띄고 크다.

그렇기에 잔탄 수에서 두 발을 손해 보겠지만, 일단은 비장의 수로 남겨 두는 게 더 좋아 보였다.

"에드릭 경."

북동쪽 성문에 도착하자 장교로 보이는 누군가 에드릭을 알은체했다.

에드릭 또한 그를 알고 있었는지, 그를 마주 보며 악수를 청했다.

"아, 개럿 경.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같은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들었네. 자네와 함께하게 되어서 기쁘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럿 경."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굳이 맞지도 않는 손발을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겠지. 어떤가, 서로 해야 할 임무만 하는 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개럿 경."

"잘 생각했네. 그러면 부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길 바라지, 에드릭 경."

"무운을 빌겠습니다, 개럿 경."

"원 사람 참, 딱딱하긴."

그 살얼음판과도 같은 대화가 끝난 뒤, 나는 슬쩍 에드릭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자는 누굽니까?"

"우리와 함께 임무를 수행할 제3 특무대 대장인 개럿 경이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3 특무대와는 별도로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까?"

"그렇게 되겠지. 자네들도 그게 훨씬 더 편하지 않겠나?"

"그렇긴 하죠."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3 특무대 역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겨울성으로 끌려온 범죄자 출신이거나, 그와 비슷한 이들일 가능성이 컸다.

전쟁터에서 내 등을 맡기기에는 영 불안한 놈들이라는 이야기.

그렇기에 차라리 어설픈 협동을 하느니 각자의 자리만 지키며 할 일만 하는 게 나한테도 훨씬 더 나았다.

북동쪽 성문 입구에 도착한 우리가 성벽 계단으로 향하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게 제4 특무대인가?"

"애송이들 같은데?"

"그렇겠지. 근데 왜 네 명이야? 다섯 명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벌써 한 명 뒈진 걸 보니까 별 볼 일 없나 본데?"

그 말에 콘란의 이마에 작은 주름이 생겼으나, 겨울성 군인으로서의 지난날이 그에게 인내심이란 걸 부여한 모양인지 나서지는 않았다.

'저 녀석들이 제3 특무대인가.'

일반적인 병사와는 조금 다른 복색.

묘하게 자신감 있어 보이는 태도.

척 봐도 질은 나빠 보이지만, 그만한 실력은 있는지 제법 그럴듯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레벨로 치면 대충 3레벨 정도일까.

물론 단순 레벨로 비교하자면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까마득한 강자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새삼스레 주눅 들 생각은 없었다.

레벨이 2든 3이든, 어지간한 강자가 아닌 이상 이마에 총알 구멍이 나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척 보니까 제3 특무대 놈들도 별것 아니네. 굳이 신경 쓸 필요 없겠어."

내가 툭 내뱉은 한마디에 옆에 있던 콘란이 놀랐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뭐."

"...아니, 조금 의외라서."

콘란이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니, 당연히 당사자들인 제3 특무대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 새끼가...!"

"그만둬. 장교와 함께 있다. 그리고 대장이 기다릴 테니 우리도 슬슬 올라가야 해."

"...빌어먹을."

제3 특무대원들은 나를 노려보고는 서둘러서 계단을 올랐다.

솔직한 마음으로 에드릭 앞에서 저들이 까부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 정도의 이성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에드릭이 슬쩍 나를 보며 웃었다.

"흠. 역시 자네는 질이 나빠."

"네? 뭘 말입니까?"

"계약을 중시하는 마법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아무래도 헛소문 같군."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올라가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에드릭의 말마따나 특무대원들이 조금 여유를 부리기는 했어도 전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특무대원들까지 별도의 임무가 아닌 수비 임무에 할당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변종의 출몰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방심하지 말게, 위험한 건 변종뿐만이 아니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성벽에 오르기 무섭게 우리를 반긴 건 이름 모를 병사의 비명이었다.

"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병사의 머리가 통째로 뜯겨 나갔다.

까드득, 까드득....

끔찍하기 짝이 없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사람 머리를 마치 껌처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마수의 얼굴이었다.

[Lv.4]

[머리 먹는 쥬고]

시작부터 네임드 개체라....

썩 운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믿음직스러운 대장이 있다는 점이었다.

제4 특무대장 에드릭.

분명히 숨겨 둔 수가 있을 터인 그가 지닌 강함은 아직 나조차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스릉....

검이 뽑혀 나오는 건 보이지 않았다.

단지, 머리 먹는 쥬고의 목이 잘렸다는 결과만이 보였을 뿐.

촤악!

순식간에 잘려 나간 쥬고의 머리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려 4레벨 네임드 마수치고는 허무한 최후였지만, 그러한 일을 해낸 에드릭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뭣들 하나, 어서 안 움직이고."

그 말마따나 새삼스레 에드릭의 신위에 감탄할 틈은 없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마수들은 여전히 눈앞에 즐비해 있었으니 말이다.

"우오오!"

가장 먼저 콘란이 도끼를 든 채로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Lv.2]

[바늘 에루스]

벌침 같은 거대한 독침을 든 곤충형 마수가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콘란은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알리시아 또한 검을 뽑아 들고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성벽 위에 올라선 마수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촤악!

촥!

알리시아의 몸이 마치 춤을 추듯이 유려하게 움직일 때마다 마수들의 몸이 갈라졌다.

익히 알고 있던 솜씨.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싸웠다가는 끝이 없어. 우선, 올라오는 마수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콜트 패리슨 B-09을 뽑아 들었다.

철컥.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성벽을 오르려던 마수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성벽 아래로 추락하고 다른 마수들이 그에 휩쓸렸다.

[키에엑!]

[크루루루!]

성벽을 오르는 마수들을 잠시 저지했으나,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총성의 굉음은 이미 성벽 위에 올라와 있던 다른 마수들의 주위를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쯧.'

마수들이 나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낸다.

[Lv.2]

[검은 갈기 늑대]

[Lv.3]

[긴 이빨 검치호]

본래였다면 감히 내가 쳐다볼 수조차 없는 강력한 마수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당장 내 몸뚱어리는 1레벨의 그것일지언정, 그 허약한 몸뚱어리를 보조하는 건 전설급 이상의 잠재력을 지닌 아이템들이었으니까.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피의 움직임에 더없이 예민해집니다.]

두근, 두근....

주변에 있는 모든 피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사기적인 능력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애석하게도 여기에도 약점은 있었다.

바로, 피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 자체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느껴지는 피의 흐름 속에서 나에게 위협이 되는 마수와 아군 그리고 이미 죽은 존재를 구분하는 건 순전히 내 몫이었다.

이래서야 없느니만 못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언제 눈먼 돌팔매질에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서는 있는 게 훨씬 더 나았다.

두근-

'뒤!'

한결 빨라진 반응과 함께 내 뒤에서 나타난 대상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카악!]

그러나 정밀한 조준 없이 마구잡이로 쏜 사격은 마수에게 있어서 그리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크르르!]

마수의 발톱이 날아든다.

그와 동시에 내 배후에서 또 다른 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앞에도 적, 뒤에도 적.'

하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서 정면에 있는 마수의 얼굴을 향해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이래서야 배후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가 될 테지만, 아직 나에게는 남은 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살얼음이 낀 얼음의 방패가 배후에서 덮쳐 오던 마수의 발톱을 막아 냈다.

캉, 카아앙...!

약화된 물의 보옥이 벌어 준 틈은 길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방아쇠를 당길 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처음부터 그 정도의 시간뿐이었으니.

철컥─

다시금 방아쇠가 당겨졌다.

* * *

겨울성 크로이츠의 북동쪽 성문을 담당하는 제4 경비대장 리암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특무대가 지원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전력으로 무슨 지원이냐고 절망했다.

그러나 막상 특무대의 활약을 보고 있으니, 그 생각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4 특무대 소속의 마법사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저런 게 가능한 건가?'

굉음과 함께 벼락이 칠 때마다 마수들의 머리가 터져 나간다.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위력.

필시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는 마법일 텐데도 불구하고, 저 마법사는 자신이 치를 대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했다.

탕!

타아앙!

단지 그뿐이었다면 그저 뒤를 생각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마법사겠거니 하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법사는 고고히 성벽 위에서 점차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도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

이런 치열한 난전 속에서도 자잘한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괴물이 따로 없군.'

그러나 동시에 아쉬웠다.

아무리 당장은 멀쩡해 보인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마법을 남발한다면 필시 그 대가는 엄청날 터.

늦든 빠르든 저 마법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기에 더없이 아쉬웠다.

만약 저런 전력이 겨울성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 준다면, 늘 겨울성에 감도는 절망 또한 조금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생각이겠지.'

겨울성에 오는 마법사들은 모두 오래 살지 못한다.

겨울성이라는 곳 자체가 적당히 마법을 아끼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암은 저 이름 모를 특무대 소속의 마법사 또한 다른 마법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으레 보아 왔던 마법사들처럼, 한껏 화려하게 타오르고 바스러지는.

29화 습격 (3)

짤랑, 짤랑....

실린더를 뒤로 젖히기 무섭게 바닥에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의 탄피가 나뒹군다.

쉴 새 없이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소모한 총알의 숫자를 잊는 일은 없었다.

그걸 잊는다는 건, 곧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쿠루루!]

타앙!─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래 콜트 패리슨 B-09에 장전되어 있던 6발의 탄과 미리 소환해 두었던 12발을 모두 소진했다.

이제 남은 탄은 새로 소환할 수 있는 콜트 패리슨 B-09과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을 합쳐서 18발.

거기에 더해서 아직 아껴 두고 있는 B686 더블 배럴 샷건에 장전된 탄 2발까지 총 20발이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을 소환합니다.]

나는 손바닥 위에 펼쳐진 12발의 탄 중에서 6발은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6발은 한 발씩 콜트 패리슨 B-09의 실린더 안에 넣었다.

콜트 패리슨 B-09 같은 리볼버는 다 좋은데, 장전이 너무 귀찮은 게 가장 큰 문제다.

'스피드 로더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걸 바랄 수는 없겠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이 있다면, 병기 소환 특성 자체가 발동할 때마다 새로운 병기를 소환하는 것이었기에 총기라면 피할 수 없는 고장이나 탄 걸림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만약 총기를 정비할 만한 그 어떤 도구도 없는 이곳에서 내 손으로 직접 총기를 정비해야 하거나 고쳐야 했다면, 나는 진작 죽어서 저기 어딘가의 눈 밑에 나자빠져 있었을 것이다.

"벨! 지원하게!"

에드릭의 외침과 함께 최소 5레벨로 보이는 마수와 에드릭이 격돌했다.

5레벨 마수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마수들 사이로 거침없이 뛰어든 에드릭의 돌격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아마 그것은 본인의 실력과 더불어서 나를 믿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탕!

타앙!!!──

연달아 방아쇠가 당겨진다.

콜트 패리슨 B-09의 방아쇠 압력은 리볼버답게 제법 강한 편이었기에 연발은 꽤 힘이 든다.

하지만 하이마의 펜던트가 가져다준 육체 능력 상승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육체 능력을 지닌 나에게 그러한 일을 충분히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체 능력이 20% 향상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출혈'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합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공정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과도 같은 그것은, 나에게 강력한 힘과 동시에 치명적인 리스크를 부여했다.

단 한 번의 공격.

만일 마수에게 단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나는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물의 보옥이 있으니 과다 출혈로 죽는 웃긴 꼴은 없겠지만... 그래도 리스크가 훨씬 더 큰 건 사실이지.'

과연 약화된 물의 보옥이 하이마의 펜던트로 인해서 증폭된 출혈 효과를 저지할 수 있을까?

워낙 조건 자체가 특수하다 보니 나로서도 감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내가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오오오오!]

총격과 더불어서 에드릭의 검무가 더해지자 5레벨 마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쓰러졌다.

이는 에드릭 본인의 강함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지닌 총의 특성을 에드릭이 놀라울 정도로 잘 이용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사이에 총의 특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한 건가? 뭐... 총만큼 직관적인 능력은 별로 없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금은 놀란 이유는, 이 세계의 주민들은 여전히 내가 사용하는 총을 마법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가지!"

에드릭이 외치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그에 질세라 콘란과 알리시아 역시도 각각 도끼와 검을 든 채로 성벽 위로 올라서는 마수들에 맞섰다.

'가 볼까.'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 * *

피, 화약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냄새와 비명이 전장에 감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성벽 위를 대충 정리하고 나니, 전황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적어도 이제 북동쪽 성벽 위에 올라온 마수들은 없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전쟁이 끝났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전히 성벽 아래에서는 어떻게든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마수들이 득실득실하게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탄환 소비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해.'

재사용 대기 시간이 될 때마다 꾸준히 병기 소환으로 탄을 리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탄은 이제 많지 않다.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 7발.

70mm 12게이지 산탄 1발.

총 8발이다.

70mm 12게이지 산탄 1발은 유사시를 대비한 비장의 수라는 걸 생각한다면 나머지 7발로 다음 병기 소환을 위한 재사용 대기 시간 동안 버텨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직접 검을 들고 마수와 얼굴을 맞대야 할 테니 말이다.

철컥-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는 다르게도 당장 성벽 밑에서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마수를 잡기 위해서는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타앙!!──

[꾸엑!]

계속해서 성벽 아래에서 꾸득꾸득 기어 올라오는 마수들의 모습이 마치 어둠의 늪에서 올라오는 악귀들처럼 보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마수였다.

성벽 아래가 어둠으로 물들어 있다 보니 정확히 어떤 마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렇게 생긴 마수들에 대한 대처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의 보옥'이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지닌 권능은 대부분 보호 혹은 회복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공격에 사용하고자 한다면 아예 사용하지 못할 건 없었다.

비록 직접적인 공격 능력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지키는 전쟁에서는 꽤 쓸 만했다.

바로, 지금처럼.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서 적을 배제합니다.]

물의 보옥에서 흘러나온 얼음 파편들이 내 의지에 따라서 성벽 아래를 향해 뻗어 나갔다.

파차창!

그것은 분명히 본래 물의 보옥이 지닌 힘에 비한다면 별 볼 일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마수 자체를 향한 공격이 아닌, 마수가 타고 오르고 있는 성벽에 있었다.

[시시싯!]

갑작스레 생긴 얼음 벽을 마주한 뱀 형태의 마수가 마찰력을 잃어버리고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당연히 밑에서 뒤따라오던 마수들이 그에 휩쓸렸음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쿠루루!]

[카아아악──!]

전투가 계속됐다.

치열하기 짝이 없는, 그런 전투가.

"하악, 하악...."

힘들다.

아니, 죽을 것 같다.

총을 든 팔이 후들거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끊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멈춰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순간이, 내가 죽는 순간일 테니까.

타앙!!!──

보통 이런 야밤의 공격은 아침이 밝으면 끝나는 게 상식이었건만, 마수들의 공세는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우오오오!"

피투성이가 된 콘란이 악을 쓰며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둘러 댔다.

도대체 저 꼴로 어떻게 아직도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아니 살아 있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였다.

잠깐의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어느덧 다시금 마수 한 마리가 성벽 위에 머리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쿠루루!]

지긋지긋한 놈들....

이제 더 이상 남은 총알은 없었기에 나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생각은 필요 없었다.

그저 내가 생존 검술이라 명명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이 존재했을 뿐.

촤악!

다행히 상대가 1레벨 마수였기에 내 조악한 검술도 어느 정도는 통하는 듯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내 상대가 한 마리뿐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크오오오!]

배후에서 마수가 덮쳐 온다.

피의 고동이 일찍이 마수의 존재를 알렸지만,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내가 거기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파차창!!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방패가 마수의 발톱을 막아서며 연신 사라졌다 재생됐다를 반복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몸을 돌려서 마수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상대는 2레벨 마수.

본래였다면 내가 지닌 조악한 근접 전투 능력으로는 절대로 죽일 수 없는 상대였지만, 물의 보옥을 믿고서 방어를 도외시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다.

그마저도 만약 3레벨 이상의 마수였다면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내 힘으로는 가죽을 뚫을 수 없었을 텐데,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벨! 뒤!"

콘란의 외침과 함께 내 뒤를 향해서 마수가 덮쳐 왔다.

그리 강한 마수는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내가 당장 대응을 하기에는 늦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하는 수 없이 내가 비장의 수를 쓰려던 순간.

촤악!─

어디선가 나타난 알리시아가 마수의 목을 베어 갈랐다.

"...고맙다."

끄덕.

알리시아는 언제나처럼 무감하게 나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시선을 마수에게로 돌렸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잠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하악, 하악...."

입에서 나는 게 단내인지 피 냄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마 둘 다겠지.

조금 시간이 흐른 덕분에 나는 다시금 병기 소환 특성을 발동했다.

이런 지긋지긋한 소모전에서 병기 소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놀리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이렇게 소환한 병기와 탄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다.

그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였으니까.

그렇게 나는 콜트 패리슨 B-09을 쥔 채로 조심스럽게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껏 해 왔듯이, 반복적으로.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성벽 아래로 보이는 건 산처럼 쌓인 마수들의 사체들뿐.

어느덧 성벽을 아득바득 기어오르던 살아 있는 마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끝난... 건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절망의 밤이 마침내 지나갔다.

* * *

잠시 정신을 잃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고 나니, 눈앞에 익숙한 알림 창들이 나타났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정신력이 상승합니다. (+1)]

[2 → 3]

[체력이 상승합니다. (+1)]

[3 → 4]

[근력이 상승합니다. (+1)]

[3 → 4]

정신력 능력치는 물론이고, 체력과 근력 능력치가 올랐다.

이 압도적인 성장 속도야말로 하이마의 펜던트와 물의 보옥을 모두 지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런 성장력이야말로 그 두 가지 아이템의 진정한 가치라고 볼 수도 있었고 말이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Lv.1 → Lv.2]

2레벨.

공정의 세계에서 레벨은 그 자체로 어떤 강함을 부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종합 평가에 가까웠다.

즉, 레벨이 높기에 강한 게 아니라 강하기에 레벨이 높은 것이다.

얼핏 보면 같아 보여도 여기에는 아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제야 2레벨인가.'

이제껏 내가 사냥했던 마수들의 레벨이 작게는 2레벨, 크게는 4레벨까지도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뭐, 그만큼 이 세계에서 총의 위력이 말도 안 된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길고 길었던 간밤의 습격은 막을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장 먼저 보인 건 피와 사체들이었다.

군인의 시체와 그보다 더 많은 마수의 사체들.

전투는 끝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오, 벨. 살아 있는 걸 보니 기쁘군."

전투 중간쯤부터 보이지 않던 에드릭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척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부상들.

에드릭 본인은 말하지 않겠지만, 전선을 지켜야 할 그가 본래의 임무마저도 팽개치고 잠시 사라졌을 정도였으니, 아마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을 하고 돌아온 것일 터였다.

"대장도 무사하셔서 기쁩니다."

"하하, 마법사답지 않게 혀에 기름칠하는 건 여전하군. 이만 가지. 임무는 성공일세."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언제나 같은 그 웃음에는 사람을 묘하게 안심시키는 힘이 있어서, 나 또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나저나, 자네는 이번 전투에서도 상처 하나 없군. 쉽지 않은 전투였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가? 뭐, 신의 은총이겠지."

"신앙심이 그토록 깊은 줄은 몰랐습니다만."

"나야 늘 신실하지. 하하."

에드릭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성벽 위에 널브러져 있는 콘란과 알리시아가 보였다.

"자네들도 무사하군."

"...이게 무사해 보입니까?"

"살아 있으면 된 것 아니겠나?"

콘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큼 콘란이나 알리시아나 모두 상당히 부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만들 돌아가지, 뒷정리는 우리의 몫이 아니니."

고단했던 겨울성에서의 하루가 또다시 끝나 갔다.

* * *

──────────────

이름 : 벨 블랙우드

레벨 : 2

체력 : 4

근력 : 4

정신력 : 3

특성 : [멸망 유예자(EX)], [병기 소환(??)], [인내(D)], [화염 내성(D)]

기예 : [생존 검술(D)]

마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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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기사단장임

"그러면 나는 먼저 가 볼 곳이 있으니 다들 의무대로 먼저 가 있게."

"대장님은 치료 안 하십니까?"

"걱정해 주는 건 기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자네들 먼저 가 있게."

"혼자 뭐 특별한 치료 같은 걸 받는 건 아닙니까?"

"하하, 자네가 나를 아주 높게 치는군. 자네는 멀쩡해 보이는데 복귀 작업에 힘 좀 보태겠나?"

"잘 다녀오십시오."

"벨 자네는 다 좋은데 꼭 한마디씩 더 붙이는 게 문제란 말이야. 마법사라서 그런가?"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래도, 정말 잘해 주었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북동쪽 성문은 위험했을 거야. 자네들이 흘린 피 덕분에 많은 생명을 구했어."

에드릭의 무거운 시선이 겨울성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와, 줘...."

"일어나! 일어나라고! 제기랄."

"끄으윽...."

죽어 가는 부상자들의 신음과 타오르는 연기가 마치 이미 죽어 나자빠진 망자들의 넋처럼 전장에 감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마수 사체가 즐비했으나, 아무리 기적적인 교환 비로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죽은 이들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는다.

죽은 건 죽은 거다.

그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죽음이 무의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네들이 강제로 끌려온 처지라는 건 잘 알고 있네.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나 군인으로서의 정신 같은 걸 말해 봐야 입만 아프겠지."

에드릭의 시선이 지금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무수한 이들을 향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자네들의 희생 덕분에 저곳에 있는 저들이 오늘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네. 그 점에 대해서 크로이츠를 대표해서 감사함을 전하는 바이네."

왜일까.

여타 군인들을 대하듯이 군율로 통제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호소하는 에드릭의 모습이 더없이 무섭게 느껴지는 건.

'과연.'

알고 있던 대로 에드릭은 유능했다.

두려울 정도로.

"무슨 그런 낯간지러운 소립니까? 평소대로 하십쇼, 평소대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콘란이 코를 문지르며 웃었고, 알리시아 역시도 드물게 입을 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반응을 의도했든 아니든, 어쨌거나 에드릭의 말은 치열한 전투를 마친 제4 특무대원들에게 있어서 깊은 울림을 준 듯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어서들 가 보게. 지금 이마에서 피 나네."

"아."

그 말대로 콘란의 이마에 대충 감은 붕대에서 피가 삐죽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이윽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디 가나?"

"먼저들 가 있어. 대장이랑 할 말이 남아서."

"쯧. 마음대로 해. 우리는 가자고."

나는 콘란과 알리시아를 뒤로한 채로 에드릭이 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에드릭이 서두르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겠지만, 꽤 느긋하게 걷고 있었기에 다행히도 내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대장님."

"오, 벨. 드디어 복구 작업에 한 손 거들 마음이 생긴 건가?"

"그럴 리가요. 대장님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건 또 마법사다운 호기심이군. 말하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답해 주지."

말해 줄 수 있는 선이라....

에드릭은 이미 내가 무엇을 물어볼지 어느 정도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평소 겨울성에 이 정도 규모의 공격이 많습니까?"

"아니... 꼭 그렇진 않네. 근래에 들어서 부쩍 늘어났다고 봐야겠지."

예상했던 답이다.

만약 오래전부터 이 정도 규모의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면, 겨울성은 진작 함락되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혹시 그 시기가 변종의 출몰 이후부터입니까?"

에드릭의 눈이 빛났다.

"역시 마법사다운 직관이군. 본래였다면 기밀이지만... 거기까지 꿰뚫어 보았다면 숨겨 봤자 의미 없겠지. 맞네."

역시.

승천석과 승천석 파편.

마기를 띤 변종의 등장과 최근 들어서 부쩍 심해진 마수들의 공격.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대체 승천석 파편을 둘러싸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나 또한 그로 인한 여파를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애초에 내가 당사자라고 볼 수도 있겠군.'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에드릭이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 알아낸 표정이군."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런가? 만약 무언가 알아낸다면 꼭 내게도 알려 주었으면 좋겠군,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으니. 보면 알겠지만... 지금 겨울성은 꽤 급하거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자네가 마법사라서 다행이야."

나는 왠지 그 마지막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 * *

라크나 대륙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불길함 속에서도 일상은 이어졌다.

큰 고비를 넘긴 덕분일까.

아니면 콘란과 알리시아가 다시금 의무대 신세를 지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느덧 제4 특무대에는 또다시 자율 훈련 시간이라는 이름의 자유 시간이 찾아왔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온전히 나 혼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평소 잘 부상을 입지 않던 알리시아조차 이번 공격에서는 부상이 작지 않았는지 먼저 의무대에 입원해 있었던 알비노, 콘란과 함께 의무대 신세를 지게 되었고, 에드릭 역시도 바쁜 일이 있는지 막사에 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정말로 혼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막사 밖에서는 복구 작업을 비롯한 여러 작업들이 한창이었으나, 에드릭의 배려 덕분인지 나는 그 어떤 작업에도 끌려가지 않고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지금껏 쓸데없다고만 여겨 왔던 특무대라는 간판이 처음으로 쓸모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간신히 손에 넣은 혼자만의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이야 뻔했다.

자체 검술 훈련과 체력 훈련은 다른 이들이 있어도 눈치 볼 것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익명 게시판만은 아니었으니까.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낯설기 짝이 없는 이 세계에서 익명 게시판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서 가뭄의 단비 혹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일종의 동질감으로 인한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멸망 유예자로서 강건하기 짝이 없는 내 정신이 고작 외로움 따위로 흔들리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거기에 더해서 익명 게시판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정보 역시도 적지 않았으므로, 내가 익명 게시판을 주기적으로 살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섭종기원n일차 : ㅅㅂ 전 재산 4천골 됐네.

-익명651 : (경험담) 너희는 ㅈ소 다니지 마라.

-루나 : 오늘 저녁 메뉴!

-돈좀주세요 : 내 인생 최악의 날이다 ㄹㅇ

익명 게시판에 접속하기 무섭게 가장 먼저 언제나처럼 온갖 정보와 잡담들이 범람했다.

대부분 쓸모없는 게시 글들이었지만, 애초에 익명 게시판의 용도 자체가 그러한 용도였으니 불만은 내비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처럼 겨울성과 관련된 정보. 그리고 변종을 비롯한 승천석 파편과 관련된 정보들을 검색했다.

[제목 검색 : 겨울성]

[제목 검색 : 변종]

[제목 검색 : 파편]

[제목 검색 : ■■■]

-익명68 : 저번에 겨울성 한번 가보니까 진짜 춥긴 오지게 춥더라 ㅋㅋ 괜히 방한복 안 입으면 바로 상태 이상 걸리던 게 아니더라.

-SilverFox : 겨울성 한번 갈까...

-구사다 : 변종 위치 제보받아요 (사례금 있음)

-기사단장임 : 저번에 ■■■ 파편 판다는 사람 있었는데 어디 감?

조금 신경이 쓰이는 글이 있기는 했어도, 그 외에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애초에 진짜 중요한 정보였다면 익명 게시판에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지는 않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배기 정보를 무상으로 뿌리는 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개미핥Gi : 제국 남서쪽 조심하셈.

특히, 개미핥기라는 유저는 제국에서 펼쳐지는 여러 위협에 대한 경고를 자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얼핏 보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행위와도 같았으나, 애초에 익명 게시판에 있는 고정 닉네임들이 그렇듯이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저렇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한 것일 터였다.

나는 개미핥기의 게시 글을 눌렀다.

평소에는 나와는 상관 없는 장소라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왠지 저 경고가 지금 라크나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변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

제국 남서쪽 분위기 심상치 않음.

근처에 있는 사람 조심.

──────────────

딱 그 정도의 정보뿐.

본래였다면 정보의 신빙성부터 의심해야 할 수준이었으나, 댓글은 개미핥기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김수박 : 또야?

-익명111 : 에구... 짐 쌉니다.

└지하 : 이번에도 같이 가싈?

└익명111 : ㄱㄱ 만나던 곳으로 오셈.

-얼굴다탔어 : 맨날 도망다니기 빡치는데 아예 이 김에 북쪽으로 옮길까?

└익명55 : 겨울성 가게? ㅋㅋㅋ

-꺄르르 : 늘 좋은 정보 ㄱㅅ

-익명55 : 근데 이분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뉴비 사냥꾼 아님? 이렇게 찌라시 뿌려 놓고 움직이는 애들 조지는 거 아님?

└익명111 : 그럼 너부터 뒤질 듯.

└익명55 : ㄷㄷ

도대체 제국 남서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댓글의 반응을 보니 유저들로서는 항거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일어날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보 찾기가 쉽지가 않아.'

그렇게 다른 정보를 찾아서 개미핥기의 게시 글을 나온 나는 유독 시선이 가는 게시 글을 보았다.

바로 익명 게시판에 새로이 나타난 뉴 페이스인 용잡이를 언급하는 게시 글들이었다.

-JUN : 근데 용잡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임? 말하는 거 보면 고렙 같은데.

-헤슨 : 용잡이 좀 수상해 보이기는 해도 정보는 진짜더라. 고렙 맞는 듯.

-익익이 : 아직도 뉴비 고렙이 남아 있었어? 신기하네.

으음....

[제목 검색 : 용잡이]

혹시나 해서 용잡이에 대한 검색을 해 보니 웬걸.

의외로 적지 않은 게시 글들이 나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익명55 : 드래곤 슬레이어좌 용잡이 ㄷㄷ

-추측성뇌피셜3 : 근데 고렙이 푼돈은 왜 벌려고 하는 거지? 그냥 마수 몇 마리 잡아다 파는 게 낫지 않나?

-익명113 : 마법을 너무 써서 이제 고장 났나 보지.

-추측성뇌피셜3 : 에이, 고인물쯤 되는 사람이 마법 난사하고 다니겠음? 븅신도 아니고.

-익명113 : 그 븅신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렇지.

-추측성뇌피셜3 : 그런가?

원인은 이전에 내가 30골드를 벌기 위해서 했었던 정보 흥신소에 있었다.

당시의 나는 골드를 벌기 위해서 몇 없는 질문자들의 질문에 상당히 성실히 답해 주었는데, 그중에는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처럼 웬만한 고레벨 유저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익명 게시판 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였다는 건, 알게 모르게 약간의 발언권이 생겼다는 말과도 같았다.

어느 정도 네임 밸류가 있는 유저와 그렇지 않은 유저의 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익명 게시판 내에서 고레벨 유저로서 자리를 잡는다면, 내가 필요한 순간 적절하게 이들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괜히 나를 주목하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용잡이의 신원은 철저한 익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뭐, 어차피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정보 흥신소는 또 활동 안 할 테니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게시 글로 시선을 옮기려던 순간.

-기사단장임 : 지금 용잡이 있음? 궁금한 거 있는데 답해 줄 수 있음? 사례 드림.

뉴들박77피셜, 익명 게시판에서 가장 위험한 네임드 중 한 명이 나를 찾고 있었다.

31화 기사단장임 (2)

기사단장임.

소위 말하는 익명 게시판 네임드 중 한 명으로, 언제고 보았던 뉴들박77의 간접적인 언급에 따르면 매우 위험한 자라고 한다.

애초에 뉴비 사냥꾼이 존재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을 정도로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익명 게시판 내에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당당히 흘리면서도 지금껏 멀쩡히 활동해 왔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다.

근거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기사단장임이 말하는 정보나 그 외 언행 등을 고려했을 때... 최소 6레벨 이상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이것도 최소로 잡은 것이지, 만약 기사단장임이 내 생각대로라면 7레벨 이상의 강자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제국 내에 있는 기사단 중 하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그런 걸 의미했으니까.

'거기다가 만약 그중에서도 삼신수 기사단 중 하나를 이끄는 자라면 그 상상조차도 뛰어넘는 자겠지.'

삼신수 기사단.

멸망룡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대륙 전체의 전력이 크게 깎여 나간 와중 새롭게 부상한 현 제국을 대표하는 세 기사단을 말하는 것으로, 각각 유니콘, 그리폰, 크라켄을 상징으로 삼은 기사단이다.

익명 게시판에서 얼핏 듣기로는 멸망룡 등장 이후에 전 대륙의 전력 수준이 크게 깎여 나간 걸 감안한다면 평균적인 수준이 꽤 높다고 하던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은 일단 기사단장임이 나를 찾고 있다는 점이었다.

짐짓 모른 척 외면을 하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닐 테지만, 만약 그것을 기사단장임이 무시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일단은 호기심이 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 정도 되는 인물이 도대체 왜 나를 콕 집어서 찾고 있는가?

나는 그게 꽤 궁금했다.

-용잡이 : 무슨 일이신가요?

일단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기사단장임이 작성한 게시 글에 댓글을 작성했다.

괜히 밉보였다가는 어떤 식으로 보복이 들어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원래 주먹은 가깝고 법은 먼데, 심지어 지금은 법조차도 상대에게 가까울 확률이 매우 높다.

아무리 지금 내 신분이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소리다.

└기사단장임 : 아, 있었네. 물어볼 게 있는데 답변 가능?

└용잡이 : 제가 아는 선에서는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임의 대댓글은 곧 달렸다. 물론 비밀 댓글로.

└기사단장임 : 굿굿 시원시원해서 좋네.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봄.

└기사단장임 : 멸망룡이 왜 사라졌는지 혹시 아는 거 있음?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저 댓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멸망 유예자의 정신은 나에게 그 어떤 동요도 허락하지 않았고, 명경지수의 마음속에서 나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역시, 멸망룡은 그냥 사라진 걸로 돼 있나.'

새삼스럽지만, 멸망룡 티아매트는 나와 치렀던 최후의 일전 끝에 영면에 빠졌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세계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없었고, 그건 익명 게시판에 있는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장임쯤 되는 인물조차도 그렇게 알고 있다면 멸망룡의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나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굳이 진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멸망룡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나뿐.

훗날 이 정보가 어떤 식으로 쓰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이 정보를 흘리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멸망룡이라는 존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 세계에 있어서 크나큰 상흔을 남겼으니까.

└용잡이 : 멸망룡과 관련된 정보는 죄송하지만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기사단장임 : 역시 그런가... 답변해 줘서 땡큐.

└기사단장임 : 경매장에 잡템 하나 올리면 입찰해 드림.

└용잡이 : 아뇨, 답변도 못 해 드렸으니 정보료는 괜찮습니다.

└기사단장임 : 흠... 그런가? 그러면 다른 질문 하나 함. 변종에 대해서 아는 정보 있음?

변종이라....

여기에 대해서는 나 또한 알고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대답해 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변종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정도는 기사단장임쯤 되는 인물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게 뻔했으니, 사실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용잡이 : 보편적으로 알려진 정보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근래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과 마 속성을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 속성이 변종이 품고 있는 파편 때문이라는 것 정도요.

그러니, 딱 이 정도가 좋다.

└기사단장임 : 흠... 이미 아는 정보긴 한데, 그래도 답변 고마워. 약속은 약속이니까 사례할게. 경매장에 템 하나 올리고 바로 댓글로 달아 줘.

└용잡이 : 예. 나무 숟가락 올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임 : 확인.

많은 우려를 했던 것과 달리, 기사단장임의 볼일은 그걸로 끝이었다.

어찌 보면 시시한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차 하면 목이 날아가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는 시시한 게 좋은 거다.

목숨이 달린 자극적인 이벤트라면 겨울성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면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러면....'

나는 곧장 경매장에 적당한 나무 숟가락 하나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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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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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품목]

◆나무 숟가락

[입찰 목록]

◆15골드(제국 금화 15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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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임은 약속대로 경매장을 통해서 정보료를 지불했다.

그런데 말이다....

'음.'

솔직히 말해서 기사단장임쯤 되는 인물이 주는 보상이니 특별한 뭔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딱 내가 제공한 정보료만큼의 가치를 정확히 지불했다고 할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그런 걸 어쩌리.

'그래도 아무 일 없이 끝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겠지.'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나중에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 * *

아마 그날부터였을 거다.

내가 기사단장임의 게시 글을 평소보다 더욱더 주시하게 된 것이.

원래도 네임드라 불리는 유저들의 게시 글은 꽤 주목하는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기사단장임을 더욱더 주목하게 된 것이다.

거리낄 건 없었다.

나를 제외한 제4 특무대원들이 모두 의무대 신세를 지고 에드릭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탓에 사실상 나는 자유 시간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기사단장임 : 애새끼들 말 진짜 안 듣는다. 또 파벌 싸움하고 ㅈㄹ 났네 그냥.

-기사단장임 : 확 다 처죽여 버릴까.

-기사단장임 : 꼭 말을 해야 들어먹지.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기사단장임은 익명 게시판 내에서 알게 모르게 작지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어떤 권력이나 권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익명 게시판에 있는 유저들의 반응 역시도 기사단장임을 명백히 의식하고 있었다.

-익명55 : 얘들아, 사려라. 단장햄 빡쳤다, 지금.

-구사다 : 야, 근데 저번에 까불던 애 어디 감? 쓱싹당했나?

-익명675 : 자숙 중이겠지. 또 까불다 걸리면 진짜 댕겅당할 수도 있잖아.

그러던 도중이었다.

-기사단장임 : 지금 용잡이 있나.

기사단장임이 나를 또다시 찾은 건.

└용잡이 : 무슨 일이신가요?

└기사단장임 : 아, 있었네. 마침 물어볼 게 있는데 ㄱㅊ?

└용잡이 : 예. 말씀하세요.

기다림은 꽤 길었다.

마치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체 무슨 질문이기에 기사단장임을 고민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거야 곧 알게 될 일.

그리고 마침내 기사단장임의 대댓글이 작성되었다.

└기사단장임 : 혹시 황혼 악단에 대해서 아는 거 있음?

황혼 악단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나는 기사단장임이 왜 이렇게까지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혼 악단.

여러 가지 수수께끼가 많은 복마전 내의 세력 중에서도 유독 비밀에 싸여 있는 곳으로, 공정의 세계 내에서 모르는 게 거의 없는 나조차도 그곳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장임이 그 황혼 악단에 대해서 묻는다라.... 이것만으로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황혼 악단이 멸망룡과의 전쟁에서도 명맥을 유지했다는 건가?'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기존에 공정의 세계 내에 있었던 무수한 세력들은 멸망룡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회생 불가의 피해를 입었다.

복마전도 그중 하나로서,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기사단장임이 황혼 악단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다는 건, 그 황혼 악단이 현재 존재한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한 것과 같았다.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내가 굳이 황혼 악단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황혼 악단의 진정한 정체는, 다름 아닌 멸망룡과의 전쟁 때 인류를 배신하고서 멸망룡의 편에 섰던 인류의 배신자들이었으니까.

「"자아, 멸망을 노래하자. 예정된 멸망의 용이여!"」

「"그 이름은 파멸이고, 멸망이자, 정해진 종말이다. 쓸데없는 발버둥은 그만두어라, 하찮은 필멸자들아."」

비록 멸망룡과의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서 그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황혼 악단과 직접 맞서기도 했던 나로서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기사단장임에게 황혼 악단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제공할 생각이었다.

기사단장임이 어째서 지금 황혼 악단에 대해서 알아보는지 알기 위해서.

└용잡이 : 복마전 내에 있는 군소 세력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온갖 사상이 판치는 복마전 내에서도 극단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복마전 내에서도 배척받는 존재들이라고 하더군요.

이 정도가 내가 기사단장임에게 알려 줘도 큰 지장이 없는 정보였다.

이 이상을 알려 주었다가는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내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답변은 곧 달렸다.

└기사단장임 : 흠... 역시.

└기사단장임 : 답변 고마워. 정보료는 똑같은 방식으로?

└용잡이 : 예. 나무 숟가락 올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댓글을 작성했다.

└용잡이 : 아, 그리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황혼 악단에 대해서 왜 물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물론 실제로 침묵 같은 게 흐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댓글이 작성됐다.

└기사단장임 : 황혼 악단이 최근 활동하기 시작했어.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주시 중이야.

딱 그 정도의 정보.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큰 정보였다.

단지 그 정도 말만으로도 지금 황혼 악단이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냈으니까.

황혼 악단.

인류를 배반한 멸망룡의 추종자들.

황혼 악단이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왠지 그것이 이 세계의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황혼 악단의 목적이 무엇인지.

승천석 파편은 무엇인지.

이 세계의 비밀은 무엇인지.

그리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용잡이 :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나무 숟가락은 경매장에 올렸습니다.

└기사단장임 : 확인.

나는 곧장 경매장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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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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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품목]

◆나무 숟가락

[입찰 목록]

◆200골드(제국 금화 200개)

◆-

──────────

기사단장임은 약속대로 이번 정보에 대한 정보료 역시도 입찰을 해 주었다.

그 금액이 무려 200골드.

순식간에 지금껏 내가 쥐어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거금이 들어온 것이다.

'괜찮은 거래였어.'

사실상 이번 거래는 나에게 있어서 이득밖에 없는 거래였다.

기사단장임이 지닌 정보를 얻었고, 그와 더불어서 기사단장임이 이미 파악하고 있을 터인 정보를 그저 교차 검증 해 주는 것만으로 무려 200골드라는 거금을 받았다.

곧, 이 덕분에 나는 이전부터 경매장에서 지켜봤던 물건 중 하나를 입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지금까지 모은 돈과 합쳐서 그걸 살 수 있겠어.'

지금껏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물건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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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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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321

[경매 품목]

◆샐러맨더의 송곳니

[최저 입찰 가능 금액]

◆210골드

[현재 입찰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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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샐러맨더의 송곳니

샐러맨더의 송곳니.

이름 그대로 화염 속성을 지닌 마수인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가공해서 만든 물건으로, 화염 속성을 품고 있는 물건들이 으레 그렇듯이 무척이나 유용한 물건이다.

특히 그게 겨울성 같은 장소에서라면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부싯돌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불을 피울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그저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북부의 한파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유사시에는 화염 속성 무기로도 사용이 가능했으니, 그 유용함에 대해서는 말해서 입만 아플 수준이었다.

'뭐... 유용한 만큼 비싸지만.'

사실, 샐러맨더의 송곳니는 그 유용성에 비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기존에 내가 치부하던 아이템들처럼 엄청나게 희귀한 물건까지는 아니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경매장에서도 샐러맨더의 송곳니가 거래되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적당한 공급과 적당한 수요.

210골드라는 절대로 낮지 않은 숫자는 시장 경제가 만들어 낸 샐러맨더의 송곳니의 적정 시세였다.

'그러면....'

나는 곧장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입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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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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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321

[경매 품목]

◆샐러맨더의 송곳니

[최저 입찰 가능 금액]

◆210골드

[현재 입찰 목록]

◆210골드

◆-

──────────

새삼스레 유찰될 거라는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현재 경매장에 등록된 샐러맨더의 송곳니는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혹시라도 유찰되더라도 다른 물건을 낙찰 받으면 되니, 애초에 걱정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

'입찰도 했겠다... 슬슬 할 거나 해 볼까.'

비록 지켜보는 자가 없다 하더라도 이 시간 동안 멍하니 익명 게시판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보를 얻는 건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위해서는 굳이 바깥에 나가서 부산을 떨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는 굳이 몸을 과격하게 움직일 필요 없이 신진대사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진대사가 크게 향상됩니다.]

전신에서 힘이 끓어오른다.

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서 물의 보옥의 권능을 발휘했다.

['물의 보옥'의 권능이 일부 활성화됩니다.]

[현재 '물의 보옥'이 힘이 온전하지 못하여 권능이 약화됩니다.]

[체내에 있는 액체를 통제합니다.]

[혈류량과 혈류속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내가 평소에 하이마의 펜던트와 물의 보옥의 권능을 동시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격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하이마의 저주와 물의 보옥의 권능을 동시에 발동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증거로 지금 내 몸에서는 한계를 뛰어넘은 혈류량으로 인해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치이익...!

단순히 힘이 끓어오르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전신의 혈액은 물론이고 육체 자체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모습이 남에게 보여 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내가 지금껏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리 내가 마법사라 알려졌다 하더라도, 이런 모습을 대놓고 보이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 넓은 막사에는 오롯이 나 혼자였고, 몸에서 열기가 좀 뿜어진들 이걸 보고 기겁할 이는 없었다.

마음껏 하이마의 펜던트와 물의 보옥이 지닌 저주와 권능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후우...."

단순히 앉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근육이 찢어질 것만 같다.

아니,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뚜둑, 뚜두둑─

실제로 전신에서 뭔가 끊어지고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는 건 사실이었으니.

그에 따른 고통 역시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으나, 멸망 유예자의 정신은 그 고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만약 물의 보옥이 지닌 치유의 권능이 나를 지탱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혈관이 터지고 뒤틀려서 죽었겠지만, 물의 보옥이 지닌 권능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치유합니다.]

찢어지고, 터지고, 회복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신체의 모든 부분이 점차 성장했다.

단순히 근육뿐만 아니라 혈관이나 장기 등 피가 닿는 모든 부분이 말이다.

'더 강해진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계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 * *

며칠이 흘렀다.

[경매가 종료되었습니다.]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낙찰 받으셨습니다.]

[입찰된 물품, '샐러맨더의 송곳니'가 전송됩니다.]

예상했던 대로 경매는 무난하게 종료되었고, 나는 210골드에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낙찰 받게 되었다.

단독 입찰이었기에 최저 입찰가에 낙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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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맨더의 송곳니]

분류 : 무기

등급 : 희귀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가공해서 만든 단검.

화염의 기운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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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진다.

단지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건만, 이제껏 주위를 맴돌던 북부의 혹독한 냉기가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이.

'그뿐만이 아니지.'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중심으로 주변의 기온이 변했다는 건, 곧 물의 보옥을 억압하고 있던 냉기 역시도 조금이나마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치유하는 중입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물의 보옥의 힘이 조금 더 강해진 게 느껴졌다.

내가 거금을 주고서 우선적으로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마련한 이유였다.

안 그래도 화염 속성 무기 자체가 매우 유용한데, 내가 지내는 곳이 겨울성이다 보니 샐러맨더의 송곳니는 사실상 필수 템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공정의 세계에서도 겨울성을 찾는 유저 대부분이 샐러맨더의 송곳니 같은 화염 속성 도구를 하나쯤은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화염 속성 도구 하나 없이 겨울성까지 찾아오는 게 이상한 거지.'

그리고 애석하게도 지금까지는 그 이상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나였고 말이다.

'뭐, 이제는 아니지만.'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암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느덧 이 세계에서의 생활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갔다.

그중 가장 큰 도움이 된 건 역시나 익명 게시판과 경매장의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익명 게시판은 나에게 있어서 이 세계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었고, 경매장은 현실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음식이나 여러 가지 유용한 도구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직은 이 세계에서도 크게 이질감 없는 수준의 음식들만 먹었지만...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다른 것들도 괜찮겠지.'

물론 그때가 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경매장에 올라와 있는 현대적인 음식들은 대개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이 세계와도 꽤 이질적인 탓에 그 자체로 눈에 꽤 띄었다.

즉, 완전히 개인적인 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면 함부로 그런 걸 먹는 모습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위험부담이라는 소리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저들 중에는 승천석 파편을 노리는 뉴비 사냥꾼 같은 흉흉한 소문의 존재도 있는 듯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음?"

감각에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익숙한 얼굴이 제4 특무대의 막사를 찾았다.

"오랜만입니다."

알리시아였다.

상대적으로 부상의 정도가 얕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회복력이 좋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알리시아는 멀쩡한 모습으로 제4 특무대 막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단순히 멀쩡한 모습을 넘어서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깨끗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다.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금발과 푸른 바다를 품고 있는 듯한 눈동자.

원래도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제껏 묵어 있던 때를 벗겨 내고 광을 내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건 그렇고....'

설마하니 알리시아가 먼저 인사를 해 올 줄은 몰랐건만, 아무래도 예전에 모닥불 앞에서 육포를 나눠 먹으면서 조금 친해진 것이 유효했던 모양이었다.

"콘란과 알비노는?"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게 군의관의 소견이었습니다."

"그래?"

콘란이야 그렇다 치고, 알비노는 유독 복귀가 늦어지는 걸 보니 마법의 후유증이 꽤 심하긴 한 듯했다.

'어쩌면 이걸로 마지막일 수도 있고.'

이 세계에서 마법사의 최후는 대개 예정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고, 그건 알비노 역시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았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지금 알비노에 대한 내 감정은 딱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반감도, 호감도 없는.

이를 바꿔 말하자면 알비노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아쉽거나 안타깝지는 않다는 소리다.

'그나저나... 왔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내 감각의 거미줄에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막사에서 혼자 지내는 평화로운 나날은 오늘로서 마지막일 듯했다.

알리시아가 복귀했다는 건, 곧 또다른 사실을 의미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다들 있었군."

알리시아가 돌아오기 무섭게 에드릭이 무척이나 오랜만에 제4 특무대의 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님도 살아 계셨군요."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농담 같지가 않군. 실제로도 그사이에 죽을 고비 몇 번 정도는 넘겼으니, 너무 걱정은 말게."

에드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으나, 에드릭 정도의 실력자가 죽을 고비를 언급할 정도라면 최근 사이에 쉽지 않은 임무를 맡은 듯했다.

"그러실 것 같아서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자네로군. 하하. 그래서 자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고... 잠깐 안 본 사이에 뭐 좋은 거라도 먹었나? 뭔가 달라진 것 같군."

에드릭이 그렇게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그사이에 직접적인 능력치 상승이나 특성 습득 같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정의 세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치들 역시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내가 최근 며칠 동안 단련한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소위 체질이라 부르는 것이었는데, 특정 상황에서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캐릭터의 성장 속도가 증가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수치는 아니기에 이제껏 일종의 미신과도 비슷하게 취급되어 왔지만, 에드릭이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단순 미신은 아닌 듯했다.

"저야 늘 잘 먹죠."

"흠, 그런가? 그것도 그렇군. 가만히 있으니 맛있는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고."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임무입니까?"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서 좋아. 마법사의 직관이라는 게 그런 거겠지."

"어떤 임무입니까? 마수 토벌입니까?"

"토벌은 맞지만, 마수는 아닐세."

에드릭이 말했다.

"우리는 마법사를 토벌할 걸세."

33화 업화의 마법사

"마법사... 라고요?"

마법사 토벌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이제껏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렇다네. 자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 보는군."

"어떤 마법사죠?"

드물게 알리시아가 적극적으로 임무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런 모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에 나 또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쉽게도 아직 자세히 알려진 건 없네. 현장에 남은 게 타고 남은 재뿐이었거든. 정황상 마법사의 소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소리지."

"재... 말인가요?"

"그렇다네."

"...알겠습니다."

알리시아의 표정이 더욱더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무엇이 알리시아의 표정을 저렇게까지 굳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게 알리시아가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에서 겨울성의 죄수로까지 오게 된 사유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마법사 토벌 임무였다.

"마법사의 소행이 확실합니까? 화염 속성을 지닌 마수도 있지 않습니까?"

"마수의 행위로 보기에는 어려운 정황이 몇 가지 발견되었네."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은 과정이 아닐 수 없으나, 전혀 납득할 수 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정의 세계에서 마법사는 배척받는 존재였으니까.

실제로 마법사의 존재가 징벌 교단에 노출되면 이단 심문관들의 집요한 추격을 받게 된다.

당장 내가 속해 있는 제4 특무대부터가 그렇게 끌려온 마법사들로 구성된 부대가 아닌가.

그나마 가릴 것 없이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써야만 하는 겨울성이기에 마법사라는 존재가 용인되는 거지만,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신의 존재에 정면으로 거역한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뭐... 그것도 죄수로 끌려온 거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러한 겨울성에서 특무대라는 귀중한 전력을 파견하면서까지 마법사 토벌에 대한 임무를 내렸다는 점이었다.

"일단 출발하지.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하겠네. 벨, 자네도 이제 말 정도는 탈 수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좋아. 훈련을 한 보람이 있군. 혹시라도 못 탄다고 했으면 밧줄에 묶어서 끌고 가려고 했네."

"농담처럼 안 들리는군요."

"하하, 원 사람도 참. 내가 그렇게 실없는 농담이나 할 사람처럼 보이나?"

그게 문제인 거야, 이 양반아.

어쨌거나 알리사아가 부대로 복귀하기 무섭게 새로운 임무가 시작이 되었다.

"각자 군장을 꾸린 후에 5분 후에 집합하겠다, 알겠나?"

"예."

"좋아, 움직이게!"

나는 알리시아와 함께 곧장 군장을 꾸렸다.

이번에 얻은 샐러맨더의 송곳니 역시도 잊지 않고 챙겼다.

원래도 용도가 많은 물건이지만, 만약 정말로 토벌 대상이 불을 다루는 마법사라면 샐러맨더의 송곳니는 큰 쓰임이 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유사시지만.'

가능하면 불을 다루는 마법사를 상대로 이걸 사용하는 순간은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마음먹은 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막사 앞에서 모인 우리는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에 도착하기 무섭게 마구간지기가 말 세 필을 이끌고서 에드릭을 반겼다.

아무래도 미리 언질을 준 듯했다.

"에드릭 경,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고했네. 그러면 바로 가지."

우리는 각자의 말에 오른 채로 에드릭의 뒤를 따랐다.

에드릭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음, 잘 타는군. 훈련의 성과를 직접 보니 기쁘기 그지없네."

"이 정도야 가뿐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자네 말이 조금 화가 난 듯한데? 혹시라도 낙마하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게."

"농담 같지는 않군요."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런 실없는 농담은 하지 않네."

에드릭과의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동안 우리는 빠르게 남쪽 성문을 통과했다.

주변에서 듣는 귀가 없어지고 나서야 에드릭이 이제까지의 농담조는 어디 갔냐는 듯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지는 리프스턴일세."

"리프스턴이라면 이곳에서 훨씬 남쪽에 있는 장소 아닙니까?"

"맞네."

그 말마따나 리프스턴은 이전에 마수 토벌로 간 적이 있었던 타스만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는 지역이었다.

사실상 겨울성의 영향력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장소라고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일어난 일까지 겨울성에서 개입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한다면 인근에 있는 블레이크 남작령과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은 겁니까?"

단지 그 정도 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는지 껄껄 웃었다.

"참 마법사답다고 해야 할지.... 그것까지 자네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미리 말해 두자면 이 임무는 블레이크 남작의 요청에 의한 것일세."

"블레이크 남작이 직접 말입니까?"

"그렇다네."

무려 영지를 소유한 귀족의 요청.

겨울성이 리프스턴에서 일어난 일에 개입하게 된 배경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블레이크령에 인접한 리프스턴에서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무려 블레이크 남작이 직접 겨울성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 마법사."

그때, 지금껏 가만히 있던 알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그에 알리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분명히 타고 남은 재만 남았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혹시 그 마법사가 불을 다루는 마법사인가요?"

에드릭의 눈에 작은 이채가 띠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그와 비슷한 마법을 다루는 것으로 판단되네. 물론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 그런 생각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위협하기 마련이니."

"...그렇군요."

평소와는 사뭇 다른 알리시아의 모습에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가는 동안 나는 미리 쿨타임을 돌려 놓을 겸, 미리 콜트 패리슨과 탄환을 소환해서 주머니에 넣어 두고서 언제든지 뽑을 준비를 해 두었다.

굳이 내색하지 않았을 뿐, 이번 임무는 정말로 목숨이 달린 위험한 임무였기에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을 소환합니다.]

그렇게 주머니에 있는 콜트 패리슨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에서 익숙한 지형이 보였다.

타스만이었다.

그에 에드릭이 말을 멈춰 세우면서 말했다.

"이쯤에서 잠시 쉬지."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어차피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출몰한 지역이 리프스턴일 뿐, 지금의 행방은 알 수 없네. 마법사의 이동 반경을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낫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과연 에드릭은 노련한 군인답게 마법사의 움직임까지도 생각하며 추격을 할 생각인 듯했다.

"불은 피우지 않겠네, 혹시라도 마법사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예전이었다면 그 결정만으로도 큰 탄식을 토해 냈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샐러맨더의 송곳니]

지금 나에게는 이게 있었으니까.

몰려오는 북부의 한파에 바들바들 떨 필요 없이 따스하게 지낼 수 있다는 소리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에드릭의 입술이 열렸다.

"알리시아."

"...네."

"자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네. 아니, 우리 모두 서로에게 그런 걸 묻지 않지. 그런 자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겨울성이니까."

에드릭 역시도 알리시아에게서 일어난 감정의 동요를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만큼 이번 임무에 임하는 알리시아는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게."

에드릭이 덧붙였다.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게. 그 행동의 결과를 짊어지는 건 자네 혼자가 아닐 수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믿겠네."

그리고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곧 마법사와의 결전을 앞둔 만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멸망 유예자의 정신을 지닌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쉬는 시간에 불과했다.

으적, 으적....

지닌 육포를 홀로 먹고 있으니, 자연스레 알리시아와 에드릭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물론 각기 다른 표정이었다.

"...자네는 지금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별달리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한 개 드시겠습니까?"

"사양하겠네. 그런 자극적인 걸 먹으면 감각이 둔해지거든.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고 하던가?"

"별 어려운 말도 다 아시네요."

"마법사 친구를 몇 둔 덕분이지."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학자나 현자 같은 이미지와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다소 의아한 대답이었으나,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에드릭의 정체가 꽤 수상하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는 바였으니.

그때였다.

"저어...."

"아. 하나 줄까?"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내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던 알리시아는 나에게서 육포를 받아 들고는 그것을 단번에 먹어 치웠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면서 만전을 기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에드릭 역시도 뭔지 모를 표정으로 알리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평소의 방임주의를 생각한다면 현재 필요 이상으로 알리시아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여유를 만끽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타났군."

에드릭의 나지막한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지평선 너머로 향했다.

멀찍이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매연.

누가 봐도 무언가가 불타오르고 있는 광경이었다.

우리가 찾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마침내 강력한 단서가 나타난 것이다.

"이만 움직이지."

-히이이잉!

그야말로 순식간에 말에 올라탄 에드릭이 어느새 앞장섰다.

"이랴!"

나와 알리시아 또한 따라서 말에 오르고는 연기의 진원지를 향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명심하게.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마수를 상대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네. 순간의 방심이 자신뿐만 아니라 전우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알리시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 자네는 대답 안 하나?"

"예, 뭐, 알고 있습니다."

"뺀질거리기는."

그렇게 검은 연기에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에드릭이 말을 멈춰 세우면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묶어 두고 걸어서 이동하지, 혹시라도 마법사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예."

검은 연기가 점차 가까워진다.

그렇게 조심스레 이동하고 있을 때, 에드릭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잠깐─"

에드릭의 말이 채 이어지기 전.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치솟았다.

34화 업화의 마법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