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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카를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새끼 늑대가 기어이...!'

모든 사람이 아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정치판에서는 초반에 분위기를 가져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번 반전된 분위기를 뒤집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제국을 위한 운운하며 강하게 나갔다. 현재 세금을 산정하는 방식이 카를로에겐 더없이 유리했기 때문에.

'비율제라니, 그런 미친 소리를!'

아벨이 제시한 방식대로라면, 카를로는 기존에 내던 세금의 몇 배를 내야 했다.

그간 많은 부를 축적해왔던 그에게, 이것은 너무나 뼈아픈 피해였다.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자신과 몇몇 가문을 제외한 모든 영지에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다른 영지에서는 좋다고 하자 하겠지.'

무엇보다, 카를로가 더 내야 하는 금액은 다른 영지의 세금이 줄어든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었다.

결과적으로 테오도어 황제의 손에 들어오는 돈은 훨씬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저 굶주린 돼지 새끼가 이 방식을 거부할 리가 없다고!'

카를로는 마음속으로 테오도어 황제를 까내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 황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성녀, 라헬이 들었다면 좋다고 박수를 칠 만한 욕설이었다.

'막아야 해.'

이 방식이 통과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리고 바로 이 방식이,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는 길인 것입니다."

아벨은 얄밉게도 카를로의 논리를 역으로 사용했다.

제국을 위해서, 라는 말은 아주 견고한 방어벽이자 강력한 무기였다.

그 논리 앞에서 카를로의 모든 반격은 오로지 제 영지의 이익만을 탐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혹시, 마그나 모르텐을 아십니까."

아벨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카를로는 일이 더 꼬일 것을 직감했다.

흐릿해지는 동시에 슬픔을 머금은 낯, 그리고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

아벨의 분위기가 변화하는 것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기랄.'

카를로는 잇새로 욕설을 삼켰다.

아벨은 제 얼굴이 가진 힘을 너무나 잘 알고 활용하고 있었다.

'저 겉만 번지르르한 놈이!'

얼굴만 놓고 보면 아벨의 매끈한 낯짝은 카인과 쌍벽을 이루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인과 다른 종류의 미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인은 타고난 선이 남성스러웠고 호쾌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아벨은 보다 선이 얇고 섬세해 그린 듯이 수려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대중의 감정을 움직이고자 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바로 지금처럼.

"그게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오는 거요?"

카를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사실 그는 마그나 모르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아벨의 페이스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다.

"마그나 모르텐?"

"거기라면 오베스트 영지의...."

영주들이 수군거리다가 카를로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위인이 있었다.

"마그나 모르텐이라."

이미 아벨의 제안에 홀라당 마음이 넘어가 버린 테오도어 황제였다.

"그곳이라면 알고 있지."

그가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베스트 영지의 중앙에 있는 위령탑을 말하는 것 아닌가."

"위령탑이라고 하면, 보통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곳 아니오?"

타이밍 좋게 미켈이 거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를로는 이를 악물었다.

'저 늙은 호랑이가!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묻기는!'

현재 상황은 마그나 모르텐에 대해 설명할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네, 맞습니다."

아벨은 사무치는 낯빛으로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영지 중앙엔 주민들의 묘지가 있지요. 하지만 오베스트 영지엔 그와 별도로 위령탑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깊이감이 더해졌다. 원래 미성이었던 음색이 더욱 매력적인 울림을 품었다.

"바로 서쪽 산맥에서 제국을 지키다 전사한 기사들을 기리기 위한 곳이죠."

아벨은 영리하게도 영지 대신 제국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그런 만큼 아주 효과적이었다.

영주들의 낯이 초연하게 가라앉았다. 아벨은 그 면면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매일 그곳에 들러 제국을 위해 몸을 바친 기사들의 넋을 돌아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파오곤 합니다. 어떻게든 돕고 싶지만, 이미 죽어버린 자들은 결코 돌아올 수 없지요."

구구절절이 눈물의 곡조요, 듣는 이의 심금을 애틋하게 울렸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더욱 숙연해졌다.

"하지만 다들 슬픔을 가슴에 묻고, 비틀거리는 무릎에 힘을 줍니다."

아벨이 극적인 어조로 계속했다.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서, 제국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회의장의 모든 이들은 아벨의 연설에 감명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오베스트 영지가 잘 버텨주긴 했소."

"킨드리얼 가문이 아니었다면 서쪽 산맥의 몬스터가...."

제국 서쪽 구석의 오베스트 영지가 제국의 수호자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또한 모든 영지와 제국을 위해서. 다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벨이 말을 마치곤 자리에 앉았다.

회의장은 고요했다. 아벨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카를로는 연신 욕설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지금껏 그는 모든 회의 때마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며 휘둘러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쭉 이어질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적어도, 오늘 아벨 킨드리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고작, 저런 애송이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도 모자라, 맥없이 끌려가야만 하는 신세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라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더냐?'

하지만 아직,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카를로가 뒤쪽을 향해 눈짓했다.

"...."

친 아르단테파 영주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 한 명,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아벨 공자의 뜻은 잘 알겠소. 하지만 내 들은 바가 있어서 말이오."

메이슨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스쳤다.

"아벨 공자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 않던데."

회의장의 분위기가 조금 흔들렸다. 영주들이 작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아벨 킨드리얼이라고 하면...."

"소문이 썩 좋지는 않은...."

"망나니로 유명...."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아벨은 태연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그게 지금 이 회의와 관련이 있습니까?"

"관련이 없을 수가 없지. 발언한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니 말이오."

"아, 그렇습니까?"

아벨의 청보랏빛 눈동자가 깊이 모를 바다처럼 깊어졌다. 그 속에 스멀스멀 비치는 심연이 어두운 빛을 발했다.

"...!"

그와 눈이 마주친 메이슨이 몸을 움찔했다. 아벨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뗐다.

"메이슨 영주님께서, 최근에 아주 값진 목걸이를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모, 목걸이?"

"네. 카르다산 피죤 루비가 정중앙에 박힌, 다이아몬드로 체인을 만든 것 말입니다."

아벨의 입꼬리가 깊게 패였다.

"그 목걸이를 받게 될 사람이 참 궁금하더군요."

비밀스럽게 반짝이는 미소였다.

"물론 저택에 계시는 귀부인이겠지요?"

"—!"

메이슨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핏기가 빠져 나간 얼굴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 무슨! 내가 뭘 사든 말든 공자가 무슨 상관이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메이슨이 구입한 그 목걸이는 지금 자택의 부인이 아닌, 애첩의 목덜미에서 반짝이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무엇이오! 나를 협박하려는 거요?"

버럭 성을 내는 그를 향해 아벨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냥 궁금하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몹시도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더없이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

"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메이슨은 아벨이 쏘아 보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그.... 으흠, 험험."

애써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영주들은 또다시 수군거렸다.

"숨겨둔 첩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애처가로 유명하지 않았소?"

"금슬 좋다는 자랑을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더니만."

아르단테 파 중 다른 이, 타일러 영주가 벌떡 일어섰다.

"다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가 노한 얼굴로 분통을 터뜨렸다.

"소문만 가지고 이렇게 사람을 모함하면 되겠소?"

"그건 메이슨 영주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만?"

아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저도 들은 소문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발랑 까진 대꾸에 타일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 뭣이...!"

그가 분노를 토해내려는 찰나,

"푸웁."

회의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로 그간 아르단테 가문의 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언 영주들이었다.

그들이 비웃음 어린 얼굴로 낮게 속삭였다.

"아벨 공자가 맞는 말을 하는군."

"그러게 괜한 말을 꺼내서는."

"똥 묻은 개가 된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지 않소."

타일러가 씩씩대며 그런 영주들을 노려보았다. 메이슨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책상만 노려볼 뿐이었다.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벨이 느물거리며 타일러를 향해 말했다.

"저 사실 타일러 영주님께 배우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무슨...?"

아벨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타일러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쩜 그리 장부 작성을 기가 막히게 하시는지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자, 자자 장부?"

"예.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사업장을 쏙 끼워 넣어, 단가를 부풀리는 그 장부 말입니다."

아벨이 느릿하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정말 배우고 싶더군요."

Chapter 13. 타인의 논리를 무기로 삼는다. (5)

"-!"

타일러의 벌겋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

그리고 싸늘하게 얼어붙은 카를로의 눈을 마주했다.

'납품 비리.'

카를로는 아벨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타일러는 수드 영지의 특산품인 푸른 진주를 유통하는 역할을 했다. 아벨은 그가 그 장부에 장난질을 해 놨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그, 그게!"

타일러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정말 결백했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할 리 없었다.

"...으흠, 흠흠."

타일러가 카를로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 후 몇몇 영주들이 추가적으로 아벨을 공격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벤자민 영주님께서는 영지 운영을 참 알뜰살뜰하게 하시더군요? 보고되는 수입과 실제 사용하신 수입이 다르던데요?"

탈세.

"해리슨 영주님께서는 여기저기 맡겨두신 장물이 참 많으시던데, 어디서 그런 귀한 보물들을 찾아내시는 겁니까?"

장물 거래.

모두 제국에서 금지된 조항들이었다.

단순히 영지에서 패악을 부리고, 성격이 더럽다거나 하는 문제와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벨이 쏟아내는 무기는 어마어마했다. 영주들은 모두 치명타를 입고 장렬히 전사해야 했다.

아벨의 곱게 접힌 눈매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이래도 계속하실 겁니까?'

영주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니, 도대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이제 막 수도에 올라오지 않았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두렵구려.'

그들은 아벨의 입에서 어떤 폭탄이 터져 나올지 확인하는 대신, 그만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크크."

그런 회의장의 모습을, 테오도어 황제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벨의 폭탄 세례를 막기는커녕, 기꺼이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귀족들끼리 서로 헐뜯고 견제하는 광경은 어제 보아도 즐거웠다.

게다가 그 중심에 오늘 처음 참석한 스무 살의 청년이 있다면, 그 재미는 두 배로 불어나는 법이었다.

"...."

회의장이 완전한 침묵에 횝싸였다. 더 이상 손을 들어 아벨에게 공격을 가하는 영주는 없었다.

"카, 카를로 영주님...."

"이를 어찌합니까?"

카를로의 뒤에 앉은 영주들이 불안스레 속삭였다.

"...후."

카를로는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얼굴에 떠올랐던 분노와 당황을 지워냈다.

그리고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감정에 휩쓸려 행동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므로.

믿고 맡겼던 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도, 나섰던 영주들이 차례차례 침몰하는 것도 일단 머리에서 지웠다.

'대체, 저 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사실, 카를로도 그리 깨끗한 위인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몰래 저질러야 하는 일이 많은 법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벨은 계속 카를로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덫을 준비한 채 기다리는 사냥꾼의 미소였다. 흥분하여 이성을 잃은 사냥감이 스스로 덫에 걸려들기를 의도하는.

'설마 저놈이 마레 길드의 일까지 아는 건 아니겠지?'

그걸 시험해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도박을 거는 것은 무리수였다.

카를로는 아벨의 무기를 확인해보는 대신, 일단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두고 보자.'

결코 장난스럽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벨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하지만 다음엔 기필코!

카를로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가장 발언권이 강한 카를로마저 입을 다물자, 그를 따르던 영주들까지 덩달아 조용해졌다.

계속되는 침묵에 보좌관이 나섰다.

"대충 결론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만."

"음."

테오도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이 마지막으로 영주들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아벨 공자가 제안한 대로, 영지의 수입에서 지출을 제외한 순수익의 10%를 세금으로 산정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겠습니다."

미켈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하오."

상황이 제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거기에 편승하지 않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동의하오."

베니퍼가 새빨간 손톱이 보이도록 손을 쫙 펼쳤다.

"이 방법이 제국에 도움이 될 것 같소. 장기적으로 보아도 바람직하고."

영주들 대부분의 의견을 물은 뒤, 보좌관이 카를로를 바라보았다.

"나도, 찬성하겠소."

카를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어떤 항목을 수입 및 지출로 책정할지는 보다 세세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오."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인 뒤 투표를 진행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동의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슥, 슥.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처음에 다소 느렸지만, 어느새 53개의 손이 허공으로 치솟게 되었다.

"그럼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고, 세금 산정 방식이 비율제로 바뀌게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보좌관이 탁자 위의 망치를 집어들었다.

"수입 및 지출 항목에 대한 논의는 다음 회의의 안건으로 추가하겠습니다."

탕, 탕, 탕.

망치가 세 번 내리쳐졌다.

그것은 이 회의가 불러온 가장 큰 변화, 그리고 귀족 사이에 휘몰아칠 파란을 이용해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아벨의 첫걸음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기세 좋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끄응."

그 안에 앉은 남자, 필립은 연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죽겠군...."

언제나 그래왔지만, 그는 아벨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나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벨이 곁에 없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진짜 수도로 가버리신 건가?"

다시 생각해도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처음 아벨이 사라진 날, 필립은 그가 정말 인장을 훔쳐 영지 어딘가에 숨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주변 영지로 놀러 갔거나.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가봤자 얼마나 멀리 갔겠어?'

그는 그리 생각하며 오히려 이 시간을 즐겼다.

아벨이 없는 성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매일 사용인을 쥐잡듯이 잡던 이가 사라지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온 사방을 뒤지고, 자신을 들들 볶던 요나스까지 떠난 뒤.

아벨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X 됐다.'

필립은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아벨이 정말로 인장을 들고 수도로 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덜컥 든 것이다.

'어떡하지? 영주님께는 뭐라고 말하지?'

이미 그는 아벨이 요나스의 인장을 훔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게 자의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더라도.

필립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는 자였다.

'나부터 살고 보자.'

그래서 돌아온 디에고에게 사실을 각색하여 전달하기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뭐? 아벨이 인장을 훔쳐?"

예상대로 자초지종을 들은 디에고는 격분했다.

"이 미친 놈이, 그게 어떤 건 줄 알고 감히!"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요나스, 이 어리석은 녀석. 향초라니! 그런 얕은수에...."

"요나스 님께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필립은 사무치는 낯빛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요나스는 아벨의 농간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얼간이가 되어버렸다.

"아니, 아닐세."

디에고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놈이 작정하고 일을 쳤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심려가 컸겠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이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디에고가 머리카락을 북북 잡아 뜯었다. 그러다 손을 멈추고 필립을 바라보았다.

"자네, 요새 서류 처리 속도가 느려졌던데. 이것 때문이었나?"

디에고의 질문에 필립은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건 아벨 도련님이 안 계셔서인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처량한 표정으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성 안팎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알겠네. 좀 더 힘써주게."

그리 넘어가는 디에고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책상 앞에 앉아있어도 일이 끝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간 엄청난 속도로 서류를 처리하던 아벨이 사라짐으로써 생긴 부작용이었다.

"다음 세금은 어찌해야 할꼬? 예산을 끌어올 곳도 없는데."

디에고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미치겠군. 이번 안건 중 세금 관련 안건이 있던데."

한탄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그 중요한 자리에 가서 자기가 뭘 하겠다고! 일을 더 크게 만들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결국, 필립은 울며 겨자먹기로 수도행 마차에 올라야 했다.

'자네만 믿겠네. 아벨 그놈의 멱살을 잡아도 좋다고 요나스에게 말하게.'

디에고의 성난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으으, 아벨 도련님을 못 데려가면 난 죽을지도 몰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일단 가서 요나스부터 찾아봐야 할 듯했다.

"아이고, 이 나이에 수도까지 마차여행이라니."

허리가 지끈거리고 삭신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종일 앉아있는 것은 몹시 고되었다.

"그래도 가면 딸을 볼 수 있으니까."

그의 딸은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다. 간만에 딸의 얼굴을 보러가는 셈 치기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게 필립은 고통 속에서 다음 영지에 도착했다. 관문 앞에 마차를 세운 뒤 창문을 열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피곤에 절어 있는 경비대원 둘이 다가왔다. 한 명이 필립의 신분패를 확인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이 앞으로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이 지나가셨습니까?"

"아벨 킨드리얼님 말인가?"

되묻는 경비대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필립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기어이 일을 치셨구나.'

아벨은 사흘이 멀다 하고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미쳐 날뛰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조용히 수도로 올라갔을 리 없는 것이다.

'젠장, 몇 명이나 죽이신 거지? 이 일이 퍼지면 난 끝장이야.'

필립은 손을 덜덜 떨며 마차 문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얼른 마차에서 뛰어내려 경비대원들에게 굽실거렸다.

"호, 혹시 피해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요? 다른 영지에까지 소문이 나진 않았습니까?"

그는 품을 뒤져 돈자루를 꺼냈다. 영지에서 출발하기 전 디에고가 미리 준비해준 돈이었다.

"일단 이 돈을 받으시고 부디...."

"잠깐, 잠깐."

경비대원들이 손을 내저었다.

"무슨 피해자를 말하는 건가?"

"아벨님은 신분패 검사만 맡고는 바로 가셨는데?"

그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라?'

필립은 그제야 제가 헛다리를 짚었음을 깨달았다.

'아벨 도련님이 사고를 친 게 아닌가?'

냉큼 노선을 바꾸어 질문했다.

"그런 것 치곤 영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요?"

"...사실은, 다른 사람 때문에 좀 곤란했었다네."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왜, 그. 오베스트 기사단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요나스 클라인이었던가."

다른 경비대원이 말을 받자, 말하던 경비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난폭한 사람이었어."

"정말이지 경비원 생활 몇 년 만에 그런 꼴... 험험, 아무튼 막무가내였지."

"게다가 도련님의 이름을 마구 부르면서 달려가더군. 명색이 기사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건가?"

"예?"

필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수도에 가봐야 할 이유가 늘어났다.

Chapter 14. 타인이 탐내는 것을 가로챈다. (1)

황궁에서 가장 크고 넓은 장소인 연회장.

천장에선 화려한 샹들리에가 불을 밝히고, 곳곳에 제국 황실의 문양을 수 놓은 휘장을 드리워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현재 이곳에는 귀족 회의를 끝낸 황제와 영주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아, 배부르다.'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고 있는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지금껏 귀족 회의는 본회의가 끝난 뒤 만찬, 그리고 피로연까지 함께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때문에 연회장 옆에 딸린 만찬장에서 식사를 마치고 이곳으로 이동해온 참이었다.

'역시 황실의 음식은 수준이 높군.'

포만감 가득한 미소가 치밀어 오른다.

아까 다과를 들 때부터 기대했었는데,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가 레퀴엠을 쥔 후로 예전보다 음식을 덜 즐기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황궁의 음식은 내 사라졌던 입맛을 되돌아오게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원작에서도 평가가 후하기로 유명했었는데.'

제 영지의 온갖 산해진미에 익숙한 카인도 황궁의 음식을 접하고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때 원작에서 음식 묘사에 어찌나 공을 들였던지, 병상에 있는 와중에도 먹고 싶다고 군침을 흘렸었는데.

당분간 수도에 더 머무를 예정이니 그동안 이런 고급 음식을 즐겨봐도 좋을듯했다.

그러려면 역시....

'엘리체를 갈아 넣어야겠군.'

이미 지금도 열심히 갈리고 있겠지만. 회의가 끝나고 그녀를 만날 시간이 기다려졌다.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됐어.'

벤데타 길드에서 협조를 잘 해준 덕에 성공적으로 오늘 회의를 잘 끝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도 정보지만, 엘리체가 조사해 온 내용이 아니었다면 영주들을 압박하는 것이 순조롭진 않았을 것이다.

'조만간 성녀를 만나봐야겠네.'

생각해둔 계획을 추진하려면 성녀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성녀가 가지고 있는 세레나드의 힘이 필요한 거지만.

"아벨 공자."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 나를 불렀다.

"...미켈 영주님."

나는 생각에서 깨어나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켈이 몇몇 영주들을 대동하고 내게 다가왔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다른 영주들이 아벨 공자와 대화하고 싶어 안달이더군."

그것은 그가 늘 얼굴에 띄워두는 의례적인 미소와는 달랐다. 진정으로 나를 기꺼워하는 표정이었다.

'아까 회의 결과가 퍽 마음에 들었나 보네.'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니 아니 그러할까.

그동안 앓던 이 같은 세금 문제를 해결했을뿐더러, 늘 눈엣가시처럼 굴던 카를로마저 격파해줬으니 말이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미켈의 뒤에 서 있는 영주들의 얼굴엔 나를 향한 호의로 가득했다.

"반갑습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라고 합니다."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그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아까 아벨 공자의 당당한 모습은 잘 보았소."

"내 그간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네."

"회의에 처음 참석한 거라곤 믿을 수 없게 차분하던데. 도통 긴장하지도 않은 것 같고."

연이어 쏟아지는 칭찬에 나는 씩 웃었다.

"긴장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할 말만 하고 앉는 것일 뿐인데."

자신만만한 대답에 그들이 움찔, 했다가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이 정도 배짱은 되어야 그리 말을 술술 하는 거겠지."

"내 이토록 패기 넘치는 젊은이는 또 오랜만에 보는군."

그들의 얼굴엔 내 소문을 안다는 꺼림칙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소리 낮추어 속삭였다.

"원래 소문이라는 게 돌고 도는 것 아니겠나?"

"또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다 보면 너무 와전되는 게 많단 말이지."

"그러니 아까 일은 신경 쓰지 말게나. 우린 그런 혐잡꾼들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으니."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소문에 귀 기울이지 않는 대범한 이로 추켜세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다들 안목이 높으시군요."

빙그레 웃으며 덩달아 치켜세워주자 그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자자, 이렇게 서 있기만 하지 말고."

미켈이 주의를 환기했다.

"그렇게 떠들기만 하면 황궁 조리장들이 서운해하지 않겠나."

다들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연회장 곳곳의 테이블 위는 온갖 화려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소스를 곁들인 굴구이라든가, 신선하고 탱글탱글한 살점의 생선회 등.

'딱 술에 먹기 좋은 종류들인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켈이 중얼거렸다.

"마침 한잔하기 좋은 메뉴들이로군."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곤 설명하듯 말했다.

"회의하다 보면 언성을 높이거나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있지. 그래서 이 피로연엔 서로 회포를 푸는 목적이 있다네."

미켈이 저 멀리 서 있는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물론, 긴 회의를 하며 쌓인 피로를 해소하라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거라면 그냥 빨리 귀가하는 게 더 도움이 되겠죠."

내 대꾸에 미켈이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정확하게 알고 있군. 꼭 회의에 여러 번 참석해 본 것처럼 말일세."

미켈의 손짓을 본 시종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그 모습을 본 영주들이 울상을 지었다.

"또 시작이시군 그래."

"누가 좀 말려보시오."

영주들의 원성에도 미켈은 꿋꿋하게 시종을 향해 주문했다.

"위스키, 그리고 잔은 네 개 주게."

주문을 마친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같이 마실 텐가?"

"좋습니다."

내 대답에 영주들이 탄식을 흘렸다. 그들은 불쌍한 어린 양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잔 하나 더 추가."

"예, 알겠습니다."

시종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물러났다. 주문을 마친 미켈이 내게 물었다.

"술은 좀 즐기는 편인가?"

"아직 취해본 적은 없습니다."

호기로운 대답에 미켈의 눈가에 흥미가 떠올랐다.

"제법 주량이 센 모양이군?"

북부의 노드 영지는 주류 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곳이다. 물론 그것은 수도처럼 술의 향기와 맛을 즐기는 문화는 아니었다.

'콜데스테였던가.'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에 들어가 누가 술을 더 많이, 그리고 오래 마시는지 겨루는 대회.

그야말로 얼어 죽기 딱 좋은 행동이다. 그런데도 이 대회는 매년 성황리에 치러지곤 했다.

[술에 취하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

...라고, 북부인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패기와 승부욕, 그리고 술을 향한 사랑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따라서 노드 영지 또한 오베스트 영지처럼 독한 술을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린 힘든 현실을 잊으려고 마시는 거긴 하지만.'

어쨌건 두 영지 사이엔 비슷한 점들이 많았다. 그 사실이 미켈과 나를 가까워지게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었다.

"요청하신 위스키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곧 시종이 요구한 술과 잔을 쟁반에 담아 왔다. 미켈이 쟁반을 받아들더니 손수 병을 땄다.

"어디 보자."

그가 위스키의 향을 맡곤 빙그레 웃었다.

"30년산 위스키로군. 아주 품질이 좋아."

"아니, 저희에게 맡기시지 않고...."

"내가 하겠네."

주변 영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직접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리고 한 잔을 집어 들더니, "자, 한 잔 받게."

내게 내밀었다.

'-!'

나는 눈을 크게 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까지 호의적이라고?'

일단 미켈이 술을 권하는 것은, 나를 그들의 견고한 울타리에 넣어주겠다는 의미였다.

첫 회의를 마치고 이 정도로 가까워진 것도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다른 영주들을 제치고 내게 가장 먼저 잔을 내밀 줄은 몰랐다.

'좀 섣부른 거 아닌가?'

의외로 다른 영주들은 이 상황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저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상황을 관망할 뿐.

'...아하, 그런 건가.'

아무래도 내가 이들에게 꽤 높은 점수를 딴 모양이었다. 하긴, 누가 회의 때 그리 속 시원하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을까.

'아니, 어쩌면....'

미켈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침착하게 잔을 받는 내 모습에 미켈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자자, 잔들 받게나."

그가 나머지 영주들에게도 잔을 돌렸다.

"술의 연식이 높을수록 향이 깊고 풍부해진다고들 하지요."

"좋은 술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들 썩 내키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술 자체에 대한 불만족은 없어 보였다.

"누가 고른 건데 당연하지 않겠나."

미켈이 피식 웃고는 나와 영주들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자, 건배하지. 물론, 첫 잔은 원샷일세."

"하하하...."

영주들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밀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잔을 갖다 댔다.

쨍!

잔끼리 부딪히는 맑은소리가 흩어지고, 다들 동시에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위스키가 각자의 목을 타고 꿀꺽꿀꺽 넘어갔다.

"술맛이 참 좋군."

잔을 깨끗하게 비워낸 미켈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누가 보면 위스키가 아니라 물을 마신 거라 착각할 정도로.

주변의 다른 영주들은 벌써부터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첫 잔을 다 마시지 못한 채 남긴 이도 있었다.

"왜 이런 고약한 술만 골라 드시는 겐지."

"도수가 약한 것은 술로도 취급하지 않는 분이시니."

"처음부터 이런 술을 아벨 공자에게 권하면...."

걱정스레 나를 바라본 한 영주가 말끝을 흐렸다.

"권하면요?"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깨끗하게 비운 잔. 그리고 여전히 매끄러운 흰 얼굴.

내 낯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허허, 아벨 공자는 정말 술이 센 편이군?"

"취해 본적은 없다더니, 그리 말할만 하구먼."

영주들이 껄껄 웃으며 한 수 물러났다. 내 변함없는 얼굴을 본 미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 술 맛은 어떠하오? "

"만족스럽군요. 과연 베스티크 위스키답습니다."

주변의 영주들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게 그 위스키라는 걸 어찌 알았소?"

"이름은 말한 적이 없는데?"

"북부의 곡류를 발효해 만든 위스키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목으로 넘길 때 특유의 향이 느껴지더군요."

"허허, 미각이 대단히 예민한가 보군."

미켈이 다음 잔을 내밀며 덧붙였다.

"아니면, 미리 알아 온 거라던가?"

그의 눈매가 은근슬쩍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네.'

아까 다른 영주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대충 감 잡았겠지. 내가 철저하게 준비해서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요."

나는 잔을 받아들며 빙긋 웃었다.

"그것은,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지."

완곡한 동의에 미켈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미리 준비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네."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들고 있던 잔을 훅, 말끔하게 비워낸 뒤 내려놓았다.

"어떻게, 저에 대한 판단이 서셨습니까?"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 그가 던졌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제가 적인지 아군인지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과연 미켈이 내 편에 서줄지, 완곡하게 돌려 묻는 말이었다.

미켈, 더 나아가 노드 영지를 내 편으로 서게 만드는 것은 무척 중요했다.

정확히는 그의 딸, 레아 노드 콘첼라레는 카인을 상대하는 데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것이다.

"글쎄.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으로도 돌아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미켈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담겨 있었으나, 날카롭게 빛나는 청회색 눈동자엔 웃음기가 한 점도 없었다.

Chapter 14. 타인이 탐내는 것을 가로챈다. (2)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이 나이 먹고도 쉬운 일이 아닐세. 하물며, 혀에 독을 품고 있는 자는 쉬이 신뢰하기 어렵지."

나는 내 혀에 독이 있다고 말하는 그를 마주 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인정하겠네."

왜냐하면, 그의 눈매 끝에 묻어나는 진한 흥미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자네가 꽤 마음에 든다는 것."

미켈이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지금껏 이 회의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오늘처럼 즐거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네. 모두 자네 덕분이지."

"그러십니까?"

"그렇지. 하지만 흥미롭다는 이유만으로 손을 잡지는 않는 다네. 적어도 등을 맞댈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나?"

완전한 신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믿겠다는 말. 또한 본인과 협력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넌지시 묻고 있기도 했다.

하긴, 그 정도 되는 자가 쉽게 나를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할 리 없다.

'조금 더 공을 들여야겠군.'

아마 내일이 지나면 미켈은 온전히 나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가 원하던 것이 손에 들어올 테니까.

"그러셨군요."

나는 실망한 것처럼 어깨를 슬쩍 늘어뜨렸다.

"그렇다면 제 부탁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

미켈은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본색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는 듯이 입가가 미세하게 굳어져 있었다.

"글쎄. 우리가 벌써 청탁을 주고 받는 사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러기엔 아직 이르지 않은가?"

다소 날선 반응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오, 그럴리가요."

비어 있는 위스키 잔을 흔들며 말했다.

"아주 사소한 부탁입니다, 아주 사소한. 그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는."

"흐음."

"아마 미켈 영주님께서도 흔쾌히 들어주실 수 있을 겁니다."

미켈이 그제야 입가를 느슨히 늘어뜨리곤 물었다.

"어떤 부탁인가?"

"그건 내일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아마 내일이면 들어주실 마음이 생기겠지요."

미켈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무슨 부탁일지 몹시 궁금해지는군."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반응이었다. 하지만 눈가에서 아까보다 한결 강해진 호기심이 엿보였다.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냐는 얼굴이네.'

사람 심리가 그렇다. 이렇게 밑밥을 깔아두면 내일쯤이면 몸이 달아서 먼저 말하라고 재촉할 것이다.

"벌써 병이 비었군. 좀더 마시도록 하세."

미켈이 잔을 마저 비우고는 다시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렇게 시종이 두세 번 왔다가는 사이, 주변의 영주들이 서서히 나가떨어졌다.

"허허, 꽤 마시는데?"

"미켈 영주님이야말로."

이건 더 이상 술 마시기가 아니었다. 검과 검 대신, 술잔과 술잔이 오가는 비정한 결투였다.

"...허어."

"어이쿠...."

"난 더는 못 보겠소."

지켜보던 영주들이 혀를 내둘렀다. 나와 미켈이 해치운 위스키가 어느새 4병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젠 그 술을 가져다주는 시종마저도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벨 공자, 자네 참.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미켈의 말끝이 약간 뭉개졌다. 그의 낯은 술기운 덕분에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것 참 기쁜 소리군요."

물론, 내 낯은 조금의 변화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내가 위장에 들이붓는 술은 모두 레퀴엠 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취기 따위가 올라올 틈이 없었다.

예전에 마셨던 샴페인이 맛 좋은 물 같았다면, 지금 마시는 위스키는 꼭....

'맛 좋은 음료수?'

같았다.

조금 쓰고, 알싸한 향이 위장을 불태우다가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상황.

"이것, 참. 콜데스테에 자네가 안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겠군."

미켈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음 병을 쥐었다. 두 개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자네가 참전했다면 그 해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게야."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도 그렇고, 나와 이렇게 오래 술을 마신 건 자네가 처음이라네."

안색은 살짝 붉어졌지만, 미켈의 눈동자는 조금도 흐릿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미는 잔을 받으며 화답했다.

"영광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뜨거운 리그가 진행되던 중, 미켈이 내 등 뒤를 보곤 픽 웃었다.

"아무래도 노인은 이만 자리를 비켜줘야겠군."

"흐음."

나는 그가 건넨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안 비켜줘도 되는데.'

그가 누굴 보고 그리 말하는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등 뒤로 다가서는 몇 명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벨 공자."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언제 오나 했더니만.'

위스키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천천히 뒤로 돌았다.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를 피워올렸다.

"카인 공자."

카인 아르단테를 선두로 하여 세 명의 청년들이 서 있었다.

"젊은이들이 모였으니 늙은이는 이만 자리를 비켜주어야겠군."

미켈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카인이 허리를 숙여 미켈에게 예를 표했다. 그의 자세는 예법 교과서에 나올 것처럼 완벽했다.

"미켈 영주님의 시간은 모든 젊은이가 탐내는 귀중한 보물과도 같습니다. 부디 조금 더 머물러 주시지요."

"허허, 빈말은 관두게. 한창 또래들과 즐길 나이대 아닌가."

미켈 또한 예법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완벽한 거절을 선보이며 물러섰다.

"즐거운 시간 보내게들."

그리곤 붙잡을 틈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미켈의 등을 쫓는 카인의 시선에 아쉬움이 담겼다.

'카인이 그의 검술을 존경한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아니, 전 제국에서 미켈 노드 콘첼라레나 디에고 오베스트 킨드리얼을 존경하지 않는 젊은이가 있기는 할까?

더욱이 검의 길에 몸담은 자라면 말이다.

'아서라.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니까.'

미켈은 절대 카를로의 아들인 카인에게 곁을 내줄 이가 아니었다. 원작을 읽은 나는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내 질문에 카인이 청년들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그가 나를 보며 입을 뗐다.

"우리야 구면이니 넘어가고, 일단 소개부터 할까."

카인의 진행에 따라, 바로 옆에 서 있던 한 청년이 나섰다. 따뜻한 느낌의 금발 녹안을 가진 청년이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베넷 시모어. 시모어 가문의 장남이다."

외모만큼 밝고 활기찬 음성이 화사한 눈웃음과 더해진다. 그는 아마 첫인상에서 꽤 높은 점수를 받고 들어갈 것이다.

그 옆에 서 있던 잿빛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난 칼라일 페일던. 마찬가지로 페일던 가문의 장남이다."

이지적인 눈매 아래로 고집스럽게 입이 다물어졌다.

음유시인처럼 섬세하면서도 기사처럼 날카로운 외모가 뭇 여성들의 마을을 설레게 할만큼 근사했다.

물론 나는 조금의 감흥도 일지 않았다. 그저 원작의 흐름대로 잘 흘러가는구나, 하는 짧은 감상뿐.

'드디어 등장하셨군.'

이들의 이름과 정체는 이미 알고 있을뿐더러, 나타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두 청년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딱히 소개가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베넷과 칼라일. 원작 공인 카인 트리오.

어릴 때부터 카인과 함께 자란 이들의 우정은 몹시도 끈끈했다. 서로 카인의 오른팔과 왼팔을 자처할 정도로.

"...뭐라고?"

하지만 내 말이 그들에겐 다소 다른 의미로 전달된 모양이다. 베넷의 얼굴에 노한 빛이 떠오른 것을 보면.

"먼저 소개를 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야?"

베넷이 발끈해서 입을 열었지만,

"그만둬, 베넷."

카인의 제지에 멈추었다. 베넷은 부루퉁한 얼굴을 내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그래, 내가 참는다 참아."

칼라일은 그보다 조용한 방법으로 제 반감을 드러냈다.

"...."

새파랗게 가라앉은 눈으로 날 노려보는 방법. 내 행동이 퍽 마음에 안 든다는 표시였다.

그들이 그러건 말건, 나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불렀으면 말을 해."

사실 그들의 용건은 짐작하고 있었다.

'지오벤 클럽, 이었나?'

카인이 만들고 저 둘이 간부로 있는, 제국에서 내로라 하는 가문들의 장남들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알짜배기 정보를 공유했다. 그 수준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참석하는 이들의 면면 또한 범상치 않았다.

'일단 클럽의 수장이 카인 아르단테.'

거기서 이미 클럽의 재력은 다른 클럽의 추종을 불허했다.

거기에 베넷의 시모어 가문은 순수 혈통을 잘 지켜온 가문으로, 수도에서 손꼽힐 만큼 유서가 깊었다.

그뿐이랴. 칼라일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로, 대대로 그의 페일던 가문은 제국의 핵심 중추를 도맡아 왔다.

그러니 이 클럽이 현재 수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또한 수준이 높은 클럽이 된 것은 당연했다.

'그만큼 가입 절차도 까다롭지만.'

카인은 꼼꼼하게 가문의 힘과 가치를 가늠해 본 뒤 가입을 제안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클럽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내곤 했다.

그리고, 원작의 아벨에게 이 제안이 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많은 것이 달라질 모양이군.'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카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

카인의 눈가에 잠시 갈등이 스쳤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이래도 되는 건지 고민이 엿보이는.

갈등의 시간은 짧았다.

"아벨 킨드리얼."

카인은 금세 감정을 마무리한 뒤 차분히 말했다.

"제안할 게 있다."

느릿하게 내려앉는 음성은 갓 20대에 들어선 청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치 무게가 있었다.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옆의 두 사람이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는 것에 비해, 카인의 얼굴은 퍽 평온했다. 그새 내 삐딱한 태도에 적응이라도 한 듯이.

과연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클럽을 맡아 이끌만한 능력은 있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겠지.'

나는 비죽이 샘솟는 비뚤어진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제안?"

"내가 회장으로 이끄는 클럽이 있다. 이름은 지오벤 클럽."

"들어는 봤겠지?"

카인의 곁에 있던 베넷이 나섰다.

과연 원작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인공의 옆에 붙어 촐싹대는 유형의 캐릭터다웠다.

"솔직히 수도 임페로에서 우리 클럽을 모르면 간첩이지."

"모르는데?"

나는 천연덕스럽게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처음 들었어, 나는."

"아니, 무슨!"

베넷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 옆에 서 있던 칼라일이 끼어들었다.

"그쯤 해둬, 베넷. 수도에 '처음' 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점잖은 척 말하고 있지만, 칼라일은 베넷을 말리는 척 독설을 꽂아 넣는 유형의 캐릭터였다.

"어쨌건, 우리 지오벤 클럽은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긍정적인 교류를 나누고 있다."

카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해서, 난 아벨 공자에게 우리 클럽에 들어오라고 제안할까 해."

"지오벤 클럽에?"

"그래. 우리 클럽에 들어오면 얻을 수 있는 게 꽤 많을 거다."

말을 이어가는 카인의 얼굴은 클럽에 대한 자신감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쉽게 얻기 힘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보증하지."

"난 사실 아벨 공자를 영입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칼라일이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본인의 평판이 썩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

Chapter 14. 타인이 탐내는 것을 가로챈다. (3)

"하지만 카인이 아벨 공자를 영입하자고 하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베넷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카인을 못 이기거든. 한번 고집을 부리면 절대 안 꺾지."

"그래? 근데 나를 왜?"

나는 재밌다는 감정을 감추고 놀랍다는 듯이 반문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카인의 낯이 뚜렷한 정의감과 선량함으로 뒤덮였다.

"내가 직접 보고 겪은 모습을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오늘 회의에서 보여준 모습은 꽤 인상 깊었다."

"...."

"무엇보다 아벨 공자는 제국의 서쪽을 수호하는 디에고 킨드리얼 영주님의 아들. 우리 클럽에 들어올 자격은 충분하지."

카인의 음성에 점점 힘이 실렸다.

"아벨 공자에게 어떤 평판이 따라다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제가 믿고 행하려는 바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철저한 믿음이 가득한 말투였다.

"하지만 우리 클럽에 들어와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면 그 정도는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다."

과연 원작 주인공다운 당당한 모습이었다.

...아주, 재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흐음."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기울였다.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에, 카인이 이해한다는 듯 옅게 미소 지었다.

"뜻밖의 제안이라 놀랐을 거라 생각한다. 쉽게 오지 않는...."

"결정했어."

나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제안, 거절한다."

"좋...."

카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변화가 일었다.

베넷과 칼라일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내가 카인의 제안을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기색이었다.

"...."

카인의 얼굴 또한 매섭게 굳어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감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 아비, 카를로와 퍽 닮은 얼굴이었다.

"...지금 이게 어떤 기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윽고 카인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듯, 선심 쓰는 얼굴로 말했다.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 오리란 법은 없으니까."

이렇게 뻗대다간 재미없을 거라는 의미가 담긴. 그만 닥치고 우리 클럽, 정확히는 자신들의 휘하에 들어오라는 고상한 협박.

물론 카인의 그런 압박은 내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미켈의 중압감도 가볍게 넘긴 내가 이따위에 휘둘릴 리가.

"글쎄?"

나는 태연하게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렇게 자주 오는 기회를 좋은 기회라고 부르진 않지."

손가락을 귀에서 뗀 뒤 탁, 튕겼다.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거길 들어가냐?"

물론 거기 귀지가 붙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참고로 내 귀는 아주 깨끗하다.

카인은 내 저질스러운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뒤늦게야 내 말을 이해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좋은 점이 많기는 개뿔, 내가 들어가서 전혀 이득 볼 게 없잖아?"

"개... 개뿔?"

카인은 뜻밖의 단어에 당황한 듯 멍청히 중얼거렸다. 베넷과 칼라일도 인상을 찌푸리며 쑥덕거렸다.

"야, 개뿔이 뭐냐? 개의 뿔?"

"맥락상 그런 뜻이 아닐 것 같지 않나."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진한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다들 너무 곱게 자라서 이런 말은 모르나? 하여간 귀족가 도련님들이란."

그들은 그제야 내가 한 말이 비속어인 줄 깨달았는지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본인은 귀족가 도련님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나는 얼굴의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카인에게 빈정거렸다.

"어쨌건 카인 네가 말한 것들은 전혀 흥미롭지 않아. 내겐 별로 필요가 없거든."

"필요가, 없다고?"

"그래. 게다가 지금 내가 들어가 봐야 그리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데?"

카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꾹 쥐었다. 낮게 도사린 어조로 속삭였다.

"다음부터 그런 제안을 할 거면, 눈에서 알량한 우월감은 지우고 해."

"...."

"티 많이 나, 너."

카인의 옆얼굴이 삽시간에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끗 본 뒤 돌아섰다.

"그럼 이만. 더 이상 이 일로 귀찮게 하지 마."

말을 툭 던진 뒤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직 탐사를 마치지 못한 음식들을 향해서.

"저, 저 자식이... !"

등 뒤에서 베넷의 기가 막히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허."

칼라일도 나직이 한숨을 삼켰다. 소리 끝이 뭉개지는 것을 보니 이를 악무는 듯했다.

"... ."

카인은 의외로 조용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썩 조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 ❖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베넷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게 뭐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장 인줄 아나? 감사합니다, 하고 덥석 물어도 모자를 판에 뭐?"

그가 뒷목을 잡으며 탄식했다.

"미쳤다고 거길 들어가? 아니, 미친 건 본인 아니야?"

"심지어 카인이 와서 손수 제안했는데도 저런 태도라니."

칼라일이 못마땅한 말투로 거들었다.

"같은 귀족이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정말이지 기품이라곤 찾아 볼 수 없군."

그의 무표정한 낯에 경멸이 스쳤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너무나 귀족적이지 못해."

카인은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멀어져가는 아벨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그래서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런 그를 향해 칼라일이 일침을 놓았다.

"아벨 킨드리얼은 좀 그렇다고, 괴이쩍은 소문이 따라다닌다고 말이야."

베넷이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클럽에 들어올 수 있으면, 세상 모든 장남들 다 들어왔게?"

그의 낯에 유서 깊은 시모어 가문 특유의 긍지가 어렸다.

"수준이라는 게 있잖아, 수준이. 솔직히 오베스트 영지가 수드 영지에 비빌 정도는 아니지."

"물론 그의 아버지, 디에고 킨드리얼이 제국 최강의 검사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칼라일이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아버지의 무력이 강한 거지 본인이 강한 건 아니야. 그 둘을 혼동해선 안 돼."

카인은 잠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것은 속에서 들끓는 어떤 감정을 식히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채 삭이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하지만, 회의장에서 아벨 공자의 모습을 봤잖아."

심경을 대변하듯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그는 정말...."

카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속에 맴도는 생각을 입 밖에 냈다간, 왠지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카인, 카인. 들어봐."

다행히 칼라일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물론 아벨 공자가 오늘 보인 모습은 인상 깊었지. 카인 네가 감명 받은 것도 이해는 하고."

그는 손가락을 들어 까딱 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야."

칼라일이 특유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이 회의를 열 살 때부터 참관해왔어. 하지만 오늘 같은 상황은 정말 드문 경우지."

과연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말솜씨는 녹록지 않았다.

"그동안 저런 방식으로 회의를 주도하려 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

베넷이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는 자신도 안다는 듯이.

카인은 그저 묵묵히 칼라일의 말을 듣기만 했다.

"물론 있었어.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지. 왜냐? 그 발언을 뒷받침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

"내가 봤을 때 저 아벨 킨드리얼은 겉모습만 그럴싸한 쭉정이에 불과해."

그렇게 말하는 칼라일의 눈동자는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오늘은 세 치 혀를 잘 놀렸지만, 저 방법이 계속 통하진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칼라일이 호언장담했던 일이 빗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카인은 그제서야 느릿하게 반문했다.

"그럴...까?"

"확실하게. 그러니 아벨을 영입하려는 시도는 그만둬."

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베넷과 칼라일은 카인이 아직도 마음 깊이 수긍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카인, 넌 너무 순진해.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

"그래. 때로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사이가 있다고."

칼라일의 위로에 베넷이 한마디 보탰다.

"당장 나를 봐.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어도 칼라일의 속옷 색을 아직 몰라."

"그걸 네가 왜 알아야 하는데?"

"진정한 친구라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카인이 시무룩 해있을 때 그들이 곧장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카인은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너희들 말은 다 이해했어. 그러니 너무 걱정 마."

"걱정 안 하게 생겼냐. 우리가 네 성격 뻔히 아는데."

"그래. 카인 너는 평민하고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베넷과 칼라일은 구제할 길 없는 순수한 어린이를 보듯 카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카인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량한 우월감은, 지우라고.'

아벨의 그 한 마디는 카인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심중을 정확하게 찔렀다.

'아벨 공자를 클럽에 가입시키려고 했던 이유.'

친구들 앞에선 고결한 척 말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벨 킨드리얼이 이 클럽에 들어와 카인과 자신의 격차를 절감하고, 결국 카인의 위세에 고개 숙이는 것.

즉, 카인은 아벨을 찍어누르고 싶었던 것이다. 저 번지르르한 낯짝이 일그러지고, 끝내 제게 굴복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타인을 제 발밑에 무릎 꿇리고 싶다는 감정. 그것은 그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감정이었다.

카인은 이런 자신이 혼란스러워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왜 이러지?'

오늘 아벨의 등장은 카인에게 새로운 경험을 여러 번 안겨 주고 이었다.

"아무튼 아벨 킨드리얼은 아니야. 저 녀석은 싹수가 글렀어."

"괜한 수고 들이지 마. 그럴 시간 있으면 우리나 더 신경 쓰고."

"장자도 장자 나름이지. 저 놈을 넣느니 내 모자란 여동생을 가입시키는 게 낫겠어."

하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카인이 순수한 의도로 아벨에게 제안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제 어둡고 비뚤어진, 음험한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자신답지 않았다.

카인은 방금 한 생각을 자연스레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래, 난 친구들이 말한 이유 때문에 그랬던 거야.'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의 내면에서 합리화는 몹시도 쉽게 이루어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아벨 공자에게 다시 제안하는 일은 없을 거야."

카인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의 일은 모두 털어버린 듯이 개운한 미소였다.

"그래, 그래. 아벨 그 녀석은 나중 가면 분명 땅 치고 후회할 거야."

"그때 가서 바짓가랑이 붙잡아도 약해지지 말고."

베넷과 칼라일은 안심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카인은 그들의 얼굴에 깃든 무한한 신뢰를 결코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결코.

"그래, 알겠어."

카인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저기 아버지가 부르시는 것 같아. 이만 가볼게."

"그래, 나중에 클럽에서 보자."

"이번 주 금요일 저녁 맞지?"

셋은 서로 손을 흔들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카인은 사람들 사이에 북적북적하게 둘러싸여 있는 카를로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카인."

카를로는 늘 아들을 볼 때면 짓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아벨 공자는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

Chapter 14. 타인이 탐내는 것을 가로챈다. (4)

그는 카인과 친구들이 무슨 용건으로 아벨과 대화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오벤 클럽에 전폭적인 지지와 재력을 쏟아 부어주는 것도 그였다.

"...사실,"

카인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제안은 굳이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카인의 입술 새로 자연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각 가문을 대표하는 장남으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물 흐르는 듯한 말투 위로 약간의 오만함이 깃들었다.

"딱히 우리와 함께 할 만한 인물은 아니더군요. 친구들도 모두 동의했고요."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구나."

카를로는 다소 의외라는 듯 카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그게 필수는 아니지."

그가 손을 내밀어 카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선택을 믿겠다."

"네, 아버지."

카를로의 지지는 카인에게 새삼 힘을 주었다.

'그래, 난 틀리지 않았어.'

아버지께 사실과 다르게 말한들 어떠하랴. 어쨌건 아벨 킨드리얼이 자신의 클럽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결과는 똑같았다.

지금 카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생애 최초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거짓말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극도로 쉬워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괜찮으신 겁니까?"

카인이 소리를 낮추어 걱정스레 물었다.

"무얼 말이냐?"

카를로가 마찬가지로 소리를 낮추어 되물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카인, 적어도 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낯빛이 평소보다 희게 질려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원인이 분노라는 감정때문이라는 것도.

"안색이... 그리 좋지 않으십니다."

"회의가 길어져서 좀 피로한 것 같구나. 너무 걱정 마려무나."

카를로는 인자하게 웃어 보인 뒤 음료를 내밀었다.

"그보다 좋은 자리 아니더냐. 이 아비는 신경 쓰지 말고 즐기도록 하거라."

"...예."

카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버지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그가 음료를 마시는 자세는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귀족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카인 공자는 여전히 기품이 흘러넘치는구려."

"내 딸이 조금만 빨리 태어났어도 약혼을 주선해 봤을 텐데."

"하하, 누가 할 소릴."

그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꿀 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엔 대충 흘러 넘겼던 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말들이 카인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카인은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이어지는 귀족들의 뒷담에 더욱 진해졌다.

"헌데 그, 아벨이라는 청년인가? 정말 못 쓰겠더군."

"하여간 부전자전 아니랄까 봐. 뻣뻣한 꼴이 꼭 제 아비를 닮았더이다."

그리 떠들어 대는 것은 모두 회의 때 아벨에게 한 방 먹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카를로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열심히 아벨에 대한 입방아를 찧었다.

"하는 짓을 보아하니, 어릴 때 예법 교과서를 갖다 버린 게 분명하오. 그게 감히 회의에서 보일 태도요?"

"할 말 안 할 말이 따로 있지. 생각 없이 지껄이는 꼴하곤. 정말이지 불쾌했소이다."

"그러니 그놈이 하는 말은 잊어버리려고 하오. 이번 회의가 끝나면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 말하는 이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았다.

부디 카를로의 기분이 풀어지길, 그리고 아까 아벨이 터뜨린 폭탄을 잊어주길.

"하하."

카를로는 나직이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잔을 입에 기울일 뿐이었다.

귀족들의 등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렀다. 그들은 카를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 하하하...."

"그, 그래. 카인 공자께서는 참관해 보시니 어땠습니까?"

결국 그들은 어물쩡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카인이 그들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 번 훑었다. 그는 회의가 진행되는 긴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호오, 그랬느냐?"

카를로는 비로소 이 대화에 관심을 보였다. 카인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농업, 상업 등 많은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짧은 새에?? 하하. 녀석도 참."

"예. 제국민들을 다스리는 영주들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또, 아버지께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도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카를로의 입가가 조금 풀렸다.

"녀석, 기특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서,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인이 보석처럼 단단해진 눈빛을 보였다.

"언젠간, 저도 당당히 이 회의에 참여하고 싶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카인의 머릿 속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해 보였던 아벨이 맴돌고 있었다.

회의장의 중앙에 서서, 다른 영주들을 압도하며 자신 있게 의견을 피력하던 아벨 킨드리얼.

그 자리에 자신이 대신 서 있고 싶다고, 아니.

'나였다면 더 잘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이요, 선언이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카인의 올곧은 말투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아들아."

카를로는 그런 아들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이 회의장을 보며 그저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눈을 반짝이던 아들이, 짧은 사이 이토록 성숙해진 모습을 보이다니.

아버지로서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었다.

"그래, 아들아."

카를로는 목이 메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내 무엇을 위해 이 자리를 일궜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

"다 너를 위해서였다. 언젠가 반드시...."

이 제국의 모든 것, 그리고 전부를 네게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카를로는 눈을 꾹 감아 혀끝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죄었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게다가 오늘 회의로 인해 그 과정이 약간 지체될 수도 있었다.

카인에게는 이 제국을 가장 완벽한 상태로 온전히 넘겨주어야만 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하지만 머지않아, 정말 머지않아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카를로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짐했다.

표독스러운 눈길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저런 음식을 탐하며 신이 난 아벨이 보였다.

'내 기필코, 너 같은 놈에게 뺏기진 않을 거다.'

이번엔 순순히 물러서지만, 그게 그의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미미한 소란이 이는 것은.

"여기 들어오시면...."

"폐하께서...."

시종들이 쩔쩔매며 극구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무슨 일이오?"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탕!

이윽고 양쪽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화, 황녀님!"

시종의 애타는 외침이 그녀의 정체를 알렸다.

"-!"

소란이 일 때부터 입구를 쳐다보고 있던 카인은 흠칫 놀랐다.

고급 새틴 원단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새카만 드레스, 그리고 사슴처럼 쭉 뻗은 목과 팔을 장식한 고급 악세사리.

밤을 재단해 만든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은 반을 땋아올리고 나머지 반은 폭포처럼 흘러내리게 두었다.

그 한가운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 어떤 흠결도 없을 듯이.

자수정 같이 요요한 눈동자가 회의장 안을 훑었다.

"비올렛 황녀님!"

뒤따라온 시종이 숨을 헐떡였다. 그녀를 말리려다가 실패한 모양새였다.

"이곳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이 황궁에 내가 못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비올렛 황녀가 뾰족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연회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폐하."

그녀의 밀랍 인형 같은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갑작스러운 등장을 아버지가 탓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담긴. 그리고 애교로써 황제를 녹일 자신이 듬뿍 담긴 미소였다.

"오오, 내 딸."

과연 연회장 중앙에 서 있던 테오도어 황제의 입가에 불쾌감은커녕, 환한 웃음만이 맺혔다.

그는 몹시 소중한 보물, 혹은 아끼는 장식품을 보듯이 황녀를 바라보았다.

"여긴 무슨 일이더냐? 지금쯤 놀러 갔을 때가 아니더냐."

황녀가 이 시간이면 늘 카지노에서 죽치고 있다는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아이, 폐하도 참."

비올렛 황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폐하께서 오늘 중대한 회의를 하셨다는데, 어찌 놀고만 있겠습니까."

그녀가 뒤쪽의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제가 피로에 좋다는 음료를 준비해왔습니다. 부디 몸 상하지 않게 함께 드셔요."

"하하하하!"

테오도어 황제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내 딸은 못 당하겠군."

그가 커다란 손을 내밀어 비올렛 황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리 아버지를 생각하다니, 내 기쁘기 한량없구나."

"폐하를 생각하는 제 마음을 어여삐 봐주십시오. 그보다 어서 한 잔 받으시지요."

"오오냐, 얼른 줘 보거라."

테오도어 황제는 비올렛 황녀가 따라준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참으로 우애 좋고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허,참."

그 모습이 도저히 부녀지간으로 보이지 않는 게 사소한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카를로는 테오도어 황제의 얼굴과 비올렛 황녀를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미친 동안이로군. 어떻게 저 나이에 저 얼굴을 유지하는 건지."

테오도어 황제의 나이는 카를로와 비슷했다. 하지만 카를로의 낯에 희미하게 비치는 주름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카를로 또한 건강과 젊음에 좋다는 음식, 재료를 찾아 먹었지만 테오도어 황제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안 그러느냐?"

빈말로 나마 아들이 제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물음이었다.

"...."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카인?"

카를로는 옆을 돌아보았다가, 제 아들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인."

"아, 예."

재차 부르자 카인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가 머쓱한 얼굴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흐음."

카를로는 아들의 귀 끝이 살짝 빨개진 것을 포착했다.

"황녀가 마음에 들더냐?"

"예? 아니, 무슨!"

카인은 극구 부인했으나 카를로의 눈치는 비상했다.

"하긴, 황녀가 어여쁘긴 하지. 절세미인으로 유명한 제 어미를 쏙 빼닮았으니 말이다."

"아, 황후를요."

멍하니 대답하는 카인의 시선은 황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카를로가 픽 웃었다.

"어제 카지노에서 보지 않았더냐? 네가 간 시간대 쯤에 있었을 거다."

"예? 황녀가요?"

"그래. 비올렛 황녀는 카지노에 푹 빠져있기로 유명하지. 황궁에 없으면 거의 카지노에 있다고 하더구나."

"그랬습니까? 하지만 전...."

카인은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황녀가 카지노에 있었다고?'

카지노의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있긴 했다. 하지만 저런 고귀한 미모의 황녀를 못 알아보진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저 황홀하게 빛나는 자줏빛 눈동자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뭐, 서로 엇갈린 모양이구나."

카를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카인에게 손짓했다.

"따라오너라."

"예?"

"녀석, 싱겁긴."

그는 귀여운 아들을 보며 허허 웃었다.

"1황녀님께서 손수 행차하셨는데, 인사를 드려야지 않겠느냐."

꼭 제 아들의 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한 마디였다.

Chapter 14. 타인이 탐내는 것을 가로챈다. (5)

"아니, 저는...."

카인은 뭐라고 항변하려다가, 결국 못이기는 척 아버지를 따랐다.

"폐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벌써? 조금 더 머물지 않고."

"제가 여기 있어 봐야 무어 얻는 게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옥체평안하심을 확인하였으니 됐습니다."

"이런 기특한지고!"

비올렛 황녀의 말에 테오도어 황제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럼 그만 가보도록 해라."

"예, 폐하."

공손히 물러나는 비올렛 황녀를 향하는 황제의 시선이 퍽 훈훈했다. 조만간 황녀의 방으로 보석이 몇 상자 배달될 듯한 느낌이었다.

비올렛 황녀가 테오도어 황제에게서 뒤돌아 서는 순간,

"...흥."

그녀는 언제 방실방실 웃었냐는 듯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이 연회장으로 들어올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권태롭고 시시하기 짝이 없다는 낯.

의외로 비올렛 황녀는 바로 돌아서서 나가지 않았다.

"황녀님,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먼 길을 온 영주들 아니냐. 한 번쯤 눈에 익혀두어야지."

그녀가 연회장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시녀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 넘기면서.

눈이 마주친 영주들은 순간 예를 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하지만 비올렛 황녀는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슥 지나쳐버렸다.

"어...."

"으음...."

뻘쭘해진 영주들은 비올렛 황녀가 지나쳐가는 것을 멀거니 지켜볼 뿐이었다.

비올렛 황녀는 그렇게 영주들을 닭 쫓던 개로 만들며 연회장을 한 바퀴 돌 듯이 걸었다.

꼭,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오던 비올렛 황녀가 카를로를 발견했다. 그녀는 여태까지처럼 그를 지나치려고 했으나, "비올렛 황녀님을 뵙습니다."

카를로가 앞을 가로막는 게 더 빨랐다.

"아."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모습조차도 그림같이 아름다워서, 카인은 부지불식간에 감탄하고 말았다.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

비올렛 황녀의 목소리에 미미한 짜증이 서렸다. 빨리 지나가고 싶으니 얼른 비키라는 암시가 담긴.

하지만 카를로는 황녀의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도 굴하지 않는 인사였다.

"비올렛 황녀님을 뵙습니다."

느지막히 웃으며 손을 내미는데, 마땅히 거절할 핑계는 없었다. 그것도 제국을 쥐락펴락하는 주요인사의 손이므로.

"하아."

비올렛 황녀는 옅은 한숨을 삼켜내곤 손을 내밀었다. 카를로는 비올렛 황녀의 손등에 짧게 키스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방금까지는."

그 말은, 지금은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별로라는 건가?

카인은 비올렛 황녀의 말뜻을 해석하곤 아연해졌다. 카를로가 허허 웃더니 그런 카인을 끌어당겼다.

"처음 보시지요? 해서 인사드릴 겸 황녀님의 앞을 가로막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계산이 오가고 있었다.

첫째, 카인이 황녀를 제법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둘째, 다른 영주들이 보는 앞에서 황녀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

셋째, 황녀가 카인에게 첫눈에 반한다면 금상첨화.

"그쪽은?"

비올렛 황녀는 마지못해 묻는다는 투로 물었다.

누가 보아도 아들인 게 분명했으나, 굳이 그런 건 알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카인에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비올렛 황녀가 코 닿을 거리,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안녕하십니까."

카인은 그동안 갈고 닦은 예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적절한 각도와 속도를 준수해가며 허리를 숙였다.

"카인 수드 아르단테라고 합니다."

여느 황족이 오더라도, 심지어 황제가 보더라도 감히 지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사였다.

"...."

서로 다른 채도, 하지만 붉은 색채를 가진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순간 카인은 온몸에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비올렛 황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 만으로도 그랬다.

'...자, 어서.'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이어질 비올렛 황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양 뺨이 상기되며, 입술이 스르르 벌어지는 그런 반응.

이건 카인이 지금껏 일상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겪은 일이었다.

카인을 본 소녀들은 백이면 백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의 잘생긴 외모, 흠잡을 데 없는 예법과 상냥한 말투에 반해버리곤 했다.

그런데.

"인사는 잘 받았소."

비올렛 황녀는 바로 손을 거둬들였다. 온기라곤 조금도 없는 차가운 눈빛을 한 채.

"-!"

카인은 얼음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 되었다.

종종, 몇몇 영애들은 카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무관심한 척을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구는 그녀들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갈망이 일렁이곤 했다.

이번에도 카인은 황녀가 그런 부류의 반응을 보인 건가 싶었다.

그러나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트는 비올렛 황녀의 옆얼굴을 보곤 깨달았다.

'진짜, 관심이 없어...?'

그녀의 온 얼굴에선 명백하고도 뚜렷한 무관심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가장한 것이 아니었다.

비올렛 황녀는 진심으로 카인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

카인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비올렛 황녀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그의 인생 최초로 끼얹어진 극적인 패배였다.

비올렛 황녀는 회의장을 한 번 슥 둘러보곤 멈춰 섰다.

"하아, 없는 건가."

맥이 빠진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 아들의 쓰디쓴 패배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카를로가 나섰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비올렛 황녀가 그를 돌아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황녀의 입술이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카를로와 카인 등 뒤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 카인은 실망해 있던 것도 잊을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표정한 밀랍 인형 같던 비올렛 황녀의 얼굴에 또렷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반가움, 흥미, 그리고 약간의 분노.

지금의 비올렛 황녀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까 제 아비인 황제에게 인사를 건넬 때보다도 더.

그리고 그것은 그녀를 더욱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었다. 지척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멈출 만큼.

'대체 왜...?'

누구를 보고 저렇게 돌변한단 말인가?

카인은 무의식적으로 황녀가 보는 방향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 끝에는 훤칠한 키에 유독 돋보이는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 있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저 자식은 또 왜?

이제 카인은 아벨을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호칭이 무엇이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또각.

비올렛 황녀의 발걸음이 아벨 쪽을 향했기 때문에.

또각, 또각.

비올렛 황녀의 힐이 회의장 바닥을 울렸다. 안 그래도 황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던 영주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비올렛 황녀는 그렇게 썰물처럼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들며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바로, 아벨 킨드리얼이 있는 곳으로.

"음?"

미켈의 옆에 서 있던 아벨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갈라진 틈 사이로 여왕처럼 걸어오는 비올렛 황녀를 발견했다.

"오."

아벨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황녀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미소였다.

"비올렛 황녀님."

"황녀님을 뵙습니다."

분분히 고개를 숙이는 영주들과 함께, 그도 고개를 숙였다.

비올렛 황녀는 그런 아벨을 빤히 바라보며 다가갔다. 이윽고 그녀가 아벨의 앞에서 멈추었다.

"...."

비올렛 황녀의 눈동자가 아벨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그녀가 말없이 자신을 빤히 보는 데도, 아벨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시선을 맞받아칠 뿐이었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듯한 기묘한 대치는,

"그대의 이름은?"

비올렛 황녀가 아벨에게 손을 내밈으로써 끝이 났다. 연회장의 사람들 사이로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파도처럼 번졌다.

"황녀님이 무슨 일이지?"

"저렇게 인사를 청하는 건 처음 보는데요?"

"마치 아벨 공자를 찾아온 것 같지 않습니까?"

영주들은 서로를 바삐 쳐다보았지만 이 상황의 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라고 합니다."

노골적으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벨을 제외하면.

그가 손을 내밀어 황녀의 손을 붙잡았다.

"비올렛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벨이 천천히 비올렛 황녀의 손등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카인보다는 다소 투박한, 최소한의 예만 갖춘 인사. 아벨의 인사는 귀족의 것이라고 보기엔 상대를 향한 예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손등에 입술을 댄 뒤,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려 황녀를 지긋이 바라보기까지 했다.

"저, 저런!"

"허어, 세상에."

"비올렛 황녀 성깔을 모르나?"

예상치 못했던 결례에 영주들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아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그의 입매가 비죽이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 위로 깃털처럼 내려앉는 미소는 꿀 같이 달콤하면서도, 독을 품은 듯이 위험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은 곧 비올렛 황녀가 화를 내며 아벨의 뺨을 내려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

비올렛 황녀는 아벨의 무례를 야단치기는커녕, 굳은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엥?"

"저 황녀가 웬일로 가만히 있지?"

그리고 카인은, 아까보다 더 한 충격이 자신을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

비올렛 황녀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덕분에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뺨이 미미하게 붉어졌다는 사실을.

'...어째서?'

그것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리고 자신을 향하길 바랐던 황녀의 감정적 반응이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아닌 저 녀석에게, 비올렛 황녀가 끌린단 말인가?

카인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 때문이었다.

'나를 두고, 어째서?'

지독한 패배감, 그리고 박탈감.

분노로 입술을 떨어대는 그의 귓가에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두 사람, 잘 어울리긴 하네요."

"한 쌍의 선남선녀로군요."

도자기 인형처럼 완벽한 미모의 비올렛 황녀와, 수려한 조각상 같은 아벨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잘 어울렸다.

마치 한 폭의 명화에 등장할 것 같은 한 쌍이었다.

뿌득.

카인의 잇새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퍼졌다.

❖ ❖ ❖

나는 카인 쪽을 곁눈질로 살폈다.

'뭐야, 저 표정은?'

현재 카인은 불이 붙은 듯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어찌나 이글이글 타오르는지, 옆얼굴이 뜨겁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설마 질투하는 건가?'

카인은 나와 황녀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이것 참, 의외의 수확인데.'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카지노에서 일을 너무 잘 치른 모양이다.

'그냥 비올렛 황녀가 카인의 조력자가 되는 걸 막으려던 것 뿐이었는데.'

불꽃처럼 서로 첫눈에 반해버린다는 원작의 전개답게, 카인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반해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비올렛 황녀의 미모는 독보적이긴 하다.

이목구비 자체가 어찌나 오밀조밀하면서도 완벽한지 평범한 인간과는 종 자체가 다른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니까.

그런 그녀가 자신은 본체만체하고, 내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니 속이 몹시 들끓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군.'

흡족한 마음에 입꼬리가 꿈질거렸다. 역시 카인을 이겨먹는 일은 너무나 재미있다.

Chapter 14. 타인이 탐내는 것을 가로챈다. (6)

사실 나는 비올렛 황녀가 회의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기둥 뒤에 슬쩍 몸을 숨긴 터였다.

'원작에서는 카인을 보러 나타나긴 했는데.'

내 덕분에(?) 둘이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번엔 날 찾으러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내가 황성을 가리키는 걸 보긴 봤으니까.'

물론 난 그녀를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저 성깔에 날 가만둘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하하, 아벨 공자! 이야기는 잘 끝났는가?"

내 어깨를 짚는 미켈 때문에 할 수 없이 기둥 밖으로 나와야 했다.

"자자, 한 잔 더 해야지! 얼른 잔을 받게!"

껄껄껄껄 웃는 미켈의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이 노인네, 그새 취했어?

내가 카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위스키를 더 마신 모양이었다.

"아벨 공자, 수고하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네."

"그대만 믿고 있겠네."

주변의 영주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몸이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었다.

야! 나한테 폭탄 처리반 시키지 말라고!

그러던 와중,

또각, 또각.

높은 힐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술에 취해 위스키 병을 흔드는 호랑이 노인네인가, 나를 향해 이를 갈고 있는 성질 더러운 황녀인가.

'그래도 후자가 낫다.'

미켈에게서 슬쩍 거리를 벌리며 비올렛 황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즉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날 찾아온 게 맞았군.'

흉흉하게 번득이는 자줏빛 눈동자는 내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뭐, 별 일 있겠어?'

사실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여긴 많은 영주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이고,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때처럼 서로의 정체를 가리는 가면이 없으니까.

과연 가까이 다가온 비올렛 황녀는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의 이름은?"

그리고 나를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묻기까지 했다.

카지노에서 날 쥐잡듯이 쫓아다녔던 그때와는 참으로 딴판이었다.

하지만.

'어휴, 눈빛 봐. 사람 잡겠네.'

번쩍번쩍 빛나는 안광엔 오늘은 절대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쯧, 귀찮은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미켈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녀와 어울려줄 생각 따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의 저 들끓는 시선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이 왈가닥 황녀에게 이런 기능이 있었군.'

그녀는 아주 효율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카인을 엿먹이는 걸 돕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귀찮음을 조금 감수해줄 용의가 있었다.

'조금 상대해줘 볼까.'

아무래도 카인의 얼굴을 구기는 건 내 새로운 취미가 될 것 같다. 마침 그 취미를 살리기 좋은 체스말도 곁에 있고 말이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라고 합니다."

비올렛 황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린 뒤, 시선을 들어 올려 얼굴을 응시했다. 황녀에게 새로운 무례를 또 저지르는 셈이었다.

비올렛 황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는 것을.

비올렛 황녀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인사를 받기도 전에 손을 빼내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

비올렛 황녀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탓이었다.

"무슨 짓이야?"

비올렛 황녀가 소리를 낮추어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내가 뭘?"

비올렛 황녀의 뺨을 물들였던 붉은 빛이 이제 귀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닿아 있는 내 입술 새로 나온 숨결이, 그녀의 손등을 간질이는 탓이었다.

비올렛 황녀가 하, 콧방귀를 크게 뀌더니 으르렁거렸다.

"너는 지금이나 그때나 정말...!"

"그때라니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야! 너 가면 벗었다고 내가 몰라볼 줄 알아?"

비올렛 황녀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아이고, 그새 호칭은 집어 던지고 야 타령이네.

비올렛 황녀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낮추어 씩씩댔다.

"죽고 싶어 진짜? 내가 그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르지?"

"그러니까 왜 과음을 하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하셨어야죠."

나는 이죽거린 뒤 씩 웃었다.

"그래서, 진짜 죽이기라도 하게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처량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게 궁금해하셨던 얼굴인데. 죽이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황녀의 입가가 흠칫 떨렸다. 정곡을 찔린 듯이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아, 역시 원작 공인 꽃미남의 얼굴은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애처로운 표정을 지을수록 효과는 강력했다.

그 기세등등하던 황녀가 주춤거릴 정도로.

"게다가 저는 황녀님을 오늘 첨 뵈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아니, 그건!"

"화를 내려면 가면을 쓴 그분께 하셔야죠. 왜 애꿎은 사람에게 하고 그러십니까."

"너, 너어 진짜!"

"어허, 너라니요."

나는 짐짓 근엄하게 속삭이며 황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곳은 황궁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시길."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황녀가 내게 속삭일 수 없는 거리만큼.

"저...!"

비올렛 황녀는 멍하니 손을 늘어뜨린 채, 뒷목을 잡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게 속삭일 수는 없었다. 지금 말했다간 무슨 대화를 하는지 주변에 알려질 테니 말이다.

'두고 봐.'

비올렛 황녀가 나를 쏘아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나 또한 입모양으로 응수했다. 내 대꾸에 황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 것은 물론이다.

"...."

씨근거리던 비올렛 황녀가 숨을 골랐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주변의 이목이 모조리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깨닫곤,

"흠흠."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아무튼, 아벨 공자. 황궁에 온 것을 환영하오."

이윽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도도한 황녀 바로 그 자체였다.

"이토록 반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매끄러운 응대에 비올렛 황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어떻게든 내게 한 방 먹이고 싶어 안달난 표정.

이윽고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말이 없어졌다.

'...얼씨구?'

비올렛 황녀를 바라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눈이 오묘하게 빛나는 것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저, 저, 또 시작이네.'

그녀가 뭔가 장난을 치고 싶을 때 떠올리는 눈빛.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놀아난 영애와 영식들의 수가 열 손가락을 넘었다. 물론, 카인도 그 장난의 피해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장난질을 웃으며 넘겼고 결국엔 키스를 퍼붓-

'...여기까지만 하자.'

아무튼 못된 장난이 시작되리라는 징조였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지만 비올렛 황녀의 시선을 유심히 살폈다.

"흐음."

비올렛 황녀가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그건가.'

원작에서 자주 써먹던 그 기술을 시전하려는 모양이었다.

비올렛 황녀가 방금 본 잔을 집어들며 나를 응시했다.

"그래, 회의를 참관한 건 오늘이 처음일 텐데. 어땠소?"

"아, 전 참관은 안 했습니다."

"...?"

비올렛 황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 자리엔 어떻게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디에고 영주가 보이지 않는군."

"아버지를 대신해서 왔습니다. 오베스트 영지 대표로."

"호오?"

비올렛 황녀가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거 놀라운 이야기로군. 확실한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지?"

"오, 물론이죠.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디에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펄펄 뛰었을 소리를, 나는 태연히 지껄였다.

"그래, 그럼 회의에 참석해보니 어땠소? 좀 지루하지 않나?"

비올렛 황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무슨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들을 길게 늘어놓고 있는지. 전부 하품이 나올만한 주제들이던데."

"회의가 평소보다 길긴 했지만, 그리 지루하진 않았습니다."

"그래? 폐하께서는 회의보다 지루한 건 없다고 늘 투덜거리셨는데?"

제 아버지의 사담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비올렛 황녀에게, 나는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아마 폐하께서도 오늘 회의는 지루했다고 말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하."

그녀는 내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오늘 회의가 흥미진진했던 이유가 나 임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군. 아무튼 수고했으니, 치하의 의미로 한 잔 건네고 싶은데."

비올렛 황녀가 생긋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여러 가지 계산을 품고 야릇하게 빛났다.

'...끝내 저지를 생각인 모양이군.'

지금 황제는 물론이고, 온 귀족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하여간 황제의 딸 아니랄까 봐.'

그건 아마 제가 저지를 짓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져야 더 효과적이기 때문일 터였다.

아무튼 비올렛 황녀의 간담은 알아주어야 했다.

'네 뜻대로 순순히 될까?'

나는 순순히 그녀가 내미는 잔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건배할까."

비올렛 황녀 또한 잔을 집어들고 내게 내밀었다.

쨍!

두 개의 샴페인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힌 순간,

"어머!"

비올렛 황녀의 손이 미끄러졌다. 그녀가 놓친 와인 잔이 교묘한 각도로 휘어져, 내 옷깃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몸을 조금 뒤로 물리는 것만으로 잔을 피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잔을 붙잡으려는 척 손을 내밀어,

"앗!"

비올렛 황녀의 드레스 앞섶으로 잔을 밀쳤다. 물론 나와 다르게, 그녀는 떨어지는 잔을 피하지 못했다.

"꺄악!"

비올렛 황녀의 드레스 아랫자락이 푹 젖어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챙그랑!

바닥에 낙하한 와인 잔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난데없는 소음에 이곳을 보지 않고 있던 사람들까지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이쿠, 이를 어쩌나? 황녀님 드레스가 왕창 젖어버렸군요."

비올렛 황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가 일부러 잔을 밀쳤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 이...!"

나는 비올렛 황녀가 폭발하기 전에 얼른 곁으로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남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키우고, 일부러 가련한 표정을 지어냈다.

"잔을 잡는다는 게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군요."

"...."

비올렛 황녀가 어깨를 움찔했다. 내 눈이 기묘하게 휘어지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녀님의 잔이 미끄러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흐흠."

그렇게 덧붙이자 비올렛 황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제 술수가 간파당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잔을 꽉 쥐었어야 했는데, 실수를 했군."

비올렛 황녀가 어금니를 악물고 답했다.

"내 아벨 공자의 실수는 너그러이 잊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황녀님."

허리를 굽혔다 들어 올리는 내 얼굴엔 보란 듯한 비웃음이 걸쳐 있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지."

비올렛 황녀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홱 몸을 돌렸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작게 속삭였다.

"...두고 봐, 진짜."

나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대꾸에 화답했다. 비올렛 황녀의 당당한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문득, 옆얼굴에 와닿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을 쳐다보자 카인이 내게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강하게 악다물어진 턱이 눈에 띄었다.

'아, 재밌다.'

정말이지 수확이 많은, 만족스러운 회의 첫날이었다.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1)

똑똑.

로웰은 문을 두드린 뒤 안에 고했다.

"주인님, 로웰입니다."

"들어오게."

안에서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카를로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웰은 그를 향해 다가간 뒤 바닥에 부복했다.

"미천한 종이 주인을 뵙나이다."

"일어나게."

"예."

로웰은 즉시 일어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카를로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카를로가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그것보다 더 붉고, 더 뜨겁게 타올랐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 아주 낯선 경험을 했어."

로웰은 금세 주인의 속을 간파했다.

'회의에서 불쾌한 일이 있으셨군.'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카를로는 오늘 회의 이후로, 불쾌한 기분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했다. 이어진 피로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란 날벌레 한 마리가 그의 하루를 온통 망쳐놓았다.

"어쩐지 회의 시작하기 전부터 예감이 안 좋더라니....

그가 안락의자에 깊게 파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들린 빈 잔을 찰랑 흔들렸다.

"잔이 비었군. 한 잔 주겠나."

"예."

로웰은 잰 걸음으로 협탁에 다가가 술병을 쥐었다. 그의 본거지에 있는 수하들이 본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로웰 님이 누군가의 시중을 들다니!'

하지만 로웰은 전혀 거리낌 없이, 오히려 기껍다는 듯이 행동했다.

"받으십시오."

로웰은 카를로가 들고 있는 잔에 술을 따랐다.

훅, 하고 강렬한 향이 올라왔다. 주인의 씁쓸한 심정을 대변하듯 몹시 독한 술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네라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 않나."

"송구합니다."

로웰은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들었다.

"소신이 주인님을 섬겨온 몇 년 동안, 오늘처럼 심기가 상하신 건 처음 보았습니다."

카를로는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넘겼다. 긍정의 의미였다.

"늘 눈엣가시처럼 여기셨던 미켈은 아닐 것 같군요. 그 자는 자신의 이름에 묶여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베니퍼는... 황제에게 미친 여자긴 하지만. 보는 눈이 있는데 대놓고 미친 짓을 하진 않았을 테고요."

로웰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몇 년간 마레 길드를 이끌며 정보를 수집했고, 음지에서 카를로를 대신해 움직였다.

그래서 카를로 만큼이나 제국의 사정에 밝았다. 그의 그림자와 다름없는 자였다.

"그 외는 전부 아르단테 가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자들 아닙니까."

주인의 기분이 나아질만한 말을 던진 뒤, 로웰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도 아니라면... 혹시 황제였습니까?"

그리 말을 하면서도 로웰은 스스로 가능성이 몹시 낮다고 생각했다.

지금 황제가 아르단테 가문을 치는 것은 악수(惡手)다. 자칫 위기감을 느낀 귀족들끼리 연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탐욕스러운 자가 그럴 리 없지.'

테오도어 황제는 사리에 밝고 손익 계산이 빨랐다.

한 때 정복왕이라고 불릴 때는 잔혹무도하게 굴었으나, 치세가 안정된 지금은 영주들을 탄압하는 대신 이용하는 쪽을 택했다.

즉, 그라면 고만고만한 영주들끼리 싸움을 붙여 공멸하게 만들거나, 자신에게 대항할 생각을 못하도록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이도 아니면.... 대체 뭐지?'

로웰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주인이 스스로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물론, 황제는 아니었네."

한참 만에 카를로가 입술을 뗐다.

"그보다 한참 어린 애송이였지."

"예?"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로웰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찾아 헤매다가, 그게 오베스트 영주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자라면 디에고 킨드리얼의...."

"그래, 외동아들이지."

"아벨 킨드리얼이 회의장에 나타났단 말입니까? 대리인이 아니고요?"

"그랬더군."

로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아까 주인의 속을 맞추려고 고군분투 할 때, 오베스트 영지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 킨드리얼 가문의 빈약함.

영주 본인이 최강의 검사일지언정, 영지의 힘은 거기 비례하지 않았다. 거기에 매번 영주 대신 대리인을 보낸 탓에 황제의 눈 밖에 나기까지 했다.

아르단테 가문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파리와 다름 없는 상대였다.

'그래서 날파리라고 칭하신 건가.'

둘째, 아직 주인께 고하지 않은 카데르 영지의 일.

카데르 영지에 다시 지부를 설립하는 일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그 먼 곳까지 인력을 보내는 게 오래 걸렸고, 그곳의 불량배들을 포섭하는 데도 시간이 소요됐다.

그뿐이랴. 놓쳐버린 창녀들을 되찾고, 새로운 상품을 조달하려면 자본도 추가로 들여야 했다.

'그리 중요도가 높지 않은 영지였는데.'

그저 제국 곳곳을 빠짐없이 파악하기 위해 준비해둔 지부였다. 사실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긴 했다.

그러지 못한 데는,

'그 시커먼 놈만 아니었어도.'

새카만 검을 쓰는 정체불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셋째, 로웰은 아직도 그자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사창가를 턴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그곳 주변의 영지를 쥐잡듯이 뒤졌지만 머리털 끝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후로 잠잠할 놈이 아니야.'

그간의 경험으로 로웰은 놈이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강자는 자기 자신을 감추곤 살 수 없다. 그것이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 검을 가져왔더라면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입맛이 썼다. 검은커녕 놈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나쁜 소식만 들고 와야 했다.

그런 마당에,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라.'

그 이름이 튀어나오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주인님을 불쾌하게 만든 게 이놈이라고?'

로웰은 자연스러운 추론 과정을 거쳐 정답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정답을 해설하는 덴 실패했다.

"주인님."

로웰이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미천한 종복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벨 킨드리얼이라니요."

"...."

"그 애송이의 나이가 고작 스무 살입니다. 거기다 영지에서 온갖 패악을 떨고 다니는 망나니일 뿐이고요."

그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영주들을 포섭할 돈도,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어찌 주인님을 불쾌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로웰."

마침내 불려진 제 이름에, 로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오늘 그놈이 내게...."

카를로는 말을 끝맺는 대신 오늘 회의 때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러다 주름살 생깁니다.'

이마를 툭툭 치며 고개를 내젓던 아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 참, 애,석,한 일이로군요.'

한 글자 한 글자 강세를 줘가며 강조하던 모습도.

'그냥 궁금하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순진무구한척 되묻던 얄미운 모습도.

까드득.

카를로가 소리 나게 이를 갈아붙였다.

"내 일평생 이런 굴욕은 처음일세."

그는 회의 때 일을 말하는 대신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나,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에게 감히...!"

그의 눈동자가 홍염처럼 불타올랐다. 그것은 자기 자신까지 불태우는 파괴적인 불꽃이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로웰은 카를로의 속뜻을 바로 간파하곤 허리를 깊이 숙였다.

"거주지를 파악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일거수 일투족을 완벽히 조사해 올리겠습니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으나, 그도 카를로도 누구를 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주인님의 심기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다니.'

바닥을 향하는 로웰의 눈동자가 음산하게 일렁였다.

주인께선 신상 및 행적만 파악해두라고 이르셨지만, 로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싹수가 노란 잎은 미리 제거해줘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그래, 그리고."

카를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타일러 영주가 장부에 장난질을 쳤더군."

"타일러라면, 푸른 진주 유통 담당자 아닙니까."

로웰은 귀족을 이름으로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높여 부를 상대는 카를로 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랬었지."

카를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주인의 것을 탐하는 사냥개라니. 목줄을 단단히 채워야 하지 않겠나?"

"감히...!"

로웰의 이마에 파란 핏대가 솟았다.

"은혜도 모르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니!"

그가 자세를 낮게 숙이며 눈을 빛냈다. 음험한, 그리고 냉혹한 살기가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주인님. 당장 새를 풀어 주인님의 것을 건드린 벌을 내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은 없다."

카를로가 느긋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온전히 믿지 않았다. 인간이란 결국 제 이익을 쫓는 존재 아니겠느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럴지언정, 이 로웰만은 주인님께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로웰은 열정적으로 빛나는 눈을 들어 카를로를 직시했다. 그의 시야에 담기는 카를로는 언제나 붉디 붉은 태양이었다.

결코 이 태양이 지게 두지 않으리라. 그의 태양이 떠오를 곳에는 그 어떤 먹구름도 없어야 했다.

"자네만 믿네."

카를로가 손을 뻗어 로웰의 어깨를 쥐었다. 그 단단한 촉감, 그리고 체온이 로웰의 심지를 더 굳게 만들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로웰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 ❖ ❖

다음날 아침 해가 밝았다.

어제 회의에 참여했던 영주들은 그 자리 그대로 회의장에 착석했다.

"이것은 제가 오늘 아침 회의 자료로 제출한 건입니다."

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들어 올렸다.

"자료의 7-3 항을 살펴봐 주십시오."

귀족들이 제 앞에 놓여 있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팔락, 팔락.

그중 유독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쪽을 힐끔 보곤 웃음을 삼켰다.

'짜증나 죽겠나 본데.'

카를로가 무표정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손길만은 감정을 감추지 못했는지,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유독 거칠었다.

"보시는 자료는 서쪽 산맥에서 오베스트 영지로 출몰하는 몬스터의 수와 종류를 정리한 표입니다."

내 설명을 따라 표를 훑는 영주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트, 트롤이 스무 마리?"

"아니, 매일 몬스터가 이만큼 나온다고?"

"디에고는 대체 어떻게...."

아, 디에고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제 위상이 시시각각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나만한 효자도 없을 거야.'

그렇게 잠시 스스로를 칭찬을 갖는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베스트 영지는 제국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왔습니다. 따라서...."

몇 시간 뒤.

쿵.

회의장의 문이 닫혔다. 그곳을 빠져나와 연회장으로 향하는 귀족들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흡족한 얼굴을 한 미켈,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베니퍼. 그리고 이가 썩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카를로까지.

"허, 이것 참....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계속 벌어지네."

"이번 회의는 정말 묘하지 않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금껏 참여한 회의 중 가장...."

소리 낮춰 수군거리는 귀족들은 한결같이 나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흥미, 감탄, 놀라움 등이 뒤섞인 시선들이 몹시 달콤했다.

'푸훗.'

거기에 참관실에서 내려오는 카인의 복잡한 시선이 섞여 있다면 더더욱.

'흐름이 좋네. 이대로라면....'

오늘 목표했던 바를 이룰 수 있을듯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귀족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미켈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

시선이 마주치는 동시에 알 수 있었다. 그가 곧 나를 찾을 거란 걸.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2)

"오호."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테이블 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진수성찬들이 보였다.

'어제 본 것도 굉장했는데, 오늘은 더 신경 썼네.'

제국 곳곳의 특산품과 진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쓴 흔적이 엿보였다. 황실의 재력이 이 정도다, 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꼴이었다.

"오늘도 너로 정했다."

아예 레몬, 자몽 등의 시트러스 계열 과일들이 가득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신나게 다과들을 해치우고 있는 도중, "아벨 공자."

묵직한 저음이 나를 불러세웠다.

어쩐지 어제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미켈 영주님."

미켈이 어제와 같은 인원들을 대동하고 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과음 때문인지 약간 초췌했다. 심지어 오늘 아침엔 회의가 시작하기 직전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기까지 했다.

'하긴, 우리 둘이서 해치운 위스키가 몇 병이냐.'

승부욕에 불타 평소보다 무리를 한 게 분명했다. 거기 불을 붙인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말이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말끔한 얼굴로 그리 묻자 미켈이 수염을 씰룩였다.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이나?"

"오늘 만찬으로 나온 뜨거운 수프를 연거푸 들이키시길래, 속이 안 좋으신가 했지요."

"그건 또 언제..., 흠흠."

만찬장에서 미켈과 나의 거리는 상당히 먼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뭘 먹는지 관찰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레퀴엠으로 강화된 시력 덕분에, 그의 수프에 담긴 건더기 개수까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수프가 퍽 입맛에 맞았을 뿐이라네."

미켈이 턱을 쓰다듬으며 내 낯빛을 꼼꼼히 살폈다.

"아벨 공자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군?"

"안 좋을 이유가 없지요. 숙취라도 있는 게 아니고서야."

"...."

대화를 듣고 있던 주변 귀족들이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돌렸다. 터질 듯한 웃음보를 눌러 참고 있는 게 보였다.

'미켈 영주님이 이렇게 당하는 건 내 처음 보는군.'

'이제 당분간 위스키의 위 자도 안 꺼내실 게 분명하네.'

웃음을 머금은 시선들이 그런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간 미켈에게 당한 게 많았던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통쾌한 경험을 안겨 줬군.'

미켈이 큼, 헛기침을 하곤 화제를 돌렸다.

"아벨 공자는 황궁의 음식을 꽤 열심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데."

"네, 내일까지 부지런히 먹고 갈 계획입니다."

그래야 레퀴엠이 좀 잠잠할 테니까요.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허허, 나와 비슷하군. 나도 황궁에 오면 허리띠를 풀고 먹곤 한다네."

미켈의 말투는 어제보다 한결 친근해져 있었다.

그뿐이랴, 나를 향하는 눈빛이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얼어붙은 듯한 청회색 눈동자에도 온기가 스밀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이가 들면 예전보단 음식을 많이 먹기 힘들지. 그래도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 조금 무리를 해야지 않겠는가?"

미켈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자 겉옷이 펄럭였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얇은 그 옷은, 그의 잘 단련된 팔뚝을 그대로 드러냈다.

'과연 북부의 노익장.'

지긋이 그의 몸을 살폈다.

전신이 균형 있게 발달했고, 근육 하나 허투루 붙은 게 없다. 팔뚝 곳곳에 자리한 상처는 전선에서 오랜 기간 싸워온 그의 시간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디....'

슬쩍 절대영역을 일으켜 보았다.

과연 디에고와 맞먹을 만한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디에고가 환한 등불과 같았다면, 미켈의 것은 쉬지 않고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아직은 못 이기겠네.'

서쪽 산맥을 거슬러오며 많은 경험을 쌓았다지만, 원작의 최강자들을 넘어서기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내 목표는 그들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그건 언제라도, 아니 지금도 가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실력을 갖추는 것. 그 어떤 상대에게도 지지 않을 수준이 되는 것.

"...."

꿈틀, 손가락이 움직인다. 그간 잠들어 있던 호승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지 오래되긴 했어.'

서쪽 산맥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며 기른 실력을 시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슬슬 운을 띄워볼까.'

나는 기회를 잡기 위해 흘러가는 분위기를 살폈다.

"그래, 오늘도 한 잔 하겠는가?"

미켈은 그새 몸이 근질거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노인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이고, 맙소사."

주변의 다른 귀족들이 손을 내저으며 물러났다.

"난 오늘은 쉬겠소."

"아직도 어제 마신 술이 다 해소되지 않은 것 같구려...."

그들이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자 남은 것은 나뿐이었다.

"좋습니다."

물론 난 거절할 생각 따윈 없었다. 우리가 나누는 술의 양과 미켈이 느낄 친밀감은 비례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젊은 게 좋군."

미켈이 피식 웃더니 어제와 다른 술을 시켰다.

어제 마신 위스키보다 도수가 훨씬 높은, 세간에서는 악마의 숨결이라고 불리는 술이었다.

하여간 이 나라는 숨결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 아벨 공자."

미켈은 시종이 가져온 병을 잡고 뚜껑을 뻥 땄다.

"그래서 내게 할 부탁이라는 건 뭔가?"

그러더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오호.'

미리 깔아둔 밑밥이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다. 아마 미켈은 어제 내내 내 부탁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면 나야 좋지.'

나는 그가 내민 잔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궁금하셨습니까?"

"어제 그리 말을 해두고 밝히질 않으니,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나."

"들어줄 마음은 있으시고요?"

"음."

미켈이 자신의 손에 들린 잔을 한 바퀴 굴렸다.

"솔직한 마음으론, 내 딸을 달라는 부탁 외엔 거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네."

그가 잔을 목으로 넘기는 대신 나를 응시했다.

"어제와 오늘, 자네의 활약. 굉장히 감명 깊었네. 노드 영지에 엄청난 도움이 될 테지."

"다행이군요."

"물론 자네도 본인 영지에 도움이 되니 그리 했겠지만...."

미켈의 그윽한 시선이 내 얼굴을 찬찬히 담았다. 거기 담긴 감정은 흡족함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내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네. 그러니 편히 말해보게. 부탁이 무엇인가?"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훅 들이켰다.

"배부르시지 않습니까?"

목소리에 악마의 숨결처럼 달콤한 향이 섞였다.

미켈이 내 빈 잔에서 시선을 거두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허리띠를 풀어놓은 채 열심히 먹긴 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가?"

"그렇다면, 소화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나는 미켈의 살짝 커진 눈을 응시하며 짧게 말했다.

"미켈 영주님과 검을 겨뤄보고 싶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미켈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귀기울이고 있던 귀족들마저 입을 다문 탓이었다.

"...그 말 진심인가?"

미켈은 술을 마실 생각이 사라졌는지 아예 잔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기도가 날카롭고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긴 했는데."

그의 가늘어진 눈초리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과연 내 압박에도 멀쩡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군."

나는 조용한 미소로 그에게 긍정했다. 미켈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말이 없어졌다.

"내가 듣기론,"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아버지께서 자네에게 검술을 가르치진 않았다던데."

"예, 소문은 그렇지요."

마치 그것이 '소문'이라는 말투로 대답하자, 미켈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아버지께서 제게 인장을 주어 이 자리에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몹시 당당한 말투로, 어깨를 쭉 펴고 이야기한다.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기만 하면, 그 거짓이 진실로 보이는 데는 충분하다.

"제가 비록 어린 시절 철없는 행동으로 아버지의 속을 썩인 건 사실이나, 그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

"당연히 이 자리에 나오기 전 검술을 하사받았습니다."

물론 그게 리암과 디에고에게서 강탈한 종류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베스트 검술이 익히기 쉬운 종류는 아닐 텐데."

"제 몸을 지킬 만큼은 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주변 귀족들이 슬그머니 나섰다.

"아벨 공자의 자신감은 이해하지만, 미켈 영주님과의 대련이 쉽지는 않을 걸세."

"무척 혹독하게 가르치기로 유명하신 분이지."

"가르침을 받고 나면 당분간 걸어 다니기 힘들 것이네."

그들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호기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내가 그 정도 패기조차 없이 어떻게 가르침을 받겠습니까."

이제는 아주 멀쩡한 오른팔을 까딱거리며 덧붙였다.

"전 아버지께 검을 배우다가 오른팔이 부러진 적도 있답니다."

"허어."

귀족들이 딱하다는 한숨을 흘렸다.

"하긴 그 디에고 킨드리얼이 오죽하겠소."

"늑대가 제 새끼를 가르칠 땐 절벽에서 떠미는 법이지."

디에고가 날 혹독하게 가르치긴 했는데. 이렇게 미화되는 걸 보고 있자니 영 거북하군.

수군거리던 귀족 중 한 명이 미켈을 바라보았다.

"사실 미켈 영주님도 전적이...."

"흐흠, 내 그런 적이 있긴 하지."

미켈이 팔짱을 끼며 수긍했다.

"내 딸아이도 검을 배우다가 어깨뼈가 나간 적이 있다네."

"아, 레아 양 말씀입니까?"

나는 천연덕스럽게 놀라는 척을 했다.

레아 노드 콘첼라레.

미켈 영주의 장녀이자 가장 아끼는 후계자, 그리고 후에 겨울검 아리아의 주인이 될 소녀.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미켈에서 검을 하사받았다. 그 과정은 설산의 북풍만큼이나 혹독하고 차가웠다.

그 지독한 수련은 결국 그녀가 제 아버지를 넘어서도록 만든다.

'물론, 그 과정에서 거대한 희생을 하나 치러야 했지만 말이지.'

나는 그 희생양이 될 남자, 미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돌아가면, 그는 죽는다.'

아리아가 불러일으킨 거대한 눈보라에 휘말려서.

그렇게 제국 최강의 검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검술이 사라지기 전에, 그에게서 검술을 조금이라도 전수받아야만 했다.

"그래, 그랬었지...."

미켈의 눈빛이 과거를 더듬듯 아련해졌다.

"레아 그 아이는 내 딸이지만 참 독해. 어깨뼈가 낫자마자 다시 내게 덤벼들더군."

"그랬군요."

나는 다 알면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 양 열심히 맞장구쳤다.

"과연, 레아 양의 실력이 상당한 모양인가 봅니다. 미켈 영주님께서 이리 등 뒤를 맡기고 오신 것을 보아하니."

"...그것이, 그 아이에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네."

미켈의 입술 새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루라도 검을 쥐지 않으면 몸에 쥐라도 나는 건지. 이럴 것 같아서 검을 가르치지 않으려 했건만."

그가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더군. 게다가 우리 딸아이의 고집은 뭐랄까, 미노타우르스의 뿔보다 단단하다네."

...그 흉측한 몬스터에 비할 정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원작의 레아를 떠올리고 수긍했다.

'정말 독한 여자긴 했어.'

미켈은 먼 곳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고운 손에 물집이 잡히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모습을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

"좋은 가문의 안주인으로 들어가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도 될 것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우리 영지의 어떤 모녀가 떠오르는 탓이었다.

'이쪽도 제 딸을 잘 모르는군.'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3)

레아는 춤을 출 때보다도 몬스터를 해치울 때, 드레스를 고를 때보다도 무기를 고를 때 더 행복해하는 소녀였다.

'그러니 끝내 아리아를 손에 쥐었겠지.'

제 온몸이 얼어붙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말이다.

"아무튼, 글쎄. 아벨 공자의 부탁을 들어줘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미켈이 턱을 감싸 쥐곤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다른 가문의 자제에게 상처를 입힐까 저어된다네."

"...."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타인이 하는 것은 다르지 않겠는가. 자칫 두 가문의 싸움으로 번지진 않을까 걱정스럽군."

아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아까 딸을 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들어준다는 게 어디의 누구더라?

"미켈 영주님께서 이토록 저를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서서히 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미켈을 지긋이 바라보며 덧붙였다.

"두 가문의 싸움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계속되지 않았습니까?"

"...."

미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긴, 그건 몇 년전부터 논란이긴 했지요."

"지금껏 승부가 안 나지 않았소?"

"승부가 날 게 있겠소이까. 몇 년간 겨뤄본 적이 없는데."

주변의 귀족들이 미켈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오베스트 검술과 노드 검술이 겨룬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

이것은 검의 길을 걷는 이들뿐만 아니라, 전 제국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일단 오베스트 검술은 나의 뼈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상대방을 베어야 할 때 사용되는 절정의 검술이다.

핵심은 날래고 예리하면서, 치명적이라는 것.

'서쪽 산맥의 몬스터들은 죽여야 후환이 없으니까.'

반면, 노드 검술은 여유롭게 우위를 점하면서 격차를 벌리고, 상대를 제압하는 데 특화된 검술이다.

따라서 느리지만,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고 강력하다.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만 만들어도 충분할 테니.'

어차피 북쪽 설산의 냉기가 몬스터들의 숨통을 대신 끊어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 검술은 각자의 분야에서 강하기로 손꼽혔기에, 사람들은 두 검술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 늘 궁금해하곤 했다.

'배X맨과 아이X맨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것과 비슷하지.'

하지만 디에고와 미켈은 절대로 검을 맞대지 않았다. 디에고가 오베스트 영지에 칩거하면서 더더욱 볼 일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묵은 논쟁을 지금 내가 다시 꺼내 들고나온 것이다.

"그 싸움의 결과가 아직 안 나온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 그랬지."

미켈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네가 그런 케케묵은 논쟁에 흥미를 가질 줄 몰랐군."

나는 비죽 치미는 웃음을 삼켰다.

'케케묵은 논쟁이라.'

자신은 이런 소모적인 논란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정말 그럴까?

"오, 그건 제국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관심 가질 만한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매끄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희미하게 파편이 박힌 듯한 미켈의 것과는 다르게.

"그것은 물론, 젊은이들만의 궁금증은 아닐 겁니다."

"...."

"솔직히 미켈 영주님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흐음."

미켈은 대답하지 않고 수염을 쓰다듬기만 했다. 내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궁금하다뿐일까. 아주 손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겠지.'

원작에서 디에고가 레퀴엠을 쥔 아벨에게 살해당한 뒤, 미켈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 몹시도 애석해한다.

'제국의 큰 별이 져버렸구나. 져버렸어.'

그리고 끝내지 못한 승부의 결과를 궁금해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내지 못한 승부를 다시 청해볼 것을!'

그렇다.

세간에는 미켈과 디에고가 겨뤄본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미 그 둘은 치열하게 격돌한 적이 있었다. 디에고가 막 가문의 영주로 자리 잡았을 즈음이었다.

미켈은 최강자로 이름을 날리는 디에고의 실력을 몹시도 궁금해했다. 자리를 피하려는 디에고에게 먼저 싸움을 건 것도 그였다.

'결과는 무승부였지.'

한창 전성기의 육체였던 디에고는 강했고, 오랜 기간 전선에 몸담았던 미켈 또한 녹록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걸어야만 이 싸움이 끝날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거두었다.

그렇게 지속된 무혈의 시간이 벌써 10년을 넘어섰다.

"나는 쉽게 검을 꺼내지 않는다네."

미켈이 기계적인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특히 이토록 이목이 많은 곳에서 검을 꺼냈다간, 구경거리가 되기에 십상이지."

그의 어깨는 몹시도 경직되어 있었다. 이는 말과는 반대로, 그가 몹시 애가 탄다는 증거였다.

미켈은 애써 요동치는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네."

이제 그는 예전처럼 무작정 덤벼들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고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며 움직였다.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은 퍽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혈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경거리라...."

나는 누가 보아도 재수 없다고 할 만한,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백호의 발톱이 무뎌진 모습은 진귀한 구경거리겠지요."

"...."

"그게 늑대의 이빨에 당해서라면 더더욱이요."

미켈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형식적으로나마 짓고 있던 미소마저 온전히 사라졌다.

"제가 영주님의 연세를 미처 배려하지 못했군요."

나는 그의 안색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슬슬 후계자를 생각하셔야 할 때이신데 말입니다."

그가 이제 늙었으며, 그만 검을 내려놓고 뒷방으로 들어갈 때라는 말을 아주 우아하게 돌려 말해주었다.

물론, 미켈은 내 귀족적 화법을 이해 못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미켈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그런 이유로 공자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생각하는 겐가?"

"레아 양을 달라는 부탁을 제외하고 다 들어줄 것처럼 말씀하신 건 미켈 영주님입니다만."

내 말투에 독사의 것보다 더 지독한 독이,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예기가 스몄다.

"그런 분이 거절을 논하시니,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해합니다. 패배의 순간을 만인 앞에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 나한테 질까 봐 그러지?

라는 말을 완곡하게 해주자 미켈의 눈빛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

여전히 미소를 띤 나와, 살벌한 얼굴의 그 사이에서 험악한 시선이 오갔다.

이거 아무래도, 도발이 너무 세게 들어간 모양이다.

"허허허허...."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말이오."

주변의 귀족들은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불똥이 튈 수 있음을 기민하게 감지한 것이다.

"...후우."

이윽고, 미켈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것 참. 내가 공자의 혀가 자유분방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군."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토록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가 가르침을 청해오는데, 거절하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니지."

하지만 목소리만은 아직 추스르지 못한 감정의 파편 탓인지 조금 낮아져 있었다.

"세간에서 무어라 말하든 상관없네. 검사 대 검사로 한 번 대련해보세나."

주변의 영주들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어, 진심이시오?"

"검사 대 검사라니, 그런...."

그들은 우려를 표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리던 바였기에,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감사합니다, 미켈 영주님."

미켈은 내 반응을 보곤 픽 코웃음을 쳤다.

"내 손속에 자비를 두긴 할 터이지만,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네. 그래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대련 중에 부상을 입는 것은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지요."

"...흠.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면, 배도 꺼뜨릴 겸 지금 자리를 마련해보세나."

"좋습니다."

흔쾌히 대답한 뒤 덧붙였다.

"장소는 황궁 기사단 연무장이 어떨까요."

"본격적으로 판을 벌이는군?"

미켈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의 얼굴에는 벌써 혈기왕성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리 몸을 사리더니, 막상 결단을 내리니 벌써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지는 것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요. 상대가 미켈 노드 콘첼라레님인까요."

내 아부성 발언에 미켈의 입꼬리가 쌜룩 움직였다. 디에고의 아들이 자신을 치켜세워주니 흡족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보다는 기뻐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가르침을 하사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흠, 흠. 공자도 알겠지만 가문의 고유 검술을 그리 쉽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네. 섣부른 발언은 삼가시게."

"오, 물론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지요."

빠르게 수긍하는 내 눈가에 뱀 같은 눈웃음이 스쳤다. 그것은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게 상대가 가르칠 의사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리암과 디에고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봐야지 않겠습니까?"

내 도전적인 발언에 미켈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가 곧 펴졌다.

"하하하, 공자도 참.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이 내가, 고작 스무 살 먹은 청년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또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재능이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영역에 있으니까요."

"글쎄."

미켈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느긋하게 웃었다.

"내 공자의 패기만큼은 높이 사지. 그럼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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