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기업 비밀
밤이슬을 맞으며 손목과 발목을 조지니.
낮에 몰래 약 파는 애들도 생겼다.
그것도 잡아 조졌다.
딱 이틀이면 충분했다.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까지는.
"최근에 도심 내에 출몰하는 소위 말하는 '골절맨'에 대해 아시나요?"
예쁘장하게 생긴 아나운서 앞으로 골골대며 쓰러진 이들의 홀로그램이 생겼다.
홀로그램 사이를 뚫고 나온 앵커가 말을 이었다.
"골절맨은 최근 대두되었던 문제인 마약상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일부 사람들은 정부의 비밀 부대가 나섰다고도 말하기도 하고 대기업에서 나섰다는 소문도 돕니다. 하지만 정부와 기업은 끝내 부인했습니다.
정부가 아니라면 서울을 지키는 자경단일까요?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활동하는 이들, 과연 이게 옳은 걸까요?
다만, 한 가지."
앵커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두 눈으로 카메라를 쏘아보며 마저 말을 맺었다.
"이들이 나섬으로 수도권 내에 마약 문제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뉴스를 보는 와중이었다.
"아들, 밤마다 나가서 쟤들 뼈 부러뜨리고 다녔니?"
소파에 앉은 어머니가 쟁반 위에 놓인 사과를 들고 물었다.
난 물컵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음, 네."
저 혼자 한 건 아니지만, 네, 제가 주모자입니다.
사각사각.
소파 테이블 위로 사과 껍질이 길게 늘어나 떨어졌다.
"사과 먹을래?"
"좋죠."
풋사과였다.
어머니 옆에 앉아 야금야금 과육을 씹어 삼켰다.
달고 상큼했다.
"마리는요?"
"훈련."
걔는 무슨 숨도 안 쉬고 훈련만 하냐.
대련할 때 붙어 보니까 이미 일반 변신족 수준은 훌쩍 넘었던데.
"걔는 안 쉬어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훈련받을 때 난 더하긴 했지.
"전 똥이 묻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마리가 제 오라버니 짐이 되기 싫다고 하더라."
"짐이요?"
변신족 실험체 특성인지, 아니면 전직 갱생 마녀 현직 주부의 가르침인지는 모르겠다만, 박마리는 이미 괴물이었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수없이 대련해 보며 느낀 게 많다.
"음, 근데 저거 경찰 애들이 되게 싫어하겠다."
눈은 TV에 두고도 얇게 사과 껍질을 벗긴 어머니가 말했다.
"네, 벌써 집 앞에서 절 찾을지도 모르죠."
"너인 줄 어떻게 알고?"
"흔적을 잔뜩 남겨 놨거든요."
"굳이?"
"배트맨 놀이할 생각은 아니라서요."
가면 쓰고 배후의 히어로 놀이할 나이는 지났다.
"엄마는 마블이 더 좋다. 스파이더맨으로 가자."
"저 거미 싫어해요."
스파이더맨은 좋지만, 그리고 기왕이면 아이언맨이 더 좋은데.
엄마가 채널을 바꿨다.
흥미 없는 뉴스 대신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노는 걸 보여 주면서 놀아선 안 된다는 제목을 가진 예능이었다.
그걸 보며 깔깔 웃는 어머니는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마마, 저 걱정 안 됩니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으응, 선 넘었다 싶으면 두들겨 팰 거라, 괜찮아, 아들."
식은땀이 솟는 계획이로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보안을 최우선으로 한 브랜드 아파트다. 들어오려면 입주민의 허락과 경비원의 허락이 필요하다.
출입 한 번 하려면 신분까지 터는 곳이다.
이게 끝도 아니다.
혹시 형태 변환자일까 싶어 초능 특수종 특유의 파장도 조사하고 주문 설계도 되어 있다.
이러니까 집이 몇백억 하는 거다.
팟.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작은 화면 위로 PWAT 경찰 마크를 들이댄다. 곧 마크가 사라지며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여자가 말했다.
"유광익 씨 계시죠?"
아는 얼굴이었다.
형태 변환자 때려잡기 작전, 공항에서 만났던 PWAT 팀장이다.
머리를 염색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특유의 매력은 그대로였다.
육감적인 몸매와 날카로운 인상의 조화다.
"오랜만이네요."
"기억하는군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곧 상대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거실 한쪽에 나타났다.
"몇 번 봤으니까요."
어머니가 TV에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뭐, 숨길 것도 아니니까.
"후, 얘기 좀 하죠. 광익 씨."
"여자친구니?"
뒤에서 어머니가 물었다.
"경찰인데요."
누가 봐도 화난 경찰과 일반인의 대화 아닙니까?
"여자친구 후보? 연상 좋지. 경험 많고 위로 잘하고."
여기서 얘기 나누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나갔다 올게요."
"피임 잘하고."
우리 어머니 텐션은 어디 안 가지.
요 며칠 꽤 진지하시긴 했는데, 이게 본래 모습이다.
"네, 항상 조심합니다."
"풉."
말을 받아치니, 어머니가 날 비웃었다.
"우리 아들이 고자라니."
놀리는 어머니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가서야 내 실수를 깨달았다.
인터폰 안 껐네.
아, 진짜. 주책 마녀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가.
밖으로 나갔다.
철두철미한 보안 덕분에 상대가 들어오는 것보다 내가 나가는 게 더 낫다.
삑.
밖으로 나가니 인터폰 앞에 있던 PWAT 팀장이 말했다.
"지금 혼자이긴 한데, 8살 연상 괜찮아요?"
뭐라는 거야.
"어머니가 위트가 넘치세요. 잊어 주세요."
이런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잖습니까.
누군가 나서서 마약쟁이를 때려잡았다.
경찰이 좋아할까?
마냥 좋아할 순 없지. 그들이 진행하는 작전에도 초를 뿌렸을 것이다.
경찰은 법을 수호하고 지키고 하여간 그런 의무가 있는 집단이다.
용감한 시민이란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작정하고 마약쟁이를 털었다.
법? 그딴 건 무시했다.
이 일로 인해 마약 제조로 문제가 되는 놈이 두더지처럼 숨을 수도 있고.
보복한다고 상대가 더 미친 짓을 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중고 형을 만났을 때, 난 이미 이쪽에 경찰 손이 닿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마약단속국이 아니라 PWAT 팀이 움직였다는 건 특수종이 깊게 개입했다는 거고.
즉, 난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다만 아는 얼굴이 올 줄은 몰랐을 뿐이지.
"광익 씨 맞죠? 부인할 생각도 없어 보이네요."
"네, 저 맞습니다. 열일곱 살 때 꿈이 마약이 없는 세상이었거든요."
"그래서 나섰다?"
"네."
"후, 미치겠네. 광익 씨 그러면 안 돼요."
그냥 던진 말이었다.
근데 이 여자, 내 말을 꽤 진지하게 들었다.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PWAT 팀장이 말을 이었다.
"요원 출신인 건 알지만, 그러면 일이 꼬일 수도 있어요."
타이르는 말투다.
어릴 때부터 자주 겪던 일인데.
평소의 태도 탓일까?
가끔 어떤 사람은 내가 생각이 아주 짧다고 생각한다. 진짜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다고 보는 거다.
내 뇌가리에 우동 사리만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최근에는 삼촌이 날 그렇게 보는 것 같고.
결론만 말하자면 내가 생각한 그림은 이게 아니다.
경찰이 따지면, 적절한 제안을 말하려고 했는데.
어째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냐고.
괜히 길게 끌 것도 없었다.
"광익 씨, 내가 진짜 동생 같아서, 아니 남자로 보이긴 해요. 하지만 동생은 맞으니까 그래서 말하는 건데."
"따지러 온 거죠?"
말을 끊었다.
"...네?"
"경찰이 진행하는 작전이 뭔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생긴 거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제조상 잡는 게 목적일 거고, 혹시 그 뒤에 엮인 사람 더 있어요?"
끔뻑끔뻑.
이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여자가 눈만 깜빡이는 걸 보니, 반전 매력으로 귀여워 보이긴 했다.
이 누나, 꽤 많이 귀여운 타입이네.
"누가 엮였든, 거기는 노터치 할게요. 제가 바라는 건 프린세, 아니 프로메테우스거든요."
"그래서요?"
이제야 눈빛이 쓸 만해졌다.
정신 차린 팀장을 향한 제안이 있었다.
"골절맨 작전은 전부 경찰의 지시로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비밀리에 프리랜서를 고용해서 일을 처리한 거죠. 마약 제조업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경찰은 뒷골목 세계를 헤집었다.
그런데도 정보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중고 형을 고용할 생각도 안 했을 거다.
일반인에 늙다리를 왜 고용해.
중고 형만 고용한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 뒤에서 날 고용했다고 한 줄 추가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물론 공짜로 해 줄 생각은 없다.
"광익 씨, 왜 머리 좋아요?"
놀란 팀장의 말에 난 숨도 안 쉬고 답했다.
"네, 제가 머리가 좀 좋습니다."
학업 성적도, 잔머리도, 눈치 머리도 있는 타입이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말로 갈구고 어머니는 손으로 교육하셨습니다.
거기에 성적 떨어지는 건 그냥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공부했고.
등산도 도움이 됐다.
산 위에 서서 보면 모든 게 다 작아 보인다. 정상에서 심호흡하다 보면 모든 일이 명료하게 정리되곤 했다.
요원 생활하면서 그 이면에 엮인 일도 많이 봤다.
팀장은 번번이 그걸 내가 알아내게 했다.
그러니 이런 걸 추측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팬더 형이나 우미호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명함을 보인다.
그런 건 쉽게 따라 할 수 없다.
일종의 재능이니까.
하지만 상황의 앞뒤를 파악하는 정도야 뭐, 머리 좀 돌아가면 다 아는 거지.
"후, 좋아요."
팀장이 손으로 얼굴을 쓸고 말을 이었다.
"하나만 약속해 줘요."
"네."
"제조업자가 프로메테우스는 맞아요. 우린 그 새끼가 가진 정보가 필요해요. 죽이진 마요."
"네, 안 죽일게요."
어차피 경찰과 협력해서 처리할 일이었다.
볼일 끝이다.
이대로 헤어지면 될 일이었다.
팀장이 불쑥 명함을 내밀었다.
이지혜, 이름이 보였다.
"지혜 누나, 어감 좋죠?"
"네?"
"데이트 신청 기다릴게요."
"네?"
뭔 소리야. 이게.
"농담이에요. 전화번호 알려 줘요."
이런 게 연상인가, 적극적이다. 그러면서도 부담은 주지 않는다.
전화번호를 찍어 줬다.
"어떻게 찾을 생각이에요? 백이면 백 다 숨을 텐데요. 마약 만들고 파는 애들, 쉽게 머리 안 들이밀어요."
"그건 기업 비밀이라서요."
내가 윙크하며 말했다.
장난이었는데 지혜 누나는 그런 날 빤히 보다가 말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 주고 싶네요."
아니, 대화의 수위가 진짜 선을 넘나든다. 능수능란, 네 글자가 떠올랐다.
그 순간이다. 내 기업 비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으으과아아앙이이이이익."
"이만 가시죠."
반대편에서 기업 비밀 강혜민 양이 눈에서 불을 뿜으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네, 그럼 또 봐요."
일단 보내고 돌아섰다.
"바람났니?"
성큼성큼 걷듯이 뛰어온 혜민이가 물었다.
"단어부터 정정하자. 난 빛이 나는 솔로니까 바람이 날 순 없어."
"우리 애는 어쩌고?"
"누구 들으라고 이렇게 크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저 누나 불멸자 아니고 초능 특수종이다. 안 들릴 거야."
누나는 창문을 내려 사이드미러로 나와 혜민이를 눈으로 훑고 차를 몰고 떠났다.
혼자 왔다는 건 어느 정도 전권을 위임받아서 온 거겠지.
이렇게 쉬이 넘어가는 건 내가 전직 불특대 요원인 것도 이유겠고.
아버지의 후광도 영향이 있을 거고.
더구나 이 일에 끼어든 게 단군 그룹이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테니, 모든 걸 감안하고 왔을 터였다.
뭐, 덕분에 일이 쉽게 정리돼서 좋았....
"너 곤란해서 딴생각하지?"
가끔 혜민이가 너무 날카로워서 무섭다.
"아닌데."
부인했다.
"맞는데."
"아닌데. 내가 널 왜 곤란해하냐?"
"시키는 일 밤새워 처리하고 오는 길에 딴 여자랑 노닥거리는 걸 보여 줬으니까."
"아니다."
"칫, 주문 적응하게 해 줘, 일 도와줘, 시부모님께 잘해, 밤마다 상대도 해 주는데 나한테 이럴 거야?"
"밤마다 뭘 상대해 주는 거냐."
얘는 진짜 집요하다. 집요하게 오해받을 말만 해.
"그거 말고 네 능력이나 보여 줘. 찾았어?"
말하며 혜민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밤을 새웠는지, 꽤 피곤해 보이긴 했다.
"마법사에게 잠은 중요해."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오빠 방에서?"
"응."
고개를 끄덕였다.
혜민이 그제야 제대로 된 언어를 뱉었다.
"찾았어."
마법사는 귀하다. 왜 귀하겠나.
그만큼 쓰기가 좋으니까.
여기저기서 마법사를 고용하기 위해 대란이 일었다고 들었다.
혜민이는 일전에 만났던 불멸 사냥꾼이란 놈에 대해 반쪽짜리, 중퇴자라 불렀다.
배우다 만 놈, 쉽게 설명하자면 중학교 입학에서 인수분해 몇 문제 풀고 중퇴한 다음에 나 수학 좀 한다고 하는 꼴이란다.
그만큼 마법사가 귀하다.
내가 괜히 수도권에 있는 모든 마약쟁이를 두들긴 게 아니다.
난 배후에 숨은 놈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줬다.
숨거나, 나오거나.
나오면 잡아 족치면 되는 거고.
숨으면? 찾으면 된다.
일부러 손목, 발목 후리고 놔줬다.
혜민은 나와 변신족 팀에게 작은 씨앗을 하나씩 줬다.
해바라기 씨를 닮은 건데 몰래 옷깃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기계 추적 장치는 금세 발각되겠지만, 주술 추적 장치는?
마약 팔아서 먹고사는 프로메테우스의 개에게 이걸 해결할 수준의 마법사가 있을까?
그렇게 얻은 정보였다.
도주하고 숨고,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는 놈들이다.
그중 몇 놈의 동선이 겹쳤을 거다.
그중에 위로, 제조업체와 선이 닿는 루트와 길이 있을 터였다.
진짜와 가짜가 섞인다. 이걸 구분하는 건 내 몫이 아니다.
아까 지혜 누나에게 말한 기업 비밀은 총 두 개였다.
하나는 혜민이.
다른 하나는 곰탱이다.
부르르.
전화가 울었다.
"네."
팬더 형이었다.
"내가 누구냐? 내가 바로 불멸이 낳은 최고의 브레인...."
이 양반이 또 이러네.
어쨌든 찾았다는 말이다.
프로메테우스 끄나풀이자, 한국에서 마약 사업하는 애들 본거지를.
"나 진짜 오빠 방에서 잔다?"
"오늘만이다."
혜민의 말에 내가 답했다.
좋다고 웃는 걸 보니, 후환이 조금 두렵긴 하네.
난 오늘 밤에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174. 우리가 아니다
"소대 병력을 한 번에 밀어 넣을까요?"
피지컬 깡패 소진이 물었다.
"좋죠."
변신족 사십이 단숨에 눈앞에 나타나면 꽤 무서울 터였다.
"경찰은 어떻게 한대요?"
생글생글 웃는 여자 거인이다.
겉으로야 둔해 보이지만, 진짜 그렇게 둔해 빠졌다면 써드 오더란 직위도 못 가졌겠지.
그녀도 이 일에 경찰이 꼬인다는 건 안다.
정확히 말하면 경찰이 하는 일에 내가 끼어든 거지만.
"경찰 합류해요?"
그녀가 재차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는 정보를 안 뿌렸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올 것이다.
이지혜란 팀장, 겉으로는 꼬리 치는 여우처럼 굴었지만, 프로다.
순순히 물러간 이유가 뭐겠나.
내 뒤에 꼬리를 붙이겠다는 말이지.
예상대로였다.
쫓는 기척이야 진즉에 잡아챘다.
붙은 꼬리는 초능 특수종이고 능력은 투명화다.
투명화로 기척을 숨길 순 없었다.
기척은 읽었다.
다만, 그 모습이 눈에 보이진 않는다. 답은 하나, 투명화 능력자다.
나름 잘 숨겨서 쫓아왔는데 감각에 틱틱 걸렸다.
변신족 훈련 이후, 무슨 이유인지 기척 감지 능력이 더 발달했다.
더듬이가 생긴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저 꼬리, 떨구면 얼마든지 떨구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는 김에 데리고 가지 뭐.
어차피 들어가기 전 지혜 누나한테 연락도 할 참이었다.
"우리끼리 하는 거죠? 재밌겠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끼리는 아닌데.
자세히 설명해 줄 필요를 못 느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목적지까지 25분이 남았다는 게 보였다.
운전자는 변신족 대원 중 하나, 말이 없는 친구였다.
조수석에는 부끄럼쟁이 암살자 변신족이 앉았고 뒷좌석에 나와 소진이 앉았다.
피지컬 깡패가 타고 갈 차다.
승용차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탄 게 지프다.
"피워도 되죠?"
옆에서 물었다.
삼촌이 툭 하면 입에 물던 것과 같은 거다.
"담배는 아니라던데 그건 뭐예요?"
훈련 첫날 담배 물었다고 혼난 삼촌은 담배 아니라며 되게 구시렁댔다.
그걸 들은 통나무 선생님은 그게 더 싫다고 했고.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는데 바로 옆에서 입에 물기에 물었다.
일반 연초로 보이진 않았다.
까만 필터와 회색의 몸통이 보였다.
"부스터요."
"부스터?"
"불멸자만 약을 쓰는 건 아니거든요. 알려 줄까요?"
"네."
"그럼 뽀뽀 한 번."
얘도 정상은 아니다.
"됐어요. 삼촌한테 물어보지 뭐."
"아, 농담이에요. 남자가 그런 거로 삐져요? 덩치가 아깝다."
그 덩치 당신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건 알고 말하는 거겠지?
부스터, 변신족이 개발한 비약 중 하나였다.
흥분할 때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 것도 있고 오히려 더 흥분하게 하는 것도 있고.
마약이 불멸자의 삼대 무기 중 하나라고 했었는데.
이제 그것도 옛날얘기란다.
"연구실에 연구원과 돈을 넣고 한 몇 년 갈아 대면 이런 게 만들어지죠. 신기하죠? 차라리 이쪽에 넘어오지 그래요? 여기 일 재밌는데. 특수대 요원 때보다 훨씬 신날걸요? 부스터 한 대 피워 볼래요?"
앞의 말은 전부 흘리고 부스터 한 대를 얻어 피웠다.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멸자의 마약처럼 화끈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에 해로운 건 빼고 약의 긍정적인 성분만 취해서 만든 거죠."
빨아 보니 알겠다.
불멸자가 쓰기에는 약효가 너무 미약하다.
다만, 변신족이 쓰기에는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가 폐 안을 휘돌고 전신에 스며든다. 혈류가 조금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럴 것이다.
예민해진 오감이 내 내부를 관조하게 했다.
"나쁘지 않네요."
내가 말했다.
"그죠?"
순진하게 웃는 이 여자가 과연 지난 밤 수십 명의 마약쟁이를 때려잡은 사람과 동일인인가.
웃으며 사람을 잡아 패기에 별명이 웃는 고릴라란다.
"이게 또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각성 부스터는 또 달라요. 비싸긴 더럽게 비싼데, 그래도 우리는 보급품으로 나오니까. 삼촌이면 본부장님이죠? 본부장님이야, 부스터 마니아시죠. 담배는 안 태우시는데 그거 때문에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라즈베리 향도 있고 오렌지 향도 있는데 전 개인적으로 그레이프 향이 좋아요. 지금 저 입에서 포도 향 나는데 맡아 볼래요?"
도착하기까지 20분, 이 수다를 듣고 가야 하는 걸까.
말을 끊을 겸 물었다.
"진짜 웃는 고릴라가 별명이에요?"
물으니.
빠직.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여자한테 고릴라라뇨? 누가 말했을까요?"
웃는 얼굴에 핏대, 별명 누가 지었는지 되게 잘 어울린다.
내 물음에 왜 운전하는 변신족이 손을 떠는 걸까.
덜컹.
과속방지턱을 밟은 차체가 흔들렸다.
"지나가다 들었어요."
"흐응, 흐응, 그렇다고 치죠."
이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것 같은데.
"운비야, 넌 아니지?"
"절대로."
부끄럼쟁이 변신족이 답했다.
"혹시 너니?"
툭, 피지컬 깡패가 앞자리를 발끝으로 찼다.
운전하던 변신족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답했다.
"아닙니다. 써드."
"그래? 누굴까, 누구일까, 누구일까아나아."
제 말에 음률을 붙이는데 공포 영화의 BGM처럼 들렸다.
걸리면 진짜 뒈지게 팰 것 같다.
음, 좀 미안한데.
별명 알려 준 친구한테 미안한 게 아니다.
"제가 예의가 없었네요. 그리 물을 건 아니었는데."
그 별명을 눈앞에서 들어 기분 상한 이쪽을 향해서다.
피지컬 깡패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답했다.
"...귀여워."
"아, 좀."
"아니, 진짜 나중에 우리 술이나 한잔하자고요."
"됐다고요."
자꾸 이러니까 사람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거지.
차가 도착했다.
인천 부두 외곽이었다.
바다가 인접한 곳은 아니고 창고가 모인 지역이었다.
서행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내가 전화를 들었다.
"누나."
밝게 인사하자, 반대쪽도 날 반겼다.
"연상 킬러 유광익 씨."
"제가 연상 킬러예요?"
"제 마음을 뺏었으니까요."
이 사람 진짜 재밌네.
겉으로는 이렇게 날 살살 놀리고 뒤로는 꼬리를 붙인다.
프로는 프로라는 건가.
"제가 고용된 몸이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말을 맞췄다.
"그렇죠."
"제 몸값이 얼마일까요?"
"네?"
예상치 못한 질문일까.
하지만 난 프리랜서인걸.
공짜로 일은 하지 않는걸.
"참고로 하루 일당 오백 제안, 연봉 3억에 보너스 별도 제안도 받은 적이 있거든요. 혹시 제 에이전트도 옆에 있나요?"
중고 형은 나와 아는 사이, 인연이 있다.
연하 킬러 이지혜 씨가 그걸 놓칠 리는 없겠지?
"음, 진짜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네요. 네, 있어요."
수화기 너머 '날 찾는다고?'라는 중고 형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로 옆에 뒀나 본데.
"제 전속 에이전트거든요. 계약서는 거기서 쓰면 되고. 자, 그래서 얼마요?"
난감해하는 게 느껴졌다.
"얼마를 원해요?"
나보고 불러라?
말하며 내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돌렸다.
내 손짓에 눈치 빠른 피지컬 깡패가 발로 운전석을 툭 찼다.
차가 제자리를 돌기 시작했다.
지프를 따라오던 버스 세 대도 마찬가지다.
따라붙던 꼬리가 절로 난감해지겠지.
"경찰청이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고용한 프리랜서 몸값의 세 배."
"와우, 광익 씨 돈 많지 않아요?"
"이 세상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뭔데요?"
"돈하고 여자요."
여우처럼 굴기에 나도 같이 맞불을 놨다.
내 말에 옆자리 깡패의 눈이 부드럽게 휜다. 왜 갑자기 웃는 거냐.
무섭다. 그 얼굴.
"바람둥이셨네."
지혜 누나가 말했다.
"아니면 꼬리 자르고 갑니다."
몇 초간 말이 없었다.
"좋아요"
오케이, 몸값 책정이 끝나고.
내가 한 말은 진심은 아니다. 사실 돈과 여자, 둘 다 그리 미련 없다.
여자는 이상형을 만나면 한 명으로 충분하고.
돈은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
뭐, 진짜 돈을 모으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왜 그렇게 봐요?"
피지컬 깡패의 눈빛이 더 음흉해졌다.
"저 바람둥이 좋아하거든요."
"전 싫습니다."
딱 잘라 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미 목적지다.
경찰 꼬리가 붙었으니, 내 위치는 알아서 말해 줄 테고.
터벅터벅 걸어서 움직였다.
목적지는 외곽 창고, 차가 멈춘 곳은 창고에서 귀를 기울여도 불멸자의 청각이 닿지 않을 거리다.
불도 켜지 않고 걸었다.
불멸이든 변신이든 이 정도 어둠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차가 오가도 좋은 큰 입구의 창고가 보였다.
슬쩍 열린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앞쪽에 경계병 둘이 우리를 발견했다.
경계병의 전신을 눈으로 훑었다.
소총 무장에 방검방탄복을 입었다.
불멸특수대 급으로 좋은 건 아니지만, 테러 단체치고는 꽤 훌륭한 무장이다.
방탄 대신 비니를 눌러쓴 두 놈의 눈이 빛났다.
둘 다 불멸자였다.
"누구냐?"
목소리가 떨렸다.
상대 쪽에서 보면 꽤 무서우려나?
어둠을 뚫고 걷는 혼혈과 사십 인의 변신족이라.
반대쪽에서 보면 공포 영화겠는데.
어둠을 뚫고 빛나는 눈 팔십 쌍이다.
"유광익."
내가 이름을 말하는 것과 동시다.
두 놈이 동시에 총구를 들었다.
"멈춰라. 뒤에는 뭐야? 야, 멈추라고, 멈춰."
난 멈추지 않았다. 무시하고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경계병 두 놈이 눈을 맞췄다. 시선이 오간 뒤다.
두 놈도 감이 있다면 이 무리가 주는 압박감을 느낄 터.
두두두!
두 놈이 그대로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난 그냥 걸었다.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신 내 앞으로 변신족 둘이 섰다.
제 몸보다 두 배는 큰 방탄 방패를 든 변신족이다.
"길 열어."
써드 오더, 소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옆으로 방패 변신족 제외한 변신족 둘이 튀어 나갔다.
좌우로 찢어져 내달리며 곡선을 그리는 신형이다.
감각에 그들의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졌다.
경계 서던 불멸자 둘이 소총을 옆으로 돌렸다. 곡선을 그리며 달리는 둘을 향해 경계심을 세웠다.
틈이었다.
방패 뒤에서 부끄럼쟁이 운비가 뛰쳐나갔다.
땅을 박차고 도착하기까지 눈 깜빡할 사이였다.
물론 난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에 그 움직임을 전부 잡아챘다.
내 대시보다 빨랐다.
물론 강각의 영역까지 가면 다른 얘기지만.
단순 대시만 보자면 나보다 빠르다.
하물며 땅을 박차는 소리도 안 났다.
운비는 그렇게 거리를 좁히고 양손을 뻗었다.
속도가 붙은 채로 휘두른 양손은 이미 흉기였다.
쩍, 뻑.
신음, 비명도 없다. 얻어맞은 둘이 풀썩 쓰러졌다.
지나치며 보니 목에 두 개의 구멍이 보였다. 손끝으로 구멍을 냈다. 깔끔한 솜씨다.
방패를 든 변신족이 다시 앞장섰다.
뛰쳐나간 변신족 둘이 그 옆에 서서 문을 좌우로 당겼다.
트드드드등, 팅.
문 밑에 붙은 레일에서 불똥이 튀었다.
"문에 기름칠 좀 하고 살지."
내가 말하며 안으로 들었다.
옹기종기 모인 무리가 보였다.
"...유광익이라고?"
이미 밖에서 말한 이름이다.
"그래, 내가 바로 동대문의 구원자, 불멸특수대가 낳은 최고의 에이스, 인간벌목꾼 살해자, 크로커다일의 대적자, 팀장이 존경하는 대리 유광익이다."
어디서 삐끗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알 바냐.
"미친놈이었나."
내 뒤에 있는 건 단군 그룹의 정예 변신족 사십 명이다.
다들 적당히 겁에 질린 듯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무릎 꿇고 손들면 살려 준다. 선착순 세 명."
"또라이 새끼."
무리 중앙에 있는 남자였다.
귓불이 큰 원숭이를 닮은 놈이었다.
"뒤에 있는 덩어리를 믿고 있는 거냐?"
놈이 한 발 나섰다.
급이 있어 보였다.
최소한 밑바닥 졸개는 아니다.
"나보고 덩어리라고 한 거죠?"
발끈한 소진이 나서려 했다.
난 그걸 팔로 막았다.
"미안해요. 쟤들 전부 제 거예요."
"...네?"
저 중 셋은 살려 줄 거다.
괜히 한 말이 아니다.
셋은 프로메테우스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이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줄 디엠이다.
우둑우둑.
목을 좌우로 꺾고 팔꿈치 위로 손을 걸어 당겼다.
허리도 풀고 다리도 풀고.
스트레칭이다.
"너 뭐 하냐?"
원숭이가 물었다.
"스트레칭."
"왜?"
"싸우려고."
"혼자?"
그가 물었다. 그게 답이었다.
피지컬 깡패는 '우리'라고 했지만, 우리가 아니다.
나 혼자 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프로메테우스도 알겠지.
아, 이 새끼 진짜 만만찮구나.
덤비면 우리도 뭘 하나 내놔야겠구나.
미친개는 건들면 안 되는 거구나.
"형이 진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뭐래, 개새끼가."
원숭이와 눈이 마주쳤다. 말과 달리 경계심이 가득한 눈이다.
상관없었다.
발끝으로 땅을 밀었다.
퉁.
땅을 박차는 순간, 내 몸이 공기를 찢는다.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왼 주먹을 앞으로.
펑.
"꺽!"
원숭이가 몸을 틀었다. 덕분에 놈의 어깨가 터졌다. 피와 살점이 튀었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눈깔 색이 변하는 게 보였다.
과도한 충격에 변신족의 피가 반응한 거로 보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오른발을 당기며 무게 중심을 이동, 발목, 종아리, 허벅지, 허리를 통해 에너지를 전달.
어깨를 틀며 주먹을 뻗는다.
어머니와 삼촌, 통나무 선생님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너 그거 전력으로 치면 아다만티움도 깨겠다."
그게 내 스트레이트다.
우두둑.
뼈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변하는 원숭이와 눈싸움을 하며 주먹을 뻗는다.
찰나의 순간, 놈의 대응은 훌륭했다.
원숭이 친구가 고개를 숙이며 목에 힘을 준다.
피하지 못할 바에 가장 단단한 두개골로 받아 내려 했다.
내 주먹이 놈의 이마를 때렸다.
꽈-앙!
포탄을 이마로 받아 내고 살아날 놈은 흔치 않지.
강체라도 익힌 게 아니라면 뭐.
"...와."
뒤에서 피지컬 깡패의 감탄이 들렸고.
난 다시 땅을 박찼다.
아직 무릎 꿇고 손든 놈이 안 보였다.
그러니 다 잡아 족칠 놈들이었다.
이들은 프로메테우스.
나와 내 어머니를 노린 놈들이었다.
꽝.
두 번째 포탄에 반신이 날아간 놈이 땅을 나뒹굴었다.
방검방탄복으로 막을 수준의 주먹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단군 그룹에서 내려오는 순혈 가문의 피를 이었다.
크로커다일은 강체.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내 핏줄의 특성은 순수한 완력 강화.
즉, 한계를 넘어선 근력이다.
훈련을 통해 자리 잡은 내 힘은 변신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변신체를 넘어선다.
불멸특수대 시절부터 남다른 완력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런 혈통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다음."
내 말에 상대 전체가 얼어붙었다.
한 마디에 무리 전체에 얼음장이 내려앉았다.
그 가운데 한 놈만이 눈을 빛내며 날 노려봤다.
보스로 보였다.
포기한 눈빛이 아니었다.
난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전부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하면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참이었다.
175. 화병이 죽을병이었던가
"지금은 놔두세요. 어설프게 건드리면 피닉스 팀이 움직이거든요."
새로 합류한 간부가 한 말이었다.
박정식은 그 말을 무시하려 했다.
작전을 짜서라도 유광익을 죽이려 했다.
대단한 전술도, 꼼수도 필요 없었다.
그가 바란 건, 대면.
정면으로 마주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불멸은 마법으로 잡고 변신은 초능으로 잡는다고 했던가?
우스운 말이었다.
능력 상성이란 개념은 박정식과는 무관한 얘기였다.
불멸자든, 변신족이든, 초능 특수종이든, 마법사든, 그에게는 전부 같았다.
전부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불멸자?
목을 자르고 사지를 잘라 분쇄기에 넣으면 된다.
그래도 재생하려 꿈틀대면 같은 일을 반복하면 된다.
불멸자는 육신이 아니라 정신을 죽이면 끝이다.
미쳐 버린 불멸자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고.
분쇄기에 갈리며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불멸자는 본 적이 없었다.
박정식은 상대를 이길 자신은 없어도, 죽일 자신은 있었다.
정식은 왼 주먹에 너클을 끼웠다.
손바닥 안쪽, 그립에 쥐며 힘을 주자, 충실한 압박감이 주먹을 압박했다.
이 너클은 어떤 방호 주문도 파훼하는 스펠 기어, 이름은 스펠 브레이커다.
충전식이라 하루에 세 번밖에 못 쓰지만, 그 세 번이면 충분했다.
오른손에는 나이프를 들었다.
물결무늬가 아로새겨진 나이프다.
아더 사이드의 신소재를 다마스커스 단조 방식으로 만든 물건이다.
이쪽의 이름은 수명살해자.
수명살해자는 독을 품은 단검이었다.
독의 배합은 자신밖에 모른다.
일단 생채기라도 나는 순간 싸움은 끝이었다.
스펠 브레이커와 수명살해자, 거기에 자신의 초능.
이 세 가지가 박정식이 믿는 바였다.
상급자에게 댈 핑계도 좋았다.
자신이 불러낸 게 아니라 상대가 알아서 왔다.
사업에 막대한 지장도 줬다. 박정식은 유광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새끼만 죽인다.'
아우들은 포기, 부하도 전부 포기다.
유광익만 죽이고 빠진다.
자신만 살아남으면 사업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었다.
티링.
너클을 칼날 면에 튕기며 박정식이 입을 열었다.
"애송이,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거냐."
광익은 혀로 입술을 핥은 뒤, 말했다.
"인천 부두 외곽 창고."
"뭐?"
"여기가 어디라고 묻길래."
짜증이 치솟는 새끼였다.
죽인다. 단순명쾌한 결론의 끝이다.
박정식은 제 초능을 발동했다.
그의 초능은 가속화.
눈 깜빡이는 순간의 짧은 찰나면 상대의 품 안에 파고들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무기를 쥐고 누구보다 빠르게 상대를 죽인다. 그게 박정식의 장기였다.
* * *
상대의 모습이 시야에 잔상을 남기며 긴 선을 그렸다.
순식간이었다.
초능 특수종, 가속화, 너클과 나이프 한 자루.
모든 걸 눈에 담자마자, 상대가 주먹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너클을 보자마자 불길한 육감이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웅.
허공에 별빛이 그려진다. 알이 선물한 은하수 장갑이 발동했다.
갤럭시 필드 위로 상대의 주먹이 꽂혔다.
둥.
주먹 한 방, 이후 놈이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는 만큼 빠른 속도였다.
아니, 물러나는 게 더 빠르다.
이제까지 만났던 모든 특수종을 통틀어도 가장 빨랐다.
"갤럭시 필드를 장갑에 새겨? 미친 자식이구나."
놈이 중얼거렸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내가 되물었다.
"그 기어를 믿은 거냐? 그래, 좋다. 그게 얼마나 갈까?"
대화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놈이다.
묻는 말에 대답 대신 제 할 말만 한다. 아니, 자기 힘에 심취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놈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땅을 박찬다.
속도가 다른 세계다.
다른 이들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놈이 달려들었고 난 이번에는 왼손을 뻗었다.
둥.
은하수 방어막이 물결을 치며 밀리며 사라진다.
너클이 만든 효과다.
보는 순간 확신했다.
스펠 기어의 방어력을 한순간 깎아 먹는 종류의 기어였다.
양손에 낀 장갑이 그저 튼튼한 천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마력을 전부 소진한 게 아니라, 꽉 막힌 변기처럼 장갑이 품은 방호 마법을 제대로 발동하지 못했다.
놈은 뒤로 물러나는 걸 전제로 덤볐다.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속도의 우위를 살린 아웃복서였다.
다만, 이곳은 링이 아니기에 주먹만 갖고 싸우지 않는다.
손에 든 무기가 단숨에 승패를 가를 수 있었다.
상대는 그걸 믿었다.
근데 맞아야 의미 있는 거 아닌가.
속도의 우위는 어떻게 가져오는가.
두 개의 능력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 운동 능력.
수의적으로 내 몸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둘, 운동 신경이다.
뇌와 근육을 이어 주는 신경을 말함이다.
내 몸에 흐르는 피가 그저 근력만 우월하게 해 주는 건 아니다.
훈련을 통해 운동 능력과 운동 신경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거기에 상대를 잡아챌 눈, 동체 시력이 뛰어나다면 속도의 우위를 도로 뺏을 수 있었다.
집중했다.
내 눈에 잔상을 남기는 놈의 흐린 그림자가 잡혔다.
화질이 개선되는 영상과 같았다.
뚝뚝 끊기고 흐렸던 모습이 선명해진다.
땅을 박차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이다.
단숨에 내달린 놈이 다시 너클을 뻗었다.
난 그거에 맞춰 코트 깃을 잡고 앞으로 당겼다.
쩡.
헥사곤 필드도 깨졌다.
허공에서 무형의 장막이 깨진 순간, 상대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흘깃하는 순간, 이미 코앞이다.
칼날이 내 늑골을 노렸다.
놈의 칼날에 담긴 의지가 엿보였다.
긋기만 하면 충분하다.
베기만 하면 충분하다.
생채기면 된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임수 하나 없는 오롯한 일변도의 공격이다.
뇌에서 시작된 명령이 근육에 전달된다.
생각과 동시에 본능과 이성이 합치를 이뤄 몸을 움직였다.
왼손 수도로 상대의 오른 손목을 때렸다.
속도, 타이밍, 궤적, 움직임 모든 계산이 끝났다.
그래서 쉬웠다.
스컥.
속도는 근력에 비례한다.
힘이 넘친다면 그만큼 빨리 움직일 수도 있다는 거다.
내 손날이 상대의 오른 손목을 통과했다.
근육을 부수고 살을 가르고 뼈를 잘랐다.
손목이 터지듯 잘렸고 놈은 반사적으로 왼 주먹을 뻗었다.
이번에는 오른 손날을 아래에서 위로 반원을 그리듯 그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손목 절단이다.
상대의 능력 발동이 멈췄다.
"끄르억."
가속화가 끝난 놈이 비명도 신음도 아닌 소리를 내질렀다.
양 손목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내 손날이 남긴 충격의 여파로 양팔의 팔꿈치까지 뒤틀렸다.
놈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다. 눈을 마주쳤다. 황당함, 놀람 따위의 감정이 내비쳤다.
"...끄아아아아!"
뒤늦은 통증에 비명을 내지른다.
그 앞에 선 채, 난 진심을 담아 물었다.
"너보다 빠른 사람 만난 적 없지?"
그러니까 이렇게 덤비는 거겠지.
속임수도 없고 칼을 휘두르는 작업에 법도도 없다.
어디서 나이프 쓰는 법, 주먹질하는 법이야 좀 배웠겠지만, 노력한 타입은 아니다.
이제까지 저 가속화 능력과 두 개의 기어만으로 손쉽게 상대를 죽였겠지.
고로, 싱거웠다.
놔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듯싶은데.
굳이 지혈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 어? 형님?"
머리가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놈이었다.
원근감을 흐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특수종일까.
"이노옴! 형님을! 형님을!"
의리가 있는 친구였다.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아직 무릎 꿇고 손든 애들이 없었다.
난 상대 보스가 떨어뜨린 손에 있는 칼을 빼서 들었다.
몇 번 허공에 휘둘러 보니, 잘 만든 칼이라는 게 느껴졌다.
무게감도 칼날의 절삭력도 더없이 훌륭하다.
"대두!"
뒤에서 포마드 가르마 놈이 말했다.
대두의 빨간 눈이 보였다.
놈의 몸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열화?"
아닌데, 조금 다르다.
육감이 그리 말한다. 화염을 뿜어내는 계통과 다른 종류다.
칼을 손안에서 돌려 역수로 잡았다.
다가오면 벤다. 의지를 곧 무형의 힘, 살기로 형상화한다. 심령을 제압하고 단숨에 벨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꽝.
내달리던 놈이 갑자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폭음과 함께다.
놈이 단숨에 창고 벽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벽이 터지며 부서졌다. 그 밖으로 내달리는 대두의 뒷모습이 보였다.
"폭발 능력자다. 잡을까?"
뒤에서 암살자 부끄럼쟁이가 물었다.
"놔둬요."
말하고 신경 껐다.
저렇게 단숨에 튀는 것도 능력이다, 진짜.
상상도 못 했거든.
"...야아아, 이 새끼야. 혼자 가냐아."
포마드 머리가 중얼거렸다.
난 포마드 머리를 향해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아니죠."
"뭐?"
"쉿."
검지를 코앞으로 가져와 말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모두 입을 다문 사이다.
펑!
경쾌한 소음이 울렸다.
"밖에 오십 명의 저격수가 여길 겨누고 있다. 나간다고 될 일이 아니지."
웃으며 내가 말했다.
"오십?"
"전부 특수 훈련받은 요원이고. 내 출신 몰라?"
난 불멸특수대 출신이다.
포마드 머리가 턱을 덜덜 떨었다.
"자, 다시 얘기...."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포마드 머리가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저 새끼가 나쁜 놈입니다. 저놈이 다 시켰습니다."
잽싸네.
제 보스를 욕하는 것도 무릎 꿇는 것도.
나간 놈이나, 남은 놈이나.
뭐, 그게 그거다.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 있을 수도 없고 이게 바로 진퇴양난이죠. 진짜 혼자서 정리해 버렸네요."
피지컬 깡패 변신족 소진이 중얼거렸다.
남은 놈들의 눈에 전의가 사라졌다.
"둘 남았다."
내가 말했고.
턱턱턱턱!
전부 시멘트 바닥 위로 제 무릎을 찍어 댔다.
무릎 깨지겠네.
"진짜 밖에 특수대가 있어요?"
뒤에서 소진이 물었다.
"있긴 하죠."
"오십 명은 아니고?"
"그게 궁금해요?"
되묻자, 입을 다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모르면 써드 오더란 책임자 자리가 울지.
그녀도 안다.
오십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가면 죽는다는 관념을 심어 준 게 유효했다는 걸.
봐, 아무도 도망갈 생각을 못 하잖아.
얘네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고 생각해 봐.
잡느라 품이 더 든다.
그리고 사실 한 명만 불렀다.
정확하게는 프로메테우스란 집단에 원한이 뼈에 사무쳐,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할 사람 하나.
"셋 놔두고 다 죽일까?"
운비가 말했다.
부끄럼쟁이라며 말은 참 살벌하게 하네.
"끅끅."
그 말에 양손을 잃은 보스 놈이 땅을 벌벌 길며 기괴한 웃음을 토했다.
"끅끄으으으."
신음인지, 웃음이지, 둘 중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다.
"괜찮아?"
내가 물었다.
쇼크로 죽었어도 할 말이 없을 상처다.
"너 프로메테우스가 어떤 곳인지 모르지."
놈이 바닥을 기며 충혈된 눈을 들며 말했다.
"응?"
"그러니까 이럴 수 있겠지. 나 하나 죽이고 사업 하나 망쳤다고 타격이 있을 것 같나?"
"오. 패기."
감탄했다. 이 상황에서 덤빈다니.
"타격은 있죠. 보스. 없을 순 없는데."
뒤에서 포마드가 말했다.
나한테 잘 보이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그 말에 보스란 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너, 이 새, 쿨럭."
얼마나 열 받는지 말하다 말고 기침도 토했다.
"등 두드려 줄까?"
하던 말이나 마저 하라고 위로를 건네니.
"미친 또라이 새끼."
자주 듣는 말이라 타격이 하나도 없었다.
"응, 그래."
원래 당한 놈이 욕하는 건 칭찬이다.
게임 참 음경같이 한다는 말을 우리 편이 하면 욕이지만, 상대가 하면 칭찬인 건 국룰이다.
"죽여라. 대신 앞으로 네가 아는 사람, 너랑 말 한번 나눈 사람, 모두가 우리의 타깃이 될 거다. 넌 이 일을 평생 후회하게 되겠지. 넌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널 살려 주고 돌려보내면?"
허리를 숙이며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흘린 피로 안색은 창백한데, 눈은 빨갛다.
빨갛게 물든 눈은 금세 피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뭐?"
너무 뜬금없는 얘기였나.
"그런 보복은 원하지 않아서, 혹시 이미 늦었어? 요즘 기술 좋아져서 양팔 붙이는 건 일도 아니야. 거기에 무기도 돌려줄게."
은근슬쩍 챙겨 둔 칼과 너클을 들며 살살 달래 봤다.
눈을 마주친 채로 진지함을 담아 바라봤다.
이건 진짜다. 뻥 아니다. 농담 아니다.
그런 의지를 담아 바라보니.
"...이 미친 새끼."
놈이 말했다.
아, 놀리는 거 들켰네.
혀를 삐죽 내밀며 내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미안, 연기는 특기가 아니라."
놈이 전신을 떨었다. 아까보다 피가 더 흘렀다.
부들부들 잼.
"이미 프린세스 메이커랑은 강을 건넌 사이라."
귀를 후비며 말하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뭐? 우린 프로메테우스다. 너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끄륵."
"아, 미안, 실수."
그게 끝이었다. 피를 너무 흘린 놈의 눈에 빛이 스러졌다.
그리고는 픽 죽어 버렸다.
부들부들하다가 죽는 걸 보니, 화나서 죽은 것처럼 보였다.
화병이 죽을병이었던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던졌다.
겁을 집어먹은 마약 제조 및 판매 집단이 보였다.
"마약 만든 곳, 판 루트, 이제까지 먹은 돈, 다 실토할 놈, 선착순 하나."
"저요! 제가 보스 바로 밑이었습니다."
포마드 머리가 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난 뒤를 향해 말했다.
"경찰 오는 거 5분만 막아 줘요."
"변신족 소대 사십을 데려와서 병풍으로 썼네요."
소진이 말했다.
"직관 재밌죠?"
난 농담을 던졌다.
"네, 재밌네요."
말하며 소진이 몸을 돌렸다.
"전원 입구 막아. 너, 너, 구멍 막고. 안으로 진입하는 경찰에게 단군 그룹의 행사라고 말하고 열어 주지 마. 십 분 막는다. 실시."
카리스마 보소.
5분이라고 했는데 10분이나 막아 준다니, 서비스도 좋다.
소진의 말에 변신족 무리가 움직였다.
시선이 따갑다.
눈을 돌리는 소대원 사십, 팔십 쌍의 눈이 날 바라봤다.
그 눈을 바라보는데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눈에 힘을 줘?
"눈깔."
소진이 말했고.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마흔 명의 변신족이 눈을 깔았다.
웨에에엥.
곧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경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난 포마드 머리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동안 얼마나 벌었냐?"
품에 들어온 작은 새가 파르르 떨며 말했다.
"보스 비자금까지 파내면 십억은 우습습니다."
"겨우?"
"그게 최근에 작전 비용을 이쪽에서 충당해서."
"무슨 작전 비용?"
말하고 나서 포마드 머리의 안색이 굳었다.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곧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아시아 쪽에 준비하는 게 있다고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월척이었다.
딱 십 분, 들을 거 듣고 풀어 주니, 뒤에서 경찰이 들이닥쳤다.
"광익아, 형이 왔다! 이 새끼들 누가 내 동생 건드리래!"
선두는 중고 형이었다.
176. 왜 내가 여기서 끝낼 거로 생각하는 걸까?
두근두근.
정소진은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절로 손톱이 삐죽삐죽 제 본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욕구 컨트롤은 제대로 된 변신족의 기본이었다.
그녀는 쉬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에 데려온 사십의 변신족은 사실상, 점수판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일을 맡기 전, 상급자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소진이 아직 시집 안 갔지?"
"네?"
"괜찮은 신랑감인지 얼굴이나 보고 올래?"
그 주인공이 유광익이었다.
제대로 된 변신족이라면 욕구를 통제할 줄 안다.
오늘 데려온 팀원 전부는 투쟁 욕구를 조절할 줄 아는 '제대로 된 변신족'이었다.
그리고 그 사십이 전부 반응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꾹 눌러 참았을 뿐.
'싸워 보고 싶다.'
엄청 재밌는 냄새가 났다.
절로 코가 씰룩였다.
상급자가 괜히 보낸 게 아니었다.
가속화를 달고 덤비는 초능 특수종이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아, 미치겠네.'
자빠뜨리고 싶고, 싸우고도 싶다.
아주 오랜만에 소유욕이 들끓었다.
하물며 머리가 빈 채로 몸만 쓰는 타입도 아니었다.
'머리가 좋아. 분위기를 만들 줄도 알아.'
운비의 말이 맞았다.
셋만 살린다고 해 놓고, 셋만 죽이고 끝났다.
아니, 밖으로 나간 놈까지 합치면 넷인가.
유광익이 직접 때려잡은 건 셋이다.
이게 노림수였다면 머리도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 타입이란 거다.
겉만 보면 머리 쓰는 쪽은 아닌데.
"영리해."
운비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의 손자라.'
처음에는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핏줄을 이었다고 해서 그게 꼭 훌륭한 혈통이란 법은 없으니까.
소진은 이제까지 혈통을 믿고 깝치다가 뒈진 놈의 이름을 최소한 열 개는 쓸 수 있었다.
상급자는 유광익의 평가를 원했다.
소진은 보고서 쓸 첫 줄을 떠올렸다.
'이레귤러.'
유광익은 특수종 세상에 전에 없던 이레귤러였다.
전투력과 별개로, 분위기를 만드는 그 심리전까지.
'아, 진짜 탐나.'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전신을 치달렸다.
"지금 덮치면 일 커진다."
옆에서 운비가 손등을 툭 쳤다.
기세를 일으키진 않았다.
소진은 업무에 충실한 회사원으로 돌아왔다.
광익이 포마드 머리를 한 놈의 어깨에 손을 풀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나 또 반했잖아. 광익 씨. 최고야, 멋있어. 짜릿해, 밤에도 그럴까요? 우리 광익 씨, 힘세고 짜릿할까?"
"네, 감사합니다. 그 자꾸 왜 그럽니까?"
뒤에 붙인 말에 대한 반응이 신선했다. 이쪽으로는 숙맥이었다.
소진은 속으로 웃음을 감추고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렇게 내가 싫어요?"
"아, 진짜 이러지 말라고,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광익이 도망쳤다. 그가 PWAT 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두에 선 여자가 눈에 띄었다. 그 여자가 광익을 보고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여자였다.
아쉽네.
소진이 입맛을 다셨다.
조금 더 있었으면 눈물도 조금 보여 줄 수 있었는데.
"쫓아낼 생각이야? 아니면 덮칠 생각이야? 둘 중 하나만 해."
운비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유혹이었는데?"
"...어디가?"
운비는 냉정했다.
소진은 이런 방식으로 남자에게 다가간 적이 없었기에 자신의 행동에서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다.
* * *
이지혜는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싸움의 흔적을 읽었고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인지했다.
'넷이 죽었고.'
나머지는 얌전하다.
덤빌 생각도 안 한다.
마약쟁이 무리가 이렇게까지 고분고분한 적이 있었나?
마약 전담 수사팀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된다.
광익이 변신족 지휘자와 말을 나누다가 자신을 향해서 다시 걸음을 놀렸다.
'단군 그룹과 연관이 있었나?'
변신족 사십과 지휘자로 보이는 둘이 눈에 띄었다.
변신족 무리는 싸우지 않았다. 그런 흔적은 없다.
'이걸 혼자?'
누가 했을까.
물어서 뭐 하겠나.
"광익 씨가 한 거죠?"
"네? 아, 네."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그래서 더 놀랍다.
혼자서 한국 마약 제조업체의 핵심 그룹 인사를 때려잡고 저 앞에 사열 종대로 벌 받게 해 둔 사람이 이런다.
"약속은 지키시는 거죠?"
광익이 물었다.
"받을 거 받으면요."
"아, 그건 저 친구가."
말하며 광익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야, 아까 뭐라 그랬지? 네 보스가 누구한테 돈 먹이고 있었다고 했더라?"
"네? 네, 아니, 그걸 그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
"아, 비밀이야? 그럼 비밀이라고 말을 해야지."
보통 이런 건 말하지 않아도 쉬쉬하게 되지 않나.
그걸 이렇게 대외적으로 말하는 게 더 어색하잖아.
하지만 이지혜에겐 생각한 걸 입 밖에 내는 것보다 정보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게 급했다.
"대우야."
그녀는 진실 감별의 능력을 지닌 부하를 부르며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가르마 대가리?"
"네, 제가 가르마 대가리 조병철입니다. 전 그럼 이제 경찰 쪽에 인계되는 겁니까?"
포마드 머리가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공손한 태도였다.
"맞아."
지혜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직의 주요 인물은 넷이었다.
첫 번째가 보스.
양팔이 터진 채로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두 번째가 원숭이.
머리가 터져 죽었다.
세 번째가 대두.
그놈은 혼자 밖에서 피격당해 죽었고.
남은 건 가르마 대가리 하나뿐이었다.
마약쟁이가 으레 그러듯, 독하고 끈질기다. 하물며 이번에 파악한 이 네 놈은 외국에서도 활동한 진짜배기 제조업자였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순할까.
"네, 최선을 다해 진술하고 복역하겠습니다."
가르마 대가리 조병철이 얌전히 양손을 내밀었다.
뭐냐고 눈으로 물으니.
"수갑이요. 채워 주시죠. 전 반드시 경찰과 함께하겠습니다."
얌전하다. 말도 잘 듣는다.
이지혜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고개를 기울인 채로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공포다. 눈에 어린 두려움이 보였다. 놔두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놈의 시선을 따라가니.
"살아서 다행이네, 우리 가르마 대가리."
조병철의 별명을 듣고 피식거리는 광익이 보였다.
뭘 어떻게 했길래.
이지혜와 유광익의 눈이 마주쳤다.
"혹시 경찰청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요?"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들어오면 곧바로 고속 승진은 물론, 시작부터 고위직 확정이다.
일선에서 이렇게 뛰어주는 인재, 정말 흔치 않았다.
"네, 없습니다."
광익이 단호하게 잘랐다.
"아."
이지혜가 아쉬움에 탄식을 터트렸다.
"그럼 연상 포지션은 놔둬 주세요. 그건 제 자리니까."
이렇게라도 연을 이어 가야 했다.
유광익은 진짜배기다.
불멸특수대 안에 있었기에 오히려 과소평가 된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새 진짜 왜 이러지."
광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김중고를 향해 돌아섰다.
* * *
"저 요새 좀 이상해요."
"넌 원래 이상했어. 괜찮아. 그게 정상이야."
일을 끝내고 팬더 형 집에 찾아온 참이었다.
"아니, 진짜 이상하다니까."
"뭐가?"
"요새 인기가 너무 많아요."
"...나가, 꺼져."
"진짜, 요새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음."
"다들 돈을 보고 왔거나, 아니면 노리는 게 있는 거다. 뒷조사부터 해 봐."
이 사람은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 상담을 하는데 왜 이 모양인가.
"쓸데없는 얘기 집어치우고. 얼마 벌었냐?"
우리 팬더 형, 돈 참 좋아한다.
"시계 사고 싶어요?"
"네가 내 마누라냐? 버는 돈 어디에 쓰는 건지 확인하게?"
그건 그렇다. 사생활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난 이번 일로 얻은 이익을 따져 봤다.
중고형이 나 대신 경찰 쪽이랑 쓴 계약서에 기재된 게 2천.
그리고 마약쟁이 비상금을 챙겨서 4억가량 된다.
전부 다 가지고 나올 수는 없었다.
일단 현물과 현금만 챙겼다. 골드바를 모으더라고 보스 새끼가.
덕분에 금붙이가 좀 생겼다.
거기에.
"물건 감정할 줄 알아요?"
보스 새끼가 들고 있던 칼과 너클이다.
"허, 알뜰하게도 챙겨 왔네. 이거 가져갈 때 경찰에서 뭐라 안 하디?"
"안 하던데요."
변신족 애들이 길막 할 때 챙겼으니까 경찰은 이거 챙기는 걸 보지도 못했다.
"어마어마하네."
팬더 형이 혀를 내둘렀다.
많이 벌었다. 뭐, 돈만 보고 한 일은 아니다.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자, 그럼 이거로 프로메테우스가 겁을 먹었을까?
"앞으로의 일을 점쳐 보시죠. 불멸특수대가 낳은 최고의 브레인님."
툭 말하니.
"유비도 제갈량을 데리러 올 때, 삼고초려 했는데, 난 왜 한 번에 수락한 걸까."
"선택지가 없었잖아요. 감방이냐, 여기냐. 양자택일이었으니까."
"그건 그렇지. 뭐, 프로메테우스는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쪽도 본격적으로 나올 테니까."
팬더 형이 캔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말했다.
테러 단체는 집요하고 지독하다.
"암살자가 오는 건 귀여운 수준일 거고. 끅."
팬더 형이 말을 끝내고 트림했다.
시큼털털한 냄새가 났다.
"저녁에 뭐 먹었어요? 상한 거 먹음?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니까."
난 코를 잡으며 말했다.
"파인애플 피자 먹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게?"
파인애플 피자는 피자가 아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피자는 그렇다 치고, 프로메테우스를 상대할 방법은 많았다.
단군 그룹 쪽에 신변 보호를 요청해도 되고.
아버지 쪽에게 부탁해도 된다.
그리고 다른 방법도 있다.
"때려야죠."
코를 잡고 말하니,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응? 뭘?"
"받아치기만 하면 애들이 만만하게 보거든요."
이걸 학창 시절에 느꼈다.
일진을 조질 때, 덤비는 놈들만 조지니까 처음에는 무작정 덤비고, 그다음에는 나를 무시한 채로 주변만 괴롭혔다.
그렇게 놔둬서야 쓰겠나.
상대가 지성인이라면 말로 타이르겠지만.
테러 단체에 지성은 무슨.
툭하면 폭탄하고 주먹, 총탄으로 얘기하니.
나도 같은 방식으로 해 주는 거다.
함무라비 스타일은 그런 거다.
팬더 형이 내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너 누구랑 얘기하니?"
"사수한테는 평생 비밀로 했겠지만, 저한테는 안 그래도 됩니다. 형."
팬더 대리가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갑자기 정아 얘기는 왜 나와? 여기 우리 둘만 있는 거 맞지?"
"한국에 남은 프로메테우스 세력 다 알죠?"
어디서 자꾸 발뺌인가.
오리발 내미는 건 시발 팀장한테 배웠겠지만, 날 속일 수는 없었다.
팬더 형이 어깨를 움찔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불멸자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다.
난 코를 잡은 손을 놨다.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거 저 줘요."
"...더 하겠다고?"
팬더 형이 물었다.
왜 내가 여기서 끝낼 거로 생각하는 걸까?
겨우 마약쟁이, 프로메테우스가 손대는 사업 하나 건드리고 내가 멈출 거로 생각하는 걸까?
프로메테우스가 진짜 날 보면 소스라치게 해 주고 싶다.
나만 보면 악몽을 꾸고 날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서 가슴을 치게 하고 싶다.
나랑 눈만 마주쳐도 오줌을 지리게 하고 싶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도 못 자게 하면 더 좋고.
"당연하죠."
내가 답했다.
"하, 이 미친놈이."
팬더 형이 감탄했다.
벌컥벌컥.
이번에는 내가 맥주를 쭉 들이켰다.
가스가 차서 절로 속에서 깊은 트림이 터졌다.
팬더 형이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기댄 형이 날 빤히 바라봤다.
"정아가 알면 나 죽는다."
숨긴 걸 알면 사수 성격에 얌전히 '아, 그랬어요.' 하고 넘어가진 않겠지.
그렇다고 이게 그렇게 겁낼 일인가.
"놔두면 곪을 상처는 도려내야 하고, 지금 나 말고 그거 할 사람 있어요?"
마약 파는 놈 붙잡고 물어보니까 가관이더라.
이 새끼들 돈 받아 처먹은 놈들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정부에도 있고 기업에도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뿌린 씨앗은 이미 한국 깊은 곳에 뿌리내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뭐 어째, 보이는 족족 뽑아서 태워 버려야지.
"야, 정아한테 말할 거지?"
깜빡깜빡, 난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이 형 왜 이러나 싶어서.
"아우, 그래. 말해 준다. 내가."
"그리고 형, 공주 육성 간부 하나가 아시아에 일을 벌인다고 하는데, 들은 거 있어요?"
"그거 기밀인데."
그 기밀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 건데?
"이번에 잡은 애가 줄줄이 말하던데요."
"그럼 누가 오는지도?"
"네."
들었다.
팬더 형과 눈이 마주쳤다.
아시아, 정확히는 일본에 일을 벌인다고 한다. 목적은 한국에 병력을 진입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담당자가 아는 놈이다.
참여하는 간부가 악어, 크로커다일이었다.
난 팬더 형과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통했다고 느꼈다.
"맞죠?"
"응, 떡밥 낚시다."
팬더 형이 내 추측에 확신을 더해 줬다.
악어, 이 새끼가 어울리지 않게 잔머리를 굴렸다.
177. 이번에는 아픈 손가락을 물어뜯어 줄 생각이었다.
[유광익] 우리 함께해요
뜬금없이 온 메시지였다.
김정아는 그걸 보며 역시 유광익은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전에는 프로메테우스 새끼발톱을 부수러 가자고 했었다.
무슨 소리인가 따질 것도 없이, 김정아는 광익을 따라가서 포탑 역할을 했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프로메테우스 하부 조직의 하부 조직원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그때와 같았다.
이 미친 초고속 승진자이자 최단기간 퇴직자가 또 자신을 불렀다.
타타타탁.
곧바로 인트라넷에 휴가 요청서를 올렸다. 팀장의 전자 서명 한 번이면 휴가다. 거절당할 이유가 없었다.
"정아야?"
김정아는 곧바로 일어나서 중봉 앞에 섰다.
의자를 삐딱하게 뒤로 기운 채로, 중봉이 반쯤 감긴 눈으로 정아를 바라봤다.
"휴가 가게?"
뒤쪽에 앉은 기남의 귀가 움직였다.
외부 보안 3팀은 신입을 받을 수 없었다.
이중봉은 이후에도 믹서기란 별명에 걸맞게 신입을 갈아 버렸고.
이 빈자리를 아이러니하게도 기남이 채웠다.
아무도 그리하라 하지 않았는데도 자원했다.
이중봉 팀장도 딱히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팀원이 셋이 됐다.
셋이 됐지만, 전보다 일이 없어서 한가한 나날이었다.
둘이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다.
외부 일이 끊긴 덕분에 최근 화림은 서울 시내와 근교에 일어나는 일을 도맡았다.
지방 출장도 잦았다.
외부 보안 3팀은 손이 부족할 때야 나서는 팀이니, 당연히 일이 없었다.
그런데 김정아만 바빴다.
프로메테우스 끄나풀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정보를 캐내기도 하고.
그녀는 나름대로 할 일이 많은 몸이었다.
애초에 복수를 위해 화림에 몸담았으니까.
"네, 쉬고 싶습니다."
이중봉은 김정아를 잘 알았다.
프로메테우스 관련이 아니면 휴가 쓸 턱이 없다.
"자꾸 그 새끼 만나지 마라. 물든다."
중봉이 말했다.
"네."
김정아는 답하고 돌아섰다.
둘 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았다.
자리에 돌아온 김정아는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퇴근, 식사, 유광익.'
식사는 광익과 함께하면 될 듯했다.
곧바로 같이 저녁 먹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10분쯤 지나 답장이 왔다.
[유광익] 내 남자 건드리지 마.
김정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무슨 소리일까.
쓸데없는 일에 고민하는 건 심력 소비였다.
김정아는 답장을 무시했다.
곧바로 답장이 하나 더 왔다.
[유광익] 네, 함께해요. 저녁도. 조금 전 메시지는 잊어 주십쇼. 미친 아이가 보낸 겁니다.
알겠다고 답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뒤에서 기남이 다가왔다.
"그놈 만나러 갑니까?"
불멸자는 눈치가 비상하다. 오감과 육감이 발달했으니, 당연했다.
그중에서도 순혈 정가라면 탁월한 육감과 오감의 소유자다.
눈치가 빨랐다.
특히나 기남은 유광익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켰다.
이전에 인베이더 퇴치 임무를 수행할 때, 기남은 물었었다.
"유광익 첫 번째 작전 나갔을 때, 눈먼 개 몇 마리 잡았습니까?"
"안 세어 봤다."
김정아는 단출하게 답했었다.
작전 상황이 비슷했다.
물론 유광익과 처음 나섰던 작전은 게이트 상태가 급변한 거였고, 기남과 함께한 임무에서는 웨이브 형태임을 알고 왔기에 중화기도 준비했다.
그날 정기남은 날뛰었다.
눈먼 개 스물을 권총과 나이프만으로 죽였다.
감각을 열어 반응하고 하나하나 쏘고 찔렀다.
모두 급소를 노렸고 빗나간 게 없었다.
묘기에 가까운 미친 짓이었다.
다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중화기로 갈기면 끝날 일이었는데.
"쟤 약 먹었어요?"
지원 나온 2팀 대리가 그렇게 묻기도 했었다.
"아마도."
김정아는 그리 말하고 기억에서 지운 일이었다.
본사로 돌아오자, 이중봉 팀장이 기남이한테 욕구불만이냐고 넌지시 놀렸다.
정기남은 깔끔하게 그걸 무시했다.
"...얘도 다른 방향으로 애가 망가졌네, 이게 다 꽝 새끼 때문이지."
이중봉 팀장은 그런 기남이를 보고 혀를 찼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광익만큼 대찬 태도라고 봐도 좋았다.
하여간 그렇게 적응한 기남이다.
유광익이 이제까지 한 일을 다 조사하고 공부하듯 달달 외운 친구이기도 했다.
"맞죠?"
"그런데?"
유광익을 만나는 건 프로메테우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다.
불협화음을 낼 동료는 필요 없었다.
"아닙니다."
기남은 그리 말하고 돌아섰다.
답답해 보이는 뒷모습이지만, 김정아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기남이 상사병에 걸린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