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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예민한 오감, 그걸 뛰어넘은 육감과 직감.

그 모든 게 하나의 결과로 귀추된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눈앞에 현실은 명확했다.

악어는 곰을 압도했다.

기피 대상 1호는 팬더 대리를 가지고 놀았다.

대부분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건 여기까지다.

하지만, 내 육감은 그 이면을 훔쳐봤다.

악어는 곰을 단숨에 죽이진 못했다. 쉬이 뿌리치지도 못했다.

눈앞에 벌어지는 사실과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가설, 거기에 육감과 직감이 말해 주는 것까지.

인과가 만들어진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난 왜 곰과 악어의 싸움에 끼어들었나.

이 전장에서 유일하게 승산이 보였으니까.

이성을 잃어 단순한 패턴으로 싸우기에 밀리는 거다.

곰이 이성을 찾는다면, 전세는 변할 것이다.

잠재력만 따지자면 악어가 아니라 이쪽이 우위란 거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었다.

"혹시 정신 차릴 생각은 없죠?"

팬더 대리가 날 향해 아가리를 벌려 물려고 하기에 뒤로 구르며 피했다.

"크헝!"

기대도 안 했다.

팬더 대리는 여전히 이성을 잃은 맹수에 불과했다.

악어는 그런 맹수의 앞발을 쳐 내고 피하며 날 노렸다.

순간, 구절 창이라도 된 듯, 티티티팅 비늘이 튕기는 소리가 나며 꼬리가 쭉 뻗어와 내 심장을 꿰뚫었다.

심장이 뚫린 내 잔상이 흐려져 흩어졌다.

찰나 간에 기척 돌리기를 쓰지 않았으면 이 일격으로 분명 전투 불능이었다.

뭐, 그랬다는 거다.

피하면 다 의미 없는 거다.

꼬리에 이어 길쭉한 손톱이 날 노렸다.

팬더 대리의 찌르기였다.

이 와중에 이런 절도 있는 찌르기라니.

톡 하고 땅을 박찼다.

깃털처럼 가볍게 몸을 띄워 피하고. 팬더 대리의 팔뚝을 손으로 짚었다.

그대로 물구나무선 자세에서 옆으로 내려섰다.

이성을 잃은 것치곤, 팬더 대리는 가끔 쿵푸 팬더가 빙의한 듯 몸을 잘 썼다. 아마도 평소에 익힌 게 자연스레 몸에 묻어나는 것일 터였다.

변신하면 이성을 잃는 걸 알기에 평소에 몸에 기술을 때려 넣은 걸까?

그저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정답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악어 꼬리, 주둥이, 주먹, 곰의 주먹, 발, 몸통 박치기 따위를 피했다.

이상하게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밖에서 보기에는 아슬아슬해 보였나 보다.

"광익."

"유광...."

"위험."

"거긴 안... 되지 않네."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특수대 요원이 날 힐긋거리며 말하는 게 다 들렸다.

기남이의 말, 혜민이 목소리, 호남이 형, 박필로 팀장, 박다람 팀장.

다들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게 여유가 넘친다.

불멸자의 감각으로 상대의 공격을 파악하고, 변신족의 운동신경으로 피한다.

단순 노동에 가까웠다.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상대가 변화를 시도했다.

변신족 실험체가 겨우 한둘이 남았을 때였다.

"엄호."

장미 또라이가 나섰다.

제 곁에 다섯의 호위를 둔 그녀가 거리를 좁혔다.

의도가 훤했다.

날 노린다. 메두사의 눈이라면 나무 위를 노니는 청설모처럼 날쌘 날 붙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뭐, 우리는 구경만 하냐?

무엇보다 아까부터 감각이 더없이 예리하게 세워진 덕인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공감각 강화가 과해서일까?

덕분에 피하면서도 잡생각이 가능했다.

장미 또라이가 다가서는 걸 보며 난 변신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내 변신을 금했다.

적어도 더 몸을 만들고 변신족의 생리를 이해한 뒤에 하길 바라셨다.

그걸 위한 수련 계획도 잡으신 듯했는데.

요새 회사가 좀 바빴어야지.

그래도 위험하면 변할 생각이었다.

이 상황을 타파....

음?

그럴 생각이었는데.

"잘 지냈겠지? 그래 보이긴 하는구나."

장미 또라이 뒤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호위 중 둘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톡톡.

목소리의 주인은 칼날을 마주할 듯 손을 뻗다가 손목을 기묘한 각도로 꺾어서 피하고, 칼을 쥔 손을 바깥으로 쳐 냈다.

쳐내고 주먹을 쥐자, 팅 하고 손등 위로 세 갈래로 갈라진 칼날이 튀어나왔고.

곧 세 갈래 칼날이 테러범 두 명의 목을 꿰뚫었다.

목소리 주인은 그 상태 그대로 횡으로 팔을 저었다.

우드득.

방검복을 입었음에도 쉬이 찢어 버린 칼날이 그대로 상대의 목줄기를 뜯어내듯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불멸자 테러범 둘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꺽."

"끄륵."

피거품을 무는 둘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다. 장내에 나타난 그는 여유 있게 어깨를 돌렸다.

"실전은 오랜만이군."

그는 나와 장미 또라이, 악어, 곰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메두사의 눈? 나랑 광익이 둘 중 누굴 멈출 것인가? 판단은 빨라야 한다. 늦으면 죽어."

"...선생님?"

피하며 내가 그를 불렀다.

익숙한 얼굴이다.

내 첫 번째 과외 선생님, 불멸자의 작대기 선생이었다.

"네 아빠가 불러서 왔다."

그는 말하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저쪽은 오다가 우연히 만나서 같이 왔고."

계속 입을 터는 게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나보다.

내 감각에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잘 버텼다. 꼬맹이."

시발 팀장의 목소리였다.

건물 밖에서부터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들어오는 시발 팀장이 보였다.

전신이 피에 젖은 채였다.

이미 밖에서 돌파하며 한바탕 난리를 친 듯했다.

"미친 테러범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시발 팀장이 들어오며 말했다.

그의 눈이 팬더 대리를 스치듯 지나쳤다.

난 몸을 뒤로 내뺐다.

그르륵.

한동안 무호흡으로 움직인 곰탱이가 숨을 몰아쉬며 움직임을 멈췄고.

상황이 변하자, 악어도 잠시 손발을 멈췄다.

악어와 곰, 내가 삼각형을 이루며 자리했다.

그러자 테러범 무리와 아군도 자연스레 대치 상황에 함께했다.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다시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누구나 다 숨을 돌리고 대치를 이어 나갈 거라 믿은 타이밍에 작대기 선생이 움직였다.

아마도 대부분 느끼지 못한 더없이 은밀한 움직임이었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난 느꼈다.

쏙- 하고, 작대기 선생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훌륭한 기척 죽이기였다.

153.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척 죽이기.

이제까지 그걸 쓴 사람 중에 최고로 깔끔했던 건 시발 팀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막 그 생각이 바뀌었다.

"기척을 죽이는 건 곧 상대의 오감에서 나를 지우는 거다."

나에게 기척 죽이기를 가르친 게 저 작대기 선생이었다.

여전히 마르고 탄탄한 몸을 가진 선생이었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와는 이미지가 아주, 매우 달랐다.

자연인에서 어느새 도시인이 돼서 돌아왔다.

정강이에 각반을 찼고, 옷도 제대로 입었다.

청바지에 흰 티, 팔꿈치 밑까지 감싸는 장갑은 유사시에 칼날 세 개를 뽑아 내는 형태의 무기였다.

그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작대기 선생만 다른 세상을 거니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 없는 발걸음과 함께 호흡조차도 느리고 긴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상태 그대로 작대기 선생은 아주 천천히, 상대가 알아챈다면 당연히 막을 만한 속도로 손등 위에 솟은 칼을 테러범 몸에 꽂았다가 뺐다.

푹, 푹.

"끅."

한 놈이 신음을 흘렸다.

찌른 곳은 폐다.

호흡을 잃은 두 명의 테러범이 손을 휘저었다.

작대기 선생은 유유히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미친."

장미 또라이가 외치며 시선을 돌렸다.

메두사의 눈이 발동할 것이다.

그게 느껴지는 순간, 작대기 선생은 바닥을 굴렀다.

저게 저렇게 피할 수 있는 거였나.

장미 또라이의 시선이 그를 따라간다.

그 타이밍이다.

핑.

쓰로잉 나이프 하나가 날아왔다.

장미 또라이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서 막았다.

그녀 또한 방검방탄복을 입은 채였다.

칼날이 팔에 닿은 순간, 칼날 주변에 빛이 일어났다.

서걱.

막은 팔이 잘렸다.

광학병기다. 난 저게 누구의 무기인 줄 알았다.

칼날을 던진 건 기남이었다.

우린 구경꾼인 줄 알았나?

이런 대사가 나올 타이밍이었지만, 아무도 그리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싸움이 시작됐고.

헐떡거리던 팬더 대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피하며 너무 놀린 걸까.

"크우어어어어!"

하울링을, 이번에는 날 향한 진득한 살기를 뿜은 팬더 대리가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야, 유광익."

"네?"

시발 팀장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동훈이는 기절하면 본래대로 돌아온다."

"그래서요?"

"그렇다고."

이 양반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크르르릉.

흥분한 팬더 대리는 침을 질질 흘리며 진짜 날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적당히 피했을 뿐인데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기절이라, 될까?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리 유광익, 지금부터 팬더 대리 졸도 작전에 돌입합니다."

난 그렇게 말하고 몸을 움직였다.

아까의 그 감각이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주변 모든 게 내 몸 안으로 빨려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게 선명하게 보였고, 들리지 않는 게 들렸다.

* * *

불멸교의 고위급 관리자는 '사도'라 한다.

그 사도가 한국에 왔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직접 갑니다."

이중봉은 그리 말했고, 사장은 말리지 않았다.

여러모로 중봉과 인연이 있는 놈이었다.

작전을 짜고 기어를 챙겼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공항 근처 안전 가옥에서 하루를 묵었다.

야옹.

까만 고양이가 아침 인사를 했고.

이중봉은 조용히 작전 지역으로 움직였다.

비행기가 도착했다.

주차장 일대에 불멸특수대가 진을 쳤다.

오롯이 사도 하나를 위한 함정이었으며 미리 첩보를 들었기에 실행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와라.'

이 세상을 살며 지긋지긋한 인연을 가진 놈이 몇 있었다.

노필두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건 신입, 아니 이제는 신입이라고 할 수 없는 꼬맹이가 죽였다.

난놈이었다.

이중봉 자신이 가진 잣대로도 가늠이 안 되는 괴물이다.

소위 말하는 천재 중의 천재란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대기 2시간째.

상대가 얼굴을 들이밀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샜나?"

그래서 딴 곳으로 빠졌을까?

"비행기 착륙했지?"

"했습니다."

곁에서 보조를 맡은 요원이었다.

"다른 루트는?"

"카메라를 포함 일대를 전부 확인했습니다. 타깃은 공항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안 나왔으면?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하늘로 솟았다.

사도의 출현은 진짜였다.

다만, 이곳에 온 놈은 고대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뭐지, 이 쌈빡하게 미친 새끼는.'

불멸교의 사도가 어떤 지위인가.

그 일거수일투족을 세계가 주목하는 테러범이다.

그런데 왔다가 그냥 가?

싸늘한 감각이 뒷목을 간지럽혔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이다.

"본사에 습격이 들어왔습니다."

요원 중 누군가 말했고.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중봉은 이게 함정임을 알았다.

'애초에 누가 흘린 정보다.'

이걸 자신에게 알려 준 건 남명진이었다.

그 사람이 불멸특수대를 배신한 건 아닐 것이다.

둘 중 하나다.

그 작자도 이용당했거나.

아니면, 그 작자가 자신을 이용했거나.

'개수작.'

놀아났다.

명확한 사실은 자신이 놀아났다는 것뿐이다.

"최고 속도로 돌아간다. 다들 귀대."

말하며 스포츠카에 올랐다.

부아아아앙!

도로 위를 질주했고, 그는 번잡한 서울의 교통 상황을 마주했다.

"헬기 불러."

"넵."

비상시에 지원 가능한 본부가 서울 곳곳에 있었다.

그는 그중 한 곳에서 헬기를 타고 본사 근처에 착륙했다.

화림 옥상에는 이미 자신 말고도 불청객이 많았다.

지금 거기에 내리는 건 죽여 달라고 고사를 비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내린 곳.

"정아 대리."

"오셨습니까."

정아가 저격 포인트를 잡은 곳이다.

캐쉬 히포의 총열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상황."

"프로메테우스의 크로커다일이 출현했습니다. 막기 위해 이동훈 대리 변신, 현재 유광익의 분전으로 1층에서 적의 발목 잡았습니다. 외부에서 테러범 부대 및 변신족 실험체 다수 출현, 최대한 억제 중입니다."

대답은 다른 쪽에서 했다.

저격 포인트를 지키는 요원 중 하나, 우미호였다.

"현재 가장 급한 곳은 본사 내부입니다. 저기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끝낼 수 없습니다."

우미호의 눈이 확신을 담아 빛났다.

상황을 파악하고 외부의 적을 막는 포인트를 선점하는 머리.

김정아는 좋은 저격수이자 훌륭한 전투원이지만, 지략가는 아니다.

그 머리의 역할을 우미호가 대신했다.

이곳에서 적의 시선을 끄는 것과 동시에 첨탑의 역할을 했다.

포지셔닝에 재주 있는 정아라면 포인트를 옮겼을 것이다.

여기에 버티자고 한 건 우미호인가?

중봉은 결론을 내린 뒤, 할 일을 정했다.

회사 안으로 진입하며 이들이 더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거다.

"내가 가지."

중봉은 그렇게 말하고 로프를 하나 꺼내, 건물 옥상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툭 하고 떨어진 곳에 변신족 실험체 셋이 그를 막았다.

테러 무리가 정아를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에도 머리를 쓰는 놈이 있으니, 의도는 알았을 터.

다만, 의도를 알았다고 해서 놔둘 수는 없다. 정아의 캐쉬 히포는 안다고 막을 종류의 총이 아니다.

중봉은 회사 안으로 진입하는 길에 최대한 타격을 줄 셈이었다.

그래야 바깥도 버틸 수 있었다.

그 뒤, 안을 정리하고 안에서 밖으로 지원을 나서야 했다.

현 화림의 상황 외에도 복잡한 일이 꼬이고 꼬였다.

실뜨기하다가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 같았다.

PWAT는 갑자기 터진 블랙홀 처리에 여념이 없었고.

엑스큐라시 휘하에 있는 경호 회사는 전부 록다운이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엑스큐라시는 본래 그런 놈들이다.

행안부 특임대 일부가 불멸특수대의 빈자리를 메웠다.

블랙홀은 컨트롤되어야 하니까.

그게 무너지면 정치가 비판받고, 올드 포스가 비난받는다.

고위 권력자는 그런 꼴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테러 단체는 이 맹점을 찔렀다.

무능을 보이느니, 특수대 지부 하나의 피해를 감수한다.

고위 관리자는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물론, 테러 단체는 이후에 올드 포스의 보복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걸 감내하고 덤빈 것이다.

이중봉은 여기까지 상황을 읽었다.

정치는 이래서 골치 아프다.

하지만 골치 아프다고 외면할 수 없어서 더 짜증 나는 일이기도 했다.

크르륵.

크허헝.

케에엥.

개의 머리를 지니고, 표범과 너구리 섞인 듯한 놈. 마지막으로 네 발로 바닥을 긁는 숫제 짐승의 모습을 한 실험체 셋이 보였다.

셋이 단숨에 중봉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중봉은 허리춤에 있던 제 무기를 꺼냈다.

티, 틱.

버튼을 올리는 것만으로, 현 세상에 베지 못할 게 없는 신검이 출현했다.

지이이이잉.

광선검이 울었다.

양손에 나눠진 광선검이 허공에 몇 개의 선을 그렸고, 그 선 안에 갇힌 실험체 셋의 몸이 조각났다.

피와 내장 등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피가 전신에 튀었다.

이중봉은 이를 무시하고 걸었다.

그의 별명은 '팬텀', 원한다면 누구도 그의 그림자 외의 것을 잡을 수 없다.

괜히 그런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럼 그 반대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지금 필요한 건.'

정아 대리에게 꽂힌 시선을 돌리는 것.

"덤벼라."

그리 말하면서 달린다. 그렇게 실험체 십여 마리를 죽이고, 테러범이 만든 포위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기 전, 중봉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각으로 읽어 냈다.

그 안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신비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몸에 별다른 기어도 제대로 두르지 못한, 꼴랑 1년을 넘긴 대리 하나가 괴수급 변신족 둘 사이를 노니는 중이었다.

중봉은 느꼈고, 봤다.

한계 따위가 의미 없는 천재를.

그래서 그는 말할 수도 있었다.

"동훈이는 기절하면 본래대로 돌아온다."

이성을 잃은 동훈을 누군가 맡아 줘야 했다.

자신은 유광익 같은 묘기는 못 부린다.

대신.

"악어, 잘 있었나?"

이쪽을 상대하지.

노필두는 자신을 라이벌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장비를 제대로 갖춘 불멸특수대의 에이스는 그를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놈으로 봤다.

진짜 강적이라면 이런 놈이지.

악어는 그르륵 소리를 내며 이중봉을 노려봤다.

"혼자?"

말끝을 올려 묻는 말에, 중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아마 유광익이라면 여기서 서슴없이 영화 대사 한마디를 읊거나 변죽을 울렸을 거라고.

가령.

"아직 싱글이지. 내가 결혼하는 건, 전 세계 여자에게 죄악이니까."

이런 말 따위를 말이다.

"어쭙잖은 농담을 하다니, 물러졌구나. 팬텀."

"그만 그르륵거리고 덤비기나 해라. 파충류 대가리."

중봉은 악어를 마주 봤다.

기회는 한 번, 첫 일격에서 승부를 낸다.

이길 수는 없다. 상대는 단일전투력 최강을 자랑하는 놈이다.

하지만 물러서게 할 순 있을 것이다.

양손에 광선검을 쥔 채, 중봉은 호흡을 골랐다.

악어의 숨소리가 가늘어졌다.

악어도 중봉을 보며 알았다.

일격에 승부가 갈린다는 걸.

일격에 승부를 보는 건, 변신족이 가장 즐겨 쓰는 전투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악어는 승리를 확신했다.

* * *

팬더 대리의 모든 움직임을 담는다.

내 안에 담고 그의 생각을 읽는다.

단순하다. 더없이 단순하다.

변신족은 단순하다.

특히 이성을 잃고 본능을 앞세운 변신족은 단순함을 넘어서 무식하다.

그들은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상대가 저 악어 새끼였다면 조금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째, 팬더 대리 하나 기절시키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을 피하고 무릎을 비껴치며 몸을 옆으로 튕긴다.

내가 있던 자리로 팬더 대리의 팔꿈치가 지나갔다.

가끔 몸에 익은 듯 제대로 된 동작이 나오지만, 다 보이니 피하지 못할 건 없었다.

모든 패턴을 몸에 담은 순간, 나도 움직였다.

아직 약의 여력이 남았다.

피지컬과 마인드 칵테일이 적절히 섞인 전투뽕의 힘도 빌리고.

오감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좌우로 발을 튕기며 팬더 대리의 공격을 피한 나는 어느새 대리의 품 안에 있었다.

타격으로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듯했다.

그래서 난 더 편리한 방법을 택했다.

난 팬더 대리의 팔을 잡고 엎어치기를 시도했다.

붕.

그 큰 곰이 공중에 떴다.

팬더 대리가 호흡을 고르는 사이에 먹인 엎어치기다.

거꾸로 고꾸라지는 곰이 날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이건 맞는다. 맞아야 했다.

퍽.

대신, 옆으로 몸을 틀었다.

작대기 선생에게 배운 덜 다치게 맞는 법이다.

그런데도 뱃가죽이 찢어지고 내장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더럽게 아팠다.

격통이 밀려오는 걸 꾹 참으며, 나는 허리를 틀고 발을 뻗었다.

머리를 바닥으로 두고 떨어지는 팬더 대리의 목덜미가 순간 크게 보였고.

난 그걸 발등으로 걷어찰 수 있었다.

훙.

채찍처럼 휘어진 다리의 힘이 그대로 발등으로 전해진다.

변신족의 힘을 오롯이 전했기에, 회복한 허벅지 위로 핏줄이 터질 듯이 솟았다.

꿍!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우둑.

팬더 대리의 목이 살짝 꺾였다.

손목으로 쳐서 기절시킬 정도의 두께가 아니었다.

전력을 실은 발차기 정도는 돼야 했는데, 그것도 팬더 대리가 땅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 자연스레 충격을 흘릴 터였다.

그래서 엎어치기에 이은 로우킥이다.

제대로 맞은 팬더 대리가 쿵 하고 귀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우드득.

목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이어서 났다.

이렇게 때리면 내 일격에 기절하지 않아도 경추 손상이다.

이것도 노린 거였는데, 일단 내 발차기에 기절은 했다.

"후악."

그제야 호흡을 뱉었다.

옆구리를 손으로 부여잡아 내장을 안으로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다.

막 악어와 팀장이 교차하는 게 보였다.

육체의 단련, 반사신경, 속도, 근력 모든 게 악어가 우위였다.

이대로면 팀장은 그냥 고깃덩이처럼 부서질 것 같았다.

막고 흘린다.

팀장의 특기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발 팀장은 악어의 주먹을 맞았다.

그것도 심장 어림에 맞았다.

펑!

주먹 한 방, 그 위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몸의 반쪽이 부서지고 찢기고 터진다. 시발 팀장의 눈이 흐려졌다.

이지를 잃은 고깃덩이가 된 시발 팀장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기절은 당연했다.

집중치료실에 들어가서 최소 몇 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고작 주먹 한 방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맞는 순간, 팀장은 광선검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세 개의 광선검을 휘둘렀다.

양손에 쥔 두 개는 악어의 인지 범위 안이었다.

그는 유려하게 피하며 주먹을 날렸고.

팀장은 앞발을 올려 찼다.

그 앞발 위로 광선의 궤적이 그려졌다.

팀장이 몸에 지닌 세 번째 광학병기였으며.

그 세 번째 병기는 악어의 팔을 잘랐다.

툭.

푸와와왁.

"끄르르르으으으!"

악어가 비명을 내질렀다.

잘린 한쪽 팔이 팔딱거리며 바닥에서 튀었다.

본래 붙어 있던 자리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솟았다.

빨간 피였다.

"이 미친 새끼."

그는 화도 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팔 하나를 자른 중봉을 향해서였다.

154. 사장 나오라고 해요.

전투의 향방이 그림처럼 머리에 남았다.

곧 팀장과의 첫 번째 대련이 떠올랐다.

그때 난 팀장의 양팔을 묶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기척 속이기 때문에 당했다.

방금도 같았다.

기척을 속여 양팔에 집중하게 한 뒤, 왼발로 악어의 팔을 벴다.

훌륭하다.

불멸자이기에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좋은 걸 배웠다.

언젠가는 저런 개인 전술을 써 볼 일도 있겠지.

팔을 자르고 팀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지나쳤고.

악어가 세로로 된 동공에 분노를 가득 담아 널브러진 이중봉 팀장을 보는 사이였다.

"눈뜨면 죽는다. 손만 까닥여도 죽는다. 입을 열어도 죽는다."

작대기 선생의 목소리였다.

장미 또라이의 목을 쥔 채로 말하는데, 그 목소리에 감정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담담한 사실을 고할 뿐이었다.

"크로커다일, 움직이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

작대기 선생은 냉정했다. 현 상황에서 악어와 싸우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다.

박필로 팀장과 박다람 팀장, 호남이 형이 침묵으로 동의했다.

"죽여라."

말하며 크로커다일이 몸을 일으켰다.

팔 한쪽을 잃은 놈은 흡- 하고 호흡을 멈추는 거로 출혈을 잡았다.

우는 아이 울음 그치듯, 몇 방울씩 점점이 떨어지던 피도 뚝 그쳤다.

제 몸 근육 하나하나를 조절하는 신기다.

변신족의 특기였다.

불멸이 감각이라면 변신은 육신.

초능이 재능이라면 마법은 노력이라고 했던가.

물론 감각, 육체적 능력, 노력과 재능은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필요한 법이다.

다만, 각 특수종에게 저런 게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거지.

뭐, 불멸자라고 몸 키우는 데 노력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마법이라 해서 재능이 필요치 않은 것도 아닐 테고.

악어 놈은 로즈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제 팔을 잃은 것에 화가 났는지, 눈을 부라릴 뿐이었다.

왼쪽 옆구리를 부여잡은 사이에 살이 얼추 붙었다.

이 정도면 다시 움직일 만은 하고.

쓰러진 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팀장 이중봉, 화림 정보 통신 최고의 요원.

그런 양반이 뒤는 생각하지도 않고 나 몰라라 덤빈 건 아닐 것이다.

팔 하나에 불멸 에이스가 전투 불능이다.

내가 시발 팀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라는 자원과 더불어 박다람 팀장, 박필로 팀장, 스펠 기어를 쓰는 정호남 과장도 있다.

기남의 무기도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먹힐 만한 무기가 있고 자원이 있다면, 버텨야 했다.

하지만 팀장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아는 시발 팀장이 성격은 개 뭣 같아도 능력이 없는 작자는 아니었다.

작전에 나갔을 때도, 코를 파면서도 할 일은 다 했다.

그게 이중봉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할 일을 다 했다.

뭐, 저 일 합을 나눈 뒤에 기절하지 않을 거란 것 역시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지금 뭐라고 지시를 내렸겠지.

항상 예상 밖의 일은 일어나는 법이니까.

팀장의 의중과 별개로 난 현재 상황만 직시했다.

순혈 변신족, 강체의 피를 이은 악어 새끼가 눈앞에 있다.

악어는 팔을 잃었음에도 금세 제 몸의 밸런스를 찾았는지,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몸 쓰는 거로 변신족을 따라잡을 건 없지.

그리고 몸이 회복하는 불멸자만큼 골치 아픈 적도 없을 것이다.

변신족은 불멸자를 바퀴벌레라 비하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난 시발 팀장의 의도를 읽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었다.

"이중봉 팀장님이 팔 하나니까. 제가 왼 다리 하나 가지고 가죠. 선생님이 오른 다리 하실? 박다람 팀장님이 남은 팔 하나 하시고, 남은 몸뚱이는 알아서 쪼개 보죠."

강체 변신족의 몸은 총탄을 무시한다.

아다만티움 정글도로 벨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광선검으로는 벨 수 있다.

난 팀장이 쓰러지며 튕겨 낸 원통 형태의 막대를 발끝으로 튕겨 쥐었다.

탁- 하고 잡아채며 스위치를 올리자, 원통 끝에서부터 빛이 흐르고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광학병기의 결정체가 눈앞에 현신했다.

지이잉.

강체를 지닌 변신족.

각성한 이후 제 앞을 막은 적이 몇이나 될까.

저 작자가 위기에 빠진 적은 몇 번이나 될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피 대상 1호는 여유가 넘쳤다.

그건 강자의 여유.

구석에 몰려보지 않은 자의 여유.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의 여유다.

가난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을 모르고.

궁지에 몰려보지 않은 작자는 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시발 팀장은 저 새끼를 잘 알았다. 오랜 시간 관찰했고 만나 보고, 싸워 봤을 것이다.

그럼 어느 정도는 성격도 알지 않을까?

"저 가죽으로도 가방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의도를 알아챈 호남이 형이 말했다.

리볼버를 든 손을 늘어뜨린 채, 그가 내 오른편에 섰고.

"...유광익을 닮으시면 안 됩니다. 과장님."

기남이 자신의 기어를 손에서 팽그르르 돌리면서 내 왼편에 섰다.

그리고 바로 뒤로 박다람 팀장이 다가왔다.

"쇠질을 열심히 해도 변신족만큼 힘이 세질 수는 없겠지만, 다리나 팔 하나쯤은 가져갈 수 있지."

"헬스를 왜 하십니까, 싸우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그 말을 받았다.

"내가 뒷수습인가?"

박필로 팀장을 마지막으로 요원 전부가 내 뒤에 섰다.

전원이 불멸자다.

이곳은 화림정보통신, 불멸특수대의 지부다.

불멸자는 제 목숨을 담보로 상대의 사지를 절단하는 미친 자들의 요새였으니.

"다시 해 봅시다."

그렇게 말하며 악어를 노려봤다.

눈이 마주쳤다.

세로 동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잘못 짚었나 싶은 순간.

무표정한 낯짝 그대로 악어가 땅을 박찼다.

눈을 부릅떴다. 선공으로 휘몰아칠 생각이라면, 그 첫 일격은 내가 막는다.

아직도 감각이 곤두선 채였다.

뇌세포가 다 타 버릴 듯 머리도 뜨거웠다.

각오와 함께 집중한 순간, 곧바로 허무함이 따라왔다.

"두."

쾅.

악어가 땅을 박차며 남긴 말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뒤따라와 문장을 완성했다.

"고."

펑.

벽을 뚫으며 말했고.

"보."

꿍!

뚫고 나가 멀어지며 말했으며.

"자."

마지막 한 글자는 아련하게 귀에 남았다.

"...먹혔군."

호남이 형이 남은 이들 사이에서 말했다.

내 의도를 알아챘다는 의미의 말이리라.

쌍남과 작대기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장성세였다.

뭐, 불가능한 전술은 아니니까.

다만, 피해는 막심했겠지.

아직 바깥도 정리가 안 됐고, 위쪽도 무슨 일이 터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장미 또라이와 테러범 일부가 남았다.

테러범 무리가 눈치를 보다가 한 놈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 불을 가져와 복 되게 하리...."

놈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쉿."

박다람 팀장이 단숨에 다가가 헬멧에 손을 올리더니 팔꿈치로 후려쳤다.

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놈이 쓰러지자, 헬멧에 총구를 바짝 붙이더니 방아쇠를 쉬지 않고 당겼다.

탕, 탕, 탕!

아무리 방탄 헬멧이 튼튼해도 저런 방식의 공격에는 버틸 수 없었다.

곧 헬멧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튀었다.

남은 테러범 중 몇이 덤볐지만, 정리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기세가 꺾였다.

이들에게는 악어도 없었고 지휘관은 잡혔으며, 병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실험체도 다 죽었으니.

반항하는 놈도 몇 되지 않았다.

그걸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야, 저 새끼 되게 의리 없다. 너 두고 갔는데?"

장미 또라이는 내 말에 날 한 번 보고 떠난 악어의 빈자리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악어가 뚫고 나간 벽을 한 번 봤다.

세 번을 돌아본 뒤, 그녀는 떨리는 동공으로 다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놔줄래?"

"지금?"

"응."

"진짜?"

"응."

"놔줄까?"

"그래 줄래? 그래 주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

나만 동의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동공이 요동치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으며, 자기도 모르게 입술도 반쯤 벌렸다.

그러다 침 흘릴라.

패닉 상태였다. 악어가 설마 자기를 버리고 갈 줄은 몰랐나 보다.

"그럼 놔줄 테니까, 아는 거 싹 말해 볼래? 앞으로 진행하는 작전부터 시작해서 간부 이름, 각 지부, 아, 너희 가지고 있는 사업체 있잖아, 그거 전부 테러 단체가 모체라고 증언도 해 주면 좋겠고. 또 뭐가 있더라."

"아."

신나서 말하는 중에 갑자기 외마디 신음을 흘린 장미 또라이의 눈이 풀렸다. 초점이 흐려지고 흐리멍덩해지더니, 곧 몸을 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장미야?"

내 부름에 반응하는 대신 장미가 침을 질질 흘렸다.

"주문이야, 강요, 속박, 억제 여러 개도 걸어 놨네. 놔두면 백치가 될 것 같은데."

어느새 나타난 혜민이가 말했다.

"막을 수 있어?"

"이쪽이 전문이야."

그렇게 말한 혜민이 장미 이마에 손을 올리고 뭐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위로 가야 하나, 밖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사이렌이 섞였다.

PWAT의 출현일 듯싶었다.

밖도 금방 정리가 되겠군.

위에서도 흰 머리 본부장을 비롯해 간부가 뛰쳐 내려왔다.

오랜만에 이장모 인사 본부장도 보였고, 그 뒤로 빨간 머리 양초남 분석 2팀장 김한도 보였다.

이장모는 여전히 대머리 스타일을 고수했기에 눈에 띄었다.

김한 팀장도 마찬가지다. 저 대가리는 본래 빨간색인가.

전부 헬멧조차 쓰지 않고 내려오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가 더 개판이군, 저건 이중봉 팀장인가?"

이장모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박다람 팀장이 나서서 말했다.

"위쪽에서도 불멸교도의 기습이 있었다."

"노린 건 뭐였습니까?"

"그들이 노린 게 무엇이든 얻은 건 없을 거다."

이장모가 말했고, 흰머리 본부장은 나한테 다가왔다.

"또 너군."

"네?"

"아니다."

말하는데 그 눈빛에 왜 대견함 따위가 엿보이는 것 같지.

나 싫어하지 않았나.

본부장은 살아남은 테러범을 구속했고, 혜민이는 곧 장미 또라이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야, 전문이라며?"

"응. 전문. 그래서 백치 안 되게 멈춰 놨어.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멀쩡하게 만들어야지. 주문이란 게 도깨비방망이인 줄 알았어? 뚝딱하면 금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

"생각만큼 잘 안 됐구나?"

혜민이는 당황하면 말이 많다.

"...티나?"

"조금."

혜민이는 제 손을 떠난 일이라고 했다. 맨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도 했고.

"끄응."

타이밍 좋게 팬더 대리가 일어났다.

변신이 풀리면 그 뒤에는 불멸의 피가 활동하는지, 중상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보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 음, 어땠냐?"

기억은 없지만, 변신 이후 자신이 폭주했음을 아는 눈치다.

하, 이럴 땐 역시 진지하게 진실을 말해 줘야 하는 법이다.

짧고 굵게 그의 모든 행동을 한 문장에 담아 말해 주고 싶었다.

난 말을 고르고 고르다, 팬더 대리의 상황을 딱 정리해 말했다.

"짐승 같았어요."

그 말에 팬더 대리의 눈꼬리가 밑으로 축 처졌고.

내 말을 들은 기남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넌 진짜 가차 없구나."

"내가?"

뭘?

바깥에도 점점 소음이 묻히고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본부장 둘이 동훈 대리 앞으로 다가왔다.

"이동훈 대리, 본사 소속임에도 동료 공격, 위장 취업으로 개인 정보 은닉,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태도를 이유로 구속한다. 이의 없지?"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동안 괜히 팬더 대리가 정체를 숨긴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동훈 대리 아니었으면 피해가 더 극심했을 겁니다."

의외였다. 기남이 나서서 말했다.

"사원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호남이 형이 그런 기남의 팔을 잡아 뒤로 끌었다.

"그럼 그냥 두고만 봅니까?"

"지금 말고."

둘이 속삭였다.

난 멀뚱히 지켜봤다. 팬더 대리가 수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가만히 놔두라는 의미였다.

나도 지금은 뭘 할 생각이 없었다.

구속한다는 건 당장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닐 테니까.

팀원이 끌려간다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귀여운 신입 사원은 이제 없다.

여기는 이제 적당히 닳은, 회사 생활에 익숙해진 대리가 있을 뿐.

팀장의 반쪽 몸뚱이는 곧 요원 몇이 정리해서 가져갔다.

고로 싸움은 끝났다.

그제야 숨을 푹 내쉬다가 불현듯 잊은 걸 떠올렸다.

어, 음, 우리 어머니한테 아까 누가 갔었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 맞아요?"

"맞아. 화림 정보 통신, 불멸특수대 서울 지부."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정리가 끝난 곳에 난입했다.

그건 난입이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불멸자가 모인 곳임에도 둘이 다가오기 전까지 기척이 제대로 안 읽혔고.

두 번째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어린 짜증과 화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난 둘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 한 번, 여자 한 번이다.

둘의 눈에 잠깐 온화한 빛이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딱 한 번만 말할게요."

여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통이 큰 수수한 면바지에 가슴에 해바라기가 그려진 면티를 입었다.

누가 봐도 동네에서 산책이나 하다 온 차림이었다.

"사장 나오라고 해요."

그녀가 말했다.

둘 다 아는 얼굴이었으며 바로 곁에는 사수와 우미호가 있었다.

사수에게 수신호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음, 유광익 대리, 부모님이 오셨습니다."

사수가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장내의 당황한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나도 당황한 참이다.

부모님이 다 큰 아들 회사에 오셨다.

그것도 뭔가 단단히 따지고 싶은 얼굴로.

155. 다 큰 자식의 직장에 부모가 찾아왔다

최미남은 자신이 수년간 몸담았던 곳을 바라봤다.

거인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판 것처럼 빌딩 외벽 곳곳에 비정상적인 출입구가 만들어졌다.

옥상에서는 불멸교가 침투했고.

1층 테러는 프로메테우스가 전담했다.

고급 세단 뒷자리에 앉은 채 창문을 내려 바라보는 광경은, 엉망진창이었다.

폭발, 비명, 사이렌 소리.

갖가지 소음이 섞인 아비규환의 장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내린 채로 여전히 난장판인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웨에에엥.

사이렌 소리가 귀를 울렸다.

"움직이지 마! 이 새끼들아!"

PWAT의 염동력자가 외치는 소리.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서고, 눈길이 향하는 방향으로 테러범 셋이 공중에 뜬 채 버둥거리는 게 보였다.

염동력으로 저 정도로 사람을 제압할 수준이면 저 치도 보통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불멸특수대 지부에서 떠오른 신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실패에 문책이 뒤따를 겁니다."

운전기사가 걱정을 담아 말했고, 최미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상벌이 따르는 법이었다.

'아깝네.'

불멸특수대의 전력을 분석하고 마윤의 비뚤어진 욕망과 복수심을 이용하고.

남명진은 오만함도 활용했다.

그런데도 실패다.

옥상을 통해 투입한 불멸교도도 막혔다.

'남명진, 남명진.'

최미남은 속으로 사장의 이름을 되뇌었다.

자신이 입사한 후, 가장 먼저 꼬리를 친 대상이었다.

잠자리까지 같이했다.

그런데도 매혹 주문이 먹히지 않았다.

괜히 1세대의 영웅, 불멸특수대의 간웅이라 불리는 작자가 아니었다.

최미남은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림 정보 통신 건물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이번 작전의 피날레를 곱씹었다.

1층 폭발 이후, 남명진은 1층을 버렸다.

믿음과 신뢰의 영역에서 요원들이 막아 주길 바란 게 아니었다.

'연구 시설 보호를 최우선으로 했지.'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했다.

덕분에 불멸교도의 습격이 무산됐다.

본부장을 비롯한 남명진과 그의 비서, 화림의 고위 전력이 남아서 불멸교도를 막았다.

그랬다면 1층이 뚫렸어야 했다.

하지만 뚫리지 않았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두 개였다.

연구 자료 탈취와 테러.

1층에 보낸 전력이 적지 않았다.

크로커다일, 로즈.

특별 전력을 둘이나 투입했는데 실패했다.

민간인 수십 명이 죽었고, 불멸특수대원 중 일부는 몇 달은 침대 신세를 져야 할 것이고.

부서진 시설을 복구해야 했으며 프로메테우스에게 당했으니, 이미지에 타격도 입었다.

그럼에도 실패다.

투입한 전력 중 하나는 잡혔고.

다른 하나는 팔을 잃고 튀었다.

그럼 목적을 이뤘나?

'유광익, 유광익, 유광익.'

세 번이나 되뇔 정도로 짙은 인상을 남긴 대원이다.

매혹 주문에 걸릴 것 같으면서도 끝내 걸리지 않았다.

더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었다.

자신과의 사이에 만리장성만큼 두꺼운 심리적 벽을 쌓아 두고 거절했다.

'이상형이 아니라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표정이 안 좋습니다. 작전 때문입니까?"

운전기사가 백미러에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아니요. 실연의 아픔이 심장을 콕콕 찌르네요."

"실연이요?"

운전기사가 눈을 깜빡였다.

최미남이 누구인가.

자타공인 불멸 최고의 미녀 중 하나다.

"시작도 못 해 보고 차인 적은 처음이라."

그녀가 읊조리는 말에 기사는 더 이을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자, 최미남은 그가 대답할 만한 질문을 던졌다.

"마윤도 실패했나요?"

"네, 연락이 끊겼습니다."

얻은 게 정말 없다.

아니, 딱 하나 있었다.

남명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하는 남자.

그 작자가 한 짓 덕분에 사장은 제 회사의 사원 하나와 사이가 매우 나빠질 것이다.

'우리 광익 씨라면.'

화를 낼 것이다. 앞뒤 상황을 보면 자신의 정보가 유출된 건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내부 첩자였다고 하더라도 사원의 개인 정보는 극비였다.

그건 누군가가 흘리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다.

남명진은 유광익을 미끼로 삼았고.

그의 가족을 미끼로 선택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광익이 그럴 리가 없을 터였다.

"재밌네요."

"네?"

"남명진은 실수했어요."

"네?"

알아듣지 못한 운전기사가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사람의 상태를 의심했다.

너무 오랫동안 홀로 둔 탓일까?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든지 말든지, 최미남은 혼잣말을 계속했다.

"피닉스팀은 좀 의외였지만, 오히려 그게 이득이 되겠네요."

광익의 어머니가 죽었다면 유광익은 원한의 화살을 이쪽에도 돌렸을 것이다.

그 어미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마윤의 실패가 오히려 득이 될 터였다.

"아셨습니까?"

아는 얘기가 나오자, 운전기사가 되물었다.

광익의 아버지, 유연호의 얘기다.

아무리 이레귤러라 해도 어지간한 순혈의 피를 잇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수준의 재능을 보였다.

최미남은 대략 그럴 거로 예상만 했다.

"추측만요."

아무리 뒤를 캐내도 광익의 부모를 알 수 없었다.

그럼 답이 나오질 않나.

그만한 기밀이란 얘기다.

행안부 특임대 정도면 딱 맞는 얘기겠지.

'왕자님이었다니.'

최미남은 유광익을 떠올렸다.

광익의 장난기 어린 태도 뒤로, 가끔 짐승과도 같은 야수성이 엿보이곤 했다.

그걸 감추는 게 능숙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최미남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아깝다. 너무 아깝다.

한 번쯤 자빠뜨렸어야 했는데.

그 입술을 훔치고 손가락을 깨물고 싶었다.

이제 쉬이 가질 수 없는 남자라고 보이자, 더 탐이 났다.

"으음."

최미남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운전기사는 자신이 모시는 프로메테우스 최고위 간부를 힐끔 바라봤다.

더없이 요망한 표정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안 되겠다. 우리 좀 쉬었다 갈래요?"

최미남이 제안했고, 기사는 거절하지 못했다.

웨에엥.

밖에는 여전히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고위 공무원 번호판을 단 고급 세단을 붙잡는 멍청한 공무원은 없었다.

"충성."

오히려 지나는 그를 보고 긴장한 신입 특수종 경찰이 경례를 붙이는 경우만 있을 뿐이었다.

"멍청아, 차를 보고 경례는 왜 하냐?"

선임이 그를 나무라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어왔다.

최미남은 창문을 닫았다.

* * *

"유광익 대리 어머니시라고요?"

내가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사이다.

흰 머리 악마라는 별명의 파견 본부장이 나섰다.

"네."

어머니는 웃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답했다.

난 그게 더 무서웠다.

여기서 사람 막 패고 그러면 안 되는데요.

"사장이라면 누굴 말하는 겁니까? 그리고 이곳은 작전 구역이고 민간인이 들어와...."

"불특대?"

그러자 아버지가 나섰다.

"...그쪽은?"

"행안부 특임대 피닉스팀 책임자."

"...?"

얼마나 당황했는지, 본부장이 고개만 갸웃하고 답을 못했다.

"누구?"

하필 그 타이밍에 뒤에서 기남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특대는 한 번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머저리들의 모임인가?"

차갑다. 더없이 차갑다.

평소의 온화한 아버지는 이곳에 없었다.

"남명진 그 새끼 나오라고 했다."

말투는 평소와 같은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방금 막 남극에서 건져 올린 빙하다.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나 말고 다른 이들의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난 뭐, 그러려니 했다.

살면서 아버지가 화내는 걸 한 번도 못 봤을까.

정말 드물게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냉전이 벌어지면 저런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셨지.

물론 어머니도 만만치 않은 기세를 풍기시긴 했고.

"아니, 아무리 특임대라지만, 함부로 사장님 존함을 부르시면 곤란...."

파견 본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고, 그걸 들은 이장모 본부장이 급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 마."

"네?"

"하지 말라고."

"네?"

"닥치라고."

음, 오티에서 봤던 그 라떼 교관의 모습이 슬쩍 엿보였다.

그는 다급하게 파견 본부장을 잡아 뒤로 당기며 대신 자신이 나섰다.

"위로 올라가시겠습니까?"

끄덕.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내분도?"

"당연한 말을요."

어머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순순히 길을 내주시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파견 본부장이 말했다.

"사우전드 페이스다."

"네?"

"피닉스 팀장, 사우전드 페이스라고."

그제야 파견 본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불멸특수대 아니, 전 세계를 두고 활동하는 최고의 불멸 요원을 꼽는다면 누구나 첫 번째 후보로 뽑는 불멸자.

천 개의 얼굴을 지닌, 이름만 존재하는 불멸자.

"네?"

"그냥 입 다물고 있으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척척 앞으로 나가시기에 내가 그 뒤에 붙었다.

부모님 뒤에 바짝 붙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물었다.

"혹시 두 분...?"

말을 끝맺지 않아도 충분했다.

"맹랑한 아들, 그동안 잘도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았구나. 나는 아들에게 비밀 따윈 없었는데."

머리 회전이 빠른 아버지다.

"불멸특수대? 공무원이라고 하지 않았니?"

어머니가 물었다.

"공무원은 공무원이거든요. 이게 또 공기업이기도 하고, 행안부 직속 자회사라는 독특한 포지션에 있거든요."

말이 잘도 나왔다.

"으흠."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분 서로 비밀을 밝히셨구나.

이제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밝혀도 된다는 거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래, 부부끼리 서로 그런 중요한 걸 숨기고 살아서야 쓰나.

그런데 사우전드 페이스?

"아빠가 그 피닉스팀이었어요?"

아버지는 내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팀장이지."

그냥 고위 공무원은 아닐 거로 생각하긴 했는데.

피닉스팀은 행정안정부 장관 직속의 최고의 팀이라고 들었다.

그 팀장은 어지간한 정치가도 함부로 못 하는 힘을 지녔다고도 들었고.

"그, 음, 그럼 되게 잘나가시는 분이네요?"

"조금."

아버지는 겸양을 보이셨다. 눈에 다 보이는 겸양인지라, 잘난 척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아, 네."

그럼 어머니는 뭘까.

아무리 봐도 내 몸에 흐르는 두 분의 피가 어중이떠중이 수준의 불멸이나 변신은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이쪽부터."

두 분의 앞, 정확히는 이장모 본부장이 안내한 곳은 그나마 멀쩡한 회의실이었다.

그곳에 피에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는 남명진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며 인사했고.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기 방식대로 인사를 건넸다.

땅을 박찬 뒤, 사장의 얼굴을 갈겨 버린 거다.

쩡, 어찌어찌 막은 사장의 양팔이 부러졌고 그가 벽에 날아가며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한 방에 넉다운이지, 저건.

어머니의 특기 중 하나였다.

일명 로켓 펀치, 예전에는 멋모르고 당했는데 지금은 어떤 방식의 공격기인지 알고 있다.

팔극권 전질보에서 파생된 오리지널 주먹질이다.

만화책에서 감명을 받아서 만든 거다.

땅을 박차는 건 대쉬, 각력으로 몸을 밀어내며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힘을 더해 주먹을 내지른다.

어지간한 특수종은 알면서도 못 막고, 막아도 박살 난다.

무게,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그러니 저런 게 당연했다.

"쿨럭."

사장이 한 대 맞고 피를 울컥 토했다.

난 그걸 일별하며 박살 나서 흩어진 건물을 바라봤고, 팔을 잃은 동료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앞자리에 있던 외부 보안 2팀 대리였다.

얼굴이 핼쑥한 게, 놔두면 곧 쓰러질 것 같았다.

* * *

"피닉스팀? 사우전드 페이스?"

기남이 제 형을 보고 말했다.

호남도 아는 게 없었다.

"나도 놀라는 중이다."

호남이 답했다.

옆에서 그걸 듣던 작대기 선생이 입을 열었다.

"혹시 유광익 어머니가 누군지 아나?"

작대기 선생도 놀랐다.

들어서는 순간, 유연호의 옆에 있던 여자.

감각의 영역 너머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야성을 느꼈다.

그건 곧 변신족이란 소리였다.

"보통은 아니었지."

쌍남 형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전투 직후 지친 것도 이유였고, 유광익 아버지의 정체에 놀라기도 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기남은 그제야 작대기 선생의 정체를 물었다.

"이중봉의 친우이자, 유광익의 스승."

그는 단출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 피닉스 팀원 중 하나라는 말도 붙여야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자리에서 필요한 건 이게 전부였다.

"조력자셨군."

흰 머리 파견 본부장이 다가왔다.

"그렇수다."

"사우전드 페이스와도 연관이 있는 분이요?"

"조금."

"그렇군."

둘의 대화가 끊겼다.

다들 머릿속에 생각하는 게 달랐다.

작대기 선생은 광익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쌍남 형제는 광익의 아버지 정체에 놀랐으며.

파견 본부장은 다 큰 자식의 부모가 자신의 일터에 와서 당당히 사장을 만나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했다.

'그건 아니잖아.'

사우전드 페이스고 뭐고 간에, 지금 공무로 온 게 아니라면.

제 아들 회사 생활에 간섭하러 온 팔불출 부모가 맞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는 광익의 어머니가 습격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쨌든 제 손을 떠난 일이긴 했다.