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회귀한 천재 헌터의 슬기로운 청소생활

001

"김준우 헌터님! 세계 최초로 SSS랭크를 달성하신 기분이 어떠신가요?"

"국내 헌터 랭킹 1위를 달성하신 지 불과 1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르셨는데,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국제 헌터 협회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이번 던전은 초고위험도 등급이라던데, 토벌 전에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준우 헌터님을 보고 있을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해주신다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마이크들 앞에서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실로 간만의 작전 투입이었다.

그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기억은 없지만, 던전 앞은 이미 새떼처럼 모여든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직접 토벌에 참여하는 건 요 1년 새엔 꽤나 드문 일이었으니, 그들에겐 오늘이 놓칠 수 없는 기회였으리라.

"죄송합니다. 자세한 답변은 추후 협회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토벌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예상한 대답이었다는 반응.

본인들이 원하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충분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내 목소리를 매체에 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겐 더 없는 수확일 테니까.

물론 정말 이대로 끝내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와 저희 팀은 그 무엇보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중한 목소리로 내뱉은 모범답안.

기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던 끝에 앞다퉈 들이밀던 마이크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럼 이만."

덧붙인 한 마디에 그들은 결국 주춤거리며 길을 열었다.

나와 내 부하들, 작전 1팀은 그 길을 따라 던전 입구로 다가섰다.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던 주변은 어느샌가 숙연해져 있었다.

더 이상 길을 막는 이도, 질문을 던지는 이도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오늘 토벌에 선출된 16명의 국내 최정상 헌터들.

그들 사이에 맴도는 무거운 긴장감.

목숨을 걸고 시민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을 감히 멈춰 세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김준우 헌터님! 최근 시끄러웠던 '청소팀 폭행 사건'에 대해선 하실 말씀이 없나요?"

뒤통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날아들었다.

"...예?"

굉장히 당황스러운 내용을 담은 목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왜, 던전 청소팀 직원 폭행한 사건이요. 벽으로 내동댕이치셨다던데?"

"그게 무슨...."

"에이~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건 이해하는데, 저도 들은 게 있어서요. 뭐, 헌터님한테 맞은 분이 저랑 좀 아는 사이기도 하고."

젊은 남자가 분노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야, 그래도 세계 랭킹 1위가 대단하긴 하네요.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패고도 기사 한 줄 안 실리는 거 보면."

"...."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직까지 남아 있던 기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나는 곧바로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불쾌한 루머군요."

간신히 대답을 내뱉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젊은 남자를 애써 무시하며 도망치듯 던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튼 오늘 토벌, 화이팅입니다. 김준우 헌터님."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나를 따라왔다.

***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

속칭 협회.

출몰하는 던전과 몬스터로부터 국가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

협회에서는 이능의 힘을 가진 인재들을 모아 던전 토벌을 위해 네 개의 팀을 만들었다.

그 중, 실질적 토벌을 맡는 이들은 소위 헌터라고 불리는 작전팀.

그중에서도 최정예로 손꼽히는 게 '작전 1팀'이다.

총원 50명.

팀원 개개인이 국내에선 최상위권을 다투는 헌터들.

토벌 성공률 100%를 자랑하는 국내 최강의 팀.

그리고 그 팀의 리더가 바로....

「세계 최초 SSS급 헌터 김준우, 실은 SSS급 폭행 헌터? - 기사 전문 보기」

"그 인간 뭐야?"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던 차 안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왜 그러세요. 토벌 잘 끝내놓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단발의 여성.

지원팀 소속, 내 전속 보좌관인 이 실장이 룸미러로 나를 슬쩍 흘기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평탄한 어조였다.

"몰라서 묻는 거냐? 내가 그 일, 밖에 새어나가지 않게 하랬지?"

"했습니다."

"근데 어디서 이야기가 새어나간 거야?! 인터넷까지 싹 다 난리잖아!"

"...."

들고 있던 핸드폰을 조수석으로 집어 던졌다.

그럼에도 이 실장은 눈도 꿈쩍하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세계 정상의 헌터, 인성 논란」

「던전 청소팀에 대한 폭언, 폭행! 김준우, 그의 실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속속히 쏟아지는 증언들」

「앞에선 '영웅 행세', 뒤에선 '갑질 행태'」

「도마 위에 오른 '세계 최강', 협회는 '몰랐다' 일관」

「논란의 중심, 김준우. 국제 헌터 협회 스카웃 불발 우려」

핸드폰 화면을 가득 메운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

하지만 아직까지 자세한 내용까진 조사하지 못한 듯, 추측과 의혹만이 난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린 수만 개의 댓글은 모두 일관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욕설.

단 몇 시간 만에 내 직업은 헌터에서 'X터'로 바뀌어버렸다.

"그 기자 어디 소속이야. 고려일보? 중심일보?"

"기자 아닙니다."

"...뭐?"

"기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에요."

"그게 뭔 소리야. 기자도 아닌 놈이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 건데."

"아들이라더군요. 던전 청소팀 박근태 팀장 아들."

빌어먹을.

나는 머리를 쥐어짜듯 쓸어 넘겼다.

"문제는 이번 일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여론에 힘입어서 이전 일들에 대한 증언들도 쏟아지고 있어요. 아마 계속해서 악화할 겁니다. 당분간은 집에서 좀 쉬세요. 어차피 앞으로 작전 스케줄도 없으니 이참에 휴가라고 생각하시고...."

"이 실장."

나는 몸을 앞으로 숙여 룸미러를 통해 이 실장과 눈을 맞췄다.

"난 말이야. 내 앞길을 가로막는 녀석들을 가장 싫어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해. 여기서 더 일이 커지면 끝장이야."

"...노력해보겠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 없는 얼굴에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에휴, 기계랑 대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됐고, 협회장은 뭐래."

현재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더는 없었기에,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별말씀 없으십니다. 국제 협회 스카웃 건으로 이래저래 바쁘시니까요. 뭐,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시려는...."

"웃기고 있네. 그 인간이 별말 없다는 건 그냥 말조차 섞기 싫다는 거잖아. 혹시 몰라. 조만간 손절할지."

"...그렇습니까."

"하, 내가 그 인간 목구멍에 꽂아준 실적이 몇 갠데, 이따위로 나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지."

"별일 없을 겁니다. 아무리 여론이 엉망이어도 랭크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스카웃이 불발 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푸욱, 뒷좌석 시트에 등을 던지며 대답했다.

이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토벌 직후에 기사를 확인했을 땐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팀원들은 그 기자를 찾아가겠다는 나를 뜯어말리기 바빴고, 억지로 차에 밀어 넣고는 이 실장에게 딴 길로 새지 말고 협회로 곧장 가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때보단 조금 진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화가 수그러든 건 결코 아니었다.

국내 최연소 헌터.

국내 최초 S급.

세계 최초 SSS급.

국내 랭킹 1위, 세계 랭킹 1위.

거기에 국제 헌터 협회의 스카웃 제의까지.

몇 년에 걸쳐 완성한 수식어가 한순간에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는데, 화를 참을 수 있는 게 이상하지.

그래도 뭐, 배짱 하나는 인정한다. 감히 내 앞길을 막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물론 그 대가는 반드시....

"그래서, 왜 그러신 겁니까?"

사색에 잠겨 있던 찰나, 이 실장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그놈이 먼저 멱살을 잡았다니까?"

"그러니까 멱살을 붙잡히신 이유 말입니다. 평소에도 청소팀을 좋게 보진 않으셨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없으시잖아요."

"...몰라. 기억도 안 나."

이 실장은 대답이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더 물어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무튼, 협회 도착하면 그 박… 박.... 아 씨, 이름이 뭐라고?"

"박근태 팀장이요."

"그래 그놈. 나한테 불러와."

"...이유라도?"

"모양새는 다듬어야 할 거 아니야. 합의했다고 명분이라도 만들어 놔야지."

"알겠습니다."

"쯧, 이놈이고 저놈이고 잘난 놈 가만히 안 내버려두는 건...."

문득 정면을 바라본 순간.

"야, 야!! 앞에!!"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끼이이익―!

이 실장의 욕지거리와 귀를 찢는 브레이크 소리가 함께 들려왔고, 몸이 한쪽 방향으로 크게 쏠렸다.

무서운 속도로 들이닥친 트럭의 쌍라이트가 내 시야를 완전히 잡아먹은 그때.

"시간 초과!"

[습득 스킬 : 시간 초과]

[스킬 발동]

내 손끝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트럭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이 실장은 그 틈을 타서 가까스로 차를 돌렸다.

"하악, 하악...."

그 천하의 이 실장도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당황한 듯 연신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슬아슬했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1초만 늦었으면 그대로 아스팔트에 피칠갑을 했을 것이다.

아니, 일단 그런 건 둘째치고....

저 트럭, 멈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야! 저 인간 술 처마셨어?!"

"...모,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기분 더러운데 여기서 기다려. 저 인간 면상 좀 보고 올 테니까."

나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문을 거칠게 닫았다.

도로 한복판에 비스듬히 멈춰선 트럭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쾅!!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다.

땅이 하늘로 보이고 하늘이 땅으로 보이는 게, 처음엔 어지럼증인가 싶었다.

'어...?'

기분상으로 몇 초쯤 지난 듯했다.

여전히 세상은 뒤집힌 채였고 어지럼증은 나을 기미가 안 보였다.

그제야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뭐야...?!'

지금 나는 하늘에 떠 있었다.

몸이 돌아간 건지 목이 돌아간 건지,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중앙선을 침범해 달려든 또 하나의 트럭.

'오늘 단체로 약이라도 처먹은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친 순간.

쾅, 쾅.

쾅쾅쾅.

다섯 대?

아니면 여섯 대쯤.

그 숫자에 맞춰 내 몸은 계속해서 허공을 날았고, 짧은 비행 끝에 겨우 바닥에 닿자마자.

탕―

콰과광―!

퍼버버벙―!!!

총과 폭탄을 비롯한 온갖 화기들이 쏟아졌다.

"...커헉."

그럼에도 아직 의식이 꺼지지 않는 거 보면, 그래 죽은 건 아니겠다 싶었다.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던전에서 천 번을 넘게 전투를 벌였다.

이 정도론 죽지 않는다.

나는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철컥―

머리에 겨눠진 푸른빛의 총구.

토벌용 이능운용총기 '타이탄'을 보기 전까진.

'저건 좀 위험...!'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블랙아웃.

***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한 캄캄한 어둠 속.

[폐, 심장, 간, 뇌 및 기타 장기에 치명적 손상 감지]

[심정지 확인]

[소생 확률 계산 중]

[소생 확률 : 0%]

[귀하의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음성.

[귀하의 사망으로 인해 히든 스킬 습득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히든 스킬 : 업보]

[히든 스킬에 의해 10년 전으로 회귀합니다]

[회귀 후 직업은 전생의 업보에 따라 배정됩니다.]

[직업 배정 중]

[직업 배정 완료]

[귀하의 직업은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 소속]

[던전 청소팀에 배정되었습니다.]

002

002

"뭐 이런 개 같은 꿈이...."

눈꺼풀을 뚫고 쏟아진 햇살에 스르륵 눈이 뜨였다.

뒤숭숭했던 꿈자리 때문인지 가슴이 퍽 답답했다. 호흡도 가빴고, 얼마나 땀을 흘린 건지 시트가 다 축축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전신에서 찌릿찌릿한 근육통이 전해졌다.

간만에 꽤나 깊게 잠이 든 모양이다.

긴 하품과 함께 남아 있던 잠기운을 떨쳐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자 내가 있는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동시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원룸.

조금 더 설명을 보태서, 돼지우리도 이것보단 나을 법한 8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당연히 내 집은 아니다.

이 정도 크기면 내 집 화장실 정도 크기밖엔 안 되니까.

그럼 이 실장의 집...은 더욱 아니겠지.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날 자기 집에 들일 리는 없으니.

"그럼 여긴 어디...."

침대에서 나와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선 순간 다리가 휘청였다.

고꾸라질 뻔한 몸을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겨우 버텨 내자, 간밤에 꿨던 꿈의 내용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귀하의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귀하의 사망으로 인해 히든 스킬 습득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히든 스킬 : 업보]

꿈속에서 들었던 그 음성이 아직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귀하의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지랄, 영화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눈을 굴려 낯선 방안을 다시 한번 훑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황급히 돼지우리 속을 뚫고 화장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화장실 문을 열기 전까진, 그래도 설마 했다.

그냥 개꿈이겠거니 넘어갈 수 있었다.

어젯밤 술을 개떡이 될 때까지 처마시고, 기억도 끊길 만큼 완전히 꼴아서 팀원 중 누군가의 집에서 잠들었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화장실 문을 열고 정면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 순간.

가차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이게 무슨...."

거울 속에는 분명히 10년 전의 나.

28살의 김준우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 시스템 오픈."

'고유 스킬'을 발현한 이능력자들만이 열 수 있는 이능력 확인 시스템을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하나의 스킬.

[히든 스킬 : 업보]

[스킬 효과 보기]

시스템 창에 손을 올리며 설명창을 띄웠다.

[해당 스킬 습득 조건 : 사망]

[해당 스킬의 효과로 인해 10년 전으로 회귀하였습니다.]

[해당 스킬은 임의로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하하...."

순간 또다시 다리에 힘이 풀리며 엉덩이가 차디찬 타일에 털썩, 떨어졌다.

꿈이 아니었다.

난 정말로 죽은 것이다.

[해당 스킬의 효과로 인해 귀하의 직업이 재배정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밑에 떠오른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발....'

욕지거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18살에 헌터가 된 나는, 28이 되던 해에 A랭크로 승급했다.

당시 나의 랭킹은 국내 22위, 세계 525위.

그러니 단순하게 10년 전으로 돌아온 거라면, 나는 여전히 헌터여야 했다.

그것도 매스컴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슈퍼 유망주 헌터.

그런데....

[던전 청소부]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청소부?

천하의 김준우가 던전 청소부?

[업보 - 해제 조건]

[5년 안에 국제 이능 협회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십시오.]

[목표 달성 시 스킬이 자동 해제되며, 사망 직전으로 귀환합니다.]

[달성 실패 시 '헌터 김준우'는 완전히 소멸합니다.]

[제한 시간 : 4년 11개월 29일 20시간 32분 48초]

[스킬 효과 닫기]

성공하면 죽기 전으로 돌아가고, 실패하면 영원히 청소일이나 하며 썩을 것이다.

스킬을 요약하자면 그랬다.

"지랄."

말도 안 된다.

국제 이능 협회.

전 세계의 모든 협회를 지휘 총괄하는 국제기구.

그곳의 사무총장은 실질적으로 미국 대통령보다 많은 권한을 가진다.

한 마디로 전 세계 최고 권력의 자리.

5년마다 내부 투표로 선발되지만, 세계 최초로 SSS랭크를 달성한 나조차 후보에는 오르지도 못했다.

그런 자리에 오르라고?

세계 랭킹 1위의 헌터로도 부족했던 그 자리를?

그것도 5년 안에?

"...."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하고 싶지 않은 걸 떠나서 불가능하다.

애초에 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따라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그래―

무시하자.

업보고 나발이고 알게 뭔가.

어쨌든 사무총장만 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전처럼 헌터로 사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이다.

물론 헌터로도 힘든 건 변함없지만, 그래도 청소부보다야 훨씬 가능성이....

[고유 스킬 : 마왕 - 잠김]

[습득 스킬 : 전능 - 잠김]

[습득 스킬 : 한계돌파 - 잠김]

[습득 스킬 : 타천사 - 잠김]

[습득 스킬 : 롤링 페이퍼 - 잠김]

....

[습득 스킬 : 로우 실드 - 잠김]

"이런 개...."

스킬창을 확인하던 내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기존 스킬을 해금하려면 각각의 조건을 달성해야 합니다 - 자세히 보기]

더 볼 것도 없었다.

스킬창을 닫고 얼굴을 쓸었다.

이능력이 없는 헌터?

차라리 지나가던 개가 사람 말을 한다는 게 더 있을 법한 일이다.

'꼼수는 꿈도 꾸지 말라는 건가....'

대체 지금 이게 뭐란 말인가.

그 빌어먹을 업보가 대체 뭐길래....

[축하합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그 순간, 시스템 창이 눈앞에서 발광했다.

이제 와서 새로운 스킬 하나 얻은 거로 이 답 없는 상황이 역전될 리는 만무했다. 그것이 설령 에픽 스킬이어도 말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스킬을 확인했다.

[습득 패시브 : 결벽증]

[효과 : 청소나 해 병신아]

쨍그랑―

화장실 거울과 함께 이성이 날아갔다.

***

돼지우리 속 침대.

그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몸뚱이.

나는 쥐죽은 듯 누운 채로 가만히 눈만 끔뻑거렸다.

죽고 깨어나 보니 10년 전.

하루아침에 SSS랭크 헌터에서 던전 청소부가 되어 있고, 헌터 때의 스킬은 모조리 잠금 상태.

내 일생의 업적, 나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이제 난 대체 뭘 해야 하는가.

정말로 청소부 일이나 해야 한단 말인가.

SSS랭크 자존심이 있지, 그런 허접한 일은 죽어도 싫다.

'그렇다고 이대로 평생 살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가긴 해야 할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니 어째 머리로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내가 왜 이딴 고민을 하고 있어야지?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게 다 그 업보인지 뭔지 그 빌어먹을 히든 스킬 때문....

"아니, 아니지."

히든 스킬은 둘째 치고, 내가 이 꼴이 된 가장 큰 원인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날 죽인 놈들 때문이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보통내기는 아니다.

민간 길드?

아니면 협회 인원?

그것도 아니면....

띠리링―

띠리리링―

순간 울리는 벨소리.

하지만 어디선가 소리만 들려올 뿐,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부터 났을 상황이었지만, 어째 지금만큼은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 실장인가?

아니면 팀원들?

혹시 협회장?

물론 얼토당토않은 기대였지만, 나도 모르게 벨소리를 따라 황급히 돼지우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벨소리는 끊어졌다 다시 울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겨우 매트리스 밑에 파묻힌 핸드폰을 찾았을 땐 4번째 벨소리가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10년 전에도 쓸까 말까 했던 구식 기종.

작은 화면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어, 받았네? 준우 씨! 날세. 박 팀장!"

"...?"

중년 남성의 호쾌한 목소리.

나를 알고 있는 거로 봐선 관계가 있는 사람인 듯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10년 전의 박씨 성을 가진 팀장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이는 없었다.

"그, 다름이 아니라. 혹시 오늘 출근하기 어렵나 해서 전화해봤네."

"...예?"

"벌써 출근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서 말이지. 아, 혹시 몸이 안 좋은 겐가? 저번 던전이 조금 힘들긴 했지?"

"던전...?"

그 한 마디에 나는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단어였다.

업보가 배정해준 직업은 던전 청소부.

그럼 지금 나한테 출근 얘기를 꺼내는 이 사람은 당연히 청소팀 인간이겠지.

"사실 저번 던전이 조금 빡센 작업이긴 했어.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긴 한데... 아, 물론 무리해서 나오라는 건...."

"아, 진짜! 팀장님! 그 새끼, 그냥 힘들어서 짼 거라니까?"

그때, 전화기 너머로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지, 뭘 굳이 또 전화까지 하세요."

"에이씨, 못하겠으면 연락이라도 하든가. 한 명 때문에 지금 몇 명이 대기하고 있는 거야, 진짜!"

"그만하고 끊어요. 우리끼리도 충분하잖아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해도, 던전 청소부 놈들한테까지 씹힐 정도라니.

내가 정말 뒤지긴 뒤졌나 보네.

"다들 조용히 해봐.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핸드폰 너머 박 팀장이 팀원을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높은 언성도 아닌 그 한 마디에 떽떽 대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아무튼, 준우 씨. 힘들면 그냥 쉬게. 다음엔 이런 일 있으면 미리 문자라도 한 통 주면 좋고."

"아, 뭐... 알겠습니다."

참 나, 누가 누굴 감싸는 건가.

기가 찬 상황에 적당히 대답하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그때였다.

"아, 문자는 이 번호로 주면 되네. 박근태 팀장이라고 저장해두면...."

잠깐.

뭐...?

"이름이... 뭐라고요?"

"응? 아, 잊어버렸나 보군.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이긴 하지. 박근태일세. 박, 근, 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그 목소리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박 팀장은 끊임없이 무어라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오늘은 푹 쉬고. 혹시 다음에라도 출근할 수 있으면...."

"오늘 하겠습니다."

"...음?"

"지금 출근한다고요."

그대로 대답 따윈 들을 생각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003

003

시내버스.

무려 중학교 이후로 처음 타본다.

박 팀장의 전화를 끊은 직후, 나는 집에 멀쩡한 옷이 없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집 밖으로 나온 후엔 내 벤X리가 사라졌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어쩔 수 없이 택시라도 타려는데, 지갑에 땡전 한 푼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결국, 돼지우리를 샅샅이 뒤져서 찾은 동전들로 겨우 버스를 잡아탄 게 지금의 상황이다.

천하의 김준우가 시내버스라니.

꽤나 적잖은 충격이지만... 뭐 별수 있나.

지금의 나는 세계 최초의 SSS랭크 헌터도, 정예 작전팀의 팀장도 아닌....

"아 씨,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하아, 길게 한숨을 늘어트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쨌든 지금은 이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건 곧 내 주변과의 관계도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이리라.

다시 말해 내가 박근태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러니 그 남자는 굳이 사과를 할 필요도 없는, 지금의 나와는 일절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출근하겠다고 한 건, 날 죽인 게 그놈일지도 모른다는 촉에서다.

내 죽음은 확실히 이상했다.

사고를 위장해 내 주의를 끄는 것도 그렇고. 스킬을 쓰지 못하게 화기로 묶어두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쏜 총격은 보통의 공격이 아니었다.

대 몬스터 화기.

토벌용 이능운용소총, 타이탄.

'저격수 클래스'의 최고 랭크 아이템을 코앞에서 머리에 박아 넣었다.

이건 누군가 작정하고 작업을 한 것이다.

생각해 볼 만한 이유는 역시, 원한에 의한 복수.

그리고 가장 유력 용의자는 박 팀장.... 그가 아니라면 박 팀장의 아들.

나한테 폭행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 이를 위해서 전문 인력을 고용했다고 하면 얼추 앞뒤는 맞아떨어진다.

...참 나.

그거 좀 밀쳤기로서니 '폭행'이라니.

애초에 먼저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은 건 그놈이 아닌가.

'빌어먹을, 주제도 모르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좋게 말할 때 알아들었으면 그럴 일 없었잖아.'

쉬지 않고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괜한 기억이 생각 저편에서 떠오른다.

***

"철회해주십시오."

이능차원관리 협회 본부.

며칠 후 있을 토벌에 대한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복귀하던 그때, 처음 보는 중년 남성이 앞을 막아섰다.

"누구시죠?"

"던전 청소팀의 박근태 팀장입니다."

"...."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상부에 청소팀 인원 감축을 건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인원이 부족해서 정말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서 더 축소되면...."

아, 나는 짧게 신음했다.

동시에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지? 전 단지 건의를 한 것뿐이고, 저에겐 아무런 권한도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판단하는 건 통제팀이니까, 통제팀 가서 말씀하세요."

"이 업계 일하면서 헌터님 영향력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세계 랭킹 1위의 헌터 아닙니까. 헌터님 말 한마디가 협회를 좌지우지하는 판국에, 우리 팀 모가지 몇 개 자르는 건 일도 아니겠지요."

얼핏 정중하면서도 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감축은 안 됩니다. 다시 한번 재고해주십시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탁하는 자세와는 반대로 남자의 눈빛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인원 감축을 건의했다는 게 저들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직접 찾아올 줄이야.

무엇보다 남자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야기가 퍽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거 아십니까?"

때문에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건 사실 매우 비효율적인 방어 수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위험이 닥치면 망설임 없이 꼬리를 잘라내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내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한 듯 보였다.

"아무리 비효율적이고, 아무리 손해가 막심해도 그래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어요. 최후의 수단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꼬리가 아니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겠죠. 물론 이해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남자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상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협회는 지금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돈에 비해 얻는 게 별로 없으니 뭐, 당연하겠지마는.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상위 헌터들의 연봉을 조정하겠다더군요."

"자, 잠깐만요! 설마 본인들 연봉 때문에 우리를...."

"협회의 1순위는 던전과 몬스터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건 작전팀, 저 같은 헌터들입니다. 그런데 그 헌터들이 제값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야 어디 토벌에 나가서 제대로 힘이나 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세를 몰아 남자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며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죠."

"말도 안 됩니다!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청소팀, 솔직히 하는 것도 없잖습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청소가 청소지, 뭘 더 알아야 합니까?"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튼, 청소야 누구나 할 수 있고. 통제팀이나 지원팀처럼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도, 헌터들처럼 재능을 보는 것도 아닌데. 부족한 인원이야 언제든 채워 넣을 수 있으니 지금은 협회를 위해서라도 좀 넘어가시죠."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자부심이...."

"예예, 어련하겠어요. 사실 몇 년 전부터 해야 했을 일인데, 그래도 동료애가 있어서 참은 겁니다. 뭐... 알아들으셨을 거라고 믿고, 전 이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를 지나치며 걸음을 옮겼다.

"협회의 1순위가 시민을 지키는 것이라고요?"

그렇게 몇 발짝 멀어졌을 때, 뒤에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더는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기에,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저희는 시민이 아닙니까?"

"...."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무릎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부탁드립니다. 재고해주십시오."

"...쯧, 귀찮게."

이젠 대놓고 뻔뻔하게 나올 심산인가.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론 부족했나 보군.

"솔직히 당신들은 우리한테 고마워해야 해."

"...예?"

"그렇잖아. 우리처럼 목숨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뒤에서 편하게 청소나 하면서 돈 벌어 가는데. 그동안 우리 덕 보면서 입에 풀칠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바라는 게 뭐 이리 많아."

기생충도 아니고.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남자는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정확히 그의 귀에 대고 말했으니까.

"지, 지금 뭐라고!"

남자가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붙잡았다.

참으로 정직한 반응.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참으며 그대로 남자의 가슴을 툭, 밀친 그 순간.

쿵―

"크윽!"

"...뭐야."

생각보다 힘이 더 들어간 건지, 남자는 저만치 날아가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기절한 건지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는 건지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 시발. 진짜 가지가지 하네."

예상치 못한 귀찮은 상황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것도 잠시,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최근 목록을 열었고, 이 실장의 연락처를 욕지거리를 뱉으며 눌렀다.

***

신림역 근처.

버스에서 내려 박 팀장이 보내준 지도를 핸드폰으로 확인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10분여간 걸어 도착한 출근지에는 몇 줄의 통제선과 안전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사이로 주황색의 던전 입구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차원 게이트의 색깔을 따서 붙인 던전 등급 중, 위험 등급에 해당하는 '옐로우 레벨' 던전이었다.

'잠깐, 이 시기에 이 장소라면....'

문득 핸드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곤 기억을 뒤적여보던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

저건 '폭스트롯 센티피드'라는 지네형 몬스터가 보스로 있는 던전.

28살의 내가 토벌에 참여했던 그 던전이다.

'10년 전으로 돌아온 게 맞긴 하나 보네.'

차원 게이트의 색깔이 많이 옅어진 거로 봐선 이미 토벌은 완료.

당시의 나조차도 조금은 애먹었던 던전인데, 용케 나 없이도 성공했나 보네.

"어어, 왔네. 준우 씨! 여기야!"

때마침 통제선 안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박 팀장이었다.

50대. 벗겨진 정수리. 싸구려 등산복 차림.

내 기억 속 모습과 얼추 들어맞는 이미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생에서 나를 찾아왔을 때와는 눈빛이 다르다는 것뿐.

'흠, 사람을 죽일 만한 인상은 아닌데....'

물론 아직 속단할 순 없다.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거니.

쯧, 어쩔 수 없지. 조금 더 지켜보는 수밖에.

"뭘 그리 멍하니 있나! 어서 들어오게. 아침은 먹었나?"

"...."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박 팀장이 내 팔을 붙잡곤 통제선 안으로 잡아당겼다.

"다들 봐봐. 내가 온다고 했지? 딱 첫날 봤을 때부터 뭔가 성실해 보였다니까."

그곳엔 박 팀장 외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였다. 보아하니 청소팀의 나머지 인원들인 듯했다.

"참 나, 딱 봐도 그냥 잠수 타려다가 걸려서 온 거구만."

"성실은 개뿔. 저번에도 저놈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4명으로도 충분한데... 왜 꼭 인원을 맞추려고 하시는 거예요."

두 명의 남자. 그리고 한 명의 여자가 번갈아 가며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다들 모였으니까 바로 작업 시작하자고. 더 늦어지면 위험하니까. 상혁아, 타이머 설정해줘."

"이미 해놨어요."

"오케이, 얼마나 남았지?"

"45분이요."

"엥?! 그거밖에 안 남았어?"

"저 새끼가 한 시간이나 늦어서 그렇죠, 뭐."

끄응, 박 팀장이 신음을 흘렸다.

"하는 수 없지. 또 위에서 뭐라 말 나오기 전에 서두르자고. 다들 방호복 입고!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서 이미 가스가 방출되고 있을 거다. 방독면 절대 벗지 마."

"옙."

"준우 씨도 이거 받아. 사이즈는 대충 맞을 거야."

"...아, 네."

박 팀장이 건넨 건 때가 쪼록쪼록 묻은 흰색 방호복과 방독면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잠자코 서 있었다.

"음? 왜 그러나.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뭐, 문제라기보다...."

나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던전 청소부는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004

004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

속칭, 협회에는 크게 네 개의 팀이 존재한다.

던전 출몰 현황을 감시하고, 던전의 정보를 수집하는 지휘통제팀.

헌터 개개인에게 알맞은 무기와 아이템을 제작하고, 헌터의 전반적인 활동을 서포트 해주는 헌터지원팀.

실질적으로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토벌하는 작전수행팀.

그리고....

"희장아, 소독하고 있지?"

"하고 있긴 한데, 생각보다 통로가 넓습니다. 이거 약품 모자랄 것 같은데요."

"넓게 넓게 뿌리면 충분할 거다. 상혁이는 보스방 위치 확인 좀 해줘. 소연이는 내부 가스 수치 잘 확인하고!"

"네. 알겠어요."

"이번 보스는 꽤 크기가 있다니까 해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서두르자고."

무슨 업무를 하는지조차 몰랐던 던전청소팀.

일렬로 통로를 걸어가는 그들을, 맨 뒤에서 바라보며 든 생각은 딱 하나.

'참 나, 뭐 이렇게 바쁜 척이야.'

그도 그럴 게. 앞에선 쉬지 않고 지시가 오고 갔지만, 맨 뒤에 있는 나에게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별로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딴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때.

"어, 어? 준우 씨! 어디 가?!"

박 팀장이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예?"

"여긴 동굴형 던전이잖나. 혼자 아무렇게나 다니면 큰일 나!"

"보스 방으로 가신다면서요."

"내 말이! 그러니까 잘 따라오라고. 보스 방은 저쪽이니까."

"무슨 소립니까. 보스 방은 이쪽인데."

"...뭐?"

툭, 내뱉은 그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저건 또 뭔 개소리야."

"무시하고 저희 갈 길 가죠.

"저기... 하기 싫으면 말로 해요."

쏟아지는 비난.

"야, 통제팀에서 준 던전 지도다. 보스 방이 어디인지 네 눈깔로 직접 봐봐."

아까부터 거친 언행을 쏟아내던 남자, 한상혁이 들고 있던 지도를 내게 건넸다.

여긴 동굴형 던전이다.

특징은 미로를 방불케 하는 복잡한 길과 수많은 방.

숙련된 헌터들조차 실수하면 그대로 길을 잃을 수 있는 곳이지만....

그래 봤자 이미 토벌이 완료된 던전.

작전에 투입된 헌터들에 의해 이미 매핑(mapping)이 끝났다는 소리다.

그걸 바탕으로 통제팀에서 만든 지도라면 당연히 오류가 있을 리는....

"지도가 잘못됐네. 아무튼, 이쪽 맞습니다."

통제팀, 그렇게 안 봤는데 일을 뭐 이렇게 하냐.

"미치겠네. 팀장님! 이 새끼 약 처먹었어요?"

"자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건가?"

결국, 박 팀장까지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선 아까와 다른 진중함이 묻어났다.

"확신이고 뭐고, 이 던전 토벌한 게...."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말해 뭐하겠는가. 믿지도 않을 텐데.

"이 던전 토벌한 게...?"

"아닙니다. 그냥 가던 대로 가세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팀원들은 끝까지 나를 노려보며 축축한 통로를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나 또한 다시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박 팀장은 그런 내가 불안했던 건지, 선두가 아닌 내 옆에 달라붙은 채였다.

그렇게 묵묵히 던전 깊숙이 이동했다.

"그런데.... 아까 45분 남았니 어쩌고 한 건 뭔 말입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이 문득 떠올라 박 팀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던전이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일세. 들어본 적 있나?"

아, 그 이야기였군.

모든 던전은 토벌 후 자연히 소멸한다.

그 시간은 던전마다 미묘하게 차이가 있지만, 평균 토벌 직후 2시간.

물론 토벌이 끝나면 곧바로 던전을 나오는 헌터들에겐 있으나 마나 한 이야기다.

그러니 나처럼 아예 잊어버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다만....

토벌이 끝난 후 던전에 진입하는 청소팀한테는 또 다른 얘기가 되는군.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어차피 사라질 던전인데 왜 굳이 청소팀까지 만들어서 청소를 하는 겁니까?"

"하하하! 모르는 소리."

비꼴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박 팀장은 그저 내 관심이 반가운 건지 호쾌하게 웃었다.

"던전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휴식기에 들어가는 걸세. 여기에 다시 몬스터가 자리 잡을 때까지 말이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이해가 빠르겠군. 만약 다시 던전이 열렸는데, 그 안에 이전 몬스터 사체랑 이것저것이 쌓여 있으면 어떻겠는가."

"...딱히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박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헌터들이 길을 찾기도 힘들고, 몬스터 사체는 부패하면서 아주 치명적인 가스를 방출하기 때문에 그대로 뒀다간 위험할 수 있어. 무엇보다 던전에 뭐가 남아 있는지 모르면 헌터들의 행동에도 제약이 생기겠지. 그건 곧 토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소리고."

"...아, 예."

"뭐, 굳이 말하자면 우린 헌터들이 마음 놓고 토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걸세.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우리가 없으면 헌터들도 없는 셈이니까. 하하하!"

개소리.

마음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한쪽 귀로 흘렸다.

"아무튼, 우리 주 업무는 몬스터의 사체 처리. 던전에 남아 있는 부산물들을 청소하고 헌터들의 정보가 남지 않게 수습하는 걸세. 뭐... 혹여나 남아 있을 헌터를 구출하는 것도 업무에 포함되긴 하지. 여태껏 그런 일은 없었지만."

당연하겠지.

청소부가 헌터를 구출한다니, 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그래도 뭐....'

아주 놀고먹는 건 아니었군.

"다 왔군. 지도에 따르면 저 방이야."

통로 끝에 위치한 커다란 입구 하나.

앞서 걸어가던 팀원들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어, 뭐야."

곧바로 한상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박 팀장도 뒤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그 또한 한상혁과 같은 반응을 내비쳤다.

그 방에는 몬스터 사체는커녕, 몬스터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했으니까.

"그러니까 말했잖습니까. 여기가 아니라고."

"뭐야, 정말이잖아."

"대체 어떻게...?"

한상혁을 포함해 팀원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오늘은 종 쳤다 생각하고 나가기나...."

"어떻게 합니까, 팀장님."

"리미트까지 몇 분 남았지?"

"22분이요."

"22분이라...."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

그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침착해졌다.

"...뭐, 뭡니까?"

내가 물었지만, 팀장은 생각에 빠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들은?"

"저도 뭐."

"까이는 것보다야."

"그럼 만장일치인 것 같은데 바로 돌아가죠."

팀 내 유일한 여성 인원, 문소연이 제멋대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상황에서, 이번엔 나 혼자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잠깐, 잠깐만! 뭐가 충분하다는 겁니까?"

"뭐긴. 일해야지."

"22분 남았다면서요. 그 사이에 던전이 닫히면 어떡하시려고?"

"한 번 닫힌 던전이 재출현하기까지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1년.

"그동안 갇혀 있는 거지, 뭐."

박 팀장이 껄껄 웃었다.

한 마디로 죽는다는 소리였다.

"제정신들이 아니네. 이깟 청소 일에 목숨을 건다고?"

"뭘 새삼스레. 원래 그런 일인걸."

"꼬우면 먼저 나가든지. 기대도 안 했으니까."

"됐어요. 우리끼리 가요. 던전도 처음인 거 같은데 뭐."

"...."

한상혁과 임희장이 차례로 혀를 차며 쏘아붙였다.

문소연 또한 말은 안 했지만,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은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하....'

던전 짬밥 먹은 지도 15년이다.

그동안 토벌에 실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가 세계 최초 SSS랭크 달성이었고, 세계 랭킹 1위 달성이었다.

그 누구도 내 던전 커리어에는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던전에서 무시를 당한다고?

천하의 김준우가, 던전에서?

"이 방 안쪽에 작은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저 새끼 저거, 또 시작...."

"아가리 닥치고 들어."

정색하고 쏘아붙인 한 마디에 한상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기서 보스방까지의 거리는 약 500m. 저 통로를 통해서 최단 루트로 간다면 8분. 뛰어가면 5분 안에도 가능할 겁니다."

"...으, 응?"

"보스방으로 갈 거 아닙니까? 단, 이번엔 제가 앞장섭니다. 불만 있으면 먼저 나가셔도 좋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난 먼저 등을 돌렸다.

***

미로 같은 통로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지도 따윈 볼 필요도 없었다.

토벌했던 던전이라 이미 개구멍 하나까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그들의 표정은 안 봐도 뻔했다.

동시에 다들 속으로 한마디씩 하고 있겠지.

'저 새끼 대체 뭐야?'라고.

어느덧 다시 도착한 보스방.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몬스터가 끈적끈적한 녹색 피를 쏟은 채 죽어 있었다.

폭스트롯 센티피드.

무려 10m가 넘는 크기를 자랑하는 보스 몬스터였다.

방 상태를 보아하니 전투의 양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상당히 치열한 전투.

20인 팀이라고 가정한다면 사상자가 최소 5~6명은 나왔을 법했다.

'그래도 용케 급소는 알아냈네.'

폭스트롯 센티피드의 급소는 저 거대한 턱 바로 위의 움푹 들어간 미간.

그곳에 정확히 검을 꽂아 넣은 흔적이 보였다.

"몬스터 보는 거 처음이죠?"

"...뭐요?"

"멍하니 있길래. 괜찮으니까 못 만지겠으면 나와요. 해체는 우리한테 맡기고."

죽어 있는 그 녀석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자, 이번엔 임희장이 끼어들었다.

딱딱한 말투였지만, 한상혁만큼의 적대감은 없어 보였다.

"어이가 없네."

툭, 나는 임희장이 들고 있던 굵직한 단검을 뺏어 들었다.

"가, 갑자기 뭡니까."

"분해한다면서요. 뭣도 모르고 칼부터 들이대다간 손목이 먼저 나갈 겁니다."

나는 센티피드의 사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동시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센티피드의 갑피 사이로 칼을 꽂아 넣었다.

"지금 보는 것처럼 3번, 6번, 12번 갑피 사이에만 칼이 들어갑니다. 머리랑 꼬리는 칼이 절대 안 들어가니까 괜히 힘쓰지 마시고. 보아하니 아직 신경이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칼질할 때 꿈틀꿈틀할 겁니다. 공격하진 않으니까 무시하세요."

"...."

"뭐합니까? 구경만 할 거예요?"

팀원들은 가만히 서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다그치고 나서야 각자 칼을 꺼내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쑤셔 넣기만 하면 잘리겠습니까? 비스듬히 넣어서 위로 쑥 올려야지!"

"...."

"꼬리는 만지지 마. 그 독에 죽어 나간 헌터가 한두 명이 아니니까."

"...."

"그리고 피에 독은 없는데 접착성이 엄청나게 강하니까 괜히 밟지 마시고. 한 번 밟으면 영영 못 움직이는 수가 있습니다."

보스방에선 서걱거리는 칼 소리와 내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내 옆에서 한상혁과 박 팀장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아까 저 새끼한테 통제팀 파일 슬쩍 보여줬죠?"

"아니."

"아, 거짓말 말고요. 쌩초보가 저런 걸 알 리가 없잖습니까. 아까 보스방 찾을 때도 그렇고. 신입 기 살려주려고 파일 보여준 거 아니에요?"

"보여주고 자시고.... 애초에 통제팀 파일엔 없어. 저런 정보."

정적.

이어 몇 명이 나를 힐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 저 새끼는 저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난들 아나."

굳이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대답하기도, 설명하기도 귀찮았기에 그저 묵묵하게 센티피드를 해체할 뿐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작업에 열중하면서도 나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 갑자기 내가 끼어들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왜 몬스터 사체를 분해하고, 주변에 튄 피를 닦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내가 왜 청소를 하고 있는 건지.

그런 의식조차 못 했다.

[습득 패시브 : 결벽증]

[패시브 발동]

너무 열중한 나머지, 머릿속에 울리는 그 음성을 완전히 흘려 들어버린 채였으니까.

005

005

"후...."

분해 작업을 완료하고, 방 곳곳에 튄 흔적들을 모두 청소한 뒤에야 나는 허리를 세웠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마무리 단계였다.

이제 남은 건 분해한 사체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슬쩍 둘러보니 난장판이었던 그곳은 어느새 훨씬 깔끔해진....

'시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불현듯 밀려오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대체 뭔가.

뭔데 내가 여기서 보람을 느끼고 있는 건가.

"이야, 준우 씨 이 일 처음 맞아?! 왜 이렇게 잘해!"

"...뭐, 1인분은 하네."

"1인분이 뭡니까. 거의 준우 씨 혼자 다 했는데."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그들의 표정과 말투에 나는 학을 뗐다.

고작해야 청소 일.

칭찬을 들어도 같잖기만 할 뿐이다.

"좋아. 상혁아, 리미트는?"

"5분이요."

"충분하네. 다들 수고했어. 이제 나가자."

이윽고 우린 분해한 몬스터를 한 조각씩 들고 보스방을 나섰다.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구가 보였다.

선두에 선 박 팀장을 따라 모두가 출구를 코앞에 둔 그 순간.

"...뭐야?"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분해한 단면에서 흘러나온 피가 무릎에서부터 발끝까지 뒤덮고 있었다.

"팀장님! 이 새끼 못 움직입니다!"

"뭐야, 왜 그래?"

"피가 묻었어요! 빨리 끌어낼 만한 걸...."

한상혁과 문소연이 진심으로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오직 나만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뭐, 내가 이거 처음 밟아본 것도 아니고....

"호들갑은. 다들 물러나 있어요."

침착하게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센티피드의 피는 어마어마한 접착력을 자랑한다. 그 위력은 헌터 때의 나조차도 힘으로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을 정도.

당연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업화."

아예 녹여버릴 생각으로 화염 스킬을 시전했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습득 스킬 : 업화]

[스킬 사용 불가]

[해당 스킬이 잠겨 있습니다]

"...아."

스킬이 모두 잠겼다는 것을 깜빡했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곧바로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고.

'음.... 좆됐네?'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상혁아! 밧줄 챙겨왔지?"

"네, 여기 있어요!"

"빨리 묶어! 희장이 너는 뒤에서 잡아, 소연이도!"

그런 와중에도 팀원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도했다.

"하나, 둘, 셋!!"

이윽고 통로에 울려 퍼지는 박 팀장의 우렁찬 목소리.

네 명의 안간힘이 온몸에 전해졌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힘 스테이터스가 거의 최대치를 달성한 회귀 전 나조차도 단순히 힘만으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었으니까.

"젠장, 리미트는?"

"1분... 아니, 55초 남았습니다."

"안 되겠다. 준우 씨, 빨리 방호복 벗어!"

"자, 잠깐. 가스 수치가 너무 높아요! 너무 위험한...."

"그럼, 여기서 다 같이 갇힐래?"

박 팀장은 문소연의 말에 정색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박 팀장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 같이 갇힌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움직일 수 없는 건 나 혼자인데, 왜 다 같이 갇힌다는 거지?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비효율적이고, 손해가 막심해도 그들은 위기가 닥치면 꼬리를 자른다. 그래야 살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뭔가.

"뭐 하고 있어! 빨리 방호복 벗으라니까!"

"일단 위에만 벗고 밧줄로 다시 한번 당기죠!"

"야! 야 이 새끼야, 정신 안 차려?!"

이 도마뱀보다 못한 것들은.

"안 되겠다. 일단 다 나가."

"네?! 뭐 하시게요!"

"뭐하긴.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럼 팀장님은요?"

"내가 왜 팀장인지 알아?"

"또 그 소립니까? 이번엔 정말 위험한...."

"빨리 나가!!"

그렇게 팀원들이 등을 돌린 걸 확인한 박 팀장은 이내 내 방호복을 다급하게 벗겼다.

상체가 드러나자 순간 전신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박 팀장이 곧바로 자신의 방호복을 벗어 나에게 덮어준 것이다.

"10초 남았어요!"

던전 밖에서 들려오는 한상혁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피가 묻은 방호복을 벗어버리자 박 팀장은 곧바로 나를 부축했고, 그대로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2초!!"

출구 밖으로 몸을 던진 그 순간.

지이잉―

던전이 소멸했다.

"허억, 허억...."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와 소란스러운 팀원들의 목소리.

괜찮다 손사래 치는 팀장.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 살아 나왔다 싶은 안도감.

'뭐야 이거.'

그것들이 한바탕 몰아치고 나서야,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 지금 설마....'

죽을 뻔한 건가?

몬스터도 없는, 이미 토벌이 완료된 던전에서?

그것도 청소 일이나 하다가 죽을 뻔했다고?

적잖은 충격.

아니, 꽤나 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그때.

"준우 씨, 괜찮아?!"

박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아… 뭐, 네."

"그래도 다행이야. 가스가 농도가 생각보다 옅었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예."

박 팀장의 손을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군데군데 화상을 입은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그리 심각하진 않았다. 응급처치만 잘한다면 흉터도 남지 않을 듯했다.

"이야, 오늘 첫 던전부터 고생깨나 했네! 뭐 액땜이라고 생각하자고! 하하하!"

박 팀장은 여전히 호쾌한 목소리로 크게 웃었고, 팀원들도 그제야 안도한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을 뻔하던 찰나.

"...잠깐."

문득 박 팀장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음? 뭔가?"

"방금 오늘 '첫 던전'이라고...."

"당연하지! 아직 몇 개 더 남았네."

"그... 몇 개나 더...?"

넌지시 던진 질문에 박 팀장은 활짝 웃으며 한 손바닥을 모두 펴서 보여줬다.

***

작전수행팀은 서울 본부에만 8개 팀.

전국 지부에는 총 96개 팀이 존재한다.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민간 길드나 프리랜서까지 모두 합치면 국내에 등록된 헌터 수는 약 11,300명.

매달 출현하는 크고 작은 던전의 수가 전국 수백 개에 달하니 안정성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 수는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서울 본부에 소속된 던전 청소팀은 고작 다섯 개.

그리고 총원은....

25명.

다시 말해 한 팀당 하루 평균 3.3개의 던전을 청소해야 한다.

물론 그것도 평균일 뿐.

운이 나쁘면 하루에 5번 이상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팀장이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이 바로 그 '운 나쁜 날'이었다.

나는 그 고비를 넘기고서도 네 번이나 더 청소 일을 해야 했다.

"좋아. 오늘은 '운 나쁜 날'이었으니까, 회식이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

모든 작업이 끝나고 박 팀장이 말했다.

"설마 이번에도 팀장님이 사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리야. 원래 이런 건 상사가 사는 거야."

"매번 팀장님이 사면 팀장님은 뭐 먹고 살아요. 월급 차이 얼마나 난다고. 됐어요. 오늘은 엔빵해요."

"이럴 때만이라도 기 좀 살려주라."

임희장의 만류에도 박 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팀원들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박 팀장을 따라나섰다.

"준우도 갈 거지?"

박 팀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불렀다.

어느새 박 팀장이 날 부르는 호칭에선 '씨'가 빠져 있었다.

"오늘 일등 공신이잖나. 솔직히 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 이 새끼, 대체 뭔 일을 하다 왔길래 던전을 죄다 꿰고 있냐?"

"던전뿐입니까? 몬스터 특징도 다 알고 있더만."

어째 대하는 태도가 아침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자자, 질문은 자리 옮겨서 계속하자고. 나도 궁금한 게 많아."

"오늘은 가까운 데로 가요. 피곤하기도 하고."

"제 차로 가시죠. 대리 부르면 되니까."

"야, 뭐해! 빨랑 와!"

"...저 간다고 안 했는데요."

내 한 마디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 이럴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저기에 낄 생각은 절대 없다.

다만 그건 그거고....

"그, 저...."

머뭇거리던 끝에 박 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오늘...."

"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회식은 강요 안 하니까. 나야 입 줄면 좋지! 하하하!"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됐어요."

영,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만뒀다.

그렇게 나는 인사도 생략한 채 등을 돌렸다.

먼저 자리를 뜨며 몇 걸음 걸어가자.

"오늘 고생했다, 새끼야."

한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

"...내일 봐요. 준우 씨."

문소연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

돼지우리 같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박 팀장은 아니야.'

전생에서 날 죽인 건 박 팀장이 아니다.

그는 원한 때문에 살인을 사주할 만큼 모질지 못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

'다른 놈들 중에 나한테 원한이 있는 놈이라면....'

하, 젠장.

짚이는 놈이 너무 많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한 놈 한 놈이 다 의심스럽다.

나한테 맨날 욕 처먹던 우리 팀 막내 양관모.

허구한 날 나한테 조인트 까이던 통제팀 황동휘.

서로 죽일 듯 싸우고 헤어진 민유진.

기타 등등.

대체 어떤 놈일지 머리를 싸매고 있길 잠시.

'에휴.... 이제 와서 그게 뭔 소용이냐.'

몰아치는 회의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냥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난 스킬도 없는 청소부일 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날 죽인 놈도 여기선 생판 모르는 놈일 텐데, 지금 복수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결국, 진짜 복수를 하려면 일단 이 빌어먹을 업보를 풀고 전생으로 돌아가는 게 첫 번째다.

그리고 그러려면....

'국제 이능 협회 사무총장이라....'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스킬만 있었어도 비벼볼 만할 텐데.

다시 헌터가 되든, 아니면 통제팀에 들어가든 말이지.

물론 청소부는 당장에 때려치울 거고.

하아, 스킬만 있었으면....

머릿속으로 투정이나 부리고 있던 그때.

불현듯 스친 기억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스템 오픈!"

[기존 스킬을 해금하려면 각각의 조건을 달성해야 합니다 - 자세히 보기]

그래, 그랬다.

아침에 봤을 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지만, 조건을 달성하면 잠금을 풀 수 있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청소부고 뭐고 때려치우고 일단 스킬을 되찾는 것에만 집중하자.

범인 찾기든, 사무총장이든 다른 건 그다음이다.

그런 희망을 품으며 나는 해금 조건을 열었고.

[타천사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부 평균 연봉 6천만 원 이상]

[한계돌파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팀 입사 경쟁률 30:1 이상]

[전능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부, 20대 청년층 해당 직업 선호도 1위 달성]

[롤링 페이퍼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부 정규직 전환율 50% 이상]

....

[마왕 - 해금 조건 : 확인 불가]

"와, 시발."

동시에 절망했다.

죄다 청소팀에 관련된 조건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게다가 조건들이 하나 같이 청소팀에 뼈를 묻으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업보 이 새끼.... 존나 철저하네.'

또다시 힘이 쭉 빠졌다.

침대에 풀썩 쓰러진 채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습득 패시브 : 결벽증]

[패시브 발동]

"아오 씨...."

다시 몸을 일으켰고, 돼지우리 같은 방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청소를 시작했다.

***

그날 밤.

꽤나 피곤했던 건지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을 때.

[해금 조건 달성]

[출근 1회]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006

006

아침, 출근 버스.

운 좋게도 난 자리에 재빨리 엉덩이를 붙였다.

여기저기서 어렴풋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마다 이 짓을 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스킬만 되찾으면 당장에 때려치울 생각으로 출근을 이어간 게, 무려 일주일이나 된 것이다.

그동안 내가 청소한 던전만 해도 25개.

해체한 몬스터는 30마리.

사용한 약품은 10L짜리 통을 6번이나 갈았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해금한 스킬은 무려.

1개.

꽤나 생뚱맞은 조건으로 해금된 이동계열 스킬,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토벌에서는 꽤나 높은 효율을 자랑하는 스킬이지만..., 그것도 공격 스킬과 연계할 때나 이야기지, 딸랑 이거 하나 가지고 뭘 하라고.

게다가 전투 중에만 활성화되는 조건 때문에 청소 일에 써먹을 수도 없고.

'하, 망할....'

그래. 이것도 나름 스킬은 스킬이니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다만 현재로선 다른 스킬은 도저히 해금할 엄두가 안 난다.

상식적으로 평균 연봉 6천을 찍으라든가, 직업 선호도 1위를 달성하라든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빌어먹을, 답이 없다 이건.'

버스 안에서 내 한숨 소리가 30초 간격으로 울려 퍼졌다.

물론 개중에도 그나마 쉬운 조건은 있었다.

[원 카운터 - 해금 조건 : 협회 내 던전 청소팀에 대한 관심도 상승]

[업화 - 해금 조건 : 던전 청소팀 예산 확대]

...같은 것들.

다른 것들과 다르게 꽤나 추상적인 조건.

구체적인 수치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노려볼 만한 것들이다.

특히 협회 내 관심도 상승.

내가 알고 있는 향후 10년간의 정보를 토대로 토벌에 협력한다면 협회의 관심도야 단번에 오르지 않겠는가.

내 팀이었던 놈들을 만난다면 한번 말이라도 걸어볼까.

'...헌터가 만 명이 넘는데 우연히 잘도 만나겠다.'

에휴, 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러다간 평생 청소일이나 해야 할 판이다.

나는 무거운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동시에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시발."

정류장을 이미 한참 전에 지나쳤다.

***

사당 근처, 오래된 상가 건물.

"뭐야. 왜 두 명밖에 없어. 나머진 지각인가?"

먼저 도착해 있던 건 한상혁과 문소연, 둘 뿐이었다.

"팀장님이 너냐? 약품 모자랄 것 같다고 사러 가셨어."

"희장 씨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며칠 쉰대요."

한상혁과 문소연이 번갈아 대답했다.

"10분이나 지났는데 뭔 약품을 지금 사러 가셨대."

"그러게. 10분이나 지났는데 넌 왜 이제야 기어 나오냐?"

"정류장을 지나쳤거든."

한상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농담인 줄 아나 보다.

한상혁의 태도는 첫날에 비하면 거의 천사 수준이 됐다.

여전히 날카롭긴 해도 욕은 안 하는 걸 보면 뭐....

내가 일주일 동안 때려치우지 않은 게 정말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커피 사놨어. 마시면서 기다리든가."

"뭘 기다리고 있어. 우리끼리 먼저 들어가 있으면 되지."

한상혁이 바닥에 놓인 비닐봉지를 가리켰지만, 나는 가뿐히 무시하며 던전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한상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안 끝났거든."

"뭐가?"

"토벌 말이야. 아직 진행 중이라고."

"...허, 참 나."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여긴 내가 토벌했던 던전은 아니다.

자세한 정보는 모르지만... 그래 봤자 중간 난이도의 '블루 등급' 던전이 아닌가.

게다가 위험 요소도 적은 건물형 던전.

백번 양보해도 토벌 예정 시간을 어길 만한 곳이 결코 아닌데, 뭘 이렇게 쩔쩔매는 건가.

"에휴...."

그렇다고 들어가서 같이 토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어쩌겠는가. 기다려야지.

늦는다고 해도 5분, 10분일 테고.

...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10분.

20분.

그리고 30분이 지났다.

'어떤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예정 시간에서 30분이나 쳐 늦는 거지?'

머리에 뿔이 나기 직전이다.

아무리 덜떨어진 놈들이라고 해도 블루 등급 토벌을 나설 정도면 그래도 C급은 될 텐데?

하, 내가 현역 때 같았으면 진짜....

"어, 나온다."

"...!"

때마침 토벌이 끝난 모양이다.

한상혁이 먼저 그들을 발견하곤 입을 열었고, 나 또한 곧바로 던전 입구로 고개를 돌려 그들을 확인했다.

당연히 시선이 고울 리는 없었다.

어떤 햇병아리들인지 얼굴이나 보자는 심산이었으니.

'쯧, 딱 봐도 죄다 D급들이구만.'

아니나 다를까, 토벌을 마치고 기어 나오는 그놈들은 내 기억 속에도 없는 헌터들이었다.

고작 블루 등급 던전 하나 토벌하고 만신창이가 돼서는....

에휴, 말세다. 말세야.

그렇게 눈을 부라리며 한 명 한 명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이윽고 내 시선은 마지막으로 던전을 빠져나온 한 여성에게 멈췄다.

'어, 어, 잠깐... 저 녀석?'

동시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익숙한 얼굴이다.

검은색 긴 생머리.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한 새하얀 피부, 던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린 외모.

확실하다. 그 녀석이다.

한때 내 팀에 소속되어 있던 헌터이자, 내 직속 부하.

김민주.

"...?"

그 순간, 김민주가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아닙니다."

김민주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하곤 등을 돌렸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그녀의 등장에 본능적으로 눈살이 확 찌푸려졌으니까.

'빌어먹을, 하필 만나도 저 자식을 만나냐.'

내 팀 소속의 헌터를 우연히라도 만난다면 말을 걸어보겠다고 했었던가.

미안하지만 저 여자는 예외다.

저 녀석이 날 알든 모르든, 저 녀석한테만큼은 부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엮이고 싶지도 않다.

주제도 모르고 나한테 저주를 퍼부은 재수 없는 년.

이유도 없이 나를 싫어하던 싸가지.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은퇴를 제안했을 때, 상관도 못 알아보고 쌍욕을 지껄이지 않았던가.

쯧, 성격 더럽고 자존심만 세 가지고는.

'다 지 생각해서 한 말인 줄도 모르고.'

불현듯 스쳐 가는 예전 기억에 벌레라도 씹은 듯 고개를 내젓던 그때.

"준우 씨?"

문소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저 헌터 분, 아는 사람이에요?"

"아뇨.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치곤 엄청 빤히 쳐다보시던데요?"

"그냥... 제가 아는 사람이랑 좀 닮아서."

"...그렇구나. 표정이 너무 험악해지셔서 전 여자 친구분인 줄 알았어요."

"...."

"미, 미안해요. 농담이었어요."

문소연이 진심으로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내가 진심으로 살기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에휴, 됐다. 신경 써봤자 나만 손해지.'

어찌 됐든 지금 나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고. 괜히 더 생각해봤자 나만 화병 걸린다.

아무튼,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 모였네? 어떻게, 토벌은 끝났나?"

박 팀장은 작전팀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곧바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뭔 일 있었어?"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지랄, 아무 일도 아니긴! 방금 저 새끼, 전 여자 친구 만났...."

"닥쳐. 뒤지기 싫으면."

곧바로 다물어지는 입.

"뭐해요. 빨리 일이나 합시다."

어딘가 어색해진 분위기 속, 나는 앞장서서 던전으로 들어갔다.

***

블루 등급의 건물형 던전.

건물 하나가 통째로 던전화 되어, 겉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곳.

지어진 지 30년밖에 안 된 건물일 텐데도 그 안은 마치 1000년은 족히 된 듯한 모습이었다.

"준우 씨, 여기도 미리 공부해왔어요?"

건물 안을 살펴보던 중 문소연이 물었다.

일주일간, 던전과 몬스터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내게 너무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미리 공부했다'로 의심을 일축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이다.

그래도 반응을 보아하니 어떻게든 먹힌 모양이다.

"아뇨. 여긴 잘 모릅니다. 보스가 인간형 몬스터라는 것만 빼면."

뭐, 내가 토벌한 던전이 아니니까.

"자자! 다들 알겠지만, 건물형 던전이라 부산물들이 눈에 잘 안 띌 거야. 구석구석 잘 찾아서 청소해야 해. 특히 계단 밑에는 피가 워낙 잘 고이니까 신경 써주고."

"예~."

"뭐, 다행히 건물이 좁으니까 나눠서 작업해도 될 것 같네. 준우야, 너는 나랑 같이 보스방으로 가자."

"...네."

나와 박 팀장은 곧바로 계단으로 올라가 3층으로 향했다.

좁고 어두운 복도.

그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꽤나 협소한 공간이 드러났다.

중앙에 반쯤 잘린 채로 죽어 있는 보스가 보인다.

인간형 몬스터, '베가'

"어이구... 인간형은 이게 싫어. 꼭 사람 시체 같다니까."

"네, 뭐."

박 팀장은 꽤나 거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별다른 감상 없이 사체를 한 차례 살폈다.

여성의 모습을 한 몬스터. 크기는 고작 160cm.

뭐, 이 정도면....

"해체 안 하고 그냥 들고 나가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그게 좋겠다."

박 팀장은 내심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내 곧바로 움직였고.

"음?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잠시 자리에 서서 생각에 빠져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사체로 다가갔다.

뭔가 이상했다.

내 기억으로 '베가'는 위험한 몬스터가 아니다.

빠른 움직임만 주의하고, 공격 타이밍만 적절하게 잡는다면 공략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민주가 이걸 상대로 고전했다고?'

10년 전, 김민주의 헌터 랭크는 B급.

어감이 그래서 그렇지, 사실 B급만 돼도 우습게 볼 수 없는 랭크다.

특히 검을 다루는 고유 스킬은 당시의 나도 꽤나 높이 샀던 기억이 있다.

부상 때문에 은퇴만 안 했다면 S랭크는 충분히 도달할 포텐셜.

그래, 사람은 빌어먹을지언정 능력은 있었다.

아무튼, 이런 블루 등급 던전의 보스한테 쩔쩔맬 수준은 결코 아니긴 한데....

"이놈아, 왜 자꾸 멍 때려. 설마 나보고 혼자 들라는 건 아니지?"

"아... 잠깐 딴생각을 좀."

박 팀장은 자꾸만 움직임이 멈추는 내가 답답했는지, 한 번 더 나를 재촉했다.

그래. 포텐셜이고 나발이고 그게 나랑 뭔 상관인가. 어차피 두 번 다신 안 볼 건데.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며 베가를 둘러업은 그때.

사체 곳곳에 난 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이 확 좁혀졌다.

'잠깐. 그 녀석, 설마...?'

원치 않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야, 준우 이놈아! 왜 자꾸 내 쪽으로 기우냐?! 너 지금 안 들고 있지?!"

"아...."

헐레벌떡 몬스터를 받쳐 들었다.

이후로는 굳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됐다.

애초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마침 오늘은 '운 나쁜 날'이었고, 마침 다량 개체 던전이 두 개나 잡혀버려 정말이지 미친 듯 바빴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미 아침에 있었던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그저 피곤한 마음에 서둘러 집에 돌아갈 생각만....

"시발, 막차 끊겼네."

끝까지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007

007

죽을 맛이다.

3일 연속 '운 나쁜 날'에 이어 오늘은 새벽 출근이라니.

"하암...."

던전 입구 앞.

참을 수 없는 하품에 연신 입이 쩍쩍 벌어졌다.

현재 시각 새벽 5시 30분.

대략... 2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아무리 굴려 먹는 팀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내가 기계도 아니고.

헌터 때조차 이 정도로 타이트한 스케줄은 없었다.

뭐, 헌터 때는 한 번 토벌하면 일주일을 쉬었으니 체력적으로는 오히려 널널했지.

"아 씨, 이럴 거면 끝나고 부르던가. 대체 언제 끝난답니까?"

한상혁의 짜증 섞인 목소리.

가뜩이나 참을성이 부족한 그는 아까부터 팔다리를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글쎄. 우리가 언제 편의 봐가면서 일했나. 늦으면 늦는가 보다 해야지, 뭐."

"하,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늦었다고 사과라도 하면 몰라."

한상혁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게, 토벌 예정 시간에서 무려 한 시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짜증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나라고 다를 건 없었지만, 대놓고 씩씩거리기엔 피로감이 너무 강했다.

"하아암...."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하품하는 날 보던 문소연이 싱긋거렸다.

"뭐..., 소연 씨는 괜찮으신가 봅니다."

"저야 워낙 체력이 좋아서요. 이 정돈 끄떡없어요."

"...그러시군요."

"그럼요!"

거짓말.

일주일 전보다 깊게 내려온 다크서클. 조금씩 떨리는 손.

계속 이마를 짚는 걸 보면 어지럼증까지 있어 보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는 있는데... 저 정도면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긴, 끽 해봐야 20대 초반인 것 같은데.

업무 강도가 체력만 믿고 버틸 만한 수준이 아니지.

"그래도 뭐... 쉬엄쉬엄하세요."

"네? 아... 네. 그럴게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어딘가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곤 곧바로 찾아온 정적.

다들 피곤에 절어서인지, 모두가 말을 아끼고 있었다.

"...드디어 나오는구먼."

장장 1시간 30분 만에 작전팀이 던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젠장...."

그와 동시에 내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김민주.

그 여자가 또다시 등장한 것이다.

망할, 재수가 없기로서니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

입술을 꾹 깨물고 눈으로 욕하는 중에, 또다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번에 김민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뭘 꼴아보냐는 듯, 불만이 있으면 와서 말로 하라는 듯, 지지 않고 가만히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서로 적의가 담긴 시선을 가만히 교환하길 잠시.

"쳇."

김민주가 혀를 차며 먼저 등을 돌렸다.

그리곤 오른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 자식, 역시.'

내 시선은 어느새 김민주의 어깨로 향했다.

말해줘야 하나?

...아냐.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내가 왜 쟤한테 신경 쓰냐.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그냥 조용히 지나가자. 괜히 또 재수 없게 엮이지 말고.

그렇게 되뇌며 나 또한 등을 돌렸다.

***

이능차원관리 협회, 서울 본부.

헌터지원팀 산하 중증 부상 관리 병동 302호.

나는 두어 번 노크 후 그곳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민주가 나를 발견하곤 고개를 꾸벅했다.

아무리 부상자라지만 상관이 왔는데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모습이 꽤나 고까웠지만....

그래,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줘야겠지.

"그래. 몸은 어때?"

"수술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어요."

"인대가 찢어졌다고?"

"찢어졌다기보단... 염증을 너무 오래 방치해서 회전근개가 삭았다고 하더군요."

쯧, 나는 혀를 찼다.

뭔 근육이 삭을 때까지 염증을 방치한단 말인가. 그것도 검을 쓴다는 녀석이.

"그러게 왼손 악력을 길렀어야지. 무식하게 팔 힘만 믿고 검을 휘둘러대니까 어깨가 박살 나잖아."

김민주가 실소를 흘렸다.

"그럼 미리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말투가 뭐 그러냐? 다 안타까워서 하는 말 아니야.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김민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안주머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아무튼, 그 상태로 헌터 생활은 더 이상 무리야. 협회 의견도 마찬가지고."

"...그게 무슨?"

"그만 은퇴해."

툭, 서류 몇 장이 김민주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휑한 눈으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고.

"이건 아니잖아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부상 별거 아니에요. 일하는 데 지장 없어요!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저 며칠 있으면 랭크 심사도 있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이미 결정 난 사항이니까 잠자코 따라."

"...."

"쯧, 그러게 아프면 말을 해야지. 왜 참아서 병을 키워, 키우긴."

나를 똑바로 보던 김민주가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말을 하라고요...?"

꽉 잠긴 목소리.

"그래 이 자식아. 내가 설마 아프다는 것도 이해 못 해주겠...."

"했어요. 당연히 말했죠. 그것도 여러 번! 제가 마지막으로 지원팀에 정밀 검사 좀 받아본다고 했을 때, 팀장님이 뭐라 그랬어요? 여기서 안 아픈 사람 없다고, 일이나 하라고 했잖아요!"

김민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고, 덩달아 내 미간은 점점 좁혀졌다.

"여태껏 참은 게 누구 때문인데요!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났는데, 이제 와서 못 쓰게 됐으니까 관두라고요?"

"지랄. 그게 왜 나 때문이냐? 내가 니 어깨 조졌어?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야지, 어디서 남 탓이야! 일이나 하랬다고 진짜 일이나 하는 병신이 어디 있어!"

김민주는 말문이 턱 막힌 듯 주춤했다.

"아무튼, 할 수 있어요. 재활 며칠 받으면...."

"그 며칠 동안 일은 누가 하고? 애초에 병신 된 어깨로 뭘 할 수 있는데. 심지어 너 검사잖아! 어떻게든 기생충처럼 협회에 남아 있고 싶으면, 저기 저 청소팀으로 들어가든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야, 너 말이 점점 짧아진다?"

태도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하지만 김민주는 내 신경을 긁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팀장님은... 저를 동료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뭐?"

"죄송해요. 질문이 좀 바보 같았네요. 저 같은 건 당연히 쓰다 버리는 도구였을 텐데."

김민주가 이죽거렸다.

그 모습에 결국 참아오던 짜증이 폭발했다.

"너 솔직히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대놓고 무시하고, 시발. 오냐오냐해주니까 상관이 우습냐?"

"맞아요. 그래도 최소한 저는 팀장님을 싫어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팀장님은... 아랫것들은 사람으로도 안 봤잖아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김민주를 쏘아봤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팀장님은 늘 그런 눈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병신, 기생충, 청소팀. 이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관심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정적.

이제 굳이 내가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다음 생엔 사람으로 태어나시길 바랄게요. 이 개새끼야."

짝―

***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말실수한 게 있었네.

미안하지만 당시 어깨로는 작전팀은 고사하고 청소팀으로 왔어도 방해만 됐을 거다.

'그나저나, 나한테 말을 했었다고....'

처음부터 되짚어 본 그때의 기억.

먼저 떠오른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솔직히 전혀 기억이 없다.

아마 꾀병 부리지 말고 일이나 하라 했던 것도, 되는대로 뱉은 말일 것이다.

아니, 그냥 관심도 없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쯧, 그때 부상만 아니었으면 크게 될 녀석이긴 했는데. 설마 그 부상이 지금부터였을 줄이야.

'하아, 시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곤 다시 한번 등을 돌렸다.

"저기."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 녀석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네?"

"왼손의 악력을 길러."

"...뭐라고요?"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대꾸가 날아들었다.

"검을 쥘 때 오른손에만 힘을 주니까 어깨에 무리가 가는 거야. 왼손이 받쳐줘야지 몸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무엇보다 양손 밸런스가 맞아야 힘도 더 실리고."

"...."

"뭐... 지원팀 가서 검사라도 한 번 받아보든가. 헌터 생활 길게 하고 싶으면."

"아, 예."

정말 적잖이 흘려듣는 표정.

저 떨떠름한 모습을 보아하니 청소부 주제에 뭘 안다고 나대냐 생각하고 있겠지.

하긴, 내가 팀장이었을 때도 내 말을 안 들었는데, 하물며 청소부 말을 들을 리가.

"에휴, 됐다. 잘나신 헌터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어쨌든 할 말은 했으니 이걸로 끝이다.

이제 두 번 다시 엮일 생각은 없다.

나는 이내 낡은 방호복을 챙겨 던전으로 향했다.

***

협회로 복귀한 김민주는 고개를 숙인 채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토벌을 마친 직후의 일을 생각 중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에게 훈수를 던진 그 남자....

이전에도 던전 청소팀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그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따지자면 두 번째였지.

초면에 죽일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것까지 포함하면.

이유 없이 사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인간. 어처구니없는 훈수. 게다가 초면에 반말까지.

만약 평소의 그녀였다면, 그런 빌어먹을 인간의 오지랖 따위 가뿐하게 무시했을 터였다.

분명히 그럴 터였는데.

'지원팀 가서 검사라도 한 번 받아보든가.'

그냥 흘려듣기엔 정말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들어 확실히 어깨에 불편한 감각이 있었으니까. 힘도 덜 들어가는 것 같고 말이지.

하지만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토벌에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뒀는데....

"김민주 헌터님? 이쪽으로 오실게요."

"아, 네."

때마침, 지원팀 소속 간호사가 호명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김민주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제 발로 지원팀 의료 센터를 찾은 건 거의 2년 만이었다.

그 남자 때문이 아니다.

그냥 검사받아볼 때가 돼서 받는 것이다.

딱히 그 남자 말이 신경 쓰여서 온 건 아니다.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민주는 괜히 자존심을 세웠다.

'에이... 뭐 문제 있겠어. 근육 좀 뭉친 거겠지.'

진료실로 들어가며 김민주는 별스럽지 않게 여겼다.

"검사 빨리 받으시길 다행이네요. 오른쪽 어깨에 염증이 좀 있어요. 심각한 건 아닌데... 오래 방치했으면 큰일 날 수도 있었어요."

"...네?"

예상치 못한 의사의 답변.

"일단 소염제 며칠 분 처방해드릴 건데... 사실 약보다 중요한 건 자세 교정입니다. 지금 보시면 밸런스가 전체적으로 불균형해요. 이대로는 계속 어깨에 무리가 갈 겁니다."

"자, 자세 교정이요?"

"네. 제가 볼 땐 왼손의 악력을 기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김민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통증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아시고 검사를?"

"그냥 때가 돼서...."

"네? 아직 정기 검진까지 3년이나 남으셨는데요?"

"...누가 받아보라 그래서요."

"뭐에요 그게. 무당? 점 봤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김민주는 말을 아꼈다.

본인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 그땐 사실 늦은 거거든요. 뭐, 수술이야 할 수 있는데 재활에만 몇 달은 걸리고. 근데 솔직히 이 바닥이 그 몇 달을 기다려 주진 않잖아요? 무엇보다 재활을 받는다고 해도 예전만 못하고요."

"...그렇겠죠."

"뭐가 됐든 간에 그분한텐 고맙다고 해둬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남 신경 써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김민주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기엔 의사가 한 말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대체 뭐야, 그 사람.'

김민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008

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