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3

* * *

서정우의 원래 계획은 아래층에서 조용히 필요한 조치를 한 후에 3층으로 올라가 단번에 전창수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음?'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의 효과가 끝나기 직전에 위쪽 움직임이 변했다. 변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효과가 끝나 자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래도 전창수가 뭔가 지시하고, 한 놈이 급히 움직였다는 것까지는 알아보았다.

다시 위쪽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 스킬은 재사용 대기시간이 짧지만, 연속해서 쓸 수는 없다.

'3차원 분석 스킬이 감지 스킬에 걸렸나?'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그렇다고 가정했다.

몬스터 점령지에서 싸울 때는 모든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거기서 몬스터만큼 위험한 것이 '설마'와 '아니겠지'이다.

'조용히 털기는 글렀다. 계획 수정이다.'

그는 두 자루의 권총을 가져왔다. 그중 하나인 소음권총은 조용히 일을 처리할 때 쓰려던 것이다.

그는 소음권총은 놔두고 평소 사용하는 권총을 뽑았다. 탄창에 들어 있는 건 철갑탄이다.

이 철갑탄은 구리로 표면만 감싼 풀 메탈 자켓이 아니라, 관통력 향상을 목표로 만든 아머드 피어싱 탄환이다. 탄환에 강철 탄자를 추가해 관통력을 높인 이 철갑탄이 몬스터 전투에 쓰이는 표준 탄약이다.

이 철갑탄을 쏘면 당연히 총소리가 크게 난다.

그의 허리에는 화염 수류탄이 여러 발 붙어 있다. 불도마뱀 추출물을 사용해 만든 그 수류탄은 폭발하면 파편과 함께 화염을 쏟아낸다.

그는 왼손으로 화염 수류탄의 안전핀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이제 화염 수류탄에는 안전클립만 걸려 있다.

위층에서 적이 뛰어 내려왔다. 서정우가 권총을 들었다. 계단에 적의 다리가 보이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철갑탄이 적의 다리를 관통했다.

"으악!"

뛰어 내려오던 적이 앞으로 엎어졌다. 서정우가 엎어진 적의 등에 총알을 두 발 더 박았다.

총소리가 건물을 쩌렁쩌렁 울렸다.

백상어 클랜은 칼치파가 이름만 바꾼 곳이다. 하는 짓은 칼치파 시절보다 더 심해져서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그런데도 경찰은 백상어 클랜을 토벌하지 못했다.

백상어 클랜의 마스터 전창수는 감지와 사격 스킬을 각성한 강자다. 클랜의 전투력도 강하고 본부 건물도 워낙 튼튼해서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전창수가 권력에 댄 줄과 여기저기 뿌려댄 뇌물 때문에 도심지 토벌 허가가 나지 않았다.

'산소가 아까운 놈들.'

그는 총을 쏘자마자 왼손으로 작은 원통형 화염 수류탄 두 개를 뽑고 안전클립을 손가락으로 제거했다. 그는 그 수류탄을 좌우에 하나씩 던진 후에 계단을 올라갔다.

총소리를 듣고 1층 여기저기서 문이 벌컥 열렸다. 백상어 클랜원들이 총을 들고 복도로 뛰어나왔다.

"어떤 새끼…."

화염 수류탄이 폭발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서정우의 등 뒤 복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화염이 폭포처럼 지나갔다. 곧바로 두 번째 화염 수류탄이 폭발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불꽃이 몰아쳤다.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열 때문에 터지면서 물을 뿌렸다. 한 층만 물을 뿌리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의 스프링클러가 다 터져 물을 쏟아냈다.

서정우는 비를 맞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계단 끝에서 오른쪽으로 총을 갈겼다. 발사 모드는 이미 연발사격 상태다.

복도에서 총을 겨누던 놈 중 둘이 나자빠졌다. 그쪽에 있던 놈들은 다급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반대편에서도 총알이 날아왔다.

서정우는 복도로 나가지 않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이 시야를 가리고 상황판단을 어렵게 했다. 그의 바로 앞에서 총알이 서로를 향해 교차했다. 백상어 클랜원들이 자기들끼리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계단 앞쪽 복도의 문도 열렸다. 앞쪽은 적끼리 싸우게 할 수가 없다.

그 문 안쪽에서 한 놈이 튀어나왔다. 서정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적은 등급이 높은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총알이 적의 방탄조끼에 막혔다. 하지만 그가 쏜 건 한 발이 아니다. 다음 총알이 적의 다리를 뚫었다.

"컥!"

엎어진 놈의 몸에 총알을 박았다.

살기가 아래쪽에서 감지됐다. 서정우가 계단 아래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남들보다 방에서 늦게 나와 화염에 휩쓸리지 않은 놈이 밑에서 올라오다가 총에 맞고 나자빠졌다.

갑자기 앞쪽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잡혔다. 지금까지 상대하던 놈들과 달리 확신을 가진 살기였다.

서정우는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의 머리 위로 총알이 쏟아졌다. 분명히 연발사격인데도 흔들림이 적고 정확했다.

서정우가 아직 총알이 남아 있는 탄창을 버리고 새 탄창을 장착하며 생각했다.

'사격 스킬 각성자네.'

스킬의 이름이 같아도 그 효과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스킬 이름은 서류상 분류를 위해 인간이 지은 것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래도 사격 스킬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총을 잘 쏜다. 놈에게 수류탄을 던져봤자 요격당할 확률이 높다. 잘못하면 던진 사람이 폭발에 휘말린다.

적의 위치는 안다. 앞쪽에서 시퍼런 살기가 느껴졌다.

'전창수는 아니야. 행동대장 중에 사격 스킬 각성자가 있다더니, 저놈이군.'

그는 허리 뒤 가방에서 미니 드론 네 대를 꺼냈다. 이건 하나에 삼만 원씩 주고 용산에서 사 온 저가형 미니 드론이다.

일부러 무늬가 화려한 것을 골라 샀다. 무선조종기 한 대에 드론 네 대를 다 연결해놔서 동시 조종도 가능했다. 네 대 모두 같은 동작을 시키면 서로 충돌해 추락하기 쉽지만 상관없다. 이건 일회용으로, 그것도 단 몇 초만 쓰려고 가져온 거다.

그는 무선조종기를 조작해 드론 네 대를 동시에 띄워, 사격 스킬 각성자 위쪽으로 돌진시켰다.

'넌 이런 거 처음 볼 테니까.'

곧바로 적이 드론을 향해 총을 갈겼다. 철갑탄이 드론을 박살 냈다. 네 대가 순식간에 격추됐다.

'일단 쏘고 보겠지.'

드론이 격추되는 순간 서정우가 튀어나갔다. 백상어 클랜 행동대장이 총구를 드론 쪽으로 돌린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지만, 서정우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정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발사한 철갑탄이 행동대장의 방탄조끼에 꽂혔다. 그 충격으로 적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적은 중심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총구를 서정우 쪽으로 돌렸다.

늦었다. 서정우가 쏜 총알이 적의 이마에 꽂혔다.

사격 스킬을 각성해 백상어 클랜의 행동대장까지 오른 놈이 나자빠졌다.

복도 좌우에서 자기들끼리 총을 쏘던 놈들은 서로 총질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잠깐 사격을 멈춘 상태였다. 그놈들은 오해를 피하려고 아래로 내렸던 총구를 급히 들었다.

서정우는 왼손에 쥔 소음권총을 왼쪽으로 뻗었다.

아음속 탄환은 백상어 클랜원들이 입고 있는 방탄조끼를 뚫지 못한다. 방탄조끼가 없는 놈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상관없다.

그는 왼쪽을 보지 않아도 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방금 사용한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이 그를 노려보는 사람들의 좌표를 알려주었다.

그는 시선은 오른쪽으로 향한 채로, 왼쪽은 보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아음속 탄환이 왼쪽으로 소나기처럼 날아가 적을 때렸다. 빗나가는 것도 있었지만, 명중탄이 더 많았다. 방탄조끼로 보호하지 못한 부분에 박히는 총탄도 있었다.

"으악!"

그 정도면 왼쪽 견제는 충분했다.

그는 오른쪽을 보고, 오른손의 권총으로 정확히 적을 겨누었다. 적이 총을 들었지만 서정우가 더 빨랐다. 그는 적을 정확히 조준하고 철갑탄을 퍼부었다.

오른쪽에도 방탄조끼를 입은 놈들이 있지만, 행동대장의 것보다 조끼의 방어 등급이 낮아 철갑탄에 뚫렸다.

"커억!"

방탄조끼가 뚫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철갑탄의 위력을 꽤 줄여주었다. 총탄이 적의 몸에 박혔지만 죽지는 않았다. 대신에 총에 맞은 충격으로 오른쪽에 있던 놈들이 우르르 나자빠졌다.

서정우가 오른쪽으로 뻗었던 권총을 왼쪽으로 돌려 그쪽에 있던 놈들에게 철갑탄을 먹였다.

아음속탄을 피하려고 날뛰던 놈들이 그가 쏜 철갑탄에 맞아 쓰러졌다. 왼쪽 놈들이 모두 쓰러진 순간 탄창이 텅 비었다.

왼쪽을 겨눴던 소음권총은 오른쪽으로 돌렸다. 총에 맞아 쓰러진 놈 중에 상태가 나은 두 놈이 그를 향해 총구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소음권총의 남은 탄환을 그 두 놈에게 발사했다. 방탄조끼로 보호되지 못한 부분에 총알이 박혔다. 총구를 돌리던 놈들이 쓰러졌다.

서정우가 탄창을 갈았다.

* * *

백상어 클랜 전창수가 3층에서 소리를 질렀다.

"애들 다 불러!"

백상어 클랜은 세 채의 건물을 본부로 쓴다. 다른 두 건물에도 무장한 클랜원들이 있다.

클랜 간부가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습격이다! 총 들고 다 튀어오라고!"

갑자기 2층이 조용해졌다. 전창수는 2층에 있는 행동대장이 사격 스킬 각성자란 것에 기대했다.

"해치웠나?"

전창수는 감지 스킬을 가지고 있다. 아래쪽에서 감지된 살기가 위쪽으로 이동했다.

'젠장'그가 3층에 있는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올라오는 놈한테 무조건 갈겨! 얼굴 확인할 생각도 하지 마! 시간을 주면 당한다! 그냥 쏴!"

갑자기 사람의 상체가 휙 올라왔다. 3층에서 대기하던 클랜원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수류탄도 하나 날아갔다.

계단 중간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서정우가 쓴 화염 수류탄이 아니라 파편 수류탄이 터졌다. 그 충격으로 건물이 흔들렸다. 계단을 타고 연기가 솟아올랐다.

전창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엔 진짜 해치웠… 어?"

적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총에 맞은 건 2층에 있던 행동대장이다. 그걸 이제 눈치챘다.

'시체를 던졌어? 함정?'

갑자기 뒤에서 살기가 감지됐다. 전창수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묘하게 생긴 비행물체가 창문 쪽으로 날아왔다. 그건 서소라가 조종하는 드론이다.

전창수는 드론이 뭔지 모른다. 그래도 저게 위험하다는 건 눈치챘다.

'내 감각을 앞쪽에 집중시키고 그 틈에 뒤를 노려?'

그는 즉시 몸을 옆으로 날렸다. 드론이 날아와 방탄유리 창문에 충돌했다.

드론의 카메라 자리에는 서정우가 개조한 폭탄이 붙어 있었다. 드론이 창문에 충돌하자마자 그 폭탄이 폭발했다.

창문에 설치된 방탄유리에 구멍이 뚫렸다.

서소라는 드론용 무선조종기를 내려놓고 저격총을 들었다. 원거리 감시 능력에 저격총의 조준경이 더해졌다.

백상어 클랜 본부의 방탄유리는 호텔 것보다 훨씬 더 튼튼해서 폭탄이 터졌는데도 뚫린 구멍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서소라에게는 그 정도 크기면 충분했다.

한 놈의 등이 십자선에 확실히 걸렸다.

전창수를 쏘면 제일 좋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장착한 저격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공간을 가르고 날아가 창문의 구멍을 통과했다. 그 탄환이 백상어 클랜원의 등에 명중했다.

백상어 클랜이 쓰는 방탄조끼는 주로 앞쪽을 강화한 것이다. 게다가 서소라가 쓴 건 저격용 특수탄이다. 그 방탄조끼의 뒤쪽 방어력으로는 막을 수 없다.

클랜원이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악!"

다른 클랜원들은 기겁하며 뒤로 돌아서 총을 겨눴다.

전창수는 드론을 이용한 폭탄 공격을 눈치채고 옆으로 피한 상태다. 그는 부하들이 돌아서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앞…."

서정우가 계단 위로 뛰어오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두 자루의 권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둘 다 2층에서 노획한 권총이다.

뒤로 돌아서 있던 클랜원들이 서정우가 쏜 총에 맞고 엎어졌다.

"크아악!"

옆쪽에 있던 전창수가 서정우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서정우는 전창수의 살기를 감지했다. 3차원 공간 분석 스킬 덕분에 위치도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하며 전창수를 향해 사격했다.

전창수도 살기를 감지하자마자 옆으로 피했다.

전창수가 쏜 총알은 서정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서정우의 총알은 전창수의 몸통에 꽂혔지만, 희귀 몬스터의 가죽을 가공해 만든 방탄조끼를 뚫지는 못했다.

서정우가 옆으로 계속 피하며 총을 발사했다. 전창수도 벽을 타고 뛰며 사격했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밟아가며 서로 상대를 쐈지만 명중탄이 나오지 않았다. 둘 다 상대가 살기를 특히 강하게 일으킬 때마다 급격히 몸을 비틀어 사선에서 벗어났다.

전창수는 서정우의 능력을 눈치챘다.

'사격 감지 더블 각성자!'

둘 다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더 빠르게 감지해서 피하고 더 정확하게 쏘는 사람이 유리하다.

서로를 노리고 날아간 총알 중 한 발이 전창수의 방탄조끼에 꽂혔다. 그 충격 때문에 전창수의 움직임을 조금 늦어졌다. 서정우가 발사한 다음 총알이 전창수의 왼팔을 관통했다.

마치 커다란 망치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이 팔을 타고 쫙 올라왔다. 전창수는 그 순간 서정우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보다 강하다! 그놈이구나!'

138. 함정

전창수는 서정우가 더 강하다는 걸 깨닫자마자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쪽 사무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안으로 도망치자마자 벽에 붙었다. 권총으로 문을 겨누면서 왼손으로는 레드 포션을 꺼냈다.

레드 포션은 상처에 직접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주사기를 이용해 주입하면 치료 효과는 반도 못 본다. 주삿바늘 자국은 상처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삼키는 건 바보짓이다.

특수한 성분으로 제작된 작은 유리병에서 빨간색 액체가 주르륵 떨어져 관통상을 입은 상처에 스며들었다.

그는 포션을 흘려 넣는 동안에도 신경은 바깥쪽에 집중했다.

'젠장. 저놈이 이렇게 대놓고 쳐들어올 줄이야.'

서정우는 3층을 완전히 정리한 후에 전창수가 숨은 방을 향해 걸어갔다.

"창수야. 오랜만이다?"

전창수가 벽 뒤에서 외쳤다.

"이 미친 새끼! 날 아냐!"

저쪽 세계의 칼치파 행동대장 전창수를 만난 적이 있다. 만나자마자 총알을 먹이긴 했다.

"원래 칼치파 두목은 어떻게 했냐? 죽였냐?"

이쪽 세계의 칼치파 두목은 실종됐다.

"옛날이야기네? 그 새끼는 당연히 제꼈지. 각성을 못한 새끼가 내 위에 있다는 게 말이 돼?"

"각성했어도 제거했겠지. 네가 두목이 되고 싶어서."

"그게 왜? 이 바닥은 원래 그래. 그리고 결과를 봐! 잘됐잖아? 내 클랜이 칼치파 시절보다 얼마나 커졌는지 알아?"

"우리를 건드렸다가 내 손에 다 죽는 지금 이 결과?"

같은 사격 스킬 각성자라면 벽 너머에서 기다리는 쪽이 전투에 조금 더 유리하다. 지금은 전창수가 그 위치였다.

서정우가 전창수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씩 남아 있던 총알이 발사되면서 권총 슬라이드가 뒤로 밀려나 고정됐다.

두 자루의 권총 모두 총알이 떨어졌다. 서정우가 권총의 탄창 교환 버튼을 눌렀다. 탄창이 손잡이에서 빠져나가 아래로 떨어졌다.

전창수는 반격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서정우 쪽에서 권총 탄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창수의 눈이 번뜩였다.

'이건?'

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탄창 교환? 두 자루를 동시에? 기회다!'

전창수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총을 옆으로 겨누며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탄창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상태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권총 두 자루도 툭 떨어졌다. 그건 조금 전까지 서정우가 쏘던, 아래층에서 노획한 권총이다.

전창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권총 두 자루도 버렸어? 탄창을 교환하려던 게 아니야?'

서정우는 일부러 탄창을 버려 전창수를 유인했다. 전창수의 살기가 공격적으로 변하자마자 아래층에서 노획한 권총 두 자루도 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가 원래 쓰던 총을 뽑았다.

전창수가 튀어나왔을 때는 서정우가 권총을 뽑은 후다. 이번에는 서정우가 벽 너머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전창수는 깨달았다.

'당했다.'

서정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전창수도 방아쇠를 당기며 앞으로 달려 벽을 박찼다.

총알이 전창수의 몸에 꽂혔다. 철갑탄 두 발이 방탄조끼를 때렸다. 철갑탄조차 뚫지 못하는 고등급 방탄조끼지만 충격을 다 흡수하지는 못했다. 전창수가 쏜 총알은 완전히 빗나가 천장에 박혔다.

서정우가 발사한 세 번째 철갑탄이 전창수의 왼팔을 관통했다. 네 번째 총알은 허벅지 근육을 찢고 지나갔다.

"끄악!"

전창수는 속았다는 걸 깨닫자마자 복도의 벽을 박차고 도로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피해가 컸다. 팔다리에 총을 한 발씩 맞았다. 게다가 왼팔은 레드 포션으로 치료하는 도중에 다시 총을 맞았다.

전창수가 왼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로 벽 뒤에서 욕을 했다.

"씨발. 이따위 함정이 있다니."

서정우가 말했다.

"전쟁터에 가면, 총에 대해 빨리 눈치채는 몬스터들이 있다. 그런 놈들을 끌어낼 때 빈 탄창을 일부러 버리면 꽤 잘 먹혀. 그놈들은 그 순간을 노리고 튀어나오거든. 베테랑 중에는 이 트릭을 아는 사람이 좀 있는데, 넌 역시 모르네."

감지와 사격 스킬을 둘 다 각성하면 전투력이 크게 강해진다. 장거리 침투능력은 다른 스킬 조합으로는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해진다. 서정우는 그 능력을 몬스터 점령지에 고립된 생존자 구출에 썼다.

반면에 전창수는 전쟁터를 피해 다녔다.

서정우가 말했다.

"실전을 별로 안 겪었으면 레벨은 낮겠네?"

스킬 레벨은 실전을 겪어야 올라간다. 숙련도는 훈련으로도 높일 수 있지만, 스킬 레벨을 훈련으로 높이는 건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며칠씩 훈련장에서 구르는 것보다 실전에서 소형 하급 몬스터 한 마리 잡는 게 스킬 레벨을 올리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탄창을 버리면, 그 순간에 살기가 조금 강해지는 변화가 생겨.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걸 보면 네 감지 스킬은 레벨만 낮은 게 아니라 숙련도까지 낮나 보다? 창수야. 너 소문만 요란했지 실속이 없구나?"

전창수가 소리를 질렀다.

"나도 많이 죽였다. 레벨이 충분히 오를 만큼 죽였다고!"

"넌 사람을 많이 죽였지. 그건 몬스터와 싸우는 것과는 달라. 아주 많이 다르지."

서정우가 천천히 사무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무실 쪽으로 수류탄을 던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전창수가 서정우보다 스킬 레벨이 낮고 숙련도도 떨어지지만, 그래도 만반의 준비 중인 감지 사격 스킬 더블 각성자에게 수류탄을 던지면 중간에 요격당한다. 복도에서 수류탄이 터지면 서정우도 피해를 본다.

그렇다고 시간을 끌 수도 없다. 여기는 백상어 클랜의 본거지다.

그는 벽 너머로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쓰려 했다.

'위치를 파악하고 돌입하면서 제압을….'

그가 그 스킬을 쓰기 직전에 갑자기 사람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음?'

창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서정우가 탄창을 버리는 척한 것처럼 전창수도 창문을 이용해 함정을 판 것일 수도 있다.

서정우는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벽 너머 한 방향에 사용했다.

사람의 형상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진짜 도망을?'

서정우가 앞으로 뛰어 문 앞을 스쳐 지나가며 내부를 확인했다. 전창수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중이었다.

그는 막 지나친 문을 바로 돌아와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창문을 넘어가는 전창수의 등에 꽂혔다.

전창수의 방탄조끼는 희귀한 몬스터 가죽을 가공해 앞뒤를 다 강화한 특제품이다. 총알이 방탄조끼를 뚫지 못했다.

대신에 뛰어내리는 전창수의 등을 총알로 밀어버리는 효과는 있었다.

전창수가 창문 너머로 추락했다.

"으악!"

서정우가 앞으로 달렸다. 창문 너머로 총을 쏴 추락한 전창수를 끝장내려 했다.

그런데 그가 창가에 서는 순간 새로운 살기가 감지됐다. 그는 즉시 옆으로 피했다.

다른 건물 옥상에서 발사된 총알 십여 발이 창문을 통과해 안쪽에 꽂혔다. 몇 발은 방탄유리에 맞아 거미줄 모양의 균열을 만들었다.

옥상에서 대기하던 적은 서정우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사격을 멈추었다.

서정우는 감지되는 살기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계산했다.

'단순히 내가 안 보이니까 사격을 멈춘 거야.'

적이 손가락에 힘을 조금 뺐다. 그 순간 살기가 살짝 줄어들었다.

서정우는 바로 그때를 노렸다.

옥상 감시병은 4배율 조준기에 눈을 대고 창문을 감시 중이다. 높은 배율이 오히려 방해돼서 창문 앞에 서정우가 나타난 것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조준경의 십자선을 조금 옆으로 이동하고, 힘을 뺐던 손가락을 다시 움직여 방아쇠를 당기는 데까지 0.

5초는 필요했다.

반면에 서정우는 창문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를 벗어난 철갑탄이 적의 4배율 조준경의 유리를 박살 내고 머리에 꽂혔다.

옥상의 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뒤늦게 발사된 총알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살기가 감지됐다. 강렬했다.

서정우가 즉시 몸을 뒤로 젖혔다. 밑에서 위로 총알이 날아왔다. 총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피하지 못했다면 단번에 머리를 당할 만큼 정확한 사격이었다.

'전창수.'

사격 스킬을 각성한 사람은 신체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에 3층에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다. 등에 총알을 먹여 밀어버렸는데도 전창수는 어디가 부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옥상의 부하가 죽는 순간을 이용해 서정우를 공격했다.

서정우의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은 재사용 대기시간에 걸려서 아직 쓸 수 없다. 그래도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거기냐.'

당장에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강렬한 살기가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전창수의 살기가 너무 강해서 위치를 잡기 편했다.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올라왔다.

'다른 건물에 있던 놈들이 몰려왔네.'

이제 시간이 없다.

그는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물건 중에 검은색 당구공을 주워 창밖으로 휙 던졌다.

감지와 사격 스킬 더블 각성자에게 수류탄을 던지면 요격당한다. 그런데 전창수는 감지 스킬의 숙련도가 낮아서 가짜를 던질 때 살기가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전창수는 그 당구공을 수류탄으로 오인하고 쏘았다. 총알에 맞은 당구공이 박살 났다.

전창수의 총구는 옆으로 잠깐 움직였다가 창문으로 돌아왔다. 그 시간은 너무 짧아서 서정우가 몸을 내밀어 전창수를 조준할 시간은 없었다.

서정우는 대신에 권총만 살짝 내밀었다.

전창수가 살기를 뿌리는 위치는 대충 알고 있다. 그는 적을 보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갑탄이 위에서 아래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중 두 발은 전창수의 방탄조끼에 막혔지만, 한 발이 어깨를 뚫었다.

"으악!"

전창수의 비명이 들렸다.

전창수는 이미 팔과 다리를 총에 맞고 3층에서 떨어진 상태다. 거기다 어깨까지 한 발을 더 맞았다.

'이대로 싸우면 진짜 죽는다.'

전창수는 겁을 먹고 총을 난사하며 후퇴했다.

서정우는 전창수가 총을 쏘는 동안 벽 뒤에서 탄창을 교환했다.

전창수는 총에서 총알이 떨어지는 순간 건물 모퉁이 너머로 몸을 피했다. 거의 동시에 서정우도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서정우가 전창수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창수야. 도망 못 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전창수가 탄창을 갈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이제 내 부하들이 널 찢어발길 거다!"

"네 부하들? 나 하나 잡겠다고 저 건물로 몰려왔더라?"

아래층에서 위로 올라온 시끄러운 소리와 간간이 섞인 살기 때문에 적이 그 건물에 많이 들어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창수야. 나도 겨우 너 하나만 잡으러 온 거 아니다. 총을 이렇게 쏴대는데 경찰이 출동할 기미도 안 보이지? 경찰도 제발 너희들이 여기서 다 죽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거야. 그런데 그거 아냐?"

서정우가 왼손을 들었다.

"사실 나도 경찰이야."

여기가 아니라 저쪽 세계의 경찰이다.

"이쪽 친구들 소원을 들어주려고, 건물 안에 선물을 남겨뒀다."

그가 손에 쥔 무선 격발기의 버튼을 눌렀다.

저쪽 세계 용산에서 산 무선 제어 장치가 이쪽 세계의 화염 수류탄을 개조해 만든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런 폭탄이 층마다 붙어 있었다.

폭탄이 터지자마자 건물 1층부터 3층까지 화염이 휩쓸었다. 유리창 몇 개가 펑펑 터져나갔다.

전창수는 깜짝 놀랐다.

"씨, 씨발?"

백상어 클랜의 건물은 두꺼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지고 그 외벽에 강화 구조물이 추가되어 있다. 강화 외벽은 로켓탄에 맞아도 버틴다. 유리창도 방탄유리라 총알에 뚫리지 않는다.

그 창문에는 강철로 된 덧창문이 추가로 설치되어 있다. 그것까지 닫으면 철벽 요새가 된다.

그런데 내부에서 폭탄이 터지자 그 많은 외부 방어벽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폭발 화염이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내부 피해가 더 커졌다.

서정우가 말했다.

"백상어 클랜. 이거 이제 보니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놈들이네. 저 건물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그냥 뛰어들어가냐?"

백상어 클랜도 외부 습격에 대한 대책을 안 세운 건 아니다. 강력한 공격 한 방에 전멸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건물을 셋으로 나누었다. 계획대로라면 한 채가 당해도 두 채가 남아서 전투력을 보존해야 한다.

그런데 전창수는 서정우를 잡으려고 다른 두 건물에서 남쪽 건물로 부하들을 불러들였다.

그 남쪽 건물은 지금 통째로 불타고 있다.

전창수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었다.

"이, 이 새끼 도대체 뭐야?"

139. 성물

서정우의 감지 스킬에 바로 옆 건물 옥상의 살기가 잡혔다.

그는 즉시 그쪽으로 사격했다. 옥상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총을 겨누던 놈이 아래로 떨어졌다.

"으아악!"

서정우가 말했다.

"다 잡은 건 아니네. 건물 하나에 유인해서 다 태워버렸는데 나머지 두 건물에 아직도 남은 놈이 있나 봐?"

전창수가 모퉁이 너머에서 외쳤다.

"많아! 엄청 많다!"

"너희는 적이 많으니까 대가리만 자르면 잔챙이들은 알아서 죽겠지. 창수야. 슬슬 끝내자."

"너 이 새끼. 여기 이렇게 혼자 쳐들어온 건 텔레포트 스킬이 있어서냐?"

"눈치챘냐?"

"씨발. 정보 브로커 개새끼. 더블이라더니 트리플이잖아!"

"브로커한테 넘겨받은 정보에는 감지와 사격밖에 없지?"

"브로커도 네가 제꼈냐?"

"선화와 나를 노린 건 백상어인데, 그걸 시킨 브레인은 브로커더라? 넌 하수인이고. 그래서 머리 쓰는 놈부터 먼저 처리했다."

"그래. 맞아. 난 하수인이야. 돈만 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놈이라고. 너한테 유감은 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고…."

"그런데 선화를 납치하려 한 건 너희가 맞잖아."

"씨발. 이선화 더럽게 아끼네."

"표 많이 나냐?"

"너 이 새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못 나가! 우리 애들이 다 털린 건 아니야!"

"내 손에 죽을 놈이 걱정할 일은 아니야."

전창수는 서정우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이 주변의 텔레포트를 막아놨다. 날 죽이면 너도 죽는다!"

서정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랄하네. 텔레포트의 원리는 어떤 과학자도 밝혀내지 못했어. 원리를 모르면 대책도 못 세워."

"현대 기술로 막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 그런데 과학자들이 원리를 밝혀내지 못한 게 어디 텔레포트 하나냐? 성물이라고 알아?"

서정우는 멈칫했다. 그도 성물을 찾고 있다.

"성물로 텔레포트를 막을 수 있다고?"

전창수는 서정우에게 협상을 걸기 위해 설명했다.

"성물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지. 가진 놈들이 죄다 비밀로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내 손에 들어왔다."

"누굴 죽이고 빼앗았겠지."

"이 바닥 비지니스가 원래 그렇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어쨌든 내가 가진 성물은 텔레포트를 막는 힘이 있단 말이다!"

전창수가 협박했다.

"그러니까 날 쏘면 너도 죽는다. 못 빠져나간다고!"

서정우는 그 문제보다 성물 자체에 더 관심이 있었다.

"네가 손에 넣은 거 보면 일반 등급이겠다?"

"씨발. 성물인데 등급이 뭐가 중요해? 어차피 희귀 등급 성물은 있다는 말만 들었지 본 적도 없는데."

서정우가 각성자 특수부대에 있을 때 본 정부 보유 성물이 희귀 등급이다.

전창수가 사납게 말했다.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성물 때문에 네 텔레포트 스킬은 못 쓴다는 거다!"

"교란 방법은?"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지?"

"내가 안 믿으면 넌 죽으니까."

"성물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일대의 텔레포트가 통째로 교란된다. 텔레포트 스킬을 쓰는 놈이 브로커를 제낀 것 같아서 피는 이미 묻혀놨다."

서정우의 감지 스킬로는 성물의 힘을 구분할 수는 없다. 이선화의 목에 걸어준 전설 등급 성물 목걸이의 힘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전창수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흐음."

전창수가 제안했다.

"우리도 네 쪽에 한 일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입은 피해는 감수하겠다. 그냥 보내줄 테니까 여기까지 하자."

"내가 텔레포트로 빠져나갈 수 있게 그 성물의 피를 닦겠다고?"

"그럴 리가 있냐? 걸어서 빠져나가라. 막지는 않을 테니까. 나도 실수한 게 있고 너도 보복할 만큼 했으니까 여기까지 하자고."

서정우는 전창수가 진짜 성물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그 말을 아예 안 믿는 건 아니다.

'선화의 목걸이에는 몸에 해로운 것을 이선화에게 보내는 힘이 있어. 그건 차원 너머까지 간섭했다는 뜻이니까, 일반 등급 성물도 공간 정도는 간섭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전창수의 약속은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이놈은 부하들을 긁어모아서 당장 오늘 밤에 날 공격할 게 뻔해. 나뿐만이 아니라 선화와 소라까지 노릴 거야.'

서정우가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끝을 봐야 하는 거 알잖아?"

서정우가 화염 수류탄을 앞으로 던졌다. 전창수가 숨어 있는 쪽이 아니라 그냥 앞쪽으로 던졌다.

화염 수류탄이 모퉁이를 넘어가자마자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수류탄은 그 위치에서 폭발했다. 화염이 크게 일어났다.

그건 전창수를 잡으려고 던진 수류탄이 아니다. 연막탄 대신이다.

서정우는 화염이 크게 일어났다가 가라앉는 순간 앞으로 달렸다. 불길과 연기가 그의 몸을 잠깐 가려주었다.

전창수는 서정우가 모퉁이를 넘어오면 쏘려고 기다렸다. 그런데 폭발과 화염, 연기가 사격을 방해했다. 방해받은 시간은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지만, 사격 각성자끼리의 전투에서 그 정도면 지형의 이점을 잃고도 남는다.

화염이 아직 다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서정우와 전창수는 동시에 상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러면서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의 살기를 감지해 옆으로 뛰었다.

서정우의 총구 방향은 화염과 연기 때문에 전창수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서정우는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사용해 전창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

전창수의 방탄복에 철갑탄이 퍽퍽 박혔다.

희귀 몬스터를 가공한 가죽에 내부 방탄판까지 있는 방탄복을 권총탄으로 뚫는 건 무리였다. 대신에 충격은 충분히 전달됐다. 연달아 박히는 명중탄 때문에 전창수가 중심을 잃었다. 전창수가 쏜 총알도 다른 방향으로 빗나갔다.

화염과 연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대가 정확히 보였다.

서정우가 총구를 위로 살짝 들었다. 범위가 넓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전창수가 고개를 비틀었다. 총알이 전창수의 뺨을 관통했다.

전창수가 쏜 총알은 서정우의 왼팔을 스쳤다.

서정우는 총상을 무시하고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쏜 총알이 전창수의 오른팔을 관통했다.

"크악!"

전창수는 권총을 놓쳤다. 다음 총알이 그의 다리를 관통했다.

전창수가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서정우가 달려들어 전창수를 걷어찼다. 전창수가 뒤로 날아갔다.

서정우가 변장을 위해 쓴 가발에 붙은 불씨가 확 커지며 불이 붙었다. 그의 머리 위로 불길이 솟아올랐다. 진짜 지옥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전창수는 겁에 질렸다.

'코드네임 지옥부처. 건드리지 말걸.'

서정우는 가발을 벗어 던졌다. 그런 후에 최근에 넉넉히 확보한 레드 포션을 꺼내 상처를 입은 왼팔에 부었다. 총상은 물론이고 폭발 화염을 뚫을 때 입은 약간의 화상도 레드 포션의 힘으로 치료되기 시작했다.

서정우가 권총을 전창수의 이마에 겨누었다.

"이제 가라. 지옥에 가면 너하고 똑같이 생긴 놈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같이 불구덩이에서 굴러라."

전창수가 왼손을 흔들었다.

"자, 잠깐! 날 죽이면 이선화도 죽는다!"

서정우가 방아쇠를 당기려다가 멈추었다.

"무슨 개소리야?"

"이선화가 오늘 야외 오디션에 갔지? 그곳에 애들을 보냈다. 그래서 여기 방어가 약해진 거다. 그놈들만 여기 있었어도 너 혼자서 내 요새를 뚫는 건 불가능했단 말이다!"

서정우가 인상을 썼다.

"영화사에는 총 잘 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거길 공격했다고?"

"비상 상황에 이거저거 가릴 때가 아니라서 일단 애들을 보냈다. 네가 누군지 알고 나서 나도 거기 있는 내 부하들에게 이선화를 잡으라고 연락했다."

"전화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조금 전에 창가에 있던 부하에게 신호했다. 그러니까 네가 날 죽이면 이선화도 죽는다!"

서정우가 무전기를 의식하고 말했다.

"선화에게 전화해봐."

잠시 후에 서소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골전도 이어폰을 통해 들렸다.

- 전화를 받지 않아요. 수정이하고 현수도요.

그의 표정이 굳었다.

서정우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전창수가 여유를 좀 찾으며 말했다.

"성물 이야기도 농담이 아니야. 이곳에서는 텔레포트 스킬을 못 써. 쓰려고 하면 거부감이 들걸? 억지로 쓰면 뒈진다고!"

전창수는 서정우가 스킬을 쓰다가 죽을까 봐 그 말을 한 게 아니다. 텔레포트를 쓰기 전에 전창수를 죽일까 봐 미리 말린 것이다.

일반적인 텔레포트는 스킬 발동, 이동할 곳 지정, 실제 이동의 3단계로 구성된다. 텔레포트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동할 곳의 좌표를 설정하는 단계에서 문제를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서정우의 평행차원 텔레포트는 이름만 텔레포트다. 같은 세계의 특정 공간으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공간 좌표 설정 단계가 아예 없다.

'이쪽 공간에만 개입하는 일반 등급 성물이라면,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나를 붙잡지 못하겠지.'

서정우가 전창수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이제 그만 가라."

전창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정우가 진짜로 그를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 미친 새끼! 너도 죽는다고!"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사, 살려줘! 살려주면 뭐든 다 할게!"

"네가 가진 성물은 어떤 유물이냐? 어디 있고?"

"그걸 말하면 죽일 거잖아!"

"대답 안 할 줄 알았…."

서정우가 휙 돌아섰다. 새로운 살기가 잡혔다. 창문을 열고 기관총을 내미는 놈이 보였다.

서정우가 그놈을 쏘았다.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화염 폭탄을 터트린 남쪽 건물에서도 살기가 몇 개 잡혔다.

'살아남은 놈들이 정신을 차렸군.'

갑자기 강렬한 살기가 또 감지됐다.

그가 옆으로 뛰었다. 동쪽 건물 옥상에서 로켓탄이 날아와 폭발했다.

서정우가 옥상을 향해 사격했다. 그곳에 있던 놈이 아래로 추락했다.

"으아악!"

전창수는 로켓탄의 폭발 압력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한쪽 다리를 이용해 도망쳤다.

서정우가 전창수를 쏘았다. 총알이 멀쩡한 다리까지 뚫었다.

"으악!"

전창수가 모퉁이 바로 앞에서 고꾸라졌다.

그런데 서정우도 총알이 떨어졌다. 탄창을 갈아야 한다.

전창수는 바닥을 굴러서 모퉁이 너머로 도망치는 중이다.

모퉁이 넘어까지 쫓아가기는 어렵다. 잘못하면 적의 화망에 걸린다.

서정우가 마지막 화염 수류탄을 전창수에게 던지고 탄창을 갈았다. 수류탄이 전창수의 바로 옆에서 폭발했다. 강력한 화염이 전창수를 집어삼켰다.

전창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가야 한다. 서정우가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했다.

서정우가 차원을 넘어왔다.

그는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후우. 역시 일반 등급 성물로는 평행차원 이동을 못 막네."

평행차원 텔레포트는 평소처럼 사용됐다.

몸에서 탄내가 나고 팔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레드 포션 덕분에 상처는 나았지만, 꼴은 엉망진창이었다.

옷도 불에 그슬렸다.

이곳은 주택가다. 이런 꼴로 돌아다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면 문제가 커진다.

"어지간하면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옷 상태가 너무 엉망이라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소라 운전면허 꼭 따게 해야겠다."

서정우가 휴대폰을 꺼냈다.

* * *

이선화는 평범한 차를 몰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타났다가, 서정우의 상태를 보고 기겁했다.

"저, 정우 씨?"

서정우가 차에 올라탔다.

"갑시다."

"그, 그래요. 병원부터!"

"다친 거 아니니까 다른 곳으로."

이선화가 화를 냈다.

"안 다치긴요? 지금 본인 상태가 안 보여요? 앗! 파, 팔은 또 왜 그래요? 총 맞았어요? 병원부터 갈게요!"

서정우가 옷에 총알구멍이 난 부분을 벌려 팔의 피부를 보여주었다. 레드 포션 덕분에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그냥 옷만 찢어진 겁니다. 긁힌 상처 하나 없죠?"

"그, 그렇네요. 그렇지만…."

총은 주택가 구석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옷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선화가 그의 옷을 힐끗 보며 말했다.

"옷은 어디서 그런 구닥다리 디자인을…. 아, 아니에요. 지금 디자인이 중요한 게 아니지. 진짜 괜찮아요? 옷 그거 다 불에 그슬린 거 같은데."

"뭘 좀 찾다가 약간의 사고가 있었습니다만,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었으면 하는데…. 집 근처에는 기자가 또 왔을 수 있으니까 근처 공원 화장실에 내려주면 되겠네요."

기자를 쫓아내려면 일단 서정우가 멀쩡해야 한다. 불에 그슬리고 화약 냄새까지 나는 상태로 기자와 접촉하면 바로 기사가 나간다.

이선화가 반대했다.

"요즘은 공원에도 CCTV 있어요. 뭔지 몰라도 이 꼴을 찍힐 순 없죠. 제일 안전한 곳으로 가요."

"거기가 어디입니까?"

"우리 집이요."

"네?"

"그 건물은 내부에 CCTV가 전혀 없는 거 알잖아요. 우리 집에 가면 절대로 안 들켜요."

140. 이선화

이선화는 그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 입구 경비원은 운전자의 신원만 확인했다.

건물 지하주차장에는 CCTV가 아예 없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 근처는 주차공간마다 칸막이가 세워져 있었다.

이선화가 차에서 내리며 설명했다.

"입주민이 집에 누굴 데려오든 다른 차의 블랙박스에 찍힐 일이 없게 하려고, 일부러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 쪽에 칸막이를 설치했대요. 그래서 주차장 모양이 이래요."

"비밀기지 만들기 딱 좋은 구조네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서정우가 이선화의 집으로 들어갔다. 앞집은 스토커가 체포된 후부터 쭉 비어 있었다.

그는 이선화의 집에서 샤워로 화약 냄새를 지웠다.

서정우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며 물었다.

"남자 옷이 또 있군요."

"정우 씨 거예요."

"제 거요?"

"의상 디자이너 차연숙이라고 들어봤어요?"

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가 아는 차연숙은 의상 디자이너가 아니라 저쪽 이선화의 핸드백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 핸드백은 분해 후에 재조립하면 심장 보호대로 바뀐다.

'몬스터 가죽을 가공할 수 있는 스킬을 각성하기 전에도 옷을 만들었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얼마나 유명한가요?"

"보통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화점에서 옷을 팔지 않으니까요. 청담동에 매장이 있어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해요. 정우 씨가 테러리스트들을 잡을 때 입은 옷도 그분이 만들었어요.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은."

그녀가 방긋 웃었다.

"샘플로 몇 개 받아온 거예요."

"샘플?"

"그런 게 있어요."

차연숙은 이선화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옷을 몇 벌 맡기면서, 그런 스타일을 서정우가 입으면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원래는 사진도 찍어오라고 했지만 그건 이선화가 거절했다. 그녀는 서정우가 웬만해서는 사진을 남기지 않는다는 걸 안다.

탁자 위에는 구급상자가 펼쳐져 있었다.

"팔 다시 보여줘요. 확인해야겠어요."

서정우가 팔을 걷어 총에 맞은 곳을 보여주었다. 뼈가 부서지기라도 했다면 레드 포션 한 병으로는 완치가 어려울 수 있지만, 겉만 조금 다친 것뿐이라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진짜 괜찮네? 옷만 보면 꼭 총알이 스친 것 같았는데."

"그런 것도 구분할 줄 압니까?"

"영화 찍다 보면 특수분장 자주 하잖아요. 전에 본 것하고 좀 비슷했는데."

영화의 특수분장은 진짜 총에 맞은 것보다 더 그럴듯하게 한다.

"그냥 어디 걸려서 옷에 구멍 난 겁니다."

"화약 냄새도 난 거 같았고."

"불 근처에 있다가 작은 사고가 있어서 옷이 조금 탄 겁니다."

이선화는 그 말을 쉽게 믿었다. 원래 잘 믿는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서정우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정우 씨가 살인마 잘 잡는 거 보고 추리력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정보를 모으는 줄은 몰랐어요.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안 위험합니다."

이선화가 그의 말을 믿기는 하지만, 다 믿는 건 아니다.

그녀가 투덜댔다.

"어쩐지 오늘 훈련 쉬게 해준다더니, 위험한 일 하러 가려고 그런 거였어."

"아니라니까요. 별로 위험하지도 않았고, 조금 그슬린 것뿐이니까."

그슬린 원인인 화염 수류탄 하나만 놓고 보면, 일단 터트린 후에 불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흐음. 진짠가?"

"진짜입니다."

대신에 그때 날아다닌 총알과 수류탄, 로켓탄이 위험했다. 그의 옷을 태운 화염 수류탄은 그런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서정우가 제안했다.

"밥부터 좀 먹죠."

레드 포션을 쓰면 배가 많이 고파진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갖다 쓴 체력을 보충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럼 나가서…."

"냉장고에 뭐 있습니까? 일단 좀 차려서 먹고 나갑시다. 배가 많이 고파서."

"아, 저기. 냉장고에는… 없어요."

"네?"

"물하고 소주밖에 없어요. 저 요리 못 해요."

"아. 예."

그녀가 얼른 설명했다.

"바빠서 못 배운 거예요. 배우면 금방 잘할 수 있어요."

서정우가 저쪽 이선화를 생각했다. 그녀는 이쪽과 달리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다. 그래서 밥은 어지간하면 직접 해서 먹는다. 서정우도 여러 번 얻어먹어 봤다.

그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아니요. 배워도 안 될 겁니다."

"예?"

"이선화 씨는 요리 재능이 없어요."

"해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잘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 잇는 분식집에서 밥을 먹었다. 서정우가 패밀리 세트에 추가로 돈가스와 만두, 우동, 제육 덮밥을 주문했다.

이선화가 걱정했다.

"우리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니에요?"

"우리?"

"네?"

"선화 씨도 밥 시켜요."

"네?"

"이건 내 밥인데."

"네?"

"배가 많이 고프다고 했잖아요."

* * *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 나 오늘 서정우와 이선화가 데이트하는 거 봄.

- 네? 어디서요?

- 우리 동네 분식집.

- 뻥 치시네. 서정우는 몰라도 이선화가 분식집이라니.

- 진짜임. 거기서 서정우는 패밀리 세트랑 돈까스랑 만두랑 우동이랑 제육 덮밥을 먹었음. 이선화는 볶음밥을 먹었고.

- 하다 하다 이젠 먹방도 찍음?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닌데?

- 먹던데요.

- 인증은?

- 사진 찍으려다가 서정우에게 걸려서 실패.

- 아. 네. 그러시겠지. 그러니까 사진이 없다는 거네?

- 진짜임. 진짜 둘이 우리 동네 분식집에서 먹방 찍으면서 데이트했다니까!

- 네. 네. 난 윤나나하고 밥 먹는 중이다. 아까 팔짱도 꼈다.

- 님 뻥 자제 좀.

- 난 진짜인데.

서소라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같이 밥을 먹던 윤나나가 물었다.

"왜?"

"오빠가 선화 언니하고 먹방 찍고 있다잖아. 혼자서 오 인분이 넘는 양을 먹으면서."

"앗! 진짜야? 어디서!"

"당연히 뻥이지. 누가 인터넷에서 관심 좀 끌어보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정우 오빠 원래 많이 드시잖아."

서정우는 저쪽에서 맛없는 것만 먹고 살다가 와서 여기서는 많이 먹는다.

"그래도 오 인분은 못 먹어."

* * *

서정우는 이튿날 오후에 총을 숨겨둔 곳으로 돌아왔다. 집에 있는 무장 캐리어에서 새 권총도 한 자루 가져왔다.

무기를 찾아 백팩에 넣은 후에는 하남시로 이동했다. 미사리 근처에 아파트와 쇼핑센터 등이 모여 있는 곳이 그의 목적지였다.

"여기가 이렇게 좋아졌네."

저쪽 세계의 이 지역은 상태가 이렇게 좋지 않았다. 원래 있던 식당과 카페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대신에 서울과 가깝고 경치도 좋아서 영화와 드라마 세트장이 많이 생겼다.

목재는 식물형 몬스터를 잡으면 나오고 석재는 광물형을 잡으면 나오기 때문에 세트장을 지을 자재는 충분했다. 세트장은 부서지면 다시 지으면 된다.

그는 저쪽 세계의 상황이 어떤지는 아직 모른다. 전창수의 부하들이 이선화를 노린다는 것만 안다.

"별일 없기를."

그는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했다.

눈앞의 풍경이 확 바뀌었다. 대형 쇼핑센터와 고층 아파트가 싹 사라지고 영화 세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세트장은 지금 무너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젠장.'

그는 즉시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사용했다. 그를 향한 시선 다섯 개의 좌표가 떠올랐다.

'두 개는 사람. 세 개는… 몬스터?'

이쪽 상황은 그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백상어 클랜이 몬스터를 키울 리는 없다.

몬스터가 근처에 있는데 오래 고민할 순 없다. 그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권총을 뽑아 오른쪽을 향해 갈겼다.

다섯 발의 총알이 가까운 거리에서 입을 쩍 벌리던 가시목도리도마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카아악!"

도마뱀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그는 곧바로 왼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좌표는 이미 파악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철갑탄이 왼쪽 가시목도리도마뱀을 때렸다. 왼쪽은 아직 거리가 있었다.

왼쪽 놈은 얼른 입을 다물고 위로 펄쩍 뛰었다. 목도리는 활짝 펼쳐 활강용 날개처럼 사용했다. 목도리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달려 있었다.

그 가시는 길이가 길고 칼날처럼 날이 서 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크게 다친다. 게다가 가시에 독까지 묻어 있어 중독 피해까지 추가된다.

그 가시 때문에 소형 하급 몬스터치고는 공격력이 강한 편이지만, 대신에 방어력은 평범했다.

서정우가 발사한 총알이 위로 뛰어오르는 도마뱀의 배에 연달아 꽂혔다. 도마뱀의 뱃속으로 철갑탄이 파고들었다.

"케에엑!"

날아오르던 도마뱀이 도로 추락했다.

왼쪽 도마뱀을 잡느라 열 발이나 사용했다. 이제 그의 권총에는 다섯 발이 남았다.

그는 뒤돌아서며 뒤쪽 풀숲을 향해 그 다섯 발을 갈겼다.

풀숲 속에 숨어 있던 도마뱀의 앞다리를 철갑탄이 파고들었다.

"케엑?"

서정우는 몬스터의 앞다리부터 봉쇄한 후에 탄창을 교환했다. 도마뱀이 뒷다리로 땅을 밀며 서정우를 향해 기어왔다. 다리 두 개만 쓰는데도 기어오는 속도가 뱀보다 빨랐다.

그래도 날아오는 것보다는 느렸다. 어느새 탄창이 교환됐다.

서정우가 도마뱀을 향해 다시 총을 갈겼다. 열 발쯤 넉넉히 박아넣자 기어오던 도마뱀이 움직임을 멈췄다.

서정우가 남녀 헌터 두 명을 쳐다보았다. 둘 다 그가 아는 사람들이다.

"김성준 씨?"

저쪽 세계의 AKX 픽처스 사장 김성준과 그의 여자친구 이윤미는 이쪽 세계에서는 부부 헌터로 활동한다. 그들은 서울과 그 근처의 소형 게이트 소탕 일을 하는 프리랜서 헌터다.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이윤미가 납치된 사건을 수사할 때 이쪽 세계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김성준과 이윤미는 서정우의 실력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동소총으로 가시목도리도마뱀을 한 마리씩 소탕하던 중이다. 그러다 동시에 두 마리와 마주쳤다.

둘이서 두 마리를 잡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러다 실수로 한 마리라도 접근을 허용하면 가시에 찔리고 독에 중독돼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마뱀들을 견제하며 후퇴하려고 했다. 안전한 곳으로 후퇴해 다시 한 마리씩 잡거나, 다른 헌터팀과 연합하는 것이 몬스터 사냥의 정석이다.

그런데 갑자기 서정우가 나타났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권총 한 자루로 세 마리를 잡았다. 심지에 세 번째 도마뱀은 두 사람의 뒤쪽 옆 방향에 숨어 있던 놈이다. 그들이 앞만 경계하며 후퇴했다면 그놈에게 뒤를 당할 뻔했다.

김성준은 하마터면 몬스터의 매복에 걸려 죽을 뻔했다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아! 고맙습니다. 저번에도 도와주시더니 이번에도…."

"우연히 만난 겁니다. 오늘은 다른 일로 이곳에 왔습니다."

서정우는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보통은 텔레포트라고 생각한다.

김성준이 감탄했다.

"그런데 텔레포트 각성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방금 그 사격 솜씨는 분명…."

서정우가 그의 말을 끊었다.

"텔레포트에 대한 건 비밀입니다."

김성준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비밀을 떠들고 다닐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

옆에서 이윤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린 오늘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런데 저 도마뱀들은 어쩌죠?"

서정우가 말했다.

"두 분이 잡은 겁니다."

이윤미가 바로 배경 이야기를 만들었다.

"맞아요. 우리가 잡았어요. 한 마리씩 차근차근 잡은 거예요."

"여기 상황을 좀 알고 싶군요."

"소형 하급 게이트가 하나 열렸어요. 돌발 게이트까지는 아니지만, 대피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었어요. 남들처럼 차를 타고 오셨으면 게이트 경보 문자를 받으셨을 텐데."

서정우는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알아냈다. 게이트가 열리기 겨우 한 시간 전에 경보가 발령됐다면, 군 병력은 물론이고 무장 경찰과 프리랜서 헌터까지 다 동원해서 전투에 임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선화는 어디 있지?'

백상어 클랜이나 영화사 관계자는 물론이고 이선화도 보이지 않았다.

141. 이선화 II

소형 게이트 경보 문자는 해당 지역 근처로 가야 휴대폰에 수신된다.

전국에서 발생하는 게이트를 전부 다 경고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경보 발령 문자를 받아야 한다. 당장 수도권만 해도 소형 게이트가 발생하는 날이 조용히 넘어가는 날보다 많다.

많은 사람이 몬스터와 관련된 트라우마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서, 게이트 경보 문자를 보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꽤 떨어진 지역에 게이트가 열려도 일을 중단하고 그 정보에 집중하거나, 아예 대피소나 집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경보를 거의 매일 받으면 생산성은 심각하게 떨어지고 사회 불안은 커진다. 정부도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래서 경보 문자는 게이트 발생이 예상되는 지역으로만 날아간다. 다른 지역에 있다가 해당 지역으로 이동해도 경계를 넘어가자마자 문자를 받을 수 있다.

소형 게이트는 경보 대상 지역이 좁고, 중형은 넓다. 대형은 거리에 상관없이 전국에 알린다.

만약 서정우가 휴대폰을 켜놓았다면 그가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몇 분 안에 경고 문자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휴대폰을 꺼두었다. 휴대폰을 켜놓고 움직이면 그의 텔레포트 흔적이 휴대폰 기지국 접속 기록에 남기 때문이다.

서정우가 물었다.

"게이트 경보가 발령되기 전에 여기 있던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압니까? 영화 관계자들이 있었을 텐데요?"

이번에는 이윤미 대신에 김성준이 대답했다.

"아. 야외 오디션. 제가 아는 선배가 그 영화의 제작자입니다."

저쪽 세계 김성준이 사장으로 있는 AKX 픽처스는 영화, 드라마, CF를 제작하는 회사다. 이쪽 김성준도 영화 제작자의 꿈은 가지고 있지만, 자금을 모집하지 못해 꿈으로만 그쳤다.

"오늘 오디션을 보는 배우 중에 이선화 씨도 있더군요. 정말 대단한 배우인데 세상이 이래서 인정받지 못…."

서정우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남쪽으로 2킬로미터쯤 가면 이젠 안 쓰는 낡은 세트장이 있는데, 거기로 간다더군요. 어차피 야외 오디션이니까 세트가 낡아도 괜찮다고…."

서정우는 더 듣지도 않고 그쪽으로 달렸다. 전투 스킬 각성자 서정우가 최선을 다해 뛰면 3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젠장.'

3분은 너무 길다. 하지만 텔레포트를 다시 쓰려면 24시간이 필요하다.

'젠장!'

* * *

이선화와 박현아는 오늘 야외 오디션에서 같은 배역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다.

박현아가 이선화에게 불평했다.

"어차피 투자자는 각성자만 뽑아. 그걸 알면서 괜히 경쟁하니까 이 고생을 하는 거잖아."

"그냥 너나 잘하세요. 내 탓 하지 말고."

박현아가 이선화에게 시비를 거는 건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선화를 왜 써야 하는지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고 설득하려고 야외 오디션을 하는 거겠지. 자존심 상해서 진짜.'

그런데 그들은 지금 투자자에게 연기를 보여줄 상황이 아니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갔다. 두 사람은 지금 엄폐물 뒤에 숨어 있는 상태였다.

박현아가 몸을 더 웅크리며 말했다.

"난 그냥 오디션 하러 온 건데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저놈들 도대체 뭐야!"

그들은 조금 전에 백상어 클랜에게 습격당했다. 이선화와 박현아는 연기를 준비하다가 습격당하는 바람에 두 명만 이 위치에 고립됐다.

영화사 사람들은 왼쪽으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남수정과 정현수가 고립된 곳은 조금 더 멀었다.

박현아가 말했다.

"경찰은 어디 있어?"

이선화가 가방에서 핑크색 권총을 꺼내며 말했다.

"근처에 게이트가 열렸잖아. 무장 경찰은 다 거기 몰려갔지. 이 총소리도 몬스터와 싸우는 소리인 줄 알 거야. 그러니까 화낼 시간에 총이나 꺼내."

박현아는 이선화의 총을 보고 당황했다.

"너 그 총 왜 그래?"

"뭐가?"

"핑크잖아!"

"내가 원래 핑크 좋아해."

"총도 작은데 핑크까지. 그런 장난감으로 뭘 할 수 있…."

이선화가 엄폐물 옆으로 몸을 슬쩍 내밀며 방아쇠를 당겼다. 세 발의 철갑탄 중 하나가 백상어 클랜원에게 명중했다. 적의 비명이 들렸다.

"으악!"

이선화는 얼른 엄폐물 뒤로 숨었다. 적의 총알이 날아와 엄폐물에 박혔다.

박현아는 방금 적이 지른 비명을 들었다.

"맞았어? 맞았지? 운이 좋…."

그녀는 방금 이선화의 총에서 탄피가 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거 혹시 무탄피 권총이야?"

"어."

"그런 거는 유명 헌터나 특수부대에서 쓰는 거 아냐?"

"그거랑 달라."

"내가 듣기론 무탄피 권총은…."

"훨씬 더 좋아. 그 기능을 작은 총에 집어넣으려고 강화 개조 풀세팅 했거든."

그 권총은 서정우가 유명한 무기 개발자인 정기훈에게 부탁해 개조한 것이다.

이선화는 핸드백도 분해했다. 가죽이 쫙 펼쳐졌다. 그녀는 핸드백을 다시 조립한 후에 어깨에 걸었다. 그러고 나서 어깨끈을 당겼다.

핸드백 가죽이 그녀의 왼쪽 가슴을 감싸며 밀착됐다.

박현아가 물었다.

"그, 그건?"

"심장만 보호하는 갑옷. 희귀 몬스터 가죽을 전문가가 가공해서 되게 튼튼해."

그 방어구는 몬스터 가죽 가공 스킬을 가진 차연숙이 서정우가 제공한 가죽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나온 화장품들을 옆으로 젖혔다.

박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화장품들은 뭐야? 혹시 이거 명품이야?"

서정우가 저쪽 세계에서 산 화장품이다. 이선화도 그것까지는 몰랐지만, 출처를 숨겨야 한다는 건 안다.

"그냥 명품이다 생각해."

그녀가 화장품 사이에서 가늘고 길쭉한 원통 케이스를 찾아 주머니에 넣었다.

박현아는 그게 뭔지 알아보았다. 영화를 찍으면서 소품으로 쓰는 모형은 많이 봤다.

실물로 본 건 처음이다.

"그 은색 원통 케이스…. 호, 혹시 레드 포션?"

"너한테 포션 쓸 생각 없으니까 총 맞지 마. 맞으면 약 바르고 버텨."

박현아는 혼란에 빠졌다. 습격당한 상황을 잠깐 잊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너, 너 뭐야? 너 가난한 배우 아니었어?"

"돈 없는 것도 맞고 배우인 것도 맞아."

좀 떨어진 곳에서 남수정이 적에게 사격한 덕분에 이쪽을 향한 공격이 잠깐 멈췄다. 이선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옆으로 튀어나가며 사격했다. 두 발을 쏜 후에는 재빨리 엄폐물 뒤로 돌아왔다. 적이 쏜 총알이 뒤늦게 엄폐물에 퍽퍽 박혔다.

박현아가 외쳤다.

"그, 그럼 그게 다 뭐야! 무탄피 권총에, 변형 특수 갑옷에, 명품 화장품에, 레드 포션까지!"

"선물 받았어."

"누가 너한테 그런 걸 줘? 왜!"

"내가 다치는 게 싫대."

"뭐?"

"그리고 너 말이야."

"으, 으응?"

이선화가 재빨리 일어서서 적을 향해 쏘고 다시 자세를 낮췄다.

"떠들 시간에 총이나 쏴. 너 전투 스킬 각성자잖아. 왜 구경만 해?"

박현아가 더듬거렸다.

"기, 기동력 스킬을 각성했는데, 그 스킬은 명중률하고는 상관없어서… 잘 못 맞춰."

"그럼 회피하면서 적을 유인하는 거라도 해."

"무, 무섭단 말이야. 실전경험도 없는데."

"자랑이니?"

"넌 있어?"

"당연하지. 최근에도 있었어."

그녀는 저주를 퍼트리던 주술사와 거기 딸려온 몬스터들과 싸웠다. 그러다 저주술사의 저주에 걸려서 죽을 뻔했다.

서정우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목걸이를 구해왔다. 희귀도 아니고 전설 등급 성물을 목에 걸었는데 저주 따위가 버틸 리 없다.

그녀는 말이 나온 김에 목걸이를 왼손으로 만졌다. 그런데 그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머?'

마치 목걸이가 말을 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로 들리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조언받는 느낌이었다.

'목걸이가 가르쳐주는 것 같아.'

그 느낌은 확실히 드는 게 아니라 어렴풋이 전해졌다.

'지금 쏘면 될 것 같은데?'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왼쪽으로 상체를 내밀며 방아쇠를 당겼다.

백상어 클랜원이 사격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그녀가 쏜 총에 맞고 나자빠졌다.

"으악!"

그녀가 다시 엄폐물 안으로 들어갔다.

박현아는 당황했다. 그녀도 이선화의 총에 맞은 놈이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

"너 왜 이렇게 총을 잘 쏴!"

"내 눈은 장식이고 내 손은 사람 손이 아니라는 구박을 받으면서 배웠거든."

감독과 제작자, 두 명의 투자자는 다른 쪽에 고립되었다. 그쪽에서는 이선화가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백상어 클랜 쪽은 머리를 내밀면 총에 맞을까 봐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이선화가 총을 쐈을 때 들린 비명 덕분에 그녀가 두 놈을 잡았다는 건 알았다.

제작자가 물었다.

"아니. 감독님. 이선화 씨는 각성자가 아니라면서요?"

"아니죠."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잘 싸웁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꼭 전투 스킬 각성자처럼 싸우네요."

"이선화 혼자 벌써 두 놈이나 잡았습니다."

제작자가 투자자들을 따라온 경호원들을 슬쩍 보며 말했다.

"우리 쪽에서는 한 놈도 못 잡았는데요."

"잡기는커녕 반격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요. 차라리 이선화 씨의 경호원들이 더 잘 싸웁니다."

남수정과 정현수는 다른 위치에 고립됐다. 그쪽에서는 총알이 꽤 매섭게 날아갔다.

감독이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뒤쪽에 있는 오디션용 카메라는 아까부터 이선화가 있는 방향을 찍고 있었다.

이선화가 다시 목걸이를 손으로 만졌다.

그녀는 평소에도 이 목걸이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고 자주 만진다. 그런데 그동안은 목걸이를 만지면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그녀가 저주술사에게 당한 저주는 서정우에게 이 목걸이를 받자마자 소멸했다. 후유증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도 이 목걸이가 귀한 아이템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데 지금 느끼는 건 단순한 안정감이 아니다.

'확실해. 감이 좋아져. 그것도 아주 굉장히.'

목걸이를 잡으면 적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상체를 살짝 세운 후에 사격했다. 철갑탄 세 발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사격을 서정우에게 배웠다. 사격 스킬 각성자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거리에서 세 발 중 한 발쯤 맞출 실력은 된다.

영화사 사람들 쪽으로 수류탄을 던지려고 일어서던 놈이 어깨를 맞고 황급히 몸을 숙였다. 손에 쥔 수류탄은 급한 대로 대충 앞으로 던졌다.

그녀는 딱 세 발만 쏘고 바로 몸을 숙였다. 조금 아쉬웠다.

'제대로 명중했으면 저놈들 한복판에서 터트리는 건데.'

중간에 떨어진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파편이 엄폐물에 꽂혔다.

그녀가 남은 총탄을 계산했다.

'내가 몇 발 쐈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도 탄창을 거의 다 소모했다는 건 안다.

그녀가 다음 상황을 짐작하려고 다시 목걸이를 잡았다.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정보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달됐다.

저절로 놀란 소리가 나왔다.

"아!"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박현아는 그녀가 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왜? 우리 죽어? 아니지? 아니지?"

그게 아니다. 그녀는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문제는 그녀가 인식한 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지다. 조금 전에 수류탄을 던지려던 놈을 쏘았을 때도 겨우 어깨만 맞췄다.

'하자!'

이선화가 아직 탄환이 남은 탄창을 제거하고 열두 발이 들어 있는 새 탄창을 끼웠다. 저주 사태 이후로는 예비탄창을 한 개 가지고 다녔다.

이선화가 심장 보호대를 풀고 겉옷을 벗었다. 속에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민소매 티셔츠 위에 다시 심장 보호대를 장착했다.

박현아가 당황해서 물었다.

"너 뭐하는 거야? 옷은 왜 벗어?"

"저놈들이 이 옷을 많이 봤으니까."

"응?"

"많이 보여준 옷을 쓰는 거라고 배웠어."

"도대체 뭘 배웠다고…."

"네 총 안 쏠 거면 내놔."

"나, 나도 총이 있어야지."

"쏠 거라도 내놔. 얼른!"

오늘 이선화가 보여준 모습이 너무 강렬했다. 박현아는 기가 죽어 권총을 넘겨주었다.

이선화는 그녀가 벗은 겉옷을 박현아에게 주었다.

"자."

"입으라고? 안 추운…."

"옆에 그 막대기에 옷을 걸고, 반대편으로 내밀어."

박현아는 그때서야 이선화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야. 그건 너무 위험…."

"빨리해! 시간 없어! 지금 당장!"

박현아는 급히 막대기에 겉옷을 걸고 엄폐물 오른쪽 옆으로 내밀었다.

곧바로 적의 총알이 쏟아졌다. 옆으로 내민 겉옷에 구멍이 퍽퍽 뚫렸다.

이선화는 목걸이에 손등을 대고 잠깐 기다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핑크색 권총을 오른손으로 쥐고 적을 조준했다. 박현아에게 받은 권총은 왼손에 쥔 채로 오른손 아래를 손등으로 지지했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연발사격이었다. 탄창에 든 탄약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철갑탄을 적을 향해 퍼부었다.

한 놈이 몸을 일으키다가 총에 맞아 나자빠졌다. 나머지 놈들은 급히 엄폐물 뒤로 숨었다.

핑크색 권총의 탄환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그녀는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를 바꾸었다. 이제는 오른손으로 권총의 아래쪽을 지지하고 왼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스무 발의 표준형 권총 철갑탄이 적을 향해 쏟아졌다. 왼손으로 쏘는 바람에 조준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적은 엄폐물 뒤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두 자루의 권총에서 모두 서른두 발의 철갑탄이 발사됐다. 그동안 고개를 드는 놈은 없었다.

권총 슬라이드가 뒤로 밀리며 고정됐다. 박현아에게 받은 권총의 총알이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적들은 이선화에게 총알이 떨어진 걸 깨달았다. 감독과 제작자,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선화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피하거나 숨지도 않았다.

감독이 당황해서 외쳤다.

"빠, 빨리 피해!"

제작자도 당황했다.

"왜 서 있는 거야! 숙여!"

백상어 클랜원들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이선화가 갑자기 오른쪽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쭉 뻗었다.

그쪽 하늘에서 서정우가 나타났다.

142. 벼락

서정우가 평행차원을 통해 도착한 곳은 미사리 영화 세트장이다.

그곳에서 이선화와 영화사 관계자들이 이동한 곳까지 두 다리로 뛰어서 가려면 전투 스킬 각성자의 육체로도 3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서정우는 3분이 너무 길다고 판단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한쪽에 세워진 자전거를 발견했다. 영화사 사람이 가져왔다가 급하게 장소를 옮기면서 실수로 놓고 간 자전거였다.

그는 그걸 타고 달렸다. 자전거 체인이 터지기 직전까지 밟아댄 덕분에 시간을 크게 단축했다.

이미 이선화와 백상어 클랜 사이의 총격전은 시작됐다.

그는 총소리의 방향, 간격, 저 멀리 슬쩍 보이는 촬영팀의 모습 등을 분석해 백상어 클랜의 위치를 추측했다. 최적의 공격 위치는 공중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가 그 위치로 이동할 때까지 적의 시선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적이 먼저 눈치채고 서정우가 오는 방향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으면 그 계획은 쓸 수 없다.

갑자기 권총을 연발로 쏘는 소리가 났다. 처음 열두 발의 개조 권총 소리를 듣고 이선화가 쏜다는 건 눈치챘다.

그녀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서른두 발이나 연발 사격한 덕분에 적들은 서정우의 돌진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선화와 백상어 클랜이 총격전을 벌이는 곳은 버려진 세트장이다. 세트 시설 상당수는 무너져 있었다. 그 무너진 시설 사이에, 나무 기둥 하나가 미끄럼틀처럼 다른 잔해 위에 얹혀 있었다.

서정우는 고속으로 달리는 자전거의 앞바퀴를 들고 자전거를 슬쩍 띄워 그 나무 기둥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체인을 터트릴 것처럼 페달을 밟아 속도를 더 높였다.

자전거가 기울어진 기둥의 끝부분을 벗어나 높이 솟아올랐다. 서정우가 공중에서 자전거를 박차고 다시 더 높이 뛰어올랐다.

서정우가 하늘로 날았다.

공중에서는 엄폐물 뒤의 백상어 클랜원들이 아주 잘 보였다.

서정우가 가진 권총은 한 자루가 아니다. 그는 하늘에서 양손으로 쌍권총을 갈겼다. 하늘에서 땅을 향해 철갑탄이 쏟아졌다.

연발로 날아가는 총탄이 적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꿰뚫었다.

"으아악!"

숨어 있던 감독이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심판의 벼락…."

제작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공중 폭격."

서정우가 아래쪽을 향해 연발로 사격하며 땅 위에 착지했다. 순식간에 적의 상당수를 제거했지만, 권총 두 자루의 탄창도 비었다.

적은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엄폐물 뒤라서 서로의 몸이 장애물 없이 완전히 노출됐다.

그는 권총의 탄창 제거 버튼을 눌렀다. 탄창 두 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두 자루의 권총으로 가슴에 걸어둔 탄입대의 아래쪽을 탁 쳤다. 새 탄창 두 개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서정우가 공중에 뜬 탄창을 향해 권총 손잡이를 휘둘렀다. 탄창이 권총 손잡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충격으로 권총의 격발장치도 제자리를 찾아가며 총알을 약실로 끌어올렸다.

살아남은 적들이 서정우를 향해 총을 들었다.

서정우가 조금 더 빨랐다. 그는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사용했다. 앞은 물론이고 뒤쪽의 적이 어디 있는지까지 단번에 인식됐다. 좌표를 놓친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권총 두 자루를 좌우로 쫙 펴며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동시에 방아쇠를 꽉 당겼다.

연발로 발사된 철갑탄이 수평으로 날아갔다. 그를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퍼지며 날아간 철갑탄들이 살아남은 적들에게 박혔다.

총을 쏘려던 적들이 뒤로 퍽퍽 날아갔다.

"으아악!"

그는 한 바퀴로 회전을 끝내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세 바퀴를 돌았다. 그를 중심으로 총탄의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서정우가 갑자기 회전을 멈추며 한쪽 다리를 살짝 굽혀 자세를 낮췄다. 두 팔은 여전히 좌우로 쭉 뻗은 상태로 손가락만 방아쇠에서 떼었다.

아직 총알은 몇 발 남아 있었지만, 서 있는 놈은 없었다.

서정우의 감지 스킬에 살기는 잡히지 않았다.

그가 자세를 바로 하며 총을 아래로 내렸다. 천천히 이선화 쪽으로 돌아섰다.

이선화는 여전히 똑바로 서 있었다. 그녀가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오빠. 왔어? 조금 늦었네?"

서정우가 그녀 쪽으로 걸어가며 구박했다.

"야. 넌 위험하게 왜 일어서 있어?"

"이겼잖아. 그럼 됐지."

"너 옷은 왜 그러냐? 영화 찍을 때 그렇게 입으라든? 어떤 놈이야? 감독이야? 제작자야? 내 총에 아직 총알 남아 있다."

"저놈들을 속이려고 그런 거야. 많이 보여준 옷으로 속여야 잘 통한다며."

그 방법은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꽤 잘 통한다. 옷이 뭔지 모르는 몬스터가 많기 때문이다.

"그거야 교양 삼아 가르친 거잖아. 실제로 그러란 게 아니라."

박현아는 아직도 엄폐물 뒤에 숨어 있었다. 그녀가 이선화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끄, 끝난 거야?"

"어. 다 잡았어."

"지금 이야기하는 저분이 잡은 거야? 너 저분하고 잘 알아? 위험한 분 아니지?"

"아니야. 나 총 쏘는 법 가르쳐준 오빠야."

"그럼 우리 편이구나."

박현아가 엄폐물 위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서정우를 보며 인사했다.

"고맙습…."

그녀가 갑자기 동그래진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앗!"

그녀는 서정우를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그, 그, 그분이시죠? 그때 그분!"

서정우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영화나 드라마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녀와 만난 적도 있다.

"아. 그…. 기동력 향상 스킬을 각성한 배우."

"네! 저예요!"

이선화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오빠가 얘를 어떻게 알아?"

"예전에 몬스터 점령지에서 구출한 사람이야. 다른 의뢰로 들어갔다가 만났는데, 너처럼 배우라서 기억에 남았지."

박현아는 서정우가 너무 반가웠다. 그녀는 몇 년 전에 사고로 몬스터 점령지에 고립됐다. 단독으로 탈출할 능력은 없고 몬스터는 점점 많아져서 이제 곧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서정우가 나타났다.

그때 그녀는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서정우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줄 알았다.

서정우는 그녀를 몬스터 점령지에서 구출했다.

그런데 구출된 후에 그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름이나 연락처조차 몰랐다.

그런 그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박현아는 너무 반가워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저 그때…."

그녀가 멈칫했다. 이선화는 서정우에게 총 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선화를 보았다가 다시 서정우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 아. 어? 아. 어? 어?"

이선화가 씩 웃으며 콧대를 살짝 세웠다.

"흐흥."

"혹시 그 핑크색 권총도 주고 심장 보호대도 주고 화장품도 주고 사격도 가르쳐주고…. 네가 다치는 게 싫다고 했다던…."

"흐흥. 맞아."

박현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또 이선화에게 졌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영화사 사람들이 총을 들고 달려가 적의 무기를 치웠다.

남수정과 정현수도 달려왔다.

남수정이 이선화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언니! 죄송해요. 저희가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오디션 때문에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저놈들이 쳐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잖아."

"그런데 하도 잘 싸우셔서 우리는 필요 없는 줄 알았어요. 그냥 구경만 해도 됐…."

정현수가 남수정의 팔을 툭 쳤다.

"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우리 임무가 경호인데."

"아니지? 아닐 것 같았어."

서정우가 말했다.

"그럼 경호 알바비는 반으로 까자."

동생 치료비가 필요한 남수정이 항의했다.

"우와. 아저씨 너무하시다. 우리도 진짜 열심히 싸웠는데! 목숨 걸고 싸웠는데! 선화 언니 옆에 딱 붙어 있다가, 오디션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던 건데! 저놈들이 하필 그 순간을 노리고 쳐들어온 건데!"

"농담이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농담이실 줄 알았어요."

"모르는 것 같던데?"

이선화가 서정우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오빠. 나 조금 전에 신기한 경험 했어."

"각성했냐?"

"자꾸 놀릴래?"

"그럼?"

"각성은 아닌데, 진짜 신기한 경험이야. 이 목걸이 말이야."

"그게 왜?"

"이걸 손으로 만지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저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지 느낌이 딱 오더라니까? 일어나서 쏘면 되겠다 싶을 때 쏘니까 정말 총알이 맞아. 오빠 오기 전에도 놈들에게 제압사격을 하면 오빠가 하늘에서 공격하기 편하겠다는 느낌이 딱 왔어."

"네가 그렇게 열심히 쏴준 덕분에 내가 오기 전에 저놈들이 고개도 못 들긴 했지. 어떻게 때맞춰 쐈나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이선화가 신나서 말했다.

"이거 혹시 미래예측 아이템 아닐까?"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소유자를 보호하는 힘이 있어서 그래."

"응?"

"그 목걸이는, 네가 위험해지니까 안전해질 방법을 찾아내서 너에게 알려준 거야. 이를테면 너에게 총을 쏘는 적을 제거하기 좋은 순간을 알려주는 식으로."

이쪽 세계의 이선화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몸에 해로운 초과 칼로리가 저쪽 이선화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진 것 중에 그렇게 칼로리를 떠넘길 만큼 격이 높은 건 성물 목걸이밖에 없다.

'총알까지 저쪽으로 보낼 수는 없어서, 안 맞을 방법을 찾아낸 거겠지.'

총알이 넘어가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다.

이선화는 서정우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목걸이의 신비한 힘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손으로 잡아도 아무렇지도 않다가, 오늘만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거구나?"

"어. 여긴 너무 위험하니까 널 보호하려고 목걸이가 힘을 쓴 거지."

서정우는 그렇게 설명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고승의 사리. 아주 자애롭게 선화를 지켜주는구나. 대신에 적에게는 불벼락을 내리고.'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 효과가 있는 거 보면 이거 진짜 귀한 거지? 혹시 희귀 등급 아이템인 거 아냐?"

희귀가 아니라 전설 등급이다. 게다가 성물은 아이템과는 격이 다르다.

"희귀 아이템은 아닌데, 좋은 거니까 항상 걸고 다녀."

"응!"

감독과 제작자, 투자자들이 다가왔다.

감독이 활짝 웃으며 이선화에게 인사했다.

"이선화 씨. 방금 정말 대단했어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선화도 감독에게 조금 미안했다. 서정우는 습격한 놈들의 정체를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감독은 그녀와 같이 있다가 말려든 것뿐이다.

물론 그걸 여기서 사실대로 말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건데요. 뭐."

"혼자서 도대체 몇 명이나 잡은 거야? 전투 스킬을 각성한 거지요? 그렇지요?"

"아니요."

"어? 하지만 그 실력은 분명히…."

"아닌데요."

목걸이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전투 스킬을 각성한 건 아니다.

지금 각성했다고 하면 상대가 속기는 하겠지만, 그런 거짓말은 금방 들통난다. 전투 스킬을 각성했을 때 얻는 운동능력 향상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각성했다고 거짓말하고 배역을 따내 봤자 촬영을 시작하면 금방 들킨다.

이선화가 서정우의 팔에 손을 살짝 끼워 넣으며 말했다.

"그냥 총 쏘는 법을 잘 배워서 그런 거예요."

"아. 그분에게 배워서…."

감독이 서정우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이선화 씨와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야 뭐 선화를 구하러 온 거라서."

"그런데 방금 공중에서 보여준 그거…. 제가 영화에 써도 되겠습니까? 아니지. 그냥 저희 영화에 출연하시죠?"

"연기는 해본 적 없습니다. 자전거 타고 공중으로 점프해서 총 쏘는 걸 찍고 싶으면 배우 시켜서 찍으세요."

"그러지 마시고…."

"안 합…."

이선화가 서정우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서정우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했다.

"선화가 이 영화에 나온다면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서정우는 이쪽에서는 저쪽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얼굴이 팔리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텔레포트나 각성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선화가 나온다면 저도 대사 없는 단역 정도는 뭐…."

감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는 원래 이선화 씨를 강력하게 밀었습니다. 공중 삼단 회전을 못 하면 어떻습니까? 연기를 그렇게 잘하고, 이제 보니까 전투 스킬 각성자보다 더 잘 싸우는데요."

전투 스킬을 각성한 배우 박현아는 총 한 발 제대로 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겁먹고 웅크리고 있을 때 이선화는 적과 싸워 세 명 반을 무찔렀다.

감독이 제작자를 돌아보았다.

"다만, 그동안은 반대하는 분이 있어서…."

제작자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제가 오늘 여기로 투자자분들을 모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이선화 씨를 어떻게든 밀어주려고 그런 겁니다. 이렇게 잘 싸우시면 게이트 근처에서 찍어도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제작자가 투자자들을 돌아보았다.

"안 그렇습니까?"

투자자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주연은 제작비 때문에 어렵지만, 다른 배역은 아주 잘하실 것 같습니다."

"제작비가 예상보다 좀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것도 투자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서정우가 제작자에게 물었다.

"게이트 근처에서 찍다니요?"

"아. 위험한 곳은 아니고, 소형 하급 게이트 근처에서 몬스터를 잡는 장면을 몇 번 찍은 후에 그걸 잘 편집해서 쓸 겁니다. 우리 감독님이 그런 쪽으로 전문가입니다. 하하하."

"그거 좀 위험할 텐데…."

"선생님이 이선화 씨 촬영이 있을 때 같이 가 주시면…."

서정우가 작정하고 나서면 소형 하급 게이트에서 이선화 한 명 보호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야겠네요."

143. 합류

배우 박현아는 서정우가 영화에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눈을 반짝였다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는 이선화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서정우가 남수정과 정현수에게 물었다.

"너네 그때도 알바 할 수 있지?"

남수정이 주먹을 쥐었다.

"아싸! 아저씨 오면 그땐 진짜 날로 먹겠다."

"그럼 현수만 부르는 거로."

"걱정하지 마시라. 제가 또 몬스터 사냥 전문이잖아요. 독 감지 스킬도 있고. 저 더블이에요. 확실히 경호할게요."

감독이 남수정의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더블 스킬 각성자! 여기 선생님도 하시는데 남수정 씨도 이 기회에 데뷔합시다. 아까 보니까 진짜 잘 싸우던데."

"아. 그럼 저도 저 아저씨 따라서 단역 정도만…."

"하하하하.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요."

"저 연기는 배운 적 없는데요?"

"테스트해봐서 연기력이 안 되면 대사 없이 총만 쏘는 헌터팀 팀원 역할을 맡길까 합니다."

감독이 남수정에게 그 역할이라도 시키려는 이유는, 영화의 맛을 살짝 보여줘 배우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정현수가 말했다.

"저도 총 잘 쏘는데요."

"어…. 말했다시피 악당이나 몬스터는 이미 자리가…."

이선화가 방긋 웃었다.

"감독님 그럼 저 뽑힌 거예요?"

"물론이지요! 이선화 씨를 안 뽑으면 누굴 뽑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박현아의 어깨가 처졌다.

'이럴 줄 알았어. 주인공을 짝사랑한 여자 역할은 결국 이선화가 가졌어. 현실 짝사랑녀는 이선화가 아니라 나 같은데.'

감독이 말했다.

"이선화 씨가 헌터팀장 역할을 맡아주십시오. 게이트 인접 지역에 가면 이선화 씨가 각성자보다 더 잘 싸울 것 같으니까요."

박현아는 깜짝 놀라서 감독을 보았다. 그녀가 원래 맡고 싶었던 배역인 짝사랑녀는 팀장이 아니라 팀원이다.

이선화가 물었다.

"네? 헌터팀장은 비중이…."

"남녀 주인공과 악당 보스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이지요. 이선화 씨를 위해서 그 자리가 비어 있었나 봅니다. 하하하."

박현아가 얼른 물었다.

"감독님. 그럼 저는…."

"당연히 남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여자 역할이지요."

"꺅! 고맙습니다!"

이선화가 더 중요한 배역을 맡았지만, 박현아는 이번에는 그걸 질투하지 않았다. 오늘 이선화가 보여준 전투력이 너무 압도적이었고, 연기와 미모 모두 밀린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방금 이선화와 서정우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영화 배역 문제로 질투하면 양심에 걸린다.

'이게 어디야?'

박현아가 처음 노린 배역이 바로 그 짝사랑녀였다.

그녀는 배역에 대한 건 만족했다.

투자자들은 이선화의 배역이 헌터팀장이 되면 제작비가 예상보다 더 들어간다는 생각에 잠깐 머뭇거렸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이선화가 오늘 보여준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붙잡은 놈들은 뒤늦게 연락받고 출동한 무장 경찰에게 넘겼다.

무장 경찰 간부는 상황을 파악하고 난감해했다.

"영화사와 영화배우들이 먼저 저런 클랜을 습격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여러분 말만 믿기도 어렵습니다. 저쪽이 너무 일방적으로 박살났잖습니까?"

그 문제는 감독이 나서서 해결했다.

"우리 배우들이 영화 촬영을 위해 연기하기 직전에 저놈들이 쳐들어와서, 그때부터 일어난 모든 일이 이 카메라에 찍혀 있습니다."

"그래요? 볼 수 있습니까?"

이쪽에서 영화를 제작할 때도 디지털카메라가 곧잘 쓰인다. 아직 기술이 부족해 필름 카메라의 화질과 느낌을 쫓아가지는 못하지만, 대신에 제작비를 아낄 수 있다.

실제 영화 촬영에서는 필름을 쓰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오디션 같은 경우는 대부분 디지털카메라로 찍는다.

감독이 카메라의 영상을 노트북에 연결해 보여주었다.

서정우가 하늘을 나는 장면이나 적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촬영 각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라 찍히지 않았다.

대신에 처음 백상어 클랜에게 습격당한 상황과 이선화가 싸우는 모습, 그녀가 일어서서 연발로 사격하다가 오른손을 하늘로 뻗는 장면은 확실히 찍혔다.

경찰들은 영상을 본 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공격을 받고 나서 반격하신 거군요. 그런데…."

경찰 간부가 이선화를 돌아보았다.

"전투 스킬 각성자였습니까? 제가 알기로 이선화 씨는…."

"어머. 저 아세요?"

간부가 부하들을 힐끗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아니라 우리 딸하고 아들이 팬입니다."

이선화가 서정우를 돌아보며 자랑했다.

"봤지? 잘 찾아보면 내 팬이 곳곳에 있다니까."

"알았으니까 대답이나 해드려."

이선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스킬 아니에요. 그냥 열심히 싸운 거예요."

성물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건 밝힐 수 없다.

경찰 간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십니다. 각성한 것도 아닌데 이런 실력에, 이런 배짱까지…."

"제가 좀 대단하긴 하죠."

이쪽 세계는 저쪽 세계와 경찰의 업무 처리 방식이 많이 다르다.

경찰은 영상 파일을 복사하고 백상어 클랜 잔당들도 끌고 갔지만, 영화사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려가진 않았다.

이쪽에서는 이런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습격당한 쪽의 정당방위도 쉽게 인정받는다. 영상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당방위 상황이다.

그리고 아직 소형 게이트가 근처에 열려 있다.

경찰 간부가 말했다.

"지금은 저희도 게이트 봉쇄 작전 때문에 인력이 없으니까, 자세한 조사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때 경찰서에 꼭 나오십시오."

개인이 자가용을 소유하면 잦은 파손 문제로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지만, 영화사쯤 되면 촬영 장비를 옮길 버스나 트럭이 있어야 한다.

현장을 떠나 이동하는 버스에서 감독이 그 영상을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이 장면을 반드시 넣을 겁니다. 새로 찍는 게 아니라 이 영상 그대로."

이쪽 세계의 영화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실탄을 쏘면서 영화를 찍는다. 특수효과를 입히는 대신에 게이트 근처에서 진짜 몬스터를 쏘고 그 영상을 찍어 편집하는 방식도 곧잘 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선화가 오늘 적과 싸우는 모습을 찍은 이 영상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좀 추가해야 한다.

"엄폐물 뒤에서 헌터팀장인 이선화 씨가 팀원인 박현아 씨와 대화하는 모습만 새로 찍고 나머지 장면을 잘 편집해서 합치면 완벽할 겁니다. 제가 그런 작업의 전문가입니다."

영화사까지 따라갈 이유는 없다. 서정우와 이선화, 남수정, 정현수는 노선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남수정과 정현수는 주변 순찰을 나섰다.

이선화가 정류장에서 웃었다.

"흐흥. 오늘 진짜 좋다."

서정우가 물었다.

"그렇게 좋냐?"

"영화 배역도 따내고, 각성한 건 아니지만 각성자 기분도 느껴보고, 오빠도 구하러 와주고."

그녀가 목걸이를 만졌다.

"그런데 지금은 아까 같은 그런 느낌은 안 드네? 아까는 목걸이를 만지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느낌이 왔는데."

"지금은 위험하지 않으니까."

"진짜 총알 날아다니는 상황에서만 알려주는 건가?"

"아마도."

"조금 서운하다. 다시 말 걸어주면 좋겠는데."

노선버스가 도착했다. 외부에 장갑판을 붙이고 지붕에 총을 쏠 공간도 마련한 무장 버스였다. 이런 무장 노선버스는 정부에서 직접 운영한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한참 이동한 후에 다시 내렸다.

그곳은 그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다.

이선화가 물었다.

"여기는 왜?"

서정우는 남수정과 정현수에게 주변을 둘러보라고 한 후에 그녀에게 설명했다.

"소라하고 합류해야지. 그리고 미사리가 아니라 이쯤에서 연락해야 아무도 이 통화 기록에 신경 안 써."

서정우가 이선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용하는 전화기도 원래 그가 쓰던 것이 아니라 익명으로 돈을 주고 산 선불폰이다.

전화가 바로 연결됐다.

"이쪽은 잘 해결됐다."

- 이쪽은 문제가 생겼어요.

서정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다행히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장소는 옮겼지?"

서정우가 평행차원 텔레포트로 그곳을 빠져나가면, 서소라도 현장만 확인하고 빠지기로 했다.

- 네.

"어떤 문제지?"

- 살아있어요.

서정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전창수가?'

그는 전창수의 상태를 떠올렸다.

'총에 맞고, 바로 옆에서 화염 수류탄까지 터졌는데 살아있다고?'

보통은 즉사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쪽 세계의 유력 차기 대선후보 강현민은 반대파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지만 탱킹 스킬 덕분에 살아남았다.

강한 생존력을 가지거나, 중상을 입고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통틀어 탱킹 스킬이라고 부른다.

'전창수. 더블이라고 알려졌지만 아니야. 스킬 하나를 숨겼어. 트리플이구나.'

탱킹 스킬을 숨긴 이유는 뻔했다. 이번처럼 목숨을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염 수류탄이 옆에서 터져도 살아남았네.'

서정우가 말했다.

"약속장소에서 만나자. 바로 이동해."

- 네.

서정우는 통화를 마친 후에 선불폰을 일부러 부쉈다. 실수로라도 다시 켜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이선화가 물었다.

"작전에 문제가 생겼어?"

"전창수가 살아있다. 확실히 처리한 줄 알았는데, 탱킹 스킬 각성자일 줄이야."

더블 스킬 각성자는 종종 있지만 트리플 스킬 각성자는 드물다. 그래서 보통은 이번 같은 경우까지 고려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집이 아니라 미리 약속된 장소에서 서소라와 합류했다. 그곳은 백상어 클랜 본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서소라가 이선화를 확 껴안았다.

"언니. 괜찮아요?"

이선화가 자랑했다.

"흐흐. 나 배역 땄다? 그것도 영화에서 네 번째로 중요한 역할로."

서소라는 이선화가 어떤 전투를 겪었는지 아직 모르지만, 서정우가 그녀를 구하러 갔다는 건 안다. 게다가 이선화가 입고 있는 겉옷은 오늘 나갈 때 입은 옷이 아니다. 그녀에게서 짙은 화약 냄새도 났다.

상황을 대충 짐작한 서소라가 이선화를 다시 꼭 안아주었다.

"잘했어요."

서정우가 서소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오빠가 사라지고 나서, 저도 당연히 전창수가 죽은 줄 알고 빠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놈이 꿈틀거리는 거예요. 뭘 하나 봤더니 레드 포션을 꺼내서 병째 깨물더라고요."

"불길은?"

"타고 있었죠."

"건물 내부 전투에서 그놈이 내 총에 맞고 레드 포션을 썼는데, 그때까지 그 효과가 남아 있었을 거야. 그래서 움직일 수 있었던 거지."

"레드 포션의 효과는 그렇게 길지 않잖아요."

"레드 포션의 약발을 아주 잘 받는 거지. 한 번 쓰면 잔류효과가 남들보다 길게 남아."

"거기다 레드 포션을 두 번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레드 포션은 연달아 쓰는 약이 아니다. 쓸 수는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효과가 형편없다. 제대로 된 효과를 보려면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써야 한다.

그런데 전창수는 연속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효과도 제대로 나타났다.

"탱킹 스킬이지. 약효도 오래 가고, 두 번 연속으로 써도 약발이 먹혔잖아. 아마 자체 회복력도 높고, 화염 수류탄의 폭발을 버틸 정도로 몸도 단단하겠지."

화염 수류탄은 파편이 아니라 화염 폭풍을 만들어내는 수류탄이다. 소이탄과 달리 진짜로 화염 폭풍을 일으킨다. 그건 주로 식물형 몬스터를 잡을 때 쓰는 무기다.

"전창수는 더블이 아니라 트리플이야. 사격, 감지, 탱킹 스킬까지. 그런 놈이 범죄자 짓이나 하고 있어."

이선화가 아쉬워했다.

"저격하려고 했는데, 백상어 클랜 놈이 창밖으로 소화탄을 던지는 바람에 시야가 차단됐어요. 좋은 기회를 놓쳤어요."

소화탄을 던져서 터트리면 소화약품이 폭발적으로 퍼져 불을 꺼뜨린다. 소화탄은 소화기보다 소화능력은 떨어지지만, 크기가 작아서 휴대할 수 있고 접근하지 않고도 불을 끌 수 있다.

"안 쏘길 잘했다. 머리 한가운데가 아니면 한 발로는 안 죽을 거야. 그리고 너 혼자 쏘면 위치가 드러나서 위험해."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백상어 클랜은 반 토막 났어. 그동안 쌓은 원한이 워낙 많으니까, 전창수만 제거하면 남은 놈들은 살아남을 걱정부터 해야지. 그런데 전창수가 살아있으면 그게 어려워. 그놈이 어중이떠중이 다 받아들이면 예전 규모로 돌아가는 건 금방이겠지."

"그렇게 되면 위험해요."

"물론이지. 그놈하고 난 이제 원수거든. 그리고 그놈은 나를 빨리 제거하고 싶을 거야."

"역시 제거해야겠네요. 언제 하죠?"

"오늘 당장. 오늘만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 있으니까."

144. 권병철

서정우가 오늘 백상어 클랜 마스터 전창수를 다시 공격하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이선화가 얼른 손을 들었다.

"이번엔 나도 도와줄게!"

"넌 집에 가라. 수정이하고 현수 붙여줄 테니까."

이선화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 오늘 싸우는 거 봤잖아. 나 이제 되게 잘 싸운단 말이야."

"이제 걸음마나 좀 할 줄 아는 게 어디서 날려고 들어?"

"나 등에 날개 달렸잖아. 천사 이선화 몰라? 내 별명인데."

"그 천사는 그게 아니라…."

"왜? 뭐?"

"응?"

"더 말해. 하고 싶은 말 있잖아."

"아니다."

"쳇."

이선화가 서정우에게 달라붙어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리고 오빠는 오늘 이미 텔레포트를 써서 지금 다시 쳐들어가면 탈출이 쉽진 않잖아. 내가 도와줄게."

"야. 네가 오늘 잘 싸운 건 네 스킬이 아니라…."

전설 등급 성물 목걸이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힘은 위기가 닥치면 발동된다.

이선화의 기본 능력에 성물 목걸이의 힘이 더해지면, 꽤 괜찮은 전력이 된다.

"알았다. 넌 그럼 소라 옆에 붙어 있어."

"오빠랑 같이 쳐들어가는 게 아니고?"

"까분다. 저격수 옆에는 원래 지원팀이 붙는 거야. 이번엔 전창수만 잡으면 되고, 그건 나 혼자 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

"쳇."

서정우는 조금 떨어진 곳을 경계 중이던 남수정과 정현수를 불렀다.

"너희는 오늘은 집에 가라."

남수정이 물었다.

"선화 언니는요?"

"선화는 나하고 할 일이 남아 있어."

남수정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알바비 받으려면 선화 언니 경호 계속해야죠. 나중에 영화 찍을 때도 경호해야 하고요."

"오늘 알바비는 다 줄게."

남수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렇게 우리를 보내려고 하실까? 또 어디 공격하러 가는 거죠? 주변 경계라도 할 테니까 추가 수당 줘요."

"고딩들 손 빌릴 일은 아니다."

"저 궁수 스킬에 독 감지 스킬까지 있어요. 그냥 고딩 아니거든요?"

정현수가 옆에서 말했다.

"수정이가 가면 저도 가요."

남수정이 물었다.

"네가 왜 날 따라와?"

"그, 그러게? 따라가면 안 될까?"

"맘대로 해. 너 총 좀 쏘긴 하더라."

"흐흐흐. 그렇지?"

"변태처럼 웃지 마."

"크하하하!"

"악당처럼 웃지도 말고."

"어. 미안."

* * *

백상어 클랜 마스터 전창수는 동쪽 건물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었다. 그는 바로 앞에 꽉 닫힌 철문을 노려보았다.

"저거 튼튼하지?"

그의 부하가 대답했다.

"예. 중형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은 한 뚫리지 않…."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 그 새끼를 막을 수 있냐고!"

"은행 금고 수준의 철문이라 로켓탄에 맞아도 안 뚫립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

"이 새끼가. 내가 걱정하는 거 같아?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거야!"

"예? 예!"

"씨발. 어디서 그런 괴물 새끼가 튀어나와서."

전창수가 원통형 은색 케이스를 잡았다. 그 안에는 레드 포션이 들어 있다.

부하가 말렸다.

"아직 재사용 시간이…""알아! 이 새끼야!"

탱킹 스킬을 가진 전창수가 일반 회복 물약을 마시면 그 약효가 남들보다 오래 간다. 상처의 회복 속도도 빠르다. 약물 허용 한계도 남들보다 훨씬 높다.

그 효과는 레드 포션에도 적용되어서, 두 병까지는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창수는 처음 총에 맞았을 때 레드 포션을 썼고, 그 효과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화염 수류탄에 당했다. 불길에 휩싸인 후에는 두 번째 레드 포션을 사용했다.

탱킹 스킬을 가지면 원래 중상을 입어도 잘 안 죽는다.

그 모든 효과가 더해져서 그는 화염 수류탄을 근거리에서 맞고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탱킹 스킬과 레드 포션에도 한계는 있다. 총상은 나았지만, 불에 탄 상처는 완치되지 않았다. 그걸 다 치료하려면 레드 포션을 한 번 더 사용해야 한다.

전창수의 탱킹 스킬은 레벨이 낮아서 세 번째 레드 포션까지 연달아 쓰는 건 무리였다. 그걸 쓰고 싶으면 오늘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

전창수가 진통제 대신에 술을 마시며 물었다.

"이선화를 잡으러 보낸 놈들은?"

"연락이 끊겼습니다. 다 죽거나 체포된 것 같습…."

"어떻게!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도대체 왜!"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경찰 쪽 우리 라인이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해서…."

"그 새끼들. 그동안 처먹은 돈이 얼마인데 일을 그따위로 해? 이미 알아냈는데 딴생각하는 거 아냐?"

간부는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전창수가 물었다.

"경계는?"

"남은 애들은 완전무장시켰습니다. 출입구도 모두 봉쇄하고, 창문도 강철 덧창을 닫았습니다. 여긴 이제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다른 클랜들은? 지원군 규모는?"

"그게…."

"왜? 값을 올려? 그럼 돈 더 준다고 해. 나중에 도로 뜯어내면 되니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서, 다들 간을 보느라…."

전창수가 술잔을 집어 던졌다. 유리로 된 술잔이 철문에 충돌해 박살났다.

"개새끼들.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 땐 언제고!"

"차라리 무슨 일인지 알려주면 도움이…."

전창수가 재떨이를 던졌다. 진짜 담뱃잎으로 만든 꽁초가 허공을 날았다.

"겨우 한 새끼한테 당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우습게 보이면 뒤통수 맞는 게 이 바닥이야! 나가! 이 새끼야! 가서 돈이나 더 준다고 해! 순순히 애들 보내지 않으면 나중에 두고 보자고 하고!"

그는 다른 간부에게도 지시했다.

"넌 가서 킬러들을 고용해.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해!"

전창수가 부하들을 대피소 바깥으로 쫓아냈다. 그들이 나간 후에 두꺼운 철문이 완전히 닫혔다.

"후우. 지옥부처 그 새끼. 도대체 그때 어떻게 빠져나간 거지?"

서정우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를 본 놈들은 다 총에 맞았기 때문이다.

백상어 클랜은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내부를 수색했지만, 평행차원 텔레포트로 사라진 서정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전창수가 옆에 있는 나무 보석함을 열었다. 그건 흔히 쓰는 식물형 몬스터의 목재가 아니라 진짜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고급 보석함이다.

그 상자 안에는 보석 대신에 피 묻은 단검이 들어 있었다.

'성물의 칼날에 피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텔레포트로 빠져나간 건 아니야. 텔레포트 능력자인 줄 알았는데 날 속인 건가?'

그는 서정우가 텔레포트 능력자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뭔지 몰라도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간 거야. 그래야 말이 돼.'

그는 칼날에 묻은 피를 확인했다. 피가 사라지면 공간 교란도 중단된다. 그러면 텔레포트 능력자가 들어올 수 있다.

"이건 이 상태로 계속 둬야지."

그가 보석함의 뚜껑을 덮었다.

불에 탄 상처가 통증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눈이 레드 포션으로 갔지만, 지금은 그걸 써봐야 의미가 없다.

"씨발."

그는 옆에 있는 위스키를 잔에 콸콸 부었다. 공장에서 합성한 에틸알코올에 향을 추가한 일반 위스키가 아니라, 20세기에 만들어진 진짜 위스키였다.

술을 마시자 뱃속이 뜨거워졌다.

그는 그동안 이런 비싼 술에서 힘과 권력의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독하기만 할 뿐 합성 양주와의 차이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킬러들이 충분히 모이면, 오늘 밤에 그 새끼를…."

오늘 밤에 레드 포션을 사용해 남은 상처를 치료하면, 다음 레드 포션은 내일은 되어야 다시 쓸 수 있다.

"내일 그 새끼를 죽여버리겠다."

* * *

서정우가 말했다.

"오늘 안으로 전창수를 끝장내야 해. 그래야 귀찮은 일이 안 생기니까."

서소라가 백상어 클랜 본부를 멀리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저쪽 세계에서 산 고해상도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

"건물 전체가 완전히 봉쇄됐어요. 오늘은 들어가기 어려워요."

"동쪽과 서쪽은 그렇지. 여기 남쪽은 완전히 불타서 봉쇄 자체가 불가능하잖아. 이쪽에 구멍이 생길 거야."

"전창수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감시 병력을 배치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기다리잖아."

"뭘 기다려요?"

"이만한 사건이 터졌는데 경찰이 안 들러볼 수는 없어. 그걸 기다리는 중이야."

* * *

백상어 클랜은 뇌물도 많이 쓰고 정치권의 줄도 여러 개 잡고 있다. 뇌물로 해결 안 되는 사람은 총으로 쏘기도 한다.

그런 클랜을 상대하는 이쪽 세계의 형사는 평소에도 중무장을 하고 다닌다. 경찰차도 몬스터만이 아니라 총알까지 막기 위한 장갑판을 둘렀다.

백상어 클랜 한 곳만 그런 짓을 하면 벌써 박살났겠지만, 이쪽 세계는 그런 놈들이 너무 많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범인만 죽는 게 아니라 경찰도 죽어 나간다. 그런 험악한 시절이 너무 길어서, 경찰도 이제는 현행범이나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게 아니면 백상어 클랜 같은 곳을 잘 건드리지 않았다.

한국은 치안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밀린 곳들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그런 곳은 이미 무법지대로 변했다.

어쨌든 한국은 게이트 전쟁 중에도 최소한의 법체계는 살아있는 곳이다. 서울 시내에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건물 하나가 불탔는데도 경찰이 구경만 할 리는 없다.

무장 경찰들이 백상어 클랜을 찾아갔다.

서울지방경찰청 각성자 수사대 2과장 권병철이 백상어 클랜 본부를 보며 실실 웃었다.

"흐흐흐. 이 새끼들. 완전히 털렸네."

각성자 수사대 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아주 그냥 속이 다 시원합니다."

"건물 세 개가 다 날아갔으면 더 좋을 텐데, 하나밖에 안 날아간 게 아쉽다."

"그러게 말입니다."

백상어 클랜의 간부가 권병철을 막아서며 인상을 썼다.

"과장님. 얼굴에서 웃음꽃이 핍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 어떻게 된 거냐? 누구 짓이야?"

"그걸 알아내는 게 경찰이 할 일 아닙니까? 일 다 끝나고 몇 시간이나 지난 후에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너희들이 언제 수사에 협조한 적 있다고 우리가 늦었다는 개소리냐? 비켜. 이 기회에 백상어 클랜 본부나 조사해야겠다."

"누구 마음대로…."

"영장도 받아왔다. 안 비키면 싹 다 체포한다."

"영장 그 종이쪼가리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봅니까?"

"할 수 있지. 너희를 박살 낸 게 어디인지는 몰라도, 거기 상대하면서 우리까지 막을 수 있겠어?"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돌아가시지요. 영장 따위 있든 말든 허락 안 하니까."

"아. 그래?"

각성자 수사대 2과장 권병철이 갑자기 클랜 간부에게 달려들었다. 클랜 간부가 급히 권총을 잡았지만 권병철의 발차기가 훨씬 더 빨랐다.

"개새끼가 어디서 해라 마라야!"

권병철은 근접 격투 능력 각성자다. 그의 공격을 클랜 간부는 제대로 막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크악!"

백상어 클랜원들이 총을 들었다. 무장 경찰들도 총구를 클랜원들에게 겨눴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간부에게 전창수의 무전이 들어갔다.

- 남쪽 건물만 열어줘.

간부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남쪽 건물만 조사하십시오. 다른 건물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새끼가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한국에서 최소한의 법체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말은, 법의 권위가 최소한으로만 유지될 만큼 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장이 있어도 중무장한 클랜이 힘으로 버티면 수색에는 한계가 있다.

권병철이 다른 경찰들과 함께 불타버린 남쪽 건물로 이동했다.

그는 건물 내부를 확인하고 감탄했다. 멀쩡한 것이 별로 없었다.

"누가 했는지 몰라도 진짜 화끈하게 태워버렸네."

정찰 관련 스킬을 가진 형사가 보고했다.

"대부분 불에 타서 남은 단서가 별로 없습니다만, 격렬한 총격전이 있었던 건 확실합니다."

"어느 클랜에서 얼마나 쳐들어온 거야?"

"그게…. 아무래도 한 명 같습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느낌이…."

정찰 관련 스킬은 원래 사건 현장 조사용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적의 흔적을 찾을 때 쓰는 스킬이다.

그 스킬은 사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대단한 능력자가 공격했다는 건가?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예?"

"혼자 여길 쳤다면, 적어도 쓰레기 클랜 간의 이권 다툼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잘 분석해 봐. 누가 우리를 위해서 이런 선물을 줬는지 알아야겠으니까."

"예!"

경찰은 남쪽 건물을 조사하면서 백상어 클랜원들을 쫓아냈다. 그러는 사이에 남쪽 감시망에 구멍이 생겼다.

서정우는 그 구멍을 통해 남쪽 건물 근처로 침투했다.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은 전창수가 감지할 위험이 있어서 쓸 수 없지만, 몬스터 점령지를 휘젓고 다니는 그에게 이 정도 침투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병철이 데려온 경찰 중 일부는 불타버린 건물의 바깥을 조사했다.

경찰은 외부에서 누가 백상어 클랜에 침입하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서정우는 남들의 눈을 피해 침투한 후에, 일부러 백상어 클랜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형사에게 걸어갔다.

건물 외부를 조사하던 형사가 서정우에게 말했다.

"너 뭐냐? 누가 가까이 오래?"

서정우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아이고.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백상어 클랜에 얼마 전에 들어간 신입입니다."

그 목소리는 경찰은 확실히 들을 수 있지만 쫓겨난 백상어 클랜원들은 듣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작았다.

145. 단검

서정우는 일부러 백상원 클랜원인 척했다.

형사는 클랜원치고는 고분고분한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너 잘 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아니요. 저는 신입이라 저쪽 건물 안에서 일만 하는 바람에, 싸우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도움 안 되는 새끼."

"죄송합니다."

형사도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신입이라고? 너 예의 바르게 말하는 거 보니까 이런 일 할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여기 그만두고 제대로 된 일을 해. 여기 있어 봤자 총알받이 돼서 죽는다."

"안 그래도 후회하는 중입니다."

그가 일부러 백상어 클랜원들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찌푸리는 바람에 형사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반면에 백상어 클랜원들은 그의 찌푸린 표정을 확실히 보았다.

서정우가 백상어 클랜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새끼들 전부 나쁜 놈들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 경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여쭤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너 혹시 전과 있냐?"

"없습니다."

"스킬은?"

"총기 반동 제어 스킬이 있는데요."

형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럼 일이 쉬워지지. 여기 빨리 그만두고 공부해서 시험 쳐. 백상어 클랜 가입 이력 때문에 감점 많이 받겠지만, 아직 신입이니까 그 스킬로 가산점 받으면 그 정도는 상쇄되고도 남아. 전과 있으면 사격 스킬이라도 있기 전에는 안 되지만, 그 스킬이면 어렵지 않게 합격할 거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사가 서정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래. 이런 쓰레기장은 빨리 그만둬라. 후배로 들어오면 내가 키워줄게."

서정우는 일부러 형사와 대화하는 모습을 백상어 클랜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후에 건물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외부를 조사하던 형사는 잠시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정우는 그 형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멀리서 보고 있던 백상어 클랜원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야. 경찰 처음 보냐?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클랜 간부가 인상을 썼다.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

"선배님하고 너희들을 어떻게 하면 잘 체포할까 의논했다. 내가 너희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면서 다 잡아들이겠다고 했지."

그들은 서정우가 조금 전에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았다.

"씨발. 증거나 찾고 나서 그러든가."

"이 새끼가 경찰 앞에서 씨발? 죽을래?"

"아. 됐고. 가쇼. 밤길에 뒤통수 조심하시고."

"이 새끼가 경찰을 협박하네? 네 뒤통수는 멀쩡할 거 같냐?"

서정우가 조금 전에 경찰 앞에서 클랜원들을 가리켰던 것과 똑같은 자세로 간부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너 얼굴 봐놨다."

서정우는 백상어 클랜원들에게 얼굴을 확실히 보여주고 조용히 사라졌다.

백상어 클랜 마스터 전창수는 각성자 수사대가 들어와 조사를 반쯤 진행했을 때 동쪽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무장 경찰의 화력은 강력하다. 클랜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하는 건 경찰도 피하지만, 일단 공격받으면 확실히 보복한다.

'그 미친놈이 아무리 강해도, 여기 경찰이 와 있을 때 공격하진 못하겠지.'

그는 동쪽 건물 앞에서 불타버린 남쪽 건물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숨어 있느라 건물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씨발. 진짜 다 탔네."

서정우는 그늘 속에서 전창수를 보았다.

'동쪽 건물에 숨어 있구나.'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전창수를 죽일 생각을 하면 적이 눈치챈다.

작살 카멜레온 중에 희귀 개체는 감지 스킬을 피할 정도로 살기를 숨길 줄 안다. 그는 최근에 양방향 게이트에서 그런 개체를 만났다.

서정우는 일부러 시선을 남쪽 건물 쪽으로 향했다.

지금 권병철이 저 안에서 건물을 조사 중이다. 그는 일부러 권병철에 대해 생각했다.

'팀장님은 여기서는 승진이 빠르시네.'

저쪽 세계의 권병철은 서정우가 소속된 강력2팀의 팀장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울지방경찰청 각성자 수사대의 2과장이다. 권병철의 이쪽 신분은 서소라가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알려주었다.

'저쪽에서 옛날에 맨손으로 범인 잡은 게 이쪽에 영향을 줘서 각성하셨나?'

저쪽 형사 2팀장 권병철은 직접 싸우는 일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달랐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만 마시면 옛날에 범인 셋을 혼자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자랑하더니, 진짜인가보다. 앞으론 그걸로 놀리지 말아야지.'

권병철은 남쪽 건물을 조사한 후에 나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창수잖아? 그런데 얼굴이 왜 그 꼬라지야? 머리카락도 다 타버리고."

권병철이 킬킬댔다.

"아주 제대로 당했네?"

전창수가 으르렁댔다.

"과장님.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적당히 하지?"

"이 새끼. 진짜 많이 컸다. 칼치파 시절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놈이."

"그만하시라고."

"어우. 야. 한 대 치겠다? 너 노린 놈이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텐데, 나랑 붙게?"

"못 붙을 건 또 뭐야?"

"겨우 한 놈한테 당했다며? 나랑 싸우다 그놈에게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전창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권병철이 히죽 웃었다.

"새끼. 진짜인가 보네?"

권병철은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손을 흔들며 돌아서 걸어갔다.

"난 간다. 알아볼 만큼 알아봤으니까. 아. 창수야. 웬만하면 내일도 살아서 보자. 못 보면 어쩔 수 없고. 으흐흐흐."

각성자 수사대가 철수하는 모습을 보던 전창수가 욕을 내뱉었다.

"씨발!"

그는 권총을 꺼내 권병철의 등을 겨눴다.

감지 스킬을 가진 경찰이 즉시 돌아서며 총을 들었다. 다른 경찰들도 신호를 받고 바로 반응했다.

권병철이 느긋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왜? 쏘게?"

전창수가 총구를 남쪽 건물로 돌린 후에 방아쇠를 당겼다. 철갑탄 스무 발이 남쪽 건물에 박혔다.

권병철이 실실 웃으며 경찰들과 돌아갔다.

전창수는 총을 벽에 집어 던지고 동쪽 건물로 들어갔다.

"권병철 저 새끼. 내가 반드시 죽인다."

옆에 있던 클랜 간부는 화들짝 놀랐다.

"각성자 수사대 과장을 죽였다가 걸리면 우린 다 죽습니다."

전창수가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씨발! 지금 말고 나중에! 나중에 죽인다고!"

물건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던 전창수가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권병철은 나중에 죽여도, 그 새끼는 내일 당장 죽인다. 내 부상만 마저 치료하면 킬러들을 데리고 가서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동쪽 건물의 문이 닫혔다.

서정우가 권병철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이야아. 팀장님 멋있네. 저쪽에선 연금 받을 때까지 안 다치면서 다니는 게 목표라고 했는데."

그는 동쪽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침투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문이 완전히 닫힌 동쪽 건물에 몰래 침투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걸어갔다. 문 앞에는 총을 든 클랜원 두 명과 간부 한 명이 서 있었다.

서정우가 그들을 불렀다.

"야."

셋 중에 간부와 클랜원 한 명은 서정우가 조금 전에 일부러 얼굴을 보여준 놈들이다.

간부가 시비를 걸었다.

"다른 놈들은 다 갔는데 혼자 남았다가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이 새끼가 또 경찰을 협박하네. 죽는다."

"됐고. 꺼지쇼."

서정우가 작은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 과장님이 너희 클랜 마스터에게 전하라는 게 있어서 왔다. 비켜."

"그럼 그냥 놓고 가시지?"

"이 새끼들이 진짜 경찰 알기를 개똥으로 아네. 비키라고."

"그럼 주고 가든가. 전해줄 테니까."

"야. 이거 진짜 중요한 거야. 직접 전해줘야 한다고. 왜냐하면."

서정우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미사리 쪽에 출동한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거기도 백상어 클랜원들이 있더라? 그놈들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간부의 표정이 굳었다.

"권 과장 밑에 있다며?"

"밑에 있는 거 맞는데, 우리 과장님 밑에 있다고 다 과장님처럼 사는 건 아니지."

"미사리 쪽 이야기를 왜 우리에게…."

"당연히 돈이지. 이 정보는 너희 클랜 마스터를 직접 만나서 팔아야겠는데 말이야. 중간에 너 같은 놈이 끼었다가 꿀꺽하면 나만 닭 쫓는 개 되는 거잖아?"

간부가 잠시 고민하다가 무전으로 전창수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미사리 쪽 정보를 팔겠다는 놈이 있습니다."

- 어떤 놈이야?

"권 과장하고 같이 온 경찰입니다."

- 사.

"직접 만나 뵙고 팔겠다는데요?"

전창수는 잠시 고민했다. 이쪽 세계에는 돈 먹는 경찰이 흔하다. 미사리 쪽으로 보낸 부하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했다.

권병철의 밑에 돈만 주면 정보를 팔아먹는 정보원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데려와. 감시 잘하고.

"예."

다른 클랜원이 손을 내밀었다. 서정우가 상자를 넘겼다.

"그건 진짜 과장님이 보내는 거니까 함부로 열어보지 마라. 내가 그거 전달하겠다고 자원해서 찾아온 거니까."

서정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권총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클랜원 세 명이 서정우를 총으로 겨누었다. 그는 그 상태로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실 대피소의 철문은 은행 금고처럼 생겼다.

"이야아. 이 정도면 소형 몬스터가 긁어도 절대 안 뚫리겠네. 그중에 쇠를 녹이는 놈들만 빼고. 이거 만들려면 돈 많이 들었겠어? 나한테 줄 돈도 많겠다?"

간부가 인상을 쓰며 직접 문을 잡아당겼다. 안쪽 잠금장치는 해제되어 있었다.

크고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전창수는 소파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창수는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서정우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너!"

클랜원 중 한 명은 서정우가 넘긴 작은 종이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든 선물의 정체는 섬광탄이다. 그것도 그냥 섬광탄이 아니라 용산에서 산 원격 제어 모듈을 추가해 개조한 것이다.

서정우가 옆으로 쓱 움직이며 소매 속에 숨겨둔 초소형 무선 격발장치 버튼을 눌렀다.

섬광탄이 그의 등 뒤에서 폭발했다.

강렬한 빛과 소리가 적의 눈과 귀를 차단했다.

서정우도 귀가 먹먹하긴 했지만, 귓속에 귀마개를 하고 있어서 좀 나았다.

이 폭발로 청력에 손상이 왔어도 상관없다. 이쪽 세계에는 손상 후 일정 시간 이내에 쓰면 청력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는 좋은 약이 많다. 그걸로 해결이 안 되면 요즘 넉넉히 확보한 레드 포션을 써도 된다.

눈이 잠깐 먼 클랜원 세 명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서정우를 겨누고 있던 총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서정우는 이미 총구 앞에서 피한 후다. 총알 중 일부가 대피소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전창수는 섬광탄이 터지자마자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있던 소파에 총알이 퍽퍽 박혔다.

앞에서 문을 열었던 클랜 간부는 부하들의 총에 맞아 고꾸라졌다.

서정우가 적의 팔을 옆으로 쭉 밀었다. 앞을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발사한 총알들이 벽을 죽 긁다가 다른 클랜원 둘을 관통했다.

"으아악!"

그는 적의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눈을 감고 총을 쏘던 놈이 고꾸라졌다.

지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서정우가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섬광탄이 터진 건 전창수가 서정우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서 눈까지 크게 뜨고 있을 때였다. 섬광탄의 강렬한 빛이 전창수의 눈에도 파고들었다. 전창수는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회복하는 중이다.

전창수는 서정우의 흐릿한 윤곽만 보고 권총을 발사했다.

그런 총에 맞을 리가 없다. 서정우가 옆으로 피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전창수의 오른팔을 꿰뚫었다.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으악!"

대피소가 다시 조용해졌다.

서정우가 대피소의 철문을 닫은 후에, 귓속에 숨겨둔 귀마개를 빼며 말했다.

"창수야. 여기 숨어 있었네?"

전창수가 눈을 껌뻑였다. 이제야 서정우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너, 너. 씨발."

전창수가 악을 썼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저 새끼들은 경찰이 미사리 쪽 정보를 팔러 왔다고 했단 말이다!"

"나 경찰이라고 했잖아. 미사리 쪽 정보? 알려줘? 네가 보낸 놈들은 당연히 전멸했지. 그게 궁금했냐?"

"권 과장 부하라며!"

"권 팀장님 밑에 있는 것도 맞아."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경찰이고, 저쪽 세계에서는 권병준의 팀에 소속되어 있다.

전창수는 혼란에 빠졌다.

"그럴 리가 없어. 브로커가 준 정보에는…."

"그걸 다 믿었냐? 브로커도 모르는 게 많아. 틀린 것도 많고."

전창수가 사납게 외쳤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 내 부하들이 몰려올 거다. 넌 이제 죽는다고!"

"나 텔레포트 스킬 있는 거 알잖아. 아까는 성물의 공간 좌표 교란 때문에 못 썼으니까, 지금 널 죽이고 그걸 써서 빠져나가면 되겠네?"

텔레포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전창수의 눈동자가 단검 상자 쪽으로 슬쩍 움직였다가 돌아왔다.

서정우가 전창수의 머리를 권총으로 겨누었다.

"너 탱킹 스킬도 있더라? 머리에 구멍 나도 살 수 있냐? 그게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높은 레벨의 탱킹 스킬은 아닐 것 같은데, 확인해볼까?"

전창수는 겁을 먹었다.

"사, 살려줘.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서정우가 나무로 만든 보석 상자를 왼손으로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단검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찾았다. 칼날에 피가 묻으면 공간이동을 교란하는 단검."

두 번째 성물을 찾았다.

146. 전투

서정우가 나무로 만든 귀중품 상자에서 단검을 꺼냈다. 성물을 손으로 잡았지만 특별한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감지 스킬로 구분할 수 없는 건 이것도 마찬가지네.'

이선화의 목걸이는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성물의 힘을 드러냈다.

그녀에게 걸렸던 저주는 그 목걸이를 걸자마자 소멸했다. 성스러운 힘으로 저주를 없애는 건 성물의 기본 효과나 마찬가지다.

남는 칼로리를 저쪽 차원으로 떠넘긴 것이나, 그녀에게 총을 쏘는 적을 언제 어떻게 쏴야 하는지 알게 된 현상은, 성물의 힘 외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칼은, 전창수의 말에 의하면 칼날에 피가 묻으면 일정 공간 이내에서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

'성물마다 고유 효과가 다른가 보다.'

서정우가 상자 속에 있던 천으로 단검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냈다.

권총을 쥔 채로 칼을 닦으려면 총을 쥐는 자세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전창수의 눈에는 그 모습이 빈틈으로 보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뜨린 권총을 힐끗거렸다.

성물을 닦느라 한눈팔고 있을 때 저걸 잡아서 쏘면….'

서정우가 칼날을 닦으며 말했다.

"왜? 될 것 같냐? 그럼 해보든가."

전창수의 오른팔은 관통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격하려면 왼손으로 총을 잡아야 한다.

전창수의 능력이라면 일반인 상대로는 충분히 시도할만한 계획이다. 하지만 감지 사격 스킬 다중 각성자 앞에서 그러는 건 자살행위다.

그런데도 그가 자꾸 권총 쪽을 힐끗거리는 건, 칼에 묻은 피가 다 닦이면 텔레포트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창수가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초조함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이에, 서정우의 작업이 끝났다.

서정우가 단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칼날에 묻은 피가 모두 사라졌다.

"깨끗하네."

그는 상자 속에서 다른 천을 꺼내 단검을 감싼 후에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간이 작은데 용케 두목질 했다?"

서정우가 탁자 위에 놓인 은색 원통 케이스를 집었다.

"넌 이게 몇 개나 있는데 계속 나오냐?"

레드 포션을 금속 케이스에 보관하는 건, 그걸 써야 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 상황을 얇은 유리병이 버틸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드 포션 보관에는 특수 제작한 원통형 케이스를 사용한다.

레드 포션은 귀하다. 재료를 구하기가 워낙 어려운 데다가 만드는 족족 소모되기 때문에 유통되는 물량이 별로 없다.

전창수가 말했다.

"몇 병 정도는 예비가 있다. 여기 클랜원이 몇 명인데 그 정도가 없을까?"

"어디 있냐?"

"당연히 여긴 없다. 여긴 대피소지 금고가 아니다!"

"그건 좀 아쉽네."

이 지하 대피소에는 식량과 무기, 술은 있어도 귀중품은 보이지 않았다. 식량은 서정우가 굳이 챙겨갈 필요가 없다. 저쪽 세계에 가면 더 맛있는 음식이 많다.

그런데 대피소의 무기 중에는 쓸 만한 게 제법 있었다.

서정우가 레드 포션을 주머니에 넣고 무기 보관대 앞으로 걸어갔다.

"좋은 거 많네."

그는 거기서 무기를 좀 보충한 후에 총구를 까닥였다.

"야. 이제 가자."

"가, 가다니?"

"나가는 길 안내하라고. 1층 현관으로 나갈 테니까 앞장서라."

전창수가 의심했다.

"넌 그냥 텔레포트로 빠져나가면 될 텐데?"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은 이미 사용해서 지금은 쓸 수 없다. 그런데 전창수는 그걸 모른다.

"너 바보냐? 텔레포트에 재사용 대기시간 있는 거 몰라? 널 이용해서 빠져나갈 수 있으면 스킬은 아끼는 게 좋지. 오늘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전창수의 눈알이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나가는 도중에 부하들에게 신호해서 저 새끼를….'

서정우가 말했다.

"허튼수작하면 널 쏴버리고 텔레포트로 사라질 테니까 해봐."

전창수는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텔레포트 능력이 진짜 있나?'

정황만 보면 서정우가 그 스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사용하는 모습을 눈으로 본 적이 없다.

대신에 서정우에게 감지 스킬이 있다는 건 안다. 브로커에게 그렇게 들었고, 실제로 싸웠을 때도 그렇게 느꼈다.

전창수는 부하를 시켜 등 뒤에서 쏘는 건 포기했다. 서정우가 그 살기를 감지하고 전창수를 방패로 쓰다가 그의 머리에 총알을 박고 사라지는 시나리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젠장. 방법이 없군.'

"알았다."

서정우가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일단 건물부터 비우라고 해. 책상 뒤나 창가에 매복하고 있어도 어차피 다 걸리는 거 알잖아? 건물 안에 한 놈도 남기지 마라. 한 놈 보일 때마다 너한테 총알 한 방씩 먹일 테니까."

전창수가 구겨진 얼굴로 무전기를 켰다.

"나다. 지금 나갈 테니까 건물 비워."

- 지금 애들을 지하실로 투입했….

"비우라고! 건물 안에 한 새끼도 남겨두지 마!"

- 예!

서정우가 지시를 추가했다.

"내가 놔두고 온 총 그 자리에 그대로 두라고 해라. 총에 장난치면 죽는다."

"끄응. 알았다."

잠시 후에 전창수가 지하 대피소 철문을 열었다. 서정우는 뒤에서 따라갔다.

지하실에는 총에 맞고 쓰러진 네 명만 있었다. 간부는 뒤에서 쏜 총에 맞고 문앞에 쓰러진 상태였다.

그놈은 아까 일부러 시비를 걸었던 간부다. 서정우가 말했다.

"그러게 너도 뒤통수 조심하라니까."

1층에 올라가도 사람이 없었다. 창문의 강철 덧문이 모두 내려진 상태라 밖에서 안을 쏘는 건 불가능했다.

서정우가 감지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말단 클랜원들은 모른다. 그런데 간부 중에는 아는 놈이 있다.

감지 스킬 각성자는 일반적인 매복이나 저격을 쉽게 눈치챈다.

백상어 클랜 간부는 건물 내 매복을 완전히 포기하고 밖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남아있는 백상어 클랜원 대부분이 바깥에서 출입문을 향해 총을 겨눈 채 기다렸다.

서정우는 1층 탁자에 올려놓았던 그의 권총을 빠른 속도로 분해했다. 총에 수상한 짓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적이 그의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정밀한 조작을 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그는 권총을 다시 조립한 후에, 1층 현관을 안쪽에서 잠가버렸다.

그런 후에 전창수의 뒤통수를 툭툭 쳤다.

"올라가자."

"뭐?"

"저 문으로 나갔다가 네 부하들이 배신하고 쏘면 어쩌라고? 옥상으로 가."

"저 문으로 나간다며!"

"그걸 믿었냐?"

"씨발."

전창수가 욕을 하며 위로 올라갔다. 서정우가 뒤따라갔다.

전창수가 성질대로 옥상 문을 벌컥 열었다. 3층 건물의 옥상은 이쪽에서는 나름 고층에 속한다.

문제가 생겼다. 옥상에 한 놈이 남아있었다.

그놈은 서정우를 저격하려고 매복한 게 아니다. 무전기 고장으로 철수 명령을 못 받고 남아있었기 때문에 감지 스킬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옥상 난간 근처에 앉아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옆을 돌아보았다가 전창수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바로 뒤에서 서정우가 전창수에게 권총을 겨눈 채로 나타났다.

백상어 클랜원은 황급히 총구를 서정우 쪽으로 돌렸다.

서정우가 조금 빨랐다. 그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철갑탄이 적의 몸을 뚫었다.

"으아악!"

적이 아래로 추락했다.

전창수는 서정우가 그를 살려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도망칠 기회만 보고 있었다.

서정우가 옥상 감시병을 쏘는 순간 전창수는 옆으로 뛰었다. 서정우가 총구를 돌렸을 때 전창수는 이미 옥상 출구 뒤쪽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그는 전창수를 쫓아 뛰었다. 갑자기 강력한 살기를 감지했다. 그 즉시 대각선 위로 뛰어올랐다.

전창수가 쏜 총알이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총이 또 있었어?'

전창수는 가지고 있던 총을 쏜 게 아니다. 옥상에 예비로 보관되어 있던 권총이다.

서정우가 공중에서 아래로 총을 겨눴다. 전창수도 총구를 위로 번쩍 들었다.

서로 방아쇠를 당겼다. 철갑탄이 날아가 상대의 몸에 퍽퍽 꽂혔다.

둘 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다. 그들이 입은 건 이름만 방탄조끼일 뿐 하체까지 어느 정도 보호하는 방어구다.

피탄 충격으로 서정우의 몸이 공중에서 뒤로 밀려났다. 전창수도 옥상 바닥에서 뒤로 미끄러졌다.

그 상황에서 둘 다 한 방 승부를 노렸다. 머리를 맞으면 탱킹 스킬이 있어도 죽는다.

서정우가 전창수의 머리를 조준했다. 전창수도 서정우의 얼굴을 노리고 총구를 조금 들어 올렸다.

사격 스킬 각성자 두 명이 상대를 노리고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서로의 얼굴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갔다.

서정우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머리카락이 총탄에 맞아 잘려나갔다.

전창수도 고개를 비틀었다. 총탄이 뺨을 관통했다.

"컥!"

날카로운 통증이 뺨에서 일어났다. 뺨이 관통될 때 받은 물리 충격 때문에 시선도 흔들렸다.

전창수의 총구가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서정우가 아니라 허공을 향했다. 목표를 놓친 건 찰나에 가까운 짧은 시간이지만, 결과는 치명적이다.

두 번째 총탄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전창수가 쏜 총탄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서정우의 총알은 전창수의 어깨를 뚫었다.

전창수의 팔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쏜 세 번째 총탄은 한참을 빗나갔다.

서정우의 다음 총탄은 적의 왼팔을 관통했다.

전창수의 왼손이 힘을 잃었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서정우가 옥상에 착지했다. 총구는 여전히 전창수를 향한 상태였다.

전창수가 권총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두 팔 다 관통상을 입은 상태라 한 손으로는 힘이 모자랐다. 어쩔 수 없이 두 손으로 총을 잡았다. 그나마도 사격 스킬 각성자라서 가능했다.

"씨, 씨발!"

전창수는 총을 잡자마자 총구를 돌렸다.

서정우가 전창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머리를 관통했다.

전창수는 비명도 못 지르고 뒤로 넘어갔다.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전투가 끝났다.

서정우가 전창수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놈을 두 번이나 죽였네.'

저쪽 세계에서도 죽이고 이쪽 세계에서도 죽였다.

그는 전창수가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소라의 무전이 들어왔다.

- 놈들이 상황을 눈치챘나 봐요. 건물 진입을 시도하고 있어요.

놈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새로운 전투를 해야 한다.

"그러면 곤란하지. 일부러 한곳에 모아놨는데."

서정우는 이곳 지하 대피소에서 수류탄과 연막탄을 몇 개 가져왔다.

"간부들 위치는?"

서소라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 중에는 백상어 클랜 간부들의 사진도 있었다.

원거리 감시 스킬과 망원경의 조합으로 이곳을 감시 중인 서소라의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 현관 기준 12시 방향 5미터, 10시 방향 7미터에 있어요. 건물 반대쪽 6시 방향 3미터에도 한 놈이 부하 둘과 함께 있어요. 파악된 건 그 셋이 다예요.

서정우가 수류탄 두 개를 12시와 10시 방향으로 던졌다. 목표는 간부들이다.

아래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수류탄이다!"

그는 뒤쪽 6시 방향으로도 수류탄을 한 발 던졌다.

앞쪽으로 던진 수류탄 두 발이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당장 비명과 혼란이 아래쪽을 뒤덮었다.

- 앞쪽은 두 놈 다 살아남았어요. 뒤쪽 놈들은 앞쪽 폭발 상황을 몰라 혼란에 빠졌어요. 좌우를 두리번거리느라 수류탄을 못 봤어요.

곧바로 뒤쪽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 뒤쪽은 모두 제거됐어요.

서정우가 앞쪽으로 이동해서 옥상 난간 밖을 슬쩍 확인했다.

목표로 한 세 놈 중에 죽은 건 뒤쪽 한 놈밖에 없었다. 앞쪽에 몰려 있던 놈들 다수가 폭발에 휩쓸렸지만, 간부 두 명은 부하가 수류탄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자마자 도망치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앞쪽에 있던 놈들 중 일부는 원래 옥상을 총으로 겨누고 있었는데, 지금은 수류탄 폭발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총구도 모두 아래로 내려갔다.

'전쟁터 실전 경험은 별로 없는 놈들이네.'

서정우는 적들 사이에서 간부 두 놈을 확인했다.

"거기냐."

그가 그 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놈이 고꾸라졌다.

이제 서소라가 파악한 백상어 클랜 간부들은 다 죽었다.

그는 남은 수류탄 두 개를 앞으로 던진 후에, 반대 방향에도 연막탄 두 개를 던졌다.

앞쪽에서 다시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파편과 폭풍이 백상어 클랜원들을 덮쳤다.

뒤쪽으로 던진 연막탄은 연기를 짙게 뿜어냈다. 건물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연막으로 덮였다.

서정우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연막 속으로 사라졌다.

* * *

서울지방경찰청 각성자 수사대 2과는 백상어 클랜을 나온 후에 철수하지 않고 근처에 머물렀다.

2과의 주요 인물들은 경찰 차량에서 백상어 클랜을 잡을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2과장 권병철이 말했다.

"전창수는 누구에게 당했는지 아는 눈치더라. 그놈 성격이면 당연히 바로 보복할 거야. 킬러를 보내거나…. 아니지. 당한 꼴을 보면 킬러 한두 놈을 보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돈으로 청부업자들을 긁어모은 후에 직접 죽이러 가겠지."

2과의 형사가 물었다.

"언제쯤 말입니까?"

"오늘 당장 치고 싶겠지. 그런데 좀 전에 전창수 꼴 봤잖아. 화상이 아직 안 나았더라. 그럼 다른 데라고 멀쩡하겠냐? 레드 포션을 다시 써서 부상을 마저 치료한 후에 갈 거다. 그럼 오늘은 어려울 테고, 아마 내일…."

갑자기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어?"

동쪽 건물 지하 대피소에서 쏜 총소리는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여기까지 들리지 않았다. 지금 들린 건 옥상의 총격전 소리다.

권병철이 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백상어 클랜 쪽에서 총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그는 총소리를 들으며 현장 상황을 추측했다.

"한 놈 쏘고, 곧바로 다른 놈과의 총격전. 그리고 이건…. 끝장냈군."

잠시 후에는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이번에도 백상어 클랜 쪽이었다.

"그놈이 돌아왔구나."

권병철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우리도 간다! 보통 놈이 아니니까 정신 바짝 차려!"

147. 궤멸

백상어 클랜과 서정우 일행의 싸움은 서정우 쪽의 완벽한 승리였다.

백상어 클랜은 세 번의 전투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첫 번째 전투인 남쪽 건물 싸움에서 백상어 클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동쪽과 서쪽 건물의 병력까지 불러들였다가 당한 게 컸다.

미사리 쪽으로 이선화를 납치하려던 갔던 놈들도 전멸했다. 다 죽은 건 아니지만, 살아남은 놈들은 모조리 체포됐다.

세 번째 전투에서는 서정우가 적들을 한 곳으로 유인한 후에 수류탄을 다섯 발이나 던졌다.

백상어 클랜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동안 서정우 쪽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

서정우의 일행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서정우가 팔에 총을 한 발 맞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레드 포션으로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치료했다. 그때 사용한 레드 포션은 전창수를 잡을 때 도로 채워 넣었다.

이제 백상어 클랜에는 잔챙이들만 남았다. 그나마도 심하게 다친 부상자가 대부분이다. 멀쩡히 서 있는 놈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 곳을 각성자 수사대 2과의 무장 경찰들이 덮쳤다.

백상어 클랜이 수색영장 앞에서도 뻗댈 수 있었던 건, 머릿수가 찾아온 무장 경찰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경찰 쪽에도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백상어 클랜의 전투력이 쪼그라들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클랜원 한 명이 돌격하는 경찰들을 보고 급히 총을 들며 소리를 질렀다.

"습격…."

2과장 권병철이 소리 지르는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근접 격투 스킬 각성자다. 그 스킬을 각성하면 근력 외에도 민첩과 동체 시력, 신체 제어 능력 등이 향상된다.

힘이 세고 몸이 빠르고 눈이 좋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 당연히 총을 쏠 때도 유리해진다. 사격 스킬 각성자인 서정우가 격투 능력까지 뛰어난 것도 비슷한 이유 덕분이다.

소리를 지르던 클랜원이 권병철이 쏜 총에 맞고 고꾸라졌다. 옆에 있던 다른 놈이 급히 몸을 돌렸지만, 그놈도 총에 맞고 쓰러졌다.

다른 클랜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하, 항복합니다!"

무장 경찰들이 백상어 클랜원들을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총을 겨누었다. 이 상황에서 백상어 클랜원 중 하나라도 저항하면 몰살당할 수도 있다.

겁에 질린 클랜원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권병철이 지시했다.

"싹 다 체포해. 죄목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쪽 건물은 불타고, 동쪽 건물은 앞에서 수류탄이 여러 발 터졌다.

"일단은 테러리스트로 하자. 너희는 이제부터 테러리스트다."

이쪽 세계에서는 무슨 죄로 체포하는지 정도만 알려줘도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경찰 사망률이 워낙 높아서 범인을 체포할 때는 규정보다는 현장의 상황판단을 더 중요하게 본다.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어차피 비슷한 죄목일 거다."

살아남은 백상어 클랜원은 전부 다 체포됐다.

그동안 저지른 범죄가 밝혀지면 사형판결을 받을 놈도 많지만, 여기서 저항했다가는 당장 벌집이 돼서 죽을 판이다. 지금은 욕 한마디 하는 놈도 없었다.

아래쪽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문도 다시 열린 후에, 권병철은 동쪽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그가 찾던 놈이 있었다.

권병철이 죽어 있는 전창수를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이 새끼. 드디어 죽었네."

그동안 전창수와 백상어 클랜에서 저지른 범죄는 이 험한 세상 기준으로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클랜원들을 현행범으로 잡는 게 한계였다.

클랜 마스터 전창수만 제거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지만, 감지와 사격 스킬 동시 각성자라 어지간한 습격으로는 제거할 수 없었다.

권병철이 죽어 있는 전창수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이 새끼 잡는 게 내 소원 중 하나였는데, 소원 하나 이뤘네."

옆에서 형사가 말했다.

"과장님은 그런 소원 많으시잖습니까?"

"요즘 세상에 이런 놈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게이트가 열리고 나서 몬스터만 쳐들어온 게 아니야. 사람들 속에 숨어 있던 이런 괴물들도 정체를 드러냈잖아."

"어쨌든 이놈 죽은 거 보니까 시원합니다."

"시원하긴 한데, 좀 허무하다. 이 지독하고 질긴 새끼가 이렇게 죽을 줄 몰랐는데."

"더 독한 놈에게 당했나 보죠."

"그렇겠지."

권병철이 일어나 건물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걸을 수 있는 백상어 클랜원들이 수갑을 찬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 더 독한 놈이 누군지 좀 알아봐. 저 중에 아는 놈이 있겠지."

* * *

서정우는 백상어 클랜 본부를 빠져나와 일행과 합류했다.

서소라가 말했다.

"각성자 수사대에서 놈들의 본부를 점령했어요. 우린 바로 빠져야 해요."

"내가 앞장설 테니까 나만 따라와.

"서정우는 CCTV의 카메라를 탐지하는 스킬이 있다. 그는 그 스킬을 이용해 안전한 탈출로를 찾아냈다.

이선화가 서정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옆에서 걸으며 불평했다.

"나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네가 도와줄 일이 없는 상황이 제일 좋은 거야."

"그래도."

그들은 안전한 경로를 이용해 그곳을 벗어난 후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정우가 남수정과 정현수에게 말했다.

"너희가 오늘 본 건 비밀이다."

남수정이 대답했다.

"아저씨 혼자 나쁜 놈들 잡은 거 우리는 하나도 못 봤어요. 우리가 본 건 오디션 현장에 쳐들어온 놈들뿐이에요. 제가 그놈들하고 진짜 치열하게 싸웠죠."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러면 경찰도 모르는 척 넘어갈 거다. 이 바닥 일이 원래 그래."

저쪽 세계에서는 이런 대형 사건을 눈감아주는 게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서로 조건만 잘 맞으면 가능하다.

정현수가 큰소리쳤다.

"형. 저 못 믿어요? 우리가 같이 싸운 게 벌써 몇 번인데 그런 걸 묻고 그래요?"

"넌 입이 좀 쌀 것 같아서."

"아니거든요?"

남수정이 눈을 반짝이며 정현수에게 물었다.

"너 전에도 이 아저씨하고 싸운 적 있어? 언제?"

"그때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입 싼 거 맞네."

"그, 그러네?"

서정우가 말했다.

"위험한 상황은 지났으니까 너희들은 집에 가라. 수정이는 선화가 새로 들어가는 영화 시작하면 다시 오고. 너도 그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으니까."

"전 계속 선화 언니 옆에 있어도 되는데요?"

"너 고3이잖아. 학교 가야지. 출석일 안 부족하냐?"

"헌터 활동 허가받아놔서 아직 여유 있는데요?"

"그래도 일단은 집에 가. 알바비는 며칠 더 일한 것으로 계산해서 줄 테니까."

"넵!"

"그건 대답이 진짜 짧고 빠르네."

"히히. 제가 원래 좀 솔직해서요."

이 동네에 사는 정현수가 급히 말했다.

"형. 저는요. 저도 일할 수 있어요."

"그럼 넌 수정이가 올 때만…."

"네!"

"너도 진짜 솔직한 녀석이다."

* * *

각성자 수사대 2과장 권병철이 인상을 썼다.

"누구 짓인지 아는 놈이 없어? 그렇게 당할 때까지 누구 짓인지도 몰랐다고?"

형사가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전창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답니다. 간부 중에도 몇 명은 알았다는데, 간부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권병철은 왜 일반 클랜원이 범인에 대해 모르는지 깨달았다.

"전창수가 한 명에게 당했다는 걸 숨겼어. 다른 클랜들이 전창수를 만만하게 볼까 봐."

"예. 첫 번째 습격에서는 몇 명인지조차 확실히 본 놈이 없습니다. 본 놈은 다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 습격이 두 번 있었잖아. 두 번째는 본 놈이 있을 텐데?"

"그놈과 같이 지하 대피소로 내려간 놈들은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쏴 죽인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섬광탄이 사용된 흔적이 있습니다. 자기편도 못 알아보고 서로 쏜 것 같습니다. 건물 밖에 얼굴을 본 놈이 둘 있었는데, 그놈들도 수류탄이 터질 때 죽었습니다."

권병철은 조금 심각해졌다.

"누군지 몰라도 보통 전문가가 아니야.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이러면 곤란해."

"찾아서 체포하시게요?"

권병철이 도로 물었다.

"너 아까 백상어 클랜 놈들이 몇이나 서 있었는지 봤냐? 원래 규모의 오분의 일도 안 됐지?"

"그렇죠."

"나머지 80퍼센트는 어떻게 됐겠냐?"

"예?"

"그놈 혼자서 백상어 클랜을 그 정도로 털었다는 생각은 안 드냐?"

"설마요. 그 정도면 혼자 군부대 하나를 날려버린 건데, 아무리 대단한 각성자라도 그게 가능합니까?"

"만약 그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런 능력자를 네가 체포하려는 거야. 사이좋게 잘 지낼 궁리를 해야지 어떻게 잡을 생각을 하냐?"

"체포 대상과는 타협하지 말라면서요."

"전창수처럼 사람의 탈을 쓴 괴물과는 타협하지 말라는 거지. 적의 적은 아군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놈이라도 적을 치는 데 이용할 수는 있다. 이번 건만 빼고 보면 악당인지는 아직 몰라. 문제는 손을 잡을 만한 견적이 나오는 인물이냐인데…."

"그런데 이번엔 과장님 계산이 틀리셨습니다."

"왜?"

"전창수가 오늘 미사리 쪽에 여러 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숫자가 더 많이 비어 보이는 겁니다."

"그놈들은 지금 어디 있어?"

"영화사와 배우들을 습격했다가 전멸했습니다."

"어? 전멸?"

"게다가 영화사 쪽은 피해가 전혀 없었답니다."

권병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진짜 이상한데? 백상어 놈들이 전부 다 바보는 아닌데, 일방적으로 전멸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데도 습격했다고? 그것도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아봐."

"예!"

* * *

서정우는 이튿날 형사로 사는 세계로 돌아왔다.

도로에는 차가 다니고 사람들은 앞만 보며 걸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주변 경계를 하지 않았다.

"여기는 오늘도 평화롭네."

서정우를 향해 마스크를 쓴 사람이 달려왔다. 그 남자는 서정우를 보고 방향을 옆으로 조금 틀어 빠져나가려 했다.

뒤쪽에서 형사 조민석이 뛰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잡아!"

서정우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오른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강도의 목이 그의 손에 덜컥 걸렸다.

"켁!"

목을 얻어맞은 강도가 크게 나자빠졌다.

형사 조민석이 달리던 속도를 줄이다 서정우의 앞에서 멈추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허어억. 허억. 정우네? 너 왜 여기에 있냐? 어디 갈 데가 있다더니?"

"그 일이 잘 해결됐거든."

"잘됐네. 그래서 너 표정이 그런가?"

"뭐가?"

"되게 편안한 표정이잖아."

서정우가 웃었다.

"되게 평화로운 이 세계가 좋아서."

"평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저기 자빠진 저놈만 해도 도둑질하다 들키니까 사람 찌른 놈이야."

"피해자는?"

"다행히 몇 바늘 꿰매면 되는 정도로 끝났다."

"역시 평화롭네. 강도가 총도 안 쏘고."

"응?"

"아니야."

그날 저녁때 2팀은 감자탕과 소주로 간단한 회식을 했다. 회식 명분은 오늘 조민석이 혼자서 강도를 찾아내 잡은 일을 축하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냥 술을 마실 핑계가 필요해서 그걸 갖다 붙였다.

서정우는 이선화에게 연락해 훈련을 연기했다.

백상어 클랜과의 전투가 예상보다 더 치열했다. 서정우도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려면 좀 더 쉬어야 한다.

2팀장 권병철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크으. 내가 옛날에는 말이야. 혼자서 세 놈을 잡았거든? 원래는 한 놈인 줄 알고 추격했는데, 골목에 들어가니까 두 놈이 더 있더란 말이야. 그렇다고 도망치냐? 그냥 뛰어들어가서 파박! 때려잡았지."

서정우가 권병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팀장님은 지금도 그런 상황이 오면 그렇게 싸우실 것 같은데요."

권병철이 활짝 웃으며 다른 형사들에게 자랑했다.

"크흐흐. 봤냐? 이게 무술 고수끼리는 통한다는 거다. 정우가 날 보고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팍 받는 거지. 네놈들은 약해빠져서 이런 거 모를 거다."

백성민이 투덜댔다.

"우리가 약한 게 아니라 정우가 지나치게 강한 거죠. 저거 진짜 올림픽에 내보내야 하는데."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내가 올림픽 도핑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나?'

그는 예전에는 전투 보조 약물을 가끔 이용했다. 몬스터 점령지에 들어가면 쓰기 싫어도 써야 할 때가 있었다. 최근에는 레드 포션도 사용했다.

당장 남수정이나 이선화가 마시는 낮은 레벨의 회복 물약도 검사에 걸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순 없다. 저쪽에서는 효과만 좋으면 뭐든 다 갖다 쓰기 때문에 그 물약에도 스포츠 대회의 금지 성분이 들어갈 수 있다.

'도핑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는지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내가 올림픽에 나갈 건 아니니까.'

백성민이 권병철에게 말했다.

"그래서 다음엔 세 놈을 혼자 잡으시게요?"

"야. 이제는 그러면 안 돼."

권병철이 지갑을 열어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내가 다치면 우리 가족은 어쩌라고. 너희들도 명심해. 다치지 마라. 특히 정우 너.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아는데, 그러다 다치면 너만 손해야. 이제 몸 좀 사리면서 일해."

서정우가 말을 돌렸다.

"따님이 참 미인이네요."

"그치? 우리 딸이 참 예쁘…."

권병철이 지갑을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아무리 너라도 우리 딸은 안 된다. 아직 학생이야. 이제 겨우 대학 1학년인데 어딜. 확 체포해버린다."

권병철의 이야기 주제가 딸 자랑으로 바뀌었다.

서정우는 장학금을 받으며 명문대를 다닌다는 대학생 딸 자랑을 들으며 생각했다.

'저쪽에서 본 모습하고는 정말 다르시네. 하긴. 양쪽 모습이 다른 거로 따지면 소라가 제일 많이 다르지.'

서정우가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소라는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서정우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역시 네가 제일 편하게 산다."

"뭐래?"

148. CF

서정우가 물었다.

"야. 걸그룹이 인기 얻으면 스케줄 많다던데 넌 왜 맨날 집에서 TV만 보냐?"

"쌍둥이가 학교 가야 하잖아. 걔네 일반고 다녀. 그동안 너무 많이 빼먹어서 이제 주중엔 수업 거의 못 빼."

"그래도 너무 노는데?"

"사장님이 우리를 쥐어짤 성격은 아니잖아? 행사는 주중 야간하고 주말에 거리 가깝고 대우 좋은 것만 골라서 뛰고 있어. 우리는 인기가 아주 오래 갈 팀이라서 막 굴리지 않아도 된대."

"인기가 오래 간다고 어떻게 장담하냐?"

서소라가 손가락을 서정우 쪽으로 까닥였다.

"사장님은 당연히 오빠만 믿는 거지. 설마 배 째겠어?"

서정우가 피식 웃으며 탁자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연습하다가 목 아프면 마셔라."

"이게 뭐야?"

"수정이한테 준, 노래 연습 많이 해도 목이 쉬지 않게 해주는 물약."

이런 낮은 레벨의 상처 회복 물약은 목이 쉬는 것이나 근육통 정도에나 효과가 있다.

서소라가 벌떡 일어나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약병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앗! 진짜 그거다! 이거 진짜 어디서 구하는 거야? 효과 진짜 좋던데 팔면 안 돼?"

제약 회사에 상처 회복 물약의 제조법을 파는 건 불가능하다. 저쪽 세계 몬스터를 잡아야 구할 수 있는 특정 물질이 들어가야 약효가 제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재료도 희귀하고, 정식 의약품이 아니라서 돈 받고 파는 순간 바로 체포되니까 꿈도 꾸지 마라."

"웅담이라도 들어갔나?"

"비슷해."

* * *

서정우는 그의 방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성물 단검은 저쪽에 두고 왔다. 대신에 사진을 충분히 찍어서 가져왔다.

그 사진을 이쪽 검색엔진에 넣고 이미지 검색을 시도지만 다른 단검들만 잔뜩 나왔다.

혹시나 싶어서 '보물 단검'이나 '박물관 단검' 등을 검색했다. 단검 사진이 쏟아졌지만 같은 칼은 보이지 않았다.

"검색으로 찾을 수 있으면 일이 편한데."

사진 검색만으로 같은 단검을 찾기 어렵다는 것만 확인했다.

"똑같은 단검이 이쪽에도 존재하는지 알아야겠는데 말이야."

그가 이선화에게 걸어준 목걸이에는 고려 시대 고승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역사책에 이름이 나오는 유명한 고승이다.

그 사리는 오래된 절의 석탑에 천 년 동안 보관되어 있었다. 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 석탑을 향해 기원했다. 그러다 최근에 석탑 안에서 사리가 발견됐다.

그 모든 사연이 더해져 그 사리는 성물이 되었다. 그것도 서정우조차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설 등급 성물이다.

그런데 저쪽 세계에서는 그 사리를 찾을 수 없었다. 오래전에 그 절 근처에서 대형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파괴됐다. 석탑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황이 반대다. 저쪽에서 성물을 찾았다. 이쪽에 같은 것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서정우가 컴퓨터를 껐다. 아직도 정신적 피로가 남아있었다. 지금은 좀 쉴 때다.

"내일 다시 알아봐야겠다."

* * *

이튿날 아침 일찍 포캣츠는 ES 엔터테인먼트에 모였다. 윤나나가 서소라에게 앓는 소리를 말했다.

"어제 춤 연습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 안 아픈 데가 없어."

"천천히 해. 우린 어차피 실력이 없어서 갈 길도 멀어. 무리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춤의 달인이 되진 않아."

"이선화는 겨우 며칠 만에 엄청난 걸 해냈잖아."

이선화는 서정우에게 겨우 며칠 동안 기술 하나만 훈련받았을 뿐인데 테러범을 잡았다.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인 덕분에 그런 일이 가능했지만, 잡은 건 잡은 거다. 그녀의 공중회전 영상은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많이 찾아본다.

당연히 윤나나도 그 영상을 보았다. 그녀는 그걸 보고 경쟁심을 불태우며 더 열심히 연습하다가 근육통에 시달렸다.

윤나나가 말했다.

"태권도나 유도 고수들은 이럴 때 몸 풀어주는 기술이 있다던데."

"그래?"

"손으로 막 주물러주면 금방 낫는데. 정우 오빠도 할 줄 알겠지?"

"할 줄 알아도 안 해주겠지. 그냥 파스를 붙여. 아! 아니다."

서소라가 씩 웃었다.

"나나야. 내가 널 위해 준비했어."

"응?"

서소라가 가방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이것이 무엇이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야. 바로…."

"이거 수정이가 마시는 그 약이네?"

서정우는 겉에 붙은 스티커만 제거하고 유리병은 그대로 사용했다.

"어. 목 아플 때 마시는 그 약. 내가 선화 언니한테 들었는데, 그 언니도 이 약 덕분에 그 독한 훈련을 받아도 근육통이 오지 않는대."

"너 이거 혹시 훔쳤…."

쌍둥이 박다연이 끼어들었다.

"언니! 잘했어! 가족 간에는 이 정도는 훔쳐도 처벌 안 받을 거야!"

"훔친 거 아니거든? 오빠가 목 아프면 마시라고 준 거야!"

윤나나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어…. 너만?"

"응? 아, 아니. 우리 네 명 마시라고 네 병 주던데?"

서정우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네 병을 준 건 사실이다.

"그치? 역시 정우 오빠는 다정하다니까."

"도대체 어디가?"

"그럼 이건 네 약을 날 주는 거고, 정우 오빠가 나 주라고 한 거는 따로 있겠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

쌍둥이가 얼른 손을 내밀었다.

"내 것도 내놓으시지."

"난 제일 많이 들어 있는 거로 달라!"

서소라가 버럭 했다.

"호랑이 새끼가 왜 이리 많아! 너희는 학교는 어쩌고 여기 있어?"

쌍둥이는 당당했다.

"지각이지."

"언니는 걱정하지 마. 한두 번 하는 지각도 아니고."

"이젠 선생님들도 그런가 보다 해."

"우릴 포기하신 듯."

서소라가 쌍둥이를 째려본 후에 물약을 한 병씩 나눠주었다.

윤나나에게도 한 병만 주었다. 그녀가 회복 물약이 들어 있는 병을 들고 망설였다.

"아깝다."

"뭐가?"

"마시면 없어지잖아."

"마셔. 마셔서 없애야 또 뜯어내지."

"더 있어?"

이게 구하기 어려운 거면 오빠가 나한테 줄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분명히 쉽게 구한 거야."

윤나나가 활짝 웃으며 병뚜껑을 열고 물약을 마셨다.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으으. 맛없어."

"수정이도 그러더라. 그 약 진짜 맛없다고. 어때? 효과가 좀 있는 것 같아?"

레드 포션도 아닌데 벌써 효과가 느껴질 리 없다. 이건 저쪽 세계 아무 약국이나 가서 만 원만 내면 두 병을 살 수 있는 약이다.

그런데 윤나나는 아픈 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다. 효과가 있다고 믿고 먹었기 때문에 생긴, 단순한 심리적 효과였다.

"어머. 벌써 많이 좋아졌어. 약효 진짜 쩐다. 정우 오빠 이거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럼 금방 부자 될 것 같은데."

서소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 받고 팔면 바로 체포될 거라던데?"

"응? 왜?"

"정식 의약품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만든 거래."

"정식으로 특허 내고 팔면 안 되나? 절차가 복잡한가?"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이거 웅담 넣어서 만든 거야."

서정우는 웅담이 들어갔냐는 질문에 비슷한 게 들어갔다고 대답했다. 웅담 대신에 몬스터를 잡고 나온 것이 조금 들어가긴 했다.

윤나나는 당황했다.

"어? 웅담? 이거 그럼 비싼 거야?"

"아니. 비싼 거면 그 인간이 이렇게 여기저기 턱턱 내놓을 리가 없지. 이건 내 생각인데."

서소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 웅담이 불법이 아닐까 싶어. 그래서 못 파는 거야."

윤나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가 깜짝 놀랐다.

"불법 웅담? 어디서 곰사냥이라도 했나?"

박하연이 의견을 냈다.

"국내에서 곰을 잡지는 못했을 테니까 밀수품이겠지."

박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디 형사님. 밀수 조직을 쓸어버리고 웅담을 빼돌린 듯."

서소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렇게까지 했으려고. 이젠 곡 팔아서 돈도 많이 버는데 뭐하러."

"원래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듯."

윤나나가 물었다.

"그런데 정우 오빠는 지금 뭐 하셔?"

"당연히 일하겠지."

* * *

서정우는 경찰서로 출근하다 이선화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정우 씨.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연락 기다렸는데!

서정우는 이선화에게 먼저 연락하기로 약속했는지 생각해보았다. 기억나는 게 없었다.

"무슨?"

- 어머. 이 남자. 필요할 땐 불러서 운전시키더니 필요 없다고 바로 안면 바꾸는 거 봐.

서정우는 저쪽 세계에서 백상어 클랜 전창수와 싸우다 중간에 넘어왔을 때 톱스타 이선화를 불렀다. 그녀 덕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아! 훈련. 이틀이나 쉬니까 새 기술이 빨리 배우고 싶어졌나 봅니다."

- 아, 아니요! 그거 말고요! 그건 며칠 더 쉬어도 돼요!

"그럼?"

- CF요!

"아."

그는 그녀가 CF를 찍을 때 도와주기로 했다.

"그게 오늘이군요."

양쪽 세계를 매일 오가다 보면 날짜를 잘못 알 때가 종종 있다.

그가 양쪽 세계를 매일 오가는 이유는,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그는 이 스킬에 수명 두 배 연장 같은 부수 효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한쪽에 너무 오래 있으면 그게 제대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24시간이니까, 노화 방지 부수 효과도 딱 하루씩만 적용될지도 모르지.'

그것만이 아니다. 이선화의 성물 목걸이나 박철우의 꿈이 이쪽 세계와 연결되려면 그가 양쪽 세계를 오가야 한다고 추측했다. 그것도 매일 오가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이 평화로운 세계가 몬스터와 전쟁 중인 저쪽 세계보다 편하고 좋다.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이쪽에 더 오래 있고 저쪽에서 머무는 시간은 줄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질 수도 있다.

그는 저쪽 세계의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매일 꼬박꼬박 넘어간다.

"몇 시까지 갈까요?"

- 지금 당장이요! 오늘 휴가 낸다고 했잖아요!

"아. 맞다. 휴가가 오늘이었지. 하마터면 출근할 뻔했네."

이선화가 걱정했다.

- 정우 씨. 괜찮아요?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죠?

"그냥 단순히 날짜를 착각한 겁니다."

- 전 이미 도착했으니까 빨리 오세요.

"가면 밥은 줍니까?"

- 어머! 전 오늘 날씬하게 나와야 해서 주스만 조금 마셔야 하는데, 혼자 밥 먹게요?

"아니요. 같이 굶으려고요."

이선화가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 농담이에요. 점심때 휴식 시간 충분히 준다고 하니까 그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서정우는 통화를 마치고 나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마침 잘됐네. 촬영 도와주고 남는 시간에 단검을 찾을 방법이나 조사해야겠다."

* * *

CF 촬영은 시내 고급 호텔의 협조를 받아 넓고 화려한 공간에서 찍기로 했다.

서정우가 그곳에 도착했다. 이선화는 촬영용 화장을 한 상태로 밝은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다.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이선화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그렇게 오래 봐도 여전히 예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그가 알던 모습과 달랐다.

화장품은 이쪽이 저쪽보다 훨씬 더 품질이 좋고 종류도 다양했다.

화장 기술도 이쪽 연예인 화장이 더 나았다.

조명 장비도 이쪽이 좋았다. 저쪽은 CF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영화까지도 저예산으로 제작한다. 장비의 질과 규모에서 이쪽의 압승이었다. 그 모든 장비가 이선화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서정우가 감탄했다.

"같은 사람 맞나 싶네."

AKX 픽처스 김성준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정말 대단하지요?"

"김 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김성준이 씩 웃었다.

"이 CF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들렀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서 형사님."

"아. 예. 잘 지내시죠?"

"덕분에요."

김성준이 조명 아래에 서 있는 이선화를 보며 말했다.

"오늘 이선화 씨는 빛이 나는군요. 서 형사님이 오셔서 그건 걸까요?"

"원래 빛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런가요? 하하하."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김성준을 생각했다. 저쪽 김성준도 영화 제작자를 꿈꾸지만, 제작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이윤미와 듀오 헌터로 산다.

서정우가 김성준에게 물었다.

"김 사장님. 만약에 말입니다. 투자자도 없고, 제작비도 조금밖에 없는 상황인데,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성준이 관심을 보였다.

"서 형사님이요?"

"아니요. 김 사장님이요. 그래서 만약이라고 한 겁니다."

"극장에 걸 게 아니라면 방법은 많습니다만."

"극장에 걸어서 성공하려면요?"

"초저예산으로 찍었는데 성공하는 영화가 가끔 있습니다. 개인용 캠코더로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 영화가 세계적인 성공을 한 예도 있고요. 물론 그런 식으로 찍은 영화의 99퍼센트는 극장에 걸려보지도 못합니다만."

"성공 확률 1퍼센트라…."

"실제로는 그만큼도 안 되지요. 그런데 그 영화에 서 형사님도 출연한다면 방법이 있긴 합니다."

"어떤?"

김성준의 눈이 반짝였다.

"하시게요?"

이쪽 세계에서 써먹으려고 묻는 게 아니다.

"아니요. 상황을 가정하고 의견만 듣는 겁니다. 이선화 씨 수준의 미모와 연기력을 가진 여자 배우가 주인공을 맡고, 저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액션 담당으로 출연한다면? 다시 말하지만 초저예산 영화입니다. 제작자는 김 사장님이시고."

저쪽은 원래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든다. 거기서 제작비를 더 줄이면 이쪽에서 볼 때는 초저예산이 된다.

"감독과 촬영을 제가 다 하면 제작비를 더 줄일 수 있겠군요."

"감독을요?"

"옛날에 독립영화를 몇 번 만들어봤습니다. 상업영화를 찍기에는 어림도 없는 실력이지만, 초저예산으로 가려면 직접 해야지요. 그럼 남은 변수는 하나밖에 없군요. 시나리오가 정말 중요합니다."

서정우가 물었다.

"그런 시나리오가 있습니까?"

"예."

149. 재회

이선화가 서정우를 발견하고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서정우도 손을 흔들어주면서 김성준에게 말했다.

"김 사장님. 그런데 그 초저예산 영화가, 액션 영화가 아니면 안 통하는 독특한 시장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AKX 픽처스 사장 김성준이 설명했다.

"권세창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선화 씨의 미모와 연기력, 서 형사님의 무술, 감독은 부족하지만 제가, 예산은 초저예산. 그 모든 조건에 딱 맞고 흥행성도 확실한 시나리오를 썼지요."

그런 시나리오가 있다면 저쪽 세계에서 이선화가 주연인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서정우가 물었다.

"권세창 씨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김성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아."

"그 미공개 시나리오를 예전에 제가 본 적이 있는데, 지금 말씀하신 그 모든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됩니다."

"이미 돌아가셨다면서요."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범인을 잡아주시면 가족들이 그 시나리오를 넘겨줄 테니까. 물론 그 시나리오가 필요하신 경우의 이야기입니다만."

"잠시만요. 범인이요?"

"사고사로 결론 나긴 했는데, 가족들은 살인 사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진짜 살인 사건이라면 서 형사님 전문분야잖습니까?"

서정우도 그 시나리오가 탐이 나긴 하지만, 무턱대고 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

"제가 항상 범인을 잡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잡범은 몰라도 살인마는 못 잡은 적이 없다던데요."

"어쨌든 제가 영화 제작을 물어본 건 그냥 그런 상황을 가정해서…."

서정우가 멈칫했다. 다른 배우가 이선화를 향해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그녀를 안다.

"박현아?"

김성준이 설명했다.

"이 CF의 초기 계획은 이선화만 나오는 것이었는데, 시나리오를 다듬다가 내용이 조금 추가됐습니다. 집에서 TV를 볼 때 말을 받아줄 상대역이 필요합니다. 이선화 씨에게 절친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아니까 그분을 출연시키면 제일 좋겠지만, 일반인이라 어쩔 수 없이 배우를 섭외했습니다."

"아. 예."

김성준은 서정우가 박현아의 이름을 아는 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현아는 영화와 드라마에 조연으로 곧잘 출연하는 배우다.

서정우가 두 사람을 보았다. 이선화와 박현아는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선화가 박현아에게 자랑했다.

"그래서 정우 씨가 도와주러 왔어."

"어머! 진짜? 어디?"

"저기 있잖아."

박현아가 고개를 돌려 서정우를 확인하자마자 쪼르르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박현아입니…."

그녀가 말을 멈췄다. 눈을 크게 뜨면서 서정우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손으로 가리켰다.

"앗!"

서정우는 그녀가 왜 그러나 싶어서 가만히 쳐다보았다.

박현아가 외쳤다.

"그렇게 헤어지고 진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서정우는 살짝 당황했다.

'이쪽 세계에서 전에 날 만난 적이 있어?'

그는 이쪽 세계에서 박현아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럼 이전에 이곳에 있던 서정우와 만났다는 뜻이다.

'무슨 사이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이선화가 다가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정우 씨. 현아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봐요? 어떻게? 응? 어떻게?"

서정우도 그게 궁금했다.

'어디지? 어디서 무슨 일로 만났지? 혹시 클럽에서 만나서 하룻밤 사고를…. 그럼 진짜 망하는 건데.'

서정우는 이쪽에서 21세기에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드러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과거의 인연을 만났다. 그가 모르는 인연이다.

서정우가 정보를 얻기 위해 말했다.

"아. 예. 오랜만이네요."

"진짜 너무너무 오랜만이에요."

서정우는 정보를 얻었다.

'존댓말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이. 일단 연인 관계는 아니겠네.'

이선화가 박현아에게 물었다.

"네가 정우 씨를 어떻게 아는데?"

"옛날에 나 산에서 사고당했을 때, 그때 구해주셨어."

이선화는 살짝 놀랐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 너 전에 예능에서 말했던 그 사건? 구해준 사람 이름은 모른다며?"

"얼굴은 알잖아. 나 서정우 형사님 사진은 본 적이 없는데, 미리 좀 찾아볼걸. 그럼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는데."

서정우는 박현아가 말하는 사고에 대해 모른다. 그가 얼른 말했다.

"경찰서에 급히 연락할 게 있어서 잠시만."

그는 구석으로 가서 스마트폰으로 그 사건을 검색했다. 연예계 기사가 떴다.

박현아는 무명 배우 시절에 산에서 조난 당해 다리를 다쳤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녀를 어떤 젊은 남자가 발견했다.

그는 다리를 다친 그녀를 업고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에 멧돼지도 만나고,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기도 했다. 산에서 여러 번 위험한 일을 겪었지만 남자는 박현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기사에 나온 남자는 산에서 내려온 후에, 그녀를 119구급대에 넘겨주고 사라졌다.

서정우는 궁금해졌다.

'박현아는 그때 기동력 향상 스킬을 각성한 걸까? 그 산에서는 그게 절실하게 필요했을 테니까.'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상대는 나를 잘 아는데 나는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서정우가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박현아는 서정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여기는 CF를 찍으러 온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작업에 참여했는데 그녀 마음대로 시간을 낼 수는 없다.

그녀가 서정우를 슬쩍 보았다.

'이제 누군지 알았으니까, 앞으로 시간은 많아.'

서정우도 박현아에 대해 생각했다.

'저쪽에서는 몬스터 점령지역에서 구출했는데, 이쪽에서는 산에서 구조했네. 양쪽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어. 세계가 다른데도.'

CF 감독은 외부 전문가를 써서 공중회전보다는 간단한 동작을 몇 개 만들었다.

이틀 전 회의에서, 감독은 이선화가 와이어 없이 그 모든 동작을 한 번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선화는 바로 배를 쨌다. 그런 위험한 걸 요구하면 이 CF를 안 찍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공중회전만 한 번에 가고 나머지 작은 동작들은 하나하나 따로 찍어 편집 작업으로 연결하기로 했다.

이선화가 테러리스트를 잡을 때 썼던 공중회전은 그 액션의 제일 마지막에 배치했다.

촬영이 시작됐다.

이선화가 옆으로 뛰다가 균형을 잃었다.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던 서정우가 얼른 다가가 그녀를 잡았다.

서정우가 말했다.

"겨우 이틀 쉬었다고 가르쳐 준 거 다 까먹었나 보네요."

"이건 다른 동작이잖아요."

"원래 배운 것을 조금만 응용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안 충분해요. 이러다 저 죽어요."

"죽진 않겠지만, 이대로는 좀 위험하긴 하겠군요."

이선화가 몸에 힘을 조금 뺐다. 서정우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등에 손을 댔다.

이선화가 말했다.

"아. 좋다."

"안 좋습니다. 자세를 조금 더 안전하고 쉽게 바꿔보죠. 멋은 좀 덜하겠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

김성준이 이선화가 서정우에게 살짝 안겨 있는 모습을 보며 CF 감독에게 물었다.

"카메라는 확실히 통제하셨지요?"

"물론입니다."

이 CF 촬영 현장에는 외부 카메라는 처음부터 반입 금지였다.

서정우를 찍는 것도 금지됐다. 이렇게 갑자기 개입하다 찍히는 건 삭제하기로 했다. 그게 그가 이 일을 도와주는 조건이다.

CF 감독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서정우가 넘어지는 이선화를 살짝 안아서 바로 세워주는 저 장면 말입니다. 그냥 써도 되는데…. 아. 저거 진짜 대박인데. 저 분위기. 와. 이선화 씨 지금 살짝 안겨서 짓는 저 표정."

"쓰면 안 됩니다."

감독이 김성준에게 물었다.

"사장님. 저 두 사람 혹시 사귑니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선화 씨는 무척 즐거워 보이는데…."

"사적으로는 어떤 관계이든, 공식적으로는 아니어야 합니다."

김성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서 형사님이 노출되는 영상은 확실히 삭제하세요. 괜히 남겨뒀다가 영상 유출되면, 서 형사님이 직접 잡으러 다닐 겁니다. 저도 가만히 안 있겠습니다."

CF 감독이 어쩔 수 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정우 형사니까… 유출하면 바로 잡히겠네요."

"물론입니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분이 왜 그렇게 사진을 싫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사건 수사할 때 편하다더군요."

"아. 하긴."

사건 수사는 핑계다.

얼굴이 너무 팔려서 사람들의 눈에 익으면, 몰래 활동한 현장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체력 소모가 심한 액션은 오후에 다시 찍기로 했다. 어차피 동작을 수정할 시간도 필요했다.

곧바로 일상 장면 촬영으로 넘어갔다.

이 CF는 액션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선화가 그 영상이 나오는 TV를 보는 장면도 중요하다.

이선화는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잔을 들었다. 그것도 다 촬영의 한 장면이다. 여러 방향에서 카메라가 그녀를 찍었다.

박현아는 친구 역할을 할 때는 소파에 같이 앉았다. 비서 역할을 할 때는 사무용 정장을 입고 옆에 서 있었다.

메이드 옷으로 갈아입고 차 세트가 담긴 쟁반을 들고 서 있는 장면도 있었다. 박현아는 노출이 조금 있는 메이드 옷을 입고 찍을 때는 살짝 부끄러워했다.

서정우는 어이가 없어서 김성준에게 물었다.

"저 장면도 CF로 나갑니까?"

"감독이 개인 취향으로 밀어붙인 것 같습니다만, 광고주 쪽에서 통과시킬 리 없습니다."

지금 촬영한 것 중에서 어느 장면이 쓰일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는 몇 개가 돌아가면서 사용될 수도 있다.

서정우는 뒤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눈으로는 연기 중인 두 사람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초저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 시나리오. 그리고 권세창 살인 사건. 그건 일단 저쪽에 가서 단서가 있는지 알아본 후에 이쪽에서 시작할지 말지를 결정해야겠다. 저쪽에도 단서가 없으면 그 시나리오는 포기하는 수밖에.'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성물 단검은 반드시 찾아야지. 양쪽 세계의 단검이 둘 다 성물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이선화는 미모만이 아니라 연기력으로도 유명한 톱스타이고, 박현아도 연기력이 꽤 괜찮은 배우다.

배우들이 워낙 잘해서 오전 촬영은 큰 문제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예정된 작업이 끝났다.

CF 감독이 말했다.

"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푹 쉬고, 오후에 다시 만납시다. 이선화 씨는 오후에 힘 많이 써야 하니까 식사 제대로 하시고요. 주스만 드시면 쓰러집니다."

이선화가 방긋 웃었다.

"그래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고요."

"이 호텔 스카이라운지가 꽤 괜찮습니다. 거기 가봐요."

"그럴게요."

박현아가 얼른 말했다.

"선화야. 나도 같이 먹어도 돼?"

"너도? 뭐야? 너 무슨 꿍꿍이야?"

"나만 따로 먹으면 심심하잖아."

"수상한데?"

"에이. 아니야."

이선화는 원래 서정우와 둘이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스카이라운지에서 그러면 또 열애설 기사가 뜰 수도 있다.

'난 뭐 상관없지만, 정우 씨는 그러면 곤란한 것 같으니까 방패막이가 필요하긴 하지.'

"알았어. 같이 가자."

두 사람이 서정우에게 다가갔다.

이선화가 물었다.

"정우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박현아가 끼어들었다.

"어머. 혹시 또 새로운 살인마나 테러리스트를 잡으시려는 거예요?"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요. 개인적으로 뭘 좀 찾아야 해서 방법을 궁리 중입니다."

이선화가 서정우의 팔을 꼬집었다. 서정우가 왜 그러나 싶어서 돌아보았다.

"왜…."

"그냥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감독님이 여기 스카이라운지 추천해 주셨어요. 맛없으면 감독님 탓해야지."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이선화와 박현아는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는 스카이라운지로 직행하는 게 아니었다. 세 사람이 복도를 걸었다.

이선화가 말했다.

"오늘 내가 다 살 테니까 뭐든 다 시켜요. 저번처럼 오인 분 넘게 시켜도 돼요. 아니다. 그냥 메뉴판 이쪽부터 저쪽까지 다 달라고 할까요?"

"그날은 배가 많이 고파서 그런 겁니다."

그때는 레드 포션의 반동 효과로 평소보다 많이 먹긴 했다.

"돼지 한 마리 키우는 줄 알았어요."

그들의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한 사람은 2미터의 키에 몸무게가 170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였다.

그 거구의 남자가 갑자기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돼지?"

곧바로 거구의 남자가 영어로 욕을 쏟아냈다. 그 목소리가 워낙 커서 이선화와 박현아는 깜짝 놀랐다.

같이 있던 마른 남자가 급히 말했다.

"제이슨! 잠깐만 기다려!"

그 마른 남자가 이선화를 향해 화를 냈다.

"뭐해요? 빨리 사과해요!"

이선화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외국 남자가 거칠게 욕하는 걸 듣고 놀라기는 했다. 그런데 사과하라는 말을 듣고 당장 삐딱해졌다.

그녀가 얼굴을 가리려고 썼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내가 사과를 왜 하죠?"

"제이슨은 한국 욕은 다 안단 말입니다. 방금 제이슨에게 돼지라고…. 어? 이선화?"

"그쪽한테 한 말이 아닌데 왜 시비세요?"

남자는 당황했다.

"아니, 그게…."

그 남자는 이선화가 일반인인 줄 알고 사과부터 요구했다. 그런데 선글라스를 벗자 톱스타가 튀어나왔다.

남자가 서둘러 설명했다.

"여기는 제이슨 잭슨입니다. 아시겠지만 종합격투기…."

"몰라요."

"세계 랭킹 13위입니다만?"

"그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